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사회진보연대 여성위 소식지 5호 '삶의 소리'에 실린 글입니다 9월 20일,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는 전범민중재판운동 발기인 총회가 열렸다. 이곳에 모였던 대략 100여명 정도 되었던 사람들 중, 이 사업이 누구의 제안으로 시작되었고, 앞으로 어떤 모양새를 갖추며 진행될지를 잘 알고 온 사람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파병 군대 철수하라며 50여 일을 곡기를 끊고 단식순례를 진행한 성직자와 동화작가,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이들을 지원하며 함께 했던 지역주민들,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들, 음악과 춤으로 전쟁반대를 외치는 아마추어 문예인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그곳에 모였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이후 1년 반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전쟁을 반대한다, 점령군은 철수하라, 파병을 반대한다, 김선일을 살려내라, 파병군대 철수하라" 등의 외쳐졌던 수많은 구호들만큼 많은 변화와 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광화문은 텅 비어 있고, 언론에서는 출국부터를 쉬쉬했던 자이툰 부대의 행적이 그 이름도 잊혀지지 않는 지난날 '배달의 기수'와 같은 형식으로 다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것이 기정사실이 된 것 같은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무엇이 이들을 전범민중재판 발기인 총회라는 정체도 잘 알 수 없는 행사에 모이게 했을까. 더러운 침략 전쟁이 당장 중단되어야 하며, 거기에 힘을 보태는 한국군대가 하루 빨리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이들의 한결같은 바램이자 의지이다. 그러나 그 날 참가자들의 다소 이질적인 이력으로 보나, 전쟁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표현해온 방식을 보자면, 아마도 모인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각자의 동기와 배경이 그들을 그곳으로 이끌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생명과 평화를 존중하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 그 자체라는 신념에 기대어 지금 우리들의 만남과 행동은 정말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는 김재복 수사. 이 전쟁이 하루만 일찍 끝나면 20명, 한 달만 일찍 끝나면 1,000여명 이라크 민중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동화작가 박기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을 안겨주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아프게 두 눈뜨고 살겠다는 시민. 경제 봉쇄로 가뜩이나 열악했던 이라크의 의료 수준을 최악으로 끌어내려 생목숨을 꺾고 있는 이 전쟁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료인. 그리고 표현되지 않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침략전쟁 가담하는 노무현을 규탄한다', '이라크 전쟁범죄 노무현을 심판하자' 다같이 외쳤던 구호들. 이런 다양한 의지와 소망이 모여든 자리였던 만큼, 행사는 총회형식을 가지는 보통의 행사에서 보이는 이러 저런 토론과 의견이 바쁘게 개진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 부조화스러운 것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게 하기도 했다. 아마 이러한 분위기가 서로 다른 이유로 적응이 안 되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서로 다른 이유로 이 사업에 다소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연장에서 이 사업의 '대중적 성공' 여부에 대해서도 누구도 확신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 이후 한국에서 벌어졌던 반전투쟁의 부침, 그것의 원인이며 동시에 결과로서 불거진 이런저런 논쟁과 주장들을 반면교사 삼는다면, 이 사업에는 앞선 운동들이 생산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미덕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폭력, 평화와 인권의 파괴에 대한 분노는 반전운동을 이끄는 기저로서 어떤 절대선 혹은 보편적인 인민의 권리와 연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즉각적으로 대중들의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생산되지 못한 많은 것들은 책임자 노무현에 대한 분명하지 않은 태도에 가로막힌 반전운동, 여성에 대해 배제적인 반전운동, 노동자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반전운동, 그리하여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는 반전투쟁이라는 비판, 논쟁의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만들었던 반전운동은 몇 차례의 극적인 계기를 지나 지금은 적절하지 못한 휴지기에 접어들어 있는 상황이다. 이 시점에 제안된 전범재판운동은 참여하는 사람 누구나가 기소인이 되고 각자의 기소장을 작성하는 사업의 주요 원칙에서 알 수 있듯, 모든 이들이 자신의 운동과 삶의 조건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권리에 근거해 이 운동의 의미를 구성하고 참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주동자 노무현-부시-블레어에 대한 민중의 심판을 우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범민중재판은 그 자체 들불이 되기보다,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반전운동에 동참했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학교가 되어 성찰과 사고의 전환의 가능성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전범민중재판은 실제로 공간을 가지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공간이 되고, 이주노동자들이 함께 함으로써 전쟁에 가담하는 이 정부가 이주노동자들도 탄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회복지에 쓰여야 할 돈이 침략전쟁으로 세나가고 있는 현실을 빈민, 장애인들과 함께 비판하고, 전쟁이 파괴하는 여성들의 고유한 권리를 함께 주장하고 운동 속에서도 소외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성찰할 수 있는 조건과 공간을 만드는 것을 지향하는, 그런 것이다. 이러한 기능성이 실제 실현되고 전범민중재판이라는 운동의 흐름으로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이에 참여하는 개개인들이 해야 할 몫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이러한 노력이 이 운동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고, 또한 그러한 노력은 전범민중재판이라는 하나의 사업을 그럴 듯하게 성사시키기는 것을 넘어서는 성찰과 고민을 요구하는 것이다 싶다. 그랬을 때, 전범민중재판이 법이라는 국가제도를 어설프게 흉내 내는 이벤트나 선언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텅 빈 광화문을 더 크게 열 수 있을 것이다. PSSP
9.17-19 베이루트 전략회의 참가기; 베이루트 국제회의의 배경 국제적인 수준에서 반전운동은 2003년 2월 15일 전 세계적으로 1천 5백만 명을 거리로 불러내 이라크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성공적으로 조직함으로써 뉴욕타임즈조차 “미국과 다른 또 하나의 수퍼 파워”라고 평할 만큼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2003년 5월에는 자카르타에서 국제회의가 개최되어 ‘자카르타 평화 컨센서스’ 원문은 http://www.focusweb.org/beirut/b-index.htm 참고 를 이끌어냈다. 자카르타 평화 컨센서스는 ‘단결 선언’, ‘이라크에 대한 입장과 행동계획’, ‘세계화와 군사주의에 대한 행동계획’ 등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반전운동의 기본 입장과 운동계획이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흐름은 2004년 1월 인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의 반전운동 총회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이라크 침략 1년이 되는 3월 20일 국제행동을 하자는 호소가 광범위하게 제안되고 합의되었다. 이번 베이루트 회의는 이러한 운동의 연장선에서 이라크와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반전(반세계화)운동 전략회의를 열자는 문제의식 하에 개최되었다. 이번 국제회의의 문제의식은 제안문에서도 말하는 바, “중동 지역의 반전 반세계화 운동과 밀착된 관계를 만들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일부로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관련된 최근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운동이 능동적으로 대처할 것인지 전략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이 회의의 주요 조직자인 ‘남반구 포커스’의 월든 벨로 교수는 연설문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중요한 시기에 우리는 여기 베이루트에 모였다. 상황은 복합적이다. 이라크에서 미국은 점점 더 깊숙이 베트남과 같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데, 2003년 3월 20일 침공 이후 미군 병사들의 사망 숫자는 9월 첫째주에 1000명을 넘어섰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직도 시오니스트 장벽[팔레스타인 분리장벽]이 하루에 1킬로미터 비율로 건설 중이다....오늘, 기업 주도 세계화의 최고 기구인 WTO는 지난 달에 개도국에 대한 경제적 무장해제를 촉진시키도록 고안된 ‘제네바 기본골격’ 합의를 가지고 제 발로 다시 돌아왔다.” 베이루트 국제회의에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조직을 대표하는 참가자들이 모였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MST(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 캐나다자동차노조, 팔레스타인노조, 청년단체 등 풀뿌리 대중조직부터 각국의 반전단체들(영국, 호주, 그리스, 남아공 등의 반전연합, 미국의 정의평화연합), 팔레스타인 관련 단체들, 평화운동 단체들, 반세계화운동 단체들, 이태리공산주의재건당, 그리스녹색당, 레바논공산당, 헤즈볼라 등 정치조직들, 연구단체들 등등 다양한 스펙트럼이었고, 나라별로 보아도 태평양의 피지에서부터 동티모르, 남쪽의 아르헨티나에서 북쪽의 노르웨이까지 참가 범위가 실로 광범위했다. 무엇보다 레바논, 이라크, 팔레스타인, 요르단, 이집트 등 현지 중동지역의 활동가들이 대거 참가하였고 거의 과반수에 이르렀다. 아랍지역의 반전 반세계화 운동이 처음으로 이렇게 국제적인 연대에 함께하는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회의규모는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는데 그만큼 국제적으로 반전 반세계화 운동의 향후 방향을 논의하는 데 관심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반전운동과 반세계화 운동은 결합되고 있는가? 회의 첫날 각 대륙의 운동 상황 보고를 들었는데 주로 반전과 반세계화 운동의 양상은 각 나라에서 공통적이었다. 독일의 경우 최근 ‘월요일 시위 (Monday Demonstration)’ 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의 복지삭감, 사유화, 탈규제 등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반전이슈와 연결되고 있다고 한다. 남아공에서는 반전연합을 결성해서 전쟁과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있는데 이들은 다국적기업 반대, 미제국주의 반대, 이라크전쟁 반대, 팔레스타인 해방을 주요 이슈로 하고 있다. 또한 반전활동가들이 대부분 반세계화활동가로서 제국주의와 다국적기업의 침략에 저항하는 운동을 조직하고 있다고 하였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플랜 콜롬비아’와 같은 미국의 군사적 개입 문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수많은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는데, 푸에르토리코 같은 곳에서는 미군기지 반대운동이 승리하기도 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반대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정부가 국가 안팎에서 전쟁과 세계화를 벌이고 있는데, 민주당의 정체성도 공화당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즉 사회복지를 삭감하고, 선제공격을 채택하는 것 등이다. 미국 내에는 6000여개 군사기지가 있고 세계적으로는 120개 국가에 1000여개 기지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군사주의, 사유화 정책을 강제한다. 한편 대선에서는 부시가 질 것으로 보이지만 전쟁과 세계화가 지속될 것이기 때문에 운동과 시위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각 국의 운동 상황 보고에서 반전 반세계화운동이 서로 결합되어 진행되고 있는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참가자들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적어도 인식의 측면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와 전쟁 문제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히 결합된 것이며 꾸준히 이를 결합시키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일례로 ‘군사주의와 세계화’ 그룹 토론에서 행동과제를 논의할 때 군사주의 부분과 세계화 부분 두 팀으로 나눠서 토론하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대다수가 이에 반대하여 행동과제를 합쳐서 논의하기도 했다.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맞춰진 초점 둘째 날인 18일에 본격적인 토론이 시작되었다. 토론주제는 1) 전쟁을 저지하지 못해서 운동이 지금 위기에 빠져 있는가? 2) 우리가 전쟁을 저지할 수 있었나? 3) 우리의 행동, 정치, 조직의 한계는 무엇인가? 4) 각기 다른 운동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힘인가 한계인가? 5) 우리는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의 저항에 대해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가? 6) 미 대선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7) 체첸이나 콜롬비아, 다르푸르(수단) 같은 곳의 갈등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이었다. 나온 의견들을 대략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부분 우리 운동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점령이 실패하고 있다. 2) 반전운동이 사회복지 삭감 항의 등 반신자유주의운동과 연계하고 있다. (독일의 월요일 시위나 미국의 50만 시위) 3)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저항운동에 조건 없이 지지 연대해야 한다. 이라크 민중들의 투쟁은 이라크만의 것이 아니라 아랍, 세계 전체의 투쟁이다. 4) 운동의 다양성을 강점으로 확대해야 한다.(인종, 성적차이, 인권, 민주주의 등등) 보편성을 강화해야 한다. 5) 미디어의 역할을 고발하고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6) 부시가 이라크에서 패배해도 운동은 더 강화되어야 한다. 미국의 실패는 미국 자본주의의 실패이므로, 자본주의 전체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7) 여성의 권리에 대한 운동이 확장되어야 한다. 8) 전쟁범죄에 대한 침묵을 폭로하면서 대중을 조직할 수 있도록 국제 이라크전범 법정을 확대하자. 9) 국제 행동의 날에 집중하고 이라크 민중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자. 10) 아랍국가들 내에서 민주주의 투쟁도 중요하다. 아랍 운동들간의 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11) 미 대선에서 부시가 재선된다면 전쟁이 더 확대될 것이다. 부시를 반드시 떨어뜨리기 위한 국제적 시위가 대선에 즈음해서 필요하다. 12) 전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기와 연계되어 있다. 20년 동안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고통받는 모든 민중들의 투쟁에 연대하자. 13) 내년 이라크 헌법제정 회의 개최할 때 이에 대응하는 국제회의를 바그다드에서 개최하자. 한편 20-30명의 이라크 참가단과의 토론에서는 팔루자에서 온 셰이크(성직자) 아이만 모하메드가 “현재 이라크는 야만적인 공격을 받고 있고 종교 시설마저 파괴되고 있다. 저항이 미군 등에 의해 테러리즘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미국의 이해에 해가 되면 테러리즘인 것이다. 안전은 그들만의 것이고 이라크인들의 것이 아니다. 이라크 정부는 미국을 쫓아내지 못한다. 이라크 저항은 순수한 저항이다.”라고 하면서 이라크 저항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라크 참가단의 주요 제안은 저항을 조건없이 지지하고 연대해달라는 것이었고, 내년에 헌법 제정 회의할 때, 바그다드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감옥에 갇힌 이라크 여성의 문제도 중요하게 제기되었다. 팔레스타인 참가단과의 토론에서는 주로 분리장벽 철폐운동이 다뤄졌다. 역사적으로 점점 팔레스타인 지역은 축소되어 왔고 현재 가자, 라파, 예루살렘, 나블루스 등에서 장벽이 건설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또한 인접 국가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의 법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도 가혹하다. 거의 생존 이하의 조건에서 살고 있고 이들은 미숙련 하층 직업에만 종사해야 하는 상황이다. 수자원을 비롯한 각종 자원도 이스라엘이 장악하고 있다. 이에 분리장벽을 철폐하기 위해 국제적으로 이스라엘을 보이콧하는 캠페인을 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제안되었다. 팔레스타인 관련해서는 회의 시작 전날 베이루트 시내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인 사브라&샤틸라라는 곳에서 22년 전에 이스라엘이 2500여명을 학살한 사건을 추모하는 영화상영이 있었고, 회의 첫째 날에는 그곳에서 추모행사도 개최되었다. 이라크 국제회의에 대한 논란 회의 3일째인 19일은 원래 오전에 선언문 초안을 논의하고 오후에 최종 선언문을 논의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일정이 변경되어 오전에는 브라질노총의 활동가가 2005년 포르투 알레그레 세계사회포럼에 대해 설명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회포럼 순서가 끝난 이후에는 1)이라크 점령 반대 2)팔레스타인 저항 3)경제적 군사적 세계화 등 세 그룹으로 나눠서 행동계획을 논의했다. 이라크 관련 행동제안은 점령감시센터(Iraq Occupation Watch Center) 재개(이는 여러 문제로 인해 4월에 중단되었음), 10월 13-14일 일본에서 열리는 재건기금 마련 회의를 반대하는 성명서 조직, 전쟁기업 반대 캠페인, 저항세력에게 식량과 의약품 지원, 이라크 전범 국제 민중법정, 외국용병 철수 캠페인, 10월 17일 국제행동, 국제적 이라크법률가위원회 구성, 2005년 이라크 헌법제정회의 개최시 이에 대응하는 국제회의를 바그다드에서 개최하는 것 등이 발표되었다. 팔레스타인 문제 관련해서는 분리장벽 반대 캠페인, 이스라엘 보이콧 캠페인, 국제방문단 조직, 11월 9-16일 국제행동,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에 맞춘 국제행동, 내년 5월 15일 국제행동 등이 제안되었다. 경제적 군사적 세계화에 대해서는 (미국)군사기지 반대 캠페인, 2005년 12월 홍콩에서 열리는 WTO 6차 각료회의 저지투쟁, 이를 위한 대중교육과 캠페인, 국제금융기구(IMF, IBRD)에 대한 반대운동 등이 제안되었다. 이후 선언문 초안과 행동계획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라크 대표단과 제안된 바그다드 국제회의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애초 이번 회의에 참가한 이라크 대표단에서는 '이라크 내에서 정치적 공간을 창출하기 위해 내년 이라크 헌법제정 회의시 반전운동의 국제회의를 바그다드에서 열자'고 제안했고 월든 벨로 등등이 이를 지지했는데, 영국 등의 참가자들이 이를 반대했다. 조지 갤로웨이 의원(영국 하원의원인데 반전 운동 때문에 노동당에서 제명당했다고 함) 등이 제기한 내용인즉슨 지금 참가한 이라크 대표단이 대표성이 없는 작은 집단이라는 것이고, 이라크 내에서 모종의 정치적 기획을 하여 정치적 입지를 넓히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이라크 대표단을 조직한 것으로 보이는 활동가는 "물론 이라크 저항세력 모두를 대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팔루자, 사마라, 쿠파, 바그다드 등에서 왔고 저항을 하고 있다.“면서 문제제기를 일축했다. 또한 여러 활동가들이 ”이라크 대표단에게 조건을 부과할 수는 없다“, ”대표단의 정당성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그들도 저항의 일부이다.“, ”운동은 단결해야 한다. 이 타입의 저항은 지지하지 않고 저 타입의 저항은 지지하는가? 이라크 안팎에서 정치세력을 단결시키고자 하는 행동을 지지해야 한다.“ 등의 발언을 하였고 월든 벨로는 ”이라크 대표단들은 점령에 반대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정치적 동물 아닌가? 그들도 이 회의에서 지지받아야 한다. 다른 이들이 오더라도 지지할 것이다. 그것이 첫걸음이다. 두번째는 우리가 이라크에 가서 이라크의 민주주의를 위해 점령에 반대하는 컨퍼런스를 여는 것이다.“라고 발언하였다. 몇 번의 인신공격성 발언들(누가 더 사담 후세인과 친했냐는)도 오갔고 ”이라크 저항세력의 광범위한 부분이 추진하여 요청하면 바그다드에서 국제회의를 할 수도 있지만 지금과 같이 작은 부분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추진하는 것은 지지할 수 없다“는 제기도 이어졌다. 급기야 이라크 대표단들이 회의장에서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라크에서 국제회의를 열자는 제안과 관련해서 문구가 세 가지 제안되었는데 이것도 논란을 거듭하다가 '통과시키지 말고 선언문과 따로 분리하되 서명할 곳은 서명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어 이에 동의하면서 논의를 마무리 지었다. 이에 따라 선언문만이 합의된 것으로 되었고 앞서 많이 제안된 행동계획은 합의되지 못한 채 남게 되어 향후 메일링리스트를 통해 지지 연명을 받기로 하였다. 이 문제는 사실 복잡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우선, 내년 1월로 예정된 총선을 어떻게 볼 것이냐다. 현재 저항의 확대로 인해 미군과 이라크 임시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면서 이라크 내에서는 대다수가 총선이 예정대로 치러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에 미국과 임시정부는 부분적인 총선도 가능할 수 있다는 얘기를 흘리고 있지만 일부지역만의 총선은 그야말로 이라크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애가 탄 미국과 임시정부가 총선 이전에 전국적인 통제력을 장악하기 위해 저항세력에 대한 ‘10월 대공세’를 시작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총선일정 자체가 극히 불투명하고, 또한 미군과 임시정부 치하에서의 총선을 소위 민주주의 과정으로 볼 수도 없고 총선이 치러지는 것을 인정할수 없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과거 미군정하 해방공간 상황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라크 저항세력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어떤 조직적 연계가 있는지, 전국적으로 단결을 모색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어서 국제 반전운동이 이들과 어떻게 연대를 맺을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정치세력과 파트너쉽을 형성하는 것은 섣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번 회의에서 이라크 저항에 대한 ‘조건없는 지지’가 대부분 동의되기는 했지만 일부 반대도 있었다. 즉 납치, 자살폭탄 등과 같은 극단적 방법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에 대해 월든 벨로는 연설문에서 “2003년 2월 15일 국제시위에 비해 2004년 3월 20일 시위의 규모가 훨씬 줄어든 것은 국제 평화운동의 중요 세력들이 이라크 저항을 정당화하는데 주저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민족해방이나 독립을 위해 ‘깨끗한’ 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이를 옹호하였다. 베이루트 회의가 남긴 것들 전체적으로 회의를 대략 평가해 보자면 첫째, 아랍지역 조직들이 대거 참석함으로써 국제적인 반전 반세계화 운동과 아랍 운동이 연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라크, 요르단, 이집트, 모로코, 튀니지, 시리아 등에서 참여하여 운동의 관심사를 논의하고 인적 교류를 맺은 것이 이번 회의의 가장 큰 성과가 아닌가 한다. 특히 이슬람 자체를 ‘테러리스트’로 묘사하는 미국과 지배 언론의 영향력이 ‘이슬라모포비아(이슬람혐오증)’의 형태로 대중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문제의식을 듣고 아랍지역의 운동이 반전 반세계화 운동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헤즈볼라 중앙위원인 알리 파야드는 레바논 남부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필자에게 “내년 1월 브라질 세계사회포럼에서 만나자”라고 하였다. 둘째, 이 연장선상에서 이라크,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조건 없이 지지하는 것에 동의했고, 그들과 직접 토론함으로써 구체적인 과제들을 활발하게 제안할 수 있었다. 특히 팔레스타인 문제는 과제와 행동계획이 잘 조직되어 제출되었고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국제적 지역적 수준에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점령에 반대하는 투쟁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의 중요성을 각인할 수 있었다. 셋째, 회의 공간의 지리적 특성상 때문인지 다소 팔레스타인, 이라크 문제만 부각되어 전체적인 군사주의의 다양한 문제, WTO-세계화 문제는 미흡하게 다뤄진 측면이 아쉬운 점이다. ‘전략회의’라는 명칭에 걸맞게 현 상황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토론, 전망 제시가 이뤄지져야 할 것이다. 넷째, 이라크에서의 국제회의 개최여부에 대한 논란 때문에 선언문만 합의되고 행동계획이 합의되지 못하였다. 물론 이라크 저항세력이 어떻게 대표될 수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지나치게 대표성 문제와 국제회의 개최여부만 논쟁됨으로써 다른 행동계획이 충분히 토론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한 활동가는 쟁점을 드러내놓고 토론한 것도 유의미하다고 평가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아쉬움은 크다. 이번 회의를 놓고 평가는 다양하게 표출될 수 있다. 그러나 강조되어야 할 것은 세계의 반전 반세계화 운동이 서로 긴밀한 연관을 맺으면서 신자유주의의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도록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지금이 미국 자본주의 헤게모니가 몰락하고 또 다른 체제로 변화하고 있는 장기적인 이행기라고 한다면 아래로부터 민중들의 행동, 연대, 조직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행위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SSP
베이루트 2004 : 불의와 전쟁에 저항하는 지구적 투쟁의 이정표 (Beirut 2004 : A Milestone in the Global Struggle against Injustice and War) 월든 벨로 (이 글은 2004년 9월 17일~19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린 국제 반전 반세 계화 운동 전략회의 가운데 ‘현 국면의 개요’부분에서 발제문으로 발표 되었다.)
현재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비록, 북핵 2차위기"라는 기사 모음입니다. "비록"이라고 하기에는 대체로 이미 언론에 알려진 내용들입니다만 재구성된 기사이니 당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듯합니다. 다만 이 기사는 북한의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분명한 사실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먼저 북한의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에 관해 미국이 제시했다는 증거가 신뢰할만한 것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이라크의 사례처럼 관련 부품 구입이 유일한 증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은 '북한이 사실상 시인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역시도 여전히 모호합니다. 앞으로도 몇 차례 더 연재될 듯한데, 참고하시길... [그 후 2년 秘錄 북핵 2차위기] 1. 2002년 10월 켈리 방북 전까지 무슨 일이 … 2. 켈리, 평양 2박3일 때 무슨 일이… 3. 북핵과 이라크 전쟁 함수관계는 … 4. 국제사회 북핵 대응 어떻게 … 5. 한국 대선 전후 … 고조되는 북핵 위기
파병 연장 즉각 중단하라 1. 국방부가 14일 전군 참모총장이 참여하는 군무회의를 통해 내년 말까지 이라크 파병을 연장하는 동의안 초안을 확정했다고 한다. 파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다시 기한을 연장하겠다는 그 뻔뻔함에 침이라도 뱉어주어야 할 것이다. 올해말까지는 소위 평화재건활동을 2개월밖에 못하게 되니 내년말까지 연장해야 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논리인가? 노무현정권은 파병에 이어 추가파병을 하고 이제 파병연장까지 함으로써 세번씩이나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2. 전쟁참여 집단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의 작태는 눈뜨고 보아주기조차 민망하다. 국익, 북핵문제, 한미동맹을 시시때때로 써먹으면서 노골적으로 미국의 군사주의와 전쟁의 동업자가 된 것이다. 노무현과 천정배를 비롯한 정권과 집권당의 지도부가 번갈아 미국에 가서 각종 역겨운 아부의 극치를 떠는 것도 모자라, 전쟁과 점령에 세계3위 규모의 군대를 파병하고도 그것도 모자라 1년을 더 연장하겠다는 것에 이르면 할말이 없어진다. 3. 애초에 대량살상 무기도 없었거니와 이라크 침략전쟁은 민주주의를 가져오기는커녕 학살과 점령으로 인해 극단적인 폭력과 갈등만을 초래했다. 미국이 말하는 테러리즘의 위협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세계는 훨씬 더 불안해졌다. 저항세력의 투쟁으로 인해 이라크 총선 자체가 불투명해지면서 이라크에 친미정부를 세우려는 구상마저 벽에 부딪쳤다. 미군과 임시정부는 바그다드 주변만을 통제하고 있을 뿐이다. 남은 것은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에는 가차없이 군사력을 사용한다는 깡패국가의 논리이다. 그것도 수천 수만의 이라크 민중들의 목숨, 김선일씨와 같은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을 댓가로 한 것이다. 4. 노무현정권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지금 이라크에서 평화와 재건은 없다. 자이툰부대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동조자로서 기능할 뿐이다. 일곱 나라가 벌써 철군했는데도 아직도 파병연장 운운하고 25일에는 미국 국무장관 파월을 불러들여 연장방침을 선물로 안겨주려 한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을 비롯하여 학살과 점령에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모든 세력들이 다시 나서야 한다. 자이툰부대 파병 이후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반전평화 운동에 새로이 불을 지피자. 지금 전개되고 있는 부시, 블레어, 노무현 전범 민중재판 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이라크 점령중단, 파병연장 저지, 한국군 철수투쟁의 물꼬를 트자. 2004년 10월 18일
동아시아 제국주의의 현재성 한국에서 '식민지'라는 용어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국권의 상실과 착취, 억압"이라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로 여겨졌고, 마땅히 청산되어야 할 과거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배"가 무엇이고 그것을 청산한다는 게 무엇인지는 그것의 가능성이 점점 사라져질수록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식민지배 청산이 정치적 지평에서 사라지게 되는 과정은 물리적 탄압을 동반하는 철저히 인위적인 결과였다. 1947년 미군정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민족반역자에 대한 특별법> 인준을 거부했고, 1948년 설립된 반민특위는 '국회프락치 사건'을 거치며 경찰에 의해 습격, 해산 당했다. 또한 1961년 5.16 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세력이 7월 <반공법>을 제정해 모든 사회운동 세력을 제거한 것은 쐐기를 박는 조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역사학계가 일제 강점기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조차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친일세력이 곧 반공세력으로 변신하거나 그들과 결탁한 상황에서 그 시기에 대한 연구 자체가 금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패망과 연합군의 승리, 대한민국의 건국은 식민지배 종식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고, 일본 식민지배의 실상과 그것이 한국사회에 남긴 광범위한 유산이 무엇인지 대해서 질문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물론 이러한 조건에서 몇몇 선구적인 인사들의 활동을 통해 대표적인 친일파 인사들의 행적에 관한 조사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이러한 활동이 현재 친일진상규명법의 모태가 된다). 하지만 식민지배 청산이라는 문제는 단지 식민지배에 앞장선 친일 인사에 대한 인적 청산에 한정될 수는 없다. 일제에 의해 이식된 사회구조의 모순 전반을 일소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친일파 청산에 관한 논란이 여야 정치세력 내부의 쟁점으로 이전된 상황에서, 우리는 식민지배 청산에 관한 더욱 광범위하며 본질적인 문제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일본 제국주의, 일본 파시즘은 왜 등장했나? 식민지배/제국주의라는 팽창주의는 당대 자본주의 중심국가의 동일한 국가적 지향이었다. 멀리 볼 것 없이 동아시아의 경우도 이러한 세력들의 각축장이었다. 영국의 인도와 동남아 여러 국가들에 대한 지배,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 등등. 물론 식민통치 전략과 목표는 서로 상이했다. 이는 세계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식민모국이 처한 조건을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동아시아에서 태평양전쟁으로 격돌하게 된 미국과 일본을 비교해 보자. 미국은 1898년 쿠바 수역에서 스페인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비밀리에 필리핀 마닐라만에 정박한 스페인 함대를 점령하고 결국 2천만 달러에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매입하여 병합하였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영향력을 뻗치고 있던 독일이나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미대륙의 양대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필리핀을 "예방점령"하는 계획을 은밀히 실행한 것이었다. 미국이 필리핀에서 팽창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은 미대륙의 서부팽창과 유사했다. 즉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연방정부가 외교적으로 개입하여 점령을 정당화하고, 군사총독을 임명하여 저항을 분쇄하고, 민정으로 이양한 후, 연방으로 편입하는 방식. 그런데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차이점이 있었다면 필리핀의 "자치화"를 내걸었다는 점이다. 이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강대국간에는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고, 약소국들에서 위임통치를 실시하여 그 기간 동안 자치주의를 이식하여 독립을 보장한다는 미국의 일반적인 대외전략으로 연장, 확대되었다. 그러나 물론 미국이 "시혜적인" 목적으로 실시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연방을 건설하는 과정 자체가 거대한 내부 식민지를 창출하는 과정이었고, 이것이 완료된 시점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판으로 "자치주의"의 동심원적인 확대가 미국의 안보가 가장 최상책이라는 전략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 자본주의가 영토주의적인 직접적인 지배를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즉 "자치주의"의 실현이 미국의 기업이나 투자가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양립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먼저 미국의 통치기간 동안 필리핀 내부의 사회경제적, 계급적 구조는 자본주의적 수탈구조로 재편되었다. 경제의 중추부가 수출용 환금작물 생산 위주로 재편되었고, 필리핀 소수의 대지주와 함께 미국의 투자가들이 농업생산이나 공장, 광산 사업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인민들은 여전히 토지에 의존해서 살아야 했지만, 가혹한 착취를 감내해야만 했다. 또한 1934년 이후 필리핀의 "자치화" 과정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만주사변 이후 필리핀의 영구중립화 추진. 2차대전 후 필리핀 군사기지 유지, 대 필리핀 투자에서 "내국인 대우" 요구 등등.) 이러한 미국의 필리핀에서의 "경험"은 2차대전 후 냉전 시기 대외 팽창주의를 실현하는 원형이 되었고, 멀게는 1945년 이후 한국에서나 가깝게는 현재 이라크에서나 공히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의 팽창주의가 겪은 길은 서로 달랐다. 일본은 1850년대 개항과 1860년대 명치유신을 겪은 후발주자였다. 일본은 "자강론"과 "진출론"이라는 지배전략 차원의 이데올로기를 적절히 배합하여 민족주의/국가주의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북해도와 오키나와를 강점했고, 청일전쟁 후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로 대외 팽창주의의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했다. 1930년대 만주사변을 거쳐 만주 지역을 점령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 전시동원체제, 천황 중심의 강력한 파시즘/전체주의 체제로 치닫게 되었다. 미국이 연방합중국이라는 거대한 내부식민지를 형성하는 과정에 비추어본다면 북해도와 오키나와 병합은 일본의 북문과 남문이라는 요충지를 획득했다는 것 외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한 것이다. 따라서 "살찐 큰 제물"이 필요했고, 그것은 곧 위기에 처한 구제국 중국이었고 그 발판이 제국의 변방인 조선과 대만이었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가 된 것은 "위대한 일본국민의 해탈과 부활", "문명화를 위한 정복"이었고, 나아가 대만이나 조선에서 "민족동화"를 달성하겠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은 구상은 실현되기 매우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었다. 식민지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식민지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로 인해 "민족동화"는 먼 훗날의 일로 계속 미뤄지게 되었다. 오히려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전황이 악화되자 전쟁 동원을 위해 '민족동화'를 강제적으로 무리하게 추진하여 커다란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전쟁동원을 위해 "황국신민화" 즉 천황숭배, 애국심, 반-백인종주의 강요, 창씨개명과 함께 식민지에서는 유례가 없는 징병제 실시를 강행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동아시아는 두 개의 팽창주의가 대결했고,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그 영욕이 갈라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동일한 팽창주의 경쟁을 펼쳤으나 일본은 동아시아 각국에서 파멸적인 전쟁동원과 착취, 이에 대한 심각한 저항운동으로 인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사상누각의 붕괴로 이어지고 전시경제가 파탄나면서 패퇴한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거대한 내부식민지를 보유하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혁신과 '고임금 체계'를 통한 노동운동의 포섭으로 무장하고, 대외적으로는 '민족자결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민족국가간 체계라는 외피로 기존 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을 포섭한 미국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일본의 팽창주의(식민주의/제국주의)는 다른 경쟁자들의 팽창주의에 비할 때 고유한 특징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다른 경쟁자들과의 대결과정에서 점차 그 형상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팽창주의는 후발주자, 추격자의 팽창주의였고, 그만큼 상쟁하는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패색이 짙어질수록 팽창주의의 야수적인 면모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해 분노를 느낄수록 그러한 팽창주의를 낳은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쟁의 시스템과 그 후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 팽창주의의 본질을 간파해야 한다. 둘째, 일본 제국주의는 청산되었나? 친일파 청산에 관한 국내에서의 논란이 가열차게 진행되는 와중에 일본에 방문한 노무현대통령은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를 포함해) "양국 간 과거사 문제에 대해선 내 임기 중엔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일본을 방문한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도 "친일진상규명법은 순수 국내문제이지 일본과 선린우호관계를 해치거나 이를 겨냥해 만든 것은 아니다"고 말하였다. 현재 정부, 여당이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막상 일본에게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국내 친일파 문제는 아직 청산이 안 됐지만 일본과의 문제는 이미 과거에 말끔히 해결되었다는 뜻인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한일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될 때 당시의 문제를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5.16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가장 기뻐한 자들은 누구인가? 물론 당시 미국 CIA 부장 덜레스가 "나의 재임 중 가장 성공한 업적은 박정희 쿠데타였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미국은 "미국이 지지하는 정부는 장면 박사의 합법정부뿐"이라는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미군 사령관의 호언장담을 금새 바꾸어버리고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를 승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수반란사건"의 주모자라는 좌익경력을 지닌 박정희 세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케네디 정부를 설득하는 데에는 일본의 공헌이 매우 컸다. 1961년 6월 19일 정상회담에서 이케다 일본수상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말했던 요지를 살펴보면 그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케다는 '일본에게 중국문제보다도 한국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일본을 겨냥하는 비수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한국이 공산화된다면 일본의 안보는 중대한 위협을 받는다'며 한국 내 정치상황에 일본의 발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쿠데타로 성립된 남한의 군사정권은 비록 민주적 정권은 아닐망정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합법정권이며, 반공체제를 견지시키기 위해서도 일본은 경제원조를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하루속히 국교정상화를 실현시켜야만 한다고 믿는다'며 박정희 세력이야말로 미국과 일본이 바라던 일본의 대한경제원조나 한일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점을 분명히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과 일본의 대한정책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그것이 바로 이른바 '역코스' 정책이었다. 당시 미국은 냉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단지 일본이 과거 공업력을 복구하는 것을 넘어서 일본이 필요로 하는 원료와 시장을 확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체를 일본의 후배지로 제공해야 한다는 '역코스' 정책을 수립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연이 아닌 것은 그것을 추진하는 일본과 한국의 세력이 과거 만주 출신의 경험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박정희 정권의 등장에 환호성을 지른 것을 말할 때 당시 일본 정치의 핵심세력과 박정희의 만주군 인맥간의 과거 "인연"을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이케다에 앞선 전임 수상이며 정치스승 격인 기시 노부스케는 관동군 경력을 지닌 자로 만주국산업부 차장으로서 '만주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만주중공업회사'를 설립했고, 도죠 내각 때 상공대신으로 활약해 전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전후 미국이 낙점한 인물로서, 도죠는 처형됬지만 그는 무죄로 석방되어 철저한 친미파로 정치활동을 전개했고 1957년에는 수상에 취임하였다. 그는 수상 취임 후 한일 국교정상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러한 노력은 박정희의 등장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의 당연한 귀결로서,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문제는 완전히 논외로 빠진 채 진행되었다.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말로만이라도 하는 "사과"도 전혀 없었고, "청구권" 문제만 논의되었다. 청구권이란 개념상 쌍방이 득실을 따져 서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다는 뜻이며, 일본은 자신이 지어준 공장, 철도, 교육 시설 등을 계산해서 받아내야할 자산으로 간주하였다. 다만 이러한 문제에서 일본이 "관대한" 태도를 보여 한국에 독립축하금 격으로 5억 달러 규모의 경제지원을 하는 것으로 매듭을 짓는 형식을 취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미국이 의도했던 것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미 1951년 미일 양국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을 전승국에서 제외하는데 합의했고, 이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어떤 배상의 의무도 없다고 못을 박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일본의 식민주의/제국주의 청산은 일본 국내적으로나 대외관계의 측면에서나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팽창주의 경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의도와 완전히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일본의 팽창주의를 자신의 헤게모니 아래로 복속시키면서 그들의 세계전략을 실행하는 하위 파트너로 적절하게 활용한 것이다. 노무현정부와 여당이 일본에게 할 말은 없다라고 한 것은 박정희 정권 이후로 구조화된 한미일 관계를 그대로 승인, 유지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식민주의/제국주의의 현재성 물론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공통된 것이다.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그것을 인정하거나 나아가 배상에 임한 제국주의 국가가 있었던가? 어차피 그들의 주도로 짜여진 국제법 체계는 과거 군사적 강점과 병합을 포함하는 식민지배를 불법화할 수 있는 요소가 없고, 어떤 강제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오히려 과거 식민 지배를 경험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민중의 고통은 한없이 연장되고 있다.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과거 식민주의의 고통(인간의 노예화와 인신매매, 자연자원의 착취)과 그 연장선상에 산업적, 금융적 착취(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직접투자, 외채와 부패스캔들을 통한 이중적 착취)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제3세계에서는 외채탕감과 각 나라에서 과거 식민모국의 자본과 결택해 부정부패로 축재한 지배세력들의 재산환수, 공적개발원조 확대 등과 강제적인 구조조정과 일방적인 무역개방 압력 중단 등의 민중의 요구가 분출하고 있지만, 현재 G-7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들은 이를 완전히 묵살하고 있다. 결국 20세기를 거쳐 미국의 공식적인 세계전략인 "민족자결주의"는 실현되었지만, 식민주의/제국주의 지배의 고통은 더욱 강하게 제3세계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로 연장되고 있는 식민주의/제국주의의 역사 속에서 한국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식민주의/제국주의 문제는 박정희 이후 한국의 신흥공업국으로의 부상이라는 화려한 성과로 인해 그야말로 "과거사"로 치부되고 있다. 지배세력들은 국교수립 후 일본이 베푼 유무형의 경제원조가 한국 경제 도약의 발판이 되었고, 더 따져보면 일본이 식민지 시기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을 통해 농업을 근대화하고 근대적 공업을 이식하였으므로 이러한 경제발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거다). 그리고 이는 박정희는 어두운 개인사를 지녔지만, 그것을 경제기적으로 승화시킨 지도자로서의 면모는 인정해야 하며, 박정희의 국가적인 경제개발계획이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이는 현재 분배 정의를 개선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친일인사 청산이나 박정희 정권과 그 이후 군사정권에서의 "공권력의 부당한 사용에 의한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에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금과옥조로서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게 현재 정부와 주류적인 정치세력들의 견해다. 그러나 위와 같이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의 한국사를 정당화하는 지배세력의 논리는 우리의 인식과 가장 첨예하게 갈리지는 대목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냉전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발전주의"라는 당근을 제공했다. 특히 일본의 군국주의적인 지배구조와 재벌체제를 유지하며, 일본의 보호무역은 용인하면서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고' 미국의 초국적기업이 직접적으로 진출하기보다는 일본의 억압적 국가와 재벌체제가 동거해 나가는 것을 용인했다. 일본의 배후지로 통합된 한국에서도 이러한 정책이 적용되었다. 한국은 냉전의 쇼케이스라는 다른 제3세계와 비교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발전주의의 예외적인 "수혜자"가 되었고, 발전주의의 성공을 선전하는 세계적인 모범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이 지속가능한 것인가? 1990년대 동아시아를 휩쓴 외채·금융위기는 동아시아의 고도성장 시대가 막을 내렸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언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른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를 통해 이용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통화와 금융전쟁을 수행하여 이 지역에서 국내 경제와 정치를 변화시키는 전략을 수행했다. 냉전 시기 정치-군사적 논리는 약화되고 초국적 법인기업의 금융적 팽창이 우선적인 목표로 전환되었다. 한국사회는 과거 발전주의의 시험무대가 되었던 것처럼, 미국 주도의 금융적 팽창을 위한 구조조정 전략의 가장 선도적인 시험무대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식민주의/제국주의라는 문제는 반공발전주의의 성공이라는 신화 속에서 굳이 다시 꺼내볼 필요가 없는 과거사로 간주하려는 지배세력의 노력에도 여전히 한국사회의 미래를 지배하는 현재적인 문제다. 그리고 그들이 그 사실을 부정할수록, 그들 자신이 제국주의 세력과 긴밀히 결탁되어있음을 반증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친일파 청산이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온 민중과 사회운동의 요구지만, 식민지배/제국주의라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이유다.
테러대책 운운말고, 당장 철군하라 ! 1. 알카에다의 2인자가 미국, 영국을 비롯한 파병국가들과 함께 한국을 대상으로 하여 공격을 촉구하는 내용이 알자지라에 방송된 이후 노무현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여는 등 테러대책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호들갑을 떨고 있다. 외교통상부는 모든 재외공관에 테러에 대비한 긴급지시를 내렸으며 법무부는 입국심사 강화 방침을 밝혔다. 2.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문제의 근본원인을 외면한 채 오히려 갈등을 더 부추길 수 있는 방안이다. 왜 그들이 공격을 촉구하게 되었는가? 전 세계가 더러운 침략전쟁이라고 하는 이라크 전쟁에 세계 3위 규모의 병력을 파견했기 때문 아닌가! 이라크 점령과 민중 학살에 한국군이 동참하는 한 그러한 위협은 피할 수 없다.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모든 점령군이 철수하지 않는 한 이라크 민중과 무장세력의 저항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3. 테러대책이 부족해서 오무전기 노동자들이 피살당하고 김선일씨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들의 의지를 짓밟으면서 가진 자들만을 위한 국익과 한미 학살동맹을 추종하여 파병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폭력과 갈등을 조장하고 위험과 불안을 세계화시키는 것은 미국의 군사주의이며 소위 ‘테러와의 전쟁’이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위선이고 기만이다. 무엇이 테러란 말인가? 미국처럼 첨단 군사무기로 무장하여 명분없는 전쟁을 벌이고, 그것도 모자라 수천 수만의 이라크 민중을 학살하는 것이야말로 테러 아닌가. 4. 더욱 심각한 것은 테러대책이라는 미명 하에 인권탄압이 자행될 수 있는 것이다. 법무부는 ‘반한(反韓)활동을 하는 불법체류 외국인’을 단속하겠다면서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활동을 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그들이 정부의 이주노동자 탄압정책에 항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단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 혹은 그에 연계될 수 있는 범죄자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인권적이고 억압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즉각 단속 방침을 철회해야 한다. 5. 극단적인 폭력의 위험을 안방으로 끌어들인 것은 바로 파병을 강행한 노무현정부요 미국이다. 위협을 초래해놓고도 오히려 그들은 감시와 경계의 눈을 부라리고 통제에 따르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일어날 지 모르는 사태를 막기란 힘들다. 만약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정부는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경찰과 군대를 더 강화시키고 인권을 더 후퇴시키면서 즉자적인 복수심, 불안과 공포를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6. 더욱이 미국과 이라크 꼭두각시 정부가 내년 1월 이라크 총선을 그들의 의도대로 실시하기 위해 저항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대해 대대적으로 ‘10월 대공세’를 펼치면서 희생자는 늘어나고 저항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아르빌의 자이툰 부대도 공격의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자이툰 부대를 즉각 철수시키고 미국이 이라크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더 큰 재앙을 막는 첫걸음이다. 지금이야말로 이를 위해 평화와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철군과 점령종식을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할 때다. 2004.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