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힘으로 한미FTA 날치기를 저지하자! 날치기 의지가 확고한 이명박과 말로만 반대하는 한미FTA 원조당 이명박 정권은 끝내 한미FTA를 날치기 처리할 작정이다. 10월31일 오후부터 줄기차게 외통위 처리를 시도하고, 11월3일 본회의에서 비준안을 통과시킨다는 계획이다. 다음날 G20회의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빈손으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이명박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다. 비준안이 외통위를 정상적으로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국회 본회의 때 국회의장 직권상정으로 처리하려 할 것이다. [%=사진1%]반면 민주당은 갈팡질팡이다. 처음에는 ‘10+2 재재협상’을 주장했다가, 다른 독소조항들은 몽땅 눈감아주고, 투자자-국가제소(ISD)만 빼주면 비준동의 해주겠다는 타협안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이틀 만에 한나라당과 야밤(10월 31일 새벽)에 만나 포기해버렸다. 김진표 원내대표가 간밤에 한나라당과 만나 엉뚱한 합의안에 사인해버린 것이다. 한미FTA를 여야합의로 비준체결하고 난 뒤에, ISD에 한해서 미국과 추가 협의하자는 말도 안 되는 안이다. FTA가 체결된 이후에 미국정부가 추가 협의를 해줄 리 없다. 설사 협의를 진행한다고 해도 ISD는 정식재협상과 의회결의가 필요한 FTA본문 조항이기 때문에, 미국정부는 수정권한이 없다. 결국 그때 가서 이러저러한 법적 절차와 미국 측의 거부로 협의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끝나고 말 것이 뻔한, 헛소리에 불과하다. 다행히 31일 오후에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이 야합 안은 부결됐다. 그러나 31일 저녁 한나라당 남경필 외통위원장이 외통위에서 FTA비준안을 처리하려고 할 때 민주당은 소극적인 행동으로 일관했다. 애초부터 한미FTA 원조당인 민주당이 끝까지 반대하리라 믿은 사람은 없다. 다만 그들의 포기가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고 교활하다는 데 분노할 따름이다. 적당히 반대할 사람은 반대하고, 물러설 사람은 말도 안 되는 물밑협상을 하면서 이쪽저쪽 눈치를 보는 모습이다. 결국 민주당은 분노한 민중운동의 진이 빠지고 날치기가 통과되고 나서야, 다시 정색을 하고 한나라당을 맹렬 규탄하면서 “내년 총선에서 더 많은 의석을 달라”고 호소할 것이다. 힘 있는 대중투쟁만이 한미FTA를 막을 수 있다 ! 결국 믿을 것은 힘 있는 대중투쟁이다. 한나라당이 감히 날치기를 감행치 못하도록 몰아세우는 길뿐이다. 인민주권과 민주주의는 노동자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고 쟁취된다. 한미FTA는 노동자 농민 대중의 힘으로만 막을 수 있다. 국회의사 일정의 절차적인 문제는 다수 의석을 가진 한나라당의 마음에 달렸다. 하지만 그들은 한미FTA를 포기할 의사도, 전면 재협상할 능력도 없다. 그들은 11월 3일에 통과시키려 발악할 것이고, 안 된다면 10일, 17일, 24일, 줄줄이 예정된 본회의에서 똑같은 시도를 할 것이다. 국회 의사일정이나 몇몇 기술적인 협상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끈기 있고 줄기차게 대중투쟁의 파고를 높여가야 한다. 지난 10월28일 국회진격 투쟁을 통해 우리는 ‘한미FTA는 이미 끝난 사안’이라는 식의 관성적이고 패배주의적 태도를 극복하는 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 뒤이은 11월 3일 범국민대회는 한미FTA 저지 투쟁을 본격적인 대중투쟁으로 이어가기 위한 결정적인 고비다. 우리가 첫 번째 투쟁의 포문을 열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도 대중투쟁의 위력은 충분치 못하다. 이런 때일수록 힘 있는 대중투쟁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동자/농민/빈민/청년/학생 대중조직의 결의가 필요하다. 어떻게 하든 이런저런 일들로 지치고 흐트러진 운동조직들의 투쟁태세를 비상태세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서 무슨 수를 쓰건 11월3일 날치기를 막고, 한미FTA 저지 투쟁의 파고를 높여야 한다. 그렇게만 되면 11월 10일 본회의는 3일 뒤에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를 전후로 결집하는 노동자대오가 주력이 되어 투쟁을 펼치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다. 추수작업으로 발이 묶였던 농민들도 다음 주부터는 이번 주보다는 더 많이 결집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는 여의도로 결집하는 대오가 직접 국회 본회의장으로 진격하는 힘 있는 의지를 보여주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거기에 다양한 대중 여론전을 이끌어 대중투쟁을 지지 엄호해야 한다. 아울러 막대한 서울시 예산의 상당부분이 한미FTA의 공공정책 제약에 묶이게 될 위기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한미FTA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박원순 서울시장도 분명한 반대 입장표명을 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한미FTA가 날치기될 때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한미FTA 투쟁은 국회비준 절차만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한미FTA는 양국 간의 무역이익을 조정하는 단순한 무역 관세협정이 아니다. 한미FTA는 세계 경제위기에 내몰린 초민족 자본이 살아남기 위한 공격적인 투자협정이자, 그들의 입맛대로 남한사회 전반을 구조조정하는 종합 정책이다. 미국 자본만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재벌 또한 민족경제의 주체가 아니라 초민족적 자본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국익’이 아니라 ‘계급’이 본질인 것이다. 한미FTA를 둘러싼 싸움은 한국 재벌을 포함한 초민족적 자본과 노동자 민중이 남한사회의 전반적 재편을 두고 맞붙는 계급투쟁이 그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FTA가 국회에서 비준 통과 된다고 해서, 결코 사태가 마무리되지 않는다. 미국은 한미FTA를 발판으로 더 큰 동아시아-환태평양 FTA 전략을 추진 할 것이고, 한국의 재벌과 정권은 그 틀 아래에서 ‘소유권을 절대화’하는 이념을 현실화하는 작업에 본격 착수할 것이다. 다시 말해 비준안 통과는 최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실제 재편이 이루어지는 최악의 상황은 비준안 통과 이후에 곳곳의 현장에서 펼쳐지게 될 것이다. 한미FTA 국회비준안 저지 투쟁은 그렇게 각개격파 당하기 전에, 함께 뭉쳐 싸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앞으로 폐지하기 위해 계속 싸울 수밖에 없는 한미FTA의 온갖 독소조항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이후 우리의 삶과 투쟁은 그만큼 더 고단해질 뿐이다. 지금 이대로 저들을 막지 못한다면, 가까운 내일에 우리는 이렇게 물으며 살아갈지 모른다. “한미FTA가 날치기될 때,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아무리 늦었더라도 함께 모일 수 있을 때, 모일 수 있는 만큼이라도 있는 힘껏 싸워야 한다. 우리가 비준안 저지 투쟁에 얼마큼 힘을 쏟느냐에 따라 이 피치 못할 투쟁의 조건이 변화한다.
2011년, 여전히 멈춰버린 시간 “새벽 다섯 시, 명동 마리 침탈. 여섯 시, 포이동 대치 중. 2011년 8월 2일 서울, 용역 천국.” - 2011년 8월 3일 새벽, 배우 김여진 씨의 트위터(@yohjini) “(세입자대책위원회(이하 세대위) 위원장이) 용역에게 주먹으로 얼굴만 7대 맞으셨고요. 각목으로 머리를 두 대 더 맞았어요. 위원장은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는데 머리에 피가 나기 시작해서 결국 병원에 실려갔어요.” - 2011년 8월 4일, 명동 마리에서의 용역폭력 증언 중 #1. 2011년 8월 3일과 4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복판인 중구 명동 거리에서는 ‘시가전’, ‘고지전’이라는 표현까지 나올 만큼 철거용역과 세입자들 간의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세입자들이 농성 중인 카페 ‘마리’를 놓고, 밤사이 4번이나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이어졌다. 용역들은 각목을 휘두르고 소화기 분말을 뿌리는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였고, 여성들에 대한 성희롱과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50대의 세대위 위원장은 각목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마리’에 연대하던 시민과 세입자 2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2. 8월 12일에는 부천 원미구 중3동 재개발지구에서,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한 강제퇴거와 철거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집 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이웃 철거민이 강제퇴거를 저지하기 위해 집 담벼락 아래 차를 세우고 차 안에 있었지만, 그대로 철거가 진행되면서 철거 잔해들이 차 위로 떨어지고, 차 안에 고립되었다. 차량은 심하게 파손되었고, 하루아침에 집에 구멍이 생긴 이는 그날 이후 반파된 집 벽을 대충 틀어막고 한 달 반 정도 거주하다가, 9월 30일 완전히 철거당했다. #3. 8월 25일, 용산구청 앞에 새 집이 하나 뚝딱하고 세워졌다. 2008년 전세 500만 원에 살던 집에서 강제퇴거와 철거를 당한 이후 3년째 천막농성 중인 신계동의 여성 철거민 혼자서, 여름내 해진 비닐천막을 보수하여, 몸 누일 곳을 만들었다. 이미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을 천막에서 홀로 보냈지만, 여전히 외롭고 힘든 고립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11년, 여전히 대한민국 철거민들의 시간은 청소차량에 실려 강제로 이주당한 1971년 광주대단지에, 20여 명에 이르는 이들이 불타 죽고, 맞아 죽고, 건물잔해에 깔려 죽은 1980년대에, 그리고 2009년 1월 20일 용산에 멈춰져 있다. 반복되는 강제퇴거는 ‘법’적으로 이루어지고, 강제퇴거 과정에서 용역깡패에 의한 폭력은 ‘법’적 절차로 진행되는 업무를 방해하는 철거민들에 대해 허용된 물리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명동, 부천, 용산에서도 재정착 가능한 대책이 없는 상태에서 강제퇴거가 자행되었고, 소위 용역깡패라 불리는 철거용역들의 폭력이 빈번했으며, 철거민들만이 ‘법적 절차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범법자가 되었다. 폭력의 시간을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는 우리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집을 둘러싼 탐욕의 추구라는 욕망과 그 탐욕을 부추기며 소수 자본에 이익을 독점시키던 정부 정책들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때문에 용산참사 직후부터 참사의 근본원인인 강제퇴거의 현실과 잘못된 개발정책을 바꾸어야 한다는 대중적 요구가 확산하였고, 이에 정부와 서울시, 정치권에서도 제도개선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한국 강제퇴거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는 국내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우려와 유엔의 권고로도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비준된 유엔 사회권규약에서는 강제퇴거를 “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므로 각국 정부가 강제퇴거를 예방하기 위해 입법조치의 채택을 비롯한 “모든 적절한 수단”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유엔 사회권위원회에서는 1995년부터 한국정부의 사회권 관련 세 차례의 심사에서 모두 ‘한국의 강제퇴거 실태에 대한 우려와 이를 위한 예방 조치를 권고’하였다. 그러나 참사발생 3년을 앞둔 지금까지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최근 명동 도시환경정비사업 지구의 ‘마리 카페’에서의 사건으로 다시금 용역폭력을 방지하자며 ‘경비업법’ 개정의 목소리가 뜨겁지만, ‘경비업법’ 개정안은 벌써 5~6년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퇴거와 퇴거 종용과정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폭력과 인권유린을 막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경비업법’을 개정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이다. 그러나 욕설과 폭력, 용 문신을 드러내는 것들을 금지한다고 해서 개발사업에서의 강제퇴거와 폭력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강제퇴거 과정에서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철거민들이 ‘버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버티면서 절규하며 이야기하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대책을 마련하고 철거하라’, ‘대책 없이 내쫓지 마라’는 것이다. 법적 절차로 진행된 퇴거는 ‘강제퇴거’가 아닌가? 결국 철거민들이 요구하는 대책이 얼마나 잘 보장되어 있고, 비자발적인 퇴거상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지가 ‘강제퇴거’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핵심이다. 그런데 빈번한 강제퇴거의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시행주체나 구청 등 공공기관에서는 ‘법적인 대책을 다 했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철거민들이 ‘떼잡이’가 아니라면, 이 법적인 대책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개발사업에서의 세입자 대책은 크게 이주대책마련과 손실보상으로 나눌 수 있다. 이주대책마련으로 임대주택 및 대체상가 등이 있고, 손실보상으로 주거이전비 및 영업손실보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책은 개발사업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데, 사업성격으로 구분하면 공익사업과 민간개발사업으로 구분하여 나뉜다. 쉽게 말해 공익사업에는 쥐꼬리만 대책이라도 있지만, 민간개발사업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공익사업과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인 간의 문제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일면 타당한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착시들이 존재한다. ‘민간개발’, ‘사인 간의 문제’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그렇다. 용산참사 해결하라는 외침에 대해 정부와 서울시가 했던 말들이다. 특히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용산 철거민 대책과 관련해서는 ‘사인간의 문제’라고 못 박았다. 상가세입자들에게 좋은 사례가 된 홍대 두리반에 대해서도 오 전 시장은 ‘개인과 개인 간의 문제이지 재개발, 뉴타운과 무관하다’고 했었다. 그런데 용산4구역의 경우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의한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로 앞서 말한 공익사업에 속하며, 공익사업법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진 곳이다. 어디는 민간에서 땅을 사들여 하는 민간개발이라 안 된다더니, ‘공익사업법’에서 규정하는 공익사업지구인 곳도 ‘사인 간의 문제’라니……. 결국 지금까지 공익적 목적의 사업마저도 민간의 이윤놀음에 내맡기고 진행해 온 것에 대한 인정이거나, 무지 혹은 약자들에 대한 공공의 책무를 외면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착시를 주기 위한 속임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착시도 있다. 민간개발은 사적이익에 관한 것이기에 공공에서 책임 없다는 논리는 사적이익 추구에서 철저히 외면되고 파괴당하는 약자들, 세입자들의 현실을 교묘히 감춘다. 예를 들어보자. A 지역에서 20년간 살거나 영업해 온 주거/상가 세입자와 B 지역에서 똑같은 조건과 기간으로 살거나 생계를 꾸려 온 세입자 있다. 두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개발 현수막이 나부끼며 개발바람이 분다. 두 지역 세입자 모두 제2의 고향과도 다름없는 우리 동네가 발전한다는 소식에 반가워했다. 그리고 좀 더 좋은 공간과 조건에서 살거나 장사하게 될 거라는 기대도 했다. 그런데 A 지역은 주택재개발조합이 결성되었고, B 지역은 지역주택조합이 결성되었다. ‘어쨌든 재개발되니 우리 동네 좋아지겠네’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아뿔싸! A 지역 세입자에게는 주거이전비와 순환형임시주택, 임대아파트 입주자격 그리고 이사비가 주어지는데, B 지역 세입자에게는 달랑 이사비 몇 푼 받고 나가란다. 상가세입자도 마찬가지다. A 지역은 영업손실보상이라도 있는데, B 지역은 그냥 철거해 버리고 끝이다. 주택재개발은 공익사업이고, 조합주택개발은 민간개발이기 때문이란다. 똑같은 세입자인데, 똑같이 살아온 사람인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와 가족의 미래가 결정된다. 굉장히 드문 예라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같은 단어로 착각하며 사용하는 재개발과 재건축이라는 말도 사실 앞의 예와 같다. 재개발이 되면 세입자 대책이 있고, 재건축이 되면 전혀 없다. 그런데 개발세력들의 주판알 계산에 따른 요청에 의해 아주 작은 조례의 변경만으로 재개발이 재건축지역으로 되고, 재건축이 재개발지역으로 되는 둔갑술을 발휘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종류의 개발이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건,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이 건 간에, 바로 그곳에는 가난한 세입자들이 옹기종기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애써 감추려는 논리가 ‘사인 간의 문제’라는 궤변에 숨겨져 있다. 이런 식으로 ‘법적인 대책’을 다 했다며, 퇴거를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 비록 민간에 의한 사업 일지라도 퇴거를 수반하고 진행되는 개발 사업이라면, 퇴거를 당해야 하는 이들이 이전과 동등한 수준으로 살거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착 대책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한 보장 없이 이루어지는 퇴거는, 우리가 단호히 거부해야 할 ‘강제퇴거’이다. 도심개발사업은 노동자들에게 닥칠 직접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전 국토가 거대한 공사장처럼 느껴지게 해야 한다. 전국 곳곳에서 해머 소리가 들리도록 하지 않으면 이 난국을 돌파하는 동력을 얻기 어렵다” “전광석화와 같이 착수하고 질풍노도처럼 몰아붙여야 한다.” 무협지 대사와도 같은 위 내용은 용산참사가 일어나기 불과 한 달 전(2008.12.15), 이명박 대통령과 당시 여당 대표(박희태)가 나눈 이야기이다. 이명박 시대를 상징하는 뉴타운 도심 광역개발은 수많은 이해당사자, 특히 도시에서 하루하루 힘겨운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고 그곳에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도시 빈민과 노동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닥친 문제가 되었다. 특히 그 규모와 속도에서 이례적인 뉴타운 개발사업은 도시의 다수를 차지하는 세입자들을 전세 난민 혹은 불안정한 잠재적 철거민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발 구역간의 보다 빠른 개발 경쟁이 불붙어서, 세입자들을 보다 빨리 쫓아내고자 용역 깡패를 이용한 폭력의 양상이 더욱 극심해졌다. 최근 전 세계적 경제위기와 부동산 침체로 PF방식의 대규모 개발사업들이 주춤하는 상황을 정부와 서울시는 소규모 개발규제 완화를 통한 민간개발의 활성화로 돌파하려고 하고 있어,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강제퇴거금지법은 개발법 체계의 근본적 변화를 촉구한다 이러한 현실은 또 다른 용산참사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시급히 관련 법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더 이상 대책 없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강제퇴거를 막기 위한 대안적인 법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강제퇴거금지법은 국내법으로는 처음으로 주거권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강제퇴거가 집에서 쫓겨나는 문제일 뿐 아니라 생계와 사회적 관계, 삶의 전반을 후퇴시키는 문제이기에 개발로 삶과 생존의 공간을 빼앗기는 이들의 삶이 개발사업 이전수준과 동등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재정착 대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행해지는 강제퇴거를 금지하자는 것을 기본 골간으로 하고 있다. 특히 강제퇴거 금지법은 다양한 개발사업과 그 사업에 따라 적용되는 다른 법체계들에 의해 대책이 달라지는 현실, 그리고 두리반처럼 법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개발 사업으로 분류조차 되지 못하는 무대책상태의 개발사업을 관통하여,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발사업의 원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강제퇴거금지법은 재산권 중심으로 이루어진 현행 개발관련 법체계의 균열과 근본적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알고 있다. 법이 만능이 될 수 없고, 이러한 법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막대한 개발이득을 목전에 둔 세력들에게는 무시하면 그만일 수 있는 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처럼 개발법에 의해 보호되는 폭력, 합법화된 폭력을, 불법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철거민이 불법세력이나 도심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법 집행을 빌미로 휘두르는 저들의 폭력과 대책 없이 남발하는 강제퇴거가 불법이고, 지역 주민에 대한 테러임을 밝혀야 한다. 강제퇴거의 책임은 공공에 있다 용산참사 당시 희생된 故 이상림(당시 72세) 열사의 유품에는 망루에 오르면서 품에 지니고 있었던 용산구청의 공문이 있었다. “세입자 보상계획에 대한 협의가 없다고 해서 관리처분계획인가 등을 중단할 수 없는 사항임을 회신하오니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용산구청장 법에 따른 관계인의 보상협의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협의가 완료될 때까지 '관리처분인가(철거 직전 마지막 인가단계)'를 중지해 달라는 고인의 민원요청에 대한 회신 공문으로, 용산구청은 “관리처분을 중단할 수 없다”며 거절을 통보했던 것이다. 한강갈비에서 레아호프까지 용산4구역 한 자리에서만 30년 가까이 생계를 꾸리고 살아온 서울시 용산구의 주민으로서의 마지막 절박한 요구마저 거절당한 구청 공문을 품고, 그렇게 사랑스러운 막내아들과 함께 하늘 끝 망루에 올랐다. 그런데 원통하게도 거절당했던 그 요구에 대해 2010년 11월 초, 서울고등법원이 절차상 중대한 위반이 있었다며 “용산4구역 관리처분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주검이 되고 땅속에 묻힌 후에야 말이다. 이처럼 용산구청은 용산4구역에 조합과 세입자들 사이의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태 해결을 위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세입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고 적당한 재정착 계획을 요구하기 위해 용산구청에 여러 차례 항의집회를 열고 질의서를 보냈다. 그러나 용산구청은 세입자들에게 중요한 사항에 대해 “세입자와 협의할 사항이 아닙니다”라는 답변으로 일관했으며, 심지어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합니다’라는 대형 간판을 구청 입구 측면에 걸기에 이르렀다. 공공기관인 용산구청의 이러한 행태는 세입자들로 하여금 공공에 대한 심각한 불신을 일으켜 구청이나 조합과 합리적으로 협의할 가능성이 없음을 인식하고 절망하게 한다. 비록 세입자이지만 수십 년 지역에 살아오고, 지역의 상권을 발전시켜온 지역 ‘주민’이 개발 현수막이 나부끼는 순간 ‘철거민’이 되고, 구청은 ‘철거민’을 더는 지역의 주민으로 대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정당한 권리를 말하는 지역 주민의 민원이 아니라, 그저 귀찮고 시끄럽게 하는 ‘떼잡이’들의 ‘생떼거리’로 취급된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을 건 저항은 ‘도심 테러’로 매도된다. 용산은 이 시대의 개발 현실을 참혹하게 각인시켜주었다. 개발로 새롭게 탈바꿈할 명품도시에 걸맞지 않은 이들을 짝퉁 취급하며 쓸어버리고, 쓸려나지 않고 버티면 어떻게 되는지를 잔인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잔혹한 개발사는 7~80년대 판자촌 철거에서부터 90년대의 달동네 아파트 건설과 신도시 건설, 그리고 2000년대 뉴타운 건설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경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속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철거민이 되어 강제퇴거의 상황에 놓여 쫓겨나거나, 저항하거나, 죽임당해야 했다. 무너질 수 없는 삶. 강제퇴거금지법, 우리의 힘으로 제정하자 강제퇴거를 예방하고, 재정착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공공의 책임이 무엇보다 강화되어야 한다. 용산4구역 개발사업의 절차에 문제가 있었다며 ‘관리처분 무효판결’이 있었지만, 그 잘못된 개발사업의 인가로 인한 죽음의 책임은 철거민들만 지고 있다. 주검이 된 이상림 열사의 막내아들, 이충연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은 5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여전히 차가운 감옥에 갇혀있다. 망루에 오르기 전 마지막 거절당한 요구가 정당했음이 판결되었지만, 끔직한 참사를 부른 강제퇴거를 수반하는 개발사업을 밀어붙인 그 누구도 책임 지지 않고 있다.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철거민들은 주검이 되어 땅속에, 그리고 감옥에 갇혔지만, 잘못된 개발을 밀어붙이고 인가한 이들은 여전히 또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퇴거에 내몰린 철거민으로 만들고 있다. 때문에 강제퇴거금지법은 시급히 제정되어야 한다. 강제퇴거금지법은 이제 입법을 위한 발의를 앞두고 있다. 국회에서 강제퇴거금지법이 발의될 수 있도록 1만 명의 제정 촉구 선언을 모으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강제퇴거금지법은 한국사회 개발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을 촉구할 수밖에 없기에, 개발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현 정치구도에서 강제퇴거금지법의 법제화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입법의 역사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고 한다. 용산참사의 아픈 기억을 잊지 않은 우리들이 그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누구도 집에서 사람을 함부로 쫓아내서는 안 된다. 개발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폭력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가난할수록 더욱 가난해지는 개발, 오래 살아온 동네와 집, 삶의 터전을 빼앗아가는 개발,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용산은 끝나지 않았다. 용산참사를 기억하는 것은 어제의 진실을 밝히고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올 내일의 용산을 막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강제퇴거금지법의 제정은 내일의 용산을 막아내는 시작이 될 것이다.
서울역 노숙인 퇴거조치가 시행된 지 꼭 두 달이 지난 지금, 본 조치의 위력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고 있다. 한 여름이었던 지난 8월 22일, 서울역 노숙인 퇴거조치는 시작되었다. 여름철, 냉방도 하지 않는 서울역은 마치 온실과 같기에 대다수 거리 홈리스들은 비가 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서울역을 잠자리로 선택하지 않았다. 서울역은 이런 시기적 특성을 고려해 여름철을 퇴거시기로 잡았다. 저항하는 이들도 적거니와 겨울에 이르기까지 “서울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학습효과가 홈리스들에게 생길 시간을 벌자는 계산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구 육상 선수권대회, 구(舊) 서울역사 문화관 개관 행사 등 외부적 요인도 적잖이 개입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현재 서울역에서 내몰린 홈리스들은 밤이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간다. 그로 인해 서울역 지하도의 노숙인구는 약 2.5배 증가하였고, 시청역, 을지로입구역 등 인근 역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허준영 철도공사 사장은 지난 9월 23일, 국정감사장에 나와 “일부 단체들은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을 노숙하도록 하는 것이 그들을 보호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울역 노숙인 퇴거조치는 단지 서울역에서 홈리스들이 잘 수 있느냐 없느냐 뿐 아니라, 철도공사의 상업화에서 기인하는, 홈리스에 대한 전방위적인 배제와 폭력과 관계된 보다 심각하고 중첩된 문제다. 왜, 노숙인 퇴거조치인가? 철도공사는 노숙인 강제퇴거 조치의 원인으로 1)임계점에 다다른 높은 민원 2)테러 위협을 들고 있다. 서울역이 노숙인을 내몰고 싶어서 내모는 것이 아니라 ‘고객님’ 들의 요청을 단순히 수행할 뿐이라는 것인데, 과연 사실일까? 우선, ‘민원’을 보자. 홈리스에 대한 이용객의 민원은 대개 ‘노숙 생활’ 자체가 야기하는 민원이다. 냄새, 더러움 따위가 그것인데, 이는 노숙생활을 종결짓지 못하는 한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그동안 서울역 측은 거리홈리스들이 청결유지를 위해 화장실에서 세면이라도 할라치면 철도경찰과 역무원들을 동원해 내치기 일쑤였다. 오히려 철도공사 스스로 민원을 키워 온 꼴이다. 또 한편, 일부 홈리스에게서 발생하는 구걸이나 소란행위에 따른 민원은 그간 철도안전법 등 관련법을 통해 서울역 내 상주하는 철도경찰이 상시적으로 대응해 왔다. 오히려 사망사고와 같은 철도경찰의 과잉대응이 문제였지, 범죄 행위에 대한 현장 억지력 부재가 도마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두번째, 홈리스로 인해 테러 위험이 있다는 철도공사의 주장은 어떤가? 철도공사는 면담자리에서 “서울역은 테러의 0 순위”라며 지난 5월 서울역에서 발생한 물품보관함 사제폭탄 사건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위 사건은 홈리스와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단지, 당시 언론들은 “노숙자 차림”이라는 표현을 쓰며 용의자를 특정하였다. 철도공사는 이렇듯 검증되지 않은 홈리스에 대한 범죄자적 낙인을 그대로 받아쓰고 있는 것이다. 과연 홈리스는 위험한가? 철도공사는 보도 자료를 통해 2개 상해사건을 언급하며, 홈리스들은 위험하고 테러 위험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집단을 특정한 부정적 정보는 수집자체만으로도 사회적 낙인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타 집단과의 비교조차 없이, “노숙인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라는 식의 보도는 어떠한 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한 통계도 근거도 될 수 없다. 오히려 홈리스들은 범죄 행위에 있어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적 위치에 서는 경우가 많다. 홈리스행동을 비롯한 단체들에서 2006년 190명의 거리홈리스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그들 중 43%가 폭행, 신분도용과 같은 범죄 피해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범죄 피해를 당한 이들의 절반은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고,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 이들 역시 사건 해결에 도움을 받은 경우는 불과 9%에 불과하였다. 이미 홈리스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말을 믿거나, 적법하게 대변하지 않을 것이란 패배감을 공유하고 있다. 이렇듯, 코레일은 “청결하고 안전한 서울역을 시민들에게 돌려드리기 위한” 것으로 강제퇴거 방침의 불가피성을 설명하지만, 이는 지난 2월 광명역 탈선사고를 비롯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철도사고, 원인도 파악되지 않은 KTX 2단계 구간의 장애, 대책 없는 인력감축과 정비축소와 같은 파행적 철도 운영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감추려는 술수에 불과하다. 또한 민자 역사로 대표되듯, 철도공사가 상업자본의 이윤확보를 위해 사전정리 작업을 수행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그 스스로도 이윤추구를 위해 구매력 없는 홈리스들을 정리하여 품격을 높여야 하는 이유도 존재한다. 기실, 철도공사에게 필요했던 것은 ‘여객 만족’, ‘청정 서울역’이 아니라 ‘노숙인’이라는 ‘공공의 적’ 을 공격하는 것이다. 서울역 퇴거 조치의 파장 서울역 퇴거조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첫째, 홈리스에 대한 생존권 위협이다. 홈리스들의 사망률은 전체인구 집단 사망률의 2~3배에 이르며, 여름과 겨울철에 정점을 이룬다. 그만큼 홈리스들의 건강상태는 열악하며, 기온 변화에도 취약하다. 많은 언론을 통해 보도됐듯 지난 13일, 서울 마천동 모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거리홈리스 박모씨가 차량 4대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 나마의 온기라도 얻으려 내려갔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이렇듯, 철도역사와 같은 공공의 장소에서 밀려난 홈리스들의 선택은 사유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사적공간은 공공장소보다 안전이나 환경면에서 더 열악할 수밖에 없어 제2, 제3의 박씨와 같은 참변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또한 서울역의 선례는 여타 공공장소로도 이전되기 마련인데 그런 우려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서울시는 푸른 도시국 간부회의를 통해 서울시내 공원 노숙행위를 단속하기로 하였다. 또한 용산역은 소공원에서 천막을 치고 살아가는 30여 명의 거리홈리스들에게 철거를 명령하였고, 서울역 구름다리 천막촌에도 철거 명령을 내건 상태다. 두 번째 문제는 홈리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해 홈리스의 인권과 복지를 후퇴시킨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서울역 퇴거 후속대책의 하나로 ‘자유카페’를 설치하기로 한 바 있다. 서울역을 대체할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아직 건물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다. 민간 임대업자들이 ‘노숙인’들에게는 건물을 내 줄 수 없다고 계약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바로 철도공사 주도로 유포한 홈리스에 대한 낙인에 서울시조차 곤혹을 당하는 것이다. 또한 최근 들어 거리 홈리스에 대한 집단 린치가 빈번한 것 역시 우려되는 점이다. 홈리스에 대한 심야시간대 집단 린치 사건이 며칠 상간으로 제보되고 있는데, 폭행당한 홈리스가 기절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등 그 정도 또한 심각하다. 마지막으로 여성과 장애인, 청소년 등 이중의 위기에 처한 홈리스들은 보다 더 심각한 위협에 처한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으로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하던 한 할머니는 “서울역 안에 있으면 경찰 같은 사람도 있어 뭔가 보호받는 거 같았는데 새벽에 나와 있으려니 너무 무섭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서울역이 문을 닫는 새벽 1시 30분부터 4시 30분까지 여성 등 위기집단이 아무런 보호도 없이, 취약시간 대 홀로 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일 것이다. 특히 거리 여성홈리스를 위한 지원기관조차 단 한 곳도 없는 현실에서 서울역에서 쫓겨난 여성들은 말 그대로 뜬 눈으로 서성이며 밤을 보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이 이럼에도 철도공사는 강제퇴거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오히려 지난 6일, “코레일은 역사 맞이방이 색다른 문화 공간으로 고객에게 다가가는 선물이 될 수 있게 노력하겠다”며 서울역 대합실에서 관현악 공연을 열었다. 마치 홈리스로부터 서울역을 탈환했다는 승전가를 울리듯 말이다. 허구적인 서울시의 후속대책 서울시는 서울역의 퇴거조치가 주목을 받자 서둘러 ‘후속대책’을 내놓으며 지탄을 면하고자 하였다. 후속대책은 임시주거지원 100호, 50인 입소 규모의 응급 구호방, 특별자활근로 일자리 200개 증편, 자유카페 등을 골자로 하는데 이들 대부분은 이미 올해 사업으로 기 편성된 것들이다. 거리홈리스들에게 쪽방, 고시원 등을 3~4개월 간 지원하는 임시 주거지원 사업은 작년 200호였던 것을 올 해 100호로 축소 편성한 것이다. 당초 이 사업은 민간의 지속적인 실시요구에도 묵살되었다가 작년 G20 개최를 위한 거리 정화정책으로 최초 실시되었다. 물량이 태부족(현재 서울지역 거리홈리스의 숫자는 1,350명 선)하기 때문에 이 사업은 강제퇴거가 실시되기도 전에 모두 종결됐다. 특별자활근로 역시 올해 예산은 작년보다 100명이 삭감된 채로 책정되었는데 200명을 더 늘려 매월 700명에게 일자리를 지원한다고 한다. 결국 겨울철 예산을 선집행하는 것인데, 이는 가을까지는 특별자활근로를 해서 노숙을 벗어나고 겨울철에는 다시 거리로 쏟아지라는 말이나 다름없다.(특별자활근로의 급여는 월 38만원으로 월세방을 구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응급 구호방 역시 겨울철 예산을 선집행한 것에 불과하며, 앞서 언급했듯 ‘자유카페’는 공간조차 구하지 못한 상태다. 그럼에도 철도공사는 9월 초 서울역 퇴거조치와 서울시의 후속대책으로 서울역 인근 노숙인구가 100명 이상 줄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서울역 인근의 노숙인구는 오히려 퇴거조치 전보다 20명 가량 증가한 상황이다. 서울시의 후속대책이 탈노숙에 있어 해답이 되지 못하는 사이, 신규 홈리스는 지속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제, 서울역을 통해 유입되는 홈리스만 한 해 800명에 이르고 있다. 철도 역사의 공공성을 확보해야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철도 역사는 홈리스를 포함한 다양한 위기계층의 유입로가 되고 있다. 최소한의 생활편의시설과 교통, 정보, 인력시장 등 생존을 위한 조건이 철도 역사를 중심으로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도 역사는 이런 기능을 인정하고, 그들을 단지 ‘아웃’ 시킬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나마 ‘세이프’ 하게 해주고, 복지 자원 연계를 통해 보다 나은 삶으로 ‘출루’ 할 수 있게 한다면 위기계층 지원에 상당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공공역사의 역할이 홈리스 지원에 얼마나 결정적인지는 해외 사례를 통해 충분히 검증된 바 있다. 2006년 철도노조는 파업투쟁의 성과로 철도공사와 역사 공공성 관련 합의를 이룬 바 있다. 합의는 “사회위기계층 보호를 위해 코레일 아웃리치 봉사팀을 운영하고 관계부처와 협의하여 서울역에 노숙인 진료소 설치를 추진하고, 연차적으로 전국 주요 역에 확대 운영되도록 노력”, “역사 공공성 확보를 위해 노사공동위원회 관련 심의절차를 상의하는 소위원회를 설치하여 구체적 방안을 토의”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에 따라 시민사회단체 참관의 형태로 ‘역사공공성 소위원회’ 논의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허준영 체제의 철도공사는 위 합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으며, 시민사회단체와의 협의를 복원할 생각도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렇듯 철도공사가 스스로의 합의를 무시하고, 여론의 도마에 오르면서까지 ‘노숙인 퇴거’조치를 고수하는 데는 철도공사에 대한 수익 창출 요구와 민자 역사로 대표되는 상업자본의 이윤 창출을 뒷받침해야 하는 이중의 압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역사 공공성에 대한 요구는 이미 민자 역사 공간의 약 90%가 상업시설에 점유당한 현 상황에서 정말 따내기 어려운 요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공공 역사가 철도공사의 전유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닌 공공의 장소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사회적으로 설득해 나가야 한다. 그에 따라 철도 역사의 상업시설 입점과 같은 영리행위를 규제하고, 사회위기계층 지원과 같은 공공의 기능을 부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서울역 홈리스들의 저항은 그리 집단적이지도 단단하지도, 거세지도 않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마지막 보루의 침탈에 저항을 중단할 수는 없다는 것을 철도공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미FTA저지 농성장 난입, 경찰의 만행을 규탄한다 오늘 18일 오후 5시 반경, 시청앞 FTA농성장에 경찰이 난입하여 허세욱 열사의 영정을 부수고 책상을 압수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열사영정이 신고되지 않은 불법시설물이란 이유에서였다. 10명 남짓한 농성인원이 갑자기 몰려든 40여 명의 경찰의 폭력을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이는 한미FTA를 저지하라며 돌아가신 허세욱 열사를 모욕하고 기본적인 민주주의를 파괴한 망동이다. 이명박 정부는 서민경제가 좋아질거라면서 기만적인 홍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서민경제'를 자본에 팔아넘기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미FTA는 미국과 한국의 초국적자본만 살찌우면서 국민들을 더욱 더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 것이다. 한미FTA는 그나마도 존재했던 한국의 복지를 위협하고 국민들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 것이다. 이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한미FTA를 저지하기 위한 정당한 투쟁을, 그것도 10명 남짓한 시민들을 40여 명이나 되는 경찰들이 와서 탄압을 한다는 것은 한미FTA의 거짓 홍보가 탄로나는 것이 두렵다는 반증일 뿐이다. 12일 미 하원과 상원이 차례로 한미FTA 이행법안을 처리한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연일 한미 FTA 국회 비준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으며 10월 28일경 단독 강행처리가 더욱 확실해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2006년 뜨겁게 타올랐던 한미 FTA 반대 투쟁은 2008년 소강상태에 빠진 뒤 그 불씨를 살려내지 못하고 현재 한미FTA 저지는 국회대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회의원 몇 명이 이 거대 사안을 막을 수는 없다. 민주당은 한미FTA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지난 5월 초 한EU FTA 국회통과를 방관한 것에서 드러났듯이, 언제든 찬성 입장으로 뒤바뀔지 모른다. 민주당이 국회에서 한미 FTA 재협상안에 반대하는 것도 실은 노무현 정부 시절 자신들이 체결한 협정은 별 문제가 없다는 인식에 근거한 정략적 계산일 따름이다. 이제 한미FTA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거리의 저항의 물결밖에 없다. 노동자 민중을 자본에 팔아넘기는 기만적인 한미FTA를 필사적으로 막아야 한다. 복지국가를 말하던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한미FTA가 통과되면 복지국가조차도 불가능하다. 박원순 후보가 하면 다르다는 서울, 한미FTA 통과되면 자본에게 더 행복한 서울이 될 텐데, 진보정당과 노동자운동은 박원순 후보 지지캠프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허세욱 열사의 정신을 살려내자. 10월 22일 한미FTA 저지투쟁으로 모이자. 2011년 10월 18일 사회진보연대
미군 성폭행 범죄자를 엄정히 처벌하고, 불평등한 SOFA협정 개정하라! 주한미군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9월 24일 새벽 제2사단 소속 미군이 동두천 시내의 고시텔에 들어가 10대 여학생을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했으며, 그 일주일 전인 9월 17일에는 미8군 소속 군인이 마포구의 고시텔에 들어가 자고있던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도 드러났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주한미군의 악질 범죄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미국 측에서는 사건에 대해 해당 군부대의 명의로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한달 동안 야간 통행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이는 사태를 모면하기 위한 눈가림에 불과하다. 한달 동안 한시적으로 취해지는 금지조치가 빈발하는 범죄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게다가 휴일에는 새벽 3시부터 2시간 동안이 통행금지 시간이라고 하는데, 범죄를 막는데 전혀 실효성이 없음이 자명하다. 게다가 이태원, 홍익대 등지의 상인들에 따르면 통행금지를 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지켜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통금에 대한 고지만 할 뿐 단속이나 처벌이 없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군 범죄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구속수사와 원칙적인 법 집행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두 명의 피의자 모두 범행 후 부대 복귀하여 불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 미군 범죄가 발생할 경우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소 시점까지 신병을 주한미군에 인도하도록 하고 있는 현행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때문이다. 이것은 개별 사건들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미군 범죄자들에 대해서 미군이 신병을 인도해감에 따라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한국의 법에 따라 처벌하지 못하고 솜방망이 처벌에 그쳐왔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함께 주한미군 범죄 재발을 막기 위한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주한미군에게 주둔군으로서 특권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SOFA를 전면 개정해야 한다. - 성폭행을 저지른 주한미군을 즉각 구속, 처벌하라! - 오바마 대통령은 주한미군에 의해 발생한 성폭행 사건에 대해 사과하라! - 불평등한 미군주둔군지위협정(SOFA)을 개정하라! 2011년 10월 11일 사회진보연대
한미FTA 국회 비준 절차를 중지하라 ! 한미FTA 저지 투쟁의 태세를 복구하자 ! 어제 10월3일 오바마 미국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행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이로써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에 방문하는 10월13일 즈음에 미국의회가 한미FTA를 비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국 의회 역시 지난달에 외통위에 FTA법안을 상정해버렸기 때문에, 상임위 표결과 본회의 통과만을 남겨 둔 상태다. 당장 한나라당 남경필 외통위 의장은 10월 17일~18일 경에 FTA법안을 외통위에서 표결 통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나라당의 뜻대로 된다면, 당장 10월 28일 본회의에서 최종 비준안이 통과될 수도 있는 다급한 상황인 것이다. 최근 경제위기가 다시금 심각해지면서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이 소소한 절차적인 이견을 접고, 빠른 합의를 이루어 미국 쪽 비준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이 “한미FTA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라는 자랑스러운 세 글자가 찍힌 제품들을 만드는 (미국) 전역의 수십만 명의 근로자들을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의회의 조속한 비준처리를 촉구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미국 측이 이런 절차를 밟을 것이라는 것은, 애초에 FTA협상이 마무리되었을 때부터 예상되어왔던 기정사실에 불과하다. 사태가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노동자 민중진영의 FTA반대 투쟁 태세를 복구하고 다시금 발동하는 것에 달려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다급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의 현실은 만만치 않다. 9월말부터 농민연대가 10월 국회를 앞두고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지만, 다른 노동자 민중운동단위들은 아직까지 한미FTA투쟁과 관련된 힘 있는 대응을 벌이고 있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의힘과 한미FTA범국본을 중심으로 긴급한 공동 투쟁 일정이 계획되었다. 우선 내일(10월5일) 오전에 민중의힘과 한미FTA범국본이 주최하는 비상시국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그날부터 민중운동 대표단의 단식농성이 서울시청 대한문 앞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대한문 앞 촛불집회도 매일 개최하기로 했다. 10월9일에는 이명박 매국방미 규탄과 한미FTA저지를 위한 범국민대회가 열린다. 그 이후로는 이명박이 미국을 방문하는 10월13일, 17~18일 국회 외통위, 29일경 국회 본회의 통과 시도가 지금 예상되는 주요한 계기점들이다. 지금은 실제 비준안 처리가 언제 이루어질지 미국과 한국의회 일정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비준안이 언제 상정되건 상관없이 총력 투쟁 태세를 복구하는데 집중해야 할 때다. 비준안이 언제 어떻게 처리될지를 따지면서, 저들의 일정을 뒤쫓을 상황이 아니다. 더욱이 아직까지는 민주당이 그 뜻이 애매모호한 ‘전면 재협상’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올 봄 한EU FTA처리 때처럼, 결국에는 말로만 반대하고 어물쩡 넘어갈 수도 있다. 우리가 믿을 대안은 힘 있는 대중투쟁의 불씨를 되살리는 길 뿐이다. 국회 본회의 FTA법안이 비준된 후에 규탄할 것이 아니라, 그전에 비준안을 본회의에 감히 상정하지 못하도록 막아설 수 있는 대중투쟁을 만들어 가자! 2011년 10월4일 사회진보연대
자본에 맞선 노동권 생존권 투쟁을 강화하자 무상급식, 반값등록금과 같은 단일 이슈 중심의 ‘복지’ 담론과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사회모델로서 ‘복지국가’ 담론을 구분지어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참여연대와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복지국가 담론을 다룬다. 논자들마다 편차는 있지만 이들의 공통된 문제인식은 신자유주의가 빈곤층의 확대, 비정규직 양산 등 다양한 사회적 위험들을 만들어내는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보편적 복지국가라는 것이다. 다양한 논자들이 제기하는 보편적 복지국가에 대해 일정 정도의 컨센서스가 존재하는데 ▲노동과 기업 간,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와 편중 심화를 극복하기 위한 공정한 경제를 실현하고, ▲노동유연화를 지양하고 고용안정과 임금격차의 축소를 도모하며, ▲교육비, 의료비, 주택마련과 관련한 국민들의 고통을 해결해줄 수 있는 보편적 복지의 실현이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를 실행하기 위한 공정한 재정 마련 방안이 제기되는데 논자들마다 관점이나 방법은 다르다. 복지국가 담론은 이념적 차원과 야권연대라는 정치적 전략 차원의 문제가 결합되어 있다. 복지국가론자들은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정권교체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야권연대나 민주대연합을 주장한다. 한편, 정권교체를 목표로 하는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야권연대를 위한 내용적 매개로 복지국가 담론을 활용한다. 한편, 7월 20일 민주노총, 한국노총, 참여연대를 포함한 36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복지국가 실현을 위한 시민사회 연석회의’가 결성되었다. 연석회의는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7대 기본원칙과 15대 의제(참고 1)를 발표하고 정기국회에서부터 법 제도 개선과 예산확보를 요구, 총·대선에서 쟁점화하기로 했다. 2단계 복지국가 비전(5개년 계획) 수립, 시민문화제 등을 추진하고 10월 말 본부와 지역본부를 결성한 뒤 총·대선에서 복지정책과 관련해 정치세력을 견인·견제할 방침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복지국가 담론이 확산되고 있는가. 복지국가 담론이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드러나면서 빈곤이 심화되고 민중의 삶이 악화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복지국가가 현재 노동자민중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복지국가의 모순 복지국가론자들은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말하며 신자유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안이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보편적 복지국가가 필요하다는 주장의 배경에는 크게 다음과 같은 논리가 있다. 1970년대 말 유럽에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전환은 완전고용의 포기, 복지혜택의 축소, 민영화 등을 의미했고 이는 복지국가의 위기를 의미했다. 이로 인해 실업자, 빈곤층이 증가하고 소득불평등이 심화되었다. 그 와중에 미국-영국의 자유주의 복지국가,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보수주의 복지국가보다는 스웨덴과 같은 사민주의 복지국가가 불평등지수도 가장 낮고, 가장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 지출을 유지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위험에 대한 적응력이 가장 높았다, 따라서 영미식 복지국가의 잔여적 복지보다는 스웨덴과 같은 보편적 복지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복지국가의 내재적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단순히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회 또는 완화한다고 해서 복지국가의 위기를 해결하거나, 한국의 경우 복지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복지국가가 내부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었는데 세계화 흐름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실행되었기 때문에 위기가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복지국가에 모순이 내재했고, 이윤율 하락국면에서 그 위기가 폭발하면서 복지국가들이 케인즈주의를 철회하고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것이다. 서구 복지자본주의 국가들은 예외 없이 복지지출이 증가하는 경향이 내재하기 때문에 재정위기 가능성이 상시적으로 존재한다. 대규모 법인기업들은 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의 ‘엔진’ 역할을 수행하는데 생산성 증가는 기술진보에 달려있기 때문에 이들의 성장은 교통, 통신, 연구개발, 교육, 기타 설비 등의 더욱 많은 사회적 투자를 필요로 한다. 대규모 법인기업의 입장에서는 숙련 노동력과 자본집약적 기술을 결합시키는 것이 합리적인데, 이때 숙련 노동력을 훈련시키는 비용은 조세에 의해 충당된다. 또 대규모법인기업의 성장은 실업과 빈곤을 수반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다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한다. 국가가 사회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재정을 확대하려면 또 다시 생산성이 높은 부문의 산출 증대에 기대게 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높은 부문의 산출 증대는 경제 위기 시에는 더더욱 구조조정, 임금삭감 등 노동자들에 대한 더 많은 착취로 이루어지고, 이는 또 다시 실업급여와 같은 사회적 지출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킨다. 반면, 기업의 성장을 위한 비용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부담되지만, 기업의 이윤은 사적으로 전유된다. 따라서 사회적 비용부담과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잉여 사이의 괴리는 점점 확대된다. 만약 국가가 독점부문에 기업을 설립하고자 한다면 이윤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안정적이기 때문에 잉여를 통해 일반적인 예산지출의 자금조달을 도울 수 있지만, 이러한 기술적 가능성은 정치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하다. 독점자본이 자신의 ‘자연적인 지배영역’에 국가자본이 침투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복지자본주의 국가들에 내재한 구조적 모순은 전후 성장기에는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지만 이윤율이 하락하면서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이 시도되었다. 둘째, 복지국가론자들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자고 말하지만 사실 신자유주의를 철회하는 것은 아니다. 참여연대의 김기식씨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해 “IMF 이후 경제정책에서 신자유주의 도입은 불가피했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들을 완화하기 위한 복지를 제도화시켰기 때문에 전 민주당 정권의 성격은 이중적이며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케인즈주의에서 완전고용을 목표로 경제정책을 보완하던 사회정책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이전과 달리 금융적 팽창과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경제정책의 목표에 종속되게 된다.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이자율 조절을 통한 통화정책 우위의 경제정책을 통해 금융자본의 우위를 보장해준 것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다. 그리고 재정정책이 이러한 통화정책의 기조에 종속됨에 따라 재정정책에 대한 정부의 재량권도 축소된다. 동일한 경제기조 속에서도 사회정책은 그 범위나 방식이 차이가 날 수 있다. 레이건과 대처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가 빈곤층을 노동시장에서 영구 배제시킴으로써 이들을 아예 경쟁에서 밀어내는 전략을 택했다면, 이로 인한 양극화와 사회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블레어가 제시한 제3의 길은 배제된 실업자를 노동연계복지를 통해 포섭하는 전략을 택한다. 사회정책은 노동연계복지처럼 강제적인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권한강화(empowerment)라는 ‘자발적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또 목표대상도 등록된 실업자에서 빈곤한 독신 부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그 비용과 지속시간도 다양하다(영국이 그 목표대상이 제한적인 잔여적 복지를 제공한다면 스웨덴은 보편적 복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정책들간에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이들은 모두 신자유주의의 핵심인 통화정책 우위의 경제정책, 자본이동의 자유화, 노동유연화를 수용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적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복지의 대상을 얼마나 넓게 제시할 것이냐를 두고 서로 차이를 부각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와 같은 공통점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복지국가론자들은 ‘복지국가는 단지 여러 복지정책들의 조합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운영 원리다’라고 이야기하지만, 보다 근본적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면 사실 상 복지정책의 조합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경제정책의 변화로 재벌기업의 지배구조 개혁, 원하청 불공정 거래 철폐 등 공정한 경제를 제시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철회하더라도 복지국가의 경제적 토대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 삼는 논자들도 존재하는데,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정태인원장은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금융거래세를 부과하고 (중략) 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자본이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새로운 금융거시건전성 규제를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케인즈주의적 주장은 위와 같은 복지자본주의 국가의 구조적 모순을 건드리지 않는다. 케인즈주의는 금융억압과 적극적 재정정책을 통해 고용과 복지를 확대하자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적 금융해방을 역전시키는 금융억압은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 감독의 강화를 의미한다. 케인즈주의자들은 금융억압의 구체적 수준과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금융억압의 국내 국제적 수단을 입법과 집행의 정치적 의지에서 찾는 데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은 금융의 정치적 압력을 제어할 수 있는 정치구조를 확립하거나 정치적 세력관계를 변화시키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억압은 단순한 정치적 의지로 실행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20세기 초의 '2차 산업혁명'을 통해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던 1930년대 금융억압을 통한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과 달리 이번 금융위기는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상황에서 발생했으므로 금융을 억압한다고 해서 새로운 경제성장이 출현할 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케인즈주의로 복귀하자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미 1970년대에 이윤율 하락에 대한 반작용으로 금융이 해방되고 실물경제적 축적이 금융적 축적으로 대체된다. 이에 따라 금융적 축적을 뒷받침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이 실행되는 것이다. 금융억압만으로는 실물경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케인즈주의자는 수요를 자극하여 실물경제를 부양하기 위한 재정정책을 강조한다. 케인즈주의의 논리에 따르면 공급이 아니라 수요, 즉 생산이 아니라 소비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므로 수요를 진작시킬 수 있는 임금인상과 총고용보장이 경제성장을 위한 대안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은 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하고 적극적 재정지출을 통해 고용을 창출하며 사회보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노동자계급이 자본의 경제위기 책임 전가에 맞서기 위해 방어해야 할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20세기 초처럼 이윤율을 장기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기술혁신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한 임금인상과 재정적자에 기초한 수요의 증가는 단기적 효과만 가질 따름이다. 설사 기술혁신의 가능성이 존재할지라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하에서 기술혁신은 고정자본을 소비하고 노동을 절약하는 편향을 가지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자본생산성 하락과 이윤율 하락이라는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넷째, 서구 복지국가는 전후 경제성장이라는 조건 하에 노동과 자본이 타협한 결과물이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전후 장기적인 완전고용의 결과로 노동자계급의 힘이 증가되었고 이는 지속적으로 인플레이션의 압력을 형성했다. 이에 유럽 국가들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노동조합에 대해 임금인상 투쟁을 자제하는 대가로 사회적 임금의 개선을 제시했다. 그러한 사회적 타협은 기본적으로 전후 호황기에 자본이 노동에 양보할 만한 여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회적 타협으로는 노동자계급이 얻을 것은 없다. 복지국가론자들은 자본과의 타협 없이 보편적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자본의 이해를 보장하는 과정이 복지국가의 모순이 심화되는 과정이었고, 세계화로 인해 자본의 힘, 특히 초국적 자본의 힘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유연화를 제어하지 못하고 각국 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한 재량권이 제한되고 있다. 경제위기 시대 노동자계급이 자본에 맞선 투쟁 없이 국가, 자본과 타협을 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양보와 후퇴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노동자의 위기 전가에 맞선 주체역량을 강화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이해를 보장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역량을 강화하고 계급 역관계를 역전시키기는 불가능하다. 사회임금의 한계 복지국가론자들이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면서 언급하는 것은 ‘사회임금을 늘리자’는 것이다. 사회공공연구소 오건호 연구실장 등은 노동자운동이 이제 시장임금만이 아니라 사회임금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지국가들의 사회임금이 매우 높음을 주목하며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사회임금 수준이 OECD 국가 평균에 비해 현저히 낮다고 지적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고 한국의 경우 복지를 확대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사회임금을 실제로 누가 부담하는가를 간과한다. 사회임금 비중이 높을수록 그만큼 국가의 역할이 크고 재분배효과도 클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계급 내 재분배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독일, 스웨덴, 영국을 대상으로 진행된 한 연구는, CEO 등 상층 관리자를 제외한 임금 노동자들이 지불한 세금이 그들에 대한 사회적 지출과 거의 일치하도록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그림 2). 1960-1987년 사이 임금노동자들에 대한 전체 사회적 지출과 그들이 지불한 세금의 차이, 즉 순 사회임금은 GDP의 1~2% 수준이었다. 이 차이가 플러스라는 것은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이 낸 것에 비해 더 많이 받았음을 의미하지만, 복지 혜택을 받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국가경제의 생산량 가운데에서 그들이 배분받는 비중은 생각보다 적다. 국가별로 보면 미국에서 전후 성장기에 순 사회임금은 마이너스였다. 즉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이 낸 세금에 비해 혜택을 덜 받았다는 것이다. 같은 기간 스웨덴에서 순 사회임금은 거의 0이었다. 즉, 전후 스웨덴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관대한 복지 지출은 사실상 노동자들이 거의 모두 스스로 부담한 것이다. 독일의 경우 순 사회임금은 성장기에 일반적으로 플러스였다(GDP의 4% 수준). 이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다. 1970년대 이후 불황기에 진입하면서 사회안전망의 확대로 인해 사회임금의 비중이 상승하게 되는데 특히 스웨덴은 1970년대부터 정부의 이전지출이 급증하여 1980년대에는 순 사회임금 비중이 독일을 추월하게 된다. 스웨덴 모델을 표방하는 복지국가론자들이 스웨덴의 사회임금 비중이 높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스웨덴에서 순 사회임금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스웨덴 모델이 쇠퇴하면서부터였고, 막상 스웨덴 모델의 전성기에는 순 사회임금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그림3). 이 자료들이 보여주는 바는 노동자들의 세금지불과 사회적 급여 혜택 사이의 재정 흐름은 전체 임금 노동자들 사이에서 임금을 재순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5개국에서 연구 결과는 사회임금의 실재가 거의 대부분 노동자계급 내 재분배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심지어 계급 내 재분배 효과도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계급 간 재분배가 적다는 것은 그만큼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에 미달한다. 기업의 이윤은 노동자의 노동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인데, 그 이윤은 일반적으로 자본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임금은 노동자가 계속 노동을 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노동력의 재생산가치)인데, 자본주의적 노동은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한 노동강도 강화 등을 통해) 더 많은 산재와 (과잉생산, 노동절약적 기술발전으로 인해) 실업과 같이 노동자에게 ‘예측 불가한 위험’을 야기한다. 재생산을 위해서는 산재를 당했을 때 치료하는 비용, 해고를 당했을 때 다음 일자리를 찾기까지 ‘생존’하는 비용과 같은 것도 포함이 되어야 하지만 직접임금은 이러한 위험에 대한 비용은 포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브뤼노프는 이를 노동력의 ‘재생산가치’와 ‘일상적 가치’의 괴리, 즉 과잉착취의 경향 또는 ‘궁핍화’ 경향이라고 정의했다. 게다가 실업인구의 형성으로 인해 노동자 내부에서 취업자과 실업자간 경쟁이 발생하고 이는 임금 하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과잉착취의 경향은 더욱 심화된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복지제도가 발전하게 되는데, 그러한 사회보장은 노동자들에게 발생하는 위험을 완화할 수는 있지만 제거하지는 않으며 불확실한 조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예방하는 효과를 가진다. 또 사회보장을 통해 제공되는 간접임금(사회임금)과 직접임금의 합은 여전히 노동력의 재생산가치에 미달한다. 한편 복지제도는 실업자와 빈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초법과 같은) 공적원조와 취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4대 보험과 같은) 사회보험 두 체계로 나눠지는데, 이 분할은 실업자와 취업자 사이의 분할을 지속시킨다. 이러한 분할은 지속적으로 노동자 간 경쟁을 유발하고 임금압박으로 작용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사회임금이 계급 내 재분배에 가깝다는 것은 노동자가 자신에게 닥치는 위험에 대한 비용을 포괄하지 못한 임금을 받는 것과 다름없다. 즉, 곧 노동자들이 실업을 비롯해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노출되는 고유한 위험에 대한 방어조차 노동자 스스로가 부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자본이 노동자에게 위험 부담을 부과함과 동시에 그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한편,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전체 산출 중 노동자가 가져가는 몫인 노동소득분배율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계속 증가하던 노동소득분배율은 1996년 노동소득분배율 62.6%를 정점으로, 2006년 57.8%로 훨씬 악화되었고, 이명박 정부 들어 노동소득분배율은 2007년 56.7%, 2008년 56.2%, 2009년 54.8%로 악화되었다. 이는 그만큼 자본이 더 많이 가져가고 있으며, 계급 간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역전시킬 계급 간 재분배 전략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계급 내 재분배는 ‘점점 더 작아지는 파이 나눠먹기’가 될 공산이 크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계급 간 재분배를 위한 전략이고,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주체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임금인상 투쟁에서와 마찬가지로, 계급 간 재분배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설사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의 역량 강화를 도모하는 것일 것이다. 오건호 연구실장은 사회임금 재원의 형성을 위해 증세와 사회보험료 인상에 노동자계급이 동의하고 참여함으로써, 무조건 국가와 자본에 요구만 하던 패러다임에서 실제로 이들의 부담을 이끌어낼 수 있는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한다. 그는 사회임금은 특정기업의 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구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통의 이해관계를 형성해줌으로써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극복하는 연대의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통의 이해관계란 같은 대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쟁취할 때 형성되는 것이지 내부적으로 양보하고 나눠 갖는 것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즉, 공통의 이해관계가 성립하려면 싸우는 대상이 일치해야 한다. 또 노동자계급이 먼저 증세에 동의하고 이를 지렛대로 부자증세를 이끌어내자는 주장은, 복지국가들의 역사에서 봤듯이, 노동자계급의 증세가 계급 간 재분배를 담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설사 정책적 효과로 계급 간의 재분배 효과가 향상되더라도, 양보를 통한 사회적 합의를 하는 방식으로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강화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계급 간 재분배 계급 간 재분배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것이 부자증세이다. 그러나 그것은 몇몇 복지국가론자들이 지적하듯 정치적 저항을 야기할 것이다. ‘부자’들의 정치적 저항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부자증세를 집행해도 계급 간 재분배는 제한적인데, 자본에 대한 과세를 높이더라도 자본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부담을 노동자계급에게 전가하거나 피해가기 때문이다. 기업은 개인소득보다는 법인소득에 과세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가격을 통제하여 법인 소득세를 소비자에 전가할 수 있다. (미국에서 세율이 12.5%였던 1920년 당시 대규모 제조업 법인기업의 과세 후 소득은 순장부가치의 12%였다. 세율이 52%였던 1955년에 그 수치는 여전히 13%였다.) 개인소득세는 누진적이지만 부의 대량 집중 현상에는 크게 충격을 줄 수 없는데, 법인소유자와 경영자는 소득의 대부분을 세금이 면제된 자치단체 채권 이자나 비교적 세율이 낮은 실현자본이득의 형태로 얻을 수 있고, 고액소득의 경우 소득을 분할함으로써 큰 편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법인기업은 조세를 차단하고 특례조항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조세체계는 사실상 노동자와 소기업계급, 특히 과세대상소득이 비교적 높은 대기업 중산층 노동자의 착취에 바탕을 둔다. 한편 기업이 부담하는 사회보장세는 임금을 억제하여 노동자에게 전가됨으로써 사실상 모든 부담이 임금에 부과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전반적인 경향은 노동자계급에게 상대적으로 더 많은 부담을 안김으로써 재분배정책의 효과를 감소시킨다. 한국은 법인세의 경우 기업들이 각종 비과세, 감면 조치를 받고 있으며 이 혜택은 주로 대기업들이 보고 있다. 재산세는 다른 OECD 국가에 비해 높은 편이지만 부동산 보유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높지 않다. 소득세의 경우 고소득층에서 소득세 탈세 규모가 높고 상위계층의 세금 부담이 소득수준에 비해 매우 작으며 금융자산소득에 대해서도 제대로 과세되지 않고 있다. 배당 소득세는 낮고 자본이득에 대해서는 비과세되고 있다. 또 사회보장세에서 기업 부담률이 낮다. 이런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비과세, 감면 혜택의 과감한 축소,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 저소득 자영업자들의 탈세를 조장하는 간이과세 제도의 개혁, 세율 조정과 누진율의 상승 등이 제시된다. 그러나 이런 방안들에 반대하는 정치적 저항을 상쇄할 만한 힘이 없다면 결국 여러 방안들 중 간이과세 개혁과 같이 노동자민중의 부담을 늘리는 정책만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즉, 부자 증세 정책을 실현시키는 데도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필요하고, 자본이 증세 부담을 다시 노동자계급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필요한 것이다. 자본은 순순히 이윤을 양보하지 않기 때문에 증세에 응하더라도 이윤을 보전하기 위해 임금삭감, 구조조정 등을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인들이나 학자들이 부자증세를 마치 조세개혁 정책들을 입안하고 실행하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지만 결국 노동자운동의 힘이 없다면 부자증세의 집행도, 계급 간 재분배 효과의 달성도 어려울 것이다. 또한 부의 편중이 가속화되는 경향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부자증세는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계층별 순자산(=부동산 자산+금융자산-부채) 보유의 변화를 한국노동패널 데이터를 통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상위계층의 자산 점유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세, 이자, 배당금 등이 포함된 재산소득의 증가가 고소득층에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1분위의 재산소득은 글로벌 금융위기 발생 이전인 2007년까지 매년 5.8%씩 감소한 반면 5분위의 재산소득은 매년 3.3%씩 늘어났다. 계급 간 재분배를 요구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직접임금 인상 투쟁과 해고 저지 투쟁일 것이다. 하지만 교육, 보건의료 등 직접임금만으로 포괄되지 않는 다양한 영역이 있기 때문에 (순)사회임금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직접임금으로 포괄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복지 영역에 대해서는 단지 “복지확대, 부자증세”를 요구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쟁점을 제기해야 한다. 보건의료나 교육서비스를 공급하는 기관을 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가 여부는 매우 중요하다. 보건의료에서는 병원, 제약, 보험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고, 대학 등록금 문제는 사학 재단에 대한 규제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부자증세를 하고 국가 재정지출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더라도, 세금이 민간의 사적 이윤으로 귀결된다면 계속 더 많은 재정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보건의료나 교육 서비스에 있어 이윤을 추구하는 공급기관에 대한 통제 요구는 계급 간 재분배 요구를 직접적으로 드러낼 뿐 아니라, 중장기적으로는 재정위기를 완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한나라당이 재정위기, 세금폭탄 등을 지적하며 복지 포퓰리즘을 공격할 때, 복지 서비스의 공급 구조를 적극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다면 진보의 무조건적 복지 확대 주장은 그러한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민중운동이 복지국가 담론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복지국가 담론이 구체적으로 제기하는 의제들이 실제 노동자·민중의 요구와 부합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복지국가 연석회의의 기본 원칙과 의제는 마치 대선 후보 공약집을 방불케 하는 법·제도적 정책개선 목록이다. 5대 원칙, 15개 의제 하위에 총 70여 개의 과제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모두 법·제도 개선 관련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 복지 패키지를 홍보하고 여론화해서 이 패키지를 지지하는 정치인·정당에 대한 투표를 조직한다는 것이 이 운동의 개요다. 이는 구체적 쟁점에 대한 구체적 투쟁 주체의 조직화 없이, 국민들이 ‘복지국가’를 지지하고, ‘복지국가’를 약속하는 정권을 세우면 노동자 민중의 삶이 나아질 것처럼 호도한다. 여기에 당장 민주당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주요 구성 단위들의 성격과 운동 방식을 고려했을 때 민주당과 협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이런 운동에 역량을 투여하면서 현장과 지역에서의 운동의 재조직화는 상대화하고 있다. 노동자 투쟁이 존재할 경우 관련 제도나 정책에 대한 사회여론전이 투쟁의 파급력을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장의 운동이 없거나 구심점이 약한 상태에서 정책 패키지에 대한 지지를 조직하는 방식의 운동은 도리어 정책 실현이라는 목표를 위한 동원에 머무르기 쉽다. 이는 역량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동이나 복지의 문제가, 다양한 사회정책들의 조합을 고려해야 하는 복지국가 건설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순간 계급대립이라는 축은 희석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은 투쟁의 주체가 되기보다는 정책개혁의 지지·협조세력 나아가 조정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더군다나 스스로 신자유주의자라는 것을 부정하지만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자들인 민주당과 연합을 추진하는 전략 속에 노동자운동은 계급성을 잃고 포섭될 가능성이 높다. 또 노동자계급 내 분할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없이, 무조건 사회임금이 많아지면 좋다는 식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부담을 증가시키고 계급 내 재분배에 머물면서 노동자 내부의 분열과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복지국가 담론은 노동자운동의 계급성을 탈각시키고, 우경화하는 데 일조할 가능성이 높다. 정권교체를 통해 복지국가로 가자는 주장이 빨리 갈 수 있는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투쟁을 지체시킴으로써 실제 노동자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