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은 파병을 당장 철회하라 ! - 자이툰부대 창설과 키르쿠크지역 상황악화에 부쳐 이라크 파병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도 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파병부대는 23일 창설식을 가졌고 4월 말 파병을 목표로 거침없이 준비되고 있다. 평화재건부대라는 자이툰 부대가 창설되었던 23일, 파병예정지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에서는 자살 차량폭탄 공격이 벌어져 5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사건은 결코 우연적이거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키르쿠크 지역의 현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미 여러 차례 언론에서 보도되었듯이 키르쿠크 지역은 미군의 점령을 계기로 쿠르드족과 아랍족, 투르크멘 족 사이의 심각한 종족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악화된다면 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종족내전이라는 위험한 상황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파병되는 것은 화약을 안고 불길에 뛰어드는 격이다. 내전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키르쿠크 지역에서 철저한 학살점령군에 불과한 한국군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가? 점령군 자체가 갈등의 요인이 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국방부가 내걸고 있는 파병부대의 '평화재건'은 공문구일 뿐만 아니라 상황을 더욱 극단적으로 악화시킬 뿐이다. 한국정부 스스로도 키르쿠크에서의 파병부대의 안전을 두려워하고 있다. 25일 국방부 관계자는 악화되는 키르쿠크 지역의 치안상황에서 장병들의 안전보장을 위해 국방비를 당초 측정액의 25%나 증액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당초 발표된 잠정액 2천 296억원에 574억원이 추가되어 약 3천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국방비가 파병비용에 소요되는 것이다. 국방부조차 그 안전보장을 예측할 수 없음을 시인한 것에 다름없는 상황에서 파병을 감행한다는 것은 결국 국민의 엄청난 혈세로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무책임한 행위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권은 기어이 무고한 국민의 생명을 침략전쟁과 한미학살동맹에 희생물로 바치려는 것이다. 파병은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 국민 대다수가 엄중히 경고하고 있듯이 파병을 철회하는 것만이 국민의 귀중한 생명을 책임지는 길이며 이라크의 진정한 평화재건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2004. 2. 25
세계화의 재단아래 젊은 피를 바치는 노무현정권과 여야정치권은 역사와 민중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오늘 국회는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노무현 행정부가 제출한 파병동의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은 3600여명의 부대원 중 대부분이 전투병인데도 이라크 재건 지원부대라며 국민의 눈을 속였고, 여야 정치권은 여기에 박수를 치며 침략전쟁과 학살동맹에 맞장구를 쳤다. 이라크 민중들과 한국 젊은이들을 피흘리게할 그 죽음의 버튼을 그들은 앓던 이 빼듯이 눌러버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서 파병처리가 차일피일 미루어지자 지난 3일 국방위원장을 불러 파병문제로 국가의 신인도가 하락해서는 곤란하다며 신속한 파병 처리를 당부했다. 지난해 4월 파병을 결정하거나 동의안 처리를 요청할 때도 국가 신인도 운운하며 협박했다. 전경련을 비롯한 자본단체들은 동의안이 통과되자 마자 생사를 내걸어야 하는 젊은이들의 목숨은 뒷전이고, 오로지 해외자본 유치와 남한자본의 해외진출을 위한 국가의 신인도가 문제였다. 그토록 강조하는 국가의 신인도, 국익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우리 젊은이들의 숭고한 피를 저 허망한 전쟁에 내바쳐야 한단 말인가? IMF 외환위기 이래 당시 국가의 신인도 하락에 국가적 환란의 원인이 있다며, 지배계급은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집권 3년 만에 그들은 대한민국의 국가 신인도가 정상으로 되돌아왔다며 샴페인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샴페인을 터트리는 자리에 민중들은 없었다. 1998년 이후 증권거래소에서만 외국으로 빠져나간 순이익금이 93조가 넘고 그 사이 노동자들의 반이상은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해고와 계약해지에 불안해하며 살아왔다. 둘이서 하던 일을 혼자하면서 노동강도는 비약적으로 늘었지만 이들이 받는 임금은 53만원이었다. ‘죽음으로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시대는 지났다’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까지 노동자들은 분신과 자결로 2003년 한해를 살아야 했다. 여기에 땅이 있어도 농사를 지을수 없는 농민은 아예 일터를 잃어버렸고, 자괴감에 빠져 농약을 들이켜야 했다. 여성들은 구조조정의 1순위였고, 가족을 지탱해야 하는 책임은 책임대로 일자리는 일자리대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도대체 국가 신인도를 올려 금융시장에 투기적 자본들이 몰릴 수 있도록 투자여건을 확보하는 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초국적 자본가들을 살찌우고, 그 떡고물을 받아 파티를 열어 대한민국의 지배계급을 배불리려는 것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여기다가 우리 젊은이들의 숭고한 피를 갖다 바쳐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이제 한국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제 3위의 군대를 파견하는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다. 이라크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미국과 영국에서는 이에 대한 정보조작이 커다란 문제가 되어 여론이 들끓고 있으며 이라크에서는 저항세력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점령군이 늪에 빠지고 있는데 한국만 자발적으로 그 수렁으로 들어가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노무현 정권과 그들 지배자들이 말하는 평화와 번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싸우며 국민을 환멸에 빠지게 하다가도 그들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라면 한미동맹이든 여야동맹이든 모든 동맹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미국과 그들 초국적자본 중심의 세계화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지배자들은 이에 종속되어 초국적 자본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군사력으로 이를 뒷받침하려는 전쟁동맹자다. 그들이 학살동맹의 역사에 새겨진 깊이 만큼, 남한 민중의 고혈을 짜내고 이라크 민중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서기 위해 진실로 등등하게 나선만큼 역사와 민중의 심판은 냉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전쟁으로써 민중의 생존과 생명을 유린하는 지배계급은 이제 민중의 철퇴를 맞는 것만 남아있을 뿐이다. 노무현정권과 지배자들은 기필코 그 죄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국회에서 파병안이 통과했지만 정의와 양심을 가진 모든 이들은 앞으로 파병반대 투쟁, 한국군 철수 투쟁, 미국의 이라크 점령반대 투쟁을 사력을 다해 전개해야 하고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도 반전 반세계화 투쟁을 굳건히 결합하면서 있는 힘껏 그 투쟁에 함께할 것이다.
4회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신 존경하는 세계평화애호가들과 인도와 세계 각 국에서 오신 언론인 여러분, 오늘 제가 ‘한반도의 군사주의, 전쟁과 평화의 주제’, 특히 북한 핵문제에 대하여 여러분들에게 제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저의 이 견해는 남한의 운동권의 전체적인 통일된 의견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반미자주, 반전․평화 운동에 앞장서서 투쟁해 온 한 사람으로서 남한의 투쟁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2002년 6월 13일 미군이 장갑차로 한국의 두 여중생을 치어 죽인 끔찍한 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당시 12살에 불과했던 심미선, 신효순 두 여중생은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다가 미군 장갑차에 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두 여중생을 무참하게 죽인 주한미군은 장갑차 운전병 마크 워커(Mark Walker)와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Fernando Nino) 병장으로 그들은 모두 미 2사단 소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두 여중생을 죽여 놓고서도 두 미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하여 한국 국민의 공분을 샀습니다. 이에 한국 국민들은 범국민대책위를 구성하고 살인미군 처벌, 한국 국민에 대한 부시 미 대통령의 직접․공개 사과, 살인미군의 한국 법정에서의 재판, 한미소파 개정 등 네 가지를 미국 정부에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와 같은 요구를 모두 거부하였습니다. 살인미군에 대한 재판권을 한국에 넘길 것을 바라는 한국인들의 요구를 무시한 미군 당국은 2002년 11월 18일부터 22일까지 미군 판사와 미군 검사, 미국 변호사, 미군 배심원으로 이뤄진 자신의 군사법정에서 두 미군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미 군사재판은 두 미군에게 무죄를 선고하기 위한 재판 놀음이었습니다. 장갑차 운전병은 관제병에게 차를 세우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증언이 받아들여져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반면 관제병 니노는 자신의 통신장비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증언이 받아들여져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이들은 무죄평결을 받은 후 신병 상의 안전 이유 등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나라로 전출되었습니다. 이러한 무죄평결은 한국의 주권 부재를 절감케 했고 남한에서 반미 감정을 폭발시켰습니다.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고 보는 한국인들은 이것이 모두 주권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군사훈련 중에 발생한 사건을 한국 법정에서 다를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는 불평등한 한․미 소파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한국 정부의 군사주권의 부재의 현실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을 밝혔는데 이는 또한 불평등한 한미 관계와 한국 측의 군사주권의 부재에 대한 한국 국민의 분노의 표현이자 우리 한국인들의 민족자주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정전 상태에서 50년이 넘는 생은 한미간의 관계가 불평하게, 북미 간의 적대적인 관계가 지속되게 했다고 믿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집권은 민족자주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이와 같은 염원이 뒷받침된 것입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등장한 뒤로도 종속적인 한미관계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 정부에게 이라크 파병을 요구하였고 한국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이라크 추가 파병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정부는 한국정부로 하여금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한국 국민들의 민족자주와 평화투쟁을 탄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눈치를 살피는 한국 정부 당국은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자주와 평화를 위한 촛불기념탑마저 철거하는 폭거를 자행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여러분들께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이라 불리는 한미동맹의 재조정에 관한 한미 당국간 회의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주한미군의 동북아시아에서 역할 확대, 한미연합전력증강, 주한미군 재배치, 용산 미군기지 이전 등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전적으로 미국이 대 북한 선제 공격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중국에 대한 군사적 패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남한 민중들은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미국의 한미군사동맹의 강화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줄기찬 투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남한 민중들은 용산 미군기지 이전 비용 한국부담 반대, 주한미군 기지 평택 이전 반대, 주한미군 사격장 신설 반대, 한미연합훈련 반대, 한국 국방비 삭감 촉구, 전시작전권 즉각 환수,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 등의 요구를 내걸고 힘차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 남한 민중들은 민족자주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지향과 염원을 꺾어버리기 위한 미국의 비열한 책동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이라크로 보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최근 남한의 반미감정은 두 여중생의 죽음으로 더욱 불타올랐지만, 부시 행정부의 대 북한 전쟁위협으로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남한 민중은 같은 동족인 북한을 공동의 운명체로 여기고 있으며 특히 한반도의 지형상,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도 함께 파멸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고 그래서 더욱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깡패국가로,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김정일 정권의 교체를 요구하는 등 북한을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선제공격 대상의 하나로 삼는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선 북한 핵포기 후 안전보장’을 떠들면서 북의 일방적 굴복을 강요하고 있고 경수로 건설을 중단함으로써 북한에게 압력을 가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미국은 겉으로는 6자 회담을 원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6자 회담을 북한에 대한 압박의 장으로 밖에 여기지 않고 있는 듯 합니다. 지금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어렵게 하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부시입니다. 지난 해 5월 미국 공화당의 웰던 의원이 북한을 방문할 때 제시했던 안은 하나의 해결 방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웰던의 구상은 '북한의 핵포기'와 '미국의 불가침 약속'을 동시에, 단계적으로 진행하여 일괄타결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 같은 합리적 안마저 거부하였습니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전쟁위협을 가해서는 안 되며, 북한을 적으로 간주하는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무조건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또한 미국은 한국 정부에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강요 등의 내정간섭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한국인들의 주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부시 행정부의 손에 달린 것 같습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선제공격 정책을 포기하고 대북 적대정책을 철회해야 합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를 해제하고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여야 하며 두 나라들 사이에 외교관을 교류하여 합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국가적 주권을 인정하고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문서로 약속한다면, 북한 핵문제는 얼마든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며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를 준수하고 NPT의 복귀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에게도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같은 미국의 조치야말로 북미간의 현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북미 관계의 정상화는 한국의 평화와 통일로 이어질 것이며 동아시아를 교류와 번영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국 언론인인 셀리그 헤리슨(Selig Harrison)은 대북 경제제재가 미국 대선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부시가 만일 재선되면 그 후인 2005년 4월에 전쟁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조지 부시가 대선에서 낙선되는 것이 미국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세계 평화에도 유익합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 해소는 오늘 한국 민중들의 가장 절박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것은 꼭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세계의 문제입니다. 세계의 평화 애호 민중들이 미국의 대한반도 전쟁책동을 중지시키고 부시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나서도록 연대하고 함께 싸워나가도록 합시다. 또한 세계의 평화애호 민중들이 불의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해 더욱 강고한 투쟁을 벌이도록 합시다. 세계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첫째는 전쟁은 문제해결의 수단으로서 포기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최전방 군부대 앞에 ‘내일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오늘 전쟁을 준비하라!’는 구호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전쟁의 불가피성이나 필요악을 정당화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불가피한 것도 필요악도 아닙니다. 오늘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문제는 사실은 인류의 사멸이냐 생존이냐를 가르는 문제입니다. 오늘의 전쟁은 재래식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핵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피하는 길이 곧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둘째로 전쟁 비용이 평화비용보다 더 싸다는 군사주의적 사고를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평화가 전쟁에 비해 더 비용이 많이 든다는 말은 전쟁주의자나 군사주의자의 사고입니다.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것은 무기를 팔아서 자기의 배를 채우고, 다른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자기 나라의 국익을 도모하려는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사고입니다. 군수산업이 미국의 정치․경제․외교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은 하이태크놀로지와 거대한 자본을 갖고서 무기생산으로 돈벌이를 하는 미국의 군수산업 구조에 그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신의 군사주의노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국제관계에서 힘의 균형, 공포의 균형만이 평화를 보장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부시 정권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압도적인 군사력 우위 구축과 선제공격을 공식적인 국가안보전략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 평화의 위기는 바로 이와 같은 부시정권의 일방적이고 패권적인 군사주의 노선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에는 패권적 군사주의 논리가 팽배합니다. 지금 미국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지구화’를 또한 제창하고 실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세계의 평화애호 민중들은 이러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논리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세계에 넘치는 무기장난감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군사주의적 사고에 물들게 합니다. 따라서 총․칼․탱크와 같은 무기장난감을 점차 줄이고 없애나가야 하며 대신 평화적 정서를 갖게 하는 장난감을 더 많이 보급함으로써 어려서부터 평화의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인간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인간 경시 풍조를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전쟁은 병사란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고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온 천하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유대 격언에는 ‘어떤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먼저 그를 지으신 조물주를 저주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노래 가운데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사람은 ‘목적적인 존재’이지 결코 ‘수단’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한 발 자욱 더 발전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동학’(東學)에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아주 중요시해야 하겠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박애, 평등, 자유’ 이 세 가지를 내세웠고, 성서는 ‘사랑, 믿음, 희망’은 영원히 있을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다’ 고 말합니다. 나는 ‘생명, 선, 평화’,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생명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사랑보다 생명, 희망보다 평화, 믿음보다 선이 더욱 절실하다고 감히 말하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힘없는 나라나 개인이라도 ‘자주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평화를 실현하는 길입니다. ‘꿇어 엎드려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서서 자유인으로 죽겠다’고 한 말은 주후 70년의 유대․로마 전쟁에서 죽음으로 마감한 한 유대인 사제의 설교입니다. 그렇지만 이 같은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철학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나의 연설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이라크 민중들의 자주성을 짓밟고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라크에 대한 한국군의 파병 또한 이라크 민중들의 자주권을 짓밟는데 동참하는 것이므로 한국 민중들은 그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해 둡니다. 북한 핵문제를 빌미로 한 미국의 대 북한 전쟁위협, 나아가 우리 민족전체의 자주권에 대한 엄중한 침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맞서 단호히 투쟁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 민중들은 주권국가의 자주성을 힘으로 제압하려는 미국의 군사주의에 맞서 한반도 평화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세계평화애호 민중들과 힘을 합칠 것입니다. 불의한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결코 안 됩니다. 군사주의, 반테러리스트 전쟁, ‘신자유주의 지구화’ 등의 제국주의적 사상 없이 평화는 쟁취될 수 있습니다. 이라크나 세계 다른 어떤 나라에 대한 전쟁 없이 ‘다른 세계는 가능합니다.’ 부시와 제국주의 없는 ‘다른 세상은 가능합니다.’ 고맙습니다.PSSP
새로운 운동,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 2003년 주목해야 할 운동이 무엇이냐 물으면 누구라도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을 손꼽을 것이다. 2003년 한 해 가장 떠들썩했던 뉴스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고 이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이 손꼽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멀리 베트남 전까지 갈 필요도 없이 1990년 이라크 전쟁에서 다국적군은 물론, 동티모르 사태의 UN평화유지군까지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이렇게 오랜 시간 전개된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병반대운동이 대중들에게 그리 익숙한 쟁점이 아닌데도, 이 새로운 반전평화운동이 전개되었던 데는 다음과 같이 적어도 두 가지 이유만큼은 들 수 있을 것이다. 9․11 테러 보복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이라크를 침공하는 등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가 드러나면서 대중들이 강하게 반발했다는 사실을 첫 번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고, 둘째로는 효순이․미선이 살인사건 이후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개선하자는 대중적 요구가 강하게 일던 중에 미국의 부당한 파병요구가 제기되자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운동을 각각 이끌었던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실천’과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 두 공동 투쟁체가 합동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2003년 상반기 파병반대운동을 주도했다. 한편, ‘7․27 정전 50년, 한반도 평화를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으로’와 ‘반전평화 8․15 통일대행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에 따른 피해를 고발하는 운동과 미국의 북한 고립 책동을 반대하며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운동들 역시 앞서의 여중생 범대위 사례처럼 반전평화운동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는 미국의 냉전 전략의 상흔이 깊숙이 남은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역으로 전통적인 반미운동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데 한반도에서만 평화로우면 되는가라는 (조금은 조잡한) 일차원적인 질문은 논외로 하더라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만이 반전평화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이 운동은 충분히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설명하겠지만 파병반대운동을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보아도 오늘날 반전평화운동의 성격은 사뭇 다른 양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기도 하다. 그렇다고 파병반대 반전운동이 내적으로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자주’ 혹은 ‘반전평화’라는 묘한 대립과 함께 ‘한반도 위기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할 것인가’ 아니면 ‘이라크 점령 중단 투쟁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격한 논란 또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4월 2일 국회의 이라크 파병 결정, 4월 9일 미국의 이라크 종전 선언이후 파병반대운동이 새로운 전망을 찾아야 하는 시점에서 제기된 이 논란은 ‘한반도 위기를 문제삼지 못하는 파병반대운동의 공허함’과 ‘이라크 전쟁 반대에 대한 민족주의 운동의 소극성’을 비난하는 양상으로까지 나아갔다.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지나친 피해의식과 새 운동세력의 출현을 못마땅해 하는 감정들의 충돌에 가까웠던 이 논란은 결국 각자 제기했던 ‘자주평화연대’와 ‘반전평화공동실천’ 구상이 좌초되면서 마무리되었다. 결과는 다소 허탈한 것이었으나 역으로 이는 반전운동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향후 반전운동 전망을 둘러싼 논란이 각자가 제기하는 연대조직의 구상차이로 드러났다는 것은 반전평화운동이 새로운 주체형성과정을 위한 실천으로서 유력한 매개고리가 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물론 뒤에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주의 반전평화운동의 기반이 약한 남한에서 파병문제가 왜 첨예한 쟁점이 되는지를 이해하려면 (북핵을 매개로 전개되는) 한반도 위기를 인식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은 국익/실리를 이야기하면서 파병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연계시켜야한다고 주장(한반도 전쟁 발발 시 이를 국제적으로 호소할 경우에 대비해서라도 파병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 포함)한다. 그리고 냉전적 사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주한미군의 역할 감소를 막기 위해서는 파병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공산 괴뢰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준 데 대한 보은의 논리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날조된 거짓말이거나 대중운동과 무관한 쟁점이다. 잘 아는 것처럼 미국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한국에게 번번이 전후복구지원과 파병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강력한 한․미(․일) 군사동맹을 믿고서다. 하지만, 한미군사동맹의 근간이 되는 정전협정, 상호방위조약 그리고 합의의사록에서조차 군사동맹의 범위는 한반도에서 군사적인 위험이 초래될 때로 한정되어 있다. 역의 경우까지 그러니까 한반도․동북아시아를 넘어서는 미국의 군사적 대치상태까지를 포괄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한국전 혈맹을 근거로 한미동맹을 확대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지배세력이 국내정치의 역관계를 유지 관리하려는 차원이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행동에서 한․미 동맹이 언급되는 것은 한․미(․일) 동맹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다. 이 역사적 특수성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냉전구도 아래 진행된 일본․한국의 전후복구 및 고도성장과 정치․외교적 관계에 바탕을 둔다. 미국의 냉전 구상은 일제의 식민지 경험을 겪었던 나라들(특히 한국, 대만)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완충시켜 왔고, 그 아래 일본을 정점으로 동아시아 각 국이 묶이는 수직적 경제질서가 형성되었다. 이 우산아래에서 남한이 성장한 것이다. 이때 남한은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자본주의적 발전 전망의 쇼케이스를 의미하는 것이고, 더불어 동북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잡아 미국에 순종하는 절대적인 협력국가(식민지 종속국가)로서 미국의 정치․군사적 이해를 보존하는 의미를 갖는다.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한․미․일 3국 동맹은 굳건했고 오히려 공동의 전망을 더 가속하였다. 미국은 이와 같은 특수성에 기반해서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을 구상하였다. 미국은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을 기화 삼아 동아시아에서 더더욱 (미국식) 번영을 구가하여 미국의 경제적 이해를 강화하는 한편, 강력한 한․미․일 군사(정치)동맹을 전제로 동아시아에서 정치․군사적 안정을 꾀하여 자신의 이해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냉전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 있어서 기본 개요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전쟁 억지력 구상은 더욱 호전적이 되었다. 불특정대상에게 예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대칭적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향으로 군사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미국은 이를 가능하다고 보았다. 첫째, 군사기술의 혁신(첨단기술, 정보전)은 이것의 기술적 토대가 되는데 미국은 여기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고, 둘째, 이 목표에 대해 미-유럽은 물론 미-동아시아 역시 공동의 이해(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충분히 협력과 공조태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군사 전략의 재편방향의 기본 얼개는 다음처럼 그려진다. 정치․군사적 불안정성이 금융세계화 중심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미국 군사안보의 경계를 확장한다는 목표 아래 첫째, 효율적인 군사적 응징이 가능하도록 작전부대를 경량화하고 기동력을 강화하는 한편, 둘째, 기존의 군사동맹(한․미․일)을 지역동맹으로 확장하고 정치․군사적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군사동맹국(한․일)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 셋째, 군사적 위험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동맹국의 역할(전비 지원, 파병)을 확대하는 것. 한반도의 주한미군재배치, 한미동맹의 현대화와 한국군 역할의 강화, 일본의 재무장은 ‘새로운 전쟁’을 수행하려는 미군의 신축성 확보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이고,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할이 재차 강조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사실, 이 같은 구상은 그 자체로서는 완전할 수 없다. 소말리아의 실패,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의 장기화, 북한의 강한 반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군사 기술적인 우위 같은 것으로 미국이 원하는 목표를 간단히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 UN․유럽 동맹국들의 지원을 손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경계 밖에서 ‘폭력의 지속’, ‘항구적인 내전’, ‘폭력의 순환’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있고, 이를 관리하는 것이 초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지역동맹을 확장하고, 한국․일본 등 동맹국의 군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무기 이용의 주체를 늘림과 동시에 군비지출을 (경쟁적으로) 비가역적으로 늘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해당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게 된다는 사실이 문제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스라엘은 빈발하는 총성 한 가운데 있으며, 중동지역의 정치․군사적 통치를 위해 키워온 이라크가 느닷없이 쿠웨이트를 침략하여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기도 하고,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가르쳐온 테러리스트들이 9․11 테러에서처럼 되려 미국 본토를 향해 총을 겨누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위험이 동반하는 것은 이스라엘, 이라크, 일본 등 하위-제국주의(sub-imperialism) 국가들을 동원하는 과정이 지배세력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동반하기 일쑤고,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자국의 무장을 합리화하고 주변을 긴장관계로 몰아넣어, 군사적인 경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남한의 자주국방론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이 동북아시아에서 북한․중국과 군사적 경쟁을 가속하고 위기상황에 빠뜨릴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에서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무기 이용 주체를 늘리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무기의 사유화(사유화된 무장)는 폭력 자체를 아예 제어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지게 한다(테러와 폭력의 악순환).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행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데, 미국이 이 때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거 호황기 때처럼 막대한 생산성이 뒷받침하는 것도 아니요, 옛날 영국 제국주의처럼 식민지에게서 공물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리품을 정부재정으로 직접 귀속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정부재정에서 전비지출 비율을 대폭 늘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는 사회복지예산의 대폭 삭감으로 귀결된다. 사실 이 같은 분배 정의의 왜곡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역의 정치․군사적 안정을 떠맡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도 적용된다. 자주국방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군비지출을 대폭 늘리고, 사회복지 지출은 실질적으로 감소하려는 남한의 현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예비하겠다는 (사전에 제거하겠다는) 안보 논리가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두 가지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냉전시대 안보란 소련이라는 ‘실제’하는 적을 경계하는 것이지만, 냉전 이후 안보란 언제 어디서 누가 강력한 적이 될지 알 수 없는 ‘가상’의 적에 대한 경계를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전과 같은 방식 즉, 냉전구도를 전제로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자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이에 기반해서 통치를 하는 방식의 부르주아 통치는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된다. ‘가상’의 적이란 적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가 아닌 남은 모두 적이라는 말이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언제 어떻게 폭력이 출현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이기도 하다. 적합한 인식을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지배세력은 반복되는 폭력의 원인을 호도하기 일쑤이고, 그리하여 이 반복되는 폭력을 ‘테러리즘’으로 뭉뚱그려서 정의한 것이다. 지배세력의 호언과 달리 이를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적일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게 된다.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것이란 시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렇게 해서 지배세력 스스로 자신이 약속한 민주주의마저 배신하는 일이 현실로 드러난다. 이 현상은 미국은 물론 동맹국 - 미국의 식민지 종속국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평화헌법 아래 유사법제를 만드는 일본,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고 헌법마저 무시하면서까지 파병을 강행하는 한국, 테러방지법의 제정, 집시법의 개악들로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 말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가상의 적이라는 말과 달리 ‘공포’는 실재한다는 점이다. 폭력의 무한한 반복과 실재하는 공포는 대중으로 하여금 사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고 대중들을 매우 수동적인 상태로 몰아 넣을 수 있다. 계속되는 테러리즘과 자신의 사회적 재생산의 기반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다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과정을 보고만 있거나 정치를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다(물론 역의 가능성도 있지만). 미국에서 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대중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 파괴과정에 침묵하는 대중, 정치에 무심한 대중의 문제를 분명히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한다. 이 때 가장 관건인 문제는 이 모든 모순과 위기감을 인민들이 참고 견딜 수 있는가 이다. 미국의 군사적 패권, 군사적 긴장 고조, 재정분배의 불균형과 이에 따른 사회적 위기의 심화, 정치적 민주주의의 위협 들 앞에서 말이다. 사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2003년 반전평화운동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한다. 바로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적 패권전략 -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이라는 시각에서 말이다. 2003년 반전평화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Ⅰ -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의 난관 : 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 자, 이제 반전평화운동의 현실을 되돌아보자. 남한의 반전운동은 대단히 더디게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2003년 2․15 국제반전행동에서 전 세계적으로 1000만에 가까운 대중들이 이라크 침략위협에 맞서는 행동을 벌이는 사이 한국에서는 2000여명의 대중들이 집회를 벌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개시되고 한국군 파병이 불거지면서 반전평화운동의 쟁점은 좀 더 구체적이 되었고, 이것은 3월 한달 내내 대중들 사이 주요 쟁점이었다. 3월 22일 서울에서만 7~8,000여 규모의 대중적인 집회가 진행되는 등 전쟁반대, 파병반대 운동의 물결은 상승세를 타는 듯 했다. 하지만,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이 제기되고 노무현 정권이 ‘국익’ 이라는 쟁점을 제기하면서 이 운동은 급격히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전쟁은 반대하지만 한국군 파병에는 국익이 중요할 수 있다는 모호한 선택이 지속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결정 이후 국회 앞에서 벌어진 투쟁은 이런 소강상태를 결정짓는 국면이었고, 파병결정이 최종으로 확정되면서 파병반대 운동은 한숨을 고르게 된다. 반전평화운동이 더디게 진행되었던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세 좋게 성장하던 반전평화운동이 왜 주춤거리게 되었을까? 일단, 전 세계적인 2․15 반전운평화운동은 우리와 달리 사회운동의 네트워크에서 상당히 체계적으로 준비되어 온 운동이라는 사실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것의 교훈으로 목적 의식적인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당시 남한의 반전운동은 (유럽처럼) 전체운동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나라 민중운동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던 데다가 그나마 반전평화라는 쟁점은 한국의 민중운동에게 낯선 쟁점이었다. ‘전쟁반대’는 신사회운동의 쟁점에 불과했거나 중심운동(노동운동, 통일운동)에 비해 부차적인 쟁점이었고, 기층 대중운동에게 이것은 사안별 연대의 대상으로서 부문운동의 지위에 머물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주의해야 할 문제는 더디게라도 시작했던 반전평화운동이 파고를 그리다 ‘한미동맹이 위험수준’이라는 지배세력의 협박 앞에서 주춤거렸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전평화운동의 첫 번째 난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다.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이 한미동맹을 넘어서기란 그리 간단치 않다.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운운하며 대중을 위협하는 수구반동세력의 공세도 문제지만, 한․미 공조를 통해서만 경제가 성장할 수 있고 정치․군사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신화가 지난 50여 년 동안 형성되어 왔고 이는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성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반공발전주의 이데올로기다. 1960~70년대 고도 성장이 노동자 민중의 처참한 희생으로 가능했음은 이제 누구에게나 알려졌지만, 이곳에 한․미 공조아래 발전이 가능하다 신화도 함께 자리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IMF 경제위기는 대중의 이율배반적인 면을 더욱 강화했다. 한편으로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으로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게되자 이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침체의 종식과 신화의 재현을 더더욱 갈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요가 부당한 파병압력에 대한 대중의 불쾌감과 동아시아 경제적 번영과 정치․군사적 안정이라는 미국의 구상에 대한 희망이 공존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온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을 가로막은 벽은 외재한다기보다는 대중 안에 내재했던 것이다. 상반기 파병반대운동이 미국의 군사패권전략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이라크 파병을 저지하는 데만 초점을 두었다는 것은 결국 한미동맹의 암초 앞에서 반전평화 운동의 동력이 급격히 위축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경제적 번영, 정치 군사적 안정)에 대한 대중의 허구적지지 - 즉, 반공발전주의 이데올로기를 미국의 야만성/전쟁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데만 초점을 둔 운동으로 깨트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003년 반전평화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Ⅱ -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의 난관 :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생존권 사수운동)과 연대의 곤란 대량살상무기의 부재, 막대한 전비, 그리고 이라크 개전 이후보다 종전 선언 이후 더 많이 발생한 미국 사망자, 이라크 저항세력의 지속적인 저항들로 미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은 이라크 점령에 대한 국제사회의 책임을 강조했고, UN의 이라크 재건 결의를 배경으로 동맹국들에게 전비지원과 추가파병을 요청하였다. 한국 역시 이를 따랐고, 추가파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하반기 파병반대 운동의 조건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파병을 반대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많은 활동가들이 적지 않게 노력했음에도 정작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은 좀처럼 다시 불붙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범국민대회라고 명명하고도 2,000 ~ 3,000 규모의 시위대를 조직하는 것 이상의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하반기 노무현 재신임을 전후하여 대중운동들이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났음에도 말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반전평화운동이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미국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생존권 사수운동이 분리된 계기를 통해서 드러나다 매번 서로 미끄러지면서 종결되더라는 사실이다. 2003년 한해 각자의 계기를 통해서 전개되는 대중운동들은 무엇 하나 예외 없이 거기에서만 멈추었다. 극한적인 삶의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목을 메고 분신하며 노동자 운동의 촉발을 호소했지만, 노동자 운동은 자신의 분노를 한번 드러내는 것으로 이후를 기약했다. WTO 시장 개방에 맞선 농민운동 역시 멀리 칸쿤에서 산화한 열사를 상여에 메고 투쟁에 나섰지만 농업시장 개방을 항의하는 투쟁을 대규모로 조직해보는 것으로 2003년 한해 투쟁을 마감하였다.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부안의 투쟁은 대중의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시도들만 보아도 주목되어야 하는 투쟁이었지만, 2003년 내내 부안지역의 문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이들 운동들은 반전평화운동과 별개의 운동으로 간주되었고, 또 그렇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민중운동의 상설적 공동투쟁체로서 전국민중연대의 위상이 모호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공동투쟁을 위한 네트워크의 부재를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설사 그런 네트워크가 형식적으로 존재했다 할지라도 사안별 연대투쟁에만 무게중심이 쏠려있던 이들 운동이 공동투쟁으로 나가기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연대 틀의 부재로 돌리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실, 2003년 하반기 파병반대운동은 상반기와 달리 미국의 침략전쟁을 규탄하는 것보다는 이라크 추가 파병을 저지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상반기 투쟁에서는 적어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규탄하면서 한국군 파병을 저지하는 투쟁을 벌였던 것에 비해, 하반기 투쟁은 오히려 쟁점의 폭이 좁았다는 뜻이다. 종전선언 이후 이라크 점령에 무심하다 한국군 파병이 제기되자 그제야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출발했다는 상황 자체가 이를 조건 지운 것이다. 물론 이렇게 출발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운동이 지속적으로 파병을 막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고, 대단히 기술적인 방식을 중시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배세력 내 분파 갈등의 활용, 재 신임 국면의 활용, 국민투표 방식의 활용, 그리고 끝내는 낙선운동마저 활용하자는 일련의 전술들은 파병을 막아내는 것만이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운동은 단기적인 목적달성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의 의식화․조직화보다는 시민운동가들 - 이른바 국회 국방위 전문가들, 정당정치 전문가들, 법률 전문가들 등 테크노크라트들의 능력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이슈를 부각시키는 데 유력한 수단인 미디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 결국 이익집단들의 운동방식 혹은 자기 중심적 실리주의 운동으로서 코포라티즘적 운동과 유사한 모양새를 띄면서 파병반대운동은 연대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던 것이다. 2003년 11월 격렬했던 노동자운동과 접점을 찾지 못하고 끝내 거리를 유지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일부 시민단체들이 노동자운동의 폭력성, 반전평화운동의 참가자와 노동자운동의 참가자가 다르다는 식으로 반발하며 이들 운동의 연대를 가로막았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모호한 입장으로 반전평화운동을 급진적이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정치적 오류를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파병반대운동이 연대 지향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원인을 단지 시민운동진영 탓이라고 돌릴 수만은 없는 문제가 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하는데, 이렇게 사안별 이슈에만 집중하여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계기에서만 찾는 방식의 운동 즉, 연대를 스스로 제한하는 운동은 파병반대운동 뿐만 아니라 손배가압류 철회를 위한 노동자운동, 그리고 FTA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농민 운동도 비슷한 경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파병반대 운동이 노동자운동, 농민운동과 거리를 둔 만큼 이들 노동자운동, 농민운동도 파병반대 운동과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의 출발점 2003년 한해동안 반전평화운동의 흐름은 파병반대운동에서만 보였던 것은 아니다. 국방비 증액 반대운동, 한미미래동맹/SCM 규탄 등, 자주국방과 한미동맹의 군사적 현대화를 비판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출현하였다. 또 두 여중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주한미군 장기 주둔에 따른 피해를 비판하는 운동이 2003년에도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이 운동이 반전평화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민족자주 통일운동이 한반도 위기에 맞서 평화를 염원하는 운동으로 전화를 모색하고, 반전평화운동과 접점을 모색하는 시도들도 있었다. 이 운동들이 광범위한 대중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제한적이지만, 적어도 이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패권전략에 맞서는 반전평화운동이 파병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다른 여러 가지 계기로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반전평화운동이 2003년에 부딪힌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다. 가장 핵심적인 초점은 어떻게 해야 한미동맹에 균열을 낼 수 있는가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한미동맹은 정치․외교․군사적 동맹뿐만 아니라 경제공동체로서 특수한 한미관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사실을, 즉 군사동맹으로서 뿐만 아니라 경제공동체로서 특수한 한미관계가 한반도 민중에게 무엇을 뜻하는 지를 정확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하고 투자여건을 확보한다는 미명아래 남한 정부는 구조조정을 진행해왔다. 그 결과의 참혹 상을 분명히 폭로할 수 있어야 한다. 수 조원의 돈이 초국적 자본의 이동과 함께 해외로 빠져나갔고, 그 사이 남한 민중은 삶의 위기에 내몰려 자신의 목숨을 내놔야 했다는 사실을 폭로해야 한다. 한미관계에 균열을 내기 위해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비판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운동과 더불어 우리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한 통치성의 구축 곧,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 반전평화운동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무장한 세계화 전략은 또한 경제위기와 통치성의 위기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전평화운동이 다양한 계기로 촉발되듯이 대중운동의 새로운 개시를 위한 객관적 조건이 존재함을 뜻한다. 문제는 대중들이 반공발전주의라는 허망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주체로 설 수 있겠는가이다. 또 이슈 파이팅으로서 운동의 지위를 넘어서 자신의 정치적 연대의 지점을 확보하고 반전평화운동의 새로운 주체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이다. 운동의 성장은 대중의 정치적 각성(의식화)과 운동주체의 형성(조직화)에 의해 가능하다고 했다. 이 고전적인 정식이 매우 적합한 대답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대중들이 과학적 인식에 기반해서 실천을 벌일 때에야 자신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분명히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정념에 빠지지 않고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반전평화운동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2003년 반전평화운동은 정치를 다시 가동하려는 인민들의 노력이라는 측면만 보아도 그 역사적 의미가 온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 많은 난관(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 노동자/농민/빈민운동과 연대의 곤란)에 부딪히면서 급격하게 소강했지만, 여전히 반전평화운동을 매개로 정치가 다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유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상이 바로 반전평화운동이 새로운 운동으로서 가능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미국의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반전평화운동은 이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남은 것은 어떻게 이것이 보편적인 이념적 지향 아래 대중운동으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는가이다. 우리가 깊이 숙고해야 하는 것은 반전평화운동은 곧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운동 자체의 복원으로서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를 진실로 깨닫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PSSP
12월 파병철회투쟁을 위한 - 10문 10답 - 제작 :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용도 : 이라크 파병 반대, 토론용 기초 자료 <기본문항> 1. 미국의 이라크 전쟁 종전선언 이후, 이라크 민중들과 주둔미군의 피해 상황은 어떤가요? 2. 이라크 저항세력의 실체는 대체 누구인가요? 3. 이라크 상황은 날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 나요? 4.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나요? 5. 이라크에 추가로 파병될 한국군은 실제로 어떠한 역할을 하게되나요? 6. 노무현 정부는 파병 문제와 한반도 안보문제를 연계하려고 했다는데 어 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7. 한국군이 주둔하게 될 지역으로 거론되고 있는 이라크 북부지역 모술 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8. 이라크에 파병을 한 나라들과 최근 파병요청을 받은 나라의 상황은 어 떠한가요? 9. 날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이라크가 하루빨리 질서를 되찾기 위해서 는 어쩌면 미군과 다국적군의 개입이 불가피하지 않을까요? 10. 한국의 이라크 파병을 저지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35차 한미안보연례협의회를 비판하며 부시행정부 매파의 수장인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이번 방한에서도 자신의 악명에 걸맞게 온갖 위험스러운 망발들로 한반도 긴장을 한층 악화시켰다. 청와대와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그의 언행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그가 내뱉은 대북 정책,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의 문제를 어떻게든 좋게 해석하려 했고, 파병압력을 중단할 것과 용산미군기지의 반환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행여 누가 될까 이들을 방패와 전경차로 가로막아 외부와 차단했다. 럼스펠드 미국방장관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북한에 대한 독설("김정일 정권은 악", "북한이 남침하면 미국은 핵으로 공격할 것", "북 정권은 쿠데타로 붕괴할 것")을 내뱉는 것도 잊지 않았는데, 이를 보더라도 미국의 대북 강경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11월 17일 럼스펠드 장관이 참가한 제 35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이하 SCM)에서는 추가파병과 주한미군재배치의 문제에 대해 큰 이견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이라크 파병부대의 성격에 대해서는 지역안정군으로서 지위와 역할을 가져야 할 것임을 확인하였고, 용산미군기지 평택이전문제, 주한미군 10개임무 한국군 이양, 한미전력증강방안, 주한미군의 아시아 지역군으로서의 위상과 성격변화 등이 일괄 타결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한미간 이견으로 알려졌던 용산기지 잔류부지 문제와 유엔군, 한미연합군사령부의 이전문제조차 19일 정부가 이 역시도 전격 수용할 것임을 밝힘에 따라 '주한미군 한강이남 배치'는 향후 일사천리로 추진될 전망이다. 이번 연례안보협의회에서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양국의 합의다. 북한을 겨냥한 '방어군(?)'으로서 주한미군은 이제 동아시아 지역 전체를 겨냥한 '지역배치군(!)'의 위상을 가지게 되며, 신속배치군이 머물게 될 평택기지는 미군의 동아시아 군사적 패권 장악을 위한 전진기지가 될 것이다. 동북아 군사 패권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미국의 '주한미군 재배치' 계획은 이제 실제화 되고 있으며 이는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위협과 전쟁위기의 실제화로 이어지고 있다. 주한미군 재배치결정을 둘러싼 논란 이번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의 결과에 북한은 즉각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군사작전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주한미군 재배치는 결국 북에 대한 선제공격테세라는 점"을 경계하며 이에 대응하기 위한 북한의 새로운 첨단무기 구비와 공격능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럼스펠드의 대북강경발언과 한미연합전력증강계획으로 인해 남북한의 군비경쟁은 다시 가시화될 것이다. 예상대로 북미간의 갈등, 한반도 전쟁위기감은 또다시 고조되고 있다. 미2사단의 후방배치문제는 지난 4월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 협의에서 처음 다루어졌다. 그 이후 지금까지 정부는 파병반대 투쟁 등 국내에서 반미반전투쟁이 고조될 때마다 미군재배치의 움직임을 '주한미군 즉각 철수'문제인양 호도 하였다. '주한미군 없는 한반도'는 곧 북한의 남침과 전멸이며 또한 해외자본의 철수로 경제위기가 악화될 것이라며 공포를 조장해 대중들의 투쟁을 잠재우려했다. 심지어 노무현 정부는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미2사단의 재배치의 일시적 유보를 얻어낸 것이 커다란 성과라고 주장하기도하였다. 이번 안보협의회(SCM) 결과를 둘러싸고도 여전히 지배세력은 미2사단의 후방배치로 인한 전력손실과 '인계철선(trip-wire)의 상실'의 문제와 한미연합/유엔군사령부가 서울을 떠나는 문제가 대북억지력을 약화시키고 한반도 안보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데, 주한미군재배치는 미국의 새로운 군사안보정책의 목표아래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변화된 국제정세에 발맞추어 동아시아와 한반도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정치적 맥락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신속 대응력 확장의 의미와 배경 9․11테러를 거치며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미국의 군사 안보전략은 비대칭적 위협(불특정 대상이 불특정 수단으로 맞서는 위협)에서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미국의 방도가 바로 이 같은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선제공격 독트린"이다. 이러한 전략에 따른 미국의 군사체계의 재편은 불가피한 것이었는데, 비대칭적인 위협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항공모함과 중보병 위주의 전력구조에서 원거리 함선과 잠수함, 그리고 거미줄 같은 정밀병기가 더욱 효율적이라는 것이다(첨단 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광범위한 군사구조개혁). 더불어 가벼운 군사장비로 과거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정밀타격으로 속전속결 전투를 벌이는 군사전략을 추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럼스펠드 독트린'이다. 이는 병력의 기동성을 규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 군대의 경량화, 유연화, 첨단화로 대표되는 이 구상은 1) 적은 병력과 첨단 무기, 특수부대로 2) 미군의 큰 피해 없이 3) 동시에 몇 개의 세력을 손볼 수 있다는 사고다. 이러한 구상은 바로 최근 이라크 전에서 하나의 사례로서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전략은 당연하게도 과거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의 변화를 포함하는데, 이에 따라 전 세계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해외주둔미군의 역할과 위상, 체계는 현재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 핵심적인 변화의 지역이 바로 동아시아다. 동아시아가 미국에게 사활적인 전략적 요충지가 되고 있는 것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신흥시장으로서 미국경제에 매우 주요한 위치라는 점, (미국의 군사적 패권전략에 조응하는) 지역적인 수준에서 군사적인 패권 국가가 분명하지 않고 이에 따라 대규모 군사적 경쟁 심지어 충돌을 배제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점, 그리고 잠재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우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중국의 부상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들 때문이다. 미국의 이 같은 구상이 온전하게 실행되려면 한-미-일 삼각 동맹을 견고히 재구축 할 것을 전제한다. 때문에 먼저 한국과 일본의 군사정책을 근본적인 수정하고 한, 일 군대가 지역방어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그 일차적인 과제가 되는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평화헌법 수정 움직임과 재무장화의 움직임에 미국은 은근히 기대하면서 압박을 가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이상의 구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현재 제기되는 위협 즉, 미국에게 동북아 지역의 안정성에 장애가 되고 있는 핵-미사일 위협의 완전한 제거가 관건인 것이다. 이는 곧 부시행정부가 대북강경정책 노선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또한 미국은 현재 아시아 지역 내 미군기지에 대한 본토의 접근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낮은 수준이라는 진단아래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접근성 제고, 기반시설 확보, 원거리 작전을 지속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 등을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즉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는 '우발적' 사태에 미국이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기동성과 신축성을 확보하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전제한다면 이번 SCM 협의 결과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한-미동맹의 현대화, 주한미군의 동아시아 지역배치군(신속배치군)으로 확장, 한국군의 한반도 안보에서의 역할 증대… 이와 같은 내용이 이번 SCM 공동성명에 담겨져 있다. "한국군이 미국의 군사변혁을 참조하여 군사력의 발전적 변화를 추진하며, 한반도 방위는 한국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10개의 주한미군의 군사임무를 한국군으로 전환한다는 것" 주한미군 재배치 구상과 노무현의 자주국방 정책의 기만성 지금까지 알려진 주한미군재배치의 구상은 전국의 미군 기지를 오산․평택권과 부산․대구권의 2개 중심기지로 통합하고 지상군 병력을 줄이는 대신 정밀유도무기를 강화하고 동아시아에서 유사상황 발생 시 부산․대구권 기지를 지역 배치국으로 즉각 파견할 수 있는 통로로 확보한다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해외주둔 미군을 이전처럼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주둔하고, 방어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비대칭적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형성할 수 있도록 배치하려는 새로운 전략의 구체적인 실행이다. 또한 최근의 한반도 주변의 미군의 동향은 단순히 북한의 남침 억지력의 확보 차원을 넘어 서고 있다. 미군은 몇 달 사이 스텔스 전폭기의 남한 배치, B-1, B-52 폭격기의 괌 배치, 핵추진 항공모함인 칼빈슨호의 일본 배치 등 한반도 주변의 병력을 계속해서 증강시켜 왔으며, 최근에는 이라크 전쟁에 사용된 1개 중무장 여단의 장비를 한반도 주변에 배치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기도 하다. 이대로라면 언론의 호들갑(한강이남배치에 따른 주한미군 전력 감소)과는 달리 오히려 작전 능력의 향상이라는 주한미군 전력 증강을 의미하는 것이고, 미군기지 이전은 감축이 아니라 오히려 신설 확충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러한 모든 변화들은 한국정부의 전반적인 군사전략과 전력개편, 확충을 강제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변화하는 전쟁양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국방정책의 목표를 '자주적 선진국방 구현'으로 설정하고 완벽한 국방태세 확립 미래지향적 방위역량 구축 지속적인 국방체제 개혁 장병복지, 병영환경 개선에 중점을 두고 국방 업무를 추진키로 했다. 이에 따라 국방비의 증액은 불가피하다. 노무현 정부는 2004년도 국방예산을 용산기지 이전비용 3,400억 원을 포함해 올해보다 8.1% 증가한 18조 9,412억 원으로 편성하여 국회에 제출하였고 이 증액분은 전체 예산의 60%에 이르는 액수로 80년 46.2% 증가율 기록이래 최고 수준이다. 국방부는 한국군이 독자적인 지역방위군으로서 자주적 방위역량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GDP의 3% 이상인 적정 군사비가 지속적으로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자주국방'이란 결국, 미국의 대북, 동북아에 대한 새로운 군사전략의 하에서 한국이 부여받은 한반도 지역방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국방비 증액과 전력의 지속적인 강화일 뿐인데, 이는 '평화군축'과는 완전히 반대말이다. (보라 노무현의 동북아 평화번영정책의 위선과 기만을!) 자주국방이라는 미명아래 벌어지는 군비 경쟁, 군사력 확장 그리고 미국의 기동타격이 가능한 신속대응력의 확대와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의 완성이 한반도 긴장고조는 물론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갈등을 심화시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닌가.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완전 철수! 우리의 반전운동이 한반도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 럼스펠드 장관이 동아시아를 순방하며 미국의 신군사전략을 구체화하던 그 시간, 이라크 북부 티그리트 지역에서 미군은 종전이후 최대규모의 공습을 단행하였다. 이 엄청난 공습은 공군폭격기와 헬기와 장거리 유도미사일 등을 동원해 이라크 민가와 공공시설에 대한 무차별적 융단폭격을 가하며 7일 동안 지속되었다. 통제불능의 이라크의 현재 상황에서 미국의 조기철군과 통치권 반환이 불가피하다는 여론은 미국을 정치적으로 위협하며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이에 미국은 이라크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계속하는 것은 자신의 패배를 또 다른 방식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은 신 군사전략과 함께 결코 지금의 이라크 상황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동북아지역의 위기와 긴장고조는 '한-미 동맹 현대화'와 '주한미군 재편'으로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이번 럼스펠드의 방한과 35차 SCM에서 노무현과 지배세력은 이 위험한 계획에 쉽게 동승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현재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군사력 증강과 긴장고조의 의도와 목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미국이 겨냥하고 있는 적군은 '북한'이라는 고정화된 대상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상대로 불특정 다수의 국가 모두가 미국의 잠재적 적군이라는 점, 이러한 긴장상태에서 언제 어떠한 사건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게 될지 모른 다는 점을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더불어 노무현 정부의 '자주국방비젼', ‘국방예산 증액’이 한반도와 아시아지역 전역의 평화를 위협하는 군사전력에 불과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반전반미-평화군축 투쟁의 의제와 대상을 확장시켜야 한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패권전략에 맞선 투쟁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의 현대화와 신설 확장, MD체제 같은 예방전쟁을 위한 준비태세의 완료, 한국군 국방비 증가와 전력강화에 대한 반대투쟁들 말이다. 이들은 모두, 군사적 위협을 강화하고, 이에 기반을 두어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하려는 지배세력에 맞서 단호히 투쟁을 조직할 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는 전쟁을 반대하는 투쟁이 단순히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투쟁으로 멈출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파병정권, 폭력정권 노무현정권 규탄!',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군사적 재편 전략 분쇄!', '동아시아에서 미국 주둔군의 완전 철수!'PSSP
번역: 기획팀 1장. 국제주의의 대장정 17세기 이래로 배태되어 온 민족적 감정은 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발생한 두 번의 근대적 대혁명의 충격 하에서 출현했다. 평등의 원리 속에 정치적 시민권을 기초하기 위해 ‘조국'과 ’민족‘은 특정한 왕조의 정당성에 대립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프랑스의 『인권선언』이나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드러난 것처럼, 갓 태어난 애국주의는 스스로가 보편주의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것이기를 바랬다. 그것은 국경을 넘어 민족적 이상과 형제애를 화해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부르주아지는 인류의 보편이익을 담지한 것으로 믿어졌다. 자본이 산업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상업적․농업적 상태로 남아있던 시기에 민족은 인민의 상상적 공동체를 표상했다. 그들은 아직 상상적 공동체를 파열시킬 계급의 새로운 적대를 경험하지 않았다. 19세기 전반기에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구성되었다. 1846년 『인민』이라는 에세이에서 미셀레(Michelet)가 인식한 사회적 분화는 그 이후 1848년 혁명에서 전면에 드러날 정도로 증폭되었다. 이제 우리는 1848년 6월 혁명의 나날들과 (『이상적 교육(l'Education sentimetale)』에서 플로베르가 상기시킨) 파리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유혈진압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건들은 생산과 재생산의 자본주의적 관계의 핵심에서 제거할 수 없는 사회적 균열을 보여주면서 유럽의 역사를 ‘둘로 쪼갰다’. 코스모폴리탄주의에서 국제주의로 쁘띠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새로운 엘리트들은 그들의 투쟁을 유럽적 전망 속에 기입했다. 1850년대에 마치니(Mazzini), 코수트(Kossuth), 루이 블랑(Louis Blanc) 등은 1848년 망명자들의 수도인 런던에 모였다. 가리발디(Gribaldi)는 베네수엘라에서부터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독립을 위해 전투에 참여했다. 갓 태어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는 산업적 비약과 동시에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또는 프랑스에서 박해받은 혁명가들의 추방(영국, 미국,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하도록 선고를 받은)에 의한 숙련 노동력의 이동에 의해 강화되면서 계몽주의의 코스모폴리탄주의를 대체했다. 형성 중인 노동자 운동은 민족국가를 자연적 현실로도 정치사회의 최종적 해답으로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근대성의 종별적․이행적 형태로 생각했다. 1848년에 이미 『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은 그것의 지양을 당면과제로 설정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제 계급의 연대는 피억압계급 내에서 신성한 (종교적) 합일과 민족적 신성동맹에 대립했다. 그러한 유년기의 국제주의는 성숙기의 민족주의에 대응했고, 국제주의에게 민족은 더 이상 세계적 시민권을 향한 진보를 표상하지 않으며, 기원, 인종, 땅, 언어 등에 대한 낭만적 추구 속에서 종말에 다다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이후로 혁명의 정치적 민족은 역사를 자연화하고 숙명화하는 신화적이고 (르낭의 정식으로 따라) 광물적이거나 ‘동물학적인’ 우스꽝스런 풍자화로 대체되었다. 식민지 팽창, 쇼비니즘과 인종주의 1860년대부터 지배계급들은 점점 더 광신적이게 되어 가는 민족주의를 위하여 낭만적 민족주의를 버렸다. 1853년 고비뇌(Gobineau)의 『인종불평등』과 그 이후 스펜서 사회학의 부산물들에서 드러난 것처럼, 제국적 헤게모니 형성의 과정에서 민족은 인종화되었다. 그러한 민족주의는 실증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양분을 얻으면서 혁명적 무질서라는 커다란 두려움을 가장 잘 쫓기 위해 문명을 수출하고 질서 내에서 진보를 확산하는 것처럼 뒤늦게 가장했다. 시민성은 민족성 내에서 강화되었다. 민족은 종족화되었다. 1850년대에 쇼비니즘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민족과 보편성 사이의 분리를 보여준다. 그러한 진화는 식민 정복 전쟁의 논리와 근대적 제국주의의 출현 속에 기입되었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미래의 ‘대재앙의 씨앗’을 담고 있었다. 그 시대의 정복의 정신을 요약하면서, 세실 로드(Cecil Rhodes)는 ‘행성들을 병합하려는’ 자신의 야심을 보여주었다. 팽창은 최고의 목적이 되었다. 다시 한번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면, 그러한 목적은 결국 ‘권력의 수출’과 ‘폭력의 기능화’를 동반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적․신학적 반유대주의는 인종적 반유대주의로 변모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그러한 반유대주의가 증폭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르주아적 파퓰리즘은 계급타협(그리고 프랑스에서는 공화주의적 협약)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대립시켰다. 이는 또한 호전적 경향과 군사주의적 확장에 의해 굴절되었다. 1912년 바젤 사회주의 총회의 평화주의적 성향의 분출(바젤의 종각에서 아라공은 서정적인 찬사를 보냈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전쟁에 맞선 전쟁’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신성 불가침의 [민족적] 통일성을 향한 사회주의 정당들의 참여는 1914년 8월에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을 낳았다. 1차 세계전쟁 이전의 [민족적] 팽창기 동안 주요 유럽 나라들에서 노동자 운동의 노조적․의회적 관료화는 사실상 그것의 ‘민족화’와 쌍을 이루었다. 민중적 문화 속에서 계급적 외양의 공동체와 민족적 공동체라는 두 개의 상상적 공동체는 일치되었다. 정당들의 인터내셔널은 근본적으로 민족적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들이 서로를 살육하는 전면전의 발발에 저항하지 못했다. 혁명적 국제주의와 관료적 쇼비니즘 1919년에 제2인터내셔널의 트라우마와 러시아 혁명이 낳은 열망 속에서 제3인터내셔널이 탄생했다. 1920년 바쿠에서 개최된 동방민족대회는 식민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인민들의 민족적 요구들을 보편화했다. 전간기 파시스트 체제에 의해 격화된 민족주의에 직면해서, ‘조국도 국경도 없는’ 투사들의 새로운 혁명적 국제주의(그것은 장 발텡(Jan Valtin)의 기념비적 저작,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의 기억들, 엘리자베스 포레츠키(Elizabeth Poretsky)의 『우리들』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영광의 시간을 누렸다. 여기서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 가교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국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적 이론, 대러시아 쇼비니즘의 재등장(이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나 『이반 대제』와 같은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속에서 호화로운 이미지로 등`장한다), 크레믈린에 대한 각국 공산당들의 관료적 예속 등에 의해 내적으로 급속하게 침식되었다. 1943년 반파시즘의 제단을 향한 인터내셔널의 순수하고 단순한 해산은 그 자체는 국제주의의 종말의 에필로그에 불과했고, 이미 국제주의는 망령이자 유령이 되어 있었다. 2차 세계전쟁 이후 국제주의는 소련이나 중국의 국가이성에 의해 박탈당했고 제3세계에서 변용되었다(이는 특히 전투적인 서인도인 프란츠 파농의 생애와 저작에서 잘 드러난다). 국제주의는 식민지 세계와 중국의 지도자들이 ‘폭풍지대(zone de tempetes)’라고 부른 지역으로 축소된 채, 비동맹국가들의 운동인 반둥회의의 형성과 함께 완화된 형태의 제도적 표현을 찾았고 두 개의 핵 강국 사이에서 불안한 균형을 활용했다. 그것은 쿠바의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된 3대륙 회의와 1967년 라틴아메리카연대조직(OLAS)의 형성 속에서 급진화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대륙적 투쟁이라는 전략적 전망 속에서 전통적 혁명운동과 새로운 혁명운동을 연합하려는 것이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알제 담화(Discours d'Alger, 1965)나 3대륙에 보내는 그의 유언서신(1967)에 대한 반향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국제주의는 제국주의적 메트로폴리스 내에서의 반자본주의라는 차원과 현존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의 반관료주의라는 차원으로부터 분리된 채 ‘자유세계’와 ‘사회주의 진영’ 사이의 대결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었다. 그것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중봉기를 지지하는 영감이 넘치는 원리들에 대한 거부와(명목상 그것들은 소비에트 탱크들의 케터펠터에 의해 부과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라고 주장되었다) 인도차이나의 해방운동 사이의 균열의 증거가 드러나면서 소진되었다. 2장. 세계화에서 또 다른 세계화로 빅토리아 시대의 세계화, 유럽과 미국에 의해 가속화된 산업화, 식민주의적 팽창 등은 1864년에 노동자국제연합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851년과 1862년의 런던 대박람회는 1864년 구성될 총회를 예비하는 노동자 대표들 사이의 접촉과 회합의 장이 되었다. 1980년대에 로날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주도한 자유주의적 반-개혁, 시장의 탈규제,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순환 등이 이번에는 국제주의의 새로운 비상으로 표현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본, 무역, 생산의 세계화는 이제 다시 다양한 형태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는 투쟁의 국제화를 낳고 있다. 시장의 전제에 맞서는 대장정의 한 걸음 한 걸음들로서 그 투쟁의 주요한 상징적 장소들은 저항의 지정학적 기묘함을 보여준다: 시애틀(1999), 밀라노(2000), 프라하(2000), 니스(2000), 포르투 알레그레(2001), 제노바(2001), 포르투 알레그레(2002), 브뤼셀(2002), 바르셀로나(2002), 몬트레이(Monterrey, 2002), 플로랑스(2002), 포르투 알레그레(2003), 하이드라바드(Hyderabad, 2003), 생-드니(2003), 나아가 퀘벡, 제네바, 워싱턴, 방콕, 멜버른, 다카, 바마코(Bamako), 교토, 부에노스 아이레스, 몬트레이. 3년 동안 이들 도시 모두는 WTO, IMF, 세계은행, G8, 다보스 포럼 등의 수뇌부 회의에 대항하거나 유럽 위원회(Conseil de Europe)의 회의에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나 회합의 무대가 되었다. 빅토리아적 세계화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19세기의 빅토리아적 세계화는 운송․통신의 거대한 기술혁명에 의해 지지되었다. 몇 년 동안에 철도망은 가지를 치면서 확장되었다. 전신은 전선으로 지구 전체를 직조했다. 증기선은 80일 동안에 세계 일주를 실현할 수 있게 만들었다. 타자기와 인쇄 윤전기는 하나의 인쇄물이 엄청나게 많은 부수로 발간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만들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인터넷, 위성통신, 그리고 원격통신이었다. 1860년대는 철도, 전신, 해운 등에서 거대한 혁신이 있었다. 또 이 시대는 거대무역의 탄생, 은행신용의 비약적 발전, 부르주아적 열정과 정념의 폭발(에밀 졸라의 『돈』에서 드러난 것 같은),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사라지는 행운, 요란스런 파산과 정치-금융 스캔들 등과 같은 사건들을 목도했다. 유동성 은행(Credit mobilier)의 파산이나 무자비한 경쟁에 의해 제거된 철도회사들은 신경제의 환상이나 엔론사의 파산의 등가물이었다. 이 시기는 또한 식민원정, ‘학살산업’, 금융적 타락, 그리고 잭 런던에 의해 상상된 강력한 마피아를 예견하는 ‘암살단’의 시대였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도 마피아적 범죄, 모든 생물 종에 대한 암거래, 마약과의 전쟁, 전자 해적과 인터넷 테러리즘, 무자비한 경쟁과 제국적 전쟁 등과 같은 일련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것은 상품과 자본의 순환을 제한할 줄 모른다. 또한 그것은 국경 없는 폭력, 생태위기, 증권시장 패닉 등의 세계화를 의미한다. 1998년 아시아 위기나 2001년 아르헨티나 위기와 같은 국지적 위기는 카오스 물리학에서 말하는 나비 효과처럼 세계화된 체계 내에서 증식된다. 그러한 세계화의 주창자들은 특별한 수식어 없이 그것을 경제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의 숙명적 결과로 제시한다. 그것은 그 이면의 부조리가 무시하고자 하는 그 자신의 근거를 갖는다: 공간에 대한 병적 허기증과 가속에 대한 광란. 이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에 내재된 것이다. 자본은 자신이 산출한 그 자신의 한계와 사회적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저하하는 이윤율에 대한 반 경향을 조직하기 위해, 자신의 활동영역을 끝없이 확장하고 자신의 변태와 회전을 가속화한다. 정보통신 및 바이오-테크놀로지의 혁명은 그러한 장기적 운동들을 증폭한다. 세계의 새로운 분할 제국적 세계화의 양상들은 경제적 논리와 기술혁신에 의해 기계적으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 독일의 재통일, 소련과 그 영광의 해체 등에 따른 새로운 정치적 상황에 조응한다. 1943년과 1944년에 테헤란, 얄타, 그리고 포츠담에서 열린 일련의 회의들에서 협상되었던 세계적 양극 균형은 지역적 위기와 분쟁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동안 냉전을 유지시켰다. 냉전 질서의 붕괴는 1815년 비엔나 조약이나 그 이후 1848년 인민의 봄을 낳은 19세기나 2차 세계전쟁 직후 중요한 조약들을 낳은 20세기 초와 같은 새로운 세계 대분할의 시대를 낳았다. 그러한 분할은 밀실의 조심스런 분위기 속에서 세계라는 ‘거대한 체스판’을 놓고 각국 재상들이 벌이는 평화적인 놀이가 아니다. 그들의 지위는 칼과 칼의 충돌에 의해 확립되고 해체된다. 1991년 평화와 번영의 동의어로 ‘신세계질서’를 선언했던 부시 시니어의 약속과 반대로, 시장이 지배하는 최상의 세계는 지난 15년 동안 걸프 전쟁에서 중앙아시아 전쟁, 그리고 발칸 전쟁이나 아프리카 내전을 거쳐 근동지역의 분쟁에 이르는 끊이지 않는 전쟁을 목도해야 했다. 군사주의는 제국의 (다소간) 숨겨진 얼굴이다. 지배 열강들의 군비지출은 새로운 기록을 경신했다. 미국의 군비지출은 전세계 국방비 지출의 40%를 넘으며 NATO의 열강들 중 2위를 차지하는 영국의 군비지출의 11배, 그리고 프랑스 군비지출의 12배에 이른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또한 무장한 세계화다. 다국적 기업의 숫자가 1970년대에 대략 10,000개 미만에서 21세기초에 40,000개에 육박하게 되었고, 3억 가까운 사람을 고용하며 그 사람들 중 40%가 애초의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다할지라도, 그러한 세계화는 민족국가들과의 연계를 단절하지 않는다. 비록 국제기구들의 배치구조가 점차 형성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민족국가에 등을 기대고 있으며 그 내에서 어느 것도 ‘세계적 통치성’의 윤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IMF와 세계은행은 채무국의 감독 기관으로 기능하면서 그들의 긴급융자 조건으로 구조조정 계획의 적용을 제시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그것의 재앙적 결과들을 보여준다. 부채의 메커니즘은 지배받는 나라들을 훈육하고 부를 이전하며 지배하는 나라들을 위해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전달벨트 역할을 한다. 세계은행은 사회보장체제를 사적 보험과 연금 기금으로 대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정치의 사용법을 고정시키는 퇴행을 향한 관계를 생산했다. 1995년 WTO의 창립과 함께 새로운 일보가 내딛어졌다. 그 기구는 협조와 조언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라케시[모로코의 도시]의 무역협정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고 분쟁조정기능을 한다. 협정에 반하는 조치를 취한 어떤 나라가 법을 벗어났다고 선언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된 국제적 관할권의 윤곽이 잡히고 있다. 결국 국제적 권리의 대부분이 언제나 국가간 관계와 조약들의 영역에 속한다면, 헤이그 국제재판소와 국제형사재판소는 세계화된 법률질서의 출현의 초안이 된다. 1989년에 세계은행의 수석 경제학자로 승진한 존 윌리엄슨(John Williamson)은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1990년대에 국제금융기구의 공식적 교리가 될 10가지 항목을 요약했다: 재정적자 축소, 자본과 주주들을 위한 재정개혁, 금융시장의 자유화, 수출증가, 관세권의 완화, 외국인 투자 장려, 공기업의 사유화, 경제의 다양한 부문들 내에서 경쟁의 탈규제, 모든 형태의 소유권의 보장. 그러한 권고사항은 유럽연합의 성서이자 마하스트리히트 조약의 ‘수렴 기준’의 모형이 되었다. 그런 지향의 결과는 사기와 같은 시장의 재앙적 발전 속에서 여러 나라들에 의해 오랫동안 검토되었다. WTO의 권위에 종속된 국제협약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나라들은 첨단기술을 보유한 초민족적 기업들에게 정보산업이나 생명공학 내에서의 혁신에 대한 독점권을 보장해주었다. 농업에 대한 협정은 그 주요한 시장들을 대폭 개방시켰지만, 열강들의 일부에서는 보조금을 받는 생산을 공고화하고 과도한 덤핑에 우호적인 조건이 마련되었다. 더욱 일반적으로 WTO의 정치는 공적 이익이나 생태적 처방에 대한 다른 모든 고려 대신에 자유무역을 특권화한다. 그러한 경제적․제도적 경향들은 권력과 결정의 새로운 장소들에 조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정하는 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한 저항을 낳았다.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사회주의 진영‘의 해체는 국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e d'Etat)의 종말을 표시했다. 그러한 국제주의는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라는 이름으로 헝가리(1956), 프라하(1968), 아프가니스탄(1980)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정당화했다. 그런 국제주의의 종말은 사회운동을 ’진영‘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와 동과 서 사이의 선택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러한 운동들은 1990년대에 절대적 자본주의와 단극적 제국 지배에 맞선 동원의 과정에서 혁신된 모습으로 재등장했다. 치아파스 산악지방에서 사파티스타의 봉기에 의해 1996년에 조직된 ’다면적(intergalactique) 회합‘은 사후적이지만 그러한 새로운 국제주의의 상징적 서막으로 제시되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것―원주민 공동체의 특수한 요구들―과 새로운 것―인터넷과 근대적 통신기술의 활용―을 결합했다. 2차, 3차 인터내셔널에 대한 비판적 평가 속에서 21세기의 국제주의는 진정으로 전지구적인 차원을 꿈꾼다. 그것은 세계의 일반화된 시장화와 사유화에 대응하면서 선행자들보다 훨씬 더 지리적으로 포괄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문화들을 결합하고 전통적 노동자 운동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행위자들의 다양성을 재조합해야 한다: 페미니스트 운동, 생태주의 운동, 문화적 운동, 청년운동과 노동조합의 운동 등. 20세기의 트라우마적 경험에서 회복되는 과정의 고통을 동반하면서 그러한 국제주의는 신중하게 형성되고 있다. 피억압자들의 정치는 ‘극단의 시대’ 동안 누적된 패배와 회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저항의 세계화가 기계적으로 반체계적 요구나 대안적 기획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공적 공간의 빈혈에 균형을 맞추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시민사회’라는 통념은 매우 다의적이다. 세계은행은 태국 빈민포럼의 투사들이나 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이 부여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시민사회에 부여한다. 세계화된 자본이나 초민족적 기구들은 세계적 ‘시민사회’를 자신들의 계급적 전략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한다. 그들은 세계적 시민사회를 ‘기업의 세계’, 사회적 재생산 역할을 자임하는 거대 기구, 그리고 체계의 결핍요소를 보충하는 것으로 호명된 조직들 사이의 협력을 제도화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운 범-정부적(para-gouvernementales) 관료기구를 신성화하고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지원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특정조직을 포섭함으로써 배제된 집단과 취약 계급의 사회적 요구를 일정한 방향으로 호도한다. 여기서 ‘시민사회’는 제도적 합의 내에서 갈등을 탈정치화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새로운 민중운동이나 부활한 민중운동은 시민사회를 시장화에 맞선 공간으로 제시하면서 그 자신의 내용을 제공할 수 있다. 프랑소아 위타르(Francois Houtart)가 ‘아래로부터의 시민사회’라고 부른 것의 윤곽이 잡혀가고 있는데, 그 속에서 공공재와 공적 서비스에 대한 대안적 논리를 발견한 피억압 집단들의 의식이 표현되고 있다. 단어들의 의미 그 자체는 유통되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뒤섞이기 마련이다. 스탈린 시대의 공식적 단어 속에 편입되면서 위대한 국제주의적 약속은 관료적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명분으로 기능했다. 만약 그 단어들의 의미가 불확실한 것이 된다면, 혼돈은 지속될 것이다. 시애틀이나 제노바에서의 시위를 낙인찍기 위해 거대언론들은 그것을 ‘반세계화주의’로 규정했다. 그들은 마치 민족국가, 부족 또는 종족의 향수가 문제인 것처럼, 그리고 마치 국제주의는 이제부터 모든 흐름에 개방된 시장의 소유물이 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쇼비니스트적 경향들은 단지 흥행성이 높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국제적 시위와 회합들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한 시위와 회합은 사실상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주의적 전통과 NGO들의 ‘무국경주의(sans-frontierisme)'를 혼합하는 용광로가 되었다. 그 구성요소들은 위기와 전쟁의 효과 하에서 국가의 재등장과 인간적 가치의 군사화에 맞서면서 급진화되는 경향이 있다. 포르투 알레그레, 제노바 또는 플로랑스의 시위대들은 편협성이나 폐쇄성, 또는 ‘반세계화주의’ 등의 함의를 거부하면서 스스로를 ‘대안세계화주의’로 정의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제 대안적 세계화를 위한 투쟁이 문제인 것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