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공무원노조의 정치적 자유 선언에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최근 전국공무원노조(이후 전공노)가 공무원의 정치활동 보장을 선언하면서 공무원의 정치적 의사표현과 정치적 중립성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정부 당국은 예의 공무원의 정치 중립을 운운하며 전공노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부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혹시라도 이를 빌미로 공무원의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탄압에 나서려는 것이 아닌지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번 기회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헌법에 명시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 내용이 과연 국민으로서 당연히 갖는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 및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모든 국민은 기본권적 권리로서 참정권과 정치적 의사결정 및 표현의 자유를 당연히 가지며 공무원도 예외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정치적 중립과 선거 중립을 구분해 사고할 필요가 있다.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란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정이 아니라 선거 사무에서의 공정성과 중립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며, 이를 단순히 문구의 해석으로 정치적 중립 그 자체로 해석한다면 명백한 오류이다. 만일 그렇게 해석한다면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정치적 권리와 공무원의 중립을 규정한 두 규정은 서로 상충하게 되며, 그럴 경우 자연법적 상위 개념인 국민의 참정권적 기본권으로서의 정치활동 자유의 규정에 의하여 하위적 구조인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표시한 헌법 규정은 당연히 위헌의 요소를 내포하게 되며, 문구를 바꾸던지 해석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발생할 것이다. 지난 세월동안 정권의 하수인으로 이용하기 위해 공무원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던 구시대적 낡은 사고로 또다시 공무원노조의 정당한 요구를 탄압한다면, 또한 이를 빌미로 공무원노조운동에 대한 대대적 탄압으로 일관한다면, 현 정부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와 민중세력의 치열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권의 탄압을 뚫고 공무원 노조 건설과 노동3권 쟁취의 한길로 매진해 온 전공노의 일련의 활동과 정치활동 자유 선언은, 그동안 보수적이던 공무원 사회 내부의 변화를 이끌어 냄은 물론이고 사회의 진보를 위한 민중운동에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그동안의 투쟁속에서 공무원 스스로 자신들의 노동자성을 인식하고 노동자운동의 일주체로서 당당히 성장해 온 전국공무원노조의 투쟁에, 사회진보연대는 동지적 연대를 표명하며 정권의 탄압에 함께 맞서 강력한 공동 투쟁을 결의한다. . 투쟁속에 성장하는 전국공무원노조! 공무원의 정당한 정치활동 보장하라! 공무원도 노동자다, 노동3권 쟁취하자! -2004. 4. 1-
2004년 1월 노무현 정부는 일자리 300만개를 창출하겠다고 호언장담하였으며, 재경부는 일자리창출을 어떤 경제정책보다도 우선시하겠다고 선언했다. 작년 한해부터 일관되게 추진되었던 합리적 노사관계의 모색(노조탄압, 사회적 합의주의)과, 정규직-비정규직 격차완화(정규직 임금억제, 파견근로 확대 등 비정규직 전면화)등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를 향한 노동유연화 정책에 비춰볼 때,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 프로그램의 완수를 위한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으로 파악된다. 지난 2월의 일자리 협약은 기업투자요건개선을 위한 노동구조재편전략을 "사회적 합의"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추진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실업정책은 대량실업 사태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 확충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는 한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마무리 단계인 노동시장 재편 완수를 지향한다.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에 입각한 "실업"에 대한 인식과 대책은 무엇이며, 오늘날 실업문제의 근본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가운데 실업운동은 어떠한 관점에서 '재'출발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1. 오늘날 실업의 양상과 국가관리 전략 1> "실업"이라는 노동력 관리전략 이윤의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적 인식 틀에 따라 '노동력'은 자본의 요구에 따라 배치되고 관리되는 일종의 상품으로 치부되어 왔다. 자본가 집단의 공통적인 원리-수요와 공급, 투자와 이윤으로 표현되는-에 근거하여 작동하는 자본 운동의 체계와 그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물신성의 원리가 지배적인 한, 착취와 배제라는 권력관계는 은폐된다. 그러나 자본은 가족과 국가의 틀 속에서 생산, 재생산되는 인간을 '상품으로 구매'-노동 계약-하여 노동력으로 만들 뿐이었다. 하지만 생산요소에 대한 통제라는 관점에서 자본은 노동력 즉, 인간 자체를 관리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실업' 혹은 '산업 예비군'을 동시에 생산해냈다. 더 많은 산 노동이 더 많은 죽은 노동, 즉 기계로 대체되는 경향이라는 자본의 경쟁 속에서 노동력의 관리, 통제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자본축적은 그 법칙 내에서 상대적 과잉인구를 낳고, 나아가 노동자 대중을 불안정 노동과 궁핍으로 이끄는 경향을 포함한다. 그것에 멈추지 않고, 소위 노동시장의 규율과 전략을 통해서 이러한 산업예비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임금 안정, 인적 자원의 가용성 제고, 기업의 노동비용 완화, 창업촉진, 산업 구조조정 가속화" 등의 과제에 실업의 문제는 조절과 통제의 차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존재했던 것이다. 국가는 언제나 "화폐화 되지 못하는 상품", 즉 실업노동자를 관리한다. 국가는 생산 과정의 외부에서, 노동력이 언제라도 좋은 상태를 유지하여 판매될 수 있도록 노동력을 관리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 이들이 사회적 갈등요인이 되는 것을 억제한다. "통계"라는 조작과정을 통해 실업자를 각각의 집단으로 분류하여 실업자 수, 실업률을 조정하여, 실업자 개개인의 능력을 자의적으로 평가·낙인찍는 작업을 수행한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실업노동자의 일부분을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하여 실업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거나, 군대, 학교의 활용 등으로 노동시장으로부터 조용히 퇴장시키는 것이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또한 이를 넘어서 적극적인 "실업 정책"의 시행으로 실업노동자들을 관리한다.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형태로 공공근로 등의 단기적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일하는 복지"로 규율과 근면이라는 습관을 유지시키고, 자본축적의 변화에 걸맞는 노동능력을 실업노동자들에게 교육시키고자 한다. 케인즈 이론의 핵심은 원래 자본주의의 내적 불안정성/불황경제 테제에 있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가격기구의 작동을 통해 자동적으로 완전고용 균형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고용량은 기업의 판단에 달린 것임.) 사회화된 형태로 정부가 재생산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시장의 지배를 제한하는 불가피한 국가의 개입에 대해 케인즈는 한 편에서 국가의 소득재분배를 통한 소비수요의 확대,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투자의 사회화를 제시했다. 투자의 사회화란 사적 이윤에 지배되는 사적 투자에 대비되는 형태로서 낮은 이윤율 하에서도 공동의 이해를 목적으로 공공적 성격의 법인에 의해 수행되는 투자를 의미한다. 케인즈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 국가개입(자본주의 개혁)을 통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고용량은 기업가의 예상에 의해 결정되며, 국가의 유효수요 확대 정책을 통해 기업가의 예상을 변화시켜 고용증대를 꾀할 수 있다고 분석하였다. 소위 새 케인즈주의(New Keynsian)으로 불리는 경제 이론에 따르면, 과거의 케인즈 정책에서 활용했던 통화 공급(화폐발행)의 엄격성은 더 이상 불가능하지만 케인즈주의적 유용성은 취하는데, '국가의 실패'라는 통화주의자의 공세에 대해 '정책 개혁'이라는 역공을 펼친다.(작고 강한 정부) 저금리정책을 통해 주식시장을 부양하고, 여기서 창조되는 '금융 소득'을 통해 유효수요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융 소득 중심의 유효수요 창출은 자연히 고용파괴적이다. 따라서 새 케인즈주의는 전통적 케인즈주의와 달리 완전고용을 포기한다. 대신 이들은 완만한 인플레이션을 동반하는 실업률(NAIRU)을 수용하면서 일정 수준의 실업률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새 케인즈주의 경제 정책의 기반은 미국식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있는데 신자유주의(새케인즈주의)에 입각한 논자들의 주된 논지는 기업의 필요에 따라 고용과 임금을 신축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의 구조를 바꾼다는 것이다. 실업을 유효수요 부족의 산물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면서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동의 유연성 확보를 강조한다. 이는 더 이상 국가가 직접적인 총수요 관리나 공공근로 확대 등의 공적 일자리 창출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성장 산업에 적합한 양질의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창조하겠다는 전략을 내포한다. 즉, 노동시장에서 구매되지 못하는 노동력을 시민사회의 관리와 적극적인 교육훈련을 통해서 노동시장으로 재진입시키는 "평생 기회 보장"이 화두가 된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은 단순히 사회복지를 책임지는 주체가 아니라 '인적 자원'을 개발하는 데 투자하는 사회투자국가 즉, 일종의 '기업가적 국가'로 재정의된다. 새케인즈주의의 '신경제'(New Economy)란 결국 노동력의 평가절하를 통한 고용 안정과 이른바 '사회 안전망'을 통한 사회보장의 축소의 경향을 갖는 것이다. 오늘날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국가·자본의 실업자(노동력) 관리 방식은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산업구조재편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훈련의 기회 확장이라는 "일하는 복지" 정책의 구사이다. 2> 오늘날 실업의 양상 김대중 정부는 "세계화된 금융적 축적체계'에 조응하기 위해, 주식시장을 매개로 하여 자유로운 금융시장을 형성하고, 그 속에서의 투자-사실상 투기와 구분하기 힘든-를 통해서 금융적 축적을 추진해왔다. 금융적 팽창과 동시에 비용절감을 통한 생산부문의 경쟁력 증진의 과정은 해고·감원, 조직·혁신, 과잉 착취, 유연화, 즉 노동의 불안정화를 동반했다. 이러한 IMF 권고안에 따른,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대량해고로 인한 대량실업사태를 불러왔다. <표1>을 살펴보면 10%대에 육박했던 실업률은 2000년부터 급격한 하락 추세를 보이며, 안정적인(!) 3% 수준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통계는 대거 발생하였던 실업자 층이 어떻게 노동시장으로 흡수되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정부자료에 의거하면, 임금노동자 비중 중 상용근로자 비중이 2003년 50.5%로 증가, 임시·일용 근로자가 49.5%로 감소 추세에 있다고 하지만 비경제활동인구가 약 1,442만 명으로 1998년에 비교 50만 명 이상 증가하였다는 사실은 크게 지적하고 있지 않다. 이 비경제활동인구의 사유 중 가사, 육아 등의 이유가 40%가 넘는다는 사실은, 실제로 구직자로 등록하지 않았지만 노동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특히 여성)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파견법의 확대 시행으로 인한 불안정노동의 종사자들은 상용근로자로 둔갑하며, 특수고용직의 형태로 개입사업자로 분류되어 있는 노동자들의 현실 또한 은폐된다. 한편 <표2>를 통해 현재 실업자 구조를 살펴보면, 신규실업자가 증가하고 있으며, 구직기간 3~5개월 미만의 실업자 비중이 높아지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략 현재의 실업의 구조는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노출되어 단기취업과 실업을 반복하는 노동자의 증가를 볼 수 있으며, 1999년까지 다수를 점했던 장기실업자 층이 실망실업자로 빠져나가 실업률 통계에 잡히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년실업의 높은 비율은, 실업자 층이 노동시장에 진입함으로써 실업이 해소된 것이 아니며, 단지, 통계에서 사라진 비경제활동인구로 전락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정부가 이에 대해 청년층에게 교육연수기회를 확장하겠다는 방식의 실업대책을 선사하는 것은 현재의 실업의 핵심원인을 외면하겠다는 의도이다. 또한, 여성, 고령자 층의 실업률 증가는 지식습득을 매개로 한 벤쳐(중소)기업 육성전략이 또 다른 위계화된 계급구조질서를 양산하였음을 보여준다. <표1> 연령대별 실업률 (단위:%) 자료 :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원자료, KOSIS. <표2> 실업자 구조 (단위:천명) 자료 :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원자료, KOSIS. 신규실업자-과거에 취업 경험이 없었던 실업자/ 전직실업자-과거에 취업 경험이 있었던 실업자 2. 신자유주의 정부에게 실업정책이란 존재하는가? 1>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과 실업정책 김대중 정부는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외 개방과 자유화를 앞당기고, 나아가 공황 상태에 빠진 자본축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국내적 축적 조건을 재형성하는 "구조조정"에 착수한다. 김대중 정부가 가장 먼저 강력하게 추진한 것은 금융부문 구조조정이었다. 98년 연말까지 41조의 재정자금을 투입하여 부실금융기관을 퇴출시키고, 인수합병을 추진하였으며, 노동력의 10~30%를 감축하였다. 이를 통해 증권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완전한 금융시장"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5대 재벌기업의 빅딜을 추진하고, 부실기업의 부채를 탕감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재벌개혁"은 재벌들의 경영을 합리화하고, 정리해고 및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창출했다. 집권 말기 이루어진 경기회복은 주식시장을 매개로 한 금융적 팽창의 지표일 뿐이며, "고용 파괴적인 자본축적"의 본격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산업부문(농업, 광업, 제조업)의 고용 감소는 서비스산업, 금융·보험 부문으로 일부 흡수되었다. 그러나 서비스·금융 산업에서 이루어진 고용 증가는 기존의 제조업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기보다 소위 골드 칼라로 불리는 금리생활자(혹은 금융 조작자)들에 의한 것이다.(서비스업 고용증가를 통한 일자리창출이라는 현 정부의 구호는 수년전에 이미 거짓으로 판명된 것이다.) 대량실업은 불가피했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권에게 실업은 해결 불가능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량실업으로 인한 노동자 민중의 불만과 저항에 직면한 정부는 "실업정책"을 내놓는데, 그것은 "신지식인 양성"과 "생산적 복지"라는 정책기조에 입각한 노동력관리전략에 불과하였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벤쳐(중소)기업육성은 수없이 망해나가는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을 실업자 통계에서 불안정 노동자로 밀어내며 또한 학력과 지식을 잣대로 실업의 문제를 개인의 무능의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결과했다. 또한 한시적인 공공근로(그것도 정규직 임금노동자와 대단히 차별적인)와 생활보호 조치는 실업노동자의 불만을 잠재우고 최소한의 도덕성을 유지하려는 면피성 "사회적 안전망" 확충에 불과했다. 김대중 정부의 이러한 실업정책의 결과, 실업노동자의 대다수는 불안정 노동 층으로 흡수되거나,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의 피로 부풀려진 금융자본에 손을 벌려 신용불량자가 되어 가정파탄-가난에 못 이겨 아파트에서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2>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개혁전망과 노동정책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의해 남한 사회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정착과 철수를 보장하는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국가로의 체질개선을 이루어내었다. 남한 사회를 금융적 팽창의 "성장"국면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무현 정부는 출범초기 정보와 기술 강국으로 나아가 동북아 중심 국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부의 재분배를 참여복지를 통해 이루어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는 장기침체에 허덕이는 세계경제의 활성화정책으로 미국이 내놓은 '신경제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미국식 신경제론의 핵심은 알려진 바대로 IT산업의 집중 육성과 인수합병을 통한 집적, 집중을 통한 부가가치의 창출, 그리고 금융부문의 활성화로 요약된다. 그러나 "정보혁명·기술혁명"으로 대변되는 신경제론은 생산의 효율성을 높일지언정,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의 기본적 성격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술은 일련의 사회관계 속에 배태되어 있다. 그러나 소유 유형과 자산을 과대평가하려는 충동-미래의 잉여가치 창출에 대한 주장을 사고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려는 투자, 투기심리-은 기술-교육의 문제를 생산요소로 분류, 투기적 성장의 요소로 포함시킨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현실 속에서 신경제는 생산성 증대의 과제를 노동절약에서 찾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신경제론은 노동유연화, 불안정화를 야기하고 잠재적 가치를 투자조건으로 탈바꿈시키는 방식으로 막대한 부를 보장하였고, 주식-금융시장의 활성화를 통해 부의 집적과 집중을 강화하였다. "지식-기술훈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노동력 관리 전략을 강화하는 한편 "노동"으로부터 노동자의 소외와 실업의 관리를 정당화하였다. 애초에 동북아중심국가 구상의 핵심은 자본유치였다. 국민소득 2만 달러의 기조 또한 만성화된 실업, 삶의 파탄이라는 사회적 위기 해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노무현 정부에게는 자본유치를 위한 국내투자환경 조성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금융주도 자본주의의 필연적 속성인 불안정성(투기성)과 장기적인 내수침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장이 '비용절감'으로부터 추출될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와 자본이 주장하는 '고용 없는 성장'은 "고용파괴적인 자본축적"을 의미한다. "고용의 파괴"란 그들의 분석대로 제조업 공동화, 해외이전이라는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성장 산업에 대한 기대를 매개로 한 금융적 팽창과 노동유연화를 통한 비용절감에 있는 것이다. GDP가 늘어도 민중의 삶은 점점 고통에 빠져드는 현실의 본질적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인위적 내수부양책(가계대출, 신용카드 거래 확대)이 파탄에 이르고, 카드사 부실 등 금융 불안 요소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다가 원/달러 환율(미국의 약한 달러 정책)의 급락 등 대내외적 제약조건은 이러한 노무현 정부의 성장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문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동원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연기금의 금융화로의 동원, 부동산거래 활성화 등 거품경제의 증대는 한국사회의 경제위기를 심화시킬 뿐이며, IT 산업육성 등 신규산업에 대한 기대심리로 주식시장을 부흥하는 길 말고는 대안이 없다. 무엇보다 확실한 방식은 신축적인 노동구조로의 재편을 통한 비용절감효과이다. 정부는 이에 따라 정규직 임금 억제, 파업투쟁 엄단 등 노동탄압의 강도를 높이는 한편, 파견제 적용영역 확대, 노동시간의 유연성 강화 등의 노동의 불안정화를 심화하는 것을 골자로 노동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지식기반경제론 지식-기술의 문제를 투기적 생산요소로 분류하여, 미래의 잉여가치에 대한 기대심리를 작동하는 방식은 금융적 팽창의 주요한 측면을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절약=효율', '재교육 기회=신분상승의 보장'이라는 도식이 추출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식기반경제론의 본질이다. '기술'혁신을 위한 지식의 문제를 학교 교육의 차원(학사관리 엄정화, 교사 평가제 등등 교육 개혁)에서 제기하는 것에서부터 취업자-실업자의 기술교육-훈련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는 이러한 논리는 실업의 문제를 개인의 무능으로 호도하고, 노동자의 삶과 지식을 송두리째 통제하는 이데올로기를 구성한다. -참여복지 한편 "참여복지"정책은 악명 높은 "생산적 복지"(언제나 팔려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노동력으로서의 자기단련)의 최신판이다. 국민의 정부의 생산적 복지는 금융 시장의 불안 요소가 되는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사관계 안정화, 실업자 관리의 근거로 작용하였다. 전통적 복지국가를 해체하여 최소한의 복지주의를 내세운 "사회안전망" 확충이란 죽지 않을 정도로 삶의 보장임과 동시에, 공공근로 등의 불안정하고 비민주적인(노동 3권 보장 없는) 노동시장으로의 실업자층의 흡수전략임이 드러난 바 있다. "참여복지" 정책은 이에 덧붙여 복지 분야의 민간참여를 확대한다. 이는 국민의 정부시절부터 국가의 노동력 관리전략에 협력해온 NGO들의 더 많은 참여를 통한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에 대한 국민적 합의 추출을 목표로 추진된다. 전국민 복지시대, 시민권적 복지라는 명분을 제시하는 가운데, 참여하지 않는 자(참여하지 못하는 자)에게 근면과 기술의 부족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 "참여 복지"의 본질이다. 따라서 실업정책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생산(노동)의 영역을 스스로 개척하라!"는 명제를 부여받은 실업노동자들은, 자본이 취사선택 가능하도록 진열된 산업예비군으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3> 일자리 창출 계획의 허구성 결론적으로 노무현 정부에게는 실업 정책이 없다. 국민적 고충을 덜겠다며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시 하겠다고 이야기하였지만, 실업대책은 "일자리 창출"의 이름으로 재정경제부의 투자활성화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기업투자환경 개선을 위한 노사협력체제 구축으로 현실화되고 있을 따름이다. "고용파괴적인 자본축적"을 지속하는 한에서 실업의 문제를 기업투자의 자유화의 과제에 철저히 종속시킨다. 노무현 정부의 일자리 창출 대책은 (1)투자활성화 (2)서비스산업과 중소기업 육성 (3)노사관계 개선 (4)공공부문 취업지원 기능 확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불안정한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안전망 확충이라는 김대중 정부의 실업대책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일말의 복지적 성격을 삭제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1)(2)의 과제는 기업투자제한요소를 제거하고 선진기술의 경영기법도입과 서비스시장 등의 개방을 통한 외자유치를 통해 실현될 것이라며, 투자활성화의 걸림돌이 되는 토지이용제한을 풀고 산학협력강화 등 혁신주도형 성장전략을 추진하여 경제자유구역 전면 실시와 개방정책으로 동북아 중심국 목표에 다가선다는 계획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서비스시장(금융부문 포함) 등의 개방은 그 투기성, 불안정성으로 인한 고용불안의 요소를 점증시킬 것이며, 기업투자 제한요소 제거는 금융주도의 투기적 이윤창출을 극대화시키는 한편,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핵심 요소 즉, '노동'의 비용절감을 위한 유연화를 심화할 것이다. 또한, 정부는 이러한 금융주도의 투기적 자본축적 방식에 대한 노동대중의 불만을 노사관계 개선이라는 구호로 무마하며 '일자리 협약'으로 노동운동을 동원하는 한편, 임금피크제 도입, 파견법 확대시행을 추진하는 등의 노동자에 대한 공세를 퍼붓는 반면, 공공부문에서의 단기적 일자리, 직업훈련, 연수기회 제공을 확대하며 실업자(특히 청년실업자)에게 선심을 베푸는 것 인양 행세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일자리 창출 계획은 정규직 임금 노동자의 임금안정 정책이며, 더 많은 노동유연화의 선언이며, 성장산업의 전망을 호도하는 가운데 '언젠가 올지도 모를 기회'를 대비한 자기단련을 강요하는 형태로 '실업자', '半 실업자'를 관리하는 노동구조의 재편전략에 불과하다. 3. 오늘 실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IMF 대량실업사태 이후 '실업자'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실업운동은 한편으로는 고용안정센터, 지역 자활사업 등의 "실업자 구제"라는 제도화된 흐름으로 정착하였다. 실업의 근본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의 흐름은 '주체형성'의 난관에 부딪혀 시작조차 되지 못하였다. 실업급여와 재교육기회, 취업알선 등의 "권리" 주장을 넘어선 실업자의 자기요구는 무엇인가? 실업노동자의 투쟁은 근본적이다.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노동하는 인간'이 '정상적인 인간'으로 규정되어왔고, 이런 관점에서라면, 실업자는 '과소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실업노동자들의 투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적 삶'에 대한 투쟁이 된다. 실업노동자의 투쟁의 과제는 정치적인 것이 된다. 노동을 가로막는, 혹은 노동을 포기하게 만드는 핵심원인이 무엇인가로부터 출발하는 정치적인 투쟁의 주체로서 '실업노동자'(이러한 방식의 호명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에 관한 고민이 요구된다. 분명한 것은, 실업은 변화하는 구조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책임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금융적 팽창이라는 고용파괴적인 양상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업자는 고용안정센터에 등록하여 재교육을 받고 팔려나가기를 기다려야 하는 구매력 없는 상품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실업운동-실업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러한 현실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PSSP <표1> <표2>
아주아주 오래간만에 자료를 올리는군요... 근 6개월 정도 발전 전력 노동조합과 수행한 프로젝트 중 노동조합의 과제 부분입니다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장님도 참여하신 프로젝트 입니다 노동조합의 과제 부분이라 한 번 올려봅니다
*오늘 울산 노동자대회 배포된 유인물입니다. 첨부파일 열어보세요. “열사정신 계승!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 철폐!” 깃발 들고 흔들림 없이 전진하자. 죽음의 공장 현대중공업 박일수 열사가 ‘하청 철폐’를 염원하며 분신하 신지 오늘로 29일이 되었다. 그의 분신은 한 점 불꽃이 되어 인터기업 노 동자들의 작업거부 투쟁으로, 하청노동조합의 지프크레인 점거투쟁으로, 조광한-진용기 공개조합원 선언으로, 열사추모 촛불집회로, 인터기업 박규 영-김태영 공개조합원 선언과 현장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열사의 유지 를 받들고자 하는 현중 하청노동자들과 하청노조 그리고 연대하는 동지들 에 의해 열사투쟁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고 불씨를 살려가고 있다. 한달여 동안 열사투쟁은 갖가지 굴곡을 거치면서도 당당하게 전진해왔 다. 하지만 현재 투쟁의 폭과 수위를 더 이상 확장시키고 있지는 못하다. 그 이유는, 전체 민주노조운동이 사측과 한 몸이 되어 열사의 분신을 비방 하고 왜곡해온 탁학수 집행부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 다. 또한 ‘10년 무쟁의’라는 사측의 막강한 현장통제력을 뚫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직영활동가들의 과감한 결단과 행동이 뒤따르지 않았기 때 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장의 하청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투쟁에 나 설 수 있는 기회와 경로가 전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면 이 속에서 故 박일수 열사 분신대책위(위원장 이헌구 울산지역본부장)는 3월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현중노조에 대한 중징계를 요청”하는 것과 동시에 “현중노조의 참여를 사측이 원한다면 받아들일 것”이라고 하였 다. 즉 “현중노조는 결코 교섭의 주체일 수 없음”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고, 대신 ‘조건없는 교섭, 현중노조 참가허용’과 금속연맹에의 현 중노조 집행부 징계안 제출을 맞바꾸기 한 것이다. 대책위는 탁학수 집행 부에 대한 징계 조치와 교섭주체로의 권한 인정이 마치 분리될 수 있는 사 안인양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일보후퇴이며 민주노조운동에 대 한 배신이다. 민주노조운동은 위로부터 상급단체의 제명 조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어용노조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 쟁취되어왔고 또 앞으 로도 그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중하청노조와 지역활동가들의 거센 반발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교섭을 위한 테이블이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열사투쟁은 ‘새로운 국면’ 에 들어섰다. 하청노조는 대책위의 ‘3.8 교섭주체 결정’을 재논의할 것 을 요구하면서 연좌시위도 불사했지만, 어제(3월 13일) 현중노조와 대책위 는 공동교섭을 위한 테이블을 가졌다. 대책위는 투쟁과 협상을 병행하겠다 고 말한다. 현중하청노조 역시 대책위 탈퇴보다는 협상테이블 참여를 통 해 압박과 견제를 한다는 생각이다. 투쟁의 원칙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열사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견지해야 할 원칙들 을 되새겨야 한다. 첫째, 박일수 열사투쟁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2003~4년 대공장 하 청투쟁의 연장임과 동시에 어용노조에 대한 흔들림 없는 태도로써 ‘민주 노조 사수’를 위한 전체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열사의 분신으로부터 촉발되었지만 유가족 위로금 보상과 하청 노동자 근로조건 개선으로 멈출 수 없는 투쟁이다. 무쟁의 10년의 현대중 공업 현장을 자본의 통제와 죽음의 망령으로부터 앗아와 새롭게 재편하는 투쟁이며, 갈수록 후퇴하고 있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복원하고 새로운 계급주체들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투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용노 조 분쇄! 민주노조 사수!”라는 투쟁의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은 현중 뿐 아니라 지하철, KT, 기아 노조집행부를 포함해 대공장 운동 전반이 실리주의화 되고 있다. 작금의 탁학수 집행부 의 노골적인 어용행각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울산지역의 화섬사업장 과 미포조선 그리고 도시철도 등 공공사업장들에서 어용들이 노민추로 가 장하여 민주파 집행부를 압박하고 조합원들의 의식을 교란하고 있다. 이 런 현실 속에서 이번 열사투쟁은 이수호 4기 집행부와 전체 민주노조운동 이 어용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 며 향후 민주노조운동의 향방을 규정지을 것이다. 전국의 계급적 활동가들은 이번 열사투쟁에서 반드시 어용노조에 대한 폭 로와 타격을 통해 민주노조 사수의 기치를 치켜들어야 한다. 작년 열사투 쟁과 같이 내 현장도 급급하다고 해서 전국적인 투쟁을 외면하는 것이 반 복되어선 안된다. 현중 열사투쟁의 패배는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또 한 번 크게 후퇴시킬 것이다. 현시기 우리의 투쟁은 비록 완전히 승리할 수 없다 하더라도 계급적 활동가들의 투지와 힘을 한데 모아 자본의 탄압과 어용의 득세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현시기 하청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받아 안고 아래로부터 자주 적인 투쟁을 만들어갈 주체는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 즉 ‘비정규직(사내 하청) 노동조합’이어야 한다. 그동안 비정규직, 특히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은 정규직 노동 조합의 직, 간접적으로 의존해온 면이 적지 않았다. 2001년도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포함해 전국적인 비정규직 운동이 우리에게 남긴 것 은, ‘정규직의 지지, 지원’ 없는 비정규직 투쟁은 패배한다는 수동성이 었다. 우리는 그것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이라는 말로 애써 위안해왔을 뿐이다. 2003~4년 대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 역시 정규직 노동조합의 지 지, 지원이 없고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해보이고 있는 듯하다(현자 아산, 현자 울산, 금호타이어 투쟁이 그러했다). 하지만 분명 히 다른 것은, 현자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이 뚜렷하게 보여주듯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투쟁에 기반한 성과들이 축적되고 있고 그 속에서 새 로운 계급주체들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최근 현자에서 직가입이 또다시 유보된 것은 하청노동자들이 더 이상 정규직에 대한 의존으로써가 아니라 자주적인 투쟁을 통해서 나아가야 함을, 그럴 때에만 정규직 노동 자들과의 공동투쟁 또한 가능함을 입증해주었다. 현중 열사투쟁에서도 하청투쟁의 ‘자주성의 원칙’은 동일하게 적용되어 야 한다. 현재까지 현중 직영노조 탁학수 집행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교 섭권을 자신에게 위임하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민주노총 이 수호 위원장은 노-노 갈등을 우려한다면서 탁학수 집행부에게 면죄부를 주 려하고 있다. 한편 대책위는 “징계는 징계, 협상은 협상”이라는 현실론 으로 어용노조와의 투쟁을 회피하고 있다. 우리는 결코 어용노조의 선처 나 도움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숨죽이고 있는 수천, 수만의 ‘쥐새끼’ - 박일수 열사가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했다- 들이 나설 때까지 하청노조와 계급적 활동가들은 투쟁의 깃발을 지켜야 한다. 셋째, “지도부가 투쟁하지 않는다면 투쟁지도부는 새롭게 재편되어야 한 다”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 현중노조와 공동교섭을 추진하면서 이헌구 대책위원장은 “(협상을 통 해) 하청노조 활동보장만큼은 반드시 쟁취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 나 지금까지 하청노조의 존재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중자본의 행태 로 볼 때 ‘문구상’의 것 이상을 과연 얻을 수 있겠는가? 3자 협상의 결 과는 뻔하다. “유족들에게 사과한다.”, “하청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 을 위해 노력한다” 정도일 것이다. 현중자본은 열사투쟁으로 인하여 무쟁의 10년의 강고한 현장장악력이 깨 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또 열사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하청 노조’의 존재를 가장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끝까지 열사를 부정 하고 하청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따라서 협상을 통해 무언가 를 쟁취해 보겠다는 이헌구 대책위원장의 발언은 비현실적인 주관적 바램 이거나 혹은 하청노조 및 투쟁하는 대중을 기만하는 관료적 술책일 수밖 에 없다. 투쟁을 회피한다면 더 이상 지도부가 아니다. 투쟁하지 않는 지도부 대 신 새롭게 투쟁의 구심을 형성하는 것 - 이것이 바로 민주노조운동의 자랑 찬 역사이자 정신이어 왔다. 민주노총과 대책위 마저 열사정신을 훼손하 고 더 이상 투쟁하지 않는다면, 전국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이고 전투적 인 활동가들이 열사정신 계승을 위해 투쟁으로 떨쳐나서야 한다. 오늘 울 산 현대공화국에서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우리의 힘과 투지를 발휘하 자! 투쟁! 새로운 계급주체의 네트워크 사회주의노동자신문(준)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승리할 것이다. 7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오늘로 24일(3월10일 현재)차 단식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감옥보다 더한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곳 화성 외국인보호소, 여수출입국관리소 내 외국인 보호시설에서 그리고 명동성당 천막 농성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왜 머나먼 이국땅에서 극한의 투쟁을 벌이고 있는가. 이주노동자는 여전히 노예인가? 고용허가제의 반노동자성에 대하여 한국정부는 2003년 7월 31일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하 고용허가제)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실제로는 이미 40만을 넘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와 통제를 위해 새로운 이주노동자 인력관리제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법은 2004년 8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며 한국에서 노예제도라 불리어 온 '산업연수생제'와 함께 실시된다. (산업연수생제도의 실패를 인정하며 제정된 고용허가제가 산업연수생제도와 병행 실시된다는 것은 굉장한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에게 산업연수생제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노예법이다. 그 첫 번째 문제는 '사업장 이동 자유의 제한'에 있다. 사업장 이동은 휴업 및 폐업 그 밖에 외국인근로자의 책임이 아닌 사유로 그 사업장에서 근로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고 인정되는 경우(제25조 2항)에만 허용되며 그마저 최대 4회까지만 가능하다. 사업장 변경 허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변경을 신청한 날부터 2월 이내에, 근로계약이 종결된 후에는 1월내에 사업장 변경신청을 하지 않으면 역시 미등록 이주노동자(불법체류자)가 된다. 사실상 고용주의 해고는 자유롭지만, 이주노동자 스스로는 다른 업체로의 이전 및 변경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는 임금체불, 열악한 노동조건, 성폭력의 위험에도 불법체류자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노예처럼 참고 일해야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해야 하고, 그 시기가 3년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점(제9조 및 제18조)이다. 이것은 이주노동자들을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의 상태로 고정시킨다.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의 재계약을 조건으로 한 임금 및 노동조건의 하락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한국에 입국하는 (브로커)비용이 1,000만원 수준이다 보니 이것을 갚기에 3년이라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따라서 한국에 체류해야 하는 기간이 어쩔 수 없이 늘어난다. 우리를 헌 기계처럼 버리려는가? 고용허가제 정착의 가장 주요한 문제인, 미등록노동자 문제에 대한 조처로 정부는 체류기간에 따른 선별합법화 조치를 취하였다. 한국 체류 4년 이상자는 무조건 한국을 떠나야 하며, 3년 이상 4년 이하는 출국 후 재입국, 3년 이하자에게는 등록절차를 통해 합법체류를 보장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2003년 11월 16일부터 매달 10일간 대대적인 합동단속, 강제추방을 통해 불법 체류자 문제를 해소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한국 정부는 2003년 11월부터 2004년 1월말까지 총 3차례의 합동단속을 실시하여 약 3,000명의 이주노동자를 강제추방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자진 출국자들을 포함해서 10,000명이 조금 넘는 이주노동자들만이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합법체류를 보장받은 이주노동자들 조차 열악한 노동조건과 인권유린의 문제로 계속 불법 체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현재(3월 2일) 법무부가 파악하고 있는 불법체류 외국인은 13만6,000여명이다. 자진출국과 강제추방, 그러나 고용허가제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1월 17일, 합동단속이 별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자 한국정부는 자진출국 시한을 2월까지 연장하고 고용허가제로 다시 들어올 수 있게 해준다는 소위 '합법화 방안'을 마련해 발표했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 고용허가제가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상태에서, 다시 불법체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길이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자진출국을 선택할 이주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1000만원이 넘는 돈을 들여 한국으로 다시 들어와야 하는 모험을 선택할 수는 없다. 정부의 기만적인 자진출국 유도 정책에 맞서 '강제추방저지,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투쟁단(이하 농성투쟁단)은 자진출국 거부 서명운동을 선언(2월10일)하고 전국적으로 서명운동을 조직했다. 2월 21일 법무부는 다시 강력한 '단속추방'을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자진출국 기간을 연장했음에도 오히려, 기한 연장 이전 출국자수(일 평균 90명)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183명(일 평균 42명)만이 한국 땅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농성투쟁단의 발의로 진행되고 있는 자진출국거부선언운동을 직접 언급하며, '자진출국전면거부운동을 방치할 경우 국가공권력 실추는 물론, 금년 8월부터 시행 예정인 고용허가제 도입에 상당한 차질이 예상'되고, 따라서 '정부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거나 '불법집회나 시위에 참가하는 불법체류외국인은 전원 검거하여 강제퇴거'시킨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이는 한국 정부의 지난 세 차례 합동단속이 실패했고, 마지막으로 내 놓았던 '자진출국 후 고용허가제로의 재입국'안 또한 아무런 실효성이 없었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즉, 한국 정부가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한 것이다. 외국인보호소 내 인권 유린과 이주노동자 운동 탄압 1월 7일 (12월 26일 비정규노동자대회에서 연행된) 비두와 자말의 강제추방에 항의하며 진행된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 집회에서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이 농성단 대오를 침탈하였다. 사람들을 몽둥이로 내려치고 가스총까지 쏘며 깨비(네팔)와 헉(방글라데시)을 강제 연행하여 출입국 관리소에서의 심사과정을 생략한 채 화성외국인 보호소로 이송해갔다. 그리고 2월 15일, 농성단 대표 샤말 타파(네팔)가 자진출국 거부 선언운동을 제안하기 위해 혜화로에서 필리핀 공동체를 만나고 있던 도중 5명의 괴한에 의해 납치되었다. 자진출국 거부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미행을 통한 표적단속이었다. 샤말은 곧바로 화성이 아닌 여수출입국 관리소 내 외국인 보호시설로 이송되었다. 농성투쟁단은 곧바로 2월 17일 출입국 관리사무소 앞 표적단속 규탄, 이주노동자 단식 투쟁 선포 대회를 진행했다. 수도권 일대에서 총출동한 80여명의 출일국 관리소 직원들이 전경의 비호를 받으며 또다시 집회 대오를 침탈하여 농성단의 굽타(네팔)를 연행해 갔다. 2월 17일 총 9명(여수보호소 1명, 화성 외국인 보호소 4명, 명동성당 농성단 4명)의 이주노동자들 강제추방 중단, 강제연행된 이주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그리고 2월 23일 화성 외국인 보호소 내 단식 투쟁이 빠르게 확산되어, 화성보호소에서만 총 17명의 이주노동자가 단식투쟁을 벌이는 상황이 발생했다. 단식투쟁이 확산되자 외국인 보호소 내에서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 유린이 극에 달했다. 6명의 이주노동자를 독방에 감금하고, 면회를 통해 전달한 단식에 필요한 약품들을 7일째 지급하지 않고, 환자들 대해 의사진료도 진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3월 3~4일 이틀간 단식에 동참한 11명의 이주노동자들을 여권, 여행자 증명 등 아무런 신분증명서도 없는 상황에서 불법적으로, 건강상태(각혈과 하혈)조차 고려하지 않으며 강제 출국시켰다. 한국 정부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농성투쟁단을 전원 검거해 강제추방 시키겠다는 협박을 하고 있다. 농성투쟁단이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있는 안산, 김포, 수원, 의정부, 성수 등의 지역에서 강력한 표적단속을 실시해 이주노동자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는 분명 농성투쟁단과 외부 이주노동자간의 단결을 막고, 농성투쟁단의 투쟁을 고립시키려는 의도이다. 이주노동자가 주체인 이주노동자 운동, 그 희망찬 미래를 위해 어느새 들머리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한지 100일을 훌쩍 넘어섰다. 강제추방 저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기치로 연수제도 폐지, 이주노동자의 노동3권 쟁취, 사업장 이동의 자유 확보, 강제 연행된 이주노동자 전원 석방을 요구로 우리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으며 투쟁은 더욱 확산되고 있고, 지지받고 있다. 농성단의 대표를 연행하고 표적단속을 자행하고 보호소 내에서 인권유린을 자행해도 이주노동자들의 강제추방 분쇄와 전면합법화를 위한 투쟁은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22일 백일기념 집회에서 '사회단체와 연계해 집회 참가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연행'하겠다는 정부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약 70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집회에 참가했다. 3월2일 4차 합동단속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결코 13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을 강제추방으로 내쫓을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에 나섰다. '우리는 쓰다가 버리면 되는 헌 기계가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 노동자다' 외치며, 아무런 대책 없이 기계가 버려지듯 나라로 쫓겨 나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현재 한국 정부의 이주노동자 정책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줄여나갈 수 있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더욱 양산하는 정책이라는 것을. 이미 이주노동운동의 주체는 이주노동자이다. 현재의 농성투쟁이 어떠한 방식으로 정리되더라도 투쟁은 승리할 것이며, 미약할지라도 이주노동자의 노조로서 전국조직화를 위한 흐름이 시작될 것이다. 많은 어려움들이 존재한다. 나라별 조직화의 문제, 센터 중심으로 구축된 이주노동자의 문화를 변화시켜나가는 문제, 한국인과 이주노동자의 관계문제, 필요한 지원과 지지 등. 화성외국인 보호소에서 들불처럼 조직된 단식투쟁은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힘을 보여주었다. 지금의 시작이 이주노동자운동을 한국노동운동의 주체로 만들어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단결과 연대로! - 고 박일수 동지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빕니다. 꼬리를 무는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은, 그 죽음‘들’에 무뎌지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살을 에는 자본의 탄압보다 두려운 것은, 이겨낼 생각조차 품지 못하는 사람들의 온순함이다. 박일수. 50세.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인터기업’ 노동자. 노조의 ‘노’자만 꺼내도 서슬 퍼런 해고가 현실이 되는 침묵의 공장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하청노동자 임금체불 진정서 한번 내보겠다고 연판장을 돌리던 이. 원하청 노동자 하나하나 만나가며 연대를 호소하고 투쟁을 조직했던 이. 심장의 피 꺼내 쓴 듯한 울림 깊은 유서를 A4용지 석 장에 빼곡이 적어 집에 한 통, 품속에 한 통. 울산에선 부리나케 분신대책위가 꾸려졌다. 유일한 유족인 딸로부터 위임장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검을 마친 뒤 현대중공업 정문 바로 앞 울산대병원에 빈소가 차려졌다. 현대중공업노조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짙다”면서 대책위 참가를 거부했다. 이어 “고 박일수 씨는 현대중공업은 물론, 현대중공업 협력회사인 인터기업과도 근로계약관계에 있지 않는 사람”임을 민주노총 울산본부에 친절히 알려왔다. 이도 모자라 “현중노조의 요구가 무시되고 특정의 목적을 위하여 현 사태를 악용할 경우, 민주노총은 물론 울산지역의 제 노동단체와의 모든 관계를 신중히 재검토할 것임을 천명”까지 했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노동자들은 크레인 고공농성을 시도하다 개처럼 두들겨 맞고 경찰에 넘겨졌다. 그 시각 정문 밖에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들이 공장진입을 시도하다 잡초처럼 짓이겨졌다. 여성도, 시의원도 예외가 없었다. 유족은 검은색 소나타에 실려 납치될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납치범 중 한 명은 현대중공업노조 이 아무개 기획부장이었다. 경찰도 찾지 못했던 고인의 이복동생이 돌연 등장했다. 이건 희극인가, 비극인가. 유서는 차라리 비정규직을 둘러싼 21세기의 야만을 폭로하는 한편의 신랄한 고발장이었다.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간존엄성은 개만도 못한 처지…암울한 하청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해 줄 곳은 아무 곳도 없다…대한민국 노동법은 자본을 위한 법…억울함을 노동부에 고발해봐야 부당해고비 몇 푼 받으면 끝난다…상대적 빈곤감과 박탈감을 피눈물나는 심정으로 울분을 달랬어야 한다…현대 중공업 공장 사내복지 시설을 하청비정규직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식당, 샤워실, 화장실, 커피자판기 뿐…이런 현실이 세상에 밝혀지고 대수술이 없는 한,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는 희망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현대어용노조는 그네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노조이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원칙은 말장난일 뿐…나도 앞서간 열사들의 고뇌와 희생에 같은 심정이다…부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진실 된 노동의 대가가 보장되는 일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고인의 분노는 날이 서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인상된 시급 640원을 소급 지급해달라고 요구했다가 하청업체 하나가 통째로 날라 가는 곳이 현대중공업이다. 원청노동자가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샤워실에 따뜻한 물과 수건조차 나오지 않는 곳이 현대중공업이다. 자본이 쳐놓은 차별의 그물은 이렇듯 촘촘하다. 하나하나 셀 수조차 없는 일상적 차별에서, 정규직 노조라면 상상도 못할 부당노동행위까지, 자본은 비정규직을 인간 이하로 대우했다. 위험수위를 넘은 차별은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진행됐다. 민주노총 금속산업연맹이 지난해 발간한 <금속산업 사내하청 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실태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02년 현재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수는 모두 14,050명이다. 2002년 1월 사내 하청노동자가 9,128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9개월만에 5천여 명이나 증가한 것이다. 이같은 추세라면 1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훨씬 더 많은 숫자의 하청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이같은 현상이 비단 현대중공업만이 아닌 모든 직종과 산업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정규직 폭증은 철저한 이윤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자본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을 선택했다. 자연스레 노동통제 및 노동강도도 직영노동자보다 가혹해졌다. 심지어 현대중공업은 다른 사내 하청업체로 이직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출입증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출입증제도는 사내하청 노동자 관리를 위한 전산망을 통해 이뤄지고 있으며, 다른 회사뿐만 아니라 사업장, 나아가 지역차원의 이동도 통제하고 있다. 노조결성을 시도했거나, 노조에 관심을 보이거나, 노조에 적극적인 노동자의 취업을 막기 위한 블랙리스트도 횡행한다. 현대중공업은 하청업체별 인력관리를 위해 구축된 통합전산시스템을 원하청업체가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현재 구성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원 대부분은 노조결성 직후 해고됐고, 지금까지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었다. 정부는 잇따르는 비정규직의 죽음과, 이 죽음을 불러온 사태악화의 주범이란 역사의 판결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이번 사건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분명히 기록하고자 한다. 고 박일수 동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차 가해자는 분명 자본과 정권이다. 노무현 정부는 취임 1년 만에 비정규노동자 2명의 생목숨을 앗아간 살인정권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보다 시선을 돌려야 할 곳은 바로 우리 스스로다. 고인이 겨눈 비판의 화살은 정권과 자본을 향한 것이었지만, 우리의 안이한 인식과 불철저한 연대도 죽음을 부채질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정규직노조 이야기는 아예 말자. 그들이 ‘비정규 투사’가 되길 기대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사회주의 언론’으로 거듭나길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보수정치인들까지 ‘차별 철폐’를 심심찮게 외치고 있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민주노조 진영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비정규 사업을 ‘제1과제’로 삼아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지만, 아직 한참 부족했다. 각종 정책과 제도개선안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그 투쟁을 주도하고 이끌어야 할 투쟁주체는 아직도 형성되지 않았다. 비정규 투쟁주체 형성의 난망함이 그들의 불안정한 신분에 있음을 깨닫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정규직노조의 과제로 규정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임단협 말기 슬그머니 양보할 수 있는 ‘카드’ 이상이 아니지 않는가. 혹 그렇다면 이는 차별에 멍든 비정규 노동자들의 눈물 젖은 얼굴을 다시 한번 가격하는 것은 아닌가. 활동가라면 누구나 성경처럼 외우고 있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단결과 연대’는 공염불에 머무르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은 아직도 ‘노조운동의 현실을 모르는 학구파들의 푸념’ 이상이 아닌가. 사람이 몇씩 죽어나가도 도무지 움직일 줄 모르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가 아닌가. 다시 반문해야 한다. 고 박일수 동지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번 싸움에서 무엇보다 역점을 둬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열과 반목을 딛는 일이다.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투쟁을 기획하고 수행해야 한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급기야 오만을 넘어 방자함에 이른 자본과 정권은 사태의 본질을 노동계급 내부의 갈등으로 치환해 해석할 것이다. 계급 내부의 약한 고리를 물고늘어지며 하나의 대오가 형성되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현대중공업노조의 이해할 수 없는(혹은 충분히 예상됐던) 반응은 그들에게 참으로 요리하기 좋은 호재임이 틀림없다. 단언컨대, 지금 싸움의 핵심은 계급 내부의 단결과 연대, 그 단순한 진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분명한 이 명제가 실현되지 않을 때 닥쳐올 불행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지경임을 확신한다. 죽음의 행렬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고, 그 때마다 분노에 몸을 떨던 노동자는 그 분노만큼의 절망에 빠져들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패륜적인 의혹처럼 어둠의 세력이 죽음을 부추겨서도 아니며, 현실의 노동운동이 무능해서도 아니다. 문제는 모두에게 닥친 노동운동의 위기 일반이다. 여기에서 비롯된 맹목적인 전투성 혹은 허울좋은 투항에 경도된 노동운동의 현실이다. 좌표를 상실한 노동운동은 계급대중을 두 가지 길로 내몰았다. 하나는 죽음도 불사한 극단적 항거이며, 다른 하나는 당장의 안락함이 보장되는 투항이다. 그칠 줄 모르는 자본의 공세와 융단폭격 속에 이 땅 노동자는 빈사상태에 놓였다. 폭격은 때론 ‘비정규직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고, 때론 ‘손배?가압류’라는 꼬리표를 달거나 ‘해고’라는 얼굴로 나타났다.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은 노조결성도 시도해보고, 수배생활을 견디고, 크레인 농성도 해보지만 단단한 자본의 벽 앞에 절망하고 만다. ‘사회적 합의’를 미끼로 달콤한 미소를 보내는 자본 앞에, 어떤 이들은 쉽게 투항한다. 먼 앞날의 효과보다 눈앞의 성과에 만족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들은 차라리 자본의 품안으로 들어간다. 협조와 타협을 앞세우고, 투쟁의 준비를 내세운다. 공장 안에 틀어박혀 고전적인 임단협 투쟁에 안주하기도 하고, ‘사회문제 해결’에 목소리 높이며 정작 문제의 근원은 외면한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부’가 들어선 마당에, 투항은 명분과 실리 모두를 갖춘 것으로 포장된다. 보다 건강한 이들은 차마 투항하지 못한 채 끝간데 없는 싸움을 택하지만, 노동운동의 위기 속에 활로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죽음을 택한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명제 중 하나인 ‘노동자 계급적 단결과 연대’를 통한 비정규직 철폐를 향해 총진군해야 한다. 정규직노동자의 인식을 전환하기 위한 장?단기적 계획을 수립하고, 강령 제?개정 운동을 통해 비정규 차별철폐의 정신을 담는 등 조직문화 혁신사업을 펼쳐야 한다. 임단협 투쟁에서부터 원하청 공동투쟁을 활성화해 민주노조 운동의 진일보를 이뤄내야 한다. 절망을 부르는 투항주의를 극복하고, 근본변혁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의 정방향을 걸어야 한다. 다시 한번 고 박일수 동지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PSSP
IMF 외환위기 당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던 실업의 문제는 정부의 실업대책 마련 이후 실업률의 감소와 함께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당시 쏟아져 나온 실업자 층이 안정적인 일자리로 흡수되는 방식으로 실업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주 노동시간 1시간 이상이면 취업자로 간주되고, 실망실업자(일자리가 없어 아예 취업을 단념)는 통계에서 누락되는 숫자놀음에 증발해버린 실업자 층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2004년 들어 다시 실업률이 급증하고 있다. 전체 실업률은 3.4%, 청년실업률은 8.9%에 육박한다. 실업률 통계자료의 특징은 신규실업자의 급증과 청년실업, 여성, 고령자 층 실업률의 급증과, 구직기간이 짧은 실업자의 높은 비중으로 요약된다.{{ 청년 실업률 - 15세 이상 29세 이하의 경제활동인구; 2003년 8.9%로 전년대비 0.9%증가, 여성 실업률 - 2003년 3.1%로 전년대비 0.6%증가, 고령자층 실업률 - 55세 이상 64세 이하의 경제활동인구; 2003년 2.4%로 전년대비 0.3% 증가 구직기간 3개월, 6개월, 9개월, 12개월 이상으로 분류했을 때, 구직기간 3개월 미만인 실업자수는 49만명으로 전체 구직자의 63% 이상을 차지, 이러한 단기구직자는 98-99년 최정점에 달했다가 이후 감소세 지속되다 2003년 다시 급증) -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 이를 통해 정부는 고임금 구조로 인한 신규고용창출 여력이 부족한 상황을 지적하고, 여성과 고령자 층, 장애인 등의 잠재적 인력의 활동방안이 시급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현재 실업은 불안정한 일자리와 소득으로 인한 단기 취업과 실업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노동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양상으로 해석된다. 강제퇴출 노동자가 급증하고 부부 맞벌이가 필수적이며 심지어 온 가족이 일터로 나서야 빈곤을 겨우 벗어나는 현실 속에서, 여성, 고령자층, 장애인 등의 주변 노동력이 대거 실업-반실업 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실업률이 잠시 주춤했던 것은 산업자본의 자태변환이 동반한 불안정한 일자리 구조 속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실업-반(半)실업의 문제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소비시장 활성화와 고용창출의 조절문제를 남한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해왔으며, 지금의 실업률 확대, 내수침체-소비위축 등의 위기 상황이 어디서 기인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운동의 자태변환과 그것이 유발한 고용구조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실업의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2월 8일 '노사정위원회'가 내놓은 '일자리 만들기 사회 협약'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권의 노동정책의 방향성을 극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고용없는 성장' 속에서의 성장을 통한 고용창출이라는 모순 정부는 2004년 경제운영계획에서 일자리 창출을 최대화두로 제시하며 기업에 대한 투자확대와 서비스산업에 대한 지원확대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동시에 재계는 대기업 임금동결과 안정적 노사관계 구축,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한 칠레 FTA비준 등을 촉구했고, 이는 결국, 지난 2월 8일 노사정위원회의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자리 협약 안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협약이 아니다. 외자유치, 신규투자 활성화를 위한 노사관계의 변화라는 노사관계선진화방안(2003년 9월 노동부)의 연장선상에서 비정규직 전면 확대와 임금동결, 노동조합 무력화를 실질화하기 위한 방안일 따름이다. 애초부터 노무현정부에게 일자리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민생의 문제'로 설정되지 않았으며, 일자리 문제 해결의 구호는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마무리 단계인 노동 유연화 전략의 완성을 포장하는 허울 좋은 수사에 불과했다.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의해 남한 사회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정착과 철수를 보장하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국가(BUY KOREA!)로의 체질개선에 착수하였다. 이제 노무현 정부에게는 각종 개방화, 자유화 조치의 체결을 앞당기고 외자유치를 실제로 해내는 문제, 즉, 금융화된 남한사회를 성장의 국면으로 끌어올리는 과제가 남겨지게 된 것이다. 이 성장의 과제 앞에 정부가 붙이는 수사는 '고용 없는'이다. KDI를 비롯한 경제연구원들은 일제히 2004년 경제성장률을 5% 이상으로 전망하며 '고용 없는 성장'을 예고했다. 이들은 경제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원인을 기업이 성장을 위한 생산성 증대를 비용(임금) 절감에서 꾀한다는 것으로 지적하고, 한국사회의 고임금 구조로 인해 제조업 공장이 해외로 떠나간다며 '산업공동화' 현상을 우려했다. 그러나, ‘고용없는 성장’의 다른 표현은 ‘고용 파괴적인 자본축적’이다. (산업)자본은 이윤율의 저하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물질적 팽창보다는 고도금융을 통한 잉여가치의 분배기술을 높이는 방식을 택했다. 실제로 산업자본은 세계적 수준에서 강제되는 금융자유화와 탈규제에 의해 가능해진 금융설계기법 덕분에, 고용을 새로 창출하는 신규투자를 행하지 않고도 국가경계를 넘어서는 인수합병을 통해 기대이상의 수익을 창출했다. 그리고 기관투자자들은 주식차익, 배당금을 노리고 고용파괴적인 구조조정을 강요한다. 또한, 생산기술과 노동통제 전략은 노동 절약적인 목표를 추구한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IT산업의 증대, 기술 혁신으로 인한 고용축소와 금융거래 등의 산업을 뒷받침하는 서비스분야의 확대(하인노동)는 저임금과 일자리의 불안정함을 불러온다. 이 고용 파괴적인 구조조정은 파견, 하청, 계약·임시직 등 각종 비정규직의 확대와 산업연수생 제도 등 각종 변형근로의 형태 등을 개발하여 노동에 대한 관리, 통제를 확장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의 금융화가 남한 사회에서 내수침체, 소비시장의 위축이라는 위기 상황으로 이어지자, 정부는 국내신규투자 확장을 통한 소비시장의 활성화를 과제로 삼게 된다. 김대중 정부가 카드 발행 확대, 벤처 육성 등으로 소비시장을 활성화하고 투자심리를 자극하여 금융자본의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면, 이러한 거품 붕괴 이후 결과로서 신용불량자 대거 양산, 투자 심리의 위축 등이 드러나는 현재의 조건을 노무현 정부는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 이에 대해 정부가 내린 답은 국내신규투자 활성화와, 사실상 반(半)실업 상태에 있는 불안정한 노동자 전반의 환상을 작동시켜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길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서 신규투자의 걸림돌이 되는 '아직 덜' 유연한 노동을 확실하게 제압하고 자살과 분신으로 항거할 만큼 강력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원천 봉쇄해나가는 한편, 실업구제책인양 불안정한 일자리를 베풀고 정규직으로의 진입에 대한 환상을 유포는 가운데, 카드규제를 완화하는 등, 노동자 민중을 기만하는 시책을 펼칠 것이다. 2004년 7월부터 전면 실시되는 주5일제 도입에 앞서 서둘러 체결된 '일자리 협약'은 결국 노동 유연화의 법제화, 노동자투쟁에 대한 판정승으로 점철된 수많은 국가들의 선례를 따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겠다는 고용 파괴적인 안이며,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지금껏 추진되었던 구조조정을 완성하고자 하는 노골적 의도를 드러내는 안인 것이다. '일자리' 통제의 일자리 협약 일자리 협약안의 출발점은, '남한 경제의 위기에 대한 극복방안의 마련'에 있다.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협약안은 전문에서 내수부진, 투자감소 등의 어려운 조건과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가 감소하는 상황, 산업공동화와 노동시장 양극화, 청년실업 증가의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협약을 체결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언뜻, 이는 고용창출이 어려운 경제적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일자리 창출을 모색하자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협약안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여 기업의 투자를 촉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한다. 기업에 대한 규제를 획기적으로 완화하고 기업에 대한 조세 및 금융지원으로 기업활동을 지원하여 일자리를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다. 노동계는 일자리 만들기 및 임금격차 완화를 위해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높은 부문에 대해 향후 2년 간 임금안정에 협력하고, 경영계는 투자확대를 통해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고용조정을 최대한 자제하며, 정부는 기업규제 완화 및 사회 안전망 확충에 노력한다는 것이 일자리 협약의 주된 내용이다. 협약안은 일자리창출이라는 구호와는 상호모순되는 명제들로부터 이루어져있다. 첫째,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여 기업의 투자를 촉진한다는 조항의 내용은, 고용창출을 위해서는 기업투자가 활성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현재 기업활동의 자유를 제약하는 조건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조세 및 금융지원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업투자의 활성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는 것은, '인력 운용의 효율화와 유연성의 확대'이다. 고용 없는 성장의 원인으로 기업들의 비용절감을 위한 고용의 축소를 스스로 지적한 바 있는 상황에서, 기업투자 핵심제한요소를 노동의 경직성으로 보는 것은, 일자리의 실질적 창출에 정부는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또한,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를 위해 원스톱(one-stop)서비스 등의 각종 지원을 강화한다는 것은, 고용의무, 관세 등의 의무 등을 책임지지 않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단기적 투기를 보장하고 그로 인한 고용-경제구조의 혼란을 확장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둘째, 고용안정과 격차완화를 통해 성장기반을 확충한다는 조항은,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동결과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 안전망 구축을 통한 제도화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업에게는 인위적인 고용조정을 '최대한' 자제하고 비정규직을 '불합리하게' 차별하지 않는 등의 고용안정을 위한 노력을 '적당히' 기울이라고 권고하는 대신, 노동계는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높은 부문에 대해서 향후 2년 간 임금안정에 협력하라는 식이다. 이러한 모호한 규정은 향후 성장론에 입각한 기업의 입장을 철저히 옹호하는 형태로 나아갈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과 저소득근로자에 관한 문제를 기업-고용의 차원에서 언급하지 않고, 정부의 사회 안전망 확충(자활근로, 직업훈련, 취업지원사업 강화)으로 치환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해결의 근본방향을 빗겨가는 것이다. 셋째, 취업애로계층에 대한 일자리 만들기 시책을 강화한다는 조항에서 공공, 복지 , 사회서비스 분야의 일자리를 확대 방침을 밝혔으나, 이는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정부가 내놓은 허구적 실업대책(공공근로 확대, 벤처 육성)과 같은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청년, 여성, 고령자 층에 대한 취업지원과 교육확대 또한 근본적인 실업대책이라 할 수 없으며 특히, 임금 피크제 도입을 통한 청년층 고용확대는 정규직 임금노동자를 발목 잡는 빌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넷째, 일자리 만들기를 지원하기 위하여 노사관계 안정에 노력한다는 조항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투명경영을 통한 노사동반자 관계 정립보다는, 법과 원칙 대화와 타협이라는 노사문화의 정착이라는 지점이다. 앞서의 조항을 준수하는 것이 대화와 타협의 전제라고 했을 때,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는 그 자체로 원칙을 거스르는 엄격한 법 집행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다섯째, 이 사회협약을 현실화하기 위해 단체협약에 충실히 반영하고 입법한다는 것은 이 협약을 그 자체로 노사간의 대화의 전제이자 상호평가의 준거로 삼겠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앞으로 노동자들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기업의 투자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고 파업 투쟁을 벌이지 않을 것을 약속해야 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쯤에서 노사정위원회에서 제출한 일자리 협약안은 결코 일자리 창출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으며, 기업투자제한, 외자유치를 가로막는 노동자들의 임금구조를 개혁하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저항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선전포고에 다름 아님이 확인된다. 협약안의 체결 이후, 재계와 언론은, 일자리협약에 제시된 임금 피크제 도입의 기준과 기업투자환경 조성의 기준과 구체적 대책이 분명하지 않다며, 실효성 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협약안 체결에 합의한 한국노총은, 협약의 확실한 실천을 요구하며 환영하고 나섰다. 그러나 협약안의 실효성 여부에 초점이 맞춰진 이러한 입장들은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비정규직이라도 일자리를 대폭 늘리겠다'는 식의 발언을 지지하고, 파견근로의 영역을 대폭 확대하는 것을 장려하고, 향후 구체적 법안 수립의 과정에서 임금삭감의 수치와 임금 피크제 도입 기준 등에 대한 논쟁의 근거가 될 따름이다. 한편, 민주노총은 노동계의 입장을 반영하는 과정이 삭제된 채 졸속적으로 추진된 이 안은 구체적인 노동의 조건에 대한 분석이 결여되어있는 정규직 임금억제정책이라며 비판에 나섰다. 그러나 만약, 민주노총이 사회적 교섭구조마련, 노사정간 의무의 성실한 이행이라는 운동의 형태를 우선시하여 정부와의 협의테이블에서 일자리협약의 조언자, 조력자라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하위파트너로서 자신을 위치 짓는다면, 노동의 권리를 협상테이블에 가두는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현재의 실업의 근본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의 실업의 문제라는 인식 틀을 수용한 채, 요구적 수준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언급과, 고용친화를 주장한다면 성장을 저해하는 안티 세력으로 전락하거나, 비정규직의 수치, 고용친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사-정의 숫자놀음에 놀아나는 수세적인 타협의 길 즉, 노동운동의 후퇴라는 위험에 처할 것이다. 정부의 노동 유연화와 노동통제 전략, 일자리 협약안에 대한 단호한 비판이 필요하다. 기업의 신규투자 감소는 비싼 노동력, 즉 성장에 협력하지 않는 노동자들에 의해 발생하였는가?, 정규직 노동자가 높은 임금을 받으며 자리를 꿰차고 노동귀족 행세를 하는 집단 이기주의 세력이기 때문에,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설움 속에서 비참하게 노동하는가? 노무현 정부의 일자리 협약에 대한 태도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무엇으로 마련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고용 파괴적인 자본축적'이라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이끄는 노동통제의 전략에 대해 한치라도 동조와 타협의 움직임을 보인다면 임금, 고용형태가 불안정한 상황-반실업 상태에 노출되어 스스로의 삶을 계획하고 통제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 뿐이다.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분노와 불만마저 갈갈이 해체당하는 실업-반실업 노동자의 확대방안에 대해 기존의 노동자운동은 무엇을 해야하며, 위계화로 분화된 대중운동은 무엇을 쟁점으로 연대를 확장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모색되어야 한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