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복간호 첫 번째 질문. DJ는 몰락했지만 노무현은 어떻게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가? 노무현은 대중들의 희망을 특수한 방식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정권은 IMF 경제개혁의 불가피성을 거듭 역설했지만 그가 약속한 환란 극복은 찾아오지 않았다. 수치상으로는 IMF 이전 상황으로 복귀했지만 민중들이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DJ정권의 부패비리는 민중들의 철저한 심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노무현-민주당은 '축제의 정치'를 제공하거나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 지역 발전이라는 실리적 기대를 자극함으로써 대중들의 희망을 조직해냈다. 두 번째 질문. DJ의 경제개혁을 통해 도대체 무엇이 바뀐 것인가? 남한은 이제 '자본유치형' 국가로 변모했고, 이제는 금융화된 초민족적 법인기업(TNC)와 금융자본의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 남은 일은 투자협정을 체결하고 동아시아의 무역자유화를 주도하고, 경제자유구역을 설치하는 식으로 오직 DJ가 닦아놓은 길로 달려나가는 것뿐이다. 세 번째 질문. 노무현 정책개혁의 핵심은 무엇인가? 동북아 중심지 구상은 중국을 고려한 남한의 전략적 선택이다. 중국경제의 성장을 '기회요인'으로 활용하기 위한 남한경제의 기반 구축이다. 조세감면/토지임대와 같은 방식으로 남한은 이제 더 이상 중국과 경쟁할 수 없다. 기술 및 산업의 특화, 교육 경쟁력 강화, 여성인력 활용(인구감소·노령화의 대안), 사회안전망 구축이 정부 재정지출의 중심점이다. 그러나 '특화'는 곧 배제를 의미한다. 경쟁을 강화하고 살아남지 못한 자는 배제된다. 배제된 자의 불만 표출을 막기 위해 하향평준화된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사회안전망이다. 네 번째 질문. 노무현 정권이 실패한다면 그 대안은 존재하는가? 이 문제에 관해서는 실로 답이 없다. 지배세력으로서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다. 외채위기가 재발한 남미의 경우는 국가의 붕괴, 사회의 해체로 이어졌다. 남한에서 경제위기가 재발한다면 이미 경제개방화가 대체로 완료된 상태이므로 그 결말을 예상할 수 없다. TNC와 금융자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안정적인 통치체제의 구축이 중요한데, 사회운동을 정책-로비형 NGO나 서비스형 NGO(사회복지의 중간전달자)으로 재편하여 정치체계 내로 포섭하는게 현 정권의 목표다. 2000년 총선을 어떻게 회고할 수 있나? 회고해 보면 DJ의 당선과 IMF 경제개혁이 시작된 1997말부터 약 2년 반 후 치뤄진 2000년 4·13 총선은 매우 미묘한 시점에 벌어진 판이었다. 1999년 12월 김대중정권은 IMF 조기졸업을 선언했지만, 이후 대우재벌의 소멸로 이어지는 대우사태-증시폭락이 겹쳤다(특히 4월에는 연일 증시폭락이었다). 4월 10일 박지원 문광부장관과 박재규 통일부장관은 남북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전격 발표했다. '총선시민연대'는 낙천낙선운동이 벌여 부정부패, 선거법위반, 반인권을 기준으로 낡은 정치인을 청산하자는 전국적 캠페인을 벌였고, 김대중정권은 병역·재산(납세)·전과기록 등 후보자 신상공개를 단행했다. 민주당은 DJ의 '지역구도 타파' 선언에서처럼 전국정당화를 내걸었고(특히 영남권 당선자 배출), '젊은 피'를 수도권 요충지에 출마시켰다. 이처럼 2000년 총선은 'IMF 경제개혁'의 현실을 놓고 정권에 대한 신임 여부를 묻는 판이자,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대사건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햇볕정책에 대한 판단을 묻는 판이자, 인물교체와 세대교체를 통한 낡은 정치관행의 청산이라는 정치적 이슈를 시험하는 판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모호했다. 먼저 투표율은 57%로 사상 최저수치를 기록했다(14대 71.9, 15대 63.9). 이는 유권자 2명 중 1명은 투표를 포기하거나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총선시민연대의 투표참여와 '바꿔' 캠페인이 언론에 집중 보도되었지만 대도시 지역의 투표율이 하락했고, 20-30대가 투표에 대거 불참한 것으로 드러났다. 투표 불참 또는 포기·거부가 (물론 야당에 대한 불신을 포함하지만) 적극적인 의미에서 야당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는 김대중정권이나 민주당에 대한 불만, 또는 당시 조성된 선거이슈에 대한 선택의 포기·거부로 이해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에 한해서는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수도권과 충청권을 중심으로 30여개 지역에서 근소한 시소게임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한나라당은 9석이 증가한 133석, 민주당은 17석이 증가한 115석을 얻었다. 양자 모두 과반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정권출범 이후 이렇다할 활동이 아무 것도 없지만) 국회 제1당의 위치를 수호했다는 점에서 자축했다. 반면 민주당은 지역구 의석 차이를 16석으로 좁혔고 영남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비등한 성과를 올렸다고 자축했다. 수도권/호남과 영남에서는 대립이 뚜렷했지만 충청, 강원, 제주 등 다른 지역에서는 자민련의 몰락만 분명했다. 한편 전체 당선자 중 초선의 비율은 41%였으며, 초·재선을 합치면 70.6%였다. '386' 후보는 대부분 지역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절반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지방에 비해 수도권에서 비교적 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2000년 총선에서 나타난 남한사회의 갈등선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게다가 최악의 투표율이 문제였다. 이는 남한 사회가 전혀 안정적이지 않으며, 총선 이후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기 어렵다는 지표였다(특히 20-30대 투표율 저조). 이러한 복합적인 갈등은 이번 대선 결과로 드러나게 되었다. 김대중정권의 경제개혁과 새로운 수탈체제의 성립 1997-8년 남한의 외채전략은 IMF 구제금융을 통해 일시적인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고, 외국 채권은행들과 채무이행연기 협상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IMF가 부과한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으로서의 경제개혁이었다. 경제개혁의 목표는 과거 남한의 발전노선 즉 중화학 공업화, 수출산업 발전과 같이 '민족적 발전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고, 1980년대 이후 남미의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동일하게 '자본유치형 국가'로 탈바꿈한다는 것이었다("기업하기 좋은 나라", "Buy Korea"). 따라서 남한의 경제개혁에서 핵심은 일차적으로는 ① 기업 퇴출, 인수합병, 해외매각, 워크아웃(재무구조개선) 등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기업·금융 부문의 부실을 처리하며, 재벌의 계열분리(특히 상호지급보증 해소)를 통해 남한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5대 재벌의 부실확대를 막고, ② 국채를 발행해서 공적자금을 조성하고, 위기에 빠진 재벌·금융사에게 분배함으로써 '국가의 미래 재정'을 담보로 남한 경제위기의 폭발을 지연시키고, ③ 기업의 재무(금융)부문을 정리하고 직접금융중심으로 전환하여(글로벌 스탠다드), 결국 ④ 자본시장을 개방하여 이미 해외로 도피한 초민족자본을 다시 유인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⑤ 주식시장 부양책을 강구하여(저금리, 연기금 투입) 남한을 '신흥시장'(주식·채권시장)으로 육성하고, ⑥ 지역차원의 무역자유화와 금융·서비스분야 개방을 선도하고 투자협정과 같은 유인책을 통해 초민적자본의 직접투자(FDI)를 끌어들여 경제성장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⑦ 김대중정권은 IMF협약에는 빠져있던 정리해고제 도입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여 '노동신축화'라는 유인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한 재벌은 계열분리를 이루고 초민족적 법인기업(TNC)으로 변모하고 있다. 또한 워크아웃 제도가 일단락되면서 2001년 김대중정부가 내놓은 '상시개혁시스템'의 골자는 기업구조조정전문 투자회사를 설립하고, M&A시장을 활성화하며, 정크본드(투기등급채권) 시장을 육성한다는 것인데, 이는 기업퇴출이 '시장기능에 따라 강제적으로' 작동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IMF와 세계은행 주도로 남한에서 이루어진 경제개혁은 남한 경제의 일대전환과 새로운 수탈체제의 형성을 의미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일단 과잉자본의 처리라는 점에서 기존 생산설비와 고용의 지속적인 파괴를 의미했다(기업퇴출, 인수합병, 워크아웃,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특히 이 과정에서 자본시장 개방, 초민족자본의 진입/이탈에 대한 탈규제, 초민족자본의 금융기법 고도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국부유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경로가 형성되었다(M&A, 이자소득, 환차익 등등). 또한 구조조정과 외국인투자(포트폴리오, 직접투자)는 기존 산업의 파괴와 산업특화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지역경제의 붕괴 또는 불균등화를 촉진하였다(특히 남한은 '농업포기'가 특징적이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는 다면적인 갈등과 불안을 심화시켰다 - 역설적이게도 건국이래 처음으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대규모로 해외이민을 떠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대중정권에 대한 민심의 이반은 기본적으로는 'IMF 위기극복'의 불평등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노동과 불안정화, 수도권/지역의 격차 확대, 여성 빈곤의 심화는 그 주요한 양상이었다. 이는 2000년 총선 결과로 드러났다. 지역주의가 여전히 존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는 지역경제의 위기가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 또한 젊은 층의 투표율 저조는 IMF위기를 전후한 시점에서의 취업대란, 반(半)실업 등 그 세대의 삶의 불안을 반영한다. 노무현의 등장과 '반창연대' 집권 말기 DJ의 몰락은 매우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2001년 11월 DJ가 총재직을 사퇴하고 2002년 6월 TV생중계로 두아들의 구속에 대한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할 때까지 그는 사태를 거의 제어할 수 없었다. 한나라당은 6·13 지방선거까지 이어지는 '연전연승'의 기세를 타고 쉽게 정권탈환을 손에 쥘 수 있을 듯 보였다. 노무현조차 국민경선을 통해 민주당 대선후보로 결정되는 과정에서 DJ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고, 여론의 동향을 추종하는 태도를 보였다. 경선 승리 직후 노무현의 대선 구상 역시 불투명했다. 예컨대 "원칙과 상식", "국민통합" 등 추상적 구호를 내걸거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자"와 같이 정서에 호소할 뿐이었다. 6·13 지자체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두어 전국 16개 광역단체장 자리 가운데 11곳 장악할 때 그는 속수무책이었다. 민주당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무현의 당선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와 개혁국민정당 발족을 통해서만 오직 가능했다. 노무현-정몽준의 단일화의 진실은 '반창 연대'의 실현 즉 '이회창에게 이길 수 있는 (젊은) 후보의 선택'이라는 게임에 있었다. 그러므로 노무현의 대선승리는 기본적으로 '네가티브' 전략에 기반한 것이며, 게임의 고유한 도박성과 시선집중이 주는 이득을 누린 결과다. 단일화는 '네가티브'와 '도박'이라는 두 다리 위에서 세대교체와 인적 청산, '낡은 정치 청산'을 대중적으로 이슈화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드디어 DJ를 정치의 풍경에서 제거하고 '죽은 인물'로 만들었고, 그들 대체할 인물이라는 대결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반면 개혁국민정당은 핵심적 지지층이 될 386세대의 정치적 집결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386세대에게 각인된 민주화운동에 있어서의 민정당-민자당-한나라당의 부정적 역할을 상기시켰고, 또한 기존의 NGO의 '정치중립' 방식을 뛰어 넘는 정치 참여를 고무했다. 결국 노무현의 등장은 이회창-한나라당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회창-한나라당은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유포한 수구와 기득권(+엘리트주의)의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했고, 북한과의 냉전적 대결양상을 '수줍게' 반복했다. 이에 비해 노무현은 세대교체와 인적청산을 통한 기득권과 부패를 해체하며 미국과의 평등한 동반자 관계를 만들며 중도적 개혁을 발전시킬 인물이라는 대립적 이미지를 창출했다(특히 TV토론에서 노무현은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 양자를 보수주의와 이상주의로 밀어내며 중도적-합리적 개혁이라는 이미지를 쌓고자 했다). 노무현 지지층의 이질성과 갈등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단순히 정치적의 풍경에서 DJ를 제거하고 이회창 대 노무현이라는 일대일 대립구도를 형성한 게 전부가 아니다. 노무현의 선거전략은 복합적이었고, 그에게 표를 던졌던 지지층도 이질적이었다. 노무현의 주요한 지지세력을 거칠게나마 도식화해보자. 첫째, 노무현에 대한 '실리주의적' 지지가 있었다. 남한의 증시부양은 'IT(정보산업)혁명', '벤처창업'이라는 바람을 타고 올라섰고, 벤처기업은 기존 경영조직·관행의 일반적 대안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지식산업', '고부가가치산업' 육성이라는 김대중정권의 전략에 따라 문화산업에 대한 지원확대도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벤처-금융업의 확대는 이른바 '386세대'를 일종의 '비즈니스네트워크'로 전환시켰다. 게다가 386세대는 남한에서의 물질적 성장을 경험하였고(삼저호황) 미국식 생활양식-소비문화의 확대를 '진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들의 결집은 '자기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DJ의 정책개혁이 노무현을 통해 보완되는 것을 지지했다. 한편 이 세대의 수많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자신의 경제적 이해가 기업경영진과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기업 내부의 권위주의적 '지배구조'에 대해 갈등에 처해 있으며, 이는 기득권이나 '고루함'(?)에 대해 강한 적대심을 유발한다. 따라서 경제적 자기 이해, 문화적 동질감에서 다른 집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형성했다. 물론 DJ정권의 경제개혁과 노무현을 지지했던 집단 중에는 '개혁적 지식인'도 포함되어야 한다(이들은 노무현이 당선된다면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빨리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여기에 기술관료적인 NGO들도 포함될 수 있다. 한편 노동운동 내에서 노무현에 대한 공공연한 혹은 잠재된 현실주의적 지지도 존재한다. 노동자 대중의 일부는 대체로 IMF 이전 상황으로 복귀했고, 이는 현상유지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낳았다. 또한 DJ 당시에는 죽어 있었던 공식적인 대화채널을 정상화하고 사회적 위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존재한다(이는 민주당 및 민주노동당 양자 모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를 강화할 수 있다). 이처럼 386세대-화이트칼라-개혁적 지식인-노동운동 내 일부 상층은 DJ와 마찬가지로 노무현 역시 핵심적 지지층으로 육성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둘째, 청년층의 도시(룸펜)프롤레타리아(불안정 노동력층)의 일시적 지지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전혀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20대 투표율은 47.8%였고, 지난 대선에 비해 약 15% 하락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의 투표율 하락에 중요한 기여를 한 셈이다. 20대 청년노동자층은 IMF위기 당시 취업대란을 겪었고 신규 '노동시장' 진입에 있어서 크나큰 불안정성을 경험했다. 또한 오늘날 교육정책의 목표는 중심적 노동력과 주변적 노동력를 분화시키는 것이므로, 20대의 대부분은 '다기능화'라는 명목으로 다수 주변적 기능을 습득했다(저임금과 고용의 불안정). 소비확대라는 생활양식을 강요받았으나('10대 시장', '20대 시장') 미래는 극히 불투명했다. 이들은 삶의 조건이 불안정한만큼 사회적·정치적 의식도 불안정하다. 이번 대선에서 강력한 '반창' 정서가 작동했으나 이들의 정치적 입장은 종종 모순적이다(즉 진보/보수의 틀로 쉽게 포섭되지 않는다). 이들이 참여한 월드컵 거리응원이나 촛불시위 참여는 기성세대에게 위력적이었고 선거의 흐름을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무규정적 행동에는 쉽게 참여하지만 제도적 행동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선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노무현의 인기영합주의적인 제스쳐와 함께 이회창에 대한 차악으로서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지역경제의 위기 속에서 '지역감정'에 근거한 잠정적 지지가 있었다. 오늘날 지역감정의 물질적 토대는 구조조정 이후 심화된 지역경제의 위기이며 이것이 지역적 소외감으로 등장했다. 지역감정이 실리추구적인 감성에 기반한 것이라면 지역감정을 동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노무현은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는 지역발전이라는 실리적 희망을 조작하여 지역감정을 동원, 장악한 것이다. 노무현은 호남 지역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DJ의 계승자로 제시했고,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스스로가 3김 이후 부산·경남을 대변할 정치지도자로 자임했고, 충청권에 대해서는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희망을 제시했다. 따라서 노무현 당선을 안정적인 지지연합의 구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질적 집단의 이데올로기는 서로 갈등적이거나 대립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일시적 제휴를 표현하는 방식은 '새롭다', '활기차다' 등등의 정서적 호소를 넘어서지 못한다. 오히려 정책개혁의 전개과정에 따라 (각각 다른 이유로) 대중적 이반을 낳을 요인을 깔고 있다. 노무현의 정책개혁 전망 이제 노무현은 인물대결 구도의 선거전략을 마무리하고 남한에서의 정책개혁의 정당성을 '사후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태세로 돌입했다. 분명히 현재는 DJ처럼 대통령직에 취임하기 전부터 '비상경제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초헌법적인 권한을 휘둘러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은 아니다. 노무현은 IMF 경제개혁의 기초적 목표 즉 금융위기 직후 위기관리책를 넘어서, '경제성장-고용확대-빈곤감축'이라는 포괄적 정책목표를 내걸었다. 그리고 개혁적 지식인을 중심으로 인수위를 구성하고 여러 정책검토사항에 대한 여론의 반응을 탐색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김대중정권의 정책기조의 유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다. 남한의 경제구조는 이미 완전히 뒤바뀌었고, 이에 조응하여 재계-관료-학계의 태도도 수렴되었다 - 사실 김대중 집권 당시 한나라당의 기본 노선도 DJ 개혁에 대한 '비판적 지지'였다(예컨대 공적자금 오남용 비판, 구조조정에서 정부가 무리하게 기업을 압박하는 것에 대한 비판, 엄격한 상호주의에 입각한 남북관계 개선 등). 이제 남는 핵심 문제 중의 하나는 남한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동력을 창출하는 것이다. 김대중정권이 남한을 '자본유치형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했다면 노무현 정권은 실제로 대규모 외국인투자를 유치하는 게 관건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이 직면한 문제는 중국과 차별적인 외국인투자유치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현재 김대중정권에 이어 노무현이 들고 나온 '동북아 중심지'는 초민족기업의 세계경영전략에 대한 고려를 반영하는 남한의 적응책이다(즉 중국의 성장에 따른 중국진출을 위한 일종의 '관문'으로서 남한의 활용가치를 높이자는 구상). 따라서 노무현정권이 기본 과제는 4대부문 구조조정을 보완하여 (외국인투자자의 감시감독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기업지배구조 개혁의 진척, 초민족기업의 활동범위를 확대시켜주기 위한 무역자유화와 투자협정 체결, 남한의 금융시스템의 불안을 완화하기 위한 금융사들의 대형화-겸업화 유도, 협조적 노사관계 구축을 위한 노사정합의기구 구성 등이 될 것이다. 또한 외국인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남한의 기술개발과 산업의 특화, 경제 인프라 구축, 평준화 해소와 교육개혁, 여성고급인력 활용 확대를 중심으로 정부 재정지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남한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정책개혁을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조건의 창출이다. 남한에서의 정책개혁은 DJ의 몰락을 통해 심대한 위기에 처했고, 차기 정권은 이러한 붕괴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게 사활적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개혁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재결집, 부패와 '도덕적 해이'가 재생산되는 정치-행정-사법구조의 혁신 또는 지배세력의 도덕성 재확립, (보수주의적 온정주의든, 또는 자유주의적 실용주의든 간에) 사회적 통합을 위한 정책적 보완 등이 관건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현실주의적 지지층을 핵심적인 지지기반으로 구축하여 개혁의 불가피성, 지속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고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개혁(특히 정당 개혁과 선거구제 개혁)을 통해 정치적 안정성을 획득하며 부패방지를 위한 정책적 수단을 강구할 것이다. 또한 고용확대나 빈곤축소의 외형적 성과를 얻어내기 위한 미봉책을 모색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시도들은 YS-DJ와는 다른 세대의 주류 개혁세력 형성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민중운동의 미래 하지만 문제는 개혁의 진전 과정에서 실제적인 민중들의 삶의 양상이 될 것이다. 과연 남한의 경제구조 개혁과 양립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남한 사회는 경제개혁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자 대중의 삶의 조건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불안정노동이 일반화되었고 특히 20대 새로운 세대의 대부분 주변적 노동인력으로 육성되었다(이른바 '청년실업' 문제). 또한 생계의 부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와 가사·육아 활동이라는 이중적 부담이 증가하고 빈곤이 여성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낳았다. 경제성장의 지속이라는 미명 속에서 산업특화가 이루어지고 배제된 산업(특히 농업)은 정부의 간헐적인 보호책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또한 주요 사회보장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의료보험의 중요한 기능이 금융업 부문으로 이전되거나 연금이 증시에 투입되면서 사회보장체계에서 빈자와 부자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평준화의 해체는 공식화할 시기를 노릴 따름이며 교육'시장' 개방화와 함께 실질적인 해체가 예상되고 있다. 또한 극악한 방식의 노동착취에 대한 자본측의 현실적 요구를 받아들여 정부는 이주노동자 문제에서 일관된 해결방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노무현정권은 미래는 무엇보다도 그가 제시하는 각종 사회통합 정책의 실현가능성과 실제적 효과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노무현정권은 DJ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노무현정권이 검토하는 구상은 기본적으로 재정지출을 최소화하면서 갈등의 폭발을 지연하거나 조정하기 위한 형식적인 틀을 마련하는데 있다. 그리고 실제로 구사될 정책은 민중들의 삶의 조건을 '하향평준화'하고 상위 20%에게는 안전과 소비의 '자유'를 부여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 인수위는 정책 아이템으로 입안하기 위한 각종 국가기구를 구성하면서 운동세력과 지식인 그룹을 포섭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국가차별시정위원회, 노사정위원회, 각종 정책자문기구 구성이 그러하다. 또한 '서비스형' NGO를 육성하여(정부·지역사회·민간 네트워크화 구상) 기존의 사회운동 그룹들을 재편성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민중운동이 신자유주의에 적합한 방식으로 적응하고(스스로를 정책-로비형 또는 서비스제공형 NGO로 정립), 위기관리체계에 체계적으로 포섭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남한의 진보정당 운동은 정치개혁 흐름과 함께 지배정당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사회운동의 성격을 강화하고 전선형성에 기여할 것인가라는 고비를 맞이할 것이다. 오늘날 남한 민중운동은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IMF 경제개혁은 일단락되었고 남한의 경제구조는 완전히 변화하였다. 앞으로 다가올 노무현정권 5년이 나갈 방향도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노무현은 김대중정권 초기와 같은 생산과 고용의 파괴라는 극단적 양상을 회피하고 고용확대-빈곤감축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전 정권과 '다르다'는 혼동을 생산할 것이다. 특히 노무현정권은 사회운동에 대한 지원(특히 사회적 위상 제고)을 민중에 대한 지원으로 '의도적으로' 혼동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결국 민중운동은 노무현의 정책개혁과 방향성과 실제적 효과에 대해 김대중정권 초기보다 더욱 엄밀한 비판해야 할 시점에 섰다. 또한 정책개혁이 실제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양상을 정확히 포착할 때에만 대중적 운동화의 발판이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고착화된 운동은 노무현정권 하에서 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곧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개혁 논의가 뜨겁습니다. 정치개혁이라는 것이 결국 부르주아지의 체제안정화 방안에 다름아니겠지 만, 비판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참고 자료로 정치개혁 추진 시민사회단체연대 제안서 및 계획을 올립니 다.
Did the Washington Consensus Fail? by John Williamson, Senior Fellow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 Outline of remarks at CSIS November 6, 2002 1980년대 말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정책개혁안을 의미하는 '워싱턴 컨센서 스'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던 존 윌리암슨의 짧은 발언록이네요. 얼마전 국 역되었던 스티글리츠의 <세계화와 그 불만>(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듯합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가 워싱턴 컨센서스의 정책권고안을 대부분 수용하여 이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아르헨티나는 제외) - 룰라 역시 대부분에 사인 을 하였구요 - 경제성장, 고용 확대, 빈곤 감소 등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며, 따라서 워싱턴 컨센서스는 실패한 것이냐에 대한 자문자 답 성격의 글입니다. 그러면서 1세대 개혁의 성과를 취하기 위한 2세대 개 혁이 필요하며, 이에 대한 세부적인 정책적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주 장하네요. * 영문자료입니다. * http://www.iie.com/papers/williamson1102.htm#1
외교안보연구원에서 나온 중장기국제정세전망입니다. 외통부에서 퍼왔습니다.
"Transcending Pessimism: Rekindling Socialist Imagination" (비관주의를 넘어서: 사회주의적 상상력을 다시 발휘하자) 저자 : Leo Panitch and Sam Gindin 민노당 자료실에서 퍼옴
12월 23일 교수7단체 주최로 열린 대선평가토론회 자료집입니다.
조작된 공포, 역사적 망각이 만들어낸 환상, 노무현 지지론을 비판한다 노무현 지지를 선동하는 선동가들은 보수우익 이회창이 당선되었을 때의 묵시록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이회창이 집권하면 북한의 벼랑끝 전술과 이회창의 끝장보기식 노선이 충돌해 한반도에 전쟁이 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제 군부독재 정권의 적자, 반민주적이며 부패비리의 총체인 보수우익 이회창의 집권을 막기 위해 권영길의 표를 노무현에게로 몰아달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1-2%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가 19일 투표를 앞두고 이들의 절박함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한편 노무현 개인에 대한 우상화 역시 마지막 가속 패달을 밟고 있다.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 결국은 이 땅에서 정직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한 정치인", "민주당이 없어도 정몽준의 보수노선이 태클을 걸어도 노무현은 개혁할 수 있다. 왜냐? 노무현이니까" 노무현은 어느새, 그 개인의 존재만으로도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슈퍼맨이 되어 있다. 2002년 대선의 마지막은 이렇게 공포와 환상의 향연이 장식하고 있는 듯 하다. 19일 투표를 하루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는 누구를 찍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 이전에 이 공포와 환상의 향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주술은 단지 19일로 끝나는 것이 아닐 것이며, 이 마법사들은 선거 이후의 정당성을 이용하여 시민들을 더욱 가증스럽게 기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에 대한 환상, 이회창에 대한 공포의 기반들 노무현 지지 선동가들의 이회창 공포와 노무현 환상의 제조 방법은 무엇보다 전쟁과 평화, 낡은 정치와 국민이 만들어 준 새로운 정치, 기득권의 대변자와 서민의 대변자 등의 비유를 통한 상징 조작이다. 이것이 왜 조작인지는 대북정책과 노동정책을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만약 노무현이 한반도의 평화와 자주를 원한다면, 그는 무엇보다 한-미-일 공조 체제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한반도 위기 국면은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이 아니라, 미국의 대북강경 정책에 의해 조성되었으며, 한국이 이에 저항 할 수 없도록 하는 체계가 바로 한-미-일 공조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부시 정권 이후의 한반도 위기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이회창과 노무현 사이에 대북지원을 둘러싼 차이는 결국 미국 부시 정권의 대북정책의 각론 수준에서의 자율권을 둘러싼 차이인 것이다. 물론 다들 알다시피 노무현은 한-미-일 공조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전쟁의 공포도 그가 만들겠다는 평화의 구상도 모두 신기루일 뿐이다. 노동정책의 경우는 아예 양자 사이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보장 강화(이회창)와 비정규직 임금 차별 감소(노무현) 사이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든 문제는 일차적으로 비정규직이라는 고용불안 조건을 기반으로 생겨나는 것이기에, 사회보장이나 임금문제를 조금 바꾼다해도 이들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양 후보는 비정규직을 이야기하며 노동 불안정화의 법적 핵심이라 할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700만 비정규직을 빼놓고 서민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만에 다름 아니다. 지역통합의 문제 또한 그러하다. 지역통합은 민주당이 부산에서 표을 얻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지역주의의 문제는 김대중 정권 이후 더욱 심화된 지역적 불균등발전의 문제, 금융 중심지 초국적 자본의 투자유치지 등을 중심으로 발전이 집중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함에도, 양 후보는 이 문제를 후보의 출생지, 후보와 지역의 연관성에서만 찾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물론 이러한 정책 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노무현지지 선동가들도 일정정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더 강력한 무기가 남아있다. 바로 "노무현" 개인의 문화적 상징과 그의 정치행보가 증명하는 신뢰이다. 분명 노무현 개인의 문화는 386의 그것과 흡사하다. 통기타, 투박한 어법, 소주 등등 기존의 정치인들이 채워줄 수 없었던 386세대의 문화적 코드를 노무현은 현실 정치인으로서 직접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뿐이다. 노무현이 바꾸고자 하는 현실은 노동자 농민들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러함에도 노무현이 무엇이던지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은 그야말로 만들어진 환상일 것이다. 노무현을 둘러싼 한국 사회 정치 자본 분파들의 이해관계를 살펴보면 왜 이러한 환상을 만들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노무현 지지 선동가의 첫 번째 분파는 바로 젊은 기업인의 상징, 벤처 사용주들이 있다. 이들의 이해는 정말로 직접적인데, 이미 이용호 진승현 게이트 등을 통해 드러났듯이 김대중 정권의 벤처 성장 정책이 만든 거대한 정부 벤처 지원 자금, 코스닥, 해외연계 채권 등등으로 이어지는 부패비리의 사슬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전 정권의 부패청산으로 임기를 시작할 이회창은 악몽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두 번째 분파는 금융 자본 분파이다. 이들의 요구는 무엇보다 재벌의 투명성, 재벌 총수에 대한 주주의 힘이며, 이는 집단소송제 금융시장에 대한 재벌규제 등의 정책을 제시한 노무현의 정책 기조이기도 하다. 실재 무디스나 블룸버그 통신 등의 초국적 금융자본의 선동가들조차 친재벌적 이회창보다 김대중 노무현의 경제 정책에 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세 번째로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지지하는 시민단체들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김대중 정권의 전폭적 지지 하에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정책적 발언권과 재정지원 모두에 있어 이들을 공식 파트너로 인정하는 노무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회창 정권은 이들에게 정책적 발언권 재정지원 모두에 있어 혹독한 시련일 것이다. 네 번째로 김대중의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이끌었던 지식인들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계획하고 정당성을 부여했던 지난 5년간의 구조조정의 결과에 대한 비판을 노무현이라는 환상을 통해 감추고자하고 있다. 이제 왜 노무현이 문화적일 뿐만이 아닌 물질적으로도 그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분명 이들에게 노무현이 아닌 이회창은 공포일 것이며, 심각한 위협일 것이다. 노무현에 대한 환상과 이회창에 대한 공포는 이러한 물질적 이해 관계들을 가지고 있다. 이 선동가들은 노무현을 우상화함으로서 정권 재창출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난 5년처럼 유지하고 싶어한다. 1987년, 그리고 2002년 : 노무현에 대한 신비화를 중단하라! "87년에 실패함으로써 15년을 견뎠지. 부마항쟁부터 치면 한 20년 정도로 참아온 셈인데, 저는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꼭 이겨야 해요." (한겨레 21 대담 중) 노무현과 그 지지자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그들은 1987년 민주화 운동을 신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 노무현은 87년 6월 거리가 2002년에 재림한 것일까? 2002년에 다시 재림한 '87년 신비화'는 '역사적 망각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다름 아닌 듯 하다. 왜 문민정권은 부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IMF 경제위기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는가? 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동시 발전,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87년의 꿈을 모두 슬로건으로 채택한 김대중 정권은 이다지도 비참하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가? 잠시만 공포와 환상의 향연을 멈추고 냉정히 생각해 볼 일이다. 12월 19일의 대통령 선거 투표에서는 현실 가능한 해결책, 차악의 선택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에 대한 지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반평 투표소에서의 선택이 바꿀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대중들의 집단적 행동, 집단적 성찰에 기반한 대중운동이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19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기에, 작은 한 표를 미래의 대중운동에 대한 큰 구상 속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이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WTO 반대! 비정규직 철폐! 주한미군 철수!" 2002년 하반기에 치열하게 펼쳐진 민중들의 함성을 다시 떠올려보며, 한 표에 제한되지 않는 현실의 모순을 다시금 떠올리는 19일이기를 바란다. SO-LA
민중10대요구에 대한 민주노동당, 사회당, 민주당, 한나라당의 답변 및 면 담 내용입니다. 전국민중연대에서 정리했습니다. *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지난 11월 25일, 노무현과 정몽준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었다. 이로써 한국의 지배세력은 IMF 이후 자신의 재생산 방식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초라해졌는지 유감 없이 드러냈다. 그들은 처참하게 붕괴된 정치정당과 함께-혹은 그것의 우산을 벗어 던지면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짓(자신들이 생각해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말고는 더 이상 대통령 선거 때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재생산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상실하고도, 10년이 넘도록 이를 대신할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자신들이 (서로에게) 힐난해 마지 않던 일을 스스로 일삼기 시작했다. 물과 기름 같은 두 후보가 1987년에도 불가능했던 후보단일화를 성사하는가 하면, 비난을 일삼던 반대편 정당으로 자신의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의원 '빼가기'라며 어떤 정계개편도 거부하던 정당이 의원 '영입'으로 몸집을 키우는가 하면, 정통보수의 왕정복고를 이루려는 세력들이 자신들의 선봉장으로 (이미 화석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 재야인사, 노동운동가를 내세운다. 보기 드문 정치 희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지켜왔던 반공·발전주의와 민주주의를 한바탕 웃음거리로 만들어 놓고도 그들은 자신이 조장한 것이나 다름없는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엄한 얼굴로 꾸짖으며, 대선 참여를 독려한다.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이 저항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결국 자신의 존립기반마저 위협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의 정치적 권리로서 선거권은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권리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구성하기도 하고, 부당한 권력의 역사적 정통성을 문제삼기도 한다. 그래서, 선거는 (드물게나마) 특정한 지배분파의 숨통마저 위협하기도 하고, (대개) 자신의 정치권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선거를 통해 지배세력은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에게 양도하는데, 이때, 주의깊게 살펴야 할 것은 선거가 단순히 권력이양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지배세력이 감당하기 곤란한 문제가 권력의 분기점이 되는 선거에서 공식화되기도 하고, 이렇게 형성된 대중적인 의제가 해당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일정하게나마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정세적 고양기에는 이것이 대중적 심판의 형태를 띠게 될 수도 있지만, 잠시 민주주의의 급진화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이같은 정치적 해결은 대개 제한적이고 의사(擬似)적인 모양을 띤다. 더구나 지배세력이 이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거에서 보이는 대다수 사람들의 정치적 행동을 지배이데올로기에 따른 조작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면,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차기 정권은 자신의 권력행사에 필요한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눈앞에 닥친 대통령 선거에서 무엇이 주요한 쟁점이 되고 있는지-무엇이 의제로 제출되고 있는지, 이를 자세히 살펴 봐야 한다. 이번처럼 쟁점이 없는 선거(혹은 쟁점이 가려진 선거)에서는 더더구나 말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안정적인 추진 지난 2002년 1/2월호에서 우리는 올 한해 정세전망을 제출하면서(사회진보연대 정세분석팀, "2002년 정세, 그리고 전선재편 : 문제의 개요", [사회진보연대 22호], 2002.1/2), "정권교체, 김대중 정부의 출범"이 재벌의 게으름으로 지체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성공가능성을 높이는 결정적 계기"였음을 지적하면서, "김대중은 이른바 反패권 지역주의와 보수-개혁 정치연합을 통해 새로운 지지연합 : 신자유주의 지지연합"을 통해 정권을 창출하고, 이에 기반해 "IMF 구제금융협약 및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집행하는데 크게 성공"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대마불사'라던 재벌을 포함해서 어떤 기업도 구조조정에서 예외일 수 없었던 상황에서, 1997년 대통령 선거의 핵심 쟁점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위한 정치적 조건이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지 에 관한 것이었다. 'IMF 국란 극복, 책임자 처벌'에서 볼 수 있듯, 김영삼 정권에 대한 극도의 불만 속에서 어느 누구도 IMF 구조조정의 파괴적 효과를 충분히 살피지 못하였고, 결국 1997년 대선은 대통령 선거-정권 교체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끝났다. 그로부터 5년 간 우리는 이것의 후과로 구조조정의 뼈저린 고통을 충분히 맛보았다. 2001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미흡"하다는 지적에 따라 구조조정은 새로운 국면에 다다르게 되는데, 즉 "상시적 구조조정을 이룰 수 있도록 구조조정의 제도적 완성으로 모아"진 것이다(홍석만, "2001년 정세를 조망한다", [사회진보연대 12호], 2001.1/2). 상시적 구조조정은 애초에 이회창이 김대중의 구조조정 정책을 비판할 때 강조했던 것으로, 결과만 놓고 보면 DJ 행정부가 이를 수렴한 셈이 된다. 2000년 총선 당시 민주당의 '전국정당화 실패'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듯, 정권교체라는 강력한 정치적 충격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은 이미 시효를 만료했다. 하지만 당시까지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계기로 단행된 IMF 구조조정이 충분히 효과를 보았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따라서, 구조조정의 안정화 단계로서 '시장의 힘'에 따른 구조조정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며, 이같은 제도적 보장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경제 정책 결정에 결정적인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OECD도 IMF 극복의 성공사례라 치켜세우며 기업부문 구조개혁에 박차를 가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데, "첫째, 구조조정투자회사를 활용하는 등 기업개선 제도를 활성화하고, 사전조정제도를 활용하여 기업퇴출 절차를 강화하고, 둘째, 산업은행의 신속인수제도와 CBO제도를 점차 폐지하여 기업구조조정이 시장의 힘에 이루어지는 여건을 마련하도록 권고하며, 셋째, 사외이사의 역할을 보다 강화하고 집중투표제의 활용을 권장하도록 함과 함께 집단소송제의 도입이나 기존 소송제의 개선을 통해 기업의 불법적 경영관행으로 인한 주주의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이경태, "OECD와 한국의 구조개혁",[OECD FOCUS 4호], 2002.11) 한편, IMF를 경과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된 노동분야 구조조정은 정책기조 상으로 볼 때 큰 변화 없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고 사회안전망에 효율성 개념을 강화하는 것이 핵심인데, 앞서의 것은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의 입법으로 드러났고, 다른 것은 사회안전망을 뒤늦게나마 도입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효율성 개념이 강화된 형태로-즉, 생산적 복지. 여기서 특기할 것은 1997년 새로운 타협체계의 구축으로서 노사정위원회가 OECD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정규근로자 중심의 과도한 고용보호를 완화하고 비정규근로자의 보호는 강화하여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완화할 것이며, 공공직업안전망의 전국적 단일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사회복지전달체계와 연계를 강화하며, 사회통합 유지를 위한 노동권 신장에 노력할 것"들을 권고하고 있는데 이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는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세력화되어 있는 데다 과거처럼 완전고용으로 노동자들의 불만을 무마할 수 없는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한데, 어찌되었든 이로써 노동정책을 가지고 상대적인 '진보'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무의미해졌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김대중 정권의 강력한 노동정책을 상기해 보라! 물론, 이념적 성향으로 보았을 때, 여성과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서는 다소 완곡한 입장을 취하는 등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 점에서 한나라당으로 대변되는 지배분파라고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어차피 핵심은 이것이 아니다. 북미관계에 종속된 대북정책 최근 북의 핵 개발 의혹이 제기된 이후 급격하게 북미관계가 냉각되면서 어떤 식으로든 햇볕정책을 평가 및 수정(유지)해야하는 상황에 다다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페리보고서' 때 처럼 외교관계협의회의 코리아태스크포스팀과 같은 역할을 맡은 정책팀이 구성되어, 이 정책팀이 남한에서 대통령 선거결과를 고려하여 2003년 2월에 한반도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할 것이라 한다. 대북정책에 있어 지배분파들 사이의 갈등은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최소한이나마 정치적 재생산을 보증하는 유효한 매개고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남한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 정책은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전제 위에서 수립되기 때문이다. 첫째 "한국과 미국의 확고한 정치적 공조체제와 군사적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둘째 그 결과로서 "한반도 통합(정세적 효과)이 결국 미국의 국익과 남한의 재벌 그리고 초국적 자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한-미-일 삼각동맹이 견고히 유지되는 상황에서 대북 정책은 근본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햇볕정책도 마찬가지다.(임필수, "김대중 정권 2년, 남북관계의 진전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사회진보연대/접속 2호], 1999.8) 주지하는 대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단순한 '봉쇄'정책을 넘어선 것은 1990년대의 일이다. 냉전이 붕괴된 이후 미국은 "자신의 세계전략에 도전하는 위협요인"이 중국 같은 전략 지역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지역에서 발생"하는 비대칭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협이 "미국의 세계적/지역적 지도력의 신뢰성과 자신의 세계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미국의 보편적 가치(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이를 간과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들의 위협수단이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대량파괴무기(핵-생화학-미사일) 개발로 집중"되었기 때문에 문제는 훨씬 심각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파괴무기 개발을 막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이다.(임필수, "200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과 한반도", [사회진보연대 6], 2000.6) 하지만, 페리보고서의 '고려되었으나 거부된 정책대안'에서 확인할 수 있듯, 미국은 북한에 대해 '봉쇄'정책을 강화하거나 단순히 현상을 유지하는 것은 오히려 미국의 국익에 위험을 초래할 뿐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북에 대한 포괄적 접근(engagement)을 통해, '협상'과 '군사력의 증강'이라는 두개의 경로를 동시에 추진하게 되는데 이의 축소판-혹은 부분적 역할이 바로 햇볕정책인 것이다. 이때 '협상'의 주요 내용이 북한의 경제 재건을 위한 최우선적인 조건인 한반도에서 북한의 정치적 안정 보장 즉, "남북한 교차승인"이며, 그 수위를 조절하는 문제가 핵심이 된다. 요컨대, 미국에게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막는 것과, 이를 전후하여 교차승인구도를 얼마나 안정화할 것인지가 구체적인 정책실현의 고려대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를 전후하여 미국으로서는 대외전략의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비대칭적인 상황이 가져다주는 위협의 체감도가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공격행위가 분쟁지역이 아니라 미국 본토에서 벌어지면서 전쟁은 이제 가상이 아니라 실제상황이 되었고, 이를 미국민들이 눈으로 똑똑히 너무도 충격적으로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곧바로 미국은 이를 '대테러전쟁'으로 공식화하였고, "비대칭적 위협이 가지는 불확실성을 격퇴하기 위해 압도적인 군사적 힘을 기반으로 강력하게 통제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이에 따라 '악의 축' 발언 등에서 드러나듯 한반도에서 미국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눈에 두드러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제네바 합의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제거했다고 믿기에는 합의내용이 매우 제한적인 것 또한 사실임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무척 위협적으로 비쳐지는 농축 우라늄 문제, 미사일 발사 실험, 재래식 무기 등등은 제네바 합의 대상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자신도 준수하지 않았듯) 제네바 합의 자체가 강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지금 상황을 개선해야 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지배분파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정책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텐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 지배세력의 논쟁이 남북 경제 교류에서 "상호주의"의 관철 정도에 머물게 된다. }} 지배세력의 정치적 목표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간단하게나마 지금 한국사회가 어디로 가려하는지, 그리고 이에 발맞추어 지배세력들이 향후 정국을 어떻게 운영하려 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쟁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한국의 지배세력은 2002년 대선을 거치면서 구조조정의 다른 국면으로서 상시적 구조조정 체제의 안정화를 꾀해야 하고, 미국이 동북아 정세를 결정짓는 몇 가지 요인들을 재조정하는데 방해가 되지 말아야 하는 바, 이에 발맞추어 모든 지배분파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야 하는 상황이다. 물론 이것이 노동배제적이며, 성적·지역적 갈등을 배가하는, 미국의 패권을 제고하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겠다. 이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우리는 한국의 지배분파들이 서로 후보를 달리 해서 나오고도 한국사회의 구조조정의 전망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이견을 확인할 수 없는 - 즉, 정치적 쟁점이 없는 선거를 보고 있는 것이다. 다소 당혹스럽겠지만, 한나라당이 '법을 엄격히 세우겠다'는 말만 빼고는 노사정 위원회를 위시하여 '주 5일제 실시' 등 민주당의 주요한 노동정책 및 복지정책이 거의 같은 데는, 마찬가지로 '상호주의의 관철', '탈북자 문제 적극 해결'이라는 말만 빼고는 대북 접촉 등 민주당의 주요 대북 정책과 거의 같은 데는 다 사정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1987년 이후 한국의 구조개혁을 선도해온 집단으로서 군부세력을 대신하는 정치세력의 형성이 상당히 오랜 기간 지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집단은 이회창으로 상징하는 보수적인 관료·테크노라트(전문가)들이다. 어느덧 한국 정치사의 혐오 대상으로 분류되어 버린 군부세력에 대해 이들은 일정한 거리를 갖는 것으로 표상되는 데다, 자유주의적인 개혁(즉, 김대중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불러 온 실망의 반사적인 표현으로,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대중들의 실리적 지향(완전고용)과도 맥을 같이 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거부감이 덜한 보수주의 정치세력이다. 더구나 오랜 기간 정국을 운영해온 경험을 통해 당면한 구조조정의 목표와 대외정책 조율에 있어서 별다른 무리수를 두지 않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안전성에 있어 대외적인 신임마저 상당한 편이다. 반면, 개혁세력이라 불리는 이들의 경우 지난 2000년 총선에서 확인할 수 있듯, 집권세력의 파트너를 넘어 직접적인 정치세력으로 나서기를 주저하고 있으며, 반정립으로서 세대갈등을 내세우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것이 별로 없는 매우 무기력한 집단이다. 사실 이는 이들의 정치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데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들 자신의 고백대로 군부독재시절 너무 오랜 기간 핍박을 받은 데다, 대중 - 특히, 노동자들을 전취할 수 있는 한국사회의 물질적 토대가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에 이들에겐 운신의 폭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대중을 전취하기 위해서는 사회 총체적인 개혁방향을 그리며, 한국사회의 자유주의적인 미래를 그려야 하는데, 반주변부 국가의 특성상 이 역시 여의치 않았다. 오랜 구력으로 이런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던 동교동계 인사들이 이들을 얼마간 농락할 수 있었던 근저에는 이같은 무능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개혁세력은 역사적인 정권교체와 함께 한국 정치사의 본무대에 등장하였으나 IMF 구조조정이 일단락 되던 2000년을 마지막으로 온갖 부정비리와 함께 퇴장해야 하는 참담한 신세가 되고 말았고, 급기야는 개혁세력의 종가라 불릴 민주당의 처참한 붕괴 위에서 대선을 맞이한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만큼 처참한 몰골로 말이다. 후보단일화, 잊지 못하는 연민의 정? : 개혁세력의 후보단일화 비판 그렇다고 이들의 명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미국사회에 대한 선망이 깊었던 만큼 이들은 정책정당이 무엇인지 훨씬 잘 알고 있었고, (국민경선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 무엇보다도 이벤트를 조직하는 데 능숙했으며, 정치의 미디어화에는 탁월했다. 이들의 정치기술이 보수적인 테크노라트들에 비하면 좀더 세련된(미국적인) 것이 사실인데, "1980년대 말 3저 호황 때와 같은 물질적 뒷받침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며, 부르주아 내부에서 어느 누구도 이니셔티브를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 …… 부르주아의 정치적 우위는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정치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사회진보연대 정세분석팀, 같은 글)에서 이들은 자신의 솜씨를 매우 능숙하게 발휘했다. '후보단일화'. 그들은 이것으로 구차한 목숨을 연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후적 효과까지 단단히 보고 있는 것이다. 1987년 6월 '대중의 반역'의 정치적 성과를 대통령 선거까지 지연시키고는 이마저도 선거 패배로 유실되자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책임을 후보단일화 실패로 돌렸다. 논쟁이 격렬했던 선거였던 만큼 이렇게 유실된 대중의 정치는 후보단일화에 대한 미련과 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연민으로 남았는데. 이는 대통령 선거 때마다 '비판적 지지'의 망령이 되어 되살아나고는 했다. 이것이 정권교체 이후에 아예 있는 그대로 바로, 못 다 이룬 꿈 '후보단일화'로 되살아난 것이다. 이것의 효과는 놀라웠다. '후보단일화'는 그 자체로 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대중의 연민을 떠올리게 한데다, 당시의 대립구도를 오늘에 똑같이 재현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민주-개혁세력의 결집을 부르며, 반창 결집으로 이회창을 국민들이 그렇게 혐오해 마지않았던 군부세력의 잔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노무현 자신은 민주주의와 개혁의 화신이 되어서 말이다. 말 그대로 못 다 이룬 꿈 '후보단일화'가 월드컵의 화신 정몽준을 통해 꿈을 이룬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후보단일화'를 이룸으로써 노무현은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던 DJ(YS)보다 더한 정치적·도덕적인 우월감을 단숨에 획득했다. DJ의 후계자라는 부담스러운 지위마저 한번에 털어 버린 것이다. 정말로(?) 노무현(!)은 달랐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대선 초장부터 뜻밖에 형성된 전선을 무마하려고 황망히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다 죽은 김대중이 산 이회창을 잡도록 놔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보수/개혁 구도가 자신들에게 하등 유리할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회창을 수구냉전세력으로 몰아넣는 것의 부당함을 강조했다. 동시에 이들은 역시 죽어버린 민주인사와 노동인사를 전면에 배치하였다. 민주당보다 앞서 SOFA 개정을 내걸기도 했다. 어느새 재등장한 '노풍'에 기선을 제압 당한 채로 대선에 뛰어든 것이다. 이렇게 노무현이 강력한 기선제압으로 대선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후보단일화 실패'로 상징되는 자유주의적 개혁의 굴곡많은 역사에 대해 대중들의 연민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DJ의 배신으로 인한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정치적 보수화에 잠시나마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이런 지향을 개혁세력들이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일단 앞서 지적한 것처럼 개혁세력은 이를 추진할 물질적 토대도, 미래를 제시할 총체적인 상도 없는 데다 어떤 고유한 이데올로기로 자신을 재생산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제 정치세력들의 이합집산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불어 (이것이 가장 중요할 텐데) 1987년과 달리 오늘날 대중운동의 상황은 오랜 침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세력들이 자신의 힘도 계획도 없이, 대중운동의 뒷받침도 없이 (1987년 봉기하는 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도 힘들었던)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몽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대중에게 거짓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더더구나 오늘 한국의 지배세력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뻔히 잘 알고 있는 개혁세력들이 말이다. 따라서, 노무현을 앞세운 개혁세력의 개혁이 잠시라도 주춤거리면(노무현은 DJ보다 정치적 입지가 훨씬 취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가 더 개연성이 높다), 이에 대한 대중의 배신감은 DJ의 그것보다 더 크고 더 깊숙이 스며들 가능성이 짙다. 이때 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소박함은 다시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고 이것이 개혁세력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또다시 조장될 것이고 이것이 다시 한번 배신을 낳을 것이고…… 이것이 만일 현실로 드러나면 이렇게 기대와 배신이 무한히 반복되는 악순환에 빠지면서 대중의 정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말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중의 정치적 냉소주의가 강하게 작동할 것이며 이는 대중을 침묵의 깊은 수렁에 밀어 넣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중의 무덤 아닌가? 개혁세력을 향한 대중의 연민은 불행히도 대중의 발목을 붙잡고 말 것이다. 개혁세력의 약속은 애초에 지킬 수도 없는 약속이다. 개혁세력의 현란한 정치기술은 그저 정치기술일 뿐이다. 이들의 장기(長技)이기도 한 정치의 미디어화와 이벤트화는 이런 문제를 더욱 가속시킨다. 정치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상징하여 다루기 때문이다. 당면한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정치는 문제를 우회하고 대중들 사이에서 미끄러지게 한다. 문제를 외면하는 정치! 문제를 봉합하는 정치! 그리하여 대중을 침묵의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 정치! 이를 잘 활용하는 것이 바로 개혁세력의 정치기술이다. * * * OECD를 위시하여 유수의 정책전문가들은 내년도 경기전망을 상당히 어둡게 내다봤다. 선진권 경제(특히 일본)와 신자유주의 경제의 구세주라 할 수 있는 IT경기의 회복세가 여전히 미약하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동반될 단기적인 유가 불안, 중남미 금융불안 등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요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2003년 시작부터 요란하게 펼쳐질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패권을 한층 더 강화시킬 것이며, 새롭게 출범하게 될 정권은 '상시적인 구조조정의 안정화'와 '북미관계의 재조정'을 위해 모든 정책을 집중시킬 것이며, 벌써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자본가들의 요구 즉, 노동 유연화를 강화하고 노동운동을 무릎꿇게 하는 요구는 극을 달릴 것이다. 그리고 개혁세력의 기선제압이 얼마나 지속할지 알 수 없지만, 당락과 관계없이 불안정한 상황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다. 당선이 되면 되는대로,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강력한 정개 개편의 회오리가 몰아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만일 우리가 상대적으로 진보된 정치공간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다면(사실 극히 의심스러운 것인데) 그것은 대통령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1987년 대중운동 내에 일었던 반역의 기운이, 그 효과가 오늘 이 시간에도 미미하게나마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 만일 우리가 상대적으로 조금이라도 열려진 공간에서 활동할 수 있다면, 아니 그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대중운동의 급진화 와 함께 대중의 정치적 발언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려진 공간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대중의 역능과 우리가 마주친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제각기 흩어져 존재하는 대중운동이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공동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지 않은가? 이것이 '좀 더 개혁적인(진보적인) 누군가를 투표하는 것'에 제한되지 않음은 너무도 자명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