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신정부의 경제정책의 양축은 상시구조조정시스템(시장)에 기반한 기업(재벌)·금융 구조개혁의 지속과 이른바 [동북아중심국가 건설]로 명명된 한국경제의 새로운 중장기 성장전략의 추진이다. 한국경제는 지난 수년간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수행함으로써,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어진 아메리카식 경제작동방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DJ정권 5년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성과는 노무현 신정부가 이어받고, 그 스스로 자임하는 정책개혁의 새로운 임무는 한축으로는 시장운영원리에 따른 구조조정이 상시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지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세계화된 세계시장에 이미 상당정도 최적화된 한국경제를 재편입시키기 위한 중장기적 비전을 구체화하는 실천인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난해 말 경제특구법(경제자유구역법으로 개칭) 저지투쟁 과정에서 김대중정권의 [동북아중심국 플랜](이하 동북아플랜)의 반민중적인 일단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동북아플랜은 경제자유구역 설치와 시행법통과만으로 그치는 일회성 사업도 김대중정권만의 아이디어성 기획도 아니다. 실제로 동북아플랜이란 기획이 처음으로 이야기되었던 시점은 1995년경 김영삼정부 시절의 4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이 제출된 때였고, 지난 대선과정에서도 이 계획에 관한한 이회창과 노무현간의 정책적 차이는 거의 없었다. 비록 지난해 11월 경제자유구역법의 국회통과를 막지 못했다하더라도 동북아플랜의 구체적 시행과 그에 따른 갖가지 개혁조치들의 추진은 적어도 노무현정권을 넘어 다음 정권이 등장하게 될 2010년경까지 이어지게 될 전망인 만큼 우리의 투쟁이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당장 노무현정권은 올해 상반기 중으로 지난해 통과된 경제자유구역법의 7월 시행을 앞두고 이 법의 갖가지 부대 시행령을 마련할 예정이고, 인천시는 올해 1월 중순경에 경제특구 개발 및 자본조달 업체인 미국 게일사(社)와 1단계 사업을 위한 토지공여(160만평) 본계약을 서둘러 체결한 상태이다. 동북아플랜에 대한 비판과 우리의 투쟁은 한국경제의 내일에 대한 비판과 투쟁인 것이며, 현 시기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결절점으로서 새롭게 인식되어야하는 것이다.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 플랜]의 개요 노무현 신정부의 동북아플랜은 크게 세 축으로 구성된다. 물류중심지화, 비즈니스거점화, 첨산기술산업 클러스터(집적단지) 조성이 그것이다. 김대중정권 시절 입안된 계획과 달라진 점은 물류·비즈니스거점화를 이루기위한 중간단계로 우선 국내의 첨단기술산업을 경제자유지역에 끌어들여 본격적인 외자유치를 위한 네트워크 이익을 극대화하자는 방안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국내 재벌 측에서 제기한 국내기업에 대한 역차별 논란을 줄이고, 외자에 대한 퍼주기식 인센티브만으로는 실제적인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북아플랜 전반의 기조나 핵심적인 실행과제들이 수정된 것은 아니다. 노동규제완화, 세금감면, 의료·교육 개방 등 초민족자본(TNC)에 대한 온갖 특혜로 가득한 기존 정부안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금융·비즈니스 중심인가 첨단산업·R&D(연구개발)허브 중심인가라는 신·구 정부 간의 논란 역시 인수위 측의 주장이 금융·비즈니스 거점화 방안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기보다는 금융·비즈니스 거점화 전략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세금감면이나 노동규제완화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이에 덧붙여 국내 IT산업과의 연관성이 고려되어야한다는 현실적인 입장이 부가된 것일 뿐이다. 동북아 플랜의 또 다른 축인 물류중심지화 계획이란 인천공항, 신부산·광양항 확충을 통해 이 지역 및 시설들을 동북아 허브공항 및 항만으로 개발한다는 것으로, 중장기적으로는 남북철도 연결을 통한 유라시아대륙과의 연계를 추진한다는 이른바 '철의 실크로드' 구상이 부가된다. 경쟁력 있는 국내외 물류 네트워크의 구축과 관세자유지역 지정 및 국제 물류지원센터 설립 등이 추진과제이다. 보다 복잡하고 핵심적인 계획은 비즈니스 거점화 계획이다. 각종의 기업서비스(Corporate Service)와 국제금융 관련 서비스를 갖춘 기업·금융 비즈니스 센터를 건설하여, 초민족자본의 동북아지역 지·본사와 금융기관을 유치한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이를 위한 추진과제는 인천, 신부산, 광양등지를 경제자유지역으로 지정하고, 초민족자본의 활동에 지장이 없는 각종의 경영, 생활환경을 갖추는 것이 일차적이다. 지난해 경제특구법 투쟁에서 주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이 바로 이 경영, 생활환경 부분이었다. 그동안 국내법상(으로나마) 보장되 온 노동, 여성, 교육, 환경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기본 인권의 사각지대가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형성되며, 나아가 이것의 효과를 타지역으로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안 자체에는 특구의 전국화에 관한 분명한 언급은 아직 없다. 하지만 특구의 전국화라는 요구는 비단 전경련과 재벌들의 요구가 아니라 동북아플랜이 가지는 자체적인 기본속성이다. 다만, 경제특구 개발에 보다 중점을 둔 계획이 정부안으로 채택된 것은 1997년, 98년경에 이미 (동북아플랜의 전범이 된) [Industrial21], [비즈니스 거점화 전략]등의 계획을 입안, 시행한 바 있는 싱가폴과 홍콩이 도시형 자유항만국가인 점을 감안하여 차별화를 위해 단계적 조치를 취한 것이다. 때문에 정부안은 1국2체제형 개방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중국의 경제특구전략과 홍콩, 싱가폴 등지의 거점화 전략을 단계적으로 혼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부의 경제특구개발계획이 가지는 장점이기보다는 치명적인 한계점일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중국의 경제특구가 그 배후에 가지는 거대한 내수시장이라는 메리트나 자국의 내수나 산업기반을 완전히 포기한 채 철저히 중국시장을 향한 교두보로 변신한 도시형 자유항만국가의 거점화 전략이 가지는 메리트 중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노무현 신정부에게 넘겨진 동북아플랜에서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전략이 어떤 방향으로 구체화되건 간에 이는 자본 측에게는 지극히 불안정한 생존전략일 수는 있어도, 노동자민중의 생존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위협책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동북아중심국 플랜의 본질과 한계 1 : 신식민지적 발전기획의 파탄 "동아시아의 중심국을 건설"한다는 레토릭의 화려함에 미혹되지만 않는다면, 노무현 정권의 동북아플랜은 실상 그처럼 옹색하고 서글픈 심정마저 자아내게 하는 것이 없는 성장전략 아닌 성장전략, 산업정책 아닌 산업정책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동북아플랜은 위기에 빠진 남한자본주의 체제의 최후의 배수진"이라 말하지만, 노무현 신정부의 표현은 "(동북아 플랜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란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 다루어져야한다. 동북아 플랜은 이전시기 한국경제를 지배해온 신식민지 근대화론적인 의미에서의 "발전"과 이에 입각한 발전국가의 (좁은 의미에서의)"산업정책"이 시효만료 되었음을 뜻한다. 동북아 플랜에서 말하는 [비즈니스 중심국가]란 이상은 더 이상 국민국가 차원의 경제발전을 기획하기 어려워진 남한 자본주의체제의 구조적 위기와 한계를 화려한 정치적 레토릭으로 치장한 것으로, 이전시기 김대중정권이 즐겨 사용하던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중장기적인 정책전략의 모양새로 손질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정권과 자본은 여전히 '발전'이나 '산업정책'과 같은 용어의 선동적 유용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변화된 국제경제환경의 생존전략인 동북아플랜은 이웃나라의(주로 중국) 경제적 기회를 활용하여 한국경제의 선진화와 고부가가치화를 달성해가기 위한 새로운 '발전'전략"이라는 경제관료들의 설명이나, 이에 한술 더 떠서 “동북아 경제중심국가 건설은 단지 장사 잘하고 부자 되는 단순한 꿈이 아니라 수백년간 중국의 변방으로서 고통스러운 역사를 극복하고 민족의 팔자를 바꾸는 계기”라는 노무현의 로또식 허풍이(민족의 운명 역전) 그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명시적인 경제성장의 조건과 목표, 방향을 확립한 가운데, 특정산업의 발전을 촉진함으로써 국민경제적 발전을 달성해가는 좁은 의미의 '산업정책'과 신식민지 근대화론적인 의미에서의 '발전국가'모델의 시효가 만료되었음은 노무현 정권 자신이 더욱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97년 IMF공황은 저임금과 미국시장의 역개방에 강하게 의지하여 유지되어오던 남한자본주의의 종속적 발전기획의 최종적 파산이 선언된 계기였다. 그후 국민의 정부 5년은 '환란 극복'이라는 당면 과제가 중장기적 비전의 부재를 대신해온 5년이었다. 이제 5년간의 강요된 희생으로 지친 국민들 앞에 새 정부가 내놓아야할 것은 새로운 비전과 전망일터인데, 노무현정권은 처음 출발부터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명확하고 눈에 띄는 거짓말은 동북아플랜의 초라한 실현가능성과 불투명한 경쟁력이다. "자동차, 철강, 조선에서 동북아 거점으로!!"라는 신정부의 캐츠프래이즈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한국경제의 중추를 담당해온 수출지향형 산업이 변화한 세계시장에서 미래비전을 상실했음은 명확하다. 그래서 동북아 플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 비전과 과제란 대략, 동북아 부품 및 중간재 공급기지화, 동북아 R&D센터화, IT/BT/NT등의 첨단기술산업 유치, 회계, 법률, 경영컨설팅, 광고업 등 각종 기업서비스업 육성, 동북아 금융중심지화 등이다. 그런데 이중에서 실제로 무언가 국내 산업과 고용에 관련된 발전적 기획에 관련된 과제라고는 보기 어렵고, 동북아 부품 및 중간재 공급기지를 만든다는 것뿐인데, 이 계획 역시 이름만 번지르르하지, 그 속내란 일본에서 생산하기에는 인건비가 너무 비싸고, 중국에서는 기술력이 아직 부족해 생산하기 어려운 일부 품목을 대상으로 한 틈새시장 전략일 뿐, 별것이 없다. 그 외 동북아 R&D센터니, 첨단 산업 유치하는 과제들은 죄다 국외 초민족기업과 자본을 국내 특별자유지구 내에 유치한다는 것인데, 이는 앞서 살펴본 바대로 중국 내 특구나 자유항만형 동북아 도시국가들의 거점화 전략에 비해 특별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또 중국 내 특구들이 활성화 되어있는 상황에서, 일본과 중국을 잇는 중국시장 진출의 교두보라는 지리적 이점 역시 크게 자랑할만한 거리가 되지못할 것이다. 요는 동북아플랜이라는 틀이 유지되는 한, 그 내에서 신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란 초민족자본에 대한 더욱더 많은 어거지식 특혜와 보다 철저한 자본위주의 노사환경을 제공하는 길뿐일 텐데, 그 같은 희생이 과연 플랜의 성공을 가져올지 매우 미심쩍을 뿐 아니라 동북아플랜 자체가 지향하고 있는 성장전략이란 것이 과연 국민경제적 차원의 파이를 키워 미래의 분배를 약속하는 체제인가라는 의문이다. 물론 이전시기 신식민주의적인 억압적 발전국가체제에서의 문제점은 '키워진 파이'의 분배가 철저히 국가 산업정책의 비호아래 비대해진 재벌과 특정 발전엘리트 계층에게 집중된 채 미래의 분배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동북아플랜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미래의 한국경제의 문제점은 금융세계화에 통합된 몇몇 핵심대형기업들의 생존과 성장만이 보장되고 이들의 생존과 성장만이 관심사일 뿐 더 이상 국민경제적 발전이란 의제 자체가 기각-포기된다는 점이다. 초민족 자본주의 경영·생활환경을 가꾸기 위한 국가의 경제적, 경찰적 개입역량은 날로 강화되지만, 국민국가의 사회적 성격과 민족적 책임성은 약화 해체되는 것이다. 설령 동북아플랜이 갖은 난점과 내외적 취약성들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성공을 거둔다하더라도, 그 결과 한국경제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한국내 위치한 특정지역의 특정집단(국적을 불문한)의 경제가 성장할 뿐이다. 동북아 중심국 플랜의 본질과 한계 2 : 글로벌 시티 네트워크로의 편입과 내부적 배제 그렇다면 결국 노무현 신정부의 동북아플랜은 한낱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한 선동문구란 말인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북아플랜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장미빛 청사진들은 확실히 그러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동북아플랜의 성공적 실행을 가정한 미래의 한국경제와 사회의 변화를 예상해본다면, 동북아플랜이 (그 낮은 성공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모두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동북아 플랜이 그리고 있는 한국경제의 성공적인 미래상은 금융세계화의 중심주체이자 그들의 집약지인 글로벌시티(세계도시, Global City) 네트워크로의 안정적 편입이다. 물론 이것은 남한자본주의가 동북아의 새로운 소제국(小帝國)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바람을 뜻하지 않는다. 금융세계화한 세계경제에서 중심국과 (반)주변국간의 경계는 중심국과 (반)주변국을 가르는 국경이 아니라 중심국 내부와 금융세계화에 통합된 (반)주변국의 중심의 내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에 도시와 농촌, 빈국과 부국 사이에 그어졌던 불평등과 배제의 장막이 도시내부와 노동시장 내부의 계층별 인종적 성적 분할선을 타고, 세계적인 차원의 내부적 배제로 침투되어 심화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동북아플랜은 어떤 국민경제적 중심 산업을 지정하고 촉진시키는 좁은 의미의 산업정책이 아닌 한에서, 초민족자본의 동북아 지본사를 국내에 마련된 비즈니스 거점지역에 유치함을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한 산업조정정책을 펼 뿐인데, 이때 중요시되는 산업조정의 방향과 결과는 경제의 서비스화와 금융화이다. 이는 국민경제 발전의 중추를 구성할 기간노동력을 구성함으로써 이들에게 미래의 분배를(일반적인 저임금 강요와 고용안정보장) 약속하는 이전의 억압적 발전기획에서와는 다른 차원의 (이미 분절화 되어 있는 노동시장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초래한다. 서비스화 된 경제에서 요구되는 노동시장의 일반화된 모형은 허리부분이 잘록한 '절구통모형'이다. 노동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이 초고소득을 보장받는 일부 첨단 IT/금융서비스 관련 전문직 종사자들과 겉으로 보기에는 첨단정보화 기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해 보이는 저임금 불안정 직종들로 양극화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IT업체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작업은 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예상하는 것보다 단순 반복적이며, 대대수의 금융관련 종사자들의 작업 역시 체계적인 교육에 의해 획득된 고도의 경제적 분석판단 능력을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업무는 지극히 특수한 상위계층의 몫일뿐이다. 더구나 이들 하층 저임금 직종들 중 비서, 청소용역 관리자, 금융객장직원 등의 노동자들이 직면하게 되는 서비스경제의 특성중의 하나인 '전문화 추세'란 바로 철저한 노동불안정화의 핵심양상중 하나인 외주용역화에 따른 파견, 임시직화이다. 더불어 이들 하층 노동자계층에게 요구되고 허용된 전혀 새롭다 할 수 없는 새로운 일자리는 점차 도시의 외곽에서 '세계도시'로 다시 회귀하게 되는 고소득 자본가들의 사적인 하인노동이다. 세계를 오가며 극한 경쟁의 압력 속에서 불안정하게 활동하는 금융자본이 필요로 하는 단순사무, 관리직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한데, 이들 금융자본이 요구하는 고용형태는 회전율이 높고 고도로 불안정한 자신의 활동만큼이나 신축화 된 고용형태이다. 이들 금융자본과의 한두 번의 거래로 거액의 서비스료를 받는 경영컨설턴트나 국제변호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사무실에서 단순 사무나 여타의 관리업무를 수행하는 임시고용직 노동자들 역시 한두 번의 거래로 고용은 마무리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변화 양극화 현상은 폐쇄적인 고용부문으로의 접근에 어려움이 많은 이민노동자나 고용의 안정성에 상대적으로 낮은 우선순위를 두는 젊은 독신 노동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며, 여성노동자들의 비중의 급속한 증가라는 특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 같은 현상은 금융세계화의 본거지인 뉴욕이나 도쿄, 런던과 같은 대표적인 '세계도시'들에서 기존 중산층의 몰락으로 인한 표준화된 대량소비체계의 해체로 나타나 신축화 된 소량주문상품소비체계를 일반화시킴으로써, 도시의 블록을 기준으로 동일품목의 상품들이 초고가 상품소비시장과 초저가 시장으로 분리되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가장 부유한 나라의 가장 발달된 도시의 중심에 가장 가난하고 철저히 배제된 자들의 게토화 된 공동체가 존재하고, 그 담장너머엔 삶의 어떤 제약도 부과 받지 않은 한없이 자유로운 자들의 마천루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또한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인터넷 시대의 개막이 경제발전의 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었다는 설명과는 달리, 금융세계화의 진행에 따른 현실의 경제활동의 국내적 국제적 분산은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강화된 지역적 집중양상과 배제의 논리를 보인다. 물론 노무현신정부의 설명은 IT기술혁명과 세계화의 성과에 입각한 동북아플랜을 통해 비로소 지역균형발전의 길이 열렸다는 식이다. 물론 정보통신산업에 관한 원론적인 설명에 따르자면 그 같은 지역적 불균형이 발생할리는 만무하다. 기업서비스 산업은 철저하게 첨단 IT기술에 기반 해 있기 때문에 주요대도시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고비용과 과밀를 피하여 입지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기 때문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각종의 기업서비스들이 반드시 소비자 즉 기업에 공간적으로 근접해야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초민족화 된 대규모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기업서비스는 그들의 고객만큼이나 초민족적이고 거대화된 전문기업들에 의해 제공되며, 각각의 영역에 따라 전문화되어있는 만큼 여타의 유관관련 업체들과의 상호근접성이 중요하다. 더군다나 그처럼 전문화 대형화된 서비스산업의 전문인력 들인 국제법률가나 회계사, 전문프로그래머들은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할 수 있는 각종의 위락시설과 쾌적한 생활환경을 중요시한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저지가나 저임금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소적 제약을 뛰어넘어 분산된 경제활동들에 대한 세계적 관리·통제기능의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금융세계화된 세계경제는 날로 세계경제 활동의 운영과 관리에 필요한 고도의 기업서비스활동과 정보통신시설이 집중된 이른바 "세계도시"를 필요로 하며, 세계도시들은 각각의 국민경제의 중심지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경제에 속한 자신들만의 (세계적이고 지역적인)네트워크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네트워크 된 세계도시는 언제나 어느 한 국민국가의 주권에 의해 건설되고 그 안에 위치하면서, 그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무한한 갈라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지역간 균형발전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태는 도시 농촌간의 지역적 격차에서 도시 간의 격차 확대로, 다시 무엇보다도 도시속의 도시들 간의 내부적 격차의 확대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각각의 세계적 지역적 도시적 규모에서 세계화에 따른 주변화과정은 과거 우리가 중심부라 여겨지던 핵심에서 이루어지며, 주변부화 과정이 심화될수록 중심성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그 역의 과정 역시) '도시속의 도시'가 또 '시민 중의 시민'이 서로의 곁에서 한없이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어떤 세계경제도 국가적 영토를 벗어나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금융세계화에 통합된 어떤 국민경제도 더 이상 하나의 국민경제가 아니라는 명제는 전적으로 옳고 되새길만한 말이다. 노무현정부는 이 같은 실상을 덮어둔 채 "동북아 플랜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면서 이를 온갖 화려한 수사로 치장하기에 여념이 없지만, 우리까지 그 장단에 맞출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또 그 같은 정치적 레토릭이 오늘의 한국경제와 민중생존을 오늘에 이르게 한 남한자본주의의 구조적 병폐와 반민중성을 치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서글픔을 느끼는 여유보다는 추상같은 역사적 분노를 키워갈 뿐이다. PSSP
‘노무현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노 대통령은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처음엔‘보잘 것 없는’정치적 자산을 가지고 대선에 뛰어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20~30대 젊은층의 지지와 인터넷 등 대안매체를 통한 ‘지지세력의 자발적 조직화’를 통해 대권을 쥐었다. 그가 젊은 시절부터 지켜온 ‘소신과 원칙’은 낡은 정치에 지친 대중들에게‘어필’했고 때마침 벌어진 대규모 촛불시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는 ‘시운(時運)’도 따랐다. 노 대통령 집권 초기인 현재 ‘노무현식 개혁’의 개념과 방향을 둘러싼 정치·사회세력과 기업, 관료사회, 이해집단의 대립과 타협이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다. 한 때 ‘집권야당’으로 불리던 한나라당은 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져 있고 집권 민주당에서조차 ‘반(反)개혁’ 세력은 ‘인적 청산’의 대상으로 낙인찍혀 ‘퇴출’당하는 처지다. 그동안 한국사회의 주류로 자임해 온 ‘50대·보수세력’은 퇴조하고 있고 수구·보수언론의 영향력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정부 부처들은 새 대통령의 ‘개혁 마인드’에 부합하는 정책을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진보적 대중운동도 사회 변화의 방향을 놓고‘노무현 시대’의 파워집단으로 떠오른 비정부기구(NGO) 는 물론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전국적으로 4%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함에 따라) 기성 정치세력과도 본격적으로 경쟁해야 할 상황이다. 누구나 변화를 모색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이런 점에서 시사적이다. 이 책은 군주(또는 이 말을 일정한 정치세력의 리더나 리딩그룹으로 대신해도 좋을 것이다)가 대중(인민)의 지지를 얻고 이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현실주의적으로(또는 역사와 경험에 근거해)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1513년 메디치가(家)의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친 책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이 책을 꼼꼼히 읽고 그 뜻을 새기면 ‘운명’과 군주의‘능력’이 약속하는 위대함(당시 사분오열돼 주변 열강의 영향력 아래 있던 이탈리아의 통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이 책을 통해 군주의 환심을 사 요직에 등용되길 바랬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약육강식’의 시대에 군주에게 ‘패자(覇者)의 길’을 설파하며 전국을 유랑하던 제자백가(諸家百家)나 책사(策士)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머릿 속에 떠오른다. 마키아벨리는 우선 ‘윤리적 공상’과 ‘엄연한 현실’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 속의 군주를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하지 않는다. 현실 속의 군주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마키아벨리는 한 마디로“군주는 운명의 풍향과 변모하는 상황이 그를 제약함에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거기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바꿀 태세가 되어 있어야”만 권력을 유지·확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군주는 필요하다면 전통적인 윤리에 얽매이지 않고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돼 있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군주는 “많은 무자비한 자들에게 둘러싸여 몰락을 자초할 것이 불가피”하다고 마키아벨리는 경고한다. 마키아벨리는 또 권력을 유지·확대하기 위해서는 “군주는 대중들이 흔히 좋다고 생각하는 성품을 실제 구비할 필요는 없지만, 구비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위장(僞裝)의 중요성을 지적한 셈이다. 군주의 싸움에 대해서는‘한편으론 동물로서(물리적 힘에 의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인간으로서(법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법만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종종 불충분하다는 게 마키아벨리의 판단이다.‘짐승적인’ 방법을 따르기로 한 군주는 ‘사자(힘을 상징)와 여우(지혜를 상징)’의 기질을 함께 익히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의 이같은 권고는 우리들이 흔히 떠올리는 ‘군주의 덕(德)’과는 거리가 있다. 이는 마키아벨리의 덕에 대한 개념이 기독교적 덕이나 유교적인 덕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덕은 고대 로마공화정 당시 덕의 개념에 해당하는 ‘남성다움’ ‘용맹스러움’‘단호함’ 등과 통한다. 덕의 개념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혁신’은 정치적인 행위자에게 요구되는 정치적인 덕이 일반 사적인 생활에서 요구되는 윤리적인 덕과 구별된다는 점을, 곧 정치영역의 독자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흔히‘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른바 ‘마키아벨리즘’의 출발점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군주론』은 군주가 권력을 유지·확대하기 위해 취해야 할 방법을 현실주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4백90년이 지난 지금도 ‘현대의 군주’에게 여전히 새로운‘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 PSSP 참고: 인용 때 원문의 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편의상 첨삭을 했음. 마키아벨리의 덕에 대한 설명은 역자해제를 참고했음.
노무현 정권의 출범과 정책개혁 전망 작성자: 임필수 (사회진보연대 정책국장) 작성일: 2003.1.29 2000년 총선을 어떻게 회고할 수 있나? 김대중정권의 경제개혁과 새로운 수탈체제의 성립 노무현의 등장과 '반창연대' 노무현 지지층의 이질성과 갈등 노무현의 정책개혁 전망 민중운동의 미래
현재의 북한 핵의혹 사태는 여러모로 10년 전 위기 상황과 여러 모로 비교가 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국은 핵무기 등의 대량파괴무기를 생산함으로써 한반도 및 지역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북한이라고 주장하며 북한에게 핵개발 계획을 포기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의 군사적인 위협이야말로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북한의 핵의혹의 해소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연계하여 협상을 시도하고 있다. 1년 반 동안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 속으로 몰아 넣는 대가를 치르며 합의를 이루어 냈음에도, 10년이 지난 지금 동일한 문제가 다시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결국 우리가 마주치게 되는 것은 위기(전쟁)와 협상(평화)의 반복 속에서 지속적으로 출현하는 해결되지 않는 갈등(들)이다. 그런데 지난 10년이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남한 정부의 접근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93년 위기 당시 막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북핵의 선결'을 대북정책의 최우선적인 기조로 삼고, 이를 위해 경제협력을 중단하고 북한에 대한 군사적인 압박을 강화하였다. 더구나 남한이 배제된 가운데 북-미간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하는 것을 제어하고자 이후 협상국면에서도 북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며 대북관계에 있어 주도권을 확보하려 애를 썼다. 한편, 현재의 사태에 대한 남한 정부의 행보는 10년 전과 사뭇 다르다. 김대중 대통령 및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북핵의 선결'이라는 원칙은 유지하되, 이 문제를 남북 간의 경제교류와는 분리하여 다룸으로서 오히려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북-미간의 갈등을 제어하려 하고 있다. 나아가 북-미간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이 사태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이런 남한의 변화된 대응이 10년 전과 다른 해결을 가져 올 수 있을까? 북한의 핵을 둘러싼 한반도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설령 이후 해결을 위한 결정적인 조건을 만들어 내는데 결국 실패한 지난 10년을 뛰어 넘는 해결을 가져 올 것인가? 지속적으로 출현하는 위기가 한반도 민중의 절멸의 가능성마저 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핵의혹이 제기된 배경: 제네바합의의 위기 2003년을 전후하여 제네바합의의 이행 문제를 둘러싸고 북-미간의 갈등이 격화되리라는 것은 예상되었던 일이다. 제네바합의에 따르면, 2003년까지 미국은 북한에 2,000메가와트 경수로를 제공해야 하며, 경수로의 주요 핵심부품의 이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북한은 모든 핵물질에 대한 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공사지연으로 인하여 2003년까지 핵심부품을 인도하기로 한 약속이 지켜질 가망성이 매우 희박해지면서 제네바합의의 이행과 책임방기를 둘러싼 북-미간의 공방이 예상되었다. 미국 정부는 제네바합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고의적으로 '위반'하였다. 하나는 관계정상화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면서 경수로 건설을 실질적으로 지연시킨 것이다. 미국이 제네바합의 이행을 고의적으로 방기한 것은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에너지-식량위기와 김일성 주석 사망 등을 빌미로 '북한붕괴론' 또는 '연착륙론' 등을 적극적으로 유포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북한의 체제가 비교적 안정화되는 모습을 보이자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기반으로 협상과 군사력이라는 이중의 경로로 북한의 군사력을 해체하고 점진적으로 북한의 '시장개혁'을 유도한다는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다.(페리 프로세스) 그런데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상황은 다시 변화하게 된다.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의 제어 혹은 감축을 효과적으로 이루어내는데 실패했고 오히려 협상의 주도권만 북한에게 내주었다고 비판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제네바합의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의제가 불충분 할 뿐 아니라 북한의 실질적인 군사력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져 왔다. 즉, 제네바합의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추가적인 핵의혹의 해소, 미사일 개발 및 수출 문제, 재래식 무기 등과 같은 위협에 대한 북한의 개선을 추구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한-미-일 공조의 강화를 통해 남-북관계, 북-일관계의 진전 속도를 조절하여 대북협상력을 높이고 북한의 개선조치에 대한 보상의 책임을 분산시키려고 하였다. 더구나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 하에 수립된 소위 테러지원국 혹은 불량국가에 대한 보다 강경한 압박과 급격한 변화의 추진이라는 세계적 차원의 전략은 미국의 대북정책 자체를 급속도로 경색시켜 왔다.(악의 축 발언, 선제핵공격 가능성의 언급)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들고 나온 카드가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개발 프로그램'이다. 부시 행정부는 이 문제를 활용하여 제네바합의의 이행을 방기해온 자신의 책임을 북한에게 전가하고, 제네바합의에서 다루지 않는 추가적인 핵문제나 미사일-재래식전력의 투명성 확보 또는 감축요구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을 형성하려 했다. 또한 북한의 핵문제를 가지고 남북관계, 북일관계의 진전을 제어하고 이후 자신의 협상력을 극대화하려 했다. 북한이 북미회담에서 새로운 핵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의혹을 시인했는지, 시인했다면 어떤 의도로 그랬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북한과 미국 측에서 나온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3일 켈리 대북특사가 관련 의혹을 제기하자, 다음 날 북한은 이 문제를 포함하는 새로운 협상을 제기했다고 한다. 이후 북한은 "미국의 가중되는 핵압살 위협에 대처해 우리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 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있다는 것을 말해줬다."며 핵의혹을 시인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리고 미국이 불가침 조약을 통해 북한에 대한 핵공격계획 중단을 포함한 불가침을 법적으로 확약한다면 미국의 핵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사찰과 검증조치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은 과거 일본인 납치의혹을 인정하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일본과의 수교를 추진하려고 했고, 경제개혁조치의 실행 신의주 경제특구, 개성공단의 추진 등 개혁·개방의 실험적 모색 등을 통해 경제재건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는 '발전'의 문제보다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그런데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와 정치적 안정이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특히 북-일 수교에 따른 보상금 차원의 일본의 원조와 일본 자본의 유치는 관건적인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의 압박에 맞서 역으로 이를 활용하여 미국의 불가침에 대한 약속을 통해 안보상의 위협을 해결하고, 추가적인 관계정상화를 이루어내 경제재건 프로그램의 토대를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전략의 이면에는 9·11 테러 이후 가중되는 미국의 압박과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의 다음 표적이 자신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깔려 있다. 따라서 지금의 사태는 단지 새로운 핵 개발 프로그램의 처리를 둘러싼 북-미 양자간의 충돌이 아니라, 제네바합의 이후 지난 10년 간 계속되어 왔던 북-미 관계의 교착상황에서 유지, 온존되어 온 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제네바합의의 '평화와 안전'은 미국에게는 자신의 동아시아에서의 정치·군사적 영향력이 유지되는 한에서의 평화와 안전이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미국이 위협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의 군사력을 협상의 카드로 활용하여 체제의 안전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미국의 패권적 전략으로부터 체제를 방어해야 하는 또 다른 현실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해왔다. 그렇게 위기는 계속 되어 왔던 것이다. 국면의 진전: 대립에서 협상으로? 북-미는 사건의 발발 이후 지금까지 '제네바합의'의 파기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해왔다. 미국은 지금의 문제는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위반하고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시도함으로 발생한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이에 따르면 문제의 해결은 북한이 스스로 잘못된 행동을 중단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핵심적인 부분인 셈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핵의혹을 부정하면서 미국의 주도 하에 중유공급이 중단되자 에너지 생산을 명분으로 동결되었던 핵 시설의 봉인을 해제하고, 원자로 가동을 준비하는 한편, NPT를 탈퇴하였다. 그런데 작년 연말을 거치면서 부시 행정부의 입장이 조금씩 선회하기 시작했다. 1월 15일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북한이 핵계획을 폐기하면 에너지와 식량지원 계획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하루 전날에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1994년 북-미간의 제네바합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합의가 필요하다"며, 원자로가 아닌 다른 형태의 발전소를 건설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나섰다.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북-미 불가침조약'에 대해서도, 북한을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다른 형태의 문서 보장의 가능성도 계속 언급되고 있다. '선(先)핵계획폐기'라는 원칙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이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없을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협상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북핵사태가 협상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지만 이는 성급한 추측이다. 현재 부시 행정부의 전략은 '잠정적으로' 사태의 진전 속도를 제어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1>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핵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엄격한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북한의 어떤 제안에 대해서도 무시하거나 최소한의 대응을 하는 한편, 2>북한의 핵개발이 진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엔이나 IAEA 등의 국제기구나 국가 간의 외교적인 수단을 활용하고, 3>이후 대화나 협상의 가능성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되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으며, 4>새로운 한국 정부 및 일본 등과의 공동의 행보를 재조율하는 4가지 축에서의 대응을 해 왔다. 이는 1월 22일 존 볼튼 미 국무부 차관의 방한 당시 "더 이상의 상황악화를 방지하고 외교적 해결노력을 지원하는 데 최우선 목표를 두기로" 남한 정부와 합의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이 사태의 지연을 중점에 두고 외교적 수단으로 북한을 압박하는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몇 가지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라크 문제에 대한 고려이다. 유엔무기사찰단의 보고서 제출 시한이 27일로 예정되어 있는 상황임에도 국제적으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를 얻을만한 이라크의 '중대한 위반'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이라크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대 여론도 높아져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핵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남한과 일본 및 주변국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려이다. 세계적인 경제 침체 상황에서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통해 이 지역의 새로운 경제활력을 개척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이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만을 고수했을 경우 동맹국 및 협력국과의 마찰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의 진행을 제어하는 가운데 이후 대응책을 모색하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북핵사태가 장기화되는 것 자체가 북한에게는 제재와 비슷한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당장 에너지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고, 남북관계와 북일관계의 진전 역시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코너에 몰린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도 있고, 혹은 북한이 핵시위의 수위를 높인다면 이후 강경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 미국의 계산인 것이다. 남한 정부의 '주도적 역할'의 의미와 한계 이런 상황에서 남한의 역할이 주시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사자는 북핵문제의 해결과정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이러한 의지는 1월 7일 한, 미, 일 삼자의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에서 중재안을 내놓으며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남한 정부는 미국,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EU) 등과 의견을 조율하며 이 안을 다듬어왔으며,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월 27일 평양에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를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임특사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북한을 방문, 북한이 먼저 농축우라늄및 플루토늄 핵 개발을 포기하면 북미 협상 및 에너지·식량 지원을 추진하는 '선(先)조치 후(後)협상 및 지원'의 2단계 중재안을 전달할 방침이다. 특히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북-미 불가침조약에 대해, 부시 미 대통령의 대북 체제보장 서한을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이 보증하는 러시아측 중재안에 이를 미 의회 혹은 유엔 등이 추가적으로 지지·보장하는 '투(two) 트랙' 안전보장 방안을 제시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북한이 핵 의혹을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해소할 경우 중유 등 포괄적인 에너지 지원을 추진하고 대대적인 북한에 대한 투자를 지원하는 방안도 제시할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24일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정동영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특사가 핵의혹 해소에 대한 대가로 '북한판 마셜플랜'을 추진할 계획이 있음을 밝힌 것과 관련하여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북한판 마셜플랜'은 노무현 당선자가 새로운 경제성장의 비전으로 제시한, 남한을 '동북아경제 허브(중심)'로 육성하겠다는 전략과 밀접히 관련이 있다. 이는 한국을 동북아 물류, 금융, 교역의 국제중심지로 키우겠다는 거대한 그림이다. 현재까지 윤곽을 드러낸 노무현 당선자의 구상은, 시베리아의 풍부한 가스전을 남북, 일본, 중국으로 공급하는 파이프 라인 구축, 남북한을 관통하는 철도망 복원을 통한 시베리아 및 중국과의 철도망 연결 등 도로·교통 인프라 구축, 정보통신 네트워크의 구축 등이며 이를 위해 동북아개발은행을 다국적 기구로 창설하여 국제적인 투자를 유지하고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북한판 마셜플랜'이란 바로 이런 연장선상에서 동북아개발은행이 북한 재건에 필요한 특별기금을 조성·관리하는 한편 남북한, 미·일·중·러 등이 컨소시엄 형태로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하여, 북한 사회간접자본과 에너지재건 사업을 추진하는 북한의 경제재건 계획이다. 러시아 역시 동해선 복원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일본 역시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일 수교의 추진과 맞물려 비슷한 구상을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동북아경제 허브 구상 중 핵심적인 부분인 북한을 통과하는 시베리아 가스 파이프라인의 구축은 제네바합의에 의해 약속된 경수로를 대체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되어 왔으며 원자로가 아닌 다른 형태의 에너지 제공을 원하는 부시 행정부의 이해와도 일치한다. 결국 북한에게 보다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단기적으로는 북한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 내 북미협상의 조건을 만들고 장기적으로 '북한의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겠다는 의도이다. 이런 제안에 대해 북한은 어떠한 답을 할 것인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북한 역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외부에서의 자금의 유입을 무엇보다 바라고 있으며 이를 위해 실험적인 개혁·개방을 조심스럽게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으로서도 솔깃한 제안 일 수 있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가 체제의 안전성을 급격하게 훼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이 제안은 북한이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일 수 있다. 더구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인 침체 속에 중심국의 경제 위기를 주변국으로 떠넘기거나 완전히 배제하는 방식으로 기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의 편입은 그 자체로 북한에게 또 다른 재앙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남한 정부의 행보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한계는 미국의 정책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미국과 남한 사이에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지만, 남한의 대북정책이 미국의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강화한다는 전망 하에서 이루어지는 한 그 차이는 같은 전망을 이루기 위한 역할분담 혹은 보완적인 방식에 불과하다. 남한 정부는 여전히 지금의 위기가 북한의 핵의혹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서 미국의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하지 못하며, '한반도의 비핵화',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론적인 입장만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김대중 정부 그리고 노무현 차기 정부가 그리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는, 미국의 군사적 위상과 역할의 변화 없는, 다시 말해 제국주의적 군사력 하의 평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가 언제든지 뒤집힐 수도 있다는 점을 오늘날 우리는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남한 민중운동의 과제 정치적 협상을 통해 현재의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덧붙여 과연 93년 위기의 해결로서 제네바합의가 가져 왔던 '평화'가 무엇이었는지, 왜 다시 동일한 상황이 10년이 지난 후에도 반복되어서 나타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제네바합의가 천명했던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은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유일한 군사적·정치적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태도에 의해 계속해서 위협받아 왔다. 남한 정부가 이에 대해 명확한 반대의 입장을 가지지 않는 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미국의 이해가 달성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절하는 것일 뿐이다. 겉으로, 그리고 10년 전의 위기에 비해 남한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북한 역시 미국을 모방하여 군사적 대결구도를 증폭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크게 높일 뿐만 아니라, 북한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경쟁의 회오리에 몰입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미국의 강압적인 전략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스스로의 최소한의 정당성마저 잃을 위험이 있다. 따라서 지속되는 한반도의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한 남한 민중운동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미국의 선제(핵)공격의 위험성을 지속적으로 폭로하며, 현재 사태의 책임은 제네바합의를 지속적으로 위반하며 한반도의 위기 가능성을 증폭시켜온 미국에게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그리고 미국의 선제(핵)공격 옵션의 포기, 북-미 불가침 조약 체결을 통해 현재의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미국을 비롯하여 남한 정부에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투쟁은 촛불시위와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반전운동의 두 가지의 흐름과 긴밀하게 연계되어야 한다. 현재 촛불시위는 특히 북한의 핵의혹이라는 문제와 결합되면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지만(노무현 당선자의 자제발언 등) 바로 이 점에서 (역으로) 촛불시위가 더욱 급진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북핵문제의 본질이 적극적으로 토론되고 민중적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에서 한반도 평화의 진정한 적이 미국과 동맹자인 한국의 지배계급이라는 점이 분명해 질 것이다. 전쟁광 김정일을 제어해야 한다는 저들의 주장에 대해서 민중들이 전쟁광 부시를 제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맞서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촛불시위는 미국의 패권적·군사주의적 전략을 반대하는 반미-반전투쟁으로 더욱 확장될 것이다. 이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국제적인 반전운동과 맞물리면서 2003년 미국의 패권적 군사주의적 노선을 저지하는 전지구적 전선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작년부터 '이라크에서 또 다른 미선이와 효순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은 호응을 얻어 왔다. 동포의 무참한 죽음에서 출발한 남한 민중들의 분노는 이라크 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비극을 보면서 국제적인 반폭력 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다. 평화는 그것을 염원하는 행위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단지, 전쟁을 조장하는 세력과 제도들, 가공할 전쟁도구들을 제어하기 위한 민중의 권력을 형성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노무현정권이 탄생했다. 인터넷세대의 반란으로까지 불리는 노무현의 당선. 그리고 마치 민주화를 이제야 달성했다는 386들의 축제는 부산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탄생직후 이 땅에서는 또 한 명의 노동자가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이 기괴한 시간의 엇갈림. 다가오는 2003년, 노무현 정권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번 특집에서 임필수는 노무현정권이 열리는 2003년 정세와 민중운동의 대응에 대해 지난 두 달간 사회진보연대의 논의를 모아냈다. 한편 정영섭은 노사정 합의주의로 대표되는 노무현정권의 노동정책을 비판하고 노동운동이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그리고 이소형은 드디어 (준)자를 떼고 본 조직 건설을 준비하고 있는 민중연대의 기간 활동평가와 이후 전망에 대해 간략한 입장을 개진한다.
한국사회 최후의 '유보된 영역' 정치개혁?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만에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집권여당으로부터 당의 발전적 해체 제안이 나오고, 새 정부의 첫 총리 인선을 앞두고 대통령 당선자가 한껏 몸을 낮추어 야당을 찾아가 협조를 구하는 모습이 연출되는 등 16대 대통령 선거 이후 정치권의 모습은 과거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닌게 아니라, 대선 공간을 갈라 치기 했던 두 개의 거대 정당에서는 모두 당 개혁을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당의 체질과 골격을 탈바꿈하는 수준에서의 정당개혁 논의들을 진행중이다. 본격적인 선거 국면이라 볼 수 있는 작년 하반기 이후의 선거지형을 되돌아본다면 정치개혁이라 명명되는 이러한 흐름들의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낙선, 낙천 류의 선거공간 외부에서 벌어졌던 캠페인을 넘어서 노사모를 대표로 대중들의 자발적인 직접행동이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으로 나타났던 것이 16대 대통령 선거였다. 물론 이는 개혁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이는 정치개혁의 필요성이 다른 한편에서 제기되기도 하였다. 유력한 당선 후보의 선거공조가 선거전야가 되어서야 깨어져 나가는 사상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은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거의 최저치에 가까운 수준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무관심이라는 말로 쉽게 정리될 수도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지배정치가 느끼는 위기감은 이렇듯 몇 마디 말로써 손쉽게 정리될 만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며, 이는 집권여당이나 야당, 심지어 이제 막 제도 정치권에 명함을 내밀기 시작한 진보정당에도 공히 해당되는 문제이다. 더 많은 개혁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구호 속에 걸어온 지난 10여년 동안 적지 않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개혁에는 미치지 못했던 '유보된 영역'으로서의 정치개혁이 바야흐로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리고 벌써부터 민중운동 내 일부 세력들은 정치개혁 논의 속에서 자신의 운동전망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의 무망함은 이미 87년 투쟁의 성과를 자신의 개혁이미지의 형성에 완벽하게 동원해낸 노무현과 그의 당선의 주요 동력인 386들의 현재적 상태를 통해 드러났다. 여기서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민주화 이행의 시기'라 재해석된 87년 투쟁 이후의 일련의 정치개혁 차원의 흐름들을 살펴 볼 것이다. 또한 실패한 정부의 집권여당이 이제껏 경험해 본적이 없는 대중동원 방식을 통해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현재의 조건, 그로부터 정치개혁이 제기되는 맥락에 대해 간단히 검토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검토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단 하나인데, 민중운동의 부활, 대중투쟁의 강화와 자유주의적 정치개혁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민주투사, 5공 청산의 주역 노무현? 민중운동의 몰락과 자유주의의 정치적 승리 한국 부르주아 정치에 있어서 87년 6월 투쟁은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수렴되었다. 6월 투쟁 이후 국민투표에 의해 결정된 새 헌법의 채택이 당시까지 제정이래 아홉 번에 이른 헌법개정의 역사상 최초로 여야 간의 합의에 의해 가능했으며, 이로써 직접, 보통 선거에 의한 대통령의 선출이 가능해졌다는 것이 바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노태우 집권 초기인 88년 총선에서 집권여당인 민정당이 국회의석 과반수를 차지하는데 실패하면서 형성된, 이 역시 역사상 최초인 여소야대 국면은 이후의 민주적 이행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있어 상당히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정지지형은 군사정권 하에서 행정부의 시녀로서 기능하던 국회의 기능이 정부에 대한 의회조사권의 발동과 같은 조치들에 의해 일정하게 정상화되는 것으로 비추어 졌으며, 그것이 절정이 5공 청문회와 같은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들이었다. 익히 알고 있듯이 노태우 정권 하의, 개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일련의 조치들은 90년의 삼당합당을 통한 거대여당의 부활로서 막을 내리게 되고, 이로써 민주적 이행의 문을 열어제치며 출범했다고 하는 한국사회 최후의 군부정권인 6공화국은 91년 투쟁의 불씨를 제공하는 것으로써, 즉 반동적 권력재편의 국면을 여는 것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한국사회에 개혁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인 김영삼 정권 시기로 가면, 정치개혁은 급물살을 타게된다. 30년만의 문민정부 수립으로 들썩거렸던 당시를 돌아보면, 정치개혁 차원의 많은 조치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은 문민정부의 정통성 강화와 통치기반의 확립이라는 이름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당시의 일련의 조치들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보자면, 문민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 과거 군사정권 하의 각종 초법적 권력기관들에 대한 개혁의 단행이다. 이 때 군, 검, 경 및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 졌는데, 전두환에 의해 조직된 군대파벌인 하나회를 해체하는 것을 비롯해, 군의 독점적 권한 하에 추진되었던 율곡사업에 대한 국정감사, 안기부법 개정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군사정권의 억압적 통치질서와 분리선을 긋고, 문민정권의 정통성을 획득하고자 했던 이러한 조치들은 상해임시정부로부터 그 연원을 가져오고, 4·19, 5·18을 민중혁명으로 복권시키는 한편에서의 직업을 통해 뒷받침되었다. 부정부패 척결 차원의 조치들도 대통령본인의 재산공개를 시작으로 공직자윤리법 개정 등을 통해 추진되나갔는데, 이의 백미는 정치자금의 투명화, 지하경제의 근절을 명분으로 했던 금융실명제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선거관련 법들의 전반적인 개정이 추진되었는데, 선거비용의 축소, 여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던 비례대표제의 개선 등을 포함하는 선거법의 개정, 국고보조금 중대의 방향으로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골자로 하는 정치자금법의 개정, 지방선거법의 개정으로 지자제 선거를 부활시켰던 것 등이 그 내용이다. 또한 의회정치의 활성화와 정당개혁 차원의 조치들도 빠지지 않았는데,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부터 총무처의 역할을 대폭 축소한다거나 국회의 심의, 의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으로 국회법 개정 등도 추진되었다. 그야말로 개혁의 드라이브라 할 만한 제도적 변화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집권여당에 의해 꼭두새벽에 관광버스를 대절하며 감행되었던 노동법, 안기부 법 날치기 통과, 끊이지 않았던 재벌들에 대한 시혜조치를 둘러싼 시비가 단지 법과 제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관행, 부르주아들의 도덕적 해이로 치부되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태우, 김영삼 정권 당시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87년 투쟁의 성과를 '민주적 이행'이라는 이름 하에 제도정치 안으로 수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의 진전과 군부정치의 종식의 궤적에서 87년 투쟁과 같은 80년대 광범위하게 분출했던 대중들의 투쟁을 삭제해 나가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김영삼 정권 당시 정치개혁 차원에서 금융실명제가 도입되었다는 측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이 정리해고 법제화(96년말 노동법 개악), 개방화조치(94년 우루과이 라운드)등을 통해 이미 김영삼 정권 당시부터 본격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이 문민정부의 정통성 확립 차원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만 설명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추진하기에 반공, 발전, 지역주의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한국의 낡은 정치체제는 그다지 적합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노무현 당선 직후의 수많은 용비어천가들이 노무현에게 부여한 87년 민주투사, 5공 청문회스타라는 칭호는 민중운동의 몰락이 가져온 자유주의 세력의 정치적 승리가 불러온 비극으로 볼 수 있다. 김대중 미완의 개혁과 노무현의 개혁과제, 그리고 정치개혁 새삼스레 재론하지만, 국가의 실패로부터 작은 정부를 구현하고자 했던 신보수주의와는 다르게 정책개혁을 통해 새로운 경제정책과 통치체제를 구축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일컬어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IMF 구제금융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당선과 동시에 정권을 인수받으며 초법적 권한을 가지고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한국경제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체질개선을 위한 본격적인 정책개혁에 착수하였으며 이는 구조조정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축적의 위기에 빠진 자본의 금융적 확장에 조응하는 형태로 한국경제를 재조직하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닌 이러한 정책개혁은 세계적으로 끊임없이 발생하는 계층간, 민족국가간, 인종간, 성별 갈등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사회적 배제와 갈등을 내포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정권 구조조정 과정을 돌아본다면 이러한 사실은 명확한데, 부의 편중과 사회적 양극화에 따른 다양한 갈등들이 항상적으로 사회 문제화되었으며, 이는 집권 초반의 금모으기 류와 같은 국민동원방식으로만 관리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렇듯 근본적인 위기의 치유가 아닌 관리정책으로서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그에 적합한 통치체제 구축이 필수적이며, 이것이 불가능해 졌을 때 위기관리는 더 이상의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김대중 정권 초기를 돌아보자면, 386개혁세력들과 시민운동세력들을 대거 흡수해내는 방식으로 일정하게 신자유주의 통치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듯 해 보였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신자유주의 지지연합의 형성이라 했으며, 이로써 김영삼 문민정부가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개량적 운동세력들에 대한 체제 내로의 포섭이 일정하게 달성되는 것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지연합만으로 성공적인 개혁의 완수는 불가능했는데, 잊혀질만하면 터져나왔던 각종의 게이트나 경제위기 극복의 수혜가 일부 중산층에게로 집중되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이 구조조정 정책의 효과와 지배계급의 정당성에 대한 회복불가능한 불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2001년 10월의 재보선과 2003년 6·13 총선에서 민주당의 참패를 불러왔는데, 이는 집권여당, 김대중식 개혁에 대한 지지철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낮은 투표율을 고려한다면 대중들의 회복되지 않는 삶의 위기가 결합되면서 정치일반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이 어느 때보다 팽배했던 것으로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있어 관건이 실행 능력에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정치적 정당성의 확보와 안정적인 통치체제의 구축은 실로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정치개혁에 있어서의 김대중 정권의 성적표는 역대 정권, 특히 앞서 살펴본 김영삼 정권 당시의 그것과 비교해도 극히 초라한 수준이다. 15대 대선 당시 내걸었던 정치개혁 관련 공약을 보면 자민련과의 공조상황에서 대부분의 내용이 행정부 개혁에 맞추어져 있으며, 실재로 추진된 것들은 시민단체를 앞세운 부패방지법제정이나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 등과 같은 과거청산 류의 개혁입법 제정에 초점이 가 있었다. 이러한 김대중 정권의 비판적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당선된 노무현 정권 정책개혁에 있어 관건은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관리 지향적 정책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대중적 지지기반과 정치세력의 구축을 통해 통치체제의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대중 정권 정책개혁 당시 위기 이전상황으로의 회기에 집중하면서 미쳐 손쓸 수 없었던 영역에 본격적으로 관리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다. 전자에 있어서는 당선 이후 인수위를 통해 쏟아져 나온 각종의 정책과제들을 통해 대강의 윤각은 드러난 셈이다. 예상했듯이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조치의 강화, 여성인력활용에 초점이 맞추어진 여성정책, 사회복지체계의 재조직 등이 여기에 대거 포함되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치영역인데, 각종 분야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에도 미달하는 수준의 개혁처방이 가해진, 가장 낙후된 형태로 남아있던 곳이 바로 여기이다. 현재까지 보여진 노무현 당선자의 정치개혁의 대한 의지는 단호하다. 1월 7일 인수위에서 발표한 10대 국정과제는 애초 8대 과제였던 것이 당선자의 지시에 의해 정치개혁과 과학기술 육성이 추가되는 형태로 수정되었다. 물론 인수위 설치 당시부터 당선자의 집적 지시에 의해 정무분과 산하에 정치개혁연구실을 신설하고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학자 임혁백, 정해구 등을 실장과 연구위원으로 선임한 바 있었다. 인수위 발표에 의하면 정치개혁연구실은 당선자의 국정철학과 공약실현을 뒷받침할 제도개선 방안을 연구, 특히 정당과 선거구제, 정치자금 등 정치관련 제도의 개선안을 만들어 정치권에 제안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 한다. 노무현 정부 정치개혁 전망,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현재적으로 노무현 정권이 추진할 정치개혁 구체적인 상을 예측하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몰락의 핵심 계기가 되었던 각종의 금융비리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화된 형태의 부패방지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 부분은 김대중 정권 집권 말기의 개정된 부패방지법을 세부적으로 보완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며, 대선 당시 공약에서 한나라당과도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부패방지법개정의 맥락에서 실행해 나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정치권 전반의 관리능력을 제고하는 것과 민주당-노무현이 가지는 지역정당 이미지를 벗고 보다 안정적인 정치 세력을 구축하는 것에 있다. 이 역시 김대중 정권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권력 누수현상과 식물국회, 방탄국회를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현재 노무현의 정국구상과 민주, 한나라 양당 개혁특위의 논의 상황을 보자면, 이는 명확한 삼권분립에 기초하여 의회중심의 정치를 실현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 고비용저효율의 정치체계의 주범으로 지목 받고 있는 현재의 정당구조를 혁신하는 것으로 수렴되고 있다. 대선 직후 각 당마다 실시된 각종 토론회 내용이나 개혁특위 논의 상황을 통해 보자면, 정당구조 전반의 혁신이 거론되는데, 주요 방향성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라 할 수 있다. 먼저, 원내정당화를 지향한다는 차원인데, 여기에는 지도체제의 개편 속에서 원내총무의 위상강화, 정책생산 및 합의 기능을 제고하기 위한 위원회 체계의 강화, 확대 등이 해당된다. 두 번째는 선거기능을 중심으로 정당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지구당 폐지 또는 연락사무소 수준으로의 축소, 중앙당의 선거대응능력 제고 및 규모 축소 등이 거론되고 있다. 세 번째는 권위주의적 정당구조를 혁신하는 차원으로 권력집중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지도체제를 변화시키는 것, 상향식 공천의 제도화 등이 검토 중이다. 마지막은 국민참여에 개방적이고 당원중심의 정당형태를 지향하는 것으로 지난 대선에서 실험된 국민경선제의 제도화 또는 미국식 예비경선제의 도입, 진성당원확보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 정도면 거의 혁명적 수준의 정당개혁처럼 보일 수 있으나 우리가 보기에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민주, 한나라 양당의 개혁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치개혁의 필요성에 있어 절실함의 차이는 없을지언정, 강조점도 다르고 양립가능하지 않은 정책들이 분열증 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노무현-민주당의 경우 당선의 실재 동력이었던 386과 20대를 정당개혁을 통해 제도적으로 흡수하는 형태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김대중 정권처럼 이들의 지지와 이탈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상황을 방지하는 형태로 정당체제를 재편하는 것에 정치개혁의 궁극적 목적이 있다 할 것이다. 이는 미국식 양당체계로 가야한다는 거듭되는 노무현의 발언을 통해 확인되는바, 대선 당시의 구도로 보자면 '반창세력'들과 경제위기 상황에서조차도 부의 기득권을 상실해 본 경험이 없는 '안정희구 세력들'을 한나라당과 분할 관리한다는 전략인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김대중 지지세력과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세력에 대한 지지층으로 일정하게 고착화되어온 정치지형을 고려한다면, 안정성의 문제가 있지만 아주 불가능한 경로는 아니다. 물론 노무현 당선에 있어 이러한 지형과는 일정하게 다른 조건, 즉 386들과 인터넷 직접행동이라는 새로운 행동양식을 선보이고 있는 20대의 노무현에 대한 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김대중 정권 당시 386들이 보였던 갈지자걸음이 경제적 실리에 기반한 일시적 지지와 철회의 반복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원하는 보다 확실한 개혁의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은 정치개혁의 전제라 할 수 있다. 대선 당시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지인 월가의 사상검증을 안전하게 통과했을 뿐 아니라, 노골적인 지지선언까지 받아냈던 노무현에게 출발의 조건은 비교적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20대인데, 월드컵-촛불시위-노무현 지지로 이어진 이들의 행동양식에서 자기표현, 문화세대라는 일종의 세대적 동질성 이외에는 이렇다할 정치적 동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386과도 다르게 민주화 투쟁의 경험도, 일시적이나마 금융화의 수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저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세대이며,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전망도 이들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서 여론주도세력이며 여러 측면에서 사회중간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386들의 압도적 지지가 지속될 수 있다면 미국식 양당체제의 모사는 일정하게 가능할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경우 대선 실패 책임론을 둘러싼 당내갈등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정치개혁 방안을 놓고 당권 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으로 쟁점이 옮아가 있는 형국이다. 민주당에 비해 한나라당의 고민은 보다 근본적일 수밖에 없는데, 반공, 발전 전략 속에 유지되어온 보수주의 이념이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망에 적합한 형태로 재정립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한 87년 투쟁을 자신들의 개혁적 이미지의 상징조작에 동원하고 있는 386들로 인해 한나라당에게 덧씌워진, 민주주의를 지체시킨 장본인이라는 혐의를 탈피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서의 대중적 동의를 얻기가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정당개혁은 제왕적 총재, 계파정치로 상징되었던 지도체제를 개편하지 않고서는 여타의 개혁조치들이 대중적 설득력을 얻기가 힘든 상황이고 그만큼 상당한 당내 갈등과 진통의 과정을 동반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현재 진행중인 정치개혁, 정당개혁의 폭과 수위를 결정짓는 것은 2004년 총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노무현-민주당으로서는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집권중반도 넘기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있는 것이고, 한나라당 역시 대선 패배 이후의 쇄신된 당지도력을 검증 받을 수 있는 일차관문인 셈이다. 그런 만큼 정치개혁 논의의 와중에도 구체적 방안과 속도조절을 놓고 양당 모두 당권 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이 첨예한 상황이고, 개혁특위로부터 제안되는 정책들이 다음날이 되면 주요 간부회의에서 철회, 유보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더욱이 개혁특위에서 논의되는 수준의 정당개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적청산, 세대교체 문제가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은 총선결과에 의해서 일정하게 강제적 형태로 정리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쟁점은 선거구제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 선거법 개정에서 첨예하게 형성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호남정당을 벗어나 전국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한 민주당의 중대선거구제, 비례대표제와 한나라당의 현행 소선거구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비례대표제를 도입한다는 방침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예정대로라면 1월 중 국회정치개혁 특위를 통해 국회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선거법 등 일련의 정치관계법의 대폭 개정에 대한 합의를 이끈다는 양당간의 협의가 있었으나, 선거구제 문제의 타협여부에 따라, 일정수준에서의 합의가 충분히 가능한 나머지 쟁점들의 처리 수준을 결정지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총선 전까지 일정수준에서의 정치개혁은 양당간의 합의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 하 민중운동,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정치권 전반이 정치개혁 논의에 당력을 쏟아 붓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 17일에는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10 여 개의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정치개혁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연대'(정치개혁연대)가 출범하였고, 29일에는 여기에 한나라당, 민주당 개혁파 의원 70여명이 가세한 가운데 가칭 '정치개혁추진범국민협의회의' 구성이 합의되었다. 참여연대를 대표로 각종 NGO 수장 급들이 이미 노무현 당선 직후 민주당과 인수위로 흡수되는 것을 보았던 상황에서 이는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이들의 활동 여하에 따라 정당-시민단체로 구성된 안정적인 정치개혁 기구가 국회 내에 신설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긴 시간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배계급의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안정적 지지기반과 통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그야말로 '개혁'적인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사가속화 시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정치개혁 논의에 편승하여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주류화라는 재단 앞에 운동의 성과를 고스란히 바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해서이다. 87년, 91년 대중투쟁의 성과들이 지배계급의 정치적 정당성을 수립하는 것으로 수렴되는 과정에는 항상적으로 정치개혁이 동반되었으며, 이는 언제나 대중투쟁을 억압하는 것으로 결과했다. 더욱이 지금의 상황이 명확히 시민운동세력의 지배체제로의 흡수가 거의 완료되는 시점에 와 있다는 점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조건은 지속적으로 민중운동진영의 정치적, 계급적 이탈을 불러올 것이며, 지난 대선 당시 일부 노동조합 관료들의 투항선언으로 이미 충분히 가능한 조건이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또한 우리는 지난 몇 년간 진보정당과 노동조합간의 실용적 역할분담, 결과적으로는 노동운동의 실리주의를 고착화시키는 형태의 운동방식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다. 정당명부비례제표제의 도입으로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목전에 와 있는 상황에서 지배계급의 정치개혁 논의에 가담하여 현실 가능한 운동의 활로를 모색해 보겠다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구조화시키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더욱이 노무현-민주당의 구상이 386, 20대들에 대한 제도정치로의 수렴을 목적으로 하는 현재 상황에서 지배정치의 정치개혁 논의에 가세하겠다는 것은 이들의 불안정한 삶과 그로부터 나타나는 지배정치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밑불로 던져 넣겠다는 것이다. 지난 김대중 정권 5년 간 민중운동 진영이 벌여온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성과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민중운동의 몰락의 끝을 기어이 보고야 말 것인가.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판단의 기로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