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은 ‘노동 없는 대선’으로 불린다. 지난 2017년 대선에서 최저임금, 비정규직 문제 등 이른바 ‘노동 문제’가 이슈가 되었던 데 비하면 이번에는 그다지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윤석열 후보의 ‘주 120시간 노동’, ‘아프리카 손발 노동’ 같은 실언들이 부각되는 정도다. 그렇다고 각 후보가 노동 문제에 대한 정책공약을 발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주요 대선 후보의 노동 정책을 살펴보고, 더 나아가 왜 이번 대선은 ‘노동 없는 대선’이 되었는지를 돌아본다.
1. 대선 후보들의 노동 공약
한국노총은 1월 말 ‘한국노총 대선후보 정책검증 및 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이재명, 윤석열, 심상정, 안철수 후보에게 정책질의를 보내고, 후보들에게 받은 답변을 전문가들이 검토했다. 평가결과는 이렇게 요약된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한국노총 대선요구와 가장 높은 적합도를 보였고,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그 뒤를 이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한국노총 정책요구 대부분 항목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고,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한국노총 대선후보 정책검증 및 평가 결과”, 2022년 1월 27일 보도자료.)
한국노총은 이후 대의원 투표(2월 7~8일)를 통해 이재명 후보 지지를 결정했고, 투표종료 후 2월 8일,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한국노총과 이재명 후보는 “노동 중심 정의로운 전환 대선 승리 정책협약”을 체결했다. 한편 민주노총은 “불평등끝장넷” 주최의 “노동·복지 분야 불평등·양극화 해소 위한 대선 후보 초청 토론회”(2월 9일)에서 부위원장의 토론문 형식으로 각 후보들의 노동정책을 평가했다. 윤석열 후보 측이 이 토론회에 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았기에 토론문에서 윤석열 후보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답변서를 제출했다고 해도 한국노총에 제출한 것과 다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예측된다.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가장 먼저 노동공약을 발표했다. 지난해 이미 1호 공약으로 “「신노동법」으로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여는 대통령”을 제시했다. ‘일하는 시민의 기본법’을 제정하여, 노동법의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주 4일제 도입, 비정규직 평등수당, 성평등임금공시제와 최고임금법, 전 국민 일자리 보장제, 원청 책임 강화 등 산재 예방과 상병수당 도입, 원하청 공동교섭과 단체협약 적용범위 확대 등을 제시했다. 청년 일자리에 대해서는 “‘청년일자리보장제’로 30만 개 이상 청년 일자리를 보장”한다는 공약을 제시한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10대 공약에서도 노동기본권 보장과 일자리 공약을 강조했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별도로 발표한 노동공약으로 ‘일하는 사람 권리보장 기본법’ 제정, 상시·지속업무의 정규직 고용 원칙과 적정임금제도, 산재 예방과 보상강화, 상병수당 확대, 노동회의소 설립, 초기업교섭 활성화와 단체협약 효력확장, 실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서비스 강화 등을 제시했다. 한국노총에 대한 답변에서는 단계적으로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을 추진하고 최저임금 산입범위 조정 등을 제시했다. 그 외 상생형 지역일자리사업 전국 확대, 청년 고용률 5%포인트 향상 등을 청년 일자리 공약으로 제시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공약에는 ‘후보 말바꾸기’ 논란이 있었던 기본소득을 추진하는 것으로 담았다. ‘돌봄국가책임제’를 주요 공약으로 부각한 것도 특징이다. 한국노총과 체결한 정책협약서에는 그간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이 제기한 정책 요구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다. 협약서에는 그간 민주당이 국회 입법 과정에 난색을 표했던 정책들도 대거 포함했는데, 과연 후보 캠프가 당 내 협의는 충분히 거쳤는지 의문이다.
윤석열 후보는 일자리 정책을 중심으로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산업변화에 따른 맞춤형 일자리 확대, 민간주도 일자리 및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등을 제시한다.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중심의 일자리 정책을 비판하면서, 민간부문에서 일자리를 창출해야한다는 것이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10대 공약에서도 경제활성화를 통해 민간부문에서 지속가능한 좋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노조에 대해서는 한 군데에서 언급하는데, 청년 공약의 일환으로 “‘귀족노조’의 고용세습 차단”을 이야기했다. 노사관계와 관련된 정책은 거의 없으나 ‘강성노조 불법행위 엄단’을 제시한다. 다만 한국노총을 방문한 직후, 공공기관 노동이사제와 공무원·교원 노조의 타임오프제에 대한 찬성의견을 밝히고, 이후 국민의힘이 입법에 협조한 바 있다.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는 2월 3일에 진행된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윤석열 후보는 공공기관의 투명한 운영에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찬성 입장을 제시했다.
안철수 후보는 “민주노총 핵심부는 대한민국 최고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비난하며, 한국노총의 정책질의에 답변을 거부했다. 또 “강성 귀족노조 혁파하겠다, 당선되면 강성 귀족 노조의 떼법과 불법을 좌시하지 않겠다”라며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한 공약에도 같은 표현이 실렸다. TV토론에서도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힘이 찬성한 공공기관 노동이사제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고, 이미 국회를 통과한 관련법의 시행을 유보하겠다고 공약했다. 조직노동의 표심을 고려하는 이재명, 윤석열 후보와 차별성을 부각하려는 것이다. 고용, 일자리 측면에서는 ‘5개 분야의 세계 초격차 기술’을 바탕으로 G5 경제강국 성장 전략을 통해 민간으로부터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주로 첨단 기술 부문의 성장 전략으로 고용문제를 해결한다는 접근이다.
2. 범보수 대 범진보?
어느 후보를 막론하고, 제시한 공약이 구체적인 이행방안이 없는 아이디어성 공약이거나 추상적인 선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제대로 된 검증을 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또 공약의 세부 정책 측면에서는 겹치는 것도 많다. 따라서 다음에서는 세부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하기 보다는 각 후보의 강조점, 방향성을 비교해보려 한다.
이재명 후보의 노동공약은 다루어야 할 노동문제 중 빠진 쟁점이 별로 없고 내용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아무래도 5년간 정책을 직접 운영해본 집권 여당이기도 하거니와, 진보정당보다도 더 많은 노동계(노동자운동과 학계) 전문가들이 선거캠프에 합류한 만큼, 이제까지 고용·노동 정책에서 대안으로 논의되던 것들을 종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초기업 교섭 활성화와 단체협약 효력확장 외에는 양대노총 정책요구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노사관계 측면은 전반적으로 강조하고 있지 않다.
심상정 후보는 노동 공약을 가장 먼저 제시하고, 선거운동 과정에서 쿠팡 물류센터 등 열악한 노동현장을 방문하면서 노동과 관련한 내용을 부각하는 접근을 보였다. 그러나 선거 캠페인에서는 주 4일제 공약을 가장 강조하며, 주로 정규직 조직노동자의 관심을 끌만한 쟁점을 부각했다. 이미 발표했던 공약에 비정규직, 중소영세,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의 처우개선, 노동권 보장과 관련된 내용이 상당히 많았음을 고려한다면 다소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1월 중순, 심상정 후보는 일시적으로 잠행한 이후 복귀하면서 “진보의 금기를 공론화하겠다”라며 여러 쟁점에 대해 발언할 것을 시사했다. 조성주 종합상황실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그러한 ‘금기’로 연공서열제 임금체계와 연금개혁을 지목했다. 기존의 민주노총 요구안이나, 정규직(장기근속) 조합원, 기업별 노조를 중심으로 한 조직노동 주류의 입장과는 상충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TV 토론에서 쟁점이 된 연금개혁 문제 외에는 후보가 공언했던 ‘금기’를 공론화하는 행보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재명과 심상정 후보의 노동공약은 노동계에서 논의되어오거나 노동자운동이 제기한 여러 쟁점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두 후보의 노동공약은 강조점이나 구체적인 정책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접근 방식에서 대체로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심상정 후보는 노동시장 정책에서 더욱 급진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고, 노사관계 제도 개선에서는 원하청 공동교섭이나 단체협약 효력확장의 구체적인 목표치를 제시하는 등 정책의 구체성 측면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 정의, 노조법상 사용자와 노동자 정의를 확대하는 노동법 개정안을 발의하고 실제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해왔다는 점에서도 민주당과 달리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대선 공약은 전체적으로 순서나 소제목까지도 이재명 후보와 같은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반면 소위 ‘범보수’ 후보로 분류되는 윤석열, 안철수 후보는 강조점이 다르다. 윤석열 후보는 거시경제 활성화와 신산업 발전 전략을 통해 민간부문의 일자리를 확대한다는 정책이다. 그런데 ‘양질의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을 제시하면서 구체적인 방안(공공부문인지 여부 등)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복지 정책에 있어서도, 이재명, 심상정 후보가 고용과 연계된 복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데 반해, 근로장려세제(EITC) 기준 완화 등 근로빈곤층 대책 몇 가지를 제외하면 주로 전 국민 대상의 복지 정책을 제시한다. 다만 복지 정책 중에서는 출산 육아 지원 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안철수 후보의 경우 민간부문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한다는 방향은 윤석열 후보와 유사하나, 주로 첨단 기술 산업 부문의 성장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안철수 후보는 산업 정책은 있으나 거시적인 일자리 정책은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다. 복지 정책에서는 윤석열 후보보다도 노동 연계 복지 정책이 없으며 생계·의료급여 부양의무자 기준 전면 폐지를 부각한 것이 특징적이다.
윤석열, 안철수 후보의 이러한 접근은 현재의 고용 문제, 노동시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거시경제 활성화와 함께, 산업 전환기에 새로운 산업 영역에서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고 진단하는 데 근거하는 것이다. 이는 고용과 임금을 비롯한 “노동문제” 해결의 전제라는 점에서는 타당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거시경제 성장 혹은 산업 정책만으로 고용문제는 물론 “노동문제”라 불리는 쟁점들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는 것도 물론이다. 이는 보수 후보들의 큰 한계라 할 수 있다.
현 정부 집권 기간의 고용 상황 악화는, 좋은 일자리가 오히려 줄어들고 단시간 노동, 플랫폼 노동자가 증가하는 방식으로 드러났다. 민간부문 비정규직도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다. 따라서 차기 정부에서는 이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윤석열, 안철수 후보는 신산업 분야 육성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만, 이 부문에서 창출되는 일자리의 성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낮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신산업 부문의 일자리는 매우 불균등하다. 쿠팡, 배달의민족 등 플랫폼 기업은 고임금의 개발자로 구성된 소수의 정규직만 채용할 뿐, 압도적인 다수는 저임금의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를 사용한다. 큰 수익을 내는 신산업 부문에서 만들어지는 고용이라고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스스로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해야한다.
물론 플랫폼 노동 관련 언론 질의에 답변하면서, 두 후보도 ‘일하는 모든 사람의 보호를 위한 기본법’ 이나 고용보험 확대 적용 등을 제시하고 있어, 원칙적으로 법적 보호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윤석열 후보의 경우 업종별 조직을 통한 플랫폼 노동자들의 이해 대변과 단체교섭권 부여 등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재명, 심상정 후보가 정책에 포함한 것과 같은 불안정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제도개선과 원청에 대한 교섭 보장 등의 제도적 대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 정부와 이재명, 심상정 후보는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 심지어 ‘일자리 보장제’까지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공약은 내용은 희망적이지만 ‘실현가능성’에 문제가 있다. 지금 좋은 일자리의 부족 상황을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를 중심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두 후보가 제시하는 복지공약과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도 엄청난 재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재정의 한계를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대부분 민간에서 창출되는 일자리의 양과 질은 거시경제 상황에 달려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정부의 명령으로 결정되는 요소가 아니다. 현재 일자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민간부문에서 고용이 확대되고 일자리의 질이 개선되지 않으면, 공공부문 일자리 질의 개선이 ‘낙수효과’를 불러오지도 못 한다는 점은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을 통해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도 81만 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을 공약한 바 있고, 실제로 공무원, 공공기관 등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확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집권 기간 고용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일자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공약은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3. 문재인 정부 노동 정책의 실패라는 조건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재명, 심상정 후보가 제시하는 정책 공약은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제시한 정책 공약 기조와 상당히 유사하다. 임기 내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을 모든 후보가 언급했던 지난 대선과는 달리, 이번 대선이 “노동 없는 대선”이라 불리게 된 핵심적인 이유 중 하나는 문재인 후보가 약속했던 여러 정책이 모두 실패하거나 추진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선 후보가 아무리 화려한 약속을 새로이 제시한다고 해도 대중이 신뢰하기 어렵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노동공약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문재인 후보는 비정규직 규모를 감축하기 위해 사용 사유 제한과 비정규직 차별 금지법, 원하청 공동사용자 책임을 공약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중 집권 5년간 제대로 집행된 것은 거의 없다. 공공부문에서만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을 추진했지만, 민간부문의 일자리 질 개선으로 확장되지 못했다. 노사관계에서도 초기업 교섭이나 단체협약 효력확장을 위한 제도개선이나 정책적 노력도 없었다. 정부가 직접 챙길 수 있는 공공부문에서도 단체교섭 체계조차 거의 발전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재명, 심상정 후보의 ‘친노동’ 공약과 유사했던 문재인 정부의 약속들은 왜 이행되지 않았는가, 혹은 못했는가.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노동개혁 정책으로는, 대통령 취임 직후 시작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과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 주 52시간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등을 들 수 있다(중대재해처벌법과 산재법 개정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들 의제는 애초 문재인 정부의 정책이라기보다는 고 김용균 사망 등을 거치면서 노동자운동의 대응을 통해 새롭게 과제로 부각된 것이라는 점에서 별도로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들 정책은 2018~2019년을 지나면서 사회적 논란이 제기되거나,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중도반단되거나 왜곡되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은 공공부문 취업준비생들로부터 “공정성” 논란이 불거졌고, 전환 당사자로부터는 전환 방식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어 노동조합 조직화와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양대노총의 공공부문 노조 조직률이 상승하기도 했다.)
일자리 정책은 민간부문에서는 별달리 실질적인 대안이 제시되지 못했다. 노동시간 단축은 탄력근로제를 크게 확대하는 개악이 병행되었는데,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IT 개발 등 업종에서 반발이 나타났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비숙련 부문의 고용을 줄인다는 문제 제기에 직면하자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하다가 노동계의 반발을 불렀다. 그 결과 최저임금 인상률은 지난 ‘보수정권’보다 나을 게 없는 수준으로 마무리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나름대로 역점을 두었던 경사노위를 통한 노사정 대화가 어긋난 것도 이 때부터였다. 뒤이어 2019년에는 주 52시간제의 보완대책으로 탄력근로제 확대를 강행하면서 경사노위는 사실상 파산했다. 이들 노동개혁 정책 대부분이 현실에서 실패한 것이다.
이러한 노동정책 실패는 노동계의 반발로 인한 노정관계의 악화와 상호작용했다. 노동조합은 “제대로 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정부와 갈등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포기에 대해서도 불만이 쌓였다. 다른 노동개혁 공약이 대부분 실질적으로 추진되지 않으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러한 불신이 누적된 결과, 민주노총의 경사노위 참여가 2019년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된 것은 물론, 2020년에는 민주노총 스스로 제안했던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협약’ 체결도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된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을 표방하면서도 노동조합의 협조조차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정부가 2018~19년을 지나면서 노동개혁 정책을 더는 추진하기 곤란한 조건에 처했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2017~2018년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에 대한 자영업자의 반발이 확대되고, 이후 고용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진단이 힘을 얻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과 주 52시간 제한에 대해서도 취업준비생과 중소기업 사용자들의 반발이 커졌다. 특히 거시경제 상황의 악화가 문제였다.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소득주도성장’ 이론에 따라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2019년부터는 거꾸로 경기침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민간부문에서 고용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노동계, 경제학계에서는 최저임금 상승 때문에 고용에 부정적 영향이 있었느냐로 논쟁했지만, 이미 경기침체가 시작된 상황에서 고용상황의 악화는 당연한 일이었다. 일자리의 질도 악화되어, 노동법의 규제 밖에 있는 주 15시간 미만 단시간 노동자와 플랫폼 노동자가 크게 늘어났다. 비정규직 비율도 2019년부터 상당히 커졌다.
통계청이 2021년 12월 발표한 ‘2021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인 지니계수는 2020년 균등화 처분가능소득(실질소득) 기준으로 0.331로 나타나 전년도보다 0.008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공적이전 소득의 영향이 커서, 시장소득 기준 지니계수는 2020년 0.405로 전년보다 오히려 0.001 올랐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던 해다. 수년 간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한 지니계수나 소득 5분위 배율은 개선이 없거나 악화되었으나 정부 재정의 역할이 커지면서 소폭 개선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노동조합이 노동시장에서 임금격차를 줄이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회보장, 복지의 확대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정부 부채의 급격한 누적을 불러온 것으로 비판받는 2020~2021년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과 같은 방식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재명 후보의 기본소득 공약은 더 과감한 재정의 역할을 통해 소득격차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응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실패를 더 심각하게 반복할 수밖에 없다.
2018년 하반기부터 이미 소득주도성장론의 파산은 분명해졌고,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성장과 일자리 정책을 주도했던 청와대 홍장표 경제수석과 일자리수석이 전격 교체되었다. 연말에는 장하성 정책실장도 교체됐다. 문재인 정부도 더는 소득주도성장론을 언급하길 꺼리게 된다. 2020년 들어서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경제위기 대응으로 관심이 전환된 가운데, 노동개혁 정책들은 관심에서 더욱 멀어졌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개혁 정책은 소득주도성장론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는데, 노동개혁 정책과 소득주도성장론 양자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 집권 2년차부터 드러나고 만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노동개혁 정책을 포기한 원인으로 문재인 정부의 정책 의지 부족 혹은 정국 주도력의 약화를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 와중에 진행된 2020년 총선 결과 180석의 거대여당이 된 민주당이 정국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게다가 민주당 지도부도 관료 출신이 아니라 “운동권” 출신으로 노동자운동과 교류가 많던 586 의원들이었다. 하지만 이미 경제정책이 실패한 상황에서, 추가적인 노동정책을 펼치기 곤란한 상황이 된 것이다. 마침 부동산 폭등과 조국사태, 윤석열 검찰총장과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정부와 여당은 노동개혁에 완전히 관심을 잃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존중”을 내건 문재인 정부의 노동개혁 정책은 대부분 실패하게 된다. 거시경제 정책이 실패하거나 악화되는 가운데, 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비판받을 만한 노동정책이 독자적으로 추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차기 정부 시기의 다른 노동개혁 정책공약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4. 실현 가능성 없는 노동 공약들
한편, 노동자운동은 문재인 정부의 노동개혁 정책을 제대로 완수할 것을 주문하는 입장이 여전히 주류다. 한국노총은 노동이사제, 정년연장 등 조직노동의 이해를 중시하는 정책 질의를 통해 앞서 살펴본 답변을 이끌어낸 바 있다. 민주노총도 문재인 정부 후반, 노동·경제 정책들의 실패가 분명해진 상황에서도 별다른 근거도 평가도 없이 유사한 정책을 끝까지 밀고 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민주노총 2022년 대선 요구안). 모든 것이 정부의 “의지” 문제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주장했던 정책들이 문재인 정부에서 상당수 시도되었음에도 모두 실패한 상황,인데,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진지한 평가 대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노조운동은 거시경제 정책과 그 효과가 노동정책을 실현하는 전제가 된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최근 대선 쟁점을 예로 살펴보면, 이재명 후보는 추가 재난지원금 지급과 기본소득 등 확장재정 정책을 위해 대규모 국채발행을 주장한다(정부가 제출한 14조 원 규모의 2022년 1차 추경을 35조~50조 원까지 증액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심상정 후보도 전 국민 ‘일자리보장제’ 등을 위해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증세와 함께 적자 재정에 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를 강행하면 국채가격 하락(금리인상)이 일어난다(이미 2월 초부터 채권 시장에서는 국채 금리가 급상승 중이다. 이후 미국 연준의 테이퍼링·금리인상·양적긴축이 본격화되면 금리 상승 부담은 더 커질 것이다). 오히려 가계와 자영업자·소상공인의 대출이자 부담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추경을 위한 국채발행이 더 확대되면 손실보상비를 이자 부담 증가가 상쇄하거나 심지어 초과할 수 있다고 비판된다. 한편 이재명 후보는 이에 대해 대출이자율을 통제하는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시중은행의 대출심사(연장 포함)가 더욱 엄격해져 파산, 따라서 실업이 증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의지’만으로는 거시경제를 다룰 수 없는데도, 문재인 정부나 이재명 후보, 심상정 후보 등 ‘범진보’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노조운동도 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상황이다. 같은 맥락에서 ‘범진보’ 후보들의 노동공약에서도 실현가능성을 크게 고려하지 않은 정책이 제시된다. 예를 들어, 심상정 후보는 실업자를 최소화하거나 실업자에게 실업수당을 충분히 보장하는 사회보장 확충이나, 일자리를 신속히 찾을 수 있게 하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에서 더 나아간다. 수사(修辭)적인 표현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완전고용을 위해서는 ‘자연실업률’ 개념도 폐기해야한다고까지 주장하는 것이다(물론 이는 경제[학]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에 유행하는 ‘국가 일자리 보장제’의 아이디어를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심상정 후보의 노동 우호적인 노동정책 공약도 실현가능성이 거시경제 상황에 따라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 후보의 경제정책은 성공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의 주요 주제는 아니라 상술하기는 어렵지만, 안타깝게도 희망적이지는 않다.
이재명 후보가 주창한 1·5·5(수출 1조 달러, 세계 5강, 국민소득 5만 달러) 시대 공약은, 희망차기는 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연 8%대 GDP 성장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는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상적 선언에 불과하다. 이재명 후보가 제시하는 기본소득 등을 위한 확장재정과 국가 부채 확대를 통해서 단기적으로는 잠재성장율을 크게 웃도는 성장을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곧 거시경제 침체, 심지어 외환 위기까지 닥칠 수 있다. 한편, 심상정 후보는 에너지 전환 등 투자 확대를 제시하면서도, 2월 3일 TV토론에서는 탈성장론에 가까운 입장으로 이재명 후보를 비판했다. 여러 산업·사회 정책 추진의 조건이 되는 거시경제 작동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심상정 후보는 2월 11일에 진행된 2차 TV토론에서는 주 4일제 도입을 주장하며 윤석열 후보에게 관련한 질문을 던졌는데, 윤 후보는 “주 4일제보다는 당연히 주 3일제가 더 좋지요, 하지만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 현실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냐의 문제”라며 반문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심상정 후보가 주 4일제를 주장하면서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 정책까지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자세한 내용은 사회진보연대, 「심상정 1호 공약, 희망사항의 나열로 민주당과 다를 수 있나」, 《사회운동포커스》, 2021년 9월 9일을 참고.)
한편, 원외 정당인 진보당 김재연 후보, 노동당의 이백윤 후보도 경제 성장은 가진 자들의 성장일 뿐이라며 성장 자체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이백윤 후보는 주 30시간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탄소배출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감(생산량)을 유지하되 임금과 일자리를 나누는 것과도 차이가 있다. “임금삭감 없는 주 30시간제”도 병행해서 공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투입을 감소시키고 설비 가동률을 낮추어 산업 생산 자체를 축소하자는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GDP 감소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이런 역성장 상황에서 에너지 전환을 위한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적자재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런 주장 외에도 적자 재정, 국채발행에 기반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간산업의 국유화와 이를 통한 국가 책임 일자리 보장도 공약한다.
이러한 정책들은 탄소 감축, 노동시간과 고용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과 외환위기, 경제위기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어떤 정세에서는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체제 전환을 위해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할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범사회적 합의를 노동자 계급이 주도할 역량을 갖기는커녕, 노동자운동이나 진보정당들이 자기 주장의 직접적인 경제적 결과에도 무관심한 상황이다. 이런 식으로 대선에서 대중적 설득력을 갖고 국민적 지지를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제시한 정치적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정책의 구체성과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심상정 후보는 노동 공약만 보아서는 정책적으로 훌륭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자신들의 정책을 현실에서 이행하기 위한 경제적, 정치적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대안이 없다. 심지어 그에 역행한다. 2월 3일 1차 TV토론에서 심상정 후보가 이재명 후보에게 성장 지향 정책을 포기하라고 주문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대해서 오히려 이재명 후보가, 성별 갈등의 원인이라고 할 청년층 고용 악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며 논쟁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재명 후보의 입장에서야 자신이 제시하는 정책이 희망사항대로 실제로 경제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믿을 테니까 그렇게 답변했겠지만, 심상정 후보는 사회 문제 해결의 조건으로 경제를 고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적) 선의와 (경제학적) 무지·무시의 결합이거나, 혹은 무지·무시와 악의의 결합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모두 실패라는 점에서는 같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윤석열, 안철수 후보의 정책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먼저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거시경제 성장의 전망 자체가 밝지 않은 상황에서 대안을 제대로 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경제가 처한 구조적 모순은 세계 자본주의 분업구조와, 재벌 중심 한국경제 구조의 결함, 저출산·고령화 인구 변천이 결합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잠재성장률 자체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2021년 11월 OECD가 발표한 재정 전망 보고서는 한국의 1인당 잠재 국내총생산 성장률이 2030년부터 0.8%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OECD가 집계한 38개국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제대로 된 거시경제 정책이 없는 후보들보다야 나을지 모르겠으나, 이런 조건에서 윤석열, 안철수 후보가 제시하는 방식의,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투자와 단기적인 경기부양이 해결책이 되기는 어렵다. 결국 거시경제 성장과 연계된 일자리 문제도 해결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들 후보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설사 국민경제가 성장한다고 해도 노동자, 특히 중소영세, 비정규직, 특수고용(플랫폼) 등 취약 노동자들의 처지가 자동적으로 개선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이들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쿠팡과 같은 ‘신성장 산업’ 기업이 아무리 성장해서 일용직 노동자의 고용을 흡수한다고 한들, 열악한 노동조건과 장시간 고강도 노동으로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은 자동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일자리의 질이 더욱 낮아질 뿐이다. 각 후보 진영은 경쟁적으로 청년 일자리 정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정작 다수의 청년층 일자리는 이 부문에서 주로 창출된다. 노동조건에 대한 제도적 규제와 산업부문·고용형태 간 격차 축소, 더 나아가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노동조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상황을 전혀 개선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현재 대선 상황은, 실현 불가능한 달콤한 노동정책을 제시하거나, 노동 문제를 해결할 정책수단에 대체로 무관심한 후보들이 경쟁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그래도 말로라도 친노동의 “의지”를 보여주는 쪽이 나으니 실현가능성은 무시하자는 주장도 있다. 기왕 실현이 안 되더라도 듣기라도 좋은 말이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정책적, 이론적 근거 없이 추진한 정책은 부작용을 더 크게 낳는다는 점을 문재인 정부를 통해 이미 보아왔다. 임금 격차 해소의 여러 방안 중에도 (소득주도성장론에 따라) 특히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만 채택했던 문재인 정부는, 결국 “을들의 갈등”을 조장하고 고용 지표도 악화시켰다. 결국 불어 닥친 여론의 역풍으로 인해 최저임금 인상율도 역대 정부에 비해 높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산입범위를 개악하기까지 했다.
5. 노동자운동의 요구와 대선 노동정책 공약
각 후보의 노동 정책에 대해, 양대노총은 대체로 심상정, 이재명 후보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앞서 언급한 한국노총의 발표도, 사실상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하기 위한 수순으로 이해되었다. 심상정 후보의 공약이 다소 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한국노총 내부의 세력구도에 더해 대의원들이 “당선 가능성”을 고려한 결과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선대본 직능총괄본부)은 한국노총에 “특정 대선후보 지지를 위한 요식행위”라며 “깊은 유감”이라고 반발했다.
민주노총은 대선 후보 단일화 시도가 실패한 후 기존 방침에 따라 복수의 진보정당 후보를 지지한다(현재 정의당 심상정, 진보당 김재연, 노동당 이백윤). 민주노총의 대선 정책요구안은 지난 수년간 요구했던 노동정책, 사회정책을 가장 급진화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등 모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전면에 제시하는 변화는 있으나, 주 4일제 도입과 최저임금 대폭인상, 획기적인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에너지 전환, 보건의료, 기간산업 국영화를 통한 일자리 확대와 같은 내용이 차별점으로 부각된다) 등 이미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정책을 다시 강조하는 내용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노동조합 현장 간부 중에서도 이재명 후보에 호의적인 경우가 상당하고, 민주노총 방침을 거슬러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 신승철, 김영훈 등 전직 민주노총 위원장들이 이재명 선거운동 캠프에 합류하기도 했다. 일부 단위 노조와 후보 진영의 정책 협의가 간접적이거나 암묵적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이재명 후보는 노동 정책 외에도 공공의료 확대나 KTX-SRT 통합과 같이, 노조가 주장하는 이슈를 선거 공약에 포함하기도 한다. 민주노총의 진보정당 후보 지지 방침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차선’ 혹은 ‘차악’으로서 이재명 후보에 대한 지지가 우세할 것으로 보인다. 노동조합의 정책 요구와 각 대선 후보의 정책 공약 비교를 통해 지지를 결정할 경우, 또 당선 가능성까지 고려할 경우 이재명 후보가 가장 선호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한국 경제 상황에서 거시경제 상황과 유리된 노동정책들은 아무리 ‘친노동’ 수사나 ‘선의’에 기반해 있어도 현실에서 작동할 수 없다. 그것이 문재인 정부 노동정책 5년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특히 노동 정책은 경제 정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도 다른 경제적 조건을 형성하기 위한 대안 없이 “노동 존중” 혹은 “노동 친화”라는 구호로 비슷한 정책들을 제시한다면, 이는 표를 얻기 위한 것 외에 어떤 내용도 없이 비어있는, 공약(空約)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대선 공약만으로 후보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노동 공약만 아니라, 앞서 평가한 것과 같이 그 정책들이 놓인 맥락이나 전체 정책 공약, 해당 정치세력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운동은 대선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후보들이 제시하는 노동정책 공약의 유불리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집권당으로서 민주당이 거부하거나 소극적이었던 항목이었음에도 한국노총과의 정책협약에는 당당히 포함시키는 이재명 후보의 공약이 진정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특히 이재명 후보의 경우 이해관계자 집단을 동원하는 방식으로 선거를 진행하고, 또 집권 이후에는 그들에게 보상하는 방식으로 성남시장, 경기도지사를 거쳐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부각된 것이 조폭 연루설과 대장동 의혹, 부인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사용(私用)과 불법 의전 문제다. 공공 정책 왜곡, 그리고 공공 조직과 재정을 탈취한 사익 추구였다. 자칫 노조운동이 이재명 후보 진영에 대한 정치적 지지의 교환을 통해 이해관계를 공유하게 될 경우, 이재명식의 부적절한 이익 추구에 동참하는 결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 물론 범보수 진영의 후보들 역시 노동기본권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고, 각종 노동규제를 약화시키려 할 것이므로 그들의 집권하면 노조운동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노조운동은 주요 대선 후보의 정책공약 경쟁에서 독립적인 입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누가 당선되든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공약도 실현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아무리 달콤한 노동공약을 제시한다고 한들 한국 경제의 토대 자체를 파괴할 우려가 큰 후보를 지지할 수는 없다. 한국 경제의 토대 붕괴로 인한 피해가 전 사회적으로 심각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운동이 노동공약만을 보면서 이런 후보를 지지한다면 노동자운동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회피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실패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기본소득 정책으로 반복하려는 이재명 후보는 같은 실패를 더 큰 규모로 반복할 것이다. 진보정당들도 진보적 정책방향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책수단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더 고민해야만 한다. 보수정당들의 허황된 공약(空約) 남발을 비판해야 할 진보정당들마저 비슷한 태도로 입장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은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한 토대를 형성할 수 있는 요구, 이를 위해 심각한 노동자 간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요구를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현실적인 ‘노동 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운동은 자신의 힘으로 초기업 교섭·투쟁을 통해 임금 격차를 줄이고, 기업별 고임금보다는 적절한 처우를 받는 고용을 늘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불거진 파괴적인 일자리 경쟁을 막아야 한다. 정부가 필요한 일자리를 모두 만들고 기본소득도 지급해서 소득 격차를 메워줄 것을 기대하기 전에, 노동조합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한다. 공동의 임금·단체 교섭과 자본에 대한 투쟁을 통해 노동시장에서 임금 격차를 줄여나가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국회에 대한 제도 개선 요구도 필요하겠지만, 노조 내부의 혁신이 우선되어야 한다.
경제성장 자체를 상대화하는 진보정당 후보들은 차치하고라도, 경제성장 방안을 제시하는 각 후보들의 경제 정책의 실현가능성도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중 이재명 후보는 가장 허황된 경제 성장 공약을 남발한다. 실제로 추진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무리하게 공약을 강행 실현하려 할 경우 거꾸로 심각한 경제적 재앙을 불러올 것이 분명한 최악의 입장이다.
2022년에는 코로나19 경제위기 대응을 위한 지난 3년간 확장정책의 부작용으로 각국에서 경제위기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대선 직후부터 세계적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경기 침체, 재정과 무역수지의 악화, 국가부채와 환율 관리가 문제가 될 수 있다. 화려한 노동공약을 포함해 많은 대선 공약이 작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가능성이 크다. 국민경제 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노동자의 고용과 임금이 개선되거나 격차가 해소되어 평등한 사회가 앞당겨지기는 더 어렵다. 고용과 임금의 개선이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역량도 확충해야 한다. 경제위기 때마다 나오는 “함께 살자”라는 구호를 정말 실현하려면 노동자운동이 스스로 무엇부터 혁신할지 시급히 고민할 때다.
문재인 정부 시기를 거치면서 조직 규모는 양대 노총이 모두 확대되었다. 각각 100만을 넘어, 총 노조 조합원 숫자는 250만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노조운동이 적어도 “노동문제”에 대해서라도 사회적 쟁점을 선도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민주노총은 급진적 요구로 총파업까지 진행했는데도, 대선에서 쟁점을 부각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사회운동과 연대하며 보편적인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여겨져 온 민주노총마저 ‘귀족노조’ 공세 속에서 사회적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 여론의 무관심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여론의 무관심이 정권과 보수 언론의 탄압 때문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지난 5년간 문재인 정부는 적어도 민주노총 비방과 탄압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며, 언론지형도 변화해왔다. “중대재해처벌법”과 같은 일부 운동 의제는 사회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 결국 지금 대선을 앞두고 여론이 무관심한 것은, 노동자운동이 주요 후보들보다 “노동문제”에 대해 더 설득력 있는 해법을 국민에게 제대로 제시해왔는가의 문제일 수 있다. 지난 5년의 성적표가 현재 노조운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 여부와 대선 후보 혹은 차기 정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에서 드러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이 이른바 “노동 없는 대선”이 된 것은 대선 후보들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실제로는 노동자운동에 대한 평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고 과거의 요구와 투쟁을 반복할 경우, 차기 정부 출범 이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다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할 우려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