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추진과 여성운동의 과제 신자유주의와 여성, 그리고 한미 FTA1) 한국사회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가져다 준 폐해들, 이른바 사회 양극화와 빈곤의 해소는 이미 NGO나 정당 뿐 아니라 정부와 기업 또한 당면 과제로 꼽는 문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양극화 해소 방안은 엉뚱하게도 한미 FTA 추진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가 일자리 창출과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를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여기서 여성은 한미 FTA의 수혜자 중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미 FTA를 통한 서비스시장 개방이 여성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며, 양국의 전문자격증 상호 인증, 외국 기업의 투자 확대 등 기업경영 환경 변화가 여성 채용과 관리직 승진기회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2)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미래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설사 일부 여성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이는 소수만의‘정상을 향한 도전’일 뿐이다. 이미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하는 대다수 여성들의 ‘바닥을 향한 경주’는 시작된 지 오래이며, 한미 FTA는 이 최악의 레이스를 더 부추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미 FTA의 진정한 심각성은 그것이 이른바 동북아 금융허브 달성’이라는 노무현 정부와 국내 초국적 자본의 능동적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전략이라는 데 있다. 협상이 중단된다면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기획 자체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 글은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칠 영향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현재 한국사회 여성의 현실과 더불어 여성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전략에 통합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정부나 기업의 정책, 이를 둘러싼 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한국여성의 변화 신자유주의는 젠더중립적인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 내지 정책의 문제로 여겨졌지만, 여성과 남성에게 분명 다른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 여성억압을 지속시키는 가부장적 성별분업 구조를 활용하고 이를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노동 유연화에 따른 여성노동의 불안정성 증대, 빈곤의 여성화, 여성의 재생산노동에 대한 부담 확대,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 등은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여성에게 가져다 준 대표적인 문제들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체결, 1996년 OECD 가입과 1997년 외환위기, IMF 구제금융 관리체계 거치며 급격히 진행되었다. 특히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른 극단적 위기는 노동유연화를 확대하고 빈곤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 가운데 한국 여성들 또한 전 세계 여성들과 같은 방식으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따른 한국 여성의 변화는 전반적인 삶의 질 하락이라는 현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적 영향 하에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여성인력 활용’은 발전과 경제 성장의 주요한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은행은“여성에 대한 투자는 사회정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발전전략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각 국의 적극적인 여성인력 활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이러한 논의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2001년 출범한 여성부가 표방한 최초의 정책 추진 방향 중 하나는‘21세기 지식기반 사회를 이끌어갈 여성인력의 양성․활용으로 국가경쟁력 제고’였으며, 특히 최근 들어 한국 여성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경제성장의‘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페미니즘은 오래전부터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완전한 시민권 획득의 전제 조건으로 여성의 더 많은 사회 진출을 주장해 왔으며, 최근 정부와 자본도‘자아실현’, ‘양성평등’등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여 여성의 사회 참여와 노동시장 진출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과연 여성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여성해방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여성은 신자유주의 발전전략을 이행하는 데 동원되어야 할 유력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 어느 때 보다 여성이 주목받고 있는 현상의 이면에 대다수 여성들의 열악한 삶이 놓여 있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야 말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한국 여성에게 가져다 준 최악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 빈곤의 여성화와 사회적 배제 심화 ① 여성 불안정노동의 확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노동의 유연화는 상대적으로 여성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킨 반면, 여성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05년 처음으로 50%를 넘어서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주로 비정규직, 저임금, 중고령자, 서비스업, 단순노무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는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증가했으며, 98년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거치며 급격히 늘어났다. IMF 당시 많은 기업의 인원감축정책은 여성 우선해고를 통해 여성 취업자 수를 대폭 감소시켰지만 이와 동시에 여성노동력은 빠른 속도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비정규직화 되었다. 2006년 현재 여성 비정규직 노동과 저임금 실태를 살펴보면, 남성노동자의 경우 45.8%가 비정규직임에 비해 여성은 67.9%가 비정규직이며 또한 여성 비정규직이 주로 기존의 여성 직종에 집중됨으로써 성별 직종분리가 강화되고 있다. 여성임금은 전체 남성 평균임금의 64.2% 수준이며 특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평균임금은 남성 정규직 노동자의 41.5% 수준에 머물러 있다.3) 여성 비정규직은 저임금 뿐 아니라 퇴직금, 시간외근로수당 등 법정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4대 보험에서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오히려 비정규직을 대규모로 양산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으며, 그 타겟은 여성노동자가 될 것이다. 또한 최근 한국사회의 급격한 저출산·고령화 현상은 여성인력 활용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관심을 증대시켰지만, 관련 정책은 특히 전업주부, 기혼 여성을 더 유연한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지금보다 더 비정규직 여성 일자리를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② 여성농민의 총체적 삶의 질 하락 WTO 출범 이후 한국정부는 누구보다 농업 개방에 앞장섰고 이미 한국농업은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농가 소득과 농업의 불안정성은 여성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함은 물론 식량을 생산하고 농촌공동체의 문화와 지식을 보존하는 여성농민의 삶의 가치를 폄하하고 있다. 개방에 따른 농업의 쇠퇴는 농가인구 감소, 급격한 인구 고령화와 함께 농업노동력의 여성화를 초래했다. 한국의 농가인구는 2005년 현재 343만명으로 90년에 비해 48.5%가 감소한 반면, 같은 기간 여성인구 비중은 50.8%에서 51.2%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여성농민의 농업노동 기여도도 증가하여 2004년 농업주종사자 중 여성 비율은 53%이며, 23.5%의 농가에서 여성농민이 농업노동을 거의 전담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여성농민이 농업노동에 투여하는 시간도 증가하였다. 여성농민의 44.7%가 하루 10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고 있으며, 가사일과 농사일의 이중 부담은 여성농민의 노동강도를 증가시켜 건강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개방농정에 따른 농가 소득 감소와 부채 증가는 많은 여성농민을 안전하지 못한 작업장이나 성산업으로 내몰았고 극단적으로는 농촌을 떠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농민은 농업생산자가 아닌 생산보조자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법․제도상의 불이익도 크다. 독자적으로 재산을 소유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농업정책과 국민연금 등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수혜 대상에서도 배제되고 있다. ③ 여성빈곤층 확대와 사회안전망에서의 배제 여성가구주의 빈곤 실태를 중심으로 IMF 이후 급속히 악화된 여성 빈곤층의 실태와 여성 빈곤을 초래하는 구조적인 원인들을 살펴보자. 사회 양극화와 경제 위기, 그에 따른 가족해체는 여성가구주 가구를 지속적으로 증가시켜 현재 전체 가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가구주가 남성가구주보다 빈곤에 처할 위험은 3배가량 높으며, 여성가구주 6명 중 1명은 최저생계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4) 이러한 현상은 주로 노동 유연화와 성차별적 노동시장, 양육과 교육·가사에 대한 사회적 지원 부족, 사회보장제도의 성차별성에 의한 것으로, 여성 빈곤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제도 개선은 미흡한 수준이다. 많은 사회보장제도는 여전히 여성을 배제하고 있으며, 한부모 여성가장에 대한 정부의 지원 정책은 소극적 수준에 그치고 있다. 또 최근 사회보장제도의 변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른바 ‘저출산 대책’은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자녀가 많은 가정에 우선적인 현금 혜택을 주거나 세금 감면, 특별주택분양 등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러한 다자녀 가정 지원책들은 조세, 복지 등 사회적 부의 재분배 수단을 인구통제 수단과 결합시켜, 결국 여성의 출산 선택 등 재생산 권리에 대한 직간접적인 통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2) 여성의 도구화, 상품화 생산성과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시장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이루며, 신자유주의적 발전 전략 하에서 여성은 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와 각 국 정부는 성장 동력으로서 여성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고 있으며, 여성인력의 활용은 경제적 효율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통로로 여겨지고 있다. 여성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정부 정책과 제도들이 사실은 여성을 발전의 수단, 인구통제의 수단으로 보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성평등과 여성의 권리 실현을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할 뿐 아니라 여성 스스로가 주체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저해한다. 한편 서비스산업의 팽창은 그동안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해 온 돌봄노동을 빠르게 사용가치가 있는 노동과 상품으로 전환시키면서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노동의 가치는 계속 낮게 평가되면서 시장영역은 물론 공공영역에서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 임금노동자들도 광범위한 저임금 불안정노동자층에 포함된다. 또한 여성의 몸과 성을 판매하여 이윤을 얻는 다양한 형태의 산업이 늘어나고, 이것이 빈곤의 여성화와 맞물리면서 여성의 삶은 다시 위협당하고 가부장적 착취는 강화한다. 이 역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증폭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① 가사, 양육, 노인부양 등 돌봄노동의 상품화 1980년대 중반 이후 자본의 국제적 경쟁이 심화되고 이윤율이 점차 하락하면서 제조업 등 전통적 굴뚝산업은 쇠퇴하고 서비스산업이 급격히 팽창하였고, 여성은 그 노동력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서비스산업은 기본적으로 가족 내에서 무임으로 이루어지는 여성의 돌봄노동을 다양한 형태의 임금노동으로 전환하고 그러한 서비스를 상품으로 판매한다. 서비스산업 중에서 양육, 간병 등 사회서비스 분야는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갖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일정한 지원을 받기도 하는데, 최근 한국사회에서 이 분야는 여성고용을 대규모 확대할 수 있는 영역으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정부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증가하는 사회서비스 수요 충족과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 제고라는 두 가지 정책 목표를 결합하여 간병인, 보육교사, 가사도우미 등 사회서비스 여성 일자리를 향후 5년간 44만개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또한 2008년 시행을 목표로 추진 중인 노인수발보험제도 도입은 간병인 단일 직종에만 5만여 개의 (여성)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여성인 사회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지위는 매우 불안정하다. 이러한 경향은 여성노동의 가치에 대한 낮은 평가에 기인하는데, 여성이 주로 수행하는 돌봄노동은 특별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지 않은, 여성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노동으로 여겨진다. 여성이 가정이라는‘사적영역’에서 수행하는 노동을 시장 등‘공적영역’으로 옮겨서 수행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높은 임금을 지불할 이유가 없는 노동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은 돌봄노동의 재구조화는 여성 내부의 차이에 기반하여 계층적·인종적 차이를 확대한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고 소득이 많은 여성의 가족 내 돌봄노동의 부담 경감과 사회적 지위 향상이 저소득층 여성이나 이주여성 등 주변화 된 여성의 저임노동에 의존하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고소득층 여성의 경우 사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상품화된 서비스에 대한 구매력이 낮은 저소득층 여성의 경우 무급돌봄노동에 대한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②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 증가 서비스산업 확대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 상품화는 여성의 서비스노동 중에서도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자리를 증가시킨다. 고용불안정과 실업이 증대될수록 정규적인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거나 탈락하는 여성들에게 각종 육체시장과 성산업은 유일한 돈벌이의 기회를 제공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성매매 세계시장을 확대하고 여성의 이주노동 증가는 이러한 성매매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 2002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은 최소 33만 명이며, 성매매 산업의 규모는 24조원으로 GDP의 4.1%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5) 이에 정부는 지난 2004년부터 성매매를 금지하고 성매매 여성을 지원하기 위한 상담과 자활, 직업훈련, 의료 및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 호주, 캐나다,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대규모 한국인 성매매 업소와 불법적 성매매 영업이 적발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국내 성매매에 대한 단속 강화가 해외 성매매 업소로의 알선과 성매매 시장을 국제적으로 확대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어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③ 가족 유지를 위한 여성의 역할과 부담 확대 사회위기와 빈곤의 확산은 가족 내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실질적인 부담을 증대시킨다. 이러한 부담에는 가족구성원을 보살피는 노동 뿐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가족 해체를 막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보이지 않는 노동 내지 정서적 수고들도 포함된다. IMF 이후 정리해고 등 고용불안은 남성 가장의 가족 내 권위를 실추시켰고, 이른바‘남편 기살리기’,‘아빠 힘내세요’류의 캠페인들이 등장하면서 여성은 가장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갖가지 행동을 요구받았다. 또한 지속되는 사회위기가 가족 해체를 증가시키고 결혼, 출산을 통한 가족 형성이 지연되는 현상이 급격한 속도로 확산되면서 최근 몇 년 사이 이러한 가족과 재생산에 대한 개입 - 특히 저출산을‘극복’하기 위한 대책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부는 한편으로 가족 내 돌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사회적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하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혼을 방지하고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제도와 프로그램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입법한 이혼숙려제도, 결혼한 가정이나 다자녀 가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도입 배경에는 가족 형성 지연과 가족 해체 증가가‘경제성장의 기반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진단이 깔려 있다.6) 이렇게 추진되는 가족정책은 여성을 여전히‘가족안의 존재’로 한정하거나, 가족위기가 초래할 사회 재생산의 위기를 막기 위해 여성의 모성과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수고를 활용하기 위한 전략으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크다. 이로써 여성은 적극적인 노동시장 참여를 통해 부족한 노동력을 메워야 할 주체이자, 많은 자녀를 낳아 출산율을 유지하고 또한 가족 해체를 막기 위해 애써야 할 주체로서 이중 삼중의 역할을 동시에 요구받게 되는 것이다. (3) ‘성평등’으로 포장된 경쟁과 배제의 논리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여성은 빈곤과 폭력의 1차적인 희생자가 되었고 또한 불안정한 자본주의를 유지해 나갈 새로운 이윤의 창출과 경제 성장, 사회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성차별적 구조와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적극 활용됨은 물론이고, 최근에는‘양성평등’과 같은 페미니즘의 담론들까지 역으로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여성의 불만을 은폐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여성인력 활용을 통한 경제성장’의 논리는 여성에게 새로운 기회가 제공되고 있음을 강조하며 여성의 자기개발이 곧 경제적 독립과 자아실현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하고 있다. 이는 최근 언론지상에 부쩍 늘어난 여성 고위직 진출 확대에 대한 보도, 단골로 등장하는 각종 고시 여성합격자 비율 기사 등 이른바‘여풍신화’와 무관하지 않다. 정부 또한 여성의 자아실현과 자기개발 욕구가 증대하고 있다며 “여성 스스로 사회진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과감히 걷어낼 것”7)을 주문하고 있다. 실제로 남성·정규직 중심의 평생고용이 해체됨에 따라 고학력 여성의 고위·전문직 진출 기회가 일정하게 확대되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의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노동유연화 정책은 고학력 고급인력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출혈 판매하는 여성들의 현실과 확산되는 여성 저임금 불안정노동의 폐해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또 한편에서는 여성의 더 많은 (그러나 지위 수준이나 고용의 질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 진출, (여성의 가사전담자로서 지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진행되는) 여성의 일·가정 양립이 곧 ‘양성평등’이며, 여성이 수행하는 돌봄노동을 사회서비스로 전환하는 것이‘여성을 가사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는 논리까지 등장하고 있다.‘양성평등 사회분위기 조성’이 곧 획기적인 저출산 대책이라고 주장하여 이목을 끌고 있는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8)에 등장하는 양성평등이란 부모 모두가 육아휴직을 사용하게 하는 제도 정착과 여성의 파트타임 근무와 탄력근무제 등 이른바‘친가족 근로형태’의 활성화를 뜻한다. 지난 9월 20일 발표된 정부의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이 표방하는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대다수 주변화 된 여성의 저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처럼 정부와 자본에 의해 왜곡되는‘성평등’ 담론은 대다수 여성의 불안정한 노동을 비가시화하며 각종 노동관계법과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되고 있는 여성의 현실을 외면하게 한다. 정부는 이러한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은 채 다수 여성들을 더욱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데, 2000년대 초반부터 다양한 분야에서 확대 시행되고 있는 여성할당제나 올해부터 시행된 적극적 고용개선조치가 일부 공공부문이나 대규모 사업장 여성에게만 혜택을 주고 있는 문제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3. 한미 FTA와 한국여성의 삶 (1) 한미 FTA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 현재 4차 협상까지 진행된 한미 FTA 협정문 초안은 물론 협상 결과가 한국사회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는 여러 견해들 중에서‘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실제 협상 테이블에서 여성에 관한 의제들이 다뤄지지 않는다고 해서 한미 FTA가 여성에게 가져다 줄 변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미 FTA 자체는 물론 그를 둘러싼 논의에서‘여성’이 사라지는 것은 초국적 자본과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부의 의도적인‘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부와 자본이 말하는‘한미 FTA가‘한국’에 미칠 영향’이란 곧 국내외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을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한미 FTA 협상의 우선 원칙으로 삼겠다는 ‘국익’이란 애당초 민중의 이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는‘우리의 선택’, 21세기 대한민국의 전략’등 마치 모두를 위한 것 인 냥 포장되고 있다. 여기서 한미 FTA가 민중의 삶과 뗄 수 없을 만큼 긴밀히 연결된다는 사실은 가시화되지 않으며, 그것이 여성에게 미칠 영향은 더 깊숙이 가려진다. 때문에 한미 FTA와 여성의 삶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미 FTA가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 즉 지금까지 한미 FTA와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여성의 문제를 배제하고 비가시화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칠 영향과 문제점을 진단하기에 앞서 젠더 시각으로 한미 FTA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크게 네 가지 부분을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한미 FTA가 여성의 삶에 미칠 총체적인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WTO 체제 내에서 양자간 특히 미국과의 FTA는 상품과 서비스, 투자와 금융은 물론 이전에는 공공부문으로 간주되던 부분들까지 모두를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삼는 만큼 단순한 자유무역협정이라기보다는‘포괄적 경제통합협정’에 가까우며 그만큼 개별 국민에게 미칠 영향은 총체적일 수밖에 없다. 즉 협정문 각 장에 수록된 내용들이 해당 분야에 가져올 직접적인 변화만 초래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까지 한미 FTA를 둘러싼 분야별 찬반논쟁의 방식 -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특정한 산업이나 의료, 교육, 문화 등 특정 분야별로 나타날 개방의 효과가 각각 이익인지 손해인지를 따져보는 방식으로는 한미 FTA와 민중의 삶의 총체적 연관성, 특히 여성의 삶에 미칠 영향을 드러내기 어렵다. 농업 피해는 서비스업 성장으로 상쇄하고 결국 그 합계가 +이면 이익이고 한미 FTA는 ‘국익’에 부합한다는 정부의 엉터리 덧셈뺄셈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우리의 논의는 그 이익의 실체가 민중의 것이 아니며, 경제, 고용, 복지는 물론 가족과 사회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열악한 삶과 억압을 더욱 구조화한다는 것이 한미 FTA의 진정한 폐단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기존의 성별 권력관계를 활용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칠 영향을 판단할 때 어떤 산업 분야의 여성에게는 이익이고 또 다른 여성에게는 불이익을 준다는,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여성들의 이익과 손해를 비교하는 것 또한 적절치 않다. 이제까지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성별분업구조를 활용하고 여성의 주변적 지위를 강화하는 방식을 필연적으로 택해 왔으며, 전문직 여성이든 저소득층 여성이든 누구도 신자유주의가 재구조화해나가는 성별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미 FTA가 이러한 경향을 더욱 확대할 것이며, 이전의 어떤 경제협정 보다도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 그 가공할 위험성이 있다. 셋째, 미국의 정치·군사적 전략의 변화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통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한미 FTA 체결이 단지 미국과의 경제적 통합 뿐 아니라 종속적인 정치적·군사적 한미동맹을 완성시킬 것이라는 예측이 이미 지배적이다. 미국은 이미 이스라엘, 모로코 등 각 대륙 군사정치적 요충국과 FTA를 채결하여 정치·군사적 체제와 경제동맹을 결합하고 자신의 경제·정치·군사적 패권화 수단으로 확장해 왔다.9) 한국정부는 올해 2월 한미 FTA 협상 개시에 앞서 미국이 한반도를 전방위 군사기지로 전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승인하였고, 그 대가로 군대를 동원하여 평택을 짓밟고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농민들을 내몰았다. 한미 FTA는 전략적 유연성과 더불어 미국의 동북아 패권전략을 뒷받침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를 더욱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북한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의 대북압력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에 대한 패권적 개입은 남북한 주민 모두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여성에게 더 많은 폭력과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통합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는 또한 평택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는 여성농민의 투쟁과 한미 FTA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투쟁이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넷째, 여성 내부의 차이에 따라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연대를 확장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들 사이의 격차를 더욱 벌여놓을 뿐 아니라 그러한 차이를 활용하여 또 다른 착취구조를 형성함으로써 여성들의 연대와 집단적 세력화를 가로막는다. 이는 한 국가 내에서의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경향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사회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계급·계층, 인종, 성정체성, 장애여부 등 다양한 차이를 지닌 여성들에게 미치는 각기 다른 영향과 그 연관 관계를 분석한 사례는 많지 않다. 또한 한미 FTA는 우리나라 여성과 또 다른 방식으로 미국 여성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에 대한 분석도 찾아보기 어렵다. 앞으로 한미 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은 한미 FTA 당사자인 한국과 미국, 그리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거나 추진하고 있는 여러 나라 여성들의 경험과 현실을 이해하고, 더 많은 연대를 모색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여성의 목소리와 힘을 모아야 한다. (2) 한미 FTA가 여성의 삶에 미칠 영향 ① 여성노동자의 고용불안과 비정규직화 한미FTA로 인해 기업간 경쟁이 심화되고 M&A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정리해고의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또한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투자장벽’으로 보는 미국의 압력이 최근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비정규직 관련 법 개악과 맞물린다면 한국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다수 비정규직으로 대체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10) 한미 FTA가 체결될 경우 나타나게 될 이러한 노동시장의 변화는 여성노동자를 1차적인 희생양으로 삼게 될 것이며, 이는 굳이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IMF와 UR 이후 나타난 여성노동시장의 변화에서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 하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우선 해고와 퇴출, 비정규직 전환의 1순위가 되었다. 98년 한 해 동안 권고사직, 정리해고 및 명예퇴직 등의 이유로 퇴출되어 고용보험 피보험자격을 상실한 노동자는 27만명이며, 여성 상실자수의 비율은 모든 산업 부문에서 남성에 비해 높게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금융보험업(여성 20.9%, 남성 13.5%)과 부동산 및 임대사업 서비스업(여성 20.4%, 남성 15.9%), 교육서비스업(여성 26.2%, 남성 15.3%), 제조업(여성 15.7%, 남성 12.1%) 등에서 여성 상실율이 남성보다 특히 더 높게 나타나, 이들 분야의 구조조정 과정에 여성 우선해고가 존재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11) 또한 IMF 당시 급격한 경제위기와 이후 양적 지표상의 경기 회복 과정에서 여성노동이 상대적으로 급격히 감소하고 빠른 회복율을 보이는‘안전판기능’을 수행했으며, 특히 그러한 현상은 여성노동자 집단 중에서도 저연령층, 저학력층, 하위직에게 집중되었다.12) 이 시기를 전후로 여성노동자의 임시, 일용직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여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여성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IMF 이후 구조조정이 집중되었던 금융산업의 경우, 하위직 여성의 퇴직율이 높고 동시에 전체 비정규직, 그 중에서도 여성 비정규직 비율이 크게 증가하여 당시 여성노동시장의 변화 양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금융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농협중앙회, 제일생명 등이 시행한 사내부부 우선 해고는 여성노동자를 생계보조자로 보는 성역할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간접차별로, 노동 유연화 과정이 기존의 성 불평등 구조를 어떻게 활용, 강화하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1993년 UR 이후 유통시장 개방에 따른 여성노동시장의 변화를 살펴보면 초국적 자본의 국내 진출과 규제 완화, 기업간 경쟁 심화가 여성고용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다.13) 한국정부는 1989년부터 단계적인 유통산업 개방 조치를 실시해 왔고 UR 협상 과정에서 1993년말 투자제한 업종을 제외한 모든 업종을 전면 개방하는 최종양허안을 제출했다. 이후 수도권 지역 유통시설 신축 허용, 할인판매에 대한 규제 완화, 외국인 투자기업 부동산 취득 제한 완화, 판촉사원 파견 허용 등 규제 완화 조치가 시행되면서, 90년대부터 대기업을 중심으로 재구조화되던 국내 유통산업은 더욱 대형화·독점화되었고, 하이퍼마켓과 대형할인점을 중심으로 한 초국적 유통기업의 진출도 확대되었다. 유통시장 개방과 유통업체 간 경쟁 심화는 유통산업 고용구조를 상용직 중심에서 임시직 중심으로 전환하여 불안정한 고용계층을 확대시켰고, 특히 판매노동과 계산노동을 중심으로 여성 비정규직, 임시직 고용을 크게 증가시켰다. 또한 여성 직종화, 영업시간 연장을 통한 매출증대를 특징으로 하는 유통업의 활성화는 장시간 영업에 따른 시간제 노동력의 필요와 가사전담자로서 기혼여성들의 분절화 된 노동시간을 맞물리며 기혼 시간제 여성의 고용을 증가시켰는데, 이는 주부라는 지위로 여성을 이차적 노동자 지위에 가두는 가부장적 성별분업을 바탕으로 여성을 질적 저하를 수반하는 고용형태에 배치하는 과정이었다. 한미 FTA 추진 과정에서 유통산업은‘시장개방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대표적인 사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 롯데 등 국내 대기업이 세계 1·2위 유통업체를 이기고 세계시장까지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성공신화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 기업의 성공은 유통노동자, 특히 기혼 여성노동자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착취, 노조 설립 자체도 허용하지 않는 반노조정책의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쟁의 승자가 국내 기업이냐 외국 기업이냐는 노동자에게 조금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경쟁의 격화 자체가 곧 극단적인 착취를 의미할 뿐이다. ② 농업의 몰락과 여성농민의 빈곤화14) 지난 한미 FTA 2차 협상 당시 웬디 커틀러 미 협상단 대표는“한국 농산물 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미국의 최고 우선 순위”라고 강조하며 농업 분과 양허 수준을 최대한 높일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한국정부 스스로도 한미 FTA로 인한 농업의 피해는 심각한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미 수년전부터 한국의 농업과 농민은 개방농정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으며, 한미 FTA는 양허 수준과 무관하게 한국 농업을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 주지하다 시피 미국의 농업 규모는 경지 면적(한국의 105배)으로 보나, 농가인구 1인당 경지면적(한국의 58배), 농산물 수출액(한국의 35.4배)으로 보나 한국의 농업 규모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며, 2003년 현재 한국의 전체 농산물 수입 중 미국으로부터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7%에 이르는 반면, 농산물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머무는 등 이미 대미농산물 무역수지는 만성적인 적자 상태에 있다. 때문에 한미 FTA가 체결될 경우 한국의 농축산물 생산액 감소 추정액은 최소 2조2천억에서 최대 8조8천억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쌀까지 개방할 경우 그 규모는 2001년 기준 한국 농업총생산의 45% 수준으로 실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측된다. 한미 FTA로 인한 피해는 농업 생산 뿐 아니라 농업 정책, 농협, 농산물 유통시장 구조 전반의 피해를 초래하는데, 농협의 경우 특별법으로 인한 각종 혜택이 위협을 받으면서 공금고와 정책자금 수신 등의 주요 수입원은 물론 국가의 보조를 받는 농협 농작물 재해 공제나 비과세 통장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또 규제 완화로 인해 미국의 거대 농산물 수출회사들이 한국 도매법인을 인수하게 된다면, 국내 주요 도매시장은 수입농산물 유통시장으로 전락하고 유통 독점에 따른 피해는 농민과 소비자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엄청난 농업의 변화는 여성농민의 열악한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고, 사실상‘농민’으로서 지위 자체를 위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방농정 하에서 여성농민의 생산자이자 가족과 지역사회 돌봄자로서 이중 역할은 더욱 확대되었고, 농가인구 특히 고령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늘어나는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농업 자체의 몰락은 여성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삶의 터전으로부터 분리를 가속화 하고 있다. 한미 FTA로 인한 농업생산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농민의 대대적인 퇴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여성농민들은 농사일에서 퇴출되거나 저임금 농업노동자로 전락할 것이며, 농촌에 남아 계속 농사를 짓는다 하더라도 여성 농민의 빈곤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농가소득의 하락, 농사의 규모화, 빚의 규모화로 인해 여성 농민들은 과중채무자나 장기체납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며, 과중한 노동의 부담과 낙후한 사회보장제도는 여성 농민들의 건강까지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다. ③ 사업서비스의 활성화와 여성 일자리의 양극화 한미 FTA 협정문 초안에 포함된 서비스·투자 관련 협상의제는 투자, 국경간 서비스 무역, 일시입국, 금융서비스, 통신·전자상거래 이상 6개로, 구체적으로 법률, 회계, 세무, 방송광고, 교육, 보건의료, 영화, 뉴스제공, 통신, 금융서비스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정부는 한미 FTA 협상에서도 가장 관심있는 분야가 서비스 시장이라고 전제하면서 “서비스를 가지고 우리가 미국에 더 팔자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시장을 열어서 우리 서비스의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것”으로 개방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 시장 개방은 단순히 몇몇 업종을 개방하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략’ 즉 금융세계화에 더 깊숙이 편입하려는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률, 회계, 세무, 방송광고, 정보통신, 금융서비스 등 이른바‘사업서비스업’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업체를 지원해주는 업종들을 말하는데, 이 부분의 팽창은 금융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초민족기업이 결집하는 금융화 된 세계도시에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사후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업서비스의 확대는 금융화의 양상을 반영하는데, 한국의 경우에도 97년 IMF 이후 증권 및 선물거래, 선물중개, 투자자문사 등 금융보험 관련 서비스업 종사자는 크게 증가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가 표방해온‘선진통상국가’,‘동북아 금융·물류허브’는 한미 FTA를 거치며 금융자유화를 완성하고, 사업서비스 산업을 확대하여 이를 기반으로 해외시장까지 개척한다는 계획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활성화된다 하더라도 이는 금융기관이 집중된 극히 제한된 공간에서만 가능할 뿐 남한 경제 자체의 성격을 지식기반경제로 바꿀 만큼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사업서비스에 종사하는 이른바 ‘전문직업인’들 외에 이들을 지원하는 일군의 전통적 블루칼라, 핑크칼라 노동자들에게는 극단적인 저임금과 고용불안만이 강요되는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15) 요컨대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을 통해 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여기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포부는 사실상 극히 일부의‘괜찮은 일자리’와 다수의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를 확대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업서비스업의‘보조적’일자리들은 이미 98년부터 파견법상 근로자 파견이 합법화된 직종들로, 비서, 타자원, 전화교환원, 건물 청소원 등은 대부분 여성 간접고용 노동자들로 채워진 대표적인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들이다. 정부가 말하는‘서비스 시장 개방을 통한 여성 일자리 창출’의 실체는 여성 일자리의 극단적 양극화와 대다수 여성의‘나쁜 일자리’를 의미할 뿐이다. ④ 공공·사회서비스 분야 개방과 여성의 이중부담 확대 한편 서비스 부문에서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공공부문에 포함되는 전력, 가스 등 에너지 분야, 물 분야의 시장개방도 문제가 되는데 이러한 공공서비스 부문에 대해서는 ‘투자’ 조항을 중심으로 공기업 매각이나 외국인 소유지분 확대를 통한 금융화·사유화가 추진되며, 공공재 성격을 가지는 이러한 기본서비스의 금융화·사유화는 가격 인상, 서비스 질의 하락 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쉽게 예상된다. 또한 보건의료와 교육분야는 서비스 시장 개방에서 특히 핵심적인 부분인데, 한미 FTA를 통해 지금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었던 최소한의 공공성은 없어지고 전면적으로 시장화 될 처지에 놓여있다. 이미 한미 FTA 이전부터 정부는 보건의료와 교육을 ‘서비스 상품’으로 규정하고 이들 ‘산업’의 경쟁력 제고해야 한다는 근거로 자발적인 개방 의사를 밝혀 왔다. 한미 FTA는 교육비와 의료비의 인상, 건강보험 등 적절한 공적의료보장체계의 축소, 이용 가능한 서비스 수준의 계층간 격차를 확대하여 저소득층의 생존권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16) 국민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공공서비스의 시장화·상품화는 특히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영향을 가져다준다. 먼저 교육비, 의료비를 포함한 생활비 인상은 주로 가족 내에서 보살핌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들로 하여금 더 많은 무급 돌봄노동으로 과도한 비용부담을 대신할 것을 강요하게 된다. 또 이미 빈곤의 여성화가 만연한 현실에서 가난한 여성들의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지고, 그만큼 물, 가스, 전기 등 공공재 제공을 더 많이 차단당하거나 여성들이 교육받을 권리, 건강을 유지할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남성보다 의료시스템을 더 많이 필요로 하지만 더 빈곤한 여성들(특히 여성노인)일수록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기회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회서비스 분야는 대체로 여성고용이 집중되어 있는 분야이며, 향후 이들 서비스의 시장화 경향이 가속화되고 민간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면 사회서비스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노동의 가치는 더욱 더 평가 절하되고, 이들 분야 여성노동자들의 안정적 노동조건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4. 한미 FTA에 대한 여성운동의 대응과 과제 (1) 한미 FTA저지 여성대책위 구성 ‘한미 FTA저지 여성대책위’가 출범한 것은 다른 부문 대책위 보다 다소 늦은 지난 6월초였다. 이미 많은 여성단체들이 한미 FTA저저 범국민운동본부에 함께 하고 있었으며, 여성대책위는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농업개방 정책의 최대 피해자이자 또한 한미 FTA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여성농민들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구성되었다. 현재까지 여성대책위에는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 경기자주여성연대, 목포여성회,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여성영화인모임, 반미여성회, 세계화반대여성연대, 인천여성회, 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 전국여성노동조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진주여성회,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한국노총 여성위원회, 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의 여성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경남, 전북, 제주, 울산, 광주전남 이상 5개 지역에 지역 여성들의 네트워크가 구성되어 한미 FTA에 반대하는 지역 차원의 교육, 홍보, 실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한국 여성농민, 여성노동자, 여성단체들이 각 부문에서 다소 산발적으로 여성의 생존권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운동을 진행해 왔다면, 한미 FTA저지를 위한 여성대책위 구성과 이후 다양한 연대활동은 그동안 각자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모으고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운동에서 여성의 통합력을 높여왔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향후 과제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한국 여성들의 한미 FTA 저지 운동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보다 확대,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한미 FTA 협상 저지를 넘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여성운동과 폭넓은 국내외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미 FTA는 이미 여성 빈곤과 차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심화시킨 한국사회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의 일부이며, 때문에 한미 FTA에 반대하는 운동은 협상 저지라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여성운동으로 보다 적극적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은 노무현 정부와 국내 자본의 능동적인 발전전략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때문에 미국의 과도한 협상 요구를 막거나 협상 중단을 이끌어 낸다 하더라도 ‘가장 최악의 경우’를 ‘잠시’ 방어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다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지금 운동에 함께하고 있는 여성들 뿐 아니라 장애여성, 성소수자여성, 빈민여성 등 보다 많은 부문의 여성들과 연대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해외 여성들과의 네트워크를 확대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한미 FTA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운동 또한 보다 힘 있게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미 FTA 반대 운동을 보다 많은 여성대중이 공감하고 참여하는 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한 의제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미 FTA저지 여성대책위는 한미 FTA가 초래할 여성 빈곤과 비정규직화,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여성의 부담 확대, 미국산 쇠고기 등 질 낮은 수입농산물과 유전자 조작 식품의 문제 등을 주요 이슈로 활동해 왔으나, 여성들의 더 많은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체적인 이슈와 다양한 행동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이미 미국과 FTA를 추진한 국가들에서 나타난 여성들의 변화와 문제점을 널리 알리고, 현재 한국의 여성관련 이슈들 - 저출산·고령화, 비정규직, 여성인력개발, 사회서비스 확충 등 - 에 대한 대응과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전체 한미 FTA 저지 운동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여성에 대한 빈곤과 차별,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자기 위상을 정립하도록 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의 한미 FTA 저지 운동에 매우 광범위한 분야의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한미 FTA가 국민에게 미칠 악영향을 분석하고 다양한 이슈를 제기하고 있지만 남성과 여성에게 미칠 다른 영향을 고려하거나, 기존의 성별 위계질서 강화에 대한 분명하고 강력한 문제제기는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여성들의 운동은 한미 FTA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여성의 힘을 모으고 여성의 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한국의 사회운동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는 한국사회의 대안적인 세계화 전략이 여성의 욕구와 경험, 지혜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1) 이 글은 지난 11월 24일 열린 국제토론회 ‘FTA에 반대하는 여성들’에서 발표하기 위해 작성한 내용을 요약․ 수정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여성신문, 2006. 3. 31, 「한·미 FTA 여성에 독인가 약인가」 본문으로 3) 김유선,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2006.8) 결과」,『노동사회』115호, 2006.11 본문으로 4) 김안나, 「한국사회 여성빈곤과 빈곤대책」, 『보건사회연구』제26권 제1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본문으로 5) 여성부(2004), 「성매매 없는 세상 아름다운 동행」. 본문으로 6) 여성가족부(2006), 「1차 건강가정기본계획(안)」. 본문으로 7) 서울경제, 2006.1.13,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 칼럼 「성장의 새로운 동력 ‘여성」. 본문으로 8) 최숙희·김정우(2006), 「획기적인 출산율 제고방안」, 삼성경제연구소., 최숙희·김정우(2005), 「외환위기 이후 저출산의 원인 분석」, 삼성경제연구소. 본문으로 9) 배성인(2006), 「한미 FTA와 전략적 유연성」, 『한미 FTA 국민보고서』, 한미 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 엮음. 본문으로 10) 차남호·이상훈(2006), 「한미 FTA와 노동」, 『한미 FTA 국민보고서』, 한미 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 엮음. 본문으로 11) 조순경(1999), 「구조조정의 성별 불균등 구조」, 『산업노동연구』제5권 제2호(1999). 본문으로 12) 장하진(2000), 「산업구조조정과 여성노동시장의 변화: 금융산업을 중심으로」, 『한국여성학』제16권 2호. 본문으로 13) 이하 이숙진(2000), 「글로벌 자본의 현지화와 지역여성의 정치」, 이화여대대학원 여성학과 박사학위 청구논문. 참고 본문으로 14) 이정옥(2006), 「한미 FTA 체결로 인한 한국사회의 변화와 농업, 여성농민에게 미치는 파괴적 영향에 대하여」,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치는 경제사회적 영향에 대한 동향분석을 위한 전문가포럼(제2차), 한국여성개발원., 심문회(2006),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여성농민의 현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정책포럼 한미 FTA와 여성노동의 변화 토론문. 등 참고 본문으로 15) 박준형(2006), 「서비스 시장 개방과 금융세계화」, 『한미 FTA, 이미 실패한 미래』, 사회진보연대 외. 참고 본문으로 16) 박준형, 앞의 글. 본문으로
한미 FTA 추진과 여성운동의 과제 신자유주의와 여성, 그리고 한미 FTA1) 한국사회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가져다 준 폐해들, 이른바 사회 양극화와 빈곤의 해소는 이미 NGO나 정당 뿐 아니라 정부와 기업 또한 당면 과제로 꼽는 문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양극화 해소 방안은 엉뚱하게도 한미 FTA 추진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 FTA가 일자리 창출과 새로운 성장 동력 확보를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여기서 여성은 한미 FTA의 수혜자 중 하나로 부각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미 FTA를 통한 서비스시장 개방이 여성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며, 양국의 전문자격증 상호 인증, 외국 기업의 투자 확대 등 기업경영 환경 변화가 여성 채용과 관리직 승진기회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2) 그러나 이러한 장밋빛 미래는 과연 가능한 것인가? 설사 일부 여성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이는 소수만의‘정상을 향한 도전’일 뿐이다. 이미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하는 대다수 여성들의 ‘바닥을 향한 경주’는 시작된 지 오래이며, 한미 FTA는 이 최악의 레이스를 더 부추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미 FTA의 진정한 심각성은 그것이 이른바 동북아 금융허브 달성’이라는 노무현 정부와 국내 초국적 자본의 능동적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전략이라는 데 있다. 협상이 중단된다면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기획 자체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 글은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칠 영향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현재 한국사회 여성의 현실과 더불어 여성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전략에 통합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정부나 기업의 정책, 이를 둘러싼 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한국여성의 변화 신자유주의는 젠더중립적인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 내지 정책의 문제로 여겨졌지만, 여성과 남성에게 분명 다른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 여성억압을 지속시키는 가부장적 성별분업 구조를 활용하고 이를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노동 유연화에 따른 여성노동의 불안정성 증대, 빈곤의 여성화, 여성의 재생산노동에 대한 부담 확대,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 등은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여성에게 가져다 준 대표적인 문제들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체결, 1996년 OECD 가입과 1997년 외환위기, IMF 구제금융 관리체계 거치며 급격히 진행되었다. 특히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른 극단적 위기는 노동유연화를 확대하고 빈곤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 가운데 한국 여성들 또한 전 세계 여성들과 같은 방식으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따른 한국 여성의 변화는 전반적인 삶의 질 하락이라는 현상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적 영향 하에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여성인력 활용’은 발전과 경제 성장의 주요한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은행은“여성에 대한 투자는 사회정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발전전략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각 국의 적극적인 여성인력 활용을 권장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이러한 논의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2001년 출범한 여성부가 표방한 최초의 정책 추진 방향 중 하나는‘21세기 지식기반 사회를 이끌어갈 여성인력의 양성․활용으로 국가경쟁력 제고’였으며, 특히 최근 들어 한국 여성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경제성장의‘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페미니즘은 오래전부터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완전한 시민권 획득의 전제 조건으로 여성의 더 많은 사회 진출을 주장해 왔으며, 최근 정부와 자본도‘자아실현’, ‘양성평등’등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여 여성의 사회 참여와 노동시장 진출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이 과연 여성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여성해방의 조건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여성은 신자유주의 발전전략을 이행하는 데 동원되어야 할 유력한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 어느 때 보다 여성이 주목받고 있는 현상의 이면에 대다수 여성들의 열악한 삶이 놓여 있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야 말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한국 여성에게 가져다 준 최악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 빈곤의 여성화와 사회적 배제 심화 ① 여성 불안정노동의 확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노동의 유연화는 상대적으로 여성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킨 반면, 여성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05년 처음으로 50%를 넘어서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주로 비정규직, 저임금, 중고령자, 서비스업, 단순노무직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는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증가했으며, 98년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거치며 급격히 늘어났다. IMF 당시 많은 기업의 인원감축정책은 여성 우선해고를 통해 여성 취업자 수를 대폭 감소시켰지만 이와 동시에 여성노동력은 빠른 속도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비정규직화 되었다. 2006년 현재 여성 비정규직 노동과 저임금 실태를 살펴보면, 남성노동자의 경우 45.8%가 비정규직임에 비해 여성은 67.9%가 비정규직이며 또한 여성 비정규직이 주로 기존의 여성 직종에 집중됨으로써 성별 직종분리가 강화되고 있다. 여성임금은 전체 남성 평균임금의 64.2% 수준이며 특히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평균임금은 남성 정규직 노동자의 41.5% 수준에 머물러 있다.3) 여성 비정규직은 저임금 뿐 아니라 퇴직금, 시간외근로수당 등 법정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4대 보험에서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오히려 비정규직을 대규모로 양산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으며, 그 타겟은 여성노동자가 될 것이다. 또한 최근 한국사회의 급격한 저출산·고령화 현상은 여성인력 활용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관심을 증대시켰지만, 관련 정책은 특히 전업주부, 기혼 여성을 더 유연한 노동력으로 활용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지금보다 더 비정규직 여성 일자리를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② 여성농민의 총체적 삶의 질 하락 WTO 출범 이후 한국정부는 누구보다 농업 개방에 앞장섰고 이미 한국농업은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농가 소득과 농업의 불안정성은 여성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함은 물론 식량을 생산하고 농촌공동체의 문화와 지식을 보존하는 여성농민의 삶의 가치를 폄하하고 있다. 개방에 따른 농업의 쇠퇴는 농가인구 감소, 급격한 인구 고령화와 함께 농업노동력의 여성화를 초래했다. 한국의 농가인구는 2005년 현재 343만명으로 90년에 비해 48.5%가 감소한 반면, 같은 기간 여성인구 비중은 50.8%에서 51.2%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여성농민의 농업노동 기여도도 증가하여 2004년 농업주종사자 중 여성 비율은 53%이며, 23.5%의 농가에서 여성농민이 농업노동을 거의 전담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여성농민이 농업노동에 투여하는 시간도 증가하였다. 여성농민의 44.7%가 하루 10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고 있으며, 가사일과 농사일의 이중 부담은 여성농민의 노동강도를 증가시켜 건강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개방농정에 따른 농가 소득 감소와 부채 증가는 많은 여성농민을 안전하지 못한 작업장이나 성산업으로 내몰았고 극단적으로는 농촌을 떠나게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농민은 농업생산자가 아닌 생산보조자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로 인한 법․제도상의 불이익도 크다. 독자적으로 재산을 소유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농업정책과 국민연금 등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수혜 대상에서도 배제되고 있다. ③ 여성빈곤층 확대와 사회안전망에서의 배제 여성가구주의 빈곤 실태를 중심으로 IMF 이후 급속히 악화된 여성 빈곤층의 실태와 여성 빈곤을 초래하는 구조적인 원인들을 살펴보자. 사회 양극화와 경제 위기, 그에 따른 가족해체는 여성가구주 가구를 지속적으로 증가시켜 현재 전체 가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가구주가 남성가구주보다 빈곤에 처할 위험은 3배가량 높으며, 여성가구주 6명 중 1명은 최저생계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다.4) 이러한 현상은 주로 노동 유연화와 성차별적 노동시장, 양육과 교육·가사에 대한 사회적 지원 부족, 사회보장제도의 성차별성에 의한 것으로, 여성 빈곤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제도 개선은 미흡한 수준이다. 많은 사회보장제도는 여전히 여성을 배제하고 있으며, 한부모 여성가장에 대한 정부의 지원 정책은 소극적 수준에 그치고 있다. 또 최근 사회보장제도의 변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른바 ‘저출산 대책’은 소득수준과 무관하게 자녀가 많은 가정에 우선적인 현금 혜택을 주거나 세금 감면, 특별주택분양 등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러한 다자녀 가정 지원책들은 조세, 복지 등 사회적 부의 재분배 수단을 인구통제 수단과 결합시켜, 결국 여성의 출산 선택 등 재생산 권리에 대한 직간접적인 통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2) 여성의 도구화, 상품화 생산성과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시장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이루며, 신자유주의적 발전 전략 하에서 여성은 성장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와 각 국 정부는 성장 동력으로서 여성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고 있으며, 여성인력의 활용은 경제적 효율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통로로 여겨지고 있다. 여성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정부 정책과 제도들이 사실은 여성을 발전의 수단, 인구통제의 수단으로 보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성평등과 여성의 권리 실현을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할 뿐 아니라 여성 스스로가 주체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저해한다. 한편 서비스산업의 팽창은 그동안 여성이 가정에서 수행해 온 돌봄노동을 빠르게 사용가치가 있는 노동과 상품으로 전환시키면서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노동의 가치는 계속 낮게 평가되면서 시장영역은 물론 공공영역에서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 임금노동자들도 광범위한 저임금 불안정노동자층에 포함된다. 또한 여성의 몸과 성을 판매하여 이윤을 얻는 다양한 형태의 산업이 늘어나고, 이것이 빈곤의 여성화와 맞물리면서 여성의 삶은 다시 위협당하고 가부장적 착취는 강화한다. 이 역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증폭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① 가사, 양육, 노인부양 등 돌봄노동의 상품화 1980년대 중반 이후 자본의 국제적 경쟁이 심화되고 이윤율이 점차 하락하면서 제조업 등 전통적 굴뚝산업은 쇠퇴하고 서비스산업이 급격히 팽창하였고, 여성은 그 노동력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서비스산업은 기본적으로 가족 내에서 무임으로 이루어지는 여성의 돌봄노동을 다양한 형태의 임금노동으로 전환하고 그러한 서비스를 상품으로 판매한다. 서비스산업 중에서 양육, 간병 등 사회서비스 분야는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갖기 어렵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일정한 지원을 받기도 하는데, 최근 한국사회에서 이 분야는 여성고용을 대규모 확대할 수 있는 영역으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정부는 저출산·고령화로 인해 증가하는 사회서비스 수요 충족과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 제고라는 두 가지 정책 목표를 결합하여 간병인, 보육교사, 가사도우미 등 사회서비스 여성 일자리를 향후 5년간 44만개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또한 2008년 시행을 목표로 추진 중인 노인수발보험제도 도입은 간병인 단일 직종에만 5만여 개의 (여성)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여성인 사회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지위는 매우 불안정하다. 이러한 경향은 여성노동의 가치에 대한 낮은 평가에 기인하는데, 여성이 주로 수행하는 돌봄노동은 특별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지 않은, 여성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노동으로 여겨진다. 여성이 가정이라는‘사적영역’에서 수행하는 노동을 시장 등‘공적영역’으로 옮겨서 수행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높은 임금을 지불할 이유가 없는 노동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특히 이와 같은 돌봄노동의 재구조화는 여성 내부의 차이에 기반하여 계층적·인종적 차이를 확대한다.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고 소득이 많은 여성의 가족 내 돌봄노동의 부담 경감과 사회적 지위 향상이 저소득층 여성이나 이주여성 등 주변화 된 여성의 저임노동에 의존하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고소득층 여성의 경우 사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상품화된 서비스에 대한 구매력이 낮은 저소득층 여성의 경우 무급돌봄노동에 대한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②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 증가 서비스산업 확대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 상품화는 여성의 서비스노동 중에서도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자리를 증가시킨다. 고용불안정과 실업이 증대될수록 정규적인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거나 탈락하는 여성들에게 각종 육체시장과 성산업은 유일한 돈벌이의 기회를 제공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성매매 세계시장을 확대하고 여성의 이주노동 증가는 이러한 성매매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요소가 되고 있다. 2002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은 최소 33만 명이며, 성매매 산업의 규모는 24조원으로 GDP의 4.1%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5) 이에 정부는 지난 2004년부터 성매매를 금지하고 성매매 여성을 지원하기 위한 상담과 자활, 직업훈련, 의료 및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 호주, 캐나다,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대규모 한국인 성매매 업소와 불법적 성매매 영업이 적발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국내 성매매에 대한 단속 강화가 해외 성매매 업소로의 알선과 성매매 시장을 국제적으로 확대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어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③ 가족 유지를 위한 여성의 역할과 부담 확대 사회위기와 빈곤의 확산은 가족 내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고 실질적인 부담을 증대시킨다. 이러한 부담에는 가족구성원을 보살피는 노동 뿐 아니라 가족 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가족 해체를 막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보이지 않는 노동 내지 정서적 수고들도 포함된다. IMF 이후 정리해고 등 고용불안은 남성 가장의 가족 내 권위를 실추시켰고, 이른바‘남편 기살리기’,‘아빠 힘내세요’류의 캠페인들이 등장하면서 여성은 가장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갖가지 행동을 요구받았다. 또한 지속되는 사회위기가 가족 해체를 증가시키고 결혼, 출산을 통한 가족 형성이 지연되는 현상이 급격한 속도로 확산되면서 최근 몇 년 사이 이러한 가족과 재생산에 대한 개입 - 특히 저출산을‘극복’하기 위한 대책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부는 한편으로 가족 내 돌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사회적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하면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혼을 방지하고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제도와 프로그램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입법한 이혼숙려제도, 결혼한 가정이나 다자녀 가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의 도입 배경에는 가족 형성 지연과 가족 해체 증가가‘경제성장의 기반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진단이 깔려 있다.6) 이렇게 추진되는 가족정책은 여성을 여전히‘가족안의 존재’로 한정하거나, 가족위기가 초래할 사회 재생산의 위기를 막기 위해 여성의 모성과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수고를 활용하기 위한 전략으로 탈바꿈할 가능성이 크다. 이로써 여성은 적극적인 노동시장 참여를 통해 부족한 노동력을 메워야 할 주체이자, 많은 자녀를 낳아 출산율을 유지하고 또한 가족 해체를 막기 위해 애써야 할 주체로서 이중 삼중의 역할을 동시에 요구받게 되는 것이다. (3) ‘성평등’으로 포장된 경쟁과 배제의 논리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에서 여성은 빈곤과 폭력의 1차적인 희생자가 되었고 또한 불안정한 자본주의를 유지해 나갈 새로운 이윤의 창출과 경제 성장, 사회 재생산을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성차별적 구조와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적극 활용됨은 물론이고, 최근에는‘양성평등’과 같은 페미니즘의 담론들까지 역으로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여성의 불만을 은폐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여성인력 활용을 통한 경제성장’의 논리는 여성에게 새로운 기회가 제공되고 있음을 강조하며 여성의 자기개발이 곧 경제적 독립과 자아실현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하고 있다. 이는 최근 언론지상에 부쩍 늘어난 여성 고위직 진출 확대에 대한 보도, 단골로 등장하는 각종 고시 여성합격자 비율 기사 등 이른바‘여풍신화’와 무관하지 않다. 정부 또한 여성의 자아실현과 자기개발 욕구가 증대하고 있다며 “여성 스스로 사회진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과감히 걷어낼 것”7)을 주문하고 있다. 실제로 남성·정규직 중심의 평생고용이 해체됨에 따라 고학력 여성의 고위·전문직 진출 기회가 일정하게 확대되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의 능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노동유연화 정책은 고학력 고급인력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생계유지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출혈 판매하는 여성들의 현실과 확산되는 여성 저임금 불안정노동의 폐해를 은폐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또 한편에서는 여성의 더 많은 (그러나 지위 수준이나 고용의 질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 진출, (여성의 가사전담자로서 지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진행되는) 여성의 일·가정 양립이 곧 ‘양성평등’이며, 여성이 수행하는 돌봄노동을 사회서비스로 전환하는 것이‘여성을 가사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는 논리까지 등장하고 있다.‘양성평등 사회분위기 조성’이 곧 획기적인 저출산 대책이라고 주장하여 이목을 끌고 있는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8)에 등장하는 양성평등이란 부모 모두가 육아휴직을 사용하게 하는 제도 정착과 여성의 파트타임 근무와 탄력근무제 등 이른바‘친가족 근로형태’의 활성화를 뜻한다. 지난 9월 20일 발표된 정부의 사회서비스 확충전략이 표방하는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또한 대다수 주변화 된 여성의 저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처럼 정부와 자본에 의해 왜곡되는‘성평등’ 담론은 대다수 여성의 불안정한 노동을 비가시화하며 각종 노동관계법과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되고 있는 여성의 현실을 외면하게 한다. 정부는 이러한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지 않은 채 다수 여성들을 더욱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있는데, 2000년대 초반부터 다양한 분야에서 확대 시행되고 있는 여성할당제나 올해부터 시행된 적극적 고용개선조치가 일부 공공부문이나 대규모 사업장 여성에게만 혜택을 주고 있는 문제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3. 한미 FTA와 한국여성의 삶 (1) 한미 FTA를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 현재 4차 협상까지 진행된 한미 FTA 협정문 초안은 물론 협상 결과가 한국사회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는 여러 견해들 중에서‘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실제 협상 테이블에서 여성에 관한 의제들이 다뤄지지 않는다고 해서 한미 FTA가 여성에게 가져다 줄 변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미 FTA 자체는 물론 그를 둘러싼 논의에서‘여성’이 사라지는 것은 초국적 자본과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부의 의도적인‘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부와 자본이 말하는‘한미 FTA가‘한국’에 미칠 영향’이란 곧 국내외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을 얼마나 증대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한미 FTA 협상의 우선 원칙으로 삼겠다는 ‘국익’이란 애당초 민중의 이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는‘우리의 선택’, 21세기 대한민국의 전략’등 마치 모두를 위한 것 인 냥 포장되고 있다. 여기서 한미 FTA가 민중의 삶과 뗄 수 없을 만큼 긴밀히 연결된다는 사실은 가시화되지 않으며, 그것이 여성에게 미칠 영향은 더 깊숙이 가려진다. 때문에 한미 FTA와 여성의 삶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미 FTA가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것, 즉 지금까지 한미 FTA와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여성의 문제를 배제하고 비가시화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칠 영향과 문제점을 진단하기에 앞서 젠더 시각으로 한미 FTA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크게 네 가지 부분을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한미 FTA가 여성의 삶에 미칠 총체적인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WTO 체제 내에서 양자간 특히 미국과의 FTA는 상품과 서비스, 투자와 금융은 물론 이전에는 공공부문으로 간주되던 부분들까지 모두를 자유무역의 대상으로 삼는 만큼 단순한 자유무역협정이라기보다는‘포괄적 경제통합협정’에 가까우며 그만큼 개별 국민에게 미칠 영향은 총체적일 수밖에 없다. 즉 협정문 각 장에 수록된 내용들이 해당 분야에 가져올 직접적인 변화만 초래할 것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할 문제가 아니다. 이제까지 한미 FTA를 둘러싼 분야별 찬반논쟁의 방식 -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특정한 산업이나 의료, 교육, 문화 등 특정 분야별로 나타날 개방의 효과가 각각 이익인지 손해인지를 따져보는 방식으로는 한미 FTA와 민중의 삶의 총체적 연관성, 특히 여성의 삶에 미칠 영향을 드러내기 어렵다. 농업 피해는 서비스업 성장으로 상쇄하고 결국 그 합계가 +이면 이익이고 한미 FTA는 ‘국익’에 부합한다는 정부의 엉터리 덧셈뺄셈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우리의 논의는 그 이익의 실체가 민중의 것이 아니며, 경제, 고용, 복지는 물론 가족과 사회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열악한 삶과 억압을 더욱 구조화한다는 것이 한미 FTA의 진정한 폐단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기존의 성별 권력관계를 활용하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칠 영향을 판단할 때 어떤 산업 분야의 여성에게는 이익이고 또 다른 여성에게는 불이익을 준다는, 각기 다른 상황에 있는 여성들의 이익과 손해를 비교하는 것 또한 적절치 않다. 이제까지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성별분업구조를 활용하고 여성의 주변적 지위를 강화하는 방식을 필연적으로 택해 왔으며, 전문직 여성이든 저소득층 여성이든 누구도 신자유주의가 재구조화해나가는 성별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한미 FTA가 이러한 경향을 더욱 확대할 것이며, 이전의 어떤 경제협정 보다도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 그 가공할 위험성이 있다. 셋째, 미국의 정치·군사적 전략의 변화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또한 통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한미 FTA 체결이 단지 미국과의 경제적 통합 뿐 아니라 종속적인 정치적·군사적 한미동맹을 완성시킬 것이라는 예측이 이미 지배적이다. 미국은 이미 이스라엘, 모로코 등 각 대륙 군사정치적 요충국과 FTA를 채결하여 정치·군사적 체제와 경제동맹을 결합하고 자신의 경제·정치·군사적 패권화 수단으로 확장해 왔다.9) 한국정부는 올해 2월 한미 FTA 협상 개시에 앞서 미국이 한반도를 전방위 군사기지로 전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승인하였고, 그 대가로 군대를 동원하여 평택을 짓밟고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아온 농민들을 내몰았다. 한미 FTA는 전략적 유연성과 더불어 미국의 동북아 패권전략을 뒷받침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를 더욱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북한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미국의 대북압력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에 대한 패권적 개입은 남북한 주민 모두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이 여성에게 더 많은 폭력과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통합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는 또한 평택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는 여성농민의 투쟁과 한미 FTA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투쟁이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넷째, 여성 내부의 차이에 따라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연대를 확장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들 사이의 격차를 더욱 벌여놓을 뿐 아니라 그러한 차이를 활용하여 또 다른 착취구조를 형성함으로써 여성들의 연대와 집단적 세력화를 가로막는다. 이는 한 국가 내에서의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경향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사회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계급·계층, 인종, 성정체성, 장애여부 등 다양한 차이를 지닌 여성들에게 미치는 각기 다른 영향과 그 연관 관계를 분석한 사례는 많지 않다. 또한 한미 FTA는 우리나라 여성과 또 다른 방식으로 미국 여성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에 대한 분석도 찾아보기 어렵다. 앞으로 한미 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은 한미 FTA 당사자인 한국과 미국, 그리고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거나 추진하고 있는 여러 나라 여성들의 경험과 현실을 이해하고, 더 많은 연대를 모색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여성의 목소리와 힘을 모아야 한다. (2) 한미 FTA가 여성의 삶에 미칠 영향 ① 여성노동자의 고용불안과 비정규직화 한미FTA로 인해 기업간 경쟁이 심화되고 M&A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많은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정리해고의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또한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투자장벽’으로 보는 미국의 압력이 최근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비정규직 관련 법 개악과 맞물린다면 한국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다수 비정규직으로 대체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10) 한미 FTA가 체결될 경우 나타나게 될 이러한 노동시장의 변화는 여성노동자를 1차적인 희생양으로 삼게 될 것이며, 이는 굳이 다른 나라의 사례를 살펴보지 않더라도 IMF와 UR 이후 나타난 여성노동시장의 변화에서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 하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우선 해고와 퇴출, 비정규직 전환의 1순위가 되었다. 98년 한 해 동안 권고사직, 정리해고 및 명예퇴직 등의 이유로 퇴출되어 고용보험 피보험자격을 상실한 노동자는 27만명이며, 여성 상실자수의 비율은 모든 산업 부문에서 남성에 비해 높게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금융보험업(여성 20.9%, 남성 13.5%)과 부동산 및 임대사업 서비스업(여성 20.4%, 남성 15.9%), 교육서비스업(여성 26.2%, 남성 15.3%), 제조업(여성 15.7%, 남성 12.1%) 등에서 여성 상실율이 남성보다 특히 더 높게 나타나, 이들 분야의 구조조정 과정에 여성 우선해고가 존재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11) 또한 IMF 당시 급격한 경제위기와 이후 양적 지표상의 경기 회복 과정에서 여성노동이 상대적으로 급격히 감소하고 빠른 회복율을 보이는‘안전판기능’을 수행했으며, 특히 그러한 현상은 여성노동자 집단 중에서도 저연령층, 저학력층, 하위직에게 집중되었다.12) 이 시기를 전후로 여성노동자의 임시, 일용직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여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여성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IMF 이후 구조조정이 집중되었던 금융산업의 경우, 하위직 여성의 퇴직율이 높고 동시에 전체 비정규직, 그 중에서도 여성 비정규직 비율이 크게 증가하여 당시 여성노동시장의 변화 양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금융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농협중앙회, 제일생명 등이 시행한 사내부부 우선 해고는 여성노동자를 생계보조자로 보는 성역할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간접차별로, 노동 유연화 과정이 기존의 성 불평등 구조를 어떻게 활용, 강화하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1993년 UR 이후 유통시장 개방에 따른 여성노동시장의 변화를 살펴보면 초국적 자본의 국내 진출과 규제 완화, 기업간 경쟁 심화가 여성고용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다.13) 한국정부는 1989년부터 단계적인 유통산업 개방 조치를 실시해 왔고 UR 협상 과정에서 1993년말 투자제한 업종을 제외한 모든 업종을 전면 개방하는 최종양허안을 제출했다. 이후 수도권 지역 유통시설 신축 허용, 할인판매에 대한 규제 완화, 외국인 투자기업 부동산 취득 제한 완화, 판촉사원 파견 허용 등 규제 완화 조치가 시행되면서, 90년대부터 대기업을 중심으로 재구조화되던 국내 유통산업은 더욱 대형화·독점화되었고, 하이퍼마켓과 대형할인점을 중심으로 한 초국적 유통기업의 진출도 확대되었다. 유통시장 개방과 유통업체 간 경쟁 심화는 유통산업 고용구조를 상용직 중심에서 임시직 중심으로 전환하여 불안정한 고용계층을 확대시켰고, 특히 판매노동과 계산노동을 중심으로 여성 비정규직, 임시직 고용을 크게 증가시켰다. 또한 여성 직종화, 영업시간 연장을 통한 매출증대를 특징으로 하는 유통업의 활성화는 장시간 영업에 따른 시간제 노동력의 필요와 가사전담자로서 기혼여성들의 분절화 된 노동시간을 맞물리며 기혼 시간제 여성의 고용을 증가시켰는데, 이는 주부라는 지위로 여성을 이차적 노동자 지위에 가두는 가부장적 성별분업을 바탕으로 여성을 질적 저하를 수반하는 고용형태에 배치하는 과정이었다. 한미 FTA 추진 과정에서 유통산업은‘시장개방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바꾼’대표적인 사례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 롯데 등 국내 대기업이 세계 1·2위 유통업체를 이기고 세계시장까지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성공신화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 기업의 성공은 유통노동자, 특히 기혼 여성노동자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착취, 노조 설립 자체도 허용하지 않는 반노조정책의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쟁의 승자가 국내 기업이냐 외국 기업이냐는 노동자에게 조금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경쟁의 격화 자체가 곧 극단적인 착취를 의미할 뿐이다. ② 농업의 몰락과 여성농민의 빈곤화14) 지난 한미 FTA 2차 협상 당시 웬디 커틀러 미 협상단 대표는“한국 농산물 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미국의 최고 우선 순위”라고 강조하며 농업 분과 양허 수준을 최대한 높일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한국정부 스스로도 한미 FTA로 인한 농업의 피해는 심각한 수준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미 수년전부터 한국의 농업과 농민은 개방농정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으며, 한미 FTA는 양허 수준과 무관하게 한국 농업을 회생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갈 수밖에 없다. 주지하다 시피 미국의 농업 규모는 경지 면적(한국의 105배)으로 보나, 농가인구 1인당 경지면적(한국의 58배), 농산물 수출액(한국의 35.4배)으로 보나 한국의 농업 규모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며, 2003년 현재 한국의 전체 농산물 수입 중 미국으로부터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27%에 이르는 반면, 농산물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머무는 등 이미 대미농산물 무역수지는 만성적인 적자 상태에 있다. 때문에 한미 FTA가 체결될 경우 한국의 농축산물 생산액 감소 추정액은 최소 2조2천억에서 최대 8조8천억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쌀까지 개방할 경우 그 규모는 2001년 기준 한국 농업총생산의 45% 수준으로 실로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측된다. 한미 FTA로 인한 피해는 농업 생산 뿐 아니라 농업 정책, 농협, 농산물 유통시장 구조 전반의 피해를 초래하는데, 농협의 경우 특별법으로 인한 각종 혜택이 위협을 받으면서 공금고와 정책자금 수신 등의 주요 수입원은 물론 국가의 보조를 받는 농협 농작물 재해 공제나 비과세 통장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또 규제 완화로 인해 미국의 거대 농산물 수출회사들이 한국 도매법인을 인수하게 된다면, 국내 주요 도매시장은 수입농산물 유통시장으로 전락하고 유통 독점에 따른 피해는 농민과 소비자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엄청난 농업의 변화는 여성농민의 열악한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고, 사실상‘농민’으로서 지위 자체를 위협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방농정 하에서 여성농민의 생산자이자 가족과 지역사회 돌봄자로서 이중 역할은 더욱 확대되었고, 농가인구 특히 고령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늘어나는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농업 자체의 몰락은 여성농민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삶의 터전으로부터 분리를 가속화 하고 있다. 한미 FTA로 인한 농업생산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농민의 대대적인 퇴출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여성농민들은 농사일에서 퇴출되거나 저임금 농업노동자로 전락할 것이며, 농촌에 남아 계속 농사를 짓는다 하더라도 여성 농민의 빈곤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농가소득의 하락, 농사의 규모화, 빚의 규모화로 인해 여성 농민들은 과중채무자나 장기체납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며, 과중한 노동의 부담과 낙후한 사회보장제도는 여성 농민들의 건강까지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다. ③ 사업서비스의 활성화와 여성 일자리의 양극화 한미 FTA 협정문 초안에 포함된 서비스·투자 관련 협상의제는 투자, 국경간 서비스 무역, 일시입국, 금융서비스, 통신·전자상거래 이상 6개로, 구체적으로 법률, 회계, 세무, 방송광고, 교육, 보건의료, 영화, 뉴스제공, 통신, 금융서비스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정부는 한미 FTA 협상에서도 가장 관심있는 분야가 서비스 시장이라고 전제하면서 “서비스를 가지고 우리가 미국에 더 팔자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 시장을 열어서 우리 서비스의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것”으로 개방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 시장 개방은 단순히 몇몇 업종을 개방하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발전전략’ 즉 금융세계화에 더 깊숙이 편입하려는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법률, 회계, 세무, 방송광고, 정보통신, 금융서비스 등 이른바‘사업서비스업’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업체를 지원해주는 업종들을 말하는데, 이 부분의 팽창은 금융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초민족기업이 결집하는 금융화 된 세계도시에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사후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업서비스의 확대는 금융화의 양상을 반영하는데, 한국의 경우에도 97년 IMF 이후 증권 및 선물거래, 선물중개, 투자자문사 등 금융보험 관련 서비스업 종사자는 크게 증가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가 표방해온‘선진통상국가’,‘동북아 금융·물류허브’는 한미 FTA를 거치며 금융자유화를 완성하고, 사업서비스 산업을 확대하여 이를 기반으로 해외시장까지 개척한다는 계획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활성화된다 하더라도 이는 금융기관이 집중된 극히 제한된 공간에서만 가능할 뿐 남한 경제 자체의 성격을 지식기반경제로 바꿀 만큼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사업서비스에 종사하는 이른바 ‘전문직업인’들 외에 이들을 지원하는 일군의 전통적 블루칼라, 핑크칼라 노동자들에게는 극단적인 저임금과 고용불안만이 강요되는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15) 요컨대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을 통해 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여기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포부는 사실상 극히 일부의‘괜찮은 일자리’와 다수의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를 확대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업서비스업의‘보조적’일자리들은 이미 98년부터 파견법상 근로자 파견이 합법화된 직종들로, 비서, 타자원, 전화교환원, 건물 청소원 등은 대부분 여성 간접고용 노동자들로 채워진 대표적인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들이다. 정부가 말하는‘서비스 시장 개방을 통한 여성 일자리 창출’의 실체는 여성 일자리의 극단적 양극화와 대다수 여성의‘나쁜 일자리’를 의미할 뿐이다. ④ 공공·사회서비스 분야 개방과 여성의 이중부담 확대 한편 서비스 부문에서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공공부문에 포함되는 전력, 가스 등 에너지 분야, 물 분야의 시장개방도 문제가 되는데 이러한 공공서비스 부문에 대해서는 ‘투자’ 조항을 중심으로 공기업 매각이나 외국인 소유지분 확대를 통한 금융화·사유화가 추진되며, 공공재 성격을 가지는 이러한 기본서비스의 금융화·사유화는 가격 인상, 서비스 질의 하락 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쉽게 예상된다. 또한 보건의료와 교육분야는 서비스 시장 개방에서 특히 핵심적인 부분인데, 한미 FTA를 통해 지금까지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었던 최소한의 공공성은 없어지고 전면적으로 시장화 될 처지에 놓여있다. 이미 한미 FTA 이전부터 정부는 보건의료와 교육을 ‘서비스 상품’으로 규정하고 이들 ‘산업’의 경쟁력 제고해야 한다는 근거로 자발적인 개방 의사를 밝혀 왔다. 한미 FTA는 교육비와 의료비의 인상, 건강보험 등 적절한 공적의료보장체계의 축소, 이용 가능한 서비스 수준의 계층간 격차를 확대하여 저소득층의 생존권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16) 국민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공공서비스의 시장화·상품화는 특히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영향을 가져다준다. 먼저 교육비, 의료비를 포함한 생활비 인상은 주로 가족 내에서 보살핌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여성들로 하여금 더 많은 무급 돌봄노동으로 과도한 비용부담을 대신할 것을 강요하게 된다. 또 이미 빈곤의 여성화가 만연한 현실에서 가난한 여성들의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워지고, 그만큼 물, 가스, 전기 등 공공재 제공을 더 많이 차단당하거나 여성들이 교육받을 권리, 건강을 유지할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남성보다 의료시스템을 더 많이 필요로 하지만 더 빈곤한 여성들(특히 여성노인)일수록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기회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회서비스 분야는 대체로 여성고용이 집중되어 있는 분야이며, 향후 이들 서비스의 시장화 경향이 가속화되고 민간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면 사회서비스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노동의 가치는 더욱 더 평가 절하되고, 이들 분야 여성노동자들의 안정적 노동조건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4. 한미 FTA에 대한 여성운동의 대응과 과제 (1) 한미 FTA저지 여성대책위 구성 ‘한미 FTA저지 여성대책위’가 출범한 것은 다른 부문 대책위 보다 다소 늦은 지난 6월초였다. 이미 많은 여성단체들이 한미 FTA저저 범국민운동본부에 함께 하고 있었으며, 여성대책위는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농업개방 정책의 최대 피해자이자 또한 한미 FTA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여성농민들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구성되었다. 현재까지 여성대책위에는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 경기자주여성연대, 목포여성회,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여성영화인모임, 반미여성회, 세계화반대여성연대, 인천여성회, 전국여대생대표자협의회, 전국여성노동조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진주여성회,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한국노총 여성위원회, 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의 여성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경남, 전북, 제주, 울산, 광주전남 이상 5개 지역에 지역 여성들의 네트워크가 구성되어 한미 FTA에 반대하는 지역 차원의 교육, 홍보, 실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한국 여성농민, 여성노동자, 여성단체들이 각 부문에서 다소 산발적으로 여성의 생존권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운동을 진행해 왔다면, 한미 FTA저지를 위한 여성대책위 구성과 이후 다양한 연대활동은 그동안 각자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를 모으고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운동에서 여성의 통합력을 높여왔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2) 향후 과제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한국 여성들의 한미 FTA 저지 운동은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보다 확대,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한미 FTA 협상 저지를 넘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여성운동과 폭넓은 국내외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미 FTA는 이미 여성 빈곤과 차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심화시킨 한국사회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의 일부이며, 때문에 한미 FTA에 반대하는 운동은 협상 저지라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여성운동으로 보다 적극적 의미를 찾아가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은 노무현 정부와 국내 자본의 능동적인 발전전략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때문에 미국의 과도한 협상 요구를 막거나 협상 중단을 이끌어 낸다 하더라도 ‘가장 최악의 경우’를 ‘잠시’ 방어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보다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지금 운동에 함께하고 있는 여성들 뿐 아니라 장애여성, 성소수자여성, 빈민여성 등 보다 많은 부문의 여성들과 연대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해외 여성들과의 네트워크를 확대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한미 FTA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운동 또한 보다 힘 있게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한미 FTA 반대 운동을 보다 많은 여성대중이 공감하고 참여하는 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한 의제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미 FTA저지 여성대책위는 한미 FTA가 초래할 여성 빈곤과 비정규직화, 가정과 직장 모두에서 여성의 부담 확대, 미국산 쇠고기 등 질 낮은 수입농산물과 유전자 조작 식품의 문제 등을 주요 이슈로 활동해 왔으나, 여성들의 더 많은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구체적인 이슈와 다양한 행동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이미 미국과 FTA를 추진한 국가들에서 나타난 여성들의 변화와 문제점을 널리 알리고, 현재 한국의 여성관련 이슈들 - 저출산·고령화, 비정규직, 여성인력개발, 사회서비스 확충 등 - 에 대한 대응과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 전체 한미 FTA 저지 운동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여성에 대한 빈곤과 차별,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자기 위상을 정립하도록 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의 한미 FTA 저지 운동에 매우 광범위한 분야의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한미 FTA가 국민에게 미칠 악영향을 분석하고 다양한 이슈를 제기하고 있지만 남성과 여성에게 미칠 다른 영향을 고려하거나, 기존의 성별 위계질서 강화에 대한 분명하고 강력한 문제제기는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한미 FTA 저지를 위한 여성들의 운동은 한미 FTA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여성의 힘을 모으고 여성의 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한국의 사회운동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는 한국사회의 대안적인 세계화 전략이 여성의 욕구와 경험, 지혜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1) 이 글은 지난 11월 24일 열린 국제토론회 ‘FTA에 반대하는 여성들’에서 발표하기 위해 작성한 내용을 요약․ 수정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여성신문, 2006. 3. 31, 「한·미 FTA 여성에 독인가 약인가」 본문으로 3) 김유선,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2006.8) 결과」,『노동사회』115호, 2006.11 본문으로 4) 김안나, 「한국사회 여성빈곤과 빈곤대책」, 『보건사회연구』제26권 제1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본문으로 5) 여성부(2004), 「성매매 없는 세상 아름다운 동행」. 본문으로 6) 여성가족부(2006), 「1차 건강가정기본계획(안)」. 본문으로 7) 서울경제, 2006.1.13,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 칼럼 「성장의 새로운 동력 ‘여성」. 본문으로 8) 최숙희·김정우(2006), 「획기적인 출산율 제고방안」, 삼성경제연구소., 최숙희·김정우(2005), 「외환위기 이후 저출산의 원인 분석」, 삼성경제연구소. 본문으로 9) 배성인(2006), 「한미 FTA와 전략적 유연성」, 『한미 FTA 국민보고서』, 한미 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 엮음. 본문으로 10) 차남호·이상훈(2006), 「한미 FTA와 노동」, 『한미 FTA 국민보고서』, 한미 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연구단 엮음. 본문으로 11) 조순경(1999), 「구조조정의 성별 불균등 구조」, 『산업노동연구』제5권 제2호(1999). 본문으로 12) 장하진(2000), 「산업구조조정과 여성노동시장의 변화: 금융산업을 중심으로」, 『한국여성학』제16권 2호. 본문으로 13) 이하 이숙진(2000), 「글로벌 자본의 현지화와 지역여성의 정치」, 이화여대대학원 여성학과 박사학위 청구논문. 참고 본문으로 14) 이정옥(2006), 「한미 FTA 체결로 인한 한국사회의 변화와 농업, 여성농민에게 미치는 파괴적 영향에 대하여」,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치는 경제사회적 영향에 대한 동향분석을 위한 전문가포럼(제2차), 한국여성개발원., 심문회(2006),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여성농민의 현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정책포럼 한미 FTA와 여성노동의 변화 토론문. 등 참고 본문으로 15) 박준형(2006), 「서비스 시장 개방과 금융세계화」, 『한미 FTA, 이미 실패한 미래』, 사회진보연대 외. 참고 본문으로 16) 박준형, 앞의 글. 본문으로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자본주의의 기원과 미래 21세기 첫번째 10년의 중반을 넘어선 지금 두드러지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자본주의의 위기다. 외채상환을 빌미로 강제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실업과 빈곤 속에서 점증하는 대중적 분노와 원한의 정치, 만성화된 종족간․인종간 갈등과 내전 등은 남반부 대부분의 지역에서 대부분의 인구를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케인즈주의적 사회-복지국가 모델의 폐기와 금융시장 부양을 위한 정책적 지원이라는 중심부 국가에서의 신자유주의 반혁명은 극소수 금융자산자들에 의한 부의 독점을 조장하고 있다. 또한 2003년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본격화된 미국의 예방전쟁․선제공격이라는 독트린은 오히려 더 큰 폭력과 무질서의 혼란을 야기하며 미국의 무능력을 노출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강의』(백승욱, 그린비, 2006)는 바로 이러한 정세 속에서 “세계체계 분석과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시각”을 택하면서 “우리가 통념으로 가지고 있었던 많은 사고들을 재검토”(p.8)하고자 한다. 세계체계 분석(world-system analysis)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기되는 것은 남한에서 1980년대 사회성격논쟁의 한계와 기존 사회주의관이 현시점에서 지니는 난점이다. 사회성격논쟁의 경우,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기반을 두고있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20세기 이후 새롭게 나타난 미국 자본주의 변화를 포괄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즉 19세기 말 이후 영국 자본주의 모델이 위기에 처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독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모델, 즉 금융과 산업자본 카르텔 등 수평적 통합을 통해 결합한 국가 주도적 자본주의가 등장한다. 한편 이와 경합하는 다른 자본주의 모델, 즉 법인기업을 중심으로 수직적 통합을 통해 거래비용을 내부화하는 미국의 자본주의가 동시에 출현했던 것인데 레닌의 제국주의론에는 결국 승리한 미국 자본주의가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현실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평가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국유화를 내세우며 결국 소비에트나 평의회 등 대중운동을 부차화 내지 억압하게 된 역사적 경험이나 최근 중국의 급격한 자본주의 발전을 살펴보면, 16~17세기 영국과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따라잡기 위해서 구사한 일종의 중상주의적 전략과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노선이 매우 다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효과의 차원에서 보자면 굳이 다르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1) 왜냐하면 중상주의란 자국의 생산구조를 고도화하여 세계경제에 더 나은 조건으로 편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중국이나 소련의 사회주의는 결국 반주변부로 진입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종결된 것이며, 따라서 사회주의 국가들을 자본주의 역사의 ‘외부’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세계체계 분석은 이처럼 20세기 새로운 자본주의의 등장을 둘러싸고 혼란을 노정 했던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보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세계체계 분석이 정립되기까지는 브로델(F. Braudel), 폴라니(K. Polany), 월러스틴(I. Wallerstein), 아리기(G. Arrighi)의 기여를 우회할 수 없다. 세계체계 분석의 전사: 브로델과 폴라니 세계체계 분석은 다른 누구보다 브로델의 연구성과를 상당 부분 계승한다. 브로델은 주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국역: 까치, 1997)에서 자본주의를 장기지속의 시간대에 위치 짓고, 삼층도식의 최상층에 자리잡은 독점의 영역으로 파악한다. 장기지속은 “구조의 시간”, 즉 “구조가 지속되는 시간”으로서, ‘먼지’에 불과한 사건의 단기 시간대 및 지속기간이 너무 길어 시간의 의미가 사라지는 초장기지속과 구분된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다루는 시간대는 바로 이 장기지속의 시간대이며, 장기지속은 다시 복수의 콩종크튀르(conjoncture)와 맞물려 복합적인 시간대를 형성한다. 브로델에게 장기지속의 시간대는 13세기 북부 이탈리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와 더불어 브로델은 자본주의를 삼층도식으로 파악하는데 1층은 물질문명, 2층은 시장경제, 3층은 자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독특한 점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상호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는 투명한 완전경쟁시장으로서 C-M-C'의 원리, 즉 자본이 축적되지 않는 교환의 영역이다. 자본주의는 바로 경쟁을 배제하고 독점을 통해 이윤을 축적하는데, 레닌이 경쟁의 상부구조로서 독점을 언급했듯이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독점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독점의 사례는 원거리 무역을 독점한 유럽의 대상인인데, 바로 이들이 초기 자본주의 역사의 주역들이다. 독점을 향한 경쟁은 반드시 국가의 지원을 조건으로 하고 있으며 그 공간적 범위는 세계시장으로 확대된다. 브로델의 자본주의관은 국가 없는 독점(자본주의)의 불가능성, 세계경제(world-economy)로서의 자본주의의에 대한 이해, 자본운동의 범위로서 생산 뿐 아니라 금융과 유통의 영역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함의를 지닌다. 하지만 브로델에게 자본주의가 생산의 영역에 자리잡고, 상부구조에 자리잡게 된 19세기 이후에 나타나는 변화에 대한 분석은 공백으로 남는다. 이와 관련하여 시장경제의 자기조정적 변화와 이에 대한 사회의 ‘자기보호’ 기제의 작동을 분석하는 폴라니의 작업이 주목된다. 19세기 영국이 자본주의를 선도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주된 특징은 자본이 생산의 영역으로 진출했다는 것, 즉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는 유럽에 한정된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비로소 전지구적으로 확산된 시기이기도 하다.2)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국역: 민음사, 1997)이 다루는 것이 바로 19세기 자본주의의 변화에 대한 분석이다. 폴라니의 분석은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모순에서 시작된다. 19세기 말 영국 헤게모니가 위기에 처하자 그동안 헤게모니를 지탱해왔던 금본위제는 내부로부터 사회를 붕괴시키는 기제로 작동한다. 금 1온스당 1파운드라는 가치를 유지하고 파운드를 국제적인 건전화폐로 유지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는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은 불가능한데, 이러한 금본위제를 정당화한 것이 이른바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의 이데올로기였다.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에 대한 신앙은 전국시장의 형성과 동시적인 과정이다. 전국시장은 16~17세기 네덜란드를 따라잡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중상주의적 국가전략에 의해 추동되는데, 전국시장이 형성되려면 국가간섭과 더불어 값싼 생필품의 대량공급을 뒷받침하는 생산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자본의 생산영역으로의 진출이 시작되며 그 과정에서 토지, 노동력, 화폐 등의 허구적 상품이 등장한다. 바로 이 허구적 상품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자기보호 기제가 작동하는데(이중운동) 그 대표적인 것이 초기에 농촌 공동체를 수호하고 빈곤과 기아의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를 구제하려는 스핀햄랜드법이다. 그러나 이는 보조금에 의존하는 빈민을 창출했을 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후 등장한 신구빈법은 빈민들에게 극악한 구빈원 생활과 공장노동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면서 ‘기아의 규율’을 통해 오히려 노동력의 상품화를 촉진하였다. 또한 경제의 파국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등장하지만 이 역시 19세기 말 점차 괴리되어 가는 자유무역과 금본위제의 안정에는 실패한다. 그 결과 20세기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에 대한 사회의 자기보호 기제는 파시즘, 사회주의, 뉴딜이라는 세 가지 형태로 등장한다. 시장경제의 위기에 대한 사회의 자기보호는 사회주의처럼 급진적 대안의 형태일 수도 있고 파시즘과 같이 반동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중운동, 즉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에 대한 사회의 자기보호 기제의 작동이라는 분석틀은 노동력의 상품화과정에서 국가의 억압적 역할을 조명하고, 전지구적 차원에서 19세기 및 20세기로 넘어가는 과정 중 나타나는 전반적인 변화를 파악하는 데는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 월러스틴과 아리기의 세계체계 분석 1970년대 등장한 세계체계 분석은 앞선 시기부터 제기된 지적운동의 연장선상에 자리잡고 있다. 세계체계 분석의 이론적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종속이론과 자본주의 이행논쟁이다. 종속이론은 제3세계의 저발전과 후진성을 근대화의 ‘과소’가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불균등 발전의 결과로 파악하고 핵심적으로 ‘종속’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로부터 중심과 주변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종속이론은 점차 근대화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를 비교하는 요소론으로 경도되면서 국가중심적 사고로 회귀한다. 종속이론의 또 다른 판본인 생산양식 접합론에서는 제3세계를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전(前)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접합이라는 틀로 분석하는데 여기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서구 자본주의와 동일시되고 근대화론의 기본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중심과 주변의 자본주의 발전이 상이한 경로로 분기한다는 종속이론의 문제의식는 이후 세계체계 분석을 통해 심화․발전된다. 돕(M. Dobb)과 스위지(P. Sweezy) 사이에 벌어진 자본주의 이행논쟁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로의 이행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중요한 논쟁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원동력을 둘러싼 돕과 스위지의 논쟁은 ‘내인론’과 ‘외인론’이라는 구도를 형성한다. 돕은 영국을 분석하면서 농민층의 분해와 여기서 비롯된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에서 이행의 동인을 참고자 하였고(내재적 발전론), 스위지는 전 유럽을 분석하면서 북유럽과 여타 유럽을 잇는 원거리 무역에서 나타나는 독점을 중시한다. 스위지는 여전히 자본주의를 19세기 근대 공업체계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불충분한 측면이 있었지만 일국적 차원에서 생산양식의 교체가 일어난다는 돕의 논지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세계체계론의 문제의식과 친화적이다. 월러스틴과 아리기는 일국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분석하는 기존의 지배적인 인식을 비판하며 세계체계로서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재과정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둘 사이에는 근대세계체계로서 역사적 자본주의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중요한 쟁점이 자리잡고 있으며 특히 아리기의 작업은 미국 헤게모니하의 현대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 자본주의 기원: 16세기 농업 자본주의 vs 13세기 상업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기원과 팽창을 분석하면서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에 대한 기존의 진화적이고 목적론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일단 자본주의 등장에 대한 월러스틴의 설명은 “정세론”이다. 즉 근대자본주의의 기원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영주제의 위기․국가의 위기․교회의 위기․몽골의 몰락이라는 정세적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가 세계체계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억압하던 영주․국가․교회가 위기에 처하면서 자본주의의 거점이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 흐름을 장악할 만큼 강한 집단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권력의 공백 상황에서 세계 각지를 정복해가던 몽골의 돌연한 유럽정복 중단이 유럽에서 자본주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기가 보기에 자본주의 출현에 대한 월러스틴의 ‘정세론’은 단지 조건에 불과할 뿐이며 자본주의의 메커니즘 속에서 해명되지 않기 때문에 불충분하다. 아리기는 또한 월러스틴이 자본주의 기원을 16세기로 설정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는 농업 내부의 기축적 분업에 의한 분화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장소만 바뀌었을 뿐 돕이 영국을 대상으로 ‘내재적 발전’을 도출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아리기는 자본주의 등장을 경쟁과 혁신이라는 틀로 설명한다. 여기서 자본주의 기원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동방과의 원거리 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당시 치열하게 벌어지던 국가들 간의 경합에서 금융자본을 지원하고 비로소 북부 이탈리아와 북부 유럽의 세계경제가 유럽의 세계경제로 통합되면서 자본주의 역사가 시작된다. 2) 근대세계체계의 구조: 중심-주변의 기축적 분업구조 vs 체계적 축적순환으로서 헤게모니 순환 『근대세계체계론』(국역: 까치, 2000)에 나타나는 월러스틴의 세계체계 분석에서 핵심적인 것은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기축적 분업(axial division of labor) 구조다. 이러한 분업구조 속에서 노동력은 임노동자나 노예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인종주의와 성차별구조에 따른 위계구조가 중첩되면서 세계 노동계급 내부에 성적․인종적 분할을 각인한다. 또한 국가간체계는 이 기축적 분업의 구조 속에서 제도화되며 영토주의적 논리에 따라 팽창하는 세계제국의 등장을 봉쇄함으로써 자본축적을 보호한다. 기축적 분업구조 속에서 재생산되는 계급적 불평등, 중심-주변의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근대세계체계가 재생산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체계를 합리화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자유주의 덕분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의의에 대해 월러스틴은 귀족과 부르주아의 계급투쟁으로 파악하거나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계기로서 이해해왔던 기존의 이해방식을 부인하고 20세기까지 서로 수렴․경합해왔던 세 가지 근대정치이데올로기(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급진주의)의 발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자유주의는 기회의 평등을 내세우며 능력주의/성과주의(meritocracy)를 통해 불평등한 위계구조가 부정되지 않도록 기능한다. 또한 전문가에 의한 점진적인 개혁, 즉 엘리트에 의해 통제되는 국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진보를 선호함으로써 보수주의의 반동을 제어하는 한편 도시 프롤레타리아, 식민지 인민 등의 ‘위험계급’에 대한 포섭을 시도한다. 그 포섭의 기제는 국내적으로는 보통선거권과 민족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사회복지국가, 국제적으로는 민족자결권의 수용과 발전주의다. 이 포섭의 기제가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했고 자유주의 이외의 이데올로기, 특히 사회주의마저 수렴될 정도였다. 반체계운동이 처한 모순은 다름 아닌 정당형태를 매개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이후 혁명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한 불만이 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들,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 제3세계 신생독립국 등 전 세계에서 동시에 터져나온 것이 1968년이다. 1968년 기존의 반체계운동에 대한 공격이 가장 격렬하게 이루어진 것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이었으며 이조차도 인민해방군의 무력진압과 지식인에 대한 공격이라는 비극적인 형태로 막을 내린다.3) 월러스틴의 반체계운동에 대한 분석은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와 한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측면이 있지만 기존 반체계운동의 실패에 대한 평가와 반성이라는 차원에서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아리기는 주저 『장기 20세기』4)에서, ‘체계적 축적순환’을 중심으로 헤게모니 순환의 역사를 설명한다. 아리기는 콩종크튀르를 콘드라티에프 곡선을 통해 설명하는 브로델과 월러스틴을 비판하며, 콘드라티에프 곡선은 장기적 가격변동의 경험적 산물일 뿐 그 자체로 이론적 함의는 없으며 자본의 이윤과 가격의 등락이 일치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근대세계체계 설명의 유용한 도구가 되기에는 한계적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아리기는 중심-주변의 구도를 배제하고 국가를 매개로 한 거대 자본들 사이의 헤게모니를 향한 경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아리기의 시도는 계급분석의 결여, 정치경제학 문제의식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중심-주변이라는 구도를 중심으로 모든 정세를 체계 전체의 문제로 환원하는 월러스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주저의 제목 “장기 20세기”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리기의 세계체계분석에서 분석의 주된 대상은 20세기 자본주의다. 이러한 점에서 아리기의 작업은 1840년대 이후 근대세계체계 이후 분석이 중단된 월러스틴에 비해 현대자본주의 분석이 훨씬 정교할 뿐 아니라 19세기 말 수정주의 논쟁 이후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자본주의 위기를 둘러싼 논쟁들의 한계를 보완한다.5) 아리기의 작업은 체계적 축적순환과 국가간체계의 모순적 결합으로서 역사적 자본주의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헤게모니 국가는 전지구적인 체계적 축적순환을 선도하는데 수익성과 이윤율의 하락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선도하는 새로운 체계적 축적순환으로 대체된다. 역사적으로 네덜란드, 영국, 미국은 세계헤게모니로서 체계적 축적순환을 선도하였던 국가들인데 이들은 각각 보호비용의 내부화(internalization), 생산비용의 내부화, 거래비용의 내부화를 통해 ‘조직혁명’을 달성하고 상대적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세계적 축적구조를 혁신하게 된다. 하지만 축적체계의 세계적 확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간체계라는 매개를 거쳐야한다. 국가간체계는 세계적 축적의 안정적 지속을 위한 상부구조로 볼 수 있는데 일례로 영국의 경우에는 영토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국가간체계, 미국의 경우에는 냉전으로 표상 되는 국가간체계의 수립이 세계헤게모니로 부상하는 데 관건적이다. 세계헤게모니를 효율성의 상대적 우위로 규정하는 월러스틴과 달리 아리기의 세계헤게모니는 다른 국가들에게 ‘발전의 길’을 제시하고 이를 따르게 하는 능력, 즉 보편성의 이상이라는 점에서 체계 전반을 재구성하는 지도력을 의미한다. 각각의 체계적 축적순환은 세계경제에서 투자와 고용의 영역에서 확대가 일어나는 실물적(물질적) 팽창국면과 이윤율이 하락하는 가운데 실믈적 팽창이 중단되고 급속한 금융화가 진행되고 기존의 세계헤게모니가 쇠퇴하면서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를 둘러싼 국가간 경쟁이 이루어지는 금융적 팽창 국면으로 구성된다. 금융적 팽창국면은 벨 에포크(belle epoque: 불어로 ‘좋은 시절’이라는 의미) 시기로서 고도금융이 성장하면서 실물적 팽창의 중단에 따른 징후적 위기(signal crisis)를 극복하고 이윤율을 회복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기존의 축적순환과 국가간체계가 붕괴하는 최종적 위기(terminal crisis), 즉 체계의 카오스가 발생한다. 새로운 축적양식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이는 세계체계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20세기 자본주의의 성립과 위기: 미국 헤게모니의 등장과 금융세계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사실상의 ‘30년 전쟁’)을 통해 미국은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를 놓고 경쟁하던 독일을 물리치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로서 새로운 체계적 축적순환을 이끌어가게 된다. 지정학적으로 유럽대륙과 떨어진 해양국가라는 점, 유럽 열강들과의 충돌을 야기하는 외부의 식민지 개척이 아니라 프런티어(frontier)라는 사고방식 속에서 내부의 식민지 개척을 추진할 수 있었던 점, 라틴 아메리카를 배후지로 둔 점 등은 독일에 비해 미국이 지닌 이점이었다. 미국 자본주의 내적 특징은 이종산업의 통합, 즉 연관 부문의 수직적 통합을 통한 법인기업(corporation)이다. 법인자본주의의 등장으로 미국 자본주의는 거래비용을 내부화함으로써 수익성을 제고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본회전 속도의 가속화, 대량생산과 대량유통의 결합에 따른 규모의 경제 출현, 소유자와 경영자의 분리에 따른 전문경영인의 등장과 노동과정을 통제하는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 즉 노동에 대한 실질적 포섭 등의 변화를 겪게 된다. 법인기업은 식민지의 독립 이후에도 투자의 자유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모색하면서 시장을 개척할 수 있었다.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서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고 전후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해결해야 했던 것이, 첫째 1929년 대공황의 교훈으로서 고도금융에 대한 통제, 둘째 복지국가와 소비주의6)를 매개로 한 노동계급의 체계 내 포섭, 셋째 발전주의를 매개로 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국가의 포섭이라는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건적인 것은 미국의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의지의 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새로운 세계질서의 수립에서 미국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에 대한 정치적인 합의가 아직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본격화된 ‘냉전의 발명’은 미국을 따라잡으려는 국가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사회주의적 발전주의와 자본주의적 발전주의로 경합하는 국가간체계로 정착된다. 그러나 1967/73년부터 미국 헤게모니는 정점에 도달하고 금융적 팽창국면이 시작되는데 오늘날 금융세계화가 전개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을 기점으로 쌍둥이 적자(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에 의해 금-달러 가치를 고정하던 브레턴우즈 체제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걸쳐 무너지고, 이후 변동환율제 시행, 자본이동 자유화, 공공채무의 증권화 등의 조치가 뒤따른다. 이로부터 금융화 국면이 시작된다. 그런데 20세기 말 금융화는 영국 헤게모니가 몰락하던 19세기 말 금융화와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국채시장이 팽창하면서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채무상태에 놓여 채권자(기관투자자)로부터 정책적 자율성을 갖기 어렵다는 점, 둘째 노동에 대한 포섭이라는 정치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자본주의 위기의 양상이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난다는 점, 셋째, 자본과 군사력이 미국으로 집중된다는 점, 넷째, 외향적이지 않는 미국경제의 특성상 제3세계에서 배제된 지역(제4세계)이 늘어난다는 것, 다섯째 과거의 민족해방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에 비견될만한 조직화된 (대중적) 저항이 부재하다는 점, 여섯째 동아시아의 비중이 커지면서 헤게모니의 지위를 넘보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외양적으로는 헤게모니의 쇠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자본과 군사력이 미국으로 집중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미국은 엄청난 재정적자와 무역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외부로부터의 엄청난 자본이 유입되어 부족분을 상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이라크전쟁 비용의 증가, 외국인의 미국 내 자산보유, 달러에 대한 동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의 발언권 증가, 경상수지 적자 등의 요인으로 인해 굉장히 불투명하다. 또한 국가간체계를 유리하게 재편하려는 미국의 정치․군사적 전략은 오히려 이라크에서 볼 수 있듯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제국’의 지배를 불안정하게 할 뿐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미래,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어느 때보다 더욱 증폭되고 있다. 앞으로의 쟁점 『자본주의 역사강의』는 세계체계 분석을 통해 앞서 언급한 것말고도 상당히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중에서 몇 가지 눈에 띠는 쟁점을 간단히 정리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1) 동아시아 자본주의 세계체계 분석에서 동아시아는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매우 독특한 함의를 지닌다. 동아시아는 유럽연합(EU)과는 달리 여전히 100여 년 전에 존재했던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대랍하고 있으며, 1950년대 이후 냉전 시대 현실사회주의 국가들과 최전선에서 대립하고 있는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와는 달리 일본의 부흥과 신흥공업경제(NIEs)의 고도성장으로 나타나는 발전국가의 모델이 등장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사회주의권이 세계경제에 편입되어 성장하면서 일본의 다층적 하청구도가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냉전 시기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조건은 남미가 “경제의 과잉”이라고 한다면 “정치의 과잉”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탈냉전 시기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갈등은 미국과 중국, 미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의 상호 관계와 맞물리며 복잡한 대립과 협력의 계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동아시의 지정학적 조건은, 특히 최근 북한 핵실험에 대한 운동진영의 이른바 ‘용인론’과 관련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역내 국가들간의 복잡한 함수 관계와 구분되는(혹은 단절하는) 사회운동의 역할은 무엇이며, 활동영역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아리기는 중국의 부상을 염두에 두고, 금융중심지인 제노바가 제국적 팽창의 군사적 중심인 이베리아 제국과 결합했던 역사적 경험이 반복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데, 본서에 언급된 대로 양자 사이에 융합(fusion)이 아니라 분기(fission)가 일어날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동아시아를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판단하여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보․한국과 일본의 이라크 파병단행․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지지 등 한미동맹 및 미일동맹을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그에 비례하여 각 지역의 반전평화 운동의 대응이 거세지는 만큼 융합이든 분기이든 그 과정은 상당한 갈등과 진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국면에서 동아시아 자본주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산과 금융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지만 이를 과연 새로운 체계적 축적순환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7) 오히려 한국의 주식시장이 초민족적 자본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상당히 취약한 토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8) 2) 자기비판된 사회구성체론의 복권과 노동자운동의 전망 저자는 곳곳에서 사회구성체론의 복권을 언급한다. 이는 한국 사회성격 논쟁으로부터 강의를 시작하는 것이나(pp.20~28), 세계체계 분석이 자본의 재생산과 관련된다면 사회구성체론은 지배관계의 재생산, 노동의 구체성이라는 차원에서 연관성이 있다는 지적(pp.40~3), 그리고 아리기의 세계체계 분석을 다루는 부분에서 사회구성체론의 복권 필요성을 제기하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pp258~64). 여기서 저자가 언급하는 사회구성체는 자기비판된 것으로서 반드시 기존의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단위일 수도 있고 더 작은 단위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세계경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의 재생산과는 달리 더 낮은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을 가리키며 그 기본단위는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은 알튀세르도 지적했듯이9)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결정적인 노동력의 재생산과 직결되는 문제다. 관련하여 본서에서는 근대적 주체의 생성이라는 차원에서 폴라니의 문제의식이 강조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근대적 노동자의 재생산에서 발생한 단절점은 ‘기아의 규율’을 통한 작업장으로의 강제동원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근대 자유주의 국가에서의 파편화된 정치적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근대 이후 보통선거권을 획득하기는 했지만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역설적으로 아무런 정치적 의사를 형성할 수 없는 존재들로 전락한다. 이처럼 노동의 상품화는 사회로부터 뿌리뽑힌/탈구된(disembedded) 노동자를 구성하는데 이는 상품화 초기스핀햄랜드법이나 신구빈원법에서 드러나듯이 전반적인 삶의 파괴과정이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스미스적 기획은 시장에서 발생하는 적대를 분배의 문제로 협소하게 인식하며, 그 결과 노동자운동에서 노동조합의 결성은 오히려 노동력의 상품화를 촉진하는 방향에서 임금인상을 목표로 하게 된다. 이후에도 운동의 주류적 흐름은 임금제도를 철폐하는 운동의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또한 20세기 들어 대표적 산업인 자동차 산업의 경우 작업장에 기반한 교섭력이 커지면서 19세기 공동체의 여러 조직들을 매개로 발휘되었던 연대와 연합적 힘을 대체하고 오히려 노동자운동이 사회로부터 격리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20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 위기와 금융세계화의 영향으로 작업장 교섭력에 기반한 조직노동자운동이 약화되고 기존의 조직으로 포괄되지 않는 여러 비정규적 형태의 노동력이 출현하면서 19세기 연합적 힘에 기반한 노동자운동의 전통이 복원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자기비판된 사회구성체론의 문제의식은 무엇보다 국제주의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조건들에 대한 탐색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주체의 재생산과 대응양상은 저자의 지적처럼 단지 세계경제로 환원할 수 없는 국지적 차별성, 즉 정세의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차별성 속에서 지난 1세기 동안 세계혁명을 꿈꾸던 혁명가들에게 강력한 양심으로 남아있으면서 결국 무기력하게 좌초한 국제주의의 재개를 위한 조건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0) 19세기 연합적 힘에 기반한 노동자운동을 20세기의 노동자운동과 비교하면 무엇보다 전자가 민족주의가 대중화되기 이전의 시기, 즉 마르크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호기롭게 외치면서 전유럽적 차원의 인터내셔널을 결성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20세기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세계의 반체계운동을 포섭하는 매개가 민족국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늘날 국제주의라는 쟁점은 운동이 기존의 반체계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매우 핵심적인 지위를 부여받을 수 있다. 더군다나 노동자운동의 주류가 의존해왔던 사회복지국가와 (반)주변부의 발전주의는 신자유주의적으로 변모하거나 한계에 봉착해 있다. 이러한 정세적 조건에서 노동자운동의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경향은 자칫 미국의 AFL-CIO가 중국의 WTO 가입을 반대하면서 보였던 국수주의적이거나 인종주의적 논리로 빠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화에 대한 불만이 세계 각지에서 종교적․종족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당화되는 극단적인 저항폭력의 형태로 수렴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요컨대 1세기 전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질문이 오늘날 “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1) 이러한 세계체계 분석의 사회주의 평가를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이루어진 국가자본주의 논쟁의 맥락에서 독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소련을 둘러싼 국가자본주의 논쟁에 대해서는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 사회주의』, 공감, 2002 참조. 본문으로 2) 홉스봄(E. Hobsbawm)은 『자본의 시대』(국역: 김동택, 한길사, 1997)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팽창과 자유주의 및 부르주아의 성장을 분석하면서 1848~75년 사이 시기를 ‘자본의 시대’로 명명한다. 본문으로 3) 당과 국가를 관통하는 대중노선의 모순, 즉 스탈린주의를 극한적으로 작동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스탈린주의의 한계를 실천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오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마오 : 스탈린주의의 내재적 비판?」; 윤소영 편역, 『맑스주의의 역사』, 민맥, 1992 참조. 본문으로 4) Giovanni Arrighi, The Long Twentieth Century - Money, Power and the Origins of Our Times, Verso, 1994. 본문으로 5) 이와 관련하여 박상현,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와 서구 마르크스주의 위기이론」; 김석진 외, 『자본주의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공감, 2001. 김숙경, 「마르크스주의 위기이론과 이윤율의 경제학」; 같은 책 참조. 본문으로 6) 19세기 말 20세기 초 미국 노동운동의 급진적인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뉴딜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소비’를 획득하는 것으로 귀결되면서 결국 체계 내로 포섭된다. 관련하여 안정옥, 「소비적 근대성과 사회적 권리 : 미국 헤게모니의 사회적 기원과 한계」; 백승욱 외,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미국 헤게모니의 역사』, 그린비, 2005 참조. 본문으로 7) ‘체계적 카오스’를 지난 500년 간 유지된 자본주의 체계 전반의 위기라는 맥락에서 사용하는 월러스틴은 일본 및 동아시아가 미국 이후 세계 헤게모니로 등장할지 여부에 대해 부정적이다. 동이사아 자본주의의 미래 역시 현재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와 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동아시아의 부상, 21세기의 세계체계」 및 「이른바 아시아의 위기 - 장기지속 내의 지정학」,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 21세기를 위한 사회과학』(백승욱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1) 참조. 본문으로 8) 2004년 12월 현재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시장의 42%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익률도 상당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국제투자대조표에서 드러나는 바, 지분성 직접투자와 증권투자를 포함하면 한국의 순국제투자는 2004년 말 903억 달러 적자(GDP 대비 13.3%)로서 이는 자본이 탈에 의한 경제위기가 상존함을 의미한다. 박하순,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전망, 그리고 불안정노동」; 박하순․장귀연 외,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노동운동 - 불안정노동 철폐를 위하여』, 도서출판 사회운동, 2005. 본문으로 9) 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국역: 『아미앵에서의 주장』, 솔, 2000) 본문으로 10) 이와 관련하여 앞서 소개했던 세계체계 분석에서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이례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분석이 지니는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본서에서는 「8강 동아시아와 세계체계」에서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