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2022-12-27

    요동치는 세계경제, 민주노조 운동의 역할과 과제는?

    12월 22일 <등촌동 워크숍①>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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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2일 <등촌동 워크숍①> 참관기

    2022년 하반기, 코로나19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서 엔데믹(풍토화)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치명률도 낮아지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 전 세계는 고물가-고금리-저성장 시대라는 또 다른 방식의 고통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시기 시행한 재정 정책과 양적완화라는 경제적 응급처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 과정에서 풀린 유동성, 2022년 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과 맞물려 순식간에 고물가-고금리 국면으로 돌변했다. 1970년대와 같은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요동치는 세계 경제 속에서 우리는 2023년을 어떻게 전망할 것인가? 노동자의 단결을 향한 사회운동의 역할과 과제는 무엇인가? 지난 22일 사회진보연대 공공운수노조 회원모임 주최의 공개 워크숍에서 “요동치는 세계 경제, 민주노조 운동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토론한 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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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경제에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한재영 공공운수노조 공공기관사업국장은 2022년 한 해의 정세를 개괄하면서 워크숍 발제를 시작했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가 기준금리를 1월 0.25%에서 12월 4.50%로 급격히 끌어올리면서 전 세계 국가가 차례로 금리를 급격히 인상했다. 미국과의 금리 차이로 인한 자본 유출을 우려해서다. 지난 30년간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해왔던 일본마저 금리 인상 대열에 합류한다는 신호를 보였다. 월드컵 우승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아르헨티나는 기준금리를 연 75%로 인상하였지만, 그럼에도 살인적인 물가상승은 좀처럼 통제되지 않는 모습이다. 한국 역시 세계적 경제위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역사상 첫 전월세 역전 등이 대표적인 현상이다.
     
    영국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역대 최단기(44일)로 사임한 사태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세계 경제위기에서 예외인 국가는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리즈 트러스 내각은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라는 긴축 정책과 상반되게 대규모 감세 및 에너지 지원금 지급정책을 시행했다. 정부의 이러한 모순된 정책으로 시장은 대혼란에 빠졌다. 30년 만기 영국 국채금리는 폭등한 반면, 파운드화는 폭락하는 등 영국 경제는 파산 직전까지 몰린다. 영국 중앙은행이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언하여 위기를 겨우 수습했지만, 영국 경제는 계속 흔들리고 있다.
     
    중국은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인한 경기침체에 더해, 부동산 침체와 지방정부 부채가 심각하다. 지방정부융자기구(LGFV)가 지방정부 부동산 등을 담보로 인프라 사업에 투자한 부채의 규모는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절반에 달한다. 부동산 시장에 물린 지방정부 부채 문제는 중국의 또 다른 뇌관이자,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핵심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미 미중 패권대결로 탈세계화되던 공급망의 붕괴를 가속화하여, 세계 경제를 고물가-고금리 위기로 더욱 몰아넣었다.
     
     

    질서가 무너지다: ‘40년’과 ‘70년’의 붕괴

     
    이러한 정세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재영 국장은 최근 정세를 ‘40년 전 시작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붕괴’와 ‘70년 전 시작된 2차 세계대전 이후 질서의 붕괴’로 진단했다. 세계경제는 1970년대를 정점으로 한 뒤, 이윤율이 저하하는 장기침체 국면에 들어섰다. 자본과 지배계급은 이윤 회복을 위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대응했다. 1980년대 이후 세계경제는 실물경제보다는 주식시장(2000년대 닷컴버블), 부동산 시장(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금융시장의 확대와 버블의 붕괴를 반복해왔다.
     
    그런데 최근의 고물가-고금리로 인한 위기는, 2008년 이후 대규모 양적완화로 간신히 버텨오던 세계경제가 또다시 무너졌으며 이를 역전시킬 마땅한 수단이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협력을 바탕으로 수립된 국제 질서, 전쟁 억제 체제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에서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전쟁은 유라시아 동쪽 끝에 있는 동아시아에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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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기 양상에 대한 전망: 2023년 세계경제

     
    문제는 현재의 경기침체 양상이 주류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성장-침체-성장 패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기 후퇴 이전의 성장률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며, 장기침체 국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도 제한적이다. 한재영 국장은 1930년대와 같은 방식, 즉, 전쟁을 통해 자본이 위기 극복을 시도하지 않을까에 대한 우려가 그저 기우는 아닐 수 있다고 덧붙였다.
     
    2023년 세계경제를 전망하는 데에 있어 어떠한 부분을 주요하게 짚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미국의 금리 인상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급증하는 국가부채를 전 세계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저성장-인구감소 문제가 심각한 한국은 노동자 내 양극화 심화, 가계부채 및 부동산 침체, 25년 만에 최고치를 갱신한 연간 무역적자, 한계기업 확대로 우려되는 고용불안 등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좀처럼 밝아질 기미가 없는 경제 정세에서 위기에 대처하는 노동자운동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이어졌다.
     
    관련하여 발제자는 현 시기 민주노조 운동은 ‘경제위기로 자본주의가 붕괴하면 무정부 상태가 되고, 민중권력 쟁취로 혁명의 그날이 가까워진다’ 식의 관념을 답습하지 말고, 마르크스가 이야기하기도 했던 ‘궁핍화’(노동자 간 적대가 심화되고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는 상태, 야만과 타락)를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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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조 운동의 과제와 다섯 가지 제안

     
    요동치는 세계경제 정세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민주노총의 역대 경제위기 대응에 대한 평가를 발본적으로 시작해보자. 경제위기 시기 자본과 지배계급은 노동시장 재편을 위해 전략적인 공세에 나선다. 하지만 한재영 국장은 지난 시기 민주노총의 경제위기 대응은 기업의 울타리 안에 갇혀 호황기에 적합했던 투쟁 방식을 반복했던 것은 아닌가, 미조직 노동자를 비롯한 전체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민주노조로 거듭나는 혁신의 계기를 유실한 것은 아닌가 질문을 던졌다. 80년대 경제성장기의 노동자운동과 단절을 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라며, 해외 사회운동의 사례에서 불황기 노동자운동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고 짚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경제위기 시기 대정부 교섭과 투쟁을 병행하여 제도를 개선하고 한시적 해고금지 요구 등을 쟁취한 이탈리아노총의 사례, 물가가 치솟는 경제정세를 고려하여 임금협약을 체결한 독일 산별노조의 사례를 소개했다. 이처럼 다른 방식의 투쟁의 사례를 만드는 것, 초기업 초업종 투쟁의 실험이 계속될 필요가 있다는 워크숍 참가자들의 의견도 있었다.
     
    경제위기 시기 실질임금 방어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당하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하다. 하지만 이례적인 경제위기 시기에는 기업별 대응을 넘어서는 두 가지가 더 필요하다. 하나는 전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하락을 막는 투쟁, 조직된 노동자의 역량을 통해 미조직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을 방어하는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이다. 다른 하나는 경제위기 시기 노동시장 재편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총연맹, 산별노조 차원의 계획이다. 경제위기에 더욱 취약한 불안정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을 함께 방어하는 보편적 요구를 제시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전체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면서 한국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이 형성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운동적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발제자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제안했다. (1) 위기 시기 더욱 벌어지는 노동자 내부 격차 축소를 위한 임금투쟁 방안과 총연맹 역할을 정립하자. (2) 위기 시기 미조직, 취약계층 노동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개입 방안을 마련하자. (3) 거시경제의 제약을 고려하여, 공공성 강화를 위한 사회보장의 우선순위 요구를 정선하자. (4) 중장기 경제변화에 대응하는 정책 대안을 모색하자. (5) 대안적 경제체제를 위한 연구와 토론에 역량을 쏟자.
     
    각각의 과제에 대한 토론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경제 정세를 더욱 깊이 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겠다는 참가자의 의견도 제출되었다. 인구감소와 고령화 등 문제를 노동자 운동이 자기 과제로 삼아 대응 방향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뿐만 아니라 민주노총도 요동치고 있는 상황을 진중하게 인식하고, 현 시기에 적합한 사회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토론을 이어가자는 제안도 덧붙여졌다. 낡은 질서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대안은 요원한, 혼란과 야만의 시대를 돌파하기 위한 토론과 실천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진보연대 공공운수노조 회원모임이 주최하는 <등촌동 워크숍>은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개최될 예정이다. 1차 워크숍 발제문과 발표자료(PPT)는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공개자료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 2022-12-23

    윤석열 정부 노동개혁 비판

    미래노동시장연구회 1차 권고안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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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노동시장연구회 1차 권고안 중심으로

    윤석열 정부는 노동 개혁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고 있다. 12일 미래노동시장연구회(이하 ‘연구회’)가 노동시장 개혁에 대한 1차 권고안을 발표했고, 정부는 적극적인 수용의 입장을 표하고 있다. 12월 15일 있었던 1차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인기가 없어도 3대개혁(노동‧교육‧연금)을 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밝혔고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과 국민의 힘은 연구회의 권고 방향 중 임금‧근로시간 개편과 관련하여 23년 상반기 입법을 예고했다.
     

    “비스포크 시대와 노동법의 현대화”

     
    권고안은 지난 6월23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노동시장 개혁방향>을 보완하여 세부 정책을 제안하였다. 노동개혁은 노사정 각 주체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갈등의 영역으로, 높은 수준의 사회적 대화와 합의 방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노사정의 이해를 조율하는 과정 대신, 담당 부서의 선 방향 제시, 후 정책자문 보완이라는 전형적인 국가주도 정책개혁의 방식을 택했다. 정책의 주요 내용은 우선적으로 근로시간과 임금체계의 유연화다.
     
    먼저, 노동시간에 있어 연장근로의 주 단위를 폐기하고 월‧분기‧반기‧연 단위 총량 관리로 개편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선택적 근로시간 정산 기간을 현행 1개월에서 3개월로 확대하고, 적용대상도 확대한다. 탄력근로제는 사전확정 요건을 완화해 사후변경절차가 가능한 제도로 보완한다. 휴가제도에는 근로시간 저축계좌제를 도입했고, 장기‧단체휴가 등 활성화를 명시했다. 기존 근로기준법 상의 예외 규정도 확대하였다. 1차 산업 및 고소득 전문직과 비대면 근로에 적합한 별도의 노동시간 산정기준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임금체계 개편도 구체화했다. 연공급을 직무성과급으로 전환하는 방향 아래, 중소기업에도 임금체계를 구축하도록 지원하고, 업종별로 임금체계를 통일하기 위한 협의체를 운영‧지원한다. 미국의 사례를 따라 직무별 시장임금 정보제공을 위한 ‘통합형 임금정보시스템’을 도입하여 직무표준과 적정임금 데이터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별도의 사회적 대화기구(상생임금위원회)를 통해 임금격차 해소를 지원한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한편, 노동시간과 임금체계 개편은 근로자대표제의 변화를 동반한다. 취업규칙 변경 동의 주체에 대한 법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되었다. 아울러 그동안 노동계가 요구해 온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을 언급하였다. 임금 산정 기준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주휴수당과 통상임금 기준을 언급하며, 파견업종 확대와 최저임금 제도도 손보겠다는 내용이 명시되었다.
     
    이러한 노동시장 개혁안의 총적 기조는 기존 노동법 제도의 ‘현대화’가 핵심이다. 오늘날 노동은 “산업화 시대의 대량생산 표준화 시대에서 개인 취향과 선택의 다양화 시대로 변모한 비스포크(맞춤생산) 시대”로 나아갔으므로, 노동의 개별화, 자율적 선택권을 부각한다는 것이다.
     

    노동 유연화의 추가적 완비와 노조의 상대화

     
    주 단위 12시간 연장근로의 최대 상한 범위 확대는 그동안 노조가 방어해 온 실노동시간 단축에 있어 심각한 퇴행이다. 연장근로 계산 기준을 권고안대로 확대하면 주 최대 69시간 노동이 사실상 가능하다. 2004년 주 40시간 도입 이후 법정주휴의 의무가 강제되지 않아, 주 68시간(휴일 근로 포함)의 장시간노동이 현실화했다. 그런데 연구회가 제시한 연장근로 개정은 이 당시보다 퇴보한 것이다. 여전히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최장 노동시간 국가에 속하는 한국에서 연장근로에 대한 전면적인 확대 정책은, 오히려 노동생산성을 약화하는 요인이 될 뿐이다.
    권고안은 “법정근로시간 단축 등 획일적 방법은 한계적이라 현행 제도를 근본에서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즉, 윤석열 정부는 이제까지 역대 정권이 해왔던 유연근로제의 부분적 확대를 넘어, 주 단위 연장근로 상한선에 대한 일반적 기준을 허무는 발상을 하고 있다.
     
    권고안은 이러한 급격한 정책변화의 근거를 이렇게 진단한다. “근로시간 연장이 곧 임금의 증가로 이어지는 구조에서, 일자리를 가진 근로자는 연장근로와 휴일근로 등으로 일자리를 독점하고(62.7%) 여성과 청년의 노동시장 진입을 어렵게 만듭니다. 여성이 일자리에서 배제되고(’21년 여성 고용률 51.2%) 경력 단절을 우려해 출산을 포기하는 상황에서, 장시간 근로 개선과 여성‧청년의 경제활동 참여 촉진을 위해 근로시간 활용 방식을 다양화하고 선택의 폭을 확장하여, 다양한 휴식과 장기휴일의 향유를 통해 근로자의 건강을 보호하고 노동력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즉, 권고안은 정규직의 장시간 노동(연장근로, 휴일근로)이 여성과 청년의 실업을 유발한다고 규정하면서, 장시간 노동을 억제하여 이들의 취업을 유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장근로를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총량을 관리하는 제도를 도입하면, 이는 오히려 정규직의 장시간 노동을 정당화하는 유인이 될 수 있다는 모순을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1차 노동시장에서 확립된 장시간 노동 관행이 고용의 불안정성이 높은 2차 노동시장에 미칠 부정적 파급도 인식하지 않는다. 연장근로 총량관리제는 여성과 청년세대의 고용 불안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어렵다.
     
    또한 권고안은 미국의 O*NET과 같은 직무별 시장임금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기업별 노조가 교섭을 통해 결정하는 연공형 체계를, 시장이 직무별 표준 임금기준을 통해 스스로 결정하는 직무급 방향으로 유인하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미국 노동시장에서 기업의 시장임금 조사가 핵심적인 임금 결정 요인이 된 것은, 사업장과 산업 차원에서 임금 교섭을 진행할 노동조합의 힘이 미약해서다. 한국처럼 연공서열적 임금체계가 이미 산업 표준으로서 암묵적인 전제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시장직무평가를 도입한다 해도 그러한 제도가 대기업노조의 임금체계 변화를 유인하기 어렵다. 또한 직무별 임금표준이 만들어진다 해도, 대기업 등 내부노동시장의 1차 분배를 조정하려는 합의가 없다면 중소기업과의 지불능력 격차로 인해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상승은 불가능하다. 임금 격차가 실질적으로 축소되려면, 대기업 등 연공체계가 굳어진 사업장 노조에서의 개별적인 변화가 아니라, 노조의 산업적 임금 정책을 전체적으로 관장할 수 있는 초기업적 산별교섭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직무급제는 단순히 연공급의 반대말을 의미할 뿐,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위해 고임금 조정이나 임금 격차 축소를 실제로 실행하겠다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대기업 임금 극대화 관행을 통제하고 조정할 당사자인, 산별노동조합 또는 노동조합총연맹이라는 주체를 진지하게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이 단순히 자유경쟁 원리로만 움직이지 않듯, 시장이 사회적 직무평정을 결정할 수 있다는 발상은 한계적이다. 정부는 직무급이 좀 더 민주적이라는 명분만 반복적으로 선언하는 대신, 협상의 대상인 노조가 구체적으로 노동시장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제대로 직시하고 대화의 주체로서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오늘날 노동시장 이중구조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총노동 차원에서 조율된 산업별 초기업적 임금교섭이다. 그러므로 노동조합 역시 기업별 노조가 개별적으로 추구하는 임금 극대화 전략의 한계를 진지하게 성찰하여 변화를 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대기업 노조가 1차 노동시장의 안정적이고 우월적인 구조를 방어하는 데 치중하지 않고, 산별노조와 총연맹 차원의 임금정책과 교섭권한의 강화에 힘을 실어야 가능하다. 노동시장 격차 축소의 핵심 열쇠는 노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분권화를 심화시킬 근로자대표성

     
    권고안 서문은 현재의 노동체제가 “지체된 제도, 지연된 개혁”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개혁은 노동자의 개별적 선택에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에 있다는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다. 권고안은 노동시간과 임금체계의 유연화 및 취업규칙 변경을 동의할 주체를, 과반노조에서 직군, 직종별 부분 근로자대표로 확대한다는 내용을 강조한다. 이는 개별적 선택권과 집단적 노사관계를 대립시키며 노조를 상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오히려 한국 노사관계 발전을 지체시키는 핵심적 문제인 기업별 노조의 분권화 경향을 촉진할 뿐이다. 노동조건 합의의 주체를 해당 노동 분업의 구획으로 나누면, 기업별 노조 내에서도 분열이 심화될 것이며, 따라서 기업을 넘어서는 초기업적 교섭은 시도조차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권고안 서문에서 언급된, “지체된 제도, 지연된 개혁”의 사례로 가장 적합한 것은 기업별 노사관계를 조율하는, 산업적 차원의 초기업적 교섭의 미비다. 정부는 노조가 현대적인 노동방식에 뒤처졌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산업구조 변화에서 노동을 대변할 수 있는 노조의 역할은 배제한다. 노동시장 격차 축소와 저인구‧저성장 시대 경제, 산업 정책에서 노조가 거시적 의제를 통해 개입을 할 수 있는 통로는 일절 차단했다. 한편, 힘의 불균형이 전제된 노사관계의 현실 속에서 직종, 부서별 개별 결정권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논리를 극대화하면, 결국 노동3권의 의미가 퇴색되고 노조의 존재 의미도 상대화될 수 있다. 이처럼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은 노동의 현대화에 역행하는 노조의 분권화 또는 노동3권의 무력화를 내재하는 결함이 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격차, 노동조합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혁은 산업별, 기업규모별 생산성 격차의 원인인 경제구조를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연구회는 이 문제를 이중구조의 내부노동시장에 우선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장기 저성장과 노동인구 감소라는 조건에서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1차 노동시장의 근로시간·임금체계 유연화를 추가적으로 완성하려 한다. 또한 권고안에 포함된 “60세 이상 고령자의 계속고용”의 의미는, 고령자가 정년 이후에도 노동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고령화 위험을 상쇄하는 노동생산성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러한 구상의 노동개혁은 주로 내부노동시장에 포괄되어있는 노조운동과 상당히 갈등적일 수밖에 없다. 대기업과 공공기관 노조들은 사실상 노동시장 격차의 핵심 변수이자 1차 노동시장을 대표하는 당사자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격차를 축소하려면, 노사 간의 첨예한 쟁점을 점진적으로 설득할 보편타당한 전략과 실현 가능한 청사진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는 노동시장 격차축소나 노사관계 현대화의 실현가능한 전략을 제시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방향이 아니라, 노조를 우회하는 개혁 방향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거나 노동운동의 일면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다. 노조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노동시장 변화를 만드는 것은 올바르지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노동조합은 스스로 노동시장 격차를 축소할 수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책임 있게 인식해야 한다. 장기저성장 경제로의 진입과 인구구조의 변화라는, 오늘날 거시경제적 제약 속에 노조의 투쟁이 놓여있다는 정세인식이 필요하다. 기술 발전과 산업구조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노동시장 제도가 변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노동자운동은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을 정확히 비판하고, 노동시장 이중구조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개혁과제를 스스로 제시해야 한다. 여기에는 초기업적 임금정책의 개발, 기업별 교섭체계를 조율할 수 있는 산별 교섭, 거시적인 총노동 정책을 만드는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2022-12-16

    시진핑 ‘신시대’를 비추는 역사의 거울, 중국공산당 100년사

    『중국공산당 100년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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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공산당 100년의 변천』

    2022년 10월, 제20차 중국공산당대회가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이 당대회에서 올해 69세인 시진핑이 총서기로 선출되고, 새로 선출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시진핑 측근으로 채워지면서 덩샤오핑 이후 약 40년간 유지해오던 중국정치의 집단지도체제가 무너졌다. 또한, 시진핑은 당대회보고에서 대만 문제와 관련하여 직접 “평화 통일을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결코 무력 사용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고, 최근 G20 정상회의 중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대만문제를 분명한 중국의 레드라인으로 삼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올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여전히 진행 중인 남중국해에서의 무력분쟁, 북한의 제7차 핵실험 전조로 인한 동북아 전쟁위험 등 세계 정세를 위협하는 요인이 나날이 심화하는 가운데, 대만에 대한 무력통일까지 불사하겠다는 시진핑의 발언은 어느 때보다도 그 위험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우리는 이른바 ‘신시대’라고 불리는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에 대해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사회진보연대 서울지부는 『중국공산당 100년의 변천』을 함께 읽고 토론했다. 이 책은 중국공산당의 지난 100년을 크게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 공산당 창당 후 30년간의 혁명을 통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시기, 둘째, 건국 후 30년간의 사회주의 건설 시기, 셋째, 1978년 이후 30년간의 개혁개방 시기, 넷째, 2012년 시진핑 이후 새로운 ‘신시대’ 10년이 그것이다. 그리고 8개의 장별로 정치, 경제, 사회, 대외정책, 문예, 젠더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시기별 중국공산당의 과제와 대응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최근 신시대에서 주목되는 변화는 무엇인지를 서술하고 있다.

    서평에서는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한편,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의 ‘신시대’가 갖는 특징과 위험을 살펴보고자 한다. 즉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2년 시진핑 집권 시기와 더불어 나날이 심화하는 미중 갈등과 코로나 팬데믹 등 불안정한 국제질서 속에서도 기어코 2022년 20차 당대회로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의 ‘신시대’가 보이는 특징이 무엇이며 어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책의 마지막 장 에필로그에서 설명하는 ‘신시대’ 중국의 역사 다시 쓰기의 의미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즉 지난 중국의 100년사를 혁명사가 아닌 외부세계에 중화민족 굴기의 투쟁사로 다시 쓰려고 하는 중국공산당의 시도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 동북아 차원의 국제적 민중연대를 모색하기 위한 단초를 찾아보고자 한다.
     
     

    1. 중국공산당 100년, 혁명에서 ‘신시대’까지

     
     
    1921년 창당된 중국공산당의 지난 100년은 대체로 30년 주기로 중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건국 시기(1921~1949년)를 살펴보자. 19세기 중국은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을 거치며 청나라라는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가운데 양무운동, 변법운동, 신해혁명이 모두 실패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이후 이전의 대응을 반성하며 계몽주의를 내세운 신문화운동과, 1919년 중국 베이징 학생들이 일으킨 항일운동이자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인 5.4운동을 거쳐 국민당과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1917년 러시아혁명과 1차 세계전쟁의 전후처리 과정으로 촉발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코민테른의 지원을 바탕으로 1921년 상하이에서 창당되었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건당과 건국의 시기에 중국 지식인 사이에서는 ‘문제와 주의 논쟁’, ‘사회주의 논쟁’, ‘무정부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논쟁’ 등 여러 사상 논쟁이 일어났다. 그 결과 여러 급진사상이 마르크스주의로 수렴되어 중국공산당의 핵심이념이 되었다. 나아가 마오쩌둥은 구체 정세에 따라 주요모순이 변화한다는 모순론과, 중국의 사회성격을 관료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이로부터 공산당이 주도하는 항일민족통일 전선을 통한 반봉건 반제국주의의 신민주주의 혁명노선을 수립했다.

    중국공산당은 창당과 함께 노동계급을 적극적인 혁명세력으로 규합하기로 하여 공개적인 노동운동을 전개하였고 1925년 전국에 약 560개 조합, 117만 명의 조합원을 보유한 중화전국총공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치열한 투쟁 끝에 얻어진 중국공산당의 승리에는 노동운동의 지대한 영향이 있었다. 하지만 혁명의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이 노동계급을 영도하는 대중노선이 확립되고, 이후 공회를 포함하여 공청단(공산주의 청년당)과 부련(전국부녀자연합회) 등 사회단체는 중국공산당만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조직체계로 종속된다.

    다음으로 두 번째 사회주의 건설 시기(1949~1976년)를 살펴보자. 1949년 건국 당시 중국은 저발전 농업사회였으므로, 중국공산당은 신민주주의 노선에 의한 발전과 점진적인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냉전 질서가 한국전쟁이라는 열전으로 전개되면서, 안보의 위협을 느낀 중국공산당은 태도를 바꿔 급속한 소련식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1956년 사회주의로의 개조가 완료되었음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도농격차의 확대, 관료주의의 심화와 같은 모순이 격화되면서, 중국공산당은 1957년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내세운 정풍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내 반우파투쟁으로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는 한편, “소련은 미국을 추월하고 중국은 영국을 추월한다”를 내세운 대약진운동이 주관주의와 결합하여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가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낳은 채 실패하게 되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후 마오쩌둥은 다시 사회주의 안에서의 계급의 존재와 계급투쟁을 강조하며 당내에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새로운 자본가계급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청운동(장부, 창고, 자재, 노동점수 면에서 간부의 부정이 없었는지 심사하는 운동)을 거쳐 1966년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대중운동으로 이어졌다. 마오쩌둥을 제외한 당과 국가의 지도자를 모두 비판의 대상으로 삼게 했던 10년간의 문화대혁명 시기는 역설적으로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 개인에 대한 권력 집중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으로 세 번째 개혁개방 시기(1977~2011년)를 살펴보자. 문화대혁명 이후 화궈펑 체제를 거쳐 집권한 덩샤오핑은 1979년 미중 수교가 상징하는 대외관계 변화에 따라, 건국 이후 중국이 선택한 전통적인 사회주의 건설이 아닌 개혁개방을 결정한다. 중국은 서구강대국에 대해 ‘중국위협론’을 불식시키며 도광양회(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 방침으로 저자세를 취했다. 미중 협력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키신저 질서’에 따라, 중국은 미국의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편승하여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대가로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동맹과 주둔군 배치를 용인하였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농촌개혁과 경제특구로부터 출발하여 1984년 도시개혁, 1992년 남순강화를 계기로 가속화되었다. 1993년에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개념으로 공유경제와 자본주의적 민영경제가 공존하는 시스템을 전면 도입하였다. 중국 정부는 동아시아 수출주도형 경제발전모델과 비슷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경제성장을 견인하였다. 중국은 2001년에는 WTO에 가입하였고, 2010년에는 일본을 추월하는 명실상부한 G2가 되었다.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중국은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증대하는 한편,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재분배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는 시진핑 주석 시기 공동부유 정책으로 이어졌다.

    개혁개방 시기에는 경제개방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통한 정치체제의 개혁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 개인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종신체제를 문화대혁명의 주요한 원인으로 분석하고, 권력의 분권화와 종신제 폐지를 통한 승계제도의 규범화를 핵심적인 정치개혁으로 추진했다. 이에 따라 덩샤오핑 이후 1992년 장쩌민 체제, 2002년 후진타오, 2012년 시진핑으로 안정적인 승계가 이루어졌다. 2002년 이후로는 중국공산당에서 68세는 새로운 임기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7상8하’ 원칙이 암묵적으로 지켜졌고, 당대회에서 젊은 차기 지도자를 최고지도부의 일원으로 참여시키는 관례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치개혁은 사실상 중국공산당 내부 개혁에 그쳤다. 개혁개방 정책이 진행되던 와중에 1989년 봄 베이징대 학생들을 필두로 한 민주화운동인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이때 기존의 공회와는 달리 독자적인 공자련(노동자자치연합회)이라는 자발적인 독립노조가 2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면서 등장하였다. 이 사태의 해결을 둘러싸고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운동을 억압하고 폭력적인 무력진압을 주장하는 강성파가 우세하면서 ‘천안문 사태’는 결국 무참하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농민공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신 노동계급은 2010년 폭스콘 노동자들의 연쇄 자살과 난카이 혼다 자동차 기업노동자들의 파업, 2014년에 3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위위안 신발공장 파업, 2017년 개혁개방 시기의 대표적인 성장도시인 선전시에서 일어난 제이식 공장 노동자들의 노조설립 투쟁과 베이징대, 난징대에 소속된 대학생들의 노학연대 투쟁이 소규모이지만 지속해서 일어나면서 중국의 ‘신 계급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인 ‘신시대’(2012년~현재)를 살펴보자. 2012년 제18차 당대회를 통해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집권한 시진핑은 ‘네 개의 자신감’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의미하는 ‘중국몽’을 주창하며 G2로 등극한 중국의 자신감을 드러냈다. 특히 개혁개방 시기의 ‘도광양회’가 아니라 ‘주동진취’와 ‘주동외교’를 내세우며 중국의 핵심이익을 침해할 경우 무력시위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드러내었다. 

    2019년 제19차 당대회에서는 2035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의 기본적 실현’, 2050년까지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건설’을 내세우며 보편적인 중국의 발전모델, 즉 ‘중국적 보편’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국가주석의 임기를 2기 10년으로 제한하는 헌법 규정을 2018년에 개정해서 삭제하고 시진핑을 중국공산당 중앙의 핵심으로 표현하면서, 덩샤오핑 이후 아슬아슬하게 내려오던 집단지도체제를 포함한 개혁 시기의 분권화가 도로 역전되었다. 

    나아가 2022년 제20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일대일로’, ‘공동부유’를 내세우면서 사실상 3연임을 통한 장기집권을 천명하였다. 시진핑의 당 중앙 핵심 지위 확립과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 즉 시진핑 사상의 지도적 지위 확립을 뜻하는 ‘두 개의 확립’과, 시진핑의 당 중앙 핵심 지위 수호와 (시진핑을 정점으로 하는) 당 중앙 집중통일 영도를 수호하는 ‘두 개의 수호’를 내세워 시진핑을 중국 인민 전체의 지도자를 뜻하는 인민 영수로까지 추켜세운 것이다. 이로써 제20차 당대회는 기존의 태자당, 상하이방, 공청단 등의 주류 계열들이 모두 탈락하고 시진핑 독점의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를 통해 본격화된 시진핑 ‘신시대’의 특징과 위험성

     
     
    과연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의 ‘신시대’ 지도체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끌며 미국을 뛰어넘고 새로운 사회주의 현대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러 측면에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개혁개방 시기 미국 중심의 경제 질서에 편승하면서 오랜 시기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미국 역시 달러 환류 메커니즘의 하위파트너로서 중국을 오랫동안 포섭해왔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러한 특수한 성격을 띤 G2 체제는 시험대에 올랐다. 미국은 트럼프가 대표하는 인민주의로 인한 정치경제적 혼란을 겪었고, 현 바이든 행정부 역시 금융화 유지와 불평등 완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요원해 보인다. 중국 역시 시진핑 취임 이후 대내적으로는 경제성장의 둔화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지도부는 이러한 위기의식 하에서 수출과 내수를 활성화하는 ‘쌍순환’ 전략, 첨단산업 육성정책인 ‘중국제조 2025’를 제시했다. 제20차 당대회에서도 ‘신발전구도 구축’, ‘과학기술 인재 육성’, ‘공동부유’, ‘경제안전’(안보)을 주된 키워드로 업무보고에 담았다. 특히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건설의 최우선 임무로 경제발전의 고도화를 제시하면서 ‘발전’이야말로 국가부흥을 위한 제1의 임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였다. 더불어 ‘공동부유’로 대표되는 분배제도 개선을 통해 취업, 사회보장제도, 의료자원 개발, 의료보장 정책을 통해 분배의 균형과 접근성을 강화하면서 중산층 확대를 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정책은 딜레마에 빠져있다. 최근 중국 부동산업계에서 채무를 상환하지 못해 디폴트를 선언하는 회사가 급증하고 부동산 채권 시장이 폭락하고 있는 등 부동산 거품이 터지면서 중국의 경기부양책은 힘을 잃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의 정책조정으로 다시 한번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면, 금융위기와 국유기업의 줄도산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국유기업의 이익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국공산당 내 지배 관료들 사이에서도 심각한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 

    ‘중국제조 2025’로 대표되는 막대한 연구개발비와 인프라 투자를 통한 기술혁신 계획 역시, 중국 특유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로 인한 억압적인 사회가 지속하는 한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다. 더군다나 중국은 여전히 제로 코로나 정책을 고수하면서 코로나19 팬데믹을 잘 극복한 것처럼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최근 폭스콘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공장을 탈출하는 일이 벌어지고 주요 도시에서 ‘백지 시위’가 발생하며 인민들의 불만 역시 커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불만을 잠재우기는커녕 고도화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개혁개방 시기와 같은 고도의 경제성장이 불투명한 가운데,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은 제20차 당대회에서 중국이 달성해야 할 두 번째 백 년의 목표를 ‘사회주의 현대화 강국 건설’이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발전’과 ‘안전’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 밑받침되어야 하며, 지금 이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에 서 있는 만큼 무엇보다 내부 ‘단결’과 ‘분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외부세력인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경쟁 속에서 중국공산당과 시진핑만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이끌 수 있는 존재라고 정당화하는 것이야말로 ‘시진핑 사상’의 핵심이다.
     
    한편, 업무보고 중 ‘일국양제 견지 및 조국통일 추진’을 살펴보면, 홍콩과 마카오의 자본주의 제도와 생활방식에 장기간 변화는 없을 것이고 중국 정부는 두 지역의 번영과 안정을 지원할 것이라고 명시하면서도, 애국자에 의한 홍콩, 마카오 통치가 이루어져야 하며 반중세력과 외부세력의 개입에 대해 견결히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만 문제 역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면서 최대한 평화 통일을 추구하되, 무력 사용이라는 선택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나아가 신중국 건국 100주년인 2049년에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 건설과 함께 대만과의 통일을 이루겠다는 시간표를 제시하면서, 향후 대만해협의 긴장 국면이 더욱 고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이후 중국의 대만을 향한 군사행동 감행에 주요한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마치 1930~1940년대 독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강대국이 자신의 배타적 주권과 생활권을 내세워 주변 국가를 무력으로 침공하는 영토팽창주의가 공고해진다면,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군사적 팽창주의가 더욱 기세를 부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이 제시하는 ‘신시대’의 함의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3. ‘신시대’ 중국의 역사 다시쓰기, 

    우리는 왜 중국공산당의 100년을 다시 읽어야 하는가?


     
    제20차 당대회의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에서 ‘신시대’가 가지고 있는 함의는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에필로그에서 백승욱 교수는 중국공산당의 ‘신시대’가 시진핑 집권기에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 몇십 년 동안 이어져 온 중국의 역사 다시쓰기를 배경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중국공산당은 당이 창립된 1921년부터 2021년까지의 100년을 중국 인민의 혁명사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서세동점의 시기에 외세에 의해 꺾였던 중화민족이 다시 굴기하는 투쟁사로 재규정하고자 한다.

    신중국 성립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온 중국 역사학계의 논쟁에서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 논쟁’이었다. 중국 내에 자본주의 맹아가 존재했지만 외국 자본의 침략과 매판자본의 억압으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아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출현한 것이 관료자본이었으며, 이를 타파하는 데 필요했던 것이 바로 신민주주의 혁명이었다는 게 중국공산당의 공식적 역사해석이었다. 이 자본주의 맹아 논쟁의 바탕에는 세계적 보편성과 중국의 특수성을 결합한 ‘반제국주의적인 자주적 국가 건립의 열망’이라는 정치적 지향이 깔려있었다.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도 가지고 있다’라는 마음이나 ‘자본주의는 중국 역사가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는 신념은 모두 중국이 반드시 근대 유럽의 발전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리보중, 『중국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책세상, 2006.

    그런데 이후의 논의 흐름은 위와 같은 내재적 발전론을 자본주의 맹아론과 연관 짓는 것이 아니라, ‘중국적 특색’이라는 ‘예외성’으로 연결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1970~1980년대 개혁개방 시기가 되면, 중국공산당은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한편 ‘관료자본론’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즉 기존의 전통적인 혁명사 인식에서는 1930년대 당시 국민당의 난징정부가 추진했던 국가부문 주도의 경제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이제는 항일투쟁에 기여했던 긍정적 측면이 있는 것으로 재평가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역사 다시쓰기는 ‘관료자본’을 ‘국가자본’으로 대체하는 시도와도 연결된다. 즉 1930년대의 관료자본을 역사적으로 재평가하면서, 오늘날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른바 ‘관료와 상인의 결합’의 부패가 GDP 손실액의 15%에 이른다고 지적되는 중국 사회의 현실에서, ‘국가자본’은 언제든지 1930년대와 같은 ‘관료자본’으로 타락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이러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가 여전히 민주 없는 사회주의라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 경축대회에서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 물질적으로 안락한 중산층 사회)를 달성했다고 선언하면서, 앞으로의 ‘신시대’는 전면적인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 건설을 위한 시대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진핑 일인체제로의 권력 집중과 억압적인 사회통제는 중국 100년의 역사 속에서 당과 국가 주도의 국가발전만이 남고 민주의 주체는 여전히 어디에도 없는 모순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난 100년간 중국 경제가 성장할수록 더욱더 벌어지는 중국 내부의 불평등과 계급 격차 문제와 더불어 증대되는 중국 노동자계급의 집단행동은, 현대 사회주의 강국을 만들겠다는 중국 사회에서 왜 여전히 노동자들이 투쟁할 수밖에 없고 당과 국가로부터 탄압받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한다.

    지난 11월에는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의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주민 1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SNS를 통해서, 중국 정부의 강력한 코로나19 봉쇄정책으로 건물 입구에 구조물이 설치되면서 화재진압은 물론이고 주민들이 빠르게 대피할 수 없었다는 의혹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결과 중국의 주요 도시와 50개 이상의 대학, 홍콩, 대만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추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 11월 30일 저녁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재한중국인의 추모 시위가 열렸다. 이들은 중국어와 한국어로 “봉쇄를 해제하라!”, “독재가 아닌 투표를 원한다!”, “언론의 자유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쳤고, 나아가 “중국공산당 물러나라, 시진핑 물러나라”라는 구호도 외쳤다. 지난 제20차 당대회에서 내부 단결과 분투를 강조했던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의 선언에 정면으로 맞서는 중국 인민들의 목소리가 현재진행형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2022년이 끝나가도록 여전히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무장 문제, 중국이 무력통일까지 언급한 대만 문제 등 세계정세는 더욱 불안정해지고 있다. 따라서 팽창주의에 맞선 반전운동, 권위주의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민주주의 투쟁을 위한 국제적인 연대가 어느 때보다도 사회운동의 주요한 과제일 것이다. 지금도 푸틴의 징집령에 맞서 전쟁을 반대하는 러시아 시민과 러시아의 침공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시민, 중국 정부의 정치 탄압과 무력 위협에 맞서 싸우는 홍콩 시민과 대만 시민, 그리고 중국의 코로나19 봉쇄정책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중국 시민의 투쟁에 연대할 수 있는 저항의 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
     
     
     
     

  • 2022-12-16

    1930~40년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부침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 식민지 시대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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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 식민지 시대 ④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 식민지 시대

     

     
    오랜만의 연재다. 지난 세 개의 글에 이어, 이번 글은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 연재를 마무리하는 글이다. 2021년 가을호에 실린 첫 번째 글 「망국과 체제이행, 격동기 노동자 민중의 삶」에서는 조선이 패망한 후 1920년대까지 노동자 민중의 삶을, 2021년 겨울호에 실린 두 번째 글 「1930년대 기계제공업화와 태평양전쟁까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의 강화」에서는 1930년대부터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1940년대 초반까지 노동자 민중의 삶을 소설을 통해 알아봤다. 그리고 2022년 봄호에 실린 세 번째 글, 「사회주의 운동, 식민지 시대 노동자 민중의 각성을 이끌다」에서는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확산한 사회주의가 1920년대 노동자운동과 결합하려는 시도를 살펴봤다. 그러나 일본의 엄혹한 탄압으로 조선공산당이 결국 자진 해산하고, 사회주의 세력의 노동자 운동이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음을 확인했다. 이어서 이번 글에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해방 전까지의 사회주의 운동을 다룬다.
     
     

    당 재건을 위한 방향전환, 혁명적(적색)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

     
     
    조선공산당은 네 차례에 걸친 당 지도부 재결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수많은 핵심 활동가가 검거된 결과, 1928년 6월 자진해 해산하고 만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해산했다고 해서, 남아있는 사람들이 사회주의 운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그간의 활동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운동은 어떻게 펼쳐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활동가들이 공통으로 지목한 조선공산당의 문제점은 그 구성이 지식인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만 매도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점은 고려해야 하지만) 분파 간의 파벌투쟁으로 역량을 모아내기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일례로 박헌영, 김단야 등이 속해있던 콤뮤니스트그룹은 “당내에는 노동계급과 빈농의 이익을 위하여 깨끗이 헌신한 희생적 동지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특히 이 파쟁의 결과로 그들은 몹시 빨리도 몰락했으며 아주 빠르게 일제경찰의 수중에 떨어졌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 사회주의자의 평가가 이렇게 일치했던 데에는 근거가 있었다. 바로 코민테른의 이른바 12월 테제다. 12월 테제의 정식 명칭은 ‘조선 문제에 대한 결의’로, 이후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에 지침서 역할을 한 문건이었다.

    12월 테제는 크게 ‘서언’과 ‘결의’로 구성되어 있다. 서언에서는 조선 혁명운동의 심각한 위기가 일본의 탄압뿐만 아니라 내부 파쟁과 갈등에 의해서도 초래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혁명투쟁의 선도자·조직자·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진단이었다. 

    이어 결의에서는 나름의 처방을 내놓고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지식인과 소부르주아지 정당인 조선공산당을 노동자와 농민의 정당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한 “공산당의 복구·강화 없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그리고 토지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지속적이고도 결정적인 싸움은 불가능하다”는 말로 결의를 마무리한다. 

    한편 1920년대 후반의 전 세계적 경기침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1년 겨울호의 「1930년대 기계제공업화와 태평양전쟁까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의 강화」에서도 함께 봤듯, 조선에 진출한 일본 기업은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불황에 대응하고자 했다. 착취가 강화됨에 따라서 1930년대 초반까지 노동자 민중의 저항도 거세게 분출했다. 1929년 원산 총파업이 대표적 사례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당 재건이 이른 시일 내에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당 재건 준비위 등의 조직을 꾸리고 대중사업을 통해 준비위의 구성원 비중에서 노동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당 재건을 사고했다. 이를 통해 분파투쟁도 지양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분파투쟁은 현장조직 없이 소부르주아적 지식인의 구성 비율이 높아 발생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투쟁이 벌어진 시점에 이 투쟁을 지도할 전국적 조직, 즉 조선공산당은 부재한 상황이었다. 결국 투쟁은 각 지역을 넘어서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고 만다. 이런 와중에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다. 여기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당 재건이 단시일 내에 가능하지는 않으리라고 전망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장기적인 시야에서 당 재건 운동을 바라보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을 조직해 당 재건에 이르는 경로를 구상하게 되고, 이런 맥락에서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
     
     

    사회주의자와 노동자의 결합, 김남천의 「공장신문」

     
     
    당 재건 운동에 나선 사회주의자들은 끊임없이 대중사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을 상대로 선전하고, 이를 통해 독서반이나 친목회를 조직해 그 기반을 닦는다. 그리고 이런 하부 조직을 여러 개 조직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공장위원회를 조직하고, 나아가 산업별, 지역별 조직을 건설한다는 구상이었다. 하부 조직에서는 친목활동을 통해 대중의 상태를 면밀히 파악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문제의식이 어느 정도 설득되었다고 판단하면 공장신문을 발행해 선전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활동태를 잘 그리고 있는 소설이 김남천의 「공장신문」이다.  「공장신문」은 작가 김남천이 1930년에 발생한 평양 고무직공 파업에서 선전선동하던 경험을 기반으로 창작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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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장신문」에는 공장 밖에서 파업을 지도할만한 지식을 가진 ‘그 사나이’, ‘그 사나이’와 이미 동지적 관계에 있는 선진적인 노동자 내지는 활동가로 작년의 파업이 실패한 직후 신입 직공에 섞여 들어온 창선, 그리고 노동조합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는 노동자 관수가 등장한다. 김남천의 「공장신문」은 현장을 조직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의 활동을 지나치게 전형적이라 비판을 받을 정도로 전형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모습을 소설 속에서 확인해보자. 

    지난 여름, 파업이 완전히 실패한 후 초조함을 느끼는 관수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자기 앞에 남겨 놓은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있는 데까지의 지혜와 경험을 털어서 모든 것을 해보았어도 일은 마음대로 되어 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조그만 불평불만이라도 잡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불평불만을 대표하여 그의 선두에 설 수 있을까?
    관수도 무엇인지 똑똑하게는 몰라도 자기에게 결함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럴 때마다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 돌연히 잠깐 참말로 번개같이 잠깐 동안 만났던 어떤 사나이한테서는 그 후 지금까지 두 달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사나이가 지금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침착한 태도로 말하던 그 사나이는 말하는 품으로 보아서 결코 이곳 사람은 아닌데 그때 파업의 사정과 또 파업 수습에 관해서 일후에 활동할 것을 어떻게 그렇게 똑똑히 아는지 몰랐다. 평양의 모든 일을 환하게 꿰어 두고 이곳에서 사는 사람보다도 잘 알았다.

    관수는 어떻게 하면 조그만 불평불만이라도 잡을 수 있을지, 노동조합이 잘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만, 혼자서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관수는 이럴 때 ‘그 사나이’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 사나이’는 공장 밖의 사람임에도 파업의 사정과 수습에 관해 잘 알고 있으며 평양의 모든 일을 꿰고 있다. 여기서 ‘그 사나이’는 파업을 지도하는 전위적 활동가를 형상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관수가 고민하던 중 사건이 발생한다.
     
    앞에 서 있는 자들은 얼굴이 노기가 올라서 붉으락푸르락하며 무엇을 소리 높여 고함치고 있으나 지금 달려온 맨 뒤에 선 직공들은 사건의 내용도 모르고 그대로 웅성웅성하기만 하였다. 어떤 젊은 직공은 앞에 선 직공의 뒤를 무르팍으로 떠밀고 후덕떡 하고 뒤를 돌려다보는 놀란 얼굴을 하! 하! 하고 웃었다.

    “물을 먹어야 살지 않우!”
    그는 그 속에 얼굴을 들었다.
    “좌우간 덤비지 말고 조용들 해!” 
    대답하는 소리는 완전히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 구정물을 먹으라고 수도를 막다니! 직공은 개 돼지란 말요?” 
    너무도 그 소리가 커서 웅성웅성하던 소리가 잦아들고 그 목소리에 군중이 통일되는 듯하였다.
    “좌우간 넓은 데 나가 이야기하지!” 
    “자― 넓은 데 나가서 합시다!” 
    최전무의 말을 받아서 군중에게 외치는 것은 고무직공조합의 간부로 있는 김재창이의 목소리가 정녕하였다.(틀림없이 확실했다.) 관수는 재창이 목소리를 듣자 벌써 간섭하기 시작한 그의 행동을 직감하였다.
    도시락을 먹은 후 물을 먹겠다고 수도를 튼 직공의 뺨을 사측 최전무가 때린 것이 소란의 원인이었다. 노동자들은 수도세 몇 푼 아끼자고 노동자들에게 수돗물을 먹지 못하게 하면 바깥의 “개굴창같은 우물”에 가서 물을 먹으라는 말이냐며 분노한 것이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조합의 대표 김재창이 등장한다. 재창은 조합의 대표지만 사측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다. 앞에 나선 재창은 노동자들에게 이번 일은 조합 집행위에서 알아서 해결할 수 있도록 일의 처리를 위임해달라고 말한다. 관수는 재창의 타협적인 태도를 알고 있기에 직접 해결하자고 군중에 외치지만, 결국 재창의 말대로 해결하기로 하고 모인 군중은 해산한다.
    그렇게 “타락 간부”에게 선수를 빼앗긴 관수는 퇴근 후 집에서 우울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장의 동료 길섭이 관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며 관수의 집을 찾아온다. 관수는 ‘그 사나이’인가 하며 기대한다.
    “여!” 
    그는 담배를 후― 내뿜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관수는 좀 견주었던 곳이 어그러진 듯한 낙망을 느꼈다. 창선이면 물론 잘 안다. 창선이는 파업 이후에 신직공 모집에 끼어서 들어와 자기네 공장에서 일하게 된 직공이다. 이 사나이는 물론 타탸줄(‘ㅌ’줄)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이 사나이가 내게 무슨 말이 있단 말인가? 관수는 마음속에 좀 불평을 느끼면서 창선 가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갔다.

    관수는 ‘그 사나이’가 아니라 동료 창선임을 확인하고 실망한다. 그런데 창선은 갑자기 자기 본명이 박태순이라 밝힌다. 창선의 본명 박태순은 ‘그 사나이’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했던 그 인물의 증거, 즉 이름 가운데 글자가 타탸줄(‘ㅌ’줄)인 이름이었다. 관수는 드디어 찾던 이를 만나 기뻐하면서 창선과 함께 회합에 참여한다. 그 회합에는 벌써 길섭이, 동찬이, 선녀 등 4~5인이 함께 모여 있었다.

    다음 날 공장에 출근한 관수는 회합에 함께한 이들과 의미 모를 웃음을 남몰래 하였다. 점심시간, 각자의 도시락을 들고 함께 먹으며 재창이 어제의 일을 잘 해결하는지 두고 보자고 말을 붙였다. 그런데 몇몇 직공의 도시락에 정체 모를 종이가 붙어있다.

    평화             일
          공장신문
    고무             호
    하고 씌어 있었다.
    “공장신문? 오―라! 우리 공장의 신문이란 말이로구나! 이건 또 누구 장난이야?” 
    직공 하나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으나 그는 종이를 놓지 않고 좀 소리를 내 읽기 시작했다.
    “얘! 이건 무슨 그림인가?” 
    한 자가 아래쪽에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요건 재창이 것이구나!” 
    “엣키! 요건 최전무 같다!” 
    “이게 뭘 하는 게야?” 
    관수가 종이를 자기에게로 향해 돌렸다.
    “하하, 이게 지금 주는 건 돈이로구나!” 
    그 옆에 있던 직공이 그림 위에 쓴 글귀를 읽었다.
    “최전무한테서 돈을 받는 몹쓸 놈 김재창이의 꼴을 봐라! 하하하!” 
     그는 종이를 놓곤 웃었다.
    “얘 거 재미난다. 좌우간 글을 읽어 보자!” 
     “지난 여름에 우리들의 파업을 팔아먹은 놈은 누구냐? 그건 김재창이 같은 타락한 조합간부다! 우리들은 그런 놈에게 조금도 우리의 일을 맡기지 말자! 그는 우리들의 마음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놈이다. 어저께 일어난 일도 우리끼리 처리해야만 된다. 우리의 마음을 꺾고 고주(고용주)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재창이는 우리 편인 체하고 나서는 것이다. 어저께 아무 일도 없게 무사히 한 덕택으로 재창이는 전무네 집에서 술 먹고 요리 먹고 돈 먹은 것을 왜 모르느냐? 벤또를 빨리 먹고 마당에 모이자! 그리하여 재창이를 내쫓고 우리끼리 지도부를 선거하자! 우리 편인 체하고 나서는 몹쓸 간부를 내쫓아라!” 
    “얘! 건 굉장하구나!”
    “그 다음 또 읽어라!”
    “크게 쓴 글자만 먼저 읽자! 뭐이가 이게? 오오라 공자로구나! 거 잘 썼는데 꾸불꾸불하게 썼네! 공장신문은 고무직공의 전부의 것이다! 공장신문을 믿어라! 공장신문을 지켜라! 또 그 아래 (원문 탈락) 들은 얼마나 이익을 보나? 전평화고무 직공형제들아! (원문 탈락) 의 준비를 하여라! 다른 공장 형제들도 늘 (원문 탈락)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곧 마당에 모여서 우리들끼리 지도부를 선거하자!”

    ‘평화공장신문’에는 타락한 간부 재창과 최전무 사이의 부정한 거래가 폭로되어 있다. 신문 발행을 통한 입장 선전에서는 개량적인 노동조합의 활동을 폭로하여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신문을 계기로 관수네 공장에서도 새로운 노동조합 준비위원회가 결성된다.

    박수 소리가 마당 안에 가득 찼다. 모임은 지금 한창 진행중이었다.
    “자― 그러면 우리끼리 준비위원을 선거합시다!”
    또 박수 소리가 났다.

    “창선이 좋소!”

    “여보! 나는 관수요!”
    “관수 좋소!”
    이렇게 하여 아홉 사람 준비위원이 선거되었다.
    “누구 연설해라!”
    하는 소리가 나매 뒤를 이어 박수 소리가 났다. 창선이가 쑥 머리를 내밀고 좀 높은 데 올라섰다.
    “여러분 이제야 우리들은 우리끼리 선거한 지도부를 가졌습니다. 우리들 아홉 사람 (원문탈락) 준비위원회는 죽을 힘을 다하여 끝까지 여러분들의 의견을 대표하여 싸우겠습니다. 여러분 자― 일동이 (원문탈락) 준비위원회 만세―”
    “만세―”
    “만세―”
    《조선일보》, 1931.7.5. ~ 7.15.

    「공장신문」은 소설이 발표된 당시 임화에게 “1931년에 있어서의 조선문학의 최고점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기에 나는 조금도 주저치 않는다”라는 고평을 받았다. 전위적 인물과 호흡하는 노동자의 헌신적 모습, 그 결과 진정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이 결성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기에 그러했으리라. 다만 앞서 언급했듯 1930년대 초반까지 김남천의 소설은 지나치게 전형적인 인물이 등장해 오히려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즉 소설 자체가 반(反)리얼리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소위 ‘전향문학’이라 일컬어지던 식민지 시대 후반기의 작품에서는 일정 극복되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즉 식민지 후반기 소설에서 오히려 현실에 존재할만한 인물들이 등장해 리얼리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관련한 작품들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농촌운동 속의 사회주의 지식인, 심훈의 『상록수』

     
     
    「공장신문」에서 사회주의 지식인이 공장의 노동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의 각성을 도왔듯, 사회주의자들은 농촌에도 직접 들어가 농민들과 호흡하며 그들의 각성을 위해 노력했다. 이를 심훈의 『상록수』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그간 심훈의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과 함께 농촌계몽소설로 거론되어왔다. 그런데 여러 연구에서 『상록수』를 농촌계몽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심훈이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작가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제기다. (2022년 봄호에 연재된 「사회주의 운동, 식민지 시대 노동자·민중의 각성을 이끌다」를 참고) 즉 작가의 지향을 고려하여 『상록수』를 다시 보면, 브나로드 운동 경향을 대표하는 농촌계몽소설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 지향을 검열을 피해 우회적으로 드러낸 소설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따라 보더라도, 『상록수』가 사회주의적 지향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우리가 2022년 봄호에서 살펴봤던,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가 일본의 검열로 완성되지 못한 경험과 관련된다. 심훈은 그의 글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에서 “지독한 검열제도 밑에서 ××를 선동하는 작품, 순정 마르크스주의파의 영화를 제작하지 않는다고 높이 앉아 꾸지람만 하는 것은 당초에 무리한 주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결국 아무리 직접적으로 써본들 검열로 민중에게 닿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으므로, 심훈은 검열을 우회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 통로 중 하나가 바로 ‘연애’를 그리는 것이었다. 이런 시도는 앞선 미완의 작품부터 시작해 이후 그의 작품들에서도 이어지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글쓰기를 통해 『상록수』를 끝까지 연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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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록수』에는 채영신, 박동혁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본 글에서는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진 주인공 박동혁의 행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앞서 봤던 작품에 나오는 직접적이고 속 시원한 구절은 덜하지만, 소설 곳곳에서 농촌의 변화를 이끌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을 소설 속에서 보도록 하자.

    가을 학기가 되자, ○○일보사에서 주최하는 학생계몽운동에 참가하였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오늘 저녁은 각처에서 모여든 대원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그 신문사 누상에서 열린 것이다.

    “금년에 활동한 계몽 대원 중에 뛰어나게 좋은 성적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글을 깨쳐 준 아동의 수효로는 우리 신문사에서 이 운동을 개시한 이래 최고 기록을 지은 분을 소개하겠소이다.” 하고는 다시 안경 너머로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들고 선생이 출석부를 부르듯이,
    “××고등농림의 박동혁(朴東赫) 군!”

    그는 박수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수첩을 꺼내 들고 자기의 고향인 남조선의 서해변에 있는 한곡리(漢谷里)라는 궁벽한 마을의 형편을 숫자적으로 대강 보고를 한다.

    “그러나 여러분! 끝으로 꼭 한마디만 허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고 목청을 높여 힘차게 청중에게 소리친다. 대원들은 물론, 사회자까지도 다시금 긴장해서 엄숙해진 동혁의 얼굴만 주목한다.
    “눈 뜬 소경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는 것은 두말헐 것 없이 필요헙니다. 계몽운동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헌 사업 중의 하나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지식 분자인 우리들이 이러한 기회에 전 조선의 농촌, 어촌, 산촌으로 방방곡곡이 파구들어가서, 그네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어떡허면 그네들이 그 더헐 수 없이 비참헌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 허는 문제를 머리를 싸매구서 생각해 봐야 헙니다. 지금부터 육칠 년 전, 러시아의 청년들이 부르짖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라는 말)를 지금 와서야 우리가 입내내듯(소리나 말로써 흉내내듯) 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남에게 뒤떨어진 것을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높직이 앉아서 민중을 관찰하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태도를 단연히 버리고, 그네들이 즉 우리 조선 사람이 제 힘으로써 다시 살어나기 위한 기초공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 이 자리에 모인 바루 여러분의 손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물질로 즉 경제적으로는 일조일석에 부활하기가 어렵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온갖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정신(精神), 요샛말로 이데올로기를 통일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사회자는 아까보다도 더 정중한 태도를 짓고 동혁이가 섰던 자리로 가서 장내가 정숙해지기를 기다려, “박동혁 군의 말은 개념적이나마 누구나 존중해야 헐 좋은 의견으로 압니다.” 하고는,
    “그러나 현재의 정세로 보아서, 어느 시기까지는 계몽운동과 사상운동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아니 됩니다. 계몽운동은 계몽운동에 그칠 따름이지, 부질없이 혼동해 가지고 공연헌데까지 피해를 끼칠 까닭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상록수』는 동아일보가 1935년 창간 15년을 기념으로 주최한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것이 『상록수』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과 연관시키게 된 출발점이다. 신문사 측에서는 “조선의 농·어·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독자적 색채와 정조를 가미할 것, 인물 중에서 한 사람쯤은 조선 청년으로서의 명랑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설정할 것” 등을 유의 사항으로 내걸었고 이것이 『상록수』를 브나로드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데 준거가 되었다.

    그러나 작가의 지향과 브나로드 운동의 지향은 차이가 있었다. 심훈은 브나로드 운동이 농민을 대상화하는 운동일 뿐이라 비판하면서, 조선 농민이 스스로 필요성을 느껴 농촌 공동체를 구성하는 자발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동혁이 “높직이 앉아서 민중을 관찰하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태도를 단연히 버리고, 그네들이 즉 우리 조선 사람이 제 힘으로써 다시 살어나기 위한 기초공사를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드러난다.

    한편 작품에는 또 하나의 주인공인 채영신이 등장한다. 채영신은 기독교 신자로서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한 신여성이다. 채영신은 “시골서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과년한 처녀”같은 행색이지만, 그 눈빛만큼은 “인텔리 여성다운 이지”가 빛나는 인물이다. 채영신과 박동혁은 발표회에서 처음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한다. 첫 만남으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참,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군요.”
    동혁이도 약간 애상적인 감정에서 눈을 번쩍 뜨며 혼자 말하듯 한다.
    “왜요?”
    영신의 눈은 동그래졌다.
    “몇 주일 전까지는 백판 이름두 모르던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앉어서 약물터의 달을 똑같이 쳐다볼 줄이야 꿈이나 꾸었겠어요?”
    “참말요, 이것두 하나님의 뜻인가 봐요.”
    “참, 영신 씨는 크리스찬이시지요?”
    “전 어려서버텀 믿어 왔어요. 왜 동혁 씨는 요새 유행하는 마르크스주의자세요?”
    “글쎄요, 그건 차차 두구 보시면 알겠지요. 아무튼 신념을 굳게 하기 위해서나 봉사의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허는 것두 좋겠지요. 그렇지만 자본주의에 아첨을 허는, 그따위 타락헌 종교는 믿구 싶지 않어요.”

    박동혁은 마르크스주의자냐는 영신의 물음에 모호하게 답한다.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렇게 모호하게 처리한 이유는 검열을 의식해서다. 박동혁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바로 이어서 기독교를 “자본주의에 아첨하는” 타락한 종교라고 비판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책 본문 중에는 “편협한 유물론자처럼 덮어놓고 종교를 아편과 같이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동혁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혁의 사회주의적 지향은 농촌을 일본의 뜻대로 통제하려는 농촌진흥회에 맞서는 사건에서 드러난다. 이 사건은 시간을 조금 거슬러 동혁이 농촌운동을 하는 한곡리에서 동혁의 주도로 조직된 농우회가 자신들의 농우회관을 짓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일 끝나고 마시던 술, 중간중간 피워대던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서 농우회관을 짓기로 결의한다. 그렇게 자재비용을 겨우 마련한 뒤에는 기술자를 부르는 게 아니라 농우회 회원 스스로 농우회관을 짓는다. 

    그런데 평소 사사건건 농우회의 활동에 훼방을 놓던 마을 유지 강기천은 농우회관이 정말로 지어지자 이를 시기해 빼앗을 궁리를 한다. 처음에는 동혁을 불러 농업진흥회장이라는 감투를 주면서 포섭하고자 하지만 동혁은 거절한다. 그리고 몇 배의 돈을 쳐서 회관 건물을 사겠다는 것도 동혁은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나 동혁이 영신을 만나러 마을을 잠시 비운 사이에, 강기천은 농우회 회원 중 자신의 논에 소작을 두는 자들을 포섭해 억지로 농우회에 가입하고 스스로 농우회장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동혁의 동생 동화는 농우회원 중 변절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지만, 동혁은 다른 수를 쓰겠다고 동생을 뜯어말린다.

    ‘집 한 채를 가지고 다툴 때가 아니다. 동지가 배반한 것을 분하게만 여기고 흥분할 것이 없다.’
    하고 무릎을 탁 치고 일어서서 좁은 방 안으로 왔다갔다하다가,
    ‘이번 기회에 영신에게도 선언한 것처럼, 제일보부터 다시 내디디지 않으면 안 된다. 표면적인 문화운동에서 실질적인 경제운동으로.’

    ‘농촌운동을 허는 사람이라도 너무 외곬으로 고지식하기만 허면, 교활한 놈의 꾀에 번번이 속아 떨어진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제 양심을 속이지 않는 정도로는 패를 써야 하겠다.’ 하고 종래와는 수작하는 태도를 변해 보리라 하였다.

    동혁은 농촌의 경제적 구조가 취약한 이상 농민들이 자유로울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경제문제, 즉 고리대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동혁은 옳은 소리만 해서는 기천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 직감하고 꾀를 내어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다. 

    동혁은 기천에게 술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집으로 찾아간다. 술자리에서 동혁은 몰래 술을 마시지 않고 강기천만 마시게끔 유도한다. 기천이 얼큰하게 취하자 동혁은 “회장 체면에 앞으로도 고리대금을” 할 거냐며 강기천의 명예욕을 자극하는 한편, “몇몇은 혈기가 대단해서 제 손으로는 꺾을 수가 없는데, 이번에 좀 후허게 인심을 써주셔야 과격한 행동까지 하려 벼르는 청년들을 어떻게 주물러 볼 수가 있겠”다거나, “여러 사람을 걸어 재판을 하려면 소송비용이 얼마나 들지” 등 적절한 위협을 섞어가며 강기천을 설득한다. 결국 동혁은 강기천의 밭에 소작을 얻고 있는 농민들의 빚에 대해 원금만 받고 쌓인 이자는 탕감하겠노라는 강기천의 약속을 받아낸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농촌진흥회장 선거를 한다. 여기서 기천은 매수한 표에 힘입어 회장에 당선된다. 함께 후보로 나섰던 동혁은 부회장 겸 서기로 지목된다. 동혁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부회장 자리는 고사하고 서기만 맡기로 한다. 그리고는 업무를 도와야 한다는 명분으로 농우회원들을 임원으로 선출해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행사가 흐지부지 끝날 즈음, 동혁이 일어나 사람들에게 연설하기 시작한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동네에도 진흥회가 생긴 까닭과, 진흥회란 무엇을 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면장께서 자세히 설명하신 것을 들으셨으니까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러나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복종하는 것보다, 우리들의 일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지 말고 자발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력갱생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농촌에서 가장 폐단이 많은 습관과 우리의 생활이 이다지도 빈곤하게 된 까닭이 도대체 어디 있나? 하는 것을 냉정허게 생각해 보고, 그것이 그른 줄 깨닫고 그 원인을 밝힌 다음에는, 즉시 악습을 타파하고 나쁜 일을 밑둥부터 뜯어고치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첫째는 고리대금업자입니다!”
    하고 언성을 높인다. 여러 사람의 시선은 말끔 새로 난 회장의 얼굴로 쏠렸다.
    “옳소―”
    그것은 갑산의 목소리였다. 저녁때가 되니까 창 밖에는 바람이 일어 불김이 없는 회관 안은 냉기가 돌건만, 누구 하나 추워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동혁은 신중히 말을 이어 고리대금업자의 발호와 간교한 착취수단으로 말미암아 빈민들의 고혈이 얼마나 빨리우고 있나 하는 것을 숫자를 들어가며 폭로하고,
    “앞으로 진흥회 회원은 과거에 중변(비싼 이자)으로 쓴 돈도 금용조합에서 놓는 저리(低利) 이상으로 갚지 말고, 더구나 회의 책임자로는 절대로 돈놀이를 해먹지 못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고 또 실행해야 합니다.”
    라고 부르짖은 다음, 목소리를 떨어트리더니,
    “오늘 회장이 되신 강기천 씨는 우리 농우회원들이 진 여러 해 묵은 빚을 변리(남에게 돈을 빌려 쓴 대가로 치르는 일정한 비율의 돈)는 한 푼도 받지 않으시고 깨끗이 탕감해 주셨습니다.” 하고 증서를 내보이면서, 
    “이번 기회에 그 갸륵한 처사를 여러분께서도 칭송하실 줄 아는 동시에, 강기천 씨는 이번에 진흥회장이 되신 기념으로 여러분의 채권까지도 모조리 포기허실 줄 믿고, 조끔도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하고는 슬쩍 기천을 흘겨본다. … 기천은 여러 사람을 바로 볼 용기가 없는 듯이 실눈을 감고 아랫입술만 자근자근 깨물고 앉았다. 팔짱을 꼈다, 손을 옆구리에 찔렀다 하는 것을 보면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 같은 모양이나 체면상 퇴석은 하지 못하는 눈치다.

    “또 한 가지 중요헌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빚을 갚고 장릿벼(장리: 돈이나 곡식을 꾸어 주고, 받을 때에는 한 해 이자로 본디 곡식의 절반 이상을 받는 변리)를 얻어먹지 않게 된대도, 지금처럼 논 한 마지기도 제 것이 없어 가지고는 도저히 먹구살 도리가 없습니다. … 그러니까 지주나 소작인이 함께 살려면 적어도 한 십 년 동안은 소작권을 이동시키지 말고 금년에 받은 석수로 따져서 도지로 내맡길 것 같으면, 누구나 제 수입을 위해서 나농(懶農, 농사일을 게을리 함)을 헐 사람이 없을 겝니다. 이만헌 근본책을 실행치 못하면 ‘농촌진흥’이니 ‘자력갱생’이니 허는 것은 모두 헛문서에 지나지 못합니다.”

    동혁은 이로써 실제로 부채탕감을 이뤄낸다. 사실 이는 동혁 스스로가 밝혔듯 술수에 불과하므로 한계적이며, 현실 가능성으로 보면 그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속 농우회 회원들이 몇 년에 걸쳐 술, 담배를 끊고 저축해 봤자 원금을 겨우 갚는 정도인 모습이 보여 주는 것처럼, 당시 농민의 경제적 토대는 매우 취약했다. 더구나 진흥회의 창설과정은 그나마 자발성마저 침해받았다. 심훈의 의도는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문제를 극복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고리대 문제를 통해 당시 농촌의 경제문제를 짚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 의미를 갖는 이유라 할 것이다.

    한편 청석골이라는 마을에서 농촌운동을 하는 영신도 동혁의 이런 활동에 자극받아 농촌회관을 건설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제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아 영양실조와 각기병에 걸려 몸이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영신은 건강을 회복할 겸 기독교회의 후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만리타향에서 건강은 더욱 나빠지기만 하고 청석골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진다. 결국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농촌운동에 매진하리라 다짐하고 귀국해 다시 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나 이미 결론은 예정된 일이었을까. 영신은 또다시 쓰러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동혁은 이 소식을 뒤늦게 듣고 입관이 끝난 뒤에야 도착한다. 영신의 장례가 끝난 후, 동혁은 다시 다짐한다.

    이튿날 아침 동혁은 산소로 올라가서,
    ‘당신이 못다 한 일과 두 몫을 하겠다.’
    고 맹세한 것을 이제로부터 실행하겠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자신 있게 한 뒤에 홱 돌아서서 그 길로 내처 걸어 한곡리로 향하였다. … 어머니의 병이 염려는 되었으나, 그는 바로 집으로 가기가 싫어서 역로에 몇 군데 모범촌이라고 소문난 마을을 들렀다. 어느 곳에서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청년이 오막살이 한 채를 빌려 가지고 혼자서 야학을 시작한 곳이 있고, 어떤 마을에서는 제법 크게 차리고 여러 해 동안 한글과 여러 가지 과정을 강습해 내려오다가, 당국과 말썽이 생겨 강습소 인가를 취소당하고 구석구석이 도적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러한 지도분자들과 굳게 악수를 하고 하룻밤씩 같이 자면서 의견을 교환하고 새로운 방침을 토론도 하였다. 어느 곳에를 가나,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는 계몽적인 문화운동도 해야 하지만, 무슨 일에든지 토대가 되는 경제운동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저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는 동시에 그는, ‘이제부터 한곡리에만 들어앉었을 게 아니라 다시 일에 기초가 잡히기만 하면, 전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널리 듣고 보기도 하고, 또는 내 주의와 주장을 세워 보리라. 그네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서 같은 정신과 계획 아래에서 농촌운동을 통일시키도록 힘써 보리라.’

    앞으로 가지가지 새로이 활동할 생각을 하며 걷자니, 그는 제풀에 어깻바람이 났다. 회관근처까지 다가온 동혁은 누가 등뒤에서,
    ‘엇, 둘! 엇, 둘!’
    하고 구령을 불러 주는 것처럼 다리를 쭉쭉 내뻗었다.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
    《동아일보》 1935.9.10.~1936.2.15.

    동혁은 영신의 몫까지 농촌운동을 하기로 결의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모범촌이라 불리는 촌을 들러 경제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의 주의, 주장에 따라 농촌운동을 통일시키도록 힘써보리라 다짐한다. 

    이러한 동혁의 결의, 그리고 영신과 동혁 사이에서 종교를 주제로 한 갈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심훈이 (자신의 지향과는 다른) 기독교도 영신의 농촌운동도 상당한 비중으로 묘사하는 것을 두고 이것이 작가 나름의 연합전선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즉 친일적이고 친자본주의적인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기독교 세력을 분리하고, 이들과의 제한적 연대 속에서 농촌운동을 활성화하려는 작가의 욕구가 투영됐다는 것이다. 이를 민족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전술적 제휴를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시도로 이해한다면, 이런 해석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
     
     

    사회주의자의 전향 문제

     
     
    다음 소설을 살펴보기에 앞서, 1930년대 중후반에 발생한 사회주의자들의 전향 문제에 대해 짚고 넘어가려 한다. 1930년대에 지식인층에서 발생한 다수의 전향은 해방 이후 민족 대 반민족의 대결 구도, 혹은 친일의 문제를 극대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말 세계 대불황의 영향으로 일본 역시 경제 불황에 빠진다. 그런데 세계 대불황의 와중에도 소련은 1차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만주 지역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에 더해 이러한 소련의 움직임까지 나타나자 일본의 군부 파시스트 세력은 큰 불안을 느끼고, 만주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여기며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만주사변을 도발한 일본은 국내 정세의 안정화를 위해 사상통제정책을 강화하는 데에도 힘쓰기 시작한다. 이런 배경에서 제출된 것이 전향제도였다. 

    1930년대 이전까지 일본은 검거와 처벌을 우선하는 정책으로 사상범을 다뤘다. 그러나 이런 강압적인 방법만으로는 사상범을 처리하기 어렵다고 느낀 일본당국은 다른 방식을 고려하게 되는데, 그것이 전향제도였다. 전향제도는 1931년 3월 사법차관 통첩 제270호에 의해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즉 검사에게 피고인의 태도 여하에 의해 기소를 유보할 권리가 부여됐다. 전향제도는 이후 1936년 사상범보호관찰법에 의해서 정식으로 제도화된다. 사상범보호관찰법은 전향한 사상범에 대해 정신적,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다른 사람들과 격리하여 재범을 예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전향정책이 큰 성과를 거뒀다. 1933년 일본공산당 내 최고의 이론가로 평가받던 사노 마나부와 노동운동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옥중에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일본공산당이 거의 소멸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반면 조선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일본 사회주의자는 전향하면 돌아갈 국가가 존재했으나,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의 추구와 민족 독립이 함께 가는 것이었으므로 전향은 곧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 중반까지 전향자는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오히려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보면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맹렬히 활동을 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중일전쟁 초반 일본이 전쟁에서 선전하는 가운데, 사회주의자는 반파시즘인민전선 하 소일(蘇日)전쟁을 전망한다. 그러나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일본과는 만주국 관동군과 소련군 간의 국경분쟁으로 일어난 노몬한(할힌골)전투에 대한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소련이 일본과 맞서 싸우는 정세가 되면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한다는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전망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조선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중일전쟁 이후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동요를 제대로 수습할 만한 구심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1929년에 조선공산당이 해산했고, 1930년대 초에 활발히 벌어진 당 재건 운동이 일본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1932년경에 이르면 적어도 대중적인 공간에서는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지도자급 사회주의자들은 지하로 들어가 은밀하게 활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이 제기한 동아신질서 구상은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에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동아신질서란 1938년 당시 일본 수상이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밝힌 대중국 전략이다. 이는 중일전쟁이 대치 상태에 빠지자 제시한 일종의 회유책으로, 중국과 화해하고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동아시아 블록을 건설하자는 제안이었다. 이것이 조선 사회주의자에게 중요하게 다가왔다. 일본 국내정책에 있어서는 (서구 열강에 맞서는) 반자본주의적 혁신정책으로 인식되었고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에 대한 무력 정복의 포기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동아신질서 구상을 조선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식민지를 청산하고 공존공영으로 나아가는 체제, 즉 다민족 일국가 체제를 현실적 대안으로 사고했는데, 일종의 자치론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일본은 파시즘 체제를 더욱 강화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일본은 허구적인 내선일체론조차 부정하면서 조선에 대한 수탈을 심화한다. 이는 곧 조선 민족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노선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했다. 그러자 다시 격렬한 저항이 시작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자의 수가 1940년 298명으로 최저치를 기록한 이래 1941년 1386명, 1942년 955명으로 격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전향 정책으로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전향하자 뒤따라 일본공산당의 대량 전향이 발생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조선에서 사회주의자의 전향이 일본에 저항하거나 대항할 한국인의 의지, 태도, 방식 등에 좋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일부 연구에서는 사회주의자의 전향을 구분해 위장전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김윤식은 코민테른의 승인이 없는 전향이 위장전향일 수는 없었을 것이라 평가한다. 당의 승인이 없는 경우 그 전향의 성격을 보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향자의 내면세계를 그리다, 김남천의 「경영」과 「맥(麥)」

     
     
    지금까지 전향에 대해 살펴봤다. 사회주의자로서 전향을 떳떳하게 수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향의 문학적 수용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김남천의 소설은 전향자들의 심리를 잘 묘사한 소설로 평가받는다. 특히 김윤식은 「맥」을 “우리말로 씌어진 전향소설의 최고봉”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김남천의 「경영」(《문장》, 1940년 10월)과 「맥」(《춘추》, 1941년 2월)은 줄거리가 이어지는 연작소설이다. 앞의 각주에서 설명했듯, 작품이 발표된 시기는 작가인 김남천이 투옥되었다가 전향한 시점이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소설에 좀 더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3%]

    「경영」에는 오시형과 최무경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오시형은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2년간 투옥된 인물이고 최무경은 그를 뒷바라지하는 여성이다. 「맥」에는 두 인물에 더해 이관형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관형은 “서울서도 손꼽히는 무역상 … 말하자면 부르주아”의 자식으로 학문적으로 깊은 이해를 하려 노력해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그들의 답답한 정신 세계에 자꾸만 부딪”치고 있는 와중에 교내 파벌다툼에 휘말려 대학 강사에 채용되지 못해 회의주의에 빠진 인물이다.

    먼저 시형의 전향 논리부터 살펴보자. 2년 만에 출소한 시형은 그가 출소하면 함께 하기 위해 무경이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직접 마련한 아파트로 간다. 이곳에서 시형은 자신의 변화한 사상에 대해 말한다.

    “내 자신이 서 있던 세계사관(世界史觀)뿐 아니라, 통틀어 구라파적인 세계사가들이 발판으로 했던 사관은 세계 일원론(世界一元論)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경우에 동양 세계는 서양 세계와 이념(理念)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세계는 대체로 세계사의 전사(前史)와 같은 취급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었죠. 종교사관이나 정신사관뿐 아니라 유물사관의 입장도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양이란 하등의 역사적 세계도 아니었고 그저 편의적으로 부르는 하나의 지리적 개념에 불과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세계 일원론적인 입장을 떠나서, 역사적 세계는 각각 고유한 세계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고 증명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현대의 세계사의 성립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가졌던 세계사관에 대해서 중대한 반성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
    물론 남이 말하는데 구두를 닦고 있을 수도 없어서, 그대로 귀를 기울이고는 있으나 무경으로선 시형의 하는 말을 어떻다고 생각할 준비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삐끔히(숨어서 살며시 보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형은 혼자서 저 자신에게 타이르기나 하듯이 창문을 바라보며 이야기에 열을 올려 제 이론을 전개해 보고 있었다.
    “가령 동양이라든가 서양이라든가 하는 개념도 로마의 세계에서 성립된 것이고, 또 고대니, 중세니, 근세니 하는 특수한 시대 구분도 근세의 구라파 사학에서 성립된 구분이니까, 이런 것에서 떠나서 동양과 동양 세계를 다원 사관의 입장에서 새로이 반성하구 성립시킬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동양인의 학문적인 사명입니다. 동양인 학도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의무입니다.”

    오시형은 세계일원론은 유럽 역사가들의 입장일 뿐이며 동양세계를 다원사관의 입장에서 새로 성립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시형이 다원사관을 강조하는 것은 곧 역사발전의 보편성을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동양세계를 다원사관의 입장에서 성립시킨다는 말은 곧 일본의 동아신질서 구상과 맞물린다. 이런 시형의 전향은 「맥」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피고가 학문상으로 도달하였다는 새로운 관념에 대해서 간명히 대답해보라.”
    재판장은 온후한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서류 위에 법복 입은 두 손을 올려놓고 그는 오시형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구라파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것이 역사에 있어서의 말하자면 일원사관일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서 떠나서 우리의 손으로 다윈사관의 세계사가 이루어지는 날 역사에 대한 이 같은 미망은 깨어지리라고 봅니다. 역사적 현실은 이러한 것을 눈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피고의 그러한 생각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과 세계사적 동향은 어떻게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피고는 말을 끊고 숨을 돌릴 듯하고는 다시 이야기의 머리를 잠깐 돌려보듯 하였다.
    “저의 사상적인 경로를 보면 딜타이의 인간주의에서 하이데거로 옮아갔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이데거가 일종의 인간의 검토로부터 히틀러리즘의 예찬에 이른 것은 퍽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철학이 놓여진 현재의 주위의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문제를 집어 올린다는 것은 최근의 우리 철학계의 하나의 동향이라고 봅니다. 와츠지 박사의 풍토사관적 관찰이나 다나베 박사의 저술이 역시 국가, 민족, 국민의 문제를 토구(討究, 사물의 이치를 따져가며 연구함)하여 이에 많은 시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과거의 사상을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 건설에 의기를 느낀 것은 대충 이상과 같은 학문상 경로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재판장은 만족한 미소를 입술에 띠었다. 
     
    이처럼 소설은 시형의 전향논리를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김남천 소설에 관한 초기 연구는 시형의 논리를 곧바로 김남천의 전향논리로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김남천이 소설 속에서 시형의 논리에 어떤 긍정성도 부여하고 있지 않다는 점, 어떤 등장인물도 그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것이 김남천 본인의 논리라기보다는 식민지 조선사회의 주요한 이데올로기를 문학적으로 표상하고자 했다는 해석으로 귀결된다.

    시형의 전향논리를 긍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맥」에 등장하는 회의주의자 이관형과 무경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관형은 시형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인물이다.

    “선생님, 제가 하나 여쭈어볼 말씀이 있습니다.”
    “무어 말입니까? 저는 그런 방면(철학)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무경이는 그러한 사내의 겸사의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열심스러운 태도로 물어본다.
    “동양학이라는 학문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무경이의 묻는 말에 처음은 농말조(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로 받아 넘기려다가 그의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한 데 눌리어서 이관형이도 잠시 제 머리를 정리해보듯 한다.
    “전문 부분이 아니어서 상식적인 것밖에는 대답할 수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로도 잘못된 해석이나 또 엉터리없는(정도나 내용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추상이 많을 줄 압니다마는. …… 내 생각 같아선 서양 사람이 자기네들의 학문적 방법을 가지고 동양을 연구하는 것과 동양인이 구라파의 학문 세계에서 동양을 분리할 생각으로 동양을 새롭게 구성해보려는 노력과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독자적인 학문을 이룬다든가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줄 생각합니다. … 가령 동양학을 건설한다지만 우리들의 대부분은 구라파의 근대를 수입한 이래 학문 방법이 구라파적으로 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의 거의가 구라파적 학문의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니 그 방법을 버리고서 동양을 연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동양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학문 방법으로 동양을 연구하여야 할 터인데 내가 영국 문학을 한 사람이라 그런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이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구라파적 학문 방법을 떠나서는 지금 한 발자국도 옴짝달싹 못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시다 같은 철학자도 서양 철학의 방법을 가지고 일본 고유의 철학 사상을 창조한다고 애쓴다지 않습니까. 한동안 조선학이라는 것을 말하는 분들도 우리네 중에 있었지만 그 심리는 이해할 만하지만 별로 깊은 내용이 없는 명칭에 그칠 것입니다. 요즘에 율곡 같은 분의 유교 사상을 서양 철학의 방법을 가지고 연구해보려는 분들이 생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양학의 성립이란 애매하고 또 내용 없는 일거리가 되기 쉽겠습니다.”
    “그러나 서양 학자들이 동양을 연구하는 데는 좀 더 다른 의미도 들어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서양의 몰락과 동양의 발견이라든가 하는.”
    “네 잘 알겠습니다. 요즘 그렇게들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겠지요. 구라파 정신의 몰락이라든가 구라파 문화의 위기라든가 하는 소리는 이 쭈루루니 책장에 꽂혀 있는 뭇별(많은 별[星]) 같은 사상가들이 오래 전부터 떠들어오는 말이고, 구라파 정신의 재생이나 갱생책을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동양을 발견하는 일이 많다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그들은 결코 구라파 정신을 건질 물건이 동양의 정신이라고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가지로 세계를 건질 정신은 역시 구라파 정신이라고 깊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양 사람으로서는 물론 당연한 일이고 우리 동양 사람은 감정적으로래도 항거하고야 견뎌 배길 일이지만 그러나 구라파 학자의 동양 발견이라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 이런 점은 우리 동양 사람이 깊이 명심할 일입니다.”
    무경이는 가만히 듣고 앉아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오시형이의 이론을 그대로 옮겨서 또 한 번 질문을 던져본다.
    “앞으로의 현대의 세계사를 구상해보는 데 있어서 서양사학에서 떠나 다원 사관에 입각하여 여러 개의 세계사를 꾸며놓는 것은 어떨까요?”
    학문적인 술어가 마음대로 입에 오르지 않아서 그는 더듬더듬 자기의 의사를 표현해놓는다.
    “동양에는 동양으로서 완결되는 세계사가 있다, 인도는 인도의, 지나(중국)는 지나의, 일본은 일본의, 그러니까 구라파학에서 생각해낸 고대니 중세니 근세니 하는 범주를 버리고 동양을 동양대로 바라보자는 역사관 말이지요. 또 문화의 개념두 마찬가지 구라파적인 것에서 떠나서 우리들 고유의 것을 가지자는 것. 한번 동양인으로 앉아 생각해 볼 만한 일이긴 하지마는 꼭 한 가지 동양이라는 개념은 서양이나 구라파라는 말이 가지는 통일성을 아직껏은 가져보지 못했다는 건 명심해둘 필요가 있겠지요. …  불교나 유교는 이러한 정신적 가치로 보면 훨씬 손색(다른 것과 견주어보아 못한 점)이 있겠지요. 조선에도 유교도 성했고 불교도 성했지만 그것이 인도나 지나를 거쳐 조선에 들어와서 하나도 고유의 사상이나 문화의 전통을 이룰 만한 정신적인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허기는 그건 불교나 유교의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조상들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어느 한귀퉁이를 비비고 들어가볼 틈새기도 없을 것 같았다. … 동양인으로서 동양을 저토록 폄하(貶下)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하나의 비극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였다. 그는 잠시 오시형이의 편지를 생각해보았다. 비판만 하면 자연히 생겨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의 지식인들의 하나의 통폐라고 말하면서 비판보다도 창조가 바쁘다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말하였던 것일까.

    위의 대화에서 이관형은 시형이 말한 동양사관의 현실성을 따지며 그것은 현실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형이 자신만의 길을 주장하거나 대안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무경은 이런 관형을 보면서 시형이 비판보다도 창조가 바쁘다고 쓴 편지의 내용을 떠올린다. 이런 모습은 작가가 시형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관형과 같이 비판만 하는 것도 아닌 정신세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즉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동시에, 아무런 대안 없이 무조건적 비판만 일삼는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형과 관형을 매개하는 무경에 대해서도 주목할 수 있다. 시형의 전향은 사상뿐만이 아니라 무경과의 관계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때의 시형은 “평양에서 부회 의원(평양 지역을 관장한 식민지 시대 행정기구였던 평양부의 의원)과, 상업 회의소에 공직을 가지고 있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거의 연을 끊은 채로 활동을 이어가면서 무경과 결혼을 약속한 상태였다. 그러나 옥중에서 전향하고 출소한 시형에게 “이 년 동안 친필로는 편지도 안 하였다던” 아버지가 찾아와 둘만의 대화를 나눈 뒤 돌아간다. 무경은 시형의 아버지가 시형과 자신의 결혼을 허락할 것인가 불안감을 느끼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형은 요양을 명분으로 본가로 돌아간다. 무경은 그를 보내면서 “아주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슬픔을 느낀다. 어쩌면 추측일 수도 있던 이 슬픔은 「맥」에서 명백해진다.

    피고석 뒤에 놓인 방청석으로부터 젊은 여자가 약간 허리를 드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이윽고 재판장은 오후에 심리를 계속하고 일단 휴식에 들어간다는 선언을 하였다. 젊은 여자는 완전히 일어섰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키가 날씬한 여자였다. 무경이는 가슴이 뚱하고 물러앉는 것을 느꼈다. 그 여자의 옆 자리엔 오시형이의 아버지, 그리고 또 그 옆자리엔 어떤 늙은 신사. 피고석으로부터 돌아온 오시형이는 긴장한 얼굴을 흐트려놓으며 그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무경이는 뒤숭숭해진 공판정의 소음에 앞서 복도로 나왔다. ‘그 여자이다! 도지사의 딸!’ ― 그리고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끝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시형은 자신을 옥바라지한 무경과의 연을 저버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도지사의 딸과 결혼한다. 이로써 무경은 시형과의 관계가 끝나고,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삶을 새로 개척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무경은 「경영」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 시형이를 위하여 얻었던 방이었다. 시형이를 맞기 위해서 저금 통장을 빈텅이를 만들면서 장식해 보았던 방이었다. 그는 이제 가 버리고 여기엔 없다.
    ――시형이를 위하여 나섰던 직업전선이었다. 시형의 차입을 대기 위해서 선택하였던 직업이었다. 시형이도 나오고 인제 직업도 목적을 잃어버렸다.

    울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제 몸에서 빈 껍질만 남겨 두고 모든 오장과 육부가 몽땅 빠져 나가는 경우가 있었으면 하고 막연히 그런 경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런데 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급사가 문을 열었다.
    “주인님이 나오셔서 장부 좀 보시잡니다.”
    급사의 말에 그는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킨다. 그는 문에 쇠를 잠그고 층계를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점점 제 다리에 기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방도, 직업도, 이제 나 자신을 위하여 가져야겠다!)
    그런 생각이 사무실을 들어설 때에 그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기 삶에 대해 얼마간 능동적인 태도로 변화하는 무경의 모습이다. 무경은 「맥」에서도 이런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는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 나아가겠다는 하나의 높은 생활력 같은 것을 천품으로서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생활력은 제 앞에 부딪쳐오는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꿰뚫고 나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력으로 나타날 때가 있었다. 사람은 제 앞에 부딪쳐오는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맞받아서 해결하고 꿰뚫고 전진하는 가운데서 힘을 얻고 굳세지고 위대해진다고 생각해본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치고 함정에 빠져서 그가 생각해본 것은 모든 운명의 쓴 술잔을 피하지 않고 마셔버리자 하는 일종의 ‘능동적인 체관(諦觀, 품었던 생각을 아주 끊어버리다)’이었다. 

    무경은 시형과의 결별을 넘어서기 위해 그의 사상궤적을 알고자 한다. “동양학은 어떻게 해서 오시형이를 저토록 고민 속에 파묻히게 만드는 것일까, 동양학으로 가는 길이 무엇이건대 그것은 오시형이와 최무경이의 관계를 이토록 유린하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일까”. 시형의 사상을 비판하는 관형과의 대화는 이런 맥락에서 나누게 된 것이었다. 

    이런 무경의 모습 역시, 시형과 관형 어느 쪽에도 동일시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사회의 한 이데올로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김남천은 자신의 사상을 대변할 ‘적극적 주인공’을 창조해낼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오히려 실제의 생활을 그려냄으로써 리얼리즘이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념으로 무장한 주인공으로서는 리얼한 세계를 포착해낼 수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김남천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했던 것은 역사에 대한 성찰이었다.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반 고호라는 화가의 말인데 … 인간의 역사란 저 보리와 같은 물건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 흙 속에 묻히지 못하였던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갈려서 빵으로 되지 않는가. 갈리지 못한 놈이야말로 불쌍하기 그지 없다 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그러고는 또 한 번 뜨즉뜨즉이(띄엄띄엄) 그것을 외고 있었다. 무경이도 그의 하는 말을 외가지고 다소곳하니 생각해본다. 그러나 한참만에,
    “그게 어떻단 말씀이에요. 흙 속에 묻히는 것보다 갈려서 빵이 되는 게 낫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잖으면 흙 속에 묻혀서 많은 보리를 만들어도 그 보리 역시 빵이 되지 않는가 하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이관형이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수록 더욱더 명구가 되는 겁니다. 해석은 자유니까요.”
    “그럼 전 이렇게 해석할 테예요. 마찬가지 갈려서 빵가루가 되는 바엔 일찍이 갈려서 가루가 되기 보담 흙에 묻히어 꽃을 피워보자.”
    이관형이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었다.
    “구라파 정신이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적에 그들이 니힐리스틱하게 던져본 말입니다. 이렇게 구라파가 몰락해버리는데 정신을 신장해보는 사업에 종사해본들 무엇하랴, 이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의 해석이랍니다. 선생님의 해석은 건강하고 낙천적이고 미래가 있어서 좋습니다.”
    “선생님께선 그런 사상을 가졌으니까 대학에서도 실패를 보신 거예요.”

    인간의 역사를 보리에 비유한다고 할 때, 위의 대화에서는 세 가지 방식이 제시된다. 첫째, 흙 속에 묻히는 것보다는 갈려서 빵이 되는 게 낫다. 둘째, 흙 속에 묻혀 많은 보리를 만들어도 결국 빵이 된다. 셋째, 가루가 되기보다 흙에 묻혀 꽃을 피워보겠다. 첫 번째 방식에서 역사는 발전하거나 쇠퇴한다기보다는 현재 소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두 번째 방식의 경우 보리의 유적 연속성은 유지된다. 그런데 세 번째 방식의 경우 보리는 질적으로 다른 꽃의 상태로 변화한다. 여기서 김남천은 어떤 선택도 명확하게 확정하지 않음으로써, 역사가 단순히 반복되는지 아니면 어떤 질적인 비약을 가지는지도 확정하지 않는다. 김남천에게 인간의 역사에 관한 정당한 성찰은 도래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력에 의존해 구성해낼 때가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반복의 가능성과 비약의 가능성이 동시에 내포된 상태로 묘사할 때 가능했다. 즉 식민지 조선 사회의 미래가 현재 상태의 반복일지 어떤 질적인 비약일지는 알 수 없고, 비약이 발생해도 그 사회가 어떤 상태일지는 알 수 없지만, 김남천은 보리의 비유로써 현재와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역사)에 관해 성찰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김남천의 연작소설은 시형과 관형의 대립하는 견해를 보여 주지만, 이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동시에 무경의 견해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평가를 드러내지 않는데, 현 상황이 그대로 유지될지 아니면 더 나은 상황으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해도 명확하지 않은 셈이다. 시형은 ‘동아신질서’를 수용하여 전향하고 관형은 ‘-주의’ 운동을 평론하기는 하지만 운동 자체와는 거리를 둔 회의주의자다. 무경은 독립적인 삶을 꾀하지만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런 세 사람을 각각 조선 사회에 만연한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전향자와 회의주의자, 그리고 당장 하루하루 사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는 해석도 충분히 곱씹어볼만 하다. 

    다만 무경이 그래도 보리의 꽃을 피워보겠다고 하는 데에 주목해볼 수 있겠다. 현재로서는 무엇도 단정할 수 없지만(아무런 계획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라 하겠다. 이렇듯 가능성을 놓지 않고 있었기에 김남천은 해방 직후 사회주의 운동을 다시 시작해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서기장으로 활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비운의 군대, 조선의용대

     
     
    끝으로 사회주의자들의 무장 항일투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에 맞서 끝까지 무장 항일투쟁을 벌인 조선인들이 존재했는데, 바로 조선의용대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일본에 대적했던 부대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창설됐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항일전쟁을 지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의 관심과 지원을 받았는데, 미국, 인도, 베트남, 소련 등에서는 기자를 파견해 조선의용대의 항일투쟁을 보도하기도 했다. 조선의용대의 역사를 간략히 보면 다음과 같다.

    만주사변 이후 의열단은 중국국민당 정부와 손을 잡고 군사, 정치 인재 양성에 착수하는 동시에 관내 지역 조선 혁명단체를 통일하는 운동에도 주력했고, 이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운동가동맹, 조선혁명가연맹이 모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고, 연맹은 중국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와 협의하여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때 군사위원회 정치부 비서장이던 하요조(賀耀祖)는 조선의용군의 성립에 대해 “1. 현재 의용군이라 칭할 필요는 없고 의용대라 칭한다. 2. 지도위원회는 조직하여도 좋다. 3. 진국빈(즉 김약산, 본명 김원봉, 일명 최림, 당시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민족전선연맹이사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대장으로 파견한다”고 지시하였다. 당초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중국항전에 직접 참가해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 목표였으나, ‘군’이 되기에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투를 주목적으로 하지 않고 선전을 주목적으로 하는 대오로 편제한 것이었다. “중국 영토에서 항일하니 중국항일작전의 영도에 복종해야” 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 군사위의 직접 통제와 감독을 받아야만 했고, 그런 처지의 외국인 부대에 ‘완전무장’이 허용될 리는 만무했다. 그렇지만 의용대원들은 대적 선전공작을 수행하는 중에 전투요원이 될 기회를 최대한 얻으려 했고, 전투요원을 방불케 하는 활동을 자진하여 적극적으로 수행하곤 했다.

    그러던 1941년,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가 김원봉의 총대부(總隊部)와 갈라져 독자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주둔하는 지역으로 진입한다. 이런 분화는 김원봉과 중국공산당과 연계가 있던 최창익 등 공산주의자 사이의 노선 차이로 인해 발생했다. 일단 두 세력 사이에 화북지역의 조선 무장대오와 연계하여 조선 진출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화북으로 진출할 필요가 있다는 데까지는 묵시적인 합의가 있었다. 다만 김원봉은 반일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활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했다. 또한, 조선의용대가 성립될 당시부터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으니 한순간에 배신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용대 내부에는 중국국민당이 항일투쟁보다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투쟁에 몰두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공산당과 연계가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대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그 결과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가 팔로군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후 팔로군으로 편입된 조선의용대는 1943년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되고, 김원봉이 이끌던 잔류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된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이후에도 일본에 맞서 무장투쟁을 지속한다.

    그러나 해방을 맞이한 이후 조선의용군은 비운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우선 미군정이 주둔한 남한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한 조선의용군 출신이 자리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후 남한은 한국광복군을 항일투쟁 역사의 중심으로 둔다. (물론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주력부대는 이미 빠져버렸기에 한국광복군의 주류는 임시정부였다.) 그러면 북한에서는 어땠나. 조선의용군은 한국전쟁에 선봉으로 참전했으나, 의용군 출신 간부들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숙청되고 만다. 그리고 전쟁 후 중국으로 돌아갔거나 숙청되기 전에 중국으로 탈출한 의용군 출신자들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국민당 특무(스파이)’로 낙인 찍혀 오래도록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이렇듯 고국의 남북 양쪽과 중국에서 이래저래 버림받고 백안시된 존재가 의용군 출신자들이었다.
     
     

    사회주의자의 항일 무장투쟁, 김학철의 「격정시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잊혀간 조선의용대. 그들의 역사는 40여 년의 시간이 흐른 1988년 7월 19일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120명의 월북 문인에 대한 출판 해금조치 이후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한다. 복원에 있어 김학철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해방 이후 역사 기록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조선의용대가 전개한 항일무장투쟁과 그들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들을, 본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서사화하여 무관심 속에 묻혀 있었던 조선의용대와 관련한 역사를 재조명받을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대표작이 바로 『격정시대』다. 소설 속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에 있었던 조선의용대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진5%]

    『격정시대』는 총 3권의 장편소설이다. 그만큼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그리고 있다. 본 글에서는 김학철 본인을 형상화한 인물인 주인공 서선장의 삶을 중심으로 보려 한다.

    평생을 버들잎 같은 나무배─야거리 한 척에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를 하여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서 서방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것은 돛도 노도 다 필요 없는 20톤급 발동선의 선장이었다. 그래서 거 아들의 이름을 선장이라고 지었는데, 그 선장이도 그럭저럭 자라서 인제 보통학교, 즉 소학교의 4학년생이 되었다.

    선장이는 고양이 수염을 깎아 괴롭히거나 벌집을 쑤셔 도망치다 벌에 잔뜩 쏘여 등교하지 못하곤 했던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렇게 장난은 심했지만 담임 선생님인 김영하가 인정할 정도로 작문만은 잘하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린 선장에게 충격적인 두 사건이 벌어진다.

    “회관에……쌈 났다!”

    청년회관 앞 신작로와 정구장에는 벌써 구경꾼들이 백차일 치듯(흰옷 입은 사람들이 매우 많이 모인 모양을 이르는 말) 하였다. … 청년회관을 포위 공격하는 한 무리 사람들의 돌팔매질에 청년회관의 유리창들은 이미 모두가 박산(박살)이 나서 성한 것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 공격자 중의 몇몇이 머리들을 한데 모으고 한참 수군수군하더니 곧 돌격대가 조직되어서 칠팔 명의 젊은 축이 몽둥이들을 꼬나들고 일시에 으악 소리를 지르며 현관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 서 있는 구경꾼들에게 말을 묻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나는 것을 선장이도, 선희도, 은희도 다 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판이오?”
    “명석동 조합에서 쳐내려왔다오.”
    “명석동 조합이라니?”
    “아따 이 양반, 노동조합두 모르우? 적색노조.”
    “그래 그 무슨 조합인가가 이 회관은 왜 들이친다우?”

    “아 빨갱이하구 까망이가 맘이 맞을 리 있소? 앙숙이지. 개와 고양이두 맞다들기만 하면 아옹다옹하잖소.”
    “빨갱이는 뭐구 까망이는 뭐요?”
    “아 빨갱이야 노동조합 아니겠소, 적색노조.”
    “그럼 까망이는?”
    “까망이야 무정부주의패지요, 쩍하면 치구 달구 하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이 큰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주재소는 쥐 죽은 듯 잠잠하였던 것이다. 설사 우주의 다른 천체에서 이런 소동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내 알 배 아니라고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원산의 신작로에 있던 원산 청년회관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 장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적색노조원들이 청년회관에 쳐들어온 것인데, 무정부주의자들이 자기네 조합에 프락치를 박아 파괴활동을 일삼는 데에 분노해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김학철이 놀란 것은 바로 길 건너편 주재소의 동향이었다. 주재소에 근무하던 순사들은 싸움판이 벌어졌음에도 나와 볼 생각은 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선장이는 당시에는 그 이유를 곧바로 알지 못했으나, 같은 민족끼리 싸우면 결국 일본만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훗날에야 깨닫게 된다.

    또 하나의 사건은 원산에서 일어난 총파업에서의 광경이다. 원산부두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단체계약의 확립”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
     
    원산항의 이 별로 보잘 것 없는 부두가 이처럼 세상의 이목을 끌 줄은 일찍이 아무도 몰랐었다. 콘크리트 안벽과 목조 잔교(부두에서 선박에 닿을 수 있도록 해 놓은 다리 모양의 구조물)들에는 일본의 쓰루가, 니가타 등 항구에서 건너온 크고 작은 화물선들이 닻은 내리고 있는데, 싣고 온 화물들을 부릴 수도 없고 또 부두 창고에 드러쟁인(많은 물건이 한군데에 차곡차곡 쌓인) 화물들을 선적할 수도 없었다. 바다와 뭍을 연결하는 가장 요긴한 매듭이 마비되어 반신불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부두노동자들이 소, 말, 개, 돼지같은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여 파업을 단행하였기 때문이다. 이날 원산항의 바람 찬 부두는 힘의 대결을 위하여 적아(敵我) 쌍방이 전투적 역량을 속속 투입하는 대회전장을 방불케 하였다. 금전에 매수된 파업깨기꾼들과 자발적으로 날뛰는 파업방해분자들과 충군애국에 혈안이 된 무장경찰들이 풍우같이 이리로 몰려들었다. 파업에 일떠난 부두 노동자들과 역시 파업을 단행한 시내외 각 공장, 제조소, 작업장들에서 급파된 규찰대들과 응원대들과 노조일꾼들이 들불같이 이리로 밀려들었다. 일장의 충돌은 불가피적이었다.

    실제로 1929년 1월, 원산노동연합회(이하 노련)는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고용주들은 대체노동자와 경찰의 협조를 구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동시에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노련은 해고를 철회하면 타협할 수 있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고용주 측 대표는 확답을 회피했고, 상업회의소는 노련이 아무 이유도 없이 파업을 선동했다는 전단을 시내에 배포했다. 결국 상업회의소는 노련 소속 노동자 전면 사용 중지를 선언했고 노련은 본격 총파업에 돌입한다. 파업은 원산 전 지역으로 퍼져 지역 곳곳의 작은 노동조합까지 함께 연대했다.

    이 조선식 ‘KKK’(미국의 KKK단이 흰 복면을 썼듯 파업깨기꾼들이 같은 모자를 쓰고 있음을 빗댄 말)가 입장을 하자 기업주의 앞잡이들과 파업 방해 분자들은 갑자기 사기가 올라서 괴상한 소리들을 지르며 기뻐 날뛰었다. … 공방전의 막이 열렸다. 주먹질 발길질이 빗발치듯 하였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의 장벽은 끄떡없이 일차 공격을 견뎌내었다.
    돌파에 실패를 한 파업깨기꾼 망나니들이 일단 뒤로 물러나서 대가리들을 한데 모으고 작전 계획을 고쳐 짤 즈음, 배후에서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여태껏 치안유지를 표방하고 정관, 즉 고요히 관찰하는 태도를 취해오던 경찰대가 행동을 개시하였다. 진압이 시작된 것이다. 한 번 충돌에서 대립한 쌍방의 여러 사람이 깨지고 터지고 피가 흘러서 이미 상해죄, 소요죄를 구성하였다는 구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 이번 돌격은 사실상 무장 경찰대와의 협동작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파업 노동자들이 과연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바로 이때다. 안벽에 선복을 붙이고 정박한 ‘쓰루가마루’라는 화물선의 갑판 위에서 관전을 하던 일본 선원들이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발들을 굴렀다. 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라치면
    “스또 반자이!”
    “교오다이다찌 감바레!”
    이것을 우리말로 바꿔놓으면
    “파업 만세!”
    “형제들 버텨라!”
    이것을 신호로나 한 듯이 안벽에 정박한 다른 기선 ─ ‘니이 가다마루’와 ‘노도니고오’에서도 또 잔교에 정박한 ‘사도마루’, ‘마이즈루로꾸고오’ 및 ‘미야즈마루’에서도 일본 선원들의 응원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잇달아서 ‘쓰루가마루’를 필두로 각 기선들이 일제히 우렁찬 기적들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아닌 뭇 기적의 긴 울음은 그러지 않아도 물정이 소연한(소란스런) 원산항을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파업깨기꾼들과 무장경찰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서 일순 모두 멍청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유분수지, 내지인(일본인)이 불령선인의 편을 들다니! 이와는 반대로 파업자들은 그 뜻하지 않은 힘진 성원에 크게 고무되었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는 다 한편이라는 것을 실물교육을 통하여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파업자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여태까지의 수동적인 방어에서 일변하여 능동적인 방어에로 넘어갔다. 방어를 위한 공격에로 넘어간 것이다.
    선장이는 기선 위에서 고함을 지르며 발을 구르는 일본 선원들을 바라보며, 귀청이 떨어질 듯 부두가 떠나갈 듯 울리는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넋을 놓았다. 도대체 이것은 어찌 된 일일까.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의 편을 들다니! 선장이는 입에다 물어 깰 수 없는 무슨 땅땅한 덩어리를 문 것만 같았다. 열 서너 살 먹은 아이의 이빨로는 물어 깬다는 것이 무리였다.
     
    파업자와 파업깨기꾼과 경찰연합의 충돌이 벌어지는 아수라장에서 별안간 일본 노동자들이 파업자들을 향해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는 장면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가 한편이라는 것을 어린 선장이가 깨닫는 것은 더 훗날의 일이었으나, 이 장면은 선장이에게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이 당시 원산에서 노련의 영향력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노련의 지도부는 중국 영사관으로 달려가 중국 노동자의 취업을 막아달라고 부탁해 그들의 협력을 약속받았고, 일본인들 역시 ‘같은 노동자’로서 파업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며 일손을 놓고 항구를 떠났다. 결과적으로 원산총파업은 일본 경찰의 폭압적인 단속과 진압으로 패배했지만, 지역 노동자운동에 큰 영향을 미쳐 1930년대 중반 이 지역의 적색노조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총파업이 패배한 후 일본 경찰의 검거선풍이 불던 그때,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된 선장이는 서울에 사는 외칠촌 아주머니인 박숙자 씨의 양아들로 들어가 서울로 유학하게 된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수학하던 어느 날, 독립운동가 이재유를 저택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된 일본인 스기우라 교수의 소식을 듣고 선장이는 어릴 적 원산총파업에서 받았던 그 “가슴 뛰노는 장면”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에서고 조선에서고 이와 동일한 시각에 그 뉴스를 듣는 청중은 다 이렇게 눈들이 동그래졌을 것이다. 전파를 타고 날아온 뉴스가 자못 엄청났기 때문이다. 중국 상해 홍구공원이란 데서 조선인 윤 무어라나 하는 사람이 폭탄을 던져서 경축회장 주석대에 앉았던 일본군 장령 여럿을 살상하였는데 그 중에는 상해 파견 군사령관 시라가와 대장도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뭐라니?”
    “인호오기찌라니까……아마 윤─봉─길이겠지요.”
    “나이 몇 살이라구?”
    “스물다섯 살이라잖아요.”

    선장이는 받은 충격이 어찌나 크던지 이날 밤 자리에 누워서도 오래도록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쏴 눕힌 것은 아무리 장쾌하더라도 필경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옛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오늘 낮의 일이다. 자기가 동양악기점 앞에서 흘러나오는 레코드의 아름다운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바로 그 무렵에 발생한 일이다. … ‘그에 대면 나는 하잘 것 없는 밥병신이로구나!’하는 자비심과 ‘그는 지금쯤 적에게 모친 악형을 당하고 있을 텐데…… 나는 여기 이렇게 편안히 누워있어?’ 하는 자책감에 등골에 땀이 다 내돋았다. … ‘남들은 다 목숨을 걸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나만 안일하게 여기서 공부를 해? 수치스러운 일이다. … 중국으루 건너가자. 임시정부를 찾아가자. 황포군관학교루 가자. 가면 무슨 수가 나겠지. 가자!’
     
    선장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에서 조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과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 대장 등 일본군 장령을 살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당장은 아무 것도 없으니 총과 폭탄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도 중국 임시정부를 찾아가거나 황포군관학교로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실제 김학철은 시골집을 판 돈에서 250원을 따로 떼어내 저금해둔 삼남매의 학비 중 어림잡아 100원만 찾아 그 돈을 들고 무작정 중국으로 떠난다. 이때 김학철의 나이는 18살이었다.)

    선장이는 다행히 특별한 문제 없이 상해에 도착한다. 그런데 도착 후 만난 조선인 김혜숙으로부터 임시정부가 이미 풍비박산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좌절한다. 그렇지만 김혜숙은 “임시정부란 것은 기실 유명무실”했다면서 “상징적인 존재만을 믿거나 의지하고 독립을 꾀할 수는 없”으니 “동적이고 보다 효과적인 노선을 개척해야”한다며 자신들과 함께할 것을 선장에게 제안한다. 김혜숙은 앞서 조선의용대의 역사에서 언급했던 조선민족혁명당 소속 활동가였던 것이다. 사실 조선에서 상해로 흘러들어오는 청년들은 김혜숙이 운영하던 식당에 들르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으레 김혜숙에게 걸려들어 조선민족혁명당 상해 특구를 통해 남경 명양거리 호가화원 초대소로 보내졌다. 여기서 몇 달의 감별을 거친 끝에 합격한 사람은 입당하고 아닌 사람은 노자를 주어 돌려보내졌다. (김학철은 무슨 까닭인지 상해 특구에 머무르다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게 됐다.)

    상해에서 지내면서 선장이는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고 당 활동을 한다. 그러던 중 상해에서 일어난 전차, 버스 노동자의 파업을 목격한다.

    “이번 파업은 그들네 노조에서 조직한 거겠지요?”
    “물론. 그렇지만 핵심적 지도역량은 공산당이겠지요……중국공산당.”
    “헤 그렇습니까, 그래요?”
    “공산주의자들은 민중을 발동하는 것을 주요한 투쟁 수단으로 삼으니까요.”
    선장이는 입에다 무슨 잘 깨물어지지 않는 덩어리를 문 것처럼 입술만 우물거리고 말을 아니하였다. 민중을 발동한다는 말이 마치 먼 화성에서 보내온 전문과도 같이 불가해하여서였다.
    “그에 반해서 민족주의자들은 개인 테러를 숭상하니까……이것이 분기점일 밖에요. 현재 우리 조직 내에서도 이런 두 갈래 서로 다른 주장이 맞서고 있습니다.”
    “어느 편이 옳다고 미스터 성은 생각하십니까 그 둘 중에?”
    “미스터 서는 어느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잘 모르니까 묻는 게 아닙니까?”
    “오늘 그들의 힘을 봤지요? 온 시내를 마비상태에 빠뜨리는. … 개인 테러로 일본놈 몇 놈 소멸한다고 해서 그놈들의 지정이 흔들리지는 않을 겁니다.”
    선장이는 여적 자신의 해온 일이 옳다고 확신하는 까닭에 성재수의 말이 귓속으로 잘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반감까지 생겼다. … 개인 테러는 극소수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용감한 애국자들만이 해낼 수 있는 신성한 사명이라고 선장이는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부정하신단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하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 한 주일 가량 지나서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성재수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던 끝에 문득 생각난 듯이 일어나가 책장 안을 한참 뒤지더니 책 두 권을 꺼내들고 돌아왔다. … 한 책에는 한문으로 ‘변증법적 유물론’ 또 한 책에는 ‘유물사관’이라고 역시 한문으로 찍혀있는데 둘이 다 일본 도쿄에서 간행된 것이었다. …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침대에 번 듯이 나가 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알구 보니 세상은 이런 거였구나!’ 선장이는 자기가 여적 흐리멍텅한 혼돈 세계에서 헤멘 것만 같았다. 저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제가 어데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맹탕 남의 정신으로 살아온 것만 같았다. … 선장이가 다 읽은 책들을 돌려주러 갔을 때 두 사람은 의미가 특별한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 “그럼 이번엔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지요.”
    성재수가 꺼내다 주는 책은 『국가와 혁명』이었다. … 『프랑스 내전』, 『철학의 빈곤』, 『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 이런 책들을 읽어나가는 동안에 선장이는 크게 변하고 또 성장하였다.

    선장이는 같이 활동하던 동지의 소개로 만났던 성재수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수받는다. 성재수는 중국공산당 소속 활동가로 광주학생사건 때 서울에서 동맹휴학을 선동, 조직하고 경찰을 폭행했다는 혐의로 지명수배를 받아 중국으로 망명한 사람이다.

    실제 김학철 역시 시간이 갈수록 파괴 위주의 폭력투쟁이 가진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희생은 엄청났지만 대가는 너무 적었다. 김원봉과 의열단 동지들도 숙의 끝에 이런 노선을 청산하고 중국 내 군관학교에 입교하기로 결정한다. 소설 속 선장 역시 “지도부에서 국민당 정부와 수차 교섭한 결과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고 교육을 받은 뒤 조선학생만으로 편성된 독립 중대를 설립하기로 한 결정에 따르게 된다.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하자 황포군관학교는 호북성 강릉으로 옮겨갔고, 여기에 이르러 조선인으로 편성된 중대가 설립했다. 조선인 교관은 김두봉, 윤세주, 한빈 등이었다. 학교에서는 한글, 조선역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웠다.

    19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대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는데, … 식순의 하나로 대원들에게 배지 하나씩을 달아주었다. 거기에는 ‘조선의용대’라는 한문 글자 다섯 자와 ‘Korean volunteer’라는 영어 글자 한 줄이 새겨져 있었다. 이어 제1지대(支隊)와 제2지대에 각각 군기 하나씩이 수여되었다. 그 군기 밑에 서서 대원들은 멸적의 기세 드높이 선서를 함으로써 민족의 사업에 충성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후 대세가 기울어져서 부득이 무한(武漢, 도시명 우한)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조선의용대의 열혈남아들은 물색없이 그냥 물러나지 않고 적들에게 탁탁한 선물을 남겨주기로 작정하였다. … 곽말약 선생은 자기의 저서 『홍피곡』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담벼락들과 길바닥에다 콜타르로 굵게 크게 일본글 표어들을 써 놓은 것이었다.
    “병사들은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재벌들은 후방에서 호사를 한다.”
    또는
    “병사들의 피와 생명, 장군들의 금까치(무공) 훈장.”

    나의 탄 자동차가 후성거리를 지날 때 표어를 쓰는 사람들은 일에 열중하여 여념들이 없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콜타르통, 뺑끼통(페인트통) 틀을 들고 또 사다리들을 메고 촌분(매우 짧은 시간)을 다투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가장 감동시킨 일막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또 그것은 나를 가장 참괴하게 만들어준 일막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조선의용대의 벗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단 한 명의 중국 사람도 끼어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중국에도 일본말을 아는 인재는 적잖을 것이다. 일본 유학을 한 학생이 줄잡아도 몇 십만 명은 될 테지? 그런데도 무한이 함락의 운명에 직면한 이 위급한 시각에 우리를 대신하여 대적군 표어를 쓰고 있는 것은 오직 이 조선의 벗들뿐이라니!

    의용대 창설 이후부터 주력이 화북지역으로 진출하기 전까지(즉 노선분화 전까지) 2년여 동안 조선의용대는 여러 활동을 했다. 조선의용대는 대적 공작 실적을 스스로 기록하고 내세웠다. 대원들은 비록 선전부대로 편성되었지만, 선전하다 보면 전투를 피할 수 없었기에 선전과 전투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그만큼 선전이 전투성을 함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활동 중 선장이는 국민당 군대가 일본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저항 정책을 보이지만 공산당에는 매우 공격적인 정책을 보이면서 돈 모을 궁리, 벼슬 얻을 궁리만 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국민당 군대는 일본과의 대적은 피하면서 중국 내 “소비에트 구역을 봉쇄”하는 데에는 개미새끼 하나 지나가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포대로 봉쇄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국민당이 일본과의 싸움보다는 공산당과의 싸움에 집중하다 보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민중들에 돌아갔다. “백색 비적을 소탕하자!” “주덕, 모택동을 사로잡자!”와 같이 한 마을에도 점령군에 따라 다른 내용의 표어가 적혀있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그런 와중에 선장은 우연히 중국공산당 소속 군대에 넘어가 있던 성재수와 재회한다. 성재수는 비밀리에 조선의용대에 들어와 중국공산당 비밀조직을 건립했는데, 선장도 이 비밀조직에 가입한다.

    1940년 말에서 그 이듬해 이삼월 사이에 화중, 화남 각 전장에 분산되어 있던 조선의용대의 각 지대들과 분대들이 육속 북상하여 낙양에 집결한 뒤 전대가 황하를 북으로 건너 태항산 항일 근거지로 넘어 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 1941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무렵 제2지대 정치위원 김학무가 영솔하는 선발대가 낙양을 출발하여 해방구로의 길에 올랐다. 선장이도 선발대에 편입되어 떠났다.

    앞서 노선 차이로 조선의용대의 본대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으로 편입되었다고 했는데, 『김학철 평전』에서도 이에 대해 비슷하게 서술하고 있다. 『김학철 평전』에 따르면, 이 즈음하여 북상하자는 주장이 점점 더 힘을 얻게 된다. 여기서 북상이란 화북 태항산으로 진출하자는 것인데, 그 목적은 우선 팔로군과 합류하여 적극적인 항일전투에 투신하는 것, 또 하나는 화북의 조선 청년들로 의용대를 확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을 국민당 정부가 알아서는 안 되므로 낙양에 머무는 동안 서안의 한국광복군에 방문단을 파견했다. 통일전선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김학철도 함께했다. 그러나 이런 통일전선의 가능성이 단시일 내에는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고, 하루 속히 북상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곧 선발대가 출발하는데, 김학철도 선발대에 편입된다.

    밤새도록 기구한 산로를 더듬고 또 더듬은 끝에 마침내 먼동이 텄다. 그리고 얼마 오래지 않아 동녘 하늘에 등적색 구름에 싸인 아침해가 서서히 떠올랐다. 선장이는 그제야 비로소 산 아래 골짜기에 1백 명도 더 되는 초록색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의용대가 서 있는 산등성이를 쳐다보며 손을 흔들고 또 모자를 흔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오, 저것은 팔로군. 우리의 마중을 나온 팔로군이다!’
    선장이는 난생 처음 자유로운 땅을 디디었다. 왜냐면 그의 조국이 망하던 그해에 그의 어머니도 겨우 열다섯 살 홍안의 부끄럼 타는 소녀였으니까.

    당시 팔로군의 총사령부는 태항산 동쪽 골짜기에 있었는데, 사면팔방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적후(敵後)사령부’라고 불렸다고 한다. 김학철 일행이 도착한 후 이틀 뒤에 ‘조선동지환영대회’가 열렸는데, 김학철은 이날 총사령관이던 펑더화이(彭德懷) 장군을 처음으로 만났다. 대회에는 일본인, 몽골인, 필리핀인도 참가해 국제적인 색채를 띠었다.

    의용군에서는 조직부 성원이건 선전부 성원이건 할 것 없이 다 전투에는 일반 대원들과 같이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돌격으로 넘어갈 때에는 반드시 지도원이 전투 서열 앞에 나서서 “공산당원은 두 발자국 앞으로!”
    명령하여 공산당원들을 앞장세우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공산당원들은 그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있었다. 솔선하여 적진에 뛰어들지 않는 공산당원은 두었다 무엇 할 것인가! 그런 것은 공산당원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한 개 지대의 조선의용군과 한 개 대대의 팔로군의 협동작전이 시작되었다.

    적군의 증원대를 물리쳐서 작전 임무를 완수한 우군 부대가 큰 손실 입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이렇게 깔끔한 승리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실전에서는 주도세밀하게 짠 작전계획도 뒤죽박죽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부대가 함께 달려들어 포대를 철저히 파괴한 연후에 불까지 콱 질렀다. 이정호는 두어 사람을 데리고 거리 안을 온 데 돌아다니며 대적군 삐라를 붙이느라고 분주하였다. 

    본격적으로 조선의용대가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위의 장면은 조선의용대가 일본군으로 위장해 적을 속여 큰 손실을 보지 않고 적군을 제압한 뒤의 시점이다. 조선의용대는 선전부대였지만 전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했는데, 소설도 그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제 소설은 종장으로 접어든다. 소설의 마지막은 김학철이 조선의용대에서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전투를 그리고 있다.

    깎아지른 누에머리에서 불시에 적습을 알리는 신호 총소리가 울렸다. 연거푸 세 방. 세 사람은 본능적 동작으로 재빨리 발걸음들을 돌치자(되돌리자) 용수철에 튕긴 것처럼 숙소를 향하고 내달았다. 총을 가지러 가는 것이다. 바로 이때 앞길 멀지 않은 곳에 포탄 한 알이 날아와 터졌다. 작렬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해가 한낮이 가까워 오자 보람 없이 사상자만 숱하게 낸 무적 황군은 수치스러운 퇴각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적군이 죽은 놈 다친 놈들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맞들고 업고 곁부축하고―죽지가 부러져서 패퇴하는 꼴을 내려다보고 승전에 고무된 항일 전사들은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날뛰었다.

    마당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저녁밥들을 먹은 뒤에 눌러앉아서 노래들을 부르는데 처음에는 장엄한 〈인터내셔널〉을 부르다가 비꾸러져서 〈방아타령〉을 부르고 〈방아타령〉에서 또 비꾸러져서(벗어나서) 〈사발가〉를 부르다가 〈사발가〉에서 아주 비꾸러져서 유행가 나부랭이를 잡스럽게 불러대며 한동안 즐기었다.

    김학철이 조선의용대에서 마지막으로 경험한 전투는 화북성 호가장이라는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일본군과 여러 날 대치하면서 전투를 이어가던 어느 날, 꽤 큰 전과를 올린 날이 있었다. 그날 밤, 부대는 뒤풀이를 거하게 하고는 잠들었는데, 그날따라 긴장의 끈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피로 치러야 했다.

    다들 고단하여 세상 모르고 잠들을 자고 있을 즈음 유신이네 분대가 들어 있는 집 캄캄한 헛청간에서 조심스러운 부스럭 소리가 났다. 뚜껑을 들어 내려놓은 관 속에서 잠을 자던 유빈이가 몽유병자처럼 부스스 일어나더니 기척 없이 각반을 치고 탄대를 두르고 또 총까지 집어들었다. 그리고 반쯤 열려있는 사립짝을 소리 없이 빠져나와 짙은 안개 속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동아상사에서 출장을 나갔던 신용순이가 돌아왔습니다!”
    ‘동아상사’라는 것은 일본군 특무 기관의 간판용 별칭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쓰이는 ‘출장을 나갔던’이란 말은 적지敵地에 ‘파견되었던’ 또는 ‘잠복하였던’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유빈이는 일본 특무 기관의 파견을 받고 항일 부대 안에 잠복하였던 밀정 신용순인 것이다.
    첫닭울이에 경무장을 한 일본군 한 개 중대가 역시 한 개 중대의 황협군을 뒤딸리고 유빈 즉 신용순의 길잡이로 호가장을 향하고 몰려왔다.

    불효의 기습작전―호가장은 일본군과 황협군에게 삼면 포위를 당한 것이다!
    아침 안개가 걷히며 말며 하는 가운데 처절한 혈투가 벌어졌다. …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이는 판이었다.

    손실은 전사(戰死)가 넷, 중상이 둘, 경상이 여섯이었다. 그 밖에 실종된 대원 하나가 있어서 온갖 군데를 다 찾아보았으나 종시 나타나주지를 아니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신비스럽게 종적을 감춰버린 대원―유빈이는 이때 본성명 신용순이로 되돌아갔었기 때문이다(그 후 신용순이는 동아상사의 사원으로 복직을 하여 상여금을 탁탁하게 타가지고 흥청망청하느라고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네 주검 중에서도 마점산의 주검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시체들을 산 밑에 그러묻은 뒤에 선장이가 무덤을 향하여 군모를 벗고 머리를 숙이니 옆에 섰던 장준광이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그는 난투장에서 군모를 어데다 날려보냈는지 맨머릿바람이었다). 다른 전우들도 다 숙연히 머리를 숙였다.
    태항산에서의 이와 같은 전투의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긴장을 풀고 있었던 데다 첩자까지 더해져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음에도 퇴각 작전은 기적이라 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부대가 전멸할 수 있었던 위기였음에도 퇴각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학철은 이 전투에서 왼쪽 대퇴골이 4분의 1쯤 깎여나가는 관통상을 당한다. 총에 맞아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혀 의식을 잃은 후 일본군의 들것에 실려 포로로 잡혀간다.

    이후 김학철은 관통상을 당했음에도 수술이 아니라 간단한 응급처치만 받고 방치된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국민으로서 사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의 적용을 받아 정치사범이 수용되는 나가사키 수용소로 보내진다. 후에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지만, 정치범 수용소는 일반 수용소와는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운 좋게 살아남아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김학철은 귀국 이후에 남한에서 활동을 이어가지만, 다리가 절단된 상황이었기에 남한에서 좌익활동을 펼치기에는 제약이 많다고 판단해 월북하고, 한국전쟁 발발 후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중국에서 자리 잡고 작품활동에 매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6년부터 중국에서는 반우파투쟁이 전개되고, 다양한 사상과 예술이 펼쳐질 필요가 있다는 “백가쟁명, 백가제방”의 필요성을 역설한 김학철은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노동 개조를 당한다.

    노동 개조의 와중에도 그는 동유럽에서 일어난 탈스탈린운동에 주목하면서 『20세기 신화』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반우파투쟁’에서 ‘문화대혁명’ 전야까지 극좌노선이 판치던 중국사회를 배경으로, 한 지도자의 독재와 그에 대한 개인숭배 그리고 이로 인해 민주주의 원칙이 여지없이 파괴되고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 비판한 정치소설이다. 김학철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게 이 소설 원고를 우연히 발각당해 7년 4개월 동안 유치장에 갇혀 밤낮으로 고문을 당했다. 그는 7년 4개월이라는 기록적인 예심 후 산송장에 가까운 상태였음에도 재판정에서 꼿꼿한 모습을 보였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예심으로 7년 4개월을 살았지만 2년 8개월을 더 채워야 했다.
    1977년 출소 후 3년이 흐른 뒤, 김학철은 『20세기 신화』가 반동적이지만 출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는다. 이후 20편의 단편소설, 100여 편의 산문 등 집필에 매진한다. 이렇듯 세상의 풍파에 맞서 올곧게 살아온 사회주의자 김학철은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2001년 9월 15일 사망한다. 

    여기서 이번 글은 마무리하지만, 다루지 못해 못내 아쉬운 내용이 있어 마지막으로 언급해두려 한다. 우선 항일무장투쟁에 있어 또 다른 중요한 단체인 동북항일연군을 다루지 못했는데,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들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형상화한 문학작품을 찾기 어려워 이번 글에서는 싣지 못했다. 또 1930~1940년대 조선 사회주의 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경성콤그룹에 관해 다루지 못했다. 이 부분은 특히 아쉽다. 경성콤그룹은 1930년대 후반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아래서도 끝까지 국내에 남아 민중 속에서 혁명적 대중조직(RMO) 건설과 당 재건, 반파쇼 인민전선 구축이란 과제를 포기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사회주의그룹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의 활동이 워낙 은밀했기에 이들의 활약상을 그린 당대의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에야 이들의 역사를 조명하는 저작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이런 작품들도 다뤄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네 편에 걸쳐서 식민지 시대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소설과 함께 살펴봤다. 네 편의 글을 집필하면서 노동자운동의 발전과정을 다시금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소설 자체도 시간에 따라 발전하고 있음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노동자운동의 역사가 소설이라는 매개를 빌려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기를 바란다. ●
     
     
     
     

  • 2022-12-16

    스탈린 시대, 속삭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올랜도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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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후편)

    1. 들어가며

     
     
    『속삭이는 사회』 책 소개 전편에서는 콘스탄틴 시모노프, 골로빈 가족, 퍄트니츠키 가족을 중심으로, 소련 시기에 특히 농업 집단화와 굴라크(노동수용소), 대숙청을 경험하며 속삭이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소련 시민들의 삶을 확인했다. 억압적 체제하에서 소련 시민들은 체제에 수동적으로 순응하여 소곤거리는 사람이 되거나, 체제에 적극적으로 복무하며 고자질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편에서 소련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을 중심으로 당시의 사회를 살펴봤다면, 후편에서는 스탈린 시대를 다루는 역사학 연구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주요 쟁점과 저자의 평가는 무엇인지 다룬다.

    저자는 스탈린 이후 혁명이 굴절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특히 그 속에서 나타나는 개인들의 비극을 다루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독재, 폭력의 문제를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잘못으로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소련 사회가 역사적 시기마다 마주했던 곤란과 그때마다 취했던 선택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함축되어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꼽아 보았다. ‘신경제정책의 중단을 어떻게 볼 것인가?’, ‘농업 집단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숙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시의 국민적인 단합이 소련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전후 스탈린의 개혁 거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스탈린 사후에도 소련 시민들은 왜 오래도록 침묵했는가?’ 
     
     
     

    2. 신경제정책의 중단: 스탈린주의의 전조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olicy, 이하 ‘네프’)은 1921년 레닌이 도입했다. 전쟁, 혁명, 내전을 겪으며 소련은 경제적 파탄 상황에 직면했고,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시 공산주의 경제정책에서 네프로의 전환이 나타났다. 내전 시기 시행됐던 식량 징발이 중단됐고, 농민들이 20%의 세금을 현물로 지급하면 여분의 농산물을 자유롭게 팔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처럼 네프는 전시 공산주의 시기에 대한 평가 속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을 위한 일종의 양보 조치이자 경제정책으로서 시작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레닌은 네프를 사회주의 이행기의 필연적인 전략으로 사고하기에 이른다. 즉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의 확대만으로는 사회주의로 갈 수 없고, 새로운 생산관계를 조직해낼 수 있는 대중들의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레닌의 구상을 당시 대다수 볼셰비키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즉 네프는 어쩔 수 없는 정치적, 경제적 양보 조치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1927년에 반 신경제정책 운동이 개시되며 네프는 결국 붕괴했다. 

    저자는 이 과정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 설명한다. 실제로 1920년대 소련사 연구에서는 네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다. 기존 연구 경향은 네프를 1917~1921년의 혁명과 내전, 그리고 1930년대 ‘스탈린 혁명’ 사이에 있었던 ‘숨 쉴 틈’으로 규정했다. 즉 전시 공산주의와 스탈린 혁명 사이에 있었던 혁명의 휴지기라는 의미다. 한편, 부하린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미국의 학자 스티븐 코헨은 네프를 전시 공산주의의 가혹함과 스탈린주의의 공포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 간주했다. 네프는 ‘숨 쉴 틈’이 아니라, 점진적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영구적 모델이라는 것이다. 홀란드 헌터와 로버트 앨런은 소련이 네프를 유지했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 비슷한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계산하기도 했다.  

    저자는 네프의 성격을 규명하기보다는, 네프가 중단된 맥락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기층 볼셰비키와 대중적 차원의 지지와 결합한 스탈린이 권력 투쟁 속에서 부상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개인 상점의 가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많은 프롤레타리아는 네프에 반대했다. 네프에 대한 이들의 불신은 시장의 심각한 시세 변동으로 더욱 강화됐다. 농촌의 재화 부족으로 농민들이 식료품 공급을 보류할 때마다 가격이 급등하며 혼란이 나타났다. 

    네프 지지자들은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부하린은 국가 지출의 확대가 산업 투자율을 둔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시장 메커니즘과 농민들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조달 가격을 인상하고자 했다. 통합반대파(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는 농민에게 더 양보하는 것이 사회주의 산업화라는 소련의 목표를 연기할 뿐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국가가 소비재 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식량과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의 곡물을 일시적으로 징발하고, 그런 다음에 시장 메커니즘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부하린 편에 일시적으로 섰다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패배한 이후에는 네프를 등졌다. 스탈린은 곡물 위기를 ‘쿨라크(부농, 농업자본가)들의 파업’ 때문이라고 비난했으며,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전 시기의 징발 정책으로 되돌아가자고 요구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수사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폭넓은 호소력을 발휘했다. 많은 사람이 네프가 사회주의 이상에서 후퇴했다고 생각했고, 자본주의 경제의 부활을 가져올까 두려워했다. 한 볼셰비키는 “우리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화폐가 단번에 일소된다는 믿음 속에 성장했다. 만일 내전 동안 폐지되었던 화폐가 다시 나타난다면, 부자도 다시 나타나지 않겠는가? 우리는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파멸의 길 위에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이 질문을 근심 어린 마음으로 자신에게 던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전시 공산주의 방식으로 복귀하자는 스탈린의 요청은 1917~1921년의 혁명적 싸움에 참여하기에는 어렸으나, 내전 이야기에 바탕을 둔 투쟁 숭배 분위기 속에 교육받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스탈린은 내전을 영웅적 시기로, 소련을 국내외 자본주의 적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국가로 보는 낭만적 인식을 이용했다. 또한 스탈린은 전쟁 공포를 조성했는데, 네프가 산업 장비를 마련하는 수단으로는 너무 느리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곡물을 조달하는 수단으로도 안정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1928~1929년에 당의 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한 부하린과의 경쟁에서, 부하린이 계급투쟁이 시간이 흐를수록 약화할 것이고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사회주의 체제와 융화할 것이라는 위험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나아가 이러한 견해는 당이 자본주의 적들에 맞서는 방어 체제를 느슨하게 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 적들이 소비에트 체제에 침투하여 내부에서부터 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로 나아감에 따라 부르주아의 저항은 반드시 강화되며, 그래서 “착취자들의 반대를 뿌리 뽑고 분쇄할”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단언했다. 저자는 이 대목이 이후 대숙청에서 억압을 합리화하는 주장의 전조라고 강조한다.

    파이지스가 보기에 반 신경제정책 운동은 스탈린 혁명전쟁의 전초전이었다. 수천 명의 네프만(네프로 재산을 모은 신자본가)이 투옥되거나 집에서 쫓겨났다. 1928년 말까지 40만 개의 자영업체 중 절반 이상이 세금 때문에 사라졌다. 리셴치(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전락한 수많은 네프만과 그 가족들은 곤궁한 처지에 내몰렸다. 그들에게는 배급표가 지급되지 않았고, 결국 얼마 남지 않은 개인 상점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솟은 식품을 살 수밖에 없었다. 또 국영 주택에서 쫓겨났고, 자녀들은 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3. 공업화를 위한 농촌의 희생: 스탈린 혁명

     
     
    농업집단화는 오랫동안 지속한 농촌의 생활방식, 즉 가족 농장, 농민 공동체, 독립적인 마을과 교회, 농촌 시장을 파괴했다. 볼셰비키는 이를 사회주의 산업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했다. 농민들이 곡물을 시장에 내놓지 않음으로써 불안정을 일으켰던 내전의 경험으로, 볼셰비키는 농민들이 식량의 공급을 통제하는 한 혁명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세력이라고 간주했다. 곡물 확보를 위한 전투가 격화되며 스탈린은 식량 생산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고 쿨라크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집단화 정책을 시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특히 1929년 스탈린은 5개년 계획의 목표 수치를 상향 조정하고(“5개년 계획을 4년 안에!”라는 구호로 대표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산업 노동자가 먹을 식량을 싸고 확실하게 공급하고자 대규모 집단화 정책을 승인한다.

    공업화와 농업집단화로 대표되는 스탈린 혁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는 네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소련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논쟁적인 쟁점 중 하나다. 스탈린은 레닌의 진정한 계승자인가, 아니면 혁명의 배반자인가? 소련 내부에서의 논쟁을 먼저 살펴보자. 1980년대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네프를 시행한 레닌의 결정에 자신의 급진적 개혁을 비유했다. 하지만 당 보수파는 스탈린에 대한 공격을 혁명 이후 소련이 물려받은 유산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했다. 결국 정치국 내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으로 혁명 이후 역사 서술에 대해 이견이 발생했고, 급기야 1988년 고등학교 역사 시험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구에서도 스탈린 혁명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미국 정치학자 제리 호크는 1937~1938년의 대숙청을 제외하면, 스탈린은 레닌이 원하는 일을 했다고 규정했다. 모셰 르윈은 내전 이후 전자본주의적 양식으로 되돌아간 농촌은 사회주의 경제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레닌이나 스탈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즉, 호크와 르윈은 스탈린이 레닌을 계승했다고 보았다. 반면 캐서린 메리 데일은 스탈린 혁명의 기원을 레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곤경에서 찾았다. 세상을 반동과 진보라는 흑백논리의 충돌로 봤던 대중들이, 일자리가 없었던 시기에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약속했던 공업화를 열렬히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근간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스탈린 시대에 들어 혁명이 굴절되었다는 견해에 따라 농업집단화를 비판한다. 즉, 농촌의 해체, 그리고 쿨라크에 대한 탄압 과정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쿨라크로 낙인찍힌 유능한 농민들에 대한 탄압이 소련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저자는 농업집단화를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세력에 대한 분석을 덧붙인다.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생활방식을 철저히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다수 농민은 몇백 년 동안 지켜온 생활방식을 포기하는 것을 주저했다. 농민을 설득하지 못한 활동가들은 폭력적인 조치를 동원하기 시작했고, 스탈린이 ‘계급으로서 쿨라크 청산’을 요구한 1929년 12월부터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몰아넣는 운동은 전쟁의 형태를 띠었다. 지역 민병대, 특별 군대, 오게페우 부대가 동원되어 집단농장을 조직했다. 이들은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목표를 초과하는 것이 더 낫다”, “지나친 행위를 했다고 비난받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기억하시오. 그러나 만일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면, 조심하시오!”와 같은 압박을 했다. 1930년의 첫 두 달 동안 소련 농민의 절반인 약 6천만 명이 집단농장으로 내몰렸고, 집단화에 반대 목소리를 낸 농민은 쿨라크로 분류되어 집과 마을에서 쫓겨났다.

    스탈린은 집단농장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쿨라크에 맞선 전쟁’을 활용했다. 스탈린의 쿨라크 박해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집단화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단화를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농민들이 집단농장에 가입하도록 추동하기 위함이었다. 쿨라크는 정의상 고용 노동을 사용하는 농촌자본가였으나, 1929년 이후 실제로 쿨라크로 몰려서 억압당한 상당수의 사람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저자는 네프 시기 농민이 자신의 노동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허용됐지만, 고용 노동 사용은 통제됐으며, 농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늘어난 1927년 이후에는 부유한 농민이 사유재산의 상당 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농촌자본가로 이루어진 ‘쿨라크 계급’이라는 개념은 환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허구적인’ 쿨라크 말살은 소련 경제에 재앙을 가져왔다. 쿨라크라는 명목으로 탄압받은 이들은 보통 마을에서 가장 근면한 농민들이었다. 쿨라크를 박해하면서 이들의 노동 윤리와 전문 기술은 사라졌고, 결국 소련 농업 부문은 출구 없는 사양길로 들어서게 된다. 스탈린의 쿨라크 박해는 경제적 고려라기보다 사실상 농촌 집단화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 탈쿨라크화 운동이 최고조에 올랐던 1930~1931년에 총 170~180만 명의 쿨라크와 그 가족들이 시베리아와 같은 소련의 오지로 추방됐다.

    그렇다면 농민들은 쿨라크 박해에 저항했는가? 놀랍게도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마을 연대라는 러시아의 강력한 역사적 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특히 이례적이었다. 물론 거부 반응을 보인 지역도 있었으나, 농민 대다수는 이웃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보며 공포에 사로잡혀 소극적인 체념으로 반응했다. 농민들은 때로는 마을에서 누가 쿨라크로 없어져야 하는지를 회의를 통해, 혹은 제비뽑기를 통해 직접 결정했으며, 마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나 외따로 사는 농부, 과부, 노인과 같은 약자들이 그 대상이 되기 쉬웠다.

    쿨라크 박해에 앞장섰던 자들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일명 ‘집단화주의자’ 대다수는 징집되었던 병사와 노동자였고, 이들은 농업집단화를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기를 갈망했으며, 쿨라크를 인민의 적으로 묘사한 선전을 통해 쿨라크를 향한 증오를 주입받았다. 몇몇은 공산주의적 열정에 휩싸인 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5개년 계획의 선전이 불러일으킨 낭만적 열의에 고무되어, 볼셰비키와 함께 인간의 의지만으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위해서는 구사회 세력과 치르는 격렬한 투쟁이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집단화주의자들은 쿨라크를 향한 폭력과 자신들의 유토피아적 믿음을 결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따라서 이들이 단순히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거나, “명령을 따르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으며 자기 행동을 합리화했다.

    대부분의 농민은 쿨라크 박해는 묵인했지만 농업집단화에는 저항했다. 경찰에 따르면, 1929~1930년에 44,779건의 ‘심각한 소요’가 있었고 볼셰비키 농촌 활동가들이 공격받았다. 농민 시위와 폭동, 기관 습격, 방화와 함께, 집단농장 재산을 공격하고 교회를 폐쇄한 조치에 항의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체제는 농민들의 저항을 분쇄할 만큼 강력했다. 무력한 농민들은 집단농장의 징발을 막기 위해 가축을 도살하는 식으로 약자의 저항을 이어갔다.
    농촌이 황폐해지자 스탈린은 집단화 운동의 일시적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1930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집단농장에 가입한 농가의 비율이 58%에서 24%로 급격히 감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집단농장을 떠나는 것은 어려웠으며, 사유재산과 농기구, 가축을 되찾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6개월의 불안정한 휴전 이후, 9월부터 스탈린은 집단화의 두 번째 물결을 개시했다. 스탈린은 1931년 말까지 농가의 최소 80%를 집단화하고 쿨라크들을 절멸시킬 것을 공언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4. 대숙청: 극단적 형태의 폭력

     
     
    파이지스는 스탈린 시기 자행된 극단적 폭력인 대숙청에 특히 주목한다. 1937년과 1938년 단 두 해 동안 적어도 681,692명의 사람이 반국가 범죄로 총살당했다. 엔카베데에 따르면, 이 수치는 1921년부터 1940년 사이에 정치적 범죄로 내려진 모든 사형선고의 91%에 달했다. 같은 기간 굴라크와 특별 정착촌의 인구는 1,196,369명에서 1,881,579명으로 약 70만 명 가까이 증가했다. 대숙청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 희생자들이 죽임을 당한 시기이기도 했는데, 체포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총살당했다. (스탈린 통치 시기에 처형 건수가 두 번째로 많았던 해인 1930년에 피체포자의 10% 미만이 사형당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이는 놀라운 수치다.)

    이와 같은 극단적 폭력의 기원에 대한 논의 역시 쟁점적이다. 스탈린 전기작가인 로버트 터커는 대숙청의 원인을 스탈린 개인의 심성과 개성에서 찾는다. 신경증에서 비롯된 편집증은 스탈린에게 자신이 레닌과 같은 위상을 갖는 혁명적 영웅임을 입증할 것을 강요했다. 스탈린은 진보를 가로막는 반역 분자인 고참 볼셰비키로부터 인민을 구원하는 영웅으로 자신을 상상했다는 것이다. 엘렌느 까레르 당꼬스는 거의 10세기 동안 지속했던, 폭력에 의존하고자 하는 러시아 정치 체제의 경향이 스탈린에게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혁명 발생 이후부터 이어진 테러가 스탈린에 이르러 법과 테러의 결합으로 죽음의 차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로 아치 게티는 소련 정부는 스탈린 하에서조차도 전체주의적이지 않았으며, 스탈린은 너무나 바빠서 숙청에 사사건건 관여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았다. 폭력은 오히려 당과 국가 기구의 하급 수준에서 일어난, “혼란에 대한” 급진적이고 “심지어 히스테리적이기까지 한 대응”이라고 보았다. 돈 라우니는 숙청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자신의 기대만큼 상향 이동을 하지 못한 소련 사회의 비 엘리트층이, 자신들의 승진을 막는 상급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행동하며 벌어진 비극으로 보았다. 파이지스는 이러한 관점들 중에서 몇몇 측면을 수용하고 있다.

    우선 파이지스는 대숙청이 집중되었던 시기에 대해서 주목한다. 일각에선 대숙청의 기원을 1934년 12월에 발생한 레닌그라드 지구당 서기장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지만, 이러한 주장은 키로프 암살과 대숙청 사이인 1935년과 1936년의 고요한 소강상태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저자는 대숙청이 내부 위협에 대한 스탈린의 두려움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관점도 기각한다. 그 당시 엔카베데의 보고는 내부 위협이 다른 시기보다 1937년에 특별히 더 심각했음을 시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왜 대숙청이 고참 볼셰비키를 대상으로 한 전시재판, 정치 엘리트 숙청, 도시에서의 대규모 체포, 쿨라크 작전, 민족 작전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동시에 일어났는지에 주목한다. 이는 각각의 현상을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으로서 설명함으로써 대숙청을 별개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시각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함의한다. 저자는 대숙청이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통일된 작전이라고 판단한다. 즉 대숙청이 통제받지 않았거나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며, 스탈린 시기에 언제든 발생할 수 있었던 대혼란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았다. 더불어 돈 라우니가 묘사한 것처럼, 저자는 대숙청에 대한 시민들의 침묵과 방조와 더 나아가 적극적인 고발이 그 광기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 결과는 수많은 죽음, 체포, 그리고 고발을 두려워하면서 나타난 인간관계의 단절이었다. 

    파이지스는 대숙청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다가올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두려움과 소련을 위협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937년 스탈린은 소련이 유럽에서는 파시즘 국가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상황에 놓였다고 확신했다. 스탈린은 파시스트들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에 ‘파시스트 첩자와 적’이라는 제5열만이 아니라, 모든 잠재적 반대자들을 분쇄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이 소련에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로버트 터커처럼 대숙청의 원인을 스탈린의 개인적 결함으로 환원하지는 않지만, 파이지스 역시 적에 대한 편집증적 두려움이라는 스탈린 특유의 성격이 대숙청에 영향을 끼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두려움이 1932년 부인 나데즈다의 자살, 그리고 형제처럼 사랑한다고 주장한 키로프의 암살로 더욱 심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은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며 죽을 때까지 이러한 입장을 변호했다. 대숙청은 지도부가 전쟁 시기에 위험 요소인 당 내부의 동요자, 출세주의자, 숨은 적을 찾아내는 수단이었다. 숙청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고 불공정한 체포 역시 많았음을 인정하지만, 내부 충돌을 허용했으면 전쟁에서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고, 아마도 패배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카가노비치 역시 몰로토프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자와 동요자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5.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소비에트 체제와는 거리가 먼 요인들

     
     
    스탈린이 대숙청까지 벌여가며 대비한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스탈린 시대는 역사적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가? 스탈린이 취한 조치들이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 아니라면 승리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이지스는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으로 소비에트 체제와는 거리가 먼 요인들을 지적한다. 우선 자기 집과 고향, 그리고 개인적 인간관계와 같은 전통적 가치들을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활약한 일반 병사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군에 대한 통제권이 정치인에서 군사 전문가에게로 넘어가며 소련군 구조가 효율적으로 변한 것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꼽는다. 

    파이지스에 따르면, 전시의 국민적 단합이라는 소비에트 신화와는 반대로, 소련 사회는 전쟁 동안 그 어떤 시기보다 분절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국가가 일부 소수민족들을 희생양으로 추방함에 따라 인종 분리가 악화되었으며, 사회 전반에 잠재되어 있던 반유대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런데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 요인은 일반 병사들의 활약이었다. 병사들을 싸우게 한 것은 두려움이나 영웅심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소비에트 모국이라는 추상적 관념보다는 특정 지역 사회, 현실 속 인간관계의 방어를 위해 더더욱 적극적으로 싸우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1941년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국민 의용군에 자원했다. 사실상 국민적 단합보다는 병사들 간의 동지애가 전쟁의 승리요인 중 하나였다. 병사들은 신뢰받는 동지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에 충성심을 느끼면서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들의 동지애는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발전했고, 이러한 신뢰는 개개인을 생존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퇴역 군인들은 동료 병사들로 이루어진 무리 속에서 전쟁 전에는 자신들의 삶에 없었던 ‘진정한’ 가족을 발견한 것처럼 회고하기도 한다.

    일반 병사들의 활약 외에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쟁의 첫 1년이 지난 후 소련군 내부의 권위 구조가 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과 당의 개입이 군 사령부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지휘관들의 자율에 맡기는 게 가장 좋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8월 주코프가 최고사령관 대리로 임명됐으며, 전쟁 수행 정책의 전략적 계획과 운용은 점차 국가방위위원회의 정치인들에서 참모본부로 이전됐다. 정치장교를 비롯한 정치 지도위원들의 군사적 결정 권한은 급격히 축소됐다. 당의 통제에서 벗어난 군 사령부는 안정된 군 전문가 집단을 창출하며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전쟁 수행에서 100만 명이 넘는 징용 노동자들의 존재 역시 중요했다. 이들은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굴라크 죄수와 똑같은 노동 임무에 징용됐다. 이들 중 대다수는 소비에트 체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소수민족이었고, 소비에트 체제의 적으로 탄압받던 쿨라크도 포함되었다. 굴라크 노동은 전시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굴라크는 소련 탄약의 15%와 군복, 군 식량의 상당 부분을 생산했다. 50만 명의 죄수가 전선에 동원됨에 따라 1943년까지 감소했던 수용소 인구는, 1943년 말부터 막대한 인력을 동원하기 위한 대량 체포가 이뤄지면서 다시 급속히 증가했다.
     
     

    6. 전쟁 시기 해빙, 그리고 다시 스탈린주의로

     
     
    전쟁이 소련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전시에도 전체주의적인 사회 통제가 유지되었는가에 대해서도 논쟁이 전개됐다. 제임스 밀러는 전쟁이 엄청난 경제적, 인적 손실을 일으켰고 체제를 거의 붕괴 지경에 이르게 했지만, 사실상 소련 제도들을 강화했다고 주장했다. 그와 달리 윌리엄 모스코프는 모스크바가 나치와 기아 문제라는 이중전선을 마주했고,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없던 지도자들은 민간인들에 대한 식량 공급의 책임을 지역 당국과 개별 국민에게 떠넘겼다고 주장했다. 이에 농촌 주민과 도시민은 재빠르고 효율적으로 식량 위기에 적응했고, 관리들은 이들의 상행위를 묵인했다. 존 바버와 마크 해리슨 역시 노동자, 농민이 전쟁으로 탈집중화된 사회에서 자급자족하는 양상, 그리고 전시에 통제가 느슨해지며 문화계 인텔리겐치아가 가졌던 전후 사회에 대한 희망을 다뤘다.

    하지만 자유가 확대될 것이라는 희망은 스탈린의 수많은 전후 정책하에서 무너졌다. 그 원인에 대해서 쉴라 피츠패트릭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국가 통제를 다시 부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당의 정치 문화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파이지스도 전쟁 기간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람들 사이에 유대가 형성됐고, 유럽이나 미국과 교류하는 등 소련 내에 잠시나마 해빙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분명한 사실임을 짚는다. 하지만 전후 스탈린이 정치 개혁을 거부하고, 긴축적인 계획경제를 추진하며 강제 노동을 강화하면서 통제가 복귀했다는 사실 역시 짚는다. 저자는 피츠패트릭이 언급한 당의 정치 문화를 체현한 새로운 중간 계급의 존재를 지적한다. 이들은 스탈린 시기에 출세를 위해 적어도 겉으로는 당에 복무한 전문가들로, 스탈린이 전후에 개혁을 거부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다.

    전쟁 시기에는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표현의 자유가 생겼다. 사람들은 감정과 의견을 표출했고, 정치적 토론과 체제에 대한 비판까지 이루어졌다. 군대의 병사 집단, 그리고 식품을 사려고 늘어선 줄에서 비판과 토론이 즉석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와 상호작용이 확대됨에 따라 시민 정신과 국민 의식이 부흥했다. 파이지스는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가치관의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고, 모든 시민적 의무는 국가의 명령으로 수행됐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시민적 의무는 나라의 방어라는 실질적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는 국가의 통제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을 단합시켰으며 새로운 공적 태도를 낳았다.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 상당수가 유럽에 들어가 다른 생활방식에 노출되면서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보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유럽의 생활 수준과 우리 소련의 생활 수준 사이에 가로놓인 격차는 감정적, 심리적 충격을 안겨주었고, 수백만 병사들의 관점을 바꾸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서구 세계를 접한 병사들은 전쟁이 끝나면 집단농장이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또 소련이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소련 사회 내부도 서구의 영향력에 노출됐다. 미국과 맺은 무기 대여 조약을 계기로 할리우드 영화, 서구의 서적과 물품이 소련에 유입됐고, 수많은 사람이 소련의 거짓 선전이 아닌 서구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됐다. 모스크바에는 레스토랑과 상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전쟁이 끝나면 생활이 좀 더 편해지고, 소련이 서구에 문호를 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부채질했다. 심지어 경제 개혁조차 토론의 주제가 됐으며, 일부 경제학자는 전쟁 후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시장으로 복귀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스탈린은 모든 정치 개혁 사상을 거부했다. 1946년 2월 9일, 전후 시대에 들어와 처음 한 중요한 연설에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체제가 느슨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스탈린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조짐이 보이면 강력히 타격하라고 부하들에게 주문했다. 전쟁 이후 군대와 당 지도부에서 ‘자유주의 개혁가’, 혹은 1945년 승리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된 최고위 지도자들을 잘라내는 숙청도 개시됐다. 이 과정에서 승장인 주코프 원수가 우랄 지역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전후의 정치적 탄압은 긴축적인 계획경제로 복귀하는 흐름과도 연계됐다. 국제적으로 긴장이 높은 상황에서 1946년 새로운 5개년 계획이 도입됐다. 하지만 생산 목표는 여전히 비현실적이었고, 전후 경제에서 강제 노동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전후 스탈린주의의 복귀에는 새로운 유형의 중간 계급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엔지니어, 행정가, 경영자 계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스탈린 체제가 의식적으로 추진한 정책(고등교육 제도의 확대)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은 교육을 더 많이 받았고, 덜 이데올로기적이었으며, 더 안정적이었다. 또한 전문적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높은 직책을 보장받았고,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비순수성 때문에 강등당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스탈린은 전후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압력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이들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의 충성을 획득하기 위해 안정되고 급료가 높은 직업, 개인 아파트와 같은 부르주아적 열망을 충족시켜줬다.

    이들은 출세하기 위해서 적어도 겉으로는 체제의 요구에 순응했다. 당시 가장 흔한 소련의 관리 유형은 공산주의 신봉자나 열성분자가 아니라, 당이나 당의 목표를 불신하더라도 당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출세주의자였다. 일부는 성공, 혹은 사회적 지위의 유지를 위해 과거의 이력을 숨기는 선택을 했다. 이와 달리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출세를 위해 엔카베데의 정보원이 되기도 했다.
     
     

    7. 스탈린 사후에도 여전히 속삭이는 사회: 소련 시민들은 왜 침묵했는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6년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고발하는 비밀 연설을 한 이후, 소련에서도 비로소 해빙의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 외부의 일부 사람들은 흐루쇼프의 연설을 모든 것을 논의하고 의문시할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지식인들이 먼저 입을 열기 시작했으며, 굴라크에서 돌아온 죄수들 역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전히 침묵했다. 흐루쇼프 시기의 해빙이 지속될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체포될 수도 있다는 공포는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사람들을 수십 년 동안 침묵시킬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실제로 해빙기는 짧았고 제한적이었다. 또 흐루쇼프 시기 내내 정권은 소비에트 체제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스탈린 시기 억압에 대한 어떤 논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60년대 초 해빙이 절정기였을 때조차도, 스탈린 시기 수백만 명이 죽거나 억압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공식적 인정도, 정부의 사과도 없었다. 마지못해 복권해준 희생자들에게 적절한 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은 불신과 적대의 대상이 됐다.

    시민들의 예상처럼,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리면서 해빙 분위기는 돌연 끝났고 다시 검열이 강화됐다. 승전 20주년 기념으로 위대한 전쟁 지도자로서 스탈린의 명성이 되살아났고, 정권은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며 스탈린 시기 억압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았다. 다시 체포될 수도 있다는 위협은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들을 1956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더욱 무겁게 침묵시킬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공포 정치는 종결됐지만, KGB(국가보안위원회)는 여전히 엄청난 범위의 가혹한 처벌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석방된 죄수였던 지나이다 부슈예바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끊임없는 걱정과 다시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1981년에 노동수용소 수감 기록이 없는 새 여권을 받은 뒤에야 두려움이 가시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딸에 따르면 “일생에 걸쳐, 세상을 하직하는 바로 그날까지도 공포 체제가 부활할지 모른다고 무서워”했다고 한다. 마리야 부트케비치는 오늘날(2004년)까지도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어딘가로 멀리 보내질까 봐 계속 불안에 떨었다. 스베틀라나 브론시테인은 노동수용소가 등장하는 악몽을 계속 꾸며, 서류를 작성해서 미국 대사관 앞에 줄을 설 기력만 있다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고 말했다.
     
     

    8. 나가며

     
     
    파이지스는 스탈린 체제의 억압적 성격과 인민주의적 성격, 그리고 그 대중적 토대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네프를 중단하고 농업 집단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억압적인 방식의 현대화, 스탈린 정권의 인민주의적 호소와 이를 승인하고 체제에 적극적으로 복무한 대중, 그리고 배제된 사람들의 고통을 확인할 수 있다. 네프 중단과 농업집단화는 공업화를 위해 농민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 선택이었고, 부하린과 같이 이견을 보인 자들에 대해 정치적 탄압을 가하며 이후 대숙청에서 상영될 본격적인 억압의 예고편을 보여줬다. 공업화를 자신의 과업으로 삼은 스탈린은, 때로는 네프만과 쿨라크와 같은 ‘계급의 적’을 상정하고 탄압하며, 때로는 내전 시기의 향수나 전쟁의 공포를 자극하며 소련 시민에게 통치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현대화로 표현되는 사회주의 이상, 폭력에 대한 공포, 출세의 기회는 소련 시민이 억압적인 스탈린 체제에 복무하도록 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 시기에 스탈린주의의 공백이 일제히 드러났다. 전시에 소비에트 이상을 중심으로 한 국민적 단합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당의 통제하에 있던 소련군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를 대체하여 소련을 승리로 이끈 것은 스탈린 체제가 의식적으로 부정해왔던 개인 간의 관계들이었다. 자기 집과 지역 사회, 그리고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한 일반 병사들의 활약이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기간 해빙의 시기가 나타나며 시민들이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를 품기도 했지만, 스탈린이 개혁의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또다시 사회는 전쟁 이전의 억압적 체제로 회귀했다. 여기에는 체제의 존속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새로운 중간 계급의 등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자는 특히 대숙청에 주목한다. 대숙청이 보여주는 충격적인 수치를 보면, 왜 소련 시민은 이러한 극단적 폭력을 경험하면서도 스탈린의 통치에 순응했는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에도 입을 열지 못했는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스탈린 혁명이 본격화되던 농업 집단화와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사회주의 경제 건설이라는 대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 중심으로 계획이 제출되고 실행됐다. 이 과정에서 소련 시민은 주체적인 위치에 있지 못했다. 누군가는 사회주의 혁명을 ‘현대화’로 이해하며 스탈린 혁명의 충실한 지지 기반이 됐고, 누군가는 자유와 권리를 억압당하고 체제에 순응하기를 요구받았다. ‘혁명의 완수’, ‘혁명 조국의 수호’가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졌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견의 배제, ‘인민의 적’에 대한 억압이 용인됐다. 이러한 배제와 억압을 합리화하는 과정은 결국 스탈린 시기 억압적 체제, 나아가 극단적인 폭력의 동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속삭이는 사회’였다. ●
     
     
     

  • 2022-12-16

    노동자 대투쟁에서 IMF 구제금융위기 이전까지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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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①

    [연재의 취지와 구성]

    지금의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부상하고, 전노협, 민주노총을 건설하며 성장한 운동의 유산이다. 1970년대 이전에도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들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3저 호황으로 정점에 이른 한국경제의 성장과 산업노동자 인구의 팽창을 배경으로 하여, 민주화 운동과 급진화된 정치·사회운동과 결합해 민주노조운동이 새로운 단계를 맞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980년대 정세에서 시작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대 본격화된 금융화, 세계화와 재벌의 과잉투자라는 조건에서 더욱 성장하며 조직적으로 민주노총 건설에 이르렀다. 민주노총은 건설 후 불과 1년여 만에 엄청난 규모의 총파업을 조직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96~97년 총파업에서 저지한 듯했던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은 불과 1년여 만에 IMF 구제금융위기를 맞아 다시 실행되었다. 그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변화된 정세에서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 운동을 중심으로, 미조직비정규직 조직화와 사회공공성 운동을 시도하면서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2000년대 후반 대체로 한계에 봉착한 가운데,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한다. 이 위기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한계와 한국과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그러나 고용위기와 구조조정에 맞선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은 변화된 정세에서도 기존의 투쟁 방식을 반복했다. 이미 기존의 운동노선이 한계에 봉착한 가운데, 노선의 전환이나 새로운 시도도 지체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에서 시작해 총선·대선에서 반복된 “범민주진보 진영”의 “야권연대”가 2010년대 내내 핵심적인 대응방식이 된다. 그 결과 2016년 “촛불항쟁”을 거쳐 2017년 이후 민주당 문재인 정권이 집권한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제기된 민주노조운동의 여러 요구를 수용했지만, 그 요구는 왜곡되거나, 한계를 보이거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노동정책을 비롯한 전반적인 국정운영이 실패한 결과 5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요구도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인지만,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한계 때문인지, 노조운동에도 한계는 없었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입장은 찾기 힘들다.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가져오는 고용불안과 저임금·장시간 노동, 노동자 사이의 격차 심화를 노동자 스스로 단결과 투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현재 노동시장과 노사관계 상황을 볼 때, 헌신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애초 목표를 의미 있게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기업, 고용형태별로 크게 벌어진 임금격차는 사회 양극화의 중요한 원인일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민주노조운동이 이러한 과정을 막아내지 못한 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를 심화하는 구조를 함께 만들어온 것은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가? 여기에 이르는 과정에 어떤 일들이 있었나? 이 글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사를 돌아보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1987년 이후 노동운동사를 돌아본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1980년대 중반부터 민주노총 건설과 96~97년 총파업까지를 다룬다. 이어질 두 번째 글에서는 1998년 IMF 구제금융위기와 노동자운동의 대응부터 2008년 세계금융위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다룬다. 세 번째 글에서는 2008년 위기와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의 집권에서 문재인 정부 집권 직전까지를 다룰 예정이다. 마지막 네 번째 글은 문재인 정부 시기 노동자운동의 대응을 정리하며, 종합적인 평가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2021~2022년 동안 진행된 사회진보연대 내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노동운동사 세미나 논의를 토대로 쓰였다는 점을 밝힌다. 198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는 노동운동사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풍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제기된 쟁점을 모두 담지는 못했고, 오류와 누락도 있을 것이다. 이는 필자의 책임이다.
     

    [정치적 노동자운동과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이 교차하는 역사]

    특정한 시공간에서 노동자운동의 발전은, 당시의 자본주의 경제, 사회의 성격을 반영한다. 노동자운동은 산업구조와 이에 따른 노동시장 상황, 노사관계 성격을 조건으로 하여 형성된다. 따라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경제사) 속에서 노동자운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검토하며, 이에 대응하면서 노동자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의 발전과 함께 어떤 정치적, 이념적 입장을 발전시켜왔는지를 역시 함께 평가할 필요가 있다.

    한편, 노동자운동은 노동조합운동만이 아니라, 노동단체와 정치운동 등 여러 범위를 포괄한다. 이를 크게 보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과, 정치단체(정당·정파)의 활동을 포함한 “정치적 노동자운동”으로 구별하여 평가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전개 과정에서도 이 두 가지 성격의 운동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협조하거나 갈등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구별을 지양하는 운동으로서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기존 운동의 구조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만이 아니라, 정치적 노동자운동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자는 경제적 요구를 중심으로 노동자운동을 노동조합 중심으로 발전시킨 경우다. 영미의 비즈니스 노조주의 뿐 아니라 전후 유럽의 사민주의 코포러티즘적 노조주의도 사회경제적 요구를 중심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 사례로 볼 수 있다. 후자의 운동은 정당이 우위에서 노동조합운동을 지도하는 노선으로, 독일과 러시아에서 주로 진행된 운동 유형이다. 물론 정당이 노동조합의 결성을 지원하거나 지도한 19세기 후반 독일 사민당 사례와, 노동조합을 정당 노선의 전달벨트로 본 러시아 혁명 이후의 유형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아리기와 실버가 제시하는 노동자운동의 유형도 참고할 수 있다. 이들은 생산의 공간에서 구조적 힘을 무기로 투쟁하는 ‘사회적’인 운동경로(미국이 이념형)와 정당의 노동조합에 대한 통제를 우선하는 ‘정치적’인 운동경로(소련이 이념형)를 제시하는데, 각각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과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7~2022, 35년 역사의 개관]

    노동자운동의 두 경향은 서로 교차하면서 역사를 만들어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부터 1990년 전노협 건설을 거쳐 1995년 민주노총 건설에 이르기까지, 노조는 전투적 경제주의로 발전하는 한편,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형성과 붕괴의 과정을 겪는다. 이 시기에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1989년 전국노동운동단체연합(전노운협) 결성과 분열, 1991년 PD 3파 통합 후 진정추, 진정련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붕괴한다. 이 과정에서 노조운동의 전투적 경제주의도 차츰 사회경제적 노조주의로 변모한다. 정치적 노동자운동이라는 한 축이 붕괴한 상황에서, 지역차원의 중소영세 사업장 노조가 다수이고 사회운동적, 정치적 성격이 강하던 전노협이 약화되고, 기업별 경제투쟁에 주력하던 대기업노조들이 주도하는 민주노총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

    민주노총이 건설된 1995년부터 IMF 구제금융위기가 시작되는 1998년까지는 민주노총 건설과 함께 “사회개혁적 노조주의” 성격이 강화된다. 점차 전투적 노조주의는 상대화되고 코포라티즘에 접근한다. 민주노총 초대 집행부는 건설 직후부터 노사정 협상(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개위)에 참여한다. 그러나 노개위 합의 실패와 1996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잇따른 96~97 총파업으로 노사정 타협은 물론 김영삼 정부도 결정적인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IMF 구제금융위기를 제대로 된 정세 인식 없이 맞은 민주노총은 노사정 합의를 번복하면서 혼란이 가중된다. 1998년 노사정 합의 과정을 겪으며 민주노총에서는 일체의 노사정 협상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형성된다. 

    1998년 내내 노사정 합의를 개정하기 위한 민주노총의 수차례 총파업 시도가 실패한 가운데,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계속된다. 이때부터 “IMF 조기 졸업”을 선언한 2001년 즈음까지 정리해고, 민영화 저지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노조의 방어 투쟁은 격렬하게 계속된다.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반대(반세계화) 입장도 노동자운동에 수용된다. 이 시기에는 산별노조 진보정당 양날개론이 노동자운동 내에서 광범위한 합의를 얻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 2003년에서 2007년까지 산별노조 진보정당 건설은 나름대로 조직적 성과를 만들어간다. 보건의료노조는 산별교섭을 실제로 시도한다. 금속노조는 집중적인 산별전환 사업을 벌여, 2006년에는 완성차 노조도 산별노조로 전환한다.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도 2006년 말 건설된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에 원내에 진입한다. 산별노조 진보정당의 양 날개는 적어도 이 시기에는 상당히 성공한 것으로, 또 미래에 더욱 성공해갈 것으로 보였다. 또한 이 시기에 노조운동 안에서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전략조직사업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고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이 활성화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대응 과정에서 사회공공성 운동도 출현한다. 한편 노사정 협상을 둘러싸고 민주노총은 격심한 내홍에 휩싸였다. 돌아보면 총연맹이 노동시장과 노사관계 제도의 변화를 어떤 식으로든 실현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한 논란이었다. 그러나 결국 조직적 합의는 형성되지 못한다. 이후 보수정권 시기에는 노사정 협상의 전망은 상실되고 총연맹은 정책적 협의 기능보다는 ‘투쟁본부’ 기능 중심으로 기운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2008년은 마침 세계금융위기가 시작된 해였다. 이때부터 박근혜 정부가 끝나는 2017년까지, 노동자운동은 경제위기와 보수정부 집권 시기라는 변화된 조건에 처한다. 민주노총은 주요 산업·업종에서 산별노조를 건설했으나, 정작 산별교섭은 실현하지 못하고 “무늬만 산별”로 정체된다. 이 시기에 민주노동당은 정파 갈등 속에 붕괴하고 복수의 진보정당 간의 이합집산이 혼란스럽게 계속된다. 결국 2000년대 노동자운동 내 합의였던 산별노조 진보정당 노선이 비슷한 시기에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가 발발한다. 이후 10년간 노동조합운동의 상층은 반보수 전선에 역점을 둔다. 한편 산별노조와 노동조합의 현장은 합의된 전략적인 목표 없이 보수정권이라는 비우호적인 정세에서, 노조 사수 투쟁이나 정리해고 저지, 노동법 개악 저지 같은 방어 투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2017년~2022년 시기에는, 이제까지 민주노총이 요구하던 정책인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과 일자리 확대 등이 나름대로 정부 정책으로 수용되고, 정권 초반에 속도감 있게 추진된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시행 과정에서 지지부진해지거나 경제위기를 가속한 원인으로 비판받게 되면서 동력을 상실하고 곧 한계에 봉착한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소득주도성장론이라는 경제정책과 맞물려 추진되었다. 양대노총과 전문가 등 노동계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갖지 못하고 사실상 지지한다. 한편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참여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만다. 경사노위 참여 안건은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고,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회의’ 합의도 실패하고 이를 추진한 김명환 집행부는 사퇴한다.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진보정당 운동도 더 위기에 처한다. 정의당은 조국사태, 공수처 설치와 선거법개정, 검수완박 법안 추진과 같은 국면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민주당과의 구별이 희석된다. 지난 2010년대 초반부터 야권연대에 몰두하던 노선의 뒤늦은 후과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의 위기와 함께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소멸해간다.

    이제 본격적으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부터 1998년 IMF 구제금융위기까지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검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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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1998년 IMF 구제금융위기 이전까지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자본주의는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1970년대 후반, 각국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불러온 경제위기는 가혹한 긴축과 구조조정을 거쳐 1980년대 중반 가라앉기 시작한다. 1970년대 말 경제위기 과정에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붕괴하고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게 되었던 한국은, 신자유주의 개혁은 지체되는 가운데 호황 국면에 진입한다. 특히 대외적 조건(3저 호황)으로 인한 경제호황은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크게 팽창하는 조건을 형성한다. 이와 함께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계승하면서도 1980년 광주항쟁을 거치며 급진화된 학생운동은 1980년대 초중반부터 대거 노동현장 진출을 감행한다.

    1984년부터 시작된 유화국면에서 야당(신민당)의 총선 승리와 1985년 인천 5.3운동, 구로동맹파업과 대우자동차노조 파업은 1980년대 후반 투쟁의 전초전이었다. 결국 1987년 대선을 앞둔 야권과 민주화운동 세력의 투쟁은 87년 6월 항쟁으로 집결된다. 군부독재 세력은 대중적 압력에 밀려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

    경제호황 시기 기업의 수익성이 늘어나고 신규채용이 확대되는 와중에도, 군사독재를 등에 업은 반인권적 현장통제와 임금억제에 짓눌려있던 노동자들의 분노는 6월 항쟁 이후 폭발한다. 1987년 7월 울산지역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해 9월까지 울산에서 부울경 지역으로, 그리고 수도권으로 번지면서 전국으로 확산한다. 이 투쟁은 곧 지역적 노동자운동의 연대체(지노협)와 전국적 연대체 건설(노동법개정투쟁본부)로 이어진다. 지노협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건설된 마산창원지역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을 시작으로, 1988년 진주, 서울, 인천, 전북, 경기남부, 1989년 광주, 성남, 부산, 부천, 대구로 이어진다. 이렇게 급속히 전국적 투쟁전선을 정비한 노동자운동은 1990년 전노협을 건설한다. 비제조업 부문에서는 업종별 조직을 구성하는데, 1989년 말까지 사무금융노련을 시작으로 출판, 화물, 언론, 시설관리, 전문기술, 지역의보 등 조직이 건설된다. 이들은 이후 일부는 전노협에 합류하고 일부는 업종회의로 결집한다. 업종회의는 전노협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12개 사무, 전문, 서비스 부문 노조 협의체와 연합체가 1989년 구성한 연대조직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은 반격에 부딪힌다. 1989년부터 경기침체가 진행되면서, 노태우 정권은 노조운동에 대한 탄압 기조를 분명히 한다. 1990년대 산업구조의 개편은 전노협의 주력 기반이던 중소영세기업의 쇠퇴, 수출대기업의 확대로 이어진다. 노동조합은 탄압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했지만, 전노협은 조직적 타격을 받는다. 이후 ILO공대위와 전노대를 거쳐 민주노총이 건설되지만, 전노협 운동의 정신을 계승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편,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노동자운동에서 두드러졌던 정치적 노동자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0~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전통과 1980년대 급진화된 지식인, 학생운동의 전통 속에서 정치적 노동자운동이 성장했다. 1980년대 초중반부터 노동현장에 진출한 이른바 학출(학생출신) 활동가들은 1995년 구로동맹파업,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이념과 조직을 발전시킨다. 이들의 목표는 변혁적 이념으로 노조운동에 개입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운동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정파들의 이합집산을 거쳐 (합법) 진보정당 운동을 건설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 소련 해체를 거치며 변혁적 이념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민주노총 건설은 이러한 조건에서 1995년 11월에 이루어졌다. 건설 직후 노사정 협상(노개위)을 진행하다 결렬된 이후, 지금도 전설로 언급되는 초유의 96~97년 총파업을 진행한다. 총파업은 개악 노동법을 저지했으나, 그 성과는 1년도 안 되어 곧 1998년 2월 노사정 합의에서 부정된다. 이번 글은 87년 노동자 대투쟁부터, 역사상 초유의 96~97년 총파업까지를 다룬다. 불과 1년 후의 IMF 구제금융위기와 이어진 불행에 대한 평가도 필요한 만큼, 이 시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자 한다. 
     
     

    2.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노조운동”의 형성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전략은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와 육성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한 체제 대결과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이 경제발전 전략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는 세계경제위기와 맞물려 79년 경제위기로 이어진다. 당시 경제위기는 YH 노동자들의 투쟁,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과 부마 항쟁을 거쳐 정치위기로 발전한다. 그 결과는 10.26 사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였다.

    1970년대 말의 격변을 거쳐 1980년대 초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재벌 구조조정과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다. 그러나 곧 이은 3저 호황으로 재벌 구조조정은 중단되고 오히려 재벌은 급격한 투자 확대로 태세를 전환한다. 3저 호황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재벌 제조업 대기업을 중심으로 미숙련·반숙련 청년 노동자의 고용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기업에서 전근대적인 노무관리와 저임금 상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3저 호황의 정점인 1987년, 정치적 기회와 결합한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한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조합의 성장과 진출은 정권에 순치된 기존 한국노총 체제를 위협한다.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민주노조운동”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은 중화학공업화와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를 배경으로 발생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특히 한국의 중화학공업 대공장은 남성노동자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87년 투쟁을 주도하게 된다.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이 노동자운동을 주도한 데는 특수한 산업구조가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이러한 특수한 조건을 간과하고 당시의 경험, 즉 중화학공업 대기업 남성노동자의 전투적 기업별 투쟁을 노동조합운동의 이상적 형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노동조합운동은 대기업 기업별 노조의 전투적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당시 노동법이 강제하던 노동조합 형태와 맞물려 이러한 노조운동의 전개는 결국 기업별 노조 체제를 한국 노사관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남기고 말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전사(前史)로 중요한 것은 1985년에 있었던 구로동맹파업과 대우자동차노조의 파업이었다. 두 파업은 노동자운동의 두 경향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었다. 먼저, 구로동맹파업은 중소기업사업장의 지역연대파업이었다. 구로동맹파업은 경제적 요구와 함께 정부의 탄압에 의한 ‘노조 존립 위기’의 상황에서, 탄압의 수단이 된 제반 악법의 개정·폐지라는 정치적 요구를 함께 제기했다. 각 사업장에서 생존권을 지키려는 ‘경제적 요구’가 정부의 탄압에 대항하는 ‘정치적 요구’와 결합한 것이다. 현장에 기반을 두면서도 사업장을 넘은 동맹파업과 함께, 투쟁의 요구를 사회적으로 제기하는 농성과 시위를 결합한 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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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로동맹파업은 김문수, 심상정 등이 주도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결성의 계기가 된다. 이는 구로동맹파업이,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대학생, 지식인 출신의 활동가들이 노동자운동과 융합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서노련은 노조의 연대체라기보다는 활동가들의 결집으로서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성격이 짙었다. 서노련은 공안탄압 과정에서 해체되지만 이러한 활동경험은 노동자 대투쟁 이후 서노협 건설에도 이어진다. 서노협이 합류하는 전노협도 정치적 노동자운동에 상당히 개방적으로 운영된다.

    한편, 1985년의 또 다른 중요한 투쟁으로는 대우자동차노조의 파업이 있다. 이 투쟁에는 중화학공업 재벌 대공장 남성노동자 파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의미가 있다. 파업농성 투쟁은 높은 임금인상을 쟁취하면서 승리로 마무리된다.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커다란 사회적 파급력을 가진다는 점도 확인시켰다. 한편 투쟁 확산을 우려한 사용자들의 양보로 인천지역 타 사업장의 임금도 따라 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대기업노조의 선도적 투쟁을 통해 일종의 ‘낙수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금도 노조운동에 주류로 남아있는 관념도 형성되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통합된 ‘지역노동시장’이 분해되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는 변화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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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3저 호황과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폭발

     
     
    그런데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학출 노동자들이 다수 포진했던 서울·경인지역보다 재벌 제조업 대기업 사업장이 많은 울산을 포함한 동남권 공업도시에서 먼저 폭발한다. 이 지역은 1980년대 말 3저 호황 과정에서 생산이 급속히 확대된 지역이었다. 동년배 청년층 노동자들이 대거 채용되면서 집단적 행동이 발생하기 쉬운 조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황의 와중에도 노동자들의 처우는 거의 개선되지 못했으며 노무관리도 군사적, 전근대적인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불만이 쌓여갔다. 이는 급격한 대중적 투쟁이 분출하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을 통한 국가권력의 후퇴는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온다. 

    6.29 선언 직후인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현대계열사 최초로 노조가 결성된 후 울산의 현대 계열사 전체로 노동조합 설립 물결이 퍼져나갔다. 7월 15일 미포조선, 7월 27일 현대중전기, 8월 1일 현대정공 등 현대계열사 사업장에서 노조가 결성된다. 이후 울산을 넘어 부산, 마산 등 영남권으로 투쟁이 파급되고, 이어 서울, 경기, 인천으로 확산한다.

    동남권 지역에도 활동가들의 현장 조직화가 있었으나 수도권보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80년대 중반, 현대엔진의 고적답사반, 현대자동차의 독서회와 같은 현장 소모임은 노동조합 결성의 필요성을 토론하면서 주체적인 준비를 해나갔다. 그러나 이들 모임은 수도권에 집중된 학출 활동가들이 추구한 급진적인 정치적, 이념적 지향을 가진 조직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학출 등 정치적 활동가들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보다는 오히려 대투쟁 이후 울산에 투신하여 조직사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활동가 중 상당수는 90년대 초 울산의 노동현장을 떠나게 된다. 

    87년 대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민주노조 인정을 요구하고 상당 부분 쟁취한다. 이때 노동자들의 요구는 체제변혁을 요구하는 정치적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경제적 성격이 핵심이었다. 새로 결성된 노동조합은 기업주와의 교섭, 즉 임금제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협약체결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또한 기업 총수를 축출하는 것이 아니라 교섭당사자로 직접 나설 것을 요구했다. 결국 1987년을 주도한 것은 이념을 압도한 거대한 경제투쟁의 파도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제적 요구로 분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투쟁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완전히 배제한 가운데 작업장을 지배하던 통제구조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심대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또한 억압적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사용자들이 강요한 저임금 체제를 분쇄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이 최우선 과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연한 상황적 조건이기도 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이와 같은 운동양식이 지속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앞으로의 과정을 살펴보며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87년 이후에는 국가와 자본은 작업장 안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든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이 시기 분출된 노동조합의 투쟁이 정치적 성격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들어 본격화된 노동법 개정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은 사업장을 넘어 제도에 대한 요구를 정부, 국회를 상대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지역적이고 전국적인 노동조합의 연대구조가 급속히 발전한다. 1988년 3월에는 ‘노동조합탄압저지 전국노동자공동대책협의회’(전국공대협), 10월에는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전국투본)가 건설된다. 11월에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최초의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자 대회’가 연세대학교 노천광장에서 개최된다. 이후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그해 12월 ‘지역 업종별 노동조합전국회의’(전국회의)를 결성한다. 이는 지노협과 업종별 협의체를 망라한 연대체였다. 전국회의는 1989년 12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 그리고 곧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2년여 만에 전국적 조직의 건설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4. 전노협 건설
     


    드디어 1990년 전노협이 건설된다. 1990년 1월 22일, 눈 내리는 수원 성균관대 율전캠퍼스에서 기습적으로 창립대의원대회가 개최된다.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의 3당 합당도 같은 날 진행된다. 민주노조 총단결과 함께 ‘범보수연합’이 결성된 것이다. 전노협 결성이 상징하는 노동자계급 단결의 한쪽에서는, 체제 위기를 정비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정치 재편이 이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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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러한 대중적 투쟁의 분출은 정치적 노동자운동에도 당연히 영향을 주었다. 6월 항쟁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결성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평가하면서 대중운동과 “노동자계급의 올바른 사상인 과학적 사회주의와의 결합”을 주요한 목표로 제시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인민노련은 노동현장에서 활동을 전개한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민주노조운동은 지역적 단결체로서 각 지역에서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를 건설한다. 이러한 운동은 전노협 건설(1990년 1월)로 이어진다. 민주노조 대단결의 토대를 놓은 것이다. 전노협은 창립선언문에서 “노동자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사회구조의 개혁과 조국의 민주화·자주화·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데 있다”는 기본목표를 천명한다. 또한 선언문은 “업종별·산업별 공동투쟁과 통일투쟁을 발전시키는 속에서 기업별노조 체계를 타파하고 자주적인 산별노조의 전국중앙조직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한다.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지향, 경제투쟁을 넘어선 정치투쟁의 방향과 산별노조로의 조직발전 지향을 집약했다.

    하지만 울산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 노동조합은 전노협에 합류하지 못하고, 사무전문직을 포함한 업종회의도 전노협과 통합하지는 않는다. 이들 민주노조운동이 모두 결집하는 것은 1991년 한국의 ILO 가입을 계기로 조직된 ‘ILO기본조약비준및노동법개정을위한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와, 이어서 구성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에 이르러서다. 이들 연대체는 이후 민주노총(준)으로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정권은 집중적으로 전노협을 탄압한다.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의 ‘3저 호황’이 1989년 상반기에 끝나고 하반기부터는 경기침체로 반전되기 시작하자, 노태우 정권은 더욱더 강경하게 노동탄압에 나선다. 1986~1988년까지 연 12% 수준의 경제성장률이 1989년에는 6.9%로 하락한다. 1989년부터는 임금 상승률은 높아지지만,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감소하면서 기업들의 채산성이 악화된다. 노태우 정권의 노동탄압 심화는 이러한 조건에서 일어난 것이다. 1990년에 노태우 정권은 조직범죄를 척결하겠다며 “범죄와의 전쟁”을 내세웠는데, 노동현장에서는 공안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마침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공안정국 형성의 명분이 되었다. (물론 당시 방북이 적절한 정세적 실천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통일운동 측면에서 별도의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정권은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발전모델을 제시하기보다는, 1987년 이후 급격한 임금상승으로 인한 노동비용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과거 개발독재 방식의 노조탄압을 선택한 것이다.

    전노협 간부에게 구속, 수배는 일상적인 일이었고, 전노협 가입 조직에 대해서는 노동청이 탈퇴를 압박한다. 1990년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 와해 대책”을 마련하는데, 제3자 개입 처벌, 핵심 인사 구속 및 수배, 전노협 가입 노조에 대한 업무조사, 관련 행사 원천봉쇄 등 전방위적이었다. 

    특히 노태우 정권은 대기업노조가 전노협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집중적으로 탄압한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울산지역의 대기업노조들도 집행부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전노협 가입을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울산의 대기업노조들은 ‘민주집행부 집권 → 전투적 투쟁 → 어용 집행부로 교체’가 반복되면서, 안정적인 민주집행부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탄압 와중에 발생한 것이 ‘대기업노조연대회의’ 참가자 구속과 이때 구속된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 박창수 열사의 사망 사건이었다(1991년). 

    이렇게 노태우 정권은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이 강한 전노협을 중심으로 노동자운동이 재편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려 했다. 이에 따라 전노협은 1990년 건설 당시보다 1994년에 이르면 조합원이 상당히 축소되는 상황에 이른다. 결국 전노협을 중심으로 “민주노조 대단결”을 실현하고 산별노조 건설과 제2노총을 건설하고자 했던 시도는 달성되지 못한다. 결국 전노협은 민주노총 건설의 여러 주체 중 하나가 되고 만다.

    지역적 연대, 즉 지노협을 통한 전노협의 건설은 기업을 넘어 지역적 공동투쟁과 단결을 통해 노동자 간 격차를 축소하는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노동조합 지역운동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정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지역’이 아니라, 기업을 넘어선 연대가 실현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며, 당시 산업과 노동시장의 사회적 조건에 따라 그 연대의 범위가 특정한 ‘지역’들이 된 것이다.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조직을 건설하는 운동은 아직 지역 차원에서 기업별 일자리 이동이 가능했던 당시 노동시장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발전경로일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현대그룹의 대기업노조가 주도하던 울산에서는 지노협이 건설되지 못하고, 대기업노조들이 결국 대부분 전노협에 결합하지 못한다. 이는 기업별 투쟁을 중심으로 성과를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지노협·전노협 운동은 초기업적 지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지역적 연대의 경험은 이후 금속산별노조를 지역에 근거해서 건설하는 지향으로 계승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업적 단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지노협은 사업장을 넘어 공동투쟁을 전개했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기업별 교섭 체제에서 주로 임금인상을 쟁취하기 위한 연대투쟁이었다. 지역, 업종별로 사용자단체가 구성된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초기업 교섭이 시도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일상적 교류를 통한 교육, 문화, 정책 등 연대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했지만, 노사관계를 초기업적으로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지노협이나 전노협은 지역적, 전국적 투쟁본부로서 역할이 강했다. 이러한 노조운동의 전통은 이후 산별노조 건설 이후에도 민주노총이 대정부 교섭 기구보다는 투쟁본부 성격이 부각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전노협이 기업별 조직을 유지하면서 공동투쟁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전노협 조직발전 논의 과정에서 핵심 쟁점은 ‘금속산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있었다. 지역별 공동투쟁만이 아니라 산별노조 건설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전노협의 조직발전 논쟁은 이후 민주노총 가입을 어떤 단위로 할 것인지, 금속연맹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1998년 통합 금속연맹 건설 때까지 계속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노동자운동도 지역적 연대운동의 강화에 기여한다. 노동자운동의 정치단체들은 지노협·전노협 건설에 매진하면서 지역적 토대를 근거로 기업을 넘어선 운동으로 나아간다는 노동자운동의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정치적 성격이 강한 노동단체, 사회운동도 적극적으로 연대했는데, 각 지역의 노동운동단체가 결집한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의 여러 노동운동 단체들은 지노협과 전노협의 투쟁에 일상적으로 결합한다. 전국노운협은 “민주노조운동이 계급적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선진노동자를 광범하게 조직하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출을 확대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건설되었다(1888년 6월). 인민노련도 노동자운동의 노선을 제시하면서 지역적 연대의 강화를 주문한다. 이러한 노조운동 안팎의 정치적 개입은 초기 노조운동이 지역을 중심으로 초기업적 연대투쟁을 펼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쇠퇴 이후 이렇게 이념적 근거를 갖는 실천적인 혁신 시도도 대체로 약화해간다. 전노협 해산과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지역운동을 강화하는 문제의식과 실천은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 건설 경로를 둘러싼 조직발전 논쟁 당시의 “전노협1안”, “전노협2안”, “업종회의안”은 모두 산별연맹을 중심축으로 하며 지역조직은 보조축으로 설정한다는 합의로 수렴된다. 논쟁의 쟁점은 “전노협 중심론”(전노협1안), 혹은 “전노협 한계론”(전노협2안과 업종회의안)으로 일별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전노협 한계론”이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조직적 우세를 점했다고 할 수 있다.

    조직노선에 대한 절충은 산별노조 건설로 나아간다는 합의를 확인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지역으로부터 연대와 이를 기반으로 한 전노협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남겼다. 그 결과 산별연맹 및 그룹별 조직(현대, 기아, 대우)은 민주노총 가맹조직으로, 지노협은 산하조직으로서 민주노총 지역본부로 재편되며 전노협은 해산한다. 조직적으로도 1993년 전노대 결성 과정에서 노동운동단체의 참여가 배제되는 결정이 이루어지며 정치운동, 사회운동과의 조직적 연계도 약화한다. 전노협의 성격이 사회운동노조와 가깝고 정치적 노동자운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면, 민주노총 건설을 전후한 시점부터 한국의 노동조합은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199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와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1989년~1990년대 초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중소기업의 해외 이전과 같은 산업 구조조정이 전개된다. 이는 전노협의 주력이던 지역 공단의 제조업 중소기업 노동조합에도 타격을 주게 된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는 제조업의 해외 이전이 가속된다. 이와 동시에 국내 산업구조는 3저 호황의 결과 재벌 대기업의 집중성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시장 조건도 변화한다. 여전히 제조업 투자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산인력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업은 소수의 핵심노동자에 대해서는 장기근속을 유도하는 한편, 주변 업무에 대해서는 외주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점차 생산 공정의 하청계열화가 심화되며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도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은 고용안정과 연공임금제를 실현하지만, 하청기업에서는 짧은 근속기간에서 비롯된 고용불안과 함께, 임금체계 자체가 부재한 상태가 이어진다. 노동조건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들이 자주 이직하면서 근속기간이 짧아져 연공임금제도 적용하기 어려웠다.

    재벌 대기업은 1990년대 초 경제위기를 거치면서도 1990년대 중반까지 성장을 계속한다. 특히 금융자유화를 활용해 해외로부터 단기자본을 차입하여 투자를 확대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은 오히려 부족해진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상황과 노동조합의 임금투쟁을 통해 높은 수준의 임금인상이 이루어진다. 대기업이 노동자들을 기업 내에 묶어두기 위해, 또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연공급 임금체계가 발전한다. 노동조합도 사용자와 중간관리자의 자의적인 인사배치와 임금결정을 반대하면서, 임금산정 기준이 근속기간이라는 단순한 요소로 설계된 연공급을 선호했다. 이후 대기업이 주도하는 민주노조운동은 이러한 임금체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중소기업에서는 연공급을 안정적으로 도입하기 어려웠고 매우 불안정한 고용 상황이 지속된다. 노동자 입장에서도 장기근속을 노리기보다는 임금이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게 유리했기 때문에 고용의 이동성이 높았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초부터 대기업(원청)·중소기업(하청)의 임금 수준과 임금체계, 고용안정 수준의 분기가 심화된다. 이미 1988년 들어서부터 대기업일수록 임금인상률 타결 수준이 높은 현상이 시작된다. 물론 중소기업(하청)의 임금인상률도 상대적으로는 낮지만, 아직은 절대적인 수치가 높은 편이었고 노조의 임금투쟁을 통해 임금인상이 가능했다. 그러나 대기업을 추격할 수는 없었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에는 더욱 격차가 벌어진다. 대기업은 회사 내에서도 장기근속을 유도하는 숙련노동자 외에 비숙련·반숙련 부문에서는 사내하청(사외공)까지 광범위하게 활용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초, 1987년부터 이어진 급격한 임금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정부와 노총·경총은 임금 가이드라인 합의를 추진한다. 1990년에는 “10% 일 더하기 운동”, “한 자릿수 임금인상” 정책을 추진하고, 1991년에는 공공기관과 대기업을 특별관리하는 ‘선도 부문’으로 지정하여 압박하기 시작한다. 1992년에는 시간 외, 성과급 등 각종 수당을 포함하여 인상률을 관리하는 “총액임금제” 정책을 추진하며 임금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압박한다. 1993년 문민정부로 출범한 김영삼 정부도 1993~1994년에 “노총·경총 임금 합의”라는 노사정 합의 방식으로 사실상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추진한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현장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이후 한국노총 탈퇴운동의 계기가 된다. 노사정 합의 방식은 이때 이후에도 1996년 노개위, 1998년 노사정위원회를 거치지만 매번 불안정한 역사를 반복한다. 정부가 임금억제를 위해 시작했다는 ‘원죄’와 함께 노사정 3자의 합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역사가 이 시점부터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발주자로 출발한 공공부문노조는 1990년대 초중반 일련의 민주집행부 당선과 공동투쟁을 통해 더욱 활성화된다. 임금억제를 위한 정부 주도의 임금 가이드라인은 민간부문에서는 실패했지만, 공공부문에서는 정부 지침을 통해 영향을 주었다. 임금억제로 인한 임금인상 지체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불만을 더욱 키우고 결국 공동투쟁이 촉발된다. 당시 한국 최대 규모의 노동조합이었던 한국통신노조(1994년)를 포함한 공공부문노조에 민주 집행부가 들어서고, 철도·지하철노조의 전투적 투쟁이 전개된다(1994~1995년 전기협·전지협 파업과 한국통신노조, 조폐공사노조의 투쟁). 이러한 투쟁은 이후 공공부문 노조가 민주노총에 합류하는 조직적 토대가 된다. 이들 노동조합은 공공부문노동조합대표자회의(공노대)를 거치며 연대를 강화하고, 이후 민주노총에 합류하면서 공공연맹(1998년)을 건설한다. 

    이 시기 형성된 노동자운동 노선은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 투쟁성 계급성”으로 제시되었다. 이는 지금도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으로 노동조합 교육에서 강조하는 지향이다. 1987년에서 1997년까지, 노동자 대투쟁과 전노협에서 민주노총 건설의 시기는 경제성장과 함께 높은 임금인상이 가능했다(앞의 ‘[표] 협약임금 인상률과 명목임금 상승률 추이’ 참고). 또한 높은 기업별 고용 이동성으로 인해, 설사 기업이 망해도 아직은 다른 일자리를 용이하게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에서는 “끝까지 투쟁하면 승리한다”는 관념이 적합했다. 반면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 노동시장은 더 이상 이러한 조건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형성된 노동조합 투쟁의 관념은 변하지 않았다.
     
     

    6. ‘노동운동 위기 논쟁’, 어떤 위기였나

     
     
    1990년대 초반 경제위기와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운동 위기 논쟁’이 진행된다. 일단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주장들은 노동조합의 전투적 경제투쟁이 노동자운동을 국민들로부터 고립시켜 위기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김형기, 박승옥, 최장집 등 ‘위기론자’들은 ‘전투적 조합주의’의 특징이 “엘리트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인 리더십 구조”, “관념적 급진주의로 치달은 운동이념”, 그리고 “전투적 투쟁 일변도의 운동방식”이라고 비판한다. 

    변혁적 운동진영은 대체로 이러한 비판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자운동의 변혁성을 약화하려는 시도라 반비판했다. 당시 정세에서 전투적 투쟁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대한 방어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는 점에서 전투성을 문제삼는 것은 사후적 평가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더구나 위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상적인 노조탄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노동자운동의 이념을 하향 평준화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당시 위기론자들은 이후 코포라티즘을 수용하고, 신자유주의 노동개혁과 유사한 방안을 받아들일 것을 제시한다. 이는 급진적인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노조와 분리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결국 위기 논쟁은 노동조합운동 이념의 탈각이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노동조합운동도 이념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실용주의적이거나 코포라티즘적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위기론을 제기한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문제제기는 완전히 허구적인 것만은 아니었고, 토론과 논쟁, 대안 마련이 실제로 필요한 부분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노동운동 위기론’이 횡행하던 1990년대 중반에도 노동자들의 투쟁 결의와 변혁적 잠재력은 높았고, 마치 상층간부들만 올바른 노선을 취했다면 위기나 후퇴는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얼마나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노동자운동 주류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초를 거치면서 경제위기가 실제로 진행되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산업과 노동시장의 조건이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론자들과의 논쟁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대안이 도출되어야 했다. 그러나 위기론자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운동의 주류에서는 기존 노선(전투적 경제주의)을 정당화하고 고수하고자 하는 편향이 더 강화된다. 당시 정세 분석을 통해 객관적인 위기를 인정하면서도 코포라티즘적 대안이 아닌 다른 대안을 제시했어야 했던 정치적 노동자운동(PD)도 대응하지 못했다. 1991년경부터 정당 건설에 주력하며 노조운동 현장에서 철수하면서 의미 있는 비판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1990년대 초 짧은 침체 뒤에 곧 경기가 회복되면서 과잉투자가 진행되고 임금인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을 노동자운동이 ‘위기’로 인식하기는 어렵기도 했다. 실제 위기는 곧 1997년 말에 닥칠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구조의 변화는 노동자운동 지형의 변화와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 전노협 위기론과 민주노총 건설은, 노선적인 전환만이 아니라 전노협에서 재벌 대기업과 공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노동자운동의 조직적 중심이 변화하고 있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비록 전노협 선거에서 조직발전 방안에 대한 쟁점이 부각되기도 했으나, 전노협도 민주노총 건설 흐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대체로 노동조합 부문 간 역관계는 변화하고 “민주노조 총단결”이라는 구호로 수렴되었다. 노선적 측면에서는 민주노총 건설론이 제시한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 노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주노총이 건설되는 1995년에는 이미 코포라티즘을 대체할 수 있는 운동전략(변혁노선을 가진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경향)이 점차 약화한 조건이었다. 결국 민주노총은 준비위원회 단계부터 김영삼 정부가 제안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 참여를 준비해간다. 민주노총 건설에는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이러한 노사정 협상에 대응한다는 배경도 있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는 결국 소련 붕괴(1991년)에 이르는 구사회주의권 붕괴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변혁적인 정치적 노동자운동 세력이 이합집산(PD 3파 통합)하면서, 동시에 합법정당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신노선’으로의 노선 전환을 진행하던 시기였다. 이들 정파의 노동자운동 활동가들은 1991년경에 대거 단위노조와 지노협 현장을 떠나 정당 건설 운동에 집중한다. 한편 같은 시기에 소련 붕괴(1991년) 이후 좌파 지식인들 상당수는 포스트구조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민주노총 건설이라는 조직의 커다란 재편은 운동노선의 변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급진적 이념의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노조운동에 대한 개입에서 철수하는 상황이었다. 노동자운동에 관여하던 활동가들조차 정당 건설 운동에 매진하며 민주노총은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의 성격이 강화된다. 그러나 정당 건설 운동은 총선 패배와 소련 붕괴 이후 이념적 혼란의 과정에서 그 자체가 약화하는 것은 물론, 노조운동에 대한 개입력도 상실한다.

    결국 1990년대 전반기에는 “민주노조 총단결”이라는 구상에 근거하여 진행된 전노협과 업종회의, 대공장 노조 간 연대의 모색과 민주노총 건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분화 및 합법정당 건설까지 일련의 과정이 동시에 진행된다. 이를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이 서로 독자적인 정체성을 강화하고,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노총 건설은 기존에 사회운동적 성격이 강하던 전노협 이념으로부터의 변화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창우는 민주노총 건설 과정을 “전노협 청산”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공동투쟁으로 임금격차를 축소하고, 사회운동적으로 발전하고자 했던 지향의 약화를 “전노협 정신의 청산”이라는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전노협이 포괄하는 제조업 사업장의 비중이 상당히 축소한 상황이었다. 이미 수출중심 경제구조와 재벌기업의 성장과 함께 노조운동 안에서도 주도권을 재벌 대기업 노동조합(이후 현총련, 대노협을 결성하고 민주노총에 가입)이 확보한 상황에서, 전노협 중심의 금속산별노조를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라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7. 민주노총 건설

     
     
    전노협은 건설 과정부터 “민주노조 총단결”을 목표로 했지만, 아직 1987년 이후 새롭게 형성된 민주노조운동을 모두 포괄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정권의 탄압이라는 외부적 요인 외에도, 민주노조운동이 하나의 조직으로 결집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공감대도 충분치 못했다. 아직은 공동투쟁을 통한 연대의 강화가 필요했다.

    민주노조운동의 연대투쟁은 ILO공대위를 거쳐 공동의 조직건설을 논의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1991년 ILO공대위 건설과 노동자대회를 거쳐 “민주노조 총단결” 구호가 대중적으로도 확산된다. 

    민주노총 건설이 전노협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직적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은 곧 산별노조 건설 전망에 대한 논의로 연결된다. ILO공대위에 참여한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우그룹노조협의회(대노협) 네 단위가 민주노총에 가입할 때에는 산별노조로 재편하여 합류하며, 따라서 전노협도 금속(제조업) 산별노조로 조직을 발전해야 한다는 과제가 도출되었다. 이미 1990년대 초반 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기업별노조로는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대응하기 어려우므로 조직적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ILO공대위 이후, 민주노조 총단결의 조직발전 전망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1993년, 새로운 조직의 틀로 ‘전국노조대표자회의’(전노대)가 건설된다. 전노대는 전노협과 업종회의뿐만 아니라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까지 포괄하면서, 한국노총과는 다른 제2노총을 건설할 수 있다는 전망을 확인하게 된다. 1994년 임투에서는 노총·경총 임금합의에 대한 반대투쟁과 함께 “어용노총 탈퇴 및 맹비납부 거부운동”을 통해 중간층 노조의 한국노총 이탈을 끌어낸다. 1994년 전지협 파업, 1995년 한국통신 민주집행부 건설과 공공부문노동조합대표자회의(공노대) 건설은 더욱 좋은 조건을 형성한다. 전노대는 1994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준비위원회(민노준) 발족을 선포한다.

    이후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 출범까지 조직발전 논쟁이 이어진다. 이는 전노협에서 먼저 진행되던 논쟁의 맥락과도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산업(업종)별을 중심으로 하고 지역 및 그룹별 조직을 보조축으로 한다는 안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룹별 조직은 이후 지역조직[지노협]과는 달리 결국 가맹조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민주노총 건설 초기에도 여전히 ‘대산별론’과 ‘소산별론’의 논쟁이 계속된다. 특히 금속산업이 문제였다.

    금속산별노조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 소산별의 입장은 업종단위(조선, 자동차, 금속일반)를 중심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산별의 입장은 업종별 단위는 분과사업으로 편제하고 중심축은 단위노조가 직접 가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96~97년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투쟁 이후 현장별로 조직력이 약화되는 휴유증을 겪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산업별 단결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결국 1997년 3월 현총련이 민주노총 임시 대대에서 금속 3조직 통합을 전격적으로 제안하면서 통합논의가 본격화된다. 1997년 3월, 금속 3조직 대표가 모여 11월 전국노대 이전에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한다는 내용으로 합의하면서 1998년 2월에 통합 금속연맹이 출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대산별연맹을 건설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금속산업 내 조선, 철강, 자동차 등 업종을 넘어선 단결이라는 쟁점보다,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영세기업의 단결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로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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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은 1995년 11월 11일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창립대의원대회를 갖고 출범한다. 민주노총에는 15개 산업(업종)조직과 10개 지역본부, 2개 그룹조직이 가맹하고 단위노조 861개에 조합원 41만 8,154명이 참여했다. 민주노총 결성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어려 갈래로 형성되어온 ‘민주노조 총단결’의 일차적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금속산업에서는 현대차, 현대중공업, 기아차 등 수출대기업노조가 참여하고, 공공부문에서도 한국통신, 서울지하철, 의료보험, 전교조가 참여하면서 조직적 위력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기업노조의 주도는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더욱 커진 조직적 위상을 통해 사회적으로도 더 큰 힘, 발언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측면은 건설 직후부터 이어진 노개위 논의와 96~97년 총파업으로 드러난다. 조직적으로는 산별노조 건설을 전면화하는 의미가 있었다. 앞서 전노협 내 논쟁을 살펴본 것처럼, 민주노총 건설은 산별노조 건설을 동시적인 과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건설 시점까지 산별노조 건설 방향은 혼란한 상태에 있었고, 산별노조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민주노총 역할은 모호한 상황이었다.

    권영길 위원장의 민주노총 1기 집행부는 “사회개혁적 노동운동”을 방향으로 제시한다. 이는 노사협조주의 배격과 사회개혁을 지향하고 있으나 혁명적 조합주의는 아니며, 이념적으로는 정치성과 투쟁성을 강하게 띤 경제적 조합주의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에서 전투적 경제주의와, 또 한편에서 정치 사회운동과 연대를 통한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양자와의 단절이었다.
     
     

    8. 1990년대, 신자유주의 노동개혁과 96~97년 총파업

     
     
    1980년대 말 3저 호황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이 중단되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시장의 신자유주의 개혁도 역시 지체된다. 노태우 정부는 노동개혁을 재추진했지만, 경기침체를 맞아 임금억제와 급진화된 노조운동을 탄압하는 데 몰두하던 상황에서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정부의 시도는 1991년 ILO 가입 및 김영삼 정부가 주도한 1995년 노개위 논의로 이어진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후반부 개혁 프로그램으로 노동개혁을 추진하며, 이를 위해 1996년 들어 노사정 협의 기구로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구성한다. 노개위의 구성은 탄압 일변도의 정책만으로는 노사관계를 개혁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최소한 상급단체의 복수노조, 즉 현실의 노조운동을 인정하면서 타협체계를 재구축하려는 시도였다. 물론 그 대가는 고용, 노동시간에서 신축화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1996년 4월에는 경상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그 위기감이 정부의 노동법 개정 추진 의지를 강화한다. 정부는 변화된 경제·국제환경에 대처하려 여러 정책을 추진하는데, 특히 WTO 체제와 OECD 가입이 문제였다. 이미 경제지표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해 그 원인인 한국경제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고쳐야겠다는 의도가 나타난 것으로 평가된다.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조직적 대응이 ILO공대위 구성과 이후 민주노총 건설(1995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준비위 상황에서 이미 노개위 (준비)논의에 참여하며, 1996년 내내 협상이 진행된다. 집권 정치세력의 변화, 신자유주의 개혁과 문민화는 노조운동의 방향에 이러한 방식으로도 영향을 주었다.

    1996년 4월, 정부는 “노사관계개혁방안 보고대회”를 열고 ‘신노사 관계 5대 원칙’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한다. 다음 달 현승종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고, 공익위원 20명, 노측 5명(민주노총 2명), 사측 5명, 3개 분과로 구성된 대통령 직속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발족한다. 노개위는 11월 14차 회의에서 개혁안을 의결하지만, 이미 민주노총은 10월 9차 회의부터 불참한 상태였다. 당시 협의는 광범위한 쟁점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노사정이 합의하기에는 무리였다. 정부도 노사 간 간극을 조정하는 가운데, 양자를 만족시킬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노개위 합의는 실패한다. 노사정 모두가 합의에 이를 준비가 되지 못했다. 당시 논의에서 민주노총은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조활동을 위해 복수노조 허용, 공무원·교사의 노동3권 보장 등 노조법을 개정하는 데 초점을 두었으며 노동유연화는 저지한다는 입장이었다. 정부 측은 정리해고 법제화, 변형근로제(현행 탄력근로제), 근로자파견제 도입 등 개별적 근로관계법을 유연하게 개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협상 과정에서 집단적 노사관계와 개별적 근로관계의 개정을 맞바꾸는 식의 협의 가능성도 타진되지만, 민주노총이 정리해고제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협상을 주도한 정부도 노사정의 입장을 조율하고 현실화할 능력이 없었다.

    1996년 11월 들어 결국 합의에 실패하자, 정부여당(신한국당)은 합의에 실패한 정부 측 개혁안(공익위원안)을 토대로 일방적 입법화를 추진한다. 정부여당은 결국 1996년 12월 26일 새벽에 일방적으로 날치기로 입법한다. 노동법 날치기 통과 직후, 민주노총 집행부는 명동성당에서 총파업 돌입 기자회견을 열고 즉각 전국적인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다. 2월 28일까지 진행된 초유의 양대노총 총파업에서 하루 이상 참여한 노조는 531개, 조합원수는 404,054명에 달했던 것으로 집계된다(당시 민주노총 조합원의 약 85% 참여).

    1996년 노사정 협상 과정에서 민주노총 역시 협상 결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총파업을 꾸준히 준비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파업이었다. 1년간 ‘1조합원 1교육’을 포함한 전조직적 조합원 조직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민주노총도 이 협의가 원만한 합의로 마무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정부 측의 구상과 민주노총의 접근은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파업의 결과 개악 노동법은 철회(연기)된다. 민주노총 건설 초반의 에너지가 일시에 분출한 것이다. 당시 대중적인 파업 투쟁은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에 장기간 패배해온 서구의 노동자운동이 보기에는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에 저항하는 놀라운 사건이었으며, 한국 노조운동이 국제 노동자운동에서도 주목받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바로 같은 시기에 진행된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 경제 정세가 변화하고 있었다. 즉 3저 호황의 조건을 역전하는 1995년 역(逆)플라자 합의로 인한 대외교역 조건의 변화, OECD 가입으로 대표되는 금융개방과 세계화의 심화, 지체된 재벌 개혁과 단기외채 과잉차입(과잉투자)이다. 이러한 경제적 조건은 결국 1997~1998년 IMF 구제금융위기로 이어지고 만다. 이미 1990년대 중반이 되면 1980년대 말 형성된 노동체제(노동시장 제도와 노사관계)가 현실에서 작동하거나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개혁은 지체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부여당이 굳이 1996년 말 날치기까지 강행했던 이유도 정리해고 도입이 OECD 가입을 위한 규제완화 패키지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노사정 합의를 형성하지 못한 무능을 날치기 법안 통과로 해결해보려했던 김영삼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모순들은 총파업이 종료된 그해 말, 불과 몇 개월 후 IMF 구제금융위기를 통해 폭력적으로 해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노동자운동 역시 정치, 경제 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위기를 맞았다.

    1997년에는 주요 기업들이 무너지면서 경제위기를 예고한다. 진로, 대농에 이어 7월에는 재계서열 8위였던 기아그룹이 위기에 빠져 ‘부도유예협약대상기업’에 선정된다. 기아그룹이 위기에 처하자 기아차노조는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기아그룹이 소유가 분산되어 있다는 이유로 “국민기업”이라고 주장하고 “기아 살리기 국민운동본부”를 구성한다. 운동본부는 기아차 정상화와 정리해고 반대, 국민기업화, 공기업화를 주장한다. 노조입장에서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대응이었다. 경영위기 상황에서 노조가 기업 내의 고용안정 방어 투쟁에 주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기아차 위기의 원인이 과잉투자였다는 점에 대한 비판, 또 단지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경제의 위기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기아차노조는 물론 민주노총 역시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다. 국민경제가 위기 상황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고, 위기의식도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대안도 마련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기아그룹은 법정관리 상태에서 매각협상, 구조조정을 거쳐 1999년 현대그룹에 합병된다.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을 실현했던 대기업에서도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 이어진다. 중소기업은 1990년대에도 고용불안이 잦았지만,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은 이들 대기업 노동자가 별로 경험하지 못한 사태였다. 이전에 안정적인 직장을 가졌던 남성노동자(노동운동을 주도한 대기업 노동자)의 상대적 불안정화(해고와 비정규직 고용)는 전체 노동시장의 고용불안 문제를 가시화한다. 이전에도 계속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도시하층노동자와 여성노동자들의 상태는 그대로였는데, 이들의 문제는 그 이전에는 부각되지 않았다는 역설이 있다. 
     
     

    9.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분화

     
     
    이 시기의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전노운협의 결성(1988년)과 분화(1990년),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창준위’(1991년 7월) 결성을 주목해야 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구성된 ‘노동조합탄압저지 전국노동자공동대책협의회’(전국공대협)(1988년)는 상설 공동투쟁체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전노운협을 결성한다. 각 지역의 노동운동단체들로서 이들은 지노협 활동에 결합하고 지원활동을 전개한다. 전노운협은 전노협 건설 이후 1990년 하반기 들어 조직노선을 둘러싸고 논쟁한 끝에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과 분화한다. 이어 합법정당 건설 운동이 부각되면서 여기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은 정당 운동으로 이전한다. 바로 한사노당 창준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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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들어 인민노련, 노동계급, 삼민동맹 등 ‘비합법 정파’ 조직들이 통합하면서 한사노당 창준위를 결성한다(이른바 ‘PD 3파 통합’). 이들이 통합한 후 채택한 길은 한사노당(주대환 위원장)이 제시한 ‘신노선’이었다. 구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새로운 사회주의의 상을 구성하고 합법정당 운동을 전면화하자는 것이었다. 한사노당 창준위 쪽 흐름은 1992년 14대 총선을 위해 많은 노선적 양보를 감수하면서도 민중당과 통합였으나, 총선 실패 후 민중당은 선거법에 따라 해체된다.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에 대해 노동자운동 안에서도 회의가 확산된다. 이 시기 한사노당 창준위 구속자, 수배자들이 공안당국에 제출한 탄원서가 큰 논란이 된다. 합법 정당 노선이 변혁 노선의 포기라는 의심이 확산된다. 탄원서가 사회주의 혁명 노선의 포기, 우경화를 보여주면서 노동자운동 내 위신도 추락한다. 전노협은 이러한 논란 속에서 민중당 지지 입장도 조직적으로 채택하지 않는다. 정치적 노동자운동과의 거리가 확인된 셈이다. 

    한편, 한사노당의 정당 건설 노선과는 달리 대중조직을 통한 정치활동 전개를 강조하는 흐름도 강력하게 존재했다. 전노운협의 주류는 전위정당 혹은 합법정당 건설보다 노조운동에 대한 개입을 통해 대중적 기반 강화와 함께 정치의식을 고양하는 방향을 주장한다. 그러나 한사노당의 실험이 진행되던 비슷한 시기(1993년)에 ILO공대위를 재편한 전노대 결성 과정에서 전노운협을 비롯한 노동운동단체들이 참여 조직에서 배제되면서 노동조합 중심의 운동이 강화된다. ILO공대위는 중앙과 지역에서 노동단체들을 포괄하고 있었으나, 애초 논의과정에서 제시된 ILO공대위 확대강화가 아니라 전노대 결성으로 안이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동단체들을 배제하는 것으로 결정된 것이다. 

    1995년 9월, 한사노당의 맥을 이었던 진정추는 민중정치연합 내 통합파와 통합하며 진보정치연합을 창립했으나, 같은 해 1996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개혁신당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노회찬 등 일부가 통합민주당(꼬마 민주당)에 합류하면서 이 과정 역시 파행을 겪는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도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1996년 총선이 이후 진보정치연합은 통합민주당에서 철수한다. 이후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총은 대선 대응기구인 ‘건설국민승리21’을 구성한다. 이미 왜소화된 진보정당 추진세력은 이 과정을 주도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합류하며, 이후 민주노동당 건설로 이어진다.

    노동조합운동이 민주노총 건설로 정비되는 과정에 정치적 노동자운동, 혹은 정당지향 노동자운동은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계속 축소되어 왔다. 결국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 사회경제적 운동노선 하에 구상된 민주노총의 권영길 위원장의 대선 출마와 ‘국민승리21’ 건설 운동이 진보정당 건설을 주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정당운동이 독자적으로 발전했던 19세기 독일 사민당보다는, 노총이 자신의 정치활동을 위해 정당을 건설하고 지배하는 20세기 영국 노동당 모델에 가까웠다. 독일 노동자운동이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영국이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을 대표하는 모델이라고 할 때,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후자에 가까운 성격이 강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2000년대 초반의 짧은 성공을 거쳐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

    ※ 다음 호에는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의 노동자운동의 전개를 다룬다.
     
     
     

  • 2022-12-13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동자운동이 평가해야 할 쟁점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자운동 평가> 2022년 노동운동포럼 지상중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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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자운동 평가> 2022년 노동운동포럼 지상중계(1)

    2022년 노동운동포럼이 지난 12월 10일 강북노동자복지관 5층 대강당에서 열렸다. 첫 번째 세션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자운동 평가”라는 주제로 두 분의 패널을 초청해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두 번째 세션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 사회운동의 과제”라는 주제로 우크라이나 좌파단체 ‘사회운동’(Sotsialnyi Rukh) 활동가 블라디슬라프 스타로두브체프 씨를 모시고 강연을 들어보았다. 《사회운동포커스》에서는 세 차례에 걸쳐서 2022년 노동운동포럼 지상중계를 싣고자 한다. 지면 관계상 본 글에 담기지 못한 자세한 내용은 2022노동운동포럼 자료집2022노동운동포럼 실시간 중계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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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진보연대 이유미 사무처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2022년 노동운동포럼이 지난 12월 10일 성황리에 열렸다. 첫 번째 순서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자운동 평가”라는 주제의 토론회가 진행되었다. 박준형 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이 주 발제를 맡았고, 유형근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와 정일부 금속노조 前 정책실장이 토론자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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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제자는 지난 20년간의 한국 노동자운동을 개괄했다. 그는 노동자운동이 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기업 차원의 고용유지를 위한 투쟁과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을 반대하는 총파업 투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산별노조 건설, 비정규직 전략조직화, 사회공공성 투쟁,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핵심 전략으로 삼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전략이 2008년 금융위기를 경과하면서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보았다. “정세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과거의 전략을 답습하면서 변화의 기회를 상실했다”라고 평가하면서, 발제자는 산별노조라는 형식과 진보정당이라는 실체는 남았지만, 이를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운동의 목표는 실종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 내부의 격차가 심각해지는 상황에 대해서 노동자운동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기업별 최대치를 요구하는 투쟁이 양극화를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지난 역사를 반추해보면서 노동자운동이 노선적 혁신을 할 수 있었던 주요한 계기를 짚는다. 그에 따르면, 첫 번째 계기가 IMF 구제금융 위기였고, 두 번째 계기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의 정세였다. 그러나 2008년에서 2012년을 지나면서 사회운동노조와 같은 새로운 운동 방향도 적극적으로 논의하지 못하였고, 민주노동당 분당과 함께 정치세력화 전략도 위기에 빠져버렸다.
     
    발제자는 앞선 두 계기에서의 실패를 넘어 노동자운동이 변화하는 정세를 감지하고 세 번째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를 자문한다. 다시 말해,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세계경제가 대침체에 빠져있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으며, 중국에서 권위주의적인 통치질서가 확고해지면서 대만위협이 심각해지는 현재의 국제정세를 노동자운동이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북한의 핵무력 완성과 윤석열 정부의 집권이라는 국내정세에 조응하여 한국사회의 변화 방향을 설정하고 이에 발맞춰 노동자운동이 쇄신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혁신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 것인가. 발제자는 첫 번째로, 노동자운동의 목표를 ‘기업별 노사관계 극복, 연대임금 정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로, 80년대 후반에 있었던 노동자운동의 성과를 ‘전투적 경제투쟁’으로 간주하고 이상화하는 구래의 운동 관념을 반성하고 변화시키자고 제안한다. 또한,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야권연대 전략이 파산했기 때문에 ‘범민주진보’ 이데올로기와도 단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발제자는 혁신을 주도할 주체 형성을 위해 ‘운동 내 운동’을 만들어가자고 밝혔다.
     
    발제자의 발제가 끝난 뒤 이어진 토론에서는 발제자의 평가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 쟁점으로 논의가 진행되었고, 발제자가 제시한 세 가지 제안에 대해서도 각각 의견을 나눴다.
     
     
    평가 쟁점 1.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왜 노동자운동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는가? 과연 2008년을 변곡점으로 볼 수 있을까?
     
    2008년 금융위기를 전후한 시점이 노동자운동 혁신의 주요한 계기라는 발제자의 주장에 대해, 유형근 교수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노동자계급의 분할이 심화한 것에는 동의하지만, 지난 10년이 ‘국민경제의 위기’였다는 정세 인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경제는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서 상당히 견고한 성장을 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같은 시기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이 견고하게 성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발생한 구조조정 반대 투쟁이 개별적인 기업별 대응에 머물고 새로운 운동 방향이 채택되는 계기가 되지 못했던 것에는 이러한 경제적 배경이 놓여 있다. 즉, 1998년의 위기와는 질적으로 달랐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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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발제자는 한국이 다른 나라보다 금융위기에서 빨리 회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점부터 세계적으로 장기 저성장 국면이 시작되었고 한국 역시 큰 틀에서 보면 예외는 아니라고 했다. 2000년대의 4%의 성장률이 2010년대에 접어들어 2%대로 하락했고, 이는 곧 노동자운동이 임금의 동반상승을 통해 격차를 축소하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여지가 더 줄어들었다는 점을 의미했다. 또한, 발제자는 평가의 초점이 2008년 금융위기가 한국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보다도 노동운동이 그 시기를 어떻게 지나왔느냐가 핵심임을 강조했다.
     
    발제자가 보기에 산별 전환이 일차적으로 마무리되던 2006년 직후에는 노동자운동이 초기업적 노사관계를 만들기 위한 실험과 투쟁에 본격적으로 착수했어야 했다. 그러나,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기업별 투쟁이 활성화되었고,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민주노동당 분당과 같은 정치적 상황도 악화하면서 2000년대 산별노조,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기대가 무너졌는데, 이 시점이 바로 2008년에서 2012년쯤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기존 노선을 다른 수단과 방법을 통해 실현할 것인가, 혹은 이 노선을 버리고 다른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이러한 판단이나 논의 자체가 안되었다”면서, “그 이후에는 야권연대, 민중총궐기 투쟁으로 나아가면서 기존 노선은 한계 속에서 해체되었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했다.
     
     
    평가 쟁점 2. 산별노조 건설의 실패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발제문에서는 2000년대 산별노조 건설 전략이 2010년대 초반에 대체로 실패로 귀결되었고 이후에는 합의된 노선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정일부 전 실장은 “애초에 산별노조 건설 역시 단지 조직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지역운동을 펼치기 위해서, 현장투쟁의 단결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일종의 연대임금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 펼쳤던 운동”임을 강조했다. 산별노조 건설의 실패를 평가하려면 왜 운동적 의미가 사라졌는가를 중심에 두고 평가해야 하는데, 발제문에는 그 이유가 잘 안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발제문이 그 이유와 맥락에 대해서 제대로 살피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덧붙여서 산별노조 건설 전략이 실패한 원인에 대해서, 사측의 대응 전략이 강력했고 그에 영향을 받아 현장에서부터 기업별 관행에 잠식당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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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발제자는 산별노조 정치세력화 노선이 애초부터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정세진단의 한계는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만들었던 대안이고 일정한 성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다가 잘 안 되었다면 안 된 부분을 평가하고, 전환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운동사회 내부의 진지한 토론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 점이 부족했다”는 점을 주로 짚고 싶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정일부 전 실장은 산별노조 역사 속의 상징적인 사례를 언급했다. 2003년에 금속노조에서 임금저하 없는 주5일제를 관철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파급효과를 주었는데, 산별교섭의 적용 범위 확대라는 의미는 이렇듯 사회적 파급효과를 의미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산별노조 운동을 구체적으로 평가해서 공과를 되새겨야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당부했다.
     
     
    평가 쟁점 3. 비정규직 노동자의 조직화와 투쟁은 어떠한 성과가 있었는가
     
    발제문에서는 정규직을 제외하고 가장 비율이 높고 처우가 열악한 노동자는 ‘임시일용직형 비정규직’ 노동자이지만, 노동자운동이 조직화에 집중한 영역은 조직화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상용형 비정규직’ 노동자였음을 지적한다. 같은 직군 내에 비교 가능한 정규직이 있기에 정규직을 따라잡는 운동이 전형화되었고, 그 결과 애초에 전략조직화가 목표로 삼았던 초기업 교섭구조를 만들어보려던 운동이 상대화되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기업별 이익극대화라는 기존 노동조합 운동의 관행이 반복되고 ‘기업 내 정규직화’와 ‘정규직 따라잡기’가 핵심 요구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비정규직 운동의 한계는 비정규직 운동 주체들의 책임은 아니다. 노동자운동의 주요 전략이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상황에서는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운동이 가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그 속에서 의미있는 새로운 시도도 존재했다. 건설, 화물노동자, 택배나 배달노동자와 같이 초기업적 연대를 활성화한 경우가 그것이다. 이는 기존의 경로와는 다르게 산별노조 운동을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성과였다. 발제문에서는 오히려 노동자운동이 이러한 측면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했던 점을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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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근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다. “‘기업 내 정규직화’와 ‘정규직 따라잡기’로 귀결되었다는 평가에 동의한다. 비정규직 운동은 적대적인 환경의 압력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자기 생존과 적응을 위해 창의적인 실험을 진행해왔다. 예를 들면 모듈 부품사 노조의 사례나 희망연대노조 사례처럼 자회사를 바탕으로 한 시도가 그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들을 기존 운동의 관성에 입각해서 일탈이라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더불어서 그는 조합원 수의 변화만 놓고 보면, 2010년대 후반의 상승은 1987년의 상승 국면과 비교해서 별로 뒤처지지 않는 규모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러한 대규모의 조직화가 가능했던 주요 요인은 산별노조의 적극적인 자원 집중 때문이고, 따라서 산별노조가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에 끼친 긍정적 영향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안 1. 정책 혁신: 연대임금 정책을 핵심과제로 삼고 모든 수단을 고려하자
     
    발제자는 “노동자운동의 주류적 관념이 기업별 임금 극대화 노선이라는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활동가, 노조의 공식기구 차원에서 이러한 관념을 변화시켜야 한다. 현재의 정세에서 기업별 노사관계의 극복과 임금격차 축소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대임금 정책이라는 핵심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 다양한 수단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대임금을 위해 전투적인 투쟁을 할 수도 있고, 교섭할 수도 있다. 사회적 대화도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 수단보다도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중요하다”는 취지임을 밝혔다. 이에 대해 정일부 전 실장은 발제문이 말하는 방향이 “좀 더 개량적으로 하자”는 주장으로 오해될 수 있지 않을까 우려스럽다는 의견을 주었다.
     
    유형근 교수는 “노동자계급의 보편적인 이해를 노총 수준에서 어떻게 모아낼 것인지가 취약하다 보니 민주노총이 목표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표류하고 있다”면서 사회적 대화는 노동운동이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말했다. 단결을 강화하고 노동자 내부의 불평등을 줄이려면 법 제도에 대한 노동의 개입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서 “정부의 거시경제 정책, 사회정책, 노동정책, 산업정책에 대해서 해석해내고, 노동조합의 정책을 생산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시민사회에 유통하는 능력을 갖춘 활동가, 연구자를 내부에서 키워야 하고 이를 위해 자원을 아낌없이 투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안 2. 운동노선 혁신: 현장주의 이데올로기와 전투적 경제주의를 넘어서자
     
    유형근 교수는 현장주의 이데올로기와 전투적 경제주의를 비판하는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현장주의 이데올로기’와 ‘현장 수준에서 노동의 권력자원 강화’는 구분되어야 하고, 후자는 새롭게 재건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정일부 전 실장은 현장주의 이데올로기나 전투적 경제주의와 같은 ‘구래의 운동 관념’에 반대하는 편이라는 점을 전제하면서도, 발제문은 이를 어떻게 극복하자는 것인지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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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 발제자는 “현장 수준에서의 권력자원을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고, 기업별 교섭이 필요한 과제들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현장과 산별 혹은 총연맹의 역할이 다르다는 점을 짚었다. 오히려 현재 시점에서 문제는 현장 차원의 투쟁만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산별이 주도해야 하는 의제, 이를테면 산별노조가 임금 문제에 대해서 단계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실험하는 데 역량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0년대 후반 금속노조가 산별교섭 기반을 형성하기 위해 진행한 정책의 “현대화”도 이러한 사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서 80년대 후반 민주노조 운동의 폭발적인 성장을 “전투적 경제주의”로만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즉 3저 호황을 맞아 한국경제가 양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했던 정세임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고, 오히려 당시에 변혁적 지향을 가진 정치적 노동자운동이 형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제안 3. 주체 형성: 노동자운동의 변화를 위한 ‘운동 내 운동’,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복원하자
     
    발제문은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과 비교해서 정치적 노동자운동이라는 축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장기적 관점과 운동노선의 혁신이 어려울 수밖에 없기에,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토론자들은 실질적인 형태나 지향하는 방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했다.
     
    여기에 대해서 발제자는 “추상적이지만 잠정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변화된 정세 속에서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변혁의 방향과 조응할 수 있는 노동운동의 전략, 진보정당의 전략을 제시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노조운동 역시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 해도, 노동정책만 고려하는 것이 아닌,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위협, 북핵 고도화라는 정세변화와 한국경제의 장기 저성장까지 고려하는 가운데, 총체적인 전망을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이는 전체 한국사회의 변혁 전략과 연계되어야 하기에 노동자운동 차원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정당, 노조, 지식인들을 모두 포함해서 활동가들의 집단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복원 아닐까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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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진보연대도 함께 해온 지난 20여 년 동안의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에 관한 평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활동을 반성하면서, 여러 논의 끝에 다다른 평가지만 아직은 개괄적인 상태이고 구체적인 전략과 실현 방안에 관해서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한 두 토론자 덕분에 평가의 내용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다. 발제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치열한 토론이 이를 방증한다. ‘일이 잘못되면 군자는 제 탓을 하고 소인은 남을 탓한다’는 말이 있다. 노동자운동이 걸어온 역사 속에서 분명 예상치 못한 곤란한 정세가 기존의 경로를 강제하며 옴짝달싹 못 하도록 만든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판단의 갈림길에 섰을 때 노동자운동이 주체적으로 선택했던 길에 대한 평가와 책임을 저울질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번만큼은 노동자운동이 쇄신할 수 있는 계기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가를 진행했다. 다만 노동운동포럼 당일에는 시간제한으로 세세한 쟁점들에 대해서 심화된 토론을 충분히 진행하지 못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앞으로도 다양한 자리를 빌려 계속해서 토론을 이어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