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의 환상을 걷어치워라 최 예 륜 |정책편집부장 APEC 13차 정상회의가 2005년 11월 18, 19일 부산에서 개최된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21개국을 아우르는 APEC은 전 세계 GDP의 약 57% 및 교역량의 46%를 차지하고, 회원국의 인구가 전 세계의 약 44.8%(2004년 기준)에 달하는 거대규모의 경제협력체다. APEC은 1989년 창설 이후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며 자유무역 확산의 선도적 역할을 자임해왔으나 그 기능과 실적에 대한 비판과 회의에 부딪혀왔다. APEC이 제시한 자유무역의 경로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럽연합이나 전미자유무역지대(NAFTA) 등 역내 무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블록들의 배타성을 경계하면서 전 세계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선도하겠다던 APEC은 명목뿐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이는 APEC 프로그램의 부실로 인한 것이 아니며 APEC이 유포해 온 자유무역 신화가 붕괴되고 아시아-태평양 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해진 데 따른 것이다. APEC은 창설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수직적 하청 네트워크를 자유무역의 신화로 포장하고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의 첨병으로서 WTO협상에 지역블록, 개도국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또한 1997년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IMF 자금지원을 통해 금융자유화 프로그램을 강제하여 금융화를 촉진하고, 9.11 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對테러 전략을 지원하는 ‘인간안보’라는 의제를 논의하는, 자유무역의 쟁점을 초과하는 광범위한 역할 수행을 자임해왔다. 이러한 과정 내내 APEC은 시효가 만료된 발전주의와 자유무역의 신화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인민들을 호도해왔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유무역 신화 세계경제에서 하나의 지역으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출현은 처음에는 일본의 경공업을 위한 시장과 원료에 대한 접근수단을 보장해줌으로써 일본 경제를 재건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기반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를 제패한 미국은 냉전정책에 기반한 전후 세계경제 복구책을 내놓으며 일본에 대한 집중적 지원을 수행했다. 미국은 일본에 미국의 기업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미 수출판로를 보장하는 ‘역개방 정책’을 펼쳤고, 일본은 생산의 배후지(경제적 식민지)를 요청했다. 남한과 대만 등이 배후지로 통합되면서 1960년대 일본 및 1970년대 남한과 대만의 경제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발전과정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 위계적으로 연결된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들의 확장을 통해 성취되었다. ‘나는 기러기 떼(flying geese)’ 발전1)이라는 명목 하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심-주변 관계가 공고화되었다. 중심에서 주변 혹은 반주변부에서 주변으로 산업들의 재배치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는 직접투자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 국가들은 높은 의존도의 대미수출을 통해 수출지향적 산업육성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산업화를 위한 기술, 자본유치에 있어서의 ‘개방성’ 및 수출지향성이 아시아 경제의 ‘필수’ 덕목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른바 네 마리 용으로 부상한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은 직접투자와 대외교역의 개방성을 극대화하여 성공한 모델로 꼽히며, 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이러한 ‘역동성’에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전략산업 집중투자라는 성장전략에 따른 과잉중복투자와 금융투기자본의 급속한 유입은 동아시아의 연쇄적 금융위기를 발생시키게 된다. 또한 1970년대 이후 미국경제 불황에 따른 수입의 감소와 일본 거품경제의 붕괴,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한계에 봉착한 기술혁신과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하청네트워크 형태의 발전모델은 파탄에 이르렀다. 아시아에서 미-일 동맹이 유포해온 다음과 같은 자유무역 신화는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첫째,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역외교역의 활성화와 경제적 역동성 덕분이며, 이러한 경제적 역동성 때문에 아시아에는 지역경제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자유무역체제는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낳는다. 셋째, 자유무역체제는 특히 한국 등의 신흥공업국(개발도상국)에 또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생산의 ’초민족적 통합‘은 이에 조응하는 세계 소득의 재분배를 동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산 네트워크의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중심부로 자본 집중이 증가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신흥공업국들을 비롯하여 중하위소득국들이 전반적인 실추를 모면할 수 있었던 예외적 능력은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 확장에 덧붙여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들의 국가장치가 누린 상대적인 자율성과 이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이용한 지정학적 전략들과 관련된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간의 중심-주변 관계의 구성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지역이 출현하는 데에 근본적이었다. 일본의 다층적인 하청 시스템들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거점들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거점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 시장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수단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미국의 관할권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시아의 지역경제체제는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없었고 수출의 판로를 확보하고 자본의 더욱 자유로운 이동을 강화하는 방식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경제의 부상과 배타적 역내 블록화 움직임은 미국의 아시아 통제권 상실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개방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의 ’개방성‘이란 미-일동맹이라는 현존하는 권력관계의 지속을 승인하고 WTO 협상과 관세철폐 등 여타 지역블록 및 거대개도국 등을 압박하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 질서로의 철저한 이행을 촉구하는 촉매라는 APEC의 본질적 기능을 포장하는 것이다. APEC 전개과정과 미-일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들 APEC은 1989년 11월 1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창설되었다. 1993년 시애틀에서 열린 APEC의 최초 정상회담은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결속에 위협을 느낀 유럽연합이 서둘러 우루과이 라운드와 WTO발족에 대한 동의를 표하는 효과를 낳았다. 2차 인도네시아 보고르 정상회의에서는 ‘보고르 선언’을 채택하여 선진국 회원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의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 등 선진국 그룹은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등 새로운 통상 이슈(기술 이전, 협력 등의 명목으로)를 APEC을 통해 타결하고자 하였고, 개도국들은 선진국의 개방 압력을 다자간 협상체제로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다양한 경제구조와 목적, 이해관계가 혼재한 가운데 APEC은 협력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무역장벽 등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기로 하고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결과 이행 및 WTO체제의 성공적인 출범을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APEC은 이 ‘보고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략들을 구사하는데 첫 번째 경로는 3차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오사카행동계획’이었다. 각 회원국들은 개별실행계획을 제출, 구체적인 일정을 수립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또 다른 경로로서 APEC은 15개의 조기자유무역화 분야를 선정하지만 이 역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 APEC은 이후 오클랜드에서 세 번째 경로로 방향을 틀게 된다. WTO에 판돈을 걸고, WTO 뉴라운드 출범이라는 대세에 몸을 맡겨 전 세계의 자유화를 함께 성취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99년 시애틀에서 WTO각료회의는 무산되었다. 사실 이 무산에는 가장 큰 경제규모의 미국과 일본의 갈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APEC의 자유화 경로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APEC의 틀 안에서 한편으로 쌍무협정들과 금융 자유화 조치 등이 꾸준히 강화되어왔다. 자본 이동이 극대화되고 외환시장이 국제적인 투기자본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초래된 금융위기로 인해 일본주도의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파탄을 맞았다. 이러한 위기는 ‘관치금융과 거품경제’의 구조개선이라는 명목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수용으로 이어지고, 기존에 국가의 집중적 지원을 받아온 재벌체제에 대한 개선과 노동 유연화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일단락 되었으며, 역설적으로 무역, 투자 자유화가 경제 활성화를 위한 필수과제로 대두했다. 또한 자유무역의 확대를 위한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외환위기 직후 금융안정화 방안에 따라 금융부문 구조조정, 민간자본 및 투기자본의 역내 유입 촉진 등이 논의되었다.2) 여기서 IMF 자금지원의 역할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고유한 접근과 관리기준의 전파를 용이하게 만들고 금융자본에 우선순위를 부여한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것으로 기능했다. APEC의 위상은 전후 아시아지역 경제 주도권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1994년 APEC의 저명인사그룹(EPG)의 정의3)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는 역내 국간에 최대한 시장개방을 실시하고, 개별국가들은 역외국에게는 역내자유화조치 혜택을 선택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를 강조하는 ‘개방적 지역주의’란 WTO 체제의 순항과 자유무역 달성을 위해 아시아지역의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거대 시장의 형성으로 여타의 경제블록을 압박하기 위한 수사다. 물론, 이와 별도로 아시아 내에서의 지역화 논의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수출 흡수국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고, ASEAN +3(한중일) 진전, EAFTA(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모색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편, 역내 금융협력체제 형성을 위한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창설(엔 블록화) 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이 느낄 ‘태평양 가운데 선긋기’의 위협은 미국 관리 하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지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와 노무현 정부 한편으로는 아시아에서의 배타적 지역화를 막고 유럽연합이나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등을 모든 무역장벽이 제거된 자유무역의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은 줄기차게 FTAAP(아시아 태평양자유무역협정) 결성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60%를 차지하는 APEC이 FTAAP를 결성하여 차별의 조건을 내걸 경우 핵심 개발도상국(브라질, 인도 등)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거대한 비회원국들은 이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따라서 배타적 경제블록들로부터 지역적 자유화보다 전 세계적 차원의 추진력을 회복하고 도하라운드 결론을 수용하도록 하여 미국을 정점에 둔 자유무역의 완성에서 APEC은 핵심 거점인 셈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의 기조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이다((미국을 중심으로 한)하나의 (빈부의 양극화를 위한)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 유럽연합이 헌법조약투표 과정 등을 거치면서 통합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미국에 적대적인 지역공동체들의 강화와 중국 부상 등 현실적 위협에 대해 자원과 소득의 재분배를 불러올 것이라는 자유무역 신화는 여전히 도전 중이라는 것이다. 냉전 구도 하에서 그리고 냉전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정치·경제·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미국의 불안정성 증대는 자유무역의 완성을 시급히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불안정성 증대와 종속의 심화라는 자유무역의 진실을 마주한 인민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몇 푼을 적선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외침을 확산하고 있다. 과연 자유무역체제는 ‘평등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전세계 소득을 증진시키고 고루 분배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정부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과 혹독한 구조조정의 터널을 거쳐 ‘관치금융’과 ‘재벌-족벌 경영의 폐해’를 시정하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감내할 노동력의 재구성을 이루어냈으며 금융자본의 출입이 자유로운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에! 또한 아직까지도 착취 가능한 동남아시아 및 남미 시장을 위한 해외투자의 수행자로서 한국의 자본가계급이 든든히 제 갈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자유무역 질서는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지방화, 분권화가 이루어질 것이라지만 실상 이는 기존의 국가의 기능을 지방정부 등을 통해 강화하고 경제자유구역, 특구 지정 등을 둘러싼 지방 도시들의 경쟁을 부추길 따름이며, 이를 위해 시민들을 동원하고 관리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이번 APEC 정상회의가 진행되는 부산시는 동북아 물류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해외자본 유치에 가속도를 붙이는 등 APEC 준비과정을 지역경제의 구조조정의 계기로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초민족적 기업과 국민국가의 위상을 동등하게 다루는 투자자유화 물결은 국가의 역할 분산을 동반한다. 노동력 관리의 엄격함과, 연기금 개혁 등 국가 개입을 통한 투기자금의 형성의 역할은 강화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문화적 쟁점의 상당수는 NGO들에게 이전된다. 노무현 정부는 NGO들을 동원하여 자유무역과 금융투기의 활성화를 위한 APEC의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고 부산여성단체협의회, 부산여성단체연합 등의 여성단체들은 ‘APEC 여성의제채택 여성연대’를 구성하여 ‘중소기업, 영세기업 및 여성 참여 강화‘ 의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으로 이에 조응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反테러와 6자회담 진전을 위한 부산선언문〉을 준비하는 등 정치적 차원에서 APEC을 활용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와 ‘전쟁’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인권과 반테러’ 즉,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도출되는 APEC에서 동북아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일 동맹 헤게모니로의 통합이라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증대된 불안정성과 인민의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아시아에서 인민들의 연대와 단결된 투쟁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자유무역 신화의 폐해가 가장 극대화된 형태로 드러난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일한’ 착취 네트워크를 향한 자유무역질서의 전략적 요충지와 아시아-태평양의 군사기지로서 동북아가 갖는 지정학적 전략에 따른 미국의 재편전략이 수행되고 있다. 이 착취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이미 드러난 자유무역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이 지배구조에 복무하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005년 APEC정상회의에 대응하는 우리의 기조는 미-일 동맹과 노무현정부에 의해 확장되는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반대,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인민들의 연대를 통한 대안세계화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다. PSSP 1) 일본을 선두로 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의 육성과 발전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아시아 발전형태설명이론(안행(雁行)형태 이론이라 불린다). 선도국가에서 경쟁력 있는 산업의 육성이 이루어지고 그 성과가 직접투자를 매개로 다음 단계의 국가에 이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설명되는 동아시아 '발전'과정에서 일본은 대동아시아 흑자 행진을 계속했는데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를 일본중심의 무역 및 투자시스템 내의 하위구조로 고착시켜놓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동아시아 경제의 틀을 형성하면서 기술을 지배하고 있어 대동아시아 수입의 상당부분도 사실은 일본기업의 현지 투자회사로부터의 수입일 뿐이다. 본문으로 2) 동아시아 금융위기 발생 이후 열린 98년 6차 콸라룸푸르 정상회의에서는 아시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면서 '경제 위기 조기극복을 위해 성장지향적 거시경제정책을 공동으로 추진키로 합의'하는 한편 국제 금융체제의 강화를 위한 노력으로서 민간자본 역내 유입 촉진과 회원국의 금융체제 강화, 금융분야 구조조정, 국제 금융체제 개선문제 등이 주로 논의되었다. 금융 및 자본자유화가 급진전되면서 헤지펀드 등 투기성 단기자본을 포함한 자본의 유출입이 빈번해진 데 원인이 있었던 발생한 동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극복 방안으로서 투자 자본의 안정적 역내 유입이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역설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3) APEC 저명인사그룹의 보고서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하는 개념이다. ①최대한의 일방적 자유화, ② 비회원국에 대한 무역장벽의 지속적 완화 확약, ③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 ④개별 회원국의 독자적인 조건적/무조건적 최혜국대우 원칙 적용. 위의 요건 중 한가지 이상을 충족하면 '개방적 지역주의'의 실천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한 이들의 개념 설정은 애초 '개방적 지역주의'가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개방화'와 '세계화'를 수행하되 지역별 구분에 따라 관리와 위계질서의 유지가 가능한 질서를 지향함을 드러낸다. 본문으로
자유무역의 환상을 걷어치워라 최 예 륜 |정책편집부장 APEC 13차 정상회의가 2005년 11월 18, 19일 부산에서 개최된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21개국을 아우르는 APEC은 전 세계 GDP의 약 57% 및 교역량의 46%를 차지하고, 회원국의 인구가 전 세계의 약 44.8%(2004년 기준)에 달하는 거대규모의 경제협력체다. APEC은 1989년 창설 이후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며 자유무역 확산의 선도적 역할을 자임해왔으나 그 기능과 실적에 대한 비판과 회의에 부딪혀왔다. APEC이 제시한 자유무역의 경로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럽연합이나 전미자유무역지대(NAFTA) 등 역내 무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블록들의 배타성을 경계하면서 전 세계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선도하겠다던 APEC은 명목뿐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이는 APEC 프로그램의 부실로 인한 것이 아니며 APEC이 유포해 온 자유무역 신화가 붕괴되고 아시아-태평양 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해진 데 따른 것이다. APEC은 창설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수직적 하청 네트워크를 자유무역의 신화로 포장하고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의 첨병으로서 WTO협상에 지역블록, 개도국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또한 1997년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IMF 자금지원을 통해 금융자유화 프로그램을 강제하여 금융화를 촉진하고, 9.11 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對테러 전략을 지원하는 ‘인간안보’라는 의제를 논의하는, 자유무역의 쟁점을 초과하는 광범위한 역할 수행을 자임해왔다. 이러한 과정 내내 APEC은 시효가 만료된 발전주의와 자유무역의 신화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인민들을 호도해왔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유무역 신화 세계경제에서 하나의 지역으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출현은 처음에는 일본의 경공업을 위한 시장과 원료에 대한 접근수단을 보장해줌으로써 일본 경제를 재건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기반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를 제패한 미국은 냉전정책에 기반한 전후 세계경제 복구책을 내놓으며 일본에 대한 집중적 지원을 수행했다. 미국은 일본에 미국의 기업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미 수출판로를 보장하는 ‘역개방 정책’을 펼쳤고, 일본은 생산의 배후지(경제적 식민지)를 요청했다. 남한과 대만 등이 배후지로 통합되면서 1960년대 일본 및 1970년대 남한과 대만의 경제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발전과정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 위계적으로 연결된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들의 확장을 통해 성취되었다. ‘나는 기러기 떼(flying geese)’ 발전1)이라는 명목 하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심-주변 관계가 공고화되었다. 중심에서 주변 혹은 반주변부에서 주변으로 산업들의 재배치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는 직접투자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 국가들은 높은 의존도의 대미수출을 통해 수출지향적 산업육성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산업화를 위한 기술, 자본유치에 있어서의 ‘개방성’ 및 수출지향성이 아시아 경제의 ‘필수’ 덕목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른바 네 마리 용으로 부상한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은 직접투자와 대외교역의 개방성을 극대화하여 성공한 모델로 꼽히며, 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이러한 ‘역동성’에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전략산업 집중투자라는 성장전략에 따른 과잉중복투자와 금융투기자본의 급속한 유입은 동아시아의 연쇄적 금융위기를 발생시키게 된다. 또한 1970년대 이후 미국경제 불황에 따른 수입의 감소와 일본 거품경제의 붕괴,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한계에 봉착한 기술혁신과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하청네트워크 형태의 발전모델은 파탄에 이르렀다. 아시아에서 미-일 동맹이 유포해온 다음과 같은 자유무역 신화는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첫째,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역외교역의 활성화와 경제적 역동성 덕분이며, 이러한 경제적 역동성 때문에 아시아에는 지역경제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자유무역체제는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낳는다. 셋째, 자유무역체제는 특히 한국 등의 신흥공업국(개발도상국)에 또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생산의 ’초민족적 통합‘은 이에 조응하는 세계 소득의 재분배를 동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산 네트워크의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중심부로 자본 집중이 증가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신흥공업국들을 비롯하여 중하위소득국들이 전반적인 실추를 모면할 수 있었던 예외적 능력은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 확장에 덧붙여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들의 국가장치가 누린 상대적인 자율성과 이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이용한 지정학적 전략들과 관련된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간의 중심-주변 관계의 구성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지역이 출현하는 데에 근본적이었다. 일본의 다층적인 하청 시스템들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거점들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거점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 시장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수단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미국의 관할권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시아의 지역경제체제는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없었고 수출의 판로를 확보하고 자본의 더욱 자유로운 이동을 강화하는 방식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경제의 부상과 배타적 역내 블록화 움직임은 미국의 아시아 통제권 상실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개방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의 ’개방성‘이란 미-일동맹이라는 현존하는 권력관계의 지속을 승인하고 WTO 협상과 관세철폐 등 여타 지역블록 및 거대개도국 등을 압박하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 질서로의 철저한 이행을 촉구하는 촉매라는 APEC의 본질적 기능을 포장하는 것이다. APEC 전개과정과 미-일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들 APEC은 1989년 11월 1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창설되었다. 1993년 시애틀에서 열린 APEC의 최초 정상회담은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결속에 위협을 느낀 유럽연합이 서둘러 우루과이 라운드와 WTO발족에 대한 동의를 표하는 효과를 낳았다. 2차 인도네시아 보고르 정상회의에서는 ‘보고르 선언’을 채택하여 선진국 회원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의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 등 선진국 그룹은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등 새로운 통상 이슈(기술 이전, 협력 등의 명목으로)를 APEC을 통해 타결하고자 하였고, 개도국들은 선진국의 개방 압력을 다자간 협상체제로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다양한 경제구조와 목적, 이해관계가 혼재한 가운데 APEC은 협력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무역장벽 등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기로 하고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결과 이행 및 WTO체제의 성공적인 출범을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APEC은 이 ‘보고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략들을 구사하는데 첫 번째 경로는 3차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오사카행동계획’이었다. 각 회원국들은 개별실행계획을 제출, 구체적인 일정을 수립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또 다른 경로로서 APEC은 15개의 조기자유무역화 분야를 선정하지만 이 역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 APEC은 이후 오클랜드에서 세 번째 경로로 방향을 틀게 된다. WTO에 판돈을 걸고, WTO 뉴라운드 출범이라는 대세에 몸을 맡겨 전 세계의 자유화를 함께 성취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99년 시애틀에서 WTO각료회의는 무산되었다. 사실 이 무산에는 가장 큰 경제규모의 미국과 일본의 갈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APEC의 자유화 경로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APEC의 틀 안에서 한편으로 쌍무협정들과 금융 자유화 조치 등이 꾸준히 강화되어왔다. 자본 이동이 극대화되고 외환시장이 국제적인 투기자본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초래된 금융위기로 인해 일본주도의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파탄을 맞았다. 이러한 위기는 ‘관치금융과 거품경제’의 구조개선이라는 명목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수용으로 이어지고, 기존에 국가의 집중적 지원을 받아온 재벌체제에 대한 개선과 노동 유연화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일단락 되었으며, 역설적으로 무역, 투자 자유화가 경제 활성화를 위한 필수과제로 대두했다. 또한 자유무역의 확대를 위한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외환위기 직후 금융안정화 방안에 따라 금융부문 구조조정, 민간자본 및 투기자본의 역내 유입 촉진 등이 논의되었다.2) 여기서 IMF 자금지원의 역할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고유한 접근과 관리기준의 전파를 용이하게 만들고 금융자본에 우선순위를 부여한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것으로 기능했다. APEC의 위상은 전후 아시아지역 경제 주도권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1994년 APEC의 저명인사그룹(EPG)의 정의3)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는 역내 국간에 최대한 시장개방을 실시하고, 개별국가들은 역외국에게는 역내자유화조치 혜택을 선택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를 강조하는 ‘개방적 지역주의’란 WTO 체제의 순항과 자유무역 달성을 위해 아시아지역의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거대 시장의 형성으로 여타의 경제블록을 압박하기 위한 수사다. 물론, 이와 별도로 아시아 내에서의 지역화 논의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수출 흡수국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고, ASEAN +3(한중일) 진전, EAFTA(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모색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편, 역내 금융협력체제 형성을 위한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창설(엔 블록화) 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이 느낄 ‘태평양 가운데 선긋기’의 위협은 미국 관리 하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지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와 노무현 정부 한편으로는 아시아에서의 배타적 지역화를 막고 유럽연합이나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등을 모든 무역장벽이 제거된 자유무역의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은 줄기차게 FTAAP(아시아 태평양자유무역협정) 결성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60%를 차지하는 APEC이 FTAAP를 결성하여 차별의 조건을 내걸 경우 핵심 개발도상국(브라질, 인도 등)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거대한 비회원국들은 이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따라서 배타적 경제블록들로부터 지역적 자유화보다 전 세계적 차원의 추진력을 회복하고 도하라운드 결론을 수용하도록 하여 미국을 정점에 둔 자유무역의 완성에서 APEC은 핵심 거점인 셈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의 기조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이다((미국을 중심으로 한)하나의 (빈부의 양극화를 위한)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 유럽연합이 헌법조약투표 과정 등을 거치면서 통합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미국에 적대적인 지역공동체들의 강화와 중국 부상 등 현실적 위협에 대해 자원과 소득의 재분배를 불러올 것이라는 자유무역 신화는 여전히 도전 중이라는 것이다. 냉전 구도 하에서 그리고 냉전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정치·경제·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미국의 불안정성 증대는 자유무역의 완성을 시급히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불안정성 증대와 종속의 심화라는 자유무역의 진실을 마주한 인민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몇 푼을 적선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외침을 확산하고 있다. 과연 자유무역체제는 ‘평등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전세계 소득을 증진시키고 고루 분배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정부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과 혹독한 구조조정의 터널을 거쳐 ‘관치금융’과 ‘재벌-족벌 경영의 폐해’를 시정하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감내할 노동력의 재구성을 이루어냈으며 금융자본의 출입이 자유로운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에! 또한 아직까지도 착취 가능한 동남아시아 및 남미 시장을 위한 해외투자의 수행자로서 한국의 자본가계급이 든든히 제 갈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자유무역 질서는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지방화, 분권화가 이루어질 것이라지만 실상 이는 기존의 국가의 기능을 지방정부 등을 통해 강화하고 경제자유구역, 특구 지정 등을 둘러싼 지방 도시들의 경쟁을 부추길 따름이며, 이를 위해 시민들을 동원하고 관리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이번 APEC 정상회의가 진행되는 부산시는 동북아 물류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해외자본 유치에 가속도를 붙이는 등 APEC 준비과정을 지역경제의 구조조정의 계기로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초민족적 기업과 국민국가의 위상을 동등하게 다루는 투자자유화 물결은 국가의 역할 분산을 동반한다. 노동력 관리의 엄격함과, 연기금 개혁 등 국가 개입을 통한 투기자금의 형성의 역할은 강화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문화적 쟁점의 상당수는 NGO들에게 이전된다. 노무현 정부는 NGO들을 동원하여 자유무역과 금융투기의 활성화를 위한 APEC의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고 부산여성단체협의회, 부산여성단체연합 등의 여성단체들은 ‘APEC 여성의제채택 여성연대’를 구성하여 ‘중소기업, 영세기업 및 여성 참여 강화‘ 의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으로 이에 조응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反테러와 6자회담 진전을 위한 부산선언문〉을 준비하는 등 정치적 차원에서 APEC을 활용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와 ‘전쟁’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인권과 반테러’ 즉,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도출되는 APEC에서 동북아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일 동맹 헤게모니로의 통합이라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증대된 불안정성과 인민의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아시아에서 인민들의 연대와 단결된 투쟁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자유무역 신화의 폐해가 가장 극대화된 형태로 드러난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일한’ 착취 네트워크를 향한 자유무역질서의 전략적 요충지와 아시아-태평양의 군사기지로서 동북아가 갖는 지정학적 전략에 따른 미국의 재편전략이 수행되고 있다. 이 착취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이미 드러난 자유무역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이 지배구조에 복무하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005년 APEC정상회의에 대응하는 우리의 기조는 미-일 동맹과 노무현정부에 의해 확장되는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반대,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인민들의 연대를 통한 대안세계화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다. PSSP 1) 일본을 선두로 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의 육성과 발전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아시아 발전형태설명이론(안행(雁行)형태 이론이라 불린다). 선도국가에서 경쟁력 있는 산업의 육성이 이루어지고 그 성과가 직접투자를 매개로 다음 단계의 국가에 이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설명되는 동아시아 '발전'과정에서 일본은 대동아시아 흑자 행진을 계속했는데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를 일본중심의 무역 및 투자시스템 내의 하위구조로 고착시켜놓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동아시아 경제의 틀을 형성하면서 기술을 지배하고 있어 대동아시아 수입의 상당부분도 사실은 일본기업의 현지 투자회사로부터의 수입일 뿐이다. 본문으로 2) 동아시아 금융위기 발생 이후 열린 98년 6차 콸라룸푸르 정상회의에서는 아시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면서 '경제 위기 조기극복을 위해 성장지향적 거시경제정책을 공동으로 추진키로 합의'하는 한편 국제 금융체제의 강화를 위한 노력으로서 민간자본 역내 유입 촉진과 회원국의 금융체제 강화, 금융분야 구조조정, 국제 금융체제 개선문제 등이 주로 논의되었다. 금융 및 자본자유화가 급진전되면서 헤지펀드 등 투기성 단기자본을 포함한 자본의 유출입이 빈번해진 데 원인이 있었던 발생한 동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극복 방안으로서 투자 자본의 안정적 역내 유입이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역설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3) APEC 저명인사그룹의 보고서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하는 개념이다. ①최대한의 일방적 자유화, ② 비회원국에 대한 무역장벽의 지속적 완화 확약, ③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 ④개별 회원국의 독자적인 조건적/무조건적 최혜국대우 원칙 적용. 위의 요건 중 한가지 이상을 충족하면 '개방적 지역주의'의 실천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한 이들의 개념 설정은 애초 '개방적 지역주의'가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개방화'와 '세계화'를 수행하되 지역별 구분에 따라 관리와 위계질서의 유지가 가능한 질서를 지향함을 드러낸다. 본문으로
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2004년 5월 1일 중동부 유럽 8개국과 지중해 지역 2개국이 유럽연합에 새로이 가입하고, 같은 해 6월 18일 유럽연합 정상들이 유럽헌법조약(Treaty of European Constitution)을 채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추진된 유럽경제통합은 2002년 유로화 공용화로 이미 일단락을 되었고 (영국, 덴마크, 스웨덴은 유로화 도입을 유보했다),1) 이제 유럽헌법조약이 회원국들의 비준을 통과하면 유럽연합은 자신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외교장관까지 두게 된다.2) 이런 외연만을 두고 보면 유럽 통합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유럽연합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나 정치세력 내부에서도 많은 쟁점이 부각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모순과 갈등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것은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다. 유럽연합이 연방제 국가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통합주의’와 정부연합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정부간주의’(intergovernmentalism) 사이의 쟁점도 있으며, 유럽연합의 탄생과 확대 과정에서 계속 문제가 된 강대국과 중소국가의 이해관계도 해소되지 않는 쟁점이다. 그러나 이런 쟁점이 유럽 민중의 권리와 의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통합 과정은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유럽 자본을 위시한 지배계급의 프로젝트였다. 유럽연합의 확대와 헌법조약의 탄생은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에서 유럽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강화하는 흐름이다. 그러므로 유럽통합 과정은 유럽의 민중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한다. “어떤 유럽인가?” 회원국들의 헌법조약 비준을 앞두고 이 질문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투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여러 운동세력들이 벌이고 있는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은 “어떤 유럽인가”에 답하는 유럽 민중들의 목소리다. 그들은 유럽통합이라는 미완의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것은 헌법조약의 비준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을 통해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유럽”을 향한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은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유럽연합의 기원과 유럽통합의 과정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럽통합 구상을 자극한 네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유럽 국가들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고자 했다. 둘째, 유럽 국가들은 전간기 유럽의 특징이었고 2차대전의 원인 중 하나였던 경제적 보호주의를 탈피하고 싶었다. 셋째, 유럽 지배세력들은 소련과 유럽공산당의 확장을 억제해야 했다. 넷째, 독일경제를 유럽으로 통합하여 독일 팽창주의의 부활을 막고자했다. 사실 이 네 가지 요인은 유럽 자본의 시각을 대변했다. 유럽 자본과 지배계급은 유럽을 자본주의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공통의 이해를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기에는 2차대전 이후 유럽을 확실한 반공주의 보루로 삼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도 반영되었다. 하지만 유럽통합 과정에서 유럽 민중에게 민주적 의사결정과 권력형성의 권리는 부여되지 않았고, 형식적인 참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럽의 일국적, 초국적 자본은 (로비, 연구작업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통합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민중을 배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유럽연합의 기원: 공산주의 확장 저지와 서유럽 통합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7년 유럽경제의 복구를 위해 유럽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Europe)가 설립되었다. 위원회는 모든 유럽국가들의 협력을 전제로 삼고자 했지만, 동유럽국가들은 소련이 주도하는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로 통합되었다. 결국 유럽경제위원회는 목표를 서유럽 통합으로 변경했다. 여기에 몇 가지를 더 고려해야 한다. 1947년은 미국이 마셜 플랜을 제안한 해이며,3) 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이 창설된 해이기도 하다 (미국은 GATT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서유럽 경제재건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보호를 받으며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결국 전후재건이라는 목표로 형성된 협력의 기운은 냉전이라는 조건 속에서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력이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는 가운데 서유럽 지배세력의 이해, 즉 자본주의적인 유럽을 재건하려는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 협력의 구체적인 형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유럽공동체로 1951년 창설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ECSC)는 석탄, 철강 및 이와 연계된 부문의 관세동맹이었다.4) ECSC 창설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ECSC는 석탄, 철강 부문의 공급을 안정화. 현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따라서 심각한 공급부족이나 과잉공급을 관리할 수 있게 했다. 정치적인 이유는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프랑스는 2차대전의 경험 때문에 독일의 팽창주의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으며, ECSC를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위한 틀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ECSC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ECSC는 유럽통합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모델을 제공했다. 일례로 ECSC의 조직구조는 유럽경제공동체의 모델이 되었다. 1958년 로마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가 창설되었다. EEC는 관세동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내의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까지 포함하는 공동시장 형태였다. 그러나 EEC는 아직까지 재정, 화폐정책이 통합되지 않은 형태였으므로 통일과 집중보다는 협조와 협력을 강화하는 수준이었다. 1965년 ECSC와 원자력공동체, 유럽경제공동체를 통합한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 EC)가 설립되었고, 그 외연도 확대되었다.5) 하지만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각 국가들은 국가 단위의 발전전략, 즉 케인즈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채택했고, 이는 통합의 기운을 약화한다고 인식되었다. 하지만 유럽공동체는 법적 강제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거의 제어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역내 단일시장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담은 단일유럽법안(Single European Act)이 1986년 조인되었는데, 이는 ‘법안’이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각 국가에 대한 구속력을 강화한 것이다. 특히 유럽경제통합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서는 회원국의 환율을 제어해야 한다는 논리로 경제 및 화폐 통합을 위한 계획을 제시했다. -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유럽연합 창설 1992년 소련 붕괴와 냉전 해체는 유럽통합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동유럽국가들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2005년까지 유럽공동체가 20여 개 국가로 확대된다는 전제로, 의사결정과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효율성은 공식적인 이유일 뿐이었고, 강대국들의 속내는 앞으로 가입할 작고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 통일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두려움을 자극했고, 프랑스는 유럽통합을 더욱 심화하는 방향에서 대응책을 세웠다. 1991년에 체결되어 1993년부터 효력을 발휘한 유럽연합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 일명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급격히 변화된 환경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때까지 유럽통합의 중심논리는 무역장벽의 제거, 탈규제와 자유화를 통한 경쟁 도입, 단일시장 건설이었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해서 유럽공동체는 정치적 통합과 한층 심화된 경제통합을 지향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동외교안보정책(Comm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 CFSP)의 중요성이 강화되었다. 물론 유럽공동체의 권한도 확대되었다.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 각료회의에 가중다수결 제도가 도입되었다.6) 그리고 조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통화연합(Economic and Monetary Union)과 단일통화를 2002년까지 도입하기 위한 조건과 시간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본래 제기된 문제, 즉 동유럽 국가들의 가입, 독일을 유럽에 더욱 통합할 필요성, 단일통화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 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 따라서 조약 개정에 대한 요구가 계속 나왔고, 1996-97년 정부간회의를 통해 법, 제도와 정책과정을 바꾸는 논의가 진행되어서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럽통합은 계속 심화하여 재정, 예산, 사회, 통화 정책을 모두 아우르는 수준까지 확대되었다. 2000년 니스조약, 2001년 라켄선언을 통해서 유럽헌법의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이 제시되었다. 경제통합을 통한 유럽연합 설립의 반-민주성 위에서 지적했듯이, 유럽통합의 출발은 유럽자본주의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과정은 철저하게 유럽 자본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는 유럽연합의 탄생은 유럽 내부에서 민중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확대, 심화뿐만 아니라 유럽 외부, 특히 주변부 민중과의 관계에서 제국주의적인 지배, 착취관계의 발전을 의미한다. 유럽통합의 중심논리였던 경제통합은 그저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이 아니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성장과 위기 국면에 대응하는 유럽 자본과 지배세력의 전망이었다. 196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공동농업시장의 탄생은 농산품 단일시장의 필요성 (경제통합에 필수적이다), 당시 집권정당들(주로 기독교민주당과 보수당)에게 강력한 압력집단인 농민층에 대한 우호적 조치의 필요성 (냉전시기 집권정당의 안정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유럽의 식량자급의 필요성 (제국주의적 정책의 선결조건이다) 등이 맞물린 결과다. 단일시장, 역내 농산품 우선, 공동재정부담을 원칙으로 하는 공동농업정책은 유럽농산품에 대해선 가격개입정책을 통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입농산품에 대해서는 양과 품목을 규정하고 수입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세계시장에서 유럽농산품의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방식은 유럽공동체 외부의 국가, 특히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 연안의 국가들의 농업부문이 유럽경제에 종속되는 효과를 낳았다. 또 하나, 단일통화라는 중요한 문제를 언급해야 한다. 단일통화가 제기되고 실현된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확산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것의 중심에는 단일통화를 향한 과정이 놓여있다. 유럽에서 통화정책이 통합되고 단일통화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1970년대 초 달러의 금태환이 중지되고 오일쇼크로 인해 외환시장이 교란된 시기에 제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면서 금융부문에서 탈규제와 자유화가 시작되었고, 미국 달러화를 정점으로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의 엔화가 삼극을 이루는 위계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통화동맹을 위한 노력은 마르크화의 위상에 기인한 것이자 마르크를 국제화폐로 만들고자 했던 독일의 이해가 맞물린 것이다. 마르크화가 진정한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전체 유럽연합에서 사용되는 통화가 되어야하며 미국에 필적하는 광범위한 시장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유로가 도입되면 유로로 표시된 국제거래의 양을 늘릴 것이며 그로써 유로에 대한 수요가 달러에 대한 수요에 맞먹거나 능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화가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마르크가 유로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제시한 경제통화연합 수렴기준을 엄격히 적용할 때만 가능해진다 (수렴기준에는 각 나라의 인플레이션 억제, 이자율 삭감, 예산적자를 최대 GDP 3%로 줄일 것, 공적 부채를 GDP의 60%이내로 억제하고 통화의 환율을 안정시킬 것 등이 포함된다).7) 마르크화가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은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통합의 효과는 겉보기에 중립적이지만, 민중에게 공격적이다. 유럽연합 내 국가들이 사용하는 경기역행수단(경기위축 시 사용하는 확장정책)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독일과 같이 생산성이 높은 나라는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이 더 높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높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 게다가 마르크화는 국제화폐의 지위를 노리므로 경기가 위축되더라도 인플레이션 수단은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같이 생산성이 낮은 나라는 인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실질임금을 감소시키는 (즉 잉여가치율을 높이고 따라서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수단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탈리아는 국제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가치절하에 의존해야만 한다. 하지만 경제통화연합 내에서 이런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제한된다. 따라서 이탈리아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확대를 통해 경쟁하는 것이고, 이는 생산과정에서 더 긴 노동일이나 더 높은 노동 강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최근에는 이를 ‘노동유연화’라고 부른다). 앞으로 유럽연합 내부에서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은 더 심화할 것인데, 유럽연합이 중동부, 지중해 주변 국가들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르크화를 유로화로 변형하는 것은 금융세계화에 적극적이고,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유럽 자본의 요구를 드러내준다. 금융세계화 흐름은 몇 가지 금융 관련 규범을 포함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의 억제다. 이런 목표는 노동자 임금과 국가의 복지비 지출을 압박하는 정책을 수반한다. 그리고 더 높고 빠른 수익성에 대한 요구는 노동유연성을 높이고자 한다. 또 지적되어야 할 것이 있다. 수렴기준과 같은 정책은 분명 유럽 초민족자본과 각 국 정부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마치 이것이 멀리 떨어져있는 관료기구(유럽연합)가 부과하며 각 국 정부는 이런 조치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유럽사회 전반이 수용해야만 하는 어떤 중립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단일통화와 그에 상응하는 경제정책의 대가는 유럽과 유럽 외부의 민중들이 지불하게 된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유럽연합의 반-민주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몇 가지 사실들이 더 있다. 단일 시장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은 이제 공공부문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고 있다. 일부 국가들이 복지국가의 전통은 서비스부문 개방과 단일시장 형성에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서비스부문 자유화를 일반화한 볼켄슈타인 훈령은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런 공격은 유럽통합을 촉진시켜 더 많은 이익을 줄 것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다. 유럽헌법조약을 둘러싼 논쟁: 신자유주의 유럽인가, 다른 유럽인가? 유럽헌법조약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유럽의 정체성을 둘러싼 것이다. 사실 유럽헌법조약에서 새로운 부분은 이미 수립된 권력의 분배 문제라는 점은 유럽 지배세력이 말하는 유럽통합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유럽은 단지 수립된 권력을 조절하는 방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지난한 유럽 통합의 과정에서 관철된 금융세계화에 조응하는 조치들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여성, 시민의 권리에 심각한 퇴행을 가져온 조치들은 그대로 인정되고 심지어 더욱 확대해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헌법조약의 작성과정에서 민중의 참여와 역할이 배제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결국 유럽헌법조약이 말하는 유럽은 인민의 권리를 제거하는 유럽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이며, 따라서 위계적인 권력 관계를 조정하고 분배하여 재생산하는 유럽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유럽의 민중과 근본에서부터 갈라지는 쟁점이 형성된다. 이는 헌법조약 문구 하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조약이 담고 있는 논리와 함의가 문제다. 예를 들어, 유럽헌법조약은 그동안 노동자가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세웠던 권리들을 부정한다. 노동자들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노동력으로 간주될 뿐이다. 시장과 경쟁의 원칙이 가장 우선시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파업과 단결, 연대의 권리는 기업의 권리와 동등하게 간주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파업의 권리가 파업에 맞서 공장을 폐쇄할 권리와 동등하게 간주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취하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파상적인 공세를 명문화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헌법조약은 유럽시민권을 회원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하면서 900만 명의 이주노동자를 배제했다. 헌법조약은 유럽경제에서 이주노동자를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법 이주노동자에 대한 심각한 착취와 억압을 방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문제는 이런 규정이 유럽시민권을 가진 노동자들과 불법 이주노동자들 사이의 분할을 심화한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데, 유럽시민권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임금을 낮추고, 일자리를 빼앗는 세력이라는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유럽시민권 규정은 위험스럽게도 이주자들을 범죄와 관련시키는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규정은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를 수용하고, 극우세력이 정치적 공간에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한 유럽헌법조약은 전쟁을 사용 가능한 수단으로 인식하면서 군사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2003년 12월 정상회의는 유럽안보전략을 채택했다. 이 전략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시민들이 불법이민과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테러리즘의 위협에 처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각 위협마다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고 국제협력도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유럽이 현재 미국 주도의 군사세계화에 굳건한 동맹자가 되겠다는 선언이며, 따라서 유럽연합의 안보에 있어서 NATO의 역할을 계속 승인한다. 나아가 헌법조약은 유럽 자신의 군사화도 염두에 두고 있다.8) 유럽의 사회운동들은 2004년 10월에 열린 유럽사회포럼에서 채택한 사회운동 호소문을 통해 유럽헌법조약이 구현하는 유럽에 명백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헌법조약은 신자유주의를 유럽연합의 공식교리로 신성화하며, 경쟁을 유럽공동체 법, 모든 인간 활동의 토대로 만들고,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목적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 헌법조약은 평등한 권리, 민중의 자유로운 이동, 모든 사람이 국적에 관계없이 자신이 사는 나라의 시민권을 향유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며, 그 대신 NATO에 유럽의 외교 및 국방정책을 담당하는 역할을 부여하고, 유럽연합의 군사화를 추진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영역을 주변화시킴으로써 시장을 우선시하며, 공공서비스의 파괴를 가속화한다.” 유럽의 사회운동을 비롯하여 유럽 민중들은 유럽헌법조약이 가지는 반-민주적, 반-민중적인 본질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 사회운동들의 새로운 도전 유럽헌법조약이 완성하려는 유럽의 실체를 인식한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헌법조약을 반대하는 흐름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섞여있다. 인종주의적인 극우 세력이 존재하는가 하면, 유럽연합이 가져올 피해를 두려워하는 민족주의적 반대 세력도 존재한다. 하지만 헌법조약이 제기한 광범위한 쟁점은 “어떤 유럽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있으며, 따라서 광범위한 정치의 공간이 열고 있다. - 여성운동 유럽의 여성들은 헌법조약이 여성들에게 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하고 헌법조약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지난 2월에 헌법조약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스페인에서는 여성들이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탁 프랑스의 여성그룹 또한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위한 면밀한 투쟁을 조직하고 있다. 우선 여성들은 헌법조약이 그동안 여성들에게 더욱 해악을 끼쳐왔던 신자유주의를 전 유럽의 질서로 공식화하려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없다”는 헌법조약의 문구는 단지 수사일 뿐이다.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배제라는 맥락은 고려되지 않은 채, 오히려 불안정 노동을 강화하고 사회적 비용 지출을 삭감하고자 하는 헌법조약의 논리는 명백히 여성에게 더 해악이 크다. 게다가 헌법조약은 여성운동이 유럽에서 쟁취해 온 이혼과 낙태에 대한 권리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헌법조약은 남성이 행하는 물리적 폭력을 가정 내 폭력으로 치부하면서 그 원인은 간과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여성을 희생자라는 수동적 지위에 묶어 둔다 (3조 116항에 관한 선언). 더 우려되는 것은 헌법조약이 전문에서 “유럽의 신성한 유산”을 승인하면서, “유럽연합이 교회와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공식적인 대화를 진행할 것“(1조 51항)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이는 유럽연합이 교회를 시민의 의견을 대표하는 하나의 주체로 인정한다는 선언인데, 이것은 교회의 논리와 요구가 유럽연합의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남녀 평등, 이혼, 낙태, 피임, 동성애 등의 권리는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여성들은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도전은 다른 사회운동들과 결합하면서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또 다른 유럽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주장하고 있다. - 노동자운동 유럽통합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유럽의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조건에 직면했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노동조합이 국가, 기업과 사회적 파트너 관계를 맡아오면서 다양한 형태의 코포라티즘이 존재했다. 이런 전통을 따르는 노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양보 교섭”과 “사회적 파트너십”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와 공존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럽통합의 맥락에 때라 새로운 형태의 파트너십은 유럽적, 국가적, 기업적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유럽노총(European Trades Union Confederation, ETUC)은 국가 수준에서는 사회협약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고, 유럽연합 수준에서는 유럽노동이사회(European Works' Councils, EWCs)에서 사회적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사회적 파트너십 전략에 저항하는 노동자운동의 흐름도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경제통화연합 수렴기준에 연결된 긴축프로그램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면서, 유럽연합 회원국 각 국에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이런 흐름이 노동조합의 대안적 전략으로 발전하고 있다. 프랑스의 연대노조, 이탈리아의 코바스(COBAS) 등의 흐름은 노동자, 임시 노동자, 실업자를 잇는 연결망을 형성하면서 광범위한 사회적 이슈를 노동운동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업, 고용불안, 사회적 배제에 반대하는 유럽행진”(European Marches Network, EMs)은 1997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럽정상회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는 국제기구들에 대항하여 노동과 여러 사회부문의 연합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유럽행진 네트워크는 최근 유럽연합의 여성,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회적 권리 확장을 위한 투쟁과 조직화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런 흐름은 유럽 통합이 강제하는 경쟁과 노동자 분할이라는 조건에 직면해 대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도전이다. 아직은 출발 단계지만, 자본과 유럽연합의 정책의 논리를 거부하고, 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사이에서의 평등과 연대를 강조하는 이런 흐름은 유럽헌법조약이 담고 있는 신자유주의 유럽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다. - 유럽좌파당9) 신자유주의 유럽통합에 맞서 대안적인 유럽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창립한 유럽좌파당 역시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유럽좌파당은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당의 역할은 이러한 사회운동들의 정치를 지지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만큼, 유럽좌파당은 사회운동들과 함께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위해 활발히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좌파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PRC) 당수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2004년 10월 유럽좌파당 로마회의 연설을 통해 현재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헌법조약이 제시하는 유럽의 미래는 자본주의 위기와 패배에 편승하는 암울한 미래일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이것이 유럽 민중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좌파당이 반드시 유럽에 관한 전망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면서 두 가지 요소를 필수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첫째는 평화라는 목표, 전쟁과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목표다. ‘예방전쟁, 무한전쟁의 상황에 대항하는 유럽은 전쟁과 테러리즘에 반대한다는 전망을 자신의 헌법에 담아야 한다. 따라서 전쟁을 거부하는 것,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에서 전쟁을 제거하는 것을 명백히 선언해야 한다. 유럽이 취해야 할 강령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둘째, 보편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입각해야 한다. ‘시민권 그리고 노동권과 같은 시민성은 더 많은 사람에게 확대되어야 하고, 풍부해져야 한다. 이는 특히 이주노동자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시민성이 태생의 권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개인 인간에 기초한 것이라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평등은 기회의 균등함을 넘어서 권리의 새로운 경계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유럽좌파당은 대안적 유럽을 위한 구체적인 강령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제4인터네셔널 계열에서는 이를 두고 유럽좌파당을 표방하면서도 유럽헌법에 대한 관점이나 유럽적인 전망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완성된 강령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민중을 동원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 아니라는 유럽좌파당의 문제의식에 비추어보면, 이는 유럽좌파당을 비판할 근거라기보다는 유럽의 사회운동과 정당, 민중운동의 장기과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좌파당이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통해서 사회운동들과 함께 또 다른 유럽의 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직 진행과정 중이다. 유럽헌법조약,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유럽에서는 헌법조약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헌법조약 부결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어서, 유럽연합과 양국 정부가 긴장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헌법조약을 부결시키기 위한 캠페인에 아탁을 비롯한 사회운동, 여성운동, 프랑스공산당,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 노동총동맹(CGT) 등이 총력을 기울였다. 이 결과 초반에는 헌법조약 찬성여론이 높았고 헌법조약 반대 의견 중에서는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인종주의적으로 활용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현재는 반대 여론이 60%를 상회하고 있는 상황이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유럽 민중이 원하는 유럽이 현재의 유럽연합과는 큰 차이가 있고,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이 중요한 쟁점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약 헌법조약이 부결된다고 해서 상황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후에 더욱 커다란 문제가 남아있다. “진정 대안적인, 다른 유럽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 또한 사회운동과 민중의 과제다. 위로부터 강요된 신자유주의 유럽을 거부하고 민중 스스로가 완성하는 다른 유럽통합의 길이 열릴 것인가? 전 세계 대안세계화 운동의 관심사다. PSSP <참고자료> 쉬잔느 드 브뤼노프, 〈지금 우리에게 어떤 유럽이 필요한가? 우리는 어떤 유럽을 얻을 수 있는가? 〉, 《사회진보연대》, 2000년 11월호 이호영, 〈유럽연합과 국민국가의 위상 변화〉,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 Guglielmo Carchedi, For Another Europe: A Class Analysis of European Economic Integration, pp.7~35, Verso, 2001 Guglielmo Carchedi, The EMU, monetary crises, and the single European currency, Capital & Class 63, Academic Research Library, Autumn 1997 Bruno Carchedi and Guglielmo Carchedi, Contradictions of European Integration, Capital & Class 67, Academic Research Library, 1997 Graham Taylor and Andrew Mathers, Social Partner or Social Movement? European Integration and Trade Union Renewal in Europe, Labor Studies Journal, Vol. 27, No. 1, Spring 2002 Speech by Fausto Bertinotti, EU: Another Constitution is Possible, http://esteri.rifondazione.co.kr/internazionale/i0038.html IV Online Magazine, Women and the European Constitution, Ⅳ365, March 2005, http://internationalviewpoint.org/article.php3?id_article=576 1) 영국이 유로화 도입을 유보한 까닭은 영국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파운드화의 위상과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다. 영국은 파운드화가 유로보다는 달러와 가까워지는 것이 자국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 본문으로 2) 유럽정상들이 채택한 유럽헌법조약은 각 국의 비준절차를 거쳐 2007년부터 발효된다. 25개 회원국 중에서 덴마크, 영국,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체코, 프랑스,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은 국민투표를 통해서 조약 비준을 결정한다. 나머지 15개국은 의회 비준절차를 거친다. 이 중 스페인은 올해 2월 20일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헌법조약이 통과되었다. 리투아니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그리스도 이미 의회 비준을 통과했다. 프랑스가 오는 5월 29일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네덜란드는 6월 1일이다. 회원국 중에서 한 국가라도 헌법조약을 거부하면, 헌법조약은 발효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중 보유한 방대한 생산능력과 과잉자본의 배출구로서, 또한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럽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획하였다. 원조를 받아들인 나라는 서유럽 16개국으로서 1951년까지 액수는 114억 달러에 달하였다. 본문으로 4) 회원국은 벨기에, 독일 연방 공화국,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그리고 네덜란드였다. 본문으로 5) 1973년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가입했고, 1981년 그리스,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입했다. 이 중에서 영국의 가입이 가장 쟁점이 되었다. 영국은 유럽공동체에 내재한 유럽연방국이라는 목표에 반대하면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유럽자유무역지대를 창설했다. 영국은 유럽대륙의 국가들보다는 미국과 영국연방(영국 및 구(舊) 영국 식민지 국가였던 캐내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파키스탄 등으로 구성된 연방체)과의 관계를 더욱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누리는 세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했는데, 이는 국제통화로서 파운드가 가지는 영향력 및 그에 따르는 부수적 이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의 공동시장이 성공하고, 유럽 기업들이 출현하여 미국기업에 맞먹는 규모를 갖게 되자 영국은 입장을 바꿔 유럽공동체에 가입을 신청했다. 본문으로 6) 회원국의 경제력과 인구에 비례하여 투표수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제도. 가중다수결 제도 도입은 유럽연합 확대 과정에서 강대국(프랑스와 독일)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후에 전원합의가 요구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가중다수결을 도입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근거는 의사결정과정에 더 큰 유연성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또한 강대국들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생각과 단일통화, 나아가 유럽연방국으로 더 빨리 이행하고자 하는 독일과 프랑스의 열망을 반영하는 주장이었다. 본문으로 7) 경제및통화연합의 전 단계였던 유럽화폐체계(the European Monetary System, EMS)는 회원국 통화의 환율격차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이것은 회원국의 환율 변동폭을 2.25%(이탈리아 리라에 대해서는 6%)로 제한하는 제도다. 본문으로 8) 통합된 유럽의 무장화라는 문제는 통합 과정에서 오래된 쟁점 중에 하나다. 1948년 브뤼셀 조약을 통해 서유럽연합(Western European Union)이 설립되었다. 애초부터 서유럽연합에게는 NATO의 유럽축이라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NATO와 미국 헤게모니를 승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연방국을 염두에 둔다면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는 문제가 지속적인 쟁점으로 남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서유럽연합은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의 기반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영국이 서유럽연합을 유럽연합에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고, 미국의 명백한 군사적 우월성은 서유럽연합을 약화했다. 냉전 해체 이후 서유럽연합의 강화가 예상되었지만, 유고에 대한 유럽연합의 전략 실패로 인해 오히려 NATO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NATO와 유럽연합의 독자적인 군사화 문제는 여전히 미묘한 쟁점으로 남아있다. 본문으로 9)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을 형성했던 유럽 내부의 좌파정당들이 건설한 정당으로, 정식명칭은 "the Party of European Left"다.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이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공산당, 독일 민주사회당, 스페인 통합좌파, 그리스 연합 등 11개국 15개 정당이 가입해있다. 본문으로
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2004년 5월 1일 중동부 유럽 8개국과 지중해 지역 2개국이 유럽연합에 새로이 가입하고, 같은 해 6월 18일 유럽연합 정상들이 유럽헌법조약(Treaty of European Constitution)을 채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추진된 유럽경제통합은 2002년 유로화 공용화로 이미 일단락을 되었고 (영국, 덴마크, 스웨덴은 유로화 도입을 유보했다),1) 이제 유럽헌법조약이 회원국들의 비준을 통과하면 유럽연합은 자신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외교장관까지 두게 된다.2) 이런 외연만을 두고 보면 유럽 통합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유럽연합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나 정치세력 내부에서도 많은 쟁점이 부각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모순과 갈등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것은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다. 유럽연합이 연방제 국가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통합주의’와 정부연합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정부간주의’(intergovernmentalism) 사이의 쟁점도 있으며, 유럽연합의 탄생과 확대 과정에서 계속 문제가 된 강대국과 중소국가의 이해관계도 해소되지 않는 쟁점이다. 그러나 이런 쟁점이 유럽 민중의 권리와 의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통합 과정은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유럽 자본을 위시한 지배계급의 프로젝트였다. 유럽연합의 확대와 헌법조약의 탄생은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에서 유럽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강화하는 흐름이다. 그러므로 유럽통합 과정은 유럽의 민중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한다. “어떤 유럽인가?” 회원국들의 헌법조약 비준을 앞두고 이 질문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투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여러 운동세력들이 벌이고 있는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은 “어떤 유럽인가”에 답하는 유럽 민중들의 목소리다. 그들은 유럽통합이라는 미완의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것은 헌법조약의 비준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을 통해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유럽”을 향한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은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유럽연합의 기원과 유럽통합의 과정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럽통합 구상을 자극한 네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유럽 국가들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고자 했다. 둘째, 유럽 국가들은 전간기 유럽의 특징이었고 2차대전의 원인 중 하나였던 경제적 보호주의를 탈피하고 싶었다. 셋째, 유럽 지배세력들은 소련과 유럽공산당의 확장을 억제해야 했다. 넷째, 독일경제를 유럽으로 통합하여 독일 팽창주의의 부활을 막고자했다. 사실 이 네 가지 요인은 유럽 자본의 시각을 대변했다. 유럽 자본과 지배계급은 유럽을 자본주의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공통의 이해를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기에는 2차대전 이후 유럽을 확실한 반공주의 보루로 삼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도 반영되었다. 하지만 유럽통합 과정에서 유럽 민중에게 민주적 의사결정과 권력형성의 권리는 부여되지 않았고, 형식적인 참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럽의 일국적, 초국적 자본은 (로비, 연구작업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통합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민중을 배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유럽연합의 기원: 공산주의 확장 저지와 서유럽 통합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7년 유럽경제의 복구를 위해 유럽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Europe)가 설립되었다. 위원회는 모든 유럽국가들의 협력을 전제로 삼고자 했지만, 동유럽국가들은 소련이 주도하는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로 통합되었다. 결국 유럽경제위원회는 목표를 서유럽 통합으로 변경했다. 여기에 몇 가지를 더 고려해야 한다. 1947년은 미국이 마셜 플랜을 제안한 해이며,3) 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이 창설된 해이기도 하다 (미국은 GATT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서유럽 경제재건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보호를 받으며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결국 전후재건이라는 목표로 형성된 협력의 기운은 냉전이라는 조건 속에서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력이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는 가운데 서유럽 지배세력의 이해, 즉 자본주의적인 유럽을 재건하려는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 협력의 구체적인 형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유럽공동체로 1951년 창설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ECSC)는 석탄, 철강 및 이와 연계된 부문의 관세동맹이었다.4) ECSC 창설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ECSC는 석탄, 철강 부문의 공급을 안정화. 현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따라서 심각한 공급부족이나 과잉공급을 관리할 수 있게 했다. 정치적인 이유는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프랑스는 2차대전의 경험 때문에 독일의 팽창주의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으며, ECSC를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위한 틀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ECSC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ECSC는 유럽통합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모델을 제공했다. 일례로 ECSC의 조직구조는 유럽경제공동체의 모델이 되었다. 1958년 로마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가 창설되었다. EEC는 관세동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내의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까지 포함하는 공동시장 형태였다. 그러나 EEC는 아직까지 재정, 화폐정책이 통합되지 않은 형태였으므로 통일과 집중보다는 협조와 협력을 강화하는 수준이었다. 1965년 ECSC와 원자력공동체, 유럽경제공동체를 통합한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 EC)가 설립되었고, 그 외연도 확대되었다.5) 하지만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각 국가들은 국가 단위의 발전전략, 즉 케인즈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채택했고, 이는 통합의 기운을 약화한다고 인식되었다. 하지만 유럽공동체는 법적 강제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거의 제어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역내 단일시장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담은 단일유럽법안(Single European Act)이 1986년 조인되었는데, 이는 ‘법안’이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각 국가에 대한 구속력을 강화한 것이다. 특히 유럽경제통합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서는 회원국의 환율을 제어해야 한다는 논리로 경제 및 화폐 통합을 위한 계획을 제시했다. -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유럽연합 창설 1992년 소련 붕괴와 냉전 해체는 유럽통합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동유럽국가들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2005년까지 유럽공동체가 20여 개 국가로 확대된다는 전제로, 의사결정과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효율성은 공식적인 이유일 뿐이었고, 강대국들의 속내는 앞으로 가입할 작고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 통일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두려움을 자극했고, 프랑스는 유럽통합을 더욱 심화하는 방향에서 대응책을 세웠다. 1991년에 체결되어 1993년부터 효력을 발휘한 유럽연합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 일명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급격히 변화된 환경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때까지 유럽통합의 중심논리는 무역장벽의 제거, 탈규제와 자유화를 통한 경쟁 도입, 단일시장 건설이었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해서 유럽공동체는 정치적 통합과 한층 심화된 경제통합을 지향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동외교안보정책(Comm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 CFSP)의 중요성이 강화되었다. 물론 유럽공동체의 권한도 확대되었다.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 각료회의에 가중다수결 제도가 도입되었다.6) 그리고 조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통화연합(Economic and Monetary Union)과 단일통화를 2002년까지 도입하기 위한 조건과 시간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본래 제기된 문제, 즉 동유럽 국가들의 가입, 독일을 유럽에 더욱 통합할 필요성, 단일통화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 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 따라서 조약 개정에 대한 요구가 계속 나왔고, 1996-97년 정부간회의를 통해 법, 제도와 정책과정을 바꾸는 논의가 진행되어서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럽통합은 계속 심화하여 재정, 예산, 사회, 통화 정책을 모두 아우르는 수준까지 확대되었다. 2000년 니스조약, 2001년 라켄선언을 통해서 유럽헌법의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이 제시되었다. 경제통합을 통한 유럽연합 설립의 반-민주성 위에서 지적했듯이, 유럽통합의 출발은 유럽자본주의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과정은 철저하게 유럽 자본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는 유럽연합의 탄생은 유럽 내부에서 민중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확대, 심화뿐만 아니라 유럽 외부, 특히 주변부 민중과의 관계에서 제국주의적인 지배, 착취관계의 발전을 의미한다. 유럽통합의 중심논리였던 경제통합은 그저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이 아니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성장과 위기 국면에 대응하는 유럽 자본과 지배세력의 전망이었다. 196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공동농업시장의 탄생은 농산품 단일시장의 필요성 (경제통합에 필수적이다), 당시 집권정당들(주로 기독교민주당과 보수당)에게 강력한 압력집단인 농민층에 대한 우호적 조치의 필요성 (냉전시기 집권정당의 안정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유럽의 식량자급의 필요성 (제국주의적 정책의 선결조건이다) 등이 맞물린 결과다. 단일시장, 역내 농산품 우선, 공동재정부담을 원칙으로 하는 공동농업정책은 유럽농산품에 대해선 가격개입정책을 통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입농산품에 대해서는 양과 품목을 규정하고 수입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세계시장에서 유럽농산품의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방식은 유럽공동체 외부의 국가, 특히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 연안의 국가들의 농업부문이 유럽경제에 종속되는 효과를 낳았다. 또 하나, 단일통화라는 중요한 문제를 언급해야 한다. 단일통화가 제기되고 실현된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확산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것의 중심에는 단일통화를 향한 과정이 놓여있다. 유럽에서 통화정책이 통합되고 단일통화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1970년대 초 달러의 금태환이 중지되고 오일쇼크로 인해 외환시장이 교란된 시기에 제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면서 금융부문에서 탈규제와 자유화가 시작되었고, 미국 달러화를 정점으로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의 엔화가 삼극을 이루는 위계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통화동맹을 위한 노력은 마르크화의 위상에 기인한 것이자 마르크를 국제화폐로 만들고자 했던 독일의 이해가 맞물린 것이다. 마르크화가 진정한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전체 유럽연합에서 사용되는 통화가 되어야하며 미국에 필적하는 광범위한 시장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유로가 도입되면 유로로 표시된 국제거래의 양을 늘릴 것이며 그로써 유로에 대한 수요가 달러에 대한 수요에 맞먹거나 능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화가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마르크가 유로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제시한 경제통화연합 수렴기준을 엄격히 적용할 때만 가능해진다 (수렴기준에는 각 나라의 인플레이션 억제, 이자율 삭감, 예산적자를 최대 GDP 3%로 줄일 것, 공적 부채를 GDP의 60%이내로 억제하고 통화의 환율을 안정시킬 것 등이 포함된다).7) 마르크화가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은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통합의 효과는 겉보기에 중립적이지만, 민중에게 공격적이다. 유럽연합 내 국가들이 사용하는 경기역행수단(경기위축 시 사용하는 확장정책)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독일과 같이 생산성이 높은 나라는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이 더 높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높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 게다가 마르크화는 국제화폐의 지위를 노리므로 경기가 위축되더라도 인플레이션 수단은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같이 생산성이 낮은 나라는 인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실질임금을 감소시키는 (즉 잉여가치율을 높이고 따라서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수단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탈리아는 국제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가치절하에 의존해야만 한다. 하지만 경제통화연합 내에서 이런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제한된다. 따라서 이탈리아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확대를 통해 경쟁하는 것이고, 이는 생산과정에서 더 긴 노동일이나 더 높은 노동 강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최근에는 이를 ‘노동유연화’라고 부른다). 앞으로 유럽연합 내부에서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은 더 심화할 것인데, 유럽연합이 중동부, 지중해 주변 국가들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르크화를 유로화로 변형하는 것은 금융세계화에 적극적이고,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유럽 자본의 요구를 드러내준다. 금융세계화 흐름은 몇 가지 금융 관련 규범을 포함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의 억제다. 이런 목표는 노동자 임금과 국가의 복지비 지출을 압박하는 정책을 수반한다. 그리고 더 높고 빠른 수익성에 대한 요구는 노동유연성을 높이고자 한다. 또 지적되어야 할 것이 있다. 수렴기준과 같은 정책은 분명 유럽 초민족자본과 각 국 정부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마치 이것이 멀리 떨어져있는 관료기구(유럽연합)가 부과하며 각 국 정부는 이런 조치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유럽사회 전반이 수용해야만 하는 어떤 중립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단일통화와 그에 상응하는 경제정책의 대가는 유럽과 유럽 외부의 민중들이 지불하게 된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유럽연합의 반-민주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몇 가지 사실들이 더 있다. 단일 시장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은 이제 공공부문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고 있다. 일부 국가들이 복지국가의 전통은 서비스부문 개방과 단일시장 형성에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서비스부문 자유화를 일반화한 볼켄슈타인 훈령은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런 공격은 유럽통합을 촉진시켜 더 많은 이익을 줄 것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다. 유럽헌법조약을 둘러싼 논쟁: 신자유주의 유럽인가, 다른 유럽인가? 유럽헌법조약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유럽의 정체성을 둘러싼 것이다. 사실 유럽헌법조약에서 새로운 부분은 이미 수립된 권력의 분배 문제라는 점은 유럽 지배세력이 말하는 유럽통합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유럽은 단지 수립된 권력을 조절하는 방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지난한 유럽 통합의 과정에서 관철된 금융세계화에 조응하는 조치들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여성, 시민의 권리에 심각한 퇴행을 가져온 조치들은 그대로 인정되고 심지어 더욱 확대해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헌법조약의 작성과정에서 민중의 참여와 역할이 배제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결국 유럽헌법조약이 말하는 유럽은 인민의 권리를 제거하는 유럽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이며, 따라서 위계적인 권력 관계를 조정하고 분배하여 재생산하는 유럽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유럽의 민중과 근본에서부터 갈라지는 쟁점이 형성된다. 이는 헌법조약 문구 하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조약이 담고 있는 논리와 함의가 문제다. 예를 들어, 유럽헌법조약은 그동안 노동자가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세웠던 권리들을 부정한다. 노동자들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노동력으로 간주될 뿐이다. 시장과 경쟁의 원칙이 가장 우선시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파업과 단결, 연대의 권리는 기업의 권리와 동등하게 간주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파업의 권리가 파업에 맞서 공장을 폐쇄할 권리와 동등하게 간주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취하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파상적인 공세를 명문화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헌법조약은 유럽시민권을 회원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하면서 900만 명의 이주노동자를 배제했다. 헌법조약은 유럽경제에서 이주노동자를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법 이주노동자에 대한 심각한 착취와 억압을 방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문제는 이런 규정이 유럽시민권을 가진 노동자들과 불법 이주노동자들 사이의 분할을 심화한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데, 유럽시민권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임금을 낮추고, 일자리를 빼앗는 세력이라는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유럽시민권 규정은 위험스럽게도 이주자들을 범죄와 관련시키는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규정은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를 수용하고, 극우세력이 정치적 공간에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한 유럽헌법조약은 전쟁을 사용 가능한 수단으로 인식하면서 군사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2003년 12월 정상회의는 유럽안보전략을 채택했다. 이 전략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시민들이 불법이민과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테러리즘의 위협에 처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각 위협마다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고 국제협력도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유럽이 현재 미국 주도의 군사세계화에 굳건한 동맹자가 되겠다는 선언이며, 따라서 유럽연합의 안보에 있어서 NATO의 역할을 계속 승인한다. 나아가 헌법조약은 유럽 자신의 군사화도 염두에 두고 있다.8) 유럽의 사회운동들은 2004년 10월에 열린 유럽사회포럼에서 채택한 사회운동 호소문을 통해 유럽헌법조약이 구현하는 유럽에 명백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헌법조약은 신자유주의를 유럽연합의 공식교리로 신성화하며, 경쟁을 유럽공동체 법, 모든 인간 활동의 토대로 만들고,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목적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 헌법조약은 평등한 권리, 민중의 자유로운 이동, 모든 사람이 국적에 관계없이 자신이 사는 나라의 시민권을 향유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며, 그 대신 NATO에 유럽의 외교 및 국방정책을 담당하는 역할을 부여하고, 유럽연합의 군사화를 추진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영역을 주변화시킴으로써 시장을 우선시하며, 공공서비스의 파괴를 가속화한다.” 유럽의 사회운동을 비롯하여 유럽 민중들은 유럽헌법조약이 가지는 반-민주적, 반-민중적인 본질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 사회운동들의 새로운 도전 유럽헌법조약이 완성하려는 유럽의 실체를 인식한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헌법조약을 반대하는 흐름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섞여있다. 인종주의적인 극우 세력이 존재하는가 하면, 유럽연합이 가져올 피해를 두려워하는 민족주의적 반대 세력도 존재한다. 하지만 헌법조약이 제기한 광범위한 쟁점은 “어떤 유럽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있으며, 따라서 광범위한 정치의 공간이 열고 있다. - 여성운동 유럽의 여성들은 헌법조약이 여성들에게 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하고 헌법조약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지난 2월에 헌법조약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스페인에서는 여성들이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탁 프랑스의 여성그룹 또한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위한 면밀한 투쟁을 조직하고 있다. 우선 여성들은 헌법조약이 그동안 여성들에게 더욱 해악을 끼쳐왔던 신자유주의를 전 유럽의 질서로 공식화하려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없다”는 헌법조약의 문구는 단지 수사일 뿐이다.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배제라는 맥락은 고려되지 않은 채, 오히려 불안정 노동을 강화하고 사회적 비용 지출을 삭감하고자 하는 헌법조약의 논리는 명백히 여성에게 더 해악이 크다. 게다가 헌법조약은 여성운동이 유럽에서 쟁취해 온 이혼과 낙태에 대한 권리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헌법조약은 남성이 행하는 물리적 폭력을 가정 내 폭력으로 치부하면서 그 원인은 간과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여성을 희생자라는 수동적 지위에 묶어 둔다 (3조 116항에 관한 선언). 더 우려되는 것은 헌법조약이 전문에서 “유럽의 신성한 유산”을 승인하면서, “유럽연합이 교회와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공식적인 대화를 진행할 것“(1조 51항)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이는 유럽연합이 교회를 시민의 의견을 대표하는 하나의 주체로 인정한다는 선언인데, 이것은 교회의 논리와 요구가 유럽연합의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남녀 평등, 이혼, 낙태, 피임, 동성애 등의 권리는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여성들은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도전은 다른 사회운동들과 결합하면서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또 다른 유럽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주장하고 있다. - 노동자운동 유럽통합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유럽의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조건에 직면했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노동조합이 국가, 기업과 사회적 파트너 관계를 맡아오면서 다양한 형태의 코포라티즘이 존재했다. 이런 전통을 따르는 노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양보 교섭”과 “사회적 파트너십”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와 공존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럽통합의 맥락에 때라 새로운 형태의 파트너십은 유럽적, 국가적, 기업적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유럽노총(European Trades Union Confederation, ETUC)은 국가 수준에서는 사회협약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고, 유럽연합 수준에서는 유럽노동이사회(European Works' Councils, EWCs)에서 사회적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사회적 파트너십 전략에 저항하는 노동자운동의 흐름도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경제통화연합 수렴기준에 연결된 긴축프로그램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면서, 유럽연합 회원국 각 국에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이런 흐름이 노동조합의 대안적 전략으로 발전하고 있다. 프랑스의 연대노조, 이탈리아의 코바스(COBAS) 등의 흐름은 노동자, 임시 노동자, 실업자를 잇는 연결망을 형성하면서 광범위한 사회적 이슈를 노동운동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업, 고용불안, 사회적 배제에 반대하는 유럽행진”(European Marches Network, EMs)은 1997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럽정상회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는 국제기구들에 대항하여 노동과 여러 사회부문의 연합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유럽행진 네트워크는 최근 유럽연합의 여성,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회적 권리 확장을 위한 투쟁과 조직화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런 흐름은 유럽 통합이 강제하는 경쟁과 노동자 분할이라는 조건에 직면해 대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도전이다. 아직은 출발 단계지만, 자본과 유럽연합의 정책의 논리를 거부하고, 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사이에서의 평등과 연대를 강조하는 이런 흐름은 유럽헌법조약이 담고 있는 신자유주의 유럽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다. - 유럽좌파당9) 신자유주의 유럽통합에 맞서 대안적인 유럽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창립한 유럽좌파당 역시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유럽좌파당은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당의 역할은 이러한 사회운동들의 정치를 지지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만큼, 유럽좌파당은 사회운동들과 함께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위해 활발히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좌파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PRC) 당수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2004년 10월 유럽좌파당 로마회의 연설을 통해 현재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헌법조약이 제시하는 유럽의 미래는 자본주의 위기와 패배에 편승하는 암울한 미래일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이것이 유럽 민중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좌파당이 반드시 유럽에 관한 전망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면서 두 가지 요소를 필수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첫째는 평화라는 목표, 전쟁과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목표다. ‘예방전쟁, 무한전쟁의 상황에 대항하는 유럽은 전쟁과 테러리즘에 반대한다는 전망을 자신의 헌법에 담아야 한다. 따라서 전쟁을 거부하는 것,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에서 전쟁을 제거하는 것을 명백히 선언해야 한다. 유럽이 취해야 할 강령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둘째, 보편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입각해야 한다. ‘시민권 그리고 노동권과 같은 시민성은 더 많은 사람에게 확대되어야 하고, 풍부해져야 한다. 이는 특히 이주노동자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시민성이 태생의 권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개인 인간에 기초한 것이라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평등은 기회의 균등함을 넘어서 권리의 새로운 경계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유럽좌파당은 대안적 유럽을 위한 구체적인 강령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제4인터네셔널 계열에서는 이를 두고 유럽좌파당을 표방하면서도 유럽헌법에 대한 관점이나 유럽적인 전망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완성된 강령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민중을 동원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 아니라는 유럽좌파당의 문제의식에 비추어보면, 이는 유럽좌파당을 비판할 근거라기보다는 유럽의 사회운동과 정당, 민중운동의 장기과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좌파당이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통해서 사회운동들과 함께 또 다른 유럽의 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직 진행과정 중이다. 유럽헌법조약,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유럽에서는 헌법조약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헌법조약 부결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어서, 유럽연합과 양국 정부가 긴장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헌법조약을 부결시키기 위한 캠페인에 아탁을 비롯한 사회운동, 여성운동, 프랑스공산당,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 노동총동맹(CGT) 등이 총력을 기울였다. 이 결과 초반에는 헌법조약 찬성여론이 높았고 헌법조약 반대 의견 중에서는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인종주의적으로 활용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현재는 반대 여론이 60%를 상회하고 있는 상황이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유럽 민중이 원하는 유럽이 현재의 유럽연합과는 큰 차이가 있고,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이 중요한 쟁점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약 헌법조약이 부결된다고 해서 상황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후에 더욱 커다란 문제가 남아있다. “진정 대안적인, 다른 유럽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 또한 사회운동과 민중의 과제다. 위로부터 강요된 신자유주의 유럽을 거부하고 민중 스스로가 완성하는 다른 유럽통합의 길이 열릴 것인가? 전 세계 대안세계화 운동의 관심사다. PSSP <참고자료> 쉬잔느 드 브뤼노프, 〈지금 우리에게 어떤 유럽이 필요한가? 우리는 어떤 유럽을 얻을 수 있는가? 〉, 《사회진보연대》, 2000년 11월호 이호영, 〈유럽연합과 국민국가의 위상 변화〉,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 Guglielmo Carchedi, For Another Europe: A Class Analysis of European Economic Integration, pp.7~35, Verso, 2001 Guglielmo Carchedi, The EMU, monetary crises, and the single European currency, Capital & Class 63, Academic Research Library, Autumn 1997 Bruno Carchedi and Guglielmo Carchedi, Contradictions of European Integration, Capital & Class 67, Academic Research Library, 1997 Graham Taylor and Andrew Mathers, Social Partner or Social Movement? European Integration and Trade Union Renewal in Europe, Labor Studies Journal, Vol. 27, No. 1, Spring 2002 Speech by Fausto Bertinotti, EU: Another Constitution is Possible, http://esteri.rifondazione.co.kr/internazionale/i0038.html IV Online Magazine, Women and the European Constitution, Ⅳ365, March 2005, http://internationalviewpoint.org/article.php3?id_article=576 1) 영국이 유로화 도입을 유보한 까닭은 영국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파운드화의 위상과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다. 영국은 파운드화가 유로보다는 달러와 가까워지는 것이 자국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 본문으로 2) 유럽정상들이 채택한 유럽헌법조약은 각 국의 비준절차를 거쳐 2007년부터 발효된다. 25개 회원국 중에서 덴마크, 영국,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체코, 프랑스,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은 국민투표를 통해서 조약 비준을 결정한다. 나머지 15개국은 의회 비준절차를 거친다. 이 중 스페인은 올해 2월 20일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헌법조약이 통과되었다. 리투아니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그리스도 이미 의회 비준을 통과했다. 프랑스가 오는 5월 29일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네덜란드는 6월 1일이다. 회원국 중에서 한 국가라도 헌법조약을 거부하면, 헌법조약은 발효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중 보유한 방대한 생산능력과 과잉자본의 배출구로서, 또한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럽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획하였다. 원조를 받아들인 나라는 서유럽 16개국으로서 1951년까지 액수는 114억 달러에 달하였다. 본문으로 4) 회원국은 벨기에, 독일 연방 공화국,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그리고 네덜란드였다. 본문으로 5) 1973년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가입했고, 1981년 그리스,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입했다. 이 중에서 영국의 가입이 가장 쟁점이 되었다. 영국은 유럽공동체에 내재한 유럽연방국이라는 목표에 반대하면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유럽자유무역지대를 창설했다. 영국은 유럽대륙의 국가들보다는 미국과 영국연방(영국 및 구(舊) 영국 식민지 국가였던 캐내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파키스탄 등으로 구성된 연방체)과의 관계를 더욱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누리는 세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했는데, 이는 국제통화로서 파운드가 가지는 영향력 및 그에 따르는 부수적 이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의 공동시장이 성공하고, 유럽 기업들이 출현하여 미국기업에 맞먹는 규모를 갖게 되자 영국은 입장을 바꿔 유럽공동체에 가입을 신청했다. 본문으로 6) 회원국의 경제력과 인구에 비례하여 투표수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제도. 가중다수결 제도 도입은 유럽연합 확대 과정에서 강대국(프랑스와 독일)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후에 전원합의가 요구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가중다수결을 도입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근거는 의사결정과정에 더 큰 유연성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또한 강대국들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생각과 단일통화, 나아가 유럽연방국으로 더 빨리 이행하고자 하는 독일과 프랑스의 열망을 반영하는 주장이었다. 본문으로 7) 경제및통화연합의 전 단계였던 유럽화폐체계(the European Monetary System, EMS)는 회원국 통화의 환율격차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이것은 회원국의 환율 변동폭을 2.25%(이탈리아 리라에 대해서는 6%)로 제한하는 제도다. 본문으로 8) 통합된 유럽의 무장화라는 문제는 통합 과정에서 오래된 쟁점 중에 하나다. 1948년 브뤼셀 조약을 통해 서유럽연합(Western European Union)이 설립되었다. 애초부터 서유럽연합에게는 NATO의 유럽축이라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NATO와 미국 헤게모니를 승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연방국을 염두에 둔다면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는 문제가 지속적인 쟁점으로 남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서유럽연합은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의 기반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영국이 서유럽연합을 유럽연합에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고, 미국의 명백한 군사적 우월성은 서유럽연합을 약화했다. 냉전 해체 이후 서유럽연합의 강화가 예상되었지만, 유고에 대한 유럽연합의 전략 실패로 인해 오히려 NATO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NATO와 유럽연합의 독자적인 군사화 문제는 여전히 미묘한 쟁점으로 남아있다. 본문으로 9)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을 형성했던 유럽 내부의 좌파정당들이 건설한 정당으로, 정식명칭은 "the Party of European Left"다.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이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공산당, 독일 민주사회당, 스페인 통합좌파, 그리스 연합 등 11개국 15개 정당이 가입해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