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변이들 [%=박스1%] 우리는 이중적 의미에서 진정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우선 활기차게 진행 중인 논쟁이 있다. 이것은 동시대 전쟁의 클라우제비츠적인 또는 비-클라우제비츠적인 성격에 관한 논쟁으로, 이는 ‘전쟁학자’들의 협소한 논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이 논쟁은 대략 25년 전[1980년대 초반 미국 레이건 정부 당시에] 시작되었다. 그 시점에서 [핵무기에 의한] 강대국의 상호파괴에 대한 전형적인 냉전 시대의 강박증은 주로 제3세계에서 발발한 ‘저강도분쟁’(low intensity conflicts)에 대한 군사전문가와 정치이론가의 첨예한 관심으로 대체되었다(제 3세계라는 범주는 제 2세계가 붕괴한 후에도 여전히 많이 사용된다). 저강도전쟁은 극히 비대칭적이었는데, 게릴라 형태의 적에 대항하는 북반구의 기술적으로 정교한 군대의 개입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마틴 반 크레벨드와 미국의 사무엘 헌팅턴은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정치환경에서 ‘비(非)-클라우제비츠적’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들인 듯하다. 그 후 전(前)유고연방과 다른 지역에서 ‘종족전쟁’(ethnic war)이 일어났다. 이 전쟁들은 영국의 평화이론가이자 정치학자인 매리 캘도어와 다른 학자들로 하여금 과거의 전쟁(Old War)과 대비되는 새로운 전쟁(New Wars)이란 슬로건을 제시하도록 자극했다. 새로운 전쟁은 정규군을 지닌 민족국가가 아닌 [전쟁의 새로운] 역사적 ‘주체’를 동반한다. 또한 그들에 따르면, 클라우제비츠의 저명한 저작 『전쟁론』에서 파생한 관념들이 일반화되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전략적 관심사와 새로운 기술에 적용되고 지난 150년 동안 전쟁이론가의 주요한 관심사였더라도 그 관념들이 지닌 설명의 효용성은 한계에 달했다. 전쟁과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 인종, 경제를 포함하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작용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만 그 관념들은 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현실 물리세계를 설명하며 영예로운 이력을 쌓은 후 어느 시점에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과 전쟁학은 또 다른 유형의 [군사적] ‘계산’(calculation)을 고려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새로운 비-클라우제비츠적 이해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현대 전쟁에 대한 분석가들이 클라우제비츠의 도식과 개념을 분석적으로나 규범적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옹호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나는 특히 『무질서의 제국』(Empire of Disorder)이라는 주목할 만한 저서를 발간한 알랭 족스가 그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는 클라우제비츠를 사회·정치적 현상이자 국가주권의 상관물인 전쟁에 대한 이론가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 그는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슈미트뿐만 아니라 홉스, 마르크스, 베버를 전쟁이론가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상당 부분 미국이 중동에서 전쟁을 개시하고 처음 3년 동안 전쟁이 전개된 방식의 결과다. [미국의 중동전쟁에서] 신속히 이어진 성공적인 공격과 점점 더 어려워지는 방어 전투는 (심지어 퇴각의 가능성, 나아가 필연성에 늘 시달린다.) 베트남 전쟁과의 유사성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지리적 또는 지리-문화적 조건에서 군사작전 내부에서 정치적 요인의 복귀에 관한 고전적 논의와,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군의 효율성이 감소하므로 결국 공격 전략보다 방어 전략이 우월하다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를 부활시킨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적용하기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난점이 있다. 그것은, 철학적 범주를 사용해서 말해보자면 ‘순수한’ 클라우제비츠 모델에서 결국 승리하게 되는 전략의 ‘주체’는 이미 형성된 것이든 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든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군대-인민-국가의 통일체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미국의 침략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에는 적용될 수 있지만 이라크 전쟁의 경우에는 매우 의심스러우며 아마도 부적합한 주장이 될 것이다. ‘인민의 저항’ 또는 ‘반제국주의 지하드’를 주창하는 일부 무명의 이데올로그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단순한 방식으로 반미 군사행동의 ‘주체’를 식별할 수 없으며 ‘이라크’ 국가와 통합된 인민의 존재 자체가 문제다.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적 관념이나 용어,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을 적용하려고 할 때 이와 비슷한 난점이 작용하는 듯하다. 현재 상황에 관한 표상은 두 적들 간의 (세계적 규모의) ‘격투’이며 각각은 상대방의 섬멸을 추구한다. 미국 정부는 이를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두 적들 간에 명백한 비대칭성이 존재하지만 현재 상황은 ‘순수한 전쟁’(pure war)의 법칙으로서 ‘극단으로의 상승’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 역시 난관에 부딪친다. 클라우제비츠의 모델에서 폭력을 극단으로 상승하게 하는 가동장치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사활적인’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각 적대국의 의지이며, 이는 합리적인 도박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극단으로의 상승에는 제한 또는 자기제한의 원칙 역시 포함된다. 전쟁을 위한 전쟁, 자신의 권력을 파괴하는 전쟁은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하며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전쟁, ‘악마’와 동일시되는 불확정적인 적에 대항하는 전쟁이란 관념 역시 불가능하다. 이러한 전쟁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전쟁’이라고 불러선 안 되며 정치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인 또는 신화적인 다른 이름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고찰이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 왜 전쟁과 정치의 본질적, 또는 구성적인 관계에 대한 반성이 심원하게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채로 남아있는지 사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 비판적인 의미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모든 명제와 정의를 재조사하고, 전도하고, 개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가 남편이 남긴 원고를 『전쟁론』으로 출판한 후 지난 150년 동안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그것은 필수적이다). 1) 나에게 시간이 있다면 나는 클로드 르포르와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에 관해 쓴 모델에 근거해서 (그들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자신들의 정의를 클라우제비츠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클라우제비츠가 항상, 완전히 합리적이진 않더라도 정치를 사고 가능하게 하는 핵심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정치이론 내부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문헌에 대한 ‘연구’는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클라우제비츠를 독해함으로써 생산되는 영속적인 곤란함이 동반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문헌적 근거를 결여한 채 내린 결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히 문헌으로 돌아가서 개념적 독자성들을 개략적으로 평가하자. 나는 발표를 상당히 불균등한 두 부분으로 나눌 것이며, 각 부분은 훨씬 더 논의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첫 번째, 훨씬 더 긴 부분에서는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을 해석 또는 재구성하는 문제를 다룰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파생’된 개념과 클라우제비츠에 대한 ‘대응’을 다룬다. 이는 상이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클라우제비츠의 민족전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대응물로서 ‘계급’이 상기될 수 있다. 이어 매우 간략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서 나는 하나의 본질적 통일체 내에서 전쟁과 정치를 접합하는 방식들에 함축된 ‘주체’(또는 비(非)주체, 또는 불가능한 주체) 개념의 쟁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제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읽을 때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를 상기해보자. 그의 저작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고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저작의 상태는 파스칼의 『명상록』이나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와 비슷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저술 과정에서 결정적인 수정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작 전체를 다시 쓰길 원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저작에서 철학적, 실용적 수준의 내적 일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지금까지 수백 편의 논평들이 출판되었을 만큼 매우 어려운 과제다. 나는 이 논평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불완전하고 편향적일 수 있으나 인위적이지 않길 바라는 해석 절차를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나의 해석은 클라우제비츠의 명제가 계속 난점을 제기하거나 새로운 재해석을 요청한다는 독해 결과에 근거를 둔다. 나는 네 가지 명제를 추려내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 또는 공리로 구성할 것이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적 기획이 각 명제들의 (서로 분리되어 있든, 서로 반작용하든) 과도한 결론을 통제하려는 계속되는 시도라고 설명할 것이다. 나는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사상가들이 상이하게 이해하든가, 또는 재정식화하든가, 아니면 서로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문제의 명제들이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중에서 (최소한 현재) 군사전문가 집단을 넘어서 가장 유명하고 자주 논의된 것은 전쟁의 정의 또는 특징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독일어로 Fortsetzung)”(때로는 단순한 계속이다.)이라는 명제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략으로서 ‘방어’는 본질적으로 ‘공격’이나 ‘공세’보다 우월하다.”는 명제다 (그런데 전략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 역시 분명히 동반된다). 나는 두 명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할 것이지만, 다른 두 명제를 더 언급해야만 [체계 또는 공리가] 완성된다고 제안할 것이다. 나는 네 가지의 사실상 독립적인 명제들의 체계 또는 공리를 통해서만 클라우제비츠의 의도와 난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할 것이다. ‘계속’ 명제는 『전쟁론』의 분리된 두 곳, 1편과 8편에서 [서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두 번 반복된다. 그것은 저작의 양끝에서 제시될 뿐만 아니라, 저자의 암시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상이한 개념들에 상응한다. 첫 번째는 확실히 전쟁이 ‘계속해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다른 수단을 통해’ 또는 ‘다른 수단을 도입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관념을 강조한다. 이 때 다른 수단은 위협이나 압박뿐만 아니라 현실의 폭력, 심지어 극단적 폭력의 수단이다. 이것은 정치의 통상적 또는 정상적 수단은 비폭력이지만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에] 불충분하므로 정상적 수단을 넘어서 ‘다른 수단’(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면, 즉 정치의 가능성(과 권력)을 확대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정치 행위는 절대적 한계에 도달한다는 관념을 함의한다. 그러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며, 정치적 주체의 존재가 위험에 빠질 뿐만 아니라 [정치]행위의 정치적 성격과 정치의 정치적 ‘논리’ 자체가 전복될 수 있는 위험 지대, 제한 영역으로 진입한다는 관념 역시 함의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클라우제비츠는 폭력적 수단(전쟁이라는 수단, 군사제도와 애국주의의 발생과 같은 수단[전쟁]의 수단)의 사용은 정치에 반작용하거나 정치를 변화시킨다는 관념을 도입한다. 정치는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면 변형될 수밖에 없으며, 아마도 근본적으로 변형되고 변성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전쟁의 접합이라는 문제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처음 진술의 본체가 위태로워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즉각 변증법적 진술로서 제시된다. 하지만 두 번째 정식이 있다. 두 번째 관념이 강조하는 것은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일 뿐’이며 정치적인 것의 정상적 한계를 침해하지 않지만, 이러한 한계 내에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정치적 주체는 상황, 세력, 이익에 따라 어떤 정치적 ‘도구’로부터 다른 도구로 이동할 수 있으며 (클라우제비츠는 ‘도구’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한다) 이제 정치적 주체의 특징은 바로 폭력적 수단과 비폭력적 수단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비폭력적 수단의 사용에만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 능력이라는 것이다(우리는 이를 주권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확실히 이러한 정식으로부터 정치의 합리적 성격에 대한 어떤 표상이 나타난다. 특히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어떤 상황을 조정하기 위하여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정치의 합리성이 설명된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 역시 변증법적 관념이라는 것이, 또는 잠재적 긴장과 위험성을 동반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묘사로 해석될 수도 있고, 처방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한편으로 정치는 자신의 본성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의 폭력적 수단은 전쟁의 결과, 전쟁을 사용하는 자에게 끼치는 반작용 효과, 전쟁의 ‘논리’가 정치적 합리성을 벗어나지 않거나 전복하지 않을 때만, 즉 독립적 논리가 되지 않을 때만 정치적 수단으로 남는다는 경고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독립적’ 논리이지 않은가? 클라우제비츠가 함의하는 것은 정치가 전쟁을 도구화할 수도 있고 전쟁이 정치를 도구화할 수도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거나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는 정치에는 ‘논리’(logic)가 있고 전쟁에는 오직 ‘문법’(grammar)만 있을 뿐이며, 전자가 후자에 대해 최우선권(primacy)을 지닌다고 썼다. 내가 보기에 바로 여기에 난점이 존재한다. 우리도, 클라우제비츠도 이 난점을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클라우제비츠는 다른 정식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한 난점은 앞으로의 고찰을 통해 규명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정치와 관련하여 전쟁을 두 번, 서로 다른 두 각도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정치의 전부가 아니지만 (왜냐하면 정치는 전쟁과 다른 절차를 지니며, 이 역시 동일하게 필수적이다) 정치의 본질과 관계를 맺고 그것에 영향을 끼친다. 정치가 전쟁에 의존하는 방식과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정치에 미치는 결과는 정치의 본질을 드러내고 실제적으로 정치를 결정한다. 확실히 클라우제비츠가 피하고자 했던 것은 전쟁에 대한 의존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주장이며, 전쟁의 폭력적 수단의 사용과 전쟁의 논리적이고 실존적 함의(예컨대 하나 이상의 ‘적’을 지목해야 할 필요성)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처음 진술의 역(‘정치는 전쟁의 계속이다,’ ‘정치는 전쟁의 결과다.’)으로 나아갈 수 있다(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이러한 주장을 피하고자 했지만 이런 시도 역시 난점들을 지니며, 그 문제들은 클라우제비츠의 계승자들을 늘 괴롭혔다는 것을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도구’로서 전쟁의 활용과 그것이 정치 그 자체에 미치는 역효과에 대해 문제제기하길 원한다(또는 필요로 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이 과거 로마의 사법적·정치적 원리를 근대적으로 다시 정식화한 것이라고 이해하고자 할 수도 있다. “문관이 군을 제압한다(cedant arma togae).”, 이는 전쟁의 무장행동과 군사제도가 문관의 최우선권에 복종되어야한다는 것이다.2) 그러나 규범적 가치를 지닌 이 정식은 클라우제비츠를 괴롭혔던 문제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전쟁은 정치에 반작용하고, 정치를 가장 심원하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하는 새로운 형태로 변형하며, 이러한 형태에서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문제가 되고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반면 전쟁을 정치적인 것의 최우선권에 영속적으로 종속시킨다는 것은 전쟁이 합리적이라고(또는 합리적인 채로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전쟁의 합리성은 하나의 고리를 형성하는 수단과 목적의 ‘실천적’ 관계를 통해 본질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전쟁의 합리성은 정치적인 것 자체로부터 유래하는 목적론적 합리성이며, 정치적인 것은 전쟁의 합리성에 대한 척도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놀라운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 폭력의 극단에 이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의 극단, 즉 현실적 파괴가 문제가 되는 폭력의 극단에 이른다는 것은 ‘순수한 폭력’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투(Gefecht)의 관리로 규정한 전술의 수준에서 폭력이 극단에 이르고, 여기서 인간이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다. 그러나 전술과 전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전쟁의 일부이며,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전략적’ 목표에 종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전략의 문제(전략의 정의, 기능)가 클라우제비츠에게 가장 중요하고 또한 (아마도) 가장 곤란한 문제인지, 결국에는 이 문제가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회피되고 마는지를 (이미) 이해할 수 있다. 전략은 전쟁에 대한 (역사적, 개념적) 분석 속에서 극단적 폭력(절대적 수단)의 수준과 정치적 합리성(절대적 목적)의 수준을 접합한다. 우리는 인간학의 용어법을 도입해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란 이름으로 정치와 결합시키는 ‘폭력’은 무제한적 폭력이 아니라 제도적 폭력이며, 제도적 폭력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은 ‘폭력이 정치의 계속’이 아니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에게 문제는 어떻게 폭력이 극단에 이르면서도 제도의 한계 내에서, 제도적인 것으로 남게 할 수 있느냐이다. 하지만 대립물의 통일이 유지될 수 없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또는 발생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변이들이 실천적 동기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매번 어떻게, 왜 발생하는지 이미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변이들은 ‘전쟁이 다른 수단, 즉 극단적 폭력의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며, (본래의 가설에 따라) 정치는 정치적 합리성 또는 목적에 종속된 도구로서 폭력을 사용한다’는 원리를 형식적으로는 유지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이들은 정치적인 것에 관한 통념과 ‘전쟁’의 정의에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다. 역으로 그 변이들은 정치, 전쟁, 폭력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만 ‘계속’이라는 관념을 주장하거나 문제 삼을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러한 변이들은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이 지닌 순환성과 동시에 초기 조건을 훨씬 뛰어넘는 생산성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클라우제비츠가 더욱 구체적인 일련의 공리들 내에서 일반적 원리와 결부시킨 다른 명제들을 고려함으로써만 가능해질 것이다. 공격 전략에 대한 방어 전략의 우월성 『전쟁론』에서 발견되는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두 번째 명제는 ‘공격’에 대한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과 관련된다. 이 명제 역시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고, 여러 번 다시 정식화된다. 특히, 방어와 공격을 다루고, 이런 관점에서 상호 검토를 다루는 6편과 7편에서 주요 논의가 전개된다. 클라우제비츠는 방어의 우월성이 전술 수준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것도 아니며, 따라서 방어의 우월성이란 전략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수준에서 전형적으로 존재하고 전략 이론의 전체 대상은 이 명제를 확립하고 여러 환경과 조건에 따라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전형적인 순환을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방어의 전술적 우월성이란 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전술적 공격은 모든 전략적 방어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관념은 그와 대단히 상반된다 (왜냐하면 전술적 공격은 적에게 피해를 주고 적의 전쟁수행 능력, 즉 기동과 판단 능력을 부단히 파괴하기 위해서 세력관계에서 나타나는 시공간적 불균형을 활용하며, 이는 특히 최초 공격에서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의 계승자 중에서 마오쩌둥은 유격대 전쟁을 이론화하면서 [방어 전략과 전술적 공격의] 상호 보완성를 일관되게 발전시키지만, 이는 클라우제비츠에게 이미 명백히 존재했다. 또한 ‘방어적 정치의 우월성’ 또는 본질적으로 우월한 방어의 정치(예를 들어 민족의 방어, 민족경계의 방어, 독립의 방어)라는 주장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이는 아마도 가장 어려운 지점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방어의 정치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 이론의 ‘현실주의적’ 판본과 같거나 그 일부다.3) 폭력의 적법성(ius ad bellum)의 근대적 판본은 오로지 외부의 침략에 반응하여 민족이 수행하는 방어적 전쟁만이 적법하다는 것이다. 이런 전쟁은 적법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리고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다(‘결국에는’이란 여러 예외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방어의 정치는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이 아니다. 그에게는 전쟁에 관한 도덕적이거나 신학적인 개념이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훗날 칼 슈미트가 유럽 공법(ius pulicum Europaeum)으로 체계화한 관념, 즉 민족국가는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전쟁에 호소할 고유한 권리를 지닌다는 관념의 전형적인 주창자다. 방어의 우위라는 관념은 정치적 목적(Zweck)과 무관하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 목표(Ziel)와 ‘오직’ 관련된다. 확실히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은 정치와 전쟁의 접합의 형식적 합리성에 본질적 한계를 부과한다(물질적 한계 또는 유물론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치가 전쟁의 궁극적 목적을 부과하는 한에서만 이러한 접합은 합리적이거나, 이론화할 수 있는 합리적 구조를 보여준다(의식적이든 아니든, 전쟁 행위자가 정치의 결정을 의식하든 못하든, 모든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항상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로 군사적 목표의 달성가능성이 정치가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한에서만(대개 사후적으로 결정한다.), [전쟁과 정치의 정합은 합리적이다.] 그리고 [군사적 목표의 달성가능성은] 확실히 현실 전투의 형태로 결정된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낯선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전략’이 클라우제비츠의 숙고의 주요 대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이를 위해 역사적 상황을 비교하고, 전략의 천재성를 보여주는 군사 천재의 사례들을 검토하고, ‘전쟁계획’ 또는 ‘전략적 통일성’의 개념이 되는 특유한 ‘문법적’ 개념을 분리하고, 이러한 전쟁계획이 고안되고 실험될 수 있는 지리적, 시간적 한계(‘전투’, ‘전장’ 등등)를 지적하려고 대부분의 분석을 할애했다.4)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역설적이다. 그러한 작업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실체화될수록, 작업의 대상[전략]의 자율성은 점점 더 모호해지거나 문제가 되는 듯하고, 또는 오히려 논리적 역설에 말려든다. 즉, 이는 마치 전략적 사고와 전략적 계획의 주요 목표는 궁극적으로 전장에서 전략의 자율성과 같은 것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 주는 것처럼 된다. 전략은 내적 긴장과, 아마도 전쟁 개념의 아포리아(aporia)[철학의 난제]를 응축한다. 세 가지 문제를 추가적으로 검토해서 이를 해명해보자. 첫째, 이는[전략의 문제는] ‘이론’과 ‘역사’가 문제의 통일체에서 만나는 곳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항상 독자적(singular) 과정이며 연역적인 전쟁과학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항상 강조했다. 그러나 『판단력 비판』의 칸트적 의미에서 정치와 전쟁이 접합되는 규칙과 경향에 대한 반성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반성은 가설로 남는다. 우리는 전략의 자율성이란 개념은 전적으로 자신의 조건들과 한계들, 그것들의 역사적 변이들과 관련을 맺으며, 자신의 유효성을 영속적으로 시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조정되는 개념이며 판단의 범주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합리적이며 주관적인 이유로 이러한 고찰에 흥미를 느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주어진 역사적 정세에서 역사로부터 끌어낸,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참여한 전쟁인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혁명전쟁과 제국전쟁으로부터 끌어낸 ‘교훈’이 결국 방어 전략이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는지, 이런 교훈이 미래로 확장될 수 있는지 결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는 전쟁이 정치의 도구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또는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전쟁이 정치의 ‘계속’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또는 이미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또는 [정치의 계속이라는 전쟁의] 논리적 기능을 제거하는 위험을 무릅쓸 뿐이라고 의미하는지 결정하고자 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역사의 경향적 결과로서 방어 전략에 우월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방어 전략의 우월성을 다루는 논증에는 이 문제가 [항상] 수반된다. 클라우제비츠를 늘 괴롭혔던 이 문제가 전쟁에 대한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반성에 영속적으로 출몰할 것이고, 현재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그러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인상적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명제를 역설로서 제시했고(어떻게 오직 소극적인 결과를 낳는 방어 전략이 적극적인 결과를 낳는 공격 또는 정복 전략에 비해 우월하다고 증명될 수 있는가?), 이러한 역설은 전쟁의 수단이 극단으로 나아갈 때 명백해질 어떤 잠재적 불가능성의 신호가 아닌지 의심했다. 둘째, 우리는 방어 전략과 공격 전략이 마치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처럼 두 가지 ‘상이한’ 전략들 각각의 특질을 비교하는 표면적인 도식을 극복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다른 것으로] 변형해야 한다. 그것은 방어의 공격으로의 변형과 반전, 또는 방어가 공격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의 탐색이라는 더욱 심원한 문제다. 이것은 전쟁의 시간과 공간의 문제 즉 전쟁의 ‘역사’의 문제이며, 전쟁 행위자의 문제이므로 다시금 실질적인 의미에서 전쟁의 역사의 문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격투’의 복합적 형태이고 시간에 따라 발전하며, 다시 말하자면 행위자들의 세력관계를 부단히 변형한다고 썼다. 그 행위자들은 복합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정부와 인민을 포함하고, ‘군대’란 전형적인 형태로 통합된 제도와 인간을 포함하며 (군대는 역사의 행위자가 전쟁의 영역에 등장하는 일반적 형태다) 동맹과 동맹의 변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시간은 공격에서 방어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지닌 시간이다. 그것은 예정된 순환을 지닌 순전히 논리적인 시간이 아니며, 결국 전략적 ‘태세’ 중 하나[방어 또는 공격]를 강화하는 모든 요인들의 경향적 우월성에 의해 지배되는 역사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의 효과를 요약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가 사용한 일반적인 통념은 마찰이다. 마찰이라는 용어가 암시할 수 있는 것과 반대로, 그것은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도덕적, 기술적, 심리적, 사회학적 요인을 ‘통합’한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의 문제, 즉 전략적 숙고의 대상은 왜 즉각 성공하지 못한 (또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공격은 방어를 취하는 적에게 점차 굴복할 수밖에 없는지, 어떤 수단이 이런 불가피한 결과를 지연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방어 전략이 성공적인 반격의 준비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이는 반격이 방어로부터 준비되며, 어떤 의미에서 방어는 내재적으로 공세국면에서도 계속되고 연장된다(fortgesetzt)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상적인 변곡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문제는 이런 변곡점을 규정할 수 있느냐, 어떤 종류의 사건이 이런 변곡점으로 규정될 수 있느냐가 된다. 클라우제비츠가 이 문제를 절대적으로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문제에 이론적 공식을 부여했다. 그것은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공세 전략’과 쿠투조프의 ‘방어 전략’의 대치 과정에서 거대한 규모로 실행되었다. 프러시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승자가 주도하는 동맹에 다소 자발적으로 참여한 후 [프러시아와 프랑스가 대(對)러시아 연합전선을 펴게 되자] 클라우제비츠는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서 러시아 군대의 보좌관으로 참전하기로 결단하고 전쟁에 참여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레오 톨스토이를 포함해 19세기 이후 전쟁 이론가들이 반복해서 언급할 정도로 극적인 사건은 보로디노 전투였다(엥겔스와 톨스토이는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 착수하기 이전에 보로디노 전투에 대해 서술한 글을 신뢰했으며, 그 글은 나중에 클라우제비츠의 누이에 의해 출판했다.).5) 비슷한 규모와 전력을 지닌 두 ‘대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보로디노 전투는 나폴레옹의 전술적 승리로 보였지만, 결국 나폴레옹의 전략적 패배로 입증되었다. 보로디노 전투는 즉각 러시아 수도의 정복을 낳았지만, 사실상 나폴레옹의 최후의 패배를 예비하였다. 그러나 이 대치 역시 [방어에서 공세로] 변곡점이 발생하는 어떤 전형적인 조건을 보여주었다. 그 조건은 전투의 지속, 광대한 지리적 환경, 주민의 적대감 상승으로 인한 정복 그 자체의 반(反)생산적 효과뿐만 아니라 정규전과 게릴라전의 결합, [정규전과 게릴라전] 양 측에서 전쟁의 주요 행위자로서의 인민의 무장과 통합이었다(게릴라전은 스페인에서 수입된 새로운 개념이다. 비록 그러한 전투형태가 스페인에서 처음 벌어진 것은 아니더라도6)). 이는 우리를 세 번째 고찰로 이끈다. 그곳에서는 ‘정치’, ‘전략’, ‘전술’이라는 세 가지 수준은 더욱 명백히 변증법적으로 얽혀있다. 이는 아마도 클라우제비츠의 가장 심원한 딜레마일 것이다. 그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을 이해할 때 두 개의 논리적 ‘대립항’ 또는 ‘극단’이라고 묘사한 것들 간의 관계와 관련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쟁이 있는 곳에는 전쟁이 추구하고 직면하는 섬멸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고, 또 한편으로 전쟁에서 고유한 정치적 능력은 전쟁이 동반하는 특정한 위험과 전쟁이 정치적인 것에 미치는 특정한 효과 속에서 이미 시작된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또는 중단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 즉 언제, 어떤 대가로 ‘전쟁을 끝낼 것인지’ 결정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섬멸에는 한계가 있고, [섬멸이] 그 한계에 접근할 수는 있지만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믿는다. 그는 자신이 ‘절대전쟁’(absolute war)이라고 부른 것을 고찰했지만, 훗날 ‘총력전’(total war)이라고 불린 것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절대전쟁에서는 격투가 극단으로 상승하며 국가 또는 민족의 모든 세력이 전쟁에 참여하지만, 총력전에서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비전투원도 목표물이 된다. 정치를 계속하는 전쟁에서 문제가 되는 섬멸은 군대를 물리적으로 섬멸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진압하거나 해산시키는 것이고, 적이 타인의 의지와 목적을 강요당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전쟁을 중단하는 능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불린 프러시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를 클라우제비츠가 매우 존경했던 이유는 그가 정복지를 계속 보유하기 위해 자신의 승리들을 통제하고 유리한 순간에 화친을 맺는 능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결국 비참하게 끝나고 그와 그의 나라를 패배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정복의 논리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복의 논리에서는 모든 예정된 한계를 넘어서 전쟁규모를 확대해야만 [나폴레옹의] 정치적 목적이 달성될 수 있고, [러시아의] 방어가 우세하고 압도적인 반격을 준비하며 이전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극단 사이에 강한 긴장이 있다. 왜냐하면 전쟁을 중단하는 능력(이는 ‘부정적인’ 전략적 통념이고, 클라우제비츠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최우선권을 두었다)은 전쟁이 군사력과 자원의 일부분만을 포함할 때, 즉 적대국들 간에 섬멸의 가능성이 거의 없을 때에만 극대화된다. 반면에 물리적 섬멸이라는 전략적 목적은 군사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인력의 동원을 초래하고, 이는 의지에 따른 전장으로부터 철수를 불가능하게 하며, [철수가 시도된다면] 국가의 실존에 대한 배후의 공격[내분]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한다. 또 다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평형’점이며 또는 ‘불가능한’ 지점, 즉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관한 ‘불가능성’의 지점이다. 즉 그것은 전쟁의 불가능성이란 유령을 되살리지만, 그 유령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나를 마지막 고찰로 이끈다. 나는 시작 부분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주요 명제를 하나의 공리 형태로 배열할 수 있으며, 그 공리의 지위 자체는 명백하다기보다는 가설적이며 문제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공리를 구성하는 두 명제만을 검토했고, 각각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남은 두 명제를 급히 다루어야 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옹호하고자 하는 관념은 클라우제비츠의 담론이 네 명제의 결합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고, 전쟁의 주체(또는 전쟁의 ‘정치적 주체’, 따라서 전쟁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주체’)라는 그의 궁극적 문제는 네 가지 명제사이에서 아마도 끊임없이, 모순적인 방식으로 순환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한전쟁과 절대전쟁 세 번째 명제는 ‘절대 전쟁’과 ‘제한 전쟁’(limited war)의 구분과 관련된다. 이것은 그가 『전쟁론』을 저술하는 동안 생각을 바꿨고(그의 저작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론 전체를 고쳐 써야만 하는 ‘새로운’ 입장에 도달했다고 주장하게 한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분명하지 않고, 사실상 징후적 독해를 필요로 한다. 그 후 해석자들은 클라우제비츠에게 다양한 인식론적 도식(변증법, 이념형 등)을 투사하여 모든 가능한 방향에서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절대’ 전쟁이 아닌 것을 가리키는 두 가지 용어를 두고 주저했다는 점이다. 그는 ‘제한’전쟁과 ‘현실’전쟁(real war)을 언급하지만, 거기서 그는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전쟁은 항상 제한전쟁이고 절대전쟁은 가상적 모형이라는 관념으로 도약한다. 즉 가상적 모형에 따라 경험적 사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관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너무나 단순하며, 문헌과 사실상 모순된다. 아주 성급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관념이 레이몽 아롱과 어긋나며 엠마뉴엘 테레이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이 ‘절대전쟁’이라는 통념을 가상적 모형이나 이념형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역사적 현실 즉 역사적으로 관찰되었던 전쟁의 성격 변화와 관련을 맺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우리가 극적인 딜레마에 직면하게 한다고 믿는다. 분명히 ‘절대전쟁’과 ‘제한전쟁’은 상반되는 두 극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논리적 의미의 극점이고, 현실전쟁은 두 극점 사이에서 움직이고 다양한 단계와 결합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은 최소한 두 가지 상황에서 거의 순수한 방식으로 두 극점에 접근했다. 나는 최근 시기에서 그에 관한 등가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18세기 절대왕정 시기에 정부 간의 전쟁(Kabinettskriege)은 군사 카스트[특권계급]의 지휘 하에 용병, 직업군인, [모병된] 신병에 의해 강압적으로 수행되었고, 그것의 목적은 이른바 ‘유럽의 균형’ 내부에서 세력균형을 바꾸고 적대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동반하더라도 정의상 제한전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함께 개시된 ‘새로운 전쟁’(Volkskriege)은 절대전쟁이었고, 규모와 폭력의 측면에서 극단으로의 상승을 동반했다. 새로운 전쟁은 인민봉기에서 처음 나타난 ‘민족의 무장’을 동반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대륙의 헤게모니를 위한 제국주의 도구로 변형했다.7) 그 후 무장한 민족들은 서로 경쟁하고 싸웠으며, 각자는 민족주의적 비책을 계발했으며, 그들은 자신의 실존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싸웠다. 이러한 전개는 전쟁의 세계사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비범한 설명이 담겨있는 8편에 약술되어 있고, 이것은 뒤따른 시도들의 모형이 되었다(여기에는 1860년대에 저술, 출판된 『신아메리카백과사전』(New American Cyclopedia)에 담긴 엥겔스의 항목도 포함된다.). 그리고 클라우제비츠의 질문은 명백하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이러한 전개가 비가역적이고 역사는 ‘전쟁의 절대화’를 향한 방향으로 전개한다고 믿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떤 가능성에 의거해 이러한 경향에 저항해야만 하는가? 이런 경향은 민족과 국가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고, 모든 정치적 문제들 중에서 전쟁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게 하며, 결국 정치의 도구인 전쟁에 대한 정치의 최우선권을 파기한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 개인이 누구였는지 회고하는 게 유용할 것이다. 그는 불안한 귀족 가문 출신의 프러시아 장교로서 (주로 칸트적인) 철학교육을 받았고, 대적(大敵) 프랑스와 계속 싸우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떠나는 위험을 무릅썼고 직접적인 외교적 조정보다는 애국적인 관심을 우선시했다. 그는 인민 징병제에 기초해서 19~20세기에 이르러 거대한 군대로 발전할 것을 창안함으로써 프러시아 군대가 민족군대로 변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8) 하지만 이러한 전개가 군사 카스트와 국가 관료로부터 정치적 결정의 완전한 독점권을 박탈할 가능성에 대해 그가 우려한 것은 분명하다(나아가 빨치산이나 게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궁극적인 무기이지만, 그들을 활용할 때 사회적 위험성이 동반된다는 점을 우려했던 것도 명백하다.). 이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명제로 우리를 이끈다. 전략에서 도덕적 요인의 최우선성 네 번째 명제 역시 가장 크게 논쟁된 것 중 하나다. 그것은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에 대한 ‘도덕적 요인’의 궁극적인 최우선성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이라는 통념으로 열거한 일련의 복합적 요소들과 그것들이 철학적 견지에서 함의하는 바를 살펴보면, 우리는 매우 복합적인 힘들의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도덕적’ 요인은 확실히 도덕성에 대한 고찰과 관련되지만, 그것은 역사에서 주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개인적, 집단적 정서라는 더 광범위한 문제틀과 분리할 수 없다. 도덕적 요인들은 집단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것과 관련된다. 그래서 우리는 군대가 난폭한 죽음의 위험과 대치할 수 있게 하는 병사의 용맹과, 어떤 전장 상황의 무한한 복잡성을 독자적인 직관으로 대체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는 총사령관의 자질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국가의 ‘지성’ 또는 국가의 정치적 합리성이라고 부른 것을 고려해야 한다(이는 수단과 목적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우리는 인민의 애국심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군인의 전투능력, 자원과 인명의 희생을 유지할 수 있는 민족적 능력의 배경을 형성한다. 애국심 역시 새로운, 즉 ‘근대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모든 도덕적 요인은 집단적인 역사적 작용인, 또는 제도적 작용인의 차원 또는 계기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는 내가 말했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전략’의 수준이 분리될 가능성을 반영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도덕적 요인을 검토하는 것에 클라우제비츠가 대부분의 시간을 쏟은 이유다. 즉 그는 도덕적 요인을 군대의 통일성이 형성되고, 그것의 소멸에 저항하고, 적의 폭력을 압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검토했다. 역으로 다른 요인(예를 들어 경제적, 기술적 계기)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요인에 부여된 중요성은 다른 요인의 유효성을 더욱 심원한 도덕적 심급에 종속시킨다(예를 들어 조세인상 등의 방식으로 경제자원을 전쟁에 동원하는 민족적 능력). 후대의 이론가들이 자신이 더욱 유물론적이고 현실주의적이라고 간주하고 클라우제비츠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예를 들어 클라우제비츠가 군사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전략의 역사적 변형과 전쟁의 결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등장한 생산양식과 결합된 기술변화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긴 연구(『신아메리카백과사전』의 ‘군대’ 항목)에 전념한 엥겔스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조차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이라고 부른 것의 등가물을 고찰해야만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쟁의 가능성과 전쟁의 발전에 관한 계급의식, 더욱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클라우제비츠의 네 명제 간 관계를 살펴보면, 각각의 명제가 다른 명제의 결과를 지지하고 규명하거나 또는 제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우리가 무한한 논리적 순환에 들어서게 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제한전쟁의 절대적 인민전쟁으로의 근대적 변형은 어떤 도덕적 요인에 결정적 역할을 부여한다. 도덕적 요인은 전쟁의 ‘정치화’라는 의미에서 방어 전략과 방어의 반격으로의 전환에서 사활적 요소다. 그러나 애국주의는 국가가 조종할 필요가 있지만 지배할 수 없는 대중의 정서이기 때문에 도덕적 요인은 정치의 합리성을 위협하는 양면성을 생산한다. 전쟁 시기에 애국주의는 공포를 포함하며 또한 공포를 압도하는 적에 대한 증오(Feindschaft)가 된다. 그것은 지배자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될 수도 없으며(그것은 심지어 지배자에 반대하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를 통해 주관적으로 통제될 수도 없다. 그것은 정치를 파괴할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주체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가차 없는 질문의 비밀을 만나게 된다. [전쟁의] 직접적인 주체는 군대이지만, 군대는 최소한 근대 시대에 결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 없다. 군대는 계속 생산·재생산되고, 전쟁의 환경과 그 누적된 효과는 이러한 재생산을 변조한다. 그러나 군대는 하나의 괴물이다. 군대는 국가와 인민의 결합이자 접합점이며, 민족이라는 관념은 [국가와 인민이라는] 두 가지 계기로 분열된다. 이것이 클라우제비츠의 딜레마였다. 이제 전쟁은 오직 민족전쟁, 곧 민족주의적 전쟁의 형태로만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결론을 끌어내야 하지만, 역사의 무대에 출현한 새로운 인민권력을 통제해야 하며, 인민권력은 국가 자체가 인민의 정서를 영속적으로 능가하도록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민족국가가 일반적으로 직면하는 정치적 문제의 군사적, 전략적 등가물이었다. 즉 어떻게 ‘봉기를 제도화할 것인가’, 어떻게 대중들에게 고삐를 채울 것인가? 놀라운 것은 이 문제가 19세기 초반 혁명전쟁과 제국전쟁 직후 정치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떠올랐던 상황을 넘어서 의제로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전쟁과 마르크스주의 전통 복잡한 문제를 동반하지만, 나는 여기서 매우 간략하게나마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담론을 들여오고자 한다. 오늘은 [포스트-클라우제비츠 담론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담론만을 다룰 것이다(만약 마르크스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 차이는 마르크스가 최소한 초기에는 클라우제비츠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클라우제비츠를 감탄하여 읽고 마르크스에게 그 중요성을 조언해준 사람은 엥겔스다(1849년 프러시아 군대와 맞선 혁명세력의 분견대를 훌륭히 퇴각시킨 후 엥겔스에게 붙여진 별명은 ‘장군’이었고, 그는 항상 군사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9) 그렇지만 비교는 『공산주의자 선언』을 새롭게 독해하면서, 특히 1장의 구절들을 엄밀히 독해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1장은 계급투쟁의 연속적 형태가 역사적 변형, 특히 국가의 상이한 형태와 정치적인 것의 상이한 제도들을 이해하기 위한 안내선을 구성하며, 계급투쟁은 계속되는 내전(civil war)과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내전이란 표현은 1장의 끝에 있으며, 분리되어 있지만 확실히 두드러진다.)10) 내전의 행위자들(또는 정당들)은 전쟁과정에서 생겨나며, 가시적일 수도 비가시적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1장의 서두에서 제시한 놀라운 정식처럼 내전은 상쟁하는 계급들 중 하나의 승리로 귀결될 수도 있고, 상호 파괴로 끝날 수도 있다.11) 나아가 우리는 클라우제비츠와의 연결고리를 확립한 푸코가 제시한 논평을 따라 이러한 구절들을 독해하자. 1) 사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인종전쟁’으로서의 정치라는 이전의 해석을 ‘전도’했다. 인종전쟁은 프랑스혁명 이전의 유럽 사서(史書)를 지배했고 그 후에도 살아남았다. 2)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적 통념은 ‘인종전쟁’의 변질된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여기서 계급은 구체제 사회 내부의 인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은 19세기의 적대적 통념, 즉 ‘인종투쟁’의 통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와 마르크스를 넘어서 ‘인종전쟁’이라는 초기 관념으로 돌아가는 것은 투쟁 또는 갈등과 동일시되는 정치적인 것의 어떤 순수성 또는 확실성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통념에서 나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출현하는 것을 둘러싸고 전쟁과 정치의 통념에 대한 역사적, 논리적으로 엇갈리는 스텝(chasse crois )이 존재한다는 관념만을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푸코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과 마르크스의 관념의 대결이다. 확실히 가장 인상적인 차이는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을 분산과 집적의 단계, 잠재와 발현의 단계를 지닌 내전(즉 일반적인 의미에서 혁명)으로 이해함으로써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범주에서 배제하길 원했던 바로 그것을 ‘전쟁’이라고 확실히 부른다는 사실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대외전쟁, 민족전쟁처럼 내전도 ‘순수한’, 무차별적 폭력의 형태가 아니며, 그 역시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내전은 심지어 문명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보일 정도로 (또는 과거에 그렇게 보였을 정도로) 잔혹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더라도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그러나 내전은 특정한 유형의 정치제도 즉 ‘도시’ 또는 ‘국가’의 파괴로서 나타난다(또는 그리스 이후로 그렇게 나타났다.). 바로 이런 이유로 클라우제비츠의 용어법은 ‘폭력의 합법적 사용에 대한 독점’이란 국가의 정의를 예상하며(이는 폭력의 정치적 활용에 대한 독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용어법에 따르면 내전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반(反)정치의 도구다. 슈미트에 이르러서야 내전을 포함하는 반정치의 도구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이율배반적으로 통합된다(나는 이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겠다.). 사실 마르크스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두고 분열을 겪었던 듯하다(우리는 이러한 딜레마가 결코 해소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계속 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치적인 것이 ‘정치국가’를 의미하며, 국가를 둘러싸고 정치적인 것의 분리된 공간이 공적 대행자로서 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그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만 외형적으로 또는 사법적으로 계급이익을 초월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인 것을 초과하며, 결국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정치국가를 억제할 것이다(마르크스는 이를 ‘정치국가의 종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 투쟁, 투쟁의 증대되는 양극화, 투쟁에 대한 ‘의식’과 ‘조직’의 형성, 역사의 변화를 생산하는 투쟁의 역할을 의미한다면 정치는 바로 영속적, 초역사적 ‘내전’으로 정의된다. 그러한 내전은 결코 정확히 동일한 형태를 취하지 않지만 (‘최후’까지,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최종 대결까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쟁’이란 용어의 은유적 활용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클라우제비츠와 비교한다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내전은 전쟁의 개념을 확실히 반성적으로 활용하며, 특정한 전쟁 개념을 단순히 적용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와 변형을 동반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 또는 가설을 독해할 수 있다. 1) 오직 ‘내전’으로서 사회적 전쟁(social war)만이 ‘절대’전쟁, 또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전쟁이 된다. 그것은 극단에 도달하고, 절멸의 위험이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연의 의미’에서 전쟁이다. 2) 이러한 전쟁은 ‘정치’를 구성하고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전도하지만, 클라우제비츠에게는 단지 경향(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포)으로 남아 있던 것을 논리적 결론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그 결론은, 정치의 ‘수단’으로서 폭력은 정치적인 것에 반작용하며, 정치가 전쟁의 계속이 되게 한다는 관념이다. 나아가 이것은 전쟁 ‘주체’의 표상의 총체적인 변화와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제도적·사법적 주체 곧 국가가 아니며 오히려 내재적인 사회적 주체다. 전쟁의 사회적 주체는 자신의 역사적 형성과 부단한 자율화 과정 자체와 진정 구분될 수 없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가 (또는 마르크스를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사람들이 -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이들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계급투쟁이라는 약호를 통해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또는 클라우제비츠의 문제를 치환 또는 ‘번역’함으로써 그 명제와 문제를 부활시키게 한다. 그러한 문제들 중 하나는 계급을 ‘군대’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된다. 이것은 계급투쟁을 점점 더 통일되고 양극화되는 두 적대적 세력들 간의 대결로 표현하는 것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자격부여(qualification)에 종속된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결과일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계급투쟁은 진정으로 자신의 행위자를 창조하거나 생산한다. 그 조건은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의 초역사적 대결의 마지막 무대 또는 등장인물,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경향이다. 오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편에서 계급투쟁의 조직자로서 직접적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 적대자는 어떤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볼 때 조직화된 세력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나 ‘정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마르크스는 그 개념[군대로서의 계급]을 최종적 결론으로 밀고 나아가는 데 주저했고, 좀 더 은유적인 활용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혁명을 계급전쟁(class war)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어도 공산주의 전통에서 1세기 동안 매우 강력했다는 것을 알지만, 마르크스에게서 군대 형태의 혁명정당, 즉 계급정당 또는 ‘전체 계급의 정당’이라는 개념의 가능성만을 발견한다(왜 그런지는 조금 후에 말하겠다.). 그러나 그 전에 방어의 문제와 관련된 두 번째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파생개념, 또는 클라우제비츠와 유사한 파생개념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비정치적’ 요소의 복귀를 준비하는 놀라운 역전을 목격한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심지어 혁명을 준비하고 자본가계급을 전복할 때라도 ‘방어적’ 투쟁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정치철학이 되며, 사실상 묵시론이 된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임금노동자를 절대적 빈곤과 실업에 빠뜨리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임금노동자, 더욱 일반적으로는 노동자[임금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노나 노예]가 사회를 부양하고 유지하므로) 사회의 재생산과 생존을 위협한다는 관념과 결합된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묘사한 것처럼, 자본주의에는 허무주의적 요소가 있으며, 이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사회 내부의 적에 대항하여 사회를 방어하는 것과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더욱 전략적, 또는 준(準)전략적 고려가 나타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자신의 힘, 의식, 조직을 경쟁하는 부르주아 조직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관념에 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라리아 계급 정당을 반(反)국가로 가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가 착취적 사회질서를 위해 사회를 억압하는 한에서 국가의 부정, 즉 ‘부정의 부정’으로 간주했다. 이 모든 것은 대외 전쟁의 상황과 반대로 ‘내전’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전쟁’에서 적대자들은 진정 외부적이지 않고,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들은 하나의 분할[분업] 형태에서 동일한 사회적 주체의 진화 양식이며, 그렇게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전쟁과 정치의 접합을 이해한 결과는 결정적인 동시에 모호하다. 적대의 화해 불가능한 성격을 현실화함으로써 내전의 모형은 계급사회, 특히 자본주의에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종언을 준비하는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이행의 형태로 명백히 나타나며, 우리는 이를 자기절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마르크스가 후속 작업에서 이러한 설명을 단념하거나 무시하게 하였는가? 후속 작업은 그가 계급투쟁의 전개에 관한 다른 모형을 모색하도록 이끌었고, 그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제시했던 반정치로서의 정치적인 것이란 날카로운 서술로부터 어떤 의미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왜 그런가? 내 견해로는 일련의 긍정적인 요인들이 작동했다. 그것에는 점증하는 빈곤과 부의 양극화라는 ‘묵시론적’인 선형모형을 희생시키는 자본주의 발전의 경제적 축적사이클에 부여된 중요성의 증대도 포함된다. 그러나 전쟁과 내전의 현상들에 대한 더 많은 경험 역시 부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 현상들은 계급투쟁을 내전과 유비하는 것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했고, 그것은 극단으로 밀린 내전 즉 ‘절대적 내전’으로서 혁명 모형에 관한 모든 부정적 측면을 보여주었다(그 교훈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개량주의’와 ‘혁명주의’간에 뜨겁게 논쟁되었다.). ‘제한적 내전’ 또는 ‘억제된’ 내전은 형용모순으로 보였다. 1848년과 1872년(파리코뮨)에 일어난 현실의 내전은 대량학살의 비극적 경험이었다. 이 때 부르주아 국가는 프롤레타리아를 궤멸시키기 위해서 (식민지 전쟁을 포함해) 대외전쟁 동안 형성된 군사 장치를 손쉽게 사용했고,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군대’가 아니었다(심지어 게릴라 군대도 아니었다.). 게다가 (20세기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 동안 민족전쟁은 계급투쟁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정치와 전쟁이 접합하는 바로 그 장소이자 전략적 사고의 장소로서 남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증거가 있었다. 민족전쟁을 ‘현실’과 현실의 ‘정치’과정을 은폐하는 외양 또는 인공현실로 묘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코 완전히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민족전쟁은 서로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이 ‘자신의’ 노동자가 서로를 절멸하도록 하고, 민족주의 담론으로 노동자를 기만하려는 노력을 결합해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민족전쟁의 엄연한 현실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했으며, 이는 클라우제비츠와 그의 문제를 직접 이해하는 것으로 복귀해야한다고 요청한 것이었다. 이는 엥겔스에 의해 준비되었다. 그는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을 ‘관념론적’으로 강조했다고 비판했고, 그것의 유물론적 등가물을 모색했다. 그것은 전쟁의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에 대한 강조와 양립할 수 있다고 입증되어야 했다. 이러한 등가물은 인민의 군대 또는 대중 징병이 (최소한 민주공화국에서는) 군대 내부에 계급투쟁을 잠재적으로 도입할 것이며, 따라서 군사문제에서 대중들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공포를 대중들이 국가와 군사장치를 희생시키며 새로운 전략적 행위자로서 부상한다는 예언으로 역전시킬 것이라는 관념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레닌과 마오쩌둥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변증법적 원칙이 전쟁과 정치의 새로운 접합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전략적 결합체에 대한 관념이 국가-군대-인민의 통일체로부터 계급, 인민, 혁명정당이라는 새로운 통일체로 대체되었다. 알다시피 레닌은 클라우제비츠를 철저히 읽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고 2인터내셔널과 반전결의안이 붕괴된 후 『전쟁론』에 관한 주석과 논평을 남겼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라는 구호를 기초했고, (적어도 자신의 나라에서는)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그 구호는 ‘도덕적 요인’(국제주의적 계급의식)이 시간이 지남에 따른 ‘대중’전쟁(즉 대중으로 구성된 민족군대가 수행하는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방어’로부터 준비되는 ‘공세’라는 관념에 대해 완전히 독창적인 해석을 제공하며, ‘절대’전쟁은 유지될 수 없거나 유지될 수 없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그 필연성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그것은[내전으로 전환은] 반드시 국가를 파괴해야 하며 차라리 국가를 희생시켜 정치의 조건들을 반드시 재창조해야 한다. 국가는 인민을 무장시키고 인민의 무장력 활용을 통제하는 능력을 보유하는 한에서만 정치를 구현할 수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박탈당하자마자 정치적 환영(幻影)이 될 것이다. 또는 합법적 폭력의 국가 독점으로부터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폭력의 계급 독점으로 변화되자마자 그렇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의 전위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칼 슈미트의 비정치적 개념의 출발점을 형성한다는 것에 잠시 주목하자.12) 여기서 주권은 계급투쟁을 예방적으로 억압하기 위해서 국가의 핵심에 ‘예외상태’를 설치할 수 있는 능력으로 동일시되며, ‘내부의 적’ 즉 ‘계급적 내전’의 적에 대한 정의는 대외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폭력의] 국가 독점과 그 능력을 항상 재창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오쩌둥의 ‘유격대의 지구전’ 이론에 이르러서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방식의 탈환이자 정치적인 것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영속적으로 클라우제비츠를 괴롭혔던 아포리아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사실 나는 여러 논평자들이 인정했던 것처럼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 이후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라고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는 클라우제비츠의 공리 중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모두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실제로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읽었거나 일부 인용문을 읽었는지 알기 어렵다(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이 그가 읽을 수 있던 유일한 언어인 중국어로 번역되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항일전쟁 이후 (더 정확히는 대장정의 종료 이후) 마오쩌둥의 다양한 소책자와 논문에서는 레닌이 제국주의에 대한 에세이에서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인용한 대목에서 다시 인용한 것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오쩌둥이 그 문제틀을 실질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모택동의 핵심적인 관념은, 처음에는 제국주의 적국과 지배 부르주아는 군대가 있지만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은 군대가 없기 때문에 방어 전략이 강요되지만, 이는 결국 대립물[공격전략]으로 역전되고, ‘가장 강한 적’의 실제 절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지구전’(또는 전쟁의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전쟁의 지속시간은 ‘마찰’의 변증법적 등가물이며, 농민 대중들 내부에서 피난처를 찾는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의 소규모 핵심에게 필요한 시간이다(그들은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인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은 세 가지 결과를 동시에 추구한다. 첫째, 침략군의 고립된 분견대에 맞서 지역적 게릴라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적군의 희생을 대가로 스스로 무장한다. 둘째, 전장을 전국적 수준으로 (중국에서는 반(半)대륙 수준으로) 확장함으로써 전략의 기술을 ‘배운다.’ 셋째, 헤게모니를 외부의 권력(식민지 정복자 또는 민족의 특권계급)으로부터 내재적 권력으로 이동하고, 피지배계급들의 공통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인민의 적(또는 당의 적)으로부터 분리한다. 공산당은 바로 그 내재적 권력으로 간주된다(그리고 장기간 동안 내재적 권력으로 머무른다고 간주된다.). 오늘 이런 분석의 맹목점은 오히려 더 분명해 보인다(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다.). 즉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민족 내부의 세력들만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처럼, 2차 세계대전의 국제적 맥락을 사실상 무시한다는 것이다. ‘자력갱생’이라는 마오주의의 위대한 구호는 잠재적으로 민족주의적 차원을 지닌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전쟁의 합리성이란 관념(이는 정치적 주체를 함축한다.)에 대해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결과는 인상적으로 남는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완전한 순환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종결이 특히 국가가 수행하는 제도적 전쟁과 인민의 게릴라 전쟁 간에 확립된 위계적 관계의 역전이라는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역전이 클라우제비츠에서 발견되는 아포리아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 아포리아를 전위할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난점은 전쟁을 ‘절대전쟁’ 즉 무장한 인민이 수행하는 전쟁으로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서 수립되고 활용되어야 하는 ‘도구’에 대해 국가가 선험적으로 절대적 지배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또한 중국혁명의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끌어오면서 생기는 마오쩌둥의 난점 또는 우리가 그를 사후적으로 독해할 때의 난점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계급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민을 군대 또는 ‘인민군’으로 내부로부터 변형한 조직[공산당]의 내재적 권력, 즉 혁명정당이 스스로 국가가 되는 조건에서만 [방어에서 공세로] 전략적 반전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으며 정치적 대행자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이는 심지어 국가가 혁명적 사건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재건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하며, ‘문화혁명’으로 나아갔던 마오주의적 전망 또는 문화혁명 동안 교육되었던 마오주의적 전망에서도 그러하다). 사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민족해방전쟁의 조건에서는 가망성이 매우 낮지만) 혁명정당이 ‘권력장악’ 또는 적의 완전한 파괴라는 ‘최종’목적(Zweck)까지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며, 따라서 ‘절대전쟁’을 ‘제한전쟁’으로 어떻게든지 축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략적 과정의 주체(또는 전략적 과정 내부로부터 결정되는 주체)는 모든 상황에서 분열된 주체 또는 주권과 봉기 사이에서 동요하는 주체로 머문다. ‘분자전쟁’(엔첸스베르거)에 대한 일부 근대 이론가와 논평자는 주체의 범주를 단순히 제거하거나 그것을 부정적이거나 불완전한 형상으로 환원함으로써 아포리아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전쟁’의 범주 그 자체가 유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1) [역주]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프러시아 부르크에서 태어나 1831년 51세의 나이로 프러시아 브레슬라우에서 콜레라로 병사할 때까지 39년 간 군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폰 마리는 1832년 유고를 정리하여 10권의 선집계획 중 1차 저작계획으로 1권에서 3권까지를 묶어 『전쟁론』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마리는 남편이 생전에 자신의 저작이 출판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고 술회했다). 그 후 1837년까지 『전쟁과 작전술에 관한 칼 폰 클라우제비츠 장군의 유작집』이 10권으로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2) [역주] 마르쿠스 키케로(기원전 106년 - 기원전 43년)는 카이사르와 동시대 사람으로 기원전 63년에 집정관의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 63년에는 카틸리나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키케로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무기 삼아 이를 진압한다. 키케로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Consul sine armis(군사력을 갖지 않은 집정관), Dux et imperator togae(토가 차림의 최고 사령관), Cedant arma togae(文이 武를 제압하다). 키케로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고, 이는 훗날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계승된다. 본문으로 3)[역주] ‘정의로운 전쟁’(just war=bellum justum) 이론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후 중세 기독교 전쟁사상의 핵을 이룬다(콘스탄니누스(301-337)는 군대를 로마로 진격시키면서 군대의 방패에 십자가 표지를 달게 했으며, 테오도시우스는 416년 칙령을 내려 기독교도만을 군인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키케로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받아들여 전쟁이 다음의 조건을 갖추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전쟁이 사회의 보편적인 선을 위한 것으로 합법적 당국에 의해 선포되어야 한다. 둘째, 전쟁의 원인이 정당해야 하며 결코 법질서에 위협이나 손상을 주어선 안 된다. 셋째, 전쟁의 목적은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법질서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합법적 당국을 황제로 규정하고 방어전이 아닌 공격전까지 정의로운 전쟁에 포함시키는 것이며, 정복전쟁 이후 적대국을 포괄적인 법질서로 융화시켜야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한편 십자군 전쟁의 참화가 지난 후 아퀴나스(1225~1274)는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을 재정식화하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전쟁방식은 공격전이 아니라 방어전이어야 하며, 정당방위의 경우에만 살상이 인정되고, 전투요원이 아닌 민간인은 결코 전쟁 대상이 되어선 안 되고, 적을 살상하기보다는 적이 스스로 상용하는 처벌을 자임할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본문으로 4) [역주] 클라우제비츠는 전략 일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략이란 전쟁의 목적(적의 무장해제)을 획득하기 위한 전투의 원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은 총체적인 군사행동에 목표를 부여하는 것이며, 전쟁계획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여러 행동계열을 하나로 묶어서 최종적인 결정행위로 유도하는 국면으로 연결시켜주어야만 한다. 요컨대 전략은 분리된 전역을 수행하기 위해 제반계획을 마련하며, 각 전역에서 행해질 전투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략의 구성요소를 ①정신적 요소, ②물리적 요소(전투병력, 조직과 편성, 3개 병종의 구성비), ③수학적 요소(작전선의 각도, 집중운동과 원심운동), ④지리적 요소(지형지세의 영향, 지휘소의 지점, 야산·삼림·도로), ⑤통계적 요소(모든 종류의 자재보급 수단)로 제시한다. 본문으로 5) [역주] 1812년 9월 7일 나폴레옹의 모스크바원정 도중에 있었던 최대의 격전. 초토화전술을 써가며 후퇴만 계속하던 러시아군은 신임 총사령관 쿠투조프 장군 지휘 하에 모스크바 서쪽 약 90㎞ 지점인 보로디노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맞아 싸웠다. 양군의 병력은 프랑스군 13만 5,000명, 러시아군 12만 6,000명이었으며, 쌍방 모두 500~600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는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맹렬한 포격전에 이어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였는데, 프랑스군 5만 8,000명, 러시아군 4만 4,000명의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저녁까지도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다. 쿠투조프는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려고 야음을 틈타서 퇴각하였으므로, 프랑스군은 그대로 전진하여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이 전투는 표면상 나폴레옹군의 승리로 보이지만, 그 후 러시아군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군의 러시아 원정 실패의 시초가 되었다.본문으로 6) [역주] 게릴라는 스페인어로 ‘소규모 전투’를 뜻하는 말로서 나폴레옹이 스페인 원정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무장저항을 게릴라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전략적으로 열세한 측이 대중의 지지와 험준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스스로 선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형태로 전술적 공격을 취하는 전쟁 과정중의 한 국면을 이루는 싸움의 한 형태이다. 참고로 빨치산(partisan)이란 parti 즉 도당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게릴라전에 종사하는 인간의 집합체 조직을 뜻한다. 1818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시에 고전하는 자국의 군대를 도와 이에 저항하였던 러시아 농민을 프랑스군이 호칭한 데서 비롯된다. 또한 유격전은 중국의 마오쩌둥이 사용한 용어이며, 1927년 이후의 국공내전 및 대일전쟁을 통하여 중국공산당 무장저항조직의 별동대가 소부대로 유격하면서 틈을 보아 적을 치는 비정규적 방식의 전법을 지칭한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게릴라, 유격대, 빨치산이란 용어는 유래가 다르지만 지금은 대체로 혼용하여 사용된다.본문으로 7)[역주]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가 프랑스 국내의 반혁명파와 손을 잡고 혁명파를 공격을 한 이후로 프랑스 군대의 역할과 성격이 변용되었다. 더 넓은 범위의 프랑스국민을 무장시킨다는 방침이 세워졌고, 정규군과 의용군의 통합이 이뤄졌다. 1793년 프랑스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법령의 문안은 다음과 같다. “모든 프랑스 국민은 군복무를 위해 징발된다. 젊은 남성은 전선의 전투부대에 참여하고, 기혼남성은 무기를 만들거나 군수품을 수송하며, 여성은 천막이나 의복을 만들거나 병원에서 복무하고, 어린이는 낡은 아마포로 붕대를 만들며, 노인은 광장에 나가서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공화국의 단결과 국왕에 대한 증오를 선전한다.” 이러한 국민총동원령에 따라 징병제(국민개병제·의무병역제)가 도입된다. 본문으로 8) [역주] 나폴레옹이 프러시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강요한 조약은 1808년 이후 프러시아 육군의 규모를 4만 2천명으로 제한했다. 프랑스의 강제적인 동원해제, 점령과 징발로 인해 프러시아 국민들의 감정은 악화되었고, 1813년 해방전쟁이 시작되고 프러시아 정부가 대대적으로 징병에 돌입하자 국민들은 기꺼이 징병에 응했다. 클라우제비츠는 1812년 러시아로 넘어가서 러시아군 중위계급의 옷을 입고 참전했다가 1813년 프러시아로 돌아오고 3월에 프러시아 군으로 복직한다. 그는 프러시아의 ‘국민총동원’(Landstrum)과 ‘후방군 민병조직’(Landwehr)을 구상했지만, 국왕의 냉대로 인해 그 활동에 직접 기여할 수 없었다.본문으로 9) [역주] 엥겔스는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독일제국헌법을 반혁명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독일 라인 지방에서 일어난 바덴-팔쯔 봉기(badisch-pf lzischer Aufstand)에서 빌리히의 부관으로 직접 참여했다(프러시아 포병장교 출신 혁명가인 빌리히는 엥겔스를 ‘대단히 쓸모있는 장교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 해 10월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그가 겪은 경험은 그의 혁명적 군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문으로 10)[역주]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발전의 가장 일반적인 단계를 서술함으로써, 다소간 가려져 있는 기존 사회 내부의 내란[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바뀌고,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를 공개적으로 타도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는 데까지 고찰했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p 64, 거름, 1991.) 본문으로 11) [역주]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 (…)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p 52, 거름, 1991.)본문으로 12) [역주] 칼 슈미트(1888-1985년)는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이다. 1933년 그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나치 당에 입당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쓴 주권에 대한 저작들은 논쟁적인 저서로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주권이 존재하는 장소는 사법적 질서의 안과 바깥 모두이며, 주권은 어떠한 법률로도 제한할 수 없는 권력이고,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하는 자이다. 본문으로
: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변이들 [%=박스1%] 우리는 이중적 의미에서 진정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우선 활기차게 진행 중인 논쟁이 있다. 이것은 동시대 전쟁의 클라우제비츠적인 또는 비-클라우제비츠적인 성격에 관한 논쟁으로, 이는 ‘전쟁학자’들의 협소한 논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이 논쟁은 대략 25년 전[1980년대 초반 미국 레이건 정부 당시에] 시작되었다. 그 시점에서 [핵무기에 의한] 강대국의 상호파괴에 대한 전형적인 냉전 시대의 강박증은 주로 제3세계에서 발발한 ‘저강도분쟁’(low intensity conflicts)에 대한 군사전문가와 정치이론가의 첨예한 관심으로 대체되었다(제 3세계라는 범주는 제 2세계가 붕괴한 후에도 여전히 많이 사용된다). 저강도전쟁은 극히 비대칭적이었는데, 게릴라 형태의 적에 대항하는 북반구의 기술적으로 정교한 군대의 개입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마틴 반 크레벨드와 미국의 사무엘 헌팅턴은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정치환경에서 ‘비(非)-클라우제비츠적’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들인 듯하다. 그 후 전(前)유고연방과 다른 지역에서 ‘종족전쟁’(ethnic war)이 일어났다. 이 전쟁들은 영국의 평화이론가이자 정치학자인 매리 캘도어와 다른 학자들로 하여금 과거의 전쟁(Old War)과 대비되는 새로운 전쟁(New Wars)이란 슬로건을 제시하도록 자극했다. 새로운 전쟁은 정규군을 지닌 민족국가가 아닌 [전쟁의 새로운] 역사적 ‘주체’를 동반한다. 또한 그들에 따르면, 클라우제비츠의 저명한 저작 『전쟁론』에서 파생한 관념들이 일반화되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전략적 관심사와 새로운 기술에 적용되고 지난 150년 동안 전쟁이론가의 주요한 관심사였더라도 그 관념들이 지닌 설명의 효용성은 한계에 달했다. 전쟁과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 인종, 경제를 포함하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작용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만 그 관념들은 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현실 물리세계를 설명하며 영예로운 이력을 쌓은 후 어느 시점에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과 전쟁학은 또 다른 유형의 [군사적] ‘계산’(calculation)을 고려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새로운 비-클라우제비츠적 이해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현대 전쟁에 대한 분석가들이 클라우제비츠의 도식과 개념을 분석적으로나 규범적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옹호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나는 특히 『무질서의 제국』(Empire of Disorder)이라는 주목할 만한 저서를 발간한 알랭 족스가 그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는 클라우제비츠를 사회·정치적 현상이자 국가주권의 상관물인 전쟁에 대한 이론가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 그는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슈미트뿐만 아니라 홉스, 마르크스, 베버를 전쟁이론가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상당 부분 미국이 중동에서 전쟁을 개시하고 처음 3년 동안 전쟁이 전개된 방식의 결과다. [미국의 중동전쟁에서] 신속히 이어진 성공적인 공격과 점점 더 어려워지는 방어 전투는 (심지어 퇴각의 가능성, 나아가 필연성에 늘 시달린다.) 베트남 전쟁과의 유사성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지리적 또는 지리-문화적 조건에서 군사작전 내부에서 정치적 요인의 복귀에 관한 고전적 논의와,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군의 효율성이 감소하므로 결국 공격 전략보다 방어 전략이 우월하다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를 부활시킨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적용하기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난점이 있다. 그것은, 철학적 범주를 사용해서 말해보자면 ‘순수한’ 클라우제비츠 모델에서 결국 승리하게 되는 전략의 ‘주체’는 이미 형성된 것이든 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든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군대-인민-국가의 통일체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미국의 침략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에는 적용될 수 있지만 이라크 전쟁의 경우에는 매우 의심스러우며 아마도 부적합한 주장이 될 것이다. ‘인민의 저항’ 또는 ‘반제국주의 지하드’를 주창하는 일부 무명의 이데올로그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단순한 방식으로 반미 군사행동의 ‘주체’를 식별할 수 없으며 ‘이라크’ 국가와 통합된 인민의 존재 자체가 문제다.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적 관념이나 용어,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을 적용하려고 할 때 이와 비슷한 난점이 작용하는 듯하다. 현재 상황에 관한 표상은 두 적들 간의 (세계적 규모의) ‘격투’이며 각각은 상대방의 섬멸을 추구한다. 미국 정부는 이를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두 적들 간에 명백한 비대칭성이 존재하지만 현재 상황은 ‘순수한 전쟁’(pure war)의 법칙으로서 ‘극단으로의 상승’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 역시 난관에 부딪친다. 클라우제비츠의 모델에서 폭력을 극단으로 상승하게 하는 가동장치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사활적인’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각 적대국의 의지이며, 이는 합리적인 도박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극단으로의 상승에는 제한 또는 자기제한의 원칙 역시 포함된다. 전쟁을 위한 전쟁, 자신의 권력을 파괴하는 전쟁은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하며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전쟁, ‘악마’와 동일시되는 불확정적인 적에 대항하는 전쟁이란 관념 역시 불가능하다. 이러한 전쟁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전쟁’이라고 불러선 안 되며 정치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인 또는 신화적인 다른 이름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고찰이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 왜 전쟁과 정치의 본질적, 또는 구성적인 관계에 대한 반성이 심원하게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채로 남아있는지 사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 비판적인 의미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모든 명제와 정의를 재조사하고, 전도하고, 개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가 남편이 남긴 원고를 『전쟁론』으로 출판한 후 지난 150년 동안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그것은 필수적이다). 1) 나에게 시간이 있다면 나는 클로드 르포르와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에 관해 쓴 모델에 근거해서 (그들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자신들의 정의를 클라우제비츠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클라우제비츠가 항상, 완전히 합리적이진 않더라도 정치를 사고 가능하게 하는 핵심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정치이론 내부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문헌에 대한 ‘연구’는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클라우제비츠를 독해함으로써 생산되는 영속적인 곤란함이 동반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문헌적 근거를 결여한 채 내린 결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히 문헌으로 돌아가서 개념적 독자성들을 개략적으로 평가하자. 나는 발표를 상당히 불균등한 두 부분으로 나눌 것이며, 각 부분은 훨씬 더 논의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첫 번째, 훨씬 더 긴 부분에서는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을 해석 또는 재구성하는 문제를 다룰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파생’된 개념과 클라우제비츠에 대한 ‘대응’을 다룬다. 이는 상이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클라우제비츠의 민족전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대응물로서 ‘계급’이 상기될 수 있다. 이어 매우 간략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서 나는 하나의 본질적 통일체 내에서 전쟁과 정치를 접합하는 방식들에 함축된 ‘주체’(또는 비(非)주체, 또는 불가능한 주체) 개념의 쟁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제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읽을 때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를 상기해보자. 그의 저작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고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저작의 상태는 파스칼의 『명상록』이나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와 비슷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저술 과정에서 결정적인 수정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작 전체를 다시 쓰길 원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저작에서 철학적, 실용적 수준의 내적 일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지금까지 수백 편의 논평들이 출판되었을 만큼 매우 어려운 과제다. 나는 이 논평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불완전하고 편향적일 수 있으나 인위적이지 않길 바라는 해석 절차를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나의 해석은 클라우제비츠의 명제가 계속 난점을 제기하거나 새로운 재해석을 요청한다는 독해 결과에 근거를 둔다. 나는 네 가지 명제를 추려내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 또는 공리로 구성할 것이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적 기획이 각 명제들의 (서로 분리되어 있든, 서로 반작용하든) 과도한 결론을 통제하려는 계속되는 시도라고 설명할 것이다. 나는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사상가들이 상이하게 이해하든가, 또는 재정식화하든가, 아니면 서로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문제의 명제들이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중에서 (최소한 현재) 군사전문가 집단을 넘어서 가장 유명하고 자주 논의된 것은 전쟁의 정의 또는 특징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독일어로 Fortsetzung)”(때로는 단순한 계속이다.)이라는 명제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략으로서 ‘방어’는 본질적으로 ‘공격’이나 ‘공세’보다 우월하다.”는 명제다 (그런데 전략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 역시 분명히 동반된다). 나는 두 명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할 것이지만, 다른 두 명제를 더 언급해야만 [체계 또는 공리가] 완성된다고 제안할 것이다. 나는 네 가지의 사실상 독립적인 명제들의 체계 또는 공리를 통해서만 클라우제비츠의 의도와 난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할 것이다. ‘계속’ 명제는 『전쟁론』의 분리된 두 곳, 1편과 8편에서 [서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두 번 반복된다. 그것은 저작의 양끝에서 제시될 뿐만 아니라, 저자의 암시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상이한 개념들에 상응한다. 첫 번째는 확실히 전쟁이 ‘계속해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다른 수단을 통해’ 또는 ‘다른 수단을 도입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관념을 강조한다. 이 때 다른 수단은 위협이나 압박뿐만 아니라 현실의 폭력, 심지어 극단적 폭력의 수단이다. 이것은 정치의 통상적 또는 정상적 수단은 비폭력이지만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에] 불충분하므로 정상적 수단을 넘어서 ‘다른 수단’(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면, 즉 정치의 가능성(과 권력)을 확대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정치 행위는 절대적 한계에 도달한다는 관념을 함의한다. 그러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며, 정치적 주체의 존재가 위험에 빠질 뿐만 아니라 [정치]행위의 정치적 성격과 정치의 정치적 ‘논리’ 자체가 전복될 수 있는 위험 지대, 제한 영역으로 진입한다는 관념 역시 함의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클라우제비츠는 폭력적 수단(전쟁이라는 수단, 군사제도와 애국주의의 발생과 같은 수단[전쟁]의 수단)의 사용은 정치에 반작용하거나 정치를 변화시킨다는 관념을 도입한다. 정치는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면 변형될 수밖에 없으며, 아마도 근본적으로 변형되고 변성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전쟁의 접합이라는 문제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처음 진술의 본체가 위태로워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즉각 변증법적 진술로서 제시된다. 하지만 두 번째 정식이 있다. 두 번째 관념이 강조하는 것은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일 뿐’이며 정치적인 것의 정상적 한계를 침해하지 않지만, 이러한 한계 내에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정치적 주체는 상황, 세력, 이익에 따라 어떤 정치적 ‘도구’로부터 다른 도구로 이동할 수 있으며 (클라우제비츠는 ‘도구’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한다) 이제 정치적 주체의 특징은 바로 폭력적 수단과 비폭력적 수단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비폭력적 수단의 사용에만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 능력이라는 것이다(우리는 이를 주권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확실히 이러한 정식으로부터 정치의 합리적 성격에 대한 어떤 표상이 나타난다. 특히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어떤 상황을 조정하기 위하여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정치의 합리성이 설명된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 역시 변증법적 관념이라는 것이, 또는 잠재적 긴장과 위험성을 동반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묘사로 해석될 수도 있고, 처방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한편으로 정치는 자신의 본성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의 폭력적 수단은 전쟁의 결과, 전쟁을 사용하는 자에게 끼치는 반작용 효과, 전쟁의 ‘논리’가 정치적 합리성을 벗어나지 않거나 전복하지 않을 때만, 즉 독립적 논리가 되지 않을 때만 정치적 수단으로 남는다는 경고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독립적’ 논리이지 않은가? 클라우제비츠가 함의하는 것은 정치가 전쟁을 도구화할 수도 있고 전쟁이 정치를 도구화할 수도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거나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는 정치에는 ‘논리’(logic)가 있고 전쟁에는 오직 ‘문법’(grammar)만 있을 뿐이며, 전자가 후자에 대해 최우선권(primacy)을 지닌다고 썼다. 내가 보기에 바로 여기에 난점이 존재한다. 우리도, 클라우제비츠도 이 난점을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클라우제비츠는 다른 정식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한 난점은 앞으로의 고찰을 통해 규명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정치와 관련하여 전쟁을 두 번, 서로 다른 두 각도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정치의 전부가 아니지만 (왜냐하면 정치는 전쟁과 다른 절차를 지니며, 이 역시 동일하게 필수적이다) 정치의 본질과 관계를 맺고 그것에 영향을 끼친다. 정치가 전쟁에 의존하는 방식과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정치에 미치는 결과는 정치의 본질을 드러내고 실제적으로 정치를 결정한다. 확실히 클라우제비츠가 피하고자 했던 것은 전쟁에 대한 의존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주장이며, 전쟁의 폭력적 수단의 사용과 전쟁의 논리적이고 실존적 함의(예컨대 하나 이상의 ‘적’을 지목해야 할 필요성)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처음 진술의 역(‘정치는 전쟁의 계속이다,’ ‘정치는 전쟁의 결과다.’)으로 나아갈 수 있다(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이러한 주장을 피하고자 했지만 이런 시도 역시 난점들을 지니며, 그 문제들은 클라우제비츠의 계승자들을 늘 괴롭혔다는 것을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도구’로서 전쟁의 활용과 그것이 정치 그 자체에 미치는 역효과에 대해 문제제기하길 원한다(또는 필요로 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이 과거 로마의 사법적·정치적 원리를 근대적으로 다시 정식화한 것이라고 이해하고자 할 수도 있다. “문관이 군을 제압한다(cedant arma togae).”, 이는 전쟁의 무장행동과 군사제도가 문관의 최우선권에 복종되어야한다는 것이다.2) 그러나 규범적 가치를 지닌 이 정식은 클라우제비츠를 괴롭혔던 문제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전쟁은 정치에 반작용하고, 정치를 가장 심원하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하는 새로운 형태로 변형하며, 이러한 형태에서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문제가 되고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반면 전쟁을 정치적인 것의 최우선권에 영속적으로 종속시킨다는 것은 전쟁이 합리적이라고(또는 합리적인 채로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전쟁의 합리성은 하나의 고리를 형성하는 수단과 목적의 ‘실천적’ 관계를 통해 본질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전쟁의 합리성은 정치적인 것 자체로부터 유래하는 목적론적 합리성이며, 정치적인 것은 전쟁의 합리성에 대한 척도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놀라운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 폭력의 극단에 이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의 극단, 즉 현실적 파괴가 문제가 되는 폭력의 극단에 이른다는 것은 ‘순수한 폭력’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투(Gefecht)의 관리로 규정한 전술의 수준에서 폭력이 극단에 이르고, 여기서 인간이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다. 그러나 전술과 전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전쟁의 일부이며,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전략적’ 목표에 종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전략의 문제(전략의 정의, 기능)가 클라우제비츠에게 가장 중요하고 또한 (아마도) 가장 곤란한 문제인지, 결국에는 이 문제가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회피되고 마는지를 (이미) 이해할 수 있다. 전략은 전쟁에 대한 (역사적, 개념적) 분석 속에서 극단적 폭력(절대적 수단)의 수준과 정치적 합리성(절대적 목적)의 수준을 접합한다. 우리는 인간학의 용어법을 도입해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란 이름으로 정치와 결합시키는 ‘폭력’은 무제한적 폭력이 아니라 제도적 폭력이며, 제도적 폭력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은 ‘폭력이 정치의 계속’이 아니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에게 문제는 어떻게 폭력이 극단에 이르면서도 제도의 한계 내에서, 제도적인 것으로 남게 할 수 있느냐이다. 하지만 대립물의 통일이 유지될 수 없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또는 발생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변이들이 실천적 동기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매번 어떻게, 왜 발생하는지 이미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변이들은 ‘전쟁이 다른 수단, 즉 극단적 폭력의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며, (본래의 가설에 따라) 정치는 정치적 합리성 또는 목적에 종속된 도구로서 폭력을 사용한다’는 원리를 형식적으로는 유지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이들은 정치적인 것에 관한 통념과 ‘전쟁’의 정의에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다. 역으로 그 변이들은 정치, 전쟁, 폭력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만 ‘계속’이라는 관념을 주장하거나 문제 삼을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러한 변이들은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이 지닌 순환성과 동시에 초기 조건을 훨씬 뛰어넘는 생산성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클라우제비츠가 더욱 구체적인 일련의 공리들 내에서 일반적 원리와 결부시킨 다른 명제들을 고려함으로써만 가능해질 것이다. 공격 전략에 대한 방어 전략의 우월성 『전쟁론』에서 발견되는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두 번째 명제는 ‘공격’에 대한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과 관련된다. 이 명제 역시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고, 여러 번 다시 정식화된다. 특히, 방어와 공격을 다루고, 이런 관점에서 상호 검토를 다루는 6편과 7편에서 주요 논의가 전개된다. 클라우제비츠는 방어의 우월성이 전술 수준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것도 아니며, 따라서 방어의 우월성이란 전략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수준에서 전형적으로 존재하고 전략 이론의 전체 대상은 이 명제를 확립하고 여러 환경과 조건에 따라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전형적인 순환을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방어의 전술적 우월성이란 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전술적 공격은 모든 전략적 방어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관념은 그와 대단히 상반된다 (왜냐하면 전술적 공격은 적에게 피해를 주고 적의 전쟁수행 능력, 즉 기동과 판단 능력을 부단히 파괴하기 위해서 세력관계에서 나타나는 시공간적 불균형을 활용하며, 이는 특히 최초 공격에서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의 계승자 중에서 마오쩌둥은 유격대 전쟁을 이론화하면서 [방어 전략과 전술적 공격의] 상호 보완성를 일관되게 발전시키지만, 이는 클라우제비츠에게 이미 명백히 존재했다. 또한 ‘방어적 정치의 우월성’ 또는 본질적으로 우월한 방어의 정치(예를 들어 민족의 방어, 민족경계의 방어, 독립의 방어)라는 주장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이는 아마도 가장 어려운 지점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방어의 정치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 이론의 ‘현실주의적’ 판본과 같거나 그 일부다.3) 폭력의 적법성(ius ad bellum)의 근대적 판본은 오로지 외부의 침략에 반응하여 민족이 수행하는 방어적 전쟁만이 적법하다는 것이다. 이런 전쟁은 적법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리고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다(‘결국에는’이란 여러 예외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방어의 정치는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이 아니다. 그에게는 전쟁에 관한 도덕적이거나 신학적인 개념이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훗날 칼 슈미트가 유럽 공법(ius pulicum Europaeum)으로 체계화한 관념, 즉 민족국가는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전쟁에 호소할 고유한 권리를 지닌다는 관념의 전형적인 주창자다. 방어의 우위라는 관념은 정치적 목적(Zweck)과 무관하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 목표(Ziel)와 ‘오직’ 관련된다. 확실히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은 정치와 전쟁의 접합의 형식적 합리성에 본질적 한계를 부과한다(물질적 한계 또는 유물론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치가 전쟁의 궁극적 목적을 부과하는 한에서만 이러한 접합은 합리적이거나, 이론화할 수 있는 합리적 구조를 보여준다(의식적이든 아니든, 전쟁 행위자가 정치의 결정을 의식하든 못하든, 모든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항상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로 군사적 목표의 달성가능성이 정치가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한에서만(대개 사후적으로 결정한다.), [전쟁과 정치의 정합은 합리적이다.] 그리고 [군사적 목표의 달성가능성은] 확실히 현실 전투의 형태로 결정된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낯선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전략’이 클라우제비츠의 숙고의 주요 대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이를 위해 역사적 상황을 비교하고, 전략의 천재성를 보여주는 군사 천재의 사례들을 검토하고, ‘전쟁계획’ 또는 ‘전략적 통일성’의 개념이 되는 특유한 ‘문법적’ 개념을 분리하고, 이러한 전쟁계획이 고안되고 실험될 수 있는 지리적, 시간적 한계(‘전투’, ‘전장’ 등등)를 지적하려고 대부분의 분석을 할애했다.4)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역설적이다. 그러한 작업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실체화될수록, 작업의 대상[전략]의 자율성은 점점 더 모호해지거나 문제가 되는 듯하고, 또는 오히려 논리적 역설에 말려든다. 즉, 이는 마치 전략적 사고와 전략적 계획의 주요 목표는 궁극적으로 전장에서 전략의 자율성과 같은 것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 주는 것처럼 된다. 전략은 내적 긴장과, 아마도 전쟁 개념의 아포리아(aporia)[철학의 난제]를 응축한다. 세 가지 문제를 추가적으로 검토해서 이를 해명해보자. 첫째, 이는[전략의 문제는] ‘이론’과 ‘역사’가 문제의 통일체에서 만나는 곳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항상 독자적(singular) 과정이며 연역적인 전쟁과학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항상 강조했다. 그러나 『판단력 비판』의 칸트적 의미에서 정치와 전쟁이 접합되는 규칙과 경향에 대한 반성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반성은 가설로 남는다. 우리는 전략의 자율성이란 개념은 전적으로 자신의 조건들과 한계들, 그것들의 역사적 변이들과 관련을 맺으며, 자신의 유효성을 영속적으로 시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조정되는 개념이며 판단의 범주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합리적이며 주관적인 이유로 이러한 고찰에 흥미를 느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주어진 역사적 정세에서 역사로부터 끌어낸,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참여한 전쟁인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혁명전쟁과 제국전쟁으로부터 끌어낸 ‘교훈’이 결국 방어 전략이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는지, 이런 교훈이 미래로 확장될 수 있는지 결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는 전쟁이 정치의 도구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또는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전쟁이 정치의 ‘계속’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또는 이미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또는 [정치의 계속이라는 전쟁의] 논리적 기능을 제거하는 위험을 무릅쓸 뿐이라고 의미하는지 결정하고자 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역사의 경향적 결과로서 방어 전략에 우월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방어 전략의 우월성을 다루는 논증에는 이 문제가 [항상] 수반된다. 클라우제비츠를 늘 괴롭혔던 이 문제가 전쟁에 대한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반성에 영속적으로 출몰할 것이고, 현재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그러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인상적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명제를 역설로서 제시했고(어떻게 오직 소극적인 결과를 낳는 방어 전략이 적극적인 결과를 낳는 공격 또는 정복 전략에 비해 우월하다고 증명될 수 있는가?), 이러한 역설은 전쟁의 수단이 극단으로 나아갈 때 명백해질 어떤 잠재적 불가능성의 신호가 아닌지 의심했다. 둘째, 우리는 방어 전략과 공격 전략이 마치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처럼 두 가지 ‘상이한’ 전략들 각각의 특질을 비교하는 표면적인 도식을 극복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다른 것으로] 변형해야 한다. 그것은 방어의 공격으로의 변형과 반전, 또는 방어가 공격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의 탐색이라는 더욱 심원한 문제다. 이것은 전쟁의 시간과 공간의 문제 즉 전쟁의 ‘역사’의 문제이며, 전쟁 행위자의 문제이므로 다시금 실질적인 의미에서 전쟁의 역사의 문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격투’의 복합적 형태이고 시간에 따라 발전하며, 다시 말하자면 행위자들의 세력관계를 부단히 변형한다고 썼다. 그 행위자들은 복합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정부와 인민을 포함하고, ‘군대’란 전형적인 형태로 통합된 제도와 인간을 포함하며 (군대는 역사의 행위자가 전쟁의 영역에 등장하는 일반적 형태다) 동맹과 동맹의 변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시간은 공격에서 방어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지닌 시간이다. 그것은 예정된 순환을 지닌 순전히 논리적인 시간이 아니며, 결국 전략적 ‘태세’ 중 하나[방어 또는 공격]를 강화하는 모든 요인들의 경향적 우월성에 의해 지배되는 역사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의 효과를 요약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가 사용한 일반적인 통념은 마찰이다. 마찰이라는 용어가 암시할 수 있는 것과 반대로, 그것은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도덕적, 기술적, 심리적, 사회학적 요인을 ‘통합’한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의 문제, 즉 전략적 숙고의 대상은 왜 즉각 성공하지 못한 (또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공격은 방어를 취하는 적에게 점차 굴복할 수밖에 없는지, 어떤 수단이 이런 불가피한 결과를 지연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방어 전략이 성공적인 반격의 준비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이는 반격이 방어로부터 준비되며, 어떤 의미에서 방어는 내재적으로 공세국면에서도 계속되고 연장된다(fortgesetzt)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상적인 변곡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문제는 이런 변곡점을 규정할 수 있느냐, 어떤 종류의 사건이 이런 변곡점으로 규정될 수 있느냐가 된다. 클라우제비츠가 이 문제를 절대적으로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문제에 이론적 공식을 부여했다. 그것은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공세 전략’과 쿠투조프의 ‘방어 전략’의 대치 과정에서 거대한 규모로 실행되었다. 프러시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승자가 주도하는 동맹에 다소 자발적으로 참여한 후 [프러시아와 프랑스가 대(對)러시아 연합전선을 펴게 되자] 클라우제비츠는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서 러시아 군대의 보좌관으로 참전하기로 결단하고 전쟁에 참여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레오 톨스토이를 포함해 19세기 이후 전쟁 이론가들이 반복해서 언급할 정도로 극적인 사건은 보로디노 전투였다(엥겔스와 톨스토이는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 착수하기 이전에 보로디노 전투에 대해 서술한 글을 신뢰했으며, 그 글은 나중에 클라우제비츠의 누이에 의해 출판했다.).5) 비슷한 규모와 전력을 지닌 두 ‘대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보로디노 전투는 나폴레옹의 전술적 승리로 보였지만, 결국 나폴레옹의 전략적 패배로 입증되었다. 보로디노 전투는 즉각 러시아 수도의 정복을 낳았지만, 사실상 나폴레옹의 최후의 패배를 예비하였다. 그러나 이 대치 역시 [방어에서 공세로] 변곡점이 발생하는 어떤 전형적인 조건을 보여주었다. 그 조건은 전투의 지속, 광대한 지리적 환경, 주민의 적대감 상승으로 인한 정복 그 자체의 반(反)생산적 효과뿐만 아니라 정규전과 게릴라전의 결합, [정규전과 게릴라전] 양 측에서 전쟁의 주요 행위자로서의 인민의 무장과 통합이었다(게릴라전은 스페인에서 수입된 새로운 개념이다. 비록 그러한 전투형태가 스페인에서 처음 벌어진 것은 아니더라도6)). 이는 우리를 세 번째 고찰로 이끈다. 그곳에서는 ‘정치’, ‘전략’, ‘전술’이라는 세 가지 수준은 더욱 명백히 변증법적으로 얽혀있다. 이는 아마도 클라우제비츠의 가장 심원한 딜레마일 것이다. 그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을 이해할 때 두 개의 논리적 ‘대립항’ 또는 ‘극단’이라고 묘사한 것들 간의 관계와 관련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쟁이 있는 곳에는 전쟁이 추구하고 직면하는 섬멸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고, 또 한편으로 전쟁에서 고유한 정치적 능력은 전쟁이 동반하는 특정한 위험과 전쟁이 정치적인 것에 미치는 특정한 효과 속에서 이미 시작된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또는 중단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 즉 언제, 어떤 대가로 ‘전쟁을 끝낼 것인지’ 결정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섬멸에는 한계가 있고, [섬멸이] 그 한계에 접근할 수는 있지만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믿는다. 그는 자신이 ‘절대전쟁’(absolute war)이라고 부른 것을 고찰했지만, 훗날 ‘총력전’(total war)이라고 불린 것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절대전쟁에서는 격투가 극단으로 상승하며 국가 또는 민족의 모든 세력이 전쟁에 참여하지만, 총력전에서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비전투원도 목표물이 된다. 정치를 계속하는 전쟁에서 문제가 되는 섬멸은 군대를 물리적으로 섬멸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진압하거나 해산시키는 것이고, 적이 타인의 의지와 목적을 강요당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전쟁을 중단하는 능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불린 프러시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를 클라우제비츠가 매우 존경했던 이유는 그가 정복지를 계속 보유하기 위해 자신의 승리들을 통제하고 유리한 순간에 화친을 맺는 능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결국 비참하게 끝나고 그와 그의 나라를 패배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정복의 논리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복의 논리에서는 모든 예정된 한계를 넘어서 전쟁규모를 확대해야만 [나폴레옹의] 정치적 목적이 달성될 수 있고, [러시아의] 방어가 우세하고 압도적인 반격을 준비하며 이전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극단 사이에 강한 긴장이 있다. 왜냐하면 전쟁을 중단하는 능력(이는 ‘부정적인’ 전략적 통념이고, 클라우제비츠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최우선권을 두었다)은 전쟁이 군사력과 자원의 일부분만을 포함할 때, 즉 적대국들 간에 섬멸의 가능성이 거의 없을 때에만 극대화된다. 반면에 물리적 섬멸이라는 전략적 목적은 군사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인력의 동원을 초래하고, 이는 의지에 따른 전장으로부터 철수를 불가능하게 하며, [철수가 시도된다면] 국가의 실존에 대한 배후의 공격[내분]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한다. 또 다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평형’점이며 또는 ‘불가능한’ 지점, 즉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관한 ‘불가능성’의 지점이다. 즉 그것은 전쟁의 불가능성이란 유령을 되살리지만, 그 유령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나를 마지막 고찰로 이끈다. 나는 시작 부분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주요 명제를 하나의 공리 형태로 배열할 수 있으며, 그 공리의 지위 자체는 명백하다기보다는 가설적이며 문제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공리를 구성하는 두 명제만을 검토했고, 각각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남은 두 명제를 급히 다루어야 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옹호하고자 하는 관념은 클라우제비츠의 담론이 네 명제의 결합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고, 전쟁의 주체(또는 전쟁의 ‘정치적 주체’, 따라서 전쟁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주체’)라는 그의 궁극적 문제는 네 가지 명제사이에서 아마도 끊임없이, 모순적인 방식으로 순환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한전쟁과 절대전쟁 세 번째 명제는 ‘절대 전쟁’과 ‘제한 전쟁’(limited war)의 구분과 관련된다. 이것은 그가 『전쟁론』을 저술하는 동안 생각을 바꿨고(그의 저작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론 전체를 고쳐 써야만 하는 ‘새로운’ 입장에 도달했다고 주장하게 한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분명하지 않고, 사실상 징후적 독해를 필요로 한다. 그 후 해석자들은 클라우제비츠에게 다양한 인식론적 도식(변증법, 이념형 등)을 투사하여 모든 가능한 방향에서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절대’ 전쟁이 아닌 것을 가리키는 두 가지 용어를 두고 주저했다는 점이다. 그는 ‘제한’전쟁과 ‘현실’전쟁(real war)을 언급하지만, 거기서 그는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전쟁은 항상 제한전쟁이고 절대전쟁은 가상적 모형이라는 관념으로 도약한다. 즉 가상적 모형에 따라 경험적 사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관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너무나 단순하며, 문헌과 사실상 모순된다. 아주 성급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관념이 레이몽 아롱과 어긋나며 엠마뉴엘 테레이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이 ‘절대전쟁’이라는 통념을 가상적 모형이나 이념형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역사적 현실 즉 역사적으로 관찰되었던 전쟁의 성격 변화와 관련을 맺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우리가 극적인 딜레마에 직면하게 한다고 믿는다. 분명히 ‘절대전쟁’과 ‘제한전쟁’은 상반되는 두 극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논리적 의미의 극점이고, 현실전쟁은 두 극점 사이에서 움직이고 다양한 단계와 결합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은 최소한 두 가지 상황에서 거의 순수한 방식으로 두 극점에 접근했다. 나는 최근 시기에서 그에 관한 등가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18세기 절대왕정 시기에 정부 간의 전쟁(Kabinettskriege)은 군사 카스트[특권계급]의 지휘 하에 용병, 직업군인, [모병된] 신병에 의해 강압적으로 수행되었고, 그것의 목적은 이른바 ‘유럽의 균형’ 내부에서 세력균형을 바꾸고 적대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동반하더라도 정의상 제한전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함께 개시된 ‘새로운 전쟁’(Volkskriege)은 절대전쟁이었고, 규모와 폭력의 측면에서 극단으로의 상승을 동반했다. 새로운 전쟁은 인민봉기에서 처음 나타난 ‘민족의 무장’을 동반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대륙의 헤게모니를 위한 제국주의 도구로 변형했다.7) 그 후 무장한 민족들은 서로 경쟁하고 싸웠으며, 각자는 민족주의적 비책을 계발했으며, 그들은 자신의 실존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싸웠다. 이러한 전개는 전쟁의 세계사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비범한 설명이 담겨있는 8편에 약술되어 있고, 이것은 뒤따른 시도들의 모형이 되었다(여기에는 1860년대에 저술, 출판된 『신아메리카백과사전』(New American Cyclopedia)에 담긴 엥겔스의 항목도 포함된다.). 그리고 클라우제비츠의 질문은 명백하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이러한 전개가 비가역적이고 역사는 ‘전쟁의 절대화’를 향한 방향으로 전개한다고 믿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떤 가능성에 의거해 이러한 경향에 저항해야만 하는가? 이런 경향은 민족과 국가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고, 모든 정치적 문제들 중에서 전쟁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게 하며, 결국 정치의 도구인 전쟁에 대한 정치의 최우선권을 파기한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 개인이 누구였는지 회고하는 게 유용할 것이다. 그는 불안한 귀족 가문 출신의 프러시아 장교로서 (주로 칸트적인) 철학교육을 받았고, 대적(大敵) 프랑스와 계속 싸우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떠나는 위험을 무릅썼고 직접적인 외교적 조정보다는 애국적인 관심을 우선시했다. 그는 인민 징병제에 기초해서 19~20세기에 이르러 거대한 군대로 발전할 것을 창안함으로써 프러시아 군대가 민족군대로 변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8) 하지만 이러한 전개가 군사 카스트와 국가 관료로부터 정치적 결정의 완전한 독점권을 박탈할 가능성에 대해 그가 우려한 것은 분명하다(나아가 빨치산이나 게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궁극적인 무기이지만, 그들을 활용할 때 사회적 위험성이 동반된다는 점을 우려했던 것도 명백하다.). 이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명제로 우리를 이끈다. 전략에서 도덕적 요인의 최우선성 네 번째 명제 역시 가장 크게 논쟁된 것 중 하나다. 그것은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에 대한 ‘도덕적 요인’의 궁극적인 최우선성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이라는 통념으로 열거한 일련의 복합적 요소들과 그것들이 철학적 견지에서 함의하는 바를 살펴보면, 우리는 매우 복합적인 힘들의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도덕적’ 요인은 확실히 도덕성에 대한 고찰과 관련되지만, 그것은 역사에서 주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개인적, 집단적 정서라는 더 광범위한 문제틀과 분리할 수 없다. 도덕적 요인들은 집단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것과 관련된다. 그래서 우리는 군대가 난폭한 죽음의 위험과 대치할 수 있게 하는 병사의 용맹과, 어떤 전장 상황의 무한한 복잡성을 독자적인 직관으로 대체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는 총사령관의 자질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국가의 ‘지성’ 또는 국가의 정치적 합리성이라고 부른 것을 고려해야 한다(이는 수단과 목적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우리는 인민의 애국심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군인의 전투능력, 자원과 인명의 희생을 유지할 수 있는 민족적 능력의 배경을 형성한다. 애국심 역시 새로운, 즉 ‘근대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모든 도덕적 요인은 집단적인 역사적 작용인, 또는 제도적 작용인의 차원 또는 계기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는 내가 말했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전략’의 수준이 분리될 가능성을 반영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도덕적 요인을 검토하는 것에 클라우제비츠가 대부분의 시간을 쏟은 이유다. 즉 그는 도덕적 요인을 군대의 통일성이 형성되고, 그것의 소멸에 저항하고, 적의 폭력을 압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검토했다. 역으로 다른 요인(예를 들어 경제적, 기술적 계기)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요인에 부여된 중요성은 다른 요인의 유효성을 더욱 심원한 도덕적 심급에 종속시킨다(예를 들어 조세인상 등의 방식으로 경제자원을 전쟁에 동원하는 민족적 능력). 후대의 이론가들이 자신이 더욱 유물론적이고 현실주의적이라고 간주하고 클라우제비츠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예를 들어 클라우제비츠가 군사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전략의 역사적 변형과 전쟁의 결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등장한 생산양식과 결합된 기술변화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긴 연구(『신아메리카백과사전』의 ‘군대’ 항목)에 전념한 엥겔스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조차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이라고 부른 것의 등가물을 고찰해야만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쟁의 가능성과 전쟁의 발전에 관한 계급의식, 더욱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클라우제비츠의 네 명제 간 관계를 살펴보면, 각각의 명제가 다른 명제의 결과를 지지하고 규명하거나 또는 제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우리가 무한한 논리적 순환에 들어서게 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제한전쟁의 절대적 인민전쟁으로의 근대적 변형은 어떤 도덕적 요인에 결정적 역할을 부여한다. 도덕적 요인은 전쟁의 ‘정치화’라는 의미에서 방어 전략과 방어의 반격으로의 전환에서 사활적 요소다. 그러나 애국주의는 국가가 조종할 필요가 있지만 지배할 수 없는 대중의 정서이기 때문에 도덕적 요인은 정치의 합리성을 위협하는 양면성을 생산한다. 전쟁 시기에 애국주의는 공포를 포함하며 또한 공포를 압도하는 적에 대한 증오(Feindschaft)가 된다. 그것은 지배자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될 수도 없으며(그것은 심지어 지배자에 반대하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를 통해 주관적으로 통제될 수도 없다. 그것은 정치를 파괴할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주체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가차 없는 질문의 비밀을 만나게 된다. [전쟁의] 직접적인 주체는 군대이지만, 군대는 최소한 근대 시대에 결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 없다. 군대는 계속 생산·재생산되고, 전쟁의 환경과 그 누적된 효과는 이러한 재생산을 변조한다. 그러나 군대는 하나의 괴물이다. 군대는 국가와 인민의 결합이자 접합점이며, 민족이라는 관념은 [국가와 인민이라는] 두 가지 계기로 분열된다. 이것이 클라우제비츠의 딜레마였다. 이제 전쟁은 오직 민족전쟁, 곧 민족주의적 전쟁의 형태로만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결론을 끌어내야 하지만, 역사의 무대에 출현한 새로운 인민권력을 통제해야 하며, 인민권력은 국가 자체가 인민의 정서를 영속적으로 능가하도록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민족국가가 일반적으로 직면하는 정치적 문제의 군사적, 전략적 등가물이었다. 즉 어떻게 ‘봉기를 제도화할 것인가’, 어떻게 대중들에게 고삐를 채울 것인가? 놀라운 것은 이 문제가 19세기 초반 혁명전쟁과 제국전쟁 직후 정치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떠올랐던 상황을 넘어서 의제로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전쟁과 마르크스주의 전통 복잡한 문제를 동반하지만, 나는 여기서 매우 간략하게나마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담론을 들여오고자 한다. 오늘은 [포스트-클라우제비츠 담론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담론만을 다룰 것이다(만약 마르크스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 차이는 마르크스가 최소한 초기에는 클라우제비츠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클라우제비츠를 감탄하여 읽고 마르크스에게 그 중요성을 조언해준 사람은 엥겔스다(1849년 프러시아 군대와 맞선 혁명세력의 분견대를 훌륭히 퇴각시킨 후 엥겔스에게 붙여진 별명은 ‘장군’이었고, 그는 항상 군사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9) 그렇지만 비교는 『공산주의자 선언』을 새롭게 독해하면서, 특히 1장의 구절들을 엄밀히 독해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1장은 계급투쟁의 연속적 형태가 역사적 변형, 특히 국가의 상이한 형태와 정치적인 것의 상이한 제도들을 이해하기 위한 안내선을 구성하며, 계급투쟁은 계속되는 내전(civil war)과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내전이란 표현은 1장의 끝에 있으며, 분리되어 있지만 확실히 두드러진다.)10) 내전의 행위자들(또는 정당들)은 전쟁과정에서 생겨나며, 가시적일 수도 비가시적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1장의 서두에서 제시한 놀라운 정식처럼 내전은 상쟁하는 계급들 중 하나의 승리로 귀결될 수도 있고, 상호 파괴로 끝날 수도 있다.11) 나아가 우리는 클라우제비츠와의 연결고리를 확립한 푸코가 제시한 논평을 따라 이러한 구절들을 독해하자. 1) 사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인종전쟁’으로서의 정치라는 이전의 해석을 ‘전도’했다. 인종전쟁은 프랑스혁명 이전의 유럽 사서(史書)를 지배했고 그 후에도 살아남았다. 2)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적 통념은 ‘인종전쟁’의 변질된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여기서 계급은 구체제 사회 내부의 인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은 19세기의 적대적 통념, 즉 ‘인종투쟁’의 통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와 마르크스를 넘어서 ‘인종전쟁’이라는 초기 관념으로 돌아가는 것은 투쟁 또는 갈등과 동일시되는 정치적인 것의 어떤 순수성 또는 확실성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통념에서 나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출현하는 것을 둘러싸고 전쟁과 정치의 통념에 대한 역사적, 논리적으로 엇갈리는 스텝(chasse crois )이 존재한다는 관념만을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푸코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과 마르크스의 관념의 대결이다. 확실히 가장 인상적인 차이는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을 분산과 집적의 단계, 잠재와 발현의 단계를 지닌 내전(즉 일반적인 의미에서 혁명)으로 이해함으로써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범주에서 배제하길 원했던 바로 그것을 ‘전쟁’이라고 확실히 부른다는 사실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대외전쟁, 민족전쟁처럼 내전도 ‘순수한’, 무차별적 폭력의 형태가 아니며, 그 역시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내전은 심지어 문명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보일 정도로 (또는 과거에 그렇게 보였을 정도로) 잔혹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더라도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그러나 내전은 특정한 유형의 정치제도 즉 ‘도시’ 또는 ‘국가’의 파괴로서 나타난다(또는 그리스 이후로 그렇게 나타났다.). 바로 이런 이유로 클라우제비츠의 용어법은 ‘폭력의 합법적 사용에 대한 독점’이란 국가의 정의를 예상하며(이는 폭력의 정치적 활용에 대한 독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용어법에 따르면 내전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반(反)정치의 도구다. 슈미트에 이르러서야 내전을 포함하는 반정치의 도구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이율배반적으로 통합된다(나는 이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겠다.). 사실 마르크스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두고 분열을 겪었던 듯하다(우리는 이러한 딜레마가 결코 해소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계속 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치적인 것이 ‘정치국가’를 의미하며, 국가를 둘러싸고 정치적인 것의 분리된 공간이 공적 대행자로서 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그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만 외형적으로 또는 사법적으로 계급이익을 초월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인 것을 초과하며, 결국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정치국가를 억제할 것이다(마르크스는 이를 ‘정치국가의 종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 투쟁, 투쟁의 증대되는 양극화, 투쟁에 대한 ‘의식’과 ‘조직’의 형성, 역사의 변화를 생산하는 투쟁의 역할을 의미한다면 정치는 바로 영속적, 초역사적 ‘내전’으로 정의된다. 그러한 내전은 결코 정확히 동일한 형태를 취하지 않지만 (‘최후’까지,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최종 대결까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쟁’이란 용어의 은유적 활용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클라우제비츠와 비교한다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내전은 전쟁의 개념을 확실히 반성적으로 활용하며, 특정한 전쟁 개념을 단순히 적용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와 변형을 동반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 또는 가설을 독해할 수 있다. 1) 오직 ‘내전’으로서 사회적 전쟁(social war)만이 ‘절대’전쟁, 또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전쟁이 된다. 그것은 극단에 도달하고, 절멸의 위험이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연의 의미’에서 전쟁이다. 2) 이러한 전쟁은 ‘정치’를 구성하고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전도하지만, 클라우제비츠에게는 단지 경향(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포)으로 남아 있던 것을 논리적 결론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그 결론은, 정치의 ‘수단’으로서 폭력은 정치적인 것에 반작용하며, 정치가 전쟁의 계속이 되게 한다는 관념이다. 나아가 이것은 전쟁 ‘주체’의 표상의 총체적인 변화와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제도적·사법적 주체 곧 국가가 아니며 오히려 내재적인 사회적 주체다. 전쟁의 사회적 주체는 자신의 역사적 형성과 부단한 자율화 과정 자체와 진정 구분될 수 없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가 (또는 마르크스를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사람들이 -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이들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계급투쟁이라는 약호를 통해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또는 클라우제비츠의 문제를 치환 또는 ‘번역’함으로써 그 명제와 문제를 부활시키게 한다. 그러한 문제들 중 하나는 계급을 ‘군대’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된다. 이것은 계급투쟁을 점점 더 통일되고 양극화되는 두 적대적 세력들 간의 대결로 표현하는 것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자격부여(qualification)에 종속된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결과일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계급투쟁은 진정으로 자신의 행위자를 창조하거나 생산한다. 그 조건은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의 초역사적 대결의 마지막 무대 또는 등장인물,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경향이다. 오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편에서 계급투쟁의 조직자로서 직접적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 적대자는 어떤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볼 때 조직화된 세력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나 ‘정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마르크스는 그 개념[군대로서의 계급]을 최종적 결론으로 밀고 나아가는 데 주저했고, 좀 더 은유적인 활용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혁명을 계급전쟁(class war)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어도 공산주의 전통에서 1세기 동안 매우 강력했다는 것을 알지만, 마르크스에게서 군대 형태의 혁명정당, 즉 계급정당 또는 ‘전체 계급의 정당’이라는 개념의 가능성만을 발견한다(왜 그런지는 조금 후에 말하겠다.). 그러나 그 전에 방어의 문제와 관련된 두 번째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파생개념, 또는 클라우제비츠와 유사한 파생개념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비정치적’ 요소의 복귀를 준비하는 놀라운 역전을 목격한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심지어 혁명을 준비하고 자본가계급을 전복할 때라도 ‘방어적’ 투쟁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정치철학이 되며, 사실상 묵시론이 된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임금노동자를 절대적 빈곤과 실업에 빠뜨리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임금노동자, 더욱 일반적으로는 노동자[임금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노나 노예]가 사회를 부양하고 유지하므로) 사회의 재생산과 생존을 위협한다는 관념과 결합된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묘사한 것처럼, 자본주의에는 허무주의적 요소가 있으며, 이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사회 내부의 적에 대항하여 사회를 방어하는 것과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더욱 전략적, 또는 준(準)전략적 고려가 나타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자신의 힘, 의식, 조직을 경쟁하는 부르주아 조직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관념에 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라리아 계급 정당을 반(反)국가로 가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가 착취적 사회질서를 위해 사회를 억압하는 한에서 국가의 부정, 즉 ‘부정의 부정’으로 간주했다. 이 모든 것은 대외 전쟁의 상황과 반대로 ‘내전’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전쟁’에서 적대자들은 진정 외부적이지 않고,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들은 하나의 분할[분업] 형태에서 동일한 사회적 주체의 진화 양식이며, 그렇게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전쟁과 정치의 접합을 이해한 결과는 결정적인 동시에 모호하다. 적대의 화해 불가능한 성격을 현실화함으로써 내전의 모형은 계급사회, 특히 자본주의에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종언을 준비하는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이행의 형태로 명백히 나타나며, 우리는 이를 자기절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마르크스가 후속 작업에서 이러한 설명을 단념하거나 무시하게 하였는가? 후속 작업은 그가 계급투쟁의 전개에 관한 다른 모형을 모색하도록 이끌었고, 그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제시했던 반정치로서의 정치적인 것이란 날카로운 서술로부터 어떤 의미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왜 그런가? 내 견해로는 일련의 긍정적인 요인들이 작동했다. 그것에는 점증하는 빈곤과 부의 양극화라는 ‘묵시론적’인 선형모형을 희생시키는 자본주의 발전의 경제적 축적사이클에 부여된 중요성의 증대도 포함된다. 그러나 전쟁과 내전의 현상들에 대한 더 많은 경험 역시 부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 현상들은 계급투쟁을 내전과 유비하는 것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했고, 그것은 극단으로 밀린 내전 즉 ‘절대적 내전’으로서 혁명 모형에 관한 모든 부정적 측면을 보여주었다(그 교훈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개량주의’와 ‘혁명주의’간에 뜨겁게 논쟁되었다.). ‘제한적 내전’ 또는 ‘억제된’ 내전은 형용모순으로 보였다. 1848년과 1872년(파리코뮨)에 일어난 현실의 내전은 대량학살의 비극적 경험이었다. 이 때 부르주아 국가는 프롤레타리아를 궤멸시키기 위해서 (식민지 전쟁을 포함해) 대외전쟁 동안 형성된 군사 장치를 손쉽게 사용했고,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군대’가 아니었다(심지어 게릴라 군대도 아니었다.). 게다가 (20세기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 동안 민족전쟁은 계급투쟁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정치와 전쟁이 접합하는 바로 그 장소이자 전략적 사고의 장소로서 남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증거가 있었다. 민족전쟁을 ‘현실’과 현실의 ‘정치’과정을 은폐하는 외양 또는 인공현실로 묘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코 완전히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민족전쟁은 서로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이 ‘자신의’ 노동자가 서로를 절멸하도록 하고, 민족주의 담론으로 노동자를 기만하려는 노력을 결합해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민족전쟁의 엄연한 현실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했으며, 이는 클라우제비츠와 그의 문제를 직접 이해하는 것으로 복귀해야한다고 요청한 것이었다. 이는 엥겔스에 의해 준비되었다. 그는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을 ‘관념론적’으로 강조했다고 비판했고, 그것의 유물론적 등가물을 모색했다. 그것은 전쟁의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에 대한 강조와 양립할 수 있다고 입증되어야 했다. 이러한 등가물은 인민의 군대 또는 대중 징병이 (최소한 민주공화국에서는) 군대 내부에 계급투쟁을 잠재적으로 도입할 것이며, 따라서 군사문제에서 대중들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공포를 대중들이 국가와 군사장치를 희생시키며 새로운 전략적 행위자로서 부상한다는 예언으로 역전시킬 것이라는 관념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레닌과 마오쩌둥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변증법적 원칙이 전쟁과 정치의 새로운 접합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전략적 결합체에 대한 관념이 국가-군대-인민의 통일체로부터 계급, 인민, 혁명정당이라는 새로운 통일체로 대체되었다. 알다시피 레닌은 클라우제비츠를 철저히 읽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고 2인터내셔널과 반전결의안이 붕괴된 후 『전쟁론』에 관한 주석과 논평을 남겼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라는 구호를 기초했고, (적어도 자신의 나라에서는)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그 구호는 ‘도덕적 요인’(국제주의적 계급의식)이 시간이 지남에 따른 ‘대중’전쟁(즉 대중으로 구성된 민족군대가 수행하는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방어’로부터 준비되는 ‘공세’라는 관념에 대해 완전히 독창적인 해석을 제공하며, ‘절대’전쟁은 유지될 수 없거나 유지될 수 없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그 필연성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그것은[내전으로 전환은] 반드시 국가를 파괴해야 하며 차라리 국가를 희생시켜 정치의 조건들을 반드시 재창조해야 한다. 국가는 인민을 무장시키고 인민의 무장력 활용을 통제하는 능력을 보유하는 한에서만 정치를 구현할 수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박탈당하자마자 정치적 환영(幻影)이 될 것이다. 또는 합법적 폭력의 국가 독점으로부터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폭력의 계급 독점으로 변화되자마자 그렇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의 전위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칼 슈미트의 비정치적 개념의 출발점을 형성한다는 것에 잠시 주목하자.12) 여기서 주권은 계급투쟁을 예방적으로 억압하기 위해서 국가의 핵심에 ‘예외상태’를 설치할 수 있는 능력으로 동일시되며, ‘내부의 적’ 즉 ‘계급적 내전’의 적에 대한 정의는 대외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폭력의] 국가 독점과 그 능력을 항상 재창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오쩌둥의 ‘유격대의 지구전’ 이론에 이르러서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방식의 탈환이자 정치적인 것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영속적으로 클라우제비츠를 괴롭혔던 아포리아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사실 나는 여러 논평자들이 인정했던 것처럼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 이후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라고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는 클라우제비츠의 공리 중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모두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실제로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읽었거나 일부 인용문을 읽었는지 알기 어렵다(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이 그가 읽을 수 있던 유일한 언어인 중국어로 번역되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항일전쟁 이후 (더 정확히는 대장정의 종료 이후) 마오쩌둥의 다양한 소책자와 논문에서는 레닌이 제국주의에 대한 에세이에서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인용한 대목에서 다시 인용한 것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오쩌둥이 그 문제틀을 실질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모택동의 핵심적인 관념은, 처음에는 제국주의 적국과 지배 부르주아는 군대가 있지만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은 군대가 없기 때문에 방어 전략이 강요되지만, 이는 결국 대립물[공격전략]으로 역전되고, ‘가장 강한 적’의 실제 절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지구전’(또는 전쟁의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전쟁의 지속시간은 ‘마찰’의 변증법적 등가물이며, 농민 대중들 내부에서 피난처를 찾는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의 소규모 핵심에게 필요한 시간이다(그들은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인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은 세 가지 결과를 동시에 추구한다. 첫째, 침략군의 고립된 분견대에 맞서 지역적 게릴라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적군의 희생을 대가로 스스로 무장한다. 둘째, 전장을 전국적 수준으로 (중국에서는 반(半)대륙 수준으로) 확장함으로써 전략의 기술을 ‘배운다.’ 셋째, 헤게모니를 외부의 권력(식민지 정복자 또는 민족의 특권계급)으로부터 내재적 권력으로 이동하고, 피지배계급들의 공통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인민의 적(또는 당의 적)으로부터 분리한다. 공산당은 바로 그 내재적 권력으로 간주된다(그리고 장기간 동안 내재적 권력으로 머무른다고 간주된다.). 오늘 이런 분석의 맹목점은 오히려 더 분명해 보인다(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다.). 즉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민족 내부의 세력들만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처럼, 2차 세계대전의 국제적 맥락을 사실상 무시한다는 것이다. ‘자력갱생’이라는 마오주의의 위대한 구호는 잠재적으로 민족주의적 차원을 지닌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전쟁의 합리성이란 관념(이는 정치적 주체를 함축한다.)에 대해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결과는 인상적으로 남는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완전한 순환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종결이 특히 국가가 수행하는 제도적 전쟁과 인민의 게릴라 전쟁 간에 확립된 위계적 관계의 역전이라는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역전이 클라우제비츠에서 발견되는 아포리아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 아포리아를 전위할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난점은 전쟁을 ‘절대전쟁’ 즉 무장한 인민이 수행하는 전쟁으로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서 수립되고 활용되어야 하는 ‘도구’에 대해 국가가 선험적으로 절대적 지배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또한 중국혁명의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끌어오면서 생기는 마오쩌둥의 난점 또는 우리가 그를 사후적으로 독해할 때의 난점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계급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민을 군대 또는 ‘인민군’으로 내부로부터 변형한 조직[공산당]의 내재적 권력, 즉 혁명정당이 스스로 국가가 되는 조건에서만 [방어에서 공세로] 전략적 반전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으며 정치적 대행자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이는 심지어 국가가 혁명적 사건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재건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하며, ‘문화혁명’으로 나아갔던 마오주의적 전망 또는 문화혁명 동안 교육되었던 마오주의적 전망에서도 그러하다). 사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민족해방전쟁의 조건에서는 가망성이 매우 낮지만) 혁명정당이 ‘권력장악’ 또는 적의 완전한 파괴라는 ‘최종’목적(Zweck)까지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며, 따라서 ‘절대전쟁’을 ‘제한전쟁’으로 어떻게든지 축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략적 과정의 주체(또는 전략적 과정 내부로부터 결정되는 주체)는 모든 상황에서 분열된 주체 또는 주권과 봉기 사이에서 동요하는 주체로 머문다. ‘분자전쟁’(엔첸스베르거)에 대한 일부 근대 이론가와 논평자는 주체의 범주를 단순히 제거하거나 그것을 부정적이거나 불완전한 형상으로 환원함으로써 아포리아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전쟁’의 범주 그 자체가 유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1) [역주]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프러시아 부르크에서 태어나 1831년 51세의 나이로 프러시아 브레슬라우에서 콜레라로 병사할 때까지 39년 간 군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폰 마리는 1832년 유고를 정리하여 10권의 선집계획 중 1차 저작계획으로 1권에서 3권까지를 묶어 『전쟁론』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마리는 남편이 생전에 자신의 저작이 출판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고 술회했다). 그 후 1837년까지 『전쟁과 작전술에 관한 칼 폰 클라우제비츠 장군의 유작집』이 10권으로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2) [역주] 마르쿠스 키케로(기원전 106년 - 기원전 43년)는 카이사르와 동시대 사람으로 기원전 63년에 집정관의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 63년에는 카틸리나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키케로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무기 삼아 이를 진압한다. 키케로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Consul sine armis(군사력을 갖지 않은 집정관), Dux et imperator togae(토가 차림의 최고 사령관), Cedant arma togae(文이 武를 제압하다). 키케로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고, 이는 훗날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계승된다. 본문으로 3)[역주] ‘정의로운 전쟁’(just war=bellum justum) 이론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후 중세 기독교 전쟁사상의 핵을 이룬다(콘스탄니누스(301-337)는 군대를 로마로 진격시키면서 군대의 방패에 십자가 표지를 달게 했으며, 테오도시우스는 416년 칙령을 내려 기독교도만을 군인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키케로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받아들여 전쟁이 다음의 조건을 갖추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전쟁이 사회의 보편적인 선을 위한 것으로 합법적 당국에 의해 선포되어야 한다. 둘째, 전쟁의 원인이 정당해야 하며 결코 법질서에 위협이나 손상을 주어선 안 된다. 셋째, 전쟁의 목적은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법질서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합법적 당국을 황제로 규정하고 방어전이 아닌 공격전까지 정의로운 전쟁에 포함시키는 것이며, 정복전쟁 이후 적대국을 포괄적인 법질서로 융화시켜야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한편 십자군 전쟁의 참화가 지난 후 아퀴나스(1225~1274)는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을 재정식화하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전쟁방식은 공격전이 아니라 방어전이어야 하며, 정당방위의 경우에만 살상이 인정되고, 전투요원이 아닌 민간인은 결코 전쟁 대상이 되어선 안 되고, 적을 살상하기보다는 적이 스스로 상용하는 처벌을 자임할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본문으로 4) [역주] 클라우제비츠는 전략 일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략이란 전쟁의 목적(적의 무장해제)을 획득하기 위한 전투의 원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은 총체적인 군사행동에 목표를 부여하는 것이며, 전쟁계획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여러 행동계열을 하나로 묶어서 최종적인 결정행위로 유도하는 국면으로 연결시켜주어야만 한다. 요컨대 전략은 분리된 전역을 수행하기 위해 제반계획을 마련하며, 각 전역에서 행해질 전투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략의 구성요소를 ①정신적 요소, ②물리적 요소(전투병력, 조직과 편성, 3개 병종의 구성비), ③수학적 요소(작전선의 각도, 집중운동과 원심운동), ④지리적 요소(지형지세의 영향, 지휘소의 지점, 야산·삼림·도로), ⑤통계적 요소(모든 종류의 자재보급 수단)로 제시한다. 본문으로 5) [역주] 1812년 9월 7일 나폴레옹의 모스크바원정 도중에 있었던 최대의 격전. 초토화전술을 써가며 후퇴만 계속하던 러시아군은 신임 총사령관 쿠투조프 장군 지휘 하에 모스크바 서쪽 약 90㎞ 지점인 보로디노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맞아 싸웠다. 양군의 병력은 프랑스군 13만 5,000명, 러시아군 12만 6,000명이었으며, 쌍방 모두 500~600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는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맹렬한 포격전에 이어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였는데, 프랑스군 5만 8,000명, 러시아군 4만 4,000명의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저녁까지도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다. 쿠투조프는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려고 야음을 틈타서 퇴각하였으므로, 프랑스군은 그대로 전진하여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이 전투는 표면상 나폴레옹군의 승리로 보이지만, 그 후 러시아군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군의 러시아 원정 실패의 시초가 되었다.본문으로 6) [역주] 게릴라는 스페인어로 ‘소규모 전투’를 뜻하는 말로서 나폴레옹이 스페인 원정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무장저항을 게릴라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전략적으로 열세한 측이 대중의 지지와 험준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스스로 선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형태로 전술적 공격을 취하는 전쟁 과정중의 한 국면을 이루는 싸움의 한 형태이다. 참고로 빨치산(partisan)이란 parti 즉 도당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게릴라전에 종사하는 인간의 집합체 조직을 뜻한다. 1818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시에 고전하는 자국의 군대를 도와 이에 저항하였던 러시아 농민을 프랑스군이 호칭한 데서 비롯된다. 또한 유격전은 중국의 마오쩌둥이 사용한 용어이며, 1927년 이후의 국공내전 및 대일전쟁을 통하여 중국공산당 무장저항조직의 별동대가 소부대로 유격하면서 틈을 보아 적을 치는 비정규적 방식의 전법을 지칭한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게릴라, 유격대, 빨치산이란 용어는 유래가 다르지만 지금은 대체로 혼용하여 사용된다.본문으로 7)[역주]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가 프랑스 국내의 반혁명파와 손을 잡고 혁명파를 공격을 한 이후로 프랑스 군대의 역할과 성격이 변용되었다. 더 넓은 범위의 프랑스국민을 무장시킨다는 방침이 세워졌고, 정규군과 의용군의 통합이 이뤄졌다. 1793년 프랑스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법령의 문안은 다음과 같다. “모든 프랑스 국민은 군복무를 위해 징발된다. 젊은 남성은 전선의 전투부대에 참여하고, 기혼남성은 무기를 만들거나 군수품을 수송하며, 여성은 천막이나 의복을 만들거나 병원에서 복무하고, 어린이는 낡은 아마포로 붕대를 만들며, 노인은 광장에 나가서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공화국의 단결과 국왕에 대한 증오를 선전한다.” 이러한 국민총동원령에 따라 징병제(국민개병제·의무병역제)가 도입된다. 본문으로 8) [역주] 나폴레옹이 프러시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강요한 조약은 1808년 이후 프러시아 육군의 규모를 4만 2천명으로 제한했다. 프랑스의 강제적인 동원해제, 점령과 징발로 인해 프러시아 국민들의 감정은 악화되었고, 1813년 해방전쟁이 시작되고 프러시아 정부가 대대적으로 징병에 돌입하자 국민들은 기꺼이 징병에 응했다. 클라우제비츠는 1812년 러시아로 넘어가서 러시아군 중위계급의 옷을 입고 참전했다가 1813년 프러시아로 돌아오고 3월에 프러시아 군으로 복직한다. 그는 프러시아의 ‘국민총동원’(Landstrum)과 ‘후방군 민병조직’(Landwehr)을 구상했지만, 국왕의 냉대로 인해 그 활동에 직접 기여할 수 없었다.본문으로 9) [역주] 엥겔스는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독일제국헌법을 반혁명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독일 라인 지방에서 일어난 바덴-팔쯔 봉기(badisch-pf lzischer Aufstand)에서 빌리히의 부관으로 직접 참여했다(프러시아 포병장교 출신 혁명가인 빌리히는 엥겔스를 ‘대단히 쓸모있는 장교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 해 10월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그가 겪은 경험은 그의 혁명적 군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문으로 10)[역주]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발전의 가장 일반적인 단계를 서술함으로써, 다소간 가려져 있는 기존 사회 내부의 내란[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바뀌고,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를 공개적으로 타도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는 데까지 고찰했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p 64, 거름, 1991.) 본문으로 11) [역주]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 (…)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p 52, 거름, 1991.)본문으로 12) [역주] 칼 슈미트(1888-1985년)는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이다. 1933년 그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나치 당에 입당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쓴 주권에 대한 저작들은 논쟁적인 저서로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주권이 존재하는 장소는 사법적 질서의 안과 바깥 모두이며, 주권은 어떠한 법률로도 제한할 수 없는 권력이고,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하는 자이다. 본문으로
권위 있는 여성 대담자가 있는 것이 인정된 권리를 갖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자유의 기획에 따라 분명히 표현하고 여성 되기(being a woman)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대담자가 필요하다.[…] 권리 주장의 정치는 그것이 얼마나 정당하고 심오한지에 상관없이 부차적인 정치다. - 밀라노 여성서점 31 이 놀라운 주장이 등장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여성 집단의 사고와 변천에서의 여성적 자유의 발생』(Non Credere di avere dei diritti: la generazione della liberta`femminile nell’idea e nelle vicende di un gruppo di donne)에서다. 이 책은 1987년 <밀라노 여성서점>(Liberteria delle Donne di Mliano)이 집단적으로 집필했고, 1990년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라는 제목으로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지금은 절판된『성적 차이』는 매우 도발적인 저작이어서 미국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고 1990년대 소위 “여성” 범주 논쟁에서도 사실상 누락되었다..1) 이와 같은 부재는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공동 역자이자 편집자인 라우레티스(Teresa de Lauretis)는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역설적으로 여성의 권리, 법 앞에서의 평등한 권리의 옹호가 아닌 여성에 대한 완전하고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책임성을 요구하는 자유는 서구적 사고 속에서 출현한 다른 어떤 통념에도 뒤지지 않는 급진적인 개념이다”(12)..2) 자유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정치적·개인적 책임성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런 실천이 과연 서구 사상사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것 못지 않게 급진적이라면, 왜 미국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성적 차이』를 다소 무시했는가? 이러한 질문을 반성하려면, 페미니스트들은 서구적 전통에서 상속받은 자유의 개념화, 즉 의지의 현상, 주체의 소유, 주권이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개념화에 그녀들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자신의 체제와 같은 자유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이 같은 설명에 따르면, 자유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용어로 정의되고,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 안에 거주하며, 정치가 종결되는 곳에 존재하는 무엇으로 경험된다..3) 그러나 <밀라노 여성서점>은 자유를 이와 다르게 사고한다. 이들에게 자유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창조적·집단적인 실천이자 근본적으로 창시적인 특성을 가진 [실천으로서], 환원할 수 없을 만큼 우연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성적 존재로서의 여성들 간의 관계를 구축한다. 즉 이 여성들은 이런 실천이 없었다면 남성적 교환 경제 안에서의 위치를 제외한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밀라노 여성들은 1·2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자유를 주장해온 틀을 거부하며 남성과의 유사성(동일, sameness) 또는 일반적인 사회 복리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특별한 기여(차이)라는 식으로 자유에 대한 여성의 요구를 정당화하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밀라노 여성들은 [서구적 전통에서] 상속받은 자유에 대한 이해를 특징짓는 주권이라는 환상뿐만 아니라, 자유를 향한 여성의 요구를 여성들의 사회적 기능의 봉사 안으로 밀어 넣는 유용성이나 편의의 논리 역시 거부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여성 문제와 여성권에 대한 논변의 역사적 반복을 운명적으로 지배해 온 논리다. 즉, 여성의 쓸모는 무엇인가? 내가 다른 곳에서 페미니즘의 사회적 문제라고 칭했던 것의 논리는 제쳐두고, <밀라노 여성서점>의 “정치를 행하는 비범한 방법”(Milan 50)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를 [발생시키는] 실천”(79), 또는 밀라노 여성들이 “성차의 정치”라 부르는 것의 관점에서 서구 페미니즘의 전체 기획을(145) 개작한다..4) 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밀라노 여성서점>의 글을 눈여겨보지 않은 것은 자유를 주권으로 보는 문제적인 관점에 우리가 연루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는 너무 나간 것이다. 이탈리아어본 부제(여성 집단의 사고와 변천에서의 여성적 자유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미국 페미니스트는『성적 차이』를 여성의 자유에 관한 정치적 선언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렇기 보다는, (“여성” 범주 논란의 맥락에서) 성들 간의 감축할 수 없는 차이에 관한, 그리고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국적 관계를 압도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간의 상징적 비대칭성에 관한 주장으로 받아들였다..5) (대부분 유럽적 기원의) 페미니즘 저작을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성급히 기각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6)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성적 차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위티그(Monique Wittig)가 신랄하게 비판한 것처럼 “우리를 여성의 신화로 후퇴시키”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차이의 범주들, 이들의 정치적 기원과 효과에 관한 진지한 토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생각해 왔다(13). 이 글에서 나는 성적 차이에 관한 페미니스트들의 설명에 대하여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익숙한 논변을 다시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7) 우리(페미니스트)가 이 논쟁에서 이미 지쳤다면―기초에 관한 논쟁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이는 적지 않게 성적 차이를 주체의 문제가 아닌 문제로 사고하는 데에 우리가 진정한 곤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 문제의 틀 내에서는, 이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적 모체 내에서 주체 형성의 조건 자체를 규정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불가능한 선택 이외의 것으로 성적차이를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성적 차이를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거나 (즉, 준 형이상학적인) 사회에 의해 구성되는 것(즉, 역사적으로 우연적인)으로 여겨왔다..8) 페미니즘 기획을 다루면서 세계를 건설하는 문제에 초점을 둔 자유-중심적 틀 내에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우리로 하여금 성적 차이를 정치적인 것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즉 이는 분명히 표현되어야 하는, 즉 공적 공간에서 이 같은 다른 주장들과 공적 관계에 진입해야 하는 성적 존재에 대한 주장[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성적 차이라고 불리는 자유의 실천이 부과한 난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밀라노 여성들의 정치의 중심에 있는 세계 건설의 임무에서 비껴나지 않아야 한다..9) 이러한 임무는 여성들이 남성적인 문화 안에서 겪는, <밀라노 여성서점>이 여성을 약화시키는 (상징적인) 무차별 상태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여성은 동일하다.’는 언명에 대한 대응이다. 이러한 동일성은 보부아르(Simon de Beauvoir)의 성/성별 차이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초점이 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유산에 동반된 성/성별 평등의 원칙을 둘러싸고 조직된 페미니스트 정치에도 도입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말하기를 페미니즘 내에서 평등은 “성별에 근거를 둔 공통성을 향한 여성들의 요구”(“당신이 모든 다른 여성들과 같은 여성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를 강화하지만, 각각의 여성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특색/구별을 필요로 한다.”는 점(137)과, 한 집합의 등가적 구성원 이상으로 취급받고자 하는 욕망, 다시 말해 그녀의 특수성을 무시한다. “중립적인 정의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여성과 비교하지 말고, 남성과의 평등을 기다리라고 명한다. 그 결과 여성들의 경험은 자기 자신 안에 감금된 채 사회적으로 번역되지 않는다.”(113) 다양한 경험을 인정하고, 평가하고, 매개할 수단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들이 자리 잡을 시-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각각의 여성은 자신만의 경험에 갇혀있고, 이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어쨌거나, 누구와 [기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25) 대담자와 매개(현세적인 사이 공간)의 상징적 구조를 이름붙이는 것은 “사회 계약의 성별화된 토대에 이르게 되며”, 첫째로 “남성과 여성간의 사회 계약은 없다.”는 사실과, 둘째로 “여성은 상징적인 수준에서는 무리이지만”, “사회생활에서는 […] 대부분 서로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129, 134). 남성적인 사회 계약의 이면은 단지 페이트먼(Carol Pateman)이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밀라노 여성서점>이 동의했을.1) 것처럼 남성의 여성 소유뿐만 아니라, 여성이 기술과 “사회 교환의 규칙”을 누리지 못하는(134) “여성 인류의 야만적 상태”(137)이기도 하다. 여성들 간의 관계는 남성들의 관계의 규범을 해치는 예외적인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밀라노 여성서점>이 “남성의 정치적 사고에서의 맹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136). “여성들이 개인적 특색/구별을 지니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과 그녀가 여성의 공통성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자매들의 요구를 화해시키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개인과 집단성 간의 관계에 관한 오래된 남성들의 선언들 사이에서 탐색해” 봐야 소용이 없다(136). <밀라노 여성서점>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적 사회 계약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모델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평등이라는 그 중심적인 원칙은 이리가레(Luce Irigaray)가 “무엇에 대한 평등인가?”(“Equal” 32)라는 간단한 질문을 통해 드러낸 실패한 논리 속에 페미니즘을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남성적 기준이 평등한 권리를 위한 여성들의 역사적 투쟁 이면의 공공연한 표준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11) 이 표준이 그들에게 평등이냐 차이냐 라는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이 초기부터 페미니즘을 괴롭혀왔던 문제다..12) 이것은 페미니즘을 상반된 진영(평등 페미니스트 대 차이 페미니스트)으로 분할하는 문제며, 이는 화해가 불가능해 보인다..13) 그리고 이는 아마 사실이다. 평등과 차이라는 분명하게 모순되는 원칙을 둘러싸고 조직된 페미니즘의 틀 내에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는 (1) 두 진영 중 한쪽을 따르거나, 즉 불가능한 선택을 하거나, (2) 불가능한 선택을, 스콧(Joan Scott)의 표현대로 “페미니즘의 구성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둘 중 하나다..14) 그러나 아마도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평등이나 차이(또는 양쪽 모두)의 깃발 아래서 페미니즘을 사고·실천하는 대신, 자유의 깃발 아래서 페미니즘을 사고·실천한다면 어떨까? 페미니즘이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불가능한 선택의 무게감으로 부서질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등보다 자유를 앞에 내세워 페미니즘적 부등(disparity)이라는 실천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을 엄청난 위험과 서구 페미니즘의 상식과의 불화에 빠뜨린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등을 향한 페미니즘의 역사적 열망을 실현하려는 기나 긴 시도를 실패하고 나서야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페미니스트들은 그래야 한다고 지나칠 만큼 주장한 바대로 평등의 원칙을 자유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은 “사회 계약을 찢어버리고 그것의 정치적 형태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Milan 143). 그러나 왜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이라는 원칙을 문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정하면서, 어쨌거나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한 호소였던 사회 계약을 찢어버리기를 원하는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사회 계약 이념의 중심을 차지해 온 자유라는 수사를 모르지 않았지만, 이는 그들이 본 뜰 만한 가치가 있는 자유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일부) 남성들의 자유로서의 역사적 정식화라는 점은 별도로 하더라도, 이는 주권의 환상으로 해석된 자유다. 이 환상은 많은 1·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페미니즘을 사회 계약의 특정한 형태(자유주의)에 고정시켰는데, 이는 정치적 자유를 소극적 자유 및 헌법적으로 보장된 개인의 권리로 축소시켰다 (Milan 136~137). 여성들 간의 자유롭고, 수평적이며, 사회적-상징적인 관계의 실천과 상징이 부재한 가운데, 자유주의는 자신의 성별화 된 육체 및 여성들의 제휴를 부정함으로써 남성과의 평등 및 자유를 추구하라는 “끔찍한 초대”를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성적 존재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를 북돋기는커녕 이를 파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기를 “공통성을 떠나기를 원하는 여성, 동료 여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여성”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세르피나와 마찬가지로 “남성 권력의 마비된 상징의 범위에 갇혀, 다른 여성들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협상할 자격이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135,137). 자유를 주권으로 인식하는 것은 공허하며, 가능성 없는 의지일 뿐이며,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기를, 만약 여성이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했듯, 그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권이다(“What Is” 165). “사회 계약을 찢어버린다.”는 것은 주권으로서의 자유를 거부하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자유를 공동체나 더 높은 선(善)에 대한 기여라는 견지에서(예를 들어 사회적 문제의 견지에서) 정당화 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여성 정치는 이런 태도, 즉 자원봉사를 한다거나 약자를 보살피고 폭력적 수단을 회피하는 등 남성적이지 않은 여성적 행동으로 체현된 가치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변화시킬 것을 계획하는 정치와 접목되었다.”(Milan 125) 여성의 자유가 “윤리적 본성의 내용”이나 “다른 내용”에 의존해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의 정치는 사회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여성과 그들의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자신의 차이를 정당화해야 하는 의무와 이러한 의무가 수반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예속으로부터 여성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26) 여성적 자유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근본적이거나 결과주의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유일한 이유는 그 자신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제시한 여성적 자유에 대한 과감한 설명은 “1966년~1986년 사이, 주로 밀라노에서 나타난” 자발적 연합의 발전을 상술하는 일련의 삽화 속에서 출현했는데, 여기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즉, 남성적 교환 경제 내에서의 전통적인 기능을 제외하면 서로 아무런 사회적 관계도 형성하지 않았던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무근거적 실천..15) 이러한 연합은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하거니와, 권리의 영역으로 소진되지 않는 여성들의 공적 자유의 실천과 영역의 구성에 결정적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이러한 연합, 그리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혼합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자유를 경험하지 않고서도 형식적 평등 및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 정치적 자유의 구성과 실천을 형식적인 평등 및 권리의 제도화와 혼동하는 것은 대단히 문제적이다. 정치적 자유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창시적인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실천은, 발언과 행동을 통해 차이를 드러내고 때로는 평등한 권리의 제도적 공간을 초과하는 주관적인 사이 공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다소 성급하게 덧붙이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실천이 자유의 실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평등이냐 차이냐의 선택지처럼) 권리와 자유를 놓고 다시 한 번 잘못된 선택지를 설치하기보다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치적 자유의 창조적이고 전복적인 특성, 세계 건설을 위한 일상적인 실천, 새로운 사회 계약은 평등한 권리를 위한 투쟁 또는 그의 행사와 어떤 식으로 연관되는가? 이 질문, 그리고 성적 차이의 정치가 내놓는 비범한 답변으로 넘어가자. 보상에 대한 욕망 <밀라노 여성서점>은 자유의 문제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제한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연합을 건설할 역량으로 이해되는 자유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형태는 성적 차이와 동떨어져서 사고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은 삶 전체를 조건 짓는 사건이기 때문이다.”(Milan128) 필연의 힘을 지닌 우연적 사실, 즉 성적 차이는 파괴되거나 초월되지 않고, “부자유의 원인에서 우리[여성의] 자유의 원칙으로” 재상징화, 변형된다. (122) 이러한 변형은 항상 “여성(female sex)의 인간적 조건에 의해 어느 정도 제약된다.”(119~20) 반드시 바뀌어야 하지만 그러나 회피하거나 의지로 사라지거나 폭력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인간 조건, 곧 성적 차이는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며, 오직 이 “새로움만이 강제로 생겨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혁명은 새로운 것을 사고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파괴한다. 그러나 파괴는 여성적 사고의 혁명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사고해야 할 새로운 것은 차이(difference)기 때문이다. 전복은 어떤 사물들이 배열되어 있는 방식, 즉 그것의 의미와 관련된다. 이미 주어진 진실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고, 따라서 그것을 악화시킴으로써 바꾸는 새로운 배열이 있다. 물리적 파괴는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파괴되더라도 그 의미를 보존하며, 누구나 그것이 다시 출현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배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20) 앳킨슨(Ti-Grace Atkinson)이 유명하게 선언한 바와 같이 “여성이 인간으로 태어날 시도를 할 작정이라면, 그녀들은 자살을 해야 한다.”는 관념은 이탈리아 여성들의 자유 기획과는 철저하게 이질적이다(49). 만약 과거의 상태가 현재의 상태 및 자신의 존재의 조건이라면, 파괴하고자 하는 소망은 퇴행을 의지하는 불가능한 소망, 그리고 니체가 무기력하고 자기혐오적인 특성이라고 진단한바 있는 것으로 이끌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과거의 상태”는 압도적인데, 왜냐하면 과거는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과 의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나는 의지한다. 그리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잊혀지거나 바뀔 수 없고, 구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자신의 관계를 바꾸어야만 한다. “지나간 것을 구원하고 ‘…였다’를 ‘나는 그것을 가질 것이다!’로 변형하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구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179)” 니체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과거를 구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 성적 차이의 정치의 맥락에서 구원은 어떤 식일까? 페미니스트들은 위티그가 “성의 범주”라고 불렀던 것을 복귀시키지 않고 성적 차이를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 성적 차이에 대한 확증이 우리를 ‘여성은 아름답다.’라는 익숙한 수렁에 가두거나 브라운(Wendy Brown)이 “상처입은 집착”, 즉 “부자유에 대한 집착”이라고 불렀던 것이 최초에 여성적 동일성을 구성했던 역사적 상처[에 대한 집착에] 숨어들지 않을까 (xii)? 주체 문제의 틀을 통해 읽는다면 『성적 차이』는 페미니즘과 같은 자유를 위한 근대적 투쟁과의 “역설적인” 연루라고 브라운이 불렀던 것을 “자유가 대항하여 출현한 바로 그 억압적인 구조”의 안에서 예로 제시한다 (Brown 7)..16) 브라운이 정의한 자유의 역설은 주체 형성의 역설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적인 설명을 반영하는데, 이는 주체는 그것을 주체로/종속시킨 사회적 규범자체를 반복하도록 강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이 제약된다. 이러한 반복이 없다면 주체는 자신의 실재성이나 및 사회적 존재감을 전혀 갖지 못할 것이다. 브라운은 반응적이고 반영적인 동일성의 구조에 대한 니체의 생각을 끌어와 다음과 같이 쓴다. 주변화 혹은 종속에 대한 항의로 출현하는 과정에서 정치화된 동일성은 자신의 배제에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동일성으로서의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이러한 배제라는 전제 위에 놓여 있고 배제의 장소에서 동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그것을 비난할 장소를 찾음으로써 종속과 주변화에 수반된 “고통의 방향을 바꾸거나” 이를 증대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그것을 구원받지 못한 역사 동안의 고통을 정치적 주장의 기초 자체, 동일성으로서의 인정에 대한 요구 안에 장착시킨다. (73~74) 인정 및 보상에 대한 주체의 정치적 요구는 악순환에 사로잡혀 동일한 주체를 예속시키는 (또한 구성하는) 상처의 경험 자체를 강박의 형태로 반복한다. 밀라노의 페미니스트들은 보상에 대한 욕망에 포함된 위험을 보고 다음과 같이 쓴다. “여성이 보상을 요구하는 한, 그녀가 무엇을 획득하는지에 관계없이, 그녀는 자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128)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밀라노 여성서점>은 보상에 대한 요구가 어떤 식으로 과거를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내버려둔 채, 여성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끝없는 추구에 가두고, 역으로 “여성”을 피해의 동일성으로 구성할 뿐인지를 보았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는 여성이 부당함의 피해자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회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그들이 얼마만큼 보상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권리를 보유하고, 이렇게 게임이 영원히 지속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요구가 불확정적이고, 상실감이 깊어서, 영원히 되풀이해 비난할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128~29) 이것이 2세대 페미니즘을 “피해자화의 정치”로 만든 것이다. 이는 “가정주부, 낙태 문제를 겪는 여성, 강간당한 여성 욕망하고 판단하는 살아있는 여성이 아니라 억압받는 여성(female sex)의 형상, 그 자체로 여성적인 것의 화신을 필요로 한다.”(103) 이것이 바로 “상처 입은 집착”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밀라노 여성서점>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상처를 동일성으로 재설정한다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의 피해자화의 정치에 관해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다. 바로, 살아있는 여성이 피해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같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성(female gender)의 비참함”을 형상화하는 것은 항상,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여성을 포함한 “다른 여성”이다..17) “다른 여성에게 투사된, 어떤 여성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형상”은 2세대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상징이며, 이는 “틀에 박힌 가정주부, 낙태문제를 겪는 여성, 강간당한 여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밀라노 여성서점>의 관점에서 브라운이 이야기한 “상처받은 집착”은 아무에게도 깃들지 않은 피해자 동일성이며 “누군가의 고통과의 대중적 동일화처럼 보인다.”(Milan 102) 밀라노 여성들에 따르면, 자유를 동시에 부인하고 확언하는 경향은 상징적 실천이 지닌 정치적 문제다. 즉,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는 아무런 상징적 형상화를 거치지 못한다.”(70) 따라서 <밀라노 여성 서점>은, “여성운동이 결여했던 것은 [여성의 예속]에 대한 의식에 선행하며 그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으로 사고되는 자유로운 여성의 표상이다. [대신] 자유가 의식에서 유래한다고 믿었다.”(103) 달리 말하면, 여성이 억압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억압의 진실이나 날 것의 사실이 아니라 여성적 자유의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모든 자유의 형상이 동일하게 페미니즘을 북돋은 것은 아니다. 2세대 페미니즘에서 중요했던, 여성 자유의 잃어버린 대상으로서의 고대 모계제라는 관념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대상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 결과는 오직 퇴행을 의지하는 불가능한 소망 내에서 이 욕망이 자신에게 반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18) 어떤 것도 과거의 절대적인 자유에 비견할 수 없으며, 과거로의 회귀만이 이러한 절대적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현재는 초월되거나 파괴되어야 한다. 이 같은 고대적 과거라는 관념은, 일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집단을 형성하고 공동의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몇몇 여성이 수행했던 결정적 역할과 같은 가장 최근의 잘 알려진 사건에 대한 평가를 왜곡하도록” 만들었다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가한다. 이러한 역할은 침묵 속에서 간과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는 개별 여성의 자유를 완전히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원망을 샀을 것이다”(104). 다시 말하면, 여성의 자유로운 행동은 고대 여성들의 절대적인 자유와 비교해 한참 떨어지는 것으로 부인되었거나, 주권의 견지에서 파악되었을 것이다. 즉 다수에 반하는 일인 혹은 소수의 자유. 따라서 빠져 있는 것은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자유의 경험(예를 들어, 행동과 발언을 통해 다른 이들과 새로운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는 실천)이 아니라 그것의 상징적 형상화였다. 이러한 형상화가 부재한 가운데, 자유의 경험은 항상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고, 미래 혁신의 원천으로 봉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여성적 자유의 상징적 형상은 중요하다. “여성”을 간단히 피해자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밀라노 여성서점>의 말을 빌면, “한 범주의 여성, 즉 가장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는 여성 범주의 문제의 윤곽을 그리고 나서, 이를 여성적 조건의 일반적 전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조건을 그들의 최소공배수로 평준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의 다양한 선택과 스스로 상황을 개선해야 하기 위해 가지는 실질적인 기회를 지각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이로써 여성(female gender)의 존재를 부인한다. 오직 아무도 동일화할 수 없는 ‘여성의 조건’만 존재할 뿐이다”(Milan 68). 더욱 나쁜 것은, 이 같은 아무것도 거처할 수 없는 주체 위치의 상징적 형상화가 헤게모니적이라는 점이다.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틀에 박힌 이미지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을 보상의 논리에 가두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피해자 동일성이 아니라, 여성적 자유의 형상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정치적 동원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형상을 제공한다. 여성을 부당함의 피해자로 인정함으로써 게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이 사회는, 여성을 보상이 아닌 사회적 기명(inscription)을 추구하는 욕망의 담지자로 인정하는 것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당한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상을 제시해 온 페미니즘은 여성 욕망의 대안적 상징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 게임이 계속 유지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빠져있는 것은 서로를 되풀이 해 비난하지 않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시점에서 일부 여성이 이러한 욕망을 지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든 여성이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정적 형태로만 상징화하지 않는” 여성 욕망의 “상징적 권위부여”다..19) 피해자 동일성의 문제가, 전체 사회 집단의 실질적인 욕망이라고 전혀 믿을 수 없는, 또는 ― 그것만이 아니라 ― 먼 일차원적인 정치적 표상의 문제라면, 이것이 요청하는 것은 주체에 대한 작업이 아니라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상징에 대한 정치적 연구”라고 부르는 것이다(Milan 106)..20)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브라운처럼 피해에 선행하는 주체성이 발전하는 순간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새로운 상징적 실천, “[보상을 요구하는] 다른 이의 부당함이 아닌 여성이 되고자 하고, 될 수 있는 더 이상의 무엇 안에서 윤곽이 그려져 있음을 보는 실천의 창출을 부정한다.”(101) 이 “이상의 무엇”은 단지 남성과의 평등에 대한 욕망이 아니며, 따라서 피해에 대해 보충받으려는 욕망도 아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정치는 피해라기보다는 자유의 형상, 평등보다는 “이상의 무엇”에 대한 욕망 아래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차별의 형태를 제거하기 위한 반작용으로서의 대응(남성에게 건네지는)은 새로운 사회 계약을 창조하기 위한 순향(順向)적인 실천(여성에게 건네지는)으로 전화될 수 있다. 이제 이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실천”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21) 평등에 얽힌 문제 <밀라노 여성서점>이라는 이름이 드러내듯 『성적 차이』에 담긴 이야기들은 주로 1975년 10월 밀라노에서 개장한 여성 서점이라는 공간과의 관련 속에서 전개된다. <밀라노여성서점은> “하기의 실천(the practice of doing)”을 발의했다고 설명되는데, 이 실천은 1970대 초반에 Autocoscienza(자기고백)의 실천을 둘러싸고 형성된 “말하기 그룹”을 토대로 세워졌다. 초기 2세대 미국 페미니즘의 ‘의식 고양’운동과 유사하게, “Autocoscienza의 실천”은, “완벽한 상호 동일화를 전제로 하며, 또 이를 추동한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즉 우리 [여성] 중 누군가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성의 언어이며, 그녀의 언어이자 나의 언어다.”(42)라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언급했다. Autocoscienza는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를 고양시켰지만, 그 힘은 또한 그 한계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보여줄 수 없었다”(45). 비록 이러한 실천을 시작한 많은 여성들이 지속되고 넘쳐나는 성차별에 대응하면서 남성들과의 평등의 가능성에 등을 돌렸지만 (40), Autocoscienza는 비록 여성들 사이에서이긴 하지만 평등의 논리를 유지했다. 즉 “차이가 발생하면, 이러한 차이가 상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한에서 주목받아왔는데, 그래야 상호 동일화가 다시 설치될 수 있다”(44). 무차이의 문제―모든 여성은 똑같다―와 초기 페미니즘에서 나타났던 이것의 재생산은 ‘하기의 실천’의 출발점이다. 이는 “말하기 생활의 물질적 측면”을 정교화하고 페미니즘을 자매애로써, 즉 정치에 앞서 공통성들이 주어진 친족 양식으로서 실천하는 경향에 대항한다. “왜냐하면 ‘하기의 실천’은 반드시 애정과 친밀성으로 묶이거나 간단명료한 슬로건으로 규합되지 않고, 공동의 기획에 의해 단결하는 여성들을 한데 모은다. 이들은 자신의 이성,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위해 이러한 공동의 기획에 전념하면서 그들을 집단적 이행의 시험에 부친다.”(Milan 86)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초기부터 “하기”라는 관념을 자신들의 정치의 중심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인적 경험 교류의 중요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데, 이는 최초의 말하기 그룹, 또는 Autocoscienza의 첫 번째 정치적 가치, 즉 “여성의 공통적인 동일성”의 확증을 특징짓는 것이었다(42).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한 순간을 형성했던 환상이나 정신적 고찰의 문제, “무의식의 실천”에 대한 고찰을 거부하지 않았다..22) 그러나 점차 출현하는 것은 평등의 정치와 주체에 대한 작업 양자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들은 피해자 동일성의 문제가 요구하는 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차이를 상징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현세적 조건의 변화라고 보았다. ‘하기의 실천’에 “새로운 주제가 도입되었다. 여성 정치라는 주제는 더 이상 의식과 발언 [즉, 언어]에 대한 접근에 중심을 둘 수 없다[…]. 새로운 용어는 창조와 변형―주어진 사회적 현실을 변형하기 위해 여성의 사회적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84). 이러한 창조와 변형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다루는 정치적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서 시작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평등의 원칙과 여성의 공통의 동일성을 둘러싸고 조직된 형태의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거부되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가 “페미니즘이 여성들을 분할하는 차이에 익숙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거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유일하게, 여성들 간의 차이는 그것들을 서로 관련짓고, 평가하거나 판단할 모종의 방법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차이를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이를 인정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문제다. 그 방법을 배우려면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관련짓고 판단할 정치적 능력의 발전이 요구되며, 이는 또 다른 정치적 기술을 필요로 한다. 성적 차이에 대한 페미니즘적 상징화가 그것이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처럼 여성들 간 차이의 상징화를 의식고양 및 초기 페미니즘과 연관된 동일성의 정치에 필요한 중화제로 여겨왔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대체로 성적 차이의 상징화를 여성들 간 차이의 소거와 연관짓는 경향이 있는 반면, <밀라노 여성서점>은 성적 차이의 정치적 상징화가 부재하다면 이러한 차이가 소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밀라노의 여성들은 성적차이의 정치를 <밀라노 여성서점>의 공간 자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하기의 실천’으로서 발전시킨다. ‘하기의 실천’의 중심적인 기획으로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여러 페미니스트 공간(loughi delle femministe) 중 하나로 여겨졌다(Milan 96)..23) <밀라노 여성서점>은 개점을 알리는 포스터에 다음과 같이 쓴다. “서점은 거리로 열린 공간입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서점은 여성들을 위해, 여성의 손으로 설립했습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여성에게 아무도 당신은 누구며, 무엇을 믿는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성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다른 이들과 관계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서점은 정치적인 공간이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이 안에서 공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만나기 때문이다. “여성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정치의 출발점이다”(92).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실천[…]이 정교화되었다. 이는 여성들 간 관계의 실천이라고 불렸다”(50). 이 실천은 “정치를 행하는 비범한 방법이다. 이는 많은 여성들에게 사회적 관계의 체계는 ― 우리가 가능하다고 배운 바대로, 추상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면서 구체적으로 ―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 왔다”(51). 유사한 관심사(예를 들어, 문헌, 작가, 장르, 비평 등)를 공유하는 여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인 <밀라노 여성서점>은 처음으로 정치의 최소 조건으로 기능했다. 이는, 아렌트의 설명대로, 공유된 현세적 관심사(interest)로, “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사이에(inter)-놓여있는(est) 무엇, 즉 사람들 사이에 놓여 그들을 서로 연계시키고 또, 묶어주는 무언가를 구성한다”(Human 182). 아렌트의 행동 중심적인 정치에 관한 견해에서, 이러한 사이 공간은 “절합적 방식으로 사람을 함께 묶으면서 또한 이들을 분리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항상 수행한다”(181). 이러한 “물리적이고 현세적인 사이 공간은 관심사에 따른 행위와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들의 직접적인 행동과 말하기에 전적으로 기원을 두는 완전히 다른 사이 공간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서 성장한다. “이 두 번째의 주관적인 사이 공간은 만질 수 없다.” 왜냐하면 행동하고 말하는 과정은 어떤 결말과 결과물을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무형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이 공간은 가시적으로 공유하는 사물들의 세계 못지 않게 실재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인간관계의 ‘그물망’이라고 부른다(182-83). 밀라노 여성들은 이를 “여성들 간 관계의 실천”이라고 부른다. 아렌트의 관찰에 따르면, 주관적인 사이 공간, 정치적 관계 자체는 “인간들의 직접적인 행동과 말하기에 전적으로 기원을 두고 있다(human 183).” 이는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한 점인데, 그 중 하나를 우리는 항상 시야에서 놓칠 위험에 처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또 하나의 간단한 점인데, 즉 대담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담자는 나와 다른 견지에서 보는 사람이다. 대담자는 인류의 복수성(plurality)이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미국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이러한 복수성은 “여성들 간의 차이”로 생각되었다. 복수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분명히 표현하는 것에 우선하여 중요한 인구통계학적 요소로 보이는 사회적 차이(예를 들어,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등)를 인정함으로써 대담자를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도 사회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동일성의 정치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하기의 실천” 뒤에 놓여있는 전반적인 요점이었다. 그러나 “하기의 실천”, 즉 여성들 간 차이를 다룰 방법을 습득하는 것은 실패했다. 왜? <밀라노 여성서점>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다른 “하기의 실천”인, <파르마 여성 도서관>을 참조하여, 이것의 창립 문서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파르마 여성 도서관>의 창립자들은 그들의 기획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여성의 의견을 녹취하는’ 그들의 모험적 시도를 제시할 ‘문서’로 이어지는 논쟁의 일부분을 보고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의 근거는 [파르마 여성들의 표현을 빌면] “우리 모두의 관점을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문서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논쟁 과정에서 한 여성이 이야기 한 것처럼 “집단 내에서의 여성의 다양성과 비동질성은 아무도 말소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존재’할 것이라는 정치적 보장이기 때문이다.”(94) 그러나 이 기획을 구성하는 평등주의적인 방법은 문제에 봉착했다. 이 보장은 실패했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로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출현하다. 이론에 따르면 차이는 여성(female sex)의 존재에 필수적이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94)..24) 판단에 대한 무언의 금기는 특정한 차이가 발언되도록 허용하지만 이를 의미 없는 상태로 내버려둔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사실 <파르마 여성 도서관>의 문서(그리고 동종의 다른 문서들)는 “여성들 간 차이의 가치에 관한 다량의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된다” (99). 이러한 차이를 평가·접합·연결하는 방법인 판단이 부재한 가운데, 이 차이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알맞게 기록되고 심지어 칭송되지만 판단을 거치지 않는 차이는, 차이를 무시하거나 부인했던 Autocoscienza의 실천에서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하기의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에도 의미가 없다. 여기서 그들은 무시되거나 부인되었다. “여성들 간의 차이”가 미국 페미니즘에서처럼 어떻게, 비록 역설적이지만, “진정 중요한 차이”를 숨기는 공허한 슬로건이 되었는지, 그렇게 해서 이것이 “죄책감의 근원”이 되었는지를 인지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하기의 실천이 지니는 한계를 대면한다. 즉, 여성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갖지 못하며 여성적 욕망은 대담자를 갖지 못한다”(99). 여기서는 처음부터 대담자의 존재에 필수적인 복수성을 구성하는 것이 여성들 간의 사회적 차이가 아니다. 복수성은 인구통계학적, 또는 실존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차이에 대한 정치적 관계이다. 따라서 내가 이러한 차이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는 것, 이를 무언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방식으로 셈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 대담자의 존재는 모든 여성의 의견을 무차별적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은 차이를 고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러한 차이를 압도적인 평등에 붙들어 놓는다. 파르마의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한 것처럼, 모든 여성의 의견을 [판단하지 않고] 녹취하는 것은 “아무도 말소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존재할 것이라는 정치적 보장”을 제공하기는커녕, 이러한 실존이 현실성을 획득할 공간, 즉 페미니즘 정치 자체의 현세적 사이 공간을 파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은 다른 여성을 판단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여성은 다른 여성의 판단을 대면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142)고 선언한다. 초기 페미니즘(예를 들어, Autocoscienza, 하기의 실천) 의 판단 유예는 전혀 해방적이지 않다. 이와 반대로, 인가(approval)의 욕구가 우세하다면,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다른 여성의 판단에 종속시키려 들지 않는다면, 여성의 욕망은 시들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파르마의 페미니스트들은 왜 <여성 서점>이 다른 기획에 비해 더 좋은 하기의 기획이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밀라노 여성 서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초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95). 이러한 기초가 욕망(즉 잘 근거지어진 논변이라기 보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밀라노 여성서점>이 관련되어 있는 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판단 내리고 판단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표현되는 욕망은 [욕망이라는] 기초에 손상을 입히는 여분의 감정을 발생시킨다.” 남아있는 것은 자신을 다른 것에 결부시키지 못한 채 여기 저기 존재하는 여성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95). “여성의 욕망을 침묵에서 꺼내고 위험에 처하도록 유도할 수 없다면”, 자신을 판단에 노출시키지 못한다면, 하기의 정치는 다양한 욕망이 원칙적으로 판단에 대한 금기로 평준화된 채로만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했다. 이러한 실패는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무언가를 여기에 걸게 만들었다. 즉, 그들은 평등의 논리와 단절하고 부등의 정치적 가치를 발견했다. 부등을 발견하다 『성적 차이』의 4장은 <밀라노여성서점>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묘사하고 있다. 그 장은 “여성문학에서 자유의 첫 번째 형상(figures)”이라는 제목의 절로 시작되며 “『노란 일람』(Catalogo giallo, Yellow Catalogue)―이것은 <밀라노 여성서점>과 <파르마 도서관>이 1982년 출판하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Le madri di tutti noi)이란 제목의 소책자 표지 색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소책자는 “부등에 관한, 모든 여성들이 그녀들 사이에서조차 동일하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관한, 그리고 이 사실에 관한 여성들 자신의 사회적 해석에 관한 것이다.”(108) 그 기획 면에서 “『노란 일람』은 이런 류의 다른 책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 책은 특히 소설과 같은 문학적 기록을 특권화하고 독자들 편에 서기 때문이다.”(109) 즉, 그것은 창작물을 생산하는 예술적 천재가 아니라 그 창작물을 판단하는 독자에게 초점을 두었다. 여성문학에 대한 이런 개입이 독특한 문학적 형태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사실 “여성들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런 흥미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그 탐구는 정의될 수 없었던, 이름이 없었던 어떤 것, 즉 “인류 문화가 알지 못했던, 여성되기에서의 차이에 관한 것”(109)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직접 관련되는 것들의 의미를 찾을 필요성”과 “여성 작가들이 여러 방식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만을 가진 채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읽혀야 할 여성 작가들과 소설을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우리는 바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읽기로 결정했다. 좀 더 객관적인 기준 [즉, 심미적 판단의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당시 생각했던 것처럼 결백한 결정이 아니었다. […] 사랑이나 우정 관계를 벗어나 다른 여성을 선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109) 반대로, 그런 선호들은 잠재적으로 금지되었는데, 그것들이 집단의 동일성을 해칠 수 있는 차이들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선호 행위는, 그 잠재적 ‘유해함’ 때문에, 모든 여성적 욕망을 마치 박해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평형 상태에 가두었던 여성적 정치의 도식을 뒤흔들 운명이었다.” 모든 독자가 같은 선호를 갖는 것도 아니고, 일부는 선호가 없었으며, 또 일부는 매우 강한 선호를 갖기도 했다. “위기를 야기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110). 위기가 터져 나온 것은 제인 오스틴이라는 인물에 관해 논쟁하던 때였다. 제인 오스틴을 반대하는 한 사람이 그녀가 다시 한 번 소수로 몰린 토론에서 […] 논쟁을 멈추고 관찰자처럼 말했다. “[딸의 자유를 방해하는] 어머니들은 작가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혀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어머니들은 사실 여기 우리 사이에 있다.” 이 단순한 진실이 처음 말로 표현되었을 때, 그 말은 끔찍하게 들렸다. […]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수정처럼 분명했다. 누구도 그 말이 진실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 우리가 눈앞에 대면하고 있었으나 수년 동안 전혀 기록하지 않았던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동등하지 않았고, 동등한 적도 없었다. 우리는 동등했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다는 점을 즉시 발견했다. 첫 순간의 공포는 좀 더 자유로워진다는 어렴풋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110~11) 여성들 사이의 불평등을 발견하자 자유로운 느낌이 생겨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게다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심미적 판단을 내리는 실천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밀라노 여성서점>은 좀 더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우리의 역사에서 생겨나지도 않았고 우리의 이해에 부합하지도 않는 평등이라는 이상”에서 해방되는 것과 일차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111) 이 평등이라는 이상은 억압받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점에 기초한 공통성을 명목으로, 상호반목하지 않는 모든 여성적 욕망(즉 피해의 동일성으로 표현되지 않는)과 차이의 분명한 표현을 뭉개버렸다. 이런 중성적이고 무성적인 이상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상상하도록 우리 자신을 괴롭혔고, 존재했던 것의 활용을 스스로에게 금지했다. 마치 우리의 문제가 강력하게 경쟁하는 욕망들 사이에서 있을 법한 경합의 치료제를 찾는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욕망이 불확실하고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고, 이는 소위 여성들 사이의 권력 갈등 이면에서 그런 갈등을 고통스럽고 끝없게 만드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111) 존재했던 것은 여성들 사이의 재능, 능력, 사회적 지위의 차이며, 만약 페미니스트들이 이를 다룰 만한 정치적 능력이 있었다면 이는 여성들의 실천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가끔은 그런 실천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존재했던 것은 기호의 차이였고, 그것은 사회적 차이로 환원될 수 없었다. 모든 여성들이 비슷하지 않은 까닭은 그녀들이 서로를 분할하는 각기 다른 사회적 집단의 일원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이것이 최근 미국 페미니즘이 차이라는 사상을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녀들이 각기 다른 호오(好惡)를 가졌기 때문인데, 이는 그녀들이 어떤 특수한 사회적 집단에 속해있다 하더라도, 비록 약간은 연관이 되기야 하겠지만, 소모되지 않는다. 오스틴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 차이(즉, 성별,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로 환원할 수 없고 하기의 실천(practice of doing)에서는 가려졌던 차이의 형태를 드러냈다. “하기의 실천”은 여성의 보편적 비참함이라는 표상에 어떤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차이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런 차이를 다루는 방법, 평가하고 판단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다. 이런 정치적 기술의 부족 때문에 그들은 의견의 깊은 갈등과 차이를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밀라노 여성서점>에 따르면, 그들이 이런 기술을 전혀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그들이 여성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남성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여성이 다른 모든 이들과 같아야 한다고, 더 정확히는 운동하는 다른 모든 여성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들 사이에서 다양성, 언쟁, 각기 다른 의식수준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모순이나 “나는 낙태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여성들과는 상관없다.”는 식의 근본적인 반대는 아니었다. (69) 격렬한 갈등이나 불화의 공간이 없다면, 강렬한 욕망을 위한 공간이나 진정성 있는 정치의 가능성도 없다. 그 당시 ― “그녀 말고는 다른 이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각각의 여성들과 “대담자 없는 여성적 욕망”이 있었던 때 ― <밀라노 여성서점>은 “페미니즘적 관점”, 즉 “더 이상 현실과 관계가 없는 미리 구성된 이데올로기나 진부한 담론”에 따른 판단의 필요성을 제외시켰다(85). 이데올로기는 판단의 규칙을 제공했다. 하지만 삼단 논법의 추론에서 예증된 규칙을 따르는 것은 심미적이거나 정치적인 판단에 아무 소용이 없는데,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특수로서의 특수(particular qua particular)이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주장한 것처럼, “당신이 ‘아름다운 장미다!’라고 말할 때, 이런 판단에 도달하기 위해 우선 ‘모든 장미는 아름답다, 이 꽃은 장미다, 그러므로 이 장미는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Lectures 13~14) 반대 방향으로도 마찬가지인데, 당신은 이를테면 “이 장미는 아름답다”는 판단에서 다른 장미나 모든 장미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영역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인데, 여기서 우리는 대상과 사건의 독특성에 직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문학 작품에 눈을 돌린 다음에야 여성들 사이의 부등이 발견된 것은 우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일 수도 있다. 오스틴과 같은 작가들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선호를 표현하면서, 각자는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점을 발견하는데, 이는 진리(또는 진리 담론, 이데올로기)에 고정점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동의를 강요할 수 없다는 의미다. “고유한” 페미니즘적 관점의 독백과 더불어 집단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이데올로기적(삼단 논법의) 추론(즉, 모든 여성 작가는 훌륭하다, 이 작가는 여성이다, 따라서 이 여성 작가는 훌륭하다)과는 다르게, 기호의 판단은 하나의 규칙 아래 포섭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드러낸다. (심미적이거나 반성적인) 판단을 실행할 때, 사람들은 여성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차이가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타인들을 진정한 대담자의 위치에 놓는다. 나와 유사하거나 유사하지 않은 선호를 가지고, 나의 관점과 동일하지 않은 관점에서 보며, 자신의 의견에 대한 판단을 나에게 청하거나 내가 고이 간직해 온 의견을 판단하고 아마 뒤흔들어 위기의 지점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할 것이다. 하나의 규칙에 의해 판결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발견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부등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부등을 발견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어쨌거나 수많은 형태의 사회적 부등이 있고, 그런 부등 중 많은 것이 부당하다. 그들은 “부등의 실천이 필수적인 시험”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부등의 부당한 형태들을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한 다른 형태의 부등과 구별하게 해 줄 것이다.”.25) 부등의 실천은 “차이가 자유로운 사회적 형태 속에서 발언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다.(Milan 132) 우리가 아직 이 부등의 실천이 어떤 식일지 모르긴 하지만, 그것이 페미니즘의 민주적 이상에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지는 궁금해 할 수 있다. 평등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밀라노의 페미니스트들은 많은 서구 3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평등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관점을 가졌다. 여기에는 권리에 기초한 법적 사회변화 전략을 대체로 수용했던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포함된다. 평등의 이상과 만연한 차별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괴리는 차치하더라도, 평등이라는 원리는 남성과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 모두에서, 동일함을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권리의 조건으로 확립하는 것 같다. 역사적인 실천 속에서 정치적 평등이라는 원칙은 모든 사회적·성적 차이를 평준화하고 여성들에게 중립과 보편을 가장한 남성적 기준으로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었다..26) 하지만 평등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게르하르트(Ute Gerhard)가 우리에게 상기시킨 바,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기”(treating likes alike)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원칙에 기초한다. 게르하르트는 우리가 평등을 동일함이나 동일성(a=a)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관계적인 개념(a=b)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평등이 고정되거나 정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으로 간주되면, 평등은 차이를 부정(오직 같은 것만 같게 취급될 수 있다.)하기는커녕, 차이들을 구체적인 목표에 따라 특정한 종류의 관계에 도입되어야만 하는 것(다른 것이 같게 취급되어야 한다.)으로 당연시하는 정치적 원칙이 된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어떤 특징이나 특수성을 비교하고 동등하게 다루자는 것을 결정하는가?”(Gerhard 8)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 된다. 이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이동은 관점의 변화를 수반하는데,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비교되는 (사회적) 대상(즉, a와 b, 남성들과 여성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마치 그 대상들 혼자서 비교의 기준을 결정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비교를 하는 주체들과 그 판단의 사회역사적 맥락에 초점을 맞출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즉, 평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설명에서 관점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요구가 제기되는 구체적인 상황과 함께 그 요구를 하는 사람들과 비교의 기준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을 결정하는 사람들 양자의 사회적인 위치도 고려하는 것이다. 만약 그 기준이 대상 그 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면, 평등에 대한 모든 요구는 정치적 판단, 즉 특수성(같지 않은 것들)에 관한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적인 평등 실천은 제 3항(third term) 또는 제 3자, 즉 비교점(tertium comparationis)을 필요로 한다. 게르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그 비교점은 결코 단순히 ‘남성’이나 남성의 지위일 수 없다. 그것은 양성에 공평한 기준이어야만 한다.”.27) 평등의 실천을 3항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고하면, 우리는 그렇지 않았을 때 완전히 반(反)평등주의적 부등의 실천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동일함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평등을 재형상화하는 가능성을 실제로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의 부등의 실천이 달성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된 3항의 발전을 가능케 한다.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설명에 따르면, 3항은 오스틴과 같이 “‘원형’이라 칭해진” 여성 작가들과의 관계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런 원형의 목표는 “우리보다 선행하여 우리에게 스스로를 알고 차이화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의 위치를 특징짓는”(Milan 112) 것이었다. 원형을 현실의 어떤 여성도 접근을 시도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진 틀에 박힌 여성적 형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우수한 여성의 형상이 틀에 박힌 피해자 형상의 이면으로서, 현실의 어떤 여성도 동일화할 수 없으며, 양자 모두 잃어버린 “여성적 사회 경제(social economy)”의 징후라는 점을 관찰했다. 여성들 사이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상징화하는 두 가지 방식 모두 전혀 실재적인 관계가 아니고, 동일한 것(과 비참한 것) 또는 다른 것(과 우수한 것)에 대한 무매개적인 연계일 뿐이다. 이런 도해상의 지위(피해자 또는 우수한 여성)는 둘 다 현실의 여성들 자신에게는 알맞지 않다. 그러므로 이상화의 경향은 페미니즘에게 힘을 북돋아주지 않는 부등의 한 실천이다.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려면 다른 여성들과 차이나는 여성 개인과 여성적 성별(젠더) 모두를 가치화하는 권력, “여성적인 잉여(female plus)”(Milan 127)가 필요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찾던 것과 원형들에서 처음에 발견했던 것은 하나의 규칙(또는 이념형)보다는 특수성들을 연관시키는 사례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다. 역설적이게도 평등의 정치가 탄생시킨 우수한 여성들과 다르게, 원형들은 그 원형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세상에 관하여 권위와 가치를 또 다른 여성에게 돌리는 것은 스스로에게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 ‘스타인(Gertrude Stein)을 옹호할 때 나는 스스로를 옹호하는 것이다.’”(112)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듯이, 만약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여성들 자신일 뿐이라면, 그런 형상은 실천의 한 부분으로 머물러, 판단과 논증과 토론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형상은 자유를 부인하는, 초월적인 권위의 원천이 되는 위험에 처한다. 그런 위험이 최소화되는 것은 수없이 많은 원형들(오스틴, 스테인, 모랭(Elsa Morante), 울프(Virginia Woolf), 바흐만(Ingeborg Bachman) 등)에 이를 때다. 하지만 “성별화된 기원의 형상”과 자유가 “상징적 어머니”로 불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얼핏 보기에 잃어버린 여성적 권위의 형상으로서 “상징적 어머니”는 “남성적 기원에서 나온 권위의 여성적 복제물”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떻게 어머니의 형상이 페미니즘적 자유의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가? 이런 형상은 처음부터 페미니즘을 무력화했던 친족 관계를 상징화하는 것 아닌가? 남성적 문화 내부에서 어머니들과 딸들의 관계는 사라졌다(“어머니는 언제나 팔에 아들을 안고 있다.”)는 이리가레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과 그녀보다 더 위대한 여성, 즉 그녀의 어머니 사이의 상징적 유대의 형태란 전혀 없다. 둘 사이에는 정서로 다양하게 덧씌워진 오직 자연적인 관계만이 존재할 뿐 상징적인 해석은 없다.”(127)고 주장했다. 따라서 상징적 어머니라는 바로 그 생각은 급진적―남성적 문화 속의 어떤 어머니도 결코 상징적이지 않다.―인 동시에 일반적(ordinary)일 수 있다. 상징적 어머니는 그를 둘러싸고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 즉 새로운 사회 계약을 조직할 성별화된 기원의 형상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식별한 핵심 문제는 “여성이 모종의 여성적 미덕을 가장하지 않고서는 사회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으로 솔직하게 밀고 나갈 도리가 없는 욕망의 무한함을 인정할 때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어려움”(Milan 115)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정치에서 이런 가장은 사회를 개선하는 요구의 형태를 띤다. 이런 요구는 사회 문제라는 더 큰 틀 내에서 공명을 일으키는데, 여기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사회적 효용이나 편의라는 언어로 표현할 것을 요구받는다. 예를 들어 일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적 차이에 대한 새롭고 보다 자유로운 해석”을 “사회적 선과 조화를 이루는” 것과 구별할 수 없었다. “다르게 되기와 더 좋아지기”를 혼동함으로써 그들은 “이런 잉여가 자격을 얻는 것을 반대했다. 그것은 실정적인 가치를 표현하지 않으며, 따라서 여성적 차이나 여성적 정치에 자격을 부여할 수 없고, 가치를 줄 수 없다.”(124) 유용성의 경제(the economy of use)에 사로잡혀, 그들은 여전히 여성적 성(female sex)과 여성적 자유의 존재이유, 즉 사회 개선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의 자유에 “어떤 실정적인 사회적 가치”(125)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적 실천을 상상할 수 없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여성적인 잉여는 감축할 수 없는 차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이 때문에 여성되기는 남성되기에 종속되지도 동화되지도 않는다.”(124) 즉, 그것은 어떤 사회적 가치, 사회적 효용도 표현하지 않으며, 보상을 추구하지 않고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포섭될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욕망을 말할 뿐이다.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 계약은 “여성의 자유를 위한 기초를 놓아야 한다.”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선언한다. (32) 이 기초는 페미니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동의해야만 하는 합리적 전제로 구성된 근거가 아니다. 상징적 어머니라는 수사 주위에 조직되는 이 계약은 합리성이나 영구적인 원칙에 호소하지 않고 “일상의 언어와 몸짓을 통한 정치적 실천의 맥락 속에서, 한 여성의 다른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욕망의 태동 속에서, 일상적 사물에 근접하여”자유를 욕망하는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할 것이다.(111) 원시적 아버지 같은 토템과 ― 이 아버지는 사회 계약의 “다른” 이야기에서 살해되어야만 하는데, 그의 살해는 남성들 사이의 정치적 평등 관계의 조건이며 그의 내재적인 회귀는 그들을 괴롭힌다. ― 다르게 상징적 어머니는 “세상에 맞서 여성의 욕망을 지지하고 유효하게 하는 여성들에 의해 한 여성으로 구체적으로 체현된 여성적 차이의 사회적 정당성의 근원을 가리키게” 된다. 이는 이 같은 성별화된 매개의 형상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들 사이의 자유로운 관계라는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실천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하지 않을 것이다. 성적 차이 실천하기 상징적 어머니, 즉 여성적 기원의 잉여를 순환시켜 그것이 집합적 부가 되게 하는 실천의 이름은 <아피다멘토> 또는 수탁(entrustment)이다. 여성들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들 중에서 성경의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 시인 힐다 두리틀(Hilda Doolittle)과 브라이허(필명이다.)의 그리스에서의 관계(힐다의 『프로이드에 대한 헌사』(Tribute to Freud)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와 비타 색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의 우정과 같은 수탁의 사례(규칙이 아니다.)를 발견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다른 여성에 대한 한 여성의 수탁은 정치적 투쟁의 소재다.”(31) 가장 결정화된 형태 속에서 여성들이 스스로를 그녀에게 수탁하는 여성은 수탁하는 이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지지하는 여성(또는 여성들)로서 그녀(들)은 “전진해(Go ahead)”라고 말한다..28) <밀라노 여성서점>은 “그것[이 경험]은 H.D에게 그녀가 시적 재능을 지녔다는 느낌을 주었고, 이와 함께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녀 곁에 있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전진해’라고 말해 준 여성 때문이라는 확신을 주었다.”고 언급한다.(33~34) “분명히 우리는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권위는 원래 그것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그것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부여된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전진해’라고 브라이허는 H.D에게 대답하면서 H.D가 그녀에게 의존함으로써 그녀에게 부여한 모성적 권위를 상징적 권위부여의 형태로 그녀에게 되돌려준다.”(126) 초기 페미니즘의 이상화된 형상과는 반대로, 수직적인 수탁이라는 관계는 수평적, 상호적 관계이기도 하다. 여성의 욕망들을 적법화하는 권위는 그것을 수여하는 인정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확립된 위계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여성은 […] 그녀 자신을 남성 또는 남성적 기획에 수탁한다.”[Milan 133]).29) 수탁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여성적 수탁의 관계가 사회적 관계라고 말하고, 그것을 정치적 기획의 내용으로 만들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어머니[즉, 우리의 욕망을 지지하는 여성들]에 대한 상징적 빚은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가시적·공적·사회적인 방식으로 지불되어야 한다.”(Milan 130) 수탁은 자매애가 아니다. “스스로를 수탁하는 것은 거울 안에서처럼 그녀 안에서 자신의 현실적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수탁의 관계 속에서 여성은 다른 여성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녀의 욕망 안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척도를 제공한다.”(149) 수탁은 규칙이나 영구적인 정치적 형태가 아니다. “그 문제에 관한 가능한 다른 답들, 더 좋은 답들이 틀림없이 존재하고, 존재하게 될 것이다.”(121) 수탁은 우연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1966년부터 1988년까지 밀라노에서 여성에게 상징적 거처가 없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결핍되어 있는 것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대응으로서 발전했다. 그것은 우연적으로 필연적인 실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필연적인 것으로 경험된 욕구에 대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즉, 권위 있는 대담자의 부재가 그것이다. 만약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자유에 대한 [일종의] 기초를 제공해야만 한다면,”(32) 하지만 그것이 자유에 대한 합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정당화(즉, 사회 개선 등)가 아니라면, 수탁이 바로 그런 기초다. 수탁의 실천에서 “여성적 자유는 여성들 자신에 의해서[만] 보장된다.”(142) 그러므로 여성의 행동과 요구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 권위가 자명하고 자신의 편에서는 어떤 동의나 행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형상도 아니고 (2세대 페미니즘이 전제하려 했던) 정치적 인식론, 즉 진리 주장으로 정치적 주장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욕망에 권위를 부여받고, 역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매번 권위부여 하는 여성들, “전진해”라고 말하는 여성들이다. 이 문구는, 그 완전한 단순성 그리고 복합적이고 일상적인 표현 속에서, 페미니즘적인 의지의 자유가 처한 궁지의 탈출구를 겸손하게나마 상징화한다. 그것은 “나는 할 것이다.”라는 공허한 자유가 “나는 할 수 있다.”는 현세적 자유로 변형되는 것을 상징한다. “전진해”라고 말하거나 이 말을 듣는 것, 그리고 이 문장에 부합하게 공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피해자 동일성, 즉 피해자화의 정치에서 벗어나면서도 여성들이라 불리는 집단의 소속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동질적 집단”의 심상 안에서 대표될 수 없었던 여성은 그런 부인에 쉽게 이끌려 주권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녀에게 동료 여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135) 여성은 종국에 “남성적 권력이라는 경직된 상징의 영역에 갇혀 다른 여성들이 필요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놓고 다른 여성들과 협상할 수 없게”(137) 된다. 지금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 인정한다는 것 안다는 것의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카벨(Stanley Cavell)을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빚지고 있음을 안다고 해서 내가 빚지고 있다는 것을 저절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여성들 사이의 관계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는 [카벨을 인용하며] 말할 수 있다. 인정은 앎을 넘어선다. (넘어선다는 것은 말하자면 앎의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앎에 기초해서 무언가를 하거나 드러내야 한다는 요구 안에 있다.)” (Cavell, 257) 다른 여성들에 대한 빚을 가시적이고 공적인 방법으로 갚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 그 부채에 대한 무언(無言)의 앎을 담고 다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고만으로는 현실이라는 직물을 바꿀 수 없고, 행동만이 그럴 수 있다. 따라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대담하게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여성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꾸밈없는 감사는 여성적 자유가 실천적으로 기반을 둔 곳이다.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의 결과가 아니면 자유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준 다른 여성에게 감사하는 한 여성은 그런 감사를 잃어버린 집단이나 페미니즘 운동 전체 보다 여성적 성의 해방에 더 가치가 있다.”(130) 감사는 위계의 표현이 아니라 상호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여성적 자유의 비주권적인 조건에 대한 상호 인정이다. 성적 차이가 여성들의 계보에 소속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요구로 읽힐 때, 성적 차이는 그것이 주어진 방식을 전혀 속죄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것과 스스로를 화해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여성되기의 ‘인과적’ 소여(datum)”를 제거하여 퇴행적으로 의지하려는 소망을 따라다니는 원한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다. “남성들이 발명해 낸 사회적인 상징 질서 속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조건 짓는 사건이다. 그녀의 인생에 개인적 운명이란 없다. 그녀가 자유와 필연(necessity)을 일치하게 만들 방법은 없다. 그녀에게 필연이란 자신의 해부체(an anatomy)의 사회적 사용(모성, 처녀성, 성매매 …)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녀의 자유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회피를 의미한다.”(Milan, 128) 성적 차이는 “우리가 사회생활에 소속되는 것이 사회생활의 여성적 구성부분에 우리가 소속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적 전제”가 아니다. 성적 차이는 “부자유의 원인으로부터 나온 이 사실적 전제를 우리 자유의 원칙으로 변형시키는 정치적 실천”(122)이다. “즉, 여성이 자유로운 것은 그것이 선택의 대상이 아님은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이 여성적 성에 속한다는 것을 뜻하는 선택을 할 때다. (138) 그러므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이해하는 식의 성적 차이의 정치는 필요성에 속박되고 자기-주권의 환상에 사로잡히고 원한으로 가득 찬 상태에 머무르는 “나는 할 것이다.”를 조건 지어지고 선택된 공동체, 즉 “다른 여성에 대한 감사와 교환이라는 원칙에 입각한 […] 사회 계약”(142)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는 “나는 할 수 있다.”로 변형시킬 것이다. 이 새로운 사회 계약은 합리적으로 동의된 원칙들의 접합이 아니라 약속(빚을 인정할 것)과 형상(원형과 상징적 어머니)에 기초한다. 이 계약은 서명자와 그들의 후손을 영원히 속박하고, 계약의 정당성을 사회 계약 이론가들이 재치 있게 “암묵적 동의”라 부른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감축시키는 계약과는 다르다. 성적 차이는 그녀보다 먼저 와서 “전진해”라고 말하는 여성들을 가시적이고 공적인 방식으로 인정하는 일상적 실천과 떨어져서는 아무런 실존도 보증도 갖지 못한다. 자신이 아는 것을 인정하는 것(즉, 비주권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성취한 것과 페미니즘 자체의 조건이라는 것)은 “여성들 사이의 차이”라는 날 것의 사실을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무언가, 즉 “권위 있는 대담자”로 변형시킨다. 그것은 “여성들 사이의 불운한 거울놀이”에 입각한 평등의 통념을 더 위험하지만 더 실체 있는 무언가, 즉 상호성으로 변형시킨다. 페미니스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자신이 인정하는 것으로 변형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당당하게 단언했다. “권위 있는 대담자를 갖는 것이 인정된 권리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이 일단 권위 있는 매개자를 창조하고 나면 페미니즘은 더 이상 권리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인가? 권리를 재형상화하기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성적 차이』를 무시했던 것은, 아마 동일성(또는 동일성의 실패)의 렌즈를 통해 읽었을 때 그 글은 본질적인 성별화된(sexed) 차이에 관한 주장으로 쉽게 오독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그런 비판이 왜 과녁에서 빗나간 것인지를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한 단호한 정치적 정식화에서, 성적 차이는 동일성의 생산이나 파괴가 아니라 수탁과 인정에 중점을 둔 자유의 실천이다. 세계 건설(world-building)과 새로운 사회 계약으로서 페미니즘에 초점을 맞추면서 성적 차이의 정치적 실천이 추구하는 것은 현세적인 실재의 직물에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성적 차이가 정치적 공간의 창조, 즉 멀고 가까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고, 새롭게 생각될 수 있는 형상(즉, “상징적 어머니”) 주위에서 조직되며, 재조직화와 판단에 종속된 현세적인 중간에 낀 공간(worldly in-between)의 창조로 이해될 때, 성적 차이는 여성들로서 모든 여성(all women qua women)(그 계급에 대한 소속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간에)에 전면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여성의 계보에 대한 정치적 주장과 판단을 제시하는 개인들에게 적용될 뿐이다. 그런 정치적 요구는 빚에 대한 인정, 즉 공적이고 가시적인 방법으로 여성적 자유의 비주권적 조건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적 차이』를 본질주의적인 문헌―또는 최소한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해도, 그 글의 가치를 폄하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는 다른 쟁점이 있다. 바로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역사적인 투쟁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권리에 기반을 둔 우리의 틀 내에서 『성적 차이』는 ― 본질주의의 공포는 차치하더라도 ― 바람직하지 못한(non grata) 페미니즘 저작으로 받아들여질 운명이었다. 자유의 정치(성적 차이) 대 평등의 정치(성적 비차이/무관심)는 쉽사리 평등한 권리냐 아니면 여성적 자유냐 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읽힐 수 있다. 전자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밀라노 여성서점>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양자 [모두가 실현될] 가능성을 제거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다른 방식이 있다. 즉, 권리 요구의 조건으로서 자유의 실천, 그리고 자유의 실천으로서 권리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다. “성적 차이의 정치는 성들 간의 평등이 달성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때때로 모순적인 평등의 정치를 대체하려는 것은 여성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기초하여 성취된 여성적 자유의 장소로부터 모든 종류의 성차별적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다.”(Milan 145. 두 번째 강조는 필자가.) 이 문장을 평등의 정치는 페미니즘에게 막다른 골목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문장을 다음처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적 차이의 정치가 성들 간의 평등이 달성된 후에 온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평등의 정치가 성적 차이의 정치로 대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후자가 없다면 전자는 현실의 실천에서 본질적으로 묘연한 상태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문제라는 렌즈를 통해 읽는다면, 이 대안적인 해석은 성적 차이를 법에 기입할 필요성에 관한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에게 가장 중요한 페미니즘 사상가임에 틀림없는 이리가레가 바로 그것을 주장했다..30) 하지만 이리가레나 <밀라노 여성서점> 모두 다른 특성의 권리들, 즉 권리들은 자유의 실천과 연결고리를 상실할 때 죽은 법적의 인공물이나 심지어 위험한 정치적 도구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31) 과연 미국 사회의 페미니즘이 대체적으로 그런 것처럼, 대부분의 동시대 페미니즘의 뿌리 깊은 사법적 제도적 점향은 어떻게 우리가 급진적인 권리 요구가 한 때 약호화한 정치적 자유라는 사상과의 접촉을 상실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만약 이리가레의 주장처럼 여성들이 성별화된 시민적 권리(civil rights)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평등한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참여(단순한 정치적 사법적 대의가 아니라)와 시민들 서로에 대한 수탁(“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지도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Democracy, 174]), 양자에 대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권리들이 제도화될 때, 우리는 그 권리들의 기원이 자유, 비(非)지배, 공적업무에서의 평등한 참여에 대한 급진적이고 비(非)근거적인(ungrounded) 요구에 있다는 점을 잊곤 한다. 우리는 애초에 그 권리들을 창조했던, 종종 덜 안정적인 실천에 투자를 지속하기보다는 그 권리들을 그 자체로 보장하는 데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시민적 권리로 회귀하자는 요구는 그런 기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투쟁은 “권리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면서 법적인 판단도 국가 대표의 판단도 기다리지 않았다.”(Democracy, 175)고 쓴다. 자유는 권리에 대한 요구에서 발원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말과 행동을 교환하는 데 있다. 자유는 그런 요구의 성공적인 제도화에 뒤따라오는 정치적 대의에는, 그 자체로는 있지 않다. 이리가레와 <밀라노 여성서점>은 모두 권리들이 보증하는 정치적 대의와 정치적 자유 사이에는 제거할 수 없는 긴장이 있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다양하고 풍부한” 성별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심원하게 다양한 정치 운동으로, 이는”여성 일반”이라는 통념으로는 결코 대의될 수 없다. (Milan, 74) 이는 권리에 반대하는 논변이 아니듯 대의에 반대하는 논변도 아니며, 다만 페미니스트들이 자유의 경험을 권리의 제도화나 대의와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상기시키려 할 뿐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에게 있어 진정한 정치적 자유 없이 대의와 제도화된 권리를 갖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자유가 부재하다면, 평등한 권리를 위해서는 동화 또는 이리가레가 “동일자의 법(law of the same)”이라 부른 것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하지만 아렌트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평등은 정치적인 따라서 인간적으로 구성된 원칙으로, 이는 인간 복수성의 경험, 즉 동무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다른 관점을 듣고 판단하는 경험을 지탱해야 한다. 아렌트와 <밀라노 여성서점> 모두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유와 그것을 지지하는 주체적인 중간에 낀 공간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평등한 대의나 평등한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동일성을 요구하는 것 같은 양자의 통념을 거부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는 점차 추상적인 원칙이나 규칙으로 굳어져 자유의 실천들 안에 있는 그 기원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실천들 안에 있는 자신들의 기원과의 관계로 되돌려질 때, 권리들은 이미 우리인 것을 승인하는 것 이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권리들은 더 이상의 무언가가 되려는 우리의 욕망을 승인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 권리들은 “전진해”라고 말하는 자유의 정치적 도구다. “권위 있는 여성적 대담자를 갖는 것이 인정된 권리보다 중요한” 것은 권리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장하고, 사용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요구와 새로운 자유로 나아갈 수 있는 한에서만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권리들이 중요한 것은 마치 권위 있는 여성적 대담자들처럼 오직 그것들이 우리가 전진하도록 영감을 주는 한에서다. 사실 게르하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권리들은 “수입되거나 명령받을 수 없다. 그것들은 연관된 사람들이 권리로서 그것을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위치에 있을 때에만 적용된다.”.32) (176) <밀라노 여성서점>이 보여준 것처럼, 그런 위치의 창조는 자유의 실천, 현세적인 중간에 낀 공간, 권위 있는 대담자를 전제한다. “만약 어떤 이가 자유의 기획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분명히 표현하고 자신의 여성으로서 존재[우연한 사실]를 이해하고자[즉,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권위 있는 대담자는 필수적이고,” 그것은 “어떤 권리나 법도 줄 수 없는” 것이다.(Milan, 31) 즉, 국가에게 청원하는 권리 요구는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정치적 요구를 결코 대체할 수 없다..33) 그것의 기원적 고향이자 열망인 자유의 실천을 통해 읽힐 때, 권리에 대한 요구는 현재 자신인 것(what one is)을 인정(recognition)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은 누구인가(who one is),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은 누가 될 수 있는가(who one might become)에 대한 인정(acknowledgement)의 요구다. 그렇게 이해되면 평등권은 특정한 동일성 범주로 분류된 모든 주체들에게 규칙처럼 적용될 수 있는 법적 인공물이 아니다. 권리는 위로부터 분배되는 것이 아니고,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더 이상의 무엇(something more)에 대한 요구다..34) 권리는 사물이 아니라 관계다. 따라서 권리는 우리가 가지는 무엇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것이다. 권리는 우리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힘을 북돋는다. 이런 방식으로 권리를 사고하는 것은 자유의 실천보다 평등에 대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운 평등한 권리에 대한 여성들의 역사적 요구의 가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페미니스트들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 자유에 대한 급진적인 요구에 있는 권리의 기원을 회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요구는 여성 해방 투쟁으로 환원할 수 없는데, 이는 사회적인 용어법 속에서, 권리가 약호화한 무언가로 전형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여성들과 같이 권리를 빼앗긴 집단에게 권리를 확장하는 것은 전혀 불가피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자유의 실천으로서 권리에 대한 요구가 반드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솟아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는 권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성적 자유가 독자적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 이것이 없다면 이는 자유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 ― [여성의] 해방을 외부에서 도왔던 역사적 환경이 말하자면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그것들이 단위생식에 의해 스스로 재생산하고 자신의 실행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생산하는 자유로 해석되거나 대체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미 쓴 것처럼, 만약 우유의 저온 살균이 “여성참정권 옹호자들”의 투쟁보다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는 데 더 기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않도록 행동해야만 한다. 영아 사망률을 감소시키고 피임을 발명했던 의학에서도 마찬가지고, 남성이 더 이상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지 못하게 한 사회생활의 진보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온 살균된 우유에 도달한 이런 자유는 어디서 왔는가? 나에게 우월한 문명의 표기로 제공된 그 꽃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가? 만약 누군가 내 손에 쥐어준 이 병과 이 꽃에 나의 자유가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144, 강조는 필자) 자유는 증여된 것도, 상속받은 것도 아니며, 오직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서만 요구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유를 보증하고, 근거 짓고, 정당화할 것인가? “여성적 자유는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 보장된다.”(142).35) 권리와 대의의 정치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밀라노 여성서점>의 지독한 회의주의처럼 보이는 것 덕분에, 우리는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고 자유 실천의 일부가 아닌 평등 원칙의 한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여성들이 권리를 위한 투쟁과 실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우리의 눈―정치적 문제에 대한 사법적이고 국가 중심적인 대답 때문에 점차 맹목적이 되어가는―을 열기 위해 아마 <밀라노 여성서점> 페미니스트들은 그렇게 비타협적인 용어로 그들의 주장을 진술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권리가 그런 실천의 일부일 수 있는지 여부는 권리가 쟁점이 되는 사례의 특수성의 맥락과 관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권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맹목적인 수용이나 거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정치적 판단이다. 이것은 성적 차이의 정치적 실천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판단에 대한 요청으로 인해 <밀라노 여성서점>의 문헌은 차이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평등에 대한 요구와 권리를 재형상화하려는 3세대 페미니스트들에게 충분히 재생시킬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참고문헌 Arendt, Hannah. The Human Con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9. --------------------. Lectures on Kant’s Political Philosophy. Ed. Ronald Bein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 “What is Freedom?” Between Past and Future: Eight Exercises in Political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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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있는 여성 대담자가 있는 것이 인정된 권리를 갖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자유의 기획에 따라 분명히 표현하고 여성 되기(being a woman)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대담자가 필요하다.[…] 권리 주장의 정치는 그것이 얼마나 정당하고 심오한지에 상관없이 부차적인 정치다. - 밀라노 여성서점 31 이 놀라운 주장이 등장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여성 집단의 사고와 변천에서의 여성적 자유의 발생』(Non Credere di avere dei diritti: la generazione della liberta`femminile nell’idea e nelle vicende di un gruppo di donne)에서다. 이 책은 1987년 <밀라노 여성서점>(Liberteria delle Donne di Mliano)이 집단적으로 집필했고, 1990년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라는 제목으로 영역본이 출판되었다. 지금은 절판된『성적 차이』는 매우 도발적인 저작이어서 미국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고 1990년대 소위 “여성” 범주 논쟁에서도 사실상 누락되었다..1) 이와 같은 부재는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공동 역자이자 편집자인 라우레티스(Teresa de Lauretis)는 다음과 같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역설적으로 여성의 권리, 법 앞에서의 평등한 권리의 옹호가 아닌 여성에 대한 완전하고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책임성을 요구하는 자유는 서구적 사고 속에서 출현한 다른 어떤 통념에도 뒤지지 않는 급진적인 개념이다”(12)..2) 자유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정치적·개인적 책임성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런 실천이 과연 서구 사상사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것 못지 않게 급진적이라면, 왜 미국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성적 차이』를 다소 무시했는가? 이러한 질문을 반성하려면, 페미니스트들은 서구적 전통에서 상속받은 자유의 개념화, 즉 의지의 현상, 주체의 소유, 주권이라는 이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개념화에 그녀들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자신의 체제와 같은 자유 민주주의를 지배하는 이 같은 설명에 따르면, 자유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용어로 정의되고,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 안에 거주하며, 정치가 종결되는 곳에 존재하는 무엇으로 경험된다..3) 그러나 <밀라노 여성서점>은 자유를 이와 다르게 사고한다. 이들에게 자유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한 창조적·집단적인 실천이자 근본적으로 창시적인 특성을 가진 [실천으로서], 환원할 수 없을 만큼 우연적이[지만]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성적 존재로서의 여성들 간의 관계를 구축한다. 즉 이 여성들은 이런 실천이 없었다면 남성적 교환 경제 안에서의 위치를 제외한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밀라노 여성들은 1·2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자유를 주장해온 틀을 거부하며 남성과의 유사성(동일, sameness) 또는 일반적인 사회 복리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특별한 기여(차이)라는 식으로 자유에 대한 여성의 요구를 정당화하기를 거부했다. 실제로 밀라노 여성들은 [서구적 전통에서] 상속받은 자유에 대한 이해를 특징짓는 주권이라는 환상뿐만 아니라, 자유를 향한 여성의 요구를 여성들의 사회적 기능의 봉사 안으로 밀어 넣는 유용성이나 편의의 논리 역시 거부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여성 문제와 여성권에 대한 논변의 역사적 반복을 운명적으로 지배해 온 논리다. 즉, 여성의 쓸모는 무엇인가? 내가 다른 곳에서 페미니즘의 사회적 문제라고 칭했던 것의 논리는 제쳐두고, <밀라노 여성서점>의 “정치를 행하는 비범한 방법”(Milan 50)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를 [발생시키는] 실천”(79), 또는 밀라노 여성들이 “성차의 정치”라 부르는 것의 관점에서 서구 페미니즘의 전체 기획을(145) 개작한다..4) 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밀라노 여성서점>의 글을 눈여겨보지 않은 것은 자유를 주권으로 보는 문제적인 관점에 우리가 연루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이는 너무 나간 것이다. 이탈리아어본 부제(여성 집단의 사고와 변천에서의 여성적 자유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미국 페미니스트는『성적 차이』를 여성의 자유에 관한 정치적 선언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렇기 보다는, (“여성” 범주 논란의 맥락에서) 성들 간의 감축할 수 없는 차이에 관한, 그리고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국적 관계를 압도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간의 상징적 비대칭성에 관한 주장으로 받아들였다..5) (대부분 유럽적 기원의) 페미니즘 저작을 “근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성급히 기각하는 것을 반대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6)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성적 차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이, 위티그(Monique Wittig)가 신랄하게 비판한 것처럼 “우리를 여성의 신화로 후퇴시키”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 차이의 범주들, 이들의 정치적 기원과 효과에 관한 진지한 토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생각해 왔다(13). 이 글에서 나는 성적 차이에 관한 페미니스트들의 설명에 대하여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익숙한 논변을 다시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7) 우리(페미니스트)가 이 논쟁에서 이미 지쳤다면―기초에 관한 논쟁에서는 확실히 그랬다―, 이는 적지 않게 성적 차이를 주체의 문제가 아닌 문제로 사고하는 데에 우리가 진정한 곤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 문제의 틀 내에서는, 이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적 모체 내에서 주체 형성의 조건 자체를 규정하는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의 불가능한 선택 이외의 것으로 성적차이를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성적 차이를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거나 (즉, 준 형이상학적인) 사회에 의해 구성되는 것(즉, 역사적으로 우연적인)으로 여겨왔다..8) 페미니즘 기획을 다루면서 세계를 건설하는 문제에 초점을 둔 자유-중심적 틀 내에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우리로 하여금 성적 차이를 정치적인 것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즉 이는 분명히 표현되어야 하는, 즉 공적 공간에서 이 같은 다른 주장들과 공적 관계에 진입해야 하는 성적 존재에 대한 주장[으로 사고하게 만든다]. 성적 차이라고 불리는 자유의 실천이 부과한 난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밀라노 여성들의 정치의 중심에 있는 세계 건설의 임무에서 비껴나지 않아야 한다..9) 이러한 임무는 여성들이 남성적인 문화 안에서 겪는, <밀라노 여성서점>이 여성을 약화시키는 (상징적인) 무차별 상태라고 부르는 것, 즉 ‘모든 여성은 동일하다.’는 언명에 대한 대응이다. 이러한 동일성은 보부아르(Simon de Beauvoir)의 성/성별 차이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서 초점이 되는 여성의 이미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유산에 동반된 성/성별 평등의 원칙을 둘러싸고 조직된 페미니스트 정치에도 도입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말하기를 페미니즘 내에서 평등은 “성별에 근거를 둔 공통성을 향한 여성들의 요구”(“당신이 모든 다른 여성들과 같은 여성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를 강화하지만, 각각의 여성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특색/구별을 필요로 한다.”는 점(137)과, 한 집합의 등가적 구성원 이상으로 취급받고자 하는 욕망, 다시 말해 그녀의 특수성을 무시한다. “중립적인 정의는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다른 여성과 비교하지 말고, 남성과의 평등을 기다리라고 명한다. 그 결과 여성들의 경험은 자기 자신 안에 감금된 채 사회적으로 번역되지 않는다.”(113) 다양한 경험을 인정하고, 평가하고, 매개할 수단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여성들이 자리 잡을 시-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각각의 여성은 자신만의 경험에 갇혀있고, 이는 철저하게 주관적이다. “어쨌거나, 누구와 [기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가?”(25) 대담자와 매개(현세적인 사이 공간)의 상징적 구조를 이름붙이는 것은 “사회 계약의 성별화된 토대에 이르게 되며”, 첫째로 “남성과 여성간의 사회 계약은 없다.”는 사실과, 둘째로 “여성은 상징적인 수준에서는 무리이지만”, “사회생활에서는 […] 대부분 서로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수반한다. (129, 134). 남성적인 사회 계약의 이면은 단지 페이트먼(Carol Pateman)이 설득력있게 주장하고 <밀라노 여성서점>이 동의했을.1) 것처럼 남성의 여성 소유뿐만 아니라, 여성이 기술과 “사회 교환의 규칙”을 누리지 못하는(134) “여성 인류의 야만적 상태”(137)이기도 하다. 여성들 간의 관계는 남성들의 관계의 규범을 해치는 예외적인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밀라노 여성서점>이 “남성의 정치적 사고에서의 맹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136). “여성들이 개인적 특색/구별을 지니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과 그녀가 여성의 공통성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는 자매들의 요구를 화해시키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개인과 집단성 간의 관계에 관한 오래된 남성들의 선언들 사이에서 탐색해” 봐야 소용이 없다(136). <밀라노 여성서점>의 주장에 따르면 남성적 사회 계약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모델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평등이라는 그 중심적인 원칙은 이리가레(Luce Irigaray)가 “무엇에 대한 평등인가?”(“Equal” 32)라는 간단한 질문을 통해 드러낸 실패한 논리 속에 페미니즘을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남성적 기준이 평등한 권리를 위한 여성들의 역사적 투쟁 이면의 공공연한 표준이라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다..11) 이 표준이 그들에게 평등이냐 차이냐 라는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한다는 것이 초기부터 페미니즘을 괴롭혀왔던 문제다..12) 이것은 페미니즘을 상반된 진영(평등 페미니스트 대 차이 페미니스트)으로 분할하는 문제며, 이는 화해가 불가능해 보인다..13) 그리고 이는 아마 사실이다. 평등과 차이라는 분명하게 모순되는 원칙을 둘러싸고 조직된 페미니즘의 틀 내에서,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는 (1) 두 진영 중 한쪽을 따르거나, 즉 불가능한 선택을 하거나, (2) 불가능한 선택을, 스콧(Joan Scott)의 표현대로 “페미니즘의 구성적인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둘 중 하나다..14) 그러나 아마도 또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평등이나 차이(또는 양쪽 모두)의 깃발 아래서 페미니즘을 사고·실천하는 대신, 자유의 깃발 아래서 페미니즘을 사고·실천한다면 어떨까? 페미니즘이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불가능한 선택의 무게감으로 부서질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등보다 자유를 앞에 내세워 페미니즘적 부등(disparity)이라는 실천을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을 엄청난 위험과 서구 페미니즘의 상식과의 불화에 빠뜨린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등을 향한 페미니즘의 역사적 열망을 실현하려는 기나 긴 시도를 실패하고 나서야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페미니스트들은 그래야 한다고 지나칠 만큼 주장한 바대로 평등의 원칙을 자유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은 “사회 계약을 찢어버리고 그것의 정치적 형태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Milan 143). 그러나 왜 페미니스트들은, 평등이라는 원칙을 문제 삼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정하면서, 어쨌거나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한 호소였던 사회 계약을 찢어버리기를 원하는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사회 계약 이념의 중심을 차지해 온 자유라는 수사를 모르지 않았지만, 이는 그들이 본 뜰 만한 가치가 있는 자유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일부) 남성들의 자유로서의 역사적 정식화라는 점은 별도로 하더라도, 이는 주권의 환상으로 해석된 자유다. 이 환상은 많은 1·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으며, 페미니즘을 사회 계약의 특정한 형태(자유주의)에 고정시켰는데, 이는 정치적 자유를 소극적 자유 및 헌법적으로 보장된 개인의 권리로 축소시켰다 (Milan 136~137). 여성들 간의 자유롭고, 수평적이며, 사회적-상징적인 관계의 실천과 상징이 부재한 가운데, 자유주의는 자신의 성별화 된 육체 및 여성들의 제휴를 부정함으로써 남성과의 평등 및 자유를 추구하라는 “끔찍한 초대”를 불러일으켰다. 이렇듯 성적 존재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를 북돋기는커녕 이를 파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기를 “공통성을 떠나기를 원하는 여성, 동료 여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여성”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세르피나와 마찬가지로 “남성 권력의 마비된 상징의 범위에 갇혀, 다른 여성들을 필요로 하지만 그들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협상할 자격이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135,137). 자유를 주권으로 인식하는 것은 공허하며, 가능성 없는 의지일 뿐이며,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기를, 만약 여성이 자유롭기를 원한다면,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했듯, 그들이 포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주권이다(“What Is” 165). “사회 계약을 찢어버린다.”는 것은 주권으로서의 자유를 거부하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자유를 공동체나 더 높은 선(善)에 대한 기여라는 견지에서(예를 들어 사회적 문제의 견지에서) 정당화 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여성 정치는 이런 태도, 즉 자원봉사를 한다거나 약자를 보살피고 폭력적 수단을 회피하는 등 남성적이지 않은 여성적 행동으로 체현된 가치에 호소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변화시킬 것을 계획하는 정치와 접목되었다.”(Milan 125) 여성의 자유가 “윤리적 본성의 내용”이나 “다른 내용”에 의존해야 한다는 관념을 거부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의 정치는 사회를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여성과 그들의 선택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자신의 차이를 정당화해야 하는 의무와 이러한 의무가 수반하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예속으로부터 여성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126) 여성적 자유는 무조건적인 것이다. 근본적이거나 결과주의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유일한 이유는 그 자신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제시한 여성적 자유에 대한 과감한 설명은 “1966년~1986년 사이, 주로 밀라노에서 나타난” 자발적 연합의 발전을 상술하는 일련의 삽화 속에서 출현했는데, 여기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즉, 남성적 교환 경제 내에서의 전통적인 기능을 제외하면 서로 아무런 사회적 관계도 형성하지 않았던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무근거적 실천..15) 이러한 연합은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하거니와, 권리의 영역으로 소진되지 않는 여성들의 공적 자유의 실천과 영역의 구성에 결정적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이러한 연합, 그리고 그들의 성공과 실패에 관한 혼합된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실질적인 정치적 자유를 경험하지 않고서도 형식적 평등 및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이 정치적 자유의 구성과 실천을 형식적인 평등 및 권리의 제도화와 혼동하는 것은 대단히 문제적이다. 정치적 자유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창시적인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실천은, 발언과 행동을 통해 차이를 드러내고 때로는 평등한 권리의 제도적 공간을 초과하는 주관적인 사이 공간을 창조한다. 그러나 다소 성급하게 덧붙이자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실천이 자유의 실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평등이냐 차이냐의 선택지처럼) 권리와 자유를 놓고 다시 한 번 잘못된 선택지를 설치하기보다는 차라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치적 자유의 창조적이고 전복적인 특성, 세계 건설을 위한 일상적인 실천, 새로운 사회 계약은 평등한 권리를 위한 투쟁 또는 그의 행사와 어떤 식으로 연관되는가? 이 질문, 그리고 성적 차이의 정치가 내놓는 비범한 답변으로 넘어가자. 보상에 대한 욕망 <밀라노 여성서점>은 자유의 문제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제한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연합을 건설할 역량으로 이해되는 자유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형태는 성적 차이와 동떨어져서 사고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은 삶 전체를 조건 짓는 사건이기 때문이다.”(Milan128) 필연의 힘을 지닌 우연적 사실, 즉 성적 차이는 파괴되거나 초월되지 않고, “부자유의 원인에서 우리[여성의] 자유의 원칙으로” 재상징화, 변형된다. (122) 이러한 변형은 항상 “여성(female sex)의 인간적 조건에 의해 어느 정도 제약된다.”(119~20) 반드시 바뀌어야 하지만 그러나 회피하거나 의지로 사라지거나 폭력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인간 조건, 곧 성적 차이는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며, 오직 이 “새로움만이 강제로 생겨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혁명은 새로운 것을 사고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파괴한다. 그러나 파괴는 여성적 사고의 혁명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사고해야 할 새로운 것은 차이(difference)기 때문이다. 전복은 어떤 사물들이 배열되어 있는 방식, 즉 그것의 의미와 관련된다. 이미 주어진 진실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고, 따라서 그것을 악화시킴으로써 바꾸는 새로운 배열이 있다. 물리적 파괴는 효과적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파괴되더라도 그 의미를 보존하며, 누구나 그것이 다시 출현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배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120) 앳킨슨(Ti-Grace Atkinson)이 유명하게 선언한 바와 같이 “여성이 인간으로 태어날 시도를 할 작정이라면, 그녀들은 자살을 해야 한다.”는 관념은 이탈리아 여성들의 자유 기획과는 철저하게 이질적이다(49). 만약 과거의 상태가 현재의 상태 및 자신의 존재의 조건이라면, 파괴하고자 하는 소망은 퇴행을 의지하는 불가능한 소망, 그리고 니체가 무기력하고 자기혐오적인 특성이라고 진단한바 있는 것으로 이끌 수 있다. 니체에 따르면, “과거의 상태”는 압도적인데, 왜냐하면 과거는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간 것과 의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나는 의지한다. 그리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잊혀지거나 바뀔 수 없고, 구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것과 자신의 관계를 바꾸어야만 한다. “지나간 것을 구원하고 ‘…였다’를 ‘나는 그것을 가질 것이다!’로 변형하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구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179)” 니체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과거를 구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 성적 차이의 정치의 맥락에서 구원은 어떤 식일까? 페미니스트들은 위티그가 “성의 범주”라고 불렀던 것을 복귀시키지 않고 성적 차이를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 성적 차이에 대한 확증이 우리를 ‘여성은 아름답다.’라는 익숙한 수렁에 가두거나 브라운(Wendy Brown)이 “상처입은 집착”, 즉 “부자유에 대한 집착”이라고 불렀던 것이 최초에 여성적 동일성을 구성했던 역사적 상처[에 대한 집착에] 숨어들지 않을까 (xii)? 주체 문제의 틀을 통해 읽는다면 『성적 차이』는 페미니즘과 같은 자유를 위한 근대적 투쟁과의 “역설적인” 연루라고 브라운이 불렀던 것을 “자유가 대항하여 출현한 바로 그 억압적인 구조”의 안에서 예로 제시한다 (Brown 7)..16) 브라운이 정의한 자유의 역설은 주체 형성의 역설적인 성격에 대한 비판적인 설명을 반영하는데, 이는 주체는 그것을 주체로/종속시킨 사회적 규범자체를 반복하도록 강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이 제약된다. 이러한 반복이 없다면 주체는 자신의 실재성이나 및 사회적 존재감을 전혀 갖지 못할 것이다. 브라운은 반응적이고 반영적인 동일성의 구조에 대한 니체의 생각을 끌어와 다음과 같이 쓴다. 주변화 혹은 종속에 대한 항의로 출현하는 과정에서 정치화된 동일성은 자신의 배제에 집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동일성으로서의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이러한 배제라는 전제 위에 놓여 있고 배제의 장소에서 동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그것을 비난할 장소를 찾음으로써 종속과 주변화에 수반된 “고통의 방향을 바꾸거나” 이를 증대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그것을 구원받지 못한 역사 동안의 고통을 정치적 주장의 기초 자체, 동일성으로서의 인정에 대한 요구 안에 장착시킨다. (73~74) 인정 및 보상에 대한 주체의 정치적 요구는 악순환에 사로잡혀 동일한 주체를 예속시키는 (또한 구성하는) 상처의 경험 자체를 강박의 형태로 반복한다. 밀라노의 페미니스트들은 보상에 대한 욕망에 포함된 위험을 보고 다음과 같이 쓴다. “여성이 보상을 요구하는 한, 그녀가 무엇을 획득하는지에 관계없이, 그녀는 자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128) 브라운과 마찬가지로, <밀라노 여성서점>은 보상에 대한 요구가 어떤 식으로 과거를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내버려둔 채, 여성을 자신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끝없는 추구에 가두고, 역으로 “여성”을 피해의 동일성으로 구성할 뿐인지를 보았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는 여성이 부당함의 피해자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회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그들이 얼마만큼 보상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할 권리를 보유하고, 이렇게 게임이 영원히 지속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요구가 불확정적이고, 상실감이 깊어서, 영원히 되풀이해 비난할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128~29) 이것이 2세대 페미니즘을 “피해자화의 정치”로 만든 것이다. 이는 “가정주부, 낙태 문제를 겪는 여성, 강간당한 여성 욕망하고 판단하는 살아있는 여성이 아니라 억압받는 여성(female sex)의 형상, 그 자체로 여성적인 것의 화신을 필요로 한다.”(103) 이것이 바로 “상처 입은 집착”이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밀라노 여성서점>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상처를 동일성으로 재설정한다는 점에 동의하더라도,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의 피해자화의 정치에 관해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다. 바로, 살아있는 여성이 피해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같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성(female gender)의 비참함”을 형상화하는 것은 항상, 적어도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여성을 포함한 “다른 여성”이다..17) “다른 여성에게 투사된, 어떤 여성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형상”은 2세대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상징이며, 이는 “틀에 박힌 가정주부, 낙태문제를 겪는 여성, 강간당한 여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밀라노 여성서점>의 관점에서 브라운이 이야기한 “상처받은 집착”은 아무에게도 깃들지 않은 피해자 동일성이며 “누군가의 고통과의 대중적 동일화처럼 보인다.”(Milan 102) 밀라노 여성들에 따르면, 자유를 동시에 부인하고 확언하는 경향은 상징적 실천이 지닌 정치적 문제다. 즉,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는 아무런 상징적 형상화를 거치지 못한다.”(70) 따라서 <밀라노 여성 서점>은, “여성운동이 결여했던 것은 [여성의 예속]에 대한 의식에 선행하며 그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으로 사고되는 자유로운 여성의 표상이다. [대신] 자유가 의식에서 유래한다고 믿었다.”(103) 달리 말하면, 여성이 억압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억압의 진실이나 날 것의 사실이 아니라 여성적 자유의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나 모든 자유의 형상이 동일하게 페미니즘을 북돋은 것은 아니다. 2세대 페미니즘에서 중요했던, 여성 자유의 잃어버린 대상으로서의 고대 모계제라는 관념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대상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자극한 결과는 오직 퇴행을 의지하는 불가능한 소망 내에서 이 욕망이 자신에게 반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18) 어떤 것도 과거의 절대적인 자유에 비견할 수 없으며, 과거로의 회귀만이 이러한 절대적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현재는 초월되거나 파괴되어야 한다. 이 같은 고대적 과거라는 관념은, 일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로 하여금 “집단을 형성하고 공동의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몇몇 여성이 수행했던 결정적 역할과 같은 가장 최근의 잘 알려진 사건에 대한 평가를 왜곡하도록” 만들었다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평가한다. 이러한 역할은 침묵 속에서 간과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는 개별 여성의 자유를 완전히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원망을 샀을 것이다”(104). 다시 말하면, 여성의 자유로운 행동은 고대 여성들의 절대적인 자유와 비교해 한참 떨어지는 것으로 부인되었거나, 주권의 견지에서 파악되었을 것이다. 즉 다수에 반하는 일인 혹은 소수의 자유. 따라서 빠져 있는 것은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자유의 경험(예를 들어, 행동과 발언을 통해 다른 이들과 새로운 정치적 연합을 형성하는 실천)이 아니라 그것의 상징적 형상화였다. 이러한 형상화가 부재한 가운데, 자유의 경험은 항상 도달할 수 없는 것이었고, 미래 혁신의 원천으로 봉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여성적 자유의 상징적 형상은 중요하다. “여성”을 간단히 피해자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밀라노 여성서점>의 말을 빌면, “한 범주의 여성, 즉 가장 불리한 위치에 처해있는 여성 범주의 문제의 윤곽을 그리고 나서, 이를 여성적 조건의 일반적 전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조건을 그들의 최소공배수로 평준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의 다양한 선택과 스스로 상황을 개선해야 하기 위해 가지는 실질적인 기회를 지각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이로써 여성(female gender)의 존재를 부인한다. 오직 아무도 동일화할 수 없는 ‘여성의 조건’만 존재할 뿐이다”(Milan 68). 더욱 나쁜 것은, 이 같은 아무것도 거처할 수 없는 주체 위치의 상징적 형상화가 헤게모니적이라는 점이다.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틀에 박힌 이미지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을 보상의 논리에 가두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피해자 동일성이 아니라, 여성적 자유의 형상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로서의 여성이 정치적 동원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형상을 제공한다. 여성을 부당함의 피해자로 인정함으로써 게임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이 사회는, 여성을 보상이 아닌 사회적 기명(inscription)을 추구하는 욕망의 담지자로 인정하는 것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부당한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상을 제시해 온 페미니즘은 여성 욕망의 대안적 상징을 제공하지 못하는 한, 게임이 계속 유지되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빠져있는 것은 서로를 되풀이 해 비난하지 않는 욕망 자체가 아니라 주어진 시점에서 일부 여성이 이러한 욕망을 지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모든 여성이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부정적 형태로만 상징화하지 않는” 여성 욕망의 “상징적 권위부여”다..19) 피해자 동일성의 문제가, 전체 사회 집단의 실질적인 욕망이라고 전혀 믿을 수 없는, 또는 ― 그것만이 아니라 ― 먼 일차원적인 정치적 표상의 문제라면, 이것이 요청하는 것은 주체에 대한 작업이 아니라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상징에 대한 정치적 연구”라고 부르는 것이다(Milan 106)..20)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브라운처럼 피해에 선행하는 주체성이 발전하는 순간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기보다는 새로운 상징적 실천, “[보상을 요구하는] 다른 이의 부당함이 아닌 여성이 되고자 하고, 될 수 있는 더 이상의 무엇 안에서 윤곽이 그려져 있음을 보는 실천의 창출을 부정한다.”(101) 이 “이상의 무엇”은 단지 남성과의 평등에 대한 욕망이 아니며, 따라서 피해에 대해 보충받으려는 욕망도 아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 정치는 피해라기보다는 자유의 형상, 평등보다는 “이상의 무엇”에 대한 욕망 아래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차별의 형태를 제거하기 위한 반작용으로서의 대응(남성에게 건네지는)은 새로운 사회 계약을 창조하기 위한 순향(順向)적인 실천(여성에게 건네지는)으로 전화될 수 있다. 이제 이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의 실천”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21) 평등에 얽힌 문제 <밀라노 여성서점>이라는 이름이 드러내듯 『성적 차이』에 담긴 이야기들은 주로 1975년 10월 밀라노에서 개장한 여성 서점이라는 공간과의 관련 속에서 전개된다. <밀라노여성서점은> “하기의 실천(the practice of doing)”을 발의했다고 설명되는데, 이 실천은 1970대 초반에 Autocoscienza(자기고백)의 실천을 둘러싸고 형성된 “말하기 그룹”을 토대로 세워졌다. 초기 2세대 미국 페미니즘의 ‘의식 고양’운동과 유사하게, “Autocoscienza의 실천”은, “완벽한 상호 동일화를 전제로 하며, 또 이를 추동한다.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즉 우리 [여성] 중 누군가가 사용하는 언어는 여성의 언어이며, 그녀의 언어이자 나의 언어다.”(42)라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언급했다. Autocoscienza는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를 고양시켰지만, 그 힘은 또한 그 한계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보여줄 수 없었다”(45). 비록 이러한 실천을 시작한 많은 여성들이 지속되고 넘쳐나는 성차별에 대응하면서 남성들과의 평등의 가능성에 등을 돌렸지만 (40), Autocoscienza는 비록 여성들 사이에서이긴 하지만 평등의 논리를 유지했다. 즉 “차이가 발생하면, 이러한 차이가 상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한에서 주목받아왔는데, 그래야 상호 동일화가 다시 설치될 수 있다”(44). 무차이의 문제―모든 여성은 똑같다―와 초기 페미니즘에서 나타났던 이것의 재생산은 ‘하기의 실천’의 출발점이다. 이는 “말하기 생활의 물질적 측면”을 정교화하고 페미니즘을 자매애로써, 즉 정치에 앞서 공통성들이 주어진 친족 양식으로서 실천하는 경향에 대항한다. “왜냐하면 ‘하기의 실천’은 반드시 애정과 친밀성으로 묶이거나 간단명료한 슬로건으로 규합되지 않고, 공동의 기획에 의해 단결하는 여성들을 한데 모은다. 이들은 자신의 이성, 자신의 욕망과 능력을 위해 이러한 공동의 기획에 전념하면서 그들을 집단적 이행의 시험에 부친다.”(Milan 86)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초기부터 “하기”라는 관념을 자신들의 정치의 중심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인적 경험 교류의 중요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데, 이는 최초의 말하기 그룹, 또는 Autocoscienza의 첫 번째 정치적 가치, 즉 “여성의 공통적인 동일성”의 확증을 특징짓는 것이었다(42).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한 순간을 형성했던 환상이나 정신적 고찰의 문제, “무의식의 실천”에 대한 고찰을 거부하지 않았다..22) 그러나 점차 출현하는 것은 평등의 정치와 주체에 대한 작업 양자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들은 피해자 동일성의 문제가 요구하는 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차이를 상징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현세적 조건의 변화라고 보았다. ‘하기의 실천’에 “새로운 주제가 도입되었다. 여성 정치라는 주제는 더 이상 의식과 발언 [즉, 언어]에 대한 접근에 중심을 둘 수 없다[…]. 새로운 용어는 창조와 변형―주어진 사회적 현실을 변형하기 위해 여성의 사회적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84). 이러한 창조와 변형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다루는 정치적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서 시작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평등의 원칙과 여성의 공통의 동일성을 둘러싸고 조직된 형태의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거부되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가 “페미니즘이 여성들을 분할하는 차이에 익숙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거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유일하게, 여성들 간의 차이는 그것들을 서로 관련짓고, 평가하거나 판단할 모종의 방법이 없다면 무의미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차이를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이를 인정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문제다. 그 방법을 배우려면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관련짓고 판단할 정치적 능력의 발전이 요구되며, 이는 또 다른 정치적 기술을 필요로 한다. 성적 차이에 대한 페미니즘적 상징화가 그것이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처럼 여성들 간 차이의 상징화를 의식고양 및 초기 페미니즘과 연관된 동일성의 정치에 필요한 중화제로 여겨왔다.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대체로 성적 차이의 상징화를 여성들 간 차이의 소거와 연관짓는 경향이 있는 반면, <밀라노 여성서점>은 성적 차이의 정치적 상징화가 부재하다면 이러한 차이가 소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밀라노의 여성들은 성적차이의 정치를 <밀라노 여성서점>의 공간 자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하기의 실천’으로서 발전시킨다. ‘하기의 실천’의 중심적인 기획으로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들 간의 자유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여러 페미니스트 공간(loughi delle femministe) 중 하나로 여겨졌다(Milan 96)..23) <밀라노 여성서점>은 개점을 알리는 포스터에 다음과 같이 쓴다. “서점은 거리로 열린 공간입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서점은 여성들을 위해, 여성의 손으로 설립했습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여성에게 아무도 당신은 누구며, 무엇을 믿는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여성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다른 이들과 관계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서점은 정치적인 공간이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이 안에서 공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만나기 때문이다. “여성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정치의 출발점이다”(92).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실천[…]이 정교화되었다. 이는 여성들 간 관계의 실천이라고 불렸다”(50). 이 실천은 “정치를 행하는 비범한 방법이다. 이는 많은 여성들에게 사회적 관계의 체계는 ― 우리가 가능하다고 배운 바대로, 추상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면서 구체적으로 ―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 왔다”(51). 유사한 관심사(예를 들어, 문헌, 작가, 장르, 비평 등)를 공유하는 여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인 <밀라노 여성서점>은 처음으로 정치의 최소 조건으로 기능했다. 이는, 아렌트의 설명대로, 공유된 현세적 관심사(interest)로, “이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사이에(inter)-놓여있는(est) 무엇, 즉 사람들 사이에 놓여 그들을 서로 연계시키고 또, 묶어주는 무언가를 구성한다”(Human 182). 아렌트의 행동 중심적인 정치에 관한 견해에서, 이러한 사이 공간은 “절합적 방식으로 사람을 함께 묶으면서 또한 이들을 분리시키는 이중의 역할을 항상 수행한다”(181). 이러한 “물리적이고 현세적인 사이 공간은 관심사에 따른 행위와 언어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들의 직접적인 행동과 말하기에 전적으로 기원을 두는 완전히 다른 사이 공간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서 성장한다. “이 두 번째의 주관적인 사이 공간은 만질 수 없다.” 왜냐하면 행동하고 말하는 과정은 어떤 결말과 결과물을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무형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이 공간은 가시적으로 공유하는 사물들의 세계 못지 않게 실재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인간관계의 ‘그물망’이라고 부른다(182-83). 밀라노 여성들은 이를 “여성들 간 관계의 실천”이라고 부른다. 아렌트의 관찰에 따르면, 주관적인 사이 공간, 정치적 관계 자체는 “인간들의 직접적인 행동과 말하기에 전적으로 기원을 두고 있다(human 183).” 이는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한 점인데, 그 중 하나를 우리는 항상 시야에서 놓칠 위험에 처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또 하나의 간단한 점인데, 즉 대담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담자는 나와 다른 견지에서 보는 사람이다. 대담자는 인류의 복수성(plurality)이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미국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이러한 복수성은 “여성들 간의 차이”로 생각되었다. 복수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분명히 표현하는 것에 우선하여 중요한 인구통계학적 요소로 보이는 사회적 차이(예를 들어,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등)를 인정함으로써 대담자를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도 사회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동일성의 정치에 대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하기의 실천” 뒤에 놓여있는 전반적인 요점이었다. 그러나 “하기의 실천”, 즉 여성들 간 차이를 다룰 방법을 습득하는 것은 실패했다. 왜? <밀라노 여성서점>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다른 “하기의 실천”인, <파르마 여성 도서관>을 참조하여, 이것의 창립 문서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파르마 여성 도서관>의 창립자들은 그들의 기획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모든 여성의 의견을 녹취하는’ 그들의 모험적 시도를 제시할 ‘문서’로 이어지는 논쟁의 일부분을 보고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선택의 근거는 [파르마 여성들의 표현을 빌면] “우리 모두의 관점을 반영할 수 있는 정치적 문서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논쟁 과정에서 한 여성이 이야기 한 것처럼 “집단 내에서의 여성의 다양성과 비동질성은 아무도 말소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존재’할 것이라는 정치적 보장이기 때문이다.”(94) 그러나 이 기획을 구성하는 평등주의적인 방법은 문제에 봉착했다. 이 보장은 실패했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로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출현하다. 이론에 따르면 차이는 여성(female sex)의 존재에 필수적이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94)..24) 판단에 대한 무언의 금기는 특정한 차이가 발언되도록 허용하지만 이를 의미 없는 상태로 내버려둔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사실 <파르마 여성 도서관>의 문서(그리고 동종의 다른 문서들)는 “여성들 간 차이의 가치에 관한 다량의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된다” (99). 이러한 차이를 평가·접합·연결하는 방법인 판단이 부재한 가운데, 이 차이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알맞게 기록되고 심지어 칭송되지만 판단을 거치지 않는 차이는, 차이를 무시하거나 부인했던 Autocoscienza의 실천에서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하기의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에도 의미가 없다. 여기서 그들은 무시되거나 부인되었다. “여성들 간의 차이”가 미국 페미니즘에서처럼 어떻게, 비록 역설적이지만, “진정 중요한 차이”를 숨기는 공허한 슬로건이 되었는지, 그렇게 해서 이것이 “죄책감의 근원”이 되었는지를 인지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하기의 실천이 지니는 한계를 대면한다. 즉, 여성이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갖지 못하며 여성적 욕망은 대담자를 갖지 못한다”(99). 여기서는 처음부터 대담자의 존재에 필수적인 복수성을 구성하는 것이 여성들 간의 사회적 차이가 아니다. 복수성은 인구통계학적, 또는 실존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차이에 대한 정치적 관계이다. 따라서 내가 이러한 차이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는 것, 이를 무언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방식으로 셈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성 대담자의 존재는 모든 여성의 의견을 무차별적으로 기록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은 차이를 고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러한 차이를 압도적인 평등에 붙들어 놓는다. 파르마의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한 것처럼, 모든 여성의 의견을 [판단하지 않고] 녹취하는 것은 “아무도 말소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존재할 것이라는 정치적 보장”을 제공하기는커녕, 이러한 실존이 현실성을 획득할 공간, 즉 페미니즘 정치 자체의 현세적 사이 공간을 파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은 다른 여성을 판단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여성은 다른 여성의 판단을 대면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142)고 선언한다. 초기 페미니즘(예를 들어, Autocoscienza, 하기의 실천) 의 판단 유예는 전혀 해방적이지 않다. 이와 반대로, 인가(approval)의 욕구가 우세하다면,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다른 여성의 판단에 종속시키려 들지 않는다면, 여성의 욕망은 시들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파르마의 페미니스트들은 왜 <여성 서점>이 다른 기획에 비해 더 좋은 하기의 기획이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밀라노 여성 서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초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95). 이러한 기초가 욕망(즉 잘 근거지어진 논변이라기 보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밀라노 여성서점>이 관련되어 있는 한,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판단 내리고 판단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표현되는 욕망은 [욕망이라는] 기초에 손상을 입히는 여분의 감정을 발생시킨다.” 남아있는 것은 자신을 다른 것에 결부시키지 못한 채 여기 저기 존재하는 여성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95). “여성의 욕망을 침묵에서 꺼내고 위험에 처하도록 유도할 수 없다면”, 자신을 판단에 노출시키지 못한다면, 하기의 정치는 다양한 욕망이 원칙적으로 판단에 대한 금기로 평준화된 채로만 표현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했다. 이러한 실패는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무언가를 여기에 걸게 만들었다. 즉, 그들은 평등의 논리와 단절하고 부등의 정치적 가치를 발견했다. 부등을 발견하다 『성적 차이』의 4장은 <밀라노여성서점>의 역사에서 전환점을 묘사하고 있다. 그 장은 “여성문학에서 자유의 첫 번째 형상(figures)”이라는 제목의 절로 시작되며 “『노란 일람』(Catalogo giallo, Yellow Catalogue)―이것은 <밀라노 여성서점>과 <파르마 도서관>이 1982년 출판하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Le madri di tutti noi)이란 제목의 소책자 표지 색깔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소책자는 “부등에 관한, 모든 여성들이 그녀들 사이에서조차 동일하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관한, 그리고 이 사실에 관한 여성들 자신의 사회적 해석에 관한 것이다.”(108) 그 기획 면에서 “『노란 일람』은 이런 류의 다른 책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 책은 특히 소설과 같은 문학적 기록을 특권화하고 독자들 편에 서기 때문이다.”(109) 즉, 그것은 창작물을 생산하는 예술적 천재가 아니라 그 창작물을 판단하는 독자에게 초점을 두었다. 여성문학에 대한 이런 개입이 독특한 문학적 형태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사실 “여성들이 인류 문화에 기여한 사례”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들이 아무런 흥미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그 탐구는 정의될 수 없었던, 이름이 없었던 어떤 것, 즉 “인류 문화가 알지 못했던, 여성되기에서의 차이에 관한 것”(109)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직접 관련되는 것들의 의미를 찾을 필요성”과 “여성 작가들이 여러 방식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만을 가진 채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읽혀야 할 여성 작가들과 소설을 선택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우리는 바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읽기로 결정했다. 좀 더 객관적인 기준 [즉, 심미적 판단의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당시 생각했던 것처럼 결백한 결정이 아니었다. […] 사랑이나 우정 관계를 벗어나 다른 여성을 선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109) 반대로, 그런 선호들은 잠재적으로 금지되었는데, 그것들이 집단의 동일성을 해칠 수 있는 차이들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선호 행위는, 그 잠재적 ‘유해함’ 때문에, 모든 여성적 욕망을 마치 박해받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평형 상태에 가두었던 여성적 정치의 도식을 뒤흔들 운명이었다.” 모든 독자가 같은 선호를 갖는 것도 아니고, 일부는 선호가 없었으며, 또 일부는 매우 강한 선호를 갖기도 했다. “위기를 야기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전혀 고려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110). 위기가 터져 나온 것은 제인 오스틴이라는 인물에 관해 논쟁하던 때였다. 제인 오스틴을 반대하는 한 사람이 그녀가 다시 한 번 소수로 몰린 토론에서 […] 논쟁을 멈추고 관찰자처럼 말했다. “[딸의 자유를 방해하는] 어머니들은 작가들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혀 동등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어머니들은 사실 여기 우리 사이에 있다.” 이 단순한 진실이 처음 말로 표현되었을 때, 그 말은 끔찍하게 들렸다. […] 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수정처럼 분명했다. 누구도 그 말이 진실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다. […] 우리가 눈앞에 대면하고 있었으나 수년 동안 전혀 기록하지 않았던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동등하지 않았고, 동등한 적도 없었다. 우리는 동등했다고 생각할 까닭이 없다는 점을 즉시 발견했다. 첫 순간의 공포는 좀 더 자유로워진다는 어렴풋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110~11) 여성들 사이의 불평등을 발견하자 자유로운 느낌이 생겨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게다가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심미적 판단을 내리는 실천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밀라노 여성서점>은 좀 더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우리의 역사에서 생겨나지도 않았고 우리의 이해에 부합하지도 않는 평등이라는 이상”에서 해방되는 것과 일차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111) 이 평등이라는 이상은 억압받는 집단의 일원이라는 점에 기초한 공통성을 명목으로, 상호반목하지 않는 모든 여성적 욕망(즉 피해의 동일성으로 표현되지 않는)과 차이의 분명한 표현을 뭉개버렸다. 이런 중성적이고 무성적인 이상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던 것을 상상하도록 우리 자신을 괴롭혔고, 존재했던 것의 활용을 스스로에게 금지했다. 마치 우리의 문제가 강력하게 경쟁하는 욕망들 사이에서 있을 법한 경합의 치료제를 찾는 것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욕망이 불확실하고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고, 이는 소위 여성들 사이의 권력 갈등 이면에서 그런 갈등을 고통스럽고 끝없게 만드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111) 존재했던 것은 여성들 사이의 재능, 능력, 사회적 지위의 차이며, 만약 페미니스트들이 이를 다룰 만한 정치적 능력이 있었다면 이는 여성들의 실천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가끔은 그런 실천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존재했던 것은 기호의 차이였고, 그것은 사회적 차이로 환원될 수 없었다. 모든 여성들이 비슷하지 않은 까닭은 그녀들이 서로를 분할하는 각기 다른 사회적 집단의 일원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이것이 최근 미국 페미니즘이 차이라는 사상을 이해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그녀들이 각기 다른 호오(好惡)를 가졌기 때문인데, 이는 그녀들이 어떤 특수한 사회적 집단에 속해있다 하더라도, 비록 약간은 연관이 되기야 하겠지만, 소모되지 않는다. 오스틴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 차이(즉, 성별,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로 환원할 수 없고 하기의 실천(practice of doing)에서는 가려졌던 차이의 형태를 드러냈다. “하기의 실천”은 여성의 보편적 비참함이라는 표상에 어떤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이런 차이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런 차이를 다루는 방법, 평가하고 판단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다. 이런 정치적 기술의 부족 때문에 그들은 의견의 깊은 갈등과 차이를 억누르는 경향이 있었다. <밀라노 여성서점>에 따르면, 그들이 이런 기술을 전혀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그들이 여성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남성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여성이 다른 모든 이들과 같아야 한다고, 더 정확히는 운동하는 다른 모든 여성들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성들 사이에서 다양성, 언쟁, 각기 다른 의식수준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모순이나 “나는 낙태의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여성들과는 상관없다.”는 식의 근본적인 반대는 아니었다. (69) 격렬한 갈등이나 불화의 공간이 없다면, 강렬한 욕망을 위한 공간이나 진정성 있는 정치의 가능성도 없다. 그 당시 ― “그녀 말고는 다른 이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각각의 여성들과 “대담자 없는 여성적 욕망”이 있었던 때 ― <밀라노 여성서점>은 “페미니즘적 관점”, 즉 “더 이상 현실과 관계가 없는 미리 구성된 이데올로기나 진부한 담론”에 따른 판단의 필요성을 제외시켰다(85). 이데올로기는 판단의 규칙을 제공했다. 하지만 삼단 논법의 추론에서 예증된 규칙을 따르는 것은 심미적이거나 정치적인 판단에 아무 소용이 없는데,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특수로서의 특수(particular qua particular)이기 때문이다. 아렌트가 주장한 것처럼, “당신이 ‘아름다운 장미다!’라고 말할 때, 이런 판단에 도달하기 위해 우선 ‘모든 장미는 아름답다, 이 꽃은 장미다, 그러므로 이 장미는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Lectures 13~14) 반대 방향으로도 마찬가지인데, 당신은 이를테면 “이 장미는 아름답다”는 판단에서 다른 장미나 모든 장미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정치적 영역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인데, 여기서 우리는 대상과 사건의 독특성에 직면한다. <밀라노 여성서점>이 문학 작품에 눈을 돌린 다음에야 여성들 사이의 부등이 발견된 것은 우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일 수도 있다. 오스틴과 같은 작가들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선호를 표현하면서, 각자는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거나 불쾌하게 한다.”는 점을 발견하는데, 이는 진리(또는 진리 담론, 이데올로기)에 고정점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동의를 강요할 수 없다는 의미다. “고유한” 페미니즘적 관점의 독백과 더불어 집단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이데올로기적(삼단 논법의) 추론(즉, 모든 여성 작가는 훌륭하다, 이 작가는 여성이다, 따라서 이 여성 작가는 훌륭하다)과는 다르게, 기호의 판단은 하나의 규칙 아래 포섭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드러낸다. (심미적이거나 반성적인) 판단을 실행할 때, 사람들은 여성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차이가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은 타인들을 진정한 대담자의 위치에 놓는다. 나와 유사하거나 유사하지 않은 선호를 가지고, 나의 관점과 동일하지 않은 관점에서 보며, 자신의 의견에 대한 판단을 나에게 청하거나 내가 고이 간직해 온 의견을 판단하고 아마 뒤흔들어 위기의 지점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할 것이다. 하나의 규칙에 의해 판결될 수 없는 의견의 차이를 발견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부등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서로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부등을 발견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어쨌거나 수많은 형태의 사회적 부등이 있고, 그런 부등 중 많은 것이 부당하다. 그들은 “부등의 실천이 필수적인 시험”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부등의 부당한 형태들을 어떤 경우에도 불가피한 다른 형태의 부등과 구별하게 해 줄 것이다.”.25) 부등의 실천은 “차이가 자유로운 사회적 형태 속에서 발언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첫 번째 단계다.(Milan 132) 우리가 아직 이 부등의 실천이 어떤 식일지 모르긴 하지만, 그것이 페미니즘의 민주적 이상에 어떻게 일치할 수 있을지는 궁금해 할 수 있다. 평등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밀라노의 페미니스트들은 많은 서구 3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지지하는 평등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관점을 가졌다. 여기에는 권리에 기초한 법적 사회변화 전략을 대체로 수용했던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포함된다. 평등의 이상과 만연한 차별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명백한 괴리는 차치하더라도, 평등이라는 원리는 남성과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 모두에서, 동일함을 여성의 정치적·사회적 권리의 조건으로 확립하는 것 같다. 역사적인 실천 속에서 정치적 평등이라는 원칙은 모든 사회적·성적 차이를 평준화하고 여성들에게 중립과 보편을 가장한 남성적 기준으로 동화될 것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었다..26) 하지만 평등에 대한 이런 사고방식은 게르하르트(Ute Gerhard)가 우리에게 상기시킨 바,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기”(treating likes alike)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원칙에 기초한다. 게르하르트는 우리가 평등을 동일함이나 동일성(a=a)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관계적인 개념(a=b)로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평등이 고정되거나 정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인 것으로 간주되면, 평등은 차이를 부정(오직 같은 것만 같게 취급될 수 있다.)하기는커녕, 차이들을 구체적인 목표에 따라 특정한 종류의 관계에 도입되어야만 하는 것(다른 것이 같게 취급되어야 한다.)으로 당연시하는 정치적 원칙이 된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어떤 특징이나 특수성을 비교하고 동등하게 다루자는 것을 결정하는가?”(Gerhard 8) 이것이 중요한 질문이 된다. 이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이동은 관점의 변화를 수반하는데,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비교되는 (사회적) 대상(즉, a와 b, 남성들과 여성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마치 그 대상들 혼자서 비교의 기준을 결정하는 것처럼―이 아니라 비교를 하는 주체들과 그 판단의 사회역사적 맥락에 초점을 맞출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즉, 평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설명에서 관점과 맥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요구가 제기되는 구체적인 상황과 함께 그 요구를 하는 사람들과 비교의 기준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을 결정하는 사람들 양자의 사회적인 위치도 고려하는 것이다. 만약 그 기준이 대상 그 자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면, 평등에 대한 모든 요구는 정치적 판단, 즉 특수성(같지 않은 것들)에 관한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적인 평등 실천은 제 3항(third term) 또는 제 3자, 즉 비교점(tertium comparationis)을 필요로 한다. 게르하르트가 말한 것처럼, “그 비교점은 결코 단순히 ‘남성’이나 남성의 지위일 수 없다. 그것은 양성에 공평한 기준이어야만 한다.”.27) 평등의 실천을 3항을 요구하는 것으로 사고하면, 우리는 그렇지 않았을 때 완전히 반(反)평등주의적 부등의 실천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동일함으로 환원되지 않도록 평등을 재형상화하는 가능성을 실제로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의 부등의 실천이 달성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된 3항의 발전을 가능케 한다. 이탈리아 페미니즘의 설명에 따르면, 3항은 오스틴과 같이 “‘원형’이라 칭해진” 여성 작가들과의 관계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런 원형의 목표는 “우리보다 선행하여 우리에게 스스로를 알고 차이화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의 위치를 특징짓는”(Milan 112) 것이었다. 원형을 현실의 어떤 여성도 접근을 시도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진 틀에 박힌 여성적 형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면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우수한 여성의 형상이 틀에 박힌 피해자 형상의 이면으로서, 현실의 어떤 여성도 동일화할 수 없으며, 양자 모두 잃어버린 “여성적 사회 경제(social economy)”의 징후라는 점을 관찰했다. 여성들 사이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를 상징화하는 두 가지 방식 모두 전혀 실재적인 관계가 아니고, 동일한 것(과 비참한 것) 또는 다른 것(과 우수한 것)에 대한 무매개적인 연계일 뿐이다. 이런 도해상의 지위(피해자 또는 우수한 여성)는 둘 다 현실의 여성들 자신에게는 알맞지 않다. 그러므로 이상화의 경향은 페미니즘에게 힘을 북돋아주지 않는 부등의 한 실천이다.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려면 다른 여성들과 차이나는 여성 개인과 여성적 성별(젠더) 모두를 가치화하는 권력, “여성적인 잉여(female plus)”(Milan 127)가 필요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찾던 것과 원형들에서 처음에 발견했던 것은 하나의 규칙(또는 이념형)보다는 특수성들을 연관시키는 사례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다. 역설적이게도 평등의 정치가 탄생시킨 우수한 여성들과 다르게, 원형들은 그 원형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세상에 관하여 권위와 가치를 또 다른 여성에게 돌리는 것은 스스로에게 권위와 가치를 부여하는 수단이었다. […] ‘스타인(Gertrude Stein)을 옹호할 때 나는 스스로를 옹호하는 것이다.’”(112) <밀라노 여성서점>이 주장하듯이, 만약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여성들 자신일 뿐이라면, 그런 형상은 실천의 한 부분으로 머물러, 판단과 논증과 토론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형상은 자유를 부인하는, 초월적인 권위의 원천이 되는 위험에 처한다. 그런 위험이 최소화되는 것은 수없이 많은 원형들(오스틴, 스테인, 모랭(Elsa Morante), 울프(Virginia Woolf), 바흐만(Ingeborg Bachman) 등)에 이를 때다. 하지만 “성별화된 기원의 형상”과 자유가 “상징적 어머니”로 불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얼핏 보기에 잃어버린 여성적 권위의 형상으로서 “상징적 어머니”는 “남성적 기원에서 나온 권위의 여성적 복제물”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떻게 어머니의 형상이 페미니즘적 자유의 실천을 조직할 수 있는가? 이런 형상은 처음부터 페미니즘을 무력화했던 친족 관계를 상징화하는 것 아닌가? 남성적 문화 내부에서 어머니들과 딸들의 관계는 사라졌다(“어머니는 언제나 팔에 아들을 안고 있다.”)는 이리가레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여성과 그녀보다 더 위대한 여성, 즉 그녀의 어머니 사이의 상징적 유대의 형태란 전혀 없다. 둘 사이에는 정서로 다양하게 덧씌워진 오직 자연적인 관계만이 존재할 뿐 상징적인 해석은 없다.”(127)고 주장했다. 따라서 상징적 어머니라는 바로 그 생각은 급진적―남성적 문화 속의 어떤 어머니도 결코 상징적이지 않다.―인 동시에 일반적(ordinary)일 수 있다. 상징적 어머니는 그를 둘러싸고 페미니즘적인 자유의 실천, 즉 새로운 사회 계약을 조직할 성별화된 기원의 형상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식별한 핵심 문제는 “여성이 모종의 여성적 미덕을 가장하지 않고서는 사회에 대한 완전한 통찰력으로 솔직하게 밀고 나갈 도리가 없는 욕망의 무한함을 인정할 때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어려움”(Milan 115)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정치에서 이런 가장은 사회를 개선하는 요구의 형태를 띤다. 이런 요구는 사회 문제라는 더 큰 틀 내에서 공명을 일으키는데, 여기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사회적 효용이나 편의라는 언어로 표현할 것을 요구받는다. 예를 들어 일부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적 차이에 대한 새롭고 보다 자유로운 해석”을 “사회적 선과 조화를 이루는” 것과 구별할 수 없었다. “다르게 되기와 더 좋아지기”를 혼동함으로써 그들은 “이런 잉여가 자격을 얻는 것을 반대했다. 그것은 실정적인 가치를 표현하지 않으며, 따라서 여성적 차이나 여성적 정치에 자격을 부여할 수 없고, 가치를 줄 수 없다.”(124) 유용성의 경제(the economy of use)에 사로잡혀, 그들은 여전히 여성적 성(female sex)과 여성적 자유의 존재이유, 즉 사회 개선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여성의 자유에 “어떤 실정적인 사회적 가치”(125)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적 실천을 상상할 수 없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여성적인 잉여는 감축할 수 없는 차이라는 개념을 표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이 때문에 여성되기는 남성되기에 종속되지도 동화되지도 않는다.”(124) 즉, 그것은 어떤 사회적 가치, 사회적 효용도 표현하지 않으며, 보상을 추구하지 않고 평등이라는 기치 아래 포섭될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욕망을 말할 뿐이다.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 계약은 “여성의 자유를 위한 기초를 놓아야 한다.”고 <밀라노 여성서점>은 선언한다. (32) 이 기초는 페미니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동의해야만 하는 합리적 전제로 구성된 근거가 아니다. 상징적 어머니라는 수사 주위에 조직되는 이 계약은 합리성이나 영구적인 원칙에 호소하지 않고 “일상의 언어와 몸짓을 통한 정치적 실천의 맥락 속에서, 한 여성의 다른 여성과의 관계 속에서, 욕망의 태동 속에서, 일상적 사물에 근접하여”자유를 욕망하는 여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할 것이다.(111) 원시적 아버지 같은 토템과 ― 이 아버지는 사회 계약의 “다른” 이야기에서 살해되어야만 하는데, 그의 살해는 남성들 사이의 정치적 평등 관계의 조건이며 그의 내재적인 회귀는 그들을 괴롭힌다. ― 다르게 상징적 어머니는 “세상에 맞서 여성의 욕망을 지지하고 유효하게 하는 여성들에 의해 한 여성으로 구체적으로 체현된 여성적 차이의 사회적 정당성의 근원을 가리키게” 된다. 이는 이 같은 성별화된 매개의 형상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다른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들 사이의 자유로운 관계라는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실천과 분리되어서는 존재할하지 않을 것이다. 성적 차이 실천하기 상징적 어머니, 즉 여성적 기원의 잉여를 순환시켜 그것이 집합적 부가 되게 하는 실천의 이름은 <아피다멘토> 또는 수탁(entrustment)이다. 여성들 사이의 전형적인 관계들 중에서 성경의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 시인 힐다 두리틀(Hilda Doolittle)과 브라이허(필명이다.)의 그리스에서의 관계(힐다의 『프로이드에 대한 헌사』(Tribute to Freud)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와 비타 색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의 우정과 같은 수탁의 사례(규칙이 아니다.)를 발견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다른 여성에 대한 한 여성의 수탁은 정치적 투쟁의 소재다.”(31) 가장 결정화된 형태 속에서 여성들이 스스로를 그녀에게 수탁하는 여성은 수탁하는 이의 자유에 대한 욕망을 지지하는 여성(또는 여성들)로서 그녀(들)은 “전진해(Go ahead)”라고 말한다..28) <밀라노 여성서점>은 “그것[이 경험]은 H.D에게 그녀가 시적 재능을 지녔다는 느낌을 주었고, 이와 함께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녀 곁에 있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전진해’라고 말해 준 여성 때문이라는 확신을 주었다.”고 언급한다.(33~34) “분명히 우리는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권위는 원래 그것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그것을 줄 수 있는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부여된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전진해’라고 브라이허는 H.D에게 대답하면서 H.D가 그녀에게 의존함으로써 그녀에게 부여한 모성적 권위를 상징적 권위부여의 형태로 그녀에게 되돌려준다.”(126) 초기 페미니즘의 이상화된 형상과는 반대로, 수직적인 수탁이라는 관계는 수평적, 상호적 관계이기도 하다. 여성의 욕망들을 적법화하는 권위는 그것을 수여하는 인정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게다가 “확립된 위계를 진정으로 존중하는 여성은 […] 그녀 자신을 남성 또는 남성적 기획에 수탁한다.”[Milan 133]).29) 수탁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여성적 수탁의 관계가 사회적 관계라고 말하고, 그것을 정치적 기획의 내용으로 만들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어머니[즉, 우리의 욕망을 지지하는 여성들]에 대한 상징적 빚은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가시적·공적·사회적인 방식으로 지불되어야 한다.”(Milan 130) 수탁은 자매애가 아니다. “스스로를 수탁하는 것은 거울 안에서처럼 그녀 안에서 자신의 현실적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여성에게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수탁의 관계 속에서 여성은 다른 여성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과 그녀의 욕망 안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척도를 제공한다.”(149) 수탁은 규칙이나 영구적인 정치적 형태가 아니다. “그 문제에 관한 가능한 다른 답들, 더 좋은 답들이 틀림없이 존재하고, 존재하게 될 것이다.”(121) 수탁은 우연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1966년부터 1988년까지 밀라노에서 여성에게 상징적 거처가 없고 그들 사이의 관계가 결핍되어 있는 것에 대한 가능한 하나의 대응으로서 발전했다. 그것은 우연적으로 필연적인 실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지만, 필연적인 것으로 경험된 욕구에 대한 응답이었기 때문이다. 즉, 권위 있는 대담자의 부재가 그것이다. 만약 “페미니즘이 여성들의 자유에 대한 [일종의] 기초를 제공해야만 한다면,”(32) 하지만 그것이 자유에 대한 합리적이거나 사회적인 정당화(즉, 사회 개선 등)가 아니라면, 수탁이 바로 그런 기초다. 수탁의 실천에서 “여성적 자유는 여성들 자신에 의해서[만] 보장된다.”(142) 그러므로 여성의 행동과 요구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그 권위가 자명하고 자신의 편에서는 어떤 동의나 행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절대적 형상도 아니고 (2세대 페미니즘이 전제하려 했던) 정치적 인식론, 즉 진리 주장으로 정치적 주장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욕망에 권위를 부여받고, 역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매번 권위부여 하는 여성들, “전진해”라고 말하는 여성들이다. 이 문구는, 그 완전한 단순성 그리고 복합적이고 일상적인 표현 속에서, 페미니즘적인 의지의 자유가 처한 궁지의 탈출구를 겸손하게나마 상징화한다. 그것은 “나는 할 것이다.”라는 공허한 자유가 “나는 할 수 있다.”는 현세적 자유로 변형되는 것을 상징한다. “전진해”라고 말하거나 이 말을 듣는 것, 그리고 이 문장에 부합하게 공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피해자 동일성, 즉 피해자화의 정치에서 벗어나면서도 여성들이라 불리는 집단의 소속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동질적 집단”의 심상 안에서 대표될 수 없었던 여성은 그런 부인에 쉽게 이끌려 주권의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녀에게 동료 여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135) 여성은 종국에 “남성적 권력이라는 경직된 상징의 영역에 갇혀 다른 여성들이 필요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놓고 다른 여성들과 협상할 수 없게”(137) 된다. 지금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 인정한다는 것 안다는 것의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카벨(Stanley Cavell)을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빚지고 있음을 안다고 해서 내가 빚지고 있다는 것을 저절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여성들 사이의 관계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는 [카벨을 인용하며] 말할 수 있다. 인정은 앎을 넘어선다. (넘어선다는 것은 말하자면 앎의 질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앎에 기초해서 무언가를 하거나 드러내야 한다는 요구 안에 있다.)” (Cavell, 257) 다른 여성들에 대한 빚을 가시적이고 공적인 방법으로 갚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 머리 속에 그 부채에 대한 무언(無言)의 앎을 담고 다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고만으로는 현실이라는 직물을 바꿀 수 없고, 행동만이 그럴 수 있다. 따라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대담하게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여성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꾸밈없는 감사는 여성적 자유가 실천적으로 기반을 둔 곳이다.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다른 모든 것은 그것의 결과가 아니면 자유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자신에게 무언가를 준 다른 여성에게 감사하는 한 여성은 그런 감사를 잃어버린 집단이나 페미니즘 운동 전체 보다 여성적 성의 해방에 더 가치가 있다.”(130) 감사는 위계의 표현이 아니라 상호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여성적 자유의 비주권적인 조건에 대한 상호 인정이다. 성적 차이가 여성들의 계보에 소속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요구로 읽힐 때, 성적 차이는 그것이 주어진 방식을 전혀 속죄하지 않으면서 주어진 것과 스스로를 화해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것은 스스로에게서 “여성되기의 ‘인과적’ 소여(datum)”를 제거하여 퇴행적으로 의지하려는 소망을 따라다니는 원한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다. “남성들이 발명해 낸 사회적인 상징 질서 속에서,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조건 짓는 사건이다. 그녀의 인생에 개인적 운명이란 없다. 그녀가 자유와 필연(necessity)을 일치하게 만들 방법은 없다. 그녀에게 필연이란 자신의 해부체(an anatomy)의 사회적 사용(모성, 처녀성, 성매매 …)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녀의 자유는 이 모든 것에 대한 회피를 의미한다.”(Milan, 128) 성적 차이는 “우리가 사회생활에 소속되는 것이 사회생활의 여성적 구성부분에 우리가 소속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적 전제”가 아니다. 성적 차이는 “부자유의 원인으로부터 나온 이 사실적 전제를 우리 자유의 원칙으로 변형시키는 정치적 실천”(122)이다. “즉, 여성이 자유로운 것은 그것이 선택의 대상이 아님은 잘 알고 있으면서 자신이 여성적 성에 속한다는 것을 뜻하는 선택을 할 때다. (138) 그러므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이해하는 식의 성적 차이의 정치는 필요성에 속박되고 자기-주권의 환상에 사로잡히고 원한으로 가득 찬 상태에 머무르는 “나는 할 것이다.”를 조건 지어지고 선택된 공동체, 즉 “다른 여성에 대한 감사와 교환이라는 원칙에 입각한 […] 사회 계약”(142)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는 “나는 할 수 있다.”로 변형시킬 것이다. 이 새로운 사회 계약은 합리적으로 동의된 원칙들의 접합이 아니라 약속(빚을 인정할 것)과 형상(원형과 상징적 어머니)에 기초한다. 이 계약은 서명자와 그들의 후손을 영원히 속박하고, 계약의 정당성을 사회 계약 이론가들이 재치 있게 “암묵적 동의”라 부른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감축시키는 계약과는 다르다. 성적 차이는 그녀보다 먼저 와서 “전진해”라고 말하는 여성들을 가시적이고 공적인 방식으로 인정하는 일상적 실천과 떨어져서는 아무런 실존도 보증도 갖지 못한다. 자신이 아는 것을 인정하는 것(즉, 비주권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성취한 것과 페미니즘 자체의 조건이라는 것)은 “여성들 사이의 차이”라는 날 것의 사실을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무언가, 즉 “권위 있는 대담자”로 변형시킨다. 그것은 “여성들 사이의 불운한 거울놀이”에 입각한 평등의 통념을 더 위험하지만 더 실체 있는 무언가, 즉 상호성으로 변형시킨다. 페미니스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자신이 인정하는 것으로 변형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밀라노 여성서점>은 당당하게 단언했다. “권위 있는 대담자를 갖는 것이 인정된 권리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이 일단 권위 있는 매개자를 창조하고 나면 페미니즘은 더 이상 권리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인가? 권리를 재형상화하기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성적 차이』를 무시했던 것은, 아마 동일성(또는 동일성의 실패)의 렌즈를 통해 읽었을 때 그 글은 본질적인 성별화된(sexed) 차이에 관한 주장으로 쉽게 오독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는 그런 비판이 왜 과녁에서 빗나간 것인지를 더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이 제기한 단호한 정치적 정식화에서, 성적 차이는 동일성의 생산이나 파괴가 아니라 수탁과 인정에 중점을 둔 자유의 실천이다. 세계 건설(world-building)과 새로운 사회 계약으로서 페미니즘에 초점을 맞추면서 성적 차이의 정치적 실천이 추구하는 것은 현세적인 실재의 직물에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성적 차이가 정치적 공간의 창조, 즉 멀고 가까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고, 새롭게 생각될 수 있는 형상(즉, “상징적 어머니”) 주위에서 조직되며, 재조직화와 판단에 종속된 현세적인 중간에 낀 공간(worldly in-between)의 창조로 이해될 때, 성적 차이는 여성들로서 모든 여성(all women qua women)(그 계급에 대한 소속을 어떤 식으로 정의하든 간에)에 전면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여성의 계보에 대한 정치적 주장과 판단을 제시하는 개인들에게 적용될 뿐이다. 그런 정치적 요구는 빚에 대한 인정, 즉 공적이고 가시적인 방법으로 여성적 자유의 비주권적 조건을 의미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성적 차이』를 본질주의적인 문헌―또는 최소한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 해도, 그 글의 가치를 폄하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는 다른 쟁점이 있다. 바로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역사적인 투쟁을 통째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권리에 기반을 둔 우리의 틀 내에서 『성적 차이』는 ― 본질주의의 공포는 차치하더라도 ― 바람직하지 못한(non grata) 페미니즘 저작으로 받아들여질 운명이었다. 자유의 정치(성적 차이) 대 평등의 정치(성적 비차이/무관심)는 쉽사리 평등한 권리냐 아니면 여성적 자유냐 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읽힐 수 있다. 전자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밀라노 여성서점>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써 양자 [모두가 실현될] 가능성을 제거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다른 방식이 있다. 즉, 권리 요구의 조건으로서 자유의 실천, 그리고 자유의 실천으로서 권리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이다. “성적 차이의 정치는 성들 간의 평등이 달성된 후에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때때로 모순적인 평등의 정치를 대체하려는 것은 여성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기초하여 성취된 여성적 자유의 장소로부터 모든 종류의 성차별적 억압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다.”(Milan 145. 두 번째 강조는 필자가.) 이 문장을 평등의 정치는 페미니즘에게 막다른 골목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 문장을 다음처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적 차이의 정치가 성들 간의 평등이 달성된 후에 온다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평등의 정치가 성적 차이의 정치로 대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후자가 없다면 전자는 현실의 실천에서 본질적으로 묘연한 상태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주체의 문제라는 렌즈를 통해 읽는다면, 이 대안적인 해석은 성적 차이를 법에 기입할 필요성에 관한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에게 가장 중요한 페미니즘 사상가임에 틀림없는 이리가레가 바로 그것을 주장했다..30) 하지만 이리가레나 <밀라노 여성서점> 모두 다른 특성의 권리들, 즉 권리들은 자유의 실천과 연결고리를 상실할 때 죽은 법적의 인공물이나 심지어 위험한 정치적 도구로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31) 과연 미국 사회의 페미니즘이 대체적으로 그런 것처럼, 대부분의 동시대 페미니즘의 뿌리 깊은 사법적 제도적 점향은 어떻게 우리가 급진적인 권리 요구가 한 때 약호화한 정치적 자유라는 사상과의 접촉을 상실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만약 이리가레의 주장처럼 여성들이 성별화된 시민적 권리(civil rights)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평등한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참여(단순한 정치적 사법적 대의가 아니라)와 시민들 서로에 대한 수탁(“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지도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Democracy, 174]), 양자에 대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권리들이 제도화될 때, 우리는 그 권리들의 기원이 자유, 비(非)지배, 공적업무에서의 평등한 참여에 대한 급진적이고 비(非)근거적인(ungrounded) 요구에 있다는 점을 잊곤 한다. 우리는 애초에 그 권리들을 창조했던, 종종 덜 안정적인 실천에 투자를 지속하기보다는 그 권리들을 그 자체로 보장하는 데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시민적 권리로 회귀하자는 요구는 그런 기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리가레는, 페미니즘과 같은 정치적 투쟁은 “권리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면서 법적인 판단도 국가 대표의 판단도 기다리지 않았다.”(Democracy, 175)고 쓴다. 자유는 권리에 대한 요구에서 발원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말과 행동을 교환하는 데 있다. 자유는 그런 요구의 성공적인 제도화에 뒤따라오는 정치적 대의에는, 그 자체로는 있지 않다. 이리가레와 <밀라노 여성서점>은 모두 권리들이 보증하는 정치적 대의와 정치적 자유 사이에는 제거할 수 없는 긴장이 있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은 “다양하고 풍부한” 성별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심원하게 다양한 정치 운동으로, 이는”여성 일반”이라는 통념으로는 결코 대의될 수 없다. (Milan, 74) 이는 권리에 반대하는 논변이 아니듯 대의에 반대하는 논변도 아니며, 다만 페미니스트들이 자유의 경험을 권리의 제도화나 대의와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는 점을 날카롭게 상기시키려 할 뿐이다. 이탈리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에게 있어 진정한 정치적 자유 없이 대의와 제도화된 권리를 갖는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자유가 부재하다면, 평등한 권리를 위해서는 동화 또는 이리가레가 “동일자의 법(law of the same)”이라 부른 것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하지만 아렌트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듯이, 평등은 정치적인 따라서 인간적으로 구성된 원칙으로, 이는 인간 복수성의 경험, 즉 동무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다른 관점을 듣고 판단하는 경험을 지탱해야 한다. 아렌트와 <밀라노 여성서점> 모두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유와 그것을 지지하는 주체적인 중간에 낀 공간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평등한 대의나 평등한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동일성을 요구하는 것 같은 양자의 통념을 거부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는 점차 추상적인 원칙이나 규칙으로 굳어져 자유의 실천들 안에 있는 그 기원으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실천들 안에 있는 자신들의 기원과의 관계로 되돌려질 때, 권리들은 이미 우리인 것을 승인하는 것 이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권리들은 더 이상의 무언가가 되려는 우리의 욕망을 승인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된 권리들은 “전진해”라고 말하는 자유의 정치적 도구다. “권위 있는 여성적 대담자를 갖는 것이 인정된 권리보다 중요한” 것은 권리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장하고, 사용하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요구와 새로운 자유로 나아갈 수 있는 한에서만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권리들이 중요한 것은 마치 권위 있는 여성적 대담자들처럼 오직 그것들이 우리가 전진하도록 영감을 주는 한에서다. 사실 게르하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권리들은 “수입되거나 명령받을 수 없다. 그것들은 연관된 사람들이 권리로서 그것을 주장하거나 옹호하는 위치에 있을 때에만 적용된다.”.32) (176) <밀라노 여성서점>이 보여준 것처럼, 그런 위치의 창조는 자유의 실천, 현세적인 중간에 낀 공간, 권위 있는 대담자를 전제한다. “만약 어떤 이가 자유의 기획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분명히 표현하고 자신의 여성으로서 존재[우연한 사실]를 이해하고자[즉,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권위 있는 대담자는 필수적이고,” 그것은 “어떤 권리나 법도 줄 수 없는” 것이다.(Milan, 31) 즉, 국가에게 청원하는 권리 요구는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정치적 요구를 결코 대체할 수 없다..33) 그것의 기원적 고향이자 열망인 자유의 실천을 통해 읽힐 때, 권리에 대한 요구는 현재 자신인 것(what one is)을 인정(recognition)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신은 누구인가(who one is),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은 누가 될 수 있는가(who one might become)에 대한 인정(acknowledgement)의 요구다. 그렇게 이해되면 평등권은 특정한 동일성 범주로 분류된 모든 주체들에게 규칙처럼 적용될 수 있는 법적 인공물이 아니다. 권리는 위로부터 분배되는 것이 아니고,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더 이상의 무엇(something more)에 대한 요구다..34) 권리는 사물이 아니라 관계다. 따라서 권리는 우리가 가지는 무엇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것이다. 권리는 우리와 타인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제한할 뿐만 아니라 힘을 북돋는다. 이런 방식으로 권리를 사고하는 것은 자유의 실천보다 평등에 대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운 평등한 권리에 대한 여성들의 역사적 요구의 가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아마도 페미니스트들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 자유에 대한 급진적인 요구에 있는 권리의 기원을 회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런 요구는 여성 해방 투쟁으로 환원할 수 없는데, 이는 사회적인 용어법 속에서, 권리가 약호화한 무언가로 전형적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여성들과 같이 권리를 빼앗긴 집단에게 권리를 확장하는 것은 전혀 불가피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자유의 실천으로서 권리에 대한 요구가 반드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솟아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는 권리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밀라노 여성서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성적 자유가 독자적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 이것이 없다면 이는 자유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것이다. ― [여성의] 해방을 외부에서 도왔던 역사적 환경이 말하자면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그것들이 단위생식에 의해 스스로 재생산하고 자신의 실행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생산하는 자유로 해석되거나 대체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미 쓴 것처럼, 만약 우유의 저온 살균이 “여성참정권 옹호자들”의 투쟁보다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는 데 더 기여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않도록 행동해야만 한다. 영아 사망률을 감소시키고 피임을 발명했던 의학에서도 마찬가지고, 남성이 더 이상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지 못하게 한 사회생활의 진보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온 살균된 우유에 도달한 이런 자유는 어디서 왔는가? 나에게 우월한 문명의 표기로 제공된 그 꽃은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가? 만약 누군가 내 손에 쥐어준 이 병과 이 꽃에 나의 자유가 있다면 나는 누구인가? (144, 강조는 필자) 자유는 증여된 것도, 상속받은 것도 아니며, 오직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서만 요구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유를 보증하고, 근거 짓고, 정당화할 것인가? “여성적 자유는 여성들 스스로에 의해 보장된다.”(142).35) 권리와 대의의 정치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밀라노 여성서점>의 지독한 회의주의처럼 보이는 것 덕분에, 우리는 같은 것을 같게 취급하고 자유 실천의 일부가 아닌 평등 원칙의 한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여성들이 권리를 위한 투쟁과 실행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우리의 눈―정치적 문제에 대한 사법적이고 국가 중심적인 대답 때문에 점차 맹목적이 되어가는―을 열기 위해 아마 <밀라노 여성서점> 페미니스트들은 그렇게 비타협적인 용어로 그들의 주장을 진술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권리가 그런 실천의 일부일 수 있는지 여부는 권리가 쟁점이 되는 사례의 특수성의 맥락과 관계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권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맹목적인 수용이나 거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정치적 판단이다. 이것은 성적 차이의 정치적 실천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판단에 대한 요청으로 인해 <밀라노 여성서점>의 문헌은 차이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지 않고서도 평등에 대한 요구와 권리를 재형상화하려는 3세대 페미니스트들에게 충분히 재생시킬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참고문헌 Arendt, Hannah. The Human Con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9. --------------------. Lectures on Kant’s Political Philosophy. Ed. Ronald Bein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2. --------------------. “What is Freedom?” Between Past and Future: Eight Exercises in Political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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