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오전, 강남 도곡동의 타워팰리스 앞에서는 빈곤해결을위한사회연대(준)(이하 빈곤사회연대)의 출범기자회견이 있었다. 한국사회 부의 상징인 타워팰리스, 싯가 30억을 호가한다는 그 주거단지 앞에서 치뤄진 출범기자회견은 타워팰리스의 명성과 그와는 극단적으로 다른 빈곤한 삶의 주체들이 외치는 요구들로 인해 충분한 기사거리가 되었다. 2001년 12월 최옥란열사와 노동사회단체들이 명동성당에서 진행한 '민중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것의 성과를 이어가기 위해 "기본생활권쟁취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현실화를 위한 연석회의(이하 기초법연석회의)라는 연대 단위를 결성하였다. 2002년 하반기 기초법 공대위로 활동하다가 2003년 참여단체를 27개 단체로 확대하고 기초법제도개선 요구, 상담 및 교육, 주간사업 등을 진행하였으며, 2003년 11월 24일부터 12월 3일까지 서울역에서 '빈곤문제 해결과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농성투쟁'을 전개했다. 그후 기초법연석회의는 기간의 활동평가를 통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개선'에 국한되지 않는 활동을 전개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즉, 빈민·장애·주거·노숙·실업·복지등 기존의 각부문별로 나뉘어 빈곤문제에 대응하던 방식의 한계를 넘어서고, 또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개선을 넘어서 부문과 영역을 한정하지 않고 빈곤문제의 전반적인 사안과 근본적인 원인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하에 기초법연석회의는 명칭을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연대(준)'으로 개칭하고 체계를 개편하는 한편 각 영역과 부문의 참여를 확대하였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빈곤문제는 더욱 심각해져가고 있다. 계속되는 생계형 자살과, 360만의 신용불량자, 그리고 134만의 수급자와 그나마 수급권에서도 탈락된 400만에 이르는 사각지대 빈곤계층. 서울에만 3만가구가 넘는 단전단수 가구와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해 병원조차 가지 못하는 체납자들, 52만원의 최저임금으로 점점 더 가난해지는 상황속에서도 항상 해고의 위협에 놓여있는 불안정노동자들. 더이상 빈곤의 문제는 일부계층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으며 사회구성원의 다수를 위협하고 있다. 얼마전 정부는 '참여복지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총선용 선심정책이라는 언론의 비난에 대해 '준비된' 계획이었다고 주장하는 정부의 5개년 계획은 구차하기까지 하다. 빈곤문제의 심각성에 임기응변식으로 제출했던 졸속대책들을 이름만 바꾸거나 기존의 추진계획중이었던 계획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참여복지 5개년 계획은 빈곤원인에 대한 최소한의 접근이나 빈곤규모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근거조차 없이 제출되었다. 또한 이를 추진할만한 예산 확보 계획도 부재한 상황이다. 그러나 '참여복지 5개년 계획'의 의도는 분명하다. '참여'라는 기치아래 다양한 NGO의 포섭과 그 참여에서 배제되어 있는 빈곤대중의 막연한 '기대'와 그 기대에 대한 절망으로 표출되는 분노를 '관리'하는 효과가 그것이다. 빈곤사회연대(준)는 이러한 막연한 '기대'를 걷어내고 복지를 권리로서 요구하고자 한다. 최소한의 생존을 넘어서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제도나 정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빈곤 주체들의 당당한 자기 권리와 요구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 빈곤문제 해결 영역에서의 주체형성은 미약한 상태이다. 대중적 기반을 가진 조직들은 현안투쟁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조직은 대중적 기반이 미약한 상황이다. 이는 조직역량만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본생활권 영역에서의 주체가 거의 전무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운동의 화두로 제기되고 있는 빈곤문제와 이의 각 영역의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지속적인 사업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러한 사업은 한 지역이나 단체적 차원에서 진행하기 어려움이 있다. 빈곤문제 및 기본생활권 영역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와 공동의 투쟁, 교육이 병행되었을 때 권리의식의 확대와 주체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많은 조직들이 빈곤문제 해결을 주요한 과제로 삼고 있으나 구체적인 활동계획은 부재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각 영역의 요구를 모아내고 투쟁의 전선을 만들어 내는 것, 이를 가능하게 하는 연대구조는 여전히 유의미하다. 다양한 부문별, 지역별 단위가 모여 자신의 요구를 표출하고 그를 기반으로 공동의 이해와 요구를 만들어 나가면서 지속적인 투쟁과 교육을 통해 빈곤문제의 주체로서 서게 될 것이다. 또한 빈곤해결과 기본생활권 쟁취를 위한 개인과 단체의 유기적인 결합이 가능한 소통과 연대의 틀을 만들어갈 것이다. 빈곤사회연대(준)는 출범과 함께 다음과 같은 5가지 요구를 내걸었다. 첫째,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기본생활을 보장하기 위하여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라. 둘째, 기초생활보장 취지에 맞게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실질적으로 개혁하라. 세째, 주택의 투기화를 막고,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기본 주거를 보장하라. 네째, 영유아 보육의 공공화, 의료급여 본인부담상한제, 노인 무료요양시설 등 사회복지서비스를 확대하라. 다섯째, 세제, 재정개혁에 박차를 가하여 사회복지재원을 대폭 확대하라. 2004년에는 최저생계비 현실화와 주거권 확보를 중심으로 사회복지서비스, 사회복지예산에 대한 부분까지 포괄하여 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이다. 빈곤사회연대(준)의 발족은 한국사회에서 드러난 빈곤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책임임을 밝히는 비판 선언이며, 노동을 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사회구성원은 최소한의 기본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권리선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PSSP
- 미국의 북한자유법안,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북한 인권 문제가 세계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3월 15일부터 4월 23일까지 열리는 제 60차 유엔인권위원회에서 ‘북한인권규탄결의안’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59차 대회에서도 다루어진 적 있는 북한인권규탄결의안은 이 번에는 더욱 강력한 조치로, 인권위 산하에 ‘북한인권 특별 보고관’을 신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미국과 그의 동맹국들이 매년 한 번씩은 거들먹거리는 북한인권문제이지만, 올해에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유엔인권위에서의 결의안이 결국 미국의 2003년 11월에 입안되어 현재 하원에 상정된 북한자유법안(North Korea Freedom Act of 2003, 이하 NK자유법안) 통과의 도덕적 명분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NK자유법안은 “탈북자 및 북한 강제수용소에 대한 CIA 비밀 보고서 작성, 북한주민에 대한 우선난민지위인정, 대량살상무기정보센터 설립, 탈북지원단체들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 대북방송 강화, 대북협상에서의 인권문제 명시화, 대북경제제재의 지속, 미국원조의 제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들 내용 대부분은 기존의 국제법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공연히 북한 체제 붕괴 및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미국의 대북 인권 문제 쟁점화 전략에 따라 한국에서도 북한인권 문제가 다시금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의 경우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유엔인권위원회 투표에서 기권 할 방침인데, 이를 두고 보수단체들은 한국 정부가 북한의 눈치만 본다며 햇볕정책의 기만성이 드러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고, 자유주의적 단체들 역시 인권 문제는 정치적 사항과는 별개로 논의되어야 한다며 북한인권개선에 한국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기에 앞서 과연 어떠한 맥락에서 북한인권문제가 제기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북한 인권문제의 이슈화는 ‘인권’의 쟁점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 전략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무리 그래도 ‘북한의 인권 상황이 참혹하다면 이를 당장 제기함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겠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 문제를 앞세운 1998년의 미국의 이라크해방법이 2003년의 이라크 전쟁의 명분 중 하나가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3월 2일 있었던 『북한자유법안의 문제점과 시민사회의 대응』토론회의 유정애씨의 발제문에 따르면, NK자유법안은 NED(민주주의를 위한 전국재단)가 배후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NED는 1983년 로널드 레이건 정부 하에서 CIA가 수십 년 동안 하던 역할을 비영리 NGO의 이름을 빌어 공공연히 진행한 단체로, 1980년대에는 사회주의 또는 반미 정부를 교체하기 위해 칠레, 나카라과, 코스타리카, 몽골리아에 수백만 달라를 지원하는가하면, 근래에는 쿠데타 시도를 했던 베네주엘라 반정부그룹과 노동조합에 수십만 달라를 제공하였다. NED의 목표는 사회주의적 혹은 민주 사회주의적 성향이 있는 운동들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NED는 한국의 북한 인권단체들과 관계가 깊다. 북한인권시민연합, 경남대 극동연구소,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북한민주화운동본부는 NED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으며, 특히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경우 매년 NED의 재정지원 아래 북한 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를 주도적으로 주최함으로서 NED의 국제회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회의의 참가자들이 NK자유법안의 입안을 주도한 북한자유연합, 북한인권미국위원회 결성의 주축이 되었다, 물론 이들 단체의 중심 멤버들이 워싱턴의 매파들이라는 점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NK자유법안은 매년 1억 4천만 달러에 이르는 예산을 책정해 놓고 있으며, 이 중 상당 부분은 탈북지원, 대북방송, 북한인권단체 들에게 지원될 예정이다. 즉 NED가 지원하던 재정을 좀 더 확대하고, 인권을 명분으로 한 대북 봉쇄 강화, 북한 정권 붕괴라는 NED의 전략이 미 정부의 대북전략의 일반원칙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과 비젼을 공유하는 NED의 NK자유법안 식의 대북전략은 점차 그 세를 확대해나가고 있으며, 법안 역시 약간의 수정을 거치겠지만 국회를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NK자유법안을 추진한 단체들, 그리고 법안이 목표로 하는 바를 보더라도 이 법안이 미국 네오콘의 대북전략의 하나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또한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추진되고 있는 북한인권과 관련한 결의안 역시 미국의 이러한 전략에서 한 치도 벗어나 있지 않다. 당장 유엔인권위의 논의에서 북한인권 악화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인 미국의 장기간에 걸친 경제봉쇄에 대한 논의를 제외한 것만 보아도 그러하다. 제국주의의 인권 향상 방법은 ‘미국식 정부’, ‘미국에 순종하는 정부’를 세워내는 것이다. NED가 목표로 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실천이 결국, 반미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이었듯이 말이다. 우리는 현재 북한인권을 제국의 논리에서 바라 볼 것이 아니라, 민중의 논리, 한반도 인권과 평화의 논리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한반도의 인권은 북한에 대한 봉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질서 재편을 거부하고, 한반도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민중들에 의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나갈 때 향상 가능할 것이다.PSSP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Ⅰ.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2004년 국민기초생활보장사업 주요 변경내용 Ⅱ. 급여 신청과 조사 1. 수급권 신청 2. 조사 3. 급여의 신청 Ⅲ. 수급자 선정기준 1. 보장의 단위 Ⅳ. 소득인정액 1. 수급자 선정기준 2. 소득조사 3. 재산조사 Ⅳ. 부양의무자 1. 부양의무자 기준 2. 부양의무자 조사 Ⅴ. 수급권자 범위의 특례 1. 수급권자 재산범위의 특례 2. 부양의무자기준 특례에 따른 수급권자 범위의 특례 3. 개인단위 보장에 따른 수급권자 범위의 특례 4. 타 법률에 의한 수급권자 범위의 특례 5. 기타 수급권자 범위의 특례 Ⅵ. 급여의 실시 1. 급여의 개요. 2. 생계급여 3. 주거급여 4. 교육급여 5. 해산급여 6. 장제급여 Ⅶ. 보장시설 1. 보장시설의 의미 2. 보장시설의 범위 3. 보장시설의 장의 의무 4. 보장시설수급자의 법상 지위 5. 보장시설 수급자 선정기준 6. 보장시설 수급(권)자에 대한 조사 및 관리 7. 보장시설수급자에 대한 급여 8. 보장시설의 장의 의무 Ⅷ. 사회취약계층 특별보호대책 1.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취약계층에 대한 특별보호 2. 지역사회 자원활용을 통한 민관 연계보호체계 운영방안 Ⅸ. 부록 1. 2004년도 국민기초생활보장 예산현황 2. 기초생활보장급여(344-3211) 국고보조금 현황 3. 희귀난치성질환자 목록(74개질환) 4. 국민기초생활보장에 대한 각종 감면제도 5. 저소득 영세민에 대한 전세자금 대여사업 6. 국민기초생활보장 업무 관련 홈페이지 의료급여제도의 이해 장애인복지정책 안내 사회보장제도와 빈곤문제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과제 (자료) 빈곤문제해결을 위한 사회연대(준) 제안서
노동자계급 내부의 단결과 연대로! - 고 박일수 동지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꼬리를 무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 죽음‘들’에 무뎌지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살을 에는 자본의 탄압보다 두려운 것은, 이겨낼 생각조차 품지 못하는 사람들의 온순함이다. 박일수. 50세.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인터기업’ 노동자. 노조의 ‘노’자만 꺼내도 서슬 퍼런 해고가 현실이 되는 침묵의 공장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하청노동자 임금체불 진정서 한번 내보겠다고 연판장을 돌리던 이. 원하청 노동자 하나하나 만나가며 연대를 호소하고 투쟁을 조직했던 이. 심장의 피 꺼내 쓴 듯한 울림 깊은 유서를 A4용지 석 장에 빼곡이 적어 집에 한 통, 품속에 한 통. 울산에선 부리나케 분신대책위가 꾸려졌다. 유일한 유족인 딸로부터 위임장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검을 마친 뒤 현대중공업 정문 바로 앞 울산대병원에 빈소가 차려졌다. 현대중공업노조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짙다”면서 대책위 참가를 거부했다. 이어 “고 박일수 씨는 현대중공업은 물론, 현대중공업 협력회사인 인터기업과도 근로계약관계에 있지 않는 사람”임을 민주노총 울산본부에 친절히 알려왔다. 이도 모자라 “현중노조의 요구가 무시되고 특정의 목적을 위하여 현 사태를 악용할 경우, 민주노총은 물론 울산지역의 제 노동단체와의 모든 관계를 신중히 재검토할 것임을 천명”까지 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노동자들은 크레인 고공농성을 시도하다 개처럼 두들겨 맞고 경찰에 넘겨졌다. 그 시각 정문 밖에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이 공장진입을 시도하다 잡초처럼 짓이겨졌다. 여성도, 시의원도 예외가 없었다. 유족은 검은색 소나타에 실려 납치될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납치범 중 한 명은 현대중공업노조 이 아무개 기획부장이었다. 경찰도 찾지 못했던 고인의 이복동생이 돌연 등장했다. 이건 희극인가, 비극인가. 유서는 차라리 비정규직을 둘러싼 21세기의 야만을 폭로하는 한편의 신랄한 고발장이었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존엄성은 개만도 못한 처지…암울한 하청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해 줄 곳은 아무 곳도 없다…대한민국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억울함을 노동부에 고발해봐야 부당해고비 몇 푼 받으면 끝난다…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피눈물나는 심정으로 울분을 달랬어야 한다…현대 중공업 공장 사내복지 시설을 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식당, 샤워실, 화장실, 커피자판기 뿐…이런 현실이 세상에 밝혀지고 대수술이 없는 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희망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현대어용노조는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조이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부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진실 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고인의 분노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인상된 시급 640원을 소급 지급해달라고 요구했다가 하청업체 하나가 통째로 날라 가는 곳이 현대중공업이다. 원청노동자가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샤워실에 따뜻한 물과 수건조차 나오지 않는 곳이 현대중공업이다. 자본이 쳐놓은 차별의 그물은 이렇듯 촘촘하다. 하나하나 셀 수조차 없는 일상적 차별에서, 정규직 노조라면 상상도 못할 부당노동행위까지, 자본은 비정규직을 인간 이하로 대우했다. 위험수위를 넘은 차별은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진행됐다.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이 지난해 발간한 <금속산업 사내하청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실태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현재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수는 모두 14,050명이다. 2002년 1월 사내 하청노동자가 9,128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9개월만에 5천여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이같은 추세라면 1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훨씬 더 많은 숫자의 하청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같은 현상이 비단 현대중공업만이 아닌 모든 직종과 산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정규직 폭증은 철저한 이윤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자본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을 선택했다. 자연스레 노동통제 및 노동강도도 직영노동자보다 가혹해졌다. 심지어 현대중공업은 다른 사내 하청업체로 이직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출입증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출입증제도는 사내하청 노동자 관리를 위한 전산망을 통해 이뤄지고 있으며, 다른 회사뿐만 아니라 사업장, 나아가 지역차원의 이동도 통제하고 있다. 노조결성을 시도했거나, 노조에 관심을 보이거나, 노조에 적극적인 노동자의 취업을 막기 위한 블랙리스트도 횡행한다. 현대중공업은 하청업체별 인력관리를 위해 구축된 통합전산시스템을 원하청업체가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현재 구성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원 대부분은 노조결성 직후 해고됐고, 지금까지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다. 정부는 잇따르는 비정규직의 죽음과, 이 죽음을 불러온 사태악화의 주범이란 역사의 판결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이번 사건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분명히 기록하고자 한다. 고 박일수 동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차 가해자는 분명 자본과 정권이다. 노무현 정부는 취임 1년 만에 비정규노동자 2명의 생목숨을 앗아간 살인정권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보다 시선을 돌려야 할 곳은 바로 우리 스스로다. 고인이 겨눈 비판의 화살은 정권과 자본을 향한 것이었지만, 우리의 안이한 인식과 불철저한 연대도 죽음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정규직노조 이야기는 아예 말자. 그들이 ‘비정규 투사’가 되길 기대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사회주의 언론’으로 거듭나길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보수정치인들까지 ‘차별 철폐’를 심심찮게 외치고 있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민주노조 진영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비정규 사업을 ‘제1과제’로 삼아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지만, 아직 한참 부족했다. 각종 정책과 제도개선안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그 투쟁을 주도하고 이끌어야 할 투쟁주체는 아직도 형성되지 않았다. 비정규 투쟁주체 형성의 난망함이 그들의 불안정한 신분에 있음을 깨닫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정규직노조의 과제로 규정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임단협 말기 슬그머니 양보할 수 있는 ‘카드’ 이상이 아니지 않는가. 혹 그렇다면 이는 차별에 멍든 비정규 노동자들의 눈물 젖은 얼굴을 다시 한번 가격하는 것은 아닌가. 활동가라면 누구나 성경처럼 외우고 있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단결과 연대’는 공염불에 머무르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은 아직도 ‘노조운동의 현실을 모르는 학구파들의 푸념’ 이상이 아닌가. 사람이 몇씩 죽어나가도 도무지 움직일 줄 모르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가 아닌가. 다시 반문해야 한다. 고 박일수 동지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번 싸움에서 무엇보다 역점을 둬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열과 반목을 딛는 일이다.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기획하고 수행해야 한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급기야 오만을 넘어 방자함에 이른 자본과 정권은 사태의 본질을 노동계급 내부의 갈등으로 치환해 해석할 것이다. 계급 내부의 약한 고리를 물고늘어지며 하나의 대오가 형성되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현대중공업노조의 이해할 수 없는(혹은 충분히 예상됐던) 반응은 그들에게 참으로 요리하기 좋은 호재임이 틀림없다. 단언컨대, 지금 싸움의 핵심은 계급 내부의 단결과 연대, 그 단순한 진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분명한 이 명제가 실현되지 않을 때 닥쳐올 불행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지경임을 확신한다. 죽음의 행렬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고, 그 때마다 분노에 몸을 떨던 노동자는 그 분노만큼의 절망에 빠져들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패륜적인 의혹처럼 어둠의 세력이 죽음을 부추겨서도 아니며, 현실의 노동운동이 무능해서도 아니다. 문제는 모두에게 닥친 노동운동의 위기 일반이다. 여기에서 비롯된 맹목적인 전투성 혹은 허울좋은 투항에 경도된 노동운동의 현실이다. 좌표를 상실한 노동운동은 계급대중을 두 가지 길로 내몰았다. 하나는 죽음도 불사한 극단적 항거이며, 다른 하나는 당장의 안락함이 보장되는 투항이다. 그칠 줄 모르는 자본의 공세와 융단폭격 속에 이 땅 노동자는 빈사상태에 놓였다. 폭격은 때론 ‘비정규직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고, 때론 ‘손배?가압류’라는 꼬리표를 달거나 ‘해고’라는 얼굴로 나타났다.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은 노조결성도 시도해보고, 수배생활을 견디고, 크레인 농성도 해보지만 단단한 자본의 벽 앞에 절망하고 만다. ‘사회적 합의’를 미끼로 달콤한 미소를 보내는 자본 앞에, 어떤 이들은 쉽게 투항한다. 먼 앞날의 효과보다 눈앞의 성과에 만족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들은 차라리 자본의 품안으로 들어간다. 협조와 타협을 앞세우고, 투쟁의 준비를 내세운다. 공장 안에 틀어박혀 고전적인 임단협 투쟁에 안주하기도 하고, ‘사회문제 해결’에 목소리 높이며 정작 문제의 근원은 외면한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투항은 명분과 실리 모두를 갖춘 것으로 포장된다. 보다 건강한 이들은 차마 투항하지 못한 채 끝간데 없는 싸움을 택하지만, 노동운동의 위기 속에 활로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죽음을 택한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명제 중 하나인 ‘노동자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통한 비정규직 철폐를 향해 총진군해야 한다. 정규직노동자의 인식을 전환하기 위한 장?단기적 계획을 수립하고, 강령 제?개정 운동을 통해 비정규 차별철폐의 정신을 담는 등 조직문화 혁신사업을 펼쳐야 한다. 임단협 투쟁에서부터 원하청 공동투쟁을 활성화해 민주노조 운동의 진일보를 이뤄내야 한다. 절망을 부르는 투항주의를 극복하고, 근본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의 정방향을 걸어야 한다. 다시 한번 고 박일수 동지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PSSP
IMF 외환위기 당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던 실업의 문제는 정부의 실업대책 마련 이후 실업률의 감소와 함께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당시 쏟아져 나온 실업자 층이 안정적인 일자리로 흡수되는 방식으로 실업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주 노동시간 1시간 이상이면 취업자로 간주되고, 실망실업자(일자리가 없어 아예 취업을 단념)는 통계에서 누락되는 숫자놀음에 증발해버린 실업자 층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2004년 들어 다시 실업률이 급증하고 있다. 전체 실업률은 3.4%, 청년실업률은 8.9%에 육박한다. 실업률 통계자료의 특징은 신규실업자의 급증과 청년실업, 여성, 고령자 층 실업률의 급증과, 구직기간이 짧은 실업자의 높은 비중으로 요약된다.{{ 청년 실업률 - 15세 이상 29세 이하의 경제활동인구; 2003년 8.9%로 전년대비 0.9%증가, 여성 실업률 - 2003년 3.1%로 전년대비 0.6%증가, 고령자층 실업률 - 55세 이상 64세 이하의 경제활동인구; 2003년 2.4%로 전년대비 0.3% 증가 구직기간 3개월, 6개월, 9개월, 12개월 이상으로 분류했을 때, 구직기간 3개월 미만인 실업자수는 49만명으로 전체 구직자의 63% 이상을 차지, 이러한 단기구직자는 98-99년 최정점에 달했다가 이후 감소세 지속되다 2003년 다시 급증) -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 이를 통해 정부는 고임금 구조로 인한 신규고용창출 여력이 부족한 상황을 지적하고, 여성과 고령자 층, 장애인 등의 잠재적 인력의 활동방안이 시급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현재 실업은 불안정한 일자리와 소득으로 인한 단기 취업과 실업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노동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양상으로 해석된다. 강제퇴출 노동자가 급증하고 부부 맞벌이가 필수적이며 심지어 온 가족이 일터로 나서야 빈곤을 겨우 벗어나는 현실 속에서, 여성, 고령자층, 장애인 등의 주변 노동력이 대거 실업-반실업 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실업률이 잠시 주춤했던 것은 산업자본의 자태변환이 동반한 불안정한 일자리 구조 속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실업-반(半)실업의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소비시장 활성화와 고용창출의 조절문제를 남한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해왔으며, 지금의 실업률 확대, 내수침체-소비위축 등의 위기 상황이 어디서 기인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운동의 자태변환과 그것이 유발한 고용구조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실업의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2월 8일 '노사정위원회'가 내놓은 '일자리 만들기 사회 협약'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권의 노동정책의 방향성을 극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고용없는 성장' 속에서의 성장을 통한 고용창출이라는 모순 정부는 2004년 경제운영계획에서 일자리 창출을 최대화두로 제시하며 기업에 대한 투자확대와 서비스산업에 대한 지원확대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동시에 재계는 대기업 임금동결과 안정적 노사관계 구축,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한 칠레 FTA비준 등을 촉구했고, 이는 결국, 지난 2월 8일 노사정위원회의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자리 협약 안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협약이 아니다. 외자유치, 신규투자 활성화를 위한 노사관계의 변화라는 노사관계선진화방안(2003년 9월 노동부)의 연장선상에서 비정규직 전면 확대와 임금동결, 노동조합 무력화를 실질화하기 위한 방안일 따름이다. 애초부터 노무현정부에게 일자리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민생의 문제'로 설정되지 않았으며, 일자리 문제 해결의 구호는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마무리 단계인 노동 유연화 전략의 완성을 포장하는 허울 좋은 수사에 불과했다.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의해 남한 사회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정착과 철수를 보장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국가(BUY KOREA!)로의 체질개선에 착수하였다. 이제 노무현 정부에게는 각종 개방화, 자유화 조치의 체결을 앞당기고 외자유치를 실제로 해내는 문제, 즉, 금융화된 남한사회를 성장의 국면으로 끌어올리는 과제가 남겨지게 된 것이다. 이 성장의 과제 앞에 정부가 붙이는 수사는 '고용 없는'이다. KDI를 비롯한 경제연구원들은 일제히 2004년 경제성장률을 5% 이상으로 전망하며 '고용 없는 성장'을 예고했다. 이들은 경제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원인을 기업이 성장을 위한 생산성 증대를 비용(임금) 절감에서 꾀한다는 것으로 지적하고, 한국사회의 고임금 구조로 인해 제조업 공장이 해외로 떠나간다며 '산업공동화' 현상을 우려했다. 그러나, ‘고용없는 성장’의 다른 표현은 ‘고용 파괴적인 자본축적’이다. (산업)자본은 이윤율의 저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물질적 팽창보다는 고도금융을 통한 잉여가치의 분배기술을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실제로 산업자본은 세계적 수준에서 강제되는 금융자유화와 탈규제에 의해 가능해진 금융설계기법 덕분에, 고용을 새로 창출하는 신규투자를 행하지 않고도 국가경계를 넘어서는 인수합병을 통해 기대이상의 수익을 창출했다. 그리고 기관투자자들은 주식차익, 배당금을 노리고 고용파괴적인 구조조정을 강요한다. 또한, 생산기술과 노동통제 전략은 노동 절약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IT산업의 증대, 기술 혁신으로 인한 고용축소와 금융거래 등의 산업을 뒷받침하는 서비스분야의 확대(하인노동)는 저임금과 일자리의 불안정함을 불러온다. 이 고용 파괴적인 구조조정은 파견, 하청, 계약·임시직 등 각종 비정규직의 확대와 산업연수생 제도 등 각종 변형근로의 형태 등을 개발하여 노동에 대한 관리, 통제를 확장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의 금융화가 남한 사회에서 내수침체, 소비시장의 위축이라는 위기 상황으로 이어지자, 정부는 국내신규투자 확장을 통한 소비시장의 활성화를 과제로 삼게 된다. 김대중 정부가 카드 발행 확대, 벤처 육성 등으로 소비시장을 활성화하고 투자심리를 자극하여 금융자본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면, 이러한 거품 붕괴 이후 결과로서 신용불량자 대거 양산, 투자 심리의 위축 등이 드러나는 현재의 조건을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 이에 대해 정부가 내린 답은 국내신규투자 활성화와, 사실상 반(半)실업 상태에 있는 불안정한 노동자 전반의 환상을 작동시켜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길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서 신규투자의 걸림돌이 되는 '아직 덜' 유연한 노동을 확실하게 제압하고 자살과 분신으로 항거할 만큼 강력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원천 봉쇄해나가는 한편, 실업구제책인양 불안정한 일자리를 베풀고 정규직으로의 진입에 대한 환상을 유포는 가운데, 카드규제를 완화하는 등, 노동자 민중을 기만하는 시책을 펼칠 것이다. 2004년 7월부터 전면 실시되는 주5일제 도입에 앞서 서둘러 체결된 '일자리 협약'은 결국 노동 유연화의 법제화, 노동자투쟁에 대한 판정승으로 점철된 수많은 국가들의 선례를 따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겠다는 고용 파괴적인 안이며,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지금껏 추진되었던 구조조정을 완성하고자 하는 노골적 의도를 드러내는 안인 것이다. '일자리' 통제의 일자리 협약 일자리 협약안의 출발점은, '남한 경제의 위기에 대한 극복방안의 마련'에 있다.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협약안은 전문에서 내수부진, 투자감소 등의 어려운 조건과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가 감소하는 상황, 산업공동화와 노동시장 양극화, 청년실업 증가의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협약을 체결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언뜻, 이는 고용창출이 어려운 경제적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일자리 창출을 모색하자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협약안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여 기업의 투자를 촉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한다. 기업에 대한 규제를 획기적으로 완화하고 기업에 대한 조세 및 금융지원으로 기업활동을 지원하여 일자리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노동계는 일자리 만들기 및 임금격차 완화를 위해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높은 부문에 대해 향후 2년 간 임금안정에 협력하고, 경영계는 투자확대를 통해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고용조정을 최대한 자제하며, 정부는 기업규제 완화 및 사회 안전망 확충에 노력한다는 것이 일자리 협약의 주된 내용이다. 협약안은 일자리창출이라는 구호와는 상호모순되는 명제들로부터 이루어져있다. 첫째,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여 기업의 투자를 촉진한다는 조항의 내용은, 고용창출을 위해서는 기업투자가 활성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현재 기업활동의 자유를 제약하는 조건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조세 및 금융지원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업투자의 활성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는 것은, '인력 운용의 효율화와 유연성의 확대'이다. 고용 없는 성장의 원인으로 기업들의 비용절감을 위한 고용의 축소를 스스로 지적한 바 있는 상황에서, 기업투자 핵심제한요소를 노동의 경직성으로 보는 것은, 일자리의 실질적 창출에 정부는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또한,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를 위해 원스톱(one-stop)서비스 등의 각종 지원을 강화한다는 것은, 고용의무, 관세 등의 의무 등을 책임지지 않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단기적 투기를 보장하고 그로 인한 고용-경제구조의 혼란을 확장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둘째, 고용안정과 격차완화를 통해 성장기반을 확충한다는 조항은,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동결과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 안전망 구축을 통한 제도화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업에게는 인위적인 고용조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비정규직을 '불합리하게' 차별하지 않는 등의 고용안정을 위한 노력을 '적당히' 기울이라고 권고하는 대신, 노동계는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높은 부문에 대해서 향후 2년 간 임금안정에 협력하라는 식이다. 이러한 모호한 규정은 향후 성장론에 입각한 기업의 입장을 철저히 옹호하는 형태로 나아갈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과 저소득근로자에 관한 문제를 기업-고용의 차원에서 언급하지 않고, 정부의 사회 안전망 확충(자활근로, 직업훈련, 취업지원사업 강화)으로 치환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해결의 근본방향을 빗겨가는 것이다. 셋째, 취업애로계층에 대한 일자리 만들기 시책을 강화한다는 조항에서 공공, 복지 , 사회서비스 분야의 일자리를 확대 방침을 밝혔으나, 이는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정부가 내놓은 허구적 실업대책(공공근로 확대, 벤처 육성)과 같은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청년, 여성, 고령자 층에 대한 취업지원과 교육확대 또한 근본적인 실업대책이라 할 수 없으며 특히, 임금 피크제 도입을 통한 청년층 고용확대는 정규직 임금노동자를 발목 잡는 빌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넷째, 일자리 만들기를 지원하기 위하여 노사관계 안정에 노력한다는 조항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투명경영을 통한 노사동반자 관계 정립보다는, 법과 원칙 대화와 타협이라는 노사문화의 정착이라는 지점이다. 앞서의 조항을 준수하는 것이 대화와 타협의 전제라고 했을 때,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는 그 자체로 원칙을 거스르는 엄격한 법 집행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다섯째, 이 사회협약을 현실화하기 위해 단체협약에 충실히 반영하고 입법한다는 것은 이 협약을 그 자체로 노사간의 대화의 전제이자 상호평가의 준거로 삼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앞으로 노동자들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기업의 투자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파업 투쟁을 벌이지 않을 것을 약속해야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쯤에서 노사정위원회에서 제출한 일자리 협약안은 결코 일자리 창출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으며, 기업투자제한, 외자유치를 가로막는 노동자들의 임금구조를 개혁하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저항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선전포고에 다름 아님이 확인된다. 협약안의 체결 이후, 재계와 언론은, 일자리협약에 제시된 임금 피크제 도입의 기준과 기업투자환경 조성의 기준과 구체적 대책이 분명하지 않다며, 실효성 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협약안 체결에 합의한 한국노총은, 협약의 확실한 실천을 요구하며 환영하고 나섰다. 그러나 협약안의 실효성 여부에 초점이 맞춰진 이러한 입장들은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비정규직이라도 일자리를 대폭 늘리겠다'는 식의 발언을 지지하고, 파견근로의 영역을 대폭 확대하는 것을 장려하고, 향후 구체적 법안 수립의 과정에서 임금삭감의 수치와 임금 피크제 도입 기준 등에 대한 논쟁의 근거가 될 따름이다. 한편, 민주노총은 노동계의 입장을 반영하는 과정이 삭제된 채 졸속적으로 추진된 이 안은 구체적인 노동의 조건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있는 정규직 임금억제정책이라며 비판에 나섰다. 그러나 만약,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구조마련, 노사정간 의무의 성실한 이행이라는 운동의 형태를 우선시하여 정부와의 협의테이블에서 일자리협약의 조언자, 조력자라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하위파트너로서 자신을 위치 짓는다면, 노동의 권리를 협상테이블에 가두는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현재의 실업의 근본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의 실업의 문제라는 인식 틀을 수용한 채, 요구적 수준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언급과, 고용친화를 주장한다면 성장을 저해하는 안티 세력으로 전락하거나, 비정규직의 수치, 고용친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사-정의 숫자놀음에 놀아나는 수세적인 타협의 길 즉, 노동운동의 후퇴라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 정부의 노동 유연화와 노동통제 전략, 일자리 협약안에 대한 단호한 비판이 필요하다. 기업의 신규투자 감소는 비싼 노동력, 즉 성장에 협력하지 않는 노동자들에 의해 발생하였는가?, 정규직 노동자가 높은 임금을 받으며 자리를 꿰차고 노동귀족 행세를 하는 집단 이기주의 세력이기 때문에,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설움 속에서 비참하게 노동하는가? 노무현 정부의 일자리 협약에 대한 태도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무엇으로 마련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고용 파괴적인 자본축적'이라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이끄는 노동통제의 전략에 대해 한치라도 동조와 타협의 움직임을 보인다면 임금, 고용형태가 불안정한 상황-반실업 상태에 노출되어 스스로의 삶을 계획하고 통제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뿐이다.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분노와 불만마저 갈갈이 해체당하는 실업-반실업 노동자의 확대방안에 대해 기존의 노동자운동은 무엇을 해야하며, 위계화로 분화된 대중운동은 무엇을 쟁점으로 연대를 확장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모색되어야 한다. PSSP
세계사회포럼의 미래는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진 문제이다. 왜냐하면, 세계사회포럼을 둘러싼 많은 논의들은 세계사회포럼 그 자체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계사회포럼의 기반이 되고 있는 전 세계의 사회운동들, 대중운동들 자체와 이들 사이의 연대와 교통,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맞선 전 세계 인민들의 투쟁에 관한 전망들이 이 질문에 반영된다. 하지만 우리는 당연히 정해진 답을 내어놓을 수는 없다. 이 글은 세계사회포럼의 전망을 둘러싼 쟁점들을 살펴보고, 우리 운동이 이후 더욱 고민해야 하는 지점들을 던지기 위한 것이다. 이 글은 사회진보연대가 지난 해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세계사회운동들의 문제의식을 검토하려 했던 맥락과 연관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월간사회진보연대 통권 37호, 2003년 7·8월 합본호에 실린 특집 [신자유주의와 세계사회운동]을 참조하길 바란다. 세계사회포럼의 형성과 진행 1999년 WTO 각료회의를 중단시킨 시애틀 투쟁을 기점으로 세계적으로 확산된 투쟁의 방식은 주요한 국제회의에 대규모 대중을 동원하고,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WTO 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라는 구호 아래 모인 운동주체들은 각각의 주제, 부문, 지역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맞서 투쟁해왔고, 다양한 참가 주제만큼이나 다양한 쟁점과 주장 또한 존재했다. 심지어 어떤 주장들은 자신의 이해에 갇혀 다른 것들과 상호 충돌하기도 했다(시애틀 투쟁에서 중국과 멕시코의 WTO 가입을 막기 위해 WTO 각료회의를 반대했던 미국의 AFL-CIO는 그 단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저항의 흐름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사회포럼을 낳았다. 세계사회포럼은 이 다양한 운동들이 서로 다른 경험들을 교류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면서 공통의 인식을 확보하는데 기여했다. 이제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는 다양한 운동들은 성별, 인종, 직업, 지역, 성적 지향, 장애 유무 등 여러 차이에 따른 각각의 운동들이 요구하는 권리가 상호 모순되거나 배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와 전쟁을 반대하는 공통의 지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사회포럼을 통해 운동들이 이런 지반을 만들어온 과정은 그 이전의 운동들(20세기 초반의 노동자운동과 정당운동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신사회운동이라 불리웠던 운동들)의 시도와는 매우 달랐다. 세계사회포럼은 공동의 강령이나 단일한 요구도, 어떤 총괄적인 상부구조도 만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세계사회포럼은 그 자체로 어떤 단일하고 특정한 입장을 대변하는 기구나 조직이 아니며, 또한 세계사회포럼을 대표할 수 있는 체계 또는 지도부도 두지 않는다. 세계사회포럼은 참가하는 단체와 운동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참가자들 또한 이를 존중해야 한다. 그리하여 세계사회포럼은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유일한 슬로건 하에서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지배 그리고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들에게 개방된 공간이다. 이전의 많은 운동들의 시도와 구별되는 세계사회포럼의 이러한 특징은 역사적이고 정세적인 이유에서 기인한다.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는 운동들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이 다양한 경향이나 스펙트럼을 몇몇의 큰 부류로 나누어 구분해보려는 시도들이 있다. 이런 시도들은 세계사회포럼 내부에서 실제 편을 가르거나 분파를 형성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세계사회포럼의 상황과 위치, 동학 등을 분석하는데 필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4회 세계사회포럼에 대해 적극적이고 성공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켈리니코스(2003)의 경우,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는 다수가 반-자본주의 운동가들은 아니지만 점차 그런 의식을 획득해가고 있다는 전제 하에 참가한 경향들을 '반동적(reactionary)', '부르주아적', '지방주의(localist)', '개량주의', '자율주의(autonomist)', '사회주의'로 구분한다(그 자신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적인 경향 중에서도 '혁명적인' 경향으로 정의한다). 세계사회포럼의 유명인사 중 한 명인 프랑스 출신의 아기통(2001)은 세계사회포럼을 통해 드러나는 지구적 정의운동(global justice movement)에는 세 가지 극이 있다고 말한다. '급진적 국제주의(자본주의와 민족-국가를 넘어서려는 듯 보이는)'와 '민족주의(주로 남반구 운동들의 대응방식)' 그리고 '신-개량주의(새로운 지구적 통치성을 추구하는)'. 포르투갈의 연구자인 보아벤투라(2003)는 기존의 정의방식이나 용어로는 세계사회포럼의 급진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분석틀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이라 그가 칭하는 분석틀로 현재까지 명백하고 유지되어왔던 흐름을 상대화하고(부재의 사회학), 지금까지 무시되고 억압당했던 새로운 흐름을 드러내야 한다(출현의 사회학)는 주장이다. 피터 워터만의 [세계사회포럼과 지구적 저항과 연대 운동: 배경설명(The World Social Forum and the Global Justice and Solidarity Movement: A Backgrounder)]를 참조했다. 출처는 www.labournet.info/wsfbook2004/backgrounder.doc/view 이에 비해 윤소영은 "봉건적, 프티부르주아적·부르주아적, 프롤레타리아적(유토피아적, 혁명적) 반자본주의라는 [공산당 선언]의 분류법을 원용해 반세계화를 인민주의·공동체주의, 진보주의·코퍼러티즘, 아나키즘·마르크스주의로 분류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대안세계화 운동], 공감 참조. }}. 이런 다양한 흐름과 이에 대한 분석은 세계사회포럼의 현재의 모습뿐만 아니라, 세계사회포럼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운동들이 가졌던 문제의식도 보여준다. 이것은 흔히 '구-좌파'라고 부르는 사회주의(혹은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한 평가와 관계가 깊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주된 주제가 아니므로 간략한 언급으로 대체한다. 참조할 자료로 이매뉴얼 월러스타인의 [체계에 맞선 새로운 반란], 월간사회진보연대 통권 34호와 다니엘 벤사이드의 [새로운 국제주의: 제국적 전쟁과 세계의 사유화에 맞서], 월간사회진보연대 통권 41호가 있다. }}. 이 운동들은 실제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소련과 동유럽, 유럽의 사민주의 정당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민족해방운동, 남미의 인민주의 운동 중 많은 수가 정권을 잡았거나, 아니면 유의미한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았다. 이 운동들 모두가 완전히 동일한 모습과 지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민족-국가 단위를 기본으로 한 당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이러한 당들의 연합과 연대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지양하고자 하는 방향성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실제로 사회와 세계를 변혁하지 못했고, 대중들은 이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운동들이 분출했다. 아마도 (특히 서구에서) 주요한 계기는 1968년을 전후로 한 흐름일 것이다. 이 새로운 운동들은 20세기의 지배적인 운동, 즉 당과 노조를 중심으로 한 운동이 애초의 약속과는 다르게 사회를 변혁하지 않았고(혹은 못했고), 오히려 다양한 억압과 이슈를 제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여성, 생태/환경, 인권, 문화 등의 주제를 제기하면서 새로운 운동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들의 시도가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들은 당과 노조의 운동이 위계적이고, 국가를 장악한다고 해서 바로 사회가 변혁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고 비판했지만, 그렇다면 운동들 사이에 수평적이고 교통이 가능한 조건과 구조는 무엇인지, 현재의 모순을 지양하는 새로운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그들 또한 말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운동들 중 몇몇은 신자유주의 위기를 관리하는 일원으로서 NGO가 되었고, 또 몇몇은 자신의 주제 내로 갇혀버렸다.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은 자신들이 비판했던 지배적인 운동의 형태를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사회포럼은 출발했다. 역설적이지만 세계사회포럼의 형성에 있어서 1980년대 이래로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역할도 있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위기를 지연시키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기존의 운동들이 처한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20세기 초반, 노동자운동(및 이를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사민주의 정당)의 성장에 대한 자본의 대응으로써 노동자들에 대한 안정적인 고용과 그를 통한 가족임금 보장, 복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다. 복지의 축소, 민영화 공세, 고용의 불안정은 노동자, 민중에게 심각한 고통이었지만, 기존의 운동은 이에 대한 전면적으로 반대하기보다는 코퍼러티즘적으로 대응하였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이미 자본주의의 성장기에 형성된 노동자, 자본간의 타협체계가 유지될 수 없는 조건임을 전제하는 것이었지만, 기존의 운동들은 좋았던 옛날로 복귀하고자, 혹은 현상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쟁점들과 운동들이 출현했다. 남미에서는 농민들과 원주민들, 실업자들의 운동이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남미 민중들의 삶을 옥죄고 있는 외채와 이를 매개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정책, 즉 자유화, 민영화, 자본의 무제한적인 소유권 보장 등의 문제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한 대중적인 투쟁을 조직해왔다. 금융의 팽창을 중심으로 현재 자본주의가 처한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 세계 도처에서 민중들의 권리와 날카롭게 충돌했다. IMF나 세계은행의 처방은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제거할 수 없었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려는 여러 조치들은 민중들의 기본적인 권리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내적인 배제는 더욱 증가했고, 민중들의 삶은 더욱 궁핍해졌다. 점차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민중들의 인식과 투쟁이 확산되었다. 각각의 주제와 양태는 달랐지만, 99년 시애틀에서 이 운동들은 조우했다. 이런 20세기 운동들이 보여준 역사적인 과정과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이라는 정세적인 계기는 세계사회포럼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논의와 합의의 기반을 이루었다. 세계사회포럼의 헌장은 사회운동들이 획득한 공동의 인식과 전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현재 민중들의 삶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권리를 박탈하는 공통의 원인으로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각각의 운동들이 가진 고유하고, 즉각적인 과제에 대한 상호 인정과 소통을 통한 공동의 인식 확장. 따라서 세계사회포럼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구조와 원리, 양식의 문제를 평가하고, 전화를 모색하는 것에는 이러한 전제에 대한 고려가 확인되어야 한다. 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드러난 쟁점들 세계사회포럼이 진행되어 온 지난 4년 간의 과정은 결코 순조롭지 않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많은 운동들이 참여했고, 세계적인 주목도 커졌다. 이 과정은 단순히 외적인 확대는 아니었다. 좀 더 많은 운동들이 참여하고, 세계사회포럼의 프로세스가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은 전 세계 운동들에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하는 모순과 폭력, 배제와 착취가 매우 다면적임을 명확히 인식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점점 더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지금까지 세계사회포럼이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 이상으로 진전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아직까지 대안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 점, 체계 자체를 반대하기 위한 전략과 투쟁을 둘러싼 문제가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 활성화되고 있는 공동의 투쟁이 무엇을 목표로 해야하는지 밝혀지지 않은 점, 이런 문제들이 해명되지 않음으로써 동맹을 형성하는 범위도 모호하다는 점 등. 이런 문제들은 이번 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은 아니다. 세계사회포럼의 출발에서부터 제기가 되었던 것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과정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만족할만한 답을 던져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세계사회포럼이 대안과 전략 등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을지언정, 이전의 운동이 가졌던 관념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찾기 위한 단초들을 제공해왔기 때문이다. 언급했듯이 대안과 전략의 부재, 명확한 방향성의 부재에 대한 문제제기는 계속 진행되었던 것이지만,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뭄바이 레지스턴스(Mumbai Resistance against Imperialist Globalization and War) 2004'이다. 10만이 넘는 사람이 참가했던 세계사회포럼에 비하면 비록 몇 천명의 왜소한 참가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방식의 문제제기가 그곳에서 이뤄졌다. 뭄바이 레지스턴스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또 다른 세계"가 무엇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현재 필요한 것은 세계화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제국주의는 오직 그것을 사회주의로 대체할 때에만 패퇴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세계사회포럼이 대안의 상이나 지향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으로 볼 수 있다. 둘째는 세계사회포럼이 포드재단과 같은 초민족적 자본과 연관된 기금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런 재원조달 방식이 세계사회포럼 내에서 NGO들의 영향력을 높이는 계기가 되고있으며, 이런 NGO들의 영향력 때문에 세계사회포럼이 우경화되고 있다는 점이 비판의 초점이다. 또한 세계사회포럼 내부의 행사에서도 세계사회포럼 전망에 관한 논의를 통해 세계사회포럼을 둘러싼 여러 문제제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패널들이 조직되었다. 우선 "신자유주의와 전쟁, 그리고 세계사회포럼의 중요성"이라는 패널은 애초 기획의도 자체가 세계사회포럼과 그 미래에 대한 논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패널은 주로 이후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제안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주된 내용은 지금까지 세계사회포럼은 잘 해왔고 꾸준히 성장해왔다는 평가가 다수를 이루었다. 세계사회포럼은 신자유주의가 아닌 "또 다른 세계"가 필요하고,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었고, 이것이 현재 세계사회포럼이 가진 책임이라는 평가다. 그리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지역별, 주제별 포럼을 활성화시켜야 하고, 공동의 행동을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하고, 세계사회포럼 내부의 민주주의를 확보하고, 대안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등의 제안이 있었다. 사실 세계사회포럼 행사에서 규모가 큰 패널들이 다 그러했듯이, 이 패널토론에서도 첨예한 의견대립이나 입장의 차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쟁점은 볼 수 있었는데, '세계사회포럼이 공간으로 남는 것이 유의미한가?'라는 쟁점이었다. 세계사회포럼의 시작 초기부터 제기되었던 이 쟁점은 아직까지도 어떤 진전된 답을 찾지 못하고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좀 더 논쟁적인 주제를 다룬 것은 "정치정당과 사회운동"이라는 패널이었다. 세계사회포럼이 헌장을 통해서 정당과 군사조직의 참여를 배제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누차 논쟁이 되어온 지점이었다. 이 패널에는 브라질 노동자당, 인도공산당(CPI),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 유럽 녹색당 연합 등 정당 활동가들이 대거 참석하여 정당이 세계사회포럼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늘날 좌파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고, 사회운동이 직면한 적과 동일한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점이 대부분 연사들이 강조하는 지점이었다. 사회운동이 다양한 주제와 이슈를 제기하고 그를 중심으로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사회운동의 역할이고 높이 평가될 지점이지만, 사회운동의 주장과 요구가 구심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현재의 정치와 국제정세 속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정당과 같은 정치적 틀이 필요하다는 그리하여 정당과 사회운동이 우호적인 파트너쉽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당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대를 곤란하게 하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아르네케르는 대안적 사회를 위한 광범위한 블록(그의 용어를 따르면 당-좌파와 사회적-좌파로 나눌 수 있는 '좌파'들의 연합)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난점을 지적한다. 우선 현재 운동들이 직면하고 있는 정치 자체의 위기(정당으로 대표되는 근대 정치의 위기)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인 사회 프로젝트의 부재를 공통의 조건으로 사고한다. 이러한 전제 하에 당-좌파의 문제점으로 대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워내는 활동이나 대중들의 투쟁에 대한 기여가 감소하고, 제도(특히 선거제도)에만 의존하는 경향, 새로운 사회적 주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회피하는 융통성 없는 개념틀을 고집하는 문제, 다양한 차이들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공동의 인식을 확보해가기 보다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균질화하려는 시도, 당 간부들의 권위주의적 스타일 등을 꼽고 있다. 물론 사회적-좌파 역시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사회운동들이 종종 정치의 중요성을 잊는다는 것,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수많은 요구를 연계하고 조직된 열망을 표현할 수단이 없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당-좌파와 사회적-좌파가 연대하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잃지 않고, 당들이 사회운동을 대리하지 않으려 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공동으로 전국적인 프로젝트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부당함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직접 참여하는 주체로 변화시키는 것이 '정치화'의 의미이며, 이를 가능케하기 위해 현존하는 당을 혁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정치적 기구를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정치적 의사표출의 새로운 방식을 창조해야한다고 주장한다. }}. 따라서 문제는 정당의 참여를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정당과 사회운동의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은 서로의 실용적인 필요에 기반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서로의 연대를 가로막았던 역사적이고 정세적인 이유들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사회포럼의 위상과 전망 뭄바이 레지스턴스 2004, 세계사회포럼의 미래를 고민하는 토론, 정당과 사회운동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토론은 각자 다른 쟁점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 근저에 놓여있는 공통된 질문은 "세계사회포럼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이다. 이 각각의 쟁점에 기반하여 세계사회포럼을 비판하는 논지의 근저에는 세계사회포럼의 현실에 대한 공통된 평가가 놓여있다. 즉, 세계사회포럼에 무정형의 사회운동들이 집합되어 있고, 중심이 없으며, 국가와 국제기구의 역할을 보조하는 NGO들의 주도권을 용인하고 있다는 비판적 평가가 그것이다. 덧붙여 세계사회포럼이 말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가 때때로 좀 더 인간적이고, 덜 잔인한 세계화라는 요구로 모아져 오히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찬성하는 것으로 귀결되기도 하므로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비판들이 담고있는 문제의식 자체는 유의미한 것이다. 중립적인 시민사회라는 허구적인 공간을 매개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현하는 국가와 국제기구의 역할을 거들고 있는 NGO에 대한 비판은 현재 신자유주의 비판에 있어서 중요한 축이며{{) 세계화된 자본이나 초민족적 기구들은 세계적 '시민사회'를 자신들의 계급적 전략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한다. 그들은 세계적 시민사회를 '기업의 세계', 사회적 재생산 역할을 자임하는 거대 기구, 그리고 체계의 결핍요소를 보충하는 것으로 호명된 조직들 사이의 협력을 제도화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운 범-정부적 관료기구를 신성화하고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지원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특정조직을 포섭함으로써 배제된 집단과 취약 계급의 사회적 요구를 일정한 방향으로 호도한다. 여기서 '시민사회'는 제도적 합의 내에서 갈등을 탈정치화하는 수단이 된다. - 다니엘 벤사이드, [새로운 국제주의: 제국적 전쟁과 세계의 사유화에 맞서], 월간사회진보연대 통권 41호 }}, '다른 세계'는 어떻게 가능하고, 그것의 상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제기되고, 세계사회포럼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고려해볼 문제이다. 세계사회포럼은 매우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모여있는 공간이자 과정이고, 그것을 규제하는 원칙도 매우 느슨한 수준이다. 따라서 단일한 전략과 전망의 부재는 어쩌면 현재까지는 그리고 당분간은 필연적인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이 세계사회포럼이 아직 미숙하고, 어떤 기준에 미달한 전근대적인 운동이기 때문은 아니다. 세계사회포럼을 정형과 중심이 없는, 그리하여 세계를 변혁하는데 불충분하고 모자란 운동으로 바라보는 평가는 세계사회포럼의 전망에 오히려 위험스럽다. 세계사회포럼을 좌익화, 급진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세계사회포럼이 어떤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그래서 조직하고 개조해야 할 운동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주장들은 '어떤 기준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20세기의 지배적인 운동들이 국제적인 전망과 이념을 상실하고, 진정 혁명적인 운동에게 필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지 못하는 과정에서 '무엇이 혁명적인가?'는 불분명해졌다. 따라서 세계사회포럼의 좌익화, 급진화의 실내용이 무엇인지 알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계사회포럼이 공간을 넘어서 공동의 행동과 투쟁을 합의하고, 단일한 지향을 만들 수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사회운동들의 다양함에 정치적인 구심을 만들어 가는 데 정당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그들이 주장하는 좌익화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조심스럽게 짐작하게 해준다: 좀 더 분명하게 자본주의 체계를 지양하고, 그 이후 사회의 전망(사회주의)을 밝히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가와 정당의 역할을 고려할 것. 이 말 자체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러한 주장이 사회운동에 대한 정치운동의 우위, 당의 이념과 전략에 대한 대중운동의 복속이라는 20세기의 실패를 상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회주의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 대안적인 사회(그것이 사회주의라 명명되던 그렇지 않던 간에)는 어떠한 윤리와 원리, 내용으로 형성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고, 정당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워내면서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낼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유럽사회포럼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의 사회운동에 대한 입장은 전통적인 좌파 정당들의 관점과는 사뭇 다르다. 이번 인도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한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의 베르티노티는 '정치정당과 사회운동' 패널에서 "좌파정당이 사회운동 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하거나, 그들에게 방향을 지시하려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와 전쟁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사회운동과 평등하게 교류하면서, 이들의 집단적 행동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정치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세계사회포럼 헌장의 정당 배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하에서 계속해서 탈정치화되는 대중들에게 유의미한 정치를 되돌려주기 위해 사회운동과 정당운동이 무엇을 할 것이냐가 진정한 문제임을 드러내준다. }}. 즉, 좌익화를 말한다면 그것은 유실된 사상과 이념의 좌익화이고, 이 때 그 대상은 세계사회포럼으로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운동 전체이다. 누차 지적했듯이, 세계사회포럼은 그 형성 과정에서부터 20세기의 지배적인 운동들과는 이질적인 요소들과 방식들을 결합시켰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노동자운동의 코퍼러티즘화, 이념과 사상의 유실이 세계사회포럼이 출발할 당시의 상황이었다. 여기서 세계사회포럼을 형성한 다양한 운동들이 기존의 운동들의 역사에 대해 정확히 평가를 하고 그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운동의 실패를 재현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합의가 존재했다. 세계사회포럼의 헌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의 반영이다. 즉,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자율성과 대중운동의 우위를 인정하면서 이 운동들의 수평적인 연대와 공동의 인식 확보를 통해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활성화하고, 인민들의 보편적 권리를 확장해나가는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대안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애초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가 진정한 문제이다. 세계사회포럼과 사회운동들이 4년 간 노력해온 과정이 기존 운동의 무기력을 넘어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전쟁에 맞서는 새롭고도 자율적인 운동들의 성장과 그들의 연대에 기여했는가? 세계사회포럼과 사회운동들의 지난 4년의 과정이 기존의 운동이 해결하지 못했던 곤란한 문제들을 드러내고, 이에 대한 대안들의 가능성을 탐구해왔는가? 세계사회포럼의 전망을 위해 고려해야 할 문제들 위에서 던진 질문을 근거로 한다면, 세계사회포럼의 전망을 둘러싼 논의가 고려해야 할 지점은 지금의 논의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우선은 세계사회포럼이 지속적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운동들의 분석을 확장시키고, 그 속에서 공동의 인식을 확보하는데 기여했느냐의 문제와 이 과정에서 지금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세계사회포럼의 프로세스를 지구적으로 확장시키려는 참가자들의 노력은 세계사회포럼이 포괄해야 하는 다양한 이슈를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대안적인 사회가 가능해지기 위해 사회운동들이 고려해야 할 쟁점을 밝혀왔다. 무엇보다 전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갈등과 불안 요인을 제거하고, 자본투자의 안정성을 제고하는 새로운 통치성을 구축하는데 필수적인 따라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인식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의 인식은 자연스럽게 모든 운동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였다. 지난 해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3회 세계사회포럼은 이라크 전쟁 발발을 저지하기 위한 2.15 국제행동을 낳았고, 올해 세계사회포럼을 통해서 전 세계 사회운동들은 3.20 국제반전공동행동을 결의했다. 3.20 국제반전공동행동의 의미는 무엇보다 9.11 테러 이후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반하는 세력들을 잠재적인 테러범으로 간주하면서 전쟁의 기운을 높이고 반전, 반-세계화 운동의 활로를 막아섰음에도, 사회운동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결의하고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공포와 억압의 분위기를 뚫고 반전 운동의 싹을 키워왔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것에 있다. 미국의 헤게모니와 초민족적 자본의 세계화된 네트워크를 보호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진행되는 군사적 세계화에 대한 사회운동들의 인식과 저항이 그 의미이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사회포럼이 전쟁 반대라는 단일한 이슈를 중심으로 개조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회운동들의 3.20 국제공동행동의 결의는 세계사회포럼을 통해 수렴되고 다시 확산되는 다양한 쟁점들을 이라크 전쟁 반대로 환원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공동의 인식이 확장되고, 공동의 행동이 결의되는 과정은 그 내부의 다양한 쟁점들을 포괄하고, 그로부터 건설적인 다양성이 확장되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세계적인 미국의 군사 전략 하에서 한반도 위기가 운동들이 처한 보편적인 문제임을 주장했던 한국 참가자들의 목소리, 끊이지 않는 분쟁으로 일상을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서아시아, 아프리카 참가자들의 목소리는 현재의 군사 세계화의 단면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이라크 전쟁과의 연계 속에서 공동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더욱 다양한 실천과 투쟁들이 모색될 수 있다. 또한 전쟁 반대라는 공통의 과제가 실제 각각의 운동을 어떻게 개조하고, 활성화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한데, 이는 한국 사회에서 반전의 이슈를 각각의 (부문)대중운동이 자기과제로 온전히 받아 안지 못하는 현실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지 반전 투쟁에 관한 것은 아니고, 세계사회포럼 자체가 움직이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지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참가자들은 카스트제도나 종단주의, 종교근본주의와 같은 문제들이 전근대적이고 몇몇 지역에 특수한 문화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추진되는 과정은 이런 문제들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번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스리랑카의 달릿(불가촉 천민)을 비롯하여 나이지리아나 케냐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 존재하는 오수(osu), 와타(watta)와 같은 집단들은 종교, 종족을 이유로 배제된 집단들인데 이들은 이번 세계사회포럼에 참가가 두드러졌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의 최초이자 최대의 피해자이다. 물, 전력, 교통, 의료, 교육과 같은 부문의 사유화와 민영화, 불안정한 노동, 초민족적 자본의 농업과 토지에서의 소유권 독점과 같은 문제는 이들의 삶을 절대 빈곤 이하로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게다가 민족-국가의 위기에 따른 민족적 동일성의 위기는 종종 인종주의와 결부되는 심각한 폭력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들은 그 폭력의 일차적 대상이다. 그렇다면 세계사회포럼이 전제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반대가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에 대응하는 근대정치 일반의 위기와 조응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쟁점을 내포할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인종주의와 같이 현재의 위기에 대한 퇴행적인 대응을 넘어서는 국제주의의 쟁점을 우리에게 강조한다. 또한 이런 문제들은 성적 차이와 같이 자본주의가 구조화해왔던 인간학적 차이에 대해서 사회운동들이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지평과도 결합된다. 세계사회포럼이 더욱 성장해가기를 바라는 논의들은 신중하게 세계사회포럼에서 국제주의의 맹아를 발견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은 과제가 많다. 무엇보다 운동들 간에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이를 통해 공동의 인식을 확보해 가는 과정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각각의 과제와 요구들이 상호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확장하는 방식으로 인민들의 보편적인 권리를 탐구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운동들이 상호 개조되면서 보편성을 담지할 수 있는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이것은 새로운 조직원리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념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세계사회포럼은 운동들이 새로운 국제주의를 만들어 가는 이런 과정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사회포럼을 대상화하여, 요구하는 방식은 아니다. 세계사회포럼의 주체가 바로 우리이고, 세계사회포럼을 둘러싼 쟁점과 과제는 바로 우리 운동이 당면한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