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부 자료 1. 민생위기 극복 연석회의(비상시국회의) 자료집 2. “운동가들의 가슴에, 투쟁하는 민중의 마음에 한국진보연대의 깃발을 세우자!”, 한국진보연대 웹진 6호 인터넷 링크 자료
1. http://www.n-jinbo.org/board/view.php?id=discussion&page=6&no=22311 "경제비상시국회의, 민생민주국민회의와 관련한 경과 및 고민", 진보신당 게시판
2.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26039.html "진보 개혁 세력 덧셈정치 논쟁 후끈", 한겨레 신문 12월 7일
3.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327152.html "한미FTA, 비정규직 입장 분명해야 정책연대 가능" , 한겨레 신문 12월 12일
2004년 1월,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이수호 후보가 당선된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총에서는 이른바 ‘국민파’의 장기집권이 지속된다. 2006년 보궐선거에서 조준호 위원장이 당선되고, 그 뒤를 이석행 위원장이 잇는 과정은 ‘국민파’가 근소한 차이로나마 과반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2004년 이후 민주노총을 집권하고 있는 ‘국민파’가 그리는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상은 산업별교섭-노사정교섭의 안정적인 제도화다. 이를 통해서 ‘사회개혁적’인(이 말은 때로는 ‘사회공공적’ 혹은 심지어 ‘사회운동적’이라는 말로 대체된다) 과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이러한 노선을 실현하기 위한 일련의 사업을 계속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안정적일 수 없었는데, 민주노총 안에서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시도는 조직 내 갈등을 증폭시키고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민주노총의 위기에 대한 인식과 그 대안에 대한 논란을 돌아보고, 앞으로 민주노조 운동을 혁신하는데 필요한 시사점을 살펴본다. 또 이 과정에서 사회진보연대가 가졌던 입장과 활동을 돌아본다.
사회적 합의주의 논쟁
민주노총은 2004년부터 사회적 교섭과 관련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사전작업에 들어간다. 민주노총 내 각급 단위 회의에서 사회적 교섭과 관련된 토론을 진행하는 한편, 총연맹 차원에서는 사회적 교섭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준비한다.
2005년부터 사회적 교섭은 쟁점으로 부각된다. 1월 20일에 열린 대의원대회는 사회적 교섭 안건에 대한 찬반토론이 격렬하게 이어지다가 무산된다. 이어 3월 14일에 열린 대의원대회에서는 이 안건을 놓고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고, 급기야 단상점거와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한다. 당시 보수언론은 이 사건을 민주노총의 과격파들에 의한 “폭력사태”로 묘사하며 민주노총이 정파대립으로 인해 조직적 위기에 빠졌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결국 민주노총은 당시 논의가 막 시작된 비정규직법안에 대해서만 정부와 협상한다는 전제를 두고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하기로 한다. 당시 정부와 여당은 4월 내에 국회에서 비정규 개악법안을 처리하고 6월에 노사관계 로드맵을 처리한다는 일정표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노동운동 내에서 ‘현장파’ 혹은 ‘좌파’의 상당수는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담합 분쇄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전노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항의를 조직하거나 현장의 반대를 조직하는 활동 주로 전노투를 통해 이루어졌다.
민주노총 안에서는 1998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IMF 협약을 관철하기 위해서 소집되었던 노사정위원회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 많았다. 상황이 이러해서 민주노총은 ‘사회적 교섭은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노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며 또한 기존 노사정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실효성 있게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새로운 틀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전노투는 ‘사회적 교섭정책은 사회적 합의주의일 뿐이며 사회적 합의주의는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서 노동자 죽이기 프로젝트일 뿐’이라며 민주노총의 입장에 반박한다. (조돈희 전노투 상황실장,「사회적 교섭 방침 안건은 폐기되어야 한다!」, 『민주노총 토론회: 사회적 교섭, 어떻게 볼 것인가 자료집』, 2005.3.11.)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적 합의 반대라는 단일 쟁점으로 좌파연대체를 구성하는 것과 사회적 교섭 참가/불참을 민주노조 운동 내 중심 쟁점으로 설정하는 것에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노투에 ‘참관’으로 연대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사회진보연대 역시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민주노총 내에서 반대 입장을 조직하는 한편 노동조합을 넘어선 사회운동의 대응을 형성하는 활동에 함께 했다. 당시 입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코퍼러티즘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실현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서구의 코퍼러티즘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노동측면에서 보완하기 위한 ‘공급중시 코퍼러티즘’으로 변모한다. 더구나 한국과 같은 반주변 국가에서는 국가가 합의를 위해 양보할 것도 별로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오히려 노동의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정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제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민주노총이 추진한 ‘선한’ 사회적 교섭은 애초부터 실현가능성이 없었다. 이는 이후 노사정대표자회의 파탄으로 다시금 확인된다. 2006년에 진행된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오른 의제는 복수노조와 교섭창구단일화, 전임자임금지급 금지, 대체노동 및 필수공익사업장 범위 확대 등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들이었다.
더구나 진행 양상을 보더라도, 노사정위원회는 지속적으로 정부의 노사관계 관리기구로서 역할을 할 뿐이었다. 민주노총이 대정부 협상을 요구하면 정부는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결국 노사정위원회, 사회적 교섭이라는 쟁점은 민주노총의 지도력을 분할시키면서 조직을 약화시켰는데, 정부는 이것만으로도 원하는 성과를 충분히 얻은 셈이다. 민주노총이 거대한 자충수를 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 모든 실패 이후에도 이를 인정하는 평가를 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논의 방식이 노사정 교섭과 관련된 모든 쟁점을 “전부 아니면 전무”로 환원하며 논의를 지나치게 과열되게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일정한 정세에서는 노사정 교섭에 노동조합이 참여할 수도 있다. 혹은 교섭을 오히려 전술적으로 요구할 수도 있다. 1)
사회적 합의주의는 민주노조 운동의 전략적 전환의 문제고, 사회진보연대는 이 노선에 단호하게 반대해왔다. 그러나 또 한편 노정 교섭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전술의 문제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반대론자 앞에서는 노사정위원회를 전술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인 양 변명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략적인 방향이라고 주장하면서 전혀 신뢰를 주지 않았다. 사실 민주노총의 입장은 전략적인 수준에서 노조운동의 노선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아니다’라는 민주노총의 주장은 공허한 변명이었다. 논의 과열의 책임은 민주노총 집행부에 있었다.
결국 쟁점이 이렇게 형성된 탓에 노사정위와 같은 사회적 합의기구가 아니라 특정정세에서 필요할 수 있는 노사정교섭의 전술적 활용마저도 모두 ‘논외’가 되었다. 이는 민주노총이 이후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무능하게 대응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이후 민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하여 비정규직 법안과 노사관계로드맵에 관한 논의를 진행한다. 그러나 2006년 9월 11일 타협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노총과 경총, 노동부의 기습적인 야합이 벌어진다. 복수노조 및 전임자임금 관련 노동법 조항의 적용을 연기하고 필수공익사업장에 대해 직권중재를 폐지하는 대신 필수업무 유지의무 부과 및 대체근로 허용 등이 합의된다. 민주노총은 이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고 한국노총에 대해 연대중단, 총파업 투쟁을 선언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총파업을 조직하지 못하는데, 이는 민주노총의 조직력과 지도력이 수년 동안 약화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 날의 야합은 이미 예상된 것이었고, 따라서 민주노총이 사실상 묵인, 방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상당히 제기되었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민주노총은 예상되는 상황에 대해 무능한 대응으로 일관하였는데, 공언한 것 처럼 ‘사회적 교섭’과 ‘투쟁’을 병행하지도 않았고, 이를 위한 전략과 전술을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민주노총 스스로가 사회적 교섭 방침은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결국 비정규직 악법과 함께 노사관계로드맵 상의 개악법안들도 모두 정기국회에 통과된다. 비정규직 법안과 필수업무유지제도 등은 지금도 심각한 후과를 낳고 있다.
당시에 비정규직 법안과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협상을 중시할 것인지 파업을 중시할 것인지가 겉으로 드러난 쟁점이었지만, 실제로 투쟁과 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총파업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좌파 우파 가릴 것 없이 모두 대안이 없었다. 12월에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이 통과되는 마지막 시점에서도 민주노총의 투쟁은 상징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더욱이 로드맵 수정안을 둘러싼 혼란은 총체적인 무력을 확연히 드러냈는데,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만들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되어온 결과였다.
사회적 대화 자체만을 놓고 보더라도, 2006년 노사정대표자회의의 파탄을 통해 지난 10년간 지배세력과 노동운동 내 일부 세력이 추진해 온 협상기제 제도화 노력이 잠정적으로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당분간은 사회적 교섭 방안이 시도될 수 없도록 그 동력이 사라진 상태며, 이후 더 이상은 중심 쟁점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노조 비리 사태 폭발
한편 2005년 노조 비리 사건이 다수 불거진다. 한국노총 권오만 사무총장의 비리 사태에 이어 민주노총 산하 현대자동차 노조, 기아자동차 노조의 채용비리 사건이 벌어진다. 급기야 10월 7일에는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비리혐의로 구속된다. 뒤이어 이 사태를 집행부가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민주노총 사무총국 활동가 15명의 집단사직 사태가 벌어진다. 노조활동가들의 지지성명이 이어졌다. 결국 2005년 10월 20일, 민주노총 이수호위원장이 사퇴 기자회견을 하기에 이른다. 사회진보연대는 민주노총 사무총국의 회원 활동가들과 함께 대응방향을 논의하는 한편, 민주노총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현장활동가들의 목소리를 여러 정치, 사회단체와 함께 조직했다.
사용자로부터 돈을 받는 비리사태가 민주노총 안에서, 그것도 민주노총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가지는 노조들인 자동차완성차 노조에서 발생했다는 것, 급기야 수석부위원장의 비리까지도 밝혀졌다는 점은 큰 충격이었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정규직 일자리가 사라지는 가운데, 일자리를 놓고 노조가 채용비리를 저지른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기업별노조들이 노사담합체계를 형성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사회적 합의주의도 문제지만, 현장에서 형성되고 있는 자본과 노조의 담합체계도 심각한 문제라는 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비리 사건은 단지 노조간부 개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점 외에도 노조에 대한 사측의 지배개입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민주노조의 생명이라고 할 자주성, 독립성이 점차 소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업별 노조를 지양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의 비리사건은 민주노조 운동 전체의 정당성을 크게 침식하는 사건이었다. 검찰이 법원에 신청한 구속영장 내용에 따르면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은 사용자측에 먼저 돈을 요구했고 돈을 받아 장인의 빚을 갚거나 적금에 가입하는 등 개인적 용도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으로 재임하던 중에도 돈을 받고 있었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애초에 밝혔던 위원장 사퇴 의사도 번복하면서 이를 개인의 비리사건으로 처리하려고 하면서 문제는 더욱 커지게 된다. 집행부 차원에서 책임을 지려는 자세가 없었던 것인데, 결국 대중적인 항의 때문에 이수호 위원장이 사퇴하게 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고 말았다.
‘사회적 교섭방침’으로 인한 민주노총의 내홍에 이어 발생한 비리사태, 민주노총 임원의 사퇴는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를 심각하게 드러냈다.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대표하는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정당성이 심각하게 침식되었다. 이미 민주노총의 요구와 투쟁이 조직된 (주로 정규직)노동자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것으로 대중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태는 노동자 운동의 위기를 가속한다.
이러한 사태를 통해 민주노조 진영 안에서도 노조 간부들이 노조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추구할 수 있다는 현실이 드러났다. 민주노총은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내부 규율의 강화 등, 이미 논의 중이던 ‘민주노총 혁신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혁신안
이렇게 민주노총이 내홍을 겪고 있는 동안 집행부는 민주노총 혁신안을 준비하여 제출했다. 이수호 집행부 출범 직후(2004년 3월 3일) 조직혁신방침이 결정되었고 2004년 말에는 조직혁신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조직혁신위원장은 비리혐의로 구속된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이었다.
조직혁신위원회는 2005년 중 논의를 지속했고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의 비리혐의가 터지기 직전에 혁신안을 제출했다. 조직혁신안에 담긴 핵심과제는 아래와 같다.
○ 산별이행안마련과 정규직-비정규미조직 연대 전면강화: 산별노조 건설
① 산별이행안 확정 및 대의원 대회 특별결의
○ 조직민주주의 확립, 도덕성 회복, 재정안정성 확립: 지도집행력 강화
② 대의원선거제도 개선 및 구성과 운영의 혁신
③ 재정투명성 강화
④ 재정안정성 강화
⑤ 조직집행체계의 정비
⑥ 정책대응력, 교육사업강화
혁신안은 대체로 조직체계를 정비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에는 민주노총에 대한 진단도 담겨있는데, 민주노총의 상태를 ‘사회적 연대성, 계급대표성의 위기,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진단과 대안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 기묘한 안이다. 사회진보연대는 민주노총의 이러한 혁신안이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를 넘어서는 대안이 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우선 혁신안은 산별노조 노선의 내적 모순에 대한 맹목을 보이고 있다. 이미 2005년 하반기에는 상반기 보건의료노조의 산별협약 10조2항 문제로 인하여 서울대병원지부를 비롯한 다수의 사업장이 산별노조를 탈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산별노조 건설도 중요하지만, 산별노조를 왜 건설하고, 어떻게 건설해야하는가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한편 이 혁신안은 ‘중앙 및 지방정부 예산사용에 대한 원칙을 재정립’ 하자면서 현재 사무실 임대비용으로 한정된 정부지원금 용도를 ‘사무실 및 사무공간의 유지, 보수, 관리비용, 교육원 설립과 교육기자재, 교육프로그램 비용, 중장기적인 다양한 정책연구 비용’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미조직, 비정규, 실업, 이주 등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상담 및 직업훈련 지원 등의 사업비, 남북교류협력기금’으로도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현재 민주노총 총연맹과 지역본부 사무실 임대료를 중앙정부와 지자체에서 지원받고 있는데, 이를 확대하여 각종 사업비와 조직화 비용까지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겠다는 것이다. 이후 40차 대의원대회(2007년 4월)에서 안건토론 중 대회가 유예됨으로서 시행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방안은 ‘자주성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현실성 있게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현실성에 타협하여 자주성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다. 정부에 재정을 의존하면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주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어떤 항목에 대해 재정 지원을 받을 것인가에 국한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이미 산별교섭 제도화와 노사정교섭 시도 등을 통해 진척되고 있던 노동운동 제도화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더욱 위험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점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혁신안은 핵심적으로는 조직의 민주주의, 도덕성 등을 특정한 ‘제도’를 도입하는 것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보는 데 문제가 있다. 혁신안은 선거제도, 규율제도, 집행체계 등을 정비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한편 당시 좌파들의 상당수는 ‘직선제’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러한 주장도 비록 혁신안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여 제출되었지만 결국 혁신안의 한계와 유사하게 제도의 도입을 통해서 조직을 혁신한다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직선제 도입은 긍정적인 혁신일 수 있지만, 조직혁신을 위한 과제는 아래로부터 대중운동의 활성화가 전제되어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도의 개선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그 제도가 어떤 혁신을 위해서 도입되는지가 분명해야하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진보연대가 제출한 입장은 “직선제는 조직혁신의 일부일 뿐이며 노동자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광범위한 참여와 운동의 지속적인 혁신을 추동하는 것에 더욱 무게를 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사후적으로 평가하건데 당시의 입장은 직선제 주장을 소극적으로 비판하는 데 머물렀는데, 이것으로는 직선제가 노동자 민주주의 실현의 유일한 출발점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비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직선제는 오히려 노조운동 안에서 의식적인 활동가로 구성된 대의원대회를 상대화할 뿐만 아니라, 투쟁과 활동에 적극적인 조직/조합원이나 그렇지 않은 조직/조합원 모두에게 1인 1표를 부여함으로써 노동운동 내 온건파가 항상 우세하게 하는데 유리한 제도라는 평가도 있기 때문이다.2)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 선거제도가 아니라 ‘어떤 운동’을 현장에서 조직할 것인가가 된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운동세력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실천을 조직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2004년 이후 사회적 교섭과 관련된 논쟁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 안에서 이념적 공유지반이 해체되어 갔다는 사정이 있다. 민주노총 안에서 합의될 수 있는 혁신의 내용은 극히 형식적인 것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노조운동이 점차 실리주의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념적 대안과 전망이라는 과제는 점차 요원한 일이 되어 갔고, 실용적인 제도의 개편이 주로 사고되는 상태에 이른다.
결국 이 문제는 노동조합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포괄하는 쟁점이라는 점에서, 이제까지 이루어진 민주노총 혁신논의가 가지는 한계의 극복이라는 과제와 일치하는 문제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가 ‘제도의 위기’가 아니라 (조합원들에게나 미조직 노동자 대중에게나) 정당성의 위기에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 바로 운동의 ‘방향’ 즉 노선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선을 수립하기 위한 운동의 이념 혁신이 문제다.
사회진보연대는 당시 「진보진영 단일연대체 건설과 민주노총 조직혁신안 및 노사정대표자회의 비판 -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즈음하여」이라는 문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노동운동의 근본적 혁신이요, 노동운동을 다시금 보편적 해방운동으로 복구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운동의 사상과 이념, 조직, 일상 활동, 연대운동 등 노동운동의 전 영역에 걸친 혁신을 의미한다. 즉,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에 조응하는 사회적 타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통한 노조의 사회운동적 경향 강화, 노동자 민주주의와 운동성의 복구, 반전-대안세계화 운동 및 여성운동과의 결합 등을 지향하는 것이다.”
민주노총 혁신은 제도와 기구의 혁신이 아니라 노동운동 자체의 혁신으로 이해되어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운동적 성격을 복구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2008년을 거치면서 민주노총 혁신안은 이제 제도개선 중에서도 ‘직선제’ 도입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다. 그마저도 2009년 말 민주노총 임원 직선제 선거 준비부터 난항을 겪고 있는 중이다.
“제도적 참여의 대장정”, 어디로 가는가?
이 글에서 검토한 주제는 2004년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 당선 이후 민주노총이라는 총연맹의 노선과 관련된 것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혁신에 대한 다른 쟁점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비정규직 투쟁과 조직화, 지역운동의 활성화 등 노조운동 혁신에 대한 많은 쟁점들은 다루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2004년 이수호 집행부가 당선된 이후 긴 시간동안 ‘국민파’의 집권을 통해 일관된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지도력은 형성되지 못했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제기하는 논란의 대상이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조직 내 합의를 통해 추진한다는 자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쟁점이 되는 사안은 극단적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대립은 주로 ‘정파적 대립’으로 이해되곤 했는데, 민주노총은 오히려 ‘정파를 지양하자’고 주장하면서 집행부에 반대하는 입장에 부정적인 색깔을 칠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을 만들어 낸 것은 오히려 집행부의 자세라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한편 집행부의 일관된 노선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기간 동안에는 안정적인 노사정 협의기구를 제도화하고 이를 통해서 사회적 교섭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3)
노사정교섭과 산업별교섭을 함께 안정화시킨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후기에 반노동자 정책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급기야 지난 대선으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이런 전략은 실행이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교섭 요구 대신 이명박 정권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민주노총 스스로가 사회적 교섭은 정세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갈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에만 있지 않다.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적 합의주의 논쟁이나 이후 민주노총 혁신안과 관련된 입장에서 개별 쟁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노동자운동의 복원을 위한 운동이념의 재구성과 사회운동적 성격의 강화와 같은 것들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러한 입장을 ‘사회운동 노조주의’, ‘노동자사회운동’, ‘사회운동노조’ 등의 개념으로 지칭해왔다. 이러한 대안을 노동운동 내에서 만들어가기 위한 집단적 실천과 토론이 없이는 모든 쟁점에 대한 논쟁은 정파적 대립의 외양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사회진보연대는 2004년 이후 노동자운동의 혁신과 부활을 위해서는 이념의 재건은 물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국민파의 민주노총 장기집권 속에서, 민주노조 운동 혁신의 쟁점이 한편으로는 정파적인 이해의 단층선에 따라서, 한편으로는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개편으로 제기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운동의 이념과 실천을 혁신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2008년 현재 시점에서도 더욱 심각하게 해체되고 있는 민주노조 운동의 지도력의 복원은 아래로부터 운동의 혁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에 따라 2004년 2월부터 <지역·부문·현장 연석회의>를 두었고, 2004년 3월에는 <노동부문연석회의>를 구성(2008년 초 <노동위원회>로 재편)하여 지역과 현장에 활동가를 배치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다. 이후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념적 과제로 ‘노동자사회운동’을 제기하고, 쟁점에 대한 대응, 현장활동가 교육과 배치 등 노력을 계속해왔다. 특히 지역운동 활성화가 아래로부터의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전선의 구축에 핵심적이라는 문제의식에 따라 노동자 사회운동론, 지역운동론 등을 정립하고 활동가를 배치하였다. 2007년 이후에는 ‘사회운동포럼’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기획단을 노동, 사회단체들과 함께 조직하고 노동자운동을 혁신하기 위한 공동의 이념, 노선을 수립하기 위한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2008년을 거치면서 ‘노동운동포럼’의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심각한 경제위기가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조운동의 혁신은 단지 내부의 체계, 기구, 운영을 정비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은 더욱 자명해지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러한 이념적 대안, 운동적 대안을 수립하기 위한 토론을 노조운동 안에서 조직하는 것은 물론, 그 대안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조직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경제위기를 넘어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주력으로서 노조의 역할을 강화하는, 대안노조 운동을 노동운동 안에서 조직하는 것이 과제다. 노동조합 운동을 재건해야할 시기다.
1)
당시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방침 반대 입장 중 전술적으로 노정대화를 추진한다면 어떤 조건과 전술이 필요한지를 언급한 것은 노중기 정도가 유일했다. 사회적합의주의 현황과 문제점」, 『노무현정권의‘사회적 합의’공세와 노동운동의 대응토론회 자료집』(2004.7.3)을 참조하시오.본문으로
2)『약자들의 사회협약 - 아일랜드, 이탈리아 및 한국 사례 비교연구』, 임상훈, 루치오 바카로, 한국노동연구원. ILO부설의 국제노동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Labour Stidies) 연구원이기도 한 바카로는 이 글에서 아일랜드, 이탈리아, 한국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약한노조-약한정부의 사회협약이 실현가능한 조건을 검토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약자들의 사회협약”이 실현되지 않은 이유를 노조의 강경파에서 찾는다. 따라서 사회협약 실현을 위해서는 온건파가 노조집행부를 운영해야하는데, 이를 위한 여러 조치 중에는 직선제도 포함된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사례는 당시 사회적 합의주의 논쟁 당시 사회적 교섭 찬성론자들에게 주로 언급되기도 했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왜 필요한가?」 <민주노총 정책토론회 : 사회적 교섭, 어떻게 볼 것인가(2005.3. 11.)>, 박용석(민주노총 공공연맹 부위원장).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전략」,
3)노동연구원의 최영기는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서론을 통해 “시장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를 위해서 노동운동은 시장경제의 거버넌스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만들어가야 한다. 즉 제도적 참여의 대장정에 나서야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노총이 2004년 이후에 걸어온 길은 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본문으로
2004년 1월,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이수호 후보가 당선된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총에서는 이른바 ‘국민파’의 장기집권이 지속된다. 2006년 보궐선거에서 조준호 위원장이 당선되고, 그 뒤를 이석행 위원장이 잇는 과정은 ‘국민파’가 근소한 차이로나마 과반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2004년 이후 민주노총을 집권하고 있는 ‘국민파’가 그리는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상은 산업별교섭-노사정교섭의 안정적인 제도화다. 이를 통해서 ‘사회개혁적’인(이 말은 때로는 ‘사회공공적’ 혹은 심지어 ‘사회운동적’이라는 말로 대체된다) 과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이러한 노선을 실현하기 위한 일련의 사업을 계속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안정적일 수 없었는데, 민주노총 안에서 폭넓은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시도는 조직 내 갈등을 증폭시키고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민주노총의 위기에 대한 인식과 그 대안에 대한 논란을 돌아보고, 앞으로 민주노조 운동을 혁신하는데 필요한 시사점을 살펴본다. 또 이 과정에서 사회진보연대가 가졌던 입장과 활동을 돌아본다.
사회적 합의주의 논쟁
민주노총은 2004년부터 사회적 교섭과 관련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사전작업에 들어간다. 민주노총 내 각급 단위 회의에서 사회적 교섭과 관련된 토론을 진행하는 한편, 총연맹 차원에서는 사회적 교섭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을 준비한다.
2005년부터 사회적 교섭은 쟁점으로 부각된다. 1월 20일에 열린 대의원대회는 사회적 교섭 안건에 대한 찬반토론이 격렬하게 이어지다가 무산된다. 이어 3월 14일에 열린 대의원대회에서는 이 안건을 놓고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고, 급기야 단상점거와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한다. 당시 보수언론은 이 사건을 민주노총의 과격파들에 의한 “폭력사태”로 묘사하며 민주노총이 정파대립으로 인해 조직적 위기에 빠졌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결국 민주노총은 당시 논의가 막 시작된 비정규직법안에 대해서만 정부와 협상한다는 전제를 두고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하기로 한다. 당시 정부와 여당은 4월 내에 국회에서 비정규 개악법안을 처리하고 6월에 노사관계 로드맵을 처리한다는 일정표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노동운동 내에서 ‘현장파’ 혹은 ‘좌파’의 상당수는 <사회적 합의주의/노사정담합 분쇄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전노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항의를 조직하거나 현장의 반대를 조직하는 활동 주로 전노투를 통해 이루어졌다.
민주노총 안에서는 1998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IMF 협약을 관철하기 위해서 소집되었던 노사정위원회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이 많았다. 상황이 이러해서 민주노총은 ‘사회적 교섭은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노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며 또한 기존 노사정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실효성 있게 합의사항을 이행하는 새로운 틀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전노투는 ‘사회적 교섭정책은 사회적 합의주의일 뿐이며 사회적 합의주의는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서 노동자 죽이기 프로젝트일 뿐’이라며 민주노총의 입장에 반박한다. (조돈희 전노투 상황실장,「사회적 교섭 방침 안건은 폐기되어야 한다!」, 『민주노총 토론회: 사회적 교섭, 어떻게 볼 것인가 자료집』, 2005.3.11.)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적 합의 반대라는 단일 쟁점으로 좌파연대체를 구성하는 것과 사회적 교섭 참가/불참을 민주노조 운동 내 중심 쟁점으로 설정하는 것에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노투에 ‘참관’으로 연대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사회진보연대 역시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민주노총 내에서 반대 입장을 조직하는 한편 노동조합을 넘어선 사회운동의 대응을 형성하는 활동에 함께 했다. 당시 입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코퍼러티즘은 바람직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실현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서구의 코퍼러티즘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노동측면에서 보완하기 위한 ‘공급중시 코퍼러티즘’으로 변모한다. 더구나 한국과 같은 반주변 국가에서는 국가가 합의를 위해 양보할 것도 별로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오히려 노동의 유연화 등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정책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제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민주노총이 추진한 ‘선한’ 사회적 교섭은 애초부터 실현가능성이 없었다. 이는 이후 노사정대표자회의 파탄으로 다시금 확인된다. 2006년에 진행된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오른 의제는 복수노조와 교섭창구단일화, 전임자임금지급 금지, 대체노동 및 필수공익사업장 범위 확대 등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들이었다.
더구나 진행 양상을 보더라도, 노사정위원회는 지속적으로 정부의 노사관계 관리기구로서 역할을 할 뿐이었다. 민주노총이 대정부 협상을 요구하면 정부는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결국 노사정위원회, 사회적 교섭이라는 쟁점은 민주노총의 지도력을 분할시키면서 조직을 약화시켰는데, 정부는 이것만으로도 원하는 성과를 충분히 얻은 셈이다. 민주노총이 거대한 자충수를 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 모든 실패 이후에도 이를 인정하는 평가를 하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논의 방식이 노사정 교섭과 관련된 모든 쟁점을 “전부 아니면 전무”로 환원하며 논의를 지나치게 과열되게 만들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일정한 정세에서는 노사정 교섭에 노동조합이 참여할 수도 있다. 혹은 교섭을 오히려 전술적으로 요구할 수도 있다. 1)
사회적 합의주의는 민주노조 운동의 전략적 전환의 문제고, 사회진보연대는 이 노선에 단호하게 반대해왔다. 그러나 또 한편 노정 교섭은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전술의 문제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반대론자 앞에서는 노사정위원회를 전술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인 양 변명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략적인 방향이라고 주장하면서 전혀 신뢰를 주지 않았다. 사실 민주노총의 입장은 전략적인 수준에서 노조운동의 노선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아니다’라는 민주노총의 주장은 공허한 변명이었다. 논의 과열의 책임은 민주노총 집행부에 있었다.
결국 쟁점이 이렇게 형성된 탓에 노사정위와 같은 사회적 합의기구가 아니라 특정정세에서 필요할 수 있는 노사정교섭의 전술적 활용마저도 모두 ‘논외’가 되었다. 이는 민주노총이 이후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무능하게 대응한 것과도 무관치 않다.
이후 민주노총은 노사정대표자회의에 참여하여 비정규직 법안과 노사관계로드맵에 관한 논의를 진행한다. 그러나 2006년 9월 11일 타협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노총과 경총, 노동부의 기습적인 야합이 벌어진다. 복수노조 및 전임자임금 관련 노동법 조항의 적용을 연기하고 필수공익사업장에 대해 직권중재를 폐지하는 대신 필수업무 유지의무 부과 및 대체근로 허용 등이 합의된다. 민주노총은 이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고 한국노총에 대해 연대중단, 총파업 투쟁을 선언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총파업을 조직하지 못하는데, 이는 민주노총의 조직력과 지도력이 수년 동안 약화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 날의 야합은 이미 예상된 것이었고, 따라서 민주노총이 사실상 묵인, 방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상당히 제기되었다. 그렇지는 않더라도, 민주노총은 예상되는 상황에 대해 무능한 대응으로 일관하였는데, 공언한 것 처럼 ‘사회적 교섭’과 ‘투쟁’을 병행하지도 않았고, 이를 위한 전략과 전술을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민주노총 스스로가 사회적 교섭 방침은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결국 비정규직 악법과 함께 노사관계로드맵 상의 개악법안들도 모두 정기국회에 통과된다. 비정규직 법안과 필수업무유지제도 등은 지금도 심각한 후과를 낳고 있다.
당시에 비정규직 법안과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협상을 중시할 것인지 파업을 중시할 것인지가 겉으로 드러난 쟁점이었지만, 실제로 투쟁과 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총파업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좌파 우파 가릴 것 없이 모두 대안이 없었다. 12월에 노사관계 로드맵 법안이 통과되는 마지막 시점에서도 민주노총의 투쟁은 상징적인 수준에 불과했다. 더욱이 로드맵 수정안을 둘러싼 혼란은 총체적인 무력을 확연히 드러냈는데,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만들지 못하는 구조가 고착되어온 결과였다.
사회적 대화 자체만을 놓고 보더라도, 2006년 노사정대표자회의의 파탄을 통해 지난 10년간 지배세력과 노동운동 내 일부 세력이 추진해 온 협상기제 제도화 노력이 잠정적으로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당분간은 사회적 교섭 방안이 시도될 수 없도록 그 동력이 사라진 상태며, 이후 더 이상은 중심 쟁점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노조 비리 사태 폭발
한편 2005년 노조 비리 사건이 다수 불거진다. 한국노총 권오만 사무총장의 비리 사태에 이어 민주노총 산하 현대자동차 노조, 기아자동차 노조의 채용비리 사건이 벌어진다. 급기야 10월 7일에는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비리혐의로 구속된다. 뒤이어 이 사태를 집행부가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민주노총 사무총국 활동가 15명의 집단사직 사태가 벌어진다. 노조활동가들의 지지성명이 이어졌다. 결국 2005년 10월 20일, 민주노총 이수호위원장이 사퇴 기자회견을 하기에 이른다. 사회진보연대는 민주노총 사무총국의 회원 활동가들과 함께 대응방향을 논의하는 한편, 민주노총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현장활동가들의 목소리를 여러 정치, 사회단체와 함께 조직했다.
사용자로부터 돈을 받는 비리사태가 민주노총 안에서, 그것도 민주노총에서 가장 중요한 위상을 가지는 노조들인 자동차완성차 노조에서 발생했다는 것, 급기야 수석부위원장의 비리까지도 밝혀졌다는 점은 큰 충격이었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정규직 일자리가 사라지는 가운데, 일자리를 놓고 노조가 채용비리를 저지른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기업별노조들이 노사담합체계를 형성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사회적 합의주의도 문제지만, 현장에서 형성되고 있는 자본과 노조의 담합체계도 심각한 문제라는 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비리 사건은 단지 노조간부 개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점 외에도 노조에 대한 사측의 지배개입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민주노조의 생명이라고 할 자주성, 독립성이 점차 소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업별 노조를 지양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의 비리사건은 민주노조 운동 전체의 정당성을 크게 침식하는 사건이었다. 검찰이 법원에 신청한 구속영장 내용에 따르면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은 사용자측에 먼저 돈을 요구했고 돈을 받아 장인의 빚을 갚거나 적금에 가입하는 등 개인적 용도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으로 재임하던 중에도 돈을 받고 있었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애초에 밝혔던 위원장 사퇴 의사도 번복하면서 이를 개인의 비리사건으로 처리하려고 하면서 문제는 더욱 커지게 된다. 집행부 차원에서 책임을 지려는 자세가 없었던 것인데, 결국 대중적인 항의 때문에 이수호 위원장이 사퇴하게 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고 말았다.
‘사회적 교섭방침’으로 인한 민주노총의 내홍에 이어 발생한 비리사태, 민주노총 임원의 사퇴는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를 심각하게 드러냈다.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대표하는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에는 정당성이 심각하게 침식되었다. 이미 민주노총의 요구와 투쟁이 조직된 (주로 정규직)노동자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것으로 대중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태는 노동자 운동의 위기를 가속한다.
이러한 사태를 통해 민주노조 진영 안에서도 노조 간부들이 노조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추구할 수 있다는 현실이 드러났다. 민주노총은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내부 규율의 강화 등, 이미 논의 중이던 ‘민주노총 혁신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 혁신안
이렇게 민주노총이 내홍을 겪고 있는 동안 집행부는 민주노총 혁신안을 준비하여 제출했다. 이수호 집행부 출범 직후(2004년 3월 3일) 조직혁신방침이 결정되었고 2004년 말에는 조직혁신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조직혁신위원장은 비리혐의로 구속된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이었다.
조직혁신위원회는 2005년 중 논의를 지속했고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의 비리혐의가 터지기 직전에 혁신안을 제출했다. 조직혁신안에 담긴 핵심과제는 아래와 같다.
○ 산별이행안마련과 정규직-비정규미조직 연대 전면강화: 산별노조 건설
① 산별이행안 확정 및 대의원 대회 특별결의
○ 조직민주주의 확립, 도덕성 회복, 재정안정성 확립: 지도집행력 강화
② 대의원선거제도 개선 및 구성과 운영의 혁신
③ 재정투명성 강화
④ 재정안정성 강화
⑤ 조직집행체계의 정비
⑥ 정책대응력, 교육사업강화
혁신안은 대체로 조직체계를 정비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여기에는 민주노총에 대한 진단도 담겨있는데, 민주노총의 상태를 ‘사회적 연대성, 계급대표성의 위기,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진단과 대안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 기묘한 안이다. 사회진보연대는 민주노총의 이러한 혁신안이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를 넘어서는 대안이 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비판했다.
우선 혁신안은 산별노조 노선의 내적 모순에 대한 맹목을 보이고 있다. 이미 2005년 하반기에는 상반기 보건의료노조의 산별협약 10조2항 문제로 인하여 서울대병원지부를 비롯한 다수의 사업장이 산별노조를 탈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산별노조 건설도 중요하지만, 산별노조를 왜 건설하고, 어떻게 건설해야하는가가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한편 이 혁신안은 ‘중앙 및 지방정부 예산사용에 대한 원칙을 재정립’ 하자면서 현재 사무실 임대비용으로 한정된 정부지원금 용도를 ‘사무실 및 사무공간의 유지, 보수, 관리비용, 교육원 설립과 교육기자재, 교육프로그램 비용, 중장기적인 다양한 정책연구 비용’으로 확대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미조직, 비정규, 실업, 이주 등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상담 및 직업훈련 지원 등의 사업비, 남북교류협력기금’으로도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현재 민주노총 총연맹과 지역본부 사무실 임대료를 중앙정부와 지자체에서 지원받고 있는데, 이를 확대하여 각종 사업비와 조직화 비용까지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겠다는 것이다. 이후 40차 대의원대회(2007년 4월)에서 안건토론 중 대회가 유예됨으로서 시행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방안은 ‘자주성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현실성 있게 재정을 확보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현실성에 타협하여 자주성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다. 정부에 재정을 의존하면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주적인 활동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어떤 항목에 대해 재정 지원을 받을 것인가에 국한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이미 산별교섭 제도화와 노사정교섭 시도 등을 통해 진척되고 있던 노동운동 제도화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더욱 위험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점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혁신안은 핵심적으로는 조직의 민주주의, 도덕성 등을 특정한 ‘제도’를 도입하는 것으로 확보할 수 있다고 보는 데 문제가 있다. 혁신안은 선거제도, 규율제도, 집행체계 등을 정비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한편 당시 좌파들의 상당수는 ‘직선제’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러한 주장도 비록 혁신안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여 제출되었지만 결국 혁신안의 한계와 유사하게 제도의 도입을 통해서 조직을 혁신한다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직선제 도입은 긍정적인 혁신일 수 있지만, 조직혁신을 위한 과제는 아래로부터 대중운동의 활성화가 전제되어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도의 개선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그 제도가 어떤 혁신을 위해서 도입되는지가 분명해야하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진보연대가 제출한 입장은 “직선제는 조직혁신의 일부일 뿐이며 노동자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광범위한 참여와 운동의 지속적인 혁신을 추동하는 것에 더욱 무게를 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사후적으로 평가하건데 당시의 입장은 직선제 주장을 소극적으로 비판하는 데 머물렀는데, 이것으로는 직선제가 노동자 민주주의 실현의 유일한 출발점이라는 일각의 주장을 비판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직선제는 오히려 노조운동 안에서 의식적인 활동가로 구성된 대의원대회를 상대화할 뿐만 아니라, 투쟁과 활동에 적극적인 조직/조합원이나 그렇지 않은 조직/조합원 모두에게 1인 1표를 부여함으로써 노동운동 내 온건파가 항상 우세하게 하는데 유리한 제도라는 평가도 있기 때문이다.2)
그렇다면 문제는 더욱 선거제도가 아니라 ‘어떤 운동’을 현장에서 조직할 것인가가 된다. 그런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운동세력이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실천을 조직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2004년 이후 사회적 교섭과 관련된 논쟁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 안에서 이념적 공유지반이 해체되어 갔다는 사정이 있다. 민주노총 안에서 합의될 수 있는 혁신의 내용은 극히 형식적인 것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노조운동이 점차 실리주의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념적 대안과 전망이라는 과제는 점차 요원한 일이 되어 갔고, 실용적인 제도의 개편이 주로 사고되는 상태에 이른다.
결국 이 문제는 노동조합운동의 이념과 전망을 포괄하는 쟁점이라는 점에서, 이제까지 이루어진 민주노총 혁신논의가 가지는 한계의 극복이라는 과제와 일치하는 문제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가 ‘제도의 위기’가 아니라 (조합원들에게나 미조직 노동자 대중에게나) 정당성의 위기에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 바로 운동의 ‘방향’ 즉 노선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선을 수립하기 위한 운동의 이념 혁신이 문제다.
사회진보연대는 당시 「진보진영 단일연대체 건설과 민주노총 조직혁신안 및 노사정대표자회의 비판 -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즈음하여」이라는 문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노동운동의 근본적 혁신이요, 노동운동을 다시금 보편적 해방운동으로 복구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운동의 사상과 이념, 조직, 일상 활동, 연대운동 등 노동운동의 전 영역에 걸친 혁신을 의미한다. 즉, 신자유주의 위기관리에 조응하는 사회적 타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통한 노조의 사회운동적 경향 강화, 노동자 민주주의와 운동성의 복구, 반전-대안세계화 운동 및 여성운동과의 결합 등을 지향하는 것이다.”
민주노총 혁신은 제도와 기구의 혁신이 아니라 노동운동 자체의 혁신으로 이해되어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사회운동적 성격을 복구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2008년을 거치면서 민주노총 혁신안은 이제 제도개선 중에서도 ‘직선제’ 도입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다. 그마저도 2009년 말 민주노총 임원 직선제 선거 준비부터 난항을 겪고 있는 중이다.
“제도적 참여의 대장정”, 어디로 가는가?
이 글에서 검토한 주제는 2004년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 당선 이후 민주노총이라는 총연맹의 노선과 관련된 것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혁신에 대한 다른 쟁점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 비정규직 투쟁과 조직화, 지역운동의 활성화 등 노조운동 혁신에 대한 많은 쟁점들은 다루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2004년 이수호 집행부가 당선된 이후 긴 시간동안 ‘국민파’의 집권을 통해 일관된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지도력은 형성되지 못했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제기하는 논란의 대상이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조직 내 합의를 통해 추진한다는 자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쟁점이 되는 사안은 극단적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대립은 주로 ‘정파적 대립’으로 이해되곤 했는데, 민주노총은 오히려 ‘정파를 지양하자’고 주장하면서 집행부에 반대하는 입장에 부정적인 색깔을 칠하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을 만들어 낸 것은 오히려 집행부의 자세라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한편 집행부의 일관된 노선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기간 동안에는 안정적인 노사정 협의기구를 제도화하고 이를 통해서 사회적 교섭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3)
노사정교섭과 산업별교섭을 함께 안정화시킨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후기에 반노동자 정책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급기야 지난 대선으로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이런 전략은 실행이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교섭 요구 대신 이명박 정권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민주노총 스스로가 사회적 교섭은 정세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갈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에만 있지 않다.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적 합의주의 논쟁이나 이후 민주노총 혁신안과 관련된 입장에서 개별 쟁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노동자운동의 복원을 위한 운동이념의 재구성과 사회운동적 성격의 강화와 같은 것들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러한 입장을 ‘사회운동 노조주의’, ‘노동자사회운동’, ‘사회운동노조’ 등의 개념으로 지칭해왔다. 이러한 대안을 노동운동 내에서 만들어가기 위한 집단적 실천과 토론이 없이는 모든 쟁점에 대한 논쟁은 정파적 대립의 외양을 띌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사회진보연대는 2004년 이후 노동자운동의 혁신과 부활을 위해서는 이념의 재건은 물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국민파의 민주노총 장기집권 속에서, 민주노조 운동 혁신의 쟁점이 한편으로는 정파적인 이해의 단층선에 따라서, 한편으로는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개편으로 제기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운동의 이념과 실천을 혁신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2008년 현재 시점에서도 더욱 심각하게 해체되고 있는 민주노조 운동의 지도력의 복원은 아래로부터 운동의 혁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에 따라 2004년 2월부터 <지역·부문·현장 연석회의>를 두었고, 2004년 3월에는 <노동부문연석회의>를 구성(2008년 초 <노동위원회>로 재편)하여 지역과 현장에 활동가를 배치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다. 이후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념적 과제로 ‘노동자사회운동’을 제기하고, 쟁점에 대한 대응, 현장활동가 교육과 배치 등 노력을 계속해왔다. 특히 지역운동 활성화가 아래로부터의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전선의 구축에 핵심적이라는 문제의식에 따라 노동자 사회운동론, 지역운동론 등을 정립하고 활동가를 배치하였다. 2007년 이후에는 ‘사회운동포럼’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노동운동기획단을 노동, 사회단체들과 함께 조직하고 노동자운동을 혁신하기 위한 공동의 이념, 노선을 수립하기 위한 토론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2008년을 거치면서 ‘노동운동포럼’의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심각한 경제위기가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조운동의 혁신은 단지 내부의 체계, 기구, 운영을 정비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은 더욱 자명해지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러한 이념적 대안, 운동적 대안을 수립하기 위한 토론을 노조운동 안에서 조직하는 것은 물론, 그 대안이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조직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경제위기를 넘어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안사회를 건설하는 주력으로서 노조의 역할을 강화하는, 대안노조 운동을 노동운동 안에서 조직하는 것이 과제다. 노동조합 운동을 재건해야할 시기다.
1)
당시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방침 반대 입장 중 전술적으로 노정대화를 추진한다면 어떤 조건과 전술이 필요한지를 언급한 것은 노중기 정도가 유일했다. 사회적합의주의 현황과 문제점」, 『노무현정권의‘사회적 합의’공세와 노동운동의 대응토론회 자료집』(2004.7.3)을 참조하시오.본문으로
2)『약자들의 사회협약 - 아일랜드, 이탈리아 및 한국 사례 비교연구』, 임상훈, 루치오 바카로, 한국노동연구원. ILO부설의 국제노동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for Labour Stidies) 연구원이기도 한 바카로는 이 글에서 아일랜드, 이탈리아, 한국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약한노조-약한정부의 사회협약이 실현가능한 조건을 검토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약자들의 사회협약”이 실현되지 않은 이유를 노조의 강경파에서 찾는다. 따라서 사회협약 실현을 위해서는 온건파가 노조집행부를 운영해야하는데, 이를 위한 여러 조치 중에는 직선제도 포함된다. 아일랜드와 이탈리아 사례는 당시 사회적 합의주의 논쟁 당시 사회적 교섭 찬성론자들에게 주로 언급되기도 했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 왜 필요한가?」 <민주노총 정책토론회 : 사회적 교섭, 어떻게 볼 것인가(2005.3. 11.)>, 박용석(민주노총 공공연맹 부위원장).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전략」,
3)노동연구원의 최영기는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서론을 통해 “시장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 강화를 위해서 노동운동은 시장경제의 거버넌스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을 만들어가야 한다. 즉 제도적 참여의 대장정에 나서야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노총이 2004년 이후에 걸어온 길은 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본문으로
10년을 돌아보며,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함께 모색하자
이 글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이래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여성들을 어떻게 활용해왔는지, 그것이 여성을 포함한 노동자계급 전반에는 어떤 의미였는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은 어떤 대응을 했고 그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가족을 매개로 여성의 노동권과 성욕의 권리를 억압해 온 역사와 신자유주의의 여성 활용 정책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여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던 노동자운동에 대한 비판이 포함된다. 이러한 비판은 경제위기, 금융위기가 심화되는 오늘날 노동자운동이 어떤 전망을 가질 것인가를 묻는 페미니즘의 질문이기도 하다. 이 글은 사회진보연대와 여성위원회의 문제의식과 활동을 중심으로 쓰였다. 여성해방과 사회의 변혁은 분리될 수 없다는 이념의 정세적인 표현으로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을 형성하고자 시도했던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의 활동은 되짚어 보건대 성과보다는 한계가 많았다. 그 한계들은 이후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가 여성운동의 전망과 실천을 개척해가는 데 있어서 깊이 각인해야 할 교훈이다. 이와 더불어 그 한계들이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 여성운동의 대안 마련에도 시사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997년 외환위기와 여성의 위기
1997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여성의 위기, 가족의 위기로 드러났다. 사실 외환위기 당시 몰아쳤던 각종 구조조정 정책이 젠더 중립적인 것은 아니었다. 가장 가시적이고 일차적인 차별적 양태는 여성의 일자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기업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력감축 계획의 대상은 주로 여성이었다. 맞벌이 여성, 사내부부인 여성, 장기근속 여성들은 가장 먼저 퇴직을 강요당하거나 정리해고 되었다.1)
이러한 정리해고는 주로 처자식을 벌어 먹여야하는 남성 가장보다는 여성이 좀 덜 벌거나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는데, 결국 이는 ‘남성 생계부양자 - 여성 가사담당자’라는 성별분업의 논리가 구조조정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서 주요한 축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사실 소수의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가족임금을 보장받지 못했고, 국가 차원의 복지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한국에서 여성은 외환위기 이전에도 가족의 생계보조자이자 최후의 복지 제공자 역할을 해왔다.2)
남편의 부족한 임금과 사회가 제공하지 않는 부족한 복지는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을 통해 보충되었고, 사회는 여성들의 이런 희생을 언제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 3)
외환위기와 이에 따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이러한 여성들의 이중부담을 더욱 증가시켰다.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리해고와 대량실업의 양산, 실질임금 하락으로 노동자 계급의 가계는 극적인 소득감소를 경험했다. 여성들은 가계소득을 보충하기 위해서 임시직, 계약직 등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라도 찾아야했고, 가계유지비용이 급증하자 가사노동을 담당하고 가족구성원을 보살피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의무는 더욱 강화되어 무임 가사노동도 더욱 늘려야 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야기한 각종 사회적 비용은 당연한 것처럼 여성에게 전가되었으며, 여성들은 절약과 노동력 출혈판매를 통해서 이런 위기 비용을 감내하고 가족을 유지해야 했다.
노동자운동의 대응
당시 노동자운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성차별적인 양태가 무엇을 의미하고,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여성 우선해고를 용인하거나 여성의 희생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시의 위기를 넘기려했다.
자본의 위기극복 전략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생산부문을 파괴하고 금융적 팽창을 추구하며, 이에 따라 노동의 유연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자본의 노동유연화 전략은 일시에 전면적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 내부의 다양한 차이와 분할을 매개로 노동자 간의 경쟁과 갈등을 심화시키며 진행된다. 여성을 우선 해고한다는 구조조정 계획은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단 한 번의 의심조차 품지 않았던 ‘남성 가장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관념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대량해고의 위협과 위기감 앞에서 여성 우선해고 조치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노동자계급 가족 전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로 인식되었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이 ‘사회적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합의한 정리해고, 파견근로제는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기업들은 연달아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했으나,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정리해고 철회를 걸고 36일 간의 파업을 벌인 현대자동차 노조의 투쟁은 대표적인 사례다. 법제화된 정리해고를 실제 실행할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상황인지라 사측은 정리해고 자체의 철회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고, 결국 파업은 식당 여성노동자 144명 전원을 포함한 277명 정리해고 수용으로 마무리되었다. 식당 여성노동자 전원의 정리해고로 당장 수천 명의 일자리를 지킬 수는 있었지만, 이는 부메랑이 되어 노동자계급을 다시 공격했다. 그 시작은 여성이었으나 그 후 하청노동자, 파견노동자, 이주노동자로 끝없이 확대되었다.
당시 노동자운동의 대응은 한국 노동자운동이 여성해방의 과제를 자기 과제로 인식하고 싸운 경험이 없었던 상황에서 기인한다. 노동자운동은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이 가사를 전담한다는 성별분업 모델, 가정은 정치의 장소가 아니고 여성의 노동은 부차적이라는 이데올로기, 여성은 남성에 미달하는 존재라는 상징을 수용해왔다. 이러한 여성의 처지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노동해방과 사회의 변혁을 위해 반드시 바뀌어야 할 투쟁의 대상임을 사고하지 못했다. 여성의 이해와 요구는 모성보호, 출산 및 육아 휴직과 같은 보호조치로 제한적으로 인식되었고, 여성운동은 특수한 부문의 이해를 대변하는 운동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가 실직의 위험에 놓인 외환위기 상황에서 여성이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당시 노동자운동이 여성을 희생해서 위기를 극복해보려던 시도가 한계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여성노동의 특질이었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은 전체 노동자에게 일반화되었고, 대다수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현실은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공격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노동자에게 전가되는 위기를 여성의 희생을 통해 극복하려했던 노동자운동의 대응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결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양자가 적대적일 수 있다는 사고를 낳았다.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이하 100인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운동사회 내에서 발생한 16개의 성폭력 사건이 가해자 실명을 포함해 공개되었다. <100인위원회>는 운동사회의 여성문제에 대한 맹목과 억압적 성격을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기함으로써 사회운동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운동사회 내의 가부장적 구조, 문화, 이데올로기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성폭력이라는 단일 이슈로 제기하고 이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성된 개별 사건이 논쟁거리로 부각됨으로써 <100인위원회>가 제기하고자 했던 애초의 문제의식은 소실되고 성적 폭력의 문제로 축소되었다.4)
이후 논쟁은 성적 자유주의자들의 악의적인 공격, 가해자의 반격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많은 운동 단위들은 형식적인 성명서로 상황을 모면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가해자에 대한 온정적 시각, 2차, 3차의 가해, 조직보위의 논리와 당면투쟁의 선차성 논리, 가해자의 역고소 등으로 인해 공개된 사건마저 ‘해결’이 어려워지면서 <100인위원회> 사건 공개의 현실 가능한 결론은 각 단위에 반성폭력 규약 작성을 장려하는 것이 되었다.
한편 <100인위원회>의 활동은 노동자운동, 사회운동 내 여성 활동가들이 여성 정체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모임이나 여성위원회 등을 결성하게 되었다. 여성 활동가들은 운동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을 기각하고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운동들과 여성운동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신념과 대의에 따라 헌신해 온 운동이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성별분업과 여성 차별적 관행을 답습하면서, 또한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거나 성적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여성 활동가들의 생존을 위협할 때 여성들은 과연 이 운동이 자신의 해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갈등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여성 활동가들은 운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운동을 바꾸는 길을 택하려 했다. 그러나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한 감정적 동일화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변혁하기 위한 운동을 사고하지 못했고, <100인위원회>가 제시한 광의의 성폭력 개념을 통해 여성 활동가의 억압적 현실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5)
그러나 운동사회의 여성 배제와 억압적 성격을 비판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반성폭력 운동은 곧 여성 활동가들에게 또 다른 곤란들을 안겨주었다. 반성폭력 운동의 결과가 규약 제정으로 귀결되면서 공동체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논의보다는 발생한 사건의 처리가 반성폭력 운동의 주요 활동이 되었다.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리를 둘러싼 지난한 논의가 반복되고, 정파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사건의 처리조차 어려워지는 경우도 많았다. 여성 활동가들은 이렇게 진행되는 사건 처리가 운동사회 내의 여성 차별적 구조를 없애거나 축소시키지 못하고, 피해자의 상처 치유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여성 활동가들이 성폭력 사건 처리 전담반이 되어가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성폭력이 무엇을 침해한 폭력인지에 대한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여성 활동가들은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에도 대응해야 했다. 게다가 피해자의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입된 2차 가해 개념은 오히려 논의를 봉쇄하고 침묵을 부채질했다. 운동사회의 페미니즘적 개조라는 애초의 문제의식은 성폭력을 유발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는 것으로 축소되어 아무런 논의도 촉발하지 못하는 현실도 목격하게 되었다. 가장 큰 난관은 노동자운동, 사회운동 내의 많은 여성의제가 성폭력 문제에 압도되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들이 제기되었으나, 아직까지 그 평가의 핵심과 대안적 방향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규약에 따른 처리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논의를 촉발시키기 위한 반성폭력 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거나 성폭력의 개념을 세분화하고 더 많은 것을 성폭력으로 정의하자는 제안만으로는 지금까지의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성폭력에 대한 반대가 여성의 성적 권리와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구조적인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고유한 권리, 즉 여성권(여성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을 실현하는 가족의 변혁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사고해야만 한다. 따라서 현재의 사회가 역사적 가족형태를 매개로 지속해온 여성억압, 여성의 존엄성의 박탈, 여성의 육체에 대한 통제권 박탈 등을 인식하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성에 대한 관리 정책으로서 여성정책의 등장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여성정책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의 문제를 고려했다. 하나는 생계유지를 위한 여성들의 일자리 요구와 자본의 여성노동력 활용요구에 관한 것이다. 외환위기 직후 우선해고, 정리해고 등으로 감소했던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이후 급격히 증가했는데,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부족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기 위한 노동자 가족의 전략으로 중요하게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계급의 생존전략이자, 경제의 금융화와 서비스화를 특질로 하는 현재의 경제발전 방향 속에서 제기되는 자본의 요구이기도 했다. 각종 서비스 노동, 하인 노동 등에 저임금의 유연한 여성노동력을 활용하고 이를 노동시장 전반의 유연화로 확대하는 것은 자본의 이윤창출에도 중요한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대응에 관한 것이다. 여성을 경제위기의 안전판이자 충격의 최종 흡수자로 사고하며 위기를 전가했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여성의 이중부담과 노동력의 출혈판매는 여성들이 감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심화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여성들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생계를 보조하는 비공식,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재생산 노동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환위기 이후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사회적 위기비용은 여성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 즉 여성에게 전가해왔던 상황에서 이런 여성의 위기는 가족의 위기, 재생산의 위기와 동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빈곤의 심화, 출산율 저하, 이혼율 증가 등의 상황은 가족해체라는 진단까지 낳으며 사회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따라서 정부의 여성정책은 ‘직장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일관된 기조 하에서, 여성의 일자리 확대를 통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 제고와 저출산을 위시한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출산 및 보육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 축으로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정책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 하에서 창출된 일자리 대부분은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수행하던 보육, 가사, 간병, 노인 돌봄과 같은 영역이었으며, 재생산 노동에 대한 저평가는 노동시장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낮은 임금이 책정되었다. 더불어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위해서는 파트타임 일자리가 장려되었는데, 이는 전반적인 노동시장 유연화를 촉진시키는 기제가 되었다. 다른 한 축으로는 건강가족기본법 제정 등을 통해 여성의 혼인과 출산의 의무를 명문화하는 한편, 양육비 지원, 보육서비스 확충 등의 지원책을 통해 출산을 장려했다. 이러한 정책의 함의는 분명했다. 여성들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1차적인 책임으로 인한 노동시장에서 부차적인 지위와, 노동시장에서 낮은 임금으로 인한 가계 소득 구성에 있어서 부차적인 역할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면서 끝없는 악순환을 이루고, 여성들의 남성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재생산하며, ‘빈곤의 여성화’ 경향을 부추긴다. 이러한 악순환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면서 여성을 자본의 위기를 극복할 이중의 자원으로 동원하는 것이 여성정책의 본질이다.
그렇지만 이런 여성정책은 성별영향평가 확대, 성인지 예산 제도 도입, 성별분리통계 마련 등 성주류화 전략의 가시적인 기반 마련, 비례대표 여성 50% 할당제 시행과 이에 따른 여성 국회의원 수 증가, 공적 영역에의 여성 진출 확대, 호주제 폐지 등의 조치들과 맞물리면서 여성을 위한 획기적인 진전으로 인식되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이 매년 끊이지 않고 증가해왔다는 현실이 단적으로 반영하듯이 실제 대다수 여성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고, 소수의 성공한 여성들의 신화는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은폐했다.
여성운동의 대응
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한 한국의 주류 여성운동은 여성의 위기를 관리하는 정책을 오히려 오랫동안 국가의 정책 영역에서 제외된 채 사적 영역의 문제로 다루어졌던 여성 의제를 정부 차원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확대됨에 따라, 그리고 ‘저출산’이라는 재생산 위기에 직면하여, 출산과 양육, 가사노동을 비롯한 여성들의 의제가 사회적 쟁점이 되고, 여성들의 발언의 공간이 열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노동시장에서의 남녀고용 차별 근절’,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더 이상 여성들만의 요구가 아니고 오히려 자본의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요구라는 점에서 그것은 여성의 기회는 아니었다.
여성운동은 한 축으로 공적 영역으로의 여성 진출 확대, 호주제 폐지, 성매매 방지법 제정 등을 매개로 정부 정책의 적극적인 주체로 편입하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직장과 가사의 양립 정책을 여성친화적인 차원에서 더욱 강화하고 보완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여성의 위기를 관리하며 여성을 자본의 위기 극복을 위한 자원으로 동원하고 착취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보완자로 여성운동이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결여한 채 그 관리 메커니즘에 편입한 여성운동의 결과는 여성의 문제를 어떤 정치적 갈등이나 차이도 없는 ‘선하고 도덕적인’ 문제로 탈정치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여성의제는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실현, 확대가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여성의제에 대한 분리주의적인 인식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 양자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행진
2005년 세계여성행진이 「인류를 위한 세계여성헌장」과 전 세계 여성들의 운동의 희망이 담긴 퀼트를 가지고 전 세계 릴레이 행진을 조직함에 따라 한국에서도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행진’이 조직되었다.6)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세계여성행진의 제안을 주목했다. 우선 대안세계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여성운동의 중요성과 역할을 제기할 수 있는 계기였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여성을 활용하는 신자유주의 여성정책과 단절하는 새로운 여성대중운동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세계여성행진은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맞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와 투쟁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세계적으로 여성에 대한 이중부담이 가중되고 여성의 위기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면서 이를 관리하고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가 주창되었고, 성주류화 전략은 그 일환으로 세계화되었다. 그러나 세계여성행진은 여성들이 직면하는 빈곤과 폭력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인식하면서 이를 넘어선 대안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여성운동의 방향임을 역설했고, 이를 위해 여타의 사회운동들과 연대를 강화하고 대안세계화를 위한 공동의 전망을 모색해왔다. 그와 동시에 세계여성행진은 대안세계화 운동 내에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여성권에 관한 쟁점을 제기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볼 때 2005년 세계여성행진의 두 번째 릴레이 행진은 한국의 여성운동과 사회운동 양자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한국의 여성운동이 스스로 대안세계화 운동의 중요한 주체가 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맞서 사회를 변혁하는 여성운동의 지향을 제기할 수 있는 동시에, 한국의 사회운동에게도 여성권을 인식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을 전망으로 삼을 것을 촉구할 수 있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시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확대하고 여성의 발전을 꾀한다는 정부의 여성정책이 노동의 불안정화에 조응한 ‘빈곤의 여성화’를 정당화하거나 관리하려는 시도이고, 여성의 권리를 축소하면서 이중적인 의무는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대중적으로 알려내고 비판할 필요가 절실했다. 게다가 주류적인 여성운동은 신자유주의의 관리 정책으로서 여성정책을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와 보육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하면서 적극적으로 그에 조응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여성정책의 관리 대상이나 활용 대상이 아닌, 운동의 주체로서 여성들 스스로가 나서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자신의 노동권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을 형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여성행진은 여성들이 처한 빈곤과 폭력의 문제가 신자유주의 자체에 내재한 결과라는 점에서 여성정책 따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성들의 운동과 투쟁을 통해서만 바꿀 수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여성대중운동 형성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여성행진이 실제 새로운 여성운동의 대중적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빈곤과 폭력의 관점에서 노동, 빈곤, 장애, 이주, 성매매와 같은 이슈를 제기하고 여성들 간의 연대를 확대하려 했으나, 여성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이 곧바로 신자유주의에 맞선 여성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외환위기 이후 성차별적 구조조정이 강화한 이중부담과 이에 연이은 위기관리 정책으로 여성들은 스스로를 운동의 주체로서 조직화하고 투쟁을 벌이는 경험을 축적하지 못했다. 여성운동이 정부의 위기관리 정책을 전달하는 역할을 자임하면서 여성들의 주체화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들의 운동을 조직한다는 것은, 주류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이나 새로운 여성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민주노총이나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과 같은 대중운동 단위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빈곤과 폭력의 구체적 현실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이에 기초하여 새로운 여성운동 방향성과 계획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함을 인식했지만, 이를 실현해 갈 구체적인 경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매매방지법과 성노동자 운동을 둘러싼 논쟁은 여성행진의 참가 범위를 규정하는 정세적인 조건으로 작용했다. 성매매의 구조적 원인으로서 빈곤과 성적 이중규범을 분석하고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성노동자의 권리선언에 대한 지지를 형성하려했던 시도 자체는 정당했다. 하지만 사회진보연대의 의도와 다르게 성노동 운동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여성행진 구성의 결정적인 쟁점이 되어버렸다. 이런 지형 속에서 성매매를 여성에 대한 폭력의 관점과 신자유주의가 심화하는 여성의 빈곤과 폭력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여성억압의 구조를 변혁하는 여성운동을 함께 만들자는 문제의식에 대한 논의는 차단될 수밖에 없었고, 여성행진을 통해 성매매 여성들을 포함하여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려던 애초의 문제의식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성매매방지법을 둘러싼 논란과 성노동자 운동
2004년 9월 23일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된 후,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의 생존권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에 존재를 드러내자 성매매방지법에 관한 논쟁이 불거졌다. 특히 성매매 여성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규정하고 <민주성노동자연대(민성노련)>라는 조직을 구성하면서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성매매를 도덕적인 거부나 규제의 관점이 아니라 여성의 빈곤, 차별적인 여성노동의 현실, 여성 육체와 성의 대상화와 상품화, 가족 제도 하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성욕과 같이 여성 일반이 겪는 문제들이 중첩되어 드러나는 복잡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관점 하에서 정의하고자 했다. 여성에 대한 이중규범과 빈곤의 여성화라는 성매매가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파악한다면, 성매매를 금지, 처벌하여 근절할 수 있다는 성매매방지법의 한계는 분명하다. 사후적으로 성매매 행위자들을 처벌하는 금지법이 성매매를 근절하거나 줄일 수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다른 나라의 경험으로나 증명된 사실이었다. 오히려 금지법은 성매매를 음성화함으로써 성매매 여성들을 폭력과 착취에 무방비 상태로 내몰지만 범죄자라는 신분 때문에 성매매 여성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전혀 제기할 수 없게 된다. 성매매방지법에서 성매매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하여 구제할 방안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성매매 여성의 불우한 희생이나 피해가 더욱 가시화되거나 강제적으로 성매매되었다는 구체적인 입증을 요구했다. 이는 성매매 여성을 수동화하여 구제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하며(이를 거부하는 성매매 여성은 문란한 창녀라는 낙인은 더욱 강화된다.) 성매매를 개인의 의지와 도덕의 문제로 환원하면서 성매매의 구조적 원인을 가리는 효과를 낳을 뿐이었다. 게다가 성매매 여성 스스로가 자신도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이며 따라서 자신의 생존과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매매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의 평가절하, 성 상품화, 빈곤의 여성화와 같은 현실은 문제 삼지 않은 채, 자신들을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로 금기시하며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폭력적인 상황에 문제를 제기했다. 여타의 사람들과 똑같이 투쟁하고 시위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해도 여성부와 여성단체들조차 철저히 묵살하는 경험을 하면서 성매매 여성들은 스스로를 권리를 가진 인간, 즉 노동자로 조직할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이런 측면에서 성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는 옹호되어야 하며, 더 많은 여성들과의 연대를 통해 여성의 억압과 배제를 지속시키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사회구조를 제거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했다.
또한 성매매방지법은 당시 시행되던 건강가족기본법에 따른 건강가정의 장려를 위한 보완책이라는 점에서 정세적인 비판도 필요했다. 당시 여성가족부는 ‘화이트 타이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그 취지를 “사회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상대(즉, 배우자)와 최선을 다해 관계를 하자는 것”이라며 “성매매에는 배우자에 대한 배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가족 밖의 성관계에 대한 보수주의적 관점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이런 발언은 건강가족기본법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 건강가족기본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가정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며, 모든 국민은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할 의무가 있다. 이는 가족해체와 저출산이 국가 위기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법적으로 의무화하겠다는 발상과 같다. 국가는 이를 위해 가정을 ‘음란물, 유흥가, 폭력 등 위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정부는 건강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위해환경인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들)를 근절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족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경제위기로 인한 가족해체의 위기비용을 가족 내 여성에게 전담하려는 시도이자, 가족제도 바깥의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였다. 여성을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과 근절되어야 할 여성으로 나누고, 전자에게는 의무를 전제한 지원을 후자에게는 폭력과 생존권의 박탈을 가져오는 정책은,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여성들의 노동권을 제약하고,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는 성적 이준기준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성매매가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여성에 대한 이중규범/빈곤의 여성화)에 주목하고 여성들의 자기조직화를 옹호(따라서 성노동자운동을 지지하며)할 것, 이 두 가지 쟁점을 제기하며 논쟁지형을 형성하면서 성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지를 확대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 간의 연대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논쟁지형을 확대하고 성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지흐름을 폭넓게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 원인의 하나는 성매매가 강간과 같은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이라는 쟁점을 넘어서지 못한 것인데, 이는 여성의 성욕에 대한 억압, 여성의 육체에 대한 대상화, 모성과 같은 여성의 기능적 부분의 착취, 여성의 노동권 박탈과 여성노동에 대한 가치절하와 같은 여성 억압과 배제의 구조와 관행을 포함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간과 같은 극단적 폭력과 동일시하면서 처벌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와 대안적 운동방향의 모색을 통해 해결해가야 할 부분이다. 또 다른 원인은 성매매를 여성일반이 처한 조건의 일부분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문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과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폭로가 보다 확대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을 만들기 위하여, 여성운동네트워크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여성들을 주체화해야 하는 운동들이 놓인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노동의 불안정화가 심화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해서 증가했으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운동 진영은 이 문제에 대해 조직률 하락에 따른 미조직 단위 조직화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다수를 점하게 되는 성별분업의 구조, 가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와 ‘여성’의제를 분리해서 사고했다. 이와 연동하여, 두 번째로 저출산-고령화 대책,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 등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하면서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서의 여성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정책이 발 빠르게 추진되었지만, 노동자운동은 이 함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오히려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 번째로 이런 상황에서 ‘가족 내 성별분업과 성차별 구조, 이데올로기 재생산 → 저임금, 불안정 노동 → 여성의 빈곤과 이중부담 강화 → 전체 노동자계급의 권리 후퇴와 삶의 조건 악화’라는 악순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추동하는 여성운동의 흐름이 부재했다. 주류적인 여성운동은 저임금 여성노동자, 빈곤 여성에 대한 정부 지원책의 전달 체계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여성의 주체화, 조직화보다는 현실의 어려움을 해소, 해결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제한하는 상황이었고, 노동자운동 내 페미니즘적 실천은 성폭력, 할당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양적 조직화로 치환되는 현실이었다. 이런 전반적인 조건 하에서 ‘빈곤의 여성화’, ‘여성노동의 비정규직화’라는 말들은 여성의 현실을 그저 지적할 뿐인 수사로 사용될 뿐, 운동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하는 데 참조점이 되지 못했다.
2007년 사회운동포럼의 여성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인 여성 활동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대중적으로 평가하고 현실에 대한 진단을 공유하기 위해 노조 내외곽의 다양한 활동가들과 함께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하여”라는 기조 하에 3차례의 사전 워크숍을 기획했다. “왜 현재 ‘비정규직철폐투쟁’이 여성 노동권 쟁취 투쟁이 아닌가”, “일-가정 양립 논의에서 한국사회 노동자운동의 한계와 과제”, “노동조합 내 페미니즘 실천의 현황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각각 진행된 워크숍을 통해서 여성을 보편적 노동자, 시민으로 인지하고 성적 차이에 기반 한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 전략을 자기 과제로 삼지 못한 노동자운동에서, 남성 ‘가장’ 노동자가 아닌 여성노동자, 가족 돌봄에 대한 책임이 있는 노동자의 문제는 가시화되지 못했고 여성문제는 늘 특수한, 주변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평가했다. 이렇게 구축된 노동자운동이 단지 투쟁할 때 ‘여성’ 비정규직을 더 많이 언급한다고 해서, 가사 육아 등 재생산영역의 문제를 여전히 여성들’만’의 문제로 치부한 채 운동 과제의 하나로 끼워 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수량적 평등, 형식적 형평성과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요구해 온 여성 활동가들의 실천 또한 그 고통스러운 지난함이야 분명하다해도 운동과 여성의 현실을 전혀 바꾸지 못할 뿐임을 함께 인식하고자 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여성들의 실천은 특수한 부문이 아니라 운동과 정치 자체를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란 여성이 삭제되고 재생산의 영역을 비가시화 한 채 구성된 사회운동의 보편성과 정치 전략을 뛰어 넘어, 여성억압에 도전하는 페미니즘이 통합된 새로운 보편적 이념, 일반적 전략, 그리고 다른 정치를 구상해 가는 것이다. 사회운동포럼에서의 여성대회는 이러한 결합의 문제의식을 사회운동들과 소통하고, 새로운 변혁의 상을 함께 만들자고 제안하려는 시도였다.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이런 여성대회의 결과물이었다. 사회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념으로 페미니즘을 확산하고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한 적극적인 실천을 조직하기 위한 주체들의 토론과 소통, 교육의 장으로서 여성운동네트워크는 탄생했다. 그렇지만 여성운동네트워크의 실천과 문제의식의 확산은 아직 미약한 상황이다. 노조 내 여성 활동가들의 결합을 강화하고, 페미니즘 교육과 여성운동 방향에 대한 공동 논의를 통해 새로운 실천을 모색해가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특히 최근의 금융위기, 경제위기 하에서 노동자운동의 진정한 대안 모색이 절실한 상황에서 전체 노동자운동의 과제를 선도하는 여성들의 요구와 실천을 제기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최근 몇 년 동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비정규직 투쟁들 중에서 다수를 차지할뿐더러 치열함과 처절함도 더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KTX, 기륭, 이랜드-뉴코아 등의 비정규직 사업장은 이른바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며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주며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각이나 노동자운동의 인식은 고용불안과 저임금을 구조화하는 원인으로서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분석하기보다는 열악한 처지에 내몰린 ‘다수의 여성들’이라는 것에 그쳐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남성생계부양자-여성가사담당자라는 이데올로기와 현실이 여성을 어떻게 노동시장에서 배제하거나 활용하는지를 분석하고 이를 고착화하는 일-가정 양립정책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정세적인 계기로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주목하고 결합하려 했다. 여성인력활용으로 압축되는 여성정책 하에서 여성은 의무로서의 모성과 재생산 노동을 강요받는 여성이자,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강요받는다. 이렇게 분리되어 다뤄지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여성에게 가족이 경제적 독립을 막고, 더욱 취약한 조건을 만드는 여성 억압 구조이며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성권의 실현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운동의 과제로 제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강조하는 문제의식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조건을 강조하지만 성별분업과 가족형태의 구조적 측면이 사장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이 시대의 가장 처절한 아픔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특히 고용의 유지와 그 형태를 둘러싼 정규직화 투쟁이 파업 등의 급박한 형태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여성의 노동권이 억압되는 구조적인 원인으로서 가족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대로 제기되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정규직 노조의 자기 방어적 태도와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소극성을 비난하는 근거로서 ‘힘없고, 불쌍한’ 여성들의 ‘처절한’ 투쟁이 강조되기도 한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과 연대가 실현되지 않고 현실적으로 비정규직의 대다수가 여성인 상황에서 우선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는 게 급선무라는 인식 하에 여성 비정규직 조합원에게만 해당하는 제도 개선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여성노동운동이나 단체들의 흐름도 존재한다. 이러한 흐름은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노동자운동에서 더욱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한데, KTX 투쟁에 대한 여성노동네트워크의 해법처럼 여성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동결이라는 결단에 달려있는 것으로 사태의 원인과 본질이 호도되고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의 갈등과 적대를 야기하는 흐름도 등장했다.
문제는 이런 조건이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주체화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별분업, 가족임금 이데올로기 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여성노동자의 노동을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과 가족 유지에 비해 부차적이고 임시적인 것으로 여기는 노동자계급에게 비정규직 여성노동의 사안은 운동의 양심과 도덕의 문제로는 받아들여질지언정 노동자운동에 중요한 과제로는 인식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나 현실이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갈등과 적대를 형성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나 조직화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는 길이 여성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과제를 제출하고 이를 위한 운동을 만드는 방향에서 모색될 필요가 절실해지고 있다.
금융위기 하에서 여성운동,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모색하기
파국적인 위기를 직면한 상황에서 지금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어떤 대안을 모색하고 어떤 운동을 할 것인가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문제이다. 금융위기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한국경제 위기는 IMF 위기에 버금가는 위기가 훨씬 장기에 걸쳐 진행될 것이고 장기불황 이후 찾아오는 위기여서 그 파괴적 효과는 IMF 위기보다 더욱 클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해 지배세력은 부담을 전 사회에 떠넘길 것이며, 노동자들에게 해고와 임금삭감의 형태로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할 것이다.
이 속에서 여성들을 둘러싼 조건은 이중적인 측면에서 억압적일 수 있다. 우선 임금삭감과 같은 조치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을 받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다수에게 더욱 파괴적인 효과를 미칠 것이다. 이들의 투쟁은 현재와 같은 노조운동 내에서 주요하게 반영되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한 임금삭감은 자본에게 더욱 손쉬운 해법으로 사고될 수 있다.(실제 지난 11월 18일 한나라당 발의로 최저임금 삭감의 내용을 담은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다른 한 측면은 여성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대한 공격에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가 ‘정규직 이기주의’를 비난하는 근거로 활용되면서 노동자운동 내의 갈등과 적대를 증폭시키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주체화되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여성들이 처하게 될 억압적인 조건은 여성들의 삶 자체를 크게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의 조건도 크게 제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지난 10년의 경험은 여성운동의 분리주의적인 양태나 노동자운동의 성 맹목이 여성, 남성 노동자 모두의 권리와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한계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운동을 지속하는 것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다. 노동자들 사이의 다양한 분할을 심화함으로써 위기를 전가하려는 자본의 시도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운동은 페미니즘을 인식하고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해야 한다.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노동자운동의 미래를 개척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여성의 저임금, 빈곤, 폭력의 현실이 도리어 노동자운동을 분할시키는 데 활용됨으로써 스스로의 권리조차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새로운 대안을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다.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로 전체 노동자운동이 지금의 위기에 노동자계급의 대안으로 맞설 수 있는 혁신과 전망을 밝혀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1)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농협중앙회의 사내부부 여성 우선해고 사태였다. 1999년 1월 농협은 인력감축을 계획하면서 사내부부 762쌍을 대상으로 “아내가 퇴직하지 않으면 남편이 해고될 것”이라며 협박했고, 그 결과 752명이 무더기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그 중 688명이 여성이었다. 당시의 많은 자료들이 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부당노동행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주로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하거나 희망퇴직 시킨 후 임시직으로 재계약하는 형태,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강제 전환하는 형태, 정규직을 부당해고 한 후 용역회사로 재입사하기를 강요하는 형태, 여성 집중 부서 자체를 퇴출시킨 후 부서원들을 용역회사를 통해 재입사시키는 형태 등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이 비정규직 전환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퇴사의 압력을 가하는 사례도 빈번했다.본문으로
2) 총 취업자 중 여성의 비율은 1975년 이래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으나, 자본은 여성노동력을 임시적이고 주변적인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결혼퇴직제, 출산, 양육으로 인한 경력 단절과 같은 차별적인 제도와 관행을 유지해왔다. 노동시장 내에서의 성별분업은 여성을 소위 ‘여성 직종’이라 불리는 도소매업, 음식숙박업, 금융보험업과 같은 서비스산업과 비공식부문에 그리고 단순노무, 사무서비스와 같은 여성 직무에 편중시켰다. 성별분리 호봉제, 노골적인 임금 차별과 같은 관행 속에서 여성들의 저임금이 정당화되었으며, 가내 노동과 같은 비공식 부문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성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3차 산업의 임시직, 일용직을 중심으로 여성 고용이 증가했으며, 이는 IMF 구조조정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화되기 이전부터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 불안정한 노동층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본문으로
3)남한에 정착된 자본주의적 가족 형태의 특징은 가족임금이 보장되지 않고 국가의 복지체제가 미비한 상황 속에서 유교적인 직계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동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한에서 성 혁명이 부재했던 상황과도 관계가 깊다. 가족을 유지할 수 있는 소득이 가족임금으로 보존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노동시장에 진출해야 했지만,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이에 기반한 성차별주의는 여성의 노동을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주로 저임금, 비공식 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런 상황은 정당화된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국가 정책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가족 관념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시행되었는데, 이는 가족의 전통을 유지하여 국가의 복지 기능을 가족에게 전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인의 부양 의무, 아이의 교육 등을 가족이 책임지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으로 전가하려는 정책이었다.본문으로
4) 성폭력은 역사적 가족형태를 매개로 조직된 여성억압에 대한 인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억압, 여성의 육체에 대한 대상화(인간으로서 존엄성 박탈), 모성과 같은 여성의 기능적 부분의 착취, 여성의 노동권 박탈과 여성노동에 대한 평가절하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을 배제하고 억압해 온 사회 구조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개별적인 성폭력 사건으로 한정될 수 없다. <100인위원회>를 비롯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자세한 평가는 김정은, 「[기획연재③ 한국여성운동사]성별화된 권리와 노동권의 결합을 위하여: 반(反)성폭력 운동 평가」, 『사회운동』 , 통권73호, 2007. 4.를 참조.본문으로
5)예를 들어 여성노동자가 노동자운동의 주체와 상징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을 반영하는 ‘노동형제’라는 호칭에 대한 문제제기는 언어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제기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제기에 대한 활동가들의 대응은 여성노동자를 주체화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호칭을 동지로 바꾸거나 쓰지 않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본문으로
6)1995년 4월, 캐나다의 10개 연방 중의 하나인 퀘벡주에서는 850여명의 여성들이 퀘벡여성연맹의 주최로 여성들의 빈곤을 제거하기 위한 분명한 조치를 요구하며 10일간의 행진을 진행했다. 이들 중 일부가 같은 해 북경여성대회에 참여하여 퀘벡의 행진을 세계화 할 것을 결의하고, 1998년 몬트리올에 모인 65개국 140명의 대표자들은 빈곤과 여성에 대한 폭력 제거를 행진의 두 가지 의제로 채택, 이에 관한 17개 요구목록을 작성하여, 2000년에 전 세계적인 행진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결성된 <세계여성행진>은 2000년 3월 8일부터 세계 빈곤철폐의 날인 10월 17일까지 까지 전 세계를 지나는 여성들의 릴레이 행진을 조직했다. 2005년에는 2004년 세계여성행진 총회에서 채택된 평등, 자유, 연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중심 가치로 하는 ‘인류를 위한 세계여성헌장’을 기초로 두 번째 릴레이 행진이 조직되었다. 2005년의 행진은 3월 8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시작하여 10월 17일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마무리되었다.
본문으로
10년을 돌아보며,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함께 모색하자
이 글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이래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여성들을 어떻게 활용해왔는지, 그것이 여성을 포함한 노동자계급 전반에는 어떤 의미였는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은 어떤 대응을 했고 그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가족을 매개로 여성의 노동권과 성욕의 권리를 억압해 온 역사와 신자유주의의 여성 활용 정책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여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던 노동자운동에 대한 비판이 포함된다. 이러한 비판은 경제위기, 금융위기가 심화되는 오늘날 노동자운동이 어떤 전망을 가질 것인가를 묻는 페미니즘의 질문이기도 하다. 이 글은 사회진보연대와 여성위원회의 문제의식과 활동을 중심으로 쓰였다. 여성해방과 사회의 변혁은 분리될 수 없다는 이념의 정세적인 표현으로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을 형성하고자 시도했던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의 활동은 되짚어 보건대 성과보다는 한계가 많았다. 그 한계들은 이후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가 여성운동의 전망과 실천을 개척해가는 데 있어서 깊이 각인해야 할 교훈이다. 이와 더불어 그 한계들이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 여성운동의 대안 마련에도 시사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997년 외환위기와 여성의 위기
1997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여성의 위기, 가족의 위기로 드러났다. 사실 외환위기 당시 몰아쳤던 각종 구조조정 정책이 젠더 중립적인 것은 아니었다. 가장 가시적이고 일차적인 차별적 양태는 여성의 일자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기업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력감축 계획의 대상은 주로 여성이었다. 맞벌이 여성, 사내부부인 여성, 장기근속 여성들은 가장 먼저 퇴직을 강요당하거나 정리해고 되었다.1)
이러한 정리해고는 주로 처자식을 벌어 먹여야하는 남성 가장보다는 여성이 좀 덜 벌거나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는데, 결국 이는 ‘남성 생계부양자 - 여성 가사담당자’라는 성별분업의 논리가 구조조정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서 주요한 축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사실 소수의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가족임금을 보장받지 못했고, 국가 차원의 복지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한국에서 여성은 외환위기 이전에도 가족의 생계보조자이자 최후의 복지 제공자 역할을 해왔다.2)
남편의 부족한 임금과 사회가 제공하지 않는 부족한 복지는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을 통해 보충되었고, 사회는 여성들의 이런 희생을 언제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 3)
외환위기와 이에 따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이러한 여성들의 이중부담을 더욱 증가시켰다.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리해고와 대량실업의 양산, 실질임금 하락으로 노동자 계급의 가계는 극적인 소득감소를 경험했다. 여성들은 가계소득을 보충하기 위해서 임시직, 계약직 등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라도 찾아야했고, 가계유지비용이 급증하자 가사노동을 담당하고 가족구성원을 보살피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의무는 더욱 강화되어 무임 가사노동도 더욱 늘려야 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야기한 각종 사회적 비용은 당연한 것처럼 여성에게 전가되었으며, 여성들은 절약과 노동력 출혈판매를 통해서 이런 위기 비용을 감내하고 가족을 유지해야 했다.
노동자운동의 대응
당시 노동자운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성차별적인 양태가 무엇을 의미하고,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여성 우선해고를 용인하거나 여성의 희생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시의 위기를 넘기려했다.
자본의 위기극복 전략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생산부문을 파괴하고 금융적 팽창을 추구하며, 이에 따라 노동의 유연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자본의 노동유연화 전략은 일시에 전면적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 내부의 다양한 차이와 분할을 매개로 노동자 간의 경쟁과 갈등을 심화시키며 진행된다. 여성을 우선 해고한다는 구조조정 계획은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단 한 번의 의심조차 품지 않았던 ‘남성 가장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관념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대량해고의 위협과 위기감 앞에서 여성 우선해고 조치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노동자계급 가족 전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로 인식되었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이 ‘사회적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합의한 정리해고, 파견근로제는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기업들은 연달아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했으나,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정리해고 철회를 걸고 36일 간의 파업을 벌인 현대자동차 노조의 투쟁은 대표적인 사례다. 법제화된 정리해고를 실제 실행할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상황인지라 사측은 정리해고 자체의 철회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고, 결국 파업은 식당 여성노동자 144명 전원을 포함한 277명 정리해고 수용으로 마무리되었다. 식당 여성노동자 전원의 정리해고로 당장 수천 명의 일자리를 지킬 수는 있었지만, 이는 부메랑이 되어 노동자계급을 다시 공격했다. 그 시작은 여성이었으나 그 후 하청노동자, 파견노동자, 이주노동자로 끝없이 확대되었다.
당시 노동자운동의 대응은 한국 노동자운동이 여성해방의 과제를 자기 과제로 인식하고 싸운 경험이 없었던 상황에서 기인한다. 노동자운동은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이 가사를 전담한다는 성별분업 모델, 가정은 정치의 장소가 아니고 여성의 노동은 부차적이라는 이데올로기, 여성은 남성에 미달하는 존재라는 상징을 수용해왔다. 이러한 여성의 처지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노동해방과 사회의 변혁을 위해 반드시 바뀌어야 할 투쟁의 대상임을 사고하지 못했다. 여성의 이해와 요구는 모성보호, 출산 및 육아 휴직과 같은 보호조치로 제한적으로 인식되었고, 여성운동은 특수한 부문의 이해를 대변하는 운동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가 실직의 위험에 놓인 외환위기 상황에서 여성이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당시 노동자운동이 여성을 희생해서 위기를 극복해보려던 시도가 한계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여성노동의 특질이었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은 전체 노동자에게 일반화되었고, 대다수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현실은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공격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노동자에게 전가되는 위기를 여성의 희생을 통해 극복하려했던 노동자운동의 대응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결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양자가 적대적일 수 있다는 사고를 낳았다.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이하 100인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운동사회 내에서 발생한 16개의 성폭력 사건이 가해자 실명을 포함해 공개되었다. <100인위원회>는 운동사회의 여성문제에 대한 맹목과 억압적 성격을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기함으로써 사회운동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운동사회 내의 가부장적 구조, 문화, 이데올로기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성폭력이라는 단일 이슈로 제기하고 이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성된 개별 사건이 논쟁거리로 부각됨으로써 <100인위원회>가 제기하고자 했던 애초의 문제의식은 소실되고 성적 폭력의 문제로 축소되었다.4)
이후 논쟁은 성적 자유주의자들의 악의적인 공격, 가해자의 반격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많은 운동 단위들은 형식적인 성명서로 상황을 모면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가해자에 대한 온정적 시각, 2차, 3차의 가해, 조직보위의 논리와 당면투쟁의 선차성 논리, 가해자의 역고소 등으로 인해 공개된 사건마저 ‘해결’이 어려워지면서 <100인위원회> 사건 공개의 현실 가능한 결론은 각 단위에 반성폭력 규약 작성을 장려하는 것이 되었다.
한편 <100인위원회>의 활동은 노동자운동, 사회운동 내 여성 활동가들이 여성 정체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모임이나 여성위원회 등을 결성하게 되었다. 여성 활동가들은 운동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을 기각하고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운동들과 여성운동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신념과 대의에 따라 헌신해 온 운동이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성별분업과 여성 차별적 관행을 답습하면서, 또한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거나 성적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여성 활동가들의 생존을 위협할 때 여성들은 과연 이 운동이 자신의 해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갈등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여성 활동가들은 운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운동을 바꾸는 길을 택하려 했다. 그러나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한 감정적 동일화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변혁하기 위한 운동을 사고하지 못했고, <100인위원회>가 제시한 광의의 성폭력 개념을 통해 여성 활동가의 억압적 현실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5)
그러나 운동사회의 여성 배제와 억압적 성격을 비판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반성폭력 운동은 곧 여성 활동가들에게 또 다른 곤란들을 안겨주었다. 반성폭력 운동의 결과가 규약 제정으로 귀결되면서 공동체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논의보다는 발생한 사건의 처리가 반성폭력 운동의 주요 활동이 되었다.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리를 둘러싼 지난한 논의가 반복되고, 정파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사건의 처리조차 어려워지는 경우도 많았다. 여성 활동가들은 이렇게 진행되는 사건 처리가 운동사회 내의 여성 차별적 구조를 없애거나 축소시키지 못하고, 피해자의 상처 치유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여성 활동가들이 성폭력 사건 처리 전담반이 되어가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성폭력이 무엇을 침해한 폭력인지에 대한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여성 활동가들은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에도 대응해야 했다. 게다가 피해자의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입된 2차 가해 개념은 오히려 논의를 봉쇄하고 침묵을 부채질했다. 운동사회의 페미니즘적 개조라는 애초의 문제의식은 성폭력을 유발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는 것으로 축소되어 아무런 논의도 촉발하지 못하는 현실도 목격하게 되었다. 가장 큰 난관은 노동자운동, 사회운동 내의 많은 여성의제가 성폭력 문제에 압도되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들이 제기되었으나, 아직까지 그 평가의 핵심과 대안적 방향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규약에 따른 처리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논의를 촉발시키기 위한 반성폭력 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거나 성폭력의 개념을 세분화하고 더 많은 것을 성폭력으로 정의하자는 제안만으로는 지금까지의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성폭력에 대한 반대가 여성의 성적 권리와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구조적인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고유한 권리, 즉 여성권(여성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을 실현하는 가족의 변혁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사고해야만 한다. 따라서 현재의 사회가 역사적 가족형태를 매개로 지속해온 여성억압, 여성의 존엄성의 박탈, 여성의 육체에 대한 통제권 박탈 등을 인식하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성에 대한 관리 정책으로서 여성정책의 등장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여성정책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의 문제를 고려했다. 하나는 생계유지를 위한 여성들의 일자리 요구와 자본의 여성노동력 활용요구에 관한 것이다. 외환위기 직후 우선해고, 정리해고 등으로 감소했던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이후 급격히 증가했는데,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부족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기 위한 노동자 가족의 전략으로 중요하게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계급의 생존전략이자, 경제의 금융화와 서비스화를 특질로 하는 현재의 경제발전 방향 속에서 제기되는 자본의 요구이기도 했다. 각종 서비스 노동, 하인 노동 등에 저임금의 유연한 여성노동력을 활용하고 이를 노동시장 전반의 유연화로 확대하는 것은 자본의 이윤창출에도 중요한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대응에 관한 것이다. 여성을 경제위기의 안전판이자 충격의 최종 흡수자로 사고하며 위기를 전가했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여성의 이중부담과 노동력의 출혈판매는 여성들이 감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심화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여성들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생계를 보조하는 비공식,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재생산 노동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환위기 이후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사회적 위기비용은 여성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 즉 여성에게 전가해왔던 상황에서 이런 여성의 위기는 가족의 위기, 재생산의 위기와 동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빈곤의 심화, 출산율 저하, 이혼율 증가 등의 상황은 가족해체라는 진단까지 낳으며 사회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따라서 정부의 여성정책은 ‘직장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일관된 기조 하에서, 여성의 일자리 확대를 통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 제고와 저출산을 위시한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출산 및 보육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 축으로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정책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 하에서 창출된 일자리 대부분은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수행하던 보육, 가사, 간병, 노인 돌봄과 같은 영역이었으며, 재생산 노동에 대한 저평가는 노동시장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낮은 임금이 책정되었다. 더불어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위해서는 파트타임 일자리가 장려되었는데, 이는 전반적인 노동시장 유연화를 촉진시키는 기제가 되었다. 다른 한 축으로는 건강가족기본법 제정 등을 통해 여성의 혼인과 출산의 의무를 명문화하는 한편, 양육비 지원, 보육서비스 확충 등의 지원책을 통해 출산을 장려했다. 이러한 정책의 함의는 분명했다. 여성들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1차적인 책임으로 인한 노동시장에서 부차적인 지위와, 노동시장에서 낮은 임금으로 인한 가계 소득 구성에 있어서 부차적인 역할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면서 끝없는 악순환을 이루고, 여성들의 남성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재생산하며, ‘빈곤의 여성화’ 경향을 부추긴다. 이러한 악순환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면서 여성을 자본의 위기를 극복할 이중의 자원으로 동원하는 것이 여성정책의 본질이다.
그렇지만 이런 여성정책은 성별영향평가 확대, 성인지 예산 제도 도입, 성별분리통계 마련 등 성주류화 전략의 가시적인 기반 마련, 비례대표 여성 50% 할당제 시행과 이에 따른 여성 국회의원 수 증가, 공적 영역에의 여성 진출 확대, 호주제 폐지 등의 조치들과 맞물리면서 여성을 위한 획기적인 진전으로 인식되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이 매년 끊이지 않고 증가해왔다는 현실이 단적으로 반영하듯이 실제 대다수 여성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고, 소수의 성공한 여성들의 신화는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은폐했다.
여성운동의 대응
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한 한국의 주류 여성운동은 여성의 위기를 관리하는 정책을 오히려 오랫동안 국가의 정책 영역에서 제외된 채 사적 영역의 문제로 다루어졌던 여성 의제를 정부 차원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확대됨에 따라, 그리고 ‘저출산’이라는 재생산 위기에 직면하여, 출산과 양육, 가사노동을 비롯한 여성들의 의제가 사회적 쟁점이 되고, 여성들의 발언의 공간이 열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노동시장에서의 남녀고용 차별 근절’,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더 이상 여성들만의 요구가 아니고 오히려 자본의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요구라는 점에서 그것은 여성의 기회는 아니었다.
여성운동은 한 축으로 공적 영역으로의 여성 진출 확대, 호주제 폐지, 성매매 방지법 제정 등을 매개로 정부 정책의 적극적인 주체로 편입하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직장과 가사의 양립 정책을 여성친화적인 차원에서 더욱 강화하고 보완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여성의 위기를 관리하며 여성을 자본의 위기 극복을 위한 자원으로 동원하고 착취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보완자로 여성운동이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결여한 채 그 관리 메커니즘에 편입한 여성운동의 결과는 여성의 문제를 어떤 정치적 갈등이나 차이도 없는 ‘선하고 도덕적인’ 문제로 탈정치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여성의제는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실현, 확대가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여성의제에 대한 분리주의적인 인식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 양자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행진
2005년 세계여성행진이 「인류를 위한 세계여성헌장」과 전 세계 여성들의 운동의 희망이 담긴 퀼트를 가지고 전 세계 릴레이 행진을 조직함에 따라 한국에서도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행진’이 조직되었다.6)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세계여성행진의 제안을 주목했다. 우선 대안세계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여성운동의 중요성과 역할을 제기할 수 있는 계기였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여성을 활용하는 신자유주의 여성정책과 단절하는 새로운 여성대중운동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세계여성행진은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맞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와 투쟁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세계적으로 여성에 대한 이중부담이 가중되고 여성의 위기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면서 이를 관리하고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가 주창되었고, 성주류화 전략은 그 일환으로 세계화되었다. 그러나 세계여성행진은 여성들이 직면하는 빈곤과 폭력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인식하면서 이를 넘어선 대안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여성운동의 방향임을 역설했고, 이를 위해 여타의 사회운동들과 연대를 강화하고 대안세계화를 위한 공동의 전망을 모색해왔다. 그와 동시에 세계여성행진은 대안세계화 운동 내에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여성권에 관한 쟁점을 제기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볼 때 2005년 세계여성행진의 두 번째 릴레이 행진은 한국의 여성운동과 사회운동 양자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한국의 여성운동이 스스로 대안세계화 운동의 중요한 주체가 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맞서 사회를 변혁하는 여성운동의 지향을 제기할 수 있는 동시에, 한국의 사회운동에게도 여성권을 인식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을 전망으로 삼을 것을 촉구할 수 있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시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확대하고 여성의 발전을 꾀한다는 정부의 여성정책이 노동의 불안정화에 조응한 ‘빈곤의 여성화’를 정당화하거나 관리하려는 시도이고, 여성의 권리를 축소하면서 이중적인 의무는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대중적으로 알려내고 비판할 필요가 절실했다. 게다가 주류적인 여성운동은 신자유주의의 관리 정책으로서 여성정책을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와 보육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하면서 적극적으로 그에 조응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여성정책의 관리 대상이나 활용 대상이 아닌, 운동의 주체로서 여성들 스스로가 나서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자신의 노동권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을 형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여성행진은 여성들이 처한 빈곤과 폭력의 문제가 신자유주의 자체에 내재한 결과라는 점에서 여성정책 따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성들의 운동과 투쟁을 통해서만 바꿀 수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여성대중운동 형성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여성행진이 실제 새로운 여성운동의 대중적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빈곤과 폭력의 관점에서 노동, 빈곤, 장애, 이주, 성매매와 같은 이슈를 제기하고 여성들 간의 연대를 확대하려 했으나, 여성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이 곧바로 신자유주의에 맞선 여성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외환위기 이후 성차별적 구조조정이 강화한 이중부담과 이에 연이은 위기관리 정책으로 여성들은 스스로를 운동의 주체로서 조직화하고 투쟁을 벌이는 경험을 축적하지 못했다. 여성운동이 정부의 위기관리 정책을 전달하는 역할을 자임하면서 여성들의 주체화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들의 운동을 조직한다는 것은, 주류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이나 새로운 여성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민주노총이나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과 같은 대중운동 단위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빈곤과 폭력의 구체적 현실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이에 기초하여 새로운 여성운동 방향성과 계획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함을 인식했지만, 이를 실현해 갈 구체적인 경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매매방지법과 성노동자 운동을 둘러싼 논쟁은 여성행진의 참가 범위를 규정하는 정세적인 조건으로 작용했다. 성매매의 구조적 원인으로서 빈곤과 성적 이중규범을 분석하고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성노동자의 권리선언에 대한 지지를 형성하려했던 시도 자체는 정당했다. 하지만 사회진보연대의 의도와 다르게 성노동 운동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여성행진 구성의 결정적인 쟁점이 되어버렸다. 이런 지형 속에서 성매매를 여성에 대한 폭력의 관점과 신자유주의가 심화하는 여성의 빈곤과 폭력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여성억압의 구조를 변혁하는 여성운동을 함께 만들자는 문제의식에 대한 논의는 차단될 수밖에 없었고, 여성행진을 통해 성매매 여성들을 포함하여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려던 애초의 문제의식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성매매방지법을 둘러싼 논란과 성노동자 운동
2004년 9월 23일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된 후,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의 생존권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에 존재를 드러내자 성매매방지법에 관한 논쟁이 불거졌다. 특히 성매매 여성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규정하고 <민주성노동자연대(민성노련)>라는 조직을 구성하면서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성매매를 도덕적인 거부나 규제의 관점이 아니라 여성의 빈곤, 차별적인 여성노동의 현실, 여성 육체와 성의 대상화와 상품화, 가족 제도 하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성욕과 같이 여성 일반이 겪는 문제들이 중첩되어 드러나는 복잡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관점 하에서 정의하고자 했다. 여성에 대한 이중규범과 빈곤의 여성화라는 성매매가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파악한다면, 성매매를 금지, 처벌하여 근절할 수 있다는 성매매방지법의 한계는 분명하다. 사후적으로 성매매 행위자들을 처벌하는 금지법이 성매매를 근절하거나 줄일 수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다른 나라의 경험으로나 증명된 사실이었다. 오히려 금지법은 성매매를 음성화함으로써 성매매 여성들을 폭력과 착취에 무방비 상태로 내몰지만 범죄자라는 신분 때문에 성매매 여성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전혀 제기할 수 없게 된다. 성매매방지법에서 성매매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하여 구제할 방안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성매매 여성의 불우한 희생이나 피해가 더욱 가시화되거나 강제적으로 성매매되었다는 구체적인 입증을 요구했다. 이는 성매매 여성을 수동화하여 구제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하며(이를 거부하는 성매매 여성은 문란한 창녀라는 낙인은 더욱 강화된다.) 성매매를 개인의 의지와 도덕의 문제로 환원하면서 성매매의 구조적 원인을 가리는 효과를 낳을 뿐이었다. 게다가 성매매 여성 스스로가 자신도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이며 따라서 자신의 생존과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매매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의 평가절하, 성 상품화, 빈곤의 여성화와 같은 현실은 문제 삼지 않은 채, 자신들을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로 금기시하며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폭력적인 상황에 문제를 제기했다. 여타의 사람들과 똑같이 투쟁하고 시위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해도 여성부와 여성단체들조차 철저히 묵살하는 경험을 하면서 성매매 여성들은 스스로를 권리를 가진 인간, 즉 노동자로 조직할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이런 측면에서 성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는 옹호되어야 하며, 더 많은 여성들과의 연대를 통해 여성의 억압과 배제를 지속시키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사회구조를 제거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했다.
또한 성매매방지법은 당시 시행되던 건강가족기본법에 따른 건강가정의 장려를 위한 보완책이라는 점에서 정세적인 비판도 필요했다. 당시 여성가족부는 ‘화이트 타이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그 취지를 “사회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상대(즉, 배우자)와 최선을 다해 관계를 하자는 것”이라며 “성매매에는 배우자에 대한 배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가족 밖의 성관계에 대한 보수주의적 관점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이런 발언은 건강가족기본법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 건강가족기본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가정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며, 모든 국민은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할 의무가 있다. 이는 가족해체와 저출산이 국가 위기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법적으로 의무화하겠다는 발상과 같다. 국가는 이를 위해 가정을 ‘음란물, 유흥가, 폭력 등 위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정부는 건강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위해환경인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들)를 근절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족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경제위기로 인한 가족해체의 위기비용을 가족 내 여성에게 전담하려는 시도이자, 가족제도 바깥의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였다. 여성을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과 근절되어야 할 여성으로 나누고, 전자에게는 의무를 전제한 지원을 후자에게는 폭력과 생존권의 박탈을 가져오는 정책은,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여성들의 노동권을 제약하고,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는 성적 이준기준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성매매가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여성에 대한 이중규범/빈곤의 여성화)에 주목하고 여성들의 자기조직화를 옹호(따라서 성노동자운동을 지지하며)할 것, 이 두 가지 쟁점을 제기하며 논쟁지형을 형성하면서 성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지를 확대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 간의 연대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논쟁지형을 확대하고 성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지흐름을 폭넓게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 원인의 하나는 성매매가 강간과 같은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이라는 쟁점을 넘어서지 못한 것인데, 이는 여성의 성욕에 대한 억압, 여성의 육체에 대한 대상화, 모성과 같은 여성의 기능적 부분의 착취, 여성의 노동권 박탈과 여성노동에 대한 가치절하와 같은 여성 억압과 배제의 구조와 관행을 포함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간과 같은 극단적 폭력과 동일시하면서 처벌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와 대안적 운동방향의 모색을 통해 해결해가야 할 부분이다. 또 다른 원인은 성매매를 여성일반이 처한 조건의 일부분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문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과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폭로가 보다 확대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을 만들기 위하여, 여성운동네트워크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여성들을 주체화해야 하는 운동들이 놓인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노동의 불안정화가 심화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해서 증가했으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운동 진영은 이 문제에 대해 조직률 하락에 따른 미조직 단위 조직화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다수를 점하게 되는 성별분업의 구조, 가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와 ‘여성’의제를 분리해서 사고했다. 이와 연동하여, 두 번째로 저출산-고령화 대책,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 등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하면서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서의 여성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정책이 발 빠르게 추진되었지만, 노동자운동은 이 함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오히려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 번째로 이런 상황에서 ‘가족 내 성별분업과 성차별 구조, 이데올로기 재생산 → 저임금, 불안정 노동 → 여성의 빈곤과 이중부담 강화 → 전체 노동자계급의 권리 후퇴와 삶의 조건 악화’라는 악순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추동하는 여성운동의 흐름이 부재했다. 주류적인 여성운동은 저임금 여성노동자, 빈곤 여성에 대한 정부 지원책의 전달 체계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여성의 주체화, 조직화보다는 현실의 어려움을 해소, 해결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제한하는 상황이었고, 노동자운동 내 페미니즘적 실천은 성폭력, 할당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양적 조직화로 치환되는 현실이었다. 이런 전반적인 조건 하에서 ‘빈곤의 여성화’, ‘여성노동의 비정규직화’라는 말들은 여성의 현실을 그저 지적할 뿐인 수사로 사용될 뿐, 운동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하는 데 참조점이 되지 못했다.
2007년 사회운동포럼의 여성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인 여성 활동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대중적으로 평가하고 현실에 대한 진단을 공유하기 위해 노조 내외곽의 다양한 활동가들과 함께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하여”라는 기조 하에 3차례의 사전 워크숍을 기획했다. “왜 현재 ‘비정규직철폐투쟁’이 여성 노동권 쟁취 투쟁이 아닌가”, “일-가정 양립 논의에서 한국사회 노동자운동의 한계와 과제”, “노동조합 내 페미니즘 실천의 현황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각각 진행된 워크숍을 통해서 여성을 보편적 노동자, 시민으로 인지하고 성적 차이에 기반 한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 전략을 자기 과제로 삼지 못한 노동자운동에서, 남성 ‘가장’ 노동자가 아닌 여성노동자, 가족 돌봄에 대한 책임이 있는 노동자의 문제는 가시화되지 못했고 여성문제는 늘 특수한, 주변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평가했다. 이렇게 구축된 노동자운동이 단지 투쟁할 때 ‘여성’ 비정규직을 더 많이 언급한다고 해서, 가사 육아 등 재생산영역의 문제를 여전히 여성들’만’의 문제로 치부한 채 운동 과제의 하나로 끼워 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수량적 평등, 형식적 형평성과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요구해 온 여성 활동가들의 실천 또한 그 고통스러운 지난함이야 분명하다해도 운동과 여성의 현실을 전혀 바꾸지 못할 뿐임을 함께 인식하고자 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여성들의 실천은 특수한 부문이 아니라 운동과 정치 자체를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란 여성이 삭제되고 재생산의 영역을 비가시화 한 채 구성된 사회운동의 보편성과 정치 전략을 뛰어 넘어, 여성억압에 도전하는 페미니즘이 통합된 새로운 보편적 이념, 일반적 전략, 그리고 다른 정치를 구상해 가는 것이다. 사회운동포럼에서의 여성대회는 이러한 결합의 문제의식을 사회운동들과 소통하고, 새로운 변혁의 상을 함께 만들자고 제안하려는 시도였다.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이런 여성대회의 결과물이었다. 사회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념으로 페미니즘을 확산하고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한 적극적인 실천을 조직하기 위한 주체들의 토론과 소통, 교육의 장으로서 여성운동네트워크는 탄생했다. 그렇지만 여성운동네트워크의 실천과 문제의식의 확산은 아직 미약한 상황이다. 노조 내 여성 활동가들의 결합을 강화하고, 페미니즘 교육과 여성운동 방향에 대한 공동 논의를 통해 새로운 실천을 모색해가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특히 최근의 금융위기, 경제위기 하에서 노동자운동의 진정한 대안 모색이 절실한 상황에서 전체 노동자운동의 과제를 선도하는 여성들의 요구와 실천을 제기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최근 몇 년 동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비정규직 투쟁들 중에서 다수를 차지할뿐더러 치열함과 처절함도 더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KTX, 기륭, 이랜드-뉴코아 등의 비정규직 사업장은 이른바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며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주며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각이나 노동자운동의 인식은 고용불안과 저임금을 구조화하는 원인으로서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분석하기보다는 열악한 처지에 내몰린 ‘다수의 여성들’이라는 것에 그쳐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남성생계부양자-여성가사담당자라는 이데올로기와 현실이 여성을 어떻게 노동시장에서 배제하거나 활용하는지를 분석하고 이를 고착화하는 일-가정 양립정책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정세적인 계기로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주목하고 결합하려 했다. 여성인력활용으로 압축되는 여성정책 하에서 여성은 의무로서의 모성과 재생산 노동을 강요받는 여성이자,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강요받는다. 이렇게 분리되어 다뤄지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여성에게 가족이 경제적 독립을 막고, 더욱 취약한 조건을 만드는 여성 억압 구조이며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성권의 실현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운동의 과제로 제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강조하는 문제의식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조건을 강조하지만 성별분업과 가족형태의 구조적 측면이 사장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이 시대의 가장 처절한 아픔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특히 고용의 유지와 그 형태를 둘러싼 정규직화 투쟁이 파업 등의 급박한 형태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여성의 노동권이 억압되는 구조적인 원인으로서 가족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대로 제기되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정규직 노조의 자기 방어적 태도와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소극성을 비난하는 근거로서 ‘힘없고, 불쌍한’ 여성들의 ‘처절한’ 투쟁이 강조되기도 한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과 연대가 실현되지 않고 현실적으로 비정규직의 대다수가 여성인 상황에서 우선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는 게 급선무라는 인식 하에 여성 비정규직 조합원에게만 해당하는 제도 개선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여성노동운동이나 단체들의 흐름도 존재한다. 이러한 흐름은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노동자운동에서 더욱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한데, KTX 투쟁에 대한 여성노동네트워크의 해법처럼 여성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동결이라는 결단에 달려있는 것으로 사태의 원인과 본질이 호도되고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의 갈등과 적대를 야기하는 흐름도 등장했다.
문제는 이런 조건이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주체화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별분업, 가족임금 이데올로기 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여성노동자의 노동을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과 가족 유지에 비해 부차적이고 임시적인 것으로 여기는 노동자계급에게 비정규직 여성노동의 사안은 운동의 양심과 도덕의 문제로는 받아들여질지언정 노동자운동에 중요한 과제로는 인식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나 현실이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갈등과 적대를 형성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나 조직화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는 길이 여성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과제를 제출하고 이를 위한 운동을 만드는 방향에서 모색될 필요가 절실해지고 있다.
금융위기 하에서 여성운동,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모색하기
파국적인 위기를 직면한 상황에서 지금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어떤 대안을 모색하고 어떤 운동을 할 것인가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문제이다. 금융위기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한국경제 위기는 IMF 위기에 버금가는 위기가 훨씬 장기에 걸쳐 진행될 것이고 장기불황 이후 찾아오는 위기여서 그 파괴적 효과는 IMF 위기보다 더욱 클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해 지배세력은 부담을 전 사회에 떠넘길 것이며, 노동자들에게 해고와 임금삭감의 형태로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할 것이다.
이 속에서 여성들을 둘러싼 조건은 이중적인 측면에서 억압적일 수 있다. 우선 임금삭감과 같은 조치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을 받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다수에게 더욱 파괴적인 효과를 미칠 것이다. 이들의 투쟁은 현재와 같은 노조운동 내에서 주요하게 반영되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한 임금삭감은 자본에게 더욱 손쉬운 해법으로 사고될 수 있다.(실제 지난 11월 18일 한나라당 발의로 최저임금 삭감의 내용을 담은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다른 한 측면은 여성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대한 공격에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가 ‘정규직 이기주의’를 비난하는 근거로 활용되면서 노동자운동 내의 갈등과 적대를 증폭시키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주체화되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여성들이 처하게 될 억압적인 조건은 여성들의 삶 자체를 크게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의 조건도 크게 제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지난 10년의 경험은 여성운동의 분리주의적인 양태나 노동자운동의 성 맹목이 여성, 남성 노동자 모두의 권리와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한계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운동을 지속하는 것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다. 노동자들 사이의 다양한 분할을 심화함으로써 위기를 전가하려는 자본의 시도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운동은 페미니즘을 인식하고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해야 한다.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노동자운동의 미래를 개척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여성의 저임금, 빈곤, 폭력의 현실이 도리어 노동자운동을 분할시키는 데 활용됨으로써 스스로의 권리조차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새로운 대안을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다.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로 전체 노동자운동이 지금의 위기에 노동자계급의 대안으로 맞설 수 있는 혁신과 전망을 밝혀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1)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농협중앙회의 사내부부 여성 우선해고 사태였다. 1999년 1월 농협은 인력감축을 계획하면서 사내부부 762쌍을 대상으로 “아내가 퇴직하지 않으면 남편이 해고될 것”이라며 협박했고, 그 결과 752명이 무더기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그 중 688명이 여성이었다. 당시의 많은 자료들이 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부당노동행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주로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하거나 희망퇴직 시킨 후 임시직으로 재계약하는 형태,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강제 전환하는 형태, 정규직을 부당해고 한 후 용역회사로 재입사하기를 강요하는 형태, 여성 집중 부서 자체를 퇴출시킨 후 부서원들을 용역회사를 통해 재입사시키는 형태 등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이 비정규직 전환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퇴사의 압력을 가하는 사례도 빈번했다.본문으로
2) 총 취업자 중 여성의 비율은 1975년 이래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으나, 자본은 여성노동력을 임시적이고 주변적인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결혼퇴직제, 출산, 양육으로 인한 경력 단절과 같은 차별적인 제도와 관행을 유지해왔다. 노동시장 내에서의 성별분업은 여성을 소위 ‘여성 직종’이라 불리는 도소매업, 음식숙박업, 금융보험업과 같은 서비스산업과 비공식부문에 그리고 단순노무, 사무서비스와 같은 여성 직무에 편중시켰다. 성별분리 호봉제, 노골적인 임금 차별과 같은 관행 속에서 여성들의 저임금이 정당화되었으며, 가내 노동과 같은 비공식 부문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성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3차 산업의 임시직, 일용직을 중심으로 여성 고용이 증가했으며, 이는 IMF 구조조정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화되기 이전부터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 불안정한 노동층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본문으로
3)남한에 정착된 자본주의적 가족 형태의 특징은 가족임금이 보장되지 않고 국가의 복지체제가 미비한 상황 속에서 유교적인 직계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동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한에서 성 혁명이 부재했던 상황과도 관계가 깊다. 가족을 유지할 수 있는 소득이 가족임금으로 보존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노동시장에 진출해야 했지만,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이에 기반한 성차별주의는 여성의 노동을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주로 저임금, 비공식 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런 상황은 정당화된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국가 정책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가족 관념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시행되었는데, 이는 가족의 전통을 유지하여 국가의 복지 기능을 가족에게 전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인의 부양 의무, 아이의 교육 등을 가족이 책임지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으로 전가하려는 정책이었다.본문으로
4) 성폭력은 역사적 가족형태를 매개로 조직된 여성억압에 대한 인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억압, 여성의 육체에 대한 대상화(인간으로서 존엄성 박탈), 모성과 같은 여성의 기능적 부분의 착취, 여성의 노동권 박탈과 여성노동에 대한 평가절하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을 배제하고 억압해 온 사회 구조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개별적인 성폭력 사건으로 한정될 수 없다. <100인위원회>를 비롯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자세한 평가는 김정은, 「[기획연재③ 한국여성운동사]성별화된 권리와 노동권의 결합을 위하여: 반(反)성폭력 운동 평가」, 『사회운동』 , 통권73호, 2007. 4.를 참조.본문으로
5)예를 들어 여성노동자가 노동자운동의 주체와 상징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을 반영하는 ‘노동형제’라는 호칭에 대한 문제제기는 언어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제기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제기에 대한 활동가들의 대응은 여성노동자를 주체화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호칭을 동지로 바꾸거나 쓰지 않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본문으로
6)1995년 4월, 캐나다의 10개 연방 중의 하나인 퀘벡주에서는 850여명의 여성들이 퀘벡여성연맹의 주최로 여성들의 빈곤을 제거하기 위한 분명한 조치를 요구하며 10일간의 행진을 진행했다. 이들 중 일부가 같은 해 북경여성대회에 참여하여 퀘벡의 행진을 세계화 할 것을 결의하고, 1998년 몬트리올에 모인 65개국 140명의 대표자들은 빈곤과 여성에 대한 폭력 제거를 행진의 두 가지 의제로 채택, 이에 관한 17개 요구목록을 작성하여, 2000년에 전 세계적인 행진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결성된 <세계여성행진>은 2000년 3월 8일부터 세계 빈곤철폐의 날인 10월 17일까지 까지 전 세계를 지나는 여성들의 릴레이 행진을 조직했다. 2005년에는 2004년 세계여성행진 총회에서 채택된 평등, 자유, 연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중심 가치로 하는 ‘인류를 위한 세계여성헌장’을 기초로 두 번째 릴레이 행진이 조직되었다. 2005년의 행진은 3월 8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시작하여 10월 17일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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