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문이 열린 이라크, 학살자 미군 3월 31일 팔루자에서 미국인 4명이 죽고 그 주검이 훼손당한 사건 이후 -사실 그들은 군인역할을 대신하는 사설 용병들이다- 4월 내내 이라크는 이라크인 들의 말처럼 "지옥문이 열린 것"과 같았다. 점령군의 학살과 이라크인들의 저항이 연일 계속되면서 보도 상으로도 미군은 100여명, 이라크 인은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숫자까지 포함하면 사망자는 이를 훨씬 초과할 것이며 부상자는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심지어 어린이와 노약자, 여성이 사망자의 다수를 차지한다. 팔루자를 봉쇄한 미군은 F-16 폭격기와 코브라헬기, 탱크, 저격수, 해병대를 동원하여 마치 사냥하는 것처럼 이라크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이슬람사원이 폭격 당했고 거리는 피바다가 되었으며 병원은 시신과 부상자로 넘쳐났다. 시신을 묻을 곳이 없어 축구장이 거대한 묘지가 되었다. 마치 팔루자는 80년 한국의 광주를 떠올리게 했다. 미군은 미국인 주검훼손사건을 빌미로 노골적이고 의도적인 살기(殺氣)와 적개심을 가지고 대학살에 나섰고, 팔루자가 끈질기게 저항하자 그 강도를 더욱 높였다. 미군은 이라크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총을 든 이라크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별하지 않고 움직이는 모두에게 총과 폭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팔루자의 저항은 부시가 말하는 고립된 소수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직장인, 상인, 젊은이였으며 심지어 이라크 경찰복을 입은 이들도 있었다. 미군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은 생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이라크 인들이 칼리쉬니코프 총을 들게 만든 것이다. 더욱이 미군은 봉쇄한 팔루자 외곽도로에서 팔루자를 탈출하는 시민들에게마저 총구에 불을 뿜었다. 미군의 학살은 팔루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4월 초 이라크인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의 강경 지도자 알-사드르의 신문발행을 점령행정관 폴 브레머가 중지시키고, 그의 측근들을 체포하고 살해하자 이에 항의하는 평화시위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미군이 이에 대해 발포하였고 이에 사드르는 즉각 무장저항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 직후 바그다드, 사드르시티, 나자프, 카르발라 등 이라크 중남부에서 광범위한 저항이 발생하였고 사드르를 지지하는 마흐디 민병대는 무장저항에 돌입하였다. 미군은 즉각 학살로 대응하였다. 그들은 주택가와 상점, 거리, 심지어 앰뷸런스에도 미사일과 총탄을 쏟아 부었다. 브레머가 도발한 이 전투로 인해 이라크 전역이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 제2의 베트남, 수렁에 빠진 미국 애초 미국은 팔루자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의 무장저항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팔루자 학살에 대한 이라크의 민심이 악화되고 팔루자를 돕기 위한 행진이 시작되는 등 저항의 중심으로 떠오른 팔루자를 쉽게 진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알-사드르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 시아파의 저항 역시 무장한 민병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들이 총을 든 민간인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드르가 농성하고 있는 나자프는 시아파 2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서, 인근 이란 정부조차 나자프를 공격하고 사드르를 살해한다면 이슬람 전체가 미국에 등을 돌릴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과 성지에 대한 공격은 점령군에 대항하여 시아파와 수니파가 공동전선을 펼치게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사실상 이라크 전역에서 미군을 포함한 점령군은 '반미', '점령반대' 무장봉기라는, 이라크 점령이후 최대의 저항에 부닥친 것이다. 이에 대해 부시는 철수예정이던 2만 명의 미군귀환을 90일 동안 연장하였고 군대를 더 보낼 수도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미 스페인, 온두라스, 도미니카공화국, 노르웨이, 태국 등 파병국가들이 속속 파병철수 의사를 밝히고 있고 폴란드도 파병인원을 대폭 감축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이라크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장기화하는 상황이어서 미군 증강은 이라크를 '제2의 베트남'으로 만들어 미국을 끝없는 수렁에 빠지게 만들 것이 뻔하다. 6월 30일로 예정된 주권이양 계획도 불투명하다. 물론 미국의 구상은 미국식 민주주의-복수정당과 연방제-에 기반을 둔 친미정부를 수립하여 중동민주화 구상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내용의 임시헌법에 대해 시아파는 반대하고 있다. 누가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주권을 이양 받을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또한 미국은 주권이양 이후에도 미국 대사관이 184억 달러의 재건자금을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향후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 재건사업에 관여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한다. 미군 역시 이라크 내 14개 기지에 11만 명이 계속 주둔할 예정이다. 이라크 군대가 미군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행정명령과 미국이 이라크에 국가안보보좌관을 임명한다는 계획도 발표되었다. 즉 6월 30일 이후 주권을 이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더라도 미국은 세계 최대규모의 대사관과 주둔군을 통해 이라크를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이 그리는 '자유 이라크'의 모습이다. 그러나 결국 이는 '피를 부르는 미국식 민주주의'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부시의 대선가도에서 이라크는 끔찍한 악몽이다. 미국 내에서 이라크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40%를 넘어서고, 군인가족이 부시 지지를 철회하고 케리의 지지율이 따라붙는 등 부시의 '내우외환'은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부시는 주권이양 이후 현재의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IGC)를 해체한 뒤 총리 및 3명의 대통령위원회로 구성되는 임시정부를 유엔 주도로 출범시키자는 브라히미 유엔 이라크특사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는 이라크 주권 이양 후 유엔이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새 임시정부 각료를 지명하며, 시아파 대표를 대통령으로, 쿠르드족과 수니파 대표를 각각 부통령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해 2005년 1월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유엔을 끌어들여 임시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미국은 한발 빼겠다는 모양새다. 그러나 유엔의 깃발을 달더라도 점령군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미국이 신설 이라크군 및 재건 지원금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이라크 임시정부는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은 유엔을 이용하여 이라크에 대한 통제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고 새 유엔결의안을 통과시켜 더 많은 나라의 군대를 이라크에 파병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이라크를 이라크인에게로'를 외치며 저항하는 이라크 민중들에게는 또 다른 점령과 억압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라크 사회운동 - 이라크의 민주주의와 자주적 단결의 흐름 이라크 내의 사회운동은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라크에도 다양한 운동세력과 정치정당이 존재한다. 미군의 침략과 점령은 이라크의 정치담론을 이분법적으로 나눴는데, 점령에 반대하면 사담주의자이고 사담에 반대하면 미국에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이러한 '점령이냐 독재냐'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는 그룹들이 조직되었는데 이 그룹은 수니파나 시아파 같은 민족주의 이슬람 진영과 투르크멘, 쿠르드, 자유주의, 좌파, 기독교, 정당 등 50여 개의 다양한 정치적 경향을 대표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민주적 이라크와 정의, 자유, 평등, 평화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제일 조건으로 점령 종식을 요구하고 있다. 정치적 조직화를 위해 이들은 대규모 회합을 가져왔다. 첫 회합은 2003년 12월 19일에 열렸는데 금요일에 열렸다고 하여 '단결의 금요일(Friday of Unity)'이라 불린다. 참가자들은 지금 가장 위험한 약점을 분열주의로 보고 이라크의 단결을 호소했다. 두 번째 회합은 2004년 1월 2일에 열렸다. 여기서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단결이 강조되었고 "단결과 정의가 우리가 열망하는 국가의 기초"라는 슬로건 하에 전국회의(National Conference)를 개최하자고 하였다. 이슬람 사이언티스트 사무총장 알 다리는 점령과 그에 협력하여 노예시장에 스스로를 파는 이들에 맞서 이라크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자고 호소했고 셰이크 (이슬람지도자) 알 칼리시 역시 아랍과 쿠르드, 투르크멘을 분열시키는 시도를 비난했다. 그 외에도 나자프를 대표하여 셰이크 아흐메드, 이라크 구원전선의 수장인 모하메드 알리, 아랍민족주의운동을 대표하는 압둘 카림 하니 등이 이라크의 해방과 단결을 강조하였다. 또한 알 시스타니 진영, 알 사드르 진영을 대표하는 이들도 분파갈등을 극복할 것과 점령당국과 협력을 중단할 것, 단결을 위한 회합을 계속할 것 등을 호소했다. 한편 앞의 전국회의 흐름과 동일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국제적으로 '이라크의 자주적 민중회의(Independent Assembly)를 지지하는 국제 호소문' 서명운동이 4월 초부터 진행되고 있다(www.focusweb.org/int-call 에 들어가서 누구나 서명할 수 있다). 이는 점령 중단을 요구하고 이라크 민중들의 주권과 자치의 권리를 지지하는 큰 틀에서 이라크인들이 "점령군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국가의 미래를 자유롭게 토론하고 제안할 수 있는" 회의를 개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유선거를 실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2003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평화회의와 2004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반전총회에서 토론하고 확인된 바 있다. 세계사회포럼 반전총회에는 이라크민주연합(Iraqi National Democratic Coalition, 약칭 Condi)에서 토론자로 참여하였는데 이라크민주연합은 민주적 이라크를 위한 사회운동연대체인 듯하다. 이 서명에는 찰머스 존슨, 크리스토프 아귀통, 임마뉴엘 월러스틴, 제임스 페트라스, 제레미 코번, 마르타 아르네케르, 나오미 클라인, 노암 촘스키, 사미르 아민, 수잔 조지, 월든 벨로, 파우스토 베르니토니 등 이름난 사회운동가와 진보학자들이 다수 동참하였다. 이라크 사회운동의 흐름이 어떠한 수준과 범위인지 아직 확실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라크 사회운동이 국제적 운동과 연계되어 있으며 이라크의 해방과 민주주의, 단결과 평화를 추구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 민중의 힘으로 학살과 점령, 파병을 중단시키자. 이렇듯 미군의 이라크 점령에 대항하여 이라크 민중들과 운동단체들이 이라크의 해방과 자주를 염원하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겠다는 것은 미국에 의한 학살과 점령에 동참하는 것일 뿐이다. 지난해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파병을 노무현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결정하고 이를 아펙 회담에서 부시에게 선물로 안긴 이후 국회는 정부의 '파병 백지위임장'에 찬성으로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국익을 위해 평화·재건군을 파병한다는 지배계급의 논리는 정작 파병지역 선정에서 스스로의 모순을 폭로했다. 당초 예정지였던 북부 키르쿠크에 대해 미군은 잔류하겠다고 하면서 한국의 전력보강을 주문했다. 국방부는 이를 은폐하다가 뒤늦게 파병일정 연기를 흘렸고, 급기야 파병지역 재검토 입장을 발표했다. 그리고 스페인 군이 철수하는 남부 나자프가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북부 에르빌과 슐라이마니야로 돌아섰다. 이리 저리 갈팡질팡하면서 정부는 미국의 침략과 점령에 동참하는 점령군에게 안전한 지역은 애초에 없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합동조사단도 미군에 의한 안내와 부실한 조사, 미리 내려진 결론에 짜 맞춘 형식적 결과발표로 일관했다. 보도에 따르면 한국군 예상사망률은 0.8%인 1천명 당 8명 꼴인데 이는 베트남전 사망율의 절반이라고 한다. 정부는 곧 아르빌과 슐라이마니야 가운데 한곳을 4월 말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파병예정지로 결정한다고 하지만 이 두 곳은 쿠르드 자치지역으로서 전쟁피해가 적어서 정부가 말하는 소위 '평화·재건' 요소가 별로 없다. 더구나 쿠르드 지역은 이란, 터키와 마주보고 있고 쿠르드민족의 독립문제가 아랍족에게 매우 민감한 사안이어서 지난 3월에도 쿠르드민주당사에 폭발사건이 일어나는 등 치안 상으로도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다. 자칫하면 종족갈등에 휘말릴 여지가 큰 것이다. 결국 무슨 이유를 갖다 대도 한국군 파병은 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한국의 반전운동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이라크 점령과 파병에 대해 반대해왔다. 그러나 지난 2월 파병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3.20 국제반전행동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투쟁의 파고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총선시기에도 파병철회 문제는 쟁점이 되지 못했고, 도리어 ‘국가 정책적 판단을 선거 시기에 쟁점으로 삼을 수 없다’는 지배세력의 이데올로기 조작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팔루자를 비롯한 이라크민중 학살과 미국의 이라크 점령 구상을 정확히 폭로해야 한다. 이라크에서 미국의 학살 만행이 오늘날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주의 때문임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한미동맹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주의 동맹이며 이를 깨뜨리지 않으면 침략전쟁에 학살자로 동참해야 하고, 노동자 민중은 세계화가 강요하는 경쟁과 빈곤, 불안정노동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광범위하게 선전해야 한다. 이에 세계화와 군사주의의 문제를 결합시켜서 '반전 반세계화' 투쟁의 기조를 의식적으로 추구하면서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는 6월 13~15에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 동아시아정상회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매우 중요하다. 세계적인 자본가, 지배정치인 수백명이 모여서 '아시아의 비즈니스와 안정'을 논의하는 회의에 대항해서 민중의 전쟁·파병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의지를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반전 반세계화 투쟁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6월 12일에는 파병반대 국민행동 차원에서 대규모 파병반대 시위가 예정되어 있어 시기적으로도 좋다. 이와 같이 아래로부터 대중의 힘에 바탕하여 파병반대 투쟁을 조직하고 광범위한 대중을 실질적으로 결집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실질적으로 파병을 철회시키자. 그 출발로 5월 1일 메이데이에서 노동자들이 반전과 파병반대 목소리를 높여나가자. 이라크 민중들이 자주적으로 자신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에 대해 굳건히 연대하자. PSSP
사회화와 노동에 실린 글을 수정하고, 이라크 사회운동 부분을 보완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민주노동과 대안' 5월호에 실립니다.
지옥문이 열린 이라크, 학살자 미군 3월 31일 팔루자에서 미국인 4명이 죽고 그 주검이 훼손당한 사건 이후-사실 그들은 군인역할을 대신하는 사설 경호원들이다- 4월 내내 이라크는 이라크인 들의 말처럼 "지옥문이 열린 것"과 같았다. 점령군의 학살과 이라크인 들의 저항이 연일 계속되면서 보도상으로도 미군은 100여명, 이라크 인은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숫자까지 포함하면 사망자는 이를 훨씬 초과할 것이다. 심지어 어린이와 노약자, 여성이 사망자의 다수를 차지한다. 팔루자를 봉쇄한 미군은 F-16 폭격기와 코브라헬기, 탱크, 저격수, 해병대를 동원하여 마치 사냥하는 것처럼 이라크 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이슬람사원이 폭격 당했고 거리는 피바다가 되었으며 병원은 시신과 부상자로 넘쳐났다. 시신을 묻을 곳이 없어 축구장이 거대한 묘지가 되었다. 미군은 노골적이고 의도적인 살기(殺氣)와 적개심을 미국인 주검훼손사건으로 가리고는 대학살에 나섰고, 팔루자가 끈질기게 저항하자 그 강도를 더욱 높였다. 미군은 이라크 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총을 든 이라크인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별하지 않았다. 팔루자의 저항은 부시가 말하는 고립된 소수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 의한 것이었다. 미군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은 생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이라크 인들이 칼리쉬니코프 총을 들게 만들었다. 더욱이 미군은 팔루자 외곽도로에서 팔루자를 탈출하는 시민들에게마저 총구에 불을 뿜었다. 미군의 학살은 팔루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4월 초 이라크인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의 강경 지도자 알-사드르의 신문발행을 점령행정관 폴 브레머가 중지시키고, 그의 측근들을 체포하고 살해하자 이에 항의하는 평화시위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미군이 이에 대해 발포하자 사드르는 즉각 무장저항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 직후 바그다드, 사드르시티, 나자프, 등 이라크 중남부에서 광범위한 저항이 발생하였고 사드르를 지지하는 마흐디 민병대는 무장저항에 돌입하였다. 미군은 즉각 학살로 대응하였다. 그들은 주택가와 상점, 거리, 심지어 앰뷸런스에도 미사일과 총탄을 쏟아 부었다. 브레머가 도발한 이 전투로 인해 이라크 전역이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 제2의 베트남, 수렁에 빠진 미국 애초 미국은 팔루자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의 무장저항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팔루자 학살에 대한 이라크의 민심이 악화되고 팔루자를 돕기 위한 행진이 시작되는 등 저항의 중심으로 떠오른 팔루자를 쉽게 진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알-사드르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 시아파의 저항 역시 무장한 민병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들이 총을 든 민간인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미군의 학살과 성지에 대한 공격은 점령군에 대항하여 시아파와 수니파가 공동전선을 펼치게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사실상 이라크 전역에서 미군을 포함한 점령군은 '반미', '점령반대' 무장봉기라는, 이라크 점령이후 최대의 저항에 부닥친 것이다. 이에 대해 부시는 철수예정이던 2만 명의 미군귀환을 90일 동안 연장하였고 군대를 더 보낼 수도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미 스페인, 온두라스 등 파병국가들이 속속 파병철수를 밝히고 있고 이라크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장기화하는 상황이어서 미군 증강은 이라크를 '제2의 베트남'으로 만들어 미국을 끝없는 수렁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6월 30일로 예정된 주권이양 계획도 불투명하다. 물론 미국의 구상은 미국식 민주주의-복수정당과 연방제-에 기반을 둔 친미정부를 수립하여 중동구상의 발판으로 삼는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내용의 임시헌법에 대해 시아파는 반대하고 있다. 누가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주권을 이양 받을 것인지 불분명한 것이다. 또한 미국은 주권이양 이후에도 미국 대사관이 184억 달러의 재건자금을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향후 이라크 정부가 이라크 재건사업에 관여할 수 없게됨을 의미한다. 미군 역시 이라크내 14개 기지에 11만 명이 계속 주둔할 예정이다. 이라크 군대가 미군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행정명령과 미국이 이라크에 국가안보보좌관을 임명한다는 계획도 발표되었다. 즉 6월 30일 이후 주권을 이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더라도 미국은 세계 최대규모의 대사관과 주둔군을 통해 이라크를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이 그리는 '자유 이라크'의 모습이다. 부시의 대선가도에서 이라크는 끔찍한 악몽이다. 미국 내에서 이라크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40%를 넘어서고, 군인가족이 부시 지지를 철회하고 케리의 지지율이 따라붙는 등 부시의 '내우외환'은 가중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부시는 주권이양 이후 현재의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IGC)를 해체한 뒤 총리 및 3명의 대통령위원회로 구성되는 임시정부를 유엔 주도로 출범시키자는 브라히미 유엔 이라크특사의 제안을 수용했다. 이는 이라크 주권 이양 후 유엔이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새 임시정부 각료를 지명하며, 시아파 대표를 대통령으로, 쿠르드족과 수니파 대표를 각각 부통령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해 2005년 1월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유엔을 끌어들여 임시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면서 미국은 한발 빼겠다는 모양이다. 그러나, 유엔의 옷을 입어도 점령군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미국이 신설 이라크군 및 재건지원금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이라크 임시정부는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다. 이는 '이라크를 이라크 인에게로'를 외치며 저항하는 이라크 민중들에게는 또 다른 점령과 억압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전 민중의 힘으로 학살과 점령, 파병을 중단시키자. 이런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겠다는 것은 학살과 점령에 동참하는 것일 뿐이다. 지난해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파병을 노무현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결정하고 이를 아펙 회담에서 부시에게 선물로 안긴 이후 국회는 정부의 '파병 백지위임장'에 찬성으로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국익을 위해 평화·재건군을 파병한다는 지배계급의 논리는 정작 파병지역 선정에서 스스로의 모순을 폭로했다. 당초 예정지였던 북부 키르쿠크에 대해 미군은 잔류하겠다고 하면서 한국의 전력보강을 주문했다. 국방부는 이를 은폐하다가 뒤늦게 파병일정 연기를 흘렸고, 급기야 파병지역 재검토 입장을 발표했다. 그리고 스페인 군이 철수하는 남부 나자프가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북부 에르빌과 슐라이마니야로 돌아섰다. 이리 저리 갈팡질팡하면서 정부는 미국의 침략과 점령에 동참하는 점령군에게 안전한 지역은 애초에 없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합동조사단도 미군에 의한 안내와 부실한 조사, 미리 내려진 결론에 짜 맞춘 형식적 결과발표로 일관했다. 그동안 한국의 반전운동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이라크 점령과 파병에 대해 반대해왔다. 그러나 2월에 파병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3.20 국제반전행동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투쟁의 파고를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총선시기에도 파병철회 문제는 쟁점이 되지 못했고, 도리어 '국가 정책적 판단을 (선거시기에) 쟁점으로 삼을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팔루자 학살과 이라크 점령 구상을 정확히 폭로해야 한다. 이라크에서 미국의 학살 만행이 오늘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재편(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의 세계화)의 그림자임을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미국의 세계질서재편 구상에 편승할 수 있겠냐며 이를 놓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한미동맹의 그늘 아래에서는 이를 거부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학살하는 참담한 전쟁에서 학살자로 끼어야 하고, 또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풍랑 속에서 서로를 헐뜯으며 경쟁의 대열에 내몰려야 하는 비참한 빈곤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폭로해야 한다. 더 나아가 몇몇 사람들의 피켓시위와 국회로비가 아닌, 거리 곳곳에서 대중들의 파병반대 행진과 서명, 시위들을 일궈내야 한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팔루자 대학살로 인해 이라크 민중의 고통이 날로 커져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파병반대 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자. 그 첫 신호로 5월 1일 메이데이에서 노동자들의 반전평화의 목소리를 높여나가자. 나아가 6월 13일 세계경제포럼 동아시아 경제정상회의에 즈음하여 여기에 참가한 정부 대표와 각료들에게 우리 민중의 전쟁반대, 파병반대, 미국반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각계의 선언을 모아 대중적 선언을 만들고, 작은 의지를 모아 조직적이고도 위력적인 파병반대 반전·반세계화의 대규모 집회를 성사시키자. 이를 기반으로 파병을 둘러싼 의회내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켜 실질적으로 파병을 철회시키자. 파병반대, 반전 평화의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나가자. 이라크 민중들이 자주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일구려 하는 노력에 대해 우리 연대의 손을 높이 들자. 이라크 파병철회를 위한 싸움은 이를 향한 소중한! 작은 출발이 될 것이다.
한-미 전쟁동맹 부추기는 전쟁광 딕 체니 부통령 방한 결사 반대한다! -정부의 이라크 파병철회를 거듭 촉구하며- 오는 4월 15-16일, 미국의 부통령 딕 체니가 방한한다. 딕 체니 부통령은 일주일에 걸쳐 한국-일본-중국을 방문하며 각 국가가 기존에 약속한 이라크 파병을 이행 할 것을 촉구한다고 한다. 현재 이라크전의 전면확대 및 파병국가 민간인들의 인질사건으로 각국의 이라크 파병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미국은 이를 무마하고 파병 강행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압박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회운동진영이 파병을 반대하며 누차 주장해온 것처럼, 현재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미·영 연합군과 이라크 민중사이의 전면전은 미국의 부당한 침략과 무자비한 점령정책이 불어온 필연적인 결과이다. 미군이 지난 1년 동안 이라크에 가져다 준 것은 오직 파괴와 학살, 대량실업과 굶주림의 고통뿐이었으며 이제 미국은 이 곤란한 상황을 전면적인 제2의 전쟁으로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딕 체니 부통령은 이라크 침략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대표적인 전쟁범죄자이다. 체니 부통령은 방한을 통해 '추가파병 이행'에 대한 노골적인 압력을 행사할 것이 분명하다. 이 야만적인 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속시키기 위해 방한까지 하여 한국정부를 압박하는 미국의 작태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이라크 파병을 결사 반대해오며 이라크 추가파병은 명백히 침략 전쟁과 이라크 학살에 대한 동참임을 규탄해왔다. 하루에도 몇 십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학살되고 파병국가의 국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되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미국이 이라크를 즉각 떠나고, 한국정부를 비롯한 파병국가들은 즉각 파병을 철회하는 길뿐이다. 체니 부통령은 방한을 통해 미국의 동북아시아 군사패권 강화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용산 미군기지 이전을 비롯한 주한미군 재배치 과정의 법적 절차를 마무리 할 예정이다. 천문학적인 용산 기지 이전비용 전액 한국부담과 평택에 대규모 대체부지 제공을 내용으로 하는 협상을 일사천리로 관철시키려 하는 것이다. 평택을 동북아 군사패권의 전진기지로 만들기 위해 320만평의 대규모 부지를 강요하며 이미 지금도 미군기지로 인해 온갖 희생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평택주민들을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다. 또한 미국은 이 시간에도 대북선제공격 및 압박의 수단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에 전력을 증강시키며 위협적인 군사훈련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실제로 대북 선제공격훈련인 한미연합전시증원훈련(RSOI)·독수리훈련, 대테러훈련 등 한미합동군사훈련을 계속 진행하였으며, PAC-3 미사일 대량 배치와 함께 오는 9월에는 동해에 해상 요격시스템의 핵심인 이지스함을 배치, 북한을 겨냥한 미사일방어망(MD)체제에 남한을 편입시키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딕 체니 부통령은 미국의 선제공격을 가장 선두에서 대변해온 인물로 이번 방한 과정에서도 대북 강경정책을 강변할 것이 분명하다. 이렇듯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한국정부에 한-미 전쟁학살 동맹을 강요할 딕체니 부통령의 방한을 한국의 민중 모두는 반대한다. 딕-체니가 방한하여 전국민이 반대하고 있는 한국정부의 추가파병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고 동북아 군사패권을 위한 미군기지 이전과 관련한 비용을 한국이 부담하게 되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리고 대북 강경 발언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전쟁위기가 고조될 경우, 한국 민중들의 들끓는 분노와 저항에 직면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우리는 또한 한국정부에게 경고한다. 한국정부는 지금까지 파병과 같은 중요한 사안을 겉으로는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신중히 결정한다 해놓고 미국의 고위관료와의 면담을 계기마다 그 주요한 결정을 단행해왔다. 작년 10월 APEC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파병방침 결정,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의 방한기간 파병규모 결정의 어이없는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국민의 의사가 어떠하든 간에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에 모든 관심이 쏠려있는 한국정부는 이번 딕 체니 부통령의 방한과정에서도 거침없이 한-미 전쟁학살동맹을 합의해줄 가능성이 크다. 하루가 멀다하고 이라크에서는 자국민의 납치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국정부는 국제적인 약속을 운운하며 파병강행만을 거듭 밝히고 있다. 무고한 국민을 희생시키고 무고한 이라크 민중을 학살하는 이 전쟁에 대해 한국정부는 즉각 파병을 철회해야 하고 체니 부통령의 방한 시 그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만약 한국정부가 이번에도 국민의 의사에 반하며 대미 굴종적인 외교로 파병을 강행하고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키는 미국의 군사패권정책에 동조한다면 딕체니 방한에 분노하는 한국민중의 저항이 정부에 대한 투쟁으로 확산될 것임을 경고한다. 미국은 침략전쟁 중단하고 이라크를 즉각 떠나라! 동아시아 패권장악을 위한 미군기지 재배치계획 즉각 중단하고 주한미군은 철수하라! 한국정부에게 미군기지 재배치 비용 전가 결사 반대한다! 한반도 위기 조장하는 군사력 증강, 대북압박정책 즉각 중단하라!
학살을 중단하라! 파병을 철회하고 파병부대 철수하라 ! 1. 지난해 3월 20일 미국에 의한 이라크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점령이 시작된지 1년만에 '제2의 전쟁'이라고 할만큼 거센 전투가 이라크 전역에서 번지고 있다. 마흐디 민병대 등 이라크 무장세력들은 연일 미점령당국과 연합군에 맞서 '반미성전'을 벌이고 있다. 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데에 시아파 수니파 구별이 없으며 이는 전면적인 민중봉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장세력들은 파병국가들의 민간인들을 인질로 잡아서 파병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근본적으로 미국의 명분없는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점령, 불투명한 주권이양, 파탄난 경제상황 등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미군을 비롯한 모든 점령군의 철수와 한국군 파병 철회 그리고 이라크 민중들에 의한 자주적인 재건을 도와주는 것이 해결책임을 강력히 주장한다. 2.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무력으로 관철하고 이라크의 석유사유화, 중동 자유무역지대 건설로 나아가려는 부시의 의도는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었고 이라크 내에서 무수한 갈등과 불안만 고조시켰다. 6월 30일까지 주권을 이양한다고 했지만 연기할 수도 있다는 말을 흘렸다. 임시헌법은 종족간의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인구 절반 이상이 실업상태에 놓여있다. 한마디로 미국의 이라크 점령정책은 실패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미군은 이라크인들의 저항에 대해 철저하게 무력진압과 학살로 대응하고 있다. 미군은 아파치헬기와 탱크, F-16폭격기를 동원하여 사원, 주택, 상점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고 있다. 특히 미군은 팔루자에서 미국인 4명이 끔찍하게 죽음을 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팔루자를 봉쇄하고 학살작전을 감행하여 벌써 400명 이상의 이라크인들이 살해되었다. 성지순례를 시작한 이라크인들은 울부짖으면서 '팔루자'를 외치고 있다. 민간인과 무장대원을 따로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군의 무차별적 공격은 더 큰 희생과 그에 따른 저항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3. 이러한 전면전 상황에서 한국군을 추가파병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다. 이라크 어디에도 갈등지역이 아닌 곳은 없으며 파병은 곧 점령군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와 재건'은 애초부터 거짓말인 것이다. 심지어 파병지 변경, 중무장 등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따르는 것은 파병 자체가 미국 통제하에 있으며 이는 전쟁수행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증명한다. 국민의 여론을 무시하고 파병을 결정한 노무현정권과 보수정치권 이를 분명히 책임져야 한다. 스페인, 이태리, 태국 등 파병국가들이 철수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나라 정부는 왜 전쟁범죄에 동참하려는가? 오무전기 노동자들이 피격되고 NGO 활동가들과 목사들이 납치되었다 풀려나는 등 시시각각 파병국가로서 겪는 위협사태가 커져가고 있는데 왜 파병을 철회하고 서희·제마부대를 철수하지 않는 것인가? 더욱 커다란 위협이 발생하면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을 것이고 사태는 돌이킬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4. 무슨 명분을 갖다 대더라도 이라크 침략전쟁과 점령, 그에따른 파병은 정당하지 못하고 인류의 양심과 평화에 반하는 것이다. 미국은 동맹이 아니라 학살과 전쟁을 부추기는 범죄 교사 국가이다. 미국은 모든 점령을 중단하고 이라크에서 손을 떼야 한다. 파병국가는 군대를 철수해야 하며, 한국정부는 파병을 철회하고 서희·제마부대를 즉각 철수시켜야 한다. 오늘날 미국과 초국적자본의 이익을 위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주의를 물리치지 않고서는 민중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를 지켜낼 수 없다. 우리 역시 한국과 세계의 민중들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주의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나갈 것이다.
브레머는 고의로 남부 시아파를 전면적인 혼돈으로 밀어넣고 있다. - 나오미 클라인 2004. 4. 6 (가디언) 나는 후세인 동상이 1년 전에 끌어내려진 바그다드 피르도스 광장에서 자유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기관총 소리처럼 들린다. 연합군에 의해 훈련되고 통제되는 이라크 군인들은 일요일에 여기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시위대가 가난한 이웃도시 사드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때, 미군은 탱크와 헬리콥터, 비행기로 집, 상점, 거리, 심지어 앰뷸런스까지 무차별적으로 쏘면서 추격했다. 지역 병원에 따르면 47명이 죽었고 더 많은 숫자가 부상당했다. 나자프도 그 날은 피투성이였다. 20명의 시위대가 죽었고 15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어제 사드르 시에서는 장례행렬들이 미군 탱크 옆을 지나갔고 병원들은 부상자로 넘쳤다. 오후에 충돌은 재개되었다. 오류를 범하지 말자. 이것은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 사이에 발생할 것이라고 워싱턴이 예측해온 ‘내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증가하는 모크타다 알-사드르 지지자에 대해 미 점령당국이 도발하고 점령군이 수행한 전쟁이다. 사드르는 아야톨라 알리 알-시스타니보다 더 젊고 급진적인 라이벌이다. 지지자들은 아야톨라 호메이니와 체게바라가 합쳐진 인물로서 그의 초상을 들고 다닌다. 그는 미국의 민간인 공격을 비난한다. 또한 그는 점령행정관 폴 브레머를 후세인에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하마스, 헤즈볼라와 동일선상에 놓는다. 그리고 논란이 되는 과도헌법에 대항해 지하드(성전)을 호소 했다. 그가 그리는 이라크는 이란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것은 지지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메시지다. 시스타니가 미국 주도의 점령에 맞서기보다 UN에 호소하는 것에 집중함에 따라 많은 시아파들은 사드르가 전파하는 더욱 과격한 전술로 돌아서고 있다. 일부는 사드르의 민병대인 검은 옷을 입은 마흐디에 가담했다. 마흐디는 그 규모가 수십만이라고 주장한다. 처음에 브레머는 사드르의 세력 성장을 무시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지금은 그가 전면적인 전투에 나서도록 도발하고 있다. 그 갈등은 지난주에 브레머가 사드르의 신문을 정간했을 때, 평화시위가 촉발됨으로써 시작되었다. 토요일에 브레머는 연합군을 보내 나자프 근처 사드르의 집을 포위하고 그의 대변인을 체포함으로써 심각한 상황을 만들었다. 예상대로 그 체포는 즉각적인 항의시위를 불렀고,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이라크군은 발포하여 3명을 사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일요일이 끝나갈 무렵 사드르는 그의 지지들에게 시위를 멈추고 명명되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점령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그 성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기사용 호소로 받아들여졌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당혹스럽다. 끔찍한 팔루자 공격 이후 소위 수니 삼각지대가 화염에 휩싸였는데 왜 브레머는 비교적 평온한 남부 시아파를 전투로 밀어넣고 있는가? 하나의 가능한 대답은 이것이다. 워싱턴이 6월 30일에 이라크 과도정부에 권력을 이양하는 계획을 포기했고, 권력이양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데 필요한 혼란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점령은 선거를 치르는 부시에게 악재지만, 만약 권력이 이양되고 이라크의 갈등이 분출된다면, 과도헌법과 미국이 임명한 과도통치위원회의 정당성을 광범위하게 거부되는 시나리오의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이라크군을 보내 그들이 보호하고 있다고 여겨지던 사람들에게 발포하게 함으로써 브레머는 이미 매우 의심 많은 주민의 신뢰를 획득하려는 새로운 이라크군의 작은 소망마저 파괴했다. 일요일에 비무장한 시위대를 몰아치기 전에 군인들은 스키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이웃이 나중에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연합행정처는 점점 거리에서 후세인과 비교되었다. 후세인 역시 평화시위대나 비판적인 신문을 매우 좋아하지 않았다. 어제 한 인터뷰에서 이라크 통신부장관인 하이더 알-아바디는 현재 폭력의 물결을 시작한 행위인 사드르 신문 '알-하위자' 정간을 비난했다. 이라크의 미디어를 책임지는 아바디는 그 계획을 알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그 사태의 중심에 있는 모크타다 알-사드르는 그의 영웅적 지위를 시시각각 확대했다. 일요일에 수천의 시위대가 피르도스 광장을 가득 채웠을 때 이 모든 폭발적 힘들은 결집했다. 광장 한쪽에서는 아이들 몇 명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이라크의 새 군대를 선전하는 광고판을 찢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미군이 탱크를 군중에게 향하고 스피커를 통해 “시위가 민주주의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교통을 막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광장 앞에는 미국인들이 후세인 동상 대신에 세운 동상이 있었다. 그 얼굴 없는 형상은 이라크인들의 해방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 그것들은 모크타다 알-사드르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다.
* 사회진보연대 반전팀의 "평화주의" 세미나를 위해 번역한 자료입니다. 상당히 오래전에 나온 글이지만, 1980년대 초반 유럽의 평화운동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참고가 될 듯하여 등록합니다. 평화를 향한 대장정 (1982) 에티엔 발리바르 [역주] 1960년대 초반 영국에서는 핵 무장해제에 관한 지식인들의 활발한 토론이 있었고 특히 <Universities and Left Review>와 <The New Reasoner>가 선 구자 역할을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에 CND(Campain for Nuclear Disarmament)의 활동이 쇠퇴하면서, 영국에서는 거의 20년 동안 핵전쟁의 문제는 대중정치의 의제에서 사라지게 된다. '데탕트'의 시기에 무기경쟁 의 속도는 실로 더욱 빨라졌지만, 1980년대까지 대중운동은 출현하지 않았 다. 하지만 1979년 10월 유럽에 쿠르즈와 퍼싱Ⅱ 미사일을 배치한다는 NATO의 결정으로 상황이 크게 바뀐다. 특히 영국에서 에드워드 톰슨은 이 문제에 관한 지적인 자극에 큰 기여를 했다. 1980년대 초반 에드워드 톰슨 은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에서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 문명의 최 후 단계'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톰슨은 이 책의 결론에서 독자들에 게 평화라는 공통의 주장을 위해 마음을 바꾸고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 고, 뉴레프트리뷰는 광범위한 토론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심포지엄이 개 최되었고, 그 결과로 출판된 것이 이 글이 담긴 <절멸주의와 냉전> (Exterminism and the Cold War)(1982)이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1980년 봄부터 1981년 겨울까지의 기간 동안 작성되었다. 저자들은 사회주의자이 고 반전운동에 적극적인 사람들이며, 대개(모두는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 를 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편 에티엔 발리바르는 1961년부터 1981년 까지 프랑스 공산당의 구성원이었고, 이주자 문제에 관한 당의 정책에 반 대해 출당 당했다. 그는 <자본을 읽자>(Reading Capital)의 (알튀세르와 함께) 저자이다. ********************************* 프랑스의 공산주의 투사들이 핵무기 경쟁에 대한 현재의 국제적 논의에 개 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임무지만, 긴급하다. 지난 몇 개월 전 북유럽과 남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벌어진 대중 시위는 [핵경쟁] 위험의 단계적 확대 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위험을 몰아내겠다는 결단을 표출하였다. 이 투쟁 은 국가들의 '선의'나 나아가 '전략적 균형'이라는 계산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핵 '절멸주의'(exterminism)의 희생자로 표현된 남성과 여성 의 에너지를 동원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상황은 매우 다르 다. <유럽 핵무장해제>(European Nuclear Disarmament)와 연합한 활동가들 이 - 대부분은 지식인들 - 벌인 몇몇 용감한 솔선을 제외하면, 프랑스는 대체로 절박한 문제에 관해 두드러지게 둔감한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프랑스 노동운동, 특히 PCF(프랑스공산당)과 CGT(프랑스노동총동맹)은 정 력적으로 평화운동에 헌신했으며, 19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도 (어떤 모순들이 있었지만) 베트남전쟁과 닉슨의 정책에 대항하는 투쟁에 힘을 기 울였다. 오히려 오늘날 새로운 유럽 평화운동의 이상은 '자주관리'(self- management)[운동]과 행동을 함께 求?프랑스 좌파 분파의 이상과 가까 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명백한 무기력이 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조건에서 해외의 수많은 우리 동료들에게 프 랑스 좌파가 역사적 임무를 '배신'하거나 포기했다는 판결을 받는 것이 다. 게다가,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무기력의 원인은 프랑스에서 가장 특 유한 어떤 정치행동 모형에 있다 (그러나 아마도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기력은 우리가 전통적인 지배계급과 정치인들 의 실천에 대한 어떤 대안도 발전시킬 수 없는 무능을 시사한다. 사실 지난 여름 프랑스 공산당은 중성자탄에 반대하고 퍼싱(Pershing) 미 사일의 서유럽 배치를 반대하는 항의 캠페인에 착수했다. 그러나 단명(短 命)한 운동은 당연하게도 그 정치적 배경에 관해 모든 종류의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프랑스 공산당은 퍼싱 미사일을 비난했지만, 1977년 극적인 정 책전환에서 뜻밖에 승인해버린 프랑스 핵무장군(force de frappe)에 대해 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1981년 10월 25일 시위의 마지 막 순간에야 나온 슬로건, "퍼싱 반대, SS-20s[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 반대"만이 노골적인 이데올로기적 불균형을 공식적으로 정정했을 따름이 다. 이 캠페인이 단명했다는 사실은 캠페인의 기능이 단지 책략을 구사하 기 위한 당의 기회를 시험해 보는데 있었다는 것을 가리키며, 몇 달 후 선 거 패배는 공산당을 사회당의 지지 세력으로 떨어뜨렸다. 아마도 그래서 이 문제가 대통령의 '배타적 특권'(exclusive prerogative)에 속하는 것이 지, 새로운 다수파 정당들의 '경쟁'(emulation)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재빨리 상기되어졌다. 어쨌든, PCF의 지도부는 항의행동에서 '통제권을 상 실할' 위험에 직면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여론을 동원하는 관 료제적 수단은 진정 대중 운동을 위한 많은 기회를 남겨두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당은 -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 프랑스에서 이슈를 제 기하는데 최소한 이점이 있었다. 사회당 장관들과 지도부는 이전 우파 정 부의 군사 정책을 따르겠다는 결정을 말과 행동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주었 다. 그들은 핵잠수함 건조를 지속할 뿐만 아니라, 전국 군인위원회의 민주 적 요구를 저지했으며, 특히 국방장관 샬르 에르누(Charles Hernu)는 그들 의 단호한 반대자였다. 프랑스 언론의 논조 변화는 더욱 어지러웠다. 거 의 대부분의 언론은 이 문제에 관한 이전의 무관심을 깨고, '소련의 군사 적 위협', 유럽의 '핀란드화(化)'[유럽의 비공산국들이 옛 소련에 대하여 취했던 유화적 외교 정책]의 위험에 대한 강력한 캠페인을 벌였고, 미국 의 군사적 우세 정책을 가차없이 지지했다. 그 동안 프랑수와 미테랑은 몇 년 내에 전략적 균형이 미국에 불리하게 변할 것이라면서 '위험'을 마 술처럼 불러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언론 캠페인은 폴란드의 군사 쿠데 타를 최대한 이용하였다. 언론은 총부리의 방향을 독일의 평화운동으로 바 꾸었는데, 어느 좌파 일간지는 이를 민족중립주의(Nazionalneutralismus) 라고 딱지를 붙이기에 이르렀다. 전통적인 우익 언론은 극좌, 자유지상주 의(Libertarian) 언론과 공동 전선에 합류했고, 똑같은 서명을 양자 모두 에서 볼 수 있었다. 군사주의적 경향이 전통적인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로 질러 뻗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불행히도, 광범위한 반-군사주의 운동이 모든 계급들과 정당들에서 지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증명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다시 새로워진 전쟁의 위험에 저항하는 프랑스 운동의 나약함과 분 할은 어떤 선입견이나 배제도 없는 집단적인 반성과 공적인 토론을 요청한 다. 내가 볼 때, 문제의 근원은 좌파의 정치적 장치나 노동조합 장치의 오 류, 부족, 심지어 경화증이라기보다 더 깊은 데에 유래한다. 사회당이 '여 당'의 위치 때문에 무기력에 빠질 때; 이제 정부에 참여하고 있고 CGT를 그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공산당이 자신의 지지자를 다시 얻기 위해 문 제들을 받아들이려는 유혹과, 소련에게 충성해온 중압감 사이에서 동요할 때; CFDT(프랑스민주노동총연맹)가 자신의 반핵 입장과 범대서양주의 (Atlanticism)[서유럽과 미국의 군사정치경제의 긴밀한 협력을 주장하는 입장]로 일정한 복귀를 결합하려는 시도 때문에 움직일 수 없을 때 - 따라 서 이 모든 것은, 프랑스 사회와 노동운동 내부에 깊숙이 작동하는 객관적 인 모순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 강한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프랑스의 '후진성'은 이로운 부수 효과를 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 내가 '우리'라고 말할 때는 이웃 나라의 동료들도 함께 생각하고 있다 - 모순들과 장애들의 현실에 주목하도록 하 기 때문이다. 그 현실은 평화와 무장해제를 위한 운동이 사건들에 실제 영 향을 미치기 위해 전망과 지지를 획득하기 전에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 이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모순들의 일부는 프랑스에서 특히 강력하거 나 두드러진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투적인 반전 운동에 헌신하는 것을 우선에 두자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어떻게 운동의 발전이 그 운동 을 깨뜨리고, 봉쇄하고, 약화하는 어떤 모호성을 쫓아 버릴 수 있는지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전쟁 문제에 대해 제국주의와 국제관계는 단순하거나 자동적인 해답을 주지 않는다 - 또는 특히, 그 대안이 전부 아니면 전무 (상호생존 또는 절멸)가 되는 '묵시록'을 향한 경쟁 속에서 [제국주의나 국제관계들이] 집중적인 공통점을 발견할지라도; 그리고 이러한 대안의 적 나라한 단순성이 수십만 명, 잠재적으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것에 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찾도록 할지라도 그러하다. 단순한 해답은 없다. 왜냐하면 비록 핵 협박이 지금 여기에서 대중들에게 복종과 죽음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며, 어쨌든 궁극적으로는 파 멸할 것이라고 위협하더라도, 이러한 협박의 희생자들은 문명의 생존을 위 해, 그 뿐만 아니라 또한 독립을 위해, 착취에 맞서, 투쟁들의 복수성 (plurality of struggles)을 얻기 위해 동시에 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나를 위해 다른 것을 희생하라고 그 투쟁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또 한 단일하고 널리 알려진 개념 아래로 이러한 투쟁들의 종별성을 침몰시키 는 것도 해답이 아니다 - 제국주의이건 절멸주의이건 간에 그 개념은 모 든 투쟁들이 생겨나게 한 비인간적인 '체계'에 대항하여 그들을 공통의 전 선으로 수렴시킬 것이다. 평화운동이 항구적으로 광범위한 인민 대중을 불 러일으키려면, 모두에게 분명한 위대한 이상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그 결 과 그들의 삶과 투쟁의 물질적 조건들 속에 깊은 뿌리를 두어야 한다. 폭 탄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질 수 있지만, 에드워드 톰슨(Edward Thompson) 이 요청한 집단적인 "자기결정 행동'(act of self-determination)은 천상 으로부터 내려올 수 없다. 정말로, 그것이야말로 그런 행동을 발휘하기 위 한 구체적인 조건들을 창출하는 것에 왜 톰슨이나 다른 사람들이 아무런 노력도 나누지 않게 되는 이유다. 이러한 조건들은 평화를 바라는 모든 사 람들의 순수한 '의지'나 '전환'의 결과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와 계급투쟁의 순수한 '논리'의 결과가 아닐 것이다. 절멸주의에 대항하 는 투쟁은 실제로 남성과 여성과 싸울 것이거나, 또는 조금도 싸우지 않 을 것이다. 그 투쟁은 그들을 '새로운' 인민으로, 서로 거대한 자유와 연 대를 소유한 인민으로 점차 변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럽과 다른 곳에 서 이미 시작된 그 운동의 결정적인 중요성이 있다: 그것이 없다면 중요 한 문제들은 드러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이 부정할 수 없게 존재한다. 위선적이거나 의식하 지 못하는 체계와의 타협과 현실의 모순을 작동시키는 진정한 능력 사이 의 경계선을 미리 밝혀낼 수는 없다. 따라서 내가 볼 때, 프랑스 핵무장군 이 단계적으로 확대되는 핵의 세계적 저장고에 속하는 것이라거나, 또는 아프리카나 다른 곳에서 프랑스 사회당 정부가 어쩔 수 없이 그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제국주의적 관계들에 겹쳐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전혀 양보할 수 없다. 반면 우리는 프랑스가(또는 쿠바 또는 소련이) 니카 라과, 앙골라, 또는 모잠비크로 무기를 수출하는 것을 반대할 수 있을 까? - 그 나라의 가난에 찌든 인민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 군대에 맞서 하루하루 자신을 방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렇다면 많은 사회당 당원의 생각 속에 의심할 바 없이 존재하는 선험적인 논거, 즉 그들에 따르면 레이건이 주창한 '전략적 불균형'을 미테랑이 부 분적으로(일시적으로?) 지원하는 게 그가 다른 영역들에서 미국 제국주의 에 맞서는데, 예를 들어 제3세계에서 어떤 해방운동을 지원하는데 자유롭 게 할 것이라는 논거를 거부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러한 어떤 계산도 - 계산이 존재하더라도 -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으며, 진정한 대안이 존재한 다고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대안까지는 여전히 먼 길 이 남아 있다. 비슷하게도, 서방의 평화운동이 '사회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는 동방 의 대중적 투쟁과 '결국'(in the last analysis)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고 단언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동시에 현실 세계에서 상당한 세력들이 양자 를 서로 반대의 자세를 취하게 함으로써 무기력하게 할 수 있을 때, 양자 가 서로를 지원하고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폴란드에서 격렬한 계급투쟁이 벌어진지 일 년 반 후 폴란드의 혁명적 과 정은 일단 군사 쿠데타로 종결되었다는 사실은 모순을 오히려 날카롭게 한 다. 물론 이는 '얄타의 논리'를 따르는 다른 결과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얄타의 논리는 세계를 대항하는 '제국들'로 분할했고 '공포의 균형'을 세 웠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논리에 대항하는 운동이 폴란드 혁명을 효과 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고 증명해야 한다. 폴란드 혁명은 레이건과 대처가 휘두르는 제재에서 효과적인 지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인데, 제재의 기능은 단지 .스스로 위기에 빠지며 썩어 들어가고 있는 제국들과 나라들에서 냉 전이라는 공동의 논리를 재건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이것들은 매우 현실적인 모순들이다. 이것들은 체계가 낳은 환상 의 결과도 아니며, 그 방어자들이 지휘한 선전(propaganda)의 결과도 아니 다. 만약 동시에 여러 면에서, 그리고 미리 예정된 이론적 '해답' 없이, 그것을 직접 대면한다면, 마침내 새로운 국제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가능 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운동의] 힘들이 이미 의미가 없어진 것은 아 니라는 게 나의 확신이다. 프랑스 '사회주의'와 국제적 맥락 영국, 네델란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서 출발한, 유럽의 거대한 평화운동의 부활은 - 대체로 놀라운 것이다 -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또 한 이는 프랑스의 우리가 반드시 완전하게 붙잡아야할 기회를 제공한다. 당장의 미래에 모든 장애물에 마주치더라도, 이 운동은 우리를 둘러싼 세 계의 제국주의적 경향에 홀로 도전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세력들의 수렴을 뚜렷하게 보도록 도와주며 강제한다. 만약 새로운 정치적 실천과, 그 목적 을 위해 필수적인 새로운 국제주의의 형태를 밝히는 게 사활적인 임무라 면, 그 운동은 우리에게 해답의 한 요소를 줄 것이다. 프랑스 언론이 우리가 무엇을 믿게 하건 간에, 평화운동은 과거 또는 미래 가 없는 우연적인 발전이 아니며 단지 공포에 따른 정신병의 결과가 아니 다. 일례로 크루즈(Cruise)와 퍼싱 미사일이 배치되는 전선 위에 서 있는 독일의 젊은이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거친 진압에 맞설 준비가 되어있으 며, 단지 그들의 평안함이 깨질까 두려워하는 한 무리의 유복한 군중이 결 코 아니다. 그들은 이미 핵무기 투성이 나라들에서, 신뢰할 수 있고 지각 있는 대중적 세력을 대표한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수십만명의 시위 운동자들과 함께, 그들은 우리 서방의 군사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 우선 을 두고, 필요하다면 일방적인(unilateral) 방식의 군축을 주장한다. 그래 서 그들은 이미 '게임의 법칙'을 뒤엎었고, '평화주의'(pacifism)에 새로 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물론, 서독을 포함하여 모든 유럽 나라들에 서 실업이 신기록을 달성하고 있을 때, 동시에 그 운동이 분출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수년 동안 서독에서는 '안보' 이데 올로기에 대해, '강한 국가'의 현실적 의미에 대해, 그리고 더 이상 복지 국가라고 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군사-산업 모델에 대한 반역과 반성 이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도, 그 운동은 서독에 세워진 사회 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모든 운동(initiative)이 함정에 빠지도록 위협하는 테러리즘과 대항-테러리즘의 그물망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결단력과 역량이 있는 것처 럼 보인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프랑스 좌파의 선거 승리를 지배의 '전략적 균형'을 뒤엎도록 돕는 또 다른 요소로 간주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새로운 사회 당 정부가 전 세계에 걸쳐 거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은 모두 가 알고 있다. 특히 벽 뒤의 배후세력과 투쟁하고 있는 민족해방운동들에 서, 독립적인 발전을 위해 가장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나라들에서 그러하다. 그들의 희망은 과장되거나 시기 상조일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 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그 희망에 알맹이와 진실을 주는 것 은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의 정치적 자율성이 전제 가 되어야 하며, 그것은 프랑스의 사회주의 실험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1981년 5-6월 선거의 승리가 단지 '권력 부식'(erosion of power)의 기계적 효과며,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권력 부식은 이곳에서는 '왼쪽으로의 흔들림'을 낳고 다른 곳에서는 '오른쪽으로의 흔 들림'을 낳는다고 종종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진지한 설명이 아닌데, 새로운 프랑스 정부는 대중의 사회적 투쟁에 뿌리를 둔 오랜 과정 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을 못보고 지나치기 때문이다. 의심할 수 없이, 1968 년 활기의 쇠퇴와 1978년 좌파 연합의 비참한 붕괴 이후, 그것은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마지막 (따라서 처음) 기 회를 어떻게 붙잡을지 알았다. 우리가 지금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어떠 한 사회변혁 프로젝트도 활동적인 대중 운동 없이는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없으며, 결코 그러한 운동은 '자유로운 사회주의'나 '위기에 대한 민족 적 해결책'[과 같은 슬로건]을 밀폐된 곳에서 배양한다고 해서 태어날 수 는 없다. '새로운 국제 질서'에 관한 프랑스의 사회주의 실험의 기초를 마련하려 는 일관된 시도는 불가피하게도 제국주의의 논리와의, 특히 미국의 이해와 의 충돌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모든 프랑스 좌파는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 의 상호지원의 축이 동구와 서구 사이의 대치를 최대한 이겨내야 한다고, 최소한 말로는,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만약 프랑스의 노동자 운동이, '우 리의'[프랑스의] 민족적 제국주의에 대한 상대적 취약성과 노동자운동 자 체의 분할, 양자에서 유래한 그릇된 방침들과 역사적 지체를 극복하기 위 해서는,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정부 의 '결정'(decision)은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 또는, 오히려, 만약 운동이 충분한 힘과 응집력이 있게 점차 발전할 때에만, 정부의 결정 은 분명한 성격을 띠게 될 것이며, 외부의 압박과 위협을 당하는 이해에 대치하는 불가피한 위험을 감수할 것이며, 그 운동 속에서 사회적 요구들 은 반-제국주의 목표들과 평화와 무장해제를 위한 투쟁과 융합될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주의 프로젝트'(그것은 거의 시작되지 않았으며, 아직 문건 조차 없다)가 이러저러한 진보적인 이론적 필요물에 해당하는지 추상적으 로 의문을 품는 대신에,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어떠한 조건들이 그러한 방 향으로 발전하거나 강제할 수 있도록 생겨날 수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 어보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유럽의 젊은이들이 대중운동과 범세계적 인 해방투쟁에 극적으로 개방적이라는 점은 분명히 하나의 우호적인 조건 이다. 이러한 점에서, 프랑스의 사회주의 실험의 국제적인 맥락에 대해 잠시 곰 곰이 생각해보고 싶다. 이 국제적 맥락에는 유럽적 차원의 중요성이 있 다. 지난 몇 해의 경험은 극히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제안하는 '초-민족 적'[민족-이상적](supra-international) 전망이 단지 신화일 따름이라고 충분히 증명한다. 민족적 사회구성체(social formation)는 그 내부에서 여 러 계급들과 사회세력들의 정치적 지향이 실제 결정(結晶)되는 주요한 틀 이며, 그렇게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특유하게도 유럽의 정치 공간 (political space)이 얼마간 햇수 동안 현존하고, 그것은 국가 기구들, 경 제적인 세력 균형, 전통적인 정치 공간으로 단지 축소될 수 없는 계급 전 략들에 의해 구조화되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측면에서의 주도권은 그들의 활동을 경계선을 가로질러 확장하려는 자본주의 정부와 기업들에게 항상 속해 왔으며, 그래서 지속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분할하고 약하게 하였다. 사실 "유럽의 건설'(building-Euope)은 - 최소한 겉보기에는 - 정치적 결 정의 장소를 계급투쟁이 닿을 수 없는 너머로 옮기려고 고안된 거대한 측 면 포위 책략으로 항상 소용되어 왔다. 반면 노동조합은 결코 동일한 수준 에서 활동을 조정할 수 없었고, 실업과 산업구조조정을 위한 유사한 계획 들에 대항하여 대중 투쟁이 동시에 일어날 때에도 그러하였다 (일례로, 1978년 로렌과 루르를 생각해 보라). 유로코뮤니즘은 자신이 떠오르던 단 계에도 어떻게 유럽 노동자운동의 뼈처럼 딱딱해진 분할을 초월할 수 있는 지 알 수 없었거나 알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해체를 맞이하고 있는 현재 의 상태에서는 더 그러하다. 세계의 경제적 위기와 자본주의 권력들 사의의 더 날카로워진 상쟁이 유 럽 국가들의 이해와 정책들 사이의 깊은 모순을 개방하고 있을 때, 노동 운동은 여전히 이러한 역사적 지체를 극복하지 못했다. 사실은 정반대다. 이는 프랑스나 다른 곳에서 사회변혁을 위한 어떠한 과정에서도 취약성의 굉장한 원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불균형을 정정하도록 돕는 대중 적, 유럽적 성격의 진보적 운동을 주저 없이 환영하고 지원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더 이상 유럽의 정치적 공간이 단지 NATO, 브뤼셀 위원회, 은행 들과 '공동변동환율제'(currency snake)의 투기장이 아니게 된다 - 그것 은 주요한 노동운동 조직들(또는 그들의 중요한 일부)의 회합과 같은 대중 적 운동을 포함하게 되며, 마찬가지로 청년, 지식인, 여성의 거대한 포부 를 포함하게 된다. 또는, 최소한 그것들을 포함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국제적 맥락 있으며, 그것은 분리할 수 없는 측면이다. 현재 자본주의의 위기는 또한 본래부터 제국주의 '세계 분할'의 구조적 위 기다. 장-피에르 비지에의 최근 논문은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의 지배(또 는 미국이 방어하는 독재)에 대한 어떤 조직화된 반대도 강제로 진압하기 위해서, 그리고 전례가 없는 무기 경쟁의 발전 속에서 미국 정부가 정치 적 공세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대외 정책에서 '굴레를 벗은 자유주 의'(unbridled liberalism) 방식을 실현하기로 결정한 미국 정부의 권력 출현이 의미하는 위험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러한 제국주의 대공세는 초과착취 당하고 희생당하는 제3세계의 대중적 저항에 맞서는 싸움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에 유래한다 - 이 러한 어려움은 심지어 이란 혁명 이전부터, '인권'[미국의 인권침해]에 대 한 여러 층의 우려를 급속하게 쫓아버리며, 또는 오히려 미국의 진의를 드 러내 준다. 동시에 미국 자본과 미국에 기반을 둔 다국적 자본은 일본과 유럽(특히 독일)의 경쟁에 직면하여 근거를 잃고 있다. 따라서, 너무 늦 기 전에 - 다시 말해 미국이 거대한 경제적 우월성을 잃기 전에 - 전세계 를 낭떠러지 끝으로 몰아서, 필요하다면 그 과정을 역전하려는 시도를 하 는 것이다. 비지에는 '우리는 레이건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히틀러 가 실패한 화가가 아니 듯이, 그는 B급 영화의 카우보이가 아니다'라고 정 당하게 주장한다. 그들의 성공은 그들에게 권력을 가져다준 사회 세력의 의미심장한 변이를 오히려 증언한다. 민족주의와 거대 권력의 쇼비니즘의 화염은 1980년대의 새로운 아메리카의 특징이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위기는 명백히 서방과 동방의 대치를 첨예하게 하며, 제국 주의 권력 사이의 적대를 고조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로 세계 의 민족-이상적인 체계의 특징인 군사의 단계적 확대라는 '논리'는 제동 이 걸리기는커녕, 거대하게 강화되고 있다. 3차 세계대전은 여전히 나타 날 수 있는 결과며, 불행하게도 그 전망은 이전 어느 때보다 무시무시하 고 비참할 것이다. 1950-60년대 냉전 시기, 두 블록간의 전체적인 균형이 있었다. 두 블록은 몹시 동등하지 않았고 사회 성격이 전혀 비슷하지 않았 지만, 아직까지 정치적 군사적 주도권을 완벽히 독점하는 '초강대국'에 의 해 지배를 당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 간의 현재 세력관계로 미래를 추정한다면, 세계 종말 의 전망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20년의 시간에서 역 사가 그처럼 직선의 과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제국주의의 논리 는, '불합리한' 무기 경쟁이 그것의 통합된 일부분이며, 체계의 바로 심장 부에서, 또한 물론 해방투쟁으로부터 저항에 직면한다. 핵 '억 지'(deterrence)의 역할이 무엇이었던 간에 - 우리는 마침내 핵억지 문제 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 베트남 인민의 애국적인(patriotic) 투쟁이 미 국의 인도차이나 침략에 반대하는 미국 인민의 운동과 결합되지 않았다 면,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의 패배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운동 이 새로이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소비에트 블록의 내적인 발전과 외부 정책이 점점 더 똑같이 제국주의 논리를 본뜨는 한에서는, 사회주의 나라 들 내에서의 민주적 민족적 투쟁들의 새로운 역사적 단계 또한 그것[제국 주의]에 저항하는 내부의 힘들로 포함되어야만 한다. 세계 경제위기와 상 대적으로 독립적인 기원을 갖는 이러한 다른 위기의 전개가 동시에 그 나 름대로 국제적인 상황을 더더욱 위험하게 할지라도. 최강-제국주의? (super-imperialism?) 대중적 저항의 현실들과 함께, 이러한 모순들은 오늘날 제국주의 체계의 분석을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하며, 우리가 물려받은 제국주의의 이미지 는, 필요하다면, 근본적으로 정정해야할 것이다. '절멸주의' 프로세스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이 체계의 성격을 폭로하며, 그 효과는 생산에서 문화 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삶의 범위로 확대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 한 효과들을 어떻게든 꼭 붙잡기 위해서는, 단지 그 효과들의 지옥과 같 은 논리를 기록하는 것 이상을 해야만 한다. 톰슨이 올바르게 보았던 것처 럼 절멸주의는 기계-생산이나 유럽과 북아메리카 군대의 세계 정복처럼, 하나의 사회적 관계다. 따라서, 그것은 자동적으로 자신을 재생산할 수 없 다. 우리가 절멸주의의 기원뿐만 아니라, - 무엇보다도 - 미래의 방향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재생산의 모든 측면을 조사해야 한다. 오늘날 미 제국주의의 현재 정책이 보여주는 중대한 위험은 아무리 강조해 도 지나치지 않다. 제3세계의 시각에서, 미국은 물론 여전히 해방투쟁의 주요한 적이며, 자본주의 약탈을 위한 조건을 유지하거나 재건하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할' 내에서 착취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항 상 간섭하고 있다. 현대 기술에 기초한 이러한 새로운 노동분할은, 지구 의 치솟는 인구에 따른 인류 자원의 완전한 활용을 결코 수반하지 않으 며, 부족한 천연자원을 매점(買占)하는데 최고의 관심을 두는 다국적기업 의 이해에 맞는 착취 구역을 창조한다. 그것은 정말로 움직일 수 있는 모 든 것의 물질적인 전멸(annihilation)을 포함할 정도로 매우 체계적인 억 압을 동반할 수 있다 - 매우 중요한 절멸주의의 형태다. 나는 오늘날 전략 무기의 비축량이 수학적으로 '평형' 상태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여하튼 무기경쟁의 단계적 확대에 기름을 붓고 객관적으로 전쟁을 향한 길을 닦 는 공포의 틀 내에서 토론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가장 결정적인 논쟁점 이다. '블록들' 사이의 분쟁의 세계적 형상이 아메리카 제국주의가 일시 적 또는 지역적 실패를 무시하고 수십 년 동안 체계적으로 추진해온 팽창 과 포위 전략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전쟁 위험의 주요한 양상은 더 이상 고립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 투기장에서 사회주의 진영의 상태는 완전한 변형을 겪었다. 사회주의 진영은 시작부터 포위되었고, 내부적 위기로 고통을 당 하면서, 이러한 미국의 전략과 동일한 방식으로 전투를 벌이려고 시도해왔 다. 이제 사회주의 나라들은 오히려, 정말로 특히 군사적 수준에서 제국주 의들간의 관계의 논리에 붙잡혀 있다. 이는 사회주의 나라들 내의 국가의 생산관계의 진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마찬가지로 민족주의가 가장 분명하게 표시된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따라서, PCF의 지도부가, 다른 이 들보다 특히, '세계 세력균형의 개선'에 대해 말하는 것을 고집할 때, 그 러한 태도는 '현존 사회주의'(actually existing socialism)의 고조되는 위기에 대해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가장 최악의 신비화(mystification) 를 고수하려는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중국-베트 남 전쟁에서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으로 (이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으 로 나아갔다), 제국주의적인 국제관계를 향한 경향은 착취와 저발전에 대 한 투쟁을 점점 더 압도해왔다. 실로 이러한 논리는 '사회주의 진영'의 세 력관계의 악화를 표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지배적이게 되었다. 이미 브레이트가 독일-소비에트 조약과 폴란드 침략 당시에 걱정했던 것처 럼, 이러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지난 오랜 기간동안 스스로를 세계의 혁명 적, 반-제국주의적 세력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 혁명적 운 동들을 깨우는 것은 그들의 존재나 사례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민족 해방운동에 직면하면서 극적인 딜레마를 겪는다. 서방의 식민주주의 권력 은 '자존'(self-reliance)을 완전히 필요조건으로 만들었지만, 충분조건으 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민족해방운동은 소련과 그 동맹국말고 누구 에게 의지할 것인가? 게다가, 그들은 어떻게 소비에트의 대외정책, 그리 고 초강대국의 무기경쟁이 강요하는 '전략적 계산'의 볼모가 되지 않으며 혁명적 운동을 수행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어떻게 최초 사회주의의 가능성 을 - 즉 존립할 수 있는 동시에 살기 좋은 - 심각하게 억압하는 새로운 경 제적 정치적 의존으로 들어가는 것을 피할 수 있을까? 앙골라, 모잠비크, 베트남의 인민들은 매일 매일 이러한 모순을 경험한다. 또한 비동맹운동 의 단결과 자율성을 강화하려는 쿠바의 노력이 소비에트의 아프가니스탄 침략에 의해 무력화되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이러한 행동은 사회주 의 나라들을 처음으로 직접적인 식민지 전쟁의 상태에 처하게 하였고, 바 로 그 때에 미국의 정책 결정가들은 '인권'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베트남 과 칠레로 나아간 원칙들을 공개적으로 부활시켰다. 나는 어떻게 이러한 발전을 세계 자본주의 사장으로의 사회주의 나라들의 전진적인 재통합과 분리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재통합은 대체 로 국가-보증의 장기신용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며, 다국적기업에게 동방-블 록 시장의 거대한 개방을 가져다주며, [다국적자본에게] 특징적인 노동 분 할과 함께 동방-블록의 시장을 축적의 제국주의적 과정에 종속시키는 경향 이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 나라들을 서로서로 경쟁을 시켜 득을 보는 게 가능하며, 그들을 제국주의들간의 경쟁에 끼워 넣는다 (일례로, 서유럽보 다 낮은 가격으로 식품, 원자재, 제조품을 제공하는 대신에 완전히 장비 를 갖춘 공장들과 발전된 기술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그들 경제의 일부분 만이 이런 방식으로 통합된다고 하더라도, 그 현상은 사회주의 나라들 사 이의 '노동 분할'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물론, 그것이 최근 동방의 정 치적 위기로 나아간 사회적 모순들을 창조하진 않는다. 그러나 모순들의 전개를 명백히 가속화하며 악화시킨다. (폴란드의 270억 달러의 외채를 생 각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기에레크(Gierek) 정부가 떠오르는 노동자의 요 구로부터 '탈출'하고자 한 결과였다.) 그 때문에, 그것은 이러한 나라들 의 현재 불안정성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우리는 그 프로세스가 비가역적 이라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시계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적이며 (autarkic), 중앙집중화된 '사회주의 진영'으로 되돌려질 수 없다. 탈출하 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적이건 평화적이건 간에, '현존 사회주의'의 전면 적인 변혁이다. 이러한 지적이 정당하다면, 세계적 규모의 '세력균형'은 동시에 세 측면 을 포함한다; 블록들간의 적대의 고조; 그들 군사전략의 '동형 성'(isomorphism); 모순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거대한 자본주의 강대국 들간의 경쟁과 집약적인 축적의 위급함에 지배당하는 단일 세계시장으로 의 사회주의 경제의 전진적인 재통합. 하지만, 이러한 이질적인 경향은, 톰슨이 시작한 토론에 대한 기여하고자 내가 지금 정식화하려는 하나의 해 석적 가설을 가리킨다. 우리가 고전적인 '제국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의심 할 수 없이 사실이며, 어쨌든 제국주의 개념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러 나 우리가,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단일한 다민족 '트러스 트 내부로 민족적 적대의 초월이라고 이해했던 '초-제국주의'(ultra- imperialism)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군사주의의 부활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초 강대국'의 현실성은 분명한 것이므로, 나는 현재의 현상을 최강-제국주의 (super-imperialism)라고 부를 것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제국주의들 의 '융합'과 그들의 사회적 관계의 균일성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제국 주의가 사회주의의 내부적 모순들을 착취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진로 자체 를 통제하고, 포위하고, 역전시키는 세계체계가 되도록 하는 새로운 정치 적 경제적 구조들의 부상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혁명-이 후'(post-revolutionary) 제국주의다. 물론 더 이상 어떤 혁명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혁명들은 항상 예방적 반-혁명과 국가주의( tatism)와 계획화를 동반하는 '현존 사회주의'를 구실로 한 지배와 착취 관계의 중단 없는 재건 양자에 직면해야만 한다. '서로 다른 사회 체계를 지닌' 나라들 사이에서 두 방식의 국가 형태들의 순환 - 우선, 군사 기술 을 포함한다 - 은 최강-제국주의의 하나의 특징이다. 그 전임자와 마찬가 지로, 최강-제국주의는 완벽한 메커니즘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시대의 남 성과 여성이 직면하고 있는 거대한 과제는 최강-제국주의의 모순들을 분석 하고, 우리를 속박하는 것을 풀기 위한 대중적 운동에 힘이 될 새로운 형 태의 투쟁(과 조직)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 때, 폴란드의 사건은 이러한 모든 문제에 냉엄하지만 광명을 주 는 불빛을 던진다. 폴란드 노동자의 혁명적 운동은 연대노조(Solidarity) 로 구현되었고, 그것은 그 뒤로 농민과 지식인을 끌어 들였고, 민주적 민 족적 요구과 불가분 결합되어 있는 계급투쟁의 특히 분명한 형태를 표현한 다는 것은 간단하고 명백한 사실이다. 폴란드의 지배 카스트(caste)가, 그 들의 편에서, 단지 '소비에트' 블록의 이해를 대표하고, 자신의 정치-경제 적 특권을 방어하는 것(이는 '부패'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알려졌다)만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은 폴란드 노장자의 초과-노동과 서방 금융자본간의 불평등 교환을 관리하였다. 이러한 이중적 의존은 왜 일부 서방의 집단들 조차 폴란드 쿠데타를, 매우 사실과 다르게 단지 '내정' 문제로 묘사하는 지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유럽의 상황은 35년 전 이루어진 합의[얄타]와의 관련성이 이제는 단지 미 미하지만, 프랑수와 미테랑이 폴란드 사건은 얄타에서의 대륙 분할에 의심 을 제기해야할 필요성을 증명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중대한 문제를 건드렸 다 - 물론 이러한 의문은 대륙의 서반구를 자본주의로서 보호하는 것도 공 격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하지만 그것은 두 블록의 구조에 대항하는 구체 적인 행동 프로그램을 위한 아주 일반적인 테제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그 렇다면 블록들의 적대는 모든 곳에서 사회적 현상유지를 보존하지만, 동시 에 그것은 지배의 국제적 '평형'이 영원히 안정적으로 남을 수 있을지는 결코 보증하지 않는다 - 사실은 정반대다. 어떤 모호성을 없애자 그렇지만, 어떤 천사의 행운 덕분에, 프랑스(또는 다른 나라)의 육체노동 자와 지식노동자들이 완전한 핵 무장해제 캠페인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분 명히 이해하고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실로 이러한 과정이 그들의 장 기적 이해에 부합한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수십만의 사람들이 무기 산업이 나 그와 관련된 기술적 '스핀-오프'[군수와 산업의 기술교환]에 종사하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프랑스는 핵 무장군을 보유했을 뿐만 아니라, 주 요한 제3세계로의 무기수출국 중 하나다. 사실, 이러한 산업들의 '전 환'은 현재의 산업구조를 변형하고 여러 부문들과 생산물들 사이의 사회 적 노동시간을 재분배하려는 어떤 시도도 직면하는 거대한 어려움이다. 이 러한 문제는, 실업이 고조되고 해외시장의 불안해지는 때에 더욱 날카로워 지고, 잠재적으로 폭발적이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문제는 사회주의 전망 내에서만 진정으로 논쟁될 수 있다. 크리스티앙 바드로(Christian Baudelot), 로저 에스타블리(Roger Establet), 자끄 뚜와제(Jacques Toiser)는 최근 작업에서 최대한 명쾌하 게 이에 관해 논했다. '부르주아 지배의 2세기는 활동적인 인구, 조직화 된 생산 장치, 권력에 있는 계급의 요구와 설계에 따라 형성된 도시계획 과 지대라는 구조를 형성했다', 계속해서, '엄격한 구획으로 구성되었다 - 생산과 전달의 전체 네트워크는 현존하는 계급구조에 적응했다. 이처럼, 그것은 대중 계급들의 노력으로 하루밤 사이에 대체될 수 없다'. 특히, 어 떤 의미로는, 대중 계급들이 그러한 장치에 의존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 다. 생산의 성장하는 부문들의 직·간접적인 군사화는 생산 장치 내의 이 질적인 부분(foreign body)이 아니라, 잉여의 생산성과 활용을 물질적으 로 조절하는 '요구와 설계'의 일부분이다. 거꾸로 사회적 생산의 '완전 한' 재조직화는 집단적 소비를 위한 거대한 화폐적, 물질적, 인간적 자원 을 해방하며, 작업량을 합리화, 편리화하며, 발전을 위한 원조를 확대하 고, 해외 무역을 더욱 안전하게 한다. 이러한 명백한 모순은 노동자들을 스스로에 대항하여 분할하도록 위협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지식 인, 정당, 정부, 공공 언론 그룹들의 수준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노동조 합의 수준에서 매우 명백하게 제출하는 게 필요하며, 노동조합만이 이 문 제에 관해 대중적 토론을 시작할 능력이 있다. 그들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방식 대신에 노동-시간 단축을 통 해 위기와 싸우자고 제안한 정부의 선출을 선택했을 때, 프랑스 노동자들 이 매우 정교한 경제적 분석을 한 것은 아마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생산 체계의 근본적 변화와 그들의 즉각적인 물질적 요구 사이의 관계에 대해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어떤 주어진 생산 모형 은 특정한 사회적 소비구조를 포함한다. 현재까지 사회와 관련된 것에서, 무기의 '소비'는 '대중 소비'의 가장 육중한 형태 중 하나다. 우리는 어떤 모호성을 없애버림으로써 아마도 여기서의 토론을 도울 수 있 다. 독자를 놀라게 하거나 거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무릅쓰고, 나는 핵 무기와 핵에너지가 실재적인 또는 잠재적인 파괴를 향한 본질적으로 하나 의 단일한 힘이며, 그것에 대항하는 동일한 형태의 동원을 요구한다는 통 념을 이러한 모호성 중에 포함시킬 것이다. 물론, 이러한 두 문제 사이에 방수구획과 같은 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한 산업 플랜트가 민간과 군사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 동시에, 동일한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가 전력을 다해서 핵 발전과 핵 잠수함 또는 대륙간 미사일 건설을 추진한다. 크루프(Krupp)나 슈나이더(Schneider)가 기관차 와 터빈 옆에서 탱크와 대포를 만들 때, 또는 보잉(Boeing)과 튜보레프 (Tupolev)가 전략 폭격기와 민간 항공기를 생산할 때, [군산복합체는] 새 로운 질적 양적 수준에 도달하였다. 북유럽의 평화운동이 '다른 종류의 성 장'을 위한 생태적 투쟁의 견고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우연 이 아니며, 어떤 인위적인 결합도 아니다. 이러한 투쟁은 세계적인 전자감 시라는 군사화된 경찰사회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에너지의 '모 두 핵으로 옵션'(all nuclear option)에 의해 일으켜졌다. 전통적인 평화주의나 꾸밈없는 반-군사주의로 단순히 복귀하는 게 민간 핵 산업에 대한 우려를 희미하게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 다. 왜냐하면 이러한 우려는 노동자와 지역 공동체의 안전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반영하기 때문이며, 그 이전 어느 것보다도 중앙집중화되고 국가화 된(statified) '고-위험' 기술의 발전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자유에 대 한 위협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이란 단어가 새로운 물신(物 神) - 톰슨은 '물'(a Thing)이라고 말할 것이다 - 즉 대중과 우리 자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유령이 되어선 안 된다. 정치는, 대중 정치를 포함하 여, 구별을 긋고 그 구별에 대한 인정을 획득하는 기술(art)이다. 그러므 로 나는 그 토론에는 핵무기와 핵에너지 사이의 구별의 조건들, 또는 오히 려 이러한 조건들의 변형을 탐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긴다 고 제안할 것이다. 핵 에너지가, 당장에는, 현재의 생산을 위한 필요물에 대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핵 동력의 압박, 이득, 위험에 대해 다른 시각 들이 있더라도, 무기경쟁의 지옥과 같은 논리를 깨뜨리기로 단호한 결정 을 내린 모든 세력들은 풍성한 단결에 함께 할 수 있다. 아마도 우리는 핵 무기에 대한 투쟁이 이러한 에너지 자원의 '민간용' 사용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보장하는 투쟁을 위해 더 나은 조건을 창조하리라 생각할 수 있 다. 확실히 두 투쟁 사이의, 그리고 이러한 운동에 의해 위협받는 이해들 사이의, 연결은 이[에너지 자원의 민주적 통제를 위한 투쟁]를 더욱 가치 있는 내기가 되게 할 것이다. 적극적인 중립주의 (Active Neutralism) 대중 동원을 위해 장벽을 '넘어뜨리자'는 선전에 호소하는 의지주의 (voluntarist) 방법은 지금까지 제기된 어떤 문제도 풀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핵무기 문제를 더욱 구체적인 틀에 위치시키고, 그 무게를 전혀 최소 화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 핵무기가 지난 40년 간 존재했고, 그 파괴력 은 극히 거대해졌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위험을 질적으로 바꾸었고, 동시에 피지배자 대중 에 대한 지배계급과 카스트의 권력을, 가능한 한, 증대시켰다. 하지 만, '핵 우산'의 존재가, 묵시론이[묵시론의 현실화 여부가] '핫 라 인'(Hot Line)이라는 가느다란 선에 의해 우리의 우두머리에게 달려있다 고 공표한 이래로, 어떤 인식의 결핍은 - 두말할 나위 없이 어떤 '유 럽'의 위선 - 그 속에서 세계의 대부분이 살아왔고, 또는 오히려 죽어 가 는 전쟁의 풍토병 상태(the endemic state of war)를 이러한[핵] 문제와 분리시켰다. 퍼싱과 크루즈, SS-20s, 프랑스의 핵잠수함과 알비옹 고원 (Plateau of Albion)의 지하 격납고는 베트남의 폭격기, 카불, 벨파스트, 방기의 낙하산부대, 바르샤바와 산티아고의 탱크, 그리고 엘살바도르의 반-게릴라 헬리콥터와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동일한 체계의 부분을 구성한다. 현재의 시기에서 핵무기가 중국, 이스라엘, 인 도, 남아공, 그리고 곧 아르헨티나, 이라크, 파키스탄 등등으로 확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술' 핵무기가 배치되고, 화학무기와 생물학무기 개발 이 빨라지고, '재래식' 무기와 '핵' 무기 사이의 간격이 항구적으로 좁아 지고 있다. 전체의 파괴 장치는 매우 높은 수준을 넘었으며, 이미 여 러 '전역'(戰域)에서 작동하고 있다. 억지와 선제공격의 시나리오가 갖 는 '불합리한' 성격은 연쇄반응을 폭발시킬 어떠한 무장 충돌도 유발할 수 있다. 동시에, 서방에서 대중적 평화운동이 성장하는 바로 그 때에, 동유럽의 나 라들은 폴란드 인민의 투쟁 속에서 지난 전쟁 이후 가장 강대한 혁명의 물 결에 흔들렸다. 폴란드에서 국가 권력과 대중 세력들 사이의 타협의 가능 성이 붕괴한 이 때에, 어떻게 이러한 두 운동이, 자유에 대한 공통의 포부 가 있는, 서로 서로에게 대항하는 도구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가에 대 해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은 여전히 결정적인 문제다. 나는 거대하 고, 다양하고, 독립적인 유럽의 운동을 건설하기 위한 지칠 줄 모르는 활 동말고는 그에 대한 다른 해결책을 알지 못한다. 유럽의 운동은 전진적인 무장해제와 군사 블록의 해소를 위해 운동을 일으킬 것이다. 프랑스와 영 국 노동자의 투쟁과 그들의 '권위주의적인 헌법 국가'에 대항하는 독일 청 년의 반역은 이러한 운동의 성장을 지원할 것이며, 마찬가지로 폴란드 인 민은 이미 그것에 객관적으로 기여해왔다. 마르크스주의와 비-마르크스주 의 노동 조직들, 기독교, 자유지상주의 경향, 사회-민주주의자 ― 모두가 모호하지 않게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동유럽 공산주의자들의 참여를 볼 수 있을 것이며, 반체제인사들뿐만 아니라 지배적인 공산주의자들도, 헝가 리에서와 같이, '제3의 길'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프랑스의 역사적 전통을 여기에서 진지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할 필 요가 있다는 점을 반드시 말해야 한다 - 특히 드골주의(Gaullism)의 양날 의 유산이 문제인데, 드골주의는 프놈펜의 연설뿐만 아니라 프랑스 핵무장 군을 포함하며, 사회당과 그 후에는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핵무장군으로 모 이고 있다. 이러한 핵무장의 존재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 주'(independence) 정책을 연상시켰지만, 자주 정책은 허구에 지나지 않았 거나, 또는 점점 더 다른 것으로 변하였고, 제국주의들간의 이해의 충돌 과 일치하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프랑스는 - '이 행'(transition)으로 충만하며, 그것을 위해 부서지기 쉬우나 귀중한 수많 은 조건들이 일년 또는 그 이상 동안 이미 존재한다 - 종속과 착취에 국 제 체계, 그리고 세계 군사주의 체계 내부에서 여전히 제국주의의 위치를 물려받으며 (아프리카의 사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자본주의의 다른 모든 구조를 물려받는다. 현재 세계의 격변은 프랑스 좌파가 민족 자주의 진정한 내용에 대해 분명 히 사고할 것을 요구하며, 단지 명복상의 NATO로부터의 '철수'가 아니라 NATO의 실제 소멸을 의식적인 목표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르샤 바 조약의 문제가 동시에 제기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지지를 얻기 위해 어 떻게 설득력 있게 주장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이러한 탈군사화가 동유럽 의 노동자와 인민들을 희생하면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여주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적은 곤란하면서도 동시에 필수적일 것이다; 두 독일의 분할을 극복하기 위해, 라파키 계획(Rapacki Plan) [1957년 폴란드 외상 아담 라파키가 동독, 서독, 폴란드 및 체코를 포함하 는 중부유럽을 핵무기 배치금지 지역으로 만들 것을 제의]을 재활성화하 기 위해, '포르투갈에서 폴란드까지' 비핵지대(nuclear-free zone)를 창조 하기 위해.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평화주의와 중립주의(neutralism)의 통념을 여전 히 괴롭히는 모호성을 점점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뮌헨[1938년 영 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참가한 정상회담에서 독일이 체코슬로바키 아의 수데텐란트 지역을 무혈로 할양 받았다]과 지난 세계대전 이후, 스페 인 내전의 '불간섭'(non-intervention) 이후, '평화주의'라는 용어는 프랑 스에서, 특히 노동자운동에게 당연히 부정적인 함축을 띠었다. 그것은 오 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을 흥미 잃게 한다. 독일에서는 당연하게도 매우 달 랐다! 독일에서는, 30년간의 공식적인 '범대서양주의'에도, 평화주의의 최 근 흐름은 현재 운동의 거대한 도덕적 승리를 얻었다. 게다가, 평화주의 의 이념은 언제나 고정된 자기-충족적인(self-contained) 의미를 지닌 게 아니다. 상황이 그것을 허용하고 요구할 때, 그 이념은 포기되는 게 아니 라, 오히려 - 매우 혁명적인 힘이 되어 - 적극적인 역사적 개입을 하게 된 다. 그 이념 주위에, 노동자와 젊은 지식인이 매우 광범위한 대중적 포부 와 함께 연결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미국 내전 기간 동안 미국과 영국의 긴장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온순한 배우가 아니라 독립적인 세력으로 역 사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다... 주인을 자청하는 자들이 전쟁을 부르짖 는 곳에서 평화를 요구할 수 있었다'고 이미 지적하였다. 그 후, 20세기 초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진로를 채택하는 것의 어려움을 - 심지어 그들의 기층에서 - 치명적으로 과소평가하였다. 하지만 사회주의 좌파의 짐머발트와 키엔탈 회의가 1914-18년 대학살의 와중에 개최되었 고, 마르크스가 가리킨 방향에 따라 이 시기를 더욱 분명한 혁명적 전망으 로 - 부분적으로 현실로 나타나는 - 규정하였다. 또한, 우리가 아는 바대 로, 그 결과 공산주의자 정당이 형성되는 하나의 시기였다. 오늘날 투쟁 의 조건들과 잠재하는 기초가 매우 다르지만, 전통적인 의미를 뛰어 넘는 적극적인 중립주의를 위해 싸우는 게 유토피아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 다 - 물론, 그것이 쉽지 않다는 점은 나도 동의한다. 이미 '퍼싱 반대, SS-20s 반대'라는 슬로건은 우리를 그 길의 어딘가로 데려다준다. '절멸주의의 논리'(the logic of exterminism)라는 에세이에서, 에드워드 톰슨은 NATO의 '현대화'와 공포의 '새로운 균형'이라는 프로젝트에 맞서 평화운동이 단결하고 조직하도록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이러한 논리가 정 치를 자동적인 기술적 전략적 메커니즘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 하면서, '"정치적" 옵션이라는 바로 그 통념이 점점 더 신뢰할 수 없게 된 다'고 썼다. 이는 틀림없이 매우 현실적인 위협을 드러낸다. 하지만, 위험 은 단지 전쟁의 새로운 기술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또한 평화와 전 쟁, '안보', 무장과 국제정치 등의 문제가 당신과 나와 같은 단순한 개인 들에게는 차단된 특수한 영역의 일부분이 되는 사회적 구조로부터 생긴 다. 왜냐하면, 정의에 따르면 '대중들'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아무 것 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국가, 그리고 정치정당의 모든 실천은, 그들이 오직 국익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한에서는, 이런 방 식으로 사태가 일어나도록 굳히는 경향이 있다. 이점에서 PCF는 좋은 사례 다. PCF는 '그들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국제적 세력관계에 대 한 '그들의' 분석을 개정한 후, 어쩔줄 몰라하는 구성원들 위에서 완전히 180도 전향했고, 핵 무장군에 대한 지지를 갑자기 내놓았다. '전문가'의 독점은 끈기 있고 동시에 지속적인 공적 토론을 통해서 깨질 수 있다. '세계적 세력균형'의 대차대조표,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의 현재 적 형세, 그리고 여러 '군사' 문제들을 정당하게 포함할 대중적 정치문화 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이러한 문화는 우리 사회의 변 혁을 위한 가능성의 영역을 증대시킬 것이다. 프랑스 좌파는 그러한 문화 를 소유할 때에만, 정부의 무감각한 볼모가 되기를 멈출 수 있다. 위로부 터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거나, 정부의 '오류'와 '배신'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 대신에, 그것은 그들의 정치를 전진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길을 닦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방식에서만 우리는, 모든 세계의 억압받는 인민들과 굳건히 연 대하는, 노동자와 혁명적 청년의 독립적인 유럽을 향한 아래로부터의 민주 적 힘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프랑스 '사회주의'는 결 국 자신의 실패, 그리고 15년 또는 그 이상 동안 추구하고 준비해온 그들 의 희망의 좌절을 진압하는 것, 단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할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끝>
미국의 이라크 침략 1년을 맞아 전 세계적으로 '3월 20일 행진'이 개최되었다. 대략 60여 나라 600여 도시에서 200만명 이상이 국제 공동행동에 참여하였다. 한국에서도 '이라크 점령 중단, 한국군 파병 철회 3.20 전세계 반전행동' 집회가 서울을 비롯한 8개 도시에서 열렸다. 당일 시위는 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유럽과 아프리카를 지나 아메리카에 이르렀다. 주요 국가와 도시의 시위 인원을 최대치로 잡아 보면, 미국이 뉴욕 10만, 샌프란시스코 5만, LA 2만, 시애틀 1만5천, 시카고 1만 등 300여개 도시에서 20만명이 넘게 참가하였고 캐나다 5만, 중남미 3만, 영국 10만, 로마 1백만, 스페인에서 바르셀로나 2십만, 마드리드 십만, 발렌시아 2만, 프랑스 파리 2만, 벨기에 브뤼셀 1만, 그리스 아테네 1만 등 유럽 1백 5십만, 호주 지역 1만 5천, 아프리카 4천, 아시아에서 일본 13만, 한국 1만 등 15만명 등이다. 주류언론에서는 1500만 명이 참가한 작년 2월 15일 국제 공동행동보다 훨씬 부드러워졌고 규모도 작아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올해 참여국가와 도시는 더 늘어났으며 특히 미국과 아시아에서 그 특징은 두드러졌다. 베트남이나 동티모르, 이라크에서도 연대집회가 개최되었는데, 동티모르에서는 "우리는 미국이 말하는 '해방'을 알고 있다. 미국은 수하르토의 침략과 24년 동안의 불법 점령, 20만 명의 학살과 실종을 지원했다. 우리는 같은 운명으로 고통받는 이라크의 친구들을 본다"라는 성명서가 낭독되었다. 이라크에서는 정치조직, 쉬아와 수니 이슬람, 기독교, 투르크멘, 앗시리아인, 노조 등이 공동성명을 통해 "이라크인들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재앙과 고통이지만, 우리는 팔레스타인과 체코 그리고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나아갈 것이다"라고 연대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뻔뻔스러운 전쟁광들의 자화자찬 조지 부시는 20일 이라크 전쟁 1주년을 기념하는 라디오 주례 연설을 통해 "이라크전은 유엔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 우리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이라크를 독재자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수행됐다", "이라크엔 해방의 날, 중동에는 전환점이었다", "인간의 자유를 위한 귀중한 진전이었다", "이라크전은 세계를 위해 현명한 처사였다. 사담 후세인 축출로 중동지역에서 침략의 뿌리가 제거됐으며 이 지역 국민에게 자유와 희망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전세계적인 반전의 물결을 외면하면서 침략과 학살, 점령을 정당화하는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다. 럼스펠드는 한술 더 떠 "50년 전 미군이 피를 흘린 결과 한국은 번영과 자유를 누리게 됐다"면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전쟁도 한국에서처럼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각양 각색의 시위물결, '점령반대, 군대철수' 한 목소리 3월 20일 시위는 북구부터 호주와 남미까지 아시아에서 서유럽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륙 모든 인종이 참가하였다. 그리고 풀뿌리조직에서 정당조직까지, 평화단체나 NGO와 공산주의나 아나키 조직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조직들과 대중들이 참여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각국의 상황과 조건에 맞게 많은 슬로건과 구호들이 터져나왔다. 스페인의 경우 3월 11일에 발생한 열차테러로 숨진 200여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부시의 충실한 동맹자인 아스나르 총리를 쫓아낸 기쁨이 공존했다. 마드리드에서는 3월 12일에 수만 명이 모여 희생자들을 추모했고 일주일이 넘도록 이 흐름은 지속되었다. 20일에는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세비야, 사라고사, 빌바오 등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이라크점령 중단과 스페인군 철수, 주권과 자치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플랭카드에는 "전쟁 반대" "아스나르 없는 스페인 만세" "우파의 장례식"이라고 씌어져있었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호세 사라마고는 마드리드를 '유럽의 도덕적 수도'라고 묘사했다. 미국에서는 300여 도시에서 열린 반전집회에서 "세계는 여전히 전쟁반대를 외친다", "부시, 당신이 내 아들을 죽였다", "모든 미군을 철수시키라" 등이 요구되었다. 부시의 고향인 텍사스주 크로포드 반전집회에서는 "부시 탄핵" 주장이 나왔고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전쟁비용을 학교, 보건, 실업에 써야한다는 요구도 많았다. 신시내티에서 어떤 참가자는 생화학전용 복장을 하고 나와 벤치 밑이나 쓰레기통을 뒤지며 대량살상무기를 찾기도 했다. 75개 도시에서 몰려든 10만 명이 참가한 영국 런던의 집회에서는 "부시는 세계 제일의 테러리스트", "부시와 블레어 지명수배", "전쟁중단, 거짓말중단" 등의 플랭카드와 포스터가 물결을 이뤘다. 그린피스 2명은 유명한 빅벤 시계탑에 올라가 '진실을 말할 때'라며 블레어를 비난했다. 로마에는 1백만명이나 되는 가장 많은 사람이 결집하였다. 시위대들은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부시, 블레어를 향해 "당신들의 전쟁이 우리들의 죽음"이라며 전쟁중단을 촉구하였다. 노벨상 수상작가 다리오 포는 무지개빛 평화 깃발들이 펄럭이는 것을 '거대한 시위'라고 말했다. 호주 시드니에서는 6000여명의 시위대가 '점령중단', '군대철수'를 외치며 반전 집회를 벌였다. 70여개 도시에서 수천여명이 시위에 참가한 독일에서는 람슈타인 미공군기지 앞에 '학살자 생일축하'라는 플랭카드가 걸리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1만여명이 '부시, 샤론, 아스나르, 블레어: 학살자'라고 쓴 플랭카드를 들고 행진하였다. 일본에서는 도쿄와 오사카를 비롯하여 일본 전역에서 약 13만명이 반전시위에 나서 점령 중단과 자위대 철수를 요구했다. 51개 단체가 주최한 도쿄 히비야공원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무력으로는 해결할 것은 없으므로 철수해야 한다", "이라크 침공이후 1만 명이 넘게 숨졌고 자위대 파견으로 일본도 위험에 노출됐다"라고 성토했고 육상자위대 본대가 있는 삿포로와 아사히카와 등에서도 시위가 벌여졌다. 제3세계: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 반대로! 서구와 1세계에서 주로 점령중단과 파병철수, 정부수반의 거짓말에 초점을 맞추어 시위가 진행되었다면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제3세계 국가에서는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 등이 결합되었고 행동도 더 급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2000여명의 시위자들이 성조기를 불태우며 미국 정부를 규탄했고 "대량살상무기를 찾지도 못한 채 이라크 민간인만 2만 명 숨졌다"면서 "우리의 피와 영혼을 바쳐 이라크를 되찾겠다"고 성토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는 500명의 시위대가 경찰저지선을 뚫고 미대사관까지 진격하면서 경찰의 물대포와 곤봉에 맞서 싸웠다. 방글라데시 다카에서는 8개 조직에 의해 시위가 조직되었는데, 주로 미 제국주의와 군사주의에 반대하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요구를 내세웠다. 터키에서는 12개 도시에서 시위가 개최되었다. 이스탄불에 3000여명이 모인 것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1만여 명이 참가하여 "점령중단", "미국은 중동에서 떠나라" 등을 외쳤고, 특히 6월 26일에서 29일에 이스탄불에서 열릴 나토 정상회담에 대비하여 부시 방문 반대 투쟁을 펼쳤다. 인도 뉴델리에서는 3000여명이 만디하우스에서 아메리카센터까지 행진했다. 공산주의 정당, 노동조합, 학생단체, 여성조직들이 '전쟁과 점령에 반대하는 시민들' 깃발아래 행진하였고 미군과 동맹군 철수, 제국주의 세계화 중단을 요구하였다. 뭄바이에서는 무슬림 1만여명을 포함하여 여러곳에서 시위가 개최되었고 그 외 방갈로르, 체네, 럭나우, 캘커타 등에서도 집회가 열렸다. 니카라과에서는 미국의 개입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가 개최되었는데 수천여명이 전쟁의 폭력뿐만 아니라 기업의 착취에 대해서도 규탄하였다. 또한 중미자유무역협정(CAFTA)에 대해서도 "우리의 생산과 산업의 적"이라고 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분명히 하였다. 칠레, 산티아고 등 중남미 국가들에서는 비슷한 시위가 이어졌다. 예외적으로 한국에서는 탄핵국면이 검열기제로 작동해서인지 그 수많은 연사들 가운데 누구도 전쟁참여를 결정하고 파병을 강행한 노무현정권과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에 대한 이렇다할 비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탄핵반대 집회시간에 맞추기 위해 쫓기듯이 집회와 행진이 진행되었고 그 많은 반전피켓은 촛불집회 앞에서 내려졌다. 한편, 이라크에서는 폭력과 점령에 반대하여 수니파와 쉬아파 이슬람교도 3000여명이 바그다드에 모여 "후세인도 미국도 반대한다. 미국은 이라크 땅에서 떠나라"고 촉구했다. 그들간의 단결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는데 쉬아파는 카다미야에서 행진을 시작하였고 수니파는 아다미야에서 행진을 하였다. 두 시위대는 중간 지점의 다리 부근에서 만났고 분위기가 고양되어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는 광장으로 행진해서 점령중단과 모든 이라크인들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라크에서는 이날도 미군 2명이 공격을 받아 사망했고 바그다드의 연합군 주둔지역인 '그린존'에도 로켓포 공격이 가해지는 등 저항세력의 공격이 이어졌다. 침략 2년 집회를 맞이하지는 말자 세계 반전운동은 2003년에 이어 2004년에도 수백만에 이르는 대규모 국제 공동행동을 조직함으로써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무장한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지구적 운동의 힘을 보여주었다. 또한 스스로 해방전쟁이라 부른 이라크 전쟁이 1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고 세계가 더욱 불안해짐으로써 부시는 국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다. 부시가 취임 직후부터 이라크 공격에 집착했다는 오닐 전 재무장관의 주장에 이어 9ㆍ11 이전 알 카에다의 위협을 긴급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클라크 전 백악관 보좌관의 증언은 부시에게 타격을 입혔다. 더욱이 전쟁과 점령의 강력한 동맹자였던 스페인의 아스나르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점령중단과 파병군 철수를 공언하는 좌파 사파테로가 집권한 것과 더불어 각국에서 철군 요구가 확대되고 있다. 전 세계 민중들의 더 강력한 연대투쟁으로 반드시 점령군을 철수시키자. 침략 2년 집회는 맞이하지 말자.PSSP ※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웹사이트와 각종 내외신을 참조하였습니다. www.indymedia.org www.unitedforpeace.org www.internationalanswer.org www.focusweb.org www.stopwar.org.uk www.occupationwatch.org www.zmag.org <박스기사> 한국의 파병지역 논란 - 미군철수, 파병철회만이 대안이다 3월 11일 국방부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맡기로 했던 키르쿠크 지역 일부에 미군이 잔류하겠다고 통보해서 미국과 이 문제를 협의중이라고 밝혔다.(미국은 한국에게 전투헬기와 탱크를 보강하도록 요구했다고 알려졌다) 그 지역의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공세작전"이 불가피하며, 한국군의 전술통제 하에 안정화 작전을 실시하려는 미국의 구상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이런 의사를 지난 2월 24일부터 3월 3일까지 이라크를 방문했던 정부대표단에게도 이미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귀국 직후 황의돈 파병부대 사단장은 "책임지역에 대해 원만히 협의했다"고만 말했다. 결국 국방부는 모든 국민을 상대로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연히 논란이 일자 국방부는 "파병 일정이 연기될 수 있다"는 식으로 모호한 입장을 취하다가, 19일 "키르쿠크의 치안 악화 때문에 파병지역 변경이 불가피하며, 이라크 전지역을 대상으로 다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게 되었다. 그리고 대체 지역으로는 6월말 스페인이 철군하는 남부 나자프 지역이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한편 이 와중에 한승주 주미대사는 24일 기자회견을 열어 "국군의 독자주둔이 원칙이지만, 이라크 반군활동에 미군이 대응하지 않으면 반군이 그 지역으로 몰려 우리에게 안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말해 파란을 일으켰다. 미국의 요구가 불가피하며 나아가 합리적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파병을 반대해온 여론은 키루쿠크 지역에 대한 말이 나올 때부터 그곳이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했다. 쿠르드, 아랍, 투르크멘 사이의 종족갈등이 내전으로 확산될 위험이 있으며, 이라크 전역에서 외국 주둔군에 대한 적대감이 시간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나 심지어 노무현대통령은 지난 28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군이 가서 전투할 곳이 없으며 전투할 상대도 없다"고 말했고, 국방부는 아무 문제없다는 말만 반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거짓말을 다시 반복하려는데 있다. 주둔 지역을 "안전한" 나자프 지역으로 옮긴다는 게 똑같은 식의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만약 나파즈가 그렇게 안전한 지역이고, 파병이 아무런 문제도 낳지 않을 것이라면 왜 스페인은 서둘러 나자프에서 철군을 하려하는가? 이미 1300여명의 스페인군은 지난해 8월 나자프에 주둔한 이후 정보요원 7명을 포함해서 11명의 스페인군을 잃지 않았는가? 나자프 시내에는 "임시헌법에 서명한 이라크 지도자들은 미국의 하수인이다"라는 구호가 걸려 있고, "미군은 알라바바다"라는 시민들의 주장이 서슴없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한승주 대사가 은연중에 "시인"한 것처럼 미국의 침략과 점령에 동참하는 점령군에게 안전한 지역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 모든 문제에 대해 한국정부는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거짓말을 거듭하게 되는 것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점령이 아무런 정당성도 없고 오히려 이라크의 불안과 갈등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이 파병을 강행하는 것은 어떤 포장을 달던 '점령군'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고, 결국 그 자체가 갈등 요인이다. 한국군 파병을 전면적으로 철회하고,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즉각 중단시키기 위한 여론과 사회운동의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