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지난 해 4월에 피랍된 제미니호의 한국 선원 4명이 2012년 10월 19일 현재 539일째 억류되어 있다. 소말리아 해적들은 ‘아덴만의 여명 작전’으로 사망한 해적들에 대한 보상금과 체포된 해적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 2009년부터 청해부대를 소말리아 해역에 파견하고 있다. 그러나 청해부대의 선박 호송 임무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생명은 계속 위협받고 있다. 더구나 공격적인 군사작전이 한국인의 생명을 더욱 위태롭게 하고 있다. 해적 문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범죄 행위이며, 마땅히 근절되어야 한다. 그러나 해군 파병을 통한 해적 단속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는 검증된 바가 없다. 다만 강력한 군사작전을 통해 해적 문제에 대응하고 있는 국가의 선원들이 해적의 표적이 되고, 보다 극단적인 폭력을 부르고 있다는 것만이 확인될 뿐이다. 소말리아 지역에 파병되어 있는 외국의 군대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대테러 전쟁’을 도우면서 소말리아의 안정을 파괴해 소말리아를 제2의 아프가니스탄으로 만들고 있다. 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소말리아 해역보다 일찍 심각한 해적 문제에 직면했던 동남아시아 지역의 예를 참고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국제해사기구가 제안하는 ‘해적 행위 예방 및 억제 지침’에 따라 선사와 선박들이 미리 대비한다면 상당부분 해적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의 소말리아 해역 파병은 결코 해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점점 더 깊숙이 말려들 뿐이다. 소말리아 파병은 하루빨리 중단되어야 한다. 목차 1. 제미니호 피랍 사건 개요 2. 한국군의 소말리아 파병 현황 3. 소말리아 파병의 문제점 4. 결론
침략과 점령을 끝내야한다 “이슬람에 대한 가장 악랄한 공격”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무슬림의 무지’라는 동영상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반이슬람 동영상으로 촉발된 이슬람의 반미시위가 계속 확산되고 있다.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시작된 이번 시위는 금새 예멘, 튀니지, 수단, 모로코, 팔레스타인, 이라크,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이란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미국 대사의 추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성난 시위대가 불을 지르고 캠프 피닉스 미군기지에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지난 9월 21일 파키스탄에서는 금요기도회를 마친 무슬림들이 파키스탄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실탄과 최루탄을 동원해 진압했고, 하루 동안 17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다쳤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반미 시위는 아시아권 이슬람 국가로까지 확산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도 자카르타를 포함해 여러 도시에서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또한 규탄 대상 역시 미국을 넘어 서방 세계 전체로 확산되는 조짐도 보인다. 반미에서 서방 세계 전체에 대한 분노로 한국의 한 언론은 반 이슬람 동영상으로 시작된 반미시위가 프랑스의 만평을 기화로 서방 세계 전체에 대한 규탄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프랑스의 한 주간지에서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실었는데, 이 사건으로 미국만이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세계 전체가 무슬림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보도였다. 들끓는 무슬림 여론을 프랑스가 자극해 전체 서방 세계로 피해가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이기도 했다. 이러한 우려에는 프랑스 주간지의 만평 사건이 없었다면 무슬림의 시위가 ‘반미’에 국한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러한 인식은 이번 사태를 오로지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모욕과 그에 대한 무슬림들의 분노라는 틀에 가두어버린다. 때문에 이번 사태 초기에 수단의 무슬림들이 영국과 독일 대사관을 습격한 일은 ‘격앙된 시위대의 우발적 폭력 사태’ 정도로 치부된다. 무슬림에 대한 혐오 이러한 보도는 뿌리 깊은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연결된다. ‘거룩한 예언자를 모욕한 이를 자신들이 직접 처벌할 것’이라며 주먹을 흔드는 시위대의 인터뷰 장면은 무슬림 혐오에 생생하게 색을 입힌다. 표현의 자유는 종교적 인물에도 예외가 아닌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무슬림들은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사람들로 그려진다. 문제가 된 만평을 게재한 프랑스 주간지의 편집장이 ‘종교는 하나의 철학,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에 무함마드도 칼 마르크스도 만화로 그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대목에서 서방 세계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는 것을 도왔던 미국의 영사관을 습격해 대사를 살해한 리비아 무슬림들에게 ‘은혜를 모르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침략과 점령에 대한 분노 그러나 이번 시위가 이렇게 단기간에 전체 이슬람 국가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0여 년간 지속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의 침략과 점령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인 <포린 폴리시 인 포커스>는 공화당과 민주당 정부 모두 독재자들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의 점령을 지원하면서 이라크 침략과 점령,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예멘에서 지속되는 군사 공격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지난 시간들이 없었다면 이러한 반미 시위들은 없었을 것이라 평가했다. 해외 언론이 예멘이나 다른 지역의 시위자들과 진행한 인터뷰를 보면 그들의 분노가 동영상 자체를 훌쩍 넘어 미국과 서방 세계로 향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테러리스트들의 배후 조종? 이러한 상황에서 리비아에서 발생한 미국 대사 살해 사건은 이번 시위의 의미를 폄하하고자 하는 세력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미국의 눈치를 보는 리비아 당국은 재빨리 이번 피습 사건은 성난 시위대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역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반미 시위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 테러리스트들의 개입으로 증폭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실제 리비아의 미국 영사관 피습은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공격으로 보인다. 이슬람 그룹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반미 시위를 호소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이 동영상이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되었다거나, 미국 정부의 사전 심의를 거쳐 승인받은 영화라는 식의 거짓 주장을 퍼뜨린 정황도 포착된다. 그러나 시위가 시작된 리비아와 이집트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는 무슬림 형제단은 시위 초기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얼마 후 무슬림 형제단은 동영상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지만, 9월 14일에 평화로운 집회를 열겠다고 밝혔을 뿐이다. 다른 이슬람 종교 학자와 그룹들도 동영상을 비난했지만 평화로운 저항을 호소했다. 이번 사태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부각시키는 것은 기나긴 침략과 점령의 세월에 대한 무슬림들의 분노를 가리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미완의 민주주의?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초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반미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국가들 중 폭력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들에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작년 ‘아랍의 봄’을 타고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 민주정부가 세워졌거나 그러한 과정에 있는 나라들이라는 것이다. 독재 정권 하에서 강력하게 유지되던 정부의 통제가 사라지고, 아직 그러한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들이나 극단주의 세력들의 폭력 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분석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자칫 서방의 군사 개입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국제 사회는 그동안 한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보장할 수 없을 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타국의 개입은 주권에 우선한다는 이른 바 ‘보호책임’ 개념을 계발해 왔다.(이에 대한 신념은 작년 리비아 사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성공적인’ 개입을 계기로 한층 강화되었다.) 민주화 과정에 있는 나라들이 치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들이나 극단주의 세력들이 폭력을 조장한다는 인식은 결국 평화를 위해서 외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논리가 그동안 유엔의 평화유지군이나 미국의 점령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활용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경계해야 한다. 침략과 점령을 중단하라 반미시위의 급속한 확산은 그동안 지속된 침략과 전쟁에 대한 무슬림의 뿌리 깊은 분노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번 사건이 미국이나 서방 세계의 또 다른 개입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개입이 세계를 얼마나 불안정하게 만들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세계화의 보호를 사활적인 이익으로 정의한 미국의 군사교리는, 세계화가 내세우는 담론과는 반대로 세계에 평화가 아닌 폭력과 파괴, 점령과 전쟁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한국은 그동안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조응해 적극적으로 파병을 하면서 불안한 중동 정세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다. 무슬림의 분노가 단지 동영상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언제든지 미국의 패권 정책을 충실히 수행해 온 한국으로 향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에서 별다른 의문 없이 지속되고 있는 해외 파병을 중단하고, 중동에 대한 침략과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한 반전평화운동의 또 다른 한걸음을 준비해야 할 때다. [%=박스1%]
[2012년 9월 18일 레디앙 칼럼] 기후변화와 시리아 봉기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필자의 지난 기사 <시리아 저항운동의 고민과 갈래들>(2012.8.29. http://www.redian.org/archive/32189)은 시리아 봉기를 이끈 다종다양한 세력들의 조직구성과 성격, 현재 저항운동이 봉착한 난관과 활로를 찾기 위한 모색이 어떠한지 살펴보았다. 필자는 시리아 정권이 여전히 상대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지닌 지지집단과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민중봉기가 발생한 근본 원인이 지속되는 한 시리아 사회가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리아에서 대중적 저항을 촉발시킨 결정적 매개는 최근 더욱 악화된 경제상황이다. 1990년대에 본격화된 경제 자유화 조치로 시리아 경제에서 사적 부문이 공공 부문을 능가하기 시작했지만 사적 부문의 가장 부유한 인사는 국가 관리, 정치가 또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시리아는 과거 지향한 아랍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에서 아주 탁월한 족벌 자본주의로 변모했다. 1990년대 경제성장은 소비 증가에 따른 단기 효과에 불과했고 2000년대 이후 슬럼프에 빠졌다. 5-7%의 성장률은 1997년 이후로 1-2%에 머물렀다. 그 결과, 시리아 봉기 전 빈곤선 이하 인구의 비중이 급상승했다. 그 비중은 2000년 11%에서 2010년 33%로 올라갔다. 이는 700만 명 이상이 빈곤선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업률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20~25% 수준에 이른다. 특히 25세 이하의 실업률은 55%에 이른다. (30세 이하 인구 비중은 55%다.) 물가상승과 생계비 부족, 높은 실업률, 정부보조금 감소 등 시리아 민중이 경험한 경제현실은 아랍의 봉기가 발생한 다른 지역, 국가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시리아 경제를 더욱 악화시킨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은 2000년대 후반에 발생한 이례적 가뭄이다. 그 가뭄은 강도와 지속성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2009년까지 약 백만 명 이상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시리아의 사회적, 지역적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다마스쿠스, 알레포와 같은 대도시가 이주민을 흡수했으나 인프라 투자는 매우 부족했다. 지방도시들, 예를 들어 다라아, 이들리브, 홈스, 하마와 같은 도시와 그 배후 지역은 이제 반란의 주요 전투지역이 되었다. 농촌 지역은 정부의 보조금 축소, 투자 부족, 도시화의 영향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파괴되었고 수십 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부정부패로 인해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믿는다. 최근 <핵과학자회보>에는 기후변화라는 맥락에서 시리아 봉기를 검토하는 기사가 실렸다. (원문 참조: http://www.thebulletin.org/web-edition/features/climate-change-and-the-syrian-uprising) 기사에 따르면 시리아 정권이 식량자급과 농산물 수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기적 농업정책에 집중한 결과, 시리아 자연조건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농업 시스템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처럼 취약하고 불균형적인 농업 시스템은 2000년대 후반에 발생한 이례적 가뭄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농촌에서 쫓겨난 백만 명 이상의 이주민은 시리아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기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시리아에서 발생한 가뭄이 기후변화에 의해 야기된 측면이 크다면 그 사실이 함의하는 바는 매우 엄중하다. 자연적으로 정상 기후로 돌아오리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리아 농업을 재건하려면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계획을 동반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의 전면 재편이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리아 사회의 민주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듯하다. 아래에서는 앞서 언급한 기사를 간추려 소개한다. * * * 시리아 봉기에 기여했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 중에서 시리아에 엄청난 충격을 준 하나의 요인이 종종 간과된다. 시리아의 기후변화는 국가의 안정성과 수명에 복잡, 미묘하지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림] 시리아의 가뭄은 200~300만 인구를 ‘극단적 빈곤’ 상태에 처하게 했다. 시리아 국토는 약 12,000년 전 인류가 최초로 농경과 목축을 실험한 곳으로 여겨진다. 현재 세계은행은 그 지역이 기후변화의 두려운 영향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연간 강수량이 감소하여 영구적으로 더 건조해지고 가뭄의 발생빈도와 심각성이 더 커지리라 예상한다. 1900년부터 2005년까지 시리아에서는 여섯 번의 심각한 가뭄이 발생했다. 이러한 건기 동안에 월간 평균 겨울 강수량은 정상시의 3분의 1이었다. 여섯 번 가뭄 중 한 번을 제외한 나머지는 단지 한 계절 동안만 지속되었다. 다른 한 번은 두 계절 지속되었다. 따라서 농촌은 정부 보조금과 2차 수자원에 의지하여 건기를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발생한 일곱 번의 가뭄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계절 동안 지속되었다. 이는 지난 세기에 비추어 진정으로 이례적 현상이었다. 나아가 사계절 동안의 평균 강수량은 지난 세기의 어떤 가뭄 기간에 비해도 훨씬 더 적었다. 가뭄의 한 사례를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의 직접적 결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의 2011년 보고서는 시리아 가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02년부터 2010년 사이의 건조도 증가의 원인 중 온실가스로 인한 기후변화는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핵심 연구자였던 마틴 호어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발생했던 건조 상태의 규모와 빈번성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자연적 가변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이미 물 부족을 경험한 지역에는 희망의 소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적 가변성만으로 그 지역의 기후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은 지구온난화가 다가올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의 가뭄을 더욱 심각하게 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림]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의 2011년 보고서는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는 지중해 지역에 빈번히 발생하는 가뭄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적색과 주황색은 1902년-2010년 기간과 비교하여 1971년-2010년의 겨울 가뭄이 심각했던 지중해 지역을 표시한다. 시리아는 가장 붉은 색으로 나타났다. 시리아의 가뭄은 150만 명을 넘는 주민의 이주를 야기한 것으로 추산된다. 농업 노동자와 소규모 농민의 모든 가족이 북동부의 곡창지대에서 남부의 도시 주변부로 이주했다. 가뭄은 불균형한 농업 시스템을 무너뜨렸다. 시리아의 농업 시스템은 이미 농업 정책의 오류와 환경적인 지속 불가능성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아가 긴급사태를 대비한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가뭄이 낳은 결과에 무능했다. 수십 년간 지속된 농업정책의 빈곤이 이제는 알아사드 정권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다. 지속 불가능한 역사 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피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수십 년간 시리아를 지배했다. 하피즈는 그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농촌 지역 대중의 지지에 의지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농업 부문은 시리아 경제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 중 하나였다. 하피즈는 시리아 국민에게 안정적인 식량공급을 보장했고 식량, 석유, 물의 가격을 내리기 위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정권은 식량자급을 강조했고, 1980년대에 밀 자급을 최초로 달성했다. 목화는 관개농업이 필요한 물 집약적 작물인데, 정권은 ‘전략 작물’로 선정하여 목화 재배를 강력히 장려했다. 그래서 한때는 목화가 석유 다음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출품이 되었다. 농업 생산은 팽창했지만 그것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페미아와 케이틀린 웨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아사드 정권은 정책의 오류를 저질렀고 시리아의 자연자원을 무시했다. 이는 물 부족과 토지 사막화를 야기했다.” 현재 발생한 가뭄 전 20년 동안 정권은 관개 시스템에 큰 액수를 투자했지만 여전히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고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이었다. 관개 시스템의 다수는 지하수를 주요 원천으로 활용했는데 강물의 양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2005년부터 정부는 농업용 우물에 대해 허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시리아 정부가 쿠르드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북동부 지역을 저개발 상태로 방치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부 농민의 허가 요구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유든 간에, 일반적으로 우물 허가를 받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 결과 시리아의 농업용 우물 중 절반 이상은 불법이었고 따라서 규제를 받지 않았다. 가뭄이 발생하기 직전 수년 동안 지하수는 급속히 고갈되었다. 경고에 대한 무시 2001년 세계은행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단기적으로 밀과 다른 곡물의 안정적 공급을 성취하고 물 집약적 목화 재배를 장려하려는 시도는 활용가능한 지하수 자원의 고갈로 인해 장기적으로 시리아의 안전을 잠식할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시리아 정부가 인식해야 한다.” 정부가 에너지와 물에 대해 상당액의 보조금을 제공함에 따라 농민은 지속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기보다는 생산량 증가에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2005년 밀 가격이 급등하자 지나치게 자만했던 시리아 정부는 긴급사태에 대비한 밀 보유고의 상당량을 판매했다. 2008년 가뭄으로 인해 시리아 정부는 자급정책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20년 만에 처음으로 밀을 수입해야 했다. 또한 보리 수확이 90% 감소하자 가축 사료 가격이 가뭄 첫 해 동안에만 두 배로 올랐다. 북동부의 소규모 목축업자는 가축의 70% 이상을 잃었고, 다수는 그 지역을 떠나야만 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가뭄으로 인해 시리아 가축의 4분이 1이 사라졌다.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아사드의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가뭄의 심각한 영향을 입은 인구의 80%는 빵과 설탕을 넣은 차로만 연명하고 있다. 거의 사막화된 북동부 농촌 지역의 주민은 급등한 식품 가격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가뭄이 강타한 지역의 주민 중 80%는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다. 2003년 농업 부문은 시리아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차지했으나 가뭄에 돌입한 2008년에는 17%로 감소했다. 유엔 재난위험경감 사무국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의 가뭄 대책은 수동적이었고, 시의적절하지 못했으며, 목표 설정과 조정과정이 매우 부적절했다. 카오스 가뭄이 시작된 후 대부분 농촌 이주민으로 구성된 임시 거주지가 다마스쿠스, 하마, 홈스, 알레포, 다라아 주변에 형성되었다. 이중 다라아는 2011년 3월, 시리아 봉기에 결정적 계기가 된 첫 번째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지역이다. 이미 주변국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서 거의 200만 명이 난민이 시리아로 건너온 상황도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주었는데, 시리아 내부에서 대규모 이주가 발생하자 그 부담은 더욱 커졌다. 아랍연구소가 발행하는 디지털 매거진 자달리야의 필자 수전 샐리비는 이렇게 말했다. “정권은 가뭄의 영향을 경감하기 위한 경제적 조치를 취하는 데 실패했다. 그것은 이렇게 거대한 대중시위를 야기한 결정적 추동력이 되었다. 최근 몇 달 동안 시리아 도시들은 쫓겨난 농촌 이주민들과 권리를 박탈당한 도시 주민들의 불만이 모이고 정치권력의 성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공간이 되었다.” 시리아 정권의 경제자유화 정책은 소득 격차와 지리적 불균형을 확대했으며, 그것이 야기한 여러 요인들은 시리아 정권이 가정한 안정성을 산산이 깨뜨렸다. 가뭄과 대규모 이주는 시리아 반란을 추동한 가장 주요한 원인이 아닐지 모르지만, 대중의 불만을 촉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리아의 가뭄은 이례적인 기후변화가 대규모 이주를 낳고 그것이 국가의 불안정성을 야기한 최초의 현대적 사례일 것이다. 이는 이미 문화적 양극성,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공평성이라는 긴장에 처해 있는 지역에서 기후변화가 매우 중대한 촉매제가 될 것이라는 교훈이자 경고다. <끝>
노동자운동연구소의 국제소식지입니다.
한국 이주운동을 위한 교훈 경제위기와 인종주의의 강화 경제위기가 본격화된 이후 유럽 전역에서 대중적 외국인혐오증과 인종주의적 폭력이 심해지고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이 강화되고 있다. 더불어 주류 집권정당들이 다문화나 이주민과의 공존과 같은 상대적으로 관대한 정책 틀을 부정하고 반이주민 정책을 추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재정위기 및 재정위기에 동반하는 정치사회적 위기가 가장 심각한 그리스에서 더욱 심각하다. 아래에서 살펴보듯이 지난 3년간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들에서 반이주민 정서가 확산되고 이주민에 대한 폭력적 범죄가 급속히 증가했다. 또한 황금새벽당과 같은 신나치주의 세력들이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으며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정당들도 갈수록 반이주민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행히도 강화되는 인종주의에 대응하는 세력이 존재한다. 1990년대부터 그리스 이주민조직과 일부 좌파들이 반인종주의 운동을 벌였다. 최근 상황에서 대규모 도심 집회를 전개하는 등 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유럽만큼 경제위기가 극심히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아직까지 인종주의의 심화가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년 간 한국에서도 반이주민 정서가 서서히 강화되고 있으며 이주민의 권리를 더욱 제약하는 정책 방향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유럽의 재정위기 심화에 따라 한국의 경제위기가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만큼 멀지 않은 미래에 한국에서도 인종주의는 중요한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 그 대응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그리스에서의 인종주의 대두와 그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전략을 검토하고 한국 이주운동을 위한 교훈을 발굴하고자 한다. 개념 정리 본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에서 쓰일 몇 가지 개념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인종주의의 의미를 확인하겠다. 인종주의를 단순히 개인적 편견이나 한 민족 또는 인종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 사고나 이데올로기로 보는 일반적이 경향이 존재한다. 아래 논의에서는 일반 시각보다 다차원적인 인종주의 정의를 사용한다. 인종주의를 차별적인 경제구조, 개인적 편견, 이데올로기, 표상, 법률과 정책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선천으로 간주된 인종민족문화적 범주에 기반을 둔 억압체계로 이해한다. 이 정의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위에 나열된 요소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강화하면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적 체계를 형성하고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억압체계로서 인종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와 맞물려서 발전되었으며 현대 자본주의 축적체제와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집단의 헤게모니를 동시에 뒷받침하고 자연화한다. 논의를 단순화하기 위해 ‘대중적 인종주의’(popular racism)와 ‘국가적 인종주의’(state racism)를 구분한다. 대중적 인종주의는 개인 편견, 일반인의 외국인혐오증, 개인 간의 인종주의적 범죄, 언론의 표상 등을 의미한다. 국가적 인종주의는 우선적으로 정부의 차별적인 이주정책을 의미한다. 정책을 해설하는 데에 사용되는 담론과 그 담론이 형성하는 정치적 문화도 국가적 인종주의로 본다. 인종주의 대응전략에 있어서 중요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 인종주의를 살펴볼 때 대중적 인종주의와 국가적 인종주의의 인과관계를 특별히 주목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다방면적인, 즉 서로를 강화하는 관계이지만 국가의 압도적인 권력과 일상생활에 대한 침투 때문에 인종주의 체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에 국가가 보다 많은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리스 사례를 보면 경제위기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대중적 인종주의가 이주정책과 정치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스와 유럽연합의 이주정책 분석에서 이주민을 ‘체류권 없는 장기체류자’로 만드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이 개념을 통해서 이주정책의 결점으로 인해 그리스의 이주민은 필연적으로 장기체류하게 되지만 안정한 체류자격, 그리고 양질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의 인권, 노동권과 정치권 보장이 동반되지 않은 것을 지적하고 싶다. 아래에서 보듯이 그리스와 다른 형태이지만 한국 이주정책도 ‘체류권 없는 장기체류자’를 양산하고 있다. 억압체계로서 인종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주민을 ‘체류권 없는 장기체류자’로 만드는 이주정책은 두 차원에서 중요하다. 첫째,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을 빼앗음으로써 이주민을 낙인찍기 쉬운 최하층으로 만들고 재생산한다. 둘째, 체류권을 부정하는 이주정책은, ‘이주민은 본질적으로 동화되지 못한 존재’라는 전제 하에서 만들어지며 또 그 전제를 영속시킨다. 따라서 인종주의 대응에서 안정적인 장기체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주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의 이주민 전체 인구가 11,304,000명인 그리스에서 현재 100~130만 명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다. 한국과 유사하게 그리스의 대대적인 이주민 유입은 지난 20년간 이뤄진 현상이다. 이주민은 주로 두 흐름으로 들어온다. 첫 번째 그룹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사이에 그리스와 국경을 공유하는 알바니아를 비롯한 발칸지역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 이후 들어온 사람들이다. 두 번째 그룹은 2000년대 초반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망명(난민) 신청자와 미등록 이주자이다. 이러한 이주민들은 주로 본국의 경제적정치적 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이주를 선택한다. 그리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럽연합으로 이동하는 경로인 터키와 국경을 공유하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국가로 이주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에 먼저 도착한다. 유럽연합 이민당국은 2010년 말 현재 유럽연합으로 들어오는 미등록 이주민 중 90%가 그리스를 통한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이주민 중 일부는 그리스에서 취업을 목표로 하지만 대부분은 그리스를 통해 기타 유럽국가에 이주해 난민신청을 하거나 가족과 결합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하듯이 대부분은 그리스를 떠나지 못해 아테네나 다른 대도시에 머물게 된다. 그들은 저임금 비정규직비공식적 사업장(농업, 건설, 제조, 가사노동, 서비스, 노점 등)에 편입되며 여러 불안정한 체류자격(난민 신청 상태, 미등록에서 단기노동과 체류허가로 등록된 상태, 노동과 체류허가 신청한 상태, 미등록)을 지닌다. 유럽연합과 그리스의 이주정책과 이주민 최하층의 재생산 난민 신청자 그리스는 유럽연합 중에 가장 낮은 난민 인정율(1% 미만)을 기록한다. 또한 난민 신청 절차의 비합리성 때문에 매우 장기간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많은 그리스 이주민의 불안정한 체류자격의 중요한 원인이다. 상황은 2003년 유럽연합의 더블린II 규정 채택으로 인해 악화됐다. 더블린II 규정은 난민 신청을 검토할 의무를 신청자가 도착한 첫 유럽연합 회원국에 부여하며 기타 회원국들은 본토로 들어온 난민 신청자를 처음에 도착한 유럽국가로 송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이는 그리스의 난민 신청 적체(backlog)를 더욱 심화한다. 또한 그리스 외국인보호소의 혼잡과 그에 따른 인권침해를 더 심각하게 만든다. 난민 신청의 부정적인 전망을 고려했을 때 많은 이주민들은 이주하게 된 배경과 무관하게 난민 신청을 하지 않는 것을 택한다. 이런 이들은 일반적으로 미등록 이주민으로 분류된다. 미등록 이주민 그리스는 이런 식으로 미등록 이주민을 계속 유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세우지 못한 채 반복되는 단속과 단기적인 체류 허가를 부여하는 이주등록 프로그램이라는 미봉책만으로 대응해 왔다. 1998년, 2001년, 2005년, 2007년에 실시된 등록 프로그램 하에서 이주민들은 1~3년 기간의 노동 및 체류 허가를 받게 된다. 체류 허가 갱신은 공식적인 횟수 제한은 없지만, 고용주가 지급하는 사회복지 지출을 입증하는 스탬프를 제출함으로써 정규적 취업 상태를 증명해야 가능하다. 대부분 이주노동자들은 고용계약서와 사회복지지출이 존재하지 않는 비정규직 일자리나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기 때문에 체류 허가 갱신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등록되었다가 다시 미등록이 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정규직 고용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도 체류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용주의 사회복지 지출 증명 스탬프가 필요하기 때문에 고용주에게 완전히 종속된다. 더욱이 체류 허가 신청이나 갱신 처리 과정은 매우 긴 기간을 요구한다. 길면 1년이 걸릴 수가 있어서 원래 허가 기간이 만료될 때 새 허가를 아직 받지 못한 이주민이 많다. 이러한 상황은 경제위기 하에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트로이카가 강요한 긴축재정 정책으로 인해 난민 신청과 체류 허가 갱신을 처리할 공무원 인원은 계속 축소되고 있다. 더구나 경제위기가 야기하는 실업은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부문에서 특히 심각하다. 2009년 이래 이주민 실업은 내국인 실업보다 더 증가했다. 지난 3년 간 등록노동자 수가 2009년 58만7천 명에서 2010년 57만7천 명, 2011년 46만7천 명으로 하락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를 떠난 등록노동자들의 숫자보다 많은 등록노동자들이 고용을 유지하지 못해 미등록이 되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고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 사회복지 스탬프의 필요로 인한 사용자에 대한 종속과 체류허가 갱신 처리의 불합리성은 결과적으로 이주민을 저임금의 착취하기 쉬운 불안정한 최하층으로 만든다. 결국 그리스와 유럽연합의 이주민 관리제도는 사회통합이 불가능한 체류권 없는 장기 체류 이주민을 양산하고 있다. 그리스 인종주의의 변화 경제위기 이전 그리스의 인종주의 완화 한국사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사회에서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의 신화는 매우 강하다. 그 역사적 배경은 이 글의 범위 밖에 있지만, 어쨌든 단일인종과 단일민족에 대한 믿음이 이주민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형성하는 사회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 이주민의 급격한 유입과 이들을 최하층으로 만드는 이주정책은 그리스 대중으로 하여금 인종주의적 태도(외국인혐오증, 이주민 범죄자화 등)를 취하도록 유도한다. 따라서 1990년대부터 인종주의적 정서가 그리스 사회에 존재했다. 그러나 경제위기 전까지 대중적인 인종주의는 완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특히 2000년대 중반에 사회당(PASOK, 제1야당) 계열 그리스노총(GSEE)이 이주노동자의 동일한 노동권과 사회복지 적용, 그리고 미등록 이주민 등록을 꾸준히 주장하고, 파판드레우 사회당 당수가 이주민의 권리 보장과 사회적 통합을 도모하는 여러 정책을 제안하면서 이주민에 대한 여론에 변화가 보였다. 같은 시기에 주요 좌파정당인 공산당(KKE)과 지난 선거에서 부각된 급진좌파연합(SYRIZA, 이하 시리자)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리스 인종주의적 정치적 문화와 대중적 인종주의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 하더라고 이주정책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체류허가제도가 다소 합리화되었지만 그리스 이주정책은 여전히 이주민들을 단기적으로 체류하는 외국인으로 취급하고 미등록 이주 문제에 대해 단속과 등록프로그램이라는 미봉책으로만 대응하였다. 따라서 재정위기가 발생한 몇 년 뒤에 그리스 이주민은 여전히 안정적 체류권이 없는 최하층으로 존재했다. 경제위기와 대중적 인종주의의 대두 이주민에 대한 여론과 사회적 분위기는 경제위기 발생 후 급속하게 극단적으로 변했다. 현재 아테네를 비롯해 그리스 대도시에서 반이주민 낙서를 쉽게 볼 수 있으며 이주민은 일반 그리스 국민에 의한 인종주의적 공격과 희롱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통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인종주의적 범죄의 빈발을 입증하는 일화적인 증거가 많다. 예컨대 아테네에 위치한 비영리 의료원 두 곳은 2011년 상반기에 폭력범죄 피해 이주민 치료사례를 각각 300건과 200건으로 보고한다. 또한 인종주의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서 결성된 NGO네트워크는 2011년 10~11월에 아테네와 파트라스 두 곳에서 총 63건의 비슷한 범죄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많은 이주민은 공격이 두려워 다니지 못한 지역이 있다고 말한다. 어느 아프간 공동체 지도자는 새롭게 이주해 온 사람들에게 위험 지역을 빨간색으로 표시한 지도를 나누어 준다고 한다. 2011년 5월에는 그리스인이 이주민에 의해 칼로 찔려 사망한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 이주민에 대한 연속 테러가 며칠 동안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갱들이 이주민을 길에서 쫓아다니며 버스에서 끌어내리고 폭행하고 칼로 찌르기도 했다. 인종주의 범죄의 급속한 증가는 지난 몇 년 동안 ‘시민조직’으로 불리는 자발적인 동네 순찰단의 결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조직들이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밤에 순찰하면서 이주민을 길거리와 공원에서 쫓아낸다. 그들은 이 활동이 긴축재정으로 인해 약화된 경찰이 못하는 역할을 채워 준다고 주장한다. 한 시민조직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포스터를 아테네 곳곳에 붙였다. “이것이 이슬람이다. 도둑질을 하며 그리스인을 강간하고 죽이는 사람들이다. 그리스인이여 각성하라!” 그리고 이주민들이 읽도록 영어로, “본국으로 즉각 돌아가라. 당신들은 여기에 자리가 없다. 이제부터 우리는 당신들과 당신들을 도와주는 배신자 정치인들이 우리나라에서 떠나도록 모든 행동을 취하겠다”고 써놓았다. 그리스 경찰들은 시민조직을 통제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활동에 안도를 표현할 때가 많다. 게다가 일부 활동가는 경찰들이 실제로 시민순찰단의 활동을 지원하고 협력한다고 주장한다. 황금새벽당의 역할 시민조직이 사용하는 담론은 지난 5~6월 총선 전후에 부각된 극우 신나치주의 정당인 황금새벽당의 담론과 매우 비슷하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Human Rights Watch)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황금새벽당 당수인 니콜라오스 미칼로리아코스(Nikolaos Michaloliakos)는 당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는 그리스인이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 우리의 수천 년에 걸친 역사를 보호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종주의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인종주의자가 맞다. 우리는 미국 원주민과 같은 운명을 원하지 않는다. 현재 이민자들은 카우보이이며 우리는 아파치족이다.” 지난 5월 언론보도를 통해서 황금새벽당은 미등록 이주의 해결책으로서 외국인 보호소 건설은 “동화”(fairy tale)라고 비꼬며, 대신 그리스-터기 국경에 대인지뢰를 설치하고 사살권이 부여된 특수부대를 배치하는 것을 제안했다. 일반 황금새벽당 당원들은 시민순찰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미칼로리아코스 당수를 비롯해 당 지도부는 조직적 개입을 부정하지만 많은 사회단체들은 황금새벽당이 이 조직들을 사실상 지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시민순찰단과 무관하게 지역정부 후보와 당선자를 포함해 황금새벽당 당원들이 인종주의 폭력에 관해서 기소된 사례가 많다. 황금새벽당은 대중적 인종주의와 국가적 인종주의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든다. 올해 선거 전까지 소수는 지역을 제외하고 공직을 차지하지 못해서, 정치적 권한을 지닌 정당이라기보다 신나치 시민단체의 위상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6월 선거를 통해서 18석의 의석을 획득해 사회적 여론, 정치적 문화 나아가 이주정책에 영향을 행사할 역량이 활씬 강화되었다. 신나치와 관련된 인종주의 범죄에 대해 그리스정부가 묵인하는 태도는 국가적 인종주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보수화되는 정치문화와 이주정책 인종주의적 여론 강화와 황금새벽당을 비롯한 신나치주의 세력의 영향력 강화는 전반적인 정치문화의 보수화와 동행하고 있고 이주정책 방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56월에 총선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주문제’는 핵심 쟁점이었다. 극우뿐 아니라 여러 주류 정당들이 미등록이주를 도시의 빈민화, 범죄와 공중위생문제의 원인으로 연결시키는 입장에 취했다. 선거공약으로 안토니스 사마라스 신민주당 당수는 그리스의 도시를 그리스인을 위해서 되찾을 것을 약속했다. 선거를 몇 개월 앞두고 신민주당과 사회당이 구성하는 연정은 이주민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 조치를 취했다. 2012년 2월에는 그리스-터키 국경의 에브로스 지역에 미등록 이주를 막기 위해서 12.5 킬로미터 장벽의 시공에 들어갔다. 3월 말에는 전국적으로 30개의 새로운 외국인보호소를 건설할 계획을 발표했다. 아테네 시내에서의 단속도 강화했다. 정부 관계자의 이주민 범죄자화 발언은 보다 잦아졌다. 예컨대 보호소 건설 계획에 관해서 사회당 출신 치안장관은 “그리스는 평화로운 민족이다. 핵심 문제는 그리스에 사는 수 천 명의 불법체류자이다”라고 설명했다. 진보세력과 일부 언론은 신민주당과 사회당이 이주문제를 강조하고 이주 통제정책을 발표한 것은 경제위기와 재정긴축정책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인종주의 강화의 원인 최근 일반인의 인종주의 정서 강화는 경제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의 재정위기는 사회복지제도를 파괴하였고 이주민과 내국인 실업을 대폭 증가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불안정과 전반적인 범죄율 상승을 야기하고 있다. 경제위기 전부터 내국인보다 빈곤했던 이주민들 중 일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생존전략으로 사소한 범죄에 의존하게 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경제위기 하에서 강화된 범죄조직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범죄 증가와 전반적인 생활주순 하락에 대해 고민하는 그리스인들은 쉽사리 이주민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곤 한다. 이와 같은 개인적 편견은 극우세력의 활동을 통해서 훨씬 강화되고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 극우정당들이 지지율 상승과 당원 확대를 위해서 이주민 범죄를 과장하고 위와 같은 극단적인 인종주의적 담론을 사용하면서 일반 국민의 공포를 자극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외국인혐오증은 전체 사회에 전파된다. 극우세력들이 인종주의적 범죄를 유도하고 조직하고 직접적으로 저지름으로써 이주민을 보다 위축시키고 테러 분위기를 조성한다. 즉, 경제위기와 사회적 혼란이라는 상황에서 극우세력들이 인종주의적 정서를 형성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심각성을 더해가는 대중적 인종주의는 정치문화의 보수화와 이주정책의 후퇴와 어떤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나? 일방적인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그리스의 경제위기와 5~6월 총선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책이 사회적인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보다는 외국인혐오 여론이 정부의 이주민 통제정책을 도입하도록 만들었다. 경제위기와 긴축정책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 정부가 ‘이주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반이주민 정서를 다시 촉발시키는 효과가 있다. 고조되는 인종주의적 사회분위기 속에서 황금새벽당이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고 이들의 의회 참여는 인종주의적 정치문화와 반이주민 정책 흐름을 보다 심각하게 만들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 그리스에서 반인종주의 운동은 1990년대부터 본격화했다. 이 운동은 이주민과 내국인 활동가의 공동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노조들이 이주노동자를 적극적으로 조직하지 않는 상황에서 수많은 국적별 이주민단체와 이주노동자의 조직이 결성되었다. 파키스탄공동체(Pakistan Community), 아프간공동체(Afghan Community), 통합아프리카여성조직(United African Women Organization), 필리핀노동자연대(Unity of Filipino Workers in Greece), 이민노동자노동조합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조직들은 그리스 좌파단체들과 함께 매년 ‘반인종주의 축제’(Anti-racist Festival)를 개최하고 있다. 이주민 조직은 행사에서 부스를 차리고 전통음악을 배경으로 음식을 팔고, 그리스인들은 이 행사에 참여하여 이주민들의 문화를 접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인과 이주민의 공존, 인종주의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과 그 가능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종주의의 정의 반인종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세력들 간에 인종주의에 대한 이해와 그에 부합하는 대응전략에 관한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운동 내 지배적 경향은 인종주의의 핵심을 대중적 외국인혐오주의로 보고 반인종주의 축제와 같은 활동을 통해서 상호간의 문화적 이해를 강화하는 것을 주 전략으로 택하고 있다. 즉, 이들은 대중적 인종주의의 원인을 이주민 문화에 대한 지식의 부재로 보고 이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종주의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국가에 원인이 있는 억압적 체계”로 보는 관점도 존재한다. 이 입장을 취하는 세력은 국가의 인종주의적 조치(racist initiatives)에 도전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종주의적 조치’란 이주정책 뿐 아니라 주류 정당의 이주민에 대한 경제위기 책임전가와 극우정당과의 협력, 그리고 경찰의 인종주의 범죄 묵인 등을 의미한다. <인종주의 파시즘위협 반대 공동행동>의 활동 경제위기의 도래와 인종주의 범죄의 급속한 증가 이래 반인종주의 세력은 황금새벽당을 비롯한 극심한 민족주의 집단의 폭력에 대응하는 것에 특별히 집중하고 있다. 2009년에 반자본주의좌파연합(ANTARSYA, 이후 ‘안타르시아’)의 일부 세력과 일부 이주민단체 지도부를 중심으로 ‘인종주의·파시즘 위협 반대 공동행동’(Initiative United against Racism and the Fascist Threat, KEERFA)이라는 새로운 반인종주의 조직이 결성되었다. KEERFA의 설립원리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가 단결하면 승리한다 △모든 미등록 이주자 합법화 △지역사회로부터 파시스트의 제거 △강제 수용소(외국인보호소) 반대. 최근 대규모 집회를 통해서 황금새벽당의 폭력을 규탄하고 반대하는 것은 KEERFA의 가장 핵심적이고 눈에 띄는 활동이다. 이러한 집회들은 여러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고 그 참가자는 보통 수천 명에 이른다. 최근 8월 24일 집회에는 무려 15,000명이 참여했다. 이주민조직의 참여가 상당히 높다. KEERFA는 또한 인종주의, 파시즘과 특히 황금새벽당에 반대하고 이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노동자의 광범위한 대응 전선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한 KEERFA 활동가에 따르면 사회당 당원(사회당 간부는 배제된다)까지 포함하는 전선을 통해서 신나치세력이 그리스 사회의 다수를 대표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이 활동가는 “나치는 선전이 아니라 테러를 통해서 강해지고 있다. 황금새벽당이 아테네 지하철에서 이민자를 잡아 칼로 찔러도 남들은 두려워서 말리지 못한다. (황금새벽당을) 고소한 사람들도 공격을 당한다. 우리가 인종주의와 나치를 반대하는 입장을 내기만 하고 시리자가 정권을 장악한 후 이를 이행할 것을 기다리기만 하는 전선이 아니라 싸우는 전선이 필요하다. 국가가 나치에 대응할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다. 시리자가 여당이 되어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반인종주의반파시즘 전선의 활동 가운데 시민순찰단에 대응할 지역자위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 제안되고 있다. 인종주의 대응 전략 평가 극단적인 외국인혐오주의와 이주민에 대한 범죄가 현재 너무 잦고 심각하기에 이주민의 신체적 안전 보호 차원의 대응이 일차적으로 시급하다. 또한 황금새벽당은 인종주의 뿐 아니라 나치 식의 파시스트 경제와 국가제도 도입을 주장하는 만큼 좌시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은 인종주의의 원인이 “자본주의와 국가에” 있다고 주장하는 KEERFA의 원칙에서 약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주정책의 후퇴에 대한 대응, 그리고 파시즘과 인종주의 폭력을 묵인하고 유도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폭로가 보다 알맞은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앞서 살펴봤듯이 황금새벽당이 자극하는 인종주의적 정서가 정치문화와 이주정책의 보수화를 촉진하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외국인혐오증을 반대하는 것은 황금새벽당을 비롯한 인종주의 집단의 대중적 기반, 따라서 정치적 영향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최우선적인 목표로 선전하는 것은 전략적인 측면이 있어 보인다. KEERFA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국가적 인종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 대중적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인종주의 체류권 없는 강제체류자를 양산하는 한국의 이주정책 그리스 사례를 통해서 경제위기와 대중적국가적 인종주의의 상관관계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그리스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한국에서 그리스와 비슷한 형태의 심각한 인종주의가 생길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여지가 있다. 두 사회가 상이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는 그리스와 같은 뿌리 깊은 나치주의의 전통이 없다. 또한 한국에서 그리스만큼 심각한 경제위기와 그에 동반하는 정치위기, 사회적 불안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반면에 이주민 유입국으로서의 짧은 역사, 단일민족 신화, 이주민을 임시적인 체류자로 취급하는 경향 등 여러 유사점도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와 형태가 다를 뿐이지 효과가 비슷한 체류권 없는 창기체류자를 양산하는 한국의 이주관리정책이 특별히 중요하다. 2004년에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수차례의 개정을 통해서 이제 최대 9년 8개월이라는 장기체류를 유도하면서도 갈수록 이주노동자의 직장선택권, 기본노동권, 사업장 내 인권을 박탈하고 여전히 정치권을 부정한다. 또한 장기체류 현실을 무시한 채 단기순환 원칙을 고수하면서 이주노동자를 한국사회의에서의 ‘국외자’(outsider), 따라서 권리를 제약해도 되는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문제들은 8월 1일부터 시행된, 사업장 이동을 보다 어렵게 하는 ‘사업장변경에 대한 고용노동부 내부지침’에서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이 지침 하에서 사업장을 이동하려는 이주노동자는 더 이상 사업장 알선 리스트를 받지 못해 사업자의 연락을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 이는 결국 사업장 변경을 방지함으로써 노동자가 노동조건이 아무리 열악해도 한 사업장에서 일하도록 강요한다. 이 지침이 노동조건과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고용노동부는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되지 않고 정치적 발언권 없는 이주노동자의 의견을 물으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대중적 인종주의의 강화 그리스만큼 심하지 않지만 최근 한국의 대중적 인종주의도 강화되는 추세가 보인다. 인터넷 카페 중심으로 활동하는 외국인혐오단체가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단체의 활동은 특히 4월 수원에서 중국동포가 저지른 끔찍한 살인 범죄에 이어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이 새누리당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에 보다 가시화되었다. 최근에 거리 시위, 국회토론회 참석 등 여러 활동으로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온·오프라인 선동을 통해서 다문화정책 반대, 외국인범죄위협 강조, 경제난 속에 외국인으로부터 자국민의 일자리 보호 등을 주장하고 있다. 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주노동자 밀집지역에서 거주하는 일부 한국인들이 이 단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 주간조선 기사는 “(외국인혐오단체의 주장에) 동조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겠다”, “너무하는 것 아닌가 싶다가도 … 이해가 가기도 한다”와 같은 내국인 주민의 태도를 보도했다. 한국의 이주정책과 대중적 인종주의의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다문화를 표방하는 정부의 공식 입장과 외국인혐오단체의 태도가 아무리 상반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상 정부와 외국인혐오단체들이 사용하는 담론이 상당히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외국인혐오단체와 마찬가지로 경찰, 법무부 등 정부부처들은 언론보도를 통해서 (미등록)이주를 범죄율 상승 및 사회질서 파괴와 무비판적으로 연계시키고 있다. 또한 2008년 경기가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노동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식의 논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채무위기 심화에 따라 한국 경제위기가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랬을 때 외국인혐오단체의 주장이 대중적 정서에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주민을 타자화하고 악마화하는 사회정치적 담론에 대한 대응이 없다면, 이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별다른 저항 없이 이주정책이 지속적으로 개악될 것이다. 더구나 장기 체류권에 대한 요구는 정부의 고집 뿐 아니라 대중의 반대에 부딪혀 불가능해질 것이다. 한국에서 반인종주의 노동운동을 건설하기 위하여 한국 사회의 인종주의와 현재 이주운동의 상태를 고려할 때, 그리스 사례에서 도출할 수 있는 몇 가지 교훈을 언급하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다. 1. 그리스에서 최소한 일부 좌파세력들이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의 상관관계,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인종주의의 상호작용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스 반인종주의 운동을 바라보는 한국의 이주운동이 KEERFA와 같은 단위의 다차원적인 인종주의 분석을 배워 한국사회 맞게 적용하고 이에 적합한 대응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이때 대중적 인종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단지 상호간의 문화적 이해에 초점을 맞춘 행사보다는 억압체계로서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적, 제도적 관계, 대중적 정서와 정부의 담론 및 이주정책의 상관관계를 드러내는 대중 교육이 중요하다. 이와 같은 교육은 우선적으로 민주노총 간부와 조합원을 대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2. KEERFA는 국가를 인종주의의 주요 가해자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위기 하에서 대중적 인종주의의 영향력을 인식하기 때문에 현재 국가적 인종주의보다 대중적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에 초점을 두고 있다. 대중적 외국인혐오증과 인종주의 폭력이 극단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전략적 선택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대중적 인종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국가적 인종주의, 즉 체류권 없는 장기체류를 유도하고 이주민을 최하층으로 만드는 이주정책의 근본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미등록 이주민 등록,’ ‘체류허가 신청 제도 합리화,’ ‘외국인보호소 폐쇄’라는 목표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체류권, 즉 안정적으로 장기 체류할 권리, 안정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권과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이 전개되어야 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3. 그리스에서 이주민단체들이 반인종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한국보다 주체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 이주민단체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들의 형성과 발전 과정 그리고 현재 활동을 보다 자세히 파악하는 것이 유의미한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에서도 이주민들이 이주민 권리, 반인종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두 나라에서 주류 사회의 인종주의적 위계가 운동 내에서도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운동 내에서 인종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다. 4. 이 말은 공동투쟁을 통해 이주노동자가 조직화되고 지도력을 강화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장변경지침 반대투쟁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벌써 수백 명의 젊은 이주노동자들이 이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문제가 본인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자발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조직하고 있다. 이러한 이주노동자들의 분노와 관심을 더욱 퍼뜨려서 이주노동자공동체 내에 토론과 전략논의를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이주노동자들이 투쟁에 참여할 구체적인 통로가 마련되어야 한다. 5. 그러나 사업장변경지침 투쟁의 일환으로 이런 식의 활동을 아무리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하더라도 단기간에 많은 성과를 내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보다 장기적인 조직화 전략을 지금부터 모색해야 한다. 여기에서 산별노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주노동자 조직화는 이주노동자들이 밀집한 부문(건설, 공단 중소 제조업 등)의 전략조직화사업의 일환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현재 이 부문에서 미조직 비정규직 조직화는 해당 산별노조의 우선적 과제인데, 사실 미조직 비정규직 조직화사업을 이주노동자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이 부문에서 이주노동자의 현황, 위치, 노동조건과 산업에서의 중요성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중장기적인 조직화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Athens News. International Press Service International Viewpoint. 각 이주민조직과 반인종주의 단체의 사이트. 류주형임월산 (2012). <그리스의 계급투쟁>. 사회진보연대. 임월산 (2011).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한국의 이주노동자>. <<사회운동>> 2011년 7-8월호. Cholezas, Ioannis and Panos Tsakloglou (2008). The Economic Impact of Immigration in Greece: Taking Stock of Existing Evidence. Institue for the Study of Labor. European Commission against Racism and Intolerance (2012). Annual Report on ECRI’S Activities (1 January to 31 December 2011). Human Rights Watch (2012). Hate on the Streets: Xenophobic Violence in Greece. Kontogiannais, Sotiris (2012). Interview by Wol-san Liem. Mavrodi, Georgia (2011). Greek Non-state Actors in Immigration Policy-making within the context of EU Membership: the Case of Trade Unions and Employers’ Associations (1990-2005). PICUM (2008). Field Visit Report: Greece Athens, 8th-12th December 2008. Triandafyllidou, Anna, et. al. (2009). Immigration towards Greece at the Eve of the 21st Century. A Critical Assessment. IDEA Working Paper. Zavos, Alexadra (2008). Moving Relationships/Shifting Alliances: Constructions of Migration in the Leftist Anti-racist Movement in Athens. Annual Review of Critical Psychology Vol. 6.
시리아 봉기의 쟁점 2011년 1월에 시작된 시리아 반정부 시위가 사실상 내전으로 전환되었다. 2012년 7월까지 사망자가 2만 명을 넘었다. 또한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15만 명이 주변국인 레바논, 터키, 요르단, 이라크에 설치된 난민 캠프에 수용되었다. 유엔은 시리아 분쟁을 내전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바샤르 알 아사드 정부와 반정부 세력 모두 내전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부는 불법적인 테러집단에 대응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반정부 세력은 독재와 억압에 대항하는 적법한 봉기라고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빠른 시일 내에 정부군과 반정부 세력 사이의 정치적 대화나 휴전, 중재가 이뤄질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유엔 특사 코피 아난은 8월 초 사임 의사를 밝혔고, 시리아에 파견된 유엔감시단 활동도 뚜렷한 해결책 없이 8월 16일 종료되었다. 8월 3일 유엔 총회는 ‘시리아 규탄 결의안’을 채택하여 ‘유엔 안보리가 중국과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 때문에 시리아 문제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총회 결의안은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중국과 러시아의 행태에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시리아 봉기가 발생하자 서방 관측가들은 아사드 정권이 곧 붕괴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시리아 사태가 장기화되자 아사드 정권이 상당히 내구성이 있다며 정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시리아 정권은 통일적이고 응집력이 강했던 반면, 시리아 사회는 이질적이고 분할되어 있었다. 정권은 종파, 부족, 계급, 지역에 따라 시리아 사회를 분할하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시리아에서 현재 벌이지고 있는 전투가 ‘대리전’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시리아 분쟁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 전략적 경쟁을 지역적 배경으로 한다. 또한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은 그 적대관계를 강화한다. 지역적, 국제적 경쟁, 적대관계는 시리아를 점점 더 고강도 폭력으로 이끌 가능성이 크다. 시리아 상황을 전망하려면 우선 시리아 사회의 계급적, 사회적 분할을 인식해야 한다. 누가 시리아 정권을 지지하는가? 시리아 봉기 세력과 반정부군은 누구인가? 누가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가? 시리아 정권을 지지하는 세 부류의 핵심 집단이 있다. 군사정보기관의 고위 인사, 신흥 자본가 계급, 모든 종교 분파의 고위 인사. 전 대통령 하피즈 아사드는 1970년대 정권을 장악한 후 군부와 정부 관리들의 거대한 부패를 용인했다. 특히 대통령의 가족과 가장 충성스런 보좌진을 포함한 권력의 핵심층은 국가기구를 현금인출기처럼 사용했다. 또한 국가와 연계된 신흥 자본가계급은 다양한 부문에서 부를 축적했다. 1991년 투자법은 신흥계급의 돈 세탁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법령은 사적 부문 투자를 허용하고 수출입 산업을 장려했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는 국가 통제 하에 있었고, 부패가 만연한 시스템이 지속되었다. 2000년 바샤르 알아사드가 권력을 인수한 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소규모 과두세력에 큰 이익을 주었다. 바샤르의 사촌인 라미 마클르푸는 정권이 주도한 마피아 스타일의 사유화를 대표한다. (그는 시리아 전기통신 사업을 지배한다.) 사유화 과정은 바샤르 친족에 의한 부의 독점을 창출했지만 상품, 서비스의 질은 하락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상위 계급과, 특히 아랍 걸프 지역의 외국인 투자자는 큰 이익을 얻었지만 시리아 민중의 다수는 인플레이션과 생계비 상승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시리아의 농업부문과 공공부문이 쇠퇴했지만, 그 부문을 강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 제시되지 않았다. 모든 종교 분파의 고위 인사들도 지난 20년간 정권으로부터 큰 이익을 얻었다. 시리아 정권과 보안기구는 특히 1980년대 이후로 수니파 공동체를 포함해 종교 인사들과 정치적, 경제적 연계를 구축했다. 종교 기관들은 마치 시리아를 대표하는 ‘시민사회’인 것처럼 행동했다. 시리아 정권의 행동은 시리아가 세속국가라는 공식적 입장과 완전히 모순된다. 정치담론에서 종교 용어가 점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1980년대 이후로 종교 사원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1만 개의 이슬람 사원과 수백 개의 이슬람 학교가 건설되었다. 문학, 예술에 대한 검열은 늘었으나 종교 서적이 도서관을 채우고, 고등교육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바아스당과 보안기구: 혁명 정당에서 국가 관료로 현재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이 속한 지배정당은 아랍사회주의부흥당(약칭 바아스당)이다. 아랍부흥당은 1947년 시리아에서 설립되었고 곧 아랍국가들에 지부를 건설했다. 1952년 아랍부흥당은 아랍사회주의당과 통합하여 아랍사회주의부흥당으로 재편되었다. 바아스당의 슬로건은 ‘통일, 자유, 사회주의’다. 이는 아랍세계를 단일 국가로 통합하고, 서구 제국주의의 아랍 지배를 종식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이상을 담았다. 바아스당은 계급투쟁 사상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산당과 차별적이었으나 주요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조합 조직화, 토지개혁을 지지했다. 바아스당은 1952년 시리아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될 정도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한 통일아랍공화국(1958–1961년)이 해체된 후 바아스당의 군사위원회가 1963년 5월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이라크의 경우, 바아스당 이라크지부 성원들도 참여한 자유장교운동이 1958년 권력을 장악했고, 1963년 2월 사담 후세인이 주도한 쿠데타로 바아스당이 권력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시리아 바아스당 내부에서 군사위원회와 민간인 지도부 사이에 권력투쟁이 발생해 결국 1966년 쿠데타로 민간인으로 구성된 전국지도부가 축출되었다. (이 시점에 시리아와 이라크 바아스당의 분할도 발생한다.) 1970년 11월에 또다시 쿠데타가 발생해 30년간 권좌를 장악하게 될 하피즈 알아사드가 권력의 전면에 나섰다. 바아스당 초기의 사회주의 이념은 시리아의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에 매력적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은 농촌 빈민층에 경제적 기회를 주고 세속주의 이념은 소수 종파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제거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많은 알라위파 청년들이 당원에 가입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1955년 알라위파는 군 하사관의 65%를 차지하게 된다. 군대는 소수 종파에 속한 청년이 생계를 해결하는 곳이자 정치적 야망을 품게 한 공간이었다. 특히 1963년 바아스당이 집권한 후 소속 종파가 군 인사 기준으로 부상한다. 알라위, 두루즈, 기독교 출신에 우선권이 부여되었고 수니파는 차별을 받는다. 점차 바아스당 간부는 친구나 같은 가문, 부족, 종파 출신에서 충원되었다. 그에 따라 1963-1966년 동안 바아스당의 성격은 완전히 변화했다. 그 후 바아스당은 국가와 일체화되었다. 관료제가 번성하고 하피즈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충성후원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는 시리아 사회가 ‘족벌 자본주의’로 변모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정부 정책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는 입장을 지닌 다른 사회주의 정당의 활동은 허용되었다. 1972년 합법화된 야당들이 민족진보전선을 구성했고 여기에는 공산당, 아랍사회주의연맹, 아랍사회당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야당은 바아스당의 하위 파트너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2000년 하피즈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바샤르가 시리아 대통령직과 바아스당 지역지도부 사무총장을 승계했다. 다른 인사가 바아스 전국지도부 사무총장을 맡았으나 이는 명목에 불과하다. 바아스당은 의회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대중의 지지라기보다는 선거에 대한 강력한 통제 때문이다. 시리아 봉기가 발생한 후 2012년 2월 헌법개정을 통해 ‘바아스당이 사회와 국가의 지도 정당이다’라는 8조는 삭제되었으나, 봉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흥 자본가계급: 아랍사회주의에서 족벌자본주의로 시리아 사태에 관한 분석에서 항상 누락되는 사실이 있다. 1970년대 이후로 정권이 자본가 집단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였고, 이러한 관계는 과거나 지금이나 위기상황에서 정권을 지지하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1963년 혁명이 성공한 후 바아스당은 아랍식 사회주의 정책(정확히 말하자면 국가자본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1965년 정부는 100개의 회사를 국유화했고 사유 토지를 몰수, 재분배했다. 하지만 1970년대 하피즈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같은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보수적 대기업가들에게 손을 뻗었다. 그들은 1960년대 바아스당의 국유화 정책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정권은 상당한 자본과 전문지식, 외국기업과 연계를 지닌 기업가들을 선택했다. 이러한 기업가들은 다양한 배경을 지녔는데 일부는 구 부르주아 출신이었고, 일부는 1973년 석유호황으로 큰 이익을 본 공공부문의 신진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공공기업 입찰에 참여해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기업을 운영했다. 기업가들과의 관계회복 정책은 1970년대 말, 80년대 초 정치적 결실을 거두었다. 그 때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이 주도한 반란에 직면해 있었다. 정부가 1973년 석유호황 이후 로 대규모 국영기업의 상품을 통해 소상인의 상태를 악화시키면서 무슬림 형제단 간부층을 이루는 전통시장 주민, 소규모 상인과 수공업자의 불만이 커졌다. 대기업 공장은 시리아 전역으로 퍼져갔고 특히 시리아 도시 지역의 보수적 수니파의 분노를 샀다. 수니파 지역은 이미 정권이 억압적이라고 인식한데다, ‘알라위파’가 주도하기 때문에 이단적이라고 보았다. 또한 바아스당 집권 이후 처음으로 정권이 대규모 민간기업 설립을 허용하자 수니 이슬람 성향의 소기업과 국가 간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무슬림 형제단과의 대치상태는 6년간 지속되었다. 국가로부터 특혜를 얻은 도시의 수니파 대기업가들은 아사드 정권을 지지했고, 시리아 상공회의소 의장은 1982년의 역사적 회합에서 정권을 변함없이 지지한다고 약속했다. 정권이 북서부 도시 하마에서 벌어진 봉기를 진압하면서 최소한 1만 5천 명의 주민이 죽었다. 1982년 이후로 비공식적 국가, 기업 파트너십은 번성했다. 대기업가는 다양한 특혜를 누렸다. 공공부문 프로젝트의 커미션, 세금 면제, 특정 상품에 대한 보호무역 등. 이러한 관계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경제정책에 불균형 효과를 미치기 시작했다. 국가 관리와 사적 기업인으로 구성된 지도위원회는 명목상의 ‘사회주의 5개년 계획’ 초안을 작성하는 각종 위원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여기서 사적 기업인은 그 자신이 국가관리이거나 그 가족이었다. 따라서 정책을 입안하는 자와 그 정책의 효과를 누리는 자가 같은 기업에 속한 셈이었고, 경제정책 입안에서 부패가 만연했다. 1990년대 총리실은 경제계획의 핵심부서였다. 기업을 운영하는 국가관리는 신속하게 이윤을 획득할 방법을 선택했다. 즉 그들은 산업보다는 상업을, 농촌보다는 도시를 선호했다. 총리를 포함해 고위 관리는 직업 자동차 대리점과 같은 최고급 소비재 판매업을 운영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대통령 부인의 조카는 새로운 거물로 부상해 관광산업이나 자유무역지대를 통해 큰 돈을 벌었고 그 후 전기통신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시리아는 과거 지향한 아랍식 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에서 아주 탁월한 족벌자본주의로 변모했다. 1991년에 시작된 경제 자유화는 경제계 거물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었다. 사적 부문이 공공 부문을 능가하기 시작했지만 사적 부문의 가장 부유한 인사는 국가 관리, 정치가 또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1990년대 경제성장은 소비 증가에 따른 단기 효과에 불과했고, 2000년대 이후 경제는 슬럼프에 빠졌다. 5-7%에 이르던 성장률은 1997년 이후로 1-2%에 머물렀다. 2000년 권력을 승계한 바샤르 아사드는 자유화 정책으로 경제하강을 막고자 했다. 그는 국가보조금을 줄이고, 40년 만에 처음으로 민간 은행을 허용하고, 주식시장을 준비했다. 2005년 정권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선언한 후 국가와 기업의 결합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국가에 공공서비스, 보조금, 복지를 의존하는 시리아인 다수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새로운 정책은 족벌주의를 영구화했고, 정권과 결탁한 가문들이 민간 부문을 지배하고 공공 자산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금도 대기업가들은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 대통령의 혈족뿐만 아니라 주요 기업을 지배하는 가문들도 정권을 굳건히 떠받들고 있다. 경제계 거물들은 정권과 운명을 같이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반대편에 선다는 것은 엄청난 도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종교세력과의 갈등과 타협 1970년대 초 하피즈는 수니파 종교 세력과 타협을 모색했다. 대통령의 이슬람 선서규정을 부활시켰고, 교회신축을 장려하고, 성직자들의 봉급을 올렸으며, 하피즈 자신이 앞장서서 신앙심을 선전했다. 그러던 1973년 시리아 헌법에서 ‘대통령의 종교는 무슬림이어야 한다’는 조항을 삭제하려 시도하자 무슬림 폭동이 발생했다. 나아가 1976년 레바논 내전에서 시리아 정부가 마론파 기독교도를 지원하자 무슬림 형제단의 분노가 폭발했다. 국유화나 토지개혁으로 몰락한 계층들도 무슬림 형제단을 지지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비폭력을 주장하는 ‘요르단 훈련파’와 폭력형명을 주장하는 ‘알레포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형제단의 무장대원은 1978년에 알레포 지역에서만 5-7천 명에 이르렀고 전국적으로 3만여 명에 달했다. 1979-1980년 잇달아 무슬림 형제단과 보안군 사이 충돌이 발생했다. 1980년 무슬림형제단의 하피즈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하피즈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 단원은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실제로는 사형 확정 후 보통 12년으로 감형했다.) 1982년 2월 무슬림 형제단이 바아스당 간부 100명을 죽이자, 군대가 탱크와 헬기를 동원해 하마시를 공격해 최소 1만 5천 명이 사망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무슬림 형제단은 붕괴했고, 수천 명이 구속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1980년대 후반 하피즈는 하마 사건의 여파를 완화하기 위해 다시금 타협책을 내놓았다. 무슬림 형제단 구속자를 석방하고 해외 망명 지도자의 귀국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슬람 사원 건설을 확대하고 쿠란학교를 개설했고 다양한 이슬람 문화활동을 장려했다. 1990년대 초반 하피즈 정권은 무슬림 형제단과 전략적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걸프전 이후로 미국-이스라엘-터키 동맹관계 형성이 중요한 계기였다. 이 시기에 무슬림 형제단은 아랍 각국에서 세속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투쟁 대신 반이스라엘, 반미 투쟁에 집중했고, 시리아 정권은 이를 활용해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서고자 했다. 반정부 세력은 누구인가? 최근 시리아 경제 상황은 대중적 저항을 촉발시킨 결정적 매개가 되었다. 2003년 이후 여러 해 동안 가뭄이 들자 농촌에서 도시로 거대한 인구 이동이 발생했다. 2009년까지 약 백만 명 이상이 도시로 이주했다. 이는 시리아의 사회적, 지역적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다마스쿠스, 알레포와 같은 대도시가 이주민을 흡수했으나 인프라 투자는 매우 부족했다. 지방도시들, 예를 들어 디라, 이들리브, 홈스, 하마와 같은 도시와 그 배후 지역은 이제 반란의 주요 전투지역이 되었다. 농촌 지역은 정부의 보조금 축소, 투자의 부족, 도시화의 영향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파괴되고 있고 수십 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부정부패로 인해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믿는다. 시리아 봉기 전 빈곤선 이하 인구의 비중이 급상승했다. 그 비중은 2000년 11%에서 2010년 33%로 올라갔는데, 이는 700만 명 이상이 빈곤선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업률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20-25% 수준에 이른다. 특히 25세 이하의 실업률은 55%에 이른다. (30세 이하 인구 비중은 55%다.) 매년 38만 명 정도가 노동시장에 나오지만 시리아 경제는 그들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시리아 정부는 10개년 계획에서 매년 25만 개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으나 전혀 실현할 수 없었다. 2010년 4월 새로운 노동법이 도입되었으나 명백히 고용주에게 유리했다. 물가상승과 생계비 부족, 높은 실업률, 정부보조금 감소 등 시리아 주민이 경험한 현실은 아랍의 봉기가 발생한 다른 지역, 국가와 완전히 동일했다. 시리아봉기 후 전국조직 형성: 시리아지역조정위원회, 시리아혁명최고평의회, 시리아혁명총사령부 시리아 봉기가 전개되면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년들을 주축으로 삼는 세 개의 전국적 집단이 형성되었다. 시리아지역조정위원회(LCC)는 2011년 3월에 설립된 조직으로 시리아 봉기를 조직하거나 그에 관한 정보를 교류하는 지역 집단들의 네트워크다. 이들은 시리아 봉기의 ‘중추’라는 평가를 들었다. 네트워크는 매우 다양한 종교적, 계급적 배경을 지닌 청년 시위자들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지역위원회는 다마스쿠스 외곽의 다라야에서 구성되었고, 그 후 홈스를 거쳐 2012년 2월 현재 총 14개 지역에 구성되어 있다. 지역조정위원회는 시민불복종 운동이나 총파업을 호소하며 평화적 운동을 지지한다. 지역조정위원회는 2011년 8월 무장저항과 국제사회의 군사개입에 호소하려는 경향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군사화는 대중적 지지와 도덕적 우월성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조정위원회는 평화적 시위가 혁명 후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더 좋은 조건을 창출할 것이며, 군사화는 시리아 사회를 위한 적법한 기초를 만들 수 없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하나의 전국조직 중 하나인 시리아혁명최고평의회(SCSR)도 주로 청년들로 이뤄진 단체다. 최고평의회는 정치적 해결책이 필요하지만 무장투쟁의 중요성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지역조정위원회과 구분된다. 최고평의회는 시리아민족위원회(SNC)에 대표를 보냈지만, 공식 구성원은 아니다. (SNC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시리아혁명총사령부(SRGC)는 2011년 8월 19일 터기 이스탄불에서 창립을 선언했다. 총사령부는 시리아 내부 40개 조직이 연합한 조직이다. 혁명총사령부는 지역 군사위원회를 통한 무장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앞의 두 조직과 달리 시리아민족위원회(SNC)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민족위원회가 끝없는 내부 권력다툼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존 야당의 재편: 민족조정위원회와 시리아민족위원회 시위 확대 와중에 기존 야당 세력도 재결집을 이뤘다. 먼저 2011년 6월, 30여 년간 정권의 탄압을 받던 야권 정당과 인사들은 다마스쿠스에서 <민주적 변화를 위한 민족조정위원회>(NCC) 결성을 선언했다. 민족조정위원회에는 민족민주회의(RND)를 비롯해 좌익 정당들과 쿠르드 정당이 속해 있다. 민족조정위원회는 정치범 석방, 군사행동 중지, 독립적인 조사위원회 설립, 발포책임자 처벌, 긴급조치 해제, 즉결처벌 중지, 평화적 시위 인정, 헌법 8조 폐지를 정부가 받아들인다는 필수적인 조건 하에 정부와 야권 세력 간의 진지한 대화를 촉구했다. 또한 9월에는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세 가지 구호를 제시했다. ‘폭력 행위 반대, 군사적 개입 반대, 종파주의 반대’. 따라서 민족조정위원회는 결성 시점부터 정권 퇴진을 우선시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예를 들어 11월 11일 일단의 반정부 운동가들은 민족조정위원회가 시리아 전역의 시위대들을 대표하지 못하며 정부 측에 기울어져 있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몇몇 운동가들은 조정위원회가 정권의 수족이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한편 2011년 8월 23일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시리아민족위원회(SNC) 구성이 선언되었다. 민족위원회는 시리아 국내외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민족위원회는 시리아 인민이 직접 위원을 선출하지 않았지만, 시리아 인민의 관심사와 요구를 대표한다고 선언했다. 2011년 10월 2일에는 총회, 사무총장, 집행위원회를 포함하는 조직 구성을 결정했다. SNC에는 무슬림형제단의 망명자 집단, <다마스쿠스 선언>, 아시리아 민주조직, 일부 쿠르드 조직, 지역조정위원회(LCC) 등이 참여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민족민주회의는 2008년에 다마스쿠스 선언 조직이 “피상적인 행동, 소수 집단과 인물에 의한 독점으로 인해 어떤 목적도 달성하는데 실패했고 아랍이슬람 정치 동맹으로 변질되었다”며 탈퇴하였다.) 민족조정위원회와 시리아민족위원회에 참가하는 단체는 거의 중복되지 않는다. 민족위원회는 자신이 시리아 저항세력의 약 60% 정도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성원은 민족위원회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주의자라고 주장했다. 평화시위와 무장투쟁 정권이 행한 고강도의 억압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은 초기 몇 달간 평화적 운동으로 남아 있었다. 간혹 일부 시위대가 폭력을 사용했지만 이는 보안기구의 광적인 폭력 도발에 대한 개별적 대응이었고, 민중운동의 지도자들은 폭력을 통제할 능력을 지녔다. 2011년 12월 총파업과 시민불복종 운동도 큰 성공을 거뒀다. 보안기구는 민중운동의 폭력을 유도하는 간계를 부렸다. 평화시위대에 대한 학살을 정당화하며 자신이 ‘테러집단’과 대치 중이라고 선전하려는 의도였다. 정권은 두 가지 방식을 활용했다. 첫째, 보안기구와 무기상인의 관계를 이용해 시민들이 값싼 경무기를 손에 얻기 쉽게 했다. 둘째, 시위 중 살해, 감옥에서의 처형, 지도자 구금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 지도부를 제거했다. 이는 보안기구와 무장투쟁을 선호하는 새로운 지도부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국외에서 무장투쟁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군대 사병들의 탈영이 늘어나지 않았다면 민중운동은 평화적 시위를 유지했을 것이다. 시리아 군대의 지휘부와 부대들은 하피즈 아사드 시절에 구성되었는데, 반란이나 집단 불복종이 어려웠다. 하지만 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민중운동을 야만적으로 탄압하라는 임무가 주어졌을 때 군인이 이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으로서 반란을 선택하는 길 밖에 없었다. (혁명에 동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수천 명의 장교가 투옥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유장교운동과 자유시리아군 자유장교운동은 2011년 7월 정부군에서 이탈한 후세인 하르모쉬 중령에 의해 설립되었다. 자유장교운동은 설립 시부터 승진 등에서 차별 받던 시리아 정부군 내 소수 세력들을 끌어들이고자 했고, 소수 세력이 자유장교운동 내의 군사 기구 및 민간 기구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군대, 친정부 민병대, 보안군으로부터 비무장한 시위대의 보호’를 자신의 임무로 규정했다. 한편 자유시리아군(FSA)은 2011년 7월 29일 정부군에서 이탈한 알아스아드 대령 및 장교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성명서에서 군의 (공격)목표는 도시를 포위하고 민간인을 공격하는 정부군임을 밝혔다. 설립 이후 몇 주 동안 자유시리아군의 여단들은 홈스주, 하마시 및 하마주 북부, 데레졸, 보크말, 자위야 산맥, 다마스쿠스, 리프 디마슈끄, 데르아 등으로 배치되기 시작했다. 가장 피해가 큰 홈스 주에서 활동하는 칼리드 븐 알 왈리드 여단은 자유시리아군의 가장 큰 여단이며, 2011년 10월 초에 자신들이 8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홈스 주의 주요 도시 및 마을들을 담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9월 23일, 아스아드 대령은 자유시리아군과 자유장교운동이 하나의 군사 지도부 아래로 통합되었다고 발표했으며 11월 14일 시리아 내의 최고군사지휘권을 가지는 군사 위원회의 결성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군사 위원회는 자유시리아군에 가담하지 않는 군인 및 보안군에게 처벌을 가할 권리를 부여했으며, 민간인 피해에 가담하지 않은 모든 군인 및 보안군이 즉각 자유시리아군에 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자유시리아군에는 탈영병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참여하고 있다. 자유시리아군의 민간인 자원병들의 다수는 하층계층 출신이다. 그들은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또는 보안기구의 추적을 피해서 자원했다. 시리아민족위원회와 자유시리아군의 공조 2011년 10월 시리아민족위원회는 리비아 시나리오가 시리아에서 반복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민족위원회는 저항의 군사화를 경고하고 시민불복종 행동의 확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평화적 수단은 기업이나 여타 전쟁의 피해를 두려워하는 여러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논거였다. 하지만 그 후 민족위원회는 입장을 변경했다. 현재 저항세력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개의 길은 ‘더 강력한 군사적 지역 저항’ 또는 ‘외국의 개입’인데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개입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군대 내부 이탈이 확대되는 맥락에서 민족위원회는 자유시리아군과 협약을 체결했다. 자유시리아군을 시리아 내부에서 전투를 벌이는 반군 단위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민족위원회는 반군을 지지하는 것이 반정부 세력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민족위원회는 자유시리아군에 직접 무력을 지원하지 않지만 자유시리아군을 유지하기 위한 기금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2012년 1월 중순 시리아 민족위원회는 자유시리아군의 지도부와 연계된 사무국 설립을 선언했다. 시리아 봉기 향후 전망 시리아 봉기의 전개과정은 점점 더 리비아를 닮아가고 있다. 평화시위에 대해 정권의 폭압이 가해지고 이에 대응해 무장투쟁이 전개되고, 해외에서 기존 야당들로 구성된 정치기구가 강대국과 채널을 형성해 외국의 군사개입을 호소하고 있다. 반면 시리아 아사드 정권은 다른 아랍 정권들에 비해 훨씬 견고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아스당, 군부, 대기업가, 고위 종교인사들로 구성된 정권 지지기반이 여전히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리아 봉기는 중대한 쟁점들을 낳고 있다. 첫째, 평화시위와 무장투쟁이라는 쟁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리아 내부에서 형성된 전국조직들도 무장투쟁에 대한 지지와 참여 여부를 두고 큰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어느 관측가는 이렇게 말했다. “초기에 대부분 자발적인 저항운동을 지지한 빈민, 실업자 그리고 대학생은 이제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정권의 억압 때문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나토-사우디-카타르 그리고 특히 무슬림 형제단이 주도하는 시리아민족위원회와 자유시리아군 등 반대 진영의 군사화에 대한 반대 때문이다.” 둘째, 시리아 국내에서 무장투쟁이 강화될수록 외국의 군사개입을 지지하는 경향과 반대하는 경향 사이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이제 미국은 반군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미국은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의 완전한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시리아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7,400만 달러로, 통신장비 등 ‘비살상’ 원조금을 2,500만 달러로 증액했다. 미국 재무부는 자유시리아군을 대표해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시리아지원단(SSG)의 반군 지원 모금활동을 허용했다. 미국 중앙정보부(CIA) 등 정보기관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비밀명령에 따라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바아스당은 아랍민족주의, 반제국주의에 뿌리를 둔 이데올로기로 외국 침략자에 저항한다는 명분으로 지난 수십 년 간 당원을 동원했다. 수백 명의 당원이 비폭력 시위자 살해에 항의하며 탈당했지만, 외국의 군사개입이 노골화된다면 더 이상의 탈당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강대국의 힘에 호소해 바샤르 정권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정권 지지 집단들의 결속력은 강화시키면서 역으로 민중운동의 정치적 분열을 가속화시킬 위험이 있다. 셋째, 현재 국제사회가 대체로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시리아민족위원회의 정통성 문제다. 시리아 봉기를 주도한 시리아 내부 집단들은 민족위원회 결성 당시 지지를 표했지만, 이는 민족위원회의 강령이나 그 내부 구조에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든 경향을 대표하는 조직에 통일성과 집중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민족위원회는 민중운동을 지지하고 활성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했으나 점점 민중운동으로부터 멀어졌다. 민족위원회는 리비아의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서 주로 강대국의 영향력에 호소할 뿐, 혁명운동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짧은 시간 내에 시리아 봉기가 아사드 정권의 퇴진과 시리아 사회의 급진적 전환을 성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게다가 사우디와 이란의 적대관계, 미국과 러시아의 긴장관계는 시리아 내전을 격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시리아 봉기를 이끌었던 ‘아랍의 각성’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초기 시위를 주도했던 시리아 대중운동이 봉기 이후 가장 큰 위기에 처한 현재 시점에 어떤 운동을 선택할지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