룰라, 한국에 오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소중한' 만남 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이하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 공식적인 명분은 유엔과 한국 정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6차 정부혁신 세계포럼 참가다. 하지만 190명이 넘는 기업인 방문단의 구성과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방문하여 브라질 투자유치 설명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이 보여주듯 기실 주된 목적은 한국과 일본, 나아가 아시아 지역의 브라질에 대한 투자유치를 촉진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고 외국자본에 투자를 구걸하며 온갖 반-노동자적, 반-민중적인 조치들을 약속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고 반-주변부 국가 수반들에게는 일상 활동이 되었지만, 룰라가 적극적으로 그 대열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일상다반사로 넘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노동자 출신이며 노동자들의 정당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한 때 전 세계 좌파의 유력한 희망으로 부상했던 그가 투자유치단의 단장 역할을 성심을 다해 수행하고 있는 현실은 씁쓸하게 비웃고 말 해프닝은 아니다(당선 이후 그는 이미 수십 차례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단지 룰라 개인이 초심을 잃고 변절했기 때문도 아니고 미국과 국제금융기구, 초민족적 자본의 압박 속에서 룰라가 어쩔 수 없이 택한 고육지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룰라는 집권 이후 경제, 사회 전반에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고, 향후에도 룰라는 이런 정책들을 심화하면 심화했지 스스로 철회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룰라가 노동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거듭난 과정과 원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현재의 룰라 정부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지구 반대편 먼 곳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은 이미 지난 해 브라질을 방문하여 룰라가 자신과 비슷한 경력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과거 경력의 유사성 정도보다 현재 누구보다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유사성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룰라 정부에 대한 평가와 브라질의 상황은 무엇보다 한국의 사회운동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룰라의 당선 배경: 심각한 사회·경제 위기와 ‘잃은 자들의 동맹‘ 룰라의 대통령 당선에는 당시 브라질이 겪고 있던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 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선거 캠페인 방식,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자당의 성격과 활동 변화라는 조건이 놓여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내용은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 공공부문과 국유기업에 있어서의 대규모 사유화, 경제적 탈규제화, 환율 안정화를 위한 ‘헤알 플랜’1), 강력한 긴축 정책 등이다. 이런 정책들은 브라질 경제의 위기를 더욱 심화했을 뿐이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브라질 경제성장률은 평균 1.7%로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았다. 이런 정책들은 외채를 줄이기는커녕 두 배로 증가시켰고, 국가 소유의 그나마 수익성 있는 기업들을 외국 자본에 팔아넘기는 효과를 낳았다2).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특히 제조업)이 초민족적 자본의 소유로 넘어갔거나 그들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그 결과 산업 자체가 외국인 투자자와 외국 시장에 종속되었다. 이런 정책의 결과는 브라질 내외 초민족적 자본과 지배 엘리트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다수에게는 심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가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큰 역할을 했고 룰라는 이런 불만들을 적절히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룰라는 결코 균질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계급, 계층의 불만을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로 조직했다. 이는 당시 룰라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구성과 이를 활용한 선거 캠페인 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물론 대선 당시 룰라 지지자들의 가장 큰 부분은 전통적인 노동자당 지지자 즉, 조직된 노동자, 숙련/반숙련 노동자, 진보적 지식인, 비공식 부문 노동자,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들과 적대적이었던 계급의 구성원들도 룰라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우선 제조업의 자본가들이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한 긴축 정책과 자유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룰라가 당선되면 다시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쓸 것으로 기대했다. 또 다른 지지자들은 토지귀족으로서 오랫동안 과두제를 형성하여 지역을 지배해왔던 계층이다. 이들은 금융의 이해가 우선되면서 자신의 지배력이 침식당했다고 생각했으며, 룰라를 지지함으로써 의회와 지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시의 중간 계층 사람들은 룰라나 노동자당의 급진적인 수사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직업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각종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불만으로 룰라를 지지했다. 노동자당의 전통적인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이런 불균등한 지지자들의 공통점이라고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잃은 것’이 있다는 점 밖에 없었지만, 룰라는 이것을 ‘잃은 자들의 동맹’으로 조직했다. 물론 이렇게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이해관계와 기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룰라는 구체적인 정책과 전망 제시는 회피한 채, 모호한 수사와 감수성을 자극하는 언사들로 집권에 성공했다. 대선 당시 룰라가 제시한 가장 구체적인 약속이 카르도주(그도 한 때 종속이론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시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IMF 협정이었다는 사실은 룰라가 ‘잃은 자들’의 요구를 “온정적인 동북부인, 룰라”, “새로운 현실주의” 등의 수사로 동원했던 측면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룰라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 현재 룰라 정부가 그 이전의 카르도주 정부보다 더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룰라 자신은 이런 정책이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극약” 처방이며, 이를 통해 경제가 안정되면 민중적 의제를 추진할 수 있으니 브라질 민중들이 조금만 더 “인내”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룰라가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유지해 온 정책 기조와 그 정책을 고안·집행하는 내각의 성격을 봤을 때, 그리고 실제 집권 이후 보여준 룰라의 행보를 봤을 때, 이런 요구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룰라는 후보 시절 IMF와의 협약을 통해서 카르도주 시절의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외채 지불과 강력한 긴축정책, 인플레이션 억제, 민영화/사유화 정책 고수, 노동부문 개혁 등이 그 내용이다. 당선 이후 그는 외채 지불을 충족하기 위한 흑자 재정 비율을 카르도주 시절 IMF와 약속했던 GDP 대비 3.75%에서 4.25%로 상향조정했다. 외채 지불을 위한 흑자 재정은 대부분 사회 복지 예산의 삭감으로 충당되었다. 이런 정책은 외국인 투자자와 브라질 수출업자들에게는 거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인도, 러시아, 중국과 함께 브릭스(BRICs)로 주목받고 있는 현재 브라질 경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외국인 투자와 수출 산업이 성장의 엔진이라고 굳게 믿는 룰라 정부의 철학은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각종 인센티브 제공,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추진, 노동과 복지 관련 제도 완화, 연금 개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비롯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고금리에서 비롯되는 이윤과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은 주식시장에 거품을 형성하고3) 채권시장 수익률 상승을 이끌며 투기성 자본을 유인하고 있다. 게다가 룰라 정부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세금 면제 조치를 고안하고 있다.4) 브라질의 수출산업을 이끄는 것은 주로 농산물과 철광석, 펄프, 석유 등 원자재 산업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분야의 수출을 증대하기 위한 최선의 방향이 자유무역의 확산이라고 믿는다. 농산물, 광물, 석유 부문의 거대 수출기업들의 활로를 위해 그는 WTO와 FTAA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새로운 무역파트너 형성을 위해 세일즈맨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방한 기간 중 진행하는 투자유치 설명회를 보라). 브라질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5차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G-21)의 반발을 주도했는데, 이는 브라질의 농산물 수출기업들을 보호하고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룰라 정부의 전투적인 방어였지 세계화나 WTO 체제를 반대하고 제3세계 가난한 농민, 농업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룰라 정부는 FTA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사실 남미의 많은 민중들은 FTAA의 파괴적 효과를 인식하고 다양한 투쟁을 통해 FTAA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룰라의 바로 곁에도 FTAA를 반대하는 무토지농민(MST) 조직, 사회운동 조직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2002년에 FTAA 반대 국민투표를 조직하여 천만 명 이상 참가, 95% 이상의 반대라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룰라는 그 투표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노동자당에도 투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당선된 후에는 서비스 시장, 투자, 지적 재산권에 대한 미국의 개방 요구를 수용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농산품 등의 분야에서 무역장벽이 낮출 것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FTAA 협상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브라질 민중에게는 거대한 부담을 지우고,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흑자 재정 4.25% 유지, 세금 제도 개혁, 복지 축소와 같은 조치는 브라질 노동자, 빈민, 농민으로부터 금융자본, 수출기업, 외국인 투자자 및 채권자로 소득이 이전되는 효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실업률은 9.6%로 여전히 높고, 그나마 창출된 일자리의 대부분은 비공식 부문 노동, 비정규직 노동이다. 대선 당시 브라질 민중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장담했던 “기아 제로” 프로그램과 토지 개혁은 지금까지 실행되지 않고 있다. ‘잃은 자들의 동맹’을 관리하기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룰라가 신자유주의로부터 ‘잃은 자들’의 지지를 동원하여 당선되었다는 점은 일견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룰라 정부의 성격을 보여준다. 노동자 출신이고 노동자당의 후보였지만 룰라의 전략과 전망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았다. 룰라는 쿠바의 사회주의 모델이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보여주는 인민주의 모델(양자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조차 고려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FTAA 국민투표 거부, IMF와의 협약 등에서 드러나듯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편입할 준비를 해왔다. 그가 ‘잃은 자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던 것은 그들의 지지를 동원해야 당선될 수 있고, 그들의 불만과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전망을 실행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선거에서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비전은 회피한 채, 누구나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를 활용하고,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했다. 집권 이후 실제 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룰라는 자신의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정치 스타일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왔다. 우선 그는 자신의 과거 경력과 비천한 출신으로서 피지배계급에게 가지는 정서적 동정심을 활용한다. 그는 가난한 어린이를 마주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무토지 농민들을 만나서는 장난스럽게 그들의 모자를 쓰고 친밀감을 표시한다. 이런 모습은 노동자 출신, 운동의 경력 등과 결부되어 강력한 진실성을 획득하고, 그의 “극약” 처방이 끝나면 민중에게 혜택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자극한다. 룰라는 노동자에게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사회경제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서는 노·사·정 사이의 사회협약이 추진되었는데, 그 내용은 법인세 감축과 외국인 투자자 세금 혜택을 골자로 하는 세금 개혁, 노동 비용 절감과 복지 정책에서의 후퇴를 골자로 하는 사회안전망 개혁이었다. “노동자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후려치고 있는 꼴이지만, 노동자당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브라질노총(CUT)은 룰라 정부의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노·사·정 협의에 대한 반격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브라질노총의 상층부를 정권의 자문단, 입각 내정자, 노동자당의 선거 후보자로 흡수하고 보조금 등을 통해 포섭하는 룰라의 실질적 혜택도 작용한다. 게다가 룰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통치의 기반으로 활용하고 지난 해 한국을 방문했던 한 브라질 활동가는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룰라의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당의 지지도는 하락하고 있지만, 룰라 개인의 지지도는 여전히 60%를 웃돈다”고 말했다. , 자신의 내각, 특히 재무장관 팔로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팀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실제 브라질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정책이 거기에서 나오고, 일단 제출된 정책은 과감하게 실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당은 룰라의 정책을 승인하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다(선거 시기가 되면 선거 캠페인 수단으로 활용된다). 노동자당이 룰라 개인과 그 측근들의 정당이 된 것은 오랜 일이지만, 집권 후 룰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룰라는 자신에 대한 반대나 자신이 제출한 정책을 반대하는 노동자당 의원들에게는 출당의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의 권위와 지시를 관철시키고 있다. 물론 ‘잃은 자들의 동맹’이 룰라에 대한 각기 다른 기대를 실리적으로 조직, 동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룰라의 실질적인 행보와 정책이 브라질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점에서 룰라가 이 동맹을 언제까지 관리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룰라의 정치 스타일이 이런 불만과 갈등의 폭발을 잠재워온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룰라의 정치 스타일은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이고 인기 영합적이며 온정주의적인 수사를 활용하고 있지만, 이런 행태는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하고 사회운동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브라질 사회운동의 도전과 시사점 룰라 정부의 반-민중성이 점차 명확해지면서, 룰라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운동을 만들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지난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은 룰라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고, 룰라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것을 당내에 관철시키는 독단적인 방식에 반대하는 지식인, 활동가들이 노동자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만들기도 했다. 룰라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금속 노동자들, 도시의 불법 점거자들의 파업과 투쟁도 있었다. 이런 투쟁은 아직 소극적으로 룰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수준이고,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또 한 축에는 무토지농민운동(MST)이 있다. 대선 시기 룰라는 무토지농민운동이 자신의 당선에 방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들에게 모든 대중행동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그 대신 당선 후 토지 개혁을 통해 농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룰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들은 다시 투쟁에 나섰다. 무토지농민운동은 지난 5월 2일부터 농지 개혁 실행과 미국의 자유무역 반대, 이라크에서 철수 등을 요구하며 전국 순회 투쟁에 돌입했고, 17일 브라질리아 대통령궁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런 투쟁이 룰라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반대의 요구를 결집시키고, 새로운 대안을 형성해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투쟁과 저항이 거세질수록 룰라의 정치 행태도 강화될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의 일정 부분은 포섭하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투쟁의 통합력과 운동의 단결을 해치려 할 것이다. 실제로 룰라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의 파업은 무참히 짓밟았지만, 금속 노동자들에게는 일정 정도의 임금인상을 보장했다. 그리고 룰라가 언젠가는 초심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도 운동이 직면한 난관 중 하나다. 룰라는 초심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방은 스스로의 투쟁과 운동으로 쟁취해야 하고 자신의 해방이 다른 사람의 해방과 맞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운동의 이념과 원칙을 잃은 것이다. 결국 룰라는 점차 대중운동과 멀어졌고, 자신이 인민의 권리를 대변하는 정책으로 인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동자민중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그가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외부의 압력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운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룰라의 당선과 그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고,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운동의 중요한 과제일 것도 없다. ‘잃은 자들의 동맹’은 신자유주의 정치 공학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인민의 삶을 볼모로 한 자본주의 위기 지연 방식인 한 ‘잃은 자들’의 불만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이를 대변하겠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언제나 선거 전에는 가장 강력한 신자유주의 비판자였다. 선거 이후에는 이런저런 변명과 현실적인 이유로 가장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다(노무현도 마찬가지다). 변절한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대통령을 바꾸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배신은 반복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관리하며 삶을 파괴하는 것에 맞서 대중이 스스로의 투쟁을 조직하고, 상호 연대하고, 그들의 투쟁과 연대가 보편적인 권리와 요구로 확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사회운동의 과제일 따름이다. 1) 1994년부터 시행됐다가 실패한 경제 안정화 정책. 미국 달러와 브라질 헤알을 1대1의 환율로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막고 외자를 끌어들인다는 구상에서 시행된 정책이었고,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 인플레이션이 감소했고 자본유입도 두 배 이상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미국 달러의 강세가 나타나면서 여기에 고정된 헤알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어 브라질의 수출 경쟁력은 크게 약화됐다. 더욱이 시장개방의 조류와 맞물리면서 수입이 급증해 무역적자가 크게 확대됐고 이 때문에 외자를 더 끌어들이려 이자율을 올리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본문으로 2)카르도주 집권 시기 헤알 플랜의 결과로 외국인 투자가 쇄도했는데, 그 상당 부분은 공기업이나 공사합동기업을 매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1년에 진행된 외국자본조사는 외국 자본이 최소 20% 이상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1995년 6,322개에서 2000년 11,404개로 증가(80.4%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외국 자본이 진출한 기업의 주식 가치는 같은 기간에 3배가 뛰었지만, 고용은 증가하지 않았고 실업률은 더욱 높아졌다. 본문으로 3)브라질 주식시장지수(BOVESPA)는 2003년 1월 11,268에서 2003년 말 20,000 이상으로 오르면서 급상승했다. 2005년 현재까지 최고치는 29,455 최저치는 23,609를 기록했다. 본문으로 4)이런 조치는 외국인 직접투자가 카르도주 시절에 비해 절반 가까이 감소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 직접투자의 감소는 브라질이 외국인 투자에 대해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다. 카르도주 시절 외국인 직접투자의 대부분은 수익성 있는 공기업을 매입하기 위해 유입되었다. 이제 그런 공기업은 다 팔려서 남은 것이 거의 없다는 점과 주식시장의 거품이 직접투자보다는 투기성 투자를 유인하고 있다는 점이 외국인 직접투자 감소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원인보다는 투자 감소라는 결과만 놓고 한층 심화된 개방, 자유화, 탈규제 조치를 추진하는데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민중을 배신한 정권의 비참한 최후 에콰도르 민중봉기: 민중을 배신한 정권의 비참한 최후 배준범| 회원, 민주노동당 국제부장 남미의 한 산유국에서 치솟는 유가와 이에 따른 외화수입의 급증, 늘어나는 국가의 부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인해서 인구의 절대 다수가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 이에 대해서 분개한 젊은 군인들 중 일부는 지휘 계통의 명령을 어긴다. 민중들을 더욱 파탄으로 몰아넣을 것이 뻔한 정부 조치들에 맞서 봉기한 인민들을 진압하라는 지침을 거부한 것이다. 이 ‘반란’을 지도했던 젊은 장교는 항명의 대가로 감옥 생활을 감내하다가 결국 군복도 벗게 된다. 그러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중을 위한 통치를 하겠다는 그의 의지에 대해 많은 원주민, 농민, 노동자들은 열성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며, 이에 힘입어 그는 석방 후 제도권 정치의 길에 나선다. 그리고 기존 정당들의 모습에 염증과 절망을 느낀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남미에 또 하나의 파퓰리스트가 등장했다는 서방 언론의 호들갑과 함께. 누구에 관한 이야기일까?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아니다. 남미에는 그 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과거를 지닌 이가 있는데, 바로 얼마 전 이웃 나라 브라질로 망명한 에콰도르의 전 대통령 루시오 구티에레스다. 하지만 차베스와의 유사점은 과거에 국한된다. 올해 초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검찰은 그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그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군부도 그의 국회탈출을 막기 위해서 출국금지령을 내렸다. 이렇듯 완전히 고립된 그는 탈출구를 찾던 중, 다행히도(?) 브라질 측에서 비공식적으로 망명을 허용하여 지난달에 에콰도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불명예스럽게 끝을 맺은 국가원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보다 더 비굴한 최후를 맞은 이가 같은 나라에 또 있다. 바로 전전 대통령인 부카람인데, 그는 ‘정신적 부적격’ 판정을 받고 역시 나라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에콰도르의 정치 현실이다. 에콰도르의 정치 수준을 더욱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구티에레스가 그의 귀국을 정치적으로 주선하려고 노력하던 중 축출 당했다는 사실이다. 별명이 ‘미치광이(El Loco)’인 부카람을 말이다. 반복되는 정권교체, 불안정한 정치 에콰도르는 남미의 많은 나라들처럼 정치 제도가 불안정하고, 정당정치의 발전이 더디고, 민주적 성숙도가 낮다. 그러다보니 정치가 개별 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편, 좌파 인사들도 파퓰리즘적 성격이 강한 경우가 많다. 더불어 에콰도르 역시 남미의 여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90년대 말부터 아래로부터의 민중투쟁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된다.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신자유주의 일색의 정책 속에서 민중들의 삶의 수준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6년에는 개혁의 열망에 힘입어 축구 선수 출신인 부카람이 이색적인 선거 운동 끝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8개월 끝에 의회에서 탄핵되었다. 자신의 정적을 당나귀라고 부른 뒤, “당나귀를 모독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발표했던 점, 선거 운동 기간 동안에 반나체 선거운동원과 가수 및 연예인들을 대거 동원했던 사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가요 음반을 발매하는 모습 등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스타일의 정치를 했는지 엿볼 수 있다. 빈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어 66%라는 지지율로 당선된 그는 초기 두세 달 간 일부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 인상 등 빈민들에게 인기 높은 조치들을 일부 취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돌변하여 긴축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대해 원주민, 학생, 인권단체, 노동자들은 파업 및 시위로 맞섰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은 후 그는 97년 초에 국회로부터 ‘정신적 부적격’이라는 판정을 받고 탄핵 당한다. 이어진 선거에서는 마우아드라는 보수 인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 역시 페소화를 포기하고 달러로 통화를 바꾸는가 하면 민영화와 긴축 재정을 서둘렀다. 그의 이러한 행보에 맞서 민중들은 봉기했고, 그는 물러났다. 그에 저항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민중들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지원에 나섰던 이가 바로 당시 대령이었던 구티에레스다. 하지만 마우아드는 이 사건 직후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에콰도르 최고의 부자 노보아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다음 해의 선거에서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구티에레스에게 진다. 민중의 지지로 당선된 후 친미 - 친자본으로 돌변한 구티에레스 이러한 질곡의 역사 속에서 2002년 11월에 그가 에콰도르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구티에레스에 주요 외신들이 보인 반응은 그가 또 한명의 차베스라는 우려(혹은 기대!)였다.1) 남미에서 차베스와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브라질의 룰라에 이어 좌파 바람이 지속되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말이다. 구티에레스 이후에도 남미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지속되고 있는 좌파 바람 속에서 대부분의 정권들이 집권 후 우경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2) 에콰도르만큼 집권 전과 후의 차이가 큰 나라는 없을 것이다. 무거운 외채 부담과 기득권에 익숙한 관료조직들, 원내에서의 소수파 위치, 친자본 세력들의 공세는 남미, 아니 전 세계의 집권 좌파 세력이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이다. 브라질의 룰라와 우루과이의 바스케즈는 경제적으로 신중한 정책을 펴는 가운데, 다방면의 사회정책 프로그램 강화와 외교 정책 노선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남미 대륙에서 경제, 외교 면에서 가장 급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가 그 중간 어딘가에 있겠지만, 키르치네르 정부의 대응도 국가 부도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들은 적든 많든 기존 정부들과의 차별점을 보여주는 것에는 성공하고 있는데, 에콰도르의 구티에레스 정부는 집권 직후 잠깐 동안의 ‘허니문’ 시기를 제외하면 이러한 면에서 완벽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집권 후 돌연 180도 변한 것이다. 구티에레스는 자신이 반미 인사라는 인식에 대해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미국과의 관계를 무엇보다도 중시한다.”라는 그 자신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애써 부인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대통령 직에 오르기 전까지는 반신자유주의 수사로 인해서 에콰도르의 차베스라고 불렸던 그는 당선하자마자 돌변하여 미국과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콜롬비아 내 좌익 소탕 작전인 플랜 콜롬비아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남미에서는 예외적으로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으며, IMF와의 새로운 협약을 맺어 공공부문에서의 대대적인 인력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추진했다. 남미의 다른 좌파 정권들이 ‘남미의 연대 협력 강화’로 노선 전환을 하고 있을 때, 에콰도르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로 인해서 필수 서비스 가격이 오르고 빈부 격차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정권 교체 이전에도 60%에 이르던 빈곤층은 더욱 늘어났다. 또한 과거 자신을 당선시킨 민중들이 몰아냈던 바로 부카람 전 대통령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귀국 금지령이 내려진 그를 다시 입국시켜, 그가 속한 당의 지지와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러한 몸부림에는 나름의 배경과 이유가 있다. 브라질만큼 당들이 난립하는 에콰도르의 다당제 정치에서, 그가 창당한 애국당은 전체 의석 100석 중에 단지 2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연정을 함께 꾸린 대중민주운동당(MPD), 에콰도르 사회당(PS)과 파차쿠틱(Pachakutik)이라는 원주민 전선체가 확보한 의석을 다 합쳐봐야 전체 의석수의 15-20%밖에 안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2002년 대선 때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노보아의 당(PRE: 원내 3당)과 탄핵되었던 부카람 전대통령의 당(원내 1당), 그리고 기독사회당 등에 손을 벌렸다. 원내에서 안정적 기반을 확보하는 동시에 금융/산업의 중심지인 과야킬과 산악 지대 속에 위치한 키토 사이의 지역주의 문제도 풀어볼 의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폭발한 대중투쟁, 구티에레스의 퇴진 그가 정책적으로 급속히 우경화하고, 적대적이었던 당들에게 무원칙적으로 손을 내미는 동안, 대선 때 구티에레스를 지지했던 에콰도르의 진보적 정치세력들은 하나둘씩 지지를 철회했다. 처음에 대중민주운동당(MPD)이 지지를 철회했고 곧 에콰도르 공산당(의석수는 없지만 민중운동 내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도 뒤를 이었다. 원주민들에게서는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파차쿠틱도 보수적인 PSC와의 공조 논의에 실망하여 연정을 떠났다. 곧 파차쿠틱과 가까운 원주민 대중 조직들의 시위가 키토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뜸했던 대중 파업과 집회들도 작년 말과 올해 초를 정점으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야당들이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보수우익 단체들과 구티에레스의 이전 지지파들이 함께 집회에 나타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러던 중 그가 대법관들을 일제히 교체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사태는 그의 퇴진으로까지 치달은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사법기관들은 가장 보수적인 관료 집단 중 하나고, 진보적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추진한 조치가 민주적 질서를 무시한 것이라 여겼고 사법 기관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더군다나 사법 개혁을 원칙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공조를 구했던 보수 정당들의 추천 인사로 채우려고 했던 의도가 드러나 명분도 상실한 상황이었다. 대법관 교체 시도가 부카람을 국내에 복귀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심도 팽배했다. 이 사건은 구티에레스 정권이 밀실 야합, 보수 정치로 완전히 전락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구티에레스와 관련된 부정부패 사건들마저 폭로되자 그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반정부 시위대에 맞서 막판에 구티에레스를 보호하기 위한 시위대가 나타나고 긴장 국면이 조성되면서(한때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었다) 차베스의 쿠데타 직후처럼 그가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일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언론들은 친위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동원된 경우라고 분석했다. 결과는 알려진 바와 같이 구티에레스가 망명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퇴진이었던 셈이다. 더더욱 참담했던 것은 지지를 철회했던 좌파 진영 중에서 가장 많은 득표력을 지닌(5%) 대중민주운동당이 막판에 구티에레스를 살리는데 결합했다는 점이다. 구티에레스의 위기 국면에서 이에 대한 대응방향을 둘러싸고 좌파 진영이 갈라진 것이다. 에콰도르의 강력한 민중운동이 희망 구티에레스가 집권 하는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압력을 받게 됐고, 집권 후에는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외부에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진보 세력의 역량에 대한 냉정한 판단 속에서 자신의 권한과 민중들의 지지를 통해 변화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보수세력 및 초국적 자본과의 손쉽게 타협하고 지지자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보가 불안정한 민주적 질서 자체에 대해 위협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베네수엘라 및 쿠바 정부도 망명한 그와는 거리를 두는 분위기다. 쿠바는 그가 물러나게 된 것은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며 간접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동조를 지적했고, 베네수엘라 외부부도 “초국적 금융자본 엘리트들과 맺은 협약의 결과”라며 결과의 책임이 일부 그에게 있음을 명확히 했다. 브라질 정부도 망명 허용 결정을 “동조”가 아닌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3) 구티에레스의 망명 후 그의 뒤를 이은 부통령 파라시오는 우선 과도기 정부로서 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사 출신인 그는 석유 값의 일부를 사회복지 예산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IMF와의 갈등을 예고하기도 했다. 미국은 그가 구티에레스보다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하고 일단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미 확인했듯이 에콰도르의 정치에서는 확실한 것이란 없다. 단, 최근 10년간 대통령을 3번이나 민중의 권력으로 갈아 치운 에콰도르의 강력하고 폭발적인 민중운동이 그 나라의 노동자, 빈민, 원주민, 여성들이 지닐 수 있는 희망일 것이다.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좌파 세력들의 약진에 다시 그들이 합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PSSP 1) 일례로 "Lucio Gutierrez: Ecuador's Populist Leader," BBC News, November 25th, 2002.본문으로 2) Immanuel Wallerstein, Death by a Thousand Cuts, Commentary No. 160. May 1., 2005. http://fbc.binghamton.edu/160en.htm본문으로 3) "Ecuador: People Drive Out President," Green Left Weekly, April 25th, 2005.본문으로
민중을 배신한 정권의 비참한 최후 에콰도르 민중봉기: 민중을 배신한 정권의 비참한 최후 배준범| 회원, 민주노동당 국제부장 남미의 한 산유국에서 치솟는 유가와 이에 따른 외화수입의 급증, 늘어나는 국가의 부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인해서 인구의 절대 다수가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 이에 대해서 분개한 젊은 군인들 중 일부는 지휘 계통의 명령을 어긴다. 민중들을 더욱 파탄으로 몰아넣을 것이 뻔한 정부 조치들에 맞서 봉기한 인민들을 진압하라는 지침을 거부한 것이다. 이 ‘반란’을 지도했던 젊은 장교는 항명의 대가로 감옥 생활을 감내하다가 결국 군복도 벗게 된다. 그러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중을 위한 통치를 하겠다는 그의 의지에 대해 많은 원주민, 농민, 노동자들은 열성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며, 이에 힘입어 그는 석방 후 제도권 정치의 길에 나선다. 그리고 기존 정당들의 모습에 염증과 절망을 느낀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남미에 또 하나의 파퓰리스트가 등장했다는 서방 언론의 호들갑과 함께. 누구에 관한 이야기일까?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아니다. 남미에는 그 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과거를 지닌 이가 있는데, 바로 얼마 전 이웃 나라 브라질로 망명한 에콰도르의 전 대통령 루시오 구티에레스다. 하지만 차베스와의 유사점은 과거에 국한된다. 올해 초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검찰은 그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그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군부도 그의 국회탈출을 막기 위해서 출국금지령을 내렸다. 이렇듯 완전히 고립된 그는 탈출구를 찾던 중, 다행히도(?) 브라질 측에서 비공식적으로 망명을 허용하여 지난달에 에콰도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불명예스럽게 끝을 맺은 국가원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보다 더 비굴한 최후를 맞은 이가 같은 나라에 또 있다. 바로 전전 대통령인 부카람인데, 그는 ‘정신적 부적격’ 판정을 받고 역시 나라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에콰도르의 정치 현실이다. 에콰도르의 정치 수준을 더욱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구티에레스가 그의 귀국을 정치적으로 주선하려고 노력하던 중 축출 당했다는 사실이다. 별명이 ‘미치광이(El Loco)’인 부카람을 말이다. 반복되는 정권교체, 불안정한 정치 에콰도르는 남미의 많은 나라들처럼 정치 제도가 불안정하고, 정당정치의 발전이 더디고, 민주적 성숙도가 낮다. 그러다보니 정치가 개별 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편, 좌파 인사들도 파퓰리즘적 성격이 강한 경우가 많다. 더불어 에콰도르 역시 남미의 여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90년대 말부터 아래로부터의 민중투쟁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된다.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신자유주의 일색의 정책 속에서 민중들의 삶의 수준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6년에는 개혁의 열망에 힘입어 축구 선수 출신인 부카람이 이색적인 선거 운동 끝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8개월 끝에 의회에서 탄핵되었다. 자신의 정적을 당나귀라고 부른 뒤, “당나귀를 모독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발표했던 점, 선거 운동 기간 동안에 반나체 선거운동원과 가수 및 연예인들을 대거 동원했던 사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가요 음반을 발매하는 모습 등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스타일의 정치를 했는지 엿볼 수 있다. 빈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어 66%라는 지지율로 당선된 그는 초기 두세 달 간 일부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 인상 등 빈민들에게 인기 높은 조치들을 일부 취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돌변하여 긴축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대해 원주민, 학생, 인권단체, 노동자들은 파업 및 시위로 맞섰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은 후 그는 97년 초에 국회로부터 ‘정신적 부적격’이라는 판정을 받고 탄핵 당한다. 이어진 선거에서는 마우아드라는 보수 인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 역시 페소화를 포기하고 달러로 통화를 바꾸는가 하면 민영화와 긴축 재정을 서둘렀다. 그의 이러한 행보에 맞서 민중들은 봉기했고, 그는 물러났다. 그에 저항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민중들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지원에 나섰던 이가 바로 당시 대령이었던 구티에레스다. 하지만 마우아드는 이 사건 직후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에콰도르 최고의 부자 노보아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다음 해의 선거에서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구티에레스에게 진다. 민중의 지지로 당선된 후 친미 - 친자본으로 돌변한 구티에레스 이러한 질곡의 역사 속에서 2002년 11월에 그가 에콰도르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구티에레스에 주요 외신들이 보인 반응은 그가 또 한명의 차베스라는 우려(혹은 기대!)였다.1) 남미에서 차베스와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브라질의 룰라에 이어 좌파 바람이 지속되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말이다. 구티에레스 이후에도 남미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지속되고 있는 좌파 바람 속에서 대부분의 정권들이 집권 후 우경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2) 에콰도르만큼 집권 전과 후의 차이가 큰 나라는 없을 것이다. 무거운 외채 부담과 기득권에 익숙한 관료조직들, 원내에서의 소수파 위치, 친자본 세력들의 공세는 남미, 아니 전 세계의 집권 좌파 세력이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이다. 브라질의 룰라와 우루과이의 바스케즈는 경제적으로 신중한 정책을 펴는 가운데, 다방면의 사회정책 프로그램 강화와 외교 정책 노선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남미 대륙에서 경제, 외교 면에서 가장 급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가 그 중간 어딘가에 있겠지만, 키르치네르 정부의 대응도 국가 부도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들은 적든 많든 기존 정부들과의 차별점을 보여주는 것에는 성공하고 있는데, 에콰도르의 구티에레스 정부는 집권 직후 잠깐 동안의 ‘허니문’ 시기를 제외하면 이러한 면에서 완벽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집권 후 돌연 180도 변한 것이다. 구티에레스는 자신이 반미 인사라는 인식에 대해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미국과의 관계를 무엇보다도 중시한다.”라는 그 자신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애써 부인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대통령 직에 오르기 전까지는 반신자유주의 수사로 인해서 에콰도르의 차베스라고 불렸던 그는 당선하자마자 돌변하여 미국과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콜롬비아 내 좌익 소탕 작전인 플랜 콜롬비아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남미에서는 예외적으로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으며, IMF와의 새로운 협약을 맺어 공공부문에서의 대대적인 인력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추진했다. 남미의 다른 좌파 정권들이 ‘남미의 연대 협력 강화’로 노선 전환을 하고 있을 때, 에콰도르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로 인해서 필수 서비스 가격이 오르고 빈부 격차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정권 교체 이전에도 60%에 이르던 빈곤층은 더욱 늘어났다. 또한 과거 자신을 당선시킨 민중들이 몰아냈던 바로 부카람 전 대통령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귀국 금지령이 내려진 그를 다시 입국시켜, 그가 속한 당의 지지와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러한 몸부림에는 나름의 배경과 이유가 있다. 브라질만큼 당들이 난립하는 에콰도르의 다당제 정치에서, 그가 창당한 애국당은 전체 의석 100석 중에 단지 2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연정을 함께 꾸린 대중민주운동당(MPD), 에콰도르 사회당(PS)과 파차쿠틱(Pachakutik)이라는 원주민 전선체가 확보한 의석을 다 합쳐봐야 전체 의석수의 15-20%밖에 안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2002년 대선 때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노보아의 당(PRE: 원내 3당)과 탄핵되었던 부카람 전대통령의 당(원내 1당), 그리고 기독사회당 등에 손을 벌렸다. 원내에서 안정적 기반을 확보하는 동시에 금융/산업의 중심지인 과야킬과 산악 지대 속에 위치한 키토 사이의 지역주의 문제도 풀어볼 의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폭발한 대중투쟁, 구티에레스의 퇴진 그가 정책적으로 급속히 우경화하고, 적대적이었던 당들에게 무원칙적으로 손을 내미는 동안, 대선 때 구티에레스를 지지했던 에콰도르의 진보적 정치세력들은 하나둘씩 지지를 철회했다. 처음에 대중민주운동당(MPD)이 지지를 철회했고 곧 에콰도르 공산당(의석수는 없지만 민중운동 내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도 뒤를 이었다. 원주민들에게서는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파차쿠틱도 보수적인 PSC와의 공조 논의에 실망하여 연정을 떠났다. 곧 파차쿠틱과 가까운 원주민 대중 조직들의 시위가 키토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뜸했던 대중 파업과 집회들도 작년 말과 올해 초를 정점으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야당들이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보수우익 단체들과 구티에레스의 이전 지지파들이 함께 집회에 나타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러던 중 그가 대법관들을 일제히 교체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사태는 그의 퇴진으로까지 치달은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사법기관들은 가장 보수적인 관료 집단 중 하나고, 진보적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추진한 조치가 민주적 질서를 무시한 것이라 여겼고 사법 기관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더군다나 사법 개혁을 원칙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공조를 구했던 보수 정당들의 추천 인사로 채우려고 했던 의도가 드러나 명분도 상실한 상황이었다. 대법관 교체 시도가 부카람을 국내에 복귀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심도 팽배했다. 이 사건은 구티에레스 정권이 밀실 야합, 보수 정치로 완전히 전락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구티에레스와 관련된 부정부패 사건들마저 폭로되자 그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반정부 시위대에 맞서 막판에 구티에레스를 보호하기 위한 시위대가 나타나고 긴장 국면이 조성되면서(한때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었다) 차베스의 쿠데타 직후처럼 그가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일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언론들은 친위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동원된 경우라고 분석했다. 결과는 알려진 바와 같이 구티에레스가 망명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퇴진이었던 셈이다. 더더욱 참담했던 것은 지지를 철회했던 좌파 진영 중에서 가장 많은 득표력을 지닌(5%) 대중민주운동당이 막판에 구티에레스를 살리는데 결합했다는 점이다. 구티에레스의 위기 국면에서 이에 대한 대응방향을 둘러싸고 좌파 진영이 갈라진 것이다. 에콰도르의 강력한 민중운동이 희망 구티에레스가 집권 하는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압력을 받게 됐고, 집권 후에는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외부에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진보 세력의 역량에 대한 냉정한 판단 속에서 자신의 권한과 민중들의 지지를 통해 변화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보수세력 및 초국적 자본과의 손쉽게 타협하고 지지자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보가 불안정한 민주적 질서 자체에 대해 위협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베네수엘라 및 쿠바 정부도 망명한 그와는 거리를 두는 분위기다. 쿠바는 그가 물러나게 된 것은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며 간접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동조를 지적했고, 베네수엘라 외부부도 “초국적 금융자본 엘리트들과 맺은 협약의 결과”라며 결과의 책임이 일부 그에게 있음을 명확히 했다. 브라질 정부도 망명 허용 결정을 “동조”가 아닌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3) 구티에레스의 망명 후 그의 뒤를 이은 부통령 파라시오는 우선 과도기 정부로서 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사 출신인 그는 석유 값의 일부를 사회복지 예산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IMF와의 갈등을 예고하기도 했다. 미국은 그가 구티에레스보다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하고 일단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미 확인했듯이 에콰도르의 정치에서는 확실한 것이란 없다. 단, 최근 10년간 대통령을 3번이나 민중의 권력으로 갈아 치운 에콰도르의 강력하고 폭발적인 민중운동이 그 나라의 노동자, 빈민, 원주민, 여성들이 지닐 수 있는 희망일 것이다.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좌파 세력들의 약진에 다시 그들이 합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PSSP 1) 일례로 "Lucio Gutierrez: Ecuador's Populist Leader," BBC News, November 25th, 2002.본문으로 2) Immanuel Wallerstein, Death by a Thousand Cuts, Commentary No. 160. May 1., 2005. http://fbc.binghamton.edu/160en.htm본문으로 3) "Ecuador: People Drive Out President," Green Left Weekly, April 25th, 2005.본문으로
블레어정부와 노무현정부가 꼭 닮은 까닭은? 2005년 영국 총선과 블레어주의의 본질 - 블레어정부와 노무현정부가 꼭 닮은 까닭은? 임 필 수 | 정책편집국장 (난민, 범죄와 같은) 보수당 이슈는 곤란하면서도 영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주도권을 따내기 위한 철저한 전략이 필요하다… 난민과 범죄 문제는 애국심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영국의 고질적인 문제이자 영국인의 본능에 깊이 닿아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범죄에 관해 우리는 강력한 수단을 강조해야만 한다. 보석 전에 마약에 대한 강제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난민 문제에서 우리는 난민의 제거를 강조해야만 한다. - 2000년 언론에 공개된 블레어의 비밀 메모 영국 노동당은 1997년 총선을 통해 18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1년 총선으로 전후시대 가장 많은 의석 수를 차지한 정당이 되었다(이 때 노동당은 413석, 보수당은 166석, 자유민주당은 52석을 얻었다). 또한 2005년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36%의 득표율로 355석을 얻어 의석 수가 상당히 줄긴 했으나 3기 집권에 성공했다. 신노동당이 지난 8년 간 거둔 성적표는 매우 뛰어나 보인다. 프랑스를 제치고 유럽의 두 번째 경제강국이 되었다는 그들의 자랑은 유럽연합에서 가장 낮은 실업률과 세계 2위의 금융시장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19세기 '아름다운 시절'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현재 영국의 상황은 부와 권력의 거대한 계급적 이동을 의미한다. 노동당이 전쟁 매파의 상징이 된 현실은 노동당의 계급적 기반과 성격이 크게 변했다는 분명한 지표의 하나다. 영국 신노동당, 총유권자 22%의 지지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다 영국 노동당의 변화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실은 영국 노동자의 상당수가 투표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2001년 투표율은 59%라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2005년에도 61%로 조금 증가했을 뿐이다(1992년 총선에서 키녹이 이끌었던 노동당이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을 때 득표는 1150만 표였지만, 최다의석을 얻게 된 2001년 선거에서 득표는 1070만 표였다). 그로 인해 영국 신노동당은 총유권자 22%의 지지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신노동당이 3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요소도 작용하였다.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은 "그래도 불가피한 차악(次惡)"이라고 생각하거나, "영국 노동당의 깊숙한 곳에 있는 진정한 노동자 전통과 영혼이 언젠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신노동당은 (노동자에 대한) '우호가 아닌 공평'이라는 구호가 말해왔던 노동자 정당의 성격을 지우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대안이 없는 노동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온정주의에 입각한 선전구호와 최소한의 예산지출을 동반하는 사회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영국 보수당의 와해는 1997년 이후 노동당의 도전 없는 지배의 전제조건이 되었다(보수당 득표는 1992년 1400만 표. 그러나 1997년 960만 표, 2001년 830만 표로 감소했다).1) 노동당은 범죄나 난민 문제와 같은 보수당 이슈를 가공하여 정치적 구심을 잃은 부동층에 대한 '상품성'을 높이고자 시도했다. 또한 승자독식의 선거체계는 낮은 득표율과 높은 의석비율이라는 괴리를 낳았고, 노동당이 과잉 대표성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대처의 금융빅뱅과 블레어 정부의 '아름다운 시절' 해외자본에 의한 국부유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최근 한국경제를 두고 '윔블던 효과'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영국이 개최하지만 우승자는 항상 외국인이 차지한다는 데서 유래된 비유인데, 이제 영국은 초민족 금융기업에게 거래장소만 제공한다는 뜻이다. 대처정부는 1979년 실시한 전면적인 외환거래자유화(대외금융거래 완전자유화)에 이어 1986년 금융서비스법을 제정해 증권시장과 관련 규제를 철폐했다(은행의 증권업무 허용, 증권수수료 자유화, 증권회사 소유제한과 업무영역 폐지). 그 결과 SG워벅, 베어링, 모건-그레펠 같은 수 백 년 전통의 투자은행이 외국자본에 인수되고,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와 같은 미국 투자은행이 런던에 진출하면서 외국계 금융기관의 활동범위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제 런던의 금융산업은 선물, 옵션, 스왑 등 신종금융상품과 금융기법의 중심지가 되었고, 뉴욕에 이어 세계 2위의 금융시장 지위를 회복했다. 영국의 금융수출은 큰 폭으로 성장하여 대외수지에 기여하며, 금융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큰 몫을 차지하며(2002년 영국 GDP의 5.3%를 차지했고, 법률·회계·컨설팅 등 관련서비스분야를 합치면 8.3%에 기여한다), 2003년 현재 104만 명을 고용하는 산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결과로 영국사회의 모습은 과거 '젠틀맨 자본주의'의 모습을 완전히 탈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교외 건축물이 남부 잉글랜드까지 뻗어 나가고, 일본과 미국 자본이 투자한 실리콘 산업과 제약회사가 급속히 성장했다. 낡은 방직산업 공장은 폐쇄되었고, 철강산업은 갈아엎어졌다. 규제철폐, 낮은 노동비용, 세계언어로서 영어라는 이점 때문에 영국은 유럽단일시장으로 들어오는 해외자본의 가장 유망한 항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비스부문(미장원, 커피숍, 가든센터, 소매점 등)이 강력히 성장했고 실업률이 떨어졌다. 주식거래에 대한 관대한 세금우대는 소규모 저축자들을 주식시장으로 유혹했다. 이제 영국은 과거 제국시대 거품의 축소판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대처리즘이 완전히 바꾸어 놓은 영국사회를 상속받았다. 처음부터 신노동당은 대처리즘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기보다는 상속받은 모델을 강화할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블레어혁명>이란 강령선언문은 대처의 성취에 대해 경외에 찬 존경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미 1992년 총선패배 이후 선언된 신노동당 구상의 핵심은 당헌 4조("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공공소유와 모든 산업과 서비스에 대한 인민의 관리와 통제체제")의 공식적인 폐기와 노조주의와의 절연이었고, 신노동당의 대처리즘에 대한 경배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새로 집권한 신노동당은 1993년 이후 4년 간의 경제팽창을 선물로 여겼고, 보수당이 확립한 경향을 앞으로 밀고 나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말은 그런 대로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평균 GDP 성장은 2.4%였다 (앞서 5년 간 평균 3.2%에 비해 다소 감소한 수치다). 1990년대 영국의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투자가 빈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영국은 2000년대에 들어서 정보통신산업의 위축으로 미국이 입은 타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금융거품은 실업률을 역사상 최저 수치로 낮췄다. 비록 그들 중 40%만 종신제, 풀타임 일자리에 근무했지만…. 가계소비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평균 5.7% 상승했다. 따라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영국은 대제국 시대의 금융·상업강국으로 복귀하고, 가장 이상적인 국제자본의 역외서비스기반으로 재탄생한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따라서 영국은 이제 경제쇠퇴가 끝나고 새로운 활력의 시대로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시절의 절대적인 노동착취 그러나 영국의 '아름다운 시절'의 본질은 부와 권력의 계급적 이동이 탁월하게 성공한 것에 불과하며, 영국의 쇠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대처의 현대화는 생산성과 투자라는 장기적 문제에 대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1997년 이후 GDP 성장은 단위 노동시간 당 산출물의 증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특히 저기술 분야의 노동시간 증대에 기인한 것이다. 경제전반의 생산성 수준은 G7 국가들 중에서 낮은 편에 속하고 투자는 지체되고 있다. 반면 인프라의 문제는 사유화를 통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기술경쟁에서 뒤쳐진 나라의 자본이 택할 수 있는 방식은 인플레이션을 통한 실질임금 삭감(생산된 가치의 이전)이나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 즉,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의 증가 뿐이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무한정 확대될 수 없는데, 자국통화의 가치절하와 맞물려 1970∼8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경제파탄의 소용돌이로 휘말릴 가능성이 잠재하며, 금융화를 위해서 인플레이션 억제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유로존에 가입한다면(블레어는 유럽단일통화를 기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유럽중앙은행의 엄격한 인플레이션 통제를 수용해야 한다. 따라서 영국처럼 기술경쟁에서 뒤쳐진 나라는 더더욱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의 증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을 오늘날 '노동신축화'라고 부르며,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2) (역으로 유럽연합은 인플레이션과 가치절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 생산성이 뒤쳐진 나라들이 회원국 가입를 꺼리는 것을 막으려면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로 영국사회에서 가난한 자로부터 부유한 자로 거대한 부의 이전이 발생하고 있다(간접세 비율도 대처시대보다 더 높다). 전체적인 불평등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저임금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하고, 임금격차 특히 남성과 여성 간 격차는 노동당 집권 시기 동안 꾸준히 커지고 있다. 노동강제복지: 산업예비군 확대와 인플레이션 억제 또한 노동당이 최선의 '빈곤퇴치, 범죄근절, 가족장려' 방법이라고 선전하는 복지개혁 즉 노동연계복지(워크패어)는 인플레이션 억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실업을 실업자 개인의 인격과 특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대처리즘과 마찬가지지만, 신노동당은 '산업예비군'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임금하향 압박을 형성하려는 숨겨진 목표를 혁신하였다. 신노동당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을 도입했다. 첫 번째 방식은 산업예비군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특히 실업자로 공식 분류되지도 않았고 노동시장 참여를 기대하지도 않았던 편모나 실업자의 다른 가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였다(병자와 장애인도 점차 포함되고 있다). 정부는 그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복지는 없다며 급여 박탈이라는 위협을 가한다. 한편 자본은 늘어난 산업예비군이 '고용능력'(employability)을 갖춰야 한다며 그들의 태도와 기술 훈육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사실상 고용능력이라는 자본의 난해한 표현은 임금을 낮춰야 한다는 뜻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들을 고용하는 자본가에게 직접적인 보조금을 제공한다. 노동당이 채택한 두 번째 방식은 저임금 노동자에게 세금공제(tax credit)라고 부르는 취업자급여를 제공하는 것이다. 노동당은 취업자급여를 25세 이상 모든 저임금 노동자로 확대하기로 했다. 최저임금제도는 엄격하게 강제된다면 임금의 최저선을 제공하겠지만, 자본은 정부가 최저선 이상으로 임금을 올리라고 압박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 알고 있다. 물론 최저임금제도가 없다면 재무성은 취업자급여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최저임금제도는 노동당정부에게 무척 중요하다. 전쟁정당 신노동당의 총선구호 중 하나는 "전쟁은 잊어라, 문제는 경제다"였지만, 블레어 정부를 말할 때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노동당의 지도자들은 보수당보다 더 미국에 아첨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영국이 한국전쟁에 지상군을 파병하는지를 보고 협력관계를 결정하겠다는 미국대사의 말에 놀라 애틀리 정부는 국가보건체계 기금을 빼돌려 군대를 무장해 한반도에 보냈다. 윌슨은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데에는 머뭇거렸지만 미국의 전쟁수행에 박수를 보냈다. 누구보다도 블레어는 클린턴에게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나도 가겠다'고 맹세했고, 신노동당은 워싱턴의 노예가 되었다. 1998년 10월과 2000년 여름 <사막의 여우> 작전이나 NATO의 78일에 걸친 유고슬라비아 공중폭격 때 블레어는 백악관보다 더 매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부시로 바뀐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노동당의 외교정책은 국내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영국 금융자본과 초민족기업이 커다란 채찍을 휘두르는 미국에게 확실한 지지를 보내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블레어의 전쟁정책도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물론 블레어가 주도한 정치개혁과 권위주의적인 정치스타일은 전쟁 결정이 신속하게 내려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영국 노동당은 당헌개정을 통해 점점 더 노동조합과 관계가 멀어졌고, 블레어 같은 정치엘리트가 주도하는 정당이 되었다. 또한 정부 내각의 권한은 블레어의 사적 참모집단으로 대체되고 있다(블레어는 "장관들도 동의할 것이다"라고 종종 말한다). 이라크 무기사찰관이었던 켈리 박사의 죽음을 계기로 폭로된, 블레어가 전쟁수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정보를 왜곡했다는 사실은 노동당 정부의 반민주적 성격의 한 단면을 드러냈다. 따라서 핵보유국인 영국에서 블레어 정부가 "그렇소, 나는 핵 버튼을 누를 것이오"라는 식의 핵 정책을 고수하는 것도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세계 경제·정치의 수렴 과거 경제정책과 다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특징은 세계경제의 중심부 국가에게 바람직한 경제정책은 주변부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바람직하다는 가설이다. 미국과 국제경제기구는 바람직한 거시경제, 구조조정 정책을 제시하고, 경제위기를 매개로 강제적인 시행을 명령한다. 이로써 세계 각 나라의 경제정책의 수렴 현상이 발생한다. 금융개방, 노동신축화, 복지개혁과 같은 경제, 사회정책이 서로 똑같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반영하여 정치·정당개혁, 교육개혁도 점차 닮아가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외교군사 정책에 대한 충성심 경쟁도 강요된다. 영국 신노동당과 한국 노무현정부의 각종 개혁조치에서 동일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전범 부시, 블레어, 노무현을 민중의 심판대로"라는 구호가 나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블레어가 내세우는 '금융적 성장체제', '노동신축화와 노동강제적인 복지개혁'의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사실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다. 1) 대처의 현대화 계획은 노동조합과 국유산업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점차 공무원, 대학, BBC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고, 결국 보수당의 정치적 헤게모니의 근거가 된 권력조직 전체에 대한 총공격으로 발전했다. 이로써 전통적인 권력조직의 정당성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수당의 핵심세력은 전통적인 귀족, 고관과 같은 특권적인 엘리트층에서 더욱 전투적인 소부르주아, 신중산층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보수당에서 부상한 새로운 세력의 이데올로기는 고상한 토리 전통('한 민족 온정주의')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들은 1950년대 프랑스를 강타한 푸자드 운동, 곧 중소상공업자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며 납세거부운동으로부터 출발한 공격적, 권위주의적 운동에 훨씬 더 가까웠다(지난 프랑스 대선 때 결선까지 진출한 국민전선의 르펜은 푸자드 당의 이름으로 27세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특히 1997년 총선 패배로 전통적인 보수당 엘리트는 급격히 추락했고, 지도부를 장악한 새로운 층은 당의 이해관계를 시티(영국금융집단)와 초민족기업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다. 1998년 보수당은 당헌을 개정하여 지금까지 별다른 권력이 없던 지방의 선거권협회에 당 지도부를 선출할 권리를 주었고 (그들은 평균 62세였고 대부분 농촌 거주자였다), 그 결과 전통적인 엘리트층은 당권에서 더욱 멀어졌다. 본문으로 2) 물론 오늘날과 같은 노동신축화 정책이 대세를 장악하기까지 영국은 길고도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1960년대 영국의 경제쇠퇴 기미가 확연해지자 - 2차대전 후 잠깐 동안 영국은 독일과 일본의 경제파괴 때문에 상대적인 우월성을 누릴 수 있었으나, 낙후된 산업기반과 금융자본의 해외이동으로 인해 1960년대에 이르게 되자 더 이상 경제침체의 징후를 감출 수 없게 되었다 - 보수당이나 노동당 모두 현대화를 위한 계획을 세웠지만 공격방향을 노동자운동으로 삼은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영국 노동조합운동은 대륙에 비해 정치성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작업현장에 참호를 파놓았고 강인함과 문화적 응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64년 윌슨 노동당정부나 1970년대 히드 보수당정부 모두 노동자조직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노동조합의 비타협적인 반대에 직면했다. 1976년 선진국에서는 처음으로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후 등장한 대처의 현대화 계획은 한마디로 '복수극'이었다. 대처 집권 10여 년 동안 실업자는 최대 300만 명까지 치솟았지만, 노동조합의 목을 비트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노동조합의 저항을 박살냈다. 노동법을 다섯 번 개정했고, 1990년 최종판은 클로즈드샵(채용조건으로 노조가입을 의무화) 완전폐지, 모든 2차 쟁의행위 불법화, 비공인쟁의행위에 대한 노동조합의 책임부담을 담고 있었다. 본문으로
블레어정부와 노무현정부가 꼭 닮은 까닭은? 2005년 영국 총선과 블레어주의의 본질 - 블레어정부와 노무현정부가 꼭 닮은 까닭은? 임 필 수 | 정책편집국장 (난민, 범죄와 같은) 보수당 이슈는 곤란하면서도 영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주도권을 따내기 위한 철저한 전략이 필요하다… 난민과 범죄 문제는 애국심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영국의 고질적인 문제이자 영국인의 본능에 깊이 닿아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범죄에 관해 우리는 강력한 수단을 강조해야만 한다. 보석 전에 마약에 대한 강제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난민 문제에서 우리는 난민의 제거를 강조해야만 한다. - 2000년 언론에 공개된 블레어의 비밀 메모 영국 노동당은 1997년 총선을 통해 18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1년 총선으로 전후시대 가장 많은 의석 수를 차지한 정당이 되었다(이 때 노동당은 413석, 보수당은 166석, 자유민주당은 52석을 얻었다). 또한 2005년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36%의 득표율로 355석을 얻어 의석 수가 상당히 줄긴 했으나 3기 집권에 성공했다. 신노동당이 지난 8년 간 거둔 성적표는 매우 뛰어나 보인다. 프랑스를 제치고 유럽의 두 번째 경제강국이 되었다는 그들의 자랑은 유럽연합에서 가장 낮은 실업률과 세계 2위의 금융시장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19세기 '아름다운 시절'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현재 영국의 상황은 부와 권력의 거대한 계급적 이동을 의미한다. 노동당이 전쟁 매파의 상징이 된 현실은 노동당의 계급적 기반과 성격이 크게 변했다는 분명한 지표의 하나다. 영국 신노동당, 총유권자 22%의 지지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다 영국 노동당의 변화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실은 영국 노동자의 상당수가 투표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2001년 투표율은 59%라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2005년에도 61%로 조금 증가했을 뿐이다(1992년 총선에서 키녹이 이끌었던 노동당이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을 때 득표는 1150만 표였지만, 최다의석을 얻게 된 2001년 선거에서 득표는 1070만 표였다). 그로 인해 영국 신노동당은 총유권자 22%의 지지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신노동당이 3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요소도 작용하였다.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은 "그래도 불가피한 차악(次惡)"이라고 생각하거나, "영국 노동당의 깊숙한 곳에 있는 진정한 노동자 전통과 영혼이 언젠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신노동당은 (노동자에 대한) '우호가 아닌 공평'이라는 구호가 말해왔던 노동자 정당의 성격을 지우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대안이 없는 노동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온정주의에 입각한 선전구호와 최소한의 예산지출을 동반하는 사회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영국 보수당의 와해는 1997년 이후 노동당의 도전 없는 지배의 전제조건이 되었다(보수당 득표는 1992년 1400만 표. 그러나 1997년 960만 표, 2001년 830만 표로 감소했다).1) 노동당은 범죄나 난민 문제와 같은 보수당 이슈를 가공하여 정치적 구심을 잃은 부동층에 대한 '상품성'을 높이고자 시도했다. 또한 승자독식의 선거체계는 낮은 득표율과 높은 의석비율이라는 괴리를 낳았고, 노동당이 과잉 대표성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대처의 금융빅뱅과 블레어 정부의 '아름다운 시절' 해외자본에 의한 국부유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최근 한국경제를 두고 '윔블던 효과'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영국이 개최하지만 우승자는 항상 외국인이 차지한다는 데서 유래된 비유인데, 이제 영국은 초민족 금융기업에게 거래장소만 제공한다는 뜻이다. 대처정부는 1979년 실시한 전면적인 외환거래자유화(대외금융거래 완전자유화)에 이어 1986년 금융서비스법을 제정해 증권시장과 관련 규제를 철폐했다(은행의 증권업무 허용, 증권수수료 자유화, 증권회사 소유제한과 업무영역 폐지). 그 결과 SG워벅, 베어링, 모건-그레펠 같은 수 백 년 전통의 투자은행이 외국자본에 인수되고,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와 같은 미국 투자은행이 런던에 진출하면서 외국계 금융기관의 활동범위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제 런던의 금융산업은 선물, 옵션, 스왑 등 신종금융상품과 금융기법의 중심지가 되었고, 뉴욕에 이어 세계 2위의 금융시장 지위를 회복했다. 영국의 금융수출은 큰 폭으로 성장하여 대외수지에 기여하며, 금융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큰 몫을 차지하며(2002년 영국 GDP의 5.3%를 차지했고, 법률·회계·컨설팅 등 관련서비스분야를 합치면 8.3%에 기여한다), 2003년 현재 104만 명을 고용하는 산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결과로 영국사회의 모습은 과거 '젠틀맨 자본주의'의 모습을 완전히 탈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교외 건축물이 남부 잉글랜드까지 뻗어 나가고, 일본과 미국 자본이 투자한 실리콘 산업과 제약회사가 급속히 성장했다. 낡은 방직산업 공장은 폐쇄되었고, 철강산업은 갈아엎어졌다. 규제철폐, 낮은 노동비용, 세계언어로서 영어라는 이점 때문에 영국은 유럽단일시장으로 들어오는 해외자본의 가장 유망한 항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비스부문(미장원, 커피숍, 가든센터, 소매점 등)이 강력히 성장했고 실업률이 떨어졌다. 주식거래에 대한 관대한 세금우대는 소규모 저축자들을 주식시장으로 유혹했다. 이제 영국은 과거 제국시대 거품의 축소판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대처리즘이 완전히 바꾸어 놓은 영국사회를 상속받았다. 처음부터 신노동당은 대처리즘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기보다는 상속받은 모델을 강화할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블레어혁명>이란 강령선언문은 대처의 성취에 대해 경외에 찬 존경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미 1992년 총선패배 이후 선언된 신노동당 구상의 핵심은 당헌 4조("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공공소유와 모든 산업과 서비스에 대한 인민의 관리와 통제체제")의 공식적인 폐기와 노조주의와의 절연이었고, 신노동당의 대처리즘에 대한 경배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새로 집권한 신노동당은 1993년 이후 4년 간의 경제팽창을 선물로 여겼고, 보수당이 확립한 경향을 앞으로 밀고 나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말은 그런 대로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평균 GDP 성장은 2.4%였다 (앞서 5년 간 평균 3.2%에 비해 다소 감소한 수치다). 1990년대 영국의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투자가 빈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영국은 2000년대에 들어서 정보통신산업의 위축으로 미국이 입은 타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금융거품은 실업률을 역사상 최저 수치로 낮췄다. 비록 그들 중 40%만 종신제, 풀타임 일자리에 근무했지만…. 가계소비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평균 5.7% 상승했다. 따라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영국은 대제국 시대의 금융·상업강국으로 복귀하고, 가장 이상적인 국제자본의 역외서비스기반으로 재탄생한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따라서 영국은 이제 경제쇠퇴가 끝나고 새로운 활력의 시대로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시절의 절대적인 노동착취 그러나 영국의 '아름다운 시절'의 본질은 부와 권력의 계급적 이동이 탁월하게 성공한 것에 불과하며, 영국의 쇠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대처의 현대화는 생산성과 투자라는 장기적 문제에 대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1997년 이후 GDP 성장은 단위 노동시간 당 산출물의 증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특히 저기술 분야의 노동시간 증대에 기인한 것이다. 경제전반의 생산성 수준은 G7 국가들 중에서 낮은 편에 속하고 투자는 지체되고 있다. 반면 인프라의 문제는 사유화를 통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기술경쟁에서 뒤쳐진 나라의 자본이 택할 수 있는 방식은 인플레이션을 통한 실질임금 삭감(생산된 가치의 이전)이나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 즉,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의 증가 뿐이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무한정 확대될 수 없는데, 자국통화의 가치절하와 맞물려 1970∼8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경제파탄의 소용돌이로 휘말릴 가능성이 잠재하며, 금융화를 위해서 인플레이션 억제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유로존에 가입한다면(블레어는 유럽단일통화를 기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유럽중앙은행의 엄격한 인플레이션 통제를 수용해야 한다. 따라서 영국처럼 기술경쟁에서 뒤쳐진 나라는 더더욱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의 증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을 오늘날 '노동신축화'라고 부르며,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2) (역으로 유럽연합은 인플레이션과 가치절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 생산성이 뒤쳐진 나라들이 회원국 가입를 꺼리는 것을 막으려면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로 영국사회에서 가난한 자로부터 부유한 자로 거대한 부의 이전이 발생하고 있다(간접세 비율도 대처시대보다 더 높다). 전체적인 불평등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저임금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하고, 임금격차 특히 남성과 여성 간 격차는 노동당 집권 시기 동안 꾸준히 커지고 있다. 노동강제복지: 산업예비군 확대와 인플레이션 억제 또한 노동당이 최선의 '빈곤퇴치, 범죄근절, 가족장려' 방법이라고 선전하는 복지개혁 즉 노동연계복지(워크패어)는 인플레이션 억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실업을 실업자 개인의 인격과 특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대처리즘과 마찬가지지만, 신노동당은 '산업예비군'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임금하향 압박을 형성하려는 숨겨진 목표를 혁신하였다. 신노동당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을 도입했다. 첫 번째 방식은 산업예비군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특히 실업자로 공식 분류되지도 않았고 노동시장 참여를 기대하지도 않았던 편모나 실업자의 다른 가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였다(병자와 장애인도 점차 포함되고 있다). 정부는 그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복지는 없다며 급여 박탈이라는 위협을 가한다. 한편 자본은 늘어난 산업예비군이 '고용능력'(employability)을 갖춰야 한다며 그들의 태도와 기술 훈육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사실상 고용능력이라는 자본의 난해한 표현은 임금을 낮춰야 한다는 뜻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들을 고용하는 자본가에게 직접적인 보조금을 제공한다. 노동당이 채택한 두 번째 방식은 저임금 노동자에게 세금공제(tax credit)라고 부르는 취업자급여를 제공하는 것이다. 노동당은 취업자급여를 25세 이상 모든 저임금 노동자로 확대하기로 했다. 최저임금제도는 엄격하게 강제된다면 임금의 최저선을 제공하겠지만, 자본은 정부가 최저선 이상으로 임금을 올리라고 압박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 알고 있다. 물론 최저임금제도가 없다면 재무성은 취업자급여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최저임금제도는 노동당정부에게 무척 중요하다. 전쟁정당 신노동당의 총선구호 중 하나는 "전쟁은 잊어라, 문제는 경제다"였지만, 블레어 정부를 말할 때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노동당의 지도자들은 보수당보다 더 미국에 아첨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영국이 한국전쟁에 지상군을 파병하는지를 보고 협력관계를 결정하겠다는 미국대사의 말에 놀라 애틀리 정부는 국가보건체계 기금을 빼돌려 군대를 무장해 한반도에 보냈다. 윌슨은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데에는 머뭇거렸지만 미국의 전쟁수행에 박수를 보냈다. 누구보다도 블레어는 클린턴에게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나도 가겠다'고 맹세했고, 신노동당은 워싱턴의 노예가 되었다. 1998년 10월과 2000년 여름 <사막의 여우> 작전이나 NATO의 78일에 걸친 유고슬라비아 공중폭격 때 블레어는 백악관보다 더 매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부시로 바뀐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노동당의 외교정책은 국내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영국 금융자본과 초민족기업이 커다란 채찍을 휘두르는 미국에게 확실한 지지를 보내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블레어의 전쟁정책도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물론 블레어가 주도한 정치개혁과 권위주의적인 정치스타일은 전쟁 결정이 신속하게 내려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영국 노동당은 당헌개정을 통해 점점 더 노동조합과 관계가 멀어졌고, 블레어 같은 정치엘리트가 주도하는 정당이 되었다. 또한 정부 내각의 권한은 블레어의 사적 참모집단으로 대체되고 있다(블레어는 "장관들도 동의할 것이다"라고 종종 말한다). 이라크 무기사찰관이었던 켈리 박사의 죽음을 계기로 폭로된, 블레어가 전쟁수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정보를 왜곡했다는 사실은 노동당 정부의 반민주적 성격의 한 단면을 드러냈다. 따라서 핵보유국인 영국에서 블레어 정부가 "그렇소, 나는 핵 버튼을 누를 것이오"라는 식의 핵 정책을 고수하는 것도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세계 경제·정치의 수렴 과거 경제정책과 다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특징은 세계경제의 중심부 국가에게 바람직한 경제정책은 주변부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바람직하다는 가설이다. 미국과 국제경제기구는 바람직한 거시경제, 구조조정 정책을 제시하고, 경제위기를 매개로 강제적인 시행을 명령한다. 이로써 세계 각 나라의 경제정책의 수렴 현상이 발생한다. 금융개방, 노동신축화, 복지개혁과 같은 경제, 사회정책이 서로 똑같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반영하여 정치·정당개혁, 교육개혁도 점차 닮아가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외교군사 정책에 대한 충성심 경쟁도 강요된다. 영국 신노동당과 한국 노무현정부의 각종 개혁조치에서 동일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전범 부시, 블레어, 노무현을 민중의 심판대로"라는 구호가 나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블레어가 내세우는 '금융적 성장체제', '노동신축화와 노동강제적인 복지개혁'의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사실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다. 1) 대처의 현대화 계획은 노동조합과 국유산업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점차 공무원, 대학, BBC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고, 결국 보수당의 정치적 헤게모니의 근거가 된 권력조직 전체에 대한 총공격으로 발전했다. 이로써 전통적인 권력조직의 정당성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수당의 핵심세력은 전통적인 귀족, 고관과 같은 특권적인 엘리트층에서 더욱 전투적인 소부르주아, 신중산층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보수당에서 부상한 새로운 세력의 이데올로기는 고상한 토리 전통('한 민족 온정주의')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들은 1950년대 프랑스를 강타한 푸자드 운동, 곧 중소상공업자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며 납세거부운동으로부터 출발한 공격적, 권위주의적 운동에 훨씬 더 가까웠다(지난 프랑스 대선 때 결선까지 진출한 국민전선의 르펜은 푸자드 당의 이름으로 27세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특히 1997년 총선 패배로 전통적인 보수당 엘리트는 급격히 추락했고, 지도부를 장악한 새로운 층은 당의 이해관계를 시티(영국금융집단)와 초민족기업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다. 1998년 보수당은 당헌을 개정하여 지금까지 별다른 권력이 없던 지방의 선거권협회에 당 지도부를 선출할 권리를 주었고 (그들은 평균 62세였고 대부분 농촌 거주자였다), 그 결과 전통적인 엘리트층은 당권에서 더욱 멀어졌다. 본문으로 2) 물론 오늘날과 같은 노동신축화 정책이 대세를 장악하기까지 영국은 길고도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1960년대 영국의 경제쇠퇴 기미가 확연해지자 - 2차대전 후 잠깐 동안 영국은 독일과 일본의 경제파괴 때문에 상대적인 우월성을 누릴 수 있었으나, 낙후된 산업기반과 금융자본의 해외이동으로 인해 1960년대에 이르게 되자 더 이상 경제침체의 징후를 감출 수 없게 되었다 - 보수당이나 노동당 모두 현대화를 위한 계획을 세웠지만 공격방향을 노동자운동으로 삼은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영국 노동조합운동은 대륙에 비해 정치성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작업현장에 참호를 파놓았고 강인함과 문화적 응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64년 윌슨 노동당정부나 1970년대 히드 보수당정부 모두 노동자조직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노동조합의 비타협적인 반대에 직면했다. 1976년 선진국에서는 처음으로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후 등장한 대처의 현대화 계획은 한마디로 '복수극'이었다. 대처 집권 10여 년 동안 실업자는 최대 300만 명까지 치솟았지만, 노동조합의 목을 비트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노동조합의 저항을 박살냈다. 노동법을 다섯 번 개정했고, 1990년 최종판은 클로즈드샵(채용조건으로 노조가입을 의무화) 완전폐지, 모든 2차 쟁의행위 불법화, 비공인쟁의행위에 대한 노동조합의 책임부담을 담고 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