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반대 운동의 파업 지지와 지원이 시급하다 [%=사진1%] 6월 말로 예정된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파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정부와 보수언론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8일 금속노조가 중앙위원회를 열어 대의원대회의 방침을 재차 확인하자 지배세력도 본격적으로 공세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특히 정부와 보수언론은 조합원과 노동조합, 완성차 노동자들과 다른 금속노동자들을 분리시켜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로막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들은 매년 임단투를 앞두고 정규직 노동자들의 “밥그릇 지키기”라고 비난하더니 이번에는 자동차산업은 한미FTA 수혜산업인데 왜 “밥그릇을 깨냐”며 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하는 척 한다. 결국 주는 대로 받아 먹어야지 파업은 절대 안 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그들은 파업 찬반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번 파업이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고 조합원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파업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현행법상 한미FTA 저지를 내걸고 파업을 하는 순간 이는 내부의 어떤 의사결정과정과는 상관없이 ‘정치파업’으로 불법이 되어 버린다. 총회를 갈음할 수 있는 대의원대회에서 파업이 결정된 이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한미FTA-중앙교섭을 연계한 조합원 찬반투표 방안'으로 변경되었다가 최종적으로 6월 8일 중앙위원회에서 다시 부결되는 과정은 파업을 실질화하기 위한 내부 토론의 과정이었다. 이를 두고 비민주니 뭐니 하기 전에 노동자들의 파업을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스스로의 반민주성부터 돌아 볼 일이다. 한미FTA로 이득을 보는 것은 자동차산업 자본이지 노동자가 아니다 정부와 언론은 한미FTA로 인해 한국의 자동차산업의 수출이 대폭 확대될 터이고 당연히 해당 산업의 노동자들에게 그 이득이 분배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미FTA로 한국 자동차의 수출이 큰 폭으로 증가할지도 의문이지만 한국의 자동차 수출 증가가 노동자들의 몫의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은 매우 적다. 오히려 한미FTA로 인한 국내외 자동차산업 자본의 세계적 이동의 자유의 확대와 소유권의 안전한 보장은 모든 자동차산업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하락시키고 권리를 파괴한다. 이미 세계적으로 과잉투자 된 자동차산업의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생산기지를 세계화하여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강화하고 고용 불안을 자극하여 노동조건을 악화시켜 왔다. 한미FTA, 나아가 모든 FTA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강화한다. 현대자동차를 예로 들어 보자. 현대자동차그룹은 2010년 해외공장 생산 규모를 현행 25%에서 50%인 310만대까지 확장하고 국내 공장은 내수를 해외 공장은 현지 판매를 전문화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현재 북미 지역에 수출되는 자동차 중 현지 생산 비율은 이미 절반을 넘었고 더 증가할 전망이다. 한미FTA는 국내 자동차 자본의 미국 진출에 더욱 좋은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결국 대미 수출의 증가로 인한 한국 현지에서의 자동차 생산의 증가분은 매우 적은 수준일 것이다. 당연히 추가적인 투자, 새로운 고용의 창출분도 매우 적다. 또한 대미 수입의 증가로 인한 내수시장 중심의 국내 공장의 생산량 감소를 고려하면 전체적으로 국내 공장의 물량의 감소와 이에 따른 구조조정이나 인력 감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한편 쌍용자동차의 사례는 외국인 직접투자의 확대가 노동자에게 미치는 파국적 결과를 잘 보여준다. 중국계 자본인 상하이 자동차에 매각된 이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사측의 지속적인 구조조정을 겪으며 비정규직의 정리해고와 현장 배치전환 등 극심한 고용불안에 시달려 왔다. 파업투쟁은 사측의 자본철수의 위협 속에 어려움을 겪었고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전반의 실리적, 타협적인 경향은 강화되어 결국 현 집행부가 “회사 측이 고용안정과 투자의 약속을 지킨다면 파업을 하지 않겠다”며 굴욕적 합의를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한미FTA의 체결로 인한 이러한 초민족적 자본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 진다. ‘이행의무부과금지조항’ 하나만으로도 고용승계 의무, 내국인 일정 비율 고용 의무, 기술이전, 현지생산품 사용 의무 등의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한미FTA로 인해 더욱 강화될 자본의 세계화는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을 자본에게 제공한다. 일국에서의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되고 노동조합의 힘이 커지면 생산물량을 해외로 조정해버리면 그만이다. FTA를 통한 투자의 자유화 확대와 투자한 자본의 소유권에 대한 보장은 이러한 자본의 전략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일부 수출확대 등으로 인한 이득은 노동자 사이의 세계적 경쟁을 활용할 수 있는 자본가에게 돌아갈 뿐이다. 정치 총파업 남발한다? 정치적 투쟁이 부족하다! 물론 농민들이나 경쟁력이 취약한 산업의 노동자들에 비해 자동차산업의 노동자들에게 한미FTA 끼칠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 나쁜’ 수 있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노동자대중의 전반적인 소득이 하락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공격으로 자신감을 잃은 조합원들에게 FTA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당장의 고용안정과 소득의 확보라는 실리적 선택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민주노총의 정치투쟁에 금속노동자들이 또다시 동원되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있다. 지배세력은 이러한 약점을 적극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일부 조합원들이 노조 게시판에 올린 총파업 반대 글을 근거로 전체 조합원을 동요시키고 완성차 4사의 지부장들이 “금속노조에 투쟁계획을 변경 또는 축소할 것을 건의키로 했다"며 완성차 조합원과 비 완성차 조합원을, 노조와 조합원을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 금속노조는 이러한 보도가 명백한 왜곡보도라며 강력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공세를 막아 내려면, 한미FTA가 노동자들에 미칠 영향을 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자본의 세계화 전략과 이에 따른 구조조정의 문제와 결합시켜 보다 구체적으로 선전하고 조합원들을 설득시키고 투쟁의 의지를 고양시켜야 한다. 현대차․기아차의 국내 자본의 세계화 전략, 쌍용차와 GM대우와 같은 외국 자본의 세계화 전략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고용을 위협하고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켜 왔음을 생생하게 폭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본의 세계화와 해외 노동자들의 착취를 용인하는 대신 국내 노동자들의 고용의 안정과 임금을 방어하고자 했던 독일이나 미국의 자동차 노동자들이 결국은 자신들의 고용과 임금마저 지킬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현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자본의 세계화와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FTA나 WTO 등에 대한 전 세계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만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단결과 파업에 대한 권리를 지킬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이렇게 한미FTA 반대 투쟁이 가지는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결합시켜 이른바 정치 총파업에 대한 기층 조합원들의 불만을 넘어서야 한다. 파업투쟁의 요구에 조합원의 보다 직접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요구를 끼어 넣는다거나 정치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조합원들의 사기저하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관심 하락의 원인은 노조가 ‘정치’적 투쟁을 너무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조합원들의 이해와 정치적 요구를 결합시키기 위한 교육과 선전, 실천투쟁이라는 ‘정치적’ 과정의 부족, 다시 말해 ‘정치’적 투쟁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6월 총파업 전선에서 밀리면 산별교섭도 없다 파업전선을 교란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산별중앙교섭이다. 지난 12일 열린 금속노조 4차 중앙교섭에서 사용자대표는 “(한미FTA 파업투쟁이) 노사간 불신을 조장하여 향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하루속히 산별교섭의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파업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다. 산별중앙교섭 성사를 미끼로 노동조합을 길들이겠다는 속셈이다. 금속노조의 현 집행부는 산별중앙교섭의 성사를 올 해 투쟁의 사활적인 과제로 잡고 이에 모든 힘을 기울여 왔다. 정갑득 위원장은 노동부 장관을 만나고 대기업 임원을 만나면서까지 중앙교섭의 성사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여전히 대기업들이 꿈쩍도 안 하고 있는 현실은 산별중앙교섭의 성사가 정권이나 자본과의 적당한 타협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자본은 노동조합을 확실히 길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나 아니면 교섭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인한 이윤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을 때만 교섭에 응할 것이다. 전자는 운동적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을뿐더러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얻을 수 있는 실리도 없다. 답은 당연히 후자다. 문제는 현재의 금속노조가 후자와 같은 투쟁을 조직할 충분한 조직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해 아무도 자신 있게 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러다보니 중앙교섭 성사를 제1의 목표로 삼고 있는 지도부는 적절한 타협을 통해 교섭을 성사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중앙교섭 성사의 목표를 현장 투쟁의 활성화, 조합원의 단결과 연대의 강화라는 운동적 목표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또한 한미FTA 총파업이 산별교섭성사를 더 어렵게 할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산별교섭성사를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일뿐더러 현실 근거도 없다. 이미 산별교섭성사는 정부와 자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가가 아니라 산별노조의 투쟁이 그들을 압도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6월 말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임단투 승리와 산별노조의 미래를 좌우할 그 첫 번째 싸움터이다. 6월말 한미FTA 저지 파업투쟁의 대중적 성사는 7월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가져다 줄 것이다. 반면 지배세력의 공세에 주저앉는다면 산별교섭을 미끼로 노조를 길들이려는 자본의 전략은 한층 더 힘을 받을 것이고 노동조합 내에서도 타협적인 경향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금속노조 파업에 대한 사회운동의 지지와 연대가 시급하다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노동자들의 이해와 무관한 정치 총파업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이해를 달성하기위한 ‘정치’적 행동이다.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일부 노동자의 배타적 이익을 지키는 파업이 아니라 노동자 전체의 보편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파업이다.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산별교섭의 ‘폭탄’이 아니라 산별을 통한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한다는 산별노조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시험대이다. 한미FTA 저지 총파업은 일부 노동자의 ‘밥그릇 지키니’나 혹은 ‘밥그릇 깨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밥상’을 지키는 투쟁이다. 지배세력의 공세에 지도부와 활동가들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더 많은 교육과 선전을 통해 조합원들의 동요를 막고 파업대오를 든든하게 꾸려야 한다. 그동안의 수많은 총파업 투쟁처럼 형식적 조직화, 동원식 조직화가 아니라 그야 말로 ‘정치적’인 조직화가 필요하다. 또한 정부와 언론의 공세에 대한 한미FTA 반대 운동 전체의 적극적인 대응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정부와 언론의 금속노조 총파업 때리기를 비판하고 금속노조를 방어하는 흐름이 미약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심지어 한미FTA 저지에 앞장서 왔던 프레시안조차 “산별교섭에 실질적인 '폭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냈다.("금속노조의 'FTA 총파업', 산별교섭에 걸림돌 되나", 6월 12일자) 하지만 진정 한미FTA를 반대한다면 금속노조의 한미FTA 저지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정부의 공세를 비판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정부의 칼 끝은 단지 금속노조 만이 아니라 한미FTA 반대 운동 전체를 향하고 있다. 정부의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다소 주춤하고 있는 한미FTA 반대 운동이 이번 총파업 투쟁을 계기로 다시 활성화될 것을 저들은 두려워하고 있다. 금속노조 총파업 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적극적인 지지와 연대의 의사를 표명하자. 정부를 상대로 금속노조와 한미FTA 투쟁에 대한 탄압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자. 민주노총 조합원 나아가 노동자 전체가 한미FTA 반대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자. 노동자와 시민, 정규직과 비정규직, 금속 노동자와 비금속 노동자의 분할을 넘어 6월 한미FTA 저지를 위해 단결하자.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의 문제점과 해결방안 토론회 자료 [내용] 1. 발제문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 2. 토론문- 새로운 고용형태인 ‘무기계약직’ 창설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3. 현장 사례 [현장사례1]한국산업인력공단:한국산업인력공단 비정규직 대책의 문제점 [현장사례 2] 노동부 비정규직 : 노동부가 앞장서는 비정규직 차별과 편법사용 [현장사례 3]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 : 비정규직 해고, 외주화에 시달리는 학교비정규직 [현장사례 4] 도시철도 비정규직 : 정부가 폐기한다던 ‘인사관리표준안’으로 계약서 강요 [현장사례 5] 철도공사 비정규직 : 무기계약전환 해보았자 차별고착, 정작 투쟁하는 비정규직 외면 [현장사례 6] 정부출연연구기관 비정규직 : 정부출연연구기관 비정규직 대책의 문제점 [현장사례 7] 국립대병원 비정규직 : 국립대병원 비정규직 대책의 문제점 [현장사례 8] 지방자치단체 비정규직 : 지방자치단체들이 엉망인 이유, 잘못된 정부대책 때문이다. [토론문] 서울시 비정규직 대책과 이후 활동 계획
1차웹자보
비정규악법에 맞서 승리하기 위하여 [%=사진1%]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반격이 시작되다 법안이 상정될 때부터 충분히 예상되었듯 비정규악법 시행을 앞두고 대규모 해고, 계약해지 와 외주용역화 사태가 번지고 있다. 7월부터 시행될 ‘비정규직 보호 법안’이 결코 보호 법안이 아니라 희대의 악법임은 더 이상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미 현실에서는 전체 규모를 파악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수의 노동자들이 임의로 계약해지를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장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또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정규노동자들 스스로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전면적인 투쟁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랜드 일반노조와 뉴코아 노조는 현장 노동자들의 극심한 고용불안, 해고와 외주화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고 있고 10일 공동총파업에 돌입한다. 0개월 근로계약서까지 나도는 마당에 유통노동자들이 단결해 투쟁전선을 구축하지 않고서는 결코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특수고용노동자들이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총력 투쟁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공공부문, 각종 민간 서비스부문 노동자들이 비정규악법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투쟁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게다가 건설노동자들도 타워크레인 노동자들이 건설 현장의 70%를 마비시키며 6월 투쟁의 포문을 연 것을 필두로 덤프, 레미콘 노동자들도 파업투쟁을 결의하였다. 사무금융의 코스콤 비정규 노동자들도 불법파견을 철폐하고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이러한 비정규직 주체들의 투쟁을 중심으로 6월 비정규직 악법에 대한 저항이 커지고 있다. 비정규악법으로 인해 그야말로 벼랑끝으로 몰리고 있는 비정규 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의 주체로 나서고 전선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악법 철폐 투쟁전선을 구축하자 비정규직 문제가 전사회적인 문제가 된 것은 오래지만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비정규 악법으로 인한 비정규직 노동권 말살과 비정규직 양산이다. 2년의 기간 내에서 계약직과 파견직을 무한정 쓸 수 있도록 하는 비정규악법 시행을 앞두고, 사용자는 해고를 자행하고 정부는 현실을 외면하며 이를 부추기고 있다. 지금도 이러한데 7월 이후 이 법이 시행된다면 더욱 광범위한 해고사태가 발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노동자운동은 비정규악법 투쟁전선을 구축하는데 주저해서는 안된다. 시행령 개입에만 몰두해 비정규악법 자체를 폐기하는 전선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다면 시행령 통과 이후 투쟁을 확대하기 힘들 것이다. 특히 비정규악법이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이에 대한 대응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운동은 6월에 비정규직 악법 철폐투쟁을 중심으로 비정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비정규 투쟁을 강화하며 투쟁주체를 확대해야 한다. 비정규악법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 첫째, 우선 비정규 악법의 실체를 끊임없이 알려내고 투쟁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정부는 무기근로계약 전환, 비정규직보호대책 등의 기만적인 선전을 통해 정부가 마치 비정규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는 양 행세하고 있다. 실제 생활에서 불안정한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비정규악법 때문이라는 점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정부의 각종 대책이 발표될 때마다 그 대책들의 좋은 이름들 때문에 쉽게 현혹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맞서 비정규직악법이 실제 노동현장에서 노동의 불안정화를 더욱 심화하고 있음을 폭로해야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신봉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노동자 생존권을 말살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내고 이러한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함을 선전해야 한다. 둘째, 대량계약해지, 외주용역화 되고 있는 노동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 최대한 지지 지원 투쟁을 전개하는 것과 동시에 투쟁하고 있거나 투쟁을 준비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모아내 공동 투쟁으로 투쟁을 집중해야 한다. 뉴코아노조와 이랜드노조 공동투쟁과 같은 연대 투쟁을 활성화시키고 공동의 전선을 구축하며 이를 전체 노동자 투쟁으로 확대시켜야 한다. 여기저기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만들어내고 투쟁의 기운을 북돋우고 연대의 분위기를 형성하면 전반적인 노동자 투쟁의 사기를 높일 수 있고, 그러한 활발한 투쟁들을 악법 폐기 투쟁으로 모아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산별임단투 투쟁에서 비정규직 노동기본권을 쟁취하고 정규직-비정규직이 실질적인 연대 투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금속산별을 필두로 하여 산별노조는 비정규 노동자 조직화와 노동권 쟁취를 중심에 놓고 투쟁을 조직하여 비정규 악법 폐기 투쟁전선 구축에 복무할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현장과 지역의 활동가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단지 쪽수가 많은 하층 노동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의 승패는 현 노동자운동의 혁신과 새로운 주체 형성을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노동자운동 주체들이 비정규악법에 대해 공통된 인식과 실천과제를 갖고 투쟁전선을 구축해 나갈 때 노동자운동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하고 계급형성에 복무할 수 있을 것이다. 뜨거운 6월, 비정규 투쟁을 강화하고 투쟁주체를 확대하자!
* 6월 9일(토) 개최된 민주노총 6월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배포한 사회화와 노동 특별호 2007년 2호 입니다. [내용] - 비정규악법 폐기! 투쟁주체를 확대하자 - 무기계약 전환요구는 대안이 아니다 - 한미 FTA 체결저지 할수있다 - 자이툰부대 철군을 위한 반전행동
6월 2일, 故 허세욱 열사의 49재 집회가 열렸다. 연단에 오른 많은 이들이 죄스럽다는 얘기를 했고 나 역시 그랬다. 메이데이나 5·18 집회 등이 있긴 했지만, 허세욱 열사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한미 FTA 반대를 내걸고 개최한 사실상 최초의 대중 집회였기 때문이다. 협상이 어떤 식으로든 타결되고 나면, 이미 지난 일인데 시비를 가려봐야 뭐하느냐 하는 분위기 때문에 투쟁의 파고가 일시적으로 잦아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정부가 협상문 공개를 차일피일 미루는 상황에서, 협상문이 공개될 때까지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지지 못한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객관적 이유를 헤아린 다음에도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이었으니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식의 논리로 빠져나갈 수 있는 죄책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한미 FTA 폐기, 노무현 정권 퇴진’이라는 열사의 유지를 실현하지 못하는 우리 운동의 가난함, 그 무력함에 대한 서러움이 이 죄책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한미 FTA를 둘러싼 갈등과 민중의 몫소리가 정치적 논쟁의 장에서 밀려난 다음, 청와대와 보수언론이, 노무현과 한나라당이, <참평포럼>과 ‘중도통합세력’이 권력을 둘러싸고 벌이는 이전투구만이 연일 언론을 뒤덮으면서, 발본적이고 정치적인 갈등에 대한 동참과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대중들에게도 우리는 무거운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사회운동』 75호에서는 74호에 이어 FTA와 신자유주의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실었다. 이번 호에서는 특히 사례를 중심으로 한 비판을 담았다. 특집에서는 5월말 6월초에 산별 출범 이후 최초의 임단투를 앞두고 있는 산별 노조의 현실과 쟁점을 다뤘다. 이번 호부터 몇몇 꼭지가 신설되었다. 다른 사회운동들과의 대화와 토론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공간으로 <기획>을 신설했고, 그 첫 번째 순서로 농민운동의 전망과 식량 주권 문제를 다뤘다. 또 독자들이 『사회운동』의 글에 관해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의 하나로 <독자평>을 신설했으며, 지금까지 주로 집행위원들 중심으로 작성되었던 <갈월동 기행>도 회원들이 『사회운동』과 <사회진보연대>, 그리고 민중운동 전반에 대한 의견을 담는 꼭지로 성격을 변경하였다. <책과 나> 역시 회원들이 기획하는 꼭지로 재출발하고, <사회진보연대>의 일상적 활동을 보고하는 <갈월동 통신>을 신설하였다. 이와 함께 조만간 그동안 요구가 많았던 교육 관련한 꼭지를 신설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 협상문은 공개되었고, 6월 말 부시와 노무현의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으며, 한미 FTA 반대를 핵심 기치로 하는 금속노조 파업과 한미 FTA 전면 무효화 총궐기 등 대중투쟁 계획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논쟁과 투쟁을 일으킬 때다. “민주주의의 정통은 노사모에 있었다.”는 오만방자한 노무현과 지배계급에게서 민주주의를 되찾아 오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들, 그리고 시민들 간의 너른 대화와 토론 공간을 만들어 내자. 그 길에서 『사회운동』이 자그마한 몫이라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를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장 진 범 | 편집부장
20년 전 6월 10일, 명동성당 청년단체 연합회 소속 조그만 단체의 회원이자 증권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었던 나는 시청에서 열리기로 했던 6·10 국민대회(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결성 이후 첫 국민대회)에 참가하려 했다가 하루 종일 최루탄과 백골단을 피해 이리저리 쫓겨 다녔다. 물론 국민대회는 보지도 못했다. 당시엔 오늘날처럼 합법적으로 집회신고를 하고 성대하게 국민대회를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어서, 중간에 성공회교회 안에서 국본 주요 지도자들 몇 분이 모여 국민대회를 치렀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도 대회는 치렀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을지로 입구 근처에서 텅 빈 거리를 보며 오늘 투쟁도 이걸로 끝나나 하며 아쉬워하고 있던 차, 퇴계로에선 아직 싸움이 진행 중이라는 얘기를 전해 듣고 급히 퇴계로로 달려갔다. 깨진 돌과 돌을 실어 나르는 데 쓰인 리어카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찾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많은 시위대들로 거리는 어지러웠지만 퇴계로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그리고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진압경찰을 격퇴시키기 위해 여기저기서 날아다니는 화염병으로 거리는 오히려 환했다. 여길 못 들르고 집에 갔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뒤 시위대는 조금 더 싸운 뒤 자연스럽게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명동성당이 퇴계로와 거리도 가까운 까닭도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명동성당과 천주교회는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발언과 행동을 곧잘 했기 때문에 시위대가 명동성당을 자연스럽게 농성 장소로 선택한 듯하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니던 복음주의적 개신교회를 대학에 온 후 어렵게 작파하고 교회를 한동안 다니지 않다가 군대에서 ‘졸병’의 권유가 있었긴 하지만 부대 근처 가까운 천주교회인 명동성당엘 나가기 시작한 데에도 천주교회와 명동성당의 이런 모습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 6월 항쟁의 시작은 이랬다. 물론 이 날이 있기까지는 광주항쟁 이후 야당과 재야 및 학생운동 세력의 지속된 투쟁이 있었다. 굵직굵직한 것만 꼽아보아도 김영삼 26일 단식사건, 미 문화원 점거 투쟁, 신민당 결성 및 2·12 총선 투쟁과 개헌현판식 투쟁,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 구로 동맹파업 투쟁, ‘서울대 연합시위 사건’, ‘인천 사태’와 이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일어난 권인숙씨 성고문에 대한 규탄 투쟁, 대학생 전방입소 거부 투쟁, ‘건대 사태’,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투쟁’ 등 무수하다. 이런 투쟁이 있을 때마다 정권이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공장과 학원가에 침투한 좌경용공 세력’ 운운하며 반공이데올로기를 전 국민에게 주입시켜도 투쟁은 연이어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조직이 생겼으며, 꼭 열혈 활동가가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투쟁 과정에서 경찰서와 감옥엘 들락거려야 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투쟁은 두 차례(1987년 2월 7일, 3월 3일) 열렸는데 이 때 경찰에 잡혀 들어간 시위대 숫자가 각각 3~4천 명을 족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내가 운동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하면서 조직내외를 오가는 중요한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어서 정확한 이야기는 아닐 수 있겠으나, 명동성당 농성은 요즘의 농성처럼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한다. 물론 농성자들 중에 일부 그런 생각을 가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당시에는 심야 투쟁이 일반적이어서 그 자연스러운 연장으로 농성 투쟁을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고 이후 중요한 투쟁 시기까지 투쟁 에너지를 이어간다는 정도로 농성 투쟁을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나도 농성 첫날을 함께 했는데, 선전홍보나 농성단 뒷바라지 등을 명동성당 청년단체 연합회원들이 분담했던 것만 보아도 농성 주체들이 사전에 튼튼히 준비된 것은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동성당 농성을 지속하여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를 철회시키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지 않았나 싶다. 당연히 국본 주요 관계자들이 결합하거나 결합하게 하려는 노력조차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농성 시작 초기에는 성당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긴 했지만 들어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들어올 수는 있었고, 명동성당 안에 들어온 사람들도 ‘문화관’에서 농성을 하는 농성대오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는 이야기이지만, 명동성당 농성 대오에서 한 명의 ‘스타’를 배출했는데, 바로 아직도 활동을 하고 계시는 ‘명동 할아버지’ 이천재 선생이시다. 그는 젊은 사람들 속에 있는 몇 안 된 나이 드신 분이었고 머리가 하해서 쉽게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연설 솜씨나 발언 내용이 빼어나 농성단 안에서 유명해졌다. 그 분은 농성단 첫날 회의에서부터 매우 조리 있고 내용 있는 발언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는데, 초자 활동가인 나에겐 매우 인상적이었다. 명동성당 청년단체에서 배정받은 선전홍보팀의 일원으로 밤에 잠깐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난 첫날 농성을 하고 아침에 명동성당을 나와 을지로 입구 근처 회사에 출근했다가 퇴근 후 비밀스러운 길을 따라 명동성당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아직도 내 머리 속에 선명한 사진으로 박혀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명동성당 주변 을지로 등지에는 명동성당으로 들어가려는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낮부터 공방이 있었고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다. 당연히 길거리에는 사람들도 평소보다 적었다. 그런데 어렵게 성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성당 마당의 하얀 돌과 벽돌들 위로는 아직 채 지지 않은 6월의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앉거나 혹은 서거나 각자 자유로운 포즈로 약간의 승리감에 젖어 이런 저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여기저기서 지원을 해서인지 성당 마당 여기저기 빵이 널려 있거나 쌓여 있거나 했다. 자욱하고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뒤덮인 바깥 거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성당 안의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 한마디로 명동성당은 또 다른 해방구였던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서 오현우와 한윤희가 숨어살던 갈뫼의 분위기와 비교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끄러운 세상과 격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지극한 평화와 안온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아무튼 투쟁으로 쟁취한, 그리고 투쟁열기가 가득했던 해방구 퇴계로와 명동성당 안의 평화로운 해방구, 둘 다 87년 투쟁에서 잊지 못할 장면이다. 앞에서도 약간 비쳤지만, 당시의 투쟁은 요즘처럼 몇 시에 시작해서 몇 시에 정리 집회를 하는 식의, 일정한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의식(儀式)처럼 진행하는 박제화된 집회나 투쟁이 아니었다. 밤늦게까지 경찰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싸웠고, 을지로에서 싸우는 사람들은 ‘퇴계로나 종로에서도 열심히 싸우고 있겠지’ 하며 싸웠고, 퇴계로나 종로에 있는 사람들은 ‘을지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 하고 싸웠다. 그리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신나게 싸웠다. 멀리 있는 백골단에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흡사 멋들어진 춤사위였고, 얼굴 표정은 자기가 세운 계획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표정, 즉 결의와 성취감이 교차하는 표정 딱 그것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신나게 열심히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긴 하지만 확실히 최루탄과 백골단의 공이 컸다. 싸우다 운이 없으면 잡히기야 하겠지만 앞에서 날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과 그 책임자인 파쇼 전두환을 그냥 두고 뒤돌아 집에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87년 이후 도입된, 신고만으로 합법집회가 가능하게 된 집회신고제, 백골단 해체, 최루탄 미사용 등의 제도 변화나, 문민정권의 등장과 같은 일들은 민주적 공간을 넓힌 계기이기도 하지만 운동세력을 순치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후자의 측면이 훨씬 더 커 보인다. 그런데도 운동세력은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분위기 속에서 별 생각 없이 순치의 길을 달려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한 당시의 집회나 투쟁은 이렇다 할 의식(儀式)이 별로 없었고 그래서 의식을 모르는 일반 시민들이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거리낌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 요즘, 조직원만의 모임이 아니라 대중 집회나 대중투쟁이 의식(儀式)처럼 진행되는 것은 문제다. 의식(儀式)이 새로운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수단이 되지는 않는지 되돌아 볼 일이다. 연단, 연설, 노래, 동작, 행진, 깃발, 투쟁방식 등 모든 부면에서. 대중 집회나 대중투쟁이 의식을 집전하고 의식을 이해하는 사람들만의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명동성당은 촛불집회, 점심시간을 이용한 인근 지역 직장인들의 방문, 명동 일대에서 벌어진 화이트칼라의 시위, 농성단 해산, 6월 18일 대규모 2차 국민대회 등으로 이내 뚫렸다. 인천 답동 성당과 부산의 어디에선가도 농성이 진행되었지만 국면은 분명 농성 국면은 아니었다. 6월 18일과 6월 26일의 2, 3차 국민대회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민중들의 대거 진출이 있었던 것이다. 6월 18일 대회에서도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장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신세계 앞 분수대 사건. 신세계 앞 분수대를 사이에 두고 남대문 시장과 신세계 앞 일대의 시위대와 최루탄 발사기로 무장한 채 소공동 쪽에 포진해 있던 전경들 사이에 돌과 최루탄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이 있었는데, 순간 전경들이 분수대까지 밀고 들어오자 시위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돌과 육탄전을 이용해 상당히 많은 수의 전경들을 고립시켜 장비도 회수하고 전경들을 분수대에 빠뜨려 버렸다. 그 때까지 만날 전경들에게 쫓겨 다니기만 했던 시위대들은 분수대에 빠진 전경들을 보고 무척 통쾌해 했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조금 있다가 더 많은 전경들이 와서 다시 쫓겨나긴 했지만 말이다. 또 하나는 부산 시위 소식. 한참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가 저녁 네다섯 시 무렵이었을까? 식사를 하러 들어간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 식당 안 텔레비전에서 전국 각 지역에서 일어난 노도와 같은 시위대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어디 몇 천, 어디 몇 만’ 하는 보도가 이어졌는데, 부산 시위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규모도 10만 명으로 가장 많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인상적인 것은 화면으로 전해진 시위대의 분노와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부산 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이 정도면 이제 우리가 승기를 잡은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신세계 앞 분수대에서의 일시적이나마 작은 승리와 부산의 노도와 같은 시위대로 인해, 6월 18일은 6월 항쟁의 결정적인 날이 되었다. 6월 18일 이후 6월 26일에 다시 한 번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마침내 지배세력이 6·29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연이어 7월에서 9월 사이에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대규모 노동자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면 당시 민중들은 왜 그렇게 떨쳐 일어났을까? 지금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인명진 목사가 대변인이었던 국본이 결성되자마자, 국민대회를 몇 번 개최하지도 않았는데도 지배세력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진출한 이유를 허약하디 허약한 국본의 지도력과 조직력에서 찾을 수는 없다. 국본은 대대적으로 진출할 결의에 차 있는 민중들에게 판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민중들은 분명히 그 이전부터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2·12 총선과 개헌 현판식에 몰려든 민중들, 그리고 경찰서에 끌려가는 것을 불사하고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투쟁에 몰려든 민중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이유로는 우선 전두환 등 지배 세력의 파쇼 통치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자유는 전혀 없었고, 오로지 최루탄, 경찰력, 군대, 정보기관의 사찰 등 억압적 국가기구에 의해 정권이 유지되었고, 정권이 불러주는 내용을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관제 언론 및 어용 지식인만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숱한 사람들이 군대에서, 학원가에서, 공장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민중들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이런 파쇼 통치를 참을 수 없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둘째로는 경제적 모순의 심화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파쇼통치의 많은 부분도 이 경제적 원인과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한국 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고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뒤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강력한 경제위기 극복책을 시행해나간다. 노동법 개악, 정부 부문에서 대규모 해고 단행, 퇴직금 제도 개악, 임금 억제 정책과 같은 노동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고, 물가를 강력히 통제하였다(전두환 정권이 벌인 ‘3대 부정심리 추방운동’ 목록에는 ‘물가오름세 심리’도 들어있었다). 1986~7년에는 이런 공격과 1986년부터 불어 닥친 3저로 인해 자본의 이윤율이 급격히 개선되고 있었는데도, 이전부터 진행된 노동에 대한 공격과 임금 억제책은 지속되고 있었다. 내수침체로 자영업자들의 상태는 매우 안 좋았고, 수출대기업은 조출, 잔업, 노동 강도 강화로 노동자들을 혹사시켜 컬러텔레비전과 VCR을 계속 실어내 떼돈을 버는데 정작 그것을 만든 노동자는 빈털터리였다. 자영업자들과 사무 관리직들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노동자들도 7월~9월에 작업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투쟁을 벌이기 전, 6월 항쟁 거리시위에도 개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민중들의 대대적인 진출에는 이런 정치적·경제적 배경이 있었고, 1986년 2월 진행된 필리핀 민중혁명과 마르코스 축출도 한국 민중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1987년 투쟁에서 민중들은 무엇을 원했는가? 그리고 그것을 쟁취했는가? 부산 시위대의 투쟁에서부터 얘기를 풀어보기로 하자. 우선 1987년 6월 항쟁에서 부산 시위대 규모가 커진 것은 김영삼과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김대중을 빼고 광주 개헌 현판식에 몰려든 사람들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이 부산 시위대들이 김영삼을 지지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통해 김영삼을 대통령 시키려고 대거 시위에 나섰을까? 난 그랬을 수 있었다고 본다. 아니 그랬다고 이야기하는 게 사태를 더 정확히 보는 것일 테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 보자. 그러면 이들은 단지 김영삼을 대통령을 시키는 것 그 자체을 목적으로 삼았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다. 답은 ‘아니오’다. 그들은 김영삼을 통해서 자신들의 특정한 요구를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파쇼 세력과 기구의 일소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신장 및 제 권리의 확대와 경제적 형편의 개선과 억압과 착취의 제한 및 철폐 등이었을 것이다. 김영삼은 이들의 요구에 부응했는가? 그 이후 정치적 과정을 보면 김영삼은 이들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물론 김대중도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자신의 지지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전두환의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실시했고, 민중 생활의 어떤 측면에서는 전두환 때보다 더 못해지기까지 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한 카드는 노동자 민중들의 희생 하에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시키자는 ‘신자유주의’라는 카드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6월 항쟁에 참여하였을 민중들은 김영삼에게 실망한 뒤에는 김대중을 지지하고, 김대중에게 실망한 뒤에는 노무현을 지지하고, 이젠 노무현에 실망하고 이명박을 지지하려 하고 있다. 왜 민중들은 계속해서 배반당하면서도 비슷한 정치인을 계속해서 지지하고 있는가? 혹은 속을 줄 알면서도 지지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왜 그렇게 생명력이 강한 것인가?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알면 이 글의 제목에 넋두리라는 단어가 들어가진 않았을 것이다. 넋두리삼아 몇 마디 해 본다면 그 이유는 대안적 이데올로기, 즉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질적 부재 때문이 아닐까? 이번 프랑스 선거를 보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치세력의 몰락은 그 끝이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강력하던 프랑스 공산당이 2%의 지지도 못 얻었으니…. 임시변통은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후보 또는 다른 좌파 후보가 일정한 지지를 얻고 더 나아가서 그 이후 선거에서 오늘날 이명박의 자리를 넘겨받을 수도 있을지라도, 그것이 대수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없다면 민중들의 봉기를 맞이해서도 민중들의 해방의 열망을 여기저기로 흘려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1987년 6월의 퇴계로와 명동성당의 해방구를 다시 만들어내기 위해서 내가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 즈음에 1987년을 경험한 ‘87년의 자식들’ 중의 하나로 ‘운동’에 뛰어들어 20여 년이 흐른 지금, 답답해 자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