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의 기원과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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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7일, 인도양의 미해군 함정들로부터 발사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남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Taliban)1) 군사기지들을 타격했다. 9.11 테러가 벌어진 지 26일도 채 되지 않아 ‘항구적 자유(Operation Enduring Freedom)’로 이름붙여진 일련의 군사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이것은 이후 7년 간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점령으로 이어진 기나긴 침략전쟁, 이른바 ‘대테러전쟁’의 신호탄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를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가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 미국은 탈레반 정부에 알 카에다 지도부의 신병을 미국에 넘길 것과 아프가니스탄 국내의 모든 알 카에다의 훈련기지들을 즉각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탈레반은 자신들과 9.11 테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주장했고, 빈 라덴이 테러의 주범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제시한다면 그의 신병을 넘기겠다고 답했다. 탈레반 정부를 인정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이 탈레반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고, 미국의 최후 통첩일이 다가오자 탈레반은 파키스탄에서 국제법정을 열어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따라 빈 라덴을 재판하겠다는 제안도 내놓았지만 거절당했다. 탈레반의 요구조건은 제3국이 아니어도 좋다는 쪽으로 계속 후퇴했지만 미국의 입장은 이미 보복공격을 실시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이미 항공모함 전단과 공군 항공단들이 작전을 위한 전개를 끝마친 뒤였다.
10월 7일의 순항미사일 공격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각지의 탈레반 군기지와 알 카에다의 훈련시설에 미국과 영국 공군기들이 대대적인 공습을 개시했다. 공습은 탈레반의 본거지인 칸다하르(Kandahar)를 비롯해 수도 카불(Kabul), 잘랄라바드(Jalalabad) 등의 지역에 집중되었다. 탈레반의 무장력은 대부분 소련군 침공 당시 쓰였던 노후 장비들이었고 그나마 며칠 만에 모두 파괴되었다.
지상에서는 탈레반에 패퇴하여 反탈레반 연합전선을 이루었던 북부동맹의 병력들이 공세를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의 특수부대원들이 합류한 북부동맹군은 NATO 공군의 지원을 받아 탈레반 병력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11월 9일, 북부의 주요도시 마자르 이 샤리프(Mazar-i-Sharif)가 북부동맹군에게 점령되자, 다수의 지역 군벌들이 탈레반에서 북부동맹으로 돌아섰다. 11월 12일,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잘랄라바드와 쿤두즈(Kunduz) 등의 도시들도 북부동맹에게 점령당했고 12월에 이르러 탈레반의 최후의 보루였던 칸다하르까지 함락되었다. 탈레반의 잔여 병력들은 파키스탄 국경지대로 도망쳤고, 험준한 산악지대에 숨어들어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탈레반의 등장
탈레반의 시작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던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과 파키스탄은 비밀리에 이슬람 무장세력3)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고, 이들을 소련의 침공에 맞선 대항마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무자헤딘 훈련캠프의 주요 일원이었다. 미국은 막대한 원조자금을 퍼부었고, 87년까지 6만 5천톤에 달하는 미제 무기가 공급되었다. 이중에는 신형 스팅거 견착식 지대공미사일과 같은 장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4)
여기서 훈련받으며 對소련 무장항쟁 활동을 벌였던 무자헤딘 세력 중의 일부가 탈레반의 기원이다. 이들의 근거지는 헬만드(Helmand)와 칸다하르를 비롯한 파슈툰족 지역이었고, 이러한 종족적 기반이 이후 탈레반의 성격을 특징짓게 된다. 이들 역시 미국, 그리고 기타 중동국가들(주로 수니파 이슬람권)로부터 훈련과 보급을 지원받았다. 이러한 지원은 표면적으로는 파키스탄 정부, 특히 정보국(ISI;Inter-Services Intelligence)에 의한 것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Mohammed Omar)5). 그 휘하로 마드라사(이슬람학교)에서 수학하던 교육자들과 소규모 군벌조직의 리더들이 섞여 있었다. 여기에 파키스탄 내 마드라사에서 온 아프간 출신 망명자들이 합류했다. 구성원 대부분은 남부 아프간과 서부 파키스탄의 파슈툰족이었고, 유라시아와 중국 출신의 소수의 자원자들이 있었다. 이처럼 탈레반의 주축을 이루었던 무자헤딘 출신들은 철저히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에는 다수의 마드라사들이 세워져 있었고6), 여기서 수학했던 많은 이들이 이슬람원리주의의 기치를 들고 탈레반에 참가하게 된다.
애초 탈레반의 취지는 잔학한 무자헤딘 군벌들 간의 끊임없는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을 구휼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탈레반의 등장 배경으로 두 가지의 설이 유력하게 알려져 있는데 하나는 칸다하르 지역에서 지역 게릴라들이 어린이들의 납치와 강간․살해 등을 일삼자 이에 분노한 오마르와 그의 학생들이 범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일어섰다는 것이다. 1994년 초 오마르가 16정의 소총으로 무장한 30명을 이끌고 지역 군벌에게 납치당했던 두 소녀를 구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댓가를 요구하지 않고 대중들에게 이슬람의 신앙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하였으며, 그로써 대중적인 신망을 얻었다.
다른 하나는 ‘Afghanistan Transit Trade’로 알려진 파키스탄의 마피아 무역상단과 파키스탄정부 내의 협력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중앙아시아 공화국들로 향하는 남부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탈레반에 무장과 자금을 제공했다는 설이다. 94년을 기점으로,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복잡한 군벌 간의 난립구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탈레반의 성장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의 민족과 종파에 대한 이해가 수반된다. 통계마다 약간씩의 오차가 존재하나, 파슈툰족이 전체 인구 중 가장 많은 36~42%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타지크족이 27~33%, 하자라족과 우즈벡족이 8% 안팎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기타 아이막족과 누리스탄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이 10% 정도가 있다. 아프간 인구의 99%에 달하는 절대다수가 무슬림이다. 이 중 하자라족을 포함하여 9~25%가 시아파, 나머지 89~74%가 수니파 이슬람이다. 하지만 종족 내부에서도 다시금 수많은 계파와 부족들로 분화되어 있기에 파슈툰족이라고 해서 모두 단일한 종족적 정체성과 연대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계파와 부족단위에서의 다양한 갈등요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종족과 종교적 차이는 아프간 내 군벌들의 세력갈등을 설명하는 요인이 될 수 있는데, 탈레반의 조직 기반이 남부의 파슈툰족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북부동맹으로 결집하게 되는 반(反)탈레반 연합세력들이 북부의 타지크족과 우즈벡족, 하자라족들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89년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각지의 군벌세력들 간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각 무자헤딘 파벌들 간 대립의 이면에는 소련군과의 전쟁기간 중에 자신들을 지원했던 이란, 중국,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고, 이후 아프간은 심각한 내전상태에 빠졌다.7)
오마르를 중심으로 모인 탈레반들의 최종 목표는 평화회복과 무장해제, 샤리아(이슬람종교법)의 실시에 입각한 사회정화로 집약된다. 즉 내전과 무정부상태를 종식시키고 이슬람의 근본원리에 입각한 ‘순수한’ 이슬람의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깊은 신앙심으로 결집한 탈레반의 이상은 내전으로 지친 대중들의 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탈레반을 지지하는 지역이 확대될수록 탈레반의 무장력은 점차 강해졌다.
1994년 10월 탈레반의 첫 군사활동이 시작되었다.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남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온 이들은 불과 10여 명의 사상자만을 낸 채 아프가니스탄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칸다하르를 접수했다. 현지어로 탈레반, 즉 학생조직이라는 명칭만으로 알려져 있었던 이 ‘정체불명의 군대’는 불과 3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의 34개 주 중 12개 주를 점령했고, 지역 군벌들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탈레반의 휘하로 항복했다. 이들 군벌들이 보유하고 있는 전차, 전폭기와 헬리콥터 등의 중화기는 고스란히 탈레반의 손으로 들어갔고, 전력을 배가시켰다. 1996년 9월,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부르하누딘 랍바니(Burhanuddin Rabbani) 정권8)을 축출했다.
탈레반의 갑작스런 등장은 일거에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반(反)탈레반 세력들은 북부동맹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항했지만 전력의 차이가 확연했다. 98년 8월, 탈레반군은 최대 군벌세력 중의 하나인 압둘 라시드 도스툼(Abdul Rashid Dostum)9)의 근거지이기도 한 마자르 이 샤리프를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고 소수의 외교관 신분의 이란인들도 사망하여 국제문제로 비화되었다. 북부동맹은 전 국토의 10%정도만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위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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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집권기
카불을 점령한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탈레반은 모든 여학교와 방송국 등의 시설들을 폐쇄시키고 카불 전역을 계엄령 상태로 만들었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이념적으로 무슬림에서도 전례가 없는 ‘샤리아(율법)의 가장 엄격한 해석’을 표방했고, 이러한 통치정책으로 인해 특히 여성에 대한 인권탄압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금지한 대표적인 사례로써, 공공장소에서는 반드시 부르카를 착용해야 하며, 8세 이후 여성은 어떠한 교육도 받을 수 없으며 노동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코란의 학습만을 할 수 있었다. 단속을 피해 지하에서 교육받을 경우 적발 시 교수자와 학습자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남성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을 수 없게 함으로써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여성들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금지조항을 어기는 여성들에게는 길거리에서 매질을 당하는 등의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고 심지어 율법을 위반한 죄목으로 공개처형당하기도 했다.
또한 기존의 모든 문화적 활동을 금지시켰다. 음악, 동물을 키우는 일, 서구식의 복장을 입거나 면도를 하는 행위, 사진과 그림, 도박 등의 행위는 율법의 위반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를 단속하기 위한 종교경찰이 운영되었다.
이처럼 종교적 극단주의가 실정에 반영되면서 많은 부작용을 낳았는데, 여기에는 탈레반 세력이 카불과 같은 국제적인 대도시를 접했던 경험이 미숙하였다는 점이 일정 부분 기인하기도 했다.
98년 북부의 마자르 이 샤리프 점령 당시 문제가 되었던 학살에서는 8천여 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학살의 배경에는 종족적 문제가 있었는데, 마자르 이 샤리프시는 북부에 퍼져 있는 하자라족과 우즈벡족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인구 대부분이 수니파인 아프간에서 하자라족만이 시아파로써, 시아파 국가인 이란이 하자라족 군벌들을 지원하고 있기도 했다. 또한 도시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탈레반군 측의 피해 역시 극심했는데,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증폭된 갈등이 인종학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불렀다. 이처럼 탈레반의 통치는 일정부분 종족적 갈등요소를 담지하고 있었는데, 집권 후 양대 공용어인 다리어(비파슈툰족 지역에서 널리 사용)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파슈툰어의 사용만을 강제함으로써 종족적 이질감을 심화시켰다.
2001년 3월, 탈레반은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얀 석불을 폭파하여 파괴함으로써 세계를 경악시켰다. 원래 물라 오마르는 문화유산의 보존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탈레반 집권 몇 년 후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율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역사적인 문화재가 모조리 파괴된 것이다. 파키스탄을 비롯한 탈레반의 지지국들마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폭파가 결행된 것에 대하여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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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침공 이후
애초 미국은 탈레반 정권에 대하여 우호적인 입장이었지만,15) 9.11 테러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정세는 다시 한 번 급격히 변화하였다. 축출된 탈레반 대신 북부동맹이 카불에 집권했고, 군벌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근거지와 병력을 되찾았다. 애초 북부동맹이 통일된 연대체가 아닌 임시적 결집이었던 만큼, 북부동맹의 구성원들 역시 새로운 정치질서의 설립보다는 자신들의 기반과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2002년에 세워진 과도정부의 수반이었던 하미드 카르자이16)는 2004년 선거를 통해 재선하여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사실상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수도 카불을 비롯한 몇몇 대도시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며 아프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과 NATO연합군의 힘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수도 이외의 지역은 지역 군벌의 통제 아래 있으며, 아프간 정부의 통치력은 지역 군벌과 중앙정부 간의 관계가 얼마나 우호적인가에 따라 좌우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 탈레반 역시 지역적 기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비록 집권기의 극단주의로 인해 비난받았지만 칸다하르 인근을 비롯한 지역에서는 아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탈레반의 게릴라전 양상 또한 변화했다. 과거에는 무장 수준이 비슷한 정부군이나 무자헤딘 군벌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지만 이제 탈레반의 상대는 고도의 훈련수준과 첨단장비를 갖춘 미국과 NATO의 정규군 병력이기 때문이다. 월등한 전력의 차이를 상쇄하기 위해 2001년까진 아프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살폭탄 공격이 등장했다.
그간 아편재배는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던 아프간 민중들의 경제력을 지탱해 왔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2000년 아프가니스탄의 아편생산은 전세계 생산량의 75%에 달했다. 그해 탈레반 정권은 아편재배를 공식적으로 금지하였고, 이듬해 아편 생산은 12,600에이커에서 17에이커로 급감했다.17) 하지만 미국의 침공 이후 아편생산은 다시 급증했다. 뒤늦게 NATO군은 아편재배 단속에 나섰고,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생활의 기반을 잃고 이러한 자살폭탄 공격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18) 이러한 자살폭탄 공격은 적의 시설이나 병력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는 것보다는 공포와 같은 심리적 효과를 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제구호단체나 민간 외국인에 대한 납치와 살해 등의 양상도 생겨났다. 이전에 비교적 국제사회의 관심 밖에 치우쳤던 내전기와 달리 미국의 침공 이후에는 서방세계에서 온 언론과 민간단체, 기업 등의 왕래가 활발해졌고, 비무장의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방패로 삼거나 특정 요구사항들을 내놓음으로써 국제적인 주목을 끄는 방식이다. 이러한 새로운 양상으로의 변모는 알 카에다와 같은 세력과의 교류의 결과이기도 한데, 무자헤딘 게릴라에서 출발한 탈레반이 심리전과 같은 고도의 기법을 구사하는 정치세력으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현재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거주하는 중남부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파키스탄이 있다. 현재 탈레반의 활동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파키스탄 접경지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해 있는 파키스탄의 북와지리스탄주는 탈레반의 근거지가 된 지 오래이다. 때문에 파키스탄에 거점을 두고 있는 탈레반은 미국과 파키스탄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파키스탄의 북서변방 지역은 파키스탄 내 6개 급진 이슬람정당의 연합체 <연합행동전선(MMA; Muttahida Majlis-e-Amal, United Council of Action)>가 득세하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파슈툰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기에 탈레반에 매우 우호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슬람성직자회의(JUI; Jamiat Ulema-e-Islam, Assembly of Islamic Clergy)당>은 탈레반의 형성 배경이었던 파키스탄의 데오반드(Deoband) 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꾸준히 탈레반을 지원해 왔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 마드라사에서 교육받은 청년들이 탈레반에 지원해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때문에 미국은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에 이 지역의 탈레반을 소탕할 것을 요구했고, 2004년부터 와지리스탄 지역에서 파키스탄군은 대대적인 알 카에다와 탈레반 세력의 소탕작전에 나섰다. 와지리스탄을 비롯한 북부 변방지역은 파키스탄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고 탈레반을 지원하는 북와지리스탄의 부족장들의 연합체인 <와지리스탄이슬람연합(Islamic Emirate of Waziristan)>의 통제 아래 있었다. 전투는 2006년 7월 와지리스탄 지역의 탈레반 지도자 시라주딘 하콰니(Sirajuddin Haqqani)가 파키스탄군과의 전투행동을 중지하는 포고를 발령하므로써 마무리되었다.
이는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보조하기 위한 파키스탄 정부의 조치였으며 한편으로는 쿠데타로 집권하여 정치적 기반이 약한 무샤라프 정권의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탈레반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세력을 갖고 있는 파키스탄 국내의 파슈툰족과 야권의 이슬람정당들을 자극하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기에, 탈레반 문제는 무샤라프 정권의 딜레마이자 동시에 미국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2006년 9월, 무샤라프정권은 지역 부족장들과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파키스탄군이 철수하는 대신 <와지리스탄이슬람연합>의 부족장들이 탈레반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 내용이었다.
이 협정은 오히려 탈레반이 세력을 재정비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아프간 국내에 진공해 있는 탈레반 세력의 공세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2006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NATO연합군, 그리고 아프간 정부에 대한 폭탄공격은 훨씬 더 빈번해졌다. 2006년 7월, 아프간 주둔 캐나다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판지와이(Panjwaii)지역에서 탈레반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전쟁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미국
패퇴한 탈레반이 파키스탄 접경지대를 근거지로 삼으면서 아프간의 정치상황은 파키스탄 내부의 정치적 문제까지 얽혀 한층 더 복잡해졌다. 무샤라프 독재정권에 대한 파키스탄 국민들의 반감은 상당한 수준에까지 고조되어 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데다가 수차례에 걸친 민정이양 약속을 어기고 군부의 힘을 빌어 철권 통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슬람 정권인 탈레반을 축출하는 미국의 전쟁에 가담하므로써 야당과 이슬람근본주의 세력들은 무샤라프를 이슬람의 배신자로 규정했다.
미국은 이처럼 불안정한 무샤라프 체제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더 안정적이고 친미적인 정권이 들어서길 바라지만 자칫 극단적인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이 파키스탄의 정권을 잡을 지도 모르기에 ‘가장 혐오스러운 독재정권의 전형’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국의 딜레마이다. 무샤라프는 파키스탄이 탈레반을 축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미국 행정부에 흐르는 전반적인 기류이다.19) 하지만 최악의 수를 피하고 파키스탄이 지닌 전략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미국은 한편으로는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이면에서는 부도덕한 독재 정권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탈레반에 이어 이젠 파키스탄이 미국에게 양날의 검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미명으로 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던 미국. 이제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이라는 비수를 안은 채 미국을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수렁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다.
참고자료
-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한겨레21』2007년08월01일 제671호 "네오 탈레반, 더 센놈이 돌아왔다“
-『주간조선』2007년08월13일 제1967호 "[포커스] 파키스탄 파슈툰 지역은 탈레반의 해방구“
- Ahmed Rashid, "Taliban"
- 피터 마스던, "탈레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역, 박종철출판사, 2005
- 구동회, “세계의 분쟁지역”, 푸른길, 2005
- 위키피디아 “taliban" (http://en.wikipedia.org/wiki/Taliban)
CRS Report for Congress : "Afghanistan: Post-War Governance, Security, and U.S. Policy" Kenneth Katzman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crs/47083.pdf)
- "Afghanistan - Taliban Era"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afghanistan/taliban.htm)
- IRIN news : "AFGHANISTAN: Taliban propaganda effective among Pashtoons"
(http://www.irinnews.org/Report.aspx?ReportId=73535)
- IRIN news : "AFGHANISTAN: Killing of de-miners suggests change in Taliban tactics"
(http://www.irinnews.org/Report.aspx?ReportId=73618)
- ACIG journal: "Afghanistan, 1979-2001; Part 3", Tom Cooper
(http://www.acig.org/artman/publish/article_339.shtml)
평화네트워크 국제분쟁자료실
(http://www.peacekorea.org/main/board/zboard.php?id=argument)
국방연구원 세계분쟁정보 (http://www.kida.re.kr/neowoww/html/)
1)탈리브(Ṭālib)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 전통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써, 그 복수형 단어가 '탈리반'(혹은 탈레반)이다. 서방 언론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탈레반’이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에 ‘탈레반’이란 명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탈리반’ 대신 ‘탈레반’으로 표기했다.본문으로
2)
빈 라덴의 신병인도를 놓고 2주일간 벌인 이 협상과정은 미국이 이미 사건 직후부터 9.11테러사건과 아프간 탈레반 정권이 무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배후에 대한 정보 역시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은 사건이 사우디-시리아-이라크-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척결하고 중동 내부의 반미 블럭을 형성한다는 목적으로 뭉친 특정 동맹세력이 벌인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동맹세력의 비밀군사조직의 지도자 격인 빈 라덴을 일차적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참조.본문으로
3)
무자헤딘(Mujahideen)은 “싸우는 자”를 뜻하는 아랍어 단수 “mujahid"의 복수형어휘로써, 성전을 뜻하는 지하드(jihad)와 같은 어원을 두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교도에 맞서는 이슬람의 투사를 지칭해 왔던 이 단어는 20세기에 이르러 무슬림 게릴라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활약했던 이슬람 무장세력들이 무자헤딘의 상징이 되었다.본문으로
4)
이러한 미국의 지원은 단지 소련군의 아프간 점령을 방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장기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역에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최소한 미국에 충성스런 정치세력을 만들어 놓기 위한 마스터플랜에 따른 것이었다. 군사지원이 비밀리에 이루졌으며 파키스탄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이루어졌던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미국과 파키스탄이 反소련(-反파슈타니스탄) 전선의 주축으로 이슬람세력을 선택한 후,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들은 ‘저항전쟁’을 지휘할 ‘합법적’ 권위를 갖는 아프간의 정치적 대표체를 만드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방기했다. 대신 저항전쟁을 수행할 7개의 단위를 창출하면서 미국과 파키스탄은 이슬람세력 각각을 분할, 통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CIA와 ISI는 헤크마티야르에게 특별 대우를 베풀었지만 대표권을 부여하지는 않았고, 각각을 대체로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미국의 개입과 무자헤딘 세력의 이후 내분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을 참조. 본문으로
5)
물라(Mullah, 또는 Mulla)는 ‘스승’을 뜻하는 이슬람어이다. 무함마드 오마르는 파슈툰족의 분파 중 하나인 Ghilzai 파의 Hotak족 출신으로써, 59년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 침공 당시 무자헤딘으로써 활약했던 그는 89년부터 92년까지 소련이 세운 나지불라 정권에 맞서 게릴라활동을 벌였고 이때 산탄파편에 맞아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파키스탄 접경지대의 도시 Quetta의 마드라사에 머물며 이슬람 학문활동에 몰두했고, 일군의 추종자들을 모아 세력화시키기에 이른다.본문으로
6)
“아프간-파키스탄 접경지역에 세워진 학교들은 다알 울름(Dar-al ‘Ulum) 계열이었다. 19세기 중반 인도의 도시 데오반드에서 수니 이슬람의 원리 교육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운동이 출발하였는데, 이들이 세운 이슬람 고등교육기관이 다알 울름이었다. 파키스탄의 데오반드 운동과 관련된 조직은 정치정당인 자미아티 울라마 이슬람(Jamiat-i Ulama-Islam, JUI)이다. 1978년 이후 JUI는 아프간 난민 소년들을 위한 수백개의 마드라사를 세웠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참조.본문으로
7)
소련군 철수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임시정부를 세우려던 미국의 의도는 쉽사리 관철될 수 없었다. 소련의 힘을 배경으로 세워졌던 나지불라 정권은 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더 이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퇴진했으며, 이로 인해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1995년까지 카불은 세 번 파괴되었고 최소한 5만 명이 사망하였고, 수십만 명의 카불 시민이 파키스탄으로 몸을 피했다. 이 기간 동안 파벌 또는 군벌(warlord)은 아프가니스탄을 분할하였고, ‘법’과 ‘안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군벌세력은 국제기구의 난민 지원 물품을 약탈했다. 미국은 아프간 지역에 대해 손을 씻었고, 특별한 정책을 수립하지도 않았다. 단지 이슬람세력의 혈투 끝에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한 세력을 지지한다는 방침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로 인해 각 세력간의 전투는 더욱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참조.본문으로
8)
92년 나지불라 정권이 무너지자 <이슬람평의회(Jamiat-e Islami. 우즈벡족과 타지크족이 중심)> 의장으로써 권력을 이양받은 뒤, 같은 해 12월 임기 2년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96년 탈레반에 패퇴한 랍바니는 <북부동맹>의 명목상의 대표가 되나 실질적인 군권은 아흐마드 샤 마수드에게 있었다.본문으로
9)
Abdul Rashid Dostum. 아프가니스탄 국방차관을 지낸 적이 있는 우즈벡족 군벌이며 <이슬람민족운동(National Islamic Movement Afghanistan)>의 지도자이다. 80년대 공산정권에서 지역군사령관을 맡았던 그는 92년 나지불라 정권이 위기에 놓이자 반란을 일으켜 아흐마드 샤 마수드군에 연합하여 카불을 점령했다. 이 시기 그의 군대는 납치와 약탈, 집단성폭력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94년 도스툼은 다시 진영을 바꾸어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 동맹을 맺고 다시 카불을 포위해 랍바니 정권과 전투를 벌였다. 탈레반의 진격이 시작되자 그는 또다시 랍바니와 마수드 세력과 손잡고 북부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그는 탈레반군에 ?겨 이란으로 망명했고, 2001년 미국의 침공과 함께 다시 재등장했다. 표면적으로는 과도정부의 국방차관직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북부지역을 자신의 영지처럼 독립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2005년 카르자이 내각에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역시 실질적인 직함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본문으로
10)
Ahmad Shah Massoud. 민족주의자이자 타지크족 출신의 카불대 공과대 학생이었던 그는 학생 시절 부르하누딘 랍바니(당시 교수)가 의장이었던 <이슬람평의회(Jamiat-e Islami)>의 영향을 받았다.
8월 28일, 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한국인 19명의 석방이 합의되었다. 7월 19일 피랍이후, 꼭 41일만의 일이다. 한국정부와 탈레반 간의 네 번째 대면협상을 통해 결정된 합의사항은 연내 한국군 철군 비정부기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 이달 말까지 철수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의 선교활동의 중단 인질 석방 중 탈레반을 공격하지 않을 것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의해 구금된 탈레반 포로들의 석방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 이상 5개 항이다. 인질의 몸값 지불여부, 한국의 외교 협상력의 치적, 기독교의 배타적·공격적 선교라는 맹비난 여론 등. 몇 가지의 선정적인 뉴스거리를 남기면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일단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미군사동맹이 초래한 죽음과 비극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몰고 온 끔찍한 증오와 폭력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이라크와 레바논서, 그리고 중동지역 전역에서 한국은 이미 그 전쟁의 한 가운데 서 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참극은 이미 예고되고 있다. '대 테러동맹'의 참혹한 대가 정부와 언론은 피랍초기부터 줄곧 사태의 원인을 '기독교의 무리한 선교'로 돌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한국인이 탑승한 버스인지도 몰랐고, 따라서 파병국가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표적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한국군 파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문제의 핵심은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 국가'를 찾아간 23명의 '공격적 선교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21명의 피랍자들에게 구상권을 행사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히고 나섰다. 이 얼마나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주장인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험국가'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이 참전하고 있는 미국의 아프간 점령이다. 가옥과 결혼식장, 장례식장을 무차별 공격하는 미국과 동맹국의 점령이 탈레반의 민간인 납치, 살해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한민국은 이미 많은 이들의 무고한 목숨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으며 '테러와의 전쟁'에 온갖 충성을 갖다 바치고 있었고, 그 덕분에 탈레반은 23명을 납치, 살해할 수 있는 명분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번 양보해 23명의 피랍자들이 '무리한 선교'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치자. 한국정부의 파병과 한·미 군사동맹이 아프가니스탄을 향하지 않았었다면, 탈레반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장기간을 피랍 할 수 있는 어떠한 명분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한국정부를 통해 미국과 카르자이 정부에게 요구할 협상카드도 사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고 배형규, 심성민 씨가 무참히 살해되는 그 순간까지, '즉각 철군' 이라는 카드를 결코 꺼내지 않았다. 잔인하고 참혹한 두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미국과의 '대테러동맹'을 굳건히 지켜냈다는 치적을 뽐내며, 이제 살려놨으니 돈으로 갚으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에 이어, 아프간과 레바논의 파병은 오무전기 노동자들과 김선일 씨의 피살, 윤장호 씨의 죽음과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까지 죽음과 비극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참혹한 기록이 말하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한·미 전쟁 동맹이 앞으로 더 많은 죽음, 더 많은 비극을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테러전쟁'이 몰고 온 증오와 폭력은 이제 어느덧 한반도를 겨냥하고 있다. 한국은 한·미 동맹의 이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면서 언제든, 누구든, 어느 때이든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 공포는 더 많은, 더 강력한 '대 테러동맹'을 원할 것이고 그 결과 더 많은, 더 강력한 폭력이 그에 대한 대가로 돌아올 것이다. [%=사진1%]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의 논란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점령반대, 한국군 즉각 철군을 요구하며 시민과 함께 하는 촛불집회를 지속해나갔다. 그러나 정부의 파병정책에 대한 분노는 위력적인 대중운동으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대중들의 지배적인 정서는 기독교 선교에 대한 반감으로 표상되었고, 미국의 점령과 파병이 사태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인식은 지배적 여론에 밀려 대중적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한편 반전평화운동 내적으로는 무엇에 초점을 두고 운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시각차이가 드러난 계기였다. 탈레반은 23명을 납치한 직후, 아프간에 있는 한국의 동의·다산부대의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했다. 반전평화운동은 <파병반대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을 중심으로 기자회견(7월 21일)과 촛불집회를 시급히 조직하였고, 즉각 철군과 미국의 점령 중단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탈레반에게 피랍자 석방을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으로 등장했다. 7월 26일 열린 <국민행동> 기획단회의에서는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를 슬로건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이 제출되었다. 탈레반에게 인질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양비론으로 몰고 갈 위험(미국 반대/탈레반 반대)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현 시기 운동의 방향은 점령과 파병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하였다. 토론 끝에 이 문제는 결국 다수결을 통해 결정되었고 결국 다수 안으로 <국민행동>의 핵심요구는 "피랍자 석방,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되었다. 7월 말, 피랍 20일이 경과하면서 탈레반의 인질석방 조건이 '탈레반 수감자 석방'으로 변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행동>은 당면 핵심요구에 탈레반의 '포로교환요구 수용'을 추가하는 것을 논의에 부쳤다. 이는 또 한 번의 논쟁을 일으켰는데 "민간인의 생명을 볼모로 한 탈레반의 잘못된 요구를 대변할 수 없다."는 입장과 "미국의 점령을 비판하고, 점령 종식을 압박할 수 있는 요구로써 탈레반의 요구는 수용 가능하다."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이 문제 역시 다수의 의견을 따라 '포로교환요구 수용'이 핵심적인 요구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쟁점들은 성명 발표, 촛불집회 기조를 결정할 때마다 참가단체들 간에 상당한 논란을 빚었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활동을 독자적으로 조직하기도 하였다. (8월 7일, 평화 여성 환경 종교, 문화 분야 78개 시민단체, '노란 리본 달기'운동.) 논란은 8월 27일에 개최된 <국민행동> 운영위원회에서 일단락 되었는데, 당면 슬로건을 "무사귀환,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하고 이외에 '포로교환요구 수용'은 미국의 책임을 묻는 내용과 결합시키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78개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를 호소하는 성명에는 탈레반에 대한 비판과 인질들의 조속한 석방이 가장 중심적인 내용으로 담겨있다.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 살해하는 탈레반의 폭력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고, 인질을 구해내는 것으로 사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국민행동>의 촛불집회 기조와 관련해서도 한·미 동맹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무사귀환의 염원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한편에서는 이 사태를 계기로 반전·반미의 목소리를 보다 확산시켜 나가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운동진영이 해야 할 역할은 피랍자 석방의 기술적 방법 자체를 제시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한·미 동맹 반대라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여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고양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양자의 입장은 모두 아프간 피랍사태에 대한 각자의 '평화주의적 해결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고도의 군사공격에 의해 격퇴 당한 탈레반이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피랍자들의 생명구제는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일 수 밖 에 없다. 또한 탈레반 전쟁포로들이 미군에 의해 최소한의 포로대우도 받지 못하고, 끔찍한 인권유린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은 탈레반으로 하여금 민간인 납치를 볼모로 포로석방을 요구하게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추동하고 있다.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나 '탈레반 수감자 석방'의 요구들은 각각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것 하나가 '절대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자의 입장이 모두 가로막혀 있는 지점은 결국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전쟁과 새로운 폭력의 양상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범세계적 공안정국과 새로운 폭력의 시대 9·11이후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시작으로 이라크 전쟁, 가자, 레바논, 소말리아 전쟁으로 번져갔고, 현재는 이란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테러'는 정치· 군사적 약자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제아무리 압도적인 정치· 군사적 우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하여도 반복적으로, 심지어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 출현할 수 밖 에 없다. )1)따라서 '테러'에 대한 공격은 승리도 패배도 없는 끝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오직 항구적인 전투과정과 그렇기 때문에 더 넓고 광범위한 전장을 필요로 할 뿐이다. 2001년 10월 미국은 9·11의 배후세력인 빈 라덴을 '죽이거나 생포하는 것'을 전쟁의 목표로 삼았으나 7년이 지난 지금, '테러와의 전쟁'은 더 이상 알카에다, 탈레반과 같이 이미 드러난 무장단체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는 점차 이슬람 전체에 대한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아프간에서 탈레반의 재등장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을 재생산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의 위협을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켰기 때문에 이제 전쟁은 단지 중동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거대한 '대 테러 동맹'을 결성하여 범세계적인 차원의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 '악마화'된 이미지를 유포하여 새로운 종교적, 종족적 분쟁을 촉진한다. 또한 각 국가는 다양한 차원에서 대 테러정책을 계발하고, 대 테러 대비 군사안보 시스템을 첨단화하고, 테러를 겨냥해 기존의 군사동맹의 성격을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흐름은 새로운 유형의 국가폭력을 자연스럽게 양산하고 있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저항수단, 새로운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다.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에 의한 외국인 피랍, 살해의 방식 역시 새롭게 등장한 폭력의 한 유형이며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그들의 '피의 보복'인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에게 던져진 질문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된 장소에서,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은 반전평화운동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일부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 운동'은 이 폭력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러나 탈레반의 극악무도한 테러행위가 아프간의 평화를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는 점이 분명한 사실일지는 몰라도, 그들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작동시키는 '대 테러전쟁'의 정교한 시스템을 사고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요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다만 무고한 인간의 생명 볼모로 하는 저항수단이 '평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반전평화운동의 다른 측면에서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탈레반의 요구와 행동을 '테러와의 전쟁'의 시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간 민중의 평화적 원칙의 시각에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반전평화운동은 그 원칙과 관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전쟁으로 얼룩진 아프간의 대지에 미국의 점령과 대 테러전쟁의 암흑을 거두어내고 어떠한 대안과 전망으로 새로운 민중의 평화를 건설해 나가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는 것이 탈레반의 극단적 폭력을 비판할 수 있는 우리의 출발점일 것이다. 이제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새로운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졌다는 점에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국가적, 지역적 틀을 넘어서는 국제주의적인 반전평화운동의 성장은 어떠한 '평화주의'를 필요로 하는가? 세계적 차원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은 '즉각적인 거부'와 '맹목'이라는 양자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되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인류 절멸로 치닫고 있는 전쟁에 맞서 평화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대안이다. 대안 세계화로서 반전 평화운동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우리에게 던져진 이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해나가자. 1).「미국은 결국 패배할 것이다」,사회화와 노동 105호 참고.본문으로
8월 28일, 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한국인 19명의 석방이 합의되었다. 7월 19일 피랍이후, 꼭 41일만의 일이다. 한국정부와 탈레반 간의 네 번째 대면협상을 통해 결정된 합의사항은 연내 한국군 철군 비정부기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 이달 말까지 철수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의 선교활동의 중단 인질 석방 중 탈레반을 공격하지 않을 것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의해 구금된 탈레반 포로들의 석방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 이상 5개 항이다. 인질의 몸값 지불여부, 한국의 외교 협상력의 치적, 기독교의 배타적·공격적 선교라는 맹비난 여론 등. 몇 가지의 선정적인 뉴스거리를 남기면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일단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미군사동맹이 초래한 죽음과 비극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몰고 온 끔찍한 증오와 폭력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이라크와 레바논서, 그리고 중동지역 전역에서 한국은 이미 그 전쟁의 한 가운데 서 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참극은 이미 예고되고 있다. '대 테러동맹'의 참혹한 대가 정부와 언론은 피랍초기부터 줄곧 사태의 원인을 '기독교의 무리한 선교'로 돌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한국인이 탑승한 버스인지도 몰랐고, 따라서 파병국가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표적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한국군 파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문제의 핵심은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 국가'를 찾아간 23명의 '공격적 선교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21명의 피랍자들에게 구상권을 행사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히고 나섰다. 이 얼마나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주장인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험국가'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이 참전하고 있는 미국의 아프간 점령이다. 가옥과 결혼식장, 장례식장을 무차별 공격하는 미국과 동맹국의 점령이 탈레반의 민간인 납치, 살해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한민국은 이미 많은 이들의 무고한 목숨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으며 '테러와의 전쟁'에 온갖 충성을 갖다 바치고 있었고, 그 덕분에 탈레반은 23명을 납치, 살해할 수 있는 명분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번 양보해 23명의 피랍자들이 '무리한 선교'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치자. 한국정부의 파병과 한·미 군사동맹이 아프가니스탄을 향하지 않았었다면, 탈레반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장기간을 피랍 할 수 있는 어떠한 명분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한국정부를 통해 미국과 카르자이 정부에게 요구할 협상카드도 사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고 배형규, 심성민 씨가 무참히 살해되는 그 순간까지, '즉각 철군' 이라는 카드를 결코 꺼내지 않았다. 잔인하고 참혹한 두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미국과의 '대테러동맹'을 굳건히 지켜냈다는 치적을 뽐내며, 이제 살려놨으니 돈으로 갚으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에 이어, 아프간과 레바논의 파병은 오무전기 노동자들과 김선일 씨의 피살, 윤장호 씨의 죽음과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까지 죽음과 비극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참혹한 기록이 말하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한·미 전쟁 동맹이 앞으로 더 많은 죽음, 더 많은 비극을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테러전쟁'이 몰고 온 증오와 폭력은 이제 어느덧 한반도를 겨냥하고 있다. 한국은 한·미 동맹의 이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면서 언제든, 누구든, 어느 때이든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 공포는 더 많은, 더 강력한 '대 테러동맹'을 원할 것이고 그 결과 더 많은, 더 강력한 폭력이 그에 대한 대가로 돌아올 것이다. [%=사진1%]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의 논란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점령반대, 한국군 즉각 철군을 요구하며 시민과 함께 하는 촛불집회를 지속해나갔다. 그러나 정부의 파병정책에 대한 분노는 위력적인 대중운동으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대중들의 지배적인 정서는 기독교 선교에 대한 반감으로 표상되었고, 미국의 점령과 파병이 사태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인식은 지배적 여론에 밀려 대중적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한편 반전평화운동 내적으로는 무엇에 초점을 두고 운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시각차이가 드러난 계기였다. 탈레반은 23명을 납치한 직후, 아프간에 있는 한국의 동의·다산부대의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했다. 반전평화운동은 <파병반대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을 중심으로 기자회견(7월 21일)과 촛불집회를 시급히 조직하였고, 즉각 철군과 미국의 점령 중단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탈레반에게 피랍자 석방을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으로 등장했다. 7월 26일 열린 <국민행동> 기획단회의에서는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를 슬로건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이 제출되었다. 탈레반에게 인질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양비론으로 몰고 갈 위험(미국 반대/탈레반 반대)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현 시기 운동의 방향은 점령과 파병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하였다. 토론 끝에 이 문제는 결국 다수결을 통해 결정되었고 결국 다수 안으로 <국민행동>의 핵심요구는 "피랍자 석방,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되었다. 7월 말, 피랍 20일이 경과하면서 탈레반의 인질석방 조건이 '탈레반 수감자 석방'으로 변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행동>은 당면 핵심요구에 탈레반의 '포로교환요구 수용'을 추가하는 것을 논의에 부쳤다. 이는 또 한 번의 논쟁을 일으켰는데 "민간인의 생명을 볼모로 한 탈레반의 잘못된 요구를 대변할 수 없다."는 입장과 "미국의 점령을 비판하고, 점령 종식을 압박할 수 있는 요구로써 탈레반의 요구는 수용 가능하다."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이 문제 역시 다수의 의견을 따라 '포로교환요구 수용'이 핵심적인 요구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쟁점들은 성명 발표, 촛불집회 기조를 결정할 때마다 참가단체들 간에 상당한 논란을 빚었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활동을 독자적으로 조직하기도 하였다. (8월 7일, 평화 여성 환경 종교, 문화 분야 78개 시민단체, '노란 리본 달기'운동.) 논란은 8월 27일에 개최된 <국민행동> 운영위원회에서 일단락 되었는데, 당면 슬로건을 "무사귀환,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하고 이외에 '포로교환요구 수용'은 미국의 책임을 묻는 내용과 결합시키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78개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를 호소하는 성명에는 탈레반에 대한 비판과 인질들의 조속한 석방이 가장 중심적인 내용으로 담겨있다.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 살해하는 탈레반의 폭력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고, 인질을 구해내는 것으로 사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국민행동>의 촛불집회 기조와 관련해서도 한·미 동맹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무사귀환의 염원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한편에서는 이 사태를 계기로 반전·반미의 목소리를 보다 확산시켜 나가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운동진영이 해야 할 역할은 피랍자 석방의 기술적 방법 자체를 제시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한·미 동맹 반대라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여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고양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양자의 입장은 모두 아프간 피랍사태에 대한 각자의 '평화주의적 해결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고도의 군사공격에 의해 격퇴 당한 탈레반이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피랍자들의 생명구제는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일 수 밖 에 없다. 또한 탈레반 전쟁포로들이 미군에 의해 최소한의 포로대우도 받지 못하고, 끔찍한 인권유린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은 탈레반으로 하여금 민간인 납치를 볼모로 포로석방을 요구하게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추동하고 있다.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나 '탈레반 수감자 석방'의 요구들은 각각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것 하나가 '절대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자의 입장이 모두 가로막혀 있는 지점은 결국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전쟁과 새로운 폭력의 양상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범세계적 공안정국과 새로운 폭력의 시대 9·11이후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시작으로 이라크 전쟁, 가자, 레바논, 소말리아 전쟁으로 번져갔고, 현재는 이란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테러'는 정치· 군사적 약자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제아무리 압도적인 정치· 군사적 우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하여도 반복적으로, 심지어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 출현할 수 밖 에 없다. )1)따라서 '테러'에 대한 공격은 승리도 패배도 없는 끝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오직 항구적인 전투과정과 그렇기 때문에 더 넓고 광범위한 전장을 필요로 할 뿐이다. 2001년 10월 미국은 9·11의 배후세력인 빈 라덴을 '죽이거나 생포하는 것'을 전쟁의 목표로 삼았으나 7년이 지난 지금, '테러와의 전쟁'은 더 이상 알카에다, 탈레반과 같이 이미 드러난 무장단체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는 점차 이슬람 전체에 대한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아프간에서 탈레반의 재등장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을 재생산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의 위협을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켰기 때문에 이제 전쟁은 단지 중동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거대한 '대 테러 동맹'을 결성하여 범세계적인 차원의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 '악마화'된 이미지를 유포하여 새로운 종교적, 종족적 분쟁을 촉진한다. 또한 각 국가는 다양한 차원에서 대 테러정책을 계발하고, 대 테러 대비 군사안보 시스템을 첨단화하고, 테러를 겨냥해 기존의 군사동맹의 성격을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흐름은 새로운 유형의 국가폭력을 자연스럽게 양산하고 있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저항수단, 새로운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다.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에 의한 외국인 피랍, 살해의 방식 역시 새롭게 등장한 폭력의 한 유형이며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그들의 '피의 보복'인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에게 던져진 질문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된 장소에서,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은 반전평화운동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일부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 운동'은 이 폭력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러나 탈레반의 극악무도한 테러행위가 아프간의 평화를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는 점이 분명한 사실일지는 몰라도, 그들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작동시키는 '대 테러전쟁'의 정교한 시스템을 사고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요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다만 무고한 인간의 생명 볼모로 하는 저항수단이 '평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반전평화운동의 다른 측면에서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탈레반의 요구와 행동을 '테러와의 전쟁'의 시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간 민중의 평화적 원칙의 시각에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반전평화운동은 그 원칙과 관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전쟁으로 얼룩진 아프간의 대지에 미국의 점령과 대 테러전쟁의 암흑을 거두어내고 어떠한 대안과 전망으로 새로운 민중의 평화를 건설해 나가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는 것이 탈레반의 극단적 폭력을 비판할 수 있는 우리의 출발점일 것이다. 이제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새로운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졌다는 점에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국가적, 지역적 틀을 넘어서는 국제주의적인 반전평화운동의 성장은 어떠한 '평화주의'를 필요로 하는가? 세계적 차원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은 '즉각적인 거부'와 '맹목'이라는 양자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되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인류 절멸로 치닫고 있는 전쟁에 맞서 평화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대안이다. 대안 세계화로서 반전 평화운동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우리에게 던져진 이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해나가자. 1).「미국은 결국 패배할 것이다」,사회화와 노동 105호 참고.본문으로
1.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인질로 잡힌 지 40여 일이 지난 상황에서, 살해당하거나 석방되지 않고 남아있는 19명의 석방을 위한 협상이 급진전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사태가 어떻게 종결되더라도 피랍 사태 40여 일 동안 한국정부가 보였던 입장들, 이번 납치사태가 제기하는 쟁점들에 대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7월31일,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되고 나서 곧 청와대, 외교통상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정부는 여기서 이번 사태에 대한 자신들의 대응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능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정부는 탈레반의 포로교환이라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피랍 한 달이 되어간 이 당시에야 '공식확인'하는 등 사태가 진행될 때마다 '확인 중'이라는 말로 일관했다. 협상에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수사도 대거 동원한다. 언론에는 협상․타협 가능성을 흘리는 한편,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까지 늘어놓았는데. 남한 정부가 탈레반에 책임을 묻겠다는 말은 정부 당국자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못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국 괴뢰 '정부'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진행되었지만 남한 정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시종 일관 돋보인 것은 미국의 책임을 배제해주는 '감동적인' 충성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물론, 미국도 공식적으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마치 故김선일 씨 납치 때 노무현이 '철군은 없다'고 곧장 대응하면서 살해를 재촉한 것을 반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납치 사건은 탈레반은 물론 미국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납치 사태의 해결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는 피랍자 가족들까지 미국대사관에 '호소'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상태에서 해결할 의지가 별로 없는데 그것은 단지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공허한 원칙 때문이 아니다. -이미 곳곳의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들의 협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미국도 선례가 있으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 현재의 갈등, 즉, 탈레반의 잔인성을 부각하는 것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럼 탈레반은 어떨까? 이들 역시, 자신들의 건재함과 주장을 전세계에 위성 TV로 매일 중계하고 있는 마당에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탈레반, 양 극단주의자들의 이해가 이렇게 일치하는 사건인데다가, 이들이 사태 해결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당에 남한 정부의 무능은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한 정부가 이러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책임지지는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한 발 더 나아가 기만으로 일관해왔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의 무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국으로 복무해온데서 비롯된다. 독자적인 정치적 결정은 실종되고 미국의 전쟁전략이 곧 남한 정부의 결정사항이 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남한정부는 가장 미국에 충실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여준 무능은 인질협상에서의 무능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무능이라는 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1) 따라서 정부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이 노무현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이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데 이르면 정부의 태도는 ‘기만'이 된다.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것의 해결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전적인 무능. 더구나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자리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끝까지 배제하는 태도는 정부의 기만이 매우 ’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나서야한다는 반전운동의 진단과 주장은 정당했다. 그러한 요구가 이 사태의 원인은 물론 해결되지 않는 원인 또한 미국의 전쟁에 있다는 것과 남한 정부의 '묻지마 한미동맹'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된 당일, 곧장 정부가 한 또 하나의 일은 뉴코아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도 아닌 민간사업장, 국가기간산업도 아닌 사업장에 공권력을 두 번이나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신속한 집행'도 더 이례적이다. 남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완전한 무능을 국내에서 '만회'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은 구할 수 없지만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이랜드-뉴코아 악질자본은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일까? 정부가 '인질 살해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황당한 공문구라는 것을 아는 대중들은,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공문구'를 날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탈레반에 대해서는 (자신이 불가능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무력사용을 배제하지만,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것을 ‘당장’ 사용한다. 신중함의 시차조차 없다.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이 없는, 오직 쉽게 사용가능한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무능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들이 미국이 벌인 전쟁과, 이에 무조건 동조한 남한 정부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은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더라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것이 바로 정세적 개입이다. 따라서 피랍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 문제라는 식(여러가지 판본의 피랍자 책임론)으로,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고 정부의 무능을 실천적으로 비호하는 입장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다소 논쟁적일 수도 있는 하나의 쟁점을 피해갈 수 있을까? 피랍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남한 보수 기독교회의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피랍자들과 보수 기독교회(라는 제도와 사회적 세력)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랍자들이 살아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단기선교' 혹은 '봉사'활동이 정당하거나 혹은 부당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그것과 무관하게 그/녀들이 인간으로서, 조건없는 인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탈레반의 납치행태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피랍자들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샘물교회는 기독교 우익 NGO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기독교 뉴라이트 등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의 기독교 뉴라이트 단체는 신지호 등이 주도하는 또 다른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와 통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강남과 신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대형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무한 것은 시청 앞 성조기 집회를 주도하는 순복음교회, 금란교회 등과 같은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 주류의 선발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보다 중산층의 구미에 맞게 보다 세련된 정치적 포지션을 유지할 뿐이다. 이들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 복음주의이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의 행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한다. 이들이 공격적인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국내에서의 선교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그럼 이들이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곳에서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에서 '선교'하면서 반공발전주의에 기반한 이들 기독교 교회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수행하는 ‘테러와의 전쟁’의 유기적인 일부, CNN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가 수행하는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필요가 있으며 피랍자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점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비판이 없는 상황에서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피해자 책임론은 안 된다'는 여론, 혹은 더 정확히는 '피랍 피해당사자' 뒤에 숨어서 자신들도 '피해자'인 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오히려 23명을 사지로 내몬 가해자의 유기적 일부다. 이들은 지금도 일말의 회개와 반성이 없다. <한기총>에서 어떤 진지한 반성적인 입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대중들의 이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숨김없이 표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납치피해자=보수 기독교 교회’로 더욱 강하게 등치되고 있다. 극단적인 네티즌들은 '반-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할 만큼 극단적인 (상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그 폭력은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주류 기독교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기독교 교회를 구별할 수 있는 비판, 책임묻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중 하나이다. 이미 그러한 은폐구도, 등치구조가 공고해진 지금 시점에서 다른 비판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늦어서 이제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는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문제제기라고 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선교는 이번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그 순진함을 의심해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이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관용적인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역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 제국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제국주의 지배 세계체제의 유기적 일부인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은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지배체제와 같이 제국주의 역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행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남한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는 어떤 반성도 없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계속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고할 수밖에 없다. ※ 이 글이 최종적으로 작성된 시점은 아프가니스탄 인질이 석방되기 전인 8월 25일 경이다. 1)탈리브(Ṭālib)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 전통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써, 그 복수형 단어가 '탈리반'(혹은 탈레반)이다. 서방 언론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탈레반’이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에 ‘탈레반’이란 명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탈리반’ 대신 ‘탈레반’으로 표기했다.본문으로
1.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인질로 잡힌 지 40여 일이 지난 상황에서, 살해당하거나 석방되지 않고 남아있는 19명의 석방을 위한 협상이 급진전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사태가 어떻게 종결되더라도 피랍 사태 40여 일 동안 한국정부가 보였던 입장들, 이번 납치사태가 제기하는 쟁점들에 대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7월31일,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되고 나서 곧 청와대, 외교통상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정부는 여기서 이번 사태에 대한 자신들의 대응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능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정부는 탈레반의 포로교환이라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피랍 한 달이 되어간 이 당시에야 '공식확인'하는 등 사태가 진행될 때마다 '확인 중'이라는 말로 일관했다. 협상에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수사도 대거 동원한다. 언론에는 협상․타협 가능성을 흘리는 한편,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까지 늘어놓았는데. 남한 정부가 탈레반에 책임을 묻겠다는 말은 정부 당국자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못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국 괴뢰 '정부'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진행되었지만 남한 정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시종 일관 돋보인 것은 미국의 책임을 배제해주는 '감동적인' 충성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물론, 미국도 공식적으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마치 故김선일 씨 납치 때 노무현이 '철군은 없다'고 곧장 대응하면서 살해를 재촉한 것을 반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납치 사건은 탈레반은 물론 미국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납치 사태의 해결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는 피랍자 가족들까지 미국대사관에 '호소'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상태에서 해결할 의지가 별로 없는데 그것은 단지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공허한 원칙 때문이 아니다. -이미 곳곳의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들의 협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미국도 선례가 있으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 현재의 갈등, 즉, 탈레반의 잔인성을 부각하는 것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럼 탈레반은 어떨까? 이들 역시, 자신들의 건재함과 주장을 전세계에 위성 TV로 매일 중계하고 있는 마당에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탈레반, 양 극단주의자들의 이해가 이렇게 일치하는 사건인데다가, 이들이 사태 해결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당에 남한 정부의 무능은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한 정부가 이러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책임지지는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한 발 더 나아가 기만으로 일관해왔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의 무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국으로 복무해온데서 비롯된다. 독자적인 정치적 결정은 실종되고 미국의 전쟁전략이 곧 남한 정부의 결정사항이 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남한정부는 가장 미국에 충실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여준 무능은 인질협상에서의 무능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무능이라는 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1) 따라서 정부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이 노무현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이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데 이르면 정부의 태도는 ‘기만'이 된다.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것의 해결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전적인 무능. 더구나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자리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끝까지 배제하는 태도는 정부의 기만이 매우 ’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나서야한다는 반전운동의 진단과 주장은 정당했다. 그러한 요구가 이 사태의 원인은 물론 해결되지 않는 원인 또한 미국의 전쟁에 있다는 것과 남한 정부의 '묻지마 한미동맹'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된 당일, 곧장 정부가 한 또 하나의 일은 뉴코아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도 아닌 민간사업장, 국가기간산업도 아닌 사업장에 공권력을 두 번이나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신속한 집행'도 더 이례적이다. 남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완전한 무능을 국내에서 '만회'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은 구할 수 없지만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이랜드-뉴코아 악질자본은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일까? 정부가 '인질 살해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황당한 공문구라는 것을 아는 대중들은,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공문구'를 날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탈레반에 대해서는 (자신이 불가능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무력사용을 배제하지만,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것을 ‘당장’ 사용한다. 신중함의 시차조차 없다.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이 없는, 오직 쉽게 사용가능한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무능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들이 미국이 벌인 전쟁과, 이에 무조건 동조한 남한 정부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은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더라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것이 바로 정세적 개입이다. 따라서 피랍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 문제라는 식(여러가지 판본의 피랍자 책임론)으로,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고 정부의 무능을 실천적으로 비호하는 입장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다소 논쟁적일 수도 있는 하나의 쟁점을 피해갈 수 있을까? 피랍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남한 보수 기독교회의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피랍자들과 보수 기독교회(라는 제도와 사회적 세력)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랍자들이 살아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단기선교' 혹은 '봉사'활동이 정당하거나 혹은 부당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그것과 무관하게 그/녀들이 인간으로서, 조건없는 인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탈레반의 납치행태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피랍자들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샘물교회는 기독교 우익 NGO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기독교 뉴라이트 등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의 기독교 뉴라이트 단체는 신지호 등이 주도하는 또 다른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와 통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강남과 신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대형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무한 것은 시청 앞 성조기 집회를 주도하는 순복음교회, 금란교회 등과 같은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 주류의 선발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보다 중산층의 구미에 맞게 보다 세련된 정치적 포지션을 유지할 뿐이다. 이들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 복음주의이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의 행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한다. 이들이 공격적인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국내에서의 선교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그럼 이들이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곳에서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에서 '선교'하면서 반공발전주의에 기반한 이들 기독교 교회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수행하는 ‘테러와의 전쟁’의 유기적인 일부, CNN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가 수행하는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필요가 있으며 피랍자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점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비판이 없는 상황에서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피해자 책임론은 안 된다'는 여론, 혹은 더 정확히는 '피랍 피해당사자' 뒤에 숨어서 자신들도 '피해자'인 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오히려 23명을 사지로 내몬 가해자의 유기적 일부다. 이들은 지금도 일말의 회개와 반성이 없다. <한기총>에서 어떤 진지한 반성적인 입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대중들의 이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숨김없이 표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납치피해자=보수 기독교 교회’로 더욱 강하게 등치되고 있다. 극단적인 네티즌들은 '반-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할 만큼 극단적인 (상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그 폭력은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주류 기독교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기독교 교회를 구별할 수 있는 비판, 책임묻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중 하나이다. 이미 그러한 은폐구도, 등치구조가 공고해진 지금 시점에서 다른 비판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늦어서 이제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는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문제제기라고 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선교는 이번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그 순진함을 의심해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이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관용적인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역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 제국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제국주의 지배 세계체제의 유기적 일부인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은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지배체제와 같이 제국주의 역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행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남한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는 어떤 반성도 없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계속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고할 수밖에 없다. ※ 이 글이 최종적으로 작성된 시점은 아프가니스탄 인질이 석방되기 전인 8월 25일 경이다. 1)탈리브(Ṭālib)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 전통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써, 그 복수형 단어가 '탈리반'(혹은 탈레반)이다. 서방 언론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탈레반’이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에 ‘탈레반’이란 명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탈리반’ 대신 ‘탈레반’으로 표기했다.본문으로
민족통일에서 경제통합으로? 햇볕정책을 주창한 김대중 정부는 '통일' 담론을 '경제통합' 담론으로 변형했다. 김대중 정부는 평화공존과 경제통합을 '사실상의 통일'로 규정하고 장기적인 경제통합 시나리오를 개발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남북 무역자유화로서, 북한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가공무역형 수출기지)로 전환하여 남한 경제의 하위 파트너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정부는 한ㆍ미 역할 분담론과 정경분리 정책을 제시했다. 즉 군사안보 대응은 미국이 주도하고 남한은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를 주도하며, 정치정세의 변화와 관계없이 남한 기업의 대북한 교역 및 투자를 장려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구상은 남측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질서의 확장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평화공존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외피를 통하여 '2국가 1체제'와 같이 사실상 (흡수)통일의 효과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방안이 북한의 붕괴에 따른 단시간 내의 흡수통일이 수반하는 '불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비용을 절약한다며 보수 층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남한 정부가 주장하는 국가연합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노무현 정부의 전략은 본질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확장판이다. 한반도 핵 위기와 동북아시아 평화와 같은 의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정책적 의지와 6자 회담의 틀이 규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이 독자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남한 정부가 어느 정도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경제협력과 대북 지원이다. 이러한 조건은 남북 경제 공동체 건설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8ㆍ15 경축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번 경축사에는 중대한 강조점의 변화가 있다. 노무현 축사는 경제협력이 "남쪽에게는 투자의 기회, 북쪽에는 경제회복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즉 더 이상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남한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자본주의 비즈니스의 논리를 이해하고, 이에 걸맞은 파트너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북경협 20년 남북교역이 시작된 첫 번째 계기는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이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ㆍ7 선언)이었다.1) 선언은 6개항의 실천 방향을 제시했는데, 남북교역에 관해서는 "남북 간 교역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 간 교역을 민족내부교역으로 간주한다."(3항), "남북 모든 동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비군사적 물자에 대해 우리 우방들이 북한과 교역을 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4항)고 명시했다.2) 같은 해 10월 <남북물자교류에 대한 기본 지침서>가 발표되면서, 남북 간의 '시범적' 성격의 교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90년 8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이 제정되면서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물자교류와 위탁가공교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남북교역 규모는 부침이 있었으나 1991년 1억 달러 수준에서 1999년 3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후 정부 주도의 남북경협이 본격화되었다. 3대 경협사업이라고 불리는 철도ㆍ도로 연결 사업, 개성공단 사업, 금강산 관광 사업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식량, 비료를 비롯한 대북 지원이 본격 추진되었다. 현재 남북경협 사업은 대체로 상업성 거래와 비상업성 거래로 분류된다. 상업성 거래는 교역(일반교역, 위탁가공교역)과 좁은 의미의 경제협력사업(개성공단, 금강산, 기타 민간)으로 나뉘고, 비상업성 거래는 대북 지원(민간, 정부)과 사회문화협력 등으로 나뉜다. 이러한 분류법에 비추어 볼 때, 지난 10년 간 남북경협의 전체 규모는 96년 2.4억 달러에서 2006년 13.5억 달러로 5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상업성 거래(교역+경제협력사업)는 2.5억 달러에서 9.3억 달러로 3.7배 증가한 반면, 대북 지원은 0.16억 달러에서 4.2억 달러로 26배나 증가했다. 현재 남북경협은 북한 대외무역의 30% 이상을 점하고 있으며, 남북경협을 제외한다면 북한이 경제계획을 수립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남한이 북한에 지원하는 연간 50톤 규모의 쌀은 북한의 쌀 생산량의 25%에 이르며, 북한의 외부 식량 도입량(약 103만 톤)의 49%에 달한다. 또한 연간 20~30만 톤 규모의 비료 지원이 북한의 농업 증산에 미치는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반면 남한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10억 달러 수준의 상업성 거래는 남한의 수출액 규모가 3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북경협을 주도하는 세력은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은 적지만, 남한 경제의 현실적, 잠재적 위협이 되는 '북한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남한 경제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의 대북 경협사업이 임가공 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져서 남북 분업구조 창출 효과가 아직은 미약하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한 경협 사업이 실질적인 분업구조를 형성하고 남북 경제통합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남한은 북한의 제조업 부문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개성공단 사업과 2006년 북한과 체결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방안을 주목하고 있다. 남한의 대북 경협 전략 1) 개성공단 개성공단은 2004년 12월 255명 북 측 노동자로 시작했으나 2007년 5월 현재 32개 사 1만 5천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다. 개성공단의 생산액과 수출액도 꾸준히 증가하여 2007년 1/4분기 생산액이 3,560만 달러에 이르며(1년 사이에 2.8배 증가), 수출액이 838만 달러에 이른다. 현재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결과를 두고, 개성공단 제품이 특례원산지 규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3)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사업의 확대가 북한에게 '비즈니스'의 현실을 실감케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고, 실제로 북한 내에서 개성공단을 정점으로 분업관계를 확장시켜 나갈 수도 있으리라 믿고 있다. 2)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또한 2006년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합의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 따르면, 남측은 8,000만 달러 상당의 경공업 원자재를 북한에 제공하고 북한은 그 중 3%를 아연과 마그네시아크링커로 상환하며, 나머지는 연 이자율 1%, 5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그런데 현재까지는 개발협력 방안에 대해 남과 북이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듯하다. 북한은 경공업 원부자재를 남한으로부터 차관 형식으로 구매한 것이므로, 품목이나 사용방식은 북한이 결정할 사항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북한이 현재 주로 요구하는 품목은 섬유, 신발, 비누 등이다). 반면 남한은 제공되는 원부자재의 효율적인 활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남한이 고려하고 있는 것은 개발협력 방안을 확장하여 북한의 경공업 분야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북한의 수출산업화 지원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① 원부자재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서 남측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유휴설비를 제공하거나 소규모 신규투자를 통해 설비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임가공 사업을 확대한다. ② 특히 섬유, 의류산업의 기반을 확충하여 수출전략산업으로 육성한다. 이를 위해 에너지, 노동력 공급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평양ㆍ남포 지역에 집약적인 생산지대를 창설한다. ③ 사업 초기부터 가능한 한 남북한 합작ㆍ합영을 실행하고, 북한 내 다른 기업과의 생산적 연계를 모색하여, 남한의 기술과 경영기법 등을 실제로 전파한다. 또한 인력훈련부터 해외마케팅 지원까지 종합적인 지원책을 마련한다. 현재 일각에서는 남북 간의 도로ㆍ철도 연결을 통해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자거나,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석유 포함?)을 개발하여 한반도 번영을 꾀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추진되는 사업은 이와 거리가 멀다. 현재 북한의 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 전력 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지만, 국제적인 협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일단은 남한이 보기에 '비즈니스'로서 성공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교통망, 전력망 등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지하자원 개발이 경제성이 있으려면, 해당 지역의 전력, 철도, 항만 등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재 조건에서는 상업적 타당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일단은 북한의 임가공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지원에 나서고 있다. 3)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 최근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시한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CEPA) 역시 이러한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면 대북 반출품 제약, 수출시장 제약이 크게 완화되어서 남북경협이 활성화될 공산이 높은데, 이럴 경우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에 대해 WTO 회원국의 제소가 빈발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방안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CEPA가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는 1국 내 2개 독립관세구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서, 중국 내륙과 홍콩의 CEPA 사례를 모델로 삼고 있다.4) 삼성경제연구소는 CEPA를 통해 남북경제통합의 첫 번째 단계로 진입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장기적인 시나리오는 ‘자유로운 물자이동(자유무역단계) → 대외무역정책 및 대내경제정책의 상호조율(제도통합단계) → 화폐단일화(화폐통합단계) → 인적자원의 자유로운 이동(인적통합단계)’이다. 특히 CEPA 잠정협정 10년 동안 북한경제구조를 재편하여 북한을 수출지향형 경제구조로 전환하는 게 핵심이라고 제시한다. 4) 대북 경제지원 또한 대북 경제지원의 성격도 앞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 식량난 이후 대북 지원은 주로 인도적 지원 또는 긴급 지원(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도적 지원만으로는 빈곤에서 탈피할 수 없고, 오히려 원조 의존적 체질을 정착시킬 수 있으므로, 이를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개발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5) 그런데 긴급지원의 경우는 지원 물품이 취약층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하는 모니터링이 이뤄진다면 (북한은 이러한 모니터링 활동에도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개발지원의 절차와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다. IMF와 세계은행 등이 요구하는 이행조건은 해당국이 특정한 정책과 제도의 채택을 강제하는 '정책 조건'과 개발사업의 추진절차와 방식을 규정하는 '프로세스 조건'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개발지원이 중단되기도 한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개발 지원이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느냐의 문제는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향한 정책적 의지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결국 대북 개발지원이 시작된다면, 이는 북한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북한의 체제 전환을 위한 세련된 대북 정책으로 작동할 것이다. 북한의 경제의 해체와 딜레마 북한은 이미 1980년대 중반 이후 개혁ㆍ개방을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84년에는 '8ㆍ3 인민소비품 창조운동'을 개시하여 각 기업과 가정 별로 계획경제 영역 바깥에서 부업생산을 장려했다 (1989년에 장려 조치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또한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하여 주로 조총련계 기업들을 중심으로 외자를 유치했다(그러나 이 당시의 사업은 대체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1년에는 라진ㆍ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설치했고, 1992년 4월 개정 헌법에서는 외국인의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기업 합영과 합작을 장려한다는 구절을 삽입했고, 곧 신무역체계도 도입하였다. 그러나 3차 7개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북한은 1993년부터 향후 2~3년 간을 '사회주의 건설의 완충기'로 설정하고, '무역, 농업, 경공업 제일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개혁 정책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계획경제 시스템이 자생적으로 퇴화, 해체하는 경향이 극심하게 나타났다. 북한은 1990-98년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고, 1995년부터 북한의 국가예산이 그 이전에 비해 1/2로 감소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96년 1월 '고난의 행군 정신'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과거 북한이 제시한 공식통계에 비추어 볼 때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붕괴 사태가 발생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성장회계'는 극히 과장된 것이고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라는 게 최근의 분석 결과다. 공식통계에 따른 분석은 북한이 성장률이 하락하는 '데드-크로스'를 경험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며, 최근에는 이미 1960년 초반 이를 겪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6) 따라서 북한경제의 위기는 갑작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누적된 효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북한의 계획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북한의 중앙, 도, 지방이 관리하는 기업소들이 차례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현재에도 공장가동률이 대략 20~30% 정도로 추정된다.7) 이에 따라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합법, 반합법, 불법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원시적인 형태의 시장 경제적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계획경제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북한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공산품은 대다수가 중국산이고, 이른바 '보따리 장사꾼'이 기관이나 회사로부터 상품을 인수하여 전국의 매대로 유통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품유통이 경제회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상품유통을 통해 약간의 부를 축적한 자들이 공장을 인수, 운영하여 자본축적을 통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일(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로 북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대규모 수해 사태는 북한의 경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계기다. 현재 북한은 전 국토가 민둥산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은 2/3이 산이며, 산림황폐화는 수자원 관리의 위기와 수해로 직결된다. 그렇지만 북한은 경제 정체와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5대 자연개조 사업의 하나로서 1976년부터 가능한 모든 산을 옥수수 밭으로 개간하기 위한 '다락밭' 조성 사업을 펼쳤다. 또한 취사와 난방을 위한 산림자원 채취가 급증하고 불법 화전인 뙈기 농사가 성행했다. 외화벌이를 위한 원목수출도 급증하여 북한의 원목수출은 1990년 14,000㎥에서, 1997년 410,000㎥으로 수십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토사유실과 침적에 따른 하수면 상승을 동반했고, 결국 반복적인 홍수 피해를 유발했다. 이러한 대혼란의 와중인 2002년에 북한은 '7ㆍ1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발표했다 (기업자율권 확대, 독립채산제 강화, 가격ㆍ임금 체계의 현실화). 2003년 3월에는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확대하여 합법적으로 취득 가능한 품목을 식량, 소비재 공산품으로 확대했다. 이러한 북한의 개혁 조치는 자생적인 시장지향적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의 공식적인 목표는 비공식 부문을 축소하고 공식 부문을 정상화하여 경제적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병존이 불가피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장경제 방식의 활동을 적절히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북한 당국도 7ㆍ1 조치를 발표할 때 '실리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면서 "이제는 국가가 생활을 다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일한 만큼 버는 것이다.", "낡은 경험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업방법을 대담하게 개선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7ㆍ1 경제개선 조치가 발표된 후에도 공장가동률이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의류, 신발, 비누 등 최소한의 소비재 경공업에 필요한 원자재마저 남한의 지원을 받아야 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또한 농업 부문은 금번 수해로 추가적인 식량 지원이 필요한 것처럼, 잦은 수해와 농업기반의 유실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개혁이 반드시 경제성장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1968년 헝가리의 '신경제 메커니즘'이나 1985~87년 이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현재 북한이 추진한 개혁조치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개혁조치를 구사했지만 경제회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로 인해 오히려 기존 메커니즘과 새로운 메커니즘의 충돌이 발생하거나, 소득격차 확대와 인플레이션 심화로 인한 대중소요가 나타나기도 했다 ('개혁 후 붕괴 시나리오'). 바로 여기에 북한의 딜레마가 있다. 북한의 대외의존과 경제개혁의 상관성 남북경협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진전이 매우 더딘 편이다. 그러나 경제협력 사업은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남한의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의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자본주의적 비즈니스 논리를 이해하고, 일방적인 지원을 바라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남한의 경제력 규모와 국제적 관심도를 고려할 때 북한을 좀 더 폭넓은 개혁, 개방으로 유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남한의 다양한 기관에서는 중장기적으로 북한이 국제경제기구(WTO, IMF 등)에 가입해야 하며, 국제경제 규범과 정책에 맞추어 내부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들이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이렇다. '북한은 정치적 안정과 인민의 경제적 피폐 상황을 맞바꾼 현재의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불안정성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개혁ㆍ개방으로 북한 경제를 되살리고 인민의 생활상을 개선할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국제통화기금(IMF)과 동유럽 경제의 관계를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친 1980년대 초반부터 IMF의 활동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 말 본격적인 경제개혁을 시작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는 IMF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8) 당시 IMF의 압력 하에 추진된 개혁은 ① 가격자유화, 임금자유화, 무역자유화, 기업경영 자율화 ② 거시경제적 안정화 ③ 국가기업의 사유화 ④ 시장경제 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기구의 확립 등이었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이 직접 체험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저개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도출된 1989년의 워싱턴 컨센서스와도 동일하다. 세계경제개혁을 주도하는 자들은 저개발 국가든, 기존 사회주의 국가든, 아니면 선진국이든 간에 각 국에게 적합한 특수한 경제정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단 하나의 경제정책(신자유주의!)이 있다는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이 경제적 생산의 감소,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증가, 계층 간 경제적 격차의 확대라는 파괴적인 효과를 낳은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9) 워싱턴 컨센서스와 IMF 경제개혁의 입안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효과는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한 일시적 혼란일 뿐이고, 이러한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면 건전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주장이 사실이냐는 문제는 세계의 민중운동이 세계적 불평등성의 증대와 빈곤의 심화를 고발하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명백하다. 현재 남북 경제협력 사업은 1단계로 북한을 남한 경제의 '후배지'로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북한경제의 통합 과정을 통해 세계경제체제로의 편입을 유도하겠다는 장기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남한의 여러 기관들은 이러한 전망이 북한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북한이 점점 더 대외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바뀌고 있고, 남한과 국제경제기구의 지원 없이 버틸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경제의 해체와 퇴화냐, 신자유주의 개혁이냐는 질문은 서로 다른 모습의 재앙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1)1988년은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장에서 김중기 후보가 6ㆍ10남북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하고, 4월 4일 김일성 대학 학생위원회가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내오면서 남북 청년학생 교류가 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하고, 통일운동이 급격히 확산되던 때였다.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이러한 저변의 흐름에 대한 일종의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단순히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고, 1970년 대 이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를 반영했다. 임필수,「미완의 교차승인 10년, 미완의 논쟁 10년」, 『사회진보연대』, 2000년 8월호. 본문으로 2) 나머지 4개항은 다음과 같다. ① 정치인ㆍ경제인ㆍ언론인ㆍ문화예술인ㆍ체육인ㆍ학자 및 학생 등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하며, 해외동포들이 자유로이 남북을 왕래하도록 문호를 개방한다. ② 남북적십자회담이 타결되기 이전이라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이산가족들간에 생사ㆍ 주소 확인, 서신왕래, 상호방문 등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주선ㆍ지원한다. ⑤ 남북 간의 소모적인 경쟁ㆍ대결 외교를 지양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에 발전적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하며, 또한 남북대표가 국제무대에서 자유롭게 만나 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희망한다. ⑥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ㆍ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한국도 소련ㆍ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는 것 등이다.본문으로 3)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초기부터 개성공단 제품의 특례원산지 문제를 '역외가공지역'(outward processing zone) 인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양국의 최종 타결 내용을 요약하면, 양국 대표로 구성되는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에서 수립한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북한 내 특정 지역이 역외가공지역으로 지정되면, 그 지역 내에서 생산된 제품은 한국 산으로 표기되며 한국 산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된다. 여기서 일정한 기준이란 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진전', ② 역외가공지역이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 ③ 역외가공지역이 일반적인 환경기준, 노동기준, 임금 관행, 영업과 경영관행에 부합하는지 여부 등이다. 위원회는 한ㆍ미 FTA 협정이 발효된 후 1주년 기념일에 회합하여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 정부가 협상 결과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① 비핵화의 '달성'이 아니라 '진전'이라고 표현되었다는 점, ② 일반적인 환경, 노동기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할 때 '현지[개성] 경제와 그 밖의 다른 곳[북한 내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상황과 관련 국제규범을 적절하게 참고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ILO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북한의 특수한 조건을 고려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6자 회담을 통해 한반도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개성공단 지역이 이미 다른 북한 지역에 비해 노동조건이 최상이고 앞으로도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본문으로 4) 삼성경제연구소는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남북관계 역시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 특수 관계'(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이므로 국가 간 협정(agreement)이 아니라 약정(arrangement) 형식으로 체결이 가능하며, 이는 '교류협력에 관한 부속합의서'(2002년)와 '4대 경협합의서' 등을 대폭 보완하고, 각종 경제협력 합의서를 통합함으로써 실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품교역에 대해서는 무관세거래 원칙을 재천명하고, 남북 간 상품교역에 관해 원칙적으로 제한을 폐지하며, 국제전략물자통제체제 상의 대북 제재의 완화를 선도한다. ② 서비스교역에 관해서는 북한이 긴급히 필요로 하는 에너지, 물류, 의류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서비스 시장을 개방한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건설 사업에 대해 우선 혜택을 부여한다. ③ 무역/투자 편리화에 관해서는 기존의 4대 경협합의서와 원산지규정합의서를 부속 문서로 채택한다. 본문으로 5) 통상 긴급 지원은 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지원을 뜻하나, 개발 지원은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지원을 뜻한다. 또한 개발지원에는 무상 지원뿐만 아니라 장기저리차관과 같은 대출도 포함된다 (물론 장기저리가 아니더라도 차관을 구하기 힘든 국가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지원의 성격을 지닐 때가 있다). 또한 개발지원을 제공하는 주체에는 특정 정부(양자간 지원)나 국제기구(다자간 지원)뿐만 아니라 NGO, 민간기업도 포함된다. 현재 국제 공적개발지원(ODA)의 추세와 부문별 비중을 보면 사회적 인프라와 행정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의 비중이 경제적 인프라와 비슷하거나 더 높다. 사회 분야에는 교육, 보건의료, 인구, 수자원 공급, 위생 등이 포함되며, 행정 분야는 행적 시스템에 대한 지원을 뜻한다. 이는 아무리 좋은 경제인프라와 생산시설이 갖춰지더라도 '인적 자원'의 상태가 나쁘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이며, 행정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면 투자가 낭비로 전환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한편 경제적 인프라에는 교통, 통신, 에너지 등이다. 이외에도 생산 분야 즉 농업, 광업, 제조업에 대한 지원도 이뤄진다. (생산 분야에 대한 개발지원은 농업 부문 투자를 중시하는데, 이는 개발지원 대상국이 대체로 농업국가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pp. 27~29, 공감, 2002. 대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북한의 주체사상/개인숭배에 대해서는 경악을 표시했지만 북한의 경제건설 성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안드레아스 크라체크 외,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본 북한사회』, 중원문화, 1990). 그러나 이는 북한 경제에 대한 부족한 정보와 단편적인 경험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는 분명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본문으로 7)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6년 북한의 철강, 시멘트, 비료 부문의 공장 가동률은 각각 18.3%, 46.1%, 11.8%로 추정된다. (차문석, 홍빈, 『현 시기 북한의 경제운영 실태에 관한 연구』, 진보정치연구소, 2007). 중요한 군수 공장이 가동되고 있으나, 특정 시간대에 전력과 에너지를 공급하여 생산이 이뤄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월 ○일~○일까지 전력을 공급하고 그 시일에 맞춰서 생산을 감행하는 방식). 본문으로 8) 북한은 1971년 서방 각 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도입하고 대 서방 무역 확대를 추진했지만, 1977년 이후 외채 상환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대 서방 경제교류를 중단했다. 그 결과 1978년 2차 7개년 계획에서는 '주체 경제', '자력갱생 원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합영법 제정은 대외 경제관계 없이 생산성 증가나 국민경제 향상이 어렵다는 북한의 인식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9) 사회주의 개혁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유고 내전일 것이다. 미셀 초스도프스키의 「유고연방의 해체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신식민지화」(『빈곤의 세계화』, 당대, 1998)는 유고의 경제개혁에 대한 IMF의 개입이 어떻게 유고 내전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상세히 추적한다. 1990년 1월, IMF의 잠정조정안(SBA)과 세계은행의 구조조정차관(SALⅡ) 아래에서 유고의 일괄 경제개혁조치가 개시되었다. 외채를 갚기 위해서 연방세입의 재조정이 요구되었고, 예산삭감은 공화국 정부와 자치주로 전달되어야 할 지불금을 중지시켰고, 이는 분리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본문으로
민족통일에서 경제통합으로? 햇볕정책을 주창한 김대중 정부는 '통일' 담론을 '경제통합' 담론으로 변형했다. 김대중 정부는 평화공존과 경제통합을 '사실상의 통일'로 규정하고 장기적인 경제통합 시나리오를 개발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남북 무역자유화로서, 북한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가공무역형 수출기지)로 전환하여 남한 경제의 하위 파트너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정부는 한ㆍ미 역할 분담론과 정경분리 정책을 제시했다. 즉 군사안보 대응은 미국이 주도하고 남한은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를 주도하며, 정치정세의 변화와 관계없이 남한 기업의 대북한 교역 및 투자를 장려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구상은 남측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질서의 확장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평화공존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외피를 통하여 '2국가 1체제'와 같이 사실상 (흡수)통일의 효과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방안이 북한의 붕괴에 따른 단시간 내의 흡수통일이 수반하는 '불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비용을 절약한다며 보수 층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남한 정부가 주장하는 국가연합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노무현 정부의 전략은 본질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확장판이다. 한반도 핵 위기와 동북아시아 평화와 같은 의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정책적 의지와 6자 회담의 틀이 규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이 독자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남한 정부가 어느 정도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경제협력과 대북 지원이다. 이러한 조건은 남북 경제 공동체 건설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8ㆍ15 경축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번 경축사에는 중대한 강조점의 변화가 있다. 노무현 축사는 경제협력이 "남쪽에게는 투자의 기회, 북쪽에는 경제회복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즉 더 이상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남한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자본주의 비즈니스의 논리를 이해하고, 이에 걸맞은 파트너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북경협 20년 남북교역이 시작된 첫 번째 계기는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이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ㆍ7 선언)이었다.1) 선언은 6개항의 실천 방향을 제시했는데, 남북교역에 관해서는 "남북 간 교역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 간 교역을 민족내부교역으로 간주한다."(3항), "남북 모든 동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비군사적 물자에 대해 우리 우방들이 북한과 교역을 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4항)고 명시했다.2) 같은 해 10월 <남북물자교류에 대한 기본 지침서>가 발표되면서, 남북 간의 '시범적' 성격의 교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90년 8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이 제정되면서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물자교류와 위탁가공교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남북교역 규모는 부침이 있었으나 1991년 1억 달러 수준에서 1999년 3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후 정부 주도의 남북경협이 본격화되었다. 3대 경협사업이라고 불리는 철도ㆍ도로 연결 사업, 개성공단 사업, 금강산 관광 사업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식량, 비료를 비롯한 대북 지원이 본격 추진되었다. 현재 남북경협 사업은 대체로 상업성 거래와 비상업성 거래로 분류된다. 상업성 거래는 교역(일반교역, 위탁가공교역)과 좁은 의미의 경제협력사업(개성공단, 금강산, 기타 민간)으로 나뉘고, 비상업성 거래는 대북 지원(민간, 정부)과 사회문화협력 등으로 나뉜다. 이러한 분류법에 비추어 볼 때, 지난 10년 간 남북경협의 전체 규모는 96년 2.4억 달러에서 2006년 13.5억 달러로 5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상업성 거래(교역+경제협력사업)는 2.5억 달러에서 9.3억 달러로 3.7배 증가한 반면, 대북 지원은 0.16억 달러에서 4.2억 달러로 26배나 증가했다. 현재 남북경협은 북한 대외무역의 30% 이상을 점하고 있으며, 남북경협을 제외한다면 북한이 경제계획을 수립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남한이 북한에 지원하는 연간 50톤 규모의 쌀은 북한의 쌀 생산량의 25%에 이르며, 북한의 외부 식량 도입량(약 103만 톤)의 49%에 달한다. 또한 연간 20~30만 톤 규모의 비료 지원이 북한의 농업 증산에 미치는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반면 남한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10억 달러 수준의 상업성 거래는 남한의 수출액 규모가 3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북경협을 주도하는 세력은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은 적지만, 남한 경제의 현실적, 잠재적 위협이 되는 '북한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남한 경제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의 대북 경협사업이 임가공 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져서 남북 분업구조 창출 효과가 아직은 미약하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한 경협 사업이 실질적인 분업구조를 형성하고 남북 경제통합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남한은 북한의 제조업 부문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개성공단 사업과 2006년 북한과 체결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방안을 주목하고 있다. 남한의 대북 경협 전략 1) 개성공단 개성공단은 2004년 12월 255명 북 측 노동자로 시작했으나 2007년 5월 현재 32개 사 1만 5천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다. 개성공단의 생산액과 수출액도 꾸준히 증가하여 2007년 1/4분기 생산액이 3,560만 달러에 이르며(1년 사이에 2.8배 증가), 수출액이 838만 달러에 이른다. 현재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결과를 두고, 개성공단 제품이 특례원산지 규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3)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사업의 확대가 북한에게 '비즈니스'의 현실을 실감케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고, 실제로 북한 내에서 개성공단을 정점으로 분업관계를 확장시켜 나갈 수도 있으리라 믿고 있다. 2)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또한 2006년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합의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 따르면, 남측은 8,000만 달러 상당의 경공업 원자재를 북한에 제공하고 북한은 그 중 3%를 아연과 마그네시아크링커로 상환하며, 나머지는 연 이자율 1%, 5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그런데 현재까지는 개발협력 방안에 대해 남과 북이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듯하다. 북한은 경공업 원부자재를 남한으로부터 차관 형식으로 구매한 것이므로, 품목이나 사용방식은 북한이 결정할 사항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북한이 현재 주로 요구하는 품목은 섬유, 신발, 비누 등이다). 반면 남한은 제공되는 원부자재의 효율적인 활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남한이 고려하고 있는 것은 개발협력 방안을 확장하여 북한의 경공업 분야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북한의 수출산업화 지원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① 원부자재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서 남측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유휴설비를 제공하거나 소규모 신규투자를 통해 설비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임가공 사업을 확대한다. ② 특히 섬유, 의류산업의 기반을 확충하여 수출전략산업으로 육성한다. 이를 위해 에너지, 노동력 공급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평양ㆍ남포 지역에 집약적인 생산지대를 창설한다. ③ 사업 초기부터 가능한 한 남북한 합작ㆍ합영을 실행하고, 북한 내 다른 기업과의 생산적 연계를 모색하여, 남한의 기술과 경영기법 등을 실제로 전파한다. 또한 인력훈련부터 해외마케팅 지원까지 종합적인 지원책을 마련한다. 현재 일각에서는 남북 간의 도로ㆍ철도 연결을 통해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자거나,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석유 포함?)을 개발하여 한반도 번영을 꾀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추진되는 사업은 이와 거리가 멀다. 현재 북한의 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 전력 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지만, 국제적인 협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일단은 남한이 보기에 '비즈니스'로서 성공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교통망, 전력망 등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지하자원 개발이 경제성이 있으려면, 해당 지역의 전력, 철도, 항만 등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재 조건에서는 상업적 타당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일단은 북한의 임가공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지원에 나서고 있다. 3)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 최근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시한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CEPA) 역시 이러한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면 대북 반출품 제약, 수출시장 제약이 크게 완화되어서 남북경협이 활성화될 공산이 높은데, 이럴 경우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에 대해 WTO 회원국의 제소가 빈발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방안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CEPA가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는 1국 내 2개 독립관세구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서, 중국 내륙과 홍콩의 CEPA 사례를 모델로 삼고 있다.4) 삼성경제연구소는 CEPA를 통해 남북경제통합의 첫 번째 단계로 진입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장기적인 시나리오는 ‘자유로운 물자이동(자유무역단계) → 대외무역정책 및 대내경제정책의 상호조율(제도통합단계) → 화폐단일화(화폐통합단계) → 인적자원의 자유로운 이동(인적통합단계)’이다. 특히 CEPA 잠정협정 10년 동안 북한경제구조를 재편하여 북한을 수출지향형 경제구조로 전환하는 게 핵심이라고 제시한다. 4) 대북 경제지원 또한 대북 경제지원의 성격도 앞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 식량난 이후 대북 지원은 주로 인도적 지원 또는 긴급 지원(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도적 지원만으로는 빈곤에서 탈피할 수 없고, 오히려 원조 의존적 체질을 정착시킬 수 있으므로, 이를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개발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5) 그런데 긴급지원의 경우는 지원 물품이 취약층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하는 모니터링이 이뤄진다면 (북한은 이러한 모니터링 활동에도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개발지원의 절차와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다. IMF와 세계은행 등이 요구하는 이행조건은 해당국이 특정한 정책과 제도의 채택을 강제하는 '정책 조건'과 개발사업의 추진절차와 방식을 규정하는 '프로세스 조건'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개발지원이 중단되기도 한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개발 지원이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느냐의 문제는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향한 정책적 의지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결국 대북 개발지원이 시작된다면, 이는 북한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북한의 체제 전환을 위한 세련된 대북 정책으로 작동할 것이다. 북한의 경제의 해체와 딜레마 북한은 이미 1980년대 중반 이후 개혁ㆍ개방을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84년에는 '8ㆍ3 인민소비품 창조운동'을 개시하여 각 기업과 가정 별로 계획경제 영역 바깥에서 부업생산을 장려했다 (1989년에 장려 조치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또한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하여 주로 조총련계 기업들을 중심으로 외자를 유치했다(그러나 이 당시의 사업은 대체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1년에는 라진ㆍ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설치했고, 1992년 4월 개정 헌법에서는 외국인의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기업 합영과 합작을 장려한다는 구절을 삽입했고, 곧 신무역체계도 도입하였다. 그러나 3차 7개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북한은 1993년부터 향후 2~3년 간을 '사회주의 건설의 완충기'로 설정하고, '무역, 농업, 경공업 제일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개혁 정책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계획경제 시스템이 자생적으로 퇴화, 해체하는 경향이 극심하게 나타났다. 북한은 1990-98년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고, 1995년부터 북한의 국가예산이 그 이전에 비해 1/2로 감소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96년 1월 '고난의 행군 정신'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과거 북한이 제시한 공식통계에 비추어 볼 때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붕괴 사태가 발생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성장회계'는 극히 과장된 것이고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라는 게 최근의 분석 결과다. 공식통계에 따른 분석은 북한이 성장률이 하락하는 '데드-크로스'를 경험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며, 최근에는 이미 1960년 초반 이를 겪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6) 따라서 북한경제의 위기는 갑작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누적된 효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북한의 계획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북한의 중앙, 도, 지방이 관리하는 기업소들이 차례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현재에도 공장가동률이 대략 20~30% 정도로 추정된다.7) 이에 따라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합법, 반합법, 불법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원시적인 형태의 시장 경제적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계획경제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북한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공산품은 대다수가 중국산이고, 이른바 '보따리 장사꾼'이 기관이나 회사로부터 상품을 인수하여 전국의 매대로 유통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품유통이 경제회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상품유통을 통해 약간의 부를 축적한 자들이 공장을 인수, 운영하여 자본축적을 통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일(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로 북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대규모 수해 사태는 북한의 경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계기다. 현재 북한은 전 국토가 민둥산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은 2/3이 산이며, 산림황폐화는 수자원 관리의 위기와 수해로 직결된다. 그렇지만 북한은 경제 정체와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5대 자연개조 사업의 하나로서 1976년부터 가능한 모든 산을 옥수수 밭으로 개간하기 위한 '다락밭' 조성 사업을 펼쳤다. 또한 취사와 난방을 위한 산림자원 채취가 급증하고 불법 화전인 뙈기 농사가 성행했다. 외화벌이를 위한 원목수출도 급증하여 북한의 원목수출은 1990년 14,000㎥에서, 1997년 410,000㎥으로 수십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토사유실과 침적에 따른 하수면 상승을 동반했고, 결국 반복적인 홍수 피해를 유발했다. 이러한 대혼란의 와중인 2002년에 북한은 '7ㆍ1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발표했다 (기업자율권 확대, 독립채산제 강화, 가격ㆍ임금 체계의 현실화). 2003년 3월에는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확대하여 합법적으로 취득 가능한 품목을 식량, 소비재 공산품으로 확대했다. 이러한 북한의 개혁 조치는 자생적인 시장지향적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의 공식적인 목표는 비공식 부문을 축소하고 공식 부문을 정상화하여 경제적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병존이 불가피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장경제 방식의 활동을 적절히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북한 당국도 7ㆍ1 조치를 발표할 때 '실리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면서 "이제는 국가가 생활을 다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일한 만큼 버는 것이다.", "낡은 경험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업방법을 대담하게 개선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7ㆍ1 경제개선 조치가 발표된 후에도 공장가동률이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의류, 신발, 비누 등 최소한의 소비재 경공업에 필요한 원자재마저 남한의 지원을 받아야 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또한 농업 부문은 금번 수해로 추가적인 식량 지원이 필요한 것처럼, 잦은 수해와 농업기반의 유실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개혁이 반드시 경제성장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1968년 헝가리의 '신경제 메커니즘'이나 1985~87년 이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현재 북한이 추진한 개혁조치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개혁조치를 구사했지만 경제회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로 인해 오히려 기존 메커니즘과 새로운 메커니즘의 충돌이 발생하거나, 소득격차 확대와 인플레이션 심화로 인한 대중소요가 나타나기도 했다 ('개혁 후 붕괴 시나리오'). 바로 여기에 북한의 딜레마가 있다. 북한의 대외의존과 경제개혁의 상관성 남북경협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진전이 매우 더딘 편이다. 그러나 경제협력 사업은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남한의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의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자본주의적 비즈니스 논리를 이해하고, 일방적인 지원을 바라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남한의 경제력 규모와 국제적 관심도를 고려할 때 북한을 좀 더 폭넓은 개혁, 개방으로 유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남한의 다양한 기관에서는 중장기적으로 북한이 국제경제기구(WTO, IMF 등)에 가입해야 하며, 국제경제 규범과 정책에 맞추어 내부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들이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이렇다. '북한은 정치적 안정과 인민의 경제적 피폐 상황을 맞바꾼 현재의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불안정성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개혁ㆍ개방으로 북한 경제를 되살리고 인민의 생활상을 개선할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국제통화기금(IMF)과 동유럽 경제의 관계를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친 1980년대 초반부터 IMF의 활동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 말 본격적인 경제개혁을 시작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는 IMF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8) 당시 IMF의 압력 하에 추진된 개혁은 ① 가격자유화, 임금자유화, 무역자유화, 기업경영 자율화 ② 거시경제적 안정화 ③ 국가기업의 사유화 ④ 시장경제 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기구의 확립 등이었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이 직접 체험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저개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도출된 1989년의 워싱턴 컨센서스와도 동일하다. 세계경제개혁을 주도하는 자들은 저개발 국가든, 기존 사회주의 국가든, 아니면 선진국이든 간에 각 국에게 적합한 특수한 경제정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단 하나의 경제정책(신자유주의!)이 있다는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이 경제적 생산의 감소,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증가, 계층 간 경제적 격차의 확대라는 파괴적인 효과를 낳은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9) 워싱턴 컨센서스와 IMF 경제개혁의 입안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효과는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한 일시적 혼란일 뿐이고, 이러한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면 건전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주장이 사실이냐는 문제는 세계의 민중운동이 세계적 불평등성의 증대와 빈곤의 심화를 고발하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명백하다. 현재 남북 경제협력 사업은 1단계로 북한을 남한 경제의 '후배지'로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북한경제의 통합 과정을 통해 세계경제체제로의 편입을 유도하겠다는 장기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남한의 여러 기관들은 이러한 전망이 북한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북한이 점점 더 대외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바뀌고 있고, 남한과 국제경제기구의 지원 없이 버틸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경제의 해체와 퇴화냐, 신자유주의 개혁이냐는 질문은 서로 다른 모습의 재앙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1)1988년은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장에서 김중기 후보가 6ㆍ10남북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하고, 4월 4일 김일성 대학 학생위원회가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내오면서 남북 청년학생 교류가 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하고, 통일운동이 급격히 확산되던 때였다.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이러한 저변의 흐름에 대한 일종의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단순히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고, 1970년 대 이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를 반영했다. 임필수,「미완의 교차승인 10년, 미완의 논쟁 10년」, 『사회진보연대』, 2000년 8월호. 본문으로 2) 나머지 4개항은 다음과 같다. ① 정치인ㆍ경제인ㆍ언론인ㆍ문화예술인ㆍ체육인ㆍ학자 및 학생 등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하며, 해외동포들이 자유로이 남북을 왕래하도록 문호를 개방한다. ② 남북적십자회담이 타결되기 이전이라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이산가족들간에 생사ㆍ 주소 확인, 서신왕래, 상호방문 등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주선ㆍ지원한다. ⑤ 남북 간의 소모적인 경쟁ㆍ대결 외교를 지양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에 발전적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하며, 또한 남북대표가 국제무대에서 자유롭게 만나 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희망한다. ⑥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ㆍ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한국도 소련ㆍ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는 것 등이다.본문으로 3)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초기부터 개성공단 제품의 특례원산지 문제를 '역외가공지역'(outward processing zone) 인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양국의 최종 타결 내용을 요약하면, 양국 대표로 구성되는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에서 수립한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북한 내 특정 지역이 역외가공지역으로 지정되면, 그 지역 내에서 생산된 제품은 한국 산으로 표기되며 한국 산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된다. 여기서 일정한 기준이란 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진전', ② 역외가공지역이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 ③ 역외가공지역이 일반적인 환경기준, 노동기준, 임금 관행, 영업과 경영관행에 부합하는지 여부 등이다. 위원회는 한ㆍ미 FTA 협정이 발효된 후 1주년 기념일에 회합하여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 정부가 협상 결과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① 비핵화의 '달성'이 아니라 '진전'이라고 표현되었다는 점, ② 일반적인 환경, 노동기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할 때 '현지[개성] 경제와 그 밖의 다른 곳[북한 내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상황과 관련 국제규범을 적절하게 참고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ILO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북한의 특수한 조건을 고려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6자 회담을 통해 한반도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개성공단 지역이 이미 다른 북한 지역에 비해 노동조건이 최상이고 앞으로도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본문으로 4) 삼성경제연구소는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남북관계 역시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 특수 관계'(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이므로 국가 간 협정(agreement)이 아니라 약정(arrangement) 형식으로 체결이 가능하며, 이는 '교류협력에 관한 부속합의서'(2002년)와 '4대 경협합의서' 등을 대폭 보완하고, 각종 경제협력 합의서를 통합함으로써 실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품교역에 대해서는 무관세거래 원칙을 재천명하고, 남북 간 상품교역에 관해 원칙적으로 제한을 폐지하며, 국제전략물자통제체제 상의 대북 제재의 완화를 선도한다. ② 서비스교역에 관해서는 북한이 긴급히 필요로 하는 에너지, 물류, 의류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서비스 시장을 개방한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건설 사업에 대해 우선 혜택을 부여한다. ③ 무역/투자 편리화에 관해서는 기존의 4대 경협합의서와 원산지규정합의서를 부속 문서로 채택한다. 본문으로 5) 통상 긴급 지원은 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지원을 뜻하나, 개발 지원은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지원을 뜻한다. 또한 개발지원에는 무상 지원뿐만 아니라 장기저리차관과 같은 대출도 포함된다 (물론 장기저리가 아니더라도 차관을 구하기 힘든 국가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지원의 성격을 지닐 때가 있다). 또한 개발지원을 제공하는 주체에는 특정 정부(양자간 지원)나 국제기구(다자간 지원)뿐만 아니라 NGO, 민간기업도 포함된다. 현재 국제 공적개발지원(ODA)의 추세와 부문별 비중을 보면 사회적 인프라와 행정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의 비중이 경제적 인프라와 비슷하거나 더 높다. 사회 분야에는 교육, 보건의료, 인구, 수자원 공급, 위생 등이 포함되며, 행정 분야는 행적 시스템에 대한 지원을 뜻한다. 이는 아무리 좋은 경제인프라와 생산시설이 갖춰지더라도 '인적 자원'의 상태가 나쁘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이며, 행정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면 투자가 낭비로 전환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한편 경제적 인프라에는 교통, 통신, 에너지 등이다. 이외에도 생산 분야 즉 농업, 광업, 제조업에 대한 지원도 이뤄진다. (생산 분야에 대한 개발지원은 농업 부문 투자를 중시하는데, 이는 개발지원 대상국이 대체로 농업국가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pp. 27~29, 공감, 2002. 대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북한의 주체사상/개인숭배에 대해서는 경악을 표시했지만 북한의 경제건설 성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안드레아스 크라체크 외,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본 북한사회』, 중원문화, 1990). 그러나 이는 북한 경제에 대한 부족한 정보와 단편적인 경험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는 분명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본문으로 7)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6년 북한의 철강, 시멘트, 비료 부문의 공장 가동률은 각각 18.3%, 46.1%, 11.8%로 추정된다. (차문석, 홍빈, 『현 시기 북한의 경제운영 실태에 관한 연구』, 진보정치연구소, 2007). 중요한 군수 공장이 가동되고 있으나, 특정 시간대에 전력과 에너지를 공급하여 생산이 이뤄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월 ○일~○일까지 전력을 공급하고 그 시일에 맞춰서 생산을 감행하는 방식). 본문으로 8) 북한은 1971년 서방 각 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도입하고 대 서방 무역 확대를 추진했지만, 1977년 이후 외채 상환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대 서방 경제교류를 중단했다. 그 결과 1978년 2차 7개년 계획에서는 '주체 경제', '자력갱생 원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합영법 제정은 대외 경제관계 없이 생산성 증가나 국민경제 향상이 어렵다는 북한의 인식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9) 사회주의 개혁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유고 내전일 것이다. 미셀 초스도프스키의 「유고연방의 해체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신식민지화」(『빈곤의 세계화』, 당대, 1998)는 유고의 경제개혁에 대한 IMF의 개입이 어떻게 유고 내전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상세히 추적한다. 1990년 1월, IMF의 잠정조정안(SBA)과 세계은행의 구조조정차관(SALⅡ) 아래에서 유고의 일괄 경제개혁조치가 개시되었다. 외채를 갚기 위해서 연방세입의 재조정이 요구되었고, 예산삭감은 공화국 정부와 자치주로 전달되어야 할 지불금을 중지시켰고, 이는 분리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