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2005-06-07

    WTO 협상은 중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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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을 지속하자! 세계무역기구(WTO)의 간략한 배경 마라케시 협정과 WTO의 출범은 전 세계적으로 무역 및 여타 분야의 자유화가 이루어지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WTO는 경제를 성장시키고 발전을 추동하며, 고용을 촉진하여 결국 세계의 부를 증대시킬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WTO의 주된 목표는 개혁과 무역정책의 자유화, 즉 수출 지향적 모델, 지역 시장의 개방, 무역 왜곡 감축 등이었다. WTO는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이러한 노선을 따르도록 했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산물인 WTO는 농업협정, 지적재산권협정, 위생 및 검역에 관한 협정, 서비스협정 등 여러 협정들을 출범시켰다. 이 모든 협정들은 소농, 무토지 농민, 농업노동자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WTO는 선진국,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의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 더욱 의존하게 됨에 따라 이들 나라에 의해 주도되었다. WTO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농업이 협상의 중요한 의제임을 알 수 있다. 농업협정 20조는 농업개혁을 지속하는 것에 관한 협상을 시작하는 기초가 된다. 사실 농업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개도국들은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는데 동의하는 것이 결국 대규모의 농업기업이 수출-지향적 생산시스템을 강화하고, 다량의 잉여농산물을 덤핑하도록 허용하여 결국 소농-기반의 농업이 붕괴하도록 허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 번째는 WTO로 대표되는 다자 시스템 하에서 무역 자유화를 강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방적, 혹은 쌍무협정이었다. 신자유주의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아세안자유무역협정,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과 같은 자유무역협정 또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미-태국 FTA와 같은 양자 협정을 장려한다. 시에틀에서 칸쿤까지 2003년 9월 칸쿤에서 열린 WTO 5차 각료회의의 붕괴는 유럽연합과 미국에 의해 형성된 교착상태를 부각시켰다. 두 강대국은 자신들의 수출지향적 농업에 대한 보조금을 축소할 의사가 없었다. 유럽연합과 미국, 그리고 일본과 호주의 입장은 브라질과 인도가 이끈 G-20 그룹과 인도네시아가 이끈 G-33그룹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 그룹들은 비록 소농과 민중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농업에 관한 대안적인 제안을 제출했다. G-20의 제안은 그들 나라의 농업기업의 이해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G-33의 제안은 불행하게도 G20의 제안에 비해 영향력이 적었다. 1999년 시애틀에서 WTO 3차 각료회의가 무산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칸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각료회의의 무산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자신들의 막대한 보조금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금감축] 공식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무역의 미명하에 발전을 희생하도록 한 다자 무역 시스템에서 개도국들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도하 각료회의에서는 WTO를 위기에서 구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도하 각료회의를 통해 “도하개발의제(DDA)”가 출범했다. 도하 각료회의 선언문은 “국제 무역은 경제발전의 촉진과 빈곤감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도하선언문, 2001)”고 밝히고 있다. 농업분야에서 도하개발의제(DDA)는 시장접근의 실질적 개선, 모든 수출보조금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감축, 무역 왜곡적 국내 보조금의 지속적인 감축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골자로 하고 있다. WTO는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WTO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자유화는 여러 가지 악영향을 불러오고 있다. 식량 혹은 여타 농업분야에서 드러나는 최악의 효과는 세계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데, 값싼 수입농산물의 덤핑이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은 개도국으로 하여금 농산물 시장을 전적으로 개방하도록 한다. 이에 반해 미국의 농업법과 유럽연합의 공동농업정책은 초국적 기업의 이해를 방어한다. 이들은 농업 생산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여, 이들이 제3세계의 시장에 농산물을 덤핑할 수 있도록 한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수출보조금을 직접지불(WTO가 허용하는 보조금의 형태)로 대체함으로써 낮은 수출가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그 결과는 분명하다. 식량산업과 슈퍼마켓에 낮은 가격으로 농산물을 공급하게 되면, 유럽에서는 농민의 수가 대폭 감소하게 될 것이고, 농업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은 열악해질 것이며, 제3세계 나라들에 낮은 가격의 잉여농산물을 수출함으로써 농업을 기반으로 한 이 나라들의 지역경제는 황폐화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총 농업보조금은 WTO가 출범한 1995년에 1820억 달러였던 것에서 1997년 2800억 달러, 1998년 362억 달러로 점차 증대하고 있다. 초국적 기업은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수출보조금을 지급 받으며, 생산비용 이하의 가격으로 농산물을 판매하도록 하며 식량주권을 위협하고 있다. 농민들은 농촌에서 떠나 도시나 해외로 이주하도록 강제 당하고 있다. 다음의 사례를 통해 이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필리핀에서 농업생산성의 감소와 농산물 수입자유화로 인해 농민들의 생존권은 파괴되고 농민들의 수입은 더욱 감소하고 있다. 1994년 이후, 농업분야에서 189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은 것은 대부분 쌀, 생선, 야채, 가축 등의 생산물을 지역 시장에 내다 파는 소규모 독립생산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미국, 캐나다, 멕시코 3개국이 북미자유무역협정에 서명한 후, 멕시코의 농민들은 옥수수 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값싼 수입옥수수 때문이었다. 수백만의 농가는 농촌을 떠나 이민 대열에 합류했다. 남한에서도 마찬가지로 WTO에 서명한 이후 쌀값이 75%로 폭락했고, 10년 동안 농가 수는 6백만에서 3백만으로 줄어들었으며 이촌향도 현상이 두드러졌다. [농가부채로 인한] 농민들의 자살도 빈번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유화의 결과가 매우 극적으로 드러난다. 수입농산물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하룻밤사이에 수입쌀이 세 배가 되기도 했다. 현재는 연간 수입량이 350만 톤으로 안정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국내소비의 6% 정도이다. 설탕 수입 역시 국내 소비의 20%에서 50%로 급등했다. 콩 수입 역시 최소한 국내 소비의 50%에 달한다. 이러한 곡물에 대한 미국정부의 보조금은 최근 급등하고 있다. 2002년 미국의 쌀은 두 말에 18.26 달러에 생산되어 11.8 달러에 수출된다. 콩 생산비는 두 발에 7.34 달러인데, 5.48달러에 수출된다. 이상의 여러 사례를 통해 비아 캄페시나의 소농, 무토지 농민, 원주민, 농업노동자들은 WTO가 농민 생존권을 파괴하고 심지어는 농민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WTO는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그렇기 때문에 WTO 협상은 중단되어야 한다. 비아캄페시나 4차 회의에서 우리는 WTO의 농업정책이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농민들의 실종과 억압, 죽음을 강화하고 있으며, 빈곤을 증가시키며, 사회운동을 억압하고, 기초적인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하고, 저임금 노동력 층을 형성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모든 정책은 유럽연합, 남한, 일본, 캐나다,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나라에서도 농민 가족의 실종을 유발하고 있다. WTO 홍콩 각료회의를 향하여 2004년 7월에 열린 일반이사회에서, WTO는 협상틀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7월 협상들은 도하개발의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협상들은 수출지향적 농업모델을 그 근간으로 유지하고 있다. 7월 일반이사회의 결과는 WTO 협상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 당시까지 농업협상은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농업이 여전히 도하개발의제 협상 전반에 있어 중요한 의제임이 분명했다. 이것이 농민운동에 의미하는 바는 6차 WTO 각료회의가 우리의 투쟁, 그리고 "WTO는 농업과 식량에서 떠나라"는 우리의 요구를 지속하기 위해 겨냥해야 할 목표물이라는 점이다. 모든 소농, 무토지농민들, 원주민 공동체가 손을 맞잡고 각국 정부가 2005년 12월에 열릴 홍콩 각료회의 전까지 WTO 내에서 더 이상의 협상을 진행하지 않도록 투쟁해야 한다. 또한 농민들의 삶에 마찬가지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양자간 협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농업정책이 추진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투쟁을 지속하자! [%=박스1%]

  • 2005-06-07

    WTO 협상은 중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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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을 지속하자! 세계무역기구(WTO)의 간략한 배경 마라케시 협정과 WTO의 출범은 전 세계적으로 무역 및 여타 분야의 자유화가 이루어지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WTO는 경제를 성장시키고 발전을 추동하며, 고용을 촉진하여 결국 세계의 부를 증대시킬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WTO의 주된 목표는 개혁과 무역정책의 자유화, 즉 수출 지향적 모델, 지역 시장의 개방, 무역 왜곡 감축 등이었다. WTO는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이러한 노선을 따르도록 했다. 우루과이 라운드의 산물인 WTO는 농업협정, 지적재산권협정, 위생 및 검역에 관한 협정, 서비스협정 등 여러 협정들을 출범시켰다. 이 모든 협정들은 소농, 무토지 농민, 농업노동자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WTO는 선진국,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의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 더욱 의존하게 됨에 따라 이들 나라에 의해 주도되었다. WTO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농업이 협상의 중요한 의제임을 알 수 있다. 농업협정 20조는 농업개혁을 지속하는 것에 관한 협상을 시작하는 기초가 된다. 사실 농업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개도국들은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는데 동의하는 것이 결국 대규모의 농업기업이 수출-지향적 생산시스템을 강화하고, 다량의 잉여농산물을 덤핑하도록 허용하여 결국 소농-기반의 농업이 붕괴하도록 허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 번째는 WTO로 대표되는 다자 시스템 하에서 무역 자유화를 강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방적, 혹은 쌍무협정이었다. 신자유주의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아세안자유무역협정,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과 같은 자유무역협정 또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미-태국 FTA와 같은 양자 협정을 장려한다. 시에틀에서 칸쿤까지 2003년 9월 칸쿤에서 열린 WTO 5차 각료회의의 붕괴는 유럽연합과 미국에 의해 형성된 교착상태를 부각시켰다. 두 강대국은 자신들의 수출지향적 농업에 대한 보조금을 축소할 의사가 없었다. 유럽연합과 미국, 그리고 일본과 호주의 입장은 브라질과 인도가 이끈 G-20 그룹과 인도네시아가 이끈 G-33그룹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 그룹들은 비록 소농과 민중들의 요구를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농업에 관한 대안적인 제안을 제출했다. G-20의 제안은 그들 나라의 농업기업의 이해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G-33의 제안은 불행하게도 G20의 제안에 비해 영향력이 적었다. 1999년 시애틀에서 WTO 3차 각료회의가 무산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칸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각료회의의 무산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자신들의 막대한 보조금을 유지하기 위한 [보조금감축] 공식에 합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무역의 미명하에 발전을 희생하도록 한 다자 무역 시스템에서 개도국들을 소외시켰기 때문이다. 도하 각료회의에서는 WTO를 위기에서 구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도하 각료회의를 통해 “도하개발의제(DDA)”가 출범했다. 도하 각료회의 선언문은 “국제 무역은 경제발전의 촉진과 빈곤감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도하선언문, 2001)”고 밝히고 있다. 농업분야에서 도하개발의제(DDA)는 시장접근의 실질적 개선, 모든 수출보조금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감축, 무역 왜곡적 국내 보조금의 지속적인 감축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골자로 하고 있다. WTO는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WTO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자유화는 여러 가지 악영향을 불러오고 있다. 식량 혹은 여타 농업분야에서 드러나는 최악의 효과는 세계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데, 값싼 수입농산물의 덤핑이 농민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은 개도국으로 하여금 농산물 시장을 전적으로 개방하도록 한다. 이에 반해 미국의 농업법과 유럽연합의 공동농업정책은 초국적 기업의 이해를 방어한다. 이들은 농업 생산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여, 이들이 제3세계의 시장에 농산물을 덤핑할 수 있도록 한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수출보조금을 직접지불(WTO가 허용하는 보조금의 형태)로 대체함으로써 낮은 수출가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그 결과는 분명하다. 식량산업과 슈퍼마켓에 낮은 가격으로 농산물을 공급하게 되면, 유럽에서는 농민의 수가 대폭 감소하게 될 것이고, 농업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은 열악해질 것이며, 제3세계 나라들에 낮은 가격의 잉여농산물을 수출함으로써 농업을 기반으로 한 이 나라들의 지역경제는 황폐화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총 농업보조금은 WTO가 출범한 1995년에 1820억 달러였던 것에서 1997년 2800억 달러, 1998년 362억 달러로 점차 증대하고 있다. 초국적 기업은 시장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수출보조금을 지급 받으며, 생산비용 이하의 가격으로 농산물을 판매하도록 하며 식량주권을 위협하고 있다. 농민들은 농촌에서 떠나 도시나 해외로 이주하도록 강제 당하고 있다. 다음의 사례를 통해 이를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필리핀에서 농업생산성의 감소와 농산물 수입자유화로 인해 농민들의 생존권은 파괴되고 농민들의 수입은 더욱 감소하고 있다. 1994년 이후, 농업분야에서 189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은 것은 대부분 쌀, 생선, 야채, 가축 등의 생산물을 지역 시장에 내다 파는 소규모 독립생산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미국, 캐나다, 멕시코 3개국이 북미자유무역협정에 서명한 후, 멕시코의 농민들은 옥수수 가격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값싼 수입옥수수 때문이었다. 수백만의 농가는 농촌을 떠나 이민 대열에 합류했다. 남한에서도 마찬가지로 WTO에 서명한 이후 쌀값이 75%로 폭락했고, 10년 동안 농가 수는 6백만에서 3백만으로 줄어들었으며 이촌향도 현상이 두드러졌다. [농가부채로 인한] 농민들의 자살도 빈번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자유화의 결과가 매우 극적으로 드러난다. 수입농산물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하룻밤사이에 수입쌀이 세 배가 되기도 했다. 현재는 연간 수입량이 350만 톤으로 안정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국내소비의 6% 정도이다. 설탕 수입 역시 국내 소비의 20%에서 50%로 급등했다. 콩 수입 역시 최소한 국내 소비의 50%에 달한다. 이러한 곡물에 대한 미국정부의 보조금은 최근 급등하고 있다. 2002년 미국의 쌀은 두 말에 18.26 달러에 생산되어 11.8 달러에 수출된다. 콩 생산비는 두 발에 7.34 달러인데, 5.48달러에 수출된다. 이상의 여러 사례를 통해 비아 캄페시나의 소농, 무토지 농민, 원주민, 농업노동자들은 WTO가 농민 생존권을 파괴하고 심지어는 농민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WTO는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그렇기 때문에 WTO 협상은 중단되어야 한다. 비아캄페시나 4차 회의에서 우리는 WTO의 농업정책이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농민들의 실종과 억압, 죽음을 강화하고 있으며, 빈곤을 증가시키며, 사회운동을 억압하고, 기초적인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하고, 저임금 노동력 층을 형성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모든 정책은 유럽연합, 남한, 일본, 캐나다, 미국과 같은 산업화된 나라에서도 농민 가족의 실종을 유발하고 있다. WTO 홍콩 각료회의를 향하여 2004년 7월에 열린 일반이사회에서, WTO는 협상틀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7월 협상들은 도하개발의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협상들은 수출지향적 농업모델을 그 근간으로 유지하고 있다. 7월 일반이사회의 결과는 WTO 협상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 당시까지 농업협상은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농업이 여전히 도하개발의제 협상 전반에 있어 중요한 의제임이 분명했다. 이것이 농민운동에 의미하는 바는 6차 WTO 각료회의가 우리의 투쟁, 그리고 "WTO는 농업과 식량에서 떠나라"는 우리의 요구를 지속하기 위해 겨냥해야 할 목표물이라는 점이다. 모든 소농, 무토지농민들, 원주민 공동체가 손을 맞잡고 각국 정부가 2005년 12월에 열릴 홍콩 각료회의 전까지 WTO 내에서 더 이상의 협상을 진행하지 않도록 투쟁해야 한다. 또한 농민들의 삶에 마찬가지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양자간 협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농업정책이 추진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투쟁을 지속하자! [%=박스1%]

  • 2005-06-07

    자본주의적 농업의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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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농민 자본주의적 농업의 성숙1) 리처드 르원틴2) (번역: 류미경 (정책편집부장)) 우리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산업 생산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개별 장인 생산자를 포섭했는지에 관한 고전적인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방식이 다른 형태의 생산·교환 조직에 침투하여 결국 이를 변형시켰다는 점을 알고 있다. 종종 이러한 변화의 힘은 매우 강력하여, 적어도 유럽과 북미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일찍 시작되어 19세기 말에 끝났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와 같은 현상의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복원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의료나 연예 등의 전문 분야와 같이 현재까지도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는 개별 장인들을 보면, 이행이 최근까지도 완료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들은 예외적인 것으로, 초기 자본주의적 관계의 화석인 셈이다. 왜냐하면 이 분야는 특별한 재능과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숙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주변적인 분야, 즉 핵심적인 필수품 생산을 제외한 분야에서는 예외가 된다는 관점은 완전히 틀렸다. 왜냐하면 기초적인 생필품을 생산하는 거대한 영역, 즉 농업분야에서 이행이 한창 진행 중이라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농업에 자본이 침투하는 과정은 18-19세기의 직물로 대표되는 고전적인 산업 생산에서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다른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표면상으로는 농업이 자본에 저항해온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개별 농기업의 수는 1930년대 670만 개에서 72%나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농업생산자의 수는 180만 명에 이른다. 이는 고작 6%의 농가가 농산물의 전체 가치의 60%를 책임지고 있지만, 모든 산출된 가치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10만여 개별 기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제조업 분야에서는, 4대 기업이 생산의 40%를 책임지고 있으며, 섬유와 같은 차별화된 분야에서는 4대 기업이 15% 이상의 가치를 생산한다. 또한 토지를 직접 소유하고 있는 농장주가 임대하는 농지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소규모 생산자는 소유주이면서 동시에 소작인이기도 한데, 이들이 경작하고 있는 농지는 [전체 농지의] 55% 정도를 차지한다. 결국 기업농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인식이지만, 20세기 초반부터 부재지주인 경영자에 의해 경작되는 농지의 비중은 1%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므로 농업의 자본주의적 이행에 대한 증거를 고전적인 산업모델에서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꽉 짜여진 계획에 따라 철저한 감시감독을 받으며 업무를 수행하는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매우 소수의 농장주에 의해 생산력이 점차 집중하는 현상을 발견할 수는 없다. 물론 농사에서 공장과 유사한 노동과정의 예를 발견할 수 있기는 하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과일과 야채를 수확하는 시기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 '공장과 같은 형태의 농사'라는 자본주의적 이행의 증거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농기업은 많은 노동력을 고용하지 않고, 주로 한두 명의 노동자를 일 년 중 특별한 시기에만 고용한다. 농업의 자본주의적 이행 과정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농작(farming)와 농업-식량 체계(agri-food system)을 구분해야 한다. 농작은 흙, 노동, 기계를 사용하여 종자, 물, 비료, 농약과 같은 투입물(inputs)을 밀, 감자와 같은 1차 생산물로 만들어내고, 농장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물리적인 과정이다. 농작에서 고전적인 자본주의적 이행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농업생산의 재정적·물리적 특성에서 발생한다. 첫째, 농지는 가치를 떨어뜨릴 수 없고 농지 부동산 시장이 빈약하고 따라서 농지에 대한 투자가 유동성이 낮기 때문에, 농지 소유는 자본이 보기에 매력적이지 않다. 두 번째로 대형 농장의 노동 과정은 넓은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통제가 어렵다. 셋째, 이미 중간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규모의 경제'가 달성되기 힘들다. 넷째, 날씨, 새로운 질병, 해충 등 외적인 자연적 현상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통제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자본 재생산의 순환이 1년을 단위로 하는 식물의 성장주기, 동물의 고정된 재생산주기와 연계되어 있어서 이를 단축시킬 수 없다. 이러한 제약의 중요한 예외를 가축 사육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재생산주기를 단축시키는데 상당한 성공을 이루어낸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 보게 될 자본주의적 농작의 발전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잘 통제되는 대규모 노동력을 고용하고 있는 대형 기업이 농장을 통째로 소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농업-식량 시스템은 단순히 농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농장 경영을 비롯하여 투입물의 생산, 운송, 판매와 농산물의 운송, 가공, 판매 모두가 포함된다. 농작이 전체 농업생산 고리에서 물리적으로 중요한 과정이긴 하지만, 오히려 투입물의 공급과 생산물을 소비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이 농업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농작 자체는 현재 농업-식량 시스템 부가가치의 10%를 차지할 뿐이다. 25%는 투입물 거래에서, 나머지 65%는 농산물을 소비 상품으로 바꾸는 운송, 가공, 판매에서 얻어진다. 20세기 초반, 농장에서의 부가가치는 전체의 40% 정도였고, 대부분의 투입물은 종자, 역축(役畜, draught animal), 사료, 거름, 가족의 노동력 등의 형태로 대부분 농장에서 직접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입물의 대부분은 화학 종자, 트랙터, 정제/합성 화학 비료, 기계, 노동력 대체품 등의 형태로 구입된다. 그러므로 산업자본은 투입물의 생산과 생산물의 가공을 통해서 농업분야에서 이윤을 획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타의 산업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농기계, 농화학 제품, 종자를 생산하고, 밀가루를 슈퍼마켓 계산대에 놓인 아침식사용 시리얼 한 상자로 바꾸어내는 것은 전적으로 자본에 의해, 그리고 자본의 요구에 의해 통제된다. 그러나 자본의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석유를 감자칩으로 바꾸는 과정이 필수적인 것이지만, 농작이 200만 소(小)생산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들이 소유한 생산수단은 토지와 같이 소유권을 집중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아무리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생산자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잉여농산물은 자본으로 전환하지 않고 소비한다. 농업은 여타의 자본주의 생산과는 달리, 생산의 필수적인 과정이 수많은 독립적인 소생산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실을 잣고, 천을 짜고, 봉제를 하는 과정은 소수 기업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염색과 가공하지 않은 천을 다듬는 일은 불가피하게 수십 만의 외부 가내생산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가내생산자들은 재료를 집으로 가져가 가공한 후 다시 공장에 판매한다. 농장 생산자들은 역사적으로 농업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과정에서 두 가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농장주는 농작에 관한 물리적 과정에 대해 선택권을 갖는다. 여기에는 어떤 작물·가축을 재배하고 사육할 것인지, 그 양은 얼마로 할지, 어떤 투입물을 사용할지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선택은 물론 항상 해당 지역의 기후와 토양의 조건과 농산물 시장의 특성에 의해 좌우된다. 두 번째, 농장주는 전통적으로 투입물 판매자들과 경쟁 관계에 놓였다. 왜냐하면 농장주들이 종자, 농기계, 비료 등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자본은 농장주들이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문제에 놓이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최대의 이익을 낳을 수 있도록 투입물을 일괄 구입하도록 하고, 농산물 가격이 구매자들의 요구에 적합하도록 맞춰야 한다. 구매자들이 가격을 결정하는 중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에 어떤 위험요소가 남아있든지 간에, 선택권은 여전히 농장주들에게 있다. 농장주들이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생산과정의 본질과 속도에 대한 결정권과 농산물 시장 판매력을 잃어감에 따라, 그들은 생산자와 고립되어 규정되는 고리 속에서 작동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즉, 농장주들은 점차 프롤레타리아화 하는 것이다. 농민들이 토지와 건물의 법적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생산수단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다. 이러한 생산수단을 경제적으로 다르게 이용할 방도는 없다. 프롤레타리아화의 핵심은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그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농업에서 이러한 이행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수확 기계의 발명과 2차 세계대전 종전의 시기인 첫 번째 단계에서는 유용성, 비용, 기계화를 통한 노동력의 통제와 같은 문제들이 농업혁신과 관련된 것처럼 언급되었다. 농장주들은 트랙터의 도입을 막을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비료, 살충제, 노동절감형 제초제 등의 정제-합성 화학 약품들이 주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품 형태의 투입물도 효용이 크고 노동 절감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거부되지 못했다. 특히 제초제로 인해 경작용 기계에 대한 요구가 줄어들었다. 살충제는 성공적인 수확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였고, 분사형 호르몬제를 통해 과일이 익는 시기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항생제로 동물들의 질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품과 농장에서 자체 생산된 투입물 간의 경쟁은 전혀 없었다. 자본주의적 투입물의 역할이 점차 늘어간다는 사실은 생산과정의 중심적인 형태를 파악함으로써 분석할 수 있다. 이러한 투입물은 현실에서 생물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된다. 기계화 및 화학제품의 사용은 생산되는 생물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생산의 다른 영역과는 달리, 농업에서 생물은 모든 투입물 사이의 연계 속에 위치하며 모든 생산물 변형의 기초적인 자원이다. 그러나 생물은 죽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생산물은 재생산되어야 한다. 즉, 농산물의 모든 사이클은 농작의 과정을 통해 가치가 부가되는 종자 혹은 씨가축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종자(혹은 씨가축)는 농작에 투입되는 중심적인 투입물이다. 이러한 종자 생물의 생물학적 특성을 통제하는 것은 전체 농산물 생산 과정을 통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다른 투입물에 대한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 있어서 종자 생산자가 유일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질소비료 가격이 급격하게 떨어짐으로써 농민들이 이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질소 비료는 매우 유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잡종 옥수수와 같은 식물의 번식에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농산물 생산에 대량의 질소 비료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토마토 수확의 성공적인 기계화는 식물 육종가(育種家)와 기계 설계자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가능했다. 육종가들은 가지가 축 늘어지고 꽃과 열매가 자라는 기간 내내 흠이 나기 쉬운 토마토의 특성을 완전히 바꾸어 짧고, 단단하며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생겨 모든 과실이 거의 동시에 익는 토마토로 만들었다. 생산 과정에서 종자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므로, 종자회사는 잠재적으로 농업에서의 소득의 큰 부분을 차지할 만큼 매우 강력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다. 농장주가 좋은 변종의 씨앗을 심었을 때, 여기서 자라는 식물은 그 변종의 씨앗을 낳게 된다. 종자회사는 농장주에게 공짜의 상품, 씨앗 안에 들어있는 유전 정보를 제공하는 셈이 되고, 농장주는 경작을 통해 변종 종자를 반복해서 재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농장주가 다음 해 수확을 위한 종자를 재생산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해답은 동계번식체(同系繁殖體: 근친교배에 의하여 생긴 개체-역자)-교·잡종(交雜種) 교배법이다. 동계번식체-교·잡종으로 번갈아 교배함으로써 교·잡종 식물을 자라게 하되 재생산되지 않는 종자를 판매하는 것이다. 두 번째 세대의 식물은 진정한 교·잡종이 아니어서 수확량이 줄고 변이하기 쉬우므로, 농장주는 매년 새로운 종자를 종자회사로부터 구입할 수밖에 없다. 변종 옥수수 종자를 판매한 종자회사가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됨에 따라, 이러한 방법은 토마토나 닭과 같은 다른 생물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델칼브, 펑크, 노스럽-킹과 같은 주요한 상업성 종자 및 닭 재배사들은 비록 곧바로 매각, 재조정되긴 했지만, 시바-게이지, 몬산토, 다우와 같은 제약회사 또는 화학제품 회사에 통합되었다. 가장 큰 교·잡종 종자 회사인 파이오니어 하이브리드만은 1997년까지 완고하게 독립적으로 남아있었고, 주식의 20%와 이사회의 두 석은 듀퐁사에 양도되었다. 일반적으로, 상업적 종자회사가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 방식으로 종자를 통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첫째, 이 방식은 콩, 밀 혹은 대형 동물과 같은 많은 주요 작물에는 경제적으로 유용하지 않았다. 둘째,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법이 총수확량을 증가시키는데 성공했을지라도, 많은 중요한 일정한 특징, 예를 들어 특정한 질병 혹은 제초제에 대한 저항력, 혹은 평지의 기름 함유율의 증가 등으로 인해 교·잡종이 더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따라서 다른 방식의 교배법을 도입해야 했다. 셋째, 어떠한 특징이 작물재배학적으로 중요한 종에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경작중인 종과 교배할 수 없는 다른 생물 안에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옥수수를 콩의 뿌리를 질소-고정 박테리아에 적합하도록 만듦으로써 가능하게 했듯이, 대기로부터 질소를 고정시키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질소 비료 시장을 축소시켰지만, 질소의 공급을 종자 회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했다. 종자회사와, 이들의 파트너 혹은 소유주가 되는 화학제품회사에 이익이 되는 작물재배학상 종에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한계는 농업에 자본이 침투하는 것이 1970년대에 명백한 한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연료비용의 극적인 변화와 이주 노동력의 공급을 통해 농업에서의 지지부진한 노동 조직 과정이 종식됨으로써, 농업생산에 있어 획기적인 형태의 기계화는 종결되었다. 비료와 농약의 오염효과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확산되고, 농장 노동자들을 유독성 있는 살충제와 제초제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직업안전위생관리국(OSHA)의 규제가 발전함에 따라, 화학제품의 사용에 따른 급격한 변화는 제어되었고, 전통적인 투입물의 사용이 꾸준히 증가했다. 게다가, 이러한 비료와 농약은 매우 높은 비율로 사용되고 있었고,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예를 들면 1975년 이후에는 비료사용량이 전혀 증가하지 않았고, 1980년쯤 도입되기 시작한 합성비료 역시 사용량이 증가하지 않았다. 투입물 판매자와 생산물 구입자가 농업에서의 소득 중 자신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1) 작물재배학상 종의 생물학적 특성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거나, 2) 생물학적 체계를 자신이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통해 늘릴 수 있다. 또한, 투입물과 경작 이후의 생산 분야(구매, 가공, 유통)의 통합력이 높아져 통제력을 집중할 수 있을 때 이 소득의 비중은 더욱 커진다. [이제] 생명공학(biotechnology)으로 넘어가자. 생명공학과 소유(property)의 통제 생명공학의 상업적 이용의 목표는 농산물에 대한 자본 통제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생명공학 혁신은 세 가지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개발 시간과 비용은 연구에 대한 자본투자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비(非)콩류 식물에도 질소 고정을 도입하는 것은 아그리세투스(Agricetus), 아그리제네티카(Agrigenetica), 바이오테크니카(Biotechnica)를 비롯한 여러 생명공학 관련 기업들이 10여 년 동안 7천5백만 달러를 들여 연구를 진행한 후,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고 만약 성공한다면 거대한 이익을 남길 것이 확실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보건 및 환경 관련 단체들이 개발에 도전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모든 생명공학상의 혁신은 환경, 보건에 대한 위험으로 인해 도전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는 생명공학 프로젝트를 중단하도록 만들었다. 생명공학이 도입되는 원동력은 비료와 농약의 사용에 대한 저항이 투입물 생산자들이 얻는 농업 소득의 비중을 늘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생명기술에 의한 생산물의 소유권과 통제는 농장주가 아니라 이를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이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공학상의 혁신으로 얻어진 새로운 변종에 대해 소유권을 유지하려는 기업의 요구는 모순을 낳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농장주는 새로운 변종 종자를 구입할 때 종자에 들어있는 좋은 유전학적 정보를 공짜로 얻게 되고, 육종가는 그 소유권을 잃게 된다.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법을 통한 재산권 보호는 몇몇 생물과 몇몇 작물재배학적 특성에 국한된다. 그리고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법이 적용되지 못하는 경우 생명공학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육종가들은 중요한 유전정보를 빼앗기고 난 후 어떻게 이익을 얻게 되는가? 법적·생물학적 무기의 결합이 답이 된다. 식물변종보호법을 통해 육종가들은 법적인 권리를 얻게 되었고, 표준 DNA 지문의 사용으로 농산물 자원을 모호하지 않게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농장주가 생명기술자로부터 종자를 구입하기를 원한다면 수확으로 얻어진 종자의 다음세대에 대한 재산권을 모두 종자 생산자에게 양도한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농장주는 수확을 통해 얻어진 종자를 다른 농장주에게 판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농장에서 이 종자를 심어 다음 해에 수확할 수도 없게 된다. 몬산토의 라운드업 레디 콩 종자 혹은 저지방 감자칩을 만들 수 있도록 개발된 감자 종자를 구입한 농장주들은 이러한 변종을 계속 생산하고 싶다면, 다음 영농철에 몬산토를 찾아가 재계약을 해야 한다. (몬산토는 라운드업이라는, 콩마저도 죽이는 효능 좋은 제초제를 생산한다. '라운드업 레디'라는 콩은 유전자 조작으로 생산되는데, 라운드업을 아무리 많이 뿌려도 죽지 않고, 밭에 영향을 주지도 않고 잘 자란다.) 이와 같은 계약은 몬산토의 곡물을 규정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식물 한 그루, 혹은 종자 하나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데, 조작된 변종의 DNA는 유전자 조작에 의해 특징적인 배열을 갖는데, 이는 다른 변종에 비교할 때 독특하다. 종자생산 기업의 생명공학 실험실에서는 이렇게 분류된 유전자 배열을 분석하는 것을 가리켜 "게놈 통제"라고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분석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상당한 양의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자를 훔치거나 다시 심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몬산토는 다음과 같은 협박성·회유성 광고를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한 잡지에 전면으로 실었다. 농장주가 몬산토의 생명공학 종자를 모아두거나 다시 심게 되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종자를 얻을 때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더라도(다시 말해, 이웃에서 종자를 훔치거나 다시 심더라도) 그는 곧 해적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종자 해적질은 농장주에게 현금 결산 및 법적 비용 등으로 에이커당 수백 달러 정도의 비용을 치르게 한다. 또한 몇 년 동안 경작과 사업 내역에 관한 시찰을 받도록 한다. 그러나 지적재산권에 관한 이야기는 한 장이 더 남아있다.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법은 고작 몇몇 생물체에만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계약 시스템은 이를 유효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협박, 감시, 소송 등을 필요로 한다. 생명공학을 도입함으로써 종자에 대한 소유권과 관련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3월 3일, 종자가 땅에 뿌려져 곡물이 한번 자라고 나면 다시는 발아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전자 조작에 대해 특허가 부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이로써 20세기 초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법이 발명되었을 때 종자생산 자본가들에게 발생한 문제가 모든 곡물에 대해 한방에 해결된 것이다. 발명한 이가 지적하듯, 이 생명공학 기술은 어떤 곡물에 대해서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으나, 상업적으로 이용되기 전 약간의 보완이 필요하다. 누가 이 특허권의 발명자이자 소유자인가? 바로 면화와 콩 종자의 주도적인 생산자이자, 미국 농업성의 연구기관인 델타 앤 파인 랜드사이다. 아직까지 이러한 기술의 개발이 농민과 소비자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국가가 공공의 이익을 해치면서 사적인 재산권을 보호하는 뻔뻔한 사례이다. 종자개발자의 재산권을 강화하는 계약이 사용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유전공학의 한계를 예측할 수 있다. 몬산토 사는 효소에서 유전자변형 박테리아를 사용하여, 젖소가 우유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물질대사를 촉진하는 성장호르몬(BST)을 상업적으로 개발했다. 그러나 보통의 소는 스스로 성장호르몬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소의 몸 속에서 단백질 생산을 조절하는 DNA가 그 양을 증가시키도록 변형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상업적인 BGH(상장호르몬)을 구입하고 투여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첫째, 젖소집단(dairy herd)은 항상 중소기업에 의해 자체 재생산되며, 대규모 종자회사에 상응하는 대규모의 상업적 젖소 육종가(dairy herd breeder)는 없다. 둘째, 강제조치가 이루어지기 매우 힘들다. 몬산토의 판매대리인이 어떤 농토 혹은 곡물저장소에서 감자 혹은 종자를 가져오기는 매우 쉽다. "게놈 통제"에 필요한 혈액 혹은 세포 표본을 농민이 소유한 젖소에서 채취하는 것은 상당히 주제 넘은 일이다. 게다가 젖소는 한꺼번에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세대를 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몇 해가 지나지 않고서 어느 소가 원래 구입한 것인지 아니면 그 자손인지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산계약, 생명공학, 그리고 농업 통제 만약 생명공학과 지적재산권 보호 계약체계의 유일한 효과가 농업에 필요한 공산품 투입물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라면, 혁명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농민들은 오랜 기간동안 공산품 투입물을 구입해왔다. 농업에서 발생한 중요한 구조적 변화는 농산품 구매자들이 전체 생산 과정을 통제하는 방식의 농업생산의 수직적 통합으로부터 일어났다. 이러한 수직적 통합은 1) 투입물과 생산품 간의 기술적 연계, 2) 한 기업이 생산품의 독점적 구매자이자 중요한 투입물의 공급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맡는 것, 3) 투입물 및 생산물과 농민을 연결시키는 계약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러한 계약은 생명공학에 선행한다. 농산품 구매자가 시장 유통 역시 담당하게 되면 수직적 통합이 가능해진다. 계약 농업은 통조림용 야채생산 분야에서 일반적이다. 오하이오 주에 있는 토마토 통조림공장은 종자와 비료를 공급하기도 하고, 숙성한 토마토를 채집하기도 한다. 농민들은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통조림 제조에 관한 계약이 처음 이루어진 이후 계속 진화해왔다. 생명공학의 주요 역할은 투입물과 생산품의 물질적 연계 속에 있다. 생산 시스템의 효과적인 통합을 보증하기 위해서, 성장하고 있는 생물은 여타의 투입물과 한묶음을 이루기에, 그리고 농업 과정에 사용되는 기술에 적합하도록, 최종생산물이 시장에서 유통되는데 필요한 품질을 갖추도록 설계된다. 이러한 몇 가지 목표는 전통적인 재배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지만, 특정한 질병에 대한 저항 혹은 생물 조합에 필요한 질적인 변화와 같은 몇몇 자질은 생명공학적인 조작을 통해서 가장 잘 만들어질 수 있다. 더불어 다양한 복제와 세포배양 기술은 투입되는 생물이 원하는 유전적 자질을 갖춘 채 배가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했다. 계약 농업의 본질의 한 예는 이러한 계약 시스템의 보루인 브로일러(고기용 닭) 생산에서 드러난다. 슈퍼마켓과 패스트푸드점에 닭고기를 주로 공급하는 업체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타이슨 팜(Tyson Farms)이다. 타이슨의 닭고기들은 타이슨 "농장"에서 생산되지 않고, 소농들에 의해 생산된다. 이들은 100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연평균 25만 마리의 닭을 생산하며, 총소득은 6만5천 달러, 실질소득은 1만2천 달러정도이다. 이러한 생산은 타이슨 사(혹은 유사한 다른 지역 기업)와의 4년 계약 하에서 이루어진다. 타이슨사는 병아리, 사료, 혹은 수의학 서비스를 독점적으로 공급한다. 오직 이 회사만이 공급할 병아리의 유형과 숫자, 빈도를 결정할 수 있다. 이후 타이슨 사는 7주 후 직접 결정한 날짜와 시간에 맞추어 성숙한 닭을 고른다. 닭의 무게를 잴 저울과 이들을 운반할 트럭 역시 타이슨사가 공급한다. 투입물 및 사육에 대한 세부적인 통제는 전적으로 타이슨 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생산자(농민)는 타이슨 사가 공급하거나 보증하지 않는 사료, 의약품, 제초제, 살충제, 쥐약, 기타 어떤 품목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게다가, 농민은 타이슨 사의 "브로일러 사육 지침"을 준수하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타이슨 사가 정하는 "브로일러 관리 및 기술 자문"의 감독에 따라 "집중 관리"를 받게 된다. 닭 사육 농민은 더 이상 원료를 구입해서 이를 자신의 노동을 통해 변형시키고 이를 시장에 판매하는 독립된 장인이 아니다. 계약 농민은 아무것도 구입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판매하지 않는다. 심지어 원료를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도 못한다. 농민은 약간의 생산수단, 즉 토지와 건물을 소유하고 있지만, 노동과정, 혹은 소외된 생산에 대해 아무런 통제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농민은 17~18세기의 자본주의 생산의 첫 단계에 특징적으로 나타난 전형적인 생산노동자가 된다. 농민이 얻은 것은 조립라인의 기계공만큼의 소득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적인 생산자이자 시장판매자였던 농민이 아무런 선택권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그 지위가 변경된 것은 전국소농위원회(National Commission on Small Farm)가 1998년 발간한 다음의 보고서에 담긴 권고사항에 반영되어 있다. 의회는 농업공정거래법(Agricultural Fair Practice Act)을 개정하여 농업성이 행정적 구속력과 민사제재 권한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또한, 사육자들이 차별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조합을 결성하고 단체협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생명공학상의 조작과 계약 농업의 조합은 제3세계 경제에 재앙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제3세계로부터 수입해오는 생산품은 독특한 특질을 지닌 원료, 예를 들면 커피, 향신료, 식물성 알코올, 식용유 등이다. 게다가 이러한 원료들은 낮은 기술 수준과 많은 노동의 투입을 통해 생산된다. 또한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나라들에서 생산된다. 그 결과로, 말하자면, 필리핀에서 수입해오는 야자기름의 가격과 입수가능성은 불안정하다.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국내 품종을 유전자 조작함으로써 특수한 작물들을 만들어 수입품을 대체하게 된다. 칼젠사는 비누, 샴푸, 화장품, 식품 등을 만드는데 쓰이는 수입 야자기름을 대체할 고-라우릭 산-캐놀라(high lauric acid canola) 품종을 만들었다. 이러한 특수 캐놀라 품종은 농촌인구들이 경제적으로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는 필리핀의 생산품을 대체하며 [미국] 중서부에서 계약을 맺고 생산된다. 그리고 생합성을 통해 카페인이 성공적으로 콩에 이식되었다. 만약 [식물성] 기름 유전자와 커피향을 이식하는데 성공한다면 중남미와 아프리카는 커피분말용 콩을 판매할 시장을 잃게 될 것이다. 농업이 자본주의 확산의 고전적인 형태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공업생산과는 달리, 농업이 자본에 포섭되는 첫 단계는 투입물 산업과 생산물 유통의 활성화이다. 이들은 소규모 기업농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팔고 그들이 생산한 것을 사들임으로서 농업의 잉여를 전유한다.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작동시키는 전유의 가능성이 침투하면서 일어난다. 농업생산과 연계된 중심적인 원료, 즉 자본주의화에 가장 저항하는 생명체에 집중하면서 생명공학은 자본 진출의 두 단계를 완수하게 된다. 첫 번째는 야생이었던 많은 생물을 포함하여 투입물 생산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를 동반하여 수직적 통합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래의 자본주의적 농업은 바로 이 두 번째 단계인데, 왜냐하면 농업생산의 물리적 특성이 불가피하게 토지와 연계되어 생산과정에서 독특한 조직형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1) "The Maturing of capitalist agriculture: Farmer as proletarian", Monthly Review, Jul./Aug. Academic Research Library pg. 72 본문으로 2) 리처드 르원틴은 하버드 대 비교동물학 박물관 내 알렉산더 아가시좌 (Alexander Agassiz Chair)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Biology as Ideology, The Genetic Basis of Evolutionary Change, Not in Our Genes(공저), The Dialectical Biologist(공저)가 있다. 본문으로

  • 2005-06-07

    자본주의적 농업의 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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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농민 자본주의적 농업의 성숙1) 리처드 르원틴2) (번역: 류미경 (정책편집부장)) 우리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산업 생산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개별 장인 생산자를 포섭했는지에 관한 고전적인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방식이 다른 형태의 생산·교환 조직에 침투하여 결국 이를 변형시켰다는 점을 알고 있다. 종종 이러한 변화의 힘은 매우 강력하여, 적어도 유럽과 북미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일찍 시작되어 19세기 말에 끝났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이와 같은 현상의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복원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의료나 연예 등의 전문 분야와 같이 현재까지도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는 개별 장인들을 보면, 이행이 최근까지도 완료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들은 예외적인 것으로, 초기 자본주의적 관계의 화석인 셈이다. 왜냐하면 이 분야는 특별한 재능과 오랜 기간의 훈련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숙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주변적인 분야, 즉 핵심적인 필수품 생산을 제외한 분야에서는 예외가 된다는 관점은 완전히 틀렸다. 왜냐하면 기초적인 생필품을 생산하는 거대한 영역, 즉 농업분야에서 이행이 한창 진행 중이라는 점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농업에 자본이 침투하는 과정은 18-19세기의 직물로 대표되는 고전적인 산업 생산에서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그리고 다른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표면상으로는 농업이 자본에 저항해온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개별 농기업의 수는 1930년대 670만 개에서 72%나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농업생산자의 수는 180만 명에 이른다. 이는 고작 6%의 농가가 농산물의 전체 가치의 60%를 책임지고 있지만, 모든 산출된 가치의 절반 이상을 생산하는 10만여 개별 기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제조업 분야에서는, 4대 기업이 생산의 40%를 책임지고 있으며, 섬유와 같은 차별화된 분야에서는 4대 기업이 15% 이상의 가치를 생산한다. 또한 토지를 직접 소유하고 있는 농장주가 임대하는 농지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소규모 생산자는 소유주이면서 동시에 소작인이기도 한데, 이들이 경작하고 있는 농지는 [전체 농지의] 55% 정도를 차지한다. 결국 기업농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인식이지만, 20세기 초반부터 부재지주인 경영자에 의해 경작되는 농지의 비중은 1%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므로 농업의 자본주의적 이행에 대한 증거를 고전적인 산업모델에서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꽉 짜여진 계획에 따라 철저한 감시감독을 받으며 업무를 수행하는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매우 소수의 농장주에 의해 생산력이 점차 집중하는 현상을 발견할 수는 없다. 물론 농사에서 공장과 유사한 노동과정의 예를 발견할 수 있기는 하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과일과 야채를 수확하는 시기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이 '공장과 같은 형태의 농사'라는 자본주의적 이행의 증거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 농기업은 많은 노동력을 고용하지 않고, 주로 한두 명의 노동자를 일 년 중 특별한 시기에만 고용한다. 농업의 자본주의적 이행 과정을 분석하면서, 우리는 농작(farming)와 농업-식량 체계(agri-food system)을 구분해야 한다. 농작은 흙, 노동, 기계를 사용하여 종자, 물, 비료, 농약과 같은 투입물(inputs)을 밀, 감자와 같은 1차 생산물로 만들어내고, 농장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물리적인 과정이다. 농작에서 고전적인 자본주의적 이행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농업생산의 재정적·물리적 특성에서 발생한다. 첫째, 농지는 가치를 떨어뜨릴 수 없고 농지 부동산 시장이 빈약하고 따라서 농지에 대한 투자가 유동성이 낮기 때문에, 농지 소유는 자본이 보기에 매력적이지 않다. 두 번째로 대형 농장의 노동 과정은 넓은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통제가 어렵다. 셋째, 이미 중간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규모의 경제'가 달성되기 힘들다. 넷째, 날씨, 새로운 질병, 해충 등 외적인 자연적 현상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통제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자본 재생산의 순환이 1년을 단위로 하는 식물의 성장주기, 동물의 고정된 재생산주기와 연계되어 있어서 이를 단축시킬 수 없다. 이러한 제약의 중요한 예외를 가축 사육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재생산주기를 단축시키는데 상당한 성공을 이루어낸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 보게 될 자본주의적 농작의 발전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잘 통제되는 대규모 노동력을 고용하고 있는 대형 기업이 농장을 통째로 소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농업-식량 시스템은 단순히 농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농장 경영을 비롯하여 투입물의 생산, 운송, 판매와 농산물의 운송, 가공, 판매 모두가 포함된다. 농작이 전체 농업생산 고리에서 물리적으로 중요한 과정이긴 하지만, 오히려 투입물의 공급과 생산물을 소비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이 농업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농작 자체는 현재 농업-식량 시스템 부가가치의 10%를 차지할 뿐이다. 25%는 투입물 거래에서, 나머지 65%는 농산물을 소비 상품으로 바꾸는 운송, 가공, 판매에서 얻어진다. 20세기 초반, 농장에서의 부가가치는 전체의 40% 정도였고, 대부분의 투입물은 종자, 역축(役畜, draught animal), 사료, 거름, 가족의 노동력 등의 형태로 대부분 농장에서 직접 생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입물의 대부분은 화학 종자, 트랙터, 정제/합성 화학 비료, 기계, 노동력 대체품 등의 형태로 구입된다. 그러므로 산업자본은 투입물의 생산과 생산물의 가공을 통해서 농업분야에서 이윤을 획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타의 산업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농기계, 농화학 제품, 종자를 생산하고, 밀가루를 슈퍼마켓 계산대에 놓인 아침식사용 시리얼 한 상자로 바꾸어내는 것은 전적으로 자본에 의해, 그리고 자본의 요구에 의해 통제된다. 그러나 자본의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석유를 감자칩으로 바꾸는 과정이 필수적인 것이지만, 농작이 200만 소(小)생산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들이 소유한 생산수단은 토지와 같이 소유권을 집중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아무리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생산자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잉여농산물은 자본으로 전환하지 않고 소비한다. 농업은 여타의 자본주의 생산과는 달리, 생산의 필수적인 과정이 수많은 독립적인 소생산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실을 잣고, 천을 짜고, 봉제를 하는 과정은 소수 기업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염색과 가공하지 않은 천을 다듬는 일은 불가피하게 수십 만의 외부 가내생산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가내생산자들은 재료를 집으로 가져가 가공한 후 다시 공장에 판매한다. 농장 생산자들은 역사적으로 농업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과정에서 두 가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농장주는 농작에 관한 물리적 과정에 대해 선택권을 갖는다. 여기에는 어떤 작물·가축을 재배하고 사육할 것인지, 그 양은 얼마로 할지, 어떤 투입물을 사용할지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선택은 물론 항상 해당 지역의 기후와 토양의 조건과 농산물 시장의 특성에 의해 좌우된다. 두 번째, 농장주는 전통적으로 투입물 판매자들과 경쟁 관계에 놓였다. 왜냐하면 농장주들이 종자, 농기계, 비료 등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자본은 농장주들이 자신의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문제에 놓이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이 최대의 이익을 낳을 수 있도록 투입물을 일괄 구입하도록 하고, 농산물 가격이 구매자들의 요구에 적합하도록 맞춰야 한다. 구매자들이 가격을 결정하는 중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산에 어떤 위험요소가 남아있든지 간에, 선택권은 여전히 농장주들에게 있다. 농장주들이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생산과정의 본질과 속도에 대한 결정권과 농산물 시장 판매력을 잃어감에 따라, 그들은 생산자와 고립되어 규정되는 고리 속에서 작동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즉, 농장주들은 점차 프롤레타리아화 하는 것이다. 농민들이 토지와 건물의 법적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생산수단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다. 이러한 생산수단을 경제적으로 다르게 이용할 방도는 없다. 프롤레타리아화의 핵심은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그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이다. 농업에서 이러한 이행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수확 기계의 발명과 2차 세계대전 종전의 시기인 첫 번째 단계에서는 유용성, 비용, 기계화를 통한 노동력의 통제와 같은 문제들이 농업혁신과 관련된 것처럼 언급되었다. 농장주들은 트랙터의 도입을 막을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비료, 살충제, 노동절감형 제초제 등의 정제-합성 화학 약품들이 주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품 형태의 투입물도 효용이 크고 노동 절감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거부되지 못했다. 특히 제초제로 인해 경작용 기계에 대한 요구가 줄어들었다. 살충제는 성공적인 수확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였고, 분사형 호르몬제를 통해 과일이 익는 시기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항생제로 동물들의 질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품과 농장에서 자체 생산된 투입물 간의 경쟁은 전혀 없었다. 자본주의적 투입물의 역할이 점차 늘어간다는 사실은 생산과정의 중심적인 형태를 파악함으로써 분석할 수 있다. 이러한 투입물은 현실에서 생물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된다. 기계화 및 화학제품의 사용은 생산되는 생물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생산의 다른 영역과는 달리, 농업에서 생물은 모든 투입물 사이의 연계 속에 위치하며 모든 생산물 변형의 기초적인 자원이다. 그러나 생물은 죽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 생산물은 재생산되어야 한다. 즉, 농산물의 모든 사이클은 농작의 과정을 통해 가치가 부가되는 종자 혹은 씨가축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종자(혹은 씨가축)는 농작에 투입되는 중심적인 투입물이다. 이러한 종자 생물의 생물학적 특성을 통제하는 것은 전체 농산물 생산 과정을 통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는 다른 투입물에 대한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 있어서 종자 생산자가 유일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질소비료 가격이 급격하게 떨어짐으로써 농민들이 이를 대량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질소 비료는 매우 유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잡종 옥수수와 같은 식물의 번식에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농산물 생산에 대량의 질소 비료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토마토 수확의 성공적인 기계화는 식물 육종가(育種家)와 기계 설계자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가능했다. 육종가들은 가지가 축 늘어지고 꽃과 열매가 자라는 기간 내내 흠이 나기 쉬운 토마토의 특성을 완전히 바꾸어 짧고, 단단하며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생겨 모든 과실이 거의 동시에 익는 토마토로 만들었다. 생산 과정에서 종자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므로, 종자회사는 잠재적으로 농업에서의 소득의 큰 부분을 차지할 만큼 매우 강력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다. 농장주가 좋은 변종의 씨앗을 심었을 때, 여기서 자라는 식물은 그 변종의 씨앗을 낳게 된다. 종자회사는 농장주에게 공짜의 상품, 씨앗 안에 들어있는 유전 정보를 제공하는 셈이 되고, 농장주는 경작을 통해 변종 종자를 반복해서 재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농장주가 다음 해 수확을 위한 종자를 재생산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역사적 해답은 동계번식체(同系繁殖體: 근친교배에 의하여 생긴 개체-역자)-교·잡종(交雜種) 교배법이다. 동계번식체-교·잡종으로 번갈아 교배함으로써 교·잡종 식물을 자라게 하되 재생산되지 않는 종자를 판매하는 것이다. 두 번째 세대의 식물은 진정한 교·잡종이 아니어서 수확량이 줄고 변이하기 쉬우므로, 농장주는 매년 새로운 종자를 종자회사로부터 구입할 수밖에 없다. 변종 옥수수 종자를 판매한 종자회사가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됨에 따라, 이러한 방법은 토마토나 닭과 같은 다른 생물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델칼브, 펑크, 노스럽-킹과 같은 주요한 상업성 종자 및 닭 재배사들은 비록 곧바로 매각, 재조정되긴 했지만, 시바-게이지, 몬산토, 다우와 같은 제약회사 또는 화학제품 회사에 통합되었다. 가장 큰 교·잡종 종자 회사인 파이오니어 하이브리드만은 1997년까지 완고하게 독립적으로 남아있었고, 주식의 20%와 이사회의 두 석은 듀퐁사에 양도되었다. 일반적으로, 상업적 종자회사가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 방식으로 종자를 통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첫째, 이 방식은 콩, 밀 혹은 대형 동물과 같은 많은 주요 작물에는 경제적으로 유용하지 않았다. 둘째,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법이 총수확량을 증가시키는데 성공했을지라도, 많은 중요한 일정한 특징, 예를 들어 특정한 질병 혹은 제초제에 대한 저항력, 혹은 평지의 기름 함유율의 증가 등으로 인해 교·잡종이 더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따라서 다른 방식의 교배법을 도입해야 했다. 셋째, 어떠한 특징이 작물재배학적으로 중요한 종에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경작중인 종과 교배할 수 없는 다른 생물 안에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유명한 예는 옥수수를 콩의 뿌리를 질소-고정 박테리아에 적합하도록 만듦으로써 가능하게 했듯이, 대기로부터 질소를 고정시키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질소 비료 시장을 축소시켰지만, 질소의 공급을 종자 회사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했다. 종자회사와, 이들의 파트너 혹은 소유주가 되는 화학제품회사에 이익이 되는 작물재배학상 종에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한계는 농업에 자본이 침투하는 것이 1970년대에 명백한 한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연료비용의 극적인 변화와 이주 노동력의 공급을 통해 농업에서의 지지부진한 노동 조직 과정이 종식됨으로써, 농업생산에 있어 획기적인 형태의 기계화는 종결되었다. 비료와 농약의 오염효과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확산되고, 농장 노동자들을 유독성 있는 살충제와 제초제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직업안전위생관리국(OSHA)의 규제가 발전함에 따라, 화학제품의 사용에 따른 급격한 변화는 제어되었고, 전통적인 투입물의 사용이 꾸준히 증가했다. 게다가, 이러한 비료와 농약은 매우 높은 비율로 사용되고 있었고,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예를 들면 1975년 이후에는 비료사용량이 전혀 증가하지 않았고, 1980년쯤 도입되기 시작한 합성비료 역시 사용량이 증가하지 않았다. 투입물 판매자와 생산물 구입자가 농업에서의 소득 중 자신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1) 작물재배학상 종의 생물학적 특성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거나, 2) 생물학적 체계를 자신이 소유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통해 늘릴 수 있다. 또한, 투입물과 경작 이후의 생산 분야(구매, 가공, 유통)의 통합력이 높아져 통제력을 집중할 수 있을 때 이 소득의 비중은 더욱 커진다. [이제] 생명공학(biotechnology)으로 넘어가자. 생명공학과 소유(property)의 통제 생명공학의 상업적 이용의 목표는 농산물에 대한 자본 통제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생명공학 혁신은 세 가지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 개발 시간과 비용은 연구에 대한 자본투자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비(非)콩류 식물에도 질소 고정을 도입하는 것은 아그리세투스(Agricetus), 아그리제네티카(Agrigenetica), 바이오테크니카(Biotechnica)를 비롯한 여러 생명공학 관련 기업들이 10여 년 동안 7천5백만 달러를 들여 연구를 진행한 후,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고 만약 성공한다면 거대한 이익을 남길 것이 확실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보건 및 환경 관련 단체들이 개발에 도전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모든 생명공학상의 혁신은 환경, 보건에 대한 위험으로 인해 도전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는 생명공학 프로젝트를 중단하도록 만들었다. 생명공학이 도입되는 원동력은 비료와 농약의 사용에 대한 저항이 투입물 생산자들이 얻는 농업 소득의 비중을 늘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생명기술에 의한 생산물의 소유권과 통제는 농장주가 아니라 이를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이 보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공학상의 혁신으로 얻어진 새로운 변종에 대해 소유권을 유지하려는 기업의 요구는 모순을 낳는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농장주는 새로운 변종 종자를 구입할 때 종자에 들어있는 좋은 유전학적 정보를 공짜로 얻게 되고, 육종가는 그 소유권을 잃게 된다.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법을 통한 재산권 보호는 몇몇 생물과 몇몇 작물재배학적 특성에 국한된다. 그리고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법이 적용되지 못하는 경우 생명공학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육종가들은 중요한 유전정보를 빼앗기고 난 후 어떻게 이익을 얻게 되는가? 법적·생물학적 무기의 결합이 답이 된다. 식물변종보호법을 통해 육종가들은 법적인 권리를 얻게 되었고, 표준 DNA 지문의 사용으로 농산물 자원을 모호하지 않게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농장주가 생명기술자로부터 종자를 구입하기를 원한다면 수확으로 얻어진 종자의 다음세대에 대한 재산권을 모두 종자 생산자에게 양도한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 농장주는 수확을 통해 얻어진 종자를 다른 농장주에게 판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농장에서 이 종자를 심어 다음 해에 수확할 수도 없게 된다. 몬산토의 라운드업 레디 콩 종자 혹은 저지방 감자칩을 만들 수 있도록 개발된 감자 종자를 구입한 농장주들은 이러한 변종을 계속 생산하고 싶다면, 다음 영농철에 몬산토를 찾아가 재계약을 해야 한다. (몬산토는 라운드업이라는, 콩마저도 죽이는 효능 좋은 제초제를 생산한다. '라운드업 레디'라는 콩은 유전자 조작으로 생산되는데, 라운드업을 아무리 많이 뿌려도 죽지 않고, 밭에 영향을 주지도 않고 잘 자란다.) 이와 같은 계약은 몬산토의 곡물을 규정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 식물 한 그루, 혹은 종자 하나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데, 조작된 변종의 DNA는 유전자 조작에 의해 특징적인 배열을 갖는데, 이는 다른 변종에 비교할 때 독특하다. 종자생산 기업의 생명공학 실험실에서는 이렇게 분류된 유전자 배열을 분석하는 것을 가리켜 "게놈 통제"라고 한다. 지금까지 이러한 분석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상당한 양의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자를 훔치거나 다시 심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몬산토는 다음과 같은 협박성·회유성 광고를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여 한 잡지에 전면으로 실었다. 농장주가 몬산토의 생명공학 종자를 모아두거나 다시 심게 되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종자를 얻을 때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더라도(다시 말해, 이웃에서 종자를 훔치거나 다시 심더라도) 그는 곧 해적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종자 해적질은 농장주에게 현금 결산 및 법적 비용 등으로 에이커당 수백 달러 정도의 비용을 치르게 한다. 또한 몇 년 동안 경작과 사업 내역에 관한 시찰을 받도록 한다. 그러나 지적재산권에 관한 이야기는 한 장이 더 남아있다.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법은 고작 몇몇 생물체에만 적용될 수 있다. 그리고 계약 시스템은 이를 유효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협박, 감시, 소송 등을 필요로 한다. 생명공학을 도입함으로써 종자에 대한 소유권과 관련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3월 3일, 종자가 땅에 뿌려져 곡물이 한번 자라고 나면 다시는 발아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전자 조작에 대해 특허가 부여되었다고 발표되었다. 이로써 20세기 초 동계번식체-교·잡종 교배법이 발명되었을 때 종자생산 자본가들에게 발생한 문제가 모든 곡물에 대해 한방에 해결된 것이다. 발명한 이가 지적하듯, 이 생명공학 기술은 어떤 곡물에 대해서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으나, 상업적으로 이용되기 전 약간의 보완이 필요하다. 누가 이 특허권의 발명자이자 소유자인가? 바로 면화와 콩 종자의 주도적인 생산자이자, 미국 농업성의 연구기관인 델타 앤 파인 랜드사이다. 아직까지 이러한 기술의 개발이 농민과 소비자에게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국가가 공공의 이익을 해치면서 사적인 재산권을 보호하는 뻔뻔한 사례이다. 종자개발자의 재산권을 강화하는 계약이 사용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유전공학의 한계를 예측할 수 있다. 몬산토 사는 효소에서 유전자변형 박테리아를 사용하여, 젖소가 우유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물질대사를 촉진하는 성장호르몬(BST)을 상업적으로 개발했다. 그러나 보통의 소는 스스로 성장호르몬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소의 몸 속에서 단백질 생산을 조절하는 DNA가 그 양을 증가시키도록 변형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상업적인 BGH(상장호르몬)을 구입하고 투여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첫째, 젖소집단(dairy herd)은 항상 중소기업에 의해 자체 재생산되며, 대규모 종자회사에 상응하는 대규모의 상업적 젖소 육종가(dairy herd breeder)는 없다. 둘째, 강제조치가 이루어지기 매우 힘들다. 몬산토의 판매대리인이 어떤 농토 혹은 곡물저장소에서 감자 혹은 종자를 가져오기는 매우 쉽다. "게놈 통제"에 필요한 혈액 혹은 세포 표본을 농민이 소유한 젖소에서 채취하는 것은 상당히 주제 넘은 일이다. 게다가 젖소는 한꺼번에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세대를 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몇 해가 지나지 않고서 어느 소가 원래 구입한 것인지 아니면 그 자손인지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산계약, 생명공학, 그리고 농업 통제 만약 생명공학과 지적재산권 보호 계약체계의 유일한 효과가 농업에 필요한 공산품 투입물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라면, 혁명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농민들은 오랜 기간동안 공산품 투입물을 구입해왔다. 농업에서 발생한 중요한 구조적 변화는 농산품 구매자들이 전체 생산 과정을 통제하는 방식의 농업생산의 수직적 통합으로부터 일어났다. 이러한 수직적 통합은 1) 투입물과 생산품 간의 기술적 연계, 2) 한 기업이 생산품의 독점적 구매자이자 중요한 투입물의 공급자라는 이중적 역할을 맡는 것, 3) 투입물 및 생산물과 농민을 연결시키는 계약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러한 계약은 생명공학에 선행한다. 농산품 구매자가 시장 유통 역시 담당하게 되면 수직적 통합이 가능해진다. 계약 농업은 통조림용 야채생산 분야에서 일반적이다. 오하이오 주에 있는 토마토 통조림공장은 종자와 비료를 공급하기도 하고, 숙성한 토마토를 채집하기도 한다. 농민들은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통조림 제조에 관한 계약이 처음 이루어진 이후 계속 진화해왔다. 생명공학의 주요 역할은 투입물과 생산품의 물질적 연계 속에 있다. 생산 시스템의 효과적인 통합을 보증하기 위해서, 성장하고 있는 생물은 여타의 투입물과 한묶음을 이루기에, 그리고 농업 과정에 사용되는 기술에 적합하도록, 최종생산물이 시장에서 유통되는데 필요한 품질을 갖추도록 설계된다. 이러한 몇 가지 목표는 전통적인 재배방식으로 달성될 수 있지만, 특정한 질병에 대한 저항 혹은 생물 조합에 필요한 질적인 변화와 같은 몇몇 자질은 생명공학적인 조작을 통해서 가장 잘 만들어질 수 있다. 더불어 다양한 복제와 세포배양 기술은 투입되는 생물이 원하는 유전적 자질을 갖춘 채 배가하는 것을 가능하도록 했다. 계약 농업의 본질의 한 예는 이러한 계약 시스템의 보루인 브로일러(고기용 닭) 생산에서 드러난다. 슈퍼마켓과 패스트푸드점에 닭고기를 주로 공급하는 업체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타이슨 팜(Tyson Farms)이다. 타이슨의 닭고기들은 타이슨 "농장"에서 생산되지 않고, 소농들에 의해 생산된다. 이들은 100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연평균 25만 마리의 닭을 생산하며, 총소득은 6만5천 달러, 실질소득은 1만2천 달러정도이다. 이러한 생산은 타이슨 사(혹은 유사한 다른 지역 기업)와의 4년 계약 하에서 이루어진다. 타이슨사는 병아리, 사료, 혹은 수의학 서비스를 독점적으로 공급한다. 오직 이 회사만이 공급할 병아리의 유형과 숫자, 빈도를 결정할 수 있다. 이후 타이슨 사는 7주 후 직접 결정한 날짜와 시간에 맞추어 성숙한 닭을 고른다. 닭의 무게를 잴 저울과 이들을 운반할 트럭 역시 타이슨사가 공급한다. 투입물 및 사육에 대한 세부적인 통제는 전적으로 타이슨 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생산자(농민)는 타이슨 사가 공급하거나 보증하지 않는 사료, 의약품, 제초제, 살충제, 쥐약, 기타 어떤 품목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게다가, 농민은 타이슨 사의 "브로일러 사육 지침"을 준수하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타이슨 사가 정하는 "브로일러 관리 및 기술 자문"의 감독에 따라 "집중 관리"를 받게 된다. 닭 사육 농민은 더 이상 원료를 구입해서 이를 자신의 노동을 통해 변형시키고 이를 시장에 판매하는 독립된 장인이 아니다. 계약 농민은 아무것도 구입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판매하지 않는다. 심지어 원료를 상품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에서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도 못한다. 농민은 약간의 생산수단, 즉 토지와 건물을 소유하고 있지만, 노동과정, 혹은 소외된 생산에 대해 아무런 통제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농민은 17~18세기의 자본주의 생산의 첫 단계에 특징적으로 나타난 전형적인 생산노동자가 된다. 농민이 얻은 것은 조립라인의 기계공만큼의 소득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적인 생산자이자 시장판매자였던 농민이 아무런 선택권 없는 프롤레타리아로 그 지위가 변경된 것은 전국소농위원회(National Commission on Small Farm)가 1998년 발간한 다음의 보고서에 담긴 권고사항에 반영되어 있다. 의회는 농업공정거래법(Agricultural Fair Practice Act)을 개정하여 농업성이 행정적 구속력과 민사제재 권한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또한, 사육자들이 차별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조합을 결성하고 단체협상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생명공학상의 조작과 계약 농업의 조합은 제3세계 경제에 재앙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제3세계로부터 수입해오는 생산품은 독특한 특질을 지닌 원료, 예를 들면 커피, 향신료, 식물성 알코올, 식용유 등이다. 게다가 이러한 원료들은 낮은 기술 수준과 많은 노동의 투입을 통해 생산된다. 또한 정치·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나라들에서 생산된다. 그 결과로, 말하자면, 필리핀에서 수입해오는 야자기름의 가격과 입수가능성은 불안정하다.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국내 품종을 유전자 조작함으로써 특수한 작물들을 만들어 수입품을 대체하게 된다. 칼젠사는 비누, 샴푸, 화장품, 식품 등을 만드는데 쓰이는 수입 야자기름을 대체할 고-라우릭 산-캐놀라(high lauric acid canola) 품종을 만들었다. 이러한 특수 캐놀라 품종은 농촌인구들이 경제적으로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는 필리핀의 생산품을 대체하며 [미국] 중서부에서 계약을 맺고 생산된다. 그리고 생합성을 통해 카페인이 성공적으로 콩에 이식되었다. 만약 [식물성] 기름 유전자와 커피향을 이식하는데 성공한다면 중남미와 아프리카는 커피분말용 콩을 판매할 시장을 잃게 될 것이다. 농업이 자본주의 확산의 고전적인 형태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공업생산과는 달리, 농업이 자본에 포섭되는 첫 단계는 투입물 산업과 생산물 유통의 활성화이다. 이들은 소규모 기업농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팔고 그들이 생산한 것을 사들임으로서 농업의 잉여를 전유한다.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작동시키는 전유의 가능성이 침투하면서 일어난다. 농업생산과 연계된 중심적인 원료, 즉 자본주의화에 가장 저항하는 생명체에 집중하면서 생명공학은 자본 진출의 두 단계를 완수하게 된다. 첫 번째는 야생이었던 많은 생물을 포함하여 투입물 생산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를 동반하여 수직적 통합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래의 자본주의적 농업은 바로 이 두 번째 단계인데, 왜냐하면 농업생산의 물리적 특성이 불가피하게 토지와 연계되어 생산과정에서 독특한 조직형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1) "The Maturing of capitalist agriculture: Farmer as proletarian", Monthly Review, Jul./Aug. Academic Research Library pg. 72 본문으로 2) 리처드 르원틴은 하버드 대 비교동물학 박물관 내 알렉산더 아가시좌 (Alexander Agassiz Chair)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Biology as Ideology, The Genetic Basis of Evolutionary Change, Not in Our Genes(공저), The Dialectical Biologist(공저)가 있다. 본문으로

  • 2005-06-03

    미국의 '네오콘'을 통해 본 남한 '뉴라이트 운동'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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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네오콘'을 통해 본 남한 '뉴라이트 운동'의 전망 정 희 찬 | 정책편집부장 1. 뉴라이트운동의 등장 :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위기에 빠져있다."1) 이른바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지난해 동아일보가 <뉴라이트, 침묵에서 행동으로>라는 연재기사를 기획하면서 자유주의연대와 뉴라이트를 표방한 여러 단체들이 세력화하면서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연대(2004년 11월 2일), 교과서포럼(2005년 1월 25일), 뉴라이트싱크넷(3월 24일), 시사웹진 뉴라이트(4월 1일)는 출범 즉시 각종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과거 '주사파' 출신 인사나 김진홍 목사 등 보수적 기독교단체를 이끌고 있는 종교계 인사가 주축이 된 이들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386'이라 부른다 (여기서 '486'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올드 레프트'나 '올드 라이트'와 차별적인 자신들이 혼란과 절망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칭 '건강한 보수'를 주장하고 있는 이들 '신보수'의 주장은 자유주의연대이나 뉴라이트싱크넷의 창립선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2) ①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역사: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통해 냉전과 공산화의 위험, 빈곤을 극복하여 세계 10위권의 산업국가로 발전했을 뿐 아니라 1987년 이후 민주주의 정착에도 성공했다. ② 현 집권세력의 위험한 '자학사관': 현 집권세력은 건국과 산업화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절차적 수준이 아니라 과거 반체제세력이 주장하는 민중민주주의와 유사한 참여민주주의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들은 또한 민족공조와 노조를 앞세워 각각 한미동맹과 기업을 대체하려고 한다. ③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反시장주의적이고 대중선동형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現집권세력에게 전적으로 있다: 외국자본과 거대노조가 득세하고 분배와 균형의 추구는 성장둔화와 빈곤의 증가를 초래했다. 민족공조는 최악의 인권유린국가로서 핵무장을 시도하는 북한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의회권력과 행정권력 뿐 아니라 예술과 문화마저 이들이 장악하여 서로 권력투쟁을 일삼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이념, 세대, 지역 간 갈등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④뉴라이트운동은 기득권에 안주하며 부패한 낡은 보수와 단절하고, 민주화세력의 위험한 민족주의적 민중주의가 아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하고 세계화, 정보화, 자유화의 대세에 발맞추어 선진한국으로의 질적 도약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상이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의 주장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지난해 여름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서 한나라당 부설기관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인 박세일 의원이 발제한 <나라의 선진화와 당의 진로>라는 제목의 문서에 기반하고 있다.3) 이 문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현정부의 주축을 이루는 민주화 세력을 겨냥하여) 1980년대 "친북 반체제적인 반독재투쟁의 잔재인 '반시장, 반자유' 세력과의 대결을 통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주도한 김대중 정권과 이를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반시장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어떤 이론체계에 근거하여 출현했다기보다는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현 집권세력에게 전가함으로써 반사이익을 노리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은 지난 30년 동안 남한 지배계급의 지주였던 '반공-발전주의'를 해체하고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통해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분파를 보수야당-자유주의 세력으로 대체하였다. 게다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연거푸 패한 결과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기존 지배계급 분파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현된 것이었으리라. 1997년 대선을 통해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수평적 정권교체'의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등장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IMF 서울 지부장'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철저하게 월스트리트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금융시장을 부양하려는 그의 경제정책은 2000년 절정에 달한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불가피하게 측근들과 여당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로 귀결되었다. 재임 중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라는 명예는 빛이 바랬고 남한 자본주의의 동요는 정권에 대한 불안정한 지지율로 직결되었다. 김대중 정권의 충실한 후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지난 신자유주의 구조정의 결과 등장한 빈곤과 청년실업, 불안정노동이라는 쟁점을 '참여 복지'라는 허울좋은 수식어로 은폐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오히려 조직된 노동자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강화하면서 한국경제의 구원자로서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신화를 유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혁의 장미빛 환상이 잿빛 현실로 드러난 현실에서 현 집권세력에 대한 지배계급 내 보수적 분파들의 선전·선동은 나날이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뉴라이트'는 바로 이러한 지배계급 내에서의 동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 '뉴라이트'에 비견할 수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출현과 함께 반동적이고 공격적인 보수주의가 출현했다. 비록 양자 사이의 시차는 존재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상황은 한국과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있고 나아가 '뉴라이트' 운동의 향후 전망을 조망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2. 미국의 네오콘(Neo-con) : 미국의 쇠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 (1) 1970년대 급진주의 도전에 대항한 공격적 보수주의의 반동 '뉴라이트운동'의 원조 격인 이른바 네오콘이 등장한 미국 역시 1970년대 경제불황과 베트남전 패배, 급진주의 페미니즘, 흑인민권운동 등 진보주의 운동의 성장에 대한 보수주의 반동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미국 내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투쟁과 흑인민권운동이 성장하며 기존 사회의 가치관과 질서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급진학생운동(68운동), 혁명과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시도했던 중남미의 좌파(쿠바와 칠레, 니카라과), 수에즈운하를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되찾은 이집트의 나세르가 제창한 중동의 아랍민족주의와 제3세계 국가들의 '비동맹주의' 등은 미국의 지배계급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서 이른바 '파웰 메모'4)로 유명한 일화는 바로 각종 형태의 자유주의·진보주의를 미국 내부의 적으로 지목하고 이들과 대결해야 한다는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를 드러낸다. 파웰은 공산주의자, 뉴레프트를 비롯한 혁명주의자들이 대학과 언론계, 문화예술계에 침투하여 미국의 정치와 경제체제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기업은 대학의 보수적 학생을 양성하고 진보적 교수를 보수적 교수로 대체해야하고 TV프로그램, 책, 팜플랫 등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진보'에 맞서 보수주의를 재구축하는 데 앞장서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후 미국에서는 해리티지 재단, 건전한 경제를 위한 시민운동 등 보수적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민주당이 지원하는 자유주의 연구소들과 경쟁했다. 특히` 1차·3차 산업에 집중된 개인기업자본과 동맹을 맺어 막대한 정치자금을 바탕으로 미국 자본가 집단의 요구를 표출했다. 이러한 요구는 조세삭감, 노동신축화, 군비증강 등 레이거노믹스로 수용된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보수주의 흐름은 낙태, 동성애, 포르노, 마약, 청소년 범죄 등 미국 사회의 첨예한 이슈들에 대해서 복음주의적 기독교 집단 - 미국 기독교세력은 1940년대에서부터 70년대까지는 세속의 정치·사회적 이슈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들이 강조했던 전통적 가치관은 급진주의와 자유주의적 세속주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 - 이 주장하는 헌법의 남녀동등권 반대, 동성애권 반대, 낙태 반대 등 쟁점을 이동하며 이른바 단일 이슈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월남전과 워터게이트 등으로 추락한 전통적인 보수주의 진영은 전열을 재정비했고 결국 1980년 공화당의 레이건 행정부가 출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2) 신보수주의(네오콘)의 출현: 급진주의와 (뉴딜)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회의 또 한편으로 미국에서는 동시에 오늘날 네오콘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보수주의자들이 점차 공화당을 지지하며 외교안보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들의 기원은 1940년대 <파티전 리뷰>(Partisan Review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부 트로츠키주의 그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소련의 동유럽 점령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반공(反共)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루즈벨트의 뉴딜 자유주의와 복지국가의 이념을 지지했다. 이들이 공격적인 보수주의로 전향하게 되는 계기는 1960년대 베트남전을 비판하며 성장한 급진주의의 등장이었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SDS)이 결성되고 신좌파운동이 출현하며 몇몇 대학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학생시위가 확산되었다 (1964년 버클리대학, 1968년 콜롬비아대학). 이때 '네오콘'의 원조로 불리는 어빙 크리스톨 등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급진주의에 무기력한 민주당의 자유주의에 실망하여 점차 민주당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또한 1960년대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아래에서 추진된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과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등의 복지 프로그램은 이들이 보기에 빈민의 자활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복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미혼모를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가족의 해체로 귀결된 전형적인 실패작이었다. 네오콘의 논리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와 차별의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자유시장경제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능케 함으로써 기업가정신이 발전하여 새로운 부가 창출될 수도 있고,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차별을 시정하는 강력한 反차별 제도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차라리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탐욕과 이기심이며, 정직, 근면, 책임감, 융통성, 친절, 타인의 필요와 이해에 대한 관심을 증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5) 게다가 이들은 1970년대 미국의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복음주의 및 기존 보수주의의 주장과 결합하는데, 앞서 낙태나 동성애에 대한 반대, 전통적 가족의 수호라는 점에서 일치할 뿐 아니라 외교안보정책에서도 전통적인 우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동맹의식도 공통적이다. 결국 미국식 선거제도의 악명을 높였던 2000년 대선에서 네오콘 세력은 복음주의 기독교 집단과 본격적인 유대관계를 구축했다. 게다가 네오콘들은 비인격적이며 물질주의적이고 개인주의·자유지상주의적인 대중문화의 공격으로부터 미국적 가치관과 문화를 방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들의 주장은 경제적 자유와 공동체적 가치를 위해서 유대-기독교의 가르침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유대-기독교는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도덕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속 종교'인 좌파 유토피아주의와 경쟁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경택, 2005). 네오콘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결합하면서 보수주의의 현대화, 이론화(?)에 조력하고 있다. 네오콘이 민주당 지지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70년대 후반 카터 행정부의 이른바 '인권외교'였다. 네오콘은 카터 행정부가 제3세계 권위주의 정권을 압박하는 '인권외교'를 통해 소련과 공산주의라는 큰 위협을 앞에 두고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동맹국을 소외시키고 있다며 레이건의 공화당 대선 캠프에 합류한다.6)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엘리엇 에이브럼스나 리처드 펄 등 신보수주의자들이 중용되었으며 대외적으로도 1970년대 데탕트와 단절하고 군비확장('스타워즈' 계획)과 동시에 강경하고 적극적인 對소련 압박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리한 군비의 부담을 이기지 못한 소련이 1985년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고, 1980년대 말 동유럽 국가들이 몰락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절정기를 구가했던 신보수주의자들은 반공이라는 대외명분 자체가 소멸함에 따라 오히려 입지가 약해지고 내부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한다 (손봉권, 2005).7) 9·11 테러사건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신보수주의자들이 '네오콘'이라는 별칭으로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 밖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미국은 이제 도처에서 보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위험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3) 9·11 이후 신보수주의의 보편화, 신자유주의의 신보수주의적 수렴? 탈냉전 이후 신보수주자들은 고립주의로 회귀하려는 공화당보다는 인권보호와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사용하겠다는 클린턴의 '대담한 주장'에 마음이 이끌리기도 했다. 냉전구도의 소멸 이후 소말리아 사태와 보스니아에서의 인종청소를 목격하며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가치를 부정하거나 위협하는 악의 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세계질서 유지를 위해 미국이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정치적 경제적 자유의 세계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위해 국방비를 늘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상윤, 2005). 네오콘의 일부세력은 공화당의 강경 매파그룹(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과 연합하여 1996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결성하고 9·11테러를 통해 명실상부한 미국의 대안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PNAC를 결성한 세력들은 작은 정부를 지지하고 해외개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자와는 달리 강한 정부와 군사력의 증강을 지지한다. 이들은 불량국가를 무너뜨리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여 중동분쟁 해결과 체제전환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거나('우익 윌슨파')와 미국의 개입과 군사적 강경노선을 유지하되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또 다른 위협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잭슨적 일방주의자') 주장한다. 미국의 자본과 군사력을 상징하는 두 곳을 공격한 9·11 테러는 다른 정치세력에 비해 네오콘만이 유일하게 뚜렷한 전망을 지니고 있고 진정으로 세계의 혼란과 무질서를 걱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짜내려 노력하는 세력으로 돋보이게 만들었다. 2000년 대선이 주로 사회·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선거운동이 이루어졌음에 반해, 2004년 대선은 외교안보 정책이 단연 압도적으로 여타의 쟁점을 압도했다. 미국 민주당은 부시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비판했으나 이는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전통적인 우방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엽적인 문제제기일 뿐이었다. 오히려 민주당과 공화당은 국토안보의 핵심의제로서 대테러전쟁의 수행, 대테러전쟁의 핵심의제로서 핵확산 방지, 이를 위한 (핵)선제공격 불사라는 점에서 서로 수렴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국제적 협력을 추구하는 다자주의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방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자적 일방주의', 혹은 '다자주의의 융단장갑 속에서의 일방주의 철권'이 존재할 뿐이다 (백승욱, 2005). 이처럼 국제주의 보수파로서 네오콘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주장은 공화당과 민주당 뿐 아니라 평범한 미국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며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과 세계를 '구원'하려는 이들의 전략은 군비증강을 위한 무리한 재정적자와 (세계 최강이지만)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한 군사력으로 인해 실패할 공산이 크다 (토드, 2003). 이들의 시도는 평화와 안정과는 거리가 먼 무한전쟁을 야기할 뿐이다. 3. 신자유주의 속에서 신보수주의의 수렴과 신자유주의의 '반동적' 전환 미국에서 네오콘의 주장이 큰 틀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새로운 수렴을 구성하는 데 강력한 구심으로 작동하고 있듯이 한국에서도 단지 뉴라이트라는 집단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뉴라이트가 등장한 후 지배계급의 전략이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미국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신자유주의는 금융적 팽창을 거듭하며 호황을 누렸지만 이제는 민주당마저 전쟁과 테러에 대해 오히려 공화당의 무능을 질책하며 대테러전쟁의 중요성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신보수주의 의제는 공화당이나 한나라당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 있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이미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과 그리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미 그들이 주장하는 질서자유주의, 상생의 자유주의, 공동체 자유주의는 참여정부의 국정목표인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성찰적 민주주의, 토론민주주의와 대동소이하고, 법치주의는 '원칙과 신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임혁백, 2004). 네오콘이 주도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태도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으로 드러났던 바, 뉴라이트가 제시하는 한미동맹 강화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북한에 대한 이들의 호전적인 민주화 운동 역시 북한의 시장경제로의 진입을 유도하려는 노무현정권의 대북정책과 본질적으로 다른 주장이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른바 시장경제에 대한 뉴라이트의 주문은 지난 10여 년 동안의 자유화·개방화로 인해 이미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을 초국적 투자자들이 내세우는 '시장의 법칙'에 맡겨놓았던 'IMF 지부장'과 그의 후계자에게 오히려 반가운 주문이 아닐 수 없다. 즉, 보수주의를 앞세우며 호전적으로 현 집권세력을 공격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들은 김대중 정권 이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재편과 차별적인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공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공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돗자리를 깔아주고 있다. 뉴라이트의 출현은 단지 '보수꼴통'의 출현이 아니라 앞으로 현재의 집권세력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의 우경화·보수화를 촉진하는 촉매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8) 뉴라이트가 단지 현 집권세력의 뒤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다고 얕잡아 볼 것이 아니라, 뉴라이트가 지배세력의 보수화와 우경화를 촉진하며 현존하는 체계의 위기를 여성과 노동자에게 전가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지배계급의 시도가 민중의 저항과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한에서는 앞으로 필연적으로 훨씬 야만적인 정세가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 뉴라이트 비판이 '무기의 비판'이 되려면 바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운동의 형성, 대안적인 주체형성의 과제가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자료※ 마상윤(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 - 탈냉전부터 이라크 전쟁까지」;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백승욱(2005), 「미국 신보수파 주도 아래의 새로운 세계질서」;백승욱 편저,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미국헤게모니의 역사』, 그린비 손봉권(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1930년대에서 레이건 행정부 시기까지」;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오경택(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정치이념의 구성과 주장」;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이삼성(1993),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 민족주의』, 한길사 임혁백(2004), 「한국의 뉴라이트 배경과 전망」;『관훈저널』2004년 겨울호 엠마뉘엘 토드(2003), 주경철 옮김, 『제국의 몰락』, 까치 1) 〈자유주의연대 창립선언문〉(2004.11.24)에 나온 말이다.본문으로 2) 자유주의연대(www.486.or.kr)의 홈페이지나 시사웹진 뉴라이트닷컴(www.new-right.com)의 홈페이지에는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각종 칼럼과 토론회 자료가 등록되어 있다.본문으로 3) 임혁백(2004)는 '뉴라이트'운동을 한나라당의 '선진화 프로젝트'에 대한 호응으로 해석한다.본문으로 4) 파웰 메모는 변호사인 루이스 파웰(Lewis Powell)이 1971년 8월23일 당시 미상공회의소 의장 스나이더(Eugene B. Snyder)에게로 보낸 "미국의 자유기업제도에 대한 공격"이란 제목의 메모를 가리키는 것인데 2개월 후 파웰은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된다.본문으로 5) 이들은 또한 빈곤의 문제 역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기대치도 상승해서 심화된 것으로 인식될 뿐이며, 과거의 시점에 비해서는 오히려 현재의 최극빈층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에 비해서는 몇 배나 더 잘 살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은 빈곤은 감소했다"는 것이다. 현대 빈곤문제를 고대 노예의 삶과 비교하라는 의미인가?본문으로 6) 그러나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란 이중적이었고 집권 초기에 한정되었다. 카터가 무기수출을 규제하고 국방예산을 감축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지역 안보에 대한 책임을 친미 동맹국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서 동맹국들이 추구했던 자주국방은 사실상 미제무기로 무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카터 행정부가 권위주의/독재국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취한 조치는 '성명외교'에 머무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이란과 니카라과에서 친미정권이 무너지고 반미 혁명정권이 세워지자 '인권외교'는 카터 행정부 말기인 1979-80년 사이에 CIA의 해외공작을 통한 공작외교와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이삼성, 1993: 82-90).본문으로 7)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했을 때 신보수주의 진영은 여전히 소련의 박멸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과,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예전의 고립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양분되었다.본문으로 8) 일례로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국민전선(FN)의 르펜이라는 극우파가 결선에 올라 프랑스인들을 경악에 빠트린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적 수사를 늘어놓은 르펜에 대항하여 프랑스 시민들은 우파의 시라크를 당선시켰지만 그는 르펜의 인종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이민자들에 대한 배제와 탄압을 강화하였고 중도-좌파(?) 정당인 프랑스사회당 역시 날로 악화되는 치안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준비하며 사실상 인종주의적 의제에서 수렴되어가고 있다. 즉 극우파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기존 가치관을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비난받지만 정작 그들이 주장한 배제의 논리와 가치체계는 이미 모든 경쟁자들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 2005-06-03

    미국의 '네오콘'을 통해 본 남한 '뉴라이트 운동'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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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네오콘'을 통해 본 남한 '뉴라이트 운동'의 전망 정 희 찬 | 정책편집부장 1. 뉴라이트운동의 등장 :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위기에 빠져있다."1) 이른바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지난해 동아일보가 <뉴라이트, 침묵에서 행동으로>라는 연재기사를 기획하면서 자유주의연대와 뉴라이트를 표방한 여러 단체들이 세력화하면서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연대(2004년 11월 2일), 교과서포럼(2005년 1월 25일), 뉴라이트싱크넷(3월 24일), 시사웹진 뉴라이트(4월 1일)는 출범 즉시 각종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과거 '주사파' 출신 인사나 김진홍 목사 등 보수적 기독교단체를 이끌고 있는 종교계 인사가 주축이 된 이들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386'이라 부른다 (여기서 '486'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올드 레프트'나 '올드 라이트'와 차별적인 자신들이 혼란과 절망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칭 '건강한 보수'를 주장하고 있는 이들 '신보수'의 주장은 자유주의연대이나 뉴라이트싱크넷의 창립선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2) ①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역사: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통해 냉전과 공산화의 위험, 빈곤을 극복하여 세계 10위권의 산업국가로 발전했을 뿐 아니라 1987년 이후 민주주의 정착에도 성공했다. ② 현 집권세력의 위험한 '자학사관': 현 집권세력은 건국과 산업화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절차적 수준이 아니라 과거 반체제세력이 주장하는 민중민주주의와 유사한 참여민주주의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들은 또한 민족공조와 노조를 앞세워 각각 한미동맹과 기업을 대체하려고 한다. ③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反시장주의적이고 대중선동형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現집권세력에게 전적으로 있다: 외국자본과 거대노조가 득세하고 분배와 균형의 추구는 성장둔화와 빈곤의 증가를 초래했다. 민족공조는 최악의 인권유린국가로서 핵무장을 시도하는 북한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의회권력과 행정권력 뿐 아니라 예술과 문화마저 이들이 장악하여 서로 권력투쟁을 일삼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이념, 세대, 지역 간 갈등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④뉴라이트운동은 기득권에 안주하며 부패한 낡은 보수와 단절하고, 민주화세력의 위험한 민족주의적 민중주의가 아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하고 세계화, 정보화, 자유화의 대세에 발맞추어 선진한국으로의 질적 도약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상이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의 주장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지난해 여름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서 한나라당 부설기관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인 박세일 의원이 발제한 <나라의 선진화와 당의 진로>라는 제목의 문서에 기반하고 있다.3) 이 문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현정부의 주축을 이루는 민주화 세력을 겨냥하여) 1980년대 "친북 반체제적인 반독재투쟁의 잔재인 '반시장, 반자유' 세력과의 대결을 통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주도한 김대중 정권과 이를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반시장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어떤 이론체계에 근거하여 출현했다기보다는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현 집권세력에게 전가함으로써 반사이익을 노리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은 지난 30년 동안 남한 지배계급의 지주였던 '반공-발전주의'를 해체하고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통해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분파를 보수야당-자유주의 세력으로 대체하였다. 게다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연거푸 패한 결과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기존 지배계급 분파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현된 것이었으리라. 1997년 대선을 통해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수평적 정권교체'의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등장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IMF 서울 지부장'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철저하게 월스트리트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금융시장을 부양하려는 그의 경제정책은 2000년 절정에 달한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불가피하게 측근들과 여당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로 귀결되었다. 재임 중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라는 명예는 빛이 바랬고 남한 자본주의의 동요는 정권에 대한 불안정한 지지율로 직결되었다. 김대중 정권의 충실한 후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지난 신자유주의 구조정의 결과 등장한 빈곤과 청년실업, 불안정노동이라는 쟁점을 '참여 복지'라는 허울좋은 수식어로 은폐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오히려 조직된 노동자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강화하면서 한국경제의 구원자로서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신화를 유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혁의 장미빛 환상이 잿빛 현실로 드러난 현실에서 현 집권세력에 대한 지배계급 내 보수적 분파들의 선전·선동은 나날이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뉴라이트'는 바로 이러한 지배계급 내에서의 동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 '뉴라이트'에 비견할 수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출현과 함께 반동적이고 공격적인 보수주의가 출현했다. 비록 양자 사이의 시차는 존재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상황은 한국과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있고 나아가 '뉴라이트' 운동의 향후 전망을 조망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2. 미국의 네오콘(Neo-con) : 미국의 쇠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 (1) 1970년대 급진주의 도전에 대항한 공격적 보수주의의 반동 '뉴라이트운동'의 원조 격인 이른바 네오콘이 등장한 미국 역시 1970년대 경제불황과 베트남전 패배, 급진주의 페미니즘, 흑인민권운동 등 진보주의 운동의 성장에 대한 보수주의 반동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미국 내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투쟁과 흑인민권운동이 성장하며 기존 사회의 가치관과 질서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급진학생운동(68운동), 혁명과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시도했던 중남미의 좌파(쿠바와 칠레, 니카라과), 수에즈운하를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되찾은 이집트의 나세르가 제창한 중동의 아랍민족주의와 제3세계 국가들의 '비동맹주의' 등은 미국의 지배계급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서 이른바 '파웰 메모'4)로 유명한 일화는 바로 각종 형태의 자유주의·진보주의를 미국 내부의 적으로 지목하고 이들과 대결해야 한다는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를 드러낸다. 파웰은 공산주의자, 뉴레프트를 비롯한 혁명주의자들이 대학과 언론계, 문화예술계에 침투하여 미국의 정치와 경제체제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기업은 대학의 보수적 학생을 양성하고 진보적 교수를 보수적 교수로 대체해야하고 TV프로그램, 책, 팜플랫 등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진보'에 맞서 보수주의를 재구축하는 데 앞장서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후 미국에서는 해리티지 재단, 건전한 경제를 위한 시민운동 등 보수적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민주당이 지원하는 자유주의 연구소들과 경쟁했다. 특히` 1차·3차 산업에 집중된 개인기업자본과 동맹을 맺어 막대한 정치자금을 바탕으로 미국 자본가 집단의 요구를 표출했다. 이러한 요구는 조세삭감, 노동신축화, 군비증강 등 레이거노믹스로 수용된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보수주의 흐름은 낙태, 동성애, 포르노, 마약, 청소년 범죄 등 미국 사회의 첨예한 이슈들에 대해서 복음주의적 기독교 집단 - 미국 기독교세력은 1940년대에서부터 70년대까지는 세속의 정치·사회적 이슈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들이 강조했던 전통적 가치관은 급진주의와 자유주의적 세속주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 - 이 주장하는 헌법의 남녀동등권 반대, 동성애권 반대, 낙태 반대 등 쟁점을 이동하며 이른바 단일 이슈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월남전과 워터게이트 등으로 추락한 전통적인 보수주의 진영은 전열을 재정비했고 결국 1980년 공화당의 레이건 행정부가 출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2) 신보수주의(네오콘)의 출현: 급진주의와 (뉴딜)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회의 또 한편으로 미국에서는 동시에 오늘날 네오콘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보수주의자들이 점차 공화당을 지지하며 외교안보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들의 기원은 1940년대 <파티전 리뷰>(Partisan Review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부 트로츠키주의 그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소련의 동유럽 점령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반공(反共)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루즈벨트의 뉴딜 자유주의와 복지국가의 이념을 지지했다. 이들이 공격적인 보수주의로 전향하게 되는 계기는 1960년대 베트남전을 비판하며 성장한 급진주의의 등장이었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SDS)이 결성되고 신좌파운동이 출현하며 몇몇 대학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학생시위가 확산되었다 (1964년 버클리대학, 1968년 콜롬비아대학). 이때 '네오콘'의 원조로 불리는 어빙 크리스톨 등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급진주의에 무기력한 민주당의 자유주의에 실망하여 점차 민주당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또한 1960년대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아래에서 추진된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과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등의 복지 프로그램은 이들이 보기에 빈민의 자활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복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미혼모를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가족의 해체로 귀결된 전형적인 실패작이었다. 네오콘의 논리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와 차별의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자유시장경제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능케 함으로써 기업가정신이 발전하여 새로운 부가 창출될 수도 있고,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차별을 시정하는 강력한 反차별 제도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차라리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탐욕과 이기심이며, 정직, 근면, 책임감, 융통성, 친절, 타인의 필요와 이해에 대한 관심을 증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5) 게다가 이들은 1970년대 미국의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복음주의 및 기존 보수주의의 주장과 결합하는데, 앞서 낙태나 동성애에 대한 반대, 전통적 가족의 수호라는 점에서 일치할 뿐 아니라 외교안보정책에서도 전통적인 우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동맹의식도 공통적이다. 결국 미국식 선거제도의 악명을 높였던 2000년 대선에서 네오콘 세력은 복음주의 기독교 집단과 본격적인 유대관계를 구축했다. 게다가 네오콘들은 비인격적이며 물질주의적이고 개인주의·자유지상주의적인 대중문화의 공격으로부터 미국적 가치관과 문화를 방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들의 주장은 경제적 자유와 공동체적 가치를 위해서 유대-기독교의 가르침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유대-기독교는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도덕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속 종교'인 좌파 유토피아주의와 경쟁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경택, 2005). 네오콘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결합하면서 보수주의의 현대화, 이론화(?)에 조력하고 있다. 네오콘이 민주당 지지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70년대 후반 카터 행정부의 이른바 '인권외교'였다. 네오콘은 카터 행정부가 제3세계 권위주의 정권을 압박하는 '인권외교'를 통해 소련과 공산주의라는 큰 위협을 앞에 두고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동맹국을 소외시키고 있다며 레이건의 공화당 대선 캠프에 합류한다.6)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엘리엇 에이브럼스나 리처드 펄 등 신보수주의자들이 중용되었으며 대외적으로도 1970년대 데탕트와 단절하고 군비확장('스타워즈' 계획)과 동시에 강경하고 적극적인 對소련 압박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리한 군비의 부담을 이기지 못한 소련이 1985년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고, 1980년대 말 동유럽 국가들이 몰락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절정기를 구가했던 신보수주의자들은 반공이라는 대외명분 자체가 소멸함에 따라 오히려 입지가 약해지고 내부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한다 (손봉권, 2005).7) 9·11 테러사건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신보수주의자들이 '네오콘'이라는 별칭으로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 밖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미국은 이제 도처에서 보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위험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3) 9·11 이후 신보수주의의 보편화, 신자유주의의 신보수주의적 수렴? 탈냉전 이후 신보수주자들은 고립주의로 회귀하려는 공화당보다는 인권보호와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사용하겠다는 클린턴의 '대담한 주장'에 마음이 이끌리기도 했다. 냉전구도의 소멸 이후 소말리아 사태와 보스니아에서의 인종청소를 목격하며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가치를 부정하거나 위협하는 악의 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세계질서 유지를 위해 미국이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정치적 경제적 자유의 세계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위해 국방비를 늘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상윤, 2005). 네오콘의 일부세력은 공화당의 강경 매파그룹(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과 연합하여 1996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결성하고 9·11테러를 통해 명실상부한 미국의 대안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PNAC를 결성한 세력들은 작은 정부를 지지하고 해외개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자와는 달리 강한 정부와 군사력의 증강을 지지한다. 이들은 불량국가를 무너뜨리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여 중동분쟁 해결과 체제전환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거나('우익 윌슨파')와 미국의 개입과 군사적 강경노선을 유지하되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또 다른 위협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잭슨적 일방주의자') 주장한다. 미국의 자본과 군사력을 상징하는 두 곳을 공격한 9·11 테러는 다른 정치세력에 비해 네오콘만이 유일하게 뚜렷한 전망을 지니고 있고 진정으로 세계의 혼란과 무질서를 걱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짜내려 노력하는 세력으로 돋보이게 만들었다. 2000년 대선이 주로 사회·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선거운동이 이루어졌음에 반해, 2004년 대선은 외교안보 정책이 단연 압도적으로 여타의 쟁점을 압도했다. 미국 민주당은 부시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비판했으나 이는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전통적인 우방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엽적인 문제제기일 뿐이었다. 오히려 민주당과 공화당은 국토안보의 핵심의제로서 대테러전쟁의 수행, 대테러전쟁의 핵심의제로서 핵확산 방지, 이를 위한 (핵)선제공격 불사라는 점에서 서로 수렴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국제적 협력을 추구하는 다자주의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방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자적 일방주의', 혹은 '다자주의의 융단장갑 속에서의 일방주의 철권'이 존재할 뿐이다 (백승욱, 2005). 이처럼 국제주의 보수파로서 네오콘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주장은 공화당과 민주당 뿐 아니라 평범한 미국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며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과 세계를 '구원'하려는 이들의 전략은 군비증강을 위한 무리한 재정적자와 (세계 최강이지만)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한 군사력으로 인해 실패할 공산이 크다 (토드, 2003). 이들의 시도는 평화와 안정과는 거리가 먼 무한전쟁을 야기할 뿐이다. 3. 신자유주의 속에서 신보수주의의 수렴과 신자유주의의 '반동적' 전환 미국에서 네오콘의 주장이 큰 틀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새로운 수렴을 구성하는 데 강력한 구심으로 작동하고 있듯이 한국에서도 단지 뉴라이트라는 집단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뉴라이트가 등장한 후 지배계급의 전략이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미국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신자유주의는 금융적 팽창을 거듭하며 호황을 누렸지만 이제는 민주당마저 전쟁과 테러에 대해 오히려 공화당의 무능을 질책하며 대테러전쟁의 중요성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신보수주의 의제는 공화당이나 한나라당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 있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이미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과 그리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미 그들이 주장하는 질서자유주의, 상생의 자유주의, 공동체 자유주의는 참여정부의 국정목표인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성찰적 민주주의, 토론민주주의와 대동소이하고, 법치주의는 '원칙과 신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임혁백, 2004). 네오콘이 주도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태도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으로 드러났던 바, 뉴라이트가 제시하는 한미동맹 강화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북한에 대한 이들의 호전적인 민주화 운동 역시 북한의 시장경제로의 진입을 유도하려는 노무현정권의 대북정책과 본질적으로 다른 주장이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른바 시장경제에 대한 뉴라이트의 주문은 지난 10여 년 동안의 자유화·개방화로 인해 이미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을 초국적 투자자들이 내세우는 '시장의 법칙'에 맡겨놓았던 'IMF 지부장'과 그의 후계자에게 오히려 반가운 주문이 아닐 수 없다. 즉, 보수주의를 앞세우며 호전적으로 현 집권세력을 공격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들은 김대중 정권 이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재편과 차별적인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공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공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돗자리를 깔아주고 있다. 뉴라이트의 출현은 단지 '보수꼴통'의 출현이 아니라 앞으로 현재의 집권세력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의 우경화·보수화를 촉진하는 촉매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8) 뉴라이트가 단지 현 집권세력의 뒤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다고 얕잡아 볼 것이 아니라, 뉴라이트가 지배세력의 보수화와 우경화를 촉진하며 현존하는 체계의 위기를 여성과 노동자에게 전가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지배계급의 시도가 민중의 저항과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한에서는 앞으로 필연적으로 훨씬 야만적인 정세가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 뉴라이트 비판이 '무기의 비판'이 되려면 바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운동의 형성, 대안적인 주체형성의 과제가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자료※ 마상윤(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 - 탈냉전부터 이라크 전쟁까지」;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백승욱(2005), 「미국 신보수파 주도 아래의 새로운 세계질서」;백승욱 편저,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미국헤게모니의 역사』, 그린비 손봉권(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1930년대에서 레이건 행정부 시기까지」;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오경택(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정치이념의 구성과 주장」;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이삼성(1993),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 민족주의』, 한길사 임혁백(2004), 「한국의 뉴라이트 배경과 전망」;『관훈저널』2004년 겨울호 엠마뉘엘 토드(2003), 주경철 옮김, 『제국의 몰락』, 까치 1) 〈자유주의연대 창립선언문〉(2004.11.24)에 나온 말이다.본문으로 2) 자유주의연대(www.486.or.kr)의 홈페이지나 시사웹진 뉴라이트닷컴(www.new-right.com)의 홈페이지에는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각종 칼럼과 토론회 자료가 등록되어 있다.본문으로 3) 임혁백(2004)는 '뉴라이트'운동을 한나라당의 '선진화 프로젝트'에 대한 호응으로 해석한다.본문으로 4) 파웰 메모는 변호사인 루이스 파웰(Lewis Powell)이 1971년 8월23일 당시 미상공회의소 의장 스나이더(Eugene B. Snyder)에게로 보낸 "미국의 자유기업제도에 대한 공격"이란 제목의 메모를 가리키는 것인데 2개월 후 파웰은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된다.본문으로 5) 이들은 또한 빈곤의 문제 역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기대치도 상승해서 심화된 것으로 인식될 뿐이며, 과거의 시점에 비해서는 오히려 현재의 최극빈층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에 비해서는 몇 배나 더 잘 살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은 빈곤은 감소했다"는 것이다. 현대 빈곤문제를 고대 노예의 삶과 비교하라는 의미인가?본문으로 6) 그러나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란 이중적이었고 집권 초기에 한정되었다. 카터가 무기수출을 규제하고 국방예산을 감축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지역 안보에 대한 책임을 친미 동맹국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서 동맹국들이 추구했던 자주국방은 사실상 미제무기로 무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카터 행정부가 권위주의/독재국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취한 조치는 '성명외교'에 머무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이란과 니카라과에서 친미정권이 무너지고 반미 혁명정권이 세워지자 '인권외교'는 카터 행정부 말기인 1979-80년 사이에 CIA의 해외공작을 통한 공작외교와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이삼성, 1993: 82-90).본문으로 7)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했을 때 신보수주의 진영은 여전히 소련의 박멸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과,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예전의 고립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양분되었다.본문으로 8) 일례로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국민전선(FN)의 르펜이라는 극우파가 결선에 올라 프랑스인들을 경악에 빠트린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적 수사를 늘어놓은 르펜에 대항하여 프랑스 시민들은 우파의 시라크를 당선시켰지만 그는 르펜의 인종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이민자들에 대한 배제와 탄압을 강화하였고 중도-좌파(?) 정당인 프랑스사회당 역시 날로 악화되는 치안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준비하며 사실상 인종주의적 의제에서 수렴되어가고 있다. 즉 극우파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기존 가치관을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비난받지만 정작 그들이 주장한 배제의 논리와 가치체계는 이미 모든 경쟁자들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 2005-06-03

    룰라, 한국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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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룰라, 한국에 오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소중한' 만남 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이하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 공식적인 명분은 유엔과 한국 정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6차 정부혁신 세계포럼 참가다. 하지만 190명이 넘는 기업인 방문단의 구성과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방문하여 브라질 투자유치 설명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이 보여주듯 기실 주된 목적은 한국과 일본, 나아가 아시아 지역의 브라질에 대한 투자유치를 촉진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고 외국자본에 투자를 구걸하며 온갖 반-노동자적, 반-민중적인 조치들을 약속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고 반-주변부 국가 수반들에게는 일상 활동이 되었지만, 룰라가 적극적으로 그 대열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일상다반사로 넘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노동자 출신이며 노동자들의 정당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한 때 전 세계 좌파의 유력한 희망으로 부상했던 그가 투자유치단의 단장 역할을 성심을 다해 수행하고 있는 현실은 씁쓸하게 비웃고 말 해프닝은 아니다(당선 이후 그는 이미 수십 차례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단지 룰라 개인이 초심을 잃고 변절했기 때문도 아니고 미국과 국제금융기구, 초민족적 자본의 압박 속에서 룰라가 어쩔 수 없이 택한 고육지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룰라는 집권 이후 경제, 사회 전반에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고, 향후에도 룰라는 이런 정책들을 심화하면 심화했지 스스로 철회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룰라가 노동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거듭난 과정과 원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현재의 룰라 정부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지구 반대편 먼 곳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은 이미 지난 해 브라질을 방문하여 룰라가 자신과 비슷한 경력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과거 경력의 유사성 정도보다 현재 누구보다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유사성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룰라 정부에 대한 평가와 브라질의 상황은 무엇보다 한국의 사회운동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룰라의 당선 배경: 심각한 사회·경제 위기와 ‘잃은 자들의 동맹‘ 룰라의 대통령 당선에는 당시 브라질이 겪고 있던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 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선거 캠페인 방식,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자당의 성격과 활동 변화라는 조건이 놓여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내용은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 공공부문과 국유기업에 있어서의 대규모 사유화, 경제적 탈규제화, 환율 안정화를 위한 ‘헤알 플랜’1), 강력한 긴축 정책 등이다. 이런 정책들은 브라질 경제의 위기를 더욱 심화했을 뿐이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브라질 경제성장률은 평균 1.7%로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았다. 이런 정책들은 외채를 줄이기는커녕 두 배로 증가시켰고, 국가 소유의 그나마 수익성 있는 기업들을 외국 자본에 팔아넘기는 효과를 낳았다2).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특히 제조업)이 초민족적 자본의 소유로 넘어갔거나 그들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그 결과 산업 자체가 외국인 투자자와 외국 시장에 종속되었다. 이런 정책의 결과는 브라질 내외 초민족적 자본과 지배 엘리트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다수에게는 심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가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큰 역할을 했고 룰라는 이런 불만들을 적절히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룰라는 결코 균질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계급, 계층의 불만을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로 조직했다. 이는 당시 룰라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구성과 이를 활용한 선거 캠페인 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물론 대선 당시 룰라 지지자들의 가장 큰 부분은 전통적인 노동자당 지지자 즉, 조직된 노동자, 숙련/반숙련 노동자, 진보적 지식인, 비공식 부문 노동자,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들과 적대적이었던 계급의 구성원들도 룰라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우선 제조업의 자본가들이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한 긴축 정책과 자유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룰라가 당선되면 다시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쓸 것으로 기대했다. 또 다른 지지자들은 토지귀족으로서 오랫동안 과두제를 형성하여 지역을 지배해왔던 계층이다. 이들은 금융의 이해가 우선되면서 자신의 지배력이 침식당했다고 생각했으며, 룰라를 지지함으로써 의회와 지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시의 중간 계층 사람들은 룰라나 노동자당의 급진적인 수사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직업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각종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불만으로 룰라를 지지했다. 노동자당의 전통적인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이런 불균등한 지지자들의 공통점이라고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잃은 것’이 있다는 점 밖에 없었지만, 룰라는 이것을 ‘잃은 자들의 동맹’으로 조직했다. 물론 이렇게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이해관계와 기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룰라는 구체적인 정책과 전망 제시는 회피한 채, 모호한 수사와 감수성을 자극하는 언사들로 집권에 성공했다. 대선 당시 룰라가 제시한 가장 구체적인 약속이 카르도주(그도 한 때 종속이론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시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IMF 협정이었다는 사실은 룰라가 ‘잃은 자들’의 요구를 “온정적인 동북부인, 룰라”, “새로운 현실주의” 등의 수사로 동원했던 측면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룰라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 현재 룰라 정부가 그 이전의 카르도주 정부보다 더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룰라 자신은 이런 정책이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극약” 처방이며, 이를 통해 경제가 안정되면 민중적 의제를 추진할 수 있으니 브라질 민중들이 조금만 더 “인내”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룰라가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유지해 온 정책 기조와 그 정책을 고안·집행하는 내각의 성격을 봤을 때, 그리고 실제 집권 이후 보여준 룰라의 행보를 봤을 때, 이런 요구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룰라는 후보 시절 IMF와의 협약을 통해서 카르도주 시절의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외채 지불과 강력한 긴축정책, 인플레이션 억제, 민영화/사유화 정책 고수, 노동부문 개혁 등이 그 내용이다. 당선 이후 그는 외채 지불을 충족하기 위한 흑자 재정 비율을 카르도주 시절 IMF와 약속했던 GDP 대비 3.75%에서 4.25%로 상향조정했다. 외채 지불을 위한 흑자 재정은 대부분 사회 복지 예산의 삭감으로 충당되었다. 이런 정책은 외국인 투자자와 브라질 수출업자들에게는 거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인도, 러시아, 중국과 함께 브릭스(BRICs)로 주목받고 있는 현재 브라질 경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외국인 투자와 수출 산업이 성장의 엔진이라고 굳게 믿는 룰라 정부의 철학은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각종 인센티브 제공,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추진, 노동과 복지 관련 제도 완화, 연금 개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비롯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고금리에서 비롯되는 이윤과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은 주식시장에 거품을 형성하고3) 채권시장 수익률 상승을 이끌며 투기성 자본을 유인하고 있다. 게다가 룰라 정부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세금 면제 조치를 고안하고 있다.4) 브라질의 수출산업을 이끄는 것은 주로 농산물과 철광석, 펄프, 석유 등 원자재 산업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분야의 수출을 증대하기 위한 최선의 방향이 자유무역의 확산이라고 믿는다. 농산물, 광물, 석유 부문의 거대 수출기업들의 활로를 위해 그는 WTO와 FTAA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새로운 무역파트너 형성을 위해 세일즈맨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방한 기간 중 진행하는 투자유치 설명회를 보라). 브라질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5차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G-21)의 반발을 주도했는데, 이는 브라질의 농산물 수출기업들을 보호하고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룰라 정부의 전투적인 방어였지 세계화나 WTO 체제를 반대하고 제3세계 가난한 농민, 농업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룰라 정부는 FTA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사실 남미의 많은 민중들은 FTAA의 파괴적 효과를 인식하고 다양한 투쟁을 통해 FTAA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룰라의 바로 곁에도 FTAA를 반대하는 무토지농민(MST) 조직, 사회운동 조직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2002년에 FTAA 반대 국민투표를 조직하여 천만 명 이상 참가, 95% 이상의 반대라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룰라는 그 투표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노동자당에도 투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당선된 후에는 서비스 시장, 투자, 지적 재산권에 대한 미국의 개방 요구를 수용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농산품 등의 분야에서 무역장벽이 낮출 것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FTAA 협상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브라질 민중에게는 거대한 부담을 지우고,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흑자 재정 4.25% 유지, 세금 제도 개혁, 복지 축소와 같은 조치는 브라질 노동자, 빈민, 농민으로부터 금융자본, 수출기업, 외국인 투자자 및 채권자로 소득이 이전되는 효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실업률은 9.6%로 여전히 높고, 그나마 창출된 일자리의 대부분은 비공식 부문 노동, 비정규직 노동이다. 대선 당시 브라질 민중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장담했던 “기아 제로” 프로그램과 토지 개혁은 지금까지 실행되지 않고 있다. ‘잃은 자들의 동맹’을 관리하기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룰라가 신자유주의로부터 ‘잃은 자들’의 지지를 동원하여 당선되었다는 점은 일견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룰라 정부의 성격을 보여준다. 노동자 출신이고 노동자당의 후보였지만 룰라의 전략과 전망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았다. 룰라는 쿠바의 사회주의 모델이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보여주는 인민주의 모델(양자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조차 고려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FTAA 국민투표 거부, IMF와의 협약 등에서 드러나듯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편입할 준비를 해왔다. 그가 ‘잃은 자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던 것은 그들의 지지를 동원해야 당선될 수 있고, 그들의 불만과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전망을 실행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선거에서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비전은 회피한 채, 누구나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를 활용하고,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했다. 집권 이후 실제 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룰라는 자신의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정치 스타일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왔다. 우선 그는 자신의 과거 경력과 비천한 출신으로서 피지배계급에게 가지는 정서적 동정심을 활용한다. 그는 가난한 어린이를 마주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무토지 농민들을 만나서는 장난스럽게 그들의 모자를 쓰고 친밀감을 표시한다. 이런 모습은 노동자 출신, 운동의 경력 등과 결부되어 강력한 진실성을 획득하고, 그의 “극약” 처방이 끝나면 민중에게 혜택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자극한다. 룰라는 노동자에게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사회경제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서는 노·사·정 사이의 사회협약이 추진되었는데, 그 내용은 법인세 감축과 외국인 투자자 세금 혜택을 골자로 하는 세금 개혁, 노동 비용 절감과 복지 정책에서의 후퇴를 골자로 하는 사회안전망 개혁이었다. “노동자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후려치고 있는 꼴이지만, 노동자당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브라질노총(CUT)은 룰라 정부의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노·사·정 협의에 대한 반격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브라질노총의 상층부를 정권의 자문단, 입각 내정자, 노동자당의 선거 후보자로 흡수하고 보조금 등을 통해 포섭하는 룰라의 실질적 혜택도 작용한다. 게다가 룰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통치의 기반으로 활용하고 지난 해 한국을 방문했던 한 브라질 활동가는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룰라의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당의 지지도는 하락하고 있지만, 룰라 개인의 지지도는 여전히 60%를 웃돈다”고 말했다. , 자신의 내각, 특히 재무장관 팔로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팀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실제 브라질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정책이 거기에서 나오고, 일단 제출된 정책은 과감하게 실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당은 룰라의 정책을 승인하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다(선거 시기가 되면 선거 캠페인 수단으로 활용된다). 노동자당이 룰라 개인과 그 측근들의 정당이 된 것은 오랜 일이지만, 집권 후 룰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룰라는 자신에 대한 반대나 자신이 제출한 정책을 반대하는 노동자당 의원들에게는 출당의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의 권위와 지시를 관철시키고 있다. 물론 ‘잃은 자들의 동맹’이 룰라에 대한 각기 다른 기대를 실리적으로 조직, 동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룰라의 실질적인 행보와 정책이 브라질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점에서 룰라가 이 동맹을 언제까지 관리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룰라의 정치 스타일이 이런 불만과 갈등의 폭발을 잠재워온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룰라의 정치 스타일은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이고 인기 영합적이며 온정주의적인 수사를 활용하고 있지만, 이런 행태는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하고 사회운동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브라질 사회운동의 도전과 시사점 룰라 정부의 반-민중성이 점차 명확해지면서, 룰라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운동을 만들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지난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은 룰라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고, 룰라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것을 당내에 관철시키는 독단적인 방식에 반대하는 지식인, 활동가들이 노동자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만들기도 했다. 룰라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금속 노동자들, 도시의 불법 점거자들의 파업과 투쟁도 있었다. 이런 투쟁은 아직 소극적으로 룰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수준이고,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또 한 축에는 무토지농민운동(MST)이 있다. 대선 시기 룰라는 무토지농민운동이 자신의 당선에 방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들에게 모든 대중행동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그 대신 당선 후 토지 개혁을 통해 농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룰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들은 다시 투쟁에 나섰다. 무토지농민운동은 지난 5월 2일부터 농지 개혁 실행과 미국의 자유무역 반대, 이라크에서 철수 등을 요구하며 전국 순회 투쟁에 돌입했고, 17일 브라질리아 대통령궁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런 투쟁이 룰라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반대의 요구를 결집시키고, 새로운 대안을 형성해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투쟁과 저항이 거세질수록 룰라의 정치 행태도 강화될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의 일정 부분은 포섭하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투쟁의 통합력과 운동의 단결을 해치려 할 것이다. 실제로 룰라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의 파업은 무참히 짓밟았지만, 금속 노동자들에게는 일정 정도의 임금인상을 보장했다. 그리고 룰라가 언젠가는 초심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도 운동이 직면한 난관 중 하나다. 룰라는 초심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방은 스스로의 투쟁과 운동으로 쟁취해야 하고 자신의 해방이 다른 사람의 해방과 맞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운동의 이념과 원칙을 잃은 것이다. 결국 룰라는 점차 대중운동과 멀어졌고, 자신이 인민의 권리를 대변하는 정책으로 인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동자민중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그가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외부의 압력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운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룰라의 당선과 그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고,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운동의 중요한 과제일 것도 없다. ‘잃은 자들의 동맹’은 신자유주의 정치 공학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인민의 삶을 볼모로 한 자본주의 위기 지연 방식인 한 ‘잃은 자들’의 불만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이를 대변하겠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언제나 선거 전에는 가장 강력한 신자유주의 비판자였다. 선거 이후에는 이런저런 변명과 현실적인 이유로 가장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다(노무현도 마찬가지다). 변절한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대통령을 바꾸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배신은 반복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관리하며 삶을 파괴하는 것에 맞서 대중이 스스로의 투쟁을 조직하고, 상호 연대하고, 그들의 투쟁과 연대가 보편적인 권리와 요구로 확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사회운동의 과제일 따름이다. 1) 1994년부터 시행됐다가 실패한 경제 안정화 정책. 미국 달러와 브라질 헤알을 1대1의 환율로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막고 외자를 끌어들인다는 구상에서 시행된 정책이었고,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 인플레이션이 감소했고 자본유입도 두 배 이상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미국 달러의 강세가 나타나면서 여기에 고정된 헤알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어 브라질의 수출 경쟁력은 크게 약화됐다. 더욱이 시장개방의 조류와 맞물리면서 수입이 급증해 무역적자가 크게 확대됐고 이 때문에 외자를 더 끌어들이려 이자율을 올리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본문으로 2)카르도주 집권 시기 헤알 플랜의 결과로 외국인 투자가 쇄도했는데, 그 상당 부분은 공기업이나 공사합동기업을 매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1년에 진행된 외국자본조사는 외국 자본이 최소 20% 이상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1995년 6,322개에서 2000년 11,404개로 증가(80.4%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외국 자본이 진출한 기업의 주식 가치는 같은 기간에 3배가 뛰었지만, 고용은 증가하지 않았고 실업률은 더욱 높아졌다. 본문으로 3)브라질 주식시장지수(BOVESPA)는 2003년 1월 11,268에서 2003년 말 20,000 이상으로 오르면서 급상승했다. 2005년 현재까지 최고치는 29,455 최저치는 23,609를 기록했다. 본문으로 4)이런 조치는 외국인 직접투자가 카르도주 시절에 비해 절반 가까이 감소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 직접투자의 감소는 브라질이 외국인 투자에 대해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다. 카르도주 시절 외국인 직접투자의 대부분은 수익성 있는 공기업을 매입하기 위해 유입되었다. 이제 그런 공기업은 다 팔려서 남은 것이 거의 없다는 점과 주식시장의 거품이 직접투자보다는 투기성 투자를 유인하고 있다는 점이 외국인 직접투자 감소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원인보다는 투자 감소라는 결과만 놓고 한층 심화된 개방, 자유화, 탈규제 조치를 추진하는데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 2005-06-03

    룰라, 한국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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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룰라, 한국에 오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소중한' 만남 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이하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 공식적인 명분은 유엔과 한국 정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6차 정부혁신 세계포럼 참가다. 하지만 190명이 넘는 기업인 방문단의 구성과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방문하여 브라질 투자유치 설명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이 보여주듯 기실 주된 목적은 한국과 일본, 나아가 아시아 지역의 브라질에 대한 투자유치를 촉진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고 외국자본에 투자를 구걸하며 온갖 반-노동자적, 반-민중적인 조치들을 약속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고 반-주변부 국가 수반들에게는 일상 활동이 되었지만, 룰라가 적극적으로 그 대열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일상다반사로 넘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노동자 출신이며 노동자들의 정당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한 때 전 세계 좌파의 유력한 희망으로 부상했던 그가 투자유치단의 단장 역할을 성심을 다해 수행하고 있는 현실은 씁쓸하게 비웃고 말 해프닝은 아니다(당선 이후 그는 이미 수십 차례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단지 룰라 개인이 초심을 잃고 변절했기 때문도 아니고 미국과 국제금융기구, 초민족적 자본의 압박 속에서 룰라가 어쩔 수 없이 택한 고육지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룰라는 집권 이후 경제, 사회 전반에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고, 향후에도 룰라는 이런 정책들을 심화하면 심화했지 스스로 철회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룰라가 노동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거듭난 과정과 원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현재의 룰라 정부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지구 반대편 먼 곳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은 이미 지난 해 브라질을 방문하여 룰라가 자신과 비슷한 경력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과거 경력의 유사성 정도보다 현재 누구보다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유사성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룰라 정부에 대한 평가와 브라질의 상황은 무엇보다 한국의 사회운동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룰라의 당선 배경: 심각한 사회·경제 위기와 ‘잃은 자들의 동맹‘ 룰라의 대통령 당선에는 당시 브라질이 겪고 있던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 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선거 캠페인 방식,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자당의 성격과 활동 변화라는 조건이 놓여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내용은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 공공부문과 국유기업에 있어서의 대규모 사유화, 경제적 탈규제화, 환율 안정화를 위한 ‘헤알 플랜’1), 강력한 긴축 정책 등이다. 이런 정책들은 브라질 경제의 위기를 더욱 심화했을 뿐이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브라질 경제성장률은 평균 1.7%로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았다. 이런 정책들은 외채를 줄이기는커녕 두 배로 증가시켰고, 국가 소유의 그나마 수익성 있는 기업들을 외국 자본에 팔아넘기는 효과를 낳았다2).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특히 제조업)이 초민족적 자본의 소유로 넘어갔거나 그들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그 결과 산업 자체가 외국인 투자자와 외국 시장에 종속되었다. 이런 정책의 결과는 브라질 내외 초민족적 자본과 지배 엘리트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다수에게는 심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가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큰 역할을 했고 룰라는 이런 불만들을 적절히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룰라는 결코 균질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계급, 계층의 불만을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로 조직했다. 이는 당시 룰라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구성과 이를 활용한 선거 캠페인 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물론 대선 당시 룰라 지지자들의 가장 큰 부분은 전통적인 노동자당 지지자 즉, 조직된 노동자, 숙련/반숙련 노동자, 진보적 지식인, 비공식 부문 노동자,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들과 적대적이었던 계급의 구성원들도 룰라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우선 제조업의 자본가들이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한 긴축 정책과 자유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룰라가 당선되면 다시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쓸 것으로 기대했다. 또 다른 지지자들은 토지귀족으로서 오랫동안 과두제를 형성하여 지역을 지배해왔던 계층이다. 이들은 금융의 이해가 우선되면서 자신의 지배력이 침식당했다고 생각했으며, 룰라를 지지함으로써 의회와 지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시의 중간 계층 사람들은 룰라나 노동자당의 급진적인 수사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직업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각종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불만으로 룰라를 지지했다. 노동자당의 전통적인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이런 불균등한 지지자들의 공통점이라고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잃은 것’이 있다는 점 밖에 없었지만, 룰라는 이것을 ‘잃은 자들의 동맹’으로 조직했다. 물론 이렇게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이해관계와 기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룰라는 구체적인 정책과 전망 제시는 회피한 채, 모호한 수사와 감수성을 자극하는 언사들로 집권에 성공했다. 대선 당시 룰라가 제시한 가장 구체적인 약속이 카르도주(그도 한 때 종속이론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시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IMF 협정이었다는 사실은 룰라가 ‘잃은 자들’의 요구를 “온정적인 동북부인, 룰라”, “새로운 현실주의” 등의 수사로 동원했던 측면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룰라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 현재 룰라 정부가 그 이전의 카르도주 정부보다 더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룰라 자신은 이런 정책이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극약” 처방이며, 이를 통해 경제가 안정되면 민중적 의제를 추진할 수 있으니 브라질 민중들이 조금만 더 “인내”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룰라가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유지해 온 정책 기조와 그 정책을 고안·집행하는 내각의 성격을 봤을 때, 그리고 실제 집권 이후 보여준 룰라의 행보를 봤을 때, 이런 요구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룰라는 후보 시절 IMF와의 협약을 통해서 카르도주 시절의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외채 지불과 강력한 긴축정책, 인플레이션 억제, 민영화/사유화 정책 고수, 노동부문 개혁 등이 그 내용이다. 당선 이후 그는 외채 지불을 충족하기 위한 흑자 재정 비율을 카르도주 시절 IMF와 약속했던 GDP 대비 3.75%에서 4.25%로 상향조정했다. 외채 지불을 위한 흑자 재정은 대부분 사회 복지 예산의 삭감으로 충당되었다. 이런 정책은 외국인 투자자와 브라질 수출업자들에게는 거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인도, 러시아, 중국과 함께 브릭스(BRICs)로 주목받고 있는 현재 브라질 경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외국인 투자와 수출 산업이 성장의 엔진이라고 굳게 믿는 룰라 정부의 철학은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각종 인센티브 제공,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추진, 노동과 복지 관련 제도 완화, 연금 개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비롯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고금리에서 비롯되는 이윤과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은 주식시장에 거품을 형성하고3) 채권시장 수익률 상승을 이끌며 투기성 자본을 유인하고 있다. 게다가 룰라 정부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세금 면제 조치를 고안하고 있다.4) 브라질의 수출산업을 이끄는 것은 주로 농산물과 철광석, 펄프, 석유 등 원자재 산업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분야의 수출을 증대하기 위한 최선의 방향이 자유무역의 확산이라고 믿는다. 농산물, 광물, 석유 부문의 거대 수출기업들의 활로를 위해 그는 WTO와 FTAA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새로운 무역파트너 형성을 위해 세일즈맨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방한 기간 중 진행하는 투자유치 설명회를 보라). 브라질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5차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G-21)의 반발을 주도했는데, 이는 브라질의 농산물 수출기업들을 보호하고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룰라 정부의 전투적인 방어였지 세계화나 WTO 체제를 반대하고 제3세계 가난한 농민, 농업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룰라 정부는 FTA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사실 남미의 많은 민중들은 FTAA의 파괴적 효과를 인식하고 다양한 투쟁을 통해 FTAA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룰라의 바로 곁에도 FTAA를 반대하는 무토지농민(MST) 조직, 사회운동 조직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2002년에 FTAA 반대 국민투표를 조직하여 천만 명 이상 참가, 95% 이상의 반대라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룰라는 그 투표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노동자당에도 투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당선된 후에는 서비스 시장, 투자, 지적 재산권에 대한 미국의 개방 요구를 수용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농산품 등의 분야에서 무역장벽이 낮출 것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FTAA 협상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브라질 민중에게는 거대한 부담을 지우고,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흑자 재정 4.25% 유지, 세금 제도 개혁, 복지 축소와 같은 조치는 브라질 노동자, 빈민, 농민으로부터 금융자본, 수출기업, 외국인 투자자 및 채권자로 소득이 이전되는 효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실업률은 9.6%로 여전히 높고, 그나마 창출된 일자리의 대부분은 비공식 부문 노동, 비정규직 노동이다. 대선 당시 브라질 민중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장담했던 “기아 제로” 프로그램과 토지 개혁은 지금까지 실행되지 않고 있다. ‘잃은 자들의 동맹’을 관리하기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룰라가 신자유주의로부터 ‘잃은 자들’의 지지를 동원하여 당선되었다는 점은 일견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룰라 정부의 성격을 보여준다. 노동자 출신이고 노동자당의 후보였지만 룰라의 전략과 전망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았다. 룰라는 쿠바의 사회주의 모델이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보여주는 인민주의 모델(양자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조차 고려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FTAA 국민투표 거부, IMF와의 협약 등에서 드러나듯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편입할 준비를 해왔다. 그가 ‘잃은 자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던 것은 그들의 지지를 동원해야 당선될 수 있고, 그들의 불만과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전망을 실행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선거에서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비전은 회피한 채, 누구나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를 활용하고,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했다. 집권 이후 실제 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룰라는 자신의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정치 스타일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왔다. 우선 그는 자신의 과거 경력과 비천한 출신으로서 피지배계급에게 가지는 정서적 동정심을 활용한다. 그는 가난한 어린이를 마주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무토지 농민들을 만나서는 장난스럽게 그들의 모자를 쓰고 친밀감을 표시한다. 이런 모습은 노동자 출신, 운동의 경력 등과 결부되어 강력한 진실성을 획득하고, 그의 “극약” 처방이 끝나면 민중에게 혜택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자극한다. 룰라는 노동자에게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사회경제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서는 노·사·정 사이의 사회협약이 추진되었는데, 그 내용은 법인세 감축과 외국인 투자자 세금 혜택을 골자로 하는 세금 개혁, 노동 비용 절감과 복지 정책에서의 후퇴를 골자로 하는 사회안전망 개혁이었다. “노동자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후려치고 있는 꼴이지만, 노동자당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브라질노총(CUT)은 룰라 정부의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노·사·정 협의에 대한 반격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브라질노총의 상층부를 정권의 자문단, 입각 내정자, 노동자당의 선거 후보자로 흡수하고 보조금 등을 통해 포섭하는 룰라의 실질적 혜택도 작용한다. 게다가 룰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통치의 기반으로 활용하고 지난 해 한국을 방문했던 한 브라질 활동가는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룰라의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당의 지지도는 하락하고 있지만, 룰라 개인의 지지도는 여전히 60%를 웃돈다”고 말했다. , 자신의 내각, 특히 재무장관 팔로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팀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실제 브라질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정책이 거기에서 나오고, 일단 제출된 정책은 과감하게 실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당은 룰라의 정책을 승인하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다(선거 시기가 되면 선거 캠페인 수단으로 활용된다). 노동자당이 룰라 개인과 그 측근들의 정당이 된 것은 오랜 일이지만, 집권 후 룰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룰라는 자신에 대한 반대나 자신이 제출한 정책을 반대하는 노동자당 의원들에게는 출당의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의 권위와 지시를 관철시키고 있다. 물론 ‘잃은 자들의 동맹’이 룰라에 대한 각기 다른 기대를 실리적으로 조직, 동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룰라의 실질적인 행보와 정책이 브라질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점에서 룰라가 이 동맹을 언제까지 관리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룰라의 정치 스타일이 이런 불만과 갈등의 폭발을 잠재워온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룰라의 정치 스타일은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이고 인기 영합적이며 온정주의적인 수사를 활용하고 있지만, 이런 행태는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하고 사회운동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브라질 사회운동의 도전과 시사점 룰라 정부의 반-민중성이 점차 명확해지면서, 룰라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운동을 만들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지난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은 룰라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고, 룰라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것을 당내에 관철시키는 독단적인 방식에 반대하는 지식인, 활동가들이 노동자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만들기도 했다. 룰라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금속 노동자들, 도시의 불법 점거자들의 파업과 투쟁도 있었다. 이런 투쟁은 아직 소극적으로 룰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수준이고,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또 한 축에는 무토지농민운동(MST)이 있다. 대선 시기 룰라는 무토지농민운동이 자신의 당선에 방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들에게 모든 대중행동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그 대신 당선 후 토지 개혁을 통해 농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룰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들은 다시 투쟁에 나섰다. 무토지농민운동은 지난 5월 2일부터 농지 개혁 실행과 미국의 자유무역 반대, 이라크에서 철수 등을 요구하며 전국 순회 투쟁에 돌입했고, 17일 브라질리아 대통령궁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런 투쟁이 룰라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반대의 요구를 결집시키고, 새로운 대안을 형성해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투쟁과 저항이 거세질수록 룰라의 정치 행태도 강화될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의 일정 부분은 포섭하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투쟁의 통합력과 운동의 단결을 해치려 할 것이다. 실제로 룰라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의 파업은 무참히 짓밟았지만, 금속 노동자들에게는 일정 정도의 임금인상을 보장했다. 그리고 룰라가 언젠가는 초심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도 운동이 직면한 난관 중 하나다. 룰라는 초심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방은 스스로의 투쟁과 운동으로 쟁취해야 하고 자신의 해방이 다른 사람의 해방과 맞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운동의 이념과 원칙을 잃은 것이다. 결국 룰라는 점차 대중운동과 멀어졌고, 자신이 인민의 권리를 대변하는 정책으로 인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동자민중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그가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외부의 압력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운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룰라의 당선과 그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고,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운동의 중요한 과제일 것도 없다. ‘잃은 자들의 동맹’은 신자유주의 정치 공학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인민의 삶을 볼모로 한 자본주의 위기 지연 방식인 한 ‘잃은 자들’의 불만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이를 대변하겠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언제나 선거 전에는 가장 강력한 신자유주의 비판자였다. 선거 이후에는 이런저런 변명과 현실적인 이유로 가장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다(노무현도 마찬가지다). 변절한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대통령을 바꾸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배신은 반복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관리하며 삶을 파괴하는 것에 맞서 대중이 스스로의 투쟁을 조직하고, 상호 연대하고, 그들의 투쟁과 연대가 보편적인 권리와 요구로 확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사회운동의 과제일 따름이다. 1) 1994년부터 시행됐다가 실패한 경제 안정화 정책. 미국 달러와 브라질 헤알을 1대1의 환율로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막고 외자를 끌어들인다는 구상에서 시행된 정책이었고,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 인플레이션이 감소했고 자본유입도 두 배 이상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미국 달러의 강세가 나타나면서 여기에 고정된 헤알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어 브라질의 수출 경쟁력은 크게 약화됐다. 더욱이 시장개방의 조류와 맞물리면서 수입이 급증해 무역적자가 크게 확대됐고 이 때문에 외자를 더 끌어들이려 이자율을 올리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본문으로 2)카르도주 집권 시기 헤알 플랜의 결과로 외국인 투자가 쇄도했는데, 그 상당 부분은 공기업이나 공사합동기업을 매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1년에 진행된 외국자본조사는 외국 자본이 최소 20% 이상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1995년 6,322개에서 2000년 11,404개로 증가(80.4%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외국 자본이 진출한 기업의 주식 가치는 같은 기간에 3배가 뛰었지만, 고용은 증가하지 않았고 실업률은 더욱 높아졌다. 본문으로 3)브라질 주식시장지수(BOVESPA)는 2003년 1월 11,268에서 2003년 말 20,000 이상으로 오르면서 급상승했다. 2005년 현재까지 최고치는 29,455 최저치는 23,609를 기록했다. 본문으로 4)이런 조치는 외국인 직접투자가 카르도주 시절에 비해 절반 가까이 감소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 직접투자의 감소는 브라질이 외국인 투자에 대해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다. 카르도주 시절 외국인 직접투자의 대부분은 수익성 있는 공기업을 매입하기 위해 유입되었다. 이제 그런 공기업은 다 팔려서 남은 것이 거의 없다는 점과 주식시장의 거품이 직접투자보다는 투기성 투자를 유인하고 있다는 점이 외국인 직접투자 감소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원인보다는 투자 감소라는 결과만 놓고 한층 심화된 개방, 자유화, 탈규제 조치를 추진하는데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 2005-05-11

    [정책워크샵] 유럽통합/헌법조약의 본질과 사회운동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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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9일(월) 7시 사회진보연대 회의실에서 5월 정책워크샵 "유럽통합/유럽헌법조약의 본질과 사회운동의 대응"을 다음과 같이 진행하였습니다. <발제> - 유럽통합의 본질과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정지영 정책편집부장) - 화폐통합을 목적으로 한 경제통합방식의 문제점(임필수 정책편집국장) - 노동자운동의 대응과 이주노동자 문제(정희찬 정책편집부장) <기획의도> 2004년 6월 18일 유럽연합 정상들이 유럽헌법조약을 채택했고, 이후 회원국들에서 국민투표 혹은 국회 비준을 통과하면 유럽헌법조약은 2007년부터 효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유럽헌법조약이 회원국들의 비준을 통과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지난 2월 국민투표를 실시한 스페인에서는 72%의 찬성률로 통과되었지만, 투표율은 42%로 매우 저조한 수준이었습니다. 유럽 민중들의 유럽 통합에 대한 무관심은 유럽 통합 과정에서 계속해서 우려 지점이었는데, 스페인의 투표율은 그 우려를 다시 일깨웠습니다. 게다가 각각 5월 말과 6월 초에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유럽헌법조약이 부결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어서, 유럽연합과 양국 정부가 긴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헌법조약을 부결시키기 위해 아탁을 비롯한 사회운동, 여성운동, 프랑스 공산당,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 노동총동맹(CGT) 등이 총력을 기울인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유럽연합이나 회원국 정부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유럽 통합이 민중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입니다. 유럽통합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완성 단계에 와있고, 이는 유럽과 유럽 민중들에게 장미빛 미래를 선사할 것이라는 지배계급의 선전은 매우 기만적인 것입니다. 유럽통합은 그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유럽 자본을 위시한 지배계급의 프로젝트였습니다. 현재 불붙고 있는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은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이 지배계급이 말하는 유럽에 반대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현재 유럽에서는 "어떤 유럽인가?"를 둘러싼 논쟁과 투쟁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런 투쟁은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대안적인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에서는 5월 정책워크샵을 통해 그 시사점을 함께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주요 논의지점> - 유럽통합과 유럽헌법조약은 반민주적 본질 -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국면에서 유럽연합 탄생의 의미: 특히 화폐통합 방식의 경제통합이 가지는 문제점 - 유럽통합과 유럽헌법조약의 쟁점들: 시민권과 노동권, 군사화, 종교권력강화, 여성권 등 - 이에 맞서는 사회운동의 대응: 아탁, 유럽좌파당, 여성운동, 노동자운동 등 유럽이라는 대륙의 범주를 넘어 확장된 시민권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유럽내에서의 논의들에 주목하고 현재 헌번조약 거부캠페인을 중심으로 운동을 벌이는 유럽 좌파 운동의 향후 확장된 투쟁의 가능성에 대해 향후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토론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날 제출된 발제문을 첨부합니다.

  • 2005-05-04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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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무역의 환상을 걷어치워라 최 예 륜 |정책편집부장 APEC 13차 정상회의가 2005년 11월 18, 19일 부산에서 개최된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21개국을 아우르는 APEC은 전 세계 GDP의 약 57% 및 교역량의 46%를 차지하고, 회원국의 인구가 전 세계의 약 44.8%(2004년 기준)에 달하는 거대규모의 경제협력체다. APEC은 1989년 창설 이후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며 자유무역 확산의 선도적 역할을 자임해왔으나 그 기능과 실적에 대한 비판과 회의에 부딪혀왔다. APEC이 제시한 자유무역의 경로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럽연합이나 전미자유무역지대(NAFTA) 등 역내 무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블록들의 배타성을 경계하면서 전 세계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선도하겠다던 APEC은 명목뿐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이는 APEC 프로그램의 부실로 인한 것이 아니며 APEC이 유포해 온 자유무역 신화가 붕괴되고 아시아-태평양 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해진 데 따른 것이다. APEC은 창설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수직적 하청 네트워크를 자유무역의 신화로 포장하고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의 첨병으로서 WTO협상에 지역블록, 개도국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또한 1997년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IMF 자금지원을 통해 금융자유화 프로그램을 강제하여 금융화를 촉진하고, 9.11 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對테러 전략을 지원하는 ‘인간안보’라는 의제를 논의하는, 자유무역의 쟁점을 초과하는 광범위한 역할 수행을 자임해왔다. 이러한 과정 내내 APEC은 시효가 만료된 발전주의와 자유무역의 신화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인민들을 호도해왔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유무역 신화 세계경제에서 하나의 지역으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출현은 처음에는 일본의 경공업을 위한 시장과 원료에 대한 접근수단을 보장해줌으로써 일본 경제를 재건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기반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를 제패한 미국은 냉전정책에 기반한 전후 세계경제 복구책을 내놓으며 일본에 대한 집중적 지원을 수행했다. 미국은 일본에 미국의 기업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미 수출판로를 보장하는 ‘역개방 정책’을 펼쳤고, 일본은 생산의 배후지(경제적 식민지)를 요청했다. 남한과 대만 등이 배후지로 통합되면서 1960년대 일본 및 1970년대 남한과 대만의 경제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발전과정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 위계적으로 연결된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들의 확장을 통해 성취되었다. ‘나는 기러기 떼(flying geese)’ 발전1)이라는 명목 하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심-주변 관계가 공고화되었다. 중심에서 주변 혹은 반주변부에서 주변으로 산업들의 재배치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는 직접투자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 국가들은 높은 의존도의 대미수출을 통해 수출지향적 산업육성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산업화를 위한 기술, 자본유치에 있어서의 ‘개방성’ 및 수출지향성이 아시아 경제의 ‘필수’ 덕목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른바 네 마리 용으로 부상한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은 직접투자와 대외교역의 개방성을 극대화하여 성공한 모델로 꼽히며, 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이러한 ‘역동성’에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전략산업 집중투자라는 성장전략에 따른 과잉중복투자와 금융투기자본의 급속한 유입은 동아시아의 연쇄적 금융위기를 발생시키게 된다. 또한 1970년대 이후 미국경제 불황에 따른 수입의 감소와 일본 거품경제의 붕괴,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한계에 봉착한 기술혁신과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하청네트워크 형태의 발전모델은 파탄에 이르렀다. 아시아에서 미-일 동맹이 유포해온 다음과 같은 자유무역 신화는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첫째,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역외교역의 활성화와 경제적 역동성 덕분이며, 이러한 경제적 역동성 때문에 아시아에는 지역경제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자유무역체제는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낳는다. 셋째, 자유무역체제는 특히 한국 등의 신흥공업국(개발도상국)에 또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생산의 ’초민족적 통합‘은 이에 조응하는 세계 소득의 재분배를 동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산 네트워크의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중심부로 자본 집중이 증가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신흥공업국들을 비롯하여 중하위소득국들이 전반적인 실추를 모면할 수 있었던 예외적 능력은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 확장에 덧붙여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들의 국가장치가 누린 상대적인 자율성과 이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이용한 지정학적 전략들과 관련된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간의 중심-주변 관계의 구성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지역이 출현하는 데에 근본적이었다. 일본의 다층적인 하청 시스템들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거점들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거점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 시장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수단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미국의 관할권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시아의 지역경제체제는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없었고 수출의 판로를 확보하고 자본의 더욱 자유로운 이동을 강화하는 방식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경제의 부상과 배타적 역내 블록화 움직임은 미국의 아시아 통제권 상실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개방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의 ’개방성‘이란 미-일동맹이라는 현존하는 권력관계의 지속을 승인하고 WTO 협상과 관세철폐 등 여타 지역블록 및 거대개도국 등을 압박하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 질서로의 철저한 이행을 촉구하는 촉매라는 APEC의 본질적 기능을 포장하는 것이다. APEC 전개과정과 미-일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들 APEC은 1989년 11월 1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창설되었다. 1993년 시애틀에서 열린 APEC의 최초 정상회담은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결속에 위협을 느낀 유럽연합이 서둘러 우루과이 라운드와 WTO발족에 대한 동의를 표하는 효과를 낳았다. 2차 인도네시아 보고르 정상회의에서는 ‘보고르 선언’을 채택하여 선진국 회원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의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 등 선진국 그룹은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등 새로운 통상 이슈(기술 이전, 협력 등의 명목으로)를 APEC을 통해 타결하고자 하였고, 개도국들은 선진국의 개방 압력을 다자간 협상체제로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다양한 경제구조와 목적, 이해관계가 혼재한 가운데 APEC은 협력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무역장벽 등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기로 하고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결과 이행 및 WTO체제의 성공적인 출범을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APEC은 이 ‘보고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략들을 구사하는데 첫 번째 경로는 3차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오사카행동계획’이었다. 각 회원국들은 개별실행계획을 제출, 구체적인 일정을 수립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또 다른 경로로서 APEC은 15개의 조기자유무역화 분야를 선정하지만 이 역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 APEC은 이후 오클랜드에서 세 번째 경로로 방향을 틀게 된다. WTO에 판돈을 걸고, WTO 뉴라운드 출범이라는 대세에 몸을 맡겨 전 세계의 자유화를 함께 성취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99년 시애틀에서 WTO각료회의는 무산되었다. 사실 이 무산에는 가장 큰 경제규모의 미국과 일본의 갈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APEC의 자유화 경로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APEC의 틀 안에서 한편으로 쌍무협정들과 금융 자유화 조치 등이 꾸준히 강화되어왔다. 자본 이동이 극대화되고 외환시장이 국제적인 투기자본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초래된 금융위기로 인해 일본주도의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파탄을 맞았다. 이러한 위기는 ‘관치금융과 거품경제’의 구조개선이라는 명목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수용으로 이어지고, 기존에 국가의 집중적 지원을 받아온 재벌체제에 대한 개선과 노동 유연화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일단락 되었으며, 역설적으로 무역, 투자 자유화가 경제 활성화를 위한 필수과제로 대두했다. 또한 자유무역의 확대를 위한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외환위기 직후 금융안정화 방안에 따라 금융부문 구조조정, 민간자본 및 투기자본의 역내 유입 촉진 등이 논의되었다.2) 여기서 IMF 자금지원의 역할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고유한 접근과 관리기준의 전파를 용이하게 만들고 금융자본에 우선순위를 부여한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것으로 기능했다. APEC의 위상은 전후 아시아지역 경제 주도권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1994년 APEC의 저명인사그룹(EPG)의 정의3)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는 역내 국간에 최대한 시장개방을 실시하고, 개별국가들은 역외국에게는 역내자유화조치 혜택을 선택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를 강조하는 ‘개방적 지역주의’란 WTO 체제의 순항과 자유무역 달성을 위해 아시아지역의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거대 시장의 형성으로 여타의 경제블록을 압박하기 위한 수사다. 물론, 이와 별도로 아시아 내에서의 지역화 논의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수출 흡수국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고, ASEAN +3(한중일) 진전, EAFTA(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모색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편, 역내 금융협력체제 형성을 위한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창설(엔 블록화) 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이 느낄 ‘태평양 가운데 선긋기’의 위협은 미국 관리 하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지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와 노무현 정부 한편으로는 아시아에서의 배타적 지역화를 막고 유럽연합이나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등을 모든 무역장벽이 제거된 자유무역의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은 줄기차게 FTAAP(아시아 태평양자유무역협정) 결성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60%를 차지하는 APEC이 FTAAP를 결성하여 차별의 조건을 내걸 경우 핵심 개발도상국(브라질, 인도 등)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거대한 비회원국들은 이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따라서 배타적 경제블록들로부터 지역적 자유화보다 전 세계적 차원의 추진력을 회복하고 도하라운드 결론을 수용하도록 하여 미국을 정점에 둔 자유무역의 완성에서 APEC은 핵심 거점인 셈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의 기조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이다((미국을 중심으로 한)하나의 (빈부의 양극화를 위한)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 유럽연합이 헌법조약투표 과정 등을 거치면서 통합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미국에 적대적인 지역공동체들의 강화와 중국 부상 등 현실적 위협에 대해 자원과 소득의 재분배를 불러올 것이라는 자유무역 신화는 여전히 도전 중이라는 것이다. 냉전 구도 하에서 그리고 냉전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정치·경제·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미국의 불안정성 증대는 자유무역의 완성을 시급히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불안정성 증대와 종속의 심화라는 자유무역의 진실을 마주한 인민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몇 푼을 적선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외침을 확산하고 있다. 과연 자유무역체제는 ‘평등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전세계 소득을 증진시키고 고루 분배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정부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과 혹독한 구조조정의 터널을 거쳐 ‘관치금융’과 ‘재벌-족벌 경영의 폐해’를 시정하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감내할 노동력의 재구성을 이루어냈으며 금융자본의 출입이 자유로운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에! 또한 아직까지도 착취 가능한 동남아시아 및 남미 시장을 위한 해외투자의 수행자로서 한국의 자본가계급이 든든히 제 갈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자유무역 질서는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지방화, 분권화가 이루어질 것이라지만 실상 이는 기존의 국가의 기능을 지방정부 등을 통해 강화하고 경제자유구역, 특구 지정 등을 둘러싼 지방 도시들의 경쟁을 부추길 따름이며, 이를 위해 시민들을 동원하고 관리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이번 APEC 정상회의가 진행되는 부산시는 동북아 물류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해외자본 유치에 가속도를 붙이는 등 APEC 준비과정을 지역경제의 구조조정의 계기로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초민족적 기업과 국민국가의 위상을 동등하게 다루는 투자자유화 물결은 국가의 역할 분산을 동반한다. 노동력 관리의 엄격함과, 연기금 개혁 등 국가 개입을 통한 투기자금의 형성의 역할은 강화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문화적 쟁점의 상당수는 NGO들에게 이전된다. 노무현 정부는 NGO들을 동원하여 자유무역과 금융투기의 활성화를 위한 APEC의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고 부산여성단체협의회, 부산여성단체연합 등의 여성단체들은 ‘APEC 여성의제채택 여성연대’를 구성하여 ‘중소기업, 영세기업 및 여성 참여 강화‘ 의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으로 이에 조응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反테러와 6자회담 진전을 위한 부산선언문〉을 준비하는 등 정치적 차원에서 APEC을 활용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와 ‘전쟁’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인권과 반테러’ 즉,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도출되는 APEC에서 동북아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일 동맹 헤게모니로의 통합이라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증대된 불안정성과 인민의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아시아에서 인민들의 연대와 단결된 투쟁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자유무역 신화의 폐해가 가장 극대화된 형태로 드러난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일한’ 착취 네트워크를 향한 자유무역질서의 전략적 요충지와 아시아-태평양의 군사기지로서 동북아가 갖는 지정학적 전략에 따른 미국의 재편전략이 수행되고 있다. 이 착취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이미 드러난 자유무역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이 지배구조에 복무하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005년 APEC정상회의에 대응하는 우리의 기조는 미-일 동맹과 노무현정부에 의해 확장되는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반대,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인민들의 연대를 통한 대안세계화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다. PSSP 1) 일본을 선두로 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의 육성과 발전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아시아 발전형태설명이론(안행(雁行)형태 이론이라 불린다). 선도국가에서 경쟁력 있는 산업의 육성이 이루어지고 그 성과가 직접투자를 매개로 다음 단계의 국가에 이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설명되는 동아시아 '발전'과정에서 일본은 대동아시아 흑자 행진을 계속했는데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를 일본중심의 무역 및 투자시스템 내의 하위구조로 고착시켜놓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동아시아 경제의 틀을 형성하면서 기술을 지배하고 있어 대동아시아 수입의 상당부분도 사실은 일본기업의 현지 투자회사로부터의 수입일 뿐이다. 본문으로 2) 동아시아 금융위기 발생 이후 열린 98년 6차 콸라룸푸르 정상회의에서는 아시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면서 '경제 위기 조기극복을 위해 성장지향적 거시경제정책을 공동으로 추진키로 합의'하는 한편 국제 금융체제의 강화를 위한 노력으로서 민간자본 역내 유입 촉진과 회원국의 금융체제 강화, 금융분야 구조조정, 국제 금융체제 개선문제 등이 주로 논의되었다. 금융 및 자본자유화가 급진전되면서 헤지펀드 등 투기성 단기자본을 포함한 자본의 유출입이 빈번해진 데 원인이 있었던 발생한 동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극복 방안으로서 투자 자본의 안정적 역내 유입이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역설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3) APEC 저명인사그룹의 보고서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하는 개념이다. ①최대한의 일방적 자유화, ② 비회원국에 대한 무역장벽의 지속적 완화 확약, ③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 ④개별 회원국의 독자적인 조건적/무조건적 최혜국대우 원칙 적용. 위의 요건 중 한가지 이상을 충족하면 '개방적 지역주의'의 실천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한 이들의 개념 설정은 애초 '개방적 지역주의'가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개방화'와 '세계화'를 수행하되 지역별 구분에 따라 관리와 위계질서의 유지가 가능한 질서를 지향함을 드러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