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성명서 2006년 11월 24일] 노무현정부의 ‘폭력시위엄단’ 대국민담화에 부쳐
탄압을 뚫고, 물러섬 없는 투쟁으로! 2차 민중총궐기로!
1. 지난 11월 22일 ‘한미 FTA 저지를 위한 범국민총궐기’가 서울, 인천, 경기, 강원, 충북, 대전충남, 전북, 광주전남, 대구경북, 경남, 부산, 울산, 제주 등 전국 13개 광역단위에서 15만 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노무현정부와 주류언론은 집회의 불법성․폭력성을 부각시키면서 전 방위적 탄압을 가해오고 있다. 11월 23일 경찰은 시위 참가단체 인사 80여 명에 대한 출석요구서 또는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25일까지 출석에 응하지 않으면 2차 소환 통보 후 불응자 전원을 체포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정부와 경찰은 한미 FTA 반대 집회를 원천 불허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한미 FTA 저지 범국본’은 11월 29일 2차 범국민총궐기를 예정대로 개최할 의사를 거듭 밝히고 있다. 노무현정부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우리의 운동이 중대한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
2. 정부의 담화문은 5공 전두환 정부 시절을 방불케 한다. 집회․시위의 기본적 요구를 묵살하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을 은폐하고, ‘법의 수호’란 미명으로 정부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수법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정부와 언론이 이번 시위의 ‘기획성’을 문제 삼고 있지만, 우리는 오히려 정부의 대응이 오랜 시간 동안 기획, 준비되어온 것이라고 확신한다.
첫째, 노무현정부는 한미FTA를 반대하는 민중의 요구를 철저히 묵살하고, 협상의 준비․진행 과정을 철저히 은폐했다. 노무현정부는 한미 FTA를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국정홍보물 제작에는 수십억 원의 예산을 투입했지만, “FTA에 대한 국민의 의사를 물어라”는 민중운동의 요구는 철저히 회피했다. 국회는 한미 FTA에 관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소속 의원들은 개점휴업 상태나 다름없이 최소한의 역할도 방기했다.
둘째, 정부의 강경대응은 한미 FTA 반대운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정부는 공무원노조를 불법화하면서 노조 사무실을 경찰폭력을 동원해 강제 폐쇄했고, 전교조의 연가투쟁을 뚜렷한 근거도 없이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엄포를 내놓았다. 정부는 노사관계로드맵 입법, 비정규직법안 개악에 반대하는 민주노총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불법파업, 불법투쟁이란 명목으로 구속된 노동자의 수는 2006년에만 수백 명에 달한다. 지난 5월부터 노무현정부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대추리․도두리에 군부대를 투입했다.
셋째, 최근 노무현정부는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도심 집회 금지’라는 명목으로 집회시위에 대한 전면적 제한을 가하고 있다. 경찰을 집시법을 근거로 집회를 신고제가 아니라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차량 흐름이 집회에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신성한 원칙처럼 말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도대체 무엇에 근거를 둔 것인가? 최근 경찰은 집회장소를 차벽으로 사방을 완전히 차단하고 대규모 경찰병력을 빽빽이 배치함으로써 집회에 대한 시민의 공포감을 유발했다. 이 모든 것이 집회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가로막거나, 인위적으로 집회참여자와 시민의 충돌을 유도하고 사회운동에 대한 대중의 혐오감을 유발하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다.
넷째, 노무현정부에 들어 집회 현장에서 가해진 경찰폭력에 의해 전용철, 홍덕표, 하중근 열사가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정부는 경찰폭력 자체를 부인했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후에도 근본적 대책을 강구하라는 요구를 완전히 묵살했다. 경찰은 민중의 분노가 점점 더 높아질 것을 분명히 알고 있고, 폭력적 진압을 위한 수단을 포기하긴커녕 오히려 한 단계 더 발전시키고 있다.
3. 따라서 이번 11월 29일로 예정된 '노동기본권 쟁취! 사회양극화 해소! 한미 FTA 저지를 위한 2차 범국민총궐기‘는 엄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정부는 우리의 투쟁을 위축시키기 위해 집회 개최에 대한 ’양해각서‘를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국면을 활용하여 경찰의 요구에 순응하는 집회만을 허용하는 선례를 남기고자 하고 있다. 집회 ‘원천불허’와 참여자 검거라는 과거 우리가 너무나 익숙했던 경험이 우리 눈앞에서 다시 펼쳐지기 직전이다.
이러한 정부의 노골적인 협박을 분쇄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우리의 집회․시위의 자유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나아가 2차 범국민총궐기대회를 통해 한미 FTA에 반대하는 우리의 뜻이 강고한 투쟁을 통해 표현되지 못한다면 한미 FTA 반대투쟁은 더 이상 승리의 전망을 열어나갈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에 가해지는 전 방위적 탄압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난 11월 22일 1차 총궐기를 넘어서, 우리의 투쟁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회진보연대는 우리 운동의 미래가 다가오는 투쟁에 달려 있다는 비상한 각오로 모슨 사회운동이 2차 총궐기에 임할 것을 호소한다.
민중생존권 파탄 노동권 말살, 노무현정부 퇴진하라!
한반도 전쟁위협 한미 FTA 강요, 미국을 규탄한다!
민중총궐기 투쟁으로 민중운동 탄압 분쇄! 집회시위의 자유 쟁취!
2006년 11월 24일
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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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1%] 인간 시민권(Human Civic Rights)의 철학은 가능한가? 평등한 자유에 관한 새로운 반성 나는 여기서 평등한 자유(아이쿠아 리베르타스, aequa libertas)라는 통념에 관한 "새로운 반성들"을 제시하고 싶은데, 이 통념은 고대(키케로)부터 존 롤스와 아마르티아 센의 작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당대 논쟁들에 이르는 공화주의 정치 전통 전체에 걸쳐 존속해 왔으며, 나는 이전의 연구에서 이 통념을 평등한 자유(equaliberty, galibert , igualibertad, Gleiche Freiheit, or Gleichheit/Freheit 등)라는 압축된 혼성어 형태로 제시한 바 있다.2) 이 반성들을 통해 정치 철학의 고전적 문제 곧 시민권(rights of the citizen)의 민주적 정초(定礎, foundation)를 토론하는 데 기여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다. 철학에서 정초는 원리 특히 구성(構成, constitutive) 원리의 해명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민권" 자체가 입헌(入憲, constitutional) 질서의 핵심이자 목표를 이룬다 성문적이든 불문적이든, 형상적이든 질료적이든, 규범적이든 구조적이든 고 상정할 때 여기서 문제는, 우리 역사에 깊이 뿌리박힌 철학적-정치적 언어유희를 따라 말하자면, 헌법의 구성(constitution of constitution) 같은 것이다(하지만 언어마다 외양은 다양하다: 프랑스어로는 constitution de la constitution이지만, 독일어로는 Konstitution der Verfassung이다.). 여기서 나는 이 구성의 구성을 '해체'(deconstruction, 탈-구축)의 정신에 따라 다루고 싶은데, 이는 파괴라거나 순전한 자격박탈이 아니라 탈-구축(Ab-bau)3), 전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는 문제적인 요소들과 부정적, 이율배반적 또는 아포리아적 측면들을 끌어냄으로써, 개작이나 전위 심지어 역전(나는 결론 부분에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은데, 이는 한나 아렌트의 일부 고찰에서 나름대로 영감을 얻은 것이다.)의 필연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4)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 내가 간략히(그리고 희망컨대 논란의 소지가 없는 방식으로) 상기하고 싶은 것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근대 시민권(citizenship)에 내재한 철학 혁명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원리상의 난점을 제기하는가 하는 점이다. 근대 시민권, 곧 고전주의 시기에 시작하여 17~19세기의 인민 봉기와 헌법 개혁을 통해 이루어진 정치 변혁에 의해 전진적으로 설립되었으며, 무한한 과제를 구성한다고 널리 인정받는 근대 시민권을, 고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의 시민권과 구별 짓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 원리의 발명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가 이미 말했듯, 폴리테이아(polliteia, 정치체)나 키비타스(civitas, 도시국가)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이우스 코뮤니스(ius communis, 공동의 법)와 콘센수스 포풀리(consensus populi, 인민의 동의)에 준거했다. 근대 시민권을 뚜렷하게 특징짓는 것은, 적어도 권리상 또는 원리상으로 본다면, 시민 지위의 보편화다. 즉 시민 지위는 특권이기를 멈추고 대신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 보편적 접근의 견지에서 파악되기에 이른다. 정치적 권리에 대한 권리(아렌트가 말했듯 "권리를 가질 권리")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권리가 바로 그것이다.5) 우리 근대인에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하지만 또한 동시에 불편한, 근대성의 유산을 대표하는 이러한 관점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우선 외연적(extensive) 보편성이다. 즉 세계정치적(cosmopolitical) 지평이 그것으로, 다양한 민족적, 연방적 시민권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족적 시민권과 국제법의 절합이 상이한 정도로 이러한 지평에 근접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내포적(intensive) 보편성이라 부르려는 것이 훨씬 중요한데, 이는 공통의 인간성, 헤겔이나 포이어바흐 식으로 말하면 가퉁스베젠(Gattungswesen) 또는 "유적(類的) 존재"인 특성 없는 인간 고유성(properties)을 결여한 인간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을 정치 참여의 지주 또는 "주체/기체"(基體, subject)로 제시한다. 이 내포적 보편성은 조건이나 지위, 본성을 이유로 한 시민권의 부인을 금지하고, 배제를 배제한다. 우리는 보편성의 개념화에 본래적인 이 부정성 또는 "부정의 부정"의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적 시민권은 이상적으로(또는 이렇게 말하길 원한다면, 규범적으로) 인간성이라는 술어와 시민성이라는 술어의 동연성(同延性, coextensivity), 두 관점의 상호성, 등식을 설립한다. 유명한 철학 정식을 빌려 말하자면, 호모 시베 키비스(Homo sive Civis, 인간 즉 시민)다. 정치적 근대성을 기초 지었으며 우리의 헌법 전문 대부분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는 위대한 선언들에, 진술적이면서 동시에 수행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다른 학자들을 따라 다른 곳에서 논증한 것처럼 이들 선언의 핵심 골자는, 이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영미권의 입헌 전통에서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는 『권리 장전』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자유(equal liberty) 또는 "평등 자유"(equaliberty) 명제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진다.6) 이 명제는 특유의 이중 부정 또는 동시 부정 형태로, 평등은 자유 없이 불가능하고 자유 역시 평등 없이 불가능하다는 점, 따라서 자유와 평등은 상호 함축 관계에 있다고 정립한다. 그리하여 이 명제는 유적(類的) 인간과 시민권을 원리상 동치로 만들며, 이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의 법적 일치(adequation)를 함축한다. 따라서 이는 근대에 전형적인 보편주의적 관점에 따라 헌법을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난점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집요하고 해결 불가능하기 십상인 난점, 민주적 보편주의를 포기하거나 와해시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되며, 민주적 보편주의의 구성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인도해야 할 그 난점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볼 때 이러한 난점을 낳는 이유들의 원천 또는 집합을 최소한 세 가지 정도는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민주주의적 헌정을 구성하는 명제 자체를 재고하거나 재정식화할 수 있게 해 주는 방식으로 이것들을 소묘해보고 싶다. 첫째(여기서 나는 물론 독창성을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난점들은 민주주의적인 권리 구성/헌정(democratic constitution of rights)이라는 관념을 이중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나오는데, 이는 기본권(게랄트 슈트르츠(Gerald Stourzh)의 주저 제목에서 환기된 기본권 민주주의(Grundrechtsdemokratie))라는 통념과 인민 주권 또는 입법적이고 입헌적인 "일반 의지"라는 통념 사이의 경합에서 표현된다.7) 둘째 나는 이 측면이 사실 첫 번째 측면과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추상적으로 규범적인 관점과 역사적·정치적으로 구체적인 관점 간의 대립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해석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난점은 보편주의적 정초가 준거하는 인간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의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우리는 우주론적(cosmological)이거나 신학적인(또는 우주신학적인) 관점을 인간학적인 관점으로 바꾸는 역사적 대체 이는 근대성을 고유하게 특징짓는 대체다 의 결과 과거 신이나 세계로 형상화되던 최종적 준거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인간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대립된 의미작용 또는 이해방식으로 즉시 분할된다는 "형이상학적 사실"을 상기함으로써 이를 표현할 수 있다. 공동체적 인간은 소유자로서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으며, 내가 도입하고 싶은 용어법에 따르자면 "주체"로서의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다. 비록 양자 모두 유적이며, 둘 다 시민과 일치하고 시민의 권리 구성을 내부로부터 결정하게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이 이중성은 정치를 실질적으로 민주화하려는 또는 평등한 자유를 제도적으로 실현하려는, 항상 갈등적인 시도와 절차들 안에서 한 시도 그치지 않고 작동해 왔다. 셋째, 마지막으로 난점은 "정초"는 그 관념만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본질적이고 돌이킬 수 없이 이율배반적이라는 사실, 즉 자기 자신과 모순을 빚고 그 자신이 설립하는 원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온다. 여기서 나는 얼마간 구성/입헌 권력(constituent power)이라는 통념의 고전적 이율배반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신학적 뿌리는 법이나 질서를 설립하는 궁극적 지점이 또한 필연적으로 모든 질서와 적법성이 해소되는 지점, 법질서의 보편성에 관한 예외 지점이자 그 법적 제약에 관한 해방의 지점 역시 표상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 하지만 내가 또한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은 보편화 자체가 배제, 또는 심지어 내적 배제 절차와 분리할 수 없어 보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는 원리를 실현하는 데서 겪게 되는 우연한 난점들이나 역사적 상황에 따른 원리들의 단순한 경험적 제한 내지 특수화 같은 것들과는 사뭇 다른 것을 표상한다. 이는 구성/입헌이나 [헌법의] 재정초라는 관념 그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용한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명백히 역설적인 것으로서, 이는 보편성 자체에 고유한 "유한성"의 종류는 무엇인지, "민주주의" 또는 "시민권"이라는 정치적 이름을 지닌 해방 과정의 무한한 또는 미완적 성격에 고유한 "유한성"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이다. 내가 방금 환기시킨 각각의 점들을 도식적이고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세 가지 경우에서 내 목표는 우리가 지도 원리로 삼는 권리의 민주적 구성/입헌이라는 관념에 본래적인 아포리아적 요소들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환기시킨 첫 번째 난점은, 모두 알다시피 정치적·철학적 담론과 분리할 수 없는 메타법적인 담론 안에서, 민주적 구성/입헌 질서의 지속적인 "정초"가 어떻게 가능한지, 따라서 그러한 질서에 대한 보증이 어떻게 제공될 수 있는지 그려볼 수 있는 두 가지 전망[기본권의 관점 대 인민 주권의 관점] 사이의 긴장과 관련된다.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이유 때문에 이 난점은 1945년 이후 독일의 상황에서 특히 뚜렷하고 명료한 형태로 정식화되었다. 또한 우리는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가 오늘날 각별한 함의를 지닌다는 점 역시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권력과 공적 권위에 관한 입헌적 전망, 가능하다면 민주주의적인 구성/입헌의 전망을 탈(post)민족적이거나 상위(supra)민족적 공간, 특히 유럽 공간으로 확장하는 문제를 우리가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이 두 측면(외연적 측면 상위민족체로의 이행 과 내포적 측면 공적 권력들의 민주화)은 분리할 수 없다. 나는 두 명의 동시대 독일 저자들에게서 몇 가지 정식화를 빌려올 생각인데, 그 중 한 명은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고, 다른 한 명은 법학자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Ernst-Wolfgang B ckenf rde)로, 이들은 이러한 난점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상당히 비슷한 용어로 이러한 난점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작인 『사실성과 타당성』의 핵심 장에서 하버마스는, 정치 질서를 내적으로 규제하는 "권리 체계"는 두 방향 중 하나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는 "실정법이라는 수단에 따라 자신들의 공동의 삶을 규제"8)할 것을 합법적으로 지향하는 시민들 사이의 상호 인정 과정 안에서 작동하는 [권리 체계의 두 방향 사이의] "내적 긴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 "양가적인 법적 타당성(validity)"을 한 편으로는 루소주의적인, 다른 한 편으로는 칸트주의적인 계보에 따라서 (이 점이 중요하다) 자율(성)의 원리를 이해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에 철학적으로 준거 짓는다(여기서 논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사실 이는 하버마스에게는 루소와 칸트의 담론이 서로에 대해 단순히 외재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권리 체계의 토대에 관한, 따라서 법적 측면, 도덕적 측면(주체적인 자기결정과 주체성들 사이의 상호 인정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는)과 고유하게 정치적 측면 간의 내적 관계에 관한 하버마스의 논의 전체는 그가 관점들 사이의 "암묵적인 경합" 관계라고 부르는 것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두 가지 경합하는 관점은 입헌 질서가 기본권(Grundrechte)으로 간주되는 인권에 기초한다고 보는 관점과, 인민 주권 원리에 기초한다고 보는 관점이다.9) 하버마스는 이 두 가지 관점이 "근대 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관념들"이라고 본다.10) 과연 이 두 관점은 그것을 수단으로 합의, 또는 하버마스의 인상적인 정식화를 따르자면 "일인칭 복수"(us, nous, wir)11) - 이는 자기결정이나 권리들의 상호 인정이라는 실질적 과정에 의해 전제된다 - 를 생산함과 동시에 그것에 규범을 주거나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관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관념은 보완적이기보다는 경합적인데, 특히 민주주의에 관한 "자유주의적"이고 "시민 공화주의적"(civic republican) 개념화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토론이 잘 보여주거니와, 이 두 관념은 각각 도식적으로 칸트주의적 표상(비록 나 자신은 로크주의적 요소를 강조해두고 싶지만)과 루소주의적 표상으로 귀속될 수 있다. 전자는 주관적 권리들12) 사이의 상호성과 합의, 또는 이러한 상호성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평등한 자유를 규범의 보편성 위에 기초 짓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보편 규범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법률 질서의 "상류"(upstream)에서, 즉 개인들이 이상적으로 서로서로를 대체할 수 있고 따라서 견해의 차이나 이해의 갈등을 중화할 수 있는 도덕적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후자는 보통 "일반 의지"라 불리는 평등주의적 규범을 구체적(하버마스는 이를 "실존적"이라고까지 부른다.13))인 정치 행위 안에 통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정치 행위는 개인들의 사회화를 실현한다. 즉 개인들을 역사적 사회의 제도들 안에 통합시키는데, 이 때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하거나 동원하지 않으면서, 개인에게 다시 한 번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일반적인 공적 이해 안에서 사적이고 특수한 이해를 초월하도록 강제하기까지 한다. 주지하듯이 하버마스가 이 딜레마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 입헌 전통 전체와 동연적이다 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하는 해법은 초월론적 형태를 취하는데, 여기서 그는 도덕화나 정치화의 방향으로 옮겨가지 않으면서도 정확히 권리 구성/입헌의 수준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주는 제 3의 통념을 도입한다. 하버마스는 이 용어가 "의사소통"(communicational) 영역 또는 "의사소통 행위의 영역"에서 발견된다고 보는데, 여기서는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언어 사용의 발화수반적(illocutionary)인 구속력이 이성과 의지를 화합시키는 데 봉사하며," 이는 "합리적 담론의 참여자로서 공동의 법주체들은 논란이 되는 규범이 그것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이들의 합의에 부합하는지, 또는 부합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14) 따라서 평등한 자유는 단순히 강제되거나 또는 준칙화되지 않으며, 그것을 자신의 주권성의 표현으로 보는 어떤 정치체(body politic)에 의해 도구화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자연히 이러한 "해법"이 실제로는 순환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한데, 왜냐하면 의사소통 절차는 사실 상호 인정이나 "합의"의 원천이라기보다는 효과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하버마스의 해법이 실제로는 인민 주권이나 집단의 자율성이라는 견지에서 [법·정치 체계] 정초를 바라보는 공화주의적이고 루소주의적인 전망보다는, 기본권이나 개별적인 권리 보장의 보편화의 견지에서 정초를 보는 칸트주의적인 도덕적 전망에 훨씬 가깝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가 제시하는 관점에서는 사태가 사뭇 달라지고, 실천적 목적 면에서 본다면 정반대가 된다.15) 여기서 자세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뵈켄회르데가 민주주의 전통에 본래적인(사실은 그 전통에 고유하게 속하는) "구성/입헌 권력"이라는 관념의 난점들과 기본권(Grundrechte) 또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차례로 검토한다는 점을 상기시켜두고 싶다(기본권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은, 인민 주권의 표현이 약소자들을 말살하거나 심지어 배제하게 되는 근대성의 보편주의와 합리주의에게는 치명적인 점이지만 가능성을 설명하고 그에 맞서기 위해 탈(脫)전체주의 헌법들이 다시 한 번 크게 힘주어 강조했던 점이다). 구성/입헌 권력이 완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그것이 주권을 기초 지음에 있어,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특히 해방적 봉기의 고유하게 구성적/입헌적인 순간에 능동적으로 구성되는, 집합적 전체로 간주되는 "인민" 뿐만 아니라, 뵈켄회르데가 미조직 인민이라고 부르는 이들, 권리 보장 및 헌법적 통제 체계로 온전히 통합되지 못한 채,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다면 (예컨대 보통 선거권의 행사에서 볼 수 있듯이) 헌정의 단순한 한 기관으로 변형되지 못한 채 항상 그 아래에 머물러 있는 이들까지 자신의 토대로 삼는 한에서다. 다른 한 편, 기본권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은 모든 시민들 사이에서 이 권리들을 분배한다는 관념, 그리고 이 분배의 실질적 실현이라는 관념과 분리할 수 없어 보인다. 나 자신은 이 후자의 관념 안에서 평등한 자유라는 관념의 강력한 표현을 읽고 싶다. 이제 이 분배라는 문제가 가동시키는 것은, 정치적 권리를 사회적 권리와 동일시하는 경향 뵈켄회르데는 이 양자 사이의 일치라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될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같은 경향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본권에 대한 규범적 개념화가 제도에 관한 또는 가치론에 관한 이론이나 개념화를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통제할 수 없는 운동(말하자면 "전방으로의 탈출(fuite en avant)"16)이다. 뵈켄회르데는 이 과정을 "기능적 민주주의"(functional democracy)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권리 및 의무의 분배를 지배하는 것은 추상적 규범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과정으로서 민주주의적 과정 자체다.17) 결국 뵈켄회르데가 두 가지 정초 그 역시 두 가지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간 반정립의 초월을 파악하는 방식은 하버마스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거니와, 이는 그가 도덕적 차원에 비해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정치적 차원을 인민의 구성/입헌 권력의 자기 규제 또는 자기 제한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 때문에 그는 "권력"(또는 "에너지"18)의 단계에서 규범(norm)과 정상성(normativity)의 단계로 이동할 수 있는데, 이는 정확히 그가 구성/입헌 권력 행사의 규칙 또는 조건에 관한 자신의 정의 안에 (그리고 그 행사 안에) "기본권"의 견지에서 정식화된 처방과 보장을 통합하는 한에서이며, 이는 최종 분석에서 보편주의적인 문화 전통에서 유래한다.19)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두 가지 원리 사이의 균형의 탐색, 또는 (인민적) 구성/입헌 권력이라는 민주주의적 관념과 "기본권"이라는 (전자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 민주주의적 관념 간의 상호 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호 한정에서 구성/입헌 권력 또는 인민 주권이라는 관념은 우선권을 보유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계속하는데, 이는 시민권의 민족적 성격20), 즉 시민권과 인류 사이의 차이에 관한 그의 고찰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추상적 개인주의나 세계시민주의에서 정식화될 수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선택한 권위에 통치 받고 그 권위의 통제 아래 있겠다는 요구의 단순한 담지자로서 개인들 다수(multitude)로 인민이 해체되지 않고, "인민"이나 더 나아가 "미조직" [인민이] 계속 정치적 주체로 남아 소속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실제로 반드시 존속해야 한다. 내가 널리 알려진 이러한 입장들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이중의 가설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한 편으로, 고유하게 법적인 수준에서는 민주적 질서 또는 내가 평등한 자유라 부른 것을 일의적으로 정초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설사 평등한 자유가 의심의 여지없이 법적인 개념 내지 관념, 하나의 "권리 형태"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는 조금도 놀라운 사실은 아닌데,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법질서가 자신을 정초할 수 있을 만한 "형이상학적 점"을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자기정초는 내부로부터 불가피하게 타자성의 출현, 권리의 본질적인 불순성을 초래하거니와, 이는 반드시 도덕적이거나 역사-정치적인 기원에 따라 뒷받침되어야 하며, 양자 모두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이상화된다. 우리가 민주주의 질서를 고찰하고 있다고 해서 난점이 사라지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는 이러한 난점을 순수한 형태로 제시하여 그것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뵈켄회르데처럼 "구성/입헌 권력"은 한계 개념이라고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본권" 역시 어느 모로 보나 한계 개념이며, 따라서 항상 규정된 내용과 공식화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 같은 한계들의 한계는 바로 이 두 가지 전망들의 합치 내지 일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원리의 문제로 간주될 경우 이러한 일치는 엄밀히 말해 획득할 수 없는 것이라면, 또는 무한한 탐색의 대상이라면, 귀결 문제로 간주된다면, 이는 즉각 주어진 것으로, 곧 평등한 자유 그 자체로 나타난다. 평등한 자유는 서로에 대한 배제 없는 인민 주권과 자율성에 대한 요구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그것이 보편적 상호성의 원리 또는 규칙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을 함의한다.21) 평등한 자유가 요구하는 것은 정치 참여와 의사 결정에 대한 개인들의 기본권의 실현이며, 구체적으로 본다면 여기에는 바로 표현과 양심의 자유라는 권리, 법적 보장만이 아니라 심지어 교육과 직업적 지위에 대한 "사회적 권리"도 포함된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한 자유는 이중 구속의 이름이다. 평등한 자유는 해방의 관념 또는 민주주의 관념의 서로 다른 표현[곧 인민 주권과 개인의 기본권]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간의 정치적 연결을 해체시키지 않고서는 개인과 공동체 양자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부당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류의 지평 내부에서 정립(되고 선언)된 원리들의 보편성과 동시에 "인민 주권"으로 설립된 결정의 자율성을 지칭한다. 내가 예고했던 마지막 두 가지 점에 관해서는 훨씬 소략하게, 심지어 전보를 치듯이 논해야만 할 상황이라서, 개략적인 정식화로 논의를 국한하도록 하겠다. 첫째(이것이 나의 두 번째 테제였다), 나는 이 두 가지 "정초적" 담론들의 감축할 수 없는 이원성과 근대적인 "인간" 문제의 역사 전체와 동연적인 철학적 이원성을 관련지어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최소한 우리는 두 가지 이원성을 활용하여 서로를 해명하려고 시도해 볼 수 있다. 각각의 담론들, 또는 차라리 민주주의 담론의 두 측면인 "자유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측면, 또는 원한다면 "개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측면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을 함축한다. 다시 루소가, 그리고 칸트보다는 로크가 여기서 준거점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로크는 문제의 기원에, 루소는 문제의 이행점에 각각 자리 잡고 있다. 한 편에는 주체의 인간학 쪽으로의 경향이 있는데, 그 지평은 공동체를 "간주관성"으로 구성하는 것이며, 그 중심 문제는 루소의 작업에서 눈부실 정도로 분명한 것처럼 법에 대한 관계의 문제로서, 이는 뗄 수 없이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이고, "특수"하면서도 "일반"적인 문제다. 만일 모든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주권이라는 신학 정치적 개념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이 근대 인간학의 한 복판에 남아 있다면, 이는 정치의 내재성 안에 법의 초월성을 통합하려는 처음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획, 또는 [근대적] "주체"가 그 자신은 복종에서 면제되어 있는 외적이고 절대적이며 숭고한 권위22)에 종속된 수브
[%=박스1%] 인간 시민권(Human Civic Rights)의 철학은 가능한가? 평등한 자유에 관한 새로운 반성 나는 여기서 평등한 자유(아이쿠아 리베르타스, aequa libertas)라는 통념에 관한 "새로운 반성들"을 제시하고 싶은데, 이 통념은 고대(키케로)부터 존 롤스와 아마르티아 센의 작업을 둘러싸고 벌어진 당대 논쟁들에 이르는 공화주의 정치 전통 전체에 걸쳐 존속해 왔으며, 나는 이전의 연구에서 이 통념을 평등한 자유(equaliberty, galibert , igualibertad, Gleiche Freiheit, or Gleichheit/Freheit 등)라는 압축된 혼성어 형태로 제시한 바 있다.2) 이 반성들을 통해 정치 철학의 고전적 문제 곧 시민권(rights of the citizen)의 민주적 정초(定礎, foundation)를 토론하는 데 기여하려는 것이 나의 의도다. 철학에서 정초는 원리 특히 구성(構成, constitutive) 원리의 해명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민권" 자체가 입헌(入憲, constitutional) 질서의 핵심이자 목표를 이룬다 성문적이든 불문적이든, 형상적이든 질료적이든, 규범적이든 구조적이든 고 상정할 때 여기서 문제는, 우리 역사에 깊이 뿌리박힌 철학적-정치적 언어유희를 따라 말하자면, 헌법의 구성(constitution of constitution) 같은 것이다(하지만 언어마다 외양은 다양하다: 프랑스어로는 constitution de la constitution이지만, 독일어로는 Konstitution der Verfassung이다.). 여기서 나는 이 구성의 구성을 '해체'(deconstruction, 탈-구축)의 정신에 따라 다루고 싶은데, 이는 파괴라거나 순전한 자격박탈이 아니라 탈-구축(Ab-bau)3), 전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해체는 문제적인 요소들과 부정적, 이율배반적 또는 아포리아적 측면들을 끌어냄으로써, 개작이나 전위 심지어 역전(나는 결론 부분에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은데, 이는 한나 아렌트의 일부 고찰에서 나름대로 영감을 얻은 것이다.)의 필연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4)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 내가 간략히(그리고 희망컨대 논란의 소지가 없는 방식으로) 상기하고 싶은 것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근대 시민권(citizenship)에 내재한 철학 혁명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원리상의 난점을 제기하는가 하는 점이다. 근대 시민권, 곧 고전주의 시기에 시작하여 17~19세기의 인민 봉기와 헌법 개혁을 통해 이루어진 정치 변혁에 의해 전진적으로 설립되었으며, 무한한 과제를 구성한다고 널리 인정받는 근대 시민권을, 고대, 중세, 그리고 르네상스의 시민권과 구별 짓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 원리의 발명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가 이미 말했듯, 폴리테이아(polliteia, 정치체)나 키비타스(civitas, 도시국가)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이우스 코뮤니스(ius communis, 공동의 법)와 콘센수스 포풀리(consensus populi, 인민의 동의)에 준거했다. 근대 시민권을 뚜렷하게 특징짓는 것은, 적어도 권리상 또는 원리상으로 본다면, 시민 지위의 보편화다. 즉 시민 지위는 특권이기를 멈추고 대신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 보편적 접근의 견지에서 파악되기에 이른다. 정치적 권리에 대한 권리(아렌트가 말했듯 "권리를 가질 권리")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권리가 바로 그것이다.5) 우리 근대인에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하지만 또한 동시에 불편한, 근대성의 유산을 대표하는 이러한 관점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우선 외연적(extensive) 보편성이다. 즉 세계정치적(cosmopolitical) 지평이 그것으로, 다양한 민족적, 연방적 시민권들,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족적 시민권과 국제법의 절합이 상이한 정도로 이러한 지평에 근접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내포적(intensive) 보편성이라 부르려는 것이 훨씬 중요한데, 이는 공통의 인간성, 헤겔이나 포이어바흐 식으로 말하면 가퉁스베젠(Gattungswesen) 또는 "유적(類的) 존재"인 특성 없는 인간 고유성(properties)을 결여한 인간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을 정치 참여의 지주 또는 "주체/기체"(基體, subject)로 제시한다. 이 내포적 보편성은 조건이나 지위, 본성을 이유로 한 시민권의 부인을 금지하고, 배제를 배제한다. 우리는 보편성의 개념화에 본래적인 이 부정성 또는 "부정의 부정"의 요소에 주목해야 한다. 근대적 시민권은 이상적으로(또는 이렇게 말하길 원한다면, 규범적으로) 인간성이라는 술어와 시민성이라는 술어의 동연성(同延性, coextensivity), 두 관점의 상호성, 등식을 설립한다. 유명한 철학 정식을 빌려 말하자면, 호모 시베 키비스(Homo sive Civis, 인간 즉 시민)다. 정치적 근대성을 기초 지었으며 우리의 헌법 전문 대부분에서 그 흔적이 발견되는 위대한 선언들에, 진술적이면서 동시에 수행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다른 학자들을 따라 다른 곳에서 논증한 것처럼 이들 선언의 핵심 골자는, 이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영미권의 입헌 전통에서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는 『권리 장전』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자유(equal liberty) 또는 "평등 자유"(equaliberty) 명제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진다.6) 이 명제는 특유의 이중 부정 또는 동시 부정 형태로, 평등은 자유 없이 불가능하고 자유 역시 평등 없이 불가능하다는 점, 따라서 자유와 평등은 상호 함축 관계에 있다고 정립한다. 그리하여 이 명제는 유적(類的) 인간과 시민권을 원리상 동치로 만들며, 이는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의 법적 일치(adequation)를 함축한다. 따라서 이는 근대에 전형적인 보편주의적 관점에 따라 헌법을 민주적으로 구성하는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난점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집요하고 해결 불가능하기 십상인 난점, 민주적 보편주의를 포기하거나 와해시키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되며, 민주적 보편주의의 구성에 대한 비판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인도해야 할 그 난점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볼 때 이러한 난점을 낳는 이유들의 원천 또는 집합을 최소한 세 가지 정도는 제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민주주의적 헌정을 구성하는 명제 자체를 재고하거나 재정식화할 수 있게 해 주는 방식으로 이것들을 소묘해보고 싶다. 첫째(여기서 나는 물론 독창성을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 난점들은 민주주의적인 권리 구성/헌정(democratic constitution of rights)이라는 관념을 이중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나오는데, 이는 기본권(게랄트 슈트르츠(Gerald Stourzh)의 주저 제목에서 환기된 기본권 민주주의(Grundrechtsdemokratie))라는 통념과 인민 주권 또는 입법적이고 입헌적인 "일반 의지"라는 통념 사이의 경합에서 표현된다.7) 둘째 나는 이 측면이 사실 첫 번째 측면과 무관하지 않을뿐더러, 추상적으로 규범적인 관점과 역사적·정치적으로 구체적인 관점 간의 대립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해석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난점은 보편주의적 정초가 준거하는 인간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의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우리는 우주론적(cosmological)이거나 신학적인(또는 우주신학적인) 관점을 인간학적인 관점으로 바꾸는 역사적 대체 이는 근대성을 고유하게 특징짓는 대체다 의 결과 과거 신이나 세계로 형상화되던 최종적 준거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인간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대립된 의미작용 또는 이해방식으로 즉시 분할된다는 "형이상학적 사실"을 상기함으로써 이를 표현할 수 있다. 공동체적 인간은 소유자로서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으며, 내가 도입하고 싶은 용어법에 따르자면 "주체"로서의 인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동일하지 않다. 비록 양자 모두 유적이며, 둘 다 시민과 일치하고 시민의 권리 구성을 내부로부터 결정하게 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이 이중성은 정치를 실질적으로 민주화하려는 또는 평등한 자유를 제도적으로 실현하려는, 항상 갈등적인 시도와 절차들 안에서 한 시도 그치지 않고 작동해 왔다. 셋째, 마지막으로 난점은 "정초"는 그 관념만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본질적이고 돌이킬 수 없이 이율배반적이라는 사실, 즉 자기 자신과 모순을 빚고 그 자신이 설립하는 원리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온다. 여기서 나는 얼마간 구성/입헌 권력(constituent power)이라는 통념의 고전적 이율배반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잘 알려진 것처럼 그 신학적 뿌리는 법이나 질서를 설립하는 궁극적 지점이 또한 필연적으로 모든 질서와 적법성이 해소되는 지점, 법질서의 보편성에 관한 예외 지점이자 그 법적 제약에 관한 해방의 지점 역시 표상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후술하겠다). 하지만 내가 또한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은 보편화 자체가 배제, 또는 심지어 내적 배제 절차와 분리할 수 없어 보이는 것 같다는 점이다. 이는 원리를 실현하는 데서 겪게 되는 우연한 난점들이나 역사적 상황에 따른 원리들의 단순한 경험적 제한 내지 특수화 같은 것들과는 사뭇 다른 것을 표상한다. 이는 구성/입헌이나 [헌법의] 재정초라는 관념 그 자체를 내부로부터 변용한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제기해야 하는 질문은 명백히 역설적인 것으로서, 이는 보편성 자체에 고유한 "유한성"의 종류는 무엇인지, "민주주의" 또는 "시민권"이라는 정치적 이름을 지닌 해방 과정의 무한한 또는 미완적 성격에 고유한 "유한성"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이다. 내가 방금 환기시킨 각각의 점들을 도식적이고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세 가지 경우에서 내 목표는 우리가 지도 원리로 삼는 권리의 민주적 구성/입헌이라는 관념에 본래적인 아포리아적 요소들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환기시킨 첫 번째 난점은, 모두 알다시피 정치적·철학적 담론과 분리할 수 없는 메타법적인 담론 안에서, 민주적 구성/입헌 질서의 지속적인 "정초"가 어떻게 가능한지, 따라서 그러한 질서에 대한 보증이 어떻게 제공될 수 있는지 그려볼 수 있는 두 가지 전망[기본권의 관점 대 인민 주권의 관점] 사이의 긴장과 관련된다.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이유 때문에 이 난점은 1945년 이후 독일의 상황에서 특히 뚜렷하고 명료한 형태로 정식화되었다. 또한 우리는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가 오늘날 각별한 함의를 지닌다는 점 역시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권력과 공적 권위에 관한 입헌적 전망, 가능하다면 민주주의적인 구성/입헌의 전망을 탈(post)민족적이거나 상위(supra)민족적 공간, 특히 유럽 공간으로 확장하는 문제를 우리가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이 두 측면(외연적 측면 상위민족체로의 이행 과 내포적 측면 공적 권력들의 민주화)은 분리할 수 없다. 나는 두 명의 동시대 독일 저자들에게서 몇 가지 정식화를 빌려올 생각인데, 그 중 한 명은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고, 다른 한 명은 법학자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Ernst-Wolfgang B ckenf rde)로, 이들은 이러한 난점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상당히 비슷한 용어로 이러한 난점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작인 『사실성과 타당성』의 핵심 장에서 하버마스는, 정치 질서를 내적으로 규제하는 "권리 체계"는 두 방향 중 하나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는 "실정법이라는 수단에 따라 자신들의 공동의 삶을 규제"8)할 것을 합법적으로 지향하는 시민들 사이의 상호 인정 과정 안에서 작동하는 [권리 체계의 두 방향 사이의] "내적 긴장"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 "양가적인 법적 타당성(validity)"을 한 편으로는 루소주의적인, 다른 한 편으로는 칸트주의적인 계보에 따라서 (이 점이 중요하다) 자율(성)의 원리를 이해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식에 철학적으로 준거 짓는다(여기서 논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사실 이는 하버마스에게는 루소와 칸트의 담론이 서로에 대해 단순히 외재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권리 체계의 토대에 관한, 따라서 법적 측면, 도덕적 측면(주체적인 자기결정과 주체성들 사이의 상호 인정이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는)과 고유하게 정치적 측면 간의 내적 관계에 관한 하버마스의 논의 전체는 그가 관점들 사이의 "암묵적인 경합" 관계라고 부르는 것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 두 가지 경합하는 관점은 입헌 질서가 기본권(Grundrechte)으로 간주되는 인권에 기초한다고 보는 관점과, 인민 주권 원리에 기초한다고 보는 관점이다.9) 하버마스는 이 두 가지 관점이 "근대 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관념들"이라고 본다.10) 과연 이 두 관점은 그것을 수단으로 합의, 또는 하버마스의 인상적인 정식화를 따르자면 "일인칭 복수"(us, nous, wir)11) - 이는 자기결정이나 권리들의 상호 인정이라는 실질적 과정에 의해 전제된다 - 를 생산함과 동시에 그것에 규범을 주거나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관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관념은 보완적이기보다는 경합적인데, 특히 민주주의에 관한 "자유주의적"이고 "시민 공화주의적"(civic republican) 개념화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토론이 잘 보여주거니와, 이 두 관념은 각각 도식적으로 칸트주의적 표상(비록 나 자신은 로크주의적 요소를 강조해두고 싶지만)과 루소주의적 표상으로 귀속될 수 있다. 전자는 주관적 권리들12) 사이의 상호성과 합의, 또는 이러한 상호성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평등한 자유를 규범의 보편성 위에 기초 짓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보편 규범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법률 질서의 "상류"(upstream)에서, 즉 개인들이 이상적으로 서로서로를 대체할 수 있고 따라서 견해의 차이나 이해의 갈등을 중화할 수 있는 도덕적 영역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후자는 보통 "일반 의지"라 불리는 평등주의적 규범을 구체적(하버마스는 이를 "실존적"이라고까지 부른다.13))인 정치 행위 안에 통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정치 행위는 개인들의 사회화를 실현한다. 즉 개인들을 역사적 사회의 제도들 안에 통합시키는데, 이 때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하거나 동원하지 않으면서, 개인에게 다시 한 번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일반적인 공적 이해 안에서 사적이고 특수한 이해를 초월하도록 강제하기까지 한다. 주지하듯이 하버마스가 이 딜레마 그에 따르면 이는 근대 입헌 전통 전체와 동연적이다 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하는 해법은 초월론적 형태를 취하는데, 여기서 그는 도덕화나 정치화의 방향으로 옮겨가지 않으면서도 정확히 권리 구성/입헌의 수준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주는 제 3의 통념을 도입한다. 하버마스는 이 용어가 "의사소통"(communicational) 영역 또는 "의사소통 행위의 영역"에서 발견된다고 보는데, 여기서는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언어 사용의 발화수반적(illocutionary)인 구속력이 이성과 의지를 화합시키는 데 봉사하며," 이는 "합리적 담론의 참여자로서 공동의 법주체들은 논란이 되는 규범이 그것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이들의 합의에 부합하는지, 또는 부합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검토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14) 따라서 평등한 자유는 단순히 강제되거나 또는 준칙화되지 않으며, 그것을 자신의 주권성의 표현으로 보는 어떤 정치체(body politic)에 의해 도구화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자연히 이러한 "해법"이 실제로는 순환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가질 만한데, 왜냐하면 의사소통 절차는 사실 상호 인정이나 "합의"의 원천이라기보다는 효과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하버마스의 해법이 실제로는 인민 주권이나 집단의 자율성이라는 견지에서 [법·정치 체계] 정초를 바라보는 공화주의적이고 루소주의적인 전망보다는, 기본권이나 개별적인 권리 보장의 보편화의 견지에서 정초를 보는 칸트주의적인 도덕적 전망에 훨씬 가깝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회르데가 제시하는 관점에서는 사태가 사뭇 달라지고, 실천적 목적 면에서 본다면 정반대가 된다.15) 여기서 자세하게 논의할 수 없는 것이 유감스럽지만, 뵈켄회르데가 민주주의 전통에 본래적인(사실은 그 전통에 고유하게 속하는) "구성/입헌 권력"이라는 관념의 난점들과 기본권(Grundrechte) 또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차례로 검토한다는 점을 상기시켜두고 싶다(기본권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은, 인민 주권의 표현이 약소자들을 말살하거나 심지어 배제하게 되는 근대성의 보편주의와 합리주의에게는 치명적인 점이지만 가능성을 설명하고 그에 맞서기 위해 탈(脫)전체주의 헌법들이 다시 한 번 크게 힘주어 강조했던 점이다). 구성/입헌 권력이 완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그것이 주권을 기초 지음에 있어,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통해, 특히 해방적 봉기의 고유하게 구성적/입헌적인 순간에 능동적으로 구성되는, 집합적 전체로 간주되는 "인민" 뿐만 아니라, 뵈켄회르데가 미조직 인민이라고 부르는 이들, 권리 보장 및 헌법적 통제 체계로 온전히 통합되지 못한 채, 또는 이렇게 말하는 편이 더 낫다면 (예컨대 보통 선거권의 행사에서 볼 수 있듯이) 헌정의 단순한 한 기관으로 변형되지 못한 채 항상 그 아래에 머물러 있는 이들까지 자신의 토대로 삼는 한에서다. 다른 한 편, 기본권의 즉각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은 모든 시민들 사이에서 이 권리들을 분배한다는 관념, 그리고 이 분배의 실질적 실현이라는 관념과 분리할 수 없어 보인다. 나 자신은 이 후자의 관념 안에서 평등한 자유라는 관념의 강력한 표현을 읽고 싶다. 이제 이 분배라는 문제가 가동시키는 것은, 정치적 권리를 사회적 권리와 동일시하는 경향 뵈켄회르데는 이 양자 사이의 일치라는 질문이 불가피하게 제기될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이 같은 경향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본권에 대한 규범적 개념화가 제도에 관한 또는 가치론에 관한 이론이나 개념화를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통제할 수 없는 운동(말하자면 "전방으로의 탈출(fuite en avant)"16)이다. 뵈켄회르데는 이 과정을 "기능적 민주주의"(functional democracy)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권리 및 의무의 분배를 지배하는 것은 추상적 규범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과정으로서 민주주의적 과정 자체다.17) 결국 뵈켄회르데가 두 가지 정초 그 역시 두 가지가 존재함을 인정한다 간 반정립의 초월을 파악하는 방식은 하버마스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거니와, 이는 그가 도덕적 차원에 비해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정치적 차원을 인민의 구성/입헌 권력의 자기 규제 또는 자기 제한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 때문에 그는 "권력"(또는 "에너지"18)의 단계에서 규범(norm)과 정상성(normativity)의 단계로 이동할 수 있는데, 이는 정확히 그가 구성/입헌 권력 행사의 규칙 또는 조건에 관한 자신의 정의 안에 (그리고 그 행사 안에) "기본권"의 견지에서 정식화된 처방과 보장을 통합하는 한에서이며, 이는 최종 분석에서 보편주의적인 문화 전통에서 유래한다.19)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두 가지 원리 사이의 균형의 탐색, 또는 (인민적) 구성/입헌 권력이라는 민주주의적 관념과 "기본권"이라는 (전자와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닌) 민주주의적 관념 간의 상호 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호 한정에서 구성/입헌 권력 또는 인민 주권이라는 관념은 우선권을 보유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계속하는데, 이는 시민권의 민족적 성격20), 즉 시민권과 인류 사이의 차이에 관한 그의 고찰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는, 추상적 개인주의나 세계시민주의에서 정식화될 수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선택한 권위에 통치 받고 그 권위의 통제 아래 있겠다는 요구의 단순한 담지자로서 개인들 다수(multitude)로 인민이 해체되지 않고, "인민"이나 더 나아가 "미조직" [인민이] 계속 정치적 주체로 남아 소속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실제로 반드시 존속해야 한다. 내가 널리 알려진 이러한 입장들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이중의 가설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한 편으로, 고유하게 법적인 수준에서는 민주적 질서 또는 내가 평등한 자유라 부른 것을 일의적으로 정초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설사 평등한 자유가 의심의 여지없이 법적인 개념 내지 관념, 하나의 "권리 형태"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는 조금도 놀라운 사실은 아닌데,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법질서가 자신을 정초할 수 있을 만한 "형이상학적 점"을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자기정초는 내부로부터 불가피하게 타자성의 출현, 권리의 본질적인 불순성을 초래하거니와, 이는 반드시 도덕적이거나 역사-정치적인 기원에 따라 뒷받침되어야 하며, 양자 모두 어느 정도 불가피하게 이상화된다. 우리가 민주주의 질서를 고찰하고 있다고 해서 난점이 사라지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는 이러한 난점을 순수한 형태로 제시하여 그것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뵈켄회르데처럼 "구성/입헌 권력"은 한계 개념이라고 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본권" 역시 어느 모로 보나 한계 개념이며, 따라서 항상 규정된 내용과 공식화를 찾아내야 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 같은 한계들의 한계는 바로 이 두 가지 전망들의 합치 내지 일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원리의 문제로 간주될 경우 이러한 일치는 엄밀히 말해 획득할 수 없는 것이라면, 또는 무한한 탐색의 대상이라면, 귀결 문제로 간주된다면, 이는 즉각 주어진 것으로, 곧 평등한 자유 그 자체로 나타난다. 평등한 자유는 서로에 대한 배제 없는 인민 주권과 자율성에 대한 요구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그것이 보편적 상호성의 원리 또는 규칙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을 함의한다.21) 평등한 자유가 요구하는 것은 정치 참여와 의사 결정에 대한 개인들의 기본권의 실현이며, 구체적으로 본다면 여기에는 바로 표현과 양심의 자유라는 권리, 법적 보장만이 아니라 심지어 교육과 직업적 지위에 대한 "사회적 권리"도 포함된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한 자유는 이중 구속의 이름이다. 평등한 자유는 해방의 관념 또는 민주주의 관념의 서로 다른 표현[곧 인민 주권과 개인의 기본권]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일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간의 정치적 연결을 해체시키지 않고서는 개인과 공동체 양자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을 부당하게 만드는 것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류의 지평 내부에서 정립(되고 선언)된 원리들의 보편성과 동시에 "인민 주권"으로 설립된 결정의 자율성을 지칭한다. 내가 예고했던 마지막 두 가지 점에 관해서는 훨씬 소략하게, 심지어 전보를 치듯이 논해야만 할 상황이라서, 개략적인 정식화로 논의를 국한하도록 하겠다. 첫째(이것이 나의 두 번째 테제였다), 나는 이 두 가지 "정초적" 담론들의 감축할 수 없는 이원성과 근대적인 "인간" 문제의 역사 전체와 동연적인 철학적 이원성을 관련지어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최소한 우리는 두 가지 이원성을 활용하여 서로를 해명하려고 시도해 볼 수 있다. 각각의 담론들, 또는 차라리 민주주의 담론의 두 측면인 "자유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측면, 또는 원한다면 "개인주의적"이고 "공동체주의적"인 측면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고유한 인간학을 함축한다. 다시 루소가, 그리고 칸트보다는 로크가 여기서 준거점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로크는 문제의 기원에, 루소는 문제의 이행점에 각각 자리 잡고 있다. 한 편에는 주체의 인간학 쪽으로의 경향이 있는데, 그 지평은 공동체를 "간주관성"으로 구성하는 것이며, 그 중심 문제는 루소의 작업에서 눈부실 정도로 분명한 것처럼 법에 대한 관계의 문제로서, 이는 뗄 수 없이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이고, "특수"하면서도 "일반"적인 문제다. 만일 모든 "세속화"에도 불구하고 주권이라는 신학 정치적 개념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이 근대 인간학의 한 복판에 남아 있다면, 이는 정치의 내재성 안에 법의 초월성을 통합하려는 처음 보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획, 또는 [근대적] "주체"가 그 자신은 복종에서 면제되어 있는 외적이고 절대적이며 숭고한 권위22)에 종속된 수브
시대착오적 간첩단 사건이 웬말이냐.
구시대 유물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1. 국가정보원이 또 사고를 쳤다. 민주노동당 간부를 포함하여 간첩혐의로 5명을 연행하고, 그 가운데 3명을 구속한 것이다. 일부 보수언론은 ‘일부 386 운동권 출신들이 연루된 대형 간첩단’ 운운하며 대대적인 여론몰이에 나섰고 한나라당에서는 색깔공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더욱이 구시대적 유물로 폐기되었어야 마땅할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살아서 공안사건을 만들어내는 현실에 치를 떨며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2. 북 핵시험 이후 ‘전쟁불사론’ 등이 터져 나오고 반북 공세가 강화되는 등 보수 우익들이 준동하고 있는 시점이라는 점 역시 국정원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국정원은 과거에도 보수 세력의 발호에 발맞추어 각종 조작사건을 만들어내어 공안분위기를 조성하고 진보진영을 탄압하였다. 국정원은 벌써 그림표를 그리고 수사를 확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끼워 맞추기식 조작이며 억지 수사를 예고하는 것이다.
3. 국정원은 회합 통신죄에 해당한다고 하지만 반인권, 반민중적인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범죄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상, 표현, 양심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공안의 잣대로만 사회를 재단하는 국정원이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4. 보수정치권, 국정원, 수구언론, 극우단체 등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사건을 부풀리고 근거도 없이 사실인양 말하면서 반북, 반공이데올로기를 조장하고 공안몰이를 가속화하는 것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아직도 그러한 철지난 공세로 국민여론을 현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한참 오산이다. 핵 실험을 빌미로 안보불안을 조장하여 호전적 군사주의를 강화시키려 하고 한미 군사동맹을 부르짖고 이와 더불어 공안분위기까지 조성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와 민중의 안전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사회진보연대 2006년 10월 27일
[성명] 노무현 정부는 폭력탄압 사죄하고 한미 FTA 중단하라!
1. 제주에서 열리고 있는 한미 FTA 4차 협상에 반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위대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연일 폭력진압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1만 명에 달하는 경찰병력을 뭍에서 군사작전 하듯 수송하여 FTA반대 시위대를 짓밟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집회를 불법화하고 23일에도 폭력적인 강제진압으로 일관하더니 24일에는 무차별적으로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고 물대포를 쏘아대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방송차량마저 두들겨 부수고 차량 운전자와 집회사회자를 집단 폭행했다. 지금 제주도는 사상 최대의 병력이 들어가 있는 준 계엄상태다. 정녕 노무현 정부는 FTA에 반대하는 범국민적인 여론을 폭력으로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2. IMF 위기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한국사회는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다. 실업자가 양산되고 사회양극화는 극에 달해 초국적자본, 소수 재벌들과 가진 자들은 부를 누리고 있지만 빈곤층은 1천만 명이 넘고 노동자, 농민들의 삶은 나락에 빠져 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문제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화하여 해결하자고 한다. 앞뒤도 맞지 않거니와, 누가 보아도 한미 FTA는 국내외 초국적자본과 지배계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3. 노무현 정부는 졸속적이고 일방적인 협상, 대다수 국민들의 생존조건을 악화시킬 FTA를 추진하면서 미국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국민들에게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교육, 의료, 물, 전기, 가스 등 공공서비스의 사유화와 개방화, 농업 개방과 농민생존 파탄, 초국적 금융자본의 금융투기 확대, 외국투자자들의 권리 강화, 노동권 약화 등 어느 것 하나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정부에서 돈을 쏟아 부어 한미 FTA 찬성 광고를 해대도 대다수 여론은 FTA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4. 민중의 의사를 무시하고 폭력만 행사하는 정권, 미국과 초국적자본, 재벌과 지배계층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정권을 민중은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 번 시작했기 때문에 협상을 끝까지 할 수밖에 없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있다면, 노무현 정부는 역사와 민중에 죄만 짓고 물러나게 될 것이다.
2006. 10. 24
사회진보연대
정부는 지난 8월 9일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발표했다. 언론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이 대거 정규직화되는 것처럼 보도했고,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공공부문이 선도한다고 선전했다. 경총 등 자본측에서는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은 민간부문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면서 정부를 비난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은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정부의 의지가 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부 대책이 나오는 과정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기대는 무리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정부 대책이 처음 준비된 '4월 11일' 정부가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처음 준비한 것은 4월 11일 열린 '국정과제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노동부에 지시를 하고 나서부터였다. 당시 회의 주제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이었는데, 이는 국회에 계류 중이던 정부의 비정규법안 개악안에 대한 내용이 논의되었음을 의미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도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럼 4월초는 어떤 시기였을까? 민주노총은 4월 17일 대의원대회를 예정하고 있었고 총파업 결의를 안건으로 상정한 시기였다. 실제 과정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법안 처리가 연기되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정부는 5월초까지 비정규법안을 처리하겠다고 공언하던 시기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안과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태생적인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연관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는 이제부터 정부 대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김근태의 뉴딜 행보와 정부대책이 발표되기까지 정부 대책은 정부 내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추진위원회'가 관계부처 합동으로 구성된 5월 4일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한다. 정부는 내년 예산에 비정규직대책의 내용을 반영하기 위해서 8월까지는 정부 차원의 대책 수립을 마무리하고 부처별로도 8월중으로 예산을 책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을 작성한다. 이에 따라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책수립 계획이 마련된 5월 중순 이후, 약 20여 일간 전국의 1만 여개 공공기관에 대한 비정규직 실태 전수조사와 (중앙행정기관, 공기업·산하기관, 학교, 지방자치단체 등 69개 조사 기관에 대한) 심층조사가 이루어진다. 이 방대한 자료는 7월초까지 정리가 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연구원은 1차적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여 노동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촉박한 실태조사는 아무래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어느정도 조사가 진행되고 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점검하고 심층조사까지 진행하며, 자료로서 활용 가능하도록 정리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부실함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에 비정규직 환경미화원(외주·용역 포함)은 불과 3천 여명이라고 발표되었는데, 그 수치는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환경미화원 숫자 규모에 불과하다. 또한 주요 대학의 청소용역노동자가 200여명 이상은 되는 상황에서 전국의 국공립대학 전체에 불과 천 여명의 청소용역노동자가 있다는 조사결과는 당장 수치상으로만 보더라도 조사가 부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부가 이번 대책 중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비정규직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각 기관에서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기관에서 사용자조차도 자기 기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정확한 규모와 실태를 알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이렇게 기초 실태조사가 부실한 상태에서 마련된 대책이라는 것이 가지는 한계는 분명하다. 비정규직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위한 기본적인 예산과 제도개선의 필요성마저도 제대로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노동연구원이 노동부에서 용역을 받아 작성한 연구보고서까지만 해도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 사용이 가지는 문제점을 인정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이후 노동부는 두 차례 정도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과 간담회를 진행한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소개된 '초안'도 한계는 분명했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없지 않았다. 노동부는 우선적으로 7월 24일, 열린우리당과 당정협의를 갖고 대책초안을 발표한다. 당시 발표가 있은 이후 열린우리당의 우원식 의원은 정부 조사 상 약 31만 명 중 18만 명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가 상시고용 되어있기 때문에 정규직화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정부 내 협의를 통해 최종안을 준비하는 사이, 김근태 열린우리당 대표의 '뉴딜' 행보가 계속되었다. 재벌과의 간담회에서 자본측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직접 언급하면서 '우려'를 나타내었다. 이후 노동부의 최종안 발표는 7월말에서 8월초로 연기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안은 수정되었다. 그 수정결과가 바로 우리가 들고 있는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다. 여기에는 애초 '정규직화'로 되어 있던 대책의 핵심이 '무기계약'으로 변화한 것은 물론, 그 규모도 5만 4천명으로 크게 줄었다.1) 외주·용역과 관련된 각종 규제도 후퇴해있었다. 저임금과 차별을 고착화하는 '무기계약화' 언론의 발표와는 달리 이번 대책의 핵심내용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다. 기관의 기존 정규직 직제로의 편입과 이를 통한 고용안정·차별해소를 의미하는 '정규직화'라는 표현을 정부는 한사코 거부하고 '무기계약화'라는 용어를 고집했다. 기존의 정규직과 같은 처우를 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정부 스스로 추진하고 있는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있다. '기간제근로자보호법안'에 따르면 2년 이상 근무한 기간제 노동자에 대해서는 정규직(무기근로계약)으로 간주한다는 조항이 있다. 정부는 이 법안을 올해 하반기에 기필코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공공부문에서도 장기간 같은 업무에 기간제 노동자를 고용하지는 못하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예산적용시기, 제도변경에 소요되는 기간 등을 예상하여 이번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올해 마련된 대책은 예산 수립과의 관련성 때문에 2008년에야 적용되는데 이 시기가 되면 공공부문에서도 기간제 노동자의 고용보장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게 된다. 정부 대책에 언급하고 있는 '무기계약화'는 현재의 처우를 유지한 가운데, 1년 단위, 혹은 6개월 단위로 이루어지던 고용계약을 자동으로 갱신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고용하던 노동자들의 처우는 개선할 수 있는 대책이 되지 못한다. 정부가 밝힌 정규직화 대상인원 5만 4천명은 결국 저임금 일자리를 5만 4천개 만든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공공부문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며 정부의 비정규법안 개악안이 통과될 경우 민간부문에도 폭넓게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으로 금융부문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주로 채워오던 은행 창구 직원 등에 대해서 현재의 처우를 유지하는 가운데 새로운 직제를 신설하여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이른바 금융권의 '신인사제도'와 '직군분리제'2) 이 과정에서 고과평가제도를 엄격하게 적용하여 일정한 점수에 미달하는 노동자는 매년 해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여 고용불안과 노동자 사이의 경쟁, 노동강도 강화를 조장한다. 구조조정의 방식으로서 외주·용역의 활성화 이번 대책의 중요한 특징은 외주·용역 등 간접고용 확산을 규제한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광범위하게 외주·용역을 활성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IMF 외환위기 때 공공부문에 대한 1차 구조조정이 완료된 이후 공공부문의 구조조정 양상은 변화하고 있다. 공기업 전체를(주로 초민족금융투기자본에) 매각하고 인원을 정리해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1차 구조조정과는 달리, 최근에는 공기업의 분할매각, 외주·용역 등 아웃소싱의 활성화를 통한 업무분할과 수익성 재고가 특징적이다. 이번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은 이러한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논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고 이를 보완하고 있다.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관리 정책이라는 것이 공공부문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한다. 이번 정부 대책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공기업들도 나름대로 '대책'을 준비해왔다. 대표적인 공기업인 철도공사는 "비정규직보호법안관련 비정규계약직 대책 검토(안)"이라는 내부 문서를 작성했다가 노동조합이 이를 확보하는 바람에 폭로되었다. 이 문서를 보면 철도공사는 자체적으로 예산절감을 위하여 기존의 비정규직을 외주화하려는 자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 직접고용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동일업무를 수행하는 상황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차별처우를 개선할 경우 수 십억 원의 예산이 추가 소요될 것이라고 보고 외주화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조정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나 '기간제근로자보호법안'에 따라 그나마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철도공사는 1단계로 2007년 1월까지 현재의 비정규직업무를 모두 외주화하고, 반드시 필요한 업무를 정규직으로 전환배치하려고 계획했다. 이 경우 해당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해고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2008년까지는 외주화된 업무에 함께 근무하는 정규직 노동자도 외주화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어 이 계획이 단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뿐만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상시업무이지만 정규직 업무 대상이 아니라고 자의적으로 판단된 업무에 대해서는 법에 예외로 규정된 고령자를 채용한다는 계획까지 있다. 정부는 이번 '공공부문비정규지대책'에서 기관의 "핵심-주변" 업무를 구분하고, 이에 따라 "핵심"업무는 정규직 사용을 원칙으로, "주변" 업무에 대해서는 외주화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주변"으로 규정되는 업무가 너무나 자의적이라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한국공항공사'는 자신의 주업무인 공항시설관리업무를 '현업업무'라는 이유로 "주변"업무로 취급하고 전체를 외주화하였다. 지방자치단체는 법률에 지자체장의 책임으로 규정된 생활폐기물 처리 업무를 '단순노무'라는 이유로 민간위탁하고 있다. 또한 상수도 사업에서는 '세계적인 물기업 육성' 운운하면서 민간위탁을 확산시킨다. 게다가 "핵심"으로 규정된 업무라도 비용절감 효과가 큰 경우에는 외주화가 가능하다. 결국 모든 종류의 공공부문 업무에 대한 외주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이번 대책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최근 확산되고 있는 고용의 원거리화를 공공부문에서도 전면적으로 적용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 효과는 이미 각종 공기업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최근 철도공사를 제외하고도 몇몇 주요 공기업에서는 신규계약을 1년 단위가 아니라 3~6개월 단위로만 체결하면서, 계약기간이 만료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계약을 해지하고 있다. 이번 정부대책에서 말하는 '무기계약화'조차 예산이 적용되는 2008년부터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공공기관에서는 2007년 말까지 대부분의 기간제 노동자에 대해서 계약해지를 통보를 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안이 통과될 경우 우려했던 비정규직노동자의 대량해고가 공공부문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비정규직 개악안과 다르지 않은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은 정부가 하반기에 반드시 통과시키기 위해 벼르고 있는 비정규직법안 개악안을 공공부문에서부터 사전에 준비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저임금의 차별적인 일자리를 고착화하고 외주·용역 등 아웃소싱을 확대하는 구조조정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보면 정부는 스스로 민간부문에 '모범'을 보이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정규직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고 관리하면 되는지를 정부는 민간 자본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인 불안요인으로 확대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관리하면서도 계속적인 착취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공공부문이든 민간부문이든 자본의 입장에서 관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부가 이번 대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현안 문제로 투쟁하고 있는 공공부문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투쟁의 원인이 되는 제도적인 모순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3) 따라서 우선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 가지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 대책과 관련하여 '정부도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한계가 있으니 참여해서 몇몇 조항을 넣어보자'는 식의 요구는 사실상 적용되기 난망하다. 이미 정부 대책의 기조가 현장의 개별적인 요구조차도 인정할 수 없도록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기조는 정부의 비정규법안 개악안 추진과도 완전히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에 대한 투쟁은 하반기에 다시 예정되어 있는 비정규법안 개악안 저지 투쟁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정부가 공공부문에서부터 자신들의 개악안을 적용하려고 시도한다면 공공부문에서도 선도적으로 정부의 의도를 저지하는 것은 물론, 정부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책'이라는 것이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고착시키고 고용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밝혀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서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현안투쟁 사업장은 물론 정규직 노동조합도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 단지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투쟁해야한다. 이번 정부 대책은 공공부문이 신자유주의적 (인력)구조조정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매뉴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 대책이 발표되고 나서 당장 시작되고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현장의 구조조정에 적극대응하고 이러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투쟁할 수 있도록 조직해야한다. 1) 5만 4천이라는 규모를 산출한 과정은 주먹구구 식었다. 노동부는 기간제 계약직 중 1년 이상 계약직은 10만 8000명 가량이라고 예상하고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이 심의를 통해 필수업무의 상시 종사자로 판정 받고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5만4천이라는 수치를 제시한다. 이는 어떠한 구체적인 근거도 없다. 한편, 언론에서는 학교 조리종사원과 각 기관의 사무보조원, 청소, 시설관리 노동자들을 일차적 심의 대상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정작 노동부는 직종별 대책을 세우는 것은 아니며, 1년 이상 근무한 상시업무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교육인적자원부는 대표적인 정규직화 대상 직종으로 보도된 학교 조리종사원에 대해서 이들은 상시노동을 하지 않으므로 정규직화(무기계약화) 계획이 전혀 없다고 밝히고 있는 실정이다. 본문으로 2) ‘금융권 신인사제도, 차별시정의 대상인가?’ 토론회(창구업무 여성 비정규직 사례를 중심으로), 단병호 의원실 본문으로 3) 정부는 이번 대책에서 △ 철도노조 KTX승무지부와 마사회, 부산지하철매표소의 불법파견 문제, △ 옥천 환경미화원의 저가낙찰제로 인한 해고, △ 전북도청, 광주 마사회의 용역업체 변경으로 인한 해고 등 제도적 문제에 대해서는 신기하게도 전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원청 기관의 책임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