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x to Ludwig Kugelmann In Hanover (London, 29 November 1869) -Marx to Sigfrid Meyer and August Vogt In New York(London, April 9, 1870) [역주: 아일랜드는 중세 이래 줄곧 이웃한 잉글랜드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초기에 잉글랜드 왕은 아일랜드의 종주왕(宗主王)으로서 간접적인 형식으로 지배했지만 1688년 명예혁명으로 왕위를 빼앗긴 제임스 2세가 아일랜드에 상륙, 아일랜드인들의 지지를 발판으로 잉글랜드를 탈환하려고 시도하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가 직접 이끄는 군대에게 치열한 전투 끝에 패전하고 아일랜드는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의 예속국이 되어 그 인민들은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한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표현에 따르면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정복자를 위한 “나무꾼과 물긷는 사람” 이상이 될 수 없었다. 18세기 초 약 400만 명에 달하는 아일랜드 인구에게 부과되는 지대의 1/8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 잉글랜드의 부재지주에게로 흘러들어갔다. 게다가 잉글랜드 이외로는 소․양모의 수출이 금지되었던 관계로 주력 산업은 완전히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대혁명 등의 격변기 속에서 잉글랜드의 전제적 지배를 타도하고자 공화주의 이념을 수용하고 이는 이후 아일랜드 저항의 주된 이념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특히 프랑스대혁명을 경과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은 무장항쟁으로 폭발했다 애초에는 프랑스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무산되고 결국 아일랜드인 1798년 독자적으로 봉기하였다. 하지만 강력한 잉글랜드 정규군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되었고 잉글랜드 의회는 1800년 통합법(Act of Union)을 제정함으로써 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이로써 아일랜드는 영국의 하원에 100명의 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지만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계였던 아일랜드인들은 하원의원이 될 자격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잉글랜드 법에 의거하여 부재지주가 내세우는 배타적인 소유권 주장은, 대다수가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 소작인들이 주장하는 공동권으로서의 소작권, 즉 소작에 대한 관습적 권리의식과 충돌하면서 아일랜드에서 농업 문제를 둘러싼 계급적 갈등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잉글랜드 의회 자체 내에서도 아일랜드인들의 정치적․종교적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또한 아일랜드 몫으로 배당된 100명분의 의석을 둘러싸고 토리파와 휘그파 등 부르주아 정파들 사이에 끊임없는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850년대 이후 파머스턴과 글래드스턴 등 정계의 실세들이 주기적으로 권력을 잡았다가 실각하는 이합집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던 핵심 쟁점은 다름 아닌 아일랜드 문제였던 것이다. ‘아일랜드 문제’는 19세기 중반 절정기에 있었던 ‘대영제국’으로서도 곤경에 부닥치는 미해결의 난제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통합정책이 허구적일 뿐 아니라 기만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정세에서 공화주의로 무장한 페니언(Fenians)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이 등장한다. 페니언은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동지회(Irish Republican Brotherhood)로서 1850년대 비로소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전부터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지고하던 중산층의 온건파에 거리를 두면서 무장반란을 통한 완전독립이라는 강령을 전면에 걸고 일반 민중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에 이주한 아일랜드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19세기 중후반 잉글랜드 여러 도시들에서 대중 시위를 조직하였고 1866~71년 사에는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영국령 캐나다를 침공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조직의 지도자들과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아일랜드 관련 서신이 1860년대 후반부터 급증하는 것은 페니언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홉스봄에 따르면 당시 페니언의 반(反)영 투쟁은 당대 유럽의 여러 민족들 중 가장 민족주의적이었으며 어떤 점에서는 20세기의 혁명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선취하는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 자본주의와 노동자운동을 분석하면서 아일랜드 문제가 영국 혁명에서 상당히 관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Class in England)(1845년)에서 「대도시들」․「농업 프롤레타리아들」․「경쟁」․「아일랜드인들의 이주」 등의 장(章)에서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상태와 잉글랜드 노동자와의 관계 등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중 특히 「경쟁」․「아일랜드인들의 이주」에서는 아일랜드 노동자와 잉글랜드 노동자 사이의 경쟁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엥겔스에 따르면 불결한 의식주, 음주로 임금을 탕진하는 습관, 잉글랜드에서도 최하층에 속하는 빈곤 등이 아일랜드 이주민들의 주된 특징이다(물론 이는 엥겔스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사회가 아일랜드 이주민들에게 스스로 노예가 되어 술고래가 될 지위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비난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1840년대 중반에만 매년 1만 5천명이 “가축처럼” 배에 실려와 영국의 주요 공업도시인 런던(12만 명 거주)과 맨체스터(4만 명 거주), 리버풀(3만 4천 명 거주), 브리스톨(2만 4천 명 거주), 글래스고우(4만 명 거주) 등에 정착함으로써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저임금만을 받는 아일랜드 이주민들, 혹은 이들의 자녀들이 전체 노동자의 1/4~1/5을 차지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쟁의 메커니즘 하에서 잉글랜드 노동자들의 상태는 점차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이 하락하면서 잉글랜드 노동자들이 아일랜드인들의 불결한 의식주 생활로 수렴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엥겔스의 관심은 아일랜드의 역사와 농업문제 등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엥겔스는 1869년 9월에는 직접 아일랜드를 답사하기까지 한다(1869년 9월 27일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 마르크스는 『자본』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서 아일랜드를 분석한다. 아일랜드는 영국을 위한 가축 사육지로서 조방적 농업의 필요성으로 인해 1846년 이후 전인구의 거의 1/3이 아사(餓死)하는 참사를 겪고 난 이후에도 자본주의하 상대적 과잉인구의 법칙에 의해 비참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반 농민의 빈곤과는 대조적으로 아일랜드 내의 농업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올리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 비밀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더욱더 많은 경작지와 황무지가 목양지로 편입되고 목양지에서 생산되는 양모와 육류 등의 상품이 잉글랜드에서 물가의 등귀로 인해 비싸게 팔렸던 것이며, 아일랜드에서 인구와 총 경작면적의 절대적인 감소에도 불구하고 농업자본의 지배하에 목양지는 늘어났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내는 서신에 따르면 바로 이 농업자본은 영국을 지배하는 과두제의 근간인 토지귀족들의 정치․경제적 기반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독립은 단지 인도주의적 감성이 아니라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제조건이며, 그로 인해 아일랜드 노동자와의 협력은 영국 노동자운동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아일랜드 노동자와 협력하지 못하는 이상 영국 노동자들은 지배계급에 속박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뉴욕의 지그프리트 마이어(Sigfrid Meyer)와 아우구스트 포크트(August Vogt)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영국 노동자들의 태도가 지배계급과 다르지 않음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이 두 사람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페니언(Fenians)이라는 비밀결사조직과 관계 있는 인물들로 보인다.). 다른 자료에서도 마르크스가 아일랜드 문제에서 영국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의 단결의 중요성 뿐 아니라 그것이 영국 혁명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강조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아일랜드는 대영제국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며 “아일랜드를 잃게 되면, 대영제국은 스러지고 여지껏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끌고 있었던 영국에서의 계급간 내전은 첨예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나(1870년 3월 5일, 라파르그 부부(Paul and Laura Lafargue)에게 보낸 편지),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말미암은 경쟁에서 연유하는 “잉글랜드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 사이의 엄청난 적대감”이 “영국 혁명의 장애”이며 이것이 “지배계급에게 능수능란하게 악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양 노동자의 연합을 강조하는 모습(1871년 런던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회의에서의 연설) 등은 마르크스의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해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일랜드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은 이주노동자나 식민지 등의 문제가 이미 마르크스 당대부터 노동자운동의 중요한 쟁점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운동이 혁명적 관점을 채택할 때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단순한 선후관계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노동자 내부에서 인종주의를 재생산하는 고유한 물질적 조건을 의제로 올리고, 이에 맞서기 위한 이념과 운동을 통과할 때에야 비로소 노동자운동이 혁명적 관점을 채택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이를 좀 더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 곧 대중들의 집단적 주체 형성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고유한 정치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혁명적 계급 형성은 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당대에 이 문제와 마주쳤고 이에 맞서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대안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가 이 문제에 단순히 무지했다거나, 이를 억압․회피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오히려 이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아무리 바깥에서 비난한들, 마르크스를 괴롭혔던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적 분석과 이념, 운동을 만들지 못하는 한, 국제주의를 ‘대중들의 운동’으로 만드는 것은 극히 곤란하다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당위적으로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는 이유, 그들의 단결을 위해 필요한 조건에 관해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의 실패는 우리가 출발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지시한다.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국제주의를 말하는 자, “여기가 로두스다! 뛰어라!”] 하노버의 루트비히 쿠겔만에게 보내는 마르크스의 편지Marx To Ludwig Kugelmann In Hanover)1) 1869년 11월 29일 런던. 친애하는 쿠겔만2)에게. 5주쯤 전에 예니첸[Jennychen, 딸인 예니 마르크스의 애칭]이 자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네(사실은 두 통인데 한 통은 자네에게, 다른 한 통은 쿠겔만 부인에게 보냈으니까.). 그 아이가 G. 비어스(G. Weerth)3)의 초상화를 동봉했는데,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도 어렵고 또한 부본(副本)을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예니첸은 자네가 편지를 받았는지 여부를 가급적 빨리 알고 싶어한다네. 내가 하노버에서 엥겔스에게 보냈던 편지가 분명히 개봉됐다가 조잡하게 다시 봉해진 적이 있기 때문에, 우편 업무의 보안이 철저한지, 안전하긴 한지에 관해 의문이 들고 있어. 엥겔스는 봉투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육안으로 봐도 확실할 정도였다네. 나의 길고, 얼마간 한심하기까지 한 침묵은, 그동안 내가 과학적 연구 뿐 아니라 인터내셔널과 관련된 방대한 업무를 따라잡는 데 정신이 없었다는 사실로 변명하고자 하네. 게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노동계급(물론 농민들도 포함해서)의 상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을 보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열심히 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내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도 변명의 이유 중 하나이네. 지금쯤 『인민의 국가』(Volksstaat)지(紙)4)에서 아일랜드 정치범의 사면을 두고 글래드스턴5)에 관해 내가 제안한 결의안을 보았을 것이네. 내가 일전에 팔머스턴6)을 공격했던 것처럼 지금은 글래드스턴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게 여기서 관심을 끌고 있어. 이 곳에 있는 선동하길 좋아하는 망명가들은 안전한 거리를 두고 대륙의 전제적 지배자들을 즐겨 공격한다네. 그런 공격이 호소력을 가지려면 폭군의 면전에서) 벌어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일세. 하지만 내가 아일랜드 정치범들의 사면에 관해 발표한 것이나, 총평의회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 노동계급의 태도를 논의하고 이 주제에 관해 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 모두, 압제자에 대항하는 아일랜드 피압제인민들을 지지한답시고 결연하지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것과는 다른 근거를 갖고 있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영국 노동자들이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계급의 태도와 자신들의 태도를 아주 명확하게 분리하고, 아일랜드인들과 함께 전선을 꾸릴 뿐만 아니라 1801년에 세워진 [아일랜드와의] 연합왕국[Union]8)을 해체하고 자유로운 연방적 관계로 대체하는 과정을 주도하기 전까지 여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결정적인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네. 이제 문제는 이 확신을 영국 노동계급에게 전파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이는 아일랜드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영국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에 기반한 요구로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일세. 그렇지 않으면 계속 지배계급에게 속박된 채로 남게 될 것이네. 영국 프롤레타리아들이 아일랜드에 맞서 지배계급과 공동전선을 꾸리도록 강제 받을 것이니 말이네. 영국에서 모든 노동계급 운동 자체는 아일랜드인들과의 불화로 인해 무기력해졌어. 이들이 영국 노동계급 내에서 아주 중요한 분파를 형성하고 있잖은가. 이곳에서 해방의 주요한 조건인 영국 의 지주 과두제 전복은 여전히 불가능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들이 아일랜드에서 굳건히 [자신들의] 전초기지를 유지하고 있는 한 그 진지를 침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일단 현안들이 아일랜드 인민 자신의 손으로 넘어가고, 그들이 자신들만의 의회와 통치자를 갖게 되자마자, 그들이 자율적이 되자마자 (대개 영국인 지주들과 같은 자들인) 토지 귀족을 타도하는 것은 이곳보다 그곳에서 훨씬 더 쉬울 것이네. 아일랜드에서는 이것이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문제이기 때문이지. 그곳에서 지주들이란 영국에서처럼 전통적인 고관이나 대표자가 아니라, 민족의 불구대천의 원수니까. 그리고 영국 내부의 사회 발전을 무력화하는 것은 현재 아일랜드와 맺고 있는 관계 뿐 아니라 대외 정책, 특히 러시아 및 미국에 관한 대외 정책이기도 하지. 그러나 영국 노동계급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회 해방 일반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바로 여기가 초점을 집중시킬 지점이라네. 크롬웰 치하의 영국 공화국이 아일랜드에서 난파했던 것은 사실이네만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는 않아야 할 걸세!9) 아일랜드인들은 유죄 선고를 받은 중죄인 오도노번 로사(O'Donovan Rossa)10)를 하원의원으로 선출함으로써 영국 정부를 조롱해왔어. 정부측 신문들은 벌써부터,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Act)11)을 다시금 유예시켜 공포정치 제도를 갱신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네! 사실, 현재와 같은 영국-아일랜드 관계가 지속되는 한, 영국은 절대로 아일랜드를 다른 식으로 통치할 수 없을 게야. 가장 구역질나는 공포정치와 가장 분통터지는 부패에 의존할밖에. 프랑스에서는 아직까지 일이 잘 풀리고 있네. 한편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선동가들과 음지에 있는 목소리 높은 민주파들은 신용이 떨어지고 있네. 다른 한편으로 보나파르트12)는 자신의 목을 부러뜨릴 타협의 길로 내몰리고 있으이. (관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옵저버』(Observer) 어제 판에서는 프러시아 의회에서의 올덴버그(Eulenburg)13) 스캔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논평하더군. “나폴레옹께서는 ‘러시아인들을 한꺼풀 벗겨보면 타타르족[같은 야만인]을 발견할 것’14)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프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한꺼풀 벗겨볼 필요도 없이 러시아인들을 발견할 것이네. 그건 그렇고, 라이히(메드(Med) 박사라네)의 세례명은 에두아르(Eduard)이고, 그의 책 서문을 볼 때 고타에 살고 있는 것 같네. 백작부인과 프렌첸(Franzchen)에게도 안부를 전하네. 친구 칼 마르크스로부터. 뉴욕의 지그프리트 마이어와 아우구스트 포크트에게 보내는 마르크스의 편지15)(Marx to Sigfrid Meyer and August Vogt In New York) 1870년 4월 9일 런던. 모레 (4월 11일) 손에 잡히는 모든 인터내셔널 문서들을 당신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오늘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거든요.). [스위스] 바젤 [보고서]16)도 더 보내겠습니다. 보내는 자료들 중에는 아일랜드 정치범 사면에 관한 11월 30일 총평의회 결의안 복사본 몇 부도 있을 겁니다. 이 결의안은 제가 발의했는데 당신도 이미 아실 겁니다. 또한 페니언 수감자 처우에 관한 아일랜드어 팜플렛도 보냅니다. 현재의 연합[왕국]의 필수적 변혁, 즉 예속된 아일랜드를 대영 제국과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방으로 변혁하는 것에 관해, 추가적 동의(動議)를 제출하려는 게 제 의도였습니다. 공개적 결의에 관한 한 이 문제에 관한 추가적인 진전은 당분간 중단되었습니다. 제가 총평의회에 부득이하게 불참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총평의회 성원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저를 대신할 만큼 아일랜드 문제를 충분히 알지 못했고, 영국 성원들에 대해 충분한 신망을 누리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 낭비는 아니었으며, 저는 여러분이 다음 사항을 특히 유의해 주었으면 합니다. 수년 동안 아일랜드 문제를 연구한 후 제가 도달한 결론은, 영국 지배계급에 대한 결정적 일격(그리고 이는 전세계 노동자운동에도 결정적일 것입니다)은 영국에서가 아니라 오직 아일랜드에서만 가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1870년 1월 1일, 총평의회17)는 제가 프랑스어(왜냐하면 영국에서 중요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독일 언론이 아니라 프랑스 언론뿐이기 때문입니다.)로 기초한 비밀 회람문18)을 발간했습니다. 이 문서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아일랜드 민족투쟁의 관계, 따라서 국제노동자협회가 아일랜드 문제에 관해 취해야 할 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일랜드는 영국 토지 귀족의 보루입니다. 아일랜드에 대한 착취는 영국 토지 귀족이 누리는 물질적 부의 주된 원천 중 하나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국 토지 귀족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 힘입니다. 사실 영국 토지 귀족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아일랜드는 영국 귀족들이 영국 자체에서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인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영국 군대와 경찰이 내일 철수한다면, 당장 아일랜드에서 농민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 영국 귀족이 몰락하면 그 필연적 결과는 영국에서 귀족제의 몰락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전제 조건을 제공할 것입니다. 아일랜드에서 영국 토지귀족의 해체는 영국 자체에서보다 훨씬 용이한 작업인데, 왜냐하면 아일랜드에서 토지 문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 문제의 유일무이한 형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아일랜드 민중의 압도적 다수에게 생사가 달린 생존의 문제이며, 동시에 민족 문제에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인들의 성격이 영국인들보다 훨씬 정열적이고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영국 부르주아지의 경우, 이들은 애초부터 영국 귀족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아일랜드를 단순한 목양지로 만들어 영국 시장에 육류와 양모를 가능한 한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려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게다가 축출과 강제적 이민을 통해 아일랜드 인구를 적은 수로 줄임으로써, (농지로 임대된 토지에 투자한) 영국 자본이 “안전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습니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예전에]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농업 지역들을 제거했을 때와 동일한 이해를, 아일랜드의 토지를 말소하는 데서도 갖습니다. 부재 지주와 여타 아일랜드 수입으로 현재 매년 런던으로 흘러 들어오는 6천~1만 파운드의 수입 역시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국 부르주아지는 현재의 아일랜드 경제에 훨씬 중요한 이해 역시 갖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차지농장의 집중화 때문에 아일랜드는 영속적으로 자신들의 잉여를 영국의 노동 시장으로 보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임금은 하락하고 영국 노동자계급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입지는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지금 영국의 모든 산업적․상업적 중심에는 두 개의 적대적 진영, 즉 영국 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 프롤레타리아로 분할된 노동자계급이 있습니다. 평범한 영국 노동자들은 아일랜드 노동자가 자신들의 생활 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라고 보면서 증오합니다. 아일랜드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배 민족의 일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결국 아일랜드에 반하는 영국 귀족과 자본가의 도구가 됩니다. 이로써 자신들[영국 노동자]에 대한 그들[영국 귀족과 자본가]의 지배를 강화하게 되는 것이죠. 영국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에 맞서 종교적․사회적․민족적 편견을 고스란히 간직합니다. 아일랜드 노동자에 대한 영국 노동자의 태도는 전에 노예제 국가였던 미국에서 ‘가난한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보였던 태도와 아주 똑같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되로 받은 다음 말로 줍니다. 영국 노동자를 아일랜드의 영국 지배자의 공모자이자 어리석은 도구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 같은 적대는 언론․설교자․희극 잡지, 즉 지배계급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인위적으로 유지될 뿐 아니라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적대야말로 조직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노동자계급이 무력한 비밀인 것입니다. 자본가들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악(害惡)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 사이의 적대는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숨겨진 기반입니다. 이 때문에 양국 노동자계급 사이의 진솔하고 진지한 협력 일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양국의 정부는 언제든지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시기에 서로 위협하거나, 필요할 때는 서로 전쟁을 벌임으로써 [각국 내부에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을 분쇄할 수 있게 됩니다. 자본의 중심지로서 그 권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은 현재 노동자 혁명을 위해 가장 중요한 국가이며, 게다가 혁명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결과적으로 국제노동자협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영국에서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혁명을 촉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일랜드를 독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내셔널의 임무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을 어디에서나 최우선의 의제로 제기하고, 어디에서나 공개적으로 아일랜드 편에 서는 것입니다. 런던 중앙평의회의 특별한 임무는, 아일랜드의 민족 해방이 추상적 정의나 인도주의적 감정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회 해방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는 점을 영국 노동자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입니다. 이상이 회람 서한의 주된 요점을 거칠게 요약한 것인데, 이는 동시에 아일랜드 정치범 사면에 관해 중앙평의회가 통과시킨 결의안의 존재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회람을 기초하고] 얼마 후에 저는 영국인들이 페니언 협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등에 대해 격렬하게 글래드스턴 등을 공격하는 익명의 기사19)를 (브뤼셀에 소재한 우리 인터내셔널 벨기에의 중앙위원회20) 기관지인) 『인터나치오날』(Internationale)지(紙)에 보냈습니다. 이 기사에서 저는 프랑스 공화주의자들(『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紙)21)는 아일랜드에 관해 악당 탈랑디에(Talandier)가 쓴 헛소리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역시 규탄했는데, 이들은 자민족 중심주의 속에서 자신들의 분노를 프랑스 제정에만 쏟기 때문입니다. 이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제 딸 예니는 윌리엄즈(J. Williams)(제 딸은 편집부에 보내는 사적인 편지에서 스스로를 예니 윌리엄즈로 불렀답니다)라는 이름으로 『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紙)에 일련의 기사를 기고했고, 그 중에서 『오도노번 로사의 편지』를 출판했습니다. 굉장한 소란이 이어졌죠. 몇 년 동안 냉소적 거부로 일관했지만, 글래드스턴은 이 일 때문에 페니언 수감자들의 처우에 관해 의회조사단을 구성할 것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니는 이제 『마르세에즈』지(紙)의 아일랜드 문제 정규 연락원이 되었습니다.22)(이것은 물론 우리 사이의 비밀입니다) 영국 정부와 언론은 아일랜드 문제가 이제 프랑스에서 의제에 오르게 되었고, 격노하고 있으며, 이 불한당들이 파리를 통해 전 대륙에서 감시받고 노출되다는 사실에 격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블린의 아일랜드 지도자, 언론인들이 우리와 접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는데, 이는 이전에 총평의회가 이뤄내지 못한 것이니, 일석이조(一石二鳥)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도 동일한 노선에 따라 작업하는 넓은 영역이 있습니다. 독일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의 동맹(물론 이 동맹에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영국 노동자와 미국 노동자의 동맹)은 지금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성과일 것입니다. 이는 인터내셔널의 이름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일랜드 문제의 사회적 중요성은 분명해져야 합니다. 다음 번에는 영국 노동자들의 입장에 관해 특별히 몇 자 적겠습니다. 안부와 우애를 전하며! 칼 마르크스. 1)MECW, Volume 43, p. 389; 처음 간행된 것은 Die Neue Zeit, Stuttgart, 1901-1902이며, 모든 텍스트가 소개된 것은 Pisma Marksa h Kugelmanu (Letters of Marx to Kugelmann), Moscow-Leningrad, 1928.본문으로 2)[역주] 루트비히 쿠겔만(Ludwig Kugelmann, 1828~1902): 독일의 의사이자 국제노동자협회의 활동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로서 1862~75년 동안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후 독일사회민주당원이 된다. 본문으로 3) [역주] 게오르그 비어스(Georg Weerth, 1822~56): 초기에는 면직물 회사에 근무하였으나 노동자운동의 대의에 공감하면서 영국으로 이주한 이후 차티스트 운동에 투신하였다. 엥겔스와 수 년 동안 교류하였으며 브뤼셀에서는 마르크스와 만나기도 하였다. 시인으로서 하이네를 동경하면서 몇몇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엥겔스는 그를 가리켜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시인”이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4)[역주] 『인민의 국가』(Der Volksstaat): 독일사회민주노동자당의 중앙 기관지. 1869년 10월 2일부터 1876년 9월 23일까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마르크스․엥겔스가 편집에 관여하였다. 본문으로 5)[역주]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 1809~98): 영국의 자유주의적 정치가. 관세개혁과 곡물법 철폐에 앞장섰으며 1868년 수상에 취임한 이후 아일랜드에 대한 온건한 종교정책을 실시했다. 이후 세 차례나 수상을 역임하면서 3차 선거법 개정을 관철시켰으나 아일랜드 자치법안은 이를 둘러싸고 당이 분열하거나(1886년 3차 내각), 상원에서 부결(1893년 4차 내각)되었다. 본문으로 6)[역주] 팔머스톤(Viscount Palmerston, 1784~865): 영국의 정치가. 1855~58년 수상이었으며 1859~65년까지 글랜드스톤 등과 함께 연합 내각을 이끌었다. 크림전쟁과 아편전쟁 등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본문으로 7) [역주] 원문은 라틴어임. “vultu instantis tyranni”본문으로 8) [역주] 1800년 잉글랜드 의회에서 통과된 통합법에 따라 아일랜드는 영국의 완전한 일부가 되었다. 본문으로 9)[역주] 원문은 라틴어임. “Non bis in idem!”본문으로 10)[역주] 제레미야 오도노번 로사(Jeremiah O'Donovan Rossa, 1831~1915): 페니언의 전신인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동지회의 창립자. 1865~71년 동안 여러 차례 페니언과 관련있다는 혐의를 받고 영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폭탄을 사용하는 일명 “다이너마이트 캠페인”을 조직하여 이름을 떨쳤다. 예니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 받기도 했다. 본문으로 11)[역주] 인신보호법: 1679년 부당한 구금에 따른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배 제정된 영국의 법률. 이에 따라 이유를 명시하지 않은 체포는 위법으로 간주하고, 반드시 인신보호영장을 받는 동시에 피구금자는 신속히 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부당한 체포나 구금이 금지되었다. 본문으로 12)[역주] 나폴레옹 3세: 프랑스의 제2공화국 대통령(재위 1850~1852)․제2제정 황제(재위 1852~1871). 나폴레옹의 조카로서 1850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 제정을 실시하지만 1870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었다가 파리코뮌으로 제정이 붕괴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본문으로 13) [역주]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올덴버그(Friedrich Albrecht zu Eulenburg, 1815~81): 프로이센의 외교관․관리. 올덴버그 사절단을 이끌고 1861년 일본 및 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62~78년 사이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본문으로 14) [역주] 원문은 불어임. “Grattez le Russe, et vous trouverez le Tartare’”본문으로 15)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Progress Publishers, 1975, pp. 220-224본문으로 16)이 언급은 총회에서 발간된 제1 인터내셔널 바젤 회의의 보고서와 관련된다. - Ed본문으로 17)마르크스는 “1869년 12월 1일”이라고 썼는데 명백한 오기(誤記)이다. - Ed.본문으로 18)Karl Marx, Le Conseil Gneral au Conseil Federal de la Suisse Romande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로망 스위스의 연방 평의회(Federal Council of Romance Switzerland)에게」] - Ed.본문으로 19)Le gouvernement anglais et les prisonniers fenians [「영국 정부와 페니언 수감자들」] 1870년 2월 27일에 간행되었다. - Ed본문으로 20)마르크스는 벨기에 연합평의회(Belgian Federal Council)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Ed.본문으로 21)[역주] 『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 프랑스의 공화주의 신문.본문으로 22) [역주] 예니는 1870년 2월 27일부터 4월 19일까지 모두 8편의 기사를 『마르세유』지에 작성하였다. 이 기사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영국 정부와 페니언 수감자들」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특히 1870년 3월 16일에 작성한 기사는 마르크스와의 공동작업이었다.본문으로
-Marx to Ludwig Kugelmann In Hanover (London, 29 November 1869) -Marx to Sigfrid Meyer and August Vogt In New York(London, April 9, 1870) [역주: 아일랜드는 중세 이래 줄곧 이웃한 잉글랜드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초기에 잉글랜드 왕은 아일랜드의 종주왕(宗主王)으로서 간접적인 형식으로 지배했지만 1688년 명예혁명으로 왕위를 빼앗긴 제임스 2세가 아일랜드에 상륙, 아일랜드인들의 지지를 발판으로 잉글랜드를 탈환하려고 시도하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가 직접 이끄는 군대에게 치열한 전투 끝에 패전하고 아일랜드는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의 예속국이 되어 그 인민들은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한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표현에 따르면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정복자를 위한 “나무꾼과 물긷는 사람” 이상이 될 수 없었다. 18세기 초 약 400만 명에 달하는 아일랜드 인구에게 부과되는 지대의 1/8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 잉글랜드의 부재지주에게로 흘러들어갔다. 게다가 잉글랜드 이외로는 소․양모의 수출이 금지되었던 관계로 주력 산업은 완전히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대혁명 등의 격변기 속에서 잉글랜드의 전제적 지배를 타도하고자 공화주의 이념을 수용하고 이는 이후 아일랜드 저항의 주된 이념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특히 프랑스대혁명을 경과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은 무장항쟁으로 폭발했다 애초에는 프랑스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무산되고 결국 아일랜드인 1798년 독자적으로 봉기하였다. 하지만 강력한 잉글랜드 정규군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되었고 잉글랜드 의회는 1800년 통합법(Act of Union)을 제정함으로써 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이로써 아일랜드는 영국의 하원에 100명의 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지만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계였던 아일랜드인들은 하원의원이 될 자격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잉글랜드 법에 의거하여 부재지주가 내세우는 배타적인 소유권 주장은, 대다수가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 소작인들이 주장하는 공동권으로서의 소작권, 즉 소작에 대한 관습적 권리의식과 충돌하면서 아일랜드에서 농업 문제를 둘러싼 계급적 갈등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잉글랜드 의회 자체 내에서도 아일랜드인들의 정치적․종교적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또한 아일랜드 몫으로 배당된 100명분의 의석을 둘러싸고 토리파와 휘그파 등 부르주아 정파들 사이에 끊임없는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850년대 이후 파머스턴과 글래드스턴 등 정계의 실세들이 주기적으로 권력을 잡았다가 실각하는 이합집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던 핵심 쟁점은 다름 아닌 아일랜드 문제였던 것이다. ‘아일랜드 문제’는 19세기 중반 절정기에 있었던 ‘대영제국’으로서도 곤경에 부닥치는 미해결의 난제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통합정책이 허구적일 뿐 아니라 기만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정세에서 공화주의로 무장한 페니언(Fenians)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이 등장한다. 페니언은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동지회(Irish Republican Brotherhood)로서 1850년대 비로소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전부터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지고하던 중산층의 온건파에 거리를 두면서 무장반란을 통한 완전독립이라는 강령을 전면에 걸고 일반 민중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에 이주한 아일랜드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19세기 중후반 잉글랜드 여러 도시들에서 대중 시위를 조직하였고 1866~71년 사에는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영국령 캐나다를 침공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조직의 지도자들과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아일랜드 관련 서신이 1860년대 후반부터 급증하는 것은 페니언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홉스봄에 따르면 당시 페니언의 반(反)영 투쟁은 당대 유럽의 여러 민족들 중 가장 민족주의적이었으며 어떤 점에서는 20세기의 혁명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선취하는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 자본주의와 노동자운동을 분석하면서 아일랜드 문제가 영국 혁명에서 상당히 관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Class in England)(1845년)에서 「대도시들」․「농업 프롤레타리아들」․「경쟁」․「아일랜드인들의 이주」 등의 장(章)에서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상태와 잉글랜드 노동자와의 관계 등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중 특히 「경쟁」․「아일랜드인들의 이주」에서는 아일랜드 노동자와 잉글랜드 노동자 사이의 경쟁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엥겔스에 따르면 불결한 의식주, 음주로 임금을 탕진하는 습관, 잉글랜드에서도 최하층에 속하는 빈곤 등이 아일랜드 이주민들의 주된 특징이다(물론 이는 엥겔스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사회가 아일랜드 이주민들에게 스스로 노예가 되어 술고래가 될 지위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비난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1840년대 중반에만 매년 1만 5천명이 “가축처럼” 배에 실려와 영국의 주요 공업도시인 런던(12만 명 거주)과 맨체스터(4만 명 거주), 리버풀(3만 4천 명 거주), 브리스톨(2만 4천 명 거주), 글래스고우(4만 명 거주) 등에 정착함으로써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저임금만을 받는 아일랜드 이주민들, 혹은 이들의 자녀들이 전체 노동자의 1/4~1/5을 차지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쟁의 메커니즘 하에서 잉글랜드 노동자들의 상태는 점차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이 하락하면서 잉글랜드 노동자들이 아일랜드인들의 불결한 의식주 생활로 수렴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엥겔스의 관심은 아일랜드의 역사와 농업문제 등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엥겔스는 1869년 9월에는 직접 아일랜드를 답사하기까지 한다(1869년 9월 27일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 마르크스는 『자본』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서 아일랜드를 분석한다. 아일랜드는 영국을 위한 가축 사육지로서 조방적 농업의 필요성으로 인해 1846년 이후 전인구의 거의 1/3이 아사(餓死)하는 참사를 겪고 난 이후에도 자본주의하 상대적 과잉인구의 법칙에 의해 비참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반 농민의 빈곤과는 대조적으로 아일랜드 내의 농업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올리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 비밀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더욱더 많은 경작지와 황무지가 목양지로 편입되고 목양지에서 생산되는 양모와 육류 등의 상품이 잉글랜드에서 물가의 등귀로 인해 비싸게 팔렸던 것이며, 아일랜드에서 인구와 총 경작면적의 절대적인 감소에도 불구하고 농업자본의 지배하에 목양지는 늘어났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내는 서신에 따르면 바로 이 농업자본은 영국을 지배하는 과두제의 근간인 토지귀족들의 정치․경제적 기반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독립은 단지 인도주의적 감성이 아니라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제조건이며, 그로 인해 아일랜드 노동자와의 협력은 영국 노동자운동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아일랜드 노동자와 협력하지 못하는 이상 영국 노동자들은 지배계급에 속박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뉴욕의 지그프리트 마이어(Sigfrid Meyer)와 아우구스트 포크트(August Vogt)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영국 노동자들의 태도가 지배계급과 다르지 않음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이 두 사람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페니언(Fenians)이라는 비밀결사조직과 관계 있는 인물들로 보인다.). 다른 자료에서도 마르크스가 아일랜드 문제에서 영국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의 단결의 중요성 뿐 아니라 그것이 영국 혁명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강조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아일랜드는 대영제국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며 “아일랜드를 잃게 되면, 대영제국은 스러지고 여지껏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끌고 있었던 영국에서의 계급간 내전은 첨예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나(1870년 3월 5일, 라파르그 부부(Paul and Laura Lafargue)에게 보낸 편지),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말미암은 경쟁에서 연유하는 “잉글랜드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 사이의 엄청난 적대감”이 “영국 혁명의 장애”이며 이것이 “지배계급에게 능수능란하게 악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양 노동자의 연합을 강조하는 모습(1871년 런던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회의에서의 연설) 등은 마르크스의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해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일랜드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은 이주노동자나 식민지 등의 문제가 이미 마르크스 당대부터 노동자운동의 중요한 쟁점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운동이 혁명적 관점을 채택할 때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단순한 선후관계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노동자 내부에서 인종주의를 재생산하는 고유한 물질적 조건을 의제로 올리고, 이에 맞서기 위한 이념과 운동을 통과할 때에야 비로소 노동자운동이 혁명적 관점을 채택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이를 좀 더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 곧 대중들의 집단적 주체 형성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고유한 정치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혁명적 계급 형성은 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당대에 이 문제와 마주쳤고 이에 맞서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대안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가 이 문제에 단순히 무지했다거나, 이를 억압․회피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오히려 이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아무리 바깥에서 비난한들, 마르크스를 괴롭혔던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적 분석과 이념, 운동을 만들지 못하는 한, 국제주의를 ‘대중들의 운동’으로 만드는 것은 극히 곤란하다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당위적으로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는 이유, 그들의 단결을 위해 필요한 조건에 관해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의 실패는 우리가 출발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지시한다.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국제주의를 말하는 자, “여기가 로두스다! 뛰어라!”] 하노버의 루트비히 쿠겔만에게 보내는 마르크스의 편지Marx To Ludwig Kugelmann In Hanover)1) 1869년 11월 29일 런던. 친애하는 쿠겔만2)에게. 5주쯤 전에 예니첸[Jennychen, 딸인 예니 마르크스의 애칭]이 자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네(사실은 두 통인데 한 통은 자네에게, 다른 한 통은 쿠겔만 부인에게 보냈으니까.). 그 아이가 G. 비어스(G. Weerth)3)의 초상화를 동봉했는데,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도 어렵고 또한 부본(副本)을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예니첸은 자네가 편지를 받았는지 여부를 가급적 빨리 알고 싶어한다네. 내가 하노버에서 엥겔스에게 보냈던 편지가 분명히 개봉됐다가 조잡하게 다시 봉해진 적이 있기 때문에, 우편 업무의 보안이 철저한지, 안전하긴 한지에 관해 의문이 들고 있어. 엥겔스는 봉투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육안으로 봐도 확실할 정도였다네. 나의 길고, 얼마간 한심하기까지 한 침묵은, 그동안 내가 과학적 연구 뿐 아니라 인터내셔널과 관련된 방대한 업무를 따라잡는 데 정신이 없었다는 사실로 변명하고자 하네. 게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노동계급(물론 농민들도 포함해서)의 상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을 보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열심히 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내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도 변명의 이유 중 하나이네. 지금쯤 『인민의 국가』(Volksstaat)지(紙)4)에서 아일랜드 정치범의 사면을 두고 글래드스턴5)에 관해 내가 제안한 결의안을 보았을 것이네. 내가 일전에 팔머스턴6)을 공격했던 것처럼 지금은 글래드스턴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게 여기서 관심을 끌고 있어. 이 곳에 있는 선동하길 좋아하는 망명가들은 안전한 거리를 두고 대륙의 전제적 지배자들을 즐겨 공격한다네. 그런 공격이 호소력을 가지려면 폭군의 면전에서) 벌어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일세. 하지만 내가 아일랜드 정치범들의 사면에 관해 발표한 것이나, 총평의회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 노동계급의 태도를 논의하고 이 주제에 관해 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 모두, 압제자에 대항하는 아일랜드 피압제인민들을 지지한답시고 결연하지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것과는 다른 근거를 갖고 있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영국 노동자들이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계급의 태도와 자신들의 태도를 아주 명확하게 분리하고, 아일랜드인들과 함께 전선을 꾸릴 뿐만 아니라 1801년에 세워진 [아일랜드와의] 연합왕국[Union]8)을 해체하고 자유로운 연방적 관계로 대체하는 과정을 주도하기 전까지 여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결정적인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네. 이제 문제는 이 확신을 영국 노동계급에게 전파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이는 아일랜드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영국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에 기반한 요구로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일세. 그렇지 않으면 계속 지배계급에게 속박된 채로 남게 될 것이네. 영국 프롤레타리아들이 아일랜드에 맞서 지배계급과 공동전선을 꾸리도록 강제 받을 것이니 말이네. 영국에서 모든 노동계급 운동 자체는 아일랜드인들과의 불화로 인해 무기력해졌어. 이들이 영국 노동계급 내에서 아주 중요한 분파를 형성하고 있잖은가. 이곳에서 해방의 주요한 조건인 영국 의 지주 과두제 전복은 여전히 불가능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들이 아일랜드에서 굳건히 [자신들의] 전초기지를 유지하고 있는 한 그 진지를 침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일단 현안들이 아일랜드 인민 자신의 손으로 넘어가고, 그들이 자신들만의 의회와 통치자를 갖게 되자마자, 그들이 자율적이 되자마자 (대개 영국인 지주들과 같은 자들인) 토지 귀족을 타도하는 것은 이곳보다 그곳에서 훨씬 더 쉬울 것이네. 아일랜드에서는 이것이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문제이기 때문이지. 그곳에서 지주들이란 영국에서처럼 전통적인 고관이나 대표자가 아니라, 민족의 불구대천의 원수니까. 그리고 영국 내부의 사회 발전을 무력화하는 것은 현재 아일랜드와 맺고 있는 관계 뿐 아니라 대외 정책, 특히 러시아 및 미국에 관한 대외 정책이기도 하지. 그러나 영국 노동계급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회 해방 일반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바로 여기가 초점을 집중시킬 지점이라네. 크롬웰 치하의 영국 공화국이 아일랜드에서 난파했던 것은 사실이네만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는 않아야 할 걸세!9) 아일랜드인들은 유죄 선고를 받은 중죄인 오도노번 로사(O'Donovan Rossa)10)를 하원의원으로 선출함으로써 영국 정부를 조롱해왔어. 정부측 신문들은 벌써부터,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Act)11)을 다시금 유예시켜 공포정치 제도를 갱신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네! 사실, 현재와 같은 영국-아일랜드 관계가 지속되는 한, 영국은 절대로 아일랜드를 다른 식으로 통치할 수 없을 게야. 가장 구역질나는 공포정치와 가장 분통터지는 부패에 의존할밖에. 프랑스에서는 아직까지 일이 잘 풀리고 있네. 한편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선동가들과 음지에 있는 목소리 높은 민주파들은 신용이 떨어지고 있네. 다른 한편으로 보나파르트12)는 자신의 목을 부러뜨릴 타협의 길로 내몰리고 있으이. (관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옵저버』(Observer) 어제 판에서는 프러시아 의회에서의 올덴버그(Eulenburg)13) 스캔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논평하더군. “나폴레옹께서는 ‘러시아인들을 한꺼풀 벗겨보면 타타르족[같은 야만인]을 발견할 것’14)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프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한꺼풀 벗겨볼 필요도 없이 러시아인들을 발견할 것이네. 그건 그렇고, 라이히(메드(Med) 박사라네)의 세례명은 에두아르(Eduard)이고, 그의 책 서문을 볼 때 고타에 살고 있는 것 같네. 백작부인과 프렌첸(Franzchen)에게도 안부를 전하네. 친구 칼 마르크스로부터. 뉴욕의 지그프리트 마이어와 아우구스트 포크트에게 보내는 마르크스의 편지15)(Marx to Sigfrid Meyer and August Vogt In New York) 1870년 4월 9일 런던. 모레 (4월 11일) 손에 잡히는 모든 인터내셔널 문서들을 당신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오늘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거든요.). [스위스] 바젤 [보고서]16)도 더 보내겠습니다. 보내는 자료들 중에는 아일랜드 정치범 사면에 관한 11월 30일 총평의회 결의안 복사본 몇 부도 있을 겁니다. 이 결의안은 제가 발의했는데 당신도 이미 아실 겁니다. 또한 페니언 수감자 처우에 관한 아일랜드어 팜플렛도 보냅니다. 현재의 연합[왕국]의 필수적 변혁, 즉 예속된 아일랜드를 대영 제국과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방으로 변혁하는 것에 관해, 추가적 동의(動議)를 제출하려는 게 제 의도였습니다. 공개적 결의에 관한 한 이 문제에 관한 추가적인 진전은 당분간 중단되었습니다. 제가 총평의회에 부득이하게 불참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총평의회 성원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저를 대신할 만큼 아일랜드 문제를 충분히 알지 못했고, 영국 성원들에 대해 충분한 신망을 누리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 낭비는 아니었으며, 저는 여러분이 다음 사항을 특히 유의해 주었으면 합니다. 수년 동안 아일랜드 문제를 연구한 후 제가 도달한 결론은, 영국 지배계급에 대한 결정적 일격(그리고 이는 전세계 노동자운동에도 결정적일 것입니다)은 영국에서가 아니라 오직 아일랜드에서만 가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1870년 1월 1일, 총평의회17)는 제가 프랑스어(왜냐하면 영국에서 중요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독일 언론이 아니라 프랑스 언론뿐이기 때문입니다.)로 기초한 비밀 회람문18)을 발간했습니다. 이 문서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아일랜드 민족투쟁의 관계, 따라서 국제노동자협회가 아일랜드 문제에 관해 취해야 할 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일랜드는 영국 토지 귀족의 보루입니다. 아일랜드에 대한 착취는 영국 토지 귀족이 누리는 물질적 부의 주된 원천 중 하나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국 토지 귀족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 힘입니다. 사실 영국 토지 귀족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아일랜드는 영국 귀족들이 영국 자체에서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인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영국 군대와 경찰이 내일 철수한다면, 당장 아일랜드에서 농민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 영국 귀족이 몰락하면 그 필연적 결과는 영국에서 귀족제의 몰락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전제 조건을 제공할 것입니다. 아일랜드에서 영국 토지귀족의 해체는 영국 자체에서보다 훨씬 용이한 작업인데, 왜냐하면 아일랜드에서 토지 문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 문제의 유일무이한 형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아일랜드 민중의 압도적 다수에게 생사가 달린 생존의 문제이며, 동시에 민족 문제에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인들의 성격이 영국인들보다 훨씬 정열적이고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영국 부르주아지의 경우, 이들은 애초부터 영국 귀족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아일랜드를 단순한 목양지로 만들어 영국 시장에 육류와 양모를 가능한 한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려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게다가 축출과 강제적 이민을 통해 아일랜드 인구를 적은 수로 줄임으로써, (농지로 임대된 토지에 투자한) 영국 자본이 “안전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습니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예전에]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농업 지역들을 제거했을 때와 동일한 이해를, 아일랜드의 토지를 말소하는 데서도 갖습니다. 부재 지주와 여타 아일랜드 수입으로 현재 매년 런던으로 흘러 들어오는 6천~1만 파운드의 수입 역시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국 부르주아지는 현재의 아일랜드 경제에 훨씬 중요한 이해 역시 갖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차지농장의 집중화 때문에 아일랜드는 영속적으로 자신들의 잉여를 영국의 노동 시장으로 보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임금은 하락하고 영국 노동자계급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입지는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지금 영국의 모든 산업적․상업적 중심에는 두 개의 적대적 진영, 즉 영국 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 프롤레타리아로 분할된 노동자계급이 있습니다. 평범한 영국 노동자들은 아일랜드 노동자가 자신들의 생활 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라고 보면서 증오합니다. 아일랜드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배 민족의 일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결국 아일랜드에 반하는 영국 귀족과 자본가의 도구가 됩니다. 이로써 자신들[영국 노동자]에 대한 그들[영국 귀족과 자본가]의 지배를 강화하게 되는 것이죠. 영국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에 맞서 종교적․사회적․민족적 편견을 고스란히 간직합니다. 아일랜드 노동자에 대한 영국 노동자의 태도는 전에 노예제 국가였던 미국에서 ‘가난한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보였던 태도와 아주 똑같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되로 받은 다음 말로 줍니다. 영국 노동자를 아일랜드의 영국 지배자의 공모자이자 어리석은 도구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 같은 적대는 언론․설교자․희극 잡지, 즉 지배계급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인위적으로 유지될 뿐 아니라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적대야말로 조직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노동자계급이 무력한 비밀인 것입니다. 자본가들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악(害惡)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 사이의 적대는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숨겨진 기반입니다. 이 때문에 양국 노동자계급 사이의 진솔하고 진지한 협력 일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양국의 정부는 언제든지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시기에 서로 위협하거나, 필요할 때는 서로 전쟁을 벌임으로써 [각국 내부에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을 분쇄할 수 있게 됩니다. 자본의 중심지로서 그 권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은 현재 노동자 혁명을 위해 가장 중요한 국가이며, 게다가 혁명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결과적으로 국제노동자협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영국에서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혁명을 촉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일랜드를 독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내셔널의 임무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을 어디에서나 최우선의 의제로 제기하고, 어디에서나 공개적으로 아일랜드 편에 서는 것입니다. 런던 중앙평의회의 특별한 임무는, 아일랜드의 민족 해방이 추상적 정의나 인도주의적 감정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회 해방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는 점을 영국 노동자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입니다. 이상이 회람 서한의 주된 요점을 거칠게 요약한 것인데, 이는 동시에 아일랜드 정치범 사면에 관해 중앙평의회가 통과시킨 결의안의 존재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회람을 기초하고] 얼마 후에 저는 영국인들이 페니언 협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등에 대해 격렬하게 글래드스턴 등을 공격하는 익명의 기사19)를 (브뤼셀에 소재한 우리 인터내셔널 벨기에의 중앙위원회20) 기관지인) 『인터나치오날』(Internationale)지(紙)에 보냈습니다. 이 기사에서 저는 프랑스 공화주의자들(『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紙)21)는 아일랜드에 관해 악당 탈랑디에(Talandier)가 쓴 헛소리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역시 규탄했는데, 이들은 자민족 중심주의 속에서 자신들의 분노를 프랑스 제정에만 쏟기 때문입니다. 이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제 딸 예니는 윌리엄즈(J. Williams)(제 딸은 편집부에 보내는 사적인 편지에서 스스로를 예니 윌리엄즈로 불렀답니다)라는 이름으로 『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紙)에 일련의 기사를 기고했고, 그 중에서 『오도노번 로사의 편지』를 출판했습니다. 굉장한 소란이 이어졌죠. 몇 년 동안 냉소적 거부로 일관했지만, 글래드스턴은 이 일 때문에 페니언 수감자들의 처우에 관해 의회조사단을 구성할 것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니는 이제 『마르세에즈』지(紙)의 아일랜드 문제 정규 연락원이 되었습니다.22)(이것은 물론 우리 사이의 비밀입니다) 영국 정부와 언론은 아일랜드 문제가 이제 프랑스에서 의제에 오르게 되었고, 격노하고 있으며, 이 불한당들이 파리를 통해 전 대륙에서 감시받고 노출되다는 사실에 격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블린의 아일랜드 지도자, 언론인들이 우리와 접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는데, 이는 이전에 총평의회가 이뤄내지 못한 것이니, 일석이조(一石二鳥)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도 동일한 노선에 따라 작업하는 넓은 영역이 있습니다. 독일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의 동맹(물론 이 동맹에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영국 노동자와 미국 노동자의 동맹)은 지금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성과일 것입니다. 이는 인터내셔널의 이름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일랜드 문제의 사회적 중요성은 분명해져야 합니다. 다음 번에는 영국 노동자들의 입장에 관해 특별히 몇 자 적겠습니다. 안부와 우애를 전하며! 칼 마르크스. 1)MECW, Volume 43, p. 389; 처음 간행된 것은 Die Neue Zeit, Stuttgart, 1901-1902이며, 모든 텍스트가 소개된 것은 Pisma Marksa h Kugelmanu (Letters of Marx to Kugelmann), Moscow-Leningrad, 1928.본문으로 2)[역주] 루트비히 쿠겔만(Ludwig Kugelmann, 1828~1902): 독일의 의사이자 국제노동자협회의 활동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로서 1862~75년 동안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후 독일사회민주당원이 된다. 본문으로 3) [역주] 게오르그 비어스(Georg Weerth, 1822~56): 초기에는 면직물 회사에 근무하였으나 노동자운동의 대의에 공감하면서 영국으로 이주한 이후 차티스트 운동에 투신하였다. 엥겔스와 수 년 동안 교류하였으며 브뤼셀에서는 마르크스와 만나기도 하였다. 시인으로서 하이네를 동경하면서 몇몇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엥겔스는 그를 가리켜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시인”이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4)[역주] 『인민의 국가』(Der Volksstaat): 독일사회민주노동자당의 중앙 기관지. 1869년 10월 2일부터 1876년 9월 23일까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마르크스․엥겔스가 편집에 관여하였다. 본문으로 5)[역주]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 1809~98): 영국의 자유주의적 정치가. 관세개혁과 곡물법 철폐에 앞장섰으며 1868년 수상에 취임한 이후 아일랜드에 대한 온건한 종교정책을 실시했다. 이후 세 차례나 수상을 역임하면서 3차 선거법 개정을 관철시켰으나 아일랜드 자치법안은 이를 둘러싸고 당이 분열하거나(1886년 3차 내각), 상원에서 부결(1893년 4차 내각)되었다. 본문으로 6)[역주] 팔머스톤(Viscount Palmerston, 1784~865): 영국의 정치가. 1855~58년 수상이었으며 1859~65년까지 글랜드스톤 등과 함께 연합 내각을 이끌었다. 크림전쟁과 아편전쟁 등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본문으로 7) [역주] 원문은 라틴어임. “vultu instantis tyranni”본문으로 8) [역주] 1800년 잉글랜드 의회에서 통과된 통합법에 따라 아일랜드는 영국의 완전한 일부가 되었다. 본문으로 9)[역주] 원문은 라틴어임. “Non bis in idem!”본문으로 10)[역주] 제레미야 오도노번 로사(Jeremiah O'Donovan Rossa, 1831~1915): 페니언의 전신인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동지회의 창립자. 1865~71년 동안 여러 차례 페니언과 관련있다는 혐의를 받고 영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폭탄을 사용하는 일명 “다이너마이트 캠페인”을 조직하여 이름을 떨쳤다. 예니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 받기도 했다. 본문으로 11)[역주] 인신보호법: 1679년 부당한 구금에 따른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배 제정된 영국의 법률. 이에 따라 이유를 명시하지 않은 체포는 위법으로 간주하고, 반드시 인신보호영장을 받는 동시에 피구금자는 신속히 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부당한 체포나 구금이 금지되었다. 본문으로 12)[역주] 나폴레옹 3세: 프랑스의 제2공화국 대통령(재위 1850~1852)․제2제정 황제(재위 1852~1871). 나폴레옹의 조카로서 1850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 제정을 실시하지만 1870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었다가 파리코뮌으로 제정이 붕괴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본문으로 13) [역주]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올덴버그(Friedrich Albrecht zu Eulenburg, 1815~81): 프로이센의 외교관․관리. 올덴버그 사절단을 이끌고 1861년 일본 및 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62~78년 사이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본문으로 14) [역주] 원문은 불어임. “Grattez le Russe, et vous trouverez le Tartare’”본문으로 15)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Progress Publishers, 1975, pp. 220-224본문으로 16)이 언급은 총회에서 발간된 제1 인터내셔널 바젤 회의의 보고서와 관련된다. - Ed본문으로 17)마르크스는 “1869년 12월 1일”이라고 썼는데 명백한 오기(誤記)이다. - Ed.본문으로 18)Karl Marx, Le Conseil Gneral au Conseil Federal de la Suisse Romande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로망 스위스의 연방 평의회(Federal Council of Romance Switzerland)에게」] - Ed.본문으로 19)Le gouvernement anglais et les prisonniers fenians [「영국 정부와 페니언 수감자들」] 1870년 2월 27일에 간행되었다. - Ed본문으로 20)마르크스는 벨기에 연합평의회(Belgian Federal Council)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Ed.본문으로 21)[역주] 『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 프랑스의 공화주의 신문.본문으로 22) [역주] 예니는 1870년 2월 27일부터 4월 19일까지 모두 8편의 기사를 『마르세유』지에 작성하였다. 이 기사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영국 정부와 페니언 수감자들」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특히 1870년 3월 16일에 작성한 기사는 마르크스와의 공동작업이었다.본문으로
연금기금 금융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의 완성 국민연금에 관한 한 2007년은 역사적인 해로 기록될만하다. 제도시행이 1988년에 시작해 올해로 20년이 됨으로써, 완전노령연금 수급자가 내년부터 배출될 예정이다. 또한 올해를 경과하며 국민연금 적립기금 200조원 시대로 들어섰다. 그리고 지난 7월에는 2003년에 시작되어 4년을 끌어온 국민연금법 개정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상대적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준비되어온 국민연금 기금운용체계 개편작업이 지난 9월 11일 정부안으로 발표, 하반기 정기국회에서 입법이 예고되고 있다. 이 밖에도 국민연금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몇 가지 개혁과제가 남겨져 있다. 국민연금 개혁을 발판 삼아 공무원연금을 비롯한 특수직역연금의 개혁이 준비 중이고, 또한 4대 사회보험 징수 일원화를 위한 입법이 추진 중이다. 2003년 연금개혁에 착수하던 당시 정부는 재정안정화, 사각지대 해소, 기금운영체계 개편을 연금개혁의 3대 과제로 제시했다. 4년여에 걸친 논란 끝에, 지난 7월 기초노령연금 도입과 '그대로 내고 덜 받는' 방향으로 국민연금법이 개정되었는데, 재정안정화, 사각지대가 주요한 명분이었다. 연금개혁의 완성을 위해서는 기금운영체계 개편 문제가 남아있던 셈이다. 기금운용체계 개편안이 발표되자, 각종 언론들은 자본시장통합법의 제정과 함께 한국경제가 금융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며 연일 환호성을 쏟아냈다. 이러한 반응만으로도 개편안의 대략적인 내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개편안의 골자는 기금운용위원회를 정부로부터 독립시켜 민간투자 전문가로 구성한다는 것인데, 두 말할 나위 없이 그동안 착실히 추진되어온 연금기금의 금융투자 확대방안에 적합한 기금운용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구상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주장처럼 이번 정부의 기금운용체계 개편을 통해 국민연금 개혁은 완성될 수 있는가? 현재 국민연금 개혁을 추진하는 지배적인 논리 하에서 연금개혁의 완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7월의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재정고갈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단지 '지연'된 것이기 때문이다. 2003년 재정추계 당시 2047년 정도로 예측되었던 재정고갈 시한은, 연금 급여율을 60%에서 40%로 낮춤으로써 2060년 정도로 지연되었을 뿐이다. 기금운용 체계 개편 문제 역시 표면적으로는 정부냐 민간이냐 따위가 핵심 쟁점인 듯 보이지만, 본질적인 쟁점은 이러한 재정고갈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연금기금의 금융투자 확대에 대한 많은 비판들을 피해갈 수 있는 논리로 정부와 신자유주의자들은 운용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재정고갈 압박을 완화해 갈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라는 주장을 강화해 나갈 것이다. 몇몇 추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운용수익률을 1% 높이면, 연간 약 2조원 정도의 수익이 생기고, 기금 고갈 연도를 4년 정도 연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기금운용 체계의 개편은 국민연금 개혁의 완성이라기보다, 차라리 국민연금을 상시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 개혁의 기본 방향은 물론 연금기금의 금융화, 운용수익률의 극대화가 될 것이다. 정부 개편안의 주요 내용 정부는 독립성, 전문성, 책임성, 대표성·투명성, 기금분할의 다섯 가지를 개편의 방향으로 설정한 후1) 다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체계 개편안을 제시하고 있다. 1)현재 비상설, 보건복지부 소속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상설화와 정부로부터 독립, 2)현재 21명(정부 7인, 민간 14인)인 위원회 위원 구성을 7인(모두 민간)으로 개편, 3)위원 추천은 신설되는 기금운용위원추천위원회(정부 5인, 민간 6인)를 통해 함, 4)현재 국민연금관리공단 내의 기금운용본부에서 수행하던 기금운용의 집행은 기금운용공사를 신설하여 함, 5)정부의 권한은 위원 및 공사 사장의 임면, 신설되는 '국민연금기금관계장관협의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보건복지부 장관이 기금운용위원회에 출석·발언, 의견제시하는 것으로 제한. 이번 정부 개편안의 보다 구체적인 실체는 이미 앞서서 차근차근 추진되어온 연금기금의 금융투자 확대를 위한 각종 조치들과 함께 바라볼 때만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즉 이번 개편안이 기금운용을 어떤 틀에서 할 것인가라는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개혁이라면, 그 형식을 규정하는 내용은 이미 마련되어 실행되어 왔다. 정부는 지난 2004년 국민연금을 포함한 연기금 전반의 주식투자를 제한하는 제도적 요인을 제거하는 '기금관리기본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연금기금 운용의 기본 방향, 목표와 관련되는 기본 내용을 담고 있는 '국민연금 중장기 기금운용 마스터플랜' 수립하여, 이를 바탕으로 매년 '국민연금기금운용계획(안)'을 마련해 왔다. '마스터플랜'은 연금기금의 투자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한 몇 가지의 포트폴리오 선택지를 비교 검토한 끝에 해외투자, 주식투자, 대체투자의 확대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최적안을 제시한 바 있다. 연간 목표 수익률을 약 6%로 잡고, 2014년까지 해외투자를 25%로 확대하며, 그 중간단계로 2009에는 해외투자 비중을 11.7%, 주식투자 비중을 10% 내외, 대체투자를 3%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지난 6월 발표된 2008년 '국민연금기금운용계획'을 보면, 이러한 정부의 기금운용 구상은 목표가 이미 초과달성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외투자는 주식과 채권을 합쳐 약 13.7%, 국내주식 17%, 대체투자 2.9%로 구성되는 목표 포트폴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투자에 활용되는 여유자금은 86조 7,000억 원 규모에 이른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기금운용위원회의 기능, 그리고 위원들이 갖추어야 할 최상의 덕목은 금융 투자 전문가로서의 면모이다. 최적 자산배분에 대한 판단, 투자 위탁운용사 선정, 투자 위험관리 등에 있어서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실제 정부 개편안은 운용위원회 위원 자격을 금융 또는 투자 분야에 대한 연구 경력이 5년 이상인 자, 국내외 금융기관 또는 국제금융기구에서 투자업무를 5년 이상 담당한 자, 변호사·공인회계사·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증 소지자로 금융·투자 또는 기업 감사업무를 5년 이상 담당한 자, 기타 이에 준하는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서브프라임 사태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 바와 같이 금융투자의 불안정성은 상존하는 것이고, 역량 있는 투자전문가들이나, 철저히 계산된 위험 허용범위 따위로 위험성을 완전히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극히 낮은 수준의 투자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연금기금의 천문학적인 규모 상 노동자들이 떠안게 되는 피해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만일 한국의 2008년 투자 액수인 87억 원 규모에서 0.1%의 투자 손실이 일어난다고만 가정해도, 그 피해액수는 100억 원에 가까운 금액이 되는 것이다. 금융화 비판 관점의 부재가 초래한 자충수 사실 기금운용체계의 정부로부터의 독립 문제는 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해온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의 오랜 숙원과제 중 하나였다.2) 시민단체들의 주요 관심사는 가입자 대표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과 이를 통해 기금운용 지배구조의 민주성, 투명성 등을 제고하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정부가 이번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마치 기금운용의 책임과 권한을 민간으로 이양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개편안의 세부적인 내용은 시민단체들의 관심사와는 정확히 역행하는 방향으로 흘렀다고 할 수 있다. 시민단체들의 구상이 사회보험의 기본 도입 취지와 원리를 반영한 노-사-정 협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정부의 이번 개편안은 철저히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이해당사자(stakeholder) 모델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의 개편안에 대한 비판은 주로 운용위원회와 추천위 구성에 관련된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현행 운용체계는 위원회 위원 21명을 정부 인사(위원장 포함 7인), 가입자 대표 12인(노동자 3인, 사용자 3인, 지역가입자 6인), 관계 전문가(2인)들로 구성하고 있다. 개편안은 독립성의 원칙에 따라 정부 관계자를 모두 배제하고, 민간위원 7인으로만 구성을 하는데, 그 자격요건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또한 추천위원회의 경우 민간에 할당된 6인 중 가입자 대표는 노동자, 사용자, 지역가입자 각 1인씩이고, 공익대표가 3인 포함되게 되어 있다. 정부로부터의 독립은 이루게 되었지만, 가입자 대표의 참여 및 발언력은 운용위원회, 추천위원회를 통틀어 거의 배제된 것이다. 이와 같이 시민단체들의 입장에서 자기모순적인 결과가 나타난 사례는 그 전사(前史)가 없지 않다. 민주노동당이나 시민단체들이 정부로부터 기금운용위원회가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일차적으로 정부가 연금기금을 빌려다 쓰고 이자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식으로 연금기금을 제주머니의 쌈짓돈처럼 사용한 것에 대한 비판과 이런 파행적인 운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고안이 필요하다는 고민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기금운용체계 개편에 대한 고민에 앞서, 1999년 개정된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이하 공자기금법)의 개정에 반영되어 있다. 정부가 각종 공적기금을 강제적으로 예탁하게 하고, 이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공자기금법의 개정을 시민단체들이 앞서서 이끌었던 것이다. 이것이 자기모순적인 결과인 이유는 사실 공자기금법에서의 강제 위탁 규정 폐지 문제는 시민단체들의 주장일 뿐 아니라, 금융위기 당시인 지난 98년, 세계은행이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강제한 요구사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의 요구가 있은 직후, 한국 정부는 공자기금법의 개정과 함께 국민연금법 개정3)을 거의 동시에 단행했다. 이를 계기로 연금기금의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는 점차 감소, 중단되고, 금융투자 중심의 기금운용이 실행되어 왔다. 연금기금 운용체계 면에서도 국민연금공단 내에 전문가조직인 기금운용본부를 신설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즈음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금융시장의 팽창을 주도한 것은 기관투자자들이었고, 여기서 연기금은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세계은행은 세계적으로 공적연금 개혁의 신자유주의적 규범을 만들어 각 국가들의 연금개혁에 개입하면서 연금기금을 금융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각종 노력을 강구해왔다. 여기에는 공적연금 제도를 축소, 적립식으로 전환하고 사적연금을 확대하는 등의 연금제도의 측면뿐 아니라, 연금기금 지배구조를 정부로부터 독립된, 민간투자자 중심으로 구축하도록 하는 내용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1998년 당시 한국이 처한 상황은 이러한 요구를 강제하기에 매우 호기였다. 이와 같은 맥락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연금개혁이 세계은행이 강제하는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어 온 것은 1998년 당시 개혁부터라 할 수 있으며, 이번 개편안 역시 그 시나리오에 따라 조금씩 움직여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연금의 지배구조를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논리에 따라 재편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금융투자의 원리를 이식해 온 것이다. 당시 한국의 운동진영 내에서는 금융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시절로, 사후적인 평가이기는 하지만, 시민단체들의 입장이 처한 현재의 상황은 금융화 비판의 관점이 부재한 가운데 초래된 자충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후적인 평가 차원에서라도 이러한 비판이 정당하며 또한 중요한 이유는 현재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번 개편안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반응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시민단체들은 한결 같이 가입자 대표의 배제와 정부의 영향력이 은폐된 형태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현 체계 내에서도 가입자 단체의 발언력과 영향력이라는 것은 사실상 매우 미비하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현재 시점에서 그 발언력과 영향력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이다. 참여연대를 주축으로 구성된 <연금제도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는 성명서를 통해, '지난 10년 간 정부 부처들이 연금기금의 정치적 활용을 시도했으나 과반을 이룬 가입자 대표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제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이번 안은 기금의 주인인 가입자의 대표성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 … 기금운용의 안정성과 기금운용 정책의 공공성을 위해서라도 국민들의 참여와 감시 기능은 철저히 확보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정부의 정치적 활용은 제거의 대상이고, 금융적 활용은 용인 가능한 것인지, 혹은 불가피한 대안인 것인지, 현재와 같이 이미 기금운용의 기본방향이 수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금운용의 안정성과 공공성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왜 연금기금의 금융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4) 금융화에 반대하는 운동 속에서 대안을! 위와 같은 상황은 사회운동 일반이 연금기금 문제에 대해 고민이 빈약함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사회운동 내에서 연금기금의 활용방안에 대한 입장으로는 사회복지, 공공주택 등에 대한 공적투자 형태가 계발되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적 수준에서 제기되어 왔다. 또한 이와 같은 공적투자가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 증가할 연금기금 규모를 충분히 감당할 수 없으며, 이 역시 결국 정부 지배구조가 가지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유로, 최근에는 사회책임투자가 연금기금 활용의 대안적인 방안으로 제안되어 왔다. 한편, 이와는 전혀 다른 접근으로 적립방식의 연금을 부과방식으로 전환하여 적립된 기금을 소진시키는 방안이 제안되어 왔는데, 사회진보연대 역시 연기금 금융화 비판의 맥락에서 이와 같은 대안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해왔다. 그 동안의 논의는 이러한 입장 사이의 쟁점이 '실현가능성' 여부인듯한 지형을 형성해왔다. 즉, 원칙적으로 적립기금의 해소가 가장 이상적인 대안이지만, 기금 해소의 방법적 측면, 그리고 부과방식의 기본 전제인 세대 간 연대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인가 등에서의 대안부재가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의, 특히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국민연금법 대응 과정에서의 논의와 현재 정부 기금운용체계 개편에 대한 입장의 편차들을 보건데, 진정한 쟁점은 단기간 내의 실현가능성 여부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비판, 그리고 금융화 비판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연금기금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연금개혁을 비판하는 앞선 글들5)에서 연금개혁 문제는 단지 연금제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으며, 금융화 비판의 문제의식의 기반 위에서 민중적 관점, 연대의 원리에 입각한 사회보장의 원리, 재생산 문제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 갈 것을 제안했다. 이는 사실상 연금개혁 문제가 신자유주의 금융화를 반대하는 운동 속에서만이 해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었다. 현재 국민연금 적립기금은 약 210조이고, 이는 2005년 한국 경상 GDP의 약 30%에 이르는 규모이며, 2006년 9월 기준으로 국내 상장 주식시가 총액 674조원의 약 30%에 이르는 액수이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1997년에 이미 세계적으로 공·사적 연금기금 적립액은 14조 달러로, 세계 GDP 대비 50%, 세계 주식시가 총액의 61%에 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민주의적 전망을 가지는 운동세력들과 금융화에 상대적으로 덜 적응된 우파들이 서로 상반된 의미에서 '연기금 사회주의'를 거론하고 있는 상황 역시 연금기금 문제가 단지 제도설계나 운용체계 개편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연금개혁과 관련하여 지금 사회운동 내에 필요한 것은 섣부른 대안이나 단발성 아이디어가 아니다. 일차적으로 신자유주의 금융화를 반대하는 운동 속에 연금개혁 문제를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연금제도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들을 확인하고, 대안을 발전시키기 위한 대중적 토론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금융투자 수익률 제고를 통해 재정안정성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대중들의 입을 통해 제기될 날이 오는 것도 불가능한 상상만은 아닐 듯하다. 사회진보연대 역시 가까운 시일 내에 관련 동향소개와 보다 정선된 입장을 『사회운동』 지면에 담아냄으로써, 이러한 논의가 활성화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하겠다고 약속드린다. 1)세계은행은 연금기금 지배구조의 주요 원칙으로 독립성, 책임성·투명성, 명확성, 자율성, 내부통제를 제시하고 있다.본문으로 2) 민주노동당은 지난 2004년 11월, 현애자 의원 대표발의로 기금운용체계 개편안을 제시한 바 있다. 기금운용위원회의 독립 및 상설화, 추천위원회 구성, 국민연금기금운용공사 설립 등, 전체적인 틀은 이번 정부 개편안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운용위원회(총 21~22인)에 정부인사 참여(3인) 및 가입자대표, 공익대표 참여 확대, 그리고 가입자 대표 참여 비중이 큰(총 7인 중 5인) 추천위원회 구성 등에 있어 정부안과 차이가 있다. 본문으로 3) 국민연금 급여율을 70%에서 60%로 인하하고, 국민연금 급여산식에서 1:0.75로 설계되어 있던 균등부분과 비례부분을 1:1로 조정하여 소득재분배 효과를 낮추는 것, 연금 수급연령을 점진적으로 높이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본문으로 4) 연금기금을 활용하여 해외 투기자본으로 부터의 한국 자본시장의 방어, 기업지배구조 개선활동 등을 주장해온 경제개혁센터의 경우, '민간위원 경력연수 요건을 10년 이상으로 하고 있는 한국투자공사(KIC) 운영위원의 경우와 비교해서도 지나치게 짧다. 한국투자공사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국민연금의 민간운용위원의 전문성 요건이 오히려 더 완화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10년으로 늘리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요건이고, 가급적 투자관리(investment management) 전문가들로 기금운용위원회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와 같이 운용위원의 투자 전문성을 보다 높이기 위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본문으로 5)『월간 사회운동』(http://www.movements.or.kr)에 관련된 많은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연금기금 금융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의 완성 국민연금에 관한 한 2007년은 역사적인 해로 기록될만하다. 제도시행이 1988년에 시작해 올해로 20년이 됨으로써, 완전노령연금 수급자가 내년부터 배출될 예정이다. 또한 올해를 경과하며 국민연금 적립기금 200조원 시대로 들어섰다. 그리고 지난 7월에는 2003년에 시작되어 4년을 끌어온 국민연금법 개정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상대적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지는 않았지만, 오랜 기간 준비되어온 국민연금 기금운용체계 개편작업이 지난 9월 11일 정부안으로 발표, 하반기 정기국회에서 입법이 예고되고 있다. 이 밖에도 국민연금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몇 가지 개혁과제가 남겨져 있다. 국민연금 개혁을 발판 삼아 공무원연금을 비롯한 특수직역연금의 개혁이 준비 중이고, 또한 4대 사회보험 징수 일원화를 위한 입법이 추진 중이다. 2003년 연금개혁에 착수하던 당시 정부는 재정안정화, 사각지대 해소, 기금운영체계 개편을 연금개혁의 3대 과제로 제시했다. 4년여에 걸친 논란 끝에, 지난 7월 기초노령연금 도입과 '그대로 내고 덜 받는' 방향으로 국민연금법이 개정되었는데, 재정안정화, 사각지대가 주요한 명분이었다. 연금개혁의 완성을 위해서는 기금운영체계 개편 문제가 남아있던 셈이다. 기금운용체계 개편안이 발표되자, 각종 언론들은 자본시장통합법의 제정과 함께 한국경제가 금융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며 연일 환호성을 쏟아냈다. 이러한 반응만으로도 개편안의 대략적인 내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개편안의 골자는 기금운용위원회를 정부로부터 독립시켜 민간투자 전문가로 구성한다는 것인데, 두 말할 나위 없이 그동안 착실히 추진되어온 연금기금의 금융투자 확대방안에 적합한 기금운용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구상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주장처럼 이번 정부의 기금운용체계 개편을 통해 국민연금 개혁은 완성될 수 있는가? 현재 국민연금 개혁을 추진하는 지배적인 논리 하에서 연금개혁의 완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듯이, 7월의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재정고갈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단지 '지연'된 것이기 때문이다. 2003년 재정추계 당시 2047년 정도로 예측되었던 재정고갈 시한은, 연금 급여율을 60%에서 40%로 낮춤으로써 2060년 정도로 지연되었을 뿐이다. 기금운용 체계 개편 문제 역시 표면적으로는 정부냐 민간이냐 따위가 핵심 쟁점인 듯 보이지만, 본질적인 쟁점은 이러한 재정고갈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연금기금의 금융투자 확대에 대한 많은 비판들을 피해갈 수 있는 논리로 정부와 신자유주의자들은 운용수익률을 높이는 것이 재정고갈 압박을 완화해 갈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라는 주장을 강화해 나갈 것이다. 몇몇 추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운용수익률을 1% 높이면, 연간 약 2조원 정도의 수익이 생기고, 기금 고갈 연도를 4년 정도 연장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기금운용 체계의 개편은 국민연금 개혁의 완성이라기보다, 차라리 국민연금을 상시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 개혁의 기본 방향은 물론 연금기금의 금융화, 운용수익률의 극대화가 될 것이다. 정부 개편안의 주요 내용 정부는 독립성, 전문성, 책임성, 대표성·투명성, 기금분할의 다섯 가지를 개편의 방향으로 설정한 후1) 다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체계 개편안을 제시하고 있다. 1)현재 비상설, 보건복지부 소속인 기금운용위원회의 상설화와 정부로부터 독립, 2)현재 21명(정부 7인, 민간 14인)인 위원회 위원 구성을 7인(모두 민간)으로 개편, 3)위원 추천은 신설되는 기금운용위원추천위원회(정부 5인, 민간 6인)를 통해 함, 4)현재 국민연금관리공단 내의 기금운용본부에서 수행하던 기금운용의 집행은 기금운용공사를 신설하여 함, 5)정부의 권한은 위원 및 공사 사장의 임면, 신설되는 '국민연금기금관계장관협의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보건복지부 장관이 기금운용위원회에 출석·발언, 의견제시하는 것으로 제한. 이번 정부 개편안의 보다 구체적인 실체는 이미 앞서서 차근차근 추진되어온 연금기금의 금융투자 확대를 위한 각종 조치들과 함께 바라볼 때만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즉 이번 개편안이 기금운용을 어떤 틀에서 할 것인가라는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개혁이라면, 그 형식을 규정하는 내용은 이미 마련되어 실행되어 왔다. 정부는 지난 2004년 국민연금을 포함한 연기금 전반의 주식투자를 제한하는 제도적 요인을 제거하는 '기금관리기본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연금기금 운용의 기본 방향, 목표와 관련되는 기본 내용을 담고 있는 '국민연금 중장기 기금운용 마스터플랜' 수립하여, 이를 바탕으로 매년 '국민연금기금운용계획(안)'을 마련해 왔다. '마스터플랜'은 연금기금의 투자 수익률을 극대화하기 위한 몇 가지의 포트폴리오 선택지를 비교 검토한 끝에 해외투자, 주식투자, 대체투자의 확대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최적안을 제시한 바 있다. 연간 목표 수익률을 약 6%로 잡고, 2014년까지 해외투자를 25%로 확대하며, 그 중간단계로 2009에는 해외투자 비중을 11.7%, 주식투자 비중을 10% 내외, 대체투자를 3%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지난 6월 발표된 2008년 '국민연금기금운용계획'을 보면, 이러한 정부의 기금운용 구상은 목표가 이미 초과달성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외투자는 주식과 채권을 합쳐 약 13.7%, 국내주식 17%, 대체투자 2.9%로 구성되는 목표 포트폴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투자에 활용되는 여유자금은 86조 7,000억 원 규모에 이른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기금운용위원회의 기능, 그리고 위원들이 갖추어야 할 최상의 덕목은 금융 투자 전문가로서의 면모이다. 최적 자산배분에 대한 판단, 투자 위탁운용사 선정, 투자 위험관리 등에 있어서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실제 정부 개편안은 운용위원회 위원 자격을 금융 또는 투자 분야에 대한 연구 경력이 5년 이상인 자, 국내외 금융기관 또는 국제금융기구에서 투자업무를 5년 이상 담당한 자, 변호사·공인회계사·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증 소지자로 금융·투자 또는 기업 감사업무를 5년 이상 담당한 자, 기타 이에 준하는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서브프라임 사태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 바와 같이 금융투자의 불안정성은 상존하는 것이고, 역량 있는 투자전문가들이나, 철저히 계산된 위험 허용범위 따위로 위험성을 완전히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극히 낮은 수준의 투자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연금기금의 천문학적인 규모 상 노동자들이 떠안게 되는 피해는 어마어마한 것이다. 만일 한국의 2008년 투자 액수인 87억 원 규모에서 0.1%의 투자 손실이 일어난다고만 가정해도, 그 피해액수는 100억 원에 가까운 금액이 되는 것이다. 금융화 비판 관점의 부재가 초래한 자충수 사실 기금운용체계의 정부로부터의 독립 문제는 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해온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의 오랜 숙원과제 중 하나였다.2) 시민단체들의 주요 관심사는 가입자 대표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과 이를 통해 기금운용 지배구조의 민주성, 투명성 등을 제고하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정부가 이번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마치 기금운용의 책임과 권한을 민간으로 이양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개편안의 세부적인 내용은 시민단체들의 관심사와는 정확히 역행하는 방향으로 흘렀다고 할 수 있다. 시민단체들의 구상이 사회보험의 기본 도입 취지와 원리를 반영한 노-사-정 협의 체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정부의 이번 개편안은 철저히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이해당사자(stakeholder) 모델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의 개편안에 대한 비판은 주로 운용위원회와 추천위 구성에 관련된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현행 운용체계는 위원회 위원 21명을 정부 인사(위원장 포함 7인), 가입자 대표 12인(노동자 3인, 사용자 3인, 지역가입자 6인), 관계 전문가(2인)들로 구성하고 있다. 개편안은 독립성의 원칙에 따라 정부 관계자를 모두 배제하고, 민간위원 7인으로만 구성을 하는데, 그 자격요건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또한 추천위원회의 경우 민간에 할당된 6인 중 가입자 대표는 노동자, 사용자, 지역가입자 각 1인씩이고, 공익대표가 3인 포함되게 되어 있다. 정부로부터의 독립은 이루게 되었지만, 가입자 대표의 참여 및 발언력은 운용위원회, 추천위원회를 통틀어 거의 배제된 것이다. 이와 같이 시민단체들의 입장에서 자기모순적인 결과가 나타난 사례는 그 전사(前史)가 없지 않다. 민주노동당이나 시민단체들이 정부로부터 기금운용위원회가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일차적으로 정부가 연금기금을 빌려다 쓰고 이자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식으로 연금기금을 제주머니의 쌈짓돈처럼 사용한 것에 대한 비판과 이런 파행적인 운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고안이 필요하다는 고민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기금운용체계 개편에 대한 고민에 앞서, 1999년 개정된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이하 공자기금법)의 개정에 반영되어 있다. 정부가 각종 공적기금을 강제적으로 예탁하게 하고, 이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공자기금법의 개정을 시민단체들이 앞서서 이끌었던 것이다. 이것이 자기모순적인 결과인 이유는 사실 공자기금법에서의 강제 위탁 규정 폐지 문제는 시민단체들의 주장일 뿐 아니라, 금융위기 당시인 지난 98년, 세계은행이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강제한 요구사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의 요구가 있은 직후, 한국 정부는 공자기금법의 개정과 함께 국민연금법 개정3)을 거의 동시에 단행했다. 이를 계기로 연금기금의 공공부문에 대한 투자는 점차 감소, 중단되고, 금융투자 중심의 기금운용이 실행되어 왔다. 연금기금 운용체계 면에서도 국민연금공단 내에 전문가조직인 기금운용본부를 신설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즈음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금융시장의 팽창을 주도한 것은 기관투자자들이었고, 여기서 연기금은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세계은행은 세계적으로 공적연금 개혁의 신자유주의적 규범을 만들어 각 국가들의 연금개혁에 개입하면서 연금기금을 금융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각종 노력을 강구해왔다. 여기에는 공적연금 제도를 축소, 적립식으로 전환하고 사적연금을 확대하는 등의 연금제도의 측면뿐 아니라, 연금기금 지배구조를 정부로부터 독립된, 민간투자자 중심으로 구축하도록 하는 내용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1998년 당시 한국이 처한 상황은 이러한 요구를 강제하기에 매우 호기였다. 이와 같은 맥락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연금개혁이 세계은행이 강제하는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되어 온 것은 1998년 당시 개혁부터라 할 수 있으며, 이번 개편안 역시 그 시나리오에 따라 조금씩 움직여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공적연금의 지배구조를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논리에 따라 재편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금융투자의 원리를 이식해 온 것이다. 당시 한국의 운동진영 내에서는 금융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시절로, 사후적인 평가이기는 하지만, 시민단체들의 입장이 처한 현재의 상황은 금융화 비판의 관점이 부재한 가운데 초래된 자충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후적인 평가 차원에서라도 이러한 비판이 정당하며 또한 중요한 이유는 현재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번 개편안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반응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시민단체들은 한결 같이 가입자 대표의 배제와 정부의 영향력이 은폐된 형태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실 현 체계 내에서도 가입자 단체의 발언력과 영향력이라는 것은 사실상 매우 미비하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현재 시점에서 그 발언력과 영향력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이다. 참여연대를 주축으로 구성된 <연금제도 정상화를 위한 연대회의>는 성명서를 통해, '지난 10년 간 정부 부처들이 연금기금의 정치적 활용을 시도했으나 과반을 이룬 가입자 대표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제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이번 안은 기금의 주인인 가입자의 대표성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 … 기금운용의 안정성과 기금운용 정책의 공공성을 위해서라도 국민들의 참여와 감시 기능은 철저히 확보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정부의 정치적 활용은 제거의 대상이고, 금융적 활용은 용인 가능한 것인지, 혹은 불가피한 대안인 것인지, 현재와 같이 이미 기금운용의 기본방향이 수립되어 있는 상황에서 기금운용의 안정성과 공공성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왜 연금기금의 금융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가?4) 금융화에 반대하는 운동 속에서 대안을! 위와 같은 상황은 사회운동 일반이 연금기금 문제에 대해 고민이 빈약함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사회운동 내에서 연금기금의 활용방안에 대한 입장으로는 사회복지, 공공주택 등에 대한 공적투자 형태가 계발되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적 수준에서 제기되어 왔다. 또한 이와 같은 공적투자가 현재의, 그리고 앞으로 증가할 연금기금 규모를 충분히 감당할 수 없으며, 이 역시 결국 정부 지배구조가 가지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유로, 최근에는 사회책임투자가 연금기금 활용의 대안적인 방안으로 제안되어 왔다. 한편, 이와는 전혀 다른 접근으로 적립방식의 연금을 부과방식으로 전환하여 적립된 기금을 소진시키는 방안이 제안되어 왔는데, 사회진보연대 역시 연기금 금융화 비판의 맥락에서 이와 같은 대안을 발전시킬 것을 주장해왔다. 그 동안의 논의는 이러한 입장 사이의 쟁점이 '실현가능성' 여부인듯한 지형을 형성해왔다. 즉, 원칙적으로 적립기금의 해소가 가장 이상적인 대안이지만, 기금 해소의 방법적 측면, 그리고 부과방식의 기본 전제인 세대 간 연대가 구축될 수 있을 것인가 등에서의 대안부재가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의, 특히 작년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국민연금법 대응 과정에서의 논의와 현재 정부 기금운용체계 개편에 대한 입장의 편차들을 보건데, 진정한 쟁점은 단기간 내의 실현가능성 여부가 아닌 듯하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비판, 그리고 금융화 비판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연금기금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다. 사회진보연대는 연금개혁을 비판하는 앞선 글들5)에서 연금개혁 문제는 단지 연금제도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으며, 금융화 비판의 문제의식의 기반 위에서 민중적 관점, 연대의 원리에 입각한 사회보장의 원리, 재생산 문제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 갈 것을 제안했다. 이는 사실상 연금개혁 문제가 신자유주의 금융화를 반대하는 운동 속에서만이 해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었다. 현재 국민연금 적립기금은 약 210조이고, 이는 2005년 한국 경상 GDP의 약 30%에 이르는 규모이며, 2006년 9월 기준으로 국내 상장 주식시가 총액 674조원의 약 30%에 이르는 액수이다. 물론 이는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1997년에 이미 세계적으로 공·사적 연금기금 적립액은 14조 달러로, 세계 GDP 대비 50%, 세계 주식시가 총액의 61%에 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민주의적 전망을 가지는 운동세력들과 금융화에 상대적으로 덜 적응된 우파들이 서로 상반된 의미에서 '연기금 사회주의'를 거론하고 있는 상황 역시 연금기금 문제가 단지 제도설계나 운용체계 개편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연금개혁과 관련하여 지금 사회운동 내에 필요한 것은 섣부른 대안이나 단발성 아이디어가 아니다. 일차적으로 신자유주의 금융화를 반대하는 운동 속에 연금개혁 문제를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연금제도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들을 확인하고, 대안을 발전시키기 위한 대중적 토론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현재와 같은 추세라면, 금융투자 수익률 제고를 통해 재정안정성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대중들의 입을 통해 제기될 날이 오는 것도 불가능한 상상만은 아닐 듯하다. 사회진보연대 역시 가까운 시일 내에 관련 동향소개와 보다 정선된 입장을 『사회운동』 지면에 담아냄으로써, 이러한 논의가 활성화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하겠다고 약속드린다. 1)세계은행은 연금기금 지배구조의 주요 원칙으로 독립성, 책임성·투명성, 명확성, 자율성, 내부통제를 제시하고 있다.본문으로 2) 민주노동당은 지난 2004년 11월, 현애자 의원 대표발의로 기금운용체계 개편안을 제시한 바 있다. 기금운용위원회의 독립 및 상설화, 추천위원회 구성, 국민연금기금운용공사 설립 등, 전체적인 틀은 이번 정부 개편안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운용위원회(총 21~22인)에 정부인사 참여(3인) 및 가입자대표, 공익대표 참여 확대, 그리고 가입자 대표 참여 비중이 큰(총 7인 중 5인) 추천위원회 구성 등에 있어 정부안과 차이가 있다. 본문으로 3) 국민연금 급여율을 70%에서 60%로 인하하고, 국민연금 급여산식에서 1:0.75로 설계되어 있던 균등부분과 비례부분을 1:1로 조정하여 소득재분배 효과를 낮추는 것, 연금 수급연령을 점진적으로 높이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본문으로 4) 연금기금을 활용하여 해외 투기자본으로 부터의 한국 자본시장의 방어, 기업지배구조 개선활동 등을 주장해온 경제개혁센터의 경우, '민간위원 경력연수 요건을 10년 이상으로 하고 있는 한국투자공사(KIC) 운영위원의 경우와 비교해서도 지나치게 짧다. 한국투자공사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국민연금의 민간운용위원의 전문성 요건이 오히려 더 완화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10년으로 늘리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요건이고, 가급적 투자관리(investment management) 전문가들로 기금운용위원회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와 같이 운용위원의 투자 전문성을 보다 높이기 위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본문으로 5)『월간 사회운동』(http://www.movements.or.kr)에 관련된 많은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