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은 1차 세계전쟁이 종전을 향해 가던 1918년 시점에, 그 유명한 ‘14개조 평화원칙’을 통해서 자결권 담론을 국제적으로 널리 퍼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이 1917년 4월, 1차 세계전쟁 참전을 결정한 후,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8일, 의회 연설 형식으로 바로 이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했다. 14개조는 ‘자결’, 또는 ‘민족자결’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윌슨의 담론은 훗날 자결 개념이 제도화되고, 국제법으로 성문화될 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윌슨이 국제무대에서 자결이라는 표현을 직접 처음 쓴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 후인 1918년 2월 11일, ‘4개 원칙’ 연설이었다. 이 역시 뒤에서 다룬다.)
윌슨이 자결에 관해 언급할 당시는 1차 세계전쟁의 이데올로기적 경쟁이 극심할 때였다. 미 행정부는 윌슨의 말이 정치선전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실제로 ‘공공정보에 관한 미국 위원회’의 수장은 윌슨의 전시 연설들이 미국이 전쟁에 참여한 동기, 목적, 이상을 세계에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고, 그래서 우방국, 적대국, 중립국 모두가 미국이야말로 이기심이 없고 정의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보게 했다고 스스로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윌슨은 파리 강화회의에 도착했을 때 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레닌이 민족자결에 대해 처음 언급할 때는 1917년 혁명 이전으로, 현실에서 민족자결을 결정할 정치적 힘이 전혀 없었다. 반면 윌슨은 처음 이를 언급할 때, 미국 대통령의 이름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즉 레닌이 처음에는 심각한 의견 차이를 보인 마르크스주의 집단 내에서 동지들을 설득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면, 윌슨은 처음부터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래서 초기 레닌이 민족자결 문제의 이론적 해명에 집중했다면, 윌슨은 주로 전쟁과 관련된 실용적, 외교적 관심사에 초점을 맞췄다. 이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윌슨 14개조의 배경: 혁명 러시아와 이데올로기적 경쟁
첫째, 윌슨은 국무부가 보이는, 볼셰비키에 대한 맹렬한 적대감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양가적이었다. 한편으로는, 1차 세계전쟁 이전에 러시아가 행하던 비밀외교와 합병에 대해 볼셰비키가 반발할 권리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볼셰비키가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즉, 볼셰비키가 제시한 비판에 어느 정도 공감하면서도, 볼셰비키가 유발할 수 있는 ‘무질서’를 우려했다.
둘째, 그는 러시아가 연합국의 편에 남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인식했고, 1917년 12월에 시작된 혁명 러시아와 독일의 강화협상에 대해 우려했다. 따라서 볼셰비키의 요구에 직접적으로 응답하면서, 그들과 대화의 문을 열고 연합국 편에 남도록 설득하고자 했다.
셋째, 윌슨은 유럽대륙이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볼셰비키가 대중에게 이데올로기적 매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자결권 개념에 담긴 세계적 매력과 공개적으로 경쟁할 필요가 있었다. 즉, 세계의 관심을 볼셰비키의 비전으로부터 미국의 이데올로기와 정치로 되돌리고자 했다. 2. 14개조의 구체적 내용: 민족자결의 개념화
또한 14개조는 “식민지에서 주권과 같은 문제들을 결정할 때, 당사자인 주민들의 이해는 법적 권리의 결정을 기다리는 정부의 정당한 청구와 동등한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기반 위에서” 식민지의 요구가 해소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5조). 그리고 그는 “외국군이 러시아의 모든 영토에서 철수해야 하며”(6조), 벨기에의 주권이 회복되어야 하며(7조), “알자스-로렌 문제에 관해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가한 부당 행위”는 시정되어야 한다고(13조) 주장했다.
이처럼 윌슨은 국가경계를 결정하는 지침으로서 민족성(nationality)을 언급함으로써, 자결이 ‘민족’을 기준으로 정의된 개념이라는 근거를 창출했다. 또한 벨기에나 프랑스에 관한 언급은 자결이 타국에 의한 점령과 병합의 종식 후, 국가주권의 재확보, 재확립과 연결되도록 했다.
한편 러시아에 대한 언급은 당시 러시아에 대한 윌슨의 관심사를 반영한다. 또한 식민지의 요구를 ‘정부’, 즉 식민모국의 청구와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언급은 당시 볼셰비키가 자결을 ‘반제국주의’와 연결하려는 노력에 대해 윌슨이 어떤 식으로 대응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3. 윌슨의 4개 원칙: 자결론에 대한 직접적 언급
첫째, 유럽 영토에 대한 조정은 오로지 “영구히 지속될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실행되어야 한다.
둘째, 평화중재자는 작은 민족들과 지역들의 권리를 존중해야만 한다. 즉, “인민들과 지역들이 어떤 주권국에서 다른 주권국으로 물물교환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지역 주민의 이익이 강대국의 이익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즉 “이번 전쟁에 연루된 모든 영토문제의 합의는 당사자 주민의 이해에 따라,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뤄져야 하며, 그저 경쟁국가 요구들의 조정이나 타협에 따라 이뤄져서는 안 된다.”
넷째, 민족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소집단은, 그들의 목적이 다른 집단과 분쟁을 발생시키면서 “불일치와 적대”를 자극하지 않는 한 인정을 받아야 한다.
즉 이번 전쟁의 뿌리는 소규모 민족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은 데 있으며, 따라서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모든 영토문제가 당사자 주민의 이해에 따라 해소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윌슨은 전후 평화로운 질서를 보장하기 위해서 불안정성에 대한 치료제로서 민족 ‘자결’을 제시한다. “민족적 열망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 인민은 이제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고, 그들 자신의 동의에 따라 통치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자결이라는 원리를 무시하는 정치인은 곧 위험에 부딪칠 것이다.4. 민족자결 이론에서 나타나는 윌슨과 레닌의 차이: 민족자결론의 탈급진화
첫째, 레닌이 민족자결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근본적 평등으로서 자유’라면, 윌슨의 근거는 ‘평화로서의 자유’였다. 간단히 말해, 레닌이 민족 간의 근본적 평등을 강조했다면, 윌슨은 민족 간의 평화를 중시했다. 따라서 강대국 간 평화를 위해서 식민지 민족의 평등은 때때로 무시될 수도 있다는 함의를 지녔다.
둘째, 윌슨은 경제영역에서 국가의 불간섭, 즉 항행과 무역의 자유를 중시했는데, 이를 곧 ‘자유로운 민족들의 자유’(freedom of free nations)라고 간주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유주의야말로 평화를 보장한다고 보았다. 물론 윌슨이 강조했던 민족국가 간의 평화로운 자유무역은 당시의 노골적인 식민주의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즉, 국가 간 부의 불평등한 이전)는 자유무역 시스템을 통해서도 작동할 수 있다.
셋째, 윌슨의 자결 담론은 ‘아래로부터의’ 인민주권이라는 관념과 거리가 멀다. 즉, 인민이 자신의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관념을 옹호하기보다는, 인민의 의지를 직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경륜이 있는 지도자에 초점을 맞춘다. 실제로 윌슨은 인민들이 위험스러운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고, 그럼으로써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윌슨은 자신이 “제퍼슨과 같은 민주주의자이지만, 귀족적 취향을 지녔다”고 말했다.)
실제로 윌슨은 자결이라는 표현과 ‘통치를 받는 자들의 동의’(the consent of governed)라는 표현을 종종 구별 없이 사용하며, 특히 후자의 표현을 훨씬 더 많이 쓴다. ‘통치를 받는 자들의 동의’에서 인민은 정치적 위계구조의 최하층부에 있으면서 수동적이고 통치를 받는 단위로 인식된다. 이러한 통념에서 인민은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나, 통치와 입법의 원천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종합해보면, 윌슨의 자결 담론은 이데올로기적 대결이 격렬하던 1차 세계전쟁 시점에서 볼셰비키의 권위를 잠식하는 효과를 발휘하고자 했다. 즉, 윌슨은 세계적으로 호소력이 있던 레닌의 민족자결론을 자신의 방식대로 흡수하면서 급진적 함의를 벗겨내고, 그 자신의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 관념과 연결시켰다.5. 윌슨의 자결 이론이 보인 결정적 한계: 파리 강화회의와 식민지배의 영속화
결국 1918년 가을, 미국 관리는 윌슨의 14개조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보유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발언했다. 이러한 보장을 받고서야 다른 연합국들은 14개조와 그 후 윌슨이 발표한 여러 연설문에 제시한 원칙에 따라 강화회의를 여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다. 윌슨이 제시한 원칙은 민족자결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다른 연합국들은 식민지의 해방을 함의할 수 있는 어떤 형태의 민족자결 담론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19년 1월부터 시작된 파리 강화회의 당시, 윌슨의 자결 담론은 놀랍게도 식민주의와 양립할 수 있었다. 윌슨은 질서, 평화, 국가의 불간섭(항행과 무역의 자유)과 같은 가치를 계속 강조했지만, 연합국들의 식민지배는 이러한 가치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듯이 식민지배를 수용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파리 강화회의가 실제로는 식민주의를 영속화하면서, 강대국의 민족적 이익에 따라 영토문제를 처리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1차 세계전쟁 동안 세계 인민은 윌슨이 민족자결의 화신이라고 보았고, 윌슨에게 서한이나 면담, 청원을 통해서 자신의 자결 요구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그러한 집단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행하지 않았다. 즉, 윌슨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을 보편적 행동원리로 삼지 않았다. 왜 그랬나. 윌슨 본인의 민족자결 담론이 전달하고자 했던 바와, 세계인이 그것을 해석했던 바 사이에 크나큰 간극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6. 파리 강화회의와 승전국 식민지 문제: 한국 사례
파리 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제출한 민족은 모두 30여 개에 달했는데, 여기에는 승전국 식민지와 패전국 식민지, 또는 승전국·패전국과 무관한 민족이 모두 포함되었다. 즉, 발트해 북부의 올란드 제도(Åland), 오스트리아, 벨기에, 중국, 한국, 베트남, 이집트, 스페인, 조지아, 그리스, 온두라스, 헝가리, 아일랜드, 이탈리아, 유태인, 발트3국, 라트비아, 레바논, 리투아니아, 몬테네그로, 스칸디나비아 3국, 폴란드, 포르투갈, 세르비아, 스위스,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청원서를 제출했다. (강조 표시를 한 것은 윌슨이 14개조에서 독립을 보장한 민족이다.)
파리 강화회의와 관련된 한국의 청원서는 △여운형의 청원서, △이승만과 정한경의 위임통치 청원서, △국내 유림이 작성한 ‘파리장서’, △김규식이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1919년 4월에 보낸 청원서, △김규식이 1919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 대표단 명의로 보낸 청원서가 있다. 이중에서 강화회의에 최종 제출된 청원서와 비망록은 김규식이 작성한 것뿐이다. 김규식이 임시정부 대표단 명의로 보낸 청원서의 요지는, “한국민족은 1910년 8월 22일 기만과 폭력에 의해 강제 체결한 ‘합병조약’의 영구폐기를 요구한다”라는 것이었다. (김규식이 4월에 신한청년당 대표로서 보낸 청원서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제안한 반면, 5월에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보낸 청원서에는 위임통치 제안이 빠진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룬다.)
한국 대표단은 일본이 승전국의 지위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한 상황에서, 한국의 민족자결 문제가 회의에 상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표단은 파리 강화회의가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세계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승전국들의 냉정한 태도에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7. 국제연맹 창설과 위임통치제도: 패전국 식민지의 분할
윌슨은 자신이 제시한 자결에 관한 원론적 입장이 현실 정책으로 구체화될 때, 오로지 충분히 ‘계몽된’ 민족만이 평등한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윌슨의 표현에 따르면 ‘평화롭게 법을 준수할 수 있는 성숙성을 보인 민족들’에게만 평등이 적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아일랜드처럼 법을 어기며 폭력을 행사하는 (식민지, 종속국의) 민족은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며, 따라서 민족으로서 평등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결론을 스스로 정당화했다.
이처럼 윌슨은 ‘자격이 없는’ 민족이 무조건적으로 국가를 창설하고 평등한 대우를 받는 정책을 부정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1918년 말에 이르러 위임통치 제도(mandate system)가 질서있는 통치를 위한 안전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위임통치 제도는 파리 강화회의에서 윌슨이 가장 힘주어 강조한 정책이 되었다. 국제연맹 규약이 최종으로 성안될 때, 위임통치 제도는 과거 러시아, 오스만, 함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인민들에 대한 ‘최종처분권’을 국제연맹에 부여했고, 국제연맹에 속한 특정 국가가 각 위임통치국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윌슨이 감탄한 위임통치 제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얀 스뫼츠 총리가 제안했다. 1918년 말에 제시된 ‘스뫼츠 플랜’에 따르면, 서양 문명국은 자기통치 능력이 없는 민족이 통치 능력을 보유하도록 그들을 육성할 특별한 책임을 져야 했다. 윌슨은 스뫼츠 플랜을 읽자마자 위임통치 제도를 그의 국제연맹 규약 초안에 포함시켰다.
미국 행정부와 그 동맹국들도 모두 위임통치 제도를 찬성했다. 미 국무장관 랜싱은 당시 동맹국이 위임통치를 열렬히 환영한 배경에는 그들이 (독일로부터 받을 전쟁배상금을 깎아주지 않고도) 독일이 보유하던 식민지를 위임통치 명목으로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위임통치를 받게 된 민족 중 소수는 국제연맹에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으나, 위임통치 형태 그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다. 오로지 국제연맹과 위임통치를 맡은 국가들만이 언제 ‘자기통치’(실질적 독립)를 실시할지 결정할 권한이 있었고, 위임통치를 받게 된 민족은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채 종속된 상태에 머물러야 했다.8. 이승만, 김규식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 이승만과 이동휘의 노선 분화
그런데 특히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은 3·1운동 이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부터 논란을 빚었다. 독립전쟁론을 주장한 임정 내 이동휘 세력, 하와이와 원동의 박용만 세력, 북경·만주·노령 지역의 일부 독립단체들이 특히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강력히 비판했다.
예컨대, 1919년 11월 임정의 국무총리로 부임한 이동휘는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일본에 종속된 상태이지만 얼마간의 자치권을 획득하여 독립의 토대로 삼자는] 자치운동이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원하는 외교가는 원치 않는다”라고 분명히 못을 박기도 했다. 이동휘가 혁명 러시아와 연계한 사회주의 운동의 길을 걸어간 사실은 자치운동이나 위임통치를 반대한 그의 입장과 분명히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당시 이동휘는 이미 1918년 5월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의 대표였다. 반면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이 당시 한국의 실정과 국제정세를 다각도로 고려한 ‘현실적인 차선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우리는 이동휘와 이승만의 노선 분화가, 궁극적으로는 민족자결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할 것이냐를 두고 나타난 레닌과 윌슨의 쟁점을 반영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동휘가 고심 끝에 임시정부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당대 사회주의 운동이 민족운동(민족주의적 독립운동)과 연대, 결합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자치운동이나 위임통치 청원 운동과는 확실히 선을 긋고자 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당대 사회주의자가 지향한 ‘민족해방운동론’이 실천적으로 어떤 길을 걷고자 했는지 읽어낼 수 있다. 9. 파리 강화회의 이후 레닌의 민족해방운동론: 파리 강화회의와 국제연맹 비판
이 소위원회에 레닌이 제출한 글,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1920년 7월 28일)는 1차 세계전쟁과 파리 강화회의에 대한 그의 평가를 분명히 제시한다. “양대 진영은 이번 전쟁을 민족해방과 [민족]자결이라는 상투적인 말로 정당화했다.” 그러나 체결된 강화조약은 “승리한 부르주아가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 ‘민족’ 간 국경선마저 가차 없이 바꿔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부르주아에게는 ‘민족’ 간 국경선마저 거래대상이다. 이른바 국제연맹은 이번 전쟁의 승자가 그들의 전리품을 서로 보장하기 위한 보험계약에 불과하다.” 애초 레닌이 전쟁을 중단한 방안으로 ‘영토병합과 배상이 없는 즉각적인 종전’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회고해 보면,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에 대한 레닌의 이러한 비판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실제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반환한 사례를 포함해 유럽 영토의 13%, 인구의 10%(650~700만 명)를 잃었다. 그렇다면 승전국의 노골적인 전리품 약탈에 관한 독일 부르주아의 항의는 정당한가.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 “부르주아에게 있어서 민족적 통일성을 재확립하고 분리된 영토를 재통일하려는 시도는 전쟁에서 완패한 자들이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군사력을 모으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인위적으로 찢긴 민족을 재통일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오로지 혁명적 투쟁을 통해서, 부르주아를 제압함으로써 진정한 민족해방과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팽창주의적이고 호전적인 독일 부르주아가 재통일을 추진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이 될 것이고, 또 이번에는 승전국이 되어 다른 나라의 영토를 더 약탈할 것이므로 이는 결코 지지할 수 없다. (이는 곧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히틀러의 독일이 벌인 2차 세계전쟁을 예언하는 듯 보인다.) 레닌이 보기에, 오히려 유럽 대륙 전반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혁명의 불길이 타올라야만 과거에 벌어졌던 제국주의 국가 간 약탈적인 영토병합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소할 길이 열릴 수 있다.
실제로 레닌은 혁명 러시아가 과거 차르 치하에서 획득했던 영토나 이권을 반환하고 원상회복이 되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1919년 7월 27일 외무위원장 레프 카라한 명의로 발표한 반제국주의 선언에서 중국 문제에 대한 입장을 보면, △ 제정 러시아가 중국과 체결한 비밀조약을 페기한다, △ 만주 중동철도와 그 이권을 중국에 무상으로 반환한다, △ 중국에 대한 배상금 청구를 포기한다, △ 제정러시아가 보유하던 중국 내 조차지와 영사재판권이라는 특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당연히 이러한 러시아의 입장은 중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한편 파리 강화조약의 결과,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민족자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래서 레닌은 테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식민지와 피억압 민족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동맹하는 것 외에는, 또 소비에트 권력이 세계 제국주의에 승리하는 것 외에는 자신들이 구원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쓰디쓴 경험을 통해 확신해 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민족해방운동, 식민지해방운동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가능한 한 가장 밀접한 동맹을 실현하는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또한 레닌은 테제의 말미에 이렇게 덧붙인다.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와 약소 인민을 오랫동안, 현재에도 노예화했기 때문에 노예화된 나라의 노동 인민은 억압민족[제국주의 열강]에 속한 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해 억압민족 전반에 대한 억울한 마음뿐만 아니라 불신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불신과 편견을 신속히 극복하기 위한 양보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처럼 2차 코민테른 대회에서 민족문제, 식민지문제를 강조한 만큼, 대회 직후인 1919년 9월 1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1차 동방인민대회도 열렸다. 터키, 인도, 아프가니스탄, 중국, 조선의 대표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미국, 일본의 급진적인 반제국주의 대표도 참석했다. 37개국에서 무려 1891명의 대표가 모였다. 이 대회에서는 “만국의 노동자와 모든 피억압민족이여 단결하라”라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또한 대회의 결정에 따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산하에 상설기관으로 선전선동 평의회를 구성하여 기관지 《동방인민》을 출판하기로 했다. 또한 1921년 모스크바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10. 레닌의 민족해방운동론이 조선에 일으킨 반향
몇 년 후 김단야가 남긴 기록이 있다. 김단야는 《조선일보》에 1925년 1월 22일부터 2월 3일까지 11회에 걸쳐 「레닌 회견 인상기 – 그의 서거 1주년에」를 연재했다. 레닌과의 회견에는 조선인 중에서 김단야 본인 외에 여운형, 김규식, 김시현, 최고려, 현순 등 5명이 참여했고, 중국, 일본, 몽골, 자바의 대표를 포함해 모두 20명이 함께 했다. 김단야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1921년 11월 11일의 일이다. 그날은 태평양회의라는 명의 아래 세계의 열강 대표가 미국 수도 워싱턴에 모며 태평양을 중심으로 나타나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모인 날이었다. 세계의 모든 시선은 그리로 모여 실로 회의는 일시 전세계의 주목의 초점이 되었다. … [조선, 중국, 일본, 기타 태평양 연안 신문의] 모든 논조의 대개는 그 회의가 동양민족의 앞길을 잘 해결하여 주리라고 쓴 것이 많았다. 그래서 더욱이 약자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조선민족은 이 회의를 태산같이 믿은 사람도 적지 않았었다. … 그러나 그 회의는 … 이미 결과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은 세인의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며, 그 결과가 동양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 회의는 … 동양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과거에 태평양 연안에서 자유경쟁에 따라다니는 이권쟁탈로 인하여 피차에 생긴 알력으로 말미암아 열강 사이에 국교가 자못 위험케 된 중에 … 일본과 미국 국교는 극도로 위험에 빠진 것을 좀 유완케 하고자 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이권쟁탈 지대를 분배하여 서로 충돌이 없이 좀 더 조직적으로, 협의적으로 동양천지를 착취하게 된 것이었다.
… 그때에 북쪽 붉은 나라 안에 근거를 둔 세계무산자해방운동의 본영인 국제공산당에서는 일찍 그 회의의 성질을 간파한 동시에 그 결과까지도 미리 알았다. 그리하여 동양의 약소민족과 노력군중에게 실로 사활문제를 가진 것이라 하여 피압박군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단결하여 무서운 독수(毒手)를 대항치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정신에서 원동민족대회를 소집케 된 것이었다. 그래서 동양 각국 안에 있는 노동단체 또는 혁명단체의 대표를 부르게 되어.. 대표 백수십여 인이 붉은 러시아에 모여 [1922년] 1월 15일에 모스크바를 밟게 된 것이었다. … 러시아 황실의 … 궁전 안에서 동양의 망명가, 무산자가 모임을 이루게 된 것은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태평양 회의(워싱턴 회의)란 무엇이었나. 1921년 3월, 미국 대통령으로 새로 취임한 공화당 출신 워런 하딩은 태평양에서 해군의 군비축소와 여타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중국,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8개국에 회의를 제안했다.
이때에도 임시정부는 대통령직에 있던 이승만을 대표로 하여 (초대를 받지 못한) 한국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미 파리 강화회의를 경험했기 때문에 임시정부 내에서도 대표단 파견에 회의론이 있었으나, 결국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국내에서는 《동아일보》가 큰 관심을 보여 연일 기사를 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리 강화회의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한국 문제는 상정되지도 않았고 거론되지도 않았다. 임시정부 내에서 이승만의 위상에 금이 갔고, 임시정부 내각은 사의를 표명했다.
이러한 참담한 실패 이후, 레닌과 코민테른의 민족문제, 식민지문제에 대한 입장이나, 식민지 민족운동, 계급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 연대 의지는 조선 내에서도 더욱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1. 결론: 레닌과 우크라이나 전쟁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개시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전쟁이고, 20세기의 반제국주의 해방 전쟁과 비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진보연대는 발리바르의 이러한 주장이 담긴 글을 번역하여 「전쟁 속에서: 민족주의, 제국주의, 세계정치」, 《사회운동포커스》, 2022년 8월 3일, 4일로 발간했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첫 번째 정의는, [이 전쟁은]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로 인해, 이 전쟁을 (알제리 전쟁, 베트남 전쟁과 같은) 20세기의 반제국주의 해방 전쟁이나, 심지어 초기 현대 국가들이 영국, 스페인,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분리되며 형성된 것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제 입장은 …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펼쳐지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을 지지해야 할 즉각적인 긴급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민족의 독립 그 자체가 절대적인 가치이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히 이것은 [러시아로부터] 부인당한, 우크라이나 민중의 자결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민중은 대규모의 범죄적 전쟁의 희생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패배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을 것이며, 국제 질서에 파괴적인 정치적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침략으로 민족자결 원리가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이 의미하는 바는 자못 심대하다. 우리 시대가 세계전쟁 이전의 세계로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레닌이 살아 있다면 어떤 입장을 취할까. 필자는 레닌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우크라이나 민중의 자결권을 지지하며 이들의 저항에 연대하고 ‘푸틴 타도’를 외쳤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이러한 확신을 입증하고자 했다. ●
민족문제에 관한 레닌과 스탈린의 논쟁에 담긴 함의
1. 서론
《노동자연대》는 2022년 6월 7일에 발표한 기사,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지지해야 하는가”에서 “레닌은 (…) 분리·독립의 권리를 포함한 피억압 민족의 자결권을 줄기차게 옹호했다. 그러나 (…) 자결권 옹호는 기본적으로 국제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한 것이었다. (…) 레닌은 피억압 민족의 반란이 제국주의를 약화시킬 수 있고, 그래서 국제 노동계급이 그들의 자결권을 지지하며 그런 반란들을 자국 지배계급과 싸우는 데에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서 “상대국의 제국주의만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자국 제국주의(또는 친제국주의)에 힘을 실어 주는 꼴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크라이나 사회주의자들의 출발점은 서방과 러시아 모두의 제국주의와, (서방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젤렌스키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즉 상대 제국주의에 힘을 싣는다면 그 자결권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8월 16일에 작성된 기사, “레닌과 민족자결권 ―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살펴본다”에서는 레닌의 자결권에 관해 좀 더 자세히 다룬다. 기사에 따르면, “레닌이 지지한 민족자결권은 (…) 모든 분리·독립 요구를 지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 구체적 현실에서 투쟁에 미치는 효과를 따져봐야 한다. 그 기준은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노동자연대》의 주장을 요약하면,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과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에 이바지하지 않는 자결권은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레닌의 민족자결권을 《노동자연대》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
우리는 민족자결권에 대한 《노동자연대》식의 이해는 다름아닌 레닌이 당내에서 투쟁했던 ‘노동자의 자결’ 개념에 더 가깝다고 본다. 스탈린이 대표적으로 주장한 노동자의 자결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복무하는 경우에만 자결권이 인정될 수 있다는, 혹은 프롤레타리아만이 자결권을 갖는다는 의미다. 즉 자결권에 대한 선택적 지지의 입장이다. 이는 어떤 수사를 붙이더라도 레닌의 개념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레닌은 민족의 자발적 결정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민족자결권 개념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레닌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한 민족해방 투쟁이 어떤 조건하에서는 다른 열강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자결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제국주의 전쟁이 벌어지는 정세 속에서도 피억압민족의 의사를 존중해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레닌의 자결권을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항쟁하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의사를 존중하며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그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문에서는 마르크스의 민족자결권 개념, 민족자결권을 둘러싼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쟁과 레닌의 자결권, 노동자의 자결과 폴란드 침공, 소련과 소연방 헌법의 성립 과정을 검토하며 이를 논증한다.2. 마르크스와 민족자결권
에드워드 카의 『볼셰비키 혁명사』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1848년 이전까지는 민족자결 문제에 대해 고찰할 기회를 갖기 어려웠으며 그 이후에야 비로소 이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1848년 즈음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민족자결 문제에 대해 입장을 요구받았을 때, 그들의 입장은 자유주의자나 민족주의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첫째, 대규모의 강력한 단위의 구성에 이르게 될 요구는 받아들이지만, 역으로 대규모의 국가를 분할해 소국을 창설하게 될 요구는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독일에서의 공산주의당의 요구들」에서 “독일 전체는 단일한 불가분의 공화국으로 선언된다”고 쓰고 있다. 이는 당시 자유주의의 견해와 일치함과 동시에 현대의 경제발전은 대규모의 단위가 필요하다는 『공산당 선언』의 견해와도 일치했다. 둘째, 부르주아의 발전이 충분히 이뤄져 궁극적인 프롤레타리아의 활동에 대해 유망한 영역이 될 수 있는 국가들의 요구에 대해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셋째,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해 19세기 당시 진보적 사상가들은 러시아가 유럽의 가장 강력한 반동세력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는 러시아가 범슬라브주의 정책을 통해 유럽을 지배하려 한다는 우려로 인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받았던 야만적 동양의 문화를 대표하는 국가로, 서방은 문명화된 민족으로 인식되었다. 넷째, 민족에 관해서는 일관된 이론보다는 당시의 상황에 따르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그 후에 일어난 폴란드 봉기는 영국 노동자와 프랑스 노동자가 최초로 만나는 기회가 되었고, 이는 제1인터내셔널이 창립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마르크스는 폴란드 봉기에 대해 러시아에 타격을 준다는 차원에서 지지했다.) 그리고 폴란드 봉기를 계기로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민족자결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다. 인터내셔널은 1865년 9월에 브뤼셀에서 첫 총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으나, 여러 조건으로 인해 개최되지 못하고 그 대신 런던에서 예비회담을 소집한다. 1865년 9월 25일부터 9월 29일까지 개최된 이 회담에서는 다음 대회에서 다룰 의제를 논의했는데, 그 의제 중에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유럽 침공과 통합적이고 독립적인 폴란드의 재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폴란드 문제가 대회 의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프루동주의자들의 주장이 있었지만, 예비회담에서는 폴란드 독립의 회복에 관한 항목을 유지했다. 그리고 1866년 제네바에서 1차 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마르크스는 예비회담에서 결정된 의제에 관한 입장을 담은 「임시 총평의회 대의원들을 위한 지침들」을 제출한다. 지침 9번은 폴란드 문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프랑스어 부제는 “민족자결권을 실행하고 폴란드의 민주적, 사회적 기반을 회복시킴으로써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소멸시킬 필요성”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민족자결이 폴란드에 한정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기존 입장을 정정한다. “이전에 나는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분리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현재로서는 비록 분리 이후에 연방제도로 나아가게 된다 하더라도 분리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이후 1866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독일의 통일과정에 개입하려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쟁)이 발발했을 때, 라파르그는 민족은 미신일 뿐이라고 규정하며 평화를 설교했다. 이에 마르크스는 “민족성을 부정함으로써 무의식중에 이들 민족이 프랑스 민족이라는 하나의 모범적인 민족 속에 동화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지적하며 반박했다.
이후에는 민족자결과 관련한 문제가 불거질 뚜렷한 계기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1896년 제2인터내셔널 런던대회의 한 결의에서는 다시 한번 민족자결에 관한 결의가 이뤄졌다. 이 대회에서는 “모든 민족의 완전한 자결에 대해서 지지를 선언”했다. 3.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민족문제 논쟁: 레닌, 오스트리아파, 로자
레닌의 민족자결에 관한 입장은 논쟁 속에서 형성되었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당 강령은 “모든 민족이 국가를 구성할 수 있는 자결권”을 인정했다. 이 언급은 러시아에 속하는 민족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플레하노프는 이 말이 오직 차르 정권에만 적용될 수 있도록 ‘국가’가 아니라 ‘제국’으로 규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렇게 제한을 두는 데 반대했다.
민족자결에 대한 레닌의 견해가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이다. 이들은 민족자결권이 아니라 비영토적인 문화적 자치를 제안했는데, 국경을 변경하지는 않되 나라 안에서 각 민족이 일정한 자치권을 확보케 하라는 제안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당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레닌과 소수 고참 볼셰비키만이 문화적 자치 제안에 반대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는 민족자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단지 두 가지, 즉 “정치적 또는 시민적 자유와 권리의 완전한 평등”, “그리고 어떤 민족에게나 부여되는 자결권”만이 관심사라 주장했다. 특히 후자는 분리의 권리를 의미했다. 레닌에게 자기결정의 자유는 분리독립의 선택과 정치적 독립을 의미했다. 그리고 분리 독립이라는 선택지가 없다면 민중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만약 어떤 민족이 분리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개개의 성원들은 동등한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는 있으나 민족이라는 차원에서는 어떤 권리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째 계기는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논박이다. 로자는 민족독립은 부르주아의 관심사이므로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는 이에 관심 갖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자결권 개념은 계급이나 계급투쟁과 같은 더 중요한 문제로부터 관심을 분산시키는 공허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보았다. 로자는 이런 근거로 민족자결권을 부정하고 폴란드의 독립에 반대했다. 폴란드에서 독립은 부르주아의 관심사이기에 반동적이며 노동자 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투쟁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첫째, 독립 민족국가의 형성은 모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주요 경향이므로 자본주의 발달은 민족자결권과 불가분의 관계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민족자결권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한 것이며, 민족문제를 특정한 시기·조건과 연관지어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 비판한다. 즉 민족자결권이 곧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동의어라는 로자의 견해는, 민족운동이 진보성과 혁명적 잠재력을 가질 수 있음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둘째, 지배민족이 다른 민족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것은 민족 간의 평등원칙을 우롱하는 일이다. 폴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가 분리를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억압민족인 대(大)러시아인은 강력히 폴란드의 분리권을 주장해야 한다. 레닌은 로자가 분리권 인정 없이 상이한 민족의 노동자계급 간 연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셋째, (분리권을 포함하는) 무조건적인 자결권을 지지하는 것과, 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요구를 지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 주장했다. 즉 자결권을 옹호하는 것과, 분리하겠다는 주장을 반대하는 것이 모순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조건과 계급투쟁 등을 고려해 해당 민족은 민주적 선거방식을 통해 분리를 결정할 수 있다. 물론 사회민주주의자도 이 과정에서 평가를 제시할 수는 있으나, 레닌은 “정치적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국가를 존중하며 어떤 형태의 무력사용에 반대하고, 해당 지역 주민의 보통·직접·평등 선거의 기초 위에서 비밀투표에 의해서만 분리문제의 해결을 요구한다”는 것을 언급한다.
이 두 계기에 대한 볼셰비키의 입장을 종합하여 1913년 가을, 레닌이 거주하던 갈리시아의 포로닌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가 채택된다.
⑴ 자본주의적 조건에서 바람직한 주요한 사항은 모든 민족과 언어에 대한 권리의 평등, 강제적인 국어를 만들지 않을 것, 지역 언어를 통한 학교 교육, 또한 광범한 주자치 및 지방자치 등이다.
⑵ 문화적 민족자치의 원칙이나 또는 일정한 나라 안의 개별 민족의 학교 행정이라는 원칙은 일반으로는 민주주의에, 특수하게는 계급투쟁의 이익에 유해한 것으로서 배척한다.
⑶ 노동자 계급의 이익은 그 나라의 모든 노동자가 민족적 경계선으로 나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 조직으로 통일될 것을 요구한다.
⑷ 당은 ‘차르 군주제하에 있는 피억압민족의 자결권, 즉 분리권 및 독립, 국가를 형성할 권리’를 지지한다.
⑸ 어떤 개별적인 경우에 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의 여부는 당이 ‘전반적인 사회발전이라는 측면과 사회주의를 향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에서’ 판단할 것이다.
20세기 초의 논쟁은 1913년 당 결의로 정리되었다. 문화적 민족자치는 배척하고 자결권, 즉 분리,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를 볼셰비키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했다.3. 1차 세계전쟁기 레닌의 민족자결론
발전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민족문제에 대한 두 가지 역사적 경향을 알고 있다. 하나의 경향은 민족 생활 및 민족운동의 태동, 모든 민족적 억압에 항거하는 투쟁, 민족국가의 창립이다. 두 번째 경향은 민족 간의 모든 관계가 발달하고 그 빈도수가 증대되는 것, 민족적 장벽의 파괴, 자본 및 경제생활 일반, 그리고 정치과학 등의 국제적 통일성 창조이다.
두 가지 경향은 자본주의의 보편적 법칙이다. 첫 번째 경향은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에 지배적이고, 두 번째 경향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사회로의 전환점에 근접하게 되는 성숙한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의 민족강령은 두 가지 경향을 고려하여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민족 및 언어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고 이점에 있어서 어떠한 특권도 인정하지 않고 민족자결권을 옹호하며, 후자의 경우에는 국제주의의 원칙을 옹호한다.
이 결의가 채택되고 1년 뒤, 1차 세계전쟁이 발발한다. 세계전쟁이라는 긴급한 정세에 발맞춰 민족자결권에 대한 레닌의 이해도 한층 넓어진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민족자결권을 무조건 승인하는 것은 기본 전제로 두되, 전쟁이 발발한 현 상황에서 노동자 국제주의의 원칙을 어떻게 달성하느냐는 쟁점을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레닌은 1916년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자결권」이라는 테제에서 이를 반영하여 민족문제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고 있다.
1. 제국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피억압 제(諸)민족의 해방
승리한 사회주의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반드시 수립해야 하며 따라서 제민족의 완전 평등뿐만 아니라 민족자결권, 즉 자유로운 정치적 독립권을 실현해야 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단순히 일회적 행위가 아니다. 단순히 하나의 전선에서의 한 번의 전투가 아닌 것이다. (…) 장기간에 걸친 연속된 전투로 이루어진다. (…)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프롤레타리아트로 하여금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이탈하도록 하거나 사회주의 혁명을 은폐하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반대로 완전한 민주주의의 실현 없이는 승리한 사회주의가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위한 전면적이고 지속적이며 혁명적인 투쟁 없이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조아지에 대한 승리를 준비할 수 없다.
민족자결권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배타적인 독립권, 즉 억압민족으로부터 자유롭게 분리할 정치적 권리를 뜻한다. (…) 그것은 단지 모든 민족적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을 지속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다. 민족적 국가체계가 분리의 자유를 완벽하게 하는 데에 근접하면 할수록 분리에의 열망은 실제로는 점차 줄어들고 희미해질 것이다. (…) 인류는 피억압계급의 독재라는 과도기를 거쳐야만 계급 폐절에 도달할 수 있듯이 모든 피압박민족의 완전한 해방 즉 분리의 자유라는 과도기를 거쳐야만 필연적인 민족들의 통합에 도달할 수 있다.
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한 민족해방 투쟁이 어떤 조건하에서는 다른 열강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자결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화제적 구호를 부르조아지가 정치적 기만과 금융적 수탈을 위해 수없이 이용한다고 해서 사회민주주의가 공화제를 요구하는 구호를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위 테제들에서 레닌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의 민족자결 투쟁에 대한 분석도 시도하고 있다. 즉, 사회주의란 한 번의 승리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긴 연속이며 완전한 민주주의를 수행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테제 1번에서 밝히고 있듯 민족자결권은 완전한 민주주의를 위한 강령으로서 채택되어야만 한다.
이뿐만 아니라 레닌은 인류는 모든 피억압민족의 완전한 해방, 즉 분리의 자유라는 과도기를 거쳐야만 여러 민족의 통합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레닌은 민족자결이라는 부르주아 이론을 러시아에 거리낌없이 적용함으로써 이를 받아들이고 또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동의에 의한 민족들의 통합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또 실제로 유일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겼다.
특히 민족자결이 다른 열강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민족자결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레닌은 여기에 ‘조국 방위’를 뜻한다고 해서, 민족자결권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며 강령적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황을 분석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희화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에서 “전쟁의 본질이 외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전쟁은 피억압국가 또는 피억압민족의 관점에서 진보적이며, 반대로 전쟁의 본질이 식민지의 재분할이거나, 전리품의 분할, 외국영토의 약탈이라면, 조국방위 운운의 모든 주장은 인민에 대한 완전한 속임수”라고 말한다. 결국 전쟁의 궁극적인 쟁점이 무엇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외국의 압박에 저항하는 ‘조국 방위’는 속임수가 아니며 민족자결은 완전한 민족해방이기에, 사회주의자는 그런 투쟁에 반대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3. 1917년 2월 혁명 직후 민족자결권의 적용
먼저 2월 혁명 직후 폴란드와 핀란드에서 독립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는 폴란드에 대해서는 독립을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했으나, 핀란드에 대해서는 미온적이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임시정부에 대해 수차례 비판했다. 레닌은 1917년 4월 29일(러시아력. 신력으로는 5월 12일) 민족문제에 관한 연설에서 “핀란드의 자유를 부정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는 쇼비니스트”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핀란드의 상황은 복잡했다. 부르주아 정부가 확고하게 권력을 쥐고 있는 한편, 사회민주주의자들도 강력한 당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핀란드에는 러시아 군대가 여전히 주둔하고 있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을 도울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민족자결에 대한 볼셰비키의 약속은 명백한 것이었기에,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핀란드 부르주아 정부의 독립을 인정했다.
우크라이나도 유사한 사례였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생하자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이 고무되어 우크라이나 자치공화국이 성립된다. 레닌은 1917년에 작성한 논문에서 임시정부가 “우크라이나의 자치 및 탈퇴 결정의 완전한 자유”를 선언하여 자신의 “기본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의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라고 비난했다. 결국, 러시아 임시정부는 마지못해 자치공화국을 인정했다. 10월 혁명 이후 1920년 6월까지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지원을 받는 라다 정권과 소비에트 정권이 상대방을 번갈아 전복시키는 혼란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런 와중이던 1919년,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독립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단위가 결성되는 것을 승인하기로 한다. 이런 결정은 레닌의 민족자결론이 강하게 반영되었기에 가능했다.
우크라이나와 핀란드 외에도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도 민족자결권이 적용되었다. 벨라루스에서는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고, 나머지에서는 부르주아 정권이 수립되었는데,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이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독립을 인정했다. 이처럼 민족자결권에 관한 볼셰비키의 결의는 러시아 주변의 다양한 국가에서 부르주아 정권이든 소비에트 정권이든 상관없이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4. 스탈린 인민위원의 민족이론
레닌의 민족자결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대표적 인물은 스탈린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민족 인민위원부를 이끄는 민족문제에 관한 인민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만큼 스탈린의 견해는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공화국의 민족문제에 관한 입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민족자결 문제에 관해 로자의 입장에 동조했던 페스트코프스키에 의하면, 혁명 초기 인민위원부 내에서 스탈린은 레닌 정책의 유일한 지지자였다. 한편 몇몇 민족의 입장에서는 민족 인민위원부가 그다지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렇듯 그 기능에 대해 의심을 받았지만, 민족 인민위원부의 기능과 기구는 내전을 거치며 야기되는 민족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더욱 확장되었다. 그 와중에 레닌에 가깝다는 평가가 무색하게 민족 인민위원부는 민족의 대변자인가 아니면 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관리하려는 중앙권력의 도구일 뿐인가라는 논쟁이 계속 제기됐다. 초기 의도가 어찌 되었든 민족 인민위원부는 점점 더 후자의 경향을 띠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경향성이 생겼는가. 민족 인민위원부의 성격은 이 기관을 장악하고 대표했던 스탈린의 개성과 의견에 따랐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레닌의 견해에 상당히 가까울 때도 있었으나, 대체로 민족자결권에 맞서 ‘노동자의 자결’을 주장했다. 스탈린은 이미 1913년에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트랜스코카서스[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타타르인[아제르바이잔의 터키인]은 (…) 낡은 제도를 부활시켜 국가로부터 분리할 것을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른다면 그들은 이러한 것을 행할 완전한 권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타타르 민족의 노동인민들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 (…) 사회민주주의자는 이것에 개입하여 일정한 방법으로 민족의 의사에 영향을 미쳐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주장은 앞으로 경우에 따라 간섭을 시도하는 당의 압력이 심해질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이는 1917년 2월 혁명 직후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던 핀란드에 대한 스탈린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앞서 볼셰비키는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했다고 언급했는데, 스탈린은 그 결정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사실상 인민위원부 회의는 핀란드 인민들에게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그 의사와는 반대로 핀란드 부르조아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핀란드는 묘한 조건의 일치로 인해 사회주의 러시아의 손아귀로부터 자신의 독립을 받아내었다. 스탈린은 이런 상황을 ‘핀란드 프롤레타리아의 비극’이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핀란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우유부단함과 비겁함의 탓으로 돌렸다.
스탈린식 노동자 자결은 민족자결권에 대한 인정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현실적으로 친소련 정부만을 승인한다는 의미였고, 무조건적인 민족자결권의 승인이라는 레닌의 주장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또한 노동자의 자결이라는 명분으로 혁명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역량이 없는 타국에 개입하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입은 차르 시절 러시아 제국의 팽창주의로 변질될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유든 개입을 당하는 피억압국의 입장에서 이는 침략과 다름없기 때문이다.5. 레닌 민족자결론과 스탈린 노동자 자결 간 대립의 첨예화
그러던 중 제헌의회 해산으로 혁명이 이미 사회주의적 단계로 이행했음이 공식화되면서, 스탈린은 민족문제와 관련한 볼셰비키의 이론을 조정하려 시도한다. 스탈린은 변경지역의 충돌은 민족적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를 둘러싼 것이고 부르주아 정부는 노동자 대중의 권력에 대항하여 벌이는 투쟁을 민족적인 것으로 위장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총괄하여 이것은 자결의 원리를 해당 민족의 부르조아의 권리가 아니라 노동자 대중의 권리로서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자결의 원리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하나의 수단이지 않으면 안 되고, 사회주의의 원리에 종속되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레닌은 여전히 민족자결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1918년 제3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은 거의 홀로 민족자결권을 방어했다. 노동자 자결은 산업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사회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했던 동유럽이나 아시아의 경우 이를 적용하기 쉽지 않았다. 레닌은 그러한 후진 사회의 민족에도 적용될 수 있는 자결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가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대러시아의 쇼비니즘”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다고 여겼다. 결국 레닌의 자결권이 1919년 당 강령 중 민족문제에 관한 항목에 관철되었다.
1. 지주 및 부르주아를 타도할 혁명적 투쟁을 연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민족의 프롤레타리아 및 반(半) 프롤레타리아를 결집하는 정책이 초석이 되어야 한다.
2. 피억압 국가들의 노동인민이 이들 피억압 국가를 억압하고 있는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해 불신을 갖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적 그룹이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을 폐지할 것, 모든 민족이 완전히 평등한 권리를 가질 것, 식민지와 비주권국의 분리권을 승인할 것 등이 필요하다.
(번호가 붙지 않은 한 절)
어떠한 경우에도 민족들을 억압하고 있는 민족의 프롤레타리아는 피억압민족 또는 비주권 민족의 노동인민 사이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민족적 감정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하며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정책을 추구해 감으로써만, 소비에트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다수의 민족 소비에트 공화국의 결합이라는 경험이 보여주고 있듯이, 민족적으로 서로 다른 여러 요소들 속에서 참으로 항구적이며 자발적인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을 위한 조건을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1922년 조지아 문제를 둘러싸고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논쟁이 벌어졌다. 스탈린은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트랜스코카서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합병하고자 했다. 조지아의 볼셰비키는 코카서스 연방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소련에 참여하기를 원했기에 이런 제안에 반대했다. 갈등이 해결되지 못하고 점차 심각한 수준으로 고조되자 레닌이 개입한다. 레닌은 조지아의 볼셰비키들에게 진심으로 당신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으며 오르조니키제의 무례함과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묵인에 분개하고 당신들을 위한 연설을 준비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곧 레닌의 건강이 악화하면서 조지아의 볼셰비키는 레닌이라는 강력한 우군을 상실했고, 결국 1922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트랜스코카서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강제 병합되어 소련에 편입된다. 이 사건은 레닌이 훗날 ‘레닌의 유언장’으로 알려진 글에서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는 단순히 의견이 달라서라기보다는, 스탈린의 방식이 차르시대 러시아의 팽창주의와 유사하며 레닌이 그토록 경계하던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가면을 쓴 대러시아의 쇼비니즘”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노동자 자결’이 러시아 내에서 점차 강화되어갔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헌법은 연방에 참여한 민족의 탈퇴권을 보장했고, 이 조항은 모든 공화국의 동의 없이는 폐지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의 존재는 소련이 점차 중앙집권화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의 자유의지에 맡겨야 한다는 레닌의 민족자결권 견해가 공화국 헌법에 최후의 유산으로서 남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6. 혁명 러시아의 폴란드 침공
내전이 어느 정도 종식된 1919년 말~1920년 초에 소비에트 정부는 폴란드와의 강화협정을 원했다. 그런데 폴란드는 과거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다는 열망과 소비에트 정부의 강화협정 제안에 대한 불신을 이유로 협정 제의를 회피했고, 결국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소비에트 군을 폴란드 군이 기습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본격화된다.
전쟁 개시 얼마 뒤, 소비에트 군은 우크라이나 수복에 성공한다. 이때 내부 논쟁이 벌어진다. 여기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폴란드 영토로 들어갈 것인가. 일반적으로는 퇴각하는 적을 따라 공세를 취하는 건 당연했으나,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자였고 군사력으로 혁명을 타국에 수출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름 아닌 레닌이 군대를 진격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는 혁명전쟁에 반대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당시 레닌은 혁명전쟁으로 유럽에서 계급투쟁이 일어날 것이고, 폴란드의 패배는 유럽 베르사유 체제를 전복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며, 유럽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전반적으로 퇴조하면서 무력에 의한 혁명의 이식만이 대안이라는 이유를 제시했다. 볼셰비키 다수는 의구심을 가졌으나 결국 레닌은 이들을 설득해 붉은 군대를 폴란드로 진격시킨다.
진격 초기 붉은 군대는 연전연승을 거두고 이에 고무된 볼셰비키는 무력을 통한 세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폴란드의 노동자, 농민은 붉은 군대의 진군을 반기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벌어진 바르샤바 인근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붉은 군대는 패배한다. 결국 레닌은 무력으로 외부로부터 폴란드에 혁명을 발생시키는 것은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퇴각을 결정했다. 이후 레닌은 이 결정을 두고두고 반성하고 후회했다.
기존 레닌의 입장과 전쟁 패배 후의 반성을 고려하면 폴란드 침공 결정은 레닌의 거대한 일탈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해당 민족의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는 노동자의 자결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사례다. 즉, 민족의 자발적 결정 없는 외부의 간섭이 그 명분의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볼셰비키는 붉은 군대의 전진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진이며, 이번 전쟁은 부르주아에 대한 노동자, 농민의 계급전쟁이므로 노동자, 농민의 열렬한 지지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그런 지지는 존재하지 않았고, 폴란드 인민의 애국심을 부추겨 오히려 전쟁에서 패배했다. 레닌은 “우리는 바르샤바와 폴란드를 구한 것이 연합군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국심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훈을 절대 잊지 맙시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서방의 지원으로 인한 군사적 패배였지만, 실은 폴란드 인민이 원하지 않는 무리한 개입이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나아가 조금 더 해석해보자면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이런 개입은 정당화되기 어렵고, 설사 군사적으로 승리했을지라도 인민의 열망을 저버리고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종국에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함의를 지닌다.7. 소비에트 연방과 헌법: 레닌 민족자결론으로부터 이탈인가
내란 종결 이후인 1923년, 당 결의에서는 군사동맹의 형태를 취한 협동으로부터 제민족의 군사, 경제적 및 정치적 연합으로의 이행을 분명히 한다. 이는 이미 진전되고 있던 결합의 움직임을 반영한 것인데,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아르메니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조지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극동공화국, 2개의 중앙아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등 8개의 국가와 이뤄졌다. 결합의 형태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충분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모델, 즉 독립성을 거의 온전히 보장하는 공동 통제의 방식, ② 힘이 가장 약했던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와 같은 종속적 모델, ③ 독립성과 종속성 중간에 있는 모델.
첫 번째로 독립성이 강했던 우크라이나 모델을 살펴보자.
1920년 내전이 종료되고 난 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은 일단 분리된 외형을 띠고 있었으나 재결합의 움직임이 진전되고 있었다. 재결합은 1919년의 포고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1919년 1월 우크라이나 임시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과의 결속을 선언했고, 6월 모스크바의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포고에서는, ‘우크라이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백러시아 및 크리미아의 노동대중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자결을 인정’하고 이 지역들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과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과의 ‘군사적 연합’(Soyuz)의 필요를 선언했다. 비록 내전이 격화되면서 포고가 구체적으로 현실화되지는 못했으나, 정신은 이어졌다. 그것은 과거 구 러시아 제국을 구성했던 나라들 사이의 ‘동맹’ 또는 ‘연합’이라는 사고방식을 포함하고 있었다.
실제로 양국 간 조약 체결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뤄졌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주변국 중에서 가장 강했고, 가장 강하게 독립과 평등의 권리를 주장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독자적 외교정책을 고려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공화국이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와의 조약은 레닌이 직접 서명한 유일한 조약이었다. 조약 전문은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 선언된 민족자결의 권리”에 경의를 표했고, “조약 체결로 각자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했다. 종속이라는 의미의 어떠한 직접적 함축도 피했다.
레닌은 이미 1918년에 우크라이나에 민족자결 원칙을 적용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자본가―자국의 자본가와 다른 나라의 자본가 양쪽 다―에 반대하는 만국 노동자의 가장 밀접한 단결을 지지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단결이 자발적인 것이기 위해서는 (…) 러시아의 노동자가 우크라이나인에게 그의 우정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과정의 동등자, 동맹자, 형제로서 그들을 대함으로써 우정을 쟁취하면서 우크라이나인의 자결권에 찬성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레닌은 우크라이나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함께 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유지하려 했고, 조약 체결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는 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만큼 우크라이나는 독립적인 공화국이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우크라이나는 볼셰비키가 만들어준 나라이며, 독립국 지위를 인정한 레닌은 거대한 실수를 했다는 푸틴의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양국의 관계를 푸틴의 주장처럼 내정의 문제로 단순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아제르바이잔은 8개의 조약 체결국 중 가장 약한 국가였다. 두 국가 간의 조약은 군사조직과 군사지휘권의 통일, 국민 경제 및 외국무역을 통제하는 기관의 통일, 공급기관의 통일, 철도, 수운 및 우편 전신 관리의 통일, 재정의 통일을 최단 시일 내에 실현하도록 했다. 그 외에 부속조약에서는 재정, 외국무역, 국민경제에서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에 결정적 표결권을 부여했다. 이 조약은 형식적으로는 각 나라 외교 인민위원에 의해 조인된 국제법으로 인정되는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실질적으로는 러시아 사회주의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종속이었다.
끝으로, 아르메니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과의 조약은 대부분 재정문제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는 우크라이나 방식과 아제르바이잔 방식의 중간 정도였는데, 이는 단순히 형식상 차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조직의 활동에 효과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범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스탈린이 위와 같은 독립공화국과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내의 자치공화국 사이에 정도의 차이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변경 지역의 지역적 자치를 주장했다. 두 번째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과의 조약을 자치의 최고 형태로서 골라냈다는 점이다. 이는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을 대표로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종속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예고한 것이었다.
조약을 맺은 공화국들을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의 자치단위로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러시아 공화국을 확대할 것인가, 아니면 러시아를 포함하여 각 자치공화국이 서로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상태에서 국가연합을 꾸릴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이 두 선택지의 타협책으로, 러시아를 포함하여 각 공화국이 함께 새로운, 더 광범위한 연방 국가를 결성하는 안이 제안되었다.
제안된 타협책에 따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지어졌으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련 내에서도 러시아가 높은 위신과 광범위한 권력을 부여받아, 러시아와 다른 공화국의 격차가 한층 심화된 것이 아니냐는 인식이 널리 퍼져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대국 쇼비니즘적 조짐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좀 더 타협적으로 여러 민족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애썼고 대표위원의 수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실질적으로 반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은 단일국가였다. 소비에트 연방 헌법 및 공문서에는 ‘연방의’(federal)라는 말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1923년의 헌법은 중앙집권화로의 일보전진이었다. 형식상 평등한 주권국가 간의 합의로 만들어졌고 연방의 각 단위에 주권이 헌법상 보장되어 있으며 자유로운 탈퇴권도 인정했다는 의의가 있었지만, (이는 앞서 언급했듯 레닌 최후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에 명시된 공화국의 이러한 권한 보장은 중앙집권화와 균형을 이룰 정도로 강력하지는 못했다. 이런 경향은 이후에도 국가위기(예를 들어, 전쟁 위기)를 이유로 점차 강화되어 간다.7. 결론
한편 스탈린이 대표적으로 주장한 노동자의 자결은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에 복무하는 경우에만 자결권이 인정될 수 있다는 의미다. 즉, 노동자의 자결은 민족자결권에 대한 선택적 지지다. 이는 레닌의 주장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외부에 대한 간섭을 실행해온 소련 역사는 이런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개입은 피개입국의 입장에서는 팽창주의와 다름없었다. 이것이 폴란드 침공 실패의 교훈이었는데, 레닌은 즉각 반성하고 민족자결권으로 돌아갔으나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음을 이후 역사가 말하고 있다. 혁명 러시아가 주변 국가에서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지지한다는 것이 곧 혁명적 노동자 운동이 집권하지 못했다고 그 민족의 자결권, 즉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고 유지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이런 관점을 우크라이나에 적용하면 어떨 것인가. 레닌은 “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한 민족해방 투쟁이 어떤 조건하에서는 다른 열강의 제국주의적 목표를 위해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민족자결권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라고 언급했다. 앞서 검토한 레닌의 민족자결권을 적용한다면, 마르크스주의자는 우크라이나 민중이 원하는 방향성을 인정하고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지지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