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2007-09-13

    사유화에 맞서 투쟁하는 아시아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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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수서비스 사유화에 관한 아시아노동자대회와 전략회의'참가보고 [%=사진1%] 배경 사유화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이미 지난 IMF 위기 직후부터 정부는 외환위기와 재정위기를 빌미로 공공부문에서 돈 될 만한 공기업을 앞뒤 가리지 않고 팔아치워 왔다. 그러나 공공부문 사유화는 소유권의 이전을 넘어, 민중이 값싸고 질 좋은 공공서비스에 접근하여 이를 누릴 권리를 제한, 파괴하는 과정이었다. 통신부문은 민간자본의 수중으로 넘어간 지 오래며, 그 결과 사람들은 높은 통신요금과 잦은 사고에 시달리고 있다. 전력부문은 사유화 시도가 발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부딪쳐 제동이 걸렸으나 최근 다시 주식상장 방식으로 사유화가 추진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철도, 상수도 등이 사유화 단계를 밟고 있다. 특히 상수도는 최근 정부가 ‘물산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긴급한 이슈로 떠올랐다. 먹는 물까지 민간자본의 손에 넘기는 것은 많은 해외 사례에서 드러난 것처럼 요금 폭등과 수질저하,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2007년 7월 8일~12일 태국에서는 ‘필수서비스(물과 전력) 사유화에 관한 아시아 노동자대회와 전략회의’가 열렸다. 아시아 전역에서 인간 생존의 기본 권리인 물과 전력의 사유화가 진행되는 것에 대해 현황을 분석하고 공동의 전략과 운동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 회의는 <주빌리사우스-아시아태평양(JS-APMDD)> 주최로 개최되었다. <주빌리사우스>는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지역에서 외채에 거부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적 연대운동체이며, 제국주의 지배와 외채, 국제금융기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등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주빌리사우스 아시아태평양>은 특히 IMF, 세계은행과 WTO 등 국제금융기구들이 강제하고 있는 공공부문 사유화에 중점을 두고 아시아 지역의 반사유화 노동자 연대를 구축함으로써 각국에서 노동자들을 투쟁의 핵심 주체로 세우고자 한다. 국내에서 전국공무원노조(이하 공무원노조)와 공공연맹은 2004년부터 을 통해 이와 연대해왔다. 특히 ‘물 사유화 관련 아시아지역 전략회의’와 토론회 등 여러 회의 및 행사에 참여하였고, 2005년 6월에는 ‘주빌리사우스-아시아태평양 회의 및 물 사유화 국제 워크샵’을 <국민행동>, 공공연맹과 공무원노조가 서울에서 직접 주관하기도 하였다.1) 이번 회의에 한국에서는 공공운수연맹, 공무원노조, <물 사유화 저지 공동행동>,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등에서 7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하였다. 2)한국 이외에도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네팔,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홍콩, 말레이시아 등에서 노조활동가들과 사회운동 활동가 80여 명이 참가하였다. 아시아 - 부족한 공공서비스, 급격한 사유화 회의에서는 우선 아시아 각국의 사유화 현황과 사례가 발표되었다. 전반적으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아시아 각국에서는 전력과 상수도 서비스 공급 자체가 부실한 상황에서 사유화가 추진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력과 상수도 보급률이 90% 이상이지만 아시아 나라들은 보급률이 채 50%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나라들에서 급격한 사유화의 추진은 대부분 천문학적인 요금인상을 초래했고, 대다수 민중들의 생활비의 많은 부분을 요금으로 지출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사유화는 여성과 아동들을 식수를 길어오는 노동으로 내몰았고, 비싼 전기요금으로 인해 기본 가전제품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결과적으로 여성의 가사노동 부담만 늘려 놓았다. 예컨대 필리핀의 경우 1997년 마닐라 상하수도가 민영화되어 1100만 인구의 일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사유화 10년 후 일부 지역에서는 수도요금이 5배 올랐고, 7배 오른 지역도 있다. 마닐라의 여성들은 밤늦게 물을 저장하기 위해(수압이 약하기도 하고 물을 천천히 받으면 요금이 줄어들기 때문에) 힘든 노동력을 투여하고 있다. 전기요금은 최저임금의 10.4%에 해당한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빈곤층이 소득의 15%를 전기요금으로 내고 있고, 현재 전기 공급이 되지 않는 가구가 43%이다. 이렇듯 공급 자체가 부족한 상황에서 진행된 급격한 사유화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 자체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윤만을 목표로 하는 초국적 물기업들은 수도관을 새로 깔거나 유지, 보수하는데 투자를 게을리 해서 애초 약속한 목표치들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사유화는 요금의 지속적인 증가를 가져왔고 빈곤층과 지역공동체가 수도와 전력서비스에 접근하기 힘들게 하였으며 수질 악화로 인한 질병문제까지 발생시켰다. 또한 수익이 나지 않는 지역에 대해서는 서비스 공급을 확대하지 않았다. 사유화 과정에서 지역사회가 삶의 터전을 잃기도 하고 환경이 파괴되기도 했다. 계약상의 내용보다 늘어나는 비용 청구 때문에 정부 부채는 오히려 증가했다. 따라서 이러한 아시아 나라들의 긴급한 과제는 사유화를 막고 공공서비스를 충분히 보급하는 것이다. 국제금융기구 - 사유화의 주범 사유화를 주도하는 것은 주로 국제금융기구들이다. 세계은행, IMF, WTO, ADB(아시아개발은행) 등이 사유화에 자금을 대거나 정책을 강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수출입신용기관도 가세하고 있다.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 등은 재정 지원, 전문성, 위험 보장 등을 미끼로 하여 사유화에 자금을 지원하고 그 돈은 결국 민간자본에 흘러들어 간다. 인도에서는 세계은행이 국가의 경제발전전략에 개입하여 구조조정이 확대되었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물 사유화가 더 늘어났다. 또한 금융자본 유치를 위해 부채-자산 전환, 주식전환 인정 등이 이루어졌다. 사유화로 인해서 요금인상, 공급부족, 약속했던 투자의 부진 등이 발생했지만 책임지지 않았다. 아시아판 세계은행인 ADB는 아시아 지역에서 개발자금 지원의 조건으로 사유화와 구조조정 정책을 강요한다. 이미 필리핀, 네팔 등지에서 ADB는 사유화에 자금을 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초국적 물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통상 ECA(Export Credit Agency)라 불리는 수출입신용기관들도 사유화의 행위자들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수출입은행이나 수출보험공사가 이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투자와 무역을 촉진한다는 미명하에 수출업자나 투자자들의 리스크를 줄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 자본이 아시아 나라들에 진출하여 사유화를 추진하고자 할 때, 이에 대해 자금을 지원하거나 위험 보장을 해주는 방식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ECA가 가장 자금이 풍부하며 연간 8천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한다. 이러한 국제금융기구들은 투자와 무역의 자유화를 주도하면서 자본의 이윤추구에 유리한 환경을 끊임없이 창출하기 위해 보고서를 내고, 자금을 지원하고 각국 정부를 압박한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한 지난 10여 년간의 사유화 추진은 각국에서 민중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도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투쟁이 주요한 투쟁 영역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2007년 10월 14~21일은 ‘사유화와 국제금융기구에 반대하는 국제 행동주간’으로, 10월 17일은 ‘사유화 반대 노동자 국제 행동의 날’로 결의되었다. 이 시기가 세계은행, IMF 등의 연차 총회가 열리는 기간이라는 것은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반대투쟁이 핵심에 놓여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필수서비스 사유화에 반대하는 아시아 민중의 투쟁 사유화가 초래하는 재앙에 맞서는 투쟁은 나라별로 다양한 수준에서 전개되고 있지만 사유화에 대한 민중들의 거부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인도에서는 전력 사유화 법안 폐기를 걸고 2006년에 전국적 파업이 진행되었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다. 전력 분할 사유화, 세계은행의 개입 반대, 요금인상 반대 투쟁 등 사유화와 관련한 많은 이슈들에 대해 활발한 투쟁이 인도에서 벌어지고 있다. 네팔에서도 필수서비스 사유화와 전력 분할 법안에 맞서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이 연대하여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방글라데시 역시 사기업의 전력산업 진출을 막는 투쟁을 하고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두 개의 전력 공기업 가운데 하나는 사유화되었는데 전력요금 인상에 대한 대중 폭동이 일어날 만큼 재국유화 요구가 높다. 9개의 정당, 좌파조직, 노동조합 등이 함께하여 사유화 반대운동을 하면서 노동자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20여 개의 물 사유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데, 지방정부가 사유화를 추진하지 않도록 조례를 제정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마닐라 상수도를 공공소유로 되돌리자는 운동과 함께 현재 사유화된 기업에서 추진되는 아웃소싱과 계약직화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들은 사유화에 대한 반대와 더불어 필수서비스를 인권으로 규정하며 민중의 권리 증진, 국제금융기구와 초국적 자본에 대한 반대를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투쟁전략에 있어서도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공동체, 사회운동 단체 등과 광범위한 동맹을 통해 효과적인 운동을 추구하며, 사유화의 파괴적인 효과를 대중들에게 알려서 여론을 형성하고 노동자와 시민의 개입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나아가 국내에서 지역적, 전국적 연대를 넘어 국제적인 수준에서 연대를 꾀하고 있다. 자연자원과 필수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 캠페인 이번 회의의 결론 격으로 논의된 것은 향후 아시아 지역에서 사유화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연대운동을 어떠한 조직적인 틀로 전개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논의를 통해 결정된 반사유화 운동 네트워크의 명칭은 <자연자원과 필수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 캠페인(Campaign for People's Rights to Natural Resources and Essential Services)>이다. 사유화 반대를 명칭에 넣지 않은 이유는 사유화 반대를 넘어 적극적으로 필수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주장하고 확대하자는 의미이다. 이 네트워크의 운영위원회는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서 각각 2명씩(물, 전력 1명씩)으로 구성하기로 하였으며 동아시아는 한국이 맡기로 하였다. 또한 연구그룹과 이주노동자 단체도 운영위원회 성원이 되기로 하였다. 물론 이러한 네트워크의 결성이 곧바로 국제적인 반사유화 연대운동의 활성화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국에서 사유화 반대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관건적이며 그 과정에서 국제연대의 필요성도 인식하게 되고 연대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운동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국제적인 시야에서 정세를 조망하고 국내 운동이 어떻게 국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일부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국제 공동행동의 날’과 같은 실천적 연대가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12월에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물 포럼’ 역시 연대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2%] 당면 과제 - 물 사유화 저지 한국 정부는 7월에 ‘물산업 육성 5개년 세부 추진계획’을 발표하였다. 지난 수년 간 추진되어 온 물 사유화 정책이 실제 계획으로 드러난 것이다. 지자체가 맡고 있는 상하수도사업을 30여개 유역권으로 묶어 광역화하고, 2012년까지 공사화, 민영화 또는 위탁관리 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를 2008년에 법제화하겠다고 한다. 이미 164개 지자체 가운데 33개가 수자원공사와 상수도 민간위탁 기본협약을 맺었고, 9개는 위탁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물산업 육성이라는 미명하에 상수도를 자본에 넘기려는 계획을 노골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물을 ‘공공재’가 아닌 ‘경제재’로, ‘공공서비스’가 아닌 ‘상업서비스’라고 규정하면서 물을 이윤논리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공공이 책임지던 국내 상수도를 자본의 새로운 이윤 창출 분야로 탈바꿈시키려는 사유화 전략이다. 정부는 상수도의 영세성, 과잉 중복투자, 농어촌의 저조한 보급률, 수질에 대한 불신, 지역별 요금 불균등, 열악한 지자체 재정 등을 이유로 들고 있으나 그것은 공공의 책임성 강화와 투자 확대, 노동자와 시민의 통제 강화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자본의 손에 넘김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해외에서 무수한 사유화 사례가 민중의 피해로 드러났듯이 사유화는 대안이 아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에 금융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본은 철저한 수익성 추구, 주주이익 극대화, 구조조정과 외주화 등을 앞세우면서 공적 서비스를 후퇴시킬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인천상수도를 초국적 물기업 ‘베올리아’에 위탁하기 위한 양해각서가 작년에 체결되었고 그에 따라 연구용역까지 진행된 것을 고려하면 초국적 자본에 상수도를 넘기는 것도 멀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면한 물 사유화 공세를 막아내는 운동을 시급하게 전개해야 한다. 이번 국제회의에서 확인하였듯이 물 사유화는 아시아 지역, 나아가 세계적인 문제이며 이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도 그러하다. <물 사유화 저지 공동행동>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반사유화 운동과 연대하면서 사유화를 반드시 막아내고 필수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쟁취하자. 1)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 784, 785번 자료 참고.본문으로 2) 회의보고서는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 1100번 자료 참고.본문으로

  • 2007-09-13

    사유화에 맞서 투쟁하는 아시아 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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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수서비스 사유화에 관한 아시아노동자대회와 전략회의'참가보고 [%=사진1%] 배경 사유화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이미 지난 IMF 위기 직후부터 정부는 외환위기와 재정위기를 빌미로 공공부문에서 돈 될 만한 공기업을 앞뒤 가리지 않고 팔아치워 왔다. 그러나 공공부문 사유화는 소유권의 이전을 넘어, 민중이 값싸고 질 좋은 공공서비스에 접근하여 이를 누릴 권리를 제한, 파괴하는 과정이었다. 통신부문은 민간자본의 수중으로 넘어간 지 오래며, 그 결과 사람들은 높은 통신요금과 잦은 사고에 시달리고 있다. 전력부문은 사유화 시도가 발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부딪쳐 제동이 걸렸으나 최근 다시 주식상장 방식으로 사유화가 추진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철도, 상수도 등이 사유화 단계를 밟고 있다. 특히 상수도는 최근 정부가 ‘물산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긴급한 이슈로 떠올랐다. 먹는 물까지 민간자본의 손에 넘기는 것은 많은 해외 사례에서 드러난 것처럼 요금 폭등과 수질저하,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2007년 7월 8일~12일 태국에서는 ‘필수서비스(물과 전력) 사유화에 관한 아시아 노동자대회와 전략회의’가 열렸다. 아시아 전역에서 인간 생존의 기본 권리인 물과 전력의 사유화가 진행되는 것에 대해 현황을 분석하고 공동의 전략과 운동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였다. 이 회의는 <주빌리사우스-아시아태평양(JS-APMDD)> 주최로 개최되었다. <주빌리사우스>는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지역에서 외채에 거부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적 연대운동체이며, 제국주의 지배와 외채, 국제금융기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등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주빌리사우스 아시아태평양>은 특히 IMF, 세계은행과 WTO 등 국제금융기구들이 강제하고 있는 공공부문 사유화에 중점을 두고 아시아 지역의 반사유화 노동자 연대를 구축함으로써 각국에서 노동자들을 투쟁의 핵심 주체로 세우고자 한다. 국내에서 전국공무원노조(이하 공무원노조)와 공공연맹은 2004년부터 을 통해 이와 연대해왔다. 특히 ‘물 사유화 관련 아시아지역 전략회의’와 토론회 등 여러 회의 및 행사에 참여하였고, 2005년 6월에는 ‘주빌리사우스-아시아태평양 회의 및 물 사유화 국제 워크샵’을 <국민행동>, 공공연맹과 공무원노조가 서울에서 직접 주관하기도 하였다.1) 이번 회의에 한국에서는 공공운수연맹, 공무원노조, <물 사유화 저지 공동행동>,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등에서 7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하였다. 2)한국 이외에도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네팔,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홍콩, 말레이시아 등에서 노조활동가들과 사회운동 활동가 80여 명이 참가하였다. 아시아 - 부족한 공공서비스, 급격한 사유화 회의에서는 우선 아시아 각국의 사유화 현황과 사례가 발표되었다. 전반적으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아시아 각국에서는 전력과 상수도 서비스 공급 자체가 부실한 상황에서 사유화가 추진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전력과 상수도 보급률이 90% 이상이지만 아시아 나라들은 보급률이 채 50%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나라들에서 급격한 사유화의 추진은 대부분 천문학적인 요금인상을 초래했고, 대다수 민중들의 생활비의 많은 부분을 요금으로 지출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사유화는 여성과 아동들을 식수를 길어오는 노동으로 내몰았고, 비싼 전기요금으로 인해 기본 가전제품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결과적으로 여성의 가사노동 부담만 늘려 놓았다. 예컨대 필리핀의 경우 1997년 마닐라 상하수도가 민영화되어 1100만 인구의 일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사유화 10년 후 일부 지역에서는 수도요금이 5배 올랐고, 7배 오른 지역도 있다. 마닐라의 여성들은 밤늦게 물을 저장하기 위해(수압이 약하기도 하고 물을 천천히 받으면 요금이 줄어들기 때문에) 힘든 노동력을 투여하고 있다. 전기요금은 최저임금의 10.4%에 해당한다고 한다. 인도에서는 빈곤층이 소득의 15%를 전기요금으로 내고 있고, 현재 전기 공급이 되지 않는 가구가 43%이다. 이렇듯 공급 자체가 부족한 상황에서 진행된 급격한 사유화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 자체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윤만을 목표로 하는 초국적 물기업들은 수도관을 새로 깔거나 유지, 보수하는데 투자를 게을리 해서 애초 약속한 목표치들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사유화는 요금의 지속적인 증가를 가져왔고 빈곤층과 지역공동체가 수도와 전력서비스에 접근하기 힘들게 하였으며 수질 악화로 인한 질병문제까지 발생시켰다. 또한 수익이 나지 않는 지역에 대해서는 서비스 공급을 확대하지 않았다. 사유화 과정에서 지역사회가 삶의 터전을 잃기도 하고 환경이 파괴되기도 했다. 계약상의 내용보다 늘어나는 비용 청구 때문에 정부 부채는 오히려 증가했다. 따라서 이러한 아시아 나라들의 긴급한 과제는 사유화를 막고 공공서비스를 충분히 보급하는 것이다. 국제금융기구 - 사유화의 주범 사유화를 주도하는 것은 주로 국제금융기구들이다. 세계은행, IMF, WTO, ADB(아시아개발은행) 등이 사유화에 자금을 대거나 정책을 강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수출입신용기관도 가세하고 있다. 세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 등은 재정 지원, 전문성, 위험 보장 등을 미끼로 하여 사유화에 자금을 지원하고 그 돈은 결국 민간자본에 흘러들어 간다. 인도에서는 세계은행이 국가의 경제발전전략에 개입하여 구조조정이 확대되었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물 사유화가 더 늘어났다. 또한 금융자본 유치를 위해 부채-자산 전환, 주식전환 인정 등이 이루어졌다. 사유화로 인해서 요금인상, 공급부족, 약속했던 투자의 부진 등이 발생했지만 책임지지 않았다. 아시아판 세계은행인 ADB는 아시아 지역에서 개발자금 지원의 조건으로 사유화와 구조조정 정책을 강요한다. 이미 필리핀, 네팔 등지에서 ADB는 사유화에 자금을 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초국적 물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통상 ECA(Export Credit Agency)라 불리는 수출입신용기관들도 사유화의 행위자들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수출입은행이나 수출보험공사가 이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투자와 무역을 촉진한다는 미명하에 수출업자나 투자자들의 리스크를 줄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 자본이 아시아 나라들에 진출하여 사유화를 추진하고자 할 때, 이에 대해 자금을 지원하거나 위험 보장을 해주는 방식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ECA가 가장 자금이 풍부하며 연간 8천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한다. 이러한 국제금융기구들은 투자와 무역의 자유화를 주도하면서 자본의 이윤추구에 유리한 환경을 끊임없이 창출하기 위해 보고서를 내고, 자금을 지원하고 각국 정부를 압박한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한 지난 10여 년간의 사유화 추진은 각국에서 민중의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이번 회의에서도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투쟁이 주요한 투쟁 영역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2007년 10월 14~21일은 ‘사유화와 국제금융기구에 반대하는 국제 행동주간’으로, 10월 17일은 ‘사유화 반대 노동자 국제 행동의 날’로 결의되었다. 이 시기가 세계은행, IMF 등의 연차 총회가 열리는 기간이라는 것은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반대투쟁이 핵심에 놓여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필수서비스 사유화에 반대하는 아시아 민중의 투쟁 사유화가 초래하는 재앙에 맞서는 투쟁은 나라별로 다양한 수준에서 전개되고 있지만 사유화에 대한 민중들의 거부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인도에서는 전력 사유화 법안 폐기를 걸고 2006년에 전국적 파업이 진행되었고 지속적인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다. 전력 분할 사유화, 세계은행의 개입 반대, 요금인상 반대 투쟁 등 사유화와 관련한 많은 이슈들에 대해 활발한 투쟁이 인도에서 벌어지고 있다. 네팔에서도 필수서비스 사유화와 전력 분할 법안에 맞서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이 연대하여 운동을 벌이고 있다. 방글라데시 역시 사기업의 전력산업 진출을 막는 투쟁을 하고 있다. 파키스탄에서는 두 개의 전력 공기업 가운데 하나는 사유화되었는데 전력요금 인상에 대한 대중 폭동이 일어날 만큼 재국유화 요구가 높다. 9개의 정당, 좌파조직, 노동조합 등이 함께하여 사유화 반대운동을 하면서 노동자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20여 개의 물 사유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데, 지방정부가 사유화를 추진하지 않도록 조례를 제정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마닐라 상수도를 공공소유로 되돌리자는 운동과 함께 현재 사유화된 기업에서 추진되는 아웃소싱과 계약직화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들은 사유화에 대한 반대와 더불어 필수서비스를 인권으로 규정하며 민중의 권리 증진, 국제금융기구와 초국적 자본에 대한 반대를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투쟁전략에 있어서도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공동체, 사회운동 단체 등과 광범위한 동맹을 통해 효과적인 운동을 추구하며, 사유화의 파괴적인 효과를 대중들에게 알려서 여론을 형성하고 노동자와 시민의 개입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나아가 국내에서 지역적, 전국적 연대를 넘어 국제적인 수준에서 연대를 꾀하고 있다. 자연자원과 필수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 캠페인 이번 회의의 결론 격으로 논의된 것은 향후 아시아 지역에서 사유화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연대운동을 어떠한 조직적인 틀로 전개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논의를 통해 결정된 반사유화 운동 네트워크의 명칭은 <자연자원과 필수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 캠페인(Campaign for People's Rights to Natural Resources and Essential Services)>이다. 사유화 반대를 명칭에 넣지 않은 이유는 사유화 반대를 넘어 적극적으로 필수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주장하고 확대하자는 의미이다. 이 네트워크의 운영위원회는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서 각각 2명씩(물, 전력 1명씩)으로 구성하기로 하였으며 동아시아는 한국이 맡기로 하였다. 또한 연구그룹과 이주노동자 단체도 운영위원회 성원이 되기로 하였다. 물론 이러한 네트워크의 결성이 곧바로 국제적인 반사유화 연대운동의 활성화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국에서 사유화 반대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관건적이며 그 과정에서 국제연대의 필요성도 인식하게 되고 연대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운동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국제적인 시야에서 정세를 조망하고 국내 운동이 어떻게 국제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일부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국제 공동행동의 날’과 같은 실천적 연대가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12월에 일본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물 포럼’ 역시 연대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2%] 당면 과제 - 물 사유화 저지 한국 정부는 7월에 ‘물산업 육성 5개년 세부 추진계획’을 발표하였다. 지난 수년 간 추진되어 온 물 사유화 정책이 실제 계획으로 드러난 것이다. 지자체가 맡고 있는 상하수도사업을 30여개 유역권으로 묶어 광역화하고, 2012년까지 공사화, 민영화 또는 위탁관리 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를 2008년에 법제화하겠다고 한다. 이미 164개 지자체 가운데 33개가 수자원공사와 상수도 민간위탁 기본협약을 맺었고, 9개는 위탁되어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물산업 육성이라는 미명하에 상수도를 자본에 넘기려는 계획을 노골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물을 ‘공공재’가 아닌 ‘경제재’로, ‘공공서비스’가 아닌 ‘상업서비스’라고 규정하면서 물을 이윤논리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공공이 책임지던 국내 상수도를 자본의 새로운 이윤 창출 분야로 탈바꿈시키려는 사유화 전략이다. 정부는 상수도의 영세성, 과잉 중복투자, 농어촌의 저조한 보급률, 수질에 대한 불신, 지역별 요금 불균등, 열악한 지자체 재정 등을 이유로 들고 있으나 그것은 공공의 책임성 강화와 투자 확대, 노동자와 시민의 통제 강화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자본의 손에 넘김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해외에서 무수한 사유화 사례가 민중의 피해로 드러났듯이 사유화는 대안이 아니다. 특히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에 금융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본은 철저한 수익성 추구, 주주이익 극대화, 구조조정과 외주화 등을 앞세우면서 공적 서비스를 후퇴시킬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인천상수도를 초국적 물기업 ‘베올리아’에 위탁하기 위한 양해각서가 작년에 체결되었고 그에 따라 연구용역까지 진행된 것을 고려하면 초국적 자본에 상수도를 넘기는 것도 멀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면한 물 사유화 공세를 막아내는 운동을 시급하게 전개해야 한다. 이번 국제회의에서 확인하였듯이 물 사유화는 아시아 지역, 나아가 세계적인 문제이며 이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도 그러하다. <물 사유화 저지 공동행동>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반사유화 운동과 연대하면서 사유화를 반드시 막아내고 필수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쟁취하자. 1)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 784, 785번 자료 참고.본문으로 2) 회의보고서는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 1100번 자료 참고.본문으로

  • 2007-09-13

    남북정상회담과 남북 경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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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통일에서 경제통합으로? 햇볕정책을 주창한 김대중 정부는 '통일' 담론을 '경제통합' 담론으로 변형했다. 김대중 정부는 평화공존과 경제통합을 '사실상의 통일'로 규정하고 장기적인 경제통합 시나리오를 개발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남북 무역자유화로서, 북한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가공무역형 수출기지)로 전환하여 남한 경제의 하위 파트너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정부는 한ㆍ미 역할 분담론과 정경분리 정책을 제시했다. 즉 군사안보 대응은 미국이 주도하고 남한은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를 주도하며, 정치정세의 변화와 관계없이 남한 기업의 대북한 교역 및 투자를 장려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구상은 남측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질서의 확장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평화공존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외피를 통하여 '2국가 1체제'와 같이 사실상 (흡수)통일의 효과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방안이 북한의 붕괴에 따른 단시간 내의 흡수통일이 수반하는 '불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비용을 절약한다며 보수 층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남한 정부가 주장하는 국가연합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노무현 정부의 전략은 본질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확장판이다. 한반도 핵 위기와 동북아시아 평화와 같은 의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정책적 의지와 6자 회담의 틀이 규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이 독자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남한 정부가 어느 정도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경제협력과 대북 지원이다. 이러한 조건은 남북 경제 공동체 건설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8ㆍ15 경축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번 경축사에는 중대한 강조점의 변화가 있다. 노무현 축사는 경제협력이 "남쪽에게는 투자의 기회, 북쪽에는 경제회복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즉 더 이상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남한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자본주의 비즈니스의 논리를 이해하고, 이에 걸맞은 파트너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북경협 20년 남북교역이 시작된 첫 번째 계기는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이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ㆍ7 선언)이었다.1) 선언은 6개항의 실천 방향을 제시했는데, 남북교역에 관해서는 "남북 간 교역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 간 교역을 민족내부교역으로 간주한다."(3항), "남북 모든 동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비군사적 물자에 대해 우리 우방들이 북한과 교역을 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4항)고 명시했다.2) 같은 해 10월 <남북물자교류에 대한 기본 지침서>가 발표되면서, 남북 간의 '시범적' 성격의 교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90년 8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이 제정되면서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물자교류와 위탁가공교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남북교역 규모는 부침이 있었으나 1991년 1억 달러 수준에서 1999년 3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후 정부 주도의 남북경협이 본격화되었다. 3대 경협사업이라고 불리는 철도ㆍ도로 연결 사업, 개성공단 사업, 금강산 관광 사업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식량, 비료를 비롯한 대북 지원이 본격 추진되었다. 현재 남북경협 사업은 대체로 상업성 거래와 비상업성 거래로 분류된다. 상업성 거래는 교역(일반교역, 위탁가공교역)과 좁은 의미의 경제협력사업(개성공단, 금강산, 기타 민간)으로 나뉘고, 비상업성 거래는 대북 지원(민간, 정부)과 사회문화협력 등으로 나뉜다. 이러한 분류법에 비추어 볼 때, 지난 10년 간 남북경협의 전체 규모는 96년 2.4억 달러에서 2006년 13.5억 달러로 5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상업성 거래(교역+경제협력사업)는 2.5억 달러에서 9.3억 달러로 3.7배 증가한 반면, 대북 지원은 0.16억 달러에서 4.2억 달러로 26배나 증가했다. 현재 남북경협은 북한 대외무역의 30% 이상을 점하고 있으며, 남북경협을 제외한다면 북한이 경제계획을 수립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남한이 북한에 지원하는 연간 50톤 규모의 쌀은 북한의 쌀 생산량의 25%에 이르며, 북한의 외부 식량 도입량(약 103만 톤)의 49%에 달한다. 또한 연간 20~30만 톤 규모의 비료 지원이 북한의 농업 증산에 미치는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반면 남한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10억 달러 수준의 상업성 거래는 남한의 수출액 규모가 3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북경협을 주도하는 세력은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은 적지만, 남한 경제의 현실적, 잠재적 위협이 되는 '북한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남한 경제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의 대북 경협사업이 임가공 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져서 남북 분업구조 창출 효과가 아직은 미약하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한 경협 사업이 실질적인 분업구조를 형성하고 남북 경제통합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남한은 북한의 제조업 부문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개성공단 사업과 2006년 북한과 체결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방안을 주목하고 있다. 남한의 대북 경협 전략 1) 개성공단 개성공단은 2004년 12월 255명 북 측 노동자로 시작했으나 2007년 5월 현재 32개 사 1만 5천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다. 개성공단의 생산액과 수출액도 꾸준히 증가하여 2007년 1/4분기 생산액이 3,560만 달러에 이르며(1년 사이에 2.8배 증가), 수출액이 838만 달러에 이른다. 현재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결과를 두고, 개성공단 제품이 특례원산지 규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3)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사업의 확대가 북한에게 '비즈니스'의 현실을 실감케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고, 실제로 북한 내에서 개성공단을 정점으로 분업관계를 확장시켜 나갈 수도 있으리라 믿고 있다. 2)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또한 2006년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합의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 따르면, 남측은 8,000만 달러 상당의 경공업 원자재를 북한에 제공하고 북한은 그 중 3%를 아연과 마그네시아크링커로 상환하며, 나머지는 연 이자율 1%, 5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그런데 현재까지는 개발협력 방안에 대해 남과 북이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듯하다. 북한은 경공업 원부자재를 남한으로부터 차관 형식으로 구매한 것이므로, 품목이나 사용방식은 북한이 결정할 사항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북한이 현재 주로 요구하는 품목은 섬유, 신발, 비누 등이다). 반면 남한은 제공되는 원부자재의 효율적인 활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남한이 고려하고 있는 것은 개발협력 방안을 확장하여 북한의 경공업 분야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북한의 수출산업화 지원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① 원부자재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서 남측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유휴설비를 제공하거나 소규모 신규투자를 통해 설비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임가공 사업을 확대한다. ② 특히 섬유, 의류산업의 기반을 확충하여 수출전략산업으로 육성한다. 이를 위해 에너지, 노동력 공급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평양ㆍ남포 지역에 집약적인 생산지대를 창설한다. ③ 사업 초기부터 가능한 한 남북한 합작ㆍ합영을 실행하고, 북한 내 다른 기업과의 생산적 연계를 모색하여, 남한의 기술과 경영기법 등을 실제로 전파한다. 또한 인력훈련부터 해외마케팅 지원까지 종합적인 지원책을 마련한다. 현재 일각에서는 남북 간의 도로ㆍ철도 연결을 통해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자거나,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석유 포함?)을 개발하여 한반도 번영을 꾀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추진되는 사업은 이와 거리가 멀다. 현재 북한의 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 전력 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지만, 국제적인 협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일단은 남한이 보기에 '비즈니스'로서 성공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교통망, 전력망 등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지하자원 개발이 경제성이 있으려면, 해당 지역의 전력, 철도, 항만 등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재 조건에서는 상업적 타당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일단은 북한의 임가공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지원에 나서고 있다. 3)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 최근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시한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CEPA) 역시 이러한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면 대북 반출품 제약, 수출시장 제약이 크게 완화되어서 남북경협이 활성화될 공산이 높은데, 이럴 경우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에 대해 WTO 회원국의 제소가 빈발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방안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CEPA가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는 1국 내 2개 독립관세구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서, 중국 내륙과 홍콩의 CEPA 사례를 모델로 삼고 있다.4) 삼성경제연구소는 CEPA를 통해 남북경제통합의 첫 번째 단계로 진입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장기적인 시나리오는 ‘자유로운 물자이동(자유무역단계) → 대외무역정책 및 대내경제정책의 상호조율(제도통합단계) → 화폐단일화(화폐통합단계) → 인적자원의 자유로운 이동(인적통합단계)’이다. 특히 CEPA 잠정협정 10년 동안 북한경제구조를 재편하여 북한을 수출지향형 경제구조로 전환하는 게 핵심이라고 제시한다. 4) 대북 경제지원 또한 대북 경제지원의 성격도 앞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 식량난 이후 대북 지원은 주로 인도적 지원 또는 긴급 지원(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도적 지원만으로는 빈곤에서 탈피할 수 없고, 오히려 원조 의존적 체질을 정착시킬 수 있으므로, 이를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개발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5) 그런데 긴급지원의 경우는 지원 물품이 취약층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하는 모니터링이 이뤄진다면 (북한은 이러한 모니터링 활동에도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개발지원의 절차와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다. IMF와 세계은행 등이 요구하는 이행조건은 해당국이 특정한 정책과 제도의 채택을 강제하는 '정책 조건'과 개발사업의 추진절차와 방식을 규정하는 '프로세스 조건'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개발지원이 중단되기도 한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개발 지원이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느냐의 문제는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향한 정책적 의지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결국 대북 개발지원이 시작된다면, 이는 북한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북한의 체제 전환을 위한 세련된 대북 정책으로 작동할 것이다. 북한의 경제의 해체와 딜레마 북한은 이미 1980년대 중반 이후 개혁ㆍ개방을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84년에는 '8ㆍ3 인민소비품 창조운동'을 개시하여 각 기업과 가정 별로 계획경제 영역 바깥에서 부업생산을 장려했다 (1989년에 장려 조치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또한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하여 주로 조총련계 기업들을 중심으로 외자를 유치했다(그러나 이 당시의 사업은 대체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1년에는 라진ㆍ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설치했고, 1992년 4월 개정 헌법에서는 외국인의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기업 합영과 합작을 장려한다는 구절을 삽입했고, 곧 신무역체계도 도입하였다. 그러나 3차 7개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북한은 1993년부터 향후 2~3년 간을 '사회주의 건설의 완충기'로 설정하고, '무역, 농업, 경공업 제일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개혁 정책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계획경제 시스템이 자생적으로 퇴화, 해체하는 경향이 극심하게 나타났다. 북한은 1990-98년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고, 1995년부터 북한의 국가예산이 그 이전에 비해 1/2로 감소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96년 1월 '고난의 행군 정신'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과거 북한이 제시한 공식통계에 비추어 볼 때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붕괴 사태가 발생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성장회계'는 극히 과장된 것이고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라는 게 최근의 분석 결과다. 공식통계에 따른 분석은 북한이 성장률이 하락하는 '데드-크로스'를 경험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며, 최근에는 이미 1960년 초반 이를 겪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6) 따라서 북한경제의 위기는 갑작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누적된 효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북한의 계획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북한의 중앙, 도, 지방이 관리하는 기업소들이 차례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현재에도 공장가동률이 대략 20~30% 정도로 추정된다.7) 이에 따라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합법, 반합법, 불법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원시적인 형태의 시장 경제적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계획경제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북한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공산품은 대다수가 중국산이고, 이른바 '보따리 장사꾼'이 기관이나 회사로부터 상품을 인수하여 전국의 매대로 유통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품유통이 경제회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상품유통을 통해 약간의 부를 축적한 자들이 공장을 인수, 운영하여 자본축적을 통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일(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로 북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대규모 수해 사태는 북한의 경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계기다. 현재 북한은 전 국토가 민둥산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은 2/3이 산이며, 산림황폐화는 수자원 관리의 위기와 수해로 직결된다. 그렇지만 북한은 경제 정체와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5대 자연개조 사업의 하나로서 1976년부터 가능한 모든 산을 옥수수 밭으로 개간하기 위한 '다락밭' 조성 사업을 펼쳤다. 또한 취사와 난방을 위한 산림자원 채취가 급증하고 불법 화전인 뙈기 농사가 성행했다. 외화벌이를 위한 원목수출도 급증하여 북한의 원목수출은 1990년 14,000㎥에서, 1997년 410,000㎥으로 수십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토사유실과 침적에 따른 하수면 상승을 동반했고, 결국 반복적인 홍수 피해를 유발했다. 이러한 대혼란의 와중인 2002년에 북한은 '7ㆍ1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발표했다 (기업자율권 확대, 독립채산제 강화, 가격ㆍ임금 체계의 현실화). 2003년 3월에는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확대하여 합법적으로 취득 가능한 품목을 식량, 소비재 공산품으로 확대했다. 이러한 북한의 개혁 조치는 자생적인 시장지향적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의 공식적인 목표는 비공식 부문을 축소하고 공식 부문을 정상화하여 경제적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병존이 불가피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장경제 방식의 활동을 적절히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북한 당국도 7ㆍ1 조치를 발표할 때 '실리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면서 "이제는 국가가 생활을 다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일한 만큼 버는 것이다.", "낡은 경험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업방법을 대담하게 개선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7ㆍ1 경제개선 조치가 발표된 후에도 공장가동률이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의류, 신발, 비누 등 최소한의 소비재 경공업에 필요한 원자재마저 남한의 지원을 받아야 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또한 농업 부문은 금번 수해로 추가적인 식량 지원이 필요한 것처럼, 잦은 수해와 농업기반의 유실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개혁이 반드시 경제성장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1968년 헝가리의 '신경제 메커니즘'이나 1985~87년 이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현재 북한이 추진한 개혁조치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개혁조치를 구사했지만 경제회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로 인해 오히려 기존 메커니즘과 새로운 메커니즘의 충돌이 발생하거나, 소득격차 확대와 인플레이션 심화로 인한 대중소요가 나타나기도 했다 ('개혁 후 붕괴 시나리오'). 바로 여기에 북한의 딜레마가 있다. 북한의 대외의존과 경제개혁의 상관성 남북경협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진전이 매우 더딘 편이다. 그러나 경제협력 사업은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남한의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의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자본주의적 비즈니스 논리를 이해하고, 일방적인 지원을 바라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남한의 경제력 규모와 국제적 관심도를 고려할 때 북한을 좀 더 폭넓은 개혁, 개방으로 유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남한의 다양한 기관에서는 중장기적으로 북한이 국제경제기구(WTO, IMF 등)에 가입해야 하며, 국제경제 규범과 정책에 맞추어 내부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들이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이렇다. '북한은 정치적 안정과 인민의 경제적 피폐 상황을 맞바꾼 현재의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불안정성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개혁ㆍ개방으로 북한 경제를 되살리고 인민의 생활상을 개선할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국제통화기금(IMF)과 동유럽 경제의 관계를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친 1980년대 초반부터 IMF의 활동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 말 본격적인 경제개혁을 시작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는 IMF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8) 당시 IMF의 압력 하에 추진된 개혁은 ① 가격자유화, 임금자유화, 무역자유화, 기업경영 자율화 ② 거시경제적 안정화 ③ 국가기업의 사유화 ④ 시장경제 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기구의 확립 등이었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이 직접 체험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저개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도출된 1989년의 워싱턴 컨센서스와도 동일하다. 세계경제개혁을 주도하는 자들은 저개발 국가든, 기존 사회주의 국가든, 아니면 선진국이든 간에 각 국에게 적합한 특수한 경제정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단 하나의 경제정책(신자유주의!)이 있다는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이 경제적 생산의 감소,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증가, 계층 간 경제적 격차의 확대라는 파괴적인 효과를 낳은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9) 워싱턴 컨센서스와 IMF 경제개혁의 입안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효과는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한 일시적 혼란일 뿐이고, 이러한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면 건전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주장이 사실이냐는 문제는 세계의 민중운동이 세계적 불평등성의 증대와 빈곤의 심화를 고발하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명백하다. 현재 남북 경제협력 사업은 1단계로 북한을 남한 경제의 '후배지'로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북한경제의 통합 과정을 통해 세계경제체제로의 편입을 유도하겠다는 장기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남한의 여러 기관들은 이러한 전망이 북한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북한이 점점 더 대외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바뀌고 있고, 남한과 국제경제기구의 지원 없이 버틸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경제의 해체와 퇴화냐, 신자유주의 개혁이냐는 질문은 서로 다른 모습의 재앙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1)1988년은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장에서 김중기 후보가 6ㆍ10남북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하고, 4월 4일 김일성 대학 학생위원회가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내오면서 남북 청년학생 교류가 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하고, 통일운동이 급격히 확산되던 때였다.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이러한 저변의 흐름에 대한 일종의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단순히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고, 1970년 대 이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를 반영했다. 임필수,「미완의 교차승인 10년, 미완의 논쟁 10년」, 『사회진보연대』, 2000년 8월호. 본문으로 2) 나머지 4개항은 다음과 같다. ① 정치인ㆍ경제인ㆍ언론인ㆍ문화예술인ㆍ체육인ㆍ학자 및 학생 등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하며, 해외동포들이 자유로이 남북을 왕래하도록 문호를 개방한다. ② 남북적십자회담이 타결되기 이전이라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이산가족들간에 생사ㆍ 주소 확인, 서신왕래, 상호방문 등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주선ㆍ지원한다. ⑤ 남북 간의 소모적인 경쟁ㆍ대결 외교를 지양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에 발전적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하며, 또한 남북대표가 국제무대에서 자유롭게 만나 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희망한다. ⑥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ㆍ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한국도 소련ㆍ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는 것 등이다.본문으로 3)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초기부터 개성공단 제품의 특례원산지 문제를 '역외가공지역'(outward processing zone) 인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양국의 최종 타결 내용을 요약하면, 양국 대표로 구성되는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에서 수립한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북한 내 특정 지역이 역외가공지역으로 지정되면, 그 지역 내에서 생산된 제품은 한국 산으로 표기되며 한국 산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된다. 여기서 일정한 기준이란 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진전', ② 역외가공지역이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 ③ 역외가공지역이 일반적인 환경기준, 노동기준, 임금 관행, 영업과 경영관행에 부합하는지 여부 등이다. 위원회는 한ㆍ미 FTA 협정이 발효된 후 1주년 기념일에 회합하여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 정부가 협상 결과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① 비핵화의 '달성'이 아니라 '진전'이라고 표현되었다는 점, ② 일반적인 환경, 노동기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할 때 '현지[개성] 경제와 그 밖의 다른 곳[북한 내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상황과 관련 국제규범을 적절하게 참고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ILO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북한의 특수한 조건을 고려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6자 회담을 통해 한반도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개성공단 지역이 이미 다른 북한 지역에 비해 노동조건이 최상이고 앞으로도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본문으로 4) 삼성경제연구소는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남북관계 역시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 특수 관계'(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이므로 국가 간 협정(agreement)이 아니라 약정(arrangement) 형식으로 체결이 가능하며, 이는 '교류협력에 관한 부속합의서'(2002년)와 '4대 경협합의서' 등을 대폭 보완하고, 각종 경제협력 합의서를 통합함으로써 실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품교역에 대해서는 무관세거래 원칙을 재천명하고, 남북 간 상품교역에 관해 원칙적으로 제한을 폐지하며, 국제전략물자통제체제 상의 대북 제재의 완화를 선도한다. ② 서비스교역에 관해서는 북한이 긴급히 필요로 하는 에너지, 물류, 의류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서비스 시장을 개방한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건설 사업에 대해 우선 혜택을 부여한다. ③ 무역/투자 편리화에 관해서는 기존의 4대 경협합의서와 원산지규정합의서를 부속 문서로 채택한다. 본문으로 5) 통상 긴급 지원은 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지원을 뜻하나, 개발 지원은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지원을 뜻한다. 또한 개발지원에는 무상 지원뿐만 아니라 장기저리차관과 같은 대출도 포함된다 (물론 장기저리가 아니더라도 차관을 구하기 힘든 국가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지원의 성격을 지닐 때가 있다). 또한 개발지원을 제공하는 주체에는 특정 정부(양자간 지원)나 국제기구(다자간 지원)뿐만 아니라 NGO, 민간기업도 포함된다. 현재 국제 공적개발지원(ODA)의 추세와 부문별 비중을 보면 사회적 인프라와 행정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의 비중이 경제적 인프라와 비슷하거나 더 높다. 사회 분야에는 교육, 보건의료, 인구, 수자원 공급, 위생 등이 포함되며, 행정 분야는 행적 시스템에 대한 지원을 뜻한다. 이는 아무리 좋은 경제인프라와 생산시설이 갖춰지더라도 '인적 자원'의 상태가 나쁘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이며, 행정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면 투자가 낭비로 전환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한편 경제적 인프라에는 교통, 통신, 에너지 등이다. 이외에도 생산 분야 즉 농업, 광업, 제조업에 대한 지원도 이뤄진다. (생산 분야에 대한 개발지원은 농업 부문 투자를 중시하는데, 이는 개발지원 대상국이 대체로 농업국가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pp. 27~29, 공감, 2002. 대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북한의 주체사상/개인숭배에 대해서는 경악을 표시했지만 북한의 경제건설 성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안드레아스 크라체크 외,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본 북한사회』, 중원문화, 1990). 그러나 이는 북한 경제에 대한 부족한 정보와 단편적인 경험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는 분명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본문으로 7)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6년 북한의 철강, 시멘트, 비료 부문의 공장 가동률은 각각 18.3%, 46.1%, 11.8%로 추정된다. (차문석, 홍빈, 『현 시기 북한의 경제운영 실태에 관한 연구』, 진보정치연구소, 2007). 중요한 군수 공장이 가동되고 있으나, 특정 시간대에 전력과 에너지를 공급하여 생산이 이뤄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월 ○일~○일까지 전력을 공급하고 그 시일에 맞춰서 생산을 감행하는 방식). 본문으로 8) 북한은 1971년 서방 각 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도입하고 대 서방 무역 확대를 추진했지만, 1977년 이후 외채 상환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대 서방 경제교류를 중단했다. 그 결과 1978년 2차 7개년 계획에서는 '주체 경제', '자력갱생 원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합영법 제정은 대외 경제관계 없이 생산성 증가나 국민경제 향상이 어렵다는 북한의 인식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9) 사회주의 개혁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유고 내전일 것이다. 미셀 초스도프스키의 「유고연방의 해체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신식민지화」(『빈곤의 세계화』, 당대, 1998)는 유고의 경제개혁에 대한 IMF의 개입이 어떻게 유고 내전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상세히 추적한다. 1990년 1월, IMF의 잠정조정안(SBA)과 세계은행의 구조조정차관(SALⅡ) 아래에서 유고의 일괄 경제개혁조치가 개시되었다. 외채를 갚기 위해서 연방세입의 재조정이 요구되었고, 예산삭감은 공화국 정부와 자치주로 전달되어야 할 지불금을 중지시켰고, 이는 분리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본문으로

  • 2007-09-13

    남북정상회담과 남북 경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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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통일에서 경제통합으로? 햇볕정책을 주창한 김대중 정부는 '통일' 담론을 '경제통합' 담론으로 변형했다. 김대중 정부는 평화공존과 경제통합을 '사실상의 통일'로 규정하고 장기적인 경제통합 시나리오를 개발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남북 무역자유화로서, 북한을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제조업 생산기지(가공무역형 수출기지)로 전환하여 남한 경제의 하위 파트너로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김대중 정부는 한ㆍ미 역할 분담론과 정경분리 정책을 제시했다. 즉 군사안보 대응은 미국이 주도하고 남한은 경제협력과 사회문화교류를 주도하며, 정치정세의 변화와 관계없이 남한 기업의 대북한 교역 및 투자를 장려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구상은 남측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 질서의 확장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따라서 이러한 전략은 평화공존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외피를 통하여 '2국가 1체제'와 같이 사실상 (흡수)통일의 효과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방안이 북한의 붕괴에 따른 단시간 내의 흡수통일이 수반하는 '불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비용을 절약한다며 보수 층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남한 정부가 주장하는 국가연합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재 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노무현 정부의 전략은 본질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확장판이다. 한반도 핵 위기와 동북아시아 평화와 같은 의제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정책적 의지와 6자 회담의 틀이 규정할 수밖에 없으므로, 한국이 독자적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남한 정부가 어느 정도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경제협력과 대북 지원이다. 이러한 조건은 남북 경제 공동체 건설을 강조한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8ㆍ15 경축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번 경축사에는 중대한 강조점의 변화가 있다. 노무현 축사는 경제협력이 "남쪽에게는 투자의 기회, 북쪽에는 경제회복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즉 더 이상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남한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자본주의 비즈니스의 논리를 이해하고, 이에 걸맞은 파트너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북경협 20년 남북교역이 시작된 첫 번째 계기는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이 발표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ㆍ7 선언)이었다.1) 선언은 6개항의 실천 방향을 제시했는데, 남북교역에 관해서는 "남북 간 교역의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 간 교역을 민족내부교역으로 간주한다."(3항), "남북 모든 동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비군사적 물자에 대해 우리 우방들이 북한과 교역을 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4항)고 명시했다.2) 같은 해 10월 <남북물자교류에 대한 기본 지침서>가 발표되면서, 남북 간의 '시범적' 성격의 교역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 후 1990년 8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이 제정되면서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물자교류와 위탁가공교역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남북교역 규모는 부침이 있었으나 1991년 1억 달러 수준에서 1999년 3억 달러 수준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진 후 정부 주도의 남북경협이 본격화되었다. 3대 경협사업이라고 불리는 철도ㆍ도로 연결 사업, 개성공단 사업, 금강산 관광 사업이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식량, 비료를 비롯한 대북 지원이 본격 추진되었다. 현재 남북경협 사업은 대체로 상업성 거래와 비상업성 거래로 분류된다. 상업성 거래는 교역(일반교역, 위탁가공교역)과 좁은 의미의 경제협력사업(개성공단, 금강산, 기타 민간)으로 나뉘고, 비상업성 거래는 대북 지원(민간, 정부)과 사회문화협력 등으로 나뉜다. 이러한 분류법에 비추어 볼 때, 지난 10년 간 남북경협의 전체 규모는 96년 2.4억 달러에서 2006년 13.5억 달러로 5배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상업성 거래(교역+경제협력사업)는 2.5억 달러에서 9.3억 달러로 3.7배 증가한 반면, 대북 지원은 0.16억 달러에서 4.2억 달러로 26배나 증가했다. 현재 남북경협은 북한 대외무역의 30% 이상을 점하고 있으며, 남북경협을 제외한다면 북한이 경제계획을 수립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남한이 북한에 지원하는 연간 50톤 규모의 쌀은 북한의 쌀 생산량의 25%에 이르며, 북한의 외부 식량 도입량(약 103만 톤)의 49%에 달한다. 또한 연간 20~30만 톤 규모의 비료 지원이 북한의 농업 증산에 미치는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반면 남한의 입장에서 볼 때 현재 10억 달러 수준의 상업성 거래는 남한의 수출액 규모가 3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거의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남북경협을 주도하는 세력은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은 적지만, 남한 경제의 현실적, 잠재적 위협이 되는 '북한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남한 경제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현재의 대북 경협사업이 임가공 사업을 중심으로 이뤄져서 남북 분업구조 창출 효과가 아직은 미약하지만, 장기적으로 꾸준한 경협 사업이 실질적인 분업구조를 형성하고 남북 경제통합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남한은 북한의 제조업 부문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개성공단 사업과 2006년 북한과 체결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방안을 주목하고 있다. 남한의 대북 경협 전략 1) 개성공단 개성공단은 2004년 12월 255명 북 측 노동자로 시작했으나 2007년 5월 현재 32개 사 1만 5천 명의 노동자가 고용되어 있다. 개성공단의 생산액과 수출액도 꾸준히 증가하여 2007년 1/4분기 생산액이 3,560만 달러에 이르며(1년 사이에 2.8배 증가), 수출액이 838만 달러에 이른다. 현재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결과를 두고, 개성공단 제품이 특례원산지 규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3)한국 정부는 개성공단 사업의 확대가 북한에게 '비즈니스'의 현실을 실감케 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고, 실제로 북한 내에서 개성공단을 정점으로 분업관계를 확장시켜 나갈 수도 있으리라 믿고 있다. 2)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 또한 2006년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합의한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 따르면, 남측은 8,000만 달러 상당의 경공업 원자재를 북한에 제공하고 북한은 그 중 3%를 아연과 마그네시아크링커로 상환하며, 나머지는 연 이자율 1%, 5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그런데 현재까지는 개발협력 방안에 대해 남과 북이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듯하다. 북한은 경공업 원부자재를 남한으로부터 차관 형식으로 구매한 것이므로, 품목이나 사용방식은 북한이 결정할 사항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북한이 현재 주로 요구하는 품목은 섬유, 신발, 비누 등이다). 반면 남한은 제공되는 원부자재의 효율적인 활용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남한이 고려하고 있는 것은 개발협력 방안을 확장하여 북한의 경공업 분야 생산능력을 확충하고 북한의 수출산업화 지원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① 원부자재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서 남측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유휴설비를 제공하거나 소규모 신규투자를 통해 설비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임가공 사업을 확대한다. ② 특히 섬유, 의류산업의 기반을 확충하여 수출전략산업으로 육성한다. 이를 위해 에너지, 노동력 공급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평양ㆍ남포 지역에 집약적인 생산지대를 창설한다. ③ 사업 초기부터 가능한 한 남북한 합작ㆍ합영을 실행하고, 북한 내 다른 기업과의 생산적 연계를 모색하여, 남한의 기술과 경영기법 등을 실제로 전파한다. 또한 인력훈련부터 해외마케팅 지원까지 종합적인 지원책을 마련한다. 현재 일각에서는 남북 간의 도로ㆍ철도 연결을 통해 새로운 실크로드를 열자거나,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석유 포함?)을 개발하여 한반도 번영을 꾀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추진되는 사업은 이와 거리가 멀다. 현재 북한의 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 전력 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지만, 국제적인 협력이 없는 상태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래서 일단은 남한이 보기에 '비즈니스'로서 성공 가능성이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교통망, 전력망 등을 구축해 나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지하자원 개발이 경제성이 있으려면, 해당 지역의 전력, 철도, 항만 등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재 조건에서는 상업적 타당성이 매우 낮기 때문에 일단은 북한의 임가공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지원에 나서고 있다. 3)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 최근 삼성경제연구소가 제시한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CEPA) 역시 이러한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가 진전되면 대북 반출품 제약, 수출시장 제약이 크게 완화되어서 남북경협이 활성화될 공산이 높은데, 이럴 경우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에 대해 WTO 회원국의 제소가 빈발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 간의 무관세 거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방안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CEPA가 가장 확실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는 1국 내 2개 독립관세구역 간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서, 중국 내륙과 홍콩의 CEPA 사례를 모델로 삼고 있다.4) 삼성경제연구소는 CEPA를 통해 남북경제통합의 첫 번째 단계로 진입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장기적인 시나리오는 ‘자유로운 물자이동(자유무역단계) → 대외무역정책 및 대내경제정책의 상호조율(제도통합단계) → 화폐단일화(화폐통합단계) → 인적자원의 자유로운 이동(인적통합단계)’이다. 특히 CEPA 잠정협정 10년 동안 북한경제구조를 재편하여 북한을 수출지향형 경제구조로 전환하는 게 핵심이라고 제시한다. 4) 대북 경제지원 또한 대북 경제지원의 성격도 앞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북한 식량난 이후 대북 지원은 주로 인도적 지원 또는 긴급 지원(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도적 지원만으로는 빈곤에서 탈피할 수 없고, 오히려 원조 의존적 체질을 정착시킬 수 있으므로, 이를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개발지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5) 그런데 긴급지원의 경우는 지원 물품이 취약층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하는 모니터링이 이뤄진다면 (북한은 이러한 모니터링 활동에도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개발지원의 절차와 조건은 훨씬 더 까다롭다. IMF와 세계은행 등이 요구하는 이행조건은 해당국이 특정한 정책과 제도의 채택을 강제하는 '정책 조건'과 개발사업의 추진절차와 방식을 규정하는 '프로세스 조건'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개발지원이 중단되기도 한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개발 지원이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느냐의 문제는 북한의 개혁ㆍ개방을 향한 정책적 의지와 비례한다는 것이다. 결국 대북 개발지원이 시작된다면, 이는 북한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북한의 체제 전환을 위한 세련된 대북 정책으로 작동할 것이다. 북한의 경제의 해체와 딜레마 북한은 이미 1980년대 중반 이후 개혁ㆍ개방을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84년에는 '8ㆍ3 인민소비품 창조운동'을 개시하여 각 기업과 가정 별로 계획경제 영역 바깥에서 부업생산을 장려했다 (1989년에 장려 조치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또한 1984년 합영법을 제정하여 주로 조총련계 기업들을 중심으로 외자를 유치했다(그러나 이 당시의 사업은 대체로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991년에는 라진ㆍ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설치했고, 1992년 4월 개정 헌법에서는 외국인의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기업 합영과 합작을 장려한다는 구절을 삽입했고, 곧 신무역체계도 도입하였다. 그러나 3차 7개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북한은 1993년부터 향후 2~3년 간을 '사회주의 건설의 완충기'로 설정하고, '무역, 농업, 경공업 제일주의'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북한 정부의 개혁 정책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계획경제 시스템이 자생적으로 퇴화, 해체하는 경향이 극심하게 나타났다. 북한은 1990-98년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했고, 1995년부터 북한의 국가예산이 그 이전에 비해 1/2로 감소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96년 1월 '고난의 행군 정신'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과거 북한이 제시한 공식통계에 비추어 볼 때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붕괴 사태가 발생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성장회계'는 극히 과장된 것이고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라는 게 최근의 분석 결과다. 공식통계에 따른 분석은 북한이 성장률이 하락하는 '데드-크로스'를 경험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며, 최근에는 이미 1960년 초반 이를 겪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6) 따라서 북한경제의 위기는 갑작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누적된 효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북한의 계획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북한의 중앙, 도, 지방이 관리하는 기업소들이 차례로 붕괴하기 시작했고, 현재에도 공장가동률이 대략 20~30% 정도로 추정된다.7) 이에 따라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합법, 반합법, 불법적인 다양한 방식으로 원시적인 형태의 시장 경제적 활동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것이 다시 계획경제를 위축시키는 악순환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북한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공산품은 대다수가 중국산이고, 이른바 '보따리 장사꾼'이 기관이나 회사로부터 상품을 인수하여 전국의 매대로 유통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품유통이 경제회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상품유통을 통해 약간의 부를 축적한 자들이 공장을 인수, 운영하여 자본축적을 통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일(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로 북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대규모 수해 사태는 북한의 경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계기다. 현재 북한은 전 국토가 민둥산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은 2/3이 산이며, 산림황폐화는 수자원 관리의 위기와 수해로 직결된다. 그렇지만 북한은 경제 정체와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5대 자연개조 사업의 하나로서 1976년부터 가능한 모든 산을 옥수수 밭으로 개간하기 위한 '다락밭' 조성 사업을 펼쳤다. 또한 취사와 난방을 위한 산림자원 채취가 급증하고 불법 화전인 뙈기 농사가 성행했다. 외화벌이를 위한 원목수출도 급증하여 북한의 원목수출은 1990년 14,000㎥에서, 1997년 410,000㎥으로 수십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토사유실과 침적에 따른 하수면 상승을 동반했고, 결국 반복적인 홍수 피해를 유발했다. 이러한 대혼란의 와중인 2002년에 북한은 '7ㆍ1 경제관리 개선 조치'를 발표했다 (기업자율권 확대, 독립채산제 강화, 가격ㆍ임금 체계의 현실화). 2003년 3월에는 농민시장을 종합시장으로 확대하여 합법적으로 취득 가능한 품목을 식량, 소비재 공산품으로 확대했다. 이러한 북한의 개혁 조치는 자생적인 시장지향적 변화에 대한 대응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의 공식적인 목표는 비공식 부문을 축소하고 공식 부문을 정상화하여 경제적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병존이 불가피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시장경제 방식의 활동을 적절히 통제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북한 당국도 7ㆍ1 조치를 발표할 때 '실리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면서 "이제는 국가가 생활을 다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일한 만큼 버는 것이다.", "낡은 경험에 사로잡히지 말고 사업방법을 대담하게 개선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7ㆍ1 경제개선 조치가 발표된 후에도 공장가동률이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경공업 및 지하자원 개발협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의류, 신발, 비누 등 최소한의 소비재 경공업에 필요한 원자재마저 남한의 지원을 받아야 되는 상황으로 보인다. 또한 농업 부문은 금번 수해로 추가적인 식량 지원이 필요한 것처럼, 잦은 수해와 농업기반의 유실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직면한 또 하나의 문제는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개혁이 반드시 경제성장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1968년 헝가리의 '신경제 메커니즘'이나 1985~87년 이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는 현재 북한이 추진한 개혁조치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개혁조치를 구사했지만 경제회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로 인해 오히려 기존 메커니즘과 새로운 메커니즘의 충돌이 발생하거나, 소득격차 확대와 인플레이션 심화로 인한 대중소요가 나타나기도 했다 ('개혁 후 붕괴 시나리오'). 바로 여기에 북한의 딜레마가 있다. 북한의 대외의존과 경제개혁의 상관성 남북경협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진전이 매우 더딘 편이다. 그러나 경제협력 사업은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남한의 기업에게도 비즈니스로서의 상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자본주의적 비즈니스 논리를 이해하고, 일방적인 지원을 바라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남한의 경제력 규모와 국제적 관심도를 고려할 때 북한을 좀 더 폭넓은 개혁, 개방으로 유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남한의 다양한 기관에서는 중장기적으로 북한이 국제경제기구(WTO, IMF 등)에 가입해야 하며, 국제경제 규범과 정책에 맞추어 내부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그들이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이렇다. '북한은 정치적 안정과 인민의 경제적 피폐 상황을 맞바꾼 현재의 상태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불안정성을 어느 정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개혁ㆍ개방으로 북한 경제를 되살리고 인민의 생활상을 개선할 것인가?' 그러나 여기서 국제통화기금(IMF)과 동유럽 경제의 관계를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친 1980년대 초반부터 IMF의 활동이 시작되었고, 1980년대 말 본격적인 경제개혁을 시작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는 IMF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8) 당시 IMF의 압력 하에 추진된 개혁은 ① 가격자유화, 임금자유화, 무역자유화, 기업경영 자율화 ② 거시경제적 안정화 ③ 국가기업의 사유화 ④ 시장경제 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기구의 확립 등이었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를 통해 한국이 직접 체험한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저개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도출된 1989년의 워싱턴 컨센서스와도 동일하다. 세계경제개혁을 주도하는 자들은 저개발 국가든, 기존 사회주의 국가든, 아니면 선진국이든 간에 각 국에게 적합한 특수한 경제정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단 하나의 경제정책(신자유주의!)이 있다는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이 경제적 생산의 감소,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증가, 계층 간 경제적 격차의 확대라는 파괴적인 효과를 낳은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9) 워싱턴 컨센서스와 IMF 경제개혁의 입안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효과는 경제의 체질 개선을 위한 일시적 혼란일 뿐이고, 이러한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면 건전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주장이 사실이냐는 문제는 세계의 민중운동이 세계적 불평등성의 증대와 빈곤의 심화를 고발하는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명백하다. 현재 남북 경제협력 사업은 1단계로 북한을 남한 경제의 '후배지'로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북한경제의 통합 과정을 통해 세계경제체제로의 편입을 유도하겠다는 장기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나아가 남한의 여러 기관들은 이러한 전망이 북한이 선택해야 할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북한이 점점 더 대외 의존적인 경제구조로 바뀌고 있고, 남한과 국제경제기구의 지원 없이 버틸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 경제의 해체와 퇴화냐, 신자유주의 개혁이냐는 질문은 서로 다른 모습의 재앙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1)1988년은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장에서 김중기 후보가 6ㆍ10남북청년학생회담을 제안하고, 4월 4일 김일성 대학 학생위원회가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내오면서 남북 청년학생 교류가 사회적 현안으로 부상하고, 통일운동이 급격히 확산되던 때였다.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이러한 저변의 흐름에 대한 일종의 대응책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의 7ㆍ7 선언은 단순히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고, 1970년 대 이래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변화를 반영했다. 임필수,「미완의 교차승인 10년, 미완의 논쟁 10년」, 『사회진보연대』, 2000년 8월호. 본문으로 2) 나머지 4개항은 다음과 같다. ① 정치인ㆍ경제인ㆍ언론인ㆍ문화예술인ㆍ체육인ㆍ학자 및 학생 등 남북동포간의 상호교류를 적극 추진하며, 해외동포들이 자유로이 남북을 왕래하도록 문호를 개방한다. ② 남북적십자회담이 타결되기 이전이라도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이산가족들간에 생사ㆍ 주소 확인, 서신왕래, 상호방문 등이 이루어지도록 적극 주선ㆍ지원한다. ⑤ 남북 간의 소모적인 경쟁ㆍ대결 외교를 지양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에 발전적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협력하며, 또한 남북대표가 국제무대에서 자유롭게 만나 민족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희망한다. ⑥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북한이 미국ㆍ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으며, 한국도 소련ㆍ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한다는 것 등이다.본문으로 3) 한국 정부는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초기부터 개성공단 제품의 특례원산지 문제를 '역외가공지역'(outward processing zone) 인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양국의 최종 타결 내용을 요약하면, 양국 대표로 구성되는 '한반도역외가공지역위원회'에서 수립한 '일정 기준'을 충족하는 북한 내 특정 지역이 역외가공지역으로 지정되면, 그 지역 내에서 생산된 제품은 한국 산으로 표기되며 한국 산과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된다. 여기서 일정한 기준이란 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진전', ② 역외가공지역이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 ③ 역외가공지역이 일반적인 환경기준, 노동기준, 임금 관행, 영업과 경영관행에 부합하는지 여부 등이다. 위원회는 한ㆍ미 FTA 협정이 발효된 후 1주년 기념일에 회합하여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한국 정부가 협상 결과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는 ① 비핵화의 '달성'이 아니라 '진전'이라고 표현되었다는 점, ② 일반적인 환경, 노동기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할 때 '현지[개성] 경제와 그 밖의 다른 곳[북한 내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상황과 관련 국제규범을 적절하게 참고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ILO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북한의 특수한 조건을 고려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6자 회담을 통해 한반도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개성공단 지역이 이미 다른 북한 지역에 비해 노동조건이 최상이고 앞으로도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본문으로 4) 삼성경제연구소는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남북관계 역시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잠정적 특수 관계'(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이므로 국가 간 협정(agreement)이 아니라 약정(arrangement) 형식으로 체결이 가능하며, 이는 '교류협력에 관한 부속합의서'(2002년)와 '4대 경협합의서' 등을 대폭 보완하고, 각종 경제협력 합의서를 통합함으로써 실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품교역에 대해서는 무관세거래 원칙을 재천명하고, 남북 간 상품교역에 관해 원칙적으로 제한을 폐지하며, 국제전략물자통제체제 상의 대북 제재의 완화를 선도한다. ② 서비스교역에 관해서는 북한이 긴급히 필요로 하는 에너지, 물류, 의류 분야부터 단계적으로 서비스 시장을 개방한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건설 사업에 대해 우선 혜택을 부여한다. ③ 무역/투자 편리화에 관해서는 기존의 4대 경협합의서와 원산지규정합의서를 부속 문서로 채택한다. 본문으로 5) 통상 긴급 지원은 식량, 의약품 등 구호물자 지원을 뜻하나, 개발 지원은 해당 국가의 사회경제적 개발을 돕는 지원을 뜻한다. 또한 개발지원에는 무상 지원뿐만 아니라 장기저리차관과 같은 대출도 포함된다 (물론 장기저리가 아니더라도 차관을 구하기 힘든 국가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지원의 성격을 지닐 때가 있다). 또한 개발지원을 제공하는 주체에는 특정 정부(양자간 지원)나 국제기구(다자간 지원)뿐만 아니라 NGO, 민간기업도 포함된다. 현재 국제 공적개발지원(ODA)의 추세와 부문별 비중을 보면 사회적 인프라와 행정적 인프라에 대한 투자의 비중이 경제적 인프라와 비슷하거나 더 높다. 사회 분야에는 교육, 보건의료, 인구, 수자원 공급, 위생 등이 포함되며, 행정 분야는 행적 시스템에 대한 지원을 뜻한다. 이는 아무리 좋은 경제인프라와 생산시설이 갖춰지더라도 '인적 자원'의 상태가 나쁘다면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이며, 행정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면 투자가 낭비로 전환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한편 경제적 인프라에는 교통, 통신, 에너지 등이다. 이외에도 생산 분야 즉 농업, 광업, 제조업에 대한 지원도 이뤄진다. (생산 분야에 대한 개발지원은 농업 부문 투자를 중시하는데, 이는 개발지원 대상국이 대체로 농업국가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6)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pp. 27~29, 공감, 2002. 대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북한의 주체사상/개인숭배에 대해서는 경악을 표시했지만 북한의 경제건설 성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안드레아스 크라체크 외,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본 북한사회』, 중원문화, 1990). 그러나 이는 북한 경제에 대한 부족한 정보와 단편적인 경험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는 분명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본문으로 7)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6년 북한의 철강, 시멘트, 비료 부문의 공장 가동률은 각각 18.3%, 46.1%, 11.8%로 추정된다. (차문석, 홍빈, 『현 시기 북한의 경제운영 실태에 관한 연구』, 진보정치연구소, 2007). 중요한 군수 공장이 가동되고 있으나, 특정 시간대에 전력과 에너지를 공급하여 생산이 이뤄진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월 ○일~○일까지 전력을 공급하고 그 시일에 맞춰서 생산을 감행하는 방식). 본문으로 8) 북한은 1971년 서방 각 국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도입하고 대 서방 무역 확대를 추진했지만, 1977년 이후 외채 상환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대 서방 경제교류를 중단했다. 그 결과 1978년 2차 7개년 계획에서는 '주체 경제', '자력갱생 원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1980년대 합영법 제정은 대외 경제관계 없이 생산성 증가나 국민경제 향상이 어렵다는 북한의 인식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9) 사회주의 개혁의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마도 유고 내전일 것이다. 미셀 초스도프스키의 「유고연방의 해체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신식민지화」(『빈곤의 세계화』, 당대, 1998)는 유고의 경제개혁에 대한 IMF의 개입이 어떻게 유고 내전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상세히 추적한다. 1990년 1월, IMF의 잠정조정안(SBA)과 세계은행의 구조조정차관(SALⅡ) 아래에서 유고의 일괄 경제개혁조치가 개시되었다. 외채를 갚기 위해서 연방세입의 재조정이 요구되었고, 예산삭감은 공화국 정부와 자치주로 전달되어야 할 지불금을 중지시켰고, 이는 분리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본문으로

  • 2007-09-13

    광우병에 맞서 민중의 식량주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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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미 FTA 체결의 선결과제로 제시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지난 4월에 재개되었으나, 검역조건에 맞지 않는 뼛조각과 척수가 계속 발견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한․미 FTA반대 운동은 미국산 소고기가 광우병의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이슈화하고 있다. 반면 정부는 미국산 소고기의 안전성을 장담하면서 국제수역사무국(OIE)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형식 논리로 일관하고 있는데, 수입과 검역에 대한 무원칙한 대응으로 미국의 눈치 보기라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국민의 건강권과 농민의 생존권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수입만 막으면 되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은 높아지고, 농민의 삶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광우병은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나 한․미 FTA 외에도 많은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현안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여유도 필요하다. [%=사진1%] 미국산 소고기만 문제인가? 한국에서 광우병이 이슈화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 말에 광우병의 안전지대라고 생각한 독일, 이탈리아에서 광우병에 감염된 소가 발견되고 프랑스의 까르푸 등 대형유통매장에서 감염된 소고기의 유통 의혹이 번지면서 광우병 문제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때 광우병에 대한 우려가 한국에까지 확산되었다. 당시에 정부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적이 없고, 한국은 전통적으로 소의 부산물을 먹었으나 인간 광우병이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에 광우병 청정지역이라고 주장했다. 또 정부는 광우병에 대한 공포를 감정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언론과 광고를 통해 국민을 계몽하면 문제가 사라질 것처럼 행동했다. 정말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막으면 국내에서 광우병의 위험은 사라지는 것일까? 2000년 이후 광우병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면 국산 소고기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부는 2000년 12월과 2001년 1월에 각각 육골분 사료와 남은 음식물 사료를 소, 양과 같은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행위를 금지했다. 영국은 1988년, 미국은 1998년부터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것이다. 또 유럽과 일본에서는 모든 동물에게 동물성 사료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반추동물에게 반추동물1)로 만든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것만 금지하고 있어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교차 오염2)의 위험이 높다. 국내에는 250만 두 가량의 소가 있는데 2006년에 그 중 6,016 두에 대해서 광우병 검사를 했다. 이를 비율로 따지면 0.24%이다. 전수 검사를 시행하는 일본에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0.1%를 검사하는 미국보다는 나은 것일까? 문제는 검사한 소의 90% 이상이 정상 도축된 건강한 소라는데 있다. 축산 농가들이 의심이 가는 소나 폐사 한 소에 대한 신고를 꺼리기 때문에 건강한 소를 대상으로 광우병 검사를 한 것이다. 정부는 광우병 검사를 실질화 하기 위한 계획 대신에 폐사 한 소를 신고하면 30만원을 준다는 사탕발림 정책을 내놓고 있다. 실정이 이러하다 보니 정부도 광우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농림부는 작년에 국제수역사무국에 광우병 등급 신청을 하려다가 신청 직전에 포기하였다. 등급판정을 신청했다가 미국과 같은 2등급(광우병 위험 통제국가)을 받을 경우를 우려한 것이다. 한국의 광우병 위험 수준이 미국과 같은 정도라면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부분적으로나마 제한할 근거를 찾기 어려워 협상에 치명적이었다. 국제수역사무국은 2005년 5월에 등급 판정 기준 중의 하나를 '광우병 검사 마리 수'에서 '광우병 고위험 군에 대한 검사이냐, 정상 도축소에 대한 검사이냐'로 변경했다. 한국과 같은 광우병 관리체계가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워진 것이다.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를 인간이 먹었을 때 걸리는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인간광우병)이 국내에서 발병했을 가능성도 있다. 국내에는 연간 26명 정도의 산발성 크로이츠펠트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 병은 알 수 없는 이유로 100만 명 당 0.5~1명에게 발병하는데 인간광우병과 증상이 유사하여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부검과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 그 동안 국내에는 전문 부검시설이 없고 유족들이 부검을 반대해 정확한 진단을 할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2001년 인간광우병으로 의심이 가는 젊은 환자가 있었지만 부검을 못해서 정확히 진단을 할 수 없었다. 산발성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대부분 50대 이상에서 발생하지만,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환자의 평균 연령이 27세로 젊은 나이에 발생한다. 전문가들도 자인하는 것처럼 한국은 광우병의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광우병은 하나의 현상일 뿐! 상황이 이러한데 왜 미국산 소고기 수입만 문제가 됐을까? 우리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이슈화되고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과정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회적 이슈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투쟁과 담론의 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위험'과 '공포'도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인지된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광우병 위험 요인이 국내에 풍부하게 존재했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고 유통되지 않은 것이다. 광우병은 대중이 위험을 인지할 수 있는 선정적인 요인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동안 언론과 운동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한․미 FTA 반대 운동도 광우병의 위험을 강조하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채택해왔다. 광우병은 초식동물에게 육식을 강제한, 자연 생태계에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 일이 원인이라는 점에서 현대문명(또는 자본주의)의 괴기스러움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소가 소를 먹는 동종식육은 식인 행위와 유비되어 "문명세계와 문명인"의 공포를 가중시킨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식인풍습으로 발생한 쿠루병, 양의 스크래피, 밍크 뇌종 등과 광우병(소해면상뇌증)의 원인과 증상이 유사하기 때문에 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과학의 지지를 받는다. 광우병이 인간에게 전염된다는 유력한 근거가 있고, 인간광우병에 걸리면 인간이 "미친소"와 유사한 증상으로 죽기 때문에 공포는 배가된다(고상하게 죽을 수도 없다!). 또 누구나 먹는 소고기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전염되고, 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치료제도 없고, 치사율이 100%다. 더군다나 잠복기가 길어서 10년 전에 먹은 소고기 때문에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다니.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그 문제가 충분히 숙고되었고, 실제로 20여 년에 걸쳐 영국 등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하지만 인간광우병에 감염된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더 안전한 소고기'를 먹거나 채식을 하는 것이 대안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광우병은 세계적 식량체계에서 생산된 먹거리가 가지는 문제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세계적 식량체계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광우병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제거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먼저 원인을 제대로 인식해야한다. 미국 축산의 역사와 광우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광우병은 소에게 스크래피에 감염된 양 또는 광우병에 걸린 소의 육골분 사료를 먹인 데서 비롯되었다. 1980년대부터 목축업자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곡물사료를 절약해서 이윤을 보장받기 위해 소에게 육골분 사료를 먹였다. 광우병 발생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과정을 조금 더 긴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우병과 같은 최근의 전세계적 식품 파동은 20세기에 녹색혁명을 통해 정착된 산업화된 농업과 세계화된 식품생산 및 유통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광우병은 산업화, 공장화된 자본주의 축산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세기 초부터 미국에서 진행된 녹색혁명과 백색혁명(축산에서의 생산성 혁명을 일컫는 말)은 생산성의 측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능케 했다. 이 미국식 농업․축산 체계가 하나의 모델로 전세계에 확장되었기 때문에 광우병 발생의 구조를 미국 축산의 역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미국은 농약과 비료를 다량 투입하여 하나의 특화된 작물을 생산하는 단작으로 곡물 생산의 혁명적 증가를 이루어냈다. 트랙터, 탈곡기 등 석유로 작동하는 농업기계를 사용하고 제초제, 살충제, 질소비료 등 화학투입물을 이용하여 자연의 생산력을 자본의 생산력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생태적으로는 그동안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 오던 농업, 임업, 축산 사이의 순환성과 연결성이 파괴되었다.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농산물의 다양성이 불과 몇 개의 작물로 획일화(단작)되면서 농약으로 인한 토양 및 수질오염, 토양 비옥도 저하, 생물 다양성 훼손, 수자원 고갈, 병해충 창궐과 같은 각종 생태적 문제가 야기되었다. 축산도 이제 가축을 가두어 놓고 필요한 사료, 영양제, 항생제를 투입하는 시스템으로 완전히 변모하였다. 예전처럼 집 마당이나 목초지에 소, 돼지, 닭, 염소 몇 마리를 키우던 목가적인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공장이나 다름없는 축사에서 움직일 틈도 주지 않고 사육하는 체제로 바뀐 것이다. 미국은 대공황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1935년 '농업 조정법'을 개정하여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고 국내 농산물 가격을 국제가격보다 높게 지지했다. 농가보호와 녹색혁명의 성공으로 잉여 농산물이 증가했는데 이를 1950년대에는 원조 물자로 해외에 처분했다. 처음에는 무상 원조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상업 가격으로 유통시킨 원조 정책으로 카길 같은 거대 곡물상이 부를 축적하고, 전세계에 미국식 농업관행과 식문화가 이식되었다. 대공황과 녹색혁명은 미국 축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공황으로 곡물가격이 떨어지자 미국 축산업자들은 저렴한 곡물을 가축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값싼 잉여 농산물이 본격적으로 동물의 사료로 전환되었다. 한편 1950년대 말부터 비육장이 성업하는데 비육장은 점차 교외로 이전한 도축장과 통합되었다. 20세기 전반까지 미국에는 도축장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했다. 하지만 도축장에서 발생하는 악취로 환경개선의 요구가 높았고 강력한 정육노조를 무력화하고 값싼 이주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도축장을 교외로 이전한다. 교외에서는 도축장과 비육장을 지리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다. 또 도축장은 정육장과 구분이 불가능해지는데 냉장과 포장 기술의 발전으로 도축한 소를 그 자리에서 부위별로 자르고 포장해서 출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축장과 이웃하고 있는 비육장은 도축되기 전에 소의 몸집을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소는 보통 3~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1400kg 정도의 곡물사료를 먹고 호르몬제, 항생제를 맞으면서 180kg 가량을 찌운다. 이렇게 되어 1960년대에 비육-도축-정육이 결합된 미국식 축산의 골격이 잡히게 되었다. 송아지를 키우는 전통적인 목축업자의 일과 정육한 소고기를 판매하는 소매업 등 나머지 부문은 1970년대 이후에 통합되기 시작한다. 1970년대 초에 미국정부는 국제수지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서 농산물 수출을 추진했다. '1973년 농업법'으로 잉여농산물과 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생산 제한을 해제하고 수출을 장려했다. 잉여 농산물 정책 변화로 미국이 세계농업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자 유럽과 미국 간의 시장 쟁탈전이 과열되었다. 이 과정에서 초국적 농기업은 제3 세계 농업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고, 수직적 통합으로 농자재 산업과 영농, 유통, 가공, 판매를 장악한다. 현재 미국의 4대 정육업체인 콘아그라, IBP(타이슨 푸드), 엑셀(카길), 내셔널 비프는 미국 소의 84%를 도살한다. 또 이들은 비육장 운영이나 선계약과 입도선매 방식의 종속적 공급으로 미국에서 사육되는 소의 20%를 관리하고 있다. 카길은 세계 최대의 사료 업체이기도 하다. 농업자금 대출 부문도 초국적 농기업에 통합되고 있는데 농업자금을 대출받기 위해서 농민은 그 기업이 제공하는 송아지와 사료 구입을 약속해야 한다. 목축업자도 농민처럼 초국적 농기업의 자본축적 과정에서 위험성 높은 한두 부문을 떠맡는 일종의 도급 노동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수직적 통합과 독과점으로 자영 목축업자는 소의 가격을 낮추어 팔 수밖에 없어서 수익과 생존에 압박을 받았다. 광우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육골분 사료가 1980년대 초부터 확산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한편 육골분 사료를 생산하는 것은 랜더링 산업(rendering industry)이다. 미국에서 가축의 40%는 고기로 소비되지만 뼈, 머리, 내장, 피 등 나머지 60%는 버려진다. 이것을 재가공하여 동물성 지방과 사료를 생산하는 것을 고상한 용어로 랜더링(우리말로 옮기면 동물부산물가공?)이라고 한다. 랜더링 산업의 원료로는 도축장에서 나오는 가축의 부산물 외에도 소매점, 식당 등에서 버려지는 고기 부산물, 폐기름, 남은 음식물 등이 사용된다. 규제가 강화되기 전에는 병들거나 죽은 가축, 애완동물의 사체 등도 널리 사용되었다. 미국에서 연간 2,000만 톤 정도 발생하는 동물 부산물은 생태적 순환에서 괴리된 대량 육식 문화의 이면이다. 동물 부산물을 가공하여 유용한 물건을 만든다는 의미의 랜더링 산업은 역사 이전부터 있었지만, 근대적인 랜더링 산업은 19세기 말에 성립되었다. 원래 랜더링 산업의 주요 생산물은 비누제조의 원료로 사용되는 동물성 지방이었다. 1950년에 미국 랜더링 산업은 50만 톤의 동물성 지방을 비누 제조업에 공급했다. 하지만 비누의 원료가 화학 합성물로 대체되면서 동물성 지방의 수요가 급감한다. 랜더링 산업은 새로운 수요를 개척해야했고 이것이 동물성 사료의 개발로 이어졌다. 현재 랜더링 산업에서 동물성 사료의 비중은 생산량 기준으로 약 55%로 530만 톤 가량의 동물성 사료가 매년 생산되고 있다. 만약 미국에서 동물성 사료가 전면 금지된다면 랜더링 산업에게는 큰 재앙일 것이다. 한편 랜더링 과정도 독립적인 사업에서 도축장 옆에 설치된 초국적 농기업의 한 공정으로 대체되는 추세이다. 미국이 동물성 사료를 계속 허용하는 데는 랜더링 산업과 초국적 농기업의 압력이 작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안을 세계화하고 지역화하기 위하여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막는다고 해도 광우병을 낳은 공업적 축산과 초국적 자본이 장악한 세계적 식량체계는 지속될 것이다. 설사 광우병이 사라진다고 해도 조류독감과 같은 새로운 문제가 계속 발생한다. 이번에는 그 장소가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고소득 국가가 아니라 제3 세계나 한국일 수도 있다. 생태적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는 농업과 생태의 위기를 치료할 근본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면 광우병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한․미 FTA와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정부의 대안은 한우의 질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여 유기농 축산까지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유기농을, 어떤 사람들은 채식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지불하는 돈에 따라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그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동물성 사료로 기른 수입 소고기를 먹고 호르몬이 듬뿍 쳐진 우유를 마실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의 목록을 늘리는 것은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세계를 움직이는 현실적인 힘(신자유주의 세계화)이 생태적 순환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생태적 이상 사회󰡑를 상상하거나 실험하는 것을 대안으로 내세울 수도 없다. 농업시장이 전세계적으로 통합되고 있는 상황에서 농업에 대한 민족적 통제를 주장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시장개방 반대를 요구하는 것은 위기를 지연시킬 수 있지만 위기가 발생하는 구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한국도 녹색혁명, 백색혁명을 거치면서 석유와 화학합성물을 고투입하는 농업이 일반화되어 있다. 광우병과 같은 농업위기, 생태위기에 대한 대안은 초민족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계적 식량체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자본의 세계화'에 '민중의 세계화'로 맞서는 것뿐이다. 최근 남미의 비아 캄페시아(Via Campesina)나, 무토지 농민운동(MST) 등 주변부를 중심으로 초민족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농민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말리 셀링게에서 비아 캄페시나를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이 '식량주권포럼'을 열고 식량을 위한 국제회의 선언문3)을 채택했다. 대안세계화 농민운동의 이념으로 제시되고 있는 식량주권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농업에 대한 민족적 통제를 재확립하자는 요구가 아니다. 닐레니 선언은 식량주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식량주권은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된 안전하고, 문화적으로 적합한 식량에 대한 민중들의 권리이며, 또한 민중들이 그들의 고유한 식량과 농업 생산 체계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식량주권은 식량체계와 정책의 중심을 시장과 기업의 요구가 아니라 생산과 공급, 소비를 하는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하며 동시에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식량주권은 현재 초국적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식량체계에 맞서 지역적 생산자들을 중심에 둔 식량, 농업, 소목축업, 어업 체계의 방향과 전략을 제시한다. 식량주권은 지역, 국민경제와 시장을 우선시하고, 독립적인 농민, 어민, 목축인과 환경적․사회적․경제적 지속가능성에 기초한 식량생산, 공급, 소비에 권한을 부여한다. 식량주권은 모든 민중에게 공정한 수입을 보증 할 수 있는 투명한 무역과 소비자가 식량과 영양물을 관리 할 수 있는 권리를 증진시킨다. 식량주권은 우리의 토지, 영토, 물, 종자, 가축, 생물의 다양성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권리가 식량 생산자에게 있다는 점을 보증한다. 식량주권은 남녀, 민중, 인종, 사회계급, 세대 사이에 불평등과 억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의미한다." 식량주권은 생물 다양성을 존중하고, 영농 지식과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옹호한다. 또 생태적인 영농과 농민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고, 여성농민의 권리를 옹호한다. 지역적인 먹거리 생산과 소비도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농민뿐 아니라 모든 민중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보장한다. 광우병을 발생시키는 신자유주의 농업체계를 변혁하고, 미국식 금융세계화를 전면적으로 이식하는 한․미 FTA에 맞서기 위해서 우리는 식량주권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전략을 마련해야한다. 이것은 수입반대나 정책대안 제시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차라리 새로운 농민운동, 생태환경운동을 만드는 문제이다. 새로운 운동의 형성, 다른 말로 운동의 혁신은 농업․생태 위기를 방기한 여타 사회운동과 농민운동, 생태환경운동의 반성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1) 되새김동물. 위가 4~5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위를 이용하여 먹이를 소화한다. 소과, 사슴과, 낙타과, 기린과 등의 많은 초식동물이 포함된다. 본문으로 2) 미국과 한국에서는 반추동물에게 반추동물로 만든 육골분 사료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을 뿐 돼지, 닭의 내장과 뼈, 고기로 만든 사료는 여전히 허용하고 있다. 또 돼지와 닭에게 반추동물의 육골분 사료를 먹이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교차오염은 우선 반추동물로 만든 육골분 사료를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경우에 발생한다.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으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값싼 돼지, 닭의 사료를 소의 사료로 사용할 수 있고, 사료 생산과정이나 축산과정에서 반추동물 육골분 사료가 다른 사료에 미량이라도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교차오염은 광우병과 유사한 질병에 걸린 가축(이 가축은 광우병에 감염된 소의 육골분 사료를 먹었을 것이다)을 사료로 만들어 소에게 먹일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영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원인이 스크래피에 걸린 양의 육골분 사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국제수역사무국 과학위원회도 "미국 정부가 광우병 감염 가능성이 있는 원료를 동물용 사료로 이용하는 한 교차오염의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바 있다. 미국뿐 아니라 동물성 사료를 허용하는 국가는 모두 교차오염의 위험이 있다.본문으로 3) 닐레니(Nyeleni) 선언, 번역 전문은 사회진보연대 자료실 1039번 참고.본문으로

  • 2007-09-13

    광우병에 맞서 민중의 식량주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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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미 FTA 체결의 선결과제로 제시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지난 4월에 재개되었으나, 검역조건에 맞지 않는 뼛조각과 척수가 계속 발견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한․미 FTA반대 운동은 미국산 소고기가 광우병의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이슈화하고 있다. 반면 정부는 미국산 소고기의 안전성을 장담하면서 국제수역사무국(OIE)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형식 논리로 일관하고 있는데, 수입과 검역에 대한 무원칙한 대응으로 미국의 눈치 보기라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국민의 건강권과 농민의 생존권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수입만 막으면 되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은 높아지고, 농민의 삶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광우병은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나 한․미 FTA 외에도 많은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현안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여유도 필요하다. [%=사진1%] 미국산 소고기만 문제인가? 한국에서 광우병이 이슈화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 말에 광우병의 안전지대라고 생각한 독일, 이탈리아에서 광우병에 감염된 소가 발견되고 프랑스의 까르푸 등 대형유통매장에서 감염된 소고기의 유통 의혹이 번지면서 광우병 문제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때 광우병에 대한 우려가 한국에까지 확산되었다. 당시에 정부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적이 없고, 한국은 전통적으로 소의 부산물을 먹었으나 인간 광우병이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에 광우병 청정지역이라고 주장했다. 또 정부는 광우병에 대한 공포를 감정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언론과 광고를 통해 국민을 계몽하면 문제가 사라질 것처럼 행동했다. 정말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막으면 국내에서 광우병의 위험은 사라지는 것일까? 2000년 이후 광우병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면 국산 소고기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부는 2000년 12월과 2001년 1월에 각각 육골분 사료와 남은 음식물 사료를 소, 양과 같은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행위를 금지했다. 영국은 1988년, 미국은 1998년부터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것이다. 또 유럽과 일본에서는 모든 동물에게 동물성 사료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반추동물에게 반추동물1)로 만든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것만 금지하고 있어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교차 오염2)의 위험이 높다. 국내에는 250만 두 가량의 소가 있는데 2006년에 그 중 6,016 두에 대해서 광우병 검사를 했다. 이를 비율로 따지면 0.24%이다. 전수 검사를 시행하는 일본에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0.1%를 검사하는 미국보다는 나은 것일까? 문제는 검사한 소의 90% 이상이 정상 도축된 건강한 소라는데 있다. 축산 농가들이 의심이 가는 소나 폐사 한 소에 대한 신고를 꺼리기 때문에 건강한 소를 대상으로 광우병 검사를 한 것이다. 정부는 광우병 검사를 실질화 하기 위한 계획 대신에 폐사 한 소를 신고하면 30만원을 준다는 사탕발림 정책을 내놓고 있다. 실정이 이러하다 보니 정부도 광우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농림부는 작년에 국제수역사무국에 광우병 등급 신청을 하려다가 신청 직전에 포기하였다. 등급판정을 신청했다가 미국과 같은 2등급(광우병 위험 통제국가)을 받을 경우를 우려한 것이다. 한국의 광우병 위험 수준이 미국과 같은 정도라면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부분적으로나마 제한할 근거를 찾기 어려워 협상에 치명적이었다. 국제수역사무국은 2005년 5월에 등급 판정 기준 중의 하나를 '광우병 검사 마리 수'에서 '광우병 고위험 군에 대한 검사이냐, 정상 도축소에 대한 검사이냐'로 변경했다. 한국과 같은 광우병 관리체계가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워진 것이다.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를 인간이 먹었을 때 걸리는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인간광우병)이 국내에서 발병했을 가능성도 있다. 국내에는 연간 26명 정도의 산발성 크로이츠펠트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 병은 알 수 없는 이유로 100만 명 당 0.5~1명에게 발병하는데 인간광우병과 증상이 유사하여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부검과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 그 동안 국내에는 전문 부검시설이 없고 유족들이 부검을 반대해 정확한 진단을 할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2001년 인간광우병으로 의심이 가는 젊은 환자가 있었지만 부검을 못해서 정확히 진단을 할 수 없었다. 산발성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대부분 50대 이상에서 발생하지만,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환자의 평균 연령이 27세로 젊은 나이에 발생한다. 전문가들도 자인하는 것처럼 한국은 광우병의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광우병은 하나의 현상일 뿐! 상황이 이러한데 왜 미국산 소고기 수입만 문제가 됐을까? 우리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이슈화되고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과정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회적 이슈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투쟁과 담론의 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위험'과 '공포'도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인지된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광우병 위험 요인이 국내에 풍부하게 존재했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고 유통되지 않은 것이다. 광우병은 대중이 위험을 인지할 수 있는 선정적인 요인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동안 언론과 운동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한․미 FTA 반대 운동도 광우병의 위험을 강조하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채택해왔다. 광우병은 초식동물에게 육식을 강제한, 자연 생태계에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 일이 원인이라는 점에서 현대문명(또는 자본주의)의 괴기스러움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소가 소를 먹는 동종식육은 식인 행위와 유비되어 "문명세계와 문명인"의 공포를 가중시킨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식인풍습으로 발생한 쿠루병, 양의 스크래피, 밍크 뇌종 등과 광우병(소해면상뇌증)의 원인과 증상이 유사하기 때문에 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과학의 지지를 받는다. 광우병이 인간에게 전염된다는 유력한 근거가 있고, 인간광우병에 걸리면 인간이 "미친소"와 유사한 증상으로 죽기 때문에 공포는 배가된다(고상하게 죽을 수도 없다!). 또 누구나 먹는 소고기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전염되고, 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치료제도 없고, 치사율이 100%다. 더군다나 잠복기가 길어서 10년 전에 먹은 소고기 때문에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다니.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그 문제가 충분히 숙고되었고, 실제로 20여 년에 걸쳐 영국 등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하지만 인간광우병에 감염된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더 안전한 소고기'를 먹거나 채식을 하는 것이 대안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광우병은 세계적 식량체계에서 생산된 먹거리가 가지는 문제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세계적 식량체계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광우병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제거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먼저 원인을 제대로 인식해야한다. 미국 축산의 역사와 광우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광우병은 소에게 스크래피에 감염된 양 또는 광우병에 걸린 소의 육골분 사료를 먹인 데서 비롯되었다. 1980년대부터 목축업자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곡물사료를 절약해서 이윤을 보장받기 위해 소에게 육골분 사료를 먹였다. 광우병 발생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과정을 조금 더 긴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우병과 같은 최근의 전세계적 식품 파동은 20세기에 녹색혁명을 통해 정착된 산업화된 농업과 세계화된 식품생산 및 유통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광우병은 산업화, 공장화된 자본주의 축산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세기 초부터 미국에서 진행된 녹색혁명과 백색혁명(축산에서의 생산성 혁명을 일컫는 말)은 생산성의 측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능케 했다. 이 미국식 농업․축산 체계가 하나의 모델로 전세계에 확장되었기 때문에 광우병 발생의 구조를 미국 축산의 역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미국은 농약과 비료를 다량 투입하여 하나의 특화된 작물을 생산하는 단작으로 곡물 생산의 혁명적 증가를 이루어냈다. 트랙터, 탈곡기 등 석유로 작동하는 농업기계를 사용하고 제초제, 살충제, 질소비료 등 화학투입물을 이용하여 자연의 생산력을 자본의 생산력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생태적으로는 그동안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 오던 농업, 임업, 축산 사이의 순환성과 연결성이 파괴되었다.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농산물의 다양성이 불과 몇 개의 작물로 획일화(단작)되면서 농약으로 인한 토양 및 수질오염, 토양 비옥도 저하, 생물 다양성 훼손, 수자원 고갈, 병해충 창궐과 같은 각종 생태적 문제가 야기되었다. 축산도 이제 가축을 가두어 놓고 필요한 사료, 영양제, 항생제를 투입하는 시스템으로 완전히 변모하였다. 예전처럼 집 마당이나 목초지에 소, 돼지, 닭, 염소 몇 마리를 키우던 목가적인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공장이나 다름없는 축사에서 움직일 틈도 주지 않고 사육하는 체제로 바뀐 것이다. 미국은 대공황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1935년 '농업 조정법'을 개정하여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고 국내 농산물 가격을 국제가격보다 높게 지지했다. 농가보호와 녹색혁명의 성공으로 잉여 농산물이 증가했는데 이를 1950년대에는 원조 물자로 해외에 처분했다. 처음에는 무상 원조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상업 가격으로 유통시킨 원조 정책으로 카길 같은 거대 곡물상이 부를 축적하고, 전세계에 미국식 농업관행과 식문화가 이식되었다. 대공황과 녹색혁명은 미국 축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공황으로 곡물가격이 떨어지자 미국 축산업자들은 저렴한 곡물을 가축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값싼 잉여 농산물이 본격적으로 동물의 사료로 전환되었다. 한편 1950년대 말부터 비육장이 성업하는데 비육장은 점차 교외로 이전한 도축장과 통합되었다. 20세기 전반까지 미국에는 도축장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했다. 하지만 도축장에서 발생하는 악취로 환경개선의 요구가 높았고 강력한 정육노조를 무력화하고 값싼 이주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도축장을 교외로 이전한다. 교외에서는 도축장과 비육장을 지리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다. 또 도축장은 정육장과 구분이 불가능해지는데 냉장과 포장 기술의 발전으로 도축한 소를 그 자리에서 부위별로 자르고 포장해서 출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축장과 이웃하고 있는 비육장은 도축되기 전에 소의 몸집을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소는 보통 3~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1400kg 정도의 곡물사료를 먹고 호르몬제, 항생제를 맞으면서 180kg 가량을 찌운다. 이렇게 되어 1960년대에 비육-도축-정육이 결합된 미국식 축산의 골격이 잡히게 되었다. 송아지를 키우는 전통적인 목축업자의 일과 정육한 소고기를 판매하는 소매업 등 나머지 부문은 1970년대 이후에 통합되기 시작한다. 1970년대 초에 미국정부는 국제수지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서 농산물 수출을 추진했다. '1973년 농업법'으로 잉여농산물과 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생산 제한을 해제하고 수출을 장려했다. 잉여 농산물 정책 변화로 미국이 세계농업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자 유럽과 미국 간의 시장 쟁탈전이 과열되었다. 이 과정에서 초국적 농기업은 제3 세계 농업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고, 수직적 통합으로 농자재 산업과 영농, 유통, 가공, 판매를 장악한다. 현재 미국의 4대 정육업체인 콘아그라, IBP(타이슨 푸드), 엑셀(카길), 내셔널 비프는 미국 소의 84%를 도살한다. 또 이들은 비육장 운영이나 선계약과 입도선매 방식의 종속적 공급으로 미국에서 사육되는 소의 20%를 관리하고 있다. 카길은 세계 최대의 사료 업체이기도 하다. 농업자금 대출 부문도 초국적 농기업에 통합되고 있는데 농업자금을 대출받기 위해서 농민은 그 기업이 제공하는 송아지와 사료 구입을 약속해야 한다. 목축업자도 농민처럼 초국적 농기업의 자본축적 과정에서 위험성 높은 한두 부문을 떠맡는 일종의 도급 노동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수직적 통합과 독과점으로 자영 목축업자는 소의 가격을 낮추어 팔 수밖에 없어서 수익과 생존에 압박을 받았다. 광우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육골분 사료가 1980년대 초부터 확산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한편 육골분 사료를 생산하는 것은 랜더링 산업(rendering industry)이다. 미국에서 가축의 40%는 고기로 소비되지만 뼈, 머리, 내장, 피 등 나머지 60%는 버려진다. 이것을 재가공하여 동물성 지방과 사료를 생산하는 것을 고상한 용어로 랜더링(우리말로 옮기면 동물부산물가공?)이라고 한다. 랜더링 산업의 원료로는 도축장에서 나오는 가축의 부산물 외에도 소매점, 식당 등에서 버려지는 고기 부산물, 폐기름, 남은 음식물 등이 사용된다. 규제가 강화되기 전에는 병들거나 죽은 가축, 애완동물의 사체 등도 널리 사용되었다. 미국에서 연간 2,000만 톤 정도 발생하는 동물 부산물은 생태적 순환에서 괴리된 대량 육식 문화의 이면이다. 동물 부산물을 가공하여 유용한 물건을 만든다는 의미의 랜더링 산업은 역사 이전부터 있었지만, 근대적인 랜더링 산업은 19세기 말에 성립되었다. 원래 랜더링 산업의 주요 생산물은 비누제조의 원료로 사용되는 동물성 지방이었다. 1950년에 미국 랜더링 산업은 50만 톤의 동물성 지방을 비누 제조업에 공급했다. 하지만 비누의 원료가 화학 합성물로 대체되면서 동물성 지방의 수요가 급감한다. 랜더링 산업은 새로운 수요를 개척해야했고 이것이 동물성 사료의 개발로 이어졌다. 현재 랜더링 산업에서 동물성 사료의 비중은 생산량 기준으로 약 55%로 530만 톤 가량의 동물성 사료가 매년 생산되고 있다. 만약 미국에서 동물성 사료가 전면 금지된다면 랜더링 산업에게는 큰 재앙일 것이다. 한편 랜더링 과정도 독립적인 사업에서 도축장 옆에 설치된 초국적 농기업의 한 공정으로 대체되는 추세이다. 미국이 동물성 사료를 계속 허용하는 데는 랜더링 산업과 초국적 농기업의 압력이 작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안을 세계화하고 지역화하기 위하여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막는다고 해도 광우병을 낳은 공업적 축산과 초국적 자본이 장악한 세계적 식량체계는 지속될 것이다. 설사 광우병이 사라진다고 해도 조류독감과 같은 새로운 문제가 계속 발생한다. 이번에는 그 장소가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고소득 국가가 아니라 제3 세계나 한국일 수도 있다. 생태적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는 농업과 생태의 위기를 치료할 근본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면 광우병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한․미 FTA와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정부의 대안은 한우의 질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여 유기농 축산까지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유기농을, 어떤 사람들은 채식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지불하는 돈에 따라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그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동물성 사료로 기른 수입 소고기를 먹고 호르몬이 듬뿍 쳐진 우유를 마실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의 목록을 늘리는 것은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세계를 움직이는 현실적인 힘(신자유주의 세계화)이 생태적 순환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생태적 이상 사회󰡑를 상상하거나 실험하는 것을 대안으로 내세울 수도 없다. 농업시장이 전세계적으로 통합되고 있는 상황에서 농업에 대한 민족적 통제를 주장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시장개방 반대를 요구하는 것은 위기를 지연시킬 수 있지만 위기가 발생하는 구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한국도 녹색혁명, 백색혁명을 거치면서 석유와 화학합성물을 고투입하는 농업이 일반화되어 있다. 광우병과 같은 농업위기, 생태위기에 대한 대안은 초민족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계적 식량체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자본의 세계화'에 '민중의 세계화'로 맞서는 것뿐이다. 최근 남미의 비아 캄페시아(Via Campesina)나, 무토지 농민운동(MST) 등 주변부를 중심으로 초민족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농민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말리 셀링게에서 비아 캄페시나를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이 '식량주권포럼'을 열고 식량을 위한 국제회의 선언문3)을 채택했다. 대안세계화 농민운동의 이념으로 제시되고 있는 식량주권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농업에 대한 민족적 통제를 재확립하자는 요구가 아니다. 닐레니 선언은 식량주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식량주권은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된 안전하고, 문화적으로 적합한 식량에 대한 민중들의 권리이며, 또한 민중들이 그들의 고유한 식량과 농업 생산 체계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식량주권은 식량체계와 정책의 중심을 시장과 기업의 요구가 아니라 생산과 공급, 소비를 하는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하며 동시에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식량주권은 현재 초국적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식량체계에 맞서 지역적 생산자들을 중심에 둔 식량, 농업, 소목축업, 어업 체계의 방향과 전략을 제시한다. 식량주권은 지역, 국민경제와 시장을 우선시하고, 독립적인 농민, 어민, 목축인과 환경적․사회적․경제적 지속가능성에 기초한 식량생산, 공급, 소비에 권한을 부여한다. 식량주권은 모든 민중에게 공정한 수입을 보증 할 수 있는 투명한 무역과 소비자가 식량과 영양물을 관리 할 수 있는 권리를 증진시킨다. 식량주권은 우리의 토지, 영토, 물, 종자, 가축, 생물의 다양성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권리가 식량 생산자에게 있다는 점을 보증한다. 식량주권은 남녀, 민중, 인종, 사회계급, 세대 사이에 불평등과 억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의미한다." 식량주권은 생물 다양성을 존중하고, 영농 지식과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옹호한다. 또 생태적인 영농과 농민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고, 여성농민의 권리를 옹호한다. 지역적인 먹거리 생산과 소비도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농민뿐 아니라 모든 민중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보장한다. 광우병을 발생시키는 신자유주의 농업체계를 변혁하고, 미국식 금융세계화를 전면적으로 이식하는 한․미 FTA에 맞서기 위해서 우리는 식량주권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전략을 마련해야한다. 이것은 수입반대나 정책대안 제시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차라리 새로운 농민운동, 생태환경운동을 만드는 문제이다. 새로운 운동의 형성, 다른 말로 운동의 혁신은 농업․생태 위기를 방기한 여타 사회운동과 농민운동, 생태환경운동의 반성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1) 되새김동물. 위가 4~5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위를 이용하여 먹이를 소화한다. 소과, 사슴과, 낙타과, 기린과 등의 많은 초식동물이 포함된다. 본문으로 2) 미국과 한국에서는 반추동물에게 반추동물로 만든 육골분 사료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을 뿐 돼지, 닭의 내장과 뼈, 고기로 만든 사료는 여전히 허용하고 있다. 또 돼지와 닭에게 반추동물의 육골분 사료를 먹이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교차오염은 우선 반추동물로 만든 육골분 사료를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경우에 발생한다.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으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값싼 돼지, 닭의 사료를 소의 사료로 사용할 수 있고, 사료 생산과정이나 축산과정에서 반추동물 육골분 사료가 다른 사료에 미량이라도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교차오염은 광우병과 유사한 질병에 걸린 가축(이 가축은 광우병에 감염된 소의 육골분 사료를 먹었을 것이다)을 사료로 만들어 소에게 먹일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영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원인이 스크래피에 걸린 양의 육골분 사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국제수역사무국 과학위원회도 "미국 정부가 광우병 감염 가능성이 있는 원료를 동물용 사료로 이용하는 한 교차오염의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바 있다. 미국뿐 아니라 동물성 사료를 허용하는 국가는 모두 교차오염의 위험이 있다.본문으로 3) 닐레니(Nyeleni) 선언, 번역 전문은 사회진보연대 자료실 1039번 참고.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