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 벨라루스인 커뮤니티 인터뷰
만약, 한국 정부가 러시아의 침공을 지지하면서 러시아에 무기를 지원하고 한국 영토에서 우크라이나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어떨까? 우크라이나에 영토를 양보할 것을 요구하고 한국 시민들을 참전시킬 가능성을 운운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들은 터무니없는 가정이 아니다. 벨라루스 시민들이 반년 넘게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서쪽, 우크라이나의 북쪽 경계와 맞닿아 있으며 대표적인 러시아 우방국이다. 1994년부터 29년째 벨라루스 대통령으로 재임 중인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는 전쟁 직후부터 러시아의 침공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벨라루스 시민들은 루카셴코를 비판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노동조합, 시민단체, 언론인 등 수많은 시민들이 독재 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 우크라이나에 연대를 표하고 있다. 많은 벨라루스 시민들이 우크라이나에 연대하는 이유는 이 전쟁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만의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전쟁 전부터 루카셴코의 독재를 도왔다. 그리고 주변국들을 침공하고 군사적 불안을 조성해왔다. 벨라루스 시민들은 러시아가 타국의 주권과 자유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벨라루스를 비롯한 주변국들도 러시아에 자유를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하루빨리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 사는 벨라루스 시민들의 공동체인 ‘재한 벨라루스인 커뮤니티’에서도 전쟁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재한 우크라이나인들과 연대하며 한국 시민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장기화로 인해 관심이 식어가는 상황에서 벨라루스 시민들의 입장은 더욱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평화 실천단 in 서울>에서는 전쟁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평화를 위협받고 있는 벨라루스 시민의 입장을 한국 사회에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본 인터뷰를 기획했다. 인터뷰를 통해 자국의 정권이 러시아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이를 비판하는 운동의 어려움과 의미는 무엇인지, 이번 전쟁이 왜 전 세계의 문제인지를 직접 듣고자 했다. 아래는 8월 20일 인터뷰 당시의 답변을 최대한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Q1.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알렉세이 : 저는 알렉세이입니다. 한국에 4년 동안 있었고 생명 과학 박사 학위 과정에 있습니다. 폴리나 : 저는 폴리나입니다. 저도 박사 학위 과정에 있습니다. 저의 전공은 약학과 화학이고 현재는 사회운동도 하고 있어요. 이 자리에 초대되어 영광이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Q2. 재한 벨라루스인 커뮤니티를 소개해주세요. 알렉세이 : 다시 한 번 우리를 여기에 초대해주셔서 고맙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벨라루스인들의 견해에 관심을 가져줘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벨라루스 부정 선거 시위 이전인 2020년 8월에 모였어요. 그 때는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 이후 우리는 같이 모여 집회나 기자회견 같은 활동을 하고 있어요. 벨라루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국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죠. 벨라루스는 멀리 있고 한국보다 5배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저희 커뮤니티는 아주 작아요. 통계 이민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는 약 250명의 벨라루스인이 일하고, 공부하고, 살고 있어요. 대략 50명 정도가 커뮤니티를 통해서 소통하고 있고요, 그중 30명은 현재 상황(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폴리나 : 그리고 우리는 벨라루스 독재정권(regime) 피해자들을 위한 기금 펀딩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국의 언론사들과 소통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의견이나 활동에 대한 정보를 한국 언론에서 접하기는 아주 어려워요. [%=사진1%] Q3.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벨라루스 시민들의 여론은 어떠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폴리나 : 그때(2월 24일)가 목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러시아가 북쪽과 남쪽, 동쪽의 3면에서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어요. 이전에도 많은 예측이 들렸지만 아무도 비행기, 배, 로켓을 이용해 3면에서 수도를 침공하는 전면전이 되리라는 것은 몰랐어요. 저는 친구들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이것은 유럽에서의 전면전이다. 한 국가가 우크라이나의 일부도 아닌 국가 전체를 침공한 것이다.”라고 설명했고, 우리 모두 “이것은 잘못됐다.”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어제도, 오늘도 죽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끔찍해요. 이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정말 싫습니다. 그들은 잔인한 괴물이에요. 시민들의 여론은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에요. 분명한 것은 100%의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에요. 제가 본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달해드릴게요. 첫 번째, 벨라루스 시민의 30%가 루카셴코를 지지한다고 밝혔어요. 30%가 최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요. 두 번째, 벨라루스 시민의 80% 이상이 벨라루스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세 번째,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것을 지지합니까?”라는 질문에 벨라루스인들은 40%가 그렇다고 답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아마 70~80%가 그렇다고 답할 거예요. 또 흥미로운 것은 66%의 시민들이 벨라루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일반적인 여론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70%의 시민들은 루카셴코를 지지하지 않아요. 80% 이상의 시민들은 벨라루스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절반 이상의 시민들은 벨라루스가 전쟁 참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해외에 있는 벨라루스인의 95%는 전쟁을 지지하지 않아요. 이 사람들을 한국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숫자들은 믿을 만한 사실이에요. 그리고 벨라루스의 여론이 흑백으로 매우 나뉘어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해요. (이 전쟁에 대해)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는 벨라루스인은 거의 없어요. 알렉세이 :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벨라루스에서 많은 소문이 있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저도 그랬고요. 제가 처음 전쟁에 대해 들었을 때 직장에 있었어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던 것처럼 매우 이른 시간에 시작됐죠. 뉴스를 보고 믿을 수 없었어요. 저는 우크라이나인 동료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벨라루스 영토에서도 공격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는 큰 배신감을 느꼈어요. 사실 우리 정부는 이전에도 시민들을 배신했어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향한 공격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어요. 그리고 한국의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가 교회 앞 집회를 조직했다는 사실을 들었어요. 그래서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의 시위에 참여했어요. 그 이후로 우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맞선 벨라루스인 시위도 조직했어요.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벨라루스에서도 철군할 것을 요구했죠. 우리는 러시아 군대가 우리의 영토에서 공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폴리나 : 침공 이후 일주일 동안, 벨라루스에서도 시위가 있었어요. 목요일에 침공이 발생했고, 그 주 일요일에 제 가족이 시위를 하러 갔어요. 저의 여동생과 어머니, 대학 친구들이 두려워했던 기억이 나요. 여동생이 저에게 영상을 보내줬어요. 영상 속에서 여동생이 우크라이나 대사관 대문 앞에 꽃을 두자, 벨라루스 경찰들이 “여기서 나가라. 당신들은 법을 어기고 있다. 멈추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라고 소리치고 있었어요. 알렉세이 : 벨라루스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해요. 우크라이나 침공 3일 뒤인 일요일에 벨라루스의 헌법 개정에 관한 국민 투표가 있었어요. 폴리나 : 벨라루스에서는 거리에 10명 이상 모이는 것이 불법이에요. 그래서 만약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싶다면, 합법적인 이유가 있는 것처럼 가장해야 해요. 사람들은 헌법 개정 국민 투표를 합법적인 이유로 활용해서 전쟁 반대 시위를 했어요. 공식 투표소 앞에서 전쟁을 멈추라고 항의했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됐어요. [%=박스2%] Q4.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정부가 푸틴을 지지하고 러시아에 군사적 지원을 하는 것에 대한 벨라루스인들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앞서 말씀해주신 부분 외에 추가하실 부분이 있으신가요? 폴리나 : 네, 이미 말했듯이 시민들 중 30%만 루카셴코를 지지해요. 루카셴코는 28년 동안 권력을 잡고 있고, 우리가 여러 번 물러나라고 말했지만 듣지 않고 있어요. 2020년에 큰 반정부 시위가 있었어요. 거리에서 100,000명의 사람들이 루카셴코에게 물러나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그때 러시아가 루카셴코를 도왔기 때문에 아직도 그가 권력을 유지하고 있어요. 미국, 유럽연합(EU), 국제사회에 루카셴코가 당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큰 운동이 있었어요. 루카셴코는 러시아나 다른 독재 국가들 외에는 지지자가 없어요. 그래서 푸틴이 침략을 계획하고 있을 때, 그는 루카셴코에게 "나는 당신의 친구이고, 당신은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 나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기 위해 벨라루스의 영토를 사용하고 싶다."라고 말했을 거예요. 루카셴코는 여기에 “NO”라는 선택지가 없었겠죠. 그래서 저는 루카셴코가 벨라루스의 독립성을 푸틴에게 팔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진2%] 저는 국제사회가 2014년 당시처럼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고 생각해요.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벨라루스에서 평화를 위한 큰 회의가 있었어요. 루카셴코가 "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평화를 만드는 것을 도울 것이다. 벨라루스에 오면 평화를 이룰 수 있다."라고 말했어요. 이제 아무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는 러시아의 꼭두각시이기 때문이죠. 그는 범죄자에요.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벨라루스 시민들을 배신하고 있어요. 알렉세이 : 벨라루스 정부의 행보와 벨라루스 시민들의 요구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왜냐하면 벨라루스 시민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2년 동안 이 정권에 저항하는 시위를 해왔기 때문이죠. 현재 정부가 벨라루스 시민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요. 폴리나 : 루카셴코는 무엇을 하든지, 벨라루스 시민들을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아요. 그는 “벨라루스 시민들을 위한 것이 무엇일까?”가 아니라 “내가 대통령을 유지하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될까?”를 생각해요. 알렉세이 : 물론 루카셴코는 이 일(전쟁)에 관여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죠. 우리는 그에게 투표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가 이 전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은 필요해요. 폴리나 : 벨라루스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것을 돕고 있어요. 우크라이나는 반격할 권리가 있어요. 우크라이나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벨라루스에 반격할 권리가 있어요. 벨라루스는 우크라이나를 향해 로켓을 발사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벨라루스에 그렇게 하지 않아요. 우리가 두려운 것은 루카셴코가 우리의 신뢰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실질적인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거예요. Q5.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거나, 이긴다면 어떤 미래가 예상되시나요? 폴리나 : 만약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긴다면,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일부가 돼요. 저는 몇 주 동안 울 거예요. 우리는 "자유로운 우크라이나 없이 자유로운 벨라루스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크라이나 군대는 이미 8년 동안 싸워왔어요. 그리고 우크라이나 군대는 나토의 지원을 받고 있죠. 만약 우크라이나군이 이 전쟁에서 진다면, 벨라루스 사람들은 러시아에 저항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미 보신 것처럼, 푸틴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벨라루스로 갔죠.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어요. 일부 벨라루스인들은 ”우리는 러시아 점령하에 있다."고 말해요. 그래서 만약 우크라이나인이 진다면, 벨라루스도 함께 지는 거예요.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한국인들은 일본 점령에 맞서 싸웠죠. 똑같아요. 만약 우크라이나가 진다면, 벨라루스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러시아의 점령에 맞서 싸우는 거예요. 알렉세이 : 그런 일은 벨라루스의 독립성과 언어에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되겠죠. 왜냐하면 러시아는 강한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우크라이나가 이 전쟁에서 진다면 벨라루스 역시 하나의 국가로서 러시아에 지는 것이에요. Q6. 이전부터 벨라루스를 포함한 러시아 인근 국가들에 군사적 긴장감이 있었나요? 그것이 이번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알렉세이 : 먼저, 2008년 조지아의 사례가 있죠.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공해서 일부를 차지했어요. 그 후 2014년에 크리미아 침공 사태가 있고, 돈바스 지역에 불안을 조성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러시아는 세계에 불안정성을 확대하고 있어요. 러시아는 시리아, 베네수엘라 정부와도 연루되어 있어요. 몰도바에도 러시아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요. 전쟁 이후로 큰 (군사적) 긴장이 있어요. 벨라루스 영토에서 많은 러시아군의 군사 활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벨라루스 정부가 아니라 우크라이나나 민간 모니터링 프로젝트, 출판 활동을 하는 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전달받아요. 폴리나 : 우리 모두가 많은 우크라이나 게시물을 볼 수 있죠. "러시아는 침략자다. 러시아는 제국주의 정부다. 많은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했지만 흥미롭게도 국제사회는 여전히 "러시아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러시아도 나쁘고, 미국도 나쁘다."라고 말하죠. 역사는 전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이 역사는 우리에게 왜 이 전쟁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줘요. 왜냐하면 러시아 내부에는 병든 제국주의 사상이 있고, 러시아의 권력자들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에요. 역사는 많은 나라들이 "다음은 나다."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어요. 러시아는 매우 큰 불량배에요. 하지만 단결해서 맞서 싸우는 대신, 많은 나라들은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다치고 싶지 않아.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요. 전문가들이 "러시아가 조지아와 크림반도를 침공했을 때 국제 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국제사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가 더 큰 일(전쟁)을 생각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나네요. 이 전쟁은 러시아에 의해 행해진 다른 곳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보다 훨씬 더 많이 중요해요. Q7.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양보하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현재 가장 필요한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폴리나 : 그것은 ‘헛소리’에요. 방금까지 러시아 역사를 이야기했죠. 러시아는 체계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했어요. 비유를 해볼게요. 도둑이 당신의 집에 들어와서, 돈을 훔치고, 밖으로 나갔다면 당신은 도둑이 돈을 가져가도록 놔둬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지금은 러시아와 싸울 때가 아니라 영토를 포기하고 휴전하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나쁜 전략이에요. 왜냐하면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기 때문이죠.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 하는 4천만 명의 시민들이 있어요. 반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는 합쳐도 5백만 명이 되지 않는 작은 나라예요. 그래서 만약 우크라이나에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전쟁터의 최고의 군인에게 팔짱을 끼고 희생만 하라는 것과 같아요. 우크라이나인들을 만난 적이 있나요?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아서 싸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나요? 조지아는 러시아가 침공했을 때 그러지 못했어요. 누가 러시아에 맞서 싸웠나요? 아무도 못 했지만, 우크라이나가 하고 있어요. 무기를 지원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을 지지해야 해요. 지금 지지하지 않는다면,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거예요. 알렉세이 : 우크라이나에 영토 일부를 양보하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러시아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알아야 해요. 우크라이나 언어와 같이 우크라이나적인 모든 것이 타겟이 되었어요.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책을 불태웠어요. 그 지역에 있는 시민들은 위험에 처해있어요. 이전에 침공 당했던 크리미아나 돈바스 지역을 포함해서 우크라이나의 모든 영토에서 그들을 쫓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에요. 폴리나 : 제 생각에 우크라이나를 도울 방법이 무엇일지 궁금하실 것 같아요.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들을 도울 방법은 무엇일지요. 저의 대답은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방어용 물품을 주는 거예요. 우크라이나는 도시를 지키기 위한 탄약과 로켓이 필요해요. 첫 번째 대안은 러시아산 가스와 연료를 훨씬 더 빠르게 불매하는 거예요. 독일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니에요. 러시아는 매일 무역으로 수천억 달러를 벌고 있어요. 러시아와의 무역을 중단해야 해요. 한국에도 친러시아 로비가 있지 않을까요?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는 한국 정부에 벨라루스 대사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했어요. 벨라루스 대사는 KGB(국가보안위원회) 요원이거든요. 우리는 한국 정부에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라. 그는 우리를 감시하고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한국 정부는 별 도움이 안 됐어요. 어쨌든 첫 번째로 우리는 희생할 필요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우크라이나인들은 말 그대로 그들의 삶을 희생하고 있어요.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정부를 돕기 위해 캠페인을 조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을 돕고 싶지만, 무장시키고 싶지 않다면 다른 희생이 필요해요. 러시아와의 무역으로 겨울에 사용할 가스를 희생해야 해요. 전쟁은 희생 없이는 끝날 수 없어요.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은 같이 러시아에 대한 한국 정부의 더욱 적극적인 제재를 요구하는 청원을 조직했어요. 하지만 예상보다 지지가 아주 적었어요. 많은 대안이 있지만 저는 첫 번째로는 러시아의 연료나 가스와 같은 경제, 두 번째로는 사업, 세 번째로는 외교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8. 벨라루스 민주노총(BKDP)이 러시아를 비판하자 루카셴코 정부가 해산 명령을 내렸습니다. 벨라루스 내에서의 사회운동 탄압이 얼마나 심각한지 사례를 듣고 싶습니다. 알렉세이 : 작년 5월에 벨라루스 정부가 국가에서 가장 큰 언론사를 폐쇄했어요. 정부가 대통령이 싫어하는 말을 하는 CEO나 기자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넣고, 웹사이트를 차단한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당시에 벨라루스의 독립 NGO 단체 대부분이 폐쇄됐어요. 생태, 인권, 변호사 단체, 언론인 단체 등이었죠. 정부는 그 단체들을 고소해서 폐쇄했죠. 그다음으로 노동조합이 타겟이 됐어요. 왜냐면 작년까지 정부는 차라리 노동조합은 비교적 온건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고 있죠. 언론이 가장 극단적으로 탄압받고 있어요. 왜냐하면 언론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달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벨라루스 언론은 인터뷰와 같은 방식으로 시위를 전달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정부의 첫 번째 타겟이 되었어요. 그래서 벨라루스의 5~10개 정도의 큰 언론사들이 불법이 되었어요. 기자들은 벨라루스를 떠나 해외에서 일하죠. NGO들은 완전히 불법이고 친정부적인 NGO들만 살아남을 수 있어요. 벨라루스에서는 아무도 체포되지 않는 날이 없어요. 그래서 2020년의 시위 이후 사회단체나 언론을 포함해서 시민들이 연합해서 지역 커뮤니티를 형성했어요. 경찰들은 그것을 멈추려 하고요. 이제는 공식적인 집회가 아니라 모든 모임이 공격받고 있어요. 폴리나 : 한국에서는 누군가를 체포할 때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하죠. 예를 들어 볼게요. 벨라루스의 시위를 대표하는 깃발(제목 밑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을 보세요. 그 깃발은 1990년대 벨라루스의 공식 국기였고 지금은 시위의 상징이에요. 제가 백-적-백색의 사탕을 두고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게시한다면 체포돼요. 게시물의 사탕이 불법성을 표현한다는 이유로요. 옷, 운동화, 양말 어떤 것이든 백-적-백색을 나타내면 체포돼요. 만약 벨라루스에 온다면 백-적-백색으로 입지 마세요. 체포돼서 15일 동안 유치장에 있게 될 거예요.(웃음) 알렉세이 : 사실 경찰에게는 이유가 필요 없어요. 경찰은 언제나 “경찰에게 위협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보고서를 쓰면 감옥에 가두기 충분하니까요. 폴리나 : 기자와 변호사가 특히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어요. Q9. 한국에 사는 벨라루스인들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뿐만 아니라 재한 러시아, 우크라이나인들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알렉세이 : 2020년 벨라루스에서의 선거와 시위 이후, 한국에서도 활동이 있었는데요. 저는 이때가 재한 벨라루스인들이 가장 많이 모인 날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후로는 한국 정부에게 인권을 탄압하는 벨라루스 정부와 교류하지 말라는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어요. 왜냐하면 벨라루스에 대한 결의안을 한국이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거든요. 한국은 2020년의 벨라루스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지 않은 나라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한국 정부와 벨라루스 독재정권의 (무역적) 협력을 반대했어요. 그래서 여론을 모으기 위해서 기자회견을 열어 독재정권과 협력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주장했죠. 그리고 시위 1년을 맞은 2021년 8월에는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시작인 광주에 방문했어요. 5·18 관련 단체들과 공동 행사를 하기도 했어요. 그 후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고, 우리는 한국의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를 지지하면서 시위에 참가했어요.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에서는 2주에 한 번씩 정기적인 시위를 진행해요. 지금까지도 저희는 그 행사에 참여하고 있어요. 러시아인 커뮤니티도 다른 장소에서 작은 집회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폴리나 : 벨라루스에서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해외에서 벨라루스에서는 하기 힘든 주장을 하고, 벨라루스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중요해요. 올해에는 벨라루스 영화를 상영하는 등 벨라루스 문화를 알리는 행사도 하려고 해요. 알렉세이 : 우리 단체가 아주 작기 때문에 다른 사회단체들과도 소통하려고 노력해요. 우리는 자원이 많지 않아서 우리를 도와줄 한국의 운동단체들과 접촉하려고 해요. Q10.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두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 문제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왜 전 세계 시민들이 우크라이나에 연대해야 하나요? 폴리나 : 앞서 러시아가 다른 나라들을 침공했던 것을 말했죠. 그 나라의 시민들이 볼 때 답은 명확해요. 우리(벨라루스인)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 러시아의 점령을 멈춰야 벨라루스의 독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제가 알기로 우크라이나 군대 내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벨라루스인이에요. 만약 한국이 러시아에 의해 침공 당한다면 아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한국은 그런 적이 없어서 왜 우크라이나를 지지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어요. 제 생각에 지금까지의 인터뷰에서 확실한 것은 러시아 정부가 위험하다는 것이에요. 러시아가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것에 타당한 이유를 하나라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러시아 정부는 아주 비합리적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러시아가 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러시아는 어디서든 핵폭탄을 발사할 수 있어요. 그게 나토, 유럽, 미국 등 어느 곳도 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을 거예요. 우크라이나에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데 러시아는 그곳을 폭격하면서 핵 연료 누출의 가능성이 있죠. 식량 위기도 들으셨을 텐데요. 아프리카는 우크라이나에 밀을 의존하고 있어요. 폭격 때문에 아프리카 시민들이 굶주릴 수 있어요.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많은 국가가 모여 의견을 나누고 국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보셨을 거예요. 국제사회가 같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러시아가 많은 것들을 방해하고 있어요. 시리아, 미얀마, 북한, 베네수엘라 등과 같이요. 4차 산업혁명, 기후 위기, 격차 문제 등 국제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어요. 이 방해꾼들은 국제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이들은 사실상 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해요. Q11.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폴리나 : 우리 커뮤니티와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는 아주 작아요. 그래서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힘들어요. 우리를 지원하고 싶다면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요. 우리의 이야기는 한국 언론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많이 다르죠. 우리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 해주세요. 커뮤니티 공식 웹사이트도 곧 만들려고 해요. 우리 커뮤니티는 성장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당장은 다른 단체에 도움을 구하고 우리도 다른 단체의 행사에 참여하려고 해요. 문화 행사나 정치 활동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참석할 거예요. 우리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행사에 참여해주는 것도 부탁드려요. 알렉세이 : 한국인들이 벨라루스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아주 기쁜 일이에요. 이 인터뷰도 정말 좋았어요. 전쟁이 길어지면서 벨라루스 내에서도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데 우리 커뮤니티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계속 노력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사진3%] 인터뷰 취지
[%=박스1%]
윌슨은 1차 세계전쟁이 종전을 향해 가던 1918년 시점에, 그 유명한 ‘14개조 평화원칙’을 통해서 자결권 담론을 국제적으로 널리 퍼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이 1917년 4월, 1차 세계전쟁 참전을 결정한 후,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8일, 의회 연설 형식으로 바로 이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했다. 14개조는 ‘자결’, 또는 ‘민족자결’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윌슨의 담론은 훗날 자결 개념이 제도화되고, 국제법으로 성문화될 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윌슨이 국제무대에서 자결이라는 표현을 직접 처음 쓴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 후인 1918년 2월 11일, ‘4개 원칙’ 연설이었다. 이 역시 뒤에서 다룬다.)
윌슨이 자결에 관해 언급할 당시는 1차 세계전쟁의 이데올로기적 경쟁이 극심할 때였다. 미 행정부는 윌슨의 말이 정치선전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실제로 ‘공공정보에 관한 미국 위원회’의 수장은 윌슨의 전시 연설들이 미국이 전쟁에 참여한 동기, 목적, 이상을 세계에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고, 그래서 우방국, 적대국, 중립국 모두가 미국이야말로 이기심이 없고 정의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보게 했다고 스스로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윌슨은 파리 강화회의에 도착했을 때 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레닌이 민족자결에 대해 처음 언급할 때는 1917년 혁명 이전으로, 현실에서 민족자결을 결정할 정치적 힘이 전혀 없었다. 반면 윌슨은 처음 이를 언급할 때, 미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즉 레닌이 처음에는 심각한 의견 차이를 보인 마르크스주의 집단 내에서 동지들을 설득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면, 윌슨은 처음부터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초기 레닌이 민족자결 문제의 이론적 해명에 집중했다면, 윌슨은 주로 전쟁과 관련된 실용적, 외교적 관심사에 초점을 맞췄다. 이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윌슨 14개조의 배경: 혁명 러시아와 이데올로기적 경쟁
첫째, 윌슨은 국무부가 보이는, 볼셰비키에 대한 맹렬한 적대감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는, 1차 세계전쟁 이전에 러시아가 행하던 비밀외교와 합병에 대해 볼셰비키가 반발할 권리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가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즉, 볼셰비키가 제시한 비판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볼셰비키가 유발할 수 있는 ‘무질서’를 우려했다.
둘째, 그는 러시아가 연합국의 편에 남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했고, 1917년 12월에 시작된 혁명 러시아와 독일의 강화협상에 대해 우려했다. 따라서 볼셰비키의 요구에 직접적으로 응답하면서, 그들과 대화의 문을 열고 연합국 편에 남도록 설득하고자 했다.
셋째, 윌슨은 유럽대륙이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볼셰비키가 대중에게 이데올로기적 매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자결권 개념에 담긴 세계적 매력과 공개적으로 경쟁할 필요가 있었다. 즉, 세계의 관심을 볼셰비키의 비전으로부터 미국의 이데올로기와 정치로 되돌리고자 했다. 2. 14개조의 구체적 내용: 민족자결의 개념화
또한 14개조는 “식민지에서 주권과 같은 문제들을 결정할 때, 당사자인 주민들의 이해는 법적 권리의 결정을 기다리는 정부의 정당한 청구와 동등한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기반 위에서” 식민지의 요구가 해소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5조). 그리고 그는 “외국군이 러시아의 모든 영토에서 철수해야 하며”(6조), 벨기에의 주권이 회복되어야 하며(7조), “알자스-로렌 문제에 관해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가한 부당 행위”는 시정되어야 한다고(13조) 주장했다.
이처럼 윌슨은 국가경계를 결정하는 지침으로서 민족성(nationality)을 언급함으로써, 자결이 ‘민족’을 기준으로 정의된 개념이라는 근거를 창출했다. 또한 벨기에나 프랑스에 관한 언급은 자결이 타국에 의한 점령과 병합의 종식 후, 국가주권의 재확보, 재확립과 연결되도록 했다.
한편 러시아에 대한 언급은 당시 러시아에 대한 윌슨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또한 식민지의 요구를 ‘정부’, 즉 식민모국의 청구와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언급은 당시 볼셰비키가 자결을 ‘반제국주의’와 연결하려는 노력에 대해 윌슨이 어떤 식으로 대응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3. 윌슨의 4개 원칙: 자결론에 대한 직접적 언급
첫째, 유럽 영토에 대한 조정은 오로지 “영구히 지속될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실행되어야 한다.
둘째, 평화중재자는 작은 민족들과 지역들의 권리를 존중해야만 한다. 즉, “인민들과 지역들이 어떤 주권국에서 다른 주권국으로 물물교환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지역 주민의 이익이 강대국의 이익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즉 “이번 전쟁에 연루된 모든 영토문제의 합의는 당사자 주민의 이해에 따라,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뤄져야 하며, 그저 경쟁국가 요구들의 조정이나 타협에 따라 이뤄져서는 안 된다.”
넷째,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소집단은, 그들의 목적이 다른 집단과 분쟁을 발생시키면서 “불일치와 적대”를 자극하지 않는 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즉 이번 전쟁의 뿌리는 소규모 민족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은 데 있으며, 따라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영토문제가 당사자 주민의 이해에 따라 해소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윌슨은 전후 평화로운 질서를 보장하기 위해서 불안정성에 대한 치료제로서 민족 ‘자결’을 제시한다. “민족적 열망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 인민은 이제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고, 그들 자신의 동의에 따라 통치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자결이라는 원리를 무시하는 정치인은 곧 위험에 부딪칠 것이다.4. 민족자결 이론에서 나타나는 윌슨과 레닌의 차이: 민족자결론의 탈급진화
첫째, 레닌이 민족자결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근본적 평등으로서 자유’라면, 윌슨의 근거는 ‘평화로서의 자유’였다. 간단히 말해, 레닌이 민족 간의 근본적 평등을 강조했다면, 윌슨은 민족 간의 평화를 중시했다. 따라서 강대국 간 평화를 위해서 식민지 민족의 평등은 때때로 무시될 수도 있다는 함의를 지녔다.
둘째, 윌슨은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불간섭, 즉 항행과 무역의 자유를 중시했는데, 이를 곧 ‘자유로운 민족들의 자유’(freedom of free nations)라고 간주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유주의야말로 평화를 보장한다고 보았다. 물론 윌슨이 강조했던 민족국가 간의 평화로운 자유무역은 당시의 노골적인 식민주의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즉, 국가 간 부의 불평등한 이전)는 자유무역 시스템을 통해서도 작동할 수 있다.
셋째, 윌슨의 자결 담론은 ‘아래로부터의’ 인민주권이라는 관념과 거리가 멀다. 즉, 인민이 자신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관념을 옹호하기보다는, 인민의 의지를 직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경륜이 있는 지도자에 초점을 맞춘다. 실제로 윌슨은 인민들이 위험스러운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고, 그럼으로써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윌슨은 자신이 “제퍼슨과 같은 민주주의자이지만, 귀족적 취향을 지녔다”고 말했다.)
실제로 윌슨은 자결이라는 표현과 ‘통치를 받는 자들의 동의’(the consent of governed)라는 표현을 종종 구별 없이 사용하며, 특히 후자의 표현을 훨씬 더 많이 쓴다. ‘통치를 받는 자들의 동의’에서 인민은 정치적 위계구조의 최하층부에 있으면서 수동적이고 통치를 받는 단위로 인식된다. 이러한 통념에서 인민은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나, 통치와 입법의 원천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종합해보면, 윌슨의 자결 담론은 이데올로기적 대결이 격렬하던 1차 세계전쟁 시점에서 볼셰비키의 권위를 잠식하는 효과를 발휘하고자 했다. 즉, 윌슨은 세계적으로 호소력이 있던 레닌의 민족자결론을 자신의 방식대로 흡수하면서 급진적 함의를 벗겨내고, 그 자신의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관념과 연결시켰다.5. 윌슨의 자결 이론이 보인 결정적 한계: 파리 강화회의와 식민지배의 영속화
결국 1918년 가을, 미국 관리는 윌슨의 14개조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보유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발언했다. 이러한 보장을 받고서야 다른 연합국들은 14개조와 그 후 윌슨이 발표한 여러 연설문에 제시한 원칙에 따라 강화회의를 여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윌슨이 제시한 원칙은 민족자결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다른 연합국들은 식민지의 해방을 함의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민족자결 담론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19년 1월부터 시작된 파리 강화회의 당시, 윌슨의 자결 담론은 놀랍게도 식민주의와 양립할 수 있었다. 윌슨은 질서, 평화, 국가의 불간섭(항행과 무역의 자유)과 같은 가치를 계속 강조했지만, 연합국들의 식민지배는 이러한 가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듯이 식민지배를 수용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파리 강화회의가 실제로는 식민주의를 영속화하면서, 강대국의 민족적 이익에 따라 영토문제를 처리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1차 세계전쟁 동안 세계 인민은 윌슨이 민족자결의 화신이라고 보았고, 윌슨에게 서한이나 면담, 청원을 통해서 자신의 자결 요구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그러한 집단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행하지 않았다. 즉, 윌슨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을 보편적 행동원리로 삼지 않았다. 왜 그랬나. 윌슨 본인의 민족자결 담론이 전달하고자 했던 바와, 세계인이 그것을 해석했던 바 사이에 크나큰 간극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6. 파리 강화회의와 승전국 식민지 문제: 한국 사례
파리 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한 민족은 모두 30여 개에 달했는데, 여기에는 승전국 식민지와 패전국 식민지, 또는 승전국·패전국과 무관한 민족이 모두 포함되었다. 즉, 발트해 북부의 올란드 제도(Åland), 오스트리아, 벨기에, 중국, 한국, 베트남, 이집트, 스페인, 조지아, 그리스, 온두라스, 헝가리, 아일랜드, 이탈리아, 유태인, 발트3국, 라트비아, 레바논, 리투아니아, 몬테네그로, 스칸디나비아 3국, 폴란드, 포르투갈, 세르비아, 스위스,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청원서를 제출했다. (강조 표시를 한 것은 윌슨이 14개조에서 독립을 보장한 민족이다.)
파리 강화회의와 관련된 한국의 청원서는 △여운형의 청원서, △이승만과 정한경의 위임통치 청원서, △국내 유림이 작성한 ‘파리장서’, △김규식이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1919년 4월에 보낸 청원서, △김규식이 1919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대표단 명의로 보낸 청원서가 있다. 이중에서 강화회의에 최종 제출된 청원서와 비망록은 김규식이 작성한 것뿐이다. 김규식이 임시정부 대표단 명의로 보낸 청원서의 요지는, “한국민족은 1910년 8월 22일 기만과 폭력에 의해 강제 체결한 ‘합병조약’의 영구폐기를 요구한다”라는 것이었다. (김규식이 4월에 신한청년당 대표로서 보낸 청원서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제안한 반면, 5월에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보낸 청원서에는 위임통치 제안이 빠진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룬다.)
한국 대표단은 일본이 승전국의 지위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상황에서, 한국의 민족자결 문제가 회의에 상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표단은 파리 강화회의가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세계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승전국들의 냉정한 태도에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7. 국제연맹 창설과 위임통치제도: 패전국 식민지의 분할
윌슨은 자신이 제시한 자결에 관한 원론적 입장이 현실 정책으로 구체화될 때, 오로지 충분히 ‘계몽된’ 민족만이 평등한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윌슨의 표현에 따르면 ‘평화롭게 법을 준수할 수 있는 성숙성을 보인 민족들’에게만 평등이 적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일랜드처럼 법을 어기며 폭력을 행사하는 (식민지, 종속국의) 민족은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며, 따라서 민족으로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스스로 정당화했다.
이처럼 윌슨은 ‘자격이 없는’ 민족이 무조건적으로 국가를 창설하고 평등한 대우를 받는 정책을 부정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1918년 말에 이르러 위임통치 제도(mandate system)가 질서있는 통치를 위한 안전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위임통치 제도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윌슨이 가장 힘주어 강조한 정책이 되었다. 국제연맹 규약이 최종으로 성안될 때, 위임통치 제도는 과거 러시아, 오스만, 함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인민들에 대한 ‘최종처분권’을 국제연맹에 부여했고, 국제연맹에 속한 특정 국가가 각 위임통치국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윌슨이 감탄한 위임통치 제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얀 스뫼츠 총리가 제안했다. 1918년 말에 제시된 ‘스뫼츠 플랜’에 따르면, 서양 문명국은 자기통치 능력이 없는 민족이 통치 능력을 보유하도록 그들을 육성할 특별한 책임을 져야 했다. 윌슨은 스뫼츠 플랜을 읽자마자 위임통치 제도를 그의 국제연맹 규약 초안에 포함시켰다.
미국 행정부와 그 동맹국들도 모두 위임통치 제도를 찬성했다. 미 국무장관 랜싱은 당시 동맹국이 위임통치를 열렬히 환영한 배경에는 그들이 (독일로부터 받을 전쟁배상금을 깎아주지 않고도) 독일이 보유하던 식민지를 위임통치 명목으로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위임통치를 받게 된 민족 중 소수는 국제연맹에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위임통치 형태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오로지 국제연맹과 위임통치를 맡은 국가들만이 언제 ‘자기통치’(실질적 독립)를 실시할지 결정할 권한이 있었고, 위임통치를 받게 된 민족은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채 종속된 상태에 머물러야 했다.8. 이승만, 김규식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 이승만과 이동휘의 노선 분화
그런데 특히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은 3·1운동 이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논란을 빚었다. 독립전쟁론을 주장한 임정 내 이동휘 세력, 하와이와 원동의 박용만 세력, 북경·만주·노령 지역의 일부 독립단체들이 특히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강력히 비판했다.
예컨대, 1919년 11월 임정의 국무총리로 부임한 이동휘는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에 종속된 상태이지만 얼마간의 자치권을 획득하여 독립의 토대로 삼자는] 자치운동이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원하는 외교가는 원치 않는다”라고 분명히 못을 박기도 했다. 이동휘가 혁명 러시아와 연계한 사회주의 운동의 길을 걸어간 사실은 자치운동이나 위임통치를 반대한 그의 입장과 분명히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당시 이동휘는 이미 1918년 5월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의 대표였다. 반면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 당시 한국의 실정과 국제정세를 다각도로 고려한 ‘현실적인 차선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우리는 이동휘와 이승만의 노선 분화가, 궁극적으로는 민족자결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할 것이냐를 두고 나타난 레닌과 윌슨의 쟁점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동휘가 고심 끝에 임시정부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당대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운동(민족주의적 독립운동)과 연대, 결합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자치운동이나 위임통치 청원 운동과는 확실히 선을 긋고자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당대 사회주의자가 지향한 ‘민족해방운동론’이 실천적으로 어떤 길을 걷고자 했는지 읽어낼 수 있다. 9. 파리 강화회의 이후 레닌의 민족해방운동론: 파리 강화회의와 국제연맹 비판
이 소위원회에 레닌이 제출한 글,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1920년 7월 28일)는 1차 세계전쟁과 파리 강화회의에 대한 그의 평가를 분명히 제시한다. “양대 진영은 이번 전쟁을 민족해방과 [민족]자결이라는 상투적인 말로 정당화했다.” 그러나 체결된 강화조약은 “승리한 부르주아가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 ‘민족’ 간 국경선마저 가차 없이 바꿔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부르주아에게는 ‘민족’ 간 국경선마저 거래대상이다. 이른바 국제연맹은 이번 전쟁의 승자가 그들의 전리품을 서로 보장하기 위한 보험계약에 불과하다.” 애초 레닌이 전쟁을 중단한 방안으로 ‘영토병합과 배상이 없는 즉각적인 종전’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회고해 보면,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에 대한 레닌의 이러한 비판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실제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반환한 사례를 포함해 유럽 영토의 13%, 인구의 10%(650~700만 명)를 잃었다. 그렇다면 승전국의 노골적인 전리품 약탈에 관한 독일 부르주아의 항의는 정당한가.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 “부르주아에게 있어서 민족적 통일성을 재확립하고 분리된 영토를 재통일하려는 시도는 전쟁에서 완패한 자들이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군사력을 모으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인위적으로 찢긴 민족을 재통일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오로지 혁명적 투쟁을 통해서, 부르주아를 제압함으로써 진정한 민족해방과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팽창주의적이고 호전적인 독일 부르주아가 재통일을 추진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이 될 것이고, 또 이번에는 승전국이 되어 다른 나라의 영토를 더 약탈할 것이므로 이는 결코 지지할 수 없다. (이는 곧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히틀러의 독일이 벌인 2차 세계전쟁을 예언하는 듯 보인다.) 레닌이 보기에, 오히려 유럽 대륙 전반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혁명의 불길이 타올라야만 과거에 벌어졌던 제국주의 국가 간 약탈적인 영토병합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소할 길이 열릴 수 있다.
실제로 레닌은 혁명 러시아가 과거 차르 치하에서 획득했던 영토나 이권을 반환하고 원상회복이 되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1919년 7월 27일 외무위원장 레프 카라한 명의로 발표한 반제국주의 선언에서 중국 문제에 대한 입장을 보면, △ 제정 러시아가 중국과 체결한 비밀조약을 페기한다, △ 만주 중동철도와 그 이권을 중국에 무상으로 반환한다, △ 중국에 대한 배상금 청구를 포기한다, △ 제정러시아가 보유하던 중국 내 조차지와 영사재판권이라는 특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연히 이러한 러시아의 입장은 중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한편 파리 강화조약의 결과,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민족자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래서 레닌은 테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식민지와 피억압 민족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동맹하는 것 외에는, 또 소비에트 권력이 세계 제국주의에 승리하는 것 외에는 자신들이 구원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쓰디쓴 경험을 통해 확신해 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민족해방운동, 식민지해방운동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가능한 한 가장 밀접한 동맹을 실현하는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또한 레닌은 테제의 말미에 이렇게 덧붙인다.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와 약소 인민을 오랫동안, 현재에도 노예화했기 때문에 노예화된 나라의 노동 인민은 억압민족[제국주의 열강]에 속한 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해 억압민족 전반에 대한 억울한 마음뿐만 아니라 불신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불신과 편견을 신속히 극복하기 위한 양보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처럼 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민족문제, 식민지문제를 강조한 만큼, 대회 직후인 1919년 9월 1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1차 동방인민대회도 열렸다. 터키, 인도, 아프가니스탄, 중국, 조선의 대표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미국, 일본의 급진적인 반제국주의 대표도 참석했다. 37개국에서 무려 1891명의 대표가 모였다. 이 대회에서는 “만국의 노동자와 모든 피억압민족이여 단결하라”라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또한 대회의 결정에 따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산하에 상설기관으로 선전선동 평의회를 구성하여 기관지 《동방인민》을 출판하기로 했다. 또한 1921년 모스크바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10. 레닌의 민족해방운동론이 조선에 일으킨 반향
몇 년 후 김단야가 남긴 기록이 있다. 김단야는 《조선일보》에 1925년 1월 22일부터 2월 3일까지 11회에 걸쳐 「레닌 회견 인상기 – 그의 서거 1주년에」를 연재했다. 레닌과의 회견에는 조선인 중에서 김단야 본인 외에 여운형, 김규식, 김시현, 최고려, 현순 등 5명이 참여했고, 중국, 일본, 몽골, 자바의 대표를 포함해 모두 20명이 함께 했다. 김단야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21년 11월 11일의 일이다. 그날은 태평양회의라는 명의 아래 세계의 열강 대표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 모며 태평양을 중심으로 나타나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모인 날이었다. 세계의 모든 시선은 그리로 모여 실로 회의는 일시 전세계의 주목의 초점이 되었다. … [조선, 중국, 일본, 기타 태평양 연안 신문의] 모든 논조의 대개는 그 회의가 동양민족의 앞길을 잘 해결하여 주리라고 쓴 것이 많았다. 그래서 더욱이 약자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조선민족은 이 회의를 태산같이 믿은 사람도 적지 않았었다. … 그러나 그 회의는 … 이미 결과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은 세인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며, 그 결과가 동양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 회의는 … 동양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과거에 태평양 연안에서 자유경쟁에 따라다니는 이권쟁탈로 인하여 피차에 생긴 알력으로 말미암아 열강 사이에 국교가 자못 위험케 된 중에 … 일본과 미국 국교는 극도로 위험에 빠진 것을 좀 유완케 하고자 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이권쟁탈 지대를 분배하여 서로 충돌이 없이 좀 더 조직적으로, 협의적으로 동양천지를 착취하게 된 것이었다.
… 그때에 북쪽 붉은 나라 안에 근거를 둔 세계무산자해방운동의 본영인 국제공산당에서는 일찍 그 회의의 성질을 간파한 동시에 그 결과까지도 미리 알았다. 그리하여 동양의 약소민족과 노력군중에게 실로 사활문제를 가진 것이라 하여 피압박군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단결하여 무서운 독수(毒手)를 대항치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정신에서 원동민족대회를 소집케 된 것이었다. 그래서 동양 각국 안에 있는 노동단체 또는 혁명단체의 대표를 부르게 되어.. 대표 백수십여 인이 붉은 러시아에 모여 [1922년] 1월 15일에 모스크바를 밟게 된 것이었다. … 러시아 황실의 … 궁전 안에서 동양의 망명가, 무산자가 모임을 이루게 된 것은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태평양 회의(워싱턴 회의)란 무엇이었나. 1921년 3월, 미국 대통령으로 새로 취임한 공화당 출신 워런 하딩은 태평양에서 해군의 군비축소와 여타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중국,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8개국에 회의를 제안했다.
이때에도 임시정부는 대통령직에 있던 이승만을 대표로 하여 (초대를 받지 못한) 한국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미 파리 강화회의를 경험했기 때문에 임시정부 내에서도 대표단 파견에 회의론이 있었으나, 결국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국내에서는 《동아일보》가 큰 관심을 보여 연일 기사를 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리 강화회의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도 않았고 거론되지도 않았다.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의 위상에 금이 갔고, 임시정부 내각은 사의를 표명했다.
이러한 참담한 실패 이후, 레닌과 코민테른의 민족문제, 식민지문제에 대한 입장이나, 식민지 민족운동, 계급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 연대 의지는 조선 내에서도 더욱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1. 결론: 레닌과 우크라이나 전쟁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개시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전쟁이고, 20세기의 반제국주의 해방 전쟁과 비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진보연대는 발리바르의 이러한 주장이 담긴 글을 번역하여 「전쟁 속에서: 민족주의, 제국주의, 세계정치」, 《사회운동포커스》, 2022년 8월 3일, 4일로 발간했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첫 번째 정의는,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로 인해, 이 전쟁을 (알제리 전쟁, 베트남 전쟁과 같은) 20세기의 반제국주의 해방 전쟁이나, 심지어 초기 현대 국가들이 영국, 스페인,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분리되며 형성된 것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제 입장은 …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펼쳐지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을 지지해야 할 즉각적인 긴급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족의 독립 그 자체가 절대적인 가치이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히 이것은 [러시아로부터] 부인당한, 우크라이나 민중의 자결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민중은 대규모의 범죄적 전쟁의 희생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패배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을 것이며, 국제 질서에 파괴적인 정치적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침략으로 민족자결 원리가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이 의미하는 바는 자못 심대하다. 우리 시대가 세계전쟁 이전의 세계로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레닌이 살아 있다면 어떤 입장을 취할까. 필자는 레닌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우크라이나 민중의 자결권을 지지하며 이들의 저항에 연대하고 ‘푸틴 타도’를 외쳤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이러한 확신을 입증하고자 했다. ●
재한 우크라이나인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인터뷰
**이 글은 인터뷰를 진행한 <우크라이나 평화 실천단 in 광주>의 동의를 얻어 게재했다. (우크라이나 평화 실천단 인스타그램) 인터뷰 취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요즘 어떤 마음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나요?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들이 인신매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현재 난민들에게 공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한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떠한 한계들이 있을까요?
안드레이 선생님께서는 난민 어린이의 교육 문제에 특히 주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어린이 교육을 위해 현재 준비하고 있는 계획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난민을 향한 시선이나 정부의 지원 등의 측면에서 폴란드와 한국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한국 정부와 시민단체가 난민 지원 측면에서 개선해야 할 지점은 무엇일까요?
[참고] 한국 우크라이나 난민 현황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고려인 난민이 들어왔는지 명확한 통계를 찾아볼 수는 없다. 언론을 참고했을 때 광주 고려인 마을에 550여 명(8월 4일 기준)이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주 고려인 마을에 많은 고려인 난민이 몰린 이유는 올해 3월 말부터 귀한 모금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금 운동을 통해 고려인 난민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항공료를 지원하고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생필품, 쉼터, 소정의 임대보증금과 임차료 등을 지원하고 있다. 광주시에서도 협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민간인 모금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광주 고려인 마을 외에도 ‘경기도 안산 땟골마을’, ‘인천 함박마을’에 고려인 난민이 정착해 민간인 지원단체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이번 질문부터는 우크라이나인의 관점에서 이번 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나토의 동진으로부터 러시아의 안보 위험을 보호하고 우크라이나를 탈나치화하기 위함’이라며 전쟁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푸틴이 말하는 전쟁의 근거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쟁 이후 전 세계적으로 식량 위기와 경제 위기가 심화하면서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떼어주고 평화협상을 맺어야 한다’는 ‘우크라이나 양보론’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난 4월 29일 광주 평화 촛불 문화제에서 선생님께서는 “전쟁을 멈추지 못하면 세계 질서가 파괴되고 확전될 것”이며 “가장 무서운 것은 러시아의 미사일이 아니라 거짓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전쟁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꼭 알려야 하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우크라이나의 평화와 국제연대를 위해 대학생들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끝으로, 인터뷰 글을 읽을 대학생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나요?
역자 해설
전쟁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