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 샤워를 하고 새하얀 방진복을 입은 노동자들의 손에는 티끌 하나 없는 반도체가 반짝인다. 뉴스에서 매연과 분진 없는 공장의 모습으로 소개되는 반도체 산업은 ‘청정 산업’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하였다. 그뿐인가. 작은 판 안에 복잡한 회로가 가득한 그 모습은 반도체 산업이 기술집약적이고 고부가가치의 산업이며, 21세기를 지배할 최첨단 산업이라는 이미지를 부가한다. 사람들은 반도체 산업이 한국 경제를 계속 선도해 나갈 것이라 믿고 있고, 국가경쟁력이 상승됐다며 자부심에 넘쳐한다. 하지만 이런 반도체 산업의 ‘깨끗한 첨단산업’이라는 이미지는 허구이다. 반도체 산업은 기업에게는 돈을 벌어다 주는 첨단기술이지만, 민중은 ‘환경’ 문제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고 그 뒷수습은 국가세금으로 해결된다. 첨단 전자회사의 ‘깨끗한’ 작업장은 반도체 칩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반도체 산업이 지나간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오염으로 가득하다. 반도체 산업은 노동자의 불건강과 지역 환경의 파괴, 그리고 반도체 폐기물을 야기하는 더러운 산업이다. 뿐만 아니라 반도체 산업은 국경을 넘나들며 민중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전자산업의 건강과 환경 파괴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서 반도체 산업은 독립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부터 기업들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이나 노출 양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반도체 산업의 공정상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미리 인지되지 않았고, 인지된 위험도 감취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노동자에게 작업 중 사고가 나거나 질병이 생겨나면서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반도체 산업과 관련된 노동보건, 환경보건 문제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피해자들과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지역사회의 노동, 보건, 환경 운동가들에 의해서였다. 1970년대부터 지역사회의 노동보건운동 소그룹 ‘전자산업 안전보건위원회(ECOSH)’가 화학물질 노출에 의한 건강 문제를 제기해왔다. 1980년 미국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원(NIOSH)이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전자 제조업 사업장에서 최초로 건강유해성 평가를 실시한 것도 이들의 투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또한 주 정부의 조사도 이끌어냈다. 조사 결과는 이 지역의 지하수가 1급 발암물질인 트리클로로에틸렌(TCE)등의 유해화학물질에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그로 인해 지역 주민들이 생식독성에 노출되었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2001년 이후 10년에 걸쳐 스코틀랜드 그리녹에 있는 내셔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암 위험에 대한 역학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역학연구에 정부가 나서게 된 계기도 미국과 유사하다. 그리녹 시에서 노동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암 피해자들의 모임을 꾸리고 지원한 스코틀랜드 노총과 피해 당사자들의 끈질긴 투쟁 때문이었다. 이후 여러 연구를 통해 반도체 제조에 벤젠, 클로로포름, 디클로로메탄 등 발암물질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함께 여성 노동자들의 자연유산율이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미국 반도체 회사들도 여론의 압박에 자체적인 조사를 시작했지만 명확한 결론도 없는 기만적 구색 갖추기에 불과했다. IBM이나 반도체산업협회(SIA) 등이 지원한 연구는 일부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제한적인 결과만을 도출했고, 지원하던 연구 기금을 통제해 추가적인 평가를 불가능하게 했다.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지만 노동자의 질병과 작업환경 사이의 연관성이 확인되면 산업재해 대상이 되고, 기업도 안전 대책을 세워야 하는 등 많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반도체 회사들이 적극적인 조사에 나서지 않았다. 1985년 IBM 연구소에서 일한 한 노동자가 동료 10명 가운데 8명에게 림프종이나 뇌종양이 집단적으로 발병한 것에 대해 회사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부터 전자산업과 암 발생과의 관련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반도체 기업들은 제한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작업장에서 암과 같은 희귀병을 얻은 노동자들이 소송을 제기해도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IBM은 1969년부터 2001년까지 IBM 종사자 가운데 사망한 3만여 명 노동자의 인적 사항과 사망 보험금을 수령한 이들의 내용이 담긴 ‘기업 사망자료’를 축적해 왔지만 이 자료의 존재 자체를 숨겨왔다. 하지만 직업병 피해자들은 회사가 불법적으로 독성 화학물질을 노출시켰고, 유해한 작업 환경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했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기업 사망자료’가 소송 중 법원의 결정으로 2004년에 공개되었고, IBM 노동자들의 암 사망률은 미국인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유력한 증거였던 ‘기업 사망자료’를 판사가 배제하면서 IBM이 승소했다. 그러나 IBM의 직업병 은폐 의혹이 계속 불거졌고, 의혹을 취재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했다. 소송 과정에서 줄곧 노동자들이 일하는 클린룸의 안전성을 주장했던 IBM은 이후 대부분의 작업을 자동화했고, 염화메틸렌, 글리콜 에텔 등 각종 화학물질의 사용도 금지했다. 암을 앓는 250여 명에게는 산재보험금이 지급됐고, IBM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노동자들 대부분에 대해 산재보험을 통해 보상했다. IBM 노동자들의 건강과 환경문제가 사회적으로 알려졌고, 현재 IBM에게 지역 환경오염의 책임을 묻는 집단소송이 이뤄지고 있다. 아시아로 확대되어 온 전자산업과 그에 맞선 투쟁들 노동자들과 지역 사회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산업은 성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시장접근성과 물류 환경 등의 특성을 살리면서 공급망을 구축했다. 아시아 전자산업은 1970~80년대 미국과 유럽의 전자회사들이 홍콩, 싱가폴, 한국, 일본, 대만 등의 국가들에 공장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본격화 됐다. 생산설비를 아시아 지역으로 이전하고 생산라인을 하청화하면서 미국에서 제기됐던 반도체 노동자 논란도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된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IBM에서 대량 발생되었던 백혈병 등 반도체 산업관련 직업병도 산업의 이전에 따라 한국을 거쳐 중국의 폭스콘 등에서 차례로 재현되고 있다. 홍콩, 대만, 중국 등의 국가들이 반도체 산업을 들여오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유무역구역에 공장을 세우고, 인건비를 낮추며, 세금혜택을 주며 유치 전쟁을 벌이고 있고, 태국과 필리핀 등의 국가들도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다국적 IT기업들이 미국에서는 금지된 화학 약품 사용을 아시아에서 계속 사용했지만 이 국가들은 직업병 발생과 환경오염 문제는 등한시하고 있다. 전자회사 RCA는 1960년대 미국 인디애나 공장에서 심각한 환경오염과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해외로 공장을 옮겨, 1970년대에 대만으로 진출했다. 대만에서는 산업단지 내의 공장들이 ‘합법적으로’ 환경을 오염시키도록 법 제도와 환경영향평가 완화를 허용해주었다. 그 후 20년이 지나서야 지역 주민들과 환경운동가, 학자들에 의해 RCA 공장에서 독성물질을 불법으로 배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공장 주변 지하수는 식수안정기준치의 1000배가 넘는 TCE로 오염되어 있었고, 공장 기숙사에 거주한 RCA 노동자들은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했다.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각종 암에 걸렸고, 200여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암으로 사망했다. RCA는 1996년부터 대만 환경보호국 관리 하에 공장 부지와 지하수 정화작업은 시행했지만 노동자들의 암 발생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환경보호국 또한 마찬가지 행태를 보였다. 결국, 1998년에 RCA 공장 주변 지역이 정화 불가능한 영구오염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수천 명의 직업병 피해자들이 10년 이상 진상 규명과 보상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대만 RCA 노동자들은 여러 연대체를 만들고, 경제발전을 위한 희생을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 대만 정부에 항의하며 환경과 산재에 관한 법률 개정을 이뤄내고 있다. 그러나 현재 RCA는 대만을 떠나 더 값싼 노동력이 있고, 국가 차원에서 사업주의 안전보건조치에 대한 법적 규제나 관리 감독이 느슨한 태국과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한편 대만 자본은 2000년부터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세워왔다. 1990년 대만은 저임금 노동력을 바탕으로 전세계 80%의 노트북을 제작했으나, 지금은 중국이 전세계 노트북 생산의 95%를 차지하고 있고, 이 상당 부분은 대만 기업의 투자로 이뤄진 결과이다. 현재 대만 IT기업들은 생산은 중국에서, 연구개발은 대만에서 진행하는 형태의 분업을 도입하고 있다. 중국에 있는 애플 하청업체인 폭스콘이나 윈텍 등에서는 수십만 명을 고용해 근로계약서도 없이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유해화학물질에 의한 중독사고, 화학물질 누출사고와 폭발사고, 공장 인근 지역 환경오염 등의 문제를 일으켰다. 국제적 연대와 투쟁이 필요하다 미국의 IBM 공장, 영국의 내셔널 반도체 공장, 대만의 RCA 공장, 중국 폭스콘 공장 등에서 발생한 문제들은 삼성반도체의 상황과 흡사하다. 일반적으로 반도체 등 전자산업은 복잡한 하청체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개발도상국에서의 대량생산에 기초하고 있다. 전자산업의 경우, 기술개발 이후의 생산과정은 노동집약형 산업이기 때문에, 고도로 유연화 된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반도체산업에서 생산직 노동력의 다수는 젊은 여성들이다. 연령과 성별의 위계에서 하위에 위치한 이들은 자신의 작업환경에 대한 고민이나 불편함, 건강상의 문제점 등을 드러내거나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데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또한 아시아 개도국 대부분이 노동권을 보호하는 제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법이 상대적으로 부실하고 역량도 취약한 실정이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권리를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다. 각 정부가 새로운 성장 동력인 IT 산업을 자국에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로버트 노이스 인텔 공동 설립자는 "노동조합이 없는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이 산업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만약 우리가 노동조합을 허용한다면, 우리 기업들은 파산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자산업의 경쟁력이 ‘무노조 무파업’에 있다는 외국 기업주들의 이야기는 무노조 정책을 고수하는 삼성과 닮아있다. 반도체 기업들은 규제가 없고, 값싼 노동력이 있는 곳으로 계속적으로 이동하면서 환경을 오염시키고, 무노조 정책을 고수하며 노동자들의 노동권이 짓밟고 있지만, 기업은 물론 해당 국가에서도 이를 은폐하고 무마하기 바쁘다. 기업들은 이윤을 쫓아 규제가 약한 곳을 찾아 국경을 넘나든다. 이것은 비단 반도체 산업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30년 전 한국의 원진레이온에서도 벌어졌던 일이다. 레이온(비스코스 인견사) 기계는 나라와 기업이름만 바뀐 채 일본의 동양레이온, 한국의 원진레이온, 중국의 화학섬유공장에서 차례로 사용되었다. “이황화탄소 중독”에 의한 직업병이 발생해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공장 폐업 후 설비는 다른 국가에 팔아버리는 행태를 보이며 이미 알려진 직업병이 되풀이되었다. 거대 반도체 자본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저질러온 환경오염과 노동자 건강문제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해 영국,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기업을 감독하거나 제어하기는커녕 규제를 완화해주고, 이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정부의 모습 또한 유사하다. 이 문제는 한 지역이나 한 국가에서 해결한다고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은 민중들의 삶과 건강을 ‘세계화’하여 파괴하고 있으며, 국경을 이동하면서 더욱 치밀하고 강도 높게 파괴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는 어느 개인, 특정 국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노동자 민중들의 공통적 이야기다. 반도체 산업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전파되는 모든 더러운 산업에 의한 파괴되는 '세계화'의 역사이다. 국경 없는 자본은 국경 없는 직업병과 환경파괴를 만들었다. 이는 자본의 이윤창출 욕구와 신자유주의 구조 하에서 발생하는 공통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 또한 국경을 넘어 국제적인 연대와 공동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 현재 아시아감시정보지원센터(Asia Monitor Resource Centre, AMRC),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 캠페인(International Campaign for Responsible Technology, ICRT),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Supporters for Health and Right of People in Semiconductor Industry, SHARPS), 대만 지구공민기금회(Citizen of the Earth Taiwan, CET) 등의 전자산업 관련 환경/노동보건/노동운동 단체들은 전자산업의 노동안전보건, 환경안전보건 행태를 변화시키고, 자본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구성 중이다. 6월 18일부터 3일간 한국에서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를 위한 국제회의(Global Strategy Meeting on Sustainable Eletronics Industry)가 있다. 국경 없는 직업병과 환경파괴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문제임을 폭로하고 함께 투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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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룸’에는 아무런 물증도 없었다. 56명이 죽어 나간 클린룸은 말끔하게 리모델링되었다. 유력한 용의자인 '화학물질'은 영업상 기업비밀이란 명목으로 행방이 묘연해 졌다. 밀실 살인이다. 죽은 사람만 있고, 죽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같은 공장, 같은 라인, 같은 팀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연이어 암과 희귀질환으로 죽었다. 노동자들의 건강에 책임이 있는 산업안전공단과 근로복지공단은 이들의 집단 암 발생이 통계학적으로 의미가 없으며, 우연일 뿐이라 변명하기에 바빴다. 유력한 용의자 '화학물질'을 은폐한 삼성은 백혈병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직업병도 아니며, 반도체공장과의 인과관계가 불명확한 희귀질환이니, 노동자들의 죽음을 그들 각자의 질병에 의한 자연사로 치부해 버렸다. 그야말로 밀실살인사건. 삼성반도체공장이라는 거대한 밀실에 피해 노동자와 유족들은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과 함께 그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들어섰다. 이 글은 그 투쟁의 역사를 정리한다. 점차 확대되어온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 국내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가 불거진 것은 2007년 3월 故황유미씨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후 부터다. 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자 한 황상기씨의 끈질긴 노력이 그 시작이었다. 실제로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던 노동자 중 백혈병 등 각종 직업병에 걸렸거나 그로 인해 목숨을 잃기까지 한 노동자들이 적지 않았으나 공공연한 비밀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이에 2007년 11월 ‘삼성반도체 집단백혈병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발족하여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10년 동안 2만 7천 명의 직원 중 6명의 백혈병 환자밖에 나오지 않았다”며, “실제 암발생률은 대한민국 평균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고 주장했다. 2008년 초 대책위는 ‘반올림’으로 이름을 바꾸고 진상규명과 산재인정을 위해 여러 활동들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제보자는 늘어났고, 현재 반올림에 접수된 백혈병, 뇌종양, 재생불량성빈혈, 다발성경화증, 루게릭 등 희귀암과 중증질환 등의 반도체 전자산업 전체 직업병 제보자는 160여명이고, 64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삼성 직업병 제보자는 140여명이고, 지난 6월 2일 故윤슬기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56번째 삼성 직업병 피해노동자가 발생했다. 노동자가 일하다가 다치거나 병을 얻으면, 산재보험보상이라는 제도로 치료비나 생계비의 일부를 보전 받게 된다. 하지만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은 희귀질환을 가져서 자신의 질병이 직업병이라는 의심을 잘 하지 못했다. 설령 직업병이라도 삼성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느냐 하는 절망감 같은 것을 가져 산재보험 요양급여신청(이하 산재신청)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산재신청을 하더라도 노동자가 어떻게, 어떤 물질에 노출되어 이 병에 걸렸는지 입증할 책임이 노동자에게 있기 때문에 영업기밀의 이유로 물질목록을 공개하지 않는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은 불승인률이 높았다. 산재신청과 미흡한 역학조사의 문제 2007년 6월 故황유미씨의 산재신청을 시작으로 반올림과 삼성반도체 피해노동자 및 유족들은 2008년 4월 4명의 제1차 집단 산재신청, 2010년 5월 산재피해자 증언대회 및 5명의 제2차 집단 산재신청, 같은 해 7월 3명의 추가 집단 산재신청 등을 진행했다. 그동안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이나 재생불량성빈혈 등의 암 질환으로 22명(삼성 노동자만 21명)의 노동자가 산재신청을 했었지만,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승인되었다. 우리나라 산재 판정 기관은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이며, 백혈병과 같은 직업성 암에 대해 산재 신청을 할 경우 근로복지공단은 ‘역학조사’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의뢰하게 된다. 2007년에 삼성반도체에서 여러 건의 백혈병이 발생하고, 산재인정투쟁이 진행되면서 삼성 백혈병 논란 사건과 관련한 역학 조사는 그동안 세 차례 실시되었다. 2007년 사망자 개개인에 대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조사, 2008년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지난 10년간 전체 국내 반도체 종사자 23만 명의 림프조혈계 암 발병 위험에 대한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 건강실태 역학조사’, 2009년 삼성전자 반도체등 국내 반도체 3사가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작업환경 역학 조사’가 그것이다. 첫 번째 역학조사는 업무와 백혈병 질병 연관성에 대한 판단을 보류했다. 2008년 12월에 발표된 두 번째 역학조사에서는 반도체 제조업체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의 암 발생률은 일반인보다 높게 나왔고, 비호지킨 림프종·백혈병 발병률의 경우는 일반인에 비해 1.31~5.16배까지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공단은 연관성이 낮다고 결론을 냈다. △백혈병은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는 증가를 찾을 수 없었고, △반도체 공정 작업 현장에서 백혈병 유발 가능 물질인 벤젠·전리방사선은 검출되지 않았거나 노출 기준을 초과하지 않았고, △높게 나온 비호지킨 림프종의 경우 원고 가운데 한명은 남자이므로 업무연관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올림은 "역학조사를 할 당시 삼성이 작업장의 물량을 줄이고 화학물질을 치우는 등 대대적인 청소를 함으로써 조사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반박했다. 또한 반올림은 노후 라인에서 발병률이 높을 가능성이 훨씬 많은데도 전체 노동자를 표본으로 설정하여 일반인의 발병률과 비교해 별 다른 특징이 없는 것처럼 결과를 나오게 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결국 2009년 5월 근로복지공단은 ‘벤젠’이라는 발암물질이 없다는 역학조사 결과를 근거로 ‘작업환경이 백혈병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객관적 증거가 미흡하다’며 전원에 대해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2009년 7월 근로복지공단에 이의신청 즉 심사청구를 하였지만 전원 불승인 처분을 받았다. 행정소송을 둘러싼 삼성의 회유와 은폐에도 투쟁을 지속하다 2010년 1월, 피해 노동자들과 유가족들은 ‘산재 불승인’에 불복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재인정을 요구하는 내용의 소장을 서울행정법원에 접수했다. 행정소송의 형식적 피고는 근로복지공단이었지만, 실제로는 세계 초일류 기업임을 자부하는 삼성전자를 상대로 벌이는 법적 투쟁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이 소송 초기부터 삼성전자 측 변호사들이 소송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실제 삼성전자가 피고 보조참가로 소송에 참여하기도 했다. 삼성은 피고 보조참가로 소송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산재를 은폐하려 했다. 삼성은 故박지연씨 가족에게 산재신청을 하지 않으면 치료비를 보상해주고 집까지 고쳐주겠다고 했다가 산재신청을 하자 수차 퇴사 권고를 하였다. 故황유미씨의 아버지에게도 거액의 금품으로 회유하여 산재신청 시도를 차단하려 하였다. 산재보험은 모든 사업주들이 낸 보험료로 정부가 운용하고, 필요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주어진다. 때문에 삼성은 작업 공정 과정에서 산재가 발생한 것을 인정하고 정부 보상받는 걸 도와주면 된다. 그런데 왜 삼성이 이를 방해할까. 삼성전자는 무재해 기록 때문에 보험료율을 50% 감면 받고 있어 연간 143억 원 정도를 절감했다. 하지만 반도체 피해자들 중 한명이라도 공식 산재 인정이 되면 절감됐던 보험료를 다시 내야한다. 진짜 재해가 없어서 보험료를 감면받은 게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몇 억 원씩 주겠다며, 산재 신청을 못하게 회유하고 은폐해왔던 것이다. 한편, 2010년 9월 삼성전자·하이닉스·엠코테크놀로지가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작업환경 역학 조사’에서는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되었다. 조사결과에는 삼성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사용되는 감광제에서 0.08ppm에서 8.91ppm의 벤젠(국내 벤젠 노출 기준은 1ppm 이하로 규제)이 검출되었고, 각종 유기화합물질의 관리가 부실하다는 내용도 담겼다. 삼성전자가 2008년 국정감사장에서 벤젠은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바로 삼성이 의뢰한 조사 결과에서 벤젠이 검출 된 것이다. 지난 2008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에서도 벤젠은 검출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발암성과 연관성이 낮다는 근거로 작용해 산재 불승인 결정이 난 것이었다. 2011년 2월에 반올림이 노동부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반도체사업장 역학조사 자료 및 화학물질 정보 등 정보공개 신청을 했지만,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영업비밀 등의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2011년 6월 백혈병 행정소송 1심에서 故황유미, 故이숙영씨의 백혈병 사망을 산재로 인정 받게 된다. 하지만 故황민웅, 송창호, 김은경씨는 기각되었다. 재판부는 故황유미, 故이숙영에 대해서는 "반도체 공장에서 세척작업을 해서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고, "명백하게 백혈병 유발 요인을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유해한 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백혈병이 발병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 측 2명은 직업병으로 인정하였지만 나머지 3인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각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입증하지 않아도 정황상 추정해 판단할 수 있다면 직업병으로 인정하는 기존 판례의 취지를 볼 때, 3명의 삼성백혈병 노동자들에게 기각 판정을 한 것은 산재보험제도의 취지에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납득하기 힘든 판결이나 부분적으로 직업병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산재인정 판결에 대해 공단은 항소를 하였고, 삼성은 인바이런사 재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삼성으로부터 연구비용을 받은 인바이런은, "사업장은 잘 관리되고 있다", "노출재구성 연구 결과에서 백혈병이나 림프종 등을 유발할 수 있는 어떠한 과학적 인과 관계도 나오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인바이런의 발표는 주장과 결론만 있을 뿐 데이터가 없는 보고서이며, 인바이런은 폐암 환자 소송에서 담배회사를 대변하고, 고엽제 관련하여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들의 건강 문제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던 컨설팅 회사이다. 2011년 8월 고용노동부는 ‘삼성반도체 노동자 보건관리 강화’를 위해 실천방안 요구 및 이행 모니터링 계획을 밝혔다. 이는 故황유미씨가 세상을 떠난지 4년 5개월만, 행정법원 1심에서 산재로 인정받은지 약 2개월 만에 발표된 노동부의 공식입장이다. 그동안 고용노동부는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한 어떤 책임 있는 자세도 보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인권과 건강권을 책임질 노동부는 삼성에게 직업병 재발방지 계획 등을 떠맡기고 뒤에서 모니터링만 하겠다는 속셈을 보이고 있다. 노동부는 ‘삼성 백혈병’으로 표현되는 반도체 및 전자산업의 유해성을 ‘삼성 반도체’만의 문제로 한정시켜서는 안 되며, 전체 전자산업 직업병에 대한 재발방지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2012년 2월 정부는 삼성전자 등 반도체 공장서 1급 발암물질이 발견되었다고 처음 인정했다.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 간 삼성전자, 하이닉스, 페어차일드코리아 등 국내 반도체 공장을 대상으로 '반도체 제조 사업장 정밀 작업환경평가 연구'를 수행한 결과, 1급 발암물질인 벤젠, 포름알데히드, 전리방사선, 비소 등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반도체 공장 설비가 현대화된 이후에도 1급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는 것은 반도체 공장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삼성 측의 주장처럼 그동안 반도체 공장의 작업 환경이 끊임없이 개선됐다면,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 노후화된 수동라인에서 일한 노동자들은 더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었을 것이라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번에 측정된 부산물의 양이 모두 노동부에서 지정한 노출 기준보다 현저히 낮기 때문에 인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라는 입장이고, 고용노동부도 측정된 노출량은 극미량이어서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노출됐다고 하더라도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노동부가 제기한 기준치는 관리 기준치일 뿐, 발암물질에는 역치가 없기 때문에 노출허용 기준 미만에서도 충분히 희귀병이 발병할 수 있다. 정부는 산재승인 뿐만 아니라 제도를 개선하고, 삼성은 유족들에게 사과하라! 2012년 4월에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린 김지숙씨의 산재신청이 처음으로 승인 처분을 받았다. 지금까지 근로복지공단은 2008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를 근거로 불승인을 남발했었다. 하지만 피해자들과 반올림 활동가들은 갖은 탄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고, 연대가 확산되면서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물꼬가 트였다. 아직은 한 명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공식 기록으로 남아야 정책을 통해 산업에 대한 예방과 규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동안 공식 블로그에 매일 ‘물타기’ 정보를 올려왔던 삼성반도체는 이번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에 대해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노동자가 산재보험의 보상을 받는 일은 삼성이 받아들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삼성이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산재 인정 다음 정부가 해야 할 것은 그동안 시행했던 여러 조사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다. 정보가 공개돼야 전·현직 노동자들, 시민들이 반도체 산업의 위험성 충분히 알고 사회적 조치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부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취지에 맞게 산재 입증책임을 완화하기 위해 관련 산업안전보건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의 개정에 시급히 나서야 한다. 국회는 국가차원의 신뢰성 있는 진상조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강제하고, 산업재해 및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제도개선에 노력해야 한다. 삼성은 백혈병 등 직업병 피해를 인정하고, 유족들 앞에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과거 작업환경과 질병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삼성이라는 거대밀실 속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멈추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삼성전자 노동자와 시민들의 적극적인 제보와 참여만이 또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다. [%=박스1%]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지난 6월 7일, 식품의약품안정청(이하 식약청)은 의약품 재분류 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에티닐에스트라디올을 함유한 사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에서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고, 레보노르게스트렐을 함유한 사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에서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식약청은 이번 의약품 재분류 안을 의견제출 기간, 자문 등을 거쳐 이르면 7월 말 확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분류 안이 통과될 경우,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살 수 있던 사후피임약은 약국에서 살 수 있게 되는 반면, 사전피임약은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살 수 있게 된다. [%=사진1%] 사전피임약은 21일 복용, 7일 휴약을 반복하여 복용함으로써 계획적으로 임신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약이다. 사후피임약은 피임을 하지 않고 성관계를 했을 경우 72시간 이내에 1회 복용하여 긴급하게 임신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약이다. 두 가지 약은 모두 여성이 임신을 계획하고 조절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피임약의 허가와 유통에 있어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기 결정권, 여성의 삶의 질에 대한 고려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있었다. 이번 재분류 계획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는 이번 재분류 계획을 여성의 재생산 권리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에 따른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사-약사 이권 절충한 일관성없는 재분류 계획 이번 식약청의 재분류 계획은 일관성이 없다. 사전피임약의 경우 1960년대 산아제한정책 때 도입되어 40년이 넘게 일반의약품으로 판매되어 왔다. 또한 사전피임약은 높은 피임율과 안전성으로 의사들도 복용을 권장해 왔을뿐 아니라 생리주기 조절, 여드름 치료에도 이용되고 있다. 새로운 위험이 보고된 바 없는 상태에서 이제 와서 사전피임약의 안전성 문제를 근거로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도 일관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사후피임약은 1996년에 수입이 시도되었으나 종교단체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2001년 현대약품이 다시 사후피임약 ‘노레보정’을 수입하려고 하자 식약청은 공청회를 개최했고. 여기서 보건복지부와 국무총리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 등이 찬성 의견을 제시하면서 결국 전문의약품으로 도입되었다. 사후피임약은 고용량 호르몬을 일시에 복용하게 되므로, 저용량 호르몬을 꾸준히 복용하게 되는 사전피임약에 비해 안정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한 이번 재분류 계획은 변화된 의학적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한 어떤 해명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처럼 피임약의 허가와 유통은 국가의 인구조절정책과 여성의 혼전순결, 낙태에 대한 사회적 여론에 따라 결정되어 왔다. 특히 이번 재분류 계획은 논리적 일관성과 의학적 근거에 기초했다기보다는, 의사와 약사의 이해를 절충한 것에 불과하다. 약사회는 그간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라는 주장을 해왔다. 반면 의사협회는 사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고, 나아가 사후피임약을 약국에서 살 수 없게 하고 24시간 응급실에서 처방받거나 병원에서 처방받는 의약분업 예외품목으로 전환하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번 식약청의 발표에 대해서도 산부인과의사회와 한국여자의사회는 안전성을 이유로 사후피임약의 일반의약품 전환에 반대했고, 대한약사회는 접근성을 이유로 사전피임약의 전문의약품 전환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이익집단 간 갈등 속에서 정작 여성의 건강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을 더욱 낮출 재분류 계획 2006년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성인 여성의 사전피임약 복용률이 벨기에 45.0%, 뉴질랜드 40.59%, 프랑스 36.44% 등인 데 비해 한국은 2.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의약품인 사후피임약 복용률이 5.6%로 더 높은 사실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피임이 이루어지는 방식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한국 여성들은 피임에 대한 정보와 의학적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매우 낮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피임에 대한 질의응답이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성교육이 충분하지 못할뿐만아니라 산부인과에서의 진료 및 상담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사전피임약과 사후피임약 모두 접근하기가 어렵다. 미혼여성의 성관계 그리고 여성이 피임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은 그 중요한 배경이다. 이번 재분류안이 통과될 경우 진료비 부담이 늘고 동시에 기존 사전피임약 가격이 약 3배 가량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미 산부인과 접근성이 매우 낮은 미혼여성들에게는 물론이고, 기혼여성들에게도 더 많은 경제적 부담을 지우게 된다면, 피임약에 대한 접근성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성관계를 맺고, 임신과 출산을 결정하는 것은 여성의 고유한 권리이다. 이러한 여성의 재생산 권리를 위해서는 피임약에 대한 접근권이 높아야 하며, 한국의 현 상황에서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전피임약과 사후피임약 모두 일반의약품으로 허용되어야 한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전문의약품은 안전하지만 접근성이 낮고, 일반의약품은 접근하기 쉽지만 안전성이 낮다는 인식은 일면적이다. 의사가 처방하는 전문의약품이라도 여성 스스로 약품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남용할 수 있고, 따라서 위험할 수 있다. 또한 산부인과의 문턱이 낮으면 전문의약품이라도 접근이 쉬울 수 있다. 일반의약품 역시 의약품에 대한 복약지도가 제대로 담보된다면 안전성을 높일 수 있으나 사회적 인식이 담보되지 않으면 접근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결국 전문의약품이냐 일반의약품이냐 라는 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실제로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피임의 부담이 여성에게 전가되는 현실, 미혼여성이 산부인과에 가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또한 많은 경우 성관계 여부에 대해 여성이 결정하지 못하고, 콘돔 사용 등 남성에게 피임을 요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여성이 피임약을 복용하게끔 하기 때문에, 성관계에 있어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번 의약품 재분류 논란을 계기로 피임의 안전성과 접근성을 동시에 높이고, 임신과 출산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전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주요 키워드 1. 포괄수가제 : 포괄수가제를 두고 의료계(의협)와 복지부의 논쟁이 계속되었음. 의료계는 포괄수가제가 과소진료와 조기퇴원 종용 등으로 의료의 질 저하를 불러올 수 있다고 주장. 복지부는 지난 시범결과와 외국의 사례 등을 들어 의료계의 주장에 반박하는 한편, 환자 개인당 21% 정도의 의료비 절감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함. 5월 30일 건정심에서 7월부터 포괄수가제를 시행하기로 합의한 이후, 국무회의에서 백내장·편도·맹장·탈장·항문·자궁(부속기)·제왕절개분만 등 7개 수술환자에 대한 포괄수가제 확대 방안을 담은 건강보험법 시행령 개정안이 통과됨. 2. 건보통합 위헌소송 기각 : 헌법재판소는 31일 지역가입자와 직장가입자에 대한 건강보험재정 통합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림. 헌재는 건보공단의 통합이 평등권과 재산권 보장을 침해한다고 보기 어렵고, 이것이 소득재분배와 국민연대의 기능을 높인다고 결론 내림. 3. 기타 : 비아그라 용도특허 소송 국내사 승소, 응급피임약 일반약 전환 논란, 보건의료관련 노사 공동포럼 등.
주요 키워드 1. 포괄수가제 :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 등은 현안 과제로 포괄수가제 확대 적용 저지를 꼽고, 이에 대한 기자회견 등을 진행하였음. 중요한 논리는 장기적으로 의료서비스의 질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24일 제13차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는 의협 위원 2명이 퇴장하며 의협은 건정심을 탈퇴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포괄수가제 도입 안건은 소위원회로 회부됨. 2. ‘환자의 권리와 의무’ 강제 게시 : 보건복지부는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하여 모든 의료기관이 환자의 권리와 의무를 게시해야 한다고 함. 이에 의료계는 이같은 조치가 환자와의 신뢰관계를 해치고, 의료분쟁조정법을 밀어붙이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이유로 반발. 3. 암환자 수술 사망률 공개 : 심평원은 22일 국내에서 발생빈도가 높은 위암, 대장암, 간암 수술을 실시한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수술사망률 평가 결과를 공개함. 302개 병원의 기록을 수집한 이 자료에서 30일내 사망한 사망률(실제사망률)은 위암의 경우 0.92%, 대장암 1.63%, 간암 1.88%로 나타났으며, 위암·대장암·간암 중 3개 암 모두 1등급에 해당하는 의료기관은 51개(17%)에 달한다고 발표. 이에 병협은 암 수술 사망률 공개가 병원 간 줄세우기를 조장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고, 환자 단체 등은 의료기관별이 아닌 의사별로 수술사망률을 공개해야 한다고 논평하기도 함. 4. 기타 : 경실련과 건강세상네트워크가 진행한 비급여 진료비용 실태조사, 한미 FTA 발효에 따른 비아그라 제네릭 출시 지연, 유디치과 관련 공정거래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치협의 대응, 심평원과 건보공단에 대한 감사원 감사 결과 발표, 백일해 집단 발생 등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음.
56번째 삼성 직업병 피해노동자, 고 윤슬기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삼성전자 LCD 천안사업장에서 일했던 젊은 여성노동자 윤슬기 님이 6월 2일 세상을 떠났다. 故 윤슬기님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9년 6월, 삼성전자에 입사했고 화학물질을 바른 엘시디(LCD) 패널(PANEL)을 자르는 업무를 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한지 겨우 5~6개월만에 중증 재생불량성빈혈을 진단받고 13년간 수혈에 의지에 살아오다 결국 2012년 6월 2일 장출혈과 패출혈이라는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숨을 거두었다. 삼성이 죽인 56명째의 죽음이다! 또한 올 해 들어 벌써 4명의 젊은 여성노동자가 삼성에서 일하다 병을 얻어 세상을 등졌다. 도대체 얼마나 더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 끔찍한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 위해 정부는 당장 관련 노동자들의 질병을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 삼성은 기업의 영업기밀을 주장하며 화학물질 리스트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문제제기한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목소리는 철저히 은폐되고 무시당했다. 하지만 오랜 싸움 끝에 그 동안 일방적인 삼성 편들기로 일관해 온 근로복지공단과 정부 또한 올 해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린 김지숙씨의 산재신청을 승인한 바 있다. 반도체 생산과정과 매우 흡사한 엘시디 생산과정에서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중증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린 고 윤슬기님의 경우도 산재보험청구를 인정해야 한다. 삼성은 유족들 앞에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과거 작업환경과 질병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그동안 삼성은 영업기밀이라는 핑계로 화학물질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작업환경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감춘 채 '작업환경은 완벽했다', '직업병은 없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해왔다. 고인의 사망으로 삼성 직업병 제보자들 중 56번째 죽음을 맞은 것이다. 삼성은 더 이상의 무책임과 기만을 중단하고 고인과 유족에게 최소한의 조의와 사과를 표하라. 또한 고인과 같이 중한 질환에 걸려 퇴사한 노동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삼성은 투명하게 밝혀라. 이제 정부는 고인과 같은 죽음이 재발되지 않도록 특단의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반올림과 민주노총을 비롯하여 노동시민사회 운동단체들은 정부의 철저한 진상조사, 대기업이나 반도체 업종 뿐 아니라 전체 전자산업의 직영과 하청업체를 아우르는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요구해왔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몇 년동안 몇 개 반도체 회사들에게 '자율관리'에 내맡겨 왔을 뿐이다. 반도체 전자산업노동자들이 삼성에서만 56명이 죽고, 하이닉스, 매그나칩 반도체 및 하청 전자업체의 노동자 죽음까지 포함하면 최소 63명의 죽음이 확인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재발방지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2월 고용노동부는 반도체 사업장에서 벤젠 등 발암물질 발생이 확인된 만큼 발암물질이 발생하지 않는 안전한 물질로의 대체, 노동자 건강보호대책 마련 등의 시정조치를 내릴 '예정'이라고만 하였을 뿐, 그 뒤 어떠한 시정조치 명령을 반도체 사업주에게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점검하고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형식적인 계획발표를 원하는 게 아니다. 시급히 반도체와 엘시디 생산공장 노동자들의 직업병 재발방지를 위한 근본적 대책을 내놓을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고 윤슬기님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기업과 정부의 은폐로 발생한 억울한 죽음의 진실이 드러나도록 함께 투쟁하자. 2012년 6월 7일 사회진보연대
포괄수가제를 둘러싼 의사-정부 간 갈등의 구조적 원인 지난 5월 24일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보건복지부 산하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가 구조적으로 공급자에게 불리하다고 문제제기하면서 전격 탈퇴를 선언했다. 의협의 탈퇴는 7월 1일부터 전면 실시되는 7개 질병군에 대한 포괄수가제를 완강히 거부한다는 뜻이다. 의협은 ‘진료비정액제’라고도 불리는 포괄수가제가 과소진료를 조장하여 결국 의료의 질을 떨어뜨릴 것이라며 포괄수가제를 반대해왔다. 이에 대해 보건복지부는 포괄수가제를 통해 현재 행위별 수가제 하에서 일어나는 과잉진료로 인한 의료비 증가를 방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1997년 시범사업과 2002년 선택 적용을 통해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의료의 질 저하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결국 보건복지부는 5월 30일 의협이 불참한 건정심 회의에서 7월 1일부터 포괄수가제를 당연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의협과 정부의 갈등은 더 깊어졌다. 의사들 내부에서는 포괄수가제에 이어 총액계약제까지 시행된다면 2000년 의약분업에 반대할 때처럼 파업을 불사하겠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중앙일보는 5월 23일 ‘포괄수가제는 국민을 위한 제도다’라는 사설을 통해 의협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압력을 넣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논평을 했다. 또한 건정심에 참여하는 가입자단체와 시민단체들도 의협이 이해득실에 급급해 포괄수가제에 반대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의약분업부터 최근 포괄수가제까지 의협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비합리적이고 무책임한’ 반대를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또한 정부의 주장대로 포괄수가제는 진정 ‘국민을 위한 제도’인가? 건강보험제도에 국한된 정책개혁이 만드는 갈등과 왜곡 포괄수가제의 목적은 건강보험 지출 증가를 억제해서 재정을 안정화하는 것에 있다. 포괄수가제를 통해 공급자에게 의료서비스의 비용에 대해 일정정도 책임을 주어서 과잉의료를 줄이려 한다. 현재의 의료공급체계는 민간의료기관이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민간위주의 왜곡된 공급체계를 공공적 성격으로 전환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 없이 정부는 포괄수가제라는 건강보험에 국한되는 수가제도의 도입만으로 의료비용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실제 민간병원을 운영하고 재정적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의사들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다. 의사들은 정책변화에 반발하거나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를 주장하는 등 건강보험제도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게 된다. 게다가 의사협회가 정부 정책에 극단적으로 반대하고 정부와 여론이 이러한 행태를 집단 이기주의로 비난하는 과정에서 제도 개혁의 진정한 쟁점은 가려진다. 정부는 제도의 관철에 집중하면서 공급자 단체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수가 인상 등의 타협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제도는 왜곡되어 그나마 내세웠던 취지마저 상실되기도 한다. 만성질환관리제가 왜곡되었던 과정이 단적인 사례다. 만성질환관리제는 선택의원제라는 이름으로 처음 추진되었다. 이 제도의 목적은 만성질환 환자가 의원을 선택해서 꾸준히 양질의 건강관리를 받게 하는 것, 이를 통해 1차 의료기관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제도 참여를 높이는 방법으로 정부는 환자관리표를 제출하고 관리 실적 평가를 받은 선택의원들에게는 경제적 보상을 주고, 환자들에게는 선택의원에서 진료를 받으면 진료비를 경감시켜주는 계획을 제출했다. 그러나 의협, 그 중에서도 현 노환규 의협 회장이 대표였던 전국의사총연합 등에서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선택의원제가 신규 개원의의 진입장벽이 될 것이고, 정부가 의사를 통제하는 주치의제로 가는 수순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환자가 의원을 선택하는 과정과 의원이 환자관리표를 정부에 제출하는 제도 등은 삭제된 후 만성질환관리제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포괄수가제도 현재 같은 갈등 상황이 지속될 경우 타협 과정에서 왜곡될 가능성이 있다. 2000년 의약분업의 사례가 주는 교훈 만성질환관리제와 포괄수가제로 이어지는 지금의 상황은 정부의 정책이 의사와 갈등을 만들고 사회적 쟁점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의약분업과 비교해 볼 수 있다. 2000년 의약분업의 사례를 통해 정책개혁의 한계가 어떤 갈등과 왜곡을 만들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약분업은 광범위한 임의조제, 음성적 약가마진 등 의약품을 둘러싼 부조리를 근절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의약분업은 과잉처방, 약제비 지출 증가의 구조적 문제인 민간 의료기관의 경쟁과 제약자본의 특허 독점 문제 등에 주목하지 않았다. 단지 리베이트의 문제를 부각시키며 의사들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고 제도를 합리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결국 추진과정에서 4차에 걸친 의사파업과 같은 의사집단의 강력한 반발을 낳았다. 의사·약사·정부 간의 타협과정에서 의약분업은 의료수가와 조제수가의 인상, 상품명 처방, 대체 조제 금지 등을 골자로 하는, 애초의 안과는 상당히 달라진 타협안으로 시행되었다. 이러한 타협안의 결과로 인해 의약품 리베이트로 대표되는 음성적 약가마진 통제와 의약품에 대한 보장성 강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시행 이후 오리지널 약 처방의 증가와 의약품 가격 관리 실패로 인해 약제비가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건강보험 재정은 악화되고 민중의 의료비부담은 커졌다. 이 과정에서 제약자본과 민간의료보험은 더욱 성장했다. 포괄수가제 논란에서 진정 바라보아야 할 쟁점 포괄수가제 논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진정한 쟁점은 바로 의료공급체계의 성격이다. 보건의료체계 내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병원자본, 제약자본, 민간보험자본의 확대가 바로 의료비 증가와 의료전달체계 붕괴의 근본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포괄수가제는 이론상 과잉진료를 유발하는 행위별 수가제의 단점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민간 병의원들은 수익을 위해 다른 방법을 추구할 수 있다. 실제 증상보다 더 심각한 진단명을 기록할 수 있고, 허위 진료건을 청구할 수 있고, 비용대비 이득이 적은 건들은 다른 공급자에게 전가시킬 수 있다. 이렇게 민간 중심 의료공급체계에서 포괄수가제는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다. 대형병원들로 이뤄진 병원협회가 포괄수가제에 대해 조건부 찬성한다는 입장을 낸 것은 병원자본의 입장에서 포괄수가제가 타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오히려 자본은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지 않는 비급여 진료를 확대하거나, 당연지정제 폐지, 영리병원 허용 등을 통해 더욱 노골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건강보험 적용을 받지 않는 영역이 확대될수록 민간의료보험의 시장은 커질 것이다. 물론 포괄수가제가 이러한 결과를 직접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부가 현재의 민간 중심적 의료공급체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계획 없이 포괄수가제만 추진한다면 한계는 명확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포괄수가제로 인한 의료비의 감소가 민간의료보험사의 의료비 부담을 줄여서 보험사의 이익 증대로 귀결된다는 비판이다. 이 주장은 나름의 근거가 있다. 포괄수가제가 가장 광범위하게 도입된 곳은 미국이다. 미국의 관리의료는 단순한 의료보험의 기능을 넘어 보험회사가 의료과정 자체에 개입하면서 비용절감을 주도한다. 포괄수가제가 민간의료보험이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으로도 사용되는 것이다. 공보험이 없는 미국의 사례를 남한 건강보험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으나, 포괄수가제라는 제도만으로 의료비를 통제하고, 의료민영화를 저지하고, 보건의료체계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보건의료운동진영은 나쁜 의협, 착한 정부라는 이분법 속에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을 넘어서 의사들이 이익을 추구하도록 만든 보건의료체계의 구조의 근본적 개혁방안에 대해 고민해야한다. 민간 중심적 의료공급체계가 변화하지 않으면 의사들의 반발과 제도의 왜곡은 항상 발생할 수 있으며 의료비 상승과 무질서한 의료공급체계로 인한 피해는 결국 민중에게 돌아올 것이다. 의료공급체계에서의 공적 투자와 통제가 필요하다. 민중이 아파야 의사와 병원이 이익을 얻는 이윤추구적 보건의료체계에서 벗어나 민중이 건강한 것이 의사에게도 좋은 보건의료체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박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