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안철수 단일화 비판 11월 한 달 간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과정은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했다. 11월 6일 후보등록 이전 단일화 합의 후 협상개시, 14일 단일화 협상 중단, 18일 민주통합당 이해찬-박지원 지도부 사퇴 선언과 새정치 공동선언 합의, 19일부터 여론조사 방식을 둘러싼 마라톤 협상과 갈등 등 단일화 과정은 많은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3일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갑작스럽게 후보직을 사퇴함에 따라 지난했던 단일화 논란이 일단락되었다. [%=사진1%] 단일화가 필요했던 이유 애초 민주당이 주도하는 야권연대는 민주당 스스로의 힘만으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없다는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2011년 민주당 지지율은 몇몇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항상 한나라당에 비해 열세였고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등 유력 야권 대선후보들의 지지율을 다 합쳐도 박근혜의 지지율 보다 낮았다. 그러던 중 2011년 말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안철수가 혜성처럼 등장해 통 큰 양보로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다. 민주통합당 및 야권연대의 열세는 올해 4.11 총선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총선 전 대부분의 미디어와 여론조사 기관에서 민주통합당 및 야권연대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당명을 개정한 새누리당은 복지담론을 일부 수용하면서 단독 과반을 확보했다. 이제 민주통합당으로서는 참신한 이미지와 폭넓은 지지층을 가지고 있는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만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로 인식된다. 안철수 후보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정치를 염원하는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자신이 대선 후보로 나선 명분인 새로운 정치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야권단일화의 전제조건으로 새정치 공동선언에 대한 합의를 줄곧 강조했다. 민주통합당 내 기득권 세력이라 불리는 지도부의 사퇴라는 가시적 성과도 만들어냈다. 우여곡절 끝에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새정치 공동선언에 합의했지만, 이후 후보 단일화 방식을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끝내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게 된다. 소통과 협치, 왜 안될까 단일화 이후에도 문재인 후보는 “안 후보와 함께 약속한 새정치 공동선언을 반드시 실천해 나가겠다”며 “민주화 세력과 미래 세력이 힘을 합치고, 나아가 합리적 보수 세력까지 함께하는 명실상부한 통합의 선거 진용을 갖추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새정치 공동선언은 이명박-박근혜의 권위주의적이고 일방적인 구태정치와 단절하고자 하는 모든 미래 지향적 세력이 연대해야할 근거가 된다. 새정치 공동선언은 △새로운 국정운영, △정치혁신, △정당혁신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안들은 실현가능성이 지극히 낮을 뿐더러 정치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위험이 있다. 첫째, 선언문이 제안하는 새로운 국정운영이란 여야정 국정협의회 상설화, 노사정 협약 등 다양한 사회적 협의 구조 등을 통해 협치의 시대를 열자는 내용이다. 소통과 협의를 위해 애쓰겠다는 상식적인 말이다. 많은 국민들이 서로 헐뜯고 싸움만 하는 국회에 환멸을 느끼는 상황에서 협치라는 말은 아름답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동안 국회가 이전투구의 장으로 전락하게 된 핵심 이유가 대통령과 의원들의 소통의지 부족은 아니다. 여야 모두 신자유주의를 수용해 큰 틀에서 정책적인 차별성이 사라진 것이 그 원인이다. 여야 공히 민생에 대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비생산적인 폭로전과 꼬투리잡기에만 몰두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핵심 원인은 소통 부족이 아니라 무능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노사정 협의 역시 마찬가지다. IMF 이후 재벌의 수출경쟁력을 높이는데 막대한 정부지원이 이루어졌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원하청 구조 속에서 저임금과 비정규직 일자리를 강요받아왔다. 또 최근 창조컨설팅 사례에서 드러나듯 노동조합 활동은 기업의 이윤추구에 방해가 된다며 공격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노사정 협의가 이루어질리 만무하다. 정부와 자본이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경제구조를 유지하고자 하는 한 노사정 협의란 노동자의 양보를 강요하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눌 수 없는 하나의 권력, 대통령 둘째, 새정치 공동선언은 국무위원 인사제청권과 해임건의권 등 국무총리의 권한 보장,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 및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국회의원 연금제도 폐지, 비례대표 의석 확대 및 지역구 의원정수 조정 등 정치혁신을 주장한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막대한 권력을 분산하고 국회의원의 특권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국회의원 의원정수 문제였다. 안철수 후보가 국회의원 정수를 200명으로 줄여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되다가, 문재인 후보와의 조율을 거쳐 최종 선언문에는 “의원정수 조정”이라고 표현되었다. 안철수 후보가 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반정치 정서를 자신에 대한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살펴본다. 대통령의 권력 분산 및 책임총리제부터 살펴보자. 한국의 대통령은 정부 영역은 물론이고, 공기업, 금융기관, 대기업 인사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또 지역주의와 결합해 국책사업 등을 매개로 연고지역에 배타적으로 이익을 집중시켜왔다. 이러한 1인 정점의 권력구조, 승자독식 구조인 대통령제에서 권력을 나눠갖는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대통령의 권력 분산이나 책임총리제 등은 말의 성찬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1998년 대선에서 호남지역 기반의 김대중과 충청지역 기반의 김종필이 연합하여 김대중 정부가 탄생했으나 권력분점은 이루어지진 않았다. 게다가 이처럼 책임총리제 자체가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권력안배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정치혁신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비슷한 맥락에서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뒷받침하는 검찰과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제어장치들 역시 실질화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역대 대통령들은 어느 정부든 통치에 권력기관을 이용해왔고 비판세력을 제거해왔다. 검찰, 경찰, 정보기관,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감사원 등 대표적 권력기관과 방송사 및 언론사에서 기존 사람들을 퇴출하고 자파세력을 배치해 장악했다. 검찰의 권한 축소와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 문제가 정략적 갈등 속에서 표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한편, 대통령의 권력남용과 관련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대통령 4년 중임제를 공통된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통령이 단임으로 자기 임기 동안 권력을 남용하다가 무책임하게 물러나버리는 현상을 개선하고, 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임기를 일치시킴으로써 책임있는 정치를 구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선거주기를 조정하기 위한 개헌이 이루어지기는 매우 어렵다. 개헌 자체가 매우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라 정략적으로 활용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2007년 노무현 정부의 원포인트 개헌안이 낳은 정치권 내 분란은 이를 잘 보여준다. 물론 선거 주기 조정을 위해서 자신의 임기를 축소하자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나설 가능성도 그리 높아보이진 않는다. 정당축소가 정당쇄신인가 셋째, 새정치 선언은 정당혁신을 위해 중앙당 권한과 기구 축소, 당의 분권화 및 정책정당화 추진, 강제적 당론 지양, 현행 국고보조금제 합리적 정비 및 축소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국회의원 정수 문제와 마찬가지로 안철수 후보의 의견이 상당부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애초 안철수 후보는 중앙당의 폐지를 주장했었는데 이 역시 문구 상의 조정이 있었다. 어쨌든 선언문에는 기존 정당은 국민과 소통하는데 실패했으므로 정당의 기능과 권한을 대폭 축소하자는 방향이 대폭 반영되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 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신이 커진 것은 정치와 정치인들이 민생문제 해결에 무능했기 때문이다. 뚜렷한 정치이념도, 경제위기에 대한 대안도 없이 지역주의와 외부인사 수혈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온 한국 정당정치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능한 정치인 집단의 규모가 크고 그들에게 많은 세금이 지급된다는 것에 대한 대중적 불만은 지극히 정당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인을 줄이고 지원을 축소한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사퇴한 안철수 후보는 정치혁신, 정당혁신을 주장하면서 무능한 정치인들을 공격하고 대중의 반정치 정서에 힘입어 자신의 지지를 끌어올리는 인민주의적 정치에 의존했다. 이러한 정치는 단기간에는 ‘그래! 변화가 필요해!’라는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 대안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에 금세 실망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개혁에 대한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을 반복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더욱 심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는 안철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당정치 전반이 개혁과 위기의 악순환을 만들어왔다. 정치에 대한 불신감이 크고 지역주의로부터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받는 유동적 중도층이 늘어나자, 정당들은 이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변모해왔다. 즉, 정당들은 대중의 선호를 빠르게 파악하는 시스템을 당 내에 구축하고, 의원들은 파악된 여론을 바탕으로 미디어 정치를 펼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렇게 되면 당원들의 이념적 지향이 당내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점차 감소하는 반면 스타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이 당의 인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새정치 선언이 주장하는 중앙당 축소 및 그 정책적 기능의 강화, 당론보다 의원 개개인의 자율성을 강화는 정당정치가 지역적, 이념적 존립기반을 잃어왔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이러한 정당의 변모는 정치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여전히 경제위기에 대한 대안이 없고 이념적 계급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휘발성 높은 유동적 중도층의 지지를 아주 잠시 동안 묶어두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는 더욱 심화된다. 반복되는 단일화 드라마 새정치 공동선언이라는 단일화의 내용도 문제지만, 단일화라는 형식 자체에도 문제가 많다. 민주화 이후 최초로 1997년 15대 대선에서 DJP 연합이 이루어졌고,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는 노무현-정몽준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두 차례 대선에서 단일화한 후보가 모두 승리하면서, 당선가능성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후보 단일화가 당연하게 인식되곤 한다. 최근에도 작년 말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박원순-박영선 단일화가 이루어진 바 있다.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정치판에서 당선을 목표로 한 단일화가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매 선거 때마다 이러한 행태가 반복되는 상황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는 그만큼 정당정치가 불안정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정당과 정치인이 자기 노선에 따라 일관된 활동을 수행하여 성과를 내고 이를 통해 검증받기보다는 오직 당선을 위해 뭉치고 그 내부에서 권력을 배분받는 데에만 몰두하는 것이 정당정치의 현주소다. 또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권력을 두고 단일화 협상이 벌어지기 때문에 양측 간 단일화 방식을 둘러싸고 지난한 갈등이 지속된다. 이번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 측은 본선경쟁력을 묻는 여론조사를 주장했고, 이 문항을 50% 반영하기로 합의하기까지 며칠 간 갈등을 빚었다. 협상 막바지에는 나머지 50%에 대해 적합도 조사를 할 것인지, 지지도 조사를 할 것인지를 두고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문재인 측은 ‘야권 단일후보로 누가 적합하다고 보십니까’라고 묻는 적합도 조사를 주장한 반면, 안철수 측은 ‘야권 단일후보로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라고 묻는 지지도 조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 당시에도 비슷했는데, 노무현 측은 “적합”, 정몽준 측은 “경쟁력”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난항 끝에 양측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경쟁할 단일후보로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가운데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라는 문구로 타협했다. 2011년 서울시 재보궐 선거 단일화 과정에서는 여론조사, 배심원단, 국민경선을 각각 몇 % 반영할지 문제, 국민참여경선 선거인단 동원 문제 등을 둘러싸고 양측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이처럼 지난한 갈등이 반복되는 가운데 아름다운 단일화, 감동있는 단일화가 이루어질리 만무하다. 2002년 단일화가 인기몰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최초로 여론조사 방식을 도입해 그만큼 새롭고 획기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일화 이벤트가 반복될수록 그 흥행 효과는 반감되고 있다. 이번 안철수 후보의 사퇴 역시 지루한 단일화 드라마를 계속 끌었다가는 지지층이 이탈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고육지책이라고 볼 수 있다. 단일화 이후 문재인 후보는 구태정치 대 새정치라는 대결구도를 유지하면서 안철수 지지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유동적 중도층을 붙잡고자 한다. 이들을 붙잡기 위해서는 안철수 측의 지원사격이 필요한데, 안철수 후보의 사퇴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경우 권력배분에 대해 합의한 후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선거 캠프 재구성 및 향후 권력 배분과 관련된 많은 쟁점이 잠복해있다. 단일화 드라마는 싱겁게 끝났지만 또다시 지루한 후속편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혼란과 무기력을 딛고 2013년 이후 질서재편을 준비하자! 2007-2009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져있는 가운데, 세계경제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의 경제회복이 지지부진하면서 3차 양적완화 정책이 단행되었다. 또한 유럽위기가 지속, 확대됨에 따라 세계경제가 다시 한 번 심각한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경제성장률 또한 연초 정부의 3.7% 전망치가 지속적으로 하향 조정(10월 한국은행 2.4%로 하향조정)되었으며, 추가적인 하향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향후 위기는 국가별, 지역별 불균등한 양상으로 시차를 두면서 진행되겠지만, 지금의 위기가 장기간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야기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무역의존도와 금융개방도가 대단히 높은 한국이 세계적 경제위기의 직접적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세계적인 장기불황과 경제위기의 심화는 그리스 등 유럽의 상황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긴축과 구조조정, 임금삭감, 사회복지의 축소를 강요하며 노동자 민중들의 권리를 축소하고 삶의 조건을 대폭 후퇴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엄혹한 정세 속에서 2012년 대선을 앞둔 한국사회의 현실은 너무도 암울하다. 연일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유력한 대권 주자로 거론되고 있는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 무소속의 안철수 후보는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하고 대중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각종 공약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명박-노무현-김대중 정부의 뒤를 이어 수출-재벌 중심의 세계화와 FTA 전략, 노동유연화의 지속적 법제화, 한미일 군사동맹의 강화와 같은 핵심적인 신자유주의 전략을 여전히 주요한 전략으로 삼고 있다. 유력 대선후보들이 내세우는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는 집권 이후 경제위기의 심화와 함께 현실론이라는 이름으로 대폭 후퇴할 것이 명확하다. 하지만 이에 맞서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한국사회의 새로운 전망을 제시해야할 민중운동은 주류 세력의 급속한 우경화 흐름 속에서 고립 분산적 활동을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 민주노총은 정당과 후보에 대한 방침조차 결정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이다. 이러한 운동진영의 혼란과 무기력을 틈타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의 문재인 후보, 안철수 후보 대선캠프행이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민중운동의 정체성 해체와 대선대응의 각개 약진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의 출범은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의 역사에서 커다란 변환점이다. 전통적으로 한국 노동자 민중운동은 구체적인 운동전략과 정당운동 노선 등에 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노동대중(노동자, 농민, 빈민 등 기층 민중)이 스스로의 요구와 투쟁을 조직하여 사회적 정당성과 영향력을 획득하고, 이러한 대중운동과 민중연대 투쟁전선의 힘을 바탕으로 기존의 지배질서를 변혁하여 생산의 주인, 사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공유해왔다. 따라서 지배세력(자유주의, 보수주의)과 달리 정치적, 조직적으로 자주성, 독자성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최근 민주노조 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의 주류 세력들이 사회구조의 변혁을 포기하고 ‘집권’을 전략적 목표로 사고하면서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가 그들의 핵심적인 노선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자유주의 세력과의 조직적 통합까지 나아가면서 노동자 민중운동의 기본적 정체성이 해체되고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라는 대단히 이질적이고 때로 모순적인 이념과 역사를 갖는 정치세력들이 통합한 정파연합당이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모토로 창당한 민주노동당과 ‘노무현의 삶과 참여정부 계승’을 목표로 창당한 국민참여당, ‘비국민참여당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다 끝내 진보신당을 탈당한 새진보통합연대가 이념과 역사의 차이를 무시하고 불과 수개월 만에 합당한 것은 진보정치-노동자정치의 진전이 아니라 역행임이 분명하다. 통진당 사태 이후 노동자 민중운동은 지배세력과 보수언론의 조롱거리로 전락하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했다. 통진당 사태는 전체 운동진영의 패배주의와 분열을 확대하고, 대선에서의 각개약진과 무기력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대선방침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민주노총의 지도력 붕괴 통진당 사태 이후 진보정당의 분화, 분열 속에서 영향력 있는 대선대응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세력은 민주노총이다. 민주노총은 4.11 총선에서 ‘1선거구 1후보 출마(진보진영 후보단일화), 반MB 반FTA 1:1구도 형성(무원칙한 야권연대)’ 방침과 함께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사회당을 진보정당으로 승인했다. 많은 내부적 반발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지역투표에서 진보신당 1곳(거제)을 제외하면 사실상 민주통합당과 통진당에 대한 일방적 지지를 관철하고, 비례대표 선거와 세액공제 관련하여 진보신당과 사회당에 대해 부문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민주노총은 총선 이후 통진당의 부정·부실 선거논란 과정에서도 내부의 강력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통진당에 대한 지지철회를 결정하지 못하다가 5월 통진당 중앙위원회 폭력사태 이후 통진당의 쇄신을 전제로 한 조건부 지지철회를 결정했다. 7월 통진당에서 이석기, 김재연 의원 제명 건이 부결되고 사실상 분당 사태에 이르러서야 통진당에 대한 지지철회를 공식 결정했다. 민주노총의 통진당에 대한 지지 철회 이후 통진당 지지세력, 통진당 탈당파 지지세력, 진보신당 지지세력, 사회주의정당 건설세력, 노동 중심의 새로운 진보정당·변혁정당 건설 세력 등 내부적 이견으로 정당과 후보에 대한 방침을 결정하기 어려운 세력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집행부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통진당 지지 세력들을 상대화하고 김영훈 위원장과 산별대표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노동자정치세력화를위한민주노총특별위원회’(이하 새정치특위)를 구성하여 2012년 대선에서 노동자 민중 독자후보 방침을 추진했다. 하지만 새정치특위의 ‘진보적 정권교체’를 중심과제로 하는 독자후보안은 통진당이나 통진당 탈당파의 야권연대를 통한 정권교체 입장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새정치 특위의 독자후보안은 이정희 대선후보 출마를 방침으로 확정한 통진당 세력과 그 비판 세력 양자의 입장을 절충하다가 결국 양자 모두에게 동의 받지 못하고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민주노총은 공언했던 8월 정치총파업이 무기력하게 마무리되면서 노조법 재개정 등 노동자들의 핵심 요구를 중심으로 한 대선시기 대중투쟁의 계획도, 대선후보 방침도 결정하지 못했다. 또한 국회 청문회를 계기로 쟁점화된 쌍용자동차 회계조작과 부당한 정리해고, 유성·KEC·SJM 등 주요 금속 사업장에 대한 자본의 노조파괴 시나리오 문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불법파견 문제 등 현안 투쟁을 대선시기 정치 쟁점화시키는 투쟁계획도 제출하지 못한 채 비정규직 참정권운동 등 대선시기 캠페인 수준의 계획만을 제출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의 안철수, 문재인 캠프행이 줄은 잇는 현상에서 알 수 있듯, 민주노총의 대선방침 부재 속에 일부 산별노조/연맹에서는 산별의 이해관계에 따라 노골적인 야권후보 지지흐름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자 민중 독자후보 추대운동의 각개 약진 9월 5일 민주노총 새정치특위의 노동자 민중 독자후보 추대 흐름과 발 맞춰 교수 3단체(전국교수노조,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학술단체협의회)와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을 중심으로 제 진보민중진영에 노동자민중후보추대를위한사회단체·인사연석회의(이하 독자후보연석회의)가 제안되었다. 초기 독자후보연석회의 제안서에서 담고 있는 ‘분열된 진보진영의 통합과 야권승리’라는 기조에 대해서 민주노총 새정치특위의 독자후보 입장과 마찬가지로 야권연대와 후보사퇴로 귀결될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대다수 좌파단위는 참가를 유보하거나 불참하게 된다. 이후 독자후보 연석회의는 내부적 논의를 거쳐 “연립정부와 야권연대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고, 후보는 완주를 원칙으로 하되 노동자 민중의 관점에서 주객관적 조건을 고려하여 최종 방침은 추후에 결정한다”는 것으로 입장을 좌선회하고 진보신당을 포함한 좌파단위들과 대선 공동대응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노동전선,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이하 사노위), 좌파노동자회, 노동자혁명정당건설추진모임(이하 노혁추) 등 좌파단위들은 독자 완주를 명확히 해야 한다며 독자후보 연석회의 참여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독자후보연석회의는 민주노총의 노동자 민중 독자후보안의 폐기와 좌파단위의 불참 속에서 독자후보 운동의 동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유명무실화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신당이 제안(민중 선거인단 경선을 통한 사회연대 대선후보 선출)한 대선공동대응을 위한 좌파단체 실무협의회가 9월 6일 첫 회의를 시작으로 진보신당, 노동전선, 좌파노동자회, 제안자모임, 전태일노동대학, 사노위, 사회진보연대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사노위는 9월 8일 총회를 통해 ‘투쟁하는 노동자·민중후보’를 무소속 후보로 내세우고 후보 사퇴 없이 완주한다는 18대 대선 방침을 만장일치로 결의했고, 변혁적현장실천·변혁적노동자계급정당건설을위한전국활동가모임(이하 변혁모임)을 통해 대선 독자후보 전술을 현실화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동전선은 사노위와 유사한 입장으로, 특정 정치세력의 후보를 다른 단위가 수용하기 어려우므로 정당이나 정치단체의 인사들이 아니라 투쟁하는 노동자 후보를 세워야 한다는 입장을 제출했다. 더불어 정당 건설 문제는 대선 대응과 분리해야 함을 강조했다. 좌파노동자회는 사퇴하지 않는 노동자민중 독자 후보 전술에 동의하고, 대선투쟁이 새로운 노동자정치세력화의 계기(진보좌파정당 건설)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이를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진보신당은 9월 8일 전국위원회를 통해 “노동자 민중의 독자후보에 동의하고, 신자유주의 연립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함께 노동자민중의 사회연대후보를 출마시키고, 완주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이를 위해 사회연대후보 1,000인 제안자를 모집해 사회연대후보 운동을 제안, 이후 5만 선거인단을 모집해 경선을 통해 사회연대후보를 선출한다”는 대선방침을 확정했다. 진보신당의 경우 독자후보연석회의의 노동자 민중 독자후보 방안이 진보신당 전국위 결정사항과 상당히 유사해 참여하지 않을 이유는 없으나, 우선 협의 대상인 좌파단위가 독자후보연석회의 참여 반대 의견이 강하기 때문에 9월 20일 대표단회의를 포함해 수차례 독자후보연석회의 참여 여부를 논의했으나 결정하지 못했다. 전태일노동대학은 대선 논의와 새로운 정당 건설 논의가 연계되어 진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대선과 후보 전술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는 것에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했다. 후보 전술을 먼저 논의하기보다는 이번 대선에서 제기되어야 할 핵심적인 요구가 무엇인지를 논의해야 한다는 취지 하에 후보 전술에 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후보 출마를 결정한다면 반대하지는 않으며 독자 완주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제안자모임은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인 대선대응의 필요성에 공감하나 현재 운동진영(특히 좌파 진영)이 후보 전술을 진행할 만큼의 역량이 되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독자후보 연석회의와 좌파단체 실무협의회가 함께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회진보연대는 기본적으로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대선대응에 공감하지만, 현 시기 제기되어야 할 핵심 요구와 운동전략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고, 만약 독자 대응을 한다고 하더라도 좌파운동의 역량을 고려할 때 민주노총을 포괄할 수 있는 계획(민주노총의 대선방침 변경 등)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독자후보 연석회의에 좌파단체 실무협의회의 참여와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제기했다. 이후 9월 20일 <야권연대 반대, 완주하는 노동자 민중 독자후보 가능성과 현실성에 대하여-2012년 대통령 선거 공동대응 제안 토론회>와 한 차례의 좌파단체 대표자회의를 거쳐 진보신당, 노동전선, 사노위, 노혁추, 좌파노동자회가 참여하는 ‘대선투쟁 공동기구 구성을 위한 기획단’(이하 좌파대선기획단)을 구성하게 된다. 사회진보연대, 제안자모임, 전태일노동대학은 강조점의 차이가 있으나,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에 대한 개입 없이 민주노총 외부에서 독자후보 운동을 벌일 경우 현장 노동자의 참여와 지원을 얻기 어렵고, 독자후보 운동의 결과가 너무 미약할 경우 민중운동의 패배주의를 강화할 우려가 있다는 입장이다. 또한 통진당의 이정희 후보, 심상정-노회찬-유시민의 새진보정당 추진위원회 후보 출마가 예상되는 가운데, 노동자 민중후보 추대와 독자 완주가 의미있는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세력결집이 필요하므로 독자후보 연석회의와 함께 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출했으나 다른 단위와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 좌파 대선 기획단에 불참하게 된다. 9월 27일 진보신당은 좌파대선기획단에 독자후보연석회의와 함께 제3지대에서 노동자민중의 독자후보경선조직위원회구성을위한원탁회의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지만 좌파대선기획단에 참가하는 다른 좌파단체들이 거부의사를 밝혔다. 이후 진보신당은 독자후보연석회의와의 공조를 사실상 포기하고 좌파대선기획단을 중심으로 대선대응을 논의하게 된다. 좌파 대선 기획단 내부에서 △적합한 후보(노동자민중진영을 상징할 수 있고 정책을 제대로 논쟁할 수 있는 후보 vs 투쟁하는 노동자 후보), △후보 선출 방식(대중적 선출 절차 vs 합의 추대), △후보 등록형식(정당 후보 vs 무소속 후보) 등 진보신당과 다른 참가단위 간에 상당한 이견이 존재했다. 하지만 10월 12일 좌파대선기획단은 △반자본주의·반신자유주의, 야권연대 반대, 완주하는 노동자민중 독자후보 △(주요 쟁점 중 하나였던)대선투쟁과 대선 이후 당 건설 문제는 분리 △10월 13일 열리는 변혁모임 전국활동가대회에서 대선방침이 결정되면, 그 결정을 최대한 존중 △(최대쟁점으로 부상했던) 임시(가설)정당을 통한 후보 등록방법과 후보선출 기구 구성을 통한 선출방법은 새롭게 구성되는 ‘대선공동기구’에서 논의하고 합의를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는 합의문을 도출했다. 최대 쟁점사항에 대해 합의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대선공동기구 구성에 합의하고 최대한 논의키로 결정한 것이다. 한편 10월 13일 변혁모임 전국활동가대회에는 4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노동자 대통령 후보 출마를 통한 대선투쟁을 결정하고, 김정우 쌍용자동차지부 지부장, 김소연 기륭전자분회 전 분회장, 이호동 전 발전노조위원장을 최종 후보군으로 제안했다. 또한 이후 공동선거투쟁본부가 구성되면 후보선출(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중적 추천 방식으로 선출하자고 제안했다. 변혁모임은 10월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야권연대가 아닌 독자적인 노동자대통령 후보를 내자며, 진보신당을 비롯한 각계각층에 노동자대통령 대선공동대응 회의를 제안했다. 진보신당은 10월 22일 대표단 회의를 통해 변혁모임이 제안한 대선공동대응기구 관련 마지막 협상 시한을 23일까지로 정하고, 후보 선출방식은 경선을 포함한 대중적 선출 방식으로, 후보 등록방식은 대선공동대응정당(임시정당)으로 하는 기본 방향으로 변혁 모임을 최대한 설득한다는 입장을 확정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진보신당과 변혁모임 간 핵심쟁점인 대중적 선출방식과 임시정당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10월 27일 진보신당 전국위원회에서 대선 독자후보 대응이 부결됨으로써 진보신당은 자신의 후보 출마를 통한 대선대응은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변혁모임은 진보신당과의 공동 대선대응이 불가능해졌지만, 김소연 기륭전자분회 전 분회장, 이호동 전 발전노조위원장 중 대선후보를 확정하여 대선투쟁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이다. 노동자 민중운동의 뚜렷한 노선분화 이로써 현재 출마를 확정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을 포함해 출마 예정인 변혁모임의 후보 등 전통적인 노동자 민중운동진영 출신의 후보가 여럿 대선에 출마한다. 1987년 NL 세력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 다수파의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PD 세력을 중심으로 한 백기완 민중후보 출마 및 중도 사퇴, 1992년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백기완 민중후보 출마와 완주, 1997년 국민승리 21 권영길 후보 출마와 완주(김대중 당선을 위한 비판적 지지흐름이 국민승리 21 내외부에 존재), 2002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출마와 완주(노무현 당선을 위한 비판적 지지 흐름이 민주노동당 내외부에 존재) 및 사회당 김영규 후보 출마 완주, 2007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출마와 완주 및 사회당 금민 후보 출마 완주 등 이전 시기와 비교해보면,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이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그 노선적 분화도 뚜렷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수 후보의 출마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 내부, 좁게 보아도 자민통진영 혹은 좌파진영 내부의 이념적·정책적 합의와 동의지반 속에서 출마하는 후보는 없다. 경기동부를 핵심으로 하는 통진당 세력은 현재 노동자 민중운동의 갈등과 무기력을 초래한 데에 핵심적인 책임이 있는 세력이며, 통진당 사태를 겪으면서 노동자 민중운동 전체에게 정치적,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진보정의당은 진보신당 출신의 심상정 후보가 대선후보로 출마하긴 했으나, 당내 주요 기반은 국참당 세력으로 자신의 계급적 기반이 부재하여 ‘국민정치를 표방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로 급격히 경도되고 있다. 통진당, 진정당 양자 공히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과정에 참여해 정권교체와 연립정부 수립(권력에의 지분참여)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의 일각으로 볼 수 없다는 비판적인 입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변혁모임의 대선 독자후보 운동 또한 좌파운동 내부의 이념적, 정책적 합의와 동의지반 위에서 진행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진보정당 운동의 급속한 우경화와 분열, 민주노조 운동의 무원칙한 야권연대를 둘러싼 갈등과 무기력으로 노동자 민중운동의 존재감마저 사라지고 있는 현재 상황은 그 간 노동자 민중운동이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맞서 제대로 된 현실인식과 이념적 지향, 운동 전략과 실천기획을 갖추지 못했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치 불신의 심화, 정당정치의 중도지향성 강화, 진보정당의 선거-의회주의 진보정당운동의 선거주의-의회주의화, 조급한 집권전략에 기반한 우경화 경향을 강화해온 역사적 과정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한국사회의 변화, 이 속에서 발생한 정당정치의 위기와 정치 불신의 심화 과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정치위기라는 정세가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의 이념과 운동 전략을 집어삼키고 있다. 한국사회는 1997년과 2007년 두 번의 경제위기라는 충격과 장기불황을 경험하는 가운데 누가 대통령인지, 누가 국회 다수석을 차지하는지와 무관하게, 금융세계화에 편입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관철되어왔다. 금융시장 개방과 이에 동반하는 국내 제도 규제완화, 수출재벌 중심의 FTA 추진, 노동유연화, 한미동맹의 현대화 등 사실상의 보수-자유주의 간에 정책이 수렴되는 상황에서 국회는 거수기화 되지만 오히려 정당 간, 정치인 간 이전투구는 더욱 극심해졌다. 그 결과 국회는 민생문제에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곳으로 상징되고, 정당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냉소가 더욱 심화되었다. 지배계급들은 경제위기에 대한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지속하면서도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부작용, 대중들의 불만을 완화하는 것이 공동의 과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새누리당의 ‘좌클릭’으로 표현되듯 각 정당 복지정책도 일정하게 수렴하고 있다. 여전히 각 정당의 지역적 지지기반은 중요하지만, 점차 중도지향성을 내세운 포괄적 호소가 선거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또한 유동적 중도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적인 전략으로 부상함에 따라 각 정당은 정당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냉소를 불식시키기 위해 선거전문가를 영입하고, 새로운 선거기법을 도입하며, 정치권 바깥으로부터의 참신한 인물을 후보로 영입하려는 경향을 강화해왔다. 최근 안철수 현상은 이러한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을 매개로, 여론조사기관과 언론매체의 의도된 여론화 기획 속에서 노무현과 이명박 사이에서 대중들이 찾아낸 화해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안철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서민의 친구이면서도 노무현과 달리 경제적으로 무능하지 않은 인물로 보인다. 또 그는 반칙 없이 성공한 경제인으로, 특권층과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며 공정성을 잃어버린 이명박과도 대비된다. 즉, 그런 점에서 안철수는 유능한 노무현이자 착한 이명박이다. 안철수 지지층의 상당수는 문재인보다 박근혜를 더 지지하는 중도보수층으로 분류되는데, 안철수 후보가 과거 노무현, 이명박에 투표했던 유동적 중도층을 모두 끌어들일 수 있는 득표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정당의 중도지향성 강화는 여전히 경제위기에 대한 대안이 없고 이념적, 계급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휘발성 높은 유동적 중도층의 지지를 아주 잠시 동안 묶어두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는 없다. 결국 대중의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여러 선거기법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당의 이념적 지향성과 당원의 요구보다는 당 바깥의 여론조사 결과가 가지는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당 바깥의 인물 영입이 당의 생존에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됨에 따라 정당의 존립기반 자체도 매우 취약해진다. 최근 통진당 사태로 드러난 진보정당운동의 붕괴 또한 정당정치의 중도지향성 강화와 밀접히 관련된다.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상징했던 2004년 총선 사례는 진보정당이 직면한 잠재적 갈등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당시 민주노동당을 선택한 (비례)정당투표자들의 특성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이 얻은 10석은 이념적 동질성이 강한 당원이나 적극적 지지자들의 표에 의해서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노조 조합원과 그 가족들의 경우 다른 집단에 비해 민주노동당 지지 비율이 높게 나타났지만, 전체 득표에서 조합원과 그 가족의 표가 차지한 비중은 매우 낮았다.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계층적으로는 고학력, 화이트칼라 등 중산층이었고, 이념적으로도 열린우리당 지지층과 구분되지 않는 유동적 중도층이었다. 이들은 탄핵정국 전후로 정당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들이었고, 그 실망감을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당투표로 반사적으로 표현했다. 민주노동당은 이념적 동질성이 강한 당원 및 적극적 지지자와 유동적 중도층의 이원적 지지구조에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4년 이후 민주노동당이 의회주의, 선거주의를 점차 강화하게 된 것은, 결국 유동적 중도층을 중심으로 당의 노선과 운영이 변모해갔다는 점을 의미한다. 의회주의와 집권전략을 노선으로 채택한 민주노동당 내 주류 세력이 이 변모를 주도해나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류 세력의 우경화한 집권전략과 좌파세력의 무능, 고립주의 오늘날 노동자 민중운동의 이념, 정체성의 해체와 분화, 민주노조 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이 동시적 위기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위기와 정치위기라는 객관적 상황에 대한 분석과 동시에 운동위기에 대한 분석, 다시말해 운동주체들의 노선과 실천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 진보정당의 수권정당·통치정당화와 자민통 그룹 다수파의 ‘우경화된 집권전략’ 세계 경제위기와 정치위기 정세 하에서 정당의 중도화 경향이 강화되고, 민주노조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의 침체를 배경으로 진보정당의 의회주의, 선거주의 경향이 심화되면서 수권정당·통치정당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수권정당·통치정당화’란 진보정당/노동자정당이 체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변혁적 운동전략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당면 집권을 핵심 목표로 제도적 틀 안에서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진보정당의 수권정당·통치정당화가 강화되는 이유는 주체적인 측면에서 첫째, 진보정당의 지지기반이 되는 대중운동의 침체와 무기력이다. 쉽게 말해 이미 무기력해진 민주노총, 전농 등 대중조직에만 의지해서는 표가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이명박 정권의 집권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 사회제도적 타협노선을 견지하고 각종 정부기구에 참여했거나 정부지원을 받았던 주류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일부 세력 입장에서는 자기 생존을 위한 정권교체에 사활적 이해가 걸려 있다. 셋째, 정치계급의 독자화 경향이다. 정치계급의 독자화는 정당 활동을 하는 정치인 및 활동가들이 당직과 공직을 매개로 개별적인 이해관계를 형성하면서 조직의 운동노선이나 대중운동의 전략적 이해보다도 정당 내부에서의 권력, 지분 보전 혹은 의회 진출을 위한 자신의 이해를 우선하게 되는 경향을 말한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 10석 당선 이후 이러한 경향이 민주노동당 내에서 꾸준히 강화되어왔다. 정치계급의 독자화는 선거주의, 의회주의 경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선거주의, 의회주의가 강화되면 정당의 운동적 활동은 감소하고 제도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당 활동가들의 운동도 선거홍보와 의정활동 지원을 중심으로 축소된다. 정당이 선거에 관해 부르주아와 똑같은 기법을 사용하고(스타 정치인에 의존하거나 심지어 이들에 대한 개인숭배를 자극), 당의 재정과 활동이 정부기구, 의회, 지방정부, 선거위원회에서 활동하는 간부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향이 강화되는 것이다. 노회찬, 심상정 의원 등 진보신당을 탈당하고 통합진보당에 합류한 흐름을 포함하여 이념·노선 없이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노동운동 출신의 명망가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넷째, 진보정당운동과 민주노조운동의 다수파인 자민통 그룹 다수파의 ‘우경화된 집권전략’이 수권정당·통치정당화의 직접적인 추동력이 되었다. 민주노조 운동과 진보정당 운동 양자가 급속한 우경화와 분열, 무기력에 처한 데에는 양자 모두에서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는 자민통 그룹 다수파의 노선전환이 크게 작용했다. 한국진보연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전국연합은 2001년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9월 테제)을 통해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이하여 광범위한 민족민주정당, 민족민주전선을 통해 10년 후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연방통일조국을 완성하기 위한 비상한 태세를 갖추자”는 방침을 결정했다. 이후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전농 등 진보정당과 주요 대중조직의 지도부를 장악한 자민통 그룹은 이러한 정치적 구상을 구체화 해왔다. 이들은 민주노동당을 광범위한 민족민주정당으로 전환하여 자주적 민주정부의 초석을 다진다는 계획을 중심으로 2007년 노동자 민중운동 좌우세력이 함께 참여하고 있던 상설연대투쟁체인 전국민중연대를 해산(참가단체의 반발로 공식회의기구에서 해산 결정도 하지 못했다)하고 자민통 그룹 중심으로 한국진보연대를 출범시켜 민중연대 투쟁전선을 정파적 이해로 재편했다. 또한 민주노총 내부에서 조합원의 정치적 주체화와 투쟁력 강화는 상대화하고 노조의 양적 조직화와 안정적 관리를 통한 민주노동당 당원 확대에 활동의 방점을 찍었다. 자민통 그룹 다수파의 경우 노동운동 내부에서 노동자들의 실리적, 경제적 이해만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합의주의, 코포러티즘적 경향을 형성해왔다. 최근에는 정당에서의 ‘우경화된 집권전략’에 발맞춰 ‘집권시대 노동운동 노선’(전국회의)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집권전략 노선의 진보정당 운동에 노조를 동원하는 노선이다.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을 운동주체로 세우기보다는 실리적 이해에 기반을 둔 노조의 양적 조직화와 조직관리, 그리고 당원 가입에 치중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에 있어서도 종파적 활동으로 인해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자민통 다수파 그룹은 2007년 대선을 전후로 민주노동당 당권을 독점하려고 무리수를 두다가 2008년 분당사태를 초래했다. 이후 이들은 ‘자주적 민주정부론’과 ‘진보·개혁 세력 대표주자 교체론’을 한 단계 발전시켜 집권으로 상징되는 주류화 전략을 전면화하였다. 그 결과 2010년부터 반MB 선거연합, 야권과의 연립정부 수립 전술을 공론화하고, 2011년에는 민주노동당 강령을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로 교체했다. 2012년 진보적 정권교체와 연립정부 수립이라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운동진영 내부의 많은 비판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세력인 국참당과의 통합을 밀어붙였다. 이들은 4.11 총선에서 통진당 내 정파 간 무리한 국회의원 의석 경쟁으로 인해 부실·부정선거와 중앙위 폭력사태까지 유발하면서 노동자 민중운동의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을 훼손하고, 노동자 민중운동의 분열과 무기력화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좌파세력의 무능과 고립주의 현재 노동자 민중운동의 급속한 우경화와 무기력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이 운동 다수파의 잘못된 노선에 기인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류적 흐름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좌파세력 또한 자신의 활동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 주류 세력의 잘못된 노선이 운동을 주도하는 것을 견제하지 못하고, 좌파 스스로 다수파로서 대안적 운동을 형성하지도 못했던 한계와 무능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는다면, 좌파세력은 앞으로도 운동을 주도하지 못한 채 소수 비판세력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세력은 특정한 이념과 강령,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운동전략, 대중운동노선, 투쟁기획 능력과 실천기풍 등 다양한 요소의 결합을 통해 현실운동을 전개한다. 사회주의적 이념을 주장하는 세력 내부에서도 그 이해와 운동전략이 상이할 수 있고, 훌륭한 이념을 갖고 있어도 운동전략의 부재 혹은 잘못된 운동전략으로 현실운동에서 무기력하거나 고립될 수 있다. 또한 정치적 입장이 올바르다 하더라도 대중운동노선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면 대중조직의 단결과 강화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 대중들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당위적 입장을 관철하려 한다면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대중조직 내부의 갈등을 확대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좌파라는 개념에 대해 각 세력이나 개인 별로 이해의 편차가 있으나, 그것은 정치적 이념이나 운동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우파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다. 흔히 좌파라고 하면 노동자 민중운동 내부의 좌파를 일컫는다. 한국사회에서 좌파라는 명명은 노동운동의 투쟁파, 현장파와 정치이념적으로 사회주의 세력, 넓게는 사민주의 경향까지를 포괄하여 사용되고 있다. 우선 좌파세력은 폭력과 야만으로 점철된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와 모순을 변혁하겠다는 정치적 방향성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체제 내적 개혁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한 현실의 운동에 있어 민주노총의 사회적 영향력과 투쟁역량이 축소되는 상황에서도 최근 발생하고 있는 주요 노동자 투쟁들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향후 대안적 운동의 재건을 위한 중요한 정치세력이다. 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정당성과 투쟁의 헌신성이라는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운동에서 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보이는 것 또한 명백하다. 다수 좌파 세력들은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을 자신의 정치적, 조직적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다. 현재 사노위로 대표되는 당 건설 노선은 최대강령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주의 정파 통합 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노위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사노준)과 사회주의노동자연합(노동해방연대, 사회주의정치연합, 당건투, 울산노동자신문 등이 참여)이 공동논의를 통해 건설했으나, 사노위 건설과정에서 사노준과의 이견으로 사노련에 참여하고 있는 사회주의정치연합, 당건투만이 사노위 건설에 참여했다. 사노준 또한 사노위 건설과정에서 일부가 이탈했다. 이후 사노위 강령논쟁 과정에서 발생한 이견으로 사회주의정치연합, 당건투 일부 세력, 기존 사노준 일부 세력이 또 다시 이탈했다. 이처럼 이념과 활동기풍이 상이한 정파들의 최대강령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한 당 통합 노선은 입장의 차이에 따라 다수파에 승복하지 못하는 소수파의 이탈과 조직 갈등을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의 당 노선은 제도정치에 대한 근본적 부정은 아니더라도 적극적인 사고가 부재하고, 선거개입을 하더라도 정당 등록에 대해서도 상당수가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의 분당 국면이나 진보대통합 및 민주노동당과 국참당의 통합국면, 2012년 대선국면 등 진보정당의 위기와 재편 국면마다 진보정당의 의회주의, 선거주의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하지만, 좌파적 정치개입이 필요한 정세에서 외부자적 비판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렵다. 한편, 1990년대 좌파운동이 전국노동단체연합이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와 같이 노조운동에 이론적, 정책적 지원을 하는 역량들을 갖추고 있었다면, 노동자의힘, 사노준, 사노위를 거치면서 이러한 역량들은 당 건설 역량으로 흡수되거나 유실되었다. 노조운동 활동가 재생산과 대중투쟁의 기획은 당의 정치방침만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당이 목적의식적으로 노조운동을 강화하기 위한 역량을 키우고 배치하지 않는다면 당은 대중운동에 프락션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이마저도 대중운동의 토대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 아닌가!) 현재 추진되고 있는 변혁적 노동자계급정당 건설 역시 현장의 취약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기획이 함께 준비되지 않는다면 현장 기반 없는 고립주의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조합 노선과 관련해서 다수 좌파 세력들은 노조운동의 상층은 관료적이고, 평조합원은 혁명적이라는 부당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노조운동의 지도부 선출의 중요성을 간과함으로써 노조운동의 큰 방향에 전혀 개입력을 갖지 못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노조의 투쟁과정에서 노조 지도부가 자신들의 입장과 다르게 움직이면 자신의 당위적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조합원들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지도부에 대한 비판을 강력히 제기함으로써 조합원 간 갈등이 확대되기도 한다. 헌신적 투쟁으로 끝까지 투쟁하는 조합원을 자신의 조직원으로 조직화하지만, 노조의 단결과 조직적 토대를 유실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곤 한다. 이러한 현상은 노선의 문제로 기인하는 측면도 있으나, 소수 세력으로서 노조운동에 대한 경험과 실력의 부재로 인한 측면도 크다.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일각의 좌파세력들은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업장에서 투쟁이 발생할 경우 노동조합의 공식체계를 상대화하고, 자신의 입장대로 투쟁을 이끌어 가는 경향이 존재한다. 정치세력이 직간접적으로 사업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겠지만, 노조의 공식체계를 무시하고 정파적인 운영을 할 경우 노조운동 내부의 갈등과 반복이 발생하고, 다른 정파 혹은 노조 상급단체의 적극적인 투쟁결합을 가로막아 해당 사업장의 투쟁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 변혁을 주장하고 조합원의 정치적 주체화를 주장하는 좌파 세력이 노조의 현장 사업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 최근 정권과 자본의 주요 금속사업장에 대한 파업유도, 직장폐쇄, 용역깡패 투입, 어용노조 설립을 통한 민주노조파괴 공세 국면에서 좌파 세력의 사업장들은 어떤 내부적 준비와 대응을 했는지 스스로에 대한 진단과 향후 계획이 필요하다. 다른 한편, 좌파운동은 운동기풍 상으로 소수파적인 기질이 강하다. 자신의 입장과 다르면 입장이 다른 정치세력과 공조와 협력을 형성하는데 취약하며, 입장이 일치하는 세력끼리 일을 추진하는 데 익숙하다. 이러한 기풍은 중요한 정세적 투쟁에 있어서도 운동진영 전체의 역량을 결집시키는 데 제약조건으로 작용한다. 또한 민주노총의 각급 단위 선거에서도 정세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세력연합 혹은 헤게모니적 정치가 필요한데, 이런 측면에 대해 상당히 배타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2012년 총선, 대선을 책임지는 지난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도 성폭행 사건과 비리로 얼룩져 사퇴한 전국회의 세력이 또 다시 집권하고, 현재의 통진당 사태까지 치닫게 된 데에는 좌파 세력의 세력연합에 대한 경직된 태도도 중요한 책임이 있다. 오늘날 통진당 사태와 노동자 민중운동의 정체성 해체, 민주노총의 지도력 붕괴라는 상황으로 치닫기까지 2012년 총선, 대선국면을 앞두고 좌파 세력의 정세적 개입이 필요한 몇 번의 국면이 있었으나, 각 세력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정세에 대한 유의미한 개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 번째 국면은 2011년 진보정치대통합과새로운진보정당건설을위한진보진영대표자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 국면이다. 이 국면에서 좌파 세력들이 진보정당 전반을 의회주의, 개량주의로 비판하며 사회주의를 강변하는 경직된 태도를 버리고 새로운 진보정당의 성격을 사회주의적 지향으로 바꾸어내기 위한 좌파 공조를 실현하여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면 진보신당 내 좌우파의 극렬한 갈등과 대립을 완화시키면서 국참당과의 통합까지 치닫는 사태를 방어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국면은 진보신당에서 연석회의 합의문이 부결되고, 민주노동당 당권파가 국참당과의 통합을 밀어붙이는 국면이다. 민주노총 내부에서 국참당과의 통합에 반발하는 조직적 흐름이 형성되었을 때, 좌파 세력 전반이 현장으로부터 이 운동을 조직했다면 국참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민주노총 및 민주노동당 내부의 흐름에 힘이 실리고, 국참당 통합을 주도하던 세력에게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국참당과의 통합을 저지하지 못했더라도 이후 민주노총의 통진당 지지입장을 막아내는 데 새로운 지형을 형성했을 수 있다. 하지만 주요한 좌파 세력들은 국참당과의 통합에 반대하지만,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으로 성과가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 자신들의 전략인 사회주의정당 건설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 때문에 전체 운동지형에 정세적 개입을 시도하지 않았다. 세 번째 국면은 통진당 출범 이후 3자통합당배타적지지반대,새로운노동자계급정치실현을위한민주노총조합원선언운동본부>(이하 선언운동본부) 활동이 이루어지던 국면이다.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 및 현장활동가 1천인 선언을 필두로 조합원 선언운동까지 좌파 세력 전반이 함께 참여하여 공동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선언운동본부는 초기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방침에 대한 이견, 각 세력의 새로운 노동자 계급정치의 상, 즉 정당 건설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유야무야 되었다. 일정한 당 노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선대응까지 염두에 두면서 당 건설 논의(각 세력의 역량을 고려할 때 범좌파 차원의 통합정당 건설)와 민주노총 내부의 선거방침, 민주노총 혁신방안 논의를 일정하게 분리하고, 민주노총 내 혁신세력군의 합력을 창출했다면 통진당 사태 국면이나 대선 국면에서 다른 기획이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네 번째 총선을 앞둔 국면에서 진보신당의 제안으로 열린 좌파단체 총선 공동대응 국면이다. 총선 국면에서의 공동대응 여부가 대선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 하에, 다른 좌파 세력들은 후보 출마를 하지 않더라도 정치적, 정책적 입장에 대한 공동논의와 합의를 통해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공동대응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총선에서 진보신당의 야권연대 문제가 주요한 쟁점이 되었다. 사노위와 노동전선의 경우 진보신당 중앙당이 야권연대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지만, 정작 당선 가능성이 있는 거제에서 야권연대를 추진한다면 진보신당 전체가 야권연대를 추진하는 것으로 상징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진보신당이 거제의 당선 가능성에 목매지 않고 다른 좌파 세력의 요구를 수용해서 정치적 결단을 내렸거나, 다른 좌파 세력들이 진보신당의 특수한 당내 상황을 인정하면서 총선 공동대응 기조를 살렸더라면 이후의 대선국면에서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다섯 번째, 대선대응 국면에서의 논의이다. 이번 대선투쟁의 목표가 통진당, 진정당의 야권단일화를 통한 연립정부와 대별되는 노동자 민중의 독자후보라면 큰 틀에서의 정치적, 정책적 기조와 함께 그에 걸맞는 세력결집이 필요하다. 가뜩이나 통진당 사태 이후 현장에서 정당운동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당위론만을 내세운 무기력한 선거대응은 또 다른 패배주의와 사기저하를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독자후보연석회의에 좌파 세력의 집단적 개입을 통한 견인전략과 민주노총 내 반통진당 세력의 연합전선 구축과 같은 정치적인 세력연합 기획이 필요했다. 이러한 전략이 어렵다면, 최소한 대선 이후 운동재편을 염두에 둔 이념노선과 정책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대선투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변혁모임의 대선 독자후보 계획은 사실상 후보출마라는 형식을 제외하면 대선시기 투쟁계획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대선국면에서 지배세력과 한국사회의 전망을 논쟁할 이념적, 정책적 준비와 합의도 부재하고, 노동자 계급정당의 상과 활동기획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준비, 지역조직의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마치 투쟁체를 건설하는 것처럼 조급하게 대선 대응 기구 건설을 추진하는 것은 주관적 의지의 과잉이다. 진보정당 운동을 책임져 왔던 세력들이 대중운동, 사회운동의 강화 없이 선거주의, 의회주의로 경도된 자기운동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 없다면 대안적 운동을 재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정당, 노동자 계급정당운동을 주장해온 좌파 세력들도 강령논쟁을 넘어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지 못한 자기 활동에 대해 진지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 동안 자신이 가져왔던 운동전략과 대중운동 노선, 실천기풍 전반에 대한 성찰 없이는 좌파 세력은 대중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고립될 것이며,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대안적 운동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점점 축소될 것이다. 2013년 이후 노동자 민중운동의 질서재편을 준비하자!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통진당 사태 이후 진보정당의 급속한 우경화와 분열이라는 상황은 민주노조운동 내·외부 각 정파들의 정치적, 조직적 프로그램이 대부분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지 못하고 한계에 봉착한 좌파 세력들의 사회주의정당, 노동자 계급정당운동 건설 프로그램도 예외가 아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통진당의 창당은 전통적인 노동자 민중운동의 정체성을 해체하고 노선적으로 뚜렷하게 분화하는 변환점이 되었으며, 자민통 그룹을 포함하여 전통적인 정파 내부의 분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후 혼란과 무기력에 빠져 있는 노동자 민중운동을 다시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 진행된 민주노조 운동의 전략, 진보정당 및 노동자정당운동과 민중연대투쟁 전선운동 전반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통한 질서재편이 불가피하다. 민주노총의 재정비와 노조운동 강화를 위한 활동가질서 재구축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2010-11년 노동조합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타임오프) 제도 도입과 창구단일화를 전제로 한 복수노조 도입 국면에서 총노동 투쟁전선을 구축하지 못함으로써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막론하고 단협해지 공세, 사측이 주도하는 직장폐쇄와 용역깡패를 동원한 복수노조 설립 및 민주노조 파괴 공작 등 정권과 자본의 가혹한 노조탄압에 각개 격파 당하는 상황으로 내몰려 왔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된 것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핵심 산별과 함께 노조탄압 분쇄와 노조법 재개정을 위한 대정부, 대자본 투쟁전선을 구축하기보다는 야당과 시민운동 상층에 의존하여 ‘반MB 야권연대’를 통한 제도적 환경개선에만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노동자 민중운동의 정체성을 해체하는 통진당 창당에 대한 지원과 방조, 민주통합당의 동원부대를 자임했음에도 여권의 선거승리로 귀결된 4.11 총선, 통진당 사태로 인한 내부 갈등과 정파적 노선분화로 인한 민주노총의 정치적 무기력, 여기에 직선제 시행을 둘러싼 내부 갈등까지 겹쳐져 민주노총은 사실상 지도력이 붕괴되고 난파위기에 처해 있다. 일각에서는 정리해고와 민주노조 파괴 등 정권과 자본의 공세에 무기력한 민주노총의 현실에 분노하며 좌파노총, 제3노총을 건설하자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분할은 그 자체로 노동자 단결의 규모를 축소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현재 시점에서는 좌파노총, 제 3노총의 실질적 동력조차 부재하다. 좌파노총과 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최소한 좌파 세력이 주도하는 산별 혹은 사업장의 투쟁과 우파 세력이 주도하는 사업장의 투쟁이 현저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특히나 현재와 같이 정권과 자본의 복수노조를 이용한 민주노조 탄압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의 분할은 현장의 민주노조의 투쟁력조차 약화시키기 때문에 현장 조합원들로부터 동의받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노총 내부에 역동적인 투쟁동력과 혁신의 조직적 기반이 충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일부 규모가 큰 산별들이 투쟁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라면 공세적 조직화를 위해 민주노총의 분할을 사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는 이러한 조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민주노총의 전면적인 혁신을 기치로 현장의 투쟁동력을 형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현재 민주노총을 재정비하고 혁신하기 위해서는 직선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고, 민주노총의 차기 지도부를 제대로 세워내는 것이 중요하다. 직선제 시행을 둘러싼 논란을 지속할 경우 민주노총이 새로운 정권에 맞서는 투쟁태세조차 갖추지 못한 채 표류할 우려가 크다. 잘못된 선거방침과 통진당 출범을 지원·방조하여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파국으로 내몰고, 민주노총의 내부 갈등을 심화시킨 현 김영훈-전국회의 집행부에 대한 책임을 묻고, 민주노총의 혁신방안에 대한 합의를 바탕으로 투쟁의 원칙과 경험이 있는 통합적인 지도부를 구성해 내야 한다. 현 시점에서 각 정파 간 정당 건설에 대한 이견이 뚜렷한 상황에서 정당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를 만들어 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원칙 있는 통합지도부를 세우지 못한다면, 현 정파 간 세력구도 하에서 어떤 지도부가 들어서더라도 공식 의결-집행체계에서 안정적인 사업집행을 담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노총이 대정권, 대자본 투쟁에서 있어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 현장과 지역에서부터의 혁신 노력도 제대로 된 성과를 만들어 내는 데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이와 동시에 현장과 지역, 산별에서 투쟁전선을 구축하고, 활동가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현장 활동가들의 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존 정파별 구도를 넘어 무너진 현장을 복원하고, 민주노조 운동을 강화하는 데 동의하는 활동가들이 지역, 산업별로 새롭게 결집해야 한다. 현 정세는 정파 및 의견그룹들이 기존의 관성화된 노동조합 활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혁신하지 않고서는 노조운동의 어떠한 진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전국적인 투쟁전선을 세우기 위해서도 향후 경제위기 하에서 정권과 자본의 전략을 정확히 분석하고 각 산업 및 사업장, 각 지역별 대응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 최근 SJM 투쟁 승리는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2011년 지역총파업 조직화의 성과를 바탕으로, SJM 자본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투쟁전략 마련, 조합원 사전 교육을 통한 조직화와 신뢰의 구축, 지부 전 조직력을 동원한 투쟁 지원 등을 통해 가능했다. SJM 투쟁을 발판으로 유성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러한 투쟁 경험을 전국화시켜야 한다. 현 정세는 경제상황에 따른 자본의 의도를 신속하게 분석하고, 원하청 공동투쟁, 계열사 공동투쟁 등 자본의 전략을 깨기 위한 노조의 공세적 전략이 없을 경우 만도지부를 비롯한 구 한라계열사 노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자본의 탄압에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정세이다. 그 동안 민주노조운동의 현장기반과 투쟁력이 약화되면서 노조운동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한 각 정파의 역량 또한 심각하게 축소되었다. 각 정파의 역할이 벌어진 투쟁에 연대하거나 선거에 개입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따라서 일정한 정치적 입장 차이가 존재하더라도 각 산업, 지역 차원에서 노조운동의 경험과 역량이 있는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노조운동을 혁신하고 강화하기 위한 활동가질서 재구축이 반드시 필요하다. 반신자유주의 정치, 사회운동의 공조질서 구축과 합의된 전국투쟁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의 공동 모색 통진당 출범 이후 전통적인 노동자 민중운동의 정체성이 해체되고 노선적 분할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반신자유주의(반자본주의)적 지향을 가진 정치·사회운동의 공조질서를 구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재와 같이 당 건설 노선이 분화되고, 각각의 역량이 취약한 조건에서 2013년 영향력 있는 당 건설로 나아가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각 정파, 세력 별로 취약한 영향력을 보완하고 각 지역, 부분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향후 닥쳐올 경제위기와 새로운 정권 하에서의 운동전략에 대한 토론과 공동실천을 위해서 조직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당 건설의 토대 재구축, 당 건설의 상과 건설 경로 등은 당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단위들이 공동논의를 진행하고, 그 성과를 정치·사회운동 연합이라는 공조질서 내부에서도 함께 논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노동자 민중운동의 상설적인 연대체인 민중의힘에 대한 판단의 문제가 존재한다. 민중의힘은 2011년 건설과정에서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연합 논쟁, 2012년 통진당 출범 이후 통진당의 민중의힘 참가 문제 등으로 크게 내부 갈등을 겪었다. 사업집행과 현안투쟁 과정에서도 자민통 그룹 중심의 사무처가 민중의힘 내부적 합의에 근거한 사업보다는 시민운동, 야당과의 상층 중심 사업계획 중심의 외부 연대체를 구성하여 민중의힘에 제안하는 방식의 사업작풍, 주요 노동 투쟁에 대한 소극적 참여 등으로 좌파 세력들의 경우 현재 민중의힘에 거의 결합하지 않는 상황이다. 향후 민주노총 집행부가 바뀌고 민중의힘을 재정비한다 하더라도 통진당이나 진정당의 가입 문제 등으로 인해 민중의힘 내부 갈등 요소가 여전히 크다. 하지만 정세적으로 중요한 대중투쟁을 엄호, 지원하기 위해서도 민중의힘과 같이 제 세력이 함께하는 단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민중의힘은 당분간 현행 특정 정파 중심의 사무처 구성을 재편하여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고, 전체 운동의 소통창구로서 민중대회와 같이 제 세력이 참가하는 전국적인 투쟁을 중심으로, 전체 운동이 합의할 수 있는 내용으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현안들은 사안별 투쟁기구 등을 통해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을 앞두고 있는 객관적 정세는 매우 엄혹하다. 한편으로는 세계 경제위기의 심화가 예고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노조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이 존망의 기로에 처해 있다. 각 정치세력 내부의 진지한 자기평가와 혁신의 노력, 상호 공조를 위한 적극적인 모색이 절실한 때이다.
‘독재자의 딸 박근혜만은 안된다.’ 이것이 18대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너르게 공유하는 정서일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가 516 쿠데타에 대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언급하고,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두 개의 판결 운운한 일은 ‘독재자의 딸 박근혜’라는 규정이 근거없는 낙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다. 이는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이를 통한 야권의 승리에 대한 절박함으로 연결된다. 역사 평가가 곧 오늘에 대한 분석이고, 이는 미래의 구상에 연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 논쟁을 박근혜의 말처럼 “국민의 삶을 챙길 일도 많은데 계속 역사 논쟁을 하느냐”는 식으로 취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이 역사 평가에서 박정희 시대의 복권이라는 의미를 부여받을 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를 박정희와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정당한 것일까? 불과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은 박정희 시대의 고도성장에 대한 희구와 경제대통령이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합치시키며 당선되었다. 1997년 위기 이후 장기 불황 속에서 노무현 정부 3년차인 2005년 국회운영위원회가 실시한 국민의식조사에서 응답자의 84.6%는 민주주의보다 경제발전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러한 여론을 반영하여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는 경제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압도적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민주화’ 담론을 ‘선진화’ 담론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정희의 정치적 복권은 17대 대선에서 이미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 이명박은 독재자로 비판당하고 있고 박근혜는 여론에 떠밀려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과거사를 둘러싼 역사 평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여야의 대립구도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최근 과거사 논란을 보면 한국의 정치지형이 민주-반민주 세력 간 대립으로 회귀한 것처럼 보인다. 야권은 이러한 대립구도를 강화하여 박근혜의 낙선과 야권 승리를 민주주의의 승리인 것처럼 호도하고, 박정희 시대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야권승리에 대한 염원을 등치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반민주 대립 구도는 야권이 과거사 논란을 통해 얻고자 하는 효과이지 오늘날 남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우선 박정희 시대 평가를 둘러싼 학계의 논의를 검토하면서, 정치이념이자 경제정책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반공·발전주의가 남한의 현대화와 동전의 양면이었음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또한 최근 진보 학계의 주류적인 논의와 거리를 두면서 과거사 공방을 통해 야권이 얻고자 하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분석한다. 끝으로 야권이 과거사와 같은 쟁점을 통해 자신의 역사적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반복적인 시도를 이들에게 고유한 인민주의적 행태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며, 독재심판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되어온 후보단일화 논리를 비판한다. 경제강국을 이룬 대통령이라는 강고한 신화 박정희는 경제발전을 이룬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독재라는 점에서는 문제가 있었지만, 경제발전을 이룬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2000년대 들어 대중적으로 확산된다.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이 독재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요구했던 세력의 집권기에 시행되면서, 이로 인한 불만이 ‘민주화 피로증’으로, 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이어졌다. 진보세력은 이에 대해 ‘그래도 민주주의는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 외에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보수 학자들은 이러한 대중의 여론에 힘입어 민주화 세력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다. 아예 박정희 정권의 반민중성을 부정하면서 1970년대의 경제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이영훈은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가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의한 희생, 농민들의 저곡가에 의한 희생, 대기업에 의한 중소기업의 희생 위에서 성장했다는 전제는 허구라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노동자가 생산에 기여한 만큼 임금이 착실히 상승했고, 농업은 공업과 달리 국제시장으로부터 보호되었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계열 관계는 1980년대 이후 높은 수준으로 발달했다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소득분배는 1997년 이전 30년간 양호했으며, 소득분배가 악화되는 것은 1997년 경제 위기 이후의 일이라는 것이 그 논거다. 이러한 보수의 공격에 맞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1970년대의 고도성장이 박정희의 공(功)이 아니었고, 또 그것이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모델이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2005년 백낙청이 박정희를 ‘지속 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라고 평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발전주의는 당시에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도입할 수는 없다는 이러한 주장은 발전주의가 봉착한 내적 모순과 한계를 역사적경제적으로 논증하지 못한다. 가령 그는 ‘우리가 애써 쟁취한 민주적 가치의 보존과 근대극복의 노력들이 슬기롭게 일치하여야 한다’며 발전주의가 군사주의 문화와 대대적인 환경파괴에 근거했기 때문에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독재시대에나 가능했던 발전주의적인 경제정책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이러한 결론의 근저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통해 ‘정치적 민주화’가 달성되었다는 부당전제가 깔려 있다. 박정희의 발전주의는 1960년대 수입대체적 산업화에서 1970년대 수출지향적 산업화로 전화한다. 급속한 현대화,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자본이 국내에는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 정책은 외국자본에 크게 의존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발전도상국이 취한 내자동원적-내수지향적인 산업화 유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특수한 발전주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반공주의에 입각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일본의 후배지로서 남한의 경제발전을 지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70년대에 기존의 경공업 중심에서 재벌 중심의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전환하였는데, 1979-80년 불황은 이러한 발전주의의 내적 모순과 위기를 의미한다. 중화학공업화로 인해 고정자본은 급격히 늘어나고, 60년대 경공업처럼 즉각 수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무역수지에서 적자가 발생하였다. 이미 외채가 많았던 상황에서 무역수지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외자를 도입하면서 외채는 급증한다. 그런데 세계적인 이자율 상승으로 외채 이자 상환의 부담이 늘어나고, 오일쇼크로 인해 외채누적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윤율 역시 하락추세로 76년 36.5에서 79년 32.9로 하락한다. 발전주의의 유지로 경제를 감당할 수 없음이 드러나자 박정희는 경제정책 개혁을 시도하는데, 이것이 1979년 4월 실시된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다. 이는 한국에 신자유주의를 처음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이처럼 박정희의 발전주의는 이미 1979년에 그 한계에 봉착했고,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위한 교두보가 마련되고 있었다. 다만, 전두환 정부 초기 시도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대마불사의 신화와 1986-88년의 ‘3저 호황’, 그리고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재벌 중심의 고도성장으로 다소간 유예, 지체되었던 것이다. 또 김영삼 정부 시기 OECD 가입을 위시한 금융세계화의 충격과 노동자 민중의 저항으로 인해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본격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마침내 1997년 가시화되기 시작한 재벌 체제의 위기로 인한 경제위기와 외환위기의 격랑 속에서 그동안 유예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은 ‘민주화 세력’에 의해 적극 실행된다. 김대중 정부는 비상 위급 상황을 빌미로 김영삼 정부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비상대권을 발휘하여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상을 주도하고 금융자유화와 노동신축화를 위한 법제를 대거 도입한다. 이 과정에서 ‘국난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 ‘환란 청문회’와 같은 인민주의적 행태를 통해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대중적 저항을 미연에 봉쇄한다. 박정희에 대한 오래된 지지 경제발전에 대한 논쟁 이전에도 박정희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지속되었다는 점은 박정희 비판자들에게 큰 곤란으로 작용했다. 박정희를 옹호하는 보수논객들이 책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고, ‘민주주의보다 경제’라며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확산된 것은 2000년대 들어서이지만, 실은 박정희에 대한 지지가 그 전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에게 근소한 차로 1위를 내주긴 했지만, 지금까지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중 지지도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는 박정희의 개발독재에 대해 대중의 자발적 지지가 있었는가, 아니면 강제로 동원되었는가라는 학계 내부의 논란을 촉발시켰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박정희 시대가 박정희 개인의 ‘위로부터의 독재’였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광범한 동의지반을 갖는 ‘아래로부터의 독재’였다는 분석이 제출되었다. 이에 따르면 독재는 강압과 그에 의한 민중의 희생 혹은 영웅적 저항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실제로는 위로부터의 강제적 동원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동원 체제가 구축되었고, 나아가 대중의 광범한 동의지반을 향유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대중이 독재에 연루되고 심지어 그것과 공모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민중이 독재의 피해자였다는 도식이 곧 민중을 옹호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대부분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시대가 폭압과 폭력으로만 일관된 것이 아니라 대중의 동의를 얻는 과정 역시 있었다는 것이 학계에서도 점차 인정되었고, 이후 이와 같은 파시즘 분석은 박정희 시대를 복합적으로 분석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진보학계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 시대를 ‘근대화를 향한 동원’을 주된 특성으로 하는 체제, 즉 ‘개발동원체제’라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개발동원체제는 ‘근대화라는 국민적, 민족적 목표를 향해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를 강력하게 추동하고 동원하는 체제’로, 이 때 권력은 민중에 대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선도성을 갖는다. 즉 국가가 국민을 가르치고 이끄는 역할을 하며, 국민도 이 과정에서 스스로 이를 적극적으로 따른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의 참상을 겪고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로부터 반드시 해방되겠다’며 국가건설과 경제성장에 집착해왔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새겨진 의식이자 삶의 태도가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공포로 변해 박정희의 개발모델을 가능한 대안으로 떠올렸다는 분석도 제출되었다. 이는 박정희에 대한 뿌리 깊은 지지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서를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이처럼 대중의 자발적인 동의가 지금까지도 박정희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고 있다는 학계의 지적은 박정희의 발전주의가 경제정책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이념이기도 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발전주의는 박정희 시대의 대중동원기제에 대한 분석이나 박정희 향수에 대한 대중정서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현대화를 위한 정치이념이자 경제정책으로서 반공·발전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발전주의의 내적 모순과 한계, 그리고 이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안으로서 (발전주의의)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을 동시에, 그리고 역사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민주화 세력’으로 자신을 호명하는 정치세력은 박정희 시대를 박정희 독재에 대한 대중의 원한에 호소하는 기제로 활용함으로써 현재의 정치위기를 한층 가중시키고 있다. 과거사 논란의 정치적 효과 정치적 공격의 도구로 과거사가 활용되면서, 박정희 시대를 평가함에 있어서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을 지양하고 억압 뿐 아니라 동원의 기제도 분석하려는 학계의 논의는 사장되고 흑백논리가 강화된다. 민주당의 박근혜 비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민주당과 문재인 후보는 7월 5.16쿠데타 발언부터 인혁당 사건, 부마항쟁, 장준하 의문사, 정수장학회 문제를 연속해서 제기하면서 박정희와 박근혜를 동일화하고, 박근혜의 과거사 인식을 공격하고 있다. ‘유신은 온 국민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군사독재세력의 발악’이라든가 박근혜는 ‘긴급조치 시리즈로 99%의 국민을 피해자로 만든 유신독재의 퍼스트레이디’라는 것이 민주당의 주장이다. 정치적인 공격에서는 상대방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흑백논리가 동원되기 일쑤고, 종종 실체보다 이미지가 부각되어야 하기 때문에 과장된 표현이 남발된다. 또한 박근혜의 지지율 하락이 목표이기 때문에 비판의 결론은 항상 박근혜를 향할 수밖에 없고, 대부분 박근혜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하며 끝을 맺는다. 박근혜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 이후에도 이슈를 바꿔가며 비슷한 논지가 반복해서 재생산된다. 이렇게 과거사 논란이 다른 쟁점을 압도할 만큼 반복되는 이유는 실질적인 여야 간 정치이념 대결이 부재한 상태에서 다분히 허구적인 대결 구도를 만들어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여야 공히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말하지만, 신자유주의 정책기조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그 실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이런 지형에서 과거사 논란은 사실상 정책적으로 수렴하고 있는 여야가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또 박정희를 절대 악으로 규정하며 박근혜의 당선을 마치 독재의 부활로 동일시함으로써,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비판을 무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한편, 야권은 과거사 논란을 통해 박근혜를 공격하는 것 외에 다른 부수적 효과도 노리고 있다. 이들은 과거사 청산을 위해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밝히며 노무현 정부 당시의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높게 평가한다. 구체적으로는 부마항쟁에 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한 국가기념일 지정과 피해자 보상이라는 공약이 문재인 캠프에서 제기되었다. 물론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필요하다. 그러나 민주당의 과거사 평가는 광주항쟁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역사적 정통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은 국가의 피해보상을 통해 사회변혁을 위해 희생했던 이들을 단순한 독재의 피해자로 전락시킨다. 이렇게 국가가 대중적 저항의 역사를 ‘민주화’라는 제한된 이름으로 포섭함으로써, 이를 계승하는 사회운동의 급진성을 관리 혹은 억압하는 효과도 낳는다.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취약성 야권은 과거사 논란을 통해 여야대립을 민주-반민주의 대립으로 치환시키려 하지만, 현재의 야권을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온 자유주의 세력이라 보기는 힘들다. 한국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는 그 태동부터 취약했다. 한국전쟁과 민족분단, 토지개혁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세력과 토지귀족 세력이 모두 몰락함으로써 계급적 토대를 갖춘 정당정치의 발전 가능성이 봉쇄되었다. 지주계급의 몰락은 보수주의 세력이 안정적인 통치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토대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정치적 무능과 부정부패로 일관한 이승만 정부가 물러난 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반공주의와 발전주의를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제시하면서 공화당을 창당하는데, 이는 지배층을 정당으로 통합하고 의회 민주주의라는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재야세력은 개발독재에 저항했지만, 군사정부의 반공주의와 발전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독자적인 정치이념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신 이들은 미국과 일본에 종속적인 경제구조와 이에 따른 지역적 불균등 발전을 문제 삼고, 이것이 학연지연 등 연고주의에 기초한 개발독재에서 비롯된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개발독재에 대한 인민주의적 비판은 일부 야당세력에 의해 수용된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재야세력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낙후된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견고한 지지기반을 형성하였다. 이처럼 박정희 시기의 야당은 자유주의 이념을 명확히 했다기보다, 낙후된 지역과 소외된 대중의 불만과 원한을 동원하면서 지지를 확산했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가 끝난 뒤 부마항쟁과 5.18 광주항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며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민정당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당질서를 강제적으로 도입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추진하는데, 신군부에 맞선 재야운동과 사회운동은 이념적으로 분화하게 된다. 사회운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정치이념을 갖게 된다. 그러나 1987년 항쟁의 성과가 직선제 쟁취로 수렴되고,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사회주의 이념이 설득력을 잃자, 자유주의가 진보진영 내에서 헤게모니를 획득하게 된다. 이는 일부 사회운동의 제도권으로의 투항, 자유주의적 NGO의 부상, 노동자운동의 선별적 포섭으로 상징된다. 그런데 1992년 14대 대선에서 군사정부는 3당합당을 통해 김영삼을 필두로 한 자유주의 세력과 통합함으로써 지배분파는 군부와 자유주의 세력의 연합으로 변모한다. 3당 합당 이후 여당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제도화되는 반면, 자유주의 세력 일부를 여권으로 흡수당한 야당은 정치이념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지도자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여 창당, 재창당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회로 대선에서 승리한다. 1997년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은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사회구조를 끊임없이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전환시켰다. 뒤를 이은 노무현 역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추진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은 곧 한나라당 및 조중동과 결합된 보수주의 세력에 대한 지지로 매도하면서 장기불황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차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라 사회 불안정성이 고조되고, 더불어 자유주의 세력과 함께 체제를 유지해 온 자유주의적 NGO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점차 철회되고, 급기야 각종 부패 스캔들이 늘어나면서 노무현 정부는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무현 역시 보수주의적 정치세력과의 연대를 시작한다. 2005년 한나라당에 제안했던 대연정이 이를 극적으로 상징한다. 이처럼 남한에서 자유주의는 그 이념적 지향이 불명확했고,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은 끊임없이 지역주의나 보수주의와 제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자유주의 세력이 독자적인 정치적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물질적 토대가 남한 자본주의에 부재했기 때문이다. 야권은 정권을 잡은 뒤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노동자민중을 적절히 포섭하고 관리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설사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이들은 안정적인 통치기반 확보를 위해 보수주의 세력과 연대했다가 이것이 위기에 빠지면 다시 파기하는 행태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공학만 남은 후보단일화 논의 후보단일화의 역사를 보더라도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여야대립이 단순히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민주화 세력’의 대선 승리는 두 번이었는데, 두 번 모두 후보단일화로 승리했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의 ‘DJP 연합’과 16대의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의 후보단일화가 그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로 김영삼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증폭된 상황에서 15대 대선에 임한 김대중은 역대 군사정부와 그들과 제휴한 자유주의 세력을 반민주적이고 부패한 ‘지역패권주의’ 세력이라고 공격하고, 이들을 경제위기와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그 자신도 결국 보수주의 세력인 자민련과 제휴하여 승리하였다. 이는 당시에 ‘진보적 지역주의’의 논리로 포장되었다. 16대 대선에서 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역시 이념과 정책을 무시한 채, 재벌 정치인과 손잡는 단일화 전술이었다. 상대적으로 견고한 기반을 가진 보수정당에 맞서야 한다는 이유로, 이러한 ‘묻지마 단일화’가 진행되었다. 한국의 반복되는 후보단일화 시도를 두고 최근에는 게임이론을 적용하여 분석한 연구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 분석에서는 그간 대선에서의 정당 간 선거연합에서 ‘뭉침’을 통한 지지율 상승과 지분 배분과 같은 정치적 거래의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고 보고, 연합을 주도하는 정당의 대선 승리확률과 연합대상정당에 대한 지분 배분을 중요 변수로 활용한 게임모형을 적용하여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진다. 이 연구의 결론은 오로지 연합을 주도하는 정당의 당선 가능성이 상당할 때만 의미 있는 선거연합이 형성된다는 것인데, 이는 역사적으로 이념적 연합보다 당선이후의 지분 배분이 선거연합을 좌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최근 한 언론에서는 단일화를 위해 문재인과 안철수가 각각 어떤 전략을 써야하는지를 컨설팅 보고서 형태의 기사로 제출하기도 했다. 대선주자를 일종의 상품으로 보고, 11월 25일 후보 등록일까지 최대한 시장점유율(지지율)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분석한 글이다. 이 기사에서는 문재인에게 ‘서민’ 시장이 비어있으니 선점하라, 하지만 ‘서민’은 너무 자주 보던 것이니까 ‘적통’ 키워드로 밀고 나가라, 등의 조언을 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이미 한국의 선거가 일관된 이념과 정책을 시험받는 장이 아니라 당선을 위한 인민주의적 수사에서 누가 뛰어난가를 시험받는 장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현재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의 단일화 논의도 독재심판과 민주주의 세력의 승리를 위해 당연시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정치공학적인 방식으로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허구적 구도에 갇히지 말자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을 주도한 구 집권세력이 정권교체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역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중운동의 입장에서 보면, 선거 시기 이들을 압박해서 설사 아주 작은 성과를 얻어낼 수 있다 하더라도, 운동의 주체적 역량이 없다면 이마저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대선이 끝나면 경제위기라는 객관적 제약 속에서, 그리고 이를 빌미로 한 관료와 재벌의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가능성이 크다. 민중운동은 여야의 허구적 대립 속에서 왜곡, 은폐되거나 굴절되는 계급대립이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자신의 투쟁으로 몸소 증명해왔다. 과거사 논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현재 여야의 대립 구도를 민주 대 반민주라는 옛 구도와 중첩시키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야권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대선 이후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설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광해’ 고르지 말고, 직접 `광해’가 되자
[인천토론회]2012 대선과 노동자정치세력화 자료집 목차 1. 2012년 대선투쟁 방향 -변혁적현장실천과 노동자계급정당건설을 위한 전국활동가모임 2. 2012년 사노위 대선방침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 3. 대안적 운동의 재건을 위한‘새로운 노동자정치세력화운동’이 필요하다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4. 노동중심의 대중적 진보정당을 건설하자 -새로운 노동정치를 위한 제안자모임 5.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2012년 대선 토론문 -좌파노동자회 인천위원회 6.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 -진보신당 인천시당
대선후보들의 경제정책, 이전과 과연 다를까?
『안철수의 생각』 출간과 힐링캠프 출연 이후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지지율이 더욱 상승세를 타고 있다. 양자구도 설문조사에서 안철수 원장은 박근혜 후보와 미세한 차이로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고, 다자구도에서도 박근혜 후보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안철수 원장은 박근혜 후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후보로 꼽히고 있지만, 사실 그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바 없다. 정치인이 아닌 기업가 출신 교수가, 출마선언도 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대선 후보로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열렬한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박근혜 대세론을 뒤엎을 대안으로 떠오르는 이런 상황, 즉 ‘안철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안철수 원장이 급부상한 계기는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였다. 9월 1일 한 언론매체를 통해 안철수 원장의 서울시장 출마설이 보도되었다. 다음 날 그가 “국회의원과 다르게 시장은 바꿀 수 있는 것이 많다”고 발언한 후, 그는 각종 여론조사 기관에서 발표한 서울시장 선거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더욱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은 9월 6일 안철수 원장이 후보직을 양보한 일이었다. 약 50%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던 그는 약 5% 지지율을 얻고 있던 박원순 변호사에게 후보직을 양보했다. 안철수 원장은 기존 정치인과 대비되는 진정성, 순수성을 가진 인물로 상징되었다. 공식 선거운동 돌입 후, 안철수 원장은 박원순 후보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인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 직후 안철수 원장은 유력한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여론조사 기관들은 그가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된 상황을 가정하여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안철수 원장의 높은 지지율이 거듭 확인됨에 따라 박근혜 대세론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안철수 현상이 본격적으로 대두된다. 특히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단독과반을 차지하자, 안철수 원장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독주를 막을 유일한 현실적 대안으로 부각된다. 안철수 현상이 기존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기존 정치가 민생문제를 해결하는데 무능했고 정치인들은 사익 추구에 골몰했기 때문에, 그 실망감이 안철수 원장에 대한 기대감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이 표출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왜 하필 그것이 안철수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을까? 공정, 공생, 공감 우선 안철수 현상에 앞서 안철수 개인에 주목해보자.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안철수 원장의 말과 행동은 공정, 공생, 공감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된다. 첫째, 그는 공정한 경쟁을 거쳐 성공한 인물로 그려진다. 안철수는 의사에서 컴퓨터 백신 프로그램 업체 창립자로, 기업을 그만 두고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거쳐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기며 도전적인 삶을 살았고 모두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은 반칙 없이 이루어진 성공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한국경제를 삼성동물원에 비유한 발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경제민주화를 지지하고 재벌과 중소기업의 공생을 주장한다. 그는 과거 자신이 개발한 백신 프로그램을 1천만 달러에 사겠다는 외국 보안업체의 제안을 거부하고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또 60억 원 상당의 주식을 업체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배분하기도 했다. 그의 과거 행적은 승자독식을 추구하는 탐욕적 기업가라는 재벌의 이미지와 그를 구분해주며, 공생이 가능하다는 점을 실천적으로 증명하는 듯하다. 셋째, 그는 2년 간 27개 지역에서 청춘콘서트를 개최하며 청년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고자 했다. 청춘콘서트는 한 번 개최될 때마다 약 1,600명 이상이 참석했다고 알려졌다. 안철수는 청년층의 고달픈 현실에 귀 기울이고, 불공정한 기업 생태계를 비판하며 청년층을 위로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이제 그는 청년들의 멘토, 나아가 ‘국민멘토’로 불리고 있다. 상식파 안철수의 생각 최근 그는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대담집을 통해,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한국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복지, 정의, 평화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제시한다. 첫째, 안철수 원장은 광범위한 사회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나아가 경제성장을 위한 투자라는 의미에서 복지사회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시급한 복지정책으로는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 아동수당제 등 보육정책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의료민영화 반대 등 의료정책 △고등학교 의무교육, 대학등록금 인하, 무상급식 확대 등 교육정책 △공공임대주책 확충, 세입자 보호 등 주거정책을 꼽는다. 2010년 6.2 지방선거 이후 각 정당이 활발히 제출해온 복지정책들을 종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재원마련이 필수적이므로 세입을 늘려야 한다. 안철수 원장은 소득수준에 따라 차등화된 보편적 증세가 필요하고, 이 외에도 탈세에 대한 처벌 강화, 법인세 실효세율 증가, 주식양도차익과세 대상 확대, 파생상품거래세나 토빈세 도입 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중산층도 혜택을 볼 수 있는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되,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를 합리적으로 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관료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증세없는 복지확대에 대한 비판, 그리고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 등을 수용한 입장이다. 둘째, 안철수 원장은 경제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경제민주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국가의 지원과 국민의 희생 위에서 성장한 재벌대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고, 이해관계자들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재벌대기업은 편법상속, 일감몰아주기, 골목상권 진출, 부정부패 등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그는 특히 한국의 기업생태계를 동물원에 비유하며, 대기업-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관행(독점계약과 단가후려치기)으로 인한 중소기업의 성장잠재력 저하를 우려한다. 안철수 원장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 개혁 △공정거래법 강화 △정부의 중소기업 집중 지원 정책 △노사관계 개혁 △기업집단법을 통한 재벌규제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등을 제시한다. 이 역시 4.11 총선 전후로 각 정당이 제출한 재벌개혁-경제민주화 정책을 종합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안철수 원장은 복지와 정의, 즉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평화라고 주장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남북관계가 개선되어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그는 특히 남북 간 경제협력을 강조한다. 남북 간 경협을 진전시켜 서로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이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접촉창구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그는 대북정책에 있어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 시 군량미 전용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북한 인권과 관련해서도 필요한 발언은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또 대외정책에 있어 그는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당의 대북정책, 동북아균형자론 등을 기본 입장으로 수용하되, 보수세력이 제기해온 ‘퍼주기 논란’에 대응하기 위한 보완책을 절충한 것이다. 이처럼 복지, 정의, 평화라는 안철수의 생각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안철수의 생각은 △경제민주화와 내수론 △사회위기에 대응한 복지정책 △남북 경협과 동북아균형자론 등 그 기본골격을 민주당에서 가져왔다. 다만, 재정건전성, 퍼주기 논란 등 보수세력이나 관료들의 문제제기를 수용하고 절충함으로써, 가장 중도적인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는 스스로 진보도 보수도 아닌 상식파라고 주장한다. 상식파 안철수의 절충적 대안은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가령, 그가 경제민주화를 위한 핵심과제로 제시하는 재벌과 중소기업의 상생은 원하청 간 이윤분배를 목적으로 할뿐 노동자에 대한 분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수활성화 역시 노동자에게 반드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세계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수출재벌과 이명박 정부 역시 내수활성화를 지지해왔다. 문제는 이들이 내수활성화와 고용창출을 핑계로 공공부문 사유화 정책을 추진한다는 점이다. 복지정책 역시 사회불안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위기관리적 성격을 가진다. 게다가 재벌 정책이나 저임금과 노동유연화 정책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수출재벌 중심의 세계화 전략의 일부이다. 마찬가지로 한미동맹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종속되어 있고 그것은 전략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재벌을 개혁하고, 미중 사이에서 균형을 잡겠다는 안철수의 생각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의 전반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세력관계의 변화없이 불가능하다. 말로는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장한 노무현 정부가 동시다발적 FTA를 추진했고 또 한미동맹을 한층 강화했다는 사실은 안철수가 제안하는 대안의 실현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점을 말해준다. 한국정치의 불안정성과 정당정치의 변모, 그리고 안철수 안철수 원장에게 단적으로 드러나는 중도 지향성은 오늘날 정당정치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중도 지향성은 오랜 기간 꾸준히 강화되어 왔다. 이미 노무현 전 대통령도 스스로를 좌파 신자유주의자라고 불렀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극우파와는 달리 일자리 창출, 복지 정책 등을 펼친 중도우파였다. 이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스스로를 중도좌파 또는 중도우파, 나아가 탈이념의 실용주의라고 호명하고 있다. 정당 차원에서도 중도로의 수렴이라고 할만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새누리당은 4.11 총선을 기점으로 복지정책을 대폭 수용하며 ‘좌클릭’을 했고 반대로 민주노동당은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한 후 국민참여당과 합당하며 ‘우클릭’을 시도했다. 이처럼 탈이념 중도 지향성이 강화되는 경향은 안철수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기본적인 배경을 이룬다. 그리고 그 구조적 원인은 한국정치의 심화되는 위기와 불안정성에 있다. 1987년 이후 한국사회는 5번의 대선을 치르면서 정당들의 이합집산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이합집산은 이념과 노선의 변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철저히 선거 승리를 위한 파벌 간의 갈등과 협상에 따라 좌우되었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갑작스러운 대권 후보자의 신당 창당, 기존 야당의 통합과 분당, 정당 외부의 참신한 인물 영입을 통한 이미지 쇄신 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 정당이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보스 정치인을 중심으로 사당화되어 있었고, 그만큼 이념적계급적 기반이 취약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그림1] 민주화 이후 선거 기점에서의 정당체계의 구성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된 이후 정치위기는 더욱 심화된다. 1997년과 2007년 두 번의 경제위기라는 충격과 장기불황을 경험하는 가운데 누가 대통령인지, 누가 국회 다수석을 차지하는지와 무관하게, 금융세계화에 편입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관철되어왔다. 사실상의 정책적 수렴 상황에서 국회는 거수기화 되지만 오히려 정당 간, 정치인 간 이전투구는 더욱 극심해진다. 여전히 정당과 정치인은 스스로의 지지기반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지엽적인 쟁점을 크게 확대하거나, 상대방을 비방하는 폭로정치가 지배적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국회는 민생문제에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곳으로 상징되고, 정당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냉소가 더욱 심화된다. 이와 동시에 삼김시대가 종료하면서 노무현 정부 전후로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보스정치가 약화되고 유동적 중도층 유권자가 크게 확대된다.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로 인한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에 대응하는 한편, 유동적 중도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정당의 핵심적인 생존전략이자 선거전략으로 부상한다. 금융시장 개방과 이에 동반하는 국내 제도 개선, 수출재벌 중심의 FTA 추진, 노동유연화, 한미동맹의 현대화 등 지배 양당의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이 사실상 신자유주의로 수렴한 상황에서, 이러한 정책이 만드는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에 대응하는 것이 지배세력 공통의 과제로 부각된다. 2010년 지방선거 그리고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의 무상급식 논란을 계기로 크게 확대된 각 정당들의 복지정책에 대한 관심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새누리당의 ‘좌클릭’으로 표현되듯 각 정당 복지정책도 일정하게 수렴한다. 여전히 각 정당의 지역적 지지기반은 중요하지만, 점차 중도지향성을 내세운 포괄적 호소가 선거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적 요소가 된다. 또한 유동적 중도층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적인 전략으로 부상함에 따라 각 정당은 정당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신과 냉소를 불식시키기 위해 선거전문가를 영입하고, 새로운 선거기법을 도입하며, 정치권 바깥으로부터의 참신한 인물을 후보로 영입하려는 경향을 강화한다. 중도층을 겨냥한 선거기법이 본격 도입된 계기는 2002년 16대 대선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최초로 여론조사를 통해 대선후보로 결정되었고, 선거운동 과정에서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정의로운 세상’과 같은 모호한 구호에 호소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와 같은 선거기법은 각급 선거를 거치며 일반화되고 더욱 발전된다. 기존 정치권 바깥에서 참신한 인물을 찾고자하는 시도도 강화되어 왔다. 역대 대선에서 정주영, 이인제, 이회창, 조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고, 문국현, 문재인, 박원순, 안철수까지 정당 바깥의 인물이 발휘하는 영향력은 계속 커지고 있다. 총선에서도 인물 영입은 계속되어왔고, 재야인사, 학생운동 출신, 법조인, 교수, 언론인, 기업가, 고위관료, 의사, 약사, 건축가, 배우 등이 정당으로 충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정치의 변모는 단기적으로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정치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켜왔다. 여전히 경제위기에 대한 대안이 없고 이념적계급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휘발성 높은 유동적 중도층의 지지를 아주 잠시 동안 묶어두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는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여러 선거기법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당의 이념적 지향성과 당원의 요구보다는 당 바깥의 여론조사 결과가 가지는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당 바깥의 인물 영입이 당의 생존에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됨에 따라 정당의 존립기반 자체도 매우 취약해진다. 안철수는 이와 같은 불안정한 정치토양에서 등장했다. 안철수 현상은 정당 자체가 대중의 불신대상이 되어 정당에 몸담지 않은 전문가출신 비정치인이 미디어를 통해 기존 정치인들의 인기를 선거에서 압도하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대선을 불과 3개월 앞둔 시점에서도 여전히 기존 정당으로부터의 영입 제의를 거부하고 ‘상식파’로서 제3지대에서 자기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새롭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유동적 중도층의 관심을 집중시킬 더욱 극적인 야권단일화 선거이벤트로 향해가는 사전 단계일 것이다. 안철수 현상은 정치위기의 표현이고, 그 일부다. 노무현과 이명박 사이의 타협점으로서 안철수 그러나 정치의 불안정성이 심화되는 가운데 어떤 인물이 대안으로 등장하는지는 대중이데올로기에 의해 결정된다. 노무현 정부의 경제적 무능은 경제성장에 대한 기대를 낳았고, 이는 747 공약을 내세운 권위주의적 지도자인 이명박의 당선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2007년-2009년 금융위기를 경험하면서 7% 경제성장 공약은 실현불가능하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또한 2008년 촛불집회는 명박산성으로 상징되듯 이명박 정부가 불통정부라는 점을 확인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은 노무현 정부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 분향소에서 500만여 명이 조문을 했고, 장의기간 동안 봉하마을에 100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탄압에 의한 희생이라는 이미지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노무현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그 결과 17대 대선 패배 이후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던 친노계 정치인들이 일거에 정치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무능으로 대표되는 노무현 정부 시기의 온갖 실정은 잊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기 말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던 노무현은 물론이고, 부패한 측근들에 대한 기억도 지워질 수 없었다. 게다가 한미 FTA 협상을 추진한 당사자는 바로 노무현 정부였다. 따라서 반MB 투쟁이 강화되더라도 이명박 정부에 대한 대안이 구 집권세력일수는 없다는 점은 대중적으로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한명숙, 유시민, 문재인은 근본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안철수는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원칙과 상식을 강조하는 인물인 동시에 성공한 경제인이다. 그는 노무현처럼 서민의 친구이면서도 노무현과 달리 경제적으로 무능하지 않은 인물로 보인다. 또 그는 반칙 없이 성공한 경제인으로, 특권층과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며 공정성을 잃어버린 이명박과도 대비된다. 즉, 안철수는 노무현과 이명박 사이에서 대중들이 찾아낸 화해의 형상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는 유능한 노무현이자 착한 이명박이다. 이는 안철수 원장이 과거 노무현, 이명박에 투표했던 유동적 중도층을 모두 끌어들일 수 있는 득표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장기적으로는 그 지지기반이 더욱 불안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이념적, 계급적 기반이 취약할 뿐만 아니라 그를 뒷받침할 정당 기반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민주당의 지원 없이는 안철수 원장의 대선대응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나아가 여전히 그가 불출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만약 안철수 원장이 대선에서 당선될 경우 심각한 정치적 불안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해볼 수 있다. 안철수 지지층의 상당수는 문재인보다 박근혜를 더 지지하는 중도보수층으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향후 정세에 따라 지지층에서 쉽게 이탈할 수 있다. 게다가 경제위기가 더욱 심화되는 가운데 소통이 성장과 고용을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날 경우, 대부분의 유동적 중도층이 등을 돌릴 수 있다. 물론 안철수는 정치적 불안을 예방하기 위한 합리적 이해조정과 국민과의 소통에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NGO 출신 전문가를 각종 국가위원회로 영입하고 노사정협의기구를 통해 노동운동을 포섭함으로써 합리적 이해조정의 외양을 갖추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또한 그가 청춘콘서트, TV 프로그램 출연을 통해 큰 인기를 끌었던 점에 착안한 여러 이벤트를 기획하여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특정 정세를 계기로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얻고 동시에 각 정당들로부터의 정치공세에 직면할 때 안철수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다. 세력기반이 취약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는 중요한 참고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그는 탄핵국면을 통해 대중에게 대통령 개인에 대한 재신임을 물음으로써 상황을 극적으로 돌파했다. 여론정치가 만들어낸 안철수 대선이 1년 가까이 남아있던 시점부터 이미 여론조사 기관들은 안철수가 지지하는 야권단일후보 대 박근혜 양자구도 설문조사, 야권단일후보로 선출된 안철수 대 박근혜 양자구도 설문조사 등 각종 여론조사를 실시해왔다. 이중의 불확실성을 가정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기관 별로 결과의 편차도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기관들은 유권자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앞 다퉈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안철수 원장 대 박근혜 후보의 양자 구도로 선거의 틀을 짜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여론정치를 뒷받침하는 여론은 실제 여론이 아니라 여론조사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인 경우가 많다. 먼저, 여론조사가 전제하는 가정들이 사실 편향되어 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음으로, 여론조사는 질문에 대한 선호를 즉각적으로 표출하게 함으로서 선택과정에서의 참여와 선택결과에 대한 책임이라는 과정을 누락한다. 실제 상황에서 주장은 세력관계를 반영한 것이고 따라서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마지막으로, 여론조사는 개인의 단순한 선호를 모아 엄청난 중요성을 담은 결론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 결과는 확률적 대표성에 기대어 과학성을 보장받고, 이를 근거로 하나의 통일된 의견이 존재한다는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세력관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 점에서 여론조사는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근거이자 도구가 된다. 여론조사 기관과 함께 언론매체는 여론정치를 주도한다. 언론매체는 주어진 여론조사 결과를 단순히 보도하는 수동적 주체가 아니다. 언론매체는 여론조사의 설계 및 문항구성에 관여하고, 특정한 선거구도에 맞춰 그 결과를 해석함으로써 여론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특정 후보 대세론을 띄우는데 일조하거나, 반대로 그것을 뒤집는 효과를 야기할 수 있다. 여론조사는 언론매체가 구성한 문제를 정치인들에게 부과하거나, 반대로 정치인들이 구성한 문제를 언론매체가 선별적으로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언론은 대선 3-4년 전부터 차기 대선후보군을 선정하고 선거구도를 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를 얻는 후보에 관한 기사량이 증가한다. 선두 후보의 긍정적 이미지는 미디어를 통해 확산된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미디어가 가공한 여론에 매우 민감해지고, 그 결과 미디어 정치인이 출현한다. 여론조사 기관과 언론매체가 주도하는 여론정치 없이 안철수의 급부상을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작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후부터 편향된 이중의 가정, 경쟁적인 여론조사 결과 발표 및 보도를 거쳐 안철수 대 박근혜 양자구도가 기정사실화되어왔다. 또한 안철수 원장 스스로도 미디어를 통해 정치적 언급과 자신의 인생사를 적절히 혼합하면서 여론정치와 상호작용하는 미디어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왔다. 만약 그가 신당을 창당할 경우 (또는 그를 후보로 내세운 야권연대 선거운동기구가 만들어질 경우), 그 정당은 미디어매개 인물정당의 성격을 가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디어매개 인물정당은 매스미디어라는 매개와 인물의 상징화를 통해 정치전략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정당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앞서 살펴본 정당정치의 변모, 즉 유동적 중도층으로부터의 득표를 최우선 목표로 선거전문가가 주도하고 중도적이고 포괄적인 요구를 내세우는 정당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실패가 낳은 안철수 지금까지 살펴본 안철수 현상의 원인들은 지난 10년 간 민중운동이 직면한 현실이었고 동시에 그러한 현실에 대응하여 전개된 민중운동의 효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이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나는 데에는, 지난 10년 간 전개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실패가 하나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97년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의 대선 출마를 계기로 본격화된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은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출범 초기 나름의 헌신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의 운동적 성격은 점차 축소되어왔다. 특히 2004년 총선에서 10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된 이후 의회주의, 선거중심주의 경향이 강화되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으로부터 지원을 획득(세액공제, 득표)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당의 인력과 재정은 노동자운동의 역량 강화를 고려하지 않은 의정지원 활동에 편중되었다. 이에 따라 스타정치인에 의존하는 경향도 강화되었다. 민주노총 역시 정치 영역을 민주노동당에 맡겨놓고,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힘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2007년 분당 이후 진보정당 운동은 한없이 추락했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양당의 경쟁구도 속에서 의회주의, 선거중심주의 경향이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2012년 총대선에서 반MB 야권연대의 승리를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전략을 구체화하여 신자유주의 구집권세력인 국민참여당과 통합하고자 했다. 민주노총도 반MB 야권연대를 겨냥하여 진보대통합을 추진했으나 이는 진보정당 간의 갈등을 더욱 확대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후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 집행부의 방조 속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통해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내 국회의원 자리와 당권을 둘러싼 과열경쟁, 부정선거 사태로 인해 민중운동 전체가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되었다. 노동자정치세력화 운동 실패의 직접적 원인은 의회주의 노선과 연립정부 전략을 밀어붙인 세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타정치인의 배신 또는 권력야욕도 그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왜 의회주의 노선과 스타정치인의 배신이 그토록 강화되었는지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정당정치의 변모라는 정세 속에서, 이념적 동질성이 강한 활동가와 핵심지지층을 중심으로 정당을 운영하고, 이를 통해 그 운동적 성격을 강화해나가고자 하는 진보정당 모델은 점차 현실의 다른 정당들의 운영방식과 비교할 때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진보정당 내 잠재적 갈등을 유발한다. 만약 진보 정치인들이 의정활동을 중심으로 정당을 운영하고자 하고, 더 많은 유동적 중도층 유권자와 접촉하고자 할 경우, 이념적 통일성이 강한 활동가나 평당원과의 갈등이 뒤따를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소위 대중성과 선명성 사이의 갈등으로 드러나지만, 사실 어떤 유권자층을 향한 대중성인가와 관련된 문제다. 민주노동당의 성공을 상징했던 2004년 총선 사례는 진보정당이 직면한 잠재적 갈등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당시 민주노동당을 선택한 (비례)정당투표자들의 특성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이 얻은 10석은 이념적 동질성이 강한 당원이나 적극적 지지자들의 표에 의해서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노조 조합원과 그 가족들의 경우 다른 집단에 비해 민주노동당 지지 비율이 높게 나타났지만, 전체 득표에서 조합원과 그 가족의 표가 차지한 비중은 매우 낮았다.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계층적으로는 고학력, 화이트칼라 등 중산층이었고, 이념적으로도 열린우리당 지지층과 구분되지 않는 유동적 중도층이었다. 이들은 탄핵정국 전후로 정당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들이었고, 그 실망감을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당투표로 반사적으로 표현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성공은 노동자운동의 정치적 성장의 결과 또는 그것을 반영하는 계급투표의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민주노동당 내 잠재적 갈등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념적 동질성이 강한 당원 및 적극적 지지자와 유동적 중도층의 이원적 지지구조에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4년 이후 민주노동당이 의회주의, 선거중심주의를 점차 강화하게 된 것은, 결국 유동적 중도층을 중심으로 당의 노선과 운영이 변모해갔다는 점을 의미한다. 의회주의와 집권전략을 노선으로 채택한 당내 정치세력이 이 변모를 주도해나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통합진보당 창당은 이러한 진보정당의 우경화된 변모를 공식화한 사건이었다. 통합진보당은 잠재적 갈등 상황에서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원칙을 지키기보다는, 손쉽게 주어진 정치현실에 적응하고자 했던 주체들의 합작품이었다.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립정부 구상을 위해 국민정당화되고자 스스로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한 민주노동당, 유시민 중심의 미디어매개 인물정당적 모습을 보여 온 국민참여당, 스타정치인 중심의 통합연대가 바로 그들이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당 내에 그나마 남아있던 활동가 당원 중심성에 최종적으로 파산선고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당원 중심성을 강조하는 구당권파는 보수언론으로부터 구태정치로 공격받고, 신당권파는 ‘국민의 눈높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포괄정당, 선거전문가정당으로 당을 재편해 나가고 있다. 문제는 그 동안 진보정당에게 정치를 일임함으로써, 노동자 정치를 새롭게 형성할 주체적 역량이 심각하게 유실된 상황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민중운동 주류가 야권연대라는 목적에 종속됨에 따라 민중운동의 이념적·조직적 정체성도 혼란에 빠져있다. 이런 민중운동의 주체적 조건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이반이 안철수나 박근혜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는 현실은 지극히 당연해보인다. 안철수 현상의 효과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자. 안철수는 공정, 공생, 공감이라는 가치, 그리고 정의, 복지, 평화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의 대안은 기존에 제시된 여러 정당의 입장을 절충한 것으로 가장 중도적이라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안철수의 대안은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 것과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그 실현가능성도 지극히 낮다. 안철수 현상은 신자유주의가 심화시킨 정치의 불안정성에 따른 정당정치의 변모와 관련된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시기 형성된 대중이데올로기 지형 속에서 안철수는 하나의 타협점으로 부각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여론조사 기관과 언론매체가 주도하는 여론정치는 안철수를 박근혜의 대항마로 부각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안철수 현상은 정치의 불안정성이 낳은 효과이자, 그것을 더욱 심화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안철수 지지층의 유동성, 그리고 그의 취약한 정당기반은 향후 안철수의 정치가 정치적 불안에 휩싸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안철수에 대한 지지는 반복되어 온 열망과 실망의 사이클의 일부로 기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현실적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안철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부정할 도리는 없다. 지배 양당과 구분되는 대안세력으로서 민중운동은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자신의 전략을 민주노동당으로 구체화했다. 그러나 진보정당 운동은 결과적으로 지배 정당들의 변모를 뒤쫓아 가며 몰락했다. 이는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대안세력으로서 지위를 상실함으로써 안철수가 급부상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민중운동은 2012 대선의 구경꾼으로 머물게 될 가능성이 크다. 노동자정치세력화 운동의 실패를 근본적으로 평가하고, 대선 이후의 정세에 대비한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을 위해 민중운동 제 세력의 지혜와 힘을 모아야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