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2006-04-05

    제라르 뒤메닐, 도미니크 레비, 『자본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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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 사회와 역사를 연구하는 다종다양한 학문 속에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을 드물게 찾을 수 있지만, 경제학계 내에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 일컫는 이는 거의 없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종의 복마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제학계 내에서 자신의 입장을 마르크스주의로 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개념과 관점을 동원하여 경제학을 보충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비주류 경제학이라는 좀 더 넓은 범위로 마르크스적인 것이 포괄되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들은 사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비평(판)적 경제학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경제 또는 경제학을 연구할 수 있는 어떤 마땅한 참고서적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라르 뒤메닐1)의 이론적 작업은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그는 경제학 내에서 이론적으로도 또한 경험적으로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가 경제학을 연구할 수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회학이나 여타 다른 종류의 이른바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경제학을 접하고, 경제학적 토론에 나서게 될 때 부딪히는 최초의 어려움은 경제학이 전개하고 있는 그 자체로 엄밀한 논리적 치밀성이다. 그 논리의 가정과 결론이 어떤 것이건 간에 경제학적 논리과정은 다른 사회과학이 침범할 수 없는 논리적 엄밀성을 지닌다. 경제학자들 자신조차 그 같은 엄밀성에 질려버릴 정도이다. 마르크스 자신이 그랬지만,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 모든 이들은 바로 그 엄밀한 논리적 완결성 속에 작업을 해나가야 하고, 그 작업에 필요한 논리적 도구들을 끊임없이 증식하여 나가야만 한다. 제라르 뒤메닐과 그의 오랜 동료인 도미니크 레비의 작업은 그러한 엄밀한 작업이 마르크스 이후에도 계속되어야하고 또한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의 작업은 (대중들의) 관심에 비해 우리에게 소개된 것이 매우 적다. 이른바 ‘신해석’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작업의 일부와 최근 작업인 현대 미국 자본주의 분석과 그와 관련된 ‘신자유주의 비판’을 몇몇 연구자들이 간간히 소개했을 뿐이다. 이는 상당히 불충분한 것인데, 이런 소개 과정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들의 작업 전체를 포괄하여 전달할 수 있는 전문적 연구자도 찾아볼 수가 없고, 설사 소개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작업이 대중적으로 수용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2) 뒤메닐과 레비 스스로 몇몇 저작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들 작업의 범위란 경제학의 모든 영역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뒤메닐과 레비도 알고 있는지, 그들은 최근 자신들의 작업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저작들을 발표하였다.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이론적인 작업을 포괄하여 대중적으로 소개한 책으로 데쿠베르트 출판사에서 2003년에 출간한『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3)이 대표적이다. 이번에 번역 소개된 『자본의 반격(이하 반격)』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책이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전개를 주로 다루고 있긴 하지만 곳곳에서 그들이 지속해온 오랜 작업들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번에 번역된 이 책을 꼼꼼히 읽어나간다면 미약하나마 그들의 작업에 한 발짝 다가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뒤메닐과 레비의 마르크스 경제학 재구성에 대한 전반적 개요 뒤메닐과 레비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관점을 특징짓는 전반적인 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선 ‘불균형 미시경제학’(microeconomie de desequlibre)이라는 이름 하에서 경쟁과 경기순환을 포괄하는 일반적 불균형 모형(modele de desequlibre general)을 구성한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것은 흔히 주류 경제학에서 성립된 ‘일반 균형’에서의 그것과 같다. 각각의 변수들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의미인데, 생산은 수요의 함수이고, 수요는 소득으로부터 유도된다는 것이다. 부분(partiel)과는 대립되는 의미에서 일반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불균형 모형에서 자본의 배분은 수익성의 차이에 기초한다. 자본가는 이 모형 내에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사이에서 생산량과 가격을 설정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다루던 균형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균형의 안정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분석이 강조된다. 어떤 (구조적) 매개변수와 반응계수의 영향 하에서 균형이 안정적이거나 불안정한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자본가들의 불균형에 반응하는 행위 이외에 자본가들에게 주어지는 은행 대부까지 고려된다. 이러한 모형으로부터 네 가지 경우를 유추할 수 있다. 먼저 단기(short-term)의 경우, 자본스톡은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장기(long-term)에서는 그와는 달리 자본스톡이 조정된다. 단기에서 자본가들에 의해 관찰된 불균형은 가동률(capacity utilization rates)과 가격의 조정을 야기한다. 만약 가격이 단기에 경직적이고, 심지어는 고정되어 있다면 기업은 수량조정을 통해 단기적으로 발견한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단기적인 동학이 진행되는 가운데서 장기변수들의 조정도 일어나는데 단기적 가동률 조정에 의해 발생하는 신호에 따라 장기적 변수인 가동률에 의존하는 가격이 조정된다. 장기적 균형은 일시적인 (단기) 균형들의 연속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 ‘비례’(proportion)와 ‘차원’(dimension)의 구분이다. 비례는 변수들의 상대적 값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은 상대 가격, 상대적인 산출, 상대적인 자본스톡의 값 등이 될 수 있다. 이에 비해 차원은 ‘거시경제’와 동의어로서 총생산 수준을 의미한다. 단기에서 비례(proportion in short-term)는 주어진 자본스톡 안에서 가격과 산출량이 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장기에서 비례(proportion in long-term)는 자본스톡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수익성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부문 간 자본이동을 말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생산가격’의 문제다. 이를테면 어떤 한 부문에 수요에 비해 너무 많은 자본스톡이 존재한다고 보자. 최초의 자본가는 수량조정에 의해 이에 반응하여 낮은 가동률을 유지한다. 이윤율은 이러한 낮은 가동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윤율은 장기에서 자본 배분의 지표가 되고, 이에 따라 자본의 이동이 발생한다. 단기에서 차원(dimension in short-term)은 대체로 거시경제학의 주요 문제가 된다. 경기순환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장기적 차원은 축적의 동학과 연관된다. 앞선 네 측면, 즉 비례와 차원과 연관된 장기와 단기적 측면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비례의 안정성’과 ‘차원의 불안정성’이다.4) 뒤메닐과 레비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강점은 바로 비례를 관리하는 능력, 자본을 배분하고 산출을 조정하며 상대가격을 정정하는 데 있다. 반면 이러한 경제의 약점은 주기적인 과열과 침체로의 경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누적적 과정(processus culuatifs)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비례와 차원의 안정성은 또한 일종의 상충관계를 갖게 된다. 만약 수요가 어떤 시점에서 감소하였다면, 재고가 상승하고, 이러한 수요의 축소에 영향 받은 기업은 그들의 생산능력을 축소시킨다. 그리고 기업의 반응은 개별적 기업의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이 바로 비례(의 안정성)와 연관된다. 이러한 개별적 기업의 반응은 거시경제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몇몇 기업의 이러한 행동은 노동자는 물론이고, 자본가들 각각의 소득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초의 반응이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수요 축소는 더 낮은 수요로 이끌린다. 여기서 화폐와 신용의 존재는 모호한 측면을 갖으며, 동시에 그것은 일반적 불균형 모형의 안정성과 불안정성의 주요 결정소이다.5) 자본주의 경제의 (최)장기(very long-term)에서 동학은 역시 마르크스가 분석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과 관련이 있다. 뒤메닐과 레비는 이 분야에서도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이 논쟁과 관련된 논의는 국내에도 일부 소개되어 있다.6) 그들에 따르면 ‘이윤율의 저하’는 ‘기술’과 ‘임금결정’에 의해 설명된다. 즉, 기술변화와 분배의 장기적인 동학이 이윤율의 저하를 설명하는 핵심 부분이라는 것이다. 분배, 특히 실질임금의 (장기적) 변화에 관련한 논의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기술변화에 관해 집중해보자. 경제학에서 기술변화에 대한 이론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기술이라는 재화 자체의 특수한 성격에 주목하는 폴 로머의 이론이나, 인적 자본(human capital)을 강조하는 루카스의 이론 등이 대표하는 새성장이론(New Growth Theory)이 그러한 것이다. 주류 경제학이나 마르크스 경제학 모두 마찬가지로 경제의 장기동학, 또는 경제성장의 엔진은 ‘자본축적’과 ‘기술진보’이다. 특히 ‘기술’에 관해서는 경제학에서 어떤 제대로 된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주류경제학에서는 ‘기술’을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대표 격이 경제성장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이라 할 수 있는 솔로 모형이다. 기술이라는 것은 이러한 외생적인 요소로 묘사된다. 다시 말하자면 기술은 경제 내부에서 발생하는 내생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마르크스를 비롯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기술변화(또는 진보)를 경제 내적인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해왔다. 마르크스경제학 이외의 이른바 ‘비주류 경제학’(포스트 케인지언으로 대표되는)에서는 관점을 받아들여 내생적인 기술변화이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칼도-버둔’(Kaldor-verdoon)의 법칙이다. ‘칼도-버둔’의 법칙은 아담 스미스이론의 현대적 개역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수요의 확대가 분업의 확대를 가져옴으로써 일인당 생산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기술변화를 묘사한다. 이전에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여러 기술변화에 대한 이론(및 모형)을 줄기차게 연구해왔는데, 그들은 비록 자신들의 진영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60년대 케네디-바이제커-사무엘슨으로 이어지는 ‘유발된 기술변화’(induced technical change)에 대한 설명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유발된 기술변화’ 모형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적인 기술변화 양식으로 묘사한 ‘편향적 기술변화’7)를 설명할 수 있는 모형이기 때문이었다. 샤와 데자이는 1981년, 유발된 기술변화 모형과 굳윈의 성장순환 모형을 종합하여 자본축적과 기술변화 모형을 구성8)하였으며, 덩컨 폴리는 2003년에 샤와 데자이가 구성한 것과 동일한 모형9)을 다시 소개하게 된다. 특히, 샤와 데자이는 이러한 모형 구성을 통해 자본가가 임금몫의 변동이라는 상황에서 기술변화를 통해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음을 밝혀냈다. 즉, 임금몫의 변동을 통해 이윤몫이 줄어드는 상황에 직면하는 자본가는 기술선택을 통해서(만약 선택할 수 있는 기술의 매우 광범위하다면) 이러한 변동성으로부터 벗어나 안정적 이윤몫과 그에 따른 안정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10) 뒤메닐과 레비가 발전시킨 기술변화 모형은 훨씬 혁신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그 모형을 ‘고전파-마르크스적인 스토캐스틱(stochastic)한 진화적 기술변화 모형’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 모형을 통해 기술선택의 문제를 다루면서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경제적 동기에서 발생하는 기술진보를 설명한다.11) 또한 앞서 설명한 ‘유발된 기술변화’ 모형이 케네디-바이제커-사무엘슨에 의해 이른바 생산함수(production function)를 보충하는 설명으로 나온 것에 비해, 스토캐스틱 모형은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생산함수와 같은 일종의 기술변화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있지 않다. 기술은 매기마다의 확률변수(스토캐스틱)로 표현되고, 자본가가 선택하게 되는 기술집합은 균등분포(uniform distribution)을 갖는다. 즉, 어떤 기술이라도 그것이 선택될 수 있는 확률은 모두 같다. 기술진보가 국소적(local)으로 발생한다면, 편향적 기술진보를 선험적으로 가정하지 않아도 ‘(기술) 혁신의 곤란’(diffculte d'innover)12)이 부과되어 자본주의 경제의 편향적 기술진보가 출현한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형태의 기술진보 양상은 앞서 밝힌 실질임금의 장기적인 궤도와 관련되어 이윤율의 저하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이윤율의 저하 궤도는 동학적인 관점에서 안정적인데,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의 반격』읽기 우리는 지금까지 뒤메닐과 레비가 거의 20년 넘게 발전시켜 온 이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검토해 보았다. 이 내용들은 이번에 번역된 『반격』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다. 앞서 정리한 내용들은 사실 일반독자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난해하고 전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뒤메닐과 레비는 그것들이 본문에서 소화되기 어려울 경우에는 박스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다. 『반격』을 읽는 독자들이 박스 속에서 들어있는 내용들만이라도 꼼꼼히 읽어 내려간다면, 그들의 신자유주의 비판 배후에 있는 경제이론적 기초를 부족하나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성미가 급한 사람들은 번역된 책을 입수하면, 제일 처음 역자(들)의 후기를 보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번역한 저자들이 이 분야의 전문가일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책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빨리 접하고 싶은 조급함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물론 이런 방식의 독서는 필자도 취하고 있는 방식이고, 때때로 이런 독서가 책의 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때도 있다. 그것은 역자들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며,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때 가능한 것이다. 역자후기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번역에 아무리 흠잡을 곳이 없다고 할지라도, 번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필자는 이번에 번역된 『반격』을 반쯤 읽다가 덮어버렸는데, 그것은 사실 이미 번역되기 전에 영어로 발간된 책을 읽은 것도 하나의 이유이겠지만, 주로 그 책 끝에 덧붙여진 역자후기의 불성실함 때문이었다. 이 역자들의 이전 작업을 대충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대단히 당혹스럽고, 이런 식의 서평을 쓰는 것 자체가 매우 곤혹스럽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서평이 오히려 뒤메닐과 레비의 작업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역자들은 자신들의 후기에서 뒤메닐과 레비의 작업 속에서 ‘이윤율 저하’에 대해 명확한 메커니즘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뒤메닐과 레비의 이윤율 저하 메커니즘은 자본주의 경제의 장기적인 기술변수와 분배변수의 동학에서 발생한다. 역자들의 말처럼 그들의 분석이 ‘사후적이고, 역사적이라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뒤메닐과 레비의 전체 이론적 맥락을 전혀 알지 못하는(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이윤율의 경험적 추정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할 경우 발생하는 오독이다. 물론 역자들이 이윤율의 저하를 제도들의 변화와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모두 총괄하는 어떤 틀의 부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또한 상당한 오독에 근거한다. 역자들은 뒤메닐과 레비가 이윤율의 저하를 ‘경제’ 변수와 관련시키고, 제도만을 ‘계급투쟁’의 결과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구조적 위기와 계급투쟁의 관계를 경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역자들의 이러한 관점은 계급투쟁에 대한 역자들의 모호한 정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그들은 역사적 계기로서의 계급투쟁과 계급관계 그 자체로 설명될 수 있는 계급투쟁의 존재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역자들의 관점은 역사적 계기로서의 계급투쟁과 가깝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설명하고 있는 계급투쟁은 단순한 사건, 또는 역사적 계기로서의 계급투쟁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생산관계의 조건이자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뒤메닐과 레비의 설명은 충실하다. 사실 뒤메닐과 레비는 거시경제적 안정성과 기술진보와 관련된 관리계급의 출현과 계급관계 또는 생산관계의 변형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다룬 바 있다. ‘이윤극대화 노동’(profit maximization labor)이라고 불리는 관리계급의 노동이 거시경제적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과 R&D과정으로 대표되는 기술혁신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13) 다시 말해 뒤메닐과 레비는 역자들의 관점에서처럼 제도의 형성과 기술변화를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율 저하에 대한 반작용과 관련하여 이른바 생산관계 변용의 조건이자 결과로서의 계급투쟁을 설명한다. 이는 『반격』의 전반적인 구성이기도 하고, 이 책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학 비판에 대한 본격적 논의의 조건들 필자는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중에 『반격』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이는 매우 환영할만한 결과이며, 한국어 번역과 관련해서도 몇 군데를 제외하면 마르크스 경제학의 재구성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뒤메닐과 레비의 작업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한다. 다만 역자후기를 접하는 이들이 불필요한 오해를 갖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현재적 상황, 특히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물론 ‘경제학 비판’의 관점은 현재적 시각에서 재구성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수학적 방법에 의해서건, 또는 개념적인 측면에서건 말이다. 뒤메닐은 경제학 비판의 역사 속의 가장 논쟁적인 쟁점들에 개입하면서, 경제학 비판을 재구성할 수 있는 전거들을 마련해왔다. 뒤메닐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재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경제학 비판의 역사에 대한 학습은 물론이고, 그의 작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논의 또한 절실하다. 1) 우리에게 도미니크 레비와의 공동작업으로 주로 알려진 뒤메닐은 1970년대에는 주로 독자적인 저작들을 발표해왔으며(이 때 발표한 주요저작들에서 대부분의 핵심적인 입장들이 모두 수립된다. 후에 이루어지는 레비와의 작업은 이러한 입장에 대한 정교화 및 재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레비의 공동작업은 80년대에 이르러 시작된다. 레비와의 작업은 그의 작업에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이른바 고전파 장기이론과 연관된 생산가격 분석과 경기순환을 통합하는 작업, 그리고 이윤율 저하에 대한 경험적 추정과 이론적 기반의 재구성(기술변화와 임금이론에 관련한)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최근에 뒤메닐은 ATTAC 학술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주로 『금융의 세계화』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도미니크 플리옹과 저술 및 강의활동을 하고 있다. 도미니크 플리옹은 역시 ATTAC 학술 위원회 소속으로 최근에 마르크스-케인즈-슘페터를 종합하는 관점에서 미국의 90년대 신경제를 분석한 Le nouveau capitalisme, La decouverte, 2003을 발표하였으며, 그의 화폐와 금융 메커니즘에 대한 교과서인 La monnaie et ses mecanismes, Quartrieme editions, La decouverte, 2004은 해당분야에 대한 적절한 참고서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또한 주목할 만한 책이다. 그들은 ATTAC 학술 위원회에서 현대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대한 케인즈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차이와 공통점에 관해서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2004년 뭄바이에서는 프랑스 ATTAC의 대표 격으로 유럽통합과정과 연관된 자유무역과 금융통합의 문제를 다루는 논문, 세계화와 더불어 발생하는 사회적 불안정성(insecurite sociale)를 지적하는 논문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2) 이것은 언어적 장벽과 기술적 장벽, 두 가지 차원에서 기인한다. 뒤메닐과 레비의 작업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상당한 난이도의 수학적 기술을 요구한다. 본문으로 3) G. Dumenil & D. Levy, Economie marxiste du capitalisme, La decouverte, 2003. 이에 상응하는 짤막한 논문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현재성」,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 2006으로 번역 소개되어 있다. 2003년 저작이 번역되기 전까지는 이 논문을 통해 그들 작업을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뒤메닐과 레비의 2003년 책은 필자에 의해 곧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될 예정이다. 본문으로 4) 경기순환에 대한 분석은 단기에서 비례, 장기에서 비례, 그리고 단기에서 차원에 대한 단일한 모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장기에서 차원은 바로 축적의 동학을 다루는 것으로 굳윈의 모형이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5) 여기서 금융부문의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거시적 측면에서의 안정성과 불안정성을 야기하는 모호한 효과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에 대해서는 뒤메닐과 레비의 일반적 불균형 모형과는 달리 자신의 독특한 자본순환(capital circuit) 모형에서 발생하는 비선형(nonlinear)동학을 연구하는 폴리의 작업 또한 검토해야 한다. 이 모형에서도 금융부문은 (거시)경제적 안정성의 주요요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불안정성의 결정소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Liquidity-Profit Rate Cycle in a Capitalist Economy", Journal of Economic Behavior and Organization, vol. 8, 1987, pp. 363-76과 "Stabilization Policy in a Nonlinear Business Cycle Model", Competition, Instability, and Nolinear Cycle, ed. W. Semmler, Springer-Verlag를 참고하라.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폴리의 모형만이 비선형 분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뒤메닐과 레비의 모형에서 또한 경기순환을 분석하는 데 있어 비선형 항(nonlinear term)의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영속적인 불안정성 또는 안정성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불안정성과 안정성의 공존과 순환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비선형 항이 존재하여야만 한다. 본문으로 6) 이 논쟁에 대해서는 『반격』의 역자 서문에서도 설명되고 있는데, 더 자세한 논의는 김숙경, 「마르크스 위기이론과 이윤율의 경제학」, 『자본주의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2001, 공감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7) 이에 대해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윤소영,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2006, 공감을 참조할 수 있는데, 단순히 설명을 하자면 자본주의 경제가 점점 노동에 비해 자본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기술변화의 경로를 겪는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8) A. Shah & M. Desai, "Growth Cycles with Induced Technical Change", The Economic Journal, Vol. 91, No. 364, 1981. 본문으로 9) D. K. Foley, Unholy Trinity: Capital, Labor and Land in New Economy. Routledge, 2003. 본문으로 10) 이러한 과정에 발생하는 것이 바로 해로드 중립적인 기술변화(Harrod neutral technical change)이다. 여기서 중립적이라고 하는 것은 소득의 분배몫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변화 유형에서는 이윤율이 저하하지 않고 일정하다. 이것은 경제학에서 균제상태(steady state)에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기술변화 유형이다. 본문으로 11) 경제적 동기에 의해 발생하는 ‘내생적 기술변화’는 주류경제학의 새성장이론에서도 설명되기는 한다. 그래서 이들을 ‘내생적 성장론자’라고 부른 적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찰스 존스 등에 의해 내생적 성장론자들의 기술변화 이론이 비판받게 되는데, 그것을 존스의 비판(Jones's critique)이라 부른다. 존스의 비판은 내생적 성장이론에서 제기하는 연구방정식(research equation)이 특정한 파라미터 값에 의존함으로써, 결국 내생적 기술진보에 대한 설명이 인구규모효과에 의해 설명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생적 성장에 대한 설명은 수년 내에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리라 예견하는 것으로 현실과 어울릴 수 없다. 존스의 비판을 통해 주류 경제학 내에서는 솔로의 모형이 다시 복귀한다. 본문으로 12) 여기서 말하는 ‘혁신의 곤란’이란 노동생산성과 자본(에 대한) 생산성을 동시 증가시킬 수 있는 기술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의미이다. 기술진보의 궤적이 로지스틱하게 표현된다고 하면(이는 기술의 진화형태에 달려있다) 초기의 패러다임의 이동에 따른 기술진보는 빠르게 발전하는 양상을 갖다가 변곡점을 지나 초기에 빠른 성장을 가져온 패러다임 자체가 소모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13) 이에 관련해서는 G. Dumenil & D. Levy, "Production and Management: Marx's Dual Theory of Labor", www.jourdan.ens.fr/~levy와 "The Economic Function of Managerial and Clerical Personnel: A Historical Perspective", Bureaucracy: Three Paradigms, ed. Neil Garstion, 1993을 참조. 본문으로

  • 2006-04-05

    제라르 뒤메닐, 도미니크 레비, 『자본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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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 사회와 역사를 연구하는 다종다양한 학문 속에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을 드물게 찾을 수 있지만, 경제학계 내에서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 일컫는 이는 거의 없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종의 복마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제학계 내에서 자신의 입장을 마르크스주의로 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천만한 일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개념과 관점을 동원하여 경제학을 보충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비주류 경제학이라는 좀 더 넓은 범위로 마르크스적인 것이 포괄되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들은 사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비평(판)적 경제학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경제 또는 경제학을 연구할 수 있는 어떤 마땅한 참고서적을 필요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라르 뒤메닐1)의 이론적 작업은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이다. 그는 경제학 내에서 이론적으로도 또한 경험적으로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가 경제학을 연구할 수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회학이나 여타 다른 종류의 이른바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경제학을 접하고, 경제학적 토론에 나서게 될 때 부딪히는 최초의 어려움은 경제학이 전개하고 있는 그 자체로 엄밀한 논리적 치밀성이다. 그 논리의 가정과 결론이 어떤 것이건 간에 경제학적 논리과정은 다른 사회과학이 침범할 수 없는 논리적 엄밀성을 지닌다. 경제학자들 자신조차 그 같은 엄밀성에 질려버릴 정도이다. 마르크스 자신이 그랬지만,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 모든 이들은 바로 그 엄밀한 논리적 완결성 속에 작업을 해나가야 하고, 그 작업에 필요한 논리적 도구들을 끊임없이 증식하여 나가야만 한다. 제라르 뒤메닐과 그의 오랜 동료인 도미니크 레비의 작업은 그러한 엄밀한 작업이 마르크스 이후에도 계속되어야하고 또한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 많은 주목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의 작업은 (대중들의) 관심에 비해 우리에게 소개된 것이 매우 적다. 이른바 ‘신해석’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작업의 일부와 최근 작업인 현대 미국 자본주의 분석과 그와 관련된 ‘신자유주의 비판’을 몇몇 연구자들이 간간히 소개했을 뿐이다. 이는 상당히 불충분한 것인데, 이런 소개 과정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들의 작업 전체를 포괄하여 전달할 수 있는 전문적 연구자도 찾아볼 수가 없고, 설사 소개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작업이 대중적으로 수용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2) 뒤메닐과 레비 스스로 몇몇 저작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들 작업의 범위란 경제학의 모든 영역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뒤메닐과 레비도 알고 있는지, 그들은 최근 자신들의 작업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저작들을 발표하였다.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이론적인 작업을 포괄하여 대중적으로 소개한 책으로 데쿠베르트 출판사에서 2003년에 출간한『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3)이 대표적이다. 이번에 번역 소개된 『자본의 반격(이하 반격)』또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책이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전개를 주로 다루고 있긴 하지만 곳곳에서 그들이 지속해온 오랜 작업들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번에 번역된 이 책을 꼼꼼히 읽어나간다면 미약하나마 그들의 작업에 한 발짝 다가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뒤메닐과 레비의 마르크스 경제학 재구성에 대한 전반적 개요 뒤메닐과 레비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관점을 특징짓는 전반적인 틀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선 ‘불균형 미시경제학’(microeconomie de desequlibre)이라는 이름 하에서 경쟁과 경기순환을 포괄하는 일반적 불균형 모형(modele de desequlibre general)을 구성한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것은 흔히 주류 경제학에서 성립된 ‘일반 균형’에서의 그것과 같다. 각각의 변수들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의미인데, 생산은 수요의 함수이고, 수요는 소득으로부터 유도된다는 것이다. 부분(partiel)과는 대립되는 의미에서 일반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불균형 모형에서 자본의 배분은 수익성의 차이에 기초한다. 자본가는 이 모형 내에서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 사이에서 생산량과 가격을 설정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다루던 균형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균형의 안정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분석이 강조된다. 어떤 (구조적) 매개변수와 반응계수의 영향 하에서 균형이 안정적이거나 불안정한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자본가들의 불균형에 반응하는 행위 이외에 자본가들에게 주어지는 은행 대부까지 고려된다. 이러한 모형으로부터 네 가지 경우를 유추할 수 있다. 먼저 단기(short-term)의 경우, 자본스톡은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장기(long-term)에서는 그와는 달리 자본스톡이 조정된다. 단기에서 자본가들에 의해 관찰된 불균형은 가동률(capacity utilization rates)과 가격의 조정을 야기한다. 만약 가격이 단기에 경직적이고, 심지어는 고정되어 있다면 기업은 수량조정을 통해 단기적으로 발견한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단기적인 동학이 진행되는 가운데서 장기변수들의 조정도 일어나는데 단기적 가동률 조정에 의해 발생하는 신호에 따라 장기적 변수인 가동률에 의존하는 가격이 조정된다. 장기적 균형은 일시적인 (단기) 균형들의 연속으로 파악된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 ‘비례’(proportion)와 ‘차원’(dimension)의 구분이다. 비례는 변수들의 상대적 값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것은 상대 가격, 상대적인 산출, 상대적인 자본스톡의 값 등이 될 수 있다. 이에 비해 차원은 ‘거시경제’와 동의어로서 총생산 수준을 의미한다. 단기에서 비례(proportion in short-term)는 주어진 자본스톡 안에서 가격과 산출량이 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장기에서 비례(proportion in long-term)는 자본스톡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수익성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부문 간 자본이동을 말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생산가격’의 문제다. 이를테면 어떤 한 부문에 수요에 비해 너무 많은 자본스톡이 존재한다고 보자. 최초의 자본가는 수량조정에 의해 이에 반응하여 낮은 가동률을 유지한다. 이윤율은 이러한 낮은 가동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윤율은 장기에서 자본 배분의 지표가 되고, 이에 따라 자본의 이동이 발생한다. 단기에서 차원(dimension in short-term)은 대체로 거시경제학의 주요 문제가 된다. 경기순환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장기적 차원은 축적의 동학과 연관된다. 앞선 네 측면, 즉 비례와 차원과 연관된 장기와 단기적 측면에서 문제시되는 것은 ‘비례의 안정성’과 ‘차원의 불안정성’이다.4) 뒤메닐과 레비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강점은 바로 비례를 관리하는 능력, 자본을 배분하고 산출을 조정하며 상대가격을 정정하는 데 있다. 반면 이러한 경제의 약점은 주기적인 과열과 침체로의 경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누적적 과정(processus culuatifs)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비례와 차원의 안정성은 또한 일종의 상충관계를 갖게 된다. 만약 수요가 어떤 시점에서 감소하였다면, 재고가 상승하고, 이러한 수요의 축소에 영향 받은 기업은 그들의 생산능력을 축소시킨다. 그리고 기업의 반응은 개별적 기업의 입장에서는 효율적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이 바로 비례(의 안정성)와 연관된다. 이러한 개별적 기업의 반응은 거시경제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몇몇 기업의 이러한 행동은 노동자는 물론이고, 자본가들 각각의 소득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초의 반응이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수요 축소는 더 낮은 수요로 이끌린다. 여기서 화폐와 신용의 존재는 모호한 측면을 갖으며, 동시에 그것은 일반적 불균형 모형의 안정성과 불안정성의 주요 결정소이다.5) 자본주의 경제의 (최)장기(very long-term)에서 동학은 역시 마르크스가 분석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과 관련이 있다. 뒤메닐과 레비는 이 분야에서도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이 논쟁과 관련된 논의는 국내에도 일부 소개되어 있다.6) 그들에 따르면 ‘이윤율의 저하’는 ‘기술’과 ‘임금결정’에 의해 설명된다. 즉, 기술변화와 분배의 장기적인 동학이 이윤율의 저하를 설명하는 핵심 부분이라는 것이다. 분배, 특히 실질임금의 (장기적) 변화에 관련한 논의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기술변화에 관해 집중해보자. 경제학에서 기술변화에 대한 이론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기술이라는 재화 자체의 특수한 성격에 주목하는 폴 로머의 이론이나, 인적 자본(human capital)을 강조하는 루카스의 이론 등이 대표하는 새성장이론(New Growth Theory)이 그러한 것이다. 주류 경제학이나 마르크스 경제학 모두 마찬가지로 경제의 장기동학, 또는 경제성장의 엔진은 ‘자본축적’과 ‘기술진보’이다. 특히 ‘기술’에 관해서는 경제학에서 어떤 제대로 된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주류경제학에서는 ‘기술’을 하늘에서 떨어진 ‘만나’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대표 격이 경제성장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이라 할 수 있는 솔로 모형이다. 기술이라는 것은 이러한 외생적인 요소로 묘사된다. 다시 말하자면 기술은 경제 내부에서 발생하는 내생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마르크스를 비롯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기술변화(또는 진보)를 경제 내적인 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설명해왔다. 마르크스경제학 이외의 이른바 ‘비주류 경제학’(포스트 케인지언으로 대표되는)에서는 관점을 받아들여 내생적인 기술변화이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칼도-버둔’(Kaldor-verdoon)의 법칙이다. ‘칼도-버둔’의 법칙은 아담 스미스이론의 현대적 개역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수요의 확대가 분업의 확대를 가져옴으로써 일인당 생산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기술변화를 묘사한다. 이전에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여러 기술변화에 대한 이론(및 모형)을 줄기차게 연구해왔는데, 그들은 비록 자신들의 진영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60년대 케네디-바이제커-사무엘슨으로 이어지는 ‘유발된 기술변화’(induced technical change)에 대한 설명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유발된 기술변화’ 모형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적인 기술변화 양식으로 묘사한 ‘편향적 기술변화’7)를 설명할 수 있는 모형이기 때문이었다. 샤와 데자이는 1981년, 유발된 기술변화 모형과 굳윈의 성장순환 모형을 종합하여 자본축적과 기술변화 모형을 구성8)하였으며, 덩컨 폴리는 2003년에 샤와 데자이가 구성한 것과 동일한 모형9)을 다시 소개하게 된다. 특히, 샤와 데자이는 이러한 모형 구성을 통해 자본가가 임금몫의 변동이라는 상황에서 기술변화를 통해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음을 밝혀냈다. 즉, 임금몫의 변동을 통해 이윤몫이 줄어드는 상황에 직면하는 자본가는 기술선택을 통해서(만약 선택할 수 있는 기술의 매우 광범위하다면) 이러한 변동성으로부터 벗어나 안정적 이윤몫과 그에 따른 안정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10) 뒤메닐과 레비가 발전시킨 기술변화 모형은 훨씬 혁신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그 모형을 ‘고전파-마르크스적인 스토캐스틱(stochastic)한 진화적 기술변화 모형’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 모형을 통해 기술선택의 문제를 다루면서 주류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경제적 동기에서 발생하는 기술진보를 설명한다.11) 또한 앞서 설명한 ‘유발된 기술변화’ 모형이 케네디-바이제커-사무엘슨에 의해 이른바 생산함수(production function)를 보충하는 설명으로 나온 것에 비해, 스토캐스틱 모형은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생산함수와 같은 일종의 기술변화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있지 않다. 기술은 매기마다의 확률변수(스토캐스틱)로 표현되고, 자본가가 선택하게 되는 기술집합은 균등분포(uniform distribution)을 갖는다. 즉, 어떤 기술이라도 그것이 선택될 수 있는 확률은 모두 같다. 기술진보가 국소적(local)으로 발생한다면, 편향적 기술진보를 선험적으로 가정하지 않아도 ‘(기술) 혁신의 곤란’(diffculte d'innover)12)이 부과되어 자본주의 경제의 편향적 기술진보가 출현한다는 의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형태의 기술진보 양상은 앞서 밝힌 실질임금의 장기적인 궤도와 관련되어 이윤율의 저하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이윤율의 저하 궤도는 동학적인 관점에서 안정적인데,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의 반격』읽기 우리는 지금까지 뒤메닐과 레비가 거의 20년 넘게 발전시켜 온 이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검토해 보았다. 이 내용들은 이번에 번역된 『반격』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다. 앞서 정리한 내용들은 사실 일반독자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난해하고 전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뒤메닐과 레비는 그것들이 본문에서 소화되기 어려울 경우에는 박스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다. 『반격』을 읽는 독자들이 박스 속에서 들어있는 내용들만이라도 꼼꼼히 읽어 내려간다면, 그들의 신자유주의 비판 배후에 있는 경제이론적 기초를 부족하나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성미가 급한 사람들은 번역된 책을 입수하면, 제일 처음 역자(들)의 후기를 보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번역한 저자들이 이 분야의 전문가일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책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빨리 접하고 싶은 조급함에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물론 이런 방식의 독서는 필자도 취하고 있는 방식이고, 때때로 이런 독서가 책의 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때도 있다. 그것은 역자들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며,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때 가능한 것이다. 역자후기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번역에 아무리 흠잡을 곳이 없다고 할지라도, 번역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필자는 이번에 번역된 『반격』을 반쯤 읽다가 덮어버렸는데, 그것은 사실 이미 번역되기 전에 영어로 발간된 책을 읽은 것도 하나의 이유이겠지만, 주로 그 책 끝에 덧붙여진 역자후기의 불성실함 때문이었다. 이 역자들의 이전 작업을 대충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대단히 당혹스럽고, 이런 식의 서평을 쓰는 것 자체가 매우 곤혹스럽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서평이 오히려 뒤메닐과 레비의 작업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역자들은 자신들의 후기에서 뒤메닐과 레비의 작업 속에서 ‘이윤율 저하’에 대해 명확한 메커니즘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뒤메닐과 레비의 이윤율 저하 메커니즘은 자본주의 경제의 장기적인 기술변수와 분배변수의 동학에서 발생한다. 역자들의 말처럼 그들의 분석이 ‘사후적이고, 역사적이라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뒤메닐과 레비의 전체 이론적 맥락을 전혀 알지 못하는(또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이윤율의 경험적 추정이라는 사실에만 주목할 경우 발생하는 오독이다. 물론 역자들이 이윤율의 저하를 제도들의 변화와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모두 총괄하는 어떤 틀의 부족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또한 상당한 오독에 근거한다. 역자들은 뒤메닐과 레비가 이윤율의 저하를 ‘경제’ 변수와 관련시키고, 제도만을 ‘계급투쟁’의 결과라고 말함으로써 결국 구조적 위기와 계급투쟁의 관계를 경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역자들의 이러한 관점은 계급투쟁에 대한 역자들의 모호한 정의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그들은 역사적 계기로서의 계급투쟁과 계급관계 그 자체로 설명될 수 있는 계급투쟁의 존재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역자들의 관점은 역사적 계기로서의 계급투쟁과 가깝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설명하고 있는 계급투쟁은 단순한 사건, 또는 역사적 계기로서의 계급투쟁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생산관계의 조건이자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뒤메닐과 레비의 설명은 충실하다. 사실 뒤메닐과 레비는 거시경제적 안정성과 기술진보와 관련된 관리계급의 출현과 계급관계 또는 생산관계의 변형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다룬 바 있다. ‘이윤극대화 노동’(profit maximization labor)이라고 불리는 관리계급의 노동이 거시경제적 안정성에 미치는 영향과 R&D과정으로 대표되는 기술혁신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13) 다시 말해 뒤메닐과 레비는 역자들의 관점에서처럼 제도의 형성과 기술변화를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율 저하에 대한 반작용과 관련하여 이른바 생산관계 변용의 조건이자 결과로서의 계급투쟁을 설명한다. 이는 『반격』의 전반적인 구성이기도 하고, 이 책이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경제학 비판에 대한 본격적 논의의 조건들 필자는 이 서평을 쓰고 있는 중에 『반격』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이는 매우 환영할만한 결과이며, 한국어 번역과 관련해서도 몇 군데를 제외하면 마르크스 경제학의 재구성에 큰 공헌을 하고 있는 뒤메닐과 레비의 작업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한다. 다만 역자후기를 접하는 이들이 불필요한 오해를 갖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현재적 상황, 특히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다. 물론 ‘경제학 비판’의 관점은 현재적 시각에서 재구성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수학적 방법에 의해서건, 또는 개념적인 측면에서건 말이다. 뒤메닐은 경제학 비판의 역사 속의 가장 논쟁적인 쟁점들에 개입하면서, 경제학 비판을 재구성할 수 있는 전거들을 마련해왔다. 뒤메닐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재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역사와 경제학 비판의 역사에 대한 학습은 물론이고, 그의 작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논의 또한 절실하다. 1) 우리에게 도미니크 레비와의 공동작업으로 주로 알려진 뒤메닐은 1970년대에는 주로 독자적인 저작들을 발표해왔으며(이 때 발표한 주요저작들에서 대부분의 핵심적인 입장들이 모두 수립된다. 후에 이루어지는 레비와의 작업은 이러한 입장에 대한 정교화 및 재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레비의 공동작업은 80년대에 이르러 시작된다. 레비와의 작업은 그의 작업에 핵심을 이루는 것으로, 이른바 고전파 장기이론과 연관된 생산가격 분석과 경기순환을 통합하는 작업, 그리고 이윤율 저하에 대한 경험적 추정과 이론적 기반의 재구성(기술변화와 임금이론에 관련한)등이 중심을 이루었다. 최근에 뒤메닐은 ATTAC 학술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주로 『금융의 세계화』로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도미니크 플리옹과 저술 및 강의활동을 하고 있다. 도미니크 플리옹은 역시 ATTAC 학술 위원회 소속으로 최근에 마르크스-케인즈-슘페터를 종합하는 관점에서 미국의 90년대 신경제를 분석한 Le nouveau capitalisme, La decouverte, 2003을 발표하였으며, 그의 화폐와 금융 메커니즘에 대한 교과서인 La monnaie et ses mecanismes, Quartrieme editions, La decouverte, 2004은 해당분야에 대한 적절한 참고서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또한 주목할 만한 책이다. 그들은 ATTAC 학술 위원회에서 현대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대한 케인즈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차이와 공통점에 관해서 강의하기도 하였으며, 2004년 뭄바이에서는 프랑스 ATTAC의 대표 격으로 유럽통합과정과 연관된 자유무역과 금융통합의 문제를 다루는 논문, 세계화와 더불어 발생하는 사회적 불안정성(insecurite sociale)를 지적하는 논문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2) 이것은 언어적 장벽과 기술적 장벽, 두 가지 차원에서 기인한다. 뒤메닐과 레비의 작업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상당한 난이도의 수학적 기술을 요구한다. 본문으로 3) G. Dumenil & D. Levy, Economie marxiste du capitalisme, La decouverte, 2003. 이에 상응하는 짤막한 논문이 「마르크스 경제학의 현재성」,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공감, 2006으로 번역 소개되어 있다. 2003년 저작이 번역되기 전까지는 이 논문을 통해 그들 작업을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뒤메닐과 레비의 2003년 책은 필자에 의해 곧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될 예정이다. 본문으로 4) 경기순환에 대한 분석은 단기에서 비례, 장기에서 비례, 그리고 단기에서 차원에 대한 단일한 모형을 구성하는 것이다. 장기에서 차원은 바로 축적의 동학을 다루는 것으로 굳윈의 모형이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5) 여기서 금융부문의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거시적 측면에서의 안정성과 불안정성을 야기하는 모호한 효과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에 대해서는 뒤메닐과 레비의 일반적 불균형 모형과는 달리 자신의 독특한 자본순환(capital circuit) 모형에서 발생하는 비선형(nonlinear)동학을 연구하는 폴리의 작업 또한 검토해야 한다. 이 모형에서도 금융부문은 (거시)경제적 안정성의 주요요소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불안정성의 결정소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Liquidity-Profit Rate Cycle in a Capitalist Economy", Journal of Economic Behavior and Organization, vol. 8, 1987, pp. 363-76과 "Stabilization Policy in a Nonlinear Business Cycle Model", Competition, Instability, and Nolinear Cycle, ed. W. Semmler, Springer-Verlag를 참고하라. 여기서 주의해야할 것은 폴리의 모형만이 비선형 분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뒤메닐과 레비의 모형에서 또한 경기순환을 분석하는 데 있어 비선형 항(nonlinear term)의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영속적인 불안정성 또는 안정성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불안정성과 안정성의 공존과 순환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비선형 항이 존재하여야만 한다. 본문으로 6) 이 논쟁에 대해서는 『반격』의 역자 서문에서도 설명되고 있는데, 더 자세한 논의는 김숙경, 「마르크스 위기이론과 이윤율의 경제학」, 『자본주의의 위기와 역사적 마르크스주의』, 2001, 공감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7) 이에 대해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는 윤소영,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2006, 공감을 참조할 수 있는데, 단순히 설명을 하자면 자본주의 경제가 점점 노동에 비해 자본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기술변화의 경로를 겪는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8) A. Shah & M. Desai, "Growth Cycles with Induced Technical Change", The Economic Journal, Vol. 91, No. 364, 1981. 본문으로 9) D. K. Foley, Unholy Trinity: Capital, Labor and Land in New Economy. Routledge, 2003. 본문으로 10) 이러한 과정에 발생하는 것이 바로 해로드 중립적인 기술변화(Harrod neutral technical change)이다. 여기서 중립적이라고 하는 것은 소득의 분배몫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변화 유형에서는 이윤율이 저하하지 않고 일정하다. 이것은 경제학에서 균제상태(steady state)에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기술변화 유형이다. 본문으로 11) 경제적 동기에 의해 발생하는 ‘내생적 기술변화’는 주류경제학의 새성장이론에서도 설명되기는 한다. 그래서 이들을 ‘내생적 성장론자’라고 부른 적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찰스 존스 등에 의해 내생적 성장론자들의 기술변화 이론이 비판받게 되는데, 그것을 존스의 비판(Jones's critique)이라 부른다. 존스의 비판은 내생적 성장이론에서 제기하는 연구방정식(research equation)이 특정한 파라미터 값에 의존함으로써, 결국 내생적 기술진보에 대한 설명이 인구규모효과에 의해 설명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생적 성장에 대한 설명은 수년 내에 경제가 ‘폭발적인’ 성장을 하리라 예견하는 것으로 현실과 어울릴 수 없다. 존스의 비판을 통해 주류 경제학 내에서는 솔로의 모형이 다시 복귀한다. 본문으로 12) 여기서 말하는 ‘혁신의 곤란’이란 노동생산성과 자본(에 대한) 생산성을 동시 증가시킬 수 있는 기술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진다는 의미이다. 기술진보의 궤적이 로지스틱하게 표현된다고 하면(이는 기술의 진화형태에 달려있다) 초기의 패러다임의 이동에 따른 기술진보는 빠르게 발전하는 양상을 갖다가 변곡점을 지나 초기에 빠른 성장을 가져온 패러다임 자체가 소모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13) 이에 관련해서는 G. Dumenil & D. Levy, "Production and Management: Marx's Dual Theory of Labor", www.jourdan.ens.fr/~levy와 "The Economic Function of Managerial and Clerical Personnel: A Historical Perspective", Bureaucracy: Three Paradigms, ed. Neil Garstion, 1993을 참조. 본문으로

  • 2006-03-02

    <기획좌담> 사회 양극화인가 빈곤 심화 확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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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곤과 불안정노동에 맞서는 2006년 사회운동의 투쟁과제 [%=박스1%] 사회자 : 한국 사회 빈곤인구가 700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빈곤은 주어진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를 ‘사회 양극화’로 인식하고 2006년 해결해야 할 주력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정부의 양극화 해소 방안에 대해 진단하고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확산에 맞선 과제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결과인 빈곤 심화를 사회 양극화로 볼 수 있는가? 유의선; 빈곤의 심각성은 일하는 빈곤층의 문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진숙 : 빈곤의 심화 양상을 사회 양극화의 틀로 접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접근이다 조동진 : 부동산, 금융 등 자산 격차로 인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사진1%] 유의선 : 빈곤의 원인과 양상의 핵심으로 신빈곤, 일하는 빈곤층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지금의 빈곤은 열심히 일해도 점점 더 가난해지는 양상을 보입니다. 일을 더 해도 소득은 일정하거나 더 줄어들고 소비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구조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현재 제기되는 빈곤의 심각성은 인구 수 대비 빈곤인구가 많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하는 빈곤층의 문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빈곤이 구조화되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금융시장의 문제로서 신용불량의 문제나 가계부채의 문제가 드러나고 특징적으로 여성의 빈곤화 문제, 사회안전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복지의 사각지대의 문제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빈곤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드러나고 하나의 구조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회자 : 일하는 빈곤층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현재 노동의 불안정화에 따라 비정규직이 비율상으로도 절반이 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핵심 화두가 아닌가 싶은데요, 이에 관해 배기남국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기남 : 87년 이전에는 특별한 계층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모두가 가난해서 국가적 수준의 ‘잘살아보세’를 외치는 분위기였죠. 그런데 87년 이후, 가깝게는 노태우 정권의 반동기를 거치고 나서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기업별 노조체제가 관철되면서부터 그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같이 일하던 사람 사이에서도 정규직은 잘 살고 비정규직은 상대적으로 못사는 양상이 주변에서 눈에 보이게 된 것이죠. 임금도 두세 배 차이가 나고, 생활수준도 누구는 자가용을 몰고 누구는 잘해야 중고차 몰고 다니고 하는 이런 차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새로운 빈곤개념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동자들 내부를 봤을 때도 조직되지 않은 영세사업장 고용 노동자들의 경우 상황은 훨씬 심각합니다. 80년대 중반에 현장에 들어갈 때만 해도 포드주의적 시스템에 의해 노동집약 산업인 전자, 섬유 등이 산업의 중심이었는데 이것이 도산하거나 외국으로 이전되면서 영세자영업에 종사하는 새로운 빈곤층이 등장하기도 했죠. 어쩌면 이 빈 공간을 60만에 달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조동진 : 지역적 상황을 본다면 대도시의 문제점 중 하나가 거주지에 따라 격차가 심화된다는 점입니다. 외국의 경우도 양극화문제가 심화되면서 계층 간 분리현상이 드러나는데 이것이 고착화, 심화되면 이중도시화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강남-북 간 불균형을 소득, 금융, 부동산의 구체적인 항목별로 살펴보면 소득격차도 심하지만 결정적으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 부동산과 금융자산입니다. 빈곤문제와 양극화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은데 양극화 관련 논의에서는 주로 소득 불균형 관련한 문제를 불평등으로 제기하는데 그보다는 부동산, 금융 등의 자산 격차로 인해 불평등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양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근로빈곤의 양상이 지금 현재의 빈곤 문제를 핵심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빈곤은 소득에 비해서 소비지출규모가 맞지 않으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서울의 생계비 문제를 살펴보면 생계비 지수가 세계 2~5위 안에 들만큼 높다고 합니다. 최근 5년 동안 근로소득이 20% 올랐다면 주거비와 직결된 부동산 가격은 70%가 증가하였습니다. 주거비용 등을 중심으로 생계비 부담이 굉장히 많이 오른 거죠. 정부에서 사회적 일자리, 사회서비스 확대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대부분 민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생계비가 더 상승하게 됩니다. 이것이 빈곤화를 가속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소득격차와 생계비 부담의 증가를 함께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2%] 이진숙 : 세 분 모두 각각 다른 각도에서 빈곤에 접근하는 맥락을 짚어주신 것 같습니다. 빈곤 인구 자체가 증가했고 여성빈곤, 노인빈곤, 노동빈곤 인구의 증가 등 빈곤의 양상이 과거와 달라진 상황이라는 것은 운동사회나 정부에서도 대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떤 틀을 통해 어떻게 개념화, 분석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사회진보연대는 사회 양극화라는 말을 가급적 쓰지 말자고 하고 싶습니다. 양극화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먼저, 현실을 묘사하기에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극소수 고소득자를 제외한 다수가 빈민이고 또 다양한 층위를 이루고 있는 상황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념화의 틀과 연관 지어서 사고해보더라도 문제가 있습니다. 정부에서 소득이 양극화되는 배경이 무엇인가를 분석할 때 노동시장이 양극화되어있고 산업이 양극화되어 있다는 방식의 단계적 분석틀을 사용하고 있으며, 대응방안 역시 그런 맥락에서 도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계적으로 접근할 경우 근본적 원인을 보지 못하게 될 뿐더러 은폐하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 저희의 기본 입장입니다. 소득격차나 산업양극화 등은 모두 금융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구조개혁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죠. 이렇게 보면 사회 양극화는 올바른 묘사 또는 개념화가 아닙니다. 양극화는 사회적 배제라는 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980년대를 경과하면서 장기실업, 가족 해체 등으로 인해 빈곤이 확대되면서 프랑스를 선두로 하여 유럽의 국가들이 이를 사회적 배제라는 말로 개념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양극화라는 개념은 주로 대도시 지역에서의 이와 같은 양상을 지칭하는 말로 많이 쓰이는데, 중산층이 붕괴되고 소득분배구조가 극단적으로 이분화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에 유럽 고유의 문제라 할 수 있는 이민자 문제, 지역 간 격차 등이 결합되어 도시 자체가 이중화된다는 식으로 분석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기존의 복지체제나 사회적 결속을 지탱해 주던 계급연대의 해체가 지목되고, 그에 따라 국가 중심의 사회통합 정책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즉 양극화, 사회적 배제 등의 개념화는 빈곤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필연적으로 계급적 관점을 희석화 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사회통합정책이라는 것은 결국 신자유주의에 걸맞은 복지개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측면을 고려해봤을 때, 빈곤의 심화 양상을 사회 양극화의 틀로 접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기남 :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 중 하나가 분할지배입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정보통신혁명이 진행되면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네트워크 생산 시스템, 하층계열화가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심한 부분이 건설이나 섬유산업입니다. 유명의류업체의 경우 제조업 생산라인을 갖고 있는 업체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IMF 이후 변화된 자본 축적 과정에서 고용수준이 더욱 낮아진 현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결과로서 주택문제와 같은 여러 양적 지표들이 나타나는 것이죠. 사회자 :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빈곤층의 지속적인 양산과 일상적 관리가 심화된 상황도 있을 것입니다. 조동진 국장님이 생계비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듯이, 노동빈곤의 문제와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현재 빈곤의 절대치가 상승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진3%] 조동진 : 대응 전략과 연결되는 문제인데요, 생계비 지수가 높다는 것은 소득 대비 생계비 부담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유화 저지 투쟁을 전개해왔지만 이미 사유화된 영역이 워낙 많습니다. 특히 보육 부문을 보더라도 대다수 국가에서는 비영리 기관을 포함한 공공보육이 80%에서 많게는 100%까지 보장됩니다. 한국의 경우 5% 대까지 떨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영유아보육법이 만들어진 다음, 정부는 민간에 집중 융자를 해줌으로써 보육 인프라를 공급하게 하면서 민간에 보육을 맡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회공공성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미 시장화된 것을 공공화하자는 이야기도 포함됩니다. 한편에서는 지금 민간자본유치사업(BTL) 방식을 통한 사회적 서비스 확대도 사회화라고 모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서비스가 증가하더라도 이것이 모두 민간 자본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유의선 : 지금 정부 추계로 빈곤인구가 700만이라고 합니다. 이는 최상위 계층까지를 포함한 것으로 최저생계비 120% 기준입니다. 2006년 기준으로 최저생계비가 1인가구가 40만 천원이고 4인가구가 117만원이니까, 1인가구면 50만원 이하, 4인가구면 130만원 수준을 빈곤계층이라고 일컫는 것이죠. 이러한 사람들이 700만 명이라는 말입니다. 여섯 명 중 한 명은 최저생계비 수준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자 중에서는 최저임금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빈곤계층에 속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죠. 가구원 중 노동인구가 적다면 그럴 수도 있는데 비정규직이 저임금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래도 일을 하면 최저임금은 최저생계비 수준을 약간 넘어서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비정규직 인구가 엄청 많이 있습니다. 사회 양극화가 곧 빈곤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 이러한 현상을 일부 고소득자에 비한 상대적 빈곤감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양극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가를 논의하려면, 지금 절대빈곤의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빈곤은 절대빈곤의 문제뿐만 아니라 빈곤화가 지속되는 구조와 과정이 문제인 것이고 지역 간, 산업 간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빈곤 문제의 양상과 원인이 복합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채 양극화라는 담론에 묻혀가는 데 대해서는 고민이 듭니다. 이진숙 : 특정 용어는 제기되는 맥락과 해결방향에 있어서의 계획까지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양극화가 아니더라도 ‘신빈곤’ 등 개념어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신빈곤이라는 표현은 연구자들과 NGO들이 자주 쓰는 표현인 것 같아요. 사회적 배제라는 용어는 소득이 절대적으로 낮은 사람들에 대해 표면적으로 빈곤을 진단하던 과거의 방식과 다르게 실제로 달라진 빈곤의 양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고 이들이 어떤 권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인식을 확대한다는 차원에서는 최소한의 긍정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적인 맥락과 탈계급적인 해결방향이 내포되어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빈곤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의선 : 사회 양극화라는 말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할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분석틀을 담아낼 수 있는 확장된 빈곤의 문제를 포괄할 논의 틀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노숙인, 장애인 등의 문제, 노동의 문제, 지역 간 격차 등 모두가 처한 빈곤화를 공통적으로 분석할 틀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배기남 : 저는 교육할 때 1-3-6 체제라는 말을 즐겨 쓰는 데, 한국사회에는 세대를 걸쳐 부를 축적하는 국가나 기업의 권력집단으로 형성된 귀족계급이 10%, 전문기술을 가진 소위 신 중산층 및 구 중산층,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고 있는 대학출신 기술직들이 30%를 이루고, 나머지가 대다수 노동자 및 영세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단순기능직 노동자라도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 간의 격차가 엄청나게 큽니다. 이전에는 빈곤의 원인을 사회적 권력관계를 중심으로 고찰했는데, 지금은 노동조합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여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자 : 정부는 양극화를 설명하면서 소득 격차 뿐 아니라 기업 내,직종 별, 업종 별, 산업간 양극화로까지 단계적으로 설명하면서 사회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노동자운동과의 합의주의를 강화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는 정부여당의 양극화 해소 담론과 구별되는 우리의 틀을 통해 빈곤의 원인을 분석하는 일입니다. 사회 양극화 해소가 화두인 정부의 사회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조동진 : 지역 간 불균형에 현상적으로 접근하면 자본 투하를 통해 열악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자는 결론에 빠지는 위험성이 있다 유의선: 복지정책이 노동연계를 강화하는 경향이 문제다 배기남 : 정부의 대책은 빈곤층을 관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진숙 : 노무현 정부는 양극화 해소 담론을 통해 사회통합과 시민운동의 동원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자 : 현재 정부가 내놓은 이른바 양극화해소 정책들에 대해 논의해보았으면 합니다. 핵심비판지점과 핵심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텐데요. 정부에서는 양극화 해소 방안으로 몇 가지를 일단 발표해놓고 결국 구체적인 과제들을 지방선거 이후로 미루어 놓았습니다. 일단, 일자리 창출이 핵심적 과제이고 근로소득보전세제 도입이나 자활, 사회적 일자리의 확충 등이 중심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저출산-고령화 대응방안이 또한 중요하게 사고되면서 노인복지 확대, 여성인력활용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관련해서도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펼치겠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현재 정부가 양극화 해소 방안에 대해 내놓은 정책 전반에 대한 입장을 확인해보았으면 합니다. 조동진 : 정부에서 주장하는 근로연계복지 강화 방안이나 사회 서비스 확대 과정에 대한 민간 참여 확대 방안에 대해서는 아까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지방선거 공약으로 공공부문 확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일자리라는 말을 대체할 다른 표현을 고민 중입니다. 지금의 사회적 일자리는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정부가 현재 이야기하는 사회적 일자리도 조금 더 오래갈 수 있다는 차이 말고는 저임금의 일자리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일자리 창출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양적 개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실제로 어떠한 일자리인지에 대한 논의가 누락됩니다. 결국 저임금 비정규직이 늘면서 오히려 빈곤의 심화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또한 사회서비스에 민간이 참여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도 사회서비스가 민간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더 심화하자는 취지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보육을 사회가 책임지자’고 하면서 BTL방식을 취하는 문제들이 그렇죠. 취약계층의 직업능력계발확대나 자활근로사업 등은 결과적으로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일단 밀어 넣고 보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서울시 저소득층 실태조사를 보면 당사자들은 직업훈련을 원하지 않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자료를 보더라도 그 직업훈련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편입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빈곤해결의 근본 방안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합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관련한 정부 입장도 부정적으로 평가한 점이 많은데, 일부 부양의무조건 완화 같은 것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결정적으로 생계비 관련 빈곤선 문제에 있어 우리가 요구하는 것과 격차가 워낙 너무 큽니다. 관련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생계비 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전제로 빈곤선을 잡는다면 서울만도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가 15~10% 정도는 나올 것이라 예상됩니다. 그런데 실제 수급 자격을 얻게 되는 사람은 2%도 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일부 자격요건 완화가 핵심 해결방안은 아니라는 것이죠. 더 조목조목 따지자면 대부분의 영세자영업자 보완대책 역시 실효성이 없는 대책에 불과합니다. 한편에서는 대형 할인점 등이 들어서고 있는데 이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도 없이 어떤 실효성이 있겠냐는 것이죠. 기업도시나 국가균형발전시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남․ 북 이야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논리입니다. 소득별 계층별로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함으로써 드러나는 현상을 현상적으로만 접근해서 지역 간 불균형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이것을 강남․ 북 문제 즉, 지역 간 격차로 치환하여 열악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자는 방식의 결론으로 이어지게 되죠. 예를 들면 자본 투하를 하면 된다는 논리인데, 이런 방식에 따라 뉴타운 등 열악한 지역의 개발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계층 간, 계급 간 격차보다는 지역적 격차 등이 언론 차원에서나 사회적으로도 부각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보도자료 앞에 ‘강남․ 북’만 붙이면 언론에 보도될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오던데요. 지역별 집중도의 차이가 지역문제로 발전하는 점에 대해서 정책적 접근도 필요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논의가 언론이 설정하는 방식대로 의제를 따라가는 측면이 많아 핵심에서 빗겨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까 지적하셨는데 양극화 담론 관련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중산층에 초점을 맞추고 대책이 중산층 중심으로 마련되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최근에 국민연금 보완에 관련해서도 갑자기 역 모기지론 1)이야기가 나와 버리면서 결국은 주택 등의 일정한 자산을 가진 계층을 보호해서 중산층이 빈곤화되는 것을 막자는 방식으로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역 모기지론은 금융을 중심으로 노후소득보장 체계를 만들자는 대표적인 주장인데 특히 주택 문제와 관련 소득 불평등이 극심한 대한민국에서는 금융세계화 비판의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의선 : 제가 보기에 양극화 해소 정책의 핵심적인 우려지점은 복지부문이 아닌 것을 복지대책이라 일컫는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일자리나 자활사업, 근로소득보전세제(EITC)나 보육정책 등의 목표가 경제활동 인구 확대 등 일자리 창출의 방향성 하에 이야기되면서 그대로 복지정책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복지정책이 노동연계를 강화하는 경향이 문제입니다. 더 이상 한국사회에 노동유인효과는 필요 없다고 봅니다. 누구든 일을 하고자 하는데 사실 그 일자리가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적절한 일자리가 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러한 복지와 노동을 연계하는 과정에서 창출되는 일자리가 사실은 최저임금 수준의 일자리입니다. 그나마 시행되고 있는 기초생활보장제도도 개정과정에서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은 제외시킬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일자리 창출이 핵심이 아니라 어떤 일자리인지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죠. 즉 이러한 노동빈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주요한 과제로 상정되어야 합니다. 또, 자활 사업이라는 것이 일정한 사회구조적 기능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노동시장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임금수준이 최저임금보단 높을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동안 안정적 일자리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었는데 재정경제부 차원에서 안정적 일자리를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안정적 일자리를 요구할 것인가가 또한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EITC 방안이 발표될 당시에 좀 무리가 있었음에도 빈곤사회연대에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바가 있습니다. 최저임금을 낮추는 효과를 낳고 오히려 노동능력자들의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문제제기하였습니다. 일자리 창출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빈곤의 문제, 이 안에서 정부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최저임금제도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조동진 국장님이 제기한 공공복지 서비스 확대 등이 이와 함께 요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논의가 빠진 채 이야기되는 일자리 창출은 오히려 노동빈곤을 강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자리 정책을 저출산․ 고령화 정책의 핵심인 경제활동인구의 확보라는 측면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듭니다. 사회 서비스 확대 과정의 공공성 확보가 사회적 배제를 낳는 구조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정부의 정책들은 그런 문제점 해결로 나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중산층을 두텁게 한다지만 실제로 그러한 실효성도 없으며 절대빈곤층의 빈곤탈출과는 무관한 논의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4%] 사회자 : 정부가 양극화 담론을 제기하면서 우려지점으로 내세우는 것이 투자 부진으로 인한 고용감소입니다. 이는 성장잠재력을 마련하고 노동시장의 경직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현재의 고용구조를 분석해볼 때 정부의 이러한 인식이 적합한 것인지에 대해 배기남 국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기남 : 현재 무역수준이 세계 12위인 한국에서 개개인이 갖는 생활수준에 대한 기대는 매우 높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자발적 실업문제도 일정하게 있다고는 봅니다. 단순기능직․ 단순노무직 같은 경우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틀거리가 없고 여전히 한국 노동자운동이 기업복지의 틀에서 벗어나있지 못한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상태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정부의 대책은 빈곤층을 관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지방노동청의 실업자 교육훈련 기관을 선정하는 심사위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데, 선정되는 업종은 미용, 요리, 재봉기술, 심지어는 점성술과 같은 것이었고, 이러한 자영 서비스업을 주로 교육․ 훈련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취업률로 이어지는 비율이 20%를 넘지 않았습니다. 단순기능직을 순수하게 교육시켜 빈곤의 문제나 저임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하는 실질적인 문제가 있죠. 사교육비를 비롯한 교육비 전반에 대해 해법이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비 지원체계에 대한 초보적 수준의 논의조차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택문제 역시 저소득층이 훨씬 높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진숙 : 양극화와 저출산․ 고령화가 함께 제시되고 있는데 최근 노무현 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세 가지 방향 정도로 정리해서 말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근로연계복지라는 이름 하에 사회복지정책들이 여러 가지 시행될 것이라는 점, 또 하나는 기초생활보장 관련된 것인데 극빈층을 대상으로 한 제도들을 일정하게 확대하거나 보완하는 방향성이 유지될 것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도시계획과 맞물린 국가균형발전 등의 수사를 활용한 다양한 발전계획의 맥락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방향성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상호 결합되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IMF 이후 불안정노동층이 급격히 증가한 후 운동사회 안에서 1-2차 구조조정에 대해 진단하면서 2차 구조조정의 경우 법제를 완비하는 형태로 가면서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이 완료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와 유비해보면 현재 빈곤관련 정부 대응이 2차의 상태에 온 것 아니냐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다양한 빈곤 정책이 쏟아져 나왔고, 현재는 앞서 말한 세 가지 방향성이 법․ 제도적 틀을 갖추고 있는 상황인데, 이러한 틀이 향후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근로연계복지의 경우 많은 분들이 분석하듯이 불안정노동의 증가와 연계하지 않고선 해명할 수 없는 맥락이 있습니다. 최근 ‘골간 노동력화’라는 개념이 등장할 만큼 불안정 노동이 정상적인 고용형태처럼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밑으로 한 층 정도가 더 생긴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산업예비군 층을 사회적 일자리, 저임금 공공서비스 등 상시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불안정노동 밑에 한 층을 더 두는 형태, 이를 제도적으로 만드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현재의 절대 빈곤이 워낙 심각하기 때문에 일정한 확대는 불가피할 것 같지만 조동진 국장님의 말씀대로 정부의 정책으로는 효과가 매우 미비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정부의 이러한 정책에 어떤 비판과 대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있어, 대응방식이 외형상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방향성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기준을 완화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수혜를 더 받는 숫자가 1%에도 미치지 않는 굉장히 적은 수치입니다. 이런 것을 왜 하냐고 비판할 수도 있겠고 생색내기 하지 말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죠. 참여연대 같은 경우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한 단체인데, 실제로 돈도 별로 안 드는데 왜 못하냐는 방식으로 접근하더라구요. 어떤 식으로 비판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유의선 : 한나라당조차도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데는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내놓고 있는 일자리창출 정책에는 큰 이견이 없는 듯해요. 다만 복지부문 확대를 더 줄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거죠. 기초생활보장제도 관련해서 예를 들면 한나라당은 그 많은 돈을 써서 이 정도밖에 해결 못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노동능력자는 아예 떼어내어 버리자, 노동무능력자만 보장하자고 하는 정도의 견해차가 있을 따름이죠. 비단 참여정부의 기조뿐만 아니라 여야 정치권은 큰 틀에서 노동시장을 최대한 유연화하고 최소한의 복지를 갖추는 것은 대략적으로 합의하는 방향인 것 같은데, 사회 양극화 담론을 통해 노무현 정부가 핵심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조세를 통한 이슈파이팅인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이슈를 선점해왔던 노무현정권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죠. 지금 양극화 해소 관련해서 감세냐 증세냐 라는 그들만의 논쟁이 있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양극화 대책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생색내기 방식보다는 정계개편까지 바라보면서 이후 대선까지의 우위 선점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자 : 조세 논란 관련해서는 정부가 양극화해소를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가 언론 학계 등에서 증세냐 감세냐를 두고 논란을 벌였지요. 그러다가 재경부 입단속 문제까지 얘기되면서 지방 선거 이후로 미뤄졌습니다. 지금 조세개혁 논란 관련해서 민주노동당이 부유세 문제도 제기했잖아요. 일부 언론에서는 부유세를 걷는 것 말고 어떤 구체적 대책이 있느냐는 비판도 있던데요. 현재 양극화해소 재원조달을 위한 조세개혁 논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의견을 말씀해주십시오. 조동진 : 굳이 양극화를 말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조세체계가 워낙 기본적인 문제가 많고 누진성도 굉장히 많이 떨어지고 금융자산․ 부동산자산 등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과세가 안 되고 있어서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부유세라는 세목 하나를 도입하는 문제가 아니라 부동산이나 금융 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라든지 전반적 조세체계 개혁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앞으로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포괄적 의미의 사회 공공성, 주거 등을 포함한 부분에 있어 기본적인 재원마련 방안과 맞물려 있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진전이 안 되고 있어 당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갑자기 노무현정부에서 조세개혁 문제를 양극화 해소 방향으로 들고 나왔지요. 지역에서 재산세 감면 문제 등도 쟁점인데 재산세가 감면되면 고가의 중대형 주택이나 주상복합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보통의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원래 해당이 안 되고 집을 소유한 사람들 가운데서 연관되어있는 재산세가 10만원 미만이어서 감면을 못 받거나 받아봤자 평균 3천 원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이것밖에 안되는데도 이것이 대중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조․ 중․ 동 등 언론에서 떠들어댄 효과이기도 합니다. 워낙 허약한 복지체제와 서비스체제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에게는 나간 다음에 돌아올 것이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어쨌든 당장은 내 주머니에서는 안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한 거죠. 이런 조건 속에서 정부가 조세개혁을 말하다가 얻어맞은 건데 이런 맥락을 떠나서 구체적 방안을 봐도 고소득, 자영업자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근로소득자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건 상식적으로 조세개혁 차원에서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함정이 있다고 봅니다. 위험한 측면이 있는 거죠. 아까 이야기한 대로 노동시장 내에서 양극화, 그리고 소득자 중에서도 근로소득자 비 근로소득자 간의 양극화를 말하면서, 양극화라고 했을 때 어떤 부위를 칠 것인가가 불확실했고 그러한 쟁점이 조세개혁논란에 들어있다고 생각됩니다. 부유세 프로젝트의 핵심은 부동산이나 금융에 대한 과세 강화가 취지였는데 지금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조세개혁론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지금 양극화라고 했을 때 각자가 일정부분 부담을 해서 이 문제를 풀어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고 모두의 책임이 되어버리니까 결과적으로 누가 원인 제공자인가 하는 문제가 굉장히 불분명해지는 거죠. 보수언론도 근로자가 봉이냐고 계속 이야기하잖아요. 지금 조세개혁론은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춰 평가를 해봐야 합니다. 이진숙 : 노무현정부는 실제 추진의지 유무와 무관하게 조세개혁에 대한 말만 던져놓고 효과를 챙기는 것 같습니다. 정부가 얼핏 흘린 말을 가지고 언론에서 보도하고 시민단체에서 분석하는 대리전 양상으로 가는 거죠. 증세냐 감세냐 하는 논쟁구도는 전통적인 것인데, 현재 한국의 상황은 이것과 다소 상이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선거 시기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감세를 주장하고 민주당은 증세를 말하는데 집권하고 나면 결국 흐지부지되는 양상이 반복됩니다. 한국의 경우 워낙 양극화 담론이 많이 형성되어서 한나라당도 노골적으로 고소득층이나 법인들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감세를 주장하진 않잖아요. 뭉뚱그려서 투자에 굉장히 위험하다고만 말하죠. 열린우리당 같은 경우에도 구체적인 방향성을 언급하지 못하는데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나서 사회복지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고 빈곤층이 너무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모두가 합심해서 증세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참여연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OECD 평균 수준에 비해 전 국민 조세부담률이 굉장히 낮은 수준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실제로 증세를 할 계획이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현재까지의 구도는 정부가 의도한 바대로 흘러간다는 생각입니다.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진보연대 뿐만 아니라 많은 운동진영에서 노무현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NGO를 동원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조세 논란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진5%] 배기남 : 부동산에서 세금을 강화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사용자에게 책임이 전가됩니다. 부동산 관련 소유권을 전혀 건드릴 생각이 없는 것이죠. 이 문제에 대한 운동진영의 정면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유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문제제기가 필요합니다. 민주노동당에서 1가구 1주택을 선언을 했던데 전혀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더군요. 이러한 것들을 정말 운동으로 조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소득관계를 누진적으로 역 재분배해야 합니다. 그 바탕 위에 그럼에도 돈을 더 잘 버는 자에게 과세율이 높이는 것이 부유세겠지요. 문제의 접근 수순이 뒤바뀐 것 같습니다. 유의선 : 양극화 해소 재원 조달 방안으로서의 증세냐 감세냐 하는 논쟁은 허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세수 확대로 양극화 해소를 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자활 같은 경우 조건부 수급자를 취업시키는 기업에 고용장려금을 주는 형태로 이어질 것이라는 거죠. 중요한 것은 양극화 해소 방안이나 빈곤해결을 위한 구체적 대책이 마련되고 미약한 복지재정이 확충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빈곤사회연대가 타워팰리스 앞에서 발족할 때 한 얘기이지만 용산 주상복합단지를 분양하는 데 하루만에 8조원이 모였다고 하고 얼마 전에 롯데백화점이 마트 확장하려고 주식을 모으면서 하루만에 20조원의 돈이 모였다는데, 이 돈이 다 부자들의 돈인가 하면 아니라는 거죠. 중산층이나 서민들이 빚내서 투자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의 사회에서는 빚을 내서라도 먹고 사는 것은 어떻게든 해결되는데 빈곤을 탈출하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은 부동산, 주식밖에 없다는 거죠. 주식은 불안정하니까 안정적 부동산에 투기가 집중되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들을 깨고 분배구조의 형평성을 만들지 않고서 재분배 중심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한계적이라는 겁니다. 이미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는데 부를 환수해 다시 나누는 것으로만 사고되면 구조적 문제를 우회하고 그러한 구조의 양산에 대해 결국 면죄부를 주는 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빈곤사회연대에서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올해 주거권운동 관련한 요구들이 가장 높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주거 빈활의 성과이기도 한데, 단순히 무주택 서민이나 지하셋방이나 쪽방 비닐하우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전월세 거주 서민들까지 광범위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불평등 문제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 여러 비판지점과 우려지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죠. 현재 정부정책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거나 일정한 효과가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진행중인 상황에서 핵심적으로 주의 깊게 봐야할 것이 무엇인지 의견을 나눠봅시다. 이진숙 : 부동산정책에 대해서는 아직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예전에 사회진보연대가 결성반대의 입장을 피력했던 양극화해소 국민연대의 워크샵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요. 초창기 단계의 회의였는데 노동, 여성 등 각 부문이 자신의 숙원사업을 들고 나오는 것을 취합하는 형태였습니다. 그 때 부문의 요구가 아닌 형태로 제기된 유일한 문제가 참여연대가 제기한 조세개혁문제와 부동산문제였습니다. 부동산 문제는 작년에 워낙 논란이 많이 되었던 것이었잖아요. 그런데 자산소득 격차가 심각한 문제인데, 부동산 문제를 건드린다고 해서 해결되는가 하는 점과, 노무현 정부에서 부동산을 잡겠다고 정책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전통적으로 전철연 등의 빈곤운동을 해오던 단위들이 제기해온 주거권 개념과도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보면 빈곤이 고착화되는 원인이 무엇인지와도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NGO의 경우 자산소득 격차 해소를 부동산문제를 통해 제기하려는 방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나 금융세계화의 문제, 금융자산이 팽창되는 문제를 봐야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한국에서는 땅 부자가 진짜 부자라는 오래된 관념 때문에 부자들을 공격한다든가 가난한 사람들 위로해주는 차원에서 부동산 문제가 효과적인 기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대책으로 그렇게 활용되는 측면이 큰 것 같습니다.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산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가, 그리고 운동진영이 주장을 해야 되는 문제인가라는 의문이 많이 듭니다. 주도권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제시할 때는 말씀하신 것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부동산을 말했을 때는 토지공개념이나 이렇게 부자가 많다고 활용되는 측면이 많은 것 같거든요. 배기남 : 자산이라는 개념에는 실사용이 아니고 재테크라는 개념이 포함되는데 주택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통계를 보면 3주택 이상 소유자가 부동산 담보대출 비율이 제일 높습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우리가 진보적인 요구를 할 때 1가구 1주택을 실현하자는 기치 속에 2주택 이상 소유자에게 담보대출을 회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빚을 1억 쯤 져본 사람은 정말 급한 상황을 많이 겪었을 텐데 담보가치가 조금만 하락해도 은행은 바로 회수하려고 하거든요. 이렇게 해서 주택가격의 하락을 유도하는 것이지요. 건물은 마모되는 것이기 때문에 건물과 토지를 분리해서 생각해보면 핵심 문제는 토지에 대한 소유관계입니다. 실제로 소유관계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벌여나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정말 대중의 절실한 요구가 무엇인지, 체제 변혁적 요소가 있는지, 조직화하기에 유용한지 고려해봐야 하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주택문제가 교육이나 의료보다 훨씬 더 대중적 설득력을 가진다고 봅니다. 노동연계복지의 강화, 사회적 일자리 사업,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표현되는 정부 노동정책의 문제는 무엇인가? 유의선: 사회적 일자리 사업 등은 필수적인 사회 서비스를 수익형 지향으로 규정하는 한편 전체 임금을 하향 평준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진숙 : 사회적 일자리는 결국 비정규직보다 낮은 산업예비군을 관리하는 정책으로 기능할 것이다 사회자 : EITC 도입, 자활이나 사회적 일자리 확대로 표현되는 노동연계복지 강화라는 양상에 대해 어떤 측면을 핵심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현재 빈곤층의 일자리, 노동에 관한 요구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자활이나 사회적 일자리 관련해서 간단하게 언급이 되었는데 자활 노조도 있고 자활 후견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의 여러 고민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가 산업재편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의 일환으로 긍정성이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의선 국장님이 그 부분의 쟁점을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유의선 : 이전에는 자활사업이 사회적 일자리의 일부였다면 이제는 이미 자활사업 참여자가 12만이고 사회적 일자리까지 더하면 18만 명 수준인 데다가 점점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아까 언급했지만 양적 확대에 대한 목표는 있는데 일자리의 질적 향상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사회적 일자리 혹은 사회적 기업이라고 이야기되면서 정부가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2~3년 안에 시장형으로 나아가게끔 한다는 점입니다. 최저임금으로 고정된 일자리들의 내용이 주로 간병이나 집수리, 활동보조서비스 등 사회적 서비스의 확대가 요구되면서 노동시장 내에서 필요로 하는 일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공의 일자리인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수익형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아 전체 노동시장의 임금을 하향화시키고 있는 측면이 지적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비정규직 보호 법안을 보면 정부가 지원하는 일자리는 무기한 기간제로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활이나 사회적일자리로 늘어난 일자리들은 무기한 기간제가 되는 것이죠. 복지부가 이미 조건부 수급자에 대해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법으로 명시했는데 법은 아직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노동부에서 지침을 그렇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산재보험도 적용되지 않거나 일부 지자체별로만 적용되고 고용보험도 적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활노조에서는 자활사업 참여자나 사회적 일자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노동조합 결성, 노동자성 인정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고 여기에서부터 일자리 안정성 확보를 해야 한다는 고민이 한축으로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활이나 사회적 일자리가 정부가 직접 고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모두 민간 위탁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민간 위탁된 단체들 간의 협의체나 연합체가 결성되어 있고, 안정적으로 일자리를 위탁받기 위한 민간부문에서 경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활동보조서비스가 늘어나고 장애인 자립생활센터들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고 있는데 민간단위에서 아웅다웅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죠. 현상적으로 드는 고민은 저임금의 확대, 이것이 시장에서 갖는 의미 측면에서, 또 운동적 기능의 측면에서 지금은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점을 발견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사회적일자리 없애고 자활사업 하지 말자고 하기는 힘들어요. 이것이 나쁜 일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당장 중단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면 무엇을 중심으로 어떤 제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남습니다. 사회자 : 세계화 국면에서 노동구조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부에서는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말을 해왔었는데 사실은 자본 축적의 방식이 고용 파괴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실제로 정부가 주장하듯이 지금의 사회가 절대적 고용감소에 직면했는가, 정말 일자리가 없는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히려 실업률은 줄고 있다는 거죠. 워낙에 필요한 서비스산업을 사회적 일자리라는 형태로 탈바꿈시켜서 임금을 낮추는가 하면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 밑으로 또 다른 층위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대응 방식을 고민할 때 노동구조의 변화에 걸맞는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이라고 표현되는 것에 대해서 기존의 비정규직 철폐투쟁보다 더욱더 심화된 고민이 한축으로 있어야 하겠고, 일하는 빈곤층의 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의 일자리정책이 양극화해소 방안과 맞물려 이야기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의견을 더 들어봤으면 합니다. 유의선 : 지금 시급하고 핵심적인 문제는 일자리창출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일자리 나누기의 구체적 의미를 IMF 직후의 일자리 나누기와 비교해서 더 설명해야 합니다. 안정적인 일자리라고 말하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고 말하든 물러설 수 없는 요구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정적이고 튼튼한 일자리의 실제 형태는 무엇이냐, 요구가 무엇인지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배기남 : 그동안 단순하고 즉자적으로 요구했던 것은 비정규직 철폐였습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를 봐도 노동시간을 연장해서라도 잔업특근을 더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산별노조관련 금속의 정책담당자에게 제조 금속 노동자들의 전국적 단결을 위한 공동투쟁과제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8시간의 임금기준을 정상화하는 것으로 접근하고 연장근로만 줄이기만 해도 현대자동차 조합원이나 계열사 하청노동자, 다른 업종의 노동자들과도 충분히 연대할 수 있다고 말하더랍니다. 현재 한국의 노동구조가 내부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판을 짜면서 임금격차를 둬 분절화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일자리나누기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해소라는 측면에서 일자리 창출문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5일제를 못 박고 하루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갔어야 하는데 성장하는 큰 대기업에서는 노동시간을 더 연장하는 방식으로 왜곡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진숙 : 경제위기 이후, 실업이 심각해지고 난 후 몇 십 만개 일자리 창출하겠다는 정부 선언을 빼면 일자리 나누기 명목으로 추진했던 것이 노동유연화와 주5일제였습니다. 주5일제가 실시되고 노동유연화는 말할 것도 없이 확대되었는데 사실 고용이 얼마나 증가했는지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자료가 없습니다. 사회적 일자리 문제는 사회진보연대 빈곤팀 논의에서도 뜨거운 감자입니다. 정부의 양극화 대책 방향성이 명확히 드러났는데 사회적 일자리는 결국 비정규직보다 낮은 산업예비군을 관리하는 정책으로 기능한다는 면에서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는 다른 쟁점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IMF 이후 사회적 일자리를 만든 것이 사실은 운동진영인데요, 자활센터 등이 그 예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사회적 일자리 참여자에게는 사용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사회적 일자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하기에 앞서 그 동안 5~6년을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또 하나는 민주노동당에서 말한 것과 맞물리는데 현재의 빈곤 문제가 소득자체의 저하 문제뿐만 아니라 생계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도 있기 때문에 사회공공성을 보장하는 것이 생계비 부담이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은 이론적 차원에서는 이해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료나 교육의 사회공공성을 강화하자는 이야기가 현재적으로는 사회적 일자리를 확대하는 현재 정부정책과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회적 일자리 대부분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고, 사업의 명분도 그러합니다. 그 밖에도 성별분업을 고착화하는 문제도 있는 겁니다. 가정에서 하는 것을 사회 나가서 또 하는 거지요. 여러 쟁점을 함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의선 : 정부가 사회 양극화 해결의 핵심으로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일자리를 말하면서 이것이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방식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NGO들이 이야기하는 민간에서 바라는 안정성의 담보 및 적정한 임금이라는 주장과 맞물리고 있는 거죠. 오히려 사회적 공공성을 확대하는 데 있어서는 전체 민중적 통제가 가능한 형태, 그 책임이 분명히 국가적 차원에 있는 형태 속에서 각 영역의 공공성이 보장되었을 때 가능할텐데, 현재 정부정책이 과연 그러한 방식으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그런 측면에서 최저임금이 업종과 무관하게 사회적 일자리의 임금 가이드라인이 되는 것이고 최저생계비가 자활사업의 임금수준을 결정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맞물려가고 있는 구조나 관계들이 더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공공성 강화의 쟁점과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조동진 : 이전의 노동조합 투쟁과 사회공공성 제기가 괴리되는 측면이 있다. 결국 시장을 통제하고 시장화를 막는 핵심 방안이 무엇인가가 고민되어야 한다 이진숙 : 사회공공성 확대라는 과제가 올바르게 제기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쟁점들과 결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유의선 : 담론과 언명의 차이는 실천방식의 차이를 포함한다. 함께 할 수 있는 공동행동과 연대를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배기남 : 민주노총은 대중의 절실한 요구를 담고, 체제변혁의 고리가 될 수 있고, 조직화의 유용성이 있는 측면에서 사회공공성에 접근해야 한다 사회자 : 사회공공성 강화나 공공부문의 확대 등이 이야기될 수 있겠는데, 사회공공성위원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방향성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주시고 쟁점들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배기남 : 보건의료노조에서는 의료보험 보장을 80%까지 확대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방어적으로는 영리법인화 반대를 이야기하고 있고 어디부터 실시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저소득층 무상의료, 취학 전 어린이 예방접종 무료화, 산전산후 진찰 무료, 65세 이상 노인 틀니 급여화 등이 기본적인 주장으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1995년도 민주노총 창립 시, 핵심슬로건이 산별건설, 사회개혁투쟁, 정치세력화였습니다. 당시에도 기업별 노조의 체계를 시급히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기업별 임금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균열이 나타났으며 노동자계층의 위계화가 드러나기 시작했지요. 1997년 대선에서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제기되었는데 당시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었습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자운동을 하자는 것이었죠. 그렇지만 사회개혁투쟁의 요구는 각 연맹의 직업적 연관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2006년 메이데이 때 세상을 바꾸는 총파업을 하자고 했는데 내부에서는 이러한 관심이 확산되지 못하고 무상의료․무상교육 같은 경우 보건의료노조와 전교조만의 오래된 주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지금은 열린우리당의 개혁드라이브 때문에 핵심적으로 제기되었던 각 연맹의 주장이 집권당의 정책에 수렴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포괄한 전체적 진보진영의 요구를 그들이 수렴해가면서 성과가 모호해졌고 초점을 새롭게 설정해야 하는 과제가 있는 거죠. 새로운 단계의 초점은 좀 더 포괄적이고 계급적 성격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사회자 : 현재 사회공공성 쟁취라는 슬로건이 핵심 화두가 되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동진 :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포함한 사회공공성의 폭넓은 맥락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기간산업의 사유화 저지 투쟁을 해왔었는데, 이는 사실 단지 반대적 의미에서 시장화되어 있는 부분들을 다시 공공영역으로 가져오고 공공성을 높여내자는 것이었지요. 민주노동당에서도 무상의료를 이야기할 때 의료전달체계 내에서 공공기관을 대폭 늘리자는 방향을 함께 얘기하는데 표면적으로는 무상의료만 이야기되어왔습니다. 우리가 아동, 노인,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무상의료를 확대하자고 주장하면, 정부에서는 암과 같은 보다 대중적인 쟁점을 제기하면서 시스템 전체를 포괄적으로 바꾸기보다는 당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을 건드리는 식입니다. 핵심은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할 때도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지요. 시장으로부터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오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윤의 논리를 감축시키고 전반적으로 생계비를 낮추는 효과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동자운동이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사회공공성 투쟁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보면 심각한 간극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해왔던 노동자운동의 임금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이냐 했을 때, 생활임금의 논리로 사회공공성이 강화되면 생계비 절감효과가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임금 상승의 효과를 갖는다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기업별노조 차원에서 벌여온 임금투쟁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더라도, 사회공공성 강화 투쟁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는 것으로 대안이 마련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평가가 필요합니다.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 문제에 대해서 노동자운동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제대로 투쟁하지 못했던 것까지 포괄되어 이야기되어야 하는데 급작스럽게 문제를 뛰어넘은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이야기가 이 두 쟁점이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하는 논의로까지도 가는데요.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제기는 무엇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결국 시장을 통제하고 시장화를 막기 위한 핵심은 무엇인지가 고민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상교육을 이야기해도 사교육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죠. 각각의 영역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분석해야 합니다. 소유와 운영의 문제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요새 무상이라는 말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본질적인 측면이 간과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자 : 앞서 공공부문의 고용 확대 등이나 공공성 강화에 있어 한계가 지적되기도 합니다. 공공성 강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병행되어야 할 과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의선 : 빈곤의 문제가 경제적 결핍으로 등치될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권리의 측면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빈곤계층, 민중들에게 사회적 권리로서 주거, 교육, 교통 등이 제기되기 위해서는 노동자운동도 최저임금의 문제, 노동유연화 등을 가지고 자기과제를 중심으로 사회공공성 강화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진숙 : 사회 공공성 쟁취 투쟁 과정에서 공공성이 제기되어왔던 맥락이 있는 것입니다.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 논쟁이 본격화된 시점에서 노동자대중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보편적인 과제들을 수행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사회공공성 강화로 수렴되는 데 비판할 지점들이 있습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기존의 노동자운동이 해왔던 긍정적 효과들이 탈각되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노동자운동의 이념적 노선과 결합된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인상과 같은 경제적인 투쟁들은 호황기라는 조건에서 어느 정도 가능한 투쟁들이었는데 그것이 어려운 조건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현실적인 측면에서만 보아도 노동자운동이 쇠락했다는 것은 경제적이고 방어적 투쟁을 할 수 있는 역량마저 취약한 상황을 말할 텐데, ‘무상의료, 무상교육’으로 표현되는 사회공공성에 대한 일반적 요구들은 이전의 투쟁에 비해 더 많은 역량이 필요한 투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노총의 무상의료․무상교육 등 사회공공성을 요구하는 투쟁은 그 투쟁의 본래적 의미를 매우 편의적으로 제기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존의 노동자운동의 기본적이고 긍정적인 역할들을 후퇴시키는 방향이 아닌가 합니다. 사회공공성 확대라는 과제가 올바르게 제기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쟁점들과 결합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를 통해서 구체적인 고민이 확장될 수 있는 공간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현재 운동사회 내에 권리의 담론으로서 사회공공성이나 사회권 등의 유사하면서 다소 차이가 있는 다양한 논의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담론들의 기본 취지, 즉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을 보다 보편적인 형태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내용은 공동체 구성원인 시민으로서의 권리일 테고, 이것이 기본 바탕에 깔려 있어야 다음 논의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 같이 보편적인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제기하는 것은 정부에서 주도하는 사회적 배제나 양극화 담론에 맞서는 것이기도 한데, 정부는 복지수급의 자격을 규정하는 형태로 시민권과 배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담론을 넘어서 시민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제기해야 하고 그것이 어떻게 구성 가능한 지를 더욱 활발히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조동진 : 사회공공성 투쟁이 기본권 쟁취 투쟁과 함께 가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의료나 교육의 무상화에 집중되기보다는 어떤 것이 우리가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인가를 밝히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영역별로 제기되어왔는데 보편적으로 가기 위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교통공공성을 이야기 할 때 그 내용이 구체화되면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까지 포함하면서 같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즉, 공공성은 소유와 운영의 공적 통제를 일컫는 것이므로 그 내용이 풍부화 되기 위해서는 일단 각 부문에서 나오고 있는 요구들을 포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노동조합에서는 사회공공성이 사회적 임금이라는 효과를 낳고 결과적으로 생계비 규모를 낮출 것이라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실제로 그런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노동을 바꾸는 투쟁에서 세상을 바꾸는 투쟁으로 확장되기 보다는, 중간 내용 없이 갑자기 뛰어넘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하기 전에 그 과정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 지가 불분명합니다. 노동조합이 그동안 해왔던 노동을 바꾸는 투쟁과 지금 하고자 하는 사회공공성 투쟁과의 결합에 대한 논의는 부족한 상황입니다. 유의선 : 이미 다양한 운동과 조직에서 사회공공성에 대한 서로 다른 담론과 언명을 하고 있습니다. 담론이나 언명 자체를 분명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차이는 실천양태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행동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빈곤사회연대 내에서는 사회적 일자리나 최저임금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노동부문의 쟁점’라는 인식이 강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빈곤운동진영은 소위 ‘노동부문의 쟁점’과 중첩되지 않는 사안인 기초생활보장제도, 최저생계비, 주거권, 금융피해자 파산문제 등을 고유한 자신의 과제로 삼게 되는 것이죠. 이는 사회운동 내에서 비주류화되었던 부문들이 주류 노동자운동에 대해 괴리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위 부문운동에서 노동자운동에 과도하게 거리를 두거나 사회운동이 노동자운동이 선차적 과제라고 사고하게 되는 양 측면이 존재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기남 : 민주노총 초기에 주장했던 사회개혁이라는 표현이 자본주의 틀 내에서 일정한 개혁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적 입장을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사회주의를 그냥 주장하자니 좀 어색하고 그 결과 시장을 최소화한다는 의미에서 공공성이라는 의제가 나온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노동자는 생활인이고, 노동자 개개인은 자신의 요구를 실현하고자 노동조합을 이루고 있죠.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최저임금 투쟁은 활동가 수준의 투쟁이 되고 맙니다. 노조운동의 대중적 차원에서 연대하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민주노총이 대중의 절실한 요구이자, 체제변혁의 고리가 될 수 있고, 조직화하기에 유용하다는 측면에서 사회공공성에 접근해보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들여야 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무상이라는 말이 의료에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데 교육은 꼭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죠. 학벌의 문제, 사교육 시장의 문제 등 구조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지 않고 교육비용의 문제로만 접근하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절실한 문제를 찾는 것이 필요한데, 그 중 하나가 주거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임금의 30~40%를 주택을 구입하는 데 씁니다. 주택 및 부동산에 대한 전면적인 제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올해는 기업별노조의 체제를 극복하는 것과 관련, 해석과 의미부여가 다양하지만 이미 공론화한 무상의료․ 무상교육 투쟁이라도 제대로 해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이것이 민주노총이 살아나갈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6년 빈곤과 불안정노동에 대응하는 연대투쟁의 활성화 방안과 의제는 무엇인가? 유의선 : 기존의 기초생활보장법, 최저임금제도 등의 쟁점을 더욱 확장해서 새로운 빈곤운동의 주체 형성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배기남 : 주택문제는 한국사회에서 자본축적의 고리를 끊는 중요한 변혁적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진숙 : 양극화 혹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전 국민적 위기로 규정하면서 정책을 제기하는 정부 논리와 명확히 단절해야 하고 비판해야 한다 조동진 : 신개발주의와 지역균형발전론에 대한 정책적 비판도 중요하지만 당사자들의 투쟁과 어떻게 연대하여 갈 것인지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사회자 : 다방면에 걸쳐 주체를 형성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과제나 요구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정부의 양극화 해소방안, 노동연계복지, 사회적 일자리로 대표되는 노동시장 정책의 문제점도 지적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006년의 핵심 요구와 투쟁과제를 논의해보았으면 합니다. 유의선 : 노동연계복지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자리 창출이 아닌 노동빈곤의 문제를 전면화해야 합니다. 올해 고민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기초생활보장제도, 최저임금제도 등의 쟁점을 더욱 확장해서 새로운 빈곤운동의 주체 형성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로 제기되는 것은 주거권입니다. 빈곤사회연대에서는 극빈층의 주거권 보장을 위한 활동을 많이 해왔었는데, 올해는 쪽방 철거에 대한 대응, 다가구 매입임대주택 문제 등과 부동산 정책에 대한 제기까지 주거권 운동을 더욱 사회적이고 대중적으로 벌여보고자 합니다. 또한 금융피해자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자 합니다. 신용불량의 문제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화시켜내야 할 쟁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부터 지속적으로 고민해왔고 올해는 구체적인 활동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올해 역시 연대를 확장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인데, 다른 부문에 있어서도 함께 투쟁 가능한 내용을 만들기 위해 워크샵을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노동정책에 있어서 함께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는 상황입니다. 사회공공성 역시 마찬가지죠.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과제를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이 전유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면서 우리만의 또다른 과제를 모색하게 되고 연대의 계기가 형성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양한 방식의 폭넓은 연대가 필요합니다. 또한 시민권의 문제에 있어서 고민이 됩니다. ‘시민=세금을 내는 자’라는 인식 속에서 시민권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서 시민권에 대한 개념과 이를 통한 논의의 확장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배기남 : 민주노총은 여러 부문계층의 다양한 요구를 운동으로 기획할 때, 대중적 가능성과 축적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조직화의 가능성이 있는 방향에 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지난 수년간 반복되어온 수세적 국면을 지나오면서 현재 남아있는 활동가들이 조직을 추스르기조차 벅찬 상황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안 찾기 자체를 힘겨워하는 것 같습니다. 적극적인 정책계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주택문제를 중요하게 사고하고 있습니다. 주택문제는 단순히 집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자본축적의 고리를 끊는 중요한 변혁적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2가구 주택 이상 소유자에 대한 주택담보 대출을 회수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제까지 금융권의 대출 관행이 정말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혀 혜택이 돌아갈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왔는데 이것의 변화를 추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동진 : 당장은 지방선거를 고리로 활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일단 무상의료부터 적극적인 운동을 시작하였고, 지역별로 보육관련 운동도 진행 중입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사회공공성을 주요 화두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입니다. 역시 고민되는 지점은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민주노동당만의 정책의제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당사자들과의 연대운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한계로 인해 더욱 큰 운동을 만들고 있지 못합니다. 앞에서 시민권의 이야기가 많았는데, 저 역시 시민권 혹은 기본권 차원에서 사회공공성 투쟁이 함께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사회공공성 투쟁은 지방선거를 통해 더욱 잘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정부 논리에 말려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가 지역 차원에서는 신개발주의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이고 선거 때는 특히 개발공약이 판을 치는데, 이에 맞서 도시계획을 어떻게 민중적으로 통제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주거권의 문제도 시장선거 등을 통해 주되게 제기할 계획입니다. ‘1가구 1주택’이라는 정책은 주택의 소유불평등 문제를 주로 제기되는 것인데,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소유자와 세입자의 점유권의 문제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자체 수준에서 ‘1가구 1주택’을 강제할 수는 없지만, 담론 수준에서 이야기되는 것과 별개로 강제철거 금지를 뛰어넘어 점유권을 권리로 확보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개발권의 공유화 등으로 담론화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정책적인 것을 뛰어넘어 선거 전후로 구체적으로 당사자들의 투쟁과 어떻게 연대하여 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잘못하면 4년마다 선거주기에 맞춘 정책이슈로만 한정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빈곤문제까지 포함하여 같이 투쟁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역시 고민 중입니다. 사회공공성 확보가 사회적 임금의 형태로 생계비의 규모를 낮추는 성과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임금문제에서 해결되어야 할 고유한 문제들은 여전히 남는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최저임금과 최저생계비 문제는 함께 또 별개의 과제로 논의되고 제기되어야 할 듯합니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 관련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보육을 말하다 보면 성인 중심으로 되어 애 키우기 좋은 도시라는 관념이 드러나게 되고 이것이 출산장려정책과 비슷해지는 문제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에서 역시 보육문제의 어떻게 제기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정부의 정책과 다른 차별성을 갖고자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동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하는데 보육의 공공인프라를 확보해도 여성의 가정에서의 혹은 직장에서의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 봅니다. 저출산 문제가 워낙 사회적 쟁점이 되다보니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한 측면도 있습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데 이에 관한 논의가 더욱 많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진숙 : 그동안 사회 양극화 담론은 말만 무성하다가 최근 들어 저출산․ 고령화 대책기구 발족 등 정책실현과정에 들어선 상황입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부각되고 있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운동진영에서도 대응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운동사회 내 토론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수련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운동진영이 너무 무력하게 손 놓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회원들의 제기가 많았습니다. 타당한 제기라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떠한 내용과 방식으로 대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현 정부는 양극화 혹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전 국민적 위기로 규정하면서 협박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것과는 명확히 단절해야 하고 비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독자적인 방안을 구성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NGO를 비롯한 상당수의 운동단체들이 저출산- 고령화 대책기구에 참여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가 생깁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민사회운동을 제도적으로 흡수해 나가면서 위기를 관리하는 노무현 정부의 경향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 이제까지 해오던 사회운동의 자율성과 방향성이 상당히 훼손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에 대한 운동사회 내 인식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얼마 후 있을 지방선거가 이러한 문제들을 운동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 상당히 위험한 시기인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노동당과 같은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단위에서는 각 지역에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이며, 양극화나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독자적 입장을 제출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모두들 알다시피 출산율이라는 것은 자본의 필요노동력의 수준이나 형태에 따라 언제나 ‘상대적’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저출산․ 고령화 대책이라는 것은 결국 성장잠재력을 말하면서 장기적으로 산업예비군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노동시장 관리전략, 즉 저임금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 있다는 것이죠. 또한 저출산 문제가 왜곡된 형태로 사회화되면서 여성들이 취약한 위치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갈수록 출산을 강요당하고 저임금 노동시장에 노출되게 될 것입니다. 여성에게 여러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면서 가족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공세도 이미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운동진영의 대응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위기, 합의를 명목으로 이와 같은 저출산 대책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오히려 시민으로서 여성의 권리는 무엇인가를 논의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적인 대응에 있어 대안적인 정책을 계발해가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현재 구도에서 정책 중심의 대응은 때로는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맹점이 있기도 하고 정부정책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나 싶습니다. 각종의 위기 담론을 등에 업고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이 빈곤이나 비정규직 문제, 직장과 가사라는 여성들의 이중부담 해소 등에 있어 당장은 요긴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대중의 생존이나 사회운동의 진로를 돌이킬 수 없는 더 큰 위험으로 이끌 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1)[정리자 주]모기지론(Mortgage Loan)은 부동산을 담보로 주택저당증권(MBS:Mortgage Backed Securities)을 발행하여 장기주택자금을 대출해 주는 제도다. 역(逆) 모기지론(reverse mortgage loan)은, 고령층 인구가 많은 미국·캐나다 같은 국가에서 도입된 바 있는 노인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 주택을 담보로 은행에서 매달 일정액의 생활비를 빌려 쓰는 제도다. 2월 16일 재경부가 발표한 ‘역모기지 활성화 방안’에 따르면, 6억 원(공시가격 기준) 이하 주택을 한 채 가진 노인 부부가 역모기지 대출을 평생 동안 매월 연금 식으로 받으려면 부부 모두 만 65세 이상이어야 한다. 현재 대출자격이 까다롭고 지방과 주택 값이 낮은 지역의 노인들이 세금감면혜택에서 제외된다는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노후보장을 개인이 소유한 집을 담보로 받도록 한다는 점이다. 정부의 양극화 해소 방안이 중산층의 보호라는 측면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과, 이러한 담보대출 등 금융자본의 유동성을 확장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서 계획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 2006-03-02

    <기획좌담> 사회 양극화인가 빈곤 심화 확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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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곤과 불안정노동에 맞서는 2006년 사회운동의 투쟁과제 [%=박스1%] 사회자 : 한국 사회 빈곤인구가 700만에 달한다고 합니다. 빈곤은 주어진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를 ‘사회 양극화’로 인식하고 2006년 해결해야 할 주력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정부의 양극화 해소 방안에 대해 진단하고 불안정노동과 빈곤의 확산에 맞선 과제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결과인 빈곤 심화를 사회 양극화로 볼 수 있는가? 유의선; 빈곤의 심각성은 일하는 빈곤층의 문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진숙 : 빈곤의 심화 양상을 사회 양극화의 틀로 접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접근이다 조동진 : 부동산, 금융 등 자산 격차로 인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사진1%] 유의선 : 빈곤의 원인과 양상의 핵심으로 신빈곤, 일하는 빈곤층의 문제를 들 수 있습니다. 지금의 빈곤은 열심히 일해도 점점 더 가난해지는 양상을 보입니다. 일을 더 해도 소득은 일정하거나 더 줄어들고 소비는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구조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현재 제기되는 빈곤의 심각성은 인구 수 대비 빈곤인구가 많기 때문만이 아니라 일하는 빈곤층의 문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빈곤이 구조화되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금융시장의 문제로서 신용불량의 문제나 가계부채의 문제가 드러나고 특징적으로 여성의 빈곤화 문제, 사회안전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복지의 사각지대의 문제 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빈곤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드러나고 하나의 구조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회자 : 일하는 빈곤층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현재 노동의 불안정화에 따라 비정규직이 비율상으로도 절반이 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핵심 화두가 아닌가 싶은데요, 이에 관해 배기남국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기남 : 87년 이전에는 특별한 계층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모두가 가난해서 국가적 수준의 ‘잘살아보세’를 외치는 분위기였죠. 그런데 87년 이후, 가깝게는 노태우 정권의 반동기를 거치고 나서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기업별 노조체제가 관철되면서부터 그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같이 일하던 사람 사이에서도 정규직은 잘 살고 비정규직은 상대적으로 못사는 양상이 주변에서 눈에 보이게 된 것이죠. 임금도 두세 배 차이가 나고, 생활수준도 누구는 자가용을 몰고 누구는 잘해야 중고차 몰고 다니고 하는 이런 차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새로운 빈곤개념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동자들 내부를 봤을 때도 조직되지 않은 영세사업장 고용 노동자들의 경우 상황은 훨씬 심각합니다. 80년대 중반에 현장에 들어갈 때만 해도 포드주의적 시스템에 의해 노동집약 산업인 전자, 섬유 등이 산업의 중심이었는데 이것이 도산하거나 외국으로 이전되면서 영세자영업에 종사하는 새로운 빈곤층이 등장하기도 했죠. 어쩌면 이 빈 공간을 60만에 달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조동진 : 지역적 상황을 본다면 대도시의 문제점 중 하나가 거주지에 따라 격차가 심화된다는 점입니다. 외국의 경우도 양극화문제가 심화되면서 계층 간 분리현상이 드러나는데 이것이 고착화, 심화되면 이중도시화로 발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강남-북 간 불균형을 소득, 금융, 부동산의 구체적인 항목별로 살펴보면 소득격차도 심하지만 결정적으로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 부동산과 금융자산입니다. 빈곤문제와 양극화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은데 양극화 관련 논의에서는 주로 소득 불균형 관련한 문제를 불평등으로 제기하는데 그보다는 부동산, 금융 등의 자산 격차로 인해 불평등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양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근로빈곤의 양상이 지금 현재의 빈곤 문제를 핵심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빈곤은 소득에 비해서 소비지출규모가 맞지 않으면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서울의 생계비 문제를 살펴보면 생계비 지수가 세계 2~5위 안에 들만큼 높다고 합니다. 최근 5년 동안 근로소득이 20% 올랐다면 주거비와 직결된 부동산 가격은 70%가 증가하였습니다. 주거비용 등을 중심으로 생계비 부담이 굉장히 많이 오른 거죠. 정부에서 사회적 일자리, 사회서비스 확대를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대부분 민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생계비가 더 상승하게 됩니다. 이것이 빈곤화를 가속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소득격차와 생계비 부담의 증가를 함께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2%] 이진숙 : 세 분 모두 각각 다른 각도에서 빈곤에 접근하는 맥락을 짚어주신 것 같습니다. 빈곤 인구 자체가 증가했고 여성빈곤, 노인빈곤, 노동빈곤 인구의 증가 등 빈곤의 양상이 과거와 달라진 상황이라는 것은 운동사회나 정부에서도 대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떤 틀을 통해 어떻게 개념화, 분석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사회진보연대는 사회 양극화라는 말을 가급적 쓰지 말자고 하고 싶습니다. 양극화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먼저, 현실을 묘사하기에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극소수 고소득자를 제외한 다수가 빈민이고 또 다양한 층위를 이루고 있는 상황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념화의 틀과 연관 지어서 사고해보더라도 문제가 있습니다. 정부에서 소득이 양극화되는 배경이 무엇인가를 분석할 때 노동시장이 양극화되어있고 산업이 양극화되어 있다는 방식의 단계적 분석틀을 사용하고 있으며, 대응방안 역시 그런 맥락에서 도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계적으로 접근할 경우 근본적 원인을 보지 못하게 될 뿐더러 은폐하는 효과를 낸다는 것이 저희의 기본 입장입니다. 소득격차나 산업양극화 등은 모두 금융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구조개혁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죠. 이렇게 보면 사회 양극화는 올바른 묘사 또는 개념화가 아닙니다. 양극화는 사회적 배제라는 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980년대를 경과하면서 장기실업, 가족 해체 등으로 인해 빈곤이 확대되면서 프랑스를 선두로 하여 유럽의 국가들이 이를 사회적 배제라는 말로 개념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양극화라는 개념은 주로 대도시 지역에서의 이와 같은 양상을 지칭하는 말로 많이 쓰이는데, 중산층이 붕괴되고 소득분배구조가 극단적으로 이분화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에 유럽 고유의 문제라 할 수 있는 이민자 문제, 지역 간 격차 등이 결합되어 도시 자체가 이중화된다는 식으로 분석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의 주요 원인으로 기존의 복지체제나 사회적 결속을 지탱해 주던 계급연대의 해체가 지목되고, 그에 따라 국가 중심의 사회통합 정책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즉 양극화, 사회적 배제 등의 개념화는 빈곤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필연적으로 계급적 관점을 희석화 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사회통합정책이라는 것은 결국 신자유주의에 걸맞은 복지개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측면을 고려해봤을 때, 빈곤의 심화 양상을 사회 양극화의 틀로 접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배기남 :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 중 하나가 분할지배입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정보통신혁명이 진행되면서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네트워크 생산 시스템, 하층계열화가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심한 부분이 건설이나 섬유산업입니다. 유명의류업체의 경우 제조업 생산라인을 갖고 있는 업체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IMF 이후 변화된 자본 축적 과정에서 고용수준이 더욱 낮아진 현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결과로서 주택문제와 같은 여러 양적 지표들이 나타나는 것이죠. 사회자 :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빈곤층의 지속적인 양산과 일상적 관리가 심화된 상황도 있을 것입니다. 조동진 국장님이 생계비 문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듯이, 노동빈곤의 문제와 결부시키지 않더라도 현재 빈곤의 절대치가 상승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사진3%] 조동진 : 대응 전략과 연결되는 문제인데요, 생계비 지수가 높다는 것은 소득 대비 생계비 부담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유화 저지 투쟁을 전개해왔지만 이미 사유화된 영역이 워낙 많습니다. 특히 보육 부문을 보더라도 대다수 국가에서는 비영리 기관을 포함한 공공보육이 80%에서 많게는 100%까지 보장됩니다. 한국의 경우 5% 대까지 떨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영유아보육법이 만들어진 다음, 정부는 민간에 집중 융자를 해줌으로써 보육 인프라를 공급하게 하면서 민간에 보육을 맡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회공공성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미 시장화된 것을 공공화하자는 이야기도 포함됩니다. 한편에서는 지금 민간자본유치사업(BTL) 방식을 통한 사회적 서비스 확대도 사회화라고 모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서비스가 증가하더라도 이것이 모두 민간 자본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유의선 : 지금 정부 추계로 빈곤인구가 700만이라고 합니다. 이는 최상위 계층까지를 포함한 것으로 최저생계비 120% 기준입니다. 2006년 기준으로 최저생계비가 1인가구가 40만 천원이고 4인가구가 117만원이니까, 1인가구면 50만원 이하, 4인가구면 130만원 수준을 빈곤계층이라고 일컫는 것이죠. 이러한 사람들이 700만 명이라는 말입니다. 여섯 명 중 한 명은 최저생계비 수준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자 중에서는 최저임금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빈곤계층에 속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죠. 가구원 중 노동인구가 적다면 그럴 수도 있는데 비정규직이 저임금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래도 일을 하면 최저임금은 최저생계비 수준을 약간 넘어서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비정규직 인구가 엄청 많이 있습니다. 사회 양극화가 곧 빈곤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 이러한 현상을 일부 고소득자에 비한 상대적 빈곤감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양극화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가를 논의하려면, 지금 절대빈곤의 문제가 대단히 심각하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빈곤은 절대빈곤의 문제뿐만 아니라 빈곤화가 지속되는 구조와 과정이 문제인 것이고 지역 간, 산업 간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빈곤 문제의 양상과 원인이 복합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채 양극화라는 담론에 묻혀가는 데 대해서는 고민이 듭니다. 이진숙 : 특정 용어는 제기되는 맥락과 해결방향에 있어서의 계획까지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양극화가 아니더라도 ‘신빈곤’ 등 개념어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신빈곤이라는 표현은 연구자들과 NGO들이 자주 쓰는 표현인 것 같아요. 사회적 배제라는 용어는 소득이 절대적으로 낮은 사람들에 대해 표면적으로 빈곤을 진단하던 과거의 방식과 다르게 실제로 달라진 빈곤의 양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고 이들이 어떤 권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인식을 확대한다는 차원에서는 최소한의 긍정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적인 맥락과 탈계급적인 해결방향이 내포되어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빈곤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의선 : 사회 양극화라는 말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할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분석틀을 담아낼 수 있는 확장된 빈곤의 문제를 포괄할 논의 틀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노숙인, 장애인 등의 문제, 노동의 문제, 지역 간 격차 등 모두가 처한 빈곤화를 공통적으로 분석할 틀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배기남 : 저는 교육할 때 1-3-6 체제라는 말을 즐겨 쓰는 데, 한국사회에는 세대를 걸쳐 부를 축적하는 국가나 기업의 권력집단으로 형성된 귀족계급이 10%, 전문기술을 가진 소위 신 중산층 및 구 중산층,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고 있는 대학출신 기술직들이 30%를 이루고, 나머지가 대다수 노동자 및 영세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단순기능직 노동자라도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 간의 격차가 엄청나게 큽니다. 이전에는 빈곤의 원인을 사회적 권력관계를 중심으로 고찰했는데, 지금은 노동조합이라는 변수를 고려하여 판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자 : 정부는 양극화를 설명하면서 소득 격차 뿐 아니라 기업 내,직종 별, 업종 별, 산업간 양극화로까지 단계적으로 설명하면서 사회통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노동자운동과의 합의주의를 강화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는 정부여당의 양극화 해소 담론과 구별되는 우리의 틀을 통해 빈곤의 원인을 분석하는 일입니다. 사회 양극화 해소가 화두인 정부의 사회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조동진 : 지역 간 불균형에 현상적으로 접근하면 자본 투하를 통해 열악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자는 결론에 빠지는 위험성이 있다 유의선: 복지정책이 노동연계를 강화하는 경향이 문제다 배기남 : 정부의 대책은 빈곤층을 관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진숙 : 노무현 정부는 양극화 해소 담론을 통해 사회통합과 시민운동의 동원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자 : 현재 정부가 내놓은 이른바 양극화해소 정책들에 대해 논의해보았으면 합니다. 핵심비판지점과 핵심과제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텐데요. 정부에서는 양극화 해소 방안으로 몇 가지를 일단 발표해놓고 결국 구체적인 과제들을 지방선거 이후로 미루어 놓았습니다. 일단, 일자리 창출이 핵심적 과제이고 근로소득보전세제 도입이나 자활, 사회적 일자리의 확충 등이 중심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저출산-고령화 대응방안이 또한 중요하게 사고되면서 노인복지 확대, 여성인력활용방안 등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관련해서도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펼치겠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현재 정부가 양극화 해소 방안에 대해 내놓은 정책 전반에 대한 입장을 확인해보았으면 합니다. 조동진 : 정부에서 주장하는 근로연계복지 강화 방안이나 사회 서비스 확대 과정에 대한 민간 참여 확대 방안에 대해서는 아까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지방선거 공약으로 공공부문 확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일자리라는 말을 대체할 다른 표현을 고민 중입니다. 지금의 사회적 일자리는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정부가 현재 이야기하는 사회적 일자리도 조금 더 오래갈 수 있다는 차이 말고는 저임금의 일자리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일자리 창출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양적 개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실제로 어떠한 일자리인지에 대한 논의가 누락됩니다. 결국 저임금 비정규직이 늘면서 오히려 빈곤의 심화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또한 사회서비스에 민간이 참여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도 사회서비스가 민간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더 심화하자는 취지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보육을 사회가 책임지자’고 하면서 BTL방식을 취하는 문제들이 그렇죠. 취약계층의 직업능력계발확대나 자활근로사업 등은 결과적으로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일단 밀어 넣고 보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서울시 저소득층 실태조사를 보면 당사자들은 직업훈련을 원하지 않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자료를 보더라도 그 직업훈련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저임금 노동시장으로 편입되는 것을 보면 이것이 빈곤해결의 근본 방안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합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관련한 정부 입장도 부정적으로 평가한 점이 많은데, 일부 부양의무조건 완화 같은 것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결정적으로 생계비 관련 빈곤선 문제에 있어 우리가 요구하는 것과 격차가 워낙 너무 큽니다. 관련해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생계비 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전제로 빈곤선을 잡는다면 서울만도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가 15~10% 정도는 나올 것이라 예상됩니다. 그런데 실제 수급 자격을 얻게 되는 사람은 2%도 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일부 자격요건 완화가 핵심 해결방안은 아니라는 것이죠. 더 조목조목 따지자면 대부분의 영세자영업자 보완대책 역시 실효성이 없는 대책에 불과합니다. 한편에서는 대형 할인점 등이 들어서고 있는데 이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도 없이 어떤 실효성이 있겠냐는 것이죠. 기업도시나 국가균형발전시책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남․ 북 이야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은 상당히 위험한 논리입니다. 소득별 계층별로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함으로써 드러나는 현상을 현상적으로만 접근해서 지역 간 불균형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이것을 강남․ 북 문제 즉, 지역 간 격차로 치환하여 열악한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자는 방식의 결론으로 이어지게 되죠. 예를 들면 자본 투하를 하면 된다는 논리인데, 이런 방식에 따라 뉴타운 등 열악한 지역의 개발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계층 간, 계급 간 격차보다는 지역적 격차 등이 언론 차원에서나 사회적으로도 부각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보도자료 앞에 ‘강남․ 북’만 붙이면 언론에 보도될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오던데요. 지역별 집중도의 차이가 지역문제로 발전하는 점에 대해서 정책적 접근도 필요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본질은 아닙니다. 논의가 언론이 설정하는 방식대로 의제를 따라가는 측면이 많아 핵심에서 빗겨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까 지적하셨는데 양극화 담론 관련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중산층에 초점을 맞추고 대책이 중산층 중심으로 마련되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최근에 국민연금 보완에 관련해서도 갑자기 역 모기지론 1)이야기가 나와 버리면서 결국은 주택 등의 일정한 자산을 가진 계층을 보호해서 중산층이 빈곤화되는 것을 막자는 방식으로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역 모기지론은 금융을 중심으로 노후소득보장 체계를 만들자는 대표적인 주장인데 특히 주택 문제와 관련 소득 불평등이 극심한 대한민국에서는 금융세계화 비판의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의선 : 제가 보기에 양극화 해소 정책의 핵심적인 우려지점은 복지부문이 아닌 것을 복지대책이라 일컫는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일자리나 자활사업, 근로소득보전세제(EITC)나 보육정책 등의 목표가 경제활동 인구 확대 등 일자리 창출의 방향성 하에 이야기되면서 그대로 복지정책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복지정책이 노동연계를 강화하는 경향이 문제입니다. 더 이상 한국사회에 노동유인효과는 필요 없다고 봅니다. 누구든 일을 하고자 하는데 사실 그 일자리가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적절한 일자리가 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러한 복지와 노동을 연계하는 과정에서 창출되는 일자리가 사실은 최저임금 수준의 일자리입니다. 그나마 시행되고 있는 기초생활보장제도도 개정과정에서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은 제외시킬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일자리 창출이 핵심이 아니라 어떤 일자리인지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죠. 즉 이러한 노동빈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가 주요한 과제로 상정되어야 합니다. 또, 자활 사업이라는 것이 일정한 사회구조적 기능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됩니다. 노동시장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 임금수준이 최저임금보단 높을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동안 안정적 일자리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었는데 재정경제부 차원에서 안정적 일자리를 표방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안정적 일자리를 요구할 것인가가 또한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EITC 방안이 발표될 당시에 좀 무리가 있었음에도 빈곤사회연대에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바가 있습니다. 최저임금을 낮추는 효과를 낳고 오히려 노동능력자들의 광범위한 사각지대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문제제기하였습니다. 일자리 창출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빈곤의 문제, 이 안에서 정부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최저임금제도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조동진 국장님이 제기한 공공복지 서비스 확대 등이 이와 함께 요구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러한 논의가 빠진 채 이야기되는 일자리 창출은 오히려 노동빈곤을 강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자리 정책을 저출산․ 고령화 정책의 핵심인 경제활동인구의 확보라는 측면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듭니다. 사회 서비스 확대 과정의 공공성 확보가 사회적 배제를 낳는 구조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정부의 정책들은 그런 문제점 해결로 나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중산층을 두텁게 한다지만 실제로 그러한 실효성도 없으며 절대빈곤층의 빈곤탈출과는 무관한 논의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4%] 사회자 : 정부가 양극화 담론을 제기하면서 우려지점으로 내세우는 것이 투자 부진으로 인한 고용감소입니다. 이는 성장잠재력을 마련하고 노동시장의 경직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현재의 고용구조를 분석해볼 때 정부의 이러한 인식이 적합한 것인지에 대해 배기남 국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배기남 : 현재 무역수준이 세계 12위인 한국에서 개개인이 갖는 생활수준에 대한 기대는 매우 높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자발적 실업문제도 일정하게 있다고는 봅니다. 단순기능직․ 단순노무직 같은 경우 생활수준을 보장하는 틀거리가 없고 여전히 한국 노동자운동이 기업복지의 틀에서 벗어나있지 못한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상태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정부의 대책은 빈곤층을 관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서울지방노동청의 실업자 교육훈련 기관을 선정하는 심사위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데, 선정되는 업종은 미용, 요리, 재봉기술, 심지어는 점성술과 같은 것이었고, 이러한 자영 서비스업을 주로 교육․ 훈련하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취업률로 이어지는 비율이 20%를 넘지 않았습니다. 단순기능직을 순수하게 교육시켜 빈곤의 문제나 저임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하는 실질적인 문제가 있죠. 사교육비를 비롯한 교육비 전반에 대해 해법이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비 지원체계에 대한 초보적 수준의 논의조차도 진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택문제 역시 저소득층이 훨씬 높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진숙 : 양극화와 저출산․ 고령화가 함께 제시되고 있는데 최근 노무현 정부가 내놓은 정책은 세 가지 방향 정도로 정리해서 말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근로연계복지라는 이름 하에 사회복지정책들이 여러 가지 시행될 것이라는 점, 또 하나는 기초생활보장 관련된 것인데 극빈층을 대상으로 한 제도들을 일정하게 확대하거나 보완하는 방향성이 유지될 것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도시계획과 맞물린 국가균형발전 등의 수사를 활용한 다양한 발전계획의 맥락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방향성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상호 결합되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IMF 이후 불안정노동층이 급격히 증가한 후 운동사회 안에서 1-2차 구조조정에 대해 진단하면서 2차 구조조정의 경우 법제를 완비하는 형태로 가면서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이 완료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와 유비해보면 현재 빈곤관련 정부 대응이 2차의 상태에 온 것 아니냐 생각합니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다양한 빈곤 정책이 쏟아져 나왔고, 현재는 앞서 말한 세 가지 방향성이 법․ 제도적 틀을 갖추고 있는 상황인데, 이러한 틀이 향후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근로연계복지의 경우 많은 분들이 분석하듯이 불안정노동의 증가와 연계하지 않고선 해명할 수 없는 맥락이 있습니다. 최근 ‘골간 노동력화’라는 개념이 등장할 만큼 불안정 노동이 정상적인 고용형태처럼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 밑으로 한 층 정도가 더 생긴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산업예비군 층을 사회적 일자리, 저임금 공공서비스 등 상시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불안정노동 밑에 한 층을 더 두는 형태, 이를 제도적으로 만드는 형태가 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현재의 절대 빈곤이 워낙 심각하기 때문에 일정한 확대는 불가피할 것 같지만 조동진 국장님의 말씀대로 정부의 정책으로는 효과가 매우 미비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정부의 이러한 정책에 어떤 비판과 대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있어, 대응방식이 외형상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방향성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예를 들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기준을 완화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수혜를 더 받는 숫자가 1%에도 미치지 않는 굉장히 적은 수치입니다. 이런 것을 왜 하냐고 비판할 수도 있겠고 생색내기 하지 말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죠. 참여연대 같은 경우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만드는 데 많은 기여를 한 단체인데, 실제로 돈도 별로 안 드는데 왜 못하냐는 방식으로 접근하더라구요. 어떤 식으로 비판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유의선 : 한나라당조차도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데는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내놓고 있는 일자리창출 정책에는 큰 이견이 없는 듯해요. 다만 복지부문 확대를 더 줄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거죠. 기초생활보장제도 관련해서 예를 들면 한나라당은 그 많은 돈을 써서 이 정도밖에 해결 못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노동능력자는 아예 떼어내어 버리자, 노동무능력자만 보장하자고 하는 정도의 견해차가 있을 따름이죠. 비단 참여정부의 기조뿐만 아니라 여야 정치권은 큰 틀에서 노동시장을 최대한 유연화하고 최소한의 복지를 갖추는 것은 대략적으로 합의하는 방향인 것 같은데, 사회 양극화 담론을 통해 노무현 정부가 핵심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조세를 통한 이슈파이팅인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이슈를 선점해왔던 노무현정권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죠. 지금 양극화 해소 관련해서 감세냐 증세냐 라는 그들만의 논쟁이 있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양극화 대책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생색내기 방식보다는 정계개편까지 바라보면서 이후 대선까지의 우위 선점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자 : 조세 논란 관련해서는 정부가 양극화해소를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가 언론 학계 등에서 증세냐 감세냐를 두고 논란을 벌였지요. 그러다가 재경부 입단속 문제까지 얘기되면서 지방 선거 이후로 미뤄졌습니다. 지금 조세개혁 논란 관련해서 민주노동당이 부유세 문제도 제기했잖아요. 일부 언론에서는 부유세를 걷는 것 말고 어떤 구체적 대책이 있느냐는 비판도 있던데요. 현재 양극화해소 재원조달을 위한 조세개혁 논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의견을 말씀해주십시오. 조동진 : 굳이 양극화를 말하지 않더라도 한국의 조세체계가 워낙 기본적인 문제가 많고 누진성도 굉장히 많이 떨어지고 금융자산․ 부동산자산 등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과세가 안 되고 있어서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부유세라는 세목 하나를 도입하는 문제가 아니라 부동산이나 금융 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라든지 전반적 조세체계 개혁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앞으로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포괄적 의미의 사회 공공성, 주거 등을 포함한 부분에 있어 기본적인 재원마련 방안과 맞물려 있는 문제들이었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진전이 안 되고 있어 당 내에서도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갑자기 노무현정부에서 조세개혁 문제를 양극화 해소 방향으로 들고 나왔지요. 지역에서 재산세 감면 문제 등도 쟁점인데 재산세가 감면되면 고가의 중대형 주택이나 주상복합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보통의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원래 해당이 안 되고 집을 소유한 사람들 가운데서 연관되어있는 재산세가 10만원 미만이어서 감면을 못 받거나 받아봤자 평균 3천 원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이것밖에 안되는데도 이것이 대중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조․ 중․ 동 등 언론에서 떠들어댄 효과이기도 합니다. 워낙 허약한 복지체제와 서비스체제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에게는 나간 다음에 돌아올 것이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어쨌든 당장은 내 주머니에서는 안 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한 거죠. 이런 조건 속에서 정부가 조세개혁을 말하다가 얻어맞은 건데 이런 맥락을 떠나서 구체적 방안을 봐도 고소득, 자영업자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근로소득자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건 상식적으로 조세개혁 차원에서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함정이 있다고 봅니다. 위험한 측면이 있는 거죠. 아까 이야기한 대로 노동시장 내에서 양극화, 그리고 소득자 중에서도 근로소득자 비 근로소득자 간의 양극화를 말하면서, 양극화라고 했을 때 어떤 부위를 칠 것인가가 불확실했고 그러한 쟁점이 조세개혁논란에 들어있다고 생각됩니다. 부유세 프로젝트의 핵심은 부동산이나 금융에 대한 과세 강화가 취지였는데 지금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조세개혁론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지금 양극화라고 했을 때 각자가 일정부분 부담을 해서 이 문제를 풀어갈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고 모두의 책임이 되어버리니까 결과적으로 누가 원인 제공자인가 하는 문제가 굉장히 불분명해지는 거죠. 보수언론도 근로자가 봉이냐고 계속 이야기하잖아요. 지금 조세개혁론은 그런 부분에 초점을 맞춰 평가를 해봐야 합니다. 이진숙 : 노무현정부는 실제 추진의지 유무와 무관하게 조세개혁에 대한 말만 던져놓고 효과를 챙기는 것 같습니다. 정부가 얼핏 흘린 말을 가지고 언론에서 보도하고 시민단체에서 분석하는 대리전 양상으로 가는 거죠. 증세냐 감세냐 하는 논쟁구도는 전통적인 것인데, 현재 한국의 상황은 이것과 다소 상이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선거 시기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감세를 주장하고 민주당은 증세를 말하는데 집권하고 나면 결국 흐지부지되는 양상이 반복됩니다. 한국의 경우 워낙 양극화 담론이 많이 형성되어서 한나라당도 노골적으로 고소득층이나 법인들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감세를 주장하진 않잖아요. 뭉뚱그려서 투자에 굉장히 위험하다고만 말하죠. 열린우리당 같은 경우에도 구체적인 방향성을 언급하지 못하는데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나서 사회복지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고 빈곤층이 너무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모두가 합심해서 증세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참여연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OECD 평균 수준에 비해 전 국민 조세부담률이 굉장히 낮은 수준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실제로 증세를 할 계획이 있었는지와 무관하게 현재까지의 구도는 정부가 의도한 바대로 흘러간다는 생각입니다.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진보연대 뿐만 아니라 많은 운동진영에서 노무현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NGO를 동원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조세 논란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진5%] 배기남 : 부동산에서 세금을 강화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실사용자에게 책임이 전가됩니다. 부동산 관련 소유권을 전혀 건드릴 생각이 없는 것이죠. 이 문제에 대한 운동진영의 정면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소유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문제제기가 필요합니다. 민주노동당에서 1가구 1주택을 선언을 했던데 전혀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않았더군요. 이러한 것들을 정말 운동으로 조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소득관계를 누진적으로 역 재분배해야 합니다. 그 바탕 위에 그럼에도 돈을 더 잘 버는 자에게 과세율이 높이는 것이 부유세겠지요. 문제의 접근 수순이 뒤바뀐 것 같습니다. 유의선 : 양극화 해소 재원 조달 방안으로서의 증세냐 감세냐 하는 논쟁은 허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세수 확대로 양극화 해소를 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자활 같은 경우 조건부 수급자를 취업시키는 기업에 고용장려금을 주는 형태로 이어질 것이라는 거죠. 중요한 것은 양극화 해소 방안이나 빈곤해결을 위한 구체적 대책이 마련되고 미약한 복지재정이 확충될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빈곤사회연대가 타워팰리스 앞에서 발족할 때 한 얘기이지만 용산 주상복합단지를 분양하는 데 하루만에 8조원이 모였다고 하고 얼마 전에 롯데백화점이 마트 확장하려고 주식을 모으면서 하루만에 20조원의 돈이 모였다는데, 이 돈이 다 부자들의 돈인가 하면 아니라는 거죠. 중산층이나 서민들이 빚내서 투자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의 사회에서는 빚을 내서라도 먹고 사는 것은 어떻게든 해결되는데 빈곤을 탈출하고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은 부동산, 주식밖에 없다는 거죠. 주식은 불안정하니까 안정적 부동산에 투기가 집중되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들을 깨고 분배구조의 형평성을 만들지 않고서 재분배 중심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한계적이라는 겁니다. 이미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는데 부를 환수해 다시 나누는 것으로만 사고되면 구조적 문제를 우회하고 그러한 구조의 양산에 대해 결국 면죄부를 주는 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빈곤사회연대에서 워크샵을 진행하면서 올해 주거권운동 관련한 요구들이 가장 높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주거 빈활의 성과이기도 한데, 단순히 무주택 서민이나 지하셋방이나 쪽방 비닐하우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전월세 거주 서민들까지 광범위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불평등 문제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 여러 비판지점과 우려지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죠. 현재 정부정책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거나 일정한 효과가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현재진행중인 상황에서 핵심적으로 주의 깊게 봐야할 것이 무엇인지 의견을 나눠봅시다. 이진숙 : 부동산정책에 대해서는 아직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예전에 사회진보연대가 결성반대의 입장을 피력했던 양극화해소 국민연대의 워크샵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요. 초창기 단계의 회의였는데 노동, 여성 등 각 부문이 자신의 숙원사업을 들고 나오는 것을 취합하는 형태였습니다. 그 때 부문의 요구가 아닌 형태로 제기된 유일한 문제가 참여연대가 제기한 조세개혁문제와 부동산문제였습니다. 부동산 문제는 작년에 워낙 논란이 많이 되었던 것이었잖아요. 그런데 자산소득 격차가 심각한 문제인데, 부동산 문제를 건드린다고 해서 해결되는가 하는 점과, 노무현 정부에서 부동산을 잡겠다고 정책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전통적으로 전철연 등의 빈곤운동을 해오던 단위들이 제기해온 주거권 개념과도 차이가 난다는 것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보면 빈곤이 고착화되는 원인이 무엇인지와도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NGO의 경우 자산소득 격차 해소를 부동산문제를 통해 제기하려는 방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나 금융세계화의 문제, 금융자산이 팽창되는 문제를 봐야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한국에서는 땅 부자가 진짜 부자라는 오래된 관념 때문에 부자들을 공격한다든가 가난한 사람들 위로해주는 차원에서 부동산 문제가 효과적인 기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대책으로 그렇게 활용되는 측면이 큰 것 같습니다.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산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가, 그리고 운동진영이 주장을 해야 되는 문제인가라는 의문이 많이 듭니다. 주도권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제시할 때는 말씀하신 것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부동산을 말했을 때는 토지공개념이나 이렇게 부자가 많다고 활용되는 측면이 많은 것 같거든요. 배기남 : 자산이라는 개념에는 실사용이 아니고 재테크라는 개념이 포함되는데 주택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년 통계를 보면 3주택 이상 소유자가 부동산 담보대출 비율이 제일 높습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우리가 진보적인 요구를 할 때 1가구 1주택을 실현하자는 기치 속에 2주택 이상 소유자에게 담보대출을 회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빚을 1억 쯤 져본 사람은 정말 급한 상황을 많이 겪었을 텐데 담보가치가 조금만 하락해도 은행은 바로 회수하려고 하거든요. 이렇게 해서 주택가격의 하락을 유도하는 것이지요. 건물은 마모되는 것이기 때문에 건물과 토지를 분리해서 생각해보면 핵심 문제는 토지에 대한 소유관계입니다. 실제로 소유관계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벌여나갈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정말 대중의 절실한 요구가 무엇인지, 체제 변혁적 요소가 있는지, 조직화하기에 유용한지 고려해봐야 하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주택문제가 교육이나 의료보다 훨씬 더 대중적 설득력을 가진다고 봅니다. 노동연계복지의 강화, 사회적 일자리 사업,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표현되는 정부 노동정책의 문제는 무엇인가? 유의선: 사회적 일자리 사업 등은 필수적인 사회 서비스를 수익형 지향으로 규정하는 한편 전체 임금을 하향 평준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진숙 : 사회적 일자리는 결국 비정규직보다 낮은 산업예비군을 관리하는 정책으로 기능할 것이다 사회자 : EITC 도입, 자활이나 사회적 일자리 확대로 표현되는 노동연계복지 강화라는 양상에 대해 어떤 측면을 핵심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현재 빈곤층의 일자리, 노동에 관한 요구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자활이나 사회적 일자리 관련해서 간단하게 언급이 되었는데 자활 노조도 있고 자활 후견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의 여러 고민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가 산업재편의 과정에서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의 일환으로 긍정성이 있는 것인지 하는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유의선 국장님이 그 부분의 쟁점을 이야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유의선 : 이전에는 자활사업이 사회적 일자리의 일부였다면 이제는 이미 자활사업 참여자가 12만이고 사회적 일자리까지 더하면 18만 명 수준인 데다가 점점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에요. 아까 언급했지만 양적 확대에 대한 목표는 있는데 일자리의 질적 향상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사회적 일자리 혹은 사회적 기업이라고 이야기되면서 정부가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2~3년 안에 시장형으로 나아가게끔 한다는 점입니다. 최저임금으로 고정된 일자리들의 내용이 주로 간병이나 집수리, 활동보조서비스 등 사회적 서비스의 확대가 요구되면서 노동시장 내에서 필요로 하는 일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공의 일자리인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수익형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아 전체 노동시장의 임금을 하향화시키고 있는 측면이 지적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비정규직 보호 법안을 보면 정부가 지원하는 일자리는 무기한 기간제로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활이나 사회적일자리로 늘어난 일자리들은 무기한 기간제가 되는 것이죠. 복지부가 이미 조건부 수급자에 대해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법으로 명시했는데 법은 아직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노동부에서 지침을 그렇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산재보험도 적용되지 않거나 일부 지자체별로만 적용되고 고용보험도 적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활노조에서는 자활사업 참여자나 사회적 일자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노동조합 결성, 노동자성 인정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고 여기에서부터 일자리 안정성 확보를 해야 한다는 고민이 한축으로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활이나 사회적 일자리가 정부가 직접 고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모두 민간 위탁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민간 위탁된 단체들 간의 협의체나 연합체가 결성되어 있고, 안정적으로 일자리를 위탁받기 위한 민간부문에서 경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활동보조서비스가 늘어나고 장애인 자립생활센터들이 여기저기서 만들어지고 있는데 민간단위에서 아웅다웅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죠. 현상적으로 드는 고민은 저임금의 확대, 이것이 시장에서 갖는 의미 측면에서, 또 운동적 기능의 측면에서 지금은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점을 발견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사회적일자리 없애고 자활사업 하지 말자고 하기는 힘들어요. 이것이 나쁜 일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당장 중단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면 무엇을 중심으로 어떤 제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남습니다. 사회자 : 세계화 국면에서 노동구조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부에서는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말을 해왔었는데 사실은 자본 축적의 방식이 고용 파괴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실제로 정부가 주장하듯이 지금의 사회가 절대적 고용감소에 직면했는가, 정말 일자리가 없는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히려 실업률은 줄고 있다는 거죠. 워낙에 필요한 서비스산업을 사회적 일자리라는 형태로 탈바꿈시켜서 임금을 낮추는가 하면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 밑으로 또 다른 층위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대응 방식을 고민할 때 노동구조의 변화에 걸맞는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이라고 표현되는 것에 대해서 기존의 비정규직 철폐투쟁보다 더욱더 심화된 고민이 한축으로 있어야 하겠고, 일하는 빈곤층의 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의 일자리정책이 양극화해소 방안과 맞물려 이야기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의견을 더 들어봤으면 합니다. 유의선 : 지금 시급하고 핵심적인 문제는 일자리창출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일자리 나누기의 구체적 의미를 IMF 직후의 일자리 나누기와 비교해서 더 설명해야 합니다. 안정적인 일자리라고 말하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고 말하든 물러설 수 없는 요구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정적이고 튼튼한 일자리의 실제 형태는 무엇이냐, 요구가 무엇인지를 구체화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배기남 : 그동안 단순하고 즉자적으로 요구했던 것은 비정규직 철폐였습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를 봐도 노동시간을 연장해서라도 잔업특근을 더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산별노조관련 금속의 정책담당자에게 제조 금속 노동자들의 전국적 단결을 위한 공동투쟁과제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8시간의 임금기준을 정상화하는 것으로 접근하고 연장근로만 줄이기만 해도 현대자동차 조합원이나 계열사 하청노동자, 다른 업종의 노동자들과도 충분히 연대할 수 있다고 말하더랍니다. 현재 한국의 노동구조가 내부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판을 짜면서 임금격차를 둬 분절화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일자리나누기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해소라는 측면에서 일자리 창출문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5일제를 못 박고 하루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갔어야 하는데 성장하는 큰 대기업에서는 노동시간을 더 연장하는 방식으로 왜곡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진숙 : 경제위기 이후, 실업이 심각해지고 난 후 몇 십 만개 일자리 창출하겠다는 정부 선언을 빼면 일자리 나누기 명목으로 추진했던 것이 노동유연화와 주5일제였습니다. 주5일제가 실시되고 노동유연화는 말할 것도 없이 확대되었는데 사실 고용이 얼마나 증가했는지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자료가 없습니다. 사회적 일자리 문제는 사회진보연대 빈곤팀 논의에서도 뜨거운 감자입니다. 정부의 양극화 대책 방향성이 명확히 드러났는데 사회적 일자리는 결국 비정규직보다 낮은 산업예비군을 관리하는 정책으로 기능한다는 면에서 원칙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는 다른 쟁점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IMF 이후 사회적 일자리를 만든 것이 사실은 운동진영인데요, 자활센터 등이 그 예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사회적 일자리 참여자에게는 사용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사회적 일자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하기에 앞서 그 동안 5~6년을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겁니다. 또 하나는 민주노동당에서 말한 것과 맞물리는데 현재의 빈곤 문제가 소득자체의 저하 문제뿐만 아니라 생계비용이 많이 드는 문제도 있기 때문에 사회공공성을 보장하는 것이 생계비 부담이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은 이론적 차원에서는 이해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료나 교육의 사회공공성을 강화하자는 이야기가 현재적으로는 사회적 일자리를 확대하는 현재 정부정책과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회적 일자리 대부분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고, 사업의 명분도 그러합니다. 그 밖에도 성별분업을 고착화하는 문제도 있는 겁니다. 가정에서 하는 것을 사회 나가서 또 하는 거지요. 여러 쟁점을 함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의선 : 정부가 사회 양극화 해결의 핵심으로 일자리 창출과 사회적 일자리를 말하면서 이것이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방식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NGO들이 이야기하는 민간에서 바라는 안정성의 담보 및 적정한 임금이라는 주장과 맞물리고 있는 거죠. 오히려 사회적 공공성을 확대하는 데 있어서는 전체 민중적 통제가 가능한 형태, 그 책임이 분명히 국가적 차원에 있는 형태 속에서 각 영역의 공공성이 보장되었을 때 가능할텐데, 현재 정부정책이 과연 그러한 방식으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그런 측면에서 최저임금이 업종과 무관하게 사회적 일자리의 임금 가이드라인이 되는 것이고 최저생계비가 자활사업의 임금수준을 결정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맞물려가고 있는 구조나 관계들이 더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공공성 강화의 쟁점과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조동진 : 이전의 노동조합 투쟁과 사회공공성 제기가 괴리되는 측면이 있다. 결국 시장을 통제하고 시장화를 막는 핵심 방안이 무엇인가가 고민되어야 한다 이진숙 : 사회공공성 확대라는 과제가 올바르게 제기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쟁점들과 결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유의선 : 담론과 언명의 차이는 실천방식의 차이를 포함한다. 함께 할 수 있는 공동행동과 연대를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배기남 : 민주노총은 대중의 절실한 요구를 담고, 체제변혁의 고리가 될 수 있고, 조직화의 유용성이 있는 측면에서 사회공공성에 접근해야 한다 사회자 : 사회공공성 강화나 공공부문의 확대 등이 이야기될 수 있겠는데, 사회공공성위원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방향성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주시고 쟁점들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배기남 : 보건의료노조에서는 의료보험 보장을 80%까지 확대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방어적으로는 영리법인화 반대를 이야기하고 있고 어디부터 실시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저소득층 무상의료, 취학 전 어린이 예방접종 무료화, 산전산후 진찰 무료, 65세 이상 노인 틀니 급여화 등이 기본적인 주장으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1995년도 민주노총 창립 시, 핵심슬로건이 산별건설, 사회개혁투쟁, 정치세력화였습니다. 당시에도 기업별 노조의 체계를 시급히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기업별 임금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균열이 나타났으며 노동자계층의 위계화가 드러나기 시작했지요. 1997년 대선에서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제기되었는데 당시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었습니다. 이것을 중심으로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자운동을 하자는 것이었죠. 그렇지만 사회개혁투쟁의 요구는 각 연맹의 직업적 연관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2006년 메이데이 때 세상을 바꾸는 총파업을 하자고 했는데 내부에서는 이러한 관심이 확산되지 못하고 무상의료․무상교육 같은 경우 보건의료노조와 전교조만의 오래된 주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지금은 열린우리당의 개혁드라이브 때문에 핵심적으로 제기되었던 각 연맹의 주장이 집권당의 정책에 수렴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포괄한 전체적 진보진영의 요구를 그들이 수렴해가면서 성과가 모호해졌고 초점을 새롭게 설정해야 하는 과제가 있는 거죠. 새로운 단계의 초점은 좀 더 포괄적이고 계급적 성격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사회자 : 현재 사회공공성 쟁취라는 슬로건이 핵심 화두가 되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조동진 :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포함한 사회공공성의 폭넓은 맥락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기간산업의 사유화 저지 투쟁을 해왔었는데, 이는 사실 단지 반대적 의미에서 시장화되어 있는 부분들을 다시 공공영역으로 가져오고 공공성을 높여내자는 것이었지요. 민주노동당에서도 무상의료를 이야기할 때 의료전달체계 내에서 공공기관을 대폭 늘리자는 방향을 함께 얘기하는데 표면적으로는 무상의료만 이야기되어왔습니다. 우리가 아동, 노인,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하는 무상의료를 확대하자고 주장하면, 정부에서는 암과 같은 보다 대중적인 쟁점을 제기하면서 시스템 전체를 포괄적으로 바꾸기보다는 당장 피부에 와 닿는 것을 건드리는 식입니다. 핵심은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할 때도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지요. 시장으로부터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들여오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윤의 논리를 감축시키고 전반적으로 생계비를 낮추는 효과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동자운동이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사회공공성 투쟁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보면 심각한 간극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해왔던 노동자운동의 임금 투쟁을 어떻게 할 것이냐 했을 때, 생활임금의 논리로 사회공공성이 강화되면 생계비 절감효과가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임금 상승의 효과를 갖는다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기업별노조 차원에서 벌여온 임금투쟁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더라도, 사회공공성 강화 투쟁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는 것으로 대안이 마련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평가가 필요합니다. 최저임금이나 최저생계비 문제에 대해서 노동자운동이 적극적으로, 그리고 제대로 투쟁하지 못했던 것까지 포괄되어 이야기되어야 하는데 급작스럽게 문제를 뛰어넘은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이야기가 이 두 쟁점이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하는 논의로까지도 가는데요.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제기는 무엇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결국 시장을 통제하고 시장화를 막기 위한 핵심은 무엇인지가 고민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상교육을 이야기해도 사교육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죠. 각각의 영역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분석해야 합니다. 소유와 운영의 문제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요새 무상이라는 말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본질적인 측면이 간과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자 : 앞서 공공부문의 고용 확대 등이나 공공성 강화에 있어 한계가 지적되기도 합니다. 공공성 강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병행되어야 할 과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의선 : 빈곤의 문제가 경제적 결핍으로 등치될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권리의 측면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빈곤계층, 민중들에게 사회적 권리로서 주거, 교육, 교통 등이 제기되기 위해서는 노동자운동도 최저임금의 문제, 노동유연화 등을 가지고 자기과제를 중심으로 사회공공성 강화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진숙 : 사회 공공성 쟁취 투쟁 과정에서 공공성이 제기되어왔던 맥락이 있는 것입니다.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 논쟁이 본격화된 시점에서 노동자대중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보편적인 과제들을 수행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사회공공성 강화로 수렴되는 데 비판할 지점들이 있습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기존의 노동자운동이 해왔던 긍정적 효과들이 탈각되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노동자운동의 이념적 노선과 결합된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인상과 같은 경제적인 투쟁들은 호황기라는 조건에서 어느 정도 가능한 투쟁들이었는데 그것이 어려운 조건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현실적인 측면에서만 보아도 노동자운동이 쇠락했다는 것은 경제적이고 방어적 투쟁을 할 수 있는 역량마저 취약한 상황을 말할 텐데, ‘무상의료, 무상교육’으로 표현되는 사회공공성에 대한 일반적 요구들은 이전의 투쟁에 비해 더 많은 역량이 필요한 투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노총의 무상의료․무상교육 등 사회공공성을 요구하는 투쟁은 그 투쟁의 본래적 의미를 매우 편의적으로 제기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존의 노동자운동의 기본적이고 긍정적인 역할들을 후퇴시키는 방향이 아닌가 합니다. 사회공공성 확대라는 과제가 올바르게 제기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쟁점들과 결합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를 통해서 구체적인 고민이 확장될 수 있는 공간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현재 운동사회 내에 권리의 담론으로서 사회공공성이나 사회권 등의 유사하면서 다소 차이가 있는 다양한 논의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담론들의 기본 취지, 즉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을 보다 보편적인 형태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내용은 공동체 구성원인 시민으로서의 권리일 테고, 이것이 기본 바탕에 깔려 있어야 다음 논의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 같이 보편적인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제기하는 것은 정부에서 주도하는 사회적 배제나 양극화 담론에 맞서는 것이기도 한데, 정부는 복지수급의 자격을 규정하는 형태로 시민권과 배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담론을 넘어서 시민으로서의 보편적 권리를 제기해야 하고 그것이 어떻게 구성 가능한 지를 더욱 활발히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조동진 : 사회공공성 투쟁이 기본권 쟁취 투쟁과 함께 가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의료나 교육의 무상화에 집중되기보다는 어떤 것이 우리가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인가를 밝히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영역별로 제기되어왔는데 보편적으로 가기 위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교통공공성을 이야기 할 때 그 내용이 구체화되면서 장애인 이동권 투쟁까지 포함하면서 같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즉, 공공성은 소유와 운영의 공적 통제를 일컫는 것이므로 그 내용이 풍부화 되기 위해서는 일단 각 부문에서 나오고 있는 요구들을 포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노동조합에서는 사회공공성이 사회적 임금이라는 효과를 낳고 결과적으로 생계비 규모를 낮출 것이라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실제로 그런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노동을 바꾸는 투쟁에서 세상을 바꾸는 투쟁으로 확장되기 보다는, 중간 내용 없이 갑자기 뛰어넘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하기 전에 그 과정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 지가 불분명합니다. 노동조합이 그동안 해왔던 노동을 바꾸는 투쟁과 지금 하고자 하는 사회공공성 투쟁과의 결합에 대한 논의는 부족한 상황입니다. 유의선 : 이미 다양한 운동과 조직에서 사회공공성에 대한 서로 다른 담론과 언명을 하고 있습니다. 담론이나 언명 자체를 분명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각각의 차이는 실천양태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함께 할 수 있는 공동행동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빈곤사회연대 내에서는 사회적 일자리나 최저임금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노동부문의 쟁점’라는 인식이 강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빈곤운동진영은 소위 ‘노동부문의 쟁점’과 중첩되지 않는 사안인 기초생활보장제도, 최저생계비, 주거권, 금융피해자 파산문제 등을 고유한 자신의 과제로 삼게 되는 것이죠. 이는 사회운동 내에서 비주류화되었던 부문들이 주류 노동자운동에 대해 괴리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위 부문운동에서 노동자운동에 과도하게 거리를 두거나 사회운동이 노동자운동이 선차적 과제라고 사고하게 되는 양 측면이 존재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기남 : 민주노총 초기에 주장했던 사회개혁이라는 표현이 자본주의 틀 내에서 일정한 개혁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하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적 입장을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사회주의를 그냥 주장하자니 좀 어색하고 그 결과 시장을 최소화한다는 의미에서 공공성이라는 의제가 나온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노동자는 생활인이고, 노동자 개개인은 자신의 요구를 실현하고자 노동조합을 이루고 있죠.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최저임금 투쟁은 활동가 수준의 투쟁이 되고 맙니다. 노조운동의 대중적 차원에서 연대하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민주노총이 대중의 절실한 요구이자, 체제변혁의 고리가 될 수 있고, 조직화하기에 유용하다는 측면에서 사회공공성에 접근해보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들여야 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무상이라는 말이 의료에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데 교육은 꼭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죠. 학벌의 문제, 사교육 시장의 문제 등 구조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지 않고 교육비용의 문제로만 접근하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절실한 문제를 찾는 것이 필요한데, 그 중 하나가 주거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임금의 30~40%를 주택을 구입하는 데 씁니다. 주택 및 부동산에 대한 전면적인 제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올해는 기업별노조의 체제를 극복하는 것과 관련, 해석과 의미부여가 다양하지만 이미 공론화한 무상의료․ 무상교육 투쟁이라도 제대로 해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이것이 민주노총이 살아나갈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6년 빈곤과 불안정노동에 대응하는 연대투쟁의 활성화 방안과 의제는 무엇인가? 유의선 : 기존의 기초생활보장법, 최저임금제도 등의 쟁점을 더욱 확장해서 새로운 빈곤운동의 주체 형성을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배기남 : 주택문제는 한국사회에서 자본축적의 고리를 끊는 중요한 변혁적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진숙 : 양극화 혹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전 국민적 위기로 규정하면서 정책을 제기하는 정부 논리와 명확히 단절해야 하고 비판해야 한다 조동진 : 신개발주의와 지역균형발전론에 대한 정책적 비판도 중요하지만 당사자들의 투쟁과 어떻게 연대하여 갈 것인지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사회자 : 다방면에 걸쳐 주체를 형성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과제나 요구에 대한 모색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정부의 양극화 해소방안, 노동연계복지, 사회적 일자리로 대표되는 노동시장 정책의 문제점도 지적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006년의 핵심 요구와 투쟁과제를 논의해보았으면 합니다. 유의선 : 노동연계복지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자리 창출이 아닌 노동빈곤의 문제를 전면화해야 합니다. 올해 고민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기초생활보장제도, 최저임금제도 등의 쟁점을 더욱 확장해서 새로운 빈곤운동의 주체 형성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주로 제기되는 것은 주거권입니다. 빈곤사회연대에서는 극빈층의 주거권 보장을 위한 활동을 많이 해왔었는데, 올해는 쪽방 철거에 대한 대응, 다가구 매입임대주택 문제 등과 부동산 정책에 대한 제기까지 주거권 운동을 더욱 사회적이고 대중적으로 벌여보고자 합니다. 또한 금융피해자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자 합니다. 신용불량의 문제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화시켜내야 할 쟁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부터 지속적으로 고민해왔고 올해는 구체적인 활동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올해 역시 연대를 확장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인데, 다른 부문에 있어서도 함께 투쟁 가능한 내용을 만들기 위해 워크샵을 진행 중입니다. 그런데 노동정책에 있어서 함께 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는 상황입니다. 사회공공성 역시 마찬가지죠. 무상의료․ 무상교육의 과제를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이 전유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면서 우리만의 또다른 과제를 모색하게 되고 연대의 계기가 형성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양한 방식의 폭넓은 연대가 필요합니다. 또한 시민권의 문제에 있어서 고민이 됩니다. ‘시민=세금을 내는 자’라는 인식 속에서 시민권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죠.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서 시민권에 대한 개념과 이를 통한 논의의 확장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배기남 : 민주노총은 여러 부문계층의 다양한 요구를 운동으로 기획할 때, 대중적 가능성과 축적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조직화의 가능성이 있는 방향에 대해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지난 수년간 반복되어온 수세적 국면을 지나오면서 현재 남아있는 활동가들이 조직을 추스르기조차 벅찬 상황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안 찾기 자체를 힘겨워하는 것 같습니다. 적극적인 정책계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주택문제를 중요하게 사고하고 있습니다. 주택문제는 단순히 집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자본축적의 고리를 끊는 중요한 변혁적 고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2가구 주택 이상 소유자에 대한 주택담보 대출을 회수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제까지 금융권의 대출 관행이 정말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혀 혜택이 돌아갈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왔는데 이것의 변화를 추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동진 : 당장은 지방선거를 고리로 활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일단 무상의료부터 적극적인 운동을 시작하였고, 지역별로 보육관련 운동도 진행 중입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사회공공성을 주요 화두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입니다. 역시 고민되는 지점은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민주노동당만의 정책의제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당사자들과의 연대운동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한계로 인해 더욱 큰 운동을 만들고 있지 못합니다. 앞에서 시민권의 이야기가 많았는데, 저 역시 시민권 혹은 기본권 차원에서 사회공공성 투쟁이 함께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사회공공성 투쟁은 지방선거를 통해 더욱 잘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정부 논리에 말려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가 지역 차원에서는 신개발주의라는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이고 선거 때는 특히 개발공약이 판을 치는데, 이에 맞서 도시계획을 어떻게 민중적으로 통제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주거권의 문제도 시장선거 등을 통해 주되게 제기할 계획입니다. ‘1가구 1주택’이라는 정책은 주택의 소유불평등 문제를 주로 제기되는 것인데,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소유자와 세입자의 점유권의 문제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자체 수준에서 ‘1가구 1주택’을 강제할 수는 없지만, 담론 수준에서 이야기되는 것과 별개로 강제철거 금지를 뛰어넘어 점유권을 권리로 확보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개발권의 공유화 등으로 담론화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정책적인 것을 뛰어넘어 선거 전후로 구체적으로 당사자들의 투쟁과 어떻게 연대하여 갈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잘못하면 4년마다 선거주기에 맞춘 정책이슈로만 한정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빈곤문제까지 포함하여 같이 투쟁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역시 고민 중입니다. 사회공공성 확보가 사회적 임금의 형태로 생계비의 규모를 낮추는 성과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임금문제에서 해결되어야 할 고유한 문제들은 여전히 남는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최저임금과 최저생계비 문제는 함께 또 별개의 과제로 논의되고 제기되어야 할 듯합니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 관련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보육을 말하다 보면 성인 중심으로 되어 애 키우기 좋은 도시라는 관념이 드러나게 되고 이것이 출산장려정책과 비슷해지는 문제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민주노동당에서 역시 보육문제의 어떻게 제기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정부의 정책과 다른 차별성을 갖고자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동의 권리에 초점을 맞춰보려고 하는데 보육의 공공인프라를 확보해도 여성의 가정에서의 혹은 직장에서의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 봅니다. 저출산 문제가 워낙 사회적 쟁점이 되다보니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못한 측면도 있습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여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데 이에 관한 논의가 더욱 많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진숙 : 그동안 사회 양극화 담론은 말만 무성하다가 최근 들어 저출산․ 고령화 대책기구 발족 등 정책실현과정에 들어선 상황입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부각되고 있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운동진영에서도 대응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운동사회 내 토론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수련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운동진영이 너무 무력하게 손 놓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회원들의 제기가 많았습니다. 타당한 제기라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떠한 내용과 방식으로 대응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현 정부는 양극화 혹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전 국민적 위기로 규정하면서 협박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것과는 명확히 단절해야 하고 비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독자적인 방안을 구성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NGO를 비롯한 상당수의 운동단체들이 저출산- 고령화 대책기구에 참여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가 생깁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민사회운동을 제도적으로 흡수해 나가면서 위기를 관리하는 노무현 정부의 경향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 이제까지 해오던 사회운동의 자율성과 방향성이 상당히 훼손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에 대한 운동사회 내 인식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얼마 후 있을 지방선거가 이러한 문제들을 운동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 상당히 위험한 시기인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노동당과 같은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단위에서는 각 지역에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이며, 양극화나 저출산․ 고령화에 대한 독자적 입장을 제출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모두들 알다시피 출산율이라는 것은 자본의 필요노동력의 수준이나 형태에 따라 언제나 ‘상대적’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현재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은 저출산․ 고령화 대책이라는 것은 결국 성장잠재력을 말하면서 장기적으로 산업예비군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라 할 것입니다. 노동시장 관리전략, 즉 저임금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 있다는 것이죠. 또한 저출산 문제가 왜곡된 형태로 사회화되면서 여성들이 취약한 위치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갈수록 출산을 강요당하고 저임금 노동시장에 노출되게 될 것입니다. 여성에게 여러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면서 가족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공세도 이미 강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운동진영의 대응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 위기, 합의를 명목으로 이와 같은 저출산 대책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오히려 시민으로서 여성의 권리는 무엇인가를 논의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적인 대응에 있어 대안적인 정책을 계발해가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현재 구도에서 정책 중심의 대응은 때로는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맹점이 있기도 하고 정부정책으로 수렴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나 싶습니다. 각종의 위기 담론을 등에 업고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이 빈곤이나 비정규직 문제, 직장과 가사라는 여성들의 이중부담 해소 등에 있어 당장은 요긴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대중의 생존이나 사회운동의 진로를 돌이킬 수 없는 더 큰 위험으로 이끌 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1)[정리자 주]모기지론(Mortgage Loan)은 부동산을 담보로 주택저당증권(MBS:Mortgage Backed Securities)을 발행하여 장기주택자금을 대출해 주는 제도다. 역(逆) 모기지론(reverse mortgage loan)은, 고령층 인구가 많은 미국·캐나다 같은 국가에서 도입된 바 있는 노인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 주택을 담보로 은행에서 매달 일정액의 생활비를 빌려 쓰는 제도다. 2월 16일 재경부가 발표한 ‘역모기지 활성화 방안’에 따르면, 6억 원(공시가격 기준) 이하 주택을 한 채 가진 노인 부부가 역모기지 대출을 평생 동안 매월 연금 식으로 받으려면 부부 모두 만 65세 이상이어야 한다. 현재 대출자격이 까다롭고 지방과 주택 값이 낮은 지역의 노인들이 세금감면혜택에서 제외된다는 문제점도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노후보장을 개인이 소유한 집을 담보로 받도록 한다는 점이다. 정부의 양극화 해소 방안이 중산층의 보호라는 측면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과, 이러한 담보대출 등 금융자본의 유동성을 확장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서 계획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 2006-03-02

    사회양극화/통합 비판 - 담론과 동맹전략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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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曰, 남은 임기엔 양극화 해소와 한미FTA에 주력하겠다?! 집권 3년차 들어 노무현 정권은 이른바 사회양극화 및 사회통합을 핵심 화두로 내세울 태세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월 18일 신년연설에서 경제 전반이 회복됐음에도 불구하고 양극화 때문에 이 같은 치적이 가려지고 있다는 현실 진단을 내놓았다. 또 2월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등반 도중에는 남은 임기 중 매진해야 할 2대 과제로 한미FTA 체결과 양극화 해소를 들었다. 열린우리당 경선에서도 김근태와 정동영 모두 입을 모아 양극화 해소를 외쳤다. 총리가 직접 챙기겠다고 한 국민통합 연석회의는 총리를 비롯한 각계 인사 36명으로 구성되어 지난 1월 26일 출범했다. 노무현의 신년연설에 대해 박근혜는 감세로 응수했고, 여기에 노무현이 다시 감세는 무책임한 주장이라는 반론을 펼치면서 증세-감세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 논쟁에 언론과 NGO 등이 가세하면서, 이른바 개혁-보수 구도가 다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이는 정확히 집권세력이 의도한 바다.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걸려 있는 양극화 특별 기획에서 집권세력은 양극화를 화두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 등 이른바 ‘기득권 세력’에게 공세를 가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양상은 영국에서 블레어 신자유주의 정권이 등장할 당시와 유사하다. 당시 블레어는 선거 당시 사회적 배제 담론을 제시하면서 그 책임을 대처 신보수주의 정권에게 돌리는 한편, 대안으로 사회통합 담론을 내세워 집권에 성공했다. 노무현 정권이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꺼낸 것 역시 눈앞에 다가온 지자체 선거 및 이후 대선 전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이 기존의 제도정치세력을 넘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2005년 9월 22일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가 양대노총과 참여연대, 전국민중연대 등 전국 133개 단체를 중심으로 출범했고, 한국노총과 참여연대 등 핵심 단체들은 위에서 말한 국민통합 연석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국민중연대는 내부의 이견 때문에 연석회의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올해 투쟁 기조 논의 과정에서 사회양극화 해소투쟁을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제안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등 민중운동 내 거대 조직들 역시 사회양극화/통합이라는 진단 및 기획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를 내놓고 있지 않다. 우리는 지난 10월 『사회운동』 58호에서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비판한 바 있다. 이 글은 당시 문제의식의 연장이면서, 앞으로 진행될 본격적 비판의 시론이다. 우리는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에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담론은 현 정세에서 객관적으로 반동적인 효과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담론이라는 이유로 이를 실용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위험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이 담론을 다뤄야 한다. 다음으로 이 담론은 매우 우려스러운 동맹전략을 내포한다. 사회양극화/통합을 핵심 쟁점으로 하여 개혁-보수 구도를 형성하고, 보수세력에 맞서 개혁세력과 함께 가야 한다는 저 지긋지긋한 ‘비판적 지지론’의 재판이 그것이다. 하지만 현 정세에서 가장 필요한 과제 중 하나인 사회운동의 독자성 확보는 심각히 지체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양극화/통합 담론, 무엇이 문제인가 1) 사회양극화 담론이 노리는 바 혹자는 최근 사회양극화 담론이 전면화되는 것을 보고, 지배계급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인정한 것이니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이 담론을 구사하는 방식을 보면 사태는 오히려 정반대다. 현 정부의 인식은 2월 21일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화면에 걸려 있는 양극화 특별 기획 두 번째 글의 소제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압축성장과 양극화는 불균형 성장이 낳은 이란성 쌍둥이’가 그것이다. 곧 현재 벌어지고 있는 양극화는 전적으로 한나라당 식 ‘개발독재’의 책임이고, IMF 사태 이후 자신들은 ‘국가경제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2배 이상 성장’하게 만들면서도 ‘압축성장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민주화 조치를 병행’하는 경제 발전의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특별기획 전면을 장식하는 다음과 같은 노무현의 발언은 이들의 인식을 아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수출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잘 나가는 상장 기업은 역대 최고의 수익을 기록하고 있는데도 서민들은 계속 어려운 양극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민생이 어려운 근본 원인입니다.”(2005. 10. 31. 출입기자 오찬 간담회) 즉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이 노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사회위기를 양분한 후 전자를 건들지 않거나 심지어 가속화하면서 후자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관념을 유포하는 것이다. 현재 지배계급들이 경제회복의 근거로 드는 것은 “경제성장(1인당 국민소득), 수출액, 주가지수(증시규모) 등 주요 경제지표들이 IMF사태를 기준으로 대부분 2배 이상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모두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통합되면서 IMF 이후 급상승한 환율이 조정되고 초민족적 금융자본이 유입된 결과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이야말로 사회위기의 진정한 원인이다. 왜냐하면 금융세계화는 성장과 고용을 근본적으로 분리하고, 고용을 파괴하거나 악화하는 성장을 낳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설비투자율 부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금융 원리가 기업의 핵심 운영원리로 관철되는 상황에서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에 배당할 단기적 이익 확보가 경영의 최우선 과제가 되기 때문에, 위험이 동반되는 중장기적 투자를 할 수 없다. 한국의 경영자들은 초민족적 금융자본에 고율배당을 하고, 경영권 확보 및 주가관리를 위해 자사주를 구입하며, 나머지 돈은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다. 비상장기업의 경우 초민족적 자본은 유상감자를 통해 자금을 빼내가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산소득이 급격히 증가하는 한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핵심인 자본자유화에 힘입어 국부유출과 자본도피가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와 성장이 이루어질리 만무하다.1) 이렇듯 지배계급이 추진하는 금융세계화로의 통합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자체가 다른 한편으로 지배계급 스스로 대안이랍시고 내놓는 고용확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양극화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설비투자율을 높이는 것 역시 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IMF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자본주의는 과잉축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3저호황을 거치면서 재벌이 추진한 시대착오적 과잉축적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이었다. (고정)자본소비적이고 노동절약적인 자본주의의 편향적 기술진보가 낳은 이윤율 하락을 이윤량의 증대를 통해 돌파해 보려 한 이 시도는 처참히 실패하여 IMF 사태를 불러왔다. 이렇듯 한국자본주의는 과잉축적 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라는 두 가지 극단 사이에 갇혀 있다. 자본주의 체계를 유지하는 한 이러한 상황에서 탈출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체계를 넘어서는 문제는 아득한 미래의 몽상이 아니라, 현재의 아주 시급하고 현실적인 문제로 떠오른다. 사태가 이렇다고 할 때, 현재 지배계급이 내세우는 사회양극화 담론의 일차적 문제는 한국자본주의가 처한 구조적 위기 및 변혁이라는 문제를 은폐한다는 점,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고용확대라는 양립 불가능한 처방을 결합함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같은 모순은 단순한 논리적 오류가 아니므로 지적을 통해 교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양극화는 처음부터 적합한 사고의 교란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담론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은 현재 한국자본주의가 겪는 모순과 위기의 양상을 체계적으로 뒤섞는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자산소득과 근로소득 간 격차 확대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 확대,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 확대를 마치 모두 동일한 문제인 것처럼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가 자본-노동 간 격차고 두 번째가 자본 내 격차며 세 번째가 노동 내 격차라는 점에서 이 모두는 전혀 다른 장에 속할뿐더러 각각에 대처하는 방법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다. 예컨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 이들이 내리는 처방은 비정규직의 확대다. 더욱 큰 문제는 지배계급이 이런 식의 유비를 통해 정규직 노동자가 마치 자산계급과 같은 안정적 지위에 있는 것처럼 허구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전반적인 노동의 불안정화 및 빈곤화를 겪고 있는 노동대중의 현실을 은폐하고 노동대중 간의 갈등과 경쟁을 체계적으로 부추김으로써 노동 전반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 담론을 통해 이들이 목표로 삼는 것은 노동대중 전반에 가해지는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 자체를 역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더욱 확대하면서 동시에 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악화시켜 양자의 격차를 줄이는 식의 하향평준화다. 이렇게 근로소득 내 재분배 문제가 초점이 되면서 근로소득과 자산소득의 격차 확대 곧 노동의 불안정화 및 금융화는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진다. 또한 교육이나 의료, 지역 등의 양극화를 언급하는 것은 얼핏 보면 소득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 더 넓은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래 목적은 사실상 현재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금융화와 빈곤화 경향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최근 정동영 등이 전면에 내세우는 논리는 교육양극화로 인한 교육기회박탈이 소득양극화를 낳으므로 교육 양극화 해소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럴 듯하지만, 이는 실상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소득양극화의 원인은 교육양극화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교육양극화가 해소되어 모든 사람에게 교육기회가 제공되면 소득양극화가 해소되어야 하는데, 곧 계급 간 격차, 노동시장 내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진단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소득격차를 초래하는 계급 간, 노동시장 내 불평등이라는 문제가 본격적인 의제로 오르지 않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더구나 교육과 의료와 같은 필수서비스를 가장 앞장서서 상품화하는, 따라서 소득에 따른 불평등을 더욱 확대하는 WTO 체제를 받아들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런 주장은 기만일 따름이다. 한편 자산소득 내 양극화라는 문제에 이르면 사회양극화 담론이 전반적인 빈곤화 경향을 역전시키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주 분명해진다. 이 해결책은 일정한 자산을 가진 집단 곧 ‘중산층’을 보호하여 이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자는 것인데, 금융세계화 하에서 지배계급이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소득을 건드릴 의지도 능력도 없기 때문에, 결국엔 노동자들의 근로소득을 이전해 중산층의 자산소득을 보충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조치들은 금융화와 빈곤화 경향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2) 사회통합 담론의 반동성 노무현은 아펙 회의 직후 “200년 전에도 공장을 부순다고 산업혁명이 진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세계화를 ‘거역할 수 없는’ ‘시대’와 ‘역사’라고 규정했다. 한편 노무현이 최근 극찬했다는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 - 일자리 창출을 위한 패러다임 변화’라는 보고서는 사회양극화의 원인 중 하나로 ‘성장률 하락, 세계화, 지식정보화 및 중국의 부상 등 대내외 환경변화’ 등의 충격에 대해 ‘각 경제주체들이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사회양극화의 원인을 ‘거역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한 ‘부적응’ 에 따른 ‘배제’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통합 또는 사회적 합의나 참여는 이렇듯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대중을 동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사회통합 담론은 필연적으로 탈(脫)정치적이다. 이 담론의 기초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금융)세계화, 신자유주의 따위의 현실적 모순을 ‘자연화’하여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일종의 섭리로 격상시키는 시도가 깔려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은 고통과 관련하여 지배계급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천재지변’에 대해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정치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통치’나 ‘행정’ 또는 ‘관리’로 전락한다. 오늘날 좌우를 막론하고 유행하는 ‘민생정치’는 이 같은 정치의 타락을 의미한다. 또한 사회통합 담론은 탈(脫)주체적이다. 이 담론은 대량실업과 궁핍화 등의 객관적 조건이 노동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척 하면서, 대중들을 체계적으로 ‘피해자화’(victimize)하고 ‘부적응’의 현상을 크게 부각한다. 이들은 말한다. 문제는 대중에게 단순히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대량실업의 근본 원인은 세계화의 무한경쟁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 또한 이른바 ‘지식기반경제’의 일자리가 요구하는 고도의 지식과 기술 따위를 대중이 갖추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중에게 무조건적인 복지 혜택을 주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저 유명한 ‘복지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2) 이런 식의 논리에 따라 (대량)실업의 책임은 대중에게 체계적으로 전가되고, 현실적 모순에 대한 대중의 갈등과 불화는 적응/부적응, 나아가 정상/비정상 식의 병리(학)적 언어로 번역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응력 정도라는 기준에 따라 노동대중들은 위계적으로 분할되는데, 이 분할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또는 차라리 이 경계선 자체인 존재들이 이른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들 이편에는 이른바 ‘정규직’ 노동자들이 있고, 저편에는 자본주의 위기로 인한 대량실업 때문에 산업예비군으로조차 통합할 수 없는 ‘잉여인구’가 있다. 대중을 이렇게 자의적이지만 전략적으로 분할한 후, 지배계급은 각각에 대해 차별적 조치를 취한다. 우선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거대하게 (재)조직된 산업예비군의 압박을 통해 노동유연화가 한층 강화되고 이에 부합하는 혹독한 노동규율․강도가 강제된다. 다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근로연계복지(workfare)에 입각하여 노동유연화에 대한 복종을 골자로 하는 직업교육을 받으면서 ‘사회적 일자리’ 형태의 산업예비군과 노동빈민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이들은 사회통합 담론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있어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존재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들을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머물게 한 후 이들의 불만을 조작하여 기존 노동자들의 성과를 공격한다. 또한 이들에게 ‘사회적 일자리’ 따위의 일정한 시혜를 베풂으로써, 자신들이 IMF 경제위기와 사회양극화의 주범으로 표상하려는 보수주의와 구별되는 개혁적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약속한 의미에서의 ‘통합’은커녕 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노동대중 전반의 불안정화가 초래된다. 또한 자본주의 위기로 인한 대량실업이 해결되지 않는 한에서 산업예비군으로조차 통합할 수 없는 ‘잉여인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 기존 체계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높이고, 다른 한편으로 경찰적인 수단을 통해 이 같은 도전을 봉합하려는 억압적 시도를 강화한다. 이 때 경찰논리의 특권적 희생양이 되는 것이 바로 ‘잉여인구’다. 세계화 속에서 국가의 무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뚜렷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국가는 극히 무력한 이들 잉여인구에게 혹독한 경찰 조치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권위가 건재하다는 허구를 상연하고 이를 통해 자신에 대한 불안과 불신을 권위적으로 잠재우려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반혁명의 권리 축소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을 일정하게 해소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잉여인구의 권리가 열등하고 취약하다는 것을 제도적 차별을 통해 전시함으로써, 기존 사회에 통합된 이들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는 안도감을 주거나 또는 그 경계 밖으로 넘어갔을 때 생기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려는 것이다. 사회통합 담론은 이러한 국가의 불의와 모순을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기존 체계에 저항하거나 기존 체계의 불가능성을 체현하는 이들 곧 ‘통합되지 않는 이들’을 ‘문화 지체자’나 잠재적 ‘범죄자’ 등으로 낙인찍는다. 따라서 지체자나 범죄자에 대한 ‘교정’이나 ‘진압’ 나아가 ‘추방’ 등의 경찰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반동적 담론으로 전도된다. 고(故) 전용철․홍덕표 농민의 죽음 앞에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통합되지 않고 저항하는 한 또 죽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노무현의 그 끔찍한 발언이야말로 사회통합 담론의 진실이다.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의 동맹전략 비판을 위하여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은 또한, 2004년 탄핵 당시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을 유실시키면서 화려하게 복귀한 개혁-보수 전선을 (재)강화한다는 점, 따라서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재)형성을 더욱 지체시키고 자유주의 세력에 대해 정치적 독자성을 견지하는 대중운동들의 출현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극히 위험하다. 탄핵 직후 50%까지 치솟았던 노무현 정권의 지지율이 취임 3주년 현재 22.9%라는 최악의 수치를 기록하는 한편, 유력한 대권후보로 꼽히는 이명박 서울시장과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동반상승하고 뉴라이트의 출현 등 보수세력의 현대화 흐름이 가시화되고 있다. 또한, 최근 한나라당이 사학법을 쟁점으로 장외투쟁을 벌이는 등 보수세력이 다면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민중운동 내 일부 세력은 현 정세를 ‘신보수대연합’의 형성으로 규정짓고 이에 반하는 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2년 전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도를 그리기 위해, 이번에는 탄핵무효/민주수호 대신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이 핵심 쟁점으로 동원된다. 이렇게 보면 2년 전 탄핵무효/민주수호 구호가 그 의도와 무관하게 그랬던 것처럼, 현 정세에서 사회양극화/통합 담론 역시 객관적으로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따라서 가장 반민중적인 효과를 산출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민중운동 내 절대다수가 신자유주의 반대를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고 있음에도 이처럼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구축이 지속적으로 교란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 같은 현상은, 그러나 참여연대와 같은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NGO나 심지어 신자유주의 세력의 수장인 대통령마저도 제 입으로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 데서 역설적으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여전히 신자유주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이 확립되지 않은 것이다. 특히 문제는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정치와 분리된 ‘경제’적 문제로 바라볼 뿐, 그것이 필연적으로 기존의 정치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과거의 자유주의는 체계적으로 타락하여 예컨대 인민주의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정치,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규명하고 토론해야 할 문제다. 1)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변형 남한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본래 재벌중심의 중화학공업화를 핵심으로 하는 박정희 식 발전주의의 모순에 대한 대응책으로 도입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미국 주도의 금융세계화에 편입되어 초민족적 금융자본을 유치하려는 거시경제적 안정화 정책, 다른 한편으로 과잉축적으로 인한 자본의 재생산 위기를 해결하려는 미시경제적 구조조정 정책을 양축으로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정책적 차별성이 없다는 점이다.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consensus, 합의)의 의미가 그것이다. 당장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를 최초로 도입한 것은 다름 아닌 박정희 정권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충실한 계승자라는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이 계승한 것은 발전주의가 아니라 바로 신자유주의였다. 김영삼 정권은 재벌의 과잉축적을 처리하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수행하진 못했지만, ‘세계화’ 담론을 유포시키면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금융세계화에 편입되고자 했다. 김대중 정권은 IMF 사태를 계기로 금융세계화의 미시적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APEC과 WTO와 FTA를 대하는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듯 노무현 정권 역시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이른바 개혁-보수 세력 간에 아무런 차별성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신자유주의가 개별 국가가 자의로 선택하고 대체할 수 있는 좁은 의미에서의 정책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금융적 재편에 조응하는 국가 자체의 근본적 성격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민족국가의 사명은 더 이상 전통적인 민족적 발전 전략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유치를 위한 조건을 확보하는 것,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민족국가는 ‘바닥을 향한 경쟁’에 대중을 동원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쟁 국가’가 되고, 발전주의는 이를 위한 수사로 전락한다. 근대적 주권 개념 및 주권국가간 체계는 근본적인 위기를 맞는다. 이 과정에서 정치는 사유화된다.3) 여기서 핵심은 탈(脫)국가적․비공식적 조절네트워크의 확대다. 시장의 탈규제화로 인해 국가의 개입 역량이 축소되는 한편, 강력한 ‘사적’ 행위자들 특히 점차 개별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게 된 초민족적 기업들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오늘날 ‘사회적 합의’가 강조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국가는 더 이상 이런 사적 행위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협상 파트너로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 혹자는 이를 정치의 ‘재봉건화’라 부르기도 한다. 즉 점점 제도적 의사결정 과정의 중요성이 쇠퇴하고 비공식적 협상공간들이 선호되는데, 이 같은 사적 협상 구조는 전통적인 민주적 제도와 절차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제 민주주의와 참여는 지극히 불평등한 행위자들이 시민사회 내에서 행하는 협상 절차로, 또는 단순히 지방들의 국제적 경쟁을 위한 참여적 동원으로 축소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정치는 통치가 된다. 이 같은 정치 조절체계는 점점 국제화되어 국제적 수준에서 조직, 제도, 그리고 비공식적인 ‘체제’의 한층 밀집된 네트워크가 창출된다. 이는 정부들을 새로운 협력 형태에 속박하고 특히 약소국들의 선택권을 제한한다. 이 같은 새로운 국제적 권력 구조에서는 자본주의 3극의 더 강한 국가들이 갈등적 협력 형태를 통해서 세계를 지배한다. 이는 세계무역기구(WTO)를 비롯하여 이들 중심의 공통이익을 대표하는 국제조직들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덜 제도적인 조정과 네트워크 형태들도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초민족적 기업들과 NGO(비정부기구)들이 각각 차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모두의 결합 효과로 개별 국가의 국가장치 자체가 변화한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 중 하나는 행정부 안에서 재무부와 중앙은행 등의 비중이 증가하고 자율성이 확대된다는 점이다. 대체로 민주적인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이들 장치는 국제 자본의 이해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국제적 자본의 흐름과 개별 국가의 정책들 사이의 매개자, 심지어는 아예 단순한 전달 벨트로 행동한다. 이는 곧 (금융)시장이라는 세계적 규범이 행정적으로 내면화됐음을 제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와 상관적으로 의회나 정당 같은 전통적 대의장치는 역할이 약화되어 대의제도 전반의 위기가 초래되고 정치 체계의 정당성은 더욱 부족해진다. 대중들은 선거에서 어떤 정당을 선택할 권리는 있으나, 그들이 무엇을 할지 통제할 수 있는 권리는 박탈된다. 이 과정에서 국제적․국내적으로 NGO의 역할이 부상한다. NGO는 기존의 국가 관료들이 소유하지 않은 관리적 지식과 이해 능력에 기반을 두고 비공식적 조절네트워크 안에서 정치적 협상과 의사결정을 위한 의제설정에 깊숙이 관여한다. 이들은 또한 대의제가 약화된 틈을 타 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동원함으로써 발언권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들은 국가나 기존 정치세력․이해집단으로부터 자율적이지 않다. 일정한 지속성을 갖는 전문조직으로서 NGO는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기부 이상의 재정적 자원을 필요로 하며 특히 대규모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와 국가연합, 국제조직, 심지어는 사적 협회나 사적 기업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의존관계를 통해 기부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NGO를 활용할 수 있다. NGO는 특히 국가 행정기관들이 수행할 수 없거나 또는 수행하고 싶지 않은 실천적 프로젝트, 특히 개발 및 구호 작업의 영역에서 참여한다. 반대로 국가 행정기관들은 정치적 정당성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NGO들을 체계적으로 활용한다. 최근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적극적으로 여론화하고 이와 관련된 정책을 실행하는 데에서 미디어와 국내 NGO들이 수행한 역할은 이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최근 노무현이 슬쩍 화두만 꺼낸 증세 문제가 증세-감세 논쟁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 박근혜의 반론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사회쟁점화한 한겨레신문 등의 미디어 및 각종 NGO들의 역할 때문이었다. 또한 지역적 차원에서 조직되고 있는 자활 사업은 지역 NGO들이 주도한다. 그리고 현재 정부는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민간자본유치사업의 형태로 수행하면서 이의 운영을 지역 NGO들에게 이전시켜, 이들이 빈곤층을 직접 관리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렇듯 NGO는 전통적으로 국가가 수행했던 역할을 대행하고 있다. 2) 신자유주의와 인민주의의 출현, 그리고 노무현 정권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근대를 지배하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이와 함께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정책을 집행한 결과 발생하는 대중의 불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둘째, 서로 다른 지배계급들의 정책이 신자유주의로 수렴되는 상황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서로의 차이를 어떻게 드러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을 것인가.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극히 첨예하고 격한 정쟁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지배적인 통치성의 역할을 수행해 온 자유주의를 대체하는 통치성이 등장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른바 ‘인민주의’라는 정치현상을 주목한다.4) 인민주의는 시기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취했지만, 몇 가지 공통점은 언급할 수 있다. 인민주의는 프랑스 혁명 등 근대 민주주의 혁명에 기원을 둔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라는 근대정치의 3대 이념이 위기에 빠질 때 출현한다. 이들은 사회적 갈등에 대한 인식과 토론보다는, 감정과 경험에 기초한 직접적인 분노의 표출을 추구한다. 또한 이들은 유기체주의에 입각하여 갈등 일반을 범죄화하고, 이 같은 유기체적 공동체의 조화를 파괴하는 가시적인 ‘적’을 만들어 원한의 감정을 동원한다. 현 정세에서 지배적인 인민주의 형태는 ‘정치가적 인민주의’다. 오늘날의 새로운 인민주의는 과거의 인민주의와 달리 지배이념으로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한다. 이들은 민족국가의 자율성이 제약되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대중의 원한과 불만을 동원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안적인 발전전략을 추진하는 대신 대중의 곤궁과 불안을 가시적인 ‘적’에 대한 분노로 조직하고 인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정치적 수사를 남발한다. 이들의 정치적 수사에서 인민의 ‘적’이란 연고주의를 활용하는 기존의 정치가와 관료, 보호주의적 조치를 옹호하는 국내자본, 그리고 노동의 유연화에 저항하는 노조 등 특수 이익과 특권을 옹호하는 존재들, 이른바 ‘기득권 세력’이다. 인민주의자들은 이러한 특권 그룹과 투쟁하며 그들의 특수 이익을 배격하고 기존 제도의 부패를 일소하겠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인민주의 지도자는 민주적 제도들을 우회하여 임의적 지배체제를 확립한다. 정치가적 인민주의는 입법부 등 대의제를 특수 이익의 구현체로 공격하는 한편 행정부와 대통령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킨다. 또한 지도자와 대중의 직접적인 인격적 유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미디어, 여론조사, 국민투표 등을 대중동원에 유용한 도구로 활용한다. 이 때 NGO는 관리적 지식에 근거해 행정부의 역할을 대리할 수 있을뿐더러, 미디어를 매개로 한 여론형성에 능하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을 일부 대신한다. 더구나 의회와 정당을 통한 기존의 정치적 정당성 형성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인민주의자들은 기존의 제도 영역에 속하지 않았던 NGO의 ‘재야’ 이미지를 활용하여 정당성을 보충한다. 요컨대 ‘정치가적 인민주의’의 등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정치지형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위기에 대한 체계적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의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동시에 이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기득권 세력 및 기존 국가장치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한다. 집중화된 권력과 기술관료 지배 승인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위한 통치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대중의 고통의 강화라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둘러싼 악무한적 투쟁은 끊이지 않고, 정치에 대한 냉소와 환멸은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대중의 기대는 약화되지 않는다. 이는 ‘탈식민지 발전도상국’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자본유치를 위해서는 기업가적 국가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예외국가’로 존재했던 이들 발전도상국들의 ‘정상국가’로의 이행은 대중의 막연한 기대를 증폭시킨다. 신자유주의와 인민주의가 결합되어 정치를 극히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안정감을 주는 권위적 국가에 대한 기대심리도 강화된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이나 집권 과정, 그리고 이후 정치행태를 보면 위에서 언급한 정치가적 인민주의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대선 당시 여론조사를 통한 대선후보 결정, 이회창을 정점으로 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공격, 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 등이 그렇다. 또한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에 비할 바 없이 적다는 10분 1 발언, 재신임 선언, 탄핵을 불사하거나 심지어 유도하며 선거법 위반 공방을 돌파하려는 정치행동은 대통령 개인에 대한 대중의 지지로 사태를 봉합하고, ‘나는 차악(lesser evil)이고 상대방이 진정 악의 두목이다’라는 전형적인 정치가적 인민주의 도식 활용이 그렇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기득권세력’이라고 주장하면서 노동자 전반에 대한 공세를 가하는 것이 그렇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을 인민주의라는 맥락에서 분석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인민주의는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성을 낳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안정적인 ‘대중적 토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 당시 노무현은 여러 이질적인 집단들을 일시적으로 결집시킴으로써 집권에 성공했지만, 이는 특정한 정치이념에 근거한 다 계급연합이 아니라 계급형성을 봉쇄하는 ‘탈계급연합’일 뿐으로 사상누각처럼 불안정하다. 실제로 최근 보수세력의 지지율 상승은 그들에 대한 적극적 지지가 아니라, 노무현이 대표하는 신자유주의적 인민주의에 대한 대중의 환멸에서 비롯하는 반사이익으로서 드러난다. ‘그들이 돌아오’는 이유는 보수세력이 건재해서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인민주의가 안정적인 대중적 토대를 구축할 수 없어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민중운동 일각에서 제기하는 ‘신보수대연합’에 맞선 자유주의와의 동맹이라는 전략은, 반민중적일 뿐만 아니라 취약하기까지 한 정치세력의 손에 민중운동의 운명을 내맡기는 위험천만한 시도다. 둘째, 정치의 위기가 전면화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가운데 대중의 민주적 통제 가능성을 무력화시킬뿐더러, 인민주의에 고유한 갈등의 범죄화 및 ‘반정치의 정치’를 초래함으로써 정치의 토대를 잠식한다. 이는 한편으로 국가에 대한 환멸과 불신을 낳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력하고 권위적인 국가를 (재)확립함으로써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하자는 식의 대중적 정서를 낳을 수도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대중적 토대가 된다. 국가에 대한 미움과 기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중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는 ‘정치 자체를 (재)발명하는 정치’가 개시되어야 한다. 셋째, 신자유주의로 인한 고통과 책임을 전가하고 ‘적과 아’를 나눠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의사쟁점이 등장한다. 현재 제기되는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은 정확히 이 맥락에 있다. 따라서 이를 고려하지 않고 이 담론에 상식적이거나 실용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매우 큰 위험을 자초할 수 있다. 넷째, 사회운동의 NGO화 압력이 가속화될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신자유주의는 대중들의 통제를 우회할 수 있는 비공식적 조절네트워크를 선호할뿐더러,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으로 인해 약화된 국가의 정당성을 보충해야 한다. 이 같은 이중적 요구에 동시에 호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NGO화된 사회운동이다. 대중운동의 후퇴 속에서 사회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만일 대중운동의 토대를 새롭게 구축하는 고단한 작업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국가주의적이고 미디어적인 NGO 노선의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또한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지체되어 온 이념적 독자성 확립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호명될 가능성이 높다. NGO화된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앞서 말한 대중적 토대의 취약함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이 위기에 빠지게 될 때 결국 비판적 지지라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제도정치로 진출한 이른바 386 ‘젊은 피’들처럼 운동 경력을 상품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대중은 벌써 386 정치세력을 환멸하기 시작했고, 이제 다음 차례는 NGO다. 주체화의 정치, 그리고 사회운동의 독자성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를 귀족들이 완강히 거부하자, 로마의 평민들은 국가에서 철수하는 혁명적 조치를 취했다. 이는 로마가 자주 에트루리아인들과 주변 산지 부족들인 아이퀴인들과 볼스키인들에게 공격을 받던 상황에서 대단히 위협적인 조치였다. 한 번은 이런 공격을 받은 뒤에 로마 군대가 그들을 격퇴하고 도시의 문들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자신들의 개혁 요구 조건들이 원로원에 의해 거절당했다는 것을 안 평민 병사들은 자신들의 귀족 장군을 버리고 아니오 강에서 5킬로미터 쯤 떨어진 성산(聖山)으로 갔다. 자기들의 도움이 없으면 로마가 어떤 전투도 치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그들은 귀족들의 후속 조치를 기다렸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호민관(護民官) 제도를 쟁취한다. 호민관은 정무관의 전횡을 막아달라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든 평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민회들이 통과시킨 법안과 원로원의 결의, 그리고 정무관의 행위 중에서 평민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간주되는 것에 대해서 중재 또는 거부할 권한이 있었다.5) 오늘날 사회운동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신)자유주의로부터 이념적·정치적 독자성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인민주의가 통치와 관리,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대중들과 함께 주체로 서는 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변혁이라는 의제를 현실적인 일정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성을 초래한다. 이처럼 불안정한 정세 앞에서 우리는 자칫 과거의 실천을 묵수하거나 국가적 권위에 자발적으로 예속될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불안정한 정세는, 과거 로마의 대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 지배계급으로부터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도리어 새로운 주체와 정치를 발명해 내는 호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같은 독자성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이데올로기 및 제도에 대한 구체적 비판을 통해서 정세적으로만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양극화/통합 담론 비판은 이를 위한 필수적 출발점이다. 1)박하순, 2006,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전망, 그리고 불안정노동」, 박하순․장귀연 외,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노동운동 - 불안정노동 철폐를 위하여』, 도서출판 사회운동 본문으로 2)한편, 이러한 탈주체화 과정은 동시에 일정한 동원과 배제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예컨대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중산층의 규율과 노력, 복지수급과 일자리를 얻기 위한 노동빈곤층의 근면성실이 요구되는 방식으로 각각의 층위가 서로를 경계하며 관리하도록 지배계급이 의도한 바대로 적극 주체화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3)아래 분석은 주로 요하임 히르쉬, 「NGO, 국가의 새로운 외피」, 『사회진보연대』54호를 참고했다.본문으로 4)구체적으로는 정인경․박정미 외, 2005, 『인민주의 비판』, 공감을 주로 참고하시오.본문으로 5)세드릭 A. 요, 프리츠 하이켈하임, 1999, 『로마사』, 현대지성사(표현은 일부 수정)본문으로

  • 2006-03-02

    사회양극화/통합 비판 - 담론과 동맹전략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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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曰, 남은 임기엔 양극화 해소와 한미FTA에 주력하겠다?! 집권 3년차 들어 노무현 정권은 이른바 사회양극화 및 사회통합을 핵심 화두로 내세울 태세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월 18일 신년연설에서 경제 전반이 회복됐음에도 불구하고 양극화 때문에 이 같은 치적이 가려지고 있다는 현실 진단을 내놓았다. 또 2월 26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의 등반 도중에는 남은 임기 중 매진해야 할 2대 과제로 한미FTA 체결과 양극화 해소를 들었다. 열린우리당 경선에서도 김근태와 정동영 모두 입을 모아 양극화 해소를 외쳤다. 총리가 직접 챙기겠다고 한 국민통합 연석회의는 총리를 비롯한 각계 인사 36명으로 구성되어 지난 1월 26일 출범했다. 노무현의 신년연설에 대해 박근혜는 감세로 응수했고, 여기에 노무현이 다시 감세는 무책임한 주장이라는 반론을 펼치면서 증세-감세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 논쟁에 언론과 NGO 등이 가세하면서, 이른바 개혁-보수 구도가 다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이는 정확히 집권세력이 의도한 바다.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걸려 있는 양극화 특별 기획에서 집권세력은 양극화를 화두로 한나라당과 보수언론 등 이른바 ‘기득권 세력’에게 공세를 가하고 있다. 사실 이 같은 양상은 영국에서 블레어 신자유주의 정권이 등장할 당시와 유사하다. 당시 블레어는 선거 당시 사회적 배제 담론을 제시하면서 그 책임을 대처 신보수주의 정권에게 돌리는 한편, 대안으로 사회통합 담론을 내세워 집권에 성공했다. 노무현 정권이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꺼낸 것 역시 눈앞에 다가온 지자체 선거 및 이후 대선 전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이 기존의 제도정치세력을 넘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2005년 9월 22일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가 양대노총과 참여연대, 전국민중연대 등 전국 133개 단체를 중심으로 출범했고, 한국노총과 참여연대 등 핵심 단체들은 위에서 말한 국민통합 연석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전국민중연대는 내부의 이견 때문에 연석회의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지만, 올해 투쟁 기조 논의 과정에서 사회양극화 해소투쟁을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제안하고 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등 민중운동 내 거대 조직들 역시 사회양극화/통합이라는 진단 및 기획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를 내놓고 있지 않다. 우리는 지난 10월 『사회운동』 58호에서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비판한 바 있다. 이 글은 당시 문제의식의 연장이면서, 앞으로 진행될 본격적 비판의 시론이다. 우리는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에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담론은 현 정세에서 객관적으로 반동적인 효과를 생산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담론이라는 이유로 이를 실용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위험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이 담론을 다뤄야 한다. 다음으로 이 담론은 매우 우려스러운 동맹전략을 내포한다. 사회양극화/통합을 핵심 쟁점으로 하여 개혁-보수 구도를 형성하고, 보수세력에 맞서 개혁세력과 함께 가야 한다는 저 지긋지긋한 ‘비판적 지지론’의 재판이 그것이다. 하지만 현 정세에서 가장 필요한 과제 중 하나인 사회운동의 독자성 확보는 심각히 지체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회양극화/통합 담론, 무엇이 문제인가 1) 사회양극화 담론이 노리는 바 혹자는 최근 사회양극화 담론이 전면화되는 것을 보고, 지배계급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모순과 위기를 인정한 것이니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이 담론을 구사하는 방식을 보면 사태는 오히려 정반대다. 현 정부의 인식은 2월 21일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 메인화면에 걸려 있는 양극화 특별 기획 두 번째 글의 소제목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압축성장과 양극화는 불균형 성장이 낳은 이란성 쌍둥이’가 그것이다. 곧 현재 벌어지고 있는 양극화는 전적으로 한나라당 식 ‘개발독재’의 책임이고, IMF 사태 이후 자신들은 ‘국가경제가 10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2배 이상 성장’하게 만들면서도 ‘압축성장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민주화 조치를 병행’하는 경제 발전의 새로운 전략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특별기획 전면을 장식하는 다음과 같은 노무현의 발언은 이들의 인식을 아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수출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잘 나가는 상장 기업은 역대 최고의 수익을 기록하고 있는데도 서민들은 계속 어려운 양극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민생이 어려운 근본 원인입니다.”(2005. 10. 31. 출입기자 오찬 간담회) 즉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이 노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사회위기를 양분한 후 전자를 건들지 않거나 심지어 가속화하면서 후자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관념을 유포하는 것이다. 현재 지배계급들이 경제회복의 근거로 드는 것은 “경제성장(1인당 국민소득), 수출액, 주가지수(증시규모) 등 주요 경제지표들이 IMF사태를 기준으로 대부분 2배 이상 상승”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모두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통합되면서 IMF 이후 급상승한 환율이 조정되고 초민족적 금융자본이 유입된 결과다. 이 같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의 통합이야말로 사회위기의 진정한 원인이다. 왜냐하면 금융세계화는 성장과 고용을 근본적으로 분리하고, 고용을 파괴하거나 악화하는 성장을 낳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설비투자율 부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금융 원리가 기업의 핵심 운영원리로 관철되는 상황에서는 초민족적 금융자본에 배당할 단기적 이익 확보가 경영의 최우선 과제가 되기 때문에, 위험이 동반되는 중장기적 투자를 할 수 없다. 한국의 경영자들은 초민족적 금융자본에 고율배당을 하고, 경영권 확보 및 주가관리를 위해 자사주를 구입하며, 나머지 돈은 현금으로 쌓아두고 있다. 비상장기업의 경우 초민족적 자본은 유상감자를 통해 자금을 빼내가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산소득이 급격히 증가하는 한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핵심인 자본자유화에 힘입어 국부유출과 자본도피가 체계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와 성장이 이루어질리 만무하다.1) 이렇듯 지배계급이 추진하는 금융세계화로의 통합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자체가 다른 한편으로 지배계급 스스로 대안이랍시고 내놓는 고용확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양극화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설비투자율을 높이는 것 역시 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IMF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자본주의는 과잉축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3저호황을 거치면서 재벌이 추진한 시대착오적 과잉축적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이었다. (고정)자본소비적이고 노동절약적인 자본주의의 편향적 기술진보가 낳은 이윤율 하락을 이윤량의 증대를 통해 돌파해 보려 한 이 시도는 처참히 실패하여 IMF 사태를 불러왔다. 이렇듯 한국자본주의는 과잉축적 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라는 두 가지 극단 사이에 갇혀 있다. 자본주의 체계를 유지하는 한 이러한 상황에서 탈출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체계를 넘어서는 문제는 아득한 미래의 몽상이 아니라, 현재의 아주 시급하고 현실적인 문제로 떠오른다. 사태가 이렇다고 할 때, 현재 지배계급이 내세우는 사회양극화 담론의 일차적 문제는 한국자본주의가 처한 구조적 위기 및 변혁이라는 문제를 은폐한다는 점,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고용확대라는 양립 불가능한 처방을 결합함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같은 모순은 단순한 논리적 오류가 아니므로 지적을 통해 교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회양극화는 처음부터 적합한 사고의 교란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담론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은 현재 한국자본주의가 겪는 모순과 위기의 양상을 체계적으로 뒤섞는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자산소득과 근로소득 간 격차 확대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 확대,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 확대를 마치 모두 동일한 문제인 것처럼 다루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가 자본-노동 간 격차고 두 번째가 자본 내 격차며 세 번째가 노동 내 격차라는 점에서 이 모두는 전혀 다른 장에 속할뿐더러 각각에 대처하는 방법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하다. 예컨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 이들이 내리는 처방은 비정규직의 확대다. 더욱 큰 문제는 지배계급이 이런 식의 유비를 통해 정규직 노동자가 마치 자산계급과 같은 안정적 지위에 있는 것처럼 허구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전반적인 노동의 불안정화 및 빈곤화를 겪고 있는 노동대중의 현실을 은폐하고 노동대중 간의 갈등과 경쟁을 체계적으로 부추김으로써 노동 전반에 대한 공격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 담론을 통해 이들이 목표로 삼는 것은 노동대중 전반에 가해지는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 자체를 역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더욱 확대하면서 동시에 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악화시켜 양자의 격차를 줄이는 식의 하향평준화다. 이렇게 근로소득 내 재분배 문제가 초점이 되면서 근로소득과 자산소득의 격차 확대 곧 노동의 불안정화 및 금융화는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진다. 또한 교육이나 의료, 지역 등의 양극화를 언급하는 것은 얼핏 보면 소득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 더 넓은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본래 목적은 사실상 현재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금융화와 빈곤화 경향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최근 정동영 등이 전면에 내세우는 논리는 교육양극화로 인한 교육기회박탈이 소득양극화를 낳으므로 교육 양극화 해소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럴 듯하지만, 이는 실상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뒤집는 것이다. 소득양극화의 원인은 교육양극화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교육양극화가 해소되어 모든 사람에게 교육기회가 제공되면 소득양극화가 해소되어야 하는데, 곧 계급 간 격차, 노동시장 내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진단이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소득격차를 초래하는 계급 간, 노동시장 내 불평등이라는 문제가 본격적인 의제로 오르지 않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더구나 교육과 의료와 같은 필수서비스를 가장 앞장서서 상품화하는, 따라서 소득에 따른 불평등을 더욱 확대하는 WTO 체제를 받아들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런 주장은 기만일 따름이다. 한편 자산소득 내 양극화라는 문제에 이르면 사회양극화 담론이 전반적인 빈곤화 경향을 역전시키려는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주 분명해진다. 이 해결책은 일정한 자산을 가진 집단 곧 ‘중산층’을 보호하여 이들이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자는 것인데, 금융세계화 하에서 지배계급이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소득을 건드릴 의지도 능력도 없기 때문에, 결국엔 노동자들의 근로소득을 이전해 중산층의 자산소득을 보충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조치들은 금융화와 빈곤화 경향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2) 사회통합 담론의 반동성 노무현은 아펙 회의 직후 “200년 전에도 공장을 부순다고 산업혁명이 진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세계화를 ‘거역할 수 없는’ ‘시대’와 ‘역사’라고 규정했다. 한편 노무현이 최근 극찬했다는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 - 일자리 창출을 위한 패러다임 변화’라는 보고서는 사회양극화의 원인 중 하나로 ‘성장률 하락, 세계화, 지식정보화 및 중국의 부상 등 대내외 환경변화’ 등의 충격에 대해 ‘각 경제주체들이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사회양극화의 원인을 ‘거역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한 ‘부적응’ 에 따른 ‘배제’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통합 또는 사회적 합의나 참여는 이렇듯 거스를 수 없는 흐름에 대중을 동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사회통합 담론은 필연적으로 탈(脫)정치적이다. 이 담론의 기초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금융)세계화, 신자유주의 따위의 현실적 모순을 ‘자연화’하여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일종의 섭리로 격상시키는 시도가 깔려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낳은 고통과 관련하여 지배계급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천재지변’에 대해 인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정치는 말의 강한 의미에서 ‘통치’나 ‘행정’ 또는 ‘관리’로 전락한다. 오늘날 좌우를 막론하고 유행하는 ‘민생정치’는 이 같은 정치의 타락을 의미한다. 또한 사회통합 담론은 탈(脫)주체적이다. 이 담론은 대량실업과 궁핍화 등의 객관적 조건이 노동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척 하면서, 대중들을 체계적으로 ‘피해자화’(victimize)하고 ‘부적응’의 현상을 크게 부각한다. 이들은 말한다. 문제는 대중에게 단순히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 대량실업의 근본 원인은 세계화의 무한경쟁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 또한 이른바 ‘지식기반경제’의 일자리가 요구하는 고도의 지식과 기술 따위를 대중이 갖추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중에게 무조건적인 복지 혜택을 주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저 유명한 ‘복지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2) 이런 식의 논리에 따라 (대량)실업의 책임은 대중에게 체계적으로 전가되고, 현실적 모순에 대한 대중의 갈등과 불화는 적응/부적응, 나아가 정상/비정상 식의 병리(학)적 언어로 번역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응력 정도라는 기준에 따라 노동대중들은 위계적으로 분할되는데, 이 분할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또는 차라리 이 경계선 자체인 존재들이 이른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들 이편에는 이른바 ‘정규직’ 노동자들이 있고, 저편에는 자본주의 위기로 인한 대량실업 때문에 산업예비군으로조차 통합할 수 없는 ‘잉여인구’가 있다. 대중을 이렇게 자의적이지만 전략적으로 분할한 후, 지배계급은 각각에 대해 차별적 조치를 취한다. 우선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거대하게 (재)조직된 산업예비군의 압박을 통해 노동유연화가 한층 강화되고 이에 부합하는 혹독한 노동규율․강도가 강제된다. 다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근로연계복지(workfare)에 입각하여 노동유연화에 대한 복종을 골자로 하는 직업교육을 받으면서 ‘사회적 일자리’ 형태의 산업예비군과 노동빈민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이들은 사회통합 담론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있어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존재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들을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정체성에 머물게 한 후 이들의 불만을 조작하여 기존 노동자들의 성과를 공격한다. 또한 이들에게 ‘사회적 일자리’ 따위의 일정한 시혜를 베풂으로써, 자신들이 IMF 경제위기와 사회양극화의 주범으로 표상하려는 보수주의와 구별되는 개혁적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약속한 의미에서의 ‘통합’은커녕 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노동대중 전반의 불안정화가 초래된다. 또한 자본주의 위기로 인한 대량실업이 해결되지 않는 한에서 산업예비군으로조차 통합할 수 없는 ‘잉여인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 기존 체계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높이고, 다른 한편으로 경찰적인 수단을 통해 이 같은 도전을 봉합하려는 억압적 시도를 강화한다. 이 때 경찰논리의 특권적 희생양이 되는 것이 바로 ‘잉여인구’다. 세계화 속에서 국가의 무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뚜렷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국가는 극히 무력한 이들 잉여인구에게 혹독한 경찰 조치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권위가 건재하다는 허구를 상연하고 이를 통해 자신에 대한 불안과 불신을 권위적으로 잠재우려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반혁명의 권리 축소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을 일정하게 해소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잉여인구의 권리가 열등하고 취약하다는 것을 제도적 차별을 통해 전시함으로써, 기존 사회에 통합된 이들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다는 안도감을 주거나 또는 그 경계 밖으로 넘어갔을 때 생기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려는 것이다. 사회통합 담론은 이러한 국가의 불의와 모순을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기존 체계에 저항하거나 기존 체계의 불가능성을 체현하는 이들 곧 ‘통합되지 않는 이들’을 ‘문화 지체자’나 잠재적 ‘범죄자’ 등으로 낙인찍는다. 따라서 지체자나 범죄자에 대한 ‘교정’이나 ‘진압’ 나아가 ‘추방’ 등의 경찰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반동적 담론으로 전도된다. 고(故) 전용철․홍덕표 농민의 죽음 앞에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통합되지 않고 저항하는 한 또 죽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노무현의 그 끔찍한 발언이야말로 사회통합 담론의 진실이다.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의 동맹전략 비판을 위하여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은 또한, 2004년 탄핵 당시 반신자유주의 정치전선을 유실시키면서 화려하게 복귀한 개혁-보수 전선을 (재)강화한다는 점, 따라서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재)형성을 더욱 지체시키고 자유주의 세력에 대해 정치적 독자성을 견지하는 대중운동들의 출현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극히 위험하다. 탄핵 직후 50%까지 치솟았던 노무현 정권의 지지율이 취임 3주년 현재 22.9%라는 최악의 수치를 기록하는 한편, 유력한 대권후보로 꼽히는 이명박 서울시장과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동반상승하고 뉴라이트의 출현 등 보수세력의 현대화 흐름이 가시화되고 있다. 또한, 최근 한나라당이 사학법을 쟁점으로 장외투쟁을 벌이는 등 보수세력이 다면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민중운동 내 일부 세력은 현 정세를 ‘신보수대연합’의 형성으로 규정짓고 이에 반하는 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2년 전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도를 그리기 위해, 이번에는 탄핵무효/민주수호 대신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이 핵심 쟁점으로 동원된다. 이렇게 보면 2년 전 탄핵무효/민주수호 구호가 그 의도와 무관하게 그랬던 것처럼, 현 정세에서 사회양극화/통합 담론 역시 객관적으로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따라서 가장 반민중적인 효과를 산출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민중운동 내 절대다수가 신자유주의 반대를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고 있음에도 이처럼 반신자유주의 전선의 구축이 지속적으로 교란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 같은 현상은, 그러나 참여연대와 같은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NGO나 심지어 신자유주의 세력의 수장인 대통령마저도 제 입으로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 데서 역설적으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여전히 신자유주의에 관한 공통된 인식이 확립되지 않은 것이다. 특히 문제는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를 정치와 분리된 ‘경제’적 문제로 바라볼 뿐, 그것이 필연적으로 기존의 정치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과거의 자유주의는 체계적으로 타락하여 예컨대 인민주의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정치,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규명하고 토론해야 할 문제다. 1) 신자유주의와 국가의 변형 남한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본래 재벌중심의 중화학공업화를 핵심으로 하는 박정희 식 발전주의의 모순에 대한 대응책으로 도입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미국 주도의 금융세계화에 편입되어 초민족적 금융자본을 유치하려는 거시경제적 안정화 정책, 다른 한편으로 과잉축적으로 인한 자본의 재생산 위기를 해결하려는 미시경제적 구조조정 정책을 양축으로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정책적 차별성이 없다는 점이다.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consensus, 합의)의 의미가 그것이다. 당장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를 최초로 도입한 것은 다름 아닌 박정희 정권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충실한 계승자라는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이 계승한 것은 발전주의가 아니라 바로 신자유주의였다. 김영삼 정권은 재벌의 과잉축적을 처리하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수행하진 못했지만, ‘세계화’ 담론을 유포시키면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금융세계화에 편입되고자 했다. 김대중 정권은 IMF 사태를 계기로 금융세계화의 미시적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APEC과 WTO와 FTA를 대하는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듯 노무현 정권 역시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이처럼 이른바 개혁-보수 세력 간에 아무런 차별성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신자유주의가 개별 국가가 자의로 선택하고 대체할 수 있는 좁은 의미에서의 정책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의 금융적 재편에 조응하는 국가 자체의 근본적 성격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민족국가의 사명은 더 이상 전통적인 민족적 발전 전략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유치를 위한 조건을 확보하는 것, 이른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민족국가는 ‘바닥을 향한 경쟁’에 대중을 동원하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쟁 국가’가 되고, 발전주의는 이를 위한 수사로 전락한다. 근대적 주권 개념 및 주권국가간 체계는 근본적인 위기를 맞는다. 이 과정에서 정치는 사유화된다.3) 여기서 핵심은 탈(脫)국가적․비공식적 조절네트워크의 확대다. 시장의 탈규제화로 인해 국가의 개입 역량이 축소되는 한편, 강력한 ‘사적’ 행위자들 특히 점차 개별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게 된 초민족적 기업들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오늘날 ‘사회적 합의’가 강조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국가는 더 이상 이런 사적 행위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협상 파트너로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 혹자는 이를 정치의 ‘재봉건화’라 부르기도 한다. 즉 점점 제도적 의사결정 과정의 중요성이 쇠퇴하고 비공식적 협상공간들이 선호되는데, 이 같은 사적 협상 구조는 전통적인 민주적 제도와 절차의 통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제 민주주의와 참여는 지극히 불평등한 행위자들이 시민사회 내에서 행하는 협상 절차로, 또는 단순히 지방들의 국제적 경쟁을 위한 참여적 동원으로 축소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정치는 통치가 된다. 이 같은 정치 조절체계는 점점 국제화되어 국제적 수준에서 조직, 제도, 그리고 비공식적인 ‘체제’의 한층 밀집된 네트워크가 창출된다. 이는 정부들을 새로운 협력 형태에 속박하고 특히 약소국들의 선택권을 제한한다. 이 같은 새로운 국제적 권력 구조에서는 자본주의 3극의 더 강한 국가들이 갈등적 협력 형태를 통해서 세계를 지배한다. 이는 세계무역기구(WTO)를 비롯하여 이들 중심의 공통이익을 대표하는 국제조직들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덜 제도적인 조정과 네트워크 형태들도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초민족적 기업들과 NGO(비정부기구)들이 각각 차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 모두의 결합 효과로 개별 국가의 국가장치 자체가 변화한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 중 하나는 행정부 안에서 재무부와 중앙은행 등의 비중이 증가하고 자율성이 확대된다는 점이다. 대체로 민주적인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이들 장치는 국제 자본의 이해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국제적 자본의 흐름과 개별 국가의 정책들 사이의 매개자, 심지어는 아예 단순한 전달 벨트로 행동한다. 이는 곧 (금융)시장이라는 세계적 규범이 행정적으로 내면화됐음을 제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와 상관적으로 의회나 정당 같은 전통적 대의장치는 역할이 약화되어 대의제도 전반의 위기가 초래되고 정치 체계의 정당성은 더욱 부족해진다. 대중들은 선거에서 어떤 정당을 선택할 권리는 있으나, 그들이 무엇을 할지 통제할 수 있는 권리는 박탈된다. 이 과정에서 국제적․국내적으로 NGO의 역할이 부상한다. NGO는 기존의 국가 관료들이 소유하지 않은 관리적 지식과 이해 능력에 기반을 두고 비공식적 조절네트워크 안에서 정치적 협상과 의사결정을 위한 의제설정에 깊숙이 관여한다. 이들은 또한 대의제가 약화된 틈을 타 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동원함으로써 발언권을 강화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들은 국가나 기존 정치세력․이해집단으로부터 자율적이지 않다. 일정한 지속성을 갖는 전문조직으로서 NGO는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기부 이상의 재정적 자원을 필요로 하며 특히 대규모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와 국가연합, 국제조직, 심지어는 사적 협회나 사적 기업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의존관계를 통해 기부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NGO를 활용할 수 있다. NGO는 특히 국가 행정기관들이 수행할 수 없거나 또는 수행하고 싶지 않은 실천적 프로젝트, 특히 개발 및 구호 작업의 영역에서 참여한다. 반대로 국가 행정기관들은 정치적 정당성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NGO들을 체계적으로 활용한다. 최근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을 적극적으로 여론화하고 이와 관련된 정책을 실행하는 데에서 미디어와 국내 NGO들이 수행한 역할은 이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최근 노무현이 슬쩍 화두만 꺼낸 증세 문제가 증세-감세 논쟁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 박근혜의 반론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사회쟁점화한 한겨레신문 등의 미디어 및 각종 NGO들의 역할 때문이었다. 또한 지역적 차원에서 조직되고 있는 자활 사업은 지역 NGO들이 주도한다. 그리고 현재 정부는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민간자본유치사업의 형태로 수행하면서 이의 운영을 지역 NGO들에게 이전시켜, 이들이 빈곤층을 직접 관리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렇듯 NGO는 전통적으로 국가가 수행했던 역할을 대행하고 있다. 2) 신자유주의와 인민주의의 출현, 그리고 노무현 정권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근대를 지배하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이와 함께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정책을 집행한 결과 발생하는 대중의 불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둘째, 서로 다른 지배계급들의 정책이 신자유주의로 수렴되는 상황에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서로의 차이를 어떻게 드러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을 것인가.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극히 첨예하고 격한 정쟁이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지배적인 통치성의 역할을 수행해 온 자유주의를 대체하는 통치성이 등장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른바 ‘인민주의’라는 정치현상을 주목한다.4) 인민주의는 시기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취했지만, 몇 가지 공통점은 언급할 수 있다. 인민주의는 프랑스 혁명 등 근대 민주주의 혁명에 기원을 둔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라는 근대정치의 3대 이념이 위기에 빠질 때 출현한다. 이들은 사회적 갈등에 대한 인식과 토론보다는, 감정과 경험에 기초한 직접적인 분노의 표출을 추구한다. 또한 이들은 유기체주의에 입각하여 갈등 일반을 범죄화하고, 이 같은 유기체적 공동체의 조화를 파괴하는 가시적인 ‘적’을 만들어 원한의 감정을 동원한다. 현 정세에서 지배적인 인민주의 형태는 ‘정치가적 인민주의’다. 오늘날의 새로운 인민주의는 과거의 인민주의와 달리 지배이념으로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한다. 이들은 민족국가의 자율성이 제약되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대중의 원한과 불만을 동원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안적인 발전전략을 추진하는 대신 대중의 곤궁과 불안을 가시적인 ‘적’에 대한 분노로 조직하고 인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정치적 수사를 남발한다. 이들의 정치적 수사에서 인민의 ‘적’이란 연고주의를 활용하는 기존의 정치가와 관료, 보호주의적 조치를 옹호하는 국내자본, 그리고 노동의 유연화에 저항하는 노조 등 특수 이익과 특권을 옹호하는 존재들, 이른바 ‘기득권 세력’이다. 인민주의자들은 이러한 특권 그룹과 투쟁하며 그들의 특수 이익을 배격하고 기존 제도의 부패를 일소하겠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인민주의 지도자는 민주적 제도들을 우회하여 임의적 지배체제를 확립한다. 정치가적 인민주의는 입법부 등 대의제를 특수 이익의 구현체로 공격하는 한편 행정부와 대통령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킨다. 또한 지도자와 대중의 직접적인 인격적 유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미디어, 여론조사, 국민투표 등을 대중동원에 유용한 도구로 활용한다. 이 때 NGO는 관리적 지식에 근거해 행정부의 역할을 대리할 수 있을뿐더러, 미디어를 매개로 한 여론형성에 능하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을 일부 대신한다. 더구나 의회와 정당을 통한 기존의 정치적 정당성 형성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인민주의자들은 기존의 제도 영역에 속하지 않았던 NGO의 ‘재야’ 이미지를 활용하여 정당성을 보충한다. 요컨대 ‘정치가적 인민주의’의 등장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정치지형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위기에 대한 체계적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의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동시에 이에 대한 대중적 불만을 기득권 세력 및 기존 국가장치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한다. 집중화된 권력과 기술관료 지배 승인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위한 통치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대중의 고통의 강화라는 상황에 대한 책임을 둘러싼 악무한적 투쟁은 끊이지 않고, 정치에 대한 냉소와 환멸은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대중의 기대는 약화되지 않는다. 이는 ‘탈식민지 발전도상국’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제시되는 자본유치를 위해서는 기업가적 국가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예외국가’로 존재했던 이들 발전도상국들의 ‘정상국가’로의 이행은 대중의 막연한 기대를 증폭시킨다. 신자유주의와 인민주의가 결합되어 정치를 극히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에, 안정감을 주는 권위적 국가에 대한 기대심리도 강화된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이나 집권 과정, 그리고 이후 정치행태를 보면 위에서 언급한 정치가적 인민주의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대선 당시 여론조사를 통한 대선후보 결정, 이회창을 정점으로 한 기득권 세력에 대한 공격, 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 등이 그렇다. 또한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에 비할 바 없이 적다는 10분 1 발언, 재신임 선언, 탄핵을 불사하거나 심지어 유도하며 선거법 위반 공방을 돌파하려는 정치행동은 대통령 개인에 대한 대중의 지지로 사태를 봉합하고, ‘나는 차악(lesser evil)이고 상대방이 진정 악의 두목이다’라는 전형적인 정치가적 인민주의 도식 활용이 그렇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통에 빠뜨리는 ‘기득권세력’이라고 주장하면서 노동자 전반에 대한 공세를 가하는 것이 그렇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을 인민주의라는 맥락에서 분석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인민주의는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성을 낳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안정적인 ‘대중적 토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 당시 노무현은 여러 이질적인 집단들을 일시적으로 결집시킴으로써 집권에 성공했지만, 이는 특정한 정치이념에 근거한 다 계급연합이 아니라 계급형성을 봉쇄하는 ‘탈계급연합’일 뿐으로 사상누각처럼 불안정하다. 실제로 최근 보수세력의 지지율 상승은 그들에 대한 적극적 지지가 아니라, 노무현이 대표하는 신자유주의적 인민주의에 대한 대중의 환멸에서 비롯하는 반사이익으로서 드러난다. ‘그들이 돌아오’는 이유는 보수세력이 건재해서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적 인민주의가 안정적인 대중적 토대를 구축할 수 없어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민중운동 일각에서 제기하는 ‘신보수대연합’에 맞선 자유주의와의 동맹이라는 전략은, 반민중적일 뿐만 아니라 취약하기까지 한 정치세력의 손에 민중운동의 운명을 내맡기는 위험천만한 시도다. 둘째, 정치의 위기가 전면화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가운데 대중의 민주적 통제 가능성을 무력화시킬뿐더러, 인민주의에 고유한 갈등의 범죄화 및 ‘반정치의 정치’를 초래함으로써 정치의 토대를 잠식한다. 이는 한편으로 국가에 대한 환멸과 불신을 낳지만, 다른 한편으로 강력하고 권위적인 국가를 (재)확립함으로써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하자는 식의 대중적 정서를 낳을 수도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경찰국가의 대중적 토대가 된다. 국가에 대한 미움과 기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중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는 ‘정치 자체를 (재)발명하는 정치’가 개시되어야 한다. 셋째, 신자유주의로 인한 고통과 책임을 전가하고 ‘적과 아’를 나눠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의사쟁점이 등장한다. 현재 제기되는 사회양극화/통합 담론은 정확히 이 맥락에 있다. 따라서 이를 고려하지 않고 이 담론에 상식적이거나 실용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매우 큰 위험을 자초할 수 있다. 넷째, 사회운동의 NGO화 압력이 가속화될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신자유주의는 대중들의 통제를 우회할 수 있는 비공식적 조절네트워크를 선호할뿐더러,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으로 인해 약화된 국가의 정당성을 보충해야 한다. 이 같은 이중적 요구에 동시에 호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NGO화된 사회운동이다. 대중운동의 후퇴 속에서 사회운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만일 대중운동의 토대를 새롭게 구축하는 고단한 작업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국가주의적이고 미디어적인 NGO 노선의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또한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지체되어 온 이념적 독자성 확립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호명될 가능성이 높다. NGO화된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앞서 말한 대중적 토대의 취약함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이 위기에 빠지게 될 때 결국 비판적 지지라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제도정치로 진출한 이른바 386 ‘젊은 피’들처럼 운동 경력을 상품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대중은 벌써 386 정치세력을 환멸하기 시작했고, 이제 다음 차례는 NGO다. 주체화의 정치, 그리고 사회운동의 독자성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를 귀족들이 완강히 거부하자, 로마의 평민들은 국가에서 철수하는 혁명적 조치를 취했다. 이는 로마가 자주 에트루리아인들과 주변 산지 부족들인 아이퀴인들과 볼스키인들에게 공격을 받던 상황에서 대단히 위협적인 조치였다. 한 번은 이런 공격을 받은 뒤에 로마 군대가 그들을 격퇴하고 도시의 문들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자신들의 개혁 요구 조건들이 원로원에 의해 거절당했다는 것을 안 평민 병사들은 자신들의 귀족 장군을 버리고 아니오 강에서 5킬로미터 쯤 떨어진 성산(聖山)으로 갔다. 자기들의 도움이 없으면 로마가 어떤 전투도 치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그들은 귀족들의 후속 조치를 기다렸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호민관(護民官) 제도를 쟁취한다. 호민관은 정무관의 전횡을 막아달라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든 평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민회들이 통과시킨 법안과 원로원의 결의, 그리고 정무관의 행위 중에서 평민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간주되는 것에 대해서 중재 또는 거부할 권한이 있었다.5) 오늘날 사회운동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신)자유주의로부터 이념적·정치적 독자성을 확보하는 것,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인민주의가 통치와 관리,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대중들과 함께 주체로 서는 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변혁이라는 의제를 현실적인 일정에 올려놓음과 동시에, 심각한 정치적 불안정성을 초래한다. 이처럼 불안정한 정세 앞에서 우리는 자칫 과거의 실천을 묵수하거나 국가적 권위에 자발적으로 예속될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불안정한 정세는, 과거 로마의 대중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 지배계급으로부터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도리어 새로운 주체와 정치를 발명해 내는 호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같은 독자성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이데올로기 및 제도에 대한 구체적 비판을 통해서 정세적으로만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양극화/통합 담론 비판은 이를 위한 필수적 출발점이다. 1)박하순, 2006,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전망, 그리고 불안정노동」, 박하순․장귀연 외,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노동운동 - 불안정노동 철폐를 위하여』, 도서출판 사회운동 본문으로 2)한편, 이러한 탈주체화 과정은 동시에 일정한 동원과 배제의 효과를 발생시킨다. 예컨대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중산층의 규율과 노력, 복지수급과 일자리를 얻기 위한 노동빈곤층의 근면성실이 요구되는 방식으로 각각의 층위가 서로를 경계하며 관리하도록 지배계급이 의도한 바대로 적극 주체화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3)아래 분석은 주로 요하임 히르쉬, 「NGO, 국가의 새로운 외피」, 『사회진보연대』54호를 참고했다.본문으로 4)구체적으로는 정인경․박정미 외, 2005, 『인민주의 비판』, 공감을 주로 참고하시오.본문으로 5)세드릭 A. 요, 프리츠 하이켈하임, 1999, 『로마사』, 현대지성사(표현은 일부 수정)본문으로

  • 2006-03-02

    한-미 FTA를 저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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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민중의 권리와 투쟁을 세계화하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공식 개시되었다. 양국 정부는 미 행정부의 무역촉진권한1)의 소멸시점인 2007년 6월 30일로부터 역산하여, 그 전에 협상을 타결하기 위한 일정을 제출하고 있다. 이처럼 한-미 FTA는 그 일정에서부터 철저히 미국에 종속되어 있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하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해 이윤을 유지하는 초민족적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 한국 정부는 한-미 FTA가 GDP 최대 2% 성장, 일자리 10만 개 창출(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조사)의 효과를 낳을 것이라 선전한다. 하지만 미국과 FTA(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를 체결한 후, 자국의 농업이 파국을 맞은 멕시코의 사례와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복지가 축소되었던 캐나다의 사례는 한-미 FTA가 불러올 재앙을 경고하는 명백한 증거다. 한-미 FTA, 반민중적 글로벌 스탠더드의 확산 이번 한-미 FTA의 주요 내용과 그것이 낳을 효과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만 해도 그것이 가진 반민중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한-미 FTA 협상이 개시를 선언한 지난 2월 2일 롭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미국 상원 임시의장과 하원 의장에게 보내는 서신에 한-미 FTA 협상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적시했다. 그는 상품무역을 비롯하여 서비스 무역, 지적재산권, 투자, 정부조달, 원산지 규정, 투명성/반부패/규제개혁 등에 이르는 폭넓은 부분을 언급했으며, 미국의 상품과 서비스 수출,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한국의 법률 및 규제를 수정하고 한국 경제․사회 전반에 미국의 기준(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을 강제하겠다고 했다.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에서 난항을 겪고 있거나 회원국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 협상의 대상으로 포함되지 못한 의제를 한미 FTA에서는 다룰 것이며, 이를 위해 한국의 법률과 규제도 바꾸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이미 주어진 기준으로 삼고 있는 한국의 지배세력에게도 이번 한-미 FTA는 아주 유효한 계기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이번 협정을 개방을 통한 충격요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외부의 경쟁 압력을 끌어들여 비효율적인 산업을 정리하고, 국내 서비스 산업의 개선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한국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겠다는 의지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기간제/파견직 노동자에 대한 요건을 완화하는 비정규법안과 정리해고 자유화, 파업권 최소화, 노동운동 제도화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노사관계선진화방안과 같이 노동유연화를 한층 강화할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있다. 1997년 외화위기를 계기로 추진된 외환시장과 외국인 자본에 대한 자유화 조치도 이미 전면 개방 수준에 달하고 있으며, 꾸준하고도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공기업 민영화와 경제자유구역․기업혁신도시 등 자본의 투자와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계획은 민중의 노동권, 건강권, 교육권 등 기본적인 권리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민중의 삶을 위협하고 권리를 파괴하는 과정이었다. 한-미 FTA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경쟁력 강화, 글로벌 스탠더드 확산이라는 효과는 결국 민중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농업을 다 내어놓아라 WTO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에서 언제나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바로 농민이다. 외자유치를 통한 발전이라는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망 속에서 가장 효율성이 없다는 농업은 언제나 과감한 포기의 대상이었다.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출국 미국과의 협상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포트먼 대표는 이미 “한국과의 FTA는 미국의 농업생산자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말해 한-미 FTA의 주된 목표가 미국의 초국적 농기업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임을 명백히 밝혔다. 한-미 FTA를 통해 한국 농업이 입을 피해액은 최소 2조원(쌀을 제외할 경우)에서 최대 8조 8천억 원(쌀 포함)으로 추정되고, 이는 농업생산액의 10~40%에 달한다. 게다가 농업 개방을 FTA의 목표로 하는 미국은 거의 모든 농산물의 관세 인하 내지는 철폐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민감품목으로 지정되었던 쇠고기, 돼지고기, 양파 등의 품목도 협상 대상이 된다고 한다. 미국은 농지 면적이 한국의 105배에 달한다. 게다가 초국적 농기업들의 대량생산 체계에서 나오는 농산물의 가격이 한국 농산물의 가격과 경쟁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농업 개방과 이에 맞물리는 정부의 농업 포기 정책 속에서 농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WTO 협상을 준비한답시고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 농지법을 개정하여 농지를 관광이나 오락 시설을 위한 투기의 대상으로 만들려 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거나 어떻게든 농사를 지켜내려는 농민들은 조금이나마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빚을 내 기계를 사고, 시설을 만들고, 땅을 임대한다. 하지만 이는 빚의 악순환이다. 주변의 공장이나 식당에 나가 이중의 일로 자신을 혹사해야 겨우 먹고살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축산물을 포함한 거의 모든 농산물의 관세 인하와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 FTA는 한국 농업을 궤멸시키고 농민을 말살하는 수준에 이를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농산물의 자유무역은 세계 민중 대다수에게 재앙이다. 농민들은 토지와 농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농업 노동자로 전락한다. 초국적 농기업은 수출을 위한 농업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자국 민중의 식량에 대한 접근권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각종 자유무역협정에 농업이 의제로 포함되면서 대량수출을 위한 농업만이 살아남게 되며(농산물의 대량수출이 불가능한 한국은 농업을 포기한다), 민중의 식량이 되어야 하는 여러 작물이 수출 품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라진다.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의 면화, 커피 등의 특화작물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각종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농업생산량은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기아로 죽어가는 상황은 세계의 농업이 초국적 농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고 소농이 사라지면서 두드러진 가장 기막힌 현상일 것이다. 금융의 원리를 관철하는 서비스 협상 이번 한-미 FTA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 중 다른 하나는 서비스 부문이다. 서비스 부문의 경우 의료, 교육, 금융, 통신, 운송, 방송, 영화, 법률, 회계 등을 망라한다. WTO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에서 요구하는 의료 개방은 기본적으로 영리법인의 병원 설립과 초국적 제약회사들의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며, 이는 이번 한-미 FTA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육 역시 미국인의 국내 학교 설립 허용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그동안 노무현 정부는 경제자유구역으로부터 최근 제주도특별자치도 추진까지 의료와 교육 등의 공공 서비스 부분의 개방과 자유화를 위한 기반을 닦아왔고, WTO 서비스 협상에서도 이 두 분야를 자발적으로 개방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요로 하는 의료와 교육은 현재 초민족적 자본에게 매력적인 투자처로 인식되고, 그 결과는 끔찍하다. 약이 있고 병원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죽음을 강요받는 상황, 학교를 포기하거나 허울뿐인 공교육 하에서 최소한의 교육만 허용되는 상황이 현실이 되지 말란 보장은 없다. 게다가 이번 협정에서 미국은 통신 부문에서 기간통신사업자 외국인 지분 제한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미 공공법인에 대한 외국인 지분 제한을 대폭 완화했다. 언급되고 있는 기간통신사업자의 경우도 단계적으로 외국인 지분 소유 제한을 완화하여 1999년 7월부터는 지분의 49%까지 외국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마저 없애라는 요구를 지속해왔는데, 이번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이미 한국의 많은 공기업들이 외국인 자본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런 과정은 공공부문 민영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고, 이번 협정은 이런 흐름을 더욱 강화하여 그나마 남아있는 공기업의 민영화 흐름도 촉진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서비스 부문의 개방과 자유화는 일차적으로 직접적인 부의 유출을 가져온다. 한국 기업에 투자한 외국인 (투기)자본은 배당과 시세차익 등을 통해 엄청난 이윤을 챙겨왔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초민족적 자본의 장악력은 계속해서 증가해왔다(그리고 한국은 이미 금융세계화에 깊숙이 편입해있다). 이들이 관철시키는 금융의 원리는 금융적인 팽창(고도금융을 통한 잉여가치의 재분배)을 중심으로 한 자본의 이윤추구를 과정을 핵심으로 한다. 여기서는 주식시장 부양과 기업의 주가 상승이 중요하고, 이 때 주가는 구조조정을 통한 고용의 파괴, 노동의 유연화, 민영화․사유화 등이 진행될수록 상승한다. 금융의 원리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대립하지만, 자사주 매입, 정규직-비정규직 분할, 퇴직연금과 국민연금의 주식시장 투자 등을 통해 노동자 민중의 일상 자체를 금융의 원리로 포섭하거나 배제한다. 언급한 것처럼 이미 한국은 외환시장과 외국인 투자, 금융 부문에 있어서 거의 완전한 수준의 개방을 진행했다. 하지만 아직 송금제한, 외국인의 법률회사 설립 및 외국인 변호사의 국내 활동, 외국 회계법인 활동과 같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를 용이하게 하는 서비스 부분의 규제가 남아있다.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은 “한국 내 미국인 투자자들에게 미국의 법률적 원칙과 관행 아래서 부여될 수 있는 수준으로 주요 권리들을 보장하게” 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통신, 금융서비스, 전문직 서비스 등의 부문에 대한 시장접근상의 필요한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미국(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서도 미국인으로부터 미국식 기준을 가진 금융서비스(법률, 회계, 은행 등)를 받겠다는 것이다(미국의 기준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이것이 바로 한국정부가 경쟁을 통한 서비스 부문의 개선이다. 결국 투자를 보조하는 서비스 전체까지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정비하고, 한국 자본과 기업의 체질, 나아가 한국 경제와 사회 전반에 금융의 원리를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한-미 FTA를 저지하자!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양자간․다자간 협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자유무역 질서를 강화하려는 전략이 힘을 얻고 있다. WTO 체제를 보완하는 양자간․다자간 협정들은 WTO의 협상 규범을 기초로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강도 높은 자유무역 규범과 범위를 적용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확대․강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권, 식량주권(토지, 종자, 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통제권, 민중의 식량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 건강권(의약품 및 의료에 대한 접근권), 교육권을 비롯한 민중의 기본적인 권리와 삶이 파괴되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의 선두에 있는 것이 바로 미국(제국주의)이다. 한국은 금융세계화를 통해 세계를 수탈․착취하는 초민족적 자본과 자국의 초민족적 농기업을 위한 미국의 FTA 추진 전략의 우선 대상이 된 것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어떻게든 편입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버텨보려는 한국의 지배세력은 그에 기꺼이 응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FTA 반대 투쟁은 그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산업의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피해산업을 보호하자는 주장은 민중의 요구와 권리이기 어렵고,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의 투쟁을 분할할 가능성이 높다. 농업을 포기하고 얻어진 제조업의 이익이 제조업 노동자의 이익이 될 수 없을뿐더러 자유무역협정은 상품화와 노동유연화를 확대하는 금융의 세계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중의 더 많은 권리, 더 확장된 권리로부터 출발해야한다.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세계 민중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이 계속 발전하고 전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것이 자국의 산업, 특정한 부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노동권과 식량주권, 여성의 권리는 결코 배타적이지 않고 오직 함께 나아갈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와는 다른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2) 한-미 FTA가 불러올 재앙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기필코 저지시켜야 한다. 저항을 세계화하고 투쟁을 세계화하는 것이 한-미 FTA를 막아낼 수 있는 길이다. 노무현 정부와 지배 세력이 제시하는 자본의 논리, ꡐ산업별 효과ꡑ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노동, 식량, 자원, 문화, 지식이 이윤의 논리가 아니라 민중의 필요와 생산에 기초하여 평등하고 자유롭게 소통, 향유되는 다른 세계를 위한 투쟁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계의 민중들과 함께 만들어가자. 1)미 헌법상의 의회권한인 무역협상권을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에게 일정한 조건하에 위임한 것으로 , 이에 따라 의회는 협상 결과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만을 표할 수 있으며, 협정내용을 수정하지 못한다. 본문으로 2)이렇게 보자면 요즘 부각되고 있는 ‘스크린쿼터 사수’라는 요구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강풍이 몰아붙이는 문화시장 개방의 요구는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이는 저작권과 지적재산권을 매개로 지식과 문화를 상품화하여 민중의 문화와 지식에 대한 권리를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고, 문화산업에 대한 자본의 투자를 보장하라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에 따라 문화산업은 이미 상당 수준 금융화 되었는데, 특히 영화의 경우 금융시장을 통한 투자자금 모금이 이미 일반화되었다. 이런 문화산업의 금융화는 주주자본주의와 동일한 모습인데, 투자자들의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영화의 생산 자체가 철저히 투자자들의 의견에 종속된다. 투자자들의 권리가 최고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미국이 스크린쿼터 축소를 한․미 FTA의 선결조건으로 내건 것도 문화산업이 이미 자본의 매력적인 투자처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스크린쿼터가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가 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스크린쿼터는 언급한 문화산업의 금융화를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영화를 보호해달라는 요구고, 이는 민중의 문화에 대한 권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문화산업의 금융화는 문화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투자자의 권리, 자본의 권리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민중의 문화와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저작권과 지적재산권, 금융의 방식을 통한 문화의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소비문화 확대를 문제삼지 않는(삼을 수 없는) 스크린쿼터 사수 요구는 한국영화산업을 보호하자는 피해산업보호의 요구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민중이 스스로를 교육하고, 성숙할 수 있는 문화를 생산․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핵심이다. 스크린쿼터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 호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본문으로

  • 2006-03-02

    한-미 FTA를 저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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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민중의 권리와 투쟁을 세계화하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공식 개시되었다. 양국 정부는 미 행정부의 무역촉진권한1)의 소멸시점인 2007년 6월 30일로부터 역산하여, 그 전에 협상을 타결하기 위한 일정을 제출하고 있다. 이처럼 한-미 FTA는 그 일정에서부터 철저히 미국에 종속되어 있고,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하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해 이윤을 유지하는 초민족적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 한국 정부는 한-미 FTA가 GDP 최대 2% 성장, 일자리 10만 개 창출(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조사)의 효과를 낳을 것이라 선전한다. 하지만 미국과 FTA(북미자유무역협정, NAFTA)를 체결한 후, 자국의 농업이 파국을 맞은 멕시코의 사례와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사회복지가 축소되었던 캐나다의 사례는 한-미 FTA가 불러올 재앙을 경고하는 명백한 증거다. 한-미 FTA, 반민중적 글로벌 스탠더드의 확산 이번 한-미 FTA의 주요 내용과 그것이 낳을 효과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만 해도 그것이 가진 반민중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한-미 FTA 협상이 개시를 선언한 지난 2월 2일 롭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미국 상원 임시의장과 하원 의장에게 보내는 서신에 한-미 FTA 협상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적시했다. 그는 상품무역을 비롯하여 서비스 무역, 지적재산권, 투자, 정부조달, 원산지 규정, 투명성/반부패/규제개혁 등에 이르는 폭넓은 부분을 언급했으며, 미국의 상품과 서비스 수출,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한국의 법률 및 규제를 수정하고 한국 경제․사회 전반에 미국의 기준(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을 강제하겠다고 했다.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에서 난항을 겪고 있거나 회원국들의 반대에 부딪혀 이 협상의 대상으로 포함되지 못한 의제를 한미 FTA에서는 다룰 것이며, 이를 위해 한국의 법률과 규제도 바꾸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을 이미 주어진 기준으로 삼고 있는 한국의 지배세력에게도 이번 한-미 FTA는 아주 유효한 계기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이번 협정을 개방을 통한 충격요법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외부의 경쟁 압력을 끌어들여 비효율적인 산업을 정리하고, 국내 서비스 산업의 개선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한국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겠다는 의지다.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기간제/파견직 노동자에 대한 요건을 완화하는 비정규법안과 정리해고 자유화, 파업권 최소화, 노동운동 제도화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노사관계선진화방안과 같이 노동유연화를 한층 강화할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있다. 1997년 외화위기를 계기로 추진된 외환시장과 외국인 자본에 대한 자유화 조치도 이미 전면 개방 수준에 달하고 있으며, 꾸준하고도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공기업 민영화와 경제자유구역․기업혁신도시 등 자본의 투자와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계획은 민중의 노동권, 건강권, 교육권 등 기본적인 권리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민중의 삶을 위협하고 권리를 파괴하는 과정이었다. 한-미 FTA를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경쟁력 강화, 글로벌 스탠더드 확산이라는 효과는 결국 민중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농업을 다 내어놓아라 WTO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에서 언제나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이들은 바로 농민이다. 외자유치를 통한 발전이라는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망 속에서 가장 효율성이 없다는 농업은 언제나 과감한 포기의 대상이었다.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출국 미국과의 협상에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포트먼 대표는 이미 “한국과의 FTA는 미국의 농업생산자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말해 한-미 FTA의 주된 목표가 미국의 초국적 농기업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임을 명백히 밝혔다. 한-미 FTA를 통해 한국 농업이 입을 피해액은 최소 2조원(쌀을 제외할 경우)에서 최대 8조 8천억 원(쌀 포함)으로 추정되고, 이는 농업생산액의 10~40%에 달한다. 게다가 농업 개방을 FTA의 목표로 하는 미국은 거의 모든 농산물의 관세 인하 내지는 철폐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민감품목으로 지정되었던 쇠고기, 돼지고기, 양파 등의 품목도 협상 대상이 된다고 한다. 미국은 농지 면적이 한국의 105배에 달한다. 게다가 초국적 농기업들의 대량생산 체계에서 나오는 농산물의 가격이 한국 농산물의 가격과 경쟁이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농업 개방과 이에 맞물리는 정부의 농업 포기 정책 속에서 농민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는 WTO 협상을 준비한답시고 추곡수매제를 폐지하고, 농지법을 개정하여 농지를 관광이나 오락 시설을 위한 투기의 대상으로 만들려 한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거나 어떻게든 농사를 지켜내려는 농민들은 조금이나마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빚을 내 기계를 사고, 시설을 만들고, 땅을 임대한다. 하지만 이는 빚의 악순환이다. 주변의 공장이나 식당에 나가 이중의 일로 자신을 혹사해야 겨우 먹고살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축산물을 포함한 거의 모든 농산물의 관세 인하와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 FTA는 한국 농업을 궤멸시키고 농민을 말살하는 수준에 이를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요하는 농산물의 자유무역은 세계 민중 대다수에게 재앙이다. 농민들은 토지와 농사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고 농업 노동자로 전락한다. 초국적 농기업은 수출을 위한 농업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자국 민중의 식량에 대한 접근권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각종 자유무역협정에 농업이 의제로 포함되면서 대량수출을 위한 농업만이 살아남게 되며(농산물의 대량수출이 불가능한 한국은 농업을 포기한다), 민중의 식량이 되어야 하는 여러 작물이 수출 품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라진다.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의 면화, 커피 등의 특화작물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각종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농업생산량은 발전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기아로 죽어가는 상황은 세계의 농업이 초국적 농기업 중심으로 재편되고 소농이 사라지면서 두드러진 가장 기막힌 현상일 것이다. 금융의 원리를 관철하는 서비스 협상 이번 한-미 FTA에서 미국의 최대 관심사 중 다른 하나는 서비스 부문이다. 서비스 부문의 경우 의료, 교육, 금융, 통신, 운송, 방송, 영화, 법률, 회계 등을 망라한다. WTO를 비롯한 자유무역협정에서 요구하는 의료 개방은 기본적으로 영리법인의 병원 설립과 초국적 제약회사들의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며, 이는 이번 한-미 FTA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육 역시 미국인의 국내 학교 설립 허용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그동안 노무현 정부는 경제자유구역으로부터 최근 제주도특별자치도 추진까지 의료와 교육 등의 공공 서비스 부분의 개방과 자유화를 위한 기반을 닦아왔고, WTO 서비스 협상에서도 이 두 분야를 자발적으로 개방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요로 하는 의료와 교육은 현재 초민족적 자본에게 매력적인 투자처로 인식되고, 그 결과는 끔찍하다. 약이 있고 병원이 있어도 돈이 없으면 죽음을 강요받는 상황, 학교를 포기하거나 허울뿐인 공교육 하에서 최소한의 교육만 허용되는 상황이 현실이 되지 말란 보장은 없다. 게다가 이번 협정에서 미국은 통신 부문에서 기간통신사업자 외국인 지분 제한을 완화하거나 제거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미 공공법인에 대한 외국인 지분 제한을 대폭 완화했다. 언급되고 있는 기간통신사업자의 경우도 단계적으로 외국인 지분 소유 제한을 완화하여 1999년 7월부터는 지분의 49%까지 외국인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마저 없애라는 요구를 지속해왔는데, 이번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의 직접적인 압박을 받게 된 것이다. 이미 한국의 많은 공기업들이 외국인 자본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런 과정은 공공부문 민영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고, 이번 협정은 이런 흐름을 더욱 강화하여 그나마 남아있는 공기업의 민영화 흐름도 촉진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서비스 부문의 개방과 자유화는 일차적으로 직접적인 부의 유출을 가져온다. 한국 기업에 투자한 외국인 (투기)자본은 배당과 시세차익 등을 통해 엄청난 이윤을 챙겨왔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초민족적 자본의 장악력은 계속해서 증가해왔다(그리고 한국은 이미 금융세계화에 깊숙이 편입해있다). 이들이 관철시키는 금융의 원리는 금융적인 팽창(고도금융을 통한 잉여가치의 재분배)을 중심으로 한 자본의 이윤추구를 과정을 핵심으로 한다. 여기서는 주식시장 부양과 기업의 주가 상승이 중요하고, 이 때 주가는 구조조정을 통한 고용의 파괴, 노동의 유연화, 민영화․사유화 등이 진행될수록 상승한다. 금융의 원리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대립하지만, 자사주 매입, 정규직-비정규직 분할, 퇴직연금과 국민연금의 주식시장 투자 등을 통해 노동자 민중의 일상 자체를 금융의 원리로 포섭하거나 배제한다. 언급한 것처럼 이미 한국은 외환시장과 외국인 투자, 금융 부문에 있어서 거의 완전한 수준의 개방을 진행했다. 하지만 아직 송금제한, 외국인의 법률회사 설립 및 외국인 변호사의 국내 활동, 외국 회계법인 활동과 같이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를 용이하게 하는 서비스 부분의 규제가 남아있다. 한-미 FTA를 통해 미국은 “한국 내 미국인 투자자들에게 미국의 법률적 원칙과 관행 아래서 부여될 수 있는 수준으로 주요 권리들을 보장하게” 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통신, 금융서비스, 전문직 서비스 등의 부문에 대한 시장접근상의 필요한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미국(을 비롯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서도 미국인으로부터 미국식 기준을 가진 금융서비스(법률, 회계, 은행 등)를 받겠다는 것이다(미국의 기준은 글로벌 스탠더드다). 이것이 바로 한국정부가 경쟁을 통한 서비스 부문의 개선이다. 결국 투자를 보조하는 서비스 전체까지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정비하고, 한국 자본과 기업의 체질, 나아가 한국 경제와 사회 전반에 금융의 원리를 관철시키겠다는 것이다. 한-미 FTA를 저지하자!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양자간․다자간 협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자유무역 질서를 강화하려는 전략이 힘을 얻고 있다. WTO 체제를 보완하는 양자간․다자간 협정들은 WTO의 협상 규범을 기초로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강도 높은 자유무역 규범과 범위를 적용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확대․강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권, 식량주권(토지, 종자, 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통제권, 민중의 식량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 건강권(의약품 및 의료에 대한 접근권), 교육권을 비롯한 민중의 기본적인 권리와 삶이 파괴되고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의 선두에 있는 것이 바로 미국(제국주의)이다. 한국은 금융세계화를 통해 세계를 수탈․착취하는 초민족적 자본과 자국의 초민족적 농기업을 위한 미국의 FTA 추진 전략의 우선 대상이 된 것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어떻게든 편입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버텨보려는 한국의 지배세력은 그에 기꺼이 응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FTA 반대 투쟁은 그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산업의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피해산업을 보호하자는 주장은 민중의 요구와 권리이기 어렵고,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의 투쟁을 분할할 가능성이 높다. 농업을 포기하고 얻어진 제조업의 이익이 제조업 노동자의 이익이 될 수 없을뿐더러 자유무역협정은 상품화와 노동유연화를 확대하는 금융의 세계화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중의 더 많은 권리, 더 확장된 권리로부터 출발해야한다.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세계 민중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이 계속 발전하고 전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것이 자국의 산업, 특정한 부문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노동권과 식량주권, 여성의 권리는 결코 배타적이지 않고 오직 함께 나아갈 때 신자유주의 세계화와는 다른 세계화를 이룰 수 있다.2) 한-미 FTA가 불러올 재앙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기필코 저지시켜야 한다. 저항을 세계화하고 투쟁을 세계화하는 것이 한-미 FTA를 막아낼 수 있는 길이다. 노무현 정부와 지배 세력이 제시하는 자본의 논리, ꡐ산업별 효과ꡑ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노동, 식량, 자원, 문화, 지식이 이윤의 논리가 아니라 민중의 필요와 생산에 기초하여 평등하고 자유롭게 소통, 향유되는 다른 세계를 위한 투쟁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계의 민중들과 함께 만들어가자. 1)미 헌법상의 의회권한인 무역협상권을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에게 일정한 조건하에 위임한 것으로 , 이에 따라 의회는 협상 결과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만을 표할 수 있으며, 협정내용을 수정하지 못한다. 본문으로 2)이렇게 보자면 요즘 부각되고 있는 ‘스크린쿼터 사수’라는 요구의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강풍이 몰아붙이는 문화시장 개방의 요구는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이는 저작권과 지적재산권을 매개로 지식과 문화를 상품화하여 민중의 문화와 지식에 대한 권리를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추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고, 문화산업에 대한 자본의 투자를 보장하라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요구에 따라 문화산업은 이미 상당 수준 금융화 되었는데, 특히 영화의 경우 금융시장을 통한 투자자금 모금이 이미 일반화되었다. 이런 문화산업의 금융화는 주주자본주의와 동일한 모습인데, 투자자들의 수익을 보장하기 위해 영화의 생산 자체가 철저히 투자자들의 의견에 종속된다. 투자자들의 권리가 최고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미국이 스크린쿼터 축소를 한․미 FTA의 선결조건으로 내건 것도 문화산업이 이미 자본의 매력적인 투자처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스크린쿼터를 축소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스크린쿼터가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가 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스크린쿼터는 언급한 문화산업의 금융화를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영화를 보호해달라는 요구고, 이는 민중의 문화에 대한 권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문화산업의 금융화는 문화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투자자의 권리, 자본의 권리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또한 민중의 문화와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저작권과 지적재산권, 금융의 방식을 통한 문화의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소비문화 확대를 문제삼지 않는(삼을 수 없는) 스크린쿼터 사수 요구는 한국영화산업을 보호하자는 피해산업보호의 요구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민중이 스스로를 교육하고, 성숙할 수 있는 문화를 생산․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핵심이다. 스크린쿼터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 호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