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보건의료 정세전망
2020년 한국 보건의료의 핵심 의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보건의료 규제완화이며, 다른 하나는 세금과 건강보험료를 통한 기업지원이다. 두 가지 모두 혁신성장을 위해 보건의료를 희생시키는 계획이다. 2020년 1월 14일, 정세균 신임 국무총리는 취임사에서 “과감한 규제개혁을 통해 불확실성을 줄이고 기업가 정신을 고양하는데 정부의 사활을 걸겠다”, “정부는 혁신성장에 전력투구해 경제 활력의 마중물이 되겠다”라고 했다. 올해는 오로지 혁신성장만을 바라보고 간다는 기조다. 이유는 한국 경제가 완연한 침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17년 3.2%, 2018년 2.7%였으며 2019년은 2.0%로,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
2019년 정부는 혁신성장 핵심 산업으로 ‘DNA + Big3’를 선정했다. 데이터(Data), 네트워크(Network), 인공지능(AI), 3대 신성장 산업(Big3)으로 바이오헬스, 시스템 반도체, 미래차다. 이 계획에 따르면 보건의료는 가장 많이 규제를 완화하고 가장 많이 투자해야 하는 부문이다. 먼저 한국에 존재하는 데이터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게 바로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축적된 보건의료 빅데이터다. 반면 반도체나 자동차와 비교하면 바이오산업의 국가 경쟁력은 형편없다. 미국 과학전문매체 사이언티픽 아메리카(Scientific America)는 2009년부터 바이오산업의 국가 경쟁력의 순위를 매겨왔다. 여기서 한국은 2018년 기준 54개국 중 26위를 차지했다. 문재인 정부의 주장은 바이오산업이 실력은 충분한데, 규제 때문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규제를 없애주고 자금을 지원하면 신성장 산업으로 발전해 한국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한국 바이오산업의 성과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에서 평가해 본다. 그리고 바이오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문재인 정부가 시행했거나, 시행할 규제완화와 자금지원 정책들을 분석한다. 문재인케어의 진행 과정도 점검하고, 문재인 정부의 공약이었던 실손보험료 인하의 약속이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도 확인한다.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면, 혁신성장 정책으로 바이오산업을 발전시키지 못할 것이며, 경제성장 효과도 별로 없을 것이다. 문재인케어 중 예비급여는 병원과 의료산업에 대한 자금지원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며, 실손보험료는 결국 인하하지 못할 것이다. 보건의료가 건강증진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의료공급체계 개혁이다. 구체적으로는 병원에 대한 규제와 의료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일차의료 중심의 통합적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2019년 한국 바이오산업의 초라한 성적표
2019년 초까지만 해도 한국 바이오산업은 블록버스터급(매출액 1조 원 이상) 신약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런 근거 없는 장밋빛 전망은 문재인 정부 탓이 크다. 혁신성장 정책의 핵심은 두 가지로, 규제완화와 코스닥 시장 활성화다. 궁극적 목표는 한국에도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세계적인 기업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즉, 세계 최고 수준의 원천 기술을 가진 벤처 기업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나 쉽게 창업하고 상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모든 규제를 없애야 한다. 설령 상품 생산에 실패하더라도 기업이 수익을 내고 연구개발을 지속할 수 있게 코스닥 시장에서 자금을 대량 공급해주어야 한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사람들이 코스닥에 상장된 바이오기업에 투자하도록 한국 바이오산업의 잠재력을 과대포장 해주었다.
정부의 지원과 소위 ‘4차 산업혁명’ 붐을 타고 바이오기업들의 주가는 치솟았다. 시가총액 기준으로 상위 10위 기업 중 6~7개가 바이오기업이었다. 시가총액은 간단히 말하면 기업의 전체 주식 수에 현재 주식가격을 곱한 값이다. 코스닥은 바이오가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코스닥에 상장된 바이오제약 기업 중 신약다운 신약을 생산하거나, 의약품 수출로 많은 수익을 남기는 기업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현재 개발하고 있는 신약의 가치를 부풀려 홍보하고, 투자자들은 개발 중인 신약의 미래가치를 보고 주식을 샀다. 투자의 결과로 블록버스터급 신약이 탄생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2019년에 임상시험을 종료하고 결과를 발표한 기업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신약개발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주가는 폭락했다. 전문지 데일리팜이 코스피와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대표 바이오제약 73개 기업의 2019년 초와 말의 시가총액을 비교한 결과, 1년 사이에 증발한 시가총액이 약 19조에 달했다. (이석준, 2019)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되는 것이 신라젠, 헬릭스미스, 에이치엘비다. 신라젠은 간암치료제인 ‘펙사벡’이라는 신약을 개발 중이었다. 창사 이래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한 기업이지만, 기술력이 높다는 이유로 코스닥에 특례 상장되었다. 미국 FDA가 2015년 펙사벡의 미국 임상 3상을 허가하자,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주가는 폭등하기 시작했다. 1만 원대로 시작한 주가는 2017년 하반기부터 급등하기 시작해 11월에는 15만 원까지 치솟았고, 코스닥 시가총액 1위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2019년 8월 미국 데이터모니터링위원회가 펙사벡 임상 3상 시험을 평가한 결과, 치료제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임상시험의 중단을 권고했다. 이후 주가는 완전히 폭락해 시가총액 4조가 증발한 상태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신라젠 대표 및 특별관계자와 회사 임원들은 임상 실패 이전에 이미 주식 매각으로 많은 수익을 남겼다. 2015년 코스닥 상장 이후로 총 292만 765주를 매도해서 2천515억 원을 벌어들였다.
헬릭스미스는 당뇨병성 신경병증 신약인 ‘엔젠시스’를 개발하고 있는 기업이다. 헬릭스미스 역시 2017년 하반기부터 주가가 급등하기 시작해 2019년 3월에는 약 25만 원까지 치솟았다. 신라젠 주가가 폭락한 2019년 9월에는 코스닥 시가총액 2위까지 갔다. 하지만 9월 중순 미국에서 전문가팀으로부터 임상시험 데이터가 오염되었다는 진단을 받는다. 임상시험은 위약효과를 배제하기 위해, 대조군에게 가짜약을 주고 실험군에게 진짜약을 준다. 의사와 환자들은 복용하는 약이 가짜약인지 진짜약인지 모르기 때문에 심리적, 행동적 변화로 인한 교란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이를 이중맹검이라 하며, 임상시험의 기본 토대다. 하지만 데이터 분석 결과 진짜약과 가짜약을 모두 복용한 환자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헬릭스미스는 임상시험을 다시 실시하겠다고 했지만, 임상시험의 기본 원칙조차 지키지 못했기에 기술력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진 상태다. 당연히 주가는 떨어졌고, 시가총액 기준으로 2조가 사라졌다.
에이치엘비는 거품이 폭발했다가 더 큰 거품이 부풀었다는 측면에서 오늘날 혁신성장 정책이 가진 위험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에이치엘비는 본래 구명정을 만드는 회사였다가 바이오기업으로 변신한 기업으로, 진행성 위암 신약인 ‘리보세라닙’을 개발하고 있다. 에이치엘비 역시 2017년 하반기부터 주가가 급등했다. 2017년 상반기에 1만 2천 원대였던 주가가 2018년에는 12만 원을 넘겼고, 2019년 초에는 시가총액이 1조 3천억 원에 달했다. 하지만 2019년 6월, 리보세라닙이 통계학적으로 생존기간을 유의하게 증가시키지 못했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주가가 폭락했다.
반전은 그다음부터다. 9월 말경 에이치엘비는 생존기간은 증가시키지 못했지만, 무병생존기간은 1개월 증가시켰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 결과가 유럽임상종양학회(ESMO)에서 해당 학회 기간 동안 발표된 가장 훌륭한 연구에게 수여되는 ‘The Best of ESMO 2019’에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주가는 폭등해 6월 결과 발표 이전보다 더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 10월에는 21만 원까지 갔다.
무병생존기간은 치료 성공 이후 질병의 증상이나 징후가 다시 나타나기 이전까지 기간을 뜻한다. 기본적으로 임상시험에서는 생존기간을 기준으로 효과를 평가하며, 여건상 생존기간을 측정하기 어려울 때 무병생존기간을 대신 사용한다. 따라서 생존기간이 훨씬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시험 결과다. 그리고 2019년 11월 26일 미국 블룸버그지(Bloomberg)의 보도에 의하면, ESMO 대변인은 리보세라닙에게 공식적으로 수여된 상은 없다고 밝혔다. 리보세라닙 연구 결과는 ‘흥미로운 결과(highlights)’ 목록에 포함된 것뿐이며,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공로를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에이치엘비 측은 ‘상’을 받았다는 표현은 쓴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Kim, 2019)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에이치엘비의 2019년 말 시가총액이 2019년 초보다 훨씬 더 큰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2019년 한국 바이오산업의 민낯을 보여준 또 다른 사례로 코오롱 생명과학의 인보사가 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2019년 4월에 발간한 민중건강과사회, ‘인보사 사태의 본질은 무분별한 규제완화’를 참고하라)
거품만 키우고 과학기술은 발전시키지 못하는 혁신성장 정책
앞서 분석한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모두 2017년 하반기부터 주가가 폭등하기 시작했고, 2019년 임상시험 결과 발표 이후 주가가 폭락했다. 소위 ‘바이오 거품’이다. 왜 하필 2017년 하반기부터 주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는지 명확한 요인을 밝히는 건 어렵다. 그러나 2017년 하반기부터 문재인 정부가 혁신성장을 앞세우며 시행했던 여러 보건의료 정책들이 거품 형성에 기여했다는 건 확실하다.
규제완화 정책이나 신의료기기·신약에 대한 건강보험 지원 정책이 발표될 때마다 관련 종목 주가들이 치솟았다. 2017년 8월 문재인케어 계획이 발표되었고, 12월에는 배아줄기세포와 유전자 치료제 연구 관련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계획이 나왔다. 그 결과 코스닥에 상장된 제약기업들의 주가 추이를 나타내는 제약업종 지수는 2017년 하반기에 급등하여 2018년 초에는 1만 3746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2018년 상반기 이후에 점차 하락하여 2020년 1월 2일에는 7662까지 떨어진다. 거품이 형성되었다가 폭발하여 사그라지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코스닥 활성화 정책 역시 거품을 조장했다. 2018년 1월, 금융위원회는 벤처기업들의 코스닥 상장 요건을 대폭 완화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최대 2800여 개 기업이 추가로 코스닥에 상장할 수 있게 되었다. 연간 코스닥 신규 상장기업 수는 2017년 99개, 2018년 101개, 2019년 108개로 지속해서 증가해왔다.
2019년 6월에는 관리·감독 기준도 대폭 완화해주었다. 본래 코스닥 상장기업은 매출액이 30억 미만이면 관리종목으로 지정해 특별 관리한다. 그런데 매출액 기준에는 미달하지만, 기술력이 우수하다면서 특례로 상장한 바이오기업은 5년간 관리종목 지정을 하지 않는다. 2019년 6월 규제완화는 소위 ‘우수 기술보유 기업’에 대해서는 매출액 요건을 아예 면제해주었다. ‘우수 기술보유 기업’이란 보건복지부가 지정하는 혁신형 제약기업과 시가총액 4천억 원 이상의 기업이다. 혁신형 제약기업에는 2019년 초까지만 해도 ‘인보사’로 물의를 빚었던 코오롱 생명과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건부 허가로 줄기세포 치료제를 승인받은 후 약속했던 의무조건을 이행하지 않은 파미셀 같은 제약사도 포함되어 있다. 시가총액은 기업의 시장가격을 나타내는 지표로 이용되지만, 바이오 거품이 형성되고 있는 시기에 기술력과 무관하게 부풀려질 가능성이 크다.
이 때문에 기술특례 상장제도의 혜택을 본 바이오 기업들이 제대로 된 성과를 못 내는 현상이 발생한다. 2019년 10월 국정감사에서 그 실태가 드러났다. 기술특례 상장제도가 도입된 2005년부터 현재까지 기술특례로 상장한 기업은 총 76개다. 바이오기업은 61개사로 전체의 80%를 차지했다. 이 바이오기업 중 2018년 흑자를 낸 기업은 단 6개였고, 신약개발에 성공한 기업은 3개였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기술특례로 상장한 바이오제약 기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삼성 등 대기업의 바이오제약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와 정부의 보건의료 혁신성장 정책 때문에 투자자들은 한국 바이오제약 부문에 과도한 기대를 하게 된다. 즉, 한국 바이오제약 산업이 과대평가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지난 20여 년간 30여 개의 신약을 개발해왔지만, 그중 교과서에서 표준치료로 제시될만한 것이나 블록버스터급 매출을 올린 신약은 하나도 없다. 이는 한국 바이오제약이 성장하고는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다. 본래 바이오제약 부문은 투자를 시작하고 나서 성과를 내기까지 아주 오랜 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계 20대 제약기업 중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 기업이다. 이들 국가가 과학기술과 대학교육에 투자하기 시작한 역사는 최소 백 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과 유럽의 아성에 도전하는 유일한 국가가 일본인데, 20대 제약기업 중 일본 기업이 하나 포함되어 있다. 이미 1967년에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된 일본마저도 과학기술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따라서 한국이 설령 제대로 된 과학기술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학기술 역량이 무르익기까지 수십 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 또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을 가지고 투자를 해야 한다. 그러나 혁신성장 정책은 근시안적이고, 방향조차 잘못되었다. 과학기술 역량 강화보다는 없는 기술을 쥐어짜서 상업화시키는 데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거품이 형성되고 폭발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자원을 낭비하고, 제대로 된 기술개발보다는 창업과 자금 유치에만 매달리게 된다.
제약산업에 투자해서 거품을 다시 키우려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이런 가운데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바이오제약 산업에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2019년 7월 16일 자금운용위원회에서 건강보험 누적 적립금을 주식형 펀드, 부동산, 사회간접자본 등에 투자할 수 있게 규정을 바꿨다. 김용익 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7월 17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건강보험 적립금을 제약·바이오·의료기기 산업 분야에 투자하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2019년 10월 국정감사에서도 "우리의 1차 목표는 의료보장이고, 그다음이 제약산업 육성이다. 따라서 수익률이 같다면 가급적 바이오, 제약, 의료기기에 투자하면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문재인 정부는 보건의료정책이 혁신성장에 기여해야 한다는 기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건강보험 재정도 과감하게 쓰려고 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공단이 주식, 특히 김용익 이사장의 발언대로 제약·바이오·의료기기 산업 주식에 투자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보건당국이 보험가입자들 편이 아니라 바이오기업 편을 서게 된다. 국민건강보험이 바이오기업의 주주가 된다면, 해당 바이오기업이 생산하는 의료기기·의약품에 대해 느슨한 규제를 적용할 수 있다. 허가를 쉽게 해준다든가, 보험급여 적용을 쉽게 해주는 것이다. 둘째, 바이오기업 주식은 위험하므로 건강보험 재정에 심각한 손실을 발생시킬 수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의하면, 2019년 12월 18일 기준으로 10억 원 이상 헬스케어펀드 24개의 성과를 집계한 결과, 연초 이후 3.37% 손실을 기록했다. 특히 국내 제약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펀드의 수익률이 부진했다. 수익률이 –20% 이하인 펀드도 여럿 있다. 펀드도 이 모양인데, 개별 기업에 투자하는 경우에는 더 위험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금운용규칙 28조 3항, “주식, 주식에 투자하는 증권펀드 등 투자 시 높은 위험이 따르는 금융상품은 투자대상에서 제외한다.”라는 조항을 어기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국민건강보험공단 측은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직접 투자하지 않고 위탁 운용을 할 것이며, 여러 분야(전기, 건설, IT 등)의 주식을 위험분산 하여 투자하도록 관리할 것이다. 건강보험의 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에 제약, 바이오, 의료기기산업의 발전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공단이 자금 운용을 하는 과정에서 이들 산업을 지원할 수 있다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는 원칙적으로 모순되는 주장이다. 제약, 바이오, 의료기기산업의 발전을 지원하려면, 제약, 바이오, 의료기기산업 투자 비중을 다른 부문에 비해 올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접 투자하지 않고서도 제약, 바이오, 의료기기산업 투자 비중을 올리는 일은 가능하다. 공단은 자산운용사와 계약을 맺어 자금 운용을 위탁하고, 운용 성과를 평가해 재계약 여부를 판단한다. 자금운용 성과를 평가할 때 제약, 바이오, 의료기기산업에 투자한 자금 규모에 비례해서 가산점을 부여하면 된다. 운용사 입장에서는 재계약을 따내려면 의식적으로 한국 제약, 바이오, 의료기기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투자를 설계하는 데 있어 수익률 외 다른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최근 바이오제약 기업들의 주가 부진을 고려하면 수익률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앞서 살펴봤듯이, 이렇게 코스닥 시장을 통해 바이오제약 기업에 투자한다고 한국 바이오제약 산업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보건의료 빅데이터를 산업계에 넘겨주는 길이 마침내 활짝 열리다
바이오 거품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2020년에도 보건의료 혁신성장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2020년 1월 15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2020년 보건의료 규제완화의 청사진을 담은 ‘바이오헬스 핵심규제 개선방안’이 발표했다. 핵심 정책은 네 가지다. 보건의료 빅데이터 활용 가이드라인 제정, DTC 유전자 검사 규제완화, 혁신형 의료기기에 대한 규제완화, 건강관리서비스와 유사한 건강 인센티브제 도입이다. 이 중 건강 인센티브제는 뒤에서 민간의료보험의 건강관리서비스를 분석할 때 더 자세히 알아보고, 앞선 세 가지만 살펴보자.
먼저 보건의료 빅데이터 활용 가이드라인은 1월 9일 통과된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에 근거한 것이며 2020년 3사분기 내에 제정될 예정이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개인정보를 통합해 익명화해서 빅데이터를 만들어서 산업계에 넘기겠다는 계획이다. 이 중 보건의료 빅데이터는 개개인별로 유전정보, 진료정보, 생활습관정보를 결합해 데이터베이스로 만드는 것이다. 유전정보는 수술, 채혈 등으로 공공기관과 민간병원에 남아있는 인체 세포의 고유한 DNA를 분석한 자료다. 민간기업은 DTC 유전자 검사를 통해 유전정보를 축적할 수 있다. 진료정보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축적된 병명, 처방 등이 기록된 청구데이터와 병원에 축적된 의무기록을 통합한 자료다. 생활습관정보는 민간보험사가 건강관리서비스를 통해 수집하는 자료로, 무엇을 먹는지 어떤 운동을 하는지 등의 자료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는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듣는다면서 시간을 끌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박근혜 정부가 설계했던 보건의료 빅데이터 모델을 그대로 관철했다. 소위 ‘익명화’라는 마법을 거치고 나면 대부분의 개인정보를 본인 동의 없이 마음대로 산업계에 넘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전정보는 마치 지문과 같이 개인에게 고유한데 이는 원본 그대로 가졌을 때만이 연구에서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유전정보는 그대로 산업계에 넘어갈 가능성이 큰데, 이는 ‘익명화’라는 마법을 파괴하는 효과를 가진다.
한편 DTC 유전자 검사에 대한 규제도 완화할 계획이다. DTC 유전자 검사는 의료기관이 아닌 일반 기업이 개인의 세포를 채취하여 DNA 정보를 분석한 후, 질병 발병확률 등을 예측해주는 것이다. 예컨대 고혈압이나 유방암 발병확률이 남들보다 몇 퍼센트 높은지 분석해주는 것이다. 현재는 혈당·혈압·탈모·비타민C 등 12항목, 46개 유전자에 한정해서 실시하고 있지만, 2020년 1월부터 검사항목을 56개로 확대하고 유전자 제한은 없앨 예정이다.
문제는 현재 기술로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이다. 2019년 12월 18일 제5기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12개 DTC 유전자 검사기관의 검사결과 일치도가 보고되었다. 동일인을 대상으로 12개 기관에 동시에 유전자 검사를 의뢰하고 검사기관 간 결과해석 일치도를 분석했다. 그 결과 57개 항목 중 통계적 유의성 있는 결과해석 일치도를 보인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똑같은 DNA를 분석해도 검사기관마다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업체의 기술이 다른 국가에 비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기술 자체가 한계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DTC 유전자 검사 업체들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기술을 가지고 개인의 DNA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수집된 DNA 정보를 축적해서 팔면 많은 수익을 남길 수 있다. 대표적인 게 미국 DTC 유전자 검사 업체 23andMe의 사례다. 2018년 7월 25일 초국적 제약회사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DTC 유전자 검사 업체인 23andMe에 3억 달러의 투자를 하고 4년간 독점적으로 23andMe의 유전체 데이터를 활용해 공동으로 신약을 개발한다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다. 물론 DTC 업체는 이렇게 유전체 데이터를 팔 거라는 내용을 사전 고지하고 동의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DTC 유전자 검사 산업을 국가가 육성해야 할 핵심 바이오산업의 하나로 꼽고 대대적인 규제완화를 통해 지원해주고 있다는 건 큰 문제다.
이론적·역사적 근거도 없이 특혜 주는 혁신형 의료기기
한편 문재인 정부는 혁신성이 큰 ‘혁신형 의료기기’에 대해서는 ‘혁신의료기술 별도평가트랙’을 통해 유효성이 입증되지 않아도 허가해주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혁신형’ 의료기기는 어떤 것인가? 혁신형 의료기기 지원방안에 대해 정부가 발주한 연구용역 결과를 참고해 살펴보자. 참고로 이 연구용역은 2018년에 진행되었고, 연구책임자 두 명 중 하나가 2019년 식약처장으로 임명된 이의경 성균관대 약학대학 교수다.
연구용역 보고서에서는 규제완화의 대상이 되는 ‘혁신의료기술’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했다. “혁신의료기술의 정의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나, 명확한 정의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다른 국가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찾고자 했으나, 한국이 별도평가트랙을 마련하는 최초의 국가임이 확인되었다. (김주연 & 이의경, 2018)
그렇다면 혁신의료기술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어떻게 마련되었을까? ‘혁신의료기술의 평가와 실시 등에 관한 규정’을 참고해서 살펴보자. 혁신의료기술 대상 선정은 ‘혁신의료기술 대상 심의위원회’에서 담당한다. 심의 기준은 주관적이며 모호하다. 총 여섯 가지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문항만 살펴보자. “기술집약도가 높고 기술혁신 속도가 빠른 혁신·첨단 기술 또는 기기를 활용한 의료기술인가?” 여기서 기술집약도나 기술혁신 속도 측정법이나, 심의에 참고할 만한 기준치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심의위원은 어떻게 구성될까? 위원은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 의사회·치과의사회·한의사회 추천인, 산업계 추천인, 환자 안전에 관한 학식이 풍부한 사람, 공무원으로 구성된다. 혁신의료기술로 선정되면 수가 가산까지 해주는데, 건강보험 가입자와 재정을 대변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개별 의료기술이 혁신적인지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혁신의료기술 평가 소위원회’에서 혁신의료기술의 포괄적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 기준 역시 주관적이며 모호하기 짝이 없다. 총 여덟 가지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만 살펴보자. “의료현장에 도입 시 임상적 유용성 및 사회적 파급력이 ① 높다 ② 낮다”라고 묻고, 두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게 되어 있다. 이것 또한 임상적 유용성과 사회적 파급력의 측정 척도나 기준치는 없다. 소위원회 위원은 신의료기술평가위원회 위원장이 임명하는데, 인원 배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산업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인물이 대거 참여할 경우, 잠재성이 높게 평가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취약한 이론적 근거를 토대로 유효성이 입증되지 않은 첨단의료기술에 대해 ‘잠재가치’를 추가로 평가하여 시장진입을 허용하는 혁신의료기술 평가트랙은 2019년 3월 이미 도입되었다. 2020년 1월 15일에 발표한 ‘바이오헬스 핵심규제 개선방안’은 이미 완화한 규제의 적용범위를 더 확장하는 것이다. 혁신의료기술 평가트랙의 적용을 받는 기술 품목은 현재 AI 의료기술, 의료로봇 등 6개인데 줄기세포치료, 정밀의료, 디지털치료제 등을 추가할 예정이다. 대상질환도 암, 심혈관, 뇌혈관 질환 등 중증질환 4개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제한을 폐지할 예정이다. 본래 혁신의료기술 평가트랙을 통해 허가받은 의료기술은 사전신고한 의료기관만 사용가능했지만, 사전신고한 의료기관이 아니더라도 사용가능하게 할 계획이다.
이미 2019년 6월 기준으로 유전자를 이용한 암 예후예측 검사 기술, 로봇을 이용한 운동재활 치료기술 등, 총 7건의 의료기술이 혁신의료기술로 잠재가치 평가를 진행 중이다. 혁신의료기술 평가트랙을 통해 유효성이 입증되지도 않은 의료기기가 출시되면, 의사들은 앞다투어 그걸 구입해서 사용할 것이다. 신의료기기를 이용한 행위는 고가이기 때문에, 수입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미국 에머리대학교, 펜실베니아 대학교 연구팀에 의하면, 수입이 의료행위의 횟수에 비례하면 의사는 효과는 비슷하지만 싼 기존 기술보다 비용효과성이 떨어지는 신의료기술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Howard et al., 2019)
문재인 정부는 규제완화 정책을 내놓을 때마다 인체에 위해가 가지 않는 안전한 의료기기, 의약품만 허가해주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문제는 심각하다. ‘효과는 없지만 안전하고 비싼 신의료기술’은 병원들이 영리 추구 수단으로 사용하기 가장 좋기 때문이다. 인체에 위해가 될 가능성이 있는 신의료기술이라면, 의료인들이 시행하는 데 있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인체에 위해가 가지 않으면서 많은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는 신의료기술은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처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큰 폭의 의료비 증가로 이어질 것이다. 당장은 국민건강보험이나 민간실손보험이 그 비용을 부담할 수 있어도, 언젠가는 보험료로 보험가입자에게 돌아온다.
예비급여의 폐해는 이제 시작이다
의료기기 허가에 대한 규제완화뿐만 아니라, 문재인케어에 포함된 예비급여 제도도 문제다. 향후 시판될 신의료기기에 대해서는 모두 예비급여를 적용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예비급여는 의료행위에 대해 부분적으로 급여를 적용하는 걸 뜻한다. 본인부담률은 50%~90% 사이에서 항목에 따라 정해진다. 즉 최소 10%, 최대 50%까지 국민건강보험으로 치료비를 지원해주는 것이다. 전액 건강보험 적용을 해주지 않는 이유는 비용효과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비용효과성은 같은 비용을 들였을 때 다른 의료행위에 비해 얼마나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평가하는 항목이다. 비용효과성이 떨어지는 대표적인 의료행위는 로봇수술이다. 복강경 수술과 치료 효과와 부작용은 비슷하지만 비용은 3~5배 더 비싸다.
신의료기술에 대해 예비급여가 적용되면, 가격이 낮아지고 평준화되어 행위량이 증가할 것이다. 2018년 상반기 기준으로 이미 3400만 명이 실손보험에 가입되어 있지만, 이 중 63%는 비급여비용의 10~20%는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상품이다. 또 실손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1600만 명도 있다. 이들 중엔 70~80대 노인층이 많다. 따라서 예비급여가 도입되면서 의사는 비싸기만 한 신의료기술을 권하기 쉬워진다. 결국 예비급여 도입은 유효성이 입증되지 않은 혁신형 의료기기나 비용효과성이 떨어지는 신의료기기 사용량을 증가시켜 의료비를 상승시킬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미국의 사례를 하나 살펴보자. 미국의 엑스레이 유방촬영술 (mammography) 자동진단보조 시스템 (CAD, Computer-aided detection)의 사례다. 유방촬영술 CAD는 2015년 미국의학협회저널 내과지(JAMA Internal medicine)에 실린 논문에 의해 의학적 유효성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2003~2009년 시행된 30만 건의 유방촬영술 CAD를 분석한 결과, 병변 확인의 민감도, 특이도 측면에서 CAD를 사용했을 때와 사용하지 않았을 때의 차이가 없었다. 암을 찾아내는 비율도 CAD 사용군과 비사용군의 차이가 없었다. (Lehman et al., 2015)
유방촬영술 CAD는 1998년 미국 FDA 승인을 받았으나 10만 달러가 넘는 초기 투자비용 때문에 2001년까지만 해도 사용 비중이 5%가 안 되었다. 하지만 2002년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에서 보상 급여를 증가시킨 후에 2008년에는 74%, 2012년에는 83%까지 사용 비중이 증가했다. 이미 FDA 승인 때부터 효과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제조회사의 로비로 의료기기 허가와 보험 적용이 승인되었다. (Fenton et al., 2010)
보건복지부는 아직은 예비급여 적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주로 선택진료비와 상급병실료에 대한 급여화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문재인케어라고 보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 때 이미 급여화하겠다고 세워놓은 계획이기 때문이다. 예비급여가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의학적 비급여 부문인데, 총 3조 2000억 원 규모로 추산되며 이 중 16% 정도만 급여화가 진행되었다. 그것도 현재까지는 응급실과 중환자실 비급여 항목에 적용되었기 때문에, 과잉진료로 인한 의료비 증가 효과가 크지 않다.
문제는 올해부터다. 2020년에는 척추질환에 대한 급여 또는 예비급여 적용이 진행되고, 2021년에는 근골격계·만성질환에 대한 적용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척추나 근골격계 질환은 오래전부터 과잉의료의 온상으로 지적되던 부분이다. 응급실이나 중환자실 이용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 하지만 척추나 근골격계 질환은 환자의 주관적인 통증 호소에 따라 치료가 결정되기 때문에, 신의료기술에 대한 의사 유발 수요가 만연할 개연성이 높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의료공급체계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지만, 정부는 그걸 할 의지도 능력도 없어 보인다.
의료공급체계 개혁이 선행되지 않고 이루어진 비급여의 급여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최근 문제가 되었던 뇌·뇌혈관 MRI다. 뇌·뇌혈관 MRI는 2018년 10월부터 급여 범위가 대폭 확대되었다. 보건복지부는 확대 시행 이후 2019년 9월까지 급여 확대에 드는 비용을 1642억 원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 170%에 해당하는 2800억 원의 의료비가 발생했다. 그 원인으로는 단순 두통·어지럼인 경우에도 뇌 MRI를 촬영하는 경우가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복지부는 단순 두통·어지럼으로 뇌 MRI를 촬영한 경우에는 본인부담률을 80%까지 증가시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단순 두통과 뇌 질환이 강력하게 의심되는 두통을 나누는 기준은 신경학적 검사인데, 여기에는 의사나 환자의 주관적 요소가 개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심사평가원이 지출 목표치를 정하여 급여를 삭감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크고, 이 과정에서 의사와 환자의 불만이 표출될 것이다. 민간 의료기관과 행위별 수가제가 지배적이며, 주치의라는 개념조차 없는 한국의 의료공급체계에서 비급여를 제대로 급여화하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라는 게 드러난 사례다.
실손보험료 인하한다던 문재인 정부, 실손보험료 할증 계획 내놓아
한편 문재인케어가 본격 시행되면서, 실손보험사들은 반사이익을 얻게 된다. 본래 실손보험에서 보장해줘야 하는 비급여 중 상당 부분에 건강보험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민간의료보험 관련 공약은 건강보험 보장성이 강화되는 만큼, 실손보험료를 인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2017년 9월, 공사보험 정책협의체를 구성하였다. 협의체에서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가 실손보험 손해율에 미치는 영향 분석을 위한 연구용역을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맡겼고, 2018년 9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연구 결과에 근거해 2018년 9월 21일, 공사보험 정책협의체는 실손보험료 인하방안을 발표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일단 실손보험이 보험료를 인하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을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권고’, ‘유도’, ‘당부’ 수준에서 그쳤다. 민간실손보험 입장에서는 보험료를 인하할 이유가 전혀 없다. 설령 실손보험이 권고안을 따른다고 해도 실제로 실손보험료가 이전 해보다 인하되는 것은 아니다. 보험료 인상요인을 매우 높게 평가해주었기 때문이다.
2018년 6월 말 기준으로 전체 실손보험의 63%를 차지하는 표준화 실손보험의 경우를 살펴보자. 권고안에서 보험료 인상요인을 12~18%로 책정하고 반사이익 수준을 6.15%로 책정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6~12% 인상된다. 30%를 차지하는 표준화 이전 실손보험은 인상요인 14~18%, 반사이익 6.15%로 8~12% 인상을 권고했다. 그나마도 ‘권고’이기 때문에 민간실손보험 입장에서 이걸 지켜야 할 이유는 없다.
2019년 12월에도 공사보험 정책협의체가 열렸지만, 실손보험료 인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손보험료 인하의 근거가 될 수 있는 KDI 연구가 2017~2018년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문재인케어가 더 진행된 2019년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게 근거였다. 민간보험사들은 문재인케어 시행에 따라 비급여 행위수가 증가해 손해율이 더 악화되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에 따라 2020년 실손보험료 인하는 아예 권고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원을 많이 이용하는 가입자에게는 실손보험료를 할증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면서, 실손보험료를 차등화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실손보험사의 개인건강정보 축적을 도와주는 문재인 정부
문재인 정부는 임기 초반부터 꾸준히 실손보험사들의 개인건강정보 축적을 독려해왔다. 실손보험사들은 건강관리서비스를 통해 개인건강정보를 수집한다. 건강관리서비스란 식이습관 교정, 운동, 금연, 금주 등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는 것을 뜻한다. 건강관리서비스는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건강불평등 심화, 개인건강정보 유출, 의료비 낭비다. (자세한 내용은 2019년 6월에 발간한 민중건강과사회, ‘문재인 정부는 건강관리서비스 가이드라인 폐기하고 일차의료 중심 건강증진 서비스 시행하라’를 참고하라)
2017년 11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헬스케어 산업과 보험산업의 융∙복합 활성화를 위한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가이드라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민간보험사는 웨어러블 기기 구입 비용을 제공할 수 있다. 건강관리서비스도 제공할 수 있으며, 건강관리 노력과 성과에 따라 보험료 할인 등 경제적인 혜택을 줄 수 있다. 특히 민간보험사는 웨어러블 기기와 스마트폰 앱을 통해 가입자의 생활습관 정보(운동량, 식이 습관 등)와 질병 정보(건강검진 수치, 혈당 수치 등)를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개인의 생활습관정보와 질병정보가 민간보험사에 넘어가게 된다. 보험사는 이 정보를 보관하고 보험료율 산출 등에 활용할 수 있다.
2019년 5월 21일, 보건복지부는 의료법상 ‘의료행위’와 ‘비의료 건강관리 서비스’를 구분할 수 있는 판단 기준과 사례를 담은 ‘의료 건강관리서비스 가이드라인 및 사례집’을 발표했다. 이는 앞서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가이드라인을 보완하는 것이다. 원래 의료법상 ‘의료행위’는 면허 자격을 갖추어야만 할 수 있는 행위이며, 건강관리서비스 제공자는 수행할 수 없다. 그런데 사례집에 따르면 웨어러블 기기를 활용한 건강 수치 모니터링과 건강 상담·조언 등 건강관리서비스는 의료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건강관리서비스는 실제로 일차의료 행위 중 일부이다. 일차의료에는 치료 서비스뿐만 아니라 건강 증진, 상담, 교육, 예방, 치료, 재활 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2019년 7월에는 ‘건강증진형 보험상품·서비스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다. 핵심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 보험회사가 건강관리서비스업에 진출할 수 있도록 법적 규제를 완화한다. 둘째, 민간보험사가 웨어러블 기기를 직접 제공할 수 있게 된다. 기존에는 비용 제공까지만 허용되었었다. 셋째, 보험사가 개인건강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법을 정비한다.
2019년 12월에는 이를 구체화해서 ‘건강증진형 보험상품 개발·판매 가이드라인’을 개정했다. 여기서 바뀐 사항은 두 가지다. 첫째, 개인건강정보 기초통계 수집기간을 5년에서 15년으로 연장했다. 보험사들은 건강관리서비스 제공에 따른 건강증진 효과가 입증되지 않아도 최초 5년은 개인건강정보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 기간을 연장한 것이다. 둘째, 보험회사가 건강관리서비스 기업을 자회사로 둘 수 있게 허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보험사는 보험업무의 부수적인 업무로 건강관리서비스를 직접 제공하는 데서 나아가서, 아예 건강관리서비스를 본업으로 하는 기업을 자회사로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2020년 1월 15일 발표된 ‘바이오헬스 핵심규제 개선방안’에는 ‘건강 인센티브제’ 시행 계획이 담겨 있다. '건강 인센티브제'란 건강생활 실천 결과에 따라 포인트를 지급해 건강검진이나 본인부담금 납부 등에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민간보험사가 아니라 국민건강보험이 실시하는 건강관리서비스인 셈이다. 이는 공보험이 실시하는 점에서 건강관리서비스보다는 낫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건강관리서비스가 가진 단점들은 그대로 지니고 있으므로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만약 건강 인센티브제가 서비스의 실내용 측면에서 건강관리서비스와 다른 게 없다면, 건강증진이 개인의 생활습관 교정 행위에만 맡겨지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 생활습관을 개선할 의지가 있어도 여건이 안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어 건강불평등 심화를 막을 수 없다. 의료비 낭비나 개인건강정보 유출 역시 안심할 수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데이터는 보건의료 빅데이터 계획에 의해 산업계에 공개되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의료기기 사용으로 인한 의료비 증가 가능성도 남아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한국 의료기기 산업 육성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의료 규제완화 중단하고 의료공급체계 개혁에 나서야
지난 20여 년간 한국 정부는 정권과 관계없이 꾸준히 보건의료 규제를 완화해왔다. 현재의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보수 정권이었을 때는 삼성 같은 대기업을 밀어주었고, 더불어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중소기업을 밀어준다는 명분으로 코스닥 시장을 활성화했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한국 바이오산업 발전을 특별히 앞당기진 못했다. 대기업을 밀어주는 정책은 재벌병원과 보험사에 유리한 의료민영화 흐름으로 나타났고, 코스닥 시장 활성화 정책은 거품만 키웠다. 규제완화 정책은 지름길처럼 보이지만, 연구의 상업화와 질 저하로 이어져 오히려 돌아가는 길이다.
지금 한국 보건의료에 필요한 것은 의료비를 낭비하는 의료공급체계를 바꾸고, 비용효과성이 떨어지는 의약품과 의료기기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침체로 접어들고 있고, 2019년에는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사상 최초로 감소로 돌아섰다. 물론 현재는 GDP 대비 의료비 지출이 크지 않고, 건강보험 보장성도 더 확대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다가올 저성장·인구감소 시대를 감안하면, 의료공급체계 개혁이 선행되지 않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2019년 9월 4일에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의료전달체계 개선 단기대책은 미봉책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보건의료 개혁안 중에는 합리적인 편이다. 그러나 병상총량제, 고가 의료장비 규제 등 핵심적인 단기대책들이 추가로 시행되어야 하며, 강력한 일차의료 중심 의료공급체계를 만들기 위한 장기대책도 병행되어야 한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예방과 건강증진 중심의 일차의료야말로 가장 비용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혁신성장이라는 헛된 꿈을 접고, 건강증진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보건의료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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