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 인도 뭄바이엔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직 공식적인 수치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여성들도 이번 세계사회포럼에 대거 참가했다. 그만큼 여성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와 이슈의 워크샵들이 조직되었다. 4차 세계사회포럼은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운동이 커다란 두 줄기였고, 특히 전쟁과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흐름이 두드러졌다. 이는 여성들이 조직한 그리고 인도 조직위원회에서 여성 관련 문제에 할당한 패널에서도 드러나는 흐름이었다. 세계사회포럼은 형식과 규모를 기준으로 행사를 컨퍼런스, 패널, 워크샵, 세미나, 증언으로 나눈다. 여기서는 모두 '워크샵'으로 표현하기로 한다. 사회진보연대는 '세계화와 여성', '여성에 대한 전쟁, 전쟁에 저항하는 여성', '전쟁에 대한 국제여성법정', '정치적 조직들과 급진 민주주의', '세계여성행진 워크샵' 등에 참가하였다. 참가한 워크샵과 세계사회포럼이란 공간에서 드러난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이곳에 모두 담아내지는 못할 듯 하다. 여기서는 '여성에 대한 전쟁, 전쟁에 저항하는 여성'에 나온 전쟁에 관한 여성들의 증언을 전한다. 그리고 세계사회포럼이 시작되기 전, 뭄바이에서는 여성국제회의가 있었는데, 그 틀이 '페미니스트 대화'라는 네트워크이다. 이에 대한 소개와 세계여성행진이 제안한 2005년 계획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전쟁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 '여성에 대한 전쟁, 전쟁에 저항하는 여성' 여성에게 '전쟁'은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 군사적 행위를 넘어선다. 미국이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나타난 결과들은 여성들의 삶 자체를 전장(戰場)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가 반전과 반세계화 운동의 결합을 고민한다고 했을 때, 전쟁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전쟁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가?" 아프가니스탄의 사어 사하(Saher Saba)는 묻는다. 미국은 민중, 특히 여성을 탈레반에서 해방한다는 명목으로 아프간을 침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독재와 근본주의자들의 지배는 계속되고 오히려 전쟁으로 근본주의는 강화되고 있다고 한다. "여성은 아프간 전쟁의 첫 번째 피해자이고, 첫 번째 저항자입니다. 전쟁에 참가한 남성들은 전쟁 후유증으로 알콜중독자가 되어 아내와 딸을 때립니다. 우리는 25년 동안의 탈레반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처음부터 탈레반을 지지해 왔던 것은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아프간에 새로운 헌법이 생겼다. 예전 헌법엔 여성은 기입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새로운 헌법엔 여성이 분명히(!) 명시되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들의 반이다!'라고. 인도의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아프리카와 인도에서는 "평화는 전쟁!(Peace is War!)"이라고 말한다. 삶 자체가 전쟁이란 의미다. 인도에서 구조조정은 농촌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인도의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다. 땅이 남편의 소유라도, 여성들은 최소한 자신이 재배한 농작물에 대한 통제권을 가질 수 있었다. 농촌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남편들은 땅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러나 여성들에겐 땅에서 노동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농작물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긴 채, 땅을 팔아 돈을 가지고 있는 남편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세워진 공장에 일하는 노동자는 남자들로 채워졌다. 또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은 인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인도에선 오랫동안 힌두교와 무슬림 사이의 분쟁(힌두교가 다수다.)이 있었다. 이라크 전쟁은 '무슬림은 나쁘고, 척결되어야 할 것'이란 생각을 남겼다. 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전쟁은 공격의 목표와 방법이 분명해지는 방법으로 변화했다. 이제 힌두교들은 그날 밤 어느 무슬림 집을 공격할지 정해놓고, 여성들을 집단 강간한다. 정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이러한 사건들을 은폐하고 있다.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은 근본주의를 득세하게 했고, 이러한 '근본주의'의 문제는 4차 세계사회포럼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아이렌 칸(Irene Khan)은 그녀를 통해 말하고자 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녀가 전한 증언은 끔찍한 것들이었고, 강간이 전쟁의 무기가 되고 있는 끔찍한 현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2003년 10월 콩고에서 아이렌 칸이 만난 여자는 교사였고 26살이었다. 콩고는 내전으로 현재 300만 명이 죽었다. 그녀는 남편과 잠자리를 갖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집단강간을 당했는데, 그녀의 10살 짜리 딸은 엄마가 에이즈에 걸렸을까봐 그녀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무서워서 남편과 잘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방글라데시 한 여성이 아이렌 칸을 찾아왔다. 그 여성은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고 호소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강간을 당했고, 아버지는 딸을 강간한 남자한테 강제로 결혼시켰다. 결혼한 집에서 남편의 친구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다. 그녀는 도망쳤지만, 다시 잡혀왔고,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녀는 결국 감옥에 가게 되었다. 경찰이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여성을 세상과 격리된 감옥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녀가 더욱 놀란 것은 감옥에 그런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건 죽음을 선택하는 일과 마찬가지라 했다. 아버지한테 가면, 집안 망신이라 맞아 죽을 것이고, 남편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증언들이 특수한 사례는 아니고 동남아시아 지역에선 더욱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는 인신매매에 관한 수많은 워크샵들이 조직되었다. 페미니스트 대화(Feminist Dialogues) 세계사회포럼이 열리기 전인 1월 14-15일에 뭄바이에서 국제여성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를 참가한 여성운동단체 네트워크의 이름이 '페미니스트 대화'이다. 자료를 보면, 이 회의는 남미여성운동연합체인 아르티쿨라시온 페미니스타 마르코수르(Articulacion Feminista Marcosur)란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우리가 이 단체를 알게 된 것은 이들과 '반근본주의 캠페인'이 조직한 「정치적 조직들과 급진 민주주의」란 워크샵에 토론자로 참가했기 때문이다. 남미여성운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사회진보연대 여성활동가들은 이 워크샵을 이들에 대한 교류의 계기로 삼았다. 좀더 조사를 해봐야하겠지만, 토론회의 제목을 근거 삼아, 이들이 여성운동 조류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이라고 단정짓긴 어려울 것 같다. 우선 우리가 참가했던 워크샵에서 이들의 발제를 살펴보면, 주요한 내용은 현재의 이성애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모델을 비판하면서, 성적 차이를 인정하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섹슈얼리티와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권리가 새로운 사회, 민주주의를 쟁취하는데 있어 통합적으로 사고해야 할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생각은 페미니스트 대화 소책자의 '정치적 조직들(Politica Bodies)'란 글에서 드러난다. 이 글에선 불평등과 차별이 재생산되는 사회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분석과 정치적 투쟁의 영역으로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를 고민한 페미니즘의 기여가 사회변혁에 대한 좀더 급진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을 이끌어냈다고 강조한다. 생산과 부의 축적, 억압과 성적 차별, 재생산 모델은 독점적인 사회적 삶의 영역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이러한 영역사이, 영역과 정치를 분리하는 것은 자본가와 가부장적 권력체계의 요구이다.), 오히려 그들은 특정한 사회구조의 구성 요소들이라 주장한다. '급진 민주주의는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 자체의 민주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서술하면서, 시민권의 재출발은 재생산과 성적 권리의 새로운 권리를 제기하고, 투쟁하는 것, 그를 위한 새로운 상징의 창조가 필요함을 밝히고 있다. '페미니스트 대화'(이하 FD)란 네트워크를 잠깐 소개해보자. 이것은 이들의 팜플렛의 선언문에 잘 나와 있다. 우선 이들은 세계사회포럼이 지금까지 성장하는데 함께 한 세계여성행진과는 다른 여성운동네트워크이다. 대부분 세계여성행진 참가 조직이 아니고, 그래서 세계여성행진도 이들을 주목하면서 다른 여성운동 네트워크와 연합을 재검토하고 세계여성행진의 계획을 함께 토론하기 위해 국제위원회의 활동가들이 이번 뭄바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세계사회포럼의 헌장에 동의하고, 매해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해왔다. 특히 선거, 정치정당, 정부기관이 아닌 혼합 조직의 여성과 페미니스트 시민 사회조직에게 민주적인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FD는 반근본주의 캠페인을 지원하는 라틴아메리카 그룹의 좀더 큰 네트워크와 국제네트워크가 주도한 2003년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개최된 여성전략회의(Women's Strategy Meeting, 이하 WSM)의 후속이다. 그리고 2003년 세계사회포럼의 마지막날의 WSM의 평가는 2004년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FD의 활동(initiative)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페미니스트 조직, 진보적인 그룹과 운동들의 네트워크 사이의 대화이다. 이 대화는 세계 여성운동이 직면한 도전과 이슈 , 좀더 큰 사회운동 그리고 인권(성적권리, 재생산의 권리, 사회적 평등, 인민의 발전, 환경 그리고 경제정의를 포함하는)을 위해 활동하는 다른 지지 그룹과의 연관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들 중 가장 활동적인 그룹은 Articulacion Feminista Marcosur, DAWN(international), FEMNET, inform(스리랑카), Isis International(필리핀), 경제정의를 위한 여성국제연합(WICEJ) 그리고 인도의 자율적 여성 그룹의 국내 네트워크(NNAWG)이다. FD는 상호 변하고 배우는 참여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하면서, 참가하는 개인과 그룹의 목소리가 그 자체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원리로 삼고 있다. 전문가들이나 소위 명망가를 통해 여성들의 입장이 대변되는 것에 비판적이다. 또한 이러한 방식이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하는 새로운 윤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 원리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짓자. <페미니스트 대화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정치적 이해와 원리의 구조 안에서 대화를 동의한다.> 1. 여성들은 균질적인 그룹이 아니라 복수성과 다층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다양한 억압을 경험한다. 그 억압은 가부장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안의 다양한 위치에서 유래한다. 우리는 다양한 페미니즘과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부르려 하지 않는 그룹도 포함한 다양한 페미니스트 관점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2. 우리는 인간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경제구조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제모델에 비판적이지 않는 "발전" 또는 "젠더 주류화"에 대한 우리의 도전을 계속할 것이다. 3. 우리는 "선제공격"인 침략 전쟁과 외국 권력에 의한 지배에 반대한다. 우리는 소위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에 반대한다. 4. 우리는 어떤 계급, 인종, 종족, 종교적, 문화적 또는 성적 정체성을 단정 짓고 시민권의 배제적인 규정을 만들고 국가 안팎에서 "적들"을 목표 삼아 연대를 헤치는 민족주의적 정치적 태도에 저항한다. 5. 우리는 또한 비국가 행위자들(non-state actors)이 저지르는 모든 형태의 폭력도 거부한다. 6. 가부장제는 공적 그리고 사적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영속시키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종교적 근본주의, 침략 전쟁의 힘에 의한 공격과 마찬가지로 가내폭력에서부터 공동체의 폭력은 여성운동에서 주요한 고민이다. 7. 우리는 여성의 인권을 채택한다. 그것은 시민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권리를 결합한다. 우리는 '권리는 폭넓은 국제적 확언을 필요하고 또한 각각의 공동체 안에서 얻어지고 개념화된다'고 인식하는 "보편주의"와 "상대주의"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거부한다. 8. 우리는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가부장적 권력에 의한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공격에 놀란다. 모든 종교에서 여성의 신체를 지배하고 규정하고 모독하고자 한 노력은 보수주의의 핵심이고 현재 전망을 조절하는 경제적 계획이다. 그리고 이는 통합적인 방법으로 도전되어야 한다. 9.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악화된, 여성의 권리와 비종교적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한 공격으로서 종교적 근본주의를 본다. 많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고 종종 인권 언어를 전유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여성의 인권과 경제적 정의를 위한 우리의 투쟁의 동맹자로 보지 않는다. 10. 우리는 섹슈얼리티 그리고 젠터/트렌스 젠터 정체성의 자기 정의를 믿는다. 11. 우리는 자기 조직과 운동에 대해 자기-비판적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권력, 실천, 관계, 전략 그리고 정치에 관한 논쟁을 주장한다. 세계여성행진의 2005년 행동계획 -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창조하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 4차에 이르는 세계사회포럼의 성장에 세계여성행진은 크게 기여해왔다. 또한 세계여성행진은 세계사회포럼이 페미니스트적 분석에 대한 자각을 일으키고, 여성이 원하는 사회변혁을 위한 새로운 동맹을 만들 기회를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사회포럼이 열어놓은 공간을 배타적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개인들과 세력이 있고, '페미니즘은 여성의 관심이고,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의 관심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투쟁을 위계 짓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평가한다. 세계여성행진은 세계사회포럼 기간 중 작은 워크샵을 통해 2005년 행동계획을 제안했다. 핵심은 세계여성헌장(The Women's Global Charter for Humanity)을 작성하는 것이다. 작성과정과 헌장의 전파과정이 운동이다. 논쟁과 공동의 전망을 조직하기 위해서 세계여성행진은 2005년 3월 8일(세계여성의 날)과 2005년 10월 17일(세계빈곤철폐의 날)을 기점으로 공동행동을 제안하고 있다. 그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세계여성헌장의 전세계 릴레이'다. 헌장은 2004년 2월에 초안이 배포되고 논의를 거쳐 2004년 12월 르완다(아프리카)에서 개최되는 세계여성행진의 다섯 번째 회의에서 확정된다. 이렇게 마련된 헌장이 어떻게 전세계 행동으로 전파될 것인가이다. 우선 이 헌장은 2005년 3월 8일 모든 참가국에서 대중 집회로 발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동시에 이 헌장과 세계지도를 그린 퀼트를 가지고 릴레이 행진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 릴레이는 브라질에서 시작되어, 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중동, 유럽 그리고 2005년 10월 17일에 아프리카에서 끝나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다. 두 번째는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24시간 동안의 국제여성연대 행동'이다. 릴레이 행진이 끝나는 10월 17일 각 국 시간 정오에 집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세아니아를 시작으로 24시간 내내 집회가 진행되는 계획이다. 세계여성행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가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증가'이고 이에 대해 전세계 운동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것이 여성들의 행진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운동들의 행진이 되기 위해서는 헌장 작성의 정신을 각국의 운동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은 요구의 목록보다는 세계원리선언을 창조하고자 하며, 이것이 세계사회변혁을 위한 힘으로 운동의 필수적인 본질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세계여성의 날은 여성들이 조직하는 다양하고 분리된 '행사'들에 머물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여성운동들과 다른 운동들의 교통과 논쟁과 공동행동의 계획들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투쟁 4차 세계사회포럼에서도 분명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목소리들이 넘쳐났다. 또한 세계사회포럼은 참가하는 단체들이 생각하는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특정한 전망에 따라 평가되고 있다. 세계사회포럼은 그 성장만큼 그 자체로 논쟁의 화두가 되고 있다. 언어의 장벽, 계급, 인종, 성적 차이, 문화적 차이들은 현실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구조이면서 다양한 운동들이 교통하기 위해서, 공간으로서 세계사회포럼이 해결해가야 할 숙제이다. 인도 뭄바이의 네츠코 센터 역시도 지금의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는 현실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이번 세계사회포럼 내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로 드러난 바 있다. 살펴본 페미니스트 대화와 세계여성행진은 모두 세계사회포럼의 헌장에 동의하면서, 그 헌장의 의미를 자신의 운동에서 실현, 확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중요하다. 세계사회포럼의 전망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세계사회포럼이 지금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진정한 운동의 성장은 자기 혁신을 통해 각각의 운동이 보편성을 띠고, 그것이 만날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PSSP
1. 이라크 임시헌법 합의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Iraqi Governing Council)는 미국의 주권이양이 이루어질 6월 30일 이후 임시정부의 법적 통치기반이 될 임시헌법 초안에 합의했다고 3월 1일 발표했다. 임시헌법은 60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표현?언론?집회?종교의 자유 △군부에 대한 민간통제 △이라크 국민의 권리 보호 △임시의회 의석의 25% 여성할당 △이슬람법(샤리아)의 지위 △연방주의 △2005년 1월 31일 이전 선거실시 등이다. 이슬람법의 역할은 제한되었다. 국교로 되었지만 동시에 종교의 자유도 인정되었고, 입법의 ‘유일한’ 근간이 아니라 다른 것 가운데 ‘하나의’ 근간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관리들은 즉각적으로 이라크 점령행정처의 브레머 최고행정관이 이 이라크 임시헌법을 승인할 것이고 이는 새로운 이라크 정부의 기본틀이 될 것이라고 환영했다. 파웰 국무장관조차 TV에 출연하여 “데드라인에서 하루가 늦었을 뿐 굉장한 성과”라고 말했다. 과도통치위에 참여하고 있는 이라크독립민주운동(IIDM)의 지도자 아드난 파차치도 “이라크 역사에서 잊지 못할 위대한 날”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점은 남는다. 과도통치위는 민병대 무장해제, 임시정부의 구성, 선거 체계 등과 같은 첨예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이후 구성될 임시정부로 넘겼다. 쿠르드 족과 관련해서는 북부 쿠르드 지역에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사법부와 입법부를 둘 수 있게 하는 등 자치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이 정해지고 후세인 정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면서 광범위한 자치를 누려온 쿠르드족은 석유 수익에 대해 일정 비율의 고정된 배분을 할 것과 쿠르드족이 다수인 북부 지역에서 영토를 확장할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해 왔기 때문에 향후 갈등의 소지가 크다. 또한 임시헌법은 이라크 내에 대규모로 존재하고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민병대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쿠르드 민병대인 페시 메르가(pesh merga), 시아파 민병대인 바드르 브리게이드(Badr Brigade), 메히드 아미(Mehidi Army)등 민병대의 규모는 크다. 이들을 그냥 놓아두면 서로 분쟁을 일으키거나 정부에 저항할 수 있다고 미국은 보고 있다. 그러나 쿠르드족이나 시아파는 이 충성스러운 무장병력을 해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임시헌법은 2005년 1월 31일 이전에 선거를 실시하도록 했는데 그렇게 되면 275명의 의원이 생기고 그들이 대통령과 두명의 부통령을 뽑게 된다. 다시 이 세명이 총리를 뽑는다. 하지만 선거 이전까지는 7월 1일부터 미국이 주권이양을 하기 위해 만들게 될 임시정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통치하게 된다 총선 실시 이전 임시정부 구성에 대한 미국의 계획은 전국 18개 주에서 지역위원회를 꾸리고 이 위원회가 각주를 대표하는 선거인단을 임명하여 이들이 다시 임시의회 의원을 임명하고 이 의원들이 임시정부 수반과 각료를 임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2004년 7월 1일에 주권을 임시정부에 이양하겠다는 것이다. 이 임시정부는 총선이 실시될 때까지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 이라크를 통치하게 된다. 이에 대해 나오미 클라인은 1월 22일자 캐나다 <글로브 앤 메일>에 기고한 글에서 ‘임명된 자들에 의한 지배(Appointocracy)'라고 비판했다. 즉 미국 대법원에 의해 임명된 부시가 임명한 브레머 최고행정관이 임명에 임명을 거듭하여 임명된 임시정부에 주권을 이양하면 미국은 ’임명된 자들에 의한 지배‘라는 영광스럽고 새로운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비꼰 것이다. 한편, 협상과정에서 이슬람법의 영향력, 쿠르드 자치구의 권한, 여성의 지위 문제 등을 높고 이견을 조정하지 못한 바 있고 시아파 위원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는데, 임시헌법을 발표할 때에도 쿠르드 대표와 시아파내 두 세력의 대표가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내재된 갈등은 확인되었다. 더욱이 임시헌법이 합의된 바로 다음 날 시아파 종교기념일인 아슈라(애도의 날)에 바그다드와 카르발라에서 동시에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은 임시헌법을 부정하고 종족갈등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음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시한을 하루밖에 넘기지 않았지만 미국이 중심적으로 작업하고 조정하여 타협된 임시헌법은 갈등의 봉합이라고 보여지며 그 결과 미국이 주도하는 주권이양과 임시정부 구성으로 이어지는 향후 정치일정에서 갈등은 더욱 다양하고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2. 이라크내 종족 갈등의 양상 7월 1일자로 주권이양 시점이 다가오고 임시정부 구성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하는 종족간의 이해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1월 19일 바그다드에서는 아야톨라 알리 알 시스타니를 최고지도자로 두고 있는 시아파가 직접선거를 촉구하여 “선거 찬성(Yes, yes to election), 임명반대(No, no to selection)"라고 외치며 10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인구의 60%인 약 1500만명을 차지하고 있다는 지금까지 언론 등에서는 일반적으로 2천5백만 이라크 인구 가운데 시아파가 60%정도, 수니파가 35% 정도여서 소수파인 수니파가 후세인 치하에서 권력을 행사했다고 보도해 왔는데, 최근에는 이라크의 한 잡지가 3차례 통계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라크 인구구성이 수니파가 53%, 시아파가 40-45%, 비이슬람이 2% 정도라는 보도를 한 바 있다. 시아파로서는 직접선거는 곧 집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중들은 경제적 권리와 투표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전운동가이자 뉴레프트리뷰 편집위원인 타리크 알리에 따르면 두명의 주요 지도자인 알리 알 시스타니와 모크타다 알 사드르가 대중의 지지를 받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알 사드르는 점령과 연방주의 양자가 이라크를 발칸화하고 서구에 석유통제권을 내주는 첫걸음이라고 보아 이에 대해 적대적이고 알 시스타니는 협조적인데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점령군과 대화하는 것보다는 UN과 대화하려 한다고 한다. 알 시스타니가 직접선거를 주장하고 있다. 둘 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실시를 요구했다. 키르쿠크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투르크멘족은 지난 2월 25일 바그다드에서 수천명이 정치 경제적 권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투르크멘족의 권리를 무시하는 헌법반대”를 외치며 스스로가 2500만 인구 가운데 약 13%인 300만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27일에는 바그다드 미군사령부 앞에서 쇠사슬로 몸을 묶고 미군 차량의 통행을 막으며 단식투쟁을 하였고 28일에는 키르쿠크에서 ‘전국투르크멘운동’이 자신들이 운영하는 상점과 음식점 문을 파업을 벌여 이를 지원했다. 쿠르드족 역시 이날 북부 쿠르드족 지역의 주민투표 실시를 촉구하는 170만명의 탄원서를 미 행정처와 과도통치위에 제출하였다. 이들 ‘이라크 쿠르디스탄 주민투표를 위한 운동’은 이라크 북부 지역에 사는 모든 종파의 16살 이상 주민들을 상대로 쿠르드족 지역을 연방제 국가의 일부로 하느냐, 독립하게 하느냐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자고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쿠르드민주당(KDP)'과 쿠르드애국동맹(PUK)이 석유통제권과 민병대 지휘권 유지를 전제로 연방제를 받아들이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라크 내 종족갈등은 한국군 파병예정지인 북부 유전지대 키르쿠크 지역에서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세계 원유매장량의 6.7%가 몰려 있다는 이곳에서는 서로가 다수라고 주장하는 아랍계, 투르크멘족, 쿠르드족의 갈등이 노골화되고 있다. 1월 26일에는 키르쿠크시 서남쪽 외곽에 자리잡은 미군 캠프에 3차례의 중화기 공격이 가해졌고 25일에도 미군 캠프에 4발의 카튜샤 로켓 공격이 가해졌다. 29일에는 경찰차가 공격받아 경찰관이 사망했고 30일에는 검문소가 로켓추진 수류탄 공격을 받아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월 1일에는 쿠르드족 관할 지역인 북부 도시 아르빌에서 쿠르드계 정당 당사를 겨냥한 2건의 동시 자폭 테러로 109명이 숨지기도 했다. 23일에는 차량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해서 10명이 숨지고 45명이 다쳤다. 28일에는 시아파 2000여명이 키르쿠크 시가지에서 “키르쿠크는 어느 민족의 것이 아니라 주민 모두의 것”이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29일에는 쿠르드족이 이라크투르크멘전선(ITF) 사무실에 난입하여 집기를 부쉈다. 폭력사태가 확산되고 충돌이 커지자 경찰은 29일부터 저녁 6시 이후의 야간통행을 금지했다. 이러한 종족갈등은 미군 점령 이후 격렬해졌다. 미군 점령은 후세인 이후의 정치체제를 이라크인들이 자주적으로 구성하지 못하게 했다. 이라크 민중들에 의한 정치체제 형성은 거세되고 미 점령당국이 종족과 분파를 안배하여 인위적으로 과도통치위원회를 구성 과도통치위는 시아파 13명, 수니파 5명, 쿠르드족 5명, 투르크멘 1명, 아시리아 1명 등 25명으로 구성되었고 과도내각도 이와 동일한 인원 비율로 이루어졌다. 함으로써 갈등은 상존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구도를 적절히 활용하여 점령을 관리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점령 자체로부터 초래된 것이며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미국은 갈등만 키워온 것이고 지금에 와서는 “이라크는 내전(內戰)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각 언론들이나 정부관계자들이 말하게 된 것이다. 3. 이라크 석유자원에 관한 점령군의 계획 작년 5월 22일 UN안보리의 ‘대 이라크 UN제재 해제결의안’에 따라 미 점령당국은 거의 모든 석유수입이 위탁되는 ‘이라크 개발기금’의 통제권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이 이라크 재건 기금 사용의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이 이라크 재건사업을 독점하고 석유자원을 착취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작년 6월에 석유생산이 재개된 이래 이라크는 현재 하루 2백 30만배럴을 생산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후 전쟁 이전 수준(2백 5십만배럴)을 회복하여 올해 말까지 3백만배럴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한편 미국은 애초에 이라크 국유기업 사유화 계획에 따라 석유산업도 사유화하고자 하였다. 이라크 산업을 100퍼센트 외국에 개방한다는 브레머 훈령 39조는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미국이 임명한 과도통치위원회조차 석유 사유화에 반대하고 있고, 자칫하면 국민적으로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계획을 수정하여 이라크 석유산업의 점진적인 사유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 경제에 대한 미국의 기본계획은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에 따른 전면적 사유화와 개방된 시장경제이다. 이미 백텔, MCI, 핼리버튼 등은 이라크의 수도, 전화, 유전에 진출해 있고 더 많은 기업들의 이라크 시장진출이 이뤄질 것이다. 이라크의 사유화와 시장경제 유도를 통해 미국은 주변 중동국들도 그러한 방향으로 이끌어내고 궁극적로 중동 자유무역지대를 건설하고자 한다. 작년 6월 요르단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회의에서 미국은 중동지역의 평화확보와 자원개발을 목적으로 2013년까지 미-중동자유무역지대(MEFTA)를 구축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로드맵'을 밝힌바 있다. 일례로 점령행정처의 석유 고문인 로버트 맥키는 “이라크가 하루아침에 사유화로 나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라크는 국가통제로부터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사유화로 나아가야 한다. 이때 팔게될 것은 정제와 수송 같은 부분이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전문 경영진을 국유 석유회사에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즉, 미국으로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석유자원의 착취가 중요하므로 이를 위해서 관리 통제 가능한 국유기업을 장악하는 것이 그 이해를 관철시키는 방향인 것인다. 덧붙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공급이 불안정해지는 상황에서 미국은 이를 대체할 안정적 공급처로 이라크를 선택한 것이다. 이라크 석유산업을 재건하고 더 개발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는 과도통치위원회 미국의 후원아래 국제은행들로부터 14억달러를 빌리는 계획으로 드러나고 있다.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금이 담보가 될 이 대출은 이라크 전후 최초의 국가채무이다. 물론 그 국제은행들은 미국 주도의 컨소시움이다. 2월에 과도통치위의 재정위원회는 미국 정부기관인 해외민간투자공사(OPIC), 씨티그룹, BNP 파리바, 크레딧스위스 등으로 이루어진 컨소시엄과 대출에 대해 협상했고 전직 금융가인 아흐메드 찰라비(이라크국민회의)가 이끄는 재정위원회는 과도통치위에 대출계획 승인을 제출했다. 미국은 석유산업을 착취해서 이득을 취하고 석유산업 재건을 위해 막대한 금액을 대출해줌으로써 금융이익을 얻는 순환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이라크의 부채는 대략 4000억 달러로 알려지고 있다. 1200억 달러를 상업은행과 정부들에 빚지고 있으며, UN의 ‘배상 위원회’(Compensation Commission) 밑에 놓인 2000억 달러의 ‘배상’ 요구가 있으며, 이란-이라크 전쟁에 관련된 1000억 달러의 배상 요구가 있다. 이 부채에 대해 이라크는 2004년까지 지불유예를 인정받은 상태이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이라크 전후 재건 과정에서 막대한 부채는 걸림돌이기 때문에 작년부터 채무국들에 대해 부채탕감을 요구해왔다. 그 결과 지난 2월 28일 국제 이라크공여국 회의에서 채무국들은 1200달러 가운데 약 60%인 720억달러를 탕감하기로 했다. 4. 이라크의 미래는? 요컨대 이라크 상황은 다음과 같다. 임시헌법은 합의되었지만 불완전하고 주권이양 계획은 비민주적이다. 미군 점령이 야기한 종족과 분파 사이의 무력 갈등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경제는 재건되지 않고 있고 실업률 50%를 상회할 만큼 기록적이다. 초국적기업은 각종 기간산업 사유화를 추진하고 있다. 석유산업과 그 수익은 미국의 통제와 관리 아래에 있다. 그러나 많은 대중들은 민주주의와 보다 나은 삶을 요구하고 있다. 이라크는 앞으로 점령과 제국주의 경제착취가 종족적 갈등, 대중의 불만과 혼합하여 내전 상황으로 갈 수도 있고, 대중의 요구가 성장하고 점령통치를 감당하지 못하는 미국이 이를 포기하여 새로운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테러와의 전쟁 시작 이후 미국이 침략한 아프간은 3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고통 끝에 지난 1월에 부족간의 합의로 새 헌법을 만들고 국가건설의 이정표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전투는 계속되고 탈레반은 세력을 넓히고 있으며 수도 부근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은 군벌들이 치안을 담당할 만큼 치안이 불안하다. 재건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위기는 계속되고 있어서 ‘실패한 국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라크가 가야 하는 길은 아프간처럼 혼돈이 지속되어 끝없는 고통속으로 빠지는 길도 아니고 정치와 경제가 미국에 의해 통제되는 친미정권의 길도 아니라는 것이다. PSSP
초국적 감시망의 설계 : ECHELON 그리고 US-VISIT 조지 오웰이 묘사했던 전체주의 사회-오세아니아-는 기계의 전지전능함만이 신뢰의 척도로 인정받는다. 그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기초한 공동체는 거부된다. 오직 Big Brother로 상징되는 전체만이 지고의 선이 되며 개인은 실종된다. 모든 기록의 날조와 재구성을 통해 인간의 사상은 통제되고 기억까지 재구성된다. 이러한 전체주의국가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조장하는 동력은 바로 정보의 독점이다. 전체 구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남김없이 감시하고 관리함으로써 윈스턴 스미스는 Big Brother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감시와 통제는 조지 오웰의 상상력을 가뿐하게 초월한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은 기껏해야 오세아니아의 국경선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21세기의 Big Brother 미국은 국경이라는 인위적 경계선을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60억 인류의 두개골 안쪽까지 점검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전 지구를 아우르는 초국가적 감시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우주공간을 돌고 있는 인공위성과 세계 각처에 설치된 에셜론(ECHELON) 감시시스템은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터넷 통신의 90%를 도청하며, 전화와 팩스 등 각종 통신수단의 대부분을 감시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1999년 영국 BBC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기 훨씬 이전부터 가동되고 있었으며, 누구를 대상으로 어느 정도의 정보를 수집해왔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통신정보절도행위에 더하여 이제 전 세계 인류의 개별적 신원정보를 수집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소위 US-VISIT라는 조치는 미국을 출입하는 모든 외국인의 생체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미국은 US-VISIT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출입국자에 대한 신원정보만을 수집하고 있지만 장기적 정책으로는 2005년부터 시행하려는 세계적 차원의 생체여권사용을 통해 미국에 출입하지 않는 외국인들의 신원정보까지도 광범위하게 수집하려 하고 있다. 이미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에 대해 올해 8월부터 한국인이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 발급받는 비자에 생체정보를 넣겠다고 하였으며, 현재 US-VISIT에 의해 생체정보수집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는 비자면제국의 국민에 대해서도 2005년까지 생체여권을 발급받지 않으면 출입국과정에서 생체정보를 수집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US-VISIT의 목적은 테러의 방지와 자국국민의 안전보장이다. US-VISIT를 통해 수집된 외국인의 생체정보는 테러범 및 국제범죄조직의 조직원을 색출하는데 사용되며,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외국인들의 상황을 임의로 확인하는데 이용된다고 한다. 또한 생체여권의 경우 기술표준의 확정을 통해 생체여권에 기재된 모든 개인정보는 데이터베이스의 공유를 통해 언제든지 확인될 수 있다. ECHELON으로 통신망을 장악한 미국은 감시의 범위를 아예 개인에게까지 확장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감시망을 구축하는데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원죄, 감시를 통한 원죄의 치유? 정보의 일방향적 독점이 권력관계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종속적 위계질서를 형성한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는 물론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정보의 독점을 통한 종속관계의 형성은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하다. 이러한 지배질서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조차 예외가 아니다. 60억 세계 인류의 개인정보가 미국정부로 집중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US-VISIT의 구축은 국가 간 종속관계의 정점에 미국을 올려놓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미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 그리고 미국 아닌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류는 자의와는 전혀 별개로 미국에 의해 구축되는 구조 안에 존재해야만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US-VISIT의 진의가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미국이 진정으로 테러를 방지하고 자국국민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자 생각했다면 먼저 왜 전 세계가 미국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부터 검토했어야 한다. 건국과정에서 저지른 원주민 학살의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미국이라는 국가가 건설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행해 온 제국주의적 만행에 대해서 스스로의 반성이 있어야 했다. 남미에서, 아시아에서,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미국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더러운 전쟁’을 저질렀으며, 테러와 폭동을 사주하고 군부독재를 옹호하고 쿠데타를 지원했다. 무력 동원으로 외국의 정권을 전복한 일도 예사로 저질렀다. 자국 자본의 이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무고한 어린이들 머리 위로 폭탄을 퍼부었으며, 중동장악의 교두보인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으로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삶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세계적인 반미적대감은 바로 미국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만행에 대해 인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축적된 분노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었고, 물리적 저항이 세계 각처에서 빈발하게 되었다. 이것을 미국은 테러라고 규정하였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전 세계를 감시하는 감시망 구축을 설계한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근본적인 문제해결의 대응책이 아니다. 폭력에 의해 발생한 대응폭력을 감시로 억제하겠다는 발상은 논리적으로도 성립 불가능하다. 감시로 억누를 수 있는 범주의 분노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정부가 이를 간과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감시로 테러를 방지할 수 있다는 단순한 발상을 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내부에서조차 US-VISIT가 테러를 방지하고 자국민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정부의 발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테러가 발생하는 양상에 의하면 US-VISIT가 설혹 예방에 일정정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할 수는 있으나 이미 발생한 테러에 대한 사후조치로는 거의 무용하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또한 감시망의 활성화를 위한 정보기관의 권력강화가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이 시스템이 결과적으로 자국국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미국이 그토록 자부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의 인권단체는 특히 이 조치가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 증대를 가져오고 그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테러방지와 관련한 부분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생체정보수집 자체는 외국인의 인권침해는 물론 자국민의 인권침해까지 유발하고 있다. 당장 브라질 정부가 브라질을 출입하는 미국인에 대해 똑같은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국민들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다. 무분별한 생체정보의 수집이 인권침해를 가져온다는 것은 미국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다. 미국 내에서 생체정보의 수집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으며, 연방이나 주정부 차원에서 미국시민에 대한 장기적이고 추상적인 목적의 일괄적인 생체정보수집은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생체정보가 인간의 신원을 파악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서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한 번 유출되어 부당한 용도로 사용될 경우 정보주체 본인에게는 치명적인 위해까지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을 비롯하여 국내에서 비등하는 비판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가 굳이 생체정보수집을 내용으로 하는 US-VISIT를 실시하는 목적은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바, “테러의 방지와 자국국민들의 안전보장”이라는 목적과는 전혀 별개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지배전략의 현실화 : 모든 인류의 복종을 위해 그들의 이해는 다른 것이 아니다. US-VISIT를 강제하는 미국정부의 근본적인 목적은 전 지구적 감시망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자국의 이해를 세계에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지구적 정착,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질서체계를 공고히 하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촘스키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미국이 이야기하는 ‘안보위협’은 바로 “미국 투자가들의 권리를 저해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더욱 적절하게 미국이 이야기하는 ‘실용주의’는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매년 세계인권백서를 발간하는 미국정부의 ‘인권’에 관한 기준은 철저하게 “실용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미국은 자국국민들의 “인권”을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보장하면서 “안보위협”을 제거하고자 US-VISIT를 시행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실용주의”에 따라 자국이 원하는 대로 세계를 지배하고자하는 목적으로 “미국 투자가들의 권리를 저해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사전에 제거하고자 하는 것을 뜻하고 US-VISIT의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이것인 것이다. 결국 “테러의 방지와 자국국민들의 안전보장”이라는 것은 미명에 불과하고, US-VISIT의 근본적인 목적은 미국의 세계지배, 미국식 자본의 세계경영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완성하고자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미국중심의 세계질서 구축을 위해 한편으로는 어린아이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트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류의 개인정보를 자신들의 관리체계 안에 포섭하겠다는 것이다. 9·11이 가져왔던 충격과 공포는 미국으로 하여금 소위 ‘악의 축’에 대한 징벌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악의 축’을 길러낸 ‘악의 제국’인 자신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자국민들의 고통을 이유로 본격적인 패권주의의 전개를 획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이다. 그 과정에서 세계 인류의 인권은 실종되고 군수산업과 석유재벌을 위시한 자국 자본의 이해가 ‘인권’의 이름으로 포장된 채 인류 개개인에게 강요되고 있다. US-VISIT는 그 시작일 뿐이며, 모든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인프라의 구축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전 세계에 강요하고 이를 통해 자본의 이해를 극대화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이처럼 개인의 인권조차도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생체여권의 발급과 US-VISIT를 단순한 통관절차의 강화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수집된 개인정보는 언제 각각의 개인들에게 탄환이 되어 돌아갈지 모른다. 지난 199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에서 자행되었던 반정부인사들에 대한 살인과 폭행의 배후에는 미국이 제공한 수 천 명의 명단과 신상정보가 있었다. 그들이 수집하는 생체정보가 후일 어느 광포한 정권에 제공되어 인도네시아의 악몽을 재현하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국은 얼마든지 그런 일을 재현할 수 있는 국가이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미국이 중심이 되어 세계적으로 구축하려는 개인생체정보수집체계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과 저항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PSSP
노무현 정권은 파병을 당장 철회하라 ! - 자이툰부대 창설과 키르쿠크지역 상황악화에 부쳐 이라크 파병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기도 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파병부대는 23일 창설식을 가졌고 4월 말 파병을 목표로 거침없이 준비되고 있다. 평화재건부대라는 자이툰 부대가 창설되었던 23일, 파병예정지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에서는 자살 차량폭탄 공격이 벌어져 5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사건은 결코 우연적이거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키르쿠크 지역의 현실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미 여러 차례 언론에서 보도되었듯이 키르쿠크 지역은 미군의 점령을 계기로 쿠르드족과 아랍족, 투르크멘 족 사이의 심각한 종족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악화된다면 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종족내전이라는 위험한 상황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파병되는 것은 화약을 안고 불길에 뛰어드는 격이다. 내전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키르쿠크 지역에서 철저한 학살점령군에 불과한 한국군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인가? 점령군 자체가 갈등의 요인이 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국방부가 내걸고 있는 파병부대의 '평화재건'은 공문구일 뿐만 아니라 상황을 더욱 극단적으로 악화시킬 뿐이다. 한국정부 스스로도 키르쿠크에서의 파병부대의 안전을 두려워하고 있다. 25일 국방부 관계자는 악화되는 키르쿠크 지역의 치안상황에서 장병들의 안전보장을 위해 국방비를 당초 측정액의 25%나 증액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당초 발표된 잠정액 2천 296억원에 574억원이 추가되어 약 3천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국방비가 파병비용에 소요되는 것이다. 국방부조차 그 안전보장을 예측할 수 없음을 시인한 것에 다름없는 상황에서 파병을 감행한다는 것은 결국 국민의 엄청난 혈세로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무책임한 행위에 불과하다. 노무현 정권은 기어이 무고한 국민의 생명을 침략전쟁과 한미학살동맹에 희생물로 바치려는 것이다. 파병은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 국민 대다수가 엄중히 경고하고 있듯이 파병을 철회하는 것만이 국민의 귀중한 생명을 책임지는 길이며 이라크의 진정한 평화재건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 2004. 2. 25
세계화의 재단아래 젊은 피를 바치는 노무현정권과 여야정치권은 역사와 민중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오늘 국회는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노무현 행정부가 제출한 파병동의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은 3600여명의 부대원 중 대부분이 전투병인데도 이라크 재건 지원부대라며 국민의 눈을 속였고, 여야 정치권은 여기에 박수를 치며 침략전쟁과 학살동맹에 맞장구를 쳤다. 이라크 민중들과 한국 젊은이들을 피흘리게할 그 죽음의 버튼을 그들은 앓던 이 빼듯이 눌러버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서 파병처리가 차일피일 미루어지자 지난 3일 국방위원장을 불러 파병문제로 국가의 신인도가 하락해서는 곤란하다며 신속한 파병 처리를 당부했다. 지난해 4월 파병을 결정하거나 동의안 처리를 요청할 때도 국가 신인도 운운하며 협박했다. 전경련을 비롯한 자본단체들은 동의안이 통과되자 마자 생사를 내걸어야 하는 젊은이들의 목숨은 뒷전이고, 오로지 해외자본 유치와 남한자본의 해외진출을 위한 국가의 신인도가 문제였다. 그토록 강조하는 국가의 신인도, 국익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우리 젊은이들의 숭고한 피를 저 허망한 전쟁에 내바쳐야 한단 말인가? IMF 외환위기 이래 당시 국가의 신인도 하락에 국가적 환란의 원인이 있다며, 지배계급은강력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집권 3년 만에 그들은 대한민국의 국가 신인도가 정상으로 되돌아왔다며 샴페인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 샴페인을 터트리는 자리에 민중들은 없었다. 1998년 이후 증권거래소에서만 외국으로 빠져나간 순이익금이 93조가 넘고 그 사이 노동자들의 반이상은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해고와 계약해지에 불안해하며 살아왔다. 둘이서 하던 일을 혼자하면서 노동강도는 비약적으로 늘었지만 이들이 받는 임금은 53만원이었다. ‘죽음으로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시대는 지났다’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까지 노동자들은 분신과 자결로 2003년 한해를 살아야 했다. 여기에 땅이 있어도 농사를 지을수 없는 농민은 아예 일터를 잃어버렸고, 자괴감에 빠져 농약을 들이켜야 했다. 여성들은 구조조정의 1순위였고, 가족을 지탱해야 하는 책임은 책임대로 일자리는 일자리대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도대체 국가 신인도를 올려 금융시장에 투기적 자본들이 몰릴 수 있도록 투자여건을 확보하는 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란 말인가? 초국적 자본가들을 살찌우고, 그 떡고물을 받아 파티를 열어 대한민국의 지배계급을 배불리려는 것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여기다가 우리 젊은이들의 숭고한 피를 갖다 바쳐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이제 한국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제 3위의 군대를 파견하는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었다. 이라크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미국과 영국에서는 이에 대한 정보조작이 커다란 문제가 되어 여론이 들끓고 있으며 이라크에서는 저항세력의 계속되는 공격으로 점령군이 늪에 빠지고 있는데 한국만 자발적으로 그 수렁으로 들어가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노무현 정권과 그들 지배자들이 말하는 평화와 번영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싸우며 국민을 환멸에 빠지게 하다가도 그들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라면 한미동맹이든 여야동맹이든 모든 동맹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미국과 그들 초국적자본 중심의 세계화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지배자들은 이에 종속되어 초국적 자본의 세계화에 앞장서고 군사력으로 이를 뒷받침하려는 전쟁동맹자다. 그들이 학살동맹의 역사에 새겨진 깊이 만큼, 남한 민중의 고혈을 짜내고 이라크 민중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서기 위해 진실로 등등하게 나선만큼 역사와 민중의 심판은 냉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전쟁으로써 민중의 생존과 생명을 유린하는 지배계급은 이제 민중의 철퇴를 맞는 것만 남아있을 뿐이다. 노무현정권과 지배자들은 기필코 그 죄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국회에서 파병안이 통과했지만 정의와 양심을 가진 모든 이들은 앞으로 파병반대 투쟁, 한국군 철수 투쟁, 미국의 이라크 점령반대 투쟁을 사력을 다해 전개해야 하고 그렇게 할 것이다. 우리도 반전 반세계화 투쟁을 굳건히 결합하면서 있는 힘껏 그 투쟁에 함께할 것이다.
4회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신 존경하는 세계평화애호가들과 인도와 세계 각 국에서 오신 언론인 여러분, 오늘 제가 ‘한반도의 군사주의, 전쟁과 평화의 주제’, 특히 북한 핵문제에 대하여 여러분들에게 제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저의 이 견해는 남한의 운동권의 전체적인 통일된 의견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반미자주, 반전․평화 운동에 앞장서서 투쟁해 온 한 사람으로서 남한의 투쟁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2002년 6월 13일 미군이 장갑차로 한국의 두 여중생을 치어 죽인 끔찍한 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당시 12살에 불과했던 심미선, 신효순 두 여중생은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다가 미군 장갑차에 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두 여중생을 무참하게 죽인 주한미군은 장갑차 운전병 마크 워커(Mark Walker)와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Fernando Nino) 병장으로 그들은 모두 미 2사단 소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두 여중생을 죽여 놓고서도 두 미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하여 한국 국민의 공분을 샀습니다. 이에 한국 국민들은 범국민대책위를 구성하고 살인미군 처벌, 한국 국민에 대한 부시 미 대통령의 직접․공개 사과, 살인미군의 한국 법정에서의 재판, 한미소파 개정 등 네 가지를 미국 정부에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와 같은 요구를 모두 거부하였습니다. 살인미군에 대한 재판권을 한국에 넘길 것을 바라는 한국인들의 요구를 무시한 미군 당국은 2002년 11월 18일부터 22일까지 미군 판사와 미군 검사, 미국 변호사, 미군 배심원으로 이뤄진 자신의 군사법정에서 두 미군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미 군사재판은 두 미군에게 무죄를 선고하기 위한 재판 놀음이었습니다. 장갑차 운전병은 관제병에게 차를 세우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는 증언이 받아들여져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반면 관제병 니노는 자신의 통신장비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증언이 받아들여져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이들은 무죄평결을 받은 후 신병 상의 안전 이유 등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나라로 전출되었습니다. 이러한 무죄평결은 한국의 주권 부재를 절감케 했고 남한에서 반미 감정을 폭발시켰습니다.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고 보는 한국인들은 이것이 모두 주권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군사훈련 중에 발생한 사건을 한국 법정에서 다를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는 불평등한 한․미 소파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한국 정부의 군사주권의 부재의 현실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을 밝혔는데 이는 또한 불평등한 한미 관계와 한국 측의 군사주권의 부재에 대한 한국 국민의 분노의 표현이자 우리 한국인들의 민족자주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정전 상태에서 50년이 넘는 생은 한미간의 관계가 불평하게, 북미 간의 적대적인 관계가 지속되게 했다고 믿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집권은 민족자주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이와 같은 염원이 뒷받침된 것입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등장한 뒤로도 종속적인 한미관계는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 정부에게 이라크 파병을 요구하였고 한국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이라크 추가 파병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정부는 한국정부로 하여금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한국 국민들의 민족자주와 평화투쟁을 탄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눈치를 살피는 한국 정부 당국은 두 여중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자주와 평화를 위한 촛불기념탑마저 철거하는 폭거를 자행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여러분들께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이라 불리는 한미동맹의 재조정에 관한 한미 당국간 회의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주한미군의 동북아시아에서 역할 확대, 한미연합전력증강, 주한미군 재배치, 용산 미군기지 이전 등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전적으로 미국이 대 북한 선제 공격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중국에 대한 군사적 패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남한 민중들은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미국의 한미군사동맹의 강화 기도를 저지하기 위해 줄기찬 투쟁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남한 민중들은 용산 미군기지 이전 비용 한국부담 반대, 주한미군 기지 평택 이전 반대, 주한미군 사격장 신설 반대, 한미연합훈련 반대, 한국 국방비 삭감 촉구, 전시작전권 즉각 환수,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 등의 요구를 내걸고 힘차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 남한 민중들은 민족자주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지향과 염원을 꺾어버리기 위한 미국의 비열한 책동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압력으로 한국군을 이라크로 보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최근 남한의 반미감정은 두 여중생의 죽음으로 더욱 불타올랐지만, 부시 행정부의 대 북한 전쟁위협으로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남한 민중은 같은 동족인 북한을 공동의 운명체로 여기고 있으며 특히 한반도의 지형상,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북한만이 아니라 남한도 함께 파멸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고 그래서 더욱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깡패국가로,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김정일 정권의 교체를 요구하는 등 북한을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선제공격 대상의 하나로 삼는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선 북한 핵포기 후 안전보장’을 떠들면서 북의 일방적 굴복을 강요하고 있고 경수로 건설을 중단함으로써 북한에게 압력을 가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미국은 겉으로는 6자 회담을 원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6자 회담을 북한에 대한 압박의 장으로 밖에 여기지 않고 있는 듯 합니다. 지금 북한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어렵게 하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부시입니다. 지난 해 5월 미국 공화당의 웰던 의원이 북한을 방문할 때 제시했던 안은 하나의 해결 방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웰던의 구상은 '북한의 핵포기'와 '미국의 불가침 약속'을 동시에, 단계적으로 진행하여 일괄타결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 같은 합리적 안마저 거부하였습니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전쟁위협을 가해서는 안 되며, 북한을 적으로 간주하는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무조건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또한 미국은 한국 정부에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강요 등의 내정간섭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한국인들의 주권을 존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부시 행정부의 손에 달린 것 같습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선제공격 정책을 포기하고 대북 적대정책을 철회해야 합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봉쇄를 해제하고 북한의 주권을 존중하여야 하며 두 나라들 사이에 외교관을 교류하여 합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국가적 주권을 인정하고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문서로 약속한다면, 북한 핵문제는 얼마든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며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를 준수하고 NPT의 복귀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은 미국에게도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같은 미국의 조치야말로 북미간의 현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러한 북미 관계의 정상화는 한국의 평화와 통일로 이어질 것이며 동아시아를 교류와 번영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국 언론인인 셀리그 헤리슨(Selig Harrison)은 대북 경제제재가 미국 대선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부시가 만일 재선되면 그 후인 2005년 4월에 전쟁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의 조지 부시가 대선에서 낙선되는 것이 미국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세계 평화에도 유익합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 해소는 오늘 한국 민중들의 가장 절박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것은 꼭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세계의 문제입니다. 세계의 평화 애호 민중들이 미국의 대한반도 전쟁책동을 중지시키고 부시가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나서도록 연대하고 함께 싸워나가도록 합시다. 또한 세계의 평화애호 민중들이 불의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해 더욱 강고한 투쟁을 벌이도록 합시다. 세계 평화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첫째는 전쟁은 문제해결의 수단으로서 포기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최전방 군부대 앞에 ‘내일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오늘 전쟁을 준비하라!’는 구호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전쟁의 불가피성이나 필요악을 정당화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불가피한 것도 필요악도 아닙니다. 오늘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문제는 사실은 인류의 사멸이냐 생존이냐를 가르는 문제입니다. 오늘의 전쟁은 재래식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핵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피하는 길이 곧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둘째로 전쟁 비용이 평화비용보다 더 싸다는 군사주의적 사고를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평화가 전쟁에 비해 더 비용이 많이 든다는 말은 전쟁주의자나 군사주의자의 사고입니다. 평화보다 전쟁을 선호하는 것은 무기를 팔아서 자기의 배를 채우고, 다른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자기 나라의 국익을 도모하려는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사고입니다. 군수산업이 미국의 정치․경제․외교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군사주의 노선은 하이태크놀로지와 거대한 자본을 갖고서 무기생산으로 돈벌이를 하는 미국의 군수산업 구조에 그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신의 군사주의노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국제관계에서 힘의 균형, 공포의 균형만이 평화를 보장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부시 정권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압도적인 군사력 우위 구축과 선제공격을 공식적인 국가안보전략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 평화의 위기는 바로 이와 같은 부시정권의 일방적이고 패권적인 군사주의 노선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에는 패권적 군사주의 논리가 팽배합니다. 지금 미국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지구화’를 또한 제창하고 실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세계의 평화애호 민중들은 이러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논리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세계에 넘치는 무기장난감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군사주의적 사고에 물들게 합니다. 따라서 총․칼․탱크와 같은 무기장난감을 점차 줄이고 없애나가야 하며 대신 평화적 정서를 갖게 하는 장난감을 더 많이 보급함으로써 어려서부터 평화의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인간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극단적인 인간 경시 풍조를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전쟁은 병사란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고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온 천하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유대 격언에는 ‘어떤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먼저 그를 지으신 조물주를 저주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노래 가운데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사람은 ‘목적적인 존재’이지 결코 ‘수단’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한 발 자욱 더 발전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동학’(東學)에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있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이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아주 중요시해야 하겠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박애, 평등, 자유’ 이 세 가지를 내세웠고, 성서는 ‘사랑, 믿음, 희망’은 영원히 있을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사랑이다’ 고 말합니다. 나는 ‘생명, 선, 평화’,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것인데 그 중 제일은 생명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사랑보다 생명, 희망보다 평화, 믿음보다 선이 더욱 절실하다고 감히 말하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힘없는 나라나 개인이라도 ‘자주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평화를 실현하는 길입니다. ‘꿇어 엎드려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서서 자유인으로 죽겠다’고 한 말은 주후 70년의 유대․로마 전쟁에서 죽음으로 마감한 한 유대인 사제의 설교입니다. 그렇지만 이 같은 말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철학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 나의 연설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은 이라크 민중들의 자주성을 짓밟고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라크에 대한 한국군의 파병 또한 이라크 민중들의 자주권을 짓밟는데 동참하는 것이므로 한국 민중들은 그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해 둡니다. 북한 핵문제를 빌미로 한 미국의 대 북한 전쟁위협, 나아가 우리 민족전체의 자주권에 대한 엄중한 침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에 맞서 단호히 투쟁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 민중들은 주권국가의 자주성을 힘으로 제압하려는 미국의 군사주의에 맞서 한반도 평화와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세계평화애호 민중들과 힘을 합칠 것입니다. 불의한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결코 안 됩니다. 군사주의, 반테러리스트 전쟁, ‘신자유주의 지구화’ 등의 제국주의적 사상 없이 평화는 쟁취될 수 있습니다. 이라크나 세계 다른 어떤 나라에 대한 전쟁 없이 ‘다른 세계는 가능합니다.’ 부시와 제국주의 없는 ‘다른 세상은 가능합니다.’ 고맙습니다.PSSP
새로운 운동,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 2003년 주목해야 할 운동이 무엇이냐 물으면 누구라도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을 손꼽을 것이다. 2003년 한 해 가장 떠들썩했던 뉴스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고 이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이 손꼽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멀리 베트남 전까지 갈 필요도 없이 1990년 이라크 전쟁에서 다국적군은 물론, 동티모르 사태의 UN평화유지군까지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이렇게 오랜 시간 전개된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병반대운동이 대중들에게 그리 익숙한 쟁점이 아닌데도, 이 새로운 반전평화운동이 전개되었던 데는 다음과 같이 적어도 두 가지 이유만큼은 들 수 있을 것이다. 9․11 테러 보복전쟁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빌미로 이라크를 침공하는 등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가 드러나면서 대중들이 강하게 반발했다는 사실을 첫 번째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고, 둘째로는 효순이․미선이 살인사건 이후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개선하자는 대중적 요구가 강하게 일던 중에 미국의 부당한 파병요구가 제기되자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운동을 각각 이끌었던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실천’과 ‘미군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 두 공동 투쟁체가 합동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2003년 상반기 파병반대운동을 주도했다. 한편, ‘7․27 정전 50년, 한반도 평화를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으로’와 ‘반전평화 8․15 통일대행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주한미군의 장기 주둔에 따른 피해를 고발하는 운동과 미국의 북한 고립 책동을 반대하며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운동들 역시 앞서의 여중생 범대위 사례처럼 반전평화운동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는 미국의 냉전 전략의 상흔이 깊숙이 남은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역으로 전통적인 반미운동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데 한반도에서만 평화로우면 되는가라는 (조금은 조잡한) 일차원적인 질문은 논외로 하더라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만이 반전평화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이 운동은 충분히 답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설명하겠지만 파병반대운동을 조금만 다른 시각에서 보아도 오늘날 반전평화운동의 성격은 사뭇 다른 양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기도 하다. 그렇다고 파병반대 반전운동이 내적으로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자주’ 혹은 ‘반전평화’라는 묘한 대립과 함께 ‘한반도 위기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할 것인가’ 아니면 ‘이라크 점령 중단 투쟁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격한 논란 또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4월 2일 국회의 이라크 파병 결정, 4월 9일 미국의 이라크 종전 선언이후 파병반대운동이 새로운 전망을 찾아야 하는 시점에서 제기된 이 논란은 ‘한반도 위기를 문제삼지 못하는 파병반대운동의 공허함’과 ‘이라크 전쟁 반대에 대한 민족주의 운동의 소극성’을 비난하는 양상으로까지 나아갔다.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지나친 피해의식과 새 운동세력의 출현을 못마땅해 하는 감정들의 충돌에 가까웠던 이 논란은 결국 각자 제기했던 ‘자주평화연대’와 ‘반전평화공동실천’ 구상이 좌초되면서 마무리되었다. 결과는 다소 허탈한 것이었으나 역으로 이는 반전운동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향후 반전운동 전망을 둘러싼 논란이 각자가 제기하는 연대조직의 구상차이로 드러났다는 것은 반전평화운동이 새로운 주체형성과정을 위한 실천으로서 유력한 매개고리가 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물론 뒤에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주의 반전평화운동의 기반이 약한 남한에서 파병문제가 왜 첨예한 쟁점이 되는지를 이해하려면 (북핵을 매개로 전개되는) 한반도 위기를 인식하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은 국익/실리를 이야기하면서 파병을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연계시켜야한다고 주장(한반도 전쟁 발발 시 이를 국제적으로 호소할 경우에 대비해서라도 파병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 포함)한다. 그리고 냉전적 사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주한미군의 역할 감소를 막기 위해서는 파병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공산 괴뢰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준 데 대한 보은의 논리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날조된 거짓말이거나 대중운동과 무관한 쟁점이다. 잘 아는 것처럼 미국이 전쟁을 벌일 때마다 한국에게 번번이 전후복구지원과 파병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강력한 한․미(․일) 군사동맹을 믿고서다. 하지만, 한미군사동맹의 근간이 되는 정전협정, 상호방위조약 그리고 합의의사록에서조차 군사동맹의 범위는 한반도에서 군사적인 위험이 초래될 때로 한정되어 있다. 역의 경우까지 그러니까 한반도․동북아시아를 넘어서는 미국의 군사적 대치상태까지를 포괄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한국전 혈맹을 근거로 한미동맹을 확대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지배세력이 국내정치의 역관계를 유지 관리하려는 차원이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행동에서 한․미 동맹이 언급되는 것은 한․미(․일) 동맹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다. 이 역사적 특수성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냉전구도 아래 진행된 일본․한국의 전후복구 및 고도성장과 정치․외교적 관계에 바탕을 둔다. 미국의 냉전 구상은 일제의 식민지 경험을 겪었던 나라들(특히 한국, 대만)과 일본의 불편한 관계를 완충시켜 왔고, 그 아래 일본을 정점으로 동아시아 각 국이 묶이는 수직적 경제질서가 형성되었다. 이 우산아래에서 남한이 성장한 것이다. 이때 남한은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자본주의적 발전 전망의 쇼케이스를 의미하는 것이고, 더불어 동북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잡아 미국에 순종하는 절대적인 협력국가(식민지 종속국가)로서 미국의 정치․군사적 이해를 보존하는 의미를 갖는다.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한․미․일 3국 동맹은 굳건했고 오히려 공동의 전망을 더 가속하였다. 미국은 이와 같은 특수성에 기반해서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을 구상하였다. 미국은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을 기화 삼아 동아시아에서 더더욱 (미국식) 번영을 구가하여 미국의 경제적 이해를 강화하는 한편, 강력한 한․미․일 군사(정치)동맹을 전제로 동아시아에서 정치․군사적 안정을 꾀하여 자신의 이해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이상이 냉전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에 있어서 기본 개요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전쟁 억지력 구상은 더욱 호전적이 되었다. 불특정대상에게 예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대칭적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향으로 군사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미국은 이를 가능하다고 보았다. 첫째, 군사기술의 혁신(첨단기술, 정보전)은 이것의 기술적 토대가 되는데 미국은 여기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고, 둘째, 이 목표에 대해 미-유럽은 물론 미-동아시아 역시 공동의 이해(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충분히 협력과 공조태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군사 전략의 재편방향의 기본 얼개는 다음처럼 그려진다. 정치․군사적 불안정성이 금융세계화 중심으로 전이되지 않도록 미국 군사안보의 경계를 확장한다는 목표 아래 첫째, 효율적인 군사적 응징이 가능하도록 작전부대를 경량화하고 기동력을 강화하는 한편, 둘째, 기존의 군사동맹(한․미․일)을 지역동맹으로 확장하고 정치․군사적 안정성을 유지하는데 군사동맹국(한․일)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 셋째, 군사적 위험을 제거하는데 있어서 동맹국의 역할(전비 지원, 파병)을 확대하는 것. 한반도의 주한미군재배치, 한미동맹의 현대화와 한국군 역할의 강화, 일본의 재무장은 ‘새로운 전쟁’을 수행하려는 미군의 신축성 확보 차원에서 전개되는 것이고,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할이 재차 강조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사실, 이 같은 구상은 그 자체로서는 완전할 수 없다. 소말리아의 실패,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의 장기화, 북한의 강한 반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군사 기술적인 우위 같은 것으로 미국이 원하는 목표를 간단히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 UN․유럽 동맹국들의 지원을 손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경계 밖에서 ‘폭력의 지속’, ‘항구적인 내전’, ‘폭력의 순환’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있고, 이를 관리하는 것이 초점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여기서 그치는 것도 아니다. 지역동맹을 확장하고, 한국․일본 등 동맹국의 군사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무기 이용의 주체를 늘림과 동시에 군비지출을 (경쟁적으로) 비가역적으로 늘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해당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높이게 된다는 사실이 문제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스라엘은 빈발하는 총성 한 가운데 있으며, 중동지역의 정치․군사적 통치를 위해 키워온 이라크가 느닷없이 쿠웨이트를 침략하여 군사적 모험을 감행하기도 하고,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가르쳐온 테러리스트들이 9․11 테러에서처럼 되려 미국 본토를 향해 총을 겨누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위험이 동반하는 것은 이스라엘, 이라크, 일본 등 하위-제국주의(sub-imperialism) 국가들을 동원하는 과정이 지배세력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동반하기 일쑤고,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자국의 무장을 합리화하고 주변을 긴장관계로 몰아넣어, 군사적인 경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과 남한의 자주국방론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이 동북아시아에서 북한․중국과 군사적 경쟁을 가속하고 위기상황에 빠뜨릴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에서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무기 이용 주체를 늘리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무기의 사유화(사유화된 무장)는 폭력 자체를 아예 제어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지게 한다(테러와 폭력의 악순환).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행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데, 미국이 이 때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과거 호황기 때처럼 막대한 생산성이 뒷받침하는 것도 아니요, 옛날 영국 제국주의처럼 식민지에게서 공물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전리품을 정부재정으로 직접 귀속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정부재정에서 전비지출 비율을 대폭 늘리는 방법밖에 없는데, 이는 사회복지예산의 대폭 삭감으로 귀결된다. 사실 이 같은 분배 정의의 왜곡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지역의 정치․군사적 안정을 떠맡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도 적용된다. 자주국방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군비지출을 대폭 늘리고, 사회복지 지출은 실질적으로 감소하려는 남한의 현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예비하겠다는 (사전에 제거하겠다는) 안보 논리가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두 가지 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냉전시대 안보란 소련이라는 ‘실제’하는 적을 경계하는 것이지만, 냉전 이후 안보란 언제 어디서 누가 강력한 적이 될지 알 수 없는 ‘가상’의 적에 대한 경계를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전과 같은 방식 즉, 냉전구도를 전제로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자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이에 기반해서 통치를 하는 방식의 부르주아 통치는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된다. ‘가상’의 적이란 적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가 아닌 남은 모두 적이라는 말이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모든 것은 언제 어떻게 폭력이 출현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이기도 하다. 적합한 인식을 할 수 없는 조건에서 지배세력은 반복되는 폭력의 원인을 호도하기 일쑤이고, 그리하여 이 반복되는 폭력을 ‘테러리즘’으로 뭉뚱그려서 정의한 것이다. 지배세력의 호언과 달리 이를 기술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적일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방향으로 수렴하게 된다. 정치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것이란 시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렇게 해서 지배세력 스스로 자신이 약속한 민주주의마저 배신하는 일이 현실로 드러난다. 이 현상은 미국은 물론 동맹국 - 미국의 식민지 종속국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평화헌법 아래 유사법제를 만드는 일본,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고 헌법마저 무시하면서까지 파병을 강행하는 한국, 테러방지법의 제정, 집시법의 개악들로 드러나는 일련의 과정 말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가상의 적이라는 말과 달리 ‘공포’는 실재한다는 점이다. 폭력의 무한한 반복과 실재하는 공포는 대중으로 하여금 사태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정치를 불가능하게 하고 대중들을 매우 수동적인 상태로 몰아 넣을 수 있다. 계속되는 테러리즘과 자신의 사회적 재생산의 기반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다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과정을 보고만 있거나 정치를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다(물론 역의 가능성도 있지만). 미국에서 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대중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 파괴과정에 침묵하는 대중, 정치에 무심한 대중의 문제를 분명히 다른 시각에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한다. 이 때 가장 관건인 문제는 이 모든 모순과 위기감을 인민들이 참고 견딜 수 있는가 이다. 미국의 군사적 패권, 군사적 긴장 고조, 재정분배의 불균형과 이에 따른 사회적 위기의 심화, 정치적 민주주의의 위협 들 앞에서 말이다. 사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2003년 반전평화운동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 평가해야 한다. 바로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적 패권전략 -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이라는 시각에서 말이다. 2003년 반전평화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Ⅰ -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의 난관 : 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 자, 이제 반전평화운동의 현실을 되돌아보자. 남한의 반전운동은 대단히 더디게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2003년 2․15 국제반전행동에서 전 세계적으로 1000만에 가까운 대중들이 이라크 침략위협에 맞서는 행동을 벌이는 사이 한국에서는 2000여명의 대중들이 집회를 벌였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개시되고 한국군 파병이 불거지면서 반전평화운동의 쟁점은 좀 더 구체적이 되었고, 이것은 3월 한달 내내 대중들 사이 주요 쟁점이었다. 3월 22일 서울에서만 7~8,000여 규모의 대중적인 집회가 진행되는 등 전쟁반대, 파병반대 운동의 물결은 상승세를 타는 듯 했다. 하지만,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이 제기되고 노무현 정권이 ‘국익’ 이라는 쟁점을 제기하면서 이 운동은 급격히 소강상태에 빠져들었다. 전쟁은 반대하지만 한국군 파병에는 국익이 중요할 수 있다는 모호한 선택이 지속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결정 이후 국회 앞에서 벌어진 투쟁은 이런 소강상태를 결정짓는 국면이었고, 파병결정이 최종으로 확정되면서 파병반대 운동은 한숨을 고르게 된다. 반전평화운동이 더디게 진행되었던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세 좋게 성장하던 반전평화운동이 왜 주춤거리게 되었을까? 일단, 전 세계적인 2․15 반전운평화운동은 우리와 달리 사회운동의 네트워크에서 상당히 체계적으로 준비되어 온 운동이라는 사실부터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것의 교훈으로 목적 의식적인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당시 남한의 반전운동은 (유럽처럼) 전체운동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나라 민중운동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던 데다가 그나마 반전평화라는 쟁점은 한국의 민중운동에게 낯선 쟁점이었다. ‘전쟁반대’는 신사회운동의 쟁점에 불과했거나 중심운동(노동운동, 통일운동)에 비해 부차적인 쟁점이었고, 기층 대중운동에게 이것은 사안별 연대의 대상으로서 부문운동의 지위에 머물렀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주의해야 할 문제는 더디게라도 시작했던 반전평화운동이 파고를 그리다 ‘한미동맹이 위험수준’이라는 지배세력의 협박 앞에서 주춤거렸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반전평화운동의 첫 번째 난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다.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이 한미동맹을 넘어서기란 그리 간단치 않다.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운운하며 대중을 위협하는 수구반동세력의 공세도 문제지만, 한․미 공조를 통해서만 경제가 성장할 수 있고 정치․군사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신화가 지난 50여 년 동안 형성되어 왔고 이는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성역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반공발전주의 이데올로기다. 1960~70년대 고도 성장이 노동자 민중의 처참한 희생으로 가능했음은 이제 누구에게나 알려졌지만, 이곳에 한․미 공조아래 발전이 가능하다 신화도 함께 자리한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IMF 경제위기는 대중의 이율배반적인 면을 더욱 강화했다. 한편으로는 불안정한 일자리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으로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없게되자 이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침체의 종식과 신화의 재현을 더더욱 갈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요가 부당한 파병압력에 대한 대중의 불쾌감과 동아시아 경제적 번영과 정치․군사적 안정이라는 미국의 구상에 대한 희망이 공존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온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을 가로막은 벽은 외재한다기보다는 대중 안에 내재했던 것이다. 상반기 파병반대운동이 미국의 군사패권전략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이라크 파병을 저지하는 데만 초점을 두었다는 것은 결국 한미동맹의 암초 앞에서 반전평화 운동의 동력이 급격히 위축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구상(경제적 번영, 정치 군사적 안정)에 대한 대중의 허구적지지 - 즉, 반공발전주의 이데올로기를 미국의 야만성/전쟁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데만 초점을 둔 운동으로 깨트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003년 반전평화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Ⅱ -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의 난관 :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생존권 사수운동)과 연대의 곤란 대량살상무기의 부재, 막대한 전비, 그리고 이라크 개전 이후보다 종전 선언 이후 더 많이 발생한 미국 사망자, 이라크 저항세력의 지속적인 저항들로 미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미국은 이라크 점령에 대한 국제사회의 책임을 강조했고, UN의 이라크 재건 결의를 배경으로 동맹국들에게 전비지원과 추가파병을 요청하였다. 한국 역시 이를 따랐고, 추가파병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하반기 파병반대 운동의 조건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파병을 반대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많은 활동가들이 적지 않게 노력했음에도 정작 파병반대 반전평화운동은 좀처럼 다시 불붙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범국민대회라고 명명하고도 2,000 ~ 3,000 규모의 시위대를 조직하는 것 이상의 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하반기 노무현 재신임을 전후하여 대중운동들이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났음에도 말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반전평화운동이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미국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반전운동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생존권 사수운동이 분리된 계기를 통해서 드러나다 매번 서로 미끄러지면서 종결되더라는 사실이다. 2003년 한해 각자의 계기를 통해서 전개되는 대중운동들은 무엇 하나 예외 없이 거기에서만 멈추었다. 극한적인 삶의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목을 메고 분신하며 노동자 운동의 촉발을 호소했지만, 노동자 운동은 자신의 분노를 한번 드러내는 것으로 이후를 기약했다. WTO 시장 개방에 맞선 농민운동 역시 멀리 칸쿤에서 산화한 열사를 상여에 메고 투쟁에 나섰지만 농업시장 개방을 항의하는 투쟁을 대규모로 조직해보는 것으로 2003년 한해 투쟁을 마감하였다.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부안의 투쟁은 대중의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시도들만 보아도 주목되어야 하는 투쟁이었지만, 2003년 내내 부안지역의 문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이들 운동들은 반전평화운동과 별개의 운동으로 간주되었고, 또 그렇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민중운동의 상설적 공동투쟁체로서 전국민중연대의 위상이 모호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공동투쟁을 위한 네트워크의 부재를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설사 그런 네트워크가 형식적으로 존재했다 할지라도 사안별 연대투쟁에만 무게중심이 쏠려있던 이들 운동이 공동투쟁으로 나가기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문제를 연대 틀의 부재로 돌리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실, 2003년 하반기 파병반대운동은 상반기와 달리 미국의 침략전쟁을 규탄하는 것보다는 이라크 추가 파병을 저지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상반기 투쟁에서는 적어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규탄하면서 한국군 파병을 저지하는 투쟁을 벌였던 것에 비해, 하반기 투쟁은 오히려 쟁점의 폭이 좁았다는 뜻이다. 종전선언 이후 이라크 점령에 무심하다 한국군 파병이 제기되자 그제야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출발했다는 상황 자체가 이를 조건 지운 것이다. 물론 이렇게 출발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운동이 지속적으로 파병을 막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고, 대단히 기술적인 방식을 중시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배세력 내 분파 갈등의 활용, 재 신임 국면의 활용, 국민투표 방식의 활용, 그리고 끝내는 낙선운동마저 활용하자는 일련의 전술들은 파병을 막아내는 것만이 이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운동은 단기적인 목적달성이 최선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의 의식화․조직화보다는 시민운동가들 - 이른바 국회 국방위 전문가들, 정당정치 전문가들, 법률 전문가들 등 테크노크라트들의 능력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이슈를 부각시키는 데 유력한 수단인 미디어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한다. 결국 이익집단들의 운동방식 혹은 자기 중심적 실리주의 운동으로서 코포라티즘적 운동과 유사한 모양새를 띄면서 파병반대운동은 연대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던 것이다. 2003년 11월 격렬했던 노동자운동과 접점을 찾지 못하고 끝내 거리를 유지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일부 시민단체들이 노동자운동의 폭력성, 반전평화운동의 참가자와 노동자운동의 참가자가 다르다는 식으로 반발하며 이들 운동의 연대를 가로막았고 노무현 정권에 대한 모호한 입장으로 반전평화운동을 급진적이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들의 정치적 오류를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파병반대운동이 연대 지향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원인을 단지 시민운동진영 탓이라고 돌릴 수만은 없는 문제가 있다. 좀 더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하는데, 이렇게 사안별 이슈에만 집중하여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을 자신의 계기에서만 찾는 방식의 운동 즉, 연대를 스스로 제한하는 운동은 파병반대운동 뿐만 아니라 손배가압류 철회를 위한 노동자운동, 그리고 FTA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농민 운동도 비슷한 경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파병반대 운동이 노동자운동, 농민운동과 거리를 둔 만큼 이들 노동자운동, 농민운동도 파병반대 운동과 거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의 출발점 2003년 한해동안 반전평화운동의 흐름은 파병반대운동에서만 보였던 것은 아니다. 국방비 증액 반대운동, 한미미래동맹/SCM 규탄 등, 자주국방과 한미동맹의 군사적 현대화를 비판하는 다양한 운동들이 출현하였다. 또 두 여중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주한미군 장기 주둔에 따른 피해를 비판하는 운동이 2003년에도 광범위하게 전개되었고, 이 운동이 반전평화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민족자주 통일운동이 한반도 위기에 맞서 평화를 염원하는 운동으로 전화를 모색하고, 반전평화운동과 접점을 모색하는 시도들도 있었다. 이 운동들이 광범위한 대중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평가하기에는 제한적이지만, 적어도 이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패권전략에 맞서는 반전평화운동이 파병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다른 여러 가지 계기로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반전평화운동이 2003년에 부딪힌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다. 가장 핵심적인 초점은 어떻게 해야 한미동맹에 균열을 낼 수 있는가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한미동맹은 정치․외교․군사적 동맹뿐만 아니라 경제공동체로서 특수한 한미관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사실을, 즉 군사동맹으로서 뿐만 아니라 경제공동체로서 특수한 한미관계가 한반도 민중에게 무엇을 뜻하는 지를 정확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하고 투자여건을 확보한다는 미명아래 남한 정부는 구조조정을 진행해왔다. 그 결과의 참혹 상을 분명히 폭로할 수 있어야 한다. 수 조원의 돈이 초국적 자본의 이동과 함께 해외로 빠져나갔고, 그 사이 남한 민중은 삶의 위기에 내몰려 자신의 목숨을 내놔야 했다는 사실을 폭로해야 한다. 한미관계에 균열을 내기 위해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비판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운동과 더불어 우리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한 통치성의 구축 곧,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투쟁, 반전평화운동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무장한 세계화 전략은 또한 경제위기와 통치성의 위기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전평화운동이 다양한 계기로 촉발되듯이 대중운동의 새로운 개시를 위한 객관적 조건이 존재함을 뜻한다. 문제는 대중들이 반공발전주의라는 허망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주체로 설 수 있겠는가이다. 또 이슈 파이팅으로서 운동의 지위를 넘어서 자신의 정치적 연대의 지점을 확보하고 반전평화운동의 새로운 주체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이다. 운동의 성장은 대중의 정치적 각성(의식화)과 운동주체의 형성(조직화)에 의해 가능하다고 했다. 이 고전적인 정식이 매우 적합한 대답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대중들이 과학적 인식에 기반해서 실천을 벌일 때에야 자신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분명히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정념에 빠지지 않고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반전평화운동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2003년 반전평화운동은 정치를 다시 가동하려는 인민들의 노력이라는 측면만 보아도 그 역사적 의미가 온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 많은 난관(한미동맹과 반공발전주의, 노동자/농민/빈민운동과 연대의 곤란)에 부딪히면서 급격하게 소강했지만, 여전히 반전평화운동을 매개로 정치가 다시 작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유의 깊게 살펴야 한다. 이상이 바로 반전평화운동이 새로운 운동으로서 가능성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미국의 무장한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들의 반전평화운동은 이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남은 것은 어떻게 이것이 보편적인 이념적 지향 아래 대중운동으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키우는가이다. 우리가 깊이 숙고해야 하는 것은 반전평화운동은 곧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운동 자체의 복원으로서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를 진실로 깨닫는 것, 이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