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국제연대운동에 관심을 갖고 시작하게 된 배경은 좀 단순했던 것 같다.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략도 국제주의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저쪽도 세계화되었으니, 우리도 세계화되어야 한다’는 단순논리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물론 논리가 단순하다고 해서 실현과정까지 단순하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에다 19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이후, 다른 나라 활동가들은 어떤 생각, 어떤 저항 논리와 이념을 갖고 운동을 지속하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핵심 원칙이면서도 책 위의 한 구절 정도로 전락한 국제주의를 현실로 끄집어내어 실현해보고 싶다는 어떤 ‘욕망’ 같은 것이 있었다. 이 세 가지는 아직까지 나를 지탱해주는 동인이기도 하다. 민주노총 국제담당자로 일하게 된 것은 2002년 12월부터이다. 민주노총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꼭 실현하고 싶은 몇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로 ‘남반구 및 아시아 연대’였다. 북반구 중심의 주류 국제노동운동에 맞선 다른 경향의 창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민주노총이 국제연대의 일방적 수혜자로부터 벗어나, 세계적 차원의 노동운동 특히 아시아 지역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1999년 말 WTO 각료회의에 맞선 시애틀 투쟁을 통해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국제 사회운동진영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이라고 꼭 노동조합과만 연대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은 아주 근원적인 문제였다. 국제연대활동을 어떻게 상층 실무자 몇몇이 하는 사업이 아니라, ‘현장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으로 전화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남반구노조연대회의(SIGTUR)에 대한 기대와 현실적 난관 초창기 남반구노조연대회의(SIGTUR)에 많은 주목을 했다. 남반구 노조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력한 매개로 생각했다. 사실 이 네트워크는 남아공노동조합회의(COSATU)와 호주노총(ACTU) 서부지역본부에 의하여 제안되었고, 1991년 5월 첫 번째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필리핀의 노동절운동(KMU), 인도네시아의 연대노조, 말레이시아의 독립노조, 스리랑카, 파키스탄, 파푸아뉴기니, 남아공노동조합회의(COSATU)가 참가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전략과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방안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그 이후 2~3년 주기로 총회가 열렸으며, 가장 최근에는 지난 4월 인도노총(CITU) 주관으로 케랄라에서 개최되었다. 민주노총이 공식적으로 SIGTUR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200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남반구노조연대회의 기획회의와 그 다음해 11월에 열린 서울 총회였다. 민주노총은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제3세계 노동조합 연대기구인 남반구노조연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제3세계 민주 노동조합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중요한 사업이라는 판단하여 참가하게 되었다. 그 이후 민주노총은 2003년 멕시코 칸쿤 투쟁, 2004년 인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등에서 ‘SIGTUR 포럼’을 조직하여, 남반구노조연대회의를 활성화시켜보고자 했다. 하지만 SIGTUR를 매개로 주류 국제노동운동에 대한 다른 경향의 창출은 현재 난관에 봉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데는 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 반공주의에 기반을 둔 국제자유노련(ICFTU)은 세계노동총동맹(WCL)을 흡수통합하여 2006년 국제노총(ITUC)을 출범시켰는데, 사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지점은 좌파 성향의 독립노조들이 새롭게 가맹했다는 점이다. 네팔노총(GEFONT), 아르헨티나노총(CTA), 콜롬비아노총(CUT), 인도의 비공식부문 여성노동조합(SEWA) 등이 대표적이다. (SEWA의 경우 ICFTU 마지막 집행위원회에서 가맹신청이 받아들여졌지만, 이 역시 새로운 국제노총의 출범을 염두에 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미 ICFTU 시절부터 가맹되어 있던 민주노총, 남아공노총, 브라질노총 등을 고려하면, 이미 남반구의 노총들에게도 주류 국제노동질서, 즉 ITUC에 대한 개입과 개혁이 현안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SIGTUR는 이를 자기 과제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SIGTUR 내부에는 ITUC에 비판적이고, 가맹하지 않은 독립노총과 노조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반전반신자유주의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이 새로운 화두로 제기되었는데, SIGTUR는 이에 대해서도 통일된 입장과 계획을 내지 못했다. SIGTUR 내에서 주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인도노총(CITU)과 필리핀 노동절운동(KMU)은 세계사회포럼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반면, 민주노총, 브라질노총은 적극적인 연계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08년 케냐 세계사회포럼을 계기로 ‘노동자와 세계화’(Labour and Globalization)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SIGTUR는 이 지점에서도 사실상 뒤쳐지게 된다. 결국 SIGTUR는 변화된 국제연대운동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위치에 처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SIGTUR 운영위원회는 2007년 회의에서, “SIGTUR는 새로운 국제노동조합조직 결성을 목표로 하지는 않으며, 진보적인 남반구 노동조합들간의 네트워크”라고 그 위상을 규정하게 된다. 동시에 초국적기업 대응 등 보다 구체적인 쟁점을 중심으로 한 실천적인 네트워크로 전화시키는 방향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질문은 남아 있다. 남반구의 진보적 노동조합 연대에 있어서 SIGTUR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아시아 노동자 연대를 향하여 민주노총 국제사업이 아시아에 보다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실현하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2003년 아시아 노동조합 연대회의를 개최하였지만, 결과는 ‘의욕 과잉’이었다. 구체적이면서 지속가능한 연대 방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결국 이벤트로 끝나고 만다는 값비싼 교훈만을 얻었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아시아 연대 실현을 위한 세 가지 계기에 착목하게 되었다. 하나는 아시아에 진출한 한국계 초국적기업 문제이고, 두 번째는 이주노동자 문제이며, 마지막으로는 장기적 안목에서 아시아 지역 민주노조운동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아시아 진출 한국계 초국적기업 문제는 민주노총 국제사업의 공백 지점이었다.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한국계 기업의 노동탄압에 대해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진정성을 갖고 이 문제에 대처하지 않는다면 아시아 연대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런 맥락에서 2005년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실과 함께 아시아 진출 한국계 초국적기업 노동탄압 실태 조사를 벌였고, 이를 국정감사에서 제기하였다. 또한 올해 4월에는 현대자동차 인도 공장에 대한 실태조사를 금속노조와 함께 진행하였고, 몇 가지 후속사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필리핀 필스전, 청원패션 등에 대해서도 시민단체와 함께 대응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필리핀 한진중공업 노동탄압이 가시권에 들어와 있고, 이에 대해 건설연맹과 금속노조가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결국 한국계 초국적기업 문제는 아시아 연대를 실현함에 있어서 우회할 수 없는 계기이면서, 또한 실천적 매개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보다 전략적 사고와 계획이 필요한 때이다. 국제기본협약(IFA), ILO 및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제소 등 다양한 제도를 활용하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현지 노동조합 투쟁 지원과 노동조합네트워크 구성 등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모기업이 속해 있는 산별(혹은 연맹)과 단위사업장 노동조합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주노동자 권리 보장 역시 아시아 연대의 중요한 계기다. 올해만 놓고 보면 이주노조와 함께 유엔인권이사회, ILO 총회, 이주발전글로벌포럼(GFMD) 등 다양한 계기들을 통해 이주노조 합법화와 이주노동자 기본권 보장을 위한 국제적인 연대와 지원을 호소했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국제적인 압력 조직화에 있어서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보다 구체적인 연대계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이주노동자 권리보장을 위한 본국과 유입국 노동조합 간의 실천적 연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향후 관건이 아닌가 한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네팔노총(GEFONT)과의 연대 협력에 초점을 맞춰 추진하고 있다. 아시아 노조활동가 교육, 교류 과정 마지막으로 아시아 연대에 있어서 관건 중의 하나가 민주노조 역량 강화 지원이다. 이는 아직 아시아 지역 민주 노동운동 역량이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다. 국제연대가 ‘뜬 구름’ 잡는 것이 아니라면, 아래로부터 역량을 강화시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아시아노조활동가 초청 교육, 교류 과정’이 기획되었다. 2007년 처음으로 이 과정을 산별, 연맹과 공동으로 진행하였고 올해 두 번째 과정을 개최했다. 6~7명 정도의 아시아지역 노조활동가들이 참가한 프로그램이었지만 아시아 노동자연대를 긴 호흡으로 강화시켜내는 중요한 계기로 성장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교육과정을 아시아 지역 민주노조활동가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그런 과정으로 발전시키고 싶은 원대한 꿈이 있다. 민주노총 반세계화 투쟁 반세계화라는 관념은 어떤 세계화를 반대하는가라는 점에서 불명확하고, 극우적인 반세계화와 차별성을 긋기 힘들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개념이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노총은 여전히 WTO, FTA 등 신자유주의적 무역질서에 맞선 투쟁, 초국적 투기자본 규제 등을 ‘반세계화’ 투쟁으로 개념화한다. 민주노총은 세계사회포럼(WSF)에 참가단을 조직하여 참가하였고, 국제위원회(IC) 위원이기도 하다. 또한 2003년 WTO 각료회의에 맞선 멕시코 칸쿤 투쟁, 2004년 한일 FTA에 맞선 도쿄 방문투쟁, 2005년 WTO 홍콩 각료회의에 맞선 투쟁, 2006~2007년 한미 FTA에 맞선 미국 방문 투쟁 등에 참가했다. 외형적으로 민주노총은 ‘반세계화’ 투쟁에 꽤 적극적이다. 하지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반세계화’ 투쟁을 민주노총이 얼마나 자기문제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미지수다. 물론 이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투쟁’ 동력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노동조합의 현실은 조합원 및 노동자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쟁점을 주요한 투쟁 의제로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반세계화’는 조합원들에게 아직까지는 거리감을 느끼는 혹은 자기 의제로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는 쟁점이다. 그나마 FTA 투쟁 정도가 구조조정과 일자리, 주권을 포함한 사회적 권리의 침해와 연계되면서, 노동자 내부 의제화에 일정하게 성공한 경우다. 하지만 FTA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적 무역질서가 초래할 ‘결과’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 보다 근원적인 초국적 금융자본과 투기자본에 대한 문제제기는 민주노총에서 여전히 자기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다. 조건들 국제노동운동의 주류에 맞선 다른 경향의 창출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최소한 몇 가지 조건들은 충족되어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로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전반신자유주의 사회운동 역량과의 연결망 형성이 필수적이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경계를 넘나들면서 서로 좋은 에너지를 교류할 수 있을 때, 새로운 경향의 창출은 가능할 것이다. 특히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두 번째로 아시아 지역의 민주노조운동 역량 강화가 필수적이다. 민주노총이 갖고 있는 한정된 자원을 고려하면 이에 대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장기적으로 ‘아시아사회운동연합’과 같은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을 아우르는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밀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구체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국제주의적 실천을 강화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초국적기업, 이주노동자, FTA를 포함한 신자유주의적 무역질서 등의 의제는 일정한 국제연대투쟁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력한 매개가 될 수 있다. 네 번째로 남반구 노조주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여전히 정치적 유효성을 갖고 있다고 보지만, 이것의 실현은 국제사회운동 및 북반구의 진보적 노동조합과의 연대 과정과 결합되어 진행되어야 한다. 다섯째 국제노총에 가맹되어 있는 진보적 노총들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내부 진보블록의 형성과 개혁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에필로그 모든 사업이 그렇듯이 국제사업도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국제주의는 모든 활동에 녹아들어가야 할 관점이자 원칙이지 특정 담당 혹은 부서의 전문 영역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국제사업도 축적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체계와 역량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고민이 사회진보연대에도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사회운동을 시작하면서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첫 사회운동 경험은 단체활동이었다. 뒤이어 노동조합활동을 시작했고 진출은 매우 어설프게 이루어졌다. 진출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선배들이 거의 없었고, 또 집단적으로 진출을 하기에도 쉽지 않은 상황이어서 사회운동으로의 진출은 상당부분 개인적 판단이나 처지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 또한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런 저런 고민이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실제 진출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고, 목적의식적이지도 않았다. 당연히 구체적인 문제의식이나 활동계획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어렵더라도 2, 3년 정도는 무조건 활동을 해보자는 정도였다. 실제 초기 2, 3년 정도가 가장 힘들었는데, 무엇보다 가장 큰 어려움은 학생운동과 짧은 단체생활을 해오면서 형성한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생각과 실제 노동조합 운동의 괴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운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의의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 괴로웠다. 오랜 기간 무기력한 상태로 생활했고, 운동적인 고민은 후순위였을 정도였다. 운동과 지역본부 활동에 대한 문제의식, 그 속에서 어떤 활동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활동을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가능했다. 즉, 활동을 시작하면서 문제의식을 가졌다기보다 활동하면서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수년 간에 걸친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경험과 사람들과의 안정적인 관계 형성, 책임영역에서의 다양한 활동경험 등이 쌓이고 나서야 좀 더 긴장감을 가지고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서울지역본부에서의 운동경험들 지역본부의 위상과 활동영역이 참으로 고약해서, 무엇하나 자기사업으로 채택하지 않는 것은 없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자기의 책임 하에 진행하는 사업도 많지 않다. 임단협 투쟁이나 연맹의 주요사업, 총연맹 차원의 사업 등 대부분의 굵직굵직한 사업들은 지원역할에 그치거나 전국동시다발로 진행하는 사업을 최대한 해당지역에서 잘 수행하는 것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미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쨌든 그렇다보니 투쟁의 처음과 끝 즉 기획단계에서부터 투쟁 마무리까지 온전하게 지역본부의 책임 하에 사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면서도 대부분의 사업은 다 하게 마련이다. 2000년 민주노총 서울본부 남동지구협의회 사무차장으로 시작한 지역본부 활동. 기억들을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2000년과 2001년도는 제외한다. 물론 2000년 이랜드노조 파업투쟁이나 롯데호텔파업, 사회보험노조 파업투쟁, 2001년의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김대중 정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심해진 공안탄압, 연이은 거리투쟁 등 많긴 했지만 주체적인 입장에서 이런 저런 고민이나 활동을 했다기보다 열심히 참가했다는 정도가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아쉬움이 많았던 2002년 발전노조 파업 발전노조 파업은 공공부문 구조조정이 본격화되고 있던 시점에서 진행한 투쟁이었고, 노동자운동에 있어서도 1997년 경제위기 이후 노사정 타협과 그에 뒤이은 현대자동차, 만도기계, 대우자동차 등의 정리해고 저지 투쟁 이후 가장 굵직한 투쟁이었다. 발전노조 조합원들의 투쟁은 완강했고, 시민들의 파업지지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민주노총도 전 역량을 동원하여 지원투쟁을 조직했고, 지역본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그 이상으로 정부의 태도도 강경했고, 파업노동자들은 국민도 아니라며 몰아 붙였다. 정부의 탄압강도가 높아지면서 산개투쟁이라는 다소 모험적인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조합원들이 많은 편이어서 안정적인 산개투쟁 장소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산개투쟁이 가능한 안정적인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서울본부의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당시 서울본부 사무실은 장충동에 위치해 있었는데, 보령화력 조합원 일부가 산개투쟁장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지원투쟁 소식을 전해주면서 조합원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는 일에서부터 먹고 자는 일을 챙기고, 필요한 교육을 진행하고, 경찰의 막가파식 검문검색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은 조합들을 위해 타 조합의 조끼를 빌려서 입히는 일, 시민선전전, 투쟁기금 모금, 조직지침에 따른 총파업조직화, 문화제, 기자회견 등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단위노조의 참여도 매우 적극적이었고, 실제 최선을 다해 파업을 비롯하여 자기 노조에서 할 수 있는 투쟁들을 최대한 조직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결말은 허망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예정되어 있던 4월 2일 당일, 민주노총의 한 부위원장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고 마침 내가 그 전화를 받았다. 교섭은 잠정합의되었고, 총파업 지침은 유보되었으니 즉각 단위노조로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민주노총의 지침이 맞냐고 재차 확인했고, 불안한 마음으로 초조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합의내용 발표를 기다렸다. 그 이후의 내용은 모두가 아는 바대로 교섭도 투쟁도 완전히 실패한 채로 발전노조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발전노조는 다음날 동국대에서 마지막 집결투쟁 후 현장으로 복귀했다. 아마도 당시 투쟁이 2000년대 들어 민주노총 차원에서 조직한 투쟁 중 가장 진정성 있는 투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비정규 악법 저지투쟁을 위해 10여 차례가 넘게 남발한 총파업보다도 훨씬 더. 2002년 발전파업은 일종의 대리전이었다. 그리고 발전노조의 완강한 파업 덕택에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그 전면전의 본게임을 앞두고 주저앉았다. 민주노총이 파업에 돌입하였더라도 승리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 결과로 매우 심각한 타격을 받았을 수도 있었다. 나도 공안탄압에 의해 민주노총이 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심리적 압박감을 많이 느꼈다. 결국 민주노총은 그 중압감을 극복하지 못했고 무의미한 합의와 파업유보를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싸움은 졌고, 민주노총은 공안탄압에 의한 상처보다 훨씬 더 큰, 그 이후로도 결코 회복할 수 없었던, 내상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노조 건설투쟁과 파업투쟁, 그리고 분열 1998년 정리해고제와 파견법을 내주고 받은 공무원노조 합법화에 따라 1999년부터 공무원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조직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각 사업장별로 직장협의회가 만들어지고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 대표자 간담회,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 발전연구회,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2001.2.3)을 거쳐 마침내 2002년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의 출범을 맞이하였다. 공무원노동조합의 결성을 바라보던 많은 시선들은 아마도 양가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으례 공무원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신반의 하면서 지원하였을 것이고, 설마설마 하던 공무원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단계까지 왔음을 나름대로 감격스러워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고, 솔직히 말한다면 전자에 가까웠다. 어쨌든 소지역별로 지원 공대위를 꾸리고, 또 서울지역 공대위를 구성하면서 실무 간사 역할을 맡아 직간접적으로 지원활동에 참가하였다. 간담회 조직, 여론사업, 탄압사업장 지원활동 등을 진행했고, 무엇보다 정서나 인식의 격차가 상당했으므로 이를 조정하는 역할이 중요했다. 마침내 3월 23일 공무원노조는 출범을 선언했고, 정권은 안간힘을 다해 이를 저지하려 했다. 나는 출범 당일 국회사무처에 있던 전공협 사무실에 마련된 상황실에 파견되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고려대에서 역사적인 공무원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당시 발전노조도 산개투쟁과 집결투쟁을 반복하면서 완강한 파업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공무원노조 출범 당일 연세대 노천광장에서 집결투쟁이 있었다. 이래저래 3월 23일 하루 종일 서울전역에서 경찰과 노동자 사이의 쫓고 쫓기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제법 흘러 노동자운동을 둘러싸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공무원노조에게도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파업투쟁(2004년), 노조사무실 폐쇄 등 지독한 노조탄압(2006년), 이 과정에서 구속, 수배, 해고된 많은 간부들, 조직분열(2007년) 등을 압축적으로 경험하였다. 당시의 활동가들 중 몇몇 동지들은 지병으로 세상을 등졌고 아직도 해고자 신분으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지들도 있다. 공무원노조 건설과정에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조합(특히 같은 공무원 신분이었던 전교조),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지역풀뿌리 조직들과 많은 시민단체, 정치조직들이 이런 저런 대의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지원활동들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들의 도움으로 쏟아지는 탄압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공무원 노조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지원활동이 긍정적인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닌데, 무엇보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대한 신규조직을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 하에 두려는 정치조직들 간의 물밑 경쟁과 활동가 조직화 사업이 조직 내에 지나친 정치적 긴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투쟁과정에서 조직 내부적으로 겪었던 많은 어려움과 극단적인 조직분열 또한 이러한 과정의 연장선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조직분열의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행사한 일부 정파의 종파적 행위 및 민주노총 지도부의 기회주의적 처신도 한몫 했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2003년 투쟁, 아.. 김주익 열사 2003년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시작했던 것 같다. 전 해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의 당선과 민주노동당의 선전이 비교적 우호적인 정치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가 깨지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새해 벽두부터 터진 배달호 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한진중공업 투쟁, 4월 철도파업, 화물파업까지가 전부였다. 철도노조의 2차 파업에 대해 신속한 경찰투입을 신호탄으로 하여 노동운동에 대한 거센 탄압물결이 이어졌고, 6명에 달하는 열사들의 자결과 분신, 대규모 구속자를 낸 전국노동자대회까지 한시도 팽팽한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던 시기였다. 9.11테러를 빌미로 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군대파견을 서두르면서 불붙은 반전평화 투쟁 또한 중요한 투쟁이었다. 운동을 해오면서 유달리 기억에 남거나 부채의식 같은 게 있는 경우가 있다. 91년 한진중공업의 박창수 위원장이 그랬다. 당시 동아리방 한쪽 귀퉁이에서 한겨레신문을 통해 보던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안기부에 의해 연행된 후 의문사한 박창수 열사의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백골단이 해머와 망치를 동원해 병원 영안실을 부수던 장면이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서른 둘이었던가 셋이었던가? 개인적인 안타까움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노동운동에서 중소기업노조가 주류를 이루던 전노협과 뒤늦게 민주노조 대열로 합류한 대공장 노조의 연대가 매우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고, 한진중공업노조가 그 맨 앞에 서 있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1990년 3당 합당(3당 합당 선언은 전노협의 창립대회 일이었던 1월 22일이고, 공식 출범은 5월 9일이었다)으로 1987년 이후 형성된 계급관계를 일시에 역전시키면서 공안탄압 국면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강경대 열사 사건(1991.4.26)이 있었고, 거센 5월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박창수 열사 사건은 그 요동치던 정세 한가운데서 발생했다(1991.5.6). 그 이후 박창수라는 이름이 한진중공업이라는 이름이 무겁게 남아 있었다. 바로 그 한진중공업에서 김주익 위원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창수와 김주익, 그 오버랩되는 영상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두산중공업 배달호, 한진중공업 김주익, 곽재규, 세원테크 이현중, 이해남, 그리고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이용석. 유달리 많은 동지들이 죽었고, 다치거나 구속되었다. 서울대병원 파업투쟁(2004년)과 산별노조 논쟁 2004년 산별협약 쟁취를 위한 보건의료노조의 투쟁은 이후 많은 논쟁거리를 남긴 투쟁이었다. 나는 마침 중부지구협의회 담당자로 자리를 옮긴 상태에서 서울대병원지부의 투쟁을 지원하고 있었다. 의외로 투쟁이 길어졌고, 막바지에 한 일주일쯤 파견 비슷하게 병원으로 출퇴근하고 있었다. 산별노조 건설 6년 만에 처음으로 쟁취한 산별기본협약을 둘러싸고 보건의료노조 본조와 서울대병원 지부 사이에 일대 논쟁이 있었고, 이를 둘러싼 논쟁은 산별노조에 대한 논쟁으로, 그리고 정치적 논쟁으로 이어졌다. 소위 산별합의안이 지부교섭과 취업규칙에 우선한다는 10장 2조를 둘러싼 논쟁이다. 산별협약이 지부교섭안보다 수준이 높을 경우야 문제 될 일이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하향평준화를 초래하는 부분이 있었고 지부단위의 현장투쟁을 무력화시킨다는 합당한 문제제기였다. 논쟁은 파국적인 방식으로 이어졌고, 지부장 징계와 조건부탈퇴 등 본조와 지부간의 팽팽한 대치국면은 결국 서울대병원지부를 비롯한 본조의 입장에 비판적 입장을 가졌던 지부들의 집단탈퇴로 이어졌고, 이후 탈퇴지부들의 공공연맹 가입을 둘러싸고 민주노총 차원의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지리한 논쟁 끝에 결국 탈퇴한 지부들을 중심으로 공공연맹 가입을 통한 의료연대노조 결성으로 이어졌다. 산별노조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투쟁은 정치적 논쟁과 중첩되면서 생산적인 교훈보다는 민주노총 내부의 분열적 요소를 확대재쟁산하기도 했다. 노사정 합의주의를 둘러싼 대대파행 뇌물비리 사건 등을 둘러싼 내홍 2005년은 무엇보다 민주노총 내부의 내홍으로 인해 힘들었던 한해였다. 이수호 집행부의 등장과 함께 민주노총의 노선도 일정 변화를 겪게 되는데, 소위 사회적 교섭 또는 노사정합의주의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각각의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들 간의 극한대결로 이어졌고, 하반기에 있었던 강승규 수석부위원장 비리사건은 민주노총의 대국민적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비리사건 처리과정에서의 입장차로 인해 심각한 내홍까지 더해지면서 극심한 분열과 상호불신이 도를 넘어서고 말았다. 비단 대국민 이미지만이 아니라 기층에서 활동하던 활동가들과 일선간부, 조합원들의 자괴감은 심각한 것이었다. 민주노총 마크가 새겨진 조끼를 입고 다니기가 겁날 정도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경과하면서 곳곳에서 (사실은 매우 뒤늦은) 민주노총의 위기, 노동운동의 위기를 들고 나오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해법과 노력을 제안하기도 했다. 아래로부터의 혁신, 직선제의 조속한 실시, 변혁적 노선으로의 재무장, 비정규직이나 사회공공성 등 기업별 의제가 아닌 사회적 의제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 등 각양각색의 대안들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돌파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탓이었을까. 민주노총의 무기력상태는 그 후로도 결코 극복되지 못했다. 비정규악법저지 또는 권리보장입법쟁취 투쟁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활발해지기 시작한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되면서, 비정규직 확산을 막고 비정규노동자들에 대한 권리보장을 요구하는 입법요구가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리고 2004년 9월 정부가 <기간제와 단시간 고용에 관한 법률제정안과 파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시점부터 2006년 11월 30일 국회통과에 이르기까지 몇 년에 걸친 지난한 싸움이 이어졌다. 나도 2004년 열린우리당 당사 점거투쟁부터 시작하여 비정규 장기투쟁사업장 동지들과 함께했던 실천투쟁, 여러 사회운동 단위들과 함께한 실천단 활동, 투쟁기획단과 공투본을 통한 실천투쟁을 함께 하였다. 3년 내리 겨울을 여의도 국회와 광화문 열린광장 앞에서 보내기도 했고, (오진이긴 했지만) 갈비뼈 골절 진단에 CTS촬영을 받을 만큼 맞아도 보고, 닭장차도 타보고, 새벽같이 국회의장 공관 앞도 가보고, 도심 삼보일배에 대국민선전전, 현장 순회 선전전, 시민문화제 등 많은 일들을 경험했다. 투쟁의 전체 과정은 내 경험보다 훨씬 복잡다단했고, 기간도 길었다. 사회교섭과 연동한 수차례에 걸친 내부적인 혼란이 반복되었고 투쟁이 끝날 때까지 투쟁기조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었다. 노사관계로드맵, 한미FTA 등 굵직굵직한 투쟁현안들과 맞물리면서 투쟁도 난마처럼 얽혔다. 솔직히 법이 통과되고 나서 마음이 홀가분했을 정도였다. 어차피 실패한 싸움이라 걸, 법이 통과되기 훨씬 이전부터,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투쟁을 안 할 수도 없었고 솔직히 ‘죽을 맛이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비극적인 패배도 아니고 절치부심 복수를 다짐하며 대오를 추스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추스를 대오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비정규투쟁이 법 관련 투쟁만으로 한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와 관련한 투쟁이 가장 중요한 투쟁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이 투쟁을 과연 진정성을 갖고 해왔었는지 자신할 수 없었다. 몇 년간 요란스럽기는 했지만 그게 민주노총 60만 조합원의 투쟁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라고 말하는 게 솔직할 것 같다. 그 밖에 기억에 남는 투쟁들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투쟁이 있었다. 민주노총 지침대로 한번은 열심히 했고 투표도 했다. 할 만한 선거투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한번은 다른 투쟁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못 본 척 했다. 나도 찍지 않을 건데 찍으라고 선거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2002년 사회진보연대는 대선공투본 활동을 했고, 노동해방선봉대 투쟁도 했었던 것 같다. 당시 고생했었던 동지들한테는 미안하지만 관심도 없었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2006년에는 비정규악법 저지투쟁 말고도 많은 일이 있었다. 노사관계로드맵 투쟁도 있었고, 포항건설노조의 투쟁과 열사투쟁, 평택기군기지 확장저지 투쟁, 한미 FTA 저지투쟁이 있었다. 장기투쟁 사업장들의 투쟁도 여전했다. 평택은 그냥 열심히 참가하는 수준이었고, 한미 FTA 저지투쟁은 다른 사회운동 단위들과 함께 범국본 차원의 투쟁을 열심히 조직했다. 하중근 열사 투쟁은 포항도 가고 대여섯 차례에 걸친 서울상경 투쟁도 휴가 반납하면서 싸웠다. 연대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참 힘들고 외로웠던 투쟁이었다. 결국 살인책임자를 처벌하지도 못했고, 이후 포항건설노조도 식물노조가 됐다. 덩달아 나도 힘든 시기였다. 2007~08년 이랜드뉴코아 투쟁도 하고 싶은 말들이 제법 있고, 정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투쟁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 미안할 따름이다. 민주노총, 산별 vs. 지역 ?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넘어오면서 ‘지역’과 ‘산별’ 질서는 사실상 교통정리가 됐다. 전노협이 지역중심이었다면 민주노총은 연맹(산별)중심 질서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지역본부는 총연맹의 사업방침을 지역차원에서 진행하는 역할이 주 임무고, 연맹에 대한 지원이나 법률사업(지노위, 지방청), 정치사업, 지역연대 사업 등 연맹이 할 수 없는 지역차원의 사업들을 담당한다. 어쨌든 보조역할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현재의 노동자운동이 또는 민주노총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민주노총이 조합원과 비조합원, 정규직과 비정규직, 취업자와 실업자 전체를 아우르는 노동자 계급의 구심점 역할을 못하는 게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과 조직노선 모두와 관련이 있고, 현재의 민주노총은 그 두 개가 착종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산별이라는 쟁점은 우회할 수 없는 쟁점이기도 하다. 어쨌든 지역본부가 민주노총의 중심축인 연맹, 산별 운동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지역에 따라 좀 편차가 있긴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비슷할 거 같다. 게다가 운동이 위축되면서 많은 단위사업장에서는 연맹사업도 겨우겨우 하는 형편이라 지역본부 사업이나 활동에는 참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역운동이나 연맹을 넘어서는 연대활동에 적극적이지 않다. 서울본부는 연맹서울과 지구협의회가 기본단위라고 할 수 있는데, 연맹서울은 지역본부가 소속 단위노조를 직접 만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지구협의회로 참가하는 단위노조는 전체 단위노조의 20%가 채 안 된다. 이래저래 지역본부는 대중 동력에 기반을 둔 사업을 기획하기가 무척 어렵다. 그나마도 총연맹의 지침이나 연맹과의 공동사업이어야 가능하다. 한마다로 독자적인 사업을 하는데 많은 한계가 있고, 이 한계가 고스란히 지역본부 활동의 한계선으로 작동한다. 지난 몇 년간의 서울지역본부 활동에 대해 ‘마치 단체 같다’는 평가를 종종 접하게 된다. 좋게 해석하자면 노동조합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사회운동들에 개방적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대중조직이 대중조직답게 활동하지 못하고 상근자들끼리만 움직이는 활동을 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아마 내가 듣는 평가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 어차피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운동의 어려움은 현재 질서 속에서 온전히 극복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상근간부 몇몇이 지역본부 이름 걸고 활동한다고 운동의 새로운 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역본부라는 자기 위상에 걸맞게 대중운동을 혁신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고,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는 과감한 시도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게 1~2년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지역본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지역본부 차원에서라도 긴 안목과 튼실한 기본계획, 성실한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 같다. 사회진보연대와 나 일단 난 사회진보연대의 성실한 회원이 아니라는 점을 솔직히 밝혀두어야 할 거 같다. 일찍부터 회원명부에 적을 올리고 중간에 운영위원으로 이름을 싣기도 했지만, 사회진보연대 활동을 내 활동의 준거점으로 삼아 왔는지는 별로 자신이 없다. 내 활동의 경험을 사회진보연대와 성실히 교류하지도 않았고 사회진보연대 활동에 성실히 참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사회진보연대와 관련해서 뭐라 말하기가 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진보연대에서 제출하고 있는 지역운동이나 사회운동노조주의와 같은 내용들은 지역본부 활동을 하면서 고민이 되는 부분이라 최대한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가 않다. 주변 활동가들의 반응도 ‘사회진보연대는 어렵다’가 많다. 일단 사회진보연대에서 제출하는 내용이 추상적이거나 애시 당초 ‘관점’ 수준에서 제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한다. 사실 그 내용을 구체화하고 실천적인 경험을 축적하고, 이를 조직적으로 환류 해야 하는 책임이 나와 같은 회원들에게 있는데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변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전체적으로 좀 둔한 편인데, 새로 배우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적응하는 데에도 오래 걸린다. 서울지역본부 활동이 거의 8년쯤 되는데, 시간으로 보자면 매우 긴 시간이지만 운동을 내 것으로 소화하는 데에는 8년도 짧았던 것 같다. 정세도 운동도 만만치 않은데 내 속도가 느려 좀 답답하다. 사회진보연대가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는다. 반성을 겸하면서 좀 더 훌륭한 사회진보연대 회원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아봐야겠다.
나는 현재 전국공공서비스노동조합(공공노조) 정책기획실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태어나서 공공노조에서 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전국보육노조에서 활동하다가 속해 있던 노조가 산별전환을 하면서 고용이 승계되어 공공노조에서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보육노조에서 공공노조로 처음에 전국보육노조에 들어갈 때는 말로만 여성노동자의 조직과 투쟁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혀 보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러나 막상 전국보육노조로 가서 보니, 여성노동자를 조직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노조로 간 남성동지 이야기를 들으니 하나의 사업장을 조직하면 최소 100~200명이 조직되었지만, 어린이집은 많아야 15명 안팎이었고 50%이상이 5인 미만 사업장이었다. 게다가 보육노조 초기이다 보니 보육교사가 노조 조합원이 된다는 것에 대해 낯설어 하는 분위기였다. 2년 여 사업으로 대부분의 보육교사는 노조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만, 실제 노조가입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처음 전국보육노조로 가면서는 노조의 규모가 커지는 조직화뿐만 아니라 보육노조가 ‘돌봄노동의 사회화’에 대해 고민하고, 운동하는 조직이 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장 터지는 보육의 시장화, 부당해고 등에 대한 대응도 버거운 것이 보육노조의 조직적 상황이었다. 그러다 조직이 채 자리 잡히기도 전에 산별전환을 하면서 보육노조는 아쉽게 해소되었다. 복잡한 조직, 공공노조 공공노조가 어떤 곳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조합원은 주로 어떤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나의 대답은 늘 ‘정말 다양해요’라는 말로 시작된다. 가스공사, 전기안전공사와 같은 공기업, 건강보험공단, 연금공단과 같은 공단, 정부로부터 예산을 받는 기타 공공기관들부터 시작해서 병원, 학교, 청소와 시설관리를 하는 민간용역업체까지 사업장의 성격도 천차만별이며 조합원이 하는 일이 사무에서 간호, 보육, 청소미화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전에 기업별 노조로 있을 때에는 같은 사업장에서 함께 임단투도 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동질성이 있었지만,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당연히 ‘같은 조합원’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조직적으로 ‘공공노조’에 함께 있다 보니, 서로 더 알려고 하고, 알다보니 서로 함께 하려는 모습도 보게 된다. 복잡한 조직형태가 활동과 사업에도 이어져 하루에도 비정규직투쟁 집회와 법 개악에 대한 기자회견, 토론회, 신규지부 조합원 교육 등이 정신없이 펼쳐진다. 이 글은 하루하루 업무를 처리하느라 바쁜 일상에서 살짝 벗어나 공공노조의 현재를 바라보고, 과제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공노조와 ‘공공성’ 공공노조뿐만 아니라 노동자운동 진영, 더 나아가 진보진영 내에서 ‘공공성’ 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사실 ‘공공성’을 이야기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공공노조는 가스, 전기, 보건의료, 건강보험, 간병, 보육, 사회복지 등의 공공부문을 포괄하고 또 조직대상으로 하고 있어 공공성 투쟁에 주요한 역할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실제 공공노조 내에서 공공성 관련 사업은 공공부문 민영화반대를 한 축으로 하고, 다른 한 축으로는 현재 제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건강보험, 국민연금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전문가나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이 ‘개선안’을 마련하고, 조합원들은 그것에 대하여 대시민선전전을 하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그러나 때로는 그 ‘개선안’이라는 것이 다른 영역에서의 후퇴를 가져오는 경우도 발생한다. 국민연금에 있어서 '기초연금'을 주장하여 '기초노령연금'이 신설되었으나, 기초노령연금으로 인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해 생계급여를 받고 있던 노인층은 생계급여가 삭감되고, 교통수당과 경로연금이 없어지면서 오히려 수입이 감소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이른바 ‘공공성 쟁취’가 하나의 제도를 중심으로 ‘완결된’ 개선안을 잘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교훈으로 남긴 것이 아닐까. 제도 개선안을 중심으로 하는 사업은 기업별노조를 지향하기 위하여 산별노조로 전환하였다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신이 속한 영역의 ‘제도’를 중심으로 사업을 하는데, 그렇다보니 이전과 다름없이 자신이 속한 영역을 중심으로 사고하게 되고, 확장된 사고를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공공성 투쟁을 강조하다 보니, 정세적으로 요구되는 투쟁은 소홀이 다루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도 있다. 올해 한창 촛불투쟁이 진행될 때, 조합원들은 촛불투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몇 개의 의제에 대하여 촛불시민에게 알리자는 계획이 제출되자 이것을 중심으로 조합원들은 결합하였다. 자신이 속한 사업장과 관련된 의제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더욱 커지는 양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특별히 사회서비스에 대해 나는 현재 담당하고 있는 게 사회서비스이다 보니, 공공노조가 만들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보육, 간병, 사회복지의 경우에는 독자적으로 노조를 만들기도 쉽지 않고, 함께 공동 활동을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돌봄노동’의 영역에 있는 노동자의 조직화에 대해 공공노조는 소극적인 경향이 있다. 이미 조직된, 또 규모가 큰 지부에 먼저 예산과 인력을 투여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돌봄노동 영역의 노동자 조직화에 대해서도 조직할 주체가 있느냐, 그 영역에 얼마나 노동자가 있느냐가 중요하게 고려된다. 반면 어떠한 노동자를 조직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는 여전히 공백이다. 돌봄노동 노동자의 조직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주제가 (나도 사회서비스에 대한 교육을 할 때 그렇지만...) 돌봄노동을 하는 여성노동자의 매우 열악한 노동조건이다. 그런데 이 노동자를 조직하여 일정 수준 이상으로 노동조건을 상승시키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노동자로서 노동권을 가지는 것이 현재의 임금을 올리는 것이나, 고용을 안정화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들과 노동권의 실내용이 무엇일지 함께 인식하는 과정이 조직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지배세력이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현재의 재생산 위기를 관리하고 있고,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방식으로 가족 내에서 이루어지던 재생산 노동 중 일부를 시장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장은 여성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노동조건으로부터 시작하더라도, 현재의 체제와 구조 안에서는 사회서비스 여성노동자의 노동권과 권리가 결코 쟁취될 수 없다는 것을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사회서비스의 시장화에 대한 대응은 지금까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적었던 노조, 대표적으로 공공노조에서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생산영역과 재생산영역을 분리하여 재생산영역을 사적영역으로 비가시화 시켜왔던 사실을,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재생산노동을 가족 내에서 여성이 무급으로 담당해 왔던 사실을, 운동사회는 생산영역의 변혁만 사고해왔고 재생산영역의 변혁은 사고하지 못해왔다는 사실을 교육하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성폭력 사건의 경우에는 노조가 성맹목적임을 인식케 했으나,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그 자체로 적대적으로 사고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페미니즘을 보편적 운동으로 인식하거나, 여성억압의 구조적인 원인을 사고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서비스 시장화에 대한 대응을 노동자운동이 페미니즘적 과제와 만날 수 있는 유의미한 계기로 사고해야 한다. 공공노조, 어디로 가야 할까? 공공노조는 지금 공공성 의제들을 세분화시켜 각각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려고 한다.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공공성 의제들을 그 자체로 완결적인 대안을 만드는 데 중심을 두면서 오히려 정세인식과 요구받는 투쟁에서 후퇴한다면, 공공노조는 공공(空空)노조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의제 속에서 완결된 대안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 대안이 현실화되는 과정은 별도로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전히도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의제들이 서 있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이다. 특히 현재 금융위기 시기에 공공노조 조합원의 반응이 ‘지금껏 펀드를 얼마를 날렸는데…, 주가 더 떨어지면 안 되는데…’와 ‘주가가 떨어지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라는 것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내년 공공노조의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노조 내에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나아가 공공노조의 과제를 현 시기 운동의 과제 속에서 인식하기 위해서는 사회운동과의 소통이 각별히 요구된다. 내년이면 금융위기가 실물경제 위기로 이어지며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임금삭감, 물가상승으로 노동자의 고통이 커질 것이다. 공공부문은 민영화와 공공서비스 축소가 진행될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좋은 제도 개선안을 국민들에게 알린다고 그것이 실현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노동자 민중들과 현시기 공공서비스를 축소하는 정부의 야만성에 대하여 폭로하며, 노동자 민중들과 함께 정부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실제 공공서비스 축소로 인해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빈곤층과 비정규직이 함께 투쟁하기 위해서 어떠한 방식으로 운동을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 그동안 비정규직을 포괄하기 위한 사회보험의 제도 개선안들, 연대전략들은 빈곤층과 비정규직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기획되고, 요구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결코 빈곤층이나 비정규직과의 연대라 볼 수 없고, 의도는 선하였을지 몰라도 시혜적이라는 지적을 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확대하지도 못했고, 주체를 형성하는 방식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공노조는 공공성의 실내용으로 공공서비스의 저렴한 가격, 안정적인 공급, 수혜 대상의 확대 등을 주로 고민하고 있다. 빈곤운동, 비정규직운동 내에서 공공노조가 고민하는 공공성에 대하여 어떠한 고민이 있는지 함께 논의해야 하며, 투쟁의 공동기획과 공동실천을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나는 최근 민주노총 간부들과 마숨 이주노조 전 사무국장, 이주노동자후원회 사무국장과 함께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2차 이주와 개발에 관한 국제포럼(GFMD)>에 참가했다. GFMD는 WTO와 같은 정부 간 기구로, 이주 정책을 논의한다. 그렇지만 구속력 있는 합의를 도출하지는 않는다. 이 기구는 2006년 UN 내에서 열린 ‘국제 이주와 개발에 관한 고위급 회담’을 통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2007년 브뤼셀에서 1차 GFMD가 개최될 당시 각 국 정부가 참여하면서 UN의 틀을 벗어나게 되었다. GFMD는 이렇듯 UN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고, 단기 방문자 프로그램, 송금이익, 이주로 인한 ‘부정적 효과(예컨대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지나치게 초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GFMD의 주요 의제가 인간의 생존과 존엄을 대가로 정부와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며, 따라서 국내적, 국제적 영역에서 광범위한 신자유주의적 조류와 일치하는 흐름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시민사회 단체들은 UN 고위급회담 시절에 뉴욕에서 개최된 대응행사를 시작으로 GFMD에 비판적으로 개입해왔고 브뤼셀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올해 열린 포럼은 시민사회단체, 특히 노동조합의 참여가 획기적으로 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0월 22일부터 30일 사이에 마닐라에서 세 가지 대응행사가 개최되었다. 이틀간 열린 국제산별연맹(Global Union Federations, GUFs) 주최 회의, 세계이주민권리(Migrants’ Rights International)와 국제 NGO들이 ‘이주와 개발, 인권에 관한 국제 민중행동’이라는 이름하에 주최한 여러 행사, 최근 결성된 세계이주민연대(International Migrants Alliance- 풀뿌리 이주민 단체들과 노조 연대체인데 국제적인 필리핀 단체인 Migrante International이 주도적인 역할을 함) 주최로 열린 사흘간의 ‘이주민과 난민의 세계대회’가 각각 개최되었다. 세 그룹은 GFMD 논의에서 인권에 기초한 담론이 중심이 되도록 비판적 개입을 해야 한다는 입장부터 GFMD의 신자유주의적 지향을 고려하여 전면적으로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까지 GFMD에 대한 각기 다른 입장을 제출했다. 그러나 세 그룹 모두 이주노동자 조직화와 이주노동자의 필요에 복무했던 다양한 경험을 공유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제안했다. 민주노총 참가단은 마닐라에 가기 전 GFMD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마련하지 못했다. 따라서 어느 정도는 서로 갈등적인 의제를 지니고 있는 세 행사에 모두 참여했다. 때로는 우리 참가단의 활동 초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닐라에서 이주정책의 세계적 흐름과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노력을 배우는 중요한 기회를 가졌고,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상황을 평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신자유주의, 이주관리, 가중되는 탄압 GFMD는 세계 각국에서 이주, 이주 ‘관리’ 방법, 이와 관련된 사회적 문제들이 중심적인 이슈가 된 상황에서 개시되었다. 미국의 이민과 난민권리를 위한 전국네트워크(National Network for Immigrant and Refugee Rights, NNIRR)에서 활동하는 콜린 라자(Colin Rajah)는 24일 개막식 연설에서 이러한 경향을 빈틈없이 묘사했다. 그는 현재 이민정책이 기업의 이윤을 목표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무역정책과 노동정책의 세계적인 강화라는 맥락 안에서 수립되고 있으며 각 국 정부들은 자본의 국경 간 이동의 자유화와 노동 유연화를 통해 이런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하면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국가의 이민정책은 고급기술과 자본을 가져오는 이민자들에게는 국경을 개방하면서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력으로서 착취당할 이들을 단기적으로 순환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주민을 보내는 국가의 이민정책은 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계획을 대체하는 노동력 수출 정책이다. GFMD의 핵심 목표 중의 하나인 성공적인 ‘이주 관리’가 바로 이런 정책이다. 물론 그 이면에서는 미등록 이주민을 범죄자 취급하고 추방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미등록 이주민들이 신분증 절도 혐의로 형사 기소되어 수감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에서는 이민자 단속임무를 지닌 무장한 민간부대 RELA가 무차별적인 체포, 고문, 강간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는 최근 2010년까지 ‘불법체류자’를 추방할 것을 목표로 그 기준을 유럽차원에서 설정한 법(Directive on Return)을 통과시켰다. 불행히도 이명박 정부는 고도의 기술과 자본을 지닌 외국인을 유인하면서 동시에 미숙련 이주노동자를 극심하게 통제하고 착취하여 위에서 언급한 국제적 경향에 발을 맞추고 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태도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의 ‘비전문 외국인력 정책개선 방안’에 잘 드러나 있다. 이명박 정부의 계획은 이 방안을 2009년 봄까지 이행한다는 것인데, 정부는 출입국관리법과 외국인근로자 고용에 관한 법률(고용허가제), 최저임금 관련 법령의 개정을 통해 미숙련 외국인 노동력 수입의 ‘합리화’를 외치며 노동자에게 (기숙사비와 식대와 같은) 비용을 더 부담시킴으로써 외국인을 고용하는 사업주들의 비용을 덜어주려고 한다. 또한 심지어 현재 전체 이주노동자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미등록이주노동자 숫자를 5년 내에 체류 외국인의 10%로 줄일 것을 목표로 더욱 강력한 합동단속을 하겠다고 한다. 이 방안은 야만적이다. 그 실질적인 의미는 지난 11월 12일 아침 마석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전경과 법무부 차량이 마석 성생가구공단의 출입구를 차단하고 대규모 단속을 자행하여 100명 이상이 연행되고 수 명이 부상당한 것이다. 한국과 전 세계에서 이러한 암울한 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GFMD 대응행사들은 실질적인 자극을 주었다. 이주민 관련 단체들이 이토록 큰 규모로 세계적으로 결집하여 경험을 공유하고 이주노동자의 인권과 노동권 보호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집단적으로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고무적인 것은 국제산별연맹이 정책개입에서부터 조직화 방식에 이르는 주제들을 다룬 이틀간의 회의를 주최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세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주노동자의 노조 결성권과 가입권이 커다란 주목을 받았고, 이주노조와 이주노조 합법화에 관한 대법원 소송이 결사의 자유권을 위한 미등록이주노동자의 투쟁의 중요한 사례로 주목받았다. 이주노조가 지도부에 대한 표적단속의 영향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을 때, 우리 투쟁의 상징적 의미에 대한 인식과 국제적 수준의 연대는 힘을 주었고 국내에서 우리 투쟁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이렇듯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는 늘어나고 있지만 불행히도 우리 지도부에 대한 표적단속과 현재의 광범위한 합동단속 때문에 이주노조는 약화되었다. 단속추방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힘들어졌고 이에 따라 노조와 기층 조합원의 접촉이 어려워져 조합원의 활동은 감소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세워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또한 단속에 반대하는 뜻을 강력하게 보여줘야 하는데, 이주노동자 관련 단체들과 연대하는 사회운동 단체들의 역량은 작고, 민주노총과 조직 노동자들은 항상 그렇듯이 이주노동자 투쟁을 중심 이슈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나 : 전진을 위한 몇 가지 실천 과제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강제단속에 대해 이주관련 단체들과 사회운동 연대단체들은 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기적인 단속 감시와 같은 현장 활동에 더 많은 역량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민주노총과 산하 노조들이 정책적 개입 수준부터 현장 활동 수준까지 강제단속에 대항해 함께 싸우고 활동한다면 저항하는 우리의 힘이 더욱 커질 것이다. 따라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해 왔지만 다시 한번 다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민주노총과 조직된 노동자운동이 이주노동자를 한국노동자로 인식하고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스스로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 때다. GFMD 대응행사들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처럼 이명박 정부가 이주노동자를 강력하게 탄압하는 것은 세계적인 이민정책 흐름의 일부이다. 동시에 국내적으로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노동자와 진보세력 전반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탄압의 일부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노총은 GFMD 대응 행사에 참가함으로써 크지는 않지만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었다. 특히 참가자들은 여기서 제기된 이슈에 대해 직접 성실하게 개입하고자 노력했다. 민주노총 중앙지도부와 산별노조, 지역본부 간부들이 이주노조와 이주노조의 밀접한 연대단위와 함께 이주노동자 관련 활동을 전개한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각기 다른 조직에 속하여 다양한 관점을 가진 경험 많은 활동가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유용한 경험이었다. 한 주 동안 참가단 내부 논의를 진행할 기회가 많았는데 이 때마다 민주노총 내에 이주노동자 관련 활동을 계획하고 조정하는 ‘이주노동자 특별위원회’와 같은 구조를 둘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주노조의 상황은 특위나 내부 소통구조가 설립되기를 기다리느라 한국 노동조합들과 협력을 미룰 만큼 여유롭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이주노동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산별노조, 지역본부와 어디서 협력이 가능한지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우리가 구체적인 논의와 활동을 시작한다면 이것이 민주노총의 중앙지도부를 움직이는 동력이 될 것이다. 단속 추방에 대항하는 투쟁과 이주노동자 조직화도 마찬가지다. 특히 조직화에 대해 더 언급하고 싶은데, 단속 때문에 조직화가 더 어려워지므로 단속을 비판하는 활동에 더 많은 역량을 투여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필요성 때문에 조직화를 우선순위에서 제쳐두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런 이유로 조직화를 후순위에 둘 것이 아니라 조직화의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 여러 산별노조와 지부, 지역본부와 논의를 통해 이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표적단속의 결과로 우리의 역량이 약화된 것을 고려하면 특히 그렇다. 다시 말해 이주노조(그리고 연대단체들이)가 한국 노조들이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조직하는 것을 적극 지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며 더불어 양자가 전략 지역과 특정 사업장에서 공동 조직화 계획을 수립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을 할 때 반드시 조직화가 단순한 조합원 모집이 아니며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조직화는 또한 지도력을 개발하는 것이고 항상적인 주의와 관심을 요한다. 매우 기본적인 수준에서 조직화와 지도력 개발이란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인데, 이는 다른 일상 활동에 비해 더 큰 고민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복합적인 과제다. 마닐라에서 향후 과제에 대한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는 지난 6월에 네팔에서 추방당한 이주노조와 평등노조이주지부 전 지도부들과의 회의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우리 간부들 및 한국에서 열심히 활동했던 다른 이주노동자들이 돌아가서 본국 사회에서 새로운 활동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본국의 시야에서 이주문제를 고민할 기회를 제공해주며 우리 활동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에서 카사마코(한국 이주노동자운동에서 적극적인 필리핀공동체 연합단체) 이전 회원들은 아로요 정부의 노동력 수출정책에 반대하고 다른 나라에서 돌아온 이주민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운동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이 네팔과 방글라데시에 돌아가서 일자리와 기회 창출을 통해 이주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지역 교육과 개발에 관한 장기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이 동지들 중 일부는 네팔노총(GEFONT) 이주노동자 부서에서 활동하고 있고, 한국으로 이주해오려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출국 전 교육프로그램에 대해 방글라데시 동지들과 논의하고 있다. 이주노조와 한국 이주노동자운동이 이 동지들의 활동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주노동자들의 본국에서 막 시작된 사회적 변화를 위한 노력과 한국에서의 조직화 양자에 대해 협력하여 이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 우리가 한국에서의 이주민 권리에 대해서만 집중하여 진행한 협소한 분석을 본국의 실업, 저발전, 사회적 불안정, 그리고 이주를 발생시키는 나라간 불평등에 대한 분석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맺음말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맺을까 한다. 나는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당분간은 이 글이 『사회운동』에 쓰는 마지막 글이 될 것이다. 지금처럼 탄압이 맹렬하고 운동역량이 부족하며 앞날이 불투명한 어려운 시기에, 좋든 나쁘든 지난 2년 반 넘게 집과 같았던 이주노조와 사회진보연대, 한국운동을 떠나게 되어 더욱 안타깝다. 나는 이번 호와 지난 호에서 한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얻은 몇 가지 생각과 뉴욕 유색인 운동에서 훈련받은 활동가로서의 고유한 관점을 바탕으로 발언하고자 했다. 이 글들은 내가 한국을 떠나면서 남기는 마지막 당부라기보다는 오히려 동지들이 나에게 준 기회를 빌려 평소에 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주, 이민정책, 이주노동자 조직화, 운동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논의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쉽지 않았는데, 이 글들을 통해 한마디 보탠 셈이다. 아니 그 이상이길 바란다. 이러한 논의가 지속되면서 관심 있는 당사자들을 더욱 더 포괄했으면 하는 기대와 믿음을 말하면서 마치고자 한다. 한국에서 지낸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동지들이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 이 중에는 현재 네팔, 방글라데시, 필리핀으로 떠난 동지들도 있다. 이들이 크나큰 어려움 속에서도 힘을 유지하고 이와 같은 논의를 새로운 조직화 방식과 새로운 투쟁으로 전화해 낼 것이라고 믿는다.
12월 7일 성대 유림회관에서 열린 사회진보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토론회 세계 경제위기와 남한 민중운동의 전망 자료집과 속기록입니다.
12월 7일 성대 유림회관에서 열린
사회진보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토론회
세계 경제위기와 남한 민중운동의 전망
자료집과 속기록입니다.
홈플러스로의 현장 복귀 이후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의 역할과 과제 교섭타결 11월 14일 홈에버 월드컵점 앞에서 열린 금요문화제를 마지막으로 510일 간의 이랜드일반노조 파업 투쟁이 마무리되었다. 앞서 이랜드일반노조는 추가 외주화 금지, 16개월 이상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 비정규직 차별 시정, 10% 임금 인상, 노조(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제외) 및 개인에 대한 민형사상 고소고발 취하, 매각 위로금 지급, 간부 12명을 제외한 해고자 복직, 3년 간의 노사평화기간, 이랜드노조와의 분리 등에 대해 홈플러스테스코(구 삼성테스코)와 합의하였고, 11일 조합원 총회를 거쳐 13일 조인식을 끝냈다(자세한 합의사항은 www.elandtu.or.kr.과 참세상 11월 13일자 참조) 교섭에서 마지막까지 쟁점은 해고자 복직 문제였다. 대부분의 쟁점은 교섭 초기에 모두 조정 되었고, 이후 3개월간 이어진 교섭에서는 해고자복직 문제가 논의되었다. 홈플러스 측은 끝까지 노조 핵심 간부들의 복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고, 사실상 투쟁 대오가 50여명 수준으로 하락한 이랜드일반노조는 현장 복귀를 늦출 수 없다고 판단, 사측 안을 받아들였다. 김경욱 위원장, 이경옥 부위원장 등 홈에버 소속 12명(퇴사 희망자 및 구속자 제외 시 9명)이 자진퇴사 형식으로 홈플러스에서 떠나게 되었고, 동시에 노동조합 분리로 인해 이남신 수석부위원장, 홍윤경 부위원장 등 이랜드 소속 10여명이 조건 변화 없이 해고자 상태에서 이랜드를 상대로 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고자 복직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끝까지 파업 상태를 유지한 180여명의 조합원들은 20일자로 현장으로 복귀한다. 경제위기와 임박한 구조조정, 영국의 테스코는 홈플러스테스코를 구원할 수 없다 한편 파업투쟁이 끝났지만 홈플러스로 복귀하는 노동조합의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조만간 다시 큰 투쟁을 준비해야 할 듯 하다. 홈에버 인수 시에도 문제가 되었지만 홈에버의 부채가 여전히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은 상태인데다가, 세계 경제위기로 인해 홈플러스의 매출 및 영업이익도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현재와같은 경제위기가 계속되면 홈플러스는 조만간 사활을 걸고 대량해고, 점포매각 등을 통해 현금 확보에 나서야만 한다. 현재 홈플러스테스코의 부채비율은 435%로 신세계 148%, 롯데마트 46%에 비해 매우 높다. 또한 2008년 8월 현재 단기성 차입금 역시 7,630억 원으로 전체 부채 2조3천억 원 중 33%에 달한다. 한편 수익성 지표 중 하나인 금융비용 대비 영업이익은 홈플러스테스코는 140%로 신세계 530%, 롯데마트 2070%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자료: 한국기업평가 회사채 신용 평가서). 홈플러스테스코의 재무제표는 당분간 더욱 악화될 것인데 앞으로 매장 리모델링 비용과 리모델링으로 인한 영업손실이 더해지고, 특히 경기침체로 인한 매출 감소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경제위기가 시작된 9월 대형마트의 매출 증감율은 전년 동월 대비 -9.2%를 기록했으며, 10월 역시 -0.7%를 기록했다(지식경제부(2008),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 글로벌 금융위기의 실물경제로의 이전이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미 매출 감소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신용평가사에서는 홈플러스테스코의 재무상황에 대해 테스코 본사의 현금 보유량과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강조하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는 않다. 실제로 홈플러스테스코는 홈에버 인수에 사용한 현금 1조 원의 대부분을 영국 모기업으로부터 차입해 왔고(한국기업평가(2008), “삼성홈플러스 회사채 신용평가 보고서”), 앞으로의 부채 역시 필요시 본사의 지원을 받을 계획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과 평가는 2008년 9월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 이전에나 가능했던 이야기이다. 지금은 상황이 180도 변했다. 뉴욕과 더불어 세계 금융의 중심지 중 하나인 런던에 금융위기 폭탄을 맞은 영국은 내년 경제성장률이 9월 예상치 0.3%보다 2.5% 하락한 -1.7%로 예상되며, 하루가 다르게 경기침체가 심각해지고 있다. 특히 소비 심리와 직결되는 실업률의 경우 9%로 급상승할 것으로 전망되었다(Financial Times, 11월 17일자). 테스코의 경우 9월에 이미 한 차례 매출 예상량을 3% 가량 하향 조정한데 이어(Financial Times, 10월 29일자) 조만간 경기침체 심화로 다시 한 번 예상량을 조정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 테스코의 상황은 비단 영국 유통 시장 침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테스코의 주가는 영국에서 작년 최고점보다 47%가 하락했고, 현재에도 가파르게 하락 중이다. 미국 테스코 역시 마찬가지로 작년 최고점 대비 53%가량 하락하였다(Bloomberg Market Data). 주가 급락과 신용경색으로 인해 테스코 본사 역시 제 코가 석자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노조재건 사업과 유통서비스노동자 노동권 강화 운동 당장 시작해야 따라서 홈플러스가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최후의 보루 테스코 본사가 홈플러스테스코를 지원할 여력이 없어지면 홈플러스테스코가 선택할수 있는 것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자본은 다시금 자신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정리해고 및 임금 삭감 등을 감행할 것이다. 또한 홈플러스가 인수한 홈에버의 점포 중 가양, 구월, 원천, 둔산, 해운대, 칠곡, 전주 등 중복 투자 성격이 강한 점포에 대한 매각 및 폐쇄 등을 통해 현금 확보에 나설 가능성 또한 크다(이데일리 5월 16일자). 현장으로 복귀한 이랜드일반노조는 이제 임박한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책을 당장 세워나가야 한다. 사회단체와 반년 넘게 진행된 비조합원 조직화 활동 및 선전전, 비정규직보호법이 가져올효과에 대한 교육 등등 2007년의 투쟁이 1년 넘는 준비를 통해서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재 중심 지도부가 현장으로 복귀하지 못해 노동조합 운영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까르푸 노조 건설부터 파업투쟁까지 리더십을 발휘한 위원장 및 이하 간부들이 없는 상태에서 파업 투쟁을 통해 노조 활동을 처음 경험해본 다수 지부장 및 조합원들이 사측의 교묘한 탄압과 파업 투쟁 이후의 후유증을 얼마나 빨리 극복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로 무장한 최악의 기업가 박성수와도 싸웠다는 자신감과 파업투쟁 중에 만들었던 소중한 연대 단위와의 협조를 강화한다면 예상보다 어렵지 않게 투쟁을 만들 수도 있다. 현장으로 복귀하는 노조원들은 우선 무엇보다 기간 파업투쟁에 함께하지 못한 700여 조합원들과 관계를 원활히 만들어내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강한 조직력을 자랑하던 서울지하철노조가 1999년 파업 이후 현장 복귀 과정에서 이탈 조합원들과 현장에서 갈등하며 조직력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렸던 경험을 되새겨야 한다. 감정적 문제들이 없을 수는 없으나 조직의 복구가 첫 번째 목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임단협이 마무리되어 구심력 보다는 원심력이 강하게 작용할 현장 정서를 감안하면 현장에서의 조합원 간의 갈등은 노동조합 붕괴로 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경제 위기 과정에서 사측이 동원할 회사 살리기 식의 여론전과 임단협 과정에서 맺은 3년간 무쟁의선언 역시 노조 활동의 큰 장애가 될 것이다. 공동투쟁을 벌인 뉴코아 노동조합에 대해 사측이 복귀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뉴코아살리기운동본부’ 등을 조직해 노조 파괴에 성공한 예가 있다. 특히나 조만간 복수노조가 사업장에서부터 허용되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없는 기존 홈플러스의 노동자들을 이용한 어용노조 조직은 사측이 꺼낼 수 있는 손 쉬운 카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러한 구사심 이데올로기와 어용노조 조직 등에 대해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회단체들과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월드컵 지대위, 인천 지대위 등의 연대 과정에서도 보여주었듯이 현장에서의 노동조합이 지역사회와 결합되어 보편적 요구와 정당성을 획득했을 때 사측과 보다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다. 따라서 복귀하지 못한 조합 간부들과 지금까지 헌신적인 연대를 진행해온 사회단체들은 비정규직 문제 및 유통서비스노동자 노동권운동을 보다 활기차게 진행하며 현장을 엄호해야 한다. 서비스연맹에서 올해 초부터 진행하고 있는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에게 의자를’과 같은 캠페인부터 장시간 저임금 노동조건, 사측에 의한 노동조합 탄압 및 비인간적 현장 통제 등 다양한 주제와 이슈에 대해 사회적 여론을 만들어내야 한다. 특히 사회운동이 복귀하지 못한 노동조합 간부들을 다시금 현장과 지역을 잇는 가교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다양한 아이디어와 결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전사회적 이슈로 만들어 내었고, 510일간의 파업투쟁과 지역연대운동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 낸 이랜드 투쟁은 다시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