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과 레닌의 전환 레닌은 자신이 제출한 테제의 독창성을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 실제로 레닌은 인용한 편지의 서두에서 볼셰비키 독자들에게 두 차례나 경고했다. 자신의 테제가 의심할 여지 없이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착상을 완전하게 개괄해야 했다고 말이다.58) 더욱이 지나가듯이 언급한 것이지만, 같은 곳에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이미 심대하게 변해버린 역사적 계기에 쓰여졌던 것이라고(레닌은 1907년에 이 지점으로 복귀할 것이다) 말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레닌은 소비에트가 비록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그들 중 일부는 사민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에 의해 자생적으로 창조되었지만 혁명적 기관이고 따라서 당만큼 필수적이라는 견해를 분명히 설명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의 힘으로 노동조합주의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사실상 그는 소비에트를 임시 혁명 정부의 맹아로 보았다. 이 기관들이 선험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조리할 것이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는 소비에트 안에서 반드시 허용되어야 하는 다른 혁명적 분파들과의 끊임없는 변증법을 통해 스스로의 테제를 전달하려 노력하면서 소비에트의 근본 원리를 따라야 한다. 따라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는 다른 혁명적 인민들로부터 스스로를 폐쇄하지 않고,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보와 결정에서 그들의 판단을 따른다. 우리는 오직 노동대중 자신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전적으로 의지한다."59) 이 테제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낡은 관점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레닌은 자신의 새로운 시각이 십중팔구 너무 조급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주로 간접 정보를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편지의 출판 여부를 편집자들에게 위임하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따라 노선을 정한 바 있고 그에 입각하여 소비에트 가담을 반대했던(소비에트가 자생적이고 비(非)-당적인 기관인 한에서) 볼셰비키 신문은 편지를 출간하지 않았고, 그 편지는 1940년이 되어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향은 있었는데, 왜냐하면 볼셰비키 분파가 결국 레닌주의적 지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레닌 자신의 경우, 1906년과 1907년을 경과하면서 혁명적 수준까지 자생적으로 상승한 대중들의 능력과 어우러지면서 그는 소비에트 기관의 혁명적 특성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1906년의 소비에트 경험을 평가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어떤 이론도, 누군가의 재능이나 혹자에 의해 창안된 전술에의 호소도, 당의 교리도 아니고, 비-당적 대중기관이 봉기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봉기의 기관으로 전환하게끔 이끌었던 상황의 힘이었다."60) 그러므로 대중들은 당의 매개 없이 사건들의 힘을 이해했던 것이다: 소비에트는 전제정에 맞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혁명적 봉기의 기관이었다. 두 달 후 레닌은 그러한 판단을 되풀이했다: "조직의 지도부들을 뛰어 넘어 대중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파업에서 봉기로 발전했다. 이는 1905년 12월에 러시아 혁명이 획득한 가장 거대한 역사적 성과다; 그리고 모든 선행하는 성과들처럼 막대한 희생의 대가가 지불됐다. 운동은 일반적인 정치파업에서 더 높은 단계로 상승했다." 계속 이어진다: "12월 당시 사회민주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우리는, 병력 배치를 어설프게 한 나머지 그 대부분이 전투에 능동적으로 가담하지 못하게 한 총사령관 같은 꼴이었다. 노동대중들은 단호한 대중행동을 위한 지도를 요구했으나 이를 받지 못했다."61)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개의 전술}에서 대중의 자생적인 혁명적 능동성으로 정의된 것과 지도의 무지 사이에 분명한 단절이 있음을 발견한다: 빠져 있던 것은 자생적인 혁명적 대중의 능동성이 아니라 지도였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지도가 자생적으로 노동조합주의적인 대중에게 혁명의 길을 보여준 데 반하여, 여기에서는(레닌의 판단에서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자생적으로 혁명적인 대중이 노동조합주의 밖에 예견하지 못한 나머지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 지도자들에게 혁명의 길을 가리켜 준 것이다. 요컨대 1905-06년에 러시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제공한 강렬한 자극으로 인해, 레닌은 발본적으로 다시 사고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입장의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a) 당은 대중들의 혁명적 의식을 독점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당의 외부적 개입과는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자율적 혁명 역량을 갖고 있다(사실 소비에트와 같은 몇몇 경우에는 대중이 당을 이끌었다). 대체로 당과 대중들 사이에는 의식 수준의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b) 따라서 비-당적이고 "자생적인" 기관인 소비에트는 당만큼의 중요성을 가지는 새로운 혁명적 권력의 맹아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다른 혁명적 분파들을 배제한다거나 소비에트가 사회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지 말고 소비에트에 단단히 결합해야 한다. (c) 소비에트에서 당은 대중들 위에 관료적으로 군림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대중들의 판단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스스로를 근거지우려는 자유로운 변증법을 받아들여야 한다.62) 동시에 경제 투쟁에 대한 레닌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최소한 혁명적 시기에는 경제 투쟁을 계급 의식 획득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로 인정하는 것이다.63) 당의 조직과 내적 구성에 관해서도 변화가 있다: 이제 레닌은 당 내에서 융통성 있고 민주적인 구조를 옹호하고,64) 회색 빛의 지적 도식을 구체적 생활로 전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기층 당원으로 대거 유입하고자 노력한다.65) 결국 레닌의 희망은 당 위원회 지식인 한 명 당 적어도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66) 분명 이는 이론적, 정치적, 노동조합적, 조직적 차원, 즉 모든 차원에서의 발본적 전환이었다. 레닌의 전환의 결과: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실질적으로 철회하다 1907년에는 성공하지 못한 혁명의 퇴조가 아주 분명해졌다. 이 기간 동안 레닌은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일련의 극히 흥미로운 저술들을 출판했다. 무엇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1905년과 1906년 사이에 당 내부적으로 조직적 전환이 있었다. 목표는 명백히 당에 뚜렷한 프롤레타리아적 형상을 부여하고 당을 직업적 혁명가의 협소하고 음모적인 조직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엄격하게 통합되어 있는 조직으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피로와 혁명의 퇴조 등과 같은 몇 가지 요소들로 인해 촉진되었는데, 레닌은 이미 1907년67)과 1908년68)의 다양한 계기 속에서 이를 감지한 바 있다. 사실 이 기간 동안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은 당을 떠났다. 반면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인자들은 당에 굳건히 뿌리내렸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 숫자나 비율 면에서 성장했다. 이리하여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신뢰할 수 없고 동요하는 면모들은 가일층 폭로되었는 바, 이는 1905-06년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창발성과 퇴조기에도 이어지는 새로운 전투적 노동자들의 출현과 날카롭게 대비되었다. 1895-1907년 기간 저작들의 모음집 서문 격으로 1907년 중반 무렵에 출판된 레닌의 저작 {12년}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저작은 거의 전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헌정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레닌은 한층 명료해지고 이전 시기의 전환을 반복하는 일련의 입장을 취한다: "현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기본적인 잘못은 팜플렛을 우리 당 발전의 명확한, 그리고 지금으로선 오래 지난 시기의 구체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1901년과 1902년의 {이스크라}의 전술 및 {이스크라}의 조직적 방침에 대한 요약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요약"이었다."69) 이러한 논의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2차 대회에서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주어진 나 자신의 정식들을 "강령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거나 특수한 원칙들을 대체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70) 같은 페이지의 앞 부분에서 레닌은 협소하고 종파적인 써클의 시대는 끝났고, 조직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민주적-프롤레타리아적인 특징의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요컨대 자생성과 의식성의 관계에 관해 종종 "완전히 유리하고 정확한 방식으로는 정식화되지 않은 ... 표현들"을 사용했음을 인정하는 것을 비롯하여,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당과 조직의 일반 이론을 제공했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거부했다. 그것은 심지어 러시아의 경험에 관해서도 일반화될 수 없고, 다만 1901년과 1905년 혁명 사이의 보다 선진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추구한 전술과 관련될 뿐이다. 게다가 레닌은 특히 그 저작에서, "자생적으로 투쟁에 가담하는 객관적으로 혁명적인 계급"이 있을 때 비로소 조직은 의미를 갖는다고 몇 번씩이나 강조했음을 언급했다. 이 계급은 "노동자 계급으로, 이들 중 최량 분자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창안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스크라} 구성원들이 수행한 유일한 적극적 역할은 사회민주주의적 써클들의 능동성을 집중시키기 위해 짜르의 탄압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해외의 중심을 구성한 것이었다.71)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레닌 자신의 해석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분명히 앞서 지적된 것처럼 이 저작에서 그는 전형적으로 러시아적인 상황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경제주의를 격퇴할 필요성이 러시아적 수준과 함께 일반적 원칙의 수준에서 정당화된다는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필요성은 정통으로 여겨진 것을 방어하기 위해 수정주의에 맞서 투쟁하던 시기에 깊이 공감되었던 것으로 이에 따라 누구든 손쉽게 [일시적] 전술에서 [일반적] 전략과 원칙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경제주의를 수정주의와 비교하고, 카우츠키를 인용하여 (완전히 동의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정주의에 맞선] 정통파의 공식 후견인이었던 카우츠키는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이나 전술의 차원이 아니라 원칙의 차원에서 자생성과 의식성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에 접근했다. 요컨대 레닌이 카우츠키의 일반적 원칙들을 러시아 상황에 적용했던 것은 그것들이 "경제주의자들"을 폐점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1902년에 레닌은 1907년에 썼던 것과 달리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최량 분자들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는 카우츠키의 일반적 주장이 "근본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이론과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 외부에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가공되어 대중들에게 외부로부터 의식성을 도입한다. 레닌에게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노동자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을 다루는 사소한 부분이었는데, 하지만 이들은 항상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으로 간주되었다. 1904년과 1907년 사이에 레닌은 러시아 계급 투쟁의 심원한 역사적 변화(소비에트의 발생)로 인해,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이 근본적으로 유지불가능하며 (따라서 그것을) 철회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내부의 전술 때문에(멘셰비키와 "인텔리주의"라는 그들의 비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레닌이 자신의 테제들을 공개적으로 정정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랐다. 이 때문에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해석"을 통해 한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출된 전술(처음에는 심지어 멘셰비키도 유보 없이 지지하였던)의 유효성을 반복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그 저작에서 모든 일반적 유효성을 박탈하였다. 그것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역사에서 완전히 지나간 단계로 격하시킴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고 극히 적절하다: 1907년에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보편적으로 유효한 원칙으로 지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 이 기간 동안 그는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해 겉보기에 모순적인 몇 가지 시각을 견지했다. 사실 멘셰비키와의 논쟁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계급-의식적이라는 진술을 반복했다72)(이는 위험한 입장인데, 비록 "외부적" 의식성을 언급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러한 입장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셰비키 쪽에서 나타나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병적인 숭배에 대항하는 논쟁의 맥락에서 보자면, 레닌에게 이런 주장은 다만 관례에 따른 논쟁적 엄호 사격에 불과하다. 사실 논쟁을 발전시키고 결론 내린 그 이후의 논문에서 그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기관의 경험으로 이해된 소비에트 경험에 대한 포괄적 평가를 내렸다. 그것은 그의 1905년 판단을 반복하는 것인 동시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1917년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이미 선취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유사한 제도들은 실질적으로 봉기의 기관이다... 봉기가 전개된 이후에야 이들의 발단이 하찮은 것 따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거대한 착취였음이 밝혀진다. 투쟁이 새롭게 고조되고 그같은 단계로 이행하면, 그같은 제도들은 물론 필수적이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적 발전은 반드시 ... 혁명적 권력의 맹아적 기관들(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바로 이런 것이다)을 혁명적 권력의 중심적 기관들로, 혁명적인 임시 정부로 전환하는 데 ... 있어야 한다."73)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한 1907년부터 1917년 기간 동안 레닌의 사상에 근본적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더 이상 이 주제에 관한 체계적 저술을 남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소비에트를 광범위하게 다루지도 않을 것이다. 1917년 1월 새로운 혁명적 폭풍의 전야에 레닌은 회의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1905년 혁명에서 소비에트의 중요성을 (비록 약간의 주의를 두면서도) 실질적으로 되풀이했다: "전투의 시련 속에서 독특한 대중조직이 형성되었다. 각 공장의 대표자들에 의해 구성된 저 유명한 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몇몇 도시에서는 이 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점차로 장차의 혁명 정부의 역할, 봉기의 기관과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74) 이렇듯 소비에트가 재출현하게 되는 시점 직전에 레닌이 그것의 혁명적 성격을 반복해 말했던 것이다. 1917년의 레닌: 소비에트와 {국가와 혁명} 위에서 언급한 회의가 있은 지 몇 주 후, 대중들의 자생적이고 예측하지 못한 행동의 결과75)인 혁명은 전제정을 전복하고 소비에트를 다시 세웠다. 이 사건의 막대한 중요성을 완벽하게 이해했던 레닌은 망명지 스위스에서 볼셰비키에게 맹렬한 편지 세례를 퍼부었다. 두 번째 편지에서 레닌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내에서 소수파에 불과했던 상황에서도 저 유명한 슬로건을 선포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76) 분명히 레닌은 소비에트에서 당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이는 오직 소비에트 대중들을 전취하는 당의 지혜와 정치적 역량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1905년 당시처럼 그는 소비에트가 근본 원칙에 관해서 볼셰비키의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당에 어떤 제도적 특권도 부여되지 않더라도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 즉각 이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맥락에서 당은 단지 소비에트 체계의 한 요소일 뿐이며, 비중이나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자유로운 합의를 획득해야만 했다 ― 대중들을 지도하고 계몽하는 "역사적 권리"를 스스로 참칭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1917년에 레닌은 대중들의 창발성이 만들어 낸 소비에트의 근본적인 혁명적 중요성을 되풀이했다.77) 그러나 1917년의 가장 중요한 문건은 {국가와 혁명}이다. 여기에서 레닌은 당이 특권적인 정치적 지위를 부여받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의 운영자로 지명된(그리고 즉각적으로 그것에 책임을 갖는) 이들을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임명하고 소환하며 통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정했다.78)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이 도식을 제출할 때에 레닌은 파리 꼬뮌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비록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전위(마르크스주의적 분파)가 파리 꼬뮌의 경험에서는 부재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파리 꼬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최초의 역사적 사례로 인정했다. 물론 그들은 꼬뮌의 우유부단함과 비극적 패배의 한 원인이 된 (중앙)집중화의 부재를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의식성의 유일한 담지자인 하나의 당이라는 소수의 제도화된 지배를 문제의 해결책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꼬뮌을 위해 보더라도 중앙위원회가 너무 빨리 해산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중앙위원회는 내전의 급박한 결정에 더 적합할 수 있는 보다 조직된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는 단연코 스스로를 역사적 권리에 의해 전위로 공언하는 유일당의 제도적 표현은 아니었다.79)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대했던 것은 단지 모든 프롤레타리아 구성원들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내전 와중의 과도적인 체제 아래서 요구되는 급박한 행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아직 갖고 있는 기관이었을 뿐이다. 레닌은 이 접근과 단절하지 않았고, 그의 예견은 파리 꼬뮌의 도식을 완전히 되풀이한다.80) 게다가 17년 9월에 발효된 슬로건 "볼셰비키는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는 우리의 테제와 모순되지 않는다. 이 슬로건을 선포한 편지에서 레닌은 분명히, 권력 획득의 시점까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장치의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의 이해를 볼셰비키가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4월 테제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있다. 소비에트는 여기에서(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첫 번째 국면에서도) 당의 도구로 여겨지지 않는다.81) 또한 카우츠키와의 1918년 논쟁에서 (여전히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여겨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맥락에서 (당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중심성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82) 1919년 초기에 레닌은 노동조합 2차 대회(1919년 1월)에서의 극히 중요한 연설에서 또다시 전술한 중추적 개념을 반복한다: "하지만 지금, 바로 지금, 정치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권력이 이양된 이후인 지금, 하나의 계급이라는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광범한 조직인 노동조합이, 아주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정치적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며, 말하자면 정치적 기관의 수장으로 나설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이 때문에 정치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이양되었을 때 노동조합은 점차적으로 노동-계급 정치의 건설자라는 임무를, 자신들의 계급적 조직을 통해 낡은 착취자 계급을 대체하는 인민적 임무를 떠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너희가 경제적 임무를 돌본다면, 부르주아지의 당은 정치를 돌볼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나는 구래의 과학의 낡은 전통과 편견들을 뒤집어 놓았으니 말입니다."83) 다시 반복된다: "이러한 연계 속에서 노동조합은 근대적 공산주의의 창시자들이 얘기했던 심오하고 유명한 말들을 아주 진지하게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에서 혁명이 더 넓고 더 깊게 진행될수록, 혁명을 만드는 사람들,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의 창조자인 인민들의 숫자는 필시 증가할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들 말입니다."84) 계속 이어진다: "사회주의 혁명은 수천만 인민이 능동적이고 실천적으로 국가 관리(administration)에 가담할 때에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85) 이 구절에 따르자면 당은 권력을 독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독점해서도 안 되며, 기층에서의 권력 증가가 즉각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는 실현될 수 없고, 당연한 얘기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살아남을 수도 없다. 사회주의는 오직 대중들이 "모든 의미에서의 입안자"로서 국가적 결정에 능동적이고 직접적으로 가담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어떤 제도화된 권력도 제한된 전위에 의해 대중들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물론 같은 경우에 레닌은 이렇게도 얘기한다: "이 임무는 인민들에게 관리(administration)의 기술을 가르치되, 책이나 강의, 회의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경험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명령하고 조직할 채비가 된 바로 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 대신, 훨씬 신선한 피가 부서에 들어올 것이고, 그와 유사한 다른 부서들에 의해 새로운 부문들이 강화될 것이다."86) 그러나 분명한 것은, (외부적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표현된 이 전위(반드시 당일 필요는 없는)의 권력이 즉각 스스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 시작해야 하는 완전히 과도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것이다(노동조합의 합리화는 정확히 이를 겨냥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는 전위의 기본적인 제도적 권력으로 파악되지 않고, 대중들의 명령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러므로 전위는 오직 대중들의 동의와 확신에 기반했고, 그럴 때에만 존속할 수 있었다. 반면 이는 소비에트 권력의 첫 번째 국면에 조응했다: 대중들은 자유로운 선택 행위를 통해 몸소 선출한 자들(이들은 대부분 볼셰비키였다)에게 통치할 권력을 (자유롭게) 부여했다. 이는 높은 수준의 의식성을 전제하는 것으로, 1917-1918년의 극적인 역사적 조건들 때문에 가능했다. 게다가 특히 인용된 구절에서 레닌이 언급한 것이 반드시 지적되어야 하는데, 그는 정치적 대중 교육의 유일하게 진실한 형태는 프롤레타리아의 점증하는 권력에의 직접 경험에 기초하지, 책이나 회의, 혹은 당 관료에 의한 다소간의 계몽된 회보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조차 기꺼이 인정하는 것처럼, 1917년 이래 레닌과 볼셰비키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917년 초반 레닌의 연설은 이 방면에서의 마지막 위대한 노력이다. 그 노력이 실패했음을, 지금의 우리는 안다. 그러나 이 실패는 카 같은 이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헬스의 법칙(Michels' Law) 같은, 일반적으로 정치 정당과 집단적 조직 안의 관료적 경화의 불가피성 따위의 탓이 아니다.87) 소비에트가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에서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생명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대중적 토대가 사멸하면서 소비에트는 관료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패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계급으로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실패인 것이다.88) 1919-1920년의 관료적 전환 1918년이 되자 소비에트 혁명이 관료적으로 타락하는 최초의 징후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구 세계, 낡은 관습, 그리고 오래된 사고방식이 새롭게 출현하는 세계를 망치려 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어야 했다. 이러한 퇴행적이고 "찌꺼기 같은" 경향은 그것들을 재도입하게 만든 일련의 사건들만 없었다면 틀림없이 격퇴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의 어리석은 태도로 인해 볼셰비키는 매우 격렬한 투쟁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도를 홀로 떠맡아야 했다. 한편,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노동조합과 소비에트가 관료화됨으로써 당과 계급간의 진정한 변증법의 가능성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료적 경직화의 이유들은 1919-1920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작동했던 역사적 조건들, 이미 1918년 후반에 분명해진 역사적 조건들에서 찾아질 수 있다. 내전과 외세의 개입은 산업생산의 총체적 붕괴를 야기하여 1920년 산업생산은 전전(戰前)의 13% 밖에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917년의 비범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학적으로 거의 완전히 소멸하였고 내전으로 지쳐버린 수십만의 개인들로 돌아갔다. 더욱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적 분자들은 전사하거나 관료기구로 흡수되어 작업장의 대중들과 유리되었다. 나아가 생산의 발전 혹은 최소한 지속을 위해 구(舊)체제의 관료 및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필요성 때문에 부르주아적 관습과 야망의 인습에 찌든 한 무리의 타락한 분자들이 국가와 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중심부 안으로 들어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반적으로 반(半)프롤레타리아적인 소농민 대중들에게 의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는 그들이 사회주의를 한사코 거부했다거나 그들이 본성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도시와 농촌 양자를 동시에 장악할 힘을 결코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백히 객관적인 이유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농민운동이 일어난 후 몇 십년 뒤에야 발전했고, 도시들에 고립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농촌은 사회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이미 스스로를 단단히 확립했던 다양한 인민주의 운동에 내맡겨졌다. 러시아의 상황에서 소농민은 사회주의에 이질적인 대중이었고, 수십년간 나로드니키와 쁘띠부르주아의 선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기껏해야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신뢰할 수 없고 동요하는 동맹자에 불과했으며, 장구한 시기에 걸쳐 지루하고 난해하며 모순적인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로 전취되어야 했다. 그러나 관료화의 과정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이 시점에는 이미 탈진해 버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당은 오랜 기간 동안 막대한 농민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었으며, 허약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 더 이상 의존할 수도 없었다. 다시 말해, 당은 나라 전체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사한 상황에서 그리고 경제적, 군사적 곤란함 속에서 프랑스 꼬뮌을 모델로 한 국가의 실현은 실로 불가능했다. 이상이 러시아 노동계급이 소생하고 그 사회적 비중 때문에 통제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러시아에 이미 견고하고 경화된 관료적 체제가 존재하게 된 배경이다. 이 같은 사정은 서방의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는데, 그 혁명만이 러시아를 유럽 사회주의 동맹의 일부로 통합함으로써 이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러시아를 해방시킬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혁명의 승리는 가능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룰 수 없는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혁명의 승리는 일어나지 않았고, 1921년경 프롤레타리아적 노도의 일반적 쇠퇴는 유럽에서도 분명해 보였다. 1918년에 이미 분명해진 이 같은 비극적 상황은 이듬해가 되면서 점차 악화되었고, 볼셰비키의 입장과 레닌의 사상에 공히 영향을 미쳤다. "이론적" 전환의 계기는 아마도 1919년 1월의 제 2차 노동조합 대회로부터 두 달 정도 후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러시아 공산당이 소비에트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우위를 점하며 모든 업무에 대한 실천적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결의안이 1919년 3월 8차 당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이론적 정당화는 전위로서 공산당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제도적으로 지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사실 전위의 두 개념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개념에 따르면, 전위는 대중들에게 길을 제시하고(그들과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종종 중앙위원회의 견해보다 더 정확할 수 있는 그들의 요구와 지시를 고려하면서) 의견이 엇갈릴 경우 강요하기보다는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두 번째 개념에 따르면, 전위는 대중들을 지도하는 제도적이고 양도불가능한 기능을 지니며 따라서 의견이 엇갈리면 대중은 그 의지와 무관하게 전위의 지도에 복종해야 한다. Novaja Zhizn에 보내는 1905년 서신이나 {국가와 혁명}의 레닌,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1917년의 볼셰비키의 경우에는 첫 번째 전위 개념이 우세했다. 그러나 8차 대회에서 두 번째 개념에 수반되는 고유한 위험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세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도 및 공산당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배타적이고 완전한 통제에 대한 강조는 전위가 "역사적 권리에 의해" 항상 대중들보다 더 신속하고 더 잘 볼 수 있다는 가정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것이다. 1919년 당 강령의 경우 자신들이 파리 꼬뮌을 모델로 한 국가의 원칙들을 고수하고 있고 이것이 서서히 기틀을 잡아가고 있다고 되풀이해 주장했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지도된 민주주의"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수용되었을 때, 역사적 맥락에서 원칙들의 이같은 선언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19년 3월에도 여전히 레닌은 모든 계급의 기관이 되어야 했던 소비에트가 사실상 제한된 전위의 권력을 "이상하게" 나타내고 있음을 슬픔에 젖어 언급했다.8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지만 불가피한 사정에 대한 깨달음은 1919년과 1920년을 거치면서 상황을 "합리화"하려는 일련의 주장들로 바뀌었다. 만일 볼셰비키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그 무렵 자신들의 권력과 동일화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한편으로 사회민주주의적 비판의 유효성과 다른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적 비판의 유효성을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것의 정치적 결과는 익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탈리아는 있을 법한 예외로 치더라도, 지도자들의 권력을 공격하고 전반적으로 룩셈부르크 사상의 영향을 받은 좌익적 경향이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우익을 형성했던 전(前)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비판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게도 타격을 가했다. 따라서 이 같은 비판적 입장들이 레닌의 지지에 근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대회를 전후로 레닌에게 무자비하게 거부당하고 말았다. 레닌은 이 좌익들에 대항하여(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이탈리아 좌익들에 대항하여) 논쟁하면서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을 썼다. 이 저작에서 좌익 공산주의의 매우 진지한 쟁점들은 "무정부주의적 광증"으로 환원되었고, 그에 반해 대중의 지도에 있어 강력한 권력집중화의 필요성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열 명의 강인한 우두머리"를 상기시키는 어조로 되풀이되었다.90) 사실 레닌의 테제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혁명}의 레닌,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2차 노동조합대회 연설에서 (당과 함께든 아니든 간에) 노동자들의 직접적이고 지속적이며 대규모의 참여를 강조했던 무정부주의적 레닌을 상기하고 어떤 전위도(아무리 능란하고 강력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사회주의 건설에서 이 같은 본질적 요소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상할 수 있듯이 인터내셔널의 2차 대회 기간에도 논쟁은 계속되었다. 타너(독일)와 맥레인(영국)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속성에 관해 질문했을 때 레닌은 자본주의 시대에는 오직 소수의 노동자들(당에 순응하는 이들)만이 계급의식을 획득할 수 있으므로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질적 조응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91) 몇 년 뒤 스탈린은 레닌이 이곳에서 실질적이지만 배타적이지는 않은 조응을 말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가 "본질적이고 진실로 중요한 것"을 의미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위의 지도력은 대중에 의해 통제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소환과 통제는 의식성을 내포하며 만일 레닌이 당시 언급했던 것처럼 진정으로 의식적인 노동자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라면, 정치권력은 이들에게만 귀속된다. 즉, 전위는 대중들이 선택해서가 아니라 의식성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운영한다. 마찬가지로 유사한 맥락에서 소비에트, 노동조합 등은 결국 독재를 실행하는 당의 수중에 있는 수동적인 집행도구(전달 벨트)가 되고 만다. 물론 레닌은 "외부적" 전위와 "지식인"의 기능에 관련된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재도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독점하는 "내부적" 전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국에는 점차로 "외부적" 전위로 변화하게 될 틈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경험을 다른 당들과 공산주의적 조류들이 모방해야 할 기본적 모델로 제시하려는 관료적 경향이 2차 대회 기간 동안 발전했다. 이 대회의 참가자들은 스탈린 시대를 예비하는 명백하게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침묵을 강요받았던 것이다.92) 이 같은 내적인 관료적 타락은 제3 인터내셔널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외부적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 시도된 종합: 관료제에 맞선 투쟁 그러나 관료화로의 경향이 이제 완전하고 최종적인 형태로 응고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는 수십년의 투쟁 동안 언제나 대중들 및 그들의 운명에 깊이 결박된 지도자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편으로는 "당독재"를 이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화의 발전과정에 대해 염려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특정한 현상의 원인을 산출했지만 그에 따른 관료적 효과의 위험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적어도 최초의 이행국면에서는 특정한 전제들이 수용되고 그것들의 "당연한" 효과를 완화하기 한 조치가 종종 취해졌다. 이는 대립하는 경향의 탁월한 조정자인 레닌이 1921년과 1923년 사이에 관료적 물결을 저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작동시키는 원리는 의문시되지 않았다. 당 독재 말이다. 요컨대 문제는 다음과 같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독재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당이 관료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의 권력에 대한 진정한 대항세력을 찾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는 그 전제와 갈등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 독재와 같은 것임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내재적이면서 관료화의 과정을 제어할 수 있는 외부의 대항세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지적했듯이 러시아의 상황에서 그리고 서방혁명의 부재 속에서 관료화 경향은 비가역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레닌과 같은 지극히 탁월한 중재자조차도 극복하기 어려운 역사적 조건에 부딪쳐야 했다. 레닌은 1922년 초에 작성한 노동조합에 관한 논문에서 문제를 대면하려고 가장 진지하게 시도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의 주도성을 반복했다.93) 그러므로 레닌은 노동조합이 당과 대중 사이에서 작동하는 전달기제라고 주장했다. 대개 스탈린의 탓으로 돌려지는 이 유명한 표현은 레닌이 최초로 사용하였고, 1919년 1월 연설과 관련하여 근본적 전환을 보여준다. 또한 레닌은 노동조합이 국가의 관료적 타락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해야만 하며, 공산주의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레닌이 1919년에 주장했던 것이 옳다면, 즉 대중들의 교육은 오직 권력의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운용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제 이행국면에서는 권력이 당에 속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레닌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94) 국가의 관료화에 맞선 투쟁의 과제는 남아 있었다. 이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1919년에 개요된 과제들에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그러나 당과 국가95)가 일치되는 경향이 있고 노동조합이 점점 더 당(차라리, 당-국가)에 장악당한 전달 벨트가 되는 만큼, 노동조합들이 이와 같은 기능을 더 이상 완수할 수 없을 것 같다. 레닌은 스스로 이 모순을 의식하고 있었던 바,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노동조합의 임무는 모순적이며 "전달 벨트"의 양상과 국가 내 관료화(특정한 자율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는)에 맞선 투쟁의 양상 간에 조정의 계기를 찾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하는지는 암시되지 않았다. 비록 레닌이 분쟁 시 제3 인터내셔널에의 의뢰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러나 그 무렵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조차 볼셰비키의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므로 이 처방은 망상이었다. 더욱이 논문의 역사적 상황과 이론적 전제를 고려할 경우, 어떤 구체적인 조치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레닌의 논문은 미해결의 문제와 물음표로 끝을 맺었다. 인생 말년에 레닌은 관료적 현상의 증가에 대해 끊임없이 몰두했다. 그러나 Lewin이 지적했듯이96) 레닌은 그것을 깊이 있게 분석하길 거부했다. 불가피한 역사적 조건을 달아 1920년과 1929년 사이97)의 러시아에 적용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과 같은 몇 가지 탁월한 분석 도구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로를 따름으로써 누군가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악전고투하고 있고 세계 혁명(혹은 적어도 유럽 혁명) 없이는 그것이 다시 소생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레닌은 이 모두를 알았으며 필사적으로 서방에서의 혁명(혹은 그의 최후 저작에서 출현하는 것처럼 동방에서의 혁명)에 의지했다.98) 따라서 레닌은 관료제를 제어하고 완화시키려 노력하면서 그것의 효과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과 10월 혁명의 "요절"을 선언하는 결론에 다다를 정도로 충분히 분석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최후 저작은 징후적이다. 관료제 현상에 대한 책임이 스탈린에게 있는 듯 했으므로 그의 숙청을 요청했던 유언장에 부치는 유명한 방주99)도 추이를 바꿀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스탈린은 레닌보다 훨씬 막강한 역사적 힘의 행위자였던 것이다. 그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다소 덜 "전제적"(oriental)이고 덜 잔인했을지 모르나, 사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레닌의 최후 저술 "더 적더라도, 더 낫게"는 이 문제를 재론했다. 하지만 항상 효과의 차원이었을 뿐, 원인의 차원을 건드리진 못했다. 능률의 문제를 다룰 때 특히 그랬다. 사실 레닌은 그것의 과도함과 오용을 나무람으로써 관료제를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대중들로부터 유리되고 심지어 대중들과 대치하는 관료적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논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레닌은 같은 글에서 기능면에서 정당화될 수만 있다면 국가 기관과 당 기관을 융합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말년의 레닌은 비극적 모순 속에서 사고했다. 관료제에 맞선 투쟁이 패배한 러시아의 맥락에서 그 투쟁을 하는 것,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독재 사이의 동일성을 이론화하면서 동시에 이 독재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 그 안에서 당과 국가가 대항세력을 발견해야 함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이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권력 및 국가(혹은 더 낫게 말하자면 그것의 지도적 기관)와 동일화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면에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레닌의 최후 진술은 극히 고통스러운 물음표로 남아 있다. 결론과 전제 확실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 안에는 즉자계급에서 대자계급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따라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다양한 지점에서 그들은 이 과정을 포착했지만, 그러나 그것의 상호연관을 명료히 하지 않고 현상적 수준의 묘사에 그쳤을 뿐이다.100) 이 점에 관한 레닌의 사상은 단일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일련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입장들 속에 존재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 좌파" 그룹들은 "레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레닌에게 말인가? 초기의 "경제주의자" 레닌, 1899~1903년 사이의 "인텔리적" 레닌, 1905~1919년 1월 시기의 레닌, 1919~20년의 관료적 레닌, 아니면 말년의 고뇌하는 레닌?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레닌은 두 번의 혁명 사이의 레닌, 곧 Novaja Zhizn에 보내는 서신에서의 레닌, {국가와 혁명}의 레닌, 혹은 노동조합 2차 대회 연설에서의 레닌이다. 다시 말해 두 번의 위대한 혁명의 영도자로서의 레닌이다. 그의 위대함은 본질적으로 소비에트 현상의 중심성을 이해하고, 1905년 11월과 1917년 4월 당시 당에 이 노선을 "부과"했던 사실에 존재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1905년과 1907년 사이의 입장들과 함께)은 {무엇을 할 것인가?}와 그것의 인텔리주의를 극복했음을 표상한다. 그것은 레닌의 혁명적 창발성의 최고의 경지이다. 만일 소비에트의 발생, 즉 수많은 대중들이 이 거인적인 경험에 생명을 부여한 방식과 질적인 도약을 거쳐 표면 위로 마침내 분출한 더딘 분자의 은밀한 과정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레닌에게서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실망할 것이다. 심지어 레닌에게서도, 전위와 대중의 관계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불합리한 교조주의로 인해 역사에 의해 지양되고 레닌 스스로 사회민주주의 전술의 과도적 국면으로 격하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이상주의적 테제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신 좌파"는 무엇을 복원한다거나 어디로 돌아가는 문제가 아니라 자율적인 연구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 글은 다만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연구를 위한 역사적 서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레닌주의적 교조주의(통상 스탈린의 눈을 통해 레닌이 파악되는)를 바르게 평가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구체적 방도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58) 레닌, [우리의 임무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레닌저작집 3-3}, 전진. 59) 같은 책, p. 293. 60) 레닌, [두마의 해산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레닌저작집 4-1}, p. 398-399.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어떤 당 조직도 대중들을 '무장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대중들을 기동적인 가벼운 전투부대로 조직화하는 것은 상황이 전개되기 시 작할 때 무기를 조달하는 데 아주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것은 1906년 7월에 쓰여졌다. 61)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 {레닌저작집 4-1}, p. 433. 62)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못박힌 손에 호소하는 것을 참주선동으로 간주했 다. 63) Cf. 레닌, [R. S. D. L. P. 5차 대회를 위한 결의 초안], {레닌저작집 4-2}, p. 323에서는 거대한 경제 파업에 대해 다음처럼 언급한다: "러시아 혁명의 전체 역사는 혁명운동의 모든 강력한 고양들이 오직 그런 대대적인 경제적 운동에 기초해서만 시작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혁명적 물결이 시작되던 1917년에 레닌은 다시 1907년의 판단을 반복한다: "즉각적이고 직접 적인 환경 개선 투쟁만이 피착취대중의 가장 후진적인 계층을 격앙시킬 수 있고, 그들을 진정으로 교육시키며, 혁명적 시기에 는 그들을 몇 개월 내에 정치 투사의 군대로 변혁할 수 있다." Cf. 레닌, "Lecture on the 1905 Revolution," in Collected Works, Vol. ⅩⅢ, p. 242. 64) 레닌, [논문 모음집 {12년}에 대한 서문], {레닌저작집 4-3}, 75p. 65) 레닌, [당의 재조직화], {레닌저작집 3-3}, 298p. 분명히 여기에서 노동자들은 지식인들과 다르게, 즉 말의 모든 의미에서 프롤 레타리아적으로 간주된다. 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다만 출신계급과 분리되고 다른 지식인들과 동등해진 노동계급 출 신의 지식인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66) 같은 책, p. 302, 각주 2. 혁명의 노도가 러시아에서 고조될 때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 3차 대회 당시(1905년 4월) 레 닌은 일찍이 당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지지했으며, 위원회가 두 명의 지식인에 대해 여덟 명의 노동자로 구성될 것을 희망했다. 지식인들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67) 레닌, [혁명과 반혁명], {레닌저작집 4-3}, pp. 83 ff. 68) Lenin, "Letter to Ronsthein" (1908년 1월),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ⅩⅣ, pp. 375 ff. 그리고 "Letter to Gorki" (1908년 2 월), 앞의 책, pp. 379 ff. 69) 레닌, [논문 모음집 {12년}에 대한 서문], {레닌저작집 4-3}, pp. 72-73. 강조는 원문. 70) 같은 책, p. 78. 71) 같은 책, p. 76. 72) Lenin, "Intellectual Warriors against Domination by the Intelligentsia," in Collected Works, vol. ?, p. 317. 73) Lenin, "Angry Embarassment." in Collected Works, vol. ?, p. 322. 강조는 최종 판본에서 추가. 74) Lenin, "Lecture on the 1905 Revolution," 앞의 책, p. 248. 75) 이 점에 관해서는 History of the Bolshevik Revolution (Ann Arbor, 1957)에 있는 Trotsky의 탁월한 분석을 보라. 여기에서 그는 2월 혁명이 그들 자신의 것이라 일컬어지는 혁명적 조직의 저항을 이겨낸 그룹에 의해 아래에서부터 해방되었고, 주도권은 나 머지보다 더 착취받고 억압받은 프롤레타리아 분파가 자생적으로 틀어쥐었음을 보여 준다: 직물 노동자들 말이다. 2월 23일에 는 아무도, 특히 혁명적 써클들조차 폭풍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05년의 혁명적 경험과 볼셰비키의 혁명적 노동자 들이 없었다면 1917년 2월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트로츠키가 처음에는 인정했던 운동의 자생적 성격의 적 절성을 낮게 평가하려 했다는 것을 지적해 두자. 간단히 말해, 당은 투사들을 통해 대중들을 "간접적으로" 지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볼셰비키가 운동 속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음을 증명하지 못했고, 볼셰비키 외부에서도 전제정에 맞선 대 중투쟁으로까지 발전한 혁명적 분파들(무정부주의자, 사회혁명당원, 트로츠키 자신 같은 비-볼셰비키적 사민주의자)이 있었음에 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투쟁을 지도하고 결정하고 계획하는 집중화된 조직이 있을 때 당이 혁명을 조직하고 지도한다 는 관념은, 이 경우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만일 당시 조직 같은 게 있었다면, 집중화된 조직이 아니라 (거리거리마다, 집집마다 조직된) 지역적이고 분파적인 것이었다: 비-제도적이고 유동적이어서 아무 자취를 남기지 않았고, 무엇보다 어떤 당 강령의 헤 게모니 하에 있지도 않았다. 만일 볼셰비키가 지역적으로 투쟁을 조직했던 이런 과도적 조직에 가담했다면 사적으로 한 것이 지, 당시 다른 당들처럼 사건 앞에서 무력해지고 뒤쳐져 있는 당의 일원으로서는 아니었다. 이런 유형의 역사적 상황에서 지배 적인 요소는 분명히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주도권이지, (맹아적이고 분파적이고 유동적인) 조직이 아닐 뿐더러, 당이 중심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유형의 현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미 1848 혁명의 자생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 다(cf.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위의 책). 76) 레닌, [당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4월 테제와 그 해설)], {레닌과 사회주의 혁명}, 태백, p. 158. 77) 공식적으로는, 1917년 당시 멘셰비키들이 추진력을 가지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상황이 주 어졌다면 대중들이 그들 스스로 1905년에 주저없이 만들어냈고 그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소비에트를 재건했을 것임은 분명하 다. 사실 소비에트를 재구성하자는 발상은 투쟁의 이틀째부터 노동자들 스스로에 의해 자생적으로 제기되었다(Lisa Foa, "I Soviet e l'Ottobre," in Il Manifesto, 1970, no. 1, p. 57 을 보라). 그러므로 멘셰비키들은 대중들의 자생적으로 가동된 추진력 아래서 행동했던 것이다. 소비에트 실험은 그 안에서 자신들의 혁명적 기관을 발견하고 거기에 비-멘셰비키적인 해석을 부여한 대중들의 추동력 아래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므로 1917년에 대중들의 창발성이 소비에트를 만들어냈다(그것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의 미래가 절망적이었을 것이다)고 반복했을 때 레닌은 옳았던 것이다. 78) 레닌, {국가와 혁명}, 돌베개. 79) 이 점에 관해서는 Lissagaray, History of the Commune of 1871 (New York, 1968) 을 보라. 80) 최근 "국가와 혁명"은 Guerin 편에서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는 Anarchism: From Theory to Practice (New York, 1970), pp. 86. ff., 에서 본질적으로 연관된 세 가지 쟁점을 제기한다: (a) 전하는 바에 따르면 레닌은 꼬뮌을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국가"와 동일시했다; (b) 이 국가의 사멸 과정이 느리다는 사실은 레닌의 "의도"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한다; (c) 레닌주의적 개 념에 따르자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기관인 소비에트는 제도적으로 볼셰비키 당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첫 번째 주장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국가와 자본"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국가"로 정의하지 않으며,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책에서 레닌은 카우츠키와 사납게 논쟁했는 바,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적 목적으로 위해 부르주아 국가를 활용하 려 했던 것이다. 대신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를 따르고 꼬뮌의 원리에 의해 고취되는 새로운 기능적 국가 장치를 창출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주장의 근거는 더욱 박약하다: 국가를 제도화하는 과정은 날카로운 계급-전쟁(국내적·국 제적으로)으로 특징지워지는 전체적인 역사적 시대로 이루어진다. 이 맥락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결단주의적인 지름길은 허용될 수 없다. 당과 소비에트의 관계에 관한 마지막 언급의 경우, 역사적 맥락이 완전히 다른 1919-1920년 당시의 레닌이 쓰고 행동했던 것에 입각하여 1917년의 레닌을 독해한 혐의가 짙다. "국가와 혁명"에서는 역사적 권리에 의해 재가된 제도적 전위로 볼셰비키를 격상시키는 것 따윈 없다: 소비에트라는 장막 뒤에서 대중의 이름으로 대중을 통치하는 별개의 특권화된 전위 말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고 새로운 이론적 입장들이 출현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새로 운 사건들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81) 이와 대립되는 견해를 보려면 Lisa Foa, op. cit., p. 60을 보라. 하지만 이는 거침없는 레닌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 같다. 사실 레닌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지도력을 획득했을 때 소비에트 장치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 했다. 즉 소비에트의 "외부적" 제도화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다. 82)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소나무. 83) Lenin, "Report to the Second All-Russia Trade-Union Congress,"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Ⅷ, p. 418-419. 조합의 기능이 소비에트 체계 안에서 펼쳐져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84) 같은 책, p. 419. 강조는 추가. 85) 같은 책, p. 426. 86) 같은 책. 87) Cf. Carr, 앞의 책. 88) 우리는 Basso가 Neocapitalismo e Sinistra Europea (Bari, 1969), pp. 20 ff에서 제출한 것보다 이같은 해석을 선호한다. 전자 에 따르면 관료적 타락은 러시아의 후진성과 이로 인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허약함 때문이다. 실제로는,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집중되어 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나선 1905년과 1917년의 소비에트 경험을 통 해 자신들의 위력과 성숙함을 증명했다. 1917년 이후 분할되거나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비범한 능력을 상실했다는 증거 같은 건 없다. 89)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의 레닌의 구절을 인용하는 Moshe Lewin, Lenin's Last Struggle (New York, 1968), p. 6을 보라. "강령 에 따르면 노동자들에 의한 정부 기관이었던 소비에트는 사실상 노동대중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선진적인 분파들에 의해 운영되는 노동자들을 위한 정부 기관에 불과하다." 강조는 Lewin. 90)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돌베개. 당은 모든 방면에서 당을 위협하는 쁘띠부르주아적 침투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중핵"으로 간주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은 매우 타락하기 쉽다고 간주되고 계급의 "정직한" 부분의 신뢰를 받는 철의 전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91) Lenin, "Speech on the Role of the Communist Party,"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 pp. 235 ff. 또한 p. 191을 보면 당과 소비에트, 그리고 대중의 관계에 대해 모호하게 언급한다. 아마도 이 같은 모호함 때문에 Tanner와 Mclaine의 질문 및 레닌의 건조한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92) 의회주의(그것이 아무리 혁명적이라 할지라도)에 반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제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이탈리아 좌 파(보르디가)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이 문제를 여기에서는 자세히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이 논쟁에 관한 문서들 ("O Preparazione Revolutionaria o preparazione Elettorale," in Documenti Raccolti dal 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 di Bordiga, Milan, 1968, 특히 pp. 36 ff 를 보라)을 재검토하는데 관심있는 사람들은 보르디가 주장의 심각성({공산주의에서 "좌 익" 소아병}에서 레닌은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과 권위주의, 스콜라주의, 그리고 레닌 및 볼셰비키의 답변의 공공연한 공허한 방식에 충격을 받는다. 93) 레닌, [신경제정책 하에서의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에 관한 테제 초안], {민중민주주의 경제론 - 레닌의 노동자통제 및 국유 화론 1}, p. 202: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적인 전위인 공산당이 그 정치적 및 경제적 활동 전체를 지도하는 정부와 친밀하고도 항상적으로 협력해야만 한다." 94) 같은 책, pp. 190-191. 여기서 레닌은 기술적 의미에서 이해된 대중 교육(즉 특정한 관념을 배우는 것)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 한다. 하지만 단지 기술적 교육을 향상시킴으로써 대중이 국가 경제 건설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비록 레닌이 반드 시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할지라도). 중앙 계획 기관에서의 노동조합 대표자들의 권력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당이 지도하 는 국가적 차원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안에 협력하는 정도였다. 95) 만약 노동조합이 당의 전달 벨트이고 당이 국가 권력의 정점이라면, 노동조합은 불가피하게 당-국가의 필요에 복무하는 전달기 관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관료제에 맞선 투쟁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의 레 닌 비판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면에서 당과 조합의 관계에 관한 것이지 전혀 상이하게 나타나는 부르주아 지배 국면의 그것 이 아님은 지적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노동조합에 관한 가장 진전된 입장은 레닌이 제 2차 노동조합 대회에서 제 출한 것으로, 이때 레닌은 (특정한 맥락과 기능을 갖는) 노동조합의 국가기구화를 말했지 전달 벨트를 언급하지 않았다. 제 2차 노동조합 대회에서의 레닌의 연설은 조합에 부여하려 했던 기능("전달 벨트" 의 관료적 테제가 기각된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 회에서 노동조합의 기능과 영속성에 대해서는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때문이 아니라, 대중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 직접적 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중요하다. 96) Moshe Lewin, Lenin's Last Struggle, op. cit. 97) 이와 같은 시기 구분에는 소련에서 관료가 진정한 계급이 된 것은 이 시점 이후라는 우리의 확신이 작용했다. 98) Lenin, "Better Fewer, but Better,", Collected Works, vol. ⅩⅩⅩⅢ, pp. 487-502. 99) Cf. Lewin, 앞의 책, pp. 84-86. 100) 이 점은 Classe e Stato 잡지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Cf. Stame의 논설, "Contraddizione e Rivoluzione," Classe e Stato, no. 4, pp. 3 ff; 그리고 Salvati, "Il Capitalismo dei Monopoli," Classe e Stato, no. 5, pp. 71 ff.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민중운동의 내적 변화는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앞서 우리가 대선 투쟁 본부를 제안했듯이, 대통령선거는 누가 무어라 해도 지난 5년 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를 놓고 비판의 주도권을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롭게 청와대에 들어설 정권이 지금 대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구조조정을 하려는 지를 놓고 과학적인 분석과 이에 근거한 비판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에 앞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오늘날 계급투쟁의 양상과 대중운동의 현실이 무엇인지, 왜 전선 재구축이 민중운동의 최우선 과제인지를 규명할 것이다. 계급투쟁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방기하는 것은 민중운동의 올바른 투쟁방향 수립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대중운동의 현실은 지배계급의 집요한 반격에 따른 대중의 분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중운동의 분화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지금 정세의 과제가 왜 전선의 재구축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02년 대선 투쟁의 목표가 왜 민중운동진영의 전국적 투쟁 거점을 확보하는데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이후 계급투쟁의 전개양상 19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지배계급의 반격은 집요했다. 경제위기로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3당 합당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할 정치적 힘을 채비하고. 무노동 무임금을 앞세워 노동조합의 전투성(파업투쟁)과 부분적인 실리(임금상승)를 사회의 공적으로 몰아붙였다. 중소기업은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의 여파에서 살아남지 못한 채 파산하거나 과거에도 그랬듯 대기업에 하청 계열화되는데, 이때 상당수 노동조합은 자연 소멸하거나, 두려움에 주저하는 조합원의 이탈을 겪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계열화된 산업질서에 조응하여 광범위한 하청업무를 대행하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한다. 한편, 대기업의 경우 하청계열화로 구조조정의 위기를 지연시키면서, 기업문화 개선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가며 노동자들을 사내질서로 흡수하고, 팀 체계를 앞세워 개별노동자들을 새로운 노동과정으로 재조직한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기업 노동자들 대다수를 조합원으로 확보한데다 다른 노동조합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에 발언력을 잃지는 않았다. 이 같은 현상은 금융과 언론으로 대변되는 사무직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들 사이에 노동조건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발언력에서조차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경기침체는 멈추지 않았고, 산업 재편은 계속되었다. 경력을 가진 사람도, 사무직 노동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력직과 사무직에서 명퇴, 조퇴가 확산되고 있었다. 남한 발전주의가 안겨준 유일한 혜택-종신고용 전통마저 사라지고 만 것이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는 이런 민중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 최초의 전국적 총파업이었지만 조직된 규모에 비해 결과는 너무도 초라했다. 정리해고 법제화는 2년 유예되었을 뿐이었고, 겨우 민주노총 합법화와 복수노조 인정이라는 결과를 얻었을 뿐이었다. 늘어나는 기업파산 앞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 보장이 설득력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로 비쳤다. 1998년, 총파업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노사정위원회에서 양 노총 지도자들은 결국 정리해고 법제화에 합의하고 만다. 2001년에는 복수노조인정마저 한국노총의 노사정 합의로 5년간 유예되고 만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노동조합이 당연히 자신의 권익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노동자, 농민, 여성: 멈추지 않는 분열과 자기파괴 혜택을 앞세운 구조조정이 아니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려 들었다. IMF 외환위기와 정권교체라는 정치 조건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기업구조조정은 사회의 공적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구조조정에 앞서 그들은 노동자는 물론 심지어 기업주까지 한몫으로 싸잡아 사회의 공적으로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구조조정에 맞선 개별기업 노동자들의 저항은 상당부분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기업과 해당사업장을 넘는 연대투쟁은 점점 더 곤란해졌다. 모든 투쟁은 IMF 이후 더욱 고립되었고, 노동자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계급으로 단결하는 노동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해고와 임시채용의 격렬한 반복은 이제 정규직 노동자, 대기업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마저 위협했다. 이젠 누구도 평생직장을 믿지 않는다. 모든 노동자들은 자신을 보호할 법적인 장치는 물론이거니와 조직적인 힘조차 없다고 믿고 있다. 유효한 방어수단이 없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한 몫 잡아두어야 했고, 고용만 보장되면 노동조건의 후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후퇴하는 단체협약에 개별 노조는 서명하였고, 허구적인 것을 알고도 고용보장에 만족할 도리밖에 없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노동조합 결성조차 어려웠고, 설사 결성했다 치더라도 사업장내로 진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투쟁의 양상은 몹시 격렬하고도 별다른 성과 없이 흩어지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심지어 정규직과 임시직 사이에 서로 배제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 투쟁이 고립되면 될수록 노동자들은 개별화되었다. 저임금 저곡가 정책에 따라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수입하고, 농가소득보존이 곤란해지면서 노동력이 도시로 유입되는 식으로 농촌사회는 이미 거의 해체되고 난 뒤였다. 격렬한 농민들의 저항으로 UR 협상에서 쌀만큼은 10년 동안 관세화를 유예한다는 협정을 맺긴 했지만, 농산물 완전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다.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작물이 개방된 데다가, 그나마 국제경쟁력을 갖춘답시고 정부가 진행한 농업구조조정은 경쟁력이 있다고 알려진 몇 가지 농산물 제작에 저리의 농가보조금이 몰리는 바람에 농산물 가격 폭락을 거들기만 할 뿐이어서 농가부채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늘어만 났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늘어나기만 했고, 계속되는 농정 실패는 농업문제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을 야기했으며, 농민을 달랜다는 농지규제 완화는 농민들의 농업 포기를 부채질 할 뿐이었다. 언론조차 외면하는 농촌문제는 이제 농촌만의 문제였고, 농가소득보존의 논리만이 휑하니 남아 노령화된 농촌사회의 농민을 더욱 초라하게 할 뿐이었다. 점점 불안정해지는 삶으로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곤란하게 되자 무엇보다 가족단위의 생계부터 어려워졌다. 경제위기에 따른 정부재정위기와 교육과정의 변화까지 초래하고만 노동력 재생산 방식의 변화는 가계 유지비를 높였다. 아내-여성을 필두로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생계유지와 재생산 비용 증가 분을 감당하기 위해 생업에 뛰어들게 되나, 노동시장에서 성별·연령별 구조적 불평등으로 여성과 청소년은 극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각기 흩어진 작업장과 가족의 거리는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을 해체시켰고, 급기야 개별적 생존이 강요되면서 가족은 역사적 사명이 다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인간·가족·사회의 재생산이 개별적으로는 불가능한데다, 국가가 이를 책임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여성은 가정 유지의 책임을 다시 짊어져야 했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열악한 노동조건과 밀려있는 가사노동·보살핌노동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성차별에 고용불안까지 겹쳐 노동조건 개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데다, 고달픈 노동으로 가사노동·보살핌 노동은 하루하루 밀리고 말았다. 각종 가전제품과 사설 보육 서비스, 금융상품만이 대안인양 기다리고 있어 이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가계 유지비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이 상황은 여성을 더더욱 극악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제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족 단위의 생존과 개인의 생존 사이의 대립을 겪으면서, 상황을 회피하거나, 짓눌린 채 체념하고 마는 양극단의 방식을 택하게 된다. 여기에 여성 신체의 특정부위가 여성의 인격을 대신하면서,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와 직·간접적인 폭력은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보증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사적인 차원으로 제한되고, 국가권력과 남성이 저지르는 성적 비하는 개별적인 사안과 피해자의 문제로만 남았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제한된 것이고, 제한된 만큼 곧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되돌려졌을 뿐이다. 대중운동의 분열, 운동노선의 분화 1987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위로부터 해체되고, 90년대내내 노동자대중은 세계적으로 진행된 산업 구조조정의 물결에 맞서 제대로된 대응을 조직하지 못하였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노동자, 농민, 여성은 너무도 오랜 기간 분열과 자기파괴를 겪었다. 오늘날 대중 운동의 분열과 고착화는 이를 반영한다. 1990년 정권의 극심한 탄압과 산업구조조정 속에서 중고기업의 몰락으로 상당수의 노동자가이 노동조합을 이탈(전노협은 절반 가까이)하였다. 이미 법·제도적 한계로 노동조합의 조직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법 개정이 노동운동의 주 관심영역이 되었을 때다. 흔히 중간층을 대변한다고 알려진 여론은 노동운동의 격렬한 파업에 등을 돌렸고, 많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중간층의 이탈과 법·제도적 한계로 인한 노동조합 투쟁의 곤란함을 호소하던 터라 조합원 감소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로 국민의 여론을 등질지도 모르는 과격한 투쟁은 제한하려 들었고, 법·제도 개선, 대 국민 여론 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더구나 개발독재시기 저임금으로나마 고용 자체는 상대적으로 보장된 탓에 노동자들의 관심사는 기업내부로 제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비공식부문 노동자나 실업자 문제가 노동자들의 주요관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차원에서 불거진 쟁점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로 인해 빈민 운동을 위시해서 지역운동과 벌이는 연계는 상층연대로만 머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 기대어 노동조합 지도부는 지역별 노조보다 산별노조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은 노동조합을 아우르는 전체 대중운동의 지도그룹을 형성하는데 끝내 실패하고 만다. 이를 기점으로 선거투쟁이란 곧 합법적 정치영역의 진출을 위한 투쟁으로 기억된다. 1993년 기업별 노조의 공통과제인 노동법개정을 위해 국제적 압력을 가하려 했던 ILO 공대위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사무직과 대기업 노동조합을 각각 대표하던 업종회의와 연대회의가 전체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하던 때였다. 이렇게 결성된 전노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민주노총 1기 지도부 결성의 토양이 되었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중간층에 대한 노동자의 헤게모니, 사회개혁(법-제도개선) 투쟁, 민주노총과 양립하는 진보정당 건설들을 전면에 내건다. 80년대 후반에 이미 제조업에서 보여지는 노동의 불안정화로 남성의 노동조건이 하락하게 되고,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있던 제조업 사업장 역시 경기후퇴로 아예 문을 닫게 된다. 남성 노동조건의 동반하락으로 제조업에서 여성이 재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는 사라지고, 서비스업종의 요청이 과잉되면서 제조업의 여성노동력은 서비스업종으로 이동하게 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대기업 노동조합의 역할은 과대평가되고, 여성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의 주변에 머물게 된다. 1990년대에 즈음하여 주부노동력은 급증하고 제조업 여성노동자들은 급감하는데 이런 현실에서 여성노동운동은 관심을 다변화하였다. 이때부터 사무직·서비스업의 여성노동자들의 이해가 여성노동운동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고, 주부노동자의 사회적 진출을 보장하기 위한 모성보호와 양육서비스의 확보를 주요한 쟁점으로 삼았다. 비정규직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과 이들에 대한 차별철폐를 내걸며, 여성노동력의 활용과 그에 따른 산업조직개편의 긍정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999년 독자적인 조합노선을 걷게 된다. 한편, 가족을 유지하는데 국가의 지원이 전무하고, 모든 것이 가족 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겨진 상황에서 여성운동은 가족법내 성불평등조항을 주된 쟁점으로 자신을 조직하는데, 이는 거의 대부분 미국식 핵가족 모델에 조응하지 못하는 낙후된 법률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급격한 민주화바람과 함께 부분적으로나마 제도개선이 달성되면서 가족법 개정 투쟁은 일단락 된다. 하지만, 이처럼 몇 가지 성불평등 조항을 중심으로 법-제도개선 투쟁을 벌이던 여성운동의 전통은 성폭력, 성 매매 등 기존 여성운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대된다. 여성이슈와 단일 사안의 해결에만 집중하면서 더더욱 법-제도 개선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촌사회를 기반으로 벌이는 농민들의 투쟁은 두말할 것도 없다. 농업의 다원성과 그에 따른 식량주권을 전면에 내걸고는 있지만, 내·외곽에서 몰아 치는 농가 소득보존 논리 앞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운동의 암중모색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처럼 대중운동 모두가 겪고 있는 노선분화와 불투명한 미래는 곧, 대중 투쟁의 고립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임시적인 처방책에 불과해서 어떤 정치세력도 이념과 미래를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내재된 고유한 한계로 인해 긍정적인 방식보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구조개혁을 선도할 수밖에 없고, 구조조정은 대상(특히 노동자, 농민, 여성)을 고립시켜 적의에 바탕을 둔 사회적 공론을 등에 업고 강제로 구조조정을 강행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이로 인해 저항 주체는 연대의 기회마저 빼앗기고,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대책위가 난립하는 것은 사실 이의 반영일 뿐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은 격렬한 저항을 통해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 정책, 나아가 자본주의의 위기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가지 못하고 되려, 국제 신용평가기관에 의해 상대적으로 노사가 안정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비극이 재현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배 정치의 위기와 2002년 대통령 선거: 민중운동진영의 전국적 투쟁 거점을 확보하라 우리는 지난 몇년동안 수 차례에 걸쳐 지배계급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제휴세력으로서 386세대와 시민운동으로 불리는 자유주의자들을 파트너로 삼아왔음을 지적해 왔다.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정치개혁이 온갖 금융비리로 주요한 의제에 상정되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햇볕정책마저 미국 정치지형의 불안정성으로 좌초하게 되자 오히려 (완전고용을 보장했던) 군부독재시절을 전후한 퇴행적인 쟁점이 대중을 선도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이들은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었음(개혁세력의 붕괴)을 지적한 바 있다. 사실, 이후 정국은 어떤 정치변수(비리폭로)가 집권의 향배를 결정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안개정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치집단도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온갖 잡다한 정치 세력의 합종연횡과 해산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대중에 대해 완전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중에 대한 지루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히 지배계급의 위기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 깊숙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이 위기를 자초한 이유가 무엇인지(바로, DJ 정권이 정권교체를 빙자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전면에 내세우고는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열망을 배신하고 대중의 삶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저들에게 예속된 삶을 선택하도록 몰아 붙이다가 여의치 못하여 궁지에 빠져버린 것), 이들이 위기에 맞서 무엇을 조직하려는지(바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할 것 없이 민중의 피와 땀을 가로채고, 기생적인 금융생활자의 영광으로 위기를 지연시켜서 자신들만의 영속적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지배세력들의 한판 굿을 벌리려는 것)을 폭로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배계급의 정치적 위기가 곧바로 인민대중의 정치적 기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노동자, 농민, 여성 모두 개별화된 채 존재하고 있다. 대중조직의 정치노선은 분화되고 있으며, 나아가 포괄 대중에 대한 대중조직의 정치적 헤게모니조차 상실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대중운동을 혁신하려는 기운이 곳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과도 마주하고 있다. 공동 투쟁을 통해 대중들이 직접 연대를 실현하려는 노력에서 상설적인 공동투쟁체를 건설하려는 노력까지, 당-노조 차원으로만 제한되지 않고, 직장과 가족을 넘어 지역과 부문을 아우르려는 노력까지, 이 모든 것들이 대중운동의 한 자락을 이루고 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중의 공동 투쟁 경험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이고, 더군다나 2002년 대통령 선거 이후 새로운 지배권력이 들어섰을 때 전체 민중운동 진영이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연합적인 질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노동자, 농민, 여성이 바로 이런 연합적인 질서를 만드는데 있어 정치적 조건을 바꾸고, 공동투쟁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부도덕한 정권을 대신하여 들어설 반동적 정권에 맞설 수 있는 전국적 투쟁 거점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이 속에서 대중운동 혁신의 거점을 확보하고, 대중운동 혁신의 흐름이 서로 실천적으로 연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곧,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의 과제는 전선의 복구와 투쟁-저항주체의 형성과 이들의 연대를 통한 대중투쟁체 건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선 시기를 관통하는 공동의 투쟁대오를 강조하며, (진보정당으로) 제한되지 않는 대중의 정치적 투쟁체, 대중의 선거 투쟁체 건설을 제안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추를 넘어 내년도 공동투쟁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고자 진보진영 대통령 후보 경선과 민중운동진영의 단일 대응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중운동 지도부 교체가 대중운동의 혁신을 대신할 노릇이 못되듯, 민중운동 좌파진영의 우선 결집 혹은 입지변화가 민중운동의 혁신과 질서재편을 대신할 노릇이 못된다. 민중운동의 혁신은 노동자, 농민, 여성 대중투쟁주체의 형성을 뜻하는 것이며, 실천적인 연대를 꾀하면서 대중운동의 혁신을 주도하는 것이다. 대중운동을 좌익적으로 강화하고자 하는 세력들의 결집은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될 뿐이다. SO-LA
지배계층의 분열과 혼란은 이전투구의 양상을 넘어 공도동망(共倒同亡)하려는 듯이 보인다. 물론 그렇게까지 철없으랴 만서도, 통치 곤란에 대안도 없으면서, 옥체(?) 보존하고 있는 것도 신기할 노릇이다. 올해 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 역시 그들의 욕된 생명줄을 연장시키려는 한판 굿이겠지만, 쉬이 볼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 선거와 하반기 투쟁을 특집으로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류주형은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냉정히 진단한다. 민주당의 어정쩡한 책략이 시효를 다한 상황에서 이들이 퇴행적인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사정을 자세히 살펴본다. 더불어 주인 없는 자리에서 퇴행적인 쟁점으로 사태를 장악하려는 한나라당의 책략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꼬집는다. 정치 일반의 위기를 비판하는 것이 민중운동의 과제라고 맺으며, 홍석만에게 자리를 비켜준다. 홍석만은 이상이야말로 신자유주의 비판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지배계급과 민중운동진영의 한판 격돌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는 하반기 대선 투쟁에서 민중운동의 투쟁방향과 과제를 제안한다. 선거투쟁을 제한하며 진보정당을 앞세우는 흐름과 좌파독자후보-선거무대응을 비판하며, 범추를 넘어서 민중진영 단일후보를 내세우고 벌이는 선거투쟁을 제안하고 있다.
2002년 하반기 투쟁의 과제와 대선의 의미 --전국대선투쟁본부 건설을 제안하며 2002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지형 현 정세는 김대중 정권과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개혁세력의 몰락과 보수세력의 재등장으로 특징지어진다. 김대중 정권 하에서 자행된 민생파탄-민주압살-부패비리의 확산은 노동자민중의 이반을 불러일으켰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대중은 개혁세력에 대한 지지를 급격히 철회했다. 김대중 정권의 정책개혁 즉 금융팽창에 따른 경제적 실리의 획득 역시 한국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매우 제한적이었고, 따라서 '중산층'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대중이 김대중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이로써 민주-반민주(개혁-보수) 구도를 통한 개혁 세력의 결집을 도모하여 전국정당화-정권 재창출을 노렸던 민주당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갔다(호남당으로의 전락). 그리고 지방선거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정치적 전망의 제시 없이 무차별적으로 시도되는 정계 개편은 스스로의 타락과 반민중성을 다시 한번 드러냈을 뿐이다. 반면 김대중 정권에 대해 퇴행·보수·반동적 반대를 조직했던 한나라당은 개혁세력의 몰락으로 발생한 정치적 공백을 대거 잠식하고 있다. 비록 한나라당의 지지 획득 방식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긴 하지만 김대중 정권 및 민주당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관리하고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특별한 계기가 없다는 점에서 이는 정권 교체의 전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보수세력의 집권이 사회 저변의 위기를 전환시킬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며, 오직 다른 양상의 위기와 모순의 심화를 의미할 뿐이다. 이들은 노골적인 친자본적 기조 하에 노사정위원회 철폐, 공공근로 사업 등 신자유주의적 코포러티즘·생산적 복지에 대해 보수주의적 반격을 감행하는 한편 국공립대 사립화, 관치금융 철폐, 공기업의 완전한 민영화 등 한국사회에서 '완전한 선진자본주의'를 구현할 것을 주장한다. 아울러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노선을 추종하며 반공·반북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실행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한 정치적 조건으로서 군부정권에서 민간민선 정부로의 이행은 역설적이게도 개혁주의 세력의 '반민주-반민중적인 문민정치'로 인해 보수주의 세력의 정치적 복권을 조장한 셈이며 사회전반의 위기와 모순의 심화, 확대를 불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6대 대통령 선거는 정치-사회적 위기의 심화 속에 지배세력의 권력재편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공간으로 놓여 있다. 이에 따라 대선은 지배계급으로서는 반복되는 위기를 관리하고 재봉합 할 새로운 지배분파를 형성해내는 적극적인 권력 재편의 계기지만,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으로서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반민중성과 파국성을 드러내고 한국 사회를 민중적-민주적 재편의 방향으로 전화시키는 계기로서 존재한다. 즉,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 정권 5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비판과 이후 한국사회 재편전망의 주도권을 놓고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의 공간이다. 이는 결국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이 김대중 정권 하에서의 내부 혼란을 일소하고, 코포러티즘과 신자유주의를 절충하려던 개혁세력을 대체할 반동적 신자유주의 정부의 출현에 대해 본격적인 투쟁의 태세를 갖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능동적 투쟁과 연합을 통해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해 민주적-계급적 반대를 조직함으로써 개혁주의 세력의 몰락으로 발생한 정치적 진공을 노동자 민중이 '능동적'으로 채워나가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노동자민중운동의 현 상황과 사민주의적 전망의 과잉 이처럼 남한 사회 저변의 사회경제적 위기, '개혁세력'의 몰락과 보수세력의 재등장, 한반도를 둘러싼 장기적인 대치상태의 첨예화는 화약고와 같은 총체적 위기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지난 5년 간 민중운동은 김대중정권 퇴진투쟁을 비롯하여,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운동을 활성화하고, 사회 각 부문에서 자행되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막아내기 위해 쉼 없이 투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IMF 경제위기 이후 노농빈학 등 계급대중조직을 포괄하며 전선 형성적 운동을 지도·집행해야할 전국민중연대(준)는 노동자민중 투쟁의 중장기적 방향설정에 있어 불분명한 입장과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전망의 불투명함으로 인해 여전히 느슨한 형태의 공동투쟁체에 머물고 있다. 또한, 계급대중의 투쟁은 스스로의 정치적 전망을 본격화하지 못하고 고립된 투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처럼 현재의 노동자민중운동은 한국 사회 저변의 사회경제적 위기의 심화, '개혁세력'의 몰락과 보수세력의 재등장과 같은 총체적 위기를 급진적으로 전화시켜 내기 위한 고유한 이데올로기와 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드러나고 있는 사회적 위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더욱 강고한 투쟁 속에서 전국적인 민중연대 투쟁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투쟁은 눈앞의 정치 탄압과 허구적인 코포라티즘적 지향 속에서 무력화될 수밖에 없으며, 대다수 대중은 위기의 파괴적 효과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상황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10%에 달하는 진보정당의 득표로 인해 진보정당(의 집권?!)을 통한 신자유주의의 극복이라는 사민주의적 전망이 극히 과잉되어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의 지배체제를 유지한 채로는 진보정당을 비롯한 그 누가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진보정당운동으로는 이러한 지배체제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 구조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이미 초민족적 금융자본, IMF/WTO 등 세계기구, 신용평가기관에 철저히 종속된 한국경제의 구조적 조건 속에서 국가와 지배세력이 할 수 있는 것은 금융화에 따른 대중의 궁핍화와 불만을 미봉적으로 관리하고, 위기를 지연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지속하는 것 이외의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민주노동당이 모범으로 삼고 있는 브라질 노동자당에 대한 초민족적 자본의 공격과 그에 대한 브라질 노동자당의 대응 과정을 보더라도 진보정당의 한계는 매우 자명한 일이다. 또한,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은 구조조정반대투쟁, 정권퇴진 투쟁 등의 과정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 바, 계급적 쟁점을 제시하고 투쟁을 선도할 능력의 부재 속에 상가임대차보호법 청원투쟁과 같이 NGO의 역할을 분점하고, 이에 더해 정치개혁 중심으로 정치적 플랜을 설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당명부비례대표제도 도입 후 처음 실시된 6·13 지자체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반부패/참여예산제 등의 쟁점을 중심으로 선거에 참여함으로서 민주당, 한나라당 등 지배세력들과 별다른 차별화나 계급적 쟁점을 형성하는데 실패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정당투표에서 133만표 8%로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으로 발돋움(?)하였다고 자평을 하고 있으나, 이번 선거결과를 민주노동당에 대한 직접적 지지의 효과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김대중정부의 정책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대중의 불만과, 금융화에서 (일시적으로라도) 혜택을 받은 자들이 지지를 철회하는 상황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개혁세력'의 붕괴(및 투표율저조+득표율저조)로 나타났다. 그리고 차별과 배제를 합리화하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하는 한나라당이 역포위에 성공하며, 지배계급의 주류 분파가 군부독재의 탈을 벗고 다시금 정치 다수파로 복권하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은 일종의 상황의 지대를 누렸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 코포러티즘에 부분적으로 조응해 들어갔던 노동운동의 실리주의-조합주의 지향도 큰 원인이다. 대선방침-후보전술을 둘러싼 입장의 문제점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등 10개 단체 지도부는 지난 7월16일 '2002년 대선승리와 범진보진영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범국민추진기구'(이하 '범추')를 구성하기로 하여 민주노동당의 선제권을 승인할 것을 전제한 당 중심의 선거운동 기구 결성을 제 민중운동 진영에게 촉구하였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9월 8일로 예정된 당내 대선후보 선출을 통해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고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원을 등에 업고) 10월로 예정된 범진보진영 경선에서는 이를 추인하도록 압박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전국연합은 민주노동당과의 관계, 전농의 범추 참가 입장의 유보 등 다양한 변수 속에서 범추 경선에 참여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여기에 사회당은 진보진영의 후보단일화에 대해 무가치하고 몰이념적인 운동방식이라고 비판하고 좌파 독자후보(이른바 '사회주의 후보')를 가시화시키려 하고 있다. 이처럼 대선방침과 관련된 민중운동진영의 논의지형은 당 중심의 선거운동 지지지원 부대로 노동자민중운동의 능동성을 희석화시킬 위험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노-농특위 역시 하반기에 펼쳐질 농민투쟁과 노동자투쟁을 명확한 정치적 기조 하에 배치하고 지도, 집행하기보다는 대중투쟁 일정을 조정하는 선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또한, 대중투쟁을 선도하고 대선을 매개로 대중투쟁 자체를 정치적으로 고양시켜 나아갈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의 조직적 계획은 제출되지 않고 있다. 이러할 때 '정치적 집중력 없는 대중투쟁의 반복'과 '대중운동적 고양 없는 선거운동'의 편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관건적인 사항이 된다. 결국 문제는 노동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다시 형성시켜내고 대중투쟁과의 결합 속에서 무엇을 목표로 선거투쟁에 임할 것인가 이다. 여기에는 크게 3가지 입장이 있는데, 첫째, 진보정당 즉,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후보전술 둘째, 좌파의 결집을 통한 좌파 또는 이른바 '사회주의 독자후보' 전술 셋째, 대선 무대응이다. 진보정당의 대선전술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지방선거로 인해 확인된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진보정당의 대선 후보를 통해 민중의 정치적 전망을 수렴하고, 2004년 총선에 제도권 진입, 2012년경 대선에서 수권한다는 전망이다. 이는 앞선 평가와 같이 민주노동당 노선의 중장기적 전망(사민주의적 전망)이 무망하다는 사실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전망을 민주노동당의 제도권 진입과 집권으로 대체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의 선거운동이 '득표전술로서 틈새전략'의 모양새를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이 신자유주의 비판을 둘러싼 정치적 쟁점을 (선거전술로든 대중투쟁에서든) 유력하게 제기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진보정당은 수권을 목표로 득표중심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정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선거시기에는 무조건(!) 자신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면, 대중의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을 더욱 가속할 뿐이다. 오늘날 노동 대중의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이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대, 정치적 전망의 부재에 기인하고, 나아가 부르주아 정치정당의 호소가 지금의 정치체제(정당-노조)의 유지-복원과 퇴행적 쟁점(설사 이념을 동반한다 할지라도)에 기반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진보정당의 선거전술 역시 여기서 한발 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맴도는 정치전술임이 분명해진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에서조차 민주노동당에게 표를 몰아 달라는 식으로 대선 투쟁을 제한하려고 한다면, 개혁세력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정치의 위기를 퇴행적인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부르주아들의 선거전술에 들러리 역할을 하겠다고 자임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대중운동의 위기, 고립 분산적인 대중투쟁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를 지연시키거나 호도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것이다. 또한, 좌파(사회주의) 독자후보론의 경우 운동진영 내부에 만연한 사민주의적 전망의 과잉 속에서 좌파진영의 세력결집을 통한 사민주의노선과의 분화를 대선투쟁의 목표로 하고 있다. 대중적 토대에 기초해 변혁운동이 노선적으로 분화하고 각 세력의 정치적 전망이 이 속에서 구체화되어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좌파독자후보론은 운동진영의 결집이 정세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또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전망에서 무엇을 도모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면서 대선투쟁의 목표를 좌파 진영의 세력결집으로 삼는 본말이 전도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선거투쟁의 목표를 대중투쟁의 정치적 상승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좌파의 세력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대리주의적 정치운동이라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정당 또는 계급정당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 정치적 전망과 목표에 있어서 진보정당의 그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현재 투쟁의 중심과제는 '사민주의 노선과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더욱 효과적으로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을 폭로하고 대중투쟁의 전국적, 정치적 구심을 형성해 들어갈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 속에서 대중 스스로가 획득할 정치적 전망을 놓고 사민주의적 전망의 비현실성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치명적인 입장은 '대선 무대응'이다. 이 견해는 민중운동 진영의 정치적 역학관계만을 과도하게 해석하고는 현재의 정세에서 대선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견해이다. 후보 경선 이건, 대선 투쟁이건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지지기반으로 삼아 (조직할 방법도 의지와 계획도 없이) 대중투쟁을 강화해야한다는 말로 정세적 실천을 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대선투쟁이 결국 진보정당 지지운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경험적 통념은 이 경향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냉정한 정세 분석없이 이 같은 통념에만 기댈 경우 92년 이후 정치세력화가 진보정당의 건설로 수렴되고 말았던 역사를 오늘날 그대로 용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비판을 둘러싼 대중투쟁을 조직하면서, 전선복구라는 역사적 임무조차 방기하는 것이다. 결국 대선 이후 노동자 민중운동의 어떠한 정치적 전망도 형성하지 못하고, 대중 사이에서 유효한 정치적 쟁점을 제시하며 토론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향후 투쟁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가장 치명적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은 반동적 권력재편을 기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에 맞서 2002년 하반기 투쟁과정에서 대선을 매개로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등 계급대중의 투쟁을 정치적으로 상승시켜 내고 집중시켜 내기 위한 적극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동시에 대통령선거라는 부르주아 정치일정이 민중운동진영의 분열을 야기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것을 막고 노동자 민중투쟁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반동적 재편을 분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범진보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구성된 현재의 범추는 진보정당을 전제로 한 대선후보 선출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제한성이 존재한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당내 후보경선이 확정되면서 전농은 참가유보를 하였고 전국연합의 현실적 유보 등으로 민중진영의 경선기구로서 범추의 생명은 다했다. 현실적으로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의 운동으로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열망을 수렴할 수 없는 조건에 있으며, 노동자 민중 투쟁의 과정에서 진보정당의 한계가 확인되고 있다. 결국 현재의 상황에서 노동자 민중이 진보정당을 통해서 걸러진 몇몇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노동자 민중 스스로가 자신의 대선 후보를 추대하는 것을 통해 진보정당의 후보로 제한되지 않는 노동자 민중의 후보를 형성해 나가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민중운동진영의 대선후보 경선은 첫째,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반동적 재편에 맞서 민중운동진영의 단일한 대응력을 확보해야한다 둘째,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에 의해서 노동자 민중의 후보를 추대해 나가야 한다. 셋째, 대선투쟁과정에서 지켜야 할 공동의 행동강령을 도출, 합의하고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민중적 정치방침을 공유해야 한다. 무엇보다 범추로 표상되는 진보정당 중심의 경선기구는 광범위한 노동자 민중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시급히 전화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후보를 내는 세력 자신들만의 집안잔치로 끝나거나 찻잔 속 태풍과 같이 노동 대중의 전반적 무관심 속에서 지배세력의 반동적 권력재편에 들러리를 서는 역할 이상을 못하게 될 것이다. '전국대선투쟁본부' 건설을 제안한다 이처럼 2002년 대선투쟁의 목표는 대선을 매개로 지난 5년 간 노동자 민중의 반신자유주의 연대투쟁과정에서 보여준 김대중 정권하 구조조정 비판의 주도권을 확인하며, 이를 통해 어떠한 방향으로 정치적 대응력을 강화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에 노동자 민중의 조직적, 정치적 전망의 형성과 반신자유주의 연대전선의 복구, 지역적·전국적 투쟁의 구심의 형성과 선거투쟁을 매개로 대중투쟁을 고양시켜 나가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하반기 대중투쟁을 명확한 정치적 기조 하에서 고양시키고, 이 연장선상에서 선거투쟁을 보다 효과적인 정치선동의 장으로 만들려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중투쟁을 선도하거나 구체적으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 전국민중연대(준)의 현실과 노-농연대투쟁의 정치적, 조직적 한계 그리고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의 전국적 확대를 이루어내지 못한 현실을 냉정히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전국적으로 대선을 매개로 각 기층대중투쟁을 고양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상승시켜 내기 위한 계획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 대선을 앞두고 하반기 투쟁을 단지 선거참여로 제한하려는 흐름에 맞설 계획도 제출해야 한다. 대중투쟁의 역능을 고양시키며 그 성과로서 대중투쟁을 중심에 둔 대선투쟁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지난 6·13 지방선거와 마찬가지로 선거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하반기 대중투쟁을 선도하고, 범추의 제한을 넘어 전체 노동자 민중의 대선 투쟁과 하반기 투쟁의 정치적 집중을 도모할 수 있는 전국적 투쟁계획과 투쟁조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반동적 권력재편 분쇄와 민중연대전선 강화를 목표로 각계 민중의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조직적, 정치적 성과를 총괄하여 하반기 투쟁을 선도할 전국대선투쟁본부(이하 '대선투쟁본부')의 건설로 모아져야 한다. 대선투쟁본부는 2002년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의 반동적 권력재편에 맞서 노동자 민중 투쟁의 정치적, 조직적 구심을 형성하는 일주체로서 활동해야 한다. 그를 위해 대선투쟁본부는 김대중 정권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 세력의 공동투쟁기구로서 전국민중연대와 긴밀히 결합하여 하반기 노농연대 투쟁을 선도하고, 불안정노동철폐 투쟁을 전국화하고, 전체 민중운동 차원에서 제기되는 후보선출과정-선거운동 전반에 결합할 단위로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대선투쟁본부 구성의 의의는 민중생존권에 기반해 대선을 매개로 정치투쟁과 대중투쟁을 결합한다는 의미,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반동적 재편을 분쇄하기 위한 향후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조직적 전망을 수렴해 나간다는 의미, 대선시기 투쟁을 진보정당으로 대리하지 않고 노동자 민중의 조직적 역량을 결집하여 대중투쟁으로 돌파해 나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대선투쟁본부는 대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첫째,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으로 인한 총체적 민생파탄-민주압살-부패비리를 전면 폭로하고 김대중과 노무현 등 개혁세력의 무능과 부패를 거듭 폭로하고 타격해야 한다. 김대중정권의 '사회적 합의'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치장하기 위한 헛된 구호에 불과했고, 그들의 무능과 부패는 노동자 대중의 희생를 대가로 뿌려진 자본의 떡고물이라는 사실을 적극 폭로해야 한다. 둘째, 동시에 보수주의적 기조를 강화하는 한나라당과 이회창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한국사회를 반공군사정권의 시대로 되돌려 놓으려는 반동적 집단임을 적극 폭로하며 이들에 대한 타격을 통해 지배계급의 반동적 권력 재편을 분쇄하고 한국사회 위기의 진정한 대안세력으로 스스로를 정립해야 한다. 셋째, 또한 2002년 하반기, 금융 자유화와 농업 개방에 따른 민중생존의 위기에 맞서 대중적 투쟁에 적극 복무하고, 노동신축화와 민중 생존의 위기 속에서 불안정노동의 확대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넷째, 한미일 삼각동맹의 대북 압박책과 남한의 군사력 증강 시도에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투쟁의 성과를 수렴하여 대선 이후 노동자 민중운동의 중장기적인 정치적 전망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나아가며 2002년 대통령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5년 동안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 아래에서 신음하며 피흘리면서도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노동자 민중 투쟁의 성과를 무엇으로 남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몰락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위기와 사회적 위기의 심화 속에서 신자유주의 세력의 반동적 재편을 그대로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의 민중투쟁의 성과를 정치적으로 수렴하고 이후 전국적 투쟁의 구심을 형성해 나갈 것인가. 짧지만 중요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계개편, 위기에 빠진 정치를 구원할 수 있는가 ―대선 정치지형 쟁점 분석과 비판 지배정치세력의 행보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 장상 총리 서리 국회 인준 부결,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 정몽준 대안론의 급부상 등 숨가쁘게 진행된 정국은 정치의 위기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현재 지배계급은 이를 재봉합할 수 있는 정치적 전망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과 민주당은 지방선거 참패 이후에 자신들의 이념·노선적 지향을 전혀 밝히지 못한 채 퇴행적·반동적인 방식으로 정계개편을 추진하고 있을 따름이다. 한나라당 역시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정치 공동화' 현상에 우왕좌왕하며 동반 몰락을 경험하고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오리무중의 정국, 과연 지배 정치의 위기는 극복될 수 있는가. 총리인준부결과 병역비리 의혹을 둘러싼 정국파탄과 교착상태의 지속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민심이반이 광범하게 형성된 가운데 거듭된 부정부패로 인해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패하였고 그 결과는 김대중 정권의 정치적 몰락과 개혁주의(세력)의 정당성의 해체, 붕괴로 드러났다. 설상가상으로, 613 지방선거에서의 대패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김대중 정권과 민주당은 다시 한번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다. 7월 31일 장상 총리 임명동의안이 국회 재적의원 259명 중 244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한 표결에서 찬성 100표, 반대 142표, 기권 1표, 무효 1표로, 찬성표가 출석의원 과반인 123표를 넘지 못해 부결 처리된 것이다. 장상 총리서리의 국회인준 부결로 말미암아 대선을 앞둔 정치적 역관계의 현저한 차이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같은 날, 김대업이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부인 한인옥 여사가 아들 정연씨의 병역면제 과정에 연루돼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정국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환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한나라당은 즉각 김대업의 배후로 현 정권을 지목하였고 공작정치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탄핵도 불사할 것임을 선언했다. 김대업 역시 자신에 대한 한나라당의 비난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를 제기하며 검찰에 맞고소·고발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자동적으로 병역비리 은폐사건에 대한 수사과정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고 상황의 불리함을 깨달은 이회창은 급기야 '대통령후보 사퇴와 정계은퇴'라는 최후저지선을 설치한다. 이어서 김대업이 한인옥씨가 아들의 병역면제 과정에 개입한 내용이 담겼다는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을 검찰에 제출함으로써 정국은 수사 물증확보를 둘러싼 지리한 공방전에 돌입하게 된다. 민주당은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을 다짐하는 특별결의문을 채택하면서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였고 한나라당 역시 검찰과 법무부장관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며(청와대 개입-조작설) 장외시위로 공방을 가속화하였다. 사태는 한나라당의 법무장관 해임건의안 제출과 민주당의 1천만 서명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이번에 지면 대선에 진다"는 인식 하에 대치 양상은 장기화될 조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여론은 극단적인 정치적 불신과 환멸을 반영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과 민주당의 실정에 대해 지지의사를 철회한 대중들은 한나라당의 보수주의적 반격에 부분적으로 조응하면서도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총리 인준 부결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타락상이 공개되면서 지배계급 전반에 대한 분노를 불러왔을 뿐더러 연이어 불거진 병역비리 공방 역시 결국은 정견과는 무관한 정치 공세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자명하게도 이회창과 노무현에 대한 지지율의 동반하락과 정몽준의 급부상으로 표현되고 있다(이회창 : 노무현 : 정몽준 / 7월 36.8% : 24.5% : 18.7% / 8월 31.8% : 19.3% : 30.9%). 그러나 그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 바, 각 정치세력이 처한 구체적인 조건을 살펴봄으로써 향후 정계개편이 불러올 파장을 예측해보도록 하자. 8.8 재보선의 참패와 민주당의 해체 30%에도 미달하는 투표율 속에 지난 8일 실시된 재보궐 선거는 11대 2라는 일방적 스코어 속에 한나라당의 원내 과반수 확보라는 결과를 낳았다. '미니 총선'이자 '대선 전초전'으로 인식되어온 8·8 재보선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적 규모로 치루어진 역대 선거 중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했다는 것은 현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극단적인 불신과 환멸을 다시 한번 반증한다. 집권 말기 국정의 안정적 운영(경제 안정+대선의 공정한 관리)이라는 기치를 내건 김대중은 월드컵 흥분의 여파를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선정적 슬로건으로 대체하려 했으나 그 결과는 참담할 뿐이었다. 장상 총리 국회 인준 부결과 병역 비리 공방은 대중들에게 지배계급 전반에 대한 공분만을 누적시켰고 그 결과는 투표율로 확인되었다. 지방선거 참패 이후 민주당은 내우외환의 형국에 처했다.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둘러싸고 형성된 당내 권력 쟁투는 급기야 노무현 후보사퇴와 신당창당, 심지어 분당 논의로까지 이어졌고 원내 단독 과반수를 확보한 한나라당의 외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위기를 타개할만한 구체적인 정책과 정치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한 행보를 거듭할 따름이었다. 그 결과 민주당은 호남지역 두 곳에서만 무소속 후보에 승리를 거뒀을 뿐 사실상 전 지역에서 완패함으로써 613 지방선거에 이어 다시 한번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로써 민주당은 해체 일로를 걷게 되었다. 8·8 재보선 참패 이후 민주당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없었다. 개혁주의로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져버린 반동·퇴행적인 정계개편 말고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지속시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613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 공방 속에서 어느 정도 가시화된 후보 교체론은 이제 노무현 자신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민주당은 즉각 신당창당 추진을 공식화했다. 노무현은 국민경선 형식으로 재경선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으나 신당 창당 전에 사퇴를 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였으며, 이인제를 중심으로 한 비주류 진영은 노무현의 후보 즉각 사퇴와 민주당의 정치적 색채를 일절 배제한 (정몽준, 김종필, 박근혜, 이한동 등을 아우르는) 신당창당을 주장하였다(굳이 노선적 근거를 찾자면 "신당은 오로지 중도개혁과 국민통합신당"이라고 말한 민주당 김영배 신당추진위원장의 말에 의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와중에 노무현과 민주당에 대한 여론의 급격한 하락과 대조적으로 수직상승세를 그리고 있는 정몽준 대안설이 확산되며 신당 논란은 오로지 당선 가능성만을 염두에 둔 채, 모든 변수는 정몽준을 중심으로 하는 신당 창당의 가능성 여부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정몽준이나 박근혜는 민주당이 제안한 신당창당에 부정적인 의사를 표시해왔고, 이들을 포섭할 것을 중심으로 구상된 신당 창당 흐름(특히 이인제 계열을 중심으로 한 노후보 先사퇴, 後창당론)은 일시적인 교착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간에 노무현의 후보사퇴는 국민경선제의 부정(최소한의 형식-절차적 민주주의의 부정, 따라서 정당성의 상실)을 의미하며 이것이 직면하게될 정치적 부담은 민주당으로서도 쉽게 감내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정계개편 논의의 새로운 흐름―'개혁적 국민정당' 창당? '4자 연대'를 중심으로 설정된 민주당의 신당창당 흐름이 일정정도 교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 개혁주의 진영의 재결집을 통한 하나의 중대한 전환이 시사되고 있다. 노무현은 후보 선출방법과 시한 등 신당에 관한 모든 것은 신당창당추진위원회에서 논의할 수 있도록 위임했다고 밝히며("나의 국민경선 주장은 살아있지만 신당을 잘되게 하기 위해 이런저런 조건을 들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제 기득권이 하나도 없다") 얼핏 보기에 후보 포기를 선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정몽준의 합류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는 정황 판단 속에서 오히려 노무현을 중심으로 하는 범개혁주의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구체적 의지로 해석될 수도 있다. 민주당 대표 한화갑 역시 정몽준이 '경선을 통해 후보될 뜻이 없다'고 밝힌 데 대해 "없으면 없는 대로 대처할 것이며 '정몽준 후보'가 없다고 당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고 말함으로써 새삼 민주당의 이니셔티브를 강조하고 나섰다. 더욱이 동반몰락을 경험하고 있는 이회창이 결정적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신당 창당 흐름은 급속히 새로운 기류로 접어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전조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있던 '노사모'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국민경선-노무현 후보 지키기 운동에 돌입했다는 점이다. 현재 '노사모'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에서 재활성화되고 있으며 노무현을 중심으로 진행중인 '정치개혁'의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정치혁명과 국민통합을 위한 개혁적 국민정당'은 반부패(즉 '탈(脫) DJ')를 핵심 쟁점으로 하는 참여민주주의(CMS 당비제)·미래형(인터넷 활동) 정당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과연 개혁신당 창당은 과연 개혁주의의 붕괴 이후 가시화된 반동·퇴행적 정계개편 논의를 적극적·발전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현 시점에서 '개혁주의'가 가능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에 대해 질문해봐야 한다. 개혁주의의 몰락은 단순히 부정부패로 인한 자동붕괴 때문이기보다는 그것을 결정하는 구조적 요인들―예컨대 금융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물질적인 수혜를 얻은 신중간층(공기업 사유화 과정에서 형성된 소규모주식을 소유한 방대한 중산층이나 벤쳐기업의 수익을 누린)의 실리가 더 이상 확장 불가능한 조건―로 인한 것이었다. 현재까지 이를 역전시킬만한 특별한 요인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 게다가 소위 반민중적·반민주적인 문민정치로 말미암아 정치적 냉소주의가 심화되고 '개혁의 피로도'가 누적된 탓에 노무현의 '개인인기영합주의'는 분명 물질적인 한계를 지닌다. 더욱이 이들 '개혁신당'론이 전제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완성(보수-진보라는 양당 체계)은 일정한 개량의 구축과 안정적인 전국적 응집력이라는 (대중을 정치적으로 포섭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현재 불가능하다. 자유주의적 지향의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노동자 대중의 지지가 필수적이지만 이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대다수의 노동자계급을 배제함으로써 그들의 집단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남한의 '자유주의' 세력은 계급적 동원보다는 뚜렷하게 '지역주의'에 기생(DJP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 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와 386세대를 앞세운 김대중과 민주당이 시도한 '자유주의' 세력의 전국정당화 역시 좌초함으로써 안정적인 정당을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이 취약하다는 것이 이미 드러났다. 따라서 노무현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자유주의' 세력의 '개혁신당' 창당 흐름 역시 비록 '4자연대'와 같은 식의 반동적·퇴행적 정계개편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이 불충분하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작전'일 뿐이다. 결국 개혁세력의 붕괴 이후 추진되고 있는 또 다른 '개혁주의'는 기존의 한계를 답습할 가능성이 농후하며 오히려 현재와 같은 사회적 위기와 정치의 위기를 반부패와 정치개혁이라는 허구적 쟁점으로 호도하려 한다는 점에서 되래 더 반동적이다. 정몽준의 출마 여부―그 의미와 파장 이러한 상황에서 정몽준의 대선 출마는 기정사실화되고 있으며, 단지 민주당 신당 합류냐, 제3의 신당 창당이냐, 무소속 단독출마냐라는 방법상의 선택만 남은 듯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정몽준의 행보를 쉽게 점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며 특히 정몽준을 중심으로 한 정파연합의 대선 승리 가능성을 낙관할 상황은 더더욱 아니다. 우선 정몽준이 무소속 혹은 독자신당을 창당해서 출마할 가능성은 애시당초 배제된다. 전자의 경우 대선이 요구하는 전국적 조직력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에서 정확히 10년전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돈'으로 '배제'된 자들을 규합해서 국민당과 같은 종이정당을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한 민주당에서 제안하는 신당창당에 합류하는 경우 역시 현재로선 그리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보여진다. 여론조사만 놓고 보자면 이미 독자적으로도 당선 가능성이 확인된 마당에 굳이 '민주당'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게다가 승리 가능성을 점칠 수 없는 국민경선제를 수용하면서까지 민주당의 신당창당에 합류하기란 그리 탐탁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제3의 신당을 창당할 가능성만이 현실적이다(실제로 지난 8월 15일 정몽준 스스로 이인제·박근혜 등과의 제휴방식을 통한 제3의 신당창당의사를 분명히 하였고 현재 9월 10일경 대선출마 여부를 공식 발표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경우 고려되어야 할 것은 과연 이렇게 창당된 신당이 전국적 조직력과 최소한의 내적 통합이나마 가질 수 있느냐라는 점이다. 이인제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내 '반노'세력의 파괴력 자체도 장담할 수 없거니와 민주당 내 분파들이 제3당으로 이탈할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정치인 개인의 인기에 의존한 창당의 한계는 자명하다. 더욱이 민주당을 포함하지 않는 제3의 신당 창당 흐름에 대한 부정적 여론(8월 22일 조선일보 발표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신당창당이 우리나라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과반수(51.2%)를 넘었다)에도 불구하고 선뜻 사실상 정치적 낙오자에 불과한 이들과 연합하여 신당을 창당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신당 창당이 성사된다해도 '군소 지역 연합'에 불과하여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권력분점을 매개로 한 '반이회창-비노무현' 노선 자체가 지니는 한계(창당 명분의 부재)로 인해 이합집산의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정몽준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동반하락 추이를 관망하며(그의 아버지인 정주영이 너무 빨리 대선 출마를 결심한 것이 오히려 각종 검증작업에 노출되었음을 반추하며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출 것이다) 자신의 이니셔티브가 최대한 보장되는 선에서 출마 여부를 저울질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정몽준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합종연횡의 성격이다. 실제로 정몽준은 "로마시대 귀족의 아들인 시저는 민중파에 속해 정치를 했고, 미국의 유명 재벌집안 아들인 케네디도 서민을 대변하는 민주당 소속이었다"며 '부유한 정치인의 진보성'을 유난히 강조했던 바 있다. 노무현의 참신성에 기반한 개혁세력의 결집 가능성이 여전히 불투명한 가운데 정몽준 개인의 인기에 영합한 새로운 형태의 연합(노무현의 인민주의적 개혁주의와는 다른 미국적 형태의 엘리트적 개혁주의?)이 출현한다해도 이는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상징조작을 통한 퇴행적·반동적 정계개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모순을 재생산할 뿐이다. 한나라당의 위기 봉착 가능성의 증대 한편 '병풍' 공방으로 첨예화된 정국은 장대환 새 총리 지명자에 대한 국회동의 여부로 연결되며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검증과정에서 실제로 밝혀졌듯이 위장전입, 재산등록 누락, 세금탈루 등 도덕성에 하자가 있는 인사가 국무총리가 돼선 안된다는 여론이 팽배해있으며 이는 장상 전 서리 당시보다 더욱 부정적인 분위기다. 이에 민주당은 이번만큼은 통과시켜야 한다는 절박감 속에 지난번 표결 때와 달리 당론투표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 반면 한나라당의 경우 막판까지 총리인준안이 두 번 연속 부결될 경우 자칫 역공세로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정치적 부담 속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은 "인사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각종 잘못된 관행과 부정부패의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장 지명자는 총리 자격이 없"고 "장 지명자가 10여개의 실정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이 청문회를 통해 드러났다"며 국회인준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장상 총리 서리의 국회인준 부결에 대해 반발했던 여성계 역시 장대환 총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장상 총리의 그것에 비해 더욱 높음에도 불구하고 "28일 실시될 국회 표결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남성 총리지명자에게 장상씨와 다른 검증잣대를 들이대고 엄정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경우, 성차별로 규정해 정치권을 심판할 것"(한국여성단체연합)이라고 경고했다(이미 한나라당은 장상 총리 인준 부결 직후 즉각적으로 여성계의 반향을 우려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장대환 총리 임명동의안은 부결되었고 그 파장은 우선 같은 날 본회의에 보고된 김정길 법무장관 해임건의안 처리 문제와 겹치면서 정국을 파란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큰 것이 사실이다. 당장 인사권자인 김대중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 자명하다. 집권 초 김종필 총리 인준 당시부터 '인사'에 관한한 가시밭길을 걸어온 김대중으로선 총리직 장기공백에 따른 부담을 고스란히 안고가야 할 처지가 된다. 원내 제2당이긴 하지만 '정책여당'을 표방하고 있는 민주당 역시 당 지도부의 지도력 부재를 확인시켜 줌으로써 내홍의 불씨를 안게 되는 동시에 '병풍의혹'으로 일정정도 만회한 정국주도권을 상당부분 상실할 수 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미 민주당 내에 팽배한 무기력증과 각 계파간 갈등이 감출 것 없이 드러난 상태인지라 인준안이 계파 갈등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지는 못할 것이며 오히려 DJ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킬 마지막 호기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국 대치상황이 가져올 파장은 한나라당에 더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의 입장에선 '과반수의 힘'을 유감 없이 발휘, 확고한 원내위상을 과시한다는 순기능적 측면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거대야당의 거만'이라는 눈총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대통령후보의 두 아들 병역비리 의혹수사에 대한 전략적 대처에 사활을 걸고 있는 한나라당으로선 당장 김정길 법무장관해임건의안 처리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인준안 부결에 이어 해임안 처리까지 강행할 경우 '다수당의 횡포'라는 여론의 반발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준안 부결로 정국이 급격히 경색된 상태에서 정기국회가 열려 국회가 '대선 격전장'이 되고 이에 따른 정국혼란이 가중되면 한나라당이 져야 할 책임도 '원내 과반수' 만큼이나 커지게 된다. 장기적 대치 상태에서 정기국회가 열리면 민주당은 이회창 후보의 '5대 의혹'을 내세워 총공세를 펼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총리인준안 처리결과와 관계없이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정면충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그 정치적 파장은 당분간 쉽게 진정되기 힘들 것이다. 이에 따라 이회창을 둘러싼 각종 의혹의 객관적 사실 여부에 따라 역관계는 항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될 것이다. 결국 9월 이후 본격적인 대선 행보가 시작되면서 지배계급 내의 공방은 지리멸렬하게 계속될 것이고 이는 대선 지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지배 정치의 위기와 민중운동의 과제 전세계적인 수준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의 파괴적 양상은 기존의 정치와 경제운영방식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요구하는 흐름을 광범위하게 낳았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1997년을 전후로 유럽 각국의 우파를 권좌에서 밀어내는 이변을 낳았고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제3의 길이었다. 영국 노동당 블레어와 프랑스 사회당 조스팽의 노선으로 상징되는 제3의 길은 기존의 사민주의의 혁신과 시민운동(NGO)의 결합을 주장함으로써 전체 노동계급의 사회적 응집성이 해체된 상황에서 이들의 일부를 재포섭하고 사회적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정치전략이라 할 수 있다. 거의 동일한 시기, 김대중은 신자유주의와 코포러티즘을 절충하는 한편 시민운동 동원전략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발전이라는 전략 속에서 공공연히 제3의 길을 자신의 노선과 유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약한 자유주의적 토대는 DJP공조가 상징하듯 보수세력과의 부분적 공조와 지역주의 연합의 형태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는 항시적인 정치적 불안과 개혁주의 노선의 파탄으로 드러났다. 결국 장기-구조적 위기 속에서 위기와 개혁의 주기가 대통령선거 등과 같은 정치일정과 맞물리면서 위기의 해결과는 무관한 의사쟁점을 중심으로 정치세력 간의 이전투구가 일상화된다. 지배정치 세력의 정쟁은 사회전반의 위기와 모순의 심화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양자가 동시적 무능력에 빠진 상황에서 전개되는 정계개편이란 이념·노선을 상실한 정치세력간의 이합집산, 합종연횡에 불과하다. 그 결과 대중들은 해결되지 않는 삶의 위기 속에서 정치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과 환멸에 빠지고 정치 자체에 대한 반감(즉 反정치)으로 일관하곤 한다. 따라서 지배정치에 대한 비판이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를 조직하거나 외면하는 전략(즉 선거를 포함한 지배정치 일체에 대한 개입을 거부하는 '전무' 전략)으로는 불가능하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관건이다. 더욱이 지배 정치의 위기가 자동적으로 다가올 대선에서 민중운동의 이니셔티브로 수렴되는 것도 아닌 바, 이러한 균열을 공략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선거 자체에 매몰된 '전부' 전략). 바로 여기에 민중운동 진영이 대통령 선거에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민중운동은 대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선거 공간 내외부를 가로지르며 지배정치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정치에 대한 지배적인 표상을 역전시켜내는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대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중운동 진영은 지배정치의 위기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강고한 투쟁과 조직을 형성함으로써 지난 시기 전개되었던 민중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전진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이 낳은 파괴적 효과로부터 자승자박의 형국에 처한 지배정치의 균열을 확장하는 실천은 이제 보다 적극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