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8년 이후, 한반도의 전쟁위기와 통일 문제, 그리고 국제적으로 벌어졌던 오늘날의 전쟁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관점과 그에 입각한 활동의 궤적을 기록한 것이다. 출범초기 사회진보연대는 <한반도위원회>를 통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비판하였고, 1990년대 이후 변화하는 미국의 대북전략과 남북경협 등의 쟁점에 대해 사회운동의 올바른 시각을 정립하고자 노력해왔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사회진보연대는 <반전팀>을 구성하여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평행하는 군사세계화’라는 분석틀로 오늘날의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벌이는 대테러전쟁을 비판하였다. 또한 정세적으로 벌어졌던 반전 평화운동에 실천적으로 결합하여 이 운동의 대중적, 정치적 성장에 복무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사회진보연대는 2006년 북한의 핵보유선언과 핵실험을 통해 한반도 핵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정세 속에서 평화운동이 견지해야 할 반핵평화와 일방적인 군비축소라는 관점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며 동아시아차원의 반핵평화 국제연대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지난 10년 동안 사회진보연대가 걸어온 반전평화운동의 궤적 속에서 성과와 평가지점을 도출해내고, 오늘 다시 출발해야 할 운동의 과제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햇볕정책 1998년 12월 사회진보연대 출범 당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고, 북한은 1998년 1월 당보, 군보 공동사설을 통해 새 정부의 연북화해정책을 촉구했다. 김대중과 DJP 연합을 결성했고, 그 후 새 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은 김종필은 1998년 2월 베이징에서 김 당선자의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한 6개국 선언> 구상을 발표했다.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남북 기본합의서 이행과 남북한 주도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특사교환을 제의했다. 새 정부의 100대 과제에는 그 외에도 정경분리 원칙으로 남북 경제협력의 적극적 추진.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사회문화 교류 활성화, 대북 경수로 사업의 원활한 추진, 이산가족 재회의 조속한 실현 등이 담겼다. 특히 1998년 4월 30일 김대중정부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른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남북교역에 관해서 통일부장관의 개별적 승인이 필요 없는 포괄승인품목을 확대하고, 위탁가공 교역을 촉진하기 위해 생산설비의 반출 제한을 폐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남북경협 활성화 조치에 조응하여, 1998년 6월과 10월에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고, 11월에는 총사업 규모가 약 10억 달러에 달하는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사업이 실행되었다. 한편 1996년 4월 김영삼, 클린턴 대통령이 제안한 4자회담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후 1998년 3월에 비로소 1차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주요 의제로 한국과 미국은 남북 당사자가 중심이 되고 미국과 중국이 실효성 있게 뒷받침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제시한 반면, 북한은 미군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이 핵심이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기존의 입장 차이로 인해 4자회담 개최가 2년 간 지연되었으나, 본회담 개시 시점에서도 이러한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 김대중정부 역시 김영삼정부를 이어 남북한이 중심이 되고 미국과 중국이 보장하며 러시아와 일본이 지지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와중에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인공위성 광명성의 발사 실험을 발표했다. 북한은 로켓이 일본 상공을 지나 1646km를 날아 태평양 공해상에 떨어졌다고 밝혔다. 미국은 인공위성과 탄도미사일 실험이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북한이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북한의 핵탄두 개발과 함께 미사일 문제가 심각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한반도위원회의 문제의식과 활동 사회진보연대는 출범과 함께 이처럼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도래한 새로운 한반도 상황에 직면하여 분석과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한반도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위원회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95년 아태재단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이 제안한 3단계 통일방안은 1) 공화국연합제에 의한 남북연합단계 (평화공존, 평화교류, 평화통일을 위한 제반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권한이 매우 적은연합기구), 2) 연방제통일단계 (1연방과 2지역의 자치정부, 외교군사 전면적 권한 및 주요 내정에 대한 주요한 권한을 갖는 연방), 3) 완전통일단계(1국가 1정부)로 요약된다. 즉 경제적 관계의 통합을 확대해 나가면 최종적으로 정치적 통합까지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경제적 통합이 정치적 통합으로 질적으로 비약할 것인가? 여기서 핵심은 공화국연합제에 의한 남북연합 단계가 사실상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는 과도적인 단계로서 설정된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다당제와 자유선거를 허용하는 것이 그 핵심으로 제기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통일방안 수준에서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이 언급하고 있는 “흡수통일반대”는 김영삼정부가 구사한 대북강경책에 대한 반대 즉 북한의 조기붕괴에 의한 흡수통일와 반대되는 개념이자 더욱 중요하게는 “합의된 통일”(예컨대 독일통일)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특히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미국의 대북전략 구도 하에서 한국-미국-일본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햇볕정책은 그 전제조건으로서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확산의 봉쇄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의 핵심적 목표를 3국의 공동관심사로 승격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햇볕정책의 기본적인 기조는 과거 한때 검토했던 북한의 붕괴-즉각적인 흡수통일이 가능하지도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이 확인됨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사활적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다른 방편의 하나로서 3국이 공동의 압박전선을 형성하여 대량파괴무기의 봉쇄라는 당면한 목표를 획득해야 한다는 정책적 목표를 수용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단기적 목표가 구조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을 자본주의 세계경제로 편입시켜 북한이라는 존재 그 자체의 위협을 궁극적으로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구상은 북한이 핵-미사일을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남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북한의 현존하는 정권에게 안정성을 부여해주면서, 점진적으로 한반도 ‘경제’통합을 추진하겠다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이를 위한 세부적인 방안으로서 남북 간의 ‘무역자유화’ 시나리오의 관철 즉 △주로 남한경제에 통합(남한경제의 하위파트너),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로의 전환(가공무역형 수출기지) 등이 제출되고 있다. 결국 한국-미국의 구상은 남측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질서의 확장을 분명하게 지지한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순전한 의미에서의 ‘평화공존’이 될 수 없으며, 평화공존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실상의 통일의 효과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이는 즉각적인 흡수통일이 수반할 수 있는 ‘불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비용을 절약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둘째, 남북경협의 진척이 한반도 평화안착에 도움이 되며, 남북 공동이익을 증진시킨다는 논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남한 자본의 북한 진출이 북한의 경제난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한반도에서 민족적 경제공동체가 회복됨으로써 국제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남한의 노동자운동과 민중운동에도 무비판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정치논리로부터 자유로운 경제논리’는 곧 자본의 논리를 뜻한다. 자본이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돈이나 경제 요소가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의 논리가 주도하는 일체의 사회적 관계도 함께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당면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북한의 저임노동력의 활용과 유지가 남한의 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발상이다. 이미 여러 연구단체가 ‘상호보완적 남북 경제 통합방안’이라는 제목으로 남북간 수직적 분업구조 구축이나 남북 노동자들의 임금체계의 분화방안을 제출하고 있다. 이것은 남한의 노동운동이 지난한 투쟁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획득해가고 있는 생존권이 대북교류와 관련해서는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즉 노동권의 차별적 적용이라는 문제는 향후 남북경협의 활성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쟁점으로 드러날 것이다. 셋째,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한반도 군축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오히려 한미동맹의 강화, 현대화가 추진되고 있다. 1998년 1월 김 당선자를 만난 윌리엄 코언 미 국방장관은 “한국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예산을 삭감하고 있지만, 국방예산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고, 김대중 정부가 제시한 100대 중심과제에는 한반도 군축이 아니라 확고한 한미 안보협력 유지가 강조되고 있다. 특히 한미연합사령부의 전쟁계획인 <작전계획 5027>은 대북 선제공격 전략을 승인하는 방향으로 호전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넷째,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통일운동 진영은 드디어 통일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전기가 마련되었다고 받아들이고 기존의 반정부적, 집회와 시위 중심의 통일운동을 벗어나서 정부와 유효하게 공조할 수 있는 대중적, 전문적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통일운동이 노선 전환을 꾀하는 것은 한반도 정세변화에 본질적으로 부적합하다. 오히려 전쟁이 아닌 상태로서의 소극적 평화가 아니라 대중의 통제력과 민주적 역량의 강화에 따른 평화의 구조화가 진정한 쟁점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평화운동이 전면적으로 강화될 필요가 있다. 또한 향후 북한의 개혁개방의 흐름이 가시화될 경우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북한 민중의 노동권 문제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태세가 구축되어야 한다. 또한 분단으로 인해 남과 북 모두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정치적 기본권의 확대(대표적으로 국가보안법의 문제)가 적극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통일운동의 실질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초기 한반도위원회는 조사연구와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한반도 연대>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소식지 머릿기사를 살펴보면, <평화권과 노동권을 통일운동의 핵심 쟁점으로 삼기 위하여>(1999.1.28), <한반도 전쟁위기론 다시 읽기: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전쟁을 준비하는 행위다>(1999.3.3), <나토확대, 그러나 평화에 대한 무능력: 유고공습을 계기로 본 나토의 현재와 미래>(1999.4.20), <현대재벌이 북한개발전략이 제기하는 쟁점>(1999.6.11) 또한 1999년 1월부터 7월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노동운동과 통일> 기획토론회를 진행했다. 주요 주제는 ‘독일통일의 역사적 성격과 통일문제’, ‘세계자본주의 체제와 한반도 통일 문제’, ‘북한경제의 현황과 남북 경제교류의 문제점’, ‘북한의 노동력 관리체제와 노동조직’ 등이었다. 한편 사회진보연대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1999년 이후로 굵직한 정세적 사안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1999년 6월 15일에는 서해상 북방한계선(NLL) 남쪽 2.5킬로미터 지점에서 남과 북의 전투함의 무력충돌이 발생해서, 북한 경비선 한 척이 침몰하고 또 한 척이 침몰하여 북한군 최소 30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한국 정부는 이를 1차 연평해전이라고 부른다. 2002년 6월 29일에는 2차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남측 고속정이 침몰하고 한국군 6명이 사망한다.) 1999년 9월 30일에는 AP통신이 자체 웹사이트에 <한국전쟁에서의 피난민 학살에 대한 퇴역 미군병사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특별 취재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노근리 학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이를 계기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문제가 사회쟁점으로 부상했다. 위원회는 서해 무력충돌을 계기로 북한한계선이 정전협정에서 규정된 공식적인 군사분계선이 아니며 (현재 정전협정 상에서는 서해상의 군사분계선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오히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 정부가 감행할 수 있는 대북 무력시위나 도발 억제하기 위해 정한 내부 규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또한 노근리 사건은 단지 전투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실수가 아니라 군사작전으로 수행된 체계적 민간인 학살이었음을 주장했다. 한편 다음해 2000년 4월에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전격 발표되고,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남북정상회담, 6.15 공동선언 발표가 이뤄졌다. 위원회는 이를 계기로 사회운동 진영이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의 모순을 더욱 분명히 인식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2000년 6월 30일에 결성된 <매향리 미군 국제폭격장 폐쇄 범국민대책위원회>에는 사회진보연대가 참가단체로 참여하였다. <매향리범대위>는 1999년 10월 6일 결성된 <불평등한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개정 국민행동>과 함께 ‘매향리 미군폭격장 즉각 폐쇄, SOFA 전면개정, 양민학살 진상규명 및 사죄 배상’ 등을 내걸고 2000년 투쟁을 주도했다. 특히 <매향리 범대위>는 사회단체와 주민운동이 결합하여 군사기지의 폐쇄와 주민 생존권 보장을 위한 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함으로써 2000년대 반전 평화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한편 2000년 8월에는 가 결성되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네트워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사회진보연대 상근활동가를 정책실장으로 파견하고 있었던 <전국민중연대>를 통해 2001년 4월 한반도위원회가 제작한 을 배포하고, 관련 활동을 전개했다. 2001년 9.11과 아프간 공격 2000년 말 부시 텍사스 주지사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2001년 미국의 대외정책은 변화를 예고했다. 그동안 공화당은 클린턴의 대외정책이 미국의 국익을 확고히 수호하지 못하고, 악당국가들이 미국을 위협하고 실리를 챙기는 나쁜 버릇에 물들게 했다고 줄곧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부시정부로의 미국 행정부 교체에 따라 세계 각지에서 정치적 경색국면이 발생하거나 최소한 새로운 정책수립 과정에서 새로운 양상의 마찰이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남북관계의 측면에서도 부시정부가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면서 새로운 정책방향 수립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북미관계의 교착 상태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9.11 공격이 발생했다. 9.11은 미 본토가 항구적인 ‘전장’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는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미국은 이를 계기로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새로운 군사교리를 천명하며 범세계적인 공안정국을 형성할 수 있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대테러동맹’이라는 명분하에 항구적인 예방, 선제 군사공격을 정당화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0월 7일, 빈라덴 체포를 목적으로 즉각적인 아프간 보복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국에서는 10월 10일 <전쟁반대 평화실현을 위한 765개 사회단체 시국선언>이 발표되고, 부시 방한에 맞추어 준비되고 있던 집회를 10월 20일 ‘전쟁반대 평화실현 신자유주의세계화반대 범국민대회’라는 이름으로 개최했다 (부시 방한은 취소되었다.) 11월 8일 <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이 발족하여 미국의 보복전쟁 즉각 중단, 한국군 파병과 전쟁지원 반대를 주장했다. ‘살인미군 규탄’에서 ‘전쟁반대’ 운동으로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에서 미 2사단 소속 장갑차가 앞서가던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 양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주한미군의 살인 만행에 대해 한국 법무부는 재판권 포기 신청을 하였으나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동두천 군사법정에서 진행된 미군 재판은 당시 범죄행위를 저지른 관제병 페르난도 리도와 운전병 마크 워커에게 무죄평결을 내렸다. 이 사건에 분노한 대중들은 자발적으로 촛불집회를 조직하였고, 이는 곧 범국민적인 반미시위로 확산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문제, 구체적으로는 주둔미군지위에 관한 일반협정(SOFA)의 불합리함이 대중적으로 폭로되었다. 2002년 12월, 두 여중생 살인 만행을 규탄하는 범국민적인 촛불집회가 조직되었고, <미군장갑차 고 신효순, 심미선 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는 12월 14일 10만 촛불대행진을 벌이게 된다. 2003년 1월, 부시는 연두교서를 통해 이라크와 이란,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하고 미국에 위협이 되는 세력에 대해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통해 응징하겠다는 ’선제 공격(pre-emption)‘을 천명하였다. 나아가 미국은 이라크가 알카에다 등 테러세력을 지원하고 있으며,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며 명분삼아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침공을 단행하였다. 대중적인 반미시위가 고조되던 2003년 초, 반전평화운동 단위들은 대중들의 반미 열기를 미국의 군사패권과 중동지역의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반미반전운동 연대조직 이었던 <전쟁반대평화실현공동실천>과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는 ‘살인미군 규탄’에서 ‘전쟁책동 미국반대’로 나아가야한다는 공동의 인식 하에 합동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대, 한국군 파병을 반대투쟁을 공동으로 전개하였다. 사회진보연대는 합동운영위 상황실에 활동가를 파견하여 이러한 운동의 흐름에 적극 개입하였다. 전쟁 직전인 2003년 2월 15일, 세계사회포럼을 통해 조직되어 전 세계 수백 개의 도시에서 개최된, “이라크 침공 반대 국제공동행동의 날”을 기점으로 한국에서도 이라크 전쟁 반대, 파병반대를 위한 대중적인 반전평화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2003년 이라크 전쟁과 반전평화운동의 성장 2003년 4월 2일, 한국군 파병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방부는 이에 따라 4월 12일에는 이라크전 파병 의료부대(제마부대, 100명)과 건설공병부대(서희부대, 573명)를, 4월 17일에는 선발대 30명을, 4월 30일에는 제1제대 300여명을, 5월 14일에는 제2제대 300여명을 각각 파견한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그리고 5월 1일,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였다. ‘충격과 공포’로 명명된 ‘이라크의 자유화(해방)’ 작전은 이제 ‘점령과 지배’ 단계로 이행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미국의 점령에 대한 이라크 내의 저항은 갈수록 거세어졌고, 미국의 개전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와 후세인 정권의 테러조직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은 2003년 9월 장기화되는 이라크 전쟁 및 점령의 부담을 동맹국에 떠넘기기 위해 한국에도 사단규모의 대규모 전투부대 추가파병을 요구하였다. 사회진보연대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평행하는 군사세계화”라는 분석틀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 그리고 ‘대테러전쟁’을 비판하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반전팀을 결성하여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정세를 분석하고, 대중적인 반전행동을 기획, 실천하였다. 또한 전국민중연대(준) 참가단체들과 공동으로 정기적인 <반전 소식지>를 발간하여 전국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반대, 파병반대운동에 정책적으로 개입하였다. 한국정부의 이라크 전투병 추가파병이 확정되자 2003년 9월 23일 전국 353개 단체가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이하 파병반대국민행동)>을 결성하여,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한국군 추가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사회진보연대는 <파병반대국민행동> 공동대표 단체로 참가하여 범국민대회, 인간띠잇기, 철야농성 등의 대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파병반대국민행동> 상황실에 활동가 파견했고, 이라크 상황 모니터 팀을 구성하고 운영하는데 참가했다. 더불어 2004년 총회에서는 국제반전공동행동에 대한 특별결의문을 채택하여 반전운동에 대한 조직적 결의를 높였다. 한편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인권운동 내부의 토론이 활성화되어 <평화권을 위한 모임>이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평화인권연대, 인권운동사랑방, 다산인권센터, 천주교인권위, 국제민주연대,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 사회진보연대가 참여했다. 2003년 모임은 이라크 전쟁범죄 보고서를 발간했고,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관련 자료를 축적했다. 2004년에는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으로 인해 오무 전기 노동자들과 김선일씨가 이라크 저항세력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무현 정권은 한-미 군사동맹을 위해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고 이에 분노한 대중들은 더욱 격렬하게 전쟁반대, 파병반대운동의 대열에 나섰다. 이렇듯 엄중한 정세에서 반전평화운동진영 내에서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태도를 두고 입장이 갈렸다.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 시민단체들은 미국비판과 노무현 비판을 분리하고 노무현 퇴진투쟁은 파병반대운동과는 별개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정권이자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무장한 군사력으로 엄호하려는 정권인 노무현 정권의 퇴진은 반전평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다수 국민들의 요구였다. 따라서 반전운동, 파병반대운동은 ‘노무현 정권 퇴진’을 정치적 요구로 내걸어야 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러한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는 <파병반대국민행동>참가 단체들과 함께 <만민공동회>집회를 기획하여 노무현 퇴진, 한미동맹 폐기라는 정치적 방향을 분명히 제기하고자 하였다. 한편 <평화권을 위한 모임>은 <전쟁은 끝난다. 우리가 원한다면! 부시-블레어-노무현 전범민중재판>을 제안했다. 9월 20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한 후 12월까지 기소인을 조직하여 기소인들이 직접 기소장을 작성하는 운동을 벌였다. 사회진보연대는 전범민중재판을 제안하고 기소인을 조직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파병반대운동의 정치적, 대중적 성장에 복무하고자 노력하였다. 대테러전쟁 비판과 운동의 쟁점 2005년과 2006년, 중동에서 미국이 벌인 “대테러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레바논, 이란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미국은 ‘새로운 중동’ 정책을 표방하면서 헤즈볼라와 하마스 같은 저항세력을 제거하여 이란과 시리아 같은 반미국가를 압박하고 봉쇄하여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는 친미 중동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대테러동맹’이라는 명분하에 전쟁비용, 파병을 지원하고 각 국가마다 ‘테러방지법’을 제정하여 세계화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을 억압하고 있었다. 2005년과 2006년을 거치면서 노무현 정부는 세 차례나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기한을 연장했고, 아프가니스탄에 동의다산부대를 파병하였다. 또한 2006년 11월 한미 정상회의에서 자이툰 파병 연장과 함께 레바논 파병을 약속하였고, 그해 12월, 국회는 자이툰 파병연장 동의안과 레바논 특전사부대 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켰다. 2007년이 되자 미국과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함께 미국의 이란 공격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부시 행정부는 이란의 핵개발과 이라크 저항세력 지원을 문제 삼으며, 유엔 안보리가 설정한 이란 핵개발 중단시한을 앞두고 페르시아 만에 항공모함 전단을 추가로 배치하는 등, 이란 공습을 위한 비상계획을 수립한다고 발표하였다. 한편 중동에서의 ‘대테러전쟁’의 확전과 이에 대한 한국정부의 파병정책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에서 故 윤장호 하사가 저항세력의 폭격으로 사망하였고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을 비롯한 반전평화운동은 이라크 점령 종식과 자이툰 철군 운동과 함께 레바논, 아프가니스탄 파병반대, 그리고 이란 확전반대운동으로 반전평화운동의 의제를 확장해나갔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문제에 대한 이슈도 주요한 투쟁과제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히 아프간 피랍사건은 반전평화운동에게 있어 중대한 쟁점을 던졌다. 당시 <파병반대 국민행동>은 피랍사태 직후,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 미국의 아프간 점령과 한국정부의 아프간 파병정책에 있으며, 오무전기 노동자들, 고 김선일와 고 윤장호 하사의 죽음에 이어 ‘미국의 대 테러동맹’에 동참한 한국정부가 겪어야 하는 참혹한 피의 대가라는 점을 원칙적으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당면 투쟁의 슬로건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탈레반의 피랍행위에 대한 운동진영 내 시각차가 쟁점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민간인의 생명을 볼모로 한 탈레반의 잘못된 요구는 수용될 수 없다.”는 입장과 “미국의 점령을 비판하고, 점령 종식을 압박할 수 있는 요구로써 탈레반의 요구는 수용 가능하다.”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이러한 쟁점들로 인해 성명 발표, 촛불집회 기조를 결정할 때마다 참가단체들은 상당한 논란을 벌였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탈레반에게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활동을 독자적으로 조직하기도 하였다. (2007년 8월 7일, 평화 여성 환경 종교, 문화 분야 78개 시민단체, ‘노란 리본 달기’운동.) 78개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를 호소하는 성명에는 탈레반에 대한 비판과 인질들의 조속한 석방요구가 가장 중심적인 내용으로 담겨있었다.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 살해하는 탈레반의 폭력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고, 인질을 구해내는 것이 사태의 해결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촛불집회 기조와 관련해서도 한·미 동맹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무사귀환의 염원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한편에서는 이 사태를 반전·반미의 목소리를 보다 확산시켜 나가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운동진영의 역할은 피랍자 석방의 기술적 방법 자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며, 한·미 동맹 반대라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여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고양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고도의 군사공격에 의해 격퇴 당한 탈레반은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피랍자들의 생명구제는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탈레반 전쟁포로들이 미군에 의해 최소한의 포로대우도 받지 못하고, 끔찍한 인권유린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은 탈레반이 민간인 납치를 볼모로 포로석방을 요구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도록 추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탈레반을 규탄하며 피랍자를 즉각 석방하라는 국제캠페인을 펼치거나, 정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예컨대 석방 조건 수용) 피랍자 석방을 우선시하라는 요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프간 피랍사태를 통해 제기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오늘날 일반화되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속성, 즉 극단적인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테러’는 정치· 군사적 약자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제아무리 압도적인 정치· 군사적 우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하여도 반복적으로, 심지어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증오와 보복’의 전쟁과 폭력에 대응하는 반전평화운동의 향후 실천이 어떠한 원칙과 관점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진지한 성찰과 숙고가 필요할 것이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저지투쟁과 한미군사동맹 해체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사업은 해외주둔 미군재배치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의 동아시아 신속 기동군으로의 전환을 추진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 중 하나이다.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은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투장과 미국의 군사패권과 전쟁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이 만나 대중적인 반전평화운동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대추리 150가구, 도두리 40가구가 주축이 되어 2003년부터 팽성 주민대책위가 결성되었고 900일이 넘는 주민 촛불집회와 다양한 투쟁들을 벌여냈다. 2005년 2월, 115개 시민사회단체로 결성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범국민 대책위>는 농지와 대추 초등학교 사수투쟁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2006년 3월과 4월 국방부는 농지를 파헤치고 철조망을 설치하여 주민들의 출입을 차단했고, 급기야 5월 4일에는 대추초등학교를 철거하고 말았다. 국방부는 이 과정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주민의 저항을 무력화했다. 2006년 사회진보연대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을 반전평화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이슈로 삼아 대추리 현지에서의 투쟁(평택지킴이 활동과 솔부엉이 도서관 건설 및 운영, 소식지 발간, 주 1회 평택방문, 후원조직)과 서울에서의 촛불집회를 병행해 나갔다. 그리고 전국적 차원에서 평화 대행진을 조직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평택미군기지 확장은 단순히 한국정부의 졸속적으로 수립된 군사안보정책이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전략과 한-미군사동맹 현대화를 위한 사활적인 과제였다. 따라서 주민과 국민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행정대집행은 무리하게 강행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체계적인 탄압이 거침없이 진행되는 동안 반전평화운동은 ‘불법과 폭력/합법과 평화적 해결’ 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되었다. 대추리 현지가 군사력에 의해 봉쇄되면서 주민들의 고립감은 심화되었고, 대중집회의 위력적인 힘이 완강하게 이어지지 못했다. 800명이 넘는 구속, 수배자가 발생하였고, 총 1억원이 넘는 벌금이 주민들과 운동단체에게 짐 지워졌고, 대추리 현지에서는 일상적인 인권유린과 공안탄압이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평택투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미 군사동맹의 반민중성은 결국 남한의 반전평화운동의 역사적인 투쟁의 기록을 만들어 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전쟁을 예비하는 미국의 전략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투쟁과 이에 함께한 반전평화 운동은 ‘평화’라는 보편적인 상징을 만들어 냈고, 반전평화운동의 대중적 위력을 실감케 했다. 2007년 2월 13일, 정부의 집요한 협박 끝에 주민들은 이주를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은 소강국면에 이르게 되었지만,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저항하는 투쟁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전북 군산지역의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에 이어 경기도 파주의 무건리에 훈련장 확장저지투쟁은 여전히 반전평화운동의 주요한 이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드러난 주한미군 재편의 비용과 책임문제, 즉 10조원이 넘는 미2사단의 이전비용, 평택 기지건설 비용을 한국 방위비 분담금으로 불법 전용하는 문제 그리고 비용조차 가늠할 수 없는 반환 미군기지 환경오염 정화비용의 문제는 반전평화운동의 과제가 될 것이다. 2007과 2008년을 거치면서 한-미 군사동맹은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따라 현대화되어 가고 있다. 2012년 전시작전통제권 반환을 대비하여 한미연합사령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미군 한국사령부((US KOCOM)건설과 유엔사령부의 존속을 포함하여 한-미간의 새로운 군사지휘체계가 논의되고 있다. 또한 대북선제공격을 위한 첨단화된 한-미 공동 군사훈련이 진행되는 가운데, 각종 신무기 도입과 미사일 방어망 구축 등 한-미 군사동맹의 기술적 진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패권을 보다 공고히 하고 유사시 북한에 대한 점령통치를 합법화하기 위한 한미동맹의 현대화를 비판하고, 이를 해체하기 위한 대중적 운동을 조직하는 일은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의 핵심적인 과제이다. 2006년 한반도 핵 위기와 동아시아 반핵평화 운동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예고했던 핵실험을 단행했다. 10월 14일 국제연합(UN)은 북한 핵?미사일의 완전한 폐기를 목표로 하는 대북결의안을 채택했고, 10월 20일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는 확장된 핵 억지력(extended deterrence)을 천명함으로서, 한반도 핵 위기가 가시화 되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북한이 택하고 있는 “국가 체계의 보존과 북미간의 일괄타결 수단으로서의 핵무장”의 맹점과 위험에 대해 제기하였다. 북한의 핵보유 시도가 “미국의 핵독점, 핵패권주의와 다르며 미국의 대북 핵전쟁 계획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군사적 억지력이자 협상용 수단”이라는 민중운동 내 일부의 변호론적 주장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 비판의 이유는 첫째, 핵전쟁은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 상호절멸을 낳기 때문에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 사이의 구별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며 둘째, 핵무기는 그 속성상 핵보유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셋째, 북한의 핵 개발 의도가 세계적인 핵확산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자, 그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에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핵무기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견지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는 미국의 한반도 핵전쟁 위협을 막는 수단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아니라 대중적인 반핵평화운동의 힘이라는 관점을 확고히 지켜나가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하에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의 반핵평화와 남한정부에서부터의 일방주의적인 군비축소를 주장했고, 한국정부의 모든 군사주의적 노선을 반대하면서 전쟁유발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을 벌여내는 것, 그리고 핵무기에 대한 숭배나 무감각을 깨고 핵무기주의에 대해 철저히 반대하는 것을 과제로 제기했다. 당시, 북한 핵실험에 대한 다양한 정치적 입장들이 공론화되고 있는 가운데 사회진보연대는 회원토론회 “북한 핵실험과 반전평화운동의 대응(2006. 10.13)”와 민중운동 공동토론회 “북 핵실험 국면, 민중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2006, 10.19)”를 개최(노동자의 힘, 노동자의힘, 문화연대, 사회진보연대, 이윤보다인간을, 인권운동사랑방, 전진, 평화인권연대)하였다. 또한 전국민중연대와 통일연대가 공동주최한 토론회 “북의 핵실험 정국과 진보진영의 대응(2006.10.12)” 에 참가하여 북한 핵실험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운동진영 내에서 적극적으로 제기하였으며 반미반전민중대회(2006.10.22)에 참가하여 사회화와 노동 특별호를 배포하면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의 반핵 평화운동을 대중적으로 제안하기도 하였다. 2007년 5월 26일~27일에는 국내의 20여 개의 사회단체를 포함하여 일본과 미국의 반전반핵운동 단체와 함께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 국제회의”를 공동개최하였다. 이 국제회의에서는 반핵 반전 활동가 400여명이 참가하여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다시금 부각된 동아시아 핵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현 정세와 향후 동아시아 반핵평화 국제연대방안을 논의하였다. ‘핵 없는 동아시아’, ‘미국의 군사패권으로부터 자유로운 동아시아’라는 기치로 진행된 국제회의에는 <원수폭금지 일본 국민회의>(이하 원수금), <원수폭금지 일본 협의회>(이하 원수협), <일본 평화 위원회>, <평화인권환경포럼>을 비롯하여 <미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아시아 공동행동 일본 연락회의>와 미국 <뉴햄프셔평화행동>의 활동가가 참여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사회운동의 과제와 반전반핵평화운동의 확장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진행하였다. 마치며 지난 10년 동안, 야만적인 전쟁과 군사동맹에 반대하는 반전평화 대중운동은 비약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세계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더욱 위험해졌으며 이 가운데 한반도의 핵 위기가 현존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위기와 함께 전쟁의 위험이 가중되고 있는 오늘날, 반전평화운동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사회진보연대가 복무하고 있는 반전평화운동이 보다 대중적으로 확장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지난 운동을 평가하고 여기서 제기된 쟁점들을 숙고하면서 향후 운동의 과제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12월 7일 성대 유림회관에서 열린 사회진보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토론회 세계 경제위기와 남한 민중운동의 전망 자료집과 속기록입니다.
12월 7일 성대 유림회관에서 열린
사회진보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토론회
세계 경제위기와 남한 민중운동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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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즉시 이라크를 떠나라! 여러 조사와 분석을 통해 살펴보면 2003년 이라크 침략전쟁 이래 지금까지 학살당한 이라크인의 숫자가 1백2십만 명이 넘는다(http://www.justforeignpolicy.org 참고). 이는 1994년 르완다 학살 당시 사망한 숫자를 훨씬 넘는다. 또한 사망한 미군의 숫자는 4천2백여 명이고 이라크 전쟁에 쏟아 부은 돈은 6천억 달러에 달한다. 여기에다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이라크 전쟁난민, 50%가 넘는다는 실업률, 파괴당한 이후 복구되지 않은 사회기반시설, 해체된 교육ㆍ의료ㆍ복지 시스템 등을 고려하면, 6년이 다 되어 가는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사회를 말 그대로 ‘황폐화’시켰다. 더욱이 미군의 전쟁과 점령이 부추긴 분열정책으로 인해 이라크 국민들은 종족과 종파 간에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따라서 이라크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학살과 파괴의 책임은 온전히 미국에게 있다. 대테러전쟁이라는 일방적인 전쟁정책을 밀어붙인 학살자 조지 부시와 그 일당은 당연히 전쟁범죄자로서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주범이다. 미국의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억지논리로 아무런 동의도 없이 무력을 동원하여 전 세계적 계엄령을 발동해서 침략과 점령으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였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도 찾아내지 못했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파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평화를 짓밟았으며 세계적으로 폭력과 불안을 증가시켰다. 민중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무장집단은 늘어났고 폭력은 폭력을 확대재생산했다. 부시는 이라크 침략 직후 ‘임무완수’를 선언했지만 완수는커녕 이라크라는 수렁에서 허우적대며 더욱 깊이 빠졌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마찬가지다. 7년이 되도록 전개된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은 미군과 나토군을 승리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전쟁 초기 임시행정처와 이후의 과도정부를 거쳐 선거를 통한 정부를 구성했지만 알 말리키 총리가 이끄는 현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저항세력으로부터는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국내 정치적 지지를 잃은 부시 정부와 이라크 내의 미군 철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라크 정부는 최근 일 년여 동안 이라크 내 미군의 주둔 지위에 관한 협정을 맺기 위한 협상을 해 왔다. 안보협정, 혹은 주둔군지위협정(SOFA)으로 불리는 이 협정은 2008년 말로 미국에 대한 유엔의 위임시한이 끝나기 때문에 그 이후의 미군주둔 상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었다. 애초 철군 시한 명시여부, 이라크 정부 승인없는 영토 사용문제, 미군의 면책권과 사법관할 문제 등에서 대부분 미국 측의 요구가 부각되었으나, 논란과 수정을 거듭하면서 타협된 형태로 최근 타결이 되었다. 이 협정은 지난 11월 16일 이라크 내각에서 통과됐고 26일 이라크 의회에서 투표될 예정이다. 2011년까지 철군? ‘미군의 일시적인 이라크 내 주둔과 그 활동, 철수에 관한 미국과 이라크 정부 간의 협정’(An agreement regarding the temporary U.S. presence in Iraq and its withdrwal from Iraq,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Iraqi government)이라는 긴 이름의 이 협정은 철군시한을 명시했다는 것이 가장 크게 알려졌다. 즉 미군 전투병력은 2009년 6월 말까지 모든 도시에서 바깥으로 물러나고 2011년 말까지 이라크에서 철수한다는 것이다(제22조). 애초 협정안에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시한 연장이나 축소를 요구하면 재검토할 수 있다는 조항과 이라크 병력 훈련과 지원을 위해 필요한 미군의 주둔 연장을 이라크 정부가 요청할 수 있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미군의 영구주둔을 위한 근거가 된다는 비판이 커지자 이라크 정부가 요청하여 삭제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2011년까지 미군이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할지는 의문이다. 오베이디 이라크 국방장관도 “데드라인 이후에 일부 미군이 필요할 수 있다”며 그 이후의 주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미군의 뮬런 합참의장도 “3년은 긴 시간”이라며 “조건이 변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논의를 계속할 것이다”고 말했으며, 백악관 대변인도 2011년은 ‘희망하는 날짜’라고 했다. 한편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협정은 미군이 3년 더 주둔하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에 비난이 거세다. ‘알 사드르 운동’을 이끄는 시아파 지도자 알 사드르는 협정이 이라크의 주권을 미국에 넘겨주는 것이라며 의회통과 거부를 주장하고 시위를 호소했다. 지난 21일에는 바그다드에서 수천 명이 “미국의 협정 반대”, “굴욕협정 반대”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점령군과의 협정은 있을 수 없다며 모든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는 사드르 세력은 의회에도 275석 가운데 30석을 갖고 있어서 협정의 통과과정에서 의회 내 비판의 선두에 서고 있다. 오바마는 선거공약으로 이라크에서 16개월 내 철군을 제시하였다. 즉 2010년 5월경이다. 그러나 이 약속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또한 완전 철군인지 주둔군을 남겨놓을 것인지 확실치 않다. 미국으로서는 그 동안 철군이 이라크 치안의 안정 여부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라크가 자체적으로 치안을 통제할 수 있게 되더라도 중동에 걸린 막대한 이해관계, 예컨대 이스라엘에 대한 엄호, 석유자원에 대한 접근, 이란과의 핵협상에서 쓸 수 있는 카드 등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이라크 미군 주둔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라크 점령기간 동안 막대한 재정을 들여 건설한 기지들과 각종 시설들도 있다. 수천 억 달러를 쏟아 부은 전쟁에 대해 ‘본전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라크의 주권 존중? 협정 제4조는 이라크에 대한 내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치안과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미군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라크인들이 미군 주둔과 점령이 이라크 내 폭력의 가장 일차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점령군이 철수하는 것만이 화합의 첫걸음이라고 여기는 것에 비춰보면 완전한 왜곡이다. 또한 군사작전은 이라크 정부의 승인과 협력으로 수행되고 이는 ‘공동군사작전협력위원회’에 의해 감독된다고 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언론에서는 이라크 정부의 허가 없이 군사작전을 못하도록 했다고 보도되었다. 물론 형식적인 효과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조항에서, 국제법이 정하는 대로 각자는 자위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 바, 미국이 특정 군사작전을 자위권 발동으로 포장하고 싶으면 그럴 수 있어서 이라크 정부 승인이 얼마나 구속력을 가질 지 알 수 없다. 미국은 이라크 침략도 자위권 행사라고 주장했다. 사법관할권 부분도 큰 문제다. 제21조에서는 공식 임무 수행 중에 발생한 어떠한 손해나 손실, 재산 파괴, 부상과 사망에 대해 각국은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포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미군이 군사작전 중에 이라크 재산을 파괴하거나 시민을 살해해도 이라크 정부는 보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피해를 입은 제3자가 보상을 요구하더라도 이는 미군 당국에 의해 미국법에 따라 다루게 되어 있어서 제대로 되기 힘들다. 협정에서는 상호 동의한 시설과 지역 외부에서, 근무 중이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이나 미국인이 저지른 고의적 중범죄에 대해서만 이라크 정부가 일차적인 사법권을 갖는다고 정하고 있어서 심각한 불평등을 드러내고 있다(제12조). 즉 미군이 영외에서 근무 중이지 않을 때 행한 범죄를 이라크 당국이 처벌하려면 그것이 중대범죄여야 하고 고의성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근무 중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도 미군이 하게 되어 있다. 이는 결국 미군 관련자들에게 광범위한 면책을 부여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석유수출 이익에 대한 통제 지속 협정 제27조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행위로 인해 제기된 (타국의) 요구를 해결하려는 이라크의 노력을 인식하면서 미국 대통령은 그의 권한으로 이라크 계좌, 이라크 발전기금, 기타 자산을 보호해왔다. 미국 정부는 이라크 정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이러한 보호를 지속할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라크 발전기금은 2003년 유엔안보리 1483호 결의안에 의해 생겼는데, 석유와 석유 생산물, 천연가스 수출에서 나오는 이익을 이라크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당시의 미군 임시행정처가 분배하게 했다. 그 이전에 유엔이 이라크를 제재하기 위해 실시했던 석유-식량 교환프로그램은 2003년에 종료되었다(석유-식량 교환프로그램 하에서 이라크는 석유수출 수익을 식량구입과 같은 인도주의적 구매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시행정처는 이라크 발전기금 계좌를 뉴욕연방준비은행에 만들었고 바그다드의 이라크 중앙은행에는 그 일부 액수만을 두었다. 미국이 사실상 계속 그 돈을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안보리 1483호 결의는 이 기금이 이라크 재건에 있어 이라크인을 돕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쓰여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무책임과 만연한 부패로 인해 수십억 달러가 새나갔다. 미 국방부가 겉치레로 행한 재건사업의 계약자인 핼리버튼과 같은 다국적기업들에게도 부풀려진 사업비용으로 막대한 돈이 흘러갔다. 이후 석유수입 통제권은 이라크 정부에 넘어갔지만 현재 뉴욕연방준비은행 계좌에 아직 100억 달러가 있다고 한다. 협정이 통과되면 이라크의 돈이 계속 미국의 ‘보호’하에 있게 되는 것이다. SOFA는 해답이 아니다 이 협정이 이라크 국회에서 통과되기까지는 난관이 많다. 미국과 이라크 정부는 통과를 자신하고 있지만 협정이 국회로 넘어간 이후 논란은 커지고 있으며 원래 24일로 예정되었던 표결도 26일로 연기되었다. 이라크와 미국 정부는 협정 반대세력을 설득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 SOFA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실상 미군의 점령 연장 협정이며 3년간의 기간 동안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 무슬림학자연합의 알-파이디 대변인은 이라크 저항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국민과 정치인들은 협정 거부에 합의했고 이 협정은 강제된 것이므로 체결되더라도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라크 평화를 위한 협정을 제안한 ‘국제 반점령네트워크’의 이라크활동가 알-바야티는 이 협정이 이라크를 영구적 식민지, 주권을 가진 식민지로 만들 것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이 협정이 통과되더라도 이라크인들에게 평화와 자유가 올 리는 만무하다. 점령 하에서 평화와 안정,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15만에 이르는 미군과 외국군대의 조건없는 완전한 철수가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
카프카스 전쟁의 거대한 위험 지난 8월 7일 그루지야 내 남(南)오세티야 자치공화국을 둘러싼 민족갈등이 러시아와 그루지야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발발 몇 주 전부터 그루지야 정부와 남오세티야 사이의 크고 작은 군사적 갈등이 고조되었는데, 친미 성향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은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휴전 제안 몇 시간 뒤에 그루지야 정부가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에 폭격을 가했고, 이 폭격으로 남오세티야의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사망했다.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에 대한 안전보호를 명분으로 즉각 그루지야 국경을 침공하였고, 전투기 공습과 지상군 공격으로 개전 3일 만에 그루지야 영토의 절반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그루지야는 미국과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들은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제재하기 위한 뚜렷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루지야의 휴전제의는 러시아로부터 거부당했고, 수도 트빌리시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중재로 가까스로 휴전을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철군을 지연하며 그루지야 내 친러 성향의 자치공화국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공화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전쟁이 남긴 위기 이번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막강한 화력으로 그루지야를 순식간에 초토화시켜버린 러시아가 무엇을 노리고 그루지야에 침공했는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루지야는 1991년 소련에서 독립했고 2003년 ‘장미혁명’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대표적인 미국의 동맹국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침공했다는 사실은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미국의 패권적 지위에 대한 러시아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것이다. 그루지야는 카스피해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에너지 송유관의 요충지인 카프카스 지역의 핵심에 위치해 있다는 점. 그리고 러시아는 그루지야 침공을 통해 카프카스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여 서유럽으로 유입되는 에너지 통로를 통제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 또한 러시아가 이 전쟁을 통해 주변의 구 소련 소속 국가와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국가들에게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드러냄으로써 지역 패권 의지를 명백히 표명했다는 점 등이 부각되고 있다. 나아가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며 중동지역까지 그 패권을 뻗어나가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전후 점령과정에서 계속되는 저항과 분쟁으로 난관에 봉착한 나머지 중동지역에서 ‘대테러전쟁’의 명분과 실리를 확고하게 챙기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더해 최근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침공한 지 열흘 만에 미국의 대테러전쟁의 거점인 파키스탄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사임한 사건, 또한 몇 해째 해결되지 못하는 이란 핵 프로그램 추진 문제 등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가 전례 없이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과 러시아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군사적 대결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신냉전’의 도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미국이 폴란드와 미사일 방어(MD)협정을 체결하자 러시아는 냉전 종식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겨냥해 발틱 함대 소속 잠수함과 전폭기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또한 미국이 그루지야에 대한 인도적 지원 물자 수송명분으로 흑해에 이지스 급 군함을 배치한 것에 대해 러시아는 그루지야의 주요 석유 수출항을 봉쇄하고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통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지역 패권을 향한 러시아의 움직임과 미국의 ‘대테러전쟁’의 정치적 명분약화와 군사력의 부침은 향후 새로운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으로 들쑤셔진 중동지역의 혼탁한 정치지형이 이란, 시리아로의 확전 가능성으로 이어지고 있다면, 카프카스 지역에서 충돌하고 있는 민족, 인종간의 극심한 갈등과 정치적 불안정성은 카스피해 유전개발과 송유관 지배를 둘러싼 미국-러시아 간 경쟁과 혼합되어 또 다른 전쟁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카프카스, 민족 분쟁과 지정학적 갈등의 무대 이번 전쟁의 진원지인 남오세티야 공화국은 압하지야, 아자리야 공화국과 함께 그루지야 영토 내에서 러시아의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자치주로서 친미국가인 그루지야 정부와 역사적으로 갈등관계였다. 그루지야가 있는 카프카스(코카서스) 지역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동양과 서양, 유럽과 아시아, 북반부와 남반부,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교차하는 다양한 종족, 종교, 문화의 경계들이 응집되어 있다. 그런 만큼 오래 전부터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아랍을 포함하여 터키,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민족들이 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주도권 싸움을 벌여왔다. 카프카스는 과거 제정 러시아 시기부터 소련 시기까지 러시아의 지배력이 집중되었던 곳이며 소련 해체 후 힘의 공백상태에서 잠시 영향력을 상실하기는 하였지만, 현재 에너지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역내 송유관 체제를 장기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러시아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주요 거점지역이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력들에게도 카프카스는 중앙아시아 지역과 더불어 유라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교두보인 동시에 에너지 자원의 공급지 및 파이프라인의 경유지로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서방세계는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배타적인 영향력을 방지하고, 카스피해 및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요충지로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20세기 소련에 편입된 이 지역의 다양한 중소 국가들은 1991년 소련 해체기에 주권국가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대내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적 불안정이 지속되었고, 대외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관계에 휘둘리면서 아직도 제대로 된 주권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국가인 그루지야는 19세기 러시아 제국에 병합된 이후, 그 내부의 다양한 민족공동체들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무차별적인 강제이주정책이 진행되면서 민족, 종족, 종교 간의 무수한 갈등의 역사를 끌어안게 되었다. 1921년 그루지야와 인근 자치주들이 모두 소비에트화 됨에 따라 압하지야 공화국을 비롯한 자치 국가들은 잠시나마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1년 그루지야 출신 스탈린의 집권 이후, 과거 그루지야 영토에 포함되어 있던 자치주들이 일방적으로 그루지야로 합병되었고, 1950년대까지 강제적인 그루지야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남오세티야, 압하스 민족에 대한 의도적인 차별 및 탄압이 자행되고, 민족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민족적 특성 무시되고, 이 지역에 대한 그루지야인들의 대량이주 정책이 펼쳐졌다. 이는 소련 민족정책 전반의 문제였는데 소련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민족, 종교적 갈등의 문제가 범이슬람 또는 범터키계의 광범위한 동일성의 연대로 확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소수 민족이나 혹은 부족규모의 민족 집단에게도 독립적인 민족의 지위를 부여하여 행정단위를 세분화하였다. 가령 캬바르지노-발카르 지역과 카라차이 지역의 경우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는 민족에게 아랍어를 금지하고, 인종과 언어가 주변지역과 다른 카프카스 남부지역의 일부를 아제르바이잔으로 통합하여 아제르바이잔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도록 하였다. 특히 스탈린 집권시절 강행된 인종 강제추방 조치에 의해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의 많은 민족들이 역사적인 거주지역으로부터 강제추방을 당했고 스탈린은 강제추방이 자행된 지역의 천연자원 및 에너지 자원들을 국유화하고 그곳으로 새로운 민족들을 이주시켜 인위적인 자치 국가를 만들었다. 나고르노-카바르흐의 경우도 소련에 편입될 당시 역사적으로 구분되었던 종교와 민족과는 상관없이 행정구역이 정해진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강제조치들은 다민족 사회에서 정치세력화의 핵심기반인 인구 구성비의 인위적인 변동을 발생시켰고, 따라서 거주 민족은 한순간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겨난 상대적 박탈감과 피해의식은 강력한 민족 분리주의를 생성시켰고 유혈충돌을 무릅쓴 민족 분리, 독립운동을 촉발하게 된다. 20세기 말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프카스 지역은 ‘힘의 진공상태’ 속에 패권 장악을 위한 강대국들의 ‘거대한 체스 게임판’이 되었다. 따라서 그루지야와 같은 신생독립국은 새로운 대내외적 환경변화에 부합하는 국가발전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그루지야의 선택은 미국 및 서방세계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루지야는 내부의 수많은 민족 갈등을 봉합한 채 ‘탈러시아 친서방 정책’을 구사하는 친미국가가 되었다. 2003년 11월 ‘장미혁명’을 통해 집권한 친미 성향의 사카쉬빌리 대통령은 ‘그루지야의 완전한 통합정책’을 공세적으로 추진하면서 자국내 3개의 자치 공화국에 대한 적대정책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이들로 하여금 ‘탈 그루지야 독립선언’ 및 ‘러시아로의 병합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분리 독립 운동의 흐름에는 카프카스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할 수 없는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다. 무엇이 폭력을 부르는가 카프카스 지역의 불안정한 정치경제적 권력 관계 속에서 그루지야의 국가통합 정책은 독립 국가의 존립을 위한 주요 과업이다. 그러나 그루지야 정부정책과 3개의 자치공화국의 분리 독립운동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미국과 러시아의 지역 패권 경쟁은 그루지야의 국가 통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루지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미국과 서방의 자본의 이해에 따라 그루지야 정부는 러시아의 지역패권을 견제하는 것을 목표로 내외부의 민족 갈등을 진압해야한다는 강박을 버릴 수 없다. 또한 러시아의 관광, 무역업에 깊숙이 의존하고 있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열악한 경제 상황은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분리 독립운동을 확산해 나갈 것을 요구받고 있다. 따라서 남오세티야, 압하지야와 같은 자치공화국은 유혈충돌과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그루지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러시아로 귀속되고자 한다. 반면에 그루지야는 무력충돌 및 경제봉쇄와 같은 강경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카프카스 지역에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을 타고 일시적으로 잠복되어 있는 수많은 갈등요인들이 시간이 갈수록 위기를 더해가고 있다. 체첸 분쟁을 비롯하여 아르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 영토 안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의 인종갈등, 그리고 압하지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러시아 북카프카스 지역의 압하스 민족의 군사적 도발 가능성, 또한 남오세티야와의 통합을 목표로 러시아와 공조하는 북오세티야 독립운동의 흐름 등 “언어와 민족의 전시장”인 카프카스에서 폭발하게 될 분쟁요인은 무수히 많다. 만일 그루지야 정부가 남오세티야 자치 공화국의 분리를 용인하게 된다면, 이는 필경 친 러시아 성향의 아자리아와 압하지야를 자극하여 그루지야는 사실상 분리주의의 도미노 현상으로 국가붕괴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사태는 순식간에 그루지야를 넘어 카프카스 전 지역의 민족, 인종의 분리주의 운동을 자극할 것이다. 따라서 그루지야 정부는 공식적으로 ‘국가 통합성 유지’의 목표를 버릴 수 없다. 반면 러시아는 체첸의 분리 독립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그루지야 자치 공화국들에 대해 불분명한 정치적 입장과 모순된 행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거대한 위험 인종, 종족전쟁의 화약고와도 같은 카프카스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성은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 냉전 시기에는 미-소 진영 간의 팽팽한 이데올로기 대결로 인해 사회, 문화적 갈등이 봉합되었다. 반면에 탈냉전과 소련 해체 이후 중앙정부 및 국가의 행정력이 약화되고, 중앙차원의 자원분배 및 경제지원이 감소하면서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내재되어 있는 갈등요인이 폭발하고 있다. 이에 더해 오늘날 카리브해 연안과 카프카스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경쟁이 심해져 역내 갈등을 부추기고 더욱 큰 군사적 대결과 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강압적 민족분리, 통합정책의 비극적 산물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하에서 ‘정상 국가’의 존립과 민족공동체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치열한 경쟁이 인종적, 종교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만성적인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불안정에 노출되어 있는 카프카스 지역의 대다수 민족국가 및 공동체들은 에너지 파이프라인과 이 지역을 지배하는 강대국의 이해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경제 재건과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명분삼아 강대국 간의 대리전을 수행하는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가장 거대한 위험은 오늘날 이 지역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이 군사적 대결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에너지 자원의 보고이자 유럽을 향하는 송유관이 교차하는 남부 카프카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위한 사활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패권 경쟁이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극심한 민족분쟁의 불씨가 세계 최강대국들의 군사적 긴장에 의해 점화된다면 서로 반목하고 있는 민족들의 증오와 분노는 돌이킬 수 없이 증폭될 수 있다. 카프카스 민중들을 위한 길 교전 6일 동안 남오세티야와 그루지야에서 민간인 2,100명이 죽고 3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카프카스 지역의 역사적 상흔의 대가와 강대국들의 지역패권을 향한 경쟁은 필연적으로 인민에 대한 공격을 낳을 것이다. 이로 인해 민족적 반감과 증오는 한층 더 심해질 것이고 이를 또 다시 활용하는 ‘동일성의 정치’는 극단적 폭력의 순환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언어와 민족, 그리고 종교의 다양성이 반드시 중앙정부와 혹은 주변지역 및 국가와의 갈등을 빚어내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다양한 동일성들이 한 지역에 공존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역사적 맥락과 오늘날 벌어지는 세계화의 폭력적 통치방식에 있다. 따라서 언어와 인종,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한 민족분리,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인종청소와 학살이라는 더 큰 재앙을 막을 수 없다.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민족, 종족, 종교의 배타적 동일성 때문에 벌어지는 ‘새로운 전쟁’이 ‘전장’과 ‘적의 대상’을 무한히 넓혀가고 있는 미국의 ‘대테러전쟁’과 조우할 때, 그 야만과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가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세계화가 주창하는 선별적인 포섭과 배제의 논리, 그리고 ‘무한 전쟁’의 악순환 속에 수많은 인민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 카프카스 민중들을 위한 유일한 길은 협소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서 벗어나 국경을 초월하는 연대를 도모하는 것, 그리고 오랜 역사적 갈등을 분리주의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상호간의 갈등과 반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의 연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무건리 훈련장 확장저지를 위한 자료집 무건리 훈련장 확장저지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 2008년 7월 25일
무건리 훈련장 확장저지를 위한 자료집
무건리 훈련장 확장저지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
2008년 7월 25일
한미 군사동맹에 맞선 오현리 주민들의 저항 국방부와 경찰의 폭력만행 9월 16일 오후 3시경, 국방부는 토지공사의 직원들을 대동하여 파주시 오현리의 한 축사에 무단으로 침입했다. 경찰병력 1개 중대가 이미 마을을 에워싸고 있었다. 몇 명의 주민들이 이들에게 항의하자, 경찰은 7명의 주민을 연행했다. 다음날 오후, 주민 3명에게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구속 영장이 청구됐다. 또 파주경찰서 앞에서 촛불을 들고 항의하던 주민과 사회단체 회원 28명도 모조리 연행됐다. 이들 중 3명에게도 집회시위법 위반으로 영장이 청구됐다. 그리고 다음날 18일부터 국방부는 다시 공권력을 대동하여 일방적인 감정평가를 진행 중이다. 지난 9월 4일 파주 직천리, 무건리 일대 370만평에 대한 훈련장 확장 ‘실시계획 승인 고시’가 경기도보에 게재된 이후, 국방부는 물적조사(감정평가)를 시작했다. 이는 훈련장 확장 부지에 포함되어 있는 오현리 주민들의 땅을 강제로 수용하기 위한 첫 번째 절차이다. 오현리 150가구 400여명의 주민들은 이미 지난 7월에 국방부의 '토지강제수용에 대한 보상계획 공고'에 반대하며 이의 신청을 해 놓은 상태이고, 8월 1일부터는 매일 저녁 훈련장 확장반대 촛불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현재 국방부와 경찰은 감정평가 강행, 무더기 연행 및 구속 등 과도한 폭력을 사용하여 주민들을 탄압하고 있다. 초기에 본보기를 보여주어 주민을 개별적으로 이탈시키겠다는 의도다. 또한 이는 이명박 정권의 공안탄압 공세와 맞물려 있다. 8월 주민촛불과 함께 결성된 <무건리 훈련장 확장저지를 위한 시민사회 공동대책위> 핵심 활동가들을 미리부터 잡아들여, 초반에 사회운동이 결합한 저항의 싹을 잘라내겠다는 엄포다. 쫓겨난 주민들 1980년 파주에 350만평 규모의 무건리 훈련장이 설치되면서 그 곳에 살던 직천리 79세대 300여명, 무건리 150세대 550여명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1986년, 1990년에 훈련장이 계속해서 확장되어 많은 주민들이 거주지에서 쫓겨났고, 이들 대부분은 현재의 오현리 일대에 정착했다. 그러나 2006년 국방부는 이들에게 무건리와 오현리 일대까지 703만평의 땅을 매수하겠다고 발표하고 2009년 까지 부지매입을 완료하겠다고 통보하였다. 주민들이 반발하자 국방부는 실제 주민이 참가하지 않는 이른바 ‘민관군 협의체’를 만들어 사업을 서둘러 추진하고 있다. 이 오랜 시간 동안 오현리 주민들은 군사훈련에 의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했다. 1993년 11월 밭에 포탄이 날아와 터졌고, 같은 해 12월에는 적성 종합고 운동장에 포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1996년 국방부가 권역화 훈련장 확장계획을 발표함에 따라 각종 인허가 규제가 강제되면서 주민들은 주택이나 축사 수리 하나 제대로 못하고 살았다. 1년 중 훈련이 진행되는 180일은 파주시 파평면과 적성면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통제되어 30분 이상 돌아가기 일쑤였고, 훈련 때마다 대규모 전차가 마을 도로로 이동함에도 제대로 된 인도가 없어 행인의 안전을 위협했다. 2002년 6월 13일에 발생한 故신효순, 심미선 장갑차 압사사건도 무건리 훈련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이동 중이던 미군 궤도차량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2005년 2월 26일에는 훈련 중인 미군 아파치헬기 1대가 추락하는 사건이 나기도 했다. 이외에도 주민들은 전차이동으로 인한 농지 훼손과 농작물 파손, 소음 피해, 가축유산 피해 등을 수없이 겪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어떠한 대책마련이나 보상이 없었다. 2007년에 들어 국방부는 되려 협의매수에 응하지 않은 주민들을 협박하기 위해 매수한 농지를 파괴하고 노골적으로 주민들의 영농을 방해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상수도까지 파괴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저질렀다. 지난 30여년의 세월동안 주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며 군사훈련장을 확장해온 정부는 이제 주민들의 마지막 생존권마저 빼앗으려 한다. 오현리에서 쫓겨나게 되면 주민들은 평생을 바쳐온 생업인 축산업을 포기해야만 한다. 대체 어떤 이유로 이 나라 정부는 주민들을 내쫓고 있는가. 또 하나의 대추리 2006년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대추리, 도두리 마을을 초토화시킨 한-미 군사동맹의 칼날은 이제 경기도 파주를 향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평택미군기지 확장사업에 이어 파주 무건리 훈련장 확장을 서둘러 추진하는 이유는 2004년 한-미간에 체결된 <연합 토지 관리계획(LPP)협정>(이하 LPP 협정)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 LPP 협정으로 한국정부는 미국의 세계적 군사전략인 ‘전략적 유연성’이 한국에서 원활히 실행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 셈이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한-미 군사동맹의 변화를 파악하는데 핵심적인 용어다. 즉, 주한미군의 역할이 기존의 대북억제에서 동북아시아 지역 전반을 아우르는 ‘신속 기동군’으로 확장되고, 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존 화력의 집중화, 효율화, 기동화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LPP 협정이 명시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를 위한 안정적인 영구주둔기지 건설(평택과 오산을 중심으로 하는 공격형 전투 기지와 대구, 부산을 중심으로는 병참기지 건설)과 첨단화된 군사 훈련시설 보장이다. 특히 미군의 신속기동능력과 타격력의 배양은 현대화된 군사훈련시설을 필요로 한다. 무건리 훈련장과 관련이 있는 부분은 바로 이 ‘군사훈련시설 보장’ 부분이다. 2011년까지 현재 미군이 사용하는 훈련장 일부를 반환하는 동시에 한국은 미군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훈련장 37개를 새롭게 조성하여 미군에게 제공해야 한다. 1980년대 550만평 규모였던 무건리 훈련장은 1996년 총 1,050만평의 권역화 훈련장으로 확장한다는 계획 아래 파주 오현리와 직천리, 갈곡리, 양주 비암리 일대의 주민들을 쫓아내면서 지속적으로 확장됐다. 1997년 10월부터는 미국의 요청으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합동위원회 시설 및 구역 분과위 건의안-과제번호 3089>(1997.11.10)에 의해 연간 13주(91일)를 미군이 사용하게 됐다. 2004년 LPP 협정 이후, 2006년 국방부는 기존 부지를 포함해 총 703만평을 매수한다고 발표하였고, 2008년 5월 7일 직천리, 무건리 일대 370만평에 대해 강제수용재결신청 공고를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무건리 훈련장 확장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한 제도를 한국정부가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과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비용부담과 책임소재 논란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한미 공동훈련장 조성의 비용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한국군 훈련장을 미군에게 공여하여 한미양국이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면 미국은 시설관리와 개조, 훈련장 접근 도로보수와 기반시설 정비, 훈련장 오염 정화, 확장부지 매입 등의 비용을 한국군에게 전가시키면서 훈련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또한 오염, 소음 등 환경피해나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피해 등의 대한 민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LPP 협정에 따라 무건리 훈련장을 미군에게 공여하는 것 자체는 명백히 불법이다. 이 협정이 근거하고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SOFA)에 따르면 주한미군 유지에 따를 비용은 전적으로 미국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주한미군 재편과정은 그 비용과 책임문제로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데, 약 10조원이 넘는 미2사단의 이전비용, 평택 기지건설 비용을 한국 방위비 분담금으로 불법 전용하는 문제 그리고 비용조차 가늠할 수 없는 반환 미군기지 환경오염 정화비용의 문제, 또한 현재의 무건리 훈련장 확장의 비용과 책임소재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한국정부는 이 모든 논란의 책임을 스스로 떠안으려는 형국이다. 국민의 땅과 집, 생존권을 팔아치우고, 국민의 혈세를 바가지로 퍼다 바치면서 미국의 동북아 군사패권전략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북 선제공격을 위한 한미 공동 훈련 한편 주한미군의 전략적 재편은 한국군의 독자적인 대북공격 능력을 미군의 그것에 필적할만하게 강화할 것을 요구한다. ‘국방개혁 2020’(국방부 발행)에 따르면 한국군은 각 제대의 작전지역을 현재보다 4배로 확장하고 기계화여단 확대, 포 사거리 확장 및 장비증강, 공세적인 전투수행교리의 채택 등 대북 선제타격 능력과 원거리 정밀타격 능력을 강화하는 군 구조와 무기체계를 재편, 강화하고 있다. 그 결과 주한미군으로서는 한국군의 작전지역이 보다 확장되어 한미 공동작전 수행이 한층 더 용이해진다는 이점을 얻게 된다. 무건리 훈련장이 확장되면 한국군은 현재의 여단 작전지역(7×15Km)을 넘어서는 기갑훈련과 포사격훈련이 가능해진다. 훈련장을 확장(남북 길이 약 18Km)함으로써 현재 약 4Km 정도인 포 사격 훈련 거리를 대폭 확장하여 사거리 18Km의 K-55와 같은 야포의 실 사거리 훈련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전차의 기동훈련 지역을 확대하고 포 사격 훈련 사거리를 연장하는 것은 한국군의 작전지역 확대에 따른 보다 넓은 훈련장을 마련한다는 뜻으로 결국 한미가 공동의 훈련을 통해 대북 선제, 종심 타격능력을 배양하기 위함이다. 확장된 무건리 훈련장에서는 주한미군의 핵심 실사격 훈련장인 스토리 사격장(215만 평, 파주 파평면, 진동면 일대)과 미 2사단 기갑부대의 전차훈련으로 사용되고 있는 다그마 노스 훈련장(175만 평, 파주 적성면)과 함께 임진강 도하, 휴전선 돌파, 개성 진격을 상정한 기갑훈련을 실시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지역, 개성-문선 축선은 북한군의 최단 서울 공격로이기도 하지만 한미연합군의 선제공격과 군사분계선 돌파, 개성과 평양 점령을 향한 최단 공격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훈련장 확장과 대북 선제공격을 가정한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훈련은 북한을 군사적으로 자극하고 위협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한미 군사동맹에 맞선 오현리의 저항 계속되는 6자회담의 난항과 북의 테러지원국 해제요구가 미국에 의해 여전히 묵살되고 있는 지금, 한반도에 드리운 전쟁위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한-미는 지난 8월 18∼22일, 2012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비해 (한미연합사가 주도한 기존의 을지포커스훈련(UFL) 대신) 한미동맹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군이 주도하고 미군이 지원하는 형태의 연합 훈련인 <을지프리덤 가디언(UFG)> 연습을 실시했다. 훈련 직후 한국합참은 “한국이 주도하는 전시작전계획이 새로운 지휘구조 하에 C4ISR(지휘통제감시정찰)체계를 시험했으며 전쟁 수행 기능별로 보완할 요소를 도출할 수 있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월터 샤프 한미연합군사령관은 훈련 도중에 한반도 유사시 미 본토에서 파견될 증원군인 <시차별부대전개제원(TPFDD) -9만여 명의 병력과 함정 160여 척, 항공기 1천600여 대 등으로 구성됨->의 신속한 파견을 위해 절차를 보다 간소화할 것을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또한 얼마 전 열린 한미간의 정책안보구상회의(SPI)에서는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시기에 대비하여 한미연합사 해체이후 새로 구성될 미군 한국사령부(US KOCOM)나 유엔사를 통하여 위기관리나 전시 전환 및 전쟁 확대 등 한국군 작전통제권의 핵심 권한을 장악하기 위한 제도적 절차를 완비하였고 한국군을 영구 지배하고 유사시 북에 대한 점령 통치를 합법화하려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논의했다. 이에 더해 최근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를 계기로 북한 내부 사태에 대비한 ‘개념계획 5029“를 작전계획으로 격상시키기 위한 한미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다시 한 번 한-미 군사동맹이 여과 없이 그 침략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2008년 가을이다. 이 시간에도 파주 무건리 훈련장 확장은 또 다시 국민의 눈을 기만하고, 주민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그어내며 가차 없이 추진되고 있다. 미국의 군사패권의 철저히 조응하는 정부의 이 야만적 행위는 필경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드리운 군사경쟁을 한층 더 고조시킬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오현리 주민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고 있다. 땅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생존의 권리를, 6년 전 잔혹하게 죽어간 두 여중생의 원한을, 그리고 평택 대추리-도두리 투쟁이 남긴 평화와 정의의 의미를, 오늘 이 시간에도 오현리 주민들은 굳건히 이어나가고 있다. 한-미 군사동맹이 조장하고 있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전쟁위기에 맞서, 작지만 환한 평화의 촛불을 밝히고 있는 무건리 훈련장 확장반대 투쟁에 사회운동은 힘차게 연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