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2007-10-23

    사회운동, 그리고 페미니즘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가)여성운동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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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사회운동포럼, 놀라운 변화의 현장 지난 9월 초 사회운동포럼이 끝난 후 주변에서 만난 많은 포럼 참가자들은 여성 관련 세션이 늘어난 점, 각 세션마다 페미니즘 문제의식이 자주 눈에 띤 점에 놀라움을 표했다. 메인 행사 중 하나로 여성대회가 개최되고, 주거 공공성 빈곤 활동양식 등 다양한 영역별 운동의 방향이 페미니즘 관점에서 재검토된 이번 사회운동포럼의 풍경은 그동안의 사회운동진영 분위기에 비춰보면 매우 낯설만한 하다. 처음 사회운동포럼이 열릴지 말지도 불투명했던 시절, 내가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으로 페미니즘 기획을 논의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이런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사회운동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많은 페미니스트들, 그녀 혹은 그들이 가진 다양한 고민과 산뜻한 의제들의 향연은 이번 사회운동포럼을 빛나게 한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모두는 또한 사회운동 혁신의 가치로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점차 많은 활동가들에게 확산되고 있다는 반가운 징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행사를 마칠 때면 늘 그렇듯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사회운동포럼을 통해 제기된 다양한 페미니즘 문제의식들을 모아 앞으로 사회운동 내에서 어떤 공통의 전망을 만들어 갈 것인지, 우리는 어떤 실천을 각자 또 함께할 것인지에 대한 소통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또 사회운동포럼에 참여한 사람들 전반이 각 세션에서 '자주' 페미니즘을 접한 만큼, 페미니즘과의 결합을 사회운동 쇄신의 핵심 과제로 절박하게 인식하게 되었는지 역시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간 사회운동의 한계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충분히 공유되었는지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운동포럼 여성운동전략기획단 참여자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사회운동포럼을 준비하기 위해 구성된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기획팀의 시선으로 사회운동포럼 전후에 걸쳐 주장했던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한 번 더 짚어보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두꺼운 사회운동포럼 자료집 중간, 중간에 있는 여러 글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게 될까 걱정되지만 페미니스트 그리고 사회운동 내 여러 주체들과의 소통과 대화를 바라는, 일종의 '프러포즈'라는 생각으로 읽고 토론해 주시길 기대한다. 사회운동의 혁신, 그리고 페미니즘의 결합이란 한국사회 사회운동의 페미니즘 인식에 대한 냉혹한 평가는 이번 사회운동포럼 이전, 아주 오래전부터 제기된 그리 새롭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이야기다. 단적으로 지난 IMF 외환위기 이후 각 기업의 구조조정 당시 사실상 자본과 공모한 남성중심 노조들에 의해 밥줄이 끊기고 생에 처절한 고통을 경험해야 했던 여성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여성들의 희생을 거쳐 드러난 이른바 '대공장 남성 정규직 중심' 노동운동의 한계는 노동운동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도 반성과 혁신의 단골 레퍼토리가 된지 오래다. 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확산이 가져온 폐해가 여성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뚜렷이 가시화되면서 여성노동자, 여성농민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최대 피해자로 주목하는 서사들, 예컨대 "비정규직 문제는 여성문제이다.", "빈곤문제는 곧 여성문제이다."라는 이야기들 또한 이제 사회운동진영 내에서 전혀 낯선 말이 아니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도대체 사회운동 자신은 무엇이 바뀌었는가. 무엇을 바꾸고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사회운동은 앞서 말한 흔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들만큼 페미니즘에도 '익숙'해졌는가. 페미니스트들의 대답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가. 사회운동포럼에서 우리는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먼저 사회운동포럼 사전 워크숍으로 개최한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하여' 1차, 2차 워크숍에서 두 가지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수년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이 왜 여성 비정규직의 차별을 개선하고 여성 비정규직 스스로를 주체로 세우는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까. 또 최근 정부와 기업이 선도(?)하고 있는 일-가정 양립 정책에 대하여 노동운동의 대응은 왜 이렇게 미흡할 수밖에 없는가,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남성=생계부양자, 여성=가사전담자'라는 공사구분/성별분업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여 구조화된 사회운동의 이념, 실천, 관행 전반의 문제점이 충분히 성찰되지 못했다는 데서 원인을 찾았다. 여성을 보편적 노동자, 시민으로 인지하고 성적 차이에 기반 한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 전략을 자기 과제로 삼지 못한 노동운동에서, 남성 '가장' 노동자가 아닌 여성노동자, 가족 돌봄에 대한 책임이 있는 노동자의 문제는 가시화되지 못했고 여성문제는 늘 특수한, 주변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구축된 노동운동이 단지 투쟁할 때 '여성' 비정규직을 더 많이 언급한다고 해서, 가사 육아 등 재생산영역의 문제를 여전히 여성들'만'의 문제로 치부한 채 운동 과제의 하나로 끼워 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일반적' 전략과는 다른 (위계적 또는 병렬적으로 배치되는)페미니즘, '보편적' 인권과 노동권을 실현하는 투쟁과 동떨어진 여성인권 여성노동권 투쟁, 철저한 남성의 시각에서 약자 소수자로서 여성을 보살피고 보호해야 한다는 태도, 공과 사/생산과 재생산을 분리한 채 이른바 공적 생산영역만을 '유일한' 정치의 장으로 인식하는 한계. 이렇게 여성 문제, 페미니스트 실천을 단지'첨가'만하는 경향은 노동운동 뿐 아니라 사회운동 일반이 가진 태도이다. 우리의 도전은 그 '일반', '보편', '정치' 자체의 전환이다. 여성이 삭제되고 재생산의 영역을 비가시화 한 채 구성된 사회운동의 보편성과 정치 전략을 뛰어 넘어, 여성억압에 도전하는 페미니즘이 통합된 새로운 보편적 이념, 일반적 전략, 그리고 다른 정치를 구상해 가는 것, 우리는 이것을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라 정의하고자 했다. 사회운동 내 페미니즘 실천, 어디까지 와 있나 이처럼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은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페미니즘이 이번 사회운동포럼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가치이자 다양한 실천으로 확장되기 까지, 이러한 변화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자각과 도전,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몇 년간 사회운동 내에서 벌어진 다양한 페미니즘 실천들은 운동사회 또한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구축된 고유한 여성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 활동가의 주변화, 여성 활동가들의 일 가정 생계 삼중 사중의 부담이 사회운동을 유지 성장시키는 토대였음을 드러내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사회운동 곳곳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성장해 왔다. 우리의 두 번째 질문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운동은 무엇이 바뀌었는가?", "사회운동은 여성활동가들이 살만한, 활동할만한 곳이 됐는가?", "자기 해방과 사회 변화를 위해 싸우는 더 많은 여성들이 지금 우리 곁에 있는가?"였다. 이런 고민을 나눠보기 위해 기획된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하여' 세 번째 워크숍은 노동조합 여성할당제와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에 초점을 뒀다. 운동사회 성폭력 문제가 제기되고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처리 방안이 제도화되기 까지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노조와 사회단체 여성 활동가들은 어느새 성폭력 사건 전담처리반과 같은 역할에 허덕이고 있었다. 개별 사건의 처리 과정이 전체 조직과 사회운동 내 반향을 일으키고 보다 성평등 한 문화를 정착시키는 성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부분이다. 또 여성할당제를 통해 몇몇 여성조합원들이 영향력 있는 지위를 갖게 되었지만 전체 여성조합원의 세력화로 쉽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할당제로 진출한 여성들이 겪는 이중 삼중의 부담도 여전히 그녀들 개인의 몫이다. 물론 현실이 이렇다고 해서 우리, 그녀들의 실천이 결코 부질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리 잡기' 중인 여성의 의사결정권 강화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제도를 섣부르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간의 실천들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페미니즘을 인지하는 일정한 경향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진전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남성과 여성의 수량적 평등, 형식적인 형평성을 페미니즘의 전부로 보는 인식, 성폭력을 유발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것으로 호도되는 현상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접하고 있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페미니즘 실천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을 강제하거나 지극히 개별적인 각성과 실천(혹은 침묵)을 촉구하는 것이 유력한 수단이 됐다. 이는 '진보란 이름표를 단 사람이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전파됐지만, 곳곳에서 페미니스트들과 남성 활동가들 혹은 페미니스트들과 여성 활동가들 간의 갈등과 의사소통의 단절로 이어지곤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이러한 결과 위에 서 있으며, 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전히 여성해방을 위한 정치적 이념으로서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운동의 인식은 지체되고 있으며, 우리에게는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하고 그것을 통해 다른 운동의 전략과 실천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가 고스란히 놓여 있다. 다른 여성운동, 새로운 여정의 출발 이쯤에서 노조나 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마음 한 편을 떠나지 않는 공통된 '갈등'을 되새겨 봐야겠다. "내가 이 고생하면서 여기서 무슨 여성운동을 할 수 있겠어. 때려치우자, 때려 쳐!!!" 처음 페미니스트로서 자기 해방의 꿈을 상상하던 시절, 얼마나 가슴벅차했던가. 여성으로서 우리 사회의 독립적 주체로 인정받는 사회, 노동의 권리가 보장되고 몸과 성욕에 대한 권리가 폭력에 의해 위협받지 않는 사회, 여/남이 자유롭게 소통하며 만들어가는 새로운 공동체. 이런 새로운 세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더욱 강화되는 자본주의의 신화에 도전하는 투쟁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단지 여성들만의 투쟁에 그친다면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신념에 우리는 늘'갈등'을 품고도 여기에 있다. 다른 사회운동, 다른 여성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한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페미니즘의 간절한 외침은 사회운동 내 메아리치지 못하지만 말이다. 사회운동포럼의 장에 이런 고민을 가진 페미니스트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제 서로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나/너/우리의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공동의 논의와 공동의 실천, 공동의 교육이 필요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여성대회를 치루는 과정에서 부족했던 소통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만들어가는 주체임을 선언하고 긴 호흡을 가다듬기로 했다. 그렇게 구성된 것이 '(가)여성운동네트워크'이다.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앞으로 사회운동 혁신을 위한 이념으로 페미니즘을 확산하고 사회운동 내에서 보다 광범위한 페미니스트 실천을 조직해내기 위한 주체들의 토론과 소통, 교육과 교류의 장을 표방하고자 한다. 어떤 결사체, 조직체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페미니스트들의 하나 혹은 여럿의 목소리가 만드는 '물결'로 존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오는 10월 23일 사회운동포럼 여성대회 선언자모임을 통해 공식적으로 새로운 여정을 출발하려는 여성운동네트워크. 무척 흥분되는 이 순간, 부담 또한 크게 다가온다. '새로운'이란 말이 주는 부담도 무겁지만 '주류'가 아닌 여성운동('비주류' 여성운동?)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또는 우리가 과연 그러한 정체성에서 출발하는가 등 여러 가지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그러나 글 앞머리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2007 사회운동포럼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지금까지 사회운동 내 페미니스트들이 일구어온 놀라운 변화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단절되거나 사회운동의 면면에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우리, 페미니스트들이 꿈꾸는 미래는 그만큼 늦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해 움직이는 페미니스트들의 마당이 되길 바라며, 여성운동네트워크의 빗장을 여러분과 함께 열고 싶다.

  • 2007-10-23

    사회운동, 그리고 페미니즘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가)여성운동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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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사회운동포럼, 놀라운 변화의 현장 지난 9월 초 사회운동포럼이 끝난 후 주변에서 만난 많은 포럼 참가자들은 여성 관련 세션이 늘어난 점, 각 세션마다 페미니즘 문제의식이 자주 눈에 띤 점에 놀라움을 표했다. 메인 행사 중 하나로 여성대회가 개최되고, 주거 공공성 빈곤 활동양식 등 다양한 영역별 운동의 방향이 페미니즘 관점에서 재검토된 이번 사회운동포럼의 풍경은 그동안의 사회운동진영 분위기에 비춰보면 매우 낯설만한 하다. 처음 사회운동포럼이 열릴지 말지도 불투명했던 시절, 내가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으로 페미니즘 기획을 논의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이런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사회운동의 다양한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많은 페미니스트들, 그녀 혹은 그들이 가진 다양한 고민과 산뜻한 의제들의 향연은 이번 사회운동포럼을 빛나게 한 주요한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모두는 또한 사회운동 혁신의 가치로서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점차 많은 활동가들에게 확산되고 있다는 반가운 징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행사를 마칠 때면 늘 그렇듯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사회운동포럼을 통해 제기된 다양한 페미니즘 문제의식들을 모아 앞으로 사회운동 내에서 어떤 공통의 전망을 만들어 갈 것인지, 우리는 어떤 실천을 각자 또 함께할 것인지에 대한 소통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또 사회운동포럼에 참여한 사람들 전반이 각 세션에서 '자주' 페미니즘을 접한 만큼, 페미니즘과의 결합을 사회운동 쇄신의 핵심 과제로 절박하게 인식하게 되었는지 역시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간 사회운동의 한계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충분히 공유되었는지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운동포럼 여성운동전략기획단 참여자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사회운동포럼을 준비하기 위해 구성된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 기획팀의 시선으로 사회운동포럼 전후에 걸쳐 주장했던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는지 한 번 더 짚어보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두꺼운 사회운동포럼 자료집 중간, 중간에 있는 여러 글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게 될까 걱정되지만 페미니스트 그리고 사회운동 내 여러 주체들과의 소통과 대화를 바라는, 일종의 '프러포즈'라는 생각으로 읽고 토론해 주시길 기대한다. 사회운동의 혁신, 그리고 페미니즘의 결합이란 한국사회 사회운동의 페미니즘 인식에 대한 냉혹한 평가는 이번 사회운동포럼 이전, 아주 오래전부터 제기된 그리 새롭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이야기다. 단적으로 지난 IMF 외환위기 이후 각 기업의 구조조정 당시 사실상 자본과 공모한 남성중심 노조들에 의해 밥줄이 끊기고 생에 처절한 고통을 경험해야 했던 여성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여성들의 희생을 거쳐 드러난 이른바 '대공장 남성 정규직 중심' 노동운동의 한계는 노동운동 외부는 물론 내부에서도 반성과 혁신의 단골 레퍼토리가 된지 오래다. 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확산이 가져온 폐해가 여성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뚜렷이 가시화되면서 여성노동자, 여성농민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최대 피해자로 주목하는 서사들, 예컨대 "비정규직 문제는 여성문제이다.", "빈곤문제는 곧 여성문제이다."라는 이야기들 또한 이제 사회운동진영 내에서 전혀 낯선 말이 아니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도대체 사회운동 자신은 무엇이 바뀌었는가. 무엇을 바꾸고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사회운동은 앞서 말한 흔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들만큼 페미니즘에도 '익숙'해졌는가. 페미니스트들의 대답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가. 사회운동포럼에서 우리는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먼저 사회운동포럼 사전 워크숍으로 개최한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하여' 1차, 2차 워크숍에서 두 가지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수년에 걸쳐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이 왜 여성 비정규직의 차별을 개선하고 여성 비정규직 스스로를 주체로 세우는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까. 또 최근 정부와 기업이 선도(?)하고 있는 일-가정 양립 정책에 대하여 노동운동의 대응은 왜 이렇게 미흡할 수밖에 없는가,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일까. 우리는 '남성=생계부양자, 여성=가사전담자'라는 공사구분/성별분업 이데올로기에 기초하여 구조화된 사회운동의 이념, 실천, 관행 전반의 문제점이 충분히 성찰되지 못했다는 데서 원인을 찾았다. 여성을 보편적 노동자, 시민으로 인지하고 성적 차이에 기반 한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 전략을 자기 과제로 삼지 못한 노동운동에서, 남성 '가장' 노동자가 아닌 여성노동자, 가족 돌봄에 대한 책임이 있는 노동자의 문제는 가시화되지 못했고 여성문제는 늘 특수한, 주변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구축된 노동운동이 단지 투쟁할 때 '여성' 비정규직을 더 많이 언급한다고 해서, 가사 육아 등 재생산영역의 문제를 여전히 여성들'만'의 문제로 치부한 채 운동 과제의 하나로 끼워 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일반적' 전략과는 다른 (위계적 또는 병렬적으로 배치되는)페미니즘, '보편적' 인권과 노동권을 실현하는 투쟁과 동떨어진 여성인권 여성노동권 투쟁, 철저한 남성의 시각에서 약자 소수자로서 여성을 보살피고 보호해야 한다는 태도, 공과 사/생산과 재생산을 분리한 채 이른바 공적 생산영역만을 '유일한' 정치의 장으로 인식하는 한계. 이렇게 여성 문제, 페미니스트 실천을 단지'첨가'만하는 경향은 노동운동 뿐 아니라 사회운동 일반이 가진 태도이다. 우리의 도전은 그 '일반', '보편', '정치' 자체의 전환이다. 여성이 삭제되고 재생산의 영역을 비가시화 한 채 구성된 사회운동의 보편성과 정치 전략을 뛰어 넘어, 여성억압에 도전하는 페미니즘이 통합된 새로운 보편적 이념, 일반적 전략, 그리고 다른 정치를 구상해 가는 것, 우리는 이것을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라 정의하고자 했다. 사회운동 내 페미니즘 실천, 어디까지 와 있나 이처럼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은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페미니즘이 이번 사회운동포럼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가치이자 다양한 실천으로 확장되기 까지, 이러한 변화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자각과 도전,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몇 년간 사회운동 내에서 벌어진 다양한 페미니즘 실천들은 운동사회 또한 성별분업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구축된 고유한 여성억압과 차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 활동가의 주변화, 여성 활동가들의 일 가정 생계 삼중 사중의 부담이 사회운동을 유지 성장시키는 토대였음을 드러내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사회운동 곳곳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성장해 왔다. 우리의 두 번째 질문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회운동은 무엇이 바뀌었는가?", "사회운동은 여성활동가들이 살만한, 활동할만한 곳이 됐는가?", "자기 해방과 사회 변화를 위해 싸우는 더 많은 여성들이 지금 우리 곁에 있는가?"였다. 이런 고민을 나눠보기 위해 기획된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하여' 세 번째 워크숍은 노동조합 여성할당제와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에 초점을 뒀다. 운동사회 성폭력 문제가 제기되고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처리 방안이 제도화되기 까지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노조와 사회단체 여성 활동가들은 어느새 성폭력 사건 전담처리반과 같은 역할에 허덕이고 있었다. 개별 사건의 처리 과정이 전체 조직과 사회운동 내 반향을 일으키고 보다 성평등 한 문화를 정착시키는 성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모두가 안타까워하는 부분이다. 또 여성할당제를 통해 몇몇 여성조합원들이 영향력 있는 지위를 갖게 되었지만 전체 여성조합원의 세력화로 쉽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할당제로 진출한 여성들이 겪는 이중 삼중의 부담도 여전히 그녀들 개인의 몫이다. 물론 현실이 이렇다고 해서 우리, 그녀들의 실천이 결코 부질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리 잡기' 중인 여성의 의사결정권 강화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제도를 섣부르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간의 실천들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페미니즘을 인지하는 일정한 경향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진전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남성과 여성의 수량적 평등, 형식적인 형평성을 페미니즘의 전부로 보는 인식, 성폭력을 유발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것으로 호도되는 현상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접하고 있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페미니즘 실천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을 강제하거나 지극히 개별적인 각성과 실천(혹은 침묵)을 촉구하는 것이 유력한 수단이 됐다. 이는 '진보란 이름표를 단 사람이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전파됐지만, 곳곳에서 페미니스트들과 남성 활동가들 혹은 페미니스트들과 여성 활동가들 간의 갈등과 의사소통의 단절로 이어지곤 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이러한 결과 위에 서 있으며, 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전히 여성해방을 위한 정치적 이념으로서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운동의 인식은 지체되고 있으며, 우리에게는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하고 그것을 통해 다른 운동의 전략과 실천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가 고스란히 놓여 있다. 다른 여성운동, 새로운 여정의 출발 이쯤에서 노조나 사회운동단체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마음 한 편을 떠나지 않는 공통된 '갈등'을 되새겨 봐야겠다. "내가 이 고생하면서 여기서 무슨 여성운동을 할 수 있겠어. 때려치우자, 때려 쳐!!!" 처음 페미니스트로서 자기 해방의 꿈을 상상하던 시절, 얼마나 가슴벅차했던가. 여성으로서 우리 사회의 독립적 주체로 인정받는 사회, 노동의 권리가 보장되고 몸과 성욕에 대한 권리가 폭력에 의해 위협받지 않는 사회, 여/남이 자유롭게 소통하며 만들어가는 새로운 공동체. 이런 새로운 세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더욱 강화되는 자본주의의 신화에 도전하는 투쟁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단지 여성들만의 투쟁에 그친다면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신념에 우리는 늘'갈등'을 품고도 여기에 있다. 다른 사회운동, 다른 여성운동을 만들어가기 위한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페미니즘의 간절한 외침은 사회운동 내 메아리치지 못하지만 말이다. 사회운동포럼의 장에 이런 고민을 가진 페미니스트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제 서로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 나/너/우리의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공동의 논의와 공동의 실천, 공동의 교육이 필요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여성대회를 치루는 과정에서 부족했던 소통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만들어가는 주체임을 선언하고 긴 호흡을 가다듬기로 했다. 그렇게 구성된 것이 '(가)여성운동네트워크'이다.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앞으로 사회운동 혁신을 위한 이념으로 페미니즘을 확산하고 사회운동 내에서 보다 광범위한 페미니스트 실천을 조직해내기 위한 주체들의 토론과 소통, 교육과 교류의 장을 표방하고자 한다. 어떤 결사체, 조직체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페미니스트들의 하나 혹은 여럿의 목소리가 만드는 '물결'로 존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오는 10월 23일 사회운동포럼 여성대회 선언자모임을 통해 공식적으로 새로운 여정을 출발하려는 여성운동네트워크. 무척 흥분되는 이 순간, 부담 또한 크게 다가온다. '새로운'이란 말이 주는 부담도 무겁지만 '주류'가 아닌 여성운동('비주류' 여성운동?)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또는 우리가 과연 그러한 정체성에서 출발하는가 등 여러 가지 답을 내리기 어려운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그러나 글 앞머리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2007 사회운동포럼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지금까지 사회운동 내 페미니스트들이 일구어온 놀라운 변화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단절되거나 사회운동의 면면에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우리, 페미니스트들이 꿈꾸는 미래는 그만큼 늦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해 움직이는 페미니스트들의 마당이 되길 바라며, 여성운동네트워크의 빗장을 여러분과 함께 열고 싶다.

  • 2007-10-23

    국제노동자협회: 설립, 조직, 정치·사회적 활동, 그리고 성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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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국제노동자협회, 노조, 파업a 국제노동자협회가 설립되면서 영국 노조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이전까지 이들의 투쟁은 오로지 임금과 노동시간에 국한되었고, 편협한 중세 길드 체계에 얽매여 있었다. 노조들은 완전히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1825년 의회법b에 따라 인가를 받고, 매일같이 벌어지는 노동과 자본의 투쟁 때문에 필수적이 된 정부가 인정하는 단체다. 그들의 목표는 고용주와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후의 수단(ultima ratio)은 파업c인데, 파업의 합법성은 평화의 파괴(breach of peace)를 회피하고 강제적인 작업제한(forcible restraint of trade)d을 시도하지 않는 조건 하에서 앞서 말한 법에 의해 보장되었다. 이 법의 비호 아래 노조는 영국의 모든 공장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그 수, 조직, 기금을 갖춘 덕에 강력한 단체로 성장하여 고용주와 대립하는 가운데 그들이 항상 고려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노조는 모든 정치적 반동의 시기 속에서도, 고용주과 자본가의 반동책략 가운데서도, 지난 수 십 년간의 모든 궁핍과 경제 공황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마르크스가 일찍이 1847년에 프루동을 비판하는 저작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응답』(파리, 1847)e에서 밝혔던 바대로, 중세 행정자치구(commune)의 성립이 부르주아 사회의 중간 계급에게 가졌던 중요성만큼이나 노동 계급의 조직화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 편으로 노조가 설사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노동 계급 조직화의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긴급하고 현재적인 목적들 곁에서 일반적 목적, 즉 노동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사회적 해방을 얻어낸다는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제 노조 자신이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국제적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본성에 있어 노동운동은 국경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자명해졌다. 이러한 이유에서 1866년 셰필드에서 열린 영국 노조 대의원들의 대규모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이 입안·채택되었다.416)

    우리는 국제노동자협회가 만국의 노동자들이 형제애(brotherhood) 안에서 하나로 묶일 수 있도록 기울인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이 자리에 모인 대표들이 속한 다양한 단체들 모두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할 것을 진심으로 권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전체 노동계급의 진보와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믿습니다.f

    런던 노동평의회g 417)는 영국 노조들의 중앙기구로서, 역시 런던에 소재하던 국제 노동자 협회의 총평의회와 합의를 맺었다. 런던평의회의 서기관 오드거(Odger)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 구성원이다. 이 시간 이후에서야 영국 노조 활동은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이는 영국의 노조들이 최초로 정치적 운동에 직접 참여했을 때부터 곧바로 드러나게 된다. 이들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러셀-글래드스톤(Russell-Gladstone) 내각이 1866년 6월 붕괴하고 난 뒤 의회 개혁은 기약 없이 중단된 듯 보였다. 토리당 지도자들은 다수의 갈채 속에서 어떤 개혁도 필요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은 정치적 운동을 떠맡았다. 대규모의 대중 집회가 런던(London), 버밍엄(Birmingham), 맨체스터(Manchester), 글래스고(Glasgow), 브리스틀(Bristol) 등지에서 열렸다. 노조는 자신들의 역량을 다해 이 집회에 참여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운동의 지도부인 '개혁 동맹Reform League'418)을 지지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승리를 쟁취했고, 토리당 정부는 의회적 개혁을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다.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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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년과 1868년 사이 영국에서는 유럽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파업과 자본가의 직장폐쇄(lock-out)*가 빈번했다. 이는 1866년의 경제위기420)와 그 여파로 인한 결과였다. 위기는 투기의 흐름을 마비시켰다. 거대 기업들은 정지했고, 자본가들은 화폐시장의 조건이 변하자 투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뿌려놓은 채무를 변제할 돈을 구할 수 없게 되어 도산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업종에서의 불황은 영국과 프랑스 은행이 추가적으로 자신의 금보유고를 개방하지 않고서는 풀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금은 은행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갔는데, 더 이상 적절한 투자처를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산업의 전반적 정지와 물가의 전반적 하락을 불러왔다. 그러나 식량, 특히 노동자들에게 필수적인 빵 가격만이 예외적으로 올랐는데, 이는 1866년과 1867년에 든 흉년 때문이었다. 정확히 이 흉년기간 동안 세계 공황이 들이닥쳤고, 이는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시간 감소와 임금 삭감이라는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많은 파업이 벌어졌고, 그에 따른 직장폐쇄가 이어졌다. 나아가 노동자들의 연합을 가로막을 법들이 프랑스와 다른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철폐되기 시작했다.421) 의심할 여지없이 제네바(Geneva)와 로잔(Lausanne)에서 열린 노동자 대회의 결의안은 도덕적 효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국제노동자협회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을 수 있다는 인식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부르주아 언론은 국제노동자협회가 이러한 분쟁을 부추겼다고 비난했는데 이는 그들이 착각한 것이다. 협회가 파업을 발의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협회는 지역적 투쟁이 개입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또한 협회의 참여가 요구되는 한에서 개입하였던 것이다. 특히 협회는 세 가지 중요한 사안에 개입하였는데, 이는 국제협회의 원칙들을 선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첫 번째로, 협회의 협조를 요청하였던 영국 노동자 파업 중 협회의 전술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 언급이 있다. 이는 "3차 연례 보고서"h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보고서는 런던 총평의회가 로잔 총회에 제출한 것이다.

    "런던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에서도 자본가들의 전횡에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외국인을 고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체근로의 가능성은 영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힘있게 주장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총평의회의 활동은 이러한 위협을 공공연히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대체근로는 비밀리에 추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노동자가 대체근로의 낌새를 채는 것만으로도 자본가들의 계획을 충분히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협회에 속한 작업장에서 파업이나 직장폐쇄가 일어나면 유럽 대륙의 연락소에서는 각각의 지역 노동자들에게 즉각 영국의 분쟁 사업장의 자본가들 및 그 대리인과의 계약에는 응하지 말 것을 교육하였습니다. 협회 소속 작업장이 아닌 경우에도 협조가 된다면 다른 직종을 대신하여 똑같은 조치가 취해집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하여 철도굴착 노동자, 차장, 엔진 운전자, 도금 노동자, 전선 노동자, 벌목 노동자 등의 작업장 및 공장에 관련된 파업 기간 동안 영국 자본가들의 책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런던의 바구니 노동자 파업에서와 같은 몇몇 사례에서 자본가들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노동자들을 몰래 입국시켰지만,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호소에 따라 그들은 영국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했다. 협회의 파리 집행위원회는 일부 노동자 집단을 지원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 루베(Roubaix)에서 리본 제조업자들은 그들의 공장에 자의적인 처벌규정을 도입했는데, 이는 자연히 임금 삭감의 효과를 불러왔다. 이 벌금 체계의 필연적 결과는 이 제도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와 직장폐쇄, 그에 대한 반란과 당국의 무력개입이었다.422) 그러나 여기서 파리의 국제노동자협회 중앙위원회가 개입하였고, 생산업자 자신들이 만들고, 적용하고, 처벌까지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내부규정은 현행법에 위배됨을 밝혀내었다. 이 결과로 프랑스 정부는 순수한 경영상의 내규 이외에 벌금을 부과하는 어떠한 사적인 공장 내규도 불법이며 전적인 횡령에 해당됨을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국제노동자협회가 개입하였던 사례 가운데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1867년 2월의 파리 놋쇠 작업장 폐쇄

    이 싸움의 가장 근본적인 의의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에서 노조가 이제 막 합법화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약 5,000명 규모의 놋쇠노동자조합은 합법화의 이익을 입은 최초의 노조로서 1866년 초 영국 모델을 따라 노조를 건설하였다. 그 시작부터 이들은 자연히 고용주들에겐 눈에 가시였고, 자본가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이를 파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기회가 닥쳐온 것은 1867년 2월로, 당시 노조는 조합원을 대표하여 5명의 고용주에게 자신의 결정사항에 합의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즉각 동맹을 맺고 구성하여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탈퇴하던지 아니면 직장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87명의 고용주가 1500명에 달하는 노동자를 포괄하는 직장폐쇄를 단행하였을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는 프랑스에서 노조의 존폐 자체를 둘러싼 싸움이었던 것이다. 직장폐쇄 초기에, 놋쇠노동자들은 35,000 프랑의 기금을 가지고 있었다. 노조는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주당 20프랑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고, 월 5,000 프랑을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국제노동자협회의 주선 하에 영국의 노조로부터 대부를 얻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승리하였다. 이는 영국의 노조들로부터 바라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게 하였던 런던 총평의회의 도덕적·재정적 지원, 그리고 프랑스의 다른 노조들로부터 놋쇠노동자들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도록 한 국제협회 파리 중앙평의회의 개입 덕분이었다. 영국인 동료들로부터의 협력을 통한 프랑스 노동자들의 승리라는 사회적 중요성 외에도, 이 사례는 국제적인 의의를 지닌다. 프랑스의 일간지 Courrier fran ais는 1867년 3월 24일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i

    "티에르(M. Thiers)씨는 국제관계에서 어떠한 새로운 정책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하고 결코 고립되지 않은 사실이 이제 막 발생했다. 민중들로부터 온 이 사례는 실로 새로운 무언가의 예고 노릇을 한다." "우리는 수 백 년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인 사이의 격렬하고도 비인간적인 증오가 여전히 우리 가슴 속에 남아있는지 어떤지는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파리의 놋쇠노동자들에게 이들의 임금과 일자리를 건 싸움에 연대와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는 사실은 새로운 정치체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정당들이 이해하지 않을뿐더러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1868년 봄 제네바 파업 **

    파리 놋쇠노동자 건이 프랑스에서 노조의 존재를 건 싸움이었다면, 스위스에서의 이 사례는 대륙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의 존망을 결정짓는 것이었다.423) 국제노동자협회와 일군의 제네바 자본가들과의 불화가 발생하였는데, 그 경과는 다음과 같다. 1867년 8월 이래로 제네바의 건설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대한 깊은 불만의 조짐이 있었다. 건설노동자들의 전체 회의는 1868년 1월 19일에 열렸는데, 여기서 이들은 공동 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이 위원회는 고용자들과의 협상과 우호적인 협의를 통해 일일 12시간 노동을 10시간으로 줄이고 20%의 임금인상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내용을 담은 협정서을 작성해서 모든 고용주들에게 배포했다. 고용자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에 대응조직을 결성하고 건설 부문 고용자 총회(genetal meeting)를 3월 18일로 공고했다. 자본가들의 임시 위원회는 총회 개시 전에 노동자와 자본가 대의원의 평화적 대화를 요구하는 노동자 위원회의 거듭된 제안을 무시하였다. 사실 이들의 태도는 곧 있을 총회에서 그들이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지를 노동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동자 위원회는 고용자 위원회와의 협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선언하고 3월 14일 저녁 국제노동자협회의 제네바 중앙 위원회가 이 일을 맡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협회는 이러한 요청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협회는 3명의 제네바 시민으로 된 위원회를 선출하였는데, 이들이 중재를 위해 기울인 개인적인 노력 역시 실패하였다. 18일 총회를 거쳐 결국 고용자 협회를 만든 이틀 뒤인 3월 20일, 위원회는 "모든 건설업자 여러분"을 대상으로 하는 3월 23일 회의를 공개제안 하였다. 바로 다음 날 신문지상에 18일 열린 총회 명의의 공식 답변이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인즉 18일 총회에서 결정한 바 자신들은 국제노동자협회의 위원회와는 무엇이 되었건 대화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단 3표의 반대만으로 통과시켰다는 것이었다. 23일 아침 국제노동자협회의 노동자 위원회는 벽보를 붙여 이 같은 상황을 알리고 만약 당일 저녁까지 호의적인 결과가 도출되지 않고 고용주들과의 모든 평화적 이해의 여지가 사라진다면 국제노동자협회 전 부문의 총회를 소집하겠다는 것을 알렸다. 그날 저녁 6시 신호가 주어졌고, 협회의 회원들은 노조의 시설이 있는 론 가(Rue de Rhone)의 도처에 모였다. 부르주아들은 공황에 빠졌다. 상점과 집 문을 걸어 잠궜고, 현금보관함을 안전한 곳에 숨겼다. 일부 사무실j의 직원들은 무기와 탄약을 지급받았다. 그 동안 협회에 소속된 5,000 명의 건장한 노동자들이 사정권까지 행진했는데, 이 곳은 원래 총회가 예정되었던 장소였다. 여기서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논의하고 입을 모아 건설노동자들에게 국제노동자협회의 지원을 확신시켰다. 이렇게 되고 나자 국제노동자협회가 아닌 제네바의 노조 지도부들이 조합원의 열광적인 환호와 연대에 대한 단호한 확신을 등에 업고 벽돌절삭공, 벽돌공, 미장공, 페인트공 등의 파업을 선언하게 된다. 그 결과 회합은 조용히 해산되었다. 그날 밤 9시가 되자 제네바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불가피했던 파업 선언이 25일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와 브뤼셀, 파리, 리용에 있는 집행위원회로 전달되었다. 협회의 제네바 지부로서는 이미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 버린 파업의 규모 때문에 긴급하게 지지를 구하는 것이었다. 한 편 고용주들은 잽싸게 티치노(Ticino)와 피에드몬트(Piedmont) 등지에서 이들을 대체할 노동자를 들여오려 했다. 그러나 대체인력들은 도착한 순간 국제노동자협회 건물로 인도되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며, 이들 역시 파업대오에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 시기 국제협회가 온갖 야만적 공격과 가장 악독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Journal de Geneve가 그러한 어조를 유지했는데, 이 신문은 비엔나의 Neue Zurcher Zeitung, Neue freie Pressk와 기타 여러 급진적, 자유주의적, 보수적 부르주아 기관지들의 열렬한 지원을 받았다. 제네바 중앙평의회가 열정적으로 활동한 결과 파업 원인 자체는 뒤로 물러나고, 국제노동자협회가 상황의 전면에 부각되게 되었다. 3월 28일 고용주 협회는 26일자로 된 벽보를 붙여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최대한 공평하게 다룰 것을 약속하는 한 편, 노동자들에게 국제노동자협회의 전횡과 공갈을 경고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국제협회는 외국자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파업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예전의 친밀한 상호이해를 상기시키면서 선의를 가지고 개별적으로 작업장에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기꺼이 올려줄 것이며, 11시간의 노동시간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노동자들이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고용주 입장에서는 아직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건설부문 작업장조차 폐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합의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하였는데, 왜냐하면 고용주들이 국제협회에서 나온 대의원들과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어떠한 노동자도 개별적으로 복귀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폐쇄는 3월 30일까지 지속되었고, 가구장이, 목수, 주석광부의 사업장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이러한 폐쇄가 제네바 노동자에게 미친 가져온 도덕적 효과는 이전까지 국제협회에 거리를 유지하던 마차제조공, 편자공, 안장공, 실내장식업자, 줄갈이공(file-cutter), 제혁공, 그리고 기타 노조들조차도 부문별로 협회에 가입을 요청했다는 사실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 며칠 사이 협회는 1,000 명이 넘는 새로운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귀금속 업계에 고용된 노동자들, 예를 들어 금세공업자, 시계 제작자, 그릇 제조업자, 세공업자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제네바 시민이었는데, 3월 30일 2,000명 규모의 집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일제히 건설노동자의 대의가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모든 도덕적, 물질적 수단을 통해 지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제협회와 관련해서 이 모임은 제네바 노동자들이 외부세력의 전횡에 지배되고 있다는 악의적인 거짓선전을 거부한다는 점을 확실히 하였다. 이때까지 국제협회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 모든 합의에 이르는 길이 봉쇄된 지금 문제는 파업을 보다 오래 지속할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국제협회의 제네바 중앙평의회는 약 3,000 명의 노동자와 가족을 지원해야만 했고, 이는 제네바의 노동자만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도움의 손길은 도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먼저 제네바 노동자들과 노조가 보여준 자기희생의 정신이 가장 먼저 치사받아 마땅하다. 제네바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과 빵을 나누었다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렇게 개인들이 임금을 자발적으로 기부한 이외에도 노조의 예금은행과 구제기금도 500프랑에서 5,000프랑에 이르는 지원금을 갹출했다. 다른 스위스 도시의 노조와 스위스 주재 독일노동자 단체들도 내놓은 지원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독일로부터의 원조 하노버(Harnover, Workers' Union), 함부르크(Hamburg, Workers' Educational Society), 쉬베린(Schwerin, building workers), 로스톡(Rostock), 카우케멘(Kaukehmen), 솔링겐(Solingen), 만하임(Mannheim, Tailors' Union), 에슬링겐(Esslingen, Workers' Educational Society), 뮌헨(Munich, Workers' Educational Society) 외 다른 도시들-도 있었다. 특히 적극적이었던 곳은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와 파리와 브뤼셀에 있는 집행위원회였다. 4월 초가 되자 총평의회는 더 많은 금액을 얻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몇 가지 형식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런던에서만 최소 월 40,000 프랑에 이르는 돈을 일부는 융자, 일부는 원조의 형태로 파업이 승리할 때까지 지급할 것을 약속하였다. 브뤼셀과 파리의 집행위원회의 중재를 통해 두 도시의 노조들에서 상당한 양의 기부금이 제공되었는데, 이를테면 인쇄업자들로부터 2,000프랑, 파리 주석광 노조로부터 1,500프랑 등등이 있었다. 고용주들은 그제서야 노동자들을 말려 죽이려던 자신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이미 협회의 중앙평의회와는 절대로 교섭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에 협상은 주의회(State Council) 의장이며 제네바 사법경찰국장(Chief of the Justice and Police Department of Geneva)이기도 한 캄페리오(Camperio)가 자본가들을 대표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협회의 중앙위원회에 모든 건설부문 직종 대의원이 4월 8일 협상타결을 위해 자신의 사무실에서 회합을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이미 협상 3일 째 합의가 도출되었다. 고용주들은 노동시간을 1시간, 경우에 따라서는 2시간을 단축하기로 합의하였고, 10퍼센트의 임금인상에 동의하였다. 그 날 저녁(4월 11일) 캄프리오는 벽보를 붙여 그의 중재를 통해 노동자와 고용주간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파업은 종료되었으며, 월요일(4월 13일)에는 모든 작업이 재개될 것이라고 알렸다. 국제노동자협회 역시 파업의 만족스러운 타결과 노동자들이 파업기간 동안 보여준 용기있는 행동들을 치하하며 지난 날들의 고난은 잊고 월요일에 활기차게 일터로 복귀할 것을 주문하는 선전포스터를 붙였다. 국제노동자협회에 있어 이 투쟁은 스위스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3. 벨기에 정부와 샤를루아(Charleroi) 광산노동자 간 유혈투쟁 (1868년 3월)

    벨기에는 부르주아의 천국이다. 이 나라의 정체(政體)는 부르주아 국가의 이상적 모델이다. 정부는 부르주아의 대행자이고, 자본 지배의 대리인이다. 자본과 노동의 이익 사이의 사소한 대립일지라도 화약과 납탄이 횡행하는 유혈사태로 마무리되는 게 여기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424) 국제노동자협회가 그 곳에서 억압받고 박해받는 자의 대의에 더욱 확고히 관여할수록, 샤를루아 광산 지대 노동 쟁의의 대의를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더욱 필수적인 것으로 보였다. 많은 나라의 국내 산업들 중에서도 석탄과 철은 그 정점에 위치해 있다. 그 두 산업은 유기적 전체를 이룬다. 어떠한 제철소나 용광로도 석탄 없이 가동될 수 없고, 채탄산업의 입장에서도 이 둘은 가장 큰 소비자다. 따라서 한 쪽에서의 교란은 다른 쪽에 곧바로 그 영향을 미친다. 모든 위기와 마찬가지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야금산업의 위기는 석탄가격에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석탄과 철에 있어 자연의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에는 석탄과 철 모두 지표 가까이 묻혀 있어 채굴이 손쉽다. 한 편 프랑스는 자연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나라인데, 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석탄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야금산업은 영국이나 프러시아의 석탄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프랑스로서는 석탄 수입이 필수적이었지만, 프랑스에서 석탄을 생산하는 벨기에는 몹시 난감한 경쟁을 겪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에서 석탄이 팔리는 가격에 영향이 있는 운송비용을 고려할 때, 영국이나 (라인강과 그 지류들로 이어진 수로를 가진) 프러시아가 운송 면에서 훨씬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나라에서 일반적인 석탄의 가격은 석탄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에 달려있다. 실제로 각 국가에서 동일한 양의 석탄을 생산하는 데 투입되는 노동시간 양의 차이로 인해 이 요소의 국제적 관련성이 눈에 띤다. 임금 또한 노동시간과 마찬가지로 국가별 차이가 있는데, 영국에서는 대륙에서보다 최소 26 2/3퍼센트 높다.*** 이것이 양국의 석탄노동자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철과 철강 산업의 위기 혹은 다른 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불황이 석탄 가격을 낮추면, 탄광소유자는 임금을 낮추려 한다. 그러나 임금이 이미 충분히 낮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고, 특히 흉작이 들이닥친 시기의 임금삭감은 노동자를 절망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그들은 임금삭감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을 준비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변명이 있는데, 하나는 영국에서만 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륙에서만 통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통하는 변명은 대륙의 낮은 임금이다. 대륙에서 통하는 변명은 영국산 석탄의 낮은 가격으로 인한 경쟁 심화이다. 이런 상황에서 벨기에 광부들이 어느 정도까지 궁핍에 내몰렸는지는 Demokratisches Wochenblatt에 실린 다음의 기사l 를 보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벨기에 광부들보다 더 통탄할 만한 궁핍은 상상하기 어렵다. 기계 부품으로 전락했다고도 할 수 있을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진 이들은 거의 모든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박탈당했다. 여기 노동자들은 말, 당나귀, 채굴도구, 기타 비품 등과 함께 광산업자의 자산 목록에 올라와 있는 도구들 중 하나일 뿐이다. 사실이다. 광산회사는 더 많은 노동자를 손에 쥐고 있을 때 더 부유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회사가 '인도적 차원'에서 노동자 거주지를 만든다면 회사가 얻는 직접적 이익은 많아봐야 2퍼센트에서 3퍼센트 내외가 될 것이지만 그 간접적 이득은 거의 측정할 수 없을 정도가 되는데, 왜냐하면 회사로서는 이를 통해 광산에 자신의 생존을 건 노동자를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어떤 작업환경 아래서든 광산의 가동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광부들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선심쓰듯이 부르는 말인 자유인이 아닌 농노나 노예라고 부르는 것이 낳겠다." "모든 노동계급 중에서 특히 벨기에 석탄노동자들은 노예 표식을 달고 있다. 무지, 잔인함, 육체적 정신적 퇴화.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아마 다른 어떤 산업보다 인간에게 해로운 산업을 자본이 제한 없이 지배할 때 나타나는 안타까운 결과이다. 물론 부르주아들은 광부들의 이 비참한 신세를 바로 자신들이 초래한 잘못과 악덕, 조심성 부족, 경솔함과 방탕에 원인을 돌리기만 할 뿐이다. 현명하시게도 부르주아는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공허한 동정심만으로는 도저히 그 출구를 찾을 수 없지만 가능한 빨리 해결하는 것이 일반 이익에 부합하는 상황을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원인과 환경들을 드러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광부들을 살과 뼈로 만든 기계와 다름없이 만드는 요인 중에 가장 큰 것은 작업의 성질과 작업환경 자체, 그리고 너무나 긴 노동시간이다. 노동시간이 노동 강도의 증가와 같은 비율로 증가하는 경향은 현 사회 체계의 경제 법칙이다." "광부들의 노동은 순전히 육체적이다. 그것은 어떤 정신적 활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뇌는 거의 정지 상태에 있다. 정신적 활동은 어떠한 자극도 받지 못한 채 초보적이고, 생기없는 수면상태에 머무른다. 결과적으로 두뇌활동은 극단적으로 편협해진다. 그 활동이 순전히 육체적인 것처럼 욕구와 취향 역시 전적으로 육체적이고 잔인해진다. 만약 당신이 그 직업의 특성을 알고 있다면 광부들의 지적, 도덕적 퇴화는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육체를 파괴하는 격심한 노동의 파괴적 효과를 고려한다면 그 습관들과 품행이 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뭇 불가능한 일이다." "광부의 가치는 오로지 그의 근육에 의해 매겨진다. 지성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광산에서 일하는 데는 기술, 재능, 교육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적 능력 하나면 족하다. 광산에서의 다양한 작업들에 대한 간략한 묘사만으로도 독자들은 현재의 경제 체계 아래서 광부가 스스로의 육체적 능력, 정신력, 도덕성을 고양시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광산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공정으로 나뉜다. 갱도작업자가 광맥층으로부터 석탄을 캔다. 불도저가 그것을 통로로 가지고 나가면, 갱도의 하역인부가 그것을 수레나 바구니에 담는다. 그 바구니를 끌어당겨 지표에 이어진 수갱으로 옮긴다. 길을 뚫는 사람, 견인차, 흙 운반인은 갱도를 파내거나, 수갱을 뚫고 거기서 나온 흙과 암석을 퍼낸다. 이 모든 작업은 조그만 등불이 밝혀주는 희미한 빛 아래에서 먼지로 가득한 공기를 마셔야 하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광부들은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옆구리로 눕는다거나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것은 기본이고 엎드리거나 고되게 몸을 구부린 상태에서 이동하기 위해서는 기어 다닐 수밖에 없다. 굴착노동자나 들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역시 전적인 육체노동을 수행한다는 점은 같지만 이들은 그나마 햇볕이 드는 개방된 공간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탄광노동자의 고통스런 조건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래도 탄광노동자들이 정신적 도덕적으로 미약한 수준에 있다는 것이 놀라운가? 어떻게 환기도 되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하루 15시간 내지 18시간 일을 시키면서 사람의 인격을 가지길 바라는가? 이렇게 사람의 성정을 파괴할 뿐인 작업조건에서는 아무리 신께서 행복한 성정을 부여한 사람일 지라도 금방 자신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신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 육체가 도덕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육체적 상태는 대개 정신의 지표인 것이다. 상공회의소의 1844년 공식 보고서를 보면 탄광노동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얼굴이 창백하고, 골격은 굽어 있고, 다리는 휘어 있으며 걸음은 매우 느리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40세에서 50세가 되면 조기노화의 징후가 나타난다.'" "탄광기술자인 비도(Biduat) 씨는 1843년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썼다. '이 직업(채탄공)을 가진 이들은 항상 태양빛을 보지 못하고, 공기 대신 유독가스를 들이마시고, 부자연스런 자세를 취해야 하며, 항상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등 정상적인 삶의 조건에서 인간을 가장 멀게 만드는 종류의 일을 하여야만 하므로 이에 대한 더 특별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나에겐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43년에 사실이었던 것이 1868년에도 마찬가지다. 채탄공의 신체적·정신적 여건이 비록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확실히 개선되지 않았다. 노동시간은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임금 역시 현재의 경기후퇴를 무시하더라도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는 데에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탄광에 여러 가지 개선책들이 도입되었지만, 이 개선책이란 노동자와는 관계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노동자들이 사다리를 타고 위아래를 오가지는 않지만, 그렇게 절약된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은 일을 하는데 바치는 것이라 이러한 개선은 자본가의 이익만 될 뿐이다. 그 결과 채굴노동자는 정신적 유연성을 잃고 학교와 교육을 '게으름뱅이'의 전유물로 치부하며 자신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조잡한 오락과 쾌락에만 탐닉하게 될 뿐이다. 탄광주들은 이러한 노동자의 야만적 상태를 유지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적으로 노동자에게서 이윤을 뽑아내기 때문에 만약 노동자들이 정신을 차려 신중하고 사려깊게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수익성을 잃게 될 더 못한 산업들이 풍부한 데서 도움을 받는다. 탄광주들은 노동자들에게서 단돈 1 페니라도 쥐어짜내기 위해 온갖 함정을 준비해 놓는다.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못하여 정신적 능력이 동면에 들어 가 버린 이들을 구슬려 등골을 빼먹는 것은 얼마나 쉬운지!" "이런 상태는 계속될 수도 없고 계속되어서도 안된다. 인간성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다. 인간성의 호소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법칙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하지만 부르주아가 아무런 도덕적 후과 없이 노동자들을 농노나 가축 수준으로 후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러한 사실은 공장지역이나 광신지구의 부르주아를 살펴보기만 하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문화와 교육에 대한 경멸, 경영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사고의 결여, 그리고 부르주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쾌락만을 향한 조악한 욕망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는가? 이는 미국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과 노예소유주가 겪었던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그 곳에서 도덕적 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노예제와 노예노동이었다. 여기서도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니, 그 원인 역시 같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노동자가 더 낮은 곳으로 몰릴수록 고용주 역시 노동자를 따라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이들처럼 확실하게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사적 기업으로부터 당하는 해악, 역으로 사회 전체를 고름을 내뿜는 종기로 뒤덮어 버리는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교육협력이다. 노동시간 단축만이 계몽과 교육의 혜택을 노동자에게 돌릴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혜택에 참여하는 것만이 노동자들이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처한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노동자의 도덕적 물질적 향상은 사회정의의 문제이며, 공공선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선 대중교육협동조합을 만드는 길 밖에는 없다. 이러한 방책들을 실행에 옮기고, 지지·지원하는 것은 국가에 달려 있다. 부르주아 경제체계가 이미 사회를 부패시키고 침식하고 있는 지금, 이를 행하지 않고 멍하게 있다면 자멸할 뿐이다."

    1867년 2월 마르시엔느의 광산에서는 소요가 있었는데, 곧바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소요의 배경에는 1866년 흉작으로 인한 빵값 상승과 물품부족이 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는 이 살육사건의 유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1867년 3월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발신하였다.425)

    국제노동자협회 중앙평의회

    런던 E.C 보바리 스트리트 8 영국의 철강, 탄광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동지 여러분, The Timesm지가 노조가 특정임금선 아래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멈추지 않으면 영국 철강 산업이 훼손되고 붕괴하고 말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 지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그 신문이 말하길 값싼 석탄과 낮은 임금으로 무장한 벨기에가 국내외에서 그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합니다. 크리드(Creed)와 윌리엄스(Williams) 두 사람은 그 신문에 석탄의 혜택과 짜증나는 공장법이나 노조의 방해를 받지 않는 벨기에 자본가의 행복한 처지에 대해 잘 기술해 놓고 있습니다. 벨기에 탄광노동자들과 철강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아내,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에 12시간에서 14시간가량 일을 하고 영국노동자들이 10시간 일해서 받을 수 있는 정도만도 못한 임금을 받는다고 합니다.n 하지만 이 신문들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그러고도 만족한다던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Economiste belgeo에서 전하기를 철광 산업은 높은 석탄가격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은 변함이 없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같은 신문에서 "탄광노동자의 무지는 너무 뿌리깊고, 그들의 야만성은 너무 심각하며 돈을 쓰는 데도 무절제하고 엉망진창이기 때문에 임금을 아무리 올려줘 보았자 무의미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상황의 책임은 이들을 평생 고역에 시달리도록 못 박아 놓은 자들의 책임입니다. 2월 초에 마르시엔느(Marchienne) 인근에 있는 3개의 용광로가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다른 철강 업자들은 즉각 10퍼센트의 임금삭감을 발표했습니다. 샤를루아의 탄광소유주들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 잡지에 나온 대로라면 석탄이 지금만큼 수요가 많았던 적이 없고, 가격도 이렇게 높았던 적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p 이에 대한 분노(Outrage)q는 이와 함께 밀가루 가격이 상승하면서 가중되었는데, 탄광소유주나 제철소소유주들이 지역 방앗간 주인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우 많은 노동자들이 분개하였지만 조직화되어 있지 못하고 자신들 공통의 문제에 대해 협력하는 법을 몰랐기에 이 분노를 승화할 행동계획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간선도로에 모여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임금삭감에도 일하려는 사람들을 막아섰습니다. 샤를루아의 채탄공들은 장전한 총으로 무장한 수 백명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밀가루 방앗간으로 몰려갔습니다. 군인들은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죽고, 다치고, 투옥되었습니다. 이 분노한 가난한 자들, 학대당한 희생자들은 극단적 궁핍에 처한 가족들을 남겨두고 무덤으로, 또 철창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벨기에에서는 이들을 대신해 감히 한 마디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오류가 있는 잘못된 전술을 택했을지라도 그 대의를 폄하할 수는 없으며, 이들이 남겨놓은 이들 역시 원호와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고아 및 남편과 사별한 이들을 돕기 위해 외국에서 오는 금전적 도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낼 도덕적 영향력은 계급 전체의 사기저하를 반등시킬 것이고 대륙의 동지들에게 노동자의 싸움이란 어때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조직과 교육이 필요한가에 대한 더 나은 인식을 제공해 줄 의견의 교류와 교환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중앙위원회는 여러분이 이것을 숙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 나라 노동자의 대의는 전 세계 노동자의 대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의장, 조지 오드거 George Odger, President 부의장, J. 조지 에커리어스 J. George Eccarius, Vice-President 서기관 R. 쇼우 R. Shaw, Secretary

    그들 자신이 겪고 있는 서글픈 곤경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탄광 노동자와 철강노동자들은 기꺼이 그리고 따뜻하게 자신들을 향한 호소에 응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벨기에에서 국제협회의 영향력이 꾸준히 증가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러다 샤를루아 지역에서 벨기에 전 지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사회적 우월성을 확인해 줄 사건들이 1868년 3월 일어나게 된다.r 이 해의 노동자들의 소요는 다음과 같다. 석탄은 이미 상당히 과잉생산되어 있었다. 벨기에에서 석탄 소비는 줄어들고 있었는데, 일부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철강 산업과 용광로 산업에 주로 영향을 끼쳤던 1866년의 일반적 재정, 금융 위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일부는 벨기에산 석탄에 대한 프러시아 석탄의 도전 때문이기도 했다. 벨기에의 탄광소유주들은 사실상 가격을 높이 매기기 위해 담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철광산업과 용융산업계는 외국에서 석탄을 들여오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향후 가격인상에 대비해 다년공급 계약을 체결하였다. 탄광소유주들에게 있어서 이제 문제는 자신들의 탐욕 때문에 자업자득 격으로 생겨난 손해를 벌충하는 것, 특히 생산을 줄이는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실도 언급해 두자. 벨기에 탄광의 상당부분을 공공 기업이 경영했는데, 이 기업들은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지난 몇 년간 배당금을 주주들과 나누었다. 탄광 소유주와 감독들은 노동일을 일주일에 4일로 제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노동자 평균 임금의 33 1/3을 줄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래서도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맞출 수 없게 되자 탄광소유주들은 석탄 가격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주주들의 배당이익에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이미 정상임금의 66 2/3 수준인 임금에서 10퍼센트를 더 내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때 필수 식료품의 가격은 1866년과 1867년의 연속 흉작 덕분에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미 비자발적인 실업 덕분에 반 기아 상태에 놓인 채탄노동자들은 이들을 아사시킬 것이 분명한 임금삭감에 항의했다. 샤를루아 전 지역으로 파업은 보편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기아와 비참은 불행한 이들을 반란과 약탈로 몰아갔는데, 다른 때 같으면 노동자 군중의 선두에는 서지 않았을 여성들이 앞장서서 넝마주이를 매단 깃발을 들고 행진했던 것이다. 이제 자본가들은 정부와 군대에 개입을 요청하여 많은 노동자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고, 투옥시킨 유혈사태를 조장하였다. 최초의 충돌은 3월 25일 샤를루아 부근에서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해산하라는 한 관료의 선의의 간청에 막 응하려는 찰나, 돌멩이 하나가 지휘부 고위급간부에게 날아들었다. 이것을 빌미삼아 발포 명령이 떨어졌다. 7명이 죽고 13명이 다친 이 최초의 충돌 이후 헌병대 및 기병대와 또 다른 충돌이 있었다. 아시몽(Arsimont)에서는 심지어 어떤 폭력사태도 일어나기 전에 현장에 도착한 헌병대와 검찰관이 단지 파업을 선언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체포했다. 경찰이 물러나면 뒤이어 군인들이 몰려와서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광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을 붙잡았다. 근대 역사에서 자마이카에서 일어난 흑인 봉기426)에 대한 대량학살 유혈사태만이 이 잔혹행위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자마이카에서처럼 이 곳에서도 자본가들은 피로 담근 술로 파티를 하였다. 또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저항정신과 자존감을 극단적 잔혹 행위를 통해 파괴하려 하였다. 그들이 이 백색 테러s를 즐기면서 희희덕거렸던 유쾌하고, 거만하고, 심지어 유머러스한 어조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의 기관지인 1868년 4월 1일자 Independance belge에 잘 나와 있다.

    "땅에는 군인들이 넘쳐나니 지도자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움츠러들었다. 일반적으로 위험하다고 알려진 이들도 모두 철창 안에 가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이러한 조치는 현명한 것이었다... 이들을 체포하면서 군대는 그 위세와 위용을 뽐내었는데, 이는 뭇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또 동료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혹 있을지 모를 감옥 습격에 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에 대한 이 조직된 압박을 고려한다면 다시는 그러한 소란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유혈극은 깊은 위협의 효과 또한 갖는 것이다... 들떠있지만 조금도 위험하지는 않은 폭도 대중은 밤이 되기 전에 완전한 무기력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들이 지난 며칠간 귀 기울였던 모든 지도자들은 철창 안에 갇혔다. 사람들이 혹 그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일지 모를 작자조차 모조리 잡아들였다... 사실 철권을 휘두른 것은 경찰이지 군대는 아니었다... 이 지역 시장(市長), 경찰관료, 헌병대장에게서 조언을 얻어, 보고서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명시된 모든 이들을 잡아넣었다."

    이 야만들이 고통받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으킨 망연자실 속에서, 국제노동자협회 브뤼셀 중앙위원회는 언론에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대중적 집회를 제안하였다. 자본가와 그 공범인 정부를 맹비난하면서 벨기에 노동자들이 다시 저항에 나설 것을 추동하고, 구속된 자들에게 법률상담과 변호사를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샤를루아 노동자의 운동은 전체 국제노동자협회 모두의 대의라고 선언하였다. 런던의 총평의회는 파리와 제네바의 운영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브뤼셀에 있는 위원회를 지원하였다.427) 샤를루아 지역 탄광노동자들의 투쟁을 군대로 진압한 이후 고용주들은 실업자들과 굶어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탄광을 당분간 가동중지 시킨 것으로 아주 만족해했다. 정부 역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국제노동자협회 밖에 없었는데, 그마저 제네바에서 동시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재정이 좋지 않았고 지원위원회도 한창 조직 중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아사의 위기에 몰렸다. 날로 커지는 비참을 보고 이제 샤를루아 마을 주민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샤를루아 자유연합(the Liberal association of Charleroi)은 정부가 이 직업을 잃은 노동자들에게 즉각 직업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선거위원회를 해체하고 천주교도들에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협박은 원하던 결과를 낳았다. 물론 아사 직전 노동자들의 울부짖는 비탄 때문이 아니라 다음 선거에서 패배할 걱정 때문에 자유주의 정권이 상당한 규모의 공공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동안 3월에 구속된 노동자들에 대한 법집행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건, 즉 그들이 유죄로 판결받던 그렇지 않던, 정부는 반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이제 그들에게서 기대할 것은 총탄세례나 감옥뿐 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정부가 자신들의 정당한 불만을 들어주리라고 기대하거나, 고용주의 학대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거나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 노동자들은 조력이 어느 쪽에서 올 것인지,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돌아서야 할 것인지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정부가 아니라 바로 국제노동자협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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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정치적 활동 정치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지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강령t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총평의회는 형편이 되는 한 최대한 정치적 활동을 추구하려 하였다. 가장 중요한 조치들은 다음과 같다. 1. 협회가 창립되기도 전에 총평의회의 몇몇 구성원들은 북아메리카동맹(North American Union)의 대의를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정부와 지배계급은 남부동맹(Confederates)을 지지했는데, 미국 항구의 봉쇄가 영국에서 야기한 여러 곤란들을 지렛대로 삼았고, 영국 노동자들을 분리주의자428)를 옹호하는 관제데모에 동원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노동운동 지도자들 역시 지배계급의 이러한 술책을 간파하고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정부와 민중들에게 영국 국민 대다수가 느끼는 진실한 감정을 연설 등을 통해 알렸다. 또 북부동맹(Union)을 지지하는 런던 노동자들의 대중 집회를 조직하였다. 1864년 11월 8일 링컨의 재선을 계기로 총평의회는 그에게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축전을 보냈다.u동시에 북부동맹을 지지하는 집회도 열었다. 링컨이 답신을 보내 대의를 위한 국제노동자협회의 활동에 대해 일부러 사의를 표한 것은 이 때문이다.v 2. 또한 총평의회는 대중 집회를 열어 폴란드의 상황에 연대를 표하고 러시아의 잔혹한 억압을 유럽에 폭로하였다. 3. 1866년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429)의 뒤를 이어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전쟁이 긴급한 문제로 떠오르자, 프랑스의 관영신문은 연일 서로 간의 증오를 부추기는 기사를 쏟아내면서 국가적 야망을 불러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국제노동자협회의 파리 중앙평의회는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 시위를 프랑스 전역에서 조직하여 독일 노동자와 노조에 대한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프랑스 노동자가 자신들 앞에 놓여있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이 힘찬 운동이 프랑스 노동자 계급에 끼친 반(反)국수주의적 태도가 당시 적당한 구실을 찾고 있던 그 전쟁을 저지하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4.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는 1867년 의회 개혁을 이루어 내었던 영국 개혁 동맹의 설립과 활동에 있어 눈에 띄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총평의회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개혁 동맹의 가장 핵심적인 지도부이다. 런던에서의 대중 집회는 토리당 내무장관 월폴(Walpole)을 사임시켰으며 주요 도시들에서 분노의 집회가 열렸던 것은 분명 이에 영향받은 것이다. 5. 맨체스터의 페니어주의자(Fenian) 살인 사건*****을 두고 총평의회는 정의가 조롱당했다고 평가하였다. 사형집행은 1867년 11월에 종결되었다. 총평의회는 영국 정부에 탄원장을 보내어w피를 흘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런던에서 맨체스터 사건으로 인한 공황이 한창일 무렵 총평의회는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의 독립을 지지하는 공개강연(public session)을 열었다. 이는 이 오심에 의한 희생자를 위한 최초의 행동이었다. 타임즈지와 다른 일간신문들은 그 행사를 보도하였다.x그 결과 런던 노동자들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크게 바뀌었고, 영국 지배계급이 민족적 편견을 이용하여 상당수의 아일랜드인이 포함된 노동계급을 두 개의 적대적인 집단으로 분할하려는 시도가 효과적으로 저지당하자 영국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매체, 예를 들면 Saturday Review 같은 신문은 국제노동자협회를 국가위험세력이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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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정부와의 투쟁

    1. 프랑스 정부와의 투쟁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법적으로 정부의 승인 없이 20인을 넘는 조직을 구성할 수 없다.431)그 법을 그대로 따르자면 프랑스에 있는 대부분의 산업·상업 기업들은 불법이며, 다만 정부의 묵인 아래 존재하는 것이다. 항고심의 결정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조직이 공개적이고 정부가 일정 기간 해체하지 않을 경우 암묵적y인 승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정부의 승인을 얻건 그렇지 않건 정부가 그 설립을 일단 묵인했던 조직이라면 기껏해야 그 조직을 해체할 수 있을 뿐 그 구성원을 처벌할 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의 조직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겪었다. 프랑스의 모든 지부는 유진 듀퐁(Eugene Dupont)을 총평의회의 대표로 하는 영국 조직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었다.(덧붙여 말하자면 런던에는 프랑스 그룹과 독일 그룹이 있다.) 비록 그들이 특정한 사안에 있어서는 함께 행동한다 하더라도 프랑스 지회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지 않고 오직 런던의 총평의회와만 소통하고 있다. 각각의 조직들은 독립적인 집행위원회를 가지고 런던의 총평의회와 교통한다. 프랑스에서 조직의 건설을 추동한 것은 파리 그룹의 파리 집행위원회였다. 위원회는 내무장관z과 파리 경찰국장에게 그 설립과 존재를 이미 1864년에 통보하였다. 그 이후로 파리위원회는 프랑스의 다른 도시의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구성원들의 공개 회합은 매주 이루어졌고, 그에 관한 보고문이 공개적으로 신문에 실렸다. 사실 지난 몇 십 년간의 비밀조직과는 완전히 다르게도 그 조직은 본성상 공개적인 것이었고, 런던의 총평의회의 회합 역시 런던 신문에 매주 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와 프랑스 정부간 최초의 분쟁은 1867년 9월 로잔 총회직후 일어났다. 프랑스 대의원의 일원인 쥘 고트로(Jules Gottraux)는 총회 문서의 일부를 맡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 문서들을 프랑스에서 영국432)으로 가져 가려 했다. 그가 프랑스 국경을 넘는 순간 문서들을 압수당했다.433) 런던 총평의회의 총서기장이 프랑스 내무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그 압류된 문서는 영국의 재산이기 때문에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협회의 총평의회는 영국 외무장관인 스탠리 경(Lord Stanley)에게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관인 코울리 경(Lord Cowley)을 소개시켜 주었고 그가 프랑스 정부에 문서들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그제서야 프랑스 정부는 요구에 응했다. 두 번째 분쟁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프랑스 대의원들은 제네바 총회에서 자신들의 관점을 제안하며 원칙을 옹호하는 제안서를 낭독했다. 이 문서는 일방적으로 프루동주의적이면서 고유하게 프랑스적이었는데, 당연히 협회에서 채택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파리에 있는 어떤 출판업자도 그것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 위원회는 브뤼셀에서 제안서를 인쇄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경을 넘는 도중 문서를 압수 당했는데, 1867년 3월 3일 협회의 파리 중앙위원회는 국무장관이며 황제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루어(Rouher)에게 편지를 보내 문서를 압류한 까닭을 물었다.그는 그라비에 44번가에 있는 협회의 파리지부 사무실로 답신을 보내어 자신의 사무실로 한 번 방문해 줄 것을 청했다. 위원회는 장관과의 회담에 파견할 사람 을 정했다. 루어는 몇 군데 못마땅한 부분의 변경과 수정을 요구했다.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노동자에게 많은 은혜를 내려준 황제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몇 마디 말을 덧붙인다면 누구나 그 업적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Pourtant, si vous faisiez entrer quelques remerciments a l'adresse de l'empereur qui a tant fait pour les classes ouvrieres, l'on pourrait voir.) 협회의 대표는 협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개인이 되었건 정당이 되었던 아첨이나 명예훼손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루어는 회담장을 박차고 나와 그 문서를 돌려주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국제노동자협회를 자신들이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 편으로 정부는 아미엥, 루베, 파리에서 일어난 파업에 대해 협회가 미치는 영향력과 증대되어가는 역량에 주목하였다. 정부는 위의 회담 몇 주 뒤 협회의 제국주의 국수주의 반대 운동에 크게 불쾌해하면서 행동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세 번째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434)1868년 정초의 꼭두새벽 파리 경찰은 파리 중앙위원회 구성원들의 집을 급습하였다. 경찰이 발견한 모든 서신과 신문은 압수되었다. 경찰은 그 문서들을 바탕으로 파리그룹의 등록된 회원만 약 2,000명이라고 추산하였다(그 이후 이 숫자는 상당히 증가하였다.). 이들이 기소할 때 가져다 붙이기 좋아한 죄목은 비밀 단체에 참여했다는 것이었는데, 두 달간 조사를 거치고 난 뒤 이는 기각되었다. 대신 치안 규정을 무시한 죄가 등장하였는데, 즉 정부의 승인 없이 20명 이상의 단체를 구성했다는 것이었다. 1868년 3월 20일 센느(Seine) 형법재판소에서 공판이 이루어졌다. 피고 중 한 명이 석공 톨랭(Tolain)이 나머지 15명의 피고인들을 대변하였다. 심문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435)

    재판장 당신은 당신과 공동피고인들이 구성원으로 속해 있던 국제노동자협회가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톨랭 이 자리가 그 질문에 답하기에 적절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항변하고 싶은 것은 우리 단체의 공개적 활동이 그 존재의 암묵적 인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재판장 하지만 승인받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군요? 톨랭 누구도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국제협회가 도대체 어떤 나라에게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프랑스, 벨기에, 영국, 아니면 독일 정부 중 어디입니까? 알 수도 없고, 누구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정부의 승인이 영국에서는 무슨 소용일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재판장 조직의 모임에서 정치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습니까? 톨랭 전혀, 그런 일 없습니다. 재판장 1866년 브뤼셀에서 출간된 선언을 당신들에게서 압수했는데, 그 내용은 정치에 관한 것이었고, 심지어 전복적 정치(politique transcendentale)에 관한 내용도 있더군요. 톨랭 그 선언문은 내 소유물입니다. 내가 알기로 프랑스에서 그 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영국 노동자들이 쓰고 출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나라의 모든 단체는 타국의 단체들에게 연대를 강요하지는 않으면서, 각자의 특수한 요구를 제출할 권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영국이나 독일 지부가 우리가 감히 손댈 생각을 하지 않는 정치 문제를 토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나는 우리 모임에서는 정치 문제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장 협회는 어떻게 조직이 됩니까? 그 소재지는 어디고, 그 목적은 무엇이지요? 그리고 파리 사무소과 총평의회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톨랭 총평의회는 1864년에 런던에서 구성되었습니다. 영구적인 소재지는 없습니다. 런던에 삼년간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극복할 수 없던 문제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아시려면 그 규약을 읽는 것이 가장 좋겠군요(규약을 읽는다.). 재판장 파리 사무소의 조직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오. 톨랭 파리 사무소는 신문을 통해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 필요성을 호소한 이후 건설되었습니다. 사무소를 만든 이유는 파리 지부의 활동의 구심을 갖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제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한다거나, 단체를 대표해서 다른 부문과 교섭을 한다거나. 이 모든 것들은 백주대낮에 매우 개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파리 사무소의 정관은 인쇄된 소책자로배포되었고 모든 구성원들은 일주일에 10상팀의 회비를 내야 합니다. 재판장 이 사무소가 조직을 확장해야 한다는 직접적 선전을 벌인 적이 있습니까? 톨랭 우리는 때때로 어떻게 사무소가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거의 대부분 우리는 런던의 총평의회를 언급하곤 합니다. 재판장 파리 사무소가 어떤 파업에 개입한 적이 있습니까? 파리 놋쇠노동자, 루베, 아미엥 그리고 다른 파업들에서? 톨랭 협회는 앞서 언급하신 그러한 사건들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인 부위였습니다. 파업의 원인을 연구한 결과 그렇게 하는 것이 노동자뿐 아니라 사용자들에게 있어서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검찰관 레펠레티에(Lepelletier)의 연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신사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피고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지적이며, 강직한 노동자들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유죄판결은 받은 적도 없고, 이들의 도덕성을 의심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의 혐의를 입증함에 있어, 신사 여러분, 그들의 명예를 손상할 만한 얘기라곤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검찰관은 이들이 법을 어겼고 유죄를 입증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재판이 무효라는 피고의 주장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떠한 비난이 이 기소에 쏟아지고 있습니까? 여러분께서 지난 며칠간 Si cle, the Opinion nationale, 그리고 Courrier fran ais를 읽어보셨다면, 국제노동자협회에 대해 공감을 표하는 이 일부 매체들이 이 기소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3년간 협회는 광범위하고 공개적으로 활동해 왔다. 정부 당국의 정식 허가를 얻지는 못했지만, 묵인되었다. 그 목적은 노동자의 물질적이며 도덕적 해방이기에,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은 경제문제에 대한 학습이며, 진리, 도덕성, 정의라는 원칙에 입각한 해법이다… 하지만 그러한 묵인이 단순히 권력의 전횡과 폭력의 변덕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가혹한 기소로 끝장나게 되었다. 대략 이런 것입니다. 만약 협회의 구성원들이 적어도 그들의 강령을 저버리고 국가에 위협적인 문제에 몰두했다면, 그들이 정치에 관여했다면 모르겠지만 반대로 그들은 총회에서 그러한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활동을 자신들의 정관이 정하는 바에만 한정시켰으며, 그 정관이란 정부당국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며 최소한 이미 간접적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한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것이 우리 검찰에게 덧씌워진 비난입니다. 나는 줄여말거나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비난입니까? 협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협회가 자신의 강령에 제시된 대로 경제문제에 대한 학습에만 자신의 활동을 한정지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가)

    그래서 그 검사는 파리 사무소가 정치적 문제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룩셈부르크 문제436)에 대한 협회의 일반적인 태도를 고려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피고인들이 법적으로 유죄를 선고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피고 톨랭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은 탄원장을 제출하였다.나)

    "조직의 불법성이 정부당국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한 데 기인한다는 점; 또한 어떠한 공식적인 승인절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 앞서 말한 승인이 암묵적으로 이미 면제되었다는 것; 특별한 형식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입법자 스스로도 예외로 인정한 법을 엄격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 결과 대중적 신뢰도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 그것이 1834년 법에 대한 논의, 그리고 언급되는 승인은 암묵적일 수 있다는 정부 대표의 언급을 따르고 있다는 점; 그러한 암묵적 인정 혹은 묵인이 20명 이상의 인원을 가진 모든 산업·상업 기업이 존재하는 형태라는 점; 이 같은 관행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우리와 같은 단체들을 박해하는 권력을 용인하는 것은 사회적 양심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점, 왜냐하면 정부가 그들의 명백한 실존 때문에 그들이 적법하게 승인되었다고 간주한다는 점은 자명하기 때문에; 협회에 대한 암묵적 승인은 1) 그것의 존재와 행동은 끊임없이 공개적이었고, 이는 여타 사기업보다 훨씬 더 공공연했다는 점에서, 2) 국제협회가 내무장관과 경찰국장에 보내는 두 통의 편지에서 협회의 설립이 186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나오다는 것; 내무장관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대리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국무장관이 협회 서기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시적이고 공식적인 정부의 승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장관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정당성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는 점, 그동안 협회가 자신의 이론이나 목적을 변경했다는 사실을 검찰 조사가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 사실상 1866년 총회라)에서 프랑스 대의원의 의견서를 발제하기 위해 초청받았던 협회의 서기 역시 지금 비난받고 기소된 것과 똑같은 이론과 목적을 제시했다는 점; 1867년 1월 4일 검찰 간부조차 조직이 충분히 합법화되었다고 간주했는데, 이유인즉슨 당시 그들이 조직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공개 재판에서는 어떤 기소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이 모든 이유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법정이 검찰의 기소내용을 각하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러한 탄원을 제출하면서 톨랭은 다른 피고들을 대신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연설은 노동계급의 결어에 맞서는 열정적인 저항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상호교육을 통하여, 또 자신들의 가장 사활적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대해 학습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규명하려고 노력할 때, 그리고 개선을 확보하려고 시도할 때 노동자들이 초래하는 위협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노동자들이 무엇을 하건, 얼마나 조심을 하건,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순수하고 무해한 것이든 노동자들은 항상 위협받고, 박해받으며 조사 대상이 되었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산업적 혁신이 새로운 요구들을 창출하였고 사회 경제를 완전히 재구축했다.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정부 자신도 이러한 재구축 운동을 따랐고 열심히 협력했다.

    톨랭은 말을 이었다. "우리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국제노동자협회로 단결한 이유입니다. 노동자들은 공식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의 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길 원합니다. 영국 노동자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과 우리 모두 똑같은 관심사, 똑같은 사회적 문제로 움직입니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말하길 기계가 정교화되면서 노동자의 사회적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므로 함께 서로를 계몽하고, 우리의 생존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을 찾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고 똑같은 생각에 고무되었습니다. 그 이후 노동자는 자신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조건의 어떤 개선도 기대할 수 없다는 공동의 구호가 제시되었습니다. 이 구호는 1864년 런던에서 열린 공개 집회에서 주창되었습니다."

    그래서 톨랭은 런던의 총평의회와 파리 사무소의 설립, 조직과 활동 등을 설명했다. 정부가 암묵적 승인을 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그는 자신들이, 다른 한 편으로는, 공식적 승인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은 노동자와 모든 시민들에게 자연적으로 부여된 권리를 허가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권력을 정부에게 양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선언으로 진술을 마무리 지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금껏 우리가 취한 입장은 적절하게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당신의 판결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우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내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증오나 옹고집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권리에 대한 각성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관련된 모든 일들은 우리가 직접 해결할 것을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끝장내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수단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법을 넘어섬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법을 길 것을 바라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경찰, 정부, 자치 행정당국, 나아가 모든 대중들이 모든 것을 알고, 보고, 묵인했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판결은 이러했다.마)

    "검찰조사와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에 따라, 피고인들이 지난 삼 년 간 국제노동자협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단체의 파리 회원이었고, 이 단체는 20인 이상으로 구성되었으며, 승인을 얻지 못했다는 점," "연합된 노동자들이 협회의 목적에 따라 뭉쳐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했고, 앞서 말한 목적이란 노동자들의 처지를 협동조합, 생산과 신용 등을 통해 개선시키려는 것이며, 또한 정기적으로 회합을 열어 자신들을 영구적인 단체로 구성하였다는 점," "형법 291조와 292조바), 1834년 4월 10일 발효된 법사)은 프랑스 영토 안에서 그 법을 어긴 자에게 적용되는 경찰과 안보에 관계되는 것이며, 그 소재지가 런던이라는 사실에 관계없이, 파리 사무소가 앞서 말한 법을 어겼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점," "신문지상에서 상기 단체의 존재가 인지되었다거나 당국의 묵인이 있었다는 것이 명시적인 정부 승인의 필요성을 면제하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 "피고인들이 그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형법 291조와 292조, 1834년 4월 10일 법에 해당하고 그에 따라 처벌가능한 위반을 범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본 법정은 이로써 파리 사무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국제노동자협회의 파리 지부를 해산하고, 피고인 각자에게 100프랑의 벌금을, 벌금을 변제하지 못할 시에는 30일의 구류로 대신할 것을 선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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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죄판결을 받은 노동자들은 이 판결에 항소하였다. 그 동안 파리의 협회는 톨랭이 법정에서 진술한 그대로 행동하였다. 기소된 15명을 대신하여 9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사무소가 선출되었다. 이들의 선출은 신문에 보도되었다.아) 이들은 자신들이 서명한 호소문에서 파리 노동자들에게 제네바에서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요청하였다.자) 1868년 4월 22일 15인 사건의 2심이 열렸다. 기소의 핵심 내용은 20인 이상의 결사를 금지하는 제국 형법의 준수에 대한 파리 사무소의 공개적 거부, 기존 질서의 모든 지주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단체의 정치적 본성, 지금까지 해온 바대로 세계 모든 국가를 포괄하도록 허용된다면 어떤 정부도 버틸 수 없는 단체의 , 또한 지금까지 주장된 것처럼 노동자들의 파업에 보편적인 매개자의 일종이 되어 왔다는 점 등이었다. 다른 모든 사건에서처럼 피고인들은 변호인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변호하였다. 공식 허가를 받지 못한 데 관해서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 그러니까 런던 총평의회의 파리 지부가, 경찰 및 관계 당국에 우리 단체의 설립을 알린 뒤 명시적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지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조직을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승인을 구하는 치욕에 굴하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규약의 바로 첫 번째 원칙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 규약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승인을 받아들이는 자는 복종, 종속, 후견권, 간단히 말해 노에 신분을 받아들이는 것인 바, 그 모든 형태의 노예 신분이야말로 국제노동자협회가 그것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을 해방시키려 하는 굴레 자체인 것입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형량을 확정한 데 덧붙여 항소한 이들에게 항소심에 들어간 모든 비용까지 선고했다. 이번 선고의 근거는 실질적으로 1심 선고의 근거와 동일했으며, 다만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그 조직의 막대한 힘과 그 활동의 광범위한 확장 때문에 위험이 가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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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와중에 3월에 선출된 새로운 사무소의 9명에 대한 재판 역시 열려, 이들은 868년 5월 22일 형사법원에 출두했다. 이 사건의 심리는 3월 20일의 심리와 유사했다.437) 피고인들 중 한 사람인 제본공 발린(Varlin)이 변호인으로 나섰다. 그 역시 어떤 법학자에게도 손색이 없을 논리와 통찰력으로 기소인들의 법적 논증을 기각한 다음, 이 사건의 도덕-정치적 측면과 사회-경제적 측면을 계속 조명했는데, 여기서 그는 대의의 올바름과 심원한 도덕적 정의를 아는 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확신과 표현의 힘으로 우뚝 선다. 그의 진술이다.차)

    "우리가 볼 때 파업은 임금을 확보하기 위한 거친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사에 반해 파업을 벌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도 그럴 것이 파업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결국 공정한 임금을 받아 내리라란 보장도 없이 몇 주에서 몇 달에 이르는 가장 혹독한 궁핍으로 노동자와 가족들을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경제적 조건을 연구함으로써 노동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과업을 스스로 설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를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고 그 결과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자주 파업이라는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점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 앞에서는 당신들이 판사이고 우리들은 피고인입니다. 하지만 주의(主義) 앞에서는 우리는 두 개의 당파입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든 지켜야 하는 질서의 당파, 안정의 당파이고, 우리는 개혁의 당파, 사회주의의 당파인 것입니다. 편견 없이 한 번 살펴봅시다. 그 완전성을 의심했다는 이유로 우리가 범죄자가 되어 버린 저 사회 질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뼛속까지 불평등으로 좀먹었고, 이기심의 위협을 받으며, 반사회적 편견의 냉혹한 발톱에 목이 졸리고 있습니다. 인권 선언과 민중의 의지의 단명(短命)했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 줌 지배계급에게 좌우됩니다. 민중들의 피가 민족과 민족, 우리와 똑같은 굴레에 허덕이며 우리와 똑같은 해방을 열망하는 민중과의 동족살해의 전쟁터에서 강이 되어 흘러가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향락은 오로지 소수만을 위해 존재하고, 그들은 최대한, 그리고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향락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대다수 민중들은 비참과 무지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에 신음하고, 저기서는 기아에 고문당하며, 그리고 도처에서 자신들의 노예상태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미신과 편견의 암흑 속에서 시들어 갑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원한다면, 주식거래라는 도박이 어떻게 혼란과 해악을 끼치는지, 풍요와 기근이 모두 어떻게 그 힘 있는 자본가의 손에 달려있는지를, 그리고 그가 쌓아올린 황금의 산 곁에 있는 폐허와 고의적인 파산을 보십시오. 산업에서는, 고삐 풀린 경쟁이 노동자를 내리누르고 생산과 소비 사이의 어떤 분별 있는 관계도 파괴합니다. 필수품을 만드는 일손은 부족하고, 사치품을 만드는 사람은 넘쳐납니다. 가난한 아이들 수백만이 몸에 걸칠 실오라기 하나 없는데 10,000일 동안 노동하더라도 살 수 없는 터무니없는 가격이 매겨진 숄이 세계 박람회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노동자가 최소한의 생필품조차 구할 만큼도 벌지 못하는 한 편에서, 세계는 부른 배를 두드리는 게으름뱅이들로 가득합니다." "구 세계는 노예제라는 가시가 살에 박혀 종말을 고했습니다. 근대 시대도 대중의 고통에 관심을 쏟지 않고, 노동자에게 쉼없는 노동을 강요한다면, 노동자들은 생필품도 살 수 없는데도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 사치와 쾌락을 누릴 수 있게 한다면, 만약 이 시대가 이 같은 사회 상태가 완전히 부당하다는 것을 보려 들지 않는다면, 그 종말 역시 멀리 있진 않을 것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W. 팰리 박사는 La Cooperation신문에서 지난 5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카) "옥수수밭에 있는 비둘기 무리를 생각해 보라. 99마리의 비둘기가 옥수수를 쪼아먹는 대신 줄기와 왕겨만을 먹으면서, 오직 한 마리 비둘기를 위해 옥수수 알갱이를 산더미처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한 마리는 종종 가장 약하고 불쌍한 비둘기일 수 있다. 이 한 마리는 꼬꼬 울면서 거들먹거리고, 배불리 포식하고, 제 영역을 표시하여 못 쓰게 한다. 열심히 일하는 나머지 99마리는 친절하게도 이를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그 중의 하나가 - 더 용감한 녀석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녀석들보다 더 배고픈 녀석이었을 수도 있다 - 옥수수 한 알을 감히 먹어버렸다. 유순함에 눈먼 나머지 비둘기들은 그 녀석에게로 몰려가 끌어내고, 손실을 보충해 넣고, 자신들의 무리에서 배제하려 한다." "이 상황을 보십시오. 당신은 물론 이러한 일이 자연상태에선 일어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성을 가진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하루에도 수 백 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론은 이중적입니다. 당신은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동물 위보다 고차원적 행위를 행한다고 결론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자신이 가진 이성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에게서 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99마리, 비참 속에 태어나서 일하러 나가 버린 그의 어미를 거의 보지 못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 하는, 일상의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쓰레기더미 속에서 자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덤까지 그를 따라 다닐 병원균을 얻는 그 99마리에 속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8살이 채 되자마자, 최소한의 근력이 생기자마자 일하러 갑니다. 희박하고 비위생적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혹사당할뿐더러, 무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다. 이는 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제 20살이 된 그 친구는 그를 필요로 하는 부모를 떠나야만 합니다. 병영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거나, 전장에서 총을 맞아 죽기 위해서 말이지요. 만약 그가 살아서 도망칠 수 있다면, 그는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영국의 박애주의자 맬서스(Malthus) 선생이나 프랑스의 장관이신 뒤샤텔(Duchatel) 씨가 이 결혼을 허락한다면 말이지요. 이 분들은 노동자에게 부인이나 가족은 필요치 않으며,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에게 살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아닙니까.). 하여간 결혼하면 바로, 가난, 궁핍, 실업, 질병과 함께 아이들이 그의 집에 들어앉습니다. 그래서 이제 비참한 자신을 보다 못한 그는 감히 공정한 임금을 요구하지만, 프레스톤에서처럼 기아에 손발이 묶이거나, 샤를루아에서처럼 총질을 당하거나, 볼로냐에서 철창에서처럼 갇히거나, 카탈로니아에서처럼 포위 상태에 놓이거나, 여기 파리에서처럼 줄줄이 법정에 엮여 들어올 뿐이겠지요." "이렇게 이 비참한 자들은 고통과 수치의 길을 터벅터벅 걷습니다. 성년이 되면, 평온했던 유년의 기억 따윈 머리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 노년이 기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가족이 없거나 가난한 상태에 머문다면, 그는 마침내 거지를 위한 시설에서 악인처럼 죽어가겠지요." "하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이 소비한 것의 네 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사회는 그 잉여를 어디에 쓴 것일까요? 100번째 비둘기에게 물어보면 알겠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른 99마리의 노동에 기생하던 그 녀석 말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엄격한 정의의 길에서 벗어나 불의를 따르는 어떤 민족이나 사회 조직체도 결국은 부패와 사멸의 먹이가 될 뿐임을. 이것이야말로 사치와 비참, 압제와 노예, 무지와 수치, 타락과 퇴화가 공존하는 이 시대에 지난 역사에서 확실하게 이끌어 낼 수 있는 위안인 것입니다. 금은보화가 삐져나오는 궁전의 문턱에서 굶어죽어 가는 인간이 있는 한, 국가 체계는 불안정할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맥박을 짚어 보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놓지 않으려는 계급과 자기 노력의 과실을 되찾으려는 계급 사이의 소리죽인 분노를 듣게 될 것입니다. 18세기에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지독한 미신이 다시 복귀하고 있습니다. 방자한 이기주의와 붕괴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것은 쇠잔의 조짐입니다. 지반이 당신 발 밑에서 진동하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조심하기를!" "위대한 정의를 실연하기 위해 지금까지는 세계 무대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곤 했던 계급, 모든 시기 모든 정권 아래서 억압되었던 그 계급, 노동 계급은 이제 당신에게 부활의 수단을 건넵니다. 현명하게 그 정당성을 인정하시오. 그 대의를 방해하지 마시오. 그것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 길입니다. 완전한 자유의 호흡만이 공기를 맑게 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구름을 흩어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한 계급이 그들에게 권력을 주었던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다면, 그들은 무대에서 퇴장해야 합니다. 만약 붕괴하는 모든 체제의 마지막 수단인 포악함을 피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노력은 이 시대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히 위대하지 않다는 것, 따라서 강력한 정치적 부활, 평등, 그리고 자유를 통한 연대의 도착을 알리는 젊은 계급 속으로 용해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도록 합시다."

    이들 9명에 대한 법원의 선고는 3개월의 금고형에 100프랑의 벌금이었다. 피고인들은 항소하려 했지만, 결국 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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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회적 중요성은 차치하더라도 프랑스 정부가 국제노동자협회를 기소한 것은 정치적 함의 역시 갖는다. 1852년의 쿠데타438) 이후 최초로 프랑스 소재 조직이 검찰의 형법 기소에 대해 시민법 상의 저항을 했다는 것이고, 스스로 시민권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보통선거를 통해 당선된 자가 자신의 기관을 통해 이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지난 수 년 간 노동계급과 맺어온 밀회를 갑작스레 끝장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 조사는 국무장관 로어에서부터 연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정치적 동기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상 속의 필요를 만들어 내는 데 거북함을 느낀 그는 파리 사무소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을 동안 리옹, 루엔, 루베, 보르도, 마르세이유 등지의 협회 조직을 해산시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파리에서 발행되는 레드뤼 롤랭(Ledru Rollin)당의 기관지인 Le Reveil지가 파리 위원회타) 회원들의 행동에 대해 가장 만족할 만한 보도를 하였다. 이 신문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직관과 도덕적 우월성을 지배계급의 음모 및 편협함과 대비시켰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만한 논평을 작성하였다.

    "우리가 평화의 지속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유럽 여러 국가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사상과 감정이 통일될 때다. 며칠 뒤 국제협회의 총회가 열릴 것이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그 곳에 대표를 파견하는데, 아마도 프랑스는 예외일 것이지만, 그 지혜로운 결의로 유럽의 모든 노동자 대표들이 모인 이 총회가 유럽의 암피트리온적인 평의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 만약 내일, 프랑스 혁명 불멸의 원칙에 통달하고 노동의 신성한 이익, 즉 질서, 안전, 자유를 포함하는 그 이익을 손에 넣어 이 총회가 평화를 선포한다면, 그 선언은 전 유럽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2. 벨기에 정부와의 투쟁

    벨기에 부르주아 신문의 부추김을 받아, Independance belge를 앞세운 벨기에 정부가 국제노동자협회를 샤를루아의 혼란을 일으킨 주모자로 꾸미려는 시도가 있었다.파) 그러나 3월에 체포된 벨기에 노동자들을 조사하자 이 같은 혐의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애초부터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1868년 5월, 벨기에 법무경찰 장관인 줄 바라(Jule Bara)는 벨기에 하원(Belgian Chamber of deputies)의 외국인 추방 법 갱신을 둘러싼 토론439)을 이용하여 악의적으로 국제노동자협회를 공격하였다하). 협회의 존재를 외국인법 갱신 제안의 1차적 구실로 삼은 그는 협회의 다음 총회 소집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기에 이르렀는데, 국제노동자협회는 로잔 총회에서 1868년 9월 7일 브뤼셀을 다음 총회 장소로 지명했었다.갸) 이에 브뤼셀 집행위원회와 벨기에 국제노동자협회의 모든 구성원은 법무장관에게 5월 22일자 공개 서신을 공동 명의로 작성했다.냐) 그 편지에서 분명히 한 것은 장관이 협회 총회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이 전혀 없고, 총회는 브뤼셀에서 열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거리낌 없는 편지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장관님, 아래 서명자들은 당신이 우리의 대의에 크게 공헌한 것에 관해 감사를 보냅니다. 노동자의 대의가 무엇인지를 의회 회기 중에 화제로 삼아 의회 기록이 우리 원칙들을 유포하는 데 활용될 수 있게 해 주셨으니까요." "당신이 더 이상은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당신네 신문들은 이 나라에서 협회가 거둔 성공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타조처럼 눈을 감고 위험을 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우리를 하나의 세력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군요. 당신은 우리를 공식적으로 축성(祝聖)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당신의 태도로써 우리가 당신네들에게 하나의 세력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당신 무리들이 벨기에에서 인기가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시는군요. 우리의 협회를 돕기 위해 외국인이 온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안달할 테구요."

    그리고 벨기에 노동자들의 운동이 해외에서 고취되고 지도되었다는 장관의 암시를 확고히 거부하면서 그 편지를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

    "장관님, 하나 명심하셔야 할 것은 진(gin) 한 통에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한 사람이 우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사로 움직일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고, 우리의 활동을 이끄는 것은 모든 명예로운 정신에 깃들어 있는 정의, 오로지 그것 뿐입니다. 출범하자마자 우리 동맹은 이미 수천 명의 추종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전진한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 있습니다. 노동 해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이상은 당신에게는 불가사의한 것이겠지만요, 장관님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듣기 바랍니다."

    이후 편지는 국제노동자협회의 포부를 상세히 밝히고, 총회의 문건 중 더 많은 문서들을 입수해 읽으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정부의 위법사항이 제시된다. 샤를루아에서 빵 대신 죽음을 선물 받아 무고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을 상기시켰다. 파업이 노동자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충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는 바이나, 파업은 자본의 가렴주구에 대항하여 아직까지 노동자가 갖고 있는 유일한 적법 수단인 것이다. 이 편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렇소, 법무('justice')장관 나으리, 우리는 당신이 배반해 버린 그 정의의 승리를 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당신 없이도, 당신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당신에 대항해 싸울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총회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히 아주 화가 나셨던 모양이지요. 장관 나으리께서 그렇게 부조리한 단어를 말하시다니… 예를 들어 당신은 '집회의 자유'를 선포하신 바 있는데, 우리는 장관님께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무사히 그것을 파괴하실지 매우 기대가 됩니다. 당신이 떠벌린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브뤼셀에서 9월에 열립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장관 나으리께옵선 우리가 벨기에에 풀어 놓은 천둥번개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완고한 권위주의 정부로써 그것을 불러들인 건 바로 당신네들입니다. 진짜 뇌성벽력은 거기 당신 곁에 있습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하신 것 같지만 말입니다."

    1868년 6월 16일 회의에서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는 벨기에 정부가 공언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브뤼셀에서 정해진 날짜에 총회를 열기로 한 벨기에 위원회의 결정을 추인하였다.440) 프랑스의 집행위원회 역시 동의의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총회에 참석하고 그 결과는 알아서 감당하겠다는 결정이었다. 파리의 Courrier francais는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의 국제노동자협회에게 가해지는 동시적 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러한 해프닝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지금 협회는 유럽 전역에 걸쳐 놀라운 규모로 그 지지기반을 넓혀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서 반동들은 그것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으며, 이는 그것이 어디에서건 사회 개조의 전위로 여겨진다는 점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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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협회의 성장 잉글랜드에서는 1866년 셰필드 노조 대회에서 결의안이 선포된 이후 영국의 약 50개의 노조와 그 지부가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다. 새로이 참여한 이들 가운데에는 예를 들어 30,000명에 달하는 철도 굴착 노동자 그룹도 있는데, 이들은 이전까지 어떠한 노조나 운동에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아일랜드에는 더블린에 한 개 지부가 있다. 미국에서는 시카고에서 열린 전미노동자대회(National Labour Congress)에서 1867년 8월 20일 국제노동자협회와 공동행동을 위한 협력관계를 맺을 것을 결의하였다. 그 때 이후로 런던의 총평의회는 미합중국 전국 노동조합(General National Labour Union of the United States)과 연락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브뤼셀 대회에는 미국의 특별 대표가 참석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런던과 직접적·배타적 관계를 맺고 있는 그룹들의 숫자는 상당히 많다. 파리(Paris), 루엔(Rouen), 리용(Lyons), 마르세이유(Marseilles), 보르도(Bordeaux), 릴(Lille), 루베(Roubaix), 아르장탱(Argentan (Orne)), 카엔(Caen), 다뉴(Digne (Basses-Alpes)), 플로리오(Fleurieux (sur Sa ne)), 푸보(Fuveau (Bouches-du-Rh ne)), 플레(Flers (Orne)), 그랑빌(Granville (Manche)), 아르쿠르(Harcourt), 티에리(Thierry (Calvados)), 아르베(Havre), 리지유(Lisieux), 누빌(Neuville (sur Saone)), 낭트(Nantes), 네프샤토(Neufch teau (Vosges)), 오를레앙(Orleans), 크레(Crets (Bouches-du-Rh ne)), 빌르프랑쉐(Villefranche (Rh ne)), 비엔느(Vienne (Is re)) 등에 지부가 존재한다. 프랑스에는 몇몇 농촌지역도 협회에 가입해 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과달루프(Guadeloupe)에도 그룹들이 있다. 벨기에에서는 협회의 주요 거점은 브뤼셀, 리에주(Li ge), 베르비에르(Verviers), 루뱅(Louvain) 등이 있다. 올해는 탄광노동자와 철강노동자들이 협회에 대규모로 가입했다. 네덜란드에는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에 두 개의 지부가 있다. 스페인에는 바르셀로나에 한 개 지부가 있다. ,b>이탈리아에는 노동자 총협의회가 나폴리와 밀라노에 있는데, 이들은 600개의 노동자 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국제노동자협회와 맺는 관계는 영국의 노조들과 미국의 전국 노조들이 협회와 맺는 관계와 성격이 같다. 그 밖에 국제노동자협회의 특별 단체가 제노바와 볼로냐에 소재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제네바 파업 이후로 집단 가입을 하려 하고 있는데, 그 주요한 그룹은 바슬(Basle)과 베른(Berne) 주(canton)의 도시들에 소재해 있다. 여기에는 villages de la montagne des Bois의 공동체들도 가입해 있다. 도시의 단체만 해도 6,000명을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제네바, 그리고 네프샤텔(Neufch tel), 보드(Vaud), 취리히(Zurich) 등의 주(canton)도 있다. 스위스 그뤼틀리(Gr tli) 노조442) 와 스위스에 있는 다양한 독일 노동자 교육 단체도 협회에 속해 있다. 독일에는 많은 그룹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심정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법적 승인이 없기 때문에 공식 가입은 할 수 없다고 공표해 왔다.443)따라서 독일과의 연계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독일의 특별 중앙 사무소는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지역 사무소와 같은 것인데, 조 필 베커 책임 하에 제네바의 프레레베크 33번가에 소재하고 있다. 런던 총평의회에서는 런던 북서부 하버스톡 힐 멧트랜드 공원 제 1 모데나 빌라에 살고 있는 칼 마르크스가 독일 간사로서, 게오르그 에카리우스가 협회의 총서기로서 독일을 대표하고 있다. 협회의 간행물은 런던의 Bee-Hive 신문 시카고의 The Workmen's Advocate 파리의 Le Courrier Francais. Le Siecle, La Liberte , L'Opinion Publique 같은 매체 또한 협회의 결의문과 다른 글들을 싣고 있다. 리용, 루엔, 보르도와 다른 도시들의 민주적인 간행물들도 있다. 로잔 지역의 La Voix de l'Avenir 제네바의 Der Vorbote 라이프치히의 Demokratische Wochenblatt은 협회의 기관지는 아니지만 그 원칙을 같이하고 있다. La Tribune du peuple, La Liberte, L'Espiegle, Le Devoir, Le Mirabeau, La Cigale, l'Ingenu, Le Peuple Belge들은 모두 벨기에에서 발행된다. (브뤼셀, 베르비에르와 기타 지역).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노동자 신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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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론 저자가 독일노동자에게 바치는 이 책을 마무리하기 전에 독일 노동자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즐겁게 드릴 말이 있다. 7월 19일 Kollnische Zeitung에 "8시간 운동 The Eight Hours Movement"라는 제목으로 실린 고무적인 보도를 소개한다.

    "미국에서 지난 몇 년간 이루어진 선동들은 갑작스레 완벽한 승리로 끝을 맺었다. 이는 그 자체 가지고 있었던 특질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입법부에 영향을 미친 여러 외부요인들의 우연한 일치와 논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예전에 정부 작업장과 공장에서는 하루 12시간 노동이 10시간 노동으로 줄어든 바 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으로 한층 단축할 것을 요구했다(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점을 확인해 두자.). 그래서 이름이 "8시간 운동"이다) 의회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요구를 거부해 왔으나, 갱신된 발의안을 예전과 똑같이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두 당 모두 다음 대선에서 노동자들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이고, 두 당 모두 분명 그들의 본심과는 달리 이 운동에 맞서 저 많은 유권자들의 불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어떤 노동자들이 약간의 언어유희를 가미하여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수면, 그리고 8실링 임금"이라는 구호를 썼다. 앞서 말한 운동이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한,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정도로 자신의 노동력이 쓰이기를 원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협박이나 불법적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정부당국은 이 선동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도록 허락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그것을 선호할 것이다.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그 전능한 불문율은 여기서도 그 진가를 드러낼 것이다."

    독일 부르주아의 기관지인 Kollnische Zeitung이 미국에서 8시간노동제 운동의 예기치 못한 성공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신문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이라는 "불문"율의 "전능함"을 믿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New-Yorker Handelszeitung 역시 바로 그 "수요와 공급"이라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데마고그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이러한 결정을 개탄할 수밖에 없다. 하원의 두 당 모두가 정부 사업장에서의 노동일을 임금삭감 없이 8시간으로 결정했고, 대통령이 이 법안에 기꺼이 서명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부가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것이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고용자들이라면 자기 사업장의 노동시간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 이유도 까닭도 없는 선동을 승인한 것이다. 그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법이란 것은 노동자와 고용주와의 관계를 규제하는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공화국의 고상하고 자유로운 시민이라면 얼마나 자주 깨끗한 셔츠를 입어야 하는가, 또는 살면서 제대로 된 양말을 신어야 하는지, 찢어진 양말을 신어야 하는지와 법이 무관한 것처럼. 그리고 생산력의 5분의 1을 불능화하기 위한 이러한 시도가 진정 시의적절한지 여부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눈먼 노동자 대중의 환심을 얻고자 했던 이가 이 횃불에 뛰어들었고, 다가오는 대선 생각에 아무도 손을 델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노동력의 가격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따라 규제된다. 국회가 이 문제를 다루고 싶어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상원과 하원의 신사들이 이 점을 보지 않았을 리 없다. 놀랍게도, 섬너(Sumner) 상원의원 같은 이도 이러 식으로 이어질 노동자의 교육적 필요에 관한 수많은 감언이설을 쏟아냈다. 이러한 말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민중에게 진실을 말하는 자만이 민중의 친구일 것이다. 일단 선거가 끝나게 되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머지 않아 8시간 노동제 운동이 "이유도 까닭도 없는" 것인지, 미국의 노동자들이 대선이 끝나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지 여부를 알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미국의 입법부가 8시간 노동일 운동을 인정한 거대한 사건에 비하면 이 문제가 부차적으로 다루어진다.444)결과는 멀지 않아 알게 될 것이다. 미 정부 작업장과 공장에서부터 8시간 노동일의 원칙은 계속 전진하여 활발히 전개되어 아메리카 대륙, 영국, 그리고 유럽대륙 모두에서 노동자 계급의 도덕적이고 정당한 요구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수요와 공급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노동시간을 늘리고, 노동자 필요의 하한선까지 임금을 낮추는 모든 지역들에서 말이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 조건의 근면한 탐구자이자 권위자인 칼 마르크스가 1867년 7월 25일 예언한 것을 목도하고 있다. "18세기에 미국 독립전쟁이 18세기에 유럽의 중간 계급에게 경종을 울린 것과 마찬가지로, 19세기에는 미국 남북전쟁이 유럽의 노동자 계급에게 경종을 울렸다." [자본 제 1판의 서문] a독일어 원본에는 영어단어 "Trades' Unions"와 "Strikes"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b노동자 연합 관련 법을 폐지하고 그것을 다른 법으로 대체하기 위한 법령 - Ed.본문으로 c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와 프랑스어 단어 "Strikes"와 "Greves"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d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단어 "breach of peace"와 "restraint of trade"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eK. Marx, The poverty of Philosophy. Answer to the "Philosophy of Poverty" by M. Proudhon. - Ed.본문으로 416) 이 직종별 대표자 회의는 1866년 7월 17일에서 21일 사이 셰필드에서 열렸고 200,000명의 조직된 노동자를 대표하는 138명의 대표자가 참석하였다. 노조에 국제노동자협회에의 참여를 호소하는 이 결의문은 "Report of the Conference of Trades' Delegates of the United Kingdom, held in Sheffield, on July 17th, 1866, and Four Following Days, Sheffield, 1866 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본문으로 f Report of the Conference of Trades' Delegates of the United Kingdoms..., Sheffield, 1866 - Ed.본문으로 g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 단어 "Trades' Council"이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17)주 38을 보라본문으로 418) 2차 선거개혁에 대한 일반 민주주의적 운동에의 영국 노조의 참여에 관여했다.본문으로 419) 이는 1867년 8월 15일 영국 의회에 의해 결국 채택된 개혁안을 지칭한다. 이 법은 투표권을 도시에 12개월 이상 거주한 사람과 집이나 아파트를 세주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켰다. 이전까지 투표권은 연간 12파운드의 수입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용이 되었다. 이러한 투표권의 확대로 인해 유권자의 수는 100만에서 200만으로 늘어났다. 이는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을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비교적 부유한 계층에게까지 투표권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수의 영국 노동자들은 여전히 투표를 할 수 없었다.본문으로 * 어떤 한 산업의 모든 공장과 작업장을 폐쇄하는 것,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감수하도록 하는 자본의 도구이다(아이이호프 주) 본문으로 420)1866년의 경제위기는 주로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 유명한 '면화기근' 현상을 불러일으킨 미국 남북전쟁 이후에 발생하였다. 면화기근은 거대 생산업자에게는 극단적으로 유리하고 수 백의 소규모 공장에게는 파괴적인 것이었다. 1866년 위기는 금용에 주로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탄광, 철강, 강철 산업은 생산을 줄이고, 철도 건설 등의 사업이 축소되었다.본문으로 421)이는 노동자의 연합과 파업을 금지하는 1791년 Le Chpelier 법의 폐지(프랑스, 1864)와 노동자 연합 금지 철폐를 의미한다.(벨기에, 1867)본문으로 h"Third Annual Report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 뒤에 독일어 해석이 괄호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22)루베에서의 직공과 방적공의 파업, 파리에서 놋쇠 노동자 파업. 14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i V. Huriot, "M. Thiers a dir qu'en matiere de relations internationales, il n'y avait point de politique nouvelle...", Le Courrier francais, No.12, March 24, 1867 - Ed.본문으로 **이 파업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다음의 소책자에 수록되어 있다: Die internationale Arbeiterassociation und die Arbeitseinstellung in Genf in Fr hjahr 1868. Von Joh. Phil. Becker. Deutsche Verlagshalle, Pr -l' v que 33, Geneva, 1868. 이 책을 읽는 노동자에게, 수익금 전액을 파업 지원 중 생겨난 비용 부담 목적에 사용하는 강심장 조 필 베커(Joh. Phil. Becker)의 소책자와 월간 Vorbote를 강력히 추천한다. 조 필 베커는 그 자신이 노동자 출신으로서 노동계급을 위해 칼로 말로 펜으로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단호하게 한 평생을 바쳐 싸워온 인물이다. 노동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이 사람은 그 사유에 있어 독창적일뿐더러 열정적인데, 요즈음 모든 노동 써클에 들이대는 "신물나는 덕성과 허무한 도덕"a1의 소인배a2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노동계급에게 인정받을 만하다. 그는 스위스 국제노동자운동의 삶과 혼이며, 지금까지 독일에서 협회에 가입한 모든 독일 성원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아이히호프 주)본문으로 a1Heinrich Heine, Neue Gedichte: Romanzen 7, anno 1829. - Ed.본문으로 a2Littel great man - Ed.본문으로 423)제네바 파업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마르크스 자신의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4차 연례보고서 "The Fourth Annual Report of the General Council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와(이 책 p.16) 국제노동자협회 4차 연례총회 총평의회 보고서 "Report of the General Council to the Fourth Annual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이 책 p.47를 보라)본문으로 j사무실 Offices. - Ed.본문으로 k Neue freie Press, Nos.1286(supplement), 1288, 1291, March 29, 31, April 3을 보라본문으로 424)이 상황에 대한 묘사는 마르크스에 의해 쓰여졌다. 벨기에 대학살("The Belgian Massacres")를 보라. (이 책, p.47)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리차드 휘팅(Richard Whiting)의 추산을 따름. 프랑스 노동자들이 영국 노동자들에 비해 어느 정도 열악한 지를 계산하기 위해 그는 두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재의 가격 차이를 비교한다. 그는 노동자가 프랑스에서 5프랑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영국에서 5실링(이는 6프랑에 해당된다)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같다고 한다. 가격 차이는 여기에서 16 2/3 퍼센트라는 임금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프랑과 실링이 지닌 가치가 양국에서 동일함을 밝혀 낸 뒤, 그는 프랑스에서 임금이 영국에서보다 적어도 10퍼센트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프랑스, 벨기에, 라인 프러시아(Rhenish Prussia)에서 임금이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 또한 밝혀내었다.본문으로 l"Die Lage der belgischen Kohlenarbeiter", Demokratisches Wochenblatt, Nos.20 and 21, May 16 and 23, 1868. - Ed.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Demokratisches Wochenblatt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독일 인민당(German People's Party)의 기관지이고 C. W. Vollrath에 의해 출간된다. 편집장은 Wilhelm Liebknecht.본문으로 425)이 호소문은 총평의회(1867년 2월 26일 회의)에서 지시한 사항을 에카리어스(Eccarius)가 작성하고, 1867년 3월 13일 The International Courier No.8에 수록한 것이다.본문으로 m영문 원본에서 "the thunderer of Printing House Square"라고 되어있다. - Ed.본문으로 nThe Times, Nos.25678, 25689, 25692, 25695 December 11, 24, 29 and 31, 1866; No.25708, January 15, 1867을 보라 - Ed.본문으로 o"La grave de Marchienne-au-Pont", L'Economiste belge, No.3, February 9, 1867 - Ed.본문으로 pIbid. - Ed.본문으로 q영어 원문에는 "the affair" - Ed.본문으로 r이 책 pp.14-15를 보라 - Ed.본문으로 426)자마이카 영국 식민지 총독 에어(Eyer)는 1865년 10월 흑인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 학살은 영국에서 대중적 격분을 일으켰고, 영국 정부는 에어를 해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본문으로 sWhite terror - Ed.본문으로 427)18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tK. Marx,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연설" - Ed.본문으로 428)분리주의자(the Secessionist)들은 1861~65년 남북전쟁 당시부터 남부 11주의 미연방 탈퇴를 주장한 이들이다. 1861년에 노예주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남부동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줄여서 CSA)을 결성한다.본문으로 uK. Marx, "미합중국의 대통령 에이브럼 링컨에게" - Ed.본문으로 v "Mr. Lincoln and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London, Jan.31", The Times, No.25101, February 6, 1865를 보라 - Ed.본문으로 429)1866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보-오전쟁)을 지칭한다. 133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1867년 9월 18일 무장한 페니어주의자들이 맨체스터에서 경찰의 열차를 습격하여 두 명의 정치범(페니어주의자 간부)을 구출하였다. 경사 한 명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전국에서 정기적인 순회재판을 보장하는 영국법에 반하여 이 사건은 특별조사위원회가 처리하였는데, 이들이 마련한 특별재판에서 그 공격에 가담한 죄로 고발된 페니어주의자들은 경찰관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름난 판사인 블랙번(Blackburn)은 수감자 탈출에 가담했다고 밝혀진 모든 피고인들이 이에 따라 살인혐의가 인정된다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배심원을 설득하였다. 블랙번 판사는 5명의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평결을 내리고 사형을 언도하였다. 5명 중 2명의 집행은 연기되었고 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1868년 6월 2일 바로 그 블랙번 판사는 자마이카 전 총독인 에어(Eyre)에 대한 재판을 맡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영국 고등법원 수석재판관인 A. 코크번(A. Cockburn)경의 견해를 인용하며 에어가 행정권을 남용하지 않았다고 대배심을 설득하여 그에게 무죄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6월 8일 고등법원 수석재판관인 A. 코크번은 퀸즈 벤치430)법정에서 블랙번 판사가 사실을 날조했다고 기소했고, 블랙번 판사는 자신의 사법적 실수를 인정하였다.본문으로 430) 278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w이 책 3~4페이지를 보라. - Ed.본문으로 x "London Meetings", The Times, No.25974, 1867년 11월 21일 - Ed.본문으로 43117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y독일어 원본에는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프랑스어 "tacite"이 라틴어로 괄호안에 적혀있다. - Ed.본문으로 z Paul Boudet - Ed.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착각이다. 분쟁은 1866년 제네바 총회 뒤에 일어났다.(13번 주를 보라) - Ed.본문으로 432)13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433)프랑스 국경에서의 이 사건과 프랑스 대표단 문서(Memorial of the French Delegation)(pp. 365~66을 보라)의 압류에 대한 아이히호프의 기술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4차 연례보고서"에 수록된 마르크스의 작업을 이용하고 있다.(이 책 12~14페이지)본문으로 John George Eccarius - Ed.본문으로 Charles La Vallette - Ed.본문으로 나폴레옹 3세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착각이다. 편지는 3월 9일자로 되어있다( "A M. le ministre de l'intereur. Vendredi, 9 mars 1867", Le courrier francais, No.112, May 1, 1868) - Ed.본문으로 Ibid - Ed.본문으로 제 1인터네셔널 파리 지부의 문서 담당관인 Antoine Marie Bourdon이다.본문으로 독일어 원본에는 프랑스어 문장이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괄호 안에 제시되어 있다. 1867년 3월 10일 벌어진 이 회담의 내용은 Le Courrier francais, No.112, May 1, 1868에 수록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34)16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1868년 전야(12월 31일) - Ed.본문으로 435)이 장(1. 프랑스 정부와의 투쟁)의 마지막까지의 텍스트는 국제노동자 협회 회보. 파리 사무소(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 Travailleurs. Bureau de Paris)(Paris, 1868)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의 요약 및 직접인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톨랭의 심문에 관한 기록을 보려면 이 책의 pp.12~15를 보라.본문으로 들르스보 (Delesvaux) - Ed.본문으로 이는 Manifeste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suivi de Reglement provisoire, Breussels, 1866을 지칭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요청에 따라 찰스 롱게(Charles Longuet)에 의해 번역되었다. 롱게는 임시규약(Provisional Rules) 첫 번째 불역본의 오역을 바로 잡았다.-Ed본문으로 독일어 원문에는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속에 프랑스어가 제시되어 있다.본문으로 강령 중에서 톨랭이 읽은 부분은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l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aris, 1868. pp.14~15이다. - Ed.본문으로 "Reglement de Bureau de Paris." In: Pre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pp.22~24 - Ed.본문으로 가)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p.16,20 - Ed.본문으로 436) 이는 1867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통치자들 사이에 있었던 룩셈부르크의 그랜드 더키(Grand Duchy)를 둘러싼 분쟁을 지칭한다. 이는 군사적 준비를 불러왔고 양 나라에서 모두 경솔한 군사적 프로파간다가 수반되었다.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향한 전초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1867년 10월 17일 Liebknecht가 제국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비스마르크의 룩셈부르크 문제에 대한 정책을 비판하였다. 10월 22일 총평의회 회의에서 마르크스는 그 연설문 요약을 읽었다. 그 연설은 이 총평의회 회의 보고서에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The Bee-Hive, No.315, October, 1867에 수록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대해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라파르그를 시켜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도록 하여 Le Courrier francais에 싣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었다.본문으로 나)Ibid., pp.32~35 - Ed.본문으로 다)Paul Boudet - Ed.본문으로 라)Congres de Geneve. Memoire des delegues francais, Brussels, 1866 - Ed.본문으로 마)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p.39~40 - Ed.본문으로 바)Code Penal, ou code des delits et des peines, Cologne, 1810 - Ed.본문으로 사)Loi sur les associations, 10~11 avril 1834 - Ed.본문으로 아) "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Le courrier francais, No.71, March 14, 1868 - Ed.본문으로 자)이 호소문은 Le courrier francais, No.101, April 20, 1868에 실렸다. - Ed.본문으로 437) 167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차) Proces..., pp.124~26 - Ed.본문으로 카)"Correspondance. Travail et Cooperation, Londres, 27 avril 1868", La Cooperation, No.18, May 3, 1868 - Ed.본문으로 438) 1852년 12월 2일 나폴레옹 3세의 이름으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가 프랑스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것으로 제 2공화국이 붕괴하였다. 루이 나폴레옹의 독재로 끝나게 된 쿠데타는 1년전인 1851년 12월 2일에 발생하였다.본문으로 타)Ch. Delescluze, "Le droit d'Association. Devant la justice", Le Reveil, No.2, July 9, 1868 - Ed.본문으로 파)이 책 p.14를 보라 - Ed.본문으로 439)5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하)1868년 5월 16일 Jules Bara의 하원의회에서의 연설, La Voix de l'Avenir, No.23, June 7, 1868; La Liberte, No.47, May 17, 1868을 보라 - Ed.본문으로 갸)브뤼셀 총회는 1868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열렸다.본문으로 냐)"A Monsieur Bara, ministre de la Justice", La tribune de peuple, No.5, May 24, 1868 - Ed.본문으로 440)26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442)Grutli 노조 (Grutli-Verein) - 스위스 개혁주의 단체인데, 장인들과 노동자의 교육협회로서 1838년 설립되었다. 그 이름은 스위스의 국가적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스위스의 전설에 따르면 스위스의 세 개 주의 대표가 1307년에 Gr tli (루틀리, Rutli)의 풀밭에서 만나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한 저항동맹을 결의했다고 한다.본문으로 443)이는 1850년 3월 11일 제정된 반동적인 프로이센 법과 관계되어 있다.본문으로 444) 미국에서 8시간 노동일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은 1840년대와 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60년대에 들어와서 그 운동은 대중적 성격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8시간 노동일을 쟁취하기 위한 연대체(league)와 노동조합이 동참하였다. 전미 노동조합(National Labour Union) 역시 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대중운동의 영향력 때문에 미국 의회는 모든 정부 기업과 연방 기구들에 대한 8시간 노동일 법을 1868년 6월 25일 상정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고용자들은 이를 실행하지 않거나 위배하였다. 전미 노동조합은 고용자들에 대해 저항할 것을 노동조합에 주문하였다. 전미 노동조합은 미국 노동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인 윌리엄 실비스(William Sylvis)의 적극적인 관여로 1866년 8월 볼티모어 대회를 거쳐 설립되었다. 1866년 10월 9일 쿠겔만(Ludwig Kugelmann)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볼티모어 대회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제안한 모든 요구들이 거기에 담겨있네, 노동자의 정확한 본능에 의해서 말이지." 1866년 10월 전미 노동조합은 국제노동자협회와의 관계를 확립하였지만, 1867년 8월 시카고 대회에서 선출된 대의원인 리차드 트레벨릭(Richard Trevellick)은 로잔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최근 대회인 바슬(Basle) 대회(1869년 9월)에는 카메론(Cameron)이 전미 노동조합의 대표였다. 1870년 8월 열렸던 전미 노동조합의 신시내티 대회에서 카메론은 자신의 국제노동자협회 대회 참가를 보고하였고, 전미 노동조합은 국제노동자협회의 원칙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확인하고, 협회에 가입할 것을 표명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그 결의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 지도자들이 화폐 개혁의 유토피아적 공상에 포섭되었고, 1870년과 71년 많은 노동조합들이 떨어져 나가, 72년 전미 노동조합은 거의 개점휴업상태가 되었다.본문으로

  • 2007-10-23

    국제노동자협회: 설립, 조직, 정치·사회적 활동, 그리고 성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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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국제노동자협회, 노조, 파업a 국제노동자협회가 설립되면서 영국 노조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이전까지 이들의 투쟁은 오로지 임금과 노동시간에 국한되었고, 편협한 중세 길드 체계에 얽매여 있었다. 노조들은 완전히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1825년 의회법b에 따라 인가를 받고, 매일같이 벌어지는 노동과 자본의 투쟁 때문에 필수적이 된 정부가 인정하는 단체다. 그들의 목표는 고용주와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후의 수단(ultima ratio)은 파업c인데, 파업의 합법성은 평화의 파괴(breach of peace)를 회피하고 강제적인 작업제한(forcible restraint of trade)d을 시도하지 않는 조건 하에서 앞서 말한 법에 의해 보장되었다. 이 법의 비호 아래 노조는 영국의 모든 공장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그 수, 조직, 기금을 갖춘 덕에 강력한 단체로 성장하여 고용주와 대립하는 가운데 그들이 항상 고려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노조는 모든 정치적 반동의 시기 속에서도, 고용주과 자본가의 반동책략 가운데서도, 지난 수 십 년간의 모든 궁핍과 경제 공황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마르크스가 일찍이 1847년에 프루동을 비판하는 저작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응답』(파리, 1847)e에서 밝혔던 바대로, 중세 행정자치구(commune)의 성립이 부르주아 사회의 중간 계급에게 가졌던 중요성만큼이나 노동 계급의 조직화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 편으로 노조가 설사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노동 계급 조직화의 수단이라는 것, 그리고 긴급하고 현재적인 목적들 곁에서 일반적 목적, 즉 노동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사회적 해방을 얻어낸다는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제 노조 자신이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국제적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본성에 있어 노동운동은 국경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자명해졌다. 이러한 이유에서 1866년 셰필드에서 열린 영국 노조 대의원들의 대규모 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이 입안·채택되었다.416)

    우리는 국제노동자협회가 만국의 노동자들이 형제애(brotherhood) 안에서 하나로 묶일 수 있도록 기울인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이 자리에 모인 대표들이 속한 다양한 단체들 모두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할 것을 진심으로 권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전체 노동계급의 진보와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믿습니다.f

    런던 노동평의회g 417)는 영국 노조들의 중앙기구로서, 역시 런던에 소재하던 국제 노동자 협회의 총평의회와 합의를 맺었다. 런던평의회의 서기관 오드거(Odger)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 구성원이다. 이 시간 이후에서야 영국 노조 활동은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이는 영국의 노조들이 최초로 정치적 운동에 직접 참여했을 때부터 곧바로 드러나게 된다. 이들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러셀-글래드스톤(Russell-Gladstone) 내각이 1866년 6월 붕괴하고 난 뒤 의회 개혁은 기약 없이 중단된 듯 보였다. 토리당 지도자들은 다수의 갈채 속에서 어떤 개혁도 필요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은 정치적 운동을 떠맡았다. 대규모의 대중 집회가 런던(London), 버밍엄(Birmingham), 맨체스터(Manchester), 글래스고(Glasgow), 브리스틀(Bristol) 등지에서 열렸다. 노조는 자신들의 역량을 다해 이 집회에 참여했다. 노동자 평의회는 운동의 지도부인 '개혁 동맹Reform League'418)을 지지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승리를 쟁취했고, 토리당 정부는 의회적 개혁을 추진하는 수밖에 없었다.419)
    --------------------
    1866년과 1868년 사이 영국에서는 유럽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파업과 자본가의 직장폐쇄(lock-out)*가 빈번했다. 이는 1866년의 경제위기420)와 그 여파로 인한 결과였다. 위기는 투기의 흐름을 마비시켰다. 거대 기업들은 정지했고, 자본가들은 화폐시장의 조건이 변하자 투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뿌려놓은 채무를 변제할 돈을 구할 수 없게 되어 도산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업종에서의 불황은 영국과 프랑스 은행이 추가적으로 자신의 금보유고를 개방하지 않고서는 풀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금은 은행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갔는데, 더 이상 적절한 투자처를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산업의 전반적 정지와 물가의 전반적 하락을 불러왔다. 그러나 식량, 특히 노동자들에게 필수적인 빵 가격만이 예외적으로 올랐는데, 이는 1866년과 1867년에 든 흉년 때문이었다. 정확히 이 흉년기간 동안 세계 공황이 들이닥쳤고, 이는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시간 감소와 임금 삭감이라는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많은 파업이 벌어졌고, 그에 따른 직장폐쇄가 이어졌다. 나아가 노동자들의 연합을 가로막을 법들이 프랑스와 다른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철폐되기 시작했다.421) 의심할 여지없이 제네바(Geneva)와 로잔(Lausanne)에서 열린 노동자 대회의 결의안은 도덕적 효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국제노동자협회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을 수 있다는 인식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부르주아 언론은 국제노동자협회가 이러한 분쟁을 부추겼다고 비난했는데 이는 그들이 착각한 것이다. 협회가 파업을 발의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협회는 지역적 투쟁이 개입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또한 협회의 참여가 요구되는 한에서 개입하였던 것이다. 특히 협회는 세 가지 중요한 사안에 개입하였는데, 이는 국제협회의 원칙들을 선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첫 번째로, 협회의 협조를 요청하였던 영국 노동자 파업 중 협회의 전술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 언급이 있다. 이는 "3차 연례 보고서"h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보고서는 런던 총평의회가 로잔 총회에 제출한 것이다.

    "런던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들에서도 자본가들의 전횡에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외국인을 고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체근로의 가능성은 영국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힘있게 주장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총평의회의 활동은 이러한 위협을 공공연히 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대체근로는 비밀리에 추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노동자가 대체근로의 낌새를 채는 것만으로도 자본가들의 계획을 충분히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협회에 속한 작업장에서 파업이나 직장폐쇄가 일어나면 유럽 대륙의 연락소에서는 각각의 지역 노동자들에게 즉각 영국의 분쟁 사업장의 자본가들 및 그 대리인과의 계약에는 응하지 말 것을 교육하였습니다. 협회 소속 작업장이 아닌 경우에도 협조가 된다면 다른 직종을 대신하여 똑같은 조치가 취해집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하여 철도굴착 노동자, 차장, 엔진 운전자, 도금 노동자, 전선 노동자, 벌목 노동자 등의 작업장 및 공장에 관련된 파업 기간 동안 영국 자본가들의 책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런던의 바구니 노동자 파업에서와 같은 몇몇 사례에서 자본가들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노동자들을 몰래 입국시켰지만,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호소에 따라 그들은 영국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했다. 협회의 파리 집행위원회는 일부 노동자 집단을 지원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았다. 루베(Roubaix)에서 리본 제조업자들은 그들의 공장에 자의적인 처벌규정을 도입했는데, 이는 자연히 임금 삭감의 효과를 불러왔다. 이 벌금 체계의 필연적 결과는 이 제도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와 직장폐쇄, 그에 대한 반란과 당국의 무력개입이었다.422) 그러나 여기서 파리의 국제노동자협회 중앙위원회가 개입하였고, 생산업자 자신들이 만들고, 적용하고, 처벌까지 할 수 있게 되어 있는 내부규정은 현행법에 위배됨을 밝혀내었다. 이 결과로 프랑스 정부는 순수한 경영상의 내규 이외에 벌금을 부과하는 어떠한 사적인 공장 내규도 불법이며 전적인 횡령에 해당됨을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국제노동자협회가 개입하였던 사례 가운데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1867년 2월의 파리 놋쇠 작업장 폐쇄

    이 싸움의 가장 근본적인 의의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에서 노조가 이제 막 합법화되기 시작했을 때였다. 약 5,000명 규모의 놋쇠노동자조합은 합법화의 이익을 입은 최초의 노조로서 1866년 초 영국 모델을 따라 노조를 건설하였다. 그 시작부터 이들은 자연히 고용주들에겐 눈에 가시였고, 자본가들은 기회가 닿는 대로 이를 파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기회가 닥쳐온 것은 1867년 2월로, 당시 노조는 조합원을 대표하여 5명의 고용주에게 자신의 결정사항에 합의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즉각 동맹을 맺고 구성하여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탈퇴하던지 아니면 직장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이는 87명의 고용주가 1500명에 달하는 노동자를 포괄하는 직장폐쇄를 단행하였을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는 프랑스에서 노조의 존폐 자체를 둘러싼 싸움이었던 것이다. 직장폐쇄 초기에, 놋쇠노동자들은 35,000 프랑의 기금을 가지고 있었다. 노조는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주당 20프랑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고, 월 5,000 프랑을 상환한다는 조건으로 국제노동자협회의 주선 하에 영국의 노조로부터 대부를 얻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승리하였다. 이는 영국의 노조들로부터 바라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게 하였던 런던 총평의회의 도덕적·재정적 지원, 그리고 프랑스의 다른 노조들로부터 놋쇠노동자들에 대한 열성적인 지지를 얻어낼 수 있도록 한 국제협회 파리 중앙평의회의 개입 덕분이었다. 영국인 동료들로부터의 협력을 통한 프랑스 노동자들의 승리라는 사회적 중요성 외에도, 이 사례는 국제적인 의의를 지닌다. 프랑스의 일간지 Courrier fran ais는 1867년 3월 24일자 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i

    "티에르(M. Thiers)씨는 국제관계에서 어떠한 새로운 정책도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하고 결코 고립되지 않은 사실이 이제 막 발생했다. 민중들로부터 온 이 사례는 실로 새로운 무언가의 예고 노릇을 한다." "우리는 수 백 년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인 사이의 격렬하고도 비인간적인 증오가 여전히 우리 가슴 속에 남아있는지 어떤지는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파리의 놋쇠노동자들에게 이들의 임금과 일자리를 건 싸움에 연대와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는 사실은 새로운 정치체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정당들이 이해하지 않을뿐더러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1868년 봄 제네바 파업 **

    파리 놋쇠노동자 건이 프랑스에서 노조의 존재를 건 싸움이었다면, 스위스에서의 이 사례는 대륙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의 존망을 결정짓는 것이었다.423) 국제노동자협회와 일군의 제네바 자본가들과의 불화가 발생하였는데, 그 경과는 다음과 같다. 1867년 8월 이래로 제네바의 건설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대한 깊은 불만의 조짐이 있었다. 건설노동자들의 전체 회의는 1868년 1월 19일에 열렸는데, 여기서 이들은 공동 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이 위원회는 고용자들과의 협상과 우호적인 협의를 통해 일일 12시간 노동을 10시간으로 줄이고 20%의 임금인상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내용을 담은 협정서을 작성해서 모든 고용주들에게 배포했다. 고용자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에 대응조직을 결성하고 건설 부문 고용자 총회(genetal meeting)를 3월 18일로 공고했다. 자본가들의 임시 위원회는 총회 개시 전에 노동자와 자본가 대의원의 평화적 대화를 요구하는 노동자 위원회의 거듭된 제안을 무시하였다. 사실 이들의 태도는 곧 있을 총회에서 그들이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지를 노동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동자 위원회는 고용자 위원회와의 협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음을 선언하고 3월 14일 저녁 국제노동자협회의 제네바 중앙 위원회가 이 일을 맡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협회는 이러한 요청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협회는 3명의 제네바 시민으로 된 위원회를 선출하였는데, 이들이 중재를 위해 기울인 개인적인 노력 역시 실패하였다. 18일 총회를 거쳐 결국 고용자 협회를 만든 이틀 뒤인 3월 20일, 위원회는 "모든 건설업자 여러분"을 대상으로 하는 3월 23일 회의를 공개제안 하였다. 바로 다음 날 신문지상에 18일 열린 총회 명의의 공식 답변이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인즉 18일 총회에서 결정한 바 자신들은 국제노동자협회의 위원회와는 무엇이 되었건 대화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단 3표의 반대만으로 통과시켰다는 것이었다. 23일 아침 국제노동자협회의 노동자 위원회는 벽보를 붙여 이 같은 상황을 알리고 만약 당일 저녁까지 호의적인 결과가 도출되지 않고 고용주들과의 모든 평화적 이해의 여지가 사라진다면 국제노동자협회 전 부문의 총회를 소집하겠다는 것을 알렸다. 그날 저녁 6시 신호가 주어졌고, 협회의 회원들은 노조의 시설이 있는 론 가(Rue de Rhone)의 도처에 모였다. 부르주아들은 공황에 빠졌다. 상점과 집 문을 걸어 잠궜고, 현금보관함을 안전한 곳에 숨겼다. 일부 사무실j의 직원들은 무기와 탄약을 지급받았다. 그 동안 협회에 소속된 5,000 명의 건장한 노동자들이 사정권까지 행진했는데, 이 곳은 원래 총회가 예정되었던 장소였다. 여기서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논의하고 입을 모아 건설노동자들에게 국제노동자협회의 지원을 확신시켰다. 이렇게 되고 나자 국제노동자협회가 아닌 제네바의 노조 지도부들이 조합원의 열광적인 환호와 연대에 대한 단호한 확신을 등에 업고 벽돌절삭공, 벽돌공, 미장공, 페인트공 등의 파업을 선언하게 된다. 그 결과 회합은 조용히 해산되었다. 그날 밤 9시가 되자 제네바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불가피했던 파업 선언이 25일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와 브뤼셀, 파리, 리용에 있는 집행위원회로 전달되었다. 협회의 제네바 지부로서는 이미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 버린 파업의 규모 때문에 긴급하게 지지를 구하는 것이었다. 한 편 고용주들은 잽싸게 티치노(Ticino)와 피에드몬트(Piedmont) 등지에서 이들을 대체할 노동자를 들여오려 했다. 그러나 대체인력들은 도착한 순간 국제노동자협회 건물로 인도되어 현재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며, 이들 역시 파업대오에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이 시기 국제협회가 온갖 야만적 공격과 가장 악독한 비난에 시달려야 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Journal de Geneve가 그러한 어조를 유지했는데, 이 신문은 비엔나의 Neue Zurcher Zeitung, Neue freie Pressk와 기타 여러 급진적, 자유주의적, 보수적 부르주아 기관지들의 열렬한 지원을 받았다. 제네바 중앙평의회가 열정적으로 활동한 결과 파업 원인 자체는 뒤로 물러나고, 국제노동자협회가 상황의 전면에 부각되게 되었다. 3월 28일 고용주 협회는 26일자로 된 벽보를 붙여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최대한 공평하게 다룰 것을 약속하는 한 편, 노동자들에게 국제노동자협회의 전횡과 공갈을 경고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국제협회는 외국자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파업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예전의 친밀한 상호이해를 상기시키면서 선의를 가지고 개별적으로 작업장에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고용주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기꺼이 올려줄 것이며, 11시간의 노동시간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었다. 또한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노동자들이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고용주 입장에서는 아직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건설부문 작업장조차 폐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합의에 도달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하였는데, 왜냐하면 고용주들이 국제협회에서 나온 대의원들과 협상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어떠한 노동자도 개별적으로 복귀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폐쇄는 3월 30일까지 지속되었고, 가구장이, 목수, 주석광부의 사업장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이러한 폐쇄가 제네바 노동자에게 미친 가져온 도덕적 효과는 이전까지 국제협회에 거리를 유지하던 마차제조공, 편자공, 안장공, 실내장식업자, 줄갈이공(file-cutter), 제혁공, 그리고 기타 노조들조차도 부문별로 협회에 가입을 요청했다는 사실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 며칠 사이 협회는 1,000 명이 넘는 새로운 회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귀금속 업계에 고용된 노동자들, 예를 들어 금세공업자, 시계 제작자, 그릇 제조업자, 세공업자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제네바 시민이었는데, 3월 30일 2,000명 규모의 집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일제히 건설노동자의 대의가 승리로 이어질 수 있도록 모든 도덕적, 물질적 수단을 통해 지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국제협회와 관련해서 이 모임은 제네바 노동자들이 외부세력의 전횡에 지배되고 있다는 악의적인 거짓선전을 거부한다는 점을 확실히 하였다. 이때까지 국제협회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면, 모든 합의에 이르는 길이 봉쇄된 지금 문제는 파업을 보다 오래 지속할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국제협회의 제네바 중앙평의회는 약 3,000 명의 노동자와 가족을 지원해야만 했고, 이는 제네바의 노동자만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도움의 손길은 도처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먼저 제네바 노동자들과 노조가 보여준 자기희생의 정신이 가장 먼저 치사받아 마땅하다. 제네바의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과 빵을 나누었다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렇게 개인들이 임금을 자발적으로 기부한 이외에도 노조의 예금은행과 구제기금도 500프랑에서 5,000프랑에 이르는 지원금을 갹출했다. 다른 스위스 도시의 노조와 스위스 주재 독일노동자 단체들도 내놓은 지원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독일로부터의 원조 하노버(Harnover, Workers' Union), 함부르크(Hamburg, Workers' Educational Society), 쉬베린(Schwerin, building workers), 로스톡(Rostock), 카우케멘(Kaukehmen), 솔링겐(Solingen), 만하임(Mannheim, Tailors' Union), 에슬링겐(Esslingen, Workers' Educational Society), 뮌헨(Munich, Workers' Educational Society) 외 다른 도시들-도 있었다. 특히 적극적이었던 곳은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와 파리와 브뤼셀에 있는 집행위원회였다. 4월 초가 되자 총평의회는 더 많은 금액을 얻기 위해 극복해야 했던 몇 가지 형식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런던에서만 최소 월 40,000 프랑에 이르는 돈을 일부는 융자, 일부는 원조의 형태로 파업이 승리할 때까지 지급할 것을 약속하였다. 브뤼셀과 파리의 집행위원회의 중재를 통해 두 도시의 노조들에서 상당한 양의 기부금이 제공되었는데, 이를테면 인쇄업자들로부터 2,000프랑, 파리 주석광 노조로부터 1,500프랑 등등이 있었다. 고용주들은 그제서야 노동자들을 말려 죽이려던 자신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그들 자신은 이미 협회의 중앙평의회와는 절대로 교섭하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기 때문에 협상은 주의회(State Council) 의장이며 제네바 사법경찰국장(Chief of the Justice and Police Department of Geneva)이기도 한 캄페리오(Camperio)가 자본가들을 대표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협회의 중앙위원회에 모든 건설부문 직종 대의원이 4월 8일 협상타결을 위해 자신의 사무실에서 회합을 가질 것을 제안하였다. 이미 협상 3일 째 합의가 도출되었다. 고용주들은 노동시간을 1시간, 경우에 따라서는 2시간을 단축하기로 합의하였고, 10퍼센트의 임금인상에 동의하였다. 그 날 저녁(4월 11일) 캄프리오는 벽보를 붙여 그의 중재를 통해 노동자와 고용주간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파업은 종료되었으며, 월요일(4월 13일)에는 모든 작업이 재개될 것이라고 알렸다. 국제노동자협회 역시 파업의 만족스러운 타결과 노동자들이 파업기간 동안 보여준 용기있는 행동들을 치하하며 지난 날들의 고난은 잊고 월요일에 활기차게 일터로 복귀할 것을 주문하는 선전포스터를 붙였다. 국제노동자협회에 있어 이 투쟁은 스위스에서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3. 벨기에 정부와 샤를루아(Charleroi) 광산노동자 간 유혈투쟁 (1868년 3월)

    벨기에는 부르주아의 천국이다. 이 나라의 정체(政體)는 부르주아 국가의 이상적 모델이다. 정부는 부르주아의 대행자이고, 자본 지배의 대리인이다. 자본과 노동의 이익 사이의 사소한 대립일지라도 화약과 납탄이 횡행하는 유혈사태로 마무리되는 게 여기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424) 국제노동자협회가 그 곳에서 억압받고 박해받는 자의 대의에 더욱 확고히 관여할수록, 샤를루아 광산 지대 노동 쟁의의 대의를 철저히 규명하는 것이 더욱 필수적인 것으로 보였다. 많은 나라의 국내 산업들 중에서도 석탄과 철은 그 정점에 위치해 있다. 그 두 산업은 유기적 전체를 이룬다. 어떠한 제철소나 용광로도 석탄 없이 가동될 수 없고, 채탄산업의 입장에서도 이 둘은 가장 큰 소비자다. 따라서 한 쪽에서의 교란은 다른 쪽에 곧바로 그 영향을 미친다. 모든 위기와 마찬가지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야금산업의 위기는 석탄가격에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석탄과 철에 있어 자연의 수혜를 가장 많이 입은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에는 석탄과 철 모두 지표 가까이 묻혀 있어 채굴이 손쉽다. 한 편 프랑스는 자연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나라인데, 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석탄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야금산업은 영국이나 프러시아의 석탄에 의존하는 형편이다. 프랑스로서는 석탄 수입이 필수적이었지만, 프랑스에서 석탄을 생산하는 벨기에는 몹시 난감한 경쟁을 겪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에서 석탄이 팔리는 가격에 영향이 있는 운송비용을 고려할 때, 영국이나 (라인강과 그 지류들로 이어진 수로를 가진) 프러시아가 운송 면에서 훨씬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나라에서 일반적인 석탄의 가격은 석탄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에 달려있다. 실제로 각 국가에서 동일한 양의 석탄을 생산하는 데 투입되는 노동시간 양의 차이로 인해 이 요소의 국제적 관련성이 눈에 띤다. 임금 또한 노동시간과 마찬가지로 국가별 차이가 있는데, 영국에서는 대륙에서보다 최소 26 2/3퍼센트 높다.*** 이것이 양국의 석탄노동자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철과 철강 산업의 위기 혹은 다른 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불황이 석탄 가격을 낮추면, 탄광소유자는 임금을 낮추려 한다. 그러나 임금이 이미 충분히 낮다는 것은 그들도 잘 알고 있고, 특히 흉작이 들이닥친 시기의 임금삭감은 노동자를 절망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그들은 임금삭감에 대한 그럴듯한 변명을 준비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변명이 있는데, 하나는 영국에서만 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륙에서만 통하는 것이다. 영국에서 통하는 변명은 대륙의 낮은 임금이다. 대륙에서 통하는 변명은 영국산 석탄의 낮은 가격으로 인한 경쟁 심화이다. 이런 상황에서 벨기에 광부들이 어느 정도까지 궁핍에 내몰렸는지는 Demokratisches Wochenblatt에 실린 다음의 기사l 를 보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벨기에 광부들보다 더 통탄할 만한 궁핍은 상상하기 어렵다. 기계 부품으로 전락했다고도 할 수 있을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진 이들은 거의 모든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박탈당했다. 여기 노동자들은 말, 당나귀, 채굴도구, 기타 비품 등과 함께 광산업자의 자산 목록에 올라와 있는 도구들 중 하나일 뿐이다. 사실이다. 광산회사는 더 많은 노동자를 손에 쥐고 있을 때 더 부유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 회사가 '인도적 차원'에서 노동자 거주지를 만든다면 회사가 얻는 직접적 이익은 많아봐야 2퍼센트에서 3퍼센트 내외가 될 것이지만 그 간접적 이득은 거의 측정할 수 없을 정도가 되는데, 왜냐하면 회사로서는 이를 통해 광산에 자신의 생존을 건 노동자를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고 어떤 작업환경 아래서든 광산의 가동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광부들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선심쓰듯이 부르는 말인 자유인이 아닌 농노나 노예라고 부르는 것이 낳겠다." "모든 노동계급 중에서 특히 벨기에 석탄노동자들은 노예 표식을 달고 있다. 무지, 잔인함, 육체적 정신적 퇴화.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아마 다른 어떤 산업보다 인간에게 해로운 산업을 자본이 제한 없이 지배할 때 나타나는 안타까운 결과이다. 물론 부르주아들은 광부들의 이 비참한 신세를 바로 자신들이 초래한 잘못과 악덕, 조심성 부족, 경솔함과 방탕에 원인을 돌리기만 할 뿐이다. 현명하시게도 부르주아는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공허한 동정심만으로는 도저히 그 출구를 찾을 수 없지만 가능한 빨리 해결하는 것이 일반 이익에 부합하는 상황을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원인과 환경들을 드러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광부들을 살과 뼈로 만든 기계와 다름없이 만드는 요인 중에 가장 큰 것은 작업의 성질과 작업환경 자체, 그리고 너무나 긴 노동시간이다. 노동시간이 노동 강도의 증가와 같은 비율로 증가하는 경향은 현 사회 체계의 경제 법칙이다." "광부들의 노동은 순전히 육체적이다. 그것은 어떤 정신적 활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두뇌는 거의 정지 상태에 있다. 정신적 활동은 어떠한 자극도 받지 못한 채 초보적이고, 생기없는 수면상태에 머무른다. 결과적으로 두뇌활동은 극단적으로 편협해진다. 그 활동이 순전히 육체적인 것처럼 욕구와 취향 역시 전적으로 육체적이고 잔인해진다. 만약 당신이 그 직업의 특성을 알고 있다면 광부들의 지적, 도덕적 퇴화는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육체를 파괴하는 격심한 노동의 파괴적 효과를 고려한다면 그 습관들과 품행이 이성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뭇 불가능한 일이다." "광부의 가치는 오로지 그의 근육에 의해 매겨진다. 지성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광산에서 일하는 데는 기술, 재능, 교육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체적 능력 하나면 족하다. 광산에서의 다양한 작업들에 대한 간략한 묘사만으로도 독자들은 현재의 경제 체계 아래서 광부가 스스로의 육체적 능력, 정신력, 도덕성을 고양시키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광산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공정으로 나뉜다. 갱도작업자가 광맥층으로부터 석탄을 캔다. 불도저가 그것을 통로로 가지고 나가면, 갱도의 하역인부가 그것을 수레나 바구니에 담는다. 그 바구니를 끌어당겨 지표에 이어진 수갱으로 옮긴다. 길을 뚫는 사람, 견인차, 흙 운반인은 갱도를 파내거나, 수갱을 뚫고 거기서 나온 흙과 암석을 퍼낸다. 이 모든 작업은 조그만 등불이 밝혀주는 희미한 빛 아래에서 먼지로 가득한 공기를 마셔야 하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 광부들은 자연스럽지 못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옆구리로 눕는다거나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것은 기본이고 엎드리거나 고되게 몸을 구부린 상태에서 이동하기 위해서는 기어 다닐 수밖에 없다. 굴착노동자나 들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역시 전적인 육체노동을 수행한다는 점은 같지만 이들은 그나마 햇볕이 드는 개방된 공간에서 일한다는 점에서 탄광노동자의 고통스런 조건과는 비교할 수 없다." "이래도 탄광노동자들이 정신적 도덕적으로 미약한 수준에 있다는 것이 놀라운가? 어떻게 환기도 되지 않는 어두컴컴한 곳에서 하루 15시간 내지 18시간 일을 시키면서 사람의 인격을 가지길 바라는가? 이렇게 사람의 성정을 파괴할 뿐인 작업조건에서는 아무리 신께서 행복한 성정을 부여한 사람일 지라도 금방 자신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신체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 육체가 도덕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육체적 상태는 대개 정신의 지표인 것이다. 상공회의소의 1844년 공식 보고서를 보면 탄광노동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은 어린 나이임에도 얼굴이 창백하고, 골격은 굽어 있고, 다리는 휘어 있으며 걸음은 매우 느리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40세에서 50세가 되면 조기노화의 징후가 나타난다.'" "탄광기술자인 비도(Biduat) 씨는 1843년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썼다. '이 직업(채탄공)을 가진 이들은 항상 태양빛을 보지 못하고, 공기 대신 유독가스를 들이마시고, 부자연스런 자세를 취해야 하며, 항상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등 정상적인 삶의 조건에서 인간을 가장 멀게 만드는 종류의 일을 하여야만 하므로 이에 대한 더 특별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나에겐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43년에 사실이었던 것이 1868년에도 마찬가지다. 채탄공의 신체적·정신적 여건이 비록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확실히 개선되지 않았다. 노동시간은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임금 역시 현재의 경기후퇴를 무시하더라도 식료품 가격이 폭등하는 데에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탄광에 여러 가지 개선책들이 도입되었지만, 이 개선책이란 노동자와는 관계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노동자들이 사다리를 타고 위아래를 오가지는 않지만, 그렇게 절약된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은 일을 하는데 바치는 것이라 이러한 개선은 자본가의 이익만 될 뿐이다. 그 결과 채굴노동자는 정신적 유연성을 잃고 학교와 교육을 '게으름뱅이'의 전유물로 치부하며 자신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는 조잡한 오락과 쾌락에만 탐닉하게 될 뿐이다. 탄광주들은 이러한 노동자의 야만적 상태를 유지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적으로 노동자에게서 이윤을 뽑아내기 때문에 만약 노동자들이 정신을 차려 신중하고 사려깊게 행동하기 시작한다면 수익성을 잃게 될 더 못한 산업들이 풍부한 데서 도움을 받는다. 탄광주들은 노동자들에게서 단돈 1 페니라도 쥐어짜내기 위해 온갖 함정을 준비해 놓는다. 최소한의 교육도 받지 못하여 정신적 능력이 동면에 들어 가 버린 이들을 구슬려 등골을 빼먹는 것은 얼마나 쉬운지!" "이런 상태는 계속될 수도 없고 계속되어서도 안된다. 인간성에 호소하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다. 인간성의 호소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법칙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하지만 부르주아가 아무런 도덕적 후과 없이 노동자들을 농노나 가축 수준으로 후퇴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러한 사실은 공장지역이나 광신지구의 부르주아를 살펴보기만 하더라도 잘 알 수 있다. 문화와 교육에 대한 경멸, 경영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사고의 결여, 그리고 부르주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쾌락만을 향한 조악한 욕망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겠는가? 이는 미국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주들과 노예소유주가 겪었던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그 곳에서 도덕적 타락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노예제와 노예노동이었다. 여기서도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니, 그 원인 역시 같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노동자가 더 낮은 곳으로 몰릴수록 고용주 역시 노동자를 따라 더 낮은 곳으로 가라앉게 된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이들처럼 확실하게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그들이 사적 기업으로부터 당하는 해악, 역으로 사회 전체를 고름을 내뿜는 종기로 뒤덮어 버리는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교육협력이다. 노동시간 단축만이 계몽과 교육의 혜택을 노동자에게 돌릴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혜택에 참여하는 것만이 노동자들이 어찌해 볼 도리 없이 처한 비참함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노동자의 도덕적 물질적 향상은 사회정의의 문제이며, 공공선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선 대중교육협동조합을 만드는 길 밖에는 없다. 이러한 방책들을 실행에 옮기고, 지지·지원하는 것은 국가에 달려 있다. 부르주아 경제체계가 이미 사회를 부패시키고 침식하고 있는 지금, 이를 행하지 않고 멍하게 있다면 자멸할 뿐이다."

    1867년 2월 마르시엔느의 광산에서는 소요가 있었는데, 곧바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소요의 배경에는 1866년 흉작으로 인한 빵값 상승과 물품부족이 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는 이 살육사건의 유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1867년 3월 영국의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발신하였다.425)

    국제노동자협회 중앙평의회

    런던 E.C 보바리 스트리트 8 영국의 철강, 탄광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동지 여러분, The Timesm지가 노조가 특정임금선 아래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멈추지 않으면 영국 철강 산업이 훼손되고 붕괴하고 말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 지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그 신문이 말하길 값싼 석탄과 낮은 임금으로 무장한 벨기에가 국내외에서 그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합니다. 크리드(Creed)와 윌리엄스(Williams) 두 사람은 그 신문에 석탄의 혜택과 짜증나는 공장법이나 노조의 방해를 받지 않는 벨기에 자본가의 행복한 처지에 대해 잘 기술해 놓고 있습니다. 벨기에 탄광노동자들과 철강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아내, 아이 할 것 없이 하루에 12시간에서 14시간가량 일을 하고 영국노동자들이 10시간 일해서 받을 수 있는 정도만도 못한 임금을 받는다고 합니다.n 하지만 이 신문들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그러고도 만족한다던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Economiste belgeo에서 전하기를 철광 산업은 높은 석탄가격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은 변함이 없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같은 신문에서 "탄광노동자의 무지는 너무 뿌리깊고, 그들의 야만성은 너무 심각하며 돈을 쓰는 데도 무절제하고 엉망진창이기 때문에 임금을 아무리 올려줘 보았자 무의미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상황의 책임은 이들을 평생 고역에 시달리도록 못 박아 놓은 자들의 책임입니다. 2월 초에 마르시엔느(Marchienne) 인근에 있는 3개의 용광로가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다른 철강 업자들은 즉각 10퍼센트의 임금삭감을 발표했습니다. 샤를루아의 탄광소유주들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 잡지에 나온 대로라면 석탄이 지금만큼 수요가 많았던 적이 없고, 가격도 이렇게 높았던 적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p 이에 대한 분노(Outrage)q는 이와 함께 밀가루 가격이 상승하면서 가중되었는데, 탄광소유주나 제철소소유주들이 지역 방앗간 주인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우 많은 노동자들이 분개하였지만 조직화되어 있지 못하고 자신들 공통의 문제에 대해 협력하는 법을 몰랐기에 이 분노를 승화할 행동계획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은 간선도로에 모여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임금삭감에도 일하려는 사람들을 막아섰습니다. 샤를루아의 채탄공들은 장전한 총으로 무장한 수 백명의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밀가루 방앗간으로 몰려갔습니다. 군인들은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죽고, 다치고, 투옥되었습니다. 이 분노한 가난한 자들, 학대당한 희생자들은 극단적 궁핍에 처한 가족들을 남겨두고 무덤으로, 또 철창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벨기에에서는 이들을 대신해 감히 한 마디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오류가 있는 잘못된 전술을 택했을지라도 그 대의를 폄하할 수는 없으며, 이들이 남겨놓은 이들 역시 원호와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고아 및 남편과 사별한 이들을 돕기 위해 외국에서 오는 금전적 도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낼 도덕적 영향력은 계급 전체의 사기저하를 반등시킬 것이고 대륙의 동지들에게 노동자의 싸움이란 어때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조직과 교육이 필요한가에 대한 더 나은 인식을 제공해 줄 의견의 교류와 교환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중앙위원회는 여러분이 이것을 숙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 나라 노동자의 대의는 전 세계 노동자의 대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의장, 조지 오드거 George Odger, President 부의장, J. 조지 에커리어스 J. George Eccarius, Vice-President 서기관 R. 쇼우 R. Shaw, Secretary

    그들 자신이 겪고 있는 서글픈 곤경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탄광 노동자와 철강노동자들은 기꺼이 그리고 따뜻하게 자신들을 향한 호소에 응답하였다. 이것이 바로 벨기에에서 국제협회의 영향력이 꾸준히 증가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러다 샤를루아 지역에서 벨기에 전 지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사회적 우월성을 확인해 줄 사건들이 1868년 3월 일어나게 된다.r 이 해의 노동자들의 소요는 다음과 같다. 석탄은 이미 상당히 과잉생산되어 있었다. 벨기에에서 석탄 소비는 줄어들고 있었는데, 일부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철강 산업과 용광로 산업에 주로 영향을 끼쳤던 1866년의 일반적 재정, 금융 위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일부는 벨기에산 석탄에 대한 프러시아 석탄의 도전 때문이기도 했다. 벨기에의 탄광소유주들은 사실상 가격을 높이 매기기 위해 담합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철광산업과 용융산업계는 외국에서 석탄을 들여오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향후 가격인상에 대비해 다년공급 계약을 체결하였다. 탄광소유주들에게 있어서 이제 문제는 자신들의 탐욕 때문에 자업자득 격으로 생겨난 손해를 벌충하는 것, 특히 생산을 줄이는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실도 언급해 두자. 벨기에 탄광의 상당부분을 공공 기업이 경영했는데, 이 기업들은 막대한 자산을 가지고 지난 몇 년간 배당금을 주주들과 나누었다. 탄광 소유주와 감독들은 노동일을 일주일에 4일로 제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는 노동자 평균 임금의 33 1/3을 줄이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래서도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맞출 수 없게 되자 탄광소유주들은 석탄 가격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주주들의 배당이익에 손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이미 정상임금의 66 2/3 수준인 임금에서 10퍼센트를 더 내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때 필수 식료품의 가격은 1866년과 1867년의 연속 흉작 덕분에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미 비자발적인 실업 덕분에 반 기아 상태에 놓인 채탄노동자들은 이들을 아사시킬 것이 분명한 임금삭감에 항의했다. 샤를루아 전 지역으로 파업은 보편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기아와 비참은 불행한 이들을 반란과 약탈로 몰아갔는데, 다른 때 같으면 노동자 군중의 선두에는 서지 않았을 여성들이 앞장서서 넝마주이를 매단 깃발을 들고 행진했던 것이다. 이제 자본가들은 정부와 군대에 개입을 요청하여 많은 노동자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고, 투옥시킨 유혈사태를 조장하였다. 최초의 충돌은 3월 25일 샤를루아 부근에서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해산하라는 한 관료의 선의의 간청에 막 응하려는 찰나, 돌멩이 하나가 지휘부 고위급간부에게 날아들었다. 이것을 빌미삼아 발포 명령이 떨어졌다. 7명이 죽고 13명이 다친 이 최초의 충돌 이후 헌병대 및 기병대와 또 다른 충돌이 있었다. 아시몽(Arsimont)에서는 심지어 어떤 폭력사태도 일어나기 전에 현장에 도착한 헌병대와 검찰관이 단지 파업을 선언했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체포했다. 경찰이 물러나면 뒤이어 군인들이 몰려와서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광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을 붙잡았다. 근대 역사에서 자마이카에서 일어난 흑인 봉기426)에 대한 대량학살 유혈사태만이 이 잔혹행위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자마이카에서처럼 이 곳에서도 자본가들은 피로 담근 술로 파티를 하였다. 또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저항정신과 자존감을 극단적 잔혹 행위를 통해 파괴하려 하였다. 그들이 이 백색 테러s를 즐기면서 희희덕거렸던 유쾌하고, 거만하고, 심지어 유머러스한 어조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의 기관지인 1868년 4월 1일자 Independance belge에 잘 나와 있다.

    "땅에는 군인들이 넘쳐나니 지도자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움츠러들었다. 일반적으로 위험하다고 알려진 이들도 모두 철창 안에 가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이러한 조치는 현명한 것이었다... 이들을 체포하면서 군대는 그 위세와 위용을 뽐내었는데, 이는 뭇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또 동료들을 구출해 내기 위해 혹 있을지 모를 감옥 습격에 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에 대한 이 조직된 압박을 고려한다면 다시는 그러한 소란이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유혈극은 깊은 위협의 효과 또한 갖는 것이다... 들떠있지만 조금도 위험하지는 않은 폭도 대중은 밤이 되기 전에 완전한 무기력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들이 지난 며칠간 귀 기울였던 모든 지도자들은 철창 안에 갇혔다. 사람들이 혹 그 목소리에 관심을 기울일지 모를 작자조차 모조리 잡아들였다... 사실 철권을 휘두른 것은 경찰이지 군대는 아니었다... 이 지역 시장(市長), 경찰관료, 헌병대장에게서 조언을 얻어, 보고서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명시된 모든 이들을 잡아넣었다."

    이 야만들이 고통받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으킨 망연자실 속에서, 국제노동자협회 브뤼셀 중앙위원회는 언론에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대중적 집회를 제안하였다. 자본가와 그 공범인 정부를 맹비난하면서 벨기에 노동자들이 다시 저항에 나설 것을 추동하고, 구속된 자들에게 법률상담과 변호사를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샤를루아 노동자의 운동은 전체 국제노동자협회 모두의 대의라고 선언하였다. 런던의 총평의회는 파리와 제네바의 운영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브뤼셀에 있는 위원회를 지원하였다.427) 샤를루아 지역 탄광노동자들의 투쟁을 군대로 진압한 이후 고용주들은 실업자들과 굶어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탄광을 당분간 가동중지 시킨 것으로 아주 만족해했다. 정부 역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의지할 데라고는 국제노동자협회 밖에 없었는데, 그마저 제네바에서 동시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재정이 좋지 않았고 지원위원회도 한창 조직 중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아사의 위기에 몰렸다. 날로 커지는 비참을 보고 이제 샤를루아 마을 주민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샤를루아 자유연합(the Liberal association of Charleroi)은 정부가 이 직업을 잃은 노동자들에게 즉각 직업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면, 선거위원회를 해체하고 천주교도들에게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협박은 원하던 결과를 낳았다. 물론 아사 직전 노동자들의 울부짖는 비탄 때문이 아니라 다음 선거에서 패배할 걱정 때문에 자유주의 정권이 상당한 규모의 공공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동안 3월에 구속된 노동자들에 대한 법집행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가 어찌되었건, 즉 그들이 유죄로 판결받던 그렇지 않던, 정부는 반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이제 그들에게서 기대할 것은 총탄세례나 감옥뿐 이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다. 정부가 자신들의 정당한 불만을 들어주리라고 기대하거나, 고용주의 학대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거나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 노동자들은 조력이 어느 쪽에서 올 것인지,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돌아서야 할 것인지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정부가 아니라 바로 국제노동자협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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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정치적 활동 정치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지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강령t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총평의회는 형편이 되는 한 최대한 정치적 활동을 추구하려 하였다. 가장 중요한 조치들은 다음과 같다. 1. 협회가 창립되기도 전에 총평의회의 몇몇 구성원들은 북아메리카동맹(North American Union)의 대의를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정부와 지배계급은 남부동맹(Confederates)을 지지했는데, 미국 항구의 봉쇄가 영국에서 야기한 여러 곤란들을 지렛대로 삼았고, 영국 노동자들을 분리주의자428)를 옹호하는 관제데모에 동원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노동운동 지도자들 역시 지배계급의 이러한 술책을 간파하고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정부와 민중들에게 영국 국민 대다수가 느끼는 진실한 감정을 연설 등을 통해 알렸다. 또 북부동맹(Union)을 지지하는 런던 노동자들의 대중 집회를 조직하였다. 1864년 11월 8일 링컨의 재선을 계기로 총평의회는 그에게 성공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축전을 보냈다.u동시에 북부동맹을 지지하는 집회도 열었다. 링컨이 답신을 보내 대의를 위한 국제노동자협회의 활동에 대해 일부러 사의를 표한 것은 이 때문이다.v 2. 또한 총평의회는 대중 집회를 열어 폴란드의 상황에 연대를 표하고 러시아의 잔혹한 억압을 유럽에 폭로하였다. 3. 1866년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429)의 뒤를 이어 프랑스와 프로이센 사이의 전쟁이 긴급한 문제로 떠오르자, 프랑스의 관영신문은 연일 서로 간의 증오를 부추기는 기사를 쏟아내면서 국가적 야망을 불러일으키는 데 앞장섰다. 국제노동자협회의 파리 중앙평의회는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 시위를 프랑스 전역에서 조직하여 독일 노동자와 노조에 대한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프랑스 노동자가 자신들 앞에 놓여있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이 힘찬 운동이 프랑스 노동자 계급에 끼친 반(反)국수주의적 태도가 당시 적당한 구실을 찾고 있던 그 전쟁을 저지하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4.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는 1867년 의회 개혁을 이루어 내었던 영국 개혁 동맹의 설립과 활동에 있어 눈에 띄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총평의회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개혁 동맹의 가장 핵심적인 지도부이다. 런던에서의 대중 집회는 토리당 내무장관 월폴(Walpole)을 사임시켰으며 주요 도시들에서 분노의 집회가 열렸던 것은 분명 이에 영향받은 것이다. 5. 맨체스터의 페니어주의자(Fenian) 살인 사건*****을 두고 총평의회는 정의가 조롱당했다고 평가하였다. 사형집행은 1867년 11월에 종결되었다. 총평의회는 영국 정부에 탄원장을 보내어w피를 흘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런던에서 맨체스터 사건으로 인한 공황이 한창일 무렵 총평의회는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의 독립을 지지하는 공개강연(public session)을 열었다. 이는 이 오심에 의한 희생자를 위한 최초의 행동이었다. 타임즈지와 다른 일간신문들은 그 행사를 보도하였다.x그 결과 런던 노동자들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크게 바뀌었고, 영국 지배계급이 민족적 편견을 이용하여 상당수의 아일랜드인이 포함된 노동계급을 두 개의 적대적인 집단으로 분할하려는 시도가 효과적으로 저지당하자 영국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매체, 예를 들면 Saturday Review 같은 신문은 국제노동자협회를 국가위험세력이라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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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정부와의 투쟁

    1. 프랑스 정부와의 투쟁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법적으로 정부의 승인 없이 20인을 넘는 조직을 구성할 수 없다.431)그 법을 그대로 따르자면 프랑스에 있는 대부분의 산업·상업 기업들은 불법이며, 다만 정부의 묵인 아래 존재하는 것이다. 항고심의 결정에 따르면 문제가 되는 조직이 공개적이고 정부가 일정 기간 해체하지 않을 경우 암묵적y인 승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정부의 승인을 얻건 그렇지 않건 정부가 그 설립을 일단 묵인했던 조직이라면 기껏해야 그 조직을 해체할 수 있을 뿐 그 구성원을 처벌할 수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의 조직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겪었다. 프랑스의 모든 지부는 유진 듀퐁(Eugene Dupont)을 총평의회의 대표로 하는 영국 조직의 구성원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었다.(덧붙여 말하자면 런던에는 프랑스 그룹과 독일 그룹이 있다.) 비록 그들이 특정한 사안에 있어서는 함께 행동한다 하더라도 프랑스 지회들은 서로 연계되어 있지 않고 오직 런던의 총평의회와만 소통하고 있다. 각각의 조직들은 독립적인 집행위원회를 가지고 런던의 총평의회와 교통한다. 프랑스에서 조직의 건설을 추동한 것은 파리 그룹의 파리 집행위원회였다. 위원회는 내무장관z과 파리 경찰국장에게 그 설립과 존재를 이미 1864년에 통보하였다. 그 이후로 파리위원회는 프랑스의 다른 도시의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활동하였다. 구성원들의 공개 회합은 매주 이루어졌고, 그에 관한 보고문이 공개적으로 신문에 실렸다. 사실 지난 몇 십 년간의 비밀조직과는 완전히 다르게도 그 조직은 본성상 공개적인 것이었고, 런던의 총평의회의 회합 역시 런던 신문에 매주 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와 프랑스 정부간 최초의 분쟁은 1867년 9월 로잔 총회직후 일어났다. 프랑스 대의원의 일원인 쥘 고트로(Jules Gottraux)는 총회 문서의 일부를 맡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 문서들을 프랑스에서 영국432)으로 가져 가려 했다. 그가 프랑스 국경을 넘는 순간 문서들을 압수당했다.433) 런던 총평의회의 총서기장이 프랑스 내무장관에게 편지를 써서 그 압류된 문서는 영국의 재산이기 때문에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협회의 총평의회는 영국 외무장관인 스탠리 경(Lord Stanley)에게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관인 코울리 경(Lord Cowley)을 소개시켜 주었고 그가 프랑스 정부에 문서들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자 그제서야 프랑스 정부는 요구에 응했다. 두 번째 분쟁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 프랑스 대의원들은 제네바 총회에서 자신들의 관점을 제안하며 원칙을 옹호하는 제안서를 낭독했다. 이 문서는 일방적으로 프루동주의적이면서 고유하게 프랑스적이었는데, 당연히 협회에서 채택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파리에 있는 어떤 출판업자도 그것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 위원회는 브뤼셀에서 제안서를 인쇄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경을 넘는 도중 문서를 압수 당했는데, 1867년 3월 3일 협회의 파리 중앙위원회는 국무장관이며 황제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루어(Rouher)에게 편지를 보내 문서를 압류한 까닭을 물었다.그는 그라비에 44번가에 있는 협회의 파리지부 사무실로 답신을 보내어 자신의 사무실로 한 번 방문해 줄 것을 청했다. 위원회는 장관과의 회담에 파견할 사람 을 정했다. 루어는 몇 군데 못마땅한 부분의 변경과 수정을 요구했다.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노동자에게 많은 은혜를 내려준 황제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은 몇 마디 말을 덧붙인다면 누구나 그 업적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Pourtant, si vous faisiez entrer quelques remerciments a l'adresse de l'empereur qui a tant fait pour les classes ouvrieres, l'on pourrait voir.) 협회의 대표는 협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개인이 되었건 정당이 되었던 아첨이나 명예훼손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루어는 회담장을 박차고 나와 그 문서를 돌려주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국제노동자협회를 자신들이 도구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 편으로 정부는 아미엥, 루베, 파리에서 일어난 파업에 대해 협회가 미치는 영향력과 증대되어가는 역량에 주목하였다. 정부는 위의 회담 몇 주 뒤 협회의 제국주의 국수주의 반대 운동에 크게 불쾌해하면서 행동에 돌입하였다. 그리하여 세 번째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434)1868년 정초의 꼭두새벽 파리 경찰은 파리 중앙위원회 구성원들의 집을 급습하였다. 경찰이 발견한 모든 서신과 신문은 압수되었다. 경찰은 그 문서들을 바탕으로 파리그룹의 등록된 회원만 약 2,000명이라고 추산하였다(그 이후 이 숫자는 상당히 증가하였다.). 이들이 기소할 때 가져다 붙이기 좋아한 죄목은 비밀 단체에 참여했다는 것이었는데, 두 달간 조사를 거치고 난 뒤 이는 기각되었다. 대신 치안 규정을 무시한 죄가 등장하였는데, 즉 정부의 승인 없이 20명 이상의 단체를 구성했다는 것이었다. 1868년 3월 20일 센느(Seine) 형법재판소에서 공판이 이루어졌다. 피고 중 한 명이 석공 톨랭(Tolain)이 나머지 15명의 피고인들을 대변하였다. 심문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435)

    재판장 당신은 당신과 공동피고인들이 구성원으로 속해 있던 국제노동자협회가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톨랭 이 자리가 그 질문에 답하기에 적절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항변하고 싶은 것은 우리 단체의 공개적 활동이 그 존재의 암묵적 인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재판장 하지만 승인받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군요? 톨랭 누구도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국제협회가 도대체 어떤 나라에게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프랑스, 벨기에, 영국, 아니면 독일 정부 중 어디입니까? 알 수도 없고, 누구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정부의 승인이 영국에서는 무슨 소용일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재판장 조직의 모임에서 정치적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습니까? 톨랭 전혀, 그런 일 없습니다. 재판장 1866년 브뤼셀에서 출간된 선언을 당신들에게서 압수했는데, 그 내용은 정치에 관한 것이었고, 심지어 전복적 정치(politique transcendentale)에 관한 내용도 있더군요. 톨랭 그 선언문은 내 소유물입니다. 내가 알기로 프랑스에서 그 사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영국 노동자들이 쓰고 출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알고 계실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나라의 모든 단체는 타국의 단체들에게 연대를 강요하지는 않으면서, 각자의 특수한 요구를 제출할 권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영국이나 독일 지부가 우리가 감히 손댈 생각을 하지 않는 정치 문제를 토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나는 우리 모임에서는 정치 문제에 대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장 협회는 어떻게 조직이 됩니까? 그 소재지는 어디고, 그 목적은 무엇이지요? 그리고 파리 사무소과 총평의회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톨랭 총평의회는 1864년에 런던에서 구성되었습니다. 영구적인 소재지는 없습니다. 런던에 삼년간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극복할 수 없던 문제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목적을 아시려면 그 규약을 읽는 것이 가장 좋겠군요(규약을 읽는다.). 재판장 파리 사무소의 조직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오. 톨랭 파리 사무소는 신문을 통해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 필요성을 호소한 이후 건설되었습니다. 사무소를 만든 이유는 파리 지부의 활동의 구심을 갖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제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한다거나, 단체를 대표해서 다른 부문과 교섭을 한다거나. 이 모든 것들은 백주대낮에 매우 개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파리 사무소의 정관은 인쇄된 소책자로배포되었고 모든 구성원들은 일주일에 10상팀의 회비를 내야 합니다. 재판장 이 사무소가 조직을 확장해야 한다는 직접적 선전을 벌인 적이 있습니까? 톨랭 우리는 때때로 어떻게 사무소가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려달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거의 대부분 우리는 런던의 총평의회를 언급하곤 합니다. 재판장 파리 사무소가 어떤 파업에 개입한 적이 있습니까? 파리 놋쇠노동자, 루베, 아미엥 그리고 다른 파업들에서? 톨랭 협회는 앞서 언급하신 그러한 사건들에 있어서 가장 적극적인 부위였습니다. 파업의 원인을 연구한 결과 그렇게 하는 것이 노동자뿐 아니라 사용자들에게 있어서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검찰관 레펠레티에(Lepelletier)의 연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신사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피고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지적이며, 강직한 노동자들입니다. 이들은 지금까지 유죄판결은 받은 적도 없고, 이들의 도덕성을 의심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의 혐의를 입증함에 있어, 신사 여러분, 그들의 명예를 손상할 만한 얘기라곤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검찰관은 이들이 법을 어겼고 유죄를 입증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재판이 무효라는 피고의 주장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떠한 비난이 이 기소에 쏟아지고 있습니까? 여러분께서 지난 며칠간 Si cle, the Opinion nationale, 그리고 Courrier fran ais를 읽어보셨다면, 국제노동자협회에 대해 공감을 표하는 이 일부 매체들이 이 기소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 겁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3년간 협회는 광범위하고 공개적으로 활동해 왔다. 정부 당국의 정식 허가를 얻지는 못했지만, 묵인되었다. 그 목적은 노동자의 물질적이며 도덕적 해방이기에,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은 경제문제에 대한 학습이며, 진리, 도덕성, 정의라는 원칙에 입각한 해법이다… 하지만 그러한 묵인이 단순히 권력의 전횡과 폭력의 변덕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가혹한 기소로 끝장나게 되었다. 대략 이런 것입니다. 만약 협회의 구성원들이 적어도 그들의 강령을 저버리고 국가에 위협적인 문제에 몰두했다면, 그들이 정치에 관여했다면 모르겠지만 반대로 그들은 총회에서 그러한 문제는 건드리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활동을 자신들의 정관이 정하는 바에만 한정시켰으며, 그 정관이란 정부당국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며 최소한 이미 간접적으로, 암묵적으로 인정한 내용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것이 우리 검찰에게 덧씌워진 비난입니다. 나는 줄여말거나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비난입니까? 협회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협회가 자신의 강령에 제시된 대로 경제문제에 대한 학습에만 자신의 활동을 한정지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가)

    그래서 그 검사는 파리 사무소가 정치적 문제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찾고자 노력하였다. 이는 룩셈부르크 문제436)에 대한 협회의 일반적인 태도를 고려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피고인들이 법적으로 유죄를 선고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피고 톨랭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은 탄원장을 제출하였다.나)

    "조직의 불법성이 정부당국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한 데 기인한다는 점; 또한 어떠한 공식적인 승인절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 앞서 말한 승인이 암묵적으로 이미 면제되었다는 것; 특별한 형식의 승인을 요구하는 것은 입법자 스스로도 예외로 인정한 법을 엄격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 그 결과 대중적 신뢰도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더 나아가 그것이 1834년 법에 대한 논의, 그리고 언급되는 승인은 암묵적일 수 있다는 정부 대표의 언급을 따르고 있다는 점; 그러한 암묵적 인정 혹은 묵인이 20명 이상의 인원을 가진 모든 산업·상업 기업이 존재하는 형태라는 점; 이 같은 관행을 문제 삼지 않으면서 우리와 같은 단체들을 박해하는 권력을 용인하는 것은 사회적 양심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점, 왜냐하면 정부가 그들의 명백한 실존 때문에 그들이 적법하게 승인되었다고 간주한다는 점은 자명하기 때문에; 협회에 대한 암묵적 승인은 1) 그것의 존재와 행동은 끊임없이 공개적이었고, 이는 여타 사기업보다 훨씬 더 공공연했다는 점에서, 2) 국제협회가 내무장관과 경찰국장에 보내는 두 통의 편지에서 협회의 설립이 186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나오다는 것; 내무장관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대리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국무장관이 협회 서기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시적이고 공식적인 정부의 승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장관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조직의 정당성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는 점, 그동안 협회가 자신의 이론이나 목적을 변경했다는 사실을 검찰 조사가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 사실상 1866년 총회라)에서 프랑스 대의원의 의견서를 발제하기 위해 초청받았던 협회의 서기 역시 지금 비난받고 기소된 것과 똑같은 이론과 목적을 제시했다는 점; 1867년 1월 4일 검찰 간부조차 조직이 충분히 합법화되었다고 간주했는데, 이유인즉슨 당시 그들이 조직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공개 재판에서는 어떤 기소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 이 모든 이유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법정이 검찰의 기소내용을 각하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러한 탄원을 제출하면서 톨랭은 다른 피고들을 대신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연설은 노동계급의 결어에 맞서는 열정적인 저항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상호교육을 통하여, 또 자신들의 가장 사활적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대해 학습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규명하려고 노력할 때, 그리고 개선을 확보하려고 시도할 때 노동자들이 초래하는 위협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노동자들이 무엇을 하건, 얼마나 조심을 하건,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순수하고 무해한 것이든 노동자들은 항상 위협받고, 박해받으며 조사 대상이 되었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산업적 혁신이 새로운 요구들을 창출하였고 사회 경제를 완전히 재구축했다. 의도적이건 그렇지 않건, 정부 자신도 이러한 재구축 운동을 따랐고 열심히 협력했다.

    톨랭은 말을 이었다. "우리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데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국제노동자협회로 단결한 이유입니다. 노동자들은 공식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의 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길 원합니다. 영국 노동자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과 우리 모두 똑같은 관심사, 똑같은 사회적 문제로 움직입니다. 영국의 노동자들이 말하길 기계가 정교화되면서 노동자의 사회적 상황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므로 함께 서로를 계몽하고, 우리의 생존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을 찾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고 똑같은 생각에 고무되었습니다. 그 이후 노동자는 자신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조건의 어떤 개선도 기대할 수 없다는 공동의 구호가 제시되었습니다. 이 구호는 1864년 런던에서 열린 공개 집회에서 주창되었습니다."

    그래서 톨랭은 런던의 총평의회와 파리 사무소의 설립, 조직과 활동 등을 설명했다. 정부가 암묵적 승인을 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그는 자신들이, 다른 한 편으로는, 공식적 승인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은 노동자와 모든 시민들에게 자연적으로 부여된 권리를 허가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권력을 정부에게 양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선언으로 진술을 마무리 지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금껏 우리가 취한 입장은 적절하게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당신의 판결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우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내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증오나 옹고집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권리에 대한 각성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에게 관련된 모든 일들은 우리가 직접 해결할 것을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끝장내기 위해서 우리는 한 가지 수단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법을 넘어섬으로써 그것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법을 길 것을 바라지 않았는데, 그것은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경찰, 정부, 자치 행정당국, 나아가 모든 대중들이 모든 것을 알고, 보고, 묵인했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판결은 이러했다.마)

    "검찰조사와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에 따라, 피고인들이 지난 삼 년 간 국제노동자협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단체의 파리 회원이었고, 이 단체는 20인 이상으로 구성되었으며, 승인을 얻지 못했다는 점," "연합된 노동자들이 협회의 목적에 따라 뭉쳐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일했고, 앞서 말한 목적이란 노동자들의 처지를 협동조합, 생산과 신용 등을 통해 개선시키려는 것이며, 또한 정기적으로 회합을 열어 자신들을 영구적인 단체로 구성하였다는 점," "형법 291조와 292조바), 1834년 4월 10일 발효된 법사)은 프랑스 영토 안에서 그 법을 어긴 자에게 적용되는 경찰과 안보에 관계되는 것이며, 그 소재지가 런던이라는 사실에 관계없이, 파리 사무소가 앞서 말한 법을 어겼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점," "신문지상에서 상기 단체의 존재가 인지되었다거나 당국의 묵인이 있었다는 것이 명시적인 정부 승인의 필요성을 면제하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 "피고인들이 그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형법 291조와 292조, 1834년 4월 10일 법에 해당하고 그에 따라 처벌가능한 위반을 범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본 법정은 이로써 파리 사무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국제노동자협회의 파리 지부를 해산하고, 피고인 각자에게 100프랑의 벌금을, 벌금을 변제하지 못할 시에는 30일의 구류로 대신할 것을 선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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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죄판결을 받은 노동자들은 이 판결에 항소하였다. 그 동안 파리의 협회는 톨랭이 법정에서 진술한 그대로 행동하였다. 기소된 15명을 대신하여 9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사무소가 선출되었다. 이들의 선출은 신문에 보도되었다.아) 이들은 자신들이 서명한 호소문에서 파리 노동자들에게 제네바에서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요청하였다.자) 1868년 4월 22일 15인 사건의 2심이 열렸다. 기소의 핵심 내용은 20인 이상의 결사를 금지하는 제국 형법의 준수에 대한 파리 사무소의 공개적 거부, 기존 질서의 모든 지주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단체의 정치적 본성, 지금까지 해온 바대로 세계 모든 국가를 포괄하도록 허용된다면 어떤 정부도 버틸 수 없는 단체의 , 또한 지금까지 주장된 것처럼 노동자들의 파업에 보편적인 매개자의 일종이 되어 왔다는 점 등이었다. 다른 모든 사건에서처럼 피고인들은 변호인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변호하였다. 공식 허가를 받지 못한 데 관해서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 그러니까 런던 총평의회의 파리 지부가, 경찰 및 관계 당국에 우리 단체의 설립을 알린 뒤 명시적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지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른 조직을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승인을 구하는 치욕에 굴하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규약의 바로 첫 번째 원칙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 규약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승인을 받아들이는 자는 복종, 종속, 후견권, 간단히 말해 노에 신분을 받아들이는 것인 바, 그 모든 형태의 노예 신분이야말로 국제노동자협회가 그것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을 해방시키려 하는 굴레 자체인 것입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형량을 확정한 데 덧붙여 항소한 이들에게 항소심에 들어간 모든 비용까지 선고했다. 이번 선고의 근거는 실질적으로 1심 선고의 근거와 동일했으며, 다만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그 조직의 막대한 힘과 그 활동의 광범위한 확장 때문에 위험이 가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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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와중에 3월에 선출된 새로운 사무소의 9명에 대한 재판 역시 열려, 이들은 868년 5월 22일 형사법원에 출두했다. 이 사건의 심리는 3월 20일의 심리와 유사했다.437) 피고인들 중 한 사람인 제본공 발린(Varlin)이 변호인으로 나섰다. 그 역시 어떤 법학자에게도 손색이 없을 논리와 통찰력으로 기소인들의 법적 논증을 기각한 다음, 이 사건의 도덕-정치적 측면과 사회-경제적 측면을 계속 조명했는데, 여기서 그는 대의의 올바름과 심원한 도덕적 정의를 아는 이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확신과 표현의 힘으로 우뚝 선다. 그의 진술이다.차)

    "우리가 볼 때 파업은 임금을 확보하기 위한 거친 수단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사에 반해 파업을 벌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도 그럴 것이 파업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결국 공정한 임금을 받아 내리라란 보장도 없이 몇 주에서 몇 달에 이르는 가장 혹독한 궁핍으로 노동자와 가족들을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경제적 조건을 연구함으로써 노동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과업을 스스로 설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를 방해하는 많은 것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고 그 결과 사회적 문제의 해결이 지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자주 파업이라는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점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 앞에서는 당신들이 판사이고 우리들은 피고인입니다. 하지만 주의(主義) 앞에서는 우리는 두 개의 당파입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든 지켜야 하는 질서의 당파, 안정의 당파이고, 우리는 개혁의 당파, 사회주의의 당파인 것입니다. 편견 없이 한 번 살펴봅시다. 그 완전성을 의심했다는 이유로 우리가 범죄자가 되어 버린 저 사회 질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뼛속까지 불평등으로 좀먹었고, 이기심의 위협을 받으며, 반사회적 편견의 냉혹한 발톱에 목이 졸리고 있습니다. 인권 선언과 민중의 의지의 단명(短命)했던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한 줌 지배계급에게 좌우됩니다. 민중들의 피가 민족과 민족, 우리와 똑같은 굴레에 허덕이며 우리와 똑같은 해방을 열망하는 민중과의 동족살해의 전쟁터에서 강이 되어 흘러가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향락은 오로지 소수만을 위해 존재하고, 그들은 최대한, 그리고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향락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대다수 민중들은 비참과 무지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에 신음하고, 저기서는 기아에 고문당하며, 그리고 도처에서 자신들의 노예상태가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미신과 편견의 암흑 속에서 시들어 갑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원한다면, 주식거래라는 도박이 어떻게 혼란과 해악을 끼치는지, 풍요와 기근이 모두 어떻게 그 힘 있는 자본가의 손에 달려있는지를, 그리고 그가 쌓아올린 황금의 산 곁에 있는 폐허와 고의적인 파산을 보십시오. 산업에서는, 고삐 풀린 경쟁이 노동자를 내리누르고 생산과 소비 사이의 어떤 분별 있는 관계도 파괴합니다. 필수품을 만드는 일손은 부족하고, 사치품을 만드는 사람은 넘쳐납니다. 가난한 아이들 수백만이 몸에 걸칠 실오라기 하나 없는데 10,000일 동안 노동하더라도 살 수 없는 터무니없는 가격이 매겨진 숄이 세계 박람회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노동자가 최소한의 생필품조차 구할 만큼도 벌지 못하는 한 편에서, 세계는 부른 배를 두드리는 게으름뱅이들로 가득합니다." "구 세계는 노예제라는 가시가 살에 박혀 종말을 고했습니다. 근대 시대도 대중의 고통에 관심을 쏟지 않고, 노동자에게 쉼없는 노동을 강요한다면, 노동자들은 생필품도 살 수 없는데도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 사치와 쾌락을 누릴 수 있게 한다면, 만약 이 시대가 이 같은 사회 상태가 완전히 부당하다는 것을 보려 들지 않는다면, 그 종말 역시 멀리 있진 않을 것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W. 팰리 박사는 La Cooperation신문에서 지난 5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카) "옥수수밭에 있는 비둘기 무리를 생각해 보라. 99마리의 비둘기가 옥수수를 쪼아먹는 대신 줄기와 왕겨만을 먹으면서, 오직 한 마리 비둘기를 위해 옥수수 알갱이를 산더미처럼 모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한 마리는 종종 가장 약하고 불쌍한 비둘기일 수 있다. 이 한 마리는 꼬꼬 울면서 거들먹거리고, 배불리 포식하고, 제 영역을 표시하여 못 쓰게 한다. 열심히 일하는 나머지 99마리는 친절하게도 이를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그 중의 하나가 - 더 용감한 녀석이었을 수도 있고 다른 녀석들보다 더 배고픈 녀석이었을 수도 있다 - 옥수수 한 알을 감히 먹어버렸다. 유순함에 눈먼 나머지 비둘기들은 그 녀석에게로 몰려가 끌어내고, 손실을 보충해 넣고, 자신들의 무리에서 배제하려 한다." "이 상황을 보십시오. 당신은 물론 이러한 일이 자연상태에선 일어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성을 가진 인간들의 사회에서는 하루에도 수 백 번씩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론은 이중적입니다. 당신은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동물 위보다 고차원적 행위를 행한다고 결론내릴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자신이 가진 이성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에게서 한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99마리, 비참 속에 태어나서 일하러 나가 버린 그의 어미를 거의 보지 못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떨어야 하는, 일상의 모든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쓰레기더미 속에서 자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덤까지 그를 따라 다닐 병원균을 얻는 그 99마리에 속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8살이 채 되자마자, 최소한의 근력이 생기자마자 일하러 갑니다. 희박하고 비위생적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혹사당할뿐더러, 무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악행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다. 이는 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제 20살이 된 그 친구는 그를 필요로 하는 부모를 떠나야만 합니다. 병영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거나, 전장에서 총을 맞아 죽기 위해서 말이지요. 만약 그가 살아서 도망칠 수 있다면, 그는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영국의 박애주의자 맬서스(Malthus) 선생이나 프랑스의 장관이신 뒤샤텔(Duchatel) 씨가 이 결혼을 허락한다면 말이지요. 이 분들은 노동자에게 부인이나 가족은 필요치 않으며,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노동자에게 살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아닙니까.). 하여간 결혼하면 바로, 가난, 궁핍, 실업, 질병과 함께 아이들이 그의 집에 들어앉습니다. 그래서 이제 비참한 자신을 보다 못한 그는 감히 공정한 임금을 요구하지만, 프레스톤에서처럼 기아에 손발이 묶이거나, 샤를루아에서처럼 총질을 당하거나, 볼로냐에서 철창에서처럼 갇히거나, 카탈로니아에서처럼 포위 상태에 놓이거나, 여기 파리에서처럼 줄줄이 법정에 엮여 들어올 뿐이겠지요." "이렇게 이 비참한 자들은 고통과 수치의 길을 터벅터벅 걷습니다. 성년이 되면, 평온했던 유년의 기억 따윈 머리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제 노년이 기어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가족이 없거나 가난한 상태에 머문다면, 그는 마침내 거지를 위한 시설에서 악인처럼 죽어가겠지요." "하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이 소비한 것의 네 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사회는 그 잉여를 어디에 쓴 것일까요? 100번째 비둘기에게 물어보면 알겠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른 99마리의 노동에 기생하던 그 녀석 말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엄격한 정의의 길에서 벗어나 불의를 따르는 어떤 민족이나 사회 조직체도 결국은 부패와 사멸의 먹이가 될 뿐임을. 이것이야말로 사치와 비참, 압제와 노예, 무지와 수치, 타락과 퇴화가 공존하는 이 시대에 지난 역사에서 확실하게 이끌어 낼 수 있는 위안인 것입니다. 금은보화가 삐져나오는 궁전의 문턱에서 굶어죽어 가는 인간이 있는 한, 국가 체계는 불안정할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맥박을 짚어 보시오. 그러면 모든 것을 놓지 않으려는 계급과 자기 노력의 과실을 되찾으려는 계급 사이의 소리죽인 분노를 듣게 될 것입니다. 18세기에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지독한 미신이 다시 복귀하고 있습니다. 방자한 이기주의와 붕괴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것은 쇠잔의 조짐입니다. 지반이 당신 발 밑에서 진동하고 무너지고 있습니다. 조심하기를!" "위대한 정의를 실연하기 위해 지금까지는 세계 무대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곤 했던 계급, 모든 시기 모든 정권 아래서 억압되었던 그 계급, 노동 계급은 이제 당신에게 부활의 수단을 건넵니다. 현명하게 그 정당성을 인정하시오. 그 대의를 방해하지 마시오. 그것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 길입니다. 완전한 자유의 호흡만이 공기를 맑게 하고 우리를 위협하는 구름을 흩어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한 계급이 그들에게 권력을 주었던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다면, 그들은 무대에서 퇴장해야 합니다. 만약 붕괴하는 모든 체제의 마지막 수단인 포악함을 피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노력은 이 시대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히 위대하지 않다는 것, 따라서 강력한 정치적 부활, 평등, 그리고 자유를 통한 연대의 도착을 알리는 젊은 계급 속으로 용해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도록 합시다."

    이들 9명에 대한 법원의 선고는 3개월의 금고형에 100프랑의 벌금이었다. 피고인들은 항소하려 했지만, 결국 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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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회적 중요성은 차치하더라도 프랑스 정부가 국제노동자협회를 기소한 것은 정치적 함의 역시 갖는다. 1852년의 쿠데타438) 이후 최초로 프랑스 소재 조직이 검찰의 형법 기소에 대해 시민법 상의 저항을 했다는 것이고, 스스로 시민권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보통선거를 통해 당선된 자가 자신의 기관을 통해 이를 부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지난 수 년 간 노동계급과 맺어온 밀회를 갑작스레 끝장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 조사는 국무장관 로어에서부터 연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정치적 동기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상 속의 필요를 만들어 내는 데 거북함을 느낀 그는 파리 사무소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을 동안 리옹, 루엔, 루베, 보르도, 마르세이유 등지의 협회 조직을 해산시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파리에서 발행되는 레드뤼 롤랭(Ledru Rollin)당의 기관지인 Le Reveil지가 파리 위원회타) 회원들의 행동에 대해 가장 만족할 만한 보도를 하였다. 이 신문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직관과 도덕적 우월성을 지배계급의 음모 및 편협함과 대비시켰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주목할 만한 논평을 작성하였다.

    "우리가 평화의 지속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유럽 여러 국가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사상과 감정이 통일될 때다. 며칠 뒤 국제협회의 총회가 열릴 것이다.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그 곳에 대표를 파견하는데, 아마도 프랑스는 예외일 것이지만, 그 지혜로운 결의로 유럽의 모든 노동자 대표들이 모인 이 총회가 유럽의 암피트리온적인 평의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그렇다. 만약 내일, 프랑스 혁명 불멸의 원칙에 통달하고 노동의 신성한 이익, 즉 질서, 안전, 자유를 포함하는 그 이익을 손에 넣어 이 총회가 평화를 선포한다면, 그 선언은 전 유럽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2. 벨기에 정부와의 투쟁

    벨기에 부르주아 신문의 부추김을 받아, Independance belge를 앞세운 벨기에 정부가 국제노동자협회를 샤를루아의 혼란을 일으킨 주모자로 꾸미려는 시도가 있었다.파) 그러나 3월에 체포된 벨기에 노동자들을 조사하자 이 같은 혐의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애초부터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1868년 5월, 벨기에 법무경찰 장관인 줄 바라(Jule Bara)는 벨기에 하원(Belgian Chamber of deputies)의 외국인 추방 법 갱신을 둘러싼 토론439)을 이용하여 악의적으로 국제노동자협회를 공격하였다하). 협회의 존재를 외국인법 갱신 제안의 1차적 구실로 삼은 그는 협회의 다음 총회 소집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기에 이르렀는데, 국제노동자협회는 로잔 총회에서 1868년 9월 7일 브뤼셀을 다음 총회 장소로 지명했었다.갸) 이에 브뤼셀 집행위원회와 벨기에 국제노동자협회의 모든 구성원은 법무장관에게 5월 22일자 공개 서신을 공동 명의로 작성했다.냐) 그 편지에서 분명히 한 것은 장관이 협회 총회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자격이 전혀 없고, 총회는 브뤼셀에서 열릴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거리낌 없는 편지는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한다.

    "장관님, 아래 서명자들은 당신이 우리의 대의에 크게 공헌한 것에 관해 감사를 보냅니다. 노동자의 대의가 무엇인지를 의회 회기 중에 화제로 삼아 의회 기록이 우리 원칙들을 유포하는 데 활용될 수 있게 해 주셨으니까요." "당신이 더 이상은 우리를 비난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당신네 신문들은 이 나라에서 협회가 거둔 성공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타조처럼 눈을 감고 위험을 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우리를 하나의 세력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군요. 당신은 우리를 공식적으로 축성(祝聖)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당신의 태도로써 우리가 당신네들에게 하나의 세력으로 대립한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당신 무리들이 벨기에에서 인기가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시는군요. 우리의 협회를 돕기 위해 외국인이 온다면 당신은 이곳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려고 안달할 테구요."

    그리고 벨기에 노동자들의 운동이 해외에서 고취되고 지도되었다는 장관의 암시를 확고히 거부하면서 그 편지를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

    "장관님, 하나 명심하셔야 할 것은 진(gin) 한 통에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한 사람이 우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사로 움직일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고, 우리의 활동을 이끄는 것은 모든 명예로운 정신에 깃들어 있는 정의, 오로지 그것 뿐입니다. 출범하자마자 우리 동맹은 이미 수천 명의 추종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전진한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 있습니다. 노동 해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이상은 당신에게는 불가사의한 것이겠지만요, 장관님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듣기 바랍니다."

    이후 편지는 국제노동자협회의 포부를 상세히 밝히고, 총회의 문건 중 더 많은 문서들을 입수해 읽으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정부의 위법사항이 제시된다. 샤를루아에서 빵 대신 죽음을 선물 받아 무고하게 죽어간 노동자들을 상기시켰다. 파업이 노동자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데 충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하는 바이나, 파업은 자본의 가렴주구에 대항하여 아직까지 노동자가 갖고 있는 유일한 적법 수단인 것이다. 이 편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렇소, 법무('justice')장관 나으리, 우리는 당신이 배반해 버린 그 정의의 승리를 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당신 없이도, 당신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당신에 대항해 싸울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 총회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히 아주 화가 나셨던 모양이지요. 장관 나으리께서 그렇게 부조리한 단어를 말하시다니… 예를 들어 당신은 '집회의 자유'를 선포하신 바 있는데, 우리는 장관님께서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무사히 그것을 파괴하실지 매우 기대가 됩니다. 당신이 떠벌린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브뤼셀에서 9월에 열립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장관 나으리께옵선 우리가 벨기에에 풀어 놓은 천둥번개에 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완고한 권위주의 정부로써 그것을 불러들인 건 바로 당신네들입니다. 진짜 뇌성벽력은 거기 당신 곁에 있습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하신 것 같지만 말입니다."

    1868년 6월 16일 회의에서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의 총평의회는 벨기에 정부가 공언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브뤼셀에서 정해진 날짜에 총회를 열기로 한 벨기에 위원회의 결정을 추인하였다.440) 프랑스의 집행위원회 역시 동의의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총회에 참석하고 그 결과는 알아서 감당하겠다는 결정이었다. 파리의 Courrier francais는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의 국제노동자협회에게 가해지는 동시적 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러한 해프닝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지금 협회는 유럽 전역에 걸쳐 놀라운 규모로 그 지지기반을 넓혀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서 반동들은 그것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으며, 이는 그것이 어디에서건 사회 개조의 전위로 여겨진다는 점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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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협회의 성장 잉글랜드에서는 1866년 셰필드 노조 대회에서 결의안이 선포된 이후 영국의 약 50개의 노조와 그 지부가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했다. 새로이 참여한 이들 가운데에는 예를 들어 30,000명에 달하는 철도 굴착 노동자 그룹도 있는데, 이들은 이전까지 어떠한 노조나 운동에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아일랜드에는 더블린에 한 개 지부가 있다. 미국에서는 시카고에서 열린 전미노동자대회(National Labour Congress)에서 1867년 8월 20일 국제노동자협회와 공동행동을 위한 협력관계를 맺을 것을 결의하였다. 그 때 이후로 런던의 총평의회는 미합중국 전국 노동조합(General National Labour Union of the United States)과 연락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브뤼셀 대회에는 미국의 특별 대표가 참석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런던과 직접적·배타적 관계를 맺고 있는 그룹들의 숫자는 상당히 많다. 파리(Paris), 루엔(Rouen), 리용(Lyons), 마르세이유(Marseilles), 보르도(Bordeaux), 릴(Lille), 루베(Roubaix), 아르장탱(Argentan (Orne)), 카엔(Caen), 다뉴(Digne (Basses-Alpes)), 플로리오(Fleurieux (sur Sa ne)), 푸보(Fuveau (Bouches-du-Rh ne)), 플레(Flers (Orne)), 그랑빌(Granville (Manche)), 아르쿠르(Harcourt), 티에리(Thierry (Calvados)), 아르베(Havre), 리지유(Lisieux), 누빌(Neuville (sur Saone)), 낭트(Nantes), 네프샤토(Neufch teau (Vosges)), 오를레앙(Orleans), 크레(Crets (Bouches-du-Rh ne)), 빌르프랑쉐(Villefranche (Rh ne)), 비엔느(Vienne (Is re)) 등에 지부가 존재한다. 프랑스에는 몇몇 농촌지역도 협회에 가입해 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과달루프(Guadeloupe)에도 그룹들이 있다. 벨기에에서는 협회의 주요 거점은 브뤼셀, 리에주(Li ge), 베르비에르(Verviers), 루뱅(Louvain) 등이 있다. 올해는 탄광노동자와 철강노동자들이 협회에 대규모로 가입했다. 네덜란드에는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에 두 개의 지부가 있다. 스페인에는 바르셀로나에 한 개 지부가 있다. ,b>이탈리아에는 노동자 총협의회가 나폴리와 밀라노에 있는데, 이들은 600개의 노동자 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국제노동자협회와 맺는 관계는 영국의 노조들과 미국의 전국 노조들이 협회와 맺는 관계와 성격이 같다. 그 밖에 국제노동자협회의 특별 단체가 제노바와 볼로냐에 소재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제네바 파업 이후로 집단 가입을 하려 하고 있는데, 그 주요한 그룹은 바슬(Basle)과 베른(Berne) 주(canton)의 도시들에 소재해 있다. 여기에는 villages de la montagne des Bois의 공동체들도 가입해 있다. 도시의 단체만 해도 6,000명을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제네바, 그리고 네프샤텔(Neufch tel), 보드(Vaud), 취리히(Zurich) 등의 주(canton)도 있다. 스위스 그뤼틀리(Gr tli) 노조442) 와 스위스에 있는 다양한 독일 노동자 교육 단체도 협회에 속해 있다. 독일에는 많은 그룹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심정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법적 승인이 없기 때문에 공식 가입은 할 수 없다고 공표해 왔다.443)따라서 독일과의 연계는 여전히 불충분하다. 독일의 특별 중앙 사무소는 스위스의 독일어 사용지역 사무소와 같은 것인데, 조 필 베커 책임 하에 제네바의 프레레베크 33번가에 소재하고 있다. 런던 총평의회에서는 런던 북서부 하버스톡 힐 멧트랜드 공원 제 1 모데나 빌라에 살고 있는 칼 마르크스가 독일 간사로서, 게오르그 에카리우스가 협회의 총서기로서 독일을 대표하고 있다. 협회의 간행물은 런던의 Bee-Hive 신문 시카고의 The Workmen's Advocate 파리의 Le Courrier Francais. Le Siecle, La Liberte , L'Opinion Publique 같은 매체 또한 협회의 결의문과 다른 글들을 싣고 있다. 리용, 루엔, 보르도와 다른 도시들의 민주적인 간행물들도 있다. 로잔 지역의 La Voix de l'Avenir 제네바의 Der Vorbote 라이프치히의 Demokratische Wochenblatt은 협회의 기관지는 아니지만 그 원칙을 같이하고 있다. La Tribune du peuple, La Liberte, L'Espiegle, Le Devoir, Le Mirabeau, La Cigale, l'Ingenu, Le Peuple Belge들은 모두 벨기에에서 발행된다. (브뤼셀, 베르비에르와 기타 지역).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노동자 신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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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론 저자가 독일노동자에게 바치는 이 책을 마무리하기 전에 독일 노동자 여러분께 마지막으로 즐겁게 드릴 말이 있다. 7월 19일 Kollnische Zeitung에 "8시간 운동 The Eight Hours Movement"라는 제목으로 실린 고무적인 보도를 소개한다.

    "미국에서 지난 몇 년간 이루어진 선동들은 갑작스레 완벽한 승리로 끝을 맺었다. 이는 그 자체 가지고 있었던 특질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입법부에 영향을 미친 여러 외부요인들의 우연한 일치와 논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예전에 정부 작업장과 공장에서는 하루 12시간 노동이 10시간 노동으로 줄어든 바 있다. 이에 만족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으로 한층 단축할 것을 요구했다(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점을 확인해 두자.). 그래서 이름이 "8시간 운동"이다) 의회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요구를 거부해 왔으나, 갱신된 발의안을 예전과 똑같이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두 당 모두 다음 대선에서 노동자들의 표가 필요했기 때문이고, 두 당 모두 분명 그들의 본심과는 달리 이 운동에 맞서 저 많은 유권자들의 불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도 어떤 노동자들이 약간의 언어유희를 가미하여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수면, 그리고 8실링 임금"이라는 구호를 썼다. 앞서 말한 운동이 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 한,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정도로 자신의 노동력이 쓰이기를 원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협박이나 불법적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정부당국은 이 선동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도록 허락해야 할 것이고, 나아가 그것을 선호할 것이다.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그 전능한 불문율은 여기서도 그 진가를 드러낼 것이다."

    독일 부르주아의 기관지인 Kollnische Zeitung이 미국에서 8시간노동제 운동의 예기치 못한 성공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신문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이라는 "불문"율의 "전능함"을 믿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New-Yorker Handelszeitung 역시 바로 그 "수요와 공급"이라는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퉁명스럽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데마고그의 냄새를 짙게 풍기는 이러한 결정을 개탄할 수밖에 없다. 하원의 두 당 모두가 정부 사업장에서의 노동일을 임금삭감 없이 8시간으로 결정했고, 대통령이 이 법안에 기꺼이 서명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부가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것이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고용자들이라면 자기 사업장의 노동시간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이 이유도 까닭도 없는 선동을 승인한 것이다. 그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법이란 것은 노동자와 고용주와의 관계를 규제하는 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공화국의 고상하고 자유로운 시민이라면 얼마나 자주 깨끗한 셔츠를 입어야 하는가, 또는 살면서 제대로 된 양말을 신어야 하는지, 찢어진 양말을 신어야 하는지와 법이 무관한 것처럼. 그리고 생산력의 5분의 1을 불능화하기 위한 이러한 시도가 진정 시의적절한지 여부는 확실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눈먼 노동자 대중의 환심을 얻고자 했던 이가 이 횃불에 뛰어들었고, 다가오는 대선 생각에 아무도 손을 델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노동력의 가격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따라 규제된다. 국회가 이 문제를 다루고 싶어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상원과 하원의 신사들이 이 점을 보지 않았을 리 없다. 놀랍게도, 섬너(Sumner) 상원의원 같은 이도 이러 식으로 이어질 노동자의 교육적 필요에 관한 수많은 감언이설을 쏟아냈다. 이러한 말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말이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민중에게 진실을 말하는 자만이 민중의 친구일 것이다. 일단 선거가 끝나게 되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머지 않아 8시간 노동제 운동이 "이유도 까닭도 없는" 것인지, 미국의 노동자들이 대선이 끝나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지 여부를 알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미국의 입법부가 8시간 노동일 운동을 인정한 거대한 사건에 비하면 이 문제가 부차적으로 다루어진다.444)결과는 멀지 않아 알게 될 것이다. 미 정부 작업장과 공장에서부터 8시간 노동일의 원칙은 계속 전진하여 활발히 전개되어 아메리카 대륙, 영국, 그리고 유럽대륙 모두에서 노동자 계급의 도덕적이고 정당한 요구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수요와 공급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 노동시간을 늘리고, 노동자 필요의 하한선까지 임금을 낮추는 모든 지역들에서 말이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 조건의 근면한 탐구자이자 권위자인 칼 마르크스가 1867년 7월 25일 예언한 것을 목도하고 있다. "18세기에 미국 독립전쟁이 18세기에 유럽의 중간 계급에게 경종을 울린 것과 마찬가지로, 19세기에는 미국 남북전쟁이 유럽의 노동자 계급에게 경종을 울렸다." [자본 제 1판의 서문] a독일어 원본에는 영어단어 "Trades' Unions"와 "Strikes"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b노동자 연합 관련 법을 폐지하고 그것을 다른 법으로 대체하기 위한 법령 - Ed.본문으로 c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와 프랑스어 단어 "Strikes"와 "Greves"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d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단어 "breach of peace"와 "restraint of trade"가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eK. Marx, The poverty of Philosophy. Answer to the "Philosophy of Poverty" by M. Proudhon. - Ed.본문으로 416) 이 직종별 대표자 회의는 1866년 7월 17일에서 21일 사이 셰필드에서 열렸고 200,000명의 조직된 노동자를 대표하는 138명의 대표자가 참석하였다. 노조에 국제노동자협회에의 참여를 호소하는 이 결의문은 "Report of the Conference of Trades' Delegates of the United Kingdom, held in Sheffield, on July 17th, 1866, and Four Following Days, Sheffield, 1866 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본문으로 f Report of the Conference of Trades' Delegates of the United Kingdoms..., Sheffield, 1866 - Ed.본문으로 g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 단어 "Trades' Council"이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17)주 38을 보라본문으로 418) 2차 선거개혁에 대한 일반 민주주의적 운동에의 영국 노조의 참여에 관여했다.본문으로 419) 이는 1867년 8월 15일 영국 의회에 의해 결국 채택된 개혁안을 지칭한다. 이 법은 투표권을 도시에 12개월 이상 거주한 사람과 집이나 아파트를 세주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켰다. 이전까지 투표권은 연간 12파운드의 수입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용이 되었다. 이러한 투표권의 확대로 인해 유권자의 수는 100만에서 200만으로 늘어났다. 이는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을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비교적 부유한 계층에게까지 투표권이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많은 수의 영국 노동자들은 여전히 투표를 할 수 없었다.본문으로 * 어떤 한 산업의 모든 공장과 작업장을 폐쇄하는 것,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감수하도록 하는 자본의 도구이다(아이이호프 주) 본문으로 420)1866년의 경제위기는 주로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그 유명한 '면화기근' 현상을 불러일으킨 미국 남북전쟁 이후에 발생하였다. 면화기근은 거대 생산업자에게는 극단적으로 유리하고 수 백의 소규모 공장에게는 파괴적인 것이었다. 1866년 위기는 금용에 주로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탄광, 철강, 강철 산업은 생산을 줄이고, 철도 건설 등의 사업이 축소되었다.본문으로 421)이는 노동자의 연합과 파업을 금지하는 1791년 Le Chpelier 법의 폐지(프랑스, 1864)와 노동자 연합 금지 철폐를 의미한다.(벨기에, 1867)본문으로 h"Third Annual Report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독일어 원본에는 영어 뒤에 독일어 해석이 괄호안에 명시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22)루베에서의 직공과 방적공의 파업, 파리에서 놋쇠 노동자 파업. 14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i V. Huriot, "M. Thiers a dir qu'en matiere de relations internationales, il n'y avait point de politique nouvelle...", Le Courrier francais, No.12, March 24, 1867 - Ed.본문으로 **이 파업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다음의 소책자에 수록되어 있다: Die internationale Arbeiterassociation und die Arbeitseinstellung in Genf in Fr hjahr 1868. Von Joh. Phil. Becker. Deutsche Verlagshalle, Pr -l' v que 33, Geneva, 1868. 이 책을 읽는 노동자에게, 수익금 전액을 파업 지원 중 생겨난 비용 부담 목적에 사용하는 강심장 조 필 베커(Joh. Phil. Becker)의 소책자와 월간 Vorbote를 강력히 추천한다. 조 필 베커는 그 자신이 노동자 출신으로서 노동계급을 위해 칼로 말로 펜으로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단호하게 한 평생을 바쳐 싸워온 인물이다. 노동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이 사람은 그 사유에 있어 독창적일뿐더러 열정적인데, 요즈음 모든 노동 써클에 들이대는 "신물나는 덕성과 허무한 도덕"a1의 소인배a2와는 대조적으로 모든 노동계급에게 인정받을 만하다. 그는 스위스 국제노동자운동의 삶과 혼이며, 지금까지 독일에서 협회에 가입한 모든 독일 성원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아이히호프 주)본문으로 a1Heinrich Heine, Neue Gedichte: Romanzen 7, anno 1829. - Ed.본문으로 a2Littel great man - Ed.본문으로 423)제네바 파업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마르크스 자신의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4차 연례보고서 "The Fourth Annual Report of the General Council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와(이 책 p.16) 국제노동자협회 4차 연례총회 총평의회 보고서 "Report of the General Council to the Fourth Annual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이 책 p.47를 보라)본문으로 j사무실 Offices. - Ed.본문으로 k Neue freie Press, Nos.1286(supplement), 1288, 1291, March 29, 31, April 3을 보라본문으로 424)이 상황에 대한 묘사는 마르크스에 의해 쓰여졌다. 벨기에 대학살("The Belgian Massacres")를 보라. (이 책, p.47)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리차드 휘팅(Richard Whiting)의 추산을 따름. 프랑스 노동자들이 영국 노동자들에 비해 어느 정도 열악한 지를 계산하기 위해 그는 두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필수재의 가격 차이를 비교한다. 그는 노동자가 프랑스에서 5프랑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영국에서 5실링(이는 6프랑에 해당된다)으로 살 수 있는 것이 같다고 한다. 가격 차이는 여기에서 16 2/3 퍼센트라는 임금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프랑과 실링이 지닌 가치가 양국에서 동일함을 밝혀 낸 뒤, 그는 프랑스에서 임금이 영국에서보다 적어도 10퍼센트 낮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프랑스, 벨기에, 라인 프러시아(Rhenish Prussia)에서 임금이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 또한 밝혀내었다.본문으로 l"Die Lage der belgischen Kohlenarbeiter", Demokratisches Wochenblatt, Nos.20 and 21, May 16 and 23, 1868. - Ed.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Demokratisches Wochenblatt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독일 인민당(German People's Party)의 기관지이고 C. W. Vollrath에 의해 출간된다. 편집장은 Wilhelm Liebknecht.본문으로 425)이 호소문은 총평의회(1867년 2월 26일 회의)에서 지시한 사항을 에카리어스(Eccarius)가 작성하고, 1867년 3월 13일 The International Courier No.8에 수록한 것이다.본문으로 m영문 원본에서 "the thunderer of Printing House Square"라고 되어있다. - Ed.본문으로 nThe Times, Nos.25678, 25689, 25692, 25695 December 11, 24, 29 and 31, 1866; No.25708, January 15, 1867을 보라 - Ed.본문으로 o"La grave de Marchienne-au-Pont", L'Economiste belge, No.3, February 9, 1867 - Ed.본문으로 pIbid. - Ed.본문으로 q영어 원문에는 "the affair" - Ed.본문으로 r이 책 pp.14-15를 보라 - Ed.본문으로 426)자마이카 영국 식민지 총독 에어(Eyer)는 1865년 10월 흑인 봉기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 학살은 영국에서 대중적 격분을 일으켰고, 영국 정부는 에어를 해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본문으로 sWhite terror - Ed.본문으로 427)18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tK. Marx, "국제노동자협회 창립연설" - Ed.본문으로 428)분리주의자(the Secessionist)들은 1861~65년 남북전쟁 당시부터 남부 11주의 미연방 탈퇴를 주장한 이들이다. 1861년에 노예주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남부동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줄여서 CSA)을 결성한다.본문으로 uK. Marx, "미합중국의 대통령 에이브럼 링컨에게" - Ed.본문으로 v "Mr. Lincoln and the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London, Jan.31", The Times, No.25101, February 6, 1865를 보라 - Ed.본문으로 429)1866년의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보-오전쟁)을 지칭한다. 133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주]1867년 9월 18일 무장한 페니어주의자들이 맨체스터에서 경찰의 열차를 습격하여 두 명의 정치범(페니어주의자 간부)을 구출하였다. 경사 한 명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전국에서 정기적인 순회재판을 보장하는 영국법에 반하여 이 사건은 특별조사위원회가 처리하였는데, 이들이 마련한 특별재판에서 그 공격에 가담한 죄로 고발된 페니어주의자들은 경찰관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름난 판사인 블랙번(Blackburn)은 수감자 탈출에 가담했다고 밝혀진 모든 피고인들이 이에 따라 살인혐의가 인정된다며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배심원을 설득하였다. 블랙번 판사는 5명의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평결을 내리고 사형을 언도하였다. 5명 중 2명의 집행은 연기되었고 3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1868년 6월 2일 바로 그 블랙번 판사는 자마이카 전 총독인 에어(Eyre)에 대한 재판을 맡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영국 고등법원 수석재판관인 A. 코크번(A. Cockburn)경의 견해를 인용하며 에어가 행정권을 남용하지 않았다고 대배심을 설득하여 그에게 무죄판결을 내린다. 그러나 6월 8일 고등법원 수석재판관인 A. 코크번은 퀸즈 벤치430)법정에서 블랙번 판사가 사실을 날조했다고 기소했고, 블랙번 판사는 자신의 사법적 실수를 인정하였다.본문으로 430) 278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w이 책 3~4페이지를 보라. - Ed.본문으로 x "London Meetings", The Times, No.25974, 1867년 11월 21일 - Ed.본문으로 43117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y독일어 원본에는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프랑스어 "tacite"이 라틴어로 괄호안에 적혀있다. - Ed.본문으로 z Paul Boudet - Ed.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착각이다. 분쟁은 1866년 제네바 총회 뒤에 일어났다.(13번 주를 보라) - Ed.본문으로 432)13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433)프랑스 국경에서의 이 사건과 프랑스 대표단 문서(Memorial of the French Delegation)(pp. 365~66을 보라)의 압류에 대한 아이히호프의 기술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4차 연례보고서"에 수록된 마르크스의 작업을 이용하고 있다.(이 책 12~14페이지)본문으로 John George Eccarius - Ed.본문으로 Charles La Vallette - Ed.본문으로 나폴레옹 3세본문으로 아이히호프의 착각이다. 편지는 3월 9일자로 되어있다( "A M. le ministre de l'intereur. Vendredi, 9 mars 1867", Le courrier francais, No.112, May 1, 1868) - Ed.본문으로 Ibid - Ed.본문으로 제 1인터네셔널 파리 지부의 문서 담당관인 Antoine Marie Bourdon이다.본문으로 독일어 원본에는 프랑스어 문장이 독일어 상응어구 뒤에 괄호 안에 제시되어 있다. 1867년 3월 10일 벌어진 이 회담의 내용은 Le Courrier francais, No.112, May 1, 1868에 수록되어 있다. - Ed.본문으로 434)16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1868년 전야(12월 31일) - Ed.본문으로 435)이 장(1. 프랑스 정부와의 투쟁)의 마지막까지의 텍스트는 국제노동자 협회 회보. 파리 사무소(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 Travailleurs. Bureau de Paris)(Paris, 1868)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의 요약 및 직접인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톨랭의 심문에 관한 기록을 보려면 이 책의 pp.12~15를 보라.본문으로 들르스보 (Delesvaux) - Ed.본문으로 이는 Manifeste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suivi de Reglement provisoire, Breussels, 1866을 지칭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요청에 따라 찰스 롱게(Charles Longuet)에 의해 번역되었다. 롱게는 임시규약(Provisional Rules) 첫 번째 불역본의 오역을 바로 잡았다.-Ed본문으로 독일어 원문에는 독일어 상응어구 뒤 괄호 속에 프랑스어가 제시되어 있다.본문으로 강령 중에서 톨랭이 읽은 부분은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l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aris, 1868. pp.14~15이다. - Ed.본문으로 "Reglement de Bureau de Paris." In: Pre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pp.22~24 - Ed.본문으로 가)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p.16,20 - Ed.본문으로 436) 이는 1867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통치자들 사이에 있었던 룩셈부르크의 그랜드 더키(Grand Duchy)를 둘러싼 분쟁을 지칭한다. 이는 군사적 준비를 불러왔고 양 나라에서 모두 경솔한 군사적 프로파간다가 수반되었다.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향한 전초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1867년 10월 17일 Liebknecht가 제국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비스마르크의 룩셈부르크 문제에 대한 정책을 비판하였다. 10월 22일 총평의회 회의에서 마르크스는 그 연설문 요약을 읽었다. 그 연설은 이 총평의회 회의 보고서에도 포함되었는데, 이는 The Bee-Hive, No.315, October, 1867에 수록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대해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라파르그를 시켜 그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도록 하여 Le Courrier francais에 싣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었다.본문으로 나)Ibid., pp.32~35 - Ed.본문으로 다)Paul Boudet - Ed.본문으로 라)Congres de Geneve. Memoire des delegues francais, Brussels, 1866 - Ed.본문으로 마) Proces de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pp.39~40 - Ed.본문으로 바)Code Penal, ou code des delits et des peines, Cologne, 1810 - Ed.본문으로 사)Loi sur les associations, 10~11 avril 1834 - Ed.본문으로 아) "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Bureau de Paris", Le courrier francais, No.71, March 14, 1868 - Ed.본문으로 자)이 호소문은 Le courrier francais, No.101, April 20, 1868에 실렸다. - Ed.본문으로 437) 167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차) Proces..., pp.124~26 - Ed.본문으로 카)"Correspondance. Travail et Cooperation, Londres, 27 avril 1868", La Cooperation, No.18, May 3, 1868 - Ed.본문으로 438) 1852년 12월 2일 나폴레옹 3세의 이름으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가 프랑스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것으로 제 2공화국이 붕괴하였다. 루이 나폴레옹의 독재로 끝나게 된 쿠데타는 1년전인 1851년 12월 2일에 발생하였다.본문으로 타)Ch. Delescluze, "Le droit d'Association. Devant la justice", Le Reveil, No.2, July 9, 1868 - Ed.본문으로 파)이 책 p.14를 보라 - Ed.본문으로 439)5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하)1868년 5월 16일 Jules Bara의 하원의회에서의 연설, La Voix de l'Avenir, No.23, June 7, 1868; La Liberte, No.47, May 17, 1868을 보라 - Ed.본문으로 갸)브뤼셀 총회는 1868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열렸다.본문으로 냐)"A Monsieur Bara, ministre de la Justice", La tribune de peuple, No.5, May 24, 1868 - Ed.본문으로 440)26번 주를 보라.본문으로 442)Grutli 노조 (Grutli-Verein) - 스위스 개혁주의 단체인데, 장인들과 노동자의 교육협회로서 1838년 설립되었다. 그 이름은 스위스의 국가적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스위스의 전설에 따르면 스위스의 세 개 주의 대표가 1307년에 Gr tli (루틀리, Rutli)의 풀밭에서 만나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한 저항동맹을 결의했다고 한다.본문으로 443)이는 1850년 3월 11일 제정된 반동적인 프로이센 법과 관계되어 있다.본문으로 444) 미국에서 8시간 노동일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은 1840년대와 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60년대에 들어와서 그 운동은 대중적 성격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8시간 노동일을 쟁취하기 위한 연대체(league)와 노동조합이 동참하였다. 전미 노동조합(National Labour Union) 역시 이 문제에 적극적이었다. 대중운동의 영향력 때문에 미국 의회는 모든 정부 기업과 연방 기구들에 대한 8시간 노동일 법을 1868년 6월 25일 상정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고용자들은 이를 실행하지 않거나 위배하였다. 전미 노동조합은 고용자들에 대해 저항할 것을 노동조합에 주문하였다. 전미 노동조합은 미국 노동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인 윌리엄 실비스(William Sylvis)의 적극적인 관여로 1866년 8월 볼티모어 대회를 거쳐 설립되었다. 1866년 10월 9일 쿠겔만(Ludwig Kugelmann)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볼티모어 대회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제안한 모든 요구들이 거기에 담겨있네, 노동자의 정확한 본능에 의해서 말이지." 1866년 10월 전미 노동조합은 국제노동자협회와의 관계를 확립하였지만, 1867년 8월 시카고 대회에서 선출된 대의원인 리차드 트레벨릭(Richard Trevellick)은 로잔 대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최근 대회인 바슬(Basle) 대회(1869년 9월)에는 카메론(Cameron)이 전미 노동조합의 대표였다. 1870년 8월 열렸던 전미 노동조합의 신시내티 대회에서 카메론은 자신의 국제노동자협회 대회 참가를 보고하였고, 전미 노동조합은 국제노동자협회의 원칙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확인하고, 협회에 가입할 것을 표명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렇지만 그 결의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 지도자들이 화폐 개혁의 유토피아적 공상에 포섭되었고, 1870년과 71년 많은 노동조합들이 떨어져 나가, 72년 전미 노동조합은 거의 개점휴업상태가 되었다.본문으로

  • 2007-10-23

    언니들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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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늦은 귀가 길. 요즘엔 잘 안나오시더니 오랜만에 엄마가 마중을 나오셨다. "일찍 좀 다녀라. 다 큰 애가 걱정하는 사람 생각 좀 안하니?" 얼굴 확인하자마자 인사 대신 하시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말을 돌리지 않으면 '좋은 직장과 배우자를 구하라'는 시리즈가 이어진다. 재빨리 다른 화제를 찾았다. "엄마, 근데 ○○는 괜찮나 몰라?" ○○는 내 동생이다. "○○가 왜?" "홈에버에서 일하는 사람들 짤려 가지고 맨날 난리잖아. 그게 홈에버만 문제가 아니라 그런 유통업체들 다 문제일텐데 ○○는 괜찮나 몰라." 내 동생은 집 근처 홈플러스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이라 믿고 있고,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포부를 밝혀놓은 터다. 나는 내가 이랜드 투쟁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하면서(다시 과녁이 내가 되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홈에버에서 짤린 사람들이 대부분이 같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사람들이라던데? 그게 얼마 전에 비정규직법안이 바뀌면서 그렇게 된 거래. 홈에버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데도 다 문제가 있을 텐데…. 그리고 홈에버나 홈플러스나 유통업체면 다 비슷할 텐데 ○○는 뭐 별 말없이 잘 다니는 것 같아?" "그래? 에휴… 그 녀석 별말 없이 그냥 잘 나가는 것 같던데…." 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홈에버 투쟁이 욕할 일도 아니고, 남의 문제도 아니더라, ○○도 지금 비정규직인데 홈에버에서 지금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도 비정규직이 대다수고, 심지어 정규직도 많다더라, 홈에버에서 그렇게 투쟁하다가 지면 홈플러스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고 홈에버에서 그렇게 시작되면 다른 유통업체들이라고 손해 보면서 노동자들 돈 많이 주고 쓰겠냐, 그러니까 홈에버에서 노동자들이 싸우는 게 그 사람들 문제만이 아니더라, 그 사람들 투쟁이 잘 되어야 우리 집도 잘 살 수 있다…, 이어가는 내 이야기에 귀를 솔깃 기울이면서도 엄마는 또 동생 걱정에 한숨이 더 늘었다. 엄마가 한숨을 쉬면 마음이야 안타깝지만 어쩌랴, 이건 정말 맞는 이야기인걸. 이런 이야기라도 들으면서 우리 엄마가 노동자의 편(?)이 되거나, 혹은 노동자로서의 각성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면서, 동시에 내가 밤늦게까지 싸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 남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는 변호까지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혼나지 않고(?) 엄마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내심 뿌듯해했다. 그런데 사실 말 그대로, 나는 정말 투쟁하고 있는 홈에버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뉴코아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내 동생의 얼굴, 우리 엄마의 얼굴을 보곤 한다. '까대기'(매장에 물건을 진열하는 것)노래를 들으면 장대같이 큰 키에 여드름 자국이 있는 앳된 얼굴의 내 동생이 진열대 앞에서 이러저러한 물건들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저녁 늦게까지 쑤시는 다리를 주무르며 집회 대오를 지키고 있는 노동자들에게서는 유난히 한쪽만 퉁퉁 부운 다리 때문에 약을 드시던 엄마가 보인다. 이렇게 비정규직/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은 이랜드 노동자들을 통해 그동안과는 무엇인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대학 새내기 시절, '연대'에 대해서 '나를 도와주러 왔다면 돌아가시오, 그러나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이고, 나의 해방이 당신의 해방이라고 생각한다면 함께합시다.'였던가? 하는 문장을 어디선가 본 이후로 이 멋진 말처럼 투쟁하며, 연대하며 살아야겠다고 계속 되뇌고는 했었는데,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속에 내 나름대로 그어놓은 '운동 공간'과 '개인 공간'이라는 구획 속에서 전자에 속하는 양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가족'이라는 밀접한 관계의 사람들을 통해 내 일상으로 '투쟁', '비정규직'과 같은 말들이 침투해들어온 것이다. 이런 침투는 예전에도 간혹 있어왔지만 이번에는 왠지 본격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런 침투가 낯설긴 하지만 무척 반갑다. 가족이나 친지들 그리고 (운동과 상관없는)친구와 같은 관계들로 구성되어있는, 예전에는 쉼터 같았던 '개인 공간'이라는 영역은 운동하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난감함을 주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나는 운동을 통해 일종의 삶의 양식을 갖게 되었고 대부분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러할 텐데, 예를 들어 페미니즘은 이념과 운동으로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성과 나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 이해하게 하는 감수성이나 시야를 갖게 했다. 그래서 명절 때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집안 남자들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거나, 여자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다가도 다른 여성에 대한 묘한 적개심과 질투(?)를 내비치는 대화 주제가 나올 때면 불편하기 그지없는, 섞여있지만 잘 섞여지지 않는 일종의 '고립감'을 많이 느껴왔다. 그러던 것이 '비정규직'이라는 주제로 그/녀들과 대화의 물꼬를 틀고, 동감을 얻어낼 때는 마치 내 운동이 뜬 구름 잡는 허상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라도 되는 듯 내 마음에 단비가 내리는 것이다. 단비와 같은 투쟁, 특히 지난 매장 점거 투쟁 때의 이랜드 노동자들의 모습은 나에겐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일상적이면서도 낯설기도 한 즉, 내가 그어놓았던 경계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린 새로운 세상(?)같은 것이었다. 점거하고 있는 매장에 들어갔을 때 내가 처음 한 것은 저녁을 먹고 있는 조합원들과 인사하고 밥 한술 함께 먹는 것이었는데, 옹기종기 모여 앉은 원안에는 어느 집 식탁에서나 익히 봤을만한 반찬통에 손수 싸들고 온 반찬들이 내어져 있었다. 이전에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과 숟가락을 섞어본 일이 없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집어먹을 때마다 '이 달달한 오징어채는 이 집의 딸내미가 좋아했을까, 이 콩자반은 이 집 아저씨가 좋아했을까, 이 계란은 어디 세일할 때 한판 사다놓았던 것이겠지' 하며 그네들의 삶의 모습이 베어 나와 조금은 다른 내음이 났다. 우리가 모여 앉은 곳 두세 걸음 뒤편에는 매장 안의 온갖 물건들이 놓여있는데, 나 같으면 좋아하는 햄이라도 하나 들고 나와 먹겠건만 여기가 우리의 돌아올 일터라고 손 하나 대이지 않은 저편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살림'이 익숙한 손으로, '죽임'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노동'을 해왔던 '살림'꾼들의 거칠고 고운 손이 점거한 매장은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윤송단 여성국장의 말처럼 '쓸고 닦는 투쟁'의 공간이었고 그 차가운 바닥에서 그녀들은 또 서로를, 이 시대를, 우리를 살려내고자 새우잠을 청하는 꽃보다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이런 그네들이 하늘색 조합원티를 입고 마스크를 쓰고 대오를 지키고 앉아있는 집회의 모습은 '안젤리나 졸리'는 비교도 안되게 정말 멋졌다! 그리고 이렇게 생생하고 역동적인 모습에 '신자유주의 시대 여성 노동자들이 활용되고 이중 노동에 시달리는….'라는 그 동안의 수사와 입장이 무색하지 않게 나 역시 생동하는 투쟁, 살아있는 발언이 간절하다. 힘들어 쉬고 싶기도 하고, 가족 걱정이 밤잠을 설치기도 하지만 오늘 하루도 다시 결의를 내며 '쓸고 닦는 투쟁'을 하는 그/녀들에게는 '투사'라는 이름보다도 오히려 여성 노동자라는 아름다운 그 이름 그 자체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고마운 '언니'들을 많이 만났다. 그런데 또 이렇게 쓸고 닦으며 길을 터고 있는 여성 노동자라는 이름의 그 언니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감사한다. 빚지지만은 말아야지. 다시 나도 멋진 언니들을 마주치는 즐거운 만남을 시작해야겠다.

  • 2007-10-23

    언니들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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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늦은 귀가 길. 요즘엔 잘 안나오시더니 오랜만에 엄마가 마중을 나오셨다. "일찍 좀 다녀라. 다 큰 애가 걱정하는 사람 생각 좀 안하니?" 얼굴 확인하자마자 인사 대신 하시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말을 돌리지 않으면 '좋은 직장과 배우자를 구하라'는 시리즈가 이어진다. 재빨리 다른 화제를 찾았다. "엄마, 근데 ○○는 괜찮나 몰라?" ○○는 내 동생이다. "○○가 왜?" "홈에버에서 일하는 사람들 짤려 가지고 맨날 난리잖아. 그게 홈에버만 문제가 아니라 그런 유통업체들 다 문제일텐데 ○○는 괜찮나 몰라." 내 동생은 집 근처 홈플러스에서 비정규직으로 일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이라 믿고 있고,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포부를 밝혀놓은 터다. 나는 내가 이랜드 투쟁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하면서(다시 과녁이 내가 되지 않게) 대화를 이어갔다. "홈에버에서 짤린 사람들이 대부분이 같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사람들이라던데? 그게 얼마 전에 비정규직법안이 바뀌면서 그렇게 된 거래. 홈에버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데도 다 문제가 있을 텐데…. 그리고 홈에버나 홈플러스나 유통업체면 다 비슷할 텐데 ○○는 뭐 별 말없이 잘 다니는 것 같아?" "그래? 에휴… 그 녀석 별말 없이 그냥 잘 나가는 것 같던데…." 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홈에버 투쟁이 욕할 일도 아니고, 남의 문제도 아니더라, ○○도 지금 비정규직인데 홈에버에서 지금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도 비정규직이 대다수고, 심지어 정규직도 많다더라, 홈에버에서 그렇게 투쟁하다가 지면 홈플러스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고 홈에버에서 그렇게 시작되면 다른 유통업체들이라고 손해 보면서 노동자들 돈 많이 주고 쓰겠냐, 그러니까 홈에버에서 노동자들이 싸우는 게 그 사람들 문제만이 아니더라, 그 사람들 투쟁이 잘 되어야 우리 집도 잘 살 수 있다…, 이어가는 내 이야기에 귀를 솔깃 기울이면서도 엄마는 또 동생 걱정에 한숨이 더 늘었다. 엄마가 한숨을 쉬면 마음이야 안타깝지만 어쩌랴, 이건 정말 맞는 이야기인걸. 이런 이야기라도 들으면서 우리 엄마가 노동자의 편(?)이 되거나, 혹은 노동자로서의 각성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면서, 동시에 내가 밤늦게까지 싸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 남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는 변호까지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혼나지 않고(?) 엄마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에 내심 뿌듯해했다. 그런데 사실 말 그대로, 나는 정말 투쟁하고 있는 홈에버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뉴코아 노동자들의 얼굴에서 내 동생의 얼굴, 우리 엄마의 얼굴을 보곤 한다. '까대기'(매장에 물건을 진열하는 것)노래를 들으면 장대같이 큰 키에 여드름 자국이 있는 앳된 얼굴의 내 동생이 진열대 앞에서 이러저러한 물건들을 올리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저녁 늦게까지 쑤시는 다리를 주무르며 집회 대오를 지키고 있는 노동자들에게서는 유난히 한쪽만 퉁퉁 부운 다리 때문에 약을 드시던 엄마가 보인다. 이렇게 비정규직/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은 이랜드 노동자들을 통해 그동안과는 무엇인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대학 새내기 시절, '연대'에 대해서 '나를 도와주러 왔다면 돌아가시오, 그러나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이고, 나의 해방이 당신의 해방이라고 생각한다면 함께합시다.'였던가? 하는 문장을 어디선가 본 이후로 이 멋진 말처럼 투쟁하며, 연대하며 살아야겠다고 계속 되뇌고는 했었는데,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속에 내 나름대로 그어놓은 '운동 공간'과 '개인 공간'이라는 구획 속에서 전자에 속하는 양식이었다. 그러던 것이 '가족'이라는 밀접한 관계의 사람들을 통해 내 일상으로 '투쟁', '비정규직'과 같은 말들이 침투해들어온 것이다. 이런 침투는 예전에도 간혹 있어왔지만 이번에는 왠지 본격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런 침투가 낯설긴 하지만 무척 반갑다. 가족이나 친지들 그리고 (운동과 상관없는)친구와 같은 관계들로 구성되어있는, 예전에는 쉼터 같았던 '개인 공간'이라는 영역은 운동하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난감함을 주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나는 운동을 통해 일종의 삶의 양식을 갖게 되었고 대부분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러할 텐데, 예를 들어 페미니즘은 이념과 운동으로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성과 나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 이해하게 하는 감수성이나 시야를 갖게 했다. 그래서 명절 때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집안 남자들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거나, 여자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다가도 다른 여성에 대한 묘한 적개심과 질투(?)를 내비치는 대화 주제가 나올 때면 불편하기 그지없는, 섞여있지만 잘 섞여지지 않는 일종의 '고립감'을 많이 느껴왔다. 그러던 것이 '비정규직'이라는 주제로 그/녀들과 대화의 물꼬를 틀고, 동감을 얻어낼 때는 마치 내 운동이 뜬 구름 잡는 허상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라도 되는 듯 내 마음에 단비가 내리는 것이다. 단비와 같은 투쟁, 특히 지난 매장 점거 투쟁 때의 이랜드 노동자들의 모습은 나에겐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일상적이면서도 낯설기도 한 즉, 내가 그어놓았던 경계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린 새로운 세상(?)같은 것이었다. 점거하고 있는 매장에 들어갔을 때 내가 처음 한 것은 저녁을 먹고 있는 조합원들과 인사하고 밥 한술 함께 먹는 것이었는데, 옹기종기 모여 앉은 원안에는 어느 집 식탁에서나 익히 봤을만한 반찬통에 손수 싸들고 온 반찬들이 내어져 있었다. 이전에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과 숟가락을 섞어본 일이 없지 않았지만, 하나하나 집어먹을 때마다 '이 달달한 오징어채는 이 집의 딸내미가 좋아했을까, 이 콩자반은 이 집 아저씨가 좋아했을까, 이 계란은 어디 세일할 때 한판 사다놓았던 것이겠지' 하며 그네들의 삶의 모습이 베어 나와 조금은 다른 내음이 났다. 우리가 모여 앉은 곳 두세 걸음 뒤편에는 매장 안의 온갖 물건들이 놓여있는데, 나 같으면 좋아하는 햄이라도 하나 들고 나와 먹겠건만 여기가 우리의 돌아올 일터라고 손 하나 대이지 않은 저편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살림'이 익숙한 손으로, '죽임'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노동'을 해왔던 '살림'꾼들의 거칠고 고운 손이 점거한 매장은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윤송단 여성국장의 말처럼 '쓸고 닦는 투쟁'의 공간이었고 그 차가운 바닥에서 그녀들은 또 서로를, 이 시대를, 우리를 살려내고자 새우잠을 청하는 꽃보다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이런 그네들이 하늘색 조합원티를 입고 마스크를 쓰고 대오를 지키고 앉아있는 집회의 모습은 '안젤리나 졸리'는 비교도 안되게 정말 멋졌다! 그리고 이렇게 생생하고 역동적인 모습에 '신자유주의 시대 여성 노동자들이 활용되고 이중 노동에 시달리는….'라는 그 동안의 수사와 입장이 무색하지 않게 나 역시 생동하는 투쟁, 살아있는 발언이 간절하다. 힘들어 쉬고 싶기도 하고, 가족 걱정이 밤잠을 설치기도 하지만 오늘 하루도 다시 결의를 내며 '쓸고 닦는 투쟁'을 하는 그/녀들에게는 '투사'라는 이름보다도 오히려 여성 노동자라는 아름다운 그 이름 그 자체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 고마운 '언니'들을 많이 만났다. 그런데 또 이렇게 쓸고 닦으며 길을 터고 있는 여성 노동자라는 이름의 그 언니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감사한다. 빚지지만은 말아야지. 다시 나도 멋진 언니들을 마주치는 즐거운 만남을 시작해야겠다.

  • 2007-10-07

    [여성,삶,노동]사회운동포럼 2007 여성대회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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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뭄 끝에 내린 비, 소중한 결실로 이어져야

    김은주 | 민주노총 부위원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가 하늘을 울린다. 여성노동자들의 울분과 한숨이 11호 태풍 나리보다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자본에 대한 떨리는 분노로 하루하루 투쟁을 이어간다. 그러나 대응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운동을 전망하며 우리는 얘기한다. 비정규직 투쟁만이 노동운동의 희망이요, 비정규직만이 새로운 투쟁의 원동력이며, 자본의 심장을 치명적으로 강타할 역동적인 노동자 계급의 선봉대라고.

    그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고 있다. 매 맞고, 피 터지고, 질질 끌려서 닭장차에 던져지는 탄압양상은 80년대를 방불케 한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백만 배는 훨씬 더 무참하고 서러운 탄압이다. 적어도 그때는 같은 조합원들에게 멸시당하거나 두드려 맞지는 않았으니까.

    이런 와중에 우리는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진실로 몸과 마음을 다해 비정규 투쟁에 인생을 바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이 정도, 이 상황 됐으면 눈에 독기를 품고 정권과 자본에 달려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랜드.뉴코아 투쟁이 한창이던 때, 사회운동 포럼이 개최되었다. 그 중간에 개최된 여성대회는 지난 10여 년 동안 비정규직 투쟁과 여성노동운동에 남다른 결의와 각오로 임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리고 여연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여성운동의 주류적 흐름에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너무나 절실하고 반가운 대회가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페미니즘이라는 의제를 그다지 매력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운동의 풍토상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사회운동포럼의 전체 일정에서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대회’를 배치하고, 그 대회에서 ‘여성주의’라는 관점을 가지고 활동가들이 토론할 수 있었다는 점, 향후 전망에 대해 고민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만 해도 대단한 진전이자 성과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다양한 사회운동 부문에서 페미니즘을 부르짖고 있는 개별 활동가들이 조직되고, 그동안 주변적. 비주류적 의제와 주체들에게 힘을 받게 해서 앞날을 도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이 있었을 뿐.

    그러나 결과는 의외로 뿌듯하였다. 최근 개최되는 각종 토론회에 기껏해야 20~30명의 참석을 넘지 못하는 상황에서 100여명 가까운 활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고, 짧게나마 한국 사회의 여성운동에 대한 평가와 전망도 다뤄졌다. 비록 토론자들의 개인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사회운동의 이념, 조직, 실천이 부족했다는 내부적 반성도 갖게 하였으며, 무엇보다 여성대회가 일회적 행사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 네트워크를 구성하거나 내년 3.8 세계 여성의 날 100주년 사업에 대한 공동 대응 등의 실천적 결의를 모은 점은 여성대회에 모인 성원들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고민을 하였나를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방증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페미니즘에 대한 시각이 계급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재 조망과 그로 인한 인식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내용을 좀 더 담을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또한 여성대회 주관 주체의 준비 부족으로 선언문이 채택되지 않은 것은 대단히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 대회가 기존 운동을 혁신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대안전략을 구성하는데 가장 중요하고도 긴급한 과제인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꾀한다는 당초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고자 하였다면, 그 결의와 실천적 내용을 담은 선언문의 채택은 필수 요소였기 때문이다.

    작은 일일지는 모르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는 부분인데, 적절한 크기와 위치의 장소 선정, 열악한 놀이방 환경 등은 다음 대회에서 좀 더 세심함을 기울여 개선되었으면 한다. 여성들이 모이는 행사에 놀이방을 마련하는 것까지의 당연히 배려는 정착되고 있지만 지하 어두컴컴한 곳에서 몇 시간씩 아이들을 놀게 하는 건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존의 운동은 변화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자본의 무한착취 대상으로 고통 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기존의 남성 중심적, 대공장,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은 획기적으로 달라져야만 한다. 자본의 계급 분할 전략은 투쟁으로 돌파되어야 하며, 여성노동자들의 한숨과 비애가 더 이상은 계속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과 접근이 지금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조직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실천으로 담보되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작, 앞으로 여성대회가 가야 할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시작은 반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미 페미니즘과 사회운동 결합을 반쯤은 성공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실천에 매진하자. 이랜드.뉴코아 투쟁 승리하자.


    새로운 여성운동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_길고도 짧았던 나흘간의 여정을 돌아보며


    문설희 | 회원,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egalia227@jinbo.net


    지난 8월30일부터 9월2일에 걸쳐 나흘 동안 이어진 <소통/연대/변혁 사회운동포럼>에서는 ‘위기에 빠졌다’라는 말조차 식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꽤 오랫동안 위기에 봉착해 있는 사회운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다. 때로는 다급한 현안과 실무에 치여서, 또는 무기력감과 막막함에 빠져, 차마 꺼내어 보지 못하고 지냈던 진지한 질문들을 우리는 다시금 꺼내어 보았다. 그 질문들 중에는 “왜 페미니즘인가?”라는 것이 있었다.


    왜 페미니즘인가?_ 새로운 길찾기를 위한 나침반

    <사회운동포럼>의 시작을 알리는 ‘대토론회’ 1부와 2부를 통틀어 페미니즘의 중요성이 거듭 강조되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조차 낯설어하고, 아니 불편해했던 사회운동 내에서 언제부턴가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점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강조 속에서 생겨나는 의문은, “왜 페미니즘인가?”라는 것이었다. <사회운동포럼>이 기치로 내건 ‘소통/연대/변혁’에 있어서 페미니즘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우리에게 페미니즘은 왜 관건적인지? 사회운동의 위기에 대한 토론의 과정에서 한 토론자는 ‘운동의 특권화’를 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이에 대해 다른 토론자는 ‘특권화’라기보다 ‘보편성의 상실’이 위기로 진단되는 것이 적확하겠다고 제기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적확한 평가는 87년을 기점으로 형성된 노동자 운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이 ‘애초에 보편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닐지? 페미니즘의 눈으로 한국사회 사회운동을 본다면, 대공장-남성-가장-정규직 중심의 운동이 가지고 있었던 취약한 보편성이 해체되는 과정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원인인 것이다. 운동의 위기를 제대로 진단할 수 있는 이러한 관점을 제공함과 동시에,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이념이 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즉 페미니즘은 ‘새로운 보편성의 구축’이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운동 간의 소통과 연대, 그를 통한 변혁을 꿈꾸는 우리에게 페미니즘이 관건적인 이유이겠다. 우리에게 왜 페미니즘이냐고? 페미니즘의 렌즈를 통해 살펴보면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외친 아이의 진실처럼 사회운동의 위기가 투명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위기를 극복할 대안적 상상력을 페미니즘이 제공해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페미니즘이 마치 위기에 빠진 기존운동의 혁신을 저절로 가능하게 해 줄 ‘구원자’로 여겨져서도 곤란하다. 페미니즘 운동 역시 전체 사회운동의 위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간과되는 순간, 페미니즘은 ‘운동’이라기보다 ‘도구’로 전락할 뿐이요, 껍데기만 남아 일종의 ‘트랜드’, ‘유행’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존의 사회운동이 자신의 운동의 목표로 삼지 못했던 ‘여성해방’이 ‘페미니즘’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운동의 새로운 보편성이 구축될 수 있고 나아가 위기에 빠진 사회운동의 혁신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길 찾기에 나선 우리들에게 길을 잃지 않게끔 해 줄 나침반과도 같은 것이다.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_대안세계를 향한 상상력을 펼쳐라

    페미니즘과 여타의 다른 운동들과의 결합이 사회운동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켜준다는 사실은 ‘대토론회’ 이후의 여타의 마당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밝혀질 수 있었다. 일례로 사회운동의 열쇠말 중의 하나였던 사회공공성 마당에서는, 사회공공성을 강화시키기 위한 운동과 여성해방을 향한 운동이 결합되었을 때를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사적 영역, 즉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행해지던 간병과 보육 등의 재생산 노동이 철저히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을 반대하고 사회공공성 강화를 위한 요구를 제기한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그러한 노동은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공간에서 누구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인지? 페미니즘은 돌봄과 관련된 재생산의 책임이 다시금 가족의 역할로 돌려지는 것도 대안이 아니요, 그것이 여성, 즉 어머니나 아내가 책임져야하는 몫으로 귀결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일러준다. 결국 사회공공성 쟁취 투쟁과 페미니즘의 결합은, 노동자민중이 마땅히 향유해야 할 사회적 권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쟁취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더욱 급진적인 대안을 요구하게끔 한다. 이처럼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은! ,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보여주는 이미 실패한 미래를 단호히 거부하고 대안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우리들이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동력이 된다.

    새로운 여성운동을 위한 우리의 선언_나/너/우리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작

    이러한 여성운동을 선언하고자 하는 이들이 <사회운동포럼> 세 번째 날 한자리에 모였다. ‘여성대회’에 모인 백여 명이 넘는 참가자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아래에서 더욱 고통받고 억압당하고 있는 오늘날 여성의 현실을 확인하였고 이에 맞서는 운동이 시급함을 가슴 절절히 공감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여성운동의 형성을 가로막았던 기존 사회운동에 대한 반성이 우선되어야 하며, 더불어 한국사회 여성운동 또한 자기혁신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는 점 역시 이야기되었다. <사회운동포럼>이 열리기 직전 개최되었던 여성노동자공동투쟁대회에서 기륭전자여성노동자, KTX-새마을호여성노동자, 이랜드-뉴코아여성노동자들은 입을 모아 질문했다. 왜 비정규직의 70%는 여성노동자인가? 왜 여성에게는 저임금불안정노동이 당연시되는가? 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여성노동자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말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현재의 운동을 혁신하고 또한 여성운동의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구해질 수 있을 것이다. 즉 새로운 여성운동의 형성 및 한국사회 사회운동의 변혁이 절실한 것이다. 여성해방을 자신의 과제로 삼지 않았던 기존 사회운동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바탕으로, 이날 ‘여성대회’에서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위한 공동의 전략과제가 제출되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여성에 대한 빈곤과 차별,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자기 위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사회운동의 전략을 재구성할 것, 여성의 경제적 자율성을 파괴하고 여성을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공사분할-성별분업-성차별이데올로기를 폐절하고 여성의 노동권과 성욕․신체에 대한 권리가 완전히 실현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할 것, 성적차이에 기반한 여성의 보편적 권리로서 노동권을 확립해나가고 여성노동자의 저임금불안정노동을 철폐하는 투쟁을 전면화할 것, 여성이 스스로를 대표하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자기조직화/자기교육을 활발하게 진행할 것 등이 제기되었다. 또한 이러한 공동전략과제와 더불어 두 가지 공동행동이 제안되었다. 한 가지는 개별화되어있는 여성운동의 주체들 간의 소통과 연대를 지원하기 위한 ‘여성운동네트워크’를 구성하자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내년이면 100주년을 맞는 2008년 3․8 여성의 날을 새로운 여성운동의 전망을 논의하는 장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새로운 여성운동.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막막한 느낌에 가슴이 짓눌리기도 했다. 절실하기는 하지만 과연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누구와 함께 시작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여성대회’에 모인 이들과 함께라면, 그리고 이날 우리가 약속한 공동의 전략과제와 공동행동에서부터 시작을 한다면, 비록 힘겹기는 하겠지만 새로운 여성운동은 분명히 가능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가슴을 짓눌러왔던 막연함이 가시고, 새로운 기대감으로 가슴이 뻐근해져왔다. ‘여성대회’에서의 논의내용은 더욱 깊이 있는 검토와 의견의 교환 과정을 거쳐 이후 선언문으로 채택될 계획이다. 그리고 새로운 여성운동을 약속한 선언자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구성될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소통과 연대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될 것이며, 이 공간에서의 대중운동적 실험은 내년의 100주년 3․8 여성의 날에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나/너/우리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시작은 길고도 짧았던 나흘간의 <사회운동포럼>이 마감된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발 한발 진행되고 있다. 나/너/우리의 마음속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야기하는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맞선 모든 사회운동의 공간에서!

    추석, 여자 그리고 가족


    이꽃맘 | 회원, 참세상 기자


    하나. 나 그리고 엄마 이야기

    나는 이제 막 서른 줄에 들어선 미혼 여성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많이 아는 얘기긴 하지만, 나의 엄마는 내가 스물다섯이 되었을 즈음부터 내가 이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남자와 결혼식을 하는 꿈을 꾸었다. 학생운동 당시 회의에 갈 때면 “화장이라도 하고, 이쁘게 하고 가라는 것”이 항상 입에 달린 당부였다. 뭐 다른 엄마와는 다르게 운동권이라도 괜찮다는 조금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했을 당부지만 참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때부터였나. 엄마는 내 침대 앞에 있는 옷장 위에 살림살이들을 쌓아 놓곤 했다. 이뿐 그릇 세트며, 이불이며, 냄비들이며... 침대에 누울 때 마다 옷장 위에 놓여 있는 상자들을 보며 헛웃음을 날리곤 한다.

    이런 공세는 추석이 되면, 명절이 돌아오면 모든 친척들의 공통분모가 된다. “이제 니 차례다”, “살 빼야 결혼하지”, “남자친구는 있냐” 나를 결혼시키기 위해 일치단결한 모습이다.

    여기서 나도 “전 가족이라는 현실의 제도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가족을 만든다는 것이 여성에게 얼마나 많은 모순을 만드는 데요”, “꼭 결혼을 통한 가족이 필요할까요. 그냥 같이 살고 싶은 사람들이랑 같이 살면 안 될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지만... 그냥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자기 주변부터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무슨 운동권(!)이냐. 그래서 변화가 없는 것이다”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그냥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냥 “네”하고 답하면 끝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나의 방식은 그간 무수한 부딪힘 속에서 터득한 방법이기도 하고, 포기이기도 하다. 이게 그냥 엄마를 설득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엄마만 설득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한 것 같은데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지 않는 것”의 중요성 말이다. 이건 오히려 남성을 설득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엄마를 설득하는 일은 사회를 페미니즘으로 바꾸는 나의 계획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일 될 것이다.

    힘들다. 추석이 힘들다.

    장면 2. 추석, 이랜드 불매운동 그리고 여성

    지난 17일, 전국여성연대는 ‘홈에버 뉴코아에서 추석 선물, 장안보기 1만인 주부선언대회’를 했다. 누구든 나서서 이랜드 불매운동을 선언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손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기사를 쓰지 않았다.

    워낙 ‘나쁜 기업 이랜드, 소비자의 힘으로 심판하자’는 논리도 썩 맘에 안 들어 하던 참에 여성단체가 주부선언이라는 것을 한다니 선뜻 기자회견에 가기도, 기사를 쓰기도 싫었다. 차라리 왜 여성들이 모여 있는 단체가 그것도 추석 직전에 ‘주부’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불매운동을 선언하는지 비판하는 기사를 쓸까 하다가 좋은 일에 왜 또 딴지냐는 말을 듣는 게 귀찮아서(?) 그만 뒀다.

    그렇지만 조금 생각해보면,

    추석이 되면 얘기에 중심에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동안 아무리 중심에 세우려고 해도 남성들의 이야기만 가득하던 세상이 명절만 돌아오면 여성들에 집중한다. 미혼 여성들이 추석에 가장 듣기 싫은 말 1위, 결혼 얘기. 기혼 여성들이 시어머니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 1위, “좀 더 있다가라”. 명절 스트레스에 우울증, 증후군까지. 온통 여자들 얘기다.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 분석하지 않아도 느낌이 온다. 명절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 여성이고, 아니 여성에게 전가되고, 명절 프로그램을 전가 받기 전(!)인 미혼여성들에게는 명절 프로그램을 이행할 준비를 하라는 압박이 집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중심이 되는 얘기는 여성이 중심에 서면 당연히 쫓아오는 ‘가족’얘기다. 모든 미디어에서는 가족과 함께 먹으면 좋을 음식, 가족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 가족과 함께 가면 좋은 여행지, 가족과 함께 하면 좋은 게임, 가족과 함께, 가족과 함께... 이도 논리적으로 분석하지 않아도 느낌이 온다. 명절은 가족과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해야만 때이고 이 프로그램은 여성들이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과 가족, 명절이 떨어질 수 없는 세트처럼 움직인다. 뭐 이건 명절 때만 그런 것이 아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자연스럽게 운동을 제안하는 여성단체들 입에서도 나온다. 전국여성연대는 명절=여성=주부=가족이라는 논리를 깨기 위한 노력(?)으로 보도자료에 주부선언대회 앞에 ‘여남’이라는 전제를 괄호를 쳐서 넣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아닌, 한국진보연대가 아닌 전국여성연대가 왜 주부선언대회를 개최하는가에 대한 원초적 질문을 피할 순 없어 보인다. 그리고 왜 여성이 아닌 ‘주부’였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소비자의 힘’으로, ‘(소비자인) 주부의 힘’으로가 아닌 생산의 주인공인 여성의 힘으로,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힘으로라는 말이 절실하다. 정말 절실하다.

    추석. 명절=여성=주부=가족이라는 논리로 힘들다. 여자들이 힘들다.

  • 2007-10-02

    [성명]뉴코아 노동자들의 노동청 점거를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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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09-23

    다시 부활한 노조파괴 공작과 노동자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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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세계화와 노동의 불안정화에 맞서는 노동자운동의 부활이 필요하다 [%=사진1%] 돌아온 노조파괴 전문가 “제임스 리”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이 활발해 지면서 기업들의 노동자 탄압 행태가 폭로되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128일간의 총파업을 전개한 현대중공업의 현대그룹해고자 협의회에 대한 사측의 식칼 각목 테러이다. “제임스 리”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던 노조파괴 전문가들이 민주노조 건설 운동이 활발한 곳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테러와 회유, 협박을 일삼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20년 지난 지금, 이러한 노조파괴 공작이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상대로 예전과 비슷하게 다시 나타나고 있다. GM-대우 부평 공장에서 벌어진 비정규직 노동조합 조합원들에 대한 구사대의 집단 폭행과 일체의 선전 활동 금지 조치와 노동조합 활동가들에 대한 해고, 코스콤 노동조합 투쟁 현장에서 벌어진 용역 깡패들의 조합원 감금 사건,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에 대한 구사대의 집단 구타, 이랜드 뉴코아 파업 현장에 등장한 손도끼와 죽봉 등으로 무장한 천 여 명의 용역 깡패 등, 최근 두세 달 사이의 폭력 사태들은 80년대의 그것만큼이나 끔찍하다. 다만 20년 전 그것이 어용노조에 대한 민주노조 건설운동에 대한 폭거였다면,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조가 일정한 합법적 권리를 획득한 지금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건설에 대한 폭거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관련 기사 보기) 자본의 고민과 해법 GM-대우, 코스콤, 이랜드-뉴코아, 기아 화성공장의 모두 투쟁의 원인은 외주 용역화에 따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악화, 고용 불안정성 증대 등 이다. 외주 용역화는 98년 이후 빠르게 증가했는데, 특히 지난 7월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 이후 사용자들의 외주 용역화 요구는 더욱 커졌다(사회화와 노동 350호, 354호). 이랜드 뉴코아의 경우 다들 잘 알다시피 7월 1일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에 맞추어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화하는 대신 외주용역화 한 경우이다. GM-대우는 올해 생산성 15% 상승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대규모 외주화와 비정규직 정리해고를 실시했다. 진합, 욱산 등의 외주 용역사들은 원청의 이러한 목표에 따라 추가로 정리해고 하였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원청인 GM 대우에 대해 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지만 GM 대우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상황이다. 코스콤의 경우 외주 용역화가 더욱 노골적인데, 코스콤의 이사들이 새운 종이 회사로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외주 용역화 하였고, 종이 회사에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코스콤에 정규직화 요구를 하고 있다. 기아 화성공장의 비정규직 노조의 요구 또한 원청의 교섭 참가와 노동조건 개선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자본의 입장은 단호하다. 일체의 교섭에 나가지 않는 것은 물론 불법적 폭력을 동반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다. 사실 자본의 이러한 태도는 자본의 수익성 저하를 비정규직의 확대와 노동자에 대한 공격을 통해 극복하려는 전략의 산물이다. 한국은행의 2006년 기업경영분석 결과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06년까지의 한국의 전 산업 매출액 영업 이익률은 1% 정도 상승한 반면 매출액 경상 이익률은 7% 가량 상승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차이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영업외수익 즉 금융 관련 수익에 기대어 경상이익을 높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본은 투자 확대를 통한 생산성 향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보다는 노동자의 외주 용역화, 사업부서 아웃 소싱 등을 통해 비용절감을 추구하며 이익을 남기는 가운데, 그 이익의 대부분을 생산적 투자확대가 아닌 금융 관련 투자에 사용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패턴은 기업들의 현금 보유 추이에서도 나타나는데, KDI의 2006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현금 보유액은 1990년 5조원 규모에서 2005년 말 40조원에 이를 정도로 상승했다. 기업들의 유동성 선호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GM이 수익성 하락에 대처하는 자본의 전략을 보여주는 한 예인데 2007년 8월 경영 보고서에서 GM 자본은 원자재 값 상승에 대한 대응책으로 노동 비용을 적극적으로 줄이려고, 미국과 유럽 내 공장의 축소와 아시아 기지(GM Daewoo, Shanghai Motors) 등과의 협력을 강조한다. GM의 글로벌 전략, 즉 미국에서의 공장 폐쇄 예정에 따른 생산기지의 세계화는 외주 용역화를 통한 노동 비용 극소화를 전제로 하여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해법 하지만 자본의 이러한 노동비용 축소와 금융적 해법의 추구는 노동자들에게는 재앙에 다름 아니다. 사실상 원청이 작업 지시와 관리를 담당하면서도 외주 용역화를 구실로 책임 회피가 용이하므로 하청 노동자들의 노동 기본권은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이는 임금 삭감, 고용 불안만의 문제를 넘어서 민주주의의 기본적 인권에 대한 위협으로까지 나아가는데, 자본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탄압하기 위해 용역 깡패까지 동원 폭력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자본이 이렇게까지 극악하게 대응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정규직 노동자의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외면으로 인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립도 있다. GM 대우 정규직 노동조합의 사내 폭력에 대한 미온적 대응, 기아차 화성 공장에서 정규직 조합원들까지 구사대에 가담한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은 이러한 정규직/비정규직의 갈등을 조장하고 확대하여 노동자들의 분할을 꾀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 이익이 수익성을 떠받치는 가운데 생산 부분의 이익 저하를 노동 유연화를 통해 해결하려는 자본의 전략이 계속되는 한 정규직의 밥그릇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GM 대우의 비정규직 확대의 이면에는 지구 저편 미국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리해고가 있는 것이다. 집회 한 번을 하려면 무수히 두들겨 맞아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오늘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내일일 수도 있다. 금융화와 노동 유연화라는 자본의 전략에 맞서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노동자 민중의 단결된 투쟁이 없다면. 20년 전 자본의 노동자 테러는 결국 민주노조운동의 분출과 성장을 막을 수 없었다. 부활한 노조파괴 공작과 노동자 테러를 격퇴하는 길은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분출과 성장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