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 식민지 시대 ④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 식민지 시대
② 1930년대 기계제공업화와 태평양전쟁까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의 강화 [2021년 겨울호]
③ 사회주의 운동, 식민지 시대 노동자 민중의 각성을 이끌다 [2022년 봄호]
④ 1930~40년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부침 [2022년 겨울호]
당 재건을 위한 방향전환, 혁명적(적색)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
활동가들이 공통으로 지목한 조선공산당의 문제점은 그 구성이 지식인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만 매도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점은 고려해야 하지만) 분파 간의 파벌투쟁으로 역량을 모아내기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일례로 박헌영, 김단야 등이 속해있던 콤뮤니스트그룹은 “당내에는 노동계급과 빈농의 이익을 위하여 깨끗이 헌신한 희생적 동지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특히 이 파쟁의 결과로 그들은 몹시 빨리도 몰락했으며 아주 빠르게 일제경찰의 수중에 떨어졌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 사회주의자의 평가가 이렇게 일치했던 데에는 근거가 있었다. 바로 코민테른의 이른바 12월 테제다. 12월 테제의 정식 명칭은 ‘조선 문제에 대한 결의’로, 이후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에 지침서 역할을 한 문건이었다.
12월 테제는 크게 ‘서언’과 ‘결의’로 구성되어 있다. 서언에서는 조선 혁명운동의 심각한 위기가 일본의 탄압뿐만 아니라 내부 파쟁과 갈등에 의해서도 초래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혁명투쟁의 선도자·조직자·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진단이었다.
이어 결의에서는 나름의 처방을 내놓고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지식인과 소부르주아지 정당인 조선공산당을 노동자와 농민의 정당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한 “공산당의 복구·강화 없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그리고 토지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지속적이고도 결정적인 싸움은 불가능하다”는 말로 결의를 마무리한다.
한편 1920년대 후반의 전 세계적 경기침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1년 겨울호의 「1930년대 기계제공업화와 태평양전쟁까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의 강화」에서도 함께 봤듯, 조선에 진출한 일본 기업은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불황에 대응하고자 했다. 착취가 강화됨에 따라서 1930년대 초반까지 노동자 민중의 저항도 거세게 분출했다. 1929년 원산 총파업이 대표적 사례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당 재건이 이른 시일 내에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당 재건 준비위 등의 조직을 꾸리고 대중사업을 통해 준비위의 구성원 비중에서 노동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당 재건을 사고했다. 이를 통해 분파투쟁도 지양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분파투쟁은 현장조직 없이 소부르주아적 지식인의 구성 비율이 높아 발생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투쟁이 벌어진 시점에 이 투쟁을 지도할 전국적 조직, 즉 조선공산당은 부재한 상황이었다. 결국 투쟁은 각 지역을 넘어서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고 만다. 이런 와중에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다. 여기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당 재건이 단시일 내에 가능하지는 않으리라고 전망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장기적인 시야에서 당 재건 운동을 바라보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을 조직해 당 재건에 이르는 경로를 구상하게 되고, 이런 맥락에서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사회주의자와 노동자의 결합, 김남천의 「공장신문」
「공장신문」에는 공장 밖에서 파업을 지도할만한 지식을 가진 ‘그 사나이’, ‘그 사나이’와 이미 동지적 관계에 있는 선진적인 노동자 내지는 활동가로 작년의 파업이 실패한 직후 신입 직공에 섞여 들어온 창선, 그리고 노동조합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는 노동자 관수가 등장한다. 김남천의 「공장신문」은 현장을 조직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의 활동을 지나치게 전형적이라 비판을 받을 정도로 전형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모습을 소설 속에서 확인해보자.
지난 여름, 파업이 완전히 실패한 후 초조함을 느끼는 관수다.
어떻게 하면 조그만 불평불만이라도 잡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불평불만을 대표하여 그의 선두에 설 수 있을까?
관수도 무엇인지 똑똑하게는 몰라도 자기에게 결함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럴 때마다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 돌연히 잠깐 참말로 번개같이 잠깐 동안 만났던 어떤 사나이한테서는 그 후 지금까지 두 달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사나이가 지금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침착한 태도로 말하던 그 사나이는 말하는 품으로 보아서 결코 이곳 사람은 아닌데 그때 파업의 사정과 또 파업 수습에 관해서 일후에 활동할 것을 어떻게 그렇게 똑똑히 아는지 몰랐다. 평양의 모든 일을 환하게 꿰어 두고 이곳에서 사는 사람보다도 잘 알았다.
관수는 어떻게 하면 조그만 불평불만이라도 잡을 수 있을지, 노동조합이 잘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만, 혼자서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관수는 이럴 때 ‘그 사나이’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 사나이’는 공장 밖의 사람임에도 파업의 사정과 수습에 관해 잘 알고 있으며 평양의 모든 일을 꿰고 있다. 여기서 ‘그 사나이’는 파업을 지도하는 전위적 활동가를 형상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관수가 고민하던 중 사건이 발생한다.
…
“물을 먹어야 살지 않우!”
그는 그 속에 얼굴을 들었다.
“좌우간 덤비지 말고 조용들 해!”
대답하는 소리는 완전히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 구정물을 먹으라고 수도를 막다니! 직공은 개 돼지란 말요?”
너무도 그 소리가 커서 웅성웅성하던 소리가 잦아들고 그 목소리에 군중이 통일되는 듯하였다.
“좌우간 넓은 데 나가 이야기하지!”
“자― 넓은 데 나가서 합시다!”
최전무의 말을 받아서 군중에게 외치는 것은 고무직공조합의 간부로 있는 김재창이의 목소리가 정녕하였다.(틀림없이 확실했다.) 관수는 재창이 목소리를 듣자 벌써 간섭하기 시작한 그의 행동을 직감하였다.
도시락을 먹은 후 물을 먹겠다고 수도를 튼 직공의 뺨을 사측 최전무가 때린 것이 소란의 원인이었다. 노동자들은 수도세 몇 푼 아끼자고 노동자들에게 수돗물을 먹지 못하게 하면 바깥의 “개굴창같은 우물”에 가서 물을 먹으라는 말이냐며 분노한 것이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조합의 대표 김재창이 등장한다. 재창은 조합의 대표지만 사측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다. 앞에 나선 재창은 노동자들에게 이번 일은 조합 집행위에서 알아서 해결할 수 있도록 일의 처리를 위임해달라고 말한다. 관수는 재창의 타협적인 태도를 알고 있기에 직접 해결하자고 군중에 외치지만, 결국 재창의 말대로 해결하기로 하고 모인 군중은 해산한다.
그렇게 “타락 간부”에게 선수를 빼앗긴 관수는 퇴근 후 집에서 우울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장의 동료 길섭이 관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며 관수의 집을 찾아온다. 관수는 ‘그 사나이’인가 하며 기대한다.
“여!”
그는 담배를 후― 내뿜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관수는 좀 견주었던 곳이 어그러진 듯한 낙망을 느꼈다. 창선이면 물론 잘 안다. 창선이는 파업 이후에 신직공 모집에 끼어서 들어와 자기네 공장에서 일하게 된 직공이다. 이 사나이는 물론 타탸줄(‘ㅌ’줄)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이 사나이가 내게 무슨 말이 있단 말인가? 관수는 마음속에 좀 불평을 느끼면서 창선 가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갔다.
관수는 ‘그 사나이’가 아니라 동료 창선임을 확인하고 실망한다. 그런데 창선은 갑자기 자기 본명이 박태순이라 밝힌다. 창선의 본명 박태순은 ‘그 사나이’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했던 그 인물의 증거, 즉 이름 가운데 글자가 타탸줄(‘ㅌ’줄)인 이름이었다. 관수는 드디어 찾던 이를 만나 기뻐하면서 창선과 함께 회합에 참여한다. 그 회합에는 벌써 길섭이, 동찬이, 선녀 등 4~5인이 함께 모여 있었다.
다음 날 공장에 출근한 관수는 회합에 함께한 이들과 의미 모를 웃음을 남몰래 하였다. 점심시간, 각자의 도시락을 들고 함께 먹으며 재창이 어제의 일을 잘 해결하는지 두고 보자고 말을 붙였다. 그런데 몇몇 직공의 도시락에 정체 모를 종이가 붙어있다.
평화 일
공장신문
고무 호
하고 씌어 있었다.
“공장신문? 오―라! 우리 공장의 신문이란 말이로구나! 이건 또 누구 장난이야?”
직공 하나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으나 그는 종이를 놓지 않고 좀 소리를 내 읽기 시작했다.
“얘! 이건 무슨 그림인가?”
한 자가 아래쪽에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요건 재창이 것이구나!”
“엣키! 요건 최전무 같다!”
“이게 뭘 하는 게야?”
관수가 종이를 자기에게로 향해 돌렸다.
“하하, 이게 지금 주는 건 돈이로구나!”
그 옆에 있던 직공이 그림 위에 쓴 글귀를 읽었다.
“최전무한테서 돈을 받는 몹쓸 놈 김재창이의 꼴을 봐라! 하하하!”
그는 종이를 놓곤 웃었다.
“얘 거 재미난다. 좌우간 글을 읽어 보자!”
“지난 여름에 우리들의 파업을 팔아먹은 놈은 누구냐? 그건 김재창이 같은 타락한 조합간부다! 우리들은 그런 놈에게 조금도 우리의 일을 맡기지 말자! 그는 우리들의 마음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놈이다. 어저께 일어난 일도 우리끼리 처리해야만 된다. 우리의 마음을 꺾고 고주(고용주)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재창이는 우리 편인 체하고 나서는 것이다. 어저께 아무 일도 없게 무사히 한 덕택으로 재창이는 전무네 집에서 술 먹고 요리 먹고 돈 먹은 것을 왜 모르느냐? 벤또를 빨리 먹고 마당에 모이자! 그리하여 재창이를 내쫓고 우리끼리 지도부를 선거하자! 우리 편인 체하고 나서는 몹쓸 간부를 내쫓아라!”
“얘! 건 굉장하구나!”
“그 다음 또 읽어라!”
“크게 쓴 글자만 먼저 읽자! 뭐이가 이게? 오오라 공자로구나! 거 잘 썼는데 꾸불꾸불하게 썼네! 공장신문은 고무직공의 전부의 것이다! 공장신문을 믿어라! 공장신문을 지켜라! 또 그 아래 (원문 탈락) 들은 얼마나 이익을 보나? 전평화고무 직공형제들아! (원문 탈락) 의 준비를 하여라! 다른 공장 형제들도 늘 (원문 탈락)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곧 마당에 모여서 우리들끼리 지도부를 선거하자!”
‘평화공장신문’에는 타락한 간부 재창과 최전무 사이의 부정한 거래가 폭로되어 있다. 신문 발행을 통한 입장 선전에서는 개량적인 노동조합의 활동을 폭로하여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신문을 계기로 관수네 공장에서도 새로운 노동조합 준비위원회가 결성된다.
박수 소리가 마당 안에 가득 찼다. 모임은 지금 한창 진행중이었다.
“자― 그러면 우리끼리 준비위원을 선거합시다!”
또 박수 소리가 났다.
…
“창선이 좋소!”
…
“여보! 나는 관수요!”
“관수 좋소!”
이렇게 하여 아홉 사람 준비위원이 선거되었다.
“누구 연설해라!”
하는 소리가 나매 뒤를 이어 박수 소리가 났다. 창선이가 쑥 머리를 내밀고 좀 높은 데 올라섰다.
“여러분 이제야 우리들은 우리끼리 선거한 지도부를 가졌습니다. 우리들 아홉 사람 (원문탈락) 준비위원회는 죽을 힘을 다하여 끝까지 여러분들의 의견을 대표하여 싸우겠습니다. 여러분 자― 일동이 (원문탈락) 준비위원회 만세―”
“만세―”
“만세―”
「공장신문」은 소설이 발표된 당시 임화에게 “1931년에 있어서의 조선문학의 최고점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기에 나는 조금도 주저치 않는다”라는 고평을 받았다. 전위적 인물과 호흡하는 노동자의 헌신적 모습, 그 결과 진정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이 결성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기에 그러했으리라. 다만 앞서 언급했듯 1930년대 초반까지 김남천의 소설은 지나치게 전형적인 인물이 등장해 오히려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즉 소설 자체가 반(反)리얼리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소위 ‘전향문학’이라 일컬어지던 식민지 시대 후반기의 작품에서는 일정 극복되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즉 식민지 후반기 소설에서 오히려 현실에 존재할만한 인물들이 등장해 리얼리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관련한 작품들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농촌운동 속의 사회주의 지식인, 심훈의 『상록수』
그간 심훈의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과 함께 농촌계몽소설로 거론되어왔다. 그런데 여러 연구에서 『상록수』를 농촌계몽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심훈이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작가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제기다. (2022년 봄호에 연재된 「사회주의 운동, 식민지 시대 노동자·민중의 각성을 이끌다」를 참고) 즉 작가의 지향을 고려하여 『상록수』를 다시 보면, 브나로드 운동 경향을 대표하는 농촌계몽소설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 지향을 검열을 피해 우회적으로 드러낸 소설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따라 보더라도, 『상록수』가 사회주의적 지향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우리가 2022년 봄호에서 살펴봤던,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가 일본의 검열로 완성되지 못한 경험과 관련된다. 심훈은 그의 글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에서 “지독한 검열제도 밑에서 ××를 선동하는 작품, 순정 마르크스주의파의 영화를 제작하지 않는다고 높이 앉아 꾸지람만 하는 것은 당초에 무리한 주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결국 아무리 직접적으로 써본들 검열로 민중에게 닿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으므로, 심훈은 검열을 우회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 통로 중 하나가 바로 ‘연애’를 그리는 것이었다. 이런 시도는 앞선 미완의 작품부터 시작해 이후 그의 작품들에서도 이어지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글쓰기를 통해 『상록수』를 끝까지 연재할 수 있었다.
『상록수』에는 채영신, 박동혁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본 글에서는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진 주인공 박동혁의 행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앞서 봤던 작품에 나오는 직접적이고 속 시원한 구절은 덜하지만, 소설 곳곳에서 농촌의 변화를 이끌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을 소설 속에서 보도록 하자.
가을 학기가 되자, ○○일보사에서 주최하는 학생계몽운동에 참가하였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오늘 저녁은 각처에서 모여든 대원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그 신문사 누상에서 열린 것이다.
…
“금년에 활동한 계몽 대원 중에 뛰어나게 좋은 성적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글을 깨쳐 준 아동의 수효로는 우리 신문사에서 이 운동을 개시한 이래 최고 기록을 지은 분을 소개하겠소이다.” 하고는 다시 안경 너머로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들고 선생이 출석부를 부르듯이,
“××고등농림의 박동혁(朴東赫) 군!”
…
그는 박수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
수첩을 꺼내 들고 자기의 고향인 남조선의 서해변에 있는 한곡리(漢谷里)라는 궁벽한 마을의 형편을 숫자적으로 대강 보고를 한다.
…
“그러나 여러분! 끝으로 꼭 한마디만 허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고 목청을 높여 힘차게 청중에게 소리친다. 대원들은 물론, 사회자까지도 다시금 긴장해서 엄숙해진 동혁의 얼굴만 주목한다.
“눈 뜬 소경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는 것은 두말헐 것 없이 필요헙니다. 계몽운동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헌 사업 중의 하나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지식 분자인 우리들이 이러한 기회에 전 조선의 농촌, 어촌, 산촌으로 방방곡곡이 파구들어가서, 그네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어떡허면 그네들이 그 더헐 수 없이 비참헌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 허는 문제를 머리를 싸매구서 생각해 봐야 헙니다. 지금부터 육칠 년 전, 러시아의 청년들이 부르짖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라는 말)를 지금 와서야 우리가 입내내듯(소리나 말로써 흉내내듯) 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남에게 뒤떨어진 것을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높직이 앉아서 민중을 관찰하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태도를 단연히 버리고, 그네들이 즉 우리 조선 사람이 제 힘으로써 다시 살어나기 위한 기초공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 이 자리에 모인 바루 여러분의 손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물질로 즉 경제적으로는 일조일석에 부활하기가 어렵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온갖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정신(精神), 요샛말로 이데올로기를 통일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
사회자는 아까보다도 더 정중한 태도를 짓고 동혁이가 섰던 자리로 가서 장내가 정숙해지기를 기다려, “박동혁 군의 말은 개념적이나마 누구나 존중해야 헐 좋은 의견으로 압니다.” 하고는,
“그러나 현재의 정세로 보아서, 어느 시기까지는 계몽운동과 사상운동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아니 됩니다. 계몽운동은 계몽운동에 그칠 따름이지, 부질없이 혼동해 가지고 공연헌데까지 피해를 끼칠 까닭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상록수』는 동아일보가 1935년 창간 15년을 기념으로 주최한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것이 『상록수』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과 연관시키게 된 출발점이다. 신문사 측에서는 “조선의 농·어·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독자적 색채와 정조를 가미할 것, 인물 중에서 한 사람쯤은 조선 청년으로서의 명랑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설정할 것” 등을 유의 사항으로 내걸었고 이것이 『상록수』를 브나로드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데 준거가 되었다.
그러나 작가의 지향과 브나로드 운동의 지향은 차이가 있었다. 심훈은 브나로드 운동이 농민을 대상화하는 운동일 뿐이라 비판하면서, 조선 농민이 스스로 필요성을 느껴 농촌 공동체를 구성하는 자발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동혁이 “높직이 앉아서 민중을 관찰하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태도를 단연히 버리고, 그네들이 즉 우리 조선 사람이 제 힘으로써 다시 살어나기 위한 기초공사를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드러난다.
한편 작품에는 또 하나의 주인공인 채영신이 등장한다. 채영신은 기독교 신자로서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한 신여성이다. 채영신은 “시골서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과년한 처녀”같은 행색이지만, 그 눈빛만큼은 “인텔리 여성다운 이지”가 빛나는 인물이다. 채영신과 박동혁은 발표회에서 처음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한다. 첫 만남으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참,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군요.”
동혁이도 약간 애상적인 감정에서 눈을 번쩍 뜨며 혼자 말하듯 한다.
“왜요?”
영신의 눈은 동그래졌다.
“몇 주일 전까지는 백판 이름두 모르던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앉어서 약물터의 달을 똑같이 쳐다볼 줄이야 꿈이나 꾸었겠어요?”
“참말요, 이것두 하나님의 뜻인가 봐요.”
“참, 영신 씨는 크리스찬이시지요?”
“전 어려서버텀 믿어 왔어요. 왜 동혁 씨는 요새 유행하는 마르크스주의자세요?”
“글쎄요, 그건 차차 두구 보시면 알겠지요. 아무튼 신념을 굳게 하기 위해서나 봉사의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허는 것두 좋겠지요. 그렇지만 자본주의에 아첨을 허는, 그따위 타락헌 종교는 믿구 싶지 않어요.”
박동혁은 마르크스주의자냐는 영신의 물음에 모호하게 답한다.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렇게 모호하게 처리한 이유는 검열을 의식해서다. 박동혁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바로 이어서 기독교를 “자본주의에 아첨하는” 타락한 종교라고 비판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책 본문 중에는 “편협한 유물론자처럼 덮어놓고 종교를 아편과 같이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동혁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혁의 사회주의적 지향은 농촌을 일본의 뜻대로 통제하려는 농촌진흥회에 맞서는 사건에서 드러난다. 이 사건은 시간을 조금 거슬러 동혁이 농촌운동을 하는 한곡리에서 동혁의 주도로 조직된 농우회가 자신들의 농우회관을 짓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일 끝나고 마시던 술, 중간중간 피워대던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서 농우회관을 짓기로 결의한다. 그렇게 자재비용을 겨우 마련한 뒤에는 기술자를 부르는 게 아니라 농우회 회원 스스로 농우회관을 짓는다.
그런데 평소 사사건건 농우회의 활동에 훼방을 놓던 마을 유지 강기천은 농우회관이 정말로 지어지자 이를 시기해 빼앗을 궁리를 한다. 처음에는 동혁을 불러 농업진흥회장이라는 감투를 주면서 포섭하고자 하지만 동혁은 거절한다. 그리고 몇 배의 돈을 쳐서 회관 건물을 사겠다는 것도 동혁은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나 동혁이 영신을 만나러 마을을 잠시 비운 사이에, 강기천은 농우회 회원 중 자신의 논에 소작을 두는 자들을 포섭해 억지로 농우회에 가입하고 스스로 농우회장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동혁의 동생 동화는 농우회원 중 변절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지만, 동혁은 다른 수를 쓰겠다고 동생을 뜯어말린다.
‘집 한 채를 가지고 다툴 때가 아니다. 동지가 배반한 것을 분하게만 여기고 흥분할 것이 없다.’
하고 무릎을 탁 치고 일어서서 좁은 방 안으로 왔다갔다하다가,
‘이번 기회에 영신에게도 선언한 것처럼, 제일보부터 다시 내디디지 않으면 안 된다. 표면적인 문화운동에서 실질적인 경제운동으로.’
…
‘농촌운동을 허는 사람이라도 너무 외곬으로 고지식하기만 허면, 교활한 놈의 꾀에 번번이 속아 떨어진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제 양심을 속이지 않는 정도로는 패를 써야 하겠다.’ 하고 종래와는 수작하는 태도를 변해 보리라 하였다.
동혁은 농촌의 경제적 구조가 취약한 이상 농민들이 자유로울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경제문제, 즉 고리대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동혁은 옳은 소리만 해서는 기천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 직감하고 꾀를 내어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다.
동혁은 기천에게 술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집으로 찾아간다. 술자리에서 동혁은 몰래 술을 마시지 않고 강기천만 마시게끔 유도한다. 기천이 얼큰하게 취하자 동혁은 “회장 체면에 앞으로도 고리대금을” 할 거냐며 강기천의 명예욕을 자극하는 한편, “몇몇은 혈기가 대단해서 제 손으로는 꺾을 수가 없는데, 이번에 좀 후허게 인심을 써주셔야 과격한 행동까지 하려 벼르는 청년들을 어떻게 주물러 볼 수가 있겠”다거나, “여러 사람을 걸어 재판을 하려면 소송비용이 얼마나 들지” 등 적절한 위협을 섞어가며 강기천을 설득한다. 결국 동혁은 강기천의 밭에 소작을 얻고 있는 농민들의 빚에 대해 원금만 받고 쌓인 이자는 탕감하겠노라는 강기천의 약속을 받아낸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농촌진흥회장 선거를 한다. 여기서 기천은 매수한 표에 힘입어 회장에 당선된다. 함께 후보로 나섰던 동혁은 부회장 겸 서기로 지목된다. 동혁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부회장 자리는 고사하고 서기만 맡기로 한다. 그리고는 업무를 도와야 한다는 명분으로 농우회원들을 임원으로 선출해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행사가 흐지부지 끝날 즈음, 동혁이 일어나 사람들에게 연설하기 시작한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동네에도 진흥회가 생긴 까닭과, 진흥회란 무엇을 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면장께서 자세히 설명하신 것을 들으셨으니까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러나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복종하는 것보다, 우리들의 일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지 말고 자발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력갱생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농촌에서 가장 폐단이 많은 습관과 우리의 생활이 이다지도 빈곤하게 된 까닭이 도대체 어디 있나? 하는 것을 냉정허게 생각해 보고, 그것이 그른 줄 깨닫고 그 원인을 밝힌 다음에는, 즉시 악습을 타파하고 나쁜 일을 밑둥부터 뜯어고치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첫째는 고리대금업자입니다!”
하고 언성을 높인다. 여러 사람의 시선은 말끔 새로 난 회장의 얼굴로 쏠렸다.
“옳소―”
그것은 갑산의 목소리였다. 저녁때가 되니까 창 밖에는 바람이 일어 불김이 없는 회관 안은 냉기가 돌건만, 누구 하나 추워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동혁은 신중히 말을 이어 고리대금업자의 발호와 간교한 착취수단으로 말미암아 빈민들의 고혈이 얼마나 빨리우고 있나 하는 것을 숫자를 들어가며 폭로하고,
“앞으로 진흥회 회원은 과거에 중변(비싼 이자)으로 쓴 돈도 금용조합에서 놓는 저리(低利) 이상으로 갚지 말고, 더구나 회의 책임자로는 절대로 돈놀이를 해먹지 못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고 또 실행해야 합니다.”
라고 부르짖은 다음, 목소리를 떨어트리더니,
“오늘 회장이 되신 강기천 씨는 우리 농우회원들이 진 여러 해 묵은 빚을 변리(남에게 돈을 빌려 쓴 대가로 치르는 일정한 비율의 돈)는 한 푼도 받지 않으시고 깨끗이 탕감해 주셨습니다.” 하고 증서를 내보이면서,
“이번 기회에 그 갸륵한 처사를 여러분께서도 칭송하실 줄 아는 동시에, 강기천 씨는 이번에 진흥회장이 되신 기념으로 여러분의 채권까지도 모조리 포기허실 줄 믿고, 조끔도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하고는 슬쩍 기천을 흘겨본다. … 기천은 여러 사람을 바로 볼 용기가 없는 듯이 실눈을 감고 아랫입술만 자근자근 깨물고 앉았다. 팔짱을 꼈다, 손을 옆구리에 찔렀다 하는 것을 보면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 같은 모양이나 체면상 퇴석은 하지 못하는 눈치다.
…
“또 한 가지 중요헌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빚을 갚고 장릿벼(장리: 돈이나 곡식을 꾸어 주고, 받을 때에는 한 해 이자로 본디 곡식의 절반 이상을 받는 변리)를 얻어먹지 않게 된대도, 지금처럼 논 한 마지기도 제 것이 없어 가지고는 도저히 먹구살 도리가 없습니다. … 그러니까 지주나 소작인이 함께 살려면 적어도 한 십 년 동안은 소작권을 이동시키지 말고 금년에 받은 석수로 따져서 도지로 내맡길 것 같으면, 누구나 제 수입을 위해서 나농(懶農, 농사일을 게을리 함)을 헐 사람이 없을 겝니다. 이만헌 근본책을 실행치 못하면 ‘농촌진흥’이니 ‘자력갱생’이니 허는 것은 모두 헛문서에 지나지 못합니다.”
동혁은 이로써 실제로 부채탕감을 이뤄낸다. 사실 이는 동혁 스스로가 밝혔듯 술수에 불과하므로 한계적이며, 현실 가능성으로 보면 그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속 농우회 회원들이 몇 년에 걸쳐 술, 담배를 끊고 저축해 봤자 원금을 겨우 갚는 정도인 모습이 보여 주는 것처럼, 당시 농민의 경제적 토대는 매우 취약했다. 더구나 진흥회의 창설과정은 그나마 자발성마저 침해받았다. 심훈의 의도는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문제를 극복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고리대 문제를 통해 당시 농촌의 경제문제를 짚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 의미를 갖는 이유라 할 것이다.
한편 청석골이라는 마을에서 농촌운동을 하는 영신도 동혁의 이런 활동에 자극받아 농촌회관을 건설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제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아 영양실조와 각기병에 걸려 몸이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영신은 건강을 회복할 겸 기독교회의 후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만리타향에서 건강은 더욱 나빠지기만 하고 청석골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진다. 결국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농촌운동에 매진하리라 다짐하고 귀국해 다시 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나 이미 결론은 예정된 일이었을까. 영신은 또다시 쓰러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동혁은 이 소식을 뒤늦게 듣고 입관이 끝난 뒤에야 도착한다. 영신의 장례가 끝난 후, 동혁은 다시 다짐한다.
이튿날 아침 동혁은 산소로 올라가서,
‘당신이 못다 한 일과 두 몫을 하겠다.’
고 맹세한 것을 이제로부터 실행하겠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자신 있게 한 뒤에 홱 돌아서서 그 길로 내처 걸어 한곡리로 향하였다. … 어머니의 병이 염려는 되었으나, 그는 바로 집으로 가기가 싫어서 역로에 몇 군데 모범촌이라고 소문난 마을을 들렀다. 어느 곳에서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청년이 오막살이 한 채를 빌려 가지고 혼자서 야학을 시작한 곳이 있고, 어떤 마을에서는 제법 크게 차리고 여러 해 동안 한글과 여러 가지 과정을 강습해 내려오다가, 당국과 말썽이 생겨 강습소 인가를 취소당하고 구석구석이 도적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
그는 그러한 지도분자들과 굳게 악수를 하고 하룻밤씩 같이 자면서 의견을 교환하고 새로운 방침을 토론도 하였다. 어느 곳에를 가나,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는 계몽적인 문화운동도 해야 하지만, 무슨 일에든지 토대가 되는 경제운동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저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는 동시에 그는, ‘이제부터 한곡리에만 들어앉었을 게 아니라 다시 일에 기초가 잡히기만 하면, 전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널리 듣고 보기도 하고, 또는 내 주의와 주장을 세워 보리라. 그네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서 같은 정신과 계획 아래에서 농촌운동을 통일시키도록 힘써 보리라.’
…
앞으로 가지가지 새로이 활동할 생각을 하며 걷자니, 그는 제풀에 어깻바람이 났다. 회관근처까지 다가온 동혁은 누가 등뒤에서,
‘엇, 둘! 엇, 둘!’
하고 구령을 불러 주는 것처럼 다리를 쭉쭉 내뻗었다.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
동혁은 영신의 몫까지 농촌운동을 하기로 결의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모범촌이라 불리는 촌을 들러 경제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의 주의, 주장에 따라 농촌운동을 통일시키도록 힘써보리라 다짐한다.
이러한 동혁의 결의, 그리고 영신과 동혁 사이에서 종교를 주제로 한 갈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심훈이 (자신의 지향과는 다른) 기독교도 영신의 농촌운동도 상당한 비중으로 묘사하는 것을 두고 이것이 작가 나름의 연합전선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즉 친일적이고 친자본주의적인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기독교 세력을 분리하고, 이들과의 제한적 연대 속에서 농촌운동을 활성화하려는 작가의 욕구가 투영됐다는 것이다. 이를 민족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전술적 제휴를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시도로 이해한다면, 이런 해석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사회주의자의 전향 문제
1920년대 말 세계 대불황의 영향으로 일본 역시 경제 불황에 빠진다. 그런데 세계 대불황의 와중에도 소련은 1차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만주 지역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에 더해 이러한 소련의 움직임까지 나타나자 일본의 군부 파시스트 세력은 큰 불안을 느끼고, 만주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여기며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만주사변을 도발한 일본은 국내 정세의 안정화를 위해 사상통제정책을 강화하는 데에도 힘쓰기 시작한다. 이런 배경에서 제출된 것이 전향제도였다.
1930년대 이전까지 일본은 검거와 처벌을 우선하는 정책으로 사상범을 다뤘다. 그러나 이런 강압적인 방법만으로는 사상범을 처리하기 어렵다고 느낀 일본당국은 다른 방식을 고려하게 되는데, 그것이 전향제도였다. 전향제도는 1931년 3월 사법차관 통첩 제270호에 의해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즉 검사에게 피고인의 태도 여하에 의해 기소를 유보할 권리가 부여됐다. 전향제도는 이후 1936년 사상범보호관찰법에 의해서 정식으로 제도화된다. 사상범보호관찰법은 전향한 사상범에 대해 정신적,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다른 사람들과 격리하여 재범을 예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전향정책이 큰 성과를 거뒀다. 1933년 일본공산당 내 최고의 이론가로 평가받던 사노 마나부와 노동운동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옥중에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일본공산당이 거의 소멸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반면 조선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일본 사회주의자는 전향하면 돌아갈 국가가 존재했으나,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의 추구와 민족 독립이 함께 가는 것이었으므로 전향은 곧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 중반까지 전향자는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오히려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보면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맹렬히 활동을 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중일전쟁 초반 일본이 전쟁에서 선전하는 가운데, 사회주의자는 반파시즘인민전선 하 소일(蘇日)전쟁을 전망한다. 그러나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일본과는 만주국 관동군과 소련군 간의 국경분쟁으로 일어난 노몬한(할힌골)전투에 대한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소련이 일본과 맞서 싸우는 정세가 되면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한다는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전망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조선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중일전쟁 이후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동요를 제대로 수습할 만한 구심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1929년에 조선공산당이 해산했고, 1930년대 초에 활발히 벌어진 당 재건 운동이 일본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1932년경에 이르면 적어도 대중적인 공간에서는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지도자급 사회주의자들은 지하로 들어가 은밀하게 활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이 제기한 동아신질서 구상은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에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동아신질서란 1938년 당시 일본 수상이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밝힌 대중국 전략이다. 이는 중일전쟁이 대치 상태에 빠지자 제시한 일종의 회유책으로, 중국과 화해하고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동아시아 블록을 건설하자는 제안이었다. 이것이 조선 사회주의자에게 중요하게 다가왔다. 일본 국내정책에 있어서는 (서구 열강에 맞서는) 반자본주의적 혁신정책으로 인식되었고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에 대한 무력 정복의 포기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동아신질서 구상을 조선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식민지를 청산하고 공존공영으로 나아가는 체제, 즉 다민족 일국가 체제를 현실적 대안으로 사고했는데, 일종의 자치론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일본은 파시즘 체제를 더욱 강화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일본은 허구적인 내선일체론조차 부정하면서 조선에 대한 수탈을 심화한다. 이는 곧 조선 민족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노선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했다. 그러자 다시 격렬한 저항이 시작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자의 수가 1940년 298명으로 최저치를 기록한 이래 1941년 1386명, 1942년 955명으로 격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전향 정책으로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전향하자 뒤따라 일본공산당의 대량 전향이 발생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조선에서 사회주의자의 전향이 일본에 저항하거나 대항할 한국인의 의지, 태도, 방식 등에 좋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일부 연구에서는 사회주의자의 전향을 구분해 위장전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김윤식은 코민테른의 승인이 없는 전향이 위장전향일 수는 없었을 것이라 평가한다. 당의 승인이 없는 경우 그 전향의 성격을 보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전향자의 내면세계를 그리다, 김남천의 「경영」과 「맥(麥)」
김남천의 「경영」(《문장》, 1940년 10월)과 「맥」(《춘추》, 1941년 2월)은 줄거리가 이어지는 연작소설이다. 앞의 각주에서 설명했듯, 작품이 발표된 시기는 작가인 김남천이 투옥되었다가 전향한 시점이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소설에 좀 더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경영」에는 오시형과 최무경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오시형은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2년간 투옥된 인물이고 최무경은 그를 뒷바라지하는 여성이다. 「맥」에는 두 인물에 더해 이관형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관형은 “서울서도 손꼽히는 무역상 … 말하자면 부르주아”의 자식으로 학문적으로 깊은 이해를 하려 노력해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그들의 답답한 정신 세계에 자꾸만 부딪”치고 있는 와중에 교내 파벌다툼에 휘말려 대학 강사에 채용되지 못해 회의주의에 빠진 인물이다.
먼저 시형의 전향 논리부터 살펴보자. 2년 만에 출소한 시형은 그가 출소하면 함께 하기 위해 무경이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직접 마련한 아파트로 간다. 이곳에서 시형은 자신의 변화한 사상에 대해 말한다.
“내 자신이 서 있던 세계사관(世界史觀)뿐 아니라, 통틀어 구라파적인 세계사가들이 발판으로 했던 사관은 세계 일원론(世界一元論)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경우에 동양 세계는 서양 세계와 이념(理念)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세계는 대체로 세계사의 전사(前史)와 같은 취급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었죠. 종교사관이나 정신사관뿐 아니라 유물사관의 입장도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양이란 하등의 역사적 세계도 아니었고 그저 편의적으로 부르는 하나의 지리적 개념에 불과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세계 일원론적인 입장을 떠나서, 역사적 세계는 각각 고유한 세계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고 증명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현대의 세계사의 성립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가졌던 세계사관에 대해서 중대한 반성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
물론 남이 말하는데 구두를 닦고 있을 수도 없어서, 그대로 귀를 기울이고는 있으나 무경으로선 시형의 하는 말을 어떻다고 생각할 준비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삐끔히(숨어서 살며시 보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형은 혼자서 저 자신에게 타이르기나 하듯이 창문을 바라보며 이야기에 열을 올려 제 이론을 전개해 보고 있었다.
“가령 동양이라든가 서양이라든가 하는 개념도 로마의 세계에서 성립된 것이고, 또 고대니, 중세니, 근세니 하는 특수한 시대 구분도 근세의 구라파 사학에서 성립된 구분이니까, 이런 것에서 떠나서 동양과 동양 세계를 다원 사관의 입장에서 새로이 반성하구 성립시킬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동양인의 학문적인 사명입니다. 동양인 학도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의무입니다.”
오시형은 세계일원론은 유럽 역사가들의 입장일 뿐이며 동양세계를 다원사관의 입장에서 새로 성립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시형이 다원사관을 강조하는 것은 곧 역사발전의 보편성을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동양세계를 다원사관의 입장에서 성립시킨다는 말은 곧 일본의 동아신질서 구상과 맞물린다. 이런 시형의 전향은 「맥」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피고가 학문상으로 도달하였다는 새로운 관념에 대해서 간명히 대답해보라.”
재판장은 온후한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서류 위에 법복 입은 두 손을 올려놓고 그는 오시형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구라파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것이 역사에 있어서의 말하자면 일원사관일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서 떠나서 우리의 손으로 다윈사관의 세계사가 이루어지는 날 역사에 대한 이 같은 미망은 깨어지리라고 봅니다. 역사적 현실은 이러한 것을 눈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피고의 그러한 생각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과 세계사적 동향은 어떻게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피고는 말을 끊고 숨을 돌릴 듯하고는 다시 이야기의 머리를 잠깐 돌려보듯 하였다.
“저의 사상적인 경로를 보면 딜타이의 인간주의에서 하이데거로 옮아갔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이데거가 일종의 인간의 검토로부터 히틀러리즘의 예찬에 이른 것은 퍽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철학이 놓여진 현재의 주위의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문제를 집어 올린다는 것은 최근의 우리 철학계의 하나의 동향이라고 봅니다. 와츠지 박사의 풍토사관적 관찰이나 다나베 박사의 저술이 역시 국가, 민족, 국민의 문제를 토구(討究, 사물의 이치를 따져가며 연구함)하여 이에 많은 시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과거의 사상을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 건설에 의기를 느낀 것은 대충 이상과 같은 학문상 경로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재판장은 만족한 미소를 입술에 띠었다.
시형의 전향논리를 긍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맥」에 등장하는 회의주의자 이관형과 무경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관형은 시형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인물이다.
“선생님, 제가 하나 여쭈어볼 말씀이 있습니다.”
“무어 말입니까? 저는 그런 방면(철학)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무경이는 그러한 사내의 겸사의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열심스러운 태도로 물어본다.
“동양학이라는 학문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
무경이의 묻는 말에 처음은 농말조(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로 받아 넘기려다가 그의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한 데 눌리어서 이관형이도 잠시 제 머리를 정리해보듯 한다.
“전문 부분이 아니어서 상식적인 것밖에는 대답할 수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로도 잘못된 해석이나 또 엉터리없는(정도나 내용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추상이 많을 줄 압니다마는. …… 내 생각 같아선 서양 사람이 자기네들의 학문적 방법을 가지고 동양을 연구하는 것과 동양인이 구라파의 학문 세계에서 동양을 분리할 생각으로 동양을 새롭게 구성해보려는 노력과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독자적인 학문을 이룬다든가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줄 생각합니다. … 가령 동양학을 건설한다지만 우리들의 대부분은 구라파의 근대를 수입한 이래 학문 방법이 구라파적으로 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의 거의가 구라파적 학문의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니 그 방법을 버리고서 동양을 연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동양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학문 방법으로 동양을 연구하여야 할 터인데 내가 영국 문학을 한 사람이라 그런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이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구라파적 학문 방법을 떠나서는 지금 한 발자국도 옴짝달싹 못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시다 같은 철학자도 서양 철학의 방법을 가지고 일본 고유의 철학 사상을 창조한다고 애쓴다지 않습니까. 한동안 조선학이라는 것을 말하는 분들도 우리네 중에 있었지만 그 심리는 이해할 만하지만 별로 깊은 내용이 없는 명칭에 그칠 것입니다. 요즘에 율곡 같은 분의 유교 사상을 서양 철학의 방법을 가지고 연구해보려는 분들이 생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양학의 성립이란 애매하고 또 내용 없는 일거리가 되기 쉽겠습니다.”
“그러나 서양 학자들이 동양을 연구하는 데는 좀 더 다른 의미도 들어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서양의 몰락과 동양의 발견이라든가 하는.”
“네 잘 알겠습니다. 요즘 그렇게들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겠지요. 구라파 정신의 몰락이라든가 구라파 문화의 위기라든가 하는 소리는 이 쭈루루니 책장에 꽂혀 있는 뭇별(많은 별[星]) 같은 사상가들이 오래 전부터 떠들어오는 말이고, 구라파 정신의 재생이나 갱생책을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동양을 발견하는 일이 많다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그들은 결코 구라파 정신을 건질 물건이 동양의 정신이라고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가지로 세계를 건질 정신은 역시 구라파 정신이라고 깊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양 사람으로서는 물론 당연한 일이고 우리 동양 사람은 감정적으로래도 항거하고야 견뎌 배길 일이지만 그러나 구라파 학자의 동양 발견이라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 이런 점은 우리 동양 사람이 깊이 명심할 일입니다.”
무경이는 가만히 듣고 앉아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오시형이의 이론을 그대로 옮겨서 또 한 번 질문을 던져본다.
“앞으로의 현대의 세계사를 구상해보는 데 있어서 서양사학에서 떠나 다원 사관에 입각하여 여러 개의 세계사를 꾸며놓는 것은 어떨까요?”
학문적인 술어가 마음대로 입에 오르지 않아서 그는 더듬더듬 자기의 의사를 표현해놓는다.
“동양에는 동양으로서 완결되는 세계사가 있다, 인도는 인도의, 지나(중국)는 지나의, 일본은 일본의, 그러니까 구라파학에서 생각해낸 고대니 중세니 근세니 하는 범주를 버리고 동양을 동양대로 바라보자는 역사관 말이지요. 또 문화의 개념두 마찬가지 구라파적인 것에서 떠나서 우리들 고유의 것을 가지자는 것. 한번 동양인으로 앉아 생각해 볼 만한 일이긴 하지마는 꼭 한 가지 동양이라는 개념은 서양이나 구라파라는 말이 가지는 통일성을 아직껏은 가져보지 못했다는 건 명심해둘 필요가 있겠지요. … 불교나 유교는 이러한 정신적 가치로 보면 훨씬 손색(다른 것과 견주어보아 못한 점)이 있겠지요. 조선에도 유교도 성했고 불교도 성했지만 그것이 인도나 지나를 거쳐 조선에 들어와서 하나도 고유의 사상이나 문화의 전통을 이룰 만한 정신적인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허기는 그건 불교나 유교의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조상들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어느 한귀퉁이를 비비고 들어가볼 틈새기도 없을 것 같았다. … 동양인으로서 동양을 저토록 폄하(貶下)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하나의 비극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였다. 그는 잠시 오시형이의 편지를 생각해보았다. 비판만 하면 자연히 생겨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의 지식인들의 하나의 통폐라고 말하면서 비판보다도 창조가 바쁘다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말하였던 것일까.
위의 대화에서 이관형은 시형이 말한 동양사관의 현실성을 따지며 그것은 현실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형이 자신만의 길을 주장하거나 대안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무경은 이런 관형을 보면서 시형이 비판보다도 창조가 바쁘다고 쓴 편지의 내용을 떠올린다. 이런 모습은 작가가 시형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관형과 같이 비판만 하는 것도 아닌 정신세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즉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동시에, 아무런 대안 없이 무조건적 비판만 일삼는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형과 관형을 매개하는 무경에 대해서도 주목할 수 있다. 시형의 전향은 사상뿐만이 아니라 무경과의 관계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때의 시형은 “평양에서 부회 의원(평양 지역을 관장한 식민지 시대 행정기구였던 평양부의 의원)과, 상업 회의소에 공직을 가지고 있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거의 연을 끊은 채로 활동을 이어가면서 무경과 결혼을 약속한 상태였다. 그러나 옥중에서 전향하고 출소한 시형에게 “이 년 동안 친필로는 편지도 안 하였다던” 아버지가 찾아와 둘만의 대화를 나눈 뒤 돌아간다. 무경은 시형의 아버지가 시형과 자신의 결혼을 허락할 것인가 불안감을 느끼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형은 요양을 명분으로 본가로 돌아간다. 무경은 그를 보내면서 “아주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슬픔을 느낀다. 어쩌면 추측일 수도 있던 이 슬픔은 「맥」에서 명백해진다.
피고석 뒤에 놓인 방청석으로부터 젊은 여자가 약간 허리를 드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이윽고 재판장은 오후에 심리를 계속하고 일단 휴식에 들어간다는 선언을 하였다. 젊은 여자는 완전히 일어섰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키가 날씬한 여자였다. 무경이는 가슴이 뚱하고 물러앉는 것을 느꼈다. 그 여자의 옆 자리엔 오시형이의 아버지, 그리고 또 그 옆자리엔 어떤 늙은 신사. 피고석으로부터 돌아온 오시형이는 긴장한 얼굴을 흐트려놓으며 그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무경이는 뒤숭숭해진 공판정의 소음에 앞서 복도로 나왔다. ‘그 여자이다! 도지사의 딸!’ ― 그리고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끝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시형은 자신을 옥바라지한 무경과의 연을 저버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도지사의 딸과 결혼한다. 이로써 무경은 시형과의 관계가 끝나고,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삶을 새로 개척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무경은 「경영」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 시형이를 위하여 얻었던 방이었다. 시형이를 맞기 위해서 저금 통장을 빈텅이를 만들면서 장식해 보았던 방이었다. 그는 이제 가 버리고 여기엔 없다.
――시형이를 위하여 나섰던 직업전선이었다. 시형의 차입을 대기 위해서 선택하였던 직업이었다. 시형이도 나오고 인제 직업도 목적을 잃어버렸다.
…
울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제 몸에서 빈 껍질만 남겨 두고 모든 오장과 육부가 몽땅 빠져 나가는 경우가 있었으면 하고 막연히 그런 경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런데 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급사가 문을 열었다.
“주인님이 나오셔서 장부 좀 보시잡니다.”
급사의 말에 그는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킨다. 그는 문에 쇠를 잠그고 층계를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점점 제 다리에 기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방도, 직업도, 이제 나 자신을 위하여 가져야겠다!)
그런 생각이 사무실을 들어설 때에 그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기 삶에 대해 얼마간 능동적인 태도로 변화하는 무경의 모습이다. 무경은 「맥」에서도 이런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는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 나아가겠다는 하나의 높은 생활력 같은 것을 천품으로서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생활력은 제 앞에 부딪쳐오는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꿰뚫고 나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력으로 나타날 때가 있었다. 사람은 제 앞에 부딪쳐오는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맞받아서 해결하고 꿰뚫고 전진하는 가운데서 힘을 얻고 굳세지고 위대해진다고 생각해본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치고 함정에 빠져서 그가 생각해본 것은 모든 운명의 쓴 술잔을 피하지 않고 마셔버리자 하는 일종의 ‘능동적인 체관(諦觀, 품었던 생각을 아주 끊어버리다)’이었다.
무경은 시형과의 결별을 넘어서기 위해 그의 사상궤적을 알고자 한다. “동양학은 어떻게 해서 오시형이를 저토록 고민 속에 파묻히게 만드는 것일까, 동양학으로 가는 길이 무엇이건대 그것은 오시형이와 최무경이의 관계를 이토록 유린하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일까”. 시형의 사상을 비판하는 관형과의 대화는 이런 맥락에서 나누게 된 것이었다.
이런 무경의 모습 역시, 시형과 관형 어느 쪽에도 동일시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사회의 한 이데올로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김남천은 자신의 사상을 대변할 ‘적극적 주인공’을 창조해낼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오히려 실제의 생활을 그려냄으로써 리얼리즘이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념으로 무장한 주인공으로서는 리얼한 세계를 포착해낼 수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김남천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했던 것은 역사에 대한 성찰이었다.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반 고호라는 화가의 말인데 … 인간의 역사란 저 보리와 같은 물건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 흙 속에 묻히지 못하였던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갈려서 빵으로 되지 않는가. 갈리지 못한 놈이야말로 불쌍하기 그지 없다 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그러고는 또 한 번 뜨즉뜨즉이(띄엄띄엄) 그것을 외고 있었다. 무경이도 그의 하는 말을 외가지고 다소곳하니 생각해본다. 그러나 한참만에,
“그게 어떻단 말씀이에요. 흙 속에 묻히는 것보다 갈려서 빵이 되는 게 낫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잖으면 흙 속에 묻혀서 많은 보리를 만들어도 그 보리 역시 빵이 되지 않는가 하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이관형이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수록 더욱더 명구가 되는 겁니다. 해석은 자유니까요.”
“그럼 전 이렇게 해석할 테예요. 마찬가지 갈려서 빵가루가 되는 바엔 일찍이 갈려서 가루가 되기 보담 흙에 묻히어 꽃을 피워보자.”
이관형이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었다.
“구라파 정신이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적에 그들이 니힐리스틱하게 던져본 말입니다. 이렇게 구라파가 몰락해버리는데 정신을 신장해보는 사업에 종사해본들 무엇하랴, 이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의 해석이랍니다. 선생님의 해석은 건강하고 낙천적이고 미래가 있어서 좋습니다.”
“선생님께선 그런 사상을 가졌으니까 대학에서도 실패를 보신 거예요.”
인간의 역사를 보리에 비유한다고 할 때, 위의 대화에서는 세 가지 방식이 제시된다. 첫째, 흙 속에 묻히는 것보다는 갈려서 빵이 되는 게 낫다. 둘째, 흙 속에 묻혀 많은 보리를 만들어도 결국 빵이 된다. 셋째, 가루가 되기보다 흙에 묻혀 꽃을 피워보겠다. 첫 번째 방식에서 역사는 발전하거나 쇠퇴한다기보다는 현재 소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두 번째 방식의 경우 보리의 유적 연속성은 유지된다. 그런데 세 번째 방식의 경우 보리는 질적으로 다른 꽃의 상태로 변화한다. 여기서 김남천은 어떤 선택도 명확하게 확정하지 않음으로써, 역사가 단순히 반복되는지 아니면 어떤 질적인 비약을 가지는지도 확정하지 않는다. 김남천에게 인간의 역사에 관한 정당한 성찰은 도래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력에 의존해 구성해낼 때가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반복의 가능성과 비약의 가능성이 동시에 내포된 상태로 묘사할 때 가능했다. 즉 식민지 조선 사회의 미래가 현재 상태의 반복일지 어떤 질적인 비약일지는 알 수 없고, 비약이 발생해도 그 사회가 어떤 상태일지는 알 수 없지만, 김남천은 보리의 비유로써 현재와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역사)에 관해 성찰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김남천의 연작소설은 시형과 관형의 대립하는 견해를 보여 주지만, 이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동시에 무경의 견해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평가를 드러내지 않는데, 현 상황이 그대로 유지될지 아니면 더 나은 상황으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해도 명확하지 않은 셈이다. 시형은 ‘동아신질서’를 수용하여 전향하고 관형은 ‘-주의’ 운동을 평론하기는 하지만 운동 자체와는 거리를 둔 회의주의자다. 무경은 독립적인 삶을 꾀하지만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런 세 사람을 각각 조선 사회에 만연한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전향자와 회의주의자, 그리고 당장 하루하루 사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는 해석도 충분히 곱씹어볼만 하다.
다만 무경이 그래도 보리의 꽃을 피워보겠다고 하는 데에 주목해볼 수 있겠다. 현재로서는 무엇도 단정할 수 없지만(아무런 계획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라 하겠다. 이렇듯 가능성을 놓지 않고 있었기에 김남천은 해방 직후 사회주의 운동을 다시 시작해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서기장으로 활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비운의 군대, 조선의용대
만주사변 이후 의열단은 중국국민당 정부와 손을 잡고 군사, 정치 인재 양성에 착수하는 동시에 관내 지역 조선 혁명단체를 통일하는 운동에도 주력했고, 이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운동가동맹, 조선혁명가연맹이 모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고, 연맹은 중국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와 협의하여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때 군사위원회 정치부 비서장이던 하요조(賀耀祖)는 조선의용군의 성립에 대해 “1. 현재 의용군이라 칭할 필요는 없고 의용대라 칭한다. 2. 지도위원회는 조직하여도 좋다. 3. 진국빈(즉 김약산, 본명 김원봉, 일명 최림, 당시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민족전선연맹이사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대장으로 파견한다”고 지시하였다. 당초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중국항전에 직접 참가해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 목표였으나, ‘군’이 되기에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투를 주목적으로 하지 않고 선전을 주목적으로 하는 대오로 편제한 것이었다. “중국 영토에서 항일하니 중국항일작전의 영도에 복종해야” 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 군사위의 직접 통제와 감독을 받아야만 했고, 그런 처지의 외국인 부대에 ‘완전무장’이 허용될 리는 만무했다. 그렇지만 의용대원들은 대적 선전공작을 수행하는 중에 전투요원이 될 기회를 최대한 얻으려 했고, 전투요원을 방불케 하는 활동을 자진하여 적극적으로 수행하곤 했다.
그러던 1941년,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가 김원봉의 총대부(總隊部)와 갈라져 독자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주둔하는 지역으로 진입한다. 이런 분화는 김원봉과 중국공산당과 연계가 있던 최창익 등 공산주의자 사이의 노선 차이로 인해 발생했다. 일단 두 세력 사이에 화북지역의 조선 무장대오와 연계하여 조선 진출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화북으로 진출할 필요가 있다는 데까지는 묵시적인 합의가 있었다. 다만 김원봉은 반일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활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했다. 또한, 조선의용대가 성립될 당시부터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으니 한순간에 배신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용대 내부에는 중국국민당이 항일투쟁보다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투쟁에 몰두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공산당과 연계가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대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그 결과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가 팔로군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후 팔로군으로 편입된 조선의용대는 1943년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되고, 김원봉이 이끌던 잔류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된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이후에도 일본에 맞서 무장투쟁을 지속한다.
그러나 해방을 맞이한 이후 조선의용군은 비운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우선 미군정이 주둔한 남한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한 조선의용군 출신이 자리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후 남한은 한국광복군을 항일투쟁 역사의 중심으로 둔다. (물론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주력부대는 이미 빠져버렸기에 한국광복군의 주류는 임시정부였다.) 그러면 북한에서는 어땠나. 조선의용군은 한국전쟁에 선봉으로 참전했으나, 의용군 출신 간부들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숙청되고 만다. 그리고 전쟁 후 중국으로 돌아갔거나 숙청되기 전에 중국으로 탈출한 의용군 출신자들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국민당 특무(스파이)’로 낙인 찍혀 오래도록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이렇듯 고국의 남북 양쪽과 중국에서 이래저래 버림받고 백안시된 존재가 의용군 출신자들이었다.사회주의자의 항일 무장투쟁, 김학철의 「격정시대」
『격정시대』는 총 3권의 장편소설이다. 그만큼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그리고 있다. 본 글에서는 김학철 본인을 형상화한 인물인 주인공 서선장의 삶을 중심으로 보려 한다.
평생을 버들잎 같은 나무배─야거리 한 척에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를 하여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서 서방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것은 돛도 노도 다 필요 없는 20톤급 발동선의 선장이었다. 그래서 거 아들의 이름을 선장이라고 지었는데, 그 선장이도 그럭저럭 자라서 인제 보통학교, 즉 소학교의 4학년생이 되었다.
선장이는 고양이 수염을 깎아 괴롭히거나 벌집을 쑤셔 도망치다 벌에 잔뜩 쏘여 등교하지 못하곤 했던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렇게 장난은 심했지만 담임 선생님인 김영하가 인정할 정도로 작문만은 잘하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린 선장에게 충격적인 두 사건이 벌어진다.
“회관에……쌈 났다!”
…
청년회관 앞 신작로와 정구장에는 벌써 구경꾼들이 백차일 치듯(흰옷 입은 사람들이 매우 많이 모인 모양을 이르는 말) 하였다. … 청년회관을 포위 공격하는 한 무리 사람들의 돌팔매질에 청년회관의 유리창들은 이미 모두가 박산(박살)이 나서 성한 것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 공격자 중의 몇몇이 머리들을 한데 모으고 한참 수군수군하더니 곧 돌격대가 조직되어서 칠팔 명의 젊은 축이 몽둥이들을 꼬나들고 일시에 으악 소리를 지르며 현관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 서 있는 구경꾼들에게 말을 묻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나는 것을 선장이도, 선희도, 은희도 다 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판이오?”
“명석동 조합에서 쳐내려왔다오.”
“명석동 조합이라니?”
“아따 이 양반, 노동조합두 모르우? 적색노조.”
“그래 그 무슨 조합인가가 이 회관은 왜 들이친다우?”
…
“아 빨갱이하구 까망이가 맘이 맞을 리 있소? 앙숙이지. 개와 고양이두 맞다들기만 하면 아옹다옹하잖소.”
“빨갱이는 뭐구 까망이는 뭐요?”
“아 빨갱이야 노동조합 아니겠소, 적색노조.”
“그럼 까망이는?”
“까망이야 무정부주의패지요, 쩍하면 치구 달구 하는,”
…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이 큰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주재소는 쥐 죽은 듯 잠잠하였던 것이다. 설사 우주의 다른 천체에서 이런 소동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내 알 배 아니라고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원산의 신작로에 있던 원산 청년회관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 장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적색노조원들이 청년회관에 쳐들어온 것인데, 무정부주의자들이 자기네 조합에 프락치를 박아 파괴활동을 일삼는 데에 분노해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김학철이 놀란 것은 바로 길 건너편 주재소의 동향이었다. 주재소에 근무하던 순사들은 싸움판이 벌어졌음에도 나와 볼 생각은 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선장이는 당시에는 그 이유를 곧바로 알지 못했으나, 같은 민족끼리 싸우면 결국 일본만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훗날에야 깨닫게 된다.
또 하나의 사건은 원산에서 일어난 총파업에서의 광경이다. 원산부두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단체계약의 확립”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
실제로 1929년 1월, 원산노동연합회(이하 노련)는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고용주들은 대체노동자와 경찰의 협조를 구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동시에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노련은 해고를 철회하면 타협할 수 있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고용주 측 대표는 확답을 회피했고, 상업회의소는 노련이 아무 이유도 없이 파업을 선동했다는 전단을 시내에 배포했다. 결국 상업회의소는 노련 소속 노동자 전면 사용 중지를 선언했고 노련은 본격 총파업에 돌입한다. 파업은 원산 전 지역으로 퍼져 지역 곳곳의 작은 노동조합까지 함께 연대했다.
이 조선식 ‘KKK’(미국의 KKK단이 흰 복면을 썼듯 파업깨기꾼들이 같은 모자를 쓰고 있음을 빗댄 말)가 입장을 하자 기업주의 앞잡이들과 파업 방해 분자들은 갑자기 사기가 올라서 괴상한 소리들을 지르며 기뻐 날뛰었다. … 공방전의 막이 열렸다. 주먹질 발길질이 빗발치듯 하였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의 장벽은 끄떡없이 일차 공격을 견뎌내었다.
돌파에 실패를 한 파업깨기꾼 망나니들이 일단 뒤로 물러나서 대가리들을 한데 모으고 작전 계획을 고쳐 짤 즈음, 배후에서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여태껏 치안유지를 표방하고 정관, 즉 고요히 관찰하는 태도를 취해오던 경찰대가 행동을 개시하였다. 진압이 시작된 것이다. 한 번 충돌에서 대립한 쌍방의 여러 사람이 깨지고 터지고 피가 흘러서 이미 상해죄, 소요죄를 구성하였다는 구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 이번 돌격은 사실상 무장 경찰대와의 협동작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파업 노동자들이 과연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바로 이때다. 안벽에 선복을 붙이고 정박한 ‘쓰루가마루’라는 화물선의 갑판 위에서 관전을 하던 일본 선원들이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발들을 굴렀다. 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라치면
“스또 반자이!”
“교오다이다찌 감바레!”
이것을 우리말로 바꿔놓으면
“파업 만세!”
“형제들 버텨라!”
이것을 신호로나 한 듯이 안벽에 정박한 다른 기선 ─ ‘니이 가다마루’와 ‘노도니고오’에서도 또 잔교에 정박한 ‘사도마루’, ‘마이즈루로꾸고오’ 및 ‘미야즈마루’에서도 일본 선원들의 응원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잇달아서 ‘쓰루가마루’를 필두로 각 기선들이 일제히 우렁찬 기적들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아닌 뭇 기적의 긴 울음은 그러지 않아도 물정이 소연한(소란스런) 원산항을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파업깨기꾼들과 무장경찰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서 일순 모두 멍청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유분수지, 내지인(일본인)이 불령선인의 편을 들다니! 이와는 반대로 파업자들은 그 뜻하지 않은 힘진 성원에 크게 고무되었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는 다 한편이라는 것을 실물교육을 통하여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파업자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여태까지의 수동적인 방어에서 일변하여 능동적인 방어에로 넘어갔다. 방어를 위한 공격에로 넘어간 것이다.
선장이는 기선 위에서 고함을 지르며 발을 구르는 일본 선원들을 바라보며, 귀청이 떨어질 듯 부두가 떠나갈 듯 울리는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넋을 놓았다. 도대체 이것은 어찌 된 일일까.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의 편을 들다니! 선장이는 입에다 물어 깰 수 없는 무슨 땅땅한 덩어리를 문 것만 같았다. 열 서너 살 먹은 아이의 이빨로는 물어 깬다는 것이 무리였다.
실제로 이 당시 원산에서 노련의 영향력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노련의 지도부는 중국 영사관으로 달려가 중국 노동자의 취업을 막아달라고 부탁해 그들의 협력을 약속받았고, 일본인들 역시 ‘같은 노동자’로서 파업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며 일손을 놓고 항구를 떠났다. 결과적으로 원산총파업은 일본 경찰의 폭압적인 단속과 진압으로 패배했지만, 지역 노동자운동에 큰 영향을 미쳐 1930년대 중반 이 지역의 적색노조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총파업이 패배한 후 일본 경찰의 검거선풍이 불던 그때,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된 선장이는 서울에 사는 외칠촌 아주머니인 박숙자 씨의 양아들로 들어가 서울로 유학하게 된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수학하던 어느 날, 독립운동가 이재유를 저택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된 일본인 스기우라 교수의 소식을 듣고 선장이는 어릴 적 원산총파업에서 받았던 그 “가슴 뛰노는 장면”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에서고 조선에서고 이와 동일한 시각에 그 뉴스를 듣는 청중은 다 이렇게 눈들이 동그래졌을 것이다. 전파를 타고 날아온 뉴스가 자못 엄청났기 때문이다. 중국 상해 홍구공원이란 데서 조선인 윤 무어라나 하는 사람이 폭탄을 던져서 경축회장 주석대에 앉았던 일본군 장령 여럿을 살상하였는데 그 중에는 상해 파견 군사령관 시라가와 대장도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뭐라니?”
“인호오기찌라니까……아마 윤─봉─길이겠지요.”
“나이 몇 살이라구?”
“스물다섯 살이라잖아요.”
…
선장이는 받은 충격이 어찌나 크던지 이날 밤 자리에 누워서도 오래도록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쏴 눕힌 것은 아무리 장쾌하더라도 필경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옛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오늘 낮의 일이다. 자기가 동양악기점 앞에서 흘러나오는 레코드의 아름다운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바로 그 무렵에 발생한 일이다. … ‘그에 대면 나는 하잘 것 없는 밥병신이로구나!’하는 자비심과 ‘그는 지금쯤 적에게 모친 악형을 당하고 있을 텐데…… 나는 여기 이렇게 편안히 누워있어?’ 하는 자책감에 등골에 땀이 다 내돋았다. … ‘남들은 다 목숨을 걸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나만 안일하게 여기서 공부를 해? 수치스러운 일이다. … 중국으루 건너가자. 임시정부를 찾아가자. 황포군관학교루 가자. 가면 무슨 수가 나겠지. 가자!’
선장이는 다행히 특별한 문제 없이 상해에 도착한다. 그런데 도착 후 만난 조선인 김혜숙으로부터 임시정부가 이미 풍비박산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좌절한다. 그렇지만 김혜숙은 “임시정부란 것은 기실 유명무실”했다면서 “상징적인 존재만을 믿거나 의지하고 독립을 꾀할 수는 없”으니 “동적이고 보다 효과적인 노선을 개척해야”한다며 자신들과 함께할 것을 선장에게 제안한다. 김혜숙은 앞서 조선의용대의 역사에서 언급했던 조선민족혁명당 소속 활동가였던 것이다. 사실 조선에서 상해로 흘러들어오는 청년들은 김혜숙이 운영하던 식당에 들르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으레 김혜숙에게 걸려들어 조선민족혁명당 상해 특구를 통해 남경 명양거리 호가화원 초대소로 보내졌다. 여기서 몇 달의 감별을 거친 끝에 합격한 사람은 입당하고 아닌 사람은 노자를 주어 돌려보내졌다. (김학철은 무슨 까닭인지 상해 특구에 머무르다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게 됐다.)
상해에서 지내면서 선장이는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고 당 활동을 한다. 그러던 중 상해에서 일어난 전차, 버스 노동자의 파업을 목격한다.
“이번 파업은 그들네 노조에서 조직한 거겠지요?”
“물론. 그렇지만 핵심적 지도역량은 공산당이겠지요……중국공산당.”
“헤 그렇습니까, 그래요?”
“공산주의자들은 민중을 발동하는 것을 주요한 투쟁 수단으로 삼으니까요.”
선장이는 입에다 무슨 잘 깨물어지지 않는 덩어리를 문 것처럼 입술만 우물거리고 말을 아니하였다. 민중을 발동한다는 말이 마치 먼 화성에서 보내온 전문과도 같이 불가해하여서였다.
“그에 반해서 민족주의자들은 개인 테러를 숭상하니까……이것이 분기점일 밖에요. 현재 우리 조직 내에서도 이런 두 갈래 서로 다른 주장이 맞서고 있습니다.”
“어느 편이 옳다고 미스터 성은 생각하십니까 그 둘 중에?”
“미스터 서는 어느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잘 모르니까 묻는 게 아닙니까?”
“오늘 그들의 힘을 봤지요? 온 시내를 마비상태에 빠뜨리는. … 개인 테러로 일본놈 몇 놈 소멸한다고 해서 그놈들의 지정이 흔들리지는 않을 겁니다.”
선장이는 여적 자신의 해온 일이 옳다고 확신하는 까닭에 성재수의 말이 귓속으로 잘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반감까지 생겼다. … 개인 테러는 극소수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용감한 애국자들만이 해낼 수 있는 신성한 사명이라고 선장이는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부정하신단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하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 한 주일 가량 지나서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성재수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던 끝에 문득 생각난 듯이 일어나가 책장 안을 한참 뒤지더니 책 두 권을 꺼내들고 돌아왔다. … 한 책에는 한문으로 ‘변증법적 유물론’ 또 한 책에는 ‘유물사관’이라고 역시 한문으로 찍혀있는데 둘이 다 일본 도쿄에서 간행된 것이었다. …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침대에 번 듯이 나가 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알구 보니 세상은 이런 거였구나!’ 선장이는 자기가 여적 흐리멍텅한 혼돈 세계에서 헤멘 것만 같았다. 저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제가 어데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맹탕 남의 정신으로 살아온 것만 같았다. … 선장이가 다 읽은 책들을 돌려주러 갔을 때 두 사람은 의미가 특별한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 “그럼 이번엔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지요.”
성재수가 꺼내다 주는 책은 『국가와 혁명』이었다. … 『프랑스 내전』, 『철학의 빈곤』, 『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 이런 책들을 읽어나가는 동안에 선장이는 크게 변하고 또 성장하였다.
선장이는 같이 활동하던 동지의 소개로 만났던 성재수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수받는다. 성재수는 중국공산당 소속 활동가로 광주학생사건 때 서울에서 동맹휴학을 선동, 조직하고 경찰을 폭행했다는 혐의로 지명수배를 받아 중국으로 망명한 사람이다.
실제 김학철 역시 시간이 갈수록 파괴 위주의 폭력투쟁이 가진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희생은 엄청났지만 대가는 너무 적었다. 김원봉과 의열단 동지들도 숙의 끝에 이런 노선을 청산하고 중국 내 군관학교에 입교하기로 결정한다. 소설 속 선장 역시 “지도부에서 국민당 정부와 수차 교섭한 결과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고 교육을 받은 뒤 조선학생만으로 편성된 독립 중대를 설립하기로 한 결정에 따르게 된다.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하자 황포군관학교는 호북성 강릉으로 옮겨갔고, 여기에 이르러 조선인으로 편성된 중대가 설립했다. 조선인 교관은 김두봉, 윤세주, 한빈 등이었다. 학교에서는 한글, 조선역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웠다.
19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대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는데, … 식순의 하나로 대원들에게 배지 하나씩을 달아주었다. 거기에는 ‘조선의용대’라는 한문 글자 다섯 자와 ‘Korean volunteer’라는 영어 글자 한 줄이 새겨져 있었다. 이어 제1지대(支隊)와 제2지대에 각각 군기 하나씩이 수여되었다. 그 군기 밑에 서서 대원들은 멸적의 기세 드높이 선서를 함으로써 민족의 사업에 충성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후 대세가 기울어져서 부득이 무한(武漢, 도시명 우한)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조선의용대의 열혈남아들은 물색없이 그냥 물러나지 않고 적들에게 탁탁한 선물을 남겨주기로 작정하였다. … 곽말약 선생은 자기의 저서 『홍피곡』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
담벼락들과 길바닥에다 콜타르로 굵게 크게 일본글 표어들을 써 놓은 것이었다.
“병사들은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재벌들은 후방에서 호사를 한다.”
또는
“병사들의 피와 생명, 장군들의 금까치(무공) 훈장.”
…
나의 탄 자동차가 후성거리를 지날 때 표어를 쓰는 사람들은 일에 열중하여 여념들이 없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콜타르통, 뺑끼통(페인트통) 틀을 들고 또 사다리들을 메고 촌분(매우 짧은 시간)을 다투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가장 감동시킨 일막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또 그것은 나를 가장 참괴하게 만들어준 일막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조선의용대의 벗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단 한 명의 중국 사람도 끼어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중국에도 일본말을 아는 인재는 적잖을 것이다. 일본 유학을 한 학생이 줄잡아도 몇 십만 명은 될 테지? 그런데도 무한이 함락의 운명에 직면한 이 위급한 시각에 우리를 대신하여 대적군 표어를 쓰고 있는 것은 오직 이 조선의 벗들뿐이라니!
의용대 창설 이후부터 주력이 화북지역으로 진출하기 전까지(즉 노선분화 전까지) 2년여 동안 조선의용대는 여러 활동을 했다. 조선의용대는 대적 공작 실적을 스스로 기록하고 내세웠다. 대원들은 비록 선전부대로 편성되었지만, 선전하다 보면 전투를 피할 수 없었기에 선전과 전투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그만큼 선전이 전투성을 함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활동 중 선장이는 국민당 군대가 일본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저항 정책을 보이지만 공산당에는 매우 공격적인 정책을 보이면서 돈 모을 궁리, 벼슬 얻을 궁리만 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국민당 군대는 일본과의 대적은 피하면서 중국 내 “소비에트 구역을 봉쇄”하는 데에는 개미새끼 하나 지나가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포대로 봉쇄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국민당이 일본과의 싸움보다는 공산당과의 싸움에 집중하다 보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민중들에 돌아갔다. “백색 비적을 소탕하자!” “주덕, 모택동을 사로잡자!”와 같이 한 마을에도 점령군에 따라 다른 내용의 표어가 적혀있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그런 와중에 선장은 우연히 중국공산당 소속 군대에 넘어가 있던 성재수와 재회한다. 성재수는 비밀리에 조선의용대에 들어와 중국공산당 비밀조직을 건립했는데, 선장도 이 비밀조직에 가입한다.
1940년 말에서 그 이듬해 이삼월 사이에 화중, 화남 각 전장에 분산되어 있던 조선의용대의 각 지대들과 분대들이 육속 북상하여 낙양에 집결한 뒤 전대가 황하를 북으로 건너 태항산 항일 근거지로 넘어 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 1941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무렵 제2지대 정치위원 김학무가 영솔하는 선발대가 낙양을 출발하여 해방구로의 길에 올랐다. 선장이도 선발대에 편입되어 떠났다.
앞서 노선 차이로 조선의용대의 본대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으로 편입되었다고 했는데, 『김학철 평전』에서도 이에 대해 비슷하게 서술하고 있다. 『김학철 평전』에 따르면, 이 즈음하여 북상하자는 주장이 점점 더 힘을 얻게 된다. 여기서 북상이란 화북 태항산으로 진출하자는 것인데, 그 목적은 우선 팔로군과 합류하여 적극적인 항일전투에 투신하는 것, 또 하나는 화북의 조선 청년들로 의용대를 확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을 국민당 정부가 알아서는 안 되므로 낙양에 머무는 동안 서안의 한국광복군에 방문단을 파견했다. 통일전선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김학철도 함께했다. 그러나 이런 통일전선의 가능성이 단시일 내에는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고, 하루 속히 북상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곧 선발대가 출발하는데, 김학철도 선발대에 편입된다.
밤새도록 기구한 산로를 더듬고 또 더듬은 끝에 마침내 먼동이 텄다. 그리고 얼마 오래지 않아 동녘 하늘에 등적색 구름에 싸인 아침해가 서서히 떠올랐다. 선장이는 그제야 비로소 산 아래 골짜기에 1백 명도 더 되는 초록색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의용대가 서 있는 산등성이를 쳐다보며 손을 흔들고 또 모자를 흔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오, 저것은 팔로군. 우리의 마중을 나온 팔로군이다!’
선장이는 난생 처음 자유로운 땅을 디디었다. 왜냐면 그의 조국이 망하던 그해에 그의 어머니도 겨우 열다섯 살 홍안의 부끄럼 타는 소녀였으니까.
당시 팔로군의 총사령부는 태항산 동쪽 골짜기에 있었는데, 사면팔방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적후(敵後)사령부’라고 불렸다고 한다. 김학철 일행이 도착한 후 이틀 뒤에 ‘조선동지환영대회’가 열렸는데, 김학철은 이날 총사령관이던 펑더화이(彭德懷) 장군을 처음으로 만났다. 대회에는 일본인, 몽골인, 필리핀인도 참가해 국제적인 색채를 띠었다.
의용군에서는 조직부 성원이건 선전부 성원이건 할 것 없이 다 전투에는 일반 대원들과 같이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돌격으로 넘어갈 때에는 반드시 지도원이 전투 서열 앞에 나서서 “공산당원은 두 발자국 앞으로!”
명령하여 공산당원들을 앞장세우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공산당원들은 그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있었다. 솔선하여 적진에 뛰어들지 않는 공산당원은 두었다 무엇 할 것인가! 그런 것은 공산당원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한 개 지대의 조선의용군과 한 개 대대의 팔로군의 협동작전이 시작되었다.
…
적군의 증원대를 물리쳐서 작전 임무를 완수한 우군 부대가 큰 손실 입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이렇게 깔끔한 승리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실전에서는 주도세밀하게 짠 작전계획도 뒤죽박죽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부대가 함께 달려들어 포대를 철저히 파괴한 연후에 불까지 콱 질렀다. 이정호는 두어 사람을 데리고 거리 안을 온 데 돌아다니며 대적군 삐라를 붙이느라고 분주하였다.
본격적으로 조선의용대가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위의 장면은 조선의용대가 일본군으로 위장해 적을 속여 큰 손실을 보지 않고 적군을 제압한 뒤의 시점이다. 조선의용대는 선전부대였지만 전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했는데, 소설도 그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제 소설은 종장으로 접어든다. 소설의 마지막은 김학철이 조선의용대에서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전투를 그리고 있다.
깎아지른 누에머리에서 불시에 적습을 알리는 신호 총소리가 울렸다. 연거푸 세 방. 세 사람은 본능적 동작으로 재빨리 발걸음들을 돌치자(되돌리자) 용수철에 튕긴 것처럼 숙소를 향하고 내달았다. 총을 가지러 가는 것이다. 바로 이때 앞길 멀지 않은 곳에 포탄 한 알이 날아와 터졌다. 작렬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
해가 한낮이 가까워 오자 보람 없이 사상자만 숱하게 낸 무적 황군은 수치스러운 퇴각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적군이 죽은 놈 다친 놈들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맞들고 업고 곁부축하고―죽지가 부러져서 패퇴하는 꼴을 내려다보고 승전에 고무된 항일 전사들은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날뛰었다.
…
마당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저녁밥들을 먹은 뒤에 눌러앉아서 노래들을 부르는데 처음에는 장엄한 〈인터내셔널〉을 부르다가 비꾸러져서 〈방아타령〉을 부르고 〈방아타령〉에서 또 비꾸러져서(벗어나서) 〈사발가〉를 부르다가 〈사발가〉에서 아주 비꾸러져서 유행가 나부랭이를 잡스럽게 불러대며 한동안 즐기었다.
김학철이 조선의용대에서 마지막으로 경험한 전투는 화북성 호가장이라는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일본군과 여러 날 대치하면서 전투를 이어가던 어느 날, 꽤 큰 전과를 올린 날이 있었다. 그날 밤, 부대는 뒤풀이를 거하게 하고는 잠들었는데, 그날따라 긴장의 끈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피로 치러야 했다.
다들 고단하여 세상 모르고 잠들을 자고 있을 즈음 유신이네 분대가 들어 있는 집 캄캄한 헛청간에서 조심스러운 부스럭 소리가 났다. 뚜껑을 들어 내려놓은 관 속에서 잠을 자던 유빈이가 몽유병자처럼 부스스 일어나더니 기척 없이 각반을 치고 탄대를 두르고 또 총까지 집어들었다. 그리고 반쯤 열려있는 사립짝을 소리 없이 빠져나와 짙은 안개 속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
“동아상사에서 출장을 나갔던 신용순이가 돌아왔습니다!”
‘동아상사’라는 것은 일본군 특무 기관의 간판용 별칭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쓰이는 ‘출장을 나갔던’이란 말은 적지敵地에 ‘파견되었던’ 또는 ‘잠복하였던’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유빈이는 일본 특무 기관의 파견을 받고 항일 부대 안에 잠복하였던 밀정 신용순인 것이다.
첫닭울이에 경무장을 한 일본군 한 개 중대가 역시 한 개 중대의 황협군을 뒤딸리고 유빈 즉 신용순의 길잡이로 호가장을 향하고 몰려왔다.
…
불효의 기습작전―호가장은 일본군과 황협군에게 삼면 포위를 당한 것이다!
아침 안개가 걷히며 말며 하는 가운데 처절한 혈투가 벌어졌다. …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이는 판이었다.
…
손실은 전사(戰死)가 넷, 중상이 둘, 경상이 여섯이었다. 그 밖에 실종된 대원 하나가 있어서 온갖 군데를 다 찾아보았으나 종시 나타나주지를 아니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신비스럽게 종적을 감춰버린 대원―유빈이는 이때 본성명 신용순이로 되돌아갔었기 때문이다(그 후 신용순이는 동아상사의 사원으로 복직을 하여 상여금을 탁탁하게 타가지고 흥청망청하느라고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네 주검 중에서도 마점산의 주검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시체들을 산 밑에 그러묻은 뒤에 선장이가 무덤을 향하여 군모를 벗고 머리를 숙이니 옆에 섰던 장준광이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그는 난투장에서 군모를 어데다 날려보냈는지 맨머릿바람이었다). 다른 전우들도 다 숙연히 머리를 숙였다.
태항산에서의 이와 같은 전투의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긴장을 풀고 있었던 데다 첩자까지 더해져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음에도 퇴각 작전은 기적이라 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부대가 전멸할 수 있었던 위기였음에도 퇴각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학철은 이 전투에서 왼쪽 대퇴골이 4분의 1쯤 깎여나가는 관통상을 당한다. 총에 맞아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혀 의식을 잃은 후 일본군의 들것에 실려 포로로 잡혀간다.
이후 김학철은 관통상을 당했음에도 수술이 아니라 간단한 응급처치만 받고 방치된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국민으로서 사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의 적용을 받아 정치사범이 수용되는 나가사키 수용소로 보내진다. 후에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지만, 정치범 수용소는 일반 수용소와는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운 좋게 살아남아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김학철은 귀국 이후에 남한에서 활동을 이어가지만, 다리가 절단된 상황이었기에 남한에서 좌익활동을 펼치기에는 제약이 많다고 판단해 월북하고, 한국전쟁 발발 후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중국에서 자리 잡고 작품활동에 매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6년부터 중국에서는 반우파투쟁이 전개되고, 다양한 사상과 예술이 펼쳐질 필요가 있다는 “백가쟁명, 백가제방”의 필요성을 역설한 김학철은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노동 개조를 당한다.
노동 개조의 와중에도 그는 동유럽에서 일어난 탈스탈린운동에 주목하면서 『20세기 신화』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반우파투쟁’에서 ‘문화대혁명’ 전야까지 극좌노선이 판치던 중국사회를 배경으로, 한 지도자의 독재와 그에 대한 개인숭배 그리고 이로 인해 민주주의 원칙이 여지없이 파괴되고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 비판한 정치소설이다. 김학철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게 이 소설 원고를 우연히 발각당해 7년 4개월 동안 유치장에 갇혀 밤낮으로 고문을 당했다. 그는 7년 4개월이라는 기록적인 예심 후 산송장에 가까운 상태였음에도 재판정에서 꼿꼿한 모습을 보였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예심으로 7년 4개월을 살았지만 2년 8개월을 더 채워야 했다.
1977년 출소 후 3년이 흐른 뒤, 김학철은 『20세기 신화』가 반동적이지만 출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는다. 이후 20편의 단편소설, 100여 편의 산문 등 집필에 매진한다. 이렇듯 세상의 풍파에 맞서 올곧게 살아온 사회주의자 김학철은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2001년 9월 15일 사망한다.
여기서 이번 글은 마무리하지만, 다루지 못해 못내 아쉬운 내용이 있어 마지막으로 언급해두려 한다. 우선 항일무장투쟁에 있어 또 다른 중요한 단체인 동북항일연군을 다루지 못했는데,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들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형상화한 문학작품을 찾기 어려워 이번 글에서는 싣지 못했다. 또 1930~1940년대 조선 사회주의 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경성콤그룹에 관해 다루지 못했다. 이 부분은 특히 아쉽다. 경성콤그룹은 1930년대 후반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아래서도 끝까지 국내에 남아 민중 속에서 혁명적 대중조직(RMO) 건설과 당 재건, 반파쇼 인민전선 구축이란 과제를 포기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사회주의그룹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의 활동이 워낙 은밀했기에 이들의 활약상을 그린 당대의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에야 이들의 역사를 조명하는 저작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이런 작품들도 다뤄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올랜도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후편)
1. 들어가며
저자는 스탈린 이후 혁명이 굴절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특히 그 속에서 나타나는 개인들의 비극을 다루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독재, 폭력의 문제를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잘못으로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소련 사회가 역사적 시기마다 마주했던 곤란과 그때마다 취했던 선택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함축되어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꼽아 보았다. ‘신경제정책의 중단을 어떻게 볼 것인가?’, ‘농업 집단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숙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시의 국민적인 단합이 소련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전후 스탈린의 개혁 거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스탈린 사후에도 소련 시민들은 왜 오래도록 침묵했는가?’ 2. 신경제정책의 중단: 스탈린주의의 전조
저자는 이 과정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 설명한다. 실제로 1920년대 소련사 연구에서는 네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다. 기존 연구 경향은 네프를 1917~1921년의 혁명과 내전, 그리고 1930년대 ‘스탈린 혁명’ 사이에 있었던 ‘숨 쉴 틈’으로 규정했다. 즉 전시 공산주의와 스탈린 혁명 사이에 있었던 혁명의 휴지기라는 의미다. 한편, 부하린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미국의 학자 스티븐 코헨은 네프를 전시 공산주의의 가혹함과 스탈린주의의 공포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 간주했다. 네프는 ‘숨 쉴 틈’이 아니라, 점진적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영구적 모델이라는 것이다. 홀란드 헌터와 로버트 앨런은 소련이 네프를 유지했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 비슷한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계산하기도 했다.
저자는 네프의 성격을 규명하기보다는, 네프가 중단된 맥락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기층 볼셰비키와 대중적 차원의 지지와 결합한 스탈린이 권력 투쟁 속에서 부상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개인 상점의 가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많은 프롤레타리아는 네프에 반대했다. 네프에 대한 이들의 불신은 시장의 심각한 시세 변동으로 더욱 강화됐다. 농촌의 재화 부족으로 농민들이 식료품 공급을 보류할 때마다 가격이 급등하며 혼란이 나타났다.
네프 지지자들은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부하린은 국가 지출의 확대가 산업 투자율을 둔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시장 메커니즘과 농민들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조달 가격을 인상하고자 했다. 통합반대파(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는 농민에게 더 양보하는 것이 사회주의 산업화라는 소련의 목표를 연기할 뿐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국가가 소비재 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식량과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의 곡물을 일시적으로 징발하고, 그런 다음에 시장 메커니즘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부하린 편에 일시적으로 섰다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패배한 이후에는 네프를 등졌다. 스탈린은 곡물 위기를 ‘쿨라크(부농, 농업자본가)들의 파업’ 때문이라고 비난했으며,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전 시기의 징발 정책으로 되돌아가자고 요구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수사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폭넓은 호소력을 발휘했다. 많은 사람이 네프가 사회주의 이상에서 후퇴했다고 생각했고, 자본주의 경제의 부활을 가져올까 두려워했다. 한 볼셰비키는 “우리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화폐가 단번에 일소된다는 믿음 속에 성장했다. 만일 내전 동안 폐지되었던 화폐가 다시 나타난다면, 부자도 다시 나타나지 않겠는가? 우리는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파멸의 길 위에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이 질문을 근심 어린 마음으로 자신에게 던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전시 공산주의 방식으로 복귀하자는 스탈린의 요청은 1917~1921년의 혁명적 싸움에 참여하기에는 어렸으나, 내전 이야기에 바탕을 둔 투쟁 숭배 분위기 속에 교육받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스탈린은 내전을 영웅적 시기로, 소련을 국내외 자본주의 적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국가로 보는 낭만적 인식을 이용했다. 또한 스탈린은 전쟁 공포를 조성했는데, 네프가 산업 장비를 마련하는 수단으로는 너무 느리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곡물을 조달하는 수단으로도 안정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1928~1929년에 당의 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한 부하린과의 경쟁에서, 부하린이 계급투쟁이 시간이 흐를수록 약화할 것이고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사회주의 체제와 융화할 것이라는 위험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나아가 이러한 견해는 당이 자본주의 적들에 맞서는 방어 체제를 느슨하게 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 적들이 소비에트 체제에 침투하여 내부에서부터 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로 나아감에 따라 부르주아의 저항은 반드시 강화되며, 그래서 “착취자들의 반대를 뿌리 뽑고 분쇄할”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단언했다. 저자는 이 대목이 이후 대숙청에서 억압을 합리화하는 주장의 전조라고 강조한다.
파이지스가 보기에 반 신경제정책 운동은 스탈린 혁명전쟁의 전초전이었다. 수천 명의 네프만(네프로 재산을 모은 신자본가)이 투옥되거나 집에서 쫓겨났다. 1928년 말까지 40만 개의 자영업체 중 절반 이상이 세금 때문에 사라졌다. 리셴치(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전락한 수많은 네프만과 그 가족들은 곤궁한 처지에 내몰렸다. 그들에게는 배급표가 지급되지 않았고, 결국 얼마 남지 않은 개인 상점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솟은 식품을 살 수밖에 없었다. 또 국영 주택에서 쫓겨났고, 자녀들은 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3. 공업화를 위한 농촌의 희생: 스탈린 혁명
공업화와 농업집단화로 대표되는 스탈린 혁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는 네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소련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논쟁적인 쟁점 중 하나다. 스탈린은 레닌의 진정한 계승자인가, 아니면 혁명의 배반자인가? 소련 내부에서의 논쟁을 먼저 살펴보자. 1980년대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네프를 시행한 레닌의 결정에 자신의 급진적 개혁을 비유했다. 하지만 당 보수파는 스탈린에 대한 공격을 혁명 이후 소련이 물려받은 유산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했다. 결국 정치국 내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으로 혁명 이후 역사 서술에 대해 이견이 발생했고, 급기야 1988년 고등학교 역사 시험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구에서도 스탈린 혁명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미국 정치학자 제리 호크는 1937~1938년의 대숙청을 제외하면, 스탈린은 레닌이 원하는 일을 했다고 규정했다. 모셰 르윈은 내전 이후 전자본주의적 양식으로 되돌아간 농촌은 사회주의 경제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레닌이나 스탈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즉, 호크와 르윈은 스탈린이 레닌을 계승했다고 보았다. 반면 캐서린 메리 데일은 스탈린 혁명의 기원을 레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곤경에서 찾았다. 세상을 반동과 진보라는 흑백논리의 충돌로 봤던 대중들이, 일자리가 없었던 시기에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약속했던 공업화를 열렬히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근간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스탈린 시대에 들어 혁명이 굴절되었다는 견해에 따라 농업집단화를 비판한다. 즉, 농촌의 해체, 그리고 쿨라크에 대한 탄압 과정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쿨라크로 낙인찍힌 유능한 농민들에 대한 탄압이 소련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저자는 농업집단화를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세력에 대한 분석을 덧붙인다.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생활방식을 철저히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다수 농민은 몇백 년 동안 지켜온 생활방식을 포기하는 것을 주저했다. 농민을 설득하지 못한 활동가들은 폭력적인 조치를 동원하기 시작했고, 스탈린이 ‘계급으로서 쿨라크 청산’을 요구한 1929년 12월부터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몰아넣는 운동은 전쟁의 형태를 띠었다. 지역 민병대, 특별 군대, 오게페우 부대가 동원되어 집단농장을 조직했다. 이들은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목표를 초과하는 것이 더 낫다”, “지나친 행위를 했다고 비난받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기억하시오. 그러나 만일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면, 조심하시오!”와 같은 압박을 했다. 1930년의 첫 두 달 동안 소련 농민의 절반인 약 6천만 명이 집단농장으로 내몰렸고, 집단화에 반대 목소리를 낸 농민은 쿨라크로 분류되어 집과 마을에서 쫓겨났다.
스탈린은 집단농장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쿨라크에 맞선 전쟁’을 활용했다. 스탈린의 쿨라크 박해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집단화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단화를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농민들이 집단농장에 가입하도록 추동하기 위함이었다. 쿨라크는 정의상 고용 노동을 사용하는 농촌자본가였으나, 1929년 이후 실제로 쿨라크로 몰려서 억압당한 상당수의 사람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저자는 네프 시기 농민이 자신의 노동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허용됐지만, 고용 노동 사용은 통제됐으며, 농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늘어난 1927년 이후에는 부유한 농민이 사유재산의 상당 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농촌자본가로 이루어진 ‘쿨라크 계급’이라는 개념은 환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허구적인’ 쿨라크 말살은 소련 경제에 재앙을 가져왔다. 쿨라크라는 명목으로 탄압받은 이들은 보통 마을에서 가장 근면한 농민들이었다. 쿨라크를 박해하면서 이들의 노동 윤리와 전문 기술은 사라졌고, 결국 소련 농업 부문은 출구 없는 사양길로 들어서게 된다. 스탈린의 쿨라크 박해는 경제적 고려라기보다 사실상 농촌 집단화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 탈쿨라크화 운동이 최고조에 올랐던 1930~1931년에 총 170~180만 명의 쿨라크와 그 가족들이 시베리아와 같은 소련의 오지로 추방됐다.
그렇다면 농민들은 쿨라크 박해에 저항했는가? 놀랍게도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마을 연대라는 러시아의 강력한 역사적 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특히 이례적이었다. 물론 거부 반응을 보인 지역도 있었으나, 농민 대다수는 이웃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보며 공포에 사로잡혀 소극적인 체념으로 반응했다. 농민들은 때로는 마을에서 누가 쿨라크로 없어져야 하는지를 회의를 통해, 혹은 제비뽑기를 통해 직접 결정했으며, 마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나 외따로 사는 농부, 과부, 노인과 같은 약자들이 그 대상이 되기 쉬웠다.
쿨라크 박해에 앞장섰던 자들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일명 ‘집단화주의자’ 대다수는 징집되었던 병사와 노동자였고, 이들은 농업집단화를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기를 갈망했으며, 쿨라크를 인민의 적으로 묘사한 선전을 통해 쿨라크를 향한 증오를 주입받았다. 몇몇은 공산주의적 열정에 휩싸인 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5개년 계획의 선전이 불러일으킨 낭만적 열의에 고무되어, 볼셰비키와 함께 인간의 의지만으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위해서는 구사회 세력과 치르는 격렬한 투쟁이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집단화주의자들은 쿨라크를 향한 폭력과 자신들의 유토피아적 믿음을 결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따라서 이들이 단순히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거나, “명령을 따르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으며 자기 행동을 합리화했다.
대부분의 농민은 쿨라크 박해는 묵인했지만 농업집단화에는 저항했다. 경찰에 따르면, 1929~1930년에 44,779건의 ‘심각한 소요’가 있었고 볼셰비키 농촌 활동가들이 공격받았다. 농민 시위와 폭동, 기관 습격, 방화와 함께, 집단농장 재산을 공격하고 교회를 폐쇄한 조치에 항의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체제는 농민들의 저항을 분쇄할 만큼 강력했다. 무력한 농민들은 집단농장의 징발을 막기 위해 가축을 도살하는 식으로 약자의 저항을 이어갔다.
농촌이 황폐해지자 스탈린은 집단화 운동의 일시적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1930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집단농장에 가입한 농가의 비율이 58%에서 24%로 급격히 감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집단농장을 떠나는 것은 어려웠으며, 사유재산과 농기구, 가축을 되찾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6개월의 불안정한 휴전 이후, 9월부터 스탈린은 집단화의 두 번째 물결을 개시했다. 스탈린은 1931년 말까지 농가의 최소 80%를 집단화하고 쿨라크들을 절멸시킬 것을 공언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4. 대숙청: 극단적 형태의 폭력
이와 같은 극단적 폭력의 기원에 대한 논의 역시 쟁점적이다. 스탈린 전기작가인 로버트 터커는 대숙청의 원인을 스탈린 개인의 심성과 개성에서 찾는다. 신경증에서 비롯된 편집증은 스탈린에게 자신이 레닌과 같은 위상을 갖는 혁명적 영웅임을 입증할 것을 강요했다. 스탈린은 진보를 가로막는 반역 분자인 고참 볼셰비키로부터 인민을 구원하는 영웅으로 자신을 상상했다는 것이다. 엘렌느 까레르 당꼬스는 거의 10세기 동안 지속했던, 폭력에 의존하고자 하는 러시아 정치 체제의 경향이 스탈린에게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혁명 발생 이후부터 이어진 테러가 스탈린에 이르러 법과 테러의 결합으로 죽음의 차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로 아치 게티는 소련 정부는 스탈린 하에서조차도 전체주의적이지 않았으며, 스탈린은 너무나 바빠서 숙청에 사사건건 관여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았다. 폭력은 오히려 당과 국가 기구의 하급 수준에서 일어난, “혼란에 대한” 급진적이고 “심지어 히스테리적이기까지 한 대응”이라고 보았다. 돈 라우니는 숙청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자신의 기대만큼 상향 이동을 하지 못한 소련 사회의 비 엘리트층이, 자신들의 승진을 막는 상급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행동하며 벌어진 비극으로 보았다. 파이지스는 이러한 관점들 중에서 몇몇 측면을 수용하고 있다.
우선 파이지스는 대숙청이 집중되었던 시기에 대해서 주목한다. 일각에선 대숙청의 기원을 1934년 12월에 발생한 레닌그라드 지구당 서기장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지만, 이러한 주장은 키로프 암살과 대숙청 사이인 1935년과 1936년의 고요한 소강상태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저자는 대숙청이 내부 위협에 대한 스탈린의 두려움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관점도 기각한다. 그 당시 엔카베데의 보고는 내부 위협이 다른 시기보다 1937년에 특별히 더 심각했음을 시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왜 대숙청이 고참 볼셰비키를 대상으로 한 전시재판, 정치 엘리트 숙청, 도시에서의 대규모 체포, 쿨라크 작전, 민족 작전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동시에 일어났는지에 주목한다. 이는 각각의 현상을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으로서 설명함으로써 대숙청을 별개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시각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함의한다. 저자는 대숙청이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통일된 작전이라고 판단한다. 즉 대숙청이 통제받지 않았거나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며, 스탈린 시기에 언제든 발생할 수 있었던 대혼란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았다. 더불어 돈 라우니가 묘사한 것처럼, 저자는 대숙청에 대한 시민들의 침묵과 방조와 더 나아가 적극적인 고발이 그 광기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 결과는 수많은 죽음, 체포, 그리고 고발을 두려워하면서 나타난 인간관계의 단절이었다.
파이지스는 대숙청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다가올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두려움과 소련을 위협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937년 스탈린은 소련이 유럽에서는 파시즘 국가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상황에 놓였다고 확신했다. 스탈린은 파시스트들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에 ‘파시스트 첩자와 적’이라는 제5열만이 아니라, 모든 잠재적 반대자들을 분쇄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이 소련에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로버트 터커처럼 대숙청의 원인을 스탈린의 개인적 결함으로 환원하지는 않지만, 파이지스 역시 적에 대한 편집증적 두려움이라는 스탈린 특유의 성격이 대숙청에 영향을 끼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두려움이 1932년 부인 나데즈다의 자살, 그리고 형제처럼 사랑한다고 주장한 키로프의 암살로 더욱 심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은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며 죽을 때까지 이러한 입장을 변호했다. 대숙청은 지도부가 전쟁 시기에 위험 요소인 당 내부의 동요자, 출세주의자, 숨은 적을 찾아내는 수단이었다. 숙청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고 불공정한 체포 역시 많았음을 인정하지만, 내부 충돌을 허용했으면 전쟁에서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고, 아마도 패배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카가노비치 역시 몰로토프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자와 동요자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5.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소비에트 체제와는 거리가 먼 요인들
파이지스에 따르면, 전시의 국민적 단합이라는 소비에트 신화와는 반대로, 소련 사회는 전쟁 동안 그 어떤 시기보다 분절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국가가 일부 소수민족들을 희생양으로 추방함에 따라 인종 분리가 악화되었으며, 사회 전반에 잠재되어 있던 반유대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런데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 요인은 일반 병사들의 활약이었다. 병사들을 싸우게 한 것은 두려움이나 영웅심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소비에트 모국이라는 추상적 관념보다는 특정 지역 사회, 현실 속 인간관계의 방어를 위해 더더욱 적극적으로 싸우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1941년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국민 의용군에 자원했다. 사실상 국민적 단합보다는 병사들 간의 동지애가 전쟁의 승리요인 중 하나였다. 병사들은 신뢰받는 동지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에 충성심을 느끼면서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들의 동지애는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발전했고, 이러한 신뢰는 개개인을 생존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퇴역 군인들은 동료 병사들로 이루어진 무리 속에서 전쟁 전에는 자신들의 삶에 없었던 ‘진정한’ 가족을 발견한 것처럼 회고하기도 한다.
일반 병사들의 활약 외에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쟁의 첫 1년이 지난 후 소련군 내부의 권위 구조가 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과 당의 개입이 군 사령부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지휘관들의 자율에 맡기는 게 가장 좋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8월 주코프가 최고사령관 대리로 임명됐으며, 전쟁 수행 정책의 전략적 계획과 운용은 점차 국가방위위원회의 정치인들에서 참모본부로 이전됐다. 정치장교를 비롯한 정치 지도위원들의 군사적 결정 권한은 급격히 축소됐다. 당의 통제에서 벗어난 군 사령부는 안정된 군 전문가 집단을 창출하며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전쟁 수행에서 100만 명이 넘는 징용 노동자들의 존재 역시 중요했다. 이들은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굴라크 죄수와 똑같은 노동 임무에 징용됐다. 이들 중 대다수는 소비에트 체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소수민족이었고, 소비에트 체제의 적으로 탄압받던 쿨라크도 포함되었다. 굴라크 노동은 전시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굴라크는 소련 탄약의 15%와 군복, 군 식량의 상당 부분을 생산했다. 50만 명의 죄수가 전선에 동원됨에 따라 1943년까지 감소했던 수용소 인구는, 1943년 말부터 막대한 인력을 동원하기 위한 대량 체포가 이뤄지면서 다시 급속히 증가했다.6. 전쟁 시기 해빙, 그리고 다시 스탈린주의로
하지만 자유가 확대될 것이라는 희망은 스탈린의 수많은 전후 정책하에서 무너졌다. 그 원인에 대해서 쉴라 피츠패트릭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국가 통제를 다시 부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당의 정치 문화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파이지스도 전쟁 기간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람들 사이에 유대가 형성됐고, 유럽이나 미국과 교류하는 등 소련 내에 잠시나마 해빙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분명한 사실임을 짚는다. 하지만 전후 스탈린이 정치 개혁을 거부하고, 긴축적인 계획경제를 추진하며 강제 노동을 강화하면서 통제가 복귀했다는 사실 역시 짚는다. 저자는 피츠패트릭이 언급한 당의 정치 문화를 체현한 새로운 중간 계급의 존재를 지적한다. 이들은 스탈린 시기에 출세를 위해 적어도 겉으로는 당에 복무한 전문가들로, 스탈린이 전후에 개혁을 거부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다.
전쟁 시기에는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표현의 자유가 생겼다. 사람들은 감정과 의견을 표출했고, 정치적 토론과 체제에 대한 비판까지 이루어졌다. 군대의 병사 집단, 그리고 식품을 사려고 늘어선 줄에서 비판과 토론이 즉석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와 상호작용이 확대됨에 따라 시민 정신과 국민 의식이 부흥했다. 파이지스는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가치관의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고, 모든 시민적 의무는 국가의 명령으로 수행됐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시민적 의무는 나라의 방어라는 실질적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는 국가의 통제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을 단합시켰으며 새로운 공적 태도를 낳았다.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 상당수가 유럽에 들어가 다른 생활방식에 노출되면서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보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유럽의 생활 수준과 우리 소련의 생활 수준 사이에 가로놓인 격차는 감정적, 심리적 충격을 안겨주었고, 수백만 병사들의 관점을 바꾸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서구 세계를 접한 병사들은 전쟁이 끝나면 집단농장이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또 소련이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소련 사회 내부도 서구의 영향력에 노출됐다. 미국과 맺은 무기 대여 조약을 계기로 할리우드 영화, 서구의 서적과 물품이 소련에 유입됐고, 수많은 사람이 소련의 거짓 선전이 아닌 서구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됐다. 모스크바에는 레스토랑과 상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전쟁이 끝나면 생활이 좀 더 편해지고, 소련이 서구에 문호를 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부채질했다. 심지어 경제 개혁조차 토론의 주제가 됐으며, 일부 경제학자는 전쟁 후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시장으로 복귀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스탈린은 모든 정치 개혁 사상을 거부했다. 1946년 2월 9일, 전후 시대에 들어와 처음 한 중요한 연설에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체제가 느슨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스탈린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조짐이 보이면 강력히 타격하라고 부하들에게 주문했다. 전쟁 이후 군대와 당 지도부에서 ‘자유주의 개혁가’, 혹은 1945년 승리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된 최고위 지도자들을 잘라내는 숙청도 개시됐다. 이 과정에서 승장인 주코프 원수가 우랄 지역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전후의 정치적 탄압은 긴축적인 계획경제로 복귀하는 흐름과도 연계됐다. 국제적으로 긴장이 높은 상황에서 1946년 새로운 5개년 계획이 도입됐다. 하지만 생산 목표는 여전히 비현실적이었고, 전후 경제에서 강제 노동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전후 스탈린주의의 복귀에는 새로운 유형의 중간 계급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엔지니어, 행정가, 경영자 계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스탈린 체제가 의식적으로 추진한 정책(고등교육 제도의 확대)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은 교육을 더 많이 받았고, 덜 이데올로기적이었으며, 더 안정적이었다. 또한 전문적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높은 직책을 보장받았고,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비순수성 때문에 강등당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스탈린은 전후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압력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이들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의 충성을 획득하기 위해 안정되고 급료가 높은 직업, 개인 아파트와 같은 부르주아적 열망을 충족시켜줬다.
이들은 출세하기 위해서 적어도 겉으로는 체제의 요구에 순응했다. 당시 가장 흔한 소련의 관리 유형은 공산주의 신봉자나 열성분자가 아니라, 당이나 당의 목표를 불신하더라도 당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출세주의자였다. 일부는 성공, 혹은 사회적 지위의 유지를 위해 과거의 이력을 숨기는 선택을 했다. 이와 달리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출세를 위해 엔카베데의 정보원이 되기도 했다.7. 스탈린 사후에도 여전히 속삭이는 사회: 소련 시민들은 왜 침묵했는가?
그러나 스탈린 체제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전히 침묵했다. 흐루쇼프 시기의 해빙이 지속될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체포될 수도 있다는 공포는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사람들을 수십 년 동안 침묵시킬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실제로 해빙기는 짧았고 제한적이었다. 또 흐루쇼프 시기 내내 정권은 소비에트 체제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스탈린 시기 억압에 대한 어떤 논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60년대 초 해빙이 절정기였을 때조차도, 스탈린 시기 수백만 명이 죽거나 억압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공식적 인정도, 정부의 사과도 없었다. 마지못해 복권해준 희생자들에게 적절한 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은 불신과 적대의 대상이 됐다.
시민들의 예상처럼,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리면서 해빙 분위기는 돌연 끝났고 다시 검열이 강화됐다. 승전 20주년 기념으로 위대한 전쟁 지도자로서 스탈린의 명성이 되살아났고, 정권은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며 스탈린 시기 억압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았다. 다시 체포될 수도 있다는 위협은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들을 1956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더욱 무겁게 침묵시킬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공포 정치는 종결됐지만, KGB(국가보안위원회)는 여전히 엄청난 범위의 가혹한 처벌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석방된 죄수였던 지나이다 부슈예바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끊임없는 걱정과 다시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1981년에 노동수용소 수감 기록이 없는 새 여권을 받은 뒤에야 두려움이 가시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딸에 따르면 “일생에 걸쳐, 세상을 하직하는 바로 그날까지도 공포 체제가 부활할지 모른다고 무서워”했다고 한다. 마리야 부트케비치는 오늘날(2004년)까지도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어딘가로 멀리 보내질까 봐 계속 불안에 떨었다. 스베틀라나 브론시테인은 노동수용소가 등장하는 악몽을 계속 꾸며, 서류를 작성해서 미국 대사관 앞에 줄을 설 기력만 있다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고 말했다.8. 나가며
하지만 전쟁 시기에 스탈린주의의 공백이 일제히 드러났다. 전시에 소비에트 이상을 중심으로 한 국민적 단합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당의 통제하에 있던 소련군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를 대체하여 소련을 승리로 이끈 것은 스탈린 체제가 의식적으로 부정해왔던 개인 간의 관계들이었다. 자기 집과 지역 사회, 그리고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한 일반 병사들의 활약이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기간 해빙의 시기가 나타나며 시민들이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를 품기도 했지만, 스탈린이 개혁의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또다시 사회는 전쟁 이전의 억압적 체제로 회귀했다. 여기에는 체제의 존속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새로운 중간 계급의 등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자는 특히 대숙청에 주목한다. 대숙청이 보여주는 충격적인 수치를 보면, 왜 소련 시민은 이러한 극단적 폭력을 경험하면서도 스탈린의 통치에 순응했는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에도 입을 열지 못했는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스탈린 혁명이 본격화되던 농업 집단화와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사회주의 경제 건설이라는 대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 중심으로 계획이 제출되고 실행됐다. 이 과정에서 소련 시민은 주체적인 위치에 있지 못했다. 누군가는 사회주의 혁명을 ‘현대화’로 이해하며 스탈린 혁명의 충실한 지지 기반이 됐고, 누군가는 자유와 권리를 억압당하고 체제에 순응하기를 요구받았다. ‘혁명의 완수’, ‘혁명 조국의 수호’가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졌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견의 배제, ‘인민의 적’에 대한 억압이 용인됐다. 이러한 배제와 억압을 합리화하는 과정은 결국 스탈린 시기 억압적 체제, 나아가 극단적인 폭력의 동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속삭이는 사회’였다. ●
위구르 투쟁의 전략과 연대에 관한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