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정치는 사라지고 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정당을 바꾸겠다고?
▶▶[소책자 전체보기] 이재명 대통령이 위험한 이유◀◀
박근혜 정부 때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가 되었다고 하지만, ‘촛불’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된 뒤 당선된 문재인 정부는 다르지 않았나요?
‘제왕적 대통령제’는 이승만, 박정희 정부 시기에 기원을 두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강화되었고 문재인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1948년 당시 제헌국회 의원 다수는 의원내각제를 모델로 헌법을 기초했지만, 강력한 권한을 원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통령제를 밀어붙여 제헌헌법에 대통령제적 요소가 포함되었습니다.
박정희 소장은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대통령제를 복귀시켰습니다. 1967년에는 3선 개헌을 통해 집권당을 청와대로 종속시키는, 청와대 중심의 당-청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정당 기능이 무력화된 대신, 대통령 비서실의 권력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전두환 정부 하에서도 이런 기조는 지속되었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권한의 축소, 나아가 정당기능의 회복과 의원내각제의 강화는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자국 내 권한만 보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보다도 훨씬 힘이 셉니다. 특히 인사권이 어마어마한데, 대통령은 국무총리, 국무위원, 감사원장, 검찰총장, 국가정보원장, 경찰청장, 국세청장, 한국은행 총재 인사권뿐만 아니라 332개 공공기관 중 74개 기관장 임명권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막강한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가 국정의 중심이 되는 ‘청와대 정부’도 특징입니다. 청와대의 대통령 비서실은 우리보다 인구가 훨씬 많은 국가들보다도 거대한 규모를 자랑합니다.
대통령 권한 확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이어졌는데, 이전에는 대통령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직책이 1만 개였다면 3만 개로 급증했습니다. 청와대 규모도 계속 커졌습니다. 민주화세력이, 자신들이 비판해온 과거 정권들의 권위주의적 유산을 오히려 강화해온 것이죠.
이러한 강력한 대통령제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바뀌기는커녕 강화되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규모는 노무현 정부 이후 최대가 되었습니다. 2018년 1월 기준 청와대는 1천 명에 달하는 인원이 1년 예산으로 1천 9백 억 원을 사용합니다.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적어도 청와대 규모를 줄이겠다는 약속을 지켜 비서실 인원과 예산을 줄인 것과 대조됩니다. 국정 운영에서도 조국 민정수석, 장하성 정책실장 등이 그 어느 장관보다도 전면에서 문재인 정부 정책을 진두지휘했습니다.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가 큰 문제이며 이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문재인 대통령도 한 이야기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행정부와 최고권력자가 아니라 입법부와 의회가 중심이 되는 체제가 더 민주적이라고 지적하듯, 문재인 후보는 2012년 대선에서도, 2017년 대선에서도 현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내각제가 낫다고 발언했습니다. “현 대통령제에서 권위주의적 행태, ‘제왕적 대통령’, 권력형 비리가 끊임없이 생긴다. 내각책임제가 훨씬 좋은 제도다. 민주주의가 발전된 대부분 나라들이 내각책임제를 하고 있다. 대통령제를 해서 성공한 나라는 연방제를 바탕으로 한 미국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취임선서에서도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다”, “권력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켜, 어떤 기관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견제장치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대통령의 과도한 권한을 국무총리에게 분산하는 ‘책임총리제’, 청와대가 아니라 여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갖고 국정을 책임지는 ‘책임정당정치’, 그리고 ‘사법부 독립’ 등을 통해 이를 실현하겠다고 했지요.
이재명 후보는 어떨까요? 문재인 대통령이 적어도 후보 시절에 ‘말’로는 다양한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안을 내놓았다면, 이재명 후보는 그러한 것에 관심을 보인 적 없습니다. 이재명 후보의 특징으로 손꼽히는 ‘결단력’, ‘추진력’은 민주주의 규범조차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행태로 드러납니다. 단적으로 ‘전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이 야당과 기재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180석 얘기를 자주하지 않나. 정말 민생에 필요한 것은 과감한 날치기를 해줘야 한다.”(2021.7.15.)고 말했습니다.
식물국회니, 동물국회니 하면서 의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국에서는 대통령이라도 나서서 강력하게 일을 추진하는 게 불가피한 거 아닌가요?
의회가 무능해서 대통령이 많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대통령이 너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회가 무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사법부를 길들이려 했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이런 상황을 침묵하거나 옹호해왔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체적 인식에서 의회는 걸핏하면 싸움박질 하는 곳, 정당은 계파 정치가 난무하는 믿을 수 없는 곳, 내각이나 사법부는 관료주의적 엘리트입니다. 그에 비해 대통령은 훨씬 단순명료하게,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보입니다. 정치 개입도 의회나 정당을 통하는 것보다 대통령을 통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큰 효과를 냅니다. 어떻게든 대통령만 바꾸면, 아니면 어떻게든 대통령만 결심을 하게 하면, 사회가 하루아침에 바뀌고 정책이 일사천리로 추진되는 것을 우리는 수도 없이 경험해왔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국민의 복잡한 이해를 혼자서 대표하거나 조율할 수는 없습니다. 시민의 다양한 요구는 5년에 한 번 있는 대통령 선거에 다 담길 수 없습니다. 특정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나머지 후보에 표를 던진 민의가 묵살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고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대선에서 50% 이상을 득표하여 당선된 대통령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에서 실제로 중심이 되는 것은 의회와 정당입니다. 각 정당은 다양한 시민 집단을 대표하고, 의회를 통해 의견을 조율합니다. 국회의원은 다양한 의견과 구체적 현실을 반영하여 법을 만듭니다. 예를 들어, 기획재정위원회, 환경노동위원회 등 다양한 국회 상임위원회는 각 분야에서 국회의원이나 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심사하는 역할을 상시적으로 담당합니다. 의회는 또한 행정부 권한의 견제라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구조적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의회가 행사하는 주요 권한을 대통령과 행정부가 가집니다. 영국, 일본 등 의원내각제 국가는 차치하고 대표적인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과 비교해보아도,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행정부가 법률안 제출권·예산 편성권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이미 가졌지만, 문재인 정부는 역대 대통령들이 발동을 삼갔던 권한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의회를 우회하여 정부가 원하는 일을 추진하거나, 의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먼저 개헌 문제가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과 전국적 ‘촛불’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치러진 대선이니만큼, 개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가 지지부진하니 어쩔 수 없다”며 직접 개헌안을 발의했습니다. 이승만 정부 시기의 ‘발췌 개헌’이나, 박정희 정부 시기의 ‘3선 개헌’, ‘유신헌법’의 사례가 있듯이, 대통령이 직접 발의하거나 주도한 개헌은 결국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헌법을 고치는 셈이므로 기본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큽니다. 해외에서도 중국 시진핑 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 터키 에르도안 대통령 등이 개헌을 통해 자신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물론 문 대통령 개헌안은 그 정도 내용은 아니지만,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하루빨리 최소화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전두환 정부 이래 처음으로 대통령 개헌안 발의를 했는데, 정작 개헌안에 ‘제왕적 대통령제’를 해소하는 내용이 없어 많은 전문가와 언론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당초에는 정부의 예산증액동의권과 법률안 제출권을 폐지한다고 보도되었지만, 실제 개헌안에서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대통령 권력 분산을 위해 감사원을 대통령 소속이 아닌 독립기구로 바꾼다고 했지만, 감사원장·감사위원 인사권이 여전히 대통령에게 있으니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독립기구가 되면서 생기는 직무감찰권을 대통령이 오남용할 여지가 생깁니다.
결국 개헌안은 국회에서 부결되었는데, 1954년 ‘이승만 대통령 3선 연임’ 개헌 부결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국회를 탓했지만, 이는 민주당이 가장 중요한 권력구조 문제부터 논의하자는 야당의 제안을 거부하여 논의가 공전을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20대 국회 개헌특위에서는 대통령제 대신 변형된 의원내각제를 지지하는 의원이 다수였는데, 이런 논의궤적을 무시했습니다. 청와대는 대통령 연임제를 개헌안에 명시하면서 논의의 초점을 이것으로 가져갑니다. 야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에 대해 얼마나 진정성 있는 대안을 모색했냐는 문제와 별개로, 결국 청와대와 민주당은 개헌 취지에 맞는 국회 논의를 피해갔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정부의 추진 의지는 강한 반면 논쟁의 여지는 큰 사안들에서 의회를 우회하여 시행령을 남발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임기 초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자문회의가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과 ‘100대 국정과제’를 발표하면서 “시행령·시행규칙만으로 이행 가능한 국정과제를 적극 발굴해 추진하겠다”고 밝힌 대로입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다른 나라 정부에는 없는 법률안 제출권을 갖고 있음에도 더 손쉬운 길을 택한 것이죠.
문재인 정부는 인사권도 남용했습니다. 2021년 5월 기준으로 야당 동의 없이 임명한 장관급 인사만 31명입니다.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2005년 이후 노무현 정부 3명, 이명박 정부 17명, 박근혜 정부 10명 전부를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인사청문회는 고위 공직자 후보를 검증하고 대통령의 인사권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인데, 이렇게 야당 패싱이 남발되면서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야당을 ‘패싱’하고 ‘의석으로 찍어누르는’ 행태로, 행정부 견제와 토론을 통한 갈등의 조정이라는 의회 기능도 약화되었습니다. 2020년 총선 뒤 21대 국회의 상임위원회 구성이 예입니다. 국회 상임위원회는 여당 독식을 막기 위해 위원 선임과 위원장을 의석수 비율에 따라 배분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은 상임위원장 자리 18개를 독식해버렸습니다. 여당이 모든 상임위원장을 차지한 건 1987년 이후 처음으로, 《한겨레》는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훼손된 원 구성 협상으로 헌정사에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습니다.
물론 이재명 후보도 이러한 민주주의 위협 행각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정부와 여당의 행보를 옹호하고,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말을 해왔습니다. “과감한 날치기”를 통해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지급하자고 했고, “일부 야당의 발목잡기로 공수처 설치가 시행될 수 없다면 갈 길은 하나, 바로 공수처법 개정”이라고 주장했고, 언론에 5배의 징벌적 배상 책임 조항을 넣은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대해 “망하게 할 정도로 강력한 징벌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