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독촉에 시달리던 20대 신용불량자가 카드 빚 천만 원을 갚을 길이 없자, 장기 매매를 선택했다. 장기는 4,500만 원에 팔렸지만 브로커가 소개료 2,000만 원을 챙겨 실제 2,500만 원을 받게 됐다. (SBS 2005.01.29 뉴스) 직장생활을 하던 B씨. 회사 상황이 나빠져 임금이 6개월 체불됐다. 카드로 생활을 꾸려가던 중 자녀C가 사고를 당해 1,500만 원을 병원비와 수술비로 지출하게 됐다. 결국 카드로 돌려 막다가 4천만 원에 가까운 빚을 지게 됐다. (신용불량자 클럽 까페에 k씨가 올린 글 中) 들어가며 위 사례는 금융채무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 중 일부이다. 현재 전국에 300만이 넘는 노동자, 민중들이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금융 부채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아니 그 가족까지 계산한다면 어림잡아도 1,000만 명 이상이다. 정부의 신용카드 남발 정책과 경기 악화로 인해 생계형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왔고, 개인뿐만 아니라 주변인의 동반 책임으로 금융채무의 피해 사례는 더 확산되고 있다. 신용불량자라는 단어가 우리 생활 속 고유명사로 자리 잡기 시작한 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생계형 자살과 가족 집단 자살이 급증했지만 정부의 대책은 '도덕적 해이'라는 개인 책임을 부과하는 방법을 뛰어 넘지 못했다. 과도한 내수 경기 활성화 정책과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왜곡된 고용구조,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의해 무참히 나락으로 떨어진 신용불량자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해서는 더 이상 안 된다.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채무를 갚기 위해 또 다른 채무를 질 수밖에 없었던' IMF 구제금융 이후 대다수의 신용불량자에게 선택의 길은 없었다. 그렇다면 평생을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며 가정파탄과 가족 해체 그리고 불안정노동에 시달리며 평생을 빚에 허덕여야 하는 빈곤의 악순환에 내몰린 신용불량자에게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신용불량자'가 아니다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신용불량자라는 용어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신용불량자 그 자체가 지극히 자본과 정권에 의하여 저질러진 구조조정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신용불량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금융피해자에게 끊임없이 신용불량은 '당신에 의해서' 저질러졌기 때문이며, 혹은 당신의 신용을 적절히 관리를 하지 못한 데 따른 개인의 책임이라고 암시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과 정권은 신용불량자를 벗어나고 싶으면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빚을 청산할 것을 부단히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신용불량자의 사회적 의미는 오히려 자본과 정권에 의하여 저질러진 구조조정과 금융권 및 카드자본의 부실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아니라 우리는 '금융피해자'로 다시 고쳐 불러야한다. 금융피해자에게 인간다운 삶이란 없다 정확하게 말해서 금융피해자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신용불량자라는 '사회적인 주홍글씨'를 달고 바닥 모를 두려움으로 인하여 피를 말리는 주변의 삶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추심기관의 협박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회의 냉정한 시선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어 결과적으로 자괴감과 두려움으로 삶은 전체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또한, 모든 삶의 목적이 빚을 갚기 위해 급속도로 변화되어 건강과 사회생활이 악화될 수밖에 없으며 열악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마저 고스란히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인권사각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를 강요받는 금융피해자 무엇보다도 금융피해자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이유는 금융피해자로서의 삶이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는 현실, 그 이상의 결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금융피해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할 일도 없게 되면서 무기력한 삶을 연명하고 사회적으로는 불필요한 인간으로 버림받음으로써 이중삼중의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즉 금융피해자들은 금융피해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생활에서 차별과 배제가 일상적으로 용인된다. 가령 금융피해자가 기업에서 요청하는 자격과 기능을 충분히 습득하였다 하더라도 취업의 창구로부터 배제가 된다. 아무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금융피해자는 공정한 심사기준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그것은 기업에서 신규채용 모집공고와 함께 일차적으로 금융기관으로부터 기업에 제공되는 신용정보시스템을 통하여 신규채용에 지원한 지원자를 '신용불량자와 비신용불량자'로 최우선적으로 선별하는 기준이 관례화되어 버렸다. 또한, 기업에서는 신규채용의 기준을 선별한다는 명목으로 금융피해자의 신용정보를 제 집 드나들듯 하며 '정보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그 사람의 능력과 됨됨이가 아니라 금융기관에서 제공되는 신용정보에 의하여 폭력적으로 등급이 매겨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융피해자라는 무거운 족쇄가 그의 이력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금융피해자들의 일자리는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한 노동시장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밖에 없다. 또한 설령 금융피해자가 정규직의 일자리를 어렵사리 들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금융피해자들은 채권기관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가압류와 채권회수의 협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최소한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규직의 일자리를 뒤로 한 채 비정규직의 일자리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라면 누구나 당연한 권리인 산재보험, 고용보험, 국민연금, 사회보험 등 4대 보험과도 철저히 담을 쌓을 수밖에 없다. 어렵사리 들어간 정규직의 일자리마저도 금용피해자이기 때문에 비정규직의 노동시장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자본과 정권은 금융피해자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마저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차별과 배제로 금융피해자에게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용불량자와 비신용불량자'라는 자본이 구획해놓은 차별은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적인 분배의 문제이고 평등의 문제이다. 자본과 정권이 구획해 놓은 구조적인 폐해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금융피해자의 인간다운 삶은 단 한 치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의 내용들, 즉 건강하게 일정한 수준의 삶의 질을 향유하면서 창의적인 생활을 만들고, 인간의 자유, 존엄, 자부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 속에 살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을 금융피해자에게 빚을 청산할 때까지 빼앗아 버린다. 금융피해자에게 한줄기 빛이 되고 있는 파산제도 가판대를 놓고 경품을 미끼로 카드를 반 강제로 안기고, 최소한의 신용평가도 없이 오히려 자본과 정권의 필요에 의해 대중을 동원하고 선동하면서 고리의 이자를 착취하였던 이들이 이제는 금융피해자에게 '신용불량자의 멍에'로 평생 동안 고단한 삶을 강요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인간다운 삶의 이름으로 경제회생 논리에 인간의 삶과 생존의 근본조차 허물어 버리는 정권과 자본의 무한 이윤추구 논리를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금융피해자에게 정권과 자본이 제기하는 개인의 책임논리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 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인가? 그 첫 출발이자 금융피해자들의 인간선언이 파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산을 통해서 금융피해자의 채무는 한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과 한편으로 온전히 개인에게 지워지는 빚이 사회공동의 책임이라고 명확히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인권운동연대를 비롯한 빈곤인권단체는 "금융피해자 파산학교"를 통해서 금융채무의 문제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이며 궁극적으로 인권의 문제임을 알려내고 있다. 매주 토요일 진행되는 "금융피해자 파산학교"는 금융채무자들이 지고 있는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유일하게 현실적인 법안이 되고 있는 파산을 실질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 파산에 대한 이해를 비롯하여 법률적 제도적인 준비와 관련한 교육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현재 매주 금융피해자 파산학교를 진행하였으며 파산학교를 수강한 수강생들을 중심으로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금융피해자 인권모임을 진행하고 있으나 여전히 적극적인 참여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금융채무의 개인의 책임을 넘어 사회적 책임으로 최근 대법원은 금융피해자들의 존엄성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는 판결을 내렸다. 즉 대법원은 신용카드를 적법하게 발급받았더라도 나중에 카드빚을 갚지 못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신용카드를 사용했을 경우 사기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빚을 갚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지 못하는' 금융피해자들의 피 끓는 고통을 대법원은 또 한 번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대법원의 판결은 금융채무의 문제가 여전히 '도덕적 해이'와 개인 책임이라는 논리를 한치 앞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로 인하여 금융기관 및 카드사는 너나 할 것 없이 금융피해자들을 상대로 공격적인 법률적 대응과 과도한 추심행위에 나설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벌써부터 금융피해자들은 대법원의 판결이 개인에 소송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인지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대법원의 판결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금융자본의 입장을 반영하는 은행과 여신기관의 또 다른 변죽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금융채무의 개인책임을 강요하는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금융채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으며 금융채무의 해결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요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또한 그러한 요구를 중심으로 '누가' 투쟁에 나설 것인가에 있다. 때문에 금융피해자들은 금융채무의 고통과 불법추심의 심리적 압박 그리고 사회적 냉대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반성과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금융자본의 무한 이윤의 창출을 위해 '금융채무'의 원인과 배경이 아니라 금융피해자들을 피와 땀을 쥐어짜는 금융채무정책은 단지 파산만으로 넘어서기에는 한계가 자명하다. 궁극적으로 파산이라는 고리를 통해서 노동자민중 스스로 '금융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주체화되어 금융채무의 책임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고 투쟁하는 것이 파산학교의 궁극적 목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신용불량자를 넘어 사회적 권리의 주체인 금융피해자,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빈곤해결과 노동해방의 대장정에 함께 나서는 일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자본주의 위기와 대안세계화운동 2006년 지자체 선거는 다음해 대선의 예비무대이자 집권세력의 레임덕이 더욱 빨리 드러날 것이냐를 결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집권세력은 선거전략과 대중동원을 위한 ‘소재’의 빈곤을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 타협을 통한 양극화 해소 재원 마련’이나 ‘외자확대가 한국경제의 프리미엄을 높여 전체 국부를 증진한다’는 주장의 기만성이 점차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현정부가 민중에게 무언가 양보할 수 있다거나 정부의 정책개혁의 큰 틀이 변화될 수 있다는 기대는 여전히 자라나고 있다. 이는 한국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허구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할 때만 지속될 수 있다. 따라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은 사회운동의 진전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미국 제국주의의 새로운 형세 미국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통해 해외로부터 엄청난 부를 수탈하는 메커니즘을 향유했다. 미국이 해외에서 흡수하는 자본소득은 미국기업이 국내 활동으로 얻는 이윤의 80% 수준에 이른다. 여기에 미국이 원자재, 특히 에너지 가격에 압력을 가하여 얻는 이득과 주변부의 저렴한 노동력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세계적인 부의 이전은 막대하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미국 경제는 심각한 불균형에 직면했다. 수입 증가가 수출 증가를 훨씬 앞지르면서 무역적자는 계속 확대되어 2000년 이후 GDP 4% 수준을 계속 상회하고 있다. 또한 무역적자에 조응하여 미국 내 외국인의 자산 규모가 급격히 증가하고(즉 외국은 무역을 통해 번 달러를 미국에 다시 투자하고 있다), 미국이 여기에 지불해야 하는 자본소득도 늘어나고 있다. 미국 내 외국인 자산은 1984년 GDP 대비 19%였으나, 2003년 72%로 증가했고, 미국의 해외자산 규모의 두 배에 해당한다. 그러나 미국이 해외자산을 통해 얻는 자본소득은 외국이 미국 내 자산으로 얻고 있는 규모와 거의 동일하다. 이는 미국의 수익률이 두 배나 높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미국 제국주의는 해외에서 강력하게 소득을 흡수하고 해외 자본가, 기업, 국가에게 그것을 다시 지불하고 있다(이를 ‘달러 환류’라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미국이 해외에서 소득을 빨아들이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러한 궤도가 무한정 지속될 수 없다. 미국의 대외불균형이 계속 악화되면 미국에 대한 투자가 중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가지 경로로 진행될 수 있다. 먼저 달러의 가치하락으로 귀결될 수 있다. 달러 가치하락은 미국의 무역적자 교정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환율 변화가 일본의 대미 무역흑자에 큰 변화를 주지 못했던 것처럼 이러한 변화가 자동적인 것은 아니다), 미국의 금융지배력과 국제적 지위를 악화시킬 게 분명하다. 물론 미국이 이자율을 높여서 달러를 방어하려고 시도할 수 있지만, 이 역시도 외국에 지불하는 소득을 증대시킴으로써 불균형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또한 미국이 해외자산규모를 더욱 확대하거나, 무역적자를 통제하는 수단을 강구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현재보다 더 빠른 수준으로 자산규모를 늘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공산이 크다. 또한 무역적자 악화의 주요 원인인 부유층의 가계소비를 축소하려는 시도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적인 지지층의 반발을 초래할 정치적 위험이 있다. 이처럼 날로 심각해지는 미국 제국주의의 모순은 세계자본주의와 착취자들의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미국이 쌍둥이 적자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의 파괴는 곧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위기, 나아가 세계자본주의의 동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경제정책과 동아시아 미국 경제의 불균형에 대한 우려가 커질수록 이런 우려 자체가 대미투자를 감소시켜 불균형을 심화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미국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상황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부시정부는 2009년까지 현재의 재정적자를 절반 이하로 축소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대규모 전비가 지출되었고, 감세조치의 영구화와 연금개혁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현실화되긴 어렵다. 따라서 부시정부는 환율·통상 등 대외경제정책을 통해 경제적 난관을 부분적으로 타개하려고 한다. 물론 이는 위기의 대가를 타국의 민중에게 전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부시정부는 자유무역지대 창설을 통상정책의 핵심수단으로 활용하고, ‘경쟁적 자유주의’ 전략을 채택하였다. 이는 미국이 FTA를 체결한 나라에게만 미국시장 접근을 허용함으로써, 차별을 우려하는 다른 나라도 FTA를 체결하도록 압박하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FTA를 단순한 교역확대수단(관세인하)으로 여기지 않고 비관세장벽의 제거와 경제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이용하며, 다자간무역협정의 선례로 활용하고자 한다. 즉 단순히 무역적자 교정을 넘어서 초민족기업의 자유로운 활동과 미국의 금융적 지배를 보장하는 수단이다. 최근 부시정부는 무역적자를 통제하기 위해 달러 약세를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해외 중앙은행이 달러 급락을 막기 위해 달러표시 자산을 계속 매입할 것이라고 예견하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장기적으로 달러 가치를 주요 통화 대비 20-40%의 절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이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7% 수준에 이르러 동아시아 통화를 중심으로 환율조정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특히 미국 의회는 위안화의 추가절상을 위해 무역 제재를 준비중이다). 부시정부 2기와 민주주의·인권외교 이라크 전쟁은 부시 정부의 핵심적인 관심사다. 부시정부는 이라크 전쟁의 승리가 “이라크 보안군이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이라크가 더 이상 테러리스트의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게 될 때” 달성된다고 규정했다. 이 정의를 따르면 미국의 승리는 요원하다. 미 의회는 2006년 이라크, 아프간 전쟁과 범세계적 대테러전쟁 비용으로 3500만 달러를 승인해야만 했다. 이 규모는 한국전쟁 당시 전체 비용과 맞먹는다. 또한 부시정부는 더 이상 의회에 이라크 재건 기금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이라크 재건지원이라는 허울마저 던져버렸다. 하지만 부시정부는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을 사후적으로라도 추인 받고 싶은 듯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확산을 위해서는 국제기구와 국가주권의 메커니즘을 위반하는 일방주의적 개입도 충분히 정당하다는 접근법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물론 부시 정부 2기가 출범한 후 이른바 네오콘의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미국의 새로운 전쟁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많이 잦아들었다. 그렇지만 공화당이 다수를 장악한 미국 의회는 민주당 인사들의 도움을 얻어 민주주의증진법(ADVANCE Act)을 준비하고 있다. 이 법안은 ‘세계 45개 독재자들을 2025년까지 끌어내린다’는 목표로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비폭력적 수단에 호소해 정권교체를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담고 있다. 법안은 국무부 담당 하에 처음 두 해 동안 민주화운동에 2.5억 달러를 지출하고, 민주화에 저항하는 국가의 자금흐름을 차단할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할 계획이다. 결국 이는 탈냉전 이후 클린턴 정부의 ‘다자주의’나 세력균형 정책과 다르고, 인권 이슈를 제기해 공산권과 데탕트(무역협정이나 군축협정 체결)에 찬물을 끼얹는 민주당과 공화당에 포진한 냉전 매파의 전통적인 ‘인권외교’의 확장판이다. 이러한 변화에 조응하여, 최근 미국은 북한인권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제기하고 위조화폐-마약 등 불법거래 자금차단에 나서면서 6자회담이 큰 위기에 처했다. 특히 북한인권 의제는 한반도 정세에 장기적인 변수로 작동할 것이다. 북한과 미국-한국 사이에 협의가 긴밀해질수록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초민족자본의 한국경제 지배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협약을 거치며 초민족자본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업매각을 통해 외국인직접투자 크게 증가했고, 외국인의 주식보유 비중은 2004년 말 42%에 이르렀다. 당연히 개별기업에서도 외국인 지분 비중이 확대되고 있다. 특히 금융업 부문에서 직접투자가 크게 증가해서 SC제일, 외환, 한국씨티은행이 외국계 은행으로 분류되며, 우리금융지주와 전북은행을 제외하면 모든 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이 60%를 초과했다. 따라서 '외국자본'의 성격과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둘러싼 논란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04년 영국계 홍콩자본인 BIH가 브릿지증권의 유상감자를 실시해 1000억원 이상의 자본금을 회수한 사건은 논란에 불을 지폈다. 외국자본의 높은 배당 성향과 외국자본이 가져가는 배당액 전체 규모도 문제가 되었다(외국자본이 챙긴 배당액 규모는 1998년 5억 달러에서 2003년 33억 달러로 급증했다). 또한 외국자본이 거래소 상장을 폐지하여 자본조달보다는 단기이익을 추구한다거나, 외국인직접투자 비중이 줄고 포트폴리오 투자의 비중이 높아지며, 직접투자로 분류되더라도 공장을 새로 세우는 게 아니라 사실상 지분 참여 수준의 인수합병(M&A)형의 비중이 증가한다거나, 한국기업들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 매입에 나서며 설비투자가 감소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외국자본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소액주주운동을 펼치며 초민족기업이나 기관투자가가 편에 섰던 쪽은 이러한 비판이 ‘외자 마녀사냥론’이고, 재벌개혁의 문제를 뒤로 미루고 ‘사이비 민족주의’를 부추긴다고 대응했다. 그런데 최근 논쟁은 더 첨예해지고 있다. 2005년에 주식배당액으로 외국자본이 가져간 금액이 2004년보다 50% 급증한 73억 달러에 이르고, 2005년 주가 폭등 과정에서 외국인들이 3조 6천억원 어치의 주식을 처분해 엄청난 차익을 실현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소버린의 SK(주)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나 헤르메스의 삼성물산 경영권 위협 사건도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기업이 외국자본의 적대적 M&A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다양한 방어장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특히 삼성은 이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하고 있다. 최근 정부가 주식거래에 대한 과세를 검토중이라는 발언이 나오면서 또 다른 논란도 일고 있다. 물론 반대하는 입장은 국내 상장사 지분의 40%가 외국인이어서 자금이탈 가능성이 높고, 홍콩-싱가포르 등이 자본이득과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세우고 있다. 물론 이런 논쟁의 와중에도 한국 자본 역시 초민족화에 적응하기 위한 해외투자와 ‘글로벌경영’에 뛰어들고 있다. 한국 금융사 역시 해외투자 펀드를 내놓고 있으며, 퇴직연금과 각종 연기금 역시 해외로 투자대상을 더 확대해 나갈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2003년에 60만대 규모의 중국공장을 세웠고 2005년에는 30만대 규모의 미국 공장을 설립했다. 또한 2006년에는 외환위기 이후 정부, 법원, 채권단의 관리에 처해 있던 대형기업들의 매각이 이루어져, 글로벌펀드와 국내 사모펀드의 각축도 치열해질 전망이다. 이처럼 국제금융기구, 한국정부, 신자유주의 NGO는 초민족자본의 직접적인 지배력을 보장했고, 한국의 기존 재벌은 초민족화를 대세로 받아들이며 명운을 걸고 초민족화의 혈로를 찾고 있다. 물론 한국 경제의 급격한 재편과 초민족자본의 지배력이 확대에 따라 삼성과 같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로비와 여론조성에 몰두해야 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스탠다드와 재벌개혁(지배구조개혁) 대 한국자본 보호(적대적 M&A 방어)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세계경제의 위기 때문에 초민족자본과 한국 자본 일부의 공생·경쟁관계가 작동하는 토대가 무너지는 것이 문제다. 미국이 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자본소득을 퍼올리고, 세계는 미국에 상품을 수출함으로써 달러를 벌어들여 이를 다시 미국에 투자하는 ‘달러 환류’ 메커니즘이 미국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생산성 하락과 이윤율 저하)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수출분야의 팽창, 한국증시의 급상승과 같은 현상은 미국의 금융세계화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는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유지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체계가 위기에 빠지면 한국 경제의 종속성과 취약성은 더욱 극적으로 표출될 것이다. 한국경제의 장기불황과 노무현 정부의 집권 하반기 프로그램 주식시장은 팽창하고 천문학적 규모의 M&A가 이뤄지면서 금융지배력과 집중력은 날로 강화되지만, 한국 경제는 경기회복은 매우 짧고 경기침체는 매우 오래 이어지는 장기불황에 빠져들었다. 인민주의적인 선거전략과 대중동원에 의존해 집권에 성공한 노무현 정부로서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과 경제적 이해가 맞물려 있는 ‘비즈니스 네트워크’로 전환한 386세대, ‘개혁적’ 지식인과 기술관료 NGO,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 대중의 일부 상층부의 명예욕과 실리주의를 자극하고, 청년층 도시프롤레타리아의 감정적인 지지를 일시적으로 이끌어 내고, IMF 구제금융협약 이후 위기에 빠진 지역들의 소외감을 자극함으로써 일시적인 지지층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는 특정한 정치이념을 보유한 다계급연합이 아니라 계급형성을 봉쇄하는 ‘탈계급연합’일 뿐이며 사상누각처럼 불안정하다. 따라서 노무현정부와 세계 곳곳에서 만개한 인민주의 정치스타일의 공통점은 지지층의 휘발성이 매우 강하며, 따라서 지지율이 급상승과 급락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대통령 탄핵 시도로 기사회생하여 2004년 총선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내친 김에 자신의 권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한 권력구조 개편, 즉 개헌까지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연정제안 실패와 2005년 10월 재보선 참패 때문에 목표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지난해 말 노대통령은 ‘남은 임기 2년 간의 미래구상’을 1월 또는 2월에 발표하겠다고 공언했고, 여기에는 노대통령의 탈당과 거국내각 구성, 임기단축과 조기개헌론 점화와 같은 충격적인 제안이 포함될 수 있다는 추측이 무성했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권력구조의 개편은 특정 정치분파가 압도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이를 공고화할 수 있는 조건에 도달하거나, 사회경제적 위기가 정치적으로 표출됨으로써 지배세력의 ‘집단적인’ 책임이 긴급해진 경우에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집권세력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처해있다. 한국경제의 장기불황이라는 조건에서 이질적인 지지층을 포괄할 수 있는 정책개혁 전망을 제시할 수도 없고, 한국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초민족자본이나 대자본에게 개헌을 매우 긴급한 과제로 제시할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권세력에는 소폭 수준이더라도 개헌을 시도해야 한다는 입장, 현재의 위기관리 체계의 근간을 유지하고, 이 체계에 여러 사회운동 세력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포섭해야 한다는 입장이 혼재해 있다. 개헌에 미련을 두는 입장은 내각제나 ‘사회적 대타협’의 틀로서 상원제 도입이 어려우면 대통령과 국회위원 임기불일치 조정과 대선 결선투표제 도입이라도 해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집권 핵심층은 중도개혁-진보진영의 연대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결선투표제 도입을 선호한다고 알려졌다). 한편 열린우리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의 하나로 꼽히는 정동영은 개헌이나 정계개편을 포함한 중장기적 정치프로그램에 대해 뚜렷한 전망을 제시하지 않은 채 열린우리당 내의 확고한 입지 구축에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한 명의 주자인 김근태는 ‘양심세력통합론’을 제시하며 ‘외연을 넓힌 통합을 시도해야 하고, 지방선거 이전 통합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어떠한 입장도 집권세력 내에서 확고한 정치프로그램으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정치 전망의 불투명성은 경제위기의 불가피한 특징이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신년연설에서 정치프로그램에 관한 ‘미래구상’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취임 전부터 검토된 사회경제정책 묶음을 다시 꺼내들었다. 물론 청와대는 ‘정파적 이해를 떠나 국가 미래과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의사결정 시스템 마련’(저출산고령화, 국민연금 등 중장기적 정책과제 해결)이 노대통령의 주요 관심사라고 포장했다. 하지만 오늘날 인민주의가 구사하는 사회정책은 국가온정주의라는 보수주의에 훨씬 더 가깝고,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실행하는 종속적 수단으로 전환된다. 완전고용과 같은 케인즈주의 목표는 제거되고, 장기실업층을 산업예비군으로 포섭하려는 사회정책이 ‘국민통합’이라는 명분으로, 국가의 시혜 형태로 제공된다. 또한 간접세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거나 노동신축화에 대한 반대급부로 제시되는 다소간의 증세를 통해 국가가 확보한 약간의 재원으로 특정 층을 겨냥한 복지정책이 활용된다. 그러나 국가의 시혜에 의존하라는 인민주의 정책은 노동자운동,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해체하는 수단으로도 기능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1월 18일 신년연설을 통해 제시한 한국경제의 중장기적 과제와 정책방향은 인민주의 전략의 전형적인 사례다. 연설에서는 양극화 해소를 위한 재정 확충,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 보호, 부동산과 사교육비 문제가 보수세력의 악의적인 선동만 없다면 머지 않은 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다는 듯이 역설했다. 또한 노대통령은 각각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노무현정부의 경제․사회정책에 대한 언론과 학계의 ‘대리전’을 유도하려는 의도를 보였다(이미 지난해 ‘사회양극화해소를 위한 국민연대’가 결성되어 이러한 의도의 일단이 드러나기도 했다). 물론 증세는 부유계급에 대한 수사적 공격을 통해 노무현 정부의 인민주의적 대중동원에 활용될 여지도 있다. 그렇지만 인민주의적 공격이 부유계급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공문구에 그칠 때가 많지만, 민중에게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통을 강요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노무현정부는 성장잠재력의 약화, 사회양극화의 심화, 저출산고령화를 비롯한 새로운 미래 위험요인의 등장이 한국경제의 당면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값싼 노동력 투입의 둔화(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산업예비군층의 축소)와 설비투자의 감소, 생산성 향상의 저하에 따른 성장잠재력의 고갈, 산업부문·업종·기업·계층간 양극화 심화는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한국 경제가 택한 신자유주의 생존전략의 필연적인 귀결일 뿐이다.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와 대안세계화운동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장기불황에 빠져 있다. 국제금융기구의 경제구조조정에 편승해 신자유주의 정책에 적응한 일부 산업·기업은 주가폭등, 수출확대를 통해 팽창에 성공했지만, 이는 결국 초민족자본의 자본소득과 경제지배력 확대에 기여한다. 최근 초민족자본의 성격과 이들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따른 논쟁이 확산되고 있지만 글로벌스탠다드와 재벌개혁을 외치든 재벌총수의 경영권 방어를 추구하든 이는 민중에게 다른 형태의 재앙일 뿐이다. 노무현정부는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려 있고, 매우 빠른 시일 내에 ‘레임덕’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계승하면서도 인민주의적 대중동원에 의존해 지지층을 끊임없이 재규합해야 하는 지극히 어려운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정부는 기술관료-NGO를 매개로 위기관리체계를 유지하고 사회운동을 공격 또는 포섭하면서, 임시방편적인 수단에 의지해서 정치적 국면들을 돌파해왔다. 그러나 아랫돌을 빼내서 윗돌로 얹는 조삼모사 방식의 양극화 해소 방안은 민중에게 더 큰 고통을 강요하려는 수단일 뿐이다. 물론 노무현정부의 집권 이후 인민주의적인 정치토양은 더욱 굳건해졌다. 하지만 세계경제의 위기는 초민족자본과 한국 자본의 ‘공생관계’를 근저에서 잠식하고 있으며, 한국 지배세력의 정치프로그램을 제약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유일한 대안이라거나, ‘외국자본’에 대항해 한국자본을 보호해야 한다거나, 현 정부와의 대화나 협약을 통해 민중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다는 모든 주장은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거부한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근본적으로 지양하려는 사회운동은 위기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서만 대안세계화운동에 적합한 노동자운동의 개조,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결합,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전운동의 결합이라는 우리의 과제를 펼쳐나갈 수 있다.
1.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한 한국민중투쟁단, 이하 한국민중투쟁단]은 지난 8일 동안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WTO 반대! 도하개발의제 중단!’, ‘열사정신 계승!’을 위해 이 곳 홍콩에 모인 전 세계의 민중들과 함께 투쟁했다. 해상시위, 삼보일배, 촛불시위 등 평화적이면서도 강력한 투쟁으로 홍콩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한국민중투쟁단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빈곤과 불평등, 전쟁과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 내고, 전 세계 민중의 삶과 권리를 지켜내기 위한 투쟁이었다. 개도국과 최빈국에 자유무역의 혜택을 확산한다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은 여전히도 개도국, 최빈국의 반발을 사며 난항을 거듭하고 있으며, 결국 별다른 진전 없이 폐막했다. 이렇듯 WTO가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동안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세계 민중의 분노는 날로 커지고 있으며, 이에 맞선 민중들의 연대와 단결은 더욱 굳건해지고 있다. 2. 전 세계 민중의 삶과 권리를 지켜내기 위한 우리의 투쟁에 대해 WTO와 홍콩 정부의 과잉 대응은 이곳에 모인 세계의 민중, 홍콩 시민, 그리고 전 세계 모든 이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한 행동 주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홍콩의 언론은 한국의 노동자, 농민을 폭도로 매도해댔다. 각료회의가 열리는 컨벤션센터 주변을 시위 금지구역으로 선포하는가 하면, 인적이 드문 곳에서만 집회를 허용하는 등 민중들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권리를 침해하였다. 심지어 페퍼스프레이, 최루탄, 전기곤봉, 고무탄, 물대포를 동원하여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가 하면 각료회의 폐막 전날인 12월 17일 집회 및 행진 참가자를 전원 연행하였고, 그 중 한국민중투쟁단 11명 등 총 14명을 구속기소하였다. 우리는 홍콩 정부와 경찰이 아닌 WTO를 상대로 한 우리의 투쟁을, 전 세계 민중의 삶과 권리를 지켜내기 위한 우리의 투쟁을 이렇듯 폭력적으로 가로막은 홍콩 정부당국과 경찰에 분노한다. 3. 뿐만 아니라 18일 새벽부터 오후까지 12시간에 걸친 연행 과정에서, 그리고 우리가 여러 경찰서에 구금되어있는 동안 홍콩 경찰은 우리를 범죄인으로 취급하며 부당하게 대우했고 심각한 인권침해를 자행했다. 저항하지 않고 연행에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케이블 타이(Cable tie)를 강제로 채우고 이를 거부할 경우 뺨을 때리거나 구타했고, 전화를 통해 연행사실을 알리거나, 음식을 공급받거나 치료를 받을 권리 등 연행되었을 경우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충분히 공지하지 않았음은 물론, 이를 요구할 시 위압적인 자세로 협박하며 거부했다. 우리는 이렇듯 전 세계적으로 비난을 사기에 충분한 홍콩경찰의 인권탄압에 대해 사례를 낱낱이 조사하고, 고소고발 등 강력하게 대처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민중투쟁단 11명을 비롯한 14명의 구속자를 조건 없이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세계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것임을 경고한다. 4. 아울러 우리는 홍콩정부의 과잉대응, 그리고 뒤이은 인권침해 등 <WTO 홍콩각료회의 저지 행동주간> 기간 동안 빚어진 일련의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데에 대한 책임이 한국정부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한국 정부는 천 명이 넘는 한국투쟁단이 연행되는 과정에서도 수수방관 했으며, 연행과정과 유치장에서 벌어진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홍콩의 실정’이라며 애써 무시했고, 심지어 11명의 기소자에 대해 도주 우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원보증을 거부하여 구속되도록 했다. 우리는 한국 정부의 이러한 무책임한 태도를 강력하게 규탄한다. 5. 홍콩 WTO 각료회의의 별다른 진척 없는 폐막, 한국민중투쟁단을 비롯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폭력 진압과 인권탄압은 WTO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과 폭력성을 여실히 드러내며 전 세계 민중의 분노를 촉발했다. 이번 홍콩에서의 투쟁을 계기로 하여, 빈곤과 폭력을 확산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우리의 투쟁, 전 세계 민중의 투쟁은 더욱 굳건해 질 것이다. 2005년 12월 20일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한 한국민중투쟁단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살인이다 지난 10월 15일 대한민국의 노무현 정부는 농민집회에서 두 명의 농민을 살해했다. 지난 12월 18일 새벽 홍콩 정부는 WTO에 반대하며 집회를 진행하던 1000명의 민중을 잡아가뒀다. 한 편에서는 전 세계 지배자들의 밀실에서 초민족적 독점자본을 위한 세계질서 마련을 위한 음모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고, 한 편에서는 그 공모의 결과를 이행하기 위한 정부기관의 조직적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다. 꺼져가는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우리 스스로 죽지 않기 위해 우리는 WTO각료회의를 중단하고 DDA협상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울의 여의도를 걸었고, 홍콩의 컨벤션 센터를 걸었다. 12월 17일 오후부터 WTO 각료회의를 반대하는 시위를 진행했던 홍콩 투쟁단이 현지시각 18일 새벽 3시경부터 무려 8시간에 걸쳐 연행되었다. 홍콩 경찰은 감옥과 같은 차가운 유치장에 시위대를 몰아넣고 구타와 욕설, 반인권적 처우로 일관했다. 심지어 기본적인 생리문제 요구조차 외면하고 수갑을 채운 채 범죄자 취급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전 세계 언론과 민중이 주목한 상황에서 홍콩 경찰의 이와 같은 뻔뻔함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WTO가 진행되는 장소로서 WTO 수호의 첨병을 자처한 이들은 WTO가 ‘상호 호혜로운 자유무역’을 가능케 하는 민주적 협상기구라는 거짓믿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WTO의 결정사항을 민중을 절망과 분노에 몰아넣을지라도 그들을 제압하고 심지어 살인할 각 국 정부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시위대가 돌아오면, 아니 전 세계 민중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WTO에 반발하면 그들을 다스릴 전 세계의 정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민중들을 자신의 집, 고향, 고국을 떠나 마치 자연스러운 것인 양 이주하게 하거나, 아니면 죽임으로써, 아니면 죽음 직전의 공포로 다스릴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WTO를 해체하라 WTO는 내년 3월까지 DDA협상을 논의할 각료회의를 다시 열겠다며 18일 회의를 폐막했다. 애초에 DDA협상은 올해를 협상시한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이번 각료회의에서는 비농산물 분야의 관세를 감축한다는 결정이 채택되었으나 농산물의 관세 감축과 상한 설정 여부는 논의되지 않았다. 한국이 속한 농산물 수입국 G10, 각각의 개도국 그룹 등의 반발과 미국과 EU의 대립이 그 원인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엔진은 제 스스로의 모순에 걸려 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관계자들은 이를 ‘다자주의’의 한계라며 양자 간 협상의 강화 등 WTO 협상의 유연화 주장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19, 20일 미국산쇠고기 수입협상을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이번 협상과정에서 14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협상진전을 위해 농업부문의 양보를 밝히기까지 했다. 실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은 이미 폭로되었다. WTO가 주도하는 세계는 불공정하다. WTO가 수호하는 금융 수혜는 극소수에 향하고 빈곤과 불평등은 날로 확산되고 있다. WTO가 주도하는 세계는 민중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WTO가 주도하는 세계는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홍콩에 모여 반 WTO를 외쳤던 수 천 민중들과 회담장까지 가기 위해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이국땅에서 삼보일배까지 해야 했던 한국시위대의 몸짓 하나하나가 그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이 제멋대로 망쳐놓은 세계를 민중의 힘으로 복구하고 민중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조직적 살인행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민중의 투쟁은 목숨을 건 싸움이기에 끝내 승리할 것이다. 노동자, 농민이 죽어나가는 세계는 더 이상 우리의 세계가 아니다. 더불어 이 죽음을 기획하고 확산하는 정부는 더 이상 우리의 정부가 아니다. 홍콩 시민들의 연대의 메시지가, 전 세계 민중의 피눈물과 절규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죽음을 부르는 DDA협상 전면 중단하고 WTO 해체하라. -폭력연행과 강제진압, 홍콩경찰 사과하라. -노무현 정부는 쌀개방 정책을 철회하고 폭력살인 책임져라. 12월 20일 사회진보연대
이강국, 2005, 『다보스, 포르투 알레그레 그리고 서울: 세계화의 두 경제학』, 후마니타스. 내가 세계화란 말을 들은 지도 10년이 넘어간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YS가 동남아를 순방하고 돌아온 직후 국제화는 세계화로 바뀌었고, 'Globalization'은 'Segyehwa'로 표기되었으며 국가적 의제로 대두되었다. 이 단어는 집회현장에서도 등장하였다. 94년 UR 협상 반대 투쟁 때였다. 과 동기 한 명이 "세계화한다 Ⅹ지랄말고 농업개방 중단하라!"라고 외쳤던 구호가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세계화는 WTO 체제의 등장 속에서 한국경제의 '갱'쟁력 강화를 위해 제시되었고 그 이후 '세계화'는 IMF 위기를 거쳐 '정보화'와 함께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었고 관련서적은 넘쳐났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세계화의 실체를 꿰뚫어 보고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는 논의는 드물며, 세계화의 본질과 영향, 그리고 그 전망에 대해서는 논란만이 분분한 현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여기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저자의 분석은 기본적으로 세계화의 두 얼굴(다보스와 포르투 알레그레)을 보여주고 세계화라는 현상에 대해 찬반의 태도를 정하기 전에 보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는 게 먼저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세계화는 무조건 선이며 개방과 자유화가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과도한 낙관론과 세계화는 재앙이며 반대해야 한다는 과도한 비관론이 평행선처럼 대립하고 있으며,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양쪽 모두 세계화의 한 쪽만을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화가 경제성장, 빈곤, 소득분배, 그리고 국가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무척이나 복잡하며 우리의 삶에 미치는 함의도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 '세계화 들여다보기'에서는 세계화의 역사와 정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저자는 세계화로 포착되는 새로운 변화는 단순히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라 1970년대 초반 이후 자본주의 경제에 닥친 심각한 위기와 1980년대 이후 전개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논증한다. 즉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초반 심각해진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대응한 자본의 축적전략인 것이다. 세계화는 1970년대 경제위기 이후 발전한 세계경제의 통합과정, 즉 금융자유화와 무역자유화의 확대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과정은 수익성 하락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인 발전으로 80년대 선·후진국의 자본자유화와 시장개방, 그리고 자유화와 규제완화 등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세계화에 대해서 주류경제학자들은 자본과 상품의 전 세계적인 이동이 투자를 촉진하고 효율성을 상승시켜 경제성장을 촉진하며 선후진국간의 격차도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제무역은 시장을 확대하고 경쟁을 촉진하며 생산성을 높여주고, 국제적 자본이동은 후진국의 부족한 투자재원을 메워주고 투자의 효율성을 높여서 경제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논리였다. 한편 비판적인 논의들은 국제무역의 이득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특히 금융세계화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강조한다. 자본자유화가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주장은 금융시장의 실패로 인해 그 근거가 취약하고 금융세계화는 오히려 금융위기와 같은 새로운 위험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것이다. 비판적 논의에 따르면 기존의 신화적 해석 내지 장밋빛 주장들의 근거가 실은 매우 약하다. 저자는 계량경제학에 힘입어 수치로 표시되는 자료에 의존해 금융과 무역의 자유화가 과연 성장과 분배에 있어서 도움이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많은 연구들은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세계화의 이득을 주장하지만 같은 통계자료와 수치를 가지고도 정반대의 비판적 논의도 가능함을 저자는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지점이 이 책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책은 자본자유화와 무역자유화의 성장효과에 관한 최근의 논쟁을 소개하면서 통계적 자료를 통해 비판과 반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동일한 통계자료가 연구자에 따라 사회적 맥락에 의해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중립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이라고 포장되는 실증주적의적 방법론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부 '세계화와 그 불만'에서는 세계화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소득분배의 문제에 대해 주류경제학과 비판경제학의 입장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세계화의 불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화를 비판하는 이들은 세계화가 후진국의 빈곤과 아동노동을 심화시키고 각 국의 빈부격차 그리고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격차도 확대되는 주범이라 비판해왔다. 실제로 80년대 이후 세계화의 진전과 함께 국내적으로나 전 세계적으로 소득분배는 전반적으로 악화되고 있으며 동아시아 국가들의 급성장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성장은 더욱 정체되고 있다. 그러나 반세계화론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선진국 임금격차의 악화는 기술진보 등 다른 요인이 더욱 중요하며 후진국의 빈곤문제에 미치는 세계화의 영향도 일방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웃소싱의 영향이나 금융위기의 파괴적인 효과 등과 함께 신자유주의 정책의 영향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지만 세계화에만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은 옳지 않다. 개도국의 노동 착취문제에 대해서도 세계화를 개도국의 노동착취 주범으로 모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응이라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세계화와 빈곤의 인과관계가 반드시 일직선이지만은 않다는 사실, 지역 간 격차도 크고 국가의 대응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저자는 반세계화를 일방적으로 내걸기 전에 세계화의 영향과 효과를 보다 자세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저자는 세계화와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세계화의 진전으로 국가의 역할이 더욱 축소되고 지역정부나 국제적 기구의 재편 등 새로운 지배구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국가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고, 일방적으로 약화되는 대신, 국내의 제도적 특성과 역관계를 반영하여 세계화와 상호작용하며 재편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또한 새로운 국제적 거버넌스 확립의 가능성은 불확실하지만 열려 있으며 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반세계화운동을 살펴보고 있다. 저자는 반세계화 모임의 다양한 그룹들과 그 주장들을 설명한다. 또한 이 그룹들이 보여준 그동안의 실천적 영향력에 대해 높이 평가를 한다. 그러나 반세계화 그룹의 내부문제에도 눈길을 떼지 않는다. 저자가 말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반세계화 운동 그룹이 내부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여러 그룹들의 혼재라는 점이다. 선진국 NGO중심이란 것도 문제가 된다. 개별 국가 간 이해관계가 충돌되기도 하는데 이를 어떻게 반세계화의 기치아래 모을 수 있는 가가 향후 가장 큰 쟁점이 될 것이다. 즉, 반세계화운동은 앞으로 진보운동의 핵심적인 영역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이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전 세계적 사회정의운동 간의 갈등이 21세기 자본주의의 가장 치열한 전선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운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누구나 인식하듯 반세계화의 외침만이 아니라 대안적 세계화의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너무나 다양한 단체들의 각양각색의 반세계화운동에 대해 명확한 입장과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것은 경청할 만하다. 이러한 고민과 저항이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질 때, 반세계화운동의 보수적, 퇴행적 요소를 극복할 수 있으며 '그들만의'의 세계화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할 것이다. 3부는 한국경제의 역사적 변화를 금융세계화와 관련하여 설명하면서 IMF 위기 이후 한국에 밀어닥친 금융개방이 한국경제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해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경제의 기적적인 경제성장은 주류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전면개방이 아니라 세계경제에 대한 전략적인 통합과 개방 과정에 대한 관리에 기초한 것이었다. 수출과 외국자본의 역할이 경제성장에서 무척 중요했지만, 자율적이고 발전 지향적인 정부가 국제무역을 관리하고 외국자본을 강력히 통제하며 생산적인 투자를 촉진하고 경제발전에 성공했던 것이다. 저자는 한국경제의 위기는 발전국가가 무너진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금융개방 조치 때문이었다는 분석을 제시한다. 위기 이후 IMF와 정부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함께 금융부문 등을 포함하여 경제를 전면적으로 개방했고 외국자본의 힘이 급속히 강화되는 가운데 투자와 성장잠재력의 저하 그리고 소득분배율의 약화, 나아가 경제의 불안정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새로운 발전국가의 역할에 기초하여 단기금융자본에 대한 규제와 외국자본에 대한 선별적 접근 그리고 생산적 금융시스템의 확립과 보다 민주적인 구조개혁 등 단순한 개방과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서 전략적인 세계화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저자는 세계화가 경제성장, 빈곤, 소득분배, 그리고 국가의 역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선과 악, 축복과 재앙 그리고 기회이며 덫이라는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저자는 한 얼굴만을 강조하는 양 극단의 주장은 모두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안고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는 양쪽 모두에서 만족스러운 답을 구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세계화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대신 어떻게 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한 세계화가 가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임을 강조한다. 나는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저자는 이분법을 뛰어넘어 세계 지도자들과 주류경제학자들은 세계화의 어두운 면에 대해 더 심각하게 고민하고, 포르투 알레그레의 반세계화 시위대들은 감정에 호소하는 대신 세계은행 경제학자들의 여러 연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반세계화를 뛰어넘는 대안적 세계화가 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한 세계화가 될 수는 없다. 세계화의 악영향을 최소화하고 이득을 극대화하는, 특히 생산적인 자본이동과 무역의 이득은 극대화하면서도 경제의 불안은 최소화하는 선별적 세계화는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지속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상 세계경제기구나 글로벌 NGO가 내세우는 이러한 주장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너무나 소박한 주장이다. 세계경제기구나 NGO가 주도하는 시민사회의 변화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글로벌 자본주의에 적합성을 가진 '순응적 시민사회'(civil society with globalization)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신자유주의와 글로벌 자본주의의 '순응적 시민사회'로 구축된 구조적 제약 속에서의 연대는 역시 자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운동들은 국가 및 시장의 제도화된 질서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영역에서 시도되는 급진적 저항이 아니라 순응성의 제약 속에서 저항하는 '자기 제한적 급진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민들의 권리를 제약하고 세계화의 고통 속에서 인민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세계화는 우리의 대안적 세계화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안세계화운동은 국제금융 무역기구와 초민족 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위로부터의 세계화)가 아닌 인민들의 운동의 국제주의(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보수적 퇴행적 반세계화운동'과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넘어서는 대안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반문해야 한다. 국가나 이익집단의 경계를 초월하는 공동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를 만들 수 있는 비전과 힘은 어디에 있는지, 대안세계화를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새로운 전망을 만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만들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의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왜 반세계화를 해야 하는지?"라는 물음에 여전히 "전쟁과 빈곤, 실업을 양산하니까,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노동권을 파괴하니까, 여성을 빈곤화하고 여성노동권을 제한하니까"라는 당위적인 답변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서평이 다분히 요약, 발췌하는 식이 되었다. 난삽하기까지 하다. 이 서평을 읽는 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변명을 하자면 나에게 경제학과 대안세계화는 아직도 어렵기 때문이다.
12월 11일~ 18일 홍콩에서 열리는 WTO 6차 각료회의 저지투쟁 준비를 위한 자료집입니다. I. 민중의 삶을 초국적 자본의 이윤놀음과 맞바꾸려는가? : 도해개발의제의 내용과 문제점 1) 도하개발의제란? 2) GATT에서 도하개발의제까지 3) 도하개발의제, 무엇이 논의되나? 4) 우리는 왜 도하개발의제에 반대하는가? II, 6차 각료회의 저지투쟁에 나서는 우리의 입장 1) 투쟁기조 2) 주요구호(한글/영어/중국어) 3) 홍콩현지투쟁원칙 III. WTO 6차 각료회의 저지 한국민중투쟁단 홍콩 현지 주요 일정 (참고: 주요 워크샵 및 해외단체 일정) IV. 기타 1) 홍콩에 관한 정보 (자료제공- 홍콩민중동맹) 2) 준비해갈 것 (개인지참물/선전물) 3) 홍콩에서의 평화적 시위 (자료제공- 홍콩인권감시단) 신자유주의세계화반대민중행동 (전국민중연대, 자유무역협정 WTO반대 국민행동, 범국민교육연대, 에너지노동사회네트워크 [단체]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노동인권회관, 노동자의힘,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다함께, 문화연대,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민족정기수호협의회, 민주노동당, 민주노동자연대,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민중의료연합, 반미여성회, 보건복지민중연대, 보건의료단체연합, 사회진보연대,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전국농민회총연맹,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빈민연합,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연합, 전국학생연대회의, 전태일을따르는민주노조운동연구소, 카톨릭노동사목, 통일광장, 투기자본감시센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한국노동조합총연맹,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한국청년단체협의회, 한국카톨릭농민회 )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에 나서는 한국민중투쟁단의 입장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 세계 민중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초국적 자본은 민중들의 식량주권을 빼앗고 토지와 종자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리고 있다. 또한 세계를 마음대로 들락날락 하며 이윤을 늘이기 위해 전 세계의 노동자들을 불안정한 일자리, 저임금,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몰아넣고 있다. 교육, 의료, 에너지, 물 등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기초서비스조차도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어 돈 없는 민중은 이를 이용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에이즈나 말라리아, 조류독감과 같은 병에 걸려서도 비싼 돈을 내지 않으면 약을 주지 않는 초국적 제약자본의 횡포에 수많은 민중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렇듯 전 세계의 부와 자원을 고르게 분배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을 비롯한 북반구로 집중시켰고, 초국적 자본의 권리는 무한정 확대한 반면 민중의 모든 권리를 빼앗아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최대 수혜자인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고 민중의 불만과 저항을 무력화하고 있다. 세계적인 빈곤과 불평등, 전쟁과 폭력.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세계화가 지닌 참 모습이다. WTO 도하개발의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동하는 역할을 한다. 시장지향적인 농산물 무역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농민을 농촌에서 쫒아내고 민중의 식량주권을 파괴하는 농업협정, 공공서비스를 사유화하여 이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을 박탈하는 서비스협정, 초국적 자본에게 지식과 기술에 대한 무한한 독점권을 부여하는 지적재산권협정, 남반구의 탈산업화를 조장하고 실업과 빈곤을 확대하는 비농산물시장접근 협상. 이 모든 것이 전 세계 민중에게는 ‘눈물의 씨앗’이다. WTO 도하개발의제를 통해 자유무역의 혜택을 개도국과 최빈국도 누리게 된다는 사탕발림은 이미 거짓임이 드러났다. 시애틀에서, 칸쿤에서 미국과 유럽연합은 오히려 스스로 자유무역의 원칙을 훼손하며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여러 개도국과 최빈국 정부는 도하개발의제가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한다며 저항했다. 이에 도하개발의제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으며, 온갖 회유와 협박, 밀실협상만이 도하개발의제를 추동하는 힘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5년 한 해만 해도 류기혁 열사, 김동윤 열사, 정용품 열사, 오추옥 열사 등 많은 노동자와 농민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며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누리지 못하는 현실, 정부의 살농정책으로 더 이상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 노동자 농민의 생명을 앗아가기에 이른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민중의 기본적인 요구조차도 묵살하며 대책 없는 농업개방, 쌀개방, 살농 정책을 지속하며 농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자본의 편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해체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면서 노동자들의 삶의 위기를 가중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나선 농민들의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였고, 급기야 전용철 열사를 죽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누구보다 앞장서서 추동하고 있는 노무현정권이 민중의 삶을 책임질 수 없음은 분명하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의 행렬을 막아 내기 위해 홍콩으로 향한다. 빈곤과 폭력의 악순환을 낳고 있는 WTO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멈추기 위해 WTO 6차 각료회의가 열리는 홍콩으로 향한다. 초국적 자본의 이윤이 아닌 민중의 권리가 중심이 되는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전 세계 민중의 단결과 연대를 강화할 것이다. 빈곤과 불평등, 전쟁과 폭력을 낳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멈추는 것, 전 세계 민중의 눈물의 씨앗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을 중단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전 세계 민중이 삶을, 그리고 권리를 되찾아오는 유일한 길이다. 아울러 우리는 전 세계 민중의 삶을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WTO에 맞서 저항할 권리를 부정하는 WTO와 홍콩 정부의 모든 시도를 강력히 규탄한다. 홍콩 정부는 한국 민중들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폭력 난동’으로, 한국의 노동자와 농민을 ‘폭도’로 몰아가는데 여념이 없으며, 한국 농민을 대상으로 한 300명의 입국 거부자 리스트를 만들고 있다. 집회와 시위 장소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제한하여 한국민중투쟁단과 홍콩 시민의 접촉을 차단하려 하는가 하면, 심지어 홍콩 경찰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한국인을 수용하기 위해 감옥을 비우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홍콩 정부의 이러한 반민주적, 반인권적 행위가 전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불평등과 빈곤, 폭력을 확산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한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전 세계 민중 단결하여 신자유주의 분쇄하자! 농촌을 파괴하고 식량을 이윤놀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농업협상 중단하라! 필수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 박탈하는 서비스협정 중단하라! 교육의 공공성 파괴하는 서비스협정 반대한다! 에너지, 물, 자연자원 사유화 강요하는 서비스협정 반대한다! 민중의 의약품 접근권 가로막는 TRIPs 협상 반대한다!
운영위원이신 백승욱 선생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그동안 백승욱 선생님이 제기하신 문제의식을 총괄해서 접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인 듯 합니다. --------------------------------------------------------------------- 고대 대학원 총학생회 주최로 11월 16일부터 25일까지 네차례에 걸쳐 진행한 특별 강의 <세계체계 분석과 역사적 자본주의>를 위해 마련한 강의안입니다. 총 16시간의 강의 내용 녹음은 고대 대학원 총학생회에서 구하실 수 있습니다. 강의 내용을 풀어 내년 3월 경 책으로 출판해볼까 계획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