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성사되도록 애쓰신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영국 핵군축캠페인(CND;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CND는 작년에 60주년을 맞았습니다. CND는 1958년 창립한 이래로 수십 년 간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저항 행동을 다양하게 조직해 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운동과 협력하면서, 우리는 영국과 세계의 정부들이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TBT; Partial Test Ban Treaty), 핵확산방지조약(NPT;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과 같은 중대한 합의에 이르게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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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영국 정부는 트라이던트(Trident) 미사일 시스템(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과 핵탄두, 핵잠수함)의 현대화 계획을 통과시켰습니다. 핵무기 반대 운동가이자 CND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한 제러미 코빈이 당 대표를 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1야당인 영국 노동당은 이 트라이던트 현대화에 찬성하는 당론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는 핵무기금지조약(TPNW) 채택을 위한 협상을 보이콧하면서, 이 조약에 반대하기 위해 미국이 조직한 기자회견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묵과할 수 없습니다. CND는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높이면서, 영국 정부와 모든 정당이 핵무기에 대해 입장을 새로, 제대로 정립할 때까지, 즉 일방적 군축 정책으로 선회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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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D는 다양한 지역별 모임으로 구성된 풀뿌리 운동입니다. 그 중에는 특정 분야를 대표하는 모임도 있습니다. 한 예가 CND 기독교도 모임입니다. 이들은 최근에 개빈 윌리엄슨 전 국방장관이 기획한,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사를 규탄하는 행동을 조직했습니다. 그 행사는 영국의 핵무기 시스템 보유 5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 차원의 추수감사절 행사였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 장소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렸고, 윌리엄 왕자(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손자)가 여기에 참석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는 무기의 도입을 ‘축하’했습니다. CND 기독교도 모임의 주도로, 수백 명이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고 죽은 사람처럼 길 위에 드러누웠습니다(‘die-in’ protest. 참가자들이 죽은 것처럼 시뮬레이션하는 항의 형태를 말한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들을 기리는 행동이었습니다. 많은 언론들이 이 날의 광경을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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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9월)에 영국에서 열리는 DSEI(Defence and Security Equipment International은 영국 국방부와 국제통상부, 국방보안기구, 항공방위보안협회의 후원으로 격년 개최되는 영국 최대 규모의 무기 박람회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무기 박람회 중 하나입니다. DSEI에는 1600개 이상의 무기 생산업체가 참가하여 저격용 무기에서 탱크까지, 온갖 범위의 무기를 전시합니다. 이들은 심각한 인권 유린을 벌여온 나라들에 무기를 판매합니다. 이 박람회에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정권들의 대표들이 초대받았습니다. 또한 전기 충격기, 고문 장비, 집속탄(cluster bombs. 한 개의 폭탄 속에 또 다른 폭탄이 들어가 있는 폭탄을 말하며, 넓은 지형에서 다수의 인명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대표적 비인도적 무기)과 같이, 그 극악무도함 때문에 영국 국내에서 판매가 금지된 무기들이 DSEI에서 판매된 전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위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DSEI를 계속 후원하고 있습니다.
CND는 무기거래반대캠페인(CAAT; Campaign Against Arms Trade. 국제 무기 거래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영국 기반의 캠페인 조직. 1974년에 여러 평화운동 단체들의 연대체로 시작했다.)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과 함께, 올해 9월 4일에 ‘반핵의 날’(No Nuclear Day) 집회를 공동 주최할 것입니다. 이는 DSEI에 맞서 2주간 이어지는 ‘무기 박람회 저지 행동 주간’의 일환입니다.
12월에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29개 회원 국가로 구성된 집단적 군사동맹 기구. 1949년 냉전 체제 하에서 소련 및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응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회원국 수장들이 런던에 모일 예정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참석할 것입니다. NATO 정상회의는 트럼프가 추구하는 핵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조직하고, ‘핵 동맹으로서 NATO’의 기능이 강화되는 것은 국제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CND는 영국 및 국제 평화운동과 협력하여 런던에서 NATO 정상회의에 대응하는 시위를 조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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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위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시민행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1958년 첫 CND 모임에는 무려 5000명이 참가했지만, 현재 모임에서 제 또래 청년들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고, 냉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세대에게 핵전쟁의 위협은 요원해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핵 전쟁 준비 태세와 이란과의 관계 악화, 그리고 핵무기는 영국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신임 총리(보수당의 보리스 존슨)의 태도는 점점 더 깊은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이 역사를 공부하고 평화 운동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시위가 마치 매주 으레 열리는 행사처럼 여겨지고, CND 로고(평화 기호. Peace symbol)가 패션 브랜드에 의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핵전쟁의 위협은 지나간 시대의 문제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할 일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의 에너지를 모아내야 하고, 베테랑 활동가들의 전략적 통찰력, 지식, 경험을 그들에게 전수하여 이를 새 세대의 역량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융통성 있는 접근 방식을 마련하고, 차이를 긍정하며,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CND 런던 지부는 청년 조직화라는 과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 조직의 구조를 단순화하고, 디지털 활용 기술을 가진 회원을 모집하며, 창조적인 워크숍과 대규모 캠페인을 통해 우리의 행사에 새로운 이들을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더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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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저는 잉글랜드 북부의 한 마을, 배로우-인-퍼네스를 방문했습니다. 바로 영국의 핵 미사일이 장착되는 뱅가드급(Vanguard class) 잠수함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현재 세계 4위 군수기업인 BAE 시스템스는 이 지역의 주요한 고용주이고, 사실상 이 마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을 곳곳의 공공서비스에서 BAE Systems 로고를 발견할 때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영국 정부가 학교 시스템을 바꿔버려, 기업들은 이제 단순히 학교에 자금 ‘후원’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업 교재까지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군수기업이 후원하는 학교에서, 11세 어린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중 무기를 디자인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들의 목록 써오기’ 같은 교재로 수업 받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전쟁과 무기는 정상적인 것이고, 사회에서 용인되는 요소이며, 일자리를 창출하고, 우리는 어떠한 충돌에도 군사적으로 대응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배우게 됩니다. 현 시스템에서 이런 식의 교육은 크게 문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군사주의적 편견을 유포하는 교육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전쟁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야 하고, 청소년들이 다양한 정보와 관점을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자주 학교 학생들, 청소년들과 함께 일하는데, 그러면서 이들과의 대화가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영향력을 느낍니다. CND의 교육 프로그램에는 해마다 영국 전역의 수 천 명의 학생들이 참여합니다. 우리의 평화교육 담당자들과 자원활동가들은 학교를 찾아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교사들을 위한 교육을 하기도 하고, 모든 연령이 사용할 수 있는 교실 교육활동 패키지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핵무기와 평화 문제에 대한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이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합니다.
교육에 들인 노력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가족 전체가 이러한 토론에 참여하고 동의지반을 공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핵무기 철폐가 일자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부모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노동조합은 이러한 상황에서 트라이던트 반대와 같이 평화를 위한 투쟁과, 군수기업의 업종 전환을 통한 일자리 유지 둘 다를 요구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2017년, 영국노총(Trade Union Congress)은 노동당에 국가 산업 전략의 차원에서 군수사업의 업종 전환 문제를 다루는 기관을 설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트라이던트를 폐기해야 하는 근거는 분명합니다. 자녀 세대가 핵 전쟁으로 절멸할 위험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무기 현대화에 들어갈 2050억 파운드를 아껴 이 예산을 모두를 위한 교육 및 보건의료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연히 부모들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단결해야 하는 필요성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각자 지닌 기술을 활용하여 운동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민행동이란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는 눈에 보이는 작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런던 거리에서는 이미 매주 시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투쟁 방법의 효과에 대해 점점 회의적이 되고 있습니다. 가시적인 대규모 행동을 조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뿌리와 가지를 사회 곳곳에 널리 퍼뜨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즉 정보를 공유하고 동료, 학생, 부모, 정치인들과 함께 우리의 견해를 토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집회를 진행하거나, 뉴스레터를 공유하거나, 전단지를 디자인하거나, 신문에 글을 쓰거나, 학교에서 연설을 하거나, 웹사이트를 만들거나, 지역 선전전을 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평화운동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집단적 힘을 조화롭게 하나로 묶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운동은 성장하고, 새로운 사람들에게 도달하며, 더 큰 대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함께 하면, 우리는 성공할 것입니다.
반일 민족주의가 발화점을 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무언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 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지난 20세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인식을 총체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겠으나, 일단 이번 글에서는 이번 사태의 직접적 발단이 된 한일청구권협정과 민간/개인청구권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지난 7월 11일 글에서는 이 문제를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번 기회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박정희 정부와 ‘민간청구권 보상’
기실 피징용자 보상 문제의 기본 방향은 민주당 장면 정부가 진행하던 한일교섭에서 그 틀이 잡혔다. (5·16 군사쿠데타 직전인 1960년 5월 10일 한일교섭) 이때 한국 측은 보상대상으로서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으로 범위를 확대했으며, 이 보상은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일본 측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일본정부의 보상을 말하는가”라고 질문했고, 한국 측은 “국가로서 청구하며 개인보상에 대해서는 한국 국내에서 조치하겠다”고 답변했다. 즉 정부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포함하는) 개인 보상금을 받아서 국내에서 이를 집행하겠다는 기본 틀이 이미 장면정부 당시 설정되었다는 뜻이다.
실제 한일청구권협정을 타결한 박정희 정부는 1965년 12월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출했다. 196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1970년대까지 국민소득을 배가시키고 이를 위해 청구권자금을 공평하게 사용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민간청구권 문제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야당이 이에 문제제기하면서, 결국 1966년 2월에 공포된 법은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 필요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고만 명기했다. 1967년 두 번째로 대선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재선되면 곧 보상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71년 1월에 이르러서야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증거자료 수집을 위한 법률이었고, 보상을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이때 신고대상 중에는 피징용자와 관련된 것은 △우편저금, 진체저금, 우편연금(곧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군인·군속·노무자로 소집·징용되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망한 자라는 항목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에서 1975년부터 2년에 걸쳐 보상금이 지급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단 신고기간이 너무 짧았고 확실한 증거서류를 구비한 신고만 접수했다. 또한 이 기간에 지급 청구를 하지 않은 경우, 그 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간주했다. 그 결과, 예를 들어 인명관계 신고수리가 8,910명이었는데, 한일교섭 당시 박정희 정부가 사망자를 77,603명으로 제시했던 것에 비해서 너무 적은 수치였다. 또한 보상액수도 너무 적은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컸다. 전반적으로 보아, 어떤 이유든 간에 박정희 정부가 피해실태를 철저히 조사할 의사나, 보상할 의사가 크게 부족하지 않았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와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노무현 정부는 2004년 2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입법했고, 여러 과정을 거쳐, 2007년 12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리 자문기구로 구성된 <민관공동위원회>의 2005년의 검토 결과,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는 결론은 지난 글에서 이미 인용한 바 있다.)
그 1조는 이 법이 “국가가 태평양 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급함으로써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그렇다면 왜 보상금(또는 위자료)이 아니라 ‘위로금’이라는 표현을 썼는가? 이는 한국정부가 이미 1975년에 시행한 보상으로 인해, 정부의 법적 보상 의무는 없지만, 그 보상이 불완전, 불충분하였다는 것을 정부가 인정하여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이에 대해 위로금 또는 지원을 보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기존 보상을 보충하는 인도적 지원으로, 보상의 성격을 담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법적 보상은 아니라는 복잡한 논리 구조를 동반했다.
그렇다면 2007년의 ‘지원’은 1975년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신고자 수가 크게 늘어나 22만 건 이상의 신고를 접수해, 11만 건에 대해 지원이 이뤄졌다. (현재까지 대략 6,000억 원 이상의 지원금이 지급되었다.) △사망자뿐 아니라, 생존자, 부상자, 미수금 피해자를 지원대상에 포함시켰다. (생존자는 위로금 2,000만 원, 부상자는 위로금 1,000만 원, 생존자에게는 연간 80만 원의 의료지원. 미수금은 1엔당 2,000원으로 환산) △ 유족범위가 후순위 유족인 형제, 자매로 확대되었다. △정부의 적극적 조사로 피해자의 입증 책임이 경감되었다.
노무현 정부 ‘희생자 지원’의 이면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만사형통이었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없는 논란도 동반되었다. 첫 번째,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다. 왜 이런 일이 있었나? 애초 정부와 국회 행정자치위가 합의한 원안은 생존자에 대한 지원으로 매년 50만 원의 의료지원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이 생존자에게 500만 원의 위로금을 추가 지급하라는 내용의 수정안을 본회의에 제출하여 통과된 결과,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당시 정부 당국자는 거부권 행사의 이유로, 수천억 원대의 추가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며, 특히 생환 후 사망한 분들과 형평성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실제 생환 후 사망자의 유족에게도 위로금을 지급할 경우, 재정투입이 조 단위로 증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는 노무현 정부의 거부권 행사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그 후, 생존자 위로금은 다시 삭제되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2월에야 다시 법안이 통과되었다.
또 하나의 논란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문제였다. (국내 징용에는 ‘일반징용’과 이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의 ‘현원징용’이 포함된다. 현원징용은 조선총독부가 중점산업으로 인정한 공장의 현직노동자를 고용장에서 그대로 징용하는 방식이다. 즉 기존 공장에서 계속 일하되 이직이나 퇴사가 금지되는 셈이다. 여기에 연간 연인원 수백만 명에 이르는 근로보국대나, 징용령 이전 시기부터 존재하던 ‘관 알선’ 노동자도 포함된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불거진 이후로, 최근이라고 말할 수 있는 2019년 7월 11일에도 서울행정법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가 외교부장관을 상대로 보상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을 각하했다. 이미 2011년 2월 헌법재판소는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을 제외하는 게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국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법을 제정해 국내 강제동원자들도 진상을 파악하고 피해자로 지정해 희생을 기리는 조치를 한 점 등을 고려하면 국가의 지원이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전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5년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등 대책기획단>은 국내 동원을 지원대상에서 제외했는데, 그 근거는 △국내강제동원은 연인원 650만 명으로 대상자 수가 너무 많아 정부의 재원에 문제가 있다는 점. △한일협상 당시 일본에 요구한 보상범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사실 여기서 제시한 두 가지 쟁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2007년의 지원법의 불가피성을 재확인하든, 아니면 그 미흡함을 인정하고 새로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든 무언가 판단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역대 한국정부가 취한 조치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미룬 채, 모든 문제를 일본 측에 미루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스스로 되돌아보자
일본 지식인계에서 일본 자신에 대한 비판과 자성을 촉구하며 사회운동의 흐름을 형성하려고 노력한다면, 현 시점에 한국에서도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의 절규를 시종일관 외면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보자. 한국 정부와 한국인은 무엇을 했던가.
2007년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당시, 우리는 이 법률 제정의 역사적 함의에 대해 명확히 인식했던가. 다시 말해, 1975년의 보상 이후에 한국 정부가 추가적인 지원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우리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인가. 당시 법률제정 이면에도 다양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는 그 문제들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한 논의가 필요했다. 만약 2007년 지원책에도 미흡한 측면이 있다고 인식한다면, 우리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현재의 한일 갈등을 파해하는 외교적 합의점의 도출도 가능하다.
글의 본론 격인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운동에 대한 평가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광우병 촛불이 “노빠(노무현 전 대통령과 당시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에 의해 조작된 거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광우병 촛불이 소위 “노빠”들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은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주장되었던 것인데요, 이러한 질문에 갇히면 평가가 불가능해집니다. 한두 마디로 광우병 촛불을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광우병 촛불은 실제보다 과장·왜곡된 광우병 위험에 대한 공포에 의해 폭발했고, 다른 한 편으로 근본적·구조적 문제인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광우병 위험에 대한 공포에만 갇혔던 한계가 있습니다.
광우병 위험이 실제보다 과장·왜곡된 것이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제가 글에서 자세히 정리했으므로 전부를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돌이켜보면 광우병 촛불 당시 많은 비난을 받았던 서울대 수의학과 이영순 교수의 견해가 옳았습니다. 당시 이 교수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광우병이 사람에게서 발생한 통계를 살펴보면 광우병은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다. 광우병의 원인이 육골분사료에 섞여 들어간 변형 프리온임을 알고 육골분의 소 사료 투여를 금지한 후 1992년 한해만 37,316마리가 광우병에 걸렸던 것이 1996년에는 8,310마리, 2004년 878마리, 2007년 141마리로 줄었고 2008년 3월 현재는 겨우 5마리만 광우병에 걸렸다. 뇌, 척수 등이 SRM(특정위험물질)으로 지목된 후 이 부위를 먹지 못하게 엄격히 규제한 후에는 인간 광우병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1999년 29명 발병을 정점으로 2006년에 3명으로 줄었고, 2007년에는 한 사람의 환자도 없었다.” “내장 가운데서 광우병 위험 물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회장원위부 그러니까 소장의 제일 끝부분이며, 미국도 30개월 이상이나 이하의 모든 소의 도축과정에서 이 위험부위를 제거하는 것이 법적으로 규정돼 있어 그것이 실제 이루어진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러한 견해가 옳았다는 것을 10년의 시간이 입증해주고 있지요. 안타깝지만 “비전문가들이 퍼뜨린 괴담이 국민을 선동하고 오도했다”는 이영순 교수의 평가에 대해, 현재 시점에서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광우병 촛불이 근거가 없는 운동이었다면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요?
광우병 촛불이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 역시 새누리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주장되었죠.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금 전 언급했던 기사를 다시 언급하자면, 이영순 교수는 2008년 4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전 “모든 연령의 쇠고기를 다 수입하는 것은 안 된다”는 입장을 이명박 정부에 전달했다고 해요. 다른 나라들이 쇠고기 수입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상황, 그리고 “식품 안심”이라는 국민 정서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글에서 “물론 이명박 정권이 맺은 쇠고기 협상의 수입 조건이 과도하게 미국에 유리한 것이었는가, 한미FTA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협상을 통해서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썼는데요, 그런 점에서 광우병 문제에 대해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분노한 것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광우병 촛불이 끝까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라는 단일 쟁점에 갇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대책회의는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반대 국민대책회의”였고, 일관되게 (한미FTA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재협상” 요구만을 내걸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한미FTA 비준의 전제조건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미FTA 문제를 전혀 제기하지 않으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기는 어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노무현 정권은 한미FTA 협상 타결과 함께 국제수역사무국(OIE)로부터 미국이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획득하면 미국산 쇠고기를 뼈를 포함하여 전면 수입할 것을 구두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타결 이후 미국은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은 한미FTA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광우병 촛불이 단일 쟁점에 갇히게 된 것일까요?
복잡한 대중운동의 양상을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만, 광우병 촛불의 몇 가지 중요한 양상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광우병 촛불의 초기 성격에 대해서입니다. 1차 광우병 촛불집회는 2008년 5월 2일 열렸는데요, 사실 1차 광우병 촛불집회라는 이름은 사후적으로 명명된 것입니다. 5월 2일 촛불집회의 이름은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였습니다. 여기서 “너”는 당연히 이명박 대통령인데, 주최한 단체가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라는 점에서 보면 적절하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는 17대 대선 투표가 끝난 2017년 12월 19일 오후 7시에 만들어졌고, 22일부터 이명박 탄핵을 목표로 한 촛불집회를 꾸준히 개최했습니다. 그러다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 집회를 계기로 큰 주목을 받게 되지요. 당시 해당 인터넷 카페는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토론의 장이 되었고 언론의 주목을 상당히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번에 당시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만, 심하게 말하면 최근 우리공화당 세력이 주도하는 가짜뉴스의 원형이 당시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이명박 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한 각종 음모론이 근거가 불분명한 채 유통되었더군요.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는 이후 <이명박 심판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이명박근혜 심판 범국민행동본부>, <적폐청산 의열행동본부>로 전환하면서 일관된 활동을 보여줍니다. 대표인 백은종 씨는 2004년 노무현 탄핵 가결 당시 분신했던 인물로, 2009년 강한 친민주당 성향의 인터넷 언론 <서울의 소리>를 설립해서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류적 흐름이라고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소위 “노빠”, “문빠”로 칭해지는 흐름의 극단적인 일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자유한국당 세력의 극단적 스펙트럼으로 우리공화당이나 뉴데일리가 존재한다는 점과 유비해볼 수 있겠지요.
정리하자면, 광우병 촛불의 시작은 반이명박이라는 선명한 목표를 바탕에 두고 있었던 세력과 당시 이명박 정권과 각을 세우고 있던 PD수첩 보도가 맞물리면서 폭발력을 얻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광우병 촛불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과오에 대한 평가와 분리된 채, 그리고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본질적 쟁점을 우회한 채 반이명박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된 데에는 이러한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광우병 촛불의 이후 진행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광우병 촛불 당시 국민대책회의 내부 논의 지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 한 부분보다는 지금부터 말씀드리려는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국민대책회의 내부에서 일부 단체들은 실제로 미국산 쇠고기 쟁점이 한미FTA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져야 하며,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개혁정책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선공약이 연결되어 있는 문제, 신자유주의와 국제자유무역 규범 등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광우병 촛불과 국민대책회의 내부의 지배적 흐름은 광우병 문제를 “괴담”으로 환원하거나 이명박 전 대통령 개인을 조롱하고 악마화하는 것이었고, 한미FTA 문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개혁정책과 이명박 대선공약의 연관성 문제, 신자유주의와 국제자유무역 규범 등의 문제는 제기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촛불집회 후반기에 국민건강보험민영화, 공공부문 민영화, 학교자율화, 한반도 대운하, 공영방송 사수 등 다섯 가지 의제가 추가되었지만 이는 모두 (노무현 정권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이 추진한 정책으로 상징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가장 핵심적 의제인 한미FTA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물론이구요.
요컨대 미국산 쇠고기 문제는 한미FTA, 즉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유산과 분리되면서도 반이명박전선을 펼칠 수 있는 사안이었고, 실제 운동의 진행도 그러했습니다. 시민운동진영이 이러한 흐름을 주도했는데, 촛불 집회의 관심사가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 제반 정책에 대한 반대로 확장되어 가고, “이명박 퇴진” 구호가 집회에 등장하는 상황에서 국민대책회의에 속한 일부 단체들은 촛불집회를 “쇠고기 재협상”으로 국한하고, 야3당 공조 흐름과 호흡을 맞추려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이명박 반대’만 강조되었다는 거죠?
그렇죠. 결국 광우병 촛불은 이후 소위 “MB악법” 저지를 명분으로 한 민주당 주도의 반이명박 전선 구축, 그리고 2010년 지방선거에서의 “민주대연합전선” 본격화로 이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사건 또한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0년 지방선거는 반보수전선이 선거라는 계기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진보정치운동,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이 형해화되는 시작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10년 지방선거에 대해서도 글에서 자세히 평가했으므로, 지금은 2008년 이명박 집권 이후 2010년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시민운동진영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참여연대의 입장 변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직후 참여연대는 노무현 정권에 깊숙이 참여한 것을 반성적으로 평가합니다. 노무현 정권이 보수 세력과 구분되지 않는 정체성을 보여주었으며, 시민운동은 보수화되어 가는 노무현 정부와 구분되는 독자적 사회비전을 갖춘 독립적 주체임을 입증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우병 촛불을 계기로 이러한 반성적 평가는 사라지고 반이명박전선과 “MB악법” 저지가 모든 쟁점을 압도합니다. 급기야 노무현 죽음 이후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수레바퀴는 ‘바보 노무현’이 흘린 피를 먹고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있으며, 노무현의 죽음은 자신의 부활과 함께 민주 진보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평가하면서, “진보 개혁 세력이 거듭나려면 노무현에게 배우고 노무현가 함께 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이후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민주정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개혁의 성과를 쌓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며, “현안과 이슈를 좇아 반대 투쟁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상황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진보와 개혁세력, 촛불 항쟁에 나선 세력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와 비전, 정책을 만들어내고 이를 기반으로 중심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에 함께 나서지 않고서는 사회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아내기도, 각 분야의 작은 개혁을 이뤄내기도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민주대연합전선”을 구축해서 지방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노골적인 주문인 셈입니다.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 이후에 참여연대는 선거결과를 놓고 “6.2 시민선택”, “제2의 6월 항쟁”으로 명명합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직후 시인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평가가 2년 만에 사라진 것입니다.
<반보수전선이라는 막다른 길>은 박근혜 퇴진 촛불에 대한 평가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박근혜 퇴진 촛불이 민주당 집권으로 이어졌다고 해서 그 의미를 지나치게 폄하한다는 견해도 있을 듯 보입니다. 박근혜 퇴진 촛불이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운동이었다고 보시나요?
박근혜 퇴진 촛불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운동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유례없이 광범위한 시민의 참여가 동반되었다는 점, 그리고 무능·독선·부패의 상징이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인상적인 결과, 문재인 정권에 대한 높은 지지율과 기대감 등이 반영된 듯합니다. 물론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와 기대는 최근 들어 상당히 무너지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객관적 시각으로 차분히 돌아볼 때가 되었습니다.
글에 쓴 것처럼,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 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는 “퇴진 촛불이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사회 대개혁으로 나아가는 시민혁명의 과정이다”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고 민주당이 집권한 것을 두고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이후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하기보다는 대통령 권력을 오히려 강화하는 4년 중임제 개헌을 주장하면서 개헌 논의를 좌초시키는데 일조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로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대통령 중심 국정 운영을 더욱 강화하는데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에서 법무·검찰개혁위원회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로 이어지는 논란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검경수사권 조정과 윤석렬 검찰총장 지명 등으로 이어지는 최근 상황은 대통령 권력의 사법부 장악 시도라고까지 보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비교할 때 참여연대·민변 등 시민운동진영 인사들이 정권에 깊숙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인데, 이것은 민주주의와 관련이 없지요. 그런가하면 소득주도성장의 파산, 재벌개혁의 실종, 노동법·노조법 개악 등을 볼 때 현 상황이 사회 대개혁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측면을 주목할 때 퇴진 촛불의 성격을 어느 정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도 박근혜 퇴진 촛불에 열심히 참여했었는데요,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당연한 얘기지만 촛불에 참여한 시민들이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라거나, 노동자사회운동이 퇴진 촛불에 참여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퇴진 촛불에 참여한 시민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적당히 덮고 대선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민주당을 비롯한 제 정치세력들의 퇴행을 거부했고, 재벌체제와 작업장 민주주의 등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시민들이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퇴진 촛불에 참여한 노동자사회운동의 역할도 일정 부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문재인 정권이 보수적이라고 해서 퇴진 촛불이라는 대중 운동까지 보수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과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급진적인 측면과 보수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진, 퇴진 촛불의 모순적인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재인 씨가 거국중립내각과 책임총리를 주장하고, 추미애 전 당대표가 영수회담을 제안하는 등 민주당이 지리멸렬하던 시점에서 대중은 일체의 수습방안을 거부하고 단호하게 즉각 퇴진을 외쳤습니다. 이 당시 민주당은 대안이기보다는 오히려 조롱의 대상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탄핵소추안 가결을 기점으로 촛불집회는 급격히 소멸하고, 어느새 대중들 사이에서 민주당이 “촛불혁명”을 대변하는 것처럼, 문재인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지도자인 것처럼 표상됩니다. 탄핵 이후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는 것 자체는 예정된 수순이라고 하더라도, 대중의 정서가 급격히 반전된 것은 일종의 집단적 기억상실로 보일 정도였습니다.
왜 그렇게 된 거죠?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을 수 있겠지만, 저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노동자사회운동의 주체적인 조건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 동안 노동자사회운동이 민주당과 시민운동진영이 주도하는 반새누리당이라는 실체 없는 전선에만 매몰되면서 민주당과 구별되는 대안적 흐름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런 상황에서 대중은 민주당 지지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나라당과의 소소한 차이를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신자유주의 개혁과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노무현 정권이 본격화한 것이었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노무현 정권의 정책 기조를 계승했다는 점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이러한 점을 인식한다면 새누리당의 대안은 민주당이 될 수 없습니다. 기존 정치 세력이나 특정한 지도자에 의존하기보다는 신자유주의의 위기에 대한 비판적 인식 속에서 대안적 실천을 만들어 나갔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새누리당만 아니면 된다”는 인식 속에서 민주당과 시민운동에 운동의 주도권을 의탁해온 결과, 노동자사회운동이 퇴진 촛불 국면에서 독자적인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퇴진 촛불에 참여했어야 하는가 하지 말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왜 이러한 상황에 처했는가 하는 질문 속에서 지난 시기 운동을 차분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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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기 운동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지만, 다시 2017년 하반기로 돌아간다면 박근혜 퇴진 촛불이라는 대중 운동이 분출하는 상황에서 참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참여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여하되, 박근혜 퇴진 촛불이 가진 한계를 분명히 인식했어야 합니다. 퇴진 촛불 당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사회운동이 보였던 태도, 즉 퇴진 촛불을 실무적으로 지원하면서 퇴진 촛불의 방향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려는 수동적인 태도는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사회진보연대는 당시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권교체를 넘어서서 재벌체제 개혁, 노동권 확장,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방향을 민주당이 담보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했습니다. 사회진보연대 외에도 이 같은 주장을 했던 민중운동 단체들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민주노총은 퇴진 촛불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동적 태도를 취하면서 대중으로부터 독자적 세력으로 인식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퇴진 촛불 이후 민주당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노총이 퇴진 촛불 국면에 어떻게 개입했어야 하는가 하는 점은 다시금 평가해봐야 할 것 같군요.
그렇죠. 역사에 만약은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평가를 위해서 한 번 곱씹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퇴진 촛불 이후 현재까지를 생각해보면, 퇴진 촛불에서의 수동적 태도가 박근혜 퇴진 이후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의존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더 큰 문제겠지요. 사실 문재인 정권 초기부터 개헌에 대한 태도를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이라는 본질적 쟁점에 무관심하다는 점, 사드 배치와 위안부 쟁점에 대한 입장변화 등을 통해 민주당이 새누리당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소득주도성장론의 내적 한계 역시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구요. 그런데도 민주노총은 지나치게 저자세로 일관하는 한편, 문재인 정권의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면서 하위파트너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결국 소득주도성장 전략은 최저임금인상 정책의 실패와 노동법 개악으로 파산했고, 경사노위를 매개로 한 사회적 대화 역시 정권의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정세를 객관적으로 인식했다면 소득주도성장론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면서 민주당에 의존하는 대신 민주당을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입장과 운동을 만들었어야 했지요. 이른바 “촛불혁명”의 정신을 문재인 정권이 담보하고 있다는 인식 속에서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잃어버렸던 것은 뼈아프게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운동에서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운동진영의 주도성이 더 강해졌습니다. 이들이 문재인 정권의 출범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처럼 과잉 해석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점 역시 인식해야 합니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주요 선거에서 소위 “민주대연합전선”을 강하게 추동하는 등으로 민주당과 더 긴밀하게 결합해오다가 문재인 정권 출범으로 화려하게 복귀해서 정권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 동안 이러한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안일한 인식 속에서 반보수전선을 강화해왔던 역사를 반성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물론 평가의 대상에는 사회진보연대 역시 포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