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외교는 가능한가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한미정상회담은 한·미·일 간의 안보와 경제협력을 활성화하려는 구상 아래서 추진되었다.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가 국제질서를 위협하고 있으며, 중국, 러시아가 미국과 대립하는 구도가 체제유지에 유리하다고 여기는 북한이 중·러와 밀착하는 것을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 고도화되면서 한국 내 불안이 커지자, 핵무장 여론이 부상하는 것에 대응이 필요했다. 그래서 국내 반발을 무릅쓰고 일본과의 관계복원 의지를 밝히고, 북·중·러의 항의를 감수하며 한일·한미 정상회담을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과 확실한 선을 그은 것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을 계승한 민주당은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윤석열 정부가 미·일에 치우쳐 북·중·러와의 관계가 나빠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도 실패했고, 균형외교라는 명분 아래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행보를 묵인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무엇보다 실패한 정책을 어떻게 다시 적용할 수 있는지 답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상당수 사회운동은 민주당의 외교노선을 지지하면서 정상회담을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반미진영론을 근거로 하며, 북·중·러가 국제질서를 흔들고 전쟁위기를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상당수 사회운동의 이와 같은 국제정세 인식은 국제연대를 통한 반핵평화운동의 건설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문제다. 적극적인 토론으로 사회운동의 국제정세 인식을 쇄신하는 것이 시급한 이유다. (이 글은 《사회운동포커스》 「한일정상회담에 대한 민주당의 비판은 타당한가?」와 「시대착오적 민주당의 한미정상회담 평가 비판」을 합쳐서 보강했다.)1. 민주당의 한일정상회담 비판의 문제점
3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은 한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해제했고, 이에 상응하여 한국 정부도 일본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했다. 중단되었던 셔틀외교도 재개하기로 했으며,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 정상화와 경제안보 협의체를 출범하고, ‘한일 미래 파트너십 기금’을 설립하기로 했다.
5월 한일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를 복원했으며,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한국 전문가의 현장 시찰단 파견에 합의했다. 또한, 기시다 총리는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개인적 애도를 표명했다. 그리고 G7 정상회의에서 윤 대통령과 함께 히로시마 원자폭탄 한국인 피해자 위령비를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한일정상회담에 비판적인데, 정작 문재인 정부 시기는 한일관계가 악화했으므로 비판의 정당성이 상당히 약하다. 그나마 그들의 비판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한일관계 개선의 방법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한일정상회담에 대한 거친 말만 난무할 뿐 책임 있는 대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재명 대표는 일본과의 셔틀외교 재개를 “빵셔틀”이라 깎아내리고, 장경태 최고위원은 윤 대통령의 방일을 “나라 팔아먹으러 간다”고 격하했으며, 고민정 최고위원도 “친일대통령”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2019년 조국 민정수석의 ‘죽창가’선동에 이어 반일선동을 반복했다.민주당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 비판은 타당한가?
제3자 변제안에 반대하며 민주당 의원들은 ‘윤석열 정부의 굴욕적·반역사적 강제동원 해법 철회 및 일본 정부와 기업의 사죄와 배상 촉구 결의안’(3/10)을 발의했다. 반대 근거로 첫째, 제3자 변제안이 2018년 대법원판결에 배치되며, 삼권분립에 대항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사법부의 판결을 행정부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주장인데 사실에 부합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공익과 관련된 재판인 경우,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도 제출을 요청할 수 있다. 미국도 외교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연방대법원이 국무부의 의견을 듣는 ‘법정 조언자’ 제도가 존재한다. 영국도 외교 문제나 국제법과 관련된 재판을 맡는 경우 외교부에 확인서를 보내 입장을 요청하는 것이 관행이다. 그리고 고도로 정치적인 사안일수록 국민의 정치적 대표자가 판단을 내리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한다. 외교적 사안마저 사법부의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은, ‘정치의 사법화’의 극단적 형태이며 실제로는 정치의 소멸이다.
둘째로 윤 정부의 해법이 일본의 ‘합법적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2018년 대법원판결은 청구권협정으로 불법적 식민지배 피해가 보상된 것이 아니므로 피해구제가 가능하다는 취지인데, 이러한 법원 판결을 수용하지 않아서라는 이유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대법원판결대로 일본 피고 기업의 압류 자산을 현금화하는 것 이외의 모든 외교적 해법은 ‘합법적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압류 자산 현금화로 일본과의 단교를 불사하는 것을 강제동원의 해법이라고 여기는지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동시에 문재인 정부도 한국기업과 일본기업이 공동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소위 ‘1+1안’을 제안했는데, 문재인 대통령도 ‘합법적 식민지배’를 인정했다는 것인지도 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아서 문제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승소를 확정한 피해자 15명(생존자 3명 포함) 중 10명은 일본의 피고 기업 대신 재단으로부터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받는 방안을 수용했고, 최근에는 생존자 한 명도 기존 생각을 바꿔 판결금을 수용하겠다고 했다. 정부의 해법을 수용한 피해자의 뜻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해법제시 없이 반일 여론몰이에 몰두하는 민주당
민주당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반일 정서에 의존하여 정략적 이해를 추구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특히 민주당이 일본 언론 보도로 촉발된 독도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쟁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모습은 문재인 정부 시기 반일선동과 흡사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대법원판결 이후 일본기업의 자산 현물화 시기가 도래하여 일본이 수출제한 조치를 결정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외교적으로 무능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강제동원 배상판결에 외교적으로 개입하면 지지율이 하락할까 우려해서 외면하다가 파국을 초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정치적 호기’로 간주한 정황이 포착되었다는 점이다. 2019년 한일 갈등이 고조되던 시점에 “일본에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이 내년 총선에 유리할 것”이라는 민주연구원 보고서를 민주당 의원 전원에게 배포했는데, 강력한 반일 메시지를 토해내라고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조국 민정수석의 ‘죽창가’선동을 필두로 민주당 의원과 지지자들은 반일선동에 앞장섰다.
이처럼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외교적 무능으로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초래했으나, 수습보다는 정치적 이해를 좇아 반일민족주의를 선동했다. 오늘날에도 민주당에서 반성과 책임감 있는 대응을 찾아보기 어렵다. 윤 정부가 제시한 해법이 문제라고 여긴다면 대안을 제시하고 진지한 논의에 임해야 하지만, 한층 과격해진 반일민족주의 선동만 난무했다.2. 민주당의 한미정상회담 비판의 문제점
워싱턴선언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강화한 것으로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 특히 북핵 위협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반응적 조치라는 측면을 외면한 채로 평가할 수 없다. 북한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자, 미국이 북한의 핵공격 위험을 무릅쓰고 핵우산을 발동할지 불확실해지면서 한국의 자체핵무장 여론이 확산했다. 이처럼 북핵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자 워싱턴선언에서 미국의 핵보복을 명문화하여 핵무장 및 전술핵 배치 여론을 진정시키고, 한국의 핵무기비확산조약(NPT) 체제준수를 재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국제정세 변화의 맥락을 무시한 채 한미정상회담을 혹평했다. 이재명 대표는 “아낌없이 퍼주는 글로벌 호갱 외교”라고 깎아내렸다. 또한 무력에 의한 현상변경 반대는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책무임에도,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이 러시아 침공과 대만문제를 언급해 중국·러시아와의 관계가 얼어붙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워싱턴선언이 나토식 핵공유에 미치지 못해 성과가 없고, 자체핵무장의 길을 닫아서 문제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확장억제 강화가 한반도 핵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는 모순적인 주장을 했다.우크라이나와 대만 침공 반대가 국익 포기란 말인가?
이에 대해 이재명 대표는 “우크라이나, 대만 문제에도 매우 큰 불신을 남겼다”며 “감당하지 못할 청구서만 잔뜩 끌어안은 채 많은 부분에서 국가가 감당하지 못할 양보를 했다”고 비판했다. 27일 민주당 대변인 논평도 동일한 맥락에서 “중국과 러시아 관계 포기가 국익입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근시안적인 태도다. 민주당의 논리대로라면 우크라이나와 대만 침공을 반대하면 국익을 포기하게 된다. 즉,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무력에 의한 영토와 주권침해를 반대하는 책무가 국익에 반한다는 의미다. 제1 야당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무책임한 발언이다.
또한, 지금은 근시안적으로 주변국인 중·러와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것만 염려할 때가 아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데 이어 중국까지 대만을 침공한다면, 힘에 의한 현상변경 시도가 확산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국제질서가 붕괴할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앞으로 국제질서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도 전쟁반대가 중요하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할 경우, 중국과 북한이 미국의 대응을 분산시키기 위해 남한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할 위험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만을 향한 중국의 무력행동을 저지하는 것이 오히려 민주당이 강조하는 국익, 즉 평화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워싱턴선언에 관한 모순된 평가
대통령실은 워싱턴선언이 “특정한 하나의 동맹국에 핵억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플랜을 담아서 선언하고 미국 대통령이 약속한 최초의 사례”라며 방미의 최대성과로 꼽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핵협의그룹만으로는 자체 핵무장 여론을 불식시키긴 역부족이라며, 앞으로 핵연료 재처리 능력을 보장받거나 전술핵 재배치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술핵 반입과 핵무장에 정부가 선을 그은 것은 불가피하고, 앞으로 미국과 정보공유 및 기획·실행 과정에서 핵협의그룹의 실효성을 갖춰나가야 한다는 평가도 있다.
민주당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전술핵 배치가 골격인 나토식 핵공유보다, 독자 핵개발이나 한반도 내 핵무기 재배치가 불발된 워싱턴선언이 어떻게 북핵 대응에 더 효과적인지 납득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나토처럼 전술핵을 배치하지 못해서 성과가 없다는 평가로 보인다. 연장선상에서 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워싱턴선언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며, “미국과의 협상에 있어서 (자체핵무장 카드를) 계속 쥐고 있으면서 협상용으로 써야 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이 카드를 포기해 버렸다”고 비판했다. 워싱턴선언 수준을 넘어 자체 핵무장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동시에 상반된 주장도 한다. 안민석 의원은 같은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을 공격하면 핵으로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것인데 한반도는 핵 전쟁터가 되고 우리 민족은 말살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선언이 자체 핵무장의 길을 닫아 문제라면서, 미국의 확장억제력으로 북핵에 대응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은 모순적이다. 민주당에 일관된 입장이 있다기보다 정략적 비판만 내세우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은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3. 민주당식 균형외교, 실체가 있나
‘가치외교’행보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미국과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을 확인하고,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 가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한국 정상으로서는 처음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했으며, 올해 3월에는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을 제시하면서 한일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토대로 한·미·일 동맹을 일정한 궤도에 올리는 것이 이번 정상회담의 목표로 보인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기조와 확실한 선을 그은 윤석열 정부의 가치외교에 비판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한미동맹 의존도 줄어들고 미국과 중국과의 균형외교를 전개할 공간이 확대되면서, 한국이 역량을 발휘해 미·중 협력관계의 선순환구도를 조성할 수 있다는 구상이다. 민주당은 이러한 노선을 계승하며 균형외교를 주장하고 있다.
한미정상 공동선언이 발표된 4월 27일, 문재인 전 대통령은 판문점 선언 5주년 기념사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중·러와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당도 28일 대변인 논평에서 “자유의 나침반을 자처하며 미국의 대외 전략에 무조건적 동참 의지를 표명한 것은 균형외교에 파산선고를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비판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균형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해야 하는데, 윤석열 정부가 미국 편향적 외교노선을 취해서 문제라는 취지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균형외교로 추구할 수 있는 실리란, 안보 측면에서는 북한과 관계개선을 위해 중국과 러시아가 중재를 서는 것이고, 경제 측면에서는 중국 수출을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균형외교의 실체가 있는지 의문이다. 우선 중국과 러시아에 북한 비핵화에 관한 의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2022년 3월 북한이 ICBM을 발사하여 2018년 선언한 모라토리엄을 파기했음에도 UN안보리는 대북 경제제재를 부결했고 규탄성명도 채택하지 못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해서다. 이들은 북한에 동조적인데, 오히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과 경제협력을 강화했으며, 북한이 러시아로 무기를 판매하고 러시아는 군사기술을 제공하는 등 군사적 측면에서도 밀착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북한은 미국에 대항하는 북·중·러 진영이 구축된다면 UN 경제제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여 비핵화를 거부하고 있다. 현재 구도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북한 비핵화를 위한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기대가 최근 좌절된 것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동안 중국에 북한과의 중재를 바라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삼갔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는 홍콩민주화 시위에 대한 중국의 폭력적 탄압, 신장위구르 강제노동 문제, 대만 무력침공 위협에 침묵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나서지 않았다.
경제적 측면에서 실리추구라는 주장도 실체가 불분명하다. 중국과 관계가 경색되면 수출에 타격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대만의 사례만 보더라도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대만에 무력통일도 불사하겠다고 중국이 엄포를 놓고 있고, 작년에는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해 중국이 공격적 군사훈련을 감행했음에도, 대만은 막대한 대중 무역흑자를 보았다. 특히 대중국 반도체 수출이 20.9% 증가했다. 중국은 경제적 필요가 있다면, 정치적 관계만 따져 손해 보는 선택을 하진 않는다는 점이 확인된다.
따라서 작년 한국의 대중국 무역적자가 윤 대통령이 균형외교를 저버린 결과라는 비판은 문제가 있다. 한국무역협회의 분석(2022.11)에 따르면 무역적자는 중국의 실물경기 회복 부진과 국제경제 환경 불안정에서 기인한 일시적 성격이 크다고 진단한다. 경기적 요인이 달라진다면 수출은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한국무역협회는 대중국 수출이 점차 고기술 중간재로 변하고 있어 수출을 확대하려면 고기술 품목에 주력해야 한다며 기술혁신을 강조했다. 즉 대중국 수출확대는 궁극적으로 기술혁신에 달려있다는 의미다.북핵 대응을 위해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가야 하나?
그러나 이번 한미정상회담 결과가 남한에 전술핵을 배치하거나 독자적으로 핵무장을 하는 식의 급격한 현상변경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핵무장 여론을 진정시키고 NPT체제를 준수한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핵전쟁을 우려한다면, 그 일차적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워싱턴선언’은 북한의 핵무장 고도화에 대한 반응적 결과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북한이 핵무력을 고도화하면서, 핵무기 사용의 문턱을 낮추고 남한을 향해 사용할 수 있다고 협박하지 않았는데, 미국이 핵우산을 강화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미정상은 공동성명에서 북한과의 외교협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의 지속적인 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북한과의 외교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하며, 북한이 협상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북한과의 관계를 외교로 풀어가야지 강 대 강을 고수하다가는 전쟁위기가 높아진다는 우려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확장억제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핵전쟁을 원하지 않는 민중에게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북한과의 협상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대화의 물꼬를 트려면 북한의 핵보유를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북한 비핵화가 필수라는 원칙을 무시하고 북한의 요구인 ‘조선반도 비핵화’(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고 핵동결·핵감축 협상을 하자는 북한의 접근법)를 두둔하는 방식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핵보유가 NPT체제를 위협한다고 국제사회가 판단하면서 좌초했다. 핵전쟁을 피하고자 핵으로 무장한 상대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핵을 막기 위해서 핵을 가져야 한다는 교리에 따라 연쇄적인 핵무장 흐름으로 이어진다. 가령 러시아의 핵위협이 성과를 거두면, 비핵보유국은 우크라이나의 비핵화를 ‘역사적 실수’로 인식하게 되고, 북한을 비롯하여 비공식 핵무장을 했거나 시도하는 국가에겐 ‘핵이 만능’이라는 신호를 주게 된다. 즉, 핵무장 국가에 투항하는 것은 오히려 모두가 핵을 더욱 절박하게 보유하려고 하는 상황을 낳는 역설을 불러온다. 마찬가지로 북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포기하면 남한도 핵무장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곧바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리하면, 민주당의 주장대로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협상을 하더라도 확장억제는 강고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한반도 핵전쟁의 위험은 영구화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북한이 핵전력을 고도화하는 한, 어떤 식으로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그에 비례하여 동북아의 핵태세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바람직하지도, 실현할 수 있지도 않다.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미화하면서 과거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자는 주장일 뿐이다.
민주당의 균형외교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운전자론은 출발점인 북한과의 관계개선부터 좌초했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에게 북한과의 중재를 기대했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팽창주의적 행태를 묵인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은 실패했으며, 북·중·러의 공조가 한층 강화된 현재 국면에서 적용은 더욱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지난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정상회담을 비난하기 바쁘다. 민주당이 책임감 있고 진지하게 대응한다기보다 정략적 이해만 좇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이유다. 4. 사회운동 대응 평가
그러나 사회운동이 민주당식 외교노선을 추종한다면 평화를 위한 대안적 길을 만들 수 없다. 균형외교라는 핑계로 사회운동이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행보를 묵인한다면, 우크라이나와 대만 민중과의 연대가 불가능해진다. 또한, 북한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하고 핵동결 협상으로 전환하자고 한다면, 한국의 반핵평화운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핵무장 담론이 거세질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 사회운동은 민주당의 외교노선을 지지하면서 한일, 한미정상회담을 비판했다. 시민단체와 민주당은 3월 7일 강제동원 피해배상 해법을 성토하는 공동기자회견을 시작으로, 3월 11일, 18일, 25일, 세 차례에 걸쳐 ‘대일 굴욕외교 규탄 범국민대회’를 개최했다. 기시다 총리 방한을 앞둔 5월 4일에도 정의당, 진보당, 시민단체가 민주당과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윤석열 정부의 굴욕외교 중단을 촉구했다. 동참한 진보정당과 시민단체는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이 사법주권을 부정하고, 식민지배가 합법이라는 일본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며, 피해자의 요구를 외면했다고 민주당과 한목소리를 냈다. 강제동원 해법을 토대로 성사된 한일정상회담 또한 굴욕적인 외교 참사라고 비판했다.
한미정상회담에 대해서도 균형외교에서 벗어난 미국 편향적 외교노선으로 국익을 상실했다는 민주당의 평가에 상당수 사회운동이 동조했다. 한미정상이 공동선언문에서 중국의 대만침공 위협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전국민중행동은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대만 문제는 국제문제, 힘에 의한 현상변경 반대 등의 발언으로 러시아와 중국을 적국으로 돌렸고”다고 지적했고(4.27), 진보당도 공동선언문에서 대만과 우크라이나 언급은 반중 반러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라며, “중국과 러시아의 보복으로 한국은 경제와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도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4.27).
대북정책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한미정상회담을 비판하면서 판문점 선언 5주기를 “동맹의 핵무기가 없이도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던 시기였음을 상기”(4.27)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이 민주당의 균형외교를 지지하는 것은 국제정세를 반미 진영론에 근거하여 분석하기 때문이다. 쇠락하는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유도했고, 대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러나 러시아가 전쟁에서 선전하면서 미국의 패권이 약화하고 있으며, 그 결과 미국 중심의 세계가 중러가 주도하는 다극화로 이동한다고 진단한다. 러시아의 침공을 미국 패권에 대항하는 정당한 행동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반미 진영론은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균형외교라는 명분으로 묵인하는 외교노선에 친화성을 보인다.
반미진영론자들은 한·미·일의 군사협력 강화가 전쟁을 유발한다고 비판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그러한 것처럼,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는 대만에서 미국이 유사한 행태를 반복할 위험이 있다는 주장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대응 수준 강화를 우려하는 것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무력으로 우크라이나 국경을 침범한 것은 러시아이며, 대만침공을 위협하는 것 역시 중국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또한, 우크라이나 침공은 푸틴이 대러시아 애국주의를 통해 장기집권의 명분을 마련하고, 러시아 시민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변국의 탈권위주의 흐름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의 대만침공 위협도 시진핑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사회운동이 사태를 거꾸로 보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 위험을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팽창주의를 저지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세계 각지의 팽창주의 세력은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시도하면서 지속해서 국제질서를 허물 것이고, 팽창주의에 대항하는 군사적 동맹은 더욱더 강화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운동의 대안적 길은 요원해질 것이다.
북한에 대한 상황인식도 거꾸로 서 있다. 반미진영론자들은 워싱턴선언을 동아시아에서 한미일과 북중러의 진영대결 구도를 형성하려는 미국의 패권전략으로 해석하면서 전쟁위기가 극대화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북중러 진영구축이 핵보유와 체제수호에 유리하다고 판단해 군사행동의 수위를 높인 것은 북한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북한은 국제질서의 판도가 바뀐다고 봤다. 북중러 진영이 구축된다면 UN 경제제재를 피할 수 있다는 계산 아래 2022년 3월 ICBM을 발사하여 2018년 선언한 모라토리엄을 파기했다. 이후에도 북한은 IC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극초음속미사일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이어갔고, 핵무력 정책을 법제화했으며, 한국을 겨냥해 전술핵 공격위협을 가했다. 이로 인해 남한에서는 미국의 핵우산조차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고조되면서 자체 핵무장을 바라는 여론이 치솟았다. 그 결과 워싱턴선언이 채택되었다. 즉, 북한의 핵위협이 가증되지 않았다면 워싱턴선언도 없었다는 의미다.
북한의 핵위협이 전쟁 위험을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북한의 요구대로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협상을 진행한다면, 한반도 평화가 아니라 핵전쟁 위험이 영구화된다.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불러들일 수는 있다더라도 한국의 핵무장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곧바로 제기될 것이며 이는 NPT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북한과 대화를 위해 북한의 비핵화를 포기하자는 의미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사회운동이 반미진영론에 근거해 민주당의 외교노선을 지지한다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중국의 대만침공 야욕을 저지하며,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하는 평화운동을 건설하기 어려워진다. 사회운동은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국제정세 인식을 전면쇄신하고 국제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
비핵화만이 상호 절멸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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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것처럼 현 여권이 져야 할 책임이 막중합니다. 실질적으로 행정부를 운영하고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라는 점에서 더욱더 그러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지난 정권에서도 그랬다는 식으로 무마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난 정부보다 더 나은 정부가 되겠다고 자기 입으로 공언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는 한국 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계기였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사회운동포커스》로 발표한 두 글,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①, 제왕적 대통령제의 한계를 답습하는 윤석열 대통령: 대통령의 정당 지배야말로 정치개혁의 대상이다」(2023.2.15.),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②, 비민주적 공천제도의 폐해: 비민주적인 공천제도 아래서 성숙한 민주주의를 바랄 수는 없다」(2023.2.17.)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요약하면, 윤석열 대통령도 선거기간에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이번 선거는 대통령과 정당·의회의 관계가 이전 정부들과 거의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이준석에 이어, 유승민, 나경원, 안철수까지, 대통령과 절대적으로나 상대적으로나 거리가 있는 당 대표는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대통령실이 당무에 개입하는 행태는 과거 대통령이 당 총재를 맡고 공천권을 휘둘렀던 단핵(單核)정당 시절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연초 윤 대통령이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자는 이슈를 띄우기도 하면서 정치개혁을 주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대통령 측이 당무에 개입하는 바로 그 방식 자체가 정치개혁에 역행한다는 것이지요.
또 여당의 내홍은 사실상 다음 총선의 공천권을 둘러싼 갈등이라는 점에서, 한국 정당정치의 미성숙을 잘 보여줍니다. 공직은 사회구성원의 공익을 추구하는 자리입니다. 이런 공직에 적절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이 정당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를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채우면서 민주주의를 온전히 실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요. 공천에 대한 당 지도부의 절대적인 권한을 내려놓고 민주적인 공천제도를 안착함으로써 당내 민주주의를 확보하는 게, 한국 정치의 난맥을 해소하기 위한 한 가지 조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한편, 최근 민주당에서 나타나고 있는 흐름도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이재명 대표의 성남시장, 경기지사 시절 비리에 관한 검찰수사가 점차 기소 단계에 이르게 되자, 민주당은 이재명 대표 ‘방탄 모드’에 점점 더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의 행태에 대해서는 《사회운동포커스》에 실린 글, 「이재명 대표 리스크는 한국 정치의 리스크다」(2023.1.11.)를 통해서, 이미 우리는 분명한 우려를 표했습니다) 당 차원에서는 장외집회를 이어 나가는 강수를 거듭하고, 여기에 호응해 이재명 대표의 극성 지지자들(이른바 ‘개딸’)은 이재명 대표 수호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투표에서 반대보다 찬성이 더 많은 부결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극성 지지자들은 이른바 ‘배신자 색출’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재명 대표 측에 커다란 충격을 준 뒤, 민주당 내부에서도 이재명 대표가 대표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전보다 더 공공연하게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재명 대표가 당 대표직을 고수하면서 당을 동원하려는 태도에는 변함이 없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실권을 잃으면 그를 지켜주던 벽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혹여나 이재명 대표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지더라도 이를 부정하려는 수순이 아닐까요.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사례를 보면 아예 불가능한 전망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사회지도층이라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나서서 사회의 기준을 무너뜨리기 시작하면, 우리 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은 무조건 그르다는 식의 정치 양극화가 심화할 것입니다. 또한 그에 따라 정치는 사라지고 파당만 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사회운동을 펼쳐 나가기에 과연 유리한 조건인지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정치 양극화의 기제로서 한국에 ‘제왕적 대통령제’가 있다면 다른 곳에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를 비교해 본다면,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치 양극화의 의미와 개선점을 뚜렷하게 정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유럽의 사례를 검토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는 양당 체계에 속해 있는 거대정당의 정치인들이 점차 극단화되고, 이들이 대중을 동원해 사회 전반의 정치 양극화가 촉진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중도우파(보수당, 기민당 등등)–중도좌파(사민당, 노동당 등등)로 구성된 정당체계 그 자체가 위기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정당이 쇠퇴하는 가운데 기존 정당체계에서 포괄하지 못했던 의제나 유권자에 집중하는 새로운 정당이 등장하는데요, 이들은 대체로 극단적인 성향을 띱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유럽의 ‘우파’ 인민주의는 주로 유럽통합과 이민정책을 둘러싸고 쟁점을 형성합니다. 즉 유럽에서는 정당체계의 위기와 정치 양극화가 동반된다는 말입니다.
우선 소련 붕괴 후 정치·사회적으로 혼란을 겪은 중·동유럽의 경우 2010년까지는 대체로 신속히 서유럽을 따라잡기 위해 서유럽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빠르게 받아들였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경제적 불만이 점증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조건을 배경으로 2010년대에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인민주의 정당이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헝가리를 볼 수 있겠습니다. 헝가리에서는 인민주의 정당이 집권한 뒤 그들에 유리하게 민주주의의 제도를 변형시켰습니다.
현재 헝가리의 집권당 피데스(청년민주동맹)는 1988년 리버럴 노선을 지향하는 당으로 출발했지만 1994년 선거 패배를 계기로 민족주의, 보수주의로 노선을 대폭 전환합니다. 피데스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계기는 2008년 금융위기였습니다. 기존 집권 세력이던 헝가리 사회당은 금융위기 대응에 있어 무력했고, 그 와중에 부패와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진보진영 전체가 함께 몰락해버립니다. 이 틈을 타고 피데스가 1당으로 등극하고, 피데스와 더불어 세를 키운 세력이 “욥빅”이라는 극우세력입니다. 욥빅은 반이민, 인접국 내 헝가리계 소수민족에 대한 지원 강화, 헝가리 청년들의 서유럽 국가로의 이주 반대 등 급진적인 민족주의적 강령을 내세우는데요, 피데스는 이들과 경쟁하면서도 사실상 이런 정책을 흡수해 극우적 성향까지 나타내고 있습니다.
2010년 선거에서 1당으로 등극한 피데스는 2022년 3연임에 성공했습니다. 집권 기간, 피데스는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민주주의의 제도를 변형합니다. 먼저 피데스의 수장이자 총리인 오르반은 자신이 이끄는 정부를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설명합니다. 대체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공정한 선거 이외에도 법의 지배, 권력분립, 언론의 자유, 재산권을 보장한다고 할 때,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선거를 제외한 다른 요소들을 결여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지칭합니다. 오르반은 이런 기조 아래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매체를 폐간하고 미디어 위원회 멤버 전원을 친정부 인사로 구성했습니다. 또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축소하고 친여인사로 재판관을 임명했습니다. 또 피데스에 유리하게 선거법과 선거 규칙을 고쳤고, 심판이라 할 수 있는 선거관리위원회에도 친여 인사를 배치해 피데스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습니다. (선거법 개정은 2차 결선투표제를 단일투표제, 다수대표제로 고치고 재외 헝가리인에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확실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는 피데스에 유리했습니다.) 이런 조건이 있었기에 2022년 선거에서 여론조사상 지지율은 여권이 뒤졌음에도 막상 선거 결과는 피데스가 199석 중 135석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집권세력이 집권 후 제도를 수정해 자신의 권한을 강화한 또 다른 사례로 튀르키예가 있습니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의원내각제하에서 2003년부터 2014년까지 총리 3연임을 한 뒤, 개헌을 단행해 정체를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습니다. 역시 대통령은 제왕적 권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위인사(장관, 판검사위원회 일부 인원) 임명권, 의회해산권, 행정명령 발표권, 비상사태 선포권, 예산 제안권 등등.
그런데 개헌 과정에서 튀르키예 사회는 헌법 수정에 찬성한 사람들(주로는 교육 수준이 낮고 지방에 거주하는 유권자)과 반대한 사람들(주로는 교육 수준이 높고 도시 중심지에 거주하는 유권자)로 양분되었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반대자들을 테러리스트로 지칭하면서 ‘우리’와 ‘그들’을 나눠 공격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더군다나 2016년에 발생한 쿠데타 진압 이후, 국가 안정을 명분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사회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여권의 정치적 입지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야 국가비상사태를 해제하며 통제를 풀었는데요. 그만큼 정권이 안정화되었다는 의미로, 다음 대선에서도 에르도안 대통령이 연임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다만 지난 2월, 튀르키예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가 잠시 흔들렸는데요, 최근에는 정부의 생활안정화 대책으로 지지율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5월에 치러질 예정인 대선을 그대로 강행한다고 합니다. 지지율 회복에도 선거운동이 쉽지는 않으리라 전망되는 가운데, 이변이 일어날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선을 돌려 지난 1월에 이슈가 됐던 브라질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브라질의 정치제도는 브라질 정치 양극화의 핵심 기제가 되었습니다. 브라질의 정치제도는 막강한 대통령의 권한, 다당제, 개방형 명부식 비례대표제가 얽혀 있어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특히 다당제 아래서 개방형 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해, 1988년 민주화 이후 특정 정당이 한 번도 다수당을 차지한 적이 없습니다. 개방형 명부제는 유권자가 정당과 인물 모두에 투표하는 방식인데요,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정당에서 명부를 작성하는 폐쇄형보다는 후보 개인의 인지도가 선거에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2022년 치러진 국가 의회 선거에서도 전체 513석의 하원의원 가운데 1위 정당은 99석을 얻은 자유당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당이 파편화되어 있기에 매번 선거 이후 연립을 구성해야만 행정부의 정책이 원활히 추진될 수 있습니다.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 유리한 선거 시스템인 데다 연립을 구성해야 하는 행정부의 필요가 맞아떨어져, 행정부에서는 이른바 포크 배럴(Pork Barrel)이라는, 지역구의 선심성 사업을 위해 정부의 예산을 남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정말 손쉽게 부패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브라질은 남미국가 중에서도 항상 민주주의, 의회, 정당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편에 속하는데,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원으로서는 정부와 연줄을 만들어 정부 예산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직결되므로, 대통령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군다나 브라질의 대통령 역시 한국에서처럼 그 권한이 막강합니다. (긴급법안요구권, 긴급명령권, 예산권 등등.) 본 글에서 지적했던, 제왕적 대통령에 매달려 사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양극화가 브라질에서는 좀 더 노골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브라질에서는 미국과 유사하게 문화적 요인을 둘러싼 대립도 갈등선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브라질의 주요 산업으로 떠올랐던 석유산업이 2010년대 들어 유가 하락으로 수익성이 악화해 브라질의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호세프 정부는 대중교통비 인상을 단행했는데, 이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대 시위가 벌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시위에도 불구하고 호세프는 2014년 선거에서 재선됐습니다. 호세프 정권은 노동자당 정권이었음에도 경제위기에 대응해 보수적인 경제정책을 펼칩니다. 정부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은 가운데 터진 부패 스캔들로, 호세프 대통령은 결국 탄핵당하고 맙니다. 그런데 노동자당의 우경화에도 여전히 노동자당을 지지하는 진영에서는 호세프 대통령의 탄핵이 국민의 선택이 아니라 부패한 의원들의 야합에 따른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라 인식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탄핵은 제도적 쿠데타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18년에 보우소나루가 집권한 것인데요, 보우소나루가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으로 중산층과 복음주의 교회의 문화전쟁을 꼽습니다. 중산층이 노동자당 정부의 빈곤층 우선 정책으로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는 데에 대한 분노를 노동자당의 페미니즘 정책, 동성결혼과 같은 정책에 대한 반발로 표출했다는 것입니다.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정치가 오직 소수만을 위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브라질 국민의 90%가 그렇다고 답했고, 정치가 국민 전체를 위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단지 7%만이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복음주의 교회는 동성애, 동성결혼, 낙태, 마약 합법화 반대와 같은 종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정직 대 부정직의 프레임을 만들어 우파 연합의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이렇듯 탄핵이 제도적 쿠데타일 뿐이라는 노동자당 지지층과 노동자당에 반대하는 문화전쟁을 벌인 우파 연합의 대립은 지난 1월 8일, 극단적 사태를 촉발합니다.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룰라 행정부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한 것인데요, 시위 참가자들은 급기야 대법원, 국가 의회, 대통령궁과 같은 정부 주요 시설을 불법으로 침입, 점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시위를 벌인 이유는 2022년 10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보우소나루 후보가 역대 최소 표차인 1.8%포인트 차이(50.9% 대 49.1%)로 패배한 후 이 선거에 불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브라질의 정치 양극화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서유럽에 속한 국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프랑스의 경우, 극우정당으로 알려진 국민연합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사회당이 집권을 위해 중도화, 탈계급화하고, 공산당이 군소정당으로 몰락하는 가운데, 극우정당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의 박탈감과 사회에 만연한 이슬람 혐오에 기초한 의제들을 정치적으로 부각하면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최근에 치러진 프랑스 대선과 총선에서도 드러납니다. 2022년 4월에 치러진 프랑스 대선에서 마크롱 대통령은 58%의 득표로, 41%를 득표한 국민연합의 마린 르 펜 후보를 17% 포인트 차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5년 전 선거에서 두 후보 간 격차가 32% 포인트였음을 고려하면 그 차이가 상당히 줄어든 모습입니다. 게다가 두 달 뒤 치러진 총선에서는 이런 구도가 더욱 극명해지는데, 마크롱 대통령의 집권 여당은 단독 과반을 상실했고, 멜랑숑이 이끄는 좌파연합과 국민연합이 각각 2, 3위로 약진했습니다. 멜랑숑과 르 펜은 모두 유럽연합에 비판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해 국민연합은 국경·이민 통제의 주권을 유럽연합으로부터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독일도 유사하게 유럽통합과 이민문제를 둘러싸고 ‘독일을 위한 대안’(AfD, 대안당)이라는 극단주의 정당이 등장했습니다. 전후 독일은 파시즘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극단주의 정당이 등장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2013년 등장한 대안당은 유로존 위기와 난민유입을 계기로 성장해 2017년에는 13%의 득표를 기록하여 제3당에 등극하기까지 했습니다. (다만 최근 치러진 2022년 총선에서는 여러 논란으로 세가 위축되어 제5당이 되었습니다.) 한편 독일사민당의 중도화 경향에 실망해 이탈한 좌파성향의 지지자들은 좌파당으로 유입되기도 했습니다.
양상은 조금씩 다르지만, 유럽에서는 정당체계 자체가 위기에 빠지면서 그 틈을 새로운 극단주의 정당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이는 경제위기 대응에 무력한 유럽연합에 대한 회의감이 커지고, 이민정책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커진 현실을 배경으로 합니다. 헝가리에서는 집권에 성공한 인민주의 정당이 자신들의 영속적인 재집권을 위한 제도 변형에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튀르키예의 경우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남미의 브라질도 마찬가지로 정치 양극화가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문화전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요, 브라질의 혼란스러운 정치제도 역시 정치 양극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정부예산을 대놓고 거래한다는 점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극단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살펴본 서유럽도 정당정치의 불안정을 틈타 극단주의 정당이 등장했으나, 프랑스는 중도 우파라 할 수 있는 마크롱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고, 독일의 경우 AfD가 2017년 선거에서 약진하기는 했으나, 2021년 총선에서는 세가 위축된 모양새입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서유럽에서는 극단주의 정당이 최소한 아직은 어느 정도 제어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고 후견인을 중심으로 정렬해 권력의 상층을 향해 돌진하는 정치문화를 가진 한국에 각각의 사례는 시사점을 줍니다. 먼저 같은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브라질의 사례에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이 노골화되었을 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튀르키예의 사례에서는 보스 중심의 하향식 정치문화가 익숙한 한국 정치문화에 시사점을 주는데요, 대통령제가 권위주의적 지도자에 좀 더 친화적인 제도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유럽의 사례에서는 정치문화가 얼마나 성숙해있느냐에 따른 서유럽과 중·동유럽의 차이를 살펴볼 수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