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체제의 안정성, 북중 관계의 변화, 동아시아의 권력 재편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미래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보수 언론들은 ‘어린 지도자’, ‘준비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마치 당장에라도 북한에 ‘급변사태’가 일어날 듯 호들갑을 떨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시기 벌어졌던 이른바 ‘조문파동’을 의식했는지 이명박 정부는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지만 결국 조문을 제한했고, 북한은 강력한 어조로 이를 비난했다. 애초 북한의 우라늄 농축문제와 식량 지원의 ‘빅딜’이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 섞인 관측이 나왔던 북미대화는 중단되었고, 언제 재개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 이후 지금까지 약 17년간 북한을 직접 통치해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것은 1974년 2월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는 약 20년간의 권력 이양의 준비기간을 거친 셈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후 북한 권력을 승계하게 된 김정은이 공식적인 승계과정에 돌입한 것은 1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 5월 무렵 심장 수술을 받았고, 2008년 8월에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사건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후계자 선정과 후계체계 확립에 속도를 내왔다. 12월에만 9차례 공식 시찰을 다닐 정도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왕성하게 활동한 것에는 후계체계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정일-김정은 체제 이양기는 2008년 이후 아무리 속도를 냈다고 하더라도 3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으로, 김일성-김정일 체제의 이양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짧은 기간이다. 더구나 후계자 지명 이전부터 당 선전위원장 등의 업무를 수행하며 경력을 쌓았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는 달리 김정은은 해외 유학 등으로 인해 북한에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시간조차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북한체제의 권력 이양이 지닌 이러한 취약점은 북한을 넘어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2012년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미래는 북한체제의 권력 이양과 이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대응 방식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겪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본 글에서는 △북한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 △북중 관계의 변화, △동아시아 각국의 대응이라는 3가지 축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정세를 분석하고자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과 북한 체제 김정은 체제로의 권력 이양은 일반적인 관측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애초 김일성 주석의 사망 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3년 상을 치렀던 것처럼 김정은 역시 이러한 시기를 거치며 권력 재편을 준비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12월 2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앙추도대회에서 김정은을 최고지도자로 하는 새 시대의 개막을 선포했다. 북한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이날 추도사를 통해 “우리의 전도에는 계승자이신 김정은 동지께서 서 계신다”며, 김정은을 ‘최고 영도자’, ‘영도의 중심’ 등으로 표현했다. 또한 <조선중앙통신>의 31일 보도에 따르면, 북한 노동당 정치국 회의에서 김정은 부위원장이 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인해 북한 체제의 권력 공백은 어쩔 수 없는 조건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맡고 있던 당내 직위는 당 총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장 겸 정치국원, 당 비서국 내 조직담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 부장이었다. 한마디로 김정일 위원장이 당의 모든 요직을 겸직하고 있던 상황이다. 당의 의사결정은 김정일 위원장에게 고도로 집중되었고, 변칙적인 당 운영이 일상화되었다. 김정은이 이러한 김정일 위원장의 역할을 하루아침에 대체하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원만한 권력 이양을 위해서는 상당 기간 기존 정책을 유지하면서 북한 지배 세력 내에서 일정하게 권력을 배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북한이 2012년 1월 1일 발표한 새해 공동사설은 이러한 북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로동신문>(당보)과 <조선인민군>(군보), <청년전위>(청년동맹 기관지)의 새해 공동사설은 “김정은 동지는 곧 김정일 동지”라며, “김정일 동지의 유훈, 정책을 … 관철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사설은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는 선군조선의 승리와 영광의 기치”라며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선군정치가 유지될 것임을 내비쳤다. 북한의 정권 담당자들은 당분간 급격한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막고 안정화를 추구하기 위해 어린 후계자를 중심으로 한 체제 유지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에 대한 대응과 재편에 대한 일사 분란한 움직임 속에서 ‘북한 급변사태’의 시나리오는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표 1] 북한 신년 공동사설 주요 내용 하지만 집단지도체제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과 국가의 운영이 상당히 변칙적으로나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라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의 성정(性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요직을 독점한 채 일관되게 북한 체제를 이끌어갈 수 있었던 ‘일인 체제’의 특성을 의미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부재 속에서 북한은 당장의 안정화는 가능할지라도, 향후 체제의 방향을 둘러싼 논의에서 심각한 정책 갈등이 표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북한의 신년 사설은 식량문제 해결을 ‘강성국가 건설의 초미의 문제’로 언급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원조는 물론이거니와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대화 진전이 전제되어야 한다. 더구나 어린 후계자가 자신의 지도체제를 시작하는 2012년은 김일성 탄생 100년을 맞아 북한이 선포한 ‘강성대국의 해’다. 북한 민중의 삶이 다소나마 실질적으로 개선되고 체제의 안정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대외관계가 핵심적인 열쇠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향후 북한의 대외관계, 직접적으로는 개혁개방을 둘러싼 논쟁이 불가피하며, 이를 둘러싼 지배계급 내의 권력투쟁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중국, 그리고 6자회담 북한 체제를 전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중국과 미국의 대북정책이다. 예전부터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과 같은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북한의 급변사태에 군사적 대책을 준비해왔다. 하지만 현재 미국은 ‘주시하고, 기다리고, 준비한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새로운 정권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접촉을 준비할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얼마 전까지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원론적인 입장을 고집해왔으나, 이는 2012년 미국의 대선을 겨냥한 국내용 제스처에 가깝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발표가 있기 하루 전(실제 사망한 다음날)까지 식량지원과 핵 협상 재개 문제를 두고 북한과 접촉을 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미 관계는 얼마간 접촉이 유지되더라도 상당 기간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미국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을 포함한 핵 프로그램을 핵심적인 쟁점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일 위원장이라는 존재가 사라진 북한이 당장에 획기적인 결단을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향후 북한 체제는 중국과의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내적 기반이 취약한 김정은 체제에서 중국의 인정과 후원은 필수적이다. 갑작스런 권력의 공백, UN 결의안 1874호로 인한 전략 물자 부족, 식량 공급 감소 등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북한이 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파트너가 중국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김정일 위원장 사망 발표 직후 후진타오 주석이 대사관을 찾아 조문하는 등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한 <조선중앙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12월 31일 후진타오 주석은 김정은 최고사령관 추대와 관련 북한에 축전을 보내 “새로운 역사적 조건에서 전통적 중-조 친선협조 관계가 강화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김정은으로의 권력 세습을 인정하고 향후 협력 관계를 강화하려는 적극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이는 중국과 북한이 단지 ‘혈맹’이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하게 중국의 대외 정책에 입각한 전략적 선택이다. 중국은 북한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제고하는 한편, 중국의 지역 개발을 위한 교두보로 삼고자 한다. 최근 우칸 지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중국이 처한 곤란함을 그대로 반영한다. 중국 남부 광둥성 루펑시 우칸촌에서는 공산당 간부들이 마을의 토지를 부동산 회사에 불법 매각해 막대한 이익을 챙겨온 데 분노한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주민들은 지난 12월 12일 당과 정부, 공안 관계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마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등 4개월간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중국 당국은 우칸촌이 해방구가 된지 열흘만인 21일 주민들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다. 중국이 대단히 억압적인 체제임을 감안할 때 우칸 지역 민중봉기의 성공은 더 이상 통제와 탄압만으로 체제의 안정적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여준다. 급격한 개혁개방과 이로 인한 빈부 격차와 지역 격차, SNS의 확대로 상징되는 시민의식의 성장과 비판적 여론 형성은 더 이상 중국이 외면할 수 없는 문제다. 따라서 안보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낙후된 동북 3성의 개발, 급증하는 에너지 수요 등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북한은 중국에 중요한 존재가 되어 왔다. 최근 북한과 중국의 경제협력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2010년 북한과 중국의 무역 총액은 총 34억6천5백만 달러다. 2010년 한중 교역액인 2,071억 달러와 비교할 수도 없는 수치지만, 2009년에 비해 29%나 증가해 그 증가율이 어마어마하다. 또한 중국의 대북 자원개발 투자는 급증하고 있다. 석탄 수요가 2030년에는 지금의 2배 이상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중국은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해 에너지와 자원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북한이 2010년에 중국에 수출한 광물 자원은 8억6239만 달러어치에 이르며, 2009년에 비해 석탄과 철광석의 수출이 크게 증가했다. [표 2] 북한의 대중국 무연탄 및 철 수출 현황 뿐만 아니라 중국은 북한의 광물자원 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중국의 통화철강그룹은 무산광산에 약 70억 위안을 투자하여 50년 동안의 채굴권을 확보했으며, 중국 최대 광물자원 수입회사인 우쾅집단도 고열탄 매장지인 용등탄광의 50년 채굴권을 획득했다. 혜산청년광산은 중국과 합작회사 형태로 전환하여 대주주인 중국의 완샹그룹이 25년간 구리광산을 독점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만포의 아연광산, 회령의 금광도 중국 기업들이 합작투자 형식으로 개발권을 확보하고 있다. 중국은 증가하는 에너지와 자원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북한의 광물자원 개발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외환수요가 높다는 점과 유일한 파트너가 중국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이러한 투자는 매우 불공평하게 진행되고 있다. 1995년부터 2009년까지 중국이 북한에 적용한 수입단가는 다른 국가들과의 거대 단가보다 훨씬 낮다. 2008년 석탄 거래의 경우를 보면 중국은 다른 나라에서 톤당 192달러에 구매한 반면, 북한으로부터는 절반도 안 되는 77달러에 구매했다. 2010년 철광석의 거래를 보아도 중국은 다른 나라로부터는 톤당 평균 130달러를 주고 구매했지만, 북한에는 평균 111달러만 쳐주었다. 또한 중국은 북한에서 자원을 싸게 수입하지만, 연료를 북한에 수출할 경우 다른 나라보다 10%정도 높은 가격으로 판매한다. 쉽게 말해 중국이 북한에 지원하는 물품의 비용이 포함된 형태로 거래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중국의 무차별적인 광물 자원 독점과 단가 후려치기가 북한에도 편할 리는 없다. 그러나 현재 중국을 대체할 대안이 부재하며, 체제 안정을 위해서도 중국의 지원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는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강화된 북중 관계는 남한과 미국 등 주변 국가들의 대북정책에 상당부분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이나 미국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모두 북한의 태도 변화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중국에 기대어 얼마간 버틸 수 있다면, 남한이나 미국의 이러한 정책은 그 실효성을 잃게 된다. 더구나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남한이나 미국에서 급격한 정책 변화도, 취약한 리더십과 군부의 반발 가능성으로 인해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도 당장은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동안 남북관계 개선이나 북미대화의 진척은 어려울 것이며, 6자회담의 모멘텀 역시 상당부분 침식될 수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한미 군사동맹의 강화와 대미외교 올인 지난 10월 이명박 대통령은 5일 간 미국을 방문했는데, 이 대통령은 방미 기간 동안 미국 국방부(펜타곤)를 방문했다. 이때 펜타곤의 작전상황실인 탱크룸에서 리온 파네타 국방장관과 마틴 뎀프시 합참의장 등 미군 최고 수뇌부 12명이 총출동하여 한국 대통령을 맞이하여 한반도의 안보정세에 관해 브리핑을 진행했다. 냉전 시기에도 없었던 이러한 이벤트는 한미 군사동맹이 얼마나 강고해지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은 방미 기간 동안 총 13조7천억 원대의 무기 구입을 약속했다. 여기에는 차세대전투기 F-X 3차 사업과 대형공격헬기 사업, KF-16 전투기 성능개량 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2011 회계연도 기준으로 미국의 전체 해외 무기 수출액(461억 달러)의 30%에 근접하는 엄청난 규모다. 이번 무기 계약은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연평도 사태에 대응하고 있는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연평도 사태 이후 한국 정부와 군 당국은 적극적인 군사력 증강으로 대응하고 있다. 군사력 증강은 언제나 상대방의 수준을 압도하거나 상회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위협은 실제보다 과장되기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가 연평도 사태 이후 주민 생활의 안정이 아니라 군사력을 증강하고 호전적인 한미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데 연평도 사태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방미 중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부상에 대해 아시아 국가들이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미국의 ‘재관여’를 주문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니 미국이 나서 중국을 견제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는 중국 입장에서 보면 도발에 가까운 발언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파병 정책을 펼치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에 적극적으로 편승해 왔다.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참가가 남북한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크게 높일 것이기 때문에 ‘참관’에 머물겠다던 한국은 이명박 정부 들어 말을 바꿔 정식 참가하는 한편, 부산 앞바다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일본 자위대 함선까지 불러들여 대규모 군사훈련을 진행했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를 빌미로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동해와 서해에 진입하는 군사훈련으로 북한은 물론 중국의 강력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가 임기 초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한 전략동맹은 냉전적 의미의 군사동맹으로의 회귀와 심화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명박 정부의 전략동맹의 대상은 오로지 미국이며, 한국의 대외 정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전략적 이익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동맹 강화에 올인하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대북 정책의 유연성도,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 완화도 기대하기 어렵다. 핵안보정상회의 이러한 흐름은 2012년 3월 서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린다는 측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핵안보정상회의는 2010년 4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요청으로 미국 워싱턴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핵안보정상회의의 핵심의제는 ‘핵안보’(Nuclear Security)다. 기존의 핵문제가 핵 군축, 핵 기술 통제, 핵의 평화적 이용에 맞추어져 있었다면, 핵안보정상회의는 여기에 핵 테러의 문제를 추가한다. 때문에 핵안보정상회의는 핵 테러 위협에 대한 공동대처와 예방, 그리고 핵물질과 핵발전소의 안전을 강조한다. 핵 테러를 예방하고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공격적인 ‘반확산’ 정책이 강조된다. 핵관련 기술이나 물품의 수출입 통제 등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비확산’ 정책을 넘어, PSI와 같이 무력 사용을 동반한 반확산 정책이 국제적인 틀을 확보해가고 있다. 애초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천명한 ‘핵무기 없는 세상’을 위한 핵군축, 비확산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현재 핵안보정상회의는 체계를 갖춘 국제기구도 아니고, 앞으로 회의가 지속될지 여부도 지금으로서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워싱턴 회의 때 47개국 정상과 3개 국제기구 수장들이 모인 핵안보정상회의는 핵문제를 중심으로 한 안보분야의 실질적인 세계 최대 회의라 할 수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2차 회의는 50여 개국 정상들과 IAEA, EU, UN등의 국제기구 수장들이 모일 것으로 전망된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회의가 서울에서 열리는 상황이 북한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하거나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핵 문제 그 자체가 정상회의 의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북한은 핵안보정상회의의 핵심 의제인 PSI에 대해 휴전협정 위반과 주권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극렬하게 반발해왔다. 군사조치를 전제로 한 공격적인 통제 정책은 필연적으로 무력 충돌의 위험을 내포한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또한 PSI나 ‘세계핵테러방지구상’(GICNT)에 참가하면서 미국의 반확산 정책, 군사 정책에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한국 정부의 대외 정책은 북한이나 중국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핵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핵발전 확대, 핵발전소 수출 증대를 꾀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핵안보정상회의 개최에 우리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2012년, 동북아시아의 재편 총선과 대선이 겹치는 한국뿐만 아니라 2012년은 여러 나라의 정권교체 시기다. 동아시아만 보아도 3월에 러시아의 대통령 선거가 있으며, 중국은 10월 중에 새 국가주석을 선임한다. 4월에 총선과 12월에 대선을 치르는 한국, 11월에 대선을 치르는 미국과 1월에 총통 선거를 치르는 대만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동북아시아의 정권 재편기라 부를 만한 시기다.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차기 대통령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최근 치러진 하원의원 부정 선거 문제로 푸틴과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에 대한 극렬한 반발이 표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대세에는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푸틴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이미 두 차례 대통령을 지낸 바 있으며, 2008년부터 현재까지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대외정책이나 군사력 증강 흐름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세계 2위의 무기 수출국으로 10년간 약 7,300억 달러를 투입하는 군 현대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1년 국방예산 630억 달러 중 약 150억 달러를 무기 구매에 할당할 정도로 적극적인 군사력 증강을 꾀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중국과 함께 육해공군을 총동원하는 합동 군사훈련 ‘평화미션 2011’을 진행할 정도로 중국과 적극적인 협력을 모색하면서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에 대응하는 등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10월에 중국 공산당 제18기 전국대표대회를 열어 새 국가주석을 뽑을 예정이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국가 부주석을 맡고 있는 시진핑이 차기 국가주석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중국 동남 연안지방인 저장성 당서기 출신인 시진핑은 2007년 당 정치국 상무위원(서열 6위)에 선출되었고,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에, 2010년에는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선출되었다. 중국 체제의 3대 포스트라고 할 수 있는 당과 국가, 군의 요직을 두루 겸직하고 있는 것이며, 중국 인민해방군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우칸 지역 민중봉기와 같이 지역 격차, 빈부 격차 문제를 해결하고 내수를 진작하기 위한 방안 마련이 최근 중국의 중요한 과제지만, 시진핑은 분배 문제와 함께 성장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의 중국이 어떠한 대외 정책을 취할지 지금으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군사력 증강의 흐름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2011년 국방예산은 6,010억 위안(약 102조6천억 원)에 달하며, 2001년부터 국방예산의 평균 증가율이 15%에 이를 정도로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작년에는 첫 항공모함을 진수하여 8월에 시험항해를 진행한 바 있으며,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 젠-20의 개발을 본격화했다. 명실상부 G2로 성장한 중국은 일본이나 베트남과 영토분쟁을 진행하며 지역 강자의 자리를 굳히기 위해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일본은 작년 9월 간 나오토 총리가 물러나고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2007년 이후 일본의 총리 임기는 평균 1년 정도로 향후 어떠한 상황이 될지는 불확실하다. 후쿠시마 사고의 해결과 경제적 부흥이 현재 일본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라 할 수 있어 애초 일본이 계획하고 있던 잠수함 전력 증강 계획 등이 추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평소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주장하면서 민주당 내 극우파 성향으로 분류되는 노다 총리는 일본의 군사력 증강에도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인다. [표 3] 아시아의 군비 경쟁 2012년 평화운동의 과제 2012년이 동북아시아의 정권 교체기라는 것은 우리에게 다음의 것들을 시사한다. 첫째로 2012년에 각국 대외정책의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권 말기에 급격한 정책 변화를 추동할 만한 정치력이 부재하거니와 차기 선거를 의식해 전통적인 지지층 이탈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최근 이명박 정부의 제스처도 이러한 어려움을 보여준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신년 국정연설에서 “북한이 진정성 있는 태도로 나온다면 새로운 한반도 시대를 함께 열어 갈 수 있을 것”이라며 기존 대북기조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그런데 이번 연설에서는 천암함과 연평도 사태에 대한 북한의 사과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원래 6자회담의 (전제조건인) 비핵화에는 천안함과 연평도 문제를 엄격하게 연계하지는 않았었다”며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북한의 기본 책임을 면해준다는 식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부연했다. 파탄난 대북정책에 대한 비판에 직면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명박 정부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이는 대체로 이전 정권의 대외정책을 계승할 것으로 전망되는 각국의 상황에서 한동안 변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고 권력 교체기에 접어든 북한의 상황에서 한국이나 미국과의 정치적 빅딜을 예상하기도 어렵다. 둘째, 정권 말기 각국 정부의 대외정책에서 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지금 시기의 반전평화운동이 중요하다. 북한에 대한 고립 정책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이나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는 이미 실패했음이 드러났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면 북한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이제는 설득력을 잃었다. ‘고립과 압박, 이에 대한 군사적 대응, 이것이 초래하는 군사력 증강의 레이스’가 아니라, 진정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길을 대중적으로 밝혀가야 한다. 셋째,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 정착의 길은 6자회담의 재개나 햇볕정책으로의 회귀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민통 진영은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정책이 북한의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의 공개와 연평도 사건으로 파탄나고, 2011년 들어 6자회담 재개를 위한 협상이 본격화되었고, 2012년에는 일정한 결실을 맺어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희망 섞인 관측과는 달리 미국은 북미대화를 진전시킬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1월 5일 “남북관계 개선은 북한이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필수 요건”이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3차 북미대화의 전망을 묻는 기자들에게 “특별히 대답할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한 북한과의 관계 진전은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대북정책의 키를 쥐고 있는 미국이 남북관계 개선을 빌미로 북미 직접 협상을 미루고 있는 셈이다. 북미대화가 진척되지 않는 한 6자회담의 재개는 불가능하다. 또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6자회담이 재개될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6자회담 프로세스는 북한이 신고한 핵 프로그램에 대해 미국이 제동을 걸면서 중단되었고, 북한이 그동안 부인해오던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공개했기에 기존의 신고는 무의미해졌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이 굳건히 버텨준다면 북한으로서는 핵을 포기하면서까지 6자회담에 나서야할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 정치적 실적을 포장하기 위해 대북 관계에서 성과를 내야하는 이명박 정부를 제외하고 다른 참가국들에서 특별히 6자회담 재개의 동인을 찾기도 어렵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역시 기존의 강경한 대북정책에 스스로 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중운동 진영 대다수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과 한미동맹 올인 정책이 남북관계 파탄의 원인이라고 믿는 듯하다. 때문에 결론은 반MB 전선의 확대를 통한 정권 교체이고, 정권 교체를 통해 615 선언과 104 선언의 이행, 즉 햇볕정책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615 선언과 104 선언이 상징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봉쇄와 대결 정책에 비해 상대적 안정감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한 축으로 남한 자본이 주도하는 북한 사회의 경제적 재편을 추구하고, 다른 축으로는 북한 봉쇄를 예비하는 한미 군사동맹을 강화함으로써 남북관계에 새로운 형태의 긴장을 형성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00대 중심과제에서 한반도 군축이 아니라 확고한 한미 안보협력 유지를 강조했고, 김대중 정부 시절에 대북 선제공격을 포함한 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27>이 등장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평택 미군기지 이전이 강행되어, 미군 육해공 군사허브의 중심이자 전진기지가 마련되었다. 햇볕정책은 정경분리의 원칙을 표방했다. 즉 북한과의 정치 문제와는 별도로 경제적 협력을 추진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는 결국 한반도의 정치문제와 군사문제의 주도권을 미국이 행사하는 가운데 그에 위배되지 않는 수준에서의 경제협력을 남한 정부가 담당한다는 것으로, 한국의 대북정책은 철저하게 미국의 전략적 판단에 종속되게 되었다. 한미 FTA 추진이 그러하듯 한미 전쟁동맹의 강화는 ‘MB만의 문제’가 아니며, 햇볕정책이 민중운동이 지향해야할 무엇도 아니다. 이를 통해 평화운동 진영이 고민해야 할 2012년의 과제를 추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북아시아 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초래하는 어떠한 행위에도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 연평도 사태를 통해서도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공격적인 군사훈련은 그 자체로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핵심적인 요인이 된다. 군사적 긴장 고조와 뒤이은 군사력 증강, 이를 빌미로 한 적대 정책의 강화와 군사적 충돌의 반복이라는 악순환은 한반도의 미래를 점점 더 어둡게 만들며 민중들의 삶을 위협할 뿐이다. 보수 강경 세력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테러 집단이라면 그들의 눈앞에서 총칼을 휘두르는 것이 결코 평화를 위한 방법이 아니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3월에 예정된 키리졸브 훈련을 비롯해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 따라 행해지는 다양한 군사훈련의 문제를 대중적으로 제기하면서 단호하게 비판하자. 둘째, 2012년 권력 재편의 시기 속에서 노동자민중운동이 군축과 안보 프레임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반전평화의 문제는 결코 노동자민중의 삶과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며, 한반도의 전쟁 위협은 지배세력의 거짓 선동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은 반복되어 왔으며, 한미 군사동맹과 대북 적대정책, 군사력 증강을 통해 우발적인 충돌마저도 큰 참화로 비화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해왔다. 안보문제는 지배세력이 노동자 민중의 정당한 요구와 목소리를 짓밟는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연평도 사태처럼 실질적으로 민중의 생명을 위협한다. 때문에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의 구축과 그 궤를 함께 해야 한다. 평화운동의 지향은 맹목적인 반MB도,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 종속되는 햇볕정책도 아니다. 한미 군사동맹의 문제, 군사력 증강의 문제, 위협적인 군사훈련의 문제를 공세적으로 제기하면서 반전평화의 흐름을 노동자민중운동이 주도하자. 셋째, 핵안보정상회의를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 핵안보정상회의는 ‘핵 없는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핵 물질의 통제, 핵 테러에 대비한 군사 조치는 결국 핵무기 보유국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는 새로운 틀거리에 다름 아니다. 더불어 각국 정부와 핵 산업계는 핵발전소 사고를 테러와 연결 지어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강하게 일고 있는 세계적인 탈핵 여론을 거슬러 핵발전소 안전과 확대, PSI 같이 역내 긴장을 고조시키는 공격적인 정책들을 정당화하려 한다. 핵안보정상회의가 그 자체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킬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류의 삶을 위협하는 핵 기술과 무기의 확대를 꾀한다는 점을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
연행 동지 석방하고 해군기지 건설 중단하라 경찰이 평화를 호소하는 동지들을 연행했다. 제주 강정마을 공사장에서 ‘동북아 군사 긴장 초래하는 해군기지 건설 반대’라는 플래카드를 펼친 노동해방선봉대원 4명을 강제 연행한 것이다. 평화 요구에 폭력으로 화답하는 경찰에 분노를 금할 수 없다. 경찰은 이를 취재하던 기자도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정권 말기 민중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가로막는 데 혈안이 된 것인가. 해군의 강점에 맞서는 힘든 싸움 속에서도 강정마을 주민들은 굳건히 싸우고 있다. 주민들은 오늘도 농성장을 지키며 올레길을 지나는 관광객들을 만나 서명을 받고, 공사가 진행되면 몸을 던져 막고, 영상으로 투쟁 상황을 기록하고 있으며, 매일 저녁 모여 촛불을 들고 있다. 경찰은 똑똑히 알아야 한다. 폭력으로는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의 목소리를 막을 수 없다. 민중들의 더욱 큰 분노를 막을 수 없다. 노동해방선봉대는 강정마을 투쟁을 지켜내고 제주 군사기지 저지 투쟁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 제주 강정마을에서 자행된 경찰의 반민중적 반민주적 행태를 다시 한 번 강력 규탄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연행 동지 석방하고 경찰 병력 철수하라 - 동북아 군사 긴장 초래하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즉각 중단하라 - 노동자가 앞장서서 해군기지 막아내자 2011년 11월 7일 사회진보연대
제주 군사기지 저지 범도민 대책위원회 오영덕 공동대표를 만나다 강정이 뜨겁다. 정부가 2007년 6월 제주 해군기지를 서귀포 강정마을 해안에 건설하기로 결정한 후 4년이 넘도록 강정마을 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는 해군기지 건설에 반발해 싸우고 있다. 주민들은 매일 밤 촛불집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천주교 신부들의 공사 강행 저지를 위한 연좌농성과 해군기지 건설 저지를 위한 평화미사를 비롯해 종교단체들의 종교행사도 이어지고 있다. 한진 중공업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희망버스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를 위한 ‘희망 비행기’로 확대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강정 마을을 찾았다. 그러나 해군의 입장은 단호하다. 지난 10월 6일 해군은 강정마을 해안의 구럼비 바위에서 여섯 차례 시험 발파를 진행했고, 발파에 항의하던 활동가들을 모두 연행했다. 다음 날에는 발파 지역에 콘크리트 타설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구럼비 바위는 전문가들이 제주도에 ‘문화재 가지정’을 요청할 정도로 민속학적,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2009년 12월 절대보전지역 변경 동의안이 제주도의회에서 통과되었지만, 2011년 3월 도의회가 절대보전지역 변경(해제) 등의 취소를 의결한 상태라 구럼비는 다시 절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에 대한 폭력적 탄압도 계속되고 있다. 2007년 이후 올 8월까지 제주 해군기지와 관련하여 134명이 공무집행방해, 공용물손상, 집시법 위반 등으로 사법 처리되었고, 이 중 4명은 구속되었다. 이외에도 총 73명의 주민과 평화 활동가들이 주거침입, 폭행, 공무집행방해, 업무방해 등으로 고소고발되었다. 10월 초에는 해군기지 건설 중단을 요구하며 매일 아침 구럼비 바위까지 헤엄쳐 가 기도를 하던 종교인을 해군 해난구조대(SSU)가 바다 한 가운데서 세 차례에 걸쳐 20-30초간 물속에 빠뜨리고 오리발을 빼앗는 장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제주 올레길 중 가장 아름답다는 ‘올레 7코스’ 길목을 가로막은 흉물스런 철제 담장 앞에서 강정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은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경찰과 해군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매일같이 주민들과 활동가들, 심지어는 신부님들까지 연행되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지난 10월 초 강정을 찾아 제주 군사기지저지 범도민 대책위원회(이하 군사기지 범대위) 오영덕 공동대표를 만났다. 엉터리 환경영향평가 오영덕 대표는 제주 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이기도 하다. 환경단체 활동가로서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유를 물었다. “환경 문제에 관심 있는 단체로서 사업 처음부터 환경영향평가가 부실했기에 이 투쟁에 나서는 이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해군기지 건설 예정지인 강정마을 앞바다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생물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곳이다. 천연기념물 442호인 ‘연산호’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멸종 위기종으로 분류되는 ‘붉은발 말똥게’의 대규모 서식지이기도 하다. 또한 제주도개발 특별법 상 ‘절대 보전지역’으로 선정된 곳이기 때문에 건축물의 건축, 시설의 설치, 토지의 형질변경, 공유수면의 매립 등의 행위를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2007년 8월부터 2008년 8월까지 진행된 사전환경성 검토가 부실하다는 비판이 일자 환경부는 관계행정기관과 찬반 양측에서 각각 추천한 조사기관, 주민대표, 전문가 등의 협으로 2009년 2월 9일부터 2월 25일까지 공통생태계 조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추가조사가 필요하다는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해군본부에 추가조사를 실시하도록 했다. 해군본부는 반대 측에서 추천한 조사기관을 통해 2009년 6월 추가 조사를 실시했고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환경부 주관으로 수행된 공동생태계 조사에서 연산호 분포 사실이 확인되어 전문가들은 계절별 조사가 필요하며 다양한 어류가 출현하는 7-9월에도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해군은 6월에만 추가조사를 진행한 채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또 사전 환경영향평가에서는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인 ‘붉은발 말똥게’와 ‘맹꽁이’가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빠졌다. 제주도는 보완평가서 작성에서 붉은발 말똥게 서식을 반영하여 대책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근래에도 ‘제주새뱅이’ 등 멸종위기 후보종이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그만큼 환경영향평가가 부실하게 진행된 것이다. 제주도에는 군사기지 필요없다 “부실한 환경영향평가도 문제지만, 제주에 군사기지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 환경단체 활동가로서의 입장을 넘어서 제주도민의 입장에서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환경 문제, 절차 문제와 함께 제주도에 건설되는 군사기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해군이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1>국가안보 측면에서 북한의 도발 억제와 해양영토 보호 등 해군 함정의 활동 보장, 2>국가경제와 전략적 측면에서 남방해역 해상교통로와 풍부한 해저자원 확보, 3>해군 작전 측면에서 제주 남방해역 보호와 해상 교통로 확보를 위한 해군함정의 군수 지원 등 세 가지다. 그러나 북한과 가장 거리가 먼 제주도에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은 해군 스스로가 이야기하는 해군기지 위치 선정의 원칙인 지리적 인접성과 배치된다. 또한 해상교통로 확보와 해저자원 확보는 해군이 할 일이 아니다. 지금은 무력으로 해상교역로와 자원을 독점하는 ‘대항해시대’가 아니다. 해군은 말라카 해협 등의 해적 활동을 근거로 들지만 아시아 지역 국가들의 안정화와 함께 이 지역 해적 발생 빈도는 이미 많이 줄어들었다. 또한 말라카 해협에서 발생한 해적 문제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제주에 있는 한국 해군이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해적이 아니라면 해상교통로와 해저자원 문제는 외교와 정치의 영역이지 무력의 영역이 아니다. 이를 빌미로 해군기지를 건설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킨다면 오히려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적 긴장만 높일 뿐이다. 막 나가는 해군 해군은 공사 강행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SSU는 살인 행위에 가까운 짓을 저지르고, 작은 보트를 이용해 해상시위를 하고 있는 활동가를 물대포를 쏘아 바다에 빠뜨리는 등 민간인에 대한 폭력도 서슴지 않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문화재청장이 유선으로 공사 중단을 요구했음에도 해군은 현장 견학조차 거부하고 있다. 오영덕 대표는 이러한 흐름이 ‘해군 측의 조바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사실 올 초 만해도 (해군기지 건설이) 완전히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해군이 공사를 추진해왔다. 그러다가 이 얘기(강정 해군기지 건설)가 점차 전국으로 퍼져 나가면서 한진중공업 문제와 함께 한국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슈가 되었다” “구럼비 바위를 부수고, 폭파하고, 도로를 내는 것이 사실 이미 다 예정되었던 것인데, 외부로 점차 알려지면서 해군이 당황하고 있다. 해군이 나름의 돌파 작전을 쓰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우리들 힘이 미약했다면 외부로 알려지지도 않고, 큰 이슈가 되지도 않았을 일들이 하나하나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현재 상황은 안타깝지만 큰 그림을 보자면 나쁘지 않은 진행이라고 생각한다.” 해군과 경찰의 폭력적인 행동이 오히려 강정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의 정당성을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포기하려던 싸움, 그러나 매일같이 지속되는 해군과 경찰의 폭력과 활동가들에 대한 연행, 구속과 고소고발. 정말 힘든 상황에서 오영덕 대표는 오히려 이후 투쟁의 희망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까지 이 투쟁을 진행해오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를 물었다. “사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가 가장 힘들었다. 거의 포기한 상태로, 물 건너 간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놓고 있었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이 수면으로 떠오른 건 지난 2001년이다. 제주도 전체로 보자면 꼬박 10년을 끌어 온 사업이고, 강정마을만도 5년째 지역 사회를 휘젓고 있는 문제다. 오랜 세월을 지지부진하게 흘러오면서 제주도민들도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 오영덕 대표는 해군이 구럼비 바위에 담장을 설치하기 전까지는 기자회견을 해도 지역 언론조차 찾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애초 강정은 해군기지 건설지가 아니었다. 1993년 말 156차 합동참모회의에서 제주전략기지 신규소요가 결정되고,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제주해군기지 후보지가 검토되었다. 당시 후보지는 화북항, 성산일출봉 근해, 신양리, 화순황, 형제도지역, 모슬포 등으로 강정마을은 포함조차 되지 않았다. 처음 후보지로 선정된 화순은 2002년 제주도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해군은 2005년 위미지역으로 후보지를 변경했다. 그러다 위미에서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해군은 추가 후보지를 검토하게 되는데, 이때 강정이 포함되었다. 더 이상 다른 곳을 찾을 수 없는 해군과 정부는 ‘민군 관광미항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막대한 지원금을 들먹이며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밀어붙였다. 지속된 도민 사회의 혼란 때문에 생긴 피로도, 막대한 지원금이 들어온다는 기대감은 제주도민의 해군기지 반대 여론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찬성 주민들을 이용한 지속적인 유치 강행 작전, 화순이나 위미 지역에 해군기지를 건설하려 할 때와는 다른 도내 여론,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는 투쟁은 점차 고립되고 활력을 잃어 갔다. “그러다가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될 즈음에 평화 운동가들이 내려오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반전이 되기 시작했다.” 해군기지 건설이 본격화되자 평화 활동가들이 하나둘씩 강정 마을로 모여들었다. 단순히 여행을 하다 구럼비 바위에 반해 강정마을에 눌러 앉아 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이도 있다.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이들은 ‘강정마을 100일 순례’를 진행하고 매일 아침 구럼비 바위에서 100배를 진행하면서 주민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고 강정마을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려내기 시작했다. 오영덕 대표는 이들이 비록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지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활동했다고 강조했다. “저는 그게 강정 해군기지 반대 운동의 굉장히 큰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여기 와 있는 많은 활동가들이 구럼비 바위가 깨지는 것에 자기 마음이 깨지는 것처럼 아파했다. 이런 분위기가 투쟁의 중요한 동력이 되고, 정말로 진정성 있는 싸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진정성이 주변을 감동시키고 투쟁을 확산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강정으로, 강정으로 그렇다고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당장 진행되는 공사를 막지 않으면 구럼비 바위를 비롯한 강정마을과 주변 생태계의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해군기지 건설 지역은 현재 해군의 공사금지가처분 신청에 묶여 있다. 강동균 마을 회장 등 개인 37명과 5개 단체를 적시하여 위반 시 행위 1회당 200만원 씩의 벌금을 물게 된다. 농성장이 설치된 철제 담장 너머에서는 해군이 감시탑과 감시견, 365도 회전하는 카메라를 세워 감시하고 있다. 오영덕 대표는 말했다. “(해군기지 건설) 백지화를 위해 싸워나갈 것이며, 중간에 좌절하거나 꺾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싸움이 현장만이 아니라 복잡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국적인 여론 형성이 좀 더 적극적으로 되어야 한다. 사회의 많은 분들이 강정 마을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정치적인 해법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희망 버스가 희망 비행기로 옮아가고, 여론의 관심이 강정마을에까지 미치자 정부와 해군은 비행기를 빌려준 항공사를 압박해 비행기 전세를 못하게 했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처럼 주민들을 고립시키고 여론 확산을 차단해 투쟁을 고사시키려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정부와 군 당국의 이러한 방식에 우리는 어떠한 해답을 갖고 있나. 오영덕 대표는 강정마을에 들어와 농성장을 지키고, 자신의 몸을 차 바퀴에 내던지며 공사 차량을 저지한 평화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투쟁이 이 싸움을 지속하게 만든 밑거름이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평화 활동가들이 벌인 활동들이 투쟁의 밑거름이었다면, 이 투쟁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강정을 찾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일단은 공사를 빨리 중단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더불어 현재 공사현장 철제 담장을 넘어가고 버티는 투쟁도 분명 필요하다.” 국책사업이 파괴한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서귀포신문이 2009년 9월 2일부터 11일까지 강정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신건강 실태조사’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적대감, 우울, 불안, 강박 등 정신적인 이상 소견이 있는 사람이 전체 주민의 75.5%를 차지했으며, 주민 10명 중 4-5명이 정신 건강 ‘위험군’에 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자살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전체 주민의 43.9%나 되어 제주도민의 자살 충동 평균치인 8.1%에 비해 5.4배나 높게 나왔다. 신문은 “이같이 집단적인 피해 양상은 국가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의 결정적인 결함을 보여준 단적인 예”라고 분석했다. [표 1] 강정마을 주민 정신건강 실태조사 -정신적 피해 [표 2] 강정마을 주민 정신건강 실태조사 -자살 충동의 이유 대규모 국책사업이 시행되는 곳에서는 대부분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과 같은 위험 시설을 비롯해 군사기지와 같은 민감한 사안들은 해당 지역의 찬반 갈등을 심각하게 불러일으킨다. 사업이 실시되는 지역의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몇 십 년을 이어온 지역 공동체는 해체되고, 찬반으로 갈려 반목하면서 생긴 상처는 고스란히 남는다. 이는 정부나 지자체가 주는 경제적 보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나도 제주도민이지만, 강정마을 주민들은 다른 어떤 지역에 비해 순하고, 마을에 대한 애착이 크다. 5년 동안 싸우면서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지만, 주민들 간의 물리적 충돌은 거의 없다.” 위의 실태조사 결과에서 보듯 5년 동안의 갈등으로 정서적,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지만 마을 공동체에 대한 애정으로 물리적 충돌을 피하고 있다고 오영덕 대표는 말했다. 그러나 강정마을이 마냥 평화롭기만 한 상황은 아니다. 해군기지 건설에 찬성하는 측에서는 반대 주민과 활동가들을 대상으로 고소고발을 계속하고 있다. 일례로 찬성 측 주민 한 명은 자신의 가게 옥상에 올라가 해군의 폭력적 탄압 모습을 찍은 반대 측 활동가를 고소하기도 했다. 오영덕 대표와의 인터뷰 하루 전에 만난 고권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대책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가 찬성 쪽으로 결론이 나건, 반대쪽으로 결론이 나건, 지금 이렇게 갈라져있는 주민들의 관계를 다 복원하고 지역 공동체를 되살려 앞으로의 삶을 같이 꾸려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찬성하는 측이 고소고발을 많이 해도 우리는 고소고발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운동, 강정에서 꽃피다 끝으로 오영덕 대표에게 『사회운동』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저는 활동가들에게 말한 만한 자격은 없는데, 이런 운동을 하면서 외부 활동가들로부터 굉장히 많은 자극을 받았다. 생명평화결사나 개척자들 같은 평화 활동가들이 강정에서 열심히 활동했는데, 그들이 찬성 측과 반대 측을 가리지 않고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보듬어 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 모습들이 전국에 전해지면서 전국의 평화 활동가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그들은 굉장히 적극적인 투쟁을 펼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포크레인이 들어왔을 때 그 밑으로 들어가서 눕는다는 생각을 우리는 하지 못했다. 이런 것들이 큰 자극이 되었다.” “제주 지역에서 기존에 해왔던 행태대로만 운동을 해왔던 입장에서는 운동이 시대에 맞게 변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이나 영상을 활용하는 힘,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는 힘, 자신의 몸을 던지는 적극적인 투쟁. 이것들을 다 품어 안아 보듬어주는 것이 또한 강정마을 주민들의 넉넉함이라고 생각한다. 제주 해군기지가 다양한 형태의 운동들의 장점들이 발현이 되어서 짧은 시간에 한국 사회 주요 이슈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운동이라는 게 살면서 머리 속의 고정된 관념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벗어나서 창조적이고 적극적으로 발현이 된다면 얼마든지 변화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군의 강점에 맞서는 힘든 싸움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굳건하게 싸워가고 있는 강정 사람들. 강정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오늘도 농성장을 지키며 올레길을 지나는 관광객들을 만나 서명을 받고, 공사가 진행되면 몸을 던져 막고, 영상으로 투쟁 상황을 기록하고 있으며, 매일 저녁 모여 촛불을 들고 있다. 오영덕 대표가 ‘변화’라고 언급한 영상과 인터넷, 몸을 던지는 투쟁은 어쩌면 그리 새로운 요소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러한 요소들이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강정마을의 투쟁을 살아나게 한 더욱 중요한 요소는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보듬어가며 함께 대중투쟁을 일구어 온 주민과 활동가들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강정마을 투쟁을 지켜내고, 제주 군사기지 저지 투쟁의 전국적 확산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반전평화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할 때다.
미군 성폭행 범죄자를 엄정히 처벌하고, 불평등한 SOFA협정 개정하라! 주한미군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9월 24일 새벽 제2사단 소속 미군이 동두천 시내의 고시텔에 들어가 10대 여학생을 수차례에 걸쳐 성폭행했으며, 그 일주일 전인 9월 17일에는 미8군 소속 군인이 마포구의 고시텔에 들어가 자고있던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도 드러났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주한미군의 악질 범죄에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미국 측에서는 사건에 대해 해당 군부대의 명의로 사과 성명을 발표하고, 한달 동안 야간 통행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이는 사태를 모면하기 위한 눈가림에 불과하다. 한달 동안 한시적으로 취해지는 금지조치가 빈발하는 범죄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게다가 휴일에는 새벽 3시부터 2시간 동안이 통행금지 시간이라고 하는데, 범죄를 막는데 전혀 실효성이 없음이 자명하다. 게다가 이태원, 홍익대 등지의 상인들에 따르면 통행금지를 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지켜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통금에 대한 고지만 할 뿐 단속이나 처벌이 없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군 범죄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구속수사와 원칙적인 법 집행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두 명의 피의자 모두 범행 후 부대 복귀하여 불구속 수사를 받고 있다. 미군 범죄가 발생할 경우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소 시점까지 신병을 주한미군에 인도하도록 하고 있는 현행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때문이다. 이것은 개별 사건들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미군 범죄자들에 대해서 미군이 신병을 인도해감에 따라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한국의 법에 따라 처벌하지 못하고 솜방망이 처벌에 그쳐왔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의 공식 사과와 함께 주한미군 범죄 재발을 막기 위한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주한미군에게 주둔군으로서 특권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SOFA를 전면 개정해야 한다. - 성폭행을 저지른 주한미군을 즉각 구속, 처벌하라! - 오바마 대통령은 주한미군에 의해 발생한 성폭행 사건에 대해 사과하라! - 불평등한 미군주둔군지위협정(SOFA)을 개정하라! 2011년 10월 11일 사회진보연대
정부의 공권력 투입과 공사 강행을 규탄한다 9월 2일 새벽 5시경,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경찰 병력이 투입되었다. 지난 8월 29일 정부와 해군이 강동균 강정마을회장 등 37명과 5개 단체를 상대로 낸 ‘공사방해금지 등 가처분 신청’을 제주지법이 받아들인 후, 제주도에는 서울경찰병력이 추가 파견되어 약 1,100여명의 경찰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평화문화제 하루 전인 9월 2일 농성자들이 모여 있는 중덕삼거리를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와 안에 있던 주민들을 밖으로 들어냈다. 그 사이에 해군은 마을과 기지 부지를 차단하는 울타리를 설치했다. 그리고 울타리 설치작업 중단을 요구하는 평화활동가와 주민 등 35명을 연행하였다.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선정과 건설 추진 과정 강정마을의 제주해군기지 건설은 처음부터 불법과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1993년 제주 해군기지 신규소요가 제기된 후, 해군은 2002년 후보지역으로 화순항을 선정했으나 주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2005년 9월 위미로 후보지를 변경 추진하였다. 역시 위미리 주민들의 반대로 난항을 겪던 중 2007년 다시 강정마을을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2007년 4월, 인구 1,900명 중 불과 87명이 모인 강정마을 비밀임시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해군기지 유치결의가 이루어졌고, 도지사는 주민 다수가 찬성한다는 이유로 해군기지 강정마을 유치결정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2007년 8월 마을 임시총회에서는 해군기지 유치결의를 주도한 마을이장을 해임하기로 결정하였고, 열흘 후인 8월 20일 공개적으로 ‘해군기지 유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주민투표에는 마을주민 725명이 참가해 유효 투표수의 94%인 680명이 유치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과 제주도는 공사를 강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기지사업단이 수행한 환경영향평가는 멸종위기종들의 서식이 보고되지 않은 졸속 부실 조사였다. 그리고 자연환경의 고유한 특성을 보호하기 위해 절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강정마을에서 공사를 강행하기 위해 제주도의회는 절대보전지역 해제 안을 날치기 처리하였다. 이렇게 차곡차곡 강정마을을 군사기지화 하려는 정부와 해군 당국의 시도가 진행되는 가운데, 경찰은 지난 8월 24일에 (서귀포시가 이미 불법 공사 시설물이라고 인정한) 기지 건설 장비인 크레인 조립을 막으려던 마을주민들과 활동가 5명을 강제 연행하였고 이중 3명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물어 서귀포경찰서장을 경질하고 강호준 제주지방경찰청 청문감사담당관을 신임 경찰서장으로 발령하기도 하였다. 또 26일에는 충북지방경찰청 윤종기 차장을 단장으로 하는 태스크포스(TF)를 제주청으로 파견하여 강정마을 사태에 대한 지휘·통제를 강화하였다. 8월 29일 공사방해금지 가처분 결정이 내려지자 경찰청은 강정마을 집회 신고를 원천 불허하였고, 서울경찰병력을 제주도에 추가로 지원하였다. 9월 1일에는 미리 경찰에 출석 의사를 밝히기도 했던 평화운동가들을 연행하였다. 그 다음날인 9월 2일 새벽에는 울타리 설치를 막는 활동가와 주민들을 대거 연행하였다. 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행정절차는 불법적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된 반면, 반대행동에 대한 진압은 강도 높게 폭력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제주해군기지는 미국의 해양 주도권 전략에 편입되기 위한 것 정부는 제주해군기지 건설 근거로 ∆북의 도발 억제 및 전시 해양 우세 확보 ∆제주 남방해역 해상교통로와 풍부한 해저자원 확보 ∆주변국으로부터 보호 ∆기존 기지들의 규모, 수심 등 기동부대 전력 수용 부적합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해군이 제주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진정한 의도는 따로 있다. 그것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 전역에서 해상패권을 강화하기 위한 미국 해양전략의 파트너가 되겠다는 것이다. 9.11 이후 미군은 해양타격, 해양방어, 해양기지화의 3대 해양전략을 담은 ‘해군력 21’ 전략을 발표하였다. 이중 ‘해양기지화’ 전략은 “해양으로부터 공세와 방어를 안정적으로 수행하고, 주둔국에 제한받지 않고 배치와 철수가 용이한 해양기지를 구축할 방안을 마련”하자는 의미다. 즉 동맹국의 본토나 섬에 고정된 해공군 기지를 두지 않고도 미국 본토와 하와이, 괌 같은 전략 기지에서 이지스탄도미사일방어체제(ABMD)를 탑재한 이지스함, 핵항공모함, 핵잠수함을 핵심전력으로 하는 일정 규모의 기동전단을 세계 각지에 파견함으로써 전 세계의 바다를 해양기지화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방국 정부로부터 최소한의 군수지원이나 단순한 기항지만을 제공받는다면 얼마든지 연안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미 해군이 한반도 남단에서 기항지만 보장받는다면 이지스함, 핵항공모함, 핵잠수함을 동원하여 중국을 바다로부터 봉쇄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최근 미국은 중동 문제로 자국의 군사력 운용이 제약을 받게됨에 따라 동맹국의 해군력 동원을 극대화하여 자국 주도의 제해권을 유지하려는 해양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주요 동맹국의 지역적 역할을 높여 미군 전력의 지역적-지구적 역할과 결합하고 상호운용성을 보장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보장하는 것이 이른바 ‘글로벌 해양 파트너십’으로, 한국은 이 개념이 제기된 이래 적극 참여하고 있다. 특히 2006년 한미 양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한 이후 주한미군은 한반도를 넘어서 주요 분쟁지역에 탄력적으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한미정상회담에서 ‘지역 및 세계 안보 수요’에 공동 대처하기로 하면서 한미동맹의 지역적-지구적 협력, 특히 해양에서의 협력은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이 한국군사시설을 무제한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으므로 제주해군기지는 미군의 기동전단이 사용하는 기항지로 사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국은 전략적 중심축을 대서양에서 아시아-태평양으로 옮기고 있으며 이미 해군력의 60%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그만큼 더 많은 해군기지와 기항지의 확보가 절실한데, 오키나와의 경우 대부분의 기지가 공군기지와 해병대 기지로서 3천 톤 이상의 선박을 정박시킬 수 없다. 대형 함정 20척 및 15만톤급 크루즈 2척의 동시 계류가 가능한 대규모의 기지로 계획된 제주해군기지는 결국 미국 해군의 사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며, 이 기지에는 이지스함, 핵항공모함, 핵잠수함도 기항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 해군이 표방하는 해양안보론은 미국의 해양패권전략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해양안보’ 혹은 ‘해양수송로 보호’를 내세운 한국 해군의 ‘지역적 역할 강화’는 잠재적 적국으로서 중국을 상대로 한미합동 해양전력 강화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이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군사적 지배력을 끊임없이 강화하려는 미국의 해양전략을 그대로 추종한 결과로 역내 군사적 긴장을 고조하고 해양의 군사화를 촉진할 위험한 정책이다. 계속해서 드러나는 불법 공사 의혹 이런 와중에 9월 5일, 문화재청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부지에서 발견된 유적을 공식 인정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전체 사업대상 지역에 대해 시굴조사를 실시하되, 유구가 확인되지 않거나 조사가 완료된 지역에 대해서는 부분 공사 시행을 승인하였다. 이에 대해 ‘제주해군기지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전국대책회의)는 문화재청의 부분 공사 승인 및 시행은 법적 근거가 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인근 지역에서 유구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시굴조사에서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정밀 발굴조사에서 유구가 확인될 가능성이 없다고 볼 수 없으며, 전체 발굴조사가 미완료된 상태에서 문화재청이 일부 조사완료구역에 대해 부분공사 시행을 승인할 수 있는 법령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군기지 공사 즉각 중단과 문화재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9월 6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해군기지사업 조사 소위원회가 제주도청을 방문하여 해군기지 건설 관련 현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제주해군기지의 이중 협약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지난 2009년 4월 국방부와 국토해양부, 제주도가 해군기지 건설과 관련해 체결한 기본협약서의 제목이 다르다는 것이다. 국토해양부와 제주특별자치도가 보관하고 있는 기본협약서의 제목과 전문에는 ‘민군 복합형 관광미항 건설과 관련한 기본협약서’로 되어 있으나 국방부가 보관하고 있는 기본협약서의 제목과 전문에는 ‘제주해군기지(민군 복합형 관광미항) 건설과 관련한 기본협약서’로 되어 있다. 공문서 위조 가능성은 물론 민군 복합형 기항지 건설 조건 아래 사업 예산을 승인한 국회의 권고를 위반한 ‘원인 무효’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강정마을회와 전국대책회의는 9월 7일, “제주도민을 우롱하고 국민을 상대로 사기극을 벌인 이중 협약서는 전면무효이며, 해군기지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부와 해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6일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구럼비 해안에 굴삭기를 투입해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즉각 중단하라 정부와 해군, 경찰의 불법과 폭력에 맞서 평화운동도 굳세게 저항하고 있다. 연행, 구속, 수배에도 불구하고 강정마을 사거리에서는 평화미사와 평화행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강정마을의 군사기지화를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들의 동참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 3일에 이어 다음 달 1일에 다시 한 번 평화문화제가 예정되어 있다.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막아내기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나서자.
반핵아시아포럼 2011 참가기 7월 30일 일본 도쿄의 아자부다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2011 반핵아시아포럼’이 개막됐다. 올해 반핵아시아포럼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지진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다’라는 주제로 일본의 도쿄, 후쿠시마, 히로시마, 이와이시마 등에서 진행되었다. 반핵아시아포럼은 아시아지역의 반핵운동 연대체로, 1992년 한국 반핵운동 진영의 제안으로 ‘핵 없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기치에 따라 아시아 지역의 반핵운동 네트워크로 결성되었다. 현재 일본,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대만, 인도, 태국, 호주, 한국 등의 반핵활동가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매년 국제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반핵아시아포럼 사무국과 일본의 원자력자료정보실(CNIC), 인도네시아의 민주화를 위한 네트워크(NINDJA) 등 아시아의 주요 반핵운동 단체들이 공동주최하는 이번 반핵아시아포럼은 8월 6일까지 진행되었다. 태국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대안 에너지 프로젝트, 인도네시아의 반핵시민연합, 필리핀의 비핵 바타안운동 네트워크, 인도의 반핵운동전국연합, 대만의 환경보호연맹 등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는 에너지정의행동, 서울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참여연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보건의료단체연합, 사회진보연대 등이 함께 이번 대회에 참가했다. 후쿠시마의 현실: 7월 30일 후쿠시마 지역 활동가들과의 토론회 7월 30일, 2011 반핵아시아포럼의 첫날 행사는 후쿠시마 지역의 사람들과 활동가들로부터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상황과 경험을 듣는 자리였다.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사고의 경험을 공유하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서는 실제 후쿠시마 지역에서 거주하다가 후쿠시마 사고 후 지금까지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후쿠시마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후쿠시마 사고는 아직도 진행형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는 사고 발생 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행형이다. 지난 8월 2일 도쿄전력은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1호기와 2호기 사이의 외부 배기관 부근에서 시간당 10Sv(시버트) 이상의 방사선량을 측정했다. 이 정도의 수치는 한 번 노출되면 즉시 사망하게 되는 치명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도쿄전력은 어디서 유출이 이루어졌는지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고농도 방사선량은 방호복을 입은 작업원도 접근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한동안은 조사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사고 지역의 상황이 이러하니 ‘정확한 피해 정도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원자로 내 연료봉이 얼마나 녹아내렸는지, 그것이 격납용기를 뚫고 흘러내려 바닥까지 내려갔는지에 대해 다양한 소문이 무성하다. 토론회 서두에서 일본 원자력자료정보실의 반 히데유키 대표는 이러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상황을 정리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고 후 후쿠시마 지역에 많은 눈이 내렸는데, 핵발전소에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이 이 눈에 흡착되어 확산되기도 했다. 그렇게 퍼진 방사성 세슘을 검출해 지도를 그리면 사고 지역에서 200km가 넘는 지역에서까지 오염이 확인되고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지금 핵연료가 녹아내리고 있기 때문에 계속 냉각해야만 하고, 이를 위해 계속해서 물을 공급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반 히데유키 대표는 ‘이 냉각도 아마 10년은 계속해야 할 것’이며, ‘원자로 폐쇄까지는 적어도 30년은 걸릴 것’이라 말했다. 코피를 쏟는 아이들 두 번째로 ‘아이들을 방사능에서 지키는 후쿠시마 네트워크’의 나카테 세이치 대표의 발표가 이어졌다. 사고 지역에서 60km 떨어진 지역에 살고 있는 나카테 대표는 초등학교 4학년과 1학년인 두 아이를 둔 아버지다. 사고 두 달 후인 5월 중순 즈음 큰 아이가 코피를 쏟았을 때에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둘째 아이가 별 이유도 없이 매우 많은 양의 코피를 쏟았다. 과학적으로 후쿠시마 사고와의 연결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같은 지역에서 코피를 쏟는 아이들의 사례가 많이 보고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현재 후쿠시마 지역 주민들, 특히 아이들의 건강 피해를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그는 후쿠시마 지역 7개 초등학교에서 방사능 수치를 측정한 활동도 들려주었다. 자신의 아이들이 다니는 (사고 이후 휴교 상태였던) 학교에서 처음 방사능 수치를 측정했는데, 운동장 지표면에서는 시간당 10μSv(마이크로시버트), 하수구 인근 지표면에서는 시간당 108.8μSv가 나왔다. 물론 이 방사능 수치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론상 108.8μSv라는 수치가 1년 365일 지속된다면 953mSv(밀리시버트)가 넘는 수치로 연간 허용치인 1mSv를 엄청나게 초과하는 양이다. 나카테 대표는 장래에 발생할 수 있는 건강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피난해야 하며, 이들이 오염이 제거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 사회를 재건할 수 있는 방식의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로 발표를 마쳤다. 토양과 소의 오염 순환 오후 세션은 농업 문제 담당 기자인 오노 카즈오키씨의 발표로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후쿠시마 지역 농민들과 교류해 온 오노씨는 사고 후에 발생한 토양 오염이 어떻게 해당 지역에서 기르는 소의 오염으로 이어졌는지 설명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소의 여물로 쓰이는 볏짚이 고농도 세슘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후쿠시마 지역 소들에게 체내피폭(방사성 물질이 생물체 내부에 들어와 쌓이는 피해)이 발생했다고 한다. 올해 소에게 먹이는 볏짚은 작년 쌀을 수확하고 논에 쌓여 있던 것들을 모은 것인데, 사고 직후 방사성 물질이 날아와 짚단에 흡착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체내피폭이 이루어진 소에서 짜낸 우유나 고기는 방사성 물질에 오염되어 또 다른 피해를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소가 배출하는 배설물은 풀이나 나무껍질과 섞어 발효시켜 퇴비로 만든다. 이렇게 만든 퇴비는 다른 농가에 공급되어 농지를 풍요롭게 만든다. 그리고 볏짚과 같이 그 농지에서 수확되고 남은 작물이 다시 소에게 공급된다. 오노씨는 이를 두고 ‘소를 중심으로 한 유기물의 물질 순환’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체내피폭된 소의 배설물은 퇴비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현재는 따로 쌓아둘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다른 토양오염과 수질오염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어른 소를 기준으로 소 한 마리가 배출하는 배설물은 하루에 30kg이 넘는다. 후쿠시마 현의 대형 축산 농가 중에는 500마리의 소를 기르는 곳도 있다고 한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강제된 핵발전소 마지막 발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인근 지역에 살던 오가 아야코씨의 순서였다. 사고 지역에서 불과 5km 지역에서 살고 있던 그녀는 사고 직후 강제피난 조치로 지금까지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오가씨는 후쿠시마 지역이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되었기 때문에 핵발전소를 유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은 원래 냉해(冷害)가 많이 발생해 한촌이라 불리던 지역이다. 그래서 도시지역으로 일하러 나가는 농민도 많았다. 인구의 과소화 현상이 시작되었고 지역 재정도 상당히 나빠졌다. 그래서 1960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입지 계획이 나오자 선뜻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당시 주민들에게는 ‘황폐한 농촌 지역에 최첨단 기술이 들어오는 꿈같은 일’이라는 얘기가 돌았다고 한다. 그녀는 핵발전소를 만들면서 들어온 거액의 정부 지원금으로 처음에는 지역 경제가 살아나는 듯이 보였지만, 그것은 얼마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정부 지원금 덕에 다양한 시설을 건설할 수 있었고, 이 건설에 많은 사람들이 고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자 일자리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다시 떠나갔다. 인구는 늘지 않고 계속 줄어들었으며, 지역 재정은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것이 후쿠시마 현만이 아니라 핵발전소를 유치한 지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후쿠시마의 진실을 세계에 알려야 오전 9시경부터 진행된 토론회는 저녁 6시가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참가자들은 발표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으며, 때로는 열정적으로 질문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참가자들은 일본의 경험과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자신들의 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 알리고, 후쿠시마 지역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결의했다. 또한 다음 날인 7월 31일 후쿠시마 시내에서 열리는 ‘핵발전소 없는 후쿠시마 요구 현민 집회’에 참석을 결의하며 첫날 일정을 마쳤다. 후쿠시마의 외침: 7월 31일 후쿠시마 현민 집회 2011 반핵아시아포럼 일정 둘째 날인 7월 31일 오후 1시, 후쿠시마시 마치나카 광장에서 ‘방사능 없는 후쿠시마를 돌려내라! 핵발전소 없는 후쿠시마를 위한 현민 집회’가 열렸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도 2천여 명의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집회는 3월 11일 후쿠시마 사고 발생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강제 피난의 문제와 식품 안전의 문제, 어린이 안전의 문제 등 심각한 피해 상황을 알리면서, 정부와 도쿄전력의 즉각적인 사태 수습을 요구하는 목소리들로 이루어졌다. 지금도 계속되는 지진 집회는 후쿠시마현 평화포럼 의장 유노카와 마모루씨의 발언으로 시작됐다. 유노카와 의장은 ‘오늘도 진도 6의 지진이 발생했고, 2-3일 전에는 큰 비가 내려 피해를 입었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집회 당일 새벽, 후쿠시마에서는 규모 6.4의 지진이 발생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여진이, 그 빈도는 줄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7일부터는 650mm에 달하는 큰 비가 내려 대피 지시가 내려지기도 했다. 유노카와 의장에 따르면 현재 강제 이주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숫자만 7만 3천 명에 이른다. 그러나 지진과 쓰나미 피해로 인해 행정력이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 상황이라 정확한 숫자나 이주 지역, 실내 대피하고 있는 주민들의 숫자와 상황 등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후 처음에는 발전소 반경 3km를 피난 구역으로 설정했던 일본 정부는 조금씩 피난 범위를 넓혔고, 현재 반경 30km가 완전 소개 지역이 되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 곳으로 이주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고, 헤어져 살고 있는 가족도 많다. 약자에게 더 집중되는 피해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피해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사태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피해는 어린이나 노약자, 살고 있는 지역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농민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집중된다. 이번 대회를 주최한 후쿠시마현 평화포럼 대표 다케나카 유이치씨는 ‘28만 명의 어린이에게 대량으로 방사성 물질이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지금 여름 방학 기간인데, 1학기를 마치고 다른 지역의 학교로 전학 가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이주해서 생계를 꾸려갈 수 있거나, 다른 지역에 친척이 있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다.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곳에 연고가 없어 이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책감을 갖고 있는 부모들이 많다고 다케나카 대표는 설명했다. 그는 또한 핵발전소 사고와 지진, 쓰나미로 인해 생계를 잃은 많은 후쿠시마 현민들이 핵발전소 수습 작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더 이상 농사를 짓게 될 수 없어 자살하는 농민들이 있는데, ‘후쿠시마는 이제 더는 안 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93세의 노인도 있다고 한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의 현실 이후 후쿠시마 주민들의 증언이 이어졌다. 이다테 마을에 살고 있다가 현재도 피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사토 켄타씨는 3월 11일의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사고 당일 직장에 있던 사토씨는 지진이 나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정전이 되어 있었고, 핸드폰도 사용할 수 없었다고 했다. TV나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자동차 라디오를 통해 재난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3월 중순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고농도 방사능이 대량 누출되었지만 전혀 모르고 살고 있었고, 이다테 마을 주민들이 상당한 피폭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쿠시마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한 정보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매일 160km를 통근해야 하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근처의 후타바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요시다 히로마사씨가 다음 증언에 나섰다. 요시다씨는 사고 당일 집에 있기 불안해서 가족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차를 세워두고 밤을 보냈다고 한다. 다음날 요시다씨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방호복을 입은 사람이 “당장 피난하라!”고 말했다. 요시다씨가 “어디로 가야 하나?”라고 물으니, “모른다. 우리는 홍보만 하고 있다. 당국에 물어 보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는 현재 후타바군에서 160km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다. 나미에마치에 회사가 있는 아내는 출근을 할 수가 없어 결국 직장을 잃었다. 요시다씨는 매일 160km 거리를 통근하고 있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금전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요시다씨의 고통은 본인과 가족의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사인 그는 아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음아파 했다.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한 아이는 그에게 “선생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사고 지역에서 도망치는 것, 정보를 모으는 것,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요시다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무력감 속에서 상처받고 있는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다. 사고 직후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힘내라 동일본’이라는 구호가 많이 등장했다. 후쿠시마 시내 곳곳에도 ‘힘내라 일본! 힘내라 후쿠시마!’라는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요시다씨는 ‘힘내라고 하지만, 어떻게 힘낼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힘을 내면 복구가 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핵발전소의 피해자는 우리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탈원전이어야 한다!’는 말로 발언을 마쳤다. 아픈 딸아이를 지켜보며 마지막 주민 보고는 후쿠시마 핵발전소로부터 남쪽으로 50km 떨어진 고리야마시에 살고 있는 마츠모토 노리코씨였다. 두 딸의 어머니인 그녀는 사고 당일 후쿠시마시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창피하지만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후쿠시마에 핵발전소가 10개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력회사나 정부에서 ‘핵발전은 깨끗하고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쿠시마에서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 자신의 딸은 코피를 흘리고 복통을 호소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 인터넷만 뒤졌다고 한다. 그녀는 결국 중학교 1학년 딸을 도쿄에 있는 여동생 집으로 보냈다. 자신은 친척이 있어 아이를 보낼 수 있었지만, 연고가 없어 아이를 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들이 많다고 그녀는 말했다. 마츠모토씨는 앞으로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라며, 끝으로 ‘원전은 필요 없다. 그것만이 소원이다’라고 말했다. 후쿠시마의 분노를 들어라 집회를 마친 참가자들은 마치나카 광장에서 후쿠시마 역까지 약 1시간가량 행진을 진행했다. ‘방사능 없는 후쿠시마를 돌려내라!’, ‘모든 원전을 없애자!’, ‘어린이의 미래를 지키자!’, ‘모든 피해를 보상하라!’는 구호에 길가의 시민들도 열렬히 호응했다. 후쿠시마 현민 집회는 후쿠시마 현민들의 고통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더 이상 그 고통이 지속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 즉 핵발전이 없는 사회를 향한 외침이었다.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자 한국의 언론은 침착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국가적인 재난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전파를 타고 성숙한 시민의식의 표본으로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TV나 신문의 카메라도, 자원 봉사자도 가 닿지 못한 지역에서 사고의 피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제 그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리고 행동하고 있다. 후쿠시마의 외침은 단지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운영 책임사인 도쿄전력이나 일본 정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그들과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계 모든 이들을 향한 외침이며 질문이다. 핵 없는 사회를 향한 아시아 지역 연대: 8월 1일 반핵아시아포럼 국제회의 다음 날인 8월 1일에는 일본 도쿄의 아자부다이 세미나 하우스에서 ‘반핵아시아포럼 2011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날 국제회의에서는 일본과 한국, 대만,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필리핀, 중국 등 총 8개 아시아 국가 100여 명의 반핵 활동가들이 참가해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핵발전소의 문제, 핵무기의 문제와 이에 대항하는 투쟁 상황 보고를 진행했다. 후쿠시마 사고, 에너지 정책 전환의 시험대 첫 번째 보고는 주최국 일본의 순서였다. 환경지속사회 연구센터의 타나베 유우씨는 후쿠시마 사고만이 아니라 시야를 좀 더 넓혀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보아야 한다며 발표를 시작했다. 타나베씨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전, 2030년까지 (전력생산에서) 핵발전 비중을 53%로 확대할 계획이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핵발전 비중을 지속적으로 증가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는 이러한 계획을 완전히 무효화시켰다. 향후 국가 에너지 정책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가 일본에서는 현재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고 타나베씨는 설명했다. 참고로 사고 이후 일본 정부는 2008년 기준 1%에 불과한 재생가능 에너지 비중을 2020년까지 20%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현재 운행이 중지된 핵발전소의 재가동을 놓고도 커다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일본에서는 3월 11일에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고 이후 총 54기의 원자로 중 39기의 원자로가 정지되어 있고, 15기만이 작동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계획 절전을 시행하고 있는 도쿄에서는 지하철역을 비롯해 곳곳에서 시간대별 전력 공급량 수치를 볼 수 있는데, 필자가 도쿄에 머무르면서 본 수치는 많아 봐야 70%대를 넘지 않았고 대부분 50-60%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건물 자동문 2곳 중 1곳이 작동을 하지 않는다거나, 가동되는 엘리베이터 1-2기를 줄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 불편을 느낄 수 없었다. 지하철의 냉방 시스템도 충분히 작동되고 있다고 느낄 만큼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참가자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도시의 엄청난 전력 수요와 이를 기반으로 확대되는 핵발전 정책의 허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지금 도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타나베씨는 마지막으로 일본의 핵발전소 수출 문제를 언급했다. 최근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핵발전소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타나베씨는 일본이 핵발전소 수출을 위해 여러 나라와 원자력 협정을 맺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베트남과 원자력 관련 협정을 맺고 현지에서 입지 조사를 벌이기도 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일본의 히타치와 도시바는 이미 대만에 핵발전소를 수출한 바 있다. 탈핵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 진영의 연대 확장 타나베씨의 발표에 이어 일본의 원자력자료정보실 반 히데유키 공동대표가 현재 일본의 운동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현재 일본에서는 일본의 에너지 정책, 핵발전소 수출 정책을 전환시키기 위해 탈핵운동 진영과 에너지전환 운동 진영이 함께 연대하고 있다고 반 공동대표는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원자력자료정보실과 원수폭금지 일본국민회의, 그 밖에 여러 운동 단체들이 함께 일본의 에너지 정책 전환, 탈핵을 위한 1,000만 명 서명운동에 돌입했으며, 9월 19일에는 도쿄에서 5만 명이 모이는 대규모 실천 투쟁을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번 반핵아시아포럼에 참여한 분들이 9월 19일에 다시 도쿄에 모여 아시아 지역 연대 투쟁을 상승시켜가자고 호소했다. 내진 설계가 일반 주택만도 못한 핵발전소 두 번째 보고는 대만의 순서였다. 대만 참가자 대표로 발표에 나선 국립타이완대학교의 카오쳉얀 교수는 대만 핵발전소의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대만에서 핵발전이 시작된 것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1978년인데 현재 3개의 핵발전소에서 6기의 원자로가 가동 중이고, 또 하나의 핵발전소(원자로 2기)가 건설 중에 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자연 재해에 대한 핵발전소의 대비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카오 교수에 따르면 현재 대만의 주택 내진 설계 기준은 0.33g(중력가속도)인데, 제1 핵발전소의 내진 설계는 0.3g에 불과하다. 또한 건설 중인 제4 핵발전소의 쓰나미에 대한 대비는 처오름 12m 수준인데, 내진 설계에 따른 최대 지진인 8.5 진도의 지진이 발생하면 25m의 쓰나미가 닥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최고의 안전 설비를 자랑하던 핵발전의 안전 신화는 깡그리 무너졌다. 인간의 예상을 초월한 자연재해 앞에서는 그 어떤 대비도 완벽할 수 없으며, 그 후과는 너무나도 엄청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대만의 핵발전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마저 제대로 구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핵무기와 연결된 핵발전 정책 인도의 상황을 보고한 반핵운동 전국동맹(National Alliance of Anti-Nuclear Movements)의 S.P.우다야쿠마 박사는 핵발전은 결국 핵무기와 연결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도의 역사,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발표를 시작한 우다야쿠마 박사는 인도는 핵에 의존하지 않아도 충분한 에너지가 있는 나라라고 주장했다. 태양광이 남아돌 정도로 더운 나라이며, 삼면이 바라도 둘러싸여 해안선이 무려 7,500km에 달해 파력 발전 등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또한 히말라야 같은 지역에서는 1년 동안 바람이 계속 불어 풍력 발전의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우다야쿠마 박사는 인도가 핵에너지 개발에 몰두하는 것은 오로지 핵무기를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파키스탄과의 갈등,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중국에 대한 대비 등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인도는 핵무기 개발에 매달린다는 설명이다. 그는 미국이 자신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도를 이용해 중국을 견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NPT(핵비확산조약)에 가입하지도 않은 인도와 원자력협력협정을 맺고 굉장히 많은 기술을 제공해주었다고 말했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핵, 그러나 인민을 죽이는 핵 중국 상황에 대해 발표에 나선 태평양 환경(Pacific Environment)의 웬 보씨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 역사에 대한 설명에 주력했다. 1964년 10월 16일, 처음 핵실험을 한 중국은 냉전 시대 제국주의 국가의 공격을 막기 위한 ‘핵 억지력’이라는 미명 하에 중국의 핵무기 개발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핵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통제가 심한 중국에서 핵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 지금까지 총 45회의 핵실험(대기권 23회, 지하 22회)을 진행했는데, 그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조사된 바가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웬씨에 따르면 중국은 ‘8023 부대’라는 핵 부대를 창설했다고 한다. 150명 정도로 구성된 이 부대는 핵실험 지역에서의 시료 채취나 실제 핵공격이 진행될 경우에 지상부대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와 같은 작전 계획 수립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핵폭발이 주는 건강 피해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고, 그에 대비하는 보호 장구도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예를 들어 핵실험 지역에서 시료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탱크를 이용했는데, 병사들 사이에서는 그 탱크 운전이 매우 명예로운 일로 여겨져 서로 자원했다고 한다. 웬씨는 8023 부대에서 퇴역한 군인들이 나이가 들면서 각종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핵실험 당시 이 부대를 지휘했던 사령관은 62세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현재 8023 부대 퇴역 군인들은 당시의 진상 규명과 건강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며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아시아 지역 연대로 핵 없는 세상을 만들자 마지막으로 공동 성명서 채택을 위한 전체 토론이 진행되었다. 8개 국가의 참가자들은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공통의 인식 마련을 위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공동 성명을 채택한 참석자들은 내년 반핵아시아포럼을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는 3월 서울에서 진행할 것을 결의하며 이날 국제회의를 마무리했다. 일본은 과연 탈핵의 길을 향해 가는가?: 8월 2일 일본 경제산업성과 도쿄전력 항의방문 지난 8월 2일 반핵아시아포럼 2011 참가자들은 일본의 경제산업성과 도쿄전력 항의방문을 진행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운영 주체이고, 경제산업성은 일본 핵발전의 추진과 감시를 함께 책임지고 있는 정부부처다. 전날 국제회의를 통해 경제산업성 장관 카이에다 반리와 도쿄전력 사장 니시자와 토시오 앞으로 전달할 요청서를 채택한 100여 명의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은 먼저 경제산업성으로 향했다. 우리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 경제산업성에서는 계장급 이하 젊은 직원들이 항의방문 대오를 맞았다. 시간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약 15분간 진행된 면담은 항의방문 대오가 전달한 요청서 항목별로 경제산업성의 입장을 듣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관리들은 일본 정부가 최대한의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예를 들어 항의방문 대오가 전달한 요청서 3항 ‘사고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사고의 진실에 대해 명백하게 설명해 주십시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부는 사고지에서 수집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다’고 답했다. 방사능 오염 지역 주민들에 대한 대피 문제에 대해서는, ‘제1 핵발전소에서 고농도 방사능이 나와 사람들을 피난시켰다’고 답했다. 정부의 대응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이었다.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이 직접 후쿠시마에서 보고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핵발전소 수출은 정부의 소관이 아니다 이러한 경제산업성의 무책임한 태도는 핵발전 정책과 핵발전소 수출 문제에서 극에 달했다.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일본의 모든 원자로를 폐로해야 한다는 요청에 대해 ‘핵발전소 폐기는 일본 전체의 에너지 정책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라고 답했다. 전체 에너지 정책과 연결된 문제이기에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식이다. 핵발전소 수출 문제에 있어서는 모든 책임을 민영 기업에게 떠넘기기까지 했다. 면담에 참여한 정부 관료는 ‘핵발전소 수출은 정부가 아니라 사기업이 진행하는 것’으로서, ‘정부가 뭐라 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정치적 이유나 핵기술의 노하우 전수 문제 등에 대해 수출 대상국과 연결하는 역할만 한다’고 말했다. 핵발전소 수출에 있어 정부의 역할은 인정하면서도 기업의 거래이기 때문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일본이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짧은 면담을 마치고 나온 대오는 경제산업성 앞에서 규탄 집회를 진행했다. 후쿠시마 현민들을 비롯해 수많은 민중이 미흡한 사고 수습 상황과 재해 지역 구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모든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경제산업성의 태도에 참가자들은 분노를 터뜨렸다. 대만에서 온 참가자는 ‘일본과 대만은 무척 가까운 나라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원한다’면서 경제산업성의 태도를 비판했다. 또한 ‘일본의 도시바와 히타치가 대만에 원자로를 수출’한 상황을 지적하며, 일본의 핵발전소 수출이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에서 온 참가자는 ‘후쿠시마 사고로 전 세계가 일본을 주목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일본이 세계에 리더십을 보여줄 때’라고 말했다. 항의방문 대오는 약 30여 분간 경제산업성 앞에서 규탄 발언을 이어간 뒤 도쿄전력으로 향했다. 복구는 로드맵에 따라 반핵 선전물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대오는 도쿄전력에 다다랐다. 언론에 많이 보도되었던 도쿄전력 본사 건물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고, 경찰 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면담은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별관 건물에서 진행되었다. 면담장에는 도쿄전력 홍보 담당으로 보이는 3명의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면담에 참가한 도쿄전력 직원은 ‘혼란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해 매우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반핵아시아포럼 여러분의 요청서를 회사로 가져가서 매우 주의 깊게 검토할 것’이라 덧붙였다. 면담 참가자들은 경제산업성에서 동일하게 요청서 문항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도쿄전력 측은 2011년 5월 20일 자로 배포된 보도자료를 제시하며, 도쿄전력이 설정한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사고 복구를 위한 로드맵’에 따라 사고 수습을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답했다. 항의방문이 이루어진 날 후쿠시마 핵발전소 1호기와 2호기 사이에서 치명적 수준의 방사선량(시간당 10Sv; 노출 시 즉사)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세운 로드맵에 따른 수습 절차를 믿으라는 식이었다. 도쿄전력 측은 또한 ‘후쿠시마 지역과 도쿄 지역의 상황에 대해 매일 알리고' 있으며, ‘할 수 있는 한 빨리, 갖고 있는 정보를 모두 공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핵발전소 수출은 중단하겠다 핵발전소 수출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필리핀에서 온 참가자는 도쿄전력이 필리핀에 핵발전소를 수출하려 하고 있는데, 향후 계획이 무엇인지 물었다. 도쿄전력 측은 후쿠시마 사태 수습과 사고 보상을 위해 해외 자본과 인력을 모두 철수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향후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피해 보상의 수준과 방식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도쿄전력이 감당해야 할 몫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상당 수준의 지분 매각이나 해외 자본 철수는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후쿠시마 사고 이전에 도쿄전력이 핵발전소 수출을 시도하고 있던 대상국으로서는 도쿄전력의 이러한 입장이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정부 차원에서 핵발전소 수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상황을 볼 때 도쿄전력이 아니라 다른 전력회사에 의한 핵발전소 수출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향후 추이를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기업은 핵발전소로 이윤을 얻지만, 민중들은 피해를 당한다 면담을 마치고 나온 사람들은 도쿄전력 본사 앞에서 항의 시위를 계속하고 있던 대오와 합류해 면담 내용을 공유하고 규탄 발언을 이어갔다. 인도의 반핵운동 전국동맹의 S.P.우다야쿠마 박사는 ‘핵발전소를 통해 도쿄전력은 이윤을 얻지만, 민중들은 모든 피해를 떠안는다’면서 ‘도쿄전력은 악의 기업’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도쿄전력 측의 핵발전소 수출 철회 이야기로 희망을 얻게 되었다는 필리핀 참가자는 '필리핀의 핵발전소 수출 저지만이 아니라, 아시아와 세계에서 핵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함께 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이와이시마, 29년간의 끈질긴 투쟁: 8월 3일 이와이시마 지역 간담회 8월 3일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은 히로시마 서남쪽 야마구치현 가미노세키정의 이와이시마로 향했다. 이와이시마는 가미노세키정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작은 섬이다. 이 작은 섬 마을에 핵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이 처음 나온 것은 1982년이다. 양식을 전혀 하지 않는 전통적인 방식의 어업과 비파 농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작은 마을에 원자로 2기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일본에서 제일 먼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세토 내해에 인접한 아름다운 환경을 지닌 섬마을을 지키고자 한 이와이시마 주민들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29년 동안 핵발전소 건설을 저지하기 위해 줄기차게 싸워오고 있다. 평화로운 지역의 분할 가미노세키 핵발전소 문제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다. 당시 가미노세키 정장이 정의회에서 기업 유치의 일환으로 핵발전소를 유치하자고, 정의회의 합의가 있으면 건설을 추진하고 싶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지역 경제가 무너져 정부의 지원금이 절실해 핵발전소를 받아들였던 후쿠시마처럼, 점차 인구가 줄어 지자체 재정이 부족했던 가미노세키 역시 발전소 유치를 통해 정부의 지원금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작고 평화로운 지역의 분할을 가져왔다. 일부 주민들은 지역 사회의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핵발전소를 수용하는 것 말고 선택지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에서 불과 4km 떨어진 이와이시마의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어업을 포기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금도 거부한 채 매주 월요일마다 29년째 핵발전소 건설 반대 집회를 이어왔다. 온 몸으로 저항하다 20년이 넘는 이와이시마 주민들의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2008년 10월, 야마구치현 지사는 핵발전소 건설 준비를 위한 전력회사의 매립권을 승인했다. 전력회사는 핵발전소 건설 예정지 주변 토지를 통제하고 바다에 부표를 설치해 주민들과 선박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건설 예정지 주변에 통나무집을 짓고 전력회사의 매립 작업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올해 매립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자재와 6백여 명의 작업원을 실은 전력회사의 배 20여 척이 새벽 2시에 이와이시마 앞바다로 들어왔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어선과 조그만 보트 30여 척을 동원해 바닷길을 막고 버텼다. 작업선이 들어올 때마다 주민들은 생업을 팽개치고 작은 어선으로 맞섰다. 전국적인 반대서명도 조직했다. 지난 8월 1일 자로 반대서명은 1백만 명을 돌파했다. 그럼에도 전력회사의 건설 작업은 조금씩 진척되었다. 올해 초에는 굴착 공사가 진행되는 등 매립 직전 상황까지 갔다. 그러던 중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함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했고, 3월 29일 매립 작업은 중단되었다. 야마구치현지사는 향후 전력회사가 매립 허가 요청을 다시 내더라도 결코 허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끝나지 않은 싸움 그러나 이와이시마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와이시마 주민인 토시야스 시미즈씨는 “향후 3년 정도는 핵발전소 건설이 중단되겠지만, 그 이후에는 어찌 될지 모른다.”라고 말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간 나오토 총리는 일본의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정부 내에서도 합의가 되지 않고 있다. 또한 후쿠시마 사고 이전부터 정권의 위기를 겪고 있던 간 총리는 조만간 사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총리가 바뀌거나, 향후 정권이 바뀔 경우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도쿄전력이 아시아 국가들에 핵발전소를 수출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다른 전력회사가 추진할 수 있는 것처럼, 핵에너지에 의존하는 에너지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와이시마의 싸움은 끝날 수 없다.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과 이와이시마 주민들은 8월 6일 함께 가미노세키 핵발전소 건설을 책임지고 있는 전력회사인 ‘중국전력’을 항의방문하면서, 향후에도 이 싸움에 함께 연대할 것을 결의했다. 남겨진 과제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그 어떤 해보다 역동적이고 다양한 일정으로 구성된 이번 반핵아시아포럼은 8월 6일 중국전력 항의방문과 집회로 모든 일정을 끝마쳤다. 한국과 일본의 핵발전소 수출 경쟁 등, 이른바 ‘핵 르네상스’ 정책으로 인해 가속화되고 있던 핵발전 확대의 흐름은 이번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상당부분 진도가 늦춰지게 되었다. 29년 간 주민들의 투쟁에도 핵발전소 건설을 지속하려 했던 가미노세키의 사례나 해외 진출 사업을 중단하겠다는 도쿄전력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반핵 운동 진영에도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도쿄전력이 해외에서 철수하더라도, 혹은 중국전력이 가미노세키에 핵발전소 건설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핵발전 확대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그리고 후쿠시마 사고의 기억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희미해져 간다면 인류를 죽음으로 몰고 갈 재앙의 씨앗은 다시 잉태될 수 있다. 후쿠시마의 상황과 현지 주민들의 외침을 널리 알리고, 그들의 희생을 통해 새로운 재앙의 싹을 제거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후쿠시마 사고가 발생하고 3일 뒤 이명박 대통령은 UAE에서 핵발전소 기공식을 진행했다. 또한 원자력안전기술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일본 원전 사고가 생겼다고 해서 (핵발전소가)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은 인류가 기술면에서 후퇴하는 것”이라 말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세계에서 탈핵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구체적인 흐름들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한국은 핵발전 확대 정책을 밀어붙이겠다는 강력한 의사 표명이었다. 내년 3월 서울에서 두 번째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린다. 핵테러리즘의 차단, 핵물질의 안전보장 등을 논의하는 핵안보정상회의는 물론 직접적으로 핵발전에 관해 논의하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핵물질이 테러리스트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 취약한 핵물질을 보호하는 것은 결국 핵무기 보유국의 절대적 권력을 보존하고, 핵발전 정책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핵발전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내년 서울의 핵안보정상회의는 결국 탈핵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자리일 수밖에 없다. 이번 반핵아시아포럼 참가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내년 반핵아시아포럼을 3월 핵안보정상회의 기간에 맞춰 한국에서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내년 3월 핵안보정상회의는 핵발전을 확대하려는 세계 정상들과 탈핵의 흐름을 확대하려는 민중들의 격돌의 장이 되어야 한다. 후쿠시마의 분노와 외침이 재난을 당한 일부 사람들의 호소가 아니라 인류가 탈핵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내년 핵안보정상회의 대응을 해 나가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핵안보’를 논의하는 정상회의가 아니라, ‘탈핵’을 위한 정상회의, 탈핵의 길을 밝히는 민중회의다.
피폭 66주년 원수폭금지대회 국제회의 2차 한일시민사회반핵포럼 지난 8월 5일 히로시마 YMCA 국제문화홀에서 160여 명의 반핵평화 활동가들이 모인 가운데 ‘피폭 66주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 국제회의’가 진행되었다. 작년 G20 정상회의 기간에 진행된 ‘G20 민중회의’에서 한국과 일본의 반핵평화운동 진영은 ‘한일시민사회반핵포럼’을 진행한 바 있다. 한일시민사회반핵포럼은 한국과 일본 정부, 핵산업계가 추진하고 있는 핵발전소 수출과 핵확산 움직임에 맞서 양국 시민사회 단체의 공동행동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다. 한일시민사회 반핵포럼을 통해 양국의 반핵평화운동 진영은 1>핵발전의 문제는 결코 개별 국가 차원에서 접근할 수 없으며, 탈핵의 길은 전 세계에서 동시에 추진되어야 한다, 2>핵발전의 문제는 핵무기의 문제와 결코 떨어질 수 없다, 3>핵 문제에 있어 각국의 반핵운동과 평화운동은 긴밀히 연결되어야 하며, 그러한 경험은 축적되어야 한다는 등의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따라서 한일시민사회반핵포럼이 단기적 이벤트가 아니라 양국의 반핵발전소-반핵평화 운동 간의 지속적인 연대운동으로 이어져야 함을 확인하고, 올해 일본 히로시마에서 두 번째 반핵포럼을 열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을 기점으로 일본에서 전국적 규모로 진행되는 반핵대회(원수폭금지 세계대회 히로시마 대회) 기간 동안 하나의 분과회의 형태로 두 번째 한일시민사회 반핵포럼을 진행하게 되었다. 핵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향해 국제회의는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실행위원장이자 원수폭금지 일본 국민회의 의장 가와노 류이치씨의 인사로 시작되었다. 나가사키 피폭자인 가와노 위원장은 자신의 피폭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러한 비참한 역사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언급한 ‘핵 없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그는 현재 핵무기는 분명 감축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현상일 뿐 핵 위협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핵비확산조약(NPT)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은 실현되지 않았고, 작년 NPT 평가회의에서 이루어진 합의 사항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가와노 위원장은 현재 일본은 근본적인 에너지 정책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역설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현재 일본은 54기의 핵발전소 중 39기가 정지해있다. 단지 15기의 핵발전소만이 가동되고 있지만 일본에 있는 동안 큰 어려움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늘어난 전력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핵발전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정부와 핵산업계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더불어 내년 봄에는 나머지 15기도 정기점검에 들어가기 때문에 정지하게 된다. 따라서 현재 멈춰있는 39기의 핵발전소가 그때까지 재가동되지 않는다면, 일본은 자연스레 핵발전이 없는 상태가 된다. 일본 정부나 핵발전 찬성파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공포를 부추겨 정지된 핵발전소의 재가동을 추진할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응,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대체 가능성을 밝히는 것이 현재 일본 반핵운동의 과제라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이어진 원수금 사무국장 후지모토 야스나리씨의 기조연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후쿠시마에서 탈핵사회로’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기조연설에서 후지모토씨는 "후쿠시마 사고로 혹독한 상황에 처해 있는 지금, 우리는 핵과 어떻게 살아갈지 질문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 아래 핵발전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것은 군사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핵발전소의 재가동과 증설 반대, 핵 사이클의 완전 철폐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얼마 전부터 시작된 ‘안녕 핵발전소 1000만인 액션’을 소개하면서, 시민사회가 반핵과 탈핵의 큰 흐름을 만들어가자고 호소했다. 그는 오늘의 국제회의를 계기로 더 강력한 연대를 만들어가는 것,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 정책으로 전환시켜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제1 세션: 후쿠시마 사고를 생각한다 열악한 피난 생활 제1 세션은 후쿠시마 사고에 대한 상황 보고였다.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 근처인 현 동부 지역은 심각한 오염지역이다. 여기에는 고리야마, 후쿠시마시, 그리고 니이가타 지역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바다 쪽에 있는 후타바마치, 오오쿠마마치, 나라하마치 등은 대부분 완전 소개지역(사고지역 20km 권내)이다. 상황 보고를 한 후쿠시마현 평화포럼 사무국장 하라씨는 완전 소개지역과 계획적 피난 구역(사고지역 20-30km 권내)의 경우 ‘행정기관조차 다 뿔뿔이 흩어져 설치’되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현재 피난민의 정확한 상황, 피난 지역, 이들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현재 파악되고 있는 피난 시설 거주민은 약 7만여 명, 일시 피난소에 약 2만 명, 자체적인 판단을 통해 현 바깥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약 4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피난소는 약 430여 곳이 있는데, 피난소는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난민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고, 사망자도 속출하고 있다. 보다 광범위한 피난이 필요한데도 하라씨는 현내의 오염 실태에 대해 도쿄전력과 정부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고 비판했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 20km 권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강제피난 되었는데, 이후 확인 결과 이들이 피난한 지역이 훨씬 더 높은 오염도를 보인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피난 경로에 따라 방사성 물질의 확산이 이루어져, 현지에서는 "사람들이 달리는 길을 따라 방사능도 달렸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게다가 오염실태가 제대로 보고되지 않으면서 이다테무라와 같은 고오염 지역이 한 달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주민들의 건강이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일본 정부는 사고 후 피난 기준을 연간 20mSv(밀리시버트)로 상향 조정했다. 원래 일본 법률에는 연간 1mSv를 허용치로 적시하고 있으니, 기준치를 20배 올린 셈이다. 그러나 원래 법률에 적시된 기준치로 보면 현내 거의 모든 지역이 해당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기준치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하라씨의 설명이다. 피폭자 담당 의사인 후츠 카츠미씨는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 지역에 살고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의 법률상 4만 Bq(베크렐) 이상의 지역은 ‘방사능 관리구역’이다. 방사능 관리구역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갔던 사람은 1년에 한 번씩 혈액 검사를 받아야 하며, 그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먹을 수 없다. 그런 곳에서 아직도 1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후쿠시마현 중앙에 위치한 인구 33만 명의 고리야마시는 시간당 1μSv(마이크로시버트) 전후의 방사선량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중에는 ‘핫스팟’이라 불리는 고선량의 지역도 존재한다. 법률상 원전 노동자나 의료사업자의 피폭 허용치는 매 시간당 0.6μSv인데, 상당한 지역이 이 수치를 넘어서고 있다. 일본 정부가 기준치를 올린 데에는 또 하나의 추론이 가능하다. 만일 법률 상 기준치를 적용할 경우 배상 대상이 너무 커져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달하게 된다. 그러나 기준치가 높아지면, 높아진 기준치 이하에 노출된 사람들에게는 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고교야구 전국대회 예선전을 강행한 데에서 알 수 있듯, 현민들의 건강이 제대로 고려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오히려 지역 경제를 망쳐버린 핵발전소 건설 후쿠시마 제1 핵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은 ‘후쿠시마의 티벳’이라 불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낙후된 곳이었다. 인구가 점차 줄어들었고 지자체의 재정이 매우 어려웠다. 결국 핵발전소 건설 대가로 지급되는 교부금 때문에 손쉽게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건설될 수 있었다. 지역은 언뜻 풍요로워진 것 같았지만, 결국은 호사스런 건물들이 들어오고 그 유지비만 떠안게 되었다고 하라씨는 말했다. 핵발전소와 관련되어 고용이 증가한다고 했지만, 발전소 건설 이후에는 다시 일자리가 사라졌다. 또한 지역에 원래 존재하던 산업의 육성을 뒤떨어지게 하여 핵발전소 이외 산업에서의 취직이 더 어려워졌고 핵발전소에 대한 의존도만 커졌다. 핵발전소가 들어선 후타바정은 다시 재정위기에 빠졌고, 정장이나 직원의 보수까지 깎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줄어든 교부금에 허덕이던 정은 다시 핵발전소 유치를 신청했고, 결국 10개의 핵발전소가 집중되게 되었다. 제2 세션: 핵발전소의 해외 수출 문제를 생각한다 핵발전 산업의 시장 재편 제2 세션에서는 일본의 핵발전소 수출 상황에 대해 원자력자료정보실의 반 히데유키의 발표가 이어졌다. 반 대표는 핵발전 역시 산업이라는 점에서 시장이 작아짐에 따라 재편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에는 일본 내 11개의 관련 회사가 있었지만, 1990년대 8개로 줄었고 계속 줄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도시바, 히타치, 미츠비시 3사가 협력하면서 핵발전 확대를 추진해왔는데 1970-1980년대 사이에 굉장히 많이 지어졌지만, 1990년대부터 차츰 줄어들어 현재 건설 중인 것은 2기에 불과하다. 국내 수요를 찾을 수 없는 핵발전 제조사들이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에도 지속되는 핵발전소 수출 정책 반 대표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경제산업성의 핵발전소 수출 정책은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6월 도시바와 히타치는 핵발전소 건설 시찰 건으로 리투아니아를 방문했다. 이 시찰 후 도시바와 히타치가 리투아니아 핵발전소 건설의 우선적인 교섭권을 갖게 되었다는 소식도 흘러나왔다. 물론 미국 남텍사스에 핵발전소를 수출하려던 프로젝트는 미국 쪽의 거부로 백지화되었지만, 그만큼 일본 정부와 핵발전 제조사들은 핵발전을 새롭게 시작하고자하는 개발도상국과 같은 다른 루트를 발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제3 세션: 에너지정책의 전환을 향하여 에너지 수요 9%만 줄이면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재 일본의 핵발전소는 총 54기 중 15개만이 가동되고 있다. 또한 8월 들어 가시와자키 핵발전소에서 2기가 중지되었고, 점차 가동을 중지시키고 있다. 중지된 핵발전소의 가동이 재개되지 않는다면 내년 봄에는 모든 핵발전소가 중지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내년 여름에는 핵발전 없는 여름을 맞게 된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월에 그러한 상황이 오면 9% 정도의 에너지가 부족하게 된다고 발표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9% 정도의 수요만 줄이면 핵발전 없이도 충분한 에너지 공급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본 정부가 인정한 셈이다. 따라서 현재 일본 반핵운동 진영에서는 가동 중단된 핵발전소의 운전 재개를 막는 것이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다. 투자와 정책의 우선순위로 해결할 수 있어 제3 세션 두 번째 발표자는 독일 녹색당 부대표인 베벨 헨씨였다. 현재 독일 연방의회 의원이기도 한 그녀는 독일의 탈핵 움직임을 소개했다. 그녀는 독일이 탈핵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후쿠시마 사고가 하나의 분수령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오랫동안 지속된 대안에너지 정책과 투자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로 큰 피해를 입은 이후 일찍부터 대안에너지에 집중한 독일은 2000년 들어서 풍력, 바이오매스, 태양열 등을 이용한 에너지 생산이 크게 증가했다. 2010년에는 전체 에너지 생산의 17%를 이러한 재생에너지로 충당했다. 이러한 성과가 가능했던 것은 생산된 재생가능에너지를 에너지 기업이 고정된 가격으로 구매해주는 ‘고정가격 보장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민간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것에 투자할 수 있다는, 그리고 충분히 수익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독일에서는 기업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에너지 생산을 통해 수익을 얻고 있다. 베벨씨는 이러한 법의 틀이 기업이나 농민, 개개인의 시민이 같이 하는 태양열 판, 풍력 터빈, 재생가능 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산업의 발달과 고용창출 효과 베벨씨는 핵발전이 오히려 경제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핵발전에 대한 환상이 다른 대안적인 기술 혁신이나 새로운 투자를 정체시키기도 하고, 고용 창출을 방해하기도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재생가능 에너지는 독일에서 크게 성장했고, 독일 경제의 주축이 되었다. 작년만 해도 400억 달러를 넘는 금액이 독일의 재생가능에너지센터에 투자됐다. 전력 생산에서 핵발전 비중이 70%를 넘는 프랑스에서도 핵발전에 대한 투자는 40억 달러에 불과하다. 또한 독일에서는 40만 명의 고용이 재생가능에너지센터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핵발전 관련 고용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그녀는 재생가능에너지 경제를 통해 독일은 점차 고용을 확대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반핵운동의 과제 국제회의 참가자들은 우리가 탈핵의 길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후쿠시마의 현실을 세계 각지에 전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점을 지적했다. 후쿠시마 현지민들의 보고와 일본 활동가들의 발언은 우리가 언론을 통해 보고 듣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후쿠시마의 상황을 전하면서 "핵과 인류는 공생할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점은 참가자들이 하나같이 지적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일본의 반핵운동이 연대활동을 펼치는 것, 각국의 반핵운동이 연대활동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가 이러한 연대활동을 자연스레 보장하지는 않는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라는 대재앙을 겪고 있는 일본 내의 반핵운동 진영에서도 아직 핵발전소에 대한 입장은 통일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8월 7일에 진행된 ‘피폭 66주년 원수폭금지 세계대회 나가사키 대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대회의 공동주최 중 한 단체인 핵병기금지평화건설국민회의(핵금회의) 부의장이 개회인사를 하고 단상을 내려가려는 순간, 객석에서는 수많은 야유와 비난이 쏟아졌다. 그의 발언에서는 핵발전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객석에서는 "핵발전 문제는 이야기 안하냐?", "핵발전 찬성하는 거냐?"는 격한 반응들이 나왔다. 원수금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핵금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단위들 중 전력회사 노동조합, 핵발전 관련 노동조합들이 있기 때문에 핵금회의는 아직까지 핵발전소 자체에 대한 반대로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전력회사나 핵발전 노동자들의 노동권 문제, 생존권 문제가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운동 진영 내에서조차 탈핵의 흐름을 키워가기 어려울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 사례가 전체 사회운동과 결합하지 못하는 노동조합 운동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세계 각지의 반핵운동은 새로운 기회를 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답해야 할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