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감 직선제로 대표되는 지방 교육자치 제도는 교육운동 진영의 숙원이었다. 2007년부터 교육감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선거가 거듭되면서 소위 ‘진보교육감’이 대거 당선됐다. 2010년 선거에서는 서울, 경기, 강원, 광주, 전남, 전북 6개 지역에서 전교조 출신 2명을 포함하여 6명의 진보교육감이 탄생했다. 2014년 선거에서는 17개 시도 중 무려 13개 지역(울산, 대구, 경북, 대전 제외)에서, 2018년에는 울산이 추가돼 총 14개 지역에서 진보교육감이 당선되었다. 전교조 출신 교육감도 2014년 8명에서 2018년 10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전교조 운동과 진보교육감 당선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지표이며, 그만큼 전교조를 비롯한 교육운동 진영에서 교육감에게 거는 기대도 컸다.
그렇다면 일반 대중이 바라보는 진보교육감 12년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초·중·고등학교에 대한 평가’ 점수(중간점 3점)는 2010년 3.09, 2014년 2.75, 2018년 2.70 그리고 2019년 2.75에 그치고 있다. 이는 진보교육감이 등장하던 시기에 조사한 교육여론 조사로서, 진보교육감에 대한 여론의 평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최근 기초학력미달 학생 비율이 증가한다는 교육부 발표에 따라 학력 부진에 대한 우려까지 더해져, 진보교육감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물론 한국교육개발원 여론조사와 국가가 평가하는 학력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은 있겠지만, 진보교육감 12년에 대한 만족도가 14개 지역에서 진보교육감을 당선시켰던 표심만큼 크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진보교육감의 대표 공약은 무상급식, 혁신학교, 학생인권조례 제정, 민주시민교육(노동, 평화 통일, 페미니즘, 생태 등 포함), 학교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이었다. 이 중에서 무상급식과 고교무상교육 등 교육복지와,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처우개선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제 보수교육감 후보 역시 당선을 위해 교육복지 정책을 쏟아내면서, 교육복지는 진보 의제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나아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진보교육 진영은 지방의 교육 권한뿐만 아니라 중앙의 교육 권한에까지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다. 반면 학생인권조례 제정, 혁신학교, 민주시민교육 등에서는 여전히 보수교육감 후보와 변별점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성과는 논란에 휩싸여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진보교육감 정책은 교육복지와 평등교육, 학교민주화의 가치를 지향하며 전교조, 시민운동단체가 제안했던 사회운동의 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 교육감 선거를 앞둔 현재, 지난 ‘진보교육감 시대 12년’의 성과와 한계를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평가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는 분위기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간에 ‘진보적’이라 불렸던 의제가 앞으로도 유의미한 것인가? 보수교육감이나 일부 학부모들의 반대에 부딪힌 정책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진영논리에 갇혀 정작 중요한 문제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육감 선거 결과에 만족하지 않는, 더 큰 운동을 만들기 위한 고민과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1. 진보교육감 교육정책에 대한 평가
1) 혁신학교의 성과와 한계
진보교육감들은 공교육 강화를 통한 사교육비 경감을 핵심 정책으로 제시해왔다. 주민 직선으로 최초 당선된 경기도 진보교육감 김상곤이 제안한 ‘혁신학교’가 대표적이다. 혁신학교는 고등학교 교육까지 보편화 단계에 접어든 한국 상황에서, 공교육을 살리고 사교육비를 절감하며 모든 학생들이 중도 탈락 없이 무사히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도록 교육방식과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혁신학교의 기본 방향은 학생중심, 수업혁신, 마을 공동체 복원, 전문학습공동체 복원, 학급당 학생 수 감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혁신학교는 기존의 학력관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부터 교사의 수업혁신,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통한 지역사회의 인적, 물적 인프라 활용 등 미래지향적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종의 실험학교였다. 또한, 혁신학교로 지정되면 단위 학교에 예산 배정이 많아져 학생들의 교육과 복지에 쓸 수 있는 예산이 많아진다는 점, 수업혁신을 위한 교사 공동체를 형성할 기틀이 마련된다는 점 등이 이점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혁신학교의 양적 확대에도 불구하고, 일부 초등학교의 성공사례를 제외하면 학교급이 올라갈수록 그 성과를 명시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혁신학교의 질적 성과에 대해 많은 교사와 학부모가 회의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 사교육의 폐해와 교실 붕괴가 심각하게 나타나는 고등학교에서 혁신학교 지정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대학 서열화로 인한 입시제도의 규정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초등학교에서는 교육과정을 다양하게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지만, 학교급이 올라갈수록 소위 명문대 합격자 수가 많은 학교를 매력적으로 생각한다. 혁신학교의 교육목표는 대학입학이 아니라 혁신적인 교육과정 운영이기 때문에, 학교급이 올라갈수록 혁신학교로 지정되는 경우가 줄어든다. 혁신학교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입시제도가 바뀌어야 하는데, 입시제도 개혁은 교육감 권한이 아니므로 혁신학교를 늘리는 것은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힌다.
둘째, 혁신교육의 철학과 방향에 대한 지역적 공유가 부족할 뿐 아니라 그 기반이 되는 지역운동이 활성화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혁신학교는 혁신교육지구를 구성하여 교육 공공성의 전면화를 구현하는 모델이 많다. 혁신교육지구 사업이란, 학교가 정규교육과정에 집중할 수 있게 하여 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이루고 지역에서는 인적·물적 교육자원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마을 단위의 교육지원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교육’을 중심으로 학교와 마을을 전면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교육 공공성의 전면화란, 학교와 마을이 협력하는 ‘공공적 방식으로’ 아이들을 함께 교육하는 시스템 구축을 뜻한다. 지역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는 이러한 공동의 협의 및 실행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을 진행하기엔 지역운동이 활성화 되지 않아 ‘무늬만 혁신학교’인 경우도 많다.
셋째, 혁신교육의 주체인 학교구성원(교사, 교육공무직, 공무원 및 학부모 등)의 합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혁신학교는 태생부터 자생적인 특징이 있다. 혁신학교 제도를 만든 것은 교육청이지만, 그 시작은 교사들의 자발적인 학교 혁신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혁신학교가 생긴 지 10년이 넘다 보니, 처음에 교육운동 차원으로 혁신학교를 시작한 교사들이 은퇴하거나 학교를 옮기게 되면서 이를 이어갈 교사가 부족하거나 혁신교육의 철학과 방향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면서, 혁신학교로 지정되고도 별다른 혁신을 못 이루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학교구성원 간 업무분장을 둘러싼 갈등도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혁신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업과 교육과정이 교사의 업무에서 중심이 되게 만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 혁신학교에서는 특히 교사의 행정업무를 경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육청은 교원행정업무경감을 획기적으로 지원하기보다는, 비정규직으로 행정실무사를 고용하여 배치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 때문에 수업만 하겠다는 교사와 행정실무사의 갈등도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정규직의 수를 늘리지 않고 무기계약직을 늘린 것은 문제지만, 교육과 행정이 얽혀 있는 실무에서 교사가 수업만 하겠다고 하면 학교 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일들을 할 사람이 없어지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 더하여 혁신교육을 강제할 수 없으니, 혁신교육에 동의하지 않는 교사들과의 갈등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다.
넷째, 혁신교육에 대한 교육청의 지원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혁신하는 일은 현장 교사만의 노력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교육활동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학생의 상태를 심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진단하고, 이를 근거로 학생 상황에 맞는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사회복지사, 전문상담사 등 여러 인적, 물적 자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육청에서는 구체적인 정책이나 프로그램을 지원하기보다는 예산만을 지원하기 때문에, 교사가 수업 외에 학생지원 프로그램(혹은 관련 강사)까지 섭외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지원방식은 교사에게 추가적인 행정업무를 부과하는 방식이기에 수업에 전념할 수 있게 만든다는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
마지막으로, 혁신학교의 학생 중심 참여수업과 체험활동이 기본교육의 부실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신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모든 학생이 수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식 수업보다는 학생참여형 수업을 선호한다. 그러나 학교급이 높아질수록, 개념 중심의 교과목일수록, 학생참여형 수업의 비중을 높이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하게 모든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을 계획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흥미 위주의 수업방식을 선호하게 되고, 이는 자칫 기본교육의 부실화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학교 혁신 방안으로 각광받던 혁신학교는 이런 이유로 인해 ‘학력 저하’ 논란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공교육의 내실화 문제는 단지 혁신학교를 지정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거시적으로 “모든 학교의 교육에 영향을 미치는 대입제도의 개혁 방안, 미래사회에서 살아갈 학생들에게 필수적인 보편교육(지식과 기능, 태도)의 강화 등에 대한 교육과정을 어떻게 편성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또한 교사들은 “수업에서 소외되는 학생을 줄이는 수업방식은 무엇인지와 학습부진 및 학습장애에 대한 진단 및 조치 등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교육전문가로서 연구하고, 이를 교육청 등 교육당국에 어떻게 요구하고 개선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사회운동은 혁신학교를 지정하는 일로 자기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진보교육감들을 비판하고, 공교육이 내실화될 수 있는 ‘혁신적인 교육청책’을 제안해야 한다.
2)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교육적 한계
학생인권조례 역시 김상곤 경기교육감이 처음 제시하여 2010년에 제정된 것을 시작으로, 2012년 광주, 2012년 서울, 2013년 전북, 2020년 충남, 2021년 제주 등 모두 6개 광역자치단체에서 제정돼 시행되고 있다. 2018~2019년에는 경남에서 제정이 시도되었지만, 기독교계를 주축으로 3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등 반발이 심하여 결국 제정 시도가 좌절되었다. 그밖에 충북, 세종, 울산, 부산, 전남, 강원에서는 2014년 이후 진보교육감 당선 비중이 높아지자 학생인권조례를 시행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은 시행을 준비하고 있는 단계다.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학교에서 학생인권조례는 체벌 금지, 야간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 자율, 복장 및 두발 자율, 휴대전화 자체를 금지하는 조항 삭제, 학생에게 양심에 반하는 내용의 반성문 및 서약 등 진술 강요 금지, 임신 및 출산 등의 이유로 차별 금지, 성별이나 종교 또는 나이 그리고 정치적 견해와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 금지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여기서 주민 반대에 부딪히는 대표적인 조항은 두발 자유화 중 염색 가능 조항과 성적지향으로 인한 차별 금지 조항이며, 보수교육감 후보들도 이를 빌미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렇듯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명확하게 진보교육감과 보수교육감이 차이를 드러내는 정책이다.
학생인권조례 자체는 학생의 인권을 증진한다는 측면이 크지만, 교육적 쟁점을 내포하는 것도 사실이다. 즉 “학생을 과연 성인과 동등하게 취급할 수 있는가? 학생인권조례가 교육적 차원에서 문제는 없는가?”가 핵심적인 쟁점이다.
소위 진보주의자들은 학생과 성인이 동등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인간의 발달 과정을 보면 단순히 아동과 성인이 동등하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모든 성인이 곧 성숙한 시민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발달 과정에서 아동과 성인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지적인 역량과 생산적 노동 측면에서 아동은 성인과 구별되며, 따라서 특정한 시기 동안 아동의 권리는 신탁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권리의 신탁이 권리의 억압이나 침해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즉, 인간의 발달 단계에서 “아동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아동의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존엄성을 무시해도 된다”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각 발달 단계에 필요한 권리가 실행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어떤 권리(예를 들면 선거권)는 아동기가 아니라 청소년기에 유효할 수도 있고 어떤 권리(예를 들면 음주, 흡연 등)는 아동기와 청소년기 모두 제한될 필요가 있는 것처럼, 학생들의 권리 제한은 교육적 또는 사회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학생인권조례가 그러한 성격인지는 심사숙고해봐야 한다. 교육적으로 필요한 훈육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학생인권조례에 어긋난다는 해석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교 내에서 휴대폰 사용 허용 문제를 학생인권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휴대폰 사용에 대한 교육적 훈육은 어려워진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휴대폰 사용 제한은 교육적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이미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휴대폰 사용을 제한하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반성문 쓰기나 상벌점제에 대한 문제도 교육적 차원에서 필요할 수 있다.
실제로 학생인권조례가 현장에 도입된 이후에, 교사의 훈육을 ‘아동학대’로 신고하는 사례가 여러 차례 발생했다. 교사의 정당한 지시를 학생이 거부했을 때 이를 강제할 장치가 부재하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교육현장에서 제기되어온 문제였다. 심지어 경계성 장애아나 자폐 증세가 있는 아이들도 교사가 함부로 수업장면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자주 발생 되면서, 현장에서는 ‘학생인권’과 ‘교사의 교육권’이 갈등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진보교육감의 정책에는 이러한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조례 제정 후 학교에 공문을 시행하는 방식, 이른바 ‘내리꽂기’만으로 끝낸다면 문제가 더욱 커질 수 있다. 학생인권이 민주주의의 문제라면, 내용뿐 아니라 과정의 문제까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더라도, 학교 구성원의 민주적 토론 과정을 거쳐 교육적으로 필요한 조치들은 학칙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3) 자사고, 특목고 폐지 이후 문제는?
예전 비평준화 체제에서는, 고교서열화가 중학교 때부터 고교입시로 인한 학습 부담과 사교육을 증가시키고 학생 간 위화감을 조성하여 공교육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진보교육감들은 고교평준화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대중적 지지를 획득했다. 고교평준화 정책은 고등학교 교육을 대중교육답게, 보편교육답게 제자리로 돌려놨다. 현시점에서 고교평준화 정책은 전국적으로 일반화되었기에 이제 그 시효가 만료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든 고등학교를 특색 없이 평준화하는 것이 진보적인 교육정책인지 고민해 봐야 한다. 학생 개개인들의 특성과 발달상황이 다른데도 모든 학생들에게 동일한 교육수준을 제공하는 것은 형식적인 평등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평균 수준에 미달하거나 초과하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까지 제공되어야 진정한 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특수교육대상자를 ‘학습의 어려움’에 중점을 두고 지정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특수교육대상자는 평균의 범위에서 벗어난 모든 학생이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핀란드 교육의 경우 “개개인이 가진 잠재능력은 그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원천적 자원”으로 보고 모두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진행한다. 이에 따라 공식적으로 별도의 영재교육을 실시하지 않더라도, 방과 후 활동을 이용해 특정한 교과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학생을 대상으로 그들의 요구를 존중하는 특수교육 내의 개별화 교육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핀란드는 의무교육기간 동안에 평균 16%에 해당하는 학생이 특수교육에 해당하는 강화지원 및 특수지원을 받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특수교육 대상자는 전체 학생의 1.4%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평등 교육을 강조하는 핀란드에서도 모든 학생에게 동일한 교육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핀란드의 사례처럼, 모든 학교가 일반고로 전환된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인 평등을 위한 교육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떤 형태의 교육제도든 중요한 원칙은 모든 학생들이 자신들의 발달 수준에 맞는 교육을 받아야 할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교육을 사회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교육의 대전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운동은 고교평준화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학교 내에서 다양한 수준과 다양한 특성의 아이들에 대한 진단과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학생들의 흥미와 적성에 맞는 교육과정을 구성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미래를 위해 공통으로 배워야 할 보편적 교육과정은 중요하므로 이러한 과정을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교육해야 하며, 동시에 다른 영역의 특기자들을 어떻게 발굴하고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했던 고교학점제는 발달 수준을 고려한 교육과정도 아니고 특기자들을 고려한 교육과정도 아닌, 배워야 할 내용을 제대로 배울 기회조차 차단하는 협소한 교육과정이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다양한 직업군이 형성되는 시대에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은 보편적이면서도 질 높은 공교육의 강화다. 다만 학습을 받아들이는 학생들의 수준이 다를 경우 이 부분에 대한 격차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와 특별한 재능이 있는 학생들의 재능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민을 현재 교육감 선거에서 뜨거운 감자인 자율형사립고(이하 자사고)와 특수목적고등학교(이하 특목고) 문제에 적용해보자. 서울을 중심으로 양적으로 팽창한 자사고의 경우 분명 문제가 있다. 자사고 설립 취지는 다양성 교육과 수월성 교육인데, 단순히 명문대와 의대 진학을 위한 기관으로 전락하여 그 영향이 일반고의 생태계까지 위협하고, 무엇보다 비싼 등록금으로 인해 부자의 자녀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고교평준화 정책이 ‘평등한 교육’의 본질은 아니지만, 교육과정에 별다른 특징 없이 단지 대입 준비기관으로 전락한 자사고를 대폭 축소하는 조치는 필요해 보인다. 다만 자사고 중에서도 사회적으로 납득할 만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끊임없이 교육개혁을 진행하고 있는 자사고에 대해서는 오히려 교육지원을 통해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도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면 특목고 폐지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특목고는 외국어계열을 제외하고 과학계열이나 예체능계열은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이러한 특수한 목적의 교육을 일반고에서 진행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외국어계열학교와 국제고등학교는 2025년부터 일반고로 전환될 예정이다. 그러므로 다른 특목고 폐지까지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진보교육운동진영은 ‘교육의 수월성’에 대해 고민을 회피하거나, ‘수월성’보다는 ‘형평성’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은 모든 공동체에게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인재’를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인재’를 만들 것인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수월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수월성’을 추구하는 것과 함께 ‘사회적으로 필요한 인재’를 제대로 양성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다.
4) 학교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은 제대로 이루어졌는가?
진보교육감의 정책 중에서 무상급식을 제외하고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개선이다. 지난 10년간 진보교육감 당선이 대거 이루어지면서 교육공무직본부나 학교비정규직노조는 진보교육감과 정책협약, 단체협약 등을 맺고 교육감 직고용 및 무기계약 전환 등의 성과를 남겨 조직 발전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개선이 충분하다고 말하긴 힘들다. 진보교육감들은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방학 중 생계대책을 마련하지 않았고, 여전히 영어전문회화강사와 스포츠강사는 무기계약 전환 대상에서 제외했다. 교사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는 기간제교사의 경우 차별을 시정하는 부분적인 처우개선만 있을 뿐, 정규직화나 무기계약직 전환에 대해서는 진보교육감이든 보수교육감이든 전혀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물론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가 실현되지 못한 것을 진보교육감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학교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교사들은 이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며, 이들의 정규직화 주장을 오히려 정규교사에 대한 역차별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갈등에서 성장한 교사노조연맹은 “전교조는 교사의 이익을 실현하는 조직이 아니라 공무직의 이익을 우선시 여긴다”라는 프레임으로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 결과 교사노조연맹 소속 경기교사노조의 조합원은 이미 전교조 경기지부 조합원 수를 훨씬 앞지르며 교육청과의 단협에서 우위를 점할 기세다. 반면 전교조는 교사노조연맹을 적절하게 비판하면서 사회운동단위로 자신의 입지를 공고화 하기보다는, 교사노조연맹의 비방에 위축되어 있을 뿐이다.
교육감은 각 시도의 유·초·중학교의 예산을 아우르고 인사권을 가지는 등 상당한 권한이 있기 때문에,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개선이나 정규직화에 대한 권한 역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민직선으로 당선된 인사이기 때문에, 사회운동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그 역할은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2. 사회운동적 관점에서 본 진보교육감 평가와 우리의 과제
1) 진보교육운동에서의 평가
진보교육감들의 핵심 선거 공약은 전교조를 비롯한 진보교육운동 진영이 오랫동안 주장해 왔던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교육운동 진영에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진보교육감들의 교육개혁을 실망스럽게 평가한다.
첫째, 진보교육감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굴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기 진보교육감들은 경쟁 중심 교육정책을 전면화하는 이명박 정부에 맞서 대부분 초등학교의 일제고사를 폐지했다. 그러나 교육감 직선제 2기(2014년)에 당선된 13개 지역의 진보교육감들은 당시 ‘자사고 폐지’ 공약을 내걸었음에도, 자사고 폐지에 소극적인 포지션을 취했다. 더욱이 직선제 3기(2018년)에는 문재인 정부가 애초에 약속했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수능자격고사화 등 교육개혁을 이행하지 않음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거나 오히려 정시 확대, 자사고 및 특목고 유지, 교원 감축, 교원평가 유지 등 이전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교육 기조와 근본적으로 단절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둘째, 진보교육감의 개혁의 상징인 혁신학교 설립과 운영이 실망스럽다는 평가이다. 공교육에 대해 실망하는 사회 분위기와 나날이 치솟는 사교육비 부담 등 교육위기 담론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혁신학교는 공교육 강화를 위한 진보교육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진보교육감 12년 동안 사교육 부담은 오히려 증가하였고, 혁신학교에 대한 성공 사례도 일부 초등학교를 제외하면 교사나 학생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셋째, 진보교육감과 전교조의 관계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2018년 진보교육감 14명 중 전교조 출신이 10명이다. 뿐만 아니라 전교조 조합원 출신이 진보교육감이 선출된 교육청에 장학사나 장학관, 보좌관, 비서 등으로 대거 진출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교조가 진보교육감이 추진하는 정책의 방향과 입장이 다르더라도 공개적인 비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전교조 활동가들도 교육청과 대립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진보교육진영은 주민의 선택으로 뽑힌 진보교육감이 자신이 내건 공약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고, 전교조가 이에 대해 제대로 압박하지도 못했다고 평가한다.
2) 교육개혁을 위한 사회운동의 과제
사회진보연대도 2010년과 2014년 교육감 선거에 적극적으로 결합했으나, 진보진영의 교육감선거 대응 목표가 단지 진보교육감 당선으로 협소화되는 것을 경계했다. 선거에서 당선을 위해 달려 나가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진보교육운동 내외를 가로지르는 토론과 선전, 그리고 교육의제에 대한 조직적, 대중적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진보교육감의 당선은 일정한 제도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지만, 전교조를 비롯한 사회운동이 일관된 계획을 가지고 학교현장을 바꾸고 지역 차원의 대중운동을 활성화시키지 않는다면 ‘모래 위의 성’일 뿐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바라본다면, 진보교육감에 대한 진보교육운동의 평가는 부족하거나 부적절하다.
우선, 평가서의 첫 문장은 ‘사회운동의 활성화 실패’가 되어야 한다. 진보교육감이 신자유주의자 혹은 보수주의자에 굴복했다는 평가는 ‘남 탓’하는 핑계이며, 진보교육감을 세우는 것으로 교육개혁이 달성된다는 왜곡된 인식을 유포할 뿐 어떠한 유의미한 교훈도 주지 못한다. 다음으로, 진보교육 혹은 좌파의 교육이념에 대한 재론이 필요하다. 진보교육감의 교육정책과 대동소이한 진보교육운동 진영의 교육정책 역시 결점이 있거나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
둘째, 교육자치의 성과 위에 학교 현장의 자치를 이루어 내야 한다. 진보교육감의 대부분 의제는 교육개혁을 시작하는 출발점으로서는 의미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진보적인 교육개혁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교육개혁의 주체는 언제까지나 교육감직선제라는 대의제를 통해 선출된 권력자가 아니라, 교사, 학생, 학부모 그리고 사회운동의 주체들이다. 교육감 직선제라는 대의제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대의제를 활용하되 그 한계를 인정하며 직접적인 실천과 노력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진보적 교육개혁을 재개념화해야 한다. 흔히 말하듯, ‘자유’와 ‘평등’은 동전의 양면이다. 자유 없는 평등은 독재체제이고, 평등 없는 자유는 무한경쟁체제이기 때문이다. ‘평등’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동일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평등교육’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동일해야 하는 것은 제공하는 교육의 수준이 아니라 교육의 성취 수준이다.
물론 학생들마다 소유한 내적 자원(지능, 정서, 기질)과 외적 자원(가족, 지역, 사회)이 다르기 때문에, 교육의 성취 수준이 완전히 동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 각각에 대한 적절한 지원이 없다면, 교육의 결과로 좋은 자원을 많이 지닌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 사이의 격차는 커질 것이다. 따라서 현시기 ‘평등한 학교’를 만들기 위한 교육개혁은 학력 격차를 줄이고, 특수한(평균수준에 미달하거나 초과하는) 학생들에게 그에 맞는 지원을 제공하여 질적 상승을 꾀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최근 전국교육공무직본부에서 제출한 ‘교육복지 플러스 학교’ 정책 제안에서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학생들을 온전히 키우기 위해선 교사의 교과 활동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교육공무직 본부에서 제안한 학교 교육복지 관련 영역인 방과 후 과정, 취약계층아동지원, 특수교육지원, 교과학습지원, 교육행정지원 등은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다. 그동안 교사들은 “돌봄은 교육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어 교육공무직이 교육활동의 주체가 되는 것을 경계해 왔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교육공무직 노동자들도 학교 교육활동에 참여하는 주체이며, 그들 대부분이 학부모이기 때문에 당연히 교육의 주체다. 학생의 교육은 수업 시간에 참여한 것으로만 성취되지 않는다. 수업 시간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학생 개개인이 가진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돌봄과 복지 영역이 충족되어야 한다. 교사에게 수업과 학생 상담 외에 과도한 행정업무를 전가하는 것은 거부해야 하지만, 교육개혁의 주체를 교사로만 한정하면 진정한 학교혁신은 요원하다.
넷째,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주체들 스스로의 혁신과 협력이 필요하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한 오늘, 학교가 정말로 혁신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교육철학과 전문성을 가진 교사들이 있어야 한다. 학생인권이 학교현장에 온전히 자리 잡기 바란다면, 교사의 교육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또한 각기 다른 발달 수준과 특성을 지닌 학생들을 온전히 교육하기 위해서는 학교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글을 마무리 하며
2022년 교육감 선거는 대선과 마찬가지로 정책 대결보다는 네거티브 선거의 경향을 보인다. 보수교육감 후보들은 진보교육감들의 정책을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자신들의 교육정책에 대해 설득하기 보다는 반(反)전교조, 반이념교육, 반혁신학교, 반학생인권조례 등 진보교육감들의 정책에 대한 ‘반대’만을 선전한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은 교육감 선거 이전이므로 선거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지만, 늘 그렇듯이 진보든 보수든 단일화된 후보자와 기존 교육감 후보자가 유리하다.
그러나 만약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모두 단일화를 이루었다고 가정한다면, 이번 선거에서는 지난 선거보다 보수 진영 후보들이 약진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 이유는 대중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육복지 정책에 대해서는 진보교육감 후보와 보수교육감 후보의 차이가 선명하지 않은 한편, 학령기 아동을 둔 부모들은 진보교육감의 교육정책이 학력저하를 낳는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 위기와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어 학부모들은 교육을 통한 계층상승이나 계급재생산에 더욱 주력하게 될 것이므로, 기존 진보교육감 보다는 보수교육감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한다. 물론 예상이 빗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진보교육감의 시대가 12년이 지났음에도 한국의 고질적인 병폐인 사교육비, 입시경쟁, 대학서열화에 대한 명쾌한 해법은 찾지 못한 채, 이에 더해 학력 격차라는 문제가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보론] 진보진영, 보수진영 후보자들의 공통정책인 AI교육정책 비판
교육부는 그동안 ‘미래교육’과 ‘학생 맞춤형 교육’을 강조해왔다. 그 일환으로 교육부는 2020년에 ‘정보교육 종합계획’을 발표하며 AI 교육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윤석열 정부도 국정과제를 통해서 디지털 교육 및 AI 교육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각 시도 교육감 후보자들 역시 AI 교육 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보수 교육감 후보자뿐만 아니라 진보 교육감 후보자들 역시 AI 기술을 교육에 적용하는 다양한 교육모델을 공약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AI 교육은 진영을 가리지 않고 하나의 미래교육 모델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AI 기술의 교육적 활용을 주장하기에 앞서, 이 기술이 학생들의 발달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교육 정책의 타당성과 교육의 지향점에 대한 논의로 채워져야 할 교육감 선거에서 오히려 교육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숙의의 과정이 축소되고 있다.
AI는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된 정보체계이기 때문에, 이를 수업의 장면에 도입해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동시에 AI는 사용자의 지적 능력을 대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AI 기술은 학생의 지적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AI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의는, 기존에 학교에서 가르치던 내용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데이터를 판단하는 능력의 중요성이 커진다고 묘사한다. 교육부는 학생들의 지적인 사고 과정이 AI 시대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적인 사고 과정은 AI 시대에 맞게 변화해나가기보다는 AI 기술에 의해 변형된다.
AI 교육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AI에 대한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AI를 활용한 교육’이다. ‘AI에 대한 교육’은 AI 기술이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교육(사회의 변화, 윤리적 쟁점 등)과, AI 기술의 원리를 활용하여 소프트웨어를 구현하는 교육을 포함한다. 이는 초등의 ‘실과’와 중등의 ‘정보’ 교과에서 교수될 것으로 예상된다. AI 기술이 정말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 이에 대한 대중적 교육은 대중과 지식인의 지적 차이를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 대중이 AI 기술을 위한 수동적 데이터로 전락하지 않고 스스로 사회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초적 소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부 학생들을 위한 진로교육에 걸맞는 내용과 대중교육에 걸맞는 내용의 구분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AI를 활용한 교육’은 AI 기술 활용 교육(AI 기술을 활용한 실생활 문제해결)과 AI 기술을 활용한 학습 보조(교수학습 자료, EBS 단추, 빅데이터 활용 교육 등)를 포함한다. 이는 교과 융합의 이름으로 교육의 전반적인 영역에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문서 작업을 위한 엑셀, 한글 등 프로그램에 대한 교육이 실제로 유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생활에 유용하면서도 성인으로서의 생활에 거의 필수적으로 활용되는 AI 기술이 있다면, AI 기술 활용 교육은 이를 활용할 역량을 키워주는 교육으로써 필요성을 가진다. 기술 활용 교육이 흥미 위주로 치우치거나 불필요하게 확대되는 것을 경계한다면, 이는 대중에게 필요한 교육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교사의 직무수행과 학생의 학습 장면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는 ‘AI 기술을 활용한 학습보조’는 교육부의 낭만적 기대와는 달리 학생들의 지적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AI 기술을 활용한 학습 보조가 교사들의 업무나 수업에 도움을 주기 위해 도입될 수 있다. 가령 영국이나 싱가포르의 사례처럼 AI 기반 자동 채점 시스템이나 학업 성취 관리 등 학생들에 대한 피드백을 돕는 기술의 발전을 생각할 수 있다. 혹은 AI 기술이 수업을 위한 교수학습 자료의 보급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수업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 수 있다. 교사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기존에 축적된 지식 체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학생들은 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다. 다만 학생들의 데이터가 수집되는 것이나, AI 면접이나 채팅 앱 ‘이루다’의 사례처럼 빅데이터가 사회적 편견을 재생산하는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례가 있기에 AI 기술의 교육적 활용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반면 AI 기술을 활용한 학습 보조가 직접적으로 학생들의 학습 장면에 개입될 때는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적용될 것으로 보이는데, 첫 번째 방향은 학생의 개별 과제 수행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생에게 다음 단계의 과제를 제시하는 방향이고, 두 번째 방향은 학생이 AI의 도움을 받아 과제를 수행하는 방향이다. 이 두 가지 방향 모두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방향은 학생들을 이미 자기조절 학습 능력을 갖춘 주체로 가정했을 때 유의미한 시도가 될 것이다. 팬데믹 시기 이루어진 2020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 중3, 고2 학생들의 기초학력 미달 비중이 거의 전 교과에 걸쳐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상승한 이유는 다층적이지만, 학생들의 자기조절 학습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핵심적 이유다. AI가 제시하는 맞춤형 과제들은 그 과제를 수행할 동기를 가진 학생들에게만 유의미한 과제가 될 수 있으며, 이 과제들은 그 자체로는 학습 동기를 형성하는 자기조절 능력의 발달을 유도하지 않는다. 교육부는 ‘학생 맞춤형 교육’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AI 교육이 이를 실현할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학생은 자신의 역량만큼만 자신의 동기를 생산할 수 있다. 학습 동기를 형성하는 역량의 성장은 자신의 욕구와 동기를 조절할 수 있도록 스스로의 규율을 만드는 것을 돕는 교수적 지도를 필요로 한다. AI 기술이 학생의 지적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 견해는 수정되어야 한다.
두 번째 방향에 대한 비판으로는, 인지 자동화 기술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약화시킨다는(혹은 프롤레타리아화시킨다는) 프랑스의 기술철학자 베르나르 스티글러의 논의를 참고할 수 있다. 학생은 자신이 목표로 하는 학습 내용을 반복적으로 암기하고 이를 인지적으로 자동화시킴으로써 지적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인지 자동화 기술은 학습의 과정에서 학습자가 스스로 자동화시켜야 할 인지적 과정을 대신함으로써 학습자의 지적 능력을 약화시킨다. 가령 EBS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AI 기술을 활용한 쓰레기 분리배출 교육을 실시한 수업을 AI 교육의 우수 사례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재질에 따라 쓰레기를 분리배출 하는 기준을 학습하는 대신에, AI가 쓰레기를 분류하면 학생이 그에 따라 쓰레기를 분리배출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AI 기술의 유용성은 학생의 인지적 수행을 절약하는 방향으로 적용된다. 과제 수행에 있어 AI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그 과정에서 학생의 인지적 기능은 외부화된다.
AI 기술은 풍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므로 학생들의 학습 경험을 다채롭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AI 기술은 학생이 스스로 숙달해야 할 인지적 과정을 대체할 수도 있으므로 신중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술의 자동성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지적 경험만을 제시할 위험이 존재한다. 문제는 AI 교육과 함께 확산되는 담론에 있다. 지금의 담론 속에서 교과 지식은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되기 때문에 숙달할 필요성이 줄어든다. 또한 학생들은 미래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의 진로에 맞는 맞춤형 학습을 자기주도적으로 수행해야 하며, AI 교육은 그러한 학생별 맞춤형 교육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담론은 AI 기술의 문제점을 견제하지 못한다.
교육부의 담론은 학생의 역량을 과대평가하거나, 학생이 학습하는 과정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을 선별하고 이를 찾아보는 역량을 모든 학생이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역량의 발달은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 그리고 지금까지의 학습 수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학생은 학교의 계획에 맞춰 학습을 단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역량만큼 자신의 지식을 구체화한다. 교육부의 낭만적 기대와 달리 모든 학생이 자기주도적 학습을 위해 준비되지는 않았다. AI가 정말로 세상을 바꿔나갈 것이라면, 교육은 학생이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지적 역량을 키우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지적 역량의 형성을 위해서는 반복적인 인지적 수행을 통해 자신의 배경지식을 확장하는 지식 학습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AI 교육의 이상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받는다. 학생은 스스로 빅데이터의 일부가 되거나, 빅데이터가 주어지는 대상이 된다. 독일의 시인 브레히트는 “서정시가 그 시를 읽은 사람들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시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떡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교육부의 낭만적 계획을 수행할 수 있는 학생들에게는 스마트 교육의 계획이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더 많은 학생이 자신을 더 현명하고 강한 사람으로 재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도와야 한다.
학교는 AI 기술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학생과 AI 기술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학생이 분리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식 기반 산업이 고도화되고 인지 자동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지식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시민과 그렇지 못한 시민의 삶의 방식은 서로 멀어져간다. 학교는 반대로 그 거리를 줄일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AI 교육에 대한 논의만이 문제는 아니다. 힘을 가진 교육 주체들은 ‘학생들은 왜 똑똑해져야 하는가, 학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