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의 출범과 정책개혁 전망 작성자: 임필수 (사회진보연대 정책국장) 작성일: 2003.1.29 2000년 총선을 어떻게 회고할 수 있나? 김대중정권의 경제개혁과 새로운 수탈체제의 성립 노무현의 등장과 '반창연대' 노무현 지지층의 이질성과 갈등 노무현의 정책개혁 전망 민중운동의 미래
현재의 북한 핵의혹 사태는 여러모로 10년 전 위기 상황과 여러 모로 비교가 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국은 핵무기 등의 대량파괴무기를 생산함으로써 한반도 및 지역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북한이라고 주장하며 북한에게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의 군사적인 위협이야말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북한의 핵의혹의 해소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연계하여 협상을 시도하고 있다. 1년 반 동안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 속으로 몰아 넣는 대가를 치르며 합의를 이루어 냈음에도, 10년이 지난 지금 동일한 문제가 다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결국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위기(전쟁)와 협상(평화)의 반복 속에서 지속적으로 출현하는 해결되지 않는 갈등(들)이다. 그런데 지난 10년이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남한 정부의 접근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93년 위기 당시 막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북핵의 선결'을 대북정책의 최우선적인 기조로 삼고, 이를 위해 경제협력을 중단하고 북한에 대한 군사적인 압박을 강화하였다. 더구나 남한이 배제된 가운데 북-미간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하는 것을 제어하고자 이후 협상국면에서도 북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며 대북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확보하려 애를 썼다. 한편, 현재의 사태에 대한 남한 정부의 행보는 10년 전과 사뭇 다르다. 김대중 대통령 및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북핵의 선결'이라는 원칙은 유지하되, 이 문제를 남북 간의 경제교류와는 분리하여 다룸으로서 오히려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북-미간의 갈등을 제어하려 하고 있다. 나아가 북-미간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이 사태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이런 남한의 변화된 대응이 10년 전과 다른 해결을 가져 올 수 있을까? 북한의 핵을 둘러싼 한반도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설령 이후 해결을 위한 결정적인 조건을 만들어 내는데 결국 실패한 지난 10년을 뛰어 넘는 해결을 가져 올 것인가? 지속적으로 출현하는 위기가 한반도 민중의 절멸의 가능성마저 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핵의혹이 제기된 배경: 제네바합의의 위기 2003년을 전후하여 제네바합의의 이행 문제를 둘러싸고 북-미간의 갈등이 격화되리라는 것은 예상되었던 일이다. 제네바합의에 따르면, 2003년까지 미국은 북한에 2,000메가와트 경수로를 제공해야 하며, 경수로의 주요 핵심부품의 이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북한은 모든 핵물질에 대한 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공사지연으로 인하여 2003년까지 핵심부품을 인도하기로 한 약속이 지켜질 가망성이 매우 희박해지면서 제네바합의의 이행과 책임방기를 둘러싼 북-미간의 공방이 예상되었다. 미국 정부는 제네바합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고의적으로 '위반'하였다. 하나는 관계정상화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면서 경수로 건설을 실질적으로 지연시킨 것이다. 미국이 제네바합의 이행을 고의적으로 방기한 것은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에너지-식량위기와 김일성 주석 사망 등을 빌미로 '북한붕괴론' 또는 '연착륙론' 등을 적극적으로 유포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북한의 체제가 비교적 안정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기반으로 협상과 군사력이라는 이중의 경로로 북한의 군사력을 해체하고 점진적으로 북한의 '시장개혁'을 유도한다는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다.(페리 프로세스) 그런데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상황은 다시 변화하게 된다.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의 제어 혹은 감축을 효과적으로 이루어내는데 실패했고 오히려 협상의 주도권만 북한에게 내주었다고 비판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제네바합의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의제가 불충분 할 뿐 아니라 북한의 실질적인 군사력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 왔다. 즉, 제네바합의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추가적인 핵의혹의 해소, 미사일 개발 및 수출 문제, 재래식 무기 등과 같은 위협에 대한 북한의 개선을 추구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한-미-일 공조의 강화를 통해 남-북관계, 북-일관계의 진전 속도를 조절하여 대북협상력을 높이고 북한의 개선조치에 대한 보상의 책임을 분산시키려고 하였다. 더구나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 하에 수립된 소위 테러지원국 혹은 불량국가에 대한 보다 강경한 압박과 급격한 변화의 추진이라는 세계적 차원의 전략은 미국의 대북정책 자체를 급속도로 경색시켜 왔다.(악의 축 발언, 선제핵공격 가능성의 언급)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들고 나온 카드가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개발 프로그램'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 문제를 활용하여 제네바합의의 이행을 방기해온 자신의 책임을 북한에게 전가하고, 제네바합의에서 다루지 않는 추가적인 핵문제나 미사일-재래식전력의 투명성 확보 또는 감축요구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을 형성하려 했다. 또한 북한의 핵문제를 가지고 남북관계, 북일관계의 진전을 제어하고 이후 자신의 협상력을 극대화하려 했다. 북한이 북미회담에서 새로운 핵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의혹을 시인했는지, 시인했다면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북한과 미국 측에서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3일 켈리 대북특사가 관련 의혹을 제기하자, 다음 날 북한은 이 문제를 포함하는 새로운 협상을 제기했다고 한다. 이후 북한은 "미국의 가중되는 핵압살 위협에 대처해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 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있다는 것을 말해줬다."며 핵의혹을 시인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리고 미국이 불가침 조약을 통해 북한에 대한 핵공격계획 중단을 포함한 불가침을 법적으로 확약한다면 미국의 핵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사찰과 검증조치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은 과거 일본인 납치의혹을 인정하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일본과의 수교를 추진하려고 했고, 경제개혁조치의 실행 신의주 경제특구, 개성공단의 추진 등 개혁·개방의 실험적 모색 등을 통해 경제재건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는 '발전'의 문제보다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그런데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와 정치적 안정이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특히 북-일 수교에 따른 보상금 차원의 일본의 원조와 일본 자본의 유치는 관건적인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의 압박에 맞서 역으로 이를 활용하여 미국의 불가침에 대한 약속을 통해 안보상의 위협을 해결하고, 추가적인 관계정상화를 이루어내 경제재건 프로그램의 토대를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전략의 이면에는 9·11 테러 이후 가중되는 미국의 압박과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의 다음 표적이 자신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따라서 지금의 사태는 단지 새로운 핵 개발 프로그램의 처리를 둘러싼 북-미 양자간의 충돌이 아니라, 제네바합의 이후 지난 10년 간 계속되어 왔던 북-미 관계의 교착상황에서 유지, 온존되어 온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제네바합의의 '평화와 안전'은 미국에게는 자신의 동아시아에서의 정치·군사적 영향력이 유지되는 한에서의 평화와 안전이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이 위협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의 군사력을 협상의 카드로 활용하여 체제의 안전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미국의 패권적 전략으로부터 체제를 방어해야 하는 또 다른 현실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해왔다. 그렇게 위기는 계속 되어 왔던 것이다. 국면의 진전: 대립에서 협상으로? 북-미는 사건의 발발 이후 지금까지 '제네바합의'의 파기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해왔다. 미국은 지금의 문제는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위반하고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시도함으로 발생한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이에 따르면 문제의 해결은 북한이 스스로 잘못된 행동을 중단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핵심적인 부분인 셈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핵의혹을 부정하면서 미국의 주도 하에 중유공급이 중단되자 에너지 생산을 명분으로 동결되었던 핵 시설의 봉인을 해제하고, 원자로 가동을 준비하는 한편, NPT를 탈퇴하였다. 그런데 작년 연말을 거치면서 부시 행정부의 입장이 조금씩 선회하기 시작했다. 1월 15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계획을 폐기하면 에너지와 식량지원 계획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하루 전날에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1994년 북-미간의 제네바합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며, 원자로가 아닌 다른 형태의 발전소를 건설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나섰다.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북-미 불가침조약'에 대해서도, 북한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다른 형태의 문서 보장의 가능성도 계속 언급되고 있다. '선(先)핵계획폐기'라는 원칙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이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없을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협상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북핵사태가 협상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이는 성급한 추측이다. 현재 부시 행정부의 전략은 '잠정적으로' 사태의 진전 속도를 제어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1>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핵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엄격한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북한의 어떤 제안에 대해서도 무시하거나 최소한의 대응을 하는 한편, 2>북한의 핵개발이 진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엔이나 IAEA 등의 국제기구나 국가 간의 외교적인 수단을 활용하고, 3>이후 대화나 협상의 가능성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되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으며, 4>새로운 한국 정부 및 일본 등과의 공동의 행보를 재조율하는 4가지 축에서의 대응을 해 왔다. 이는 1월 22일 존 볼튼 미 국무부 차관의 방한 당시 "더 이상의 상황악화를 방지하고 외교적 해결노력을 지원하는 데 최우선 목표를 두기로" 남한 정부와 합의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이 사태의 지연을 중점에 두고 외교적 수단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몇 가지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라크 문제에 대한 고려이다. 유엔무기사찰단의 보고서 제출 시한이 27일로 예정되어 있는 상황임에도 국제적으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를 얻을만한 이라크의 '중대한 위반'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대 여론도 높아져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핵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남한과 일본 및 주변국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려이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 상황에서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통해 이 지역의 새로운 경제활력을 개척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이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만을 고수했을 경우 동맹국 및 협력국과의 마찰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의 진행을 제어하는 가운데 이후 대응책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북핵사태가 장기화되는 것 자체가 북한에게는 제재와 비슷한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당장 에너지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고, 남북관계와 북일관계의 진전 역시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코너에 몰린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도 있고, 혹은 북한이 핵시위의 수위를 높인다면 이후 강경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 미국의 계산인 것이다. 남한 정부의 '주도적 역할'의 의미와 한계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역할이 주시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사자는 북핵문제의 해결과정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이러한 의지는 1월 7일 한, 미, 일 삼자의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에서 중재안을 내놓으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남한 정부는 미국,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EU) 등과 의견을 조율하며 이 안을 다듬어왔으며,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월 27일 평양에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임특사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북한을 방문, 북한이 먼저 농축우라늄및 플루토늄 핵 개발을 포기하면 북미 협상 및 에너지·식량 지원을 추진하는 '선(先)조치 후(後)협상 및 지원'의 2단계 중재안을 전달할 방침이다. 특히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북-미 불가침조약에 대해, 부시 미 대통령의 대북 체제보장 서한을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이 보증하는 러시아측 중재안에 이를 미 의회 혹은 유엔 등이 추가적으로 지지·보장하는 '투(two) 트랙' 안전보장 방안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북한이 핵 의혹을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해소할 경우 중유 등 포괄적인 에너지 지원을 추진하고 대대적인 북한에 대한 투자를 지원하는 방안도 제시할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24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정동영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특사가 핵의혹 해소에 대한 대가로 '북한판 마셜플랜'을 추진할 계획이 있음을 밝힌 것과 관련하여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북한판 마셜플랜'은 노무현 당선자가 새로운 경제성장의 비전으로 제시한, 남한을 '동북아경제 허브(중심)'로 육성하겠다는 전략과 밀접히 관련이 있다. 이는 한국을 동북아 물류, 금융, 교역의 국제중심지로 키우겠다는 거대한 그림이다. 현재까지 윤곽을 드러낸 노무현 당선자의 구상은, 시베리아의 풍부한 가스전을 남북, 일본, 중국으로 공급하는 파이프 라인 구축, 남북한을 관통하는 철도망 복원을 통한 시베리아 및 중국과의 철도망 연결 등 도로·교통 인프라 구축, 정보통신 네트워크의 구축 등이며 이를 위해 동북아개발은행을 다국적 기구로 창설하여 국제적인 투자를 유지하고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북한판 마셜플랜'이란 바로 이런 연장선상에서 동북아개발은행이 북한 재건에 필요한 특별기금을 조성·관리하는 한편 남북한, 미·일·중·러 등이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하여, 북한 사회간접자본과 에너지재건 사업을 추진하는 북한의 경제재건 계획이다. 러시아 역시 동해선 복원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일본 역시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일 수교의 추진과 맞물려 비슷한 구상을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동북아경제 허브 구상 중 핵심적인 부분인 북한을 통과하는 시베리아 가스 파이프라인의 구축은 제네바합의에 의해 약속된 경수로를 대체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되어 왔으며 원자로가 아닌 다른 형태의 에너지 제공을 원하는 부시 행정부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결국 북한에게 보다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단기적으로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 북미협상의 조건을 만들고 장기적으로 '북한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의도이다. 이런 제안에 대해 북한은 어떠한 답을 할 것인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북한 역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외부에서의 자금의 유입을 무엇보다 바라고 있으며 이를 위해 실험적인 개혁·개방을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으로서도 솔깃한 제안 일 수 있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가 체제의 안전성을 급격하게 훼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제안은 북한이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일 수 있다. 더구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인 침체 속에 중심국의 경제 위기를 주변국으로 떠넘기거나 완전히 배제하는 방식으로 기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은 그 자체로 북한에게 또 다른 재앙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남한 정부의 행보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한계는 미국의 정책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미국과 남한 사이에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지만, 남한의 대북정책이 미국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강화한다는 전망 하에서 이루어지는 한 그 차이는 같은 전망을 이루기 위한 역할분담 혹은 보완적인 방식에 불과하다. 남한 정부는 여전히 지금의 위기가 북한의 핵의혹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미국의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하지 못하며, '한반도의 비핵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김대중 정부 그리고 노무현 차기 정부가 그리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는, 미국의 군사적 위상과 역할의 변화 없는, 다시 말해 제국주의적 군사력 하의 평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가 언제든지 뒤집힐 수도 있다는 점을 오늘날 우리는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남한 민중운동의 과제 정치적 협상을 통해 현재의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덧붙여 과연 93년 위기의 해결로서 제네바합의가 가져 왔던 '평화'가 무엇이었는지, 왜 다시 동일한 상황이 10년이 지난 후에도 반복되어서 나타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제네바합의가 천명했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은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유일한 군사적·정치적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태도에 의해 계속해서 위협받아 왔다. 남한 정부가 이에 대해 명확한 반대의 입장을 가지지 않는 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국의 이해가 달성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절하는 것일 뿐이다. 겉으로, 그리고 10년 전의 위기에 비해 남한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북한 역시 미국을 모방하여 군사적 대결구도를 증폭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크게 높일 뿐만 아니라, 북한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경쟁의 회오리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미국의 강압적인 전략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스스로의 최소한의 정당성마저 잃을 위험이 있다. 따라서 지속되는 한반도의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한 남한 민중운동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의 선제(핵)공격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폭로하며, 현재 사태의 책임은 제네바합의를 지속적으로 위반하며 한반도의 위기 가능성을 증폭시켜온 미국에게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미국의 선제(핵)공격 옵션의 포기, 북-미 불가침 조약 체결을 통해 현재의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미국을 비롯하여 남한 정부에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촛불시위와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반전운동의 두 가지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계되어야 한다. 현재 촛불시위는 특히 북한의 핵의혹이라는 문제와 결합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지만(노무현 당선자의 자제발언 등) 바로 이 점에서 (역으로) 촛불시위가 더욱 급진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북핵문제의 본질이 적극적으로 토론되고 민중적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반도 평화의 진정한 적이 미국과 동맹자인 한국의 지배계급이라는 점이 분명해 질 것이다. 전쟁광 김정일을 제어해야 한다는 저들의 주장에 대해서 민중들이 전쟁광 부시를 제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맞서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촛불시위는 미국의 패권적·군사주의적 전략을 반대하는 반미-반전투쟁으로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국제적인 반전운동과 맞물리면서 2003년 미국의 패권적 군사주의적 노선을 저지하는 전지구적 전선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작년부터 '이라크에서 또 다른 미선이와 효순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은 호응을 얻어 왔다. 동포의 무참한 죽음에서 출발한 남한 민중들의 분노는 이라크 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을 보면서 국제적인 반폭력 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다. 평화는 그것을 염원하는 행위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단지, 전쟁을 조장하는 세력과 제도들, 가공할 전쟁도구들을 제어하기 위한 민중의 권력을 형성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노무현정권이 탄생했다. 인터넷세대의 반란으로까지 불리는 노무현의 당선. 그리고 마치 민주화를 이제야 달성했다는 386들의 축제는 부산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탄생직후 이 땅에서는 또 한 명의 노동자가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이 기괴한 시간의 엇갈림. 다가오는 2003년, 노무현 정권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번 특집에서 임필수는 노무현정권이 열리는 2003년 정세와 민중운동의 대응에 대해 지난 두 달간 사회진보연대의 논의를 모아냈다. 한편 정영섭은 노사정 합의주의로 대표되는 노무현정권의 노동정책을 비판하고 노동운동이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그리고 이소형은 드디어 (준)자를 떼고 본 조직 건설을 준비하고 있는 민중연대의 기간 활동평가와 이후 전망에 대해 간략한 입장을 개진한다.
한국사회 최후의 '유보된 영역' 정치개혁?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만에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집권여당으로부터 당의 발전적 해체 제안이 나오고, 새 정부의 첫 총리 인선을 앞두고 대통령 당선자가 한껏 몸을 낮추어 야당을 찾아가 협조를 구하는 모습이 연출되는 등 16대 대통령 선거 이후 정치권의 모습은 과거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닌게 아니라, 대선 공간을 갈라 치기 했던 두 개의 거대 정당에서는 모두 당 개혁을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당의 체질과 골격을 탈바꿈하는 수준에서의 정당개혁 논의들을 진행중이다. 본격적인 선거 국면이라 볼 수 있는 작년 하반기 이후의 선거지형을 되돌아본다면 정치개혁이라 명명되는 이러한 흐름들의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낙선, 낙천 류의 선거공간 외부에서 벌어졌던 캠페인을 넘어서 노사모를 대표로 대중들의 자발적인 직접행동이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16대 대통령 선거였다. 물론 이는 개혁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는 정치개혁의 필요성이 다른 한편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유력한 당선 후보의 선거공조가 선거전야가 되어서야 깨어져 나가는 사상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은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거의 최저치에 가까운 수준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무관심이라는 말로 쉽게 정리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지배정치가 느끼는 위기감은 이렇듯 몇 마디 말로써 손쉽게 정리될 만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이는 집권여당이나 야당, 심지어 이제 막 제도 정치권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진보정당에도 공히 해당되는 문제이다. 더 많은 개혁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구호 속에 걸어온 지난 10여년 동안 적지 않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개혁에는 미치지 못했던 '유보된 영역'으로서의 정치개혁이 바야흐로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리고 벌써부터 민중운동 내 일부 세력들은 정치개혁 논의 속에서 자신의 운동전망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의 무망함은 이미 87년 투쟁의 성과를 자신의 개혁이미지의 형성에 완벽하게 동원해낸 노무현과 그의 당선의 주요 동력인 386들의 현재적 상태를 통해 드러났다. 여기서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민주화 이행의 시기'라 재해석된 87년 투쟁 이후의 일련의 정치개혁 차원의 흐름들을 살펴 볼 것이다. 또한 실패한 정부의 집권여당이 이제껏 경험해 본적이 없는 대중동원 방식을 통해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현재의 조건, 그로부터 정치개혁이 제기되는 맥락에 대해 간단히 검토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검토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인데, 민중운동의 부활, 대중투쟁의 강화와 자유주의적 정치개혁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민주투사, 5공 청산의 주역 노무현? 민중운동의 몰락과 자유주의의 정치적 승리 한국 부르주아 정치에 있어서 87년 6월 투쟁은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6월 투쟁 이후 국민투표에 의해 결정된 새 헌법의 채택이 당시까지 제정이래 아홉 번에 이른 헌법개정의 역사상 최초로 여야 간의 합의에 의해 가능했으며, 이로써 직접, 보통 선거에 의한 대통령의 선출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 집권 초기인 88년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민정당이 국회의석 과반수를 차지하는데 실패하면서 형성된, 이 역시 역사상 최초인 여소야대 국면은 이후의 민주적 이행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있어 상당히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정지지형은 군사정권 하에서 행정부의 시녀로서 기능하던 국회의 기능이 정부에 대한 의회조사권의 발동과 같은 조치들에 의해 일정하게 정상화되는 것으로 비추어 졌으며, 그것이 절정이 5공 청문회와 같은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들이었다. 익히 알고 있듯이 노태우 정권 하의, 개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일련의 조치들은 90년의 삼당합당을 통한 거대여당의 부활로서 막을 내리게 되고, 이로써 민주적 이행의 문을 열어제치며 출범했다고 하는 한국사회 최후의 군부정권인 6공화국은 91년 투쟁의 불씨를 제공하는 것으로써, 즉 반동적 권력재편의 국면을 여는 것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국사회에 개혁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인 김영삼 정권 시기로 가면, 정치개혁은 급물살을 타게된다. 30년만의 문민정부 수립으로 들썩거렸던 당시를 돌아보면, 정치개혁 차원의 많은 조치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은 문민정부의 정통성 강화와 통치기반의 확립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당시의 일련의 조치들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보자면, 문민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 과거 군사정권 하의 각종 초법적 권력기관들에 대한 개혁의 단행이다. 이 때 군, 검, 경 및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 졌는데, 전두환에 의해 조직된 군대파벌인 하나회를 해체하는 것을 비롯해, 군의 독점적 권한 하에 추진되었던 율곡사업에 대한 국정감사, 안기부법 개정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군사정권의 억압적 통치질서와 분리선을 긋고, 문민정권의 정통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이러한 조치들은 상해임시정부로부터 그 연원을 가져오고, 4·19, 5·18을 민중혁명으로 복권시키는 한편에서의 직업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부정부패 척결 차원의 조치들도 대통령본인의 재산공개를 시작으로 공직자윤리법 개정 등을 통해 추진되나갔는데, 이의 백미는 정치자금의 투명화, 지하경제의 근절을 명분으로 했던 금융실명제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선거관련 법들의 전반적인 개정이 추진되었는데, 선거비용의 축소, 여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비례대표제의 개선 등을 포함하는 선거법의 개정, 국고보조금 중대의 방향으로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골자로 하는 정치자금법의 개정, 지방선거법의 개정으로 지자제 선거를 부활시켰던 것 등이 그 내용이다. 또한 의회정치의 활성화와 정당개혁 차원의 조치들도 빠지지 않았는데,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부터 총무처의 역할을 대폭 축소한다거나 국회의 심의, 의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국회법 개정 등도 추진되었다. 그야말로 개혁의 드라이브라 할 만한 제도적 변화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집권여당에 의해 꼭두새벽에 관광버스를 대절하며 감행되었던 노동법, 안기부 법 날치기 통과, 끊이지 않았던 재벌들에 대한 시혜조치를 둘러싼 시비가 단지 법과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관행, 부르주아들의 도덕적 해이로 치부되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태우, 김영삼 정권 당시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87년 투쟁의 성과를 '민주적 이행'이라는 이름 하에 제도정치 안으로 수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진전과 군부정치의 종식의 궤적에서 87년 투쟁과 같은 80년대 광범위하게 분출했던 대중들의 투쟁을 삭제해 나가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김영삼 정권 당시 정치개혁 차원에서 금융실명제가 도입되었다는 측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이 정리해고 법제화(96년말 노동법 개악), 개방화조치(94년 우루과이 라운드)등을 통해 이미 김영삼 정권 당시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이 문민정부의 정통성 확립 차원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만 설명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추진하기에 반공, 발전, 지역주의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한국의 낡은 정치체제는 그다지 적합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노무현 당선 직후의 수많은 용비어천가들이 노무현에게 부여한 87년 민주투사, 5공 청문회스타라는 칭호는 민중운동의 몰락이 가져온 자유주의 세력의 정치적 승리가 불러온 비극으로 볼 수 있다. 김대중 미완의 개혁과 노무현의 개혁과제, 그리고 정치개혁 새삼스레 재론하지만, 국가의 실패로부터 작은 정부를 구현하고자 했던 신보수주의와는 다르게 정책개혁을 통해 새로운 경제정책과 통치체제를 구축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일컬어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IMF 구제금융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당선과 동시에 정권을 인수받으며 초법적 권한을 가지고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한국경제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체질개선을 위한 본격적인 정책개혁에 착수하였으며 이는 구조조정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축적의 위기에 빠진 자본의 금융적 확장에 조응하는 형태로 한국경제를 재조직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닌 이러한 정책개혁은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하는 계층간, 민족국가간, 인종간, 성별 갈등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사회적 배제와 갈등을 내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정권 구조조정 과정을 돌아본다면 이러한 사실은 명확한데, 부의 편중과 사회적 양극화에 따른 다양한 갈등들이 항상적으로 사회 문제화되었으며, 이는 집권 초반의 금모으기 류와 같은 국민동원방식으로만 관리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렇듯 근본적인 위기의 치유가 아닌 관리정책으로서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에 적합한 통치체제 구축이 필수적이며, 이것이 불가능해 졌을 때 위기관리는 더 이상의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김대중 정권 초기를 돌아보자면, 386개혁세력들과 시민운동세력들을 대거 흡수해내는 방식으로 일정하게 신자유주의 통치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듯 해 보였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신자유주의 지지연합의 형성이라 했으며, 이로써 김영삼 문민정부가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개량적 운동세력들에 대한 체제 내로의 포섭이 일정하게 달성되는 것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지연합만으로 성공적인 개혁의 완수는 불가능했는데, 잊혀질만하면 터져나왔던 각종의 게이트나 경제위기 극복의 수혜가 일부 중산층에게로 집중되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구조조정 정책의 효과와 지배계급의 정당성에 대한 회복불가능한 불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2001년 10월의 재보선과 2003년 6·13 총선에서 민주당의 참패를 불러왔는데, 이는 집권여당, 김대중식 개혁에 대한 지지철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낮은 투표율을 고려한다면 대중들의 회복되지 않는 삶의 위기가 결합되면서 정치일반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이 어느 때보다 팽배했던 것으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있어 관건이 실행 능력에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정치적 정당성의 확보와 안정적인 통치체제의 구축은 실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정치개혁에 있어서의 김대중 정권의 성적표는 역대 정권, 특히 앞서 살펴본 김영삼 정권 당시의 그것과 비교해도 극히 초라한 수준이다. 15대 대선 당시 내걸었던 정치개혁 관련 공약을 보면 자민련과의 공조상황에서 대부분의 내용이 행정부 개혁에 맞추어져 있으며, 실재로 추진된 것들은 시민단체를 앞세운 부패방지법제정이나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 등과 같은 과거청산 류의 개혁입법 제정에 초점이 가 있었다. 이러한 김대중 정권의 비판적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당선된 노무현 정권 정책개혁에 있어 관건은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관리 지향적 정책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대중적 지지기반과 정치세력의 구축을 통해 통치체제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대중 정권 정책개혁 당시 위기 이전상황으로의 회기에 집중하면서 미쳐 손쓸 수 없었던 영역에 본격적으로 관리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는 당선 이후 인수위를 통해 쏟아져 나온 각종의 정책과제들을 통해 대강의 윤각은 드러난 셈이다. 예상했듯이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조치의 강화, 여성인력활용에 초점이 맞추어진 여성정책, 사회복지체계의 재조직 등이 여기에 대거 포함되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치영역인데, 각종 분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도 미달하는 수준의 개혁처방이 가해진, 가장 낙후된 형태로 남아있던 곳이 바로 여기이다. 현재까지 보여진 노무현 당선자의 정치개혁의 대한 의지는 단호하다. 1월 7일 인수위에서 발표한 10대 국정과제는 애초 8대 과제였던 것이 당선자의 지시에 의해 정치개혁과 과학기술 육성이 추가되는 형태로 수정되었다. 물론 인수위 설치 당시부터 당선자의 집적 지시에 의해 정무분과 산하에 정치개혁연구실을 신설하고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학자 임혁백, 정해구 등을 실장과 연구위원으로 선임한 바 있었다. 인수위 발표에 의하면 정치개혁연구실은 당선자의 국정철학과 공약실현을 뒷받침할 제도개선 방안을 연구, 특히 정당과 선거구제, 정치자금 등 정치관련 제도의 개선안을 만들어 정치권에 제안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 한다. 노무현 정부 정치개혁 전망,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현재적으로 노무현 정권이 추진할 정치개혁 구체적인 상을 예측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몰락의 핵심 계기가 되었던 각종의 금융비리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화된 형태의 부패방지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 부분은 김대중 정권 집권 말기의 개정된 부패방지법을 세부적으로 보완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며, 대선 당시 공약에서 한나라당과도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부패방지법개정의 맥락에서 실행해 나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정치권 전반의 관리능력을 제고하는 것과 민주당-노무현이 가지는 지역정당 이미지를 벗고 보다 안정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는 것에 있다. 이 역시 김대중 정권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권력 누수현상과 식물국회, 방탄국회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현재 노무현의 정국구상과 민주, 한나라 양당 개혁특위의 논의 상황을 보자면, 이는 명확한 삼권분립에 기초하여 의회중심의 정치를 실현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고비용저효율의 정치체계의 주범으로 지목 받고 있는 현재의 정당구조를 혁신하는 것으로 수렴되고 있다. 대선 직후 각 당마다 실시된 각종 토론회 내용이나 개혁특위 논의 상황을 통해 보자면, 정당구조 전반의 혁신이 거론되는데, 주요 방향성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라 할 수 있다. 먼저, 원내정당화를 지향한다는 차원인데, 여기에는 지도체제의 개편 속에서 원내총무의 위상강화, 정책생산 및 합의 기능을 제고하기 위한 위원회 체계의 강화, 확대 등이 해당된다. 두 번째는 선거기능을 중심으로 정당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지구당 폐지 또는 연락사무소 수준으로의 축소, 중앙당의 선거대응능력 제고 및 규모 축소 등이 거론되고 있다. 세 번째는 권위주의적 정당구조를 혁신하는 차원으로 권력집중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지도체제를 변화시키는 것, 상향식 공천의 제도화 등이 검토 중이다. 마지막은 국민참여에 개방적이고 당원중심의 정당형태를 지향하는 것으로 지난 대선에서 실험된 국민경선제의 제도화 또는 미국식 예비경선제의 도입, 진성당원확보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 정도면 거의 혁명적 수준의 정당개혁처럼 보일 수 있으나 우리가 보기에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민주, 한나라 양당의 개혁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치개혁의 필요성에 있어 절실함의 차이는 없을지언정, 강조점도 다르고 양립가능하지 않은 정책들이 분열증 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노무현-민주당의 경우 당선의 실재 동력이었던 386과 20대를 정당개혁을 통해 제도적으로 흡수하는 형태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김대중 정권처럼 이들의 지지와 이탈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상황을 방지하는 형태로 정당체제를 재편하는 것에 정치개혁의 궁극적 목적이 있다 할 것이다. 이는 미국식 양당체계로 가야한다는 거듭되는 노무현의 발언을 통해 확인되는바, 대선 당시의 구도로 보자면 '반창세력'들과 경제위기 상황에서조차도 부의 기득권을 상실해 본 경험이 없는 '안정희구 세력들'을 한나라당과 분할 관리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김대중 지지세력과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세력에 대한 지지층으로 일정하게 고착화되어온 정치지형을 고려한다면, 안정성의 문제가 있지만 아주 불가능한 경로는 아니다. 물론 노무현 당선에 있어 이러한 지형과는 일정하게 다른 조건, 즉 386들과 인터넷 직접행동이라는 새로운 행동양식을 선보이고 있는 20대의 노무현에 대한 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김대중 정권 당시 386들이 보였던 갈지자걸음이 경제적 실리에 기반한 일시적 지지와 철회의 반복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원하는 보다 확실한 개혁의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은 정치개혁의 전제라 할 수 있다. 대선 당시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인 월가의 사상검증을 안전하게 통과했을 뿐 아니라, 노골적인 지지선언까지 받아냈던 노무현에게 출발의 조건은 비교적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20대인데, 월드컵-촛불시위-노무현 지지로 이어진 이들의 행동양식에서 자기표현, 문화세대라는 일종의 세대적 동질성 이외에는 이렇다할 정치적 동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386과도 다르게 민주화 투쟁의 경험도, 일시적이나마 금융화의 수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저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이며,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도 이들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서 여론주도세력이며 여러 측면에서 사회중간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386들의 압도적 지지가 지속될 수 있다면 미국식 양당체제의 모사는 일정하게 가능할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경우 대선 실패 책임론을 둘러싼 당내갈등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정치개혁 방안을 놓고 당권 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으로 쟁점이 옮아가 있는 형국이다. 민주당에 비해 한나라당의 고민은 보다 근본적일 수밖에 없는데, 반공, 발전 전략 속에 유지되어온 보수주의 이념이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망에 적합한 형태로 재정립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한 87년 투쟁을 자신들의 개혁적 이미지의 상징조작에 동원하고 있는 386들로 인해 한나라당에게 덧씌워진, 민주주의를 지체시킨 장본인이라는 혐의를 탈피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서의 대중적 동의를 얻기가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정당개혁은 제왕적 총재, 계파정치로 상징되었던 지도체제를 개편하지 않고서는 여타의 개혁조치들이 대중적 설득력을 얻기가 힘든 상황이고 그만큼 상당한 당내 갈등과 진통의 과정을 동반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현재 진행중인 정치개혁, 정당개혁의 폭과 수위를 결정짓는 것은 2004년 총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무현-민주당으로서는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집권중반도 넘기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있는 것이고, 한나라당 역시 대선 패배 이후의 쇄신된 당지도력을 검증 받을 수 있는 일차관문인 셈이다. 그런 만큼 정치개혁 논의의 와중에도 구체적 방안과 속도조절을 놓고 양당 모두 당권 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이 첨예한 상황이고, 개혁특위로부터 제안되는 정책들이 다음날이 되면 주요 간부회의에서 철회, 유보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더욱이 개혁특위에서 논의되는 수준의 정당개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적청산, 세대교체 문제가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은 총선결과에 의해서 일정하게 강제적 형태로 정리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쟁점은 선거구제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 선거법 개정에서 첨예하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호남정당을 벗어나 전국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한 민주당의 중대선거구제, 비례대표제와 한나라당의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비례대표제를 도입한다는 방침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예정대로라면 1월 중 국회정치개혁 특위를 통해 국회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선거법 등 일련의 정치관계법의 대폭 개정에 대한 합의를 이끈다는 양당간의 협의가 있었으나, 선거구제 문제의 타협여부에 따라, 일정수준에서의 합의가 충분히 가능한 나머지 쟁점들의 처리 수준을 결정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총선 전까지 일정수준에서의 정치개혁은 양당간의 합의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 하 민중운동,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정치권 전반이 정치개혁 논의에 당력을 쏟아 붓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17일에는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10 여 개의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정치개혁연대)가 출범하였고, 29일에는 여기에 한나라당, 민주당 개혁파 의원 70여명이 가세한 가운데 가칭 '정치개혁추진범국민협의회의' 구성이 합의되었다. 참여연대를 대표로 각종 NGO 수장 급들이 이미 노무현 당선 직후 민주당과 인수위로 흡수되는 것을 보았던 상황에서 이는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이들의 활동 여하에 따라 정당-시민단체로 구성된 안정적인 정치개혁 기구가 국회 내에 신설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긴 시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배계급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안정적 지지기반과 통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그야말로 '개혁'적인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사가속화 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정치개혁 논의에 편승하여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주류화라는 재단 앞에 운동의 성과를 고스란히 바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해서이다. 87년, 91년 대중투쟁의 성과들이 지배계급의 정치적 정당성을 수립하는 것으로 수렴되는 과정에는 항상적으로 정치개혁이 동반되었으며, 이는 언제나 대중투쟁을 억압하는 것으로 결과했다. 더욱이 지금의 상황이 명확히 시민운동세력의 지배체제로의 흡수가 거의 완료되는 시점에 와 있다는 점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조건은 지속적으로 민중운동진영의 정치적, 계급적 이탈을 불러올 것이며, 지난 대선 당시 일부 노동조합 관료들의 투항선언으로 이미 충분히 가능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또한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진보정당과 노동조합간의 실용적 역할분담, 결과적으로는 노동운동의 실리주의를 고착화시키는 형태의 운동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정당명부비례제표제의 도입으로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목전에 와 있는 상황에서 지배계급의 정치개혁 논의에 가담하여 현실 가능한 운동의 활로를 모색해 보겠다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구조화시키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더욱이 노무현-민주당의 구상이 386, 20대들에 대한 제도정치로의 수렴을 목적으로 하는 현재 상황에서 지배정치의 정치개혁 논의에 가세하겠다는 것은 이들의 불안정한 삶과 그로부터 나타나는 지배정치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밑불로 던져 넣겠다는 것이다. 지난 김대중 정권 5년 간 민중운동 진영이 벌여온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민중운동의 몰락의 끝을 기어이 보고야 말 것인가.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판단의 기로에 서 있다.
민중운동재편의 출발점을 인식하자. 2002년 11월을 기억할 것이다. 10만명의 농민들이 여의도에 모였고, 노동자와 빈민, 그리고 공무원노동자들이 며칠을 사이에 두고 대규모의 투쟁을 벌여내었다.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정책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강하게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강력한 대중투쟁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한번의 공세적인 대중투쟁을 벌여낸 후, 각 부문대중조직들은 12월 대선이라는 특수한 정치지형속에서 각 대선후보들에 대한 압박 및 지지를 통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으로 투쟁의 흐름을 대체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02년 하반기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투쟁을 중심으로 형성해왔던 전국적인 민중연대투쟁전선이 소실되고 말았다. 지난 5년동안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의해 생존의 벼랑끝에 내몰린 민중의 불만은 폭발적인 분노로 표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분노의 표출은 민중운동진영의 의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신자유주의 공동투쟁전선 형성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생산과 고용에 대한 파괴적 효과를 민중들은 삶의 극단적 불안감으로 인내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생존의 위협은 실리주의적인 대중운동은 고착화하는 조건을 만들었다. 한편 각급 대중조직들은 분출되는 대중들의 불만을 생존에 대한 요구투쟁 이상으로 조직할 수 없었고, '대중투쟁의 정치적 급진화'라는 과제는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만으로 한계지워졌다. 01년 '민족자주·민주주의·민중생존권 쟁취 전국민중연대 준비위원회(이하 전국민중연대(준))은 상설적 공동투쟁체로서 이러한 고립분산적 대중투쟁을 단일한 전선으로 모아내고, 단결과 연대에 기반한 공동투쟁을 통해 각 부문대중운동의 정치성을 복원한 것을 자기과제로 안고 탄생하였다. 2002년 하반기는 전국민중연대(준)이 주체적인 계획들을 수립하고 대중조직으로부터의 결의를 추동하여 전국적인 민중연대 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던 시기였다. 02년 8월 발족한 "전국민중연대(준)산하 WTO반대, 식량주권사구,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노농특위)"는 30만 농민대회를 준비하는 전농의 요청과 민주노총의 결의로 구성될 수 있었다. 노-농특위는 노동자-농민의 연대의 정신을 바탕으로 지역(기초단위까지)의 상설적인 민중연대 연대체의 건설을 목표로하는 간담회 조직화와 매달 전국동시다발 공동선전전을 개최, 그리고 기초단위에서의 민중대회를 동시다발적으로 개최하고, 11월 부문대중들의 총력투쟁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와 더불어 시군단위의 민중연대 조직단위를 위한 소식지 배포, 일상적인 지역민중연대와의 소통을 통해 각 지역에서의 공동실천의 계획을 만들어왔으며, 이는 전국민중연대(준)차원에서 각 지역 기층대중운동 지형에 가장 공세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계기였다. 이러한 전국민중연대(준)의 계획과 의식적인 실천은 실제로 각 지역에서의 노동자-농민의 연대의 틀거리와 공동실천의 기풍을 만들어왔으며, 이러한 흐름은 11월 30만 농민투쟁에 대한 전국적, 전사회적인 여론을 형성하여 11월 부문투쟁에 대한지지·엄호를 할 수 있는 실제적인 물리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제 전국민중연대(준)은 2년여동안의 준비위원회 활동을 거쳐 2003년 상반기 본조직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가장 공세적인 활동을 벌여내었던 02년 하반기 전국민중연대 준비위원회에 대한 평가를 보다 면밀히 수행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이를 통해 전국민중연대(준)이 처해있는 현재적 조건과 한계를 보다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본조직 건설에 적극적으로 복무하고자 한다. 전국적·지역적 민중연대전선을 확장해야 한다. 전국민중연대(준)의 노농투쟁은 전국 각지역에서 지역민중연대(상설적인 연대투쟁체)건설의 흐름으로 그 구체적인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전국적으로 30여 곳의 시·군·구 기초단위지역에서 지역민중연대가 건설되었거나 발족을 앞두고 있으며, 그 이외의 수많은 지역에서 투쟁체의 형태는 아니지만 지역운동에서 최초로 공동의 노-농연대의 실천을 벌여내는 성과를 얻었다. 민중연대 전선의 전국적, 지역적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흐름은 보다 적극적으로 옹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지역상설공투체가 그 자체로 민중연대 전선의 확장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은 아직 이르다. 오히려 우리는 현재의 지형과 연대투쟁흐름에 대한 면밀한 평가를 통해, 지역연대운동이 나아가야 할 바를 명확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현재 지역연대체 건설의 흐름은 민주노총 지역본부와 전농도연맹이라는 전국적인 대중조직의 중앙적 강제력에 의해, 진보정당의 지구당과 지역청년회조직들과 사회단체들이 함께 논의테이블을 구성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지역민중연대는 부문대중의 고립분산적인 생존권투쟁을 정치적으로 급진화시킬 수 있는 유의미한 틀거리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각급 대중조직들의 연대투쟁에 대한 실용적인 접근과 진보정당 및 각 정치세력들이 "지역내 입지굳히기"의 수단으로 지역민중연대를 활용하는 경향이 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는 지속적으로 침체되고 있는 대중운동을 복구하고 대중조직을 정치적으로 재조직하는 구체적인 경로가 밝혀지지 못하면서, 대중운동의 자기방어적인 실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사회운동의 정치적 지반이 부재한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운동을 어떻게 공동투쟁의 전선으로 조직할 것인가?"의 과제는 대중/정치조직 상층간 연대만으로 앙상하게 대체되고 있다. 물론 상층간 연대의 강화 역시 중요할 것이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화된 상층연대가 기층의 투쟁현장을 추동해내지 못하는 한계 역시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또한 어떤 지역의 경우는 지역민중연대의 활동이 각급 대중운동을 강화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민중연대 그 자체를 물신화시키고 대중조직의 의존도를 높이는 방식이 되어버렸다. 또한 지역민중연대가 지역 내 대중투쟁의 단위로 위치지워지지 못하고 특정 정파운동의 단위로 표상되면서, 연대의 틀거리가 협소화되고 각 대중/정치조직들 간에 불신이 증폭되고 있다. 지역민중연대에 대한 이러한 평가와 한계들은 현존하는 대중운동의 정치적 재조직화의 과정에 삭제된 상층차원의 연대연합전술의 무의미함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건강한 연대투쟁의 기풍은 반드시 재창출되어야 한다. 각 지역민중연대에서는 대중운동을 정치적으로 급진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대중운동 사안을 발굴하고 주목해야하며, 각 대중조직들은 자신의 정치적 투쟁과제를 명확히 제출한다. 그리고 이를 지역사회운동으로 쟁점화시킬 수 있는 연대사업을 기획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민중연대는 건강한 연대투쟁이 가능한 공간, 새로운 대중운동이 창출되는 공간이며, 각급 대중/정치조직들의 대중운동에 대한 정치적 책임감으로 유지되는 공간이어야 할 것이다. 연대운동에 대한 정치적 책임감을 높이는 방식은 의식적인 노력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는 앞으로 건설될 본조직의 의결체계에도 충분히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각 지역민중연대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전선을 지역적으로 명확히 형성할 수 있는 대중투쟁단위로 표상되고 기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전국민중연대(준)의 한계는 무엇인가? -민중10대요구 쟁취투쟁에 대한 평가- 작년 대선국면 속에서 전국민중연대(준)은 '민중10대요구 쟁취투쟁'을 기획하게 된다. 그러나 전국민중연대(준)은 이를 통하여 각부문단위의 투쟁의 흐름을 단일하게 모아내어 전국적인 민중연대 전선을 형성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이 기획은 요구안 형식의 10대요구를 취합하여 각 당의 대선후보들에게 답변을 요구하는 것 이상의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는가? 11월 부문대중들의 폭발적인 투쟁 이후 이것의 정치적 성과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는 당시 민중운동진영의 최대의 쟁점이었다. 상설적 공투체로서, 그리고 02년 하반기 핵심적인 투쟁을 주도하고 있었던 전국민중연대(준)은 이에 대한 답안을 억지로라도 만들어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전국민중연대(준)이 대선방침을 수립할 수 없는 조건과 선거시기 스스로 민중운동진영의 고착화된 지형을 변화시킬 수 없는 한계속에 위치하였음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대선이라는 특수한 정치공간에서 당-노조(대중조직)의 기계적인 역할분담 속에서 전선(체)운동이 상대화되었다는 점. 즉 민중운동 전체의 결의에 근거한 민중후보를 중심으로 대중투쟁의 공간을 확장해낼 수 있는 운동진영의 대선전술이 부재하게 되면서, 상설적 공투체로서의 전국민중연대(준)조차 그러한 공간으로 기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전국민중연대(준)에 대한 운동진영내의 인식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40여개의 참가단체들로부터 대선방침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국민중연대(준)의 이러한 객관적인 한계조건을 전제한다고 해도 우리는 '민중10대요구 쟁취투쟁'의 기획과정에서 형성된 '민중연대전선형성'에 대한 '왜곡된 원칙'에 대해 평가해야 할 것이다. 11월 초, 전국민중연대(준) 사무처가 '민중대표단을 통한 노-정교섭'의 형태로 제출한 당시의 문제의식은 각각의 부문투쟁이 고립분산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요구-공동투쟁-공동교섭-공동타결'의 원칙으로 강력한 물리력을 형성하여 정부/대선후보를 압박한다는 것이었다. 전국민중연대(준)은 이를 위해 공동요구안을 작성하고 대표 협상단을 꾸려 정부/대선후보와 직접 교섭할 것을 제안하게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투쟁수위의 과도함에 대한 문제제기에 부딪치고 또한 당시 각 투쟁단위들의 하반기 투쟁의 목표가 불균등하였다는 점, 또한 대선시기, 정치세력화를 위한 각자의 모색이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그 현실적 불가능함이 제기되었다. 결국 투쟁의 명칭과 수위를 조절하는 정도의 실용적인 방식으로 정리되었고, 결국 민중10대요구는 각각 투쟁단위의 요구를 취합하는 실무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각 대중운동의 연대성을 확장하는 과정이란 투쟁사안을 나열하거나 시기집중투쟁의 방식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전국민중연대(준)의 결정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공동투쟁-공동교섭-공동타결'이란 그자체로 단결과 연대의 사상의 최대치의 표현이 결코 아니다. 이는 다만 해당 정세속에서 판단되는 강한 물리력을 동원하는 구체적 전술일 뿐이다. 특히 사그라들어가는 대중투쟁을 상층간의 연대와 상층 정치 협상력으로부터, 그리고 기층으로부터 공동투쟁-공동교섭-공동타결이라는 현실불가능한 원칙만으로 투쟁을 다시 조직할 수 있다는 전국민중연대(준)의 발상은 공동투쟁자체를 물신화시키고 결국 대중운동간의 연대와 투쟁의 정치적 상승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말 것이다. 현재 정작 심각한 문제는 각 대중운동간의 단결과 연대가 지난 5년동안 지속적으로 해체되어왔다는 것이며, 대중조직 역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모색의 시간과 대중운동의 재조직화의 계획이 필요함을 터득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단지 단결과 연대의 정신을 남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현시기 연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생략된 전국민중연대(준)의 상층 중심의 단결과 연대의 호소는 앙상한 대의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전국민중연대(준)가 처한 악조건은 기층 대중운동으로 하여금 '민중연대'와 '공동투쟁'에 대한 물신화된 인식을 낳고 있다. 이는 주요 대중조직들이 전국민중연대를 사고하고 결합하는 방식 및 민중운동 진영에서의 민중연대(준)의 위치속에서 확인된다.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한 운동들의 경우 전국민중연대(준)을 외각(시민운동세력)의 지지·지원부대의 하나로 사고하고 있고, 현재 민중연대(준)의 주요활동은 대표단의 기자회견과 시국선언 등을 개최하여 그 사안을 해결할 수 있는 영향력있는 시민운동세력을 조직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렇듯 현시기 전선형성적 대중운동을 조직하여 민중운동진영의 명실상부한 상설적 공동투쟁체로서 기능해야 할 전국민중연대(준)은 그 스스로의 위상과 역할을 축소시키고 있다. 단지 대중조직의 실용적인 이해와 요구(당과 노조운동의 공백을 절충하는 형태)를 받아안는 것으로 자신의 운동진영 내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으며, 이는 결국 공동투쟁 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유보시키며, 현시기 자기중심적이고 실리적인 대중운동의 악순환을 지속시키는 악요인이 될 것이다. 2003년, 전국민중연대 본조직 건설의 의미. 지금, 남한 민중운동은 또다시 중대한 갈림길에 서있다. 곧 등장할 노무현 정권 5년의 방향은 김대중 정권이 행한 생산과 고용의 극단적인 파괴효과를 수습한다는 차원에서 진행될 것이다. 이는 고용확대-빈곤감축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국민통합이데올로기를 형성할 것이다. 결국 민중운동은 노무현 정책개혁에 대해 김대중 정권 초기보다 더욱 엄밀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무현 정권의 정책개혁이 실제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과정에서 대중들의 불만의 존재를 보다 예리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남한사회 어떤 운동진영도 민중의 불만을 변혁운동으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대중의 불만을 어떻게 전국적 차원에서 하나의 응집력 있는 질서로 조직해 낼 것인가?" 인 것이다. 물론 전국적 차원의 응집력을 형성시키는 것이 어떤 단일한 조직 건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시기 고립분산적인 대중투쟁을 조정하고, 그것을 보편적인 계급적 요구로 상승시켜내는 일련의 조직적 실천이 현재의 민중운동 질서재편의 핵심적인 과제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03년 상반기 전국민중연대(준)의 본조직의 출범이 노무현 정권 5년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위한 조직적 테세임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앞서 평가한 것처럼 현재, 지난 2년여동안의 전국민중연대 준비위원회의 활동의 오류와 한계는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운동진영내의 불신과 비관은 실제로 무관심과 반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의 지점을 현재의 민중운동 진영의 객관적인 조건속에서 분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 역시 면밀히 구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인식의 지점이 존재한다. 첫째, 전국민중연대(준)의 본조직 건설은 그 자체로 대중조직의 심도 깊은 결의를 끌어내는 과정임과 동시에 운동진영 내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통합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전국민중연대(준)가 상설공동투쟁체로서 자기 위상을 세워나가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즉 기층 대중운동과 지역민중연대와 긴밀하게 결합하기 위한 과제, 민중생존권 투쟁을 단일한 정치전선으로 형성하기 위한 민중연대 조직전망을 세우는 것을 합의하는 과정이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2003년 상반기, 전국민중연대(준)의 본조직건설관련해 상설적 공투체의 이후 전망을 둘러싼 쟁점이 부각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은 먼저,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에 대해서 진보정당과 전선체의 상호보족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그 속에 전선체의 맹아로서 전국민중연대(준)을 사고하는 편향. 이는 민중연대의 역할을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과의 전략적 구도 속에서 파악하고, 선거시기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선거지원을 하는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말것이며, 정치적 과제의 기계적인 역할 분담이 되고 말 우려가 있다. 이러한 관점은 보다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노무현 정권 5년하에서 이미 충분히 예상되고 있는 바 사회운동에 대한 지원(특히 사회적 위상 제고)을 민중에 대한 지원으로 '의도적으로' 혼동은 민중운동과 신자유주의적 시민운동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 것이다. '연대의 확장'이라는 목표가 자칫 신자유주의적 시민운동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의 형태로 드러나는 경향에 대해, 또한 이러한 과정속에 잠복되어 있는 정권에 대한 입장차에 대해 전국민중연대(준)은 단호한 입장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전제를 확고히 인식하며, 우리는 전국민중연대 본조직으로 나아가기위한 실천적, 조직적 준비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주요대중조직의 상층결합을 넘어 지역과 연맹의 결합을 실질적으로 확대하고 지역 및 부문조직의 결합을 강화할 수 있는 의결체계의 확립이 핵심적으로 요구된다.
2003년 복간호 첫 번째 질문. DJ는 몰락했지만 노무현은 어떻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가? 노무현은 대중들의 희망을 특수한 방식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정권은 IMF 경제개혁의 불가피성을 거듭 역설했지만 그가 약속한 환란 극복은 찾아오지 않았다. 수치상으로는 IMF 이전 상황으로 복귀했지만 민중들이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DJ정권의 부패비리는 민중들의 철저한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노무현-민주당은 '축제의 정치'를 제공하거나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 지역 발전이라는 실리적 기대를 자극함으로써 대중들의 희망을 조직해냈다. 두 번째 질문. DJ의 경제개혁을 통해 도대체 무엇이 바뀐 것인가? 남한은 이제 '자본유치형' 국가로 변모했고, 이제는 금융화된 초민족적 법인기업(TNC)와 금융자본의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남은 일은 투자협정을 체결하고 동아시아의 무역자유화를 주도하고, 경제자유구역을 설치하는 식으로 오직 DJ가 닦아놓은 길로 달려나가는 것뿐이다. 세 번째 질문. 노무현 정책개혁의 핵심은 무엇인가? 동북아 중심지 구상은 중국을 고려한 남한의 전략적 선택이다. 중국경제의 성장을 '기회요인'으로 활용하기 위한 남한경제의 기반 구축이다. 조세감면/토지임대와 같은 방식으로 남한은 이제 더 이상 중국과 경쟁할 수 없다. 기술 및 산업의 특화, 교육 경쟁력 강화, 여성인력 활용(인구감소·노령화의 대안), 사회안전망 구축이 정부 재정지출의 중심점이다. 그러나 '특화'는 곧 배제를 의미한다. 경쟁을 강화하고 살아남지 못한 자는 배제된다. 배제된 자의 불만 표출을 막기 위해 하향평준화된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사회안전망이다. 네 번째 질문. 노무현 정권이 실패한다면 그 대안은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실로 답이 없다. 지배세력으로서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외채위기가 재발한 남미의 경우는 국가의 붕괴, 사회의 해체로 이어졌다. 남한에서 경제위기가 재발한다면 이미 경제개방화가 대체로 완료된 상태이므로 그 결말을 예상할 수 없다. TNC와 금융자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안정적인 통치체제의 구축이 중요한데, 사회운동을 정책-로비형 NGO나 서비스형 NGO(사회복지의 중간전달자)으로 재편하여 정치체계 내로 포섭하는게 현 정권의 목표다. 2000년 총선을 어떻게 회고할 수 있나? 회고해 보면 DJ의 당선과 IMF 경제개혁이 시작된 1997말부터 약 2년 반 후 치뤄진 2000년 4·13 총선은 매우 미묘한 시점에 벌어진 판이었다. 1999년 12월 김대중정권은 IMF 조기졸업을 선언했지만, 이후 대우재벌의 소멸로 이어지는 대우사태-증시폭락이 겹쳤다(특히 4월에는 연일 증시폭락이었다). 4월 10일 박지원 문광부장관과 박재규 통일부장관은 남북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전격 발표했다. '총선시민연대'는 낙천낙선운동이 벌여 부정부패, 선거법위반, 반인권을 기준으로 낡은 정치인을 청산하자는 전국적 캠페인을 벌였고, 김대중정권은 병역·재산(납세)·전과기록 등 후보자 신상공개를 단행했다. 민주당은 DJ의 '지역구도 타파' 선언에서처럼 전국정당화를 내걸었고(특히 영남권 당선자 배출), '젊은 피'를 수도권 요충지에 출마시켰다. 이처럼 2000년 총선은 'IMF 경제개혁'의 현실을 놓고 정권에 대한 신임 여부를 묻는 판이자,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대사건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햇볕정책에 대한 판단을 묻는 판이자, 인물교체와 세대교체를 통한 낡은 정치관행의 청산이라는 정치적 이슈를 시험하는 판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모호했다. 먼저 투표율은 57%로 사상 최저수치를 기록했다(14대 71.9, 15대 63.9). 이는 유권자 2명 중 1명은 투표를 포기하거나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총선시민연대의 투표참여와 '바꿔' 캠페인이 언론에 집중 보도되었지만 대도시 지역의 투표율이 하락했고, 20-30대가 투표에 대거 불참한 것으로 드러났다. 투표 불참 또는 포기·거부가 (물론 야당에 대한 불신을 포함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 야당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는 김대중정권이나 민주당에 대한 불만, 또는 당시 조성된 선거이슈에 대한 선택의 포기·거부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에 한해서는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수도권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30여개 지역에서 근소한 시소게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한나라당은 9석이 증가한 133석, 민주당은 17석이 증가한 115석을 얻었다. 양자 모두 과반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정권출범 이후 이렇다할 활동이 아무 것도 없지만) 국회 제1당의 위치를 수호했다는 점에서 자축했다. 반면 민주당은 지역구 의석 차이를 16석으로 좁혔고 영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비등한 성과를 올렸다고 자축했다. 수도권/호남과 영남에서는 대립이 뚜렷했지만 충청, 강원, 제주 등 다른 지역에서는 자민련의 몰락만 분명했다. 한편 전체 당선자 중 초선의 비율은 41%였으며, 초·재선을 합치면 70.6%였다. '386' 후보는 대부분 지역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절반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지방에 비해 수도권에서 비교적 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2000년 총선에서 나타난 남한사회의 갈등선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게다가 최악의 투표율이 문제였다. 이는 남한 사회가 전혀 안정적이지 않으며, 총선 이후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기 어렵다는 지표였다(특히 20-30대 투표율 저조). 이러한 복합적인 갈등은 이번 대선 결과로 드러나게 되었다. 김대중정권의 경제개혁과 새로운 수탈체제의 성립 1997-8년 남한의 외채전략은 IMF 구제금융을 통해 일시적인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고, 외국 채권은행들과 채무이행연기 협상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IMF가 부과한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으로서의 경제개혁이었다. 경제개혁의 목표는 과거 남한의 발전노선 즉 중화학 공업화, 수출산업 발전과 같이 '민족적 발전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고, 1980년대 이후 남미의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동일하게 '자본유치형 국가'로 탈바꿈한다는 것이었다("기업하기 좋은 나라", "Buy Korea"). 따라서 남한의 경제개혁에서 핵심은 일차적으로는 ① 기업 퇴출, 인수합병, 해외매각, 워크아웃(재무구조개선)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기업·금융 부문의 부실을 처리하며, 재벌의 계열분리(특히 상호지급보증 해소)를 통해 남한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5대 재벌의 부실확대를 막고, ② 국채를 발행해서 공적자금을 조성하고, 위기에 빠진 재벌·금융사에게 분배함으로써 '국가의 미래 재정'을 담보로 남한 경제위기의 폭발을 지연시키고, ③ 기업의 재무(금융)부문을 정리하고 직접금융중심으로 전환하여(글로벌 스탠다드), 결국 ④ 자본시장을 개방하여 이미 해외로 도피한 초민족자본을 다시 유인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⑤ 주식시장 부양책을 강구하여(저금리, 연기금 투입) 남한을 '신흥시장'(주식·채권시장)으로 육성하고, ⑥ 지역차원의 무역자유화와 금융·서비스분야 개방을 선도하고 투자협정과 같은 유인책을 통해 초민적자본의 직접투자(FDI)를 끌어들여 경제성장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⑦ 김대중정권은 IMF협약에는 빠져있던 정리해고제 도입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노동신축화'라는 유인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한 재벌은 계열분리를 이루고 초민족적 법인기업(TNC)으로 변모하고 있다. 또한 워크아웃 제도가 일단락되면서 2001년 김대중정부가 내놓은 '상시개혁시스템'의 골자는 기업구조조정전문 투자회사를 설립하고, M&A시장을 활성화하며, 정크본드(투기등급채권) 시장을 육성한다는 것인데, 이는 기업퇴출이 '시장기능에 따라 강제적으로' 작동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IMF와 세계은행 주도로 남한에서 이루어진 경제개혁은 남한 경제의 일대전환과 새로운 수탈체제의 형성을 의미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일단 과잉자본의 처리라는 점에서 기존 생산설비와 고용의 지속적인 파괴를 의미했다(기업퇴출, 인수합병, 워크아웃,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특히 이 과정에서 자본시장 개방, 초민족자본의 진입/이탈에 대한 탈규제, 초민족자본의 금융기법 고도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국부유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경로가 형성되었다(M&A, 이자소득, 환차익 등등). 또한 구조조정과 외국인투자(포트폴리오, 직접투자)는 기존 산업의 파괴와 산업특화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지역경제의 붕괴 또는 불균등화를 촉진하였다(특히 남한은 '농업포기'가 특징적이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다면적인 갈등과 불안을 심화시켰다 - 역설적이게도 건국이래 처음으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대규모로 해외이민을 떠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대중정권에 대한 민심의 이반은 기본적으로는 'IMF 위기극복'의 불평등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노동과 불안정화, 수도권/지역의 격차 확대, 여성 빈곤의 심화는 그 주요한 양상이었다. 이는 2000년 총선 결과로 드러났다. 지역주의가 여전히 존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는 지역경제의 위기가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젊은 층의 투표율 저조는 IMF위기를 전후한 시점에서의 취업대란, 반(半)실업 등 그 세대의 삶의 불안을 반영한다. 노무현의 등장과 '반창연대' 집권 말기 DJ의 몰락은 매우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2001년 11월 DJ가 총재직을 사퇴하고 2002년 6월 TV생중계로 두아들의 구속에 대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할 때까지 그는 사태를 거의 제어할 수 없었다. 한나라당은 6·13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는 '연전연승'의 기세를 타고 쉽게 정권탈환을 손에 쥘 수 있을 듯 보였다. 노무현조차 국민경선을 통해 민주당 대선후보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DJ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고, 여론의 동향을 추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경선 승리 직후 노무현의 대선 구상 역시 불투명했다. 예컨대 "원칙과 상식", "국민통합" 등 추상적 구호를 내걸거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자"와 같이 정서에 호소할 뿐이었다. 6·13 지자체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어 전국 16개 광역단체장 자리 가운데 11곳 장악할 때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민주당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무현의 당선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와 개혁국민정당 발족을 통해서만 오직 가능했다. 노무현-정몽준의 단일화의 진실은 '반창 연대'의 실현 즉 '이회창에게 이길 수 있는 (젊은) 후보의 선택'이라는 게임에 있었다. 그러므로 노무현의 대선승리는 기본적으로 '네가티브' 전략에 기반한 것이며, 게임의 고유한 도박성과 시선집중이 주는 이득을 누린 결과다. 단일화는 '네가티브'와 '도박'이라는 두 다리 위에서 세대교체와 인적 청산, '낡은 정치 청산'을 대중적으로 이슈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드디어 DJ를 정치의 풍경에서 제거하고 '죽은 인물'로 만들었고, 그들 대체할 인물이라는 대결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반면 개혁국민정당은 핵심적 지지층이 될 386세대의 정치적 집결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386세대에게 각인된 민주화운동에 있어서의 민정당-민자당-한나라당의 부정적 역할을 상기시켰고, 또한 기존의 NGO의 '정치중립' 방식을 뛰어 넘는 정치 참여를 고무했다. 결국 노무현의 등장은 이회창-한나라당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회창-한나라당은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유포한 수구와 기득권(+엘리트주의)의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했고, 북한과의 냉전적 대결양상을 '수줍게' 반복했다. 이에 비해 노무현은 세대교체와 인적청산을 통한 기득권과 부패를 해체하며 미국과의 평등한 동반자 관계를 만들며 중도적 개혁을 발전시킬 인물이라는 대립적 이미지를 창출했다(특히 TV토론에서 노무현은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양자를 보수주의와 이상주의로 밀어내며 중도적-합리적 개혁이라는 이미지를 쌓고자 했다). 노무현 지지층의 이질성과 갈등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단순히 정치적의 풍경에서 DJ를 제거하고 이회창 대 노무현이라는 일대일 대립구도를 형성한 게 전부가 아니다. 노무현의 선거전략은 복합적이었고, 그에게 표를 던졌던 지지층도 이질적이었다. 노무현의 주요한 지지세력을 거칠게나마 도식화해보자. 첫째, 노무현에 대한 '실리주의적' 지지가 있었다. 남한의 증시부양은 'IT(정보산업)혁명', '벤처창업'이라는 바람을 타고 올라섰고, 벤처기업은 기존 경영조직·관행의 일반적 대안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지식산업', '고부가가치산업' 육성이라는 김대중정권의 전략에 따라 문화산업에 대한 지원확대도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벤처-금융업의 확대는 이른바 '386세대'를 일종의 '비즈니스네트워크'로 전환시켰다. 게다가 386세대는 남한에서의 물질적 성장을 경험하였고(삼저호황) 미국식 생활양식-소비문화의 확대를 '진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들의 결집은 '자기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DJ의 정책개혁이 노무현을 통해 보완되는 것을 지지했다. 한편 이 세대의 수많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자신의 경제적 이해가 기업경영진과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기업 내부의 권위주의적 '지배구조'에 대해 갈등에 처해 있으며, 이는 기득권이나 '고루함'(?)에 대해 강한 적대심을 유발한다. 따라서 경제적 자기 이해, 문화적 동질감에서 다른 집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형성했다. 물론 DJ정권의 경제개혁과 노무현을 지지했던 집단 중에는 '개혁적 지식인'도 포함되어야 한다(이들은 노무현이 당선된다면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여기에 기술관료적인 NGO들도 포함될 수 있다. 한편 노동운동 내에서 노무현에 대한 공공연한 혹은 잠재된 현실주의적 지지도 존재한다. 노동자 대중의 일부는 대체로 IMF 이전 상황으로 복귀했고, 이는 현상유지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낳았다. 또한 DJ 당시에는 죽어 있었던 공식적인 대화채널을 정상화하고 사회적 위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존재한다(이는 민주당 및 민주노동당 양자 모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를 강화할 수 있다). 이처럼 386세대-화이트칼라-개혁적 지식인-노동운동 내 일부 상층은 DJ와 마찬가지로 노무현 역시 핵심적 지지층으로 육성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둘째, 청년층의 도시(룸펜)프롤레타리아(불안정 노동력층)의 일시적 지지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전혀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20대 투표율은 47.8%였고, 지난 대선에 비해 약 15% 하락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의 투표율 하락에 중요한 기여를 한 셈이다. 20대 청년노동자층은 IMF위기 당시 취업대란을 겪었고 신규 '노동시장' 진입에 있어서 크나큰 불안정성을 경험했다. 또한 오늘날 교육정책의 목표는 중심적 노동력과 주변적 노동력를 분화시키는 것이므로, 20대의 대부분은 '다기능화'라는 명목으로 다수 주변적 기능을 습득했다(저임금과 고용의 불안정). 소비확대라는 생활양식을 강요받았으나('10대 시장', '20대 시장') 미래는 극히 불투명했다. 이들은 삶의 조건이 불안정한만큼 사회적·정치적 의식도 불안정하다. 이번 대선에서 강력한 '반창' 정서가 작동했으나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종종 모순적이다(즉 진보/보수의 틀로 쉽게 포섭되지 않는다). 이들이 참여한 월드컵 거리응원이나 촛불시위 참여는 기성세대에게 위력적이었고 선거의 흐름을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무규정적 행동에는 쉽게 참여하지만 제도적 행동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노무현의 인기영합주의적인 제스쳐와 함께 이회창에 대한 차악으로서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지역경제의 위기 속에서 '지역감정'에 근거한 잠정적 지지가 있었다. 오늘날 지역감정의 물질적 토대는 구조조정 이후 심화된 지역경제의 위기이며 이것이 지역적 소외감으로 등장했다. 지역감정이 실리추구적인 감성에 기반한 것이라면 지역감정을 동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노무현은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는 지역발전이라는 실리적 희망을 조작하여 지역감정을 동원, 장악한 것이다. 노무현은 호남 지역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DJ의 계승자로 제시했고,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스스로가 3김 이후 부산·경남을 대변할 정치지도자로 자임했고, 충청권에 대해서는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희망을 제시했다. 따라서 노무현 당선을 안정적인 지지연합의 구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질적 집단의 이데올로기는 서로 갈등적이거나 대립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일시적 제휴를 표현하는 방식은 '새롭다', '활기차다' 등등의 정서적 호소를 넘어서지 못한다. 오히려 정책개혁의 전개과정에 따라 (각각 다른 이유로) 대중적 이반을 낳을 요인을 깔고 있다. 노무현의 정책개혁 전망 이제 노무현은 인물대결 구도의 선거전략을 마무리하고 남한에서의 정책개혁의 정당성을 '사후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태세로 돌입했다. 분명히 현재는 DJ처럼 대통령직에 취임하기 전부터 '비상경제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초헌법적인 권한을 휘둘러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은 아니다. 노무현은 IMF 경제개혁의 기초적 목표 즉 금융위기 직후 위기관리책를 넘어서, '경제성장-고용확대-빈곤감축'이라는 포괄적 정책목표를 내걸었다. 그리고 개혁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인수위를 구성하고 여러 정책검토사항에 대한 여론의 반응을 탐색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김대중정권의 정책기조의 유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남한의 경제구조는 이미 완전히 뒤바뀌었고, 이에 조응하여 재계-관료-학계의 태도도 수렴되었다 - 사실 김대중 집권 당시 한나라당의 기본 노선도 DJ 개혁에 대한 '비판적 지지'였다(예컨대 공적자금 오남용 비판, 구조조정에서 정부가 무리하게 기업을 압박하는 것에 대한 비판, 엄격한 상호주의에 입각한 남북관계 개선 등). 이제 남는 핵심 문제 중의 하나는 남한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동력을 창출하는 것이다. 김대중정권이 남한을 '자본유치형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했다면 노무현 정권은 실제로 대규모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는 게 관건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이 직면한 문제는 중국과 차별적인 외국인투자유치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현재 김대중정권에 이어 노무현이 들고 나온 '동북아 중심지'는 초민족기업의 세계경영전략에 대한 고려를 반영하는 남한의 적응책이다(즉 중국의 성장에 따른 중국진출을 위한 일종의 '관문'으로서 남한의 활용가치를 높이자는 구상). 따라서 노무현정권이 기본 과제는 4대부문 구조조정을 보완하여 (외국인투자자의 감시감독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기업지배구조 개혁의 진척, 초민족기업의 활동범위를 확대시켜주기 위한 무역자유화와 투자협정 체결, 남한의 금융시스템의 불안을 완화하기 위한 금융사들의 대형화-겸업화 유도, 협조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한 노사정합의기구 구성 등이 될 것이다. 또한 외국인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남한의 기술개발과 산업의 특화, 경제 인프라 구축, 평준화 해소와 교육개혁, 여성고급인력 활용 확대를 중심으로 정부 재정지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남한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정책개혁을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조건의 창출이다. 남한에서의 정책개혁은 DJ의 몰락을 통해 심대한 위기에 처했고, 차기 정권은 이러한 붕괴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게 사활적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개혁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재결집, 부패와 '도덕적 해이'가 재생산되는 정치-행정-사법구조의 혁신 또는 지배세력의 도덕성 재확립, (보수주의적 온정주의든, 또는 자유주의적 실용주의든 간에) 사회적 통합을 위한 정책적 보완 등이 관건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현실주의적 지지층을 핵심적인 지지기반으로 구축하여 개혁의 불가피성, 지속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고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개혁(특히 정당 개혁과 선거구제 개혁)을 통해 정치적 안정성을 획득하며 부패방지를 위한 정책적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또한 고용확대나 빈곤축소의 외형적 성과를 얻어내기 위한 미봉책을 모색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시도들은 YS-DJ와는 다른 세대의 주류 개혁세력 형성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민중운동의 미래 하지만 문제는 개혁의 진전 과정에서 실제적인 민중들의 삶의 양상이 될 것이다. 과연 남한의 경제구조 개혁과 양립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남한 사회는 경제개혁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자 대중의 삶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불안정노동이 일반화되었고 특히 20대 새로운 세대의 대부분 주변적 노동인력으로 육성되었다(이른바 '청년실업' 문제). 또한 생계의 부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와 가사·육아 활동이라는 이중적 부담이 증가하고 빈곤이 여성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낳았다. 경제성장의 지속이라는 미명 속에서 산업특화가 이루어지고 배제된 산업(특히 농업)은 정부의 간헐적인 보호책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또한 주요 사회보장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의료보험의 중요한 기능이 금융업 부문으로 이전되거나 연금이 증시에 투입되면서 사회보장체계에서 빈자와 부자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평준화의 해체는 공식화할 시기를 노릴 따름이며 교육'시장' 개방화와 함께 실질적인 해체가 예상되고 있다. 또한 극악한 방식의 노동착취에 대한 자본측의 현실적 요구를 받아들여 정부는 이주노동자 문제에서 일관된 해결방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노무현정권은 미래는 무엇보다도 그가 제시하는 각종 사회통합 정책의 실현가능성과 실제적 효과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노무현정권은 DJ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노무현정권이 검토하는 구상은 기본적으로 재정지출을 최소화하면서 갈등의 폭발을 지연하거나 조정하기 위한 형식적인 틀을 마련하는데 있다. 그리고 실제로 구사될 정책은 민중들의 삶의 조건을 '하향평준화'하고 상위 20%에게는 안전과 소비의 '자유'를 부여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 인수위는 정책 아이템으로 입안하기 위한 각종 국가기구를 구성하면서 운동세력과 지식인 그룹을 포섭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국가차별시정위원회, 노사정위원회, 각종 정책자문기구 구성이 그러하다. 또한 '서비스형' NGO를 육성하여(정부·지역사회·민간 네트워크화 구상) 기존의 사회운동 그룹들을 재편성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중운동이 신자유주의에 적합한 방식으로 적응하고(스스로를 정책-로비형 또는 서비스제공형 NGO로 정립), 위기관리체계에 체계적으로 포섭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남한의 진보정당 운동은 정치개혁 흐름과 함께 지배정당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사회운동의 성격을 강화하고 전선형성에 기여할 것인가라는 고비를 맞이할 것이다. 오늘날 남한 민중운동은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IMF 경제개혁은 일단락되었고 남한의 경제구조는 완전히 변화하였다. 앞으로 다가올 노무현정권 5년이 나갈 방향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노무현은 김대중정권 초기와 같은 생산과 고용의 파괴라는 극단적 양상을 회피하고 고용확대-빈곤감축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전 정권과 '다르다'는 혼동을 생산할 것이다. 특히 노무현정권은 사회운동에 대한 지원(특히 사회적 위상 제고)을 민중에 대한 지원으로 '의도적으로' 혼동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결국 민중운동은 노무현의 정책개혁과 방향성과 실제적 효과에 대해 김대중정권 초기보다 더욱 엄밀한 비판해야 할 시점에 섰다. 또한 정책개혁이 실제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양상을 정확히 포착할 때에만 대중적 운동화의 발판이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고착화된 운동은 노무현정권 하에서 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