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국제적인 운동의 부상
1997년 IMF 경제위기와 함께 등장한 김대중 정권은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집행자였다. 이전 정권이 체결한 IMF 합의 의향서에 담긴 금융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 조치를 충실히 이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리해고제 도입, 4대 부문 구조조정과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 도입, 두 단계에 걸친 외환거래 자유화 등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본격화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외자 유치만이 한국경제가 살 길”이라며 한국에 투자된 외자의 수익성 극대화와 안전성 보장을 위한 양자간 투자협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98년 하반기부터 한미/한일 투자자유화협정(BIT) 협상을 개시했고, 뒤이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를 추진했다. 1998년 당시 이러한 BIT나 FTA의 실체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미 BIT와 연계된 스크린쿼터 폐지 문제로 스크린 속 영화배우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사회진보연대는 출범 직후 <투자자유화협정 및 초국적자본 대응을 위한 대책반>(이하 대책반)을 구성하여 이러한 협정들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 사회적 영향을 조사하고 분석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대책반은 스크린쿼터처럼 여론을 통해 알려진 문제뿐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내용이 이러한 협정에 담겨 있음을 파악했다. 즉 한미 투자자유화협정이 외국기업의 고용승계의무, 현지인 일정비율 고용 의무, 노동기본권 보장 등의 각종 이행의무부과금지, 직간접적 수용시의 국가 보상 의무, 구속적인 분쟁해결절차 등을 무력화하며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해체한다는 점을 밝혔다. 또한 한일 투자자유화협정이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외국기업에 대한 교육세 등 목적세 부과 폐지 등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여러 차례 토론회를 개최하여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추동하는 핵심적인 기제들에 대한 민중운동의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기했다.
대책반의 이러한 활동은 <투자협정 WTO 뉴라운드 반대 민중행동>(이하 민중행동) 결성으로 이어진다. 1999년 6월 사회진보연대는 민주노총, 전농 등 여러 단체들과 함께 OECD 내에서 추진되고 있던 다자간투자협정(MAI) 체결과 WTO 내에서 추진되던 새로운 무역협상 라운드인 밀레니엄 라운드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적인 행동과 발맞추어 “6·18 국제민중행동, IMF·한미/한일투자협정·밀레니엄라운드 반대 행동의 날”을 개최했다. 이 공동행동의 성과로 결성된 민중행동은 1999년 11월 시애틀 3차 WTO 각료회의 저지투쟁에 대표단을 파견했다.1)
시애틀에서 벌어진 국제적인 투쟁은 빈곤과 불평등을 확산하는 WTO 국제무역체계의 모순을 폭로해냈고, 밀레니엄라운드의 출범을 실질적으로 저지해냄으로써 세기의 끝자락을 뒤흔든 커다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와 동시에 세계 민중들의 직접적인 연대로 국제기구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전 세계 사회운동에 심어주었다. 여기에 힘입어 민중행동은 2000년 1월 <투자협정 WTO 반대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으로 확대 재편되었다. 2)
WTO 3차 각료회의는 결렬되었지만 여러 의제들에 관한 협상은 계속되면서 초민족자본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자간, 양자간 투자자유화협정 및 자유무역협정을 사회운동의 의제로 만들어내고 이에 대한 민중적인 대안을 형성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전농 등 대중조직과 학생, 환경, 여성, 보건의료 등 부문조직을 포함하여 40여개 단체가 국민행동 출범에 함께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사무국을 구성하는 것에서부터 국민행동이 출범하고 활동하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국민행동은 2000년 10월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에 대응하는 투쟁을 <신자유주의반대, 민중생존권쟁취 민중대회위원회>와 함께 조직했다. 당시 시민단체들이 먼저 ASEM 내의 민간 협의틀인 ‘ASEM 2000 민간포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국민행동과 민중대회위원회는 민간포럼을 통한 의견개진이 아니라 ASEM이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지역통합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과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 이에 따라 두 연대기구는 ASEM 2000 민간포럼과 대규모 집회를 공동개최하되, 별도의 교육, 선전사업 및 실천사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초민족자본이 주도하는 세계화에 맞서 민중의 보편적 권리를 옹호하자
김영삼 정부는 재벌중심 세계화의 일환으로 경제협력기구(OECD),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이들 기구가 요구하는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게 한국사회를 재편하려고 시도했다. WTO를 탄생시킨 우루과이라운드는 공산품뿐만 아니라 농산물과 서비스도 자유 무역의 대상으로 삼아 각종 무역 장벽 제거를 시도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 새로운 의제를 추가해서 초민족 기업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기 위해 노동자 민중의 기본권을 공격한다. 1999년 3차 각료회의에서 출범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밀레니엄라운드는 우루과이라운드에서 무역협상 의제로 포함된 농산물 및 서비스 무역 자유화를 위한 세부적인 원칙을 확정하고 투자자유화를 비롯한 새로운 의제의 협상을 시작하려는 시도였다. 시애틀에서 실패한 후 2년 뒤인 2001년 4차 각료회의를 통해 ‘도하개발의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협상이 개시되었으나, 시애틀을 계기로 한 대안세계화운동의 성장과 WTO의 내부 모순 확대로 인해 아직까지도 교착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주자유무역지대(FTAA)와 같은 지역무역협정, 한미 FTA와 같은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이 무역자유화의 범위와 내용을 확대하려는 시도로서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농산물을 무역자유화의 대상으로 포함시킨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결과로 WTO가 출범하자 국내에서는 농산물 수입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투쟁이 폭발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추진되던 WTO 내에서의 새로운 협상이나 김대중 정권이 추진한 양자간 투자자유화협정 및 자유무역협정을 단순히 ‘수입개방 반대’라는 논리로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민행동은 각종 다자간, 양자간 협정으로 인해 국내 시장이 잠식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초민족자본이 국경을 넘나들며 아무런 제약 없이 활동하고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보장하면서 전 세계 민중의 기본적인 권리를 파괴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국민행동은 WTO 도하개발의제의 농업협정(AoA)이 관세감축과 각종 보조금 폐지를 통해 전 세계 농업 생산 및 무역에 대한 초민족 농기업의 지배력을 확대하며 민중의 식량주권을 파괴한다는 점, 서비스협정(GATS)이 교육, 의료, 물, 에너지에 대한 민중의 기본적인 권리를 파괴하며 초민족 금융자본의 활동범위를 넓힌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지적재산권협정(TRIPs)이 제약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며 민중의 의약품접근권을 파괴하는 한편 종자에 대한 농민의 권리, 지식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파괴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노동기본권을 직접 공격하는 내용(노동쟁의 억제, 무노동무임금 관철, 퇴직금 유연화, 불법노동쟁의 신속조치 등)을 ‘비관세장벽 제거’라는 명목으로 담고 있는 한일 FTA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양자간 협정은 WTO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으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런 점에서 국민행동은 여러 가지 무역협정에 맞서는 투쟁이 국익보호가 아니라 노동자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를 옹호하는 투쟁으로서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따라 국제적인 연대투쟁을 중요한 전술로 사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전개된 투쟁이 국민행동이 제기한 위와 같은 관점을 바탕으로만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양자간 FTA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각 협정의 체결로 인해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산업부문을 중심으로 피해를 축소하기 위한 대응이 형성되었다. 한미 FTA 반대투쟁은 스크린쿼터를 지키기 위한 영화인들의 투쟁, 한칠레 FTA는 농산물 수입개방을 저지하기 위한 농민들의 투쟁, 한일 FTA는 자동차 부문 노동자들의 투쟁과 같은 형태로 각각의 협정 체결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이러한 투쟁들은 전체 사회운동의 공동투쟁으로 확산되지 못한 채 피해 당사자들의 방어투쟁에 그쳤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투쟁은 부문을 넘나드는 사회운동의 연대를 촉발하기보다는 국내에서 점유하고 있는 시장을 지키고 개방의 속도와 일정을 조절하기 위해 피해 산업에 대한 지원을 우선 시행하고 FTA를 신중하게 체결하자고 주장했던 자본의 요구에 묻혀버리곤 했다.4)
한국 사회운동과 국제 연대
1998년 다자간투자협정(MAI) 저지투쟁, 1999년 시애틀 WTO 3차 각료회의 저지투쟁 참여를 발판으로 결성된 국민행동은 전 세계 민중의 보편적 권리 옹호라는 관점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연대를 중요한 전술로 사고하고 실행했다. 한국과 일본 정부의 FTA 체결 움직임이 본격화됨에 따라 국민행동은 일본의 ‘이의 있음! 한일투자협정 긴급캠페인’과 함께 서울과 도쿄에서 공동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공동 대응의 태세를 갖췄다. 양국 정부가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공동 성명서를 작성하고 각 국에서 항의행동을 전개했다. 2004년 11월 도쿄에서 6차 협상이 열렸을 당시에는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하여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 국민행동에 소속된 여러 단체들이 ‘한일 FTA 저지 동경 원정투쟁단’을 구성하여 도쿄 현지에서 투쟁을 벌였다. 일본에서는 전노협, 평화포럼, 아탁 저팬 등이 ‘11월 일한 FTA 저지 공동행동 실행위원회’를 구성하여 투쟁에 함께했다. 양국 민중은 한일 FTA가 자본이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선사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하나가 되어 투쟁했다.5)
2003년 WTO 5차 각료회의 당시에도 국민행동은 전국민중연대와 함께 투쟁단을 구성하여 멕시코 칸쿤으로 떠났다. 그 해 1월 3차 세계사회포럼에 모인 각 국의 사회운동들은 칸쿤 5차 각료회의 저지 투쟁을 중요한 공동행동으로 정했다. 칸쿤에서 한국 투쟁단은 특유의 창의력과 기동성을 바탕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당시 이경해 열사의 죽음은 현지의 모든 이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전 세계 농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WTO가 농민을 죽인다”는 그의 외침은 여전히도 수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다. 한국 투쟁단은 칸쿤 시내 한 복판에서 천막농성을 전개하면서 회담장 밖에서의 투쟁을 이끄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시애틀에 이어 칸쿤에서도 WTO 각료회의는 결렬되었다.6)
칸쿤과 도쿄에서의 투쟁은 홍콩으로 이어졌다. 2005년 12월 홍콩에서 열린 6차 각료회의 저지투쟁에서는 한국의 농민들을 비롯한 아시아 사회운동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시애틀 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2001년부터 시작된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를 계기로 아시아 사회운동들이 활발한 교류와 연대활동을 펼친 결과였다. 아시아 사회운동들은 여러 차례 ‘아시아 사회운동 총회’를 개최하여 각국 민중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서로 공유했고, 각 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각종 자유무역협정이 민중들에게 어떤 효과를 낳을 것인지 함께 분석했다. 국민행동은 총회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004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동아시아 경제장관 회의에 맞서 조직된 아시아 민중/사회운동 회의와 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 정상회의에 대한 대응으로 개최된 ‘APEC 반대 국제민중회의’는 WTO 홍콩 6차 각료회의에 맞서는 투쟁에서 아시아 사회운동들이 앞장설 것을 결의하는 장이 되었다.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에 모인 이들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한국 투쟁단은 회담장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세계 민중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술을 선도적으로 구사했다. 한국 투쟁단의 선도적인 투쟁으로 하룻밤에 천 명 이상이 연행되고 그 중 13명이 기소되어 3개월이 넘도록 재판을 받았다. 이는 홍콩 현지에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홍콩투쟁 직전 노무현 정권의 폭력 진압으로 사망한 전용철 농민열사에서부터 초민족 농기업의 횡포로 삶의 터전을 잃고 자살을 택하는 인도의 농민들, 제약자본이 내세우는 특허권으로 인해 값싼 약을 먹을 수 없는 민중들에 이르는 세계 민중들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홍콩에 모인 이들을 최루탄과 방패로 막아선 홍콩 정부와 경찰의 행태는 WTO가 반민중적이고 반민주적임을 충분히 드러냈다.7)
한미 FTA 반대투쟁: 국익인가 노동자 민중의 권리인가
2006년 6월 한미 양국 정부가 한미 FTA 체결을 위한 협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이 협상은 전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가 ‘개방과 경쟁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하고 성장잠재력을 확충하는 제2의 장기성장 전략’이라며 협정 체결을 강행했다. 노무현 정부가 한국사회의 미래를 둘러싼 중대한 사안을 두고 민중들은 아무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철저히 배제하면서 초민족자본의 목소리를 일방적으로 좇자 민중들의 불만은 높아져갔다. 2006년 초 국민행동은 그동안 선도적으로 제기해 온 의제들이 다양한 대중조직으로 확산되었다고 판단하여 해소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민주노총, 전농 등의 대중조직들이 한국진보연대를 건설하여 연대사업을 한국진보연대로 집중할 것을 염두에 두고 국민행동 운영에 힘을 쏟지 않았던 상황 탓이기도 하다. 국민행동 해소와 함께 참가단체들은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를 건설하는데 참여한다. 범국본에는 300여개의 단체들이 참여했으며, 산하에 15개의 부문별 공대위가 구성되었다. 한미 FTA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은 특정 부문의 피해에 관한 문제를 초과하여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그리고 한국 사회의 미래에 관한 문제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한미 FTA 협상 개시와 함께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었던 FTA 반대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미 FTA에 관한 범국본 참가단체들의 입장은 통일적이지 않았다. 가장 부각된 쟁점은 한미 FTA가 끼칠 피해의 정도였다. 이런 차원에서 농축수산업과 서비스 분야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정부는 피해가 예상되는 분야에 대한 보호조치를 답으로 제시했다. 더불어 한미 FTA 협상이 추진되어 온 절차상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최대한 신속하게 협상을 마무리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FTA 체결 절차에 관한 대통령 훈령에 명시된 공청회조차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이 발의한 ‘통상협정 체결 절차에 관한 법’ 제정을 범국본의 주요 요구로 삼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범국본에 참가하여 한미 FTA 반대투쟁이 피해산업 보호나 협정 체결절차에 대한 문제제기에 그쳐서는 안 되고,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권리를 담보로 한 재벌중심의 세계화에 맞서는 투쟁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다. 또한 노동자운동, 농민운동이 한미 FTA 반대투쟁을 계기로 국제적인 대안세계화운동과 함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는 전혀 다른 민중의 대안을 형성하는 데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 FTA 체결이 불러올 경제적 손익을 예측하는 것을 넘는 근본적인 비판이 필요했는데, 단행본 『한미 FTA, 이미 실패한 미래』(2006. 도서출판 사회운동)를 발간하는 한편 여러 매체를 통해 한미 FTA를 계급적 관점에서 비판하고자 했다. FTA의 목표는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고, 이는 노동자 민중의 이익과는 전혀 상관없는 국내 재벌과 초민족자본의 생존전략일 따름이며, 오히려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 대가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범국본은 한국과 미국을 번갈아가며 양국 정부가 협상을 진행할 때마다 대규모 집회와 원정투쟁을 벌였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 반대’를 내 건 모든 집회를 불허했지만 세 차례나 민중총궐기를 성사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부는 2007년 4월 협상을 타결했다. 그 후 운동진영 일각에서는 ‘협상 손익계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협상 과정에서 어느 편의 요구가 더 많이 관철되었나’, ‘한미 FTA가 발효되면 어느 편이 더 많은 이익을 거둘 것인가’를 따져볼 때 미국의 일방적인 이익이 예상되므로 한미 FTA의 경제적 실익은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와 ‘한미 FTA’를 분리하여 ‘한미 FTA의 졸속타결’에 반대하는 신자유주의 지배세력 내 일부와 제휴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다 들어주더라도 협상을 타결하기만 하면 그 자체로 이익이다’라고 주장하며 한미 FTA 반대 운동을 ‘후퇴세력’으로 몰아세웠다. 2007년 6월 금속노조의 ‘한미 FTA 저지 총파업’은 이러한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로 주춤하게 된 한미 FTA 반대운동을 다시금 활성화할 수 있는 계기였으나 이를 끝으로 FTA에 대한 전 사회적인 관심과 대응은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이명박 정권의 등장과 촛불집회
이렇듯 협상 초기 형성되었던 한미 FTA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여론은 분야별 이해득실, 국익 논란이 전면에 부각되면서 체결 후에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명박 정부가 2008년 4월 18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재개하기로 결정한 후, 이른바 ‘촛불 국면’이 개시된다. 한국진보연대와 참여연대를 비롯한 몇몇 시민단체의 발의로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재개에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가 결성되고 1800여개 단체가 참여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는 한미 FTA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미 FTA 협상 개시의 선결조건으로 쇠고기 수입 재개를 제시했고, 노무현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2006년 9월 30개월 미만의 뼈 없는 고기에 한하여 수입을 재개했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정부는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된 직후에 미국이 국제수역사무국(OIE)으로부터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획득하면 미국산 쇠고기를 전면 수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명박 정부는 이 약속을 이어받아 한미 FTA가 양국 의회에서 조속히 비준되도록 하기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재개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생태와 민중의 건강에 대한 위협을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자유화’라는 미명하에 이를 누구도 통제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현재의 국제 무역체계의 본질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쇠고기 수입 재개의 발단이자 이를 매듭짓도록 추동했던 한미 FTA는 촛불의 의제에 포함되지 못했다. 물론 범국본 역시 2007년 4월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고 난 후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전면에 내세워 한미 FTA 반대 여론을 재형성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재벌중심의 세계화 비판과 대안세계화 운동의 관점에서 발전되어야 할 한미 FTA 반대운동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라는 단일 이슈 운동으로 환원할 우려가 있는 이와 같은 전술을 경계했다. 또한 광우병의 위험을 강조하는 방식 역시 사태에 대한 과학적 인식보다는 선정성에 기대어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가로막을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광우병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던 중 2008년 5월부터 대중적인 투쟁이 전개되고 쇠고기 수입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실정에 대한 문제제기로 확대되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대책회의가 결성되고 난 후에는 한미 쇠고기 협상이 WTO나 FTA를 통해 추진되는 신자유주의적 투자와 무역 자유화의 일단이며, 이에 대한 사회운동의 대응은 신자유주의 반대/대안세계화 운동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운동진영 내에서 확산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다.8)
자본의 위기에 맞서 노동자 민중의 단결과 연대로
2008년 정기국회 개원과 함께 한미 FTA 국회비준 문제가 다시 이슈로 떠올랐지만 사회운동은 주춤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노총과 한국진보연대 참가단체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 그리고 대책회의에 참가했던 네티즌 단체 등은 민생민주 국민회의(준)을 결성하여 폭넓은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국민회의 결성 과정에서 민주당을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가 논란이 되었는데, 민주당이 직접 참가하지는 않지만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 공조하고 여기에 시민사회 세력이 가세하는 식의 행보는 계속 되고 있다. 한미 FTA를 미국발 금융위기의 확산과 연관해서 다시금 이슈화하면서 범국본을 재가동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나 큰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많은 단체들은 피해산업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 후 미국 내 비준 진척 상황에 따라 천천히 비준하자고 주장하는 야당 의원들이 한미 FTA 국회 비준을 지연시켜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WTO와 각종 FTA를 통해 초민족자본의 이해가 배타적으로 관철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완성하려는 시도에 대해 국민행동을 결성하여 그 실체를 선도적으로 폭로하고 운동의 의제로 만들려던 노력, 그리고 전국민중연대와 함께 민중운동 진영 내에서의 공동투쟁을 형성하려는 노력, 나아가 국제적인 민중들의 단결과 연대를 꾀하려던 노력의 성과가 소실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또다시 ‘한미 FTA 국회비준 지연’이라는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한다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기회는 한 없이 미뤄지고 말 것이다. 올해 초부터 세계 곳곳에서 경험한 식량위기, 에너지 위기, 그리고 그 영향과 범위가 날로 확산되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는 지배세력이 한미 FTA를 통해 완성하려던 금융화된 세계경제로의 편입,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파국적 결과를 모두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이에 대한 민중적인 대안을 형성하기 위한 노동자 민중의 단결과 연대 강화, 민중운동 공동 투쟁의 복원이라는 과제를 방기하고 말 것인가? 정세는 우리에게 엄중하게 묻고 있다.
1)
시애틀 WTO 3차 각료회의 결렬 및 국제 연대 시위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투자협정 WTO 반대 국민행동 주최 워크샵 발제문을 참조할 수 있다. 이창근, 「시애틀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http://antiwto.jinbo.net/jsboard/read.php?table=kopa&no=51) 본문으로
2) <투자협정 WTO 반대 국민행동>은 2003년 초 <자유무역협정 WTO 반대 국민행동>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한칠레 FTA 체결 이후 투자자유화 조치만을 담은 투자협정보다는 관세 및 비관세 무역장벽 철폐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자유무역협정이 대세를 이루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본문으로
3)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시오. 정종권, 「아셈투쟁 평가, 일보전진 그러나 이보후퇴」,『월간 사회진보연대』 2000년 11월호.본문으로
4)
FTA 반대투쟁 평가의 자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시오. 류미경, 「대안세계화운동과 한미 FTA 반대투쟁」,『한미FTA, 이미 실패한 미래』, 도서출판 사회운동.본문으로
5)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시오. 류미경, 「한일 FTA 6차 협상 저지 동경 원정투쟁 3일간의 이야기」, 『월간 사회진보연대』 2005년 1-2월호.
본문으로
6)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두 글을 참조하시오. 류미경, 「WTO 5차 각료회의 무산, 어떻게 볼 것인가? 」,『월간 사회진보연대』(2003년 11월호);『한국민중칸쿤투쟁단 평가 보고대회 자료집』 (http://antiwto.jinbo.net/jsboard/read.php?table=kopa&no=578)본문으로
7) WTO 6차 각료회의에 대한 한국민중투쟁단의 입장은 다음을 참조하시오. 『한국민중홍콩투쟁단 투쟁해설서』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856&page)본문으로
8)
자세한 내용은 다음 소책자를 참조하시오. 사회진보연대,『광우병, 한미FTA, 민중의 식량주권』. (http://www.pssp.org/bbs/view.php?board=document&id=1584&page=8)본문으로
10년을 돌아보며,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함께 모색하자
이 글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이래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여성들을 어떻게 활용해왔는지, 그것이 여성을 포함한 노동자계급 전반에는 어떤 의미였는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은 어떤 대응을 했고 그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가족을 매개로 여성의 노동권과 성욕의 권리를 억압해 온 역사와 신자유주의의 여성 활용 정책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여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던 노동자운동에 대한 비판이 포함된다. 이러한 비판은 경제위기, 금융위기가 심화되는 오늘날 노동자운동이 어떤 전망을 가질 것인가를 묻는 페미니즘의 질문이기도 하다. 이 글은 사회진보연대와 여성위원회의 문제의식과 활동을 중심으로 쓰였다. 여성해방과 사회의 변혁은 분리될 수 없다는 이념의 정세적인 표현으로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을 형성하고자 시도했던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의 활동은 되짚어 보건대 성과보다는 한계가 많았다. 그 한계들은 이후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가 여성운동의 전망과 실천을 개척해가는 데 있어서 깊이 각인해야 할 교훈이다. 이와 더불어 그 한계들이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 여성운동의 대안 마련에도 시사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997년 외환위기와 여성의 위기
1997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여성의 위기, 가족의 위기로 드러났다. 사실 외환위기 당시 몰아쳤던 각종 구조조정 정책이 젠더 중립적인 것은 아니었다. 가장 가시적이고 일차적인 차별적 양태는 여성의 일자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기업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력감축 계획의 대상은 주로 여성이었다. 맞벌이 여성, 사내부부인 여성, 장기근속 여성들은 가장 먼저 퇴직을 강요당하거나 정리해고 되었다.1)
이러한 정리해고는 주로 처자식을 벌어 먹여야하는 남성 가장보다는 여성이 좀 덜 벌거나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는데, 결국 이는 ‘남성 생계부양자 - 여성 가사담당자’라는 성별분업의 논리가 구조조정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서 주요한 축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사실 소수의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가족임금을 보장받지 못했고, 국가 차원의 복지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한국에서 여성은 외환위기 이전에도 가족의 생계보조자이자 최후의 복지 제공자 역할을 해왔다.2)
남편의 부족한 임금과 사회가 제공하지 않는 부족한 복지는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을 통해 보충되었고, 사회는 여성들의 이런 희생을 언제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 3)
외환위기와 이에 따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이러한 여성들의 이중부담을 더욱 증가시켰다.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리해고와 대량실업의 양산, 실질임금 하락으로 노동자 계급의 가계는 극적인 소득감소를 경험했다. 여성들은 가계소득을 보충하기 위해서 임시직, 계약직 등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라도 찾아야했고, 가계유지비용이 급증하자 가사노동을 담당하고 가족구성원을 보살피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의무는 더욱 강화되어 무임 가사노동도 더욱 늘려야 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야기한 각종 사회적 비용은 당연한 것처럼 여성에게 전가되었으며, 여성들은 절약과 노동력 출혈판매를 통해서 이런 위기 비용을 감내하고 가족을 유지해야 했다.
노동자운동의 대응
당시 노동자운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성차별적인 양태가 무엇을 의미하고,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여성 우선해고를 용인하거나 여성의 희생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시의 위기를 넘기려했다.
자본의 위기극복 전략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생산부문을 파괴하고 금융적 팽창을 추구하며, 이에 따라 노동의 유연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자본의 노동유연화 전략은 일시에 전면적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 내부의 다양한 차이와 분할을 매개로 노동자 간의 경쟁과 갈등을 심화시키며 진행된다. 여성을 우선 해고한다는 구조조정 계획은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단 한 번의 의심조차 품지 않았던 ‘남성 가장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관념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대량해고의 위협과 위기감 앞에서 여성 우선해고 조치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노동자계급 가족 전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로 인식되었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이 ‘사회적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합의한 정리해고, 파견근로제는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기업들은 연달아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했으나,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정리해고 철회를 걸고 36일 간의 파업을 벌인 현대자동차 노조의 투쟁은 대표적인 사례다. 법제화된 정리해고를 실제 실행할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상황인지라 사측은 정리해고 자체의 철회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고, 결국 파업은 식당 여성노동자 144명 전원을 포함한 277명 정리해고 수용으로 마무리되었다. 식당 여성노동자 전원의 정리해고로 당장 수천 명의 일자리를 지킬 수는 있었지만, 이는 부메랑이 되어 노동자계급을 다시 공격했다. 그 시작은 여성이었으나 그 후 하청노동자, 파견노동자, 이주노동자로 끝없이 확대되었다.
당시 노동자운동의 대응은 한국 노동자운동이 여성해방의 과제를 자기 과제로 인식하고 싸운 경험이 없었던 상황에서 기인한다. 노동자운동은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이 가사를 전담한다는 성별분업 모델, 가정은 정치의 장소가 아니고 여성의 노동은 부차적이라는 이데올로기, 여성은 남성에 미달하는 존재라는 상징을 수용해왔다. 이러한 여성의 처지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노동해방과 사회의 변혁을 위해 반드시 바뀌어야 할 투쟁의 대상임을 사고하지 못했다. 여성의 이해와 요구는 모성보호, 출산 및 육아 휴직과 같은 보호조치로 제한적으로 인식되었고, 여성운동은 특수한 부문의 이해를 대변하는 운동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가 실직의 위험에 놓인 외환위기 상황에서 여성이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당시 노동자운동이 여성을 희생해서 위기를 극복해보려던 시도가 한계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여성노동의 특질이었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은 전체 노동자에게 일반화되었고, 대다수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현실은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공격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노동자에게 전가되는 위기를 여성의 희생을 통해 극복하려했던 노동자운동의 대응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결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양자가 적대적일 수 있다는 사고를 낳았다.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이하 100인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운동사회 내에서 발생한 16개의 성폭력 사건이 가해자 실명을 포함해 공개되었다. <100인위원회>는 운동사회의 여성문제에 대한 맹목과 억압적 성격을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기함으로써 사회운동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운동사회 내의 가부장적 구조, 문화, 이데올로기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성폭력이라는 단일 이슈로 제기하고 이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성된 개별 사건이 논쟁거리로 부각됨으로써 <100인위원회>가 제기하고자 했던 애초의 문제의식은 소실되고 성적 폭력의 문제로 축소되었다.4)
이후 논쟁은 성적 자유주의자들의 악의적인 공격, 가해자의 반격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많은 운동 단위들은 형식적인 성명서로 상황을 모면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가해자에 대한 온정적 시각, 2차, 3차의 가해, 조직보위의 논리와 당면투쟁의 선차성 논리, 가해자의 역고소 등으로 인해 공개된 사건마저 ‘해결’이 어려워지면서 <100인위원회> 사건 공개의 현실 가능한 결론은 각 단위에 반성폭력 규약 작성을 장려하는 것이 되었다.
한편 <100인위원회>의 활동은 노동자운동, 사회운동 내 여성 활동가들이 여성 정체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모임이나 여성위원회 등을 결성하게 되었다. 여성 활동가들은 운동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을 기각하고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운동들과 여성운동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신념과 대의에 따라 헌신해 온 운동이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성별분업과 여성 차별적 관행을 답습하면서, 또한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거나 성적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여성 활동가들의 생존을 위협할 때 여성들은 과연 이 운동이 자신의 해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갈등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여성 활동가들은 운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운동을 바꾸는 길을 택하려 했다. 그러나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한 감정적 동일화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변혁하기 위한 운동을 사고하지 못했고, <100인위원회>가 제시한 광의의 성폭력 개념을 통해 여성 활동가의 억압적 현실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5)
그러나 운동사회의 여성 배제와 억압적 성격을 비판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반성폭력 운동은 곧 여성 활동가들에게 또 다른 곤란들을 안겨주었다. 반성폭력 운동의 결과가 규약 제정으로 귀결되면서 공동체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논의보다는 발생한 사건의 처리가 반성폭력 운동의 주요 활동이 되었다.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리를 둘러싼 지난한 논의가 반복되고, 정파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사건의 처리조차 어려워지는 경우도 많았다. 여성 활동가들은 이렇게 진행되는 사건 처리가 운동사회 내의 여성 차별적 구조를 없애거나 축소시키지 못하고, 피해자의 상처 치유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여성 활동가들이 성폭력 사건 처리 전담반이 되어가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성폭력이 무엇을 침해한 폭력인지에 대한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여성 활동가들은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에도 대응해야 했다. 게다가 피해자의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입된 2차 가해 개념은 오히려 논의를 봉쇄하고 침묵을 부채질했다. 운동사회의 페미니즘적 개조라는 애초의 문제의식은 성폭력을 유발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는 것으로 축소되어 아무런 논의도 촉발하지 못하는 현실도 목격하게 되었다. 가장 큰 난관은 노동자운동, 사회운동 내의 많은 여성의제가 성폭력 문제에 압도되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들이 제기되었으나, 아직까지 그 평가의 핵심과 대안적 방향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규약에 따른 처리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논의를 촉발시키기 위한 반성폭력 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거나 성폭력의 개념을 세분화하고 더 많은 것을 성폭력으로 정의하자는 제안만으로는 지금까지의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성폭력에 대한 반대가 여성의 성적 권리와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구조적인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고유한 권리, 즉 여성권(여성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을 실현하는 가족의 변혁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사고해야만 한다. 따라서 현재의 사회가 역사적 가족형태를 매개로 지속해온 여성억압, 여성의 존엄성의 박탈, 여성의 육체에 대한 통제권 박탈 등을 인식하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성에 대한 관리 정책으로서 여성정책의 등장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여성정책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의 문제를 고려했다. 하나는 생계유지를 위한 여성들의 일자리 요구와 자본의 여성노동력 활용요구에 관한 것이다. 외환위기 직후 우선해고, 정리해고 등으로 감소했던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이후 급격히 증가했는데,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부족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기 위한 노동자 가족의 전략으로 중요하게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계급의 생존전략이자, 경제의 금융화와 서비스화를 특질로 하는 현재의 경제발전 방향 속에서 제기되는 자본의 요구이기도 했다. 각종 서비스 노동, 하인 노동 등에 저임금의 유연한 여성노동력을 활용하고 이를 노동시장 전반의 유연화로 확대하는 것은 자본의 이윤창출에도 중요한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대응에 관한 것이다. 여성을 경제위기의 안전판이자 충격의 최종 흡수자로 사고하며 위기를 전가했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여성의 이중부담과 노동력의 출혈판매는 여성들이 감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심화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여성들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생계를 보조하는 비공식,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재생산 노동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환위기 이후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사회적 위기비용은 여성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 즉 여성에게 전가해왔던 상황에서 이런 여성의 위기는 가족의 위기, 재생산의 위기와 동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빈곤의 심화, 출산율 저하, 이혼율 증가 등의 상황은 가족해체라는 진단까지 낳으며 사회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따라서 정부의 여성정책은 ‘직장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일관된 기조 하에서, 여성의 일자리 확대를 통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 제고와 저출산을 위시한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출산 및 보육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 축으로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정책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 하에서 창출된 일자리 대부분은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수행하던 보육, 가사, 간병, 노인 돌봄과 같은 영역이었으며, 재생산 노동에 대한 저평가는 노동시장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낮은 임금이 책정되었다. 더불어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위해서는 파트타임 일자리가 장려되었는데, 이는 전반적인 노동시장 유연화를 촉진시키는 기제가 되었다. 다른 한 축으로는 건강가족기본법 제정 등을 통해 여성의 혼인과 출산의 의무를 명문화하는 한편, 양육비 지원, 보육서비스 확충 등의 지원책을 통해 출산을 장려했다. 이러한 정책의 함의는 분명했다. 여성들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1차적인 책임으로 인한 노동시장에서 부차적인 지위와, 노동시장에서 낮은 임금으로 인한 가계 소득 구성에 있어서 부차적인 역할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면서 끝없는 악순환을 이루고, 여성들의 남성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재생산하며, ‘빈곤의 여성화’ 경향을 부추긴다. 이러한 악순환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면서 여성을 자본의 위기를 극복할 이중의 자원으로 동원하는 것이 여성정책의 본질이다.
그렇지만 이런 여성정책은 성별영향평가 확대, 성인지 예산 제도 도입, 성별분리통계 마련 등 성주류화 전략의 가시적인 기반 마련, 비례대표 여성 50% 할당제 시행과 이에 따른 여성 국회의원 수 증가, 공적 영역에의 여성 진출 확대, 호주제 폐지 등의 조치들과 맞물리면서 여성을 위한 획기적인 진전으로 인식되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이 매년 끊이지 않고 증가해왔다는 현실이 단적으로 반영하듯이 실제 대다수 여성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고, 소수의 성공한 여성들의 신화는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은폐했다.
여성운동의 대응
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한 한국의 주류 여성운동은 여성의 위기를 관리하는 정책을 오히려 오랫동안 국가의 정책 영역에서 제외된 채 사적 영역의 문제로 다루어졌던 여성 의제를 정부 차원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확대됨에 따라, 그리고 ‘저출산’이라는 재생산 위기에 직면하여, 출산과 양육, 가사노동을 비롯한 여성들의 의제가 사회적 쟁점이 되고, 여성들의 발언의 공간이 열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노동시장에서의 남녀고용 차별 근절’,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더 이상 여성들만의 요구가 아니고 오히려 자본의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요구라는 점에서 그것은 여성의 기회는 아니었다.
여성운동은 한 축으로 공적 영역으로의 여성 진출 확대, 호주제 폐지, 성매매 방지법 제정 등을 매개로 정부 정책의 적극적인 주체로 편입하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직장과 가사의 양립 정책을 여성친화적인 차원에서 더욱 강화하고 보완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여성의 위기를 관리하며 여성을 자본의 위기 극복을 위한 자원으로 동원하고 착취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보완자로 여성운동이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결여한 채 그 관리 메커니즘에 편입한 여성운동의 결과는 여성의 문제를 어떤 정치적 갈등이나 차이도 없는 ‘선하고 도덕적인’ 문제로 탈정치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여성의제는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실현, 확대가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여성의제에 대한 분리주의적인 인식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 양자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행진
2005년 세계여성행진이 「인류를 위한 세계여성헌장」과 전 세계 여성들의 운동의 희망이 담긴 퀼트를 가지고 전 세계 릴레이 행진을 조직함에 따라 한국에서도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행진’이 조직되었다.6)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세계여성행진의 제안을 주목했다. 우선 대안세계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여성운동의 중요성과 역할을 제기할 수 있는 계기였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여성을 활용하는 신자유주의 여성정책과 단절하는 새로운 여성대중운동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세계여성행진은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맞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와 투쟁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세계적으로 여성에 대한 이중부담이 가중되고 여성의 위기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면서 이를 관리하고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가 주창되었고, 성주류화 전략은 그 일환으로 세계화되었다. 그러나 세계여성행진은 여성들이 직면하는 빈곤과 폭력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인식하면서 이를 넘어선 대안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여성운동의 방향임을 역설했고, 이를 위해 여타의 사회운동들과 연대를 강화하고 대안세계화를 위한 공동의 전망을 모색해왔다. 그와 동시에 세계여성행진은 대안세계화 운동 내에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여성권에 관한 쟁점을 제기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볼 때 2005년 세계여성행진의 두 번째 릴레이 행진은 한국의 여성운동과 사회운동 양자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한국의 여성운동이 스스로 대안세계화 운동의 중요한 주체가 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맞서 사회를 변혁하는 여성운동의 지향을 제기할 수 있는 동시에, 한국의 사회운동에게도 여성권을 인식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을 전망으로 삼을 것을 촉구할 수 있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시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확대하고 여성의 발전을 꾀한다는 정부의 여성정책이 노동의 불안정화에 조응한 ‘빈곤의 여성화’를 정당화하거나 관리하려는 시도이고, 여성의 권리를 축소하면서 이중적인 의무는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대중적으로 알려내고 비판할 필요가 절실했다. 게다가 주류적인 여성운동은 신자유주의의 관리 정책으로서 여성정책을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와 보육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하면서 적극적으로 그에 조응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여성정책의 관리 대상이나 활용 대상이 아닌, 운동의 주체로서 여성들 스스로가 나서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자신의 노동권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을 형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여성행진은 여성들이 처한 빈곤과 폭력의 문제가 신자유주의 자체에 내재한 결과라는 점에서 여성정책 따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성들의 운동과 투쟁을 통해서만 바꿀 수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여성대중운동 형성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여성행진이 실제 새로운 여성운동의 대중적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빈곤과 폭력의 관점에서 노동, 빈곤, 장애, 이주, 성매매와 같은 이슈를 제기하고 여성들 간의 연대를 확대하려 했으나, 여성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이 곧바로 신자유주의에 맞선 여성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외환위기 이후 성차별적 구조조정이 강화한 이중부담과 이에 연이은 위기관리 정책으로 여성들은 스스로를 운동의 주체로서 조직화하고 투쟁을 벌이는 경험을 축적하지 못했다. 여성운동이 정부의 위기관리 정책을 전달하는 역할을 자임하면서 여성들의 주체화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들의 운동을 조직한다는 것은, 주류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이나 새로운 여성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민주노총이나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과 같은 대중운동 단위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빈곤과 폭력의 구체적 현실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이에 기초하여 새로운 여성운동 방향성과 계획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함을 인식했지만, 이를 실현해 갈 구체적인 경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매매방지법과 성노동자 운동을 둘러싼 논쟁은 여성행진의 참가 범위를 규정하는 정세적인 조건으로 작용했다. 성매매의 구조적 원인으로서 빈곤과 성적 이중규범을 분석하고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성노동자의 권리선언에 대한 지지를 형성하려했던 시도 자체는 정당했다. 하지만 사회진보연대의 의도와 다르게 성노동 운동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여성행진 구성의 결정적인 쟁점이 되어버렸다. 이런 지형 속에서 성매매를 여성에 대한 폭력의 관점과 신자유주의가 심화하는 여성의 빈곤과 폭력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여성억압의 구조를 변혁하는 여성운동을 함께 만들자는 문제의식에 대한 논의는 차단될 수밖에 없었고, 여성행진을 통해 성매매 여성들을 포함하여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려던 애초의 문제의식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성매매방지법을 둘러싼 논란과 성노동자 운동
2004년 9월 23일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된 후,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의 생존권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에 존재를 드러내자 성매매방지법에 관한 논쟁이 불거졌다. 특히 성매매 여성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규정하고 <민주성노동자연대(민성노련)>라는 조직을 구성하면서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성매매를 도덕적인 거부나 규제의 관점이 아니라 여성의 빈곤, 차별적인 여성노동의 현실, 여성 육체와 성의 대상화와 상품화, 가족 제도 하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성욕과 같이 여성 일반이 겪는 문제들이 중첩되어 드러나는 복잡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관점 하에서 정의하고자 했다. 여성에 대한 이중규범과 빈곤의 여성화라는 성매매가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파악한다면, 성매매를 금지, 처벌하여 근절할 수 있다는 성매매방지법의 한계는 분명하다. 사후적으로 성매매 행위자들을 처벌하는 금지법이 성매매를 근절하거나 줄일 수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다른 나라의 경험으로나 증명된 사실이었다. 오히려 금지법은 성매매를 음성화함으로써 성매매 여성들을 폭력과 착취에 무방비 상태로 내몰지만 범죄자라는 신분 때문에 성매매 여성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전혀 제기할 수 없게 된다. 성매매방지법에서 성매매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하여 구제할 방안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성매매 여성의 불우한 희생이나 피해가 더욱 가시화되거나 강제적으로 성매매되었다는 구체적인 입증을 요구했다. 이는 성매매 여성을 수동화하여 구제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하며(이를 거부하는 성매매 여성은 문란한 창녀라는 낙인은 더욱 강화된다.) 성매매를 개인의 의지와 도덕의 문제로 환원하면서 성매매의 구조적 원인을 가리는 효과를 낳을 뿐이었다. 게다가 성매매 여성 스스로가 자신도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이며 따라서 자신의 생존과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매매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의 평가절하, 성 상품화, 빈곤의 여성화와 같은 현실은 문제 삼지 않은 채, 자신들을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로 금기시하며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폭력적인 상황에 문제를 제기했다. 여타의 사람들과 똑같이 투쟁하고 시위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해도 여성부와 여성단체들조차 철저히 묵살하는 경험을 하면서 성매매 여성들은 스스로를 권리를 가진 인간, 즉 노동자로 조직할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이런 측면에서 성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는 옹호되어야 하며, 더 많은 여성들과의 연대를 통해 여성의 억압과 배제를 지속시키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사회구조를 제거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했다.
또한 성매매방지법은 당시 시행되던 건강가족기본법에 따른 건강가정의 장려를 위한 보완책이라는 점에서 정세적인 비판도 필요했다. 당시 여성가족부는 ‘화이트 타이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그 취지를 “사회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상대(즉, 배우자)와 최선을 다해 관계를 하자는 것”이라며 “성매매에는 배우자에 대한 배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가족 밖의 성관계에 대한 보수주의적 관점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이런 발언은 건강가족기본법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 건강가족기본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가정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며, 모든 국민은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할 의무가 있다. 이는 가족해체와 저출산이 국가 위기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법적으로 의무화하겠다는 발상과 같다. 국가는 이를 위해 가정을 ‘음란물, 유흥가, 폭력 등 위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정부는 건강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위해환경인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들)를 근절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족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경제위기로 인한 가족해체의 위기비용을 가족 내 여성에게 전담하려는 시도이자, 가족제도 바깥의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였다. 여성을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과 근절되어야 할 여성으로 나누고, 전자에게는 의무를 전제한 지원을 후자에게는 폭력과 생존권의 박탈을 가져오는 정책은,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여성들의 노동권을 제약하고,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는 성적 이준기준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성매매가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여성에 대한 이중규범/빈곤의 여성화)에 주목하고 여성들의 자기조직화를 옹호(따라서 성노동자운동을 지지하며)할 것, 이 두 가지 쟁점을 제기하며 논쟁지형을 형성하면서 성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지를 확대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 간의 연대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논쟁지형을 확대하고 성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지흐름을 폭넓게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 원인의 하나는 성매매가 강간과 같은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이라는 쟁점을 넘어서지 못한 것인데, 이는 여성의 성욕에 대한 억압, 여성의 육체에 대한 대상화, 모성과 같은 여성의 기능적 부분의 착취, 여성의 노동권 박탈과 여성노동에 대한 가치절하와 같은 여성 억압과 배제의 구조와 관행을 포함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간과 같은 극단적 폭력과 동일시하면서 처벌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와 대안적 운동방향의 모색을 통해 해결해가야 할 부분이다. 또 다른 원인은 성매매를 여성일반이 처한 조건의 일부분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문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과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폭로가 보다 확대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을 만들기 위하여, 여성운동네트워크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여성들을 주체화해야 하는 운동들이 놓인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노동의 불안정화가 심화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해서 증가했으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운동 진영은 이 문제에 대해 조직률 하락에 따른 미조직 단위 조직화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다수를 점하게 되는 성별분업의 구조, 가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와 ‘여성’의제를 분리해서 사고했다. 이와 연동하여, 두 번째로 저출산-고령화 대책,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 등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하면서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서의 여성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정책이 발 빠르게 추진되었지만, 노동자운동은 이 함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오히려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 번째로 이런 상황에서 ‘가족 내 성별분업과 성차별 구조, 이데올로기 재생산 → 저임금, 불안정 노동 → 여성의 빈곤과 이중부담 강화 → 전체 노동자계급의 권리 후퇴와 삶의 조건 악화’라는 악순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추동하는 여성운동의 흐름이 부재했다. 주류적인 여성운동은 저임금 여성노동자, 빈곤 여성에 대한 정부 지원책의 전달 체계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여성의 주체화, 조직화보다는 현실의 어려움을 해소, 해결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제한하는 상황이었고, 노동자운동 내 페미니즘적 실천은 성폭력, 할당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양적 조직화로 치환되는 현실이었다. 이런 전반적인 조건 하에서 ‘빈곤의 여성화’, ‘여성노동의 비정규직화’라는 말들은 여성의 현실을 그저 지적할 뿐인 수사로 사용될 뿐, 운동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하는 데 참조점이 되지 못했다.
2007년 사회운동포럼의 여성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인 여성 활동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대중적으로 평가하고 현실에 대한 진단을 공유하기 위해 노조 내외곽의 다양한 활동가들과 함께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하여”라는 기조 하에 3차례의 사전 워크숍을 기획했다. “왜 현재 ‘비정규직철폐투쟁’이 여성 노동권 쟁취 투쟁이 아닌가”, “일-가정 양립 논의에서 한국사회 노동자운동의 한계와 과제”, “노동조합 내 페미니즘 실천의 현황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각각 진행된 워크숍을 통해서 여성을 보편적 노동자, 시민으로 인지하고 성적 차이에 기반 한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 전략을 자기 과제로 삼지 못한 노동자운동에서, 남성 ‘가장’ 노동자가 아닌 여성노동자, 가족 돌봄에 대한 책임이 있는 노동자의 문제는 가시화되지 못했고 여성문제는 늘 특수한, 주변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평가했다. 이렇게 구축된 노동자운동이 단지 투쟁할 때 ‘여성’ 비정규직을 더 많이 언급한다고 해서, 가사 육아 등 재생산영역의 문제를 여전히 여성들’만’의 문제로 치부한 채 운동 과제의 하나로 끼워 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수량적 평등, 형식적 형평성과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요구해 온 여성 활동가들의 실천 또한 그 고통스러운 지난함이야 분명하다해도 운동과 여성의 현실을 전혀 바꾸지 못할 뿐임을 함께 인식하고자 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여성들의 실천은 특수한 부문이 아니라 운동과 정치 자체를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란 여성이 삭제되고 재생산의 영역을 비가시화 한 채 구성된 사회운동의 보편성과 정치 전략을 뛰어 넘어, 여성억압에 도전하는 페미니즘이 통합된 새로운 보편적 이념, 일반적 전략, 그리고 다른 정치를 구상해 가는 것이다. 사회운동포럼에서의 여성대회는 이러한 결합의 문제의식을 사회운동들과 소통하고, 새로운 변혁의 상을 함께 만들자고 제안하려는 시도였다.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이런 여성대회의 결과물이었다. 사회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념으로 페미니즘을 확산하고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한 적극적인 실천을 조직하기 위한 주체들의 토론과 소통, 교육의 장으로서 여성운동네트워크는 탄생했다. 그렇지만 여성운동네트워크의 실천과 문제의식의 확산은 아직 미약한 상황이다. 노조 내 여성 활동가들의 결합을 강화하고, 페미니즘 교육과 여성운동 방향에 대한 공동 논의를 통해 새로운 실천을 모색해가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특히 최근의 금융위기, 경제위기 하에서 노동자운동의 진정한 대안 모색이 절실한 상황에서 전체 노동자운동의 과제를 선도하는 여성들의 요구와 실천을 제기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최근 몇 년 동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비정규직 투쟁들 중에서 다수를 차지할뿐더러 치열함과 처절함도 더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KTX, 기륭, 이랜드-뉴코아 등의 비정규직 사업장은 이른바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며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주며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각이나 노동자운동의 인식은 고용불안과 저임금을 구조화하는 원인으로서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분석하기보다는 열악한 처지에 내몰린 ‘다수의 여성들’이라는 것에 그쳐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남성생계부양자-여성가사담당자라는 이데올로기와 현실이 여성을 어떻게 노동시장에서 배제하거나 활용하는지를 분석하고 이를 고착화하는 일-가정 양립정책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정세적인 계기로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주목하고 결합하려 했다. 여성인력활용으로 압축되는 여성정책 하에서 여성은 의무로서의 모성과 재생산 노동을 강요받는 여성이자,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강요받는다. 이렇게 분리되어 다뤄지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여성에게 가족이 경제적 독립을 막고, 더욱 취약한 조건을 만드는 여성 억압 구조이며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성권의 실현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운동의 과제로 제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강조하는 문제의식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조건을 강조하지만 성별분업과 가족형태의 구조적 측면이 사장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이 시대의 가장 처절한 아픔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특히 고용의 유지와 그 형태를 둘러싼 정규직화 투쟁이 파업 등의 급박한 형태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여성의 노동권이 억압되는 구조적인 원인으로서 가족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대로 제기되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정규직 노조의 자기 방어적 태도와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소극성을 비난하는 근거로서 ‘힘없고, 불쌍한’ 여성들의 ‘처절한’ 투쟁이 강조되기도 한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과 연대가 실현되지 않고 현실적으로 비정규직의 대다수가 여성인 상황에서 우선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는 게 급선무라는 인식 하에 여성 비정규직 조합원에게만 해당하는 제도 개선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여성노동운동이나 단체들의 흐름도 존재한다. 이러한 흐름은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노동자운동에서 더욱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한데, KTX 투쟁에 대한 여성노동네트워크의 해법처럼 여성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동결이라는 결단에 달려있는 것으로 사태의 원인과 본질이 호도되고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의 갈등과 적대를 야기하는 흐름도 등장했다.
문제는 이런 조건이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주체화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별분업, 가족임금 이데올로기 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여성노동자의 노동을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과 가족 유지에 비해 부차적이고 임시적인 것으로 여기는 노동자계급에게 비정규직 여성노동의 사안은 운동의 양심과 도덕의 문제로는 받아들여질지언정 노동자운동에 중요한 과제로는 인식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나 현실이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갈등과 적대를 형성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나 조직화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는 길이 여성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과제를 제출하고 이를 위한 운동을 만드는 방향에서 모색될 필요가 절실해지고 있다.
금융위기 하에서 여성운동,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모색하기
파국적인 위기를 직면한 상황에서 지금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어떤 대안을 모색하고 어떤 운동을 할 것인가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문제이다. 금융위기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한국경제 위기는 IMF 위기에 버금가는 위기가 훨씬 장기에 걸쳐 진행될 것이고 장기불황 이후 찾아오는 위기여서 그 파괴적 효과는 IMF 위기보다 더욱 클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해 지배세력은 부담을 전 사회에 떠넘길 것이며, 노동자들에게 해고와 임금삭감의 형태로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할 것이다.
이 속에서 여성들을 둘러싼 조건은 이중적인 측면에서 억압적일 수 있다. 우선 임금삭감과 같은 조치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을 받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다수에게 더욱 파괴적인 효과를 미칠 것이다. 이들의 투쟁은 현재와 같은 노조운동 내에서 주요하게 반영되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한 임금삭감은 자본에게 더욱 손쉬운 해법으로 사고될 수 있다.(실제 지난 11월 18일 한나라당 발의로 최저임금 삭감의 내용을 담은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다른 한 측면은 여성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대한 공격에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가 ‘정규직 이기주의’를 비난하는 근거로 활용되면서 노동자운동 내의 갈등과 적대를 증폭시키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주체화되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여성들이 처하게 될 억압적인 조건은 여성들의 삶 자체를 크게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의 조건도 크게 제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지난 10년의 경험은 여성운동의 분리주의적인 양태나 노동자운동의 성 맹목이 여성, 남성 노동자 모두의 권리와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한계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운동을 지속하는 것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다. 노동자들 사이의 다양한 분할을 심화함으로써 위기를 전가하려는 자본의 시도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운동은 페미니즘을 인식하고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해야 한다.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노동자운동의 미래를 개척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여성의 저임금, 빈곤, 폭력의 현실이 도리어 노동자운동을 분할시키는 데 활용됨으로써 스스로의 권리조차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새로운 대안을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다.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로 전체 노동자운동이 지금의 위기에 노동자계급의 대안으로 맞설 수 있는 혁신과 전망을 밝혀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1)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농협중앙회의 사내부부 여성 우선해고 사태였다. 1999년 1월 농협은 인력감축을 계획하면서 사내부부 762쌍을 대상으로 “아내가 퇴직하지 않으면 남편이 해고될 것”이라며 협박했고, 그 결과 752명이 무더기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그 중 688명이 여성이었다. 당시의 많은 자료들이 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부당노동행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주로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하거나 희망퇴직 시킨 후 임시직으로 재계약하는 형태,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강제 전환하는 형태, 정규직을 부당해고 한 후 용역회사로 재입사하기를 강요하는 형태, 여성 집중 부서 자체를 퇴출시킨 후 부서원들을 용역회사를 통해 재입사시키는 형태 등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이 비정규직 전환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퇴사의 압력을 가하는 사례도 빈번했다.본문으로
2) 총 취업자 중 여성의 비율은 1975년 이래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으나, 자본은 여성노동력을 임시적이고 주변적인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결혼퇴직제, 출산, 양육으로 인한 경력 단절과 같은 차별적인 제도와 관행을 유지해왔다. 노동시장 내에서의 성별분업은 여성을 소위 ‘여성 직종’이라 불리는 도소매업, 음식숙박업, 금융보험업과 같은 서비스산업과 비공식부문에 그리고 단순노무, 사무서비스와 같은 여성 직무에 편중시켰다. 성별분리 호봉제, 노골적인 임금 차별과 같은 관행 속에서 여성들의 저임금이 정당화되었으며, 가내 노동과 같은 비공식 부문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성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3차 산업의 임시직, 일용직을 중심으로 여성 고용이 증가했으며, 이는 IMF 구조조정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화되기 이전부터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 불안정한 노동층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본문으로
3)남한에 정착된 자본주의적 가족 형태의 특징은 가족임금이 보장되지 않고 국가의 복지체제가 미비한 상황 속에서 유교적인 직계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동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한에서 성 혁명이 부재했던 상황과도 관계가 깊다. 가족을 유지할 수 있는 소득이 가족임금으로 보존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노동시장에 진출해야 했지만,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이에 기반한 성차별주의는 여성의 노동을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주로 저임금, 비공식 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런 상황은 정당화된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국가 정책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가족 관념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시행되었는데, 이는 가족의 전통을 유지하여 국가의 복지 기능을 가족에게 전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인의 부양 의무, 아이의 교육 등을 가족이 책임지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으로 전가하려는 정책이었다.본문으로
4) 성폭력은 역사적 가족형태를 매개로 조직된 여성억압에 대한 인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억압, 여성의 육체에 대한 대상화(인간으로서 존엄성 박탈), 모성과 같은 여성의 기능적 부분의 착취, 여성의 노동권 박탈과 여성노동에 대한 평가절하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을 배제하고 억압해 온 사회 구조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개별적인 성폭력 사건으로 한정될 수 없다. <100인위원회>를 비롯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자세한 평가는 김정은, 「[기획연재③ 한국여성운동사]성별화된 권리와 노동권의 결합을 위하여: 반(反)성폭력 운동 평가」, 『사회운동』 , 통권73호, 2007. 4.를 참조.본문으로
5)예를 들어 여성노동자가 노동자운동의 주체와 상징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을 반영하는 ‘노동형제’라는 호칭에 대한 문제제기는 언어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제기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제기에 대한 활동가들의 대응은 여성노동자를 주체화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호칭을 동지로 바꾸거나 쓰지 않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본문으로
6)1995년 4월, 캐나다의 10개 연방 중의 하나인 퀘벡주에서는 850여명의 여성들이 퀘벡여성연맹의 주최로 여성들의 빈곤을 제거하기 위한 분명한 조치를 요구하며 10일간의 행진을 진행했다. 이들 중 일부가 같은 해 북경여성대회에 참여하여 퀘벡의 행진을 세계화 할 것을 결의하고, 1998년 몬트리올에 모인 65개국 140명의 대표자들은 빈곤과 여성에 대한 폭력 제거를 행진의 두 가지 의제로 채택, 이에 관한 17개 요구목록을 작성하여, 2000년에 전 세계적인 행진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결성된 <세계여성행진>은 2000년 3월 8일부터 세계 빈곤철폐의 날인 10월 17일까지 까지 전 세계를 지나는 여성들의 릴레이 행진을 조직했다. 2005년에는 2004년 세계여성행진 총회에서 채택된 평등, 자유, 연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중심 가치로 하는 ‘인류를 위한 세계여성헌장’을 기초로 두 번째 릴레이 행진이 조직되었다. 2005년의 행진은 3월 8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시작하여 10월 17일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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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돌아보며,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함께 모색하자
이 글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 이래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여성들을 어떻게 활용해왔는지, 그것이 여성을 포함한 노동자계급 전반에는 어떤 의미였는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은 어떤 대응을 했고 그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가족을 매개로 여성의 노동권과 성욕의 권리를 억압해 온 역사와 신자유주의의 여성 활용 정책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여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던 노동자운동에 대한 비판이 포함된다. 이러한 비판은 경제위기, 금융위기가 심화되는 오늘날 노동자운동이 어떤 전망을 가질 것인가를 묻는 페미니즘의 질문이기도 하다. 이 글은 사회진보연대와 여성위원회의 문제의식과 활동을 중심으로 쓰였다. 여성해방과 사회의 변혁은 분리될 수 없다는 이념의 정세적인 표현으로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을 형성하고자 시도했던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의 활동은 되짚어 보건대 성과보다는 한계가 많았다. 그 한계들은 이후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가 여성운동의 전망과 실천을 개척해가는 데 있어서 깊이 각인해야 할 교훈이다. 이와 더불어 그 한계들이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 여성운동의 대안 마련에도 시사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997년 외환위기와 여성의 위기
1997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여성의 위기, 가족의 위기로 드러났다. 사실 외환위기 당시 몰아쳤던 각종 구조조정 정책이 젠더 중립적인 것은 아니었다. 가장 가시적이고 일차적인 차별적 양태는 여성의 일자리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기업들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인력감축 계획의 대상은 주로 여성이었다. 맞벌이 여성, 사내부부인 여성, 장기근속 여성들은 가장 먼저 퇴직을 강요당하거나 정리해고 되었다.1)
이러한 정리해고는 주로 처자식을 벌어 먹여야하는 남성 가장보다는 여성이 좀 덜 벌거나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는데, 결국 이는 ‘남성 생계부양자 - 여성 가사담당자’라는 성별분업의 논리가 구조조정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서 주요한 축을 이뤘음을 말해준다.
사실 소수의 노동자들을 제외하고는 가족임금을 보장받지 못했고, 국가 차원의 복지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한국에서 여성은 외환위기 이전에도 가족의 생계보조자이자 최후의 복지 제공자 역할을 해왔다.2)
남편의 부족한 임금과 사회가 제공하지 않는 부족한 복지는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을 통해 보충되었고, 사회는 여성들의 이런 희생을 언제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했다. 3)
외환위기와 이에 따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이러한 여성들의 이중부담을 더욱 증가시켰다.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리해고와 대량실업의 양산, 실질임금 하락으로 노동자 계급의 가계는 극적인 소득감소를 경험했다. 여성들은 가계소득을 보충하기 위해서 임시직, 계약직 등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라도 찾아야했고, 가계유지비용이 급증하자 가사노동을 담당하고 가족구성원을 보살피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의무는 더욱 강화되어 무임 가사노동도 더욱 늘려야 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야기한 각종 사회적 비용은 당연한 것처럼 여성에게 전가되었으며, 여성들은 절약과 노동력 출혈판매를 통해서 이런 위기 비용을 감내하고 가족을 유지해야 했다.
노동자운동의 대응
당시 노동자운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성차별적인 양태가 무엇을 의미하고,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오히려 여성 우선해고를 용인하거나 여성의 희생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시의 위기를 넘기려했다.
자본의 위기극복 전략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생산부문을 파괴하고 금융적 팽창을 추구하며, 이에 따라 노동의 유연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자본의 노동유연화 전략은 일시에 전면적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 내부의 다양한 차이와 분할을 매개로 노동자 간의 경쟁과 갈등을 심화시키며 진행된다. 여성을 우선 해고한다는 구조조정 계획은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단 한 번의 의심조차 품지 않았던 ‘남성 가장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관념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 대량해고의 위협과 위기감 앞에서 여성 우선해고 조치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과 아이를 포함한 노동자계급 가족 전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로 인식되었다.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서 민주노총이 ‘사회적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합의한 정리해고, 파견근로제는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기업들은 연달아 정리해고 계획을 발표했으나,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정리해고 철회를 걸고 36일 간의 파업을 벌인 현대자동차 노조의 투쟁은 대표적인 사례다. 법제화된 정리해고를 실제 실행할 수 있느냐를 가늠하는 상황인지라 사측은 정리해고 자체의 철회는 불가하다는 입장이었고, 결국 파업은 식당 여성노동자 144명 전원을 포함한 277명 정리해고 수용으로 마무리되었다. 식당 여성노동자 전원의 정리해고로 당장 수천 명의 일자리를 지킬 수는 있었지만, 이는 부메랑이 되어 노동자계급을 다시 공격했다. 그 시작은 여성이었으나 그 후 하청노동자, 파견노동자, 이주노동자로 끝없이 확대되었다.
당시 노동자운동의 대응은 한국 노동자운동이 여성해방의 과제를 자기 과제로 인식하고 싸운 경험이 없었던 상황에서 기인한다. 노동자운동은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이 가사를 전담한다는 성별분업 모델, 가정은 정치의 장소가 아니고 여성의 노동은 부차적이라는 이데올로기, 여성은 남성에 미달하는 존재라는 상징을 수용해왔다. 이러한 여성의 처지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노동해방과 사회의 변혁을 위해 반드시 바뀌어야 할 투쟁의 대상임을 사고하지 못했다. 여성의 이해와 요구는 모성보호, 출산 및 육아 휴직과 같은 보호조치로 제한적으로 인식되었고, 여성운동은 특수한 부문의 이해를 대변하는 운동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가 실직의 위험에 놓인 외환위기 상황에서 여성이 가족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당시 노동자운동이 여성을 희생해서 위기를 극복해보려던 시도가 한계적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여성노동의 특질이었던 저임금, 불안정 노동은 전체 노동자에게 일반화되었고, 대다수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현실은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공격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노동자에게 전가되는 위기를 여성의 희생을 통해 극복하려했던 노동자운동의 대응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결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양자가 적대적일 수 있다는 사고를 낳았다.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이하 100인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운동사회 내에서 발생한 16개의 성폭력 사건이 가해자 실명을 포함해 공개되었다. <100인위원회>는 운동사회의 여성문제에 대한 맹목과 억압적 성격을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기함으로써 사회운동의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운동사회 내의 가부장적 구조, 문화, 이데올로기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성폭력이라는 단일 이슈로 제기하고 이에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성된 개별 사건이 논쟁거리로 부각됨으로써 <100인위원회>가 제기하고자 했던 애초의 문제의식은 소실되고 성적 폭력의 문제로 축소되었다.4)
이후 논쟁은 성적 자유주의자들의 악의적인 공격, 가해자의 반격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많은 운동 단위들은 형식적인 성명서로 상황을 모면하거나 침묵으로 일관했다. 가해자에 대한 온정적 시각, 2차, 3차의 가해, 조직보위의 논리와 당면투쟁의 선차성 논리, 가해자의 역고소 등으로 인해 공개된 사건마저 ‘해결’이 어려워지면서 <100인위원회> 사건 공개의 현실 가능한 결론은 각 단위에 반성폭력 규약 작성을 장려하는 것이 되었다.
한편 <100인위원회>의 활동은 노동자운동, 사회운동 내 여성 활동가들이 여성 정체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성 활동가들은 여성모임이나 여성위원회 등을 결성하게 되었다. 여성 활동가들은 운동 내부에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을 기각하고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운동들과 여성운동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신념과 대의에 따라 헌신해 온 운동이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성별분업과 여성 차별적 관행을 답습하면서, 또한 여성의 성을 대상화하거나 성적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여성 활동가들의 생존을 위협할 때 여성들은 과연 이 운동이 자신의 해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갈등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여성 활동가들은 운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운동을 바꾸는 길을 택하려 했다. 그러나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폭력에 대한 감정적 동일화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변혁하기 위한 운동을 사고하지 못했고, <100인위원회>가 제시한 광의의 성폭력 개념을 통해 여성 활동가의 억압적 현실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5)
그러나 운동사회의 여성 배제와 억압적 성격을 비판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반성폭력 운동은 곧 여성 활동가들에게 또 다른 곤란들을 안겨주었다. 반성폭력 운동의 결과가 규약 제정으로 귀결되면서 공동체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논의보다는 발생한 사건의 처리가 반성폭력 운동의 주요 활동이 되었다.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리를 둘러싼 지난한 논의가 반복되고, 정파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사건의 처리조차 어려워지는 경우도 많았다. 여성 활동가들은 이렇게 진행되는 사건 처리가 운동사회 내의 여성 차별적 구조를 없애거나 축소시키지 못하고, 피해자의 상처 치유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여성 활동가들이 성폭력 사건 처리 전담반이 되어가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성폭력이 무엇을 침해한 폭력인지에 대한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여성 활동가들은 가해자의 명예훼손 역고소에도 대응해야 했다. 게다가 피해자의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도입된 2차 가해 개념은 오히려 논의를 봉쇄하고 침묵을 부채질했다. 운동사회의 페미니즘적 개조라는 애초의 문제의식은 성폭력을 유발하거나 여성을 비하하는 말과 행동을 자제하는 것으로 축소되어 아무런 논의도 촉발하지 못하는 현실도 목격하게 되었다. 가장 큰 난관은 노동자운동, 사회운동 내의 많은 여성의제가 성폭력 문제에 압도되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들이 제기되었으나, 아직까지 그 평가의 핵심과 대안적 방향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규약에 따른 처리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논의를 촉발시키기 위한 반성폭력 운동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거나 성폭력의 개념을 세분화하고 더 많은 것을 성폭력으로 정의하자는 제안만으로는 지금까지의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어렵다. 성폭력에 대한 반대가 여성의 성적 권리와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구조적인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고유한 권리, 즉 여성권(여성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대해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을 실현하는 가족의 변혁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사고해야만 한다. 따라서 현재의 사회가 역사적 가족형태를 매개로 지속해온 여성억압, 여성의 존엄성의 박탈, 여성의 육체에 대한 통제권 박탈 등을 인식하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성에 대한 관리 정책으로서 여성정책의 등장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여성정책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의 문제를 고려했다. 하나는 생계유지를 위한 여성들의 일자리 요구와 자본의 여성노동력 활용요구에 관한 것이다. 외환위기 직후 우선해고, 정리해고 등으로 감소했던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이후 급격히 증가했는데,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부족한 가계 소득을 보충하기 위한 노동자 가족의 전략으로 중요하게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계급의 생존전략이자, 경제의 금융화와 서비스화를 특질로 하는 현재의 경제발전 방향 속에서 제기되는 자본의 요구이기도 했다. 각종 서비스 노동, 하인 노동 등에 저임금의 유연한 여성노동력을 활용하고 이를 노동시장 전반의 유연화로 확대하는 것은 자본의 이윤창출에도 중요한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대응에 관한 것이다. 여성을 경제위기의 안전판이자 충격의 최종 흡수자로 사고하며 위기를 전가했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여성의 이중부담과 노동력의 출혈판매는 여성들이 감내할 수 없는 수준으로 심화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여성들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생계를 보조하는 비공식,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면서도 재생산 노동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외환위기 이후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사회적 위기비용은 여성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 즉 여성에게 전가해왔던 상황에서 이런 여성의 위기는 가족의 위기, 재생산의 위기와 동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빈곤의 심화, 출산율 저하, 이혼율 증가 등의 상황은 가족해체라는 진단까지 낳으며 사회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따라서 정부의 여성정책은 ‘직장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일관된 기조 하에서, 여성의 일자리 확대를 통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 제고와 저출산을 위시한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출산 및 보육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 축으로 여성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정책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 하에서 창출된 일자리 대부분은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수행하던 보육, 가사, 간병, 노인 돌봄과 같은 영역이었으며, 재생산 노동에 대한 저평가는 노동시장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낮은 임금이 책정되었다. 더불어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위해서는 파트타임 일자리가 장려되었는데, 이는 전반적인 노동시장 유연화를 촉진시키는 기제가 되었다. 다른 한 축으로는 건강가족기본법 제정 등을 통해 여성의 혼인과 출산의 의무를 명문화하는 한편, 양육비 지원, 보육서비스 확충 등의 지원책을 통해 출산을 장려했다. 이러한 정책의 함의는 분명했다. 여성들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1차적인 책임으로 인한 노동시장에서 부차적인 지위와, 노동시장에서 낮은 임금으로 인한 가계 소득 구성에 있어서 부차적인 역할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면서 끝없는 악순환을 이루고, 여성들의 남성에 대한 경제적 의존을 재생산하며, ‘빈곤의 여성화’ 경향을 부추긴다. 이러한 악순환을 털끝만큼도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면서 여성을 자본의 위기를 극복할 이중의 자원으로 동원하는 것이 여성정책의 본질이다.
그렇지만 이런 여성정책은 성별영향평가 확대, 성인지 예산 제도 도입, 성별분리통계 마련 등 성주류화 전략의 가시적인 기반 마련, 비례대표 여성 50% 할당제 시행과 이에 따른 여성 국회의원 수 증가, 공적 영역에의 여성 진출 확대, 호주제 폐지 등의 조치들과 맞물리면서 여성을 위한 획기적인 진전으로 인식되었다.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이 매년 끊이지 않고 증가해왔다는 현실이 단적으로 반영하듯이 실제 대다수 여성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고, 소수의 성공한 여성들의 신화는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은폐했다.
여성운동의 대응
여성단체연합을 비롯한 한국의 주류 여성운동은 여성의 위기를 관리하는 정책을 오히려 오랫동안 국가의 정책 영역에서 제외된 채 사적 영역의 문제로 다루어졌던 여성 의제를 정부 차원의 문제로 제기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했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확대됨에 따라, 그리고 ‘저출산’이라는 재생산 위기에 직면하여, 출산과 양육, 가사노동을 비롯한 여성들의 의제가 사회적 쟁점이 되고, 여성들의 발언의 공간이 열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노동시장에서의 남녀고용 차별 근절’, ‘출산-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더 이상 여성들만의 요구가 아니고 오히려 자본의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요구라는 점에서 그것은 여성의 기회는 아니었다.
여성운동은 한 축으로 공적 영역으로의 여성 진출 확대, 호주제 폐지, 성매매 방지법 제정 등을 매개로 정부 정책의 적극적인 주체로 편입하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직장과 가사의 양립 정책을 여성친화적인 차원에서 더욱 강화하고 보완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여성의 위기를 관리하며 여성을 자본의 위기 극복을 위한 자원으로 동원하고 착취를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보완자로 여성운동이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결여한 채 그 관리 메커니즘에 편입한 여성운동의 결과는 여성의 문제를 어떤 정치적 갈등이나 차이도 없는 ‘선하고 도덕적인’ 문제로 탈정치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여성의제는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실현, 확대가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여성의제에 대한 분리주의적인 인식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 양자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행진
2005년 세계여성행진이 「인류를 위한 세계여성헌장」과 전 세계 여성들의 운동의 희망이 담긴 퀼트를 가지고 전 세계 릴레이 행진을 조직함에 따라 한국에서도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행진’이 조직되었다.6)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세계여성행진의 제안을 주목했다. 우선 대안세계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여성운동의 중요성과 역할을 제기할 수 있는 계기였고,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여성을 활용하는 신자유주의 여성정책과 단절하는 새로운 여성대중운동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세계여성행진은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여성에 대한 빈곤과 폭력에 맞선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와 투쟁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세계적으로 여성에 대한 이중부담이 가중되고 여성의 위기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면서 이를 관리하고 신자유주의의 통치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가 주창되었고, 성주류화 전략은 그 일환으로 세계화되었다. 그러나 세계여성행진은 여성들이 직면하는 빈곤과 폭력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인식하면서 이를 넘어선 대안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여성운동의 방향임을 역설했고, 이를 위해 여타의 사회운동들과 연대를 강화하고 대안세계화를 위한 공동의 전망을 모색해왔다. 그와 동시에 세계여성행진은 대안세계화 운동 내에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여성권에 관한 쟁점을 제기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볼 때 2005년 세계여성행진의 두 번째 릴레이 행진은 한국의 여성운동과 사회운동 양자에게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한국의 여성운동이 스스로 대안세계화 운동의 중요한 주체가 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맞서 사회를 변혁하는 여성운동의 지향을 제기할 수 있는 동시에, 한국의 사회운동에게도 여성권을 인식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을 전망으로 삼을 것을 촉구할 수 있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더불어 당시는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확대하고 여성의 발전을 꾀한다는 정부의 여성정책이 노동의 불안정화에 조응한 ‘빈곤의 여성화’를 정당화하거나 관리하려는 시도이고, 여성의 권리를 축소하면서 이중적인 의무는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대중적으로 알려내고 비판할 필요가 절실했다. 게다가 주류적인 여성운동은 신자유주의의 관리 정책으로서 여성정책을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와 보육에 대한 지원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하면서 적극적으로 그에 조응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여성정책의 관리 대상이나 활용 대상이 아닌, 운동의 주체로서 여성들 스스로가 나서서 신자유주의에 맞서 자신의 노동권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을 형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여성행진은 여성들이 처한 빈곤과 폭력의 문제가 신자유주의 자체에 내재한 결과라는 점에서 여성정책 따위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성들의 운동과 투쟁을 통해서만 바꿀 수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제기하면서, 새로운 여성대중운동 형성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여성행진이 실제 새로운 여성운동의 대중적 흐름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양산하는 빈곤과 폭력의 관점에서 노동, 빈곤, 장애, 이주, 성매매와 같은 이슈를 제기하고 여성들 간의 연대를 확대하려 했으나, 여성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이 곧바로 신자유주의에 맞선 여성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외환위기 이후 성차별적 구조조정이 강화한 이중부담과 이에 연이은 위기관리 정책으로 여성들은 스스로를 운동의 주체로서 조직화하고 투쟁을 벌이는 경험을 축적하지 못했다. 여성운동이 정부의 위기관리 정책을 전달하는 역할을 자임하면서 여성들의 주체화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들의 운동을 조직한다는 것은, 주류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이나 새로운 여성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민주노총이나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과 같은 대중운동 단위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빈곤과 폭력의 구체적 현실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이에 기초하여 새로운 여성운동 방향성과 계획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함을 인식했지만, 이를 실현해 갈 구체적인 경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매매방지법과 성노동자 운동을 둘러싼 논쟁은 여성행진의 참가 범위를 규정하는 정세적인 조건으로 작용했다. 성매매의 구조적 원인으로서 빈곤과 성적 이중규범을 분석하고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성노동자의 권리선언에 대한 지지를 형성하려했던 시도 자체는 정당했다. 하지만 사회진보연대의 의도와 다르게 성노동 운동을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여성행진 구성의 결정적인 쟁점이 되어버렸다. 이런 지형 속에서 성매매를 여성에 대한 폭력의 관점과 신자유주의가 심화하는 여성의 빈곤과 폭력의 맥락에서 파악함으로써 여성억압의 구조를 변혁하는 여성운동을 함께 만들자는 문제의식에 대한 논의는 차단될 수밖에 없었고, 여성행진을 통해 성매매 여성들을 포함하여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려던 애초의 문제의식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성매매방지법을 둘러싼 논란과 성노동자 운동
2004년 9월 23일 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된 후,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의 생존권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는 등 사회에 존재를 드러내자 성매매방지법에 관한 논쟁이 불거졌다. 특히 성매매 여성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규정하고 <민주성노동자연대(민성노련)>라는 조직을 구성하면서 논쟁은 더욱 가열되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성매매를 도덕적인 거부나 규제의 관점이 아니라 여성의 빈곤, 차별적인 여성노동의 현실, 여성 육체와 성의 대상화와 상품화, 가족 제도 하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성욕과 같이 여성 일반이 겪는 문제들이 중첩되어 드러나는 복잡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관점 하에서 정의하고자 했다. 여성에 대한 이중규범과 빈곤의 여성화라는 성매매가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파악한다면, 성매매를 금지, 처벌하여 근절할 수 있다는 성매매방지법의 한계는 분명하다. 사후적으로 성매매 행위자들을 처벌하는 금지법이 성매매를 근절하거나 줄일 수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다른 나라의 경험으로나 증명된 사실이었다. 오히려 금지법은 성매매를 음성화함으로써 성매매 여성들을 폭력과 착취에 무방비 상태로 내몰지만 범죄자라는 신분 때문에 성매매 여성들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전혀 제기할 수 없게 된다. 성매매방지법에서 성매매 여성을 피해자로 규정하여 구제할 방안을 마련했다 하더라도 성매매 여성의 불우한 희생이나 피해가 더욱 가시화되거나 강제적으로 성매매되었다는 구체적인 입증을 요구했다. 이는 성매매 여성을 수동화하여 구제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하며(이를 거부하는 성매매 여성은 문란한 창녀라는 낙인은 더욱 강화된다.) 성매매를 개인의 의지와 도덕의 문제로 환원하면서 성매매의 구조적 원인을 가리는 효과를 낳을 뿐이었다. 게다가 성매매 여성 스스로가 자신도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이며 따라서 자신의 생존과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매매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여성노동의 평가절하, 성 상품화, 빈곤의 여성화와 같은 현실은 문제 삼지 않은 채, 자신들을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로 금기시하며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폭력적인 상황에 문제를 제기했다. 여타의 사람들과 똑같이 투쟁하고 시위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해도 여성부와 여성단체들조차 철저히 묵살하는 경험을 하면서 성매매 여성들은 스스로를 권리를 가진 인간, 즉 노동자로 조직할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이런 측면에서 성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는 옹호되어야 하며, 더 많은 여성들과의 연대를 통해 여성의 억압과 배제를 지속시키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사회구조를 제거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했다.
또한 성매매방지법은 당시 시행되던 건강가족기본법에 따른 건강가정의 장려를 위한 보완책이라는 점에서 정세적인 비판도 필요했다. 당시 여성가족부는 ‘화이트 타이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그 취지를 “사회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상대(즉, 배우자)와 최선을 다해 관계를 하자는 것”이라며 “성매매에는 배우자에 대한 배신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가족 밖의 성관계에 대한 보수주의적 관점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이런 발언은 건강가족기본법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 건강가족기본법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가정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며, 모든 국민은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할 의무가 있다. 이는 가족해체와 저출산이 국가 위기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법적으로 의무화하겠다는 발상과 같다. 국가는 이를 위해 가정을 ‘음란물, 유흥가, 폭력 등 위해환경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정부는 건강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위해환경인 성매매(와 성매매 여성들)를 근절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족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경제위기로 인한 가족해체의 위기비용을 가족 내 여성에게 전담하려는 시도이자, 가족제도 바깥의 여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문제였다. 여성을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과 근절되어야 할 여성으로 나누고, 전자에게는 의무를 전제한 지원을 후자에게는 폭력과 생존권의 박탈을 가져오는 정책은,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일차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여성들의 노동권을 제약하고,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는 성적 이준기준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었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성매매가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여성에 대한 이중규범/빈곤의 여성화)에 주목하고 여성들의 자기조직화를 옹호(따라서 성노동자운동을 지지하며)할 것, 이 두 가지 쟁점을 제기하며 논쟁지형을 형성하면서 성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지를 확대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 간의 연대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논쟁지형을 확대하고 성노동자운동에 대한 지지흐름을 폭넓게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 원인의 하나는 성매매가 강간과 같은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이라는 쟁점을 넘어서지 못한 것인데, 이는 여성의 성욕에 대한 억압, 여성의 육체에 대한 대상화, 모성과 같은 여성의 기능적 부분의 착취, 여성의 노동권 박탈과 여성노동에 대한 가치절하와 같은 여성 억압과 배제의 구조와 관행을 포함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간과 같은 극단적 폭력과 동일시하면서 처벌을 통해 해결하려 했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와 대안적 운동방향의 모색을 통해 해결해가야 할 부분이다. 또 다른 원인은 성매매를 여성일반이 처한 조건의 일부분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실패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문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과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폭로가 보다 확대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긴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을 만들기 위하여, 여성운동네트워크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여성들을 주체화해야 하는 운동들이 놓인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선 노동의 불안정화가 심화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계속해서 증가했으나,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자운동 진영은 이 문제에 대해 조직률 하락에 따른 미조직 단위 조직화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여성노동자들이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다수를 점하게 되는 성별분업의 구조, 가족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와 ‘여성’의제를 분리해서 사고했다. 이와 연동하여, 두 번째로 저출산-고령화 대책, 사회서비스 확충 전략 등 재생산의 위기에 대응하면서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서의 여성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정책이 발 빠르게 추진되었지만, 노동자운동은 이 함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오히려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 번째로 이런 상황에서 ‘가족 내 성별분업과 성차별 구조, 이데올로기 재생산 → 저임금, 불안정 노동 → 여성의 빈곤과 이중부담 강화 → 전체 노동자계급의 권리 후퇴와 삶의 조건 악화’라는 악순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추동하는 여성운동의 흐름이 부재했다. 주류적인 여성운동은 저임금 여성노동자, 빈곤 여성에 대한 정부 지원책의 전달 체계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여성의 주체화, 조직화보다는 현실의 어려움을 해소, 해결해줘야 하는 대상으로 제한하는 상황이었고, 노동자운동 내 페미니즘적 실천은 성폭력, 할당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양적 조직화로 치환되는 현실이었다. 이런 전반적인 조건 하에서 ‘빈곤의 여성화’, ‘여성노동의 비정규직화’라는 말들은 여성의 현실을 그저 지적할 뿐인 수사로 사용될 뿐, 운동의 전략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하는 데 참조점이 되지 못했다.
2007년 사회운동포럼의 여성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모인 여성 활동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대중적으로 평가하고 현실에 대한 진단을 공유하기 위해 노조 내외곽의 다양한 활동가들과 함께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하여”라는 기조 하에 3차례의 사전 워크숍을 기획했다. “왜 현재 ‘비정규직철폐투쟁’이 여성 노동권 쟁취 투쟁이 아닌가”, “일-가정 양립 논의에서 한국사회 노동자운동의 한계와 과제”, “노동조합 내 페미니즘 실천의 현황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각각 진행된 워크숍을 통해서 여성을 보편적 노동자, 시민으로 인지하고 성적 차이에 기반 한 여성의 권리를 실현하는 전략을 자기 과제로 삼지 못한 노동자운동에서, 남성 ‘가장’ 노동자가 아닌 여성노동자, 가족 돌봄에 대한 책임이 있는 노동자의 문제는 가시화되지 못했고 여성문제는 늘 특수한, 주변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평가했다. 이렇게 구축된 노동자운동이 단지 투쟁할 때 ‘여성’ 비정규직을 더 많이 언급한다고 해서, 가사 육아 등 재생산영역의 문제를 여전히 여성들’만’의 문제로 치부한 채 운동 과제의 하나로 끼워 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수량적 평등, 형식적 형평성과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요구해 온 여성 활동가들의 실천 또한 그 고통스러운 지난함이야 분명하다해도 운동과 여성의 현실을 전혀 바꾸지 못할 뿐임을 함께 인식하고자 했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기 위한 여성들의 실천은 특수한 부문이 아니라 운동과 정치 자체를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이란 여성이 삭제되고 재생산의 영역을 비가시화 한 채 구성된 사회운동의 보편성과 정치 전략을 뛰어 넘어, 여성억압에 도전하는 페미니즘이 통합된 새로운 보편적 이념, 일반적 전략, 그리고 다른 정치를 구상해 가는 것이다. 사회운동포럼에서의 여성대회는 이러한 결합의 문제의식을 사회운동들과 소통하고, 새로운 변혁의 상을 함께 만들자고 제안하려는 시도였다.
여성운동네트워크는 이런 여성대회의 결과물이었다. 사회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념으로 페미니즘을 확산하고 사회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을 위한 적극적인 실천을 조직하기 위한 주체들의 토론과 소통, 교육의 장으로서 여성운동네트워크는 탄생했다. 그렇지만 여성운동네트워크의 실천과 문제의식의 확산은 아직 미약한 상황이다. 노조 내 여성 활동가들의 결합을 강화하고, 페미니즘 교육과 여성운동 방향에 대한 공동 논의를 통해 새로운 실천을 모색해가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특히 최근의 금융위기, 경제위기 하에서 노동자운동의 진정한 대안 모색이 절실한 상황에서 전체 노동자운동의 과제를 선도하는 여성들의 요구와 실천을 제기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최근 몇 년 동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비정규직 투쟁들 중에서 다수를 차지할뿐더러 치열함과 처절함도 더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KTX, 기륭, 이랜드-뉴코아 등의 비정규직 사업장은 이른바 여성에게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며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주며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각이나 노동자운동의 인식은 고용불안과 저임금을 구조화하는 원인으로서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분석하기보다는 열악한 처지에 내몰린 ‘다수의 여성들’이라는 것에 그쳐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남성생계부양자-여성가사담당자라는 이데올로기와 현실이 여성을 어떻게 노동시장에서 배제하거나 활용하는지를 분석하고 이를 고착화하는 일-가정 양립정책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정세적인 계기로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 주목하고 결합하려 했다. 여성인력활용으로 압축되는 여성정책 하에서 여성은 의무로서의 모성과 재생산 노동을 강요받는 여성이자,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강요받는다. 이렇게 분리되어 다뤄지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여성에게 가족이 경제적 독립을 막고, 더욱 취약한 조건을 만드는 여성 억압 구조이며 여성노동자들의 노동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여성권의 실현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운동의 과제로 제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강조하는 문제의식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조건을 강조하지만 성별분업과 가족형태의 구조적 측면이 사장되면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이 시대의 가장 처절한 아픔을 대변하는 상징이 되었다. 특히 고용의 유지와 그 형태를 둘러싼 정규직화 투쟁이 파업 등의 급박한 형태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여성의 노동권이 억압되는 구조적인 원인으로서 가족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대로 제기되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정규직 노조의 자기 방어적 태도와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소극성을 비난하는 근거로서 ‘힘없고, 불쌍한’ 여성들의 ‘처절한’ 투쟁이 강조되기도 한다.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과 연대가 실현되지 않고 현실적으로 비정규직의 대다수가 여성인 상황에서 우선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는 게 급선무라는 인식 하에 여성 비정규직 조합원에게만 해당하는 제도 개선을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여성노동운동이나 단체들의 흐름도 존재한다. 이러한 흐름은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노동자운동에서 더욱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한데, KTX 투쟁에 대한 여성노동네트워크의 해법처럼 여성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동결이라는 결단에 달려있는 것으로 사태의 원인과 본질이 호도되고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의 갈등과 적대를 야기하는 흐름도 등장했다.
문제는 이런 조건이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주체화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별분업, 가족임금 이데올로기 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여성노동자의 노동을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과 가족 유지에 비해 부차적이고 임시적인 것으로 여기는 노동자계급에게 비정규직 여성노동의 사안은 운동의 양심과 도덕의 문제로는 받아들여질지언정 노동자운동에 중요한 과제로는 인식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나 현실이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갈등과 적대를 형성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나 조직화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바꾸는 길이 여성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운동의 혁신의 과제를 제출하고 이를 위한 운동을 만드는 방향에서 모색될 필요가 절실해지고 있다.
금융위기 하에서 여성운동,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모색하기
파국적인 위기를 직면한 상황에서 지금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어떤 대안을 모색하고 어떤 운동을 할 것인가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문제이다. 금융위기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한국경제 위기는 IMF 위기에 버금가는 위기가 훨씬 장기에 걸쳐 진행될 것이고 장기불황 이후 찾아오는 위기여서 그 파괴적 효과는 IMF 위기보다 더욱 클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해 지배세력은 부담을 전 사회에 떠넘길 것이며, 노동자들에게 해고와 임금삭감의 형태로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할 것이다.
이 속에서 여성들을 둘러싼 조건은 이중적인 측면에서 억압적일 수 있다. 우선 임금삭감과 같은 조치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을 받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다수에게 더욱 파괴적인 효과를 미칠 것이다. 이들의 투쟁은 현재와 같은 노조운동 내에서 주요하게 반영되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한 임금삭감은 자본에게 더욱 손쉬운 해법으로 사고될 수 있다.(실제 지난 11월 18일 한나라당 발의로 최저임금 삭감의 내용을 담은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다른 한 측면은 여성노동자들이 정규직에 대한 공격에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가 ‘정규직 이기주의’를 비난하는 근거로 활용되면서 노동자운동 내의 갈등과 적대를 증폭시키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주체화되기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여성들이 처하게 될 억압적인 조건은 여성들의 삶 자체를 크게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자운동의 조건도 크게 제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더욱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지난 10년의 경험은 여성운동의 분리주의적인 양태나 노동자운동의 성 맹목이 여성, 남성 노동자 모두의 권리와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한계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운동을 지속하는 것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다. 노동자들 사이의 다양한 분할을 심화함으로써 위기를 전가하려는 자본의 시도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운동은 페미니즘을 인식하고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해야 한다.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노동자운동의 미래를 개척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여성의 저임금, 빈곤, 폭력의 현실이 도리어 노동자운동을 분할시키는 데 활용됨으로써 스스로의 권리조차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새로운 대안을 건설하는 것 외에는 없다.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로 전체 노동자운동이 지금의 위기에 노동자계급의 대안으로 맞설 수 있는 혁신과 전망을 밝혀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여성운동, 노동자운동과 페미니즘의 결합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1)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농협중앙회의 사내부부 여성 우선해고 사태였다. 1999년 1월 농협은 인력감축을 계획하면서 사내부부 762쌍을 대상으로 “아내가 퇴직하지 않으면 남편이 해고될 것”이라며 협박했고, 그 결과 752명이 무더기로 사직서를 제출했고, 그 중 688명이 여성이었다. 당시의 많은 자료들이 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부당노동행위를 언급하고 있는데, 주로 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하거나 희망퇴직 시킨 후 임시직으로 재계약하는 형태,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강제 전환하는 형태, 정규직을 부당해고 한 후 용역회사로 재입사하기를 강요하는 형태, 여성 집중 부서 자체를 퇴출시킨 후 부서원들을 용역회사를 통해 재입사시키는 형태 등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여성이 비정규직 전환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퇴사의 압력을 가하는 사례도 빈번했다.본문으로
2) 총 취업자 중 여성의 비율은 1975년 이래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으나, 자본은 여성노동력을 임시적이고 주변적인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결혼퇴직제, 출산, 양육으로 인한 경력 단절과 같은 차별적인 제도와 관행을 유지해왔다. 노동시장 내에서의 성별분업은 여성을 소위 ‘여성 직종’이라 불리는 도소매업, 음식숙박업, 금융보험업과 같은 서비스산업과 비공식부문에 그리고 단순노무, 사무서비스와 같은 여성 직무에 편중시켰다. 성별분리 호봉제, 노골적인 임금 차별과 같은 관행 속에서 여성들의 저임금이 정당화되었으며, 가내 노동과 같은 비공식 부문의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자성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3차 산업의 임시직, 일용직을 중심으로 여성 고용이 증가했으며, 이는 IMF 구조조정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화되기 이전부터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 불안정한 노동층을 구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본문으로
3)남한에 정착된 자본주의적 가족 형태의 특징은 가족임금이 보장되지 않고 국가의 복지체제가 미비한 상황 속에서 유교적인 직계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동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남한에서 성 혁명이 부재했던 상황과도 관계가 깊다. 가족을 유지할 수 있는 소득이 가족임금으로 보존되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들은 노동시장에 진출해야 했지만,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이에 기반한 성차별주의는 여성의 노동을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은 주로 저임금, 비공식 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런 상황은 정당화된다.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국가 정책은 전통적인 가부장제적 가족 관념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시행되었는데, 이는 가족의 전통을 유지하여 국가의 복지 기능을 가족에게 전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인의 부양 의무, 아이의 교육 등을 가족이 책임지게 되었고, 이것은 결국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노동력 재생산을 가족으로 전가하려는 정책이었다.본문으로
4) 성폭력은 역사적 가족형태를 매개로 조직된 여성억압에 대한 인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성의 성욕에 대한 억압, 여성의 육체에 대한 대상화(인간으로서 존엄성 박탈), 모성과 같은 여성의 기능적 부분의 착취, 여성의 노동권 박탈과 여성노동에 대한 평가절하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을 배제하고 억압해 온 사회 구조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개별적인 성폭력 사건으로 한정될 수 없다. <100인위원회>를 비롯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자세한 평가는 김정은, 「[기획연재③ 한국여성운동사]성별화된 권리와 노동권의 결합을 위하여: 반(反)성폭력 운동 평가」, 『사회운동』 , 통권73호, 2007. 4.를 참조.본문으로
5)예를 들어 여성노동자가 노동자운동의 주체와 상징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을 반영하는 ‘노동형제’라는 호칭에 대한 문제제기는 언어 성폭력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제기되었다. 따라서 이 문제제기에 대한 활동가들의 대응은 여성노동자를 주체화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호칭을 동지로 바꾸거나 쓰지 않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본문으로
6)1995년 4월, 캐나다의 10개 연방 중의 하나인 퀘벡주에서는 850여명의 여성들이 퀘벡여성연맹의 주최로 여성들의 빈곤을 제거하기 위한 분명한 조치를 요구하며 10일간의 행진을 진행했다. 이들 중 일부가 같은 해 북경여성대회에 참여하여 퀘벡의 행진을 세계화 할 것을 결의하고, 1998년 몬트리올에 모인 65개국 140명의 대표자들은 빈곤과 여성에 대한 폭력 제거를 행진의 두 가지 의제로 채택, 이에 관한 17개 요구목록을 작성하여, 2000년에 전 세계적인 행진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결성된 <세계여성행진>은 2000년 3월 8일부터 세계 빈곤철폐의 날인 10월 17일까지 까지 전 세계를 지나는 여성들의 릴레이 행진을 조직했다. 2005년에는 2004년 세계여성행진 총회에서 채택된 평등, 자유, 연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중심 가치로 하는 ‘인류를 위한 세계여성헌장’을 기초로 두 번째 릴레이 행진이 조직되었다. 2005년의 행진은 3월 8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시작하여 10월 17일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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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금융위기와 동아시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위기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끝이 어디인지 알기 어려운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긴급한 반복적 국가 개입에 의해 일시적으로 위기가 완화될지 몰라도, 그 대가로 미국 금융위기의 효과가 전 지구적으로 파급되면서 세계경제 전체가 동요하고 있는 국면이다. 특히 달러 흡입을 위한 미국의 강력한 개입이 커지면서 미국을 제외한 여타 지역의 달러부족 사태가 심각해지고, 또 미국의 소비시장 위축과 투자 위축으로 인한 경제적 여파가 여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본격 폭발하기에 앞서 이미 경기침체 상태에 들어선 유럽지역은 달러화 대비 유로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미국 경제위기의 부담을 크게 떠안는 국면에 들어서고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 또한 미국 경기침체가 수출시장에 끼치는 효과 때문에 상당한 위기적 상황을 보이고 있다.
현재의 미국의 금융위기의 발발은 금융세계화의 조건 변화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특히 1990년대 미국의 ‘신경제’ 상황과 대비되는 2000년대의 미국 중심 금융세계화는 금융위기의 폭과 심도를 더욱 확대하면서 새로운 면모를 띠고 있다. 1990년대 미국의 금융적 팽창은 주로 초국경적 인수합병을 목적으로 유럽에서 유입되는 자본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주식시장의 거대한 거품을 기반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1998년 주식시장의 거품이 극대화된 시점까지 진행된 이 과정에서 주식시장과 또한 거기에 의탁한 정보통신기술(IT)은 ‘신경제’의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는 또한 급속하게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된 시기이기도 한데, 이 적자는 미국으로 계속 유입되는 달러에 의해 상쇄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 신경제의 바탕을 이룬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고, 주식시장이 과거와 같은 호경기를 회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금융적 팽창은 새로운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경기부양을 위한 초저금리 시대를 맞이하여, 낮은 금리에 기반을 둔 금융화한 자본은 대대적으로 부동산 시장에 흘러들어 부동산 거품을 형성하였다. 여기에 부동산의 모기지 채권을 상품화하는 기법들이 결합해 파생상품들을 낳기 시작했고, 이는 회사채나 여타 부채를 유동화해서 판매하는 새로운 기법들과 결합해 파생상품 시장을 거대하게 팽창시켰다. 주택담보부증권(MBS), 자산담보부증권(ABS)과 이를 투자은행이 재가공한 부채담보부증권(CDO), 그리고 대출 위험에 대한 보험 장치로서 대대적으로 성장한 신용파산스왑(CDS) 등의 파생상품 시장은 위험을 분산한다는 최초 목적을 벗어나 그 자체로 금융적 위험성을 대대적으로 증폭시키고, 그에 대한 근본적 치유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금융시장을 몰아갔다.
가공자본의 위험성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현재의 미국 금융위기는 국가의 개입에 의해 그 폭발이 지연되고 있는데, 이런 방식의 미국의 국가의 개입이 아직까지 타 지역에 대한 미국 경제의 우위 그 자체를 침식하지 않고, 미국 경제를 어느 정도 유지시켜갈 수 있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이 세 가지 점은 미국의 헤게모니적 지위가 쇠퇴하기는 하지만 아직 종료되지는 않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첫째는 미국이 달러라는 기축통화의 발권특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러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미국은 이 특권을 활용해, 엄청난 무역적자와 대폭 증가하는 재정적자가 있음에도 통화 인플레이션 없이 경화부족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데, 특히 해외로부터 달러를 대대적으로 흡수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그 주요한 메커니즘이 된다.
둘째로 여타 통화에 대한 달러의 신뢰가 근본적으로 손상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위기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자본이탈이나 달러로부터 금으로의 투자 이탈이 발생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이 유로에 대한 달러의 상대적 우위가 관철되고 있는 현 상황이 보여주고 있는 바이며, 미국의 국가개입을 통한 위기해소 메커니즘이 아직도 작동하게 되는 배경이다.
셋째로 특히 2000년대 들어서 미국의 이중 적자를 메워주고 있는 것으로서 동아시아 외환보유고 증가에 기반을 둔 달러환류 메커니즘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데, 이 또한 미국의 경제적 부담을 타 지역으로 이전시키는 중요한 메커니즘이 되고 있다.
현재 위기는 이런 미국의 우위를 곧바로 침식시키기보다 당분간 유지시킬 것으로 보인다. 그 지속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동아시아이다. 현재 금융위기의 상황에서 동아시아와 미국의 연관성에서 중요한 부분은 미국 금융위기의 부담이 어떤 방식으로 동아시아로 이전될 가능성이 있는지, 그리고 미국의 경제를 지탱시키기 위한 동아시아로부터의 달러환류가 지속될 것인지 문제고, 이는 결국 여타 지역의 정책적 공조-지원에 의해 유지되는 미국의 위기가 어떤 한계에 봉착할 것인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금융위기 전후의 동아시아 경제
미국의 경기침체의 효과는 여타지역에 동시에 파급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한편에서 미국 소비시장의 위축 때문에 미국으로의 수출이 대폭 줄어드는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경제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전함으로써 그 효과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는 대체로 1997년 금융위기를 전후로 해서 1990년 전반기에 비해 저조한 성장세를 보이다가, 이 상태가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후, 2005년 이후 다소의 회복세를 보인다. 우선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을 신흥공업경제(NIEs)와 ASEAN4(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로 나누어 살펴보면, 두 지역에서 경제성장률은 1991-1995년 각각 7.3%와 6.8%였다가, 1996-2000년 시기에는 급격히 하락하여 각각 4.8%와 1.9%를 기록하였고, 2001-2005년에도 크게 회복되지는 않아 각각 4.1%와 4.8% 수치를 보였다. 다만 최근 3년인 2005-2007년에는 각각 5.2%와 5.6%로 지난 10년간에서는 가장 호전된 국면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변동 자체는 미국의 경기변동과도 일정한 관련성을 보인다.
그러나 2007년 말경부터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기침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 금융위기 이후 이 지역 국가들은 경상수지 균형과 흑자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2007년 12월 한국의 경상수지가 적자로 전환되어 그 후 계속 적자기조를 유지하고 있고, ASEAN4도 경상수지 흑자가 축소되다가 2008년 4-6월에는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소폭 적자로 전환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90년대 말 위기에서 벗어나 있던 베트남에서 무역수지 적자가 크게 늘어나는 동시에 통화가치 하락이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봄부터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인플레이션의 가속화와 대폭적인 대외 수지의 악화가 일반적인 추세로 관찰되는데, 이런 상황 변화의 배경에는 국제적인 자원가격 상승이 놓여 있다. 이 지역 국가들이 자원의존국들이 많고, 에너지 효율이 낮기 때문에 국제적인 자원가격의 상승은 생산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전반적인 인플레이션과 무역수지 악화를 초래했다. 특히 과거에는 자원비용 상승이 자원생산국에 대한 수출증가를 통해 어느 정도 그 효과가 상쇄되어, 무역수지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작았던 반면, 최근의 변화는 유가 인상 뿐 아니라, 광물, 농산품을 포함한 일차산품 전체로 가격인상이 확대되면서 그 파급력이 훨씬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1)
최근의 경기침체라는 흐름은 일본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 일본은 2002년 2월에 시작된 경기회복 국면이 2007년 4/4분기에 종료되고 침체국면에 들어섰다. 일본 또한 동아시아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자원가격 상승의 직접적 영향을 겪고 그 때문에 교역조건이 악화되었으며, 두 번째로 미국의 경기 악화가 대미수출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일본경기에 영향을 다시 끼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008년 10월에 일본은 무역적자를 기록하였으며, 11월 현재로 일본은 두 분기 연속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거품붕괴 이후의 가장 심각한 경기침체 상태를 겪고 있으며, 2009년에도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중국은 다소 이례적이어서 여전히 여타 국가들에 비해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지만, 성장률 추세는 최근 들어 점차 둔화되고 있다. 2008년 3분기까지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9.9%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1.9%보다 상당히 하락하였고, 5년 만에 처음으로 한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다. 내년에는 더 낮아져서, 경제성장률의 예측치는 8.6%로 이야기되고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는 미국의 경제위기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데다 인민폐의 지속적 절상 등의 원인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둔화하면서 도시-농촌 간 인구이동에도 변화가 발생하여,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농민공들이 도시의 일자리부족으로 다시 농촌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고 있기도 하다.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과거 몇 년간 빠른 속도로 단기외채가 증가하는 문제도 관찰되는데, 특히 이는 한국에서 두드러진다. 단기외채는 2006년 중반까지는 1천억 달러 이하였지만, 2006년 후반에 1천억 달러를 돌파한 후, 2008년 들어서는 1700억 달러 수준을 넘어섰다. GDP 대비 단기외채 비율 또한 2008년 6월에 18.1%로, 1997년 금융위기 시절(1997년 6월)의 15.4%를 넘어서고 있으며, 이것이 금융에 대한 신뢰를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단기외채가 늘어난 주요한 이유는 금융기관, 특히 외국은행의 한국 지점에서의 차입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었다.2)
동아시아는 여전히 세계의 제조업 중심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이는 1990년대 말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에도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1990년대 말의 위기를 동아시아 지역이 돌파할 수 있던 주요한 이유는 미국의 소비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인데, 2000년대 들어 특히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추가해 가계적자라는 틀을 통해 여타 세계로부터 미국으로의 수출이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메커니즘을 지탱해 준 미국 자체가 위기에 처한데다, 이와 결합해 자원가격 상승이라는 위기요소가 증폭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은 미국에 연계된 수출지향 경제라는 이전의 구도를 지속시켜 가는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자원가격은 하락세로 돌아섰지만, 이번에는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여파 때문에 대대적으로 소비시장이 위축되어, 이 또한 수출 증가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경기침체를 더 촉발하고 있다는 난점에 봉착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기본적으로 자체 소비시장 확대보다는 미국 소비시장 확대에 기반해 경제성장을 유지해 온 지역이며, 이로 인한 무역흑자 증대-->환율절상의 압력이 발생해도, 이를 다시 임금억압을 통해 돌파하고 또 다시 미국 시장에 대한 의존을 통해 이를 해소하려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데, 미국발 경제위기는 이런 한계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금융세계화 국면에 세 가지 서로 연결되지만 다소 상이한 방향의 움직임이 나타난 바 있다. 한편에서는 과거 ‘발전국가’라 지칭된 지역들이 탈발전주의 신자유주의로 진행되면서, 개방화의 속도가 급속히 빨라지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던 고용의 틀이 붕괴되었다. 두 번째로 후발 공업화 지역으로 이 지역에 중요성을 갖게 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국가에 의한 금융적 보호나 산업적 보호장치도 배제된 채 금융세계화의 조건 속에 던져진 결과, 전 지구적 금융위기의 충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로 존재하게 되고, 자본의 유동성의 충격을 대대적으로 받게 되었다. 셋째로, 탈사회주의 해체의 지역들도 등장하였는데, 이들 지역에서는 금융적으로는 상대적으로 개방성의 진행도가 낮더라도, 국내에서 작동해온 여러 가지 보호장치들을 해체하면서 세계시장의 편입도를 높임에 따라, 내외적 충격의 요소들이 국내적으로 증폭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세 지역들은 그 자체로 금융화의 주도적 지역은 아니지만, 금융 우위의 축적구조에 적절하도록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세계적 금융위기에 그만큼 더 취약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구조조정을 불가피하게 만든 내적 요인들(자본수익성의 하락을 포함해)은 세계적 위기를 더욱 심각한 방식으로 내부화할 수 있는 요소가 되어 왔다.
달러 환류 메커니즘과 동아시아
미국이 이중의 적자에 가계부채의 증가라는 제3의 적자까지 추가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음에도, 지속적으로 달러유입이 가능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비시장을 팽창시킬 수 있던 주요한 지지대 중 하나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통해 유출된 달러가 금융적 투자 형태로 다시 미국에 재유입되는 달러환류의 메커니즘이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이 역할을 맡아온 것은 일본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 이 달러환류의 메커니즘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달러환류를 실행하는 주요 국가들이 동아시아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아래 <표1>에서 보면 2000년에서 2007년 사이에 미국 재무부 증권 총액의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날 정도로 미국경제에서 차지하는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여기서 차지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의 비중이 다소 줄어들고 있음에 비해서 중국의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나 이제는 미국 재무부 증권 보유액에서 일본과 비등한 수준에 올라섰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 지역에서 2000년대 들어 미국 재무부 증권 보유 형태로 미국으로 유입되는 달러환류 메커니즘의 중요성이 커질 수 있던 주요한 이유는 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고가 1990년대 말 금융위기의 후과로 급격히 증가했던데 기인한다. 이런 외환보유고 증가는 무역수지 흑자 증가에 기인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 나타난 바 있듯이 정부정책상 외환보유고를 증가시키기 위해 통화안정채권이나 외평채의 발행을 통해 인위적으로 달러보유액을 늘린 데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달러의 약세 추세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거대하게 늘어난 외환보유고는 집중적으로 미국 재무부 증권에 집중 투자되었던 것이다. 반면 미국의 여타 금융부문에서 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중요성은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동아시아가 이처럼 대량의 외환보유고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이를 집중적으로 미국 재무성 증권 투입에 투자하고 있는 이유는 첫째로, 이 지역 전체가 세계적 금융위기의 가능성에 매우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음에 비해 이를 대비할 수 있는 완충적 장치나 제도가 매우 취약했고, 그 대책은 공동의 차원이 아니라 개별 국가들 수준에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각국은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외환보유고를 늘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두 번째로, 이렇게 형성된 외환보유고는 긴급할 때 유동성을 보장받는 형태로 보유되어야 하는 동시에, 그 자체가 위험에 과도하게 노출되어서는 안 되고, 안정적 투자처를 찾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지속적 생산은 줄곧 미국 시장의 팽창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시장의 성장지속과 동아시아의 성장지속은 서로에 대한 긍정적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외환보유고가 늘어나게 되는 주원인 중 하나는 미국에 대한 무역수지 흑자이면서, 또한 이를 가지고 미국 경제의 소비의 지속을 지탱해주는 메커니즘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의 외형적으로 성장한 금융력은 그자체로서는 초민족적인 금융적 이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고도금융과는 성격이 상이하며, 오히려 미국의 금고라는 성격을 지녀왔다.
중국이라는 변수
2008년 7월말 현재 중국의 미국 재무부 증권 보유액은 5187억 달러로, 외국인 보유액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이 수준은 2000년의 603억 달러에서 760% 증가한 것이다. 2007년말 미국의 대 중국 무역적자는 2562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후로도 중국의 미국 재무부 증권 보유액은 계속 늘어나서, 11월 9일 기준으로 보유총액이 5850억 달러로, 일본의 5732억 달러를 100억 달러 앞서서 최대의 채권국으로 부상하였다(한겨레 신문, 11월 21일).
이처럼 거대하게 형성된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양면적인 측면을 지닌다. 한편에서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중국의 강력한 금융적 자율성의 상징이기보다는 중국이 강하게 미국경제의 운명에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는 의존성의 지표이다. 동아시아의 외환보유고의 증가가 직접적으로 이 지역을 휩쓴 1990년대 말 금융위기의 교훈의 결과물인 것에서 보듯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고 증가는 이 지역 전체에 걸쳐서 외부로부터의 금융적 충격에 대해 취약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또한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그 상당부분이 대미 수출 시장 팽창에 의존하고, 이는 다시 미국 소비시장 팽창에 의존하는데, 그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 구조를 지탱시키기 위해 중국의 외환보유고가 다시 미국에 재무부 증권과 같은 형태로 환류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외환보유고가 대폭 늘어난 2001-2004년의 시기를 분석해 보면, 이 시기 외환보유고의 대폭 증가는 무역수지 흑자의 대폭 증가 때문이 아니라, 위완화 평가절상을 기대하고 대폭 유입된 핫머니 때문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이유 때문에 중국의 금융시장이 보수적인 구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전 지구적 금융적 충격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3)
그렇지만 다른 한편 중국의 외환보유고 증가는 중국이 미국의 경제 위기의 부담을 계속 넘겨받는 방식으로 미국을 지탱하는 것이 가능한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85년의 플라자 협약의 정책적 환율조정을 통해 미국의 부담이 일본으로 이전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현 시기 위기에도 핵심적 쟁점은 누가 미국 경제위기의 부담을 넘겨받는가에 있게 된다. 위안화는 절상되고, 경제 위기 때문에 안정적 투자처인 재무부 증권에 대한 수익률은 계속 하락하는 상황에서, 더더욱 미국 경제의 향후 전망이 비관적인 데도 중국이 지속적으로 미국 국채에 대해 투자를 지속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손실을 감수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도 경기 둔화의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서, 이처럼 거대한 자금이 쇠락하는 지역에 묶여 있다는 것은 그 부담이 전보다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중국의 성장은 미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축적체제의 등장이라기보다는 미국 헤게모니 하에 형성된 축적구조의 최종적 확대였던 성격이 크다. 미국 시장에 대한 전폭적 의존,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분업구조 속의 편입과 일본에 대한 기술적 의존, 국내의 코포라티즘적 포섭 체제의 취약성 등이 모두 그런 측면들을 잘 보여준다. 중국 자체 보유 금융력의 증가와 미국 경제위기는 지금까지의 이런 중국의 구도가 지속될 수 있을지를 의문시하고 있다. 미국발 충격이 더욱 심화될 경우, 미국 축적체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동아시아의 성장구도에 심각한 타격이 초래되고, 그것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어떤 대응을 촉발할지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점이 되고 있다.
1)みずほ硏究所, 「通貨危機の深化防止に向けた東アジア各國および地域的な取り組みの效果·意義に關する考察」, 『みずほ總硏論集』, 2008年 IV號.본문으로
2)같은 글, p. 16. 본문으로
3)백승욱, 『세계화의 경계에 선 중국』, 창비, 2008, 제6장 참고. 본문으로
세계 금융위기와 동아시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위기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끝이 어디인지 알기 어려운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긴급한 반복적 국가 개입에 의해 일시적으로 위기가 완화될지 몰라도, 그 대가로 미국 금융위기의 효과가 전 지구적으로 파급되면서 세계경제 전체가 동요하고 있는 국면이다. 특히 달러 흡입을 위한 미국의 강력한 개입이 커지면서 미국을 제외한 여타 지역의 달러부족 사태가 심각해지고, 또 미국의 소비시장 위축과 투자 위축으로 인한 경제적 여파가 여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본격 폭발하기에 앞서 이미 경기침체 상태에 들어선 유럽지역은 달러화 대비 유로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미국 경제위기의 부담을 크게 떠안는 국면에 들어서고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 또한 미국 경기침체가 수출시장에 끼치는 효과 때문에 상당한 위기적 상황을 보이고 있다.
현재의 미국의 금융위기의 발발은 금융세계화의 조건 변화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특히 1990년대 미국의 ‘신경제’ 상황과 대비되는 2000년대의 미국 중심 금융세계화는 금융위기의 폭과 심도를 더욱 확대하면서 새로운 면모를 띠고 있다. 1990년대 미국의 금융적 팽창은 주로 초국경적 인수합병을 목적으로 유럽에서 유입되는 자본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낸 주식시장의 거대한 거품을 기반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1998년 주식시장의 거품이 극대화된 시점까지 진행된 이 과정에서 주식시장과 또한 거기에 의탁한 정보통신기술(IT)은 ‘신경제’의 상징이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는 또한 급속하게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확대된 시기이기도 한데, 이 적자는 미국으로 계속 유입되는 달러에 의해 상쇄될 수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 신경제의 바탕을 이룬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고, 주식시장이 과거와 같은 호경기를 회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금융적 팽창은 새로운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경기부양을 위한 초저금리 시대를 맞이하여, 낮은 금리에 기반을 둔 금융화한 자본은 대대적으로 부동산 시장에 흘러들어 부동산 거품을 형성하였다. 여기에 부동산의 모기지 채권을 상품화하는 기법들이 결합해 파생상품들을 낳기 시작했고, 이는 회사채나 여타 부채를 유동화해서 판매하는 새로운 기법들과 결합해 파생상품 시장을 거대하게 팽창시켰다. 주택담보부증권(MBS), 자산담보부증권(ABS)과 이를 투자은행이 재가공한 부채담보부증권(CDO), 그리고 대출 위험에 대한 보험 장치로서 대대적으로 성장한 신용파산스왑(CDS) 등의 파생상품 시장은 위험을 분산한다는 최초 목적을 벗어나 그 자체로 금융적 위험성을 대대적으로 증폭시키고, 그에 대한 근본적 치유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금융시장을 몰아갔다.
가공자본의 위험성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노출시킨 현재의 미국 금융위기는 국가의 개입에 의해 그 폭발이 지연되고 있는데, 이런 방식의 미국의 국가의 개입이 아직까지 타 지역에 대한 미국 경제의 우위 그 자체를 침식하지 않고, 미국 경제를 어느 정도 유지시켜갈 수 있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이 세 가지 점은 미국의 헤게모니적 지위가 쇠퇴하기는 하지만 아직 종료되지는 않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첫째는 미국이 달러라는 기축통화의 발권특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러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미국은 이 특권을 활용해, 엄청난 무역적자와 대폭 증가하는 재정적자가 있음에도 통화 인플레이션 없이 경화부족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데, 특히 해외로부터 달러를 대대적으로 흡수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그 주요한 메커니즘이 된다.
둘째로 여타 통화에 대한 달러의 신뢰가 근본적으로 손상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위기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자본이탈이나 달러로부터 금으로의 투자 이탈이 발생하고 있지는 않다. 이것이 유로에 대한 달러의 상대적 우위가 관철되고 있는 현 상황이 보여주고 있는 바이며, 미국의 국가개입을 통한 위기해소 메커니즘이 아직도 작동하게 되는 배경이다.
셋째로 특히 2000년대 들어서 미국의 이중 적자를 메워주고 있는 것으로서 동아시아 외환보유고 증가에 기반을 둔 달러환류 메커니즘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데, 이 또한 미국의 경제적 부담을 타 지역으로 이전시키는 중요한 메커니즘이 되고 있다.
현재 위기는 이런 미국의 우위를 곧바로 침식시키기보다 당분간 유지시킬 것으로 보인다. 그 지속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동아시아이다. 현재 금융위기의 상황에서 동아시아와 미국의 연관성에서 중요한 부분은 미국 금융위기의 부담이 어떤 방식으로 동아시아로 이전될 가능성이 있는지, 그리고 미국의 경제를 지탱시키기 위한 동아시아로부터의 달러환류가 지속될 것인지 문제고, 이는 결국 여타 지역의 정책적 공조-지원에 의해 유지되는 미국의 위기가 어떤 한계에 봉착할 것인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금융위기 전후의 동아시아 경제
미국의 경기침체의 효과는 여타지역에 동시에 파급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은 한편에서 미국 소비시장의 위축 때문에 미국으로의 수출이 대폭 줄어드는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경제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전함으로써 그 효과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는 대체로 1997년 금융위기를 전후로 해서 1990년 전반기에 비해 저조한 성장세를 보이다가, 이 상태가 200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후, 2005년 이후 다소의 회복세를 보인다. 우선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국가들을 신흥공업경제(NIEs)와 ASEAN4(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로 나누어 살펴보면, 두 지역에서 경제성장률은 1991-1995년 각각 7.3%와 6.8%였다가, 1996-2000년 시기에는 급격히 하락하여 각각 4.8%와 1.9%를 기록하였고, 2001-2005년에도 크게 회복되지는 않아 각각 4.1%와 4.8% 수치를 보였다. 다만 최근 3년인 2005-2007년에는 각각 5.2%와 5.6%로 지난 10년간에서는 가장 호전된 국면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변동 자체는 미국의 경기변동과도 일정한 관련성을 보인다.
그러나 2007년 말경부터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기침체 국면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 금융위기 이후 이 지역 국가들은 경상수지 균형과 흑자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2007년 12월 한국의 경상수지가 적자로 전환되어 그 후 계속 적자기조를 유지하고 있고, ASEAN4도 경상수지 흑자가 축소되다가 2008년 4-6월에는 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소폭 적자로 전환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90년대 말 위기에서 벗어나 있던 베트남에서 무역수지 적자가 크게 늘어나는 동시에 통화가치 하락이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 봄부터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인플레이션의 가속화와 대폭적인 대외 수지의 악화가 일반적인 추세로 관찰되는데, 이런 상황 변화의 배경에는 국제적인 자원가격 상승이 놓여 있다. 이 지역 국가들이 자원의존국들이 많고, 에너지 효율이 낮기 때문에 국제적인 자원가격의 상승은 생산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전반적인 인플레이션과 무역수지 악화를 초래했다. 특히 과거에는 자원비용 상승이 자원생산국에 대한 수출증가를 통해 어느 정도 그 효과가 상쇄되어, 무역수지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작았던 반면, 최근의 변화는 유가 인상 뿐 아니라, 광물, 농산품을 포함한 일차산품 전체로 가격인상이 확대되면서 그 파급력이 훨씬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1)
최근의 경기침체라는 흐름은 일본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 일본은 2002년 2월에 시작된 경기회복 국면이 2007년 4/4분기에 종료되고 침체국면에 들어섰다. 일본 또한 동아시아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자원가격 상승의 직접적 영향을 겪고 그 때문에 교역조건이 악화되었으며, 두 번째로 미국의 경기 악화가 대미수출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일본경기에 영향을 다시 끼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008년 10월에 일본은 무역적자를 기록하였으며, 11월 현재로 일본은 두 분기 연속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거품붕괴 이후의 가장 심각한 경기침체 상태를 겪고 있으며, 2009년에도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중국은 다소 이례적이어서 여전히 여타 국가들에 비해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지만, 성장률 추세는 최근 들어 점차 둔화되고 있다. 2008년 3분기까지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9.9%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11.9%보다 상당히 하락하였고, 5년 만에 처음으로 한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다. 내년에는 더 낮아져서, 경제성장률의 예측치는 8.6%로 이야기되고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는 미국의 경제위기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데다 인민폐의 지속적 절상 등의 원인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의 경제성장이 둔화하면서 도시-농촌 간 인구이동에도 변화가 발생하여,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농민공들이 도시의 일자리부족으로 다시 농촌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고 있기도 하다.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과거 몇 년간 빠른 속도로 단기외채가 증가하는 문제도 관찰되는데, 특히 이는 한국에서 두드러진다. 단기외채는 2006년 중반까지는 1천억 달러 이하였지만, 2006년 후반에 1천억 달러를 돌파한 후, 2008년 들어서는 1700억 달러 수준을 넘어섰다. GDP 대비 단기외채 비율 또한 2008년 6월에 18.1%로, 1997년 금융위기 시절(1997년 6월)의 15.4%를 넘어서고 있으며, 이것이 금융에 대한 신뢰를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단기외채가 늘어난 주요한 이유는 금융기관, 특히 외국은행의 한국 지점에서의 차입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었다.2)
동아시아는 여전히 세계의 제조업 중심지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이는 1990년대 말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에도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1990년대 말의 위기를 동아시아 지역이 돌파할 수 있던 주요한 이유는 미국의 소비시장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인데, 2000년대 들어 특히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추가해 가계적자라는 틀을 통해 여타 세계로부터 미국으로의 수출이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메커니즘을 지탱해 준 미국 자체가 위기에 처한데다, 이와 결합해 자원가격 상승이라는 위기요소가 증폭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은 미국에 연계된 수출지향 경제라는 이전의 구도를 지속시켜 가는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자원가격은 하락세로 돌아섰지만, 이번에는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여파 때문에 대대적으로 소비시장이 위축되어, 이 또한 수출 증가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경기침체를 더 촉발하고 있다는 난점에 봉착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기본적으로 자체 소비시장 확대보다는 미국 소비시장 확대에 기반해 경제성장을 유지해 온 지역이며, 이로 인한 무역흑자 증대-->환율절상의 압력이 발생해도, 이를 다시 임금억압을 통해 돌파하고 또 다시 미국 시장에 대한 의존을 통해 이를 해소하려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데, 미국발 경제위기는 이런 한계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금융세계화 국면에 세 가지 서로 연결되지만 다소 상이한 방향의 움직임이 나타난 바 있다. 한편에서는 과거 ‘발전국가’라 지칭된 지역들이 탈발전주의 신자유주의로 진행되면서, 개방화의 속도가 급속히 빨라지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던 고용의 틀이 붕괴되었다. 두 번째로 후발 공업화 지역으로 이 지역에 중요성을 갖게 된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국가에 의한 금융적 보호나 산업적 보호장치도 배제된 채 금융세계화의 조건 속에 던져진 결과, 전 지구적 금융위기의 충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로 존재하게 되고, 자본의 유동성의 충격을 대대적으로 받게 되었다. 셋째로, 탈사회주의 해체의 지역들도 등장하였는데, 이들 지역에서는 금융적으로는 상대적으로 개방성의 진행도가 낮더라도, 국내에서 작동해온 여러 가지 보호장치들을 해체하면서 세계시장의 편입도를 높임에 따라, 내외적 충격의 요소들이 국내적으로 증폭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세 지역들은 그 자체로 금융화의 주도적 지역은 아니지만, 금융 우위의 축적구조에 적절하도록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세계적 금융위기에 그만큼 더 취약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런 구조조정을 불가피하게 만든 내적 요인들(자본수익성의 하락을 포함해)은 세계적 위기를 더욱 심각한 방식으로 내부화할 수 있는 요소가 되어 왔다.
달러 환류 메커니즘과 동아시아
미국이 이중의 적자에 가계부채의 증가라는 제3의 적자까지 추가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음에도, 지속적으로 달러유입이 가능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비시장을 팽창시킬 수 있던 주요한 지지대 중 하나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통해 유출된 달러가 금융적 투자 형태로 다시 미국에 재유입되는 달러환류의 메커니즘이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이 역할을 맡아온 것은 일본이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 이 달러환류의 메커니즘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달러환류를 실행하는 주요 국가들이 동아시아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아래 <표1>에서 보면 2000년에서 2007년 사이에 미국 재무부 증권 총액의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날 정도로 미국경제에서 차지하는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여기서 차지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일본의 비중이 다소 줄어들고 있음에 비해서 중국의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나 이제는 미국 재무부 증권 보유액에서 일본과 비등한 수준에 올라섰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 지역에서 2000년대 들어 미국 재무부 증권 보유 형태로 미국으로 유입되는 달러환류 메커니즘의 중요성이 커질 수 있던 주요한 이유는 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고가 1990년대 말 금융위기의 후과로 급격히 증가했던데 기인한다. 이런 외환보유고 증가는 무역수지 흑자 증가에 기인한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 나타난 바 있듯이 정부정책상 외환보유고를 증가시키기 위해 통화안정채권이나 외평채의 발행을 통해 인위적으로 달러보유액을 늘린 데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 달러의 약세 추세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거대하게 늘어난 외환보유고는 집중적으로 미국 재무부 증권에 집중 투자되었던 것이다. 반면 미국의 여타 금융부문에서 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중요성은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동아시아가 이처럼 대량의 외환보유고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이를 집중적으로 미국 재무성 증권 투입에 투자하고 있는 이유는 첫째로, 이 지역 전체가 세계적 금융위기의 가능성에 매우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음에 비해 이를 대비할 수 있는 완충적 장치나 제도가 매우 취약했고, 그 대책은 공동의 차원이 아니라 개별 국가들 수준에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각국은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해서 자체적으로 외환보유고를 늘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두 번째로, 이렇게 형성된 외환보유고는 긴급할 때 유동성을 보장받는 형태로 보유되어야 하는 동시에, 그 자체가 위험에 과도하게 노출되어서는 안 되고, 안정적 투자처를 찾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지속적 생산은 줄곧 미국 시장의 팽창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시장의 성장지속과 동아시아의 성장지속은 서로에 대한 긍정적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외환보유고가 늘어나게 되는 주원인 중 하나는 미국에 대한 무역수지 흑자이면서, 또한 이를 가지고 미국 경제의 소비의 지속을 지탱해주는 메커니즘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의 외형적으로 성장한 금융력은 그자체로서는 초민족적인 금융적 이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고도금융과는 성격이 상이하며, 오히려 미국의 금고라는 성격을 지녀왔다.
중국이라는 변수
2008년 7월말 현재 중국의 미국 재무부 증권 보유액은 5187억 달러로, 외국인 보유액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이 수준은 2000년의 603억 달러에서 760% 증가한 것이다. 2007년말 미국의 대 중국 무역적자는 2562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후로도 중국의 미국 재무부 증권 보유액은 계속 늘어나서, 11월 9일 기준으로 보유총액이 5850억 달러로, 일본의 5732억 달러를 100억 달러 앞서서 최대의 채권국으로 부상하였다(한겨레 신문, 11월 21일).
이처럼 거대하게 형성된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양면적인 측면을 지닌다. 한편에서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중국의 강력한 금융적 자율성의 상징이기보다는 중국이 강하게 미국경제의 운명에 맞물려 있음을 보여주는 의존성의 지표이다. 동아시아의 외환보유고의 증가가 직접적으로 이 지역을 휩쓴 1990년대 말 금융위기의 교훈의 결과물인 것에서 보듯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보유고 증가는 이 지역 전체에 걸쳐서 외부로부터의 금융적 충격에 대해 취약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또한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그 상당부분이 대미 수출 시장 팽창에 의존하고, 이는 다시 미국 소비시장 팽창에 의존하는데, 그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 구조를 지탱시키기 위해 중국의 외환보유고가 다시 미국에 재무부 증권과 같은 형태로 환류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 외환보유고가 대폭 늘어난 2001-2004년의 시기를 분석해 보면, 이 시기 외환보유고의 대폭 증가는 무역수지 흑자의 대폭 증가 때문이 아니라, 위완화 평가절상을 기대하고 대폭 유입된 핫머니 때문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이유 때문에 중국의 금융시장이 보수적인 구도를 보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전 지구적 금융적 충격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3)
그렇지만 다른 한편 중국의 외환보유고 증가는 중국이 미국의 경제 위기의 부담을 계속 넘겨받는 방식으로 미국을 지탱하는 것이 가능한지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85년의 플라자 협약의 정책적 환율조정을 통해 미국의 부담이 일본으로 이전된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현 시기 위기에도 핵심적 쟁점은 누가 미국 경제위기의 부담을 넘겨받는가에 있게 된다. 위안화는 절상되고, 경제 위기 때문에 안정적 투자처인 재무부 증권에 대한 수익률은 계속 하락하는 상황에서, 더더욱 미국 경제의 향후 전망이 비관적인 데도 중국이 지속적으로 미국 국채에 대해 투자를 지속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손실을 감수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도 경기 둔화의 조짐이 보이는 상황에서, 이처럼 거대한 자금이 쇠락하는 지역에 묶여 있다는 것은 그 부담이 전보다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중국의 성장은 미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축적체제의 등장이라기보다는 미국 헤게모니 하에 형성된 축적구조의 최종적 확대였던 성격이 크다. 미국 시장에 대한 전폭적 의존,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분업구조 속의 편입과 일본에 대한 기술적 의존, 국내의 코포라티즘적 포섭 체제의 취약성 등이 모두 그런 측면들을 잘 보여준다. 중국 자체 보유 금융력의 증가와 미국 경제위기는 지금까지의 이런 중국의 구도가 지속될 수 있을지를 의문시하고 있다. 미국발 충격이 더욱 심화될 경우, 미국 축적체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동아시아의 성장구도에 심각한 타격이 초래되고, 그것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어떤 대응을 촉발할지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점이 되고 있다.
1)みずほ硏究所, 「通貨危機の深化防止に向けた東アジア各國および地域的な取り組みの效果·意義に關する考察」, 『みずほ總硏論集』, 2008年 IV號.본문으로
2)같은 글, p. 16. 본문으로
3)백승욱, 『세계화의 경계에 선 중국』, 창비, 2008, 제6장 참고.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