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앙 칼럼 2012년 10월 31일] 조어도에서 중국과 일본의 국지전이 벌어진다면? - 중국의 국지전 계획에 담긴 핵전쟁의 위험성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2012년 10월 19일 일본 언론은 자위대가 조어도(일본명 센카쿠, 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중국과 일본의 국지적 해전을 가정하고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일본은 6척의 미사일구축함과 1척의 헬기 구축함이 피해를 보는 반면, 중국은 동해함대와 북해함대가 작전 능력을 상실할 정도로 궤멸적 타격을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중국 군부는 강력히 반발했다. 양위쥔(楊宇軍, 양우군) 국방부 대변인은 10월 25일 정례 브리핑에서 "일본의 급선무는 맹목적으로 무력을 뽐내는 일이 아니라, 이런 상태에 이른 원인을 깊이 반성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대변인은 점잖게 말했지만 다른 인사들은 더욱 구체적으로 일본의 시뮬레이션을 반박했다. 멍옌(孟彦, 맹언) 국방부 국제전파국 부국장은 “일본이 중국의 미사일 능력을 고려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는 국지전 발생으로 양국의 함정과 전투기가 출동하기 전에 중국 측의 미사일 선제공격이 이뤄질 수 있다는 뜻이다. 뤄위안(羅援, 나원) 군사과학학회 부비서장은 "국지전이 발생하면 중국은 해군뿐만 아니라 공군, 제2포병이 입체적인 작전을 벌여 승리를 얻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일본이 두려워하는 핵무기를 갖추고 있다"면서 "비록 중국은 핵 비보유국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핵무기 보유 자체가 우리의 불패를 보증하는 최후의 카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핵 보유 자체가 불패의 카드가 된다는 중국 인사의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일까? 중국 핵전력을 전담하는 제2포병 부대의 독특한 구조를 알아야만 그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핵미사일을 통괄하는 제2포병은 1990년대 초반부터 국지전에 대비하여 재래식 중단거리미사일도 보유하기 시작했다. 즉 동일한 기지에서 핵미사일도, 재래식미사일도 발사할 수 있다. 중국은 적국이 재래식 미사일 발사 기지에 반격을 가하는 것은 곧 핵미사일 기지를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적국도 인식하기 때문에 함부로 중국 미사일 기지에 반격을 가할 수 없으리라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적국에 마음껏 재래식 미사일 공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핵 보유가 ‘불패의 카드’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반면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자는 중국의 바로 그 독특한 구조 때문에 국지전이 핵전쟁으로 상승할 위험이 매우 크다고 지적한다. 상대국은 중국 기지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핵미사일인지 재래식미사일인지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중국 기지를 완파하기 위한 공격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작용, 반작용의 악순환을 작동시켜 순식간에 국지전이 본격적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중국은 이미 1980년대 말 세계 3위의 핵무기 국가였다. 약 100기에서 400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제2포병 부대는 약 10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공식적 입장은 ‘핵 선제 불사용’을 고수하고 있으나, 중국의 핵전략이 국지전의 승리를 목표로 점차 공격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최근 핵과학자회보에 실린 <중국의 핵전쟁 계획 수립>(John W. Lewis, Xue Litai, ‘Making China's nuclear war plan’)이라는 논문을 토대로 중국이 가정한 국지전 시나리오의 위험성을 짚어 보겠다. 중국의 핵무기 접근법 중국의 핵무기 관련 접근법은 ① 군사전략방침, ② 핵정책, ③ 핵전략, ④ 핵위협(核威懾, 핵위섭) 이론, ⑤ 작전운용원칙, ⑥ 작전규칙(作戰条令, 작전조령)이라는 여섯 개 층의 개념적 요소들로 구성된다. 인민해방군 군사전략의 출발점은 ‘적극적 방어’다. 즉 적이 먼저 공격한 후에 적을 공격함으로써 승리를 거둔다는 원칙이다. (후발제인(後發制人). 즉 ‘뒤에 손을 써서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순자>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원칙은 중국의 기본 핵정책에서 직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1964년 최초 핵실험 후, 중국은 공식적 핵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았다. 특히 지난 수십 년간 중국의 핵 정책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 핵무기는 완벽히 금지되어야 하고 범세계적으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 핵 강대국의 위협은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도록 강요했다. 중국의 소규모 핵보유고는 오직 자위 방어를 위한 것이다. - 어떤 때라도, 어떤 조건에서도 중국은 핵무기를 선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명백히 핵무기 선제 불사용 정책, 또는 ‘후발제인’ 정책의 파생물이다. - 중국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나 비핵무기지대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한다고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 - 중국은 핵 확산을 반대하며, 다른 국가가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결코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국가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지원했다는 상당한 증거가 있으나 중국은 계속 부정하고 있다.) - 1980년대 이후로 중국은 중국으로부터 핵관련 물질과 장비를 수입하는 국가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물질보장조치를 수용해야 하며 중국의 동의 없이 수입품을 제삼국으로 이전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또한 중국은 수입된 모든 핵물질, 장비가 오직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된다는 것을 보장한다. (중국은 1984년 국제원자력기구에 가입했고 기구의 핵물질보장조치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중국은 1992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이러한 중국의 핵정책은 공개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반해 군사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는 핵전략은 매우 민감한 문제이지만 자세히 공개된 바 없다. 중국은 1966년 7월 1일 제2포병 부대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중국 제2포병은 핵무기 전담 부대로 창설되었다. 육군, 해군, 공군 삼군 편제와 구분되는 ‘제4군’인 셈이다. 중국은 소련의 '전략로켓군‘을 차용했다.) 그 후 마오쩌둥에서 니에룽전(聂荣臻, 섭영진)에 이르는 초기 지도자들은 핵정책을 위한 방침을 제시했을 뿐 핵전략에 대해서는 뚜렷한 입장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 후 어떤 지도자도 핵전략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핵무기의 제조와 이용에 관한 한 지도자들은 중국 핵보유고 규모를 ‘최소 보복수단’ 수준으로 제한했을 뿐 어떤 세부적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그에 따라 1966-76년 문화대혁명의 혼란기 동안 제2포병은 엄밀한 작전계획, 목표계획을 발전시키는 데 매우 더디었다. 1964년부터 1980년대 말까지 중국은 명시적 핵전략을 갖추지 않았다. 1977년 덩샤오핑이 권력에 복귀한 후 중앙군사위원회는 최초로 핵전략 연구를 장려했다. (중국의 경우,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와 정부의 중앙군사위원회가 명칭과 구성원이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에 별도로 칭하지 않겠다.) 1987년 제2포병은 포괄적 핵전략 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연구팀을 구성했다. 2년 후 중앙군사위원회는 초안의 최종 판본을 공식적으로 채택했다. 초안은 ‘최소보복’을 대체하는 ‘제한핵보복’(有限核報復, 유한핵보복) 전략을 제시했다. 2006년에야 중국은 공식적 핵전략으로서 ‘자위방어적 핵전략’ 개념을 선언했다. 그 전략의 궁극적 목적은 ‘다른 국가가 중국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억지한다’는 것이다. 중국과 핵억지 이론 핵전략을 발전시키기에 앞서 중앙군사위원회는 핵억지라는 개념을 거부했고 그것이 ‘제국주의자들의 협박’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거부 의사는 중국의 공식 입장에서 자주 반복되었다. 1995년에 중국이 군비통제와 비확산 문제에 관해 처음으로 발행한 백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중국 정부는 언제나 핵 위협과 핵억지 정책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적 언급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오의 후계자가 핵억지 이론을 수용하지 않았지만, 중국에 대항하는 어떤 국가도 중국의 핵무기 보유고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군사 분석가들은 중국이 마오 이래로 ‘실존적 핵억지’(存在性核威懾, 실존성핵위섭) 이론을 채택했다고 주장한다. [사진] 중국 탄도미사일의 사정거리 중국의 핵무기 선제 불사용 정책은 중국의 핵보유가 소규모이고 매우 취약하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어떤 정보원에 따르면, “우리 중국의 소규모 핵미사일은 적국의 핵 반격 전력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한다. 중국의 핵미사일 발사는 의심할 바 없이 감당할 수 없는 핵보복을 촉발할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서 볼 때 중국이 핵공격을 먼저 단행한다는 가정은 절대적으로 있을 수 없다.” 중국이 핵 미사일을 먼저 발사한다는 결정은 자살과 같다. 물론 1960년대 이후로 소련, 미국과의 논쟁에서 ‘선제 불사용’은 ‘자기 파괴의 회피’보다 더 나은 장신구였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중국 관리와 안보전문가들은 서방과 교류를 확대하면서 마오의 금언과 거리를 두었고 핵억지를 전략적 용어에 포함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중국의 핵보유고는 더 이상 매우 제한적이거나 취약하지 않으며, 새롭고 덜 위협적인 전략적 안보환경 내에서 성장하고 있다. 드디어 현대적 핵전략을 모색하면서 핵억지를 추가할 때가 온 것이다. 하지만 2006년에야 중국의 방위 백서는 공식적으로 핵억지력(核威懾力量, 핵위섭역량)과 전략적 억지(戰略威懾, 전략위섭)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방위백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제2포병은 정보화라는 조건에서, 핵미사일과 재래식미사일을 보유하는 전력구조를 전진적으로 개선하고, 핵억지와 재래식 타격 능력을 향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제2포병은 핵무기의 안전성과 확실성을 보장하고 핵억지력의 신뢰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중국에서 핵억지의 시대가 온 것이다. 중앙군사위원회는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장쩌민이, 그 후 2012년까지 후진타오가 이끌었다. 이 시기 동안 중앙군사위원회는 핵억지 이론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지만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장쩌민 시대의 이론은 억지력의 강화를 위한 핵무기와 재래식무기를 포괄하는 다양한 수단의 결합(核常兼備, 핵상겸비, 또는 多種手段配合, 다종수단배합) 이론으로 설명된다. 장쩌민은 중국 고유의 이중적 억지로서 ‘재래식무기=창’과 ‘핵무기=방패’의 관계를 강조했다. 2006년 후진타오는 손자의 말에 따라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병법의 최선이다’(不戰而屈人之兵, 부전이굴인지병)라며 자위방어적 핵전략을 옹호했다. 그에 따라 후진타오는 핵억지력과 재래식 타격능력을 갖추기 위해 제2포병이 능률적이며 효과적인 전력을 구축하도록 촉구했다(精干有效·核常兼備的戰略打擊力量, 정간유효·핵상겸비적 전략타격역량). 전략방침의 진화 핵억지 개념이 공식적으로 채택되고 점차 정교화되면서 기본 군사전략방침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1977년 덩샤오핑이 복귀한 후 그는 중국에 대한 안보위협을 재평가했다. 1980년대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개선되고 소련의 위협도 감소하기 시작하자 덩은 전쟁이 세계적 차원에서 발발하지도 않을 것이며 곧 벌어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미국은 소련과의 대결로 세계적 교착상태에 빠져 있고 베트남과의 전쟁에서도 곤경을 겪었다. 덩은 중국이 베트남과 충돌할 것이며, 아마도 상당 기간 후에 인도와 충돌할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이러한 덩의 전략적 계산에 따라 1984년 중앙군사위원회는 국지전과 제한적 충돌(有限衝突, 유한충돌)에 대비한 새로운 전략방침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곧 발발한 전쟁, 전면전, 핵전쟁’에 대비하라는 마오주의적 방침을 폐기하는 문제를 검토했다. 덩의 방침에 따라 군부는 제한적 국지전에 대비한 정밀 재래식무기 연구를 개시했다. 중국의 공군력과 해군력이 저열했고 현대화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기 때문에 중앙군사위원회는 제2포병에 재래식 미사일을 도입하는 응급책에 의존했다. 1979년 중국의 베트남 전쟁은 매우 단기간에 벌어졌지만 그 결과는 재앙에 가까웠다. 중국 당국은 인민해방군이 국지전에서 통합 전력으로 전투를 벌일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1987년 안보 이론가들은 첨단기술을 활용하는 연합작전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88년 에 이르러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전쟁에 대비하는 새로운 군사전략방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마오 시대의 유산에서 벗어나, 국지전과 돌발사태(突發事件, 돌발사건)에 대비한 전략방침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91년 미국은 걸프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승리를 거둔 후 ‘군사혁명’에 돌입했다. 이는 현대적 정보통신체계, 비밀정보력, 우주기술, 초현대적 항공기, 고급 작전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대만의 리덩후이(李登輝, 이등휘)가 ‘하나의 중국’ 정책을 벗어나려는 시도에 대응해야 했다. 1992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장쩌민은 국제정세의 급속한 전개와 세계적 군사혁명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지침에 대한 연구를 지시했다. 1993년 1월 장쩌민은 중국 동남해에 초점을 맞추어 ‘하이테크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방침을 채택하라고 지시했다. 새로운 군사전략방침의 요소들이 실행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방침은 인민해방군의 핵심적 군사임무를 재정의했고 중국의 ‘가상 적국’을 정의했으며 미래 작전의 규모와 유형을 설정했다. 하이테크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해방군의 우선적 임무로 규정되었다. 새로운 방침은 중국 본토 침공에 대비한다는 역사적 과업에서 공식적으로 벗어나도록 촉진했다. 미래의 가상 적국은 대만과 그를 지지하는 핵무장한 미국이었다. 중국의 총괄적 국가전략은 여전히 평화, 안정성, 발전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예상되는 하이테크 국지전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재래식 마시일 프로그램 1984년 초반 중국 우주항공국은 주로 해외 수출을 위한 재래식 전술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해 학술부를 설립했다. 1985년 10월 학술부는 미사일 총괄 디자인을 시작했다. 군부는 미사일 M-9이란 암호명을 붙였지만 내부적으로는 DF-15라 불렸다. 그것은 일단계 미사일로 600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지녔고, 재래식탄두와 핵탄두를 모두 탑재할 수 있었다. 미사일은 어느 정도 강화 방어설비를 갖춘 장소에 저장되었고 이동성이 있고 고체로켓추진 체계였기 때문에 탐지와 파괴 위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로 몇 년간 인민해방군 전략가는 “재래식 국지전이 벌어지면 핵무장한 제2포병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심사숙고했다. 당시 중국은 주변국, 특히 베트남, 인도, 일본의 군사적 도전이 거세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 세 나라는 첨단 재래식무기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남중국해의 남사군도(南沙群島)의 통제권을 둘러싼 분쟁은 위협에 대한 인식을 강화했다. 인민해방군은 항공모함도, 공중급유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남사군도에 대한 공중통제권을 지배할 수 없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임시변통책으로 중거리 미사일 DF-25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사진] 수송 중에 촬영된 DF-25 중앙군사위원회는 이 새로운 중단거리 미사일을 정규군에 배치할지, 제2포병에 배치할지 결정해야 했으므로 큰 논쟁이 벌어졌다. 중앙군사위원회는 제2포병의 의견을 받아들였는데, 투자 비용이 적고 신속히 배치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2포병은 대만 맞은 편에 있는 52기지에 부대를 설치하기 위해 준비했고, 1992년 4월 처음으로 DF-15를 수용했다. 미사일이 계속 들어오기 시작하자 중앙군사위원회는 1년 후 최초로 재래식 미사일 여단 설치하고, 1년 내로 발사 준비를 마치라고 명했다. 1995년 7월 1996년 3월, 중국은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지도자에 대한 경고의 표시로 대만 인근 바다에 재래식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 발사가 위기를 악화시켰는지, 완화시켰는지 여전히 논쟁이 분분하지만 중국은 자신이 정치적 목표로 삼은 대만의 여론과 미국의 방위 정책에 대해 의도한 만큼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았다. 중국 정보원에 따르면, “1995년 7월 6발의 미사일을 발사한 다음 날 6천 명의 대만인이 독립세력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대만 주식시장은 미사일 발사 직후 절반으로 폭락했다.” 미국의 강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미사일이 대만의 분리주의자들에 대해 압력을 유지하는 유용한 수단이라고 인식했다. 제2포병 지휘자는 1990년대 중반의 미사일 발사가 대만 독립세력의 오만함을 억제했다고 주장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대만에서 분리주의 경향이 감소하는 정치적 변화가 발생했지만, 52기지의 재래식 여단의 수와 더욱 정밀한 탄도미사일 규모가 점차 증가했다. 권두부대(拳頭 部隊, 신속대응부대)는 대만 맞은 편 해안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나아가 2008년 미국 방위보고서에 따르면, 상당 규모의 대지 순항미사일 DH-10가 윈난 남부에 배치되었고, 일부 핵 기지가 재래식미사일과 핵미사일 능력을 동시에 갖춘 기지로 바뀌었다. 하이테트 국지전에서 이중 억지의 모순 중앙군사위원회가 핵=방패와 재래식무기=창의 동적인 관계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중앙군사위원회는 재래식미사일을 중국의 전략적 억지를 강화하기 위한 다용도 수단으로 간주한다. 재래식·핵미사일 여단들을 순차적으로 활용하거나 함께 결합하여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중국의 정치적, 군사적 힘의 근본적 원천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는 결정적 불확실성이라는 문제를 일으키는 원천이기도 하다. 군사전략가들이 겪는 딜레마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능력과 목적을 지닌 재래식 미사일과 핵 미사일이 동일한 부대, 즉 제2포병에 배피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이처럼 중국의 고유한 이중성은 중국의 핵정책과 핵전략의 세 가지 기본요소를 복잡하게 한다. - 수량이 안정적인 소규모의 핵보유고는 대규모이고 점점 더 그 수량이 증가하고 있는 중거리 재래식 탄도미사일, 순항미사일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 핵무기의 선제 불사용은 공식적으로 선언된 정책이지만 재래식 미사일은 먼저 발사될 수 있는데, 이는 핵미사일을 보관하고 있으며 핵미사일이 발사될 때 활용되는 지휘명령 인프라와 동일한 인프라를 사용하는 기지에서 발사된다. - 중앙군사위원회만이 핵무기 사용을 승인할 수 있지만, 재래식 미사일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지휘 승인과 함께 전역 합동지휘부의 작전통제 하에 있다. 미사일 전력은 자기 방어 능력을 지니고 못하고 있다. 결국 미사일은 그 성격상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며 그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발사되어야만 한다. 미사일 전력은 더 강력하고 공격적인 적국과 대치할 때 항상 ‘사용할 것이냐, 파괴될 것이냐’라는 곤경에 직면한다. 또한 미사일 전력을 방어하기 위한 공중·미사일 방어 시스템도 적극적 방어라는 전략방침이 함축하는 전투 임무 와중에 파괴될 수 있다. 만약 중앙군사위원회가 재래식 미사일로 적국을 선제공격한다고 승인한다면 상대방은 그것이 재래식 미사일인지, 핵 미사일인지 즉각 구분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보면 상대국은 중국의 모든 지휘통제 체계와 미사일 발사 기지의 모든 미사일 관련 시설을 목표로 삼아 보복 공격을 할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중국의 재래식무기에 의한 자위 방어적 선제공격이 중국 핵미사일과 관련 지휘통제 체계에 대한 보복 파괴로 종결될 수도 있다. 이러한 재앙적 결과는 파괴되지 않고 생존했지만 여전히 공격에 취약한 중국의 핵미사일 부대가 남아 있는 미사일을 적국 본토로 발사하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다. 이처럼 충분히 예상 가능한 작용, 반작용 싸이클에서 핵전쟁으로의 상승이 가속화될 것이며,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중국이 이중 정책이 상호 핵공격을 억지하기보다는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군사계획가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추론을 펼치고 있다. 핵 기지에서 재래식 무기를 발사하는 것이 상대국의 직접적인 대응을 억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선제공격에 의한 피해가 재래식무기뿐만 아니라 핵무기를 보유한 중국 기지에 대한 보복이 낳을 결과에 대한 공포를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 전문가들이 보기에 재래식무기에 의한 반격이 중국의 핵 반격을 촉발할 수 있다는 공포가 공격을 당한 상대국의 대응을 억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과 그 잠재적 적국이 처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재래식 충돌이 벌어질 경우에 신속한 승리나 전술적 우위를 추구함으로써 예상치 못하게 핵전쟁으로 상승할 위험을 양측 모두 무릅쓰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이러한 딜레마는 매우 큰 위험이 아닐 수 없다. <끝>
새로운 전쟁 사령부의 탄생을 예고하는 한미안보협의회의 규탄한다! 한미 양국은 10월 24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44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를 열었다. 이 회의는 한미연합사 해체 후 이를 대체할 새로운 ‘동맹 지휘 기구’ 신설 논의를 비롯해 북한 도발을 빌미로 한 한미 양국의 호전적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양국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동안 악화일로로 치달았던 남북관계의 상을 재정립하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길을 함께 고민해야하는 지금, 한미 양국은 다시 한 번 대결과 갈등의 길로 성큼 나아가고 있다. 한미 양국의 국방장관은 회의 직후 공동성명을 발표해 북한의 국지도발에 대응한 대비계획을 발전시켰다고 밝혔다. 특히 천안함, 연평도 문제를 언급하며 한반도에서의 연합훈련 실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미 양국은 그동안 실질적 전쟁 수행이 가능한 작전계획 수립과 이를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군사훈련을 지속해왔다. 특히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태 이후 주변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한국의 동해와 서해에 진입하는 등 그 대응 수위를 높여왔다. 반전평화운동 진영은 이러한 한미 양국의 대응이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 민중의 평화적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음을 꾸준히 지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준비, 전쟁 연습만을 부르짖는 한미 양국의 호전 세력들은 대화와 타협, 외교적 해법은 등한시한 채 오로지 군사력 증강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번 공동성명은 한국의 서북도서 및 북방한계선(NLL) 문제와 관련 이 일대에서의 연합훈련을 지속할 것임을 확인하며, 북한이 NLL의 실질적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할 것을 주장했다. 군사 작전의 한계지점을 설정한 NLL을 마치 국경선인 양 일방적인 주장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정전협정 후 해상에서의 분계선이 지정되지 않으면서 서해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과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 충돌이 지속되고 있는 서북도서 일대의 바다는 꽃게잡이 등 남북한 어민들의 생계와 직결된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긴장과 충돌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방적인 주장이나 위협적인 군사훈련이 아니라 남북한 양국의 대화와 외교적 해법 모색이다. 또한 이번 회의에서는 전시작전통제권의 한국군 이양 이후를 대비해 새로운 지휘구조 연구를 진행하기로 합의해 논란이 일고 있다. 애초 한미 양국은 전작권이 이양되면 전작권을 보유하지 않는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전작권을 행사하는 한국의 합동참모본부를 미국의 한국사령부(KORCOM)가 지원하는 형태로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미 양국은 1개의 전구에 2개의 사령부가 존재하면 유사시 효율적인 대비를 하기 어렵다며,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분야별 협조기구 설립을 넘어 새로운 지휘 구조를 설립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는 이후에도 미국이 한국에서의 작전통제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는 점과, 호전적인 한미 군사동맹을 강화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더구나 이번 회의에서는 한국이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제에 적극적으로 조응해 들어가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공동성명 발표 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리언 파네타 미 국방장관은 “미래 미사일방어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모든 방어 능력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말해, 한미 양국이 MD 체제에 대해 긴밀히 협력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미국의 MD 체제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온 것이 거짓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미국의 MD 체제 추진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가 극렬 반발해왔고, 결국 이것이 이미 새로운 군사적 경쟁을 불러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부는 한국의 MD 추진이 이러한 갈등의 한복판에 발을 들이는 것이고, 민중의 평화적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임을 직시해야 한다. 남북한 민중의 평화적 생존과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가는 길에서 우리가 한미 양국의 호전 세력에게 기대할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을 이번 44차 한미안보협의회의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북한 도발을 빌미로 한 군사력 증강과 호전적 전쟁연습, 군사동맹의 강화, 그리고 주변국의 강력한 반발을 부르는 MD 참여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한층 고조시켜 민중의 삶을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 뿐이다. 한미 양국은 지금에라도 군사력 증강,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정책을 중단하고 진정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에 필요한 길이 무엇인지 민중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갈등과 충돌을 부르는 호전적 군사훈련 중단하라! 한반도 전쟁 위협 고조시키는 한미동맹 폐기하라! 2012.10.25. 사회진보연대
새로운 전쟁 사령부의 탄생을 예고하는 한미안보협의회의 규탄한다!
2012.10.25. 사회진보연대
미사일 지침 개정 규탄한다 한국 정부는 어제(10월 7일) 오후 새로운 ‘미사일 정책 선언’을 발표해 11년 만에 미사일 지침을 개정했다. 이번 지침의 개정으로 300킬로미터로 제한되었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800킬로미터로 크게 늘였다. 탄도중량의 경우 기존의 500킬로그램을 유지하기로 했지만, 사거리를 줄일 경우 탄도중량을 늘리는 방식(트레이드 오프)을 채택해 사거리를 300킬로미터로 할 경우 최대 4배인 2톤까지 늘릴 수 있도록 했다. 중부권 기준으로 북한 전역이 미사일 사거리에 포함된 것이며, 트레이드 오프 방식을 통해 미사일의 파괴력을 훨씬 더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정부는 이번 개정이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유사시 민첩하게 대응할 종합대책이라고 주장한다. 보수언론을 포함한 일부 호전세력들은 한술 더 떠 이번 지침 개정도 부족하다며, 이번 대선을 거치면서 아예 지침을 폐기해 미사일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북한 위협을 빌미로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해왔다. 특히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태 이후에는 남북간 평화와 화해의 노력은 사라지고 남북 관계는 오로지 강경 대결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국민들의 생명과 안정을 보호하고 전쟁을 억지해야 하는 정부의 의무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한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북한을 비롯한 주변국들을 자극해 한국의 안보를 강화하기보다는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든다. 언론을 포함한 호전 세력들은 이번 지침 개정이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한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임을 숨기지 않았다. 한국의 미사일 지침 개정이 발표되자마자 중국은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을 통해 우회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최근 도서 지역의 영토분쟁이 격화되는 등 복잡하게 얽힌 동북아 정세 속에서 한국의 군사력 증강이 다른 나라를 자극하고, 이것이 또 다른 군사력 경쟁의 도미노를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부는 이번 미사일 지침 개정이 한국형 MD 구축 과정일 뿐 미국의 MD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가 미국의 MD 참여를 협상카드로 미사일 사거리 연장을 요구해왔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며, 탄도미사일 방어를 위해서는 미국의 MD 시스템의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정부의 주장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하루가 다르게 격화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긴장과 대결 구도 속에서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사일 사거리 연장이 아니라 민중들의 평화적 생존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동북아시아 주변국들의 군사력 경쟁을 불러오고, 미국의 MD 체제에 깊숙이 참여하게 될 한국 정부의 시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2012년 10월 8일 사회진보연대
미사일 지침 개정 규탄한다
2012년 10월 8일 사회진보연대
반전평화연대에서 발간한 이슈페이퍼 '한국정부의 파병 상황과 문제점' 입니다. 레바논, 소말리아, UAE(아랍에미리트), 아이티, 아프가니스탄 파병의 현황과 문제점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목차> 평화유지군 5년, 동명부대가 레바논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가 | 김태경(2005파병철회단식동지회) 소말리아 파병의 현황과 문제점 | 수열(사회진보연대) UAE 원전수주 백지화하고, 위헌적 아크부대 철군하라! | 김환영(평화재향군인회) 국군 해외파병연장에 관한 이슈페이퍼 - 아이티 단비부대 | 최재훈(경계를넘어) 오쉬노부대, 아프가니스탄 파병의 진실 | 김어진(다함께)
침략과 점령을 끝내야한다 “이슬람에 대한 가장 악랄한 공격”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무슬림의 무지’라는 동영상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반이슬람 동영상으로 촉발된 이슬람의 반미시위가 계속 확산되고 있다.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시작된 이번 시위는 금새 예멘, 튀니지, 수단, 모로코, 팔레스타인, 이라크,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이란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미국 대사의 추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성난 시위대가 불을 지르고 캠프 피닉스 미군기지에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지난 9월 21일 파키스탄에서는 금요기도회를 마친 무슬림들이 파키스탄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실탄과 최루탄을 동원해 진압했고, 하루 동안 17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다쳤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반미 시위는 아시아권 이슬람 국가로까지 확산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도 자카르타를 포함해 여러 도시에서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또한 규탄 대상 역시 미국을 넘어 서방 세계 전체로 확산되는 조짐도 보인다. 반미에서 서방 세계 전체에 대한 분노로 한국의 한 언론은 반 이슬람 동영상으로 시작된 반미시위가 프랑스의 만평을 기화로 서방 세계 전체에 대한 규탄으로 비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프랑스의 한 주간지에서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실었는데, 이 사건으로 미국만이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세계 전체가 무슬림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보도였다. 들끓는 무슬림 여론을 프랑스가 자극해 전체 서방 세계로 피해가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이기도 했다. 이러한 우려에는 프랑스 주간지의 만평 사건이 없었다면 무슬림의 시위가 ‘반미’에 국한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이러한 인식은 이번 사태를 오로지 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모욕과 그에 대한 무슬림들의 분노라는 틀에 가두어버린다. 때문에 이번 사태 초기에 수단의 무슬림들이 영국과 독일 대사관을 습격한 일은 ‘격앙된 시위대의 우발적 폭력 사태’ 정도로 치부된다. 무슬림에 대한 혐오 이러한 보도는 뿌리 깊은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연결된다. ‘거룩한 예언자를 모욕한 이를 자신들이 직접 처벌할 것’이라며 주먹을 흔드는 시위대의 인터뷰 장면은 무슬림 혐오에 생생하게 색을 입힌다. 표현의 자유는 종교적 인물에도 예외가 아닌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무슬림들은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사람들로 그려진다. 문제가 된 만평을 게재한 프랑스 주간지의 편집장이 ‘종교는 하나의 철학,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에 무함마드도 칼 마르크스도 만화로 그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대목에서 서방 세계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독재자를 몰아내고 민주화를 이루는 것을 도왔던 미국의 영사관을 습격해 대사를 살해한 리비아 무슬림들에게 ‘은혜를 모르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침략과 점령에 대한 분노 그러나 이번 시위가 이렇게 단기간에 전체 이슬람 국가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10여 년간 지속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의 침략과 점령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인 <포린 폴리시 인 포커스>는 공화당과 민주당 정부 모두 독재자들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의 점령을 지원하면서 이라크 침략과 점령,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예멘에서 지속되는 군사 공격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지난 시간들이 없었다면 이러한 반미 시위들은 없었을 것이라 평가했다. 해외 언론이 예멘이나 다른 지역의 시위자들과 진행한 인터뷰를 보면 그들의 분노가 동영상 자체를 훌쩍 넘어 미국과 서방 세계로 향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테러리스트들의 배후 조종? 이러한 상황에서 리비아에서 발생한 미국 대사 살해 사건은 이번 시위의 의미를 폄하하고자 하는 세력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미국의 눈치를 보는 리비아 당국은 재빨리 이번 피습 사건은 성난 시위대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역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반미 시위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 테러리스트들의 개입으로 증폭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실제 리비아의 미국 영사관 피습은 이슬람 무장단체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공격으로 보인다. 이슬람 그룹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반미 시위를 호소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이 동영상이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작되었다거나, 미국 정부의 사전 심의를 거쳐 승인받은 영화라는 식의 거짓 주장을 퍼뜨린 정황도 포착된다. 그러나 시위가 시작된 리비아와 이집트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는 무슬림 형제단은 시위 초기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얼마 후 무슬림 형제단은 동영상에 대한 비난 성명을 발표했지만, 9월 14일에 평화로운 집회를 열겠다고 밝혔을 뿐이다. 다른 이슬람 종교 학자와 그룹들도 동영상을 비난했지만 평화로운 저항을 호소했다. 이번 사태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부각시키는 것은 기나긴 침략과 점령의 세월에 대한 무슬림들의 분노를 가리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미완의 민주주의?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초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반미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국가들 중 폭력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들에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작년 ‘아랍의 봄’을 타고 독재 정권을 무너뜨려 민주정부가 세워졌거나 그러한 과정에 있는 나라들이라는 것이다. 독재 정권 하에서 강력하게 유지되던 정부의 통제가 사라지고, 아직 그러한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들이나 극단주의 세력들의 폭력 행위를 막을 수 없다는 분석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자칫 서방의 군사 개입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국제 사회는 그동안 한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보장할 수 없을 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타국의 개입은 주권에 우선한다는 이른 바 ‘보호책임’ 개념을 계발해 왔다.(이에 대한 신념은 작년 리비아 사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성공적인’ 개입을 계기로 한층 강화되었다.) 민주화 과정에 있는 나라들이 치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들이나 극단주의 세력들이 폭력을 조장한다는 인식은 결국 평화를 위해서 외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논리가 그동안 유엔의 평화유지군이나 미국의 점령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활용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경계해야 한다. 침략과 점령을 중단하라 반미시위의 급속한 확산은 그동안 지속된 침략과 전쟁에 대한 무슬림의 뿌리 깊은 분노를 보여준다. 따라서 이번 사건이 미국이나 서방 세계의 또 다른 개입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의 개입이 세계를 얼마나 불안정하게 만들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세계화의 보호를 사활적인 이익으로 정의한 미국의 군사교리는, 세계화가 내세우는 담론과는 반대로 세계에 평화가 아닌 폭력과 파괴, 점령과 전쟁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한국은 그동안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조응해 적극적으로 파병을 하면서 불안한 중동 정세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다. 무슬림의 분노가 단지 동영상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언제든지 미국의 패권 정책을 충실히 수행해 온 한국으로 향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에서 별다른 의문 없이 지속되고 있는 해외 파병을 중단하고, 중동에 대한 침략과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한 반전평화운동의 또 다른 한걸음을 준비해야 할 때다. [%=박스1%]
[2012년 9월 18일 레디앙 칼럼] 기후변화와 시리아 봉기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반전팀 필자의 지난 기사 <시리아 저항운동의 고민과 갈래들>(2012.8.29. http://www.redian.org/archive/32189)은 시리아 봉기를 이끈 다종다양한 세력들의 조직구성과 성격, 현재 저항운동이 봉착한 난관과 활로를 찾기 위한 모색이 어떠한지 살펴보았다. 필자는 시리아 정권이 여전히 상대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지닌 지지집단과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민중봉기가 발생한 근본 원인이 지속되는 한 시리아 사회가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리아에서 대중적 저항을 촉발시킨 결정적 매개는 최근 더욱 악화된 경제상황이다. 1990년대에 본격화된 경제 자유화 조치로 시리아 경제에서 사적 부문이 공공 부문을 능가하기 시작했지만 사적 부문의 가장 부유한 인사는 국가 관리, 정치가 또는 그들의 가족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시리아는 과거 지향한 아랍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에서 아주 탁월한 족벌 자본주의로 변모했다. 1990년대 경제성장은 소비 증가에 따른 단기 효과에 불과했고 2000년대 이후 슬럼프에 빠졌다. 5-7%의 성장률은 1997년 이후로 1-2%에 머물렀다. 그 결과, 시리아 봉기 전 빈곤선 이하 인구의 비중이 급상승했다. 그 비중은 2000년 11%에서 2010년 33%로 올라갔다. 이는 700만 명 이상이 빈곤선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업률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20~25% 수준에 이른다. 특히 25세 이하의 실업률은 55%에 이른다. (30세 이하 인구 비중은 55%다.) 물가상승과 생계비 부족, 높은 실업률, 정부보조금 감소 등 시리아 민중이 경험한 경제현실은 아랍의 봉기가 발생한 다른 지역, 국가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시리아 경제를 더욱 악화시킨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은 2000년대 후반에 발생한 이례적 가뭄이다. 그 가뭄은 강도와 지속성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2009년까지 약 백만 명 이상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시리아의 사회적, 지역적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다. 다마스쿠스, 알레포와 같은 대도시가 이주민을 흡수했으나 인프라 투자는 매우 부족했다. 지방도시들, 예를 들어 다라아, 이들리브, 홈스, 하마와 같은 도시와 그 배후 지역은 이제 반란의 주요 전투지역이 되었다. 농촌 지역은 정부의 보조금 축소, 투자 부족, 도시화의 영향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파괴되었고 수십 년에 걸친 권위주의와 부정부패로 인해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고 믿는다. 최근 <핵과학자회보>에는 기후변화라는 맥락에서 시리아 봉기를 검토하는 기사가 실렸다. (원문 참조: http://www.thebulletin.org/web-edition/features/climate-change-and-the-syrian-uprising) 기사에 따르면 시리아 정권이 식량자급과 농산물 수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단기적 농업정책에 집중한 결과, 시리아 자연조건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농업 시스템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 이처럼 취약하고 불균형적인 농업 시스템은 2000년대 후반에 발생한 이례적 가뭄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농촌에서 쫓겨난 백만 명 이상의 이주민은 시리아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기사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시리아에서 발생한 가뭄이 기후변화에 의해 야기된 측면이 크다면 그 사실이 함의하는 바는 매우 엄중하다. 자연적으로 정상 기후로 돌아오리라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리아 농업을 재건하려면 장기적이고 심층적인 계획을 동반하는 사회경제 시스템의 전면 재편이 불가피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시리아 사회의 민주화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듯하다. 아래에서는 앞서 언급한 기사를 간추려 소개한다. * * * 시리아 봉기에 기여했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요인 중에서 시리아에 엄청난 충격을 준 하나의 요인이 종종 간과된다. 시리아의 기후변화는 국가의 안정성과 수명에 복잡, 미묘하지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림] 시리아의 가뭄은 200~300만 인구를 ‘극단적 빈곤’ 상태에 처하게 했다. 시리아 국토는 약 12,000년 전 인류가 최초로 농경과 목축을 실험한 곳으로 여겨진다. 현재 세계은행은 그 지역이 기후변화의 두려운 영향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연간 강수량이 감소하여 영구적으로 더 건조해지고 가뭄의 발생빈도와 심각성이 더 커지리라 예상한다. 1900년부터 2005년까지 시리아에서는 여섯 번의 심각한 가뭄이 발생했다. 이러한 건기 동안에 월간 평균 겨울 강수량은 정상시의 3분의 1이었다. 여섯 번 가뭄 중 한 번을 제외한 나머지는 단지 한 계절 동안만 지속되었다. 다른 한 번은 두 계절 지속되었다. 따라서 농촌은 정부 보조금과 2차 수자원에 의지하여 건기를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최근에 발생한 일곱 번의 가뭄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계절 동안 지속되었다. 이는 지난 세기에 비추어 진정으로 이례적 현상이었다. 나아가 사계절 동안의 평균 강수량은 지난 세기의 어떤 가뭄 기간에 비해도 훨씬 더 적었다. 가뭄의 한 사례를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의 직접적 결과로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의 2011년 보고서는 시리아 가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02년부터 2010년 사이의 건조도 증가의 원인 중 온실가스로 인한 기후변화는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핵심 연구자였던 마틴 호어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발생했던 건조 상태의 규모와 빈번성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자연적 가변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이미 물 부족을 경험한 지역에는 희망의 소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적 가변성만으로 그 지역의 기후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은 지구온난화가 다가올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의 가뭄을 더욱 심각하게 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림]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의 2011년 보고서는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는 지중해 지역에 빈번히 발생하는 가뭄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적색과 주황색은 1902년-2010년 기간과 비교하여 1971년-2010년의 겨울 가뭄이 심각했던 지중해 지역을 표시한다. 시리아는 가장 붉은 색으로 나타났다. 시리아의 가뭄은 150만 명을 넘는 주민의 이주를 야기한 것으로 추산된다. 농업 노동자와 소규모 농민의 모든 가족이 북동부의 곡창지대에서 남부의 도시 주변부로 이주했다. 가뭄은 불균형한 농업 시스템을 무너뜨렸다. 시리아의 농업 시스템은 이미 농업 정책의 오류와 환경적인 지속 불가능성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아가 긴급사태를 대비한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가뭄이 낳은 결과에 무능했다. 수십 년간 지속된 농업정책의 빈곤이 이제는 알아사드 정권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있다. 지속 불가능한 역사 현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피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수십 년간 시리아를 지배했다. 하피즈는 그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농촌 지역 대중의 지지에 의지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농업 부문은 시리아 경제의 가장 중요한 중심축 중 하나였다. 하피즈는 시리아 국민에게 안정적인 식량공급을 보장했고 식량, 석유, 물의 가격을 내리기 위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정권은 식량자급을 강조했고, 1980년대에 밀 자급을 최초로 달성했다. 목화는 관개농업이 필요한 물 집약적 작물인데, 정권은 ‘전략 작물’로 선정하여 목화 재배를 강력히 장려했다. 그래서 한때는 목화가 석유 다음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수출품이 되었다. 농업 생산은 팽창했지만 그것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프란치스코 페미아와 케이틀린 웨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아사드 정권은 정책의 오류를 저질렀고 시리아의 자연자원을 무시했다. 이는 물 부족과 토지 사막화를 야기했다.” 현재 발생한 가뭄 전 20년 동안 정권은 관개 시스템에 큰 액수를 투자했지만 여전히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고 극단적으로 비효율적이었다. 관개 시스템의 다수는 지하수를 주요 원천으로 활용했는데 강물의 양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2005년부터 정부는 농업용 우물에 대해 허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시리아 정부가 쿠르드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북동부 지역을 저개발 상태로 방치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부 농민의 허가 요구를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어떤 이유든 간에, 일반적으로 우물 허가를 받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 결과 시리아의 농업용 우물 중 절반 이상은 불법이었고 따라서 규제를 받지 않았다. 가뭄이 발생하기 직전 수년 동안 지하수는 급속히 고갈되었다. 경고에 대한 무시 2001년 세계은행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단기적으로 밀과 다른 곡물의 안정적 공급을 성취하고 물 집약적 목화 재배를 장려하려는 시도는 활용가능한 지하수 자원의 고갈로 인해 장기적으로 시리아의 안전을 잠식할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시리아 정부가 인식해야 한다.” 정부가 에너지와 물에 대해 상당액의 보조금을 제공함에 따라 농민은 지속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기보다는 생산량 증가에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2005년 밀 가격이 급등하자 지나치게 자만했던 시리아 정부는 긴급사태에 대비한 밀 보유고의 상당량을 판매했다. 2008년 가뭄으로 인해 시리아 정부는 자급정책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20년 만에 처음으로 밀을 수입해야 했다. 또한 보리 수확이 90% 감소하자 가축 사료 가격이 가뭄 첫 해 동안에만 두 배로 올랐다. 북동부의 소규모 목축업자는 가축의 70% 이상을 잃었고, 다수는 그 지역을 떠나야만 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가뭄으로 인해 시리아 가축의 4분이 1이 사라졌다.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라는 아사드의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가뭄의 심각한 영향을 입은 인구의 80%는 빵과 설탕을 넣은 차로만 연명하고 있다. 거의 사막화된 북동부 농촌 지역의 주민은 급등한 식품 가격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가뭄이 강타한 지역의 주민 중 80%는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다. 2003년 농업 부문은 시리아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차지했으나 가뭄에 돌입한 2008년에는 17%로 감소했다. 유엔 재난위험경감 사무국에 따르면 시리아 정부의 가뭄 대책은 수동적이었고, 시의적절하지 못했으며, 목표 설정과 조정과정이 매우 부적절했다. 카오스 가뭄이 시작된 후 대부분 농촌 이주민으로 구성된 임시 거주지가 다마스쿠스, 하마, 홈스, 알레포, 다라아 주변에 형성되었다. 이중 다라아는 2011년 3월, 시리아 봉기에 결정적 계기가 된 첫 번째 대규모 시위가 발생한 지역이다. 이미 주변국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서 거의 200만 명이 난민이 시리아로 건너온 상황도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주었는데, 시리아 내부에서 대규모 이주가 발생하자 그 부담은 더욱 커졌다. 아랍연구소가 발행하는 디지털 매거진 자달리야의 필자 수전 샐리비는 이렇게 말했다. “정권은 가뭄의 영향을 경감하기 위한 경제적 조치를 취하는 데 실패했다. 그것은 이렇게 거대한 대중시위를 야기한 결정적 추동력이 되었다. 최근 몇 달 동안 시리아 도시들은 쫓겨난 농촌 이주민들과 권리를 박탈당한 도시 주민들의 불만이 모이고 정치권력의 성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공간이 되었다.” 시리아 정권의 경제자유화 정책은 소득 격차와 지리적 불균형을 확대했으며, 그것이 야기한 여러 요인들은 시리아 정권이 가정한 안정성을 산산이 깨뜨렸다. 가뭄과 대규모 이주는 시리아 반란을 추동한 가장 주요한 원인이 아닐지 모르지만, 대중의 불만을 촉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리아의 가뭄은 이례적인 기후변화가 대규모 이주를 낳고 그것이 국가의 불안정성을 야기한 최초의 현대적 사례일 것이다. 이는 이미 문화적 양극성,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공평성이라는 긴장에 처해 있는 지역에서 기후변화가 매우 중대한 촉매제가 될 것이라는 교훈이자 경고다. <끝>
미국의 군사적 보복 움직임을 경계한다 이슬람을 모욕한 동영상이 미국 전역에 유포되자 이슬람권 전역으로 반미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 주 금요일 ‘분노의 금요일’에 절정에 이르며 중동 지역의 시위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분노한 리비아 시위대에 의한 미 대사의 죽음으로 미국은 해병대를 급파하고 순항 미사일을 탑재한 미 해군함을 리비아 인근 해상에 배치했다. 미국은 예멘에도 미 해병대를 급파했다. 며칠만에 20개국으로 확산된 무슬림의 시위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다. 무슬림 모욕 동영상은 결코 우연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 동안 서방 강대국은 이슬람 혐오증은 여러 방식으로 부추겨 왔다. 중동 지역 지배를 위한 자신의 군사적·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슬람이 호전적이고 테러 지향적이며 여성억압적인 경향이 있는 종교라는 편견을 조장해 왔다. 올해 초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코란을 소각한 사건은 그 결과의 일부일 뿐이다. 이슬람에서 무함마드 사진이나 영상은 종교적 금기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모욕 동영상은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에 무슬림이 가장 모욕적으로 여기는 모든 극단적 표현을 집중시켰다.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를 비하하는 영상을 본 수많은 무슬림들이 격하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반미 시위는 이집트와 리비아에 이어 튀니지·모로코·수단·팔레스타인·예멘·이란 등 인근 중동 국가들뿐 아니라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들로까지 반미시위가 번지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도 13일 1000여 명 시위대가 시위를 벌였다. 서방의 이슬람 혐오증에 대한 격렬한 반감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침공과 점령을 해 온 미국과 나토에 대한 깊은 적대감과도 관련있다. 그 동안 미국은 9ㆍ11에 대한 대응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고 전쟁과 점령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매일 4백 명이 난민이 되고 있고 이라크에서는 1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리비아로 치자면 미국과 나토의 전투기 폭격으로 수많은 리비아 국민들이 죽었다. 따라서 미국이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석유과 패권을 위해 아랍 민중을 멸시해 온 자들이야말로 이번 사태를 일으킨 핵심 원인이다. 반전평화연대는 혹시라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이 중동에서 자신들의 힘을 다시 강화하려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전 세계의 반전운동 세력들과 함께 이에 대한 강력한 규탄 행동을 조직할 것이다. 2012년 9월 14일 반전평화연대
미국의 군사적 보복 움직임을 경계한다
2012년 9월 14일 반전평화연대
2박 3일간의 반핵대회 참가기 7월 16일, 도쿄 요요기공원에서 ‘안녕 핵발전소 10만 집회’ 가 열렸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 사고를 일으키고 이로 인해 핵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대중적인 반핵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2011년 4월 도쿄에서 1만 5천 규모의 집회가 처음 열린 이후, 몇 만 단위의 집회가 2-3개월마다 한 번씩 열렸다. 이번 집회는 2011년 9월 도쿄에서 6만 명이 모인이래,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일본정부가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오이 핵발전소를 가동시킨 지 약 보름, 전력수급량이 급증하는 한여름을 목전에 둔 7월 14일, 이틀 뒤에 열릴 집회참가를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탈핵텐트 도쿄는 이제 막 무더위가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가스미가세키 역에 내려 햇빛이 내리쬐는 빌딩 숲을 걸었다. 도쿄의 가스미가세키는 대부분의 일본 중앙행정기관과 대기업들의 본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일본 행정의 중심지이다. 일본인들이 관료들을 비꼴 때 ‘가스미가세키 문학’이라는 말을 쓰는데, 자기들끼리 일반인들이 못 알아들을 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그 가스미가세키 한가운데,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는 경제산업성 앞이자, 도쿄전력 본사와 총리관저를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탈핵텐트가 있다. 지난해 9월 11일 경제산업성 인간띠잇기 집회 후 첫 번째 텐트가 세워지면서, 300일이 넘는 농성이 시작되었다. 작년 10월 25일과 28일에 텐트가 연이어 세워진 후 총 3개의 농성텐트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두 번째 텐트가 세워질 때 ‘핵발전소 필요없다! 후쿠시마의 여성들’이 2박 3일간의 투쟁을 한 뒤 농성에 결합하기 시작했고, ‘핵발전소 필요없다! 전국의 여성들’이 그 뒤를 이었다. 세워진 순서대로 제1~제3텐트라고 불리는데, 제1텐트는 접수처 역할을 하는 메인텐트이고, 제2텐트는 여성들이 주로 지킨다고 한다. 접수처에 가서 방명록을 적고 나니, 후쿠시마 여성들이 와 있으니 제2텐트로 가보라고 한다. 4명의 여성들이 텐트를 지키고 있다. 평일에는 도쿄에 있는 여성들이 당번을 정해 지키고, 주말에는 후쿠시마에서 사람들이 와서 함께 지킨다고 한다. 텐트 안에는 지금까지 나온 유인물이 정리되어 있고, 세계 곳곳에서 전해온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텐트는 경제산업성의 요청으로 철거위기에 내몰리기도 하고, 핵발전소를 찬성하는 우익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반핵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일본의 레이버넷에는 거의 매일 텐트일지가 업데이트된다. 후쿠시마 여성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첫 번째 텐트 뒤쪽에 붙어 있는 ‘어머니와 아이들을 지켜주세요’라는 슬로건과 ‘미래를 잉태한 여성들의 열 달 열흘의 텐트’ 라는 이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여성들은 농성투쟁의 상징이고, 실제로도 텐트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흐름을 이어서 지난해 12월 1일에 시작된 것이 ‘미래를 잉태한 여성들의 열 달 열흘의 텐트행동’ 이다. 텐트에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나오는 길에 보니 정말 이런 이름이 제2텐트에 붙어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4명의 여성들은 나이도 사는 지역도 달랐는데, 이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되니 금새 토론이 활발해졌다. 주로 이러한 구호들이 여성들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것 같고, 어머니 역할을 너무나 강조하여 불편하다는 이야기였다. 실제 방사성 물질의 위험성을 이야기할 때, 가임기 여성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또한 ‘기형아’에 대한 공포도 심어준다. 그러나 여성들은 ‘미래의 어머니’ 정체성만으로 투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를 지켜주세요’ ‘미래를 잉태한 열 달 열흘’과 같은 구호는 그녀들의 투쟁을 축소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본 여성 활동가들의 토론에 운 좋게 동석하게 된 내가 이런 이야기를 이전에도 했었냐고 묻자, 놀랍게도 오늘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단다. 뭔가 불편하긴 한데, 과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눈치 보며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다가 우연히 토론이 시작된 것이었다. 토론은 서로의 의견이 대략 일치함을 확인하고, 반핵운동의 구호에서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다른 천막농성자들과 이야기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누구는 30년 넘게 반핵운동을 하고, 누구는 이번 사고를 계기로 반핵운동에 나섰고, 누구는 후쿠시마에 살고, 또 누구는 도쿄에 사는데, 텐트농성을 진행하면서 이 자리가 이들의 토론의 장이 되고 서로를 교육하는 장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운동이 축소 재생산되었던 일본에서, 누군가와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일본에서 이러한 경험은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본 활동가들과의 교류회 14일과 15일 저녁에는 교류회에 참석하였다. 첫 번째 교류회는 일본 노동운동활동가평의회에 속한 활동가들과의 소규모 간담회였고, 둘째날은 ‘반핵발전신문’에서 주최하는 전국교류집회였다. 노동운동활동가평의회는 일본의 노동조합이 분열할 때, 중핵파와 혁마루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소수노조들의 연합 중 하나이다. 노동운동활동가평의회는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 준비회에 함께하고 있는데, 교류회를 통해 핵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을 수 있었다. 최근 방사선량이 약간 낮아지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크게 낮아졌다는 사실, 핵발전소 노동자로 취직하여 조직화에 나선 활동가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고, ‘피폭노동을 생각하는 네트워크’가 핵발전소 노동자들에게 배포하고 있는 피폭노동을 방지하기 위한 매뉴얼도 받을 수 있었다. 이외에 소위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는 총리관저 앞 금요집회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오이 핵발전소의 재가동이 목전에 다가온 6월부터 집회 참가자가 몇 만 단위로 급증하자 활동가들도 크게 놀랐는데, 들어보면 집회 분위기가 마치 2008년 한국의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했다. 활동가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자발적 참가자들의 역동성도 그렇지만, 예를 들어 조직의 깃발을 내리라는 요구가 튀어나오고, 핵발전소 재가동 저지 외의 주제로는 발언을 금지하는 등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무정형의 집회가 대중의 창발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방식이자, 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이라는 주장과 이를 둘러싼 쟁점은 2008년 한국의 촛불집회나 2011년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운동에서도 제기되었는데, 아무래도 21세기의 운동은 이 쟁점을 결코 우회할 수 없을 듯하다. 15일의 전국교류집회는 150여 명의 전국의 반핵활동가들이 참가한 자리였다. 케이오 대학의 카네코 마사루 교수의 짧은 강연 후, 전국의 반핵활동가들이 각 지역의 활동내용을 보고했다. 후쿠시마에서는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피난생활과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노인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고농도 오염 지역이 늘어나고 있는 등의 피해를 보고했다. 그리고 사고 직후 방사성 물질의 누출이 가장 심각했던 날의 행동기록을 남겨 피해를 확실히 기록하자는 운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핵발전소 노동자들이 큰 위험에 노출됨에도 임금이 낮아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핵발전소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 전망했다. 후쿠시마 외의 각 지역에서도 자기 지역의 핵발전소 가동을 멈추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활동을 보고했다. 주로 서명운동, 현지사 선거 대응, 핵발전소 피해에 대한 재판 등의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운동에 대해서는 총리관저 앞에서 열리는 집회와 같은 직접행동을 강화해야 하며, 전국적인 운동과 지역적인 운동이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 각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왔다. 안녕 핵발전소 10만 집회 7월 16일, ‘안녕 핵발전소 10만 집회’의 날이 밝았다. 집회 장소까지 인솔해주신 분이 집회 실무도 담당하고 있다보니 집회시작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대규모 집회인 만큼, 미리 모여서 할 일을 나누는 스텝들 만해도 200여 명은 되어 보인다. 스텝들 중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더운 여름날 체력이 될까 싶을 정도로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젊은 활동가로서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무대는 총 4개로, 각각 시작시간과 끝나는 시간, 프로그램의 성격이 다르다. 내가 발언한 곳은 제4스테이지, 가장 작은 방송차이다. 집회 장소로 향하는 사람들을 안내하며,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곳이다. 오랫동안 핵발전소와 핵무기 반대 활동을 해왔던 단체와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의 활동가 발언이 이어졌다. 제1스테이지는 메인무대로, 조직적으로 참가하지 않은 일반시민들을 비롯하여 시민단체, NGO들이 자리잡았다. 사카모토 류이치나 오에 겐자부로와 같은 유명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발언은 모두 이곳에 배치되었다. 제2스테이지는 렌고가 속한 평화포럼과 전노협 등 조직 노동자들, 제3스테이지는 여타 단체와 시민들의 무대로 라이브공연과 발언이 번갈아 진행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인상에 남았던 장면 중 하나는 집회장에 흩날리는 일장기였다. 대중운동에 민족주의적인 감정이 빠지기 어렵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상징인 일장기가 오랫동안 천황제에 맞서고, 일본의 역사를 반성하는 활동가들이 쏟아져 나온 집회에서 자랑스럽게 흩날리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다. 넘어야 할 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또 하나는, 활동가들의 발언이 주로 작은 무대에 배치되어, 큰 무대에서는 오히려 오랫동안 반핵운동을 해왔던 여러 활동가들의 의견을 듣기 어렵게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의 반핵운동에 참가하는 대중들이 핵발전소 문제와 핵무장 문제를 연관 짓지 못하는 것은 일본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문제로 지적되기도 하는데, 집회를 주최하는 측이 이런 부분을 돌파하는데 있어 매우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만 명이 참가한 집회는,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열기를 느끼게 했다. 발언은 힘이 넘치고 절절하고, 공연은 능숙하든 서툴든 진심이 담겨있다. 젊은 사람들도 많고 나이든 사람들도 많다. 각 조직들은 곳곳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일본 경찰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도로점거를 막기 위해 집회를 방해한다. 메인 무대의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이미 행진을 시작하기 위한 대열이 만들어졌다. 도저히 혼자서는 집회 전체 모습을 다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만큼 역동성이 느껴진다. 경찰의 지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인도로 가는 착한 시민들, 그 와중에 경찰과 싸워 1차선을 확보하는 어떤 활동가를 지켜보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향했다. 무수한 갈림길에서 오랜 기간 반핵운동을 해왔던 일본의 활동가들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을 경험하며 흥분과 걱정을 동시에 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이들이 반핵운동의 과제 전반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 세대 간의 문화적 차이로 인한 당혹스러움 등 여러 감정이 섞여 있다. 물론 가장 큰 감정은 기쁨과 희망이긴 하지만 말이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미 제기되고 있는 몇 가지 쟁점이 보인다. 집회에서 본 일장기는 많은 것을 상징할 것이다. 이미 3월에 있었던 1주기 집회 때도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집회주관자들은 추모와 부흥, 반핵운동이 함께 가야 한다며, 집회기조를 설정했다. 하지만 동일본대지진과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자에 대한 추모는, 천황과 정부도 다 하고 있는 일이다. 집회기조가 추모와 부흥을 외치는 천황에 대한 비판 없이 세워졌다는 비판이 오랫동안 활동해 온 후쿠시마 현지의 반핵활동가들을 통해 제기되면서 집회 기조는 수정될 수 있었다고 한다. 소위 조직된 집회와 인터넷을 통해 모인 대중 집회에 대한 태도도 쟁점 중 하나이다. 실은 각각의 집회에 참가하는 대중들이 완전히 이분화된 것은 아님에도, 두 집회를 대립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어떤 이들은 대중 집회에서 조직의 깃발을 들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반면 10만 집회를 조직한 주최 측은 총리관저 앞의 집회에 대해 과소평가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두 집회 모두 참여하고 있는 여러 활동가들은 어느 한 쪽이 좋고 나쁘다고 평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두 집회가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핵발전소에서 피폭당하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반핵운동이 어떻게 함께 쟁취해 나갈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지금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핵발전소 사고에 의한 피폭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집회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피폭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핵발전소 하청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핵발전소가 가동중지 상태가 되더라도,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지 않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핵발전소에서 피폭을 무릅쓰고 일해야 한다. 이런 문제에 대해 현재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을까? 섣불리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일본의 한 활동가가 제기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수습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가능하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물론 당신들은 파업할 권리가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수습작업을 멈추면 당장 방사성 물질이 일본 전역으로 퍼질 것이라는 공포는 반핵운동의 커다란 동력이지만, 핵발전소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을 가로막는 주요 논리가 될 수 있다. 물론 핵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어려워, 이런 쟁점이 당장 불거지지는 않을 수 있다. 폭발적인 대중운동은 수많은 쟁점을 제기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하고 돌파하느냐에 따라 운동의 방향이 갈린다. 30년이 넘게 끈질기게 운동을 지속해 온 60-70년대 학생운동 세대 활동가들에게 이는 희망이자 또한 두려움이기도 할 것이다. 무수한 갈림길에서, 일본의 반핵운동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이 질문을 던질 때 나에게 지금도 떠오르는 장면은, 무더운 여름날 집회 곳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유인물을 차곡차곡 모으던 허리 굽은 한 할아버지 활동가와, 바깥보다 훨씬 더워 땀을 뻘뻘 흘려야 했던 텐트 안에서 60대와 30대 여성이 세대를 넘어 토론하는 모습이다. 일본 본토가 방사성 물질로 오염된 초유의 재앙을 맞닥뜨린 후 사람들은 겨우 만나기 시작했고, 토론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전세대의 신심과 현재의 창발성 모두를 힘으로 갖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바란다. 이들과 토론하며 동아시아의 반핵평화 운동을 건설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