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 사회운동의 과제> 2022년 노동운동포럼 지상중계(3)
<우크라이나 전쟁과 세계 사회운동의 과제> 2022년 노동운동포럼 지상중계(2)
5471호
노동권 보장에 대한 규제 완화
5161호
최소노동시간 규제 완화 ('0시간 계약'도입)
2352호
동원노동에 대한 임금보장 없음
3663호
사회보장과 연금기금 통합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 식민지 시대 ④
소설과 함께 보는 한국 노동자운동 역사: 식민지 시대
② 1930년대 기계제공업화와 태평양전쟁까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의 강화 [2021년 겨울호]
③ 사회주의 운동, 식민지 시대 노동자 민중의 각성을 이끌다 [2022년 봄호]
④ 1930~40년대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부침 [2022년 겨울호]
당 재건을 위한 방향전환, 혁명적(적색)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
활동가들이 공통으로 지목한 조선공산당의 문제점은 그 구성이 지식인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만 매도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점은 고려해야 하지만) 분파 간의 파벌투쟁으로 역량을 모아내기 어려웠다는 점이었다. 일례로 박헌영, 김단야 등이 속해있던 콤뮤니스트그룹은 “당내에는 노동계급과 빈농의 이익을 위하여 깨끗이 헌신한 희생적 동지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특히 이 파쟁의 결과로 그들은 몹시 빨리도 몰락했으며 아주 빠르게 일제경찰의 수중에 떨어졌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 사회주의자의 평가가 이렇게 일치했던 데에는 근거가 있었다. 바로 코민테른의 이른바 12월 테제다. 12월 테제의 정식 명칭은 ‘조선 문제에 대한 결의’로, 이후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에 지침서 역할을 한 문건이었다.
12월 테제는 크게 ‘서언’과 ‘결의’로 구성되어 있다. 서언에서는 조선 혁명운동의 심각한 위기가 일본의 탄압뿐만 아니라 내부 파쟁과 갈등에 의해서도 초래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혁명투쟁의 선도자·조직자·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진단이었다.
이어 결의에서는 나름의 처방을 내놓고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지식인과 소부르주아지 정당인 조선공산당을 노동자와 농민의 정당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한 “공산당의 복구·강화 없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그리고 토지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지속적이고도 결정적인 싸움은 불가능하다”는 말로 결의를 마무리한다.
한편 1920년대 후반의 전 세계적 경기침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1년 겨울호의 「1930년대 기계제공업화와 태평양전쟁까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수탈의 강화」에서도 함께 봤듯, 조선에 진출한 일본 기업은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불황에 대응하고자 했다. 착취가 강화됨에 따라서 1930년대 초반까지 노동자 민중의 저항도 거세게 분출했다. 1929년 원산 총파업이 대표적 사례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당 재건이 이른 시일 내에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당 재건 준비위 등의 조직을 꾸리고 대중사업을 통해 준비위의 구성원 비중에서 노동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당 재건을 사고했다. 이를 통해 분파투쟁도 지양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분파투쟁은 현장조직 없이 소부르주아적 지식인의 구성 비율이 높아 발생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투쟁이 벌어진 시점에 이 투쟁을 지도할 전국적 조직, 즉 조선공산당은 부재한 상황이었다. 결국 투쟁은 각 지역을 넘어서지 못하고 일본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고 만다. 이런 와중에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다. 여기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당 재건이 단시일 내에 가능하지는 않으리라고 전망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고, 다시 장기적인 시야에서 당 재건 운동을 바라보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을 조직해 당 재건에 이르는 경로를 구상하게 되고, 이런 맥락에서 혁명적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사회주의자와 노동자의 결합, 김남천의 「공장신문」
「공장신문」에는 공장 밖에서 파업을 지도할만한 지식을 가진 ‘그 사나이’, ‘그 사나이’와 이미 동지적 관계에 있는 선진적인 노동자 내지는 활동가로 작년의 파업이 실패한 직후 신입 직공에 섞여 들어온 창선, 그리고 노동조합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자 하는 노동자 관수가 등장한다. 김남천의 「공장신문」은 현장을 조직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의 활동을 지나치게 전형적이라 비판을 받을 정도로 전형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 모습을 소설 속에서 확인해보자.
지난 여름, 파업이 완전히 실패한 후 초조함을 느끼는 관수다.
어떻게 하면 조그만 불평불만이라도 잡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불평불만을 대표하여 그의 선두에 설 수 있을까?
관수도 무엇인지 똑똑하게는 몰라도 자기에게 결함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럴 때마다 누구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 돌연히 잠깐 참말로 번개같이 잠깐 동안 만났던 어떤 사나이한테서는 그 후 지금까지 두 달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 사나이가 지금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침착한 태도로 말하던 그 사나이는 말하는 품으로 보아서 결코 이곳 사람은 아닌데 그때 파업의 사정과 또 파업 수습에 관해서 일후에 활동할 것을 어떻게 그렇게 똑똑히 아는지 몰랐다. 평양의 모든 일을 환하게 꿰어 두고 이곳에서 사는 사람보다도 잘 알았다.
관수는 어떻게 하면 조그만 불평불만이라도 잡을 수 있을지, 노동조합이 잘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지만, 혼자서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관수는 이럴 때 ‘그 사나이’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그 사나이’는 공장 밖의 사람임에도 파업의 사정과 수습에 관해 잘 알고 있으며 평양의 모든 일을 꿰고 있다. 여기서 ‘그 사나이’는 파업을 지도하는 전위적 활동가를 형상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관수가 고민하던 중 사건이 발생한다.
…
“물을 먹어야 살지 않우!”
그는 그 속에 얼굴을 들었다.
“좌우간 덤비지 말고 조용들 해!”
대답하는 소리는 완전히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 구정물을 먹으라고 수도를 막다니! 직공은 개 돼지란 말요?”
너무도 그 소리가 커서 웅성웅성하던 소리가 잦아들고 그 목소리에 군중이 통일되는 듯하였다.
“좌우간 넓은 데 나가 이야기하지!”
“자― 넓은 데 나가서 합시다!”
최전무의 말을 받아서 군중에게 외치는 것은 고무직공조합의 간부로 있는 김재창이의 목소리가 정녕하였다.(틀림없이 확실했다.) 관수는 재창이 목소리를 듣자 벌써 간섭하기 시작한 그의 행동을 직감하였다.
도시락을 먹은 후 물을 먹겠다고 수도를 튼 직공의 뺨을 사측 최전무가 때린 것이 소란의 원인이었다. 노동자들은 수도세 몇 푼 아끼자고 노동자들에게 수돗물을 먹지 못하게 하면 바깥의 “개굴창같은 우물”에 가서 물을 먹으라는 말이냐며 분노한 것이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조합의 대표 김재창이 등장한다. 재창은 조합의 대표지만 사측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다. 앞에 나선 재창은 노동자들에게 이번 일은 조합 집행위에서 알아서 해결할 수 있도록 일의 처리를 위임해달라고 말한다. 관수는 재창의 타협적인 태도를 알고 있기에 직접 해결하자고 군중에 외치지만, 결국 재창의 말대로 해결하기로 하고 모인 군중은 해산한다.
그렇게 “타락 간부”에게 선수를 빼앗긴 관수는 퇴근 후 집에서 우울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공장의 동료 길섭이 관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며 관수의 집을 찾아온다. 관수는 ‘그 사나이’인가 하며 기대한다.
“여!”
그는 담배를 후― 내뿜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관수는 좀 견주었던 곳이 어그러진 듯한 낙망을 느꼈다. 창선이면 물론 잘 안다. 창선이는 파업 이후에 신직공 모집에 끼어서 들어와 자기네 공장에서 일하게 된 직공이다. 이 사나이는 물론 타탸줄(‘ㅌ’줄)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이 사나이가 내게 무슨 말이 있단 말인가? 관수는 마음속에 좀 불평을 느끼면서 창선 가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갔다.
관수는 ‘그 사나이’가 아니라 동료 창선임을 확인하고 실망한다. 그런데 창선은 갑자기 자기 본명이 박태순이라 밝힌다. 창선의 본명 박태순은 ‘그 사나이’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했던 그 인물의 증거, 즉 이름 가운데 글자가 타탸줄(‘ㅌ’줄)인 이름이었다. 관수는 드디어 찾던 이를 만나 기뻐하면서 창선과 함께 회합에 참여한다. 그 회합에는 벌써 길섭이, 동찬이, 선녀 등 4~5인이 함께 모여 있었다.
다음 날 공장에 출근한 관수는 회합에 함께한 이들과 의미 모를 웃음을 남몰래 하였다. 점심시간, 각자의 도시락을 들고 함께 먹으며 재창이 어제의 일을 잘 해결하는지 두고 보자고 말을 붙였다. 그런데 몇몇 직공의 도시락에 정체 모를 종이가 붙어있다.
평화 일
공장신문
고무 호
하고 씌어 있었다.
“공장신문? 오―라! 우리 공장의 신문이란 말이로구나! 이건 또 누구 장난이야?”
직공 하나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으나 그는 종이를 놓지 않고 좀 소리를 내 읽기 시작했다.
“얘! 이건 무슨 그림인가?”
한 자가 아래쪽에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요건 재창이 것이구나!”
“엣키! 요건 최전무 같다!”
“이게 뭘 하는 게야?”
관수가 종이를 자기에게로 향해 돌렸다.
“하하, 이게 지금 주는 건 돈이로구나!”
그 옆에 있던 직공이 그림 위에 쓴 글귀를 읽었다.
“최전무한테서 돈을 받는 몹쓸 놈 김재창이의 꼴을 봐라! 하하하!”
그는 종이를 놓곤 웃었다.
“얘 거 재미난다. 좌우간 글을 읽어 보자!”
“지난 여름에 우리들의 파업을 팔아먹은 놈은 누구냐? 그건 김재창이 같은 타락한 조합간부다! 우리들은 그런 놈에게 조금도 우리의 일을 맡기지 말자! 그는 우리들의 마음을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놈이다. 어저께 일어난 일도 우리끼리 처리해야만 된다. 우리의 마음을 꺾고 고주(고용주)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재창이는 우리 편인 체하고 나서는 것이다. 어저께 아무 일도 없게 무사히 한 덕택으로 재창이는 전무네 집에서 술 먹고 요리 먹고 돈 먹은 것을 왜 모르느냐? 벤또를 빨리 먹고 마당에 모이자! 그리하여 재창이를 내쫓고 우리끼리 지도부를 선거하자! 우리 편인 체하고 나서는 몹쓸 간부를 내쫓아라!”
“얘! 건 굉장하구나!”
“그 다음 또 읽어라!”
“크게 쓴 글자만 먼저 읽자! 뭐이가 이게? 오오라 공자로구나! 거 잘 썼는데 꾸불꾸불하게 썼네! 공장신문은 고무직공의 전부의 것이다! 공장신문을 믿어라! 공장신문을 지켜라! 또 그 아래 (원문 탈락) 들은 얼마나 이익을 보나? 전평화고무 직공형제들아! (원문 탈락) 의 준비를 하여라! 다른 공장 형제들도 늘 (원문 탈락)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곧 마당에 모여서 우리들끼리 지도부를 선거하자!”
‘평화공장신문’에는 타락한 간부 재창과 최전무 사이의 부정한 거래가 폭로되어 있다. 신문 발행을 통한 입장 선전에서는 개량적인 노동조합의 활동을 폭로하여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신문을 계기로 관수네 공장에서도 새로운 노동조합 준비위원회가 결성된다.
박수 소리가 마당 안에 가득 찼다. 모임은 지금 한창 진행중이었다.
“자― 그러면 우리끼리 준비위원을 선거합시다!”
또 박수 소리가 났다.
…
“창선이 좋소!”
…
“여보! 나는 관수요!”
“관수 좋소!”
이렇게 하여 아홉 사람 준비위원이 선거되었다.
“누구 연설해라!”
하는 소리가 나매 뒤를 이어 박수 소리가 났다. 창선이가 쑥 머리를 내밀고 좀 높은 데 올라섰다.
“여러분 이제야 우리들은 우리끼리 선거한 지도부를 가졌습니다. 우리들 아홉 사람 (원문탈락) 준비위원회는 죽을 힘을 다하여 끝까지 여러분들의 의견을 대표하여 싸우겠습니다. 여러분 자― 일동이 (원문탈락) 준비위원회 만세―”
“만세―”
“만세―”
「공장신문」은 소설이 발표된 당시 임화에게 “1931년에 있어서의 조선문학의 최고점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단언하기에 나는 조금도 주저치 않는다”라는 고평을 받았다. 전위적 인물과 호흡하는 노동자의 헌신적 모습, 그 결과 진정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이 결성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기에 그러했으리라. 다만 앞서 언급했듯 1930년대 초반까지 김남천의 소설은 지나치게 전형적인 인물이 등장해 오히려 현실에 존재하기 어려운, 즉 소설 자체가 반(反)리얼리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런 경향은 소위 ‘전향문학’이라 일컬어지던 식민지 시대 후반기의 작품에서는 일정 극복되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즉 식민지 후반기 소설에서 오히려 현실에 존재할만한 인물들이 등장해 리얼리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관련한 작품들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농촌운동 속의 사회주의 지식인, 심훈의 『상록수』
그간 심훈의 『상록수』는 이광수의 『흙』과 함께 농촌계몽소설로 거론되어왔다. 그런데 여러 연구에서 『상록수』를 농촌계몽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심훈이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작가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제기다. (2022년 봄호에 연재된 「사회주의 운동, 식민지 시대 노동자·민중의 각성을 이끌다」를 참고) 즉 작가의 지향을 고려하여 『상록수』를 다시 보면, 브나로드 운동 경향을 대표하는 농촌계몽소설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 지향을 검열을 피해 우회적으로 드러낸 소설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을 따라 보더라도, 『상록수』가 사회주의적 지향을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다. 이는 우리가 2022년 봄호에서 살펴봤던,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가 일본의 검열로 완성되지 못한 경험과 관련된다. 심훈은 그의 글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에서 “지독한 검열제도 밑에서 ××를 선동하는 작품, 순정 마르크스주의파의 영화를 제작하지 않는다고 높이 앉아 꾸지람만 하는 것은 당초에 무리한 주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결국 아무리 직접적으로 써본들 검열로 민중에게 닿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으므로, 심훈은 검열을 우회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 통로 중 하나가 바로 ‘연애’를 그리는 것이었다. 이런 시도는 앞선 미완의 작품부터 시작해 이후 그의 작품들에서도 이어지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글쓰기를 통해 『상록수』를 끝까지 연재할 수 있었다.
『상록수』에는 채영신, 박동혁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본 글에서는 사회주의적 지향을 가진 주인공 박동혁의 행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앞서 봤던 작품에 나오는 직접적이고 속 시원한 구절은 덜하지만, 소설 곳곳에서 농촌의 변화를 이끌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을 소설 속에서 보도록 하자.
가을 학기가 되자, ○○일보사에서 주최하는 학생계몽운동에 참가하였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오늘 저녁은 각처에서 모여든 대원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그 신문사 누상에서 열린 것이다.
…
“금년에 활동한 계몽 대원 중에 뛰어나게 좋은 성적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글을 깨쳐 준 아동의 수효로는 우리 신문사에서 이 운동을 개시한 이래 최고 기록을 지은 분을 소개하겠소이다.” 하고는 다시 안경 너머로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얼굴을 들고 선생이 출석부를 부르듯이,
“××고등농림의 박동혁(朴東赫) 군!”
…
그는 박수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려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
수첩을 꺼내 들고 자기의 고향인 남조선의 서해변에 있는 한곡리(漢谷里)라는 궁벽한 마을의 형편을 숫자적으로 대강 보고를 한다.
…
“그러나 여러분! 끝으로 꼭 한마디만 허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고 목청을 높여 힘차게 청중에게 소리친다. 대원들은 물론, 사회자까지도 다시금 긴장해서 엄숙해진 동혁의 얼굴만 주목한다.
“눈 뜬 소경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는 것은 두말헐 것 없이 필요헙니다. 계몽운동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헌 사업 중의 하나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지식 분자인 우리들이 이러한 기회에 전 조선의 농촌, 어촌, 산촌으로 방방곡곡이 파구들어가서, 그네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어떡허면 그네들이 그 더헐 수 없이 비참헌 생활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 ― 허는 문제를 머리를 싸매구서 생각해 봐야 헙니다. 지금부터 육칠 년 전, 러시아의 청년들이 부르짖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라는 말)를 지금 와서야 우리가 입내내듯(소리나 말로써 흉내내듯) 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남에게 뒤떨어진 것을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높직이 앉아서 민중을 관찰하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태도를 단연히 버리고, 그네들이 즉 우리 조선 사람이 제 힘으로써 다시 살어나기 위한 기초공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저녁 이 자리에 모인 바루 여러분의 손으로 시작해야겠습니다. 물질로 즉 경제적으로는 일조일석에 부활하기가 어렵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온갖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정신(精神), 요샛말로 이데올로기를 통일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
사회자는 아까보다도 더 정중한 태도를 짓고 동혁이가 섰던 자리로 가서 장내가 정숙해지기를 기다려, “박동혁 군의 말은 개념적이나마 누구나 존중해야 헐 좋은 의견으로 압니다.” 하고는,
“그러나 현재의 정세로 보아서, 어느 시기까지는 계몽운동과 사상운동을 절대로 혼동해서는 아니 됩니다. 계몽운동은 계몽운동에 그칠 따름이지, 부질없이 혼동해 가지고 공연헌데까지 피해를 끼칠 까닭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상록수』는 동아일보가 1935년 창간 15년을 기념으로 주최한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다. 이것이 『상록수』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과 연관시키게 된 출발점이다. 신문사 측에서는 “조선의 농·어·산촌을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독자적 색채와 정조를 가미할 것, 인물 중에서 한 사람쯤은 조선 청년으로서의 명랑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설정할 것” 등을 유의 사항으로 내걸었고 이것이 『상록수』를 브나로드 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데 준거가 되었다.
그러나 작가의 지향과 브나로드 운동의 지향은 차이가 있었다. 심훈은 브나로드 운동이 농민을 대상화하는 운동일 뿐이라 비판하면서, 조선 농민이 스스로 필요성을 느껴 농촌 공동체를 구성하는 자발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동혁이 “높직이 앉아서 민중을 관찰하거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태도를 단연히 버리고, 그네들이 즉 우리 조선 사람이 제 힘으로써 다시 살어나기 위한 기초공사를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드러난다.
한편 작품에는 또 하나의 주인공인 채영신이 등장한다. 채영신은 기독교 신자로서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한 신여성이다. 채영신은 “시골서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과년한 처녀”같은 행색이지만, 그 눈빛만큼은 “인텔리 여성다운 이지”가 빛나는 인물이다. 채영신과 박동혁은 발표회에서 처음 만나 서로 첫눈에 반한다. 첫 만남으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 두 사람은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참,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군요.”
동혁이도 약간 애상적인 감정에서 눈을 번쩍 뜨며 혼자 말하듯 한다.
“왜요?”
영신의 눈은 동그래졌다.
“몇 주일 전까지는 백판 이름두 모르던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앉어서 약물터의 달을 똑같이 쳐다볼 줄이야 꿈이나 꾸었겠어요?”
“참말요, 이것두 하나님의 뜻인가 봐요.”
“참, 영신 씨는 크리스찬이시지요?”
“전 어려서버텀 믿어 왔어요. 왜 동혁 씨는 요새 유행하는 마르크스주의자세요?”
“글쎄요, 그건 차차 두구 보시면 알겠지요. 아무튼 신념을 굳게 하기 위해서나 봉사의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허는 것두 좋겠지요. 그렇지만 자본주의에 아첨을 허는, 그따위 타락헌 종교는 믿구 싶지 않어요.”
박동혁은 마르크스주의자냐는 영신의 물음에 모호하게 답한다.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렇게 모호하게 처리한 이유는 검열을 의식해서다. 박동혁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바로 이어서 기독교를 “자본주의에 아첨하는” 타락한 종교라고 비판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책 본문 중에는 “편협한 유물론자처럼 덮어놓고 종교를 아편과 같이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동혁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혁의 사회주의적 지향은 농촌을 일본의 뜻대로 통제하려는 농촌진흥회에 맞서는 사건에서 드러난다. 이 사건은 시간을 조금 거슬러 동혁이 농촌운동을 하는 한곡리에서 동혁의 주도로 조직된 농우회가 자신들의 농우회관을 짓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일 끝나고 마시던 술, 중간중간 피워대던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서 농우회관을 짓기로 결의한다. 그렇게 자재비용을 겨우 마련한 뒤에는 기술자를 부르는 게 아니라 농우회 회원 스스로 농우회관을 짓는다.
그런데 평소 사사건건 농우회의 활동에 훼방을 놓던 마을 유지 강기천은 농우회관이 정말로 지어지자 이를 시기해 빼앗을 궁리를 한다. 처음에는 동혁을 불러 농업진흥회장이라는 감투를 주면서 포섭하고자 하지만 동혁은 거절한다. 그리고 몇 배의 돈을 쳐서 회관 건물을 사겠다는 것도 동혁은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나 동혁이 영신을 만나러 마을을 잠시 비운 사이에, 강기천은 농우회 회원 중 자신의 논에 소작을 두는 자들을 포섭해 억지로 농우회에 가입하고 스스로 농우회장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동혁의 동생 동화는 농우회원 중 변절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지만, 동혁은 다른 수를 쓰겠다고 동생을 뜯어말린다.
‘집 한 채를 가지고 다툴 때가 아니다. 동지가 배반한 것을 분하게만 여기고 흥분할 것이 없다.’
하고 무릎을 탁 치고 일어서서 좁은 방 안으로 왔다갔다하다가,
‘이번 기회에 영신에게도 선언한 것처럼, 제일보부터 다시 내디디지 않으면 안 된다. 표면적인 문화운동에서 실질적인 경제운동으로.’
…
‘농촌운동을 허는 사람이라도 너무 외곬으로 고지식하기만 허면, 교활한 놈의 꾀에 번번이 속아 떨어진다. 과거의 경험으로 보더라도 제 양심을 속이지 않는 정도로는 패를 써야 하겠다.’ 하고 종래와는 수작하는 태도를 변해 보리라 하였다.
동혁은 농촌의 경제적 구조가 취약한 이상 농민들이 자유로울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경제문제, 즉 고리대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동혁은 옳은 소리만 해서는 기천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 직감하고 꾀를 내어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다.
동혁은 기천에게 술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집으로 찾아간다. 술자리에서 동혁은 몰래 술을 마시지 않고 강기천만 마시게끔 유도한다. 기천이 얼큰하게 취하자 동혁은 “회장 체면에 앞으로도 고리대금을” 할 거냐며 강기천의 명예욕을 자극하는 한편, “몇몇은 혈기가 대단해서 제 손으로는 꺾을 수가 없는데, 이번에 좀 후허게 인심을 써주셔야 과격한 행동까지 하려 벼르는 청년들을 어떻게 주물러 볼 수가 있겠”다거나, “여러 사람을 걸어 재판을 하려면 소송비용이 얼마나 들지” 등 적절한 위협을 섞어가며 강기천을 설득한다. 결국 동혁은 강기천의 밭에 소작을 얻고 있는 농민들의 빚에 대해 원금만 받고 쌓인 이자는 탕감하겠노라는 강기천의 약속을 받아낸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농촌진흥회장 선거를 한다. 여기서 기천은 매수한 표에 힘입어 회장에 당선된다. 함께 후보로 나섰던 동혁은 부회장 겸 서기로 지목된다. 동혁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부회장 자리는 고사하고 서기만 맡기로 한다. 그리고는 업무를 도와야 한다는 명분으로 농우회원들을 임원으로 선출해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행사가 흐지부지 끝날 즈음, 동혁이 일어나 사람들에게 연설하기 시작한다.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동네에도 진흥회가 생긴 까닭과, 진흥회란 무엇을 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면장께서 자세히 설명하신 것을 들으셨으니까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러나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복종하는 것보다, 우리들의 일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지 말고 자발적으로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력갱생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농촌에서 가장 폐단이 많은 습관과 우리의 생활이 이다지도 빈곤하게 된 까닭이 도대체 어디 있나? 하는 것을 냉정허게 생각해 보고, 그것이 그른 줄 깨닫고 그 원인을 밝힌 다음에는, 즉시 악습을 타파하고 나쁜 일을 밑둥부터 뜯어고치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첫째는 고리대금업자입니다!”
하고 언성을 높인다. 여러 사람의 시선은 말끔 새로 난 회장의 얼굴로 쏠렸다.
“옳소―”
그것은 갑산의 목소리였다. 저녁때가 되니까 창 밖에는 바람이 일어 불김이 없는 회관 안은 냉기가 돌건만, 누구 하나 추워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동혁은 신중히 말을 이어 고리대금업자의 발호와 간교한 착취수단으로 말미암아 빈민들의 고혈이 얼마나 빨리우고 있나 하는 것을 숫자를 들어가며 폭로하고,
“앞으로 진흥회 회원은 과거에 중변(비싼 이자)으로 쓴 돈도 금용조합에서 놓는 저리(低利) 이상으로 갚지 말고, 더구나 회의 책임자로는 절대로 돈놀이를 해먹지 못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고 또 실행해야 합니다.”
라고 부르짖은 다음, 목소리를 떨어트리더니,
“오늘 회장이 되신 강기천 씨는 우리 농우회원들이 진 여러 해 묵은 빚을 변리(남에게 돈을 빌려 쓴 대가로 치르는 일정한 비율의 돈)는 한 푼도 받지 않으시고 깨끗이 탕감해 주셨습니다.” 하고 증서를 내보이면서,
“이번 기회에 그 갸륵한 처사를 여러분께서도 칭송하실 줄 아는 동시에, 강기천 씨는 이번에 진흥회장이 되신 기념으로 여러분의 채권까지도 모조리 포기허실 줄 믿고, 조끔도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하고는 슬쩍 기천을 흘겨본다. … 기천은 여러 사람을 바로 볼 용기가 없는 듯이 실눈을 감고 아랫입술만 자근자근 깨물고 앉았다. 팔짱을 꼈다, 손을 옆구리에 찔렀다 하는 것을 보면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 같은 모양이나 체면상 퇴석은 하지 못하는 눈치다.
…
“또 한 가지 중요헌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빚을 갚고 장릿벼(장리: 돈이나 곡식을 꾸어 주고, 받을 때에는 한 해 이자로 본디 곡식의 절반 이상을 받는 변리)를 얻어먹지 않게 된대도, 지금처럼 논 한 마지기도 제 것이 없어 가지고는 도저히 먹구살 도리가 없습니다. … 그러니까 지주나 소작인이 함께 살려면 적어도 한 십 년 동안은 소작권을 이동시키지 말고 금년에 받은 석수로 따져서 도지로 내맡길 것 같으면, 누구나 제 수입을 위해서 나농(懶農, 농사일을 게을리 함)을 헐 사람이 없을 겝니다. 이만헌 근본책을 실행치 못하면 ‘농촌진흥’이니 ‘자력갱생’이니 허는 것은 모두 헛문서에 지나지 못합니다.”
동혁은 이로써 실제로 부채탕감을 이뤄낸다. 사실 이는 동혁 스스로가 밝혔듯 술수에 불과하므로 한계적이며, 현실 가능성으로 보면 그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일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 속 농우회 회원들이 몇 년에 걸쳐 술, 담배를 끊고 저축해 봤자 원금을 겨우 갚는 정도인 모습이 보여 주는 것처럼, 당시 농민의 경제적 토대는 매우 취약했다. 더구나 진흥회의 창설과정은 그나마 자발성마저 침해받았다. 심훈의 의도는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문제를 극복하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고리대 문제를 통해 당시 농촌의 경제문제를 짚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 의미를 갖는 이유라 할 것이다.
한편 청석골이라는 마을에서 농촌운동을 하는 영신도 동혁의 이런 활동에 자극받아 농촌회관을 건설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제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아 영양실조와 각기병에 걸려 몸이 완전히 망가지고 만다. 영신은 건강을 회복할 겸 기독교회의 후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만리타향에서 건강은 더욱 나빠지기만 하고 청석골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진다. 결국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농촌운동에 매진하리라 다짐하고 귀국해 다시 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나 이미 결론은 예정된 일이었을까. 영신은 또다시 쓰러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동혁은 이 소식을 뒤늦게 듣고 입관이 끝난 뒤에야 도착한다. 영신의 장례가 끝난 후, 동혁은 다시 다짐한다.
이튿날 아침 동혁은 산소로 올라가서,
‘당신이 못다 한 일과 두 몫을 하겠다.’
고 맹세한 것을 이제로부터 실행하겠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자신 있게 한 뒤에 홱 돌아서서 그 길로 내처 걸어 한곡리로 향하였다. … 어머니의 병이 염려는 되었으나, 그는 바로 집으로 가기가 싫어서 역로에 몇 군데 모범촌이라고 소문난 마을을 들렀다. 어느 곳에서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청년이 오막살이 한 채를 빌려 가지고 혼자서 야학을 시작한 곳이 있고, 어떤 마을에서는 제법 크게 차리고 여러 해 동안 한글과 여러 가지 과정을 강습해 내려오다가, 당국과 말썽이 생겨 강습소 인가를 취소당하고 구석구석이 도적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
그는 그러한 지도분자들과 굳게 악수를 하고 하룻밤씩 같이 자면서 의견을 교환하고 새로운 방침을 토론도 하였다. 어느 곳에를 가나,
“지금 우리의 형편으로는 계몽적인 문화운동도 해야 하지만, 무슨 일에든지 토대가 되는 경제운동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저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는 동시에 그는, ‘이제부터 한곡리에만 들어앉었을 게 아니라 다시 일에 기초가 잡히기만 하면, 전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널리 듣고 보기도 하고, 또는 내 주의와 주장을 세워 보리라. 그네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서 같은 정신과 계획 아래에서 농촌운동을 통일시키도록 힘써 보리라.’
…
앞으로 가지가지 새로이 활동할 생각을 하며 걷자니, 그는 제풀에 어깻바람이 났다. 회관근처까지 다가온 동혁은 누가 등뒤에서,
‘엇, 둘! 엇, 둘!’
하고 구령을 불러 주는 것처럼 다리를 쭉쭉 내뻗었다.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
동혁은 영신의 몫까지 농촌운동을 하기로 결의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모범촌이라 불리는 촌을 들러 경제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자신의 주의, 주장에 따라 농촌운동을 통일시키도록 힘써보리라 다짐한다.
이러한 동혁의 결의, 그리고 영신과 동혁 사이에서 종교를 주제로 한 갈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심훈이 (자신의 지향과는 다른) 기독교도 영신의 농촌운동도 상당한 비중으로 묘사하는 것을 두고 이것이 작가 나름의 연합전선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즉 친일적이고 친자본주의적인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기독교 세력을 분리하고, 이들과의 제한적 연대 속에서 농촌운동을 활성화하려는 작가의 욕구가 투영됐다는 것이다. 이를 민족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전술적 제휴를 통해 활로를 모색하려는 시도로 이해한다면, 이런 해석도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다.사회주의자의 전향 문제
1920년대 말 세계 대불황의 영향으로 일본 역시 경제 불황에 빠진다. 그런데 세계 대불황의 와중에도 소련은 1차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만주 지역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에 더해 이러한 소련의 움직임까지 나타나자 일본의 군부 파시스트 세력은 큰 불안을 느끼고, 만주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여기며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만주사변을 도발한 일본은 국내 정세의 안정화를 위해 사상통제정책을 강화하는 데에도 힘쓰기 시작한다. 이런 배경에서 제출된 것이 전향제도였다.
1930년대 이전까지 일본은 검거와 처벌을 우선하는 정책으로 사상범을 다뤘다. 그러나 이런 강압적인 방법만으로는 사상범을 처리하기 어렵다고 느낀 일본당국은 다른 방식을 고려하게 되는데, 그것이 전향제도였다. 전향제도는 1931년 3월 사법차관 통첩 제270호에 의해 처음으로 인정받았다. 즉 검사에게 피고인의 태도 여하에 의해 기소를 유보할 권리가 부여됐다. 전향제도는 이후 1936년 사상범보호관찰법에 의해서 정식으로 제도화된다. 사상범보호관찰법은 전향한 사상범에 대해 정신적,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다른 사람들과 격리하여 재범을 예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전향정책이 큰 성과를 거뒀다. 1933년 일본공산당 내 최고의 이론가로 평가받던 사노 마나부와 노동운동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옥중에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일본공산당이 거의 소멸 직전의 상황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반면 조선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일본 사회주의자는 전향하면 돌아갈 국가가 존재했으나,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의 추구와 민족 독립이 함께 가는 것이었으므로 전향은 곧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30년대 중반까지 전향자는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오히려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보면서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맹렬히 활동을 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중일전쟁 초반 일본이 전쟁에서 선전하는 가운데, 사회주의자는 반파시즘인민전선 하 소일(蘇日)전쟁을 전망한다. 그러나 소련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일본과는 만주국 관동군과 소련군 간의 국경분쟁으로 일어난 노몬한(할힌골)전투에 대한 휴전협정을 체결한다. 소련이 일본과 맞서 싸우는 정세가 되면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한다는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전망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조선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중일전쟁 이후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동요를 제대로 수습할 만한 구심력을 형성할 수 없었다. 1929년에 조선공산당이 해산했고, 1930년대 초에 활발히 벌어진 당 재건 운동이 일본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1932년경에 이르면 적어도 대중적인 공간에서는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지도자급 사회주의자들은 지하로 들어가 은밀하게 활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이 제기한 동아신질서 구상은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에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동아신질서란 1938년 당시 일본 수상이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밝힌 대중국 전략이다. 이는 중일전쟁이 대치 상태에 빠지자 제시한 일종의 회유책으로, 중국과 화해하고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동아시아 블록을 건설하자는 제안이었다. 이것이 조선 사회주의자에게 중요하게 다가왔다. 일본 국내정책에 있어서는 (서구 열강에 맞서는) 반자본주의적 혁신정책으로 인식되었고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에 대한 무력 정복의 포기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조선 사회주의자들은 동아신질서 구상을 조선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식민지를 청산하고 공존공영으로 나아가는 체제, 즉 다민족 일국가 체제를 현실적 대안으로 사고했는데, 일종의 자치론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일본은 파시즘 체제를 더욱 강화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일본은 허구적인 내선일체론조차 부정하면서 조선에 대한 수탈을 심화한다. 이는 곧 조선 민족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노선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했다. 그러자 다시 격렬한 저항이 시작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자의 수가 1940년 298명으로 최저치를 기록한 이래 1941년 1386명, 1942년 955명으로 격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전향 정책으로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전향하자 뒤따라 일본공산당의 대량 전향이 발생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조선에서 사회주의자의 전향이 일본에 저항하거나 대항할 한국인의 의지, 태도, 방식 등에 좋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일부 연구에서는 사회주의자의 전향을 구분해 위장전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김윤식은 코민테른의 승인이 없는 전향이 위장전향일 수는 없었을 것이라 평가한다. 당의 승인이 없는 경우 그 전향의 성격을 보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전향자의 내면세계를 그리다, 김남천의 「경영」과 「맥(麥)」
김남천의 「경영」(《문장》, 1940년 10월)과 「맥」(《춘추》, 1941년 2월)은 줄거리가 이어지는 연작소설이다. 앞의 각주에서 설명했듯, 작품이 발표된 시기는 작가인 김남천이 투옥되었다가 전향한 시점이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소설에 좀 더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경영」에는 오시형과 최무경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오시형은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2년간 투옥된 인물이고 최무경은 그를 뒷바라지하는 여성이다. 「맥」에는 두 인물에 더해 이관형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관형은 “서울서도 손꼽히는 무역상 … 말하자면 부르주아”의 자식으로 학문적으로 깊은 이해를 하려 노력해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그들의 답답한 정신 세계에 자꾸만 부딪”치고 있는 와중에 교내 파벌다툼에 휘말려 대학 강사에 채용되지 못해 회의주의에 빠진 인물이다.
먼저 시형의 전향 논리부터 살펴보자. 2년 만에 출소한 시형은 그가 출소하면 함께 하기 위해 무경이 직업전선에 뛰어들어 직접 마련한 아파트로 간다. 이곳에서 시형은 자신의 변화한 사상에 대해 말한다.
“내 자신이 서 있던 세계사관(世界史觀)뿐 아니라, 통틀어 구라파적인 세계사가들이 발판으로 했던 사관은 세계 일원론(世界一元論)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경우에 동양 세계는 서양 세계와 이념(理念)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세계는 대체로 세계사의 전사(前史)와 같은 취급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었죠. 종교사관이나 정신사관뿐 아니라 유물사관의 입장도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양이란 하등의 역사적 세계도 아니었고 그저 편의적으로 부르는 하나의 지리적 개념에 불과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세계 일원론적인 입장을 떠나서, 역사적 세계는 각각 고유한 세계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고 증명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현대의 세계사의 성립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가졌던 세계사관에 대해서 중대한 반성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
물론 남이 말하는데 구두를 닦고 있을 수도 없어서, 그대로 귀를 기울이고는 있으나 무경으로선 시형의 하는 말을 어떻다고 생각할 준비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삐끔히(숨어서 살며시 보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형은 혼자서 저 자신에게 타이르기나 하듯이 창문을 바라보며 이야기에 열을 올려 제 이론을 전개해 보고 있었다.
“가령 동양이라든가 서양이라든가 하는 개념도 로마의 세계에서 성립된 것이고, 또 고대니, 중세니, 근세니 하는 특수한 시대 구분도 근세의 구라파 사학에서 성립된 구분이니까, 이런 것에서 떠나서 동양과 동양 세계를 다원 사관의 입장에서 새로이 반성하구 성립시킬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동양인의 학문적인 사명입니다. 동양인 학도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의무입니다.”
오시형은 세계일원론은 유럽 역사가들의 입장일 뿐이며 동양세계를 다원사관의 입장에서 새로 성립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시형이 다원사관을 강조하는 것은 곧 역사발전의 보편성을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동양세계를 다원사관의 입장에서 성립시킨다는 말은 곧 일본의 동아신질서 구상과 맞물린다. 이런 시형의 전향은 「맥」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피고가 학문상으로 도달하였다는 새로운 관념에 대해서 간명히 대답해보라.”
재판장은 온후한 얼굴에 미소를 그리고 질문을 던진다. 서류 위에 법복 입은 두 손을 올려놓고 그는 오시형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구라파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것이 역사에 있어서의 말하자면 일원사관일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서 떠나서 우리의 손으로 다윈사관의 세계사가 이루어지는 날 역사에 대한 이 같은 미망은 깨어지리라고 봅니다. 역사적 현실은 이러한 것을 눈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피고의 그러한 생각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과 세계사적 동향은 어떻게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피고는 말을 끊고 숨을 돌릴 듯하고는 다시 이야기의 머리를 잠깐 돌려보듯 하였다.
“저의 사상적인 경로를 보면 딜타이의 인간주의에서 하이데거로 옮아갔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이데거가 일종의 인간의 검토로부터 히틀러리즘의 예찬에 이른 것은 퍽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철학이 놓여진 현재의 주위의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문제를 집어 올린다는 것은 최근의 우리 철학계의 하나의 동향이라고 봅니다. 와츠지 박사의 풍토사관적 관찰이나 다나베 박사의 저술이 역시 국가, 민족, 국민의 문제를 토구(討究, 사물의 이치를 따져가며 연구함)하여 이에 많은 시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과거의 사상을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 건설에 의기를 느낀 것은 대충 이상과 같은 학문상 경로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재판장은 만족한 미소를 입술에 띠었다.
시형의 전향논리를 긍정하지 않았다는 점은 「맥」에 등장하는 회의주의자 이관형과 무경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관형은 시형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인물이다.
“선생님, 제가 하나 여쭈어볼 말씀이 있습니다.”
“무어 말입니까? 저는 그런 방면(철학)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무경이는 그러한 사내의 겸사의 말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열심스러운 태도로 물어본다.
“동양학이라는 학문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
무경이의 묻는 말에 처음은 농말조(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로 받아 넘기려다가 그의 태도가 지나치게 진지한 데 눌리어서 이관형이도 잠시 제 머리를 정리해보듯 한다.
“전문 부분이 아니어서 상식적인 것밖에는 대답할 수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로도 잘못된 해석이나 또 엉터리없는(정도나 내용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추상이 많을 줄 압니다마는. …… 내 생각 같아선 서양 사람이 자기네들의 학문적 방법을 가지고 동양을 연구하는 것과 동양인이 구라파의 학문 세계에서 동양을 분리할 생각으로 동양을 새롭게 구성해보려는 노력과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독자적인 학문을 이룬다든가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줄 생각합니다. … 가령 동양학을 건설한다지만 우리들의 대부분은 구라파의 근대를 수입한 이래 학문 방법이 구라파적으로 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의 거의가 구라파적 학문의 방법을 배운 사람들이니 그 방법을 버리고서 동양을 연구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동양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학문 방법으로 동양을 연구하여야 할 터인데 내가 영국 문학을 한 사람이라 그런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이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구라파적 학문 방법을 떠나서는 지금 한 발자국도 옴짝달싹 못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시다 같은 철학자도 서양 철학의 방법을 가지고 일본 고유의 철학 사상을 창조한다고 애쓴다지 않습니까. 한동안 조선학이라는 것을 말하는 분들도 우리네 중에 있었지만 그 심리는 이해할 만하지만 별로 깊은 내용이 없는 명칭에 그칠 것입니다. 요즘에 율곡 같은 분의 유교 사상을 서양 철학의 방법을 가지고 연구해보려는 분들이 생기고 있는 모양이지만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양학의 성립이란 애매하고 또 내용 없는 일거리가 되기 쉽겠습니다.”
“그러나 서양 학자들이 동양을 연구하는 데는 좀 더 다른 의미도 들어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서양의 몰락과 동양의 발견이라든가 하는.”
“네 잘 알겠습니다. 요즘 그렇게들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겠지요. 구라파 정신의 몰락이라든가 구라파 문화의 위기라든가 하는 소리는 이 쭈루루니 책장에 꽂혀 있는 뭇별(많은 별[星]) 같은 사상가들이 오래 전부터 떠들어오는 말이고, 구라파 정신의 재생이나 갱생책을 생각해보는 과정에서 동양을 발견하는 일이 많다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그들은 결코 구라파 정신을 건질 물건이 동양의 정신이라고는 믿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한가지로 세계를 건질 정신은 역시 구라파 정신이라고 깊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양 사람으로서는 물론 당연한 일이고 우리 동양 사람은 감정적으로래도 항거하고야 견뎌 배길 일이지만 그러나 구라파 학자의 동양 발견이라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 이런 점은 우리 동양 사람이 깊이 명심할 일입니다.”
무경이는 가만히 듣고 앉아 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오시형이의 이론을 그대로 옮겨서 또 한 번 질문을 던져본다.
“앞으로의 현대의 세계사를 구상해보는 데 있어서 서양사학에서 떠나 다원 사관에 입각하여 여러 개의 세계사를 꾸며놓는 것은 어떨까요?”
학문적인 술어가 마음대로 입에 오르지 않아서 그는 더듬더듬 자기의 의사를 표현해놓는다.
“동양에는 동양으로서 완결되는 세계사가 있다, 인도는 인도의, 지나(중국)는 지나의, 일본은 일본의, 그러니까 구라파학에서 생각해낸 고대니 중세니 근세니 하는 범주를 버리고 동양을 동양대로 바라보자는 역사관 말이지요. 또 문화의 개념두 마찬가지 구라파적인 것에서 떠나서 우리들 고유의 것을 가지자는 것. 한번 동양인으로 앉아 생각해 볼 만한 일이긴 하지마는 꼭 한 가지 동양이라는 개념은 서양이나 구라파라는 말이 가지는 통일성을 아직껏은 가져보지 못했다는 건 명심해둘 필요가 있겠지요. … 불교나 유교는 이러한 정신적 가치로 보면 훨씬 손색(다른 것과 견주어보아 못한 점)이 있겠지요. 조선에도 유교도 성했고 불교도 성했지만 그것이 인도나 지나를 거쳐 조선에 들어와서 하나도 고유의 사상이나 문화의 전통을 이룰 만한 정신적인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허기는 그건 불교나 유교의 탓이라기보다는 우리 조상들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어느 한귀퉁이를 비비고 들어가볼 틈새기도 없을 것 같았다. … 동양인으로서 동양을 저토록 폄하(貶下)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하나의 비극이라고 생각되어지기도 하였다. 그는 잠시 오시형이의 편지를 생각해보았다. 비판만 하면 자연히 생겨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의 지식인들의 하나의 통폐라고 말하면서 비판보다도 창조가 바쁘다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말하였던 것일까.
위의 대화에서 이관형은 시형이 말한 동양사관의 현실성을 따지며 그것은 현실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되기 어려울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형이 자신만의 길을 주장하거나 대안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무경은 이런 관형을 보면서 시형이 비판보다도 창조가 바쁘다고 쓴 편지의 내용을 떠올린다. 이런 모습은 작가가 시형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관형과 같이 비판만 하는 것도 아닌 정신세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즉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는 동시에, 아무런 대안 없이 무조건적 비판만 일삼는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형과 관형을 매개하는 무경에 대해서도 주목할 수 있다. 시형의 전향은 사상뿐만이 아니라 무경과의 관계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때의 시형은 “평양에서 부회 의원(평양 지역을 관장한 식민지 시대 행정기구였던 평양부의 의원)과, 상업 회의소에 공직을 가지고 있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거의 연을 끊은 채로 활동을 이어가면서 무경과 결혼을 약속한 상태였다. 그러나 옥중에서 전향하고 출소한 시형에게 “이 년 동안 친필로는 편지도 안 하였다던” 아버지가 찾아와 둘만의 대화를 나눈 뒤 돌아간다. 무경은 시형의 아버지가 시형과 자신의 결혼을 허락할 것인가 불안감을 느끼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형은 요양을 명분으로 본가로 돌아간다. 무경은 그를 보내면서 “아주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슬픔을 느낀다. 어쩌면 추측일 수도 있던 이 슬픔은 「맥」에서 명백해진다.
피고석 뒤에 놓인 방청석으로부터 젊은 여자가 약간 허리를 드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이윽고 재판장은 오후에 심리를 계속하고 일단 휴식에 들어간다는 선언을 하였다. 젊은 여자는 완전히 일어섰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키가 날씬한 여자였다. 무경이는 가슴이 뚱하고 물러앉는 것을 느꼈다. 그 여자의 옆 자리엔 오시형이의 아버지, 그리고 또 그 옆자리엔 어떤 늙은 신사. 피고석으로부터 돌아온 오시형이는 긴장한 얼굴을 흐트려놓으며 그 여자가 서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무경이는 뒤숭숭해진 공판정의 소음에 앞서 복도로 나왔다. ‘그 여자이다! 도지사의 딸!’ ― 그리고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끝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시형은 자신을 옥바라지한 무경과의 연을 저버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도지사의 딸과 결혼한다. 이로써 무경은 시형과의 관계가 끝나고,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삶을 새로 개척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무경은 「경영」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 시형이를 위하여 얻었던 방이었다. 시형이를 맞기 위해서 저금 통장을 빈텅이를 만들면서 장식해 보았던 방이었다. 그는 이제 가 버리고 여기엔 없다.
――시형이를 위하여 나섰던 직업전선이었다. 시형의 차입을 대기 위해서 선택하였던 직업이었다. 시형이도 나오고 인제 직업도 목적을 잃어버렸다.
…
울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제 몸에서 빈 껍질만 남겨 두고 모든 오장과 육부가 몽땅 빠져 나가는 경우가 있었으면 하고 막연히 그런 경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런데 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급사가 문을 열었다.
“주인님이 나오셔서 장부 좀 보시잡니다.”
급사의 말에 그는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킨다. 그는 문에 쇠를 잠그고 층계를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점점 제 다리에 기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방도, 직업도, 이제 나 자신을 위하여 가져야겠다!)
그런 생각이 사무실을 들어설 때에 그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자기 삶에 대해 얼마간 능동적인 태도로 변화하는 무경의 모습이다. 무경은 「맥」에서도 이런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는다.
그러나 그는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 나아가겠다는 하나의 높은 생활력 같은 것을 천품으로서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생활력은 제 앞에 부딪쳐오는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꿰뚫고 나아가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력으로 나타날 때가 있었다. 사람은 제 앞에 부딪쳐오는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맞받아서 해결하고 꿰뚫고 전진하는 가운데서 힘을 얻고 굳세지고 위대해진다고 생각해본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치고 함정에 빠져서 그가 생각해본 것은 모든 운명의 쓴 술잔을 피하지 않고 마셔버리자 하는 일종의 ‘능동적인 체관(諦觀, 품었던 생각을 아주 끊어버리다)’이었다.
무경은 시형과의 결별을 넘어서기 위해 그의 사상궤적을 알고자 한다. “동양학은 어떻게 해서 오시형이를 저토록 고민 속에 파묻히게 만드는 것일까, 동양학으로 가는 길이 무엇이건대 그것은 오시형이와 최무경이의 관계를 이토록 유린하고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일까”. 시형의 사상을 비판하는 관형과의 대화는 이런 맥락에서 나누게 된 것이었다.
이런 무경의 모습 역시, 시형과 관형 어느 쪽에도 동일시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사회의 한 이데올로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김남천은 자신의 사상을 대변할 ‘적극적 주인공’을 창조해낼 생각이 애초에 없었고, 오히려 실제의 생활을 그려냄으로써 리얼리즘이 달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념으로 무장한 주인공으로서는 리얼한 세계를 포착해낼 수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김남천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했던 것은 역사에 대한 성찰이었다.
“요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반 고호라는 화가의 말인데 … 인간의 역사란 저 보리와 같은 물건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서 흙 속에 묻히지 못하였던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갈려서 빵으로 되지 않는가. 갈리지 못한 놈이야말로 불쌍하기 그지 없다 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그러고는 또 한 번 뜨즉뜨즉이(띄엄띄엄) 그것을 외고 있었다. 무경이도 그의 하는 말을 외가지고 다소곳하니 생각해본다. 그러나 한참만에,
“그게 어떻단 말씀이에요. 흙 속에 묻히는 것보다 갈려서 빵이 되는 게 낫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잖으면 흙 속에 묻혀서 많은 보리를 만들어도 그 보리 역시 빵이 되지 않는가 하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이관형이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수록 더욱더 명구가 되는 겁니다. 해석은 자유니까요.”
“그럼 전 이렇게 해석할 테예요. 마찬가지 갈려서 빵가루가 되는 바엔 일찍이 갈려서 가루가 되기 보담 흙에 묻히어 꽃을 피워보자.”
이관형이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었다.
“구라파 정신이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적에 그들이 니힐리스틱하게 던져본 말입니다. 이렇게 구라파가 몰락해버리는데 정신을 신장해보는 사업에 종사해본들 무엇하랴, 이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의 해석이랍니다. 선생님의 해석은 건강하고 낙천적이고 미래가 있어서 좋습니다.”
“선생님께선 그런 사상을 가졌으니까 대학에서도 실패를 보신 거예요.”
인간의 역사를 보리에 비유한다고 할 때, 위의 대화에서는 세 가지 방식이 제시된다. 첫째, 흙 속에 묻히는 것보다는 갈려서 빵이 되는 게 낫다. 둘째, 흙 속에 묻혀 많은 보리를 만들어도 결국 빵이 된다. 셋째, 가루가 되기보다 흙에 묻혀 꽃을 피워보겠다. 첫 번째 방식에서 역사는 발전하거나 쇠퇴한다기보다는 현재 소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두 번째 방식의 경우 보리의 유적 연속성은 유지된다. 그런데 세 번째 방식의 경우 보리는 질적으로 다른 꽃의 상태로 변화한다. 여기서 김남천은 어떤 선택도 명확하게 확정하지 않음으로써, 역사가 단순히 반복되는지 아니면 어떤 질적인 비약을 가지는지도 확정하지 않는다. 김남천에게 인간의 역사에 관한 정당한 성찰은 도래하지 않는 미래를 상상력에 의존해 구성해낼 때가 아니라 현재의 시간을 반복의 가능성과 비약의 가능성이 동시에 내포된 상태로 묘사할 때 가능했다. 즉 식민지 조선 사회의 미래가 현재 상태의 반복일지 어떤 질적인 비약일지는 알 수 없고, 비약이 발생해도 그 사회가 어떤 상태일지는 알 수 없지만, 김남천은 보리의 비유로써 현재와는 ‘다른’ 미래의 가능성(역사)에 관해 성찰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김남천의 연작소설은 시형과 관형의 대립하는 견해를 보여 주지만, 이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동시에 무경의 견해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평가를 드러내지 않는데, 현 상황이 그대로 유지될지 아니면 더 나은 상황으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해도 명확하지 않은 셈이다. 시형은 ‘동아신질서’를 수용하여 전향하고 관형은 ‘-주의’ 운동을 평론하기는 하지만 운동 자체와는 거리를 둔 회의주의자다. 무경은 독립적인 삶을 꾀하지만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런 세 사람을 각각 조선 사회에 만연한 이데올로기를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전향자와 회의주의자, 그리고 당장 하루하루 사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는 해석도 충분히 곱씹어볼만 하다.
다만 무경이 그래도 보리의 꽃을 피워보겠다고 하는 데에 주목해볼 수 있겠다. 현재로서는 무엇도 단정할 수 없지만(아무런 계획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만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라 하겠다. 이렇듯 가능성을 놓지 않고 있었기에 김남천은 해방 직후 사회주의 운동을 다시 시작해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서기장으로 활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비운의 군대, 조선의용대
만주사변 이후 의열단은 중국국민당 정부와 손을 잡고 군사, 정치 인재 양성에 착수하는 동시에 관내 지역 조선 혁명단체를 통일하는 운동에도 주력했고, 이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운동가동맹, 조선혁명가연맹이 모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고, 연맹은 중국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와 협의하여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때 군사위원회 정치부 비서장이던 하요조(賀耀祖)는 조선의용군의 성립에 대해 “1. 현재 의용군이라 칭할 필요는 없고 의용대라 칭한다. 2. 지도위원회는 조직하여도 좋다. 3. 진국빈(즉 김약산, 본명 김원봉, 일명 최림, 당시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조선민족전선연맹이사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대장으로 파견한다”고 지시하였다. 당초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중국항전에 직접 참가해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것이 목표였으나, ‘군’이 되기에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전투를 주목적으로 하지 않고 선전을 주목적으로 하는 대오로 편제한 것이었다. “중국 영토에서 항일하니 중국항일작전의 영도에 복종해야” 함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 군사위의 직접 통제와 감독을 받아야만 했고, 그런 처지의 외국인 부대에 ‘완전무장’이 허용될 리는 만무했다. 그렇지만 의용대원들은 대적 선전공작을 수행하는 중에 전투요원이 될 기회를 최대한 얻으려 했고, 전투요원을 방불케 하는 활동을 자진하여 적극적으로 수행하곤 했다.
그러던 1941년,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가 김원봉의 총대부(總隊部)와 갈라져 독자적으로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이 주둔하는 지역으로 진입한다. 이런 분화는 김원봉과 중국공산당과 연계가 있던 최창익 등 공산주의자 사이의 노선 차이로 인해 발생했다. 일단 두 세력 사이에 화북지역의 조선 무장대오와 연계하여 조선 진출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화북으로 진출할 필요가 있다는 데까지는 묵시적인 합의가 있었다. 다만 김원봉은 반일통일전선 결성을 위해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활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했다. 또한, 조선의용대가 성립될 당시부터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으니 한순간에 배신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용대 내부에는 중국국민당이 항일투쟁보다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투쟁에 몰두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중국공산당과 연계가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대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그 결과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가 팔로군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후 팔로군으로 편입된 조선의용대는 1943년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되고, 김원봉이 이끌던 잔류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된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이후에도 일본에 맞서 무장투쟁을 지속한다.
그러나 해방을 맞이한 이후 조선의용군은 비운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우선 미군정이 주둔한 남한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한 조선의용군 출신이 자리 잡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후 남한은 한국광복군을 항일투쟁 역사의 중심으로 둔다. (물론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주력부대는 이미 빠져버렸기에 한국광복군의 주류는 임시정부였다.) 그러면 북한에서는 어땠나. 조선의용군은 한국전쟁에 선봉으로 참전했으나, 의용군 출신 간부들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숙청되고 만다. 그리고 전쟁 후 중국으로 돌아갔거나 숙청되기 전에 중국으로 탈출한 의용군 출신자들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국민당 특무(스파이)’로 낙인 찍혀 오래도록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이렇듯 고국의 남북 양쪽과 중국에서 이래저래 버림받고 백안시된 존재가 의용군 출신자들이었다.사회주의자의 항일 무장투쟁, 김학철의 「격정시대」
『격정시대』는 총 3권의 장편소설이다. 그만큼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그리고 있다. 본 글에서는 김학철 본인을 형상화한 인물인 주인공 서선장의 삶을 중심으로 보려 한다.
평생을 버들잎 같은 나무배─야거리 한 척에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를 하여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서 서방이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것은 돛도 노도 다 필요 없는 20톤급 발동선의 선장이었다. 그래서 거 아들의 이름을 선장이라고 지었는데, 그 선장이도 그럭저럭 자라서 인제 보통학교, 즉 소학교의 4학년생이 되었다.
선장이는 고양이 수염을 깎아 괴롭히거나 벌집을 쑤셔 도망치다 벌에 잔뜩 쏘여 등교하지 못하곤 했던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렇게 장난은 심했지만 담임 선생님인 김영하가 인정할 정도로 작문만은 잘하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린 선장에게 충격적인 두 사건이 벌어진다.
“회관에……쌈 났다!”
…
청년회관 앞 신작로와 정구장에는 벌써 구경꾼들이 백차일 치듯(흰옷 입은 사람들이 매우 많이 모인 모양을 이르는 말) 하였다. … 청년회관을 포위 공격하는 한 무리 사람들의 돌팔매질에 청년회관의 유리창들은 이미 모두가 박산(박살)이 나서 성한 것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 공격자 중의 몇몇이 머리들을 한데 모으고 한참 수군수군하더니 곧 돌격대가 조직되어서 칠팔 명의 젊은 축이 몽둥이들을 꼬나들고 일시에 으악 소리를 지르며 현관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 서 있는 구경꾼들에게 말을 묻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나는 것을 선장이도, 선희도, 은희도 다 들었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판이오?”
“명석동 조합에서 쳐내려왔다오.”
“명석동 조합이라니?”
“아따 이 양반, 노동조합두 모르우? 적색노조.”
“그래 그 무슨 조합인가가 이 회관은 왜 들이친다우?”
…
“아 빨갱이하구 까망이가 맘이 맞을 리 있소? 앙숙이지. 개와 고양이두 맞다들기만 하면 아옹다옹하잖소.”
“빨갱이는 뭐구 까망이는 뭐요?”
“아 빨갱이야 노동조합 아니겠소, 적색노조.”
“그럼 까망이는?”
“까망이야 무정부주의패지요, 쩍하면 치구 달구 하는,”
…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이 큰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주재소는 쥐 죽은 듯 잠잠하였던 것이다. 설사 우주의 다른 천체에서 이런 소동이 벌어졌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내 알 배 아니라고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원산의 신작로에 있던 원산 청년회관은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 장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적색노조원들이 청년회관에 쳐들어온 것인데, 무정부주의자들이 자기네 조합에 프락치를 박아 파괴활동을 일삼는 데에 분노해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김학철이 놀란 것은 바로 길 건너편 주재소의 동향이었다. 주재소에 근무하던 순사들은 싸움판이 벌어졌음에도 나와 볼 생각은 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선장이는 당시에는 그 이유를 곧바로 알지 못했으나, 같은 민족끼리 싸우면 결국 일본만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훗날에야 깨닫게 된다.
또 하나의 사건은 원산에서 일어난 총파업에서의 광경이다. 원산부두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단체계약의 확립”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
실제로 1929년 1월, 원산노동연합회(이하 노련)는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고용주들은 대체노동자와 경찰의 협조를 구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동시에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해고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노련은 해고를 철회하면 타협할 수 있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고용주 측 대표는 확답을 회피했고, 상업회의소는 노련이 아무 이유도 없이 파업을 선동했다는 전단을 시내에 배포했다. 결국 상업회의소는 노련 소속 노동자 전면 사용 중지를 선언했고 노련은 본격 총파업에 돌입한다. 파업은 원산 전 지역으로 퍼져 지역 곳곳의 작은 노동조합까지 함께 연대했다.
이 조선식 ‘KKK’(미국의 KKK단이 흰 복면을 썼듯 파업깨기꾼들이 같은 모자를 쓰고 있음을 빗댄 말)가 입장을 하자 기업주의 앞잡이들과 파업 방해 분자들은 갑자기 사기가 올라서 괴상한 소리들을 지르며 기뻐 날뛰었다. … 공방전의 막이 열렸다. 주먹질 발길질이 빗발치듯 하였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들의 장벽은 끄떡없이 일차 공격을 견뎌내었다.
돌파에 실패를 한 파업깨기꾼 망나니들이 일단 뒤로 물러나서 대가리들을 한데 모으고 작전 계획을 고쳐 짤 즈음, 배후에서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여태껏 치안유지를 표방하고 정관, 즉 고요히 관찰하는 태도를 취해오던 경찰대가 행동을 개시하였다. 진압이 시작된 것이다. 한 번 충돌에서 대립한 쌍방의 여러 사람이 깨지고 터지고 피가 흘러서 이미 상해죄, 소요죄를 구성하였다는 구실이 생겼기 때문이다. … 이번 돌격은 사실상 무장 경찰대와의 협동작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파업 노동자들이 과연 어떻게 당해낼 것인가. 바로 이때다. 안벽에 선복을 붙이고 정박한 ‘쓰루가마루’라는 화물선의 갑판 위에서 관전을 하던 일본 선원들이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발들을 굴렀다. 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을라치면
“스또 반자이!”
“교오다이다찌 감바레!”
이것을 우리말로 바꿔놓으면
“파업 만세!”
“형제들 버텨라!”
이것을 신호로나 한 듯이 안벽에 정박한 다른 기선 ─ ‘니이 가다마루’와 ‘노도니고오’에서도 또 잔교에 정박한 ‘사도마루’, ‘마이즈루로꾸고오’ 및 ‘미야즈마루’에서도 일본 선원들의 응원시위가 벌어졌다. 그리고 잇달아서 ‘쓰루가마루’를 필두로 각 기선들이 일제히 우렁찬 기적들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 때아닌 뭇 기적의 긴 울음은 그러지 않아도 물정이 소연한(소란스런) 원산항을 크게 뒤흔들어놓았다, 파업깨기꾼들과 무장경찰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서 일순 모두 멍청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유분수지, 내지인(일본인)이 불령선인의 편을 들다니! 이와는 반대로 파업자들은 그 뜻하지 않은 힘진 성원에 크게 고무되었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는 다 한편이라는 것을 실물교육을 통하여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파업자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여태까지의 수동적인 방어에서 일변하여 능동적인 방어에로 넘어갔다. 방어를 위한 공격에로 넘어간 것이다.
선장이는 기선 위에서 고함을 지르며 발을 구르는 일본 선원들을 바라보며, 귀청이 떨어질 듯 부두가 떠나갈 듯 울리는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넋을 놓았다. 도대체 이것은 어찌 된 일일까.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의 편을 들다니! 선장이는 입에다 물어 깰 수 없는 무슨 땅땅한 덩어리를 문 것만 같았다. 열 서너 살 먹은 아이의 이빨로는 물어 깬다는 것이 무리였다.
실제로 이 당시 원산에서 노련의 영향력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일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노련의 지도부는 중국 영사관으로 달려가 중국 노동자의 취업을 막아달라고 부탁해 그들의 협력을 약속받았고, 일본인들 역시 ‘같은 노동자’로서 파업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며 일손을 놓고 항구를 떠났다. 결과적으로 원산총파업은 일본 경찰의 폭압적인 단속과 진압으로 패배했지만, 지역 노동자운동에 큰 영향을 미쳐 1930년대 중반 이 지역의 적색노조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총파업이 패배한 후 일본 경찰의 검거선풍이 불던 그때,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된 선장이는 서울에 사는 외칠촌 아주머니인 박숙자 씨의 양아들로 들어가 서울로 유학하게 된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수학하던 어느 날, 독립운동가 이재유를 저택에 숨겨두었다가 발각된 일본인 스기우라 교수의 소식을 듣고 선장이는 어릴 적 원산총파업에서 받았던 그 “가슴 뛰노는 장면”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에서고 조선에서고 이와 동일한 시각에 그 뉴스를 듣는 청중은 다 이렇게 눈들이 동그래졌을 것이다. 전파를 타고 날아온 뉴스가 자못 엄청났기 때문이다. 중국 상해 홍구공원이란 데서 조선인 윤 무어라나 하는 사람이 폭탄을 던져서 경축회장 주석대에 앉았던 일본군 장령 여럿을 살상하였는데 그 중에는 상해 파견 군사령관 시라가와 대장도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뭐라니?”
“인호오기찌라니까……아마 윤─봉─길이겠지요.”
“나이 몇 살이라구?”
“스물다섯 살이라잖아요.”
…
선장이는 받은 충격이 어찌나 크던지 이날 밤 자리에 누워서도 오래도록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쏴 눕힌 것은 아무리 장쾌하더라도 필경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옛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오늘 낮의 일이다. 자기가 동양악기점 앞에서 흘러나오는 레코드의 아름다운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바로 그 무렵에 발생한 일이다. … ‘그에 대면 나는 하잘 것 없는 밥병신이로구나!’하는 자비심과 ‘그는 지금쯤 적에게 모친 악형을 당하고 있을 텐데…… 나는 여기 이렇게 편안히 누워있어?’ 하는 자책감에 등골에 땀이 다 내돋았다. … ‘남들은 다 목숨을 걸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나만 안일하게 여기서 공부를 해? 수치스러운 일이다. … 중국으루 건너가자. 임시정부를 찾아가자. 황포군관학교루 가자. 가면 무슨 수가 나겠지. 가자!’
선장이는 다행히 특별한 문제 없이 상해에 도착한다. 그런데 도착 후 만난 조선인 김혜숙으로부터 임시정부가 이미 풍비박산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좌절한다. 그렇지만 김혜숙은 “임시정부란 것은 기실 유명무실”했다면서 “상징적인 존재만을 믿거나 의지하고 독립을 꾀할 수는 없”으니 “동적이고 보다 효과적인 노선을 개척해야”한다며 자신들과 함께할 것을 선장에게 제안한다. 김혜숙은 앞서 조선의용대의 역사에서 언급했던 조선민족혁명당 소속 활동가였던 것이다. 사실 조선에서 상해로 흘러들어오는 청년들은 김혜숙이 운영하던 식당에 들르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으레 김혜숙에게 걸려들어 조선민족혁명당 상해 특구를 통해 남경 명양거리 호가화원 초대소로 보내졌다. 여기서 몇 달의 감별을 거친 끝에 합격한 사람은 입당하고 아닌 사람은 노자를 주어 돌려보내졌다. (김학철은 무슨 까닭인지 상해 특구에 머무르다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게 됐다.)
상해에서 지내면서 선장이는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고 당 활동을 한다. 그러던 중 상해에서 일어난 전차, 버스 노동자의 파업을 목격한다.
“이번 파업은 그들네 노조에서 조직한 거겠지요?”
“물론. 그렇지만 핵심적 지도역량은 공산당이겠지요……중국공산당.”
“헤 그렇습니까, 그래요?”
“공산주의자들은 민중을 발동하는 것을 주요한 투쟁 수단으로 삼으니까요.”
선장이는 입에다 무슨 잘 깨물어지지 않는 덩어리를 문 것처럼 입술만 우물거리고 말을 아니하였다. 민중을 발동한다는 말이 마치 먼 화성에서 보내온 전문과도 같이 불가해하여서였다.
“그에 반해서 민족주의자들은 개인 테러를 숭상하니까……이것이 분기점일 밖에요. 현재 우리 조직 내에서도 이런 두 갈래 서로 다른 주장이 맞서고 있습니다.”
“어느 편이 옳다고 미스터 성은 생각하십니까 그 둘 중에?”
“미스터 서는 어느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글쎄요……잘 모르니까 묻는 게 아닙니까?”
“오늘 그들의 힘을 봤지요? 온 시내를 마비상태에 빠뜨리는. … 개인 테러로 일본놈 몇 놈 소멸한다고 해서 그놈들의 지정이 흔들리지는 않을 겁니다.”
선장이는 여적 자신의 해온 일이 옳다고 확신하는 까닭에 성재수의 말이 귓속으로 잘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반감까지 생겼다. … 개인 테러는 극소수의 가장 고상하고 가장 용감한 애국자들만이 해낼 수 있는 신성한 사명이라고 선장이는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부정하신단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하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 한 주일 가량 지나서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성재수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던 끝에 문득 생각난 듯이 일어나가 책장 안을 한참 뒤지더니 책 두 권을 꺼내들고 돌아왔다. … 한 책에는 한문으로 ‘변증법적 유물론’ 또 한 책에는 ‘유물사관’이라고 역시 한문으로 찍혀있는데 둘이 다 일본 도쿄에서 간행된 것이었다. …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침대에 번 듯이 나가 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알구 보니 세상은 이런 거였구나!’ 선장이는 자기가 여적 흐리멍텅한 혼돈 세계에서 헤멘 것만 같았다. 저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제가 어데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맹탕 남의 정신으로 살아온 것만 같았다. … 선장이가 다 읽은 책들을 돌려주러 갔을 때 두 사람은 의미가 특별한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 “그럼 이번엔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지요.”
성재수가 꺼내다 주는 책은 『국가와 혁명』이었다. … 『프랑스 내전』, 『철학의 빈곤』, 『가정, 사유제와 국가의 기원』……. 이런 책들을 읽어나가는 동안에 선장이는 크게 변하고 또 성장하였다.
선장이는 같이 활동하던 동지의 소개로 만났던 성재수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전수받는다. 성재수는 중국공산당 소속 활동가로 광주학생사건 때 서울에서 동맹휴학을 선동, 조직하고 경찰을 폭행했다는 혐의로 지명수배를 받아 중국으로 망명한 사람이다.
실제 김학철 역시 시간이 갈수록 파괴 위주의 폭력투쟁이 가진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희생은 엄청났지만 대가는 너무 적었다. 김원봉과 의열단 동지들도 숙의 끝에 이런 노선을 청산하고 중국 내 군관학교에 입교하기로 결정한다. 소설 속 선장 역시 “지도부에서 국민당 정부와 수차 교섭한 결과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고 교육을 받은 뒤 조선학생만으로 편성된 독립 중대를 설립하기로 한 결정에 따르게 된다.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하자 황포군관학교는 호북성 강릉으로 옮겨갔고, 여기에 이르러 조선인으로 편성된 중대가 설립했다. 조선인 교관은 김두봉, 윤세주, 한빈 등이었다. 학교에서는 한글, 조선역사,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배웠다.
19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대가 정식으로 발족하였는데, … 식순의 하나로 대원들에게 배지 하나씩을 달아주었다. 거기에는 ‘조선의용대’라는 한문 글자 다섯 자와 ‘Korean volunteer’라는 영어 글자 한 줄이 새겨져 있었다. 이어 제1지대(支隊)와 제2지대에 각각 군기 하나씩이 수여되었다. 그 군기 밑에 서서 대원들은 멸적의 기세 드높이 선서를 함으로써 민족의 사업에 충성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후 대세가 기울어져서 부득이 무한(武漢, 도시명 우한)을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조선의용대의 열혈남아들은 물색없이 그냥 물러나지 않고 적들에게 탁탁한 선물을 남겨주기로 작정하였다. … 곽말약 선생은 자기의 저서 『홍피곡』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
담벼락들과 길바닥에다 콜타르로 굵게 크게 일본글 표어들을 써 놓은 것이었다.
“병사들은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재벌들은 후방에서 호사를 한다.”
또는
“병사들의 피와 생명, 장군들의 금까치(무공) 훈장.”
…
나의 탄 자동차가 후성거리를 지날 때 표어를 쓰는 사람들은 일에 열중하여 여념들이 없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콜타르통, 뺑끼통(페인트통) 틀을 들고 또 사다리들을 메고 촌분(매우 짧은 시간)을 다투며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가장 감동시킨 일막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또 그것은 나를 가장 참괴하게 만들어준 일막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조선의용대의 벗들이었다. 그 가운데는 단 한 명의 중국 사람도 끼어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중국에도 일본말을 아는 인재는 적잖을 것이다. 일본 유학을 한 학생이 줄잡아도 몇 십만 명은 될 테지? 그런데도 무한이 함락의 운명에 직면한 이 위급한 시각에 우리를 대신하여 대적군 표어를 쓰고 있는 것은 오직 이 조선의 벗들뿐이라니!
의용대 창설 이후부터 주력이 화북지역으로 진출하기 전까지(즉 노선분화 전까지) 2년여 동안 조선의용대는 여러 활동을 했다. 조선의용대는 대적 공작 실적을 스스로 기록하고 내세웠다. 대원들은 비록 선전부대로 편성되었지만, 선전하다 보면 전투를 피할 수 없었기에 선전과 전투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 그만큼 선전이 전투성을 함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활동 중 선장이는 국민당 군대가 일본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저항 정책을 보이지만 공산당에는 매우 공격적인 정책을 보이면서 돈 모을 궁리, 벼슬 얻을 궁리만 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국민당 군대는 일본과의 대적은 피하면서 중국 내 “소비에트 구역을 봉쇄”하는 데에는 개미새끼 하나 지나가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포대로 봉쇄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국민당이 일본과의 싸움보다는 공산당과의 싸움에 집중하다 보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민중들에 돌아갔다. “백색 비적을 소탕하자!” “주덕, 모택동을 사로잡자!”와 같이 한 마을에도 점령군에 따라 다른 내용의 표어가 적혀있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연상시킨다.)
그런 와중에 선장은 우연히 중국공산당 소속 군대에 넘어가 있던 성재수와 재회한다. 성재수는 비밀리에 조선의용대에 들어와 중국공산당 비밀조직을 건립했는데, 선장도 이 비밀조직에 가입한다.
1940년 말에서 그 이듬해 이삼월 사이에 화중, 화남 각 전장에 분산되어 있던 조선의용대의 각 지대들과 분대들이 육속 북상하여 낙양에 집결한 뒤 전대가 황하를 북으로 건너 태항산 항일 근거지로 넘어 들어갈 태세를 갖추었다. … 1941년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무렵 제2지대 정치위원 김학무가 영솔하는 선발대가 낙양을 출발하여 해방구로의 길에 올랐다. 선장이도 선발대에 편입되어 떠났다.
앞서 노선 차이로 조선의용대의 본대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으로 편입되었다고 했는데, 『김학철 평전』에서도 이에 대해 비슷하게 서술하고 있다. 『김학철 평전』에 따르면, 이 즈음하여 북상하자는 주장이 점점 더 힘을 얻게 된다. 여기서 북상이란 화북 태항산으로 진출하자는 것인데, 그 목적은 우선 팔로군과 합류하여 적극적인 항일전투에 투신하는 것, 또 하나는 화북의 조선 청년들로 의용대를 확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을 국민당 정부가 알아서는 안 되므로 낙양에 머무는 동안 서안의 한국광복군에 방문단을 파견했다. 통일전선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여기에 김학철도 함께했다. 그러나 이런 통일전선의 가능성이 단시일 내에는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고, 하루 속히 북상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곧 선발대가 출발하는데, 김학철도 선발대에 편입된다.
밤새도록 기구한 산로를 더듬고 또 더듬은 끝에 마침내 먼동이 텄다. 그리고 얼마 오래지 않아 동녘 하늘에 등적색 구름에 싸인 아침해가 서서히 떠올랐다. 선장이는 그제야 비로소 산 아래 골짜기에 1백 명도 더 되는 초록색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의용대가 서 있는 산등성이를 쳐다보며 손을 흔들고 또 모자를 흔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오, 저것은 팔로군. 우리의 마중을 나온 팔로군이다!’
선장이는 난생 처음 자유로운 땅을 디디었다. 왜냐면 그의 조국이 망하던 그해에 그의 어머니도 겨우 열다섯 살 홍안의 부끄럼 타는 소녀였으니까.
당시 팔로군의 총사령부는 태항산 동쪽 골짜기에 있었는데, 사면팔방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적후(敵後)사령부’라고 불렸다고 한다. 김학철 일행이 도착한 후 이틀 뒤에 ‘조선동지환영대회’가 열렸는데, 김학철은 이날 총사령관이던 펑더화이(彭德懷) 장군을 처음으로 만났다. 대회에는 일본인, 몽골인, 필리핀인도 참가해 국제적인 색채를 띠었다.
의용군에서는 조직부 성원이건 선전부 성원이건 할 것 없이 다 전투에는 일반 대원들과 같이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돌격으로 넘어갈 때에는 반드시 지도원이 전투 서열 앞에 나서서 “공산당원은 두 발자국 앞으로!”
명령하여 공산당원들을 앞장세우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공산당원들은 그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있었다. 솔선하여 적진에 뛰어들지 않는 공산당원은 두었다 무엇 할 것인가! 그런 것은 공산당원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그들은 알고 있었다.
한 개 지대의 조선의용군과 한 개 대대의 팔로군의 협동작전이 시작되었다.
…
적군의 증원대를 물리쳐서 작전 임무를 완수한 우군 부대가 큰 손실 입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이렇게 깔끔한 승리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실전에서는 주도세밀하게 짠 작전계획도 뒤죽박죽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부대가 함께 달려들어 포대를 철저히 파괴한 연후에 불까지 콱 질렀다. 이정호는 두어 사람을 데리고 거리 안을 온 데 돌아다니며 대적군 삐라를 붙이느라고 분주하였다.
본격적으로 조선의용대가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다. 위의 장면은 조선의용대가 일본군으로 위장해 적을 속여 큰 손실을 보지 않고 적군을 제압한 뒤의 시점이다. 조선의용대는 선전부대였지만 전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했는데, 소설도 그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제 소설은 종장으로 접어든다. 소설의 마지막은 김학철이 조선의용대에서 마지막으로 경험했던 전투를 그리고 있다.
깎아지른 누에머리에서 불시에 적습을 알리는 신호 총소리가 울렸다. 연거푸 세 방. 세 사람은 본능적 동작으로 재빨리 발걸음들을 돌치자(되돌리자) 용수철에 튕긴 것처럼 숙소를 향하고 내달았다. 총을 가지러 가는 것이다. 바로 이때 앞길 멀지 않은 곳에 포탄 한 알이 날아와 터졌다. 작렬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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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한낮이 가까워 오자 보람 없이 사상자만 숱하게 낸 무적 황군은 수치스러운 퇴각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적군이 죽은 놈 다친 놈들을 모두 거두어 가지고―맞들고 업고 곁부축하고―죽지가 부러져서 패퇴하는 꼴을 내려다보고 승전에 고무된 항일 전사들은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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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저녁밥들을 먹은 뒤에 눌러앉아서 노래들을 부르는데 처음에는 장엄한 〈인터내셔널〉을 부르다가 비꾸러져서 〈방아타령〉을 부르고 〈방아타령〉에서 또 비꾸러져서(벗어나서) 〈사발가〉를 부르다가 〈사발가〉에서 아주 비꾸러져서 유행가 나부랭이를 잡스럽게 불러대며 한동안 즐기었다.
김학철이 조선의용대에서 마지막으로 경험한 전투는 화북성 호가장이라는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일본군과 여러 날 대치하면서 전투를 이어가던 어느 날, 꽤 큰 전과를 올린 날이 있었다. 그날 밤, 부대는 뒤풀이를 거하게 하고는 잠들었는데, 그날따라 긴장의 끈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가를 피로 치러야 했다.
다들 고단하여 세상 모르고 잠들을 자고 있을 즈음 유신이네 분대가 들어 있는 집 캄캄한 헛청간에서 조심스러운 부스럭 소리가 났다. 뚜껑을 들어 내려놓은 관 속에서 잠을 자던 유빈이가 몽유병자처럼 부스스 일어나더니 기척 없이 각반을 치고 탄대를 두르고 또 총까지 집어들었다. 그리고 반쯤 열려있는 사립짝을 소리 없이 빠져나와 짙은 안개 속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
“동아상사에서 출장을 나갔던 신용순이가 돌아왔습니다!”
‘동아상사’라는 것은 일본군 특무 기관의 간판용 별칭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쓰이는 ‘출장을 나갔던’이란 말은 적지敵地에 ‘파견되었던’ 또는 ‘잠복하였던’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유빈이는 일본 특무 기관의 파견을 받고 항일 부대 안에 잠복하였던 밀정 신용순인 것이다.
첫닭울이에 경무장을 한 일본군 한 개 중대가 역시 한 개 중대의 황협군을 뒤딸리고 유빈 즉 신용순의 길잡이로 호가장을 향하고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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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의 기습작전―호가장은 일본군과 황협군에게 삼면 포위를 당한 것이다!
아침 안개가 걷히며 말며 하는 가운데 처절한 혈투가 벌어졌다. …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나를 죽이는 판이었다.
…
손실은 전사(戰死)가 넷, 중상이 둘, 경상이 여섯이었다. 그 밖에 실종된 대원 하나가 있어서 온갖 군데를 다 찾아보았으나 종시 나타나주지를 아니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신비스럽게 종적을 감춰버린 대원―유빈이는 이때 본성명 신용순이로 되돌아갔었기 때문이다(그 후 신용순이는 동아상사의 사원으로 복직을 하여 상여금을 탁탁하게 타가지고 흥청망청하느라고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네 주검 중에서도 마점산의 주검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였다. 시체들을 산 밑에 그러묻은 뒤에 선장이가 무덤을 향하여 군모를 벗고 머리를 숙이니 옆에 섰던 장준광이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그는 난투장에서 군모를 어데다 날려보냈는지 맨머릿바람이었다). 다른 전우들도 다 숙연히 머리를 숙였다.
태항산에서의 이와 같은 전투의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긴장을 풀고 있었던 데다 첩자까지 더해져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음에도 퇴각 작전은 기적이라 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부대가 전멸할 수 있었던 위기였음에도 퇴각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학철은 이 전투에서 왼쪽 대퇴골이 4분의 1쯤 깎여나가는 관통상을 당한다. 총에 맞아 쓰러지며 머리를 부딪혀 의식을 잃은 후 일본군의 들것에 실려 포로로 잡혀간다.
이후 김학철은 관통상을 당했음에도 수술이 아니라 간단한 응급처치만 받고 방치된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국민으로서 사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의 적용을 받아 정치사범이 수용되는 나가사키 수용소로 보내진다. 후에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지만, 정치범 수용소는 일반 수용소와는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운 좋게 살아남아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김학철은 귀국 이후에 남한에서 활동을 이어가지만, 다리가 절단된 상황이었기에 남한에서 좌익활동을 펼치기에는 제약이 많다고 판단해 월북하고, 한국전쟁 발발 후 중국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중국에서 자리 잡고 작품활동에 매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56년부터 중국에서는 반우파투쟁이 전개되고, 다양한 사상과 예술이 펼쳐질 필요가 있다는 “백가쟁명, 백가제방”의 필요성을 역설한 김학철은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노동 개조를 당한다.
노동 개조의 와중에도 그는 동유럽에서 일어난 탈스탈린운동에 주목하면서 『20세기 신화』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반우파투쟁’에서 ‘문화대혁명’ 전야까지 극좌노선이 판치던 중국사회를 배경으로, 한 지도자의 독재와 그에 대한 개인숭배 그리고 이로 인해 민주주의 원칙이 여지없이 파괴되고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 비판한 정치소설이다. 김학철은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게 이 소설 원고를 우연히 발각당해 7년 4개월 동안 유치장에 갇혀 밤낮으로 고문을 당했다. 그는 7년 4개월이라는 기록적인 예심 후 산송장에 가까운 상태였음에도 재판정에서 꼿꼿한 모습을 보였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예심으로 7년 4개월을 살았지만 2년 8개월을 더 채워야 했다.
1977년 출소 후 3년이 흐른 뒤, 김학철은 『20세기 신화』가 반동적이지만 출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는다. 이후 20편의 단편소설, 100여 편의 산문 등 집필에 매진한다. 이렇듯 세상의 풍파에 맞서 올곧게 살아온 사회주의자 김학철은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2001년 9월 15일 사망한다.
여기서 이번 글은 마무리하지만, 다루지 못해 못내 아쉬운 내용이 있어 마지막으로 언급해두려 한다. 우선 항일무장투쟁에 있어 또 다른 중요한 단체인 동북항일연군을 다루지 못했는데,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들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형상화한 문학작품을 찾기 어려워 이번 글에서는 싣지 못했다. 또 1930~1940년대 조선 사회주의 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경성콤그룹에 관해 다루지 못했다. 이 부분은 특히 아쉽다. 경성콤그룹은 1930년대 후반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 아래서도 끝까지 국내에 남아 민중 속에서 혁명적 대중조직(RMO) 건설과 당 재건, 반파쇼 인민전선 구축이란 과제를 포기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사회주의그룹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의 활동이 워낙 은밀했기에 이들의 활약상을 그린 당대의 작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에야 이들의 역사를 조명하는 저작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이런 작품들도 다뤄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올랜도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후편)
1. 들어가며
저자는 스탈린 이후 혁명이 굴절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특히 그 속에서 나타나는 개인들의 비극을 다루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독재, 폭력의 문제를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잘못으로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소련 사회가 역사적 시기마다 마주했던 곤란과 그때마다 취했던 선택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함축되어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꼽아 보았다. ‘신경제정책의 중단을 어떻게 볼 것인가?’, ‘농업 집단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숙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시의 국민적인 단합이 소련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전후 스탈린의 개혁 거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스탈린 사후에도 소련 시민들은 왜 오래도록 침묵했는가?’ 2. 신경제정책의 중단: 스탈린주의의 전조
저자는 이 과정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 설명한다. 실제로 1920년대 소련사 연구에서는 네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다. 기존 연구 경향은 네프를 1917~1921년의 혁명과 내전, 그리고 1930년대 ‘스탈린 혁명’ 사이에 있었던 ‘숨 쉴 틈’으로 규정했다. 즉 전시 공산주의와 스탈린 혁명 사이에 있었던 혁명의 휴지기라는 의미다. 한편, 부하린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미국의 학자 스티븐 코헨은 네프를 전시 공산주의의 가혹함과 스탈린주의의 공포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 간주했다. 네프는 ‘숨 쉴 틈’이 아니라, 점진적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영구적 모델이라는 것이다. 홀란드 헌터와 로버트 앨런은 소련이 네프를 유지했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 비슷한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계산하기도 했다.
저자는 네프의 성격을 규명하기보다는, 네프가 중단된 맥락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기층 볼셰비키와 대중적 차원의 지지와 결합한 스탈린이 권력 투쟁 속에서 부상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개인 상점의 가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많은 프롤레타리아는 네프에 반대했다. 네프에 대한 이들의 불신은 시장의 심각한 시세 변동으로 더욱 강화됐다. 농촌의 재화 부족으로 농민들이 식료품 공급을 보류할 때마다 가격이 급등하며 혼란이 나타났다.
네프 지지자들은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부하린은 국가 지출의 확대가 산업 투자율을 둔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시장 메커니즘과 농민들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조달 가격을 인상하고자 했다. 통합반대파(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는 농민에게 더 양보하는 것이 사회주의 산업화라는 소련의 목표를 연기할 뿐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국가가 소비재 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식량과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의 곡물을 일시적으로 징발하고, 그런 다음에 시장 메커니즘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부하린 편에 일시적으로 섰다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패배한 이후에는 네프를 등졌다. 스탈린은 곡물 위기를 ‘쿨라크(부농, 농업자본가)들의 파업’ 때문이라고 비난했으며,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전 시기의 징발 정책으로 되돌아가자고 요구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수사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폭넓은 호소력을 발휘했다. 많은 사람이 네프가 사회주의 이상에서 후퇴했다고 생각했고, 자본주의 경제의 부활을 가져올까 두려워했다. 한 볼셰비키는 “우리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화폐가 단번에 일소된다는 믿음 속에 성장했다. 만일 내전 동안 폐지되었던 화폐가 다시 나타난다면, 부자도 다시 나타나지 않겠는가? 우리는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파멸의 길 위에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이 질문을 근심 어린 마음으로 자신에게 던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전시 공산주의 방식으로 복귀하자는 스탈린의 요청은 1917~1921년의 혁명적 싸움에 참여하기에는 어렸으나, 내전 이야기에 바탕을 둔 투쟁 숭배 분위기 속에 교육받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스탈린은 내전을 영웅적 시기로, 소련을 국내외 자본주의 적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국가로 보는 낭만적 인식을 이용했다. 또한 스탈린은 전쟁 공포를 조성했는데, 네프가 산업 장비를 마련하는 수단으로는 너무 느리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곡물을 조달하는 수단으로도 안정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1928~1929년에 당의 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한 부하린과의 경쟁에서, 부하린이 계급투쟁이 시간이 흐를수록 약화할 것이고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사회주의 체제와 융화할 것이라는 위험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나아가 이러한 견해는 당이 자본주의 적들에 맞서는 방어 체제를 느슨하게 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 적들이 소비에트 체제에 침투하여 내부에서부터 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로 나아감에 따라 부르주아의 저항은 반드시 강화되며, 그래서 “착취자들의 반대를 뿌리 뽑고 분쇄할”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단언했다. 저자는 이 대목이 이후 대숙청에서 억압을 합리화하는 주장의 전조라고 강조한다.
파이지스가 보기에 반 신경제정책 운동은 스탈린 혁명전쟁의 전초전이었다. 수천 명의 네프만(네프로 재산을 모은 신자본가)이 투옥되거나 집에서 쫓겨났다. 1928년 말까지 40만 개의 자영업체 중 절반 이상이 세금 때문에 사라졌다. 리셴치(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전락한 수많은 네프만과 그 가족들은 곤궁한 처지에 내몰렸다. 그들에게는 배급표가 지급되지 않았고, 결국 얼마 남지 않은 개인 상점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솟은 식품을 살 수밖에 없었다. 또 국영 주택에서 쫓겨났고, 자녀들은 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3. 공업화를 위한 농촌의 희생: 스탈린 혁명
공업화와 농업집단화로 대표되는 스탈린 혁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는 네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소련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논쟁적인 쟁점 중 하나다. 스탈린은 레닌의 진정한 계승자인가, 아니면 혁명의 배반자인가? 소련 내부에서의 논쟁을 먼저 살펴보자. 1980년대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네프를 시행한 레닌의 결정에 자신의 급진적 개혁을 비유했다. 하지만 당 보수파는 스탈린에 대한 공격을 혁명 이후 소련이 물려받은 유산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했다. 결국 정치국 내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으로 혁명 이후 역사 서술에 대해 이견이 발생했고, 급기야 1988년 고등학교 역사 시험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구에서도 스탈린 혁명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미국 정치학자 제리 호크는 1937~1938년의 대숙청을 제외하면, 스탈린은 레닌이 원하는 일을 했다고 규정했다. 모셰 르윈은 내전 이후 전자본주의적 양식으로 되돌아간 농촌은 사회주의 경제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레닌이나 스탈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즉, 호크와 르윈은 스탈린이 레닌을 계승했다고 보았다. 반면 캐서린 메리 데일은 스탈린 혁명의 기원을 레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곤경에서 찾았다. 세상을 반동과 진보라는 흑백논리의 충돌로 봤던 대중들이, 일자리가 없었던 시기에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약속했던 공업화를 열렬히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근간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스탈린 시대에 들어 혁명이 굴절되었다는 견해에 따라 농업집단화를 비판한다. 즉, 농촌의 해체, 그리고 쿨라크에 대한 탄압 과정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쿨라크로 낙인찍힌 유능한 농민들에 대한 탄압이 소련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저자는 농업집단화를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세력에 대한 분석을 덧붙인다.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생활방식을 철저히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다수 농민은 몇백 년 동안 지켜온 생활방식을 포기하는 것을 주저했다. 농민을 설득하지 못한 활동가들은 폭력적인 조치를 동원하기 시작했고, 스탈린이 ‘계급으로서 쿨라크 청산’을 요구한 1929년 12월부터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몰아넣는 운동은 전쟁의 형태를 띠었다. 지역 민병대, 특별 군대, 오게페우 부대가 동원되어 집단농장을 조직했다. 이들은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목표를 초과하는 것이 더 낫다”, “지나친 행위를 했다고 비난받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기억하시오. 그러나 만일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면, 조심하시오!”와 같은 압박을 했다. 1930년의 첫 두 달 동안 소련 농민의 절반인 약 6천만 명이 집단농장으로 내몰렸고, 집단화에 반대 목소리를 낸 농민은 쿨라크로 분류되어 집과 마을에서 쫓겨났다.
스탈린은 집단농장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쿨라크에 맞선 전쟁’을 활용했다. 스탈린의 쿨라크 박해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집단화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단화를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농민들이 집단농장에 가입하도록 추동하기 위함이었다. 쿨라크는 정의상 고용 노동을 사용하는 농촌자본가였으나, 1929년 이후 실제로 쿨라크로 몰려서 억압당한 상당수의 사람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저자는 네프 시기 농민이 자신의 노동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허용됐지만, 고용 노동 사용은 통제됐으며, 농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늘어난 1927년 이후에는 부유한 농민이 사유재산의 상당 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농촌자본가로 이루어진 ‘쿨라크 계급’이라는 개념은 환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허구적인’ 쿨라크 말살은 소련 경제에 재앙을 가져왔다. 쿨라크라는 명목으로 탄압받은 이들은 보통 마을에서 가장 근면한 농민들이었다. 쿨라크를 박해하면서 이들의 노동 윤리와 전문 기술은 사라졌고, 결국 소련 농업 부문은 출구 없는 사양길로 들어서게 된다. 스탈린의 쿨라크 박해는 경제적 고려라기보다 사실상 농촌 집단화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 탈쿨라크화 운동이 최고조에 올랐던 1930~1931년에 총 170~180만 명의 쿨라크와 그 가족들이 시베리아와 같은 소련의 오지로 추방됐다.
그렇다면 농민들은 쿨라크 박해에 저항했는가? 놀랍게도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마을 연대라는 러시아의 강력한 역사적 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특히 이례적이었다. 물론 거부 반응을 보인 지역도 있었으나, 농민 대다수는 이웃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보며 공포에 사로잡혀 소극적인 체념으로 반응했다. 농민들은 때로는 마을에서 누가 쿨라크로 없어져야 하는지를 회의를 통해, 혹은 제비뽑기를 통해 직접 결정했으며, 마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나 외따로 사는 농부, 과부, 노인과 같은 약자들이 그 대상이 되기 쉬웠다.
쿨라크 박해에 앞장섰던 자들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일명 ‘집단화주의자’ 대다수는 징집되었던 병사와 노동자였고, 이들은 농업집단화를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기를 갈망했으며, 쿨라크를 인민의 적으로 묘사한 선전을 통해 쿨라크를 향한 증오를 주입받았다. 몇몇은 공산주의적 열정에 휩싸인 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5개년 계획의 선전이 불러일으킨 낭만적 열의에 고무되어, 볼셰비키와 함께 인간의 의지만으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위해서는 구사회 세력과 치르는 격렬한 투쟁이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집단화주의자들은 쿨라크를 향한 폭력과 자신들의 유토피아적 믿음을 결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따라서 이들이 단순히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거나, “명령을 따르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으며 자기 행동을 합리화했다.
대부분의 농민은 쿨라크 박해는 묵인했지만 농업집단화에는 저항했다. 경찰에 따르면, 1929~1930년에 44,779건의 ‘심각한 소요’가 있었고 볼셰비키 농촌 활동가들이 공격받았다. 농민 시위와 폭동, 기관 습격, 방화와 함께, 집단농장 재산을 공격하고 교회를 폐쇄한 조치에 항의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체제는 농민들의 저항을 분쇄할 만큼 강력했다. 무력한 농민들은 집단농장의 징발을 막기 위해 가축을 도살하는 식으로 약자의 저항을 이어갔다.
농촌이 황폐해지자 스탈린은 집단화 운동의 일시적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1930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집단농장에 가입한 농가의 비율이 58%에서 24%로 급격히 감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집단농장을 떠나는 것은 어려웠으며, 사유재산과 농기구, 가축을 되찾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6개월의 불안정한 휴전 이후, 9월부터 스탈린은 집단화의 두 번째 물결을 개시했다. 스탈린은 1931년 말까지 농가의 최소 80%를 집단화하고 쿨라크들을 절멸시킬 것을 공언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4. 대숙청: 극단적 형태의 폭력
이와 같은 극단적 폭력의 기원에 대한 논의 역시 쟁점적이다. 스탈린 전기작가인 로버트 터커는 대숙청의 원인을 스탈린 개인의 심성과 개성에서 찾는다. 신경증에서 비롯된 편집증은 스탈린에게 자신이 레닌과 같은 위상을 갖는 혁명적 영웅임을 입증할 것을 강요했다. 스탈린은 진보를 가로막는 반역 분자인 고참 볼셰비키로부터 인민을 구원하는 영웅으로 자신을 상상했다는 것이다. 엘렌느 까레르 당꼬스는 거의 10세기 동안 지속했던, 폭력에 의존하고자 하는 러시아 정치 체제의 경향이 스탈린에게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혁명 발생 이후부터 이어진 테러가 스탈린에 이르러 법과 테러의 결합으로 죽음의 차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로 아치 게티는 소련 정부는 스탈린 하에서조차도 전체주의적이지 않았으며, 스탈린은 너무나 바빠서 숙청에 사사건건 관여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았다. 폭력은 오히려 당과 국가 기구의 하급 수준에서 일어난, “혼란에 대한” 급진적이고 “심지어 히스테리적이기까지 한 대응”이라고 보았다. 돈 라우니는 숙청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자신의 기대만큼 상향 이동을 하지 못한 소련 사회의 비 엘리트층이, 자신들의 승진을 막는 상급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행동하며 벌어진 비극으로 보았다. 파이지스는 이러한 관점들 중에서 몇몇 측면을 수용하고 있다.
우선 파이지스는 대숙청이 집중되었던 시기에 대해서 주목한다. 일각에선 대숙청의 기원을 1934년 12월에 발생한 레닌그라드 지구당 서기장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지만, 이러한 주장은 키로프 암살과 대숙청 사이인 1935년과 1936년의 고요한 소강상태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저자는 대숙청이 내부 위협에 대한 스탈린의 두려움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관점도 기각한다. 그 당시 엔카베데의 보고는 내부 위협이 다른 시기보다 1937년에 특별히 더 심각했음을 시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왜 대숙청이 고참 볼셰비키를 대상으로 한 전시재판, 정치 엘리트 숙청, 도시에서의 대규모 체포, 쿨라크 작전, 민족 작전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동시에 일어났는지에 주목한다. 이는 각각의 현상을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으로서 설명함으로써 대숙청을 별개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시각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함의한다. 저자는 대숙청이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통일된 작전이라고 판단한다. 즉 대숙청이 통제받지 않았거나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며, 스탈린 시기에 언제든 발생할 수 있었던 대혼란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았다. 더불어 돈 라우니가 묘사한 것처럼, 저자는 대숙청에 대한 시민들의 침묵과 방조와 더 나아가 적극적인 고발이 그 광기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 결과는 수많은 죽음, 체포, 그리고 고발을 두려워하면서 나타난 인간관계의 단절이었다.
파이지스는 대숙청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다가올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두려움과 소련을 위협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937년 스탈린은 소련이 유럽에서는 파시즘 국가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상황에 놓였다고 확신했다. 스탈린은 파시스트들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에 ‘파시스트 첩자와 적’이라는 제5열만이 아니라, 모든 잠재적 반대자들을 분쇄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이 소련에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로버트 터커처럼 대숙청의 원인을 스탈린의 개인적 결함으로 환원하지는 않지만, 파이지스 역시 적에 대한 편집증적 두려움이라는 스탈린 특유의 성격이 대숙청에 영향을 끼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두려움이 1932년 부인 나데즈다의 자살, 그리고 형제처럼 사랑한다고 주장한 키로프의 암살로 더욱 심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은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며 죽을 때까지 이러한 입장을 변호했다. 대숙청은 지도부가 전쟁 시기에 위험 요소인 당 내부의 동요자, 출세주의자, 숨은 적을 찾아내는 수단이었다. 숙청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고 불공정한 체포 역시 많았음을 인정하지만, 내부 충돌을 허용했으면 전쟁에서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고, 아마도 패배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카가노비치 역시 몰로토프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자와 동요자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5.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소비에트 체제와는 거리가 먼 요인들
파이지스에 따르면, 전시의 국민적 단합이라는 소비에트 신화와는 반대로, 소련 사회는 전쟁 동안 그 어떤 시기보다 분절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국가가 일부 소수민족들을 희생양으로 추방함에 따라 인종 분리가 악화되었으며, 사회 전반에 잠재되어 있던 반유대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런데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 요인은 일반 병사들의 활약이었다. 병사들을 싸우게 한 것은 두려움이나 영웅심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소비에트 모국이라는 추상적 관념보다는 특정 지역 사회, 현실 속 인간관계의 방어를 위해 더더욱 적극적으로 싸우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1941년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국민 의용군에 자원했다. 사실상 국민적 단합보다는 병사들 간의 동지애가 전쟁의 승리요인 중 하나였다. 병사들은 신뢰받는 동지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에 충성심을 느끼면서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들의 동지애는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발전했고, 이러한 신뢰는 개개인을 생존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퇴역 군인들은 동료 병사들로 이루어진 무리 속에서 전쟁 전에는 자신들의 삶에 없었던 ‘진정한’ 가족을 발견한 것처럼 회고하기도 한다.
일반 병사들의 활약 외에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쟁의 첫 1년이 지난 후 소련군 내부의 권위 구조가 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과 당의 개입이 군 사령부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지휘관들의 자율에 맡기는 게 가장 좋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8월 주코프가 최고사령관 대리로 임명됐으며, 전쟁 수행 정책의 전략적 계획과 운용은 점차 국가방위위원회의 정치인들에서 참모본부로 이전됐다. 정치장교를 비롯한 정치 지도위원들의 군사적 결정 권한은 급격히 축소됐다. 당의 통제에서 벗어난 군 사령부는 안정된 군 전문가 집단을 창출하며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전쟁 수행에서 100만 명이 넘는 징용 노동자들의 존재 역시 중요했다. 이들은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굴라크 죄수와 똑같은 노동 임무에 징용됐다. 이들 중 대다수는 소비에트 체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소수민족이었고, 소비에트 체제의 적으로 탄압받던 쿨라크도 포함되었다. 굴라크 노동은 전시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굴라크는 소련 탄약의 15%와 군복, 군 식량의 상당 부분을 생산했다. 50만 명의 죄수가 전선에 동원됨에 따라 1943년까지 감소했던 수용소 인구는, 1943년 말부터 막대한 인력을 동원하기 위한 대량 체포가 이뤄지면서 다시 급속히 증가했다.6. 전쟁 시기 해빙, 그리고 다시 스탈린주의로
하지만 자유가 확대될 것이라는 희망은 스탈린의 수많은 전후 정책하에서 무너졌다. 그 원인에 대해서 쉴라 피츠패트릭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국가 통제를 다시 부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당의 정치 문화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파이지스도 전쟁 기간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람들 사이에 유대가 형성됐고, 유럽이나 미국과 교류하는 등 소련 내에 잠시나마 해빙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분명한 사실임을 짚는다. 하지만 전후 스탈린이 정치 개혁을 거부하고, 긴축적인 계획경제를 추진하며 강제 노동을 강화하면서 통제가 복귀했다는 사실 역시 짚는다. 저자는 피츠패트릭이 언급한 당의 정치 문화를 체현한 새로운 중간 계급의 존재를 지적한다. 이들은 스탈린 시기에 출세를 위해 적어도 겉으로는 당에 복무한 전문가들로, 스탈린이 전후에 개혁을 거부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다.
전쟁 시기에는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표현의 자유가 생겼다. 사람들은 감정과 의견을 표출했고, 정치적 토론과 체제에 대한 비판까지 이루어졌다. 군대의 병사 집단, 그리고 식품을 사려고 늘어선 줄에서 비판과 토론이 즉석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와 상호작용이 확대됨에 따라 시민 정신과 국민 의식이 부흥했다. 파이지스는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가치관의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고, 모든 시민적 의무는 국가의 명령으로 수행됐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시민적 의무는 나라의 방어라는 실질적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는 국가의 통제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을 단합시켰으며 새로운 공적 태도를 낳았다.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 상당수가 유럽에 들어가 다른 생활방식에 노출되면서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보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유럽의 생활 수준과 우리 소련의 생활 수준 사이에 가로놓인 격차는 감정적, 심리적 충격을 안겨주었고, 수백만 병사들의 관점을 바꾸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서구 세계를 접한 병사들은 전쟁이 끝나면 집단농장이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또 소련이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소련 사회 내부도 서구의 영향력에 노출됐다. 미국과 맺은 무기 대여 조약을 계기로 할리우드 영화, 서구의 서적과 물품이 소련에 유입됐고, 수많은 사람이 소련의 거짓 선전이 아닌 서구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됐다. 모스크바에는 레스토랑과 상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전쟁이 끝나면 생활이 좀 더 편해지고, 소련이 서구에 문호를 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부채질했다. 심지어 경제 개혁조차 토론의 주제가 됐으며, 일부 경제학자는 전쟁 후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시장으로 복귀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스탈린은 모든 정치 개혁 사상을 거부했다. 1946년 2월 9일, 전후 시대에 들어와 처음 한 중요한 연설에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체제가 느슨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스탈린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조짐이 보이면 강력히 타격하라고 부하들에게 주문했다. 전쟁 이후 군대와 당 지도부에서 ‘자유주의 개혁가’, 혹은 1945년 승리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된 최고위 지도자들을 잘라내는 숙청도 개시됐다. 이 과정에서 승장인 주코프 원수가 우랄 지역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전후의 정치적 탄압은 긴축적인 계획경제로 복귀하는 흐름과도 연계됐다. 국제적으로 긴장이 높은 상황에서 1946년 새로운 5개년 계획이 도입됐다. 하지만 생산 목표는 여전히 비현실적이었고, 전후 경제에서 강제 노동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전후 스탈린주의의 복귀에는 새로운 유형의 중간 계급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엔지니어, 행정가, 경영자 계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스탈린 체제가 의식적으로 추진한 정책(고등교육 제도의 확대)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은 교육을 더 많이 받았고, 덜 이데올로기적이었으며, 더 안정적이었다. 또한 전문적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높은 직책을 보장받았고,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비순수성 때문에 강등당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스탈린은 전후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압력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이들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의 충성을 획득하기 위해 안정되고 급료가 높은 직업, 개인 아파트와 같은 부르주아적 열망을 충족시켜줬다.
이들은 출세하기 위해서 적어도 겉으로는 체제의 요구에 순응했다. 당시 가장 흔한 소련의 관리 유형은 공산주의 신봉자나 열성분자가 아니라, 당이나 당의 목표를 불신하더라도 당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출세주의자였다. 일부는 성공, 혹은 사회적 지위의 유지를 위해 과거의 이력을 숨기는 선택을 했다. 이와 달리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출세를 위해 엔카베데의 정보원이 되기도 했다.7. 스탈린 사후에도 여전히 속삭이는 사회: 소련 시민들은 왜 침묵했는가?
그러나 스탈린 체제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전히 침묵했다. 흐루쇼프 시기의 해빙이 지속될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체포될 수도 있다는 공포는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사람들을 수십 년 동안 침묵시킬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실제로 해빙기는 짧았고 제한적이었다. 또 흐루쇼프 시기 내내 정권은 소비에트 체제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스탈린 시기 억압에 대한 어떤 논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60년대 초 해빙이 절정기였을 때조차도, 스탈린 시기 수백만 명이 죽거나 억압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공식적 인정도, 정부의 사과도 없었다. 마지못해 복권해준 희생자들에게 적절한 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은 불신과 적대의 대상이 됐다.
시민들의 예상처럼,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리면서 해빙 분위기는 돌연 끝났고 다시 검열이 강화됐다. 승전 20주년 기념으로 위대한 전쟁 지도자로서 스탈린의 명성이 되살아났고, 정권은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며 스탈린 시기 억압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았다. 다시 체포될 수도 있다는 위협은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들을 1956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더욱 무겁게 침묵시킬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공포 정치는 종결됐지만, KGB(국가보안위원회)는 여전히 엄청난 범위의 가혹한 처벌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석방된 죄수였던 지나이다 부슈예바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끊임없는 걱정과 다시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1981년에 노동수용소 수감 기록이 없는 새 여권을 받은 뒤에야 두려움이 가시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딸에 따르면 “일생에 걸쳐, 세상을 하직하는 바로 그날까지도 공포 체제가 부활할지 모른다고 무서워”했다고 한다. 마리야 부트케비치는 오늘날(2004년)까지도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어딘가로 멀리 보내질까 봐 계속 불안에 떨었다. 스베틀라나 브론시테인은 노동수용소가 등장하는 악몽을 계속 꾸며, 서류를 작성해서 미국 대사관 앞에 줄을 설 기력만 있다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고 말했다.8. 나가며
하지만 전쟁 시기에 스탈린주의의 공백이 일제히 드러났다. 전시에 소비에트 이상을 중심으로 한 국민적 단합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당의 통제하에 있던 소련군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를 대체하여 소련을 승리로 이끈 것은 스탈린 체제가 의식적으로 부정해왔던 개인 간의 관계들이었다. 자기 집과 지역 사회, 그리고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한 일반 병사들의 활약이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기간 해빙의 시기가 나타나며 시민들이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를 품기도 했지만, 스탈린이 개혁의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또다시 사회는 전쟁 이전의 억압적 체제로 회귀했다. 여기에는 체제의 존속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새로운 중간 계급의 등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자는 특히 대숙청에 주목한다. 대숙청이 보여주는 충격적인 수치를 보면, 왜 소련 시민은 이러한 극단적 폭력을 경험하면서도 스탈린의 통치에 순응했는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에도 입을 열지 못했는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스탈린 혁명이 본격화되던 농업 집단화와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사회주의 경제 건설이라는 대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 중심으로 계획이 제출되고 실행됐다. 이 과정에서 소련 시민은 주체적인 위치에 있지 못했다. 누군가는 사회주의 혁명을 ‘현대화’로 이해하며 스탈린 혁명의 충실한 지지 기반이 됐고, 누군가는 자유와 권리를 억압당하고 체제에 순응하기를 요구받았다. ‘혁명의 완수’, ‘혁명 조국의 수호’가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졌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견의 배제, ‘인민의 적’에 대한 억압이 용인됐다. 이러한 배제와 억압을 합리화하는 과정은 결국 스탈린 시기 억압적 체제, 나아가 극단적인 폭력의 동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속삭이는 사회’였다. ●
또한 2021년 말에 발표한 경제전망에서도 이렇게 언급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굴리에모 카르케디와의 공동연구를 바탕으로, 미국이 향후 수년간 3% 이상의 인플레이션과 2% 미만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생산성이 하락 중이고 유동성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2022년은 세계 각국이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지지 않게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조정할 수 있을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시기다.”
이제는 2023년 경제전망에서, 이미 폭발한 인플레이션의 충격과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이 가하는 경기침체 위험을 살펴보아야 할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2023년에 특히 주목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이 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연준의 금리인상, 양적 긴축이 단행된 후, 자금경색과 금융 불안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연준의 결단이 지속될 것인가.
둘째, 중국의 부동산 시장 악화, 소비 위축이 정부의 적극적인 부동산 대책, 소비 진작책으로 역전될 수 있을까. 정부가 부동산 시장을 구제하려는 구제금융 정책은 부동산 거품을 키우는 결과를 낳지 않을 것인가.
셋째, 대외경제 상황에 취약한 한국경제는 세계적 통화긴축, 경기침체를 버텨낼 수 있을까. 수출 부진과 투자 부진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부동산 시장의 하방 압력은 경제 전반에 걸쳐 어떤 파급효과를 낼 것인가.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핵심 문제들을 살펴보고, 이러한 문제가 얼마간 관리된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인 저성장, 이른바 ‘장기침체’라는 본질적 문제가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기저에 깔려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도록 하겠다.1. 2023년 세계경제 전망
1) 국가별 전망
먼저, 선진국들을 살펴보면, 경기침체가 곧 닥칠 듯하다(그림1). 미국의 2022년 GDP는 2021년보다 1.7% 상회했으나, 2023년에는 2022년보다 0.5% 하락할 전망이다. 유로지역 경제는 2023년에 수축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는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제한으로 타격을 입었다. 영국의 경우, 에너지 위기, 고인플레이션, 기타 요인이 경제를 짓누르며, 최근 데이터는 이미 경기침체가 진행되고 있다고 시사한다. 일본의 경우, 인플레이션이 온건하고 따라서 통화긴축이 별로 필요 없지만, 다른 나라들의 경기감속 때문에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행이 11월 24일 발표한 「경제전망」에서는 2023년 미국의 GDP 성장률을 0.3%, 유로존 –0.2%, 일본 1.3%, 중국 4.5%로 내다보았다.)
신흥시장국도 2023년에 대부분 부진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경제부양책이 코로나 폐쇄에 따른 상당한 장애와 부동산 부문의 하강을 상쇄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 결과 경제성장이 계속해서 정부 목표에 밑돌 가능성이 크다. 인도는 팬더믹 취약성에서 회복하기 시작했으나, 올해의 성과가 통화긴축과 외부역풍으로 약화될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상당한 경제적 파급효과와 제재로 인해 계속 고통을 받을 것이다. 브라질의 경제적 성과는 정치적 교착상태로 인해 손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룰라 후보에게 1.8%p 격차로 패배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결과에 불복하고 지지자들이 대선 후 3주 이상 폭력을 동반하는 강력한 시위를 전개하고 있다. (룰라 당선인은 친시장 성향의 부통령 후보와 출마했고, 집권 당시에도 재정안정과 아마존 환경보호에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그의 당선이 경제적 성과를 불러올 것이라 기대하는 흐름도 있다. 그러나 브라질의 정치적 양극화가 워낙 격렬하므로 정책집행에서 큰 갈등과 충돌을 예상할 수 있다.)2) 미국의 인플레이션 전망
미국의 핵심 이슈는 거의 1년에 걸친 경제성장 감속이 주목할 만한 인플레이션 하락을 낳지 못했다는 점이다(그림2). 연준은 정책금리를 올렸고, 금융긴축이 이어졌다. 주택수요가 하락했고, 소비자 지출도 감소했다. 그러나 미국 노동시장은 여전히 타이트하고, 임금성장은 팬더믹 이전에 비해 여전히 빠르다. 나아가 노동공급이 증대하여 노동시장이 느슨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없어 보인다.
가장 최근의 상황을 보면, 2022년 10월 중 단기(1년) 기대인플레이션이 7개월 만에 상승세로 돌아서고, 장기(5년) 기대인플레이션도 4개월 만에 다시 상승하였다. 이를 반영하여, 한국은행의 보고서, 「최근의 미국경제 상황과 평가」(2022.11.)는 “적극적인 통화긴축에도 불구하고 서비스관련 가격은 오히려 상승세가 확대되고 기대 인플레이션까지 오르는 등 높은 인플레이션 지속 가능성이 커진다”고 평가했다. 현재 조건을 볼 때, 연준의 금리인상 속도와 폭이 온건해질 것이라고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에 따라 미국경제의 연착륙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미국 실업률은 2022년 8월 3.7%에서 상승하여, 내년에는 5.5%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다만 이렇게 실업률이 올라갈 경우, 코어 개인소비지출(PCE) 인플레이션은 2022년 4분기 동안 4.6%에서 2023년 4분기 동안 3.6%로 완만해질 가능성이 언급되기도 한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견해에 따르면, 경기침체가 불가피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경기침체는 역사적 기준에서 보면 온건한 편에 속한다. 모든 소득분포 수준에서 (즉 소득이 높건 낮건 간에) 개별 가계의 자산이 팬더믹 이전 수준보다 높고, 기업 이윤도 역사적 기록 중에서 높은 축에 속하기 때문에, 가계와 기업이 이러한 수준의 경기침체는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반면 미국의 전 재무장관 래리 서머스는 이미 2022년 6월 21일 시점에 훨씬 더 어두운 예측을 한 바 있었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면 실업률이 5년간 5%를 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2년간 7.5%의 실업률, 5년간 6%의 실업률, 아니면 1년간 10%의 실업률을 겪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머스는 10월 31일에 발표한 글, 「인플레이션 억제가 최우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멈출 수 없다」는 글에서도 미국의 거시경제가 처한 심각성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 지난 75년을 통틀어 가장 복잡한 거시경제적 도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물론 현재는 실업률이 낮고, 그래서 2007~9년 금융위기나 1970년대 인플레이션만큼 암울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서로 얽혀있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코어 인플레이션율이 여전히 7%에 가까우며 하락하지 않고 있다. 둘째, 인플레이션의 역기능과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의 역기능이 결합함으로써 2023년에 경기침체가 개시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최근 연준은 실업률이 4.4%를 넘지 않고서도 인플레이션이 2% 목표치로 내려올 수 있다고 암시했는데, 이는 타당성이 없다. 셋째, 연준은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수준으로 이자율을 올렸다. 시장은 충격을 받아 휘청거렸는데, 이는 국채시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다른 시장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줄 가능성이 있는 수준이었다. 넷째, 미국의 이자율이 오르고 기록적인 달러 강세가 나타나자 세계경제 모든 곳에서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상황이 완전히 종식된 것도 아니며, 이번 겨울에 발병이 늘어날 수 있다.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장기적인 코로나 상황으로 고용에서 철수한 것으로 추산되며, 나아가 코로나의 영향으로 미국의 생산성 성장이 둔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8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비농업부문에서 시간당 산출로 측정된 2분기 노동생산성은 전년 대비 2.5% 하락했다. 반면 단위노동비용은 급상승하여, 강한 임금압박이 지속되고 있다고 시사했다.)
평상시라면 이러한 문제 각각이 매우 중요한 의제로 다뤄졌을 것이다. 서머스는 이러한 문제들이 서로 얽혀있는 복잡한 상황에서 정책입안자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질문한다. 그는 정책목표는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가 최대한 많이 고용되고, 가능한 한 높은 소득을 얻는 것이다. 나머지는 오로지 고용과 소득이라는 목표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고려해야 한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연준 의장 폴 볼커가 심각한 경기침체라는 비용을 무릅쓰고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구사한 것도, 그가 노동자의 고용과 소득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인플레이션 억제가 늦어질수록 고통이 가중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원칙이 현 상황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업의 구인공고(job opening)가 최대 수준에 도달하고 노동부족이 심각해 노동자의 협상력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소득은 상당히 감소했다. 인플레이션이 진정되지 않으면, 노동자의 구매력이 증가하기 어렵다.
따라서 서머스는 연준이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다. 연준 의장 파월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통화정책을 충분히 긴축적으로 끌고 가겠다고 약속한 바 있는데, 사람들이 연준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신뢰할수록, 인플레이션 억제가 성공할 가능성도 커지고, 고통도 감소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바이든 행정부가 연준에게 이자율을 높게 올리지 말라고 정치적 압력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매우 유익하다.
그런데, (폴 크루그먼처럼)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던 논자들 중에는 연준의 통화정책 긴축이 과잉될 경우, 과도한 경기침체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다. 물론 민간주택 부문 데이터나 여타 일부 지표는 2023년에 인플레이션이 진정될 것이라고 암시하기도 하지만 아직 확신을 줄 정도는 아니다. 혹자는 기대 인플레이션 상승이 억제되고 있으므로 연준이 좀 느긋해져도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역이다. 즉 서머스는 연준이 예상보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기대 인플레이션 상승이 억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통화정책 긴축이 당연히 독성효과를 동반하므로 여러 정책대응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첫째, 미국 국채시장이나 여타 시장의 위기가 나타나기 전에 정책당국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은행 부문에 대한 규제가 강화된 데 비해 비은행 금융부문에 대한 규제는 미흡한 측면이 많기 때문에, 다음번 위기는 비은행 금융부문에서 출현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적절한 규제조치가 필요하다. 둘째, 1980년대나 2009년 금융위기 당시 나타난 라틴아메리카의 부채위기와 같은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 따라서 신흥시장 국가들을 위한 채무 구조조정, 금융지원책을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좀 더 살펴보자. 3) 연준의 양적 긴축 이후: 금융불안과 기업의 자금경색
2022년 5월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는 0.5%p의 금리인상(빅 스텝)을 단행하면서, 동시에 양적 긴축(quantative tightening, QT)을 실시한다고 공식화했다. 여기서 양적 긴축은 양적 완화(quantative easing, QE, 수량 완화)의 반대라고 볼 수 있다. 양적 완화 정책은 연준이 시장에서 국채나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함으로써, 긴급하게 유동성을 주입해 채권금리를 낮추고 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하는 정책을 뜻한다. 반대로 양적 긴축은 보유자산의 재투자 중단이나 보유자산의 매각을 통해 연준의 자산과 부채(즉 대차대조표 규모)를 줄이는 정책을 뜻한다. 이럴 경우 시중의 유동성을 흡수하고, 채권의 금리를 높인다.
연준이 5월에 발표한 방식은 보유자산의 재투자 중단이었다. 즉 만기가 도래하는 국채나 MBS를 만기정산을 하는 방식으로 보유채권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연준은 줄여나가는 양을 국채의 경우 월 300억 달러에서 시작하여 3개월 후 600억 달러로 하고, MBS의 경우 175억 달러에서 시작하여 3개월 후 350억 달러로 한다고 발표했다. 이럴 때 국채의 발행자인 재무부는 재정균형을 이루고자 한다면 매달 300억 달러(9월 후는 600억 달러)의 국채를 새로 발행해 연준이 아닌 다른 주체에게 팔아야 한다.
여기에다가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야심 찬 재정지출 프로그램에 따라 매년 1조 달러의 재정적자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이 달러 강세 기조에 따라 자국 통화 약세 흐름을 방어하기 위해 환율 개입에 나설 때, 각국 중앙은행은 미국 국채를 팔아 달러를 조달해야 한다.
따라서 이처럼 어마어마한 미국 국채와, 그에 덧붙여 MBS를 미국 민간과 해외부문이 어떻게 흡수할 것이냐는 문제가 떠오른다. 민간과 해외부문이 미국 국채물량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유동성이 증발할 경우,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미국 국채 가격이 추락하고 시장이 마비되면서 금융시장 전체가 불안에 빠질 위험이 있다.
또한 세계적 수준에서 달러 유동성이 위축되면서 기업의 자금경색이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할 수 있다. 기업이 채권을 발행해서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여건도 악화하고, 은행의 대출기준이 강화되면서 은행대출이라는 간접 조달 경로로 좁아지고 있다.
국제금융센터가 발표한 「주요국의 기업부도 증가와 전망」(2022.11.22.)에 따르면, 주요국의 기업부도 건수는 코로나 발생 이전보다 대체로 낮은 수준이지만, 올해 2분기 이후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점차 증가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이어진 저금리 여건에서 존속할 수 있었던 한계기업, 중소기업이 재정, 통화정책의 동시적 긴축과 경기둔화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다. 또한 회사채의 디폴트가 증가할 경우, 채권시장의 불안이 확대될 것이다.4) 미국의 통화정책과 근린궁핍화
다른 한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모리스 옵스트펠드는 「세계적 조정이 없는 통화정책이 역사적인 세계적 경제둔화라는 위험을 낳는다」(2022.9.12.)에서 미국 통화정책의 국제적 측면을 분석한다. 먼저 그는 1980년대의 반인플레이션 정책이 ‘근린궁핍화’(beggar-thy-neighbor), 즉 이웃국가를 가난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 이자율을 올리면, 한국의 통화는 그에 대비해 가치가 하락한다. 한국의 수출이 미국 통화로 이루어진다면, 한국의 수입물가가 올라갈 것이다. 즉 미국의 통화 긴축은 인플레이션을 무역상대국에 수출함으로써, 근린궁핍화 효과를 냈다는 뜻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미국이 이자율을 올릴 때 다른 나라 중앙은행의 고금리 정책도 고려하여 너무 과도한 수준에 이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달리 말해, 외국의 중앙은행이 이자율을 올리면 그 나라의 유휴수준이 높아지며, 그 나라로부터 수입하는 상품의 가격이 낮아져서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나라의 모든 중앙은행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즉 고금리 정책으로 가면 다른 나라들의 금리상승 효과를 한층 더 강화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경기침체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타당성이 있으나, 이를 고려한 각국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적정 수준을 계량적으로 도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또 한편, 서머스와 같은 논자는 과도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보다 과소한 정책을 오히려 우려한다는 사실을 볼 때,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에 대한 논란은 불식되지 않을 것이다.5) 중국의 부동산 위기
한국은행은 「경제전망」(11.24)에서 제로코로나 지속, 부동산 시장 침체로 경기부진이 당분간 이어지리라 전망했다. 올해 중국의 (전년동기대비) GDP 성장률은 1/4분기 4.8%, 2/4분기 0.4%, 3/4분기 3.9%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은 내년 전망치를 4.5%로 내놓았다. 그런데 중국 경제의 부진한 실적은 단지 제로코로나 정책과 같은 일시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올해 10월 26일 《월 스트리트 저널》은 중국이 ‘중간소득국가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기고문을 내놓았다.
중진국 함정이란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 초기에는 ‘후진성의 이점’을 활용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보이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하여 중진국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이러한 이점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여기서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생산성 상승과 자체적인 기술혁신을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모형을 구축해야 하나, 숱한 개도국이 이에 실패하여 장기간 중진국 수준의 국민소득에 머물게 된다. (중진국 함정은 뒤에서 한국경제를 언급할 때 다시 나온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시진핑 주석의 독주체제, 강압통치가 강화될수록 중국의 장기적 성장전망은 어두워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미 중진국 함정에 접어들고 있는 와중에, 국유기업이 늘어나고 국가자원의 관료적 배분이 확대되면서 비효율과 낭비가 커지고, 혁신역량이 감소한다는 의미다.
중국의 부동산 부문은 이러한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베이징의 정책당국이 GDP의 고성장을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인프라 투자와 주거용 부동산 활황 덕분이었다. 지방정부는 토지매각과 부동산 개발회사의 일자리에 큰 덕을 보았다. 개발 붐에 따른 부동산 가격 상승이 GDP의 25% 수준을 뛰어넘고, 가계소득 성장의 75%를 차지하는 것은 불건전하고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주택가격 폭락으로 가계소득이 줄고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줄었다. 그러면서 소비지출이 줄고, 곤경에 처한 대형 부동산회사가 디폴트에 빠지게 되었다. 주택을 분양받은 사람들은 완공되지도 않은 아파트 대출금 상환을 거부하고 있다. 정부는 소비 진착책을 펴고 부동산회사에 대한 구제금융에 나섰지만, 상황이 빠르게 개선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이외에도 중국경제가 처한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면서, 중국은 GDP 규모에서나 세계적 생산허브, 수출대국으로서의 위상에서나 여전히 경제대국으로 남겠지만, 중진국 함정에 빠진 채로, 세계적 불안정성을 유발하는 진원지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금 당장 위기의 폭발점으로 꼽히고 있는 중국의 부동산 시장 상황을 좀 더 살펴보면, 15위 부동산 개발 업체인 쉬후이는 10월 말 만기였던 4억 달러(약 5,554억 원) 해외 채무 상환에 실패한 뒤 11월 1일 상환 연기를 발표했다. 쉬후이는 정부의 보증을 받았는데도 상환에 실패했다. 11월 8일 쉬후이의 2024년 만기 채권은 시장에서 96센트에 거래되고 있다. 올해 1월만 해도 15달러에 거래됐는데 1년도 안 돼 가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같은 날 중국에서 가장 큰 부동산 개발사인 비구이위안의 2024년 만기 채권도 1.59달러에 거래돼 지난 1월보다 89% 급락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중국의 달러 표시 역외채권의 최근 1년간 디폴트율은 5.79%를 기록했다. 작년 12월만 해도 2.42%였지만 이후 급등해 지난 7월부터 4개월 연속 6%를 넘기기도 했다. 문제는 부동산 업체들의 대규모 채무 만기가 계속 도래한다는 점이다. 블룸버그는 올 연말까지 중국 부동산 업계의 국내외 채무 537억 달러(약 74조 3000억 원)에 대한 만기가 도래하고, 내년까지는 최소 2,920억 달러(약 404조 7,000억 원)를 갚아야 할 것으로 본다. 미국 투자사 루미스세일즈는 “중국 부동산 업계의 달러 채권 위기가 심각해져 더는 분석이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빚을 상환하기 위해 필요한 수입은 오히려 줄고 있다. 지난 9월 중국의 주거용 부동산 거래량은 9,200만㎡로 전월 대비 12.5% 상승하긴 했지만, 여전히 작년 동기의 66% 수준에 불과하다. 최근 3개년과 비교하면 55% 수준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달 미완성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주택이 중국 전역에 200만 채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중국 정부는 부동산 경기의 급격한 둔화를 막기 위해 다종다양한 지원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여전히 거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6) 소결: 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지속할 수 있을까
2023년 세계경제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초점은 결국 미국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이 금융불안, 기업의 자금경색과 부도 위기로 나타날 조짐이 확대될 경우에도 금리인상 정책을 지속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모인다.
지난 호 기관지에서 소개했듯이, 루비니 교수는 중앙은행의 금리인상이 경기침체로 이어질 때, 과연 중앙은행이 매파적 결단, 즉 고금리 기조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많은 분석가는 매파적 태도를 유지하리라 예측하지만, 루비니 교수는 중앙은행이 겁을 먹고 오히려 높은 인플레이션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왜 그런가? 세계 GDP에 대비할 때 민간, 공공의 부채수준이 과거보다 훨씬 높다. 1999년 200%에서 2022년 350%로 상승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이자율이 상승하면 대출이 많은 좀비 가계, 기업, 금융기관, 정부는 파산과 지급불능으로 빠질 것이다. (여기서 좀비란 죽었는데 산 것처럼 행동하는 자를 뜻한다. 곧 갚기 어려운 부채로 연명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즉 경기침체와 함께 금융위기의 가능성이 커지면 중앙은행이 매파적 입장을 포기할 공산이 크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공급요인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금리인상이 중단, 역전되면 스테그플레이션이 도래할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에는 스테그플레이션이 있었지만 대규모 부채위기는 없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부채위기가 있었지만, 그 후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 압력이 뒤따랐다.) 따라서 우리는 1970년대식 스테그플레이션과 2008년식 부채위기가 결합할 가능성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즉 금리인상이 중단, 역전되더라도 스테그플레이션이 장기간 이어진다면 부채위기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중앙은행과 정부는 사면초가에 빠질 수 있다.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통화정책을 공격적으로 완화하기도 어렵고, 정부가 부채위기 상황에서 재정수단을 활용하기도 어렵다. 달리 말하면, 부채위기를 우려하여 매파적 입장을 포기한다고 해도, 결국 부채위기를 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2. 저생산성과 부채위기라는 늪에 빠진 세계경제
1) 세계적인 생산성 하락
그런데, 더 본질적인 문제는, 경기침체를 감내해내면 세계경제가 팬더믹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빠른 경제성장으로 진입할 수 있냐는 데 있다. 그러나 코로나 위기가 발생하기 전인 2019년 시점에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아담 포젠과 제로민 제텔마이어는 『저생산성 성장을 직시하자』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지적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사실상 모든 나라는 평균 생산성 증가율이 감소했는데 이는 이전 10년 동안의 평균과 전후 장기 평균에 비해 크게 떨어진 것이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총요소생산성(TFP) 성장의 일시적 호황이 끝난 후 하락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다른 주요 국가에서는 1970년대 초에 시작된 [하락] 추세가 지속됐다.”
세계적인 생산성 하락은 신흥국으로서도 매우 어두운 소식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신흥국과 미국 사이의 1인당 GDP 격차는 좁혀졌지만 이는 대부분 신흥국의 빠른 물적, 인적 자본 축적에 따른 결과였다. 사실 신흥국의 총요소생산성 성장은 미국보다도 느렸다. 신흥국의 생산성 상승은 선진국의 생산성 상승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아마도 대체로 무역과 관련된 파급효과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선진국의 생산성 상승세가 둔화하면 신흥국은 이미 어려운 상황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신흥국이 생산성 상승을 가속할 수 없다면 선진국의 생활수준을 추격하는 일은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2) 저생산성과 재정위기
그런데 생산성 하락은 국가의 부채 문제에도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부채수준이 높을 때, 노동생산성 성장률의 하락, 인구 고령화, 이자율 상승은 국가채무의 지속 가능성에 심각한 위협을 가한다. 노동생산성 성장 하락이 정부 채무에 영향을 끼치는 각 요소, 즉 기초적자, 이자율-성장률 격차, 환율, 우발부채에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생산성 성장률의 하락은 정부의 기초적자를 늘릴 개연성이 매우 높다. 생산성 성장의 감속은 소득 성장의 감속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정부지출이 필요한 사람들의 수를 늘릴 것이므로 GDP 대비 정부지출은 증가할 것이다. 반면 GDP 대비 세금수입은 감소할 개연성이 높다. 누진세 구조에서는 실질소득이 증가해야 납세자의 과세율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자율과 경제성장률의 격차 문제를 보자. 개념적으로 생각하면, 이자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높다면 GDP 대비 채무의 비중이 증가하기 때문에 충분한 기초흑자가 필요하다. 반대로 경제성장률이 이자율보다 높다면 정부적자가 크더라도 채무가 안정화될 수 있다. 2007~2009년 금융위기 이후 이자율이 역사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정부의 채무 상환 비용을 크게 낮추었다.
그런데 노동생산성 상승률 감속은 이 격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노동생산성 상승이 감속하면 성장률 상승도 감속한다. 그런데 저생산성이 이자율에 미치는 영향은 다소 모호하다. 그렇지만 현재와 같이 생산성 성장은 감속하는데 이자율이 급격히 상승할 경우, 정부부채에 큰 부담을 줄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세 번째로, 환율을 살펴보자. 이자율의 하락은 환율의 평가절하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해외통화표시 채무를 지닌 국가에서 GDP 대비 채무가 추가로 증가한다는 함의를 지닌다. 부채의 추가적 증가 정도는 국내 이자율과 세계 이자율의 격차, 해외통화표시 채무의 비중에 달려 있다.
네 번째로, 우발부채를 보자. 1990~2014년, 80개국에서 우발부채의 현실화로 GDP 대비 평균 6%의 채무가 확대되었다. (최고 기록은 아시아 위기 당시 인도네시아로, GDP 대비 57%가 늘었다.) 한국은 우발부채와 관련된 재정비용이 GDP의 31.2%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노동생산성 하락과 연결된 GDP 성장률 하락은 GDP 대비 우발부채의 비중이 커진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자율 하락은 위기가 발생할 때 통화정책의 효과를 떨어뜨린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글은 코로나 위기 발생 이전에 쓰인 글로, 코로나 위기가 또다시 대규모의 정부 부채를 축적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종합해보면, 미국, 일본, 영국은 지난 15년간 기초예산적자가 채무창출의 주요 추동력이었다. 또한 우발부채의 물질화(예를 들어 은행 구제금융)에 따른 비용은 재정적자로 기록되었다. 그에 따라 이러한 국가들은 낮은 성장률과 과중한 채무라는 난관에 직면해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 경제에서 장기침체와 노동생산성의 장기적 하락은 국가의 부채위기라는 형태로 표출될 잠재력을 지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국가의 부채위기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3. 한국의 경제전망
1) 2023년 경제전망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22년 11월 10일에 발표한 「KDI 경제전망」에서 “우리 경제는 2023년에 수출 증가세가 크게 둔화하고 투자 부진도 지속되면서 1.8%의 낮은 성장률을 기록할 전망”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는 세계 경제의 성장률이 2.7%라는 낮은 수치를 보이고, 원유 도입단가가 2022년보다 15% 하락한 배럴당 84달러를 기록하고, 실질실효환율로 평가한 원화가치가 4% 절하될 것이라는 전제로 도출한 것이다. (한국은행이 11월 24일 발표한 「경제전망」에서는 경제성장률을 1.7%로 예측했다.)
특히 수출의 경우, 세계적 경기둔화로 1.6% 증가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보았다. 설비투자는 반도체 경기둔화와 대외불확실성으로 인해 2022년 –3.7%를 기록한 데 이어, 2023년에도 0.7%라는 낮은 증가율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상황은 이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미국의 매우 빠른 금리인상이 지속되면 세계무역이 위축되면서 한국의 수출도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국이 제로코로나 정책과 부동산 시장 위축으로 수요 부진이 나타날 때도 한국의 수출이 둔화할 것이다. 또 한편, 우크라이나 전쟁도 원자재와 곡물가격 불안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남아 있다.
국내요인을 보더라도, 민간부채가 많은 상황에서 기준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면 경기둔화가 커질 것이다. 최근 회사채 시장을 중심으로 기업의 자금조달 문제가 큰 이슈로 떠올랐는데, 자금조달 사정이 나빠지면 투자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부동산 경기 하락은 건설업체의 자금경색으로 이어지고 건설투자 부진으로 나타날 것이다.
다만 경기회복세가 약화하고 있음에도 2022년 고용은 ‘양호한’ 흐름을 보인다. 고용률이 높은 수준으로 빠르게 상승하고, 실업률도 장기추세를 크게 하회하여 경기상황과 대조적인 흐름을 보여서 그 원인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최근 고용 확대에 가장 기여한 업종은 ▵전문과학, 정보통신, ▵운수창고업, ▵보건업, 사회복지 서비스업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업종은 코로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대면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배달 관련 인력수요가 빠르게 증가했고, 디지털화가 가속화되면서 정보통신 관련 일자리도 증가했다. 물론 방역과 돌봄 인력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반면 숙박, 도소매와 같이 코로나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업종은 아직도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KDI는 취업자 수가 2022년에 79.1만 명 증가한 데 비해, 2023년에는 8.4만 명 늘어나는 데 그치리라 전망했다. 특히 생애주기에서 고용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시기인 핵심노동인구(30~59세)의 비중이 급락하고, 대면서비스업의 고용회복세가 빨라지더라도 경기둔화의 영향으로 제조업과 비대면서비스업의 증가세는 둔화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는 인구요인이나 (2022년의 급증에 따른) 기저효과에 의한 것으로, 고용여건은 여전히 양호한 흐름을 이어간다는 뜻이다.2) 11월 한국은행 금리 정책의 의미
11월 24일 금융통화위원회는 한국은행 기준금리를 3.00%에서 3.25%로, 0.25%p 올리면서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높은 수준의 물가오름세가 지속되고 있어 물가대응 정책대응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 소비자 물가는 10월에도 5.7%의 높은 오름세를 지속했고,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인플레이션율과 기대인플레율도 4%대 초반의 높은 수준을 이어갔다. 따라서 이는 금리인상 기조를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둘째, 그런데 경기둔화 정도가 8월 전망치에 비해 커질 것으로 예상되며, 외환부문의 리스크가 완화되고, 단기금융시장이 위축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아래 표를 보면, 여기서 외환부문의 리스크가 완화되었다는 것은 원달러 환율이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10월에 달러당 1,424원에서 11월 23일 1,352원으로 내려가 리스크가 어느 정도는 완화된 것으로 판단한다는 뜻이다. 단기금융시장이 위축되었다는 것은 기업어음(CP) 금리의 상승으로 표현되는데, 특히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관련된 자산담보부기업어음(PF-ABCP)의 금리가 큰 폭으로 상승하고 거래가 위축된 상황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요소들은 한국은행이 금리인상 폭을 좁게 한 근거가 된다.
역으로 보면, 한국은행이 인플레이션을 강하게 누르기 위해 금리인상 폭을 넓힌다면 단기금융시장의 위험이 커지고, 경기둔화가 심해질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먼저,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가 보여주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문제를 살펴보자. 3) 레고랜드 사태의 파급효과: 프로젝트 파이낸싱 부실에서 채권시장 경색으로
한국은행은 이미 9월 22일에 발표한 「금융안정 상황」에서 비은행권의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의 “건전성이 저하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2011~2013년 부동산 PF대출 부실사태 후, 은행권은 PF대출을 크게 늘리지 않았지만, 비은행권, 즉 저축은행, 증권사, 여신전문회사는 이를 대폭 확대했다. 2014년부터 2022년 6월까지 증가액을 보면 은행은 6.9조 원인데 반해, 비은행권은 70.1조 원에 이르렀다. 또한 은행과 보험사의 대출은 대형사업장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하지만, 저축은행과 증권사, 여신전문회사는 중소규모 사업장의 아파트 외 주택, 상업시설을 중심으로 했다. 게다가 PF대출 관련 유동화증권 발행이 증가하면서 증권사의 채무보증도 크게 증가했다. 따라서 주택가격이 하락하면, 비은행권의 PF대출 부실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보고서 발표 직후인, 9월 28일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레고랜드의 개발을 맡은 강원중도개발공사의 기업회생을 신청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기업회생 신청이란 상환해야 할 금액 중 대부분을 자사의 주식으로 대신 지불하고, 나머지 15%를 수년에 걸쳐 갚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발행한 ‘아이원제일차’가 10월 4일 부도처리 되면서, 기업어음 시장이나 회사채 시장에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그 후 추경호 경제부총리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등이 참여한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가 열려 채권시장 경색에 대처하기 위해 ‘50조+α’를 공급하겠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여기서 50조라는 수치는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뽑은 수치일 것이다.) 채권시장안정펀드 중 여유자금 1.6조 원으로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사들이고, 산업은행·기업은행·신용보증기금의 회사채·기업어음 매입프로그램도 8조 원에서 16조 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주택도시보증공사와 주택금융공사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시장 안정을 위해 2023년까지 10조 원 규모의 보증지원에 나서겠다고 밝혔다.4) 주택담보대출 금리인상의 파급효과: 기업의 자금난 확대
부동산 시장의 냉각이 미치는 파급효과는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기업어음, 회사채 시장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안심전환대출’ 문제도 있다. 안심전환대출은 고금리로 받은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을 연 3.7~4.0% 고정금리 대출로 바꿔주는 정책 금융상품으로, 주택가격 6억 원 이하, 부부 합산 소득 1억 원 이하여야 신청할 수 있다. 올해와 내년에 총 45조 원이 공급될 예정이다.
문제는 신용등급이 높은 주택금융공사가 관련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MBS(주택담보대출 유동화증권)를 발행할 경우 올해 한전채가 시중자금을 빨아들였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주택금융공사가 국내에서 발행하는 MBS 잔액은 올해 말 139조 5,980억 원에서 내년 말 167조 4,641억 원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주택금융공사의 MBS는 신용등급이 AAA로 최상급인 데다 금리도 연 5%대 수준으로 높아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올해 회사채 금리 급등을 촉발한 한국전력도 내년에 추가로 한전채를 발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11월 22일 국회 산업통상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한전채 발행 한도가 자본금과 적립을 더한 금액의 2배에서 5배로, 경영위기 상황에선 6배로 늘리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될 경우, 올해 말 70조 원 내외일 것으로 추정되는 누적 한전채 발행 잔액은 내년에는 110조 원 규모까지 늘어나게 될 수 있다.
이처럼 주택금융공사나 한전이 발행하는 막대한 규모의 채권은 다시금 회사채 시장을 압박하는 위험요인이 된다. 기업은 이자율 상승으로 회사채를 통한 자금조달이나, 은행을 통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되고, 부동산 시장 침체로 부동산 자산 매각도 곤란할 수 있다. 경기침체에 따른 이익의 감소도 당연히 동반될 것이다. 이는 기업의 투자, 고용증대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5) 소결
2023년 전망을 보면 수출 부진, 설비투자와 건설투자 부진이 직접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끌어내리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부동산 시장 하방압력이 미치는 다각적인 파급효과가 있다.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 부실이 기업어음이나 회사채 시장을 압박하고, 여기에 대응하기 위한 채권시장안정펀드는 다시금 은행채 발행을 늘려 회사채 시장을 압박하여, ‘아랫돌을 빼서 윗돌로 괴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또한 주택담보대출 금리인상에 따른 정부의 정책대응 역시 채권시장을 압박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경기침체, 금리인상이 장기화될 경우 자금시장 경색, 기업의 재무 상황 악화가 위험 수위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 경제의 위기 상황이 연출되면 정부의 직접적인 정책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그렇지만 정부의 미시적인 경제개입은 다양한 이해당사자 간의 갈등을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전이시킬 수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안심전환대출의 경우, 주택가격 6억 원 이하, 부부 합산 소득 1억 원이라는 제한이 있는데,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현재 수도권에 살거나 부부 맞벌이를 하는 경우 받을 수 없다는 불만이 나올 수 있다. 반대로 이러한 요건을 완화할 경우, 이른바 ‘영끌족’, 즉 주택가격이 치솟을 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라 기대하면서 변동금리 상 저금리로 돈을 빌려 집을 마련한 사람들까지 세금으로 구제해 주어야 하냐는 불만이 나올 수 있다. 또한 금리가 오르는 상황을 대비해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고정금리를 선택한 사람만 손해 보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나올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미시적 정책개입을 하면 할수록, 즉 정부가 직접 나서서 금리, 가격, 임금의 결정에 개입하면 할수록, ‘누구는 도와주고 누구는 안 도와주고, 기준이 무엇이냐’라면서 형평성을 따지는 문제제기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경제위기는 ‘인민 내부의’ 갈등과 불화가 커질 뿐만 아니라 그 불만이 정부로 집중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4. 한국의 장기 경제성장률 전망
KDI의 「장기 경제성장률 전망과 시사점」은 (성장률 간 관계를 뜻하는) 성장회계를 통해서, 성장률 하락을 분석한다. 즉 경제성장률에 기여하는 항목을 총요소생산성 상승률, 노동공급 증가율, 자본공급 증가율로 구분하여, 각각이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정도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펴본다.
KDI의 추산에 따르면, 2000년대에는 경제성장률 하락이 자본공급 증가세의 둔화에 기인했다면, 2010년대에는 생산성 증가세의 둔화에 주로 기인한다. (노동공급의 기여도는 전체 기간에서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먼저 노동공급 측면을 보면, 2021년 통계청이 발표한 『장래인구추계: 2020~2070년』에 따르면 생산연령(16~64세) 인구는 2011~2020년에 117만 명 증가했으나, 2021~3030년에 357만 명 감소하고, 2031~2040년에는 더 확대되어 529만 명이 감소할 것이다. 그에 따라 생산연령비중이 2020년 72.1%에서 2050년 51.1%로 하락할 것이다.
이처럼 노동공급이 감소한다고 했을 때, 이를 보완하여 경제성장률을 높이려면 총요소생산성 상승이 필수적이다. KDI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국 중 상위 25%와 50% 사이의 값인 1.0%를 총요소생산성 상승률의 기준값으로 잡고, 낙관적 시나리오는 상위 25% 수준인 1.3%로, 비관적 시나리오는 2011~2019년 사이에 한국에서 나타난 실제 값 0.7%로 설정하였다. (KDI는 2011~2019년에 나타난 0.7%라는 낮은 수치가 금융위기의 여파에 따른 일시적 현상인지, 아니면 영구적 현상인지 판별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이 수치를 ‘비관적’ 시나리오의 기준치로 설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KDI가 추산한 값은 아래 표와 같다. 2023~2030년에, 낙관적 시나리오는 2.4%, 비관적 시나리오는 1.5%이며, 2041~2050년에 낙관적 시나리오는 1.1%, 비관적 시나리오는 0.2%다. 기준시나리오로 보면 2010년대 2%대에서 2020년대 1%대로, 2040년대에 0%대로 하락하는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장기적으로 하락한다는 분석과 전망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시되었다. 나아가, 2013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한국개발연구원(KDI), 하버드대학 공동 연구시리즈 중 첫 번째 책, 『기적에서 성숙으로』는 성장률 하락 현상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과거 빈곤국가로 저수준 균형 함정을 성공적으로 벗어나 빠른 성장을 구가한 특성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따라잡게 되는 것은 곧 인건비 상승과 그로 인한 가격경쟁력 약화를 의미한다. 단순히 기술을 수입하는 것만으로는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고, 그 대신 비용이 많이 발생하고 어려운 원천기술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성숙기와 수렴의 시대에 성장둔화는 불가피하다.” 즉, 일반적으로 1인당 소득이 1만 4천 달러 수준에 도달하면 성장둔화가 발생한다는 것이고, 이를 이른바 ‘중진국 함정’이라고 부른다. 한국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기적에서 성숙으로』는 한국의 경험에서는 몇 가지 독특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탈산업화의 속도가 이례적으로 빠르다. 제조업 고용비중이 1989년에 정점에 도달한 후 10년간 연 0.91%p 하락했다. (대만을 제외하면 어느 국가보다 빠르다.) 또한 탈산업화가 시작된 GDP 수준 역시 이례적으로 낮았다.
둘째, 생산·고용 부진을 개선해주리라 예상되는 서비스 부문이 만성적인 저생산성을 보인다. 특히 도소매업과 의료, 교육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정보통신 분야는 기술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지만, 서비스 부문 고용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작다.)
셋째, 한국의 상품수출은 비교적 잘 지탱되어 왔다. 기적적인 성장의 시기에 이룬 높은 수출증가율 대비 그 후 부진한 상품수출 증가는 한국경제의 성숙으로 인한 필연적인 성장둔화의 결과다. (누적수출증가율이 둔화한 시점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이후에 나타난다.) 다만 수출의 증가가 과거처럼 고용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는 수출산업이 생산하는 제품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노동집약적 투입요소를 해외에서 조달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중국에서 부품을 수입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서비스 수출실적이 미미하다. OECD 국가는 서비스 수출이 GDP의 10% 이상을 차지하는데, 한국은 7%에 불과하다.
넷째,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규모는 한국경제의 특징을 근거로 기대되는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 (또한 외국인직접투자가 중국으로 몰리게 되어 한국의 외자유치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해외직접투자 수준은 정상적이다. (‘한국의 해외직접투자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국가경제의 공동화를 초래한다’는 대중의 불만과는 상반된다.)
다섯째, 한국경제는 위기에 대한 취약성을 보였다. 지난 40년간 네 차례의 위기를 겪은 것이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평균보다는 좀 더 위기에 취약한 편이었다. 이는 주식발행을 통한 자금조달보다 부채(특히 단기부채)를 선호하는 개발전략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다양한 연구에서 제시되는 성장률 하락에 대한 진단과 대책은 사실 모두 대동소이하다. 문제는 한국경제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어떤 대책이든 단기적 처방으로 해소될 수 없는 중장기적 과제라는 사실에 있다. 경제성장론의 관점에서는 경제의 개방성을 높여야 한다, 교육과 연구개발을 혁신해야 한다, 기업활동과 노동 관련 규제 제도를 바꿔야 한다 등등 과제는 제시된다. 이러한 과제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도 달성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실제 현실에서는 ‘정치적 실행가능성’이라는 문제가 개입하므로, 급격한 변화를 꾀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교육제도의 개편 문제를 보더라도, 수많은 쟁점과 갈등이 존재한다. 단적인 사례를 들면, 현 정부는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해 수도권 대학의 첨단분야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는데, 보도에 따르면 전국 대학총장 133명 중 수도권 대학총장은 87.5%가 찬성, 비수도권 대학은 92.9%가 반대하여, 종합적으로 대학총장 65.9%가 반대한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명확히 갈리는 가운데, 정부 정책은 힘을 얻어 추진하기 어렵고, 추진하더라도 심각한 갈등과 후유증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한국경제의 장기 저성장 추세는 그 누구도 쉽게 역전시키지 못할 것이다.5. [보론] 장기침체와 마르크스의 정상상태론/구조적 위기론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말하는 ‘장기침체’를 마르크스의 정상상태론/구조적 위기론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더 분명한 정치적 함의를 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마르크스의 이론을 간략히 살펴보자.
성장의 한계라는 관념은 이미 스미스가 고전파 경제학을 확립하는 시기에 제시한 것이다.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상태를 정상상태(定常狀態)라고 지칭한다. 즉 고정자본과 국민소득의 성장이 정지한 상태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다.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이러한 쟁점을 포괄한다.
마르크스는 스미스와 리카도를 비판하면서 이윤율 하락을 자본주의의 내재적 법칙으로 설명한다. 자본축적의 진전에 따른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즉 자본생산성의 하락이 이윤율 하락을 야기한다. 이윤율 하락은 자본축적의 둔화, 즉 고정자본 성장률의 하락을 야기하고 그것이 경제성장률도 하락시킨다. 마르크스는 스미스와 반대로 이윤율의 하락의 원인이 제한된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해 잉여가치를 추출할 기회가 감소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윤율의 하락의 결과 제한된 잉여가치를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고 자본의 집중이 발생한다. 그 결과 성장의 한계에서 ‘자본의 과잉’과 ‘인구의 과잉’(상대적 과잉인구)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된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면 정상상태에 근접하는 것은 사회의 경쟁과 갈등과 불행을 증폭시킨다. 왜냐하면 정상상태에 근접하면 점차 확대재생산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단순재생산으로 수렴하고, 자본간 경쟁이 심화될 뿐만 아니라 노동자 내부에서의 경쟁도 심화된다.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의 경쟁, 취업노동자 내부의 경쟁,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경쟁, 생산적 노동 및 비생산적 노동 각 내부에서의 경쟁도 심화된다. 다만 생활수준은 과거보다 높다. 이것이 궁핍화의 현실적 의미일 수 있다. 즉, 과거보다 생활수준은 높지만 경쟁과 갈등이 격해지고,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마르크스 이후 부르주아 경제학자, 대표적으로는 존 스튜어트 밀과 케인즈는 정상상태로 근접할수록 풍요와 행복이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밀은 정상상태를 향한 경향의 기본적 원인을 자본축적에 의해 야기된 부의 증가에서 찾는다. 즉 너무나 많은 부가 존재해서 더 이상 자본축적이 심화될 필요가 없고 자본축적에 대한 자극도 없는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이자율은 0이 되고, 어떤 사람도 자기노동의 생산물 이상의 것을 벌지 않게 될 것이다. 즉 밀에게 정상상태란 곧 ‘사회주의’다.
자유주의자로서 케인즈도 밀과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우리의 자손들을 위한 경제전망』에서 단기적 불안정성이 50~60년 정도 안정화될 수 있다면 자본의 한계 생산성이 0이 되는 지점까지 자본축적이 진행될 것이고 이윤율과 이자율도 매우 낮아지리라 생각했다. 밀과 유사하게 이는 사실상 자본가계급의 소멸을 의미한다. 매우 높은 노동생산성과 낮은 이윤율 수준에서 임금은 거대한 양의 소득을 나타낼 것이며 이에 따라 소득분배는 훨씬 더 평등할 것이다. 막대한 부를 물질적 소비에는 좀 더 작게 지출하고 여가와 자기발전에는 더 많이 지출할 것이다. 밀과 케인즈에게 있어 정상상태는 행복이 최대화되는 상태다.
경제성장률이 0으로 접근하는 정상상태에 대한 마르크스와 밀·케인즈의 분석 중 어떤 것이 현실에 더 부합하는가. 자본주의의 내재적 원리가 극대화되는 경쟁과 불행인가, 자본주의의 현실적 모순이 사라져가는 풍요와 행복인가. 우리는 마르크스의 전망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함의는 사실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장기침체에 빠질수록 노동자 내부의 경쟁과 불화가 증폭된다는 사실은 노동자운동에 매우 심각한 도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속성장 시대에 전형화된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과연 장기침체 시대에 적합한 변화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가 가장 근본적 문제다. ●
위구르 투쟁의 전략과 연대에 관한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