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현재 진행 중인 대선의 최대 쟁점을 여론조사 등을 통해 본다면, 소란스러워 보이는 이명박 후보의 비리나 BBK 문제보다는 '누가 경제를 살릴 수 있느냐'인 것으로 보인다. '양극화' 문제, 즉 빈곤문제와 이것의 해결책('좋은 일자리' 만들기, 비정규직 축소)이 전혀 쟁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나 '경제성장'이 더 큰 쟁점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라면 빈곤문제가 경제성장이 높아진다고 꼭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높은 경제성장 없이는 이것의 해결이 어려운 측면이 존재하는 바, 빈곤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높은 경제성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국민들은 기본적으로 옳다. 물론 '어떤 후보가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할 것이다.'라는 국민들의 판단이 옳으냐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현재로서 '경제를 살릴' 것 같은 후보는 한나라당 이명박으로 여겨지고 있고, 그래서 여론조사에 따른다면 이명박 후보는 무응답이 20% 내외가 존재하는 가운데 40% 내외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국민들은 현재 '경제가 죽었다.'는 것이고, 경제를 죽인 범여권 또는 소위 '좌파'를 반대하고 있고, 이는 통합신당의 정동영 후보의 낮은 지지율('정권교체')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한 반사효과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 출신의 무소속 후보 이회창에 대한 높은 지지율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지지율의 합은 65% 정도이고,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통합신당의 대안으로 읽혀지고 있는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50%에 가깝다. 한편 '경제를 죽인' 범여권에 확실한 선을 긋지 않았다고 여겨지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당연히 지지가 그리 높지 않다. 그런데 경제는 왜 죽었을까? 간단히 이야기해 본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있는 한국자본주의는 1980년을 전후로 저성장기에 접어들었고, 1997년 과잉축적 및 이윤율 저하로 구조적 위기에 빠졌고, 이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좌파'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개혁'정책, 즉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및 금융세계화로의 편입 정책이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저성장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익부빈익빈, 저투자, 내수부진, 국부·소득·두뇌의 해외유출 등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제가 죽은' 이유는 지배세력이 제출할 수 있는 최선의 '개혁' 정책으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제를 살릴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명박 후보 혹은 또 다른 대선 후보들은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판단으로는 이명박 후보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후보들의 정책도 경제를 살릴 수 없고 동일한 결과를 낳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들이 현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모순을 건드릴 것은 아니고, 이미 실패로 드러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및 금융세계화 정책을 지속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 FTA, 한·EU FTA 추진, 각종 네트워크 사업(전력, 가스, 수도, 철도 등)의 민영화, 각종 연금의 개악 등이 새로운 '개혁'정책의 목록이 될 것이다. 이들 정책은 농업붕괴, 금융거품의 형성과 붕괴를 초래할 것이며, 공공부문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사회복지기능을 무화시킬 것이고 공공부문에서의 투자부족, 요금 인상, 서비스 부실, 노동권 후퇴 등의 사태를 초래할 것이다. 더구나 '대외환경'이라고 이야기되는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 상황이 이전보다 한층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 대통령이 되든 약속한 경제성장은 신통치 않을 것이고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어서 집권 초반부터 대중적인 정권반대운동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한국경제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악화될 '대외환경'은 무엇인지, '대외환경'과 새 정권에서도 지속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정책이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보기로 하자. 한국경제의 현재 사실 한국경제는 IMF 외환위기 이후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최근 몇 년 동안 3∼5%대에 머물렀다. 국민총소득(GNI) 성장률은 이보다 2∼3%포인트 더 낮았다. 한국경제가 만들어내 수출하는 재화(예를 들어 반도체)의 가격은 하락하고 외국에서 수입하는 재화(예를 들어 원유)의 가격은 상승해 국민들의 실질 소득은 국내총생산 성장률보다 더 낮아진 것이다. 국민총소득 성장률이 국내총생산 증가율보다 낮은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인의 대외투자로부터 얻는 소득에 비해 국내에서의 외국인투자(약 반 정도가 미국계 자본이다)가 얻는 소득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경제통계에 정확히 계상이 되지 않고 있는데, 외국인투자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점점 더 커지고 있을 외국인투자의 미배당 이익이 제대로 반영이 된다면 국민총소득 증가율 통계치는 더 낮아질 것이다. 노무현정부의 자랑과는 달리 성장률로 본 한국경제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경기순환주기가 2년 정도로 짧아졌고 그래서 반짝 1년 정도 경기가 좋아지는가 싶으면 이내 다시 나빠지곤 한다. 마르크스 말대로 경제위기 혹은 공황의 궁극적 원인은 이윤율 저하인데, 현재의 상태와 앞으로의 전망을 위해서 <그림 1>의 그래프를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자. 매출액영업이익률에 유형자산회전률(=매출액/유형자산)을 곱해 계산한 제조업 유형자산영업이익률을 이윤율 대용으로 사용하자. 반도체가격변화의 영향이 커 보이지만 한국경제의 대략의 추세는 알 수 있다. [%=사진1%] 1979∼80년 경제위기로 낮아졌을 이익률은 3저 호황이 시작된 해인 1986년까지 일정하게 회복한다. 그 이후 1989년, 1992∼93년, 1996년, 1998∼99년, 2001년 저점을 형성한다. 최근 년에는 2004년 이익률이 최고점에 이르렀다가 2005년 2006년 연속 하락하고 있다. 2004년의 높은 이익률과 1996년과 2006년의 낮은 이익률은 반도체 가격 상승과 하락으로 경기상황에 비해 과도하게 높아지고 낮아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 와중에 한국경제는 그래프에는 나타나지 않은 1979∼80년과 1997∼98년에 구조적 경제위기를 경험하고, 1989∼90년, 92년, 2001년에 경기후퇴(순환적 위기)를 경험한다. 2002년 이후에는 짧은 경기순환을 반복하는데, 최근 2007년 2/4, 3/4분기에는 전기대비 성장률이 약간 높아져, 2006년 말 2007년 초 약간 악화되었던 경기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07년 상반기 영업이익 상황은 2006년에 비해 그리 개선되고 있지 않다. 악화될 ‘대외환경’ 그러면 대선 이후 등장할 새 정권의 '대외환경'을 비롯한 경제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980년대부터 지속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여러 문제(남미 외채위기, 아시아 금융위기, 정보기술(IT) 주식시장 거품 형성 및 붕괴 등)를 낳았는데, 현재 가장 커다란 문제는 미국에서 발생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이다. 지난 8월, 미국에서 신용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준 주택담보 대출이 부실해져서, 이와 관련하여 몇 개의 헤지펀드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 세계 증권시장이 요동을 친 바 있다. 사태의 원인은 주택시장에 낀 거품이었다. 미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6년까지 몇 년 동안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하였다. 주택도 많이 건설되어 너도나도 빚을 내 주택을 구입했다. 2001년 IT(정보기술) 거품형성 붕괴로 인한 불황을 탈출하기 위해 이자율을 대폭적으로 내렸기 때문에 돈을 꾸는 데 부담이 없었다. 집을 빚으로 산 개인들은 집값이 오르자 이 집을 담보로 더 많은 부채를 얻어 소비를 하기도 하였다(그래서 미국은 저축률이 마이너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주택담보대출 금융기관들은 대출자산을 근거로 채권을 발행했고, 이런 채권을 헤지펀드, 투자은행들이 샀다. 그런데 이자율은 점차 올랐고 자동차 산업 밀집지역 등에서 불황으로 소득이 줄면서 대출 이자와 할부금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계속 오를 것 같던 집값이 하락하면서 상승한 주택을 담보로 한 추가대출도 어려워졌다. 금융기관의 대출들이 부실해 진 것이다. 주택담보대출 금융기관들 중 일부도 문을 닫았다. 당연히 이런 부실대출을 근거로 발행된 채권가격들은 하락하였고, 이런 채권들을 보유한 헤지펀드나 투자은행들 중 일부는 문을 닫거나 부실해졌다. 집들은 금융기관으로 넘어가 싸게 팔리면서 집값을 더욱 하락시키고 있다. 이른바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11월 들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전 세계 증권시장이 다시 출렁거리고 있다. 홍콩, 중국, 일본 증권시장은 전 고점 기준 15% 이상 하락해 다시 증권시장 침체가 시작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이번 증시하락은 홍콩, 중국 등에서 심한 것으로 보아 중국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정부가 경기를 둔화시킬 조치를 취할 것이다)도 영향을 미쳤고, 100달러를 향해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유가문제도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시티그룹, 제이피모건,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이카 등 미국 거대 은행들의 부실자산에 대한 대규모 상각, 미국 주택담보대출 금융기관인 컨츄리와이드(Countrywide)사의 부실 심화, 소비자신뢰지수 하락 등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부정적 효과가 본격화되면서 증시가 크게 출렁거리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중앙은행 격) 버냉키 의장은 미국경제가 향후 성장률은 둔화되고 물가는 오를 것이라고 하였다. 자본부족으로 '배당을 줄여야 한다.', '줄일 필요가 없다.'는 논란이 일었던 세계 최대 은행 씨티그룹에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아부다비투자청 석유자금이 투입이 되고, 12월에 금리가 또 내릴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면서 11월 말 현재 세계금융시장이 다시 안정을 되찾는 듯이 보이지만 실물 경제 상황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신규주택이든 기존주택이든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집값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최근의 집값하락을 '자유낙하' 양상이라고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기존주택은 전년대비 5% 내외, 신규주택은 13% 정도 하락하였다는 보고다. 신규주택가격 하락은 1970년 이래 최악이다. 우량 금융기관들의 채권금리마저 국채금리보다 현저히 높아지는 등 혼란스럽다. 금융기관 보유 부실자산에 대한 대규모 상각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금융기관 불신이 쌓여가면서 신용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금융기관에서의 예금유출-현금고갈 사태도 예견되고 있다(영국에서는 한 건이 이미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3/4분기 경제성장이 초기 발표치 3.9%보다 1%나 높은 4.9%로 조정된 통계치가 나와도 별 반응이 없다. 오히려 재고증대가 이런 성장률 상향조정의 한 원인이었다면서 4/4분기 성장률과 2008년도 성장률이 얼마나 낮아질 것인가가 관심사항이다(일부에서는 4/4분기 성장률이 0%에 근접할 것이라 한다). 8월 이후 상황을 보면 미 연방공개시장조작위원회(FOMC)의 계속적인 금리인하가 시장을 잠깐 동안 안정시키는 듯하다가('버냉키 효과') 이내 다시 불안이 엄습하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버냉키 효과'가 현재의 위기를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2%]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는 주택시장의 거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주택시장은 <그림 2>에서 보다시피 1990년대 중반 이후 폭등을 하였다. 미 경제정책연구센타(CEPR)의 딘 베이커에 의하면 미국 주택시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일반 물가상승률정도로 올랐는데 9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물가상승률을 제외하고 누적상승률이 약 70%나 되고 액수로 치면 8조 달러(참고로 미국 국내총생산은 약 13조 달러다)에 달한다고 한다.2) 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언제까지 지속되고 어느 정도까지 악화될 것인가? 이는 물론 주택가격 하락 정도와 기간에 달린 문제다. 단순 산술을 하면 향후 3-4년 동안(매년 인플레이션률이 2-3%라 가정하자) 이제껏 상승했던 70%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70 170) 100 - 10(3-4년 동안 진행될 물가상승률)= 31%, 즉 최고가격 대비 30% 내외는 하락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보다 덜 하락할 수도 있고, 더 하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주택건설부문 부진으로 인한 성장 감소, 자산 가격 하락에서 오는 소비감소로 인한 성장 감소, 금융기관 부실로 인한 금융위기, 일부 개도국들의 환율 및 금융 위기 등을 야기할 것이다. 이런 사태는 전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부에서는 중국 등 미국을 대체하는 성장지역을 들면서 세계경제가 미국경제와의 동조현상에서 많이 벗어나('디커플링') 있어서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중국 성장의 대미 수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지고 있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역내 교역 증대도 중국을 경유한 대미 수출이 주요인이어서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대미 의존도 결코 이전보다 적지 않다. 결정적으로는 세계 증권시장을 주도하는 미국 증권시장을 보면 세계경제의 미국경제로부터의 탈동조화가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미국시장이 쉬는 날의 다른 나라 증권시장의 모습은 영락없이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모습이다. 새 정권이 직면할 '대외여건'은 이것만은 아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고유가행진, 과열상태를 보이고 있는 중국경제 등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중국경제 과열은 특히 심각한데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전후로 하여 중국경제가 불황에 빠질 것이라는 진단은 무수하다. 환율위기 가능성 한편 현재 미 달러화가 약세인 상황에서도 몇몇 나라의 화폐가치는 그 약한 달러화에 대해서도 약세를 보이고 있는데 원화가 그 중에 속한다. 즉 달러화가 약세로 돌아서면 원화는 달러화에 대해서도 약세를 나타낸다. 이는 일본자금의 탈출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현재 한국경제가 초민족적 자본의 투기적 유출입에 지극히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원화가 고평가가 되어 있다는 데서 주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경상수지 흑자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고 심지어 내년에는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설 것이라 한다. 이는 환율변동으로 인한 추가적인 위험을 야기할 것이다. [%=사진3%] 투기자본의 유출입으로 인한 환율변동성을 가늠해 보기 위해 외채통계와 순국제투자잔액통계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표 1> 참조). 2007년 2/4분기 대외채무, 즉 외채는 약 3,111억(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3/4분기에 1,774억 달러였다), 대외채권은 약 3,921억 달러였고 이 둘의 차이인 순채권은 약 810억 달러이다. 순채권 규모는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4/4분기에 -681억 달러였다가 2006년 1/4분기에 약 1,211억 달러로 최고규모를 나타냈는데 그 이후에 급격히 줄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투자 중에서 주식투자 비중이 줄어들고 채권투자나 기타투자가 늘고 있어 대외채무는 당분간 지속적으로 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외채무에서는 단기외채 비중이 외환위기 당시와 비슷한 정도로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 2008년이나 2009년에는 대외채무 위기가 다시 사회적 쟁점으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외채무과 대외채권에다 지분성 직접투자와 주식투자를 포함한 더 포괄적인 범주인 대외투자잔액과 외국인투자잔액과 그 차이를 나타내는 순국제투자잔액(2001년부터 통계가 작성되고 있는데, 이 액수가 마이너스인 미국에서는 이것을 외채라고 하기도 한다)은 2001년 4/4분기에 약 -638억이었다가 2007년 2/4분기에는 -2,402억 불에 이르렀다. 이 순국제투자잔액의 마이너스 규모도 계속 급증하고 있다. 순국제투자 마이너스 규모가 이렇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원화가치의 상승과 외국인투자에서의 엄청난 이윤 및 국내 주식시장의 급등 등에 그 원인이 있다. 지난 8월과 11월 주식시장 폭락 와중에서 외국인들의 주식시장 철수로 인해 엔화와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하락한 바 있는데, 보다 급격한 하락은 미국 달러가치가 어느 정도 하락한 이후 미국 달러가치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할 때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원화의 급격한 하락은 물가상승, 금리상승을 동반할 것이어서 한국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3) 장기불황 속의 또 다른 위기 결국 새 정권 집권 시기는 세계적인 경제위기 시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이런 위기의 서막일 가능성이 높고, 중국의 불황기로의 진입이 겹친다면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불가피 할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한국경제 또한 구조적 위기에 처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 성장률로 보면 IMF 외환위기가 한창인 1998년보다는 양호하겠지만 장기 불황 속의 또 다른 위기가 될 것이며, 민중들에겐 훨씬 더 고통스러운 시기가 될 것이다. 또 다른 환율위기나 금융위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새 정권이 펼칠 정책이라야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더 혹독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과 금융세계화로의 한층 심화된 편입 일 텐데 이것은 '대외환경' 악화로 인해 한국경제를 더욱 더 취약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짧아진 경기순환주기를 생각한다면 외부여건의 변화에 따라서는 한국경제는 언제든지 경기후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하겠다. 따라서 최근의 세계금융시장의 동요에 따라서는 2/4분기, 3/4분기 성장세가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당장은 아닐지라도 이윤율의 급격한 저하나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유출이 발생할 수도 있겠는데 이 경우 1998년에 버금가는 구조적 위기가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업붕괴, 금융거품의 형성과 붕괴로 인한 금융위기, 한국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공공부문의 황폐화(투자부족, 요금인상, 서비스 부실, 노동권 후퇴) 등의 사태가 초래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체제 내 '좌파'와 '우파'가 신자유주의로 수렴되고 있고, 그것이 좌파든 우파든 집권하자마자 대체로 위기에 빠진다('현직의 위기'). 우파에서 좌파로, 좌파에서 우파로의 정권교체와 그들이 시행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엔 경제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해 민중들의 생활상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국적·지역적 생산관계의 재편을 내포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이 불가피해 보인다. 사회운동은 불모의 체제 내 정권교체 시도로 자신의 역량을 갉아먹을 것이 아니라 대안세계화를 목표로 해야 하고, 이것을 목표로 해야 사회운동의 활성화도 가능할 것이다. 1)이윤율 추세선(들쭉날쭉한 실제 이윤율궤도를 평활하게 만든 가상의 선)이 하락하면서 이윤율이 급격히 하락할 때 구조적 위기가 발생한다.본문으로 2)Dean Baker, "Midsummer Meltdown - Prospects for the Stock and Housing Markets", 2007년 8월(http://www.cepr.net/documents/publications/meltdown_2007_08.pdf) 참조본문으로 3)최근 몇 년간 미국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많은 개도국들이 경상수지 흑자를 누리고 외채도 축소되는 등 환율위기의 가능성을 현저히 줄였지만 이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 달러 가치는 현재 어느 정도 하락하였고 이는 경상수지 적자의 개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정 기간 이후 달러가치는 다시 상승 할 텐데 이때가 되면 개도국의 환율위기는 다시 빈발할 것이다. 현재 미국주도 세계경제에 위기가 발생한다면 그것의 파괴적 효과는 주변에서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본문으로
서 현재 진행 중인 대선의 최대 쟁점을 여론조사 등을 통해 본다면, 소란스러워 보이는 이명박 후보의 비리나 BBK 문제보다는 '누가 경제를 살릴 수 있느냐'인 것으로 보인다. '양극화' 문제, 즉 빈곤문제와 이것의 해결책('좋은 일자리' 만들기, 비정규직 축소)이 전혀 쟁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나 '경제성장'이 더 큰 쟁점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라면 빈곤문제가 경제성장이 높아진다고 꼭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높은 경제성장 없이는 이것의 해결이 어려운 측면이 존재하는 바, 빈곤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도 높은 경제성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국민들은 기본적으로 옳다. 물론 '어떤 후보가 높은 경제성장을 이룩할 것이다.'라는 국민들의 판단이 옳으냐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현재로서 '경제를 살릴' 것 같은 후보는 한나라당 이명박으로 여겨지고 있고, 그래서 여론조사에 따른다면 이명박 후보는 무응답이 20% 내외가 존재하는 가운데 40% 내외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국민들은 현재 '경제가 죽었다.'는 것이고, 경제를 죽인 범여권 또는 소위 '좌파'를 반대하고 있고, 이는 통합신당의 정동영 후보의 낮은 지지율('정권교체')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한 반사효과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 출신의 무소속 후보 이회창에 대한 높은 지지율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지지율의 합은 65% 정도이고,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통합신당의 대안으로 읽혀지고 있는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50%에 가깝다. 한편 '경제를 죽인' 범여권에 확실한 선을 긋지 않았다고 여겨지고 있는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도 당연히 지지가 그리 높지 않다. 그런데 경제는 왜 죽었을까? 간단히 이야기해 본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에 편입되어 있는 한국자본주의는 1980년을 전후로 저성장기에 접어들었고, 1997년 과잉축적 및 이윤율 저하로 구조적 위기에 빠졌고, 이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한 '좌파'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개혁'정책, 즉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및 금융세계화로의 편입 정책이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저성장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익부빈익빈, 저투자, 내수부진, 국부·소득·두뇌의 해외유출 등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제가 죽은' 이유는 지배세력이 제출할 수 있는 최선의 '개혁' 정책으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제를 살릴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명박 후보 혹은 또 다른 대선 후보들은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판단으로는 이명박 후보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후보들의 정책도 경제를 살릴 수 없고 동일한 결과를 낳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들이 현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모순을 건드릴 것은 아니고, 이미 실패로 드러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및 금융세계화 정책을 지속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 FTA, 한·EU FTA 추진, 각종 네트워크 사업(전력, 가스, 수도, 철도 등)의 민영화, 각종 연금의 개악 등이 새로운 '개혁'정책의 목록이 될 것이다. 이들 정책은 농업붕괴, 금융거품의 형성과 붕괴를 초래할 것이며, 공공부문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사회복지기능을 무화시킬 것이고 공공부문에서의 투자부족, 요금 인상, 서비스 부실, 노동권 후퇴 등의 사태를 초래할 것이다. 더구나 '대외환경'이라고 이야기되는 미국 주도의 세계경제 상황이 이전보다 한층 악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 대통령이 되든 약속한 경제성장은 신통치 않을 것이고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어서 집권 초반부터 대중적인 정권반대운동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한국경제가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그리고 악화될 '대외환경'은 무엇인지, '대외환경'과 새 정권에서도 지속될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정책이 한국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보기로 하자. 한국경제의 현재 사실 한국경제는 IMF 외환위기 이후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최근 몇 년 동안 3∼5%대에 머물렀다. 국민총소득(GNI) 성장률은 이보다 2∼3%포인트 더 낮았다. 한국경제가 만들어내 수출하는 재화(예를 들어 반도체)의 가격은 하락하고 외국에서 수입하는 재화(예를 들어 원유)의 가격은 상승해 국민들의 실질 소득은 국내총생산 성장률보다 더 낮아진 것이다. 국민총소득 성장률이 국내총생산 증가율보다 낮은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인의 대외투자로부터 얻는 소득에 비해 국내에서의 외국인투자(약 반 정도가 미국계 자본이다)가 얻는 소득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경제통계에 정확히 계상이 되지 않고 있는데, 외국인투자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점점 더 커지고 있을 외국인투자의 미배당 이익이 제대로 반영이 된다면 국민총소득 증가율 통계치는 더 낮아질 것이다. 노무현정부의 자랑과는 달리 성장률로 본 한국경제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경기순환주기가 2년 정도로 짧아졌고 그래서 반짝 1년 정도 경기가 좋아지는가 싶으면 이내 다시 나빠지곤 한다. 마르크스 말대로 경제위기 혹은 공황의 궁극적 원인은 이윤율 저하인데, 현재의 상태와 앞으로의 전망을 위해서 <그림 1>의 그래프를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자. 매출액영업이익률에 유형자산회전률(=매출액/유형자산)을 곱해 계산한 제조업 유형자산영업이익률을 이윤율 대용으로 사용하자. 반도체가격변화의 영향이 커 보이지만 한국경제의 대략의 추세는 알 수 있다. [%=사진1%] 1979∼80년 경제위기로 낮아졌을 이익률은 3저 호황이 시작된 해인 1986년까지 일정하게 회복한다. 그 이후 1989년, 1992∼93년, 1996년, 1998∼99년, 2001년 저점을 형성한다. 최근 년에는 2004년 이익률이 최고점에 이르렀다가 2005년 2006년 연속 하락하고 있다. 2004년의 높은 이익률과 1996년과 2006년의 낮은 이익률은 반도체 가격 상승과 하락으로 경기상황에 비해 과도하게 높아지고 낮아진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 와중에 한국경제는 그래프에는 나타나지 않은 1979∼80년과 1997∼98년에 구조적 경제위기를 경험하고, 1989∼90년, 92년, 2001년에 경기후퇴(순환적 위기)를 경험한다. 2002년 이후에는 짧은 경기순환을 반복하는데, 최근 2007년 2/4, 3/4분기에는 전기대비 성장률이 약간 높아져, 2006년 말 2007년 초 약간 악화되었던 경기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07년 상반기 영업이익 상황은 2006년에 비해 그리 개선되고 있지 않다. 악화될 ‘대외환경’ 그러면 대선 이후 등장할 새 정권의 '대외환경'을 비롯한 경제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자. 1980년대부터 지속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여러 문제(남미 외채위기, 아시아 금융위기, 정보기술(IT) 주식시장 거품 형성 및 붕괴 등)를 낳았는데, 현재 가장 커다란 문제는 미국에서 발생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이다. 지난 8월, 미국에서 신용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준 주택담보 대출이 부실해져서, 이와 관련하여 몇 개의 헤지펀드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 세계 증권시장이 요동을 친 바 있다. 사태의 원인은 주택시장에 낀 거품이었다. 미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6년까지 몇 년 동안 주택가격이 계속 상승하였다. 주택도 많이 건설되어 너도나도 빚을 내 주택을 구입했다. 2001년 IT(정보기술) 거품형성 붕괴로 인한 불황을 탈출하기 위해 이자율을 대폭적으로 내렸기 때문에 돈을 꾸는 데 부담이 없었다. 집을 빚으로 산 개인들은 집값이 오르자 이 집을 담보로 더 많은 부채를 얻어 소비를 하기도 하였다(그래서 미국은 저축률이 마이너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주택담보대출 금융기관들은 대출자산을 근거로 채권을 발행했고, 이런 채권을 헤지펀드, 투자은행들이 샀다. 그런데 이자율은 점차 올랐고 자동차 산업 밀집지역 등에서 불황으로 소득이 줄면서 대출 이자와 할부금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계속 오를 것 같던 집값이 하락하면서 상승한 주택을 담보로 한 추가대출도 어려워졌다. 금융기관의 대출들이 부실해 진 것이다. 주택담보대출 금융기관들 중 일부도 문을 닫았다. 당연히 이런 부실대출을 근거로 발행된 채권가격들은 하락하였고, 이런 채권들을 보유한 헤지펀드나 투자은행들 중 일부는 문을 닫거나 부실해졌다. 집들은 금융기관으로 넘어가 싸게 팔리면서 집값을 더욱 하락시키고 있다. 이른바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11월 들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전 세계 증권시장이 다시 출렁거리고 있다. 홍콩, 중국, 일본 증권시장은 전 고점 기준 15% 이상 하락해 다시 증권시장 침체가 시작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이번 증시하락은 홍콩, 중국 등에서 심한 것으로 보아 중국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정부가 경기를 둔화시킬 조치를 취할 것이다)도 영향을 미쳤고, 100달러를 향해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유가문제도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시티그룹, 제이피모건,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이카 등 미국 거대 은행들의 부실자산에 대한 대규모 상각, 미국 주택담보대출 금융기관인 컨츄리와이드(Countrywide)사의 부실 심화, 소비자신뢰지수 하락 등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부정적 효과가 본격화되면서 증시가 크게 출렁거리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중앙은행 격) 버냉키 의장은 미국경제가 향후 성장률은 둔화되고 물가는 오를 것이라고 하였다. 자본부족으로 '배당을 줄여야 한다.', '줄일 필요가 없다.'는 논란이 일었던 세계 최대 은행 씨티그룹에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아부다비투자청 석유자금이 투입이 되고, 12월에 금리가 또 내릴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면서 11월 말 현재 세계금융시장이 다시 안정을 되찾는 듯이 보이지만 실물 경제 상황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신규주택이든 기존주택이든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집값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최근의 집값하락을 '자유낙하' 양상이라고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기존주택은 전년대비 5% 내외, 신규주택은 13% 정도 하락하였다는 보고다. 신규주택가격 하락은 1970년 이래 최악이다. 우량 금융기관들의 채권금리마저 국채금리보다 현저히 높아지는 등 혼란스럽다. 금융기관 보유 부실자산에 대한 대규모 상각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금융기관 불신이 쌓여가면서 신용이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금융기관에서의 예금유출-현금고갈 사태도 예견되고 있다(영국에서는 한 건이 이미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3/4분기 경제성장이 초기 발표치 3.9%보다 1%나 높은 4.9%로 조정된 통계치가 나와도 별 반응이 없다. 오히려 재고증대가 이런 성장률 상향조정의 한 원인이었다면서 4/4분기 성장률과 2008년도 성장률이 얼마나 낮아질 것인가가 관심사항이다(일부에서는 4/4분기 성장률이 0%에 근접할 것이라 한다). 8월 이후 상황을 보면 미 연방공개시장조작위원회(FOMC)의 계속적인 금리인하가 시장을 잠깐 동안 안정시키는 듯하다가('버냉키 효과') 이내 다시 불안이 엄습하는 양상이 반복되고 있다. '버냉키 효과'가 현재의 위기를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2%]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근본적인 이유는 주택시장의 거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주택시장은 <그림 2>에서 보다시피 1990년대 중반 이후 폭등을 하였다. 미 경제정책연구센타(CEPR)의 딘 베이커에 의하면 미국 주택시장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일반 물가상승률정도로 올랐는데 9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물가상승률을 제외하고 누적상승률이 약 70%나 되고 액수로 치면 8조 달러(참고로 미국 국내총생산은 약 13조 달러다)에 달한다고 한다.2) 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언제까지 지속되고 어느 정도까지 악화될 것인가? 이는 물론 주택가격 하락 정도와 기간에 달린 문제다. 단순 산술을 하면 향후 3-4년 동안(매년 인플레이션률이 2-3%라 가정하자) 이제껏 상승했던 70%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70 170) 100 - 10(3-4년 동안 진행될 물가상승률)= 31%, 즉 최고가격 대비 30% 내외는 하락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보다 덜 하락할 수도 있고, 더 하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주택건설부문 부진으로 인한 성장 감소, 자산 가격 하락에서 오는 소비감소로 인한 성장 감소, 금융기관 부실로 인한 금융위기, 일부 개도국들의 환율 및 금융 위기 등을 야기할 것이다. 이런 사태는 전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부에서는 중국 등 미국을 대체하는 성장지역을 들면서 세계경제가 미국경제와의 동조현상에서 많이 벗어나('디커플링') 있어서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중국 성장의 대미 수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지고 있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역내 교역 증대도 중국을 경유한 대미 수출이 주요인이어서 중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의 대미 의존도 결코 이전보다 적지 않다. 결정적으로는 세계 증권시장을 주도하는 미국 증권시장을 보면 세계경제의 미국경제로부터의 탈동조화가 얼마나 허망한 이야기인지를 잘 알 수 있다. 미국시장이 쉬는 날의 다른 나라 증권시장의 모습은 영락없이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모습이다. 새 정권이 직면할 '대외여건'은 이것만은 아니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고유가행진, 과열상태를 보이고 있는 중국경제 등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중국경제 과열은 특히 심각한데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전후로 하여 중국경제가 불황에 빠질 것이라는 진단은 무수하다. 환율위기 가능성 한편 현재 미 달러화가 약세인 상황에서도 몇몇 나라의 화폐가치는 그 약한 달러화에 대해서도 약세를 보이고 있는데 원화가 그 중에 속한다. 즉 달러화가 약세로 돌아서면 원화는 달러화에 대해서도 약세를 나타낸다. 이는 일본자금의 탈출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현재 한국경제가 초민족적 자본의 투기적 유출입에 지극히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으며 원화가 고평가가 되어 있다는 데서 주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경상수지 흑자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고 심지어 내년에는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설 것이라 한다. 이는 환율변동으로 인한 추가적인 위험을 야기할 것이다. [%=사진3%] 투기자본의 유출입으로 인한 환율변동성을 가늠해 보기 위해 외채통계와 순국제투자잔액통계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표 1> 참조). 2007년 2/4분기 대외채무, 즉 외채는 약 3,111억(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 3/4분기에 1,774억 달러였다), 대외채권은 약 3,921억 달러였고 이 둘의 차이인 순채권은 약 810억 달러이다. 순채권 규모는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4/4분기에 -681억 달러였다가 2006년 1/4분기에 약 1,211억 달러로 최고규모를 나타냈는데 그 이후에 급격히 줄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투자 중에서 주식투자 비중이 줄어들고 채권투자나 기타투자가 늘고 있어 대외채무는 당분간 지속적으로 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외채무에서는 단기외채 비중이 외환위기 당시와 비슷한 정도로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다. 2008년이나 2009년에는 대외채무 위기가 다시 사회적 쟁점으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외채무과 대외채권에다 지분성 직접투자와 주식투자를 포함한 더 포괄적인 범주인 대외투자잔액과 외국인투자잔액과 그 차이를 나타내는 순국제투자잔액(2001년부터 통계가 작성되고 있는데, 이 액수가 마이너스인 미국에서는 이것을 외채라고 하기도 한다)은 2001년 4/4분기에 약 -638억이었다가 2007년 2/4분기에는 -2,402억 불에 이르렀다. 이 순국제투자잔액의 마이너스 규모도 계속 급증하고 있다. 순국제투자 마이너스 규모가 이렇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원화가치의 상승과 외국인투자에서의 엄청난 이윤 및 국내 주식시장의 급등 등에 그 원인이 있다. 지난 8월과 11월 주식시장 폭락 와중에서 외국인들의 주식시장 철수로 인해 엔화와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하락한 바 있는데, 보다 급격한 하락은 미국 달러가치가 어느 정도 하락한 이후 미국 달러가치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할 때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원화의 급격한 하락은 물가상승, 금리상승을 동반할 것이어서 한국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3) 장기불황 속의 또 다른 위기 결국 새 정권 집권 시기는 세계적인 경제위기 시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이런 위기의 서막일 가능성이 높고, 중국의 불황기로의 진입이 겹친다면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불가피 할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한국경제 또한 구조적 위기에 처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 성장률로 보면 IMF 외환위기가 한창인 1998년보다는 양호하겠지만 장기 불황 속의 또 다른 위기가 될 것이며, 민중들에겐 훨씬 더 고통스러운 시기가 될 것이다. 또 다른 환율위기나 금융위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새 정권이 펼칠 정책이라야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더 혹독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정책과 금융세계화로의 한층 심화된 편입 일 텐데 이것은 '대외환경' 악화로 인해 한국경제를 더욱 더 취약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짧아진 경기순환주기를 생각한다면 외부여건의 변화에 따라서는 한국경제는 언제든지 경기후퇴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하겠다. 따라서 최근의 세계금융시장의 동요에 따라서는 2/4분기, 3/4분기 성장세가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당장은 아닐지라도 이윤율의 급격한 저하나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유출이 발생할 수도 있겠는데 이 경우 1998년에 버금가는 구조적 위기가 도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업붕괴, 금융거품의 형성과 붕괴로 인한 금융위기, 한국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공공부문의 황폐화(투자부족, 요금인상, 서비스 부실, 노동권 후퇴) 등의 사태가 초래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체제 내 '좌파'와 '우파'가 신자유주의로 수렴되고 있고, 그것이 좌파든 우파든 집권하자마자 대체로 위기에 빠진다('현직의 위기'). 우파에서 좌파로, 좌파에서 우파로의 정권교체와 그들이 시행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엔 경제위기를 근본적으로 극복해 민중들의 생활상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국적·지역적 생산관계의 재편을 내포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이 불가피해 보인다. 사회운동은 불모의 체제 내 정권교체 시도로 자신의 역량을 갉아먹을 것이 아니라 대안세계화를 목표로 해야 하고, 이것을 목표로 해야 사회운동의 활성화도 가능할 것이다. 1)이윤율 추세선(들쭉날쭉한 실제 이윤율궤도를 평활하게 만든 가상의 선)이 하락하면서 이윤율이 급격히 하락할 때 구조적 위기가 발생한다.본문으로 2)Dean Baker, "Midsummer Meltdown - Prospects for the Stock and Housing Markets", 2007년 8월(http://www.cepr.net/documents/publications/meltdown_2007_08.pdf) 참조본문으로 3)최근 몇 년간 미국의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많은 개도국들이 경상수지 흑자를 누리고 외채도 축소되는 등 환율위기의 가능성을 현저히 줄였지만 이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 달러 가치는 현재 어느 정도 하락하였고 이는 경상수지 적자의 개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정 기간 이후 달러가치는 다시 상승 할 텐데 이때가 되면 개도국의 환율위기는 다시 빈발할 것이다. 현재 미국주도 세계경제에 위기가 발생한다면 그것의 파괴적 효과는 주변에서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본문으로
-Marx to Ludwig Kugelmann In Hanover (London, 29 November 1869) -Marx to Sigfrid Meyer and August Vogt In New York(London, April 9, 1870) [역주: 아일랜드는 중세 이래 줄곧 이웃한 잉글랜드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초기에 잉글랜드 왕은 아일랜드의 종주왕(宗主王)으로서 간접적인 형식으로 지배했지만 1688년 명예혁명으로 왕위를 빼앗긴 제임스 2세가 아일랜드에 상륙, 아일랜드인들의 지지를 발판으로 잉글랜드를 탈환하려고 시도하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가 직접 이끄는 군대에게 치열한 전투 끝에 패전하고 아일랜드는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의 예속국이 되어 그 인민들은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한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표현에 따르면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정복자를 위한 “나무꾼과 물긷는 사람” 이상이 될 수 없었다. 18세기 초 약 400만 명에 달하는 아일랜드 인구에게 부과되는 지대의 1/8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 잉글랜드의 부재지주에게로 흘러들어갔다. 게다가 잉글랜드 이외로는 소․양모의 수출이 금지되었던 관계로 주력 산업은 완전히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대혁명 등의 격변기 속에서 잉글랜드의 전제적 지배를 타도하고자 공화주의 이념을 수용하고 이는 이후 아일랜드 저항의 주된 이념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특히 프랑스대혁명을 경과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은 무장항쟁으로 폭발했다 애초에는 프랑스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무산되고 결국 아일랜드인 1798년 독자적으로 봉기하였다. 하지만 강력한 잉글랜드 정규군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되었고 잉글랜드 의회는 1800년 통합법(Act of Union)을 제정함으로써 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이로써 아일랜드는 영국의 하원에 100명의 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지만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계였던 아일랜드인들은 하원의원이 될 자격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잉글랜드 법에 의거하여 부재지주가 내세우는 배타적인 소유권 주장은, 대다수가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 소작인들이 주장하는 공동권으로서의 소작권, 즉 소작에 대한 관습적 권리의식과 충돌하면서 아일랜드에서 농업 문제를 둘러싼 계급적 갈등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잉글랜드 의회 자체 내에서도 아일랜드인들의 정치적․종교적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또한 아일랜드 몫으로 배당된 100명분의 의석을 둘러싸고 토리파와 휘그파 등 부르주아 정파들 사이에 끊임없는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850년대 이후 파머스턴과 글래드스턴 등 정계의 실세들이 주기적으로 권력을 잡았다가 실각하는 이합집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던 핵심 쟁점은 다름 아닌 아일랜드 문제였던 것이다. ‘아일랜드 문제’는 19세기 중반 절정기에 있었던 ‘대영제국’으로서도 곤경에 부닥치는 미해결의 난제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통합정책이 허구적일 뿐 아니라 기만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정세에서 공화주의로 무장한 페니언(Fenians)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이 등장한다. 페니언은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동지회(Irish Republican Brotherhood)로서 1850년대 비로소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전부터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지고하던 중산층의 온건파에 거리를 두면서 무장반란을 통한 완전독립이라는 강령을 전면에 걸고 일반 민중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에 이주한 아일랜드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19세기 중후반 잉글랜드 여러 도시들에서 대중 시위를 조직하였고 1866~71년 사에는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영국령 캐나다를 침공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조직의 지도자들과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아일랜드 관련 서신이 1860년대 후반부터 급증하는 것은 페니언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홉스봄에 따르면 당시 페니언의 반(反)영 투쟁은 당대 유럽의 여러 민족들 중 가장 민족주의적이었으며 어떤 점에서는 20세기의 혁명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선취하는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 자본주의와 노동자운동을 분석하면서 아일랜드 문제가 영국 혁명에서 상당히 관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Class in England)(1845년)에서 「대도시들」․「농업 프롤레타리아들」․「경쟁」․「아일랜드인들의 이주」 등의 장(章)에서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상태와 잉글랜드 노동자와의 관계 등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중 특히 「경쟁」․「아일랜드인들의 이주」에서는 아일랜드 노동자와 잉글랜드 노동자 사이의 경쟁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엥겔스에 따르면 불결한 의식주, 음주로 임금을 탕진하는 습관, 잉글랜드에서도 최하층에 속하는 빈곤 등이 아일랜드 이주민들의 주된 특징이다(물론 이는 엥겔스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사회가 아일랜드 이주민들에게 스스로 노예가 되어 술고래가 될 지위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비난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1840년대 중반에만 매년 1만 5천명이 “가축처럼” 배에 실려와 영국의 주요 공업도시인 런던(12만 명 거주)과 맨체스터(4만 명 거주), 리버풀(3만 4천 명 거주), 브리스톨(2만 4천 명 거주), 글래스고우(4만 명 거주) 등에 정착함으로써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저임금만을 받는 아일랜드 이주민들, 혹은 이들의 자녀들이 전체 노동자의 1/4~1/5을 차지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쟁의 메커니즘 하에서 잉글랜드 노동자들의 상태는 점차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이 하락하면서 잉글랜드 노동자들이 아일랜드인들의 불결한 의식주 생활로 수렴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엥겔스의 관심은 아일랜드의 역사와 농업문제 등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엥겔스는 1869년 9월에는 직접 아일랜드를 답사하기까지 한다(1869년 9월 27일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 마르크스는 『자본』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서 아일랜드를 분석한다. 아일랜드는 영국을 위한 가축 사육지로서 조방적 농업의 필요성으로 인해 1846년 이후 전인구의 거의 1/3이 아사(餓死)하는 참사를 겪고 난 이후에도 자본주의하 상대적 과잉인구의 법칙에 의해 비참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반 농민의 빈곤과는 대조적으로 아일랜드 내의 농업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올리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 비밀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더욱더 많은 경작지와 황무지가 목양지로 편입되고 목양지에서 생산되는 양모와 육류 등의 상품이 잉글랜드에서 물가의 등귀로 인해 비싸게 팔렸던 것이며, 아일랜드에서 인구와 총 경작면적의 절대적인 감소에도 불구하고 농업자본의 지배하에 목양지는 늘어났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내는 서신에 따르면 바로 이 농업자본은 영국을 지배하는 과두제의 근간인 토지귀족들의 정치․경제적 기반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독립은 단지 인도주의적 감성이 아니라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제조건이며, 그로 인해 아일랜드 노동자와의 협력은 영국 노동자운동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아일랜드 노동자와 협력하지 못하는 이상 영국 노동자들은 지배계급에 속박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뉴욕의 지그프리트 마이어(Sigfrid Meyer)와 아우구스트 포크트(August Vogt)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영국 노동자들의 태도가 지배계급과 다르지 않음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이 두 사람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페니언(Fenians)이라는 비밀결사조직과 관계 있는 인물들로 보인다.). 다른 자료에서도 마르크스가 아일랜드 문제에서 영국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의 단결의 중요성 뿐 아니라 그것이 영국 혁명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강조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아일랜드는 대영제국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며 “아일랜드를 잃게 되면, 대영제국은 스러지고 여지껏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끌고 있었던 영국에서의 계급간 내전은 첨예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나(1870년 3월 5일, 라파르그 부부(Paul and Laura Lafargue)에게 보낸 편지),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말미암은 경쟁에서 연유하는 “잉글랜드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 사이의 엄청난 적대감”이 “영국 혁명의 장애”이며 이것이 “지배계급에게 능수능란하게 악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양 노동자의 연합을 강조하는 모습(1871년 런던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회의에서의 연설) 등은 마르크스의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해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일랜드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은 이주노동자나 식민지 등의 문제가 이미 마르크스 당대부터 노동자운동의 중요한 쟁점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운동이 혁명적 관점을 채택할 때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단순한 선후관계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노동자 내부에서 인종주의를 재생산하는 고유한 물질적 조건을 의제로 올리고, 이에 맞서기 위한 이념과 운동을 통과할 때에야 비로소 노동자운동이 혁명적 관점을 채택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이를 좀 더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 곧 대중들의 집단적 주체 형성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고유한 정치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혁명적 계급 형성은 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당대에 이 문제와 마주쳤고 이에 맞서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대안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가 이 문제에 단순히 무지했다거나, 이를 억압․회피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오히려 이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아무리 바깥에서 비난한들, 마르크스를 괴롭혔던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적 분석과 이념, 운동을 만들지 못하는 한, 국제주의를 ‘대중들의 운동’으로 만드는 것은 극히 곤란하다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당위적으로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는 이유, 그들의 단결을 위해 필요한 조건에 관해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의 실패는 우리가 출발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지시한다.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국제주의를 말하는 자, “여기가 로두스다! 뛰어라!”] 하노버의 루트비히 쿠겔만에게 보내는 마르크스의 편지Marx To Ludwig Kugelmann In Hanover)1) 1869년 11월 29일 런던. 친애하는 쿠겔만2)에게. 5주쯤 전에 예니첸[Jennychen, 딸인 예니 마르크스의 애칭]이 자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네(사실은 두 통인데 한 통은 자네에게, 다른 한 통은 쿠겔만 부인에게 보냈으니까.). 그 아이가 G. 비어스(G. Weerth)3)의 초상화를 동봉했는데,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도 어렵고 또한 부본(副本)을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예니첸은 자네가 편지를 받았는지 여부를 가급적 빨리 알고 싶어한다네. 내가 하노버에서 엥겔스에게 보냈던 편지가 분명히 개봉됐다가 조잡하게 다시 봉해진 적이 있기 때문에, 우편 업무의 보안이 철저한지, 안전하긴 한지에 관해 의문이 들고 있어. 엥겔스는 봉투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육안으로 봐도 확실할 정도였다네. 나의 길고, 얼마간 한심하기까지 한 침묵은, 그동안 내가 과학적 연구 뿐 아니라 인터내셔널과 관련된 방대한 업무를 따라잡는 데 정신이 없었다는 사실로 변명하고자 하네. 게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노동계급(물론 농민들도 포함해서)의 상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을 보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열심히 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내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도 변명의 이유 중 하나이네. 지금쯤 『인민의 국가』(Volksstaat)지(紙)4)에서 아일랜드 정치범의 사면을 두고 글래드스턴5)에 관해 내가 제안한 결의안을 보았을 것이네. 내가 일전에 팔머스턴6)을 공격했던 것처럼 지금은 글래드스턴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게 여기서 관심을 끌고 있어. 이 곳에 있는 선동하길 좋아하는 망명가들은 안전한 거리를 두고 대륙의 전제적 지배자들을 즐겨 공격한다네. 그런 공격이 호소력을 가지려면 폭군의 면전에서) 벌어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일세. 하지만 내가 아일랜드 정치범들의 사면에 관해 발표한 것이나, 총평의회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 노동계급의 태도를 논의하고 이 주제에 관해 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 모두, 압제자에 대항하는 아일랜드 피압제인민들을 지지한답시고 결연하지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것과는 다른 근거를 갖고 있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영국 노동자들이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계급의 태도와 자신들의 태도를 아주 명확하게 분리하고, 아일랜드인들과 함께 전선을 꾸릴 뿐만 아니라 1801년에 세워진 [아일랜드와의] 연합왕국[Union]8)을 해체하고 자유로운 연방적 관계로 대체하는 과정을 주도하기 전까지 여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결정적인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네. 이제 문제는 이 확신을 영국 노동계급에게 전파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이는 아일랜드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영국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에 기반한 요구로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일세. 그렇지 않으면 계속 지배계급에게 속박된 채로 남게 될 것이네. 영국 프롤레타리아들이 아일랜드에 맞서 지배계급과 공동전선을 꾸리도록 강제 받을 것이니 말이네. 영국에서 모든 노동계급 운동 자체는 아일랜드인들과의 불화로 인해 무기력해졌어. 이들이 영국 노동계급 내에서 아주 중요한 분파를 형성하고 있잖은가. 이곳에서 해방의 주요한 조건인 영국 의 지주 과두제 전복은 여전히 불가능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들이 아일랜드에서 굳건히 [자신들의] 전초기지를 유지하고 있는 한 그 진지를 침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일단 현안들이 아일랜드 인민 자신의 손으로 넘어가고, 그들이 자신들만의 의회와 통치자를 갖게 되자마자, 그들이 자율적이 되자마자 (대개 영국인 지주들과 같은 자들인) 토지 귀족을 타도하는 것은 이곳보다 그곳에서 훨씬 더 쉬울 것이네. 아일랜드에서는 이것이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문제이기 때문이지. 그곳에서 지주들이란 영국에서처럼 전통적인 고관이나 대표자가 아니라, 민족의 불구대천의 원수니까. 그리고 영국 내부의 사회 발전을 무력화하는 것은 현재 아일랜드와 맺고 있는 관계 뿐 아니라 대외 정책, 특히 러시아 및 미국에 관한 대외 정책이기도 하지. 그러나 영국 노동계급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회 해방 일반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바로 여기가 초점을 집중시킬 지점이라네. 크롬웰 치하의 영국 공화국이 아일랜드에서 난파했던 것은 사실이네만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는 않아야 할 걸세!9) 아일랜드인들은 유죄 선고를 받은 중죄인 오도노번 로사(O'Donovan Rossa)10)를 하원의원으로 선출함으로써 영국 정부를 조롱해왔어. 정부측 신문들은 벌써부터,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Act)11)을 다시금 유예시켜 공포정치 제도를 갱신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네! 사실, 현재와 같은 영국-아일랜드 관계가 지속되는 한, 영국은 절대로 아일랜드를 다른 식으로 통치할 수 없을 게야. 가장 구역질나는 공포정치와 가장 분통터지는 부패에 의존할밖에. 프랑스에서는 아직까지 일이 잘 풀리고 있네. 한편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선동가들과 음지에 있는 목소리 높은 민주파들은 신용이 떨어지고 있네. 다른 한편으로 보나파르트12)는 자신의 목을 부러뜨릴 타협의 길로 내몰리고 있으이. (관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옵저버』(Observer) 어제 판에서는 프러시아 의회에서의 올덴버그(Eulenburg)13) 스캔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논평하더군. “나폴레옹께서는 ‘러시아인들을 한꺼풀 벗겨보면 타타르족[같은 야만인]을 발견할 것’14)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프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한꺼풀 벗겨볼 필요도 없이 러시아인들을 발견할 것이네. 그건 그렇고, 라이히(메드(Med) 박사라네)의 세례명은 에두아르(Eduard)이고, 그의 책 서문을 볼 때 고타에 살고 있는 것 같네. 백작부인과 프렌첸(Franzchen)에게도 안부를 전하네. 친구 칼 마르크스로부터. 뉴욕의 지그프리트 마이어와 아우구스트 포크트에게 보내는 마르크스의 편지15)(Marx to Sigfrid Meyer and August Vogt In New York) 1870년 4월 9일 런던. 모레 (4월 11일) 손에 잡히는 모든 인터내셔널 문서들을 당신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오늘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거든요.). [스위스] 바젤 [보고서]16)도 더 보내겠습니다. 보내는 자료들 중에는 아일랜드 정치범 사면에 관한 11월 30일 총평의회 결의안 복사본 몇 부도 있을 겁니다. 이 결의안은 제가 발의했는데 당신도 이미 아실 겁니다. 또한 페니언 수감자 처우에 관한 아일랜드어 팜플렛도 보냅니다. 현재의 연합[왕국]의 필수적 변혁, 즉 예속된 아일랜드를 대영 제국과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방으로 변혁하는 것에 관해, 추가적 동의(動議)를 제출하려는 게 제 의도였습니다. 공개적 결의에 관한 한 이 문제에 관한 추가적인 진전은 당분간 중단되었습니다. 제가 총평의회에 부득이하게 불참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총평의회 성원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저를 대신할 만큼 아일랜드 문제를 충분히 알지 못했고, 영국 성원들에 대해 충분한 신망을 누리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 낭비는 아니었으며, 저는 여러분이 다음 사항을 특히 유의해 주었으면 합니다. 수년 동안 아일랜드 문제를 연구한 후 제가 도달한 결론은, 영국 지배계급에 대한 결정적 일격(그리고 이는 전세계 노동자운동에도 결정적일 것입니다)은 영국에서가 아니라 오직 아일랜드에서만 가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1870년 1월 1일, 총평의회17)는 제가 프랑스어(왜냐하면 영국에서 중요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독일 언론이 아니라 프랑스 언론뿐이기 때문입니다.)로 기초한 비밀 회람문18)을 발간했습니다. 이 문서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아일랜드 민족투쟁의 관계, 따라서 국제노동자협회가 아일랜드 문제에 관해 취해야 할 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일랜드는 영국 토지 귀족의 보루입니다. 아일랜드에 대한 착취는 영국 토지 귀족이 누리는 물질적 부의 주된 원천 중 하나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국 토지 귀족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 힘입니다. 사실 영국 토지 귀족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아일랜드는 영국 귀족들이 영국 자체에서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인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영국 군대와 경찰이 내일 철수한다면, 당장 아일랜드에서 농민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 영국 귀족이 몰락하면 그 필연적 결과는 영국에서 귀족제의 몰락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전제 조건을 제공할 것입니다. 아일랜드에서 영국 토지귀족의 해체는 영국 자체에서보다 훨씬 용이한 작업인데, 왜냐하면 아일랜드에서 토지 문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 문제의 유일무이한 형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아일랜드 민중의 압도적 다수에게 생사가 달린 생존의 문제이며, 동시에 민족 문제에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인들의 성격이 영국인들보다 훨씬 정열적이고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영국 부르주아지의 경우, 이들은 애초부터 영국 귀족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아일랜드를 단순한 목양지로 만들어 영국 시장에 육류와 양모를 가능한 한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려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게다가 축출과 강제적 이민을 통해 아일랜드 인구를 적은 수로 줄임으로써, (농지로 임대된 토지에 투자한) 영국 자본이 “안전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습니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예전에]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농업 지역들을 제거했을 때와 동일한 이해를, 아일랜드의 토지를 말소하는 데서도 갖습니다. 부재 지주와 여타 아일랜드 수입으로 현재 매년 런던으로 흘러 들어오는 6천~1만 파운드의 수입 역시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국 부르주아지는 현재의 아일랜드 경제에 훨씬 중요한 이해 역시 갖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차지농장의 집중화 때문에 아일랜드는 영속적으로 자신들의 잉여를 영국의 노동 시장으로 보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임금은 하락하고 영국 노동자계급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입지는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지금 영국의 모든 산업적․상업적 중심에는 두 개의 적대적 진영, 즉 영국 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 프롤레타리아로 분할된 노동자계급이 있습니다. 평범한 영국 노동자들은 아일랜드 노동자가 자신들의 생활 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라고 보면서 증오합니다. 아일랜드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배 민족의 일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결국 아일랜드에 반하는 영국 귀족과 자본가의 도구가 됩니다. 이로써 자신들[영국 노동자]에 대한 그들[영국 귀족과 자본가]의 지배를 강화하게 되는 것이죠. 영국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에 맞서 종교적․사회적․민족적 편견을 고스란히 간직합니다. 아일랜드 노동자에 대한 영국 노동자의 태도는 전에 노예제 국가였던 미국에서 ‘가난한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보였던 태도와 아주 똑같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되로 받은 다음 말로 줍니다. 영국 노동자를 아일랜드의 영국 지배자의 공모자이자 어리석은 도구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 같은 적대는 언론․설교자․희극 잡지, 즉 지배계급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인위적으로 유지될 뿐 아니라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적대야말로 조직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노동자계급이 무력한 비밀인 것입니다. 자본가들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악(害惡)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 사이의 적대는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숨겨진 기반입니다. 이 때문에 양국 노동자계급 사이의 진솔하고 진지한 협력 일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양국의 정부는 언제든지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시기에 서로 위협하거나, 필요할 때는 서로 전쟁을 벌임으로써 [각국 내부에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을 분쇄할 수 있게 됩니다. 자본의 중심지로서 그 권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은 현재 노동자 혁명을 위해 가장 중요한 국가이며, 게다가 혁명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결과적으로 국제노동자협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영국에서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혁명을 촉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일랜드를 독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내셔널의 임무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을 어디에서나 최우선의 의제로 제기하고, 어디에서나 공개적으로 아일랜드 편에 서는 것입니다. 런던 중앙평의회의 특별한 임무는, 아일랜드의 민족 해방이 추상적 정의나 인도주의적 감정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회 해방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는 점을 영국 노동자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입니다. 이상이 회람 서한의 주된 요점을 거칠게 요약한 것인데, 이는 동시에 아일랜드 정치범 사면에 관해 중앙평의회가 통과시킨 결의안의 존재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회람을 기초하고] 얼마 후에 저는 영국인들이 페니언 협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등에 대해 격렬하게 글래드스턴 등을 공격하는 익명의 기사19)를 (브뤼셀에 소재한 우리 인터내셔널 벨기에의 중앙위원회20) 기관지인) 『인터나치오날』(Internationale)지(紙)에 보냈습니다. 이 기사에서 저는 프랑스 공화주의자들(『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紙)21)는 아일랜드에 관해 악당 탈랑디에(Talandier)가 쓴 헛소리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역시 규탄했는데, 이들은 자민족 중심주의 속에서 자신들의 분노를 프랑스 제정에만 쏟기 때문입니다. 이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제 딸 예니는 윌리엄즈(J. Williams)(제 딸은 편집부에 보내는 사적인 편지에서 스스로를 예니 윌리엄즈로 불렀답니다)라는 이름으로 『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紙)에 일련의 기사를 기고했고, 그 중에서 『오도노번 로사의 편지』를 출판했습니다. 굉장한 소란이 이어졌죠. 몇 년 동안 냉소적 거부로 일관했지만, 글래드스턴은 이 일 때문에 페니언 수감자들의 처우에 관해 의회조사단을 구성할 것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니는 이제 『마르세에즈』지(紙)의 아일랜드 문제 정규 연락원이 되었습니다.22)(이것은 물론 우리 사이의 비밀입니다) 영국 정부와 언론은 아일랜드 문제가 이제 프랑스에서 의제에 오르게 되었고, 격노하고 있으며, 이 불한당들이 파리를 통해 전 대륙에서 감시받고 노출되다는 사실에 격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블린의 아일랜드 지도자, 언론인들이 우리와 접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는데, 이는 이전에 총평의회가 이뤄내지 못한 것이니, 일석이조(一石二鳥)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도 동일한 노선에 따라 작업하는 넓은 영역이 있습니다. 독일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의 동맹(물론 이 동맹에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영국 노동자와 미국 노동자의 동맹)은 지금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성과일 것입니다. 이는 인터내셔널의 이름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일랜드 문제의 사회적 중요성은 분명해져야 합니다. 다음 번에는 영국 노동자들의 입장에 관해 특별히 몇 자 적겠습니다. 안부와 우애를 전하며! 칼 마르크스. 1)MECW, Volume 43, p. 389; 처음 간행된 것은 Die Neue Zeit, Stuttgart, 1901-1902이며, 모든 텍스트가 소개된 것은 Pisma Marksa h Kugelmanu (Letters of Marx to Kugelmann), Moscow-Leningrad, 1928.본문으로 2)[역주] 루트비히 쿠겔만(Ludwig Kugelmann, 1828~1902): 독일의 의사이자 국제노동자협회의 활동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로서 1862~75년 동안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후 독일사회민주당원이 된다. 본문으로 3) [역주] 게오르그 비어스(Georg Weerth, 1822~56): 초기에는 면직물 회사에 근무하였으나 노동자운동의 대의에 공감하면서 영국으로 이주한 이후 차티스트 운동에 투신하였다. 엥겔스와 수 년 동안 교류하였으며 브뤼셀에서는 마르크스와 만나기도 하였다. 시인으로서 하이네를 동경하면서 몇몇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엥겔스는 그를 가리켜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시인”이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4)[역주] 『인민의 국가』(Der Volksstaat): 독일사회민주노동자당의 중앙 기관지. 1869년 10월 2일부터 1876년 9월 23일까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마르크스․엥겔스가 편집에 관여하였다. 본문으로 5)[역주]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 1809~98): 영국의 자유주의적 정치가. 관세개혁과 곡물법 철폐에 앞장섰으며 1868년 수상에 취임한 이후 아일랜드에 대한 온건한 종교정책을 실시했다. 이후 세 차례나 수상을 역임하면서 3차 선거법 개정을 관철시켰으나 아일랜드 자치법안은 이를 둘러싸고 당이 분열하거나(1886년 3차 내각), 상원에서 부결(1893년 4차 내각)되었다. 본문으로 6)[역주] 팔머스톤(Viscount Palmerston, 1784~865): 영국의 정치가. 1855~58년 수상이었으며 1859~65년까지 글랜드스톤 등과 함께 연합 내각을 이끌었다. 크림전쟁과 아편전쟁 등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본문으로 7) [역주] 원문은 라틴어임. “vultu instantis tyranni”본문으로 8) [역주] 1800년 잉글랜드 의회에서 통과된 통합법에 따라 아일랜드는 영국의 완전한 일부가 되었다. 본문으로 9)[역주] 원문은 라틴어임. “Non bis in idem!”본문으로 10)[역주] 제레미야 오도노번 로사(Jeremiah O'Donovan Rossa, 1831~1915): 페니언의 전신인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동지회의 창립자. 1865~71년 동안 여러 차례 페니언과 관련있다는 혐의를 받고 영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폭탄을 사용하는 일명 “다이너마이트 캠페인”을 조직하여 이름을 떨쳤다. 예니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 받기도 했다. 본문으로 11)[역주] 인신보호법: 1679년 부당한 구금에 따른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배 제정된 영국의 법률. 이에 따라 이유를 명시하지 않은 체포는 위법으로 간주하고, 반드시 인신보호영장을 받는 동시에 피구금자는 신속히 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부당한 체포나 구금이 금지되었다. 본문으로 12)[역주] 나폴레옹 3세: 프랑스의 제2공화국 대통령(재위 1850~1852)․제2제정 황제(재위 1852~1871). 나폴레옹의 조카로서 1850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 제정을 실시하지만 1870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었다가 파리코뮌으로 제정이 붕괴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본문으로 13) [역주]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올덴버그(Friedrich Albrecht zu Eulenburg, 1815~81): 프로이센의 외교관․관리. 올덴버그 사절단을 이끌고 1861년 일본 및 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62~78년 사이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본문으로 14) [역주] 원문은 불어임. “Grattez le Russe, et vous trouverez le Tartare’”본문으로 15)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Progress Publishers, 1975, pp. 220-224본문으로 16)이 언급은 총회에서 발간된 제1 인터내셔널 바젤 회의의 보고서와 관련된다. - Ed본문으로 17)마르크스는 “1869년 12월 1일”이라고 썼는데 명백한 오기(誤記)이다. - Ed.본문으로 18)Karl Marx, Le Conseil Gneral au Conseil Federal de la Suisse Romande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로망 스위스의 연방 평의회(Federal Council of Romance Switzerland)에게」] - Ed.본문으로 19)Le gouvernement anglais et les prisonniers fenians [「영국 정부와 페니언 수감자들」] 1870년 2월 27일에 간행되었다. - Ed본문으로 20)마르크스는 벨기에 연합평의회(Belgian Federal Council)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Ed.본문으로 21)[역주] 『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 프랑스의 공화주의 신문.본문으로 22) [역주] 예니는 1870년 2월 27일부터 4월 19일까지 모두 8편의 기사를 『마르세유』지에 작성하였다. 이 기사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영국 정부와 페니언 수감자들」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특히 1870년 3월 16일에 작성한 기사는 마르크스와의 공동작업이었다.본문으로
-Marx to Ludwig Kugelmann In Hanover (London, 29 November 1869) -Marx to Sigfrid Meyer and August Vogt In New York(London, April 9, 1870) [역주: 아일랜드는 중세 이래 줄곧 이웃한 잉글랜드의 침략과 지배를 받아왔다. 초기에 잉글랜드 왕은 아일랜드의 종주왕(宗主王)으로서 간접적인 형식으로 지배했지만 1688년 명예혁명으로 왕위를 빼앗긴 제임스 2세가 아일랜드에 상륙, 아일랜드인들의 지지를 발판으로 잉글랜드를 탈환하려고 시도하다 잉글랜드 왕 윌리엄 3세가 직접 이끄는 군대에게 치열한 전투 끝에 패전하고 아일랜드는 본격적으로 잉글랜드의 예속국이 되어 그 인민들은 사실상의 노예로 전락한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표현에 따르면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정복자를 위한 “나무꾼과 물긷는 사람” 이상이 될 수 없었다. 18세기 초 약 400만 명에 달하는 아일랜드 인구에게 부과되는 지대의 1/8은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 잉글랜드의 부재지주에게로 흘러들어갔다. 게다가 잉글랜드 이외로는 소․양모의 수출이 금지되었던 관계로 주력 산업은 완전히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의 독립혁명, 프랑스대혁명 등의 격변기 속에서 잉글랜드의 전제적 지배를 타도하고자 공화주의 이념을 수용하고 이는 이후 아일랜드 저항의 주된 이념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특히 프랑스대혁명을 경과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저항은 무장항쟁으로 폭발했다 애초에는 프랑스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무산되고 결국 아일랜드인 1798년 독자적으로 봉기하였다. 하지만 강력한 잉글랜드 정규군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되었고 잉글랜드 의회는 1800년 통합법(Act of Union)을 제정함으로써 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이로써 아일랜드는 영국의 하원에 100명의 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지만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계였던 아일랜드인들은 하원의원이 될 자격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잉글랜드 법에 의거하여 부재지주가 내세우는 배타적인 소유권 주장은, 대다수가 가톨릭교도인 아일랜드 소작인들이 주장하는 공동권으로서의 소작권, 즉 소작에 대한 관습적 권리의식과 충돌하면서 아일랜드에서 농업 문제를 둘러싼 계급적 갈등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잉글랜드 의회 자체 내에서도 아일랜드인들의 정치적․종교적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수 있는가를 둘러싸고, 또한 아일랜드 몫으로 배당된 100명분의 의석을 둘러싸고 토리파와 휘그파 등 부르주아 정파들 사이에 끊임없는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1850년대 이후 파머스턴과 글래드스턴 등 정계의 실세들이 주기적으로 권력을 잡았다가 실각하는 이합집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던 핵심 쟁점은 다름 아닌 아일랜드 문제였던 것이다. ‘아일랜드 문제’는 19세기 중반 절정기에 있었던 ‘대영제국’으로서도 곤경에 부닥치는 미해결의 난제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의 통합정책이 허구적일 뿐 아니라 기만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정세에서 공화주의로 무장한 페니언(Fenians)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이 등장한다. 페니언은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동지회(Irish Republican Brotherhood)로서 1850년대 비로소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전부터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지고하던 중산층의 온건파에 거리를 두면서 무장반란을 통한 완전독립이라는 강령을 전면에 걸고 일반 민중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에 이주한 아일랜드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19세기 중후반 잉글랜드 여러 도시들에서 대중 시위를 조직하였고 1866~71년 사에는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영국령 캐나다를 침공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조직의 지도자들과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아일랜드 관련 서신이 1860년대 후반부터 급증하는 것은 페니언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홉스봄에 따르면 당시 페니언의 반(反)영 투쟁은 당대 유럽의 여러 민족들 중 가장 민족주의적이었으며 어떤 점에서는 20세기의 혁명적인 민족해방운동을 선취하는 측면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 자본주의와 노동자운동을 분석하면서 아일랜드 문제가 영국 혁명에서 상당히 관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The Condition of the Working-Class in England)(1845년)에서 「대도시들」․「농업 프롤레타리아들」․「경쟁」․「아일랜드인들의 이주」 등의 장(章)에서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상태와 잉글랜드 노동자와의 관계 등을 분석한 바 있다. 이 중 특히 「경쟁」․「아일랜드인들의 이주」에서는 아일랜드 노동자와 잉글랜드 노동자 사이의 경쟁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엥겔스에 따르면 불결한 의식주, 음주로 임금을 탕진하는 습관, 잉글랜드에서도 최하층에 속하는 빈곤 등이 아일랜드 이주민들의 주된 특징이다(물론 이는 엥겔스가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사회가 아일랜드 이주민들에게 스스로 노예가 되어 술고래가 될 지위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비난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1840년대 중반에만 매년 1만 5천명이 “가축처럼” 배에 실려와 영국의 주요 공업도시인 런던(12만 명 거주)과 맨체스터(4만 명 거주), 리버풀(3만 4천 명 거주), 브리스톨(2만 4천 명 거주), 글래스고우(4만 명 거주) 등에 정착함으로써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저임금만을 받는 아일랜드 이주민들, 혹은 이들의 자녀들이 전체 노동자의 1/4~1/5을 차지함으로써 발생하는 경쟁의 메커니즘 하에서 잉글랜드 노동자들의 상태는 점차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이 하락하면서 잉글랜드 노동자들이 아일랜드인들의 불결한 의식주 생활로 수렴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엥겔스의 관심은 아일랜드의 역사와 농업문제 등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엥겔스는 1869년 9월에는 직접 아일랜드를 답사하기까지 한다(1869년 9월 27일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 마르크스는 『자본』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에서 아일랜드를 분석한다. 아일랜드는 영국을 위한 가축 사육지로서 조방적 농업의 필요성으로 인해 1846년 이후 전인구의 거의 1/3이 아사(餓死)하는 참사를 겪고 난 이후에도 자본주의하 상대적 과잉인구의 법칙에 의해 비참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반 농민의 빈곤과는 대조적으로 아일랜드 내의 농업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올리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 비밀의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더욱더 많은 경작지와 황무지가 목양지로 편입되고 목양지에서 생산되는 양모와 육류 등의 상품이 잉글랜드에서 물가의 등귀로 인해 비싸게 팔렸던 것이며, 아일랜드에서 인구와 총 경작면적의 절대적인 감소에도 불구하고 농업자본의 지배하에 목양지는 늘어났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내는 서신에 따르면 바로 이 농업자본은 영국을 지배하는 과두제의 근간인 토지귀족들의 정치․경제적 기반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독립은 단지 인도주의적 감성이 아니라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제조건이며, 그로 인해 아일랜드 노동자와의 협력은 영국 노동자운동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아일랜드 노동자와 협력하지 못하는 이상 영국 노동자들은 지배계급에 속박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마르크스는 뉴욕의 지그프리트 마이어(Sigfrid Meyer)와 아우구스트 포크트(August Vogt)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영국 노동자들의 태도가 지배계급과 다르지 않음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이 두 사람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페니언(Fenians)이라는 비밀결사조직과 관계 있는 인물들로 보인다.). 다른 자료에서도 마르크스가 아일랜드 문제에서 영국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의 단결의 중요성 뿐 아니라 그것이 영국 혁명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강조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아일랜드는 대영제국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며 “아일랜드를 잃게 되면, 대영제국은 스러지고 여지껏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끌고 있었던 영국에서의 계급간 내전은 첨예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나(1870년 3월 5일, 라파르그 부부(Paul and Laura Lafargue)에게 보낸 편지), 아일랜드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말미암은 경쟁에서 연유하는 “잉글랜드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 사이의 엄청난 적대감”이 “영국 혁명의 장애”이며 이것이 “지배계급에게 능수능란하게 악용”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양 노동자의 연합을 강조하는 모습(1871년 런던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회의에서의 연설) 등은 마르크스의 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해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일랜드에 관한 마르크스의 글은 이주노동자나 식민지 등의 문제가 이미 마르크스 당대부터 노동자운동의 중요한 쟁점이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운동이 혁명적 관점을 채택할 때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보았다. 단순한 선후관계는 아니겠지만, 그러나 노동자 내부에서 인종주의를 재생산하는 고유한 물질적 조건을 의제로 올리고, 이에 맞서기 위한 이념과 운동을 통과할 때에야 비로소 노동자운동이 혁명적 관점을 채택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이를 좀 더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데올로기 곧 대중들의 집단적 주체 형성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고유한 정치를 통과하지 않는다면 혁명적 계급 형성은 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당대에 이 문제와 마주쳤고 이에 맞서기 위해 분투했지만, 결국 대안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는 마르크스가 이 문제에 단순히 무지했다거나, 이를 억압․회피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다. 오히려 이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아무리 바깥에서 비난한들, 마르크스를 괴롭혔던 이 문제를 돌파할 수 있는 대안적 분석과 이념, 운동을 만들지 못하는 한, 국제주의를 ‘대중들의 운동’으로 만드는 것은 극히 곤란하다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당위적으로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는 이유, 그들의 단결을 위해 필요한 조건에 관해 끊임없이 자문했다. 그의 실패는 우리가 출발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지시한다.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국제주의를 말하는 자, “여기가 로두스다! 뛰어라!”] 하노버의 루트비히 쿠겔만에게 보내는 마르크스의 편지Marx To Ludwig Kugelmann In Hanover)1) 1869년 11월 29일 런던. 친애하는 쿠겔만2)에게. 5주쯤 전에 예니첸[Jennychen, 딸인 예니 마르크스의 애칭]이 자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네(사실은 두 통인데 한 통은 자네에게, 다른 한 통은 쿠겔만 부인에게 보냈으니까.). 그 아이가 G. 비어스(G. Weerth)3)의 초상화를 동봉했는데,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도 어렵고 또한 부본(副本)을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예니첸은 자네가 편지를 받았는지 여부를 가급적 빨리 알고 싶어한다네. 내가 하노버에서 엥겔스에게 보냈던 편지가 분명히 개봉됐다가 조잡하게 다시 봉해진 적이 있기 때문에, 우편 업무의 보안이 철저한지, 안전하긴 한지에 관해 의문이 들고 있어. 엥겔스는 봉투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육안으로 봐도 확실할 정도였다네. 나의 길고, 얼마간 한심하기까지 한 침묵은, 그동안 내가 과학적 연구 뿐 아니라 인터내셔널과 관련된 방대한 업무를 따라잡는 데 정신이 없었다는 사실로 변명하고자 하네. 게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노동계급(물론 농민들도 포함해서)의 상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을 보냈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열심히 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내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도 변명의 이유 중 하나이네. 지금쯤 『인민의 국가』(Volksstaat)지(紙)4)에서 아일랜드 정치범의 사면을 두고 글래드스턴5)에 관해 내가 제안한 결의안을 보았을 것이네. 내가 일전에 팔머스턴6)을 공격했던 것처럼 지금은 글래드스턴을 공격하고 있는데, 이게 여기서 관심을 끌고 있어. 이 곳에 있는 선동하길 좋아하는 망명가들은 안전한 거리를 두고 대륙의 전제적 지배자들을 즐겨 공격한다네. 그런 공격이 호소력을 가지려면 폭군의 면전에서) 벌어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일세. 하지만 내가 아일랜드 정치범들의 사면에 관해 발표한 것이나, 총평의회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 노동계급의 태도를 논의하고 이 주제에 관해 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 모두, 압제자에 대항하는 아일랜드 피압제인민들을 지지한답시고 결연하지만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것과는 다른 근거를 갖고 있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영국 노동자들이 아일랜드에 대한 지배계급의 태도와 자신들의 태도를 아주 명확하게 분리하고, 아일랜드인들과 함께 전선을 꾸릴 뿐만 아니라 1801년에 세워진 [아일랜드와의] 연합왕국[Union]8)을 해체하고 자유로운 연방적 관계로 대체하는 과정을 주도하기 전까지 여기 영국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결정적인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네. 이제 문제는 이 확신을 영국 노동계급에게 전파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이는 아일랜드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영국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에 기반한 요구로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일세. 그렇지 않으면 계속 지배계급에게 속박된 채로 남게 될 것이네. 영국 프롤레타리아들이 아일랜드에 맞서 지배계급과 공동전선을 꾸리도록 강제 받을 것이니 말이네. 영국에서 모든 노동계급 운동 자체는 아일랜드인들과의 불화로 인해 무기력해졌어. 이들이 영국 노동계급 내에서 아주 중요한 분파를 형성하고 있잖은가. 이곳에서 해방의 주요한 조건인 영국 의 지주 과두제 전복은 여전히 불가능할 것인데, 왜냐하면 이들이 아일랜드에서 굳건히 [자신들의] 전초기지를 유지하고 있는 한 그 진지를 침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일단 현안들이 아일랜드 인민 자신의 손으로 넘어가고, 그들이 자신들만의 의회와 통치자를 갖게 되자마자, 그들이 자율적이 되자마자 (대개 영국인 지주들과 같은 자들인) 토지 귀족을 타도하는 것은 이곳보다 그곳에서 훨씬 더 쉬울 것이네. 아일랜드에서는 이것이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문제이기 때문이지. 그곳에서 지주들이란 영국에서처럼 전통적인 고관이나 대표자가 아니라, 민족의 불구대천의 원수니까. 그리고 영국 내부의 사회 발전을 무력화하는 것은 현재 아일랜드와 맺고 있는 관계 뿐 아니라 대외 정책, 특히 러시아 및 미국에 관한 대외 정책이기도 하지. 그러나 영국 노동계급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회 해방 일반을 가장 크게 좌우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바로 여기가 초점을 집중시킬 지점이라네. 크롬웰 치하의 영국 공화국이 아일랜드에서 난파했던 것은 사실이네만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는 않아야 할 걸세!9) 아일랜드인들은 유죄 선고를 받은 중죄인 오도노번 로사(O'Donovan Rossa)10)를 하원의원으로 선출함으로써 영국 정부를 조롱해왔어. 정부측 신문들은 벌써부터,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Act)11)을 다시금 유예시켜 공포정치 제도를 갱신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네! 사실, 현재와 같은 영국-아일랜드 관계가 지속되는 한, 영국은 절대로 아일랜드를 다른 식으로 통치할 수 없을 게야. 가장 구역질나는 공포정치와 가장 분통터지는 부패에 의존할밖에. 프랑스에서는 아직까지 일이 잘 풀리고 있네. 한편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선동가들과 음지에 있는 목소리 높은 민주파들은 신용이 떨어지고 있네. 다른 한편으로 보나파르트12)는 자신의 목을 부러뜨릴 타협의 길로 내몰리고 있으이. (관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옵저버』(Observer) 어제 판에서는 프러시아 의회에서의 올덴버그(Eulenburg)13) 스캔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논평하더군. “나폴레옹께서는 ‘러시아인들을 한꺼풀 벗겨보면 타타르족[같은 야만인]을 발견할 것’14)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프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한꺼풀 벗겨볼 필요도 없이 러시아인들을 발견할 것이네. 그건 그렇고, 라이히(메드(Med) 박사라네)의 세례명은 에두아르(Eduard)이고, 그의 책 서문을 볼 때 고타에 살고 있는 것 같네. 백작부인과 프렌첸(Franzchen)에게도 안부를 전하네. 친구 칼 마르크스로부터. 뉴욕의 지그프리트 마이어와 아우구스트 포크트에게 보내는 마르크스의 편지15)(Marx to Sigfrid Meyer and August Vogt In New York) 1870년 4월 9일 런던. 모레 (4월 11일) 손에 잡히는 모든 인터내셔널 문서들을 당신께 보내도록 하겠습니다(오늘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거든요.). [스위스] 바젤 [보고서]16)도 더 보내겠습니다. 보내는 자료들 중에는 아일랜드 정치범 사면에 관한 11월 30일 총평의회 결의안 복사본 몇 부도 있을 겁니다. 이 결의안은 제가 발의했는데 당신도 이미 아실 겁니다. 또한 페니언 수감자 처우에 관한 아일랜드어 팜플렛도 보냅니다. 현재의 연합[왕국]의 필수적 변혁, 즉 예속된 아일랜드를 대영 제국과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방으로 변혁하는 것에 관해, 추가적 동의(動議)를 제출하려는 게 제 의도였습니다. 공개적 결의에 관한 한 이 문제에 관한 추가적인 진전은 당분간 중단되었습니다. 제가 총평의회에 부득이하게 불참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총평의회 성원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저를 대신할 만큼 아일랜드 문제를 충분히 알지 못했고, 영국 성원들에 대해 충분한 신망을 누리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 낭비는 아니었으며, 저는 여러분이 다음 사항을 특히 유의해 주었으면 합니다. 수년 동안 아일랜드 문제를 연구한 후 제가 도달한 결론은, 영국 지배계급에 대한 결정적 일격(그리고 이는 전세계 노동자운동에도 결정적일 것입니다)은 영국에서가 아니라 오직 아일랜드에서만 가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1870년 1월 1일, 총평의회17)는 제가 프랑스어(왜냐하면 영국에서 중요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독일 언론이 아니라 프랑스 언론뿐이기 때문입니다.)로 기초한 비밀 회람문18)을 발간했습니다. 이 문서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아일랜드 민족투쟁의 관계, 따라서 국제노동자협회가 아일랜드 문제에 관해 취해야 할 태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요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일랜드는 영국 토지 귀족의 보루입니다. 아일랜드에 대한 착취는 영국 토지 귀족이 누리는 물질적 부의 주된 원천 중 하나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국 토지 귀족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 힘입니다. 사실 영국 토지 귀족은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대표합니다. 그러므로 아일랜드는 영국 귀족들이 영국 자체에서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인 것입니다. 반면에 만약 영국 군대와 경찰이 내일 철수한다면, 당장 아일랜드에서 농민 혁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에서 영국 귀족이 몰락하면 그 필연적 결과는 영국에서 귀족제의 몰락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전제 조건을 제공할 것입니다. 아일랜드에서 영국 토지귀족의 해체는 영국 자체에서보다 훨씬 용이한 작업인데, 왜냐하면 아일랜드에서 토지 문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 문제의 유일무이한 형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아일랜드 민중의 압도적 다수에게 생사가 달린 생존의 문제이며, 동시에 민족 문제에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인들의 성격이 영국인들보다 훨씬 정열적이고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말입니다. 영국 부르주아지의 경우, 이들은 애초부터 영국 귀족과 이해를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아일랜드를 단순한 목양지로 만들어 영국 시장에 육류와 양모를 가능한 한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려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게다가 축출과 강제적 이민을 통해 아일랜드 인구를 적은 수로 줄임으로써, (농지로 임대된 토지에 투자한) 영국 자본이 “안전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관심을 갖습니다. 영국 부르주아지는 [예전에]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농업 지역들을 제거했을 때와 동일한 이해를, 아일랜드의 토지를 말소하는 데서도 갖습니다. 부재 지주와 여타 아일랜드 수입으로 현재 매년 런던으로 흘러 들어오는 6천~1만 파운드의 수입 역시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국 부르주아지는 현재의 아일랜드 경제에 훨씬 중요한 이해 역시 갖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차지농장의 집중화 때문에 아일랜드는 영속적으로 자신들의 잉여를 영국의 노동 시장으로 보내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임금은 하락하고 영국 노동자계급의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입지는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지금 영국의 모든 산업적․상업적 중심에는 두 개의 적대적 진영, 즉 영국 프롤레타리아와 아일랜드 프롤레타리아로 분할된 노동자계급이 있습니다. 평범한 영국 노동자들은 아일랜드 노동자가 자신들의 생활 수준을 낮추는 경쟁자라고 보면서 증오합니다. 아일랜드 노동자와의 관계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배 민족의 일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결국 아일랜드에 반하는 영국 귀족과 자본가의 도구가 됩니다. 이로써 자신들[영국 노동자]에 대한 그들[영국 귀족과 자본가]의 지배를 강화하게 되는 것이죠. 영국 노동자는 아일랜드 노동자에 맞서 종교적․사회적․민족적 편견을 고스란히 간직합니다. 아일랜드 노동자에 대한 영국 노동자의 태도는 전에 노예제 국가였던 미국에서 ‘가난한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보였던 태도와 아주 똑같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되로 받은 다음 말로 줍니다. 영국 노동자를 아일랜드의 영국 지배자의 공모자이자 어리석은 도구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 같은 적대는 언론․설교자․희극 잡지, 즉 지배계급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통해 인위적으로 유지될 뿐 아니라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적대야말로 조직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노동자계급이 무력한 비밀인 것입니다. 자본가들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악(害惡)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 사이의 적대는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숨겨진 기반입니다. 이 때문에 양국 노동자계급 사이의 진솔하고 진지한 협력 일체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양국의 정부는 언제든지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시기에 서로 위협하거나, 필요할 때는 서로 전쟁을 벌임으로써 [각국 내부에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을 분쇄할 수 있게 됩니다. 자본의 중심지로서 그 권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은 현재 노동자 혁명을 위해 가장 중요한 국가이며, 게다가 혁명을 위한 물질적 조건이 어느 정도 성숙한 단계에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결과적으로 국제노동자협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영국에서 사회혁명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혁명을 촉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일랜드를 독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내셔널의 임무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을 어디에서나 최우선의 의제로 제기하고, 어디에서나 공개적으로 아일랜드 편에 서는 것입니다. 런던 중앙평의회의 특별한 임무는, 아일랜드의 민족 해방이 추상적 정의나 인도주의적 감정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회 해방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는 점을 영국 노동자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입니다. 이상이 회람 서한의 주된 요점을 거칠게 요약한 것인데, 이는 동시에 아일랜드 정치범 사면에 관해 중앙평의회가 통과시킨 결의안의 존재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회람을 기초하고] 얼마 후에 저는 영국인들이 페니언 협회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등에 대해 격렬하게 글래드스턴 등을 공격하는 익명의 기사19)를 (브뤼셀에 소재한 우리 인터내셔널 벨기에의 중앙위원회20) 기관지인) 『인터나치오날』(Internationale)지(紙)에 보냈습니다. 이 기사에서 저는 프랑스 공화주의자들(『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紙)21)는 아일랜드에 관해 악당 탈랑디에(Talandier)가 쓴 헛소리를 출판한 바 있습니다.) 역시 규탄했는데, 이들은 자민족 중심주의 속에서 자신들의 분노를 프랑스 제정에만 쏟기 때문입니다. 이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제 딸 예니는 윌리엄즈(J. Williams)(제 딸은 편집부에 보내는 사적인 편지에서 스스로를 예니 윌리엄즈로 불렀답니다)라는 이름으로 『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紙)에 일련의 기사를 기고했고, 그 중에서 『오도노번 로사의 편지』를 출판했습니다. 굉장한 소란이 이어졌죠. 몇 년 동안 냉소적 거부로 일관했지만, 글래드스턴은 이 일 때문에 페니언 수감자들의 처우에 관해 의회조사단을 구성할 것에 찬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니는 이제 『마르세에즈』지(紙)의 아일랜드 문제 정규 연락원이 되었습니다.22)(이것은 물론 우리 사이의 비밀입니다) 영국 정부와 언론은 아일랜드 문제가 이제 프랑스에서 의제에 오르게 되었고, 격노하고 있으며, 이 불한당들이 파리를 통해 전 대륙에서 감시받고 노출되다는 사실에 격노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블린의 아일랜드 지도자, 언론인들이 우리와 접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는데, 이는 이전에 총평의회가 이뤄내지 못한 것이니, 일석이조(一石二鳥)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도 동일한 노선에 따라 작업하는 넓은 영역이 있습니다. 독일 노동자와 아일랜드 노동자의 동맹(물론 이 동맹에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영국 노동자와 미국 노동자의 동맹)은 지금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성과일 것입니다. 이는 인터내셔널의 이름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일랜드 문제의 사회적 중요성은 분명해져야 합니다. 다음 번에는 영국 노동자들의 입장에 관해 특별히 몇 자 적겠습니다. 안부와 우애를 전하며! 칼 마르크스. 1)MECW, Volume 43, p. 389; 처음 간행된 것은 Die Neue Zeit, Stuttgart, 1901-1902이며, 모든 텍스트가 소개된 것은 Pisma Marksa h Kugelmanu (Letters of Marx to Kugelmann), Moscow-Leningrad, 1928.본문으로 2)[역주] 루트비히 쿠겔만(Ludwig Kugelmann, 1828~1902): 독일의 의사이자 국제노동자협회의 활동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친구로서 1862~75년 동안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기도 했다. 이후 독일사회민주당원이 된다. 본문으로 3) [역주] 게오르그 비어스(Georg Weerth, 1822~56): 초기에는 면직물 회사에 근무하였으나 노동자운동의 대의에 공감하면서 영국으로 이주한 이후 차티스트 운동에 투신하였다. 엥겔스와 수 년 동안 교류하였으며 브뤼셀에서는 마르크스와 만나기도 하였다. 시인으로서 하이네를 동경하면서 몇몇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엥겔스는 그를 가리켜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시인”이라고 격찬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4)[역주] 『인민의 국가』(Der Volksstaat): 독일사회민주노동자당의 중앙 기관지. 1869년 10월 2일부터 1876년 9월 23일까지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마르크스․엥겔스가 편집에 관여하였다. 본문으로 5)[역주] 글래드스턴 (William Ewart Gladstone, 1809~98): 영국의 자유주의적 정치가. 관세개혁과 곡물법 철폐에 앞장섰으며 1868년 수상에 취임한 이후 아일랜드에 대한 온건한 종교정책을 실시했다. 이후 세 차례나 수상을 역임하면서 3차 선거법 개정을 관철시켰으나 아일랜드 자치법안은 이를 둘러싸고 당이 분열하거나(1886년 3차 내각), 상원에서 부결(1893년 4차 내각)되었다. 본문으로 6)[역주] 팔머스톤(Viscount Palmerston, 1784~865): 영국의 정치가. 1855~58년 수상이었으며 1859~65년까지 글랜드스톤 등과 함께 연합 내각을 이끌었다. 크림전쟁과 아편전쟁 등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본문으로 7) [역주] 원문은 라틴어임. “vultu instantis tyranni”본문으로 8) [역주] 1800년 잉글랜드 의회에서 통과된 통합법에 따라 아일랜드는 영국의 완전한 일부가 되었다. 본문으로 9)[역주] 원문은 라틴어임. “Non bis in idem!”본문으로 10)[역주] 제레미야 오도노번 로사(Jeremiah O'Donovan Rossa, 1831~1915): 페니언의 전신인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동지회의 창립자. 1865~71년 동안 여러 차례 페니언과 관련있다는 혐의를 받고 영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폭탄을 사용하는 일명 “다이너마이트 캠페인”을 조직하여 이름을 떨쳤다. 예니와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 받기도 했다. 본문으로 11)[역주] 인신보호법: 1679년 부당한 구금에 따른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배 제정된 영국의 법률. 이에 따라 이유를 명시하지 않은 체포는 위법으로 간주하고, 반드시 인신보호영장을 받는 동시에 피구금자는 신속히 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부당한 체포나 구금이 금지되었다. 본문으로 12)[역주] 나폴레옹 3세: 프랑스의 제2공화국 대통령(재위 1850~1852)․제2제정 황제(재위 1852~1871). 나폴레옹의 조카로서 1850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 제정을 실시하지만 1870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었다가 파리코뮌으로 제정이 붕괴되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본문으로 13) [역주]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올덴버그(Friedrich Albrecht zu Eulenburg, 1815~81): 프로이센의 외교관․관리. 올덴버그 사절단을 이끌고 1861년 일본 및 청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1862~78년 사이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본문으로 14) [역주] 원문은 불어임. “Grattez le Russe, et vous trouverez le Tartare’”본문으로 15)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Selected correspondence Progress Publishers, 1975, pp. 220-224본문으로 16)이 언급은 총회에서 발간된 제1 인터내셔널 바젤 회의의 보고서와 관련된다. - Ed본문으로 17)마르크스는 “1869년 12월 1일”이라고 썼는데 명백한 오기(誤記)이다. - Ed.본문으로 18)Karl Marx, Le Conseil Gneral au Conseil Federal de la Suisse Romande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로망 스위스의 연방 평의회(Federal Council of Romance Switzerland)에게」] - Ed.본문으로 19)Le gouvernement anglais et les prisonniers fenians [「영국 정부와 페니언 수감자들」] 1870년 2월 27일에 간행되었다. - Ed본문으로 20)마르크스는 벨기에 연합평의회(Belgian Federal Council)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 Ed.본문으로 21)[역주] 『마르세에즈』(Marseillaise)지: 프랑스의 공화주의 신문.본문으로 22) [역주] 예니는 1870년 2월 27일부터 4월 19일까지 모두 8편의 기사를 『마르세유』지에 작성하였다. 이 기사들은 모두 마르크스가 「영국 정부와 페니언 수감자들」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으며 특히 1870년 3월 16일에 작성한 기사는 마르크스와의 공동작업이었다.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