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민중의 권리와 투쟁을 세계화하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공식 개시되었다. 양국 정부는 미 행정부의 무역촉진권한1)의 소멸시점인 2007년 6월 30일로부터 역산하여, 그 전에 협상을 타결하기 위한 일정을 제출하고 있다. 이처럼 한-미 FTA는 그 일정에서부터 철저히 미국에 종속되어 있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하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해 이윤을 유지하는 초민족적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 한국 정부는 한-미 FTA가 GDP 최대 2% 성장, 일자리 10만 개 창출(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조사)의 효과를 낳을 것이라 선전한다. 하지만 미국과 FTA(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를 체결한 후, 자국의 농업이 파국을 맞은 멕시코의 사례와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복지가 축소되었던 캐나다의 사례는 한-미 FTA가 불러올 재앙을 경고하는 명백한 증거다. 한-미 FTA, 반민중적 글로벌 스탠더드의 확산 이번 한-미 FTA의 주요 내용과 그것이 낳을 효과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만 해도 그것이 가진 반민중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한-미 FTA 협상이 개시를 선언한 지난 2월 2일 롭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미국 상원 임시의장과 하원 의장에게 보내는 서신에 한-미 FTA 협상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적시했다. 그는 상품무역을 비롯하여 서비스 무역, 지적재산권, 투자, 정부조달, 원산지 규정, 투명성/반부패/규제개혁 등에 이르는 폭넓은 부분을 언급했으며, 미국의 상품과 서비스 수출,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한국의 법률 및 규제를 수정하고 한국 경제․사회 전반에 미국의 기준(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을 강제하겠다고 했다.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에서 난항을 겪고 있거나 회원국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 협상의 대상으로 포함되지 못한 의제를 한미 FTA에서는 다룰 것이며, 이를 위해 한국의 법률과 규제도 바꾸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이미 주어진 기준으로 삼고 있는 한국의 지배세력에게도 이번 한-미 FTA는 아주 유효한 계기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이번 협정을 개방을 통한 충격요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외부의 경쟁 압력을 끌어들여 비효율적인 산업을 정리하고, 국내 서비스 산업의 개선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한국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겠다는 의지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기간제/파견직 노동자에 대한 요건을 완화하는 비정규법안과 정리해고 자유화, 파업권 최소화, 노동운동 제도화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노사관계선진화방안과 같이 노동유연화를 한층 강화할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있다. 1997년 외화위기를 계기로 추진된 외환시장과 외국인 자본에 대한 자유화 조치도 이미 전면 개방 수준에 달하고 있으며, 꾸준하고도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공기업 민영화와 경제자유구역․기업혁신도시 등 자본의 투자와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계획은 민중의 노동권, 건강권, 교육권 등 기본적인 권리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민중의 삶을 위협하고 권리를 파괴하는 과정이었다. 한-미 FTA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경쟁력 강화, 글로벌 스탠더드 확산이라는 효과는 결국 민중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농업을 다 내어놓아라 WTO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에서 언제나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바로 농민이다. 외자유치를 통한 발전이라는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망 속에서 가장 효율성이 없다는 농업은 언제나 과감한 포기의 대상이었다.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출국 미국과의 협상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포트먼 대표는 이미 “한국과의 FTA는 미국의 농업생산자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말해 한-미 FTA의 주된 목표가 미국의 초국적 농기업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임을 명백히 밝혔다. 한-미 FTA를 통해 한국 농업이 입을 피해액은 최소 2조원(쌀을 제외할 경우)에서 최대 8조 8천억 원(쌀 포함)으로 추정되고, 이는 농업생산액의 10~40%에 달한다. 게다가 농업 개방을 FTA의 목표로 하는 미국은 거의 모든 농산물의 관세 인하 내지는 철폐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민감품목으로 지정되었던 쇠고기, 돼지고기, 양파 등의 품목도 협상 대상이 된다고 한다. 미국은 농지 면적이 한국의 105배에 달한다. 게다가 초국적 농기업들의 대량생산 체계에서 나오는 농산물의 가격이 한국 농산물의 가격과 경쟁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농업 개방과 이에 맞물리는 정부의 농업 포기 정책 속에서 농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WTO 협상을 준비한답시고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 농지법을 개정하여 농지를 관광이나 오락 시설을 위한 투기의 대상으로 만들려 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거나 어떻게든 농사를 지켜내려는 농민들은 조금이나마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빚을 내 기계를 사고, 시설을 만들고, 땅을 임대한다. 하지만 이는 빚의 악순환이다. 주변의 공장이나 식당에 나가 이중의 일로 자신을 혹사해야 겨우 먹고살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축산물을 포함한 거의 모든 농산물의 관세 인하와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 FTA는 한국 농업을 궤멸시키고 농민을 말살하는 수준에 이를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농산물의 자유무역은 세계 민중 대다수에게 재앙이다. 농민들은 토지와 농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농업 노동자로 전락한다. 초국적 농기업은 수출을 위한 농업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자국 민중의 식량에 대한 접근권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각종 자유무역협정에 농업이 의제로 포함되면서 대량수출을 위한 농업만이 살아남게 되며(농산물의 대량수출이 불가능한 한국은 농업을 포기한다), 민중의 식량이 되어야 하는 여러 작물이 수출 품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라진다.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의 면화, 커피 등의 특화작물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각종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농업생산량은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기아로 죽어가는 상황은 세계의 농업이 초국적 농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고 소농이 사라지면서 두드러진 가장 기막힌 현상일 것이다. 금융의 원리를 관철하는 서비스 협상 이번 한-미 FTA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 중 다른 하나는 서비스 부문이다. 서비스 부문의 경우 의료, 교육, 금융, 통신, 운송, 방송, 영화, 법률, 회계 등을 망라한다. WTO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에서 요구하는 의료 개방은 기본적으로 영리법인의 병원 설립과 초국적 제약회사들의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며, 이는 이번 한-미 FTA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육 역시 미국인의 국내 학교 설립 허용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그동안 노무현 정부는 경제자유구역으로부터 최근 제주도특별자치도 추진까지 의료와 교육 등의 공공 서비스 부분의 개방과 자유화를 위한 기반을 닦아왔고, WTO 서비스 협상에서도 이 두 분야를 자발적으로 개방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요로 하는 의료와 교육은 현재 초민족적 자본에게 매력적인 투자처로 인식되고, 그 결과는 끔찍하다. 약이 있고 병원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죽음을 강요받는 상황, 학교를 포기하거나 허울뿐인 공교육 하에서 최소한의 교육만 허용되는 상황이 현실이 되지 말란 보장은 없다. 게다가 이번 협정에서 미국은 통신 부문에서 기간통신사업자 외국인 지분 제한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미 공공법인에 대한 외국인 지분 제한을 대폭 완화했다. 언급되고 있는 기간통신사업자의 경우도 단계적으로 외국인 지분 소유 제한을 완화하여 1999년 7월부터는 지분의 49%까지 외국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마저 없애라는 요구를 지속해왔는데, 이번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이미 한국의 많은 공기업들이 외국인 자본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런 과정은 공공부문 민영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고, 이번 협정은 이런 흐름을 더욱 강화하여 그나마 남아있는 공기업의 민영화 흐름도 촉진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서비스 부문의 개방과 자유화는 일차적으로 직접적인 부의 유출을 가져온다. 한국 기업에 투자한 외국인 (투기)자본은 배당과 시세차익 등을 통해 엄청난 이윤을 챙겨왔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초민족적 자본의 장악력은 계속해서 증가해왔다(그리고 한국은 이미 금융세계화에 깊숙이 편입해있다). 이들이 관철시키는 금융의 원리는 금융적인 팽창(고도금융을 통한 잉여가치의 재분배)을 중심으로 한 자본의 이윤추구를 과정을 핵심으로 한다. 여기서는 주식시장 부양과 기업의 주가 상승이 중요하고, 이 때 주가는 구조조정을 통한 고용의 파괴, 노동의 유연화, 민영화․사유화 등이 진행될수록 상승한다. 금융의 원리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대립하지만, 자사주 매입, 정규직-비정규직 분할, 퇴직연금과 국민연금의 주식시장 투자 등을 통해 노동자 민중의 일상 자체를 금융의 원리로 포섭하거나 배제한다. 언급한 것처럼 이미 한국은 외환시장과 외국인 투자, 금융 부문에 있어서 거의 완전한 수준의 개방을 진행했다. 하지만 아직 송금제한, 외국인의 법률회사 설립 및 외국인 변호사의 국내 활동, 외국 회계법인 활동과 같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를 용이하게 하는 서비스 부분의 규제가 남아있다.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은 “한국 내 미국인 투자자들에게 미국의 법률적 원칙과 관행 아래서 부여될 수 있는 수준으로 주요 권리들을 보장하게” 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통신, 금융서비스, 전문직 서비스 등의 부문에 대한 시장접근상의 필요한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미국(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서도 미국인으로부터 미국식 기준을 가진 금융서비스(법률, 회계, 은행 등)를 받겠다는 것이다(미국의 기준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이것이 바로 한국정부가 경쟁을 통한 서비스 부문의 개선이다. 결국 투자를 보조하는 서비스 전체까지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정비하고, 한국 자본과 기업의 체질, 나아가 한국 경제와 사회 전반에 금융의 원리를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한-미 FTA를 저지하자!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양자간․다자간 협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자유무역 질서를 강화하려는 전략이 힘을 얻고 있다. WTO 체제를 보완하는 양자간․다자간 협정들은 WTO의 협상 규범을 기초로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강도 높은 자유무역 규범과 범위를 적용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확대․강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권, 식량주권(토지, 종자, 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통제권, 민중의 식량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 건강권(의약품 및 의료에 대한 접근권), 교육권을 비롯한 민중의 기본적인 권리와 삶이 파괴되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의 선두에 있는 것이 바로 미국(제국주의)이다. 한국은 금융세계화를 통해 세계를 수탈․착취하는 초민족적 자본과 자국의 초민족적 농기업을 위한 미국의 FTA 추진 전략의 우선 대상이 된 것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어떻게든 편입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버텨보려는 한국의 지배세력은 그에 기꺼이 응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FTA 반대 투쟁은 그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산업의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피해산업을 보호하자는 주장은 민중의 요구와 권리이기 어렵고,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의 투쟁을 분할할 가능성이 높다. 농업을 포기하고 얻어진 제조업의 이익이 제조업 노동자의 이익이 될 수 없을뿐더러 자유무역협정은 상품화와 노동유연화를 확대하는 금융의 세계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중의 더 많은 권리, 더 확장된 권리로부터 출발해야한다.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세계 민중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이 계속 발전하고 전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것이 자국의 산업, 특정한 부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노동권과 식량주권, 여성의 권리는 결코 배타적이지 않고 오직 함께 나아갈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와는 다른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2) 한-미 FTA가 불러올 재앙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기필코 저지시켜야 한다. 저항을 세계화하고 투쟁을 세계화하는 것이 한-미 FTA를 막아낼 수 있는 길이다. 노무현 정부와 지배 세력이 제시하는 자본의 논리, ꡐ산업별 효과ꡑ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노동, 식량, 자원, 문화, 지식이 이윤의 논리가 아니라 민중의 필요와 생산에 기초하여 평등하고 자유롭게 소통, 향유되는 다른 세계를 위한 투쟁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계의 민중들과 함께 만들어가자. 1)미 헌법상의 의회권한인 무역협상권을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에게 일정한 조건하에 위임한 것으로 , 이에 따라 의회는 협상 결과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만을 표할 수 있으며, 협정내용을 수정하지 못한다. 본문으로 2)이렇게 보자면 요즘 부각되고 있는 ‘스크린쿼터 사수’라는 요구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강풍이 몰아붙이는 문화시장 개방의 요구는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이는 저작권과 지적재산권을 매개로 지식과 문화를 상품화하여 민중의 문화와 지식에 대한 권리를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고, 문화산업에 대한 자본의 투자를 보장하라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에 따라 문화산업은 이미 상당 수준 금융화 되었는데, 특히 영화의 경우 금융시장을 통한 투자자금 모금이 이미 일반화되었다. 이런 문화산업의 금융화는 주주자본주의와 동일한 모습인데, 투자자들의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영화의 생산 자체가 철저히 투자자들의 의견에 종속된다. 투자자들의 권리가 최고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미국이 스크린쿼터 축소를 한․미 FTA의 선결조건으로 내건 것도 문화산업이 이미 자본의 매력적인 투자처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스크린쿼터가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가 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스크린쿼터는 언급한 문화산업의 금융화를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영화를 보호해달라는 요구고, 이는 민중의 문화에 대한 권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문화산업의 금융화는 문화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투자자의 권리, 자본의 권리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민중의 문화와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저작권과 지적재산권, 금융의 방식을 통한 문화의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소비문화 확대를 문제삼지 않는(삼을 수 없는) 스크린쿼터 사수 요구는 한국영화산업을 보호하자는 피해산업보호의 요구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민중이 스스로를 교육하고, 성숙할 수 있는 문화를 생산․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핵심이다. 스크린쿼터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 호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본문으로
-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민중의 권리와 투쟁을 세계화하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공식 개시되었다. 양국 정부는 미 행정부의 무역촉진권한1)의 소멸시점인 2007년 6월 30일로부터 역산하여, 그 전에 협상을 타결하기 위한 일정을 제출하고 있다. 이처럼 한-미 FTA는 그 일정에서부터 철저히 미국에 종속되어 있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하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해 이윤을 유지하는 초민족적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 한국 정부는 한-미 FTA가 GDP 최대 2% 성장, 일자리 10만 개 창출(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조사)의 효과를 낳을 것이라 선전한다. 하지만 미국과 FTA(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를 체결한 후, 자국의 농업이 파국을 맞은 멕시코의 사례와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복지가 축소되었던 캐나다의 사례는 한-미 FTA가 불러올 재앙을 경고하는 명백한 증거다. 한-미 FTA, 반민중적 글로벌 스탠더드의 확산 이번 한-미 FTA의 주요 내용과 그것이 낳을 효과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만 해도 그것이 가진 반민중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한-미 FTA 협상이 개시를 선언한 지난 2월 2일 롭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미국 상원 임시의장과 하원 의장에게 보내는 서신에 한-미 FTA 협상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적시했다. 그는 상품무역을 비롯하여 서비스 무역, 지적재산권, 투자, 정부조달, 원산지 규정, 투명성/반부패/규제개혁 등에 이르는 폭넓은 부분을 언급했으며, 미국의 상품과 서비스 수출,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한국의 법률 및 규제를 수정하고 한국 경제․사회 전반에 미국의 기준(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을 강제하겠다고 했다.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에서 난항을 겪고 있거나 회원국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 협상의 대상으로 포함되지 못한 의제를 한미 FTA에서는 다룰 것이며, 이를 위해 한국의 법률과 규제도 바꾸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이미 주어진 기준으로 삼고 있는 한국의 지배세력에게도 이번 한-미 FTA는 아주 유효한 계기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이번 협정을 개방을 통한 충격요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외부의 경쟁 압력을 끌어들여 비효율적인 산업을 정리하고, 국내 서비스 산업의 개선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한국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겠다는 의지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기간제/파견직 노동자에 대한 요건을 완화하는 비정규법안과 정리해고 자유화, 파업권 최소화, 노동운동 제도화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노사관계선진화방안과 같이 노동유연화를 한층 강화할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있다. 1997년 외화위기를 계기로 추진된 외환시장과 외국인 자본에 대한 자유화 조치도 이미 전면 개방 수준에 달하고 있으며, 꾸준하고도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공기업 민영화와 경제자유구역․기업혁신도시 등 자본의 투자와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계획은 민중의 노동권, 건강권, 교육권 등 기본적인 권리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민중의 삶을 위협하고 권리를 파괴하는 과정이었다. 한-미 FTA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경쟁력 강화, 글로벌 스탠더드 확산이라는 효과는 결국 민중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농업을 다 내어놓아라 WTO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에서 언제나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바로 농민이다. 외자유치를 통한 발전이라는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망 속에서 가장 효율성이 없다는 농업은 언제나 과감한 포기의 대상이었다.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출국 미국과의 협상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포트먼 대표는 이미 “한국과의 FTA는 미국의 농업생산자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말해 한-미 FTA의 주된 목표가 미국의 초국적 농기업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임을 명백히 밝혔다. 한-미 FTA를 통해 한국 농업이 입을 피해액은 최소 2조원(쌀을 제외할 경우)에서 최대 8조 8천억 원(쌀 포함)으로 추정되고, 이는 농업생산액의 10~40%에 달한다. 게다가 농업 개방을 FTA의 목표로 하는 미국은 거의 모든 농산물의 관세 인하 내지는 철폐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민감품목으로 지정되었던 쇠고기, 돼지고기, 양파 등의 품목도 협상 대상이 된다고 한다. 미국은 농지 면적이 한국의 105배에 달한다. 게다가 초국적 농기업들의 대량생산 체계에서 나오는 농산물의 가격이 한국 농산물의 가격과 경쟁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농업 개방과 이에 맞물리는 정부의 농업 포기 정책 속에서 농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WTO 협상을 준비한답시고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 농지법을 개정하여 농지를 관광이나 오락 시설을 위한 투기의 대상으로 만들려 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거나 어떻게든 농사를 지켜내려는 농민들은 조금이나마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빚을 내 기계를 사고, 시설을 만들고, 땅을 임대한다. 하지만 이는 빚의 악순환이다. 주변의 공장이나 식당에 나가 이중의 일로 자신을 혹사해야 겨우 먹고살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축산물을 포함한 거의 모든 농산물의 관세 인하와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 FTA는 한국 농업을 궤멸시키고 농민을 말살하는 수준에 이를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농산물의 자유무역은 세계 민중 대다수에게 재앙이다. 농민들은 토지와 농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농업 노동자로 전락한다. 초국적 농기업은 수출을 위한 농업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자국 민중의 식량에 대한 접근권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각종 자유무역협정에 농업이 의제로 포함되면서 대량수출을 위한 농업만이 살아남게 되며(농산물의 대량수출이 불가능한 한국은 농업을 포기한다), 민중의 식량이 되어야 하는 여러 작물이 수출 품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라진다.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의 면화, 커피 등의 특화작물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각종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농업생산량은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기아로 죽어가는 상황은 세계의 농업이 초국적 농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고 소농이 사라지면서 두드러진 가장 기막힌 현상일 것이다. 금융의 원리를 관철하는 서비스 협상 이번 한-미 FTA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 중 다른 하나는 서비스 부문이다. 서비스 부문의 경우 의료, 교육, 금융, 통신, 운송, 방송, 영화, 법률, 회계 등을 망라한다. WTO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에서 요구하는 의료 개방은 기본적으로 영리법인의 병원 설립과 초국적 제약회사들의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며, 이는 이번 한-미 FTA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육 역시 미국인의 국내 학교 설립 허용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그동안 노무현 정부는 경제자유구역으로부터 최근 제주도특별자치도 추진까지 의료와 교육 등의 공공 서비스 부분의 개방과 자유화를 위한 기반을 닦아왔고, WTO 서비스 협상에서도 이 두 분야를 자발적으로 개방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요로 하는 의료와 교육은 현재 초민족적 자본에게 매력적인 투자처로 인식되고, 그 결과는 끔찍하다. 약이 있고 병원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죽음을 강요받는 상황, 학교를 포기하거나 허울뿐인 공교육 하에서 최소한의 교육만 허용되는 상황이 현실이 되지 말란 보장은 없다. 게다가 이번 협정에서 미국은 통신 부문에서 기간통신사업자 외국인 지분 제한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미 공공법인에 대한 외국인 지분 제한을 대폭 완화했다. 언급되고 있는 기간통신사업자의 경우도 단계적으로 외국인 지분 소유 제한을 완화하여 1999년 7월부터는 지분의 49%까지 외국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마저 없애라는 요구를 지속해왔는데, 이번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이미 한국의 많은 공기업들이 외국인 자본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런 과정은 공공부문 민영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고, 이번 협정은 이런 흐름을 더욱 강화하여 그나마 남아있는 공기업의 민영화 흐름도 촉진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서비스 부문의 개방과 자유화는 일차적으로 직접적인 부의 유출을 가져온다. 한국 기업에 투자한 외국인 (투기)자본은 배당과 시세차익 등을 통해 엄청난 이윤을 챙겨왔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초민족적 자본의 장악력은 계속해서 증가해왔다(그리고 한국은 이미 금융세계화에 깊숙이 편입해있다). 이들이 관철시키는 금융의 원리는 금융적인 팽창(고도금융을 통한 잉여가치의 재분배)을 중심으로 한 자본의 이윤추구를 과정을 핵심으로 한다. 여기서는 주식시장 부양과 기업의 주가 상승이 중요하고, 이 때 주가는 구조조정을 통한 고용의 파괴, 노동의 유연화, 민영화․사유화 등이 진행될수록 상승한다. 금융의 원리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대립하지만, 자사주 매입, 정규직-비정규직 분할, 퇴직연금과 국민연금의 주식시장 투자 등을 통해 노동자 민중의 일상 자체를 금융의 원리로 포섭하거나 배제한다. 언급한 것처럼 이미 한국은 외환시장과 외국인 투자, 금융 부문에 있어서 거의 완전한 수준의 개방을 진행했다. 하지만 아직 송금제한, 외국인의 법률회사 설립 및 외국인 변호사의 국내 활동, 외국 회계법인 활동과 같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를 용이하게 하는 서비스 부분의 규제가 남아있다.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은 “한국 내 미국인 투자자들에게 미국의 법률적 원칙과 관행 아래서 부여될 수 있는 수준으로 주요 권리들을 보장하게” 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통신, 금융서비스, 전문직 서비스 등의 부문에 대한 시장접근상의 필요한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미국(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서도 미국인으로부터 미국식 기준을 가진 금융서비스(법률, 회계, 은행 등)를 받겠다는 것이다(미국의 기준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이것이 바로 한국정부가 경쟁을 통한 서비스 부문의 개선이다. 결국 투자를 보조하는 서비스 전체까지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정비하고, 한국 자본과 기업의 체질, 나아가 한국 경제와 사회 전반에 금융의 원리를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한-미 FTA를 저지하자!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양자간․다자간 협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자유무역 질서를 강화하려는 전략이 힘을 얻고 있다. WTO 체제를 보완하는 양자간․다자간 협정들은 WTO의 협상 규범을 기초로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강도 높은 자유무역 규범과 범위를 적용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확대․강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권, 식량주권(토지, 종자, 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통제권, 민중의 식량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 건강권(의약품 및 의료에 대한 접근권), 교육권을 비롯한 민중의 기본적인 권리와 삶이 파괴되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의 선두에 있는 것이 바로 미국(제국주의)이다. 한국은 금융세계화를 통해 세계를 수탈․착취하는 초민족적 자본과 자국의 초민족적 농기업을 위한 미국의 FTA 추진 전략의 우선 대상이 된 것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어떻게든 편입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버텨보려는 한국의 지배세력은 그에 기꺼이 응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FTA 반대 투쟁은 그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산업의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피해산업을 보호하자는 주장은 민중의 요구와 권리이기 어렵고,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의 투쟁을 분할할 가능성이 높다. 농업을 포기하고 얻어진 제조업의 이익이 제조업 노동자의 이익이 될 수 없을뿐더러 자유무역협정은 상품화와 노동유연화를 확대하는 금융의 세계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중의 더 많은 권리, 더 확장된 권리로부터 출발해야한다.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세계 민중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이 계속 발전하고 전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것이 자국의 산업, 특정한 부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노동권과 식량주권, 여성의 권리는 결코 배타적이지 않고 오직 함께 나아갈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와는 다른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2) 한-미 FTA가 불러올 재앙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기필코 저지시켜야 한다. 저항을 세계화하고 투쟁을 세계화하는 것이 한-미 FTA를 막아낼 수 있는 길이다. 노무현 정부와 지배 세력이 제시하는 자본의 논리, ꡐ산업별 효과ꡑ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노동, 식량, 자원, 문화, 지식이 이윤의 논리가 아니라 민중의 필요와 생산에 기초하여 평등하고 자유롭게 소통, 향유되는 다른 세계를 위한 투쟁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계의 민중들과 함께 만들어가자. 1)미 헌법상의 의회권한인 무역협상권을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에게 일정한 조건하에 위임한 것으로 , 이에 따라 의회는 협상 결과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만을 표할 수 있으며, 협정내용을 수정하지 못한다. 본문으로 2)이렇게 보자면 요즘 부각되고 있는 ‘스크린쿼터 사수’라는 요구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강풍이 몰아붙이는 문화시장 개방의 요구는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이는 저작권과 지적재산권을 매개로 지식과 문화를 상품화하여 민중의 문화와 지식에 대한 권리를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고, 문화산업에 대한 자본의 투자를 보장하라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에 따라 문화산업은 이미 상당 수준 금융화 되었는데, 특히 영화의 경우 금융시장을 통한 투자자금 모금이 이미 일반화되었다. 이런 문화산업의 금융화는 주주자본주의와 동일한 모습인데, 투자자들의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영화의 생산 자체가 철저히 투자자들의 의견에 종속된다. 투자자들의 권리가 최고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미국이 스크린쿼터 축소를 한․미 FTA의 선결조건으로 내건 것도 문화산업이 이미 자본의 매력적인 투자처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스크린쿼터가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가 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스크린쿼터는 언급한 문화산업의 금융화를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영화를 보호해달라는 요구고, 이는 민중의 문화에 대한 권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문화산업의 금융화는 문화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투자자의 권리, 자본의 권리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민중의 문화와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저작권과 지적재산권, 금융의 방식을 통한 문화의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소비문화 확대를 문제삼지 않는(삼을 수 없는) 스크린쿼터 사수 요구는 한국영화산업을 보호하자는 피해산업보호의 요구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민중이 스스로를 교육하고, 성숙할 수 있는 문화를 생산․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핵심이다. 스크린쿼터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 호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본문으로
일반노동조합 운동과 일반노협 현황 일반노조는 2000년 4월 부산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만 6년의 기간을 경과하면서 전국적으로 20여 개의 조직으로 늘어났다. IMF 국가부도 위기 이후 자본과 정권의 전면적 공세를 받으면서 기존의 기업별 노조운동이 갖는 한계를 절감하여 산별노조건설의 과제가 대두되었다. 1999년 부산에서는 중심적 지역 활동가들이 기업별 노조의 시대적 대안은 산별노조가 아니라 단일노조임을 피력하였다. 무엇보다 민주노총 건설로 민주노조운동이 산별연맹 체제로 개편되면서 지역적 연대운동이 급격히 허물어져 간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미 산별노조만을 유일한 대안으로 기정사실화 한 운동현실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오히려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펼치는 활동가들의 저의가 무엇인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하였다. 지역의 활동가들은 1년 간의 추진위 준비위 과정의 실천을 통하여 기업과 업종을 뛰어넘는 계급적 노동조합을 지역노조로 직접 건설하였다. 최초의 일반노조인 부산지역일반노조이다. 부산일반노조는 2개월만에 지자체 민간위탁 청소업체를 힘있게 조직하여 기본대오를 확보하고 뒤이어 6월 초부터 100여 일에 걸친 조선비치호텔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의 정리해고 철회투쟁을 끈질기게 전개하였다. 이 투쟁을 통해 부산일반노조는 지역에서 크게 주목받게 된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할 때였다. 해를 넘기면서 충남, 경남, 서울 등지에서 일반노조들이 덩달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지역이 경북이다(2005년 6월 29일). 경북일반노조는 민주노총 경북본부가 조직적 논의를 거쳐 만들어졌다. 초기 인력과 재정을 민주노총이 책임지고 지원하고 있다. 일반노조를 민주노총이 조직가들을 투입하여 직접 만든 셈이다. 작년에 처음으로 조합원이 1천명이 넘는 노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경남, 충남). 일반노조는 이렇게 민주노조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아왔다. 그 동안 전국의 일반노조들은 해마다 한 번씩 수련회를 통해 경험을 교류해 오다가 2004년부터 대표자회의를 구성하여 보다 일상적인 활동공유와 연대를 축적해왔다. 그 성과로 지난 2월 12일 21개 조직(참가 15개, 참관 6개)이 함께 하는 조합원 5천여 명의 전국지역·업종일반노동조합(일반노협)을 건설하였다. 일반노협은 지역노조들의 전국적 연계를 한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중소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인도하는 것이다.1) 민주노조운동 위기는 지역연대가 허물어진데서 잉태되었다 일반노조운동은 중소영세 사업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의 길을 열어주었다. 원래 산별노조만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겼고 따라서 기업별노조들의 통합을 산별노조 건설의 방안으로 생각했지만 지역노조로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산별연맹이 고착화되기 전에 기업별 노조로서도 업종을 뛰어넘는 지역적 연대의 힘으로 노동조합을 사수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해 왔기 때문이다. 연대의 문제가 본질이다. 현 시기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도 그러하고 대공장과 중소공장 사이의 관계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지역연대의 상실에서 오고 있다. 아니 지역연대의 기초 없이 만들어가는 산별연대의 한계에서 오고 있다.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대(對) 자본 투쟁에서 나타나는 한계점이다. 프랑스처럼 시민사회의 정치적 의식수준이 받쳐주지도 못하는 현실에서 낮은 조직율은 계급대표성의 한계와 곧바로 연결된다. 즉 합쳐도 힘쓰기 어려운데 16~7개 산별연맹으로 나뉘어 제각각 활동하는 데서부터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산업별로 전국적으로 뭉치면 힘쓰기는 더 수월하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 있으나 전국적 대중파업을 수행하여 자본과 정권의 공격을 분쇄할 만한 투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왜소한 산별대오는 전투 대형에서 보급선을 길게 늘어뜨려 놓는 것만큼이나 불리한 진용이다. 노조운동 내부적으로 보더라도 많은 문제가 생겨나기 쉬운 조직형식이다. 첫째, 지역에서부터 산별노조로 전진하지 못한 현실에서 그리고 전체 조합원들이 그렇게 많지도 못한 현실에서 기업별 노조들의 전국적 연대는 자연스럽게 대공장 중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즉 전국적 지도력 생산에서 치명적 한계를 구조적으로 배태하고 있다. 둘째, 연대의 수준이 상층 간부들의 연대로 협소하게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쉽게 정치화(?)된다. 지금 민주노총 운동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파적 활동가 그룹들로 구성되고 있는 과두제적 지도력은 그러한 산물이다. 이렇게 협소하고 비대중적인 활동에도 이들 지도력 체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산별연맹 체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함께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중심노조로서의 대공장 노조의 책무감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옆에 사업장에서 죽든 살든 책임을 느끼지 않고도 전국적 연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계급적 심성과 감성의 상실이다. 일상적·대중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지역 활동은 부차적으로 돌려놓고 하려고 해도 하기 어려운 전국연대를 중심적 임무로 설정하고 있는데서 오는 필연적 질곡이다. 이런 점에서 의식은 존재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명제는 역사적인 진실을 이야기한다. 존재는 사회적 존재 즉 인간관계이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민주노총 운동의 병폐는 가까이 있는 노동자들과의 대중적 일상적 연대 즉 지역연대를 복원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2) 민주노조운동의 혁신과 일반노협의 역할 일반노조운동은 탄생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지역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일반노협 건설을 계기로 보다 체계적으로 지역연대를 외치고 실현할 것이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연대운동에서 균형있는 연대를 만들어 가는데 일반노조가 앞장 설 것이다. 씨줄과 날줄의 굵기를 같게 만들어야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는 천을 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먼저 일반노협은 산별 소속과 관계없이 지역연대 강화를 통해 조직을 사수하고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는 모든 조직들이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사실 많은 전국적 업종(소산별)노조들의 경우 지역적 기반의 취약으로 고통받고 있다. 산별연맹 본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되기에는 여간 어려운 여건이 아니다. 다 같이 어려운 처지의 조직들이 산별연맹을 뛰어넘어 연대함으로써 그 한계를 함께 극복할 필요가 있다. 또 업종별 지역노조들도 마찬가지다. 전국을 지향하지만 여력이 없어 지역에 묶여있다. 아니 지역을 지키기도 버겁다. 이들 조직들이 전국적으로 함께 하여 연대한다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반노조운동은 지역본부의 강화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실천적으로 각 지역에서 앞장서고 있다. 사실 지역본부를 받치고 있는 산별연맹들이 지역적 역할을 방기함으로써 지역본부는 구심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총연맹이 연맹들의 눈치를 보며 구심으로서 지도력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민주노총이 힘이 있어야 하고 민주노총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일반노조들은 헌신적으로 지역노조운동으로서 스스로 지역에서 튼튼히 뿌리내리고 이를 중심으로 지역연대의 복원에 헌신적으로 주력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역노동자들의 단결투쟁 구심으로서 지역본부의 위상정립에 보다 힘 있게 앞장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과제들은 일반노조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힘이 약하다. 또 산별연맹 안에도 많은 뜻있는 조합원 간부 활동가들이 있다. 마음을 열고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고 대책을 수립하여 힘을 모아 실천해 나간다면 위기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든 동지들이 마음을 모아야 할 때이다. 어려운 현실의 조건에 얽매여 있지 말고 진취적인 마음으로 만난다면 투쟁의 의지가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일반노조운동의 전망 일반노조운동의 앞날에 대하여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일반노조운동은 아직 여전히 과도기에 있는 운동이다. 그러나 나타난 계기와 형태는 다르지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그러하듯 일반노조운동은 시대가 만들어낸 운동이다. 신자유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에서 특히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완전한 무권리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정규직이 절반을 훨씬 넘었다. 더 이상 이러한 상태로 노동자들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완고하다. 자본독재의 지배는 군사독재보다 훨씬 강력하고 정교하여 사슬을 박차고 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지역을 중심으로 계급적 진지를 튼튼히 꾸려나가야 할 때이다. 기업별 참호는 더 이상 소나기 같은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 참호로서 역할을 할 수 없다. 제대로 되었다면 산별노조도 원래 그러한 사회운동적 변혁적 무기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리라. 대사업장들이 진정한 산별노조로 나아가려면 사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형제로서 안을 수 있어야 하고 지역의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중심노조서 역할을 높여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만들어 가면서 상층의 통합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일반노조운동은 광범위한 지역노조활동가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장기적 전략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과 굳게 결합하는 활동가들의 연대는 지역 중심의 활동에서 가능하다. 1) 경북과 충남 경남의 사례로 볼 때 산별연맹 조직들이 협소한 이기주의에 매이지 않고 민주노총 차원에서 일반노조로 힘을 모아낸다면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매우 성공적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조직화 효율성을 배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승적 마음을 갖지 못하고서는 50억 돈을 모은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낮은 조직율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본문으로 2) 물론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적 병폐를 불러온 것은 지역연대의 소홀만이 원인이 아니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활동가들의 사상이념적 긴장감 소진(사상적 투항)과 조합권력 매몰, 비정규직 확산 등 신자유주의 전면 공세로 노조운동의 힘이 급격히 왜소하게 된 데서 비롯된 조합원들의 실리주의 경도 등 다른 많은 요인들도 있다.본문으로 [%=박스1%]
일반노동조합 운동과 일반노협 현황 일반노조는 2000년 4월 부산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만 6년의 기간을 경과하면서 전국적으로 20여 개의 조직으로 늘어났다. IMF 국가부도 위기 이후 자본과 정권의 전면적 공세를 받으면서 기존의 기업별 노조운동이 갖는 한계를 절감하여 산별노조건설의 과제가 대두되었다. 1999년 부산에서는 중심적 지역 활동가들이 기업별 노조의 시대적 대안은 산별노조가 아니라 단일노조임을 피력하였다. 무엇보다 민주노총 건설로 민주노조운동이 산별연맹 체제로 개편되면서 지역적 연대운동이 급격히 허물어져 간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미 산별노조만을 유일한 대안으로 기정사실화 한 운동현실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오히려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펼치는 활동가들의 저의가 무엇인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하였다. 지역의 활동가들은 1년 간의 추진위 준비위 과정의 실천을 통하여 기업과 업종을 뛰어넘는 계급적 노동조합을 지역노조로 직접 건설하였다. 최초의 일반노조인 부산지역일반노조이다. 부산일반노조는 2개월만에 지자체 민간위탁 청소업체를 힘있게 조직하여 기본대오를 확보하고 뒤이어 6월 초부터 100여 일에 걸친 조선비치호텔 비정규직 아주머니들의 정리해고 철회투쟁을 끈질기게 전개하였다. 이 투쟁을 통해 부산일반노조는 지역에서 크게 주목받게 된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할 때였다. 해를 넘기면서 충남, 경남, 서울 등지에서 일반노조들이 덩달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지역이 경북이다(2005년 6월 29일). 경북일반노조는 민주노총 경북본부가 조직적 논의를 거쳐 만들어졌다. 초기 인력과 재정을 민주노총이 책임지고 지원하고 있다. 일반노조를 민주노총이 조직가들을 투입하여 직접 만든 셈이다. 작년에 처음으로 조합원이 1천명이 넘는 노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경남, 충남). 일반노조는 이렇게 민주노조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아왔다. 그 동안 전국의 일반노조들은 해마다 한 번씩 수련회를 통해 경험을 교류해 오다가 2004년부터 대표자회의를 구성하여 보다 일상적인 활동공유와 연대를 축적해왔다. 그 성과로 지난 2월 12일 21개 조직(참가 15개, 참관 6개)이 함께 하는 조합원 5천여 명의 전국지역·업종일반노동조합(일반노협)을 건설하였다. 일반노협은 지역노조들의 전국적 연계를 한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중소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인도하는 것이다.1) 민주노조운동 위기는 지역연대가 허물어진데서 잉태되었다 일반노조운동은 중소영세 사업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의 길을 열어주었다. 원래 산별노조만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겼고 따라서 기업별노조들의 통합을 산별노조 건설의 방안으로 생각했지만 지역노조로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산별연맹이 고착화되기 전에 기업별 노조로서도 업종을 뛰어넘는 지역적 연대의 힘으로 노동조합을 사수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해 왔기 때문이다. 연대의 문제가 본질이다. 현 시기 가장 화두가 되고 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도 그러하고 대공장과 중소공장 사이의 관계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지역연대의 상실에서 오고 있다. 아니 지역연대의 기초 없이 만들어가는 산별연대의 한계에서 오고 있다.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대(對) 자본 투쟁에서 나타나는 한계점이다. 프랑스처럼 시민사회의 정치적 의식수준이 받쳐주지도 못하는 현실에서 낮은 조직율은 계급대표성의 한계와 곧바로 연결된다. 즉 합쳐도 힘쓰기 어려운데 16~7개 산별연맹으로 나뉘어 제각각 활동하는 데서부터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산업별로 전국적으로 뭉치면 힘쓰기는 더 수월하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 있으나 전국적 대중파업을 수행하여 자본과 정권의 공격을 분쇄할 만한 투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왜소한 산별대오는 전투 대형에서 보급선을 길게 늘어뜨려 놓는 것만큼이나 불리한 진용이다. 노조운동 내부적으로 보더라도 많은 문제가 생겨나기 쉬운 조직형식이다. 첫째, 지역에서부터 산별노조로 전진하지 못한 현실에서 그리고 전체 조합원들이 그렇게 많지도 못한 현실에서 기업별 노조들의 전국적 연대는 자연스럽게 대공장 중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즉 전국적 지도력 생산에서 치명적 한계를 구조적으로 배태하고 있다. 둘째, 연대의 수준이 상층 간부들의 연대로 협소하게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쉽게 정치화(?)된다. 지금 민주노총 운동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파적 활동가 그룹들로 구성되고 있는 과두제적 지도력은 그러한 산물이다. 이렇게 협소하고 비대중적인 활동에도 이들 지도력 체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산별연맹 체제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함께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중심노조로서의 대공장 노조의 책무감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옆에 사업장에서 죽든 살든 책임을 느끼지 않고도 전국적 연대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계급적 심성과 감성의 상실이다. 일상적·대중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지역 활동은 부차적으로 돌려놓고 하려고 해도 하기 어려운 전국연대를 중심적 임무로 설정하고 있는데서 오는 필연적 질곡이다. 이런 점에서 의식은 존재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명제는 역사적인 진실을 이야기한다. 존재는 사회적 존재 즉 인간관계이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민주노총 운동의 병폐는 가까이 있는 노동자들과의 대중적 일상적 연대 즉 지역연대를 복원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2) 민주노조운동의 혁신과 일반노협의 역할 일반노조운동은 탄생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지역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일반노협 건설을 계기로 보다 체계적으로 지역연대를 외치고 실현할 것이다. 한쪽으로만 치우친 연대운동에서 균형있는 연대를 만들어 가는데 일반노조가 앞장 설 것이다. 씨줄과 날줄의 굵기를 같게 만들어야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는 천을 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먼저 일반노협은 산별 소속과 관계없이 지역연대 강화를 통해 조직을 사수하고 조직을 확대하고자 하는 모든 조직들이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사실 많은 전국적 업종(소산별)노조들의 경우 지역적 기반의 취약으로 고통받고 있다. 산별연맹 본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힘이 되기에는 여간 어려운 여건이 아니다. 다 같이 어려운 처지의 조직들이 산별연맹을 뛰어넘어 연대함으로써 그 한계를 함께 극복할 필요가 있다. 또 업종별 지역노조들도 마찬가지다. 전국을 지향하지만 여력이 없어 지역에 묶여있다. 아니 지역을 지키기도 버겁다. 이들 조직들이 전국적으로 함께 하여 연대한다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일반노조운동은 지역본부의 강화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실천적으로 각 지역에서 앞장서고 있다. 사실 지역본부를 받치고 있는 산별연맹들이 지역적 역할을 방기함으로써 지역본부는 구심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총연맹이 연맹들의 눈치를 보며 구심으로서 지도력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민주노총이 힘이 있어야 하고 민주노총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을 먼저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일반노조들은 헌신적으로 지역노조운동으로서 스스로 지역에서 튼튼히 뿌리내리고 이를 중심으로 지역연대의 복원에 헌신적으로 주력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지역노동자들의 단결투쟁 구심으로서 지역본부의 위상정립에 보다 힘 있게 앞장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과제들은 일반노조 혼자서는 할 수 없다. 힘이 약하다. 또 산별연맹 안에도 많은 뜻있는 조합원 간부 활동가들이 있다. 마음을 열고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고 대책을 수립하여 힘을 모아 실천해 나간다면 위기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앞날을 걱정하는 모든 동지들이 마음을 모아야 할 때이다. 어려운 현실의 조건에 얽매여 있지 말고 진취적인 마음으로 만난다면 투쟁의 의지가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라 확신한다. 일반노조운동의 전망 일반노조운동의 앞날에 대하여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일반노조운동은 아직 여전히 과도기에 있는 운동이다. 그러나 나타난 계기와 형태는 다르지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그러하듯 일반노조운동은 시대가 만들어낸 운동이다. 신자유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에서 특히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은 완전한 무권리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정규직이 절반을 훨씬 넘었다. 더 이상 이러한 상태로 노동자들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완고하다. 자본독재의 지배는 군사독재보다 훨씬 강력하고 정교하여 사슬을 박차고 나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지역을 중심으로 계급적 진지를 튼튼히 꾸려나가야 할 때이다. 기업별 참호는 더 이상 소나기 같은 신자유주의 공세 앞에 참호로서 역할을 할 수 없다. 제대로 되었다면 산별노조도 원래 그러한 사회운동적 변혁적 무기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리라. 대사업장들이 진정한 산별노조로 나아가려면 사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형제로서 안을 수 있어야 하고 지역의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중심노조서 역할을 높여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만들어 가면서 상층의 통합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일반노조운동은 광범위한 지역노조활동가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장기적 전략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과 굳게 결합하는 활동가들의 연대는 지역 중심의 활동에서 가능하다. 1) 경북과 충남 경남의 사례로 볼 때 산별연맹 조직들이 협소한 이기주의에 매이지 않고 민주노총 차원에서 일반노조로 힘을 모아낸다면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매우 성공적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조직화 효율성을 배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승적 마음을 갖지 못하고서는 50억 돈을 모은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낮은 조직율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본문으로 2) 물론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적 병폐를 불러온 것은 지역연대의 소홀만이 원인이 아니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활동가들의 사상이념적 긴장감 소진(사상적 투항)과 조합권력 매몰, 비정규직 확산 등 신자유주의 전면 공세로 노조운동의 힘이 급격히 왜소하게 된 데서 비롯된 조합원들의 실리주의 경도 등 다른 많은 요인들도 있다.본문으로 [%=박스1%]
[%=박스1%] 가족과 친구를 위해 하는 일을 묘사할 때 “사랑의 노동”이라는 표현을 얼마나 자주 듣는가? 잠시만 생각해보면 사랑의 노동이 대개 가정에서 여성이 하는 일과 관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일을 “보살핌 노동”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보살핌과 관련된 일은 가족이나 사회적 지원을 받는 서비스 기관에 의해 제공되거나 시장에서 구매된다. 예를 들어, 노인은 사립 또는 공립 요양원에서 보살핌을 받고 아이들은 사립 또는 공립 양육 센터와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는다. 그리고 중환자는 가정에서 가족 성원의 보살핌을 받거나 유급 간호사의 보조를 받고 공립 또는 사립 기관에서 보살핌을 받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 그 일은 유급이고 보살핌 제공자는 소득을 번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보살핌 노동은 무급이고 화폐 거래는 발생하지 않는다. 보살핌 노동은 그것이 유급이든 무급이든 경제적 후생에 절대적으로 핵심적이다. 보살핌 노동이란 무엇인가? 현재 경제학에서 보살핌 노동을 다루는 방식은 전통적인 성별 이데올로기의 엄청난 영향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보살핌 노동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성별 이데올로기로 인해 경제학자들은 유급이 아닌 모든 노동을 평가절하하고 무시했다. 더욱이 그들은 보살핌 노동의 취지나 그것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중요성을 밝혀야 할 근거도 찾지 못했다. 페미니스트들은 보살핌 노동이라는 충분히 발전된 개념을 통해 경제학을 재구조화하고자 한다. 경제사상사에서 가구노동에 대한 관심은 별개의 두 학문 영역인 마르크스주의와 제도주의에서 부상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류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무급 가구노동의 중요성에 맹목이었음을 지적했다. 가사노동 논쟁으로 알려진 논의에서 마가렛 벤스톤, 낸시 폴브르, 하이디 하트만, 수 힘멜화이트, 제인 험프리즈, 막신 몰리뉴 그리고 시몬 모흔 같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가구 내 무급 노동이 사회적 재생산에 필수적임을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무급 가구노동이 구매된 상품을 성인 노동자들을 위한 요리된 식사, 세탁된 옷, 깨끗한 집으로 변형하며, 또 미래의 노동자 세대를 재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양육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가사노동 논쟁은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가족의 경제적 후생―부르주아 가족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가족도 포함하여―에서 성별분업의 중요성을 밝혔고 현재의 산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가구는 여전히 생산의 중요한 영역임을 보여주었다. 가정이 단지 소비의 장소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핵심적인 점을 놓치는 것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재생산 노동의 개념적 중요성을 주장했다. 19세기 제도주의 경제학자 샬롯 퍼킨스 길먼과 토스타인 베블렌은 가정의 일의 중요성을 인식한 최초의 사람들 중 일부였다. 그들에 이어 20세기 제도주의 경제학자 하젤 키르크와 마가렛 라이드는 노동의 전문화가 가정의 핵심적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공급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졌다. 키르크와 라이드는 유급 고용의 확대가 무급 노동의 공급에 미치는 효과를 규명했다. 이 경제학자들은 무급 가사노동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2차 세계전쟁 이후 수년 동안 주류 경제학자들은 경제학 이론과 강의에서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가구노동에 대한 고려는 가정 경제학의 영역으로 강등되었다. 특정한 페미니즘 경제학이 출현하면서 그들의 작업은 재발견되었고, 경제학자들은 다시 한 번 가정 내에서 수행되는 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경제학은 사랑, 공감, 동정, 연계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보살핌 노동의 관점에서 재생산 노동에 대한 논의를 재구조화했다. 경제학자 낸시 폴브르의 작업은 이런 논의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보살핌 노동은 보살피는 사람과 보살핌을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로 구성된다. 따라서 보살핌 노동은 대개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보살핌을 받는 사람은 대개 보살피는 사람에게 매우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영유아, 취학아동, 환자, 장애인, 노인이 받는 보살핌은 이들이 보살피는 사람과 맺는 관계의 질에 좌우된다. 가족이 시장 소득을 늘려야 하는 압박이 증대하는 세계에서 유급고용의 수요가 보살핌 노동의 공급을 압박할 수밖에 없다. 여성과 남성이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유급고용에 할애하면서 “보살핌 결핍”이 나타난다. 오랜 성별분업 하에서 여성은 사회적 재생산에 필요한 보살핌 노동을 하기 위해 가정에 있어야 한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오늘날 여성의 노동력 참여율은 남성의 참여율에 근접하고 있으며, 편부모 가족이 증가하고 있고, 지리적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확대가족은 규범이 아니라 예외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보살피는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이에 주목한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은 보살핌 노동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정책을 발전시키려 한다. 여기서 페미니즘의 시각은 완전 고용이라는 특별히 숭배되는 거시경제정책의 목표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전일제 일자리를 원하는 모든 이들이 그런 일자리를 갖는 동시에 보살핌 노동의 저임금, 미조직 상황이 지속된다면 사회의 의존자들은 고도의 불안전성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에서 보살핌 노동을 구매하는 비용에 비해 가정 밖의 여성의 급여가 너무 낮기 때문에 여성이 무급의 보살핌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 가정에 머물면서 발생하는 위장된 실업을 지속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살핌 노동자들이 당면한 급여와 노동조건을 변화시키자는 주장이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이런 문제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이런 상황과 이와 관련한 쟁점들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후원해왔다. 국제노동기구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에 따르면, 보살핌 노동은 한 사람 또는 더 많은 이들의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그리고 발달상의 욕구를 돌보는 일로 정의된다. 그에 따르면, 보살핌 노동의 충분한 공급을 보장하는 한 가지 방법은 충분한 급여를 지급하고 보살핌의 능력과 숙련을 보장하는 적절한 규제 지침을 마련하고 규제 규범의 강화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보살핌 노동과 관련하여 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국가는 원하는 이들이 양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만 이를 위해 지불할 충분한 소득이 없는 이들을 위해 보조금과 소득이전을 보장해 주어야만 한다. 가족 역시 보살핌의 제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탠딩이 주장하는 것처럼 공식적인 유급 보살핌이 중요한 사회 서비스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피할 수 있다면 공식적인 보살핌의 공급에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의존하려 하지 않고, 의존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살핌 노동은 이타성, 상호존중과 존엄, 호혜성과 같은 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적 관계다. 이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점이 도출된다. 첫째, 보살핌 노동에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이런 일의 감정적 내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간호사, 교사, 사회 서비스 노동자가 수행하는 모든 일을 생각해보자. 때로는 이런 직업이 좋은 급여를 받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스트레스가 많고 감정적인 고갈을 동반하는 성질 때문에 이런 일의 중요성은 대체로 인정되고, 누구도 이런 유급 노동을 자발적인 무급 노동으로 바꿔야 후생이 향상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간호사, 교사, 사회 서비스 노동자가 자신의 일에 대한 급여를 받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사실 그들의 일을 자발적인 무급 노동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노동자(보살핌 제공자)와 그 노동의 수혜자(보살핌 수혜자)가 가족이고 그 일이 가정 내에서 수행될 때, 여성과 가족 내 이타주의에 대한 문화적 가설로 인해 우리는 이런 일이 무급이기 때문에 그 질이 향상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높은 급여가 몸져누운 노인과 장애인에게 양질의 보살핌을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왜 양육의 질은 무급일 때 더 나아진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역설은 모성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이 어머니의 친근하고 배타적인 관심을 요구한다는 통념은 역사적으로 산업혁명의 우연적인 가공물이다. 상호 배타적인 공/사 영역을 만들어 여성에게 사적인 가내 세계를 할당하는 과정은 동시에 어머니를 아이의 후생을 위한 배타적인 보호자로 정의했다. 어머니와 자녀 관계에 관한 모든 시각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여성에게 전일 가정생활을 강요하지 않고서도 양질의 양육을 적절히 공급할 수 있는 사회 정책의 길이 열린다. 둘째, 보살핌 노동, 특히 양육과 관련된 보살핌 노동은 경제학자들이 “긍정적인 외부효과”라고 부르는 중요한 사회적 혜택을 갖는다. 아이들이 배려있고 생산적인 시민으로 길러짐으로써 생기는 이득은 사회에 돌아가지만, 이런 특성의 인간을 생산하는 비용은 대체로 여성에게 전가된다. 18세기 버나드 만데빌의 “벌들의 우화”는 사적인 미덕과 공적인 악덕에 대해 논했다. 그는 이타심, 관용, 정직과 같은 사적인 미덕이 경제와 정치의 공적 영역에서 행동 지침으로 활용되면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런 미덕들이 보살핌 노동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만데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모성의 경제적 비용 보살핌 노동의 사례 중에서 양육과 관련된 노동보다 더 좋은 예는 없다. 정치가, 사회 비평가, 교육자, 종교 지도자는 가족과 아동의 부양에 대해 점점 더 창조적이 되어간다. 어떤 이들은 가족의 양육비 부담을 보조하기 위해 세금 공제를 활용하자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이들은 양질의 조기 교육 프로그램을 위한 직접적인 보조금을 요구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직장-가족 균형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을 제안한다. 이런 정책들의 효용성을 둘러싼 논쟁이 몇 권의 책에 달하고 신문기사의 제목을 장식하며 저녁 뉴스에 풍부한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 논쟁의 참가자들은 어머니의 일이 아이의 후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들을 참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용이 아이의 후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다는 점에 왜 놀라지 않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정책 논쟁은 주로 어머니가 아이에게 책임이 있다는 가정(그리고 이 가정은 종종 현실이다)을 반영한다. 산업혁명 이전, 즉 가정생활과 경제생활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 아이는 부모와 더불어 노동하고 놀았다. 그러나 직장이 가정 밖의 공장, 가게, 사무실로 이동하면서 가사와 양육이 전적으로 ‘여성의 일’이 되어버린 새로운 성별분업이 발생했다. 바바라 버그만은 생물학으로 인해 여성이 가사담당자라는 하나의 직업에 고정되어 버리는 신분 체계가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부상하는 성별 이데올로기에 따라 여성은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기 위해 가정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직업적 성취와 경제적 독립의 권리를 주장함에 따라 이런 신분 체계는 붕괴하는 중이다. 이처럼 여성의 유급 고용이 크게 증대했지만 남성의 무급 가구노동 기여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 아이들은 맞벌이 가족에서 산다. 1998년에 한살 미만의 아이를 둔 여성의 59%가 고용됐고, 한살 이상의 아이를 둔 어머니의 73%가 가정 밖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여성들은 왜 일하는가? 남성이 일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다. 즉 직장, 경력, 소득이 아버지에게 의미가 있듯이 어머니에게도 의미가 있다. 성별분업의 유산 중 하나는 작업장에서의 평등을 위한 여성의 요구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 즉 누가 양육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가구의 남성 가장이 가족임금을 벌어 전업 주부를 부양하는 오래된 합의, 즉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델이 모든 이에게 실제로 작동한 적도 없었다. 가난한 가족에서는 능력 있는 모든 이들이 일했다. 농촌 공동체에서 농사는 몹시 고되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 조부모, 형제, 자매가 모두 참여했다. 화폐임금에 의존하는 가족에서 여성과 아이는 산업 노동을 수행하거나 가내 하인으로 보내졌다. 어머니가 일할 때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페미니스트와 반(反)페미니스트는 모두 모성이 여성의 노동시장 소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한다. 양육이 소득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 중요해서 저널리스트 앤 크리텐든은 그것을 “엄마세”(mommy tax)라고 불렀다. 엄마세는 여성이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벌 수 없는 소득이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기회비용”이라고 부른다.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미셀 버디그와 파울라 잉글랜드는 모성으로 인한 임금 불이익이 5~7%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아이가 태어난 후, 여성은 대개 직업 경험을 잃고 이 때문에 다시 평생소득이 낮아진다. 더욱이 어머니는 모성친화적인 직업을 위해 고임금을 포기하거나 파트타임으로 일할 것이다. 양육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을 지는 일하는 어머니는 적정한 비용의 양질의 양육을 활용할 수 없을 때 파트타임 일자리를 매력적인 선택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전일제 대신 파트타임 일자리를 선택함으로써 어머니의 평생소득은 더 낮아진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파트타임 고용이 언제나 시간당 급여가 낮고 전일제 고용에 따르는 수당이 거의 없으며 총 노동시간(주당, 월당, 혹은 연당)도 더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디그와 잉글랜드는 전일제와 파트타임 노동 사이의 차이와 고임금에 관련된 다른 객관적 수치(경험, 근속 등)를 통제한 후에도 여전히 어머니가 더 적게 번다는 점을 지적한다. 양육의 사회적 책임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양육에 대한 두 가지 접근이 있다. 많은 국가들이 양육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고 따라서 높은 수준의 직업 교육, 충분한 급여의 직업, 그리고 육아 휴직을 지원하는 실질적인 공공기금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특히 미국과 같이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국가들에서는 이런 사회적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다. 잘 양육된 아이의 혜택이 더 큰 사회에 돌아갈 때조차도 양육의 경제적 부담은 여전히 가족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양육에 관한 국가 정책은 육아휴직 정책에서 시작된다. 표 3-1은 7개 산업국의 육아휴직 정책을 보여준다. 표 3-1 OECD 7개국의 모성/육아 휴직 수당 (* 첨부자료 참조)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정책, 가족의료휴가법(Family Medical Leave Act)은 전혀 관대하지 않다. 이 법은 회사가 12주에 달하는 무급 육아휴직을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50인 이상의 사업장에만 적용되고 또 대부분의 여성들은 50인 미만의 사업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법과 현실의 격차가 크다. 또한 이 법은 육아휴직 중에 부모의 소득을 보전해주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적정한 비용의 양질의 양육 서비스의 공급은 매우 부족하다. 따라서 대다수의 가족은 믿을 만한 양육기관에 아이의 전일 보살핌과 교육을 맡길만한 여유가 없다. 많은 지역에서 확실히 검증된 양육기관의 연간 수업료는 종종 지방 주립대학의 연간 비용을 초과하지만 입학 대기자들이 줄을 이루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세 가지 선택지를 가질 뿐인데, 이것들은 모두 신임할 수 없는 환경에서의 양육을 의미한다. 유아가 있는 가족은 아이를 최소한의 안전과 보육교사의 요건만을 갖춘 양육기관에 아이를 맡긴다. 이런 기관조차도 매우 비싸다. 또 다른 선택지는 가내 양육시설을 이용하거나 보모를 고용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 비용이 많이 든다. 이런 양육기관들에는 허가를 위한 필수규정이 거의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의 주나 지방만이 매년 안전점검을 요구하고 소방 안전에 대한 기준을 설정해놓고 있다. 양육기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타의 위험을 점검하는 주(州) 보건 감독관에 대한 요건은 없다. 가내 양육기관의 경우 연령에 따른 커리큘럼을 개설하고, 아이 당 보육교사의 비율을 높이며, 넓고 장비가 갖춰진 놀이공간을 마련하는 등의 쾌적한 설비의 제공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선택지인 보모의 고용은 교육과 훈련의 기준이 부재하기 때문에 아이의 건강과 후생을 위한 안전장치가 거의 없는 셈이다. 재정적 능력이 있는 여성은 노동시장으로의 재진입을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 미룰 수 있다. 다른 여성들에게, 특히 아이가 어리지만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의 경우에도 초등학교는 양육비용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육기관으로서 초등학교는 또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다. 당신이 작업장 정책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가장 자유로운 회사조차 노동시간을 학교 일정과 맞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확실히 부모들은 학교와 직장의 일정을 잘 조정하지 못함으로써 고용상의 책임을 다하는 데에 곤란을 겪을 수 있다. 아이를 어머니의 책임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견해로 인해 여성은 비용이 많이 들고 아이들에게 잠재적으로 위험한 방식들을 선택할 수가 없다. 평등이 여성과 남성이 직면하는 선택과 제약이 대체로 유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양육과 관련된 확실한 사회정책이 제시되어야 한다. 부모가 직장과 가족에서의 의무를 모두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사회 정책과 관련하여 서유럽 국가들의 상황은 미국과 기타 영어권 국가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영어권 국가에서 부모가 직장과 가족에서의 책임을 균형있게 수행하려고 할 때 그들은 정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복지국가들은 상황이 매우 다른데, 이들은 모든 시민이 잠재적으로 노동자이자 양육자라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들은 여성과 남성의 유급 노동자이자 무급 양육자로서의 역할을 지원하는 정책을 선도해왔다. 다시 말해 국가 정책이 작업장과 가정에서의 평등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이런 정책들에 대한 사회적 헌신은 우리가 점차 맞벌이 가구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만 더 이상 한 사람에게만 가사노동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정책들의 비용은 충분히 수용가능하다. 고용된 여성 1인의 가족 휴가를 위한 년간 지출은 미미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가족 휴가 관련 지출은 고용된 여성 1인 당 약 900달러였고,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는 600~700달러였다. 이 같은 지출은 이들 국가의 GDP의 0.7~1% 정도다. 이런 관대한 프로그램이 다른 산업 국가에서는 GDP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할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불행하게도 세계의 많은 곳에서 반대 방향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동유럽의 이행기 경제는 그런 사례를 보여준다. “자유 시장”을 촉진하기 위해 이 국가들은 사회 서비스를 심각하게 축소하고 있다. 보건, 양육, 교육이 모두 손상되고 있다. 결과는 좋지 않다. 일부 나라에서는 기대 수명이 줄었고, 초등교육 진학률이 감소했으며, 여성의 노동부담은 증대했다. 부유한 나라들이 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제공하지 않으려 할 때 다른 문제들이 발생한다. 양육 제공자로 일하는 여성이 자기 가족의 경제적·감정적 안전을 해치는 고용 조건에 직면한다는 것은 그 예다. 양육 노동은 급여가 매우 적고 건강과 안전 조건이 감독되지 않으며 사회보장 급여를 거의 받지 못한다.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유색인종 여성(특히 남부의 아프리카계 여성)이 백인 가정에서 가내 노동자로 일했다. 2차 세계전쟁 이전에 아프리카계 여성의 절반 이상이 가내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사실 시민권 운동과 여성운동의 중요한 성과들 중 하나는 그 수를 급격히 줄인 것이다. 현재에는 개발도상국과 동유럽의 구(舊)공산주의 경제 출신의 이주자들이 주로 양육 노동을 수행하는데, 이들은 특권층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더 부유한 국가로 이주한다. 하지만 여성이 더 좋은 기회를 찾아 이주할 때 대다수가 자신의 아이를 두고 떠나야만 한다. 알리 혹쉴드는 이것을 “보모 사슬”, 즉 양육 노동에 기초한 일련의 지구적 연계망이라고 부른다. 부유한 나라의 전문직 여성은 외국인 보모를 고용함으로써 자신은 전일제로 일할 수 있다. 가난한 나라 또는 지역 출신의 보모는 한 명 이상의 아이를 가정에 두고 떠나오며, 그 곳에서는 나이가 많은 딸이나 여성 친척이 그들을 돌본다. 이런 지구적 보살핌 사슬에는 다양한 변종이 있다. 그 변종들의 공통된 특징은 양육 노동의 흐름이 항상 빈자에게서 부자로 향한다는 점이다. 이주 여성이 자신의 아이를 떠나는 상황은 1959년 아동의 권리에 대한 유엔선언의 허울뿐인 전망을 폭로한다. 선언에 따르면 모든 아이는 “행복, 사랑, 이해가 넘치는 가족 환경에서 자라야 하고” “자신의 의지에 반해 부모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이주 여성에 대한 착취는 구식민주의의 현재적 변종이며 이를 통해 부유한 나라는 가난한 나라의 인적·자연적 자원을 착취한다. 로버트 에스피노자는 다양한 출처의 자료를 연구하면서 가사노동에 종사하기 위해 가난한 지역에서 부유한 지역으로 이주하는 여성들의 초민족적인 흐름을 네 가지로 규명했다.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중동 국가들은 백만 명 이상의 여성들을 인도, 스리랑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에서 수입했으며 이들은 현재 가정에서 가내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유사하게 많은 유럽 국가들이 스리랑카와 필리핀 출신의 가내 노동자에게 의존한다. 일례로 1987년에 이탈리아의 가내 노동자의 52.5%가 필리핀 출신이었다. 모로코,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나이지리아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 출신의 가난한 여성이 서유럽으로 향하는 흐름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증가하고 있다. 수십만의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필리핀 출신의 여성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돈을 보낼 수 있는 가내 일자리를 찾아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한다. 미국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본 학생이라면 이것을 인종 착취만큼이나 오래된 한 이야기의 변종으로 여길 것이다. 노예상이 서아프리카 사람들을 포획할 때 그들은 가족과 마을을 일부러 파괴하고 부모와 아이를 강제적으로 떼어놓았다.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이 몇 백 마일 떨어진 플랜테이션으로 빈번히 팔려갈 때 이런 상황은 미주(美洲)에서도 지속되었다. 노예해방 이후 남부의 엄격한 인종 분리정책은 아프리카계 여성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백인 여성의 아이를 돌보는 것과 관련된 일뿐인 경제적 조건을 창출했고 그녀들은 다시금 자신의 아이들을 희생시켰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미국에 왔던 아일랜드, 폴란드, 그리스, 중부 유럽 출신의 다른 이주 여성들 역시 부유층의 아이를 돌볼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였다. 부유층의 아이를 보살피는 가난한 여성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그것이 해결하는 만큼이나 많은 문제들을 낳고 있는 구식 해법이다. 첫째, 가장 명백한 문제는 가내 서비스에 종사하는 여성의 아이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이런 일자리는 급여가 많지 않고, 따라서 빈곤을 영속화한다. 셋째, 이런 직종은 수당이 거의 없거나 있더라도 매우 적고, 가내 노동자는 작업장의 학대로부터 거의 보호받지 못한다. 넷째, 이런 가내노동을 조직하는 것은 시공간적으로 성별분업을 심화할 뿐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해결책이 보살핌 노동의 가치를 평가하고 보상하는 방식을 심원하게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아동, 노인 또는 환자를 비롯한 가족의 의존자들에 대한 보살핌이 여성의 고유한 일로서 사적인 가족의 문제라는 가설에 도전해야 한다. 오늘날 부유한 국가들은 보살핌 노동의 수출을 장려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저개발국을 계속 착취하고 있다. 이 사슬의 끝에 있는 여성들은 종종 자신의 아이를 희생하면서 다른 이들의 아이에게 감정적 지원, 애정, 보살핌을 제공해야 하는 부러워할 것도 없고 지속가능하지도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 가난한 여성이 다른 이의 아이에게 보살핌, 사랑, 애정을 제공할 때 모성애는 돈으로 교환된다. 1960년대 비틀즈는 돈이 당신에게 사랑을 사줄 수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반대다. 사랑의 노동, 즉 보살핌 노동은 많은 면에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상품이다. 본질적으로 문제는 그것의 상품화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상품화가 착취에 기초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보살핌 노동이 사적 시장에 놓일 때 그것의 가치와 보상은 낮다. 그 이유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전통적인 이원론이 모성애를 본성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 특질이 본성이라면 훈련이나 숙련이 필요 없고 따라서 높은 급여를 받을 가치도 없다. 우리는 이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보살핌 노동이 전문직으로 인정된다면 급여는 증대할 것이고 노동조건도 개선될 것이며 보살핌의 질도 향상될 것이다. 보살핌 노동이 비숙련의 여성의 일이라는 전통적인 가정은 성별분업에 관한 본질주의적인 견해를 재생산한다.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고, 은행을 경영하고, 우편을 배달하고, 심장수술을 하고, 법을 집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과 기술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닌 것처럼, 보살핌에 필요한 능력과 기술도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난 삼십년간 유급노동에서 여성의 기회가 급변했지만 남성이 보살핌 노동과 맺는 관계는 겨우 변화의 초기단계에 있다. 충분한 평등을 위해서는 남성과 남성성에 대한 문화적 구성이 변해야 한다. 또한 유급 고용의 구조도 변화하여 보살핌에 대한 인간의 요구가 고용의 책임과 동등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직장-가족 분리를 연결하기 양육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 지원이 부재한 상황과 더불어 여성이 일차적으로 아이를 책임진다는 가정은 여성의 경력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법학 교수 조안 윌리엄스의 연구에 따르면, 생산직 또는 전문/관리직 노동자를 위한 최고의 일자리는 “전일 또는 초과근무를 하고 출산과 양육에는 거의 또는 전혀 시간을 뺏기지 않는 노동자의 이상”을 중심으로 조직되기 때문에 “이상적 노동자”만이 풍부한 승진의 기회를 갖는다. 결국 승진은 저녁에 일하고, 갑작스레 출장을 가고, 주말에 출근하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문제는 아이들, 특히 12세 미만의 아이들에게는 어른의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그들이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고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장시간 방치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합당하지도 않다. 만약 중요한 회의가 저녁 7시에 있고 양육기관이 저녁 6시에 끝난다면 일하는 부모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엄마의 진로”로 알려진, 덜 유망하고 경력을 덜 요구하는 길을 선택한다. 유전자 조작된 태아가 산업화된 인큐베이터에서 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 알도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끔찍한 전망에서조차 보육교사를 둔 탁아소가 등장한다. 양육의 엄청난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사회는 현재의 재생산 양태에 결부된 비용과 혜택을 따져봐야 한다. 문화, 교육, 시민 생활, 좋은 직업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도록 육성된 성인이라는 혜택은 우리 모두가 향유한다. 그러나 그 비용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법률, 과학, 기술, 회계, 의료, 정부 분야에서 고소득을 올리는 명망 높은 최상위층을 조사해보면 불온한 양태가 드러난다. 승진과 양육을 결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랜디 알벨다와 크리스 틸리 교수가 훌륭하게 지적했듯이, 아내를 위한 직업과 아내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직업이 있다. 그들의 요점은 승진에 대한 “정상적인” 기대는 회사 일정에 갑작스런 변화가 있을 때 24~27시간 활용할 수 있는 양육전담자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양육전담자가 없다면 의무적인 초과근무, 출장 또는 주말근무에 대한 고용주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부모의 책임과 직접적으로 마찰을 빚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MBA학위를 받았거나 CEO 지위의 최상층에 오른 여성의 49%만이 아이가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같은 지위의 남성의 84%가 아이가 있다. 이런 수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종이 여전히 “아내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직종”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베티 굿 와이프> 광고가 보여주듯이, 가정에만 있는 전통적인 배우자의 역할을 수용하는 전업남편이 있다면 확실히 많은 여성의 경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상자 3.1). 상자 3.1 <베티 굿 와이프> 광고(북 캘롤라이나 상점에 붙어있던 전단지, 1998) 모든 잡다한 일이 해결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까? 아내를 빌려주는 <베티 굿 와이프>에 전화하세요. 방문해서 집을 깨끗하게 만들어 드립니다. · 집 청소 · 양육 · 임시일 · 식료품 구매 · 오븐, 창, 차일 청소 · 요리 · 세탁 · 심부름 우리는 당신의 모든 가사 요구를 돌봐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이것이 여전히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40여 년 전에 베티 프리단은 “이름 없는 문제”는 여성을 가정에 유폐하고 유의미한 직장과 자기실현에 대한 여성의 요구를 무시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상황을 뒤집어 또 다른 아내의 신분제도를 만드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직장과 가족 의무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일자리 공유, 가족·의료 휴가, 신축적인 노동일정과 같은 “가족 친화적인” 정책이 생산되었다. 이런 정책이 표방하는 목표는 소득을 버는 데 필수적인 고용주에 대한 책임과 가족의 성원들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일하는 가족들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스웨덴은 이런 움직임의 선두에 있었고 그 정책들은 종종 하나의 모델로 간주된다. 스웨덴은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양육, 유급 노동, 가사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고안된 정책을 실행했다. 아이의 출산 또는 입양 시에 부모는 둘 다 소득을 보전해주는 긴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아이가 어릴 때 부모는 자신의 1일 노동 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그들의 급여 또한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유급 의료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더욱이 모든 노동자들이 매우 적은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전문화된 조기 아동 교육과 보육의 체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이 모성과 승진을 결합하도록 하는 명백한 국가적인 노력을 스웨덴에서 발견한다. 그렇지만 스웨덴식 해법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엘렌 무타리와 데보라 피가트에 따르면, 육아휴직과 관련된 법의 젠더 중립적인 언어와 남성이 휴가를 이용하도록 장려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휴가를 사용한 사람 중 단지 6%만이 남성이었다. 이들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결국 직장과 가족의 의무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책임은 어머니에게 남겨진다. 따라서 대다수 스웨덴 여성은 첫째 아이를 출산한 후 파트타임 노동자가 된다. 이런 정책이 가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그것은 전통적인 성별분업을 강화한다. 이런 발견은 가족 친화적인 정책으로 인해 여성은 계속해서 양육과 가사의 일차적인 책임을 떠맡는 불이익을 당한다는 바바라 버그만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여성의 소득이 남성의 소득보다 매우 적은 상황에서 아이가 생긴다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는 게 이치에 맞다. 임금 형평성을 창출하는 강력한 정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성은 계속해서 무급의, 대체로 비가시적인 노동을 하는 암사자의 역할을 맡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임금이 남성의 임금과 거의 동등할 때 이런 이점은 사라지고 양육을 좀 더 평등하게 분담된 사업으로 만드는 방법에 관해 논의할 수 있는 상당한 공간이 생길 것이다. 이런 점을 인식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은 보편적인 양육자 등가1)를 촉진하는 정책과 임금 형평성을 촉진하는 정책의 신중한 결합을 지지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오래 전부터 임금 형평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옹호해왔다. 여성과 남성의 소득 불균형의 감축은 여성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근본적인 원인을 감축하기 때문에 이런 프로그램은 보살핌 노동과 관련하여 적절한 것이다. 또한 양육자 등가 정책은 고용주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가족을 돌보는 데 똑같은 책임감을 갖는 동등한 파트너로 취급하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거대한 태도의 변화, 즉 시민권과 보편적 참정권과 관련된 변화만큼이나 거대한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최대한의 평등은 가능하다. 결론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사람―아버지와 어머니, 빈자와 부자―들이 양육, 노인부양, 환자 보살핌 그리고 자기 보살핌에 필요한 시간과 경제적 자원을 가질 때, 사회의 최고의 이익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런 쟁점을 다루는 효과적인 정책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보살핌 노동의 중요성과 지속적으로 보살핌 노동을 여성의 일로 가정하는 명백한 불공정성 그리고 보살핌 노동의 급여와 존중을 향상시킬 필요성에 대한 공개 토론이 필요하다. 보살핌이 시간소비적이고 노동집약적이라는 사실을 우회할 방법은 없다. 어떤 기술적 변화도 이것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시민들이 건강한 가족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 정책이 필요하다. 현재의 상황에서 세계 대부분의 여성은 남성 또는 더 큰 사회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사실상 이 모든 노동을 하고 있다. 여성의 낮은 소득, 양육자로서 가난한 여성의 착취, 가족에 대한 정신적 부담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그 비용은 여전히 사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 혜택은 사회적이다. 1)[역주] 지난 호 <책속의 책>에서 언급된 보편적 양육자 모델을 말한다. 이는 가정 안과 밖에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게 분업하는 모델로, 이 하에서는 가사 노동, 아동과 피부양자의 양육, 유급노동이 성인 가구성원 사이에서 평등하게 분담된다. 자세한 것은 드루실라·바커, 「가족문제: 성별분업의 재생산」, 『사회운동』, 2006, 1/2월호를 참조하라.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