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재선을 돌아보며 부시의 재선 확정으로 마무리된 2004년 미 대선 직후인 지난 11월 4일, 미군은 저항세력의 소탕을 목적으로 한다는 대대적인 공습을 퍼부었다. 일주일 새 최소 600여명 이상의 이라크인이 사망했으며, 1천2백여 명이 부상당했다. 심지어 휴전협정이 맺어진 11일에도 이라크인 11명이 숨지고 50여명이 부상당하는 등 이라크에서의 미군의 공격은 무차별총기난사 수준이다. 부시는 10일 연설을 통해 "일부 소수 그룹이 이라크의 민주화를 좌절시켜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다"며 "이같은 민주주의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 미군은 향후 수주간에 걸쳐 공세를 계속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미국 시민의 1/4 가량의 선택을 통한 재선이 마치 9.11테러 이후 일관된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전 세계의 공인이라고 선언하는 듯 하지만, 그 이면의 부시정부의 초조함이 드러난다. 이번 팔루자 공습을 계기로 이라크 내 반미여론이 고조되고 미군이 창설한 이라크군 4개 대대 중 일부는 미군의 공격지원명령을 거부하는 등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들이 쏟아지고 있으며, 부시는 동맹국의 힘을 협박 어린 호소로 요구하고 있다. 2004 미 대선은 베트남전쟁 중이던 1968년 닉슨의 재선이래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는 점, 그리고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나 총득표수 논란 같은 사태가 불거지지 않은 깔끔한 승리와 승복이었다는 점 등에서 미국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와 부시체제로의 강력한 결집이라는 양상을 띄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강력한 양당체제를 유지해오며 한편으로는 지배엘리트간의 합의와 견제로 지탱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와 다양성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주의의 담지를 포함하는 미국정치체제가 돌이키기 힘든 균열의 조짐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이번 대선이다. 한계에 봉착한 미국 정치체제의 '민주성' 미국의 자유주의와 그것을 방어하는 외피로서 보수주의적 성향간의 불균형은 미국적 정치원리의 내부 긴장관계를 크게 흔들고 있다. 대중들의 정치적 의식을 관리하는 가운데, 지방분권화와 중앙집중적 성격의 조화를 목표로 창안된 미국의 선거제도는 강력한 양당체제를 뒷받침해왔다. 이러한 미국의 정치체제는 공화주의적 덕성관념과 자유주의적 사익관념의 대립을 현상으로 하면서 주기적으로 개혁의 이념을 형성하였으며, 미국 건국의 정신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아가서는 구래의 정신으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한계 내에서 지속되어왔다. 80년대 '스태그 플레이션'과 경제불황 등으로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뉴딜연합이 해체된 이래 민주당 내 급진화와 보수화 사이의 경합은 1992년 클린턴의 중도보수로 일단락되었다. 유색인종, 여성, 소수자들의 권리라는 자유주의적 쟁점을 포괄하는 이질적인 집단들의 연합으로서 과거의 민주당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또한 냉전의 해소와 함께 평화, 인도주의적 개입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선봉장으로서의 미국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자주의적 개입의 틀(UN과 국제법)을 초과하는 일방주의적 대외정책 구사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과정에서 미국적 보편주의의 균열은 가속화되었다.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는 분명한 선거조작과 플로리다의 수백 표가 미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결정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자의 패배의 승복으로 일단락되었다. 레이건-부시/클린턴-고어의 합작품인 '범죄와의 전쟁'은 흑인남성의 상당수를 범죄자로 낙인찍어 공민권의 박탈을 초래했다. 투표자의 다수가 모든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선거제도는 미국 자유주의의 몰락을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결집으로 은폐하고 있을 뿐이며, 공민의 지위로부터 추방되거나 이탈되는 광범위한 세력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이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복지의 종식을 뜻하는 '일하는 복지'와 보편주의적 성격을 상실한 자유주의의 앙상함은 미국정치의 '민주성'의 환멸로부터 이탈하는 광범위한 세력들을 더 이상 조직할 수 없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9.11이후 군사개입의 확대로 재정적자가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인 2억9천만명 중 4천5백만 명이 의료보험으로부터 소외되고 8백만이 실업상태라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내건 의료보호확대와 재정적자 해소 등은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하였다. 이를 정치적, 법적 기회의 평등을 자유의 동반자로 인식하면서도 경제적, 결과적 평등은 자유와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미국 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회의와 불만으로 파악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기업에 대한 감세정책, 동성애자 결혼반대, 사형제도 찬성, 낙태 불법화 등에 있어 종교적 가치로 환원되는 '도덕적 가치' 중심의 표-조직화는 미국 정치체제의 '민주성'이라 일컬어지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균형의 균열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자유주의의 몰락(지지기반의 회의와 환멸)의 상황에서 적어도 보수주의라는 외피의 옹호만이 강조되는 것은 미국 지배계급이 대중의 정치의식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체제의 위기상황을 전쟁과 종교의 상호방어라는 방식을 통해서만 관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9.11이후 확장된 미국의 소명의식과 특수주의. 9.11은 보편적 자유민주주의의 확대에 대한 소명의식과 미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사고의 변형을 낳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자본과 국방의 심장부에 가해진 예측불허의 테러는 '우월성과 모범성'을 가진 구원자로서의 나라, 그 점에서 미국이 타락한 구대륙과도 전혀 다르고 미개한 나라에 대해서는 인도자가 되어야 할 대단히 '예외적'인 나라라는 미국적 경험과 체제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부시와 신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천명된 팍스 아메리카나는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는 행복한 제국의 기획으로서가 아니라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따라서 항존하는 '테러'위협으로부터 강력한 보호망을 형성하는 요새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더불어 이는 자신과 타자에 대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개념의 강화를 의미한다. 이라크전은 이러한 변화의 첫 수순이었으며, 부시의 재선은 결정된 대외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그 목적을 철저히 추구하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도덕적 절대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미국인이 선택한 '도덕적 가치'란 소명의식과 미국적 특수성에 도전하는 세력에 대한 화답이며, 4130억 달러라는 엄청난 재정적자와 취약한 경제구조를 안고 있는 미국의 채권을 6984억 달러가 넘게 사들이는 각 국의 중앙은행에 대한 미국적 보답인 셈이다. 한편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북한과 이란 등 불량국가에 대한 개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케리의 패배는 자유주의의 몰락을 저지하는 길이 다양한 이익집단(흑인, 환경, 여성, 동성애자)의 이해를 포괄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것을 1980년대 선거이래 공화당과 보수주의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신보수주의자들의 '제국'적 기획의 판정승이라 결론짓기보다는 세계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민족국가로서 미국의 선택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제국의 신민에 의한 보편성의 승인은 이제 미국의 목표일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자국적 이해를 보호하는 것, 미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요새를 수호해내는 것이 미국과 여타의 종속국과의 관계가 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수호하는 전 세계 국가들의 과제는 FTA 등의 도입을 통한 관세철폐로 미국대외무역적자를 감축하고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보호해야 할 요새에는 미국 부의 40%를 가진 상위 1%가 존재하며 이에는 전세계 지배엘리트들이 포함되어있음은 분명하다.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이 요새에 대한 저항과 공격은 물론 모두 테러로 간주된다. 이 때, 현실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대응력을 갖춘 신보수주의적 쟁점은 이라크, 북한, 이란 등과 같은 위협요인을 미리 제거하고 예방전쟁을 항구적으로 전개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렇게 더 나은 미래(위협요인의 제거의 수순을 밟아나가는)를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전파하는 합의적 미국정치체제가 복원될 것은 요원하며, 세계는 더욱 야만적인 폭력에 노출될 것이다. 미국의 위기는 증폭되고 있다. 미국헤게모니의 쇠퇴와 금융적 팽창이 새로운 헤게모니 출현의 전조를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미국의 헤게모니가 쉽게 지속된다거나 미국의 제국으로의 전환이 무난히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우선 미국은 절대적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인 개입을 펼치기에는 군사력과 재정적 여력이 충분치 않다. 그러나 바로 이런 점에서 지금의 이라크전이 동맹국의 동의를 광범위하게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케리의 비판은 그다지 실효성이 없어 보인다. 이라크저항군에게 무참히 깨져나가며 친미정부 수립과정에서 미궁에 빠진 미국에 대한 이라크와 전 세계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으며 요새 아메리카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에 대한 부담으로 동맹국들의 불만과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는 9.11이라는 역사를 돌려놓기 전까지, 그리고 다자주의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일방주의적 군사개입을 상시화했던 미국의 역사를 돌려놓기 전까지는 해결불가능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 15억 달러씩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로 표현되는 미국 경제의 취약성은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서 지게되는 정치적, 사회적 비용부담이 가중되고 있고, 이를 오래 지탱하기 힘들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유동성과 규제철폐의 경향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미국으로 집중되는 금융분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있어 분명한 난점이다. 더구나 선거에서 드러나듯 요새 내에서의 공민의 지위마저 협소화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보편주의의 상실은 미국 내 인민들 그리고 전 세계 인민들과 민족국가들의 끊임없는, 그리고 보다 확장된 저항을 불러올 것이다. 미대선 직후 개설된 'sorry everybody(모두에게 미안)' 라는 싸이트에는, 노력은 했지만 부시를 막지 못해 미안하다는 메시지들이 '아메리카의 절반의 이름'으로 게재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몰락의 징후를 분명하게 보여준 이 대선의 결과에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것은 아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미국의 폭력과 야만의 선택에서, 이전의 반전반세계화 그리고 반미투쟁의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반미란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보다 냉철한 비판과 폭넓은 저항을 조직해야 할 의무를 의미한다. 또한 모든 사회운동적 쟁점의 연대를 통한 저항의 세계화라는 과제 즉, 전 세계 인민의 보편적 민주주의의 창출이 요구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반전반세계화 투쟁이 반부시로 수렴되는 구호에 머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0월 15-17일에 열린 유럽사회포럼에 대한 글들입니다. 1. 유럽사회포럼 : 또다른 세계, 그런데 어떻게? 2. 유럽사회포럼의 미래 : 운동간에 더 많은 연계를 맺기 위해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3. 유럽사회포럼 4. 바벨(Babel) 성명서 5. 사회운동 총회 호소문 6. 유럽사회포럼 - 심각해져야 할 때 7. 극좌파(Hard Left)의 낡은 속임수 8.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유럽사회포럼을 망칠 것이다 9. 런던 유럽사회포럼의 몇가지 문제점들에 대하여 10. 런던 유럽사회포럼에 대한 몇가지 평가
민주노총에서 나온 '총파업 승리! 조합원/간부 교양자료집'입니다. - 민주노총 4대 요구 - 재앙이 시작된다 : 한일 FTA - 신자유주의 세계화 WTO / 도하개발의제 - 비정규 노동자도 인간이다 - 파병은 미친짓이다 - 국가보안법 - 하반기 입법과제 - 하반기 총파업 투쟁 이렇게 합시다
9/11 위원회 보고서 미국에 대한 테러리스트 공격에 관한 국가위원회의 최종보고서 요약본 * 한글번역
10월 15-17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3회 유럽사회포럼의 사회운동 총회에서 나온 호소문입니다.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고구려사의 해석문제가 한국과 중국 사이의 뜨거운 논란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학술 해석의 문제인 것처럼 시작한 이 쟁점은 급속히 정치적 쟁점으로 변했고, 어느덧 중국은 대외팽창을 추구하는 위험한 패권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있다. 역사의 자의적 해석과 그에 뒤이은 사회의 우경화와 군사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의 그림자가 중국이 현재 걷고 있는 발걸음에 겹쳐지면서 한반도가 좌우로 협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증폭되고 있다. 이에 편승하여 역시 중국에 과도한 신뢰를 보낸 것은 위험한 일이었고, 우리의 영원한 ‘우방’인 미국에 좀 더 적극적으로 기대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뿌리깊은 수구적 논리나, 간도도 우리 땅, 만주도 우리 땅이라는 반사적 대응논리 또한 돌출하고 있는데, 좌우파를 구분할 수 없이 뒤섞여 나타나는 이런 독특한 민족주의의 이면에 대한 성찰이 어느 때보다 시급한 실정이다. 동북공정과 고구려사의 문제를 살펴볼 때 우리는 몇가지 측면을 나누어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동북공정과 고구려사의 자의적 해석은 중국의 중앙정부차원에서 진행되는 국가정책 노선을 반영하는 것인가? 두 번째로 고구려사의 재해석은 동북공정의 핵심인가? 세 번째로, 왜 이 시기 동북공정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가? 네 번째로, 이런 동북공정과 관련된 변화들은 중국사회의 어떤 변화들을 반영해주고 있는가? 다섯 번째로 이후 이 문제는 어떻게 전개될 것이고, 우리는 최소한의 어떤 대응태도를 갖추어야 하는가? 우선 첫 번째 문제와 두 번째 문제를 묶어서 살펴보자.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문제가 한국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2003년 6월 24일 중국공산당 선전부 기관지인 ??광명일보??에 삐엔중(邊衆)이라는 필명으로 “고구려 역사 연구의 몇가지 문제 시론”이라는 글이 실리면서부터였다. 물론 동북공정과 관련있는 중국학자들이 제기하는 고구려의 중국지방정권설이 그 전부터 알려지면서 논란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 때까지는 문제가 아직 학계 내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광명일보에 그런 입장의 글이 게재되자, 이것이 중국정부의 공식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해석되면서, 고구려사 재해석 문제는 한국언론의 대대적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광명일보에 게재된 글은 동북공정을 주관하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의 공식입장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변방의 군중’이라는 뜻의 삐엔중이라는 이 글 필자의 필명은 변강사지연구중심의 간략명칭인 ‘邊中’과 발음이 같다는 점에서, 동북공정의 기본 입장이며, 이 입장이 당 기관지에 실렸기 때문에 중앙정부와 일정한 합의를 거친 글로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고구려사의 재해석은 곧 동북공정의 핵심사업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가, 이미 고구려사 재해석 작업은 그보다 한참 전인 1980년대부터 시작된 장기기획이며, 이런 식의 고구려사 해석은 이미 중국 역사교과서를 왜곡시키고 있고, 이런 작업을 진행하는 동북공정에는 3조원이 넘는 돈이 투입되었다는 등의 각종 확인되지 않는 사실들이나, 있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동북공정과 직접관련이 적은 일들까지 한데 합처져 실상을 부풀리는 작용을 하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갈등의 잠재성이 커지고 있는 중국 변경지역 문제에 대한 정책과제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동북공정 이전에 이미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남공정과 위구르족이 살고 있는 신장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북공정이 진행된 바 있는데, 양 지역 모두 분리운동이 일어나고 있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서남공정이나 서북공정은 모두 이 지역의 현황과 발전전망, 역사적 유산, 통합의 방향 등을 대상으로 진행된 종합연구이며, 이 연구에 기반해 이 지역의 잠재적 갈등요소를 없애기 위한 정책처방을 추진하기 위한 실용적 목적의 연구였다. 동북공정은 같은 맥락에서 동북지역의 불안정성에 대비하기 위한 정책과제로 추진되었는데, 이 경우 주요한 정책적 초점의 하나는 북한의 동요와 조선족 사회의 동요가능성에 대한 장기적 대책마련이었다. 그런 점에서 다른 두지역과 마찬가지로 동북공정 또한 해당 지역의 중요성에 대한 각종 평가와, 이 지역의 발전전략의 마련,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주도권을 인정받기 위한 역사적 정당성의 마련 등의 작업이 진행되기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해당지역의 역사나 현황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면서 같은 역사-문화적 유산을 공유하는 인근 지역과의 잠재적 갈등의 소지를 키워갈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사해석의 문제는 그런 실용적 목적이 역사적 해석을 좌우하면서 발생한 대표적인 갈등의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다만 지금까지 확인된 동북공정의 진행과정에서는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해석하는 입장을 중앙정부가 주도적으로 추진해왔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할 수 있다. 동북공정은 동북지역의 현황과 역사문제에 대한 정리하는데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간의 계획에 따라 중국돈 1500만위안(약 23억원)을 투입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야기되는 3조원에는 이와 별도로 동북지역의 경제개발 및 하부구조 재건설에 투입되는 각종 자금이 모두 포함된 액수인데, 동북개발 전체와 동북공정을 구분해야하기 때문에 23억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투입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대적 국가사업의 추진으로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투입된 액수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사 문제가 정부의 핵심적 의제가 아니었다는 점은 이 문제가 한국 내에서 일으킨 파장에 비교해 볼 때, 중국 내에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낮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동북공정에서 고구려사 문제는 반드시 핵심적인 쟁점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동북공정의 진행과정에서 고구려사 문제가 부각된 것은, 이것을 정부가 의도적으로 지속적으로 추진해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동북지역의 고구려 유적의 유네스코 등록 문제 등과 관련하여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일군의 중국 학자들의 영향력 확대 시도 및 지방정부의 사업확대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쪽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이러면서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문제가 하나로 얽히면서 파장은 증폭되었다. 다만 이 경우에 중국의 중앙정부가 고구려사 문제의 재해석에 대해 시인도 부정도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임에 따라 이 문제가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설사 이 과정이 계획된 의도의 결과는 아니더라도, 이후 유사한 추세가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수민족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자기중심적 태도는 1980년보다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가 1950년대부터도 나타난 바 있는 지속적 흐름이다. 이전과 달리 이번의 경우는 이에 대한 중국공산당과 중앙정부의 입장이 매우 모호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세 번째로, 그럼 왜 이시점에 동북공정이나 고구려사 문제가 부각되는 것일까? 우선 이야기 해 볼 수 있는 배경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개혁개방기 변경지역의 소수민족의 동향에 대한 중앙정부의 우려를 들 수 있다. 개혁개방기 들어 소수민족 거주지역이 지닌 각종 불만은 이전과 다른 돌파구를 찾게 되는데, 이는 소수민족 지역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기반하고, 국경을 접한 인근지역과 공유하는 역사적 자원의 공통성에 근거한 분리주의가 발생할 가능성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티벳이나 신장지역의 분규에서 그런 조짐들은 지속적으로 관찰되었다. 동북지방의 경우는 여기서 특수하게 더 중요한 변수가 추가되었는데,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북한의 동향이다. 북한의 경제가 붕괴상태로 치달으면서 탈북자가 증가하자 북한과 국경지역의 불안정성은 중국에게 점점 더 큰 정치적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특히 동북지역에 1백만명 이상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 국가구조의 약화와 한반도 정세의 변화는 이 지역의 조선족과 한반도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도 시사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조선족의 이주사가 불과 100년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고려하면, 이 지역 조선족의 중국에 대한 통합력이 한반도 지역에 대한 통합력보다 강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며, 이 때문에 동북지역을 중국역사 속으로 통합해 들이려는 정치적 열망은 앞으로도 더 증가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사의 재해석은 계획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정치적 배경을 지닌 통합의 열망의 한 시도가 돌출해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북한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중국에 대한 북한의 위상 또한 바뀌고 있는데, 특히 이는 한반도와 맞닿아 있는 중국의 국경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문제에 대한 완충지역이 사라졌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시기 중국과 북한은 냉전의 국제정세 속에서 이른바 ‘형제국’으로서 특수한 연대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 잠재적 갈등요소가 있는 국경의 문제에 대해 논쟁의 가능성을 봉합하는 타협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요즘 이야기 되는 것처럼 쩌우언라이(周恩來)가 고구려사가 한반도의 역사에 귀속됨을 인정한 것이나, 백두산의 국경선 획정 문제 등이 그런 방식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은 북한을 완충지역으로 하여 중국과 직접적으로 이런 근대적 민족국가 형성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국경선긋기나 민족동일성 형성상의 갈등문제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한반도 정세의 변화와 더불어 완충지역이 사라지면서, 한반도 전체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의 사이에서 앞으로도 점점 더 유사한 형태의 다양한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이 있음을 이런 문제들이 예시해 주고 있다. 중국 내부로 눈을 돌려 볼 경우, 이런 한반도의 정세변화와 맞물린 민족동일성 문제는 중국의 내적통합의 문제와도 관련된다.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에 과거의 (역사적)제국이 동일한 외연을 유지하면서 민족국가로 전환한 드문 형태인 중국의 경우, 그것을 ‘민족국가’로 정당화하는 민족적 동일성의 토대는 사실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다. ‘중원’으로 대표되는 한족과 거기서 조금 더 외연을 확장해 외부로부터 유입되었지만 한족 문화에 깊이 동화된 여타 지배민족(예를 들어 만주족)의 경우는, 그 역사적 공통성을 기반으로 동일한 ‘민족’ 동일성을 표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주변의 흩어진 ‘소수민족’의 경우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제기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으로서 ‘대중화민족’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강한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시기 사회주의적 ‘개혁’을 통해 그 구심력이 일정정도 확보된 것은 사실이지만, 티벳과의 관계에서 보듯이 그 구심력에도 늘 한계가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사회주의적 개혁이 폐기되고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주도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민족적 동일성에 구심력을 주고 있는 것은 발전주의적 국가주의라고 할 수 있을터인데, 이것은 그와 동일하거나 그보다 강한 강도의 원심력이 외부에서 작용할 경우 쉽게 허물어질 수 있고, 또 설사 구심력이 어느정도 유지되더라도 내부에서 그 혜택에서 배제되는 층들이 늘어날 경우 구심력으로부터 이탈하는 원심력의 요소가 늘어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는 곧바로 네 번째 질문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처럼 취약한 구심력과 다양하게 존재하는 원심력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중국은 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한 애국주의적 민족주의에 점점 더 의존하려하는데, 그것은 허구적 민족적 동일성의 신화를 강화하려는 노력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민족이라는 범주 자체가 ‘상상된’ 또는 ‘허구적’ 동일성에 기반한 것임은 많이 지적되는 것인데, 특히 이것이 억압에 대한 대타적 이미지나 타민족에 대한 확고한 우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닐 경우 더더욱 그 취약성은 심해질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중국의 민족주의는 그 진보적 성격을 계속적으로 탈각해 오면서 서구선망적인 형태로, 소비주의에 포섭된 민족주의, 발전주의적 민족주의의 특징을 점점 더 강하게 키워오고 있다. 강력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선망의 민족주의는 그런 맥락에서 형성되는데, 강한 구심력을 가진 중국만이 더 큰 소비력과 더 높은 소득, 그리고 사회적인 안정성을 보장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노력이 현재의 중국의 민족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취약한 측면을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 가공 작업을 통해서 보완하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모순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높다. 전설의 3황5제시기까지 역사와 고고학에 포함시키려는 무리한 노력은 과거 제국과 조공질서를 중국중심주의의 실현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으로 넓혀지게 되며, 현재의 강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모든 자원들을 소급해석하려는 무리한 요구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중국 민족주의가 지닌 모순적 성격의 독특성은 한쪽 측면에서 한족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우월성이 민족통합의 요소로 동원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한 다민족간의 통합과 공존을 중국의 역사로 설명함으로써 대중화주의가 정당화되는 논리가 공존한다는 점에서도 관찰된다. 20세기 초 신해혁명과 그 이후 시기 쑨원(손문)은 한편에서 반청 한족혁명의 기치를 내세운 반면, 다른 한편에서 오족공화(五族共和)의 민족공존의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한 바 있는데, 중국 민족주의의 이런 모순은 이미 그 시기에도 드러난 바 있다. 문제가 중국의 내부적 통합과 갈등의 딜레마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파장이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온전하게 해결될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또한 허구적 동일성이라는 특징을 지니는 민족동일성의 역사적 뿌리에 대한 논쟁은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주제라는 점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고구려사가 한국사로 귀속되는가 아니면 중국사로 귀속되는가라는 문제 이전에, 역사를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거의 어떤 시기가 현재의 특정한 시공간에 귀속되는 것이 타당한지의 문제 또한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역사의 근거로 삼아 현재와 미래의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사의 경우도 비중으로 보건대 중국사보다 한국사에 귀속될 수 있는 자원이 많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고구려사를 기술하는 온전한 방식일 수 있는가의 질문은 끊임없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후세의 어떤 시점의 어떤 국가로 모든 역사는 귀속되어야 하는 것인가? 최근에 중국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중 하나는 송나라 때 민족영웅으로 칭송받는 웨페이(岳飛)에 대한 평가이다. 금나라의 침입에 맞선 웨페이는 화평론자인 친후이(秦檜)의 모함으로 일찍 죽었고, 웨페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는 역사의 배신자로 모멸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이 기존의 중국의 역사기술이었다. 그런데 최근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시각에서 볼 때 이 웨페이를 민족통합을 방해한 인물로 평가절하 하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에서 재단한 과거는 여러 가지 희극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현시점에 설사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왜곡 문제가 전면적 기획의 산물은 아닐지라도, 현재의 중국의 민족주의가 보여주는 특징들을 보건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더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역사기술이나 행동양식들이 강화되고, 문제의 지평을 공통의 영역으로 확대하기보다는 논의와 소통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귀결점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보인다. 그렇다고 이에 대한 즉자적 대응이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기술을 역사화하는 노력 속에서 현재 중국이 문제를 발생시키는 지점의 근원에 대한 뿌리를 찾아보려는 노력과 공동의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를 상이한 시간대 속에서 자리매김하고 현재의 문제를 현재의 시간대 속에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PSSP
우파의 좌절과 좌파의 승리로 인한 도취감 속에서, 정작 베네수엘라 정치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진실들과 차베스 정치의 특성에 대해서 쓴 글은 거의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워싱턴[미 정치엘리트]과 실용주의적인 월 스트리트[경제엘리트] 사이의 분할, 대결의 정치와 화해의 정치의 분할,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초점이 맞춰진 토론은 더더욱 없다. 우파와 좌파 공히 차베스 정부에 대하여 진실과 대면하기 보다는 신화로 대체해버렸다. 신화 1:차베스는 우파들이 국민투표에서 패배시킬 수 있는 인기 없는 대통령이다. 하지만 우익과 그 지지자들인 워싱턴은 몇 가지 지점에서 계산을 잘못했다. 먼저 차베스 정부가 가장 취약했던 순간은 국영석유기업 PVDS 간부가 2002년 12월부터 2003년 2월까지 단행한 직장폐쇄 직후였다. 그 때 유가는 하락했고 경제는 황폐화되었으며 정부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은 재정부족에 직면했으며 기층 민중의 정치적 조직화는 취약했다. 국민투표가 시행된 2004년 8월까지, 1년 반 사이에 사회경제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환경은 역동적으로 바뀌었다. 경제는 12%로 성장하고 있었고, 유가는 기록적으로 높았고, 사회복지 지출은 증가하고 있었으며 그 사회적 효과는 대단히 두드러졌고 광범위했으며, 대중 사회 조직은 전국적으로 대중 속에서 깊게 파고들었다. 명백하게 주도권은 우익에서 좌익으로 넘어왔지만 미국과 반대파에서 있던 세력들은 진실을 보지 못했다. 국영 석유 산업과 자금 배분에 관한 통제권은 2003년 초 직장폐쇄의 실패로 상실되었으며 군대에 대한 영향력은 2002년 쿠데타의 실패로 사라졌기 때문에, 반대파들은 정부의 국민투표 선거운동을 제한할 수단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선거 이후 ‘시민-군부’ 쿠데타를 추진할 수단이 전혀 없었다. 신화2: 우파분석가들에 따르면 국민투표는 차베스의 ‘인기도’, ‘인성’, 카리스마, 그리고 ‘독재’ 스타일의 이슈에 기초하고 있었다. 실상 국민투표는 계급적 인종적 분할들에 기초했다. 비-반대파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노동자 계급과 빈민층의 85%가 넘는 이들이 차베스에게 투표했다고 밝힌 반면에, 부유한 지역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선거 여론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정확히 그 반대로 80% 이상이 [대통령 소환을 위한] 국민투표에 찬성을 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유사한 양상 혹은 계급적/인종적 양극화는 빈곤한 아프리카계 베네수엘라인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높은 투표율과 [차베스 지지]투표 성향으로 보아 명백하였다. 이 계층 유권자로서는 전례가 없는 71%가 선거에 참여하였는데, 투표율이 높을수록 차베스에 대한 지지표가 많았던 것이다. 명백하게도 차베스는 사회복지프로그램 및 계급적 헌신성을 투표행위로 이어지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신화3: 좌파와 우파 공히 대중매체가 대중의 투표행위를 통제하고, 정치적 의제들을 제한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우파의 승리와 좌파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90%의 주요 TV 네트워크와 활자 매체 그리고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국을 우파가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투표는 18%차이로 대패하였다.(59% 대 41%) 국민투표 결과는 사회개혁을 위한 성공적인 투쟁 중에 건설된 강력한 풀뿌리 민중조직들이 미디어 조작을 쉽게 무력화할 수 있는 대중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구조적 권력-돈, 언론독점 그리고 워싱턴의 지원-에 기대어 낙관주의에 빠지게 되면서 의식화된 대중 조직이 그들이 가진 자원에게 강력한 견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눈 감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국민투표의 결과는 중도좌파의 주장 즉, 대중매체 때문에 선거에서 패배한다는 주장을 일축한다. 중도좌파는 대중매체를 ‘중립화'하기 위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들은 사전에 대중투쟁과 조직화가 대중의 사회적 각성을 만들어낸다면 대중 매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한다. 신화4: 많은 좌파 저널리스트들은 차베스의 승리는 라티아메리카 차원의 민중적 민족주의 정치의 새로운 흐름을 반영했다고 한다. 이를 반증하는 자료는 풍부하다. 룰라가 통치하는 브라질은 석유광구의 권리를 미국과 유럽의 초국적 자본에게 팔았으며, 대통령 당선자 아리스티드를 납치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미국의 괴뢰정부를 안정화하기 위하여 1500명의 군대를 (아르헨티나, 칠레 등과 함께) 아이티에 파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안데스 국가들(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그리고 콜롬비아)의 정부들은 석유 공기업들을 사유화하려 하고, 전미자유무역협정(ALCA)과 콜롬비아 플랜을 지지하고, 외채를 갚고 있다. 우루과이 ‘확대전선’은 브라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따를 것을 약속하고 있다. 차베스는 지역무역 블럭인 메르쿠수르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반면, 주요 멤버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블럭 바깥에서의 무역관계를 증대시키고 있다. 사실은 차베스의 반신자유주의 정책과 대중적 사회운동에 반하여 신자유주의 정권 블록이 있는 것이다. 차베스가 그의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계속하는 하는 한, 그의 기본적인 동맹은 대중적 사회운동과 쿠바이다. 신화5: 국민소환투표의 부결은 미제국주의와 지역의 지배층에게 주요한 전술적 패배였다. 하지만 선거 이후 차베스의 워싱턴 및 거대 자본에 대한 호소가 보여주듯이, 제국주의의 패배가 반드시 혁명적 변화를 의미하거나 혹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차베스 정치를 더욱 잘 보여주는 것은 오리노코 지역의 가스와 석유 개발을 위해 예정된 텍사코-모밀사 및 엑손사와 50억 달러의 투자 계약이다. [소환투표에서의] 투표승리에 의한 도취감으로 인해 좌파는 차베스 언설에서의 변화들과 그가 시종일관 실천해 온 사회복지와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시킨 정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의 정책은 언제나 한편으로는 미국 및 국내 소수의 금리생활자들에 대한 영합을 거부하는 것과, 다른 한 편으로는 국내외의 투자가들, 도시 및 농촌의 빈곤층의 연대를 통해 복지 자본주의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하는 정책을 시도하는 것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줄타기를 해왔다. 그의 정책은 카스트로의 사회주의혁명보다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에 가깝다. 세 번의 정치적 위기 -시민들과 군인들이 합세한 실패한 쿠데타, 석유회사 중역들의 직장폐쇄 와해, 국민투표 실패 -이후 차베스는 언론을 장악한 세력, 거대 자본가계급, 그리고 미국 정부와의 대화와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차베스의 중도개혁적 정책에 대한 신념을 고려하면 그가 왜 공개적으로 그의 정부의 폭력적인 전복을 주장한 대중 매체의 소유주들을 기소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역시 그가 왜 헌법 질서에 대한 군사 반란과 폭력적인 공격을 선동한 자본가들의 연합 조직(FEDECAMARS)에 대해 어떠한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유럽과 북미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였다면, 어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라도 이런 지배엘리트들에 대해서 폭력적인 전복 행위를 이유로 체포하고 기소했을 것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그들의 재산, 특권, 부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도 없을 것이라고 언제나 반복해서 말해왔다. 게다가 이들 엘리트들이 정부에 대해 세 번의 비합법적인 정부 전복 시도를 하고도 여전히 그들의 계급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베스 대통령이 여전히 민관 협력과 사회복지 지출에 기초한 발전 구상에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이 정부가 집권한 지 5년 동안 그리고 세 번의 계급 갈등을 거치면서도 최소한 정부 수준에서는 소유 관계 또는 계급 관계의 파열이 없었으며, 외국인 채권자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원유 고객들과의 어떠한 관계 단절도 없었다. 정부는 의료제도, 교육, 중소기업, 그리고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 프로그램에 대한 국가의 자금지출을 증가시키긴 했는데, 이를 외채 상환, 민간 수출업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 산업자본가에 대한 저리의 융자라는 재정 계획의 틀이라는 제약조건 안에서만 그러하였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고유가와 석유 수출로부터 얻은 많은 세입이 있기 때문에 거대기업과 빈곤층 사이의 이러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루즈벨트 대통령처럼, 차베스의 긍정적인 사회복지제도는 수백만의 저소득층 투표자들을 끌어들이기는 하지만, 화폐소득의 증가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대규모 고용창출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실업률은 여전히 20% 수준이며 빈곤층은 여전히 50%를 상회한다. 광범위한 사회보장제도 지출은 빈곤층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는 했지만 그들의 계급적 지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차베스는 그의 지도력이 위협받을 때에는 저항적이고 급진적인데 그가 그에 대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했을 때에는 유화적이고 중도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한다. 신화6: 좌파와 우파는 모두 이데올로기적인 워싱턴과 실용주의적인 월가 사이의 전술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었다. 미국의 정치가들(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행정부건 의회이건)은 차베스를 축출하는 데 적극적으로 위협을 하고 개입하였고, 파괴적인 공장폐쇄, 폭력 쿠데타, 그리고 사기적인 국민투표를 지지해 왔다. 대조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주요 석유회사들과 은행들은 차베스 정부와 안정적이고도 지속적인, 그리고 많은 이윤이 보장되는 경제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외국인 채권자들은 몇 십억 달러의 채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때에 착실하게 변제받았으며, 이들은 이 돈이 되는 거래관계를 파탄낼 수 있는 어떠한 발언이나 행동도 하지 않았다. 미국의 다국적 석유회사들은 새로운 유전 탐사 및 개발 투자에 50억 달러에서 200억 달러를 추산한다. 다국적 자본들이 베네수엘라의 모든 석유수입을 독점하기 위해 쿠데타가 질서 있게 성공하기를 바랬을 것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들은 워싱턴의 정책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감지하고서 석유의 이익을 차베스 정권과 공유하는 것에 만족한다. 워싱턴과 월가 사이의 전술적 차이들은 차베스 정부가 FEDECAMARS와 워싱턴에 대하여 유화적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좁혀져 가는 것 같다. 국민소환 투표에서의 워싱턴의 패배와 주요 미국 다국적 회사와의 거대한 석유계약이라는 상황에서, 워싱턴은 자신에게 더욱 유리한 새로운 환경이 조성될 때까지 잠정적인 ‘정전’을 추구할 것이다. 이러한 ‘정전’이 베네수엘라의 [미국을 향한]비판적인 대외정책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신화 7: 차베스 혁명의 최근 국면에서의 주요 공세는 정부의 부패와, 정치적으로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정치적 반대파와 강하게 제휴되어 있는 고도로 정치화된 사법 체계에 대한 도덕적인 공격이다. 좌파의 많은 사람들에게, [차베스 소환에 대한] ‘부결' 캠페인의 급진적인 내용이란 지역 대중 조직의 확산, 노조 집회를 통한 동원, 그리고 일자리 · 소득 · 대중적 정치권력과 관련하여 장래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회적 변화에 대한 약속에 기초한 탈집중화된 민주적인 투표참여 과정에 기초하고 있었다. (반부패) 도덕 캠페인은 “국가적 단결”을 만들어내고 대개는 계급적 연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중산층 정치와 통상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국민투표에 동원된 대중조직이 필연적으로 ‘새로운 민중 민주주의’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좌파의 믿음은 최근에는 거의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비슷하게 동원이 실패한 쿠데타 이전에도 그리고 사장들의 공장 폐쇄 기간에도 있었으나[그것이 새로운 민중 민주주의를 건설하지는 못했다]). 정부가 후원하는 도덕 캠페인이 베네수엘라나 여타 나라들의 빈민들에게서 커다란 관심을 끌어내지도 못하고 있다. 더욱이 차베스적 정치 지도자들의 관심은 곧 닥쳐올 의회 선거에 있지, 대안적인 지배구조의 요소들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국민투표 이후 시기에 대중 동원을 하려던 좌파의 안이한 계획은 정치적으로 잘못된 믿음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이로 인해 베네수엘라 정치적 과정의 내부적 모순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결론 베네수엘라 국민투표에서 ‘부결' 투표 운동의 거대한 대중적 승리는 라틴 아메리카와 그 밖의 지역의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이는 미국이 후원하는 과두지배체제도 투표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승리한 선거결과가 미주기구(OAS), [선거감시를 나온 전 미 대통령] 카터, 그리고 미 정계에 의해 인정되었다는 사실은 차베스 대통령의 군부에 대한 전략적 변화에 대한 찬사이고, 그것은 합헌적 결과를 존중하도록 한다. 보다 깊이 분석해 보면, 우파와 좌파 가운데 주요 적대세력들의 관념과 인식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즉 우파는 최근 정세에서 차베스에 대한 정치적 제도적인 지지도를 과소평가했다는 점에서, 좌파는 국민투표 이후 시기의 정치 진로에 있어서 과도하게 급진적인 전망을 계획했다는 점에서.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우리는 차베스 정권은 주요 국내외 투자자들과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뉴딜”적인 사회적 복지 프로그램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시기에 따라 이 쪽, 저쪽으로 기울면서도 계급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그의 능력은 높은 원유 수입의 지속적인 유입에 의존할 것이다. 만약 유가가 떨어진다면, 어려운 선택-어느 계급을 선택할 것인가-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