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②
이번 호에서는 1997~98년 시작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 이에 따른 구조조정과 노동운동의 대응을 다룬다. 대체로 1997년에서 2003년에 이르는 이 시기에, 1980년대 말 형성된 노동운동의 조건이 급격하게 붕괴되는 가운데 새로운 노동체제가 형성되었다. 노동운동은 노동법 개정, 구조조정과 고용불안, 임금삭감에 대응해 투쟁하면서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혹은 저항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시기의 초기 몇 년간 노동조합이 펼친 대응은 위기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노동운동의 구조를 상당 부분 형성했다. 당시 노동운동의 대응은 1987~97년 시기 형성된 민주노조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하지만 그것은 1980년대 말 민주노조운동의 분출을 통해 민주노총 건설과 1996~97년 총파업에 이르는 한 시기와 폭력적 단절을 보이기도 했다. 거대한 충격에 맞서는 가운데 노동운동이 취한 특정한 선택은 2023년, 현재에 이르는 노동운동의 구조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하루하루 쉴 새 없이 진행된 구조조정과 노동조합의 투쟁은,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새로운 질서를 형성했다.
1. IMF 구제금융 위기의 전개
1) 1997~98년 금융위기의 시작
1996~97년 노동계 총파업 결과, 노동법은 여야합의를 통해 날치기 개정안을 되돌리는 방향으로 다시 개정되었다. 노동운동은 자신의 거대한 힘을 확인하고,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는 계획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었다. 정권이 노동법 개악을 추진했던 정세적 조건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은 1997년 11월, IMF 구제금융 위기라는 극적인 형태로 폭발했다.
위기 조짐은 총파업이 한참 전개되고 있던 1997년 초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월 한보철강이 결국 부도를 맞으면서 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3월부터 삼미, 진로, 기아 등 대기업 그룹들의 연쇄부도가 이어졌다. 7월에는 태국 바트화, 8월에 인도네시아 루피화가 폭락하면서 동아시아 각국으로 외환위기가 확산된다. 한국은 원달러 환율을 800원대로 유지하기 위해 고투하면서 외환보유고를 소진했다. 결국 외환보유고가 거의 고갈된 11월,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IMF 외환위기는 재벌체제와 금융세계화의 결과였다고 요약할 수 있다(윤소영, 2006). 즉 1980년대 말 3저 호황 이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과잉투자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김영삼 정부가 성급한 금융시장 개방, 금융자유화를 추진한 결과였다. 직접적으로는 재벌 계열사가 다수 포함된 종합금융사(종금사)들이 국외에서 1년 미만의 단기외채를 차입해, 국내에서 장기대출에 나섰기 때문이다. 경기가 후퇴하고 금융불안정이 심화되자 더 이상 단기외채의 대출연장(rollover)을 할 수 없게 된다. 특히 금융자유화 정책에 따라 설립이 허가된 종금사들은 기업들에 장기시설투자 자금으로 많은 액수를 대출했다.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은 가혹했다. 극도로 긴축적인 재정, 통화정책을 실시해야 했고, 자본시장도 추가로 개방해야 했다. 정부는 경제 구조조정 정책으로 금융, 기업, 공공, 노동 부문의 ‘4대 부문 구조조정’을 추진한다. 기업들은 부채비율을 낮추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대규모 해고에 나선다. 인수합병 과정에서 해고되는 일도 발생한다. 조흥, 제일, 한일 등 대규모 시중은행이 합병되거나 해외에 매각되고, 재계 4위 기업집단이었던 대우그룹은 해체된다. 재정 확보를 위해 포항제철, 한국중공업, 국정교과서 등 다수 공기업의 민영화도 추진된다. 또한 정부는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한 제도 정비에 나섰다. 그 중 최우선 순위 중 하나가 바로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해고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법 개악이었다.
2) IMF 구제금융 협약과 최초의 노사정 합의
외환위기가 본격화되던 1997년 12월 18일,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 김대중 당선자는 취임도 하기 전인 12월 26일, ‘IMF체제 극복을 위한 노사정 위원회’ 구성을 제안한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1997년 12월 3일, 한국정부와 IMF가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한 일주일 후 열린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에서는 ‘경제위기 극복과 고용안정을 위한 노사정 3자 기구’ 구성을 정부에 먼저 요구하였다. 이 중앙위와 2주 후 열린 임원산별대표자회의에서 민주노총의 대응기조를 이렇게 결정한다.
① 재벌과 현 정권을 주요 투쟁대상으로 하고, IMF를 내세워 한국 경제를 장악하려는 미국을 공격하며, ② 재벌개혁 고용안정을 위한 노사정 사회협약 쟁취투쟁을 공세적으로 전개하고, ③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전개한다. ④ 각계 각층의 시민사회단체와 광범한 범국민적 전선을 형성하며, ⑤ 기업별·산업별 차원에서 진행되는 정리해고 등 공세에 대해 해당 노조와 연맹, 지역본부 차원의 연대투쟁과 중앙의 지지 연대를 긴밀하게 결합한다.
그리고 이에 입각한 주요 투쟁요구로 ① 재벌해체, ② 고용안정, ③ 노사정 대책기구 구성, ④ 경제파탄 청문회 개최 및 책임자 처벌, ⑤ 자본시장 전면개방 반대 및 IMF 재협상 촉구, ⑥ 물가안정 및 재정안정을 제시했다.
이에 김대중 당선자가 회답한 지 불과 2주 후인 1월 15일,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한다. 협상의 핵심 쟁점은 ‘정리해고 불가론’(민주노총) 대 ‘정리해고 불가피론’(김대중 정부)였다. 정부의 입장은 명확했다. 정부는 외채 협상단의 외자 유치 교섭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는, 정리해고 법제화에 동의한다는 공동합의문 작성이 필요하다며 민주노총을 압박했다(김창우, 2020). 그리고 불과 5일 후인 1월 20일에는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사정 합의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공정한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채택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2월 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잠정합의한다. 이것이 바로 큰 논란이 된 1998년 노사정 합의문이다. (본 합의문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있던 2월 9일, 민주노총을 제외하고 공식 체결된다.)
공동선언문(1월20일)은 “노사정은 IMF 체제하의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필요한 종합적인 제반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할 것을 다짐하면서” 합의사항을 제시한다. 이어 2월 6일 잠정합의문은 기업의 경영투명성 확보 및 구조조정 촉진, 물가 안정, 고용안정 및 실업대책, 사회보장제도 확충, 임금안정과 노사협력 증진, 노동기본권 보장,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 수출증대 및 국제수지 개선,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기타 사항, 국민대통합을 위한 건의사항 등 10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2016). 무엇보다 핵심은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정리해고제와 파견근로제 도입이었다. 대신 교원노조 합법화와 공무원직장협의회 허용, 노조의 정치활동 보장, 실업자의 초기업단위노조 가입 인정, 고용보험 확대 등이 교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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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사정 합의문은 민주노총이 1997년 12월에 정한 대응 기조가 반영되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민주노총 요구안 자체가 당시 상황에서 노사정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민주노총 요구안은 경제위기 상황의 해법으로 정합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는데, 이는 당시 위기의 성격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방증일 수 있다.
1997년 12월의 대응기조를 보면, 민주노총은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금융세계화라는 구조적 문제를 제대로 비판하지 못했다. 도리어 “IMF를 앞세워 한국 경제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정치적 공작으로 해석했다. 재벌 문제를 보면, IMF가 오히려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그들과 다른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합의에는 불과 1년 전 총파업을 통해 저지한 노동유연화 3제, 즉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탄력근로제 도입이 포함된다. 물론 이 합의서에는 노동자에게 불리한 내용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교조 합법화와 노조의 정치활동 허용, 실업자의 초기업노조 가입 등 노동기본권 보장과 정부의 고용 실업 대책, 고용보험 확대 등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이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경제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정부가 노동조합을 압박해 양보를 받아내고, 대신 노사관계 제도와 사회보장 개선에 관한 사항을 부분적으로 약속(하는 척)했다고 할 수 있다. 세부사항에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교환 구조는 1996~97년 총파업의 발단이 되었던 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의 논의 구도와도 상당히 유사했다.
협상이 진행되던 1월 21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에서 우려가 제기된다. 그러나 협상에 몰두한 민주노총 집행부가 잠정 합의를 발표하자,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격렬한 반대가 분출한다.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결국 기립투표로 잠정합의안을 부결시켰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 1기 지도부(권영길 위원장의 대선 출마로 인해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 체제)는 총사퇴하고, 단병호 금속연맹 위원장을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된다. 그러나 정부는 합의 무효라는 민주노총의 주장을 일축하고, 국회는 2월 14일 관련 법안을 통과시킨다. 한편 한국노총은 사회협약안 타결을 발표한다. 이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노사정위원회와 사회적 대화에 대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갈라진 입장은 현재까지도 대체로 유지된다.
3) 1998년 노사정 합의를 둘러싼 논쟁과 평가
1998년 당시부터, 민주노총 1기 집행부가 노사정 협약에 동의한 사실에 대해서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민주노총 스스로 “건국 후 최초의 전국 총파업 투쟁”이며 “세계 노동계를 뒤흔든 정치 총파업은 너무 장대하고 위대한 투쟁”이라고 평가(노개투 총파업 보고서)했던 총파업 이후 불과 1년 만에 노동법 개정을 대부분 수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IMF의 의중에 포함된 노동법 개정에 대한 노사정 합의가 없으면, 구제금융도 어려울 수 있다는 정부의 압박을 받았다. IMF의 구제금융이 없으면 채무불이행(디폴트)에 이르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부담이 있었던 셈이다. 대중적인 위기의식이 매우 큰 가운데, 대중동원 투쟁도 무척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IMF 구제금융 협약을 실제로 거부할 경우 민주노총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개혁 이슈는 IMF의 핵심 관심사였다기보다는 오히려 한국 정부 관료들이 더 적극적으로 관철시키려 한 것이라는 증언도 존재한다. (구제금융 협약서에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한다”는 추상적 언급만 존재했다. 정리해고제 도입은 IMF의 요구보다는 김대중 정부의 의지에 따라 추진됐다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민주노총이 노사정 합의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 구제금융 협약이 파기되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전술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민주노총 집행부가 그 모든 개악안을 수용할 필요가 없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운동 내 일각에는 구제금융 협약을 ‘경제신탁통치’라고 규정하고, 아예 외채상환을 거부해야 한다(사실상 디폴트 선언)는 주장도 있었다(전태일을따르는민주노조연구소, 1997).
그런데 민주노총 집행부의 노사정 합의는 정치적 압박 때문만은 아니었다. 집행부는 노개위 논의과정에서도 집단적 노사관계 문제를 매우 중시했고, 노동유연화 ‘3제’를 사실상 막기 어려운 상황에서 집단적 노사관계에 관한 반대급부라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노조로 조직된 부문에서는 투쟁과 단체협약을 통해 노동유연화 공세를 방어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합의문에는 노조 조직화와 정치활동을 용이하게 하는 사항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IMF 구제금융 협약에 따른 제반 조치가 대규모 실업과 노동조건 후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는 불과 1년 전 전국적인 총파업을 전개한 노동운동의 반발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운동, 특히 전투적 투쟁을 선도한 민주노총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최초의 ‘정권교체’를 ‘DJP연합’으로 겨우 실현한 김대중 정부는 정치적 기반이 여전히 취약했기 때문에, 정치적 위기관리 체계로서 노사정 합의라는 형식이 필요했다.
그러나 IMF의 요구를 떠나, 당시 위기에서 기업들이 구조조정 없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 과잉투자와 함께 고용도 크게 늘린 대기업들이 기존의 성장방식을 고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조정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노동법 개악이었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수용하지 않아도 정부와 국회는 노동법 개정을 강행했을 것이라는 의미다. 다만 김대중 정부는 정치적인 맥락에서 노사정 합의가 필요했을 뿐이다.
이는 노동법 개정에 민주노총의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총이 합의하지 않았으면 정리해고를 비롯한 노동유연화가 추진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도 순진한 것이었다.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의 노사정 합의안이 부결되었지만, 정부와 국회는 이 합의서를 명분으로 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노사정 합의, 혹은 교환을 수용한 민주노총 집행부의 판단이 타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어차피 정부와 자본이 ‘답정너’로 강행할 노동유연화였다면 차라리 동의하지 않고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옳았을 수 있다. 다만 이후 지속적인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야하는 상황이 왜 나타났는지, 그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한계와 책임은 없었는지를 인식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유효한 대응이 가능했을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 1990년대 노동운동은 사업장 단위로 임금인상 투쟁을 격렬하게 전개했지만, 한국경제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경로로 편입하는 현실을 똑바로 분석하지 못했고, 그 잠재적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재벌의 과잉투자는 고용을 늘리고 임금인상의 조건이 되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995~96년 경상수지가 악화되기 시작하고 1997년 들어 위기의 조짐이 분명히 나타났지만, 노동운동은 노동법 관련 쟁점과 임단투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른 한편, 민주노총은 1995년 출범 이후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기조로 사회개혁 투쟁과 민주노총 합법화를 요구하며 대정부와 협상에 집중한다(1996년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참여). 사회개혁주의 혹은 사회경제적 노동운동이라는 성격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 출범은 근본적 사회변혁을 지향한 “전노협 정신”의 청산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김창우, 2020). 민주노총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청산된 “전노협 정신”을 곧 사회운동노조라는 지향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임필수, 2008). 이러한 노선 변화는 민주노총이 IMF 금융위기 상황에서 노사정 협상을 우선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후 민주노총은 총파업 선언과 노사정위 복귀, 탈퇴를 반복하는 혼란을 겪었다. 정리해고에 봉착해 당장 투쟁을 조직해야 하는 기업노조의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곧 전투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총연맹 수준에서도 좌충우돌을 거듭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러한 심대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어떤 대비책도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이미 1970년대에도 한국경제가 외채위기에 준하는 경제위기를 겪었고, 그 후로도 구조적 약점이 전혀 치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노동운동조차 망각했다는 의미다.
2. 민주노총의 노사정 합의 파기 이후 총파업 투쟁
1) 1998년, 총파업과 노사정 협상의 혼란
민주노총은 집행부 사퇴 후 곧 단병호 금속연맹 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고, 대의원대회 나흘 후인 2월 13일 총파업을 선언한다. 그러나 비대위는 예정된 총파업을 철회한다. ‘극단적으로 불리한 여론’, ‘파업동력’, ‘총파업을 둘러싼 첨예한 의견 대립에 따른 조직의 균열’ 등이 이유였다(김창우, 2020). 특히 마지막이 문제였는데, 대의원대회의 격렬한 논쟁과 잠정합의안의 부결, 집행부 사퇴라는 상황을 의미했다. 결국 약속한 총파업은 진행되지 못한 채 민주노총은 2기 집행부 선거 국면에 돌입한다.
3월 3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2기 이갑용 집행부가 출범한다. 민주노총은 정리해고·근로자파견제 철폐, 부당노동행위 중단을 요구하는 총파업을 준비한다. 이어 4~5월에 진행된 중앙위원회와 단위노조 대표자대회에서는 대정부 요구안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① 고용안정, 생존권 쟁취, ② 정치 사회 경제구조의 전면적 개혁, ③ IMF 재협상 관철이 핵심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확대’가 포함된다. 이와 함께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는 자문기구이자 실무적 협의기구 수준이므로 실효성이 없다고 평가하며, “책임 있는 정부당국과의 직접적인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현재의 난국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대정부 중앙교섭”을 요구한다. 사회적 대화에 관해 현재 민주노총이 제시하고 있는 입장의 원형이 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이러한 요구를 중심으로 5월 총파업 투쟁을 조직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5대 요구안을 내건 총파업이라는 외형을 취하고자 했으나, 실제로는 각 연맹의 요구에 기반을 둔 시기집중 투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허영구, 1999).
민주노총은 5월 총파업 이후 추가 총파업을 선포한다. 그러나 5~6월 대정부 협의를 거쳐 민주노총은 정부 측의 최종수정안을 수용하면서 노정 합의에 도달하고, 이에 따라 6월 총파업을 철회한다. 곧 소집된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도 합의안이 높은 찬성률로 가결되었다. 바로 이 6·5 노정 합의는 1기 노사정위원회 합의사항을 재확인한 것을 제외하면, △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를 사실상 인정하는 가운데 개선 방안을 논의하고, △ 법정근로시간을 주 40시간으로 단축하는 방안도 논의하며, △ 부당노동행위 사업주를 엄단하고, 주요 투쟁사업장 문제를 해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철폐하자는 요구는 더 이상 제기되기 어려웠다.
또한 이 합의는 노사정위 참여를 전제했다. 실제 이를 계기로 ‘2기 노사정위’가 구성된다. 노사정 합의안 거부를 제시하고 집권한 2기 집행부가 불과 두 달 만에 노사정위 참여로 입장을 바꿨다는 사실과, 2월에는 노사정위 참가에 반대한 대의원들이 6월에는 대거 찬성으로 돌아섰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경제위기에 따른 구조조정 압박이 강화되고, 총파업 투쟁으로도 구조조정을 완전히 막아내기 힘들다는 조합원들의 판단이 작동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 집행부도 노사정 합의를 거부하면 정부가 일방적으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일 것이라고 우려했다(정진상, 2003). 또한 이때 주 40시간으로 법정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방안이 처음으로 명시되었는데, 이는 노동유연화 3제 중 나머지 하나, 즉 탄력근로제와 관련된다는 것이 몇 년 후 드러난다.
민주노총 2기 집행부는 이 합의를 통해 노사정 협상에 관해 ‘전술적 활용론’으로 입장을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투쟁을 조직하면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사정 협의를 활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기 집행부가 노사정위 복귀의 전제로 요구한 ‘선결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술적’ 이유로 참가와 탈퇴를 반복하면서 현장의 혼란도 이어진다.
민주노총의 ‘선결조건’인 5대 요구안은 △ 정리해고제·근로자파견제 철폐, △ 주 40시간제 도입, △ 재벌총수 퇴진과 IMF 재협상 등을 포함했다. 그러나 이를 고수할 경우 노사정위 협상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러한 혼란은 노사정위 참여의 타당성을 둘러싼 노선 논쟁으로 이어졌고, 원칙적 반대론과 원칙적 참여론 사이에서 입장 정리가 필요해졌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이를 정리하지 못한 채, 노무현 정부 시기에도 노사정위 참여를 둘러싼 극심한 내부 갈등을 반복한다.
6·5 노정 합의에도 불구하고 합의안 이행은 부진한 가운데, 정부가 구조조정 계획을 속속 발표하자 양대노총은 다시 총파업을 선언한다. 민주노총은 7월 중앙위원회에서 총파업 방침을 결정하고 노사정위 참여도 거부한다. 7월 14~16일 2차 총파업은 당시 현대자동차노조의 정리해고 반대 파업, 한국통신 등 공공부문 노조의 구조조정 반대 파업과 함께 진행된다. 정부는 강경기조로 대처했는데, 대통령이 불법파업 엄단을 지시하고 단병호 금속연맹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에 체포영장이 떨어졌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7월 3차 총파업을 하루 앞둔 7월 23일, 양대노총 위원장과 노사정위원장의 합의 형식으로 노정합의가 발표되면서 총파업은 철회된다. 공공 금융부문 구조조정에 관해 노사정위에서 성실히 협의하고 경제파탄 책임자 처벌 청문회를 개최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 중 후자는 주로 전임 김영삼 정부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그 외 내용은 대체로 6·5 노정 합의를 반복했다. 더구나 이때 노정합의는 현대자동차노조가 정리해고 반대 파업에 돌입한 상황에서 발표되었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현대자동차노조 파업은 총노동 전선에서 중대한 함의를 지녔지만, 결과적으로 기업별 투쟁으로 전개된다.
2) 2기 노사정위 붕괴와 민주노총의 탈퇴
이후 노사정위는 실질적 합의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실효성 없는 건의문, 권고문을 내는 기구가 되었다. 결국 1998년 2월 노사정 협약의 노동유연화 관련 사항들도 그대로 입법화되었다. 반면, 노동기본권과 관련된 조항들이 실제 입법화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즉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 근로자 파견제라는 ‘3제’는 신속하게 입법화된 반면, 복수노조 금지,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 제3자 개입금지라는 ‘3금’ 폐지는 제대로 실현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이행되었다. 합의사항이던 실업자의 노조 가입 인정을 위한 법 개정도 야당의 반대는 물론, 정부 내 일부 부처의 반대로 보류되었다.
1998년 말에 본격화된 5대 재벌 빅딜은 해당 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민주노총은 1999년 초, △ 일방적 구조조정 및 정리해고 중단, △ 주 40시간으로의 노동시간 단축으로 고용보장 등을 요구하는 투쟁을 다시 결의한다. 이와 함께 민주노총은 (1998년 12월 31일, 노사정위 탈퇴를 선언한 데 이어) 1999년 2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노사정위 탈퇴를 공식적으로 결정한다. 정부 측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등 굵직한 사안이 정리된 상황에서, 노사정위의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이후 민주노총은 몇 차례 조직적 논란을 겪지만 결과적으로 노사정 삼자 합의기구(노사정위, 2018년 이후 경사노위)에 복귀하지 않는다. 한국노총은 노사정위 참여 문제를 두고 정부와 협상을 벌이다가 1999년 5월 총파업을 선언한다. 하지만 실제 총파업을 조직할 힘은 없었으며, 6월 들어 노정협상을 거쳐 3기 노사정위원회에 다시 참여한다.
3) 노사정 협상을 둘러싼 민주노총의 동요와 혼란
앞서 언급한 것처럼 1기 집행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사회개혁주의를 추구했는데, IMF 위기가 시작되자마자 노사정 협상부터 요구했다. 하지만 노사정 합의가 부결된 후 새로 선출된 집행부도 두 번에 걸쳐 총파업을 선언하고 노정협상을 통해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거나, 노정협상을 통해 파업을 유보했다.
되돌아 볼 때, 민주노총은 어떤 선택을 해야 했나. 일체의 노사정 협상을 거부하고 총파업 투쟁을 중심으로 정세를 돌파했어야 했나. 당시 민주노총은 투쟁 동력이 충분했으므로 여론을 매개로 한 정권과 자본의 압박을 넘어 구조조정 저지 투쟁과 임단투를 결합하여 투쟁전선을 설치했어야 한다는 평가도 있다(김창우, 2020).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안타깝게도 당시 경제위기는 단지 노조 압박을 위한 명분이 아니었고, 노조의 유무를 떠나 기업 전반에 광범위하고 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즉 노조가 조직된 사업장의 투쟁만으로 노동자 전체를 대변하기 힘들었다.
한편, 노사정 합의에 비판적이었던 2기 집행부도 노사정 협상에 응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처럼, 노사정 협상은 노조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적 수단의 하나라는 관점이 필요했다. 협상 자체를 타협주의라고 거부할 필요도 없지만, 노동운동이 독자적인 투쟁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어렵다는 점도 자명하다.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시기 민주노총의 핵심적 과제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실현해야 할 전략적 목표를 조직적으로 분명히 합의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노사정 협상과 대정부 투쟁 전술을 병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98~99년 사이 민주노총의 행보를 보면, 경제위기 상황에서 쟁취할 전략적 목표가 불분명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노사정위 참여와 총파업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동요했다. 물론 정부 측이 노사정 협상 테이블에 민주노총이 복귀하도록 하여 투쟁을 관리하려 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정부가 총파업을 앞둔 시점에는 노사정위 복귀를 연계한 협상 전술을 구사하다가, 총파업을 유보하면 곧장 합의를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기만적으로 행동한 것도 민주노총이 우왕좌왕하게 된 중요한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정부 측의 구도에 쉽사리 말려들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은 어떤 전략적 목표를 가졌어야 했을까? 아래 서술하는 정리해고, 구조조정 저지 투쟁과 비정규직 투쟁,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돌아보면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 본격화된 정리해고
1)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
외환위기가 시작되면서 재벌기업들이 연이어 도산하는 가운데, 현대자동차는 1997년 말 ‘1998년 인력관리 운영계획’을 통해 1998년 한 해에만 총 3천 명의 ‘여유 인원’을 정리할 계획을 발표한다. 그 직후 하청노동자 1천 8백여 명을 먼저 정리한다. 1998년 들어 회사 임원과 과장급 이상 관리자에 대한 명예퇴직을 실시하여 8백 명 이상을 정리하고, 이어 2월부터는 전 공장에 걸쳐 잔업 축소와 일방적 배치전환, 집단 순환 휴가를 실시한다. 그러다가 1998년 4월, 현대자동차가 8189명의 대규모 정리해고 방안을 발표하면서 긴장이 높아진다.
현대자동차는 당시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의 최대 사업장으로, 여기서 정리해고가 어떻게 결판나느냐에 따라 그 외 기업들의 고용조정, 구조조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은 처음부터 이 투쟁이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리전이라고 규정하고 전국적인 투쟁을 조직한다는 방침을 수립한다. 자본 측도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정리해고를 고집했다.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후, 4424명의 조합원이 먼저 희망퇴직으로 떠난다. 노조 집행부는 희망퇴직과 실질임금 삭감을 수용하고 순환휴가제나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양보교섭안을 제시했지만, 양보교섭에 반대하는 현장조직들의 강력한 비판에 직면한다. 회사 측은 정리해고 대상자를 2678명으로 조정하여 7월 31일자로 해고하겠다고 발표한다. 노사교섭이 결렬된 7월 20일, 노조는 울산 공장 내에서 점거파업에 돌입한다. 7월 22일, 금속연맹에 속한 15개 노조 6만 8천여 명이 연대파업에 돌입한다. 그러나 이는 하루 단발성 파업이었다.
교섭은 이어졌지만 회사 측의 입장은 강경했다. 인원수를 다소 줄일 수는 있어도 정리해고는 단행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노동조합은 정리해고를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어떤 규모든 간에, 정리해고의 실현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되었다. 정부도 정리해고가 현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시험대라고 인식하며 현대차에 주목했다. 집권 여당인 국민회의와 노사정위원회가 노사 교섭에 중재자로 나서는데, 정리해고 인원을 최소화하더라도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 중재의 목표였다.
결과적으로 노조 집행부는 정리해고 대상 중 1261명을 무급휴직으로 전환하고, 276명을 정리해고한다는 중재안을 수용한다. 그 외에 △ 노동조합이 정상조업을 위해 노력한다면 회사는 재산 가압류와 고소고발을 부분 철회하며, △ 노사화합 및 무분규 선언을 발표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가족 대책위까지 대거 결합한 점거파업은 8월 24일 마무리된다. 36일 간의 파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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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파업 이후 노조 내부의 후유증은 상당했다. 우선, 잠정합의안에 대한 찬반 투표가 조합원 총회에서 압도적으로 부결된다. (9월 1일, 63.6% 반대.) 이후 집행부 사퇴 여부를 묻는 12월 신임투표에서 집행부 신임은 확인되었지만, 노조 집행부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 다음 집행부는 단체교섭을 통해 1999년 12월 27일, 무급휴직자를 전원 복직시킨다. 일반 정리해고자 133명은 2000년 5월까지 복직을 완료한다. 그러나 144명의 조합원은 끝내 복직하지 못한다.
정리해고 대상자도 문제였다. 복직되지 못한 144명 전원이 구내식당 여성노동자였다. 점거파업 기간 내내 파업 조합원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던 여성노동자들이 우선 해고 대상이 되었다. 비록 노조가 위탁받는 식당에 재취업하는 방식으로 이들의 고용을 보장하기로 했으나, 여성노동자를 우선 해고하는 성별화된 구조조정에 노조가 동의했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에 큰 충격과 반성의 계기가 된다. 이후 이 사건을 비판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밥·꽃·양’의 상영을 노조 활동가들이 방해하는 행태가 벌어지면서 ‘민주노조 운동’의 젠더 맹목이 심각하다는 사실이 재차 드러났다.
비슷한 시기 만도기계에서도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전개된다. 회사는 흑자 상태에서도 경영위기를 이유로, 전체 생산직 직원 4천여 명의 15.5%인 1090명의 정리해고를 발표한다. 노조는 8월 13일부터 파업에 돌입한다. 전면파업이 계속되던 9월 3일, 전국 7개 공장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조합원들을 연행한다. 며칠 전 현대자동차의 파업이 종료된 후 투쟁이 고립된 상황에서, 여당이나 노사정위의 중재 대신, 공권력 투입으로 파업을 끝내고자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두 곳에서 정리해고가 관철되면서, 노조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정리해고가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서, 정리해고를 끝까지 저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인식도 확산된다. 현대자동차 노사정 합의는 형식적으로는 개별 사업장 수준의 합의였지만, 합의 과정에 민주노총 중앙과 정부가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미 전국적·전계급적 의미를 띠었다. 정리해고 법제화와 실행, 쟁의 봉쇄라는 정부의 전략적 목표는 대체로 관철되었다. 외환위기 정국에서 정부가 주도권을 행사하고 노동운동은 수세적인 대응을 넘어서기 어려웠다(정진상, 2003).
2) 대우자동차 해외매각과 정리해고 저지 투쟁
한편, 외환위기 이후 가장 강력한 구조조정을 겪은 기업은 대우그룹일 것이다. 대우그룹은 IMF 외환위기 이후 거대한 부실과 분식회계로 적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내몰렸다. 그룹 부채는 총 89조 원으로 추산되었으며, 분식회계만 해도 50조 원이 넘는 수준으로 정부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우중 회장은 1998년 1월 쌍용자동차를 인수한다. 그러나 부채비율이 이미 높은 쌍용자동차의 인수는 그룹 회생을 더욱 어렵게 했다. 결국 대우그룹의 회생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되자 정부는 그룹을 해체하고 회생가능성 있는 기업이라도 매각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한다. 1999년 8월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등 그룹의 주요 계열사가 채권단 관리 하에 워크아웃에 들어간다.
워크아웃 하에서도 대우자동차의 경영은 호전되지 못한다. 1999년 176.8조에 이르던 총부채는 2000년에는 223.3조에 이르면서 영업손실에 더해 자본잠식 상태에 들어간다. 정부는 1999년 12월, 대우자동차와 쌍용자동차를 해외에 매각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한다. 완성차 노조들은 해외매각이 실행되면 자동차산업이 해외 초국적기업의 하청기지로 전락하고 고용불안이 대두될 것으로 보아 반대한다.
이에 따라 완성차노조 대표들은 ‘자동차산업 정상화 및 해외매각 반대와 자동차산업 노동자 생존권 사수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12월 12일 공대위는 긴급대표자회의를 열고 해외매각이 아닌 공기업화를 기본방향으로 삼고, 재벌 및 해외 매각 반대 공동투쟁을 결정한다. 대우차노조는 2000년 3월 22일부터 선도파업에 돌입하고 쌍용차노조는 순환파업에 돌입한다. 완성차 노조는 4월 6일에 사상 최초로 공동파업을 전개한다.
2000년 6월, 첫 번째 국제입찰에서 70억 달러를 제시한 포드가 단독 우선협상업체로 선정되었지만 포드는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인수를 포기한다. 2000년 11월, 회사는 부도로 인해 법정관리에 들어간다. 12월부터 회사는 1차 희망퇴직을 접수한다. 2001년 1월 16일에는 생산직 2794명에 대한 정리해고 계획서를 노동부에 제출하고, 2월 16일에는 1750명에 대한 정리해고를 통보한다. 노조는 전면 파업과 공장점거에 돌입했으나, 2월 19일 대우차 부평공장에 공권력이 투입되어 파업 대오가 해산되고 공장에는 경찰병력이 상주한다. 노조 지도부는 산곡동 성당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한다.
민주노총은 2월 19일 긴급 산별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민주노총 정리해고 분쇄 투쟁 지휘부’를 대우차 투쟁 현지에 설치하고 모든 조직역량을 동원하여 대정부 투쟁에 나설 것을 결정한다. 이어 3월에는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을 기조로 정한다. 이는 대우차 투쟁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으로 규정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면 반대하는 투쟁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정세 인식을 배경으로 했다.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7월 5일 김대중 정권 퇴진과 구조조정 분쇄를 위한 ‘하루 정치 총파업’을 결의한다. 그러나 현대차노조가 간부파업만 진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실질적 총파업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거리투쟁을 비롯해 완강한 투쟁을 전개했지만, 대우차노조 간부들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하여 총연맹과 금속노조 간부들이 구속되고, 1750명의 정리해고가 강행된다.
포드가 인수를 포기한 후, 약 2년이 지난 2002년 4월 30일 GM이 자사의 순수 자금 4억 달러만 투자하여 대우자동차를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하면서 마침내 GM의 대우자동차 인수가 마무리된다. 한 때 포드가 70억 달러를 제안했으나, 결국 GM에 10억 달러 미만에 팔렸다는 사실은 헐값 매각 논란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정형찬, 2018). 정리해고된 노동자는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후 2002년 12월 최초로 300명이 복직하고, 2005년 복직희망자 1613명이 복직된다.
3) 정리해고 이후, 기업의 회복과 그 결과
사후적으로 보면, 현대차나 대우차 모두 정리해고자는 수년 내에 복직할 수 있었다. 구조조정 후 이들 대기업의 수익성이 빠르게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대마불사를 다시 확인했다고 할 수 있다. 대우차의 경우,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매각된 후 경영이 호전되었다. 그에 따라, 쌍용차, 대우조선, 한국GM 등 대기업이 경영위기에 처할 경우 대개 노동조합은 공적자금 투입을 요구한다. 물론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경영정상화는 하청, 중소기업에는 적용되지 않는, 대기업에만 가능한 방법이었다.
외환위기를 겪고 난 이후 살아남은 대기업과 조합원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격렬한 정리해고 저지 파업을 거친 이후, 대기업의 수익성도 다시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고용도 차츰 안정된다. 예를 들어 현대차는 기아차를 1999년에 인수하면서 자동차산업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2001년을 지나면서 경영도 정상화된다. 수출도 크게 늘어, 2009년이 되면 판매대수 기준 세계 5위로 올라선다. 노동자들의 임금도 빠르게 회복된다. 2011년에 이르면 현대자동차 조합원의 임금은 평균 연령과 성별을 고려할 때 조립종사자와 기능원은 말할 것도 없고, 전문가와 관리자 직종의 임금총액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 이른다(유형근, 2022).
그러나 현대차 정규직 조합원의 고임금은 노동계급 내부의 임금격차와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임금격차는 특히 자동차산업의 가치사슬을 구성하는 원하청 거래관계에 따라 체계적으로 발생했다(유형근, 2022). 현대차는 생산량이 다시 늘 때 정규직 채용은 최소화하고, 자동화와 사내하청 혹은 모듈 생산을 통한 외주화를 확대한다. 원하청 임금격차의 증가와 함께, 정규직 고용의 최소화, 비정규직화(외주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이중노동시장 구조가 외환위기 전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로 떠오른다.
4. 정리해고 저지 투쟁 평가의 쟁점
재벌 대기업에서도 정규직 노동자의 정리해고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현대차와 대우차 정리해고는 그 후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고, 노동운동에 여러 어려운 문제를 남겼다.
정리해고가 대기업노조 조합원에 남긴 직접적인 결과는 “있을 때 벌자”는 정서였다. 그에 따라 조합원들은 시간 외 근무 수당을 위해 물량 확보 경쟁에 나섰다(박태주, 2014).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을 지키기 위한 안전판으로 비정규직 사용도 용인된다. 2000년, 현대차노조는 사내하청 투입을 16.9%까지 인정하는 내용의 ‘완전고용보장합의서’를 체결한다. (이후 사내하청 노동자의 실제 비율은 더 증가한다.) 1천여 명에 달하는 무급휴직자를 조기 복직시키기로 한 합의에 부가된 조건이었다.
기업 구조조정, 정리해고는 노동운동이 어떤 요구를 제기해야 하냐는 문제를 숙제로 남겼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문제는 몇 년 후, 2009년 쌍용차,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현대차, 대우차 투쟁을 거치면서도 노동운동 내 합의가 형성되지 못했기에 비슷한 논란을 반복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자.
1) 정리해고제 철폐가 투쟁목표인가
정리해고는 1996~97년 총파업 투쟁의 핵심 쟁점이었고, 1998년 노사정 합의에서 가장 큰 반발을 불러왔던 사안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98년 2월,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법안(근로기준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민주노총 내 한편에서는 법을 재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완강히 이어나갔다. 이들을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가 정리해고제 철폐가 아니라 산별교섭이나 사회개혁 투쟁을 제시하는 것도 비판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정리해고제 자체를 반대하는 투쟁은 더 이상 실효성이 없고, 기업에 해고회피 노력이나 성실한 사전협의를 요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기업에 해고회피나 사전협의를 힘 있게 압박하기 위해서는 산업 수준의 공동대응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이 산별노조 건설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체로 전자가 전국노련 등 현장파, 후자가 한노사연 등 국민파와 산별연맹·노조 집행부가 취한 입장이었다. 후자 중에는 현장에서도 정리해고를 제한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경영참가와 교환하자는 주장도 있어 논란이 더 커졌다(조성재, 2008).
이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고용안정을 위한 투쟁이 어떤 방향을 택해야 하냐는 심각한 쟁점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전자의 입장은 자본이 정리해고제를 통해 손쉽게 고용을 조정하는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에 대한 원칙적 비판으로서는 의미가 있었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 고용안정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또 현실에서는 법 제정 이전에도 정리해고가 이미 시행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법원은 1989년 5월, 삼익건설 사건에서 정리해고의 요건을 ①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 ② 사용자의 해고회피 노력, ③ 공정한 기준에 따른 대상자 선정, ④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 대표와의 성실한 협의 등 4가지로 규정한 판결 이후, 이러한 기준이 법원 판례와 노동부 행정지침으로 통용되었다. 1991년 이후에는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를 해석할 때, ‘계속되는 경영 악화’,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구조조정, 기술혁신’, ‘업종전환’ 등까지 확장하는 판례가 쌓였다. 그에 따라 정부는 근로기준법에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것이 “그 동안 법원에서 인정해온 정당한 해고의 요건을 명시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에 반해, 노동계는 사용자가 소송을 비롯해 번잡한 절차 없이 노동자를 내보낼 수 있는 길이 열린 만큼 해고의 칼을 쉽게 빼들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정리해고제의 법적 도입 자체를 반대하거나, 설사 도입하더라도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를 매우 제한적으로 명시하는 방식으로 조문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파업을 불러온 1996년 12월 26일의 ‘날치기’ 노동법은, 그때까지 법원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를 점차 확대 해석하는 판례를 모두 법안에 담았다. 총파업 이후 1997년 3월 13일 다시 개정된 노동법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문구 외에 다른 조건을 모두 삭제하고 시행을 2년간 유예했다. 그러다가 노사정 합의 직후 1998년 2월 20일 개정된 근로기준법은 “경영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의 양도·인수·합병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는 분명히도 대기업 빅딜이나 해외매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따라서 정리해고가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법제화되지 않았더라도 현실에서 정리해고는 계속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노사정 합의를 통한 도입이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기대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법 개정을 통해 절차와 요건을 명시함으로써 사용자들이 번거로운 재판 없이 정리해고를 시행할 수 있었다. 심지어 법원은 이후에도 정리해고의 요건을 더 완화한다. 2002년 예술의전당 정리해고 사건에서 대법원은 ‘장래에 올 수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 인원삭감이 객관적으로 보아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도 ‘긴박한 경영상 위기’ 요건을 갖춘 것으로 인정했다.
이러한 조건을 볼 때,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에서 정리해고제를 합의해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정리해고제 자체를 철폐하는 투쟁을 전개하자는 일부 주장도 현실성이 없었다. ‘정리해고제 철폐’를 둘러싼 논란은 노동운동 내 논쟁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010년대 들어,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투쟁에서도 정리해고 문제가 부각되었고,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 요건을 강화하는 입법이 몇 차례 추진된다. 이러한 접근이 IMF 외환위기 당시에도 더 현실적이었을 수 있다.
2) 기업의 위기는 정리해고의 명분일 뿐인가
김영두는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을 평가하면서, 대우차의 경영상태는 이미 심각했다는 점을 인정하느냐는 문제부터 쟁점이었다고 지적한다(2001, 노동사회 52호). 그는 이 사태를 거대재벌의 한 핵심기업이 글로벌화한 자동차산업 경쟁체제에 대응하기 위해 막대한 외부 자본을 끌어와 글로벌 자동차 생산판매망을 건설하려 하다가 IMF 관리 체제하의 금융경색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위기로 치달은 사건으로 진단한다. 노조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인식하는 가운데, 고용은 최대한 방어하되 경영정상화를 핵심문제로 놓고 접근했어야 했지만, 당시 노조는 부도나 경영위기 상황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노조 측이 정리해고가 추진되는 상황에서도 고용보장을 고수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경영위기를 부인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러한 노조의 정세인식이 노조운동 전반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상급단체들도 대우차 투쟁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의 최전선으로 보고 비타협적인 기조를 유지하며 상반기 구조조정 투쟁을 대대적으로 확산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구조조정을 “신자유주의 정책”이라고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기업이 겪는 위기를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적절한 구조조정이 진행되도록 하되 이 때 파생되는 문제를 기업 울타리 밖에서, 즉 국가와 지역사회에서 해소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제시된 투쟁 평가에서, 현장파적 입장을 대표한다고 할 노동자의힘(준)은 대우차 사태의 본질이 부도처리를 무기로 노동조합에 구조조정 합의 각서를 종용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종류의 평가를 보면, 현장파는 경영상태에 관한 객관적 진단에는 관심이 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경영위기는 ‘명분’이었을 뿐이다. 또한 투쟁의 성과적인 측면으로 ‘공권력 투입을 통해 김대중 정권의 반민중성을 폭로한 것’도 강조하는데, 전국적 반신자유주의 투쟁전선 형성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우선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분명히 대별되는 입장을 볼 때, 접근 방향에서 확실히 쟁점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현장에서는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불가피할 수 있으며, 이를 인식하는 가운데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접근을 거부하는 정서적 반대가 상당히 컸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정서는 2020년 금속노조의 ‘고용안정기금’ 요구안 채택 논란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고용안정기금 자체가 해고를 수용한다는 함의가 있다며 고용안정기금 조성을 반대하는 주장이 결국 관철되었다.
그러나 당시 경영위기는 고용조정을 위한 허구적 명분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이었다. 구조조정에 성공해 살아남은 기업과, 그 기업에 속한 노조를 우리가 지금 접하다 보니, 당시 위기에서 사라진 노동자들을 잊기 쉽다. 그러나 1998년 당시 구조조정을 진행한 기업은 85%가 넘고, 전체 기업의 1/4이 정리해고를, 또 1/4은 명예퇴직을 진행했다. 절반 이상의 기업에서 고용조정이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라도 살아남은 기업도 있지만, 대우, 쌍용, 해태, 진로 등 30대 그룹 중 17개가 퇴출되었고 많은 계열사가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더 많은 중소기업과 하청 업체가 찍소리도 내지 못한 채 폐업했다. 외환위기 전인 1997년 2.6%이던 실업률은 1999년에는 6.3%까지 치솟았다. 기업체의 상용직 비율은 1997년 9월 32.8%에서 1998년 9월 31.1%, 1999년 9월 28.9%로 급격히 줄어든다. 반면 일용직 비율은 이 2년간 9.2%에서 12.1%로 크게 늘었다.
구조조정이 있는 기업에서 해당 기업 노조가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IMF 위기라는 조건에서, 노동운동이 그나마 노동조합이 조직된 대기업의 정리해고 저지 투쟁을 중심으로 대정부 전선을 형성하는 데 몰두하는 것이 타당했는지 비판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경영위기가 객관적으로 폭발한 기업에서 이를 부정하고 ‘정리해고 철폐’를 요구하는 투쟁은 승리한 사례가 없다. 일자리 나누기, 순환 휴직과 하청노동자 보호 등 다른 요구가 묻히기도 십상이었다.
나아가 총연맹과 산별노조(연맹)는 대기업노조와 달리 자신을 대변할 힘이 없는 노동자, 즉 구조조정이나 기업파산으로 실업자가 되거나 임시일용직으로 전락한 노동자를 조직할 계획이나, 관련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다방면의 활동과 노사정 협상에 더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노사정 협상과 무관하게 정부가 강행하려는 정리해고제를 수용하는 협상은 의미가 없었다. 그런 협상은 거부해야 했지만, 오히려 그 이후 전개되는 고용조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공동 투쟁 전선을 조직하는 것과 함께, 사회적 대책을 요구하는 노사정 협상을 병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로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결과적으로 보면,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제 도입을 위한 노사정 협약은 잠정 합의한 반면, 사회적 대책 마련을 위한 노사정 대화 채널은 거부한 셈이 되었다.) 경제위기가 계속되는 1998~99년에 주된 노조 투쟁은 기업별 구조조정 저지 투쟁이었으며, 이는 산별노조 전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업별 노조 운동의 관행을 바꾸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3)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투쟁 평가의 쟁점
민주노총은 2002년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대우자동차 투쟁에 대해 정리해고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해외매각(구조조정) 정책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사회정치적으로 쟁점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대우차 공투본 결성을 통한 국내외 연대 노력도 성과로 평가한다. 이와 함께 ① 신자유주의 핵심인 미국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련의 투쟁흐름을 만들어내는 데 미흡하였고, ② 대우차노조의 투쟁동력을 전 조합원으로 확대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전자, ①은 민주노총이 이 투쟁을 반미 투쟁으로 보고 반미, 반GM 연대전선을 형성하려 했던 노력과 관련된다. 금속노조의 평가에서도 해외매각 반대라는 기조를 반미투쟁으로 발전시키자는 입장과, 정리해고 철회 목표를 중점에 둔 입장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당시 민족해방파 활동가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침략이 노골화되는 상황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적 요구투쟁이나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반미 정치투쟁으로 발전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이상훈, 2001).
한편, 후자, ②는 정리해고 저지 투쟁이 정리해고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현실과 관련된다. 이른바 “산자-죽은자” 갈등은 이후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에서도 반복된다. 정리해고에서 제외된 이른바 ‘산자’는 투쟁이 조속히 마무리되어 조업이 정상화되기를 원하는 반면, 정리해고자를 일컫는 이른바 ‘죽은자’는 공장 점거투쟁을 통해 생산을 중단하여 사측을 압박하는 가운데 ‘산자’도 ‘죽은자’와 함께 정리해고 철회 투쟁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사측은 이러한 ‘산자-죽은자’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다양한 술책을 벌이고, 정리해고자의 편에 서서 투쟁하는 노조는 어려움에 처한다. 노조 집행부가 이러한 갈등을 최소화하고 ‘산자’가 동참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열어두기보다, 파업불참 조합원을 제명하는 식의 ‘원칙적 입장’으로 강경하게 대응할 경우 노동자 내부의 갈등은 오히려 심화된다(2009년 쌍용차 투쟁, 금속노조쌍용차지부·한내, 2010).
한편, 대우차 처리를 둘러싸고 공기업화 요구라는 쟁점이 부각된다. ‘자동차산업 정상화 및 해외매각 반대와 자동차산업 노동자 생존권 공동대책위원회’(금속연맹 완성차 4사 대책위)는 해외매각은 한국 자동차산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대안으로 공기업화를 주장한다. 산업은행이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지방정부나 협력업체를 포함한 컨소시엄이 실질적 대주주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제시했던 김성구(2007)는 (전술적) 국유화를 통해 “국유기업을 이윤생산이 아니라 대중들의 통제 하에 대중들의 필요에 복무하도록 그 성격을 전환”시킬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도 해외매각을 반대하면서 ‘공기업화를 통한 사회화’가 대안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당시 공적 소비재와 구분되는 사적 소비재인 중소형차 시장에 대해서도 공기업화를 통해 준(準)독점을 형성해야한다고 요구했다. 경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공적자금 투입과 이후 지분매각이라는 일시적 국유화보다 더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일시적 국유화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 정부도 GM 등에서 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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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한 ‘공기업화’가 (자본주의를 지양한다는 의미에서) ‘사회화’로 가는 유력한 경로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은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기업 소유를 국가로 이전한다고 하여 곧바로 자본-임금노동이라는 생산관계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공기업화와 민주적 경영통제를 결합하면 사회주의 이행의 감제고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왜 이미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공기업은 이행의 감제고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기만 하면 그 조건이 충족되는가. 이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면, 1970년대 영국 노동당 ‘벤 좌파’의 ‘대안경제전략’(Alternative Economy Strategy, AES)과 1980년대 초 프랑스 미테랑 사회당 정부의 국유화 정책을 살펴보아야 한다.
영국 노동당의 AES는 철강산업을 비롯해 수익성이 하락한 민간 기간산업 부문을 ‘국가지주회사’ 형태로 국유화하면서, 고용을 유지하면서도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찾고자 했다. 1970년대 집권한 노동당은 재정확장에 친화적이었으나, 1974년부터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자 재정 지출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상매입 방식을 기본으로 하는 국유화는 검토 단계에서 중단되었다. 1976년, 외환위기가 전개되자 거시경제 안정화가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고, 재정확장과 수입통제를 결합한 AES는 부활할 기회를 잃었다. (AES는 무역자유화의 매개체인 유럽연합 탈퇴를 조건으로 했는데, ‘탈세계화’를 전제로 한 전략이 지금도 유효하냐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1981년 집권한 프랑스 미테랑 정부는 금융기관과 6개 제조업 대기업그룹을 국유화하고, 9개 그룹의 지배지분을 확보한다. 그러나 이는 상당한 재정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국유화된 공기업은 국제적으로 상업적 생존력을 획득해야 했다. 이들 기업이 프랑스 무역수지를 좌지우지하는 핵심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업들은 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국가의 재정투입에 의존해야 했으나, 정부도 무한정 재정을 투입할 수는 없었다. 기업은 국제경쟁이라는 무대에서 재무 실적을 개선해야 했기 때문에 고용창출이나 종업원 참여와 같은 개혁적 의제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후임 정부가 추가 국유화 계획을 중단하거나 재사유화를 추진할 때, 사회당은 강력한 반대에 나설 수 없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을 공기업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후 대우해양조선 처리과정에서도 다시 부각되기도 한다(박용석 외, 2020). 그러나 대우조선해양에는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된 끝에 결국 2023년 한화그룹에 매각되어 ‘일시적 국유화’의 사례가 되었다. 대우조선해양은 대우그룹이 무너진 이후인 2001년부터 대주주(지분 55.7% 보유)인 산업은행의 관리 체제 아래 하에서 총 13조 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그러나 매각되는 2023년까지 20년이 지나도록 경영정상화는커녕 추가적인 공적자금 투입이 필요한 상태였다. 대우자동차의 공기업화가 이와 달랐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국유화라는 대안이 제시되는 제조업 기업은 모두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주는 대기업들뿐이었기 때문에, “대마불사”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이들은 ‘기간산업’으로 간주되었다.) 재정을 투입하여 국유화하고 고용을 유지하는 옵션은 중소영세, 하청기업에는 적용될 여지가 애초에 없었다.
5. 공공, 금융부문의 구조조정
1) 공공, 금융부문의 구조조정
1998년 중반 들어 금융·기업·공공·노동 부문에서 고용조정을 포함한 4대 부문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관련 노동조합들의 투쟁이 전개된다. 애초 공공부문 민영화와 구조조정은 1998년 IMF 구제금융 협약 이후 본격적으로 쟁점이 되기 전에도, 1995년 당시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한국통신 민영화를 추진했지만, 바로 출발점에서부터 실패를 경험한다. IMF 외환위기는 민영화 정책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준 셈이며, 김대중 정권은 이를 집행했다.
가장 먼저 구조조정 대상이 된 금융기관의 노동조합이 투쟁을 전개한다. 금융감독원은 6월, 민간 부실기업의 퇴출을 결정한다. △ 동화, 대동, 동남, 경기, 충청 등 5개 은행은 퇴출하고 △ ‘조건부 승인’을 받은 은행은 정상화하며, △ 서울, 제일 은행은 매각하고, △ 4개 부실 보험사는 3개월간 영업을 정지한다. 인수합병 과정도 고용을 보장하지 않으며 상당수의 인원이 해고되는 식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노총 금융연맹는 국민-주택은행 통합반대 파업을 비롯해 구조조정을 막기 위한 투쟁을 전개한다. 이 투쟁을 거치면서 금융연맹은 2000년, 한국노총에서 거의 유일하게 산별노조(금융노조)로 전환한다.
공공부문의 구조조정도 본격화된다. 기획예산처는 7~8월에 걸쳐, 포항제철, 한국중공업, 국정교과서 등을 1차로, 한국통신, 한국전력공사, 한국가스공사 등을 2차로 하여 16개 공기업을 민영화(지분매각)하는 계획을 발표한다. 민영화 외에도 조직과 인력을 슬림화하고 정원과 현원을 10% 이상 감축하도록 했다. 기관별로 평균적으로 20%의 인력을 감축하는 계획이었다. 정부의 인원감축정책에 따르면, 1998년 현재 14만 3000여 명의 인력에 대해 2000년 말까지 20.1%를 감축할 예정이었으나 1998년에 이미 총 1만 614명의 감축 목표를 넘어 1만 3378명을 감축한다(오건호, 1999). 1998년에 4.1%, 1999년에 4.5%에 달하는 인건비 삭감이 있었고 복리후생도 상당히 줄어든다. 그러나 공공기관의 기존 업무가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인원 감축은 무리한 것이었다. 결국 이는 광범위한 외주화,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확대를 동반한다.
2) 본격화되는 공공부문 노조의 구조조정, 민영화 저지 투쟁
정부의 구조조정 방안이 발표되자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투쟁계획을 수립하고 두 노총의 공동투쟁 기구도 구성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8년 7월 23일 노사정 합의로 총파업은 일단 유보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강행하자, 노동조합의 투쟁도 본격화된다. 민주노총 내 공공부문 산별연맹(공익노련, 민철노련, 공공연맹)은 1999년 3월,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연맹’(공공연맹)으로 통합하고, 곧 서울지하철노조 등을 시작으로 공공부문 연쇄파업 투쟁을 전개하기로 한다. 4월 19일 서울지하철노조와 데이콤노조 등 17개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다. 서울지하철의 경우, 정원 대비 30% 수준의 인원 감축안을 서울시에 보고할 정도로 대규모의 인력 감축과, 이에 따른 근무체제 개편과 외주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서울지하철노조의 파업은 일주일 넘게 이어졌는데, 사업장 특성상 짧게 진행되곤 했던 과거 파업에 비해 상당히 길었다. 그러나 한국통신노조가 파업을 유보하면서 서울지하철의 파업도 종료된다. 이후 대규모 징계, 해고가 이어졌고, 이 해고자들의 복직이 오랫동안 노사 간에 쟁점으로 남게 된다. 당시 민영화, 구조조정 저지 투쟁에 나섰던 다수의 공공부문 노조에서 이러한 상황이 반복된다.
이 해 9월에는 인원감축, 구조조정에 반발하는 조폐공사노조의 파업도 있었다. 회사 측이 폐쇄하기로 결정한 옥천창(공장)에서 진행된 파업은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약 한 달 만에 종료된다. 검찰이 파업을 일부러 유도했다는 발언이 다음 해에 나오면서 ‘조폐공사 파업 유도 사건’이 불거진다. (파업 당시 대검 공안부장이던 진형구는 기자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구조조정 반발을 사전에 제압하기 위해 국가가 파업을 유도한 후 진압하여 ‘본보기’를 보이려 했다고 말했다.) 결국 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리면서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정부의 공안 기구들이 ‘관계기관 대책회의’라는 방식으로 대규모 노사 갈등에 직접 개입하는 행태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러한 개입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 등 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된다.
한국노총도 정부의 구조조정에 반발했고, 전력노조, 체신노조 등이 투쟁을 벌였다. 특히 전력노조는 정부의 한전 분할매각 방침을 철회시키기 위한 투쟁을 민주노총 공공연맹과 함께 진행한다. 그러나 2000년 12월까지 구조개편 저지 투쟁을 전개하던 전력노조가 투쟁을 중단하고 전력산업구조개편법이 국회를 통과하게 된다. 이후 한전의 발전부문이 분사되고 화력발전 5개 사에서는 소산별노조인 발전노조가 설립되어 민주노총(공공연맹)에 가입한다. 결과적으로 한전과 6개 발전 자회사를 분할하는 결과는 막지 못했으나, 이러한 흐름은 2002년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를 위한 철도, 발전, 가스 3개 조직 공동파업으로 이어진다. (파업 당시 철도, 가스 노조는 한국노총 소속이었으며 양대노총이 민영화 저지 공투본을 구성했다). 2001년 10월에는 공공연맹 주도로 ‘국가기간산업민영화(사유화)저지 공투본’이 결성된다. 발전노조, 한국전력기술노조, 지역난방공사노조, 고속철도노조(이상 공공연맹), 철도노조, 가스공사노조(이상 한국노총) 등이 참여한다. 철도노조의 경우 1980년대 말부터 계속된 노조 민주화 투쟁의 결과, 위원장 직선제를 통해 2001년 최초로 민주파 집행부(김재길 위원장)가 선출된 상태였다. 이후 2002년 2월 25일 3개 조직이 파업에 돌입한다. 현안이 상대적으로 덜 시급했던 가스공사노조가 공동파업 하루 만에 노사합의를 통해 파업을 종료하고, 철도노조도 노사합의에 따라 3일 만에 파업을 끝냈다. 그러나 발전노조는 38일에 걸친 장기파업을 전개한다. 파업은 조합원들이 전국에 산개하는 방식을 취한다. 정부는 끝까지 민영화와 같은 정부 정책이 교섭, 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파업은 4월 2일, 민주노총의 연대 총파업을 몇 시간 앞두고, 민영화 여부에 대한 특별한 합의서를 남기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단병호 위원장이 구속 수감된 상태에서 허영구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4·2 총파업을 선언했다가 총파업 당일 노정합의에 따라 이를 철회하면서 후유증을 겪었다. 4월 3일 민주노총 투본 대표자회의는 합의안 폐기와 함께 민주노총 임원진 전원 사퇴를 결정했다. 이에 따라 수감 중이던 단병호 위원장을 제외한 전 집행부가 사퇴했다. 이후 백순환(금속연맹 위원장) 비대위원장 체제를 거친 후 위원장을 제외한 임원 보궐선거를 실시해 새로 당선된 유덕상 수석부위원장이 직무대행을 맡게 된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철회가 이 정도로 큰 후폭풍을 낳았다는 현실은 당시 노조운동 전반이 그만큼 발전노조의 파업에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파업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후 민영화에 대한 국민 여론이 나빠지고, 외환위기도 종료된 상황에서, 이어서 집권한 노무현 정부는 민영화를 더 강행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공공부문의 지배, 운영구조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소프트웨어 구조조정으로) 전환한다.
한편, 한국통신 사례를 보면, 노조가 2000년 12월 파업을 전개하지만 민영화는 강행된다. 노사는 강제 명퇴 중단 등을 합의했으나 민영화 자체는 진행되어 2002년에 민영화가 완료된다. 민영화 이후에도 인력 구조조정이 강도 높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노사협조주의적 노조 집행부가 계속 집권하고 2004년에는 공공연맹을 탈퇴하고, 2009년에는 민주노총도 탈퇴한다.
참여연대 등 시민운동은 1990년대에는 공공부문 민영화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관치 반대). 그러나 이들 투쟁을 경과하면서 민영화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정리한다.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라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면서, 이후 공공부문 노조는 각종 구조조정에 대해 (때론 과장되게) ‘민영화 반대’라는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공공부문 중 민영화 반대 투쟁을 거친 사회간접자본(SOC)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투쟁을 이어가며 정치적 성격을 강화한다.
한편, 2002년 철도, 발전, 가스 등 공기업노조는 민영화 저지 투쟁 과정에서 ‘노조민주화’를 추구했고, 민주노총에 가입했다. 이에 따라, 전투적인 SOC 공기업 노조가 민주노총 공공부문(공공연맹)의 주요 부문을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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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영화 반대 투쟁의 결론으로서 사회공공성?
공공부문 노동운동의 민영화 반대 투쟁과, 외환위기 이후 급격한 고용위기 속에서 사회보장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는 “사회공공성 강화”라는 구호로 종합되었다. 민주노총은 철도·발전·가스 공동파업 이듬해인 2003년 활동목표로 ‘사회공공성’ 의제를 채택하고 산하에 사회공공성 강화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한다. ‘사회공공성’은 처음 제기했던 오건호에 의해 아래와 같이 정의되었다.
“현대자본주의에서 사회적 필수서비스들이 신자유주의 시장화 공세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공공성운동은 사회적 필수서비스를 공급하는 영역을 ‘시장화·이윤화’ 공세로부터 지키고, 나아가 확장하는 운동이다. 사회공공성은 ‘탈시장화·탈이윤화’로 정의될 수 있다. 협의로는 사회복지, 기간산업서비스 등 경제적 부등가교환 부문, 광의로는 언론, 문화 등 이데올로기(상부구조) 영역도 포괄한다”(오건호, 2008b) 또한 “사회공공성은 ‘필수서비스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보편적 접근성’으로 정의”(오건호, 2008a)될 수 있다.
사회공공성 운동은 민주노총 설립 초반부터 진행해온 “사회개혁 투쟁”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주노총의 사회개혁 투쟁은 의료보험 통합운동 등 예외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크게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민주노총 1기 집행부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 계급적 원칙에 불철저한 운동이라는 노선적 비판도 겹쳐, 조직 내에서 크게 확산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다(오건호, 2005). 그러나 ‘사회공공성’은 2000년대 초반을 거치며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운동에서 전반적으로 운동 노선으로 수용된다. 2002년 시작된 한국사회포럼에서도 사회공공성 강화가 주요 과제로 제시되고, 민주노총을 포함해 문화연대, 사회진보연대 등 사회단체들은 “세계화, 시장화를 넘어 사회공공성 운동으로”라는 제목의 공동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이 토론회 제목은 이 운동의 지향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오건호(2005)는 “시장화, 이윤화에 대항하는 투쟁”이라고 정의한다.
사회공공성 운동 담론은 공공부문 노조들이 특히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공공부문 노조가 외환위기 이후 민영화, 구조조정에 대응하는 투쟁과정에서 국민적 여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체감한 것도 그러한 태도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노선이라고 하기에는 “사회공공성”이라는 개념과 그 구체적 내용은 여전히 모호했다.
사회공공성론은 자본주의하에서 공공부문의 지속적 확대를 통해 시장을 일정하게 통제하고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유럽 사민주의 모델을 한국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모델은 1950~60년대 성장기에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정점에 이른 후, 자본주의의 위기와 함께 점차 쇠퇴를 겪었다. 이는 장기저성장 국면으로 나아가는 2000년대 한국에서는 반복되기 어려운 길이었다. 전기, 가스, 수도와 같은 필수재, 혹은 건강보험, 공공의료 등 ‘필수서비스에 대한 사회구성원의 보편적 접근성’, 이를 위한 공공부문의 강화라는 의미의 사회공공성(오건호, 2008a)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제기된 정세적 과제로 여전히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1970년대 말 이후 (한국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이론, 정책, 전략, 이데올로기의 종합인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대안이라고 말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6. 정리해고 폭풍 이후: 노동시간 단축과 주 5일제 도입 요구
정리해고, 구조조정의 폭풍이 지난 이후, 노동운동은 유사한 사태를 막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한다. 그 중에 노동시간 단축(주 5일제) 도입이 대표적이었다.
민주노총은 1998년 노사정 합의와 파기, 총파업을 거치면서 제시한 ‘5대 요구안’에 ‘주 40시간 법정근로시간제’를 포함한다. 노동시간 단축에 따라 일자리를 나누면 대량해고를 피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민주노총이 1999년 2월 노사정위를 탈퇴하면서 결의한 ‘4대 투쟁요구’의 핵심은 역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문제였지만 노동시간 단축도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1999년 서울지하철노조 파업을 비롯해 구조조정 저지 투쟁으로 노정대립이 격화된 상황에서 이 요구가 우선 순위를 차지하기는 어려웠다.
2000년 들어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하자, 노동운동은 구조조정 반대투쟁을 중장기적 과제로 전환하고 이른바 제도개선 투쟁을 전개한다. 민주노총은 핵심적으로 ‘주5일제 근무’(주40시간제) 실시를 요구한다. 한국노총이 복귀한 노사정위원회는 ‘근로시간단축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는데, 노동시간 단축 문제를 변형근로시간제 및 파견제 확대와 휴가 휴일 조정 등 노동유연화 정책과 연계하는 방식으로 논의구도를 형성했다.
그런데 이때 민주노총의 노동시간 단축 요구(2000년 대정부 요구안)에 담긴 취지가 바뀌기 시작한다. 즉 민주노총은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를 줄여 노동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주5일제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8~99년에는 해고를 막고 일자리를 나누기 위해 이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실과 비교할 때, 그 취지와 달라졌다. 노사정위 논의 과정에서 주5일제가 일자리 나누기와 사실 무관하고, 휴일 휴가제도의 개편과 변형근로시간제 확대 등 노동유연화를 병행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 만큼, 오히려 ‘삶의 질’과 같은 다른 명분이 필요했다고도 볼 수 있다(이현, 2004).
2001년 재선된 단병호 위원장 집행부는 ‘노동조건 후퇴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새로운 기조를 제시한다. 대우차 해고와 폭력 탄압으로 노정관계가 악화되면서 민주노총이 김대중 정권 퇴진 구호마저 제기한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주5일제를 노사정위에서 조속히 처리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따라 제출된 노사정위 공익위원안은 경총이 요구한 노동유연화 사항을 대폭 수용했다.
또한 주5일제가 법 개정 이전에도 이미 대기업(정규직) 중심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2002년, ‘중소 영세 비정규직 희생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기조를 새로 제시한다. 법 개정이 본격화되자 주40시간제는 노동유연화를 병행한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자 민주노총은 2003년, ‘근로기준법 개악 저지’로 또 다시 투쟁기조를 변경한다.
2003년 국회 환노위원들과 진행된 협의에서 상임위원장이 조정안을 제출한다. 민주노총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총파업 집회를 열고 있는 상황에서 이 조정안에 기반한 개정법이 본회의를 통과한다. 애초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를 나누어 해고를 최소화하자는 취지로 제시된 요구였다. 그러나 여러 번의 기조 변화를 거쳐 결국 법 개정 반대 투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개정된 근로기준법은 법정 노동시간을 주40시간으로 단축했지만, 주5일제를 명시하지 않았고 다양한 근무형태가 가능하게 했다. 탄력근로제는 3개월 단위로 확대되었다. 선택적 보상휴가제가 도입되고 월차유급휴가는 폐지되고 연차휴가 조정과 사용촉진제가 신설되었다. 생리휴가는 무급화되었다. 대기업의 정규직 노조는 기존 단협을 유지하면서도 개정 근기법 중 후퇴된 조항의 적용을 막는 방식으로 주5일 근무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다수의 중소영세 사업장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2000년대 초반, 민주노총의 성과로 알려진 노동시간 단축은 상당한 혼란과 우여곡절을 겪었다. 민주노총도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리라 예상하지는 못했다. 노동시간 단축이 필연적으로 노동시간 유연화(신축화)와 연결될 것이라는 인식이 분명치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라는 민주노총의 목표는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시간 유연화를 교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후로도 노동시간 단축이 추진될 때마다 노동시간 유연화 정책은 항상 동반된다.
7. 비정규직 투쟁: 금속과 공공, 화물연대를 중심으로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가 확대되고, 비정규직에 대한 우선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여러 투쟁이 촉발된다. 1999년 학습지 노동자, 골프장 경기보조원 등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화가 시작된다. 2000년에는 이랜드와 롯데호텔, 한국통신 계약직노조, 서울상용직노조 등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이 본격화된다. 2001년 광주 캐리어 사내하청 노동자의 노조 결성 투쟁과 레미콘 노동자의 투쟁이 전개되고, 화물연대 조직화도 시작된다. 이 시기의 비정규직 투쟁 중에서 특히 금속 부문의 불법파견 투쟁과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 그리고 화물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을 살펴본다.
1) 금속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
먼저, 금속부문의 사내하청 노동자의 투쟁은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본격화된다. 구제금융 협약 직전 기아차가 경영 위기를 겪을 때, 아시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 후 1998년부터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를 필두로 INP,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신호제지 등 여러 기업에 속한 사내하청 노동자의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2001년 광주 캐리어, 2003년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를 비롯해 금속부문 자동차 업종을 중심으로 대공장 내 사내하청 노동자의 노조 결성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이상호 외, 2011).
금속노조의 대표적인 비정규직 투쟁이었던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투쟁을 살펴보자. 현대차 사내하청 운동의 역사는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2003년 비정규직 노조 결성부터, 2009년까지 이어진 시기다. 이때는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고 투쟁이 전개되지만 요구를 쟁취하지 못한다. 투쟁의 성쇠에 따라 조합원 규모도 요동쳤다. 두 번째는 2010년 법원 판결을 계기로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다시 활성화된 시기다. 세 번째는 노사협상이 최종 마무리된 2014~16년 시기다(유형근, 2022). 일단 이 글에서는 첫번째 시기를 살펴본다.
2003년, 현대차 아산공장 식칼 테러 사건을 계기로 현대아산 사내하청 노조가 세워진다. 울산에는 현대자동차비정규직 노조가 출범한 직후 500명이 넘는 조합원이 가입한다. 2004년, 다수의 생산공정에서 불법적인 파견근로가 활용되고 있다는 노동부 판정이 나온 후, 불법파견 의제가 본격적으로 떠오른다. 금속노조도 임단협에서 “불법파견 근절과 직접고용쟁취, 사내하청 조직화 실천”을 주요 목표로 설정한다. 2005년부터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는 ‘원하청 연대회의’를 결성하고 공동 대응을 모색한다. 그러나 현장동원력을 확보한 비정규직 노조는 2006년 들어 독자적인 현장투쟁과 현대차 사측(원청)과 독자, 직접 교섭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정규직노조와도 갈등을 빚는다. 현대차 사측은 정규직노조도 함께 참여하는 것을 조건으로 특별교섭 요구를 수용한다. 2006년 9월, 노조는 46개 사내하청 업체와 함께 기본협약을 체결한다. 그 후 2010년 대법원이 소송을 제기한 불법파견 노동자(최병승 조합원)가 정규 직원이라고 인정하는 판결을 내릴 때까지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은 소강국면에 접어든다.
제조업 대기업에서 사내하청 방식의 외주화는 이미 오랜 역사가 있고, 이에 항의하는 노동조합의 투쟁도 존재했다. 1970년대부터 사내하청(사외공) 노동자가 상당 규모로 도입된 현대중공업에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사내하청 노동자를 포함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1990년에는 투쟁을 통해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대거 직접고용으로 전환한다. 그러나 회사 측은 사내하청 노동자를 꾸준히 새로이 고용한다. 현대차의 경우, 1990년대 전주, 아산 등 신공장 건설 과정에서 신규 고용에 사내하청을 대거 활용한다(손정순, 2009). 한때 사외공의 직접 고용을 관철했던 현대중공업 노조를 보면, 2000년대 초반, 노조의 보수화 경향이 뚜렷해지고 정규직노조가 사내하청 노동자의 증가를 묵인하기에 이른다. 2003년에 조직된 사내하청 노동자의 독자 노조도 정규직노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결국 2004년 사내하청 노동자인 박일수 열사의 분신 이후 이 투쟁을 비토하던 현대중공업노조는 금속연맹에서 제명된다. 현대중공업노조가 금속노조에 다시 가입하는 것은 12년이 지난 2016년에 이르러서다.
물론 1990년대 외환위기 이전에도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은 간간히 터져나온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사내하청이나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동하는 게 어렵기는 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1992년을 보면, 대기업으로 이동하는 상향 이동률이 37.4%, 중소기업으로 가는 하향이동률이 29.3%로, 상당히 빈번한 이동이 있었다(요코타 노부코, 2020).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이직을 선택하는 식으로 불만을 해결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원청 사측이 다수의 하청 업체를 주도적으로 신설하며 사내하청 노동자가 급증하며, 원청사에서 정규직 채용을 거의 중단하면서 고용 이동도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1998년, 노동계가 반대하던 근로자파견법이 제정되면서 직접생산공정업무는 근로자파견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미 존재하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파견을 다툴 수 있는 법적 조건이 형성된다. 파견법 제정 이후 2000년 경부터 불법파견 문제를 매개로 투쟁을 조직하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하고, 2003년에 이르러 현대자동차에서도 사내하청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이다.
최종적으로 2016년 현대차 노사합의를 통해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 투쟁의 목표는 ‘현대차 정규직 되기’였다. 불법파견 투쟁은 그 성격상 원청사의 정규직 직원 지위를 인정받는 투쟁이다. 현대차와 같은 대기업에서 불법파견 투쟁은 정규직화가 가져올 경제적 혜택이 워낙 크기 때문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런데 정규직화 요구는 그 외에 다른 모든 활동, 즉 정규직과의 차별 철폐, 노조의 조직확대, 노조 일상활동과 교육, 원하청 연대의 심화 등등을 압도했다(유형근, 2022).
불법파견 투쟁은 비정규직 노조의 성패를 사법부 판결에 종속시키는 효과를 불러왔다. 그뿐 아니라, ‘1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화’가 운동의 최종 목표가 되게 했다. 같은 공장의 2, 3차 하청이나 부품사에 속한 노동자들과의 연대는 시야에서 사라졌다(유형근, 2022). 2015~16년, 비정규직 노조들은 정규직 전환 교섭에서 전환 대상자를 조합 가입자로 한정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정규직 노동자와의 연대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지만 상당히 불안정했다. 2005년에는 정규직과 “공동요구, 공동투쟁, 공동합의”인가, “비정규직 독자 요구, 연대 투쟁”인가라는 쟁점이 불거진다. 이는 2007년 이후 정규직노조와 통합 여부를 둘러싼 ‘1사 1조직’ 쟁점으로 이어진다. 비정규직의 독자적인 요구와 투쟁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정규직과의 공동행보는 후순위 고려사항이 된다. 이들은 정규직노조가 공동요구로 채택하기 어려운 급진적인 요구, 예를 들어 정규직 전환, 임금인상과 같은 요구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한편, 공공부문에서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정규직 우선 해고가 광범위하게 벌어졌고, 이에 저항하며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진다. 한국통신 계약직노조(2000~02), 서울지역상용직노조(1999~2000, 2006), 경기도노조(2000~06), 근로복지공단비정규직노조 및 이용석 열사(2003), 경찰청 고용직(2004), 산업인력공단(2004) 파업이 이 시기의 주요 투쟁이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은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았다. 2003년 공공부문 구조조정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새로 집권한 노무현 정부는 민영화는 멈추되 내부 구조조정을 진척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비정규직도 증가하고 투쟁도 촉발되었다. 실제 2003년 노동시장의 변화를 살펴보면, 비정규직 증가를 선도한 것은 공공부문이었다(김유선, 2004). 그 결과 2004년 이후 정부는 일련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수립한다(2004년 1차, 2006년 2차 대책 발표).
3) 비정규직 투쟁의 쟁점
금속산업에서는 불법파견이 비정규직 운동의 핵심으로 떠올랐다면, 공공부문에서는 “비정규직 차별철폐냐”, “비정규직 철폐냐”라는 쟁점이 크게 부각된다. 사실 ‘비정규직 철폐’는 비정규직 고용을 가능케 하는 일련의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고, 특정 기업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정규직화) 요구와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비정규직 철페’와 ‘정규직화’는 마치 똑같은 말인 것처럼 통용되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토론회에서 김태현(2001)은 이 논쟁에 관해, “비정규 노동운동은 정규직 전환이 필요한 비정규 일자리의 정규직화 요구를 한 축에 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정규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철폐를 목표로 내세우는 이원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비정규직 철폐’만 외치는 것은 관념적이라고 비판한다. 비정규직 형태가 다양한 만큼 고용개선을 위한 접근 방법도 다양할 수 있는데, 비정규직 철폐만 고수한다면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고용개선 경로를 가로막고, 정규직-비정규직 연대가 진척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닫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배규식, 김유선(김태현, 2001에 대한 토론)은 한국통신 사례를 검토하면서, 사용자의 외주화 전략도 비판해야 하지만, 정규직 노조가 동의한 정규직 연공급과 고임금도 외주화와 심각한 임금격차의 한 가지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정규직노조가 고임금을 자제하면서 임금격차를 줄여야 외주화를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요구는 적절치 않으며, 오히려 비정규직 보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김유선은 산별교섭 체계 도입을 서둘러야 하며, 초임 수준 등 기본임금 수준을 끌어올리고 직무급을 표준화하는 방식으로 비정규직 보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김혜진(2002)은 구조적인 노동권 말살을 비판하면서,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한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자들의 고용형태를 중층화하고 차별하는 것에 맞서 모두의 권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김혜진, 2017).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비정규직 고용형태를 인정하는 가운데 차별을 축소,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 고용형태를 철폐하는 것이 올바른 투쟁방향이 된다. 노동자의힘은 투쟁의 목표가 “[노동법] 개악안 저지에 갇혀서는 안 되며, 파견법 철폐투쟁, 비정규직 철폐투쟁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노동자의힘, 2004). 당시 이와 유사하게 접근했던 사회진보연대도 “파견근로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 나아가서 근로자파견법의 철폐를 요구”하는 투쟁을 통한 조직화를 강조하면서(사회진보연대, 2000), “비정규직 관련 개악의 핵심은 비정규직의 제도화에 머무르지 않고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직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에 대한 투쟁을 강조하면서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우선 과제라고 간주했다(사회진보연대, 2002).
이러한 논쟁 구도는 똑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이후에도 종종 반복된다. 물론 당시 논쟁은 어떤 구호를 제시할 것이냐는 문제로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차별철폐”보다는 “철폐”(정규직화) 슬로건이 더 원칙적이라는 판단이나, 임단협에서 최초 요구안을 강하게 내고 진행 과정에서 요구안을 조정하는 전술처럼, 일단 가장 강력한 “철폐”(정규직화) 요구를 제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실용적 판단도 더해졌다.
그러나 돌이켜볼 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요구는 무엇보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에 기여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렇다면 단결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임금, 노동조건의 격차를 축소하는 과정이 일차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물론 일부 대기업, 공공부문의 기간제, 불법파견 사내하청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는 정규직 전환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요구를 제시하려면, 기업을 넘어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고 임금격차를 축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산별(초기업) 교섭을 통한 연대임금의 실현이다.
다시 말해, 양자의 입장 모두 기업 내에 초점을 맞추어, 즉 기업 내 정규직을 비교대상으로 삼아 정규직화나 차별축소 등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볼 때, 결과적으로 같은 패러다임을 공유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출현한 비정규직 노조 역시 주로 정규직 노동자가 이미 조직된 사업장에서 기업별로 조직되었다. 이들에게는 노동조건이나 고용에서 비교 대상인 정규직 노동자들이 눈앞에 존재했다.
그러나 그런 기업에서 정규직 전환을 목표로 한 기간제, 불법파견 사내하청 노동조합의 지향점은 그 외부에 있는 중소영세사업장, 특수고용, 그리고 이들과 구분되기 어려운 영세자영업자 등 더 많고 불안정한 노동자들이 추구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이들 부문에는 ‘비정규직 철폐’(정규직화)를 요구할 대상, 즉 특정할 수 있는 사용자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대기업, 공공부문의 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형태로 이들을 ‘정규직화’한다는 것은 기존 경제, 산업구조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차별철폐’라는 구호 역시 차별 여부를 비교할 정규직 노동자의 대상조차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산별교섭을 통해 초기업 임금체계를 형성할 경우 차별철폐는 의미있는 요구가 될 수 있었겠으나, 2000년대 초반에 이런 접근 방식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비정규직 투쟁을 둘러싼 쟁점은 2005~06년 “비정규직 보호법”에 관한 논쟁을 거쳐 2010년대에도 이어진다.
4) 특수고용노동자: 화물연대 조직화와 투쟁
한편, 금속산업과 공공부문에서 정규직 전환을 목표로 하는 비정규직 운동과는 다른 양상을 띠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도 진행되고 있었다. 화물, 건설, 학습지교사, 골프장캐디 등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들이었다. 특히 2003년 큰 투쟁을 전개한 화물연대 사례를 간단히 살펴본다.
1999년 산별노조로 전환한 전국운송하역노조는 2002년 위수탁 노동자와 지입 노동자 등 비정규 화물 노동자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그 해 6월에 ‘화물노동자공동연대 준비위’를 구성한다.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동자성’에 관한 법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우선 ‘준조합원’으로 조직화를 시작했다. 즉, 합법성과 관련된 논쟁으로 역량을 소진하기보다는 법률적 제한을 우회하여 ‘조직화 → 투쟁 → 합법화 쟁취’라는 경로를 취하기로 판단했다(윤영삼, 백두주, 2008).
운송하역노조는 본격적인 조직화 이전에도 존재하던 자발적 저항을 조직하게 된다(휴게소 화물차 출입 제한 항의, 경유가 인하, 운송료 현실화와 같은 요구와 직접행동). 2002년 10월, 화물연대가 공식 출범하면서 대정부 요구안을 제시하고 본격적인 투쟁을 준비한다.
2003년에는 조직적 동원에 기반해, 정부와 운송자본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에 돌입한다. 몇 차례의 대규모 집회를 거쳐 파업이 준비된다. 노무현 정부와 대화를 시도했으나 진전이 없자, 5월 초부터 지부별 순환 파업이 시작된다. 사용자단체도 구성되어 있지 않은 조건에서, 화물운송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었으나 정부는 협의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파업이 확대되자 정부는 교통세 인상분 정부 보전이라는 협상안을 제시하여 최종 타결에 이른다.
그러나 여전히 적정운임 등 핵심요구가 관철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와 자본은 교섭 불가 입장으로 선회한다. 집권 초반에 노동계에 다소 유화적이던 노무현 정부의 노동정책이 전환되는 과정에서 정부 내 강경대응론이 힘을 얻는다. 8월 21일부터 2차 파업이 전개되자 운송 자본 측은 손배 청구로 화물연대를 압박한다. 결국 16일간의 파업은 9월 5일 끝난다.
이러한 투쟁을 거치면서 화물연대의 조직은 크게 성장한다. 2002년 10월 출범 당시 1천여 명 규모의 조합원은 7월에 3만여 명에 달했다.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구축하고 활동 기풍을 세우고 연대 활동의 기반도 확대했다. 그러나 정부와 운송자본과의 교섭틀이 불안정하다는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투쟁 과정에서 지부별 교섭틀이 형성되고, 이후 노정협의와 운송사업자(사용자) 단체들과 중앙 협의틀도 구성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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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이후 특수고용노동자는 여러 업종에서 증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물연대 조직화와 투쟁은 사용자를 특정하기 어려운 특수고용노동자도 전국적인 규모의 노조를 결성하고 단체행동을 전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화물연대는 법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기능을 사실상 실현할 수 있었다. 물론 법적 지위(근로자성)를 확보하기 위한 노동법 개정 투쟁도 병행되어야 하지만, 화물연대의 투쟁은 불안정한 일자리에 속한 노동자들이 기업별 노사관계를 넘어선 방식으로 조직화와 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특히 화물연대는 ‘사별 투쟁’이라는 방식으로 기업별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전국적인 투쟁을 통해 화물노동자 전체에게 적용되는 운송비와 제도 개선 과제를 관철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이는 조합원에게만 적용되는 단체협약을 쟁취하는 금속, 공공부문의 모델(이는 비정규직 노조들도 일반적으로 채택한 모델이다)과 달랐고, 비교 가능한 정규직 노동자와의 차별을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방식과도 달랐다.
8. 소결: IMF 구제금융 위기, 노동운동이 남긴 것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 노사관계, 노동운동은 큰 변화를 겪었다. 임영일(2003)은 경제위기 이후 ‘87년 노동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대량실업과 고용불안, 비정규직 급증으로 노동시장의 유연화, 분절화가 빠르게 진전되었다. 노동운동은 이념적·정책적 정체성의 위기, 계급대표성의 위기(조직률 하락과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부진), 노동자의 대중적 참여와 동원능력 약화, 리더십의 위기로 어려움에 빠졌다.
경제위기에 따라 기업 구조조정과 외주화, 임금삭감이 급격히 전개된다. IMF 경제위기 이전에 구조조정을 실시한 기업은 32.3%에 지나지 않았지만, 위기가 시작된 1997년 12월 이후 구조조정을 실시한 기업이 급격히 증가해, 1998년 4~10월에는 85.6%에 이른다. 특히 기업의 1/4(24.5%)가 정리해고를, 23.4%가 명예퇴직을 실시해 반 이상의 기업이 고용조정에 나섰다. 이 시기 기업 80%가 임금조정을 실시했으며 약 60%의 기업에서는 임금삭감도 있었다. 고용조정은 비정규직화(15.8%)와 함께 사내하청 활용을 포함한 외주화(18.0%)를 동반했다.
이러한 추세는 1999년 이후 변화하여,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은 절반 정도로 줄어들고,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로 대체하는 흐름이 강해진다. 외주화, 분사화는 2000년에 이르면 24.5%에 달한다. 임금삭감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연공급 임금체계를 연봉제(성과급제)로 대체하는 경향이 확산된다. ‘87년 체제’의 결과물이자, 대기업 남성 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에 두었던 내부 노동시장 체제가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한다(요코타 노부코, 2020).
노동운동은 예상치 못한 가운데 IMF 구제금융 위기와 부딪쳤다. 1996~97년 총파업 이후 민주노총의 대중투쟁 계획은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대신 민주노총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세력화라는 과제에 집중한다. 총파업 평가를 통해, 국회 내에서 노동자를 대변할 정치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끌어내고 ‘국민승리21’을 창당하여 권영길 위원장이 대선 후보로 출마한다. 노동운동 내 그 누구도 1997년 하반기에 경제위기가 급격히 전개되리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한국 정부도 11월에 들어서야 위기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따라서 민주노총이 위기를 예상하고 대응책을 준비하기 매우 어려웠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위기 내내 정세분석을 진전시키고 이에 따라 요구와 투쟁 계획을 수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위기의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짚고 국민경제의 개혁 방향에 관해 뚜렷한 입장을 제시하지 못했다. 1998년 총파업 선언과 철회, 노사정 협상과 탈퇴, 복귀가 반복되는 과정에서도 조합원의 고용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정책 요구가 핵심이었다. 물론 민주노총은 창립 당시부터 사업장의 경제적 요구를 넘어서는 “사회개혁” 요구를 제기했다. (2000년대로 치면 “사회공공성 운동”에 가깝다.) 정경유착 근절과 노동조합 경영참가, 사회복지제도 개선(의료보험 통합, 교육개혁, 연금기금 운영, 사회복지 예산 증액 등), 세제 개혁(근로소득세율 인하, 금융소득 종합과세 실시)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회개혁 요구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고통을 완화하는 정책처방으로 매우 중요할 수 있다. 의료보험 통합을 비롯해 일부 정책은 현실화되어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역시 1998년 IMF 구제금융위기를 불러온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노동운동은 1990년대의 주된 행동방식, 즉 임금인상을 위한 전투적 동원이라는 전략으로 대처하기 어려웠다(최영기 외, 2001). 위기 시기에는 시기집중 임단투 공동투쟁이 아니라, 기업별로 구조조정에 대처하고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사업장마다 상황이 달랐기 때문에 구조조정, 정리해고에 처한 기업에서는 전투적 투쟁이 촉발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현상유지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조정 대응 투쟁이 기업을 넘어선 투쟁, 즉 산별 혹은 총연맹 수준의 투쟁으로 상승하기 어려웠다. 결국 기업별로 구조조정 방식과 규모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천문학적 부실이 드러난 대기업과 은행에서 구조조정을 완전히 막는 것은 실제로 매우 어려웠다.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구조조정을 회피하고자 할 경우에도 (중소기업, 자영업에는 가능하지 않은) ‘대마불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조건에서 고용조정을 최소화하기 위한 정부 정책을 끌어내기 위한 민주노총의 노력은 노사정위원회 협상을 매개로 진행되었지만 합의사항이 번번이 이행되지 않으면서 불신만 커졌다. 결국 민주노총은 1999년 2월 노사정위를 탈퇴하고, 그 이후로도 사회적 대화기구에 복귀하지 않았다. 노사정 간의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 후, 다시 기업별 노사관계로 복귀한 셈이 되었다. 산별노조 전환과 산별교섭 실현도 여전히 미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최영기는,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역설적으로 ‘시장에 의한 조정’을 회피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는 ‘합의에 의한 조정’이라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최영기 외, 2001, 중 ‘1987년 이후 한국의 노동운동 [초청토론회]’).
시기집중 임금인상 투쟁은 유효성을 점차 상실하지만, 위기가 끝나가면서 기업별 임금인상 투쟁은 다시 활성화된다. 2001년 8월 23일 한국정부는 IMF 구제금융을 전액 상환하고 IMF 관리 체제를 종료했다. 김대중 정부는 신용카드 발행 남발, 주식시장 활성화,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등 경기부양책을 무리하게 밀어붙여 조기에 경제회복을 달성했다는 성과를 내고자 했다. 하지만 이처럼 무리한 부양책은 곧 카드 사태, 부동산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외환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김대중 정부와 노동조합 모두 경제위기의 구조적 원인이 진정 해결되었냐는 문제를 손쉽게 망각했고, 김대중 정부는 단기적 경제부양에, 노동조합은 임금 원상회복에 올인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위기가 남긴 영향은 심대했고, 구조적인 변화는 오랫동안 효과를 발휘했다. 공기업 민영화 정책은 일부 중단되기도 했으나, IMF가 권고한 정책은 대부분 제도화되었다. 기업과 은행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개혁과 같이 위기가 재발되지 않도록 필요한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책개혁을 거치며 경제의 금융화가 더욱 빨라지고, 주요 재벌 기업과 공기업이 해외자본에 매각되었다. 노동법이 개정되면서 노동유연화도 매우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당시 노동운동의 대응을 돌아볼 때, ‘이렇게 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결과들을 얼마간 피할 수 있는 대응을 모색할 수 있지 않았을까. 1997년 말 위기가 시작되기 전에도 이미 노동운동은 비정규직 문제나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차츰 인식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가 끝나가는 2000년부터 이미 노동조합들은 위기 때문에 억제되거나 삭감된 임금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에 나선다. 파업건수가 늘어나고 임금인상률도 높아진다. 2000년에는 협약임금 인상률이 7.6%로 대폭 상승했고, 이후 2004년까지 매년 5% 이상을 기록했으며, 2008년에도 4.9%에 달했다. 그런데 이러한 임금 투쟁은 기업별 투쟁이었다. 금속, 보건, 금융 산업에서 산별노조 전환이 활성화되던 때에도 임금교섭은 여전히 기업별로 이루어졌고, 산업수준의 조정은 없었다. ‘위기에서 살아남은 자’를 중심으로 한 높은 임금인상률은 조직노동자, 즉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빠른 임금인상을 시사한다.
반면, 주로 미조직 부문인 비정규직, 영세,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은 억제되면서 임금격차가 점점 더 벌어진다. 특히 기업규모별 임금격차가 크게 벌어져 500인 이상 기업 대비 500인 미만 기업의 임금수준은 1999년 71.7%에서 2007년 63.2%로 빠르게 하락한다. 민주노총의 주력은 전자 쪽이었다. 이러한 수치는 IMF 구제금융 위기가 가한 충격, 정부와 자본의 공세에 직면하여 노동운동이 펼친 대응에 어떤 한계가 있었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 문제는 다음 편에서 함께 다룰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