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 2005-06-03

    미국의 '네오콘'을 통해 본 남한 '뉴라이트 운동'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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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네오콘'을 통해 본 남한 '뉴라이트 운동'의 전망 정 희 찬 | 정책편집부장 1. 뉴라이트운동의 등장 :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위기에 빠져있다."1) 이른바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지난해 동아일보가 <뉴라이트, 침묵에서 행동으로>라는 연재기사를 기획하면서 자유주의연대와 뉴라이트를 표방한 여러 단체들이 세력화하면서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연대(2004년 11월 2일), 교과서포럼(2005년 1월 25일), 뉴라이트싱크넷(3월 24일), 시사웹진 뉴라이트(4월 1일)는 출범 즉시 각종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과거 '주사파' 출신 인사나 김진홍 목사 등 보수적 기독교단체를 이끌고 있는 종교계 인사가 주축이 된 이들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386'이라 부른다 (여기서 '486'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올드 레프트'나 '올드 라이트'와 차별적인 자신들이 혼란과 절망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칭 '건강한 보수'를 주장하고 있는 이들 '신보수'의 주장은 자유주의연대이나 뉴라이트싱크넷의 창립선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2) ①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역사: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통해 냉전과 공산화의 위험, 빈곤을 극복하여 세계 10위권의 산업국가로 발전했을 뿐 아니라 1987년 이후 민주주의 정착에도 성공했다. ② 현 집권세력의 위험한 '자학사관': 현 집권세력은 건국과 산업화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절차적 수준이 아니라 과거 반체제세력이 주장하는 민중민주주의와 유사한 참여민주주의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들은 또한 민족공조와 노조를 앞세워 각각 한미동맹과 기업을 대체하려고 한다. ③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反시장주의적이고 대중선동형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現집권세력에게 전적으로 있다: 외국자본과 거대노조가 득세하고 분배와 균형의 추구는 성장둔화와 빈곤의 증가를 초래했다. 민족공조는 최악의 인권유린국가로서 핵무장을 시도하는 북한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의회권력과 행정권력 뿐 아니라 예술과 문화마저 이들이 장악하여 서로 권력투쟁을 일삼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이념, 세대, 지역 간 갈등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④뉴라이트운동은 기득권에 안주하며 부패한 낡은 보수와 단절하고, 민주화세력의 위험한 민족주의적 민중주의가 아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하고 세계화, 정보화, 자유화의 대세에 발맞추어 선진한국으로의 질적 도약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상이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의 주장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지난해 여름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서 한나라당 부설기관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인 박세일 의원이 발제한 <나라의 선진화와 당의 진로>라는 제목의 문서에 기반하고 있다.3) 이 문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현정부의 주축을 이루는 민주화 세력을 겨냥하여) 1980년대 "친북 반체제적인 반독재투쟁의 잔재인 '반시장, 반자유' 세력과의 대결을 통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주도한 김대중 정권과 이를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반시장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어떤 이론체계에 근거하여 출현했다기보다는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현 집권세력에게 전가함으로써 반사이익을 노리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은 지난 30년 동안 남한 지배계급의 지주였던 '반공-발전주의'를 해체하고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통해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분파를 보수야당-자유주의 세력으로 대체하였다. 게다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연거푸 패한 결과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기존 지배계급 분파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현된 것이었으리라. 1997년 대선을 통해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수평적 정권교체'의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등장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IMF 서울 지부장'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철저하게 월스트리트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금융시장을 부양하려는 그의 경제정책은 2000년 절정에 달한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불가피하게 측근들과 여당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로 귀결되었다. 재임 중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라는 명예는 빛이 바랬고 남한 자본주의의 동요는 정권에 대한 불안정한 지지율로 직결되었다. 김대중 정권의 충실한 후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지난 신자유주의 구조정의 결과 등장한 빈곤과 청년실업, 불안정노동이라는 쟁점을 '참여 복지'라는 허울좋은 수식어로 은폐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오히려 조직된 노동자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강화하면서 한국경제의 구원자로서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신화를 유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혁의 장미빛 환상이 잿빛 현실로 드러난 현실에서 현 집권세력에 대한 지배계급 내 보수적 분파들의 선전·선동은 나날이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뉴라이트'는 바로 이러한 지배계급 내에서의 동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 '뉴라이트'에 비견할 수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출현과 함께 반동적이고 공격적인 보수주의가 출현했다. 비록 양자 사이의 시차는 존재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상황은 한국과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있고 나아가 '뉴라이트' 운동의 향후 전망을 조망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2. 미국의 네오콘(Neo-con) : 미국의 쇠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 (1) 1970년대 급진주의 도전에 대항한 공격적 보수주의의 반동 '뉴라이트운동'의 원조 격인 이른바 네오콘이 등장한 미국 역시 1970년대 경제불황과 베트남전 패배, 급진주의 페미니즘, 흑인민권운동 등 진보주의 운동의 성장에 대한 보수주의 반동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미국 내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투쟁과 흑인민권운동이 성장하며 기존 사회의 가치관과 질서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급진학생운동(68운동), 혁명과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시도했던 중남미의 좌파(쿠바와 칠레, 니카라과), 수에즈운하를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되찾은 이집트의 나세르가 제창한 중동의 아랍민족주의와 제3세계 국가들의 '비동맹주의' 등은 미국의 지배계급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서 이른바 '파웰 메모'4)로 유명한 일화는 바로 각종 형태의 자유주의·진보주의를 미국 내부의 적으로 지목하고 이들과 대결해야 한다는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를 드러낸다. 파웰은 공산주의자, 뉴레프트를 비롯한 혁명주의자들이 대학과 언론계, 문화예술계에 침투하여 미국의 정치와 경제체제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기업은 대학의 보수적 학생을 양성하고 진보적 교수를 보수적 교수로 대체해야하고 TV프로그램, 책, 팜플랫 등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진보'에 맞서 보수주의를 재구축하는 데 앞장서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후 미국에서는 해리티지 재단, 건전한 경제를 위한 시민운동 등 보수적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민주당이 지원하는 자유주의 연구소들과 경쟁했다. 특히` 1차·3차 산업에 집중된 개인기업자본과 동맹을 맺어 막대한 정치자금을 바탕으로 미국 자본가 집단의 요구를 표출했다. 이러한 요구는 조세삭감, 노동신축화, 군비증강 등 레이거노믹스로 수용된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보수주의 흐름은 낙태, 동성애, 포르노, 마약, 청소년 범죄 등 미국 사회의 첨예한 이슈들에 대해서 복음주의적 기독교 집단 - 미국 기독교세력은 1940년대에서부터 70년대까지는 세속의 정치·사회적 이슈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들이 강조했던 전통적 가치관은 급진주의와 자유주의적 세속주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 - 이 주장하는 헌법의 남녀동등권 반대, 동성애권 반대, 낙태 반대 등 쟁점을 이동하며 이른바 단일 이슈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월남전과 워터게이트 등으로 추락한 전통적인 보수주의 진영은 전열을 재정비했고 결국 1980년 공화당의 레이건 행정부가 출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2) 신보수주의(네오콘)의 출현: 급진주의와 (뉴딜)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회의 또 한편으로 미국에서는 동시에 오늘날 네오콘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보수주의자들이 점차 공화당을 지지하며 외교안보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들의 기원은 1940년대 <파티전 리뷰>(Partisan Review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부 트로츠키주의 그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소련의 동유럽 점령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반공(反共)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루즈벨트의 뉴딜 자유주의와 복지국가의 이념을 지지했다. 이들이 공격적인 보수주의로 전향하게 되는 계기는 1960년대 베트남전을 비판하며 성장한 급진주의의 등장이었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SDS)이 결성되고 신좌파운동이 출현하며 몇몇 대학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학생시위가 확산되었다 (1964년 버클리대학, 1968년 콜롬비아대학). 이때 '네오콘'의 원조로 불리는 어빙 크리스톨 등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급진주의에 무기력한 민주당의 자유주의에 실망하여 점차 민주당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또한 1960년대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아래에서 추진된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과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등의 복지 프로그램은 이들이 보기에 빈민의 자활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복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미혼모를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가족의 해체로 귀결된 전형적인 실패작이었다. 네오콘의 논리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와 차별의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자유시장경제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능케 함으로써 기업가정신이 발전하여 새로운 부가 창출될 수도 있고,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차별을 시정하는 강력한 反차별 제도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차라리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탐욕과 이기심이며, 정직, 근면, 책임감, 융통성, 친절, 타인의 필요와 이해에 대한 관심을 증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5) 게다가 이들은 1970년대 미국의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복음주의 및 기존 보수주의의 주장과 결합하는데, 앞서 낙태나 동성애에 대한 반대, 전통적 가족의 수호라는 점에서 일치할 뿐 아니라 외교안보정책에서도 전통적인 우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동맹의식도 공통적이다. 결국 미국식 선거제도의 악명을 높였던 2000년 대선에서 네오콘 세력은 복음주의 기독교 집단과 본격적인 유대관계를 구축했다. 게다가 네오콘들은 비인격적이며 물질주의적이고 개인주의·자유지상주의적인 대중문화의 공격으로부터 미국적 가치관과 문화를 방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들의 주장은 경제적 자유와 공동체적 가치를 위해서 유대-기독교의 가르침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유대-기독교는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도덕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속 종교'인 좌파 유토피아주의와 경쟁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경택, 2005). 네오콘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결합하면서 보수주의의 현대화, 이론화(?)에 조력하고 있다. 네오콘이 민주당 지지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70년대 후반 카터 행정부의 이른바 '인권외교'였다. 네오콘은 카터 행정부가 제3세계 권위주의 정권을 압박하는 '인권외교'를 통해 소련과 공산주의라는 큰 위협을 앞에 두고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동맹국을 소외시키고 있다며 레이건의 공화당 대선 캠프에 합류한다.6)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엘리엇 에이브럼스나 리처드 펄 등 신보수주의자들이 중용되었으며 대외적으로도 1970년대 데탕트와 단절하고 군비확장('스타워즈' 계획)과 동시에 강경하고 적극적인 對소련 압박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리한 군비의 부담을 이기지 못한 소련이 1985년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고, 1980년대 말 동유럽 국가들이 몰락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절정기를 구가했던 신보수주의자들은 반공이라는 대외명분 자체가 소멸함에 따라 오히려 입지가 약해지고 내부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한다 (손봉권, 2005).7) 9·11 테러사건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신보수주의자들이 '네오콘'이라는 별칭으로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 밖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미국은 이제 도처에서 보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위험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3) 9·11 이후 신보수주의의 보편화, 신자유주의의 신보수주의적 수렴? 탈냉전 이후 신보수주자들은 고립주의로 회귀하려는 공화당보다는 인권보호와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사용하겠다는 클린턴의 '대담한 주장'에 마음이 이끌리기도 했다. 냉전구도의 소멸 이후 소말리아 사태와 보스니아에서의 인종청소를 목격하며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가치를 부정하거나 위협하는 악의 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세계질서 유지를 위해 미국이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정치적 경제적 자유의 세계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위해 국방비를 늘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상윤, 2005). 네오콘의 일부세력은 공화당의 강경 매파그룹(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과 연합하여 1996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결성하고 9·11테러를 통해 명실상부한 미국의 대안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PNAC를 결성한 세력들은 작은 정부를 지지하고 해외개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자와는 달리 강한 정부와 군사력의 증강을 지지한다. 이들은 불량국가를 무너뜨리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여 중동분쟁 해결과 체제전환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거나('우익 윌슨파')와 미국의 개입과 군사적 강경노선을 유지하되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또 다른 위협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잭슨적 일방주의자') 주장한다. 미국의 자본과 군사력을 상징하는 두 곳을 공격한 9·11 테러는 다른 정치세력에 비해 네오콘만이 유일하게 뚜렷한 전망을 지니고 있고 진정으로 세계의 혼란과 무질서를 걱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짜내려 노력하는 세력으로 돋보이게 만들었다. 2000년 대선이 주로 사회·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선거운동이 이루어졌음에 반해, 2004년 대선은 외교안보 정책이 단연 압도적으로 여타의 쟁점을 압도했다. 미국 민주당은 부시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비판했으나 이는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전통적인 우방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엽적인 문제제기일 뿐이었다. 오히려 민주당과 공화당은 국토안보의 핵심의제로서 대테러전쟁의 수행, 대테러전쟁의 핵심의제로서 핵확산 방지, 이를 위한 (핵)선제공격 불사라는 점에서 서로 수렴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국제적 협력을 추구하는 다자주의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방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자적 일방주의', 혹은 '다자주의의 융단장갑 속에서의 일방주의 철권'이 존재할 뿐이다 (백승욱, 2005). 이처럼 국제주의 보수파로서 네오콘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주장은 공화당과 민주당 뿐 아니라 평범한 미국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며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과 세계를 '구원'하려는 이들의 전략은 군비증강을 위한 무리한 재정적자와 (세계 최강이지만)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한 군사력으로 인해 실패할 공산이 크다 (토드, 2003). 이들의 시도는 평화와 안정과는 거리가 먼 무한전쟁을 야기할 뿐이다. 3. 신자유주의 속에서 신보수주의의 수렴과 신자유주의의 '반동적' 전환 미국에서 네오콘의 주장이 큰 틀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새로운 수렴을 구성하는 데 강력한 구심으로 작동하고 있듯이 한국에서도 단지 뉴라이트라는 집단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뉴라이트가 등장한 후 지배계급의 전략이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미국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신자유주의는 금융적 팽창을 거듭하며 호황을 누렸지만 이제는 민주당마저 전쟁과 테러에 대해 오히려 공화당의 무능을 질책하며 대테러전쟁의 중요성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신보수주의 의제는 공화당이나 한나라당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 있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이미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과 그리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미 그들이 주장하는 질서자유주의, 상생의 자유주의, 공동체 자유주의는 참여정부의 국정목표인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성찰적 민주주의, 토론민주주의와 대동소이하고, 법치주의는 '원칙과 신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임혁백, 2004). 네오콘이 주도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태도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으로 드러났던 바, 뉴라이트가 제시하는 한미동맹 강화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북한에 대한 이들의 호전적인 민주화 운동 역시 북한의 시장경제로의 진입을 유도하려는 노무현정권의 대북정책과 본질적으로 다른 주장이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른바 시장경제에 대한 뉴라이트의 주문은 지난 10여 년 동안의 자유화·개방화로 인해 이미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을 초국적 투자자들이 내세우는 '시장의 법칙'에 맡겨놓았던 'IMF 지부장'과 그의 후계자에게 오히려 반가운 주문이 아닐 수 없다. 즉, 보수주의를 앞세우며 호전적으로 현 집권세력을 공격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들은 김대중 정권 이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재편과 차별적인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공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공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돗자리를 깔아주고 있다. 뉴라이트의 출현은 단지 '보수꼴통'의 출현이 아니라 앞으로 현재의 집권세력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의 우경화·보수화를 촉진하는 촉매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8) 뉴라이트가 단지 현 집권세력의 뒤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다고 얕잡아 볼 것이 아니라, 뉴라이트가 지배세력의 보수화와 우경화를 촉진하며 현존하는 체계의 위기를 여성과 노동자에게 전가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지배계급의 시도가 민중의 저항과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한에서는 앞으로 필연적으로 훨씬 야만적인 정세가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 뉴라이트 비판이 '무기의 비판'이 되려면 바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운동의 형성, 대안적인 주체형성의 과제가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자료※ 마상윤(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 - 탈냉전부터 이라크 전쟁까지」;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백승욱(2005), 「미국 신보수파 주도 아래의 새로운 세계질서」;백승욱 편저,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미국헤게모니의 역사』, 그린비 손봉권(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1930년대에서 레이건 행정부 시기까지」;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오경택(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정치이념의 구성과 주장」;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이삼성(1993),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 민족주의』, 한길사 임혁백(2004), 「한국의 뉴라이트 배경과 전망」;『관훈저널』2004년 겨울호 엠마뉘엘 토드(2003), 주경철 옮김, 『제국의 몰락』, 까치 1) 〈자유주의연대 창립선언문〉(2004.11.24)에 나온 말이다.본문으로 2) 자유주의연대(www.486.or.kr)의 홈페이지나 시사웹진 뉴라이트닷컴(www.new-right.com)의 홈페이지에는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각종 칼럼과 토론회 자료가 등록되어 있다.본문으로 3) 임혁백(2004)는 '뉴라이트'운동을 한나라당의 '선진화 프로젝트'에 대한 호응으로 해석한다.본문으로 4) 파웰 메모는 변호사인 루이스 파웰(Lewis Powell)이 1971년 8월23일 당시 미상공회의소 의장 스나이더(Eugene B. Snyder)에게로 보낸 "미국의 자유기업제도에 대한 공격"이란 제목의 메모를 가리키는 것인데 2개월 후 파웰은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된다.본문으로 5) 이들은 또한 빈곤의 문제 역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기대치도 상승해서 심화된 것으로 인식될 뿐이며, 과거의 시점에 비해서는 오히려 현재의 최극빈층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에 비해서는 몇 배나 더 잘 살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은 빈곤은 감소했다"는 것이다. 현대 빈곤문제를 고대 노예의 삶과 비교하라는 의미인가?본문으로 6) 그러나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란 이중적이었고 집권 초기에 한정되었다. 카터가 무기수출을 규제하고 국방예산을 감축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지역 안보에 대한 책임을 친미 동맹국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서 동맹국들이 추구했던 자주국방은 사실상 미제무기로 무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카터 행정부가 권위주의/독재국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취한 조치는 '성명외교'에 머무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이란과 니카라과에서 친미정권이 무너지고 반미 혁명정권이 세워지자 '인권외교'는 카터 행정부 말기인 1979-80년 사이에 CIA의 해외공작을 통한 공작외교와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이삼성, 1993: 82-90).본문으로 7)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했을 때 신보수주의 진영은 여전히 소련의 박멸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과,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예전의 고립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양분되었다.본문으로 8) 일례로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국민전선(FN)의 르펜이라는 극우파가 결선에 올라 프랑스인들을 경악에 빠트린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적 수사를 늘어놓은 르펜에 대항하여 프랑스 시민들은 우파의 시라크를 당선시켰지만 그는 르펜의 인종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이민자들에 대한 배제와 탄압을 강화하였고 중도-좌파(?) 정당인 프랑스사회당 역시 날로 악화되는 치안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준비하며 사실상 인종주의적 의제에서 수렴되어가고 있다. 즉 극우파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기존 가치관을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비난받지만 정작 그들이 주장한 배제의 논리와 가치체계는 이미 모든 경쟁자들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 2005-06-03

    룰라, 한국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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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룰라, 한국에 오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소중한' 만남 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이하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 공식적인 명분은 유엔과 한국 정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6차 정부혁신 세계포럼 참가다. 하지만 190명이 넘는 기업인 방문단의 구성과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방문하여 브라질 투자유치 설명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이 보여주듯 기실 주된 목적은 한국과 일본, 나아가 아시아 지역의 브라질에 대한 투자유치를 촉진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고 외국자본에 투자를 구걸하며 온갖 반-노동자적, 반-민중적인 조치들을 약속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고 반-주변부 국가 수반들에게는 일상 활동이 되었지만, 룰라가 적극적으로 그 대열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일상다반사로 넘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노동자 출신이며 노동자들의 정당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한 때 전 세계 좌파의 유력한 희망으로 부상했던 그가 투자유치단의 단장 역할을 성심을 다해 수행하고 있는 현실은 씁쓸하게 비웃고 말 해프닝은 아니다(당선 이후 그는 이미 수십 차례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단지 룰라 개인이 초심을 잃고 변절했기 때문도 아니고 미국과 국제금융기구, 초민족적 자본의 압박 속에서 룰라가 어쩔 수 없이 택한 고육지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룰라는 집권 이후 경제, 사회 전반에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고, 향후에도 룰라는 이런 정책들을 심화하면 심화했지 스스로 철회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룰라가 노동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거듭난 과정과 원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현재의 룰라 정부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지구 반대편 먼 곳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은 이미 지난 해 브라질을 방문하여 룰라가 자신과 비슷한 경력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과거 경력의 유사성 정도보다 현재 누구보다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유사성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룰라 정부에 대한 평가와 브라질의 상황은 무엇보다 한국의 사회운동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룰라의 당선 배경: 심각한 사회·경제 위기와 ‘잃은 자들의 동맹‘ 룰라의 대통령 당선에는 당시 브라질이 겪고 있던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 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선거 캠페인 방식,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자당의 성격과 활동 변화라는 조건이 놓여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내용은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 공공부문과 국유기업에 있어서의 대규모 사유화, 경제적 탈규제화, 환율 안정화를 위한 ‘헤알 플랜’1), 강력한 긴축 정책 등이다. 이런 정책들은 브라질 경제의 위기를 더욱 심화했을 뿐이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브라질 경제성장률은 평균 1.7%로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았다. 이런 정책들은 외채를 줄이기는커녕 두 배로 증가시켰고, 국가 소유의 그나마 수익성 있는 기업들을 외국 자본에 팔아넘기는 효과를 낳았다2).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특히 제조업)이 초민족적 자본의 소유로 넘어갔거나 그들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그 결과 산업 자체가 외국인 투자자와 외국 시장에 종속되었다. 이런 정책의 결과는 브라질 내외 초민족적 자본과 지배 엘리트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다수에게는 심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가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큰 역할을 했고 룰라는 이런 불만들을 적절히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룰라는 결코 균질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계급, 계층의 불만을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로 조직했다. 이는 당시 룰라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구성과 이를 활용한 선거 캠페인 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물론 대선 당시 룰라 지지자들의 가장 큰 부분은 전통적인 노동자당 지지자 즉, 조직된 노동자, 숙련/반숙련 노동자, 진보적 지식인, 비공식 부문 노동자,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들과 적대적이었던 계급의 구성원들도 룰라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우선 제조업의 자본가들이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한 긴축 정책과 자유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룰라가 당선되면 다시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쓸 것으로 기대했다. 또 다른 지지자들은 토지귀족으로서 오랫동안 과두제를 형성하여 지역을 지배해왔던 계층이다. 이들은 금융의 이해가 우선되면서 자신의 지배력이 침식당했다고 생각했으며, 룰라를 지지함으로써 의회와 지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시의 중간 계층 사람들은 룰라나 노동자당의 급진적인 수사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직업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각종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불만으로 룰라를 지지했다. 노동자당의 전통적인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이런 불균등한 지지자들의 공통점이라고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잃은 것’이 있다는 점 밖에 없었지만, 룰라는 이것을 ‘잃은 자들의 동맹’으로 조직했다. 물론 이렇게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이해관계와 기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룰라는 구체적인 정책과 전망 제시는 회피한 채, 모호한 수사와 감수성을 자극하는 언사들로 집권에 성공했다. 대선 당시 룰라가 제시한 가장 구체적인 약속이 카르도주(그도 한 때 종속이론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시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IMF 협정이었다는 사실은 룰라가 ‘잃은 자들’의 요구를 “온정적인 동북부인, 룰라”, “새로운 현실주의” 등의 수사로 동원했던 측면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룰라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 현재 룰라 정부가 그 이전의 카르도주 정부보다 더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룰라 자신은 이런 정책이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극약” 처방이며, 이를 통해 경제가 안정되면 민중적 의제를 추진할 수 있으니 브라질 민중들이 조금만 더 “인내”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룰라가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유지해 온 정책 기조와 그 정책을 고안·집행하는 내각의 성격을 봤을 때, 그리고 실제 집권 이후 보여준 룰라의 행보를 봤을 때, 이런 요구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룰라는 후보 시절 IMF와의 협약을 통해서 카르도주 시절의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외채 지불과 강력한 긴축정책, 인플레이션 억제, 민영화/사유화 정책 고수, 노동부문 개혁 등이 그 내용이다. 당선 이후 그는 외채 지불을 충족하기 위한 흑자 재정 비율을 카르도주 시절 IMF와 약속했던 GDP 대비 3.75%에서 4.25%로 상향조정했다. 외채 지불을 위한 흑자 재정은 대부분 사회 복지 예산의 삭감으로 충당되었다. 이런 정책은 외국인 투자자와 브라질 수출업자들에게는 거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인도, 러시아, 중국과 함께 브릭스(BRICs)로 주목받고 있는 현재 브라질 경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외국인 투자와 수출 산업이 성장의 엔진이라고 굳게 믿는 룰라 정부의 철학은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각종 인센티브 제공,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추진, 노동과 복지 관련 제도 완화, 연금 개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비롯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고금리에서 비롯되는 이윤과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은 주식시장에 거품을 형성하고3) 채권시장 수익률 상승을 이끌며 투기성 자본을 유인하고 있다. 게다가 룰라 정부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세금 면제 조치를 고안하고 있다.4) 브라질의 수출산업을 이끄는 것은 주로 농산물과 철광석, 펄프, 석유 등 원자재 산업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분야의 수출을 증대하기 위한 최선의 방향이 자유무역의 확산이라고 믿는다. 농산물, 광물, 석유 부문의 거대 수출기업들의 활로를 위해 그는 WTO와 FTAA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새로운 무역파트너 형성을 위해 세일즈맨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방한 기간 중 진행하는 투자유치 설명회를 보라). 브라질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5차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G-21)의 반발을 주도했는데, 이는 브라질의 농산물 수출기업들을 보호하고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룰라 정부의 전투적인 방어였지 세계화나 WTO 체제를 반대하고 제3세계 가난한 농민, 농업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룰라 정부는 FTA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사실 남미의 많은 민중들은 FTAA의 파괴적 효과를 인식하고 다양한 투쟁을 통해 FTAA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룰라의 바로 곁에도 FTAA를 반대하는 무토지농민(MST) 조직, 사회운동 조직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2002년에 FTAA 반대 국민투표를 조직하여 천만 명 이상 참가, 95% 이상의 반대라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룰라는 그 투표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노동자당에도 투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당선된 후에는 서비스 시장, 투자, 지적 재산권에 대한 미국의 개방 요구를 수용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농산품 등의 분야에서 무역장벽이 낮출 것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FTAA 협상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브라질 민중에게는 거대한 부담을 지우고,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흑자 재정 4.25% 유지, 세금 제도 개혁, 복지 축소와 같은 조치는 브라질 노동자, 빈민, 농민으로부터 금융자본, 수출기업, 외국인 투자자 및 채권자로 소득이 이전되는 효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실업률은 9.6%로 여전히 높고, 그나마 창출된 일자리의 대부분은 비공식 부문 노동, 비정규직 노동이다. 대선 당시 브라질 민중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장담했던 “기아 제로” 프로그램과 토지 개혁은 지금까지 실행되지 않고 있다. ‘잃은 자들의 동맹’을 관리하기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룰라가 신자유주의로부터 ‘잃은 자들’의 지지를 동원하여 당선되었다는 점은 일견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룰라 정부의 성격을 보여준다. 노동자 출신이고 노동자당의 후보였지만 룰라의 전략과 전망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았다. 룰라는 쿠바의 사회주의 모델이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보여주는 인민주의 모델(양자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조차 고려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FTAA 국민투표 거부, IMF와의 협약 등에서 드러나듯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편입할 준비를 해왔다. 그가 ‘잃은 자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던 것은 그들의 지지를 동원해야 당선될 수 있고, 그들의 불만과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전망을 실행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선거에서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비전은 회피한 채, 누구나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를 활용하고,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했다. 집권 이후 실제 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룰라는 자신의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정치 스타일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왔다. 우선 그는 자신의 과거 경력과 비천한 출신으로서 피지배계급에게 가지는 정서적 동정심을 활용한다. 그는 가난한 어린이를 마주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무토지 농민들을 만나서는 장난스럽게 그들의 모자를 쓰고 친밀감을 표시한다. 이런 모습은 노동자 출신, 운동의 경력 등과 결부되어 강력한 진실성을 획득하고, 그의 “극약” 처방이 끝나면 민중에게 혜택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자극한다. 룰라는 노동자에게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사회경제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서는 노·사·정 사이의 사회협약이 추진되었는데, 그 내용은 법인세 감축과 외국인 투자자 세금 혜택을 골자로 하는 세금 개혁, 노동 비용 절감과 복지 정책에서의 후퇴를 골자로 하는 사회안전망 개혁이었다. “노동자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후려치고 있는 꼴이지만, 노동자당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브라질노총(CUT)은 룰라 정부의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노·사·정 협의에 대한 반격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브라질노총의 상층부를 정권의 자문단, 입각 내정자, 노동자당의 선거 후보자로 흡수하고 보조금 등을 통해 포섭하는 룰라의 실질적 혜택도 작용한다. 게다가 룰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통치의 기반으로 활용하고 지난 해 한국을 방문했던 한 브라질 활동가는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룰라의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당의 지지도는 하락하고 있지만, 룰라 개인의 지지도는 여전히 60%를 웃돈다”고 말했다. , 자신의 내각, 특히 재무장관 팔로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팀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실제 브라질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정책이 거기에서 나오고, 일단 제출된 정책은 과감하게 실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당은 룰라의 정책을 승인하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다(선거 시기가 되면 선거 캠페인 수단으로 활용된다). 노동자당이 룰라 개인과 그 측근들의 정당이 된 것은 오랜 일이지만, 집권 후 룰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룰라는 자신에 대한 반대나 자신이 제출한 정책을 반대하는 노동자당 의원들에게는 출당의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의 권위와 지시를 관철시키고 있다. 물론 ‘잃은 자들의 동맹’이 룰라에 대한 각기 다른 기대를 실리적으로 조직, 동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룰라의 실질적인 행보와 정책이 브라질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점에서 룰라가 이 동맹을 언제까지 관리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룰라의 정치 스타일이 이런 불만과 갈등의 폭발을 잠재워온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룰라의 정치 스타일은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이고 인기 영합적이며 온정주의적인 수사를 활용하고 있지만, 이런 행태는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하고 사회운동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브라질 사회운동의 도전과 시사점 룰라 정부의 반-민중성이 점차 명확해지면서, 룰라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운동을 만들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지난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은 룰라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고, 룰라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것을 당내에 관철시키는 독단적인 방식에 반대하는 지식인, 활동가들이 노동자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만들기도 했다. 룰라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금속 노동자들, 도시의 불법 점거자들의 파업과 투쟁도 있었다. 이런 투쟁은 아직 소극적으로 룰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수준이고,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또 한 축에는 무토지농민운동(MST)이 있다. 대선 시기 룰라는 무토지농민운동이 자신의 당선에 방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들에게 모든 대중행동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그 대신 당선 후 토지 개혁을 통해 농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룰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들은 다시 투쟁에 나섰다. 무토지농민운동은 지난 5월 2일부터 농지 개혁 실행과 미국의 자유무역 반대, 이라크에서 철수 등을 요구하며 전국 순회 투쟁에 돌입했고, 17일 브라질리아 대통령궁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런 투쟁이 룰라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반대의 요구를 결집시키고, 새로운 대안을 형성해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투쟁과 저항이 거세질수록 룰라의 정치 행태도 강화될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의 일정 부분은 포섭하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투쟁의 통합력과 운동의 단결을 해치려 할 것이다. 실제로 룰라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의 파업은 무참히 짓밟았지만, 금속 노동자들에게는 일정 정도의 임금인상을 보장했다. 그리고 룰라가 언젠가는 초심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도 운동이 직면한 난관 중 하나다. 룰라는 초심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방은 스스로의 투쟁과 운동으로 쟁취해야 하고 자신의 해방이 다른 사람의 해방과 맞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운동의 이념과 원칙을 잃은 것이다. 결국 룰라는 점차 대중운동과 멀어졌고, 자신이 인민의 권리를 대변하는 정책으로 인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동자민중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그가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외부의 압력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운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룰라의 당선과 그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고,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운동의 중요한 과제일 것도 없다. ‘잃은 자들의 동맹’은 신자유주의 정치 공학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인민의 삶을 볼모로 한 자본주의 위기 지연 방식인 한 ‘잃은 자들’의 불만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이를 대변하겠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언제나 선거 전에는 가장 강력한 신자유주의 비판자였다. 선거 이후에는 이런저런 변명과 현실적인 이유로 가장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다(노무현도 마찬가지다). 변절한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대통령을 바꾸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배신은 반복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관리하며 삶을 파괴하는 것에 맞서 대중이 스스로의 투쟁을 조직하고, 상호 연대하고, 그들의 투쟁과 연대가 보편적인 권리와 요구로 확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사회운동의 과제일 따름이다. 1) 1994년부터 시행됐다가 실패한 경제 안정화 정책. 미국 달러와 브라질 헤알을 1대1의 환율로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막고 외자를 끌어들인다는 구상에서 시행된 정책이었고,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 인플레이션이 감소했고 자본유입도 두 배 이상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미국 달러의 강세가 나타나면서 여기에 고정된 헤알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어 브라질의 수출 경쟁력은 크게 약화됐다. 더욱이 시장개방의 조류와 맞물리면서 수입이 급증해 무역적자가 크게 확대됐고 이 때문에 외자를 더 끌어들이려 이자율을 올리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본문으로 2)카르도주 집권 시기 헤알 플랜의 결과로 외국인 투자가 쇄도했는데, 그 상당 부분은 공기업이나 공사합동기업을 매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1년에 진행된 외국자본조사는 외국 자본이 최소 20% 이상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1995년 6,322개에서 2000년 11,404개로 증가(80.4%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외국 자본이 진출한 기업의 주식 가치는 같은 기간에 3배가 뛰었지만, 고용은 증가하지 않았고 실업률은 더욱 높아졌다. 본문으로 3)브라질 주식시장지수(BOVESPA)는 2003년 1월 11,268에서 2003년 말 20,000 이상으로 오르면서 급상승했다. 2005년 현재까지 최고치는 29,455 최저치는 23,609를 기록했다. 본문으로 4)이런 조치는 외국인 직접투자가 카르도주 시절에 비해 절반 가까이 감소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 직접투자의 감소는 브라질이 외국인 투자에 대해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다. 카르도주 시절 외국인 직접투자의 대부분은 수익성 있는 공기업을 매입하기 위해 유입되었다. 이제 그런 공기업은 다 팔려서 남은 것이 거의 없다는 점과 주식시장의 거품이 직접투자보다는 투기성 투자를 유인하고 있다는 점이 외국인 직접투자 감소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원인보다는 투자 감소라는 결과만 놓고 한층 심화된 개방, 자유화, 탈규제 조치를 추진하는데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 2005-06-03

    룰라, 한국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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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룰라, 한국에 오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소중한' 만남 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이하 룰라) 브라질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다. 공식적인 명분은 유엔과 한국 정부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6차 정부혁신 세계포럼 참가다. 하지만 190명이 넘는 기업인 방문단의 구성과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방문하여 브라질 투자유치 설명회를 개최한다는 계획이 보여주듯 기실 주된 목적은 한국과 일본, 나아가 아시아 지역의 브라질에 대한 투자유치를 촉진하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고 외국자본에 투자를 구걸하며 온갖 반-노동자적, 반-민중적인 조치들을 약속하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고 반-주변부 국가 수반들에게는 일상 활동이 되었지만, 룰라가 적극적으로 그 대열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일상다반사로 넘기기는 어려울 듯하다. 노동자 출신이며 노동자들의 정당을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한 때 전 세계 좌파의 유력한 희망으로 부상했던 그가 투자유치단의 단장 역할을 성심을 다해 수행하고 있는 현실은 씁쓸하게 비웃고 말 해프닝은 아니다(당선 이후 그는 이미 수십 차례 이런 역할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이런 현실은 단지 룰라 개인이 초심을 잃고 변절했기 때문도 아니고 미국과 국제금융기구, 초민족적 자본의 압박 속에서 룰라가 어쩔 수 없이 택한 고육지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룰라는 집권 이후 경제, 사회 전반에서 일관되게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했고, 향후에도 룰라는 이런 정책들을 심화하면 심화했지 스스로 철회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룰라가 노동자의 대변자를 자처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거듭난 과정과 원인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현재의 룰라 정부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지구 반대편 먼 곳의 일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노무현은 이미 지난 해 브라질을 방문하여 룰라가 자신과 비슷한 경력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과거 경력의 유사성 정도보다 현재 누구보다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유사성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룰라 정부에 대한 평가와 브라질의 상황은 무엇보다 한국의 사회운동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룰라의 당선 배경: 심각한 사회·경제 위기와 ‘잃은 자들의 동맹‘ 룰라의 대통령 당선에는 당시 브라질이 겪고 있던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 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선거 캠페인 방식,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노동자당의 성격과 활동 변화라는 조건이 놓여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의 내용은 무역과 금융의 자유화, 공공부문과 국유기업에 있어서의 대규모 사유화, 경제적 탈규제화, 환율 안정화를 위한 ‘헤알 플랜’1), 강력한 긴축 정책 등이다. 이런 정책들은 브라질 경제의 위기를 더욱 심화했을 뿐이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브라질 경제성장률은 평균 1.7%로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보다 더 낮았다. 이런 정책들은 외채를 줄이기는커녕 두 배로 증가시켰고, 국가 소유의 그나마 수익성 있는 기업들을 외국 자본에 팔아넘기는 효과를 낳았다2).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특히 제조업)이 초민족적 자본의 소유로 넘어갔거나 그들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그 결과 산업 자체가 외국인 투자자와 외국 시장에 종속되었다. 이런 정책의 결과는 브라질 내외 초민족적 자본과 지배 엘리트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 다수에게는 심히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가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이 큰 역할을 했고 룰라는 이런 불만들을 적절히 조직하는데 성공했다. 룰라는 결코 균질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 적대적인 계급, 계층의 불만을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로 조직했다. 이는 당시 룰라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구성과 이를 활용한 선거 캠페인 방식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물론 대선 당시 룰라 지지자들의 가장 큰 부분은 전통적인 노동자당 지지자 즉, 조직된 노동자, 숙련/반숙련 노동자, 진보적 지식인, 비공식 부문 노동자,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들과 적대적이었던 계급의 구성원들도 룰라를 지지했다는 점이다. 우선 제조업의 자본가들이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한 긴축 정책과 자유화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룰라가 당선되면 다시 민족 자본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쓸 것으로 기대했다. 또 다른 지지자들은 토지귀족으로서 오랫동안 과두제를 형성하여 지역을 지배해왔던 계층이다. 이들은 금융의 이해가 우선되면서 자신의 지배력이 침식당했다고 생각했으며, 룰라를 지지함으로써 의회와 지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시의 중간 계층 사람들은 룰라나 노동자당의 급진적인 수사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 직업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각종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불만으로 룰라를 지지했다. 노동자당의 전통적인 지지자들을 포함하여 이런 불균등한 지지자들의 공통점이라고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잃은 것’이 있다는 점 밖에 없었지만, 룰라는 이것을 ‘잃은 자들의 동맹’으로 조직했다. 물론 이렇게 갈등적이고 모순적인 이해관계와 기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룰라는 구체적인 정책과 전망 제시는 회피한 채, 모호한 수사와 감수성을 자극하는 언사들로 집권에 성공했다. 대선 당시 룰라가 제시한 가장 구체적인 약속이 카르도주(그도 한 때 종속이론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시절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IMF 협정이었다는 사실은 룰라가 ‘잃은 자들’의 요구를 “온정적인 동북부인, 룰라”, “새로운 현실주의” 등의 수사로 동원했던 측면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지점이다. 룰라의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 현재 룰라 정부가 그 이전의 카르도주 정부보다 더 강력하게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룰라 자신은 이런 정책이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극약” 처방이며, 이를 통해 경제가 안정되면 민중적 의제를 추진할 수 있으니 브라질 민중들이 조금만 더 “인내”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룰라가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유지해 온 정책 기조와 그 정책을 고안·집행하는 내각의 성격을 봤을 때, 그리고 실제 집권 이후 보여준 룰라의 행보를 봤을 때, 이런 요구는 신뢰성이 떨어진다. 룰라는 후보 시절 IMF와의 협약을 통해서 카르도주 시절의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 외채 지불과 강력한 긴축정책, 인플레이션 억제, 민영화/사유화 정책 고수, 노동부문 개혁 등이 그 내용이다. 당선 이후 그는 외채 지불을 충족하기 위한 흑자 재정 비율을 카르도주 시절 IMF와 약속했던 GDP 대비 3.75%에서 4.25%로 상향조정했다. 외채 지불을 위한 흑자 재정은 대부분 사회 복지 예산의 삭감으로 충당되었다. 이런 정책은 외국인 투자자와 브라질 수출업자들에게는 거대한 이윤을 가져다주었다. 인도, 러시아, 중국과 함께 브릭스(BRICs)로 주목받고 있는 현재 브라질 경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외국인 투자와 수출 산업이 성장의 엔진이라고 굳게 믿는 룰라 정부의 철학은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한 각종 인센티브 제공,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추진, 노동과 복지 관련 제도 완화, 연금 개혁,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을 비롯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고금리에서 비롯되는 이윤과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은 주식시장에 거품을 형성하고3) 채권시장 수익률 상승을 이끌며 투기성 자본을 유인하고 있다. 게다가 룰라 정부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세금 면제 조치를 고안하고 있다.4) 브라질의 수출산업을 이끄는 것은 주로 농산물과 철광석, 펄프, 석유 등 원자재 산업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분야의 수출을 증대하기 위한 최선의 방향이 자유무역의 확산이라고 믿는다. 농산물, 광물, 석유 부문의 거대 수출기업들의 활로를 위해 그는 WTO와 FTAA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새로운 무역파트너 형성을 위해 세일즈맨이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닌다(방한 기간 중 진행하는 투자유치 설명회를 보라). 브라질은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5차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G-21)의 반발을 주도했는데, 이는 브라질의 농산물 수출기업들을 보호하고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룰라 정부의 전투적인 방어였지 세계화나 WTO 체제를 반대하고 제3세계 가난한 농민, 농업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룰라 정부는 FTA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사실 남미의 많은 민중들은 FTAA의 파괴적 효과를 인식하고 다양한 투쟁을 통해 FTAA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룰라의 바로 곁에도 FTAA를 반대하는 무토지농민(MST) 조직, 사회운동 조직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2002년에 FTAA 반대 국민투표를 조직하여 천만 명 이상 참가, 95% 이상의 반대라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룰라는 그 투표에 참가하기를 거부했고, 노동자당에도 투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당선된 후에는 서비스 시장, 투자, 지적 재산권에 대한 미국의 개방 요구를 수용하고, 그 대가로 미국이 농산품 등의 분야에서 무역장벽이 낮출 것을 요구하면서 오히려 FTAA 협상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브라질 민중에게는 거대한 부담을 지우고,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흑자 재정 4.25% 유지, 세금 제도 개혁, 복지 축소와 같은 조치는 브라질 노동자, 빈민, 농민으로부터 금융자본, 수출기업, 외국인 투자자 및 채권자로 소득이 이전되는 효과를 낳았다. 뿐만 아니라 실업률은 9.6%로 여전히 높고, 그나마 창출된 일자리의 대부분은 비공식 부문 노동, 비정규직 노동이다. 대선 당시 브라질 민중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장담했던 “기아 제로” 프로그램과 토지 개혁은 지금까지 실행되지 않고 있다. ‘잃은 자들의 동맹’을 관리하기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룰라가 신자유주의로부터 ‘잃은 자들’의 지지를 동원하여 당선되었다는 점은 일견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룰라 정부의 성격을 보여준다. 노동자 출신이고 노동자당의 후보였지만 룰라의 전략과 전망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미래를 고려하지 않았다. 룰라는 쿠바의 사회주의 모델이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가 보여주는 인민주의 모델(양자 모두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조차 고려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FTAA 국민투표 거부, IMF와의 협약 등에서 드러나듯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편입할 준비를 해왔다. 그가 ‘잃은 자들’의 대변자를 자처했던 것은 그들의 지지를 동원해야 당선될 수 있고, 그들의 불만과 갈등을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전망을 실행하는 관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선거에서 구체적인 실행계획과 비전은 회피한 채, 누구나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변화”라는 모호한 수사를 활용하고,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하여 대중의 감수성에 호소했다. 집권 이후 실제 정책의 실행 과정에서 룰라는 자신의 온정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인 정치 스타일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왔다. 우선 그는 자신의 과거 경력과 비천한 출신으로서 피지배계급에게 가지는 정서적 동정심을 활용한다. 그는 가난한 어린이를 마주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무토지 농민들을 만나서는 장난스럽게 그들의 모자를 쓰고 친밀감을 표시한다. 이런 모습은 노동자 출신, 운동의 경력 등과 결부되어 강력한 진실성을 획득하고, 그의 “극약” 처방이 끝나면 민중에게 혜택이 돌아오리라는 기대를 자극한다. 룰라는 노동자에게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사회경제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서는 노·사·정 사이의 사회협약이 추진되었는데, 그 내용은 법인세 감축과 외국인 투자자 세금 혜택을 골자로 하는 세금 개혁, 노동 비용 절감과 복지 정책에서의 후퇴를 골자로 하는 사회안전망 개혁이었다. “노동자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후려치고 있는 꼴이지만, 노동자당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브라질노총(CUT)은 룰라 정부의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노·사·정 협의에 대한 반격을 조직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브라질노총의 상층부를 정권의 자문단, 입각 내정자, 노동자당의 선거 후보자로 흡수하고 보조금 등을 통해 포섭하는 룰라의 실질적 혜택도 작용한다. 게다가 룰라는 자신의 개인적인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통치의 기반으로 활용하고 지난 해 한국을 방문했던 한 브라질 활동가는 “브라질의 정치 상황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룰라의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당의 지지도는 하락하고 있지만, 룰라 개인의 지지도는 여전히 60%를 웃돈다”고 말했다. , 자신의 내각, 특히 재무장관 팔로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팀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실제 브라질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정책이 거기에서 나오고, 일단 제출된 정책은 과감하게 실행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당은 룰라의 정책을 승인하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다(선거 시기가 되면 선거 캠페인 수단으로 활용된다). 노동자당이 룰라 개인과 그 측근들의 정당이 된 것은 오랜 일이지만, 집권 후 룰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룰라는 자신에 대한 반대나 자신이 제출한 정책을 반대하는 노동자당 의원들에게는 출당의 위협을 가하면서 자신의 권위와 지시를 관철시키고 있다. 물론 ‘잃은 자들의 동맹’이 룰라에 대한 각기 다른 기대를 실리적으로 조직, 동원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룰라의 실질적인 행보와 정책이 브라질 민중들의 삶을 개선하기는커녕 더욱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점에서 룰라가 이 동맹을 언제까지 관리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룰라의 정치 스타일이 이런 불만과 갈등의 폭발을 잠재워온 측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룰라의 정치 스타일은 철저하게 권위주의적이고 인기 영합적이며 온정주의적인 수사를 활용하고 있지만, 이런 행태는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를 자극하고 사회운동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브라질 사회운동의 도전과 시사점 룰라 정부의 반-민중성이 점차 명확해지면서, 룰라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운동을 만들려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지난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은 룰라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고, 룰라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것을 당내에 관철시키는 독단적인 방식에 반대하는 지식인, 활동가들이 노동자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당을 만들기도 했다. 룰라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 금속 노동자들, 도시의 불법 점거자들의 파업과 투쟁도 있었다. 이런 투쟁은 아직 소극적으로 룰라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수준이고,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또 한 축에는 무토지농민운동(MST)이 있다. 대선 시기 룰라는 무토지농민운동이 자신의 당선에 방해물이 되지 않기를 바랐고, 따라서 이들에게 모든 대중행동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물론 그 대신 당선 후 토지 개혁을 통해 농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룰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들은 다시 투쟁에 나섰다. 무토지농민운동은 지난 5월 2일부터 농지 개혁 실행과 미국의 자유무역 반대, 이라크에서 철수 등을 요구하며 전국 순회 투쟁에 돌입했고, 17일 브라질리아 대통령궁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런 투쟁이 룰라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반대의 요구를 결집시키고, 새로운 대안을 형성해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투쟁과 저항이 거세질수록 룰라의 정치 행태도 강화될 것이다. 대중의 실리적인 기대의 일정 부분은 포섭하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투쟁의 통합력과 운동의 단결을 해치려 할 것이다. 실제로 룰라는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공공 부문의 파업은 무참히 짓밟았지만, 금속 노동자들에게는 일정 정도의 임금인상을 보장했다. 그리고 룰라가 언젠가는 초심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도 운동이 직면한 난관 중 하나다. 룰라는 초심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방은 스스로의 투쟁과 운동으로 쟁취해야 하고 자신의 해방이 다른 사람의 해방과 맞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권리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운동의 이념과 원칙을 잃은 것이다. 결국 룰라는 점차 대중운동과 멀어졌고, 자신이 인민의 권리를 대변하는 정책으로 인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노동자민중에게 인내를 강요하는 것 아닌가! 따라서 그가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외부의 압력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새로운 운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룰라의 당선과 그가 처한 현실적 어려움에 일희일비할 것도 없고, 노동자 출신의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운동의 중요한 과제일 것도 없다. ‘잃은 자들의 동맹’은 신자유주의 정치 공학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인민의 삶을 볼모로 한 자본주의 위기 지연 방식인 한 ‘잃은 자들’의 불만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이를 대변하겠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언제나 선거 전에는 가장 강력한 신자유주의 비판자였다. 선거 이후에는 이런저런 변명과 현실적인 이유로 가장 충실한 신자유주의 추종자가 된다(노무현도 마찬가지다). 변절한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은 쉽지만, 대통령을 바꾸는 것만으로 사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배신은 반복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관리하며 삶을 파괴하는 것에 맞서 대중이 스스로의 투쟁을 조직하고, 상호 연대하고, 그들의 투쟁과 연대가 보편적인 권리와 요구로 확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것, 그것이 사회운동의 과제일 따름이다. 1) 1994년부터 시행됐다가 실패한 경제 안정화 정책. 미국 달러와 브라질 헤알을 1대1의 환율로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막고 외자를 끌어들인다는 구상에서 시행된 정책이었고, 단기적으로는 성공했다. 인플레이션이 감소했고 자본유입도 두 배 이상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미국 달러의 강세가 나타나면서 여기에 고정된 헤알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어 브라질의 수출 경쟁력은 크게 약화됐다. 더욱이 시장개방의 조류와 맞물리면서 수입이 급증해 무역적자가 크게 확대됐고 이 때문에 외자를 더 끌어들이려 이자율을 올리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본문으로 2)카르도주 집권 시기 헤알 플랜의 결과로 외국인 투자가 쇄도했는데, 그 상당 부분은 공기업이나 공사합동기업을 매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2001년에 진행된 외국자본조사는 외국 자본이 최소 20% 이상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이 1995년 6,322개에서 2000년 11,404개로 증가(80.4%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외국 자본이 진출한 기업의 주식 가치는 같은 기간에 3배가 뛰었지만, 고용은 증가하지 않았고 실업률은 더욱 높아졌다. 본문으로 3)브라질 주식시장지수(BOVESPA)는 2003년 1월 11,268에서 2003년 말 20,000 이상으로 오르면서 급상승했다. 2005년 현재까지 최고치는 29,455 최저치는 23,609를 기록했다. 본문으로 4)이런 조치는 외국인 직접투자가 카르도주 시절에 비해 절반 가까이 감소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 직접투자의 감소는 브라질이 외국인 투자에 대해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다. 카르도주 시절 외국인 직접투자의 대부분은 수익성 있는 공기업을 매입하기 위해 유입되었다. 이제 그런 공기업은 다 팔려서 남은 것이 거의 없다는 점과 주식시장의 거품이 직접투자보다는 투기성 투자를 유인하고 있다는 점이 외국인 직접투자 감소의 결정적인 원인이다. 룰라 정부는 이런 원인보다는 투자 감소라는 결과만 놓고 한층 심화된 개방, 자유화, 탈규제 조치를 추진하는데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본문으로

  • 2005-05-11

    [정책워크샵] 유럽통합/헌법조약의 본질과 사회운동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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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9일(월) 7시 사회진보연대 회의실에서 5월 정책워크샵 "유럽통합/유럽헌법조약의 본질과 사회운동의 대응"을 다음과 같이 진행하였습니다. <발제> - 유럽통합의 본질과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정지영 정책편집부장) - 화폐통합을 목적으로 한 경제통합방식의 문제점(임필수 정책편집국장) - 노동자운동의 대응과 이주노동자 문제(정희찬 정책편집부장) <기획의도> 2004년 6월 18일 유럽연합 정상들이 유럽헌법조약을 채택했고, 이후 회원국들에서 국민투표 혹은 국회 비준을 통과하면 유럽헌법조약은 2007년부터 효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유럽헌법조약이 회원국들의 비준을 통과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지난 2월 국민투표를 실시한 스페인에서는 72%의 찬성률로 통과되었지만, 투표율은 42%로 매우 저조한 수준이었습니다. 유럽 민중들의 유럽 통합에 대한 무관심은 유럽 통합 과정에서 계속해서 우려 지점이었는데, 스페인의 투표율은 그 우려를 다시 일깨웠습니다. 게다가 각각 5월 말과 6월 초에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유럽헌법조약이 부결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어서, 유럽연합과 양국 정부가 긴장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헌법조약을 부결시키기 위해 아탁을 비롯한 사회운동, 여성운동, 프랑스 공산당,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 노동총동맹(CGT) 등이 총력을 기울인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유럽연합이나 회원국 정부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유럽 통합이 민중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입니다. 유럽통합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완성 단계에 와있고, 이는 유럽과 유럽 민중들에게 장미빛 미래를 선사할 것이라는 지배계급의 선전은 매우 기만적인 것입니다. 유럽통합은 그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유럽 자본을 위시한 지배계급의 프로젝트였습니다. 현재 불붙고 있는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은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이 지배계급이 말하는 유럽에 반대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현재 유럽에서는 "어떤 유럽인가?"를 둘러싼 논쟁과 투쟁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런 투쟁은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대안적인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진보연대에서는 5월 정책워크샵을 통해 그 시사점을 함께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주요 논의지점> - 유럽통합과 유럽헌법조약은 반민주적 본질 -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국면에서 유럽연합 탄생의 의미: 특히 화폐통합 방식의 경제통합이 가지는 문제점 - 유럽통합과 유럽헌법조약의 쟁점들: 시민권과 노동권, 군사화, 종교권력강화, 여성권 등 - 이에 맞서는 사회운동의 대응: 아탁, 유럽좌파당, 여성운동, 노동자운동 등 유럽이라는 대륙의 범주를 넘어 확장된 시민권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유럽내에서의 논의들에 주목하고 현재 헌번조약 거부캠페인을 중심으로 운동을 벌이는 유럽 좌파 운동의 향후 확장된 투쟁의 가능성에 대해 향후 지속적으로 조사하고 토론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날 제출된 발제문을 첨부합니다.

  • 2005-05-04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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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무역의 환상을 걷어치워라 최 예 륜 |정책편집부장 APEC 13차 정상회의가 2005년 11월 18, 19일 부산에서 개최된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21개국을 아우르는 APEC은 전 세계 GDP의 약 57% 및 교역량의 46%를 차지하고, 회원국의 인구가 전 세계의 약 44.8%(2004년 기준)에 달하는 거대규모의 경제협력체다. APEC은 1989년 창설 이후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며 자유무역 확산의 선도적 역할을 자임해왔으나 그 기능과 실적에 대한 비판과 회의에 부딪혀왔다. APEC이 제시한 자유무역의 경로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럽연합이나 전미자유무역지대(NAFTA) 등 역내 무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블록들의 배타성을 경계하면서 전 세계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선도하겠다던 APEC은 명목뿐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이는 APEC 프로그램의 부실로 인한 것이 아니며 APEC이 유포해 온 자유무역 신화가 붕괴되고 아시아-태평양 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해진 데 따른 것이다. APEC은 창설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수직적 하청 네트워크를 자유무역의 신화로 포장하고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의 첨병으로서 WTO협상에 지역블록, 개도국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또한 1997년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IMF 자금지원을 통해 금융자유화 프로그램을 강제하여 금융화를 촉진하고, 9.11 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對테러 전략을 지원하는 ‘인간안보’라는 의제를 논의하는, 자유무역의 쟁점을 초과하는 광범위한 역할 수행을 자임해왔다. 이러한 과정 내내 APEC은 시효가 만료된 발전주의와 자유무역의 신화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인민들을 호도해왔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유무역 신화 세계경제에서 하나의 지역으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출현은 처음에는 일본의 경공업을 위한 시장과 원료에 대한 접근수단을 보장해줌으로써 일본 경제를 재건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기반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를 제패한 미국은 냉전정책에 기반한 전후 세계경제 복구책을 내놓으며 일본에 대한 집중적 지원을 수행했다. 미국은 일본에 미국의 기업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미 수출판로를 보장하는 ‘역개방 정책’을 펼쳤고, 일본은 생산의 배후지(경제적 식민지)를 요청했다. 남한과 대만 등이 배후지로 통합되면서 1960년대 일본 및 1970년대 남한과 대만의 경제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발전과정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 위계적으로 연결된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들의 확장을 통해 성취되었다. ‘나는 기러기 떼(flying geese)’ 발전1)이라는 명목 하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심-주변 관계가 공고화되었다. 중심에서 주변 혹은 반주변부에서 주변으로 산업들의 재배치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는 직접투자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 국가들은 높은 의존도의 대미수출을 통해 수출지향적 산업육성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산업화를 위한 기술, 자본유치에 있어서의 ‘개방성’ 및 수출지향성이 아시아 경제의 ‘필수’ 덕목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른바 네 마리 용으로 부상한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은 직접투자와 대외교역의 개방성을 극대화하여 성공한 모델로 꼽히며, 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이러한 ‘역동성’에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전략산업 집중투자라는 성장전략에 따른 과잉중복투자와 금융투기자본의 급속한 유입은 동아시아의 연쇄적 금융위기를 발생시키게 된다. 또한 1970년대 이후 미국경제 불황에 따른 수입의 감소와 일본 거품경제의 붕괴,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한계에 봉착한 기술혁신과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하청네트워크 형태의 발전모델은 파탄에 이르렀다. 아시아에서 미-일 동맹이 유포해온 다음과 같은 자유무역 신화는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첫째,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역외교역의 활성화와 경제적 역동성 덕분이며, 이러한 경제적 역동성 때문에 아시아에는 지역경제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자유무역체제는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낳는다. 셋째, 자유무역체제는 특히 한국 등의 신흥공업국(개발도상국)에 또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생산의 ’초민족적 통합‘은 이에 조응하는 세계 소득의 재분배를 동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산 네트워크의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중심부로 자본 집중이 증가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신흥공업국들을 비롯하여 중하위소득국들이 전반적인 실추를 모면할 수 있었던 예외적 능력은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 확장에 덧붙여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들의 국가장치가 누린 상대적인 자율성과 이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이용한 지정학적 전략들과 관련된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간의 중심-주변 관계의 구성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지역이 출현하는 데에 근본적이었다. 일본의 다층적인 하청 시스템들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거점들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거점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 시장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수단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미국의 관할권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시아의 지역경제체제는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없었고 수출의 판로를 확보하고 자본의 더욱 자유로운 이동을 강화하는 방식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경제의 부상과 배타적 역내 블록화 움직임은 미국의 아시아 통제권 상실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개방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의 ’개방성‘이란 미-일동맹이라는 현존하는 권력관계의 지속을 승인하고 WTO 협상과 관세철폐 등 여타 지역블록 및 거대개도국 등을 압박하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 질서로의 철저한 이행을 촉구하는 촉매라는 APEC의 본질적 기능을 포장하는 것이다. APEC 전개과정과 미-일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들 APEC은 1989년 11월 1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창설되었다. 1993년 시애틀에서 열린 APEC의 최초 정상회담은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결속에 위협을 느낀 유럽연합이 서둘러 우루과이 라운드와 WTO발족에 대한 동의를 표하는 효과를 낳았다. 2차 인도네시아 보고르 정상회의에서는 ‘보고르 선언’을 채택하여 선진국 회원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의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 등 선진국 그룹은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등 새로운 통상 이슈(기술 이전, 협력 등의 명목으로)를 APEC을 통해 타결하고자 하였고, 개도국들은 선진국의 개방 압력을 다자간 협상체제로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다양한 경제구조와 목적, 이해관계가 혼재한 가운데 APEC은 협력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무역장벽 등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기로 하고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결과 이행 및 WTO체제의 성공적인 출범을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APEC은 이 ‘보고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략들을 구사하는데 첫 번째 경로는 3차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오사카행동계획’이었다. 각 회원국들은 개별실행계획을 제출, 구체적인 일정을 수립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또 다른 경로로서 APEC은 15개의 조기자유무역화 분야를 선정하지만 이 역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 APEC은 이후 오클랜드에서 세 번째 경로로 방향을 틀게 된다. WTO에 판돈을 걸고, WTO 뉴라운드 출범이라는 대세에 몸을 맡겨 전 세계의 자유화를 함께 성취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99년 시애틀에서 WTO각료회의는 무산되었다. 사실 이 무산에는 가장 큰 경제규모의 미국과 일본의 갈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APEC의 자유화 경로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APEC의 틀 안에서 한편으로 쌍무협정들과 금융 자유화 조치 등이 꾸준히 강화되어왔다. 자본 이동이 극대화되고 외환시장이 국제적인 투기자본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초래된 금융위기로 인해 일본주도의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파탄을 맞았다. 이러한 위기는 ‘관치금융과 거품경제’의 구조개선이라는 명목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수용으로 이어지고, 기존에 국가의 집중적 지원을 받아온 재벌체제에 대한 개선과 노동 유연화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일단락 되었으며, 역설적으로 무역, 투자 자유화가 경제 활성화를 위한 필수과제로 대두했다. 또한 자유무역의 확대를 위한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외환위기 직후 금융안정화 방안에 따라 금융부문 구조조정, 민간자본 및 투기자본의 역내 유입 촉진 등이 논의되었다.2) 여기서 IMF 자금지원의 역할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고유한 접근과 관리기준의 전파를 용이하게 만들고 금융자본에 우선순위를 부여한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것으로 기능했다. APEC의 위상은 전후 아시아지역 경제 주도권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1994년 APEC의 저명인사그룹(EPG)의 정의3)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는 역내 국간에 최대한 시장개방을 실시하고, 개별국가들은 역외국에게는 역내자유화조치 혜택을 선택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를 강조하는 ‘개방적 지역주의’란 WTO 체제의 순항과 자유무역 달성을 위해 아시아지역의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거대 시장의 형성으로 여타의 경제블록을 압박하기 위한 수사다. 물론, 이와 별도로 아시아 내에서의 지역화 논의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수출 흡수국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고, ASEAN +3(한중일) 진전, EAFTA(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모색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편, 역내 금융협력체제 형성을 위한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창설(엔 블록화) 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이 느낄 ‘태평양 가운데 선긋기’의 위협은 미국 관리 하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지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와 노무현 정부 한편으로는 아시아에서의 배타적 지역화를 막고 유럽연합이나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등을 모든 무역장벽이 제거된 자유무역의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은 줄기차게 FTAAP(아시아 태평양자유무역협정) 결성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60%를 차지하는 APEC이 FTAAP를 결성하여 차별의 조건을 내걸 경우 핵심 개발도상국(브라질, 인도 등)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거대한 비회원국들은 이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따라서 배타적 경제블록들로부터 지역적 자유화보다 전 세계적 차원의 추진력을 회복하고 도하라운드 결론을 수용하도록 하여 미국을 정점에 둔 자유무역의 완성에서 APEC은 핵심 거점인 셈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의 기조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이다((미국을 중심으로 한)하나의 (빈부의 양극화를 위한)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 유럽연합이 헌법조약투표 과정 등을 거치면서 통합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미국에 적대적인 지역공동체들의 강화와 중국 부상 등 현실적 위협에 대해 자원과 소득의 재분배를 불러올 것이라는 자유무역 신화는 여전히 도전 중이라는 것이다. 냉전 구도 하에서 그리고 냉전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정치·경제·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미국의 불안정성 증대는 자유무역의 완성을 시급히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불안정성 증대와 종속의 심화라는 자유무역의 진실을 마주한 인민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몇 푼을 적선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외침을 확산하고 있다. 과연 자유무역체제는 ‘평등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전세계 소득을 증진시키고 고루 분배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정부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과 혹독한 구조조정의 터널을 거쳐 ‘관치금융’과 ‘재벌-족벌 경영의 폐해’를 시정하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감내할 노동력의 재구성을 이루어냈으며 금융자본의 출입이 자유로운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에! 또한 아직까지도 착취 가능한 동남아시아 및 남미 시장을 위한 해외투자의 수행자로서 한국의 자본가계급이 든든히 제 갈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자유무역 질서는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지방화, 분권화가 이루어질 것이라지만 실상 이는 기존의 국가의 기능을 지방정부 등을 통해 강화하고 경제자유구역, 특구 지정 등을 둘러싼 지방 도시들의 경쟁을 부추길 따름이며, 이를 위해 시민들을 동원하고 관리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이번 APEC 정상회의가 진행되는 부산시는 동북아 물류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해외자본 유치에 가속도를 붙이는 등 APEC 준비과정을 지역경제의 구조조정의 계기로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초민족적 기업과 국민국가의 위상을 동등하게 다루는 투자자유화 물결은 국가의 역할 분산을 동반한다. 노동력 관리의 엄격함과, 연기금 개혁 등 국가 개입을 통한 투기자금의 형성의 역할은 강화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문화적 쟁점의 상당수는 NGO들에게 이전된다. 노무현 정부는 NGO들을 동원하여 자유무역과 금융투기의 활성화를 위한 APEC의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고 부산여성단체협의회, 부산여성단체연합 등의 여성단체들은 ‘APEC 여성의제채택 여성연대’를 구성하여 ‘중소기업, 영세기업 및 여성 참여 강화‘ 의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으로 이에 조응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反테러와 6자회담 진전을 위한 부산선언문〉을 준비하는 등 정치적 차원에서 APEC을 활용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와 ‘전쟁’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인권과 반테러’ 즉,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도출되는 APEC에서 동북아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일 동맹 헤게모니로의 통합이라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증대된 불안정성과 인민의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아시아에서 인민들의 연대와 단결된 투쟁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자유무역 신화의 폐해가 가장 극대화된 형태로 드러난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일한’ 착취 네트워크를 향한 자유무역질서의 전략적 요충지와 아시아-태평양의 군사기지로서 동북아가 갖는 지정학적 전략에 따른 미국의 재편전략이 수행되고 있다. 이 착취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이미 드러난 자유무역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이 지배구조에 복무하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005년 APEC정상회의에 대응하는 우리의 기조는 미-일 동맹과 노무현정부에 의해 확장되는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반대,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인민들의 연대를 통한 대안세계화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다. PSSP 1) 일본을 선두로 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의 육성과 발전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아시아 발전형태설명이론(안행(雁行)형태 이론이라 불린다). 선도국가에서 경쟁력 있는 산업의 육성이 이루어지고 그 성과가 직접투자를 매개로 다음 단계의 국가에 이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설명되는 동아시아 '발전'과정에서 일본은 대동아시아 흑자 행진을 계속했는데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를 일본중심의 무역 및 투자시스템 내의 하위구조로 고착시켜놓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동아시아 경제의 틀을 형성하면서 기술을 지배하고 있어 대동아시아 수입의 상당부분도 사실은 일본기업의 현지 투자회사로부터의 수입일 뿐이다. 본문으로 2) 동아시아 금융위기 발생 이후 열린 98년 6차 콸라룸푸르 정상회의에서는 아시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면서 '경제 위기 조기극복을 위해 성장지향적 거시경제정책을 공동으로 추진키로 합의'하는 한편 국제 금융체제의 강화를 위한 노력으로서 민간자본 역내 유입 촉진과 회원국의 금융체제 강화, 금융분야 구조조정, 국제 금융체제 개선문제 등이 주로 논의되었다. 금융 및 자본자유화가 급진전되면서 헤지펀드 등 투기성 단기자본을 포함한 자본의 유출입이 빈번해진 데 원인이 있었던 발생한 동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극복 방안으로서 투자 자본의 안정적 역내 유입이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역설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3) APEC 저명인사그룹의 보고서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하는 개념이다. ①최대한의 일방적 자유화, ② 비회원국에 대한 무역장벽의 지속적 완화 확약, ③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 ④개별 회원국의 독자적인 조건적/무조건적 최혜국대우 원칙 적용. 위의 요건 중 한가지 이상을 충족하면 '개방적 지역주의'의 실천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한 이들의 개념 설정은 애초 '개방적 지역주의'가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개방화'와 '세계화'를 수행하되 지역별 구분에 따라 관리와 위계질서의 유지가 가능한 질서를 지향함을 드러낸다. 본문으로

  • 2005-05-04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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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무역의 환상을 걷어치워라 최 예 륜 |정책편집부장 APEC 13차 정상회의가 2005년 11월 18, 19일 부산에서 개최된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21개국을 아우르는 APEC은 전 세계 GDP의 약 57% 및 교역량의 46%를 차지하고, 회원국의 인구가 전 세계의 약 44.8%(2004년 기준)에 달하는 거대규모의 경제협력체다. APEC은 1989년 창설 이후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며 자유무역 확산의 선도적 역할을 자임해왔으나 그 기능과 실적에 대한 비판과 회의에 부딪혀왔다. APEC이 제시한 자유무역의 경로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럽연합이나 전미자유무역지대(NAFTA) 등 역내 무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블록들의 배타성을 경계하면서 전 세계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선도하겠다던 APEC은 명목뿐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이는 APEC 프로그램의 부실로 인한 것이 아니며 APEC이 유포해 온 자유무역 신화가 붕괴되고 아시아-태평양 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해진 데 따른 것이다. APEC은 창설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수직적 하청 네트워크를 자유무역의 신화로 포장하고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의 첨병으로서 WTO협상에 지역블록, 개도국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또한 1997년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IMF 자금지원을 통해 금융자유화 프로그램을 강제하여 금융화를 촉진하고, 9.11 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對테러 전략을 지원하는 ‘인간안보’라는 의제를 논의하는, 자유무역의 쟁점을 초과하는 광범위한 역할 수행을 자임해왔다. 이러한 과정 내내 APEC은 시효가 만료된 발전주의와 자유무역의 신화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인민들을 호도해왔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유무역 신화 세계경제에서 하나의 지역으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출현은 처음에는 일본의 경공업을 위한 시장과 원료에 대한 접근수단을 보장해줌으로써 일본 경제를 재건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기반한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세계를 제패한 미국은 냉전정책에 기반한 전후 세계경제 복구책을 내놓으며 일본에 대한 집중적 지원을 수행했다. 미국은 일본에 미국의 기업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미 수출판로를 보장하는 ‘역개방 정책’을 펼쳤고, 일본은 생산의 배후지(경제적 식민지)를 요청했다. 남한과 대만 등이 배후지로 통합되면서 1960년대 일본 및 1970년대 남한과 대만의 경제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발전과정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 위계적으로 연결된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들의 확장을 통해 성취되었다. ‘나는 기러기 떼(flying geese)’ 발전1)이라는 명목 하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심-주변 관계가 공고화되었다. 중심에서 주변 혹은 반주변부에서 주변으로 산업들의 재배치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는 직접투자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 국가들은 높은 의존도의 대미수출을 통해 수출지향적 산업육성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산업화를 위한 기술, 자본유치에 있어서의 ‘개방성’ 및 수출지향성이 아시아 경제의 ‘필수’ 덕목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른바 네 마리 용으로 부상한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은 직접투자와 대외교역의 개방성을 극대화하여 성공한 모델로 꼽히며, 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이러한 ‘역동성’에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전략산업 집중투자라는 성장전략에 따른 과잉중복투자와 금융투기자본의 급속한 유입은 동아시아의 연쇄적 금융위기를 발생시키게 된다. 또한 1970년대 이후 미국경제 불황에 따른 수입의 감소와 일본 거품경제의 붕괴,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한계에 봉착한 기술혁신과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하청네트워크 형태의 발전모델은 파탄에 이르렀다. 아시아에서 미-일 동맹이 유포해온 다음과 같은 자유무역 신화는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첫째,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역외교역의 활성화와 경제적 역동성 덕분이며, 이러한 경제적 역동성 때문에 아시아에는 지역경제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자유무역체제는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낳는다. 셋째, 자유무역체제는 특히 한국 등의 신흥공업국(개발도상국)에 또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생산의 ’초민족적 통합‘은 이에 조응하는 세계 소득의 재분배를 동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산 네트워크의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중심부로 자본 집중이 증가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신흥공업국들을 비롯하여 중하위소득국들이 전반적인 실추를 모면할 수 있었던 예외적 능력은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 확장에 덧붙여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들의 국가장치가 누린 상대적인 자율성과 이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이용한 지정학적 전략들과 관련된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간의 중심-주변 관계의 구성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지역이 출현하는 데에 근본적이었다. 일본의 다층적인 하청 시스템들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거점들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거점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 시장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수단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미국의 관할권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시아의 지역경제체제는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없었고 수출의 판로를 확보하고 자본의 더욱 자유로운 이동을 강화하는 방식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경제의 부상과 배타적 역내 블록화 움직임은 미국의 아시아 통제권 상실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개방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의 ’개방성‘이란 미-일동맹이라는 현존하는 권력관계의 지속을 승인하고 WTO 협상과 관세철폐 등 여타 지역블록 및 거대개도국 등을 압박하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 질서로의 철저한 이행을 촉구하는 촉매라는 APEC의 본질적 기능을 포장하는 것이다. APEC 전개과정과 미-일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들 APEC은 1989년 11월 1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창설되었다. 1993년 시애틀에서 열린 APEC의 최초 정상회담은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결속에 위협을 느낀 유럽연합이 서둘러 우루과이 라운드와 WTO발족에 대한 동의를 표하는 효과를 낳았다. 2차 인도네시아 보고르 정상회의에서는 ‘보고르 선언’을 채택하여 선진국 회원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의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 등 선진국 그룹은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등 새로운 통상 이슈(기술 이전, 협력 등의 명목으로)를 APEC을 통해 타결하고자 하였고, 개도국들은 선진국의 개방 압력을 다자간 협상체제로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다양한 경제구조와 목적, 이해관계가 혼재한 가운데 APEC은 협력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무역장벽 등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기로 하고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결과 이행 및 WTO체제의 성공적인 출범을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APEC은 이 ‘보고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략들을 구사하는데 첫 번째 경로는 3차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오사카행동계획’이었다. 각 회원국들은 개별실행계획을 제출, 구체적인 일정을 수립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또 다른 경로로서 APEC은 15개의 조기자유무역화 분야를 선정하지만 이 역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 APEC은 이후 오클랜드에서 세 번째 경로로 방향을 틀게 된다. WTO에 판돈을 걸고, WTO 뉴라운드 출범이라는 대세에 몸을 맡겨 전 세계의 자유화를 함께 성취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99년 시애틀에서 WTO각료회의는 무산되었다. 사실 이 무산에는 가장 큰 경제규모의 미국과 일본의 갈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APEC의 자유화 경로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APEC의 틀 안에서 한편으로 쌍무협정들과 금융 자유화 조치 등이 꾸준히 강화되어왔다. 자본 이동이 극대화되고 외환시장이 국제적인 투기자본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초래된 금융위기로 인해 일본주도의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파탄을 맞았다. 이러한 위기는 ‘관치금융과 거품경제’의 구조개선이라는 명목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수용으로 이어지고, 기존에 국가의 집중적 지원을 받아온 재벌체제에 대한 개선과 노동 유연화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일단락 되었으며, 역설적으로 무역, 투자 자유화가 경제 활성화를 위한 필수과제로 대두했다. 또한 자유무역의 확대를 위한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외환위기 직후 금융안정화 방안에 따라 금융부문 구조조정, 민간자본 및 투기자본의 역내 유입 촉진 등이 논의되었다.2) 여기서 IMF 자금지원의 역할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고유한 접근과 관리기준의 전파를 용이하게 만들고 금융자본에 우선순위를 부여한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것으로 기능했다. APEC의 위상은 전후 아시아지역 경제 주도권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1994년 APEC의 저명인사그룹(EPG)의 정의3)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는 역내 국간에 최대한 시장개방을 실시하고, 개별국가들은 역외국에게는 역내자유화조치 혜택을 선택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를 강조하는 ‘개방적 지역주의’란 WTO 체제의 순항과 자유무역 달성을 위해 아시아지역의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거대 시장의 형성으로 여타의 경제블록을 압박하기 위한 수사다. 물론, 이와 별도로 아시아 내에서의 지역화 논의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수출 흡수국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고, ASEAN +3(한중일) 진전, EAFTA(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모색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편, 역내 금융협력체제 형성을 위한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창설(엔 블록화) 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이 느낄 ‘태평양 가운데 선긋기’의 위협은 미국 관리 하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지 두려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와 노무현 정부 한편으로는 아시아에서의 배타적 지역화를 막고 유럽연합이나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등을 모든 무역장벽이 제거된 자유무역의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은 줄기차게 FTAAP(아시아 태평양자유무역협정) 결성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60%를 차지하는 APEC이 FTAAP를 결성하여 차별의 조건을 내걸 경우 핵심 개발도상국(브라질, 인도 등)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거대한 비회원국들은 이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따라서 배타적 경제블록들로부터 지역적 자유화보다 전 세계적 차원의 추진력을 회복하고 도하라운드 결론을 수용하도록 하여 미국을 정점에 둔 자유무역의 완성에서 APEC은 핵심 거점인 셈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의 기조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이다((미국을 중심으로 한)하나의 (빈부의 양극화를 위한)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 유럽연합이 헌법조약투표 과정 등을 거치면서 통합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미국에 적대적인 지역공동체들의 강화와 중국 부상 등 현실적 위협에 대해 자원과 소득의 재분배를 불러올 것이라는 자유무역 신화는 여전히 도전 중이라는 것이다. 냉전 구도 하에서 그리고 냉전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정치·경제·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미국의 불안정성 증대는 자유무역의 완성을 시급히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불안정성 증대와 종속의 심화라는 자유무역의 진실을 마주한 인민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몇 푼을 적선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외침을 확산하고 있다. 과연 자유무역체제는 ‘평등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전세계 소득을 증진시키고 고루 분배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정부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과 혹독한 구조조정의 터널을 거쳐 ‘관치금융’과 ‘재벌-족벌 경영의 폐해’를 시정하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감내할 노동력의 재구성을 이루어냈으며 금융자본의 출입이 자유로운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에! 또한 아직까지도 착취 가능한 동남아시아 및 남미 시장을 위한 해외투자의 수행자로서 한국의 자본가계급이 든든히 제 갈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자유무역 질서는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지방화, 분권화가 이루어질 것이라지만 실상 이는 기존의 국가의 기능을 지방정부 등을 통해 강화하고 경제자유구역, 특구 지정 등을 둘러싼 지방 도시들의 경쟁을 부추길 따름이며, 이를 위해 시민들을 동원하고 관리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이번 APEC 정상회의가 진행되는 부산시는 동북아 물류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해외자본 유치에 가속도를 붙이는 등 APEC 준비과정을 지역경제의 구조조정의 계기로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초민족적 기업과 국민국가의 위상을 동등하게 다루는 투자자유화 물결은 국가의 역할 분산을 동반한다. 노동력 관리의 엄격함과, 연기금 개혁 등 국가 개입을 통한 투기자금의 형성의 역할은 강화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문화적 쟁점의 상당수는 NGO들에게 이전된다. 노무현 정부는 NGO들을 동원하여 자유무역과 금융투기의 활성화를 위한 APEC의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고 부산여성단체협의회, 부산여성단체연합 등의 여성단체들은 ‘APEC 여성의제채택 여성연대’를 구성하여 ‘중소기업, 영세기업 및 여성 참여 강화‘ 의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으로 이에 조응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反테러와 6자회담 진전을 위한 부산선언문〉을 준비하는 등 정치적 차원에서 APEC을 활용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와 ‘전쟁’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인권과 반테러’ 즉,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도출되는 APEC에서 동북아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일 동맹 헤게모니로의 통합이라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증대된 불안정성과 인민의 고통이라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아시아에서 인민들의 연대와 단결된 투쟁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자유무역 신화의 폐해가 가장 극대화된 형태로 드러난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일한’ 착취 네트워크를 향한 자유무역질서의 전략적 요충지와 아시아-태평양의 군사기지로서 동북아가 갖는 지정학적 전략에 따른 미국의 재편전략이 수행되고 있다. 이 착취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이미 드러난 자유무역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이 지배구조에 복무하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005년 APEC정상회의에 대응하는 우리의 기조는 미-일 동맹과 노무현정부에 의해 확장되는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반대,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인민들의 연대를 통한 대안세계화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다. PSSP 1) 일본을 선두로 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의 육성과 발전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아시아 발전형태설명이론(안행(雁行)형태 이론이라 불린다). 선도국가에서 경쟁력 있는 산업의 육성이 이루어지고 그 성과가 직접투자를 매개로 다음 단계의 국가에 이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설명되는 동아시아 '발전'과정에서 일본은 대동아시아 흑자 행진을 계속했는데 이는 일본이 동아시아를 일본중심의 무역 및 투자시스템 내의 하위구조로 고착시켜놓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동아시아 경제의 틀을 형성하면서 기술을 지배하고 있어 대동아시아 수입의 상당부분도 사실은 일본기업의 현지 투자회사로부터의 수입일 뿐이다. 본문으로 2) 동아시아 금융위기 발생 이후 열린 98년 6차 콸라룸푸르 정상회의에서는 아시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면서 '경제 위기 조기극복을 위해 성장지향적 거시경제정책을 공동으로 추진키로 합의'하는 한편 국제 금융체제의 강화를 위한 노력으로서 민간자본 역내 유입 촉진과 회원국의 금융체제 강화, 금융분야 구조조정, 국제 금융체제 개선문제 등이 주로 논의되었다. 금융 및 자본자유화가 급진전되면서 헤지펀드 등 투기성 단기자본을 포함한 자본의 유출입이 빈번해진 데 원인이 있었던 발생한 동아시아 금융위기에 대한 극복 방안으로서 투자 자본의 안정적 역내 유입이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역설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3) APEC 저명인사그룹의 보고서에 따르면 개방적 지역주의는 다음과 같은 요건을 충족하는 개념이다. ①최대한의 일방적 자유화, ② 비회원국에 대한 무역장벽의 지속적 완화 확약, ③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 ④개별 회원국의 독자적인 조건적/무조건적 최혜국대우 원칙 적용. 위의 요건 중 한가지 이상을 충족하면 '개방적 지역주의'의 실천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한 이들의 개념 설정은 애초 '개방적 지역주의'가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개방화'와 '세계화'를 수행하되 지역별 구분에 따라 관리와 위계질서의 유지가 가능한 질서를 지향함을 드러낸다. 본문으로

  • 2005-05-04

    유럽통합의 본질과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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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2004년 5월 1일 중동부 유럽 8개국과 지중해 지역 2개국이 유럽연합에 새로이 가입하고, 같은 해 6월 18일 유럽연합 정상들이 유럽헌법조약(Treaty of European Constitution)을 채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추진된 유럽경제통합은 2002년 유로화 공용화로 이미 일단락을 되었고 (영국, 덴마크, 스웨덴은 유로화 도입을 유보했다),1) 이제 유럽헌법조약이 회원국들의 비준을 통과하면 유럽연합은 자신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외교장관까지 두게 된다.2) 이런 외연만을 두고 보면 유럽 통합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유럽연합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나 정치세력 내부에서도 많은 쟁점이 부각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모순과 갈등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것은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다. 유럽연합이 연방제 국가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통합주의’와 정부연합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정부간주의’(intergovernmentalism) 사이의 쟁점도 있으며, 유럽연합의 탄생과 확대 과정에서 계속 문제가 된 강대국과 중소국가의 이해관계도 해소되지 않는 쟁점이다. 그러나 이런 쟁점이 유럽 민중의 권리와 의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통합 과정은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유럽 자본을 위시한 지배계급의 프로젝트였다. 유럽연합의 확대와 헌법조약의 탄생은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에서 유럽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강화하는 흐름이다. 그러므로 유럽통합 과정은 유럽의 민중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한다. “어떤 유럽인가?” 회원국들의 헌법조약 비준을 앞두고 이 질문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투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여러 운동세력들이 벌이고 있는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은 “어떤 유럽인가”에 답하는 유럽 민중들의 목소리다. 그들은 유럽통합이라는 미완의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것은 헌법조약의 비준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을 통해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유럽”을 향한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은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유럽연합의 기원과 유럽통합의 과정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럽통합 구상을 자극한 네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유럽 국가들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고자 했다. 둘째, 유럽 국가들은 전간기 유럽의 특징이었고 2차대전의 원인 중 하나였던 경제적 보호주의를 탈피하고 싶었다. 셋째, 유럽 지배세력들은 소련과 유럽공산당의 확장을 억제해야 했다. 넷째, 독일경제를 유럽으로 통합하여 독일 팽창주의의 부활을 막고자했다. 사실 이 네 가지 요인은 유럽 자본의 시각을 대변했다. 유럽 자본과 지배계급은 유럽을 자본주의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공통의 이해를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기에는 2차대전 이후 유럽을 확실한 반공주의 보루로 삼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도 반영되었다. 하지만 유럽통합 과정에서 유럽 민중에게 민주적 의사결정과 권력형성의 권리는 부여되지 않았고, 형식적인 참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럽의 일국적, 초국적 자본은 (로비, 연구작업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통합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민중을 배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유럽연합의 기원: 공산주의 확장 저지와 서유럽 통합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7년 유럽경제의 복구를 위해 유럽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Europe)가 설립되었다. 위원회는 모든 유럽국가들의 협력을 전제로 삼고자 했지만, 동유럽국가들은 소련이 주도하는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로 통합되었다. 결국 유럽경제위원회는 목표를 서유럽 통합으로 변경했다. 여기에 몇 가지를 더 고려해야 한다. 1947년은 미국이 마셜 플랜을 제안한 해이며,3) 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이 창설된 해이기도 하다 (미국은 GATT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서유럽 경제재건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보호를 받으며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결국 전후재건이라는 목표로 형성된 협력의 기운은 냉전이라는 조건 속에서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력이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는 가운데 서유럽 지배세력의 이해, 즉 자본주의적인 유럽을 재건하려는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 협력의 구체적인 형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유럽공동체로 1951년 창설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ECSC)는 석탄, 철강 및 이와 연계된 부문의 관세동맹이었다.4) ECSC 창설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ECSC는 석탄, 철강 부문의 공급을 안정화. 현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따라서 심각한 공급부족이나 과잉공급을 관리할 수 있게 했다. 정치적인 이유는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프랑스는 2차대전의 경험 때문에 독일의 팽창주의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으며, ECSC를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위한 틀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ECSC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ECSC는 유럽통합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모델을 제공했다. 일례로 ECSC의 조직구조는 유럽경제공동체의 모델이 되었다. 1958년 로마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가 창설되었다. EEC는 관세동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내의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까지 포함하는 공동시장 형태였다. 그러나 EEC는 아직까지 재정, 화폐정책이 통합되지 않은 형태였으므로 통일과 집중보다는 협조와 협력을 강화하는 수준이었다. 1965년 ECSC와 원자력공동체, 유럽경제공동체를 통합한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 EC)가 설립되었고, 그 외연도 확대되었다.5) 하지만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각 국가들은 국가 단위의 발전전략, 즉 케인즈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채택했고, 이는 통합의 기운을 약화한다고 인식되었다. 하지만 유럽공동체는 법적 강제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거의 제어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역내 단일시장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담은 단일유럽법안(Single European Act)이 1986년 조인되었는데, 이는 ‘법안’이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각 국가에 대한 구속력을 강화한 것이다. 특히 유럽경제통합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서는 회원국의 환율을 제어해야 한다는 논리로 경제 및 화폐 통합을 위한 계획을 제시했다. -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유럽연합 창설 1992년 소련 붕괴와 냉전 해체는 유럽통합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동유럽국가들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2005년까지 유럽공동체가 20여 개 국가로 확대된다는 전제로, 의사결정과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효율성은 공식적인 이유일 뿐이었고, 강대국들의 속내는 앞으로 가입할 작고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 통일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두려움을 자극했고, 프랑스는 유럽통합을 더욱 심화하는 방향에서 대응책을 세웠다. 1991년에 체결되어 1993년부터 효력을 발휘한 유럽연합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 일명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급격히 변화된 환경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때까지 유럽통합의 중심논리는 무역장벽의 제거, 탈규제와 자유화를 통한 경쟁 도입, 단일시장 건설이었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해서 유럽공동체는 정치적 통합과 한층 심화된 경제통합을 지향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동외교안보정책(Comm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 CFSP)의 중요성이 강화되었다. 물론 유럽공동체의 권한도 확대되었다.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 각료회의에 가중다수결 제도가 도입되었다.6) 그리고 조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통화연합(Economic and Monetary Union)과 단일통화를 2002년까지 도입하기 위한 조건과 시간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본래 제기된 문제, 즉 동유럽 국가들의 가입, 독일을 유럽에 더욱 통합할 필요성, 단일통화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 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 따라서 조약 개정에 대한 요구가 계속 나왔고, 1996-97년 정부간회의를 통해 법, 제도와 정책과정을 바꾸는 논의가 진행되어서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럽통합은 계속 심화하여 재정, 예산, 사회, 통화 정책을 모두 아우르는 수준까지 확대되었다. 2000년 니스조약, 2001년 라켄선언을 통해서 유럽헌법의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이 제시되었다. 경제통합을 통한 유럽연합 설립의 반-민주성 위에서 지적했듯이, 유럽통합의 출발은 유럽자본주의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과정은 철저하게 유럽 자본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는 유럽연합의 탄생은 유럽 내부에서 민중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확대, 심화뿐만 아니라 유럽 외부, 특히 주변부 민중과의 관계에서 제국주의적인 지배, 착취관계의 발전을 의미한다. 유럽통합의 중심논리였던 경제통합은 그저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이 아니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성장과 위기 국면에 대응하는 유럽 자본과 지배세력의 전망이었다. 196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공동농업시장의 탄생은 농산품 단일시장의 필요성 (경제통합에 필수적이다), 당시 집권정당들(주로 기독교민주당과 보수당)에게 강력한 압력집단인 농민층에 대한 우호적 조치의 필요성 (냉전시기 집권정당의 안정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유럽의 식량자급의 필요성 (제국주의적 정책의 선결조건이다) 등이 맞물린 결과다. 단일시장, 역내 농산품 우선, 공동재정부담을 원칙으로 하는 공동농업정책은 유럽농산품에 대해선 가격개입정책을 통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입농산품에 대해서는 양과 품목을 규정하고 수입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세계시장에서 유럽농산품의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방식은 유럽공동체 외부의 국가, 특히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 연안의 국가들의 농업부문이 유럽경제에 종속되는 효과를 낳았다. 또 하나, 단일통화라는 중요한 문제를 언급해야 한다. 단일통화가 제기되고 실현된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확산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것의 중심에는 단일통화를 향한 과정이 놓여있다. 유럽에서 통화정책이 통합되고 단일통화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1970년대 초 달러의 금태환이 중지되고 오일쇼크로 인해 외환시장이 교란된 시기에 제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면서 금융부문에서 탈규제와 자유화가 시작되었고, 미국 달러화를 정점으로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의 엔화가 삼극을 이루는 위계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통화동맹을 위한 노력은 마르크화의 위상에 기인한 것이자 마르크를 국제화폐로 만들고자 했던 독일의 이해가 맞물린 것이다. 마르크화가 진정한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전체 유럽연합에서 사용되는 통화가 되어야하며 미국에 필적하는 광범위한 시장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유로가 도입되면 유로로 표시된 국제거래의 양을 늘릴 것이며 그로써 유로에 대한 수요가 달러에 대한 수요에 맞먹거나 능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화가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마르크가 유로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제시한 경제통화연합 수렴기준을 엄격히 적용할 때만 가능해진다 (수렴기준에는 각 나라의 인플레이션 억제, 이자율 삭감, 예산적자를 최대 GDP 3%로 줄일 것, 공적 부채를 GDP의 60%이내로 억제하고 통화의 환율을 안정시킬 것 등이 포함된다).7) 마르크화가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은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통합의 효과는 겉보기에 중립적이지만, 민중에게 공격적이다. 유럽연합 내 국가들이 사용하는 경기역행수단(경기위축 시 사용하는 확장정책)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독일과 같이 생산성이 높은 나라는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이 더 높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높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 게다가 마르크화는 국제화폐의 지위를 노리므로 경기가 위축되더라도 인플레이션 수단은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같이 생산성이 낮은 나라는 인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실질임금을 감소시키는 (즉 잉여가치율을 높이고 따라서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수단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탈리아는 국제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가치절하에 의존해야만 한다. 하지만 경제통화연합 내에서 이런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제한된다. 따라서 이탈리아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확대를 통해 경쟁하는 것이고, 이는 생산과정에서 더 긴 노동일이나 더 높은 노동 강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최근에는 이를 ‘노동유연화’라고 부른다). 앞으로 유럽연합 내부에서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은 더 심화할 것인데, 유럽연합이 중동부, 지중해 주변 국가들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르크화를 유로화로 변형하는 것은 금융세계화에 적극적이고,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유럽 자본의 요구를 드러내준다. 금융세계화 흐름은 몇 가지 금융 관련 규범을 포함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의 억제다. 이런 목표는 노동자 임금과 국가의 복지비 지출을 압박하는 정책을 수반한다. 그리고 더 높고 빠른 수익성에 대한 요구는 노동유연성을 높이고자 한다. 또 지적되어야 할 것이 있다. 수렴기준과 같은 정책은 분명 유럽 초민족자본과 각 국 정부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마치 이것이 멀리 떨어져있는 관료기구(유럽연합)가 부과하며 각 국 정부는 이런 조치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유럽사회 전반이 수용해야만 하는 어떤 중립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단일통화와 그에 상응하는 경제정책의 대가는 유럽과 유럽 외부의 민중들이 지불하게 된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유럽연합의 반-민주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몇 가지 사실들이 더 있다. 단일 시장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은 이제 공공부문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고 있다. 일부 국가들이 복지국가의 전통은 서비스부문 개방과 단일시장 형성에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서비스부문 자유화를 일반화한 볼켄슈타인 훈령은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런 공격은 유럽통합을 촉진시켜 더 많은 이익을 줄 것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다. 유럽헌법조약을 둘러싼 논쟁: 신자유주의 유럽인가, 다른 유럽인가? 유럽헌법조약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유럽의 정체성을 둘러싼 것이다. 사실 유럽헌법조약에서 새로운 부분은 이미 수립된 권력의 분배 문제라는 점은 유럽 지배세력이 말하는 유럽통합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유럽은 단지 수립된 권력을 조절하는 방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지난한 유럽 통합의 과정에서 관철된 금융세계화에 조응하는 조치들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여성, 시민의 권리에 심각한 퇴행을 가져온 조치들은 그대로 인정되고 심지어 더욱 확대해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헌법조약의 작성과정에서 민중의 참여와 역할이 배제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결국 유럽헌법조약이 말하는 유럽은 인민의 권리를 제거하는 유럽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이며, 따라서 위계적인 권력 관계를 조정하고 분배하여 재생산하는 유럽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유럽의 민중과 근본에서부터 갈라지는 쟁점이 형성된다. 이는 헌법조약 문구 하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조약이 담고 있는 논리와 함의가 문제다. 예를 들어, 유럽헌법조약은 그동안 노동자가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세웠던 권리들을 부정한다. 노동자들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노동력으로 간주될 뿐이다. 시장과 경쟁의 원칙이 가장 우선시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파업과 단결, 연대의 권리는 기업의 권리와 동등하게 간주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파업의 권리가 파업에 맞서 공장을 폐쇄할 권리와 동등하게 간주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취하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파상적인 공세를 명문화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헌법조약은 유럽시민권을 회원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하면서 900만 명의 이주노동자를 배제했다. 헌법조약은 유럽경제에서 이주노동자를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법 이주노동자에 대한 심각한 착취와 억압을 방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문제는 이런 규정이 유럽시민권을 가진 노동자들과 불법 이주노동자들 사이의 분할을 심화한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데, 유럽시민권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임금을 낮추고, 일자리를 빼앗는 세력이라는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유럽시민권 규정은 위험스럽게도 이주자들을 범죄와 관련시키는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규정은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를 수용하고, 극우세력이 정치적 공간에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한 유럽헌법조약은 전쟁을 사용 가능한 수단으로 인식하면서 군사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2003년 12월 정상회의는 유럽안보전략을 채택했다. 이 전략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시민들이 불법이민과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테러리즘의 위협에 처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각 위협마다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고 국제협력도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유럽이 현재 미국 주도의 군사세계화에 굳건한 동맹자가 되겠다는 선언이며, 따라서 유럽연합의 안보에 있어서 NATO의 역할을 계속 승인한다. 나아가 헌법조약은 유럽 자신의 군사화도 염두에 두고 있다.8) 유럽의 사회운동들은 2004년 10월에 열린 유럽사회포럼에서 채택한 사회운동 호소문을 통해 유럽헌법조약이 구현하는 유럽에 명백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헌법조약은 신자유주의를 유럽연합의 공식교리로 신성화하며, 경쟁을 유럽공동체 법, 모든 인간 활동의 토대로 만들고,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목적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 헌법조약은 평등한 권리, 민중의 자유로운 이동, 모든 사람이 국적에 관계없이 자신이 사는 나라의 시민권을 향유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며, 그 대신 NATO에 유럽의 외교 및 국방정책을 담당하는 역할을 부여하고, 유럽연합의 군사화를 추진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영역을 주변화시킴으로써 시장을 우선시하며, 공공서비스의 파괴를 가속화한다.” 유럽의 사회운동을 비롯하여 유럽 민중들은 유럽헌법조약이 가지는 반-민주적, 반-민중적인 본질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 사회운동들의 새로운 도전 유럽헌법조약이 완성하려는 유럽의 실체를 인식한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헌법조약을 반대하는 흐름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섞여있다. 인종주의적인 극우 세력이 존재하는가 하면, 유럽연합이 가져올 피해를 두려워하는 민족주의적 반대 세력도 존재한다. 하지만 헌법조약이 제기한 광범위한 쟁점은 “어떤 유럽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있으며, 따라서 광범위한 정치의 공간이 열고 있다. - 여성운동 유럽의 여성들은 헌법조약이 여성들에게 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하고 헌법조약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지난 2월에 헌법조약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스페인에서는 여성들이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탁 프랑스의 여성그룹 또한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위한 면밀한 투쟁을 조직하고 있다. 우선 여성들은 헌법조약이 그동안 여성들에게 더욱 해악을 끼쳐왔던 신자유주의를 전 유럽의 질서로 공식화하려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없다”는 헌법조약의 문구는 단지 수사일 뿐이다.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배제라는 맥락은 고려되지 않은 채, 오히려 불안정 노동을 강화하고 사회적 비용 지출을 삭감하고자 하는 헌법조약의 논리는 명백히 여성에게 더 해악이 크다. 게다가 헌법조약은 여성운동이 유럽에서 쟁취해 온 이혼과 낙태에 대한 권리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헌법조약은 남성이 행하는 물리적 폭력을 가정 내 폭력으로 치부하면서 그 원인은 간과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여성을 희생자라는 수동적 지위에 묶어 둔다 (3조 116항에 관한 선언). 더 우려되는 것은 헌법조약이 전문에서 “유럽의 신성한 유산”을 승인하면서, “유럽연합이 교회와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공식적인 대화를 진행할 것“(1조 51항)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이는 유럽연합이 교회를 시민의 의견을 대표하는 하나의 주체로 인정한다는 선언인데, 이것은 교회의 논리와 요구가 유럽연합의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남녀 평등, 이혼, 낙태, 피임, 동성애 등의 권리는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여성들은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도전은 다른 사회운동들과 결합하면서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또 다른 유럽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주장하고 있다. - 노동자운동 유럽통합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유럽의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조건에 직면했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노동조합이 국가, 기업과 사회적 파트너 관계를 맡아오면서 다양한 형태의 코포라티즘이 존재했다. 이런 전통을 따르는 노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양보 교섭”과 “사회적 파트너십”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와 공존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럽통합의 맥락에 때라 새로운 형태의 파트너십은 유럽적, 국가적, 기업적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유럽노총(European Trades Union Confederation, ETUC)은 국가 수준에서는 사회협약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고, 유럽연합 수준에서는 유럽노동이사회(European Works' Councils, EWCs)에서 사회적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사회적 파트너십 전략에 저항하는 노동자운동의 흐름도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경제통화연합 수렴기준에 연결된 긴축프로그램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면서, 유럽연합 회원국 각 국에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이런 흐름이 노동조합의 대안적 전략으로 발전하고 있다. 프랑스의 연대노조, 이탈리아의 코바스(COBAS) 등의 흐름은 노동자, 임시 노동자, 실업자를 잇는 연결망을 형성하면서 광범위한 사회적 이슈를 노동운동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업, 고용불안, 사회적 배제에 반대하는 유럽행진”(European Marches Network, EMs)은 1997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럽정상회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는 국제기구들에 대항하여 노동과 여러 사회부문의 연합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유럽행진 네트워크는 최근 유럽연합의 여성,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회적 권리 확장을 위한 투쟁과 조직화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런 흐름은 유럽 통합이 강제하는 경쟁과 노동자 분할이라는 조건에 직면해 대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도전이다. 아직은 출발 단계지만, 자본과 유럽연합의 정책의 논리를 거부하고, 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사이에서의 평등과 연대를 강조하는 이런 흐름은 유럽헌법조약이 담고 있는 신자유주의 유럽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다. - 유럽좌파당9) 신자유주의 유럽통합에 맞서 대안적인 유럽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창립한 유럽좌파당 역시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유럽좌파당은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당의 역할은 이러한 사회운동들의 정치를 지지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만큼, 유럽좌파당은 사회운동들과 함께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위해 활발히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좌파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PRC) 당수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2004년 10월 유럽좌파당 로마회의 연설을 통해 현재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헌법조약이 제시하는 유럽의 미래는 자본주의 위기와 패배에 편승하는 암울한 미래일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이것이 유럽 민중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좌파당이 반드시 유럽에 관한 전망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면서 두 가지 요소를 필수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첫째는 평화라는 목표, 전쟁과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목표다. ‘예방전쟁, 무한전쟁의 상황에 대항하는 유럽은 전쟁과 테러리즘에 반대한다는 전망을 자신의 헌법에 담아야 한다. 따라서 전쟁을 거부하는 것,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에서 전쟁을 제거하는 것을 명백히 선언해야 한다. 유럽이 취해야 할 강령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둘째, 보편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입각해야 한다. ‘시민권 그리고 노동권과 같은 시민성은 더 많은 사람에게 확대되어야 하고, 풍부해져야 한다. 이는 특히 이주노동자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시민성이 태생의 권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개인 인간에 기초한 것이라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평등은 기회의 균등함을 넘어서 권리의 새로운 경계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유럽좌파당은 대안적 유럽을 위한 구체적인 강령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제4인터네셔널 계열에서는 이를 두고 유럽좌파당을 표방하면서도 유럽헌법에 대한 관점이나 유럽적인 전망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완성된 강령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민중을 동원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 아니라는 유럽좌파당의 문제의식에 비추어보면, 이는 유럽좌파당을 비판할 근거라기보다는 유럽의 사회운동과 정당, 민중운동의 장기과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좌파당이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통해서 사회운동들과 함께 또 다른 유럽의 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직 진행과정 중이다. 유럽헌법조약,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유럽에서는 헌법조약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헌법조약 부결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어서, 유럽연합과 양국 정부가 긴장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헌법조약을 부결시키기 위한 캠페인에 아탁을 비롯한 사회운동, 여성운동, 프랑스공산당,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 노동총동맹(CGT) 등이 총력을 기울였다. 이 결과 초반에는 헌법조약 찬성여론이 높았고 헌법조약 반대 의견 중에서는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인종주의적으로 활용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현재는 반대 여론이 60%를 상회하고 있는 상황이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유럽 민중이 원하는 유럽이 현재의 유럽연합과는 큰 차이가 있고,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이 중요한 쟁점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약 헌법조약이 부결된다고 해서 상황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후에 더욱 커다란 문제가 남아있다. “진정 대안적인, 다른 유럽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 또한 사회운동과 민중의 과제다. 위로부터 강요된 신자유주의 유럽을 거부하고 민중 스스로가 완성하는 다른 유럽통합의 길이 열릴 것인가? 전 세계 대안세계화 운동의 관심사다. PSSP <참고자료> 쉬잔느 드 브뤼노프, 〈지금 우리에게 어떤 유럽이 필요한가? 우리는 어떤 유럽을 얻을 수 있는가? 〉, 《사회진보연대》, 2000년 11월호 이호영, 〈유럽연합과 국민국가의 위상 변화〉,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 Guglielmo Carchedi, For Another Europe: A Class Analysis of European Economic Integration, pp.7~35, Verso, 2001 Guglielmo Carchedi, The EMU, monetary crises, and the single European currency, Capital & Class 63, Academic Research Library, Autumn 1997 Bruno Carchedi and Guglielmo Carchedi, Contradictions of European Integration, Capital & Class 67, Academic Research Library, 1997 Graham Taylor and Andrew Mathers, Social Partner or Social Movement? European Integration and Trade Union Renewal in Europe, Labor Studies Journal, Vol. 27, No. 1, Spring 2002 Speech by Fausto Bertinotti, EU: Another Constitution is Possible, http://esteri.rifondazione.co.kr/internazionale/i0038.html IV Online Magazine, Women and the European Constitution, Ⅳ365, March 2005, http://internationalviewpoint.org/article.php3?id_article=576 1) 영국이 유로화 도입을 유보한 까닭은 영국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파운드화의 위상과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다. 영국은 파운드화가 유로보다는 달러와 가까워지는 것이 자국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 본문으로 2) 유럽정상들이 채택한 유럽헌법조약은 각 국의 비준절차를 거쳐 2007년부터 발효된다. 25개 회원국 중에서 덴마크, 영국,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체코, 프랑스,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은 국민투표를 통해서 조약 비준을 결정한다. 나머지 15개국은 의회 비준절차를 거친다. 이 중 스페인은 올해 2월 20일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헌법조약이 통과되었다. 리투아니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그리스도 이미 의회 비준을 통과했다. 프랑스가 오는 5월 29일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네덜란드는 6월 1일이다. 회원국 중에서 한 국가라도 헌법조약을 거부하면, 헌법조약은 발효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중 보유한 방대한 생산능력과 과잉자본의 배출구로서, 또한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럽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획하였다. 원조를 받아들인 나라는 서유럽 16개국으로서 1951년까지 액수는 114억 달러에 달하였다. 본문으로 4) 회원국은 벨기에, 독일 연방 공화국,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그리고 네덜란드였다. 본문으로 5) 1973년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가입했고, 1981년 그리스,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입했다. 이 중에서 영국의 가입이 가장 쟁점이 되었다. 영국은 유럽공동체에 내재한 유럽연방국이라는 목표에 반대하면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유럽자유무역지대를 창설했다. 영국은 유럽대륙의 국가들보다는 미국과 영국연방(영국 및 구(舊) 영국 식민지 국가였던 캐내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파키스탄 등으로 구성된 연방체)과의 관계를 더욱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누리는 세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했는데, 이는 국제통화로서 파운드가 가지는 영향력 및 그에 따르는 부수적 이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의 공동시장이 성공하고, 유럽 기업들이 출현하여 미국기업에 맞먹는 규모를 갖게 되자 영국은 입장을 바꿔 유럽공동체에 가입을 신청했다. 본문으로 6) 회원국의 경제력과 인구에 비례하여 투표수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제도. 가중다수결 제도 도입은 유럽연합 확대 과정에서 강대국(프랑스와 독일)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후에 전원합의가 요구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가중다수결을 도입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근거는 의사결정과정에 더 큰 유연성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또한 강대국들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생각과 단일통화, 나아가 유럽연방국으로 더 빨리 이행하고자 하는 독일과 프랑스의 열망을 반영하는 주장이었다. 본문으로 7) 경제및통화연합의 전 단계였던 유럽화폐체계(the European Monetary System, EMS)는 회원국 통화의 환율격차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이것은 회원국의 환율 변동폭을 2.25%(이탈리아 리라에 대해서는 6%)로 제한하는 제도다. 본문으로 8) 통합된 유럽의 무장화라는 문제는 통합 과정에서 오래된 쟁점 중에 하나다. 1948년 브뤼셀 조약을 통해 서유럽연합(Western European Union)이 설립되었다. 애초부터 서유럽연합에게는 NATO의 유럽축이라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NATO와 미국 헤게모니를 승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연방국을 염두에 둔다면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는 문제가 지속적인 쟁점으로 남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서유럽연합은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의 기반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영국이 서유럽연합을 유럽연합에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고, 미국의 명백한 군사적 우월성은 서유럽연합을 약화했다. 냉전 해체 이후 서유럽연합의 강화가 예상되었지만, 유고에 대한 유럽연합의 전략 실패로 인해 오히려 NATO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NATO와 유럽연합의 독자적인 군사화 문제는 여전히 미묘한 쟁점으로 남아있다. 본문으로 9)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을 형성했던 유럽 내부의 좌파정당들이 건설한 정당으로, 정식명칭은 "the Party of European Left"다.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이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공산당, 독일 민주사회당, 스페인 통합좌파, 그리스 연합 등 11개국 15개 정당이 가입해있다. 본문으로

  • 2005-05-04

    유럽통합의 본질과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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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지 영 | 정책편집부장 2004년 5월 1일 중동부 유럽 8개국과 지중해 지역 2개국이 유럽연합에 새로이 가입하고, 같은 해 6월 18일 유럽연합 정상들이 유럽헌법조약(Treaty of European Constitution)을 채택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꾸준히 추진된 유럽경제통합은 2002년 유로화 공용화로 이미 일단락을 되었고 (영국, 덴마크, 스웨덴은 유로화 도입을 유보했다),1) 이제 유럽헌법조약이 회원국들의 비준을 통과하면 유럽연합은 자신을 대표하는 대통령과 외교장관까지 두게 된다.2) 이런 외연만을 두고 보면 유럽 통합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는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유럽연합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나 정치세력 내부에서도 많은 쟁점이 부각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많은 모순과 갈등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것은 아직 미완의 프로젝트다. 유럽연합이 연방제 국가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통합주의’와 정부연합체를 지향해야 한다는 ‘정부간주의’(intergovernmentalism) 사이의 쟁점도 있으며, 유럽연합의 탄생과 확대 과정에서 계속 문제가 된 강대국과 중소국가의 이해관계도 해소되지 않는 쟁점이다. 그러나 이런 쟁점이 유럽 민중의 권리와 의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통합 과정은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유럽 자본을 위시한 지배계급의 프로젝트였다. 유럽연합의 확대와 헌법조약의 탄생은 자본주의의 위기 국면에서 유럽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강화하는 흐름이다. 그러므로 유럽통합 과정은 유럽의 민중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시한다. “어떤 유럽인가?” 회원국들의 헌법조약 비준을 앞두고 이 질문을 둘러싼 문제제기와 투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여러 운동세력들이 벌이고 있는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은 “어떤 유럽인가”에 답하는 유럽 민중들의 목소리다. 그들은 유럽통합이라는 미완의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것은 헌법조약의 비준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을 통해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또 다른 유럽”을 향한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은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또 다른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유럽연합의 기원과 유럽통합의 과정 2차대전이 끝난 후 유럽통합 구상을 자극한 네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유럽 국가들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고자 했다. 둘째, 유럽 국가들은 전간기 유럽의 특징이었고 2차대전의 원인 중 하나였던 경제적 보호주의를 탈피하고 싶었다. 셋째, 유럽 지배세력들은 소련과 유럽공산당의 확장을 억제해야 했다. 넷째, 독일경제를 유럽으로 통합하여 독일 팽창주의의 부활을 막고자했다. 사실 이 네 가지 요인은 유럽 자본의 시각을 대변했다. 유럽 자본과 지배계급은 유럽을 자본주의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공통의 이해를 강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기에는 2차대전 이후 유럽을 확실한 반공주의 보루로 삼고자 했던 미국의 의도도 반영되었다. 하지만 유럽통합 과정에서 유럽 민중에게 민주적 의사결정과 권력형성의 권리는 부여되지 않았고, 형식적인 참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유럽의 일국적, 초국적 자본은 (로비, 연구작업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통합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지금도 그렇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민중을 배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유럽연합의 기원: 공산주의 확장 저지와 서유럽 통합 2차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7년 유럽경제의 복구를 위해 유럽경제위원회(Economic Commission for Europe)가 설립되었다. 위원회는 모든 유럽국가들의 협력을 전제로 삼고자 했지만, 동유럽국가들은 소련이 주도하는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로 통합되었다. 결국 유럽경제위원회는 목표를 서유럽 통합으로 변경했다. 여기에 몇 가지를 더 고려해야 한다. 1947년은 미국이 마셜 플랜을 제안한 해이며,3) 관세와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이 창설된 해이기도 하다 (미국은 GATT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서유럽 경제재건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보호를 받으며 이루어질 수 있었다. 결국 전후재건이라는 목표로 형성된 협력의 기운은 냉전이라는 조건 속에서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지배력이 커다란 영향을 발휘하는 가운데 서유럽 지배세력의 이해, 즉 자본주의적인 유럽을 재건하려는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 협력의 구체적인 형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유럽공동체로 1951년 창설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uropean Coal and Steel Community, ECSC)는 석탄, 철강 및 이와 연계된 부문의 관세동맹이었다.4) ECSC 창설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ECSC는 석탄, 철강 부문의 공급을 안정화. 현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고, 따라서 심각한 공급부족이나 과잉공급을 관리할 수 있게 했다. 정치적인 이유는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었다. 프랑스는 2차대전의 경험 때문에 독일의 팽창주의에 대한 심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으며, ECSC를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위한 틀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ECSC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ECSC는 유럽통합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중요한 모델을 제공했다. 일례로 ECSC의 조직구조는 유럽경제공동체의 모델이 되었다. 1958년 로마조약이 체결되면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가 창설되었다. EEC는 관세동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내의 노동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까지 포함하는 공동시장 형태였다. 그러나 EEC는 아직까지 재정, 화폐정책이 통합되지 않은 형태였으므로 통일과 집중보다는 협조와 협력을 강화하는 수준이었다. 1965년 ECSC와 원자력공동체, 유럽경제공동체를 통합한 유럽공동체(European Community, EC)가 설립되었고, 그 외연도 확대되었다.5) 하지만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각 국가들은 국가 단위의 발전전략, 즉 케인즈주의 복지국가 모델을 채택했고, 이는 통합의 기운을 약화한다고 인식되었다. 하지만 유럽공동체는 법적 강제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이를 거의 제어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역내 단일시장을 완성한다는 목표를 담은 단일유럽법안(Single European Act)이 1986년 조인되었는데, 이는 ‘법안’이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각 국가에 대한 구속력을 강화한 것이다. 특히 유럽경제통합을 더욱 심화하기 위해서는 회원국의 환율을 제어해야 한다는 논리로 경제 및 화폐 통합을 위한 계획을 제시했다. -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유럽연합 창설 1992년 소련 붕괴와 냉전 해체는 유럽통합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동유럽국가들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따라서 2005년까지 유럽공동체가 20여 개 국가로 확대된다는 전제로, 의사결정과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효율성은 공식적인 이유일 뿐이었고, 강대국들의 속내는 앞으로 가입할 작고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 통일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두려움을 자극했고, 프랑스는 유럽통합을 더욱 심화하는 방향에서 대응책을 세웠다. 1991년에 체결되어 1993년부터 효력을 발휘한 유럽연합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 일명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급격히 변화된 환경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 때까지 유럽통합의 중심논리는 무역장벽의 제거, 탈규제와 자유화를 통한 경쟁 도입, 단일시장 건설이었다. 그러나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해서 유럽공동체는 정치적 통합과 한층 심화된 경제통합을 지향하게 되었다. 따라서 공동외교안보정책(Comm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 CFSP)의 중요성이 강화되었다. 물론 유럽공동체의 권한도 확대되었다.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 각료회의에 가중다수결 제도가 도입되었다.6) 그리고 조약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제통화연합(Economic and Monetary Union)과 단일통화를 2002년까지 도입하기 위한 조건과 시간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본래 제기된 문제, 즉 동유럽 국가들의 가입, 독일을 유럽에 더욱 통합할 필요성, 단일통화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 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 따라서 조약 개정에 대한 요구가 계속 나왔고, 1996-97년 정부간회의를 통해 법, 제도와 정책과정을 바꾸는 논의가 진행되어서 1997년 암스테르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럽통합은 계속 심화하여 재정, 예산, 사회, 통화 정책을 모두 아우르는 수준까지 확대되었다. 2000년 니스조약, 2001년 라켄선언을 통해서 유럽헌법의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이 제시되었다. 경제통합을 통한 유럽연합 설립의 반-민주성 위에서 지적했듯이, 유럽통합의 출발은 유럽자본주의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과정은 철저하게 유럽 자본의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는 유럽연합의 탄생은 유럽 내부에서 민중에 대한 자본주의적 착취의 확대, 심화뿐만 아니라 유럽 외부, 특히 주변부 민중과의 관계에서 제국주의적인 지배, 착취관계의 발전을 의미한다. 유럽통합의 중심논리였던 경제통합은 그저 자연스러운 발달과정이 아니었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성장과 위기 국면에 대응하는 유럽 자본과 지배세력의 전망이었다. 196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공동농업시장의 탄생은 농산품 단일시장의 필요성 (경제통합에 필수적이다), 당시 집권정당들(주로 기독교민주당과 보수당)에게 강력한 압력집단인 농민층에 대한 우호적 조치의 필요성 (냉전시기 집권정당의 안정성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유럽의 식량자급의 필요성 (제국주의적 정책의 선결조건이다) 등이 맞물린 결과다. 단일시장, 역내 농산품 우선, 공동재정부담을 원칙으로 하는 공동농업정책은 유럽농산품에 대해선 가격개입정책을 통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입농산품에 대해서는 양과 품목을 규정하고 수입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세계시장에서 유럽농산품의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런 방식은 유럽공동체 외부의 국가, 특히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 연안의 국가들의 농업부문이 유럽경제에 종속되는 효과를 낳았다. 또 하나, 단일통화라는 중요한 문제를 언급해야 한다. 단일통화가 제기되고 실현된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확산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것의 중심에는 단일통화를 향한 과정이 놓여있다. 유럽에서 통화정책이 통합되고 단일통화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제안이 1970년대 초 달러의 금태환이 중지되고 오일쇼크로 인해 외환시장이 교란된 시기에 제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면서 금융부문에서 탈규제와 자유화가 시작되었고, 미국 달러화를 정점으로 독일 마르크화와 일본의 엔화가 삼극을 이루는 위계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통화동맹을 위한 노력은 마르크화의 위상에 기인한 것이자 마르크를 국제화폐로 만들고자 했던 독일의 이해가 맞물린 것이다. 마르크화가 진정한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전체 유럽연합에서 사용되는 통화가 되어야하며 미국에 필적하는 광범위한 시장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유로가 도입되면 유로로 표시된 국제거래의 양을 늘릴 것이며 그로써 유로에 대한 수요가 달러에 대한 수요에 맞먹거나 능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화가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마르크가 유로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제시한 경제통화연합 수렴기준을 엄격히 적용할 때만 가능해진다 (수렴기준에는 각 나라의 인플레이션 억제, 이자율 삭감, 예산적자를 최대 GDP 3%로 줄일 것, 공적 부채를 GDP의 60%이내로 억제하고 통화의 환율을 안정시킬 것 등이 포함된다).7) 마르크화가 국제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인플레이션은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통합의 효과는 겉보기에 중립적이지만, 민중에게 공격적이다. 유럽연합 내 국가들이 사용하는 경기역행수단(경기위축 시 사용하는 확장정책)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독일과 같이 생산성이 높은 나라는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이 더 높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높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 게다가 마르크화는 국제화폐의 지위를 노리므로 경기가 위축되더라도 인플레이션 수단은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같이 생산성이 낮은 나라는 인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실질임금을 감소시키는 (즉 잉여가치율을 높이고 따라서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수단을 사용하고자 한다. 이탈리아는 국제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가치절하에 의존해야만 한다. 하지만 경제통화연합 내에서 이런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제한된다. 따라서 이탈리아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의 확대를 통해 경쟁하는 것이고, 이는 생산과정에서 더 긴 노동일이나 더 높은 노동 강도를 통해서 가능하다 (최근에는 이를 ‘노동유연화’라고 부른다). 앞으로 유럽연합 내부에서 이런 비대칭적인 상황은 더 심화할 것인데, 유럽연합이 중동부, 지중해 주변 국가들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르크화를 유로화로 변형하는 것은 금융세계화에 적극적이고,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유럽 자본의 요구를 드러내준다. 금융세계화 흐름은 몇 가지 금융 관련 규범을 포함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의 억제다. 이런 목표는 노동자 임금과 국가의 복지비 지출을 압박하는 정책을 수반한다. 그리고 더 높고 빠른 수익성에 대한 요구는 노동유연성을 높이고자 한다. 또 지적되어야 할 것이 있다. 수렴기준과 같은 정책은 분명 유럽 초민족자본과 각 국 정부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마치 이것이 멀리 떨어져있는 관료기구(유럽연합)가 부과하며 각 국 정부는 이런 조치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정책은 유럽사회 전반이 수용해야만 하는 어떤 중립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래서 단일통화와 그에 상응하는 경제정책의 대가는 유럽과 유럽 외부의 민중들이 지불하게 된다는 사실은 은폐된다. 유럽연합의 반-민주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몇 가지 사실들이 더 있다. 단일 시장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은 이제 공공부문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고 있다. 일부 국가들이 복지국가의 전통은 서비스부문 개방과 단일시장 형성에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서비스부문 자유화를 일반화한 볼켄슈타인 훈령은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런 공격은 유럽통합을 촉진시켜 더 많은 이익을 줄 것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되고 있다. 유럽헌법조약을 둘러싼 논쟁: 신자유주의 유럽인가, 다른 유럽인가? 유럽헌법조약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유럽의 정체성을 둘러싼 것이다. 사실 유럽헌법조약에서 새로운 부분은 이미 수립된 권력의 분배 문제라는 점은 유럽 지배세력이 말하는 유럽통합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유럽은 단지 수립된 권력을 조절하는 방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지난한 유럽 통합의 과정에서 관철된 금융세계화에 조응하는 조치들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여성, 시민의 권리에 심각한 퇴행을 가져온 조치들은 그대로 인정되고 심지어 더욱 확대해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헌법조약의 작성과정에서 민중의 참여와 역할이 배제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결국 유럽헌법조약이 말하는 유럽은 인민의 권리를 제거하는 유럽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이며, 따라서 위계적인 권력 관계를 조정하고 분배하여 재생산하는 유럽일 따름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유럽의 민중과 근본에서부터 갈라지는 쟁점이 형성된다. 이는 헌법조약 문구 하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조약이 담고 있는 논리와 함의가 문제다. 예를 들어, 유럽헌법조약은 그동안 노동자가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세웠던 권리들을 부정한다. 노동자들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단지 노동력으로 간주될 뿐이다. 시장과 경쟁의 원칙이 가장 우선시되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파업과 단결, 연대의 권리는 기업의 권리와 동등하게 간주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의 파업의 권리가 파업에 맞서 공장을 폐쇄할 권리와 동등하게 간주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취하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파상적인 공세를 명문화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헌법조약은 유럽시민권을 회원국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하면서 900만 명의 이주노동자를 배제했다. 헌법조약은 유럽경제에서 이주노동자를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법 이주노동자에 대한 심각한 착취와 억압을 방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문제는 이런 규정이 유럽시민권을 가진 노동자들과 불법 이주노동자들 사이의 분할을 심화한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데, 유럽시민권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이주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임금을 낮추고, 일자리를 빼앗는 세력이라는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유럽시민권 규정은 위험스럽게도 이주자들을 범죄와 관련시키는 조항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규정은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를 수용하고, 극우세력이 정치적 공간에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또한 유럽헌법조약은 전쟁을 사용 가능한 수단으로 인식하면서 군사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2003년 12월 정상회의는 유럽안보전략을 채택했다. 이 전략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시민들이 불법이민과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테러리즘의 위협에 처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각 위협마다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고 국제협력도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유럽이 현재 미국 주도의 군사세계화에 굳건한 동맹자가 되겠다는 선언이며, 따라서 유럽연합의 안보에 있어서 NATO의 역할을 계속 승인한다. 나아가 헌법조약은 유럽 자신의 군사화도 염두에 두고 있다.8) 유럽의 사회운동들은 2004년 10월에 열린 유럽사회포럼에서 채택한 사회운동 호소문을 통해 유럽헌법조약이 구현하는 유럽에 명백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헌법조약은 신자유주의를 유럽연합의 공식교리로 신성화하며, 경쟁을 유럽공동체 법, 모든 인간 활동의 토대로 만들고,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라는 목적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이 헌법조약은 평등한 권리, 민중의 자유로운 이동, 모든 사람이 국적에 관계없이 자신이 사는 나라의 시민권을 향유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며, 그 대신 NATO에 유럽의 외교 및 국방정책을 담당하는 역할을 부여하고, 유럽연합의 군사화를 추진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영역을 주변화시킴으로써 시장을 우선시하며, 공공서비스의 파괴를 가속화한다.” 유럽의 사회운동을 비롯하여 유럽 민중들은 유럽헌법조약이 가지는 반-민주적, 반-민중적인 본질을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 사회운동들의 새로운 도전 유럽헌법조약이 완성하려는 유럽의 실체를 인식한 유럽 민중과 사회운동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헌법조약을 반대하는 흐름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섞여있다. 인종주의적인 극우 세력이 존재하는가 하면, 유럽연합이 가져올 피해를 두려워하는 민족주의적 반대 세력도 존재한다. 하지만 헌법조약이 제기한 광범위한 쟁점은 “어떤 유럽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있으며, 따라서 광범위한 정치의 공간이 열고 있다. - 여성운동 유럽의 여성들은 헌법조약이 여성들에게 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하고 헌법조약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지난 2월에 헌법조약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스페인에서는 여성들이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탁 프랑스의 여성그룹 또한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위한 면밀한 투쟁을 조직하고 있다. 우선 여성들은 헌법조약이 그동안 여성들에게 더욱 해악을 끼쳐왔던 신자유주의를 전 유럽의 질서로 공식화하려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없다”는 헌법조약의 문구는 단지 수사일 뿐이다.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배제라는 맥락은 고려되지 않은 채, 오히려 불안정 노동을 강화하고 사회적 비용 지출을 삭감하고자 하는 헌법조약의 논리는 명백히 여성에게 더 해악이 크다. 게다가 헌법조약은 여성운동이 유럽에서 쟁취해 온 이혼과 낙태에 대한 권리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헌법조약은 남성이 행하는 물리적 폭력을 가정 내 폭력으로 치부하면서 그 원인은 간과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여성을 희생자라는 수동적 지위에 묶어 둔다 (3조 116항에 관한 선언). 더 우려되는 것은 헌법조약이 전문에서 “유럽의 신성한 유산”을 승인하면서, “유럽연합이 교회와 개방적이고 투명하며 공식적인 대화를 진행할 것“(1조 51항)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이는 유럽연합이 교회를 시민의 의견을 대표하는 하나의 주체로 인정한다는 선언인데, 이것은 교회의 논리와 요구가 유럽연합의 정책에 반영될 수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남녀 평등, 이혼, 낙태, 피임, 동성애 등의 권리는 심각한 위협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여성들은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의 주체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도전은 다른 사회운동들과 결합하면서 여성의 권리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이 또 다른 유럽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주장하고 있다. - 노동자운동 유럽통합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유럽의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조건에 직면했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노동조합이 국가, 기업과 사회적 파트너 관계를 맡아오면서 다양한 형태의 코포라티즘이 존재했다. 이런 전통을 따르는 노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양보 교섭”과 “사회적 파트너십”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와 공존을 유지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유럽통합의 맥락에 때라 새로운 형태의 파트너십은 유럽적, 국가적, 기업적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유럽노총(European Trades Union Confederation, ETUC)은 국가 수준에서는 사회협약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고, 유럽연합 수준에서는 유럽노동이사회(European Works' Councils, EWCs)에서 사회적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사회적 파트너십 전략에 저항하는 노동자운동의 흐름도 활발히 나타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경제통화연합 수렴기준에 연결된 긴축프로그램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면서, 유럽연합 회원국 각 국에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이런 흐름이 노동조합의 대안적 전략으로 발전하고 있다. 프랑스의 연대노조, 이탈리아의 코바스(COBAS) 등의 흐름은 노동자, 임시 노동자, 실업자를 잇는 연결망을 형성하면서 광범위한 사회적 이슈를 노동운동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업, 고용불안, 사회적 배제에 반대하는 유럽행진”(European Marches Network, EMs)은 1997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럽정상회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는 국제기구들에 대항하여 노동과 여러 사회부문의 연합을 추구하는 흐름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유럽행진 네트워크는 최근 유럽연합의 여성, 이민 정책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회적 권리 확장을 위한 투쟁과 조직화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이런 흐름은 유럽 통합이 강제하는 경쟁과 노동자 분할이라는 조건에 직면해 대안을 모색하는 새로운 도전이다. 아직은 출발 단계지만, 자본과 유럽연합의 정책의 논리를 거부하고, 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사이에서의 평등과 연대를 강조하는 이런 흐름은 유럽헌법조약이 담고 있는 신자유주의 유럽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다. - 유럽좌파당9) 신자유주의 유럽통합에 맞서 대안적인 유럽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지를 천명하면서 창립한 유럽좌파당 역시 유럽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유럽좌파당은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정당의 역할은 이러한 사회운동들의 정치를 지지하고 활성화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만큼, 유럽좌파당은 사회운동들과 함께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위해 활발히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좌파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PRC) 당수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2004년 10월 유럽좌파당 로마회의 연설을 통해 현재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헌법조약이 제시하는 유럽의 미래는 자본주의 위기와 패배에 편승하는 암울한 미래일 뿐이라고 강조하면서, 이것이 유럽 민중의 미래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좌파당이 반드시 유럽에 관한 전망을 가져야 함을 지적하면서 두 가지 요소를 필수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첫째는 평화라는 목표, 전쟁과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목표다. ‘예방전쟁, 무한전쟁의 상황에 대항하는 유럽은 전쟁과 테러리즘에 반대한다는 전망을 자신의 헌법에 담아야 한다. 따라서 전쟁을 거부하는 것,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에서 전쟁을 제거하는 것을 명백히 선언해야 한다. 유럽이 취해야 할 강령은 평화를 위한 것이다’. 둘째, 보편적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입각해야 한다. ‘시민권 그리고 노동권과 같은 시민성은 더 많은 사람에게 확대되어야 하고, 풍부해져야 한다. 이는 특히 이주노동자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시민성이 태생의 권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개인 인간에 기초한 것이라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평등은 기회의 균등함을 넘어서 권리의 새로운 경계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 유럽좌파당은 대안적 유럽을 위한 구체적인 강령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제4인터네셔널 계열에서는 이를 두고 유럽좌파당을 표방하면서도 유럽헌법에 대한 관점이나 유럽적인 전망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완성된 강령을 제시하고 그것으로 민중을 동원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 아니라는 유럽좌파당의 문제의식에 비추어보면, 이는 유럽좌파당을 비판할 근거라기보다는 유럽의 사회운동과 정당, 민중운동의 장기과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좌파당이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을 통해서 사회운동들과 함께 또 다른 유럽의 상을 만들어가는 것은 아직 진행과정 중이다. 유럽헌법조약,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유럽에서는 헌법조약에 반대하는 캠페인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는 헌법조약 부결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어서, 유럽연합과 양국 정부가 긴장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헌법조약을 부결시키기 위한 캠페인에 아탁을 비롯한 사회운동, 여성운동, 프랑스공산당,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 노동총동맹(CGT) 등이 총력을 기울였다. 이 결과 초반에는 헌법조약 찬성여론이 높았고 헌법조약 반대 의견 중에서는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인종주의적으로 활용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현재는 반대 여론이 60%를 상회하고 있는 상황이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유럽 민중이 원하는 유럽이 현재의 유럽연합과는 큰 차이가 있고, 헌법조약 반대 캠페인이 중요한 쟁점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약 헌법조약이 부결된다고 해서 상황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후에 더욱 커다란 문제가 남아있다. “진정 대안적인, 다른 유럽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 또한 사회운동과 민중의 과제다. 위로부터 강요된 신자유주의 유럽을 거부하고 민중 스스로가 완성하는 다른 유럽통합의 길이 열릴 것인가? 전 세계 대안세계화 운동의 관심사다. PSSP <참고자료> 쉬잔느 드 브뤼노프, 〈지금 우리에게 어떤 유럽이 필요한가? 우리는 어떤 유럽을 얻을 수 있는가? 〉, 《사회진보연대》, 2000년 11월호 이호영, 〈유럽연합과 국민국가의 위상 변화〉, 사회진보연대 홈페이지 자료실 Guglielmo Carchedi, For Another Europe: A Class Analysis of European Economic Integration, pp.7~35, Verso, 2001 Guglielmo Carchedi, The EMU, monetary crises, and the single European currency, Capital & Class 63, Academic Research Library, Autumn 1997 Bruno Carchedi and Guglielmo Carchedi, Contradictions of European Integration, Capital & Class 67, Academic Research Library, 1997 Graham Taylor and Andrew Mathers, Social Partner or Social Movement? European Integration and Trade Union Renewal in Europe, Labor Studies Journal, Vol. 27, No. 1, Spring 2002 Speech by Fausto Bertinotti, EU: Another Constitution is Possible, http://esteri.rifondazione.co.kr/internazionale/i0038.html IV Online Magazine, Women and the European Constitution, Ⅳ365, March 2005, http://internationalviewpoint.org/article.php3?id_article=576 1) 영국이 유로화 도입을 유보한 까닭은 영국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파운드화의 위상과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다. 영국은 파운드화가 유로보다는 달러와 가까워지는 것이 자국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다. 본문으로 2) 유럽정상들이 채택한 유럽헌법조약은 각 국의 비준절차를 거쳐 2007년부터 발효된다. 25개 회원국 중에서 덴마크, 영국,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체코, 프랑스,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은 국민투표를 통해서 조약 비준을 결정한다. 나머지 15개국은 의회 비준절차를 거친다. 이 중 스페인은 올해 2월 20일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헌법조약이 통과되었다. 리투아니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그리스도 이미 의회 비준을 통과했다. 프랑스가 오는 5월 29일 국민투표를 실시하며, 네덜란드는 6월 1일이다. 회원국 중에서 한 국가라도 헌법조약을 거부하면, 헌법조약은 발효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3)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중 보유한 방대한 생산능력과 과잉자본의 배출구로서, 또한 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럽에 대한 경제 원조를 계획하였다. 원조를 받아들인 나라는 서유럽 16개국으로서 1951년까지 액수는 114억 달러에 달하였다. 본문으로 4) 회원국은 벨기에, 독일 연방 공화국,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그리고 네덜란드였다. 본문으로 5) 1973년 덴마크, 아일랜드, 영국이 가입했고, 1981년 그리스, 1986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입했다. 이 중에서 영국의 가입이 가장 쟁점이 되었다. 영국은 유럽공동체에 내재한 유럽연방국이라는 목표에 반대하면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유럽자유무역지대를 창설했다. 영국은 유럽대륙의 국가들보다는 미국과 영국연방(영국 및 구(舊) 영국 식민지 국가였던 캐내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파키스탄 등으로 구성된 연방체)과의 관계를 더욱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누리는 세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했는데, 이는 국제통화로서 파운드가 가지는 영향력 및 그에 따르는 부수적 이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의 공동시장이 성공하고, 유럽 기업들이 출현하여 미국기업에 맞먹는 규모를 갖게 되자 영국은 입장을 바꿔 유럽공동체에 가입을 신청했다. 본문으로 6) 회원국의 경제력과 인구에 비례하여 투표수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제도. 가중다수결 제도 도입은 유럽연합 확대 과정에서 강대국(프랑스와 독일)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이후에 전원합의가 요구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가중다수결을 도입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근거는 의사결정과정에 더 큰 유연성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이 또한 강대국들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생각과 단일통화, 나아가 유럽연방국으로 더 빨리 이행하고자 하는 독일과 프랑스의 열망을 반영하는 주장이었다. 본문으로 7) 경제및통화연합의 전 단계였던 유럽화폐체계(the European Monetary System, EMS)는 회원국 통화의 환율격차를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이것은 회원국의 환율 변동폭을 2.25%(이탈리아 리라에 대해서는 6%)로 제한하는 제도다. 본문으로 8) 통합된 유럽의 무장화라는 문제는 통합 과정에서 오래된 쟁점 중에 하나다. 1948년 브뤼셀 조약을 통해 서유럽연합(Western European Union)이 설립되었다. 애초부터 서유럽연합에게는 NATO의 유럽축이라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NATO와 미국 헤게모니를 승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럽연방국을 염두에 둔다면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는 문제가 지속적인 쟁점으로 남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서유럽연합은 유럽의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의 기반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영국이 서유럽연합을 유럽연합에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고, 미국의 명백한 군사적 우월성은 서유럽연합을 약화했다. 냉전 해체 이후 서유럽연합의 강화가 예상되었지만, 유고에 대한 유럽연합의 전략 실패로 인해 오히려 NATO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NATO와 유럽연합의 독자적인 군사화 문제는 여전히 미묘한 쟁점으로 남아있다. 본문으로 9) 유럽연합 의회 선거에 대응하기 위해 연합을 형성했던 유럽 내부의 좌파정당들이 건설한 정당으로, 정식명칭은 "the Party of European Left"다. 이탈리아 공산주의 재건당이 창당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공산당, 독일 민주사회당, 스페인 통합좌파, 그리스 연합 등 11개국 15개 정당이 가입해있다. 본문으로

  • 2005-04-14

    자유무역의 환상을 걷어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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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의 본질 APEC 13차 정상회의가 2005년 11월 18, 19일 부산에서 개최된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미대륙 21개국을 아우르는 APEC은 전 세계 GDP의 약 57% 및 교역량의 46%를 차지하고, 회원국의 인구가 전 세계의 약 44.8%(2004년 기준)에 달하는 거대규모의 경제협력체다. APEC은 1989년 창설 이후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며 자유무역 확산의 선도적 역할을 자임해왔으나 그 기능과 실적에 대한 비판과 회의에 부딪혀왔다. APEC이 제시한 자유무역의 가능한 경로들은 실현되지 않았다. 유럽연합이나 전미자유무역지대(NAFTA) 등 역내 무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 블록들의 배타성을 경계하면서 전 세계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선도하겠다던 APEC은 명목뿐인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이는 APEC 프로그램의 부실로 인한 것이 아니며 APEC이 유포해 온 자유무역 신화가 붕괴되고 아시아-태평양 경제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해진 것에 따른 것이다. 그동안 APEC은 일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수직적 하청 네트워크를 자유무역의 신화로 포장하고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의 첨병으로서 WTO협상에 지역블록, 개도국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더군다나 동아시아 경제구조의 모순으로 발생한 97년 금융위기 상황에서는 APEC은 IMF 자금지원을 통해 금융자유화 프로그램을 강제하고, 9.11 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대테러 전략을 지원하는 ‘인간안보’라는 포괄적인 의제 설정 등으로 돌파구를 모색해왔다. 시효가 만료된 발전주의와 자유무역의 신화는 아직까지도 전 세계 인민들을 호도하고 태평양 바다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자유무역 신화 세계경제에서 하나의 지역으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출현은 처음에는 일본의 경공업을 위한 시장과 원료에 대한 접근수단을 보장해줌으로써 일본 경제를 재건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기반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제패한 미국은 냉전정책에 기반을 둔 전후 세계경제 복구책을 내놓으며 일본에 대한 집중적 지원을 수행했다. 미국은 일본에 미국의 기업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미 수출을 적극 개방하는 ‘역개방 정책’을 펼쳤고, 일본은 생산의 배후지(경제적 식민지)를 요청한다. 남한과 대만 등이 배후지로 통합되면서 60년대 일본의 경제기적과 70년대 남한과 대만의 경제기적이 가능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발전과정은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와 위계적으로 연결된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들의 확장을 통해 성취되었다. ‘날으는 기러기 떼(flying geese)’ 발전(일본을 선두로 하여 아시아 국가들의 산업의 육성과 발전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짐. 이전과정에서는 앞선 국가의 직접투자가 매개됨.)이라는 명목 하에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중심-주변 관계가 공고화되었다. 중심에서 주변 혹은 반주변에서 주변으로 산업들의 재배치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이는 직접투자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졌다. 아시아 국가들은 의존도가 높은 대미수출을 통해 수출지향적 산업육성전략을 구사하였으며, 산업화를 위한 기술, 자본유치에 있어서의 ‘개방성’ 및 수출지향성이 아시아 경제의 ‘필수’ 덕목을 구성하게 된다. 네 마리 용으로 부상한 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은 직접투자와 대외교역의 개방성을 극대화하여 성공한 모델로 꼽히며 아시아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이러한 ‘역동성’에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전략산업 집중투자라는 성장전략에 따른 과잉중복투자와 금융투기자본의 급속한 유입은 동아시아의 연쇄적 금융위기를 발생시키게 된다. 또한 70년대 이후 미국경제 불황에 따른 수입이 감소하고 일본 거품경제가 붕괴함에 따라 그리고 동아시아에서의 기술혁신과 산업화 진전이 한계에 봉착함에 따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하청네트워크 형태의 발전모델은 파탄에 이르렀다. 아시아에서 미-일 동맹이 유포해온 다음과 같은 자유무역 신화는 거짓으로 증명되었다. "첫째,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역외교역의 활성화와 경제적 역동성 덕분이며, 이러한 경제적 역동성 때문에 아시아에는 지역경제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둘째, 자유무역체제는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낳는다. 셋째, 자유무역체제는 특히 한국 등의 신흥공업국(개발도상국)에 또다른 기회를 제공한다." 생산의 ’초민족적 통합‘은 이에 조응하는 세계 소득의 재분배를 동반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산 네트워크의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중심에서 자본 집중이 증가하였다. 동아시아에서 신흥공업국들을 비롯하여 중하위소득국들이 전반적인 실추를 모면할 수 있었던 예외적인 능력은 일본의 하청 네트워크 확장에 덧붙여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들의 국가장치가 누린 상대적인 자율성과 이 지역에서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이용한 지정학적 전략들과 관련된다. 일본과 동남아시아 간의 중심-주변 관계의 구성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지역이 출현하는 데에 근본적이었다. 일본의 다층적인 하청 시스템들이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다른 거점들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거점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미국 시장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수단을 보장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따라서 미국의 관할권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아시아의 지역경제체제는 새롭게 구성될 필요가 없었고 수출의 판로를 확보하고 자본의 더욱 자유로운 이동을 강화하는 방식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경제의 부상과 배타적 역내 블록화 움직임은 미국의 아시아 통제권 상실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개방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아시아 지역의 ’개방성‘이란 미-일동맹이라는 현존하는 권력관계의 지속을 승인하고 WTO 협상과 관세철폐 등 여타 지역블록 및 거대개도국 등을 압박하는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무역 질서로의 철저한 이행을 촉구하는 촉매라는 APEC의 본질적 기능을 포장하는 것이다. APEC 전개과정과 미-일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들 APEC은 1989년 11월 1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창설되었다. 1993년 시애틀에서의 APEC의 최초 정상회담은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결속에 위협을 느낀 유럽연합이 서둘러 우루과이 라운드와 WTO발족에 대한 동의를 표하는 효과를 낳았다. 2차 인도네시아 보고르 정상회의에서는 ‘보고르 선언’을 채택하여 선진국 회원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의 무역 및 투자자유화를 실현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 등 선진국 그룹은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등 새로운 통상 이슈(기술 이전, 협력 등의 명목으로)를 APEC을 통해 타결하고자 하였고, 개도국들은 선진국의 개방 압력을 다자간 협상체제로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다양한 경제구조와 목적, 이해관계가 혼재한 가운데 APEC은 협력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하는 한편, 관세, 무역장벽 등의 제거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기로 하고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결과 이행 및 WTO체제의 성공적인 출범을 촉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 APEC은 이 ‘보고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전략들을 구사하는데 첫 번째 경로는 3차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오사카행동계획이었다. 각 회원국들은 개별실행계획을 제출, 구체적인 일정을 수립했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또 다른 경로로서 APEC은 15개의 조기자유무역화 분야를 선정하지만 이 역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 APEC은 이후 오클랜드에서 세 번째 경로로 방향을 틀게 된다. WTO에 판돈을 걸고, WTO 뉴라운드 출범이라는 대세에 몸을 맡겨 전 세계의 자유화를 함께 성취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99년 시애틀에서 WTO각료회의는 무산되었다. 사실 이 무산에는 가장 큰 경제규모의 미국과 일본의 갈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 APEC의 자유화 경로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APEC의 틀 안에서 한편으로 쌍무협정들과 금융 자유화 조치 등은 꾸준히 강화되어왔다. 자본 이동이 극대화되고 외환시장이 국제적인 투기자본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서 초래된 금융위기로 인해 일본주도의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파탄을 맞았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관치금융과 거품경제’의 구조개선이라는 명목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 수용으로 이어지고, 기존에 국가의 집중적 지원을 받아온 재벌체제에 대한 개선과 노동유연화 프로그램의 도입으로 일단락되며, 역설적으로 무역, 투자 자유화가 경제 활성화를 위한 필수과제로 대두된다. 따라서 자유무역의 확대를 위한 자유무역협정 등의 체결이 가속화된다. 외환위기 직후 금융안정화 방안에 따라 금융 분야 구조조정, 민간자본 및 투기자본의 역내 유입 촉진 등이 논의된다. 여기서 IMF 자금지원의 역할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고유한 접근과 관리기준의 전파를 용이하게 만들고 금융자본에 우선순위를 부여한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APEC의 위상은 전후 아시아지역 경제 주도권을 강화하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지역적 개방주의‘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1994년 APEC의 저명인사그룹(EPG)의 정의에 따르면, ’지역적 개방주의‘는 역내 국간에 최대한 시장개방을 실시하고, 개별국가들은 역외국에게는 역내자유화조치 혜택을 선택적으로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자유화의 실시를 강조하는 ‘개방적 지역주의’란 WTO 체제의 순항과 자유무역 달성을 위해 아시아지역의 배타적 블록화를 저지하고, 거대 시장의 형성으로 여타의 경제블록을 압박하기 위한 수사다. 물론, 이와 별도로 아시아 내에서의 지역화 논의도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수출 흡수국으로서 중국의 역할이 증대되고 있고, ASEAN +3(한중일) 진전, EAFTA(동아시아자유무역협정)모색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편, 역내 금융협력체제 형성을 위한 아시아통화기금(AMF)의 창설(엔 블록화) 등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미국이 느낄 ‘태평양 가운데 선긋기’의 위협은 미국 관리 하에서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경제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단지 위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와 노무현 정부 한편으로는 아시아에서의 배타적 지역화를 막고 유럽연합이나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등을 모든 무역장벽이 제거된 자유무역의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미국은 줄기차게 FTAAP(아시아 태평양자유무역협정) 결성을 주장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60%를 차지하는 APEC이 FTAAP를 결성하여 차별의 조건을 내걸 경우 핵심 개발도상국(브라질, 인도 등)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거대한 비회원국들은 이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따라서 배타적 경제블록들로부터 지역적 자유화보다 전 세계적 차원의 추진력을 회복하고 도하라운드 결론을 수용하도록 하여 미국을 정점에 둔 자유무역의 완성에 있어 APEC은 핵심 거점인 셈이다. 2005년 APEC 정상회의의 기조는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이다((미국을 중심으로 한)하나의 (빈부의 양극화를 위한)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 유럽연합이 헌법조약투표 과정 등을 거치면서 통합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미국에 적대적인 지역공동체들의 강화와 중국 부상 등 현실적 위협에 대해 자원과 소득의 재분배를 불러올 것이라는 자유무역 신화는 여전히 도전 중인 것이다. 냉전 구도 하에서 그리고 냉전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정치, 경제, 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해온 미국의 불안정성 증대는 자유무역의 완성을 시급히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불안정성 증대와 종속의 심화라는 자유무역의 진실을 마주한 인민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몇 푼을 적선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신뢰를 철회하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외침을 확산하고 있다. 과연 자유무역체제는 ‘평등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전세계 소득을 증진시키고 고루 배분할 수 있는가? 노무현 정부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IMF 구제금융과 혹독한 구조조정의 터널을 거쳐 관치금융과 재벌-족벌 경영의 페해를 시정하고 (아직은 부족하지만)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감내할 노동력의 재구성을 이루어냈으며 금융자본의 출입이 자유로운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에! 또한 우리에겐 아직까지도 착취 가능한 동남아시아, 남미 시장이 존재하며 이를 위한 해외투자의 수행자로서 한국의 자본가계급이 든든히 제 갈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자유무역 질서는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존의 국가의 역할은 축소되고 지방화, 분권화가 이루어질 것이라지만 실상 이는 기존의 국가의 기능을 지방정부 등을 통해 강화하고 경제자유구역, 특구 지정 등을 둘러싼 지방 도시들의 경쟁을 부추길 따름이며, 이를 위해 시민들을 동원하고 관리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이번 APEC 정상회의가 진행되는 부산시는 동북아 물류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해외자본 유치에 가속도를 붙이는 등 APEC 준비과정을 지역경제의 구조조정의 계기로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있다. 초민족적 기업과 국민국가의 위상을 동등하게 다루는 투자자유화 물결은 국가의 역할 분산을 동반한다. 노동력 관리의 엄격함과, 연기금 개혁 등 국가 개입을 통한 투기자금의 형성의 역할은 강화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의 정치적 문화적 쟁점의 상당수는 NGO들에게 이전된다. 노무현 정부는 NGO들을 동원하여 자유무역과 금융투기의 활성화를 위한 APEC의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고 부산여협, 부산여성연합 등의 여성단체들은 APEC 여성의제채택 여성연대를 구성하여 ‘중소기업, 영세기업 및 여성 참여 강화‘ 의제에 대해 집중하는 것으로 이에 조응하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6자회담 진전을 위한 부산선언문을 준비하는 등 정치적 차원에서 APEC을 활용하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질서’와 ‘전쟁’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인권과 반테러’ 즉, ‘인간안보’라는 개념이 도출되는 APEC에서 동북아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일 동맹 헤게모니로의 통합이라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증대된 불안정성과 인민의 고통이란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아시아에서 인민들의 연대와 단결된 투쟁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자유무역 신화의 페해가 가장 극대화된 형태로 드러난 공간이기 때문이다. ‘단일한’ 착취 네트워크를 향한 자유무역질서의 전략적 요충지와 아시아-태평양의 군사기지로서 동북아가 갖는 지정학적 전략에 따른 미국의 재편전략이 수행되고 있다. 이 착취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이미 드러난 자유무역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이 지배구조에 복무하는 노무현 정부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005년 APEC정상회의에 대응하는 우리의 기조는 미-일 동맹과 노무현정부에 의해 확장되는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반대,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인민들의 연대를 통한 대안세계화를 향한 투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