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네오콘'을 통해 본 남한 '뉴라이트 운동'의 전망 정 희 찬 | 정책편집부장 1. 뉴라이트운동의 등장 :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위기에 빠져있다."1) 이른바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지난해 동아일보가 <뉴라이트, 침묵에서 행동으로>라는 연재기사를 기획하면서 자유주의연대와 뉴라이트를 표방한 여러 단체들이 세력화하면서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연대(2004년 11월 2일), 교과서포럼(2005년 1월 25일), 뉴라이트싱크넷(3월 24일), 시사웹진 뉴라이트(4월 1일)는 출범 즉시 각종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과거 '주사파' 출신 인사나 김진홍 목사 등 보수적 기독교단체를 이끌고 있는 종교계 인사가 주축이 된 이들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386'이라 부른다 (여기서 '486'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올드 레프트'나 '올드 라이트'와 차별적인 자신들이 혼란과 절망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칭 '건강한 보수'를 주장하고 있는 이들 '신보수'의 주장은 자유주의연대이나 뉴라이트싱크넷의 창립선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2) ①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역사: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통해 냉전과 공산화의 위험, 빈곤을 극복하여 세계 10위권의 산업국가로 발전했을 뿐 아니라 1987년 이후 민주주의 정착에도 성공했다. ② 현 집권세력의 위험한 '자학사관': 현 집권세력은 건국과 산업화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절차적 수준이 아니라 과거 반체제세력이 주장하는 민중민주주의와 유사한 참여민주주의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들은 또한 민족공조와 노조를 앞세워 각각 한미동맹과 기업을 대체하려고 한다. ③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反시장주의적이고 대중선동형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現집권세력에게 전적으로 있다: 외국자본과 거대노조가 득세하고 분배와 균형의 추구는 성장둔화와 빈곤의 증가를 초래했다. 민족공조는 최악의 인권유린국가로서 핵무장을 시도하는 북한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의회권력과 행정권력 뿐 아니라 예술과 문화마저 이들이 장악하여 서로 권력투쟁을 일삼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이념, 세대, 지역 간 갈등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④뉴라이트운동은 기득권에 안주하며 부패한 낡은 보수와 단절하고, 민주화세력의 위험한 민족주의적 민중주의가 아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하고 세계화, 정보화, 자유화의 대세에 발맞추어 선진한국으로의 질적 도약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상이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의 주장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지난해 여름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서 한나라당 부설기관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인 박세일 의원이 발제한 <나라의 선진화와 당의 진로>라는 제목의 문서에 기반하고 있다.3) 이 문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현정부의 주축을 이루는 민주화 세력을 겨냥하여) 1980년대 "친북 반체제적인 반독재투쟁의 잔재인 '반시장, 반자유' 세력과의 대결을 통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주도한 김대중 정권과 이를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반시장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어떤 이론체계에 근거하여 출현했다기보다는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현 집권세력에게 전가함으로써 반사이익을 노리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은 지난 30년 동안 남한 지배계급의 지주였던 '반공-발전주의'를 해체하고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통해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분파를 보수야당-자유주의 세력으로 대체하였다. 게다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연거푸 패한 결과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기존 지배계급 분파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현된 것이었으리라. 1997년 대선을 통해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수평적 정권교체'의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등장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IMF 서울 지부장'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철저하게 월스트리트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금융시장을 부양하려는 그의 경제정책은 2000년 절정에 달한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불가피하게 측근들과 여당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로 귀결되었다. 재임 중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라는 명예는 빛이 바랬고 남한 자본주의의 동요는 정권에 대한 불안정한 지지율로 직결되었다. 김대중 정권의 충실한 후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지난 신자유주의 구조정의 결과 등장한 빈곤과 청년실업, 불안정노동이라는 쟁점을 '참여 복지'라는 허울좋은 수식어로 은폐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오히려 조직된 노동자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강화하면서 한국경제의 구원자로서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신화를 유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혁의 장미빛 환상이 잿빛 현실로 드러난 현실에서 현 집권세력에 대한 지배계급 내 보수적 분파들의 선전·선동은 나날이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뉴라이트'는 바로 이러한 지배계급 내에서의 동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 '뉴라이트'에 비견할 수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출현과 함께 반동적이고 공격적인 보수주의가 출현했다. 비록 양자 사이의 시차는 존재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상황은 한국과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있고 나아가 '뉴라이트' 운동의 향후 전망을 조망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2. 미국의 네오콘(Neo-con) : 미국의 쇠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 (1) 1970년대 급진주의 도전에 대항한 공격적 보수주의의 반동 '뉴라이트운동'의 원조 격인 이른바 네오콘이 등장한 미국 역시 1970년대 경제불황과 베트남전 패배, 급진주의 페미니즘, 흑인민권운동 등 진보주의 운동의 성장에 대한 보수주의 반동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미국 내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투쟁과 흑인민권운동이 성장하며 기존 사회의 가치관과 질서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급진학생운동(68운동), 혁명과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시도했던 중남미의 좌파(쿠바와 칠레, 니카라과), 수에즈운하를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되찾은 이집트의 나세르가 제창한 중동의 아랍민족주의와 제3세계 국가들의 '비동맹주의' 등은 미국의 지배계급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서 이른바 '파웰 메모'4)로 유명한 일화는 바로 각종 형태의 자유주의·진보주의를 미국 내부의 적으로 지목하고 이들과 대결해야 한다는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를 드러낸다. 파웰은 공산주의자, 뉴레프트를 비롯한 혁명주의자들이 대학과 언론계, 문화예술계에 침투하여 미국의 정치와 경제체제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기업은 대학의 보수적 학생을 양성하고 진보적 교수를 보수적 교수로 대체해야하고 TV프로그램, 책, 팜플랫 등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진보'에 맞서 보수주의를 재구축하는 데 앞장서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후 미국에서는 해리티지 재단, 건전한 경제를 위한 시민운동 등 보수적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민주당이 지원하는 자유주의 연구소들과 경쟁했다. 특히` 1차·3차 산업에 집중된 개인기업자본과 동맹을 맺어 막대한 정치자금을 바탕으로 미국 자본가 집단의 요구를 표출했다. 이러한 요구는 조세삭감, 노동신축화, 군비증강 등 레이거노믹스로 수용된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보수주의 흐름은 낙태, 동성애, 포르노, 마약, 청소년 범죄 등 미국 사회의 첨예한 이슈들에 대해서 복음주의적 기독교 집단 - 미국 기독교세력은 1940년대에서부터 70년대까지는 세속의 정치·사회적 이슈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들이 강조했던 전통적 가치관은 급진주의와 자유주의적 세속주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 - 이 주장하는 헌법의 남녀동등권 반대, 동성애권 반대, 낙태 반대 등 쟁점을 이동하며 이른바 단일 이슈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월남전과 워터게이트 등으로 추락한 전통적인 보수주의 진영은 전열을 재정비했고 결국 1980년 공화당의 레이건 행정부가 출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2) 신보수주의(네오콘)의 출현: 급진주의와 (뉴딜)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회의 또 한편으로 미국에서는 동시에 오늘날 네오콘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보수주의자들이 점차 공화당을 지지하며 외교안보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들의 기원은 1940년대 <파티전 리뷰>(Partisan Review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부 트로츠키주의 그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소련의 동유럽 점령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반공(反共)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루즈벨트의 뉴딜 자유주의와 복지국가의 이념을 지지했다. 이들이 공격적인 보수주의로 전향하게 되는 계기는 1960년대 베트남전을 비판하며 성장한 급진주의의 등장이었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SDS)이 결성되고 신좌파운동이 출현하며 몇몇 대학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학생시위가 확산되었다 (1964년 버클리대학, 1968년 콜롬비아대학). 이때 '네오콘'의 원조로 불리는 어빙 크리스톨 등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급진주의에 무기력한 민주당의 자유주의에 실망하여 점차 민주당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또한 1960년대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아래에서 추진된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과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등의 복지 프로그램은 이들이 보기에 빈민의 자활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복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미혼모를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가족의 해체로 귀결된 전형적인 실패작이었다. 네오콘의 논리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와 차별의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자유시장경제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능케 함으로써 기업가정신이 발전하여 새로운 부가 창출될 수도 있고,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차별을 시정하는 강력한 反차별 제도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차라리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탐욕과 이기심이며, 정직, 근면, 책임감, 융통성, 친절, 타인의 필요와 이해에 대한 관심을 증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5) 게다가 이들은 1970년대 미국의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복음주의 및 기존 보수주의의 주장과 결합하는데, 앞서 낙태나 동성애에 대한 반대, 전통적 가족의 수호라는 점에서 일치할 뿐 아니라 외교안보정책에서도 전통적인 우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동맹의식도 공통적이다. 결국 미국식 선거제도의 악명을 높였던 2000년 대선에서 네오콘 세력은 복음주의 기독교 집단과 본격적인 유대관계를 구축했다. 게다가 네오콘들은 비인격적이며 물질주의적이고 개인주의·자유지상주의적인 대중문화의 공격으로부터 미국적 가치관과 문화를 방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들의 주장은 경제적 자유와 공동체적 가치를 위해서 유대-기독교의 가르침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유대-기독교는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도덕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속 종교'인 좌파 유토피아주의와 경쟁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경택, 2005). 네오콘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결합하면서 보수주의의 현대화, 이론화(?)에 조력하고 있다. 네오콘이 민주당 지지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70년대 후반 카터 행정부의 이른바 '인권외교'였다. 네오콘은 카터 행정부가 제3세계 권위주의 정권을 압박하는 '인권외교'를 통해 소련과 공산주의라는 큰 위협을 앞에 두고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동맹국을 소외시키고 있다며 레이건의 공화당 대선 캠프에 합류한다.6)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엘리엇 에이브럼스나 리처드 펄 등 신보수주의자들이 중용되었으며 대외적으로도 1970년대 데탕트와 단절하고 군비확장('스타워즈' 계획)과 동시에 강경하고 적극적인 對소련 압박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리한 군비의 부담을 이기지 못한 소련이 1985년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고, 1980년대 말 동유럽 국가들이 몰락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절정기를 구가했던 신보수주의자들은 반공이라는 대외명분 자체가 소멸함에 따라 오히려 입지가 약해지고 내부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한다 (손봉권, 2005).7) 9·11 테러사건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신보수주의자들이 '네오콘'이라는 별칭으로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 밖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미국은 이제 도처에서 보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위험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3) 9·11 이후 신보수주의의 보편화, 신자유주의의 신보수주의적 수렴? 탈냉전 이후 신보수주자들은 고립주의로 회귀하려는 공화당보다는 인권보호와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사용하겠다는 클린턴의 '대담한 주장'에 마음이 이끌리기도 했다. 냉전구도의 소멸 이후 소말리아 사태와 보스니아에서의 인종청소를 목격하며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가치를 부정하거나 위협하는 악의 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세계질서 유지를 위해 미국이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정치적 경제적 자유의 세계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위해 국방비를 늘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상윤, 2005). 네오콘의 일부세력은 공화당의 강경 매파그룹(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과 연합하여 1996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결성하고 9·11테러를 통해 명실상부한 미국의 대안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PNAC를 결성한 세력들은 작은 정부를 지지하고 해외개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자와는 달리 강한 정부와 군사력의 증강을 지지한다. 이들은 불량국가를 무너뜨리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여 중동분쟁 해결과 체제전환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거나('우익 윌슨파')와 미국의 개입과 군사적 강경노선을 유지하되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또 다른 위협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잭슨적 일방주의자') 주장한다. 미국의 자본과 군사력을 상징하는 두 곳을 공격한 9·11 테러는 다른 정치세력에 비해 네오콘만이 유일하게 뚜렷한 전망을 지니고 있고 진정으로 세계의 혼란과 무질서를 걱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짜내려 노력하는 세력으로 돋보이게 만들었다. 2000년 대선이 주로 사회·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선거운동이 이루어졌음에 반해, 2004년 대선은 외교안보 정책이 단연 압도적으로 여타의 쟁점을 압도했다. 미국 민주당은 부시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비판했으나 이는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전통적인 우방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엽적인 문제제기일 뿐이었다. 오히려 민주당과 공화당은 국토안보의 핵심의제로서 대테러전쟁의 수행, 대테러전쟁의 핵심의제로서 핵확산 방지, 이를 위한 (핵)선제공격 불사라는 점에서 서로 수렴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국제적 협력을 추구하는 다자주의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방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자적 일방주의', 혹은 '다자주의의 융단장갑 속에서의 일방주의 철권'이 존재할 뿐이다 (백승욱, 2005). 이처럼 국제주의 보수파로서 네오콘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주장은 공화당과 민주당 뿐 아니라 평범한 미국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며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과 세계를 '구원'하려는 이들의 전략은 군비증강을 위한 무리한 재정적자와 (세계 최강이지만)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한 군사력으로 인해 실패할 공산이 크다 (토드, 2003). 이들의 시도는 평화와 안정과는 거리가 먼 무한전쟁을 야기할 뿐이다. 3. 신자유주의 속에서 신보수주의의 수렴과 신자유주의의 '반동적' 전환 미국에서 네오콘의 주장이 큰 틀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새로운 수렴을 구성하는 데 강력한 구심으로 작동하고 있듯이 한국에서도 단지 뉴라이트라는 집단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뉴라이트가 등장한 후 지배계급의 전략이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미국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신자유주의는 금융적 팽창을 거듭하며 호황을 누렸지만 이제는 민주당마저 전쟁과 테러에 대해 오히려 공화당의 무능을 질책하며 대테러전쟁의 중요성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신보수주의 의제는 공화당이나 한나라당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 있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이미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과 그리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미 그들이 주장하는 질서자유주의, 상생의 자유주의, 공동체 자유주의는 참여정부의 국정목표인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성찰적 민주주의, 토론민주주의와 대동소이하고, 법치주의는 '원칙과 신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임혁백, 2004). 네오콘이 주도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태도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으로 드러났던 바, 뉴라이트가 제시하는 한미동맹 강화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북한에 대한 이들의 호전적인 민주화 운동 역시 북한의 시장경제로의 진입을 유도하려는 노무현정권의 대북정책과 본질적으로 다른 주장이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른바 시장경제에 대한 뉴라이트의 주문은 지난 10여 년 동안의 자유화·개방화로 인해 이미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을 초국적 투자자들이 내세우는 '시장의 법칙'에 맡겨놓았던 'IMF 지부장'과 그의 후계자에게 오히려 반가운 주문이 아닐 수 없다. 즉, 보수주의를 앞세우며 호전적으로 현 집권세력을 공격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들은 김대중 정권 이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재편과 차별적인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공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공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돗자리를 깔아주고 있다. 뉴라이트의 출현은 단지 '보수꼴통'의 출현이 아니라 앞으로 현재의 집권세력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의 우경화·보수화를 촉진하는 촉매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8) 뉴라이트가 단지 현 집권세력의 뒤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다고 얕잡아 볼 것이 아니라, 뉴라이트가 지배세력의 보수화와 우경화를 촉진하며 현존하는 체계의 위기를 여성과 노동자에게 전가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지배계급의 시도가 민중의 저항과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한에서는 앞으로 필연적으로 훨씬 야만적인 정세가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 뉴라이트 비판이 '무기의 비판'이 되려면 바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운동의 형성, 대안적인 주체형성의 과제가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자료※ 마상윤(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 - 탈냉전부터 이라크 전쟁까지」;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백승욱(2005), 「미국 신보수파 주도 아래의 새로운 세계질서」;백승욱 편저,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미국헤게모니의 역사』, 그린비 손봉권(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1930년대에서 레이건 행정부 시기까지」;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오경택(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정치이념의 구성과 주장」;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이삼성(1993),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 민족주의』, 한길사 임혁백(2004), 「한국의 뉴라이트 배경과 전망」;『관훈저널』2004년 겨울호 엠마뉘엘 토드(2003), 주경철 옮김, 『제국의 몰락』, 까치 1) 〈자유주의연대 창립선언문〉(2004.11.24)에 나온 말이다.본문으로 2) 자유주의연대(www.486.or.kr)의 홈페이지나 시사웹진 뉴라이트닷컴(www.new-right.com)의 홈페이지에는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각종 칼럼과 토론회 자료가 등록되어 있다.본문으로 3) 임혁백(2004)는 '뉴라이트'운동을 한나라당의 '선진화 프로젝트'에 대한 호응으로 해석한다.본문으로 4) 파웰 메모는 변호사인 루이스 파웰(Lewis Powell)이 1971년 8월23일 당시 미상공회의소 의장 스나이더(Eugene B. Snyder)에게로 보낸 "미국의 자유기업제도에 대한 공격"이란 제목의 메모를 가리키는 것인데 2개월 후 파웰은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된다.본문으로 5) 이들은 또한 빈곤의 문제 역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기대치도 상승해서 심화된 것으로 인식될 뿐이며, 과거의 시점에 비해서는 오히려 현재의 최극빈층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에 비해서는 몇 배나 더 잘 살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은 빈곤은 감소했다"는 것이다. 현대 빈곤문제를 고대 노예의 삶과 비교하라는 의미인가?본문으로 6) 그러나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란 이중적이었고 집권 초기에 한정되었다. 카터가 무기수출을 규제하고 국방예산을 감축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지역 안보에 대한 책임을 친미 동맹국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서 동맹국들이 추구했던 자주국방은 사실상 미제무기로 무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카터 행정부가 권위주의/독재국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취한 조치는 '성명외교'에 머무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이란과 니카라과에서 친미정권이 무너지고 반미 혁명정권이 세워지자 '인권외교'는 카터 행정부 말기인 1979-80년 사이에 CIA의 해외공작을 통한 공작외교와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이삼성, 1993: 82-90).본문으로 7)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했을 때 신보수주의 진영은 여전히 소련의 박멸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과,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예전의 고립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양분되었다.본문으로 8) 일례로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국민전선(FN)의 르펜이라는 극우파가 결선에 올라 프랑스인들을 경악에 빠트린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적 수사를 늘어놓은 르펜에 대항하여 프랑스 시민들은 우파의 시라크를 당선시켰지만 그는 르펜의 인종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이민자들에 대한 배제와 탄압을 강화하였고 중도-좌파(?) 정당인 프랑스사회당 역시 날로 악화되는 치안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준비하며 사실상 인종주의적 의제에서 수렴되어가고 있다. 즉 극우파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기존 가치관을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비난받지만 정작 그들이 주장한 배제의 논리와 가치체계는 이미 모든 경쟁자들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미국의 '네오콘'을 통해 본 남한 '뉴라이트 운동'의 전망 정 희 찬 | 정책편집부장 1. 뉴라이트운동의 등장 :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위기에 빠져있다."1) 이른바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이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지난해 동아일보가 <뉴라이트, 침묵에서 행동으로>라는 연재기사를 기획하면서 자유주의연대와 뉴라이트를 표방한 여러 단체들이 세력화하면서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연대(2004년 11월 2일), 교과서포럼(2005년 1월 25일), 뉴라이트싱크넷(3월 24일), 시사웹진 뉴라이트(4월 1일)는 출범 즉시 각종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과거 '주사파' 출신 인사나 김진홍 목사 등 보수적 기독교단체를 이끌고 있는 종교계 인사가 주축이 된 이들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 386'이라 부른다 (여기서 '486'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올드 레프트'나 '올드 라이트'와 차별적인 자신들이 혼란과 절망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칭 '건강한 보수'를 주장하고 있는 이들 '신보수'의 주장은 자유주의연대이나 뉴라이트싱크넷의 창립선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2) ①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역사: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통해 냉전과 공산화의 위험, 빈곤을 극복하여 세계 10위권의 산업국가로 발전했을 뿐 아니라 1987년 이후 민주주의 정착에도 성공했다. ② 현 집권세력의 위험한 '자학사관': 현 집권세력은 건국과 산업화를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이해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절차적 수준이 아니라 과거 반체제세력이 주장하는 민중민주주의와 유사한 참여민주주의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들은 또한 민족공조와 노조를 앞세워 각각 한미동맹과 기업을 대체하려고 한다. ③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反시장주의적이고 대중선동형 포퓰리즘에 사로잡힌 現집권세력에게 전적으로 있다: 외국자본과 거대노조가 득세하고 분배와 균형의 추구는 성장둔화와 빈곤의 증가를 초래했다. 민족공조는 최악의 인권유린국가로서 핵무장을 시도하는 북한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의회권력과 행정권력 뿐 아니라 예술과 문화마저 이들이 장악하여 서로 권력투쟁을 일삼는 가운데 대한민국은 이념, 세대, 지역 간 갈등 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④뉴라이트운동은 기득권에 안주하며 부패한 낡은 보수와 단절하고, 민주화세력의 위험한 민족주의적 민중주의가 아닌,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하고 세계화, 정보화, 자유화의 대세에 발맞추어 선진한국으로의 질적 도약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상이 이른바 뉴라이트 운동의 주장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지난해 여름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에서 한나라당 부설기관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인 박세일 의원이 발제한 <나라의 선진화와 당의 진로>라는 제목의 문서에 기반하고 있다.3) 이 문서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현정부의 주축을 이루는 민주화 세력을 겨냥하여) 1980년대 "친북 반체제적인 반독재투쟁의 잔재인 '반시장, 반자유' 세력과의 대결을 통해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주도한 김대중 정권과 이를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반시장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이들의 주장이 어떤 이론체계에 근거하여 출현했다기보다는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현 집권세력에게 전가함으로써 반사이익을 노리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은 지난 30년 동안 남한 지배계급의 지주였던 '반공-발전주의'를 해체하고 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통해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분파를 보수야당-자유주의 세력으로 대체하였다. 게다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연거푸 패한 결과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기존 지배계급 분파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현된 것이었으리라. 1997년 대선을 통해 '준비된 대통령'으로서 '수평적 정권교체'의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등장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는 'IMF 서울 지부장'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철저하게 월스트리트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금융시장을 부양하려는 그의 경제정책은 2000년 절정에 달한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불가피하게 측근들과 여당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정부패로 귀결되었다. 재임 중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라는 명예는 빛이 바랬고 남한 자본주의의 동요는 정권에 대한 불안정한 지지율로 직결되었다. 김대중 정권의 충실한 후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지난 신자유주의 구조정의 결과 등장한 빈곤과 청년실업, 불안정노동이라는 쟁점을 '참여 복지'라는 허울좋은 수식어로 은폐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오히려 조직된 노동자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강화하면서 한국경제의 구원자로서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신화를 유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혁의 장미빛 환상이 잿빛 현실로 드러난 현실에서 현 집권세력에 대한 지배계급 내 보수적 분파들의 선전·선동은 나날이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뉴라이트'는 바로 이러한 지배계급 내에서의 동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1970년대 '뉴라이트'에 비견할 수 있는 신보수주의자들의 출현과 함께 반동적이고 공격적인 보수주의가 출현했다. 비록 양자 사이의 시차는 존재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상황은 한국과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있고 나아가 '뉴라이트' 운동의 향후 전망을 조망할 수 있는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2. 미국의 네오콘(Neo-con) : 미국의 쇠퇴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 (1) 1970년대 급진주의 도전에 대항한 공격적 보수주의의 반동 '뉴라이트운동'의 원조 격인 이른바 네오콘이 등장한 미국 역시 1970년대 경제불황과 베트남전 패배, 급진주의 페미니즘, 흑인민권운동 등 진보주의 운동의 성장에 대한 보수주의 반동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미국 내에서는 베트남전쟁 반대투쟁과 흑인민권운동이 성장하며 기존 사회의 가치관과 질서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또한 유럽의 급진학생운동(68운동), 혁명과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시도했던 중남미의 좌파(쿠바와 칠레, 니카라과), 수에즈운하를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되찾은 이집트의 나세르가 제창한 중동의 아랍민족주의와 제3세계 국가들의 '비동맹주의' 등은 미국의 지배계급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와중에서 이른바 '파웰 메모'4)로 유명한 일화는 바로 각종 형태의 자유주의·진보주의를 미국 내부의 적으로 지목하고 이들과 대결해야 한다는 공격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보수주의자의 태도를 드러낸다. 파웰은 공산주의자, 뉴레프트를 비롯한 혁명주의자들이 대학과 언론계, 문화예술계에 침투하여 미국의 정치와 경제체제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기업은 대학의 보수적 학생을 양성하고 진보적 교수를 보수적 교수로 대체해야하고 TV프로그램, 책, 팜플랫 등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진보'에 맞서 보수주의를 재구축하는 데 앞장서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후 미국에서는 해리티지 재단, 건전한 경제를 위한 시민운동 등 보수적 단체들이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기존의 민주당이 지원하는 자유주의 연구소들과 경쟁했다. 특히` 1차·3차 산업에 집중된 개인기업자본과 동맹을 맺어 막대한 정치자금을 바탕으로 미국 자본가 집단의 요구를 표출했다. 이러한 요구는 조세삭감, 노동신축화, 군비증강 등 레이거노믹스로 수용된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보수주의 흐름은 낙태, 동성애, 포르노, 마약, 청소년 범죄 등 미국 사회의 첨예한 이슈들에 대해서 복음주의적 기독교 집단 - 미국 기독교세력은 1940년대에서부터 70년대까지는 세속의 정치·사회적 이슈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들이 강조했던 전통적 가치관은 급진주의와 자유주의적 세속주의에 의해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 - 이 주장하는 헌법의 남녀동등권 반대, 동성애권 반대, 낙태 반대 등 쟁점을 이동하며 이른바 단일 이슈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월남전과 워터게이트 등으로 추락한 전통적인 보수주의 진영은 전열을 재정비했고 결국 1980년 공화당의 레이건 행정부가 출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2) 신보수주의(네오콘)의 출현: 급진주의와 (뉴딜)자유주의 이념에 대한 회의 또 한편으로 미국에서는 동시에 오늘날 네오콘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보수주의자들이 점차 공화당을 지지하며 외교안보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들의 기원은 1940년대 <파티전 리뷰>(Partisan Review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부 트로츠키주의 그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소련의 동유럽 점령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반공(反共)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루즈벨트의 뉴딜 자유주의와 복지국가의 이념을 지지했다. 이들이 공격적인 보수주의로 전향하게 되는 계기는 1960년대 베트남전을 비판하며 성장한 급진주의의 등장이었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SDS)이 결성되고 신좌파운동이 출현하며 몇몇 대학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학생시위가 확산되었다 (1964년 버클리대학, 1968년 콜롬비아대학). 이때 '네오콘'의 원조로 불리는 어빙 크리스톨 등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급진주의에 무기력한 민주당의 자유주의에 실망하여 점차 민주당으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한다. 또한 1960년대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아래에서 추진된 '가난과의 전쟁'(War on Poverty)과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등의 복지 프로그램은 이들이 보기에 빈민의 자활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복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미혼모를 증가시켜 결과적으로 가족의 해체로 귀결된 전형적인 실패작이었다. 네오콘의 논리에 의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와 차별의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자유시장경제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능케 함으로써 기업가정신이 발전하여 새로운 부가 창출될 수도 있고, 오히려 세월이 흐를수록 차별을 시정하는 강력한 反차별 제도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차라리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탐욕과 이기심이며, 정직, 근면, 책임감, 융통성, 친절, 타인의 필요와 이해에 대한 관심을 증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5) 게다가 이들은 1970년대 미국의 급진주의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복음주의 및 기존 보수주의의 주장과 결합하는데, 앞서 낙태나 동성애에 대한 반대, 전통적 가족의 수호라는 점에서 일치할 뿐 아니라 외교안보정책에서도 전통적인 우방으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동맹의식도 공통적이다. 결국 미국식 선거제도의 악명을 높였던 2000년 대선에서 네오콘 세력은 복음주의 기독교 집단과 본격적인 유대관계를 구축했다. 게다가 네오콘들은 비인격적이며 물질주의적이고 개인주의·자유지상주의적인 대중문화의 공격으로부터 미국적 가치관과 문화를 방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들의 주장은 경제적 자유와 공동체적 가치를 위해서 유대-기독교의 가르침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유대-기독교는 물질세계를 초월하는 도덕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세속 종교'인 좌파 유토피아주의와 경쟁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경택, 2005). 네오콘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결합하면서 보수주의의 현대화, 이론화(?)에 조력하고 있다. 네오콘이 민주당 지지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70년대 후반 카터 행정부의 이른바 '인권외교'였다. 네오콘은 카터 행정부가 제3세계 권위주의 정권을 압박하는 '인권외교'를 통해 소련과 공산주의라는 큰 위협을 앞에 두고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동맹국을 소외시키고 있다며 레이건의 공화당 대선 캠프에 합류한다.6)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엘리엇 에이브럼스나 리처드 펄 등 신보수주의자들이 중용되었으며 대외적으로도 1970년대 데탕트와 단절하고 군비확장('스타워즈' 계획)과 동시에 강경하고 적극적인 對소련 압박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그러나 무리한 군비의 부담을 이기지 못한 소련이 1985년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고, 1980년대 말 동유럽 국가들이 몰락하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절정기를 구가했던 신보수주의자들은 반공이라는 대외명분 자체가 소멸함에 따라 오히려 입지가 약해지고 내부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한다 (손봉권, 2005).7) 9·11 테러사건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던 신보수주의자들이 '네오콘'이라는 별칭으로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하는 계기가 된다. 미국 밖 사람들이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미국은 이제 도처에서 보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위험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3) 9·11 이후 신보수주의의 보편화, 신자유주의의 신보수주의적 수렴? 탈냉전 이후 신보수주자들은 고립주의로 회귀하려는 공화당보다는 인권보호와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사용하겠다는 클린턴의 '대담한 주장'에 마음이 이끌리기도 했다. 냉전구도의 소멸 이후 소말리아 사태와 보스니아에서의 인종청소를 목격하며 신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가치를 부정하거나 위협하는 악의 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세계질서 유지를 위해 미국이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정치적 경제적 자유의 세계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위해 국방비를 늘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상윤, 2005). 네오콘의 일부세력은 공화당의 강경 매파그룹(딕 체니, 도널드 럼스펠드)과 연합하여 1996년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결성하고 9·11테러를 통해 명실상부한 미국의 대안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PNAC를 결성한 세력들은 작은 정부를 지지하고 해외개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자와는 달리 강한 정부와 군사력의 증강을 지지한다. 이들은 불량국가를 무너뜨리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식하여 중동분쟁 해결과 체제전환을 동시에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거나('우익 윌슨파')와 미국의 개입과 군사적 강경노선을 유지하되 이라크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또 다른 위협세력을 제거해야 한다고('잭슨적 일방주의자') 주장한다. 미국의 자본과 군사력을 상징하는 두 곳을 공격한 9·11 테러는 다른 정치세력에 비해 네오콘만이 유일하게 뚜렷한 전망을 지니고 있고 진정으로 세계의 혼란과 무질서를 걱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짜내려 노력하는 세력으로 돋보이게 만들었다. 2000년 대선이 주로 사회·경제적 쟁점을 중심으로 선거운동이 이루어졌음에 반해, 2004년 대선은 외교안보 정책이 단연 압도적으로 여타의 쟁점을 압도했다. 미국 민주당은 부시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비판했으나 이는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전통적인 우방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엽적인 문제제기일 뿐이었다. 오히려 민주당과 공화당은 국토안보의 핵심의제로서 대테러전쟁의 수행, 대테러전쟁의 핵심의제로서 핵확산 방지, 이를 위한 (핵)선제공격 불사라는 점에서 서로 수렴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국제적 협력을 추구하는 다자주의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방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자적 일방주의', 혹은 '다자주의의 융단장갑 속에서의 일방주의 철권'이 존재할 뿐이다 (백승욱, 2005). 이처럼 국제주의 보수파로서 네오콘의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주장은 공화당과 민주당 뿐 아니라 평범한 미국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며 점차 보편화되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과 세계를 '구원'하려는 이들의 전략은 군비증강을 위한 무리한 재정적자와 (세계 최강이지만)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한 군사력으로 인해 실패할 공산이 크다 (토드, 2003). 이들의 시도는 평화와 안정과는 거리가 먼 무한전쟁을 야기할 뿐이다. 3. 신자유주의 속에서 신보수주의의 수렴과 신자유주의의 '반동적' 전환 미국에서 네오콘의 주장이 큰 틀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의 새로운 수렴을 구성하는 데 강력한 구심으로 작동하고 있듯이 한국에서도 단지 뉴라이트라는 집단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뉴라이트가 등장한 후 지배계급의 전략이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미국에서 클린턴 행정부의 신자유주의는 금융적 팽창을 거듭하며 호황을 누렸지만 이제는 민주당마저 전쟁과 테러에 대해 오히려 공화당의 무능을 질책하며 대테러전쟁의 중요성에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처럼 신보수주의 의제는 공화당이나 한나라당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 있다. 한국의 뉴라이트는 이미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과 그리 다르지 않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미 그들이 주장하는 질서자유주의, 상생의 자유주의, 공동체 자유주의는 참여정부의 국정목표인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성찰적 민주주의, 토론민주주의와 대동소이하고, 법치주의는 '원칙과 신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임혁백, 2004). 네오콘이 주도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태도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으로 드러났던 바, 뉴라이트가 제시하는 한미동맹 강화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북한에 대한 이들의 호전적인 민주화 운동 역시 북한의 시장경제로의 진입을 유도하려는 노무현정권의 대북정책과 본질적으로 다른 주장이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른바 시장경제에 대한 뉴라이트의 주문은 지난 10여 년 동안의 자유화·개방화로 인해 이미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을 초국적 투자자들이 내세우는 '시장의 법칙'에 맡겨놓았던 'IMF 지부장'과 그의 후계자에게 오히려 반가운 주문이 아닐 수 없다. 즉, 보수주의를 앞세우며 호전적으로 현 집권세력을 공격하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들은 김대중 정권 이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 재편과 차별적인 이념적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공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 공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의 돗자리를 깔아주고 있다. 뉴라이트의 출현은 단지 '보수꼴통'의 출현이 아니라 앞으로 현재의 집권세력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의 우경화·보수화를 촉진하는 촉매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8) 뉴라이트가 단지 현 집권세력의 뒤꽁무니를 따라가고 있다고 얕잡아 볼 것이 아니라, 뉴라이트가 지배세력의 보수화와 우경화를 촉진하며 현존하는 체계의 위기를 여성과 노동자에게 전가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러한 지배계급의 시도가 민중의 저항과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한에서는 앞으로 필연적으로 훨씬 야만적인 정세가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현재 뉴라이트 비판이 '무기의 비판'이 되려면 바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운동의 형성, 대안적인 주체형성의 과제가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자료※ 마상윤(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 - 탈냉전부터 이라크 전쟁까지」;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백승욱(2005), 「미국 신보수파 주도 아래의 새로운 세계질서」;백승욱 편저,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 세계체계 분석으로 본 미국헤게모니의 역사』, 그린비 손봉권(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1930년대에서 레이건 행정부 시기까지」;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오경택(2005), 「미국 신보수주의의 정치이념의 구성과 주장」;남공군 편,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 네오콘 프로젝트』, 사회평론 이삼성(1993),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 민족주의』, 한길사 임혁백(2004), 「한국의 뉴라이트 배경과 전망」;『관훈저널』2004년 겨울호 엠마뉘엘 토드(2003), 주경철 옮김, 『제국의 몰락』, 까치 1) 〈자유주의연대 창립선언문〉(2004.11.24)에 나온 말이다.본문으로 2) 자유주의연대(www.486.or.kr)의 홈페이지나 시사웹진 뉴라이트닷컴(www.new-right.com)의 홈페이지에는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는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의 각종 칼럼과 토론회 자료가 등록되어 있다.본문으로 3) 임혁백(2004)는 '뉴라이트'운동을 한나라당의 '선진화 프로젝트'에 대한 호응으로 해석한다.본문으로 4) 파웰 메모는 변호사인 루이스 파웰(Lewis Powell)이 1971년 8월23일 당시 미상공회의소 의장 스나이더(Eugene B. Snyder)에게로 보낸 "미국의 자유기업제도에 대한 공격"이란 제목의 메모를 가리키는 것인데 2개월 후 파웰은 연방대법관으로 임명된다.본문으로 5) 이들은 또한 빈곤의 문제 역시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기대치도 상승해서 심화된 것으로 인식될 뿐이며, 과거의 시점에 비해서는 오히려 현재의 최극빈층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에 비해서는 몇 배나 더 잘 살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은 빈곤은 감소했다"는 것이다. 현대 빈곤문제를 고대 노예의 삶과 비교하라는 의미인가?본문으로 6) 그러나 카터 행정부의 인권외교란 이중적이었고 집권 초기에 한정되었다. 카터가 무기수출을 규제하고 국방예산을 감축하려고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지역 안보에 대한 책임을 친미 동맹국이 부담하게 하는 것으로서 동맹국들이 추구했던 자주국방은 사실상 미제무기로 무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카터 행정부가 권위주의/독재국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취한 조치는 '성명외교'에 머무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도 이란과 니카라과에서 친미정권이 무너지고 반미 혁명정권이 세워지자 '인권외교'는 카터 행정부 말기인 1979-80년 사이에 CIA의 해외공작을 통한 공작외교와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이삼성, 1993: 82-90).본문으로 7)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고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했을 때 신보수주의 진영은 여전히 소련의 박멸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과,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예전의 고립주의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양분되었다.본문으로 8) 일례로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국민전선(FN)의 르펜이라는 극우파가 결선에 올라 프랑스인들을 경악에 빠트린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적 수사를 늘어놓은 르펜에 대항하여 프랑스 시민들은 우파의 시라크를 당선시켰지만 그는 르펜의 인종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이민자들에 대한 배제와 탄압을 강화하였고 중도-좌파(?) 정당인 프랑스사회당 역시 날로 악화되는 치안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준비하며 사실상 인종주의적 의제에서 수렴되어가고 있다. 즉 극우파의 출현은 사람들에게 기존 가치관을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비난받지만 정작 그들이 주장한 배제의 논리와 가치체계는 이미 모든 경쟁자들에 의해 공유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역사왜곡과 국사교과서 문제 김 대 일 | 회원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역사교육은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국사과의 비중을 늘리겠다느니, 7차 교육과정에서 사회과에 통합된 역사과를 별도로 독립시킨다느니 하는 각종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동안 역사교육이 도외시되었다는 것에 있지 않다. 역사교육의 '양적 빈곤'을 탓하기 전에, '질적 빈곤'을 돌아보아야 한다. 현장에서 국사는 대다수 학생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과목이 아니다. 딱딱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국사교과서는 도대체 역사가 학생들의 삶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역사 속에서 학생들이 배워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역사문제를 둘러싼 갈등에 역사교육으로 대처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지금과 같은 교과서로는 그나마도 해결책이 없다. 무엇이 이처럼 교과서를 빈약하게 만들었는가. 국사교과서의 문제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왕조의 변천이라는 뜻의 역(歷)과 이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의 사(史)라는 글자로 이루어진 역사(歷史)라는 단어 그 자체가 증명하듯이, 역사란 본래 권력자의 의지에 의한 기록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기록에 배어있는 권력의 의지는 이를 다른 의미에서 재해석하려했던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우 꿋꿋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역사 '교과서'이다. 본디 공교육이란 그 자체가 민족국가의 발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공교육이 독일이 민족국가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공교육이 갖고 있는 성격에 깊은 시사점을 남긴다. 교육권을 놓고 끊임없는 투쟁이 벌어졌지만, 국민의 형성과 관련된 공교육의 역할 자체는 현재까지도 소멸하지 않고 굳건히 살아남았다.1) 그리고 이러한 경직성은 국가가 교육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강할수록 더하며, 파시즘과 패전의 경험을 겪은 일본보다도 오랜 군사독재를 거치며 우익적 민족주의가 공적 담론을 장악한 한국에서 훨씬 더 강하다. 현재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국가가 직접 편찬하며, 다른 교과서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히 전근대시대의 정사(正史) 편찬이라 할 만큼 독단적이며 권위적이다.2) 이렇게 편찬된 국사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사를 '민족사의 발전과정'으로 이해하는 단선적이고 우익적인 역사관을 아무 여과 없이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사 교과서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점은 여기서 유래된다. 자연스럽게 서술의 중심에는 민중의 역사보다는 지배자의 역사가 놓이게 되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기보다는 정해진 견해에 의한 사실의 나열에 그치게 되고, 민족과 국가라는 우익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게 된다. 당연히 갈등은 은폐되고 소수자는 기록되지 않으며 한국사가 갖고 있는 어두운 부분들은 미화되거나 또는 누락된다.3) '나선정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국사교과서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이라크 파병의 부당성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왜곡은 일본에 앞서 한국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근래에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기실 한국의 국사교과서를 좇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이들의 주요 논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주변국과 달리 자국민에 대한 혐오감을 지어내는 '자학사관'에 의해 서술되었으며, 따라서 일본 역시 민족 정체성의 함양을 위한 '국적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교과서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모델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은 멀리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매우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차이라면, 한국의 국사교과서가 갖는 반동성은 과거의 유산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있다면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갖는 반동성은 적극적인 우경화 노력의 부산이라는 것 정도일까. '합의된' 역사인식으로 돌파가 가능한 문제인가? 한중일 3국의 시민단체들과 학계에서는 역사교육을 둘러싼 현재의 갈등에 대한 하나의 노력으로 공동 역사교과서를 편찬하였다. 내용을 떠나 선동적인 구호들로 인민들을 기만해온 각 국의 대처방식보다 일 진전된 소중한 노력임에 틀림없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해 현재 뚜렷하게 진행되고 있는 각 국의 우경화를 저지하는데 유의미한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이란 결국 권력의 문제이다. 현재의 문제를 상호간의 무지에만 그 원인을 돌리는 것은 결국 이것을 계몽의 문제로 얽어매는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이 영상축전을 보내 책의 발간을 환영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문제는 왜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여전히 우익적 민족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며, 또한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왜 이와 닮아가고 있는가, 중국에선 왜 민족주의적 선동이 줄을 잇고 있는가에 있다. 이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와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질서가 어떠한 정부와 어떠한 국가와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원하는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일본 전체의 우경화가 과거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없으며 한국의 우익적 민족주의를 아직도 일제 시대의 경험에서 역산하여 끌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강한 국가에 대한 자본의 요구, 일본을 축으로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한 긴장감 없이 교육의 내용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어설픈 타협의 결과물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교과서야말로 그 시대 지배계급의 의지를 가장 솔직하게 반영하는 거울이다. 교육현장에서도, 그리고 그 바깥에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 일본, 중국에서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민족주의의 광풍이 어떠한 맥락에 있는지를 읽어내고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학생들의 삶과 역사를 더불어 숨쉬게 하는, 진실로 억압받은 자를 위한 교육은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1)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함께 공교육의 역할은 공교육이라는 개념이 생긴 이래 가장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여 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공적 영역의 시장화를 넘어 변화하고 있는 민족국가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 정치적인 독재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에서조차 교육에서의 경쟁 도입을 위해 2001년부터 검정교과서 제도로 전환하였다. 또한, 후술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가 그 내용을 놓고 논쟁의 대상으로 오르는 것은 정반대의 의미에서 현재 공교육이 어떠한 것을 요청받는가를 질문하게 한다.본문으로 2) 국사교과서가 국정화된 것은 1972년 10월 유신의 결과였다. 1972년 3월 대구실내 체육관에서 열린 <총력안보를 위한 전국교육자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올바른 국가관에 입각한 우리 교육]이라는 치사를 통해 '국적 있는 교육'과 '주체적 민족사관 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문교부는 그 해 5월 대통령 '유시'에 따라 국사교육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국사를 독립과목으로 추가하여 30점을 배정하고 국사 연구비를 대폭 증액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였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발표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73년 6월이었다.본문으로 3) 글의 분량 상 해당 부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겠지만, 국사교과서를 조금만 깊게 읽으면 그 교과서의 우익성이 얼마나 명확한지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전쟁이 민족의 웅비나 민족의 위기로 그려져 있고 그 주어도 우리 민족이다. 이 얼마나 우습기 짝이 없는 서술인가.본문으로
역사왜곡과 국사교과서 문제 김 대 일 | 회원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역사교육은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국사과의 비중을 늘리겠다느니, 7차 교육과정에서 사회과에 통합된 역사과를 별도로 독립시킨다느니 하는 각종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동안 역사교육이 도외시되었다는 것에 있지 않다. 역사교육의 '양적 빈곤'을 탓하기 전에, '질적 빈곤'을 돌아보아야 한다. 현장에서 국사는 대다수 학생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과목이 아니다. 딱딱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국사교과서는 도대체 역사가 학생들의 삶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역사 속에서 학생들이 배워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역사문제를 둘러싼 갈등에 역사교육으로 대처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지금과 같은 교과서로는 그나마도 해결책이 없다. 무엇이 이처럼 교과서를 빈약하게 만들었는가. 국사교과서의 문제와 일본의 역사교과서 왕조의 변천이라는 뜻의 역(歷)과 이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의 사(史)라는 글자로 이루어진 역사(歷史)라는 단어 그 자체가 증명하듯이, 역사란 본래 권력자의 의지에 의한 기록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기록에 배어있는 권력의 의지는 이를 다른 의미에서 재해석하려했던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우 꿋꿋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역사 '교과서'이다. 본디 공교육이란 그 자체가 민족국가의 발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공교육이 독일이 민족국가로 재편되어 가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공교육이 갖고 있는 성격에 깊은 시사점을 남긴다. 교육권을 놓고 끊임없는 투쟁이 벌어졌지만, 국민의 형성과 관련된 공교육의 역할 자체는 현재까지도 소멸하지 않고 굳건히 살아남았다.1) 그리고 이러한 경직성은 국가가 교육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강할수록 더하며, 파시즘과 패전의 경험을 겪은 일본보다도 오랜 군사독재를 거치며 우익적 민족주의가 공적 담론을 장악한 한국에서 훨씬 더 강하다. 현재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국가가 직접 편찬하며, 다른 교과서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히 전근대시대의 정사(正史) 편찬이라 할 만큼 독단적이며 권위적이다.2) 이렇게 편찬된 국사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는, 한국사를 '민족사의 발전과정'으로 이해하는 단선적이고 우익적인 역사관을 아무 여과 없이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사 교과서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점은 여기서 유래된다. 자연스럽게 서술의 중심에는 민중의 역사보다는 지배자의 역사가 놓이게 되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기보다는 정해진 견해에 의한 사실의 나열에 그치게 되고, 민족과 국가라는 우익적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게 된다. 당연히 갈등은 은폐되고 소수자는 기록되지 않으며 한국사가 갖고 있는 어두운 부분들은 미화되거나 또는 누락된다.3) '나선정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국사교과서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이라크 파병의 부당성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왜곡은 일본에 앞서 한국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할 수 있다. 근래에 문제가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기실 한국의 국사교과서를 좇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이들의 주요 논리는 일본의 역사교과서가 주변국과 달리 자국민에 대한 혐오감을 지어내는 '자학사관'에 의해 서술되었으며, 따라서 일본 역시 민족 정체성의 함양을 위한 '국적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교과서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모델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은 멀리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매우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차이라면, 한국의 국사교과서가 갖는 반동성은 과거의 유산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있다면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갖는 반동성은 적극적인 우경화 노력의 부산이라는 것 정도일까. '합의된' 역사인식으로 돌파가 가능한 문제인가? 한중일 3국의 시민단체들과 학계에서는 역사교육을 둘러싼 현재의 갈등에 대한 하나의 노력으로 공동 역사교과서를 편찬하였다. 내용을 떠나 선동적인 구호들로 인민들을 기만해온 각 국의 대처방식보다 일 진전된 소중한 노력임에 틀림없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해 현재 뚜렷하게 진행되고 있는 각 국의 우경화를 저지하는데 유의미한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육이란 결국 권력의 문제이다. 현재의 문제를 상호간의 무지에만 그 원인을 돌리는 것은 결국 이것을 계몽의 문제로 얽어매는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이 영상축전을 보내 책의 발간을 환영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문제는 왜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여전히 우익적 민족주의를 고수하고 있으며, 또한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왜 이와 닮아가고 있는가, 중국에선 왜 민족주의적 선동이 줄을 잇고 있는가에 있다. 이것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와 그리고 현재의 동아시아 질서가 어떠한 정부와 어떠한 국가와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원하는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일본 전체의 우경화가 과거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없으며 한국의 우익적 민족주의를 아직도 일제 시대의 경험에서 역산하여 끌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강한 국가에 대한 자본의 요구, 일본을 축으로 하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대한 긴장감 없이 교육의 내용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어설픈 타협의 결과물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교과서야말로 그 시대 지배계급의 의지를 가장 솔직하게 반영하는 거울이다. 교육현장에서도, 그리고 그 바깥에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 일본, 중국에서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는 민족주의의 광풍이 어떠한 맥락에 있는지를 읽어내고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학생들의 삶과 역사를 더불어 숨쉬게 하는, 진실로 억압받은 자를 위한 교육은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1)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함께 공교육의 역할은 공교육이라는 개념이 생긴 이래 가장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여 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공적 영역의 시장화를 넘어 변화하고 있는 민족국가의 위상을 반영하고 있다. 정치적인 독재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에서조차 교육에서의 경쟁 도입을 위해 2001년부터 검정교과서 제도로 전환하였다. 또한, 후술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가 그 내용을 놓고 논쟁의 대상으로 오르는 것은 정반대의 의미에서 현재 공교육이 어떠한 것을 요청받는가를 질문하게 한다.본문으로 2) 국사교과서가 국정화된 것은 1972년 10월 유신의 결과였다. 1972년 3월 대구실내 체육관에서 열린 <총력안보를 위한 전국교육자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올바른 국가관에 입각한 우리 교육]이라는 치사를 통해 '국적 있는 교육'과 '주체적 민족사관 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문교부는 그 해 5월 대통령 '유시'에 따라 국사교육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대학입학 예비고사에 국사를 독립과목으로 추가하여 30점을 배정하고 국사 연구비를 대폭 증액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였다. 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발표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73년 6월이었다.본문으로 3) 글의 분량 상 해당 부분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겠지만, 국사교과서를 조금만 깊게 읽으면 그 교과서의 우익성이 얼마나 명확한지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전쟁이 민족의 웅비나 민족의 위기로 그려져 있고 그 주어도 우리 민족이다. 이 얼마나 우습기 짝이 없는 서술인가.본문으로
민중을 배신한 정권의 비참한 최후 에콰도르 민중봉기: 민중을 배신한 정권의 비참한 최후 배준범| 회원, 민주노동당 국제부장 남미의 한 산유국에서 치솟는 유가와 이에 따른 외화수입의 급증, 늘어나는 국가의 부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인해서 인구의 절대 다수가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 이에 대해서 분개한 젊은 군인들 중 일부는 지휘 계통의 명령을 어긴다. 민중들을 더욱 파탄으로 몰아넣을 것이 뻔한 정부 조치들에 맞서 봉기한 인민들을 진압하라는 지침을 거부한 것이다. 이 ‘반란’을 지도했던 젊은 장교는 항명의 대가로 감옥 생활을 감내하다가 결국 군복도 벗게 된다. 그러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중을 위한 통치를 하겠다는 그의 의지에 대해 많은 원주민, 농민, 노동자들은 열성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며, 이에 힘입어 그는 석방 후 제도권 정치의 길에 나선다. 그리고 기존 정당들의 모습에 염증과 절망을 느낀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남미에 또 하나의 파퓰리스트가 등장했다는 서방 언론의 호들갑과 함께. 누구에 관한 이야기일까?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아니다. 남미에는 그 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과거를 지닌 이가 있는데, 바로 얼마 전 이웃 나라 브라질로 망명한 에콰도르의 전 대통령 루시오 구티에레스다. 하지만 차베스와의 유사점은 과거에 국한된다. 올해 초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검찰은 그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그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군부도 그의 국회탈출을 막기 위해서 출국금지령을 내렸다. 이렇듯 완전히 고립된 그는 탈출구를 찾던 중, 다행히도(?) 브라질 측에서 비공식적으로 망명을 허용하여 지난달에 에콰도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불명예스럽게 끝을 맺은 국가원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보다 더 비굴한 최후를 맞은 이가 같은 나라에 또 있다. 바로 전전 대통령인 부카람인데, 그는 ‘정신적 부적격’ 판정을 받고 역시 나라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에콰도르의 정치 현실이다. 에콰도르의 정치 수준을 더욱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구티에레스가 그의 귀국을 정치적으로 주선하려고 노력하던 중 축출 당했다는 사실이다. 별명이 ‘미치광이(El Loco)’인 부카람을 말이다. 반복되는 정권교체, 불안정한 정치 에콰도르는 남미의 많은 나라들처럼 정치 제도가 불안정하고, 정당정치의 발전이 더디고, 민주적 성숙도가 낮다. 그러다보니 정치가 개별 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편, 좌파 인사들도 파퓰리즘적 성격이 강한 경우가 많다. 더불어 에콰도르 역시 남미의 여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90년대 말부터 아래로부터의 민중투쟁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된다.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신자유주의 일색의 정책 속에서 민중들의 삶의 수준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6년에는 개혁의 열망에 힘입어 축구 선수 출신인 부카람이 이색적인 선거 운동 끝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8개월 끝에 의회에서 탄핵되었다. 자신의 정적을 당나귀라고 부른 뒤, “당나귀를 모독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발표했던 점, 선거 운동 기간 동안에 반나체 선거운동원과 가수 및 연예인들을 대거 동원했던 사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가요 음반을 발매하는 모습 등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스타일의 정치를 했는지 엿볼 수 있다. 빈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어 66%라는 지지율로 당선된 그는 초기 두세 달 간 일부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 인상 등 빈민들에게 인기 높은 조치들을 일부 취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돌변하여 긴축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대해 원주민, 학생, 인권단체, 노동자들은 파업 및 시위로 맞섰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은 후 그는 97년 초에 국회로부터 ‘정신적 부적격’이라는 판정을 받고 탄핵 당한다. 이어진 선거에서는 마우아드라는 보수 인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 역시 페소화를 포기하고 달러로 통화를 바꾸는가 하면 민영화와 긴축 재정을 서둘렀다. 그의 이러한 행보에 맞서 민중들은 봉기했고, 그는 물러났다. 그에 저항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민중들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지원에 나섰던 이가 바로 당시 대령이었던 구티에레스다. 하지만 마우아드는 이 사건 직후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에콰도르 최고의 부자 노보아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다음 해의 선거에서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구티에레스에게 진다. 민중의 지지로 당선된 후 친미 - 친자본으로 돌변한 구티에레스 이러한 질곡의 역사 속에서 2002년 11월에 그가 에콰도르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구티에레스에 주요 외신들이 보인 반응은 그가 또 한명의 차베스라는 우려(혹은 기대!)였다.1) 남미에서 차베스와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브라질의 룰라에 이어 좌파 바람이 지속되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말이다. 구티에레스 이후에도 남미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지속되고 있는 좌파 바람 속에서 대부분의 정권들이 집권 후 우경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2) 에콰도르만큼 집권 전과 후의 차이가 큰 나라는 없을 것이다. 무거운 외채 부담과 기득권에 익숙한 관료조직들, 원내에서의 소수파 위치, 친자본 세력들의 공세는 남미, 아니 전 세계의 집권 좌파 세력이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이다. 브라질의 룰라와 우루과이의 바스케즈는 경제적으로 신중한 정책을 펴는 가운데, 다방면의 사회정책 프로그램 강화와 외교 정책 노선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남미 대륙에서 경제, 외교 면에서 가장 급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가 그 중간 어딘가에 있겠지만, 키르치네르 정부의 대응도 국가 부도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들은 적든 많든 기존 정부들과의 차별점을 보여주는 것에는 성공하고 있는데, 에콰도르의 구티에레스 정부는 집권 직후 잠깐 동안의 ‘허니문’ 시기를 제외하면 이러한 면에서 완벽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집권 후 돌연 180도 변한 것이다. 구티에레스는 자신이 반미 인사라는 인식에 대해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미국과의 관계를 무엇보다도 중시한다.”라는 그 자신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애써 부인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대통령 직에 오르기 전까지는 반신자유주의 수사로 인해서 에콰도르의 차베스라고 불렸던 그는 당선하자마자 돌변하여 미국과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콜롬비아 내 좌익 소탕 작전인 플랜 콜롬비아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남미에서는 예외적으로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으며, IMF와의 새로운 협약을 맺어 공공부문에서의 대대적인 인력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추진했다. 남미의 다른 좌파 정권들이 ‘남미의 연대 협력 강화’로 노선 전환을 하고 있을 때, 에콰도르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로 인해서 필수 서비스 가격이 오르고 빈부 격차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정권 교체 이전에도 60%에 이르던 빈곤층은 더욱 늘어났다. 또한 과거 자신을 당선시킨 민중들이 몰아냈던 바로 부카람 전 대통령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귀국 금지령이 내려진 그를 다시 입국시켜, 그가 속한 당의 지지와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러한 몸부림에는 나름의 배경과 이유가 있다. 브라질만큼 당들이 난립하는 에콰도르의 다당제 정치에서, 그가 창당한 애국당은 전체 의석 100석 중에 단지 2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연정을 함께 꾸린 대중민주운동당(MPD), 에콰도르 사회당(PS)과 파차쿠틱(Pachakutik)이라는 원주민 전선체가 확보한 의석을 다 합쳐봐야 전체 의석수의 15-20%밖에 안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2002년 대선 때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노보아의 당(PRE: 원내 3당)과 탄핵되었던 부카람 전대통령의 당(원내 1당), 그리고 기독사회당 등에 손을 벌렸다. 원내에서 안정적 기반을 확보하는 동시에 금융/산업의 중심지인 과야킬과 산악 지대 속에 위치한 키토 사이의 지역주의 문제도 풀어볼 의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폭발한 대중투쟁, 구티에레스의 퇴진 그가 정책적으로 급속히 우경화하고, 적대적이었던 당들에게 무원칙적으로 손을 내미는 동안, 대선 때 구티에레스를 지지했던 에콰도르의 진보적 정치세력들은 하나둘씩 지지를 철회했다. 처음에 대중민주운동당(MPD)이 지지를 철회했고 곧 에콰도르 공산당(의석수는 없지만 민중운동 내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도 뒤를 이었다. 원주민들에게서는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파차쿠틱도 보수적인 PSC와의 공조 논의에 실망하여 연정을 떠났다. 곧 파차쿠틱과 가까운 원주민 대중 조직들의 시위가 키토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뜸했던 대중 파업과 집회들도 작년 말과 올해 초를 정점으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야당들이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보수우익 단체들과 구티에레스의 이전 지지파들이 함께 집회에 나타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러던 중 그가 대법관들을 일제히 교체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사태는 그의 퇴진으로까지 치달은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사법기관들은 가장 보수적인 관료 집단 중 하나고, 진보적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추진한 조치가 민주적 질서를 무시한 것이라 여겼고 사법 기관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더군다나 사법 개혁을 원칙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공조를 구했던 보수 정당들의 추천 인사로 채우려고 했던 의도가 드러나 명분도 상실한 상황이었다. 대법관 교체 시도가 부카람을 국내에 복귀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심도 팽배했다. 이 사건은 구티에레스 정권이 밀실 야합, 보수 정치로 완전히 전락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구티에레스와 관련된 부정부패 사건들마저 폭로되자 그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반정부 시위대에 맞서 막판에 구티에레스를 보호하기 위한 시위대가 나타나고 긴장 국면이 조성되면서(한때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었다) 차베스의 쿠데타 직후처럼 그가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일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언론들은 친위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동원된 경우라고 분석했다. 결과는 알려진 바와 같이 구티에레스가 망명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퇴진이었던 셈이다. 더더욱 참담했던 것은 지지를 철회했던 좌파 진영 중에서 가장 많은 득표력을 지닌(5%) 대중민주운동당이 막판에 구티에레스를 살리는데 결합했다는 점이다. 구티에레스의 위기 국면에서 이에 대한 대응방향을 둘러싸고 좌파 진영이 갈라진 것이다. 에콰도르의 강력한 민중운동이 희망 구티에레스가 집권 하는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압력을 받게 됐고, 집권 후에는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외부에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진보 세력의 역량에 대한 냉정한 판단 속에서 자신의 권한과 민중들의 지지를 통해 변화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보수세력 및 초국적 자본과의 손쉽게 타협하고 지지자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보가 불안정한 민주적 질서 자체에 대해 위협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베네수엘라 및 쿠바 정부도 망명한 그와는 거리를 두는 분위기다. 쿠바는 그가 물러나게 된 것은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며 간접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동조를 지적했고, 베네수엘라 외부부도 “초국적 금융자본 엘리트들과 맺은 협약의 결과”라며 결과의 책임이 일부 그에게 있음을 명확히 했다. 브라질 정부도 망명 허용 결정을 “동조”가 아닌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3) 구티에레스의 망명 후 그의 뒤를 이은 부통령 파라시오는 우선 과도기 정부로서 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사 출신인 그는 석유 값의 일부를 사회복지 예산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IMF와의 갈등을 예고하기도 했다. 미국은 그가 구티에레스보다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하고 일단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미 확인했듯이 에콰도르의 정치에서는 확실한 것이란 없다. 단, 최근 10년간 대통령을 3번이나 민중의 권력으로 갈아 치운 에콰도르의 강력하고 폭발적인 민중운동이 그 나라의 노동자, 빈민, 원주민, 여성들이 지닐 수 있는 희망일 것이다.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좌파 세력들의 약진에 다시 그들이 합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PSSP 1) 일례로 "Lucio Gutierrez: Ecuador's Populist Leader," BBC News, November 25th, 2002.본문으로 2) Immanuel Wallerstein, Death by a Thousand Cuts, Commentary No. 160. May 1., 2005. http://fbc.binghamton.edu/160en.htm본문으로 3) "Ecuador: People Drive Out President," Green Left Weekly, April 25th, 2005.본문으로
민중을 배신한 정권의 비참한 최후 에콰도르 민중봉기: 민중을 배신한 정권의 비참한 최후 배준범| 회원, 민주노동당 국제부장 남미의 한 산유국에서 치솟는 유가와 이에 따른 외화수입의 급증, 늘어나는 국가의 부에도 불구하고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인해서 인구의 절대 다수가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비참한 상황이 전개된다. 이에 대해서 분개한 젊은 군인들 중 일부는 지휘 계통의 명령을 어긴다. 민중들을 더욱 파탄으로 몰아넣을 것이 뻔한 정부 조치들에 맞서 봉기한 인민들을 진압하라는 지침을 거부한 것이다. 이 ‘반란’을 지도했던 젊은 장교는 항명의 대가로 감옥 생활을 감내하다가 결국 군복도 벗게 된다. 그러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민중을 위한 통치를 하겠다는 그의 의지에 대해 많은 원주민, 농민, 노동자들은 열성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며, 이에 힘입어 그는 석방 후 제도권 정치의 길에 나선다. 그리고 기존 정당들의 모습에 염증과 절망을 느낀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남미에 또 하나의 파퓰리스트가 등장했다는 서방 언론의 호들갑과 함께. 누구에 관한 이야기일까?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아니다. 남미에는 그 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와 거의 비슷한 과거를 지닌 이가 있는데, 바로 얼마 전 이웃 나라 브라질로 망명한 에콰도르의 전 대통령 루시오 구티에레스다. 하지만 차베스와의 유사점은 과거에 국한된다. 올해 초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면서 검찰은 그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그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군부도 그의 국회탈출을 막기 위해서 출국금지령을 내렸다. 이렇듯 완전히 고립된 그는 탈출구를 찾던 중, 다행히도(?) 브라질 측에서 비공식적으로 망명을 허용하여 지난달에 에콰도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불명예스럽게 끝을 맺은 국가원수는 없을 것 같지만, 그보다 더 비굴한 최후를 맞은 이가 같은 나라에 또 있다. 바로 전전 대통령인 부카람인데, 그는 ‘정신적 부적격’ 판정을 받고 역시 나라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에콰도르의 정치 현실이다. 에콰도르의 정치 수준을 더욱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구티에레스가 그의 귀국을 정치적으로 주선하려고 노력하던 중 축출 당했다는 사실이다. 별명이 ‘미치광이(El Loco)’인 부카람을 말이다. 반복되는 정권교체, 불안정한 정치 에콰도르는 남미의 많은 나라들처럼 정치 제도가 불안정하고, 정당정치의 발전이 더디고, 민주적 성숙도가 낮다. 그러다보니 정치가 개별 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편, 좌파 인사들도 파퓰리즘적 성격이 강한 경우가 많다. 더불어 에콰도르 역시 남미의 여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90년대 말부터 아래로부터의 민중투쟁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된다. 기득권층의 부정부패와 신자유주의 일색의 정책 속에서 민중들의 삶의 수준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6년에는 개혁의 열망에 힘입어 축구 선수 출신인 부카람이 이색적인 선거 운동 끝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는 8개월 끝에 의회에서 탄핵되었다. 자신의 정적을 당나귀라고 부른 뒤, “당나귀를 모독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발표했던 점, 선거 운동 기간 동안에 반나체 선거운동원과 가수 및 연예인들을 대거 동원했던 사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가요 음반을 발매하는 모습 등에서 우리는 그가 어떤 스타일의 정치를 했는지 엿볼 수 있다. 빈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어 66%라는 지지율로 당선된 그는 초기 두세 달 간 일부 생필품에 대한 보조금 인상 등 빈민들에게 인기 높은 조치들을 일부 취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돌변하여 긴축 정책을 추진했고, 이에 대해 원주민, 학생, 인권단체, 노동자들은 파업 및 시위로 맞섰다. 이로 인해 타격을 입은 후 그는 97년 초에 국회로부터 ‘정신적 부적격’이라는 판정을 받고 탄핵 당한다. 이어진 선거에서는 마우아드라는 보수 인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 역시 페소화를 포기하고 달러로 통화를 바꾸는가 하면 민영화와 긴축 재정을 서둘렀다. 그의 이러한 행보에 맞서 민중들은 봉기했고, 그는 물러났다. 그에 저항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민중들의 정당성을 설파하며 지원에 나섰던 이가 바로 당시 대령이었던 구티에레스다. 하지만 마우아드는 이 사건 직후 망명할 수밖에 없었고, 에콰도르 최고의 부자 노보아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다음 해의 선거에서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구티에레스에게 진다. 민중의 지지로 당선된 후 친미 - 친자본으로 돌변한 구티에레스 이러한 질곡의 역사 속에서 2002년 11월에 그가 에콰도르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구티에레스에 주요 외신들이 보인 반응은 그가 또 한명의 차베스라는 우려(혹은 기대!)였다.1) 남미에서 차베스와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브라질의 룰라에 이어 좌파 바람이 지속되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말이다. 구티에레스 이후에도 남미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지속되고 있는 좌파 바람 속에서 대부분의 정권들이 집권 후 우경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2) 에콰도르만큼 집권 전과 후의 차이가 큰 나라는 없을 것이다. 무거운 외채 부담과 기득권에 익숙한 관료조직들, 원내에서의 소수파 위치, 친자본 세력들의 공세는 남미, 아니 전 세계의 집권 좌파 세력이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이다. 브라질의 룰라와 우루과이의 바스케즈는 경제적으로 신중한 정책을 펴는 가운데, 다방면의 사회정책 프로그램 강화와 외교 정책 노선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남미 대륙에서 경제, 외교 면에서 가장 급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가 그 중간 어딘가에 있겠지만, 키르치네르 정부의 대응도 국가 부도 상황에서 나온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들은 적든 많든 기존 정부들과의 차별점을 보여주는 것에는 성공하고 있는데, 에콰도르의 구티에레스 정부는 집권 직후 잠깐 동안의 ‘허니문’ 시기를 제외하면 이러한 면에서 완벽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집권 후 돌연 180도 변한 것이다. 구티에레스는 자신이 반미 인사라는 인식에 대해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미국과의 관계를 무엇보다도 중시한다.”라는 그 자신의 표현에서 드러나듯, 애써 부인하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대통령 직에 오르기 전까지는 반신자유주의 수사로 인해서 에콰도르의 차베스라고 불렸던 그는 당선하자마자 돌변하여 미국과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콜롬비아 내 좌익 소탕 작전인 플랜 콜롬비아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남미에서는 예외적으로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으며, IMF와의 새로운 협약을 맺어 공공부문에서의 대대적인 인력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추진했다. 남미의 다른 좌파 정권들이 ‘남미의 연대 협력 강화’로 노선 전환을 하고 있을 때, 에콰도르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공공 서비스의 민영화로 인해서 필수 서비스 가격이 오르고 빈부 격차가 더욱 심해지기 시작했다. 정권 교체 이전에도 60%에 이르던 빈곤층은 더욱 늘어났다. 또한 과거 자신을 당선시킨 민중들이 몰아냈던 바로 부카람 전 대통령을 포용하기 시작했다. 귀국 금지령이 내려진 그를 다시 입국시켜, 그가 속한 당의 지지와 협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러한 몸부림에는 나름의 배경과 이유가 있다. 브라질만큼 당들이 난립하는 에콰도르의 다당제 정치에서, 그가 창당한 애국당은 전체 의석 100석 중에 단지 2석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연정을 함께 꾸린 대중민주운동당(MPD), 에콰도르 사회당(PS)과 파차쿠틱(Pachakutik)이라는 원주민 전선체가 확보한 의석을 다 합쳐봐야 전체 의석수의 15-20%밖에 안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2002년 대선 때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노보아의 당(PRE: 원내 3당)과 탄핵되었던 부카람 전대통령의 당(원내 1당), 그리고 기독사회당 등에 손을 벌렸다. 원내에서 안정적 기반을 확보하는 동시에 금융/산업의 중심지인 과야킬과 산악 지대 속에 위치한 키토 사이의 지역주의 문제도 풀어볼 의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폭발한 대중투쟁, 구티에레스의 퇴진 그가 정책적으로 급속히 우경화하고, 적대적이었던 당들에게 무원칙적으로 손을 내미는 동안, 대선 때 구티에레스를 지지했던 에콰도르의 진보적 정치세력들은 하나둘씩 지지를 철회했다. 처음에 대중민주운동당(MPD)이 지지를 철회했고 곧 에콰도르 공산당(의석수는 없지만 민중운동 내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도 뒤를 이었다. 원주민들에게서는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파차쿠틱도 보수적인 PSC와의 공조 논의에 실망하여 연정을 떠났다. 곧 파차쿠틱과 가까운 원주민 대중 조직들의 시위가 키토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뜸했던 대중 파업과 집회들도 작년 말과 올해 초를 정점으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부 야당들이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보수우익 단체들과 구티에레스의 이전 지지파들이 함께 집회에 나타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러던 중 그가 대법관들을 일제히 교체하려고 시도했던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사태는 그의 퇴진으로까지 치달은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사법기관들은 가장 보수적인 관료 집단 중 하나고, 진보적 변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추진한 조치가 민주적 질서를 무시한 것이라 여겼고 사법 기관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더군다나 사법 개혁을 원칙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공조를 구했던 보수 정당들의 추천 인사로 채우려고 했던 의도가 드러나 명분도 상실한 상황이었다. 대법관 교체 시도가 부카람을 국내에 복귀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심도 팽배했다. 이 사건은 구티에레스 정권이 밀실 야합, 보수 정치로 완전히 전락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구티에레스와 관련된 부정부패 사건들마저 폭로되자 그는 더욱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반정부 시위대에 맞서 막판에 구티에레스를 보호하기 위한 시위대가 나타나고 긴장 국면이 조성되면서(한때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었다) 차베스의 쿠데타 직후처럼 그가 살아남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일부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언론들은 친위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동원된 경우라고 분석했다. 결과는 알려진 바와 같이 구티에레스가 망명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퇴진이었던 셈이다. 더더욱 참담했던 것은 지지를 철회했던 좌파 진영 중에서 가장 많은 득표력을 지닌(5%) 대중민주운동당이 막판에 구티에레스를 살리는데 결합했다는 점이다. 구티에레스의 위기 국면에서 이에 대한 대응방향을 둘러싸고 좌파 진영이 갈라진 것이다. 에콰도르의 강력한 민중운동이 희망 구티에레스가 집권 하는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압력을 받게 됐고, 집권 후에는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외부에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진보 세력의 역량에 대한 냉정한 판단 속에서 자신의 권한과 민중들의 지지를 통해 변화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보수세력 및 초국적 자본과의 손쉽게 타협하고 지지자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급선회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보가 불안정한 민주적 질서 자체에 대해 위협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반에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베네수엘라 및 쿠바 정부도 망명한 그와는 거리를 두는 분위기다. 쿠바는 그가 물러나게 된 것은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라며 간접적으로 제국주의에 대한 동조를 지적했고, 베네수엘라 외부부도 “초국적 금융자본 엘리트들과 맺은 협약의 결과”라며 결과의 책임이 일부 그에게 있음을 명확히 했다. 브라질 정부도 망명 허용 결정을 “동조”가 아닌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3) 구티에레스의 망명 후 그의 뒤를 이은 부통령 파라시오는 우선 과도기 정부로서 안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의사 출신인 그는 석유 값의 일부를 사회복지 예산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여 IMF와의 갈등을 예고하기도 했다. 미국은 그가 구티에레스보다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하고 일단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미 확인했듯이 에콰도르의 정치에서는 확실한 것이란 없다. 단, 최근 10년간 대통령을 3번이나 민중의 권력으로 갈아 치운 에콰도르의 강력하고 폭발적인 민중운동이 그 나라의 노동자, 빈민, 원주민, 여성들이 지닐 수 있는 희망일 것이다. 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좌파 세력들의 약진에 다시 그들이 합류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PSSP 1) 일례로 "Lucio Gutierrez: Ecuador's Populist Leader," BBC News, November 25th, 2002.본문으로 2) Immanuel Wallerstein, Death by a Thousand Cuts, Commentary No. 160. May 1., 2005. http://fbc.binghamton.edu/160en.htm본문으로 3) "Ecuador: People Drive Out President," Green Left Weekly, April 25th, 2005.본문으로
블레어정부와 노무현정부가 꼭 닮은 까닭은? 2005년 영국 총선과 블레어주의의 본질 - 블레어정부와 노무현정부가 꼭 닮은 까닭은? 임 필 수 | 정책편집국장 (난민, 범죄와 같은) 보수당 이슈는 곤란하면서도 영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주도권을 따내기 위한 철저한 전략이 필요하다… 난민과 범죄 문제는 애국심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영국의 고질적인 문제이자 영국인의 본능에 깊이 닿아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범죄에 관해 우리는 강력한 수단을 강조해야만 한다. 보석 전에 마약에 대한 강제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난민 문제에서 우리는 난민의 제거를 강조해야만 한다. - 2000년 언론에 공개된 블레어의 비밀 메모 영국 노동당은 1997년 총선을 통해 18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1년 총선으로 전후시대 가장 많은 의석 수를 차지한 정당이 되었다(이 때 노동당은 413석, 보수당은 166석, 자유민주당은 52석을 얻었다). 또한 2005년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36%의 득표율로 355석을 얻어 의석 수가 상당히 줄긴 했으나 3기 집권에 성공했다. 신노동당이 지난 8년 간 거둔 성적표는 매우 뛰어나 보인다. 프랑스를 제치고 유럽의 두 번째 경제강국이 되었다는 그들의 자랑은 유럽연합에서 가장 낮은 실업률과 세계 2위의 금융시장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19세기 '아름다운 시절'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현재 영국의 상황은 부와 권력의 거대한 계급적 이동을 의미한다. 노동당이 전쟁 매파의 상징이 된 현실은 노동당의 계급적 기반과 성격이 크게 변했다는 분명한 지표의 하나다. 영국 신노동당, 총유권자 22%의 지지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다 영국 노동당의 변화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실은 영국 노동자의 상당수가 투표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2001년 투표율은 59%라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2005년에도 61%로 조금 증가했을 뿐이다(1992년 총선에서 키녹이 이끌었던 노동당이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을 때 득표는 1150만 표였지만, 최다의석을 얻게 된 2001년 선거에서 득표는 1070만 표였다). 그로 인해 영국 신노동당은 총유권자 22%의 지지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신노동당이 3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요소도 작용하였다.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은 "그래도 불가피한 차악(次惡)"이라고 생각하거나, "영국 노동당의 깊숙한 곳에 있는 진정한 노동자 전통과 영혼이 언젠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신노동당은 (노동자에 대한) '우호가 아닌 공평'이라는 구호가 말해왔던 노동자 정당의 성격을 지우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대안이 없는 노동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온정주의에 입각한 선전구호와 최소한의 예산지출을 동반하는 사회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영국 보수당의 와해는 1997년 이후 노동당의 도전 없는 지배의 전제조건이 되었다(보수당 득표는 1992년 1400만 표. 그러나 1997년 960만 표, 2001년 830만 표로 감소했다).1) 노동당은 범죄나 난민 문제와 같은 보수당 이슈를 가공하여 정치적 구심을 잃은 부동층에 대한 '상품성'을 높이고자 시도했다. 또한 승자독식의 선거체계는 낮은 득표율과 높은 의석비율이라는 괴리를 낳았고, 노동당이 과잉 대표성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대처의 금융빅뱅과 블레어 정부의 '아름다운 시절' 해외자본에 의한 국부유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최근 한국경제를 두고 '윔블던 효과'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영국이 개최하지만 우승자는 항상 외국인이 차지한다는 데서 유래된 비유인데, 이제 영국은 초민족 금융기업에게 거래장소만 제공한다는 뜻이다. 대처정부는 1979년 실시한 전면적인 외환거래자유화(대외금융거래 완전자유화)에 이어 1986년 금융서비스법을 제정해 증권시장과 관련 규제를 철폐했다(은행의 증권업무 허용, 증권수수료 자유화, 증권회사 소유제한과 업무영역 폐지). 그 결과 SG워벅, 베어링, 모건-그레펠 같은 수 백 년 전통의 투자은행이 외국자본에 인수되고,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와 같은 미국 투자은행이 런던에 진출하면서 외국계 금융기관의 활동범위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제 런던의 금융산업은 선물, 옵션, 스왑 등 신종금융상품과 금융기법의 중심지가 되었고, 뉴욕에 이어 세계 2위의 금융시장 지위를 회복했다. 영국의 금융수출은 큰 폭으로 성장하여 대외수지에 기여하며, 금융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큰 몫을 차지하며(2002년 영국 GDP의 5.3%를 차지했고, 법률·회계·컨설팅 등 관련서비스분야를 합치면 8.3%에 기여한다), 2003년 현재 104만 명을 고용하는 산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결과로 영국사회의 모습은 과거 '젠틀맨 자본주의'의 모습을 완전히 탈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교외 건축물이 남부 잉글랜드까지 뻗어 나가고, 일본과 미국 자본이 투자한 실리콘 산업과 제약회사가 급속히 성장했다. 낡은 방직산업 공장은 폐쇄되었고, 철강산업은 갈아엎어졌다. 규제철폐, 낮은 노동비용, 세계언어로서 영어라는 이점 때문에 영국은 유럽단일시장으로 들어오는 해외자본의 가장 유망한 항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비스부문(미장원, 커피숍, 가든센터, 소매점 등)이 강력히 성장했고 실업률이 떨어졌다. 주식거래에 대한 관대한 세금우대는 소규모 저축자들을 주식시장으로 유혹했다. 이제 영국은 과거 제국시대 거품의 축소판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대처리즘이 완전히 바꾸어 놓은 영국사회를 상속받았다. 처음부터 신노동당은 대처리즘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기보다는 상속받은 모델을 강화할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블레어혁명>이란 강령선언문은 대처의 성취에 대해 경외에 찬 존경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미 1992년 총선패배 이후 선언된 신노동당 구상의 핵심은 당헌 4조("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공공소유와 모든 산업과 서비스에 대한 인민의 관리와 통제체제")의 공식적인 폐기와 노조주의와의 절연이었고, 신노동당의 대처리즘에 대한 경배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새로 집권한 신노동당은 1993년 이후 4년 간의 경제팽창을 선물로 여겼고, 보수당이 확립한 경향을 앞으로 밀고 나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말은 그런 대로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평균 GDP 성장은 2.4%였다 (앞서 5년 간 평균 3.2%에 비해 다소 감소한 수치다). 1990년대 영국의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투자가 빈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영국은 2000년대에 들어서 정보통신산업의 위축으로 미국이 입은 타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금융거품은 실업률을 역사상 최저 수치로 낮췄다. 비록 그들 중 40%만 종신제, 풀타임 일자리에 근무했지만…. 가계소비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평균 5.7% 상승했다. 따라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영국은 대제국 시대의 금융·상업강국으로 복귀하고, 가장 이상적인 국제자본의 역외서비스기반으로 재탄생한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따라서 영국은 이제 경제쇠퇴가 끝나고 새로운 활력의 시대로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시절의 절대적인 노동착취 그러나 영국의 '아름다운 시절'의 본질은 부와 권력의 계급적 이동이 탁월하게 성공한 것에 불과하며, 영국의 쇠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대처의 현대화는 생산성과 투자라는 장기적 문제에 대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1997년 이후 GDP 성장은 단위 노동시간 당 산출물의 증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특히 저기술 분야의 노동시간 증대에 기인한 것이다. 경제전반의 생산성 수준은 G7 국가들 중에서 낮은 편에 속하고 투자는 지체되고 있다. 반면 인프라의 문제는 사유화를 통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기술경쟁에서 뒤쳐진 나라의 자본이 택할 수 있는 방식은 인플레이션을 통한 실질임금 삭감(생산된 가치의 이전)이나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 즉,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의 증가 뿐이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무한정 확대될 수 없는데, 자국통화의 가치절하와 맞물려 1970∼8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경제파탄의 소용돌이로 휘말릴 가능성이 잠재하며, 금융화를 위해서 인플레이션 억제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유로존에 가입한다면(블레어는 유럽단일통화를 기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유럽중앙은행의 엄격한 인플레이션 통제를 수용해야 한다. 따라서 영국처럼 기술경쟁에서 뒤쳐진 나라는 더더욱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의 증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을 오늘날 '노동신축화'라고 부르며,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2) (역으로 유럽연합은 인플레이션과 가치절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 생산성이 뒤쳐진 나라들이 회원국 가입를 꺼리는 것을 막으려면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로 영국사회에서 가난한 자로부터 부유한 자로 거대한 부의 이전이 발생하고 있다(간접세 비율도 대처시대보다 더 높다). 전체적인 불평등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저임금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하고, 임금격차 특히 남성과 여성 간 격차는 노동당 집권 시기 동안 꾸준히 커지고 있다. 노동강제복지: 산업예비군 확대와 인플레이션 억제 또한 노동당이 최선의 '빈곤퇴치, 범죄근절, 가족장려' 방법이라고 선전하는 복지개혁 즉 노동연계복지(워크패어)는 인플레이션 억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실업을 실업자 개인의 인격과 특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대처리즘과 마찬가지지만, 신노동당은 '산업예비군'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임금하향 압박을 형성하려는 숨겨진 목표를 혁신하였다. 신노동당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을 도입했다. 첫 번째 방식은 산업예비군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특히 실업자로 공식 분류되지도 않았고 노동시장 참여를 기대하지도 않았던 편모나 실업자의 다른 가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였다(병자와 장애인도 점차 포함되고 있다). 정부는 그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복지는 없다며 급여 박탈이라는 위협을 가한다. 한편 자본은 늘어난 산업예비군이 '고용능력'(employability)을 갖춰야 한다며 그들의 태도와 기술 훈육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사실상 고용능력이라는 자본의 난해한 표현은 임금을 낮춰야 한다는 뜻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들을 고용하는 자본가에게 직접적인 보조금을 제공한다. 노동당이 채택한 두 번째 방식은 저임금 노동자에게 세금공제(tax credit)라고 부르는 취업자급여를 제공하는 것이다. 노동당은 취업자급여를 25세 이상 모든 저임금 노동자로 확대하기로 했다. 최저임금제도는 엄격하게 강제된다면 임금의 최저선을 제공하겠지만, 자본은 정부가 최저선 이상으로 임금을 올리라고 압박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 알고 있다. 물론 최저임금제도가 없다면 재무성은 취업자급여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최저임금제도는 노동당정부에게 무척 중요하다. 전쟁정당 신노동당의 총선구호 중 하나는 "전쟁은 잊어라, 문제는 경제다"였지만, 블레어 정부를 말할 때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노동당의 지도자들은 보수당보다 더 미국에 아첨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영국이 한국전쟁에 지상군을 파병하는지를 보고 협력관계를 결정하겠다는 미국대사의 말에 놀라 애틀리 정부는 국가보건체계 기금을 빼돌려 군대를 무장해 한반도에 보냈다. 윌슨은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데에는 머뭇거렸지만 미국의 전쟁수행에 박수를 보냈다. 누구보다도 블레어는 클린턴에게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나도 가겠다'고 맹세했고, 신노동당은 워싱턴의 노예가 되었다. 1998년 10월과 2000년 여름 <사막의 여우> 작전이나 NATO의 78일에 걸친 유고슬라비아 공중폭격 때 블레어는 백악관보다 더 매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부시로 바뀐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노동당의 외교정책은 국내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영국 금융자본과 초민족기업이 커다란 채찍을 휘두르는 미국에게 확실한 지지를 보내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블레어의 전쟁정책도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물론 블레어가 주도한 정치개혁과 권위주의적인 정치스타일은 전쟁 결정이 신속하게 내려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영국 노동당은 당헌개정을 통해 점점 더 노동조합과 관계가 멀어졌고, 블레어 같은 정치엘리트가 주도하는 정당이 되었다. 또한 정부 내각의 권한은 블레어의 사적 참모집단으로 대체되고 있다(블레어는 "장관들도 동의할 것이다"라고 종종 말한다). 이라크 무기사찰관이었던 켈리 박사의 죽음을 계기로 폭로된, 블레어가 전쟁수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정보를 왜곡했다는 사실은 노동당 정부의 반민주적 성격의 한 단면을 드러냈다. 따라서 핵보유국인 영국에서 블레어 정부가 "그렇소, 나는 핵 버튼을 누를 것이오"라는 식의 핵 정책을 고수하는 것도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세계 경제·정치의 수렴 과거 경제정책과 다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특징은 세계경제의 중심부 국가에게 바람직한 경제정책은 주변부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바람직하다는 가설이다. 미국과 국제경제기구는 바람직한 거시경제, 구조조정 정책을 제시하고, 경제위기를 매개로 강제적인 시행을 명령한다. 이로써 세계 각 나라의 경제정책의 수렴 현상이 발생한다. 금융개방, 노동신축화, 복지개혁과 같은 경제, 사회정책이 서로 똑같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반영하여 정치·정당개혁, 교육개혁도 점차 닮아가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외교군사 정책에 대한 충성심 경쟁도 강요된다. 영국 신노동당과 한국 노무현정부의 각종 개혁조치에서 동일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전범 부시, 블레어, 노무현을 민중의 심판대로"라는 구호가 나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블레어가 내세우는 '금융적 성장체제', '노동신축화와 노동강제적인 복지개혁'의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사실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다. 1) 대처의 현대화 계획은 노동조합과 국유산업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점차 공무원, 대학, BBC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고, 결국 보수당의 정치적 헤게모니의 근거가 된 권력조직 전체에 대한 총공격으로 발전했다. 이로써 전통적인 권력조직의 정당성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수당의 핵심세력은 전통적인 귀족, 고관과 같은 특권적인 엘리트층에서 더욱 전투적인 소부르주아, 신중산층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보수당에서 부상한 새로운 세력의 이데올로기는 고상한 토리 전통('한 민족 온정주의')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들은 1950년대 프랑스를 강타한 푸자드 운동, 곧 중소상공업자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며 납세거부운동으로부터 출발한 공격적, 권위주의적 운동에 훨씬 더 가까웠다(지난 프랑스 대선 때 결선까지 진출한 국민전선의 르펜은 푸자드 당의 이름으로 27세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특히 1997년 총선 패배로 전통적인 보수당 엘리트는 급격히 추락했고, 지도부를 장악한 새로운 층은 당의 이해관계를 시티(영국금융집단)와 초민족기업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다. 1998년 보수당은 당헌을 개정하여 지금까지 별다른 권력이 없던 지방의 선거권협회에 당 지도부를 선출할 권리를 주었고 (그들은 평균 62세였고 대부분 농촌 거주자였다), 그 결과 전통적인 엘리트층은 당권에서 더욱 멀어졌다. 본문으로 2) 물론 오늘날과 같은 노동신축화 정책이 대세를 장악하기까지 영국은 길고도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1960년대 영국의 경제쇠퇴 기미가 확연해지자 - 2차대전 후 잠깐 동안 영국은 독일과 일본의 경제파괴 때문에 상대적인 우월성을 누릴 수 있었으나, 낙후된 산업기반과 금융자본의 해외이동으로 인해 1960년대에 이르게 되자 더 이상 경제침체의 징후를 감출 수 없게 되었다 - 보수당이나 노동당 모두 현대화를 위한 계획을 세웠지만 공격방향을 노동자운동으로 삼은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영국 노동조합운동은 대륙에 비해 정치성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작업현장에 참호를 파놓았고 강인함과 문화적 응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64년 윌슨 노동당정부나 1970년대 히드 보수당정부 모두 노동자조직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노동조합의 비타협적인 반대에 직면했다. 1976년 선진국에서는 처음으로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후 등장한 대처의 현대화 계획은 한마디로 '복수극'이었다. 대처 집권 10여 년 동안 실업자는 최대 300만 명까지 치솟았지만, 노동조합의 목을 비트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노동조합의 저항을 박살냈다. 노동법을 다섯 번 개정했고, 1990년 최종판은 클로즈드샵(채용조건으로 노조가입을 의무화) 완전폐지, 모든 2차 쟁의행위 불법화, 비공인쟁의행위에 대한 노동조합의 책임부담을 담고 있었다. 본문으로
블레어정부와 노무현정부가 꼭 닮은 까닭은? 2005년 영국 총선과 블레어주의의 본질 - 블레어정부와 노무현정부가 꼭 닮은 까닭은? 임 필 수 | 정책편집국장 (난민, 범죄와 같은) 보수당 이슈는 곤란하면서도 영국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주도권을 따내기 위한 철저한 전략이 필요하다… 난민과 범죄 문제는 애국심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영국의 고질적인 문제이자 영국인의 본능에 깊이 닿아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범죄에 관해 우리는 강력한 수단을 강조해야만 한다. 보석 전에 마약에 대한 강제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난민 문제에서 우리는 난민의 제거를 강조해야만 한다. - 2000년 언론에 공개된 블레어의 비밀 메모 영국 노동당은 1997년 총선을 통해 18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1년 총선으로 전후시대 가장 많은 의석 수를 차지한 정당이 되었다(이 때 노동당은 413석, 보수당은 166석, 자유민주당은 52석을 얻었다). 또한 2005년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36%의 득표율로 355석을 얻어 의석 수가 상당히 줄긴 했으나 3기 집권에 성공했다. 신노동당이 지난 8년 간 거둔 성적표는 매우 뛰어나 보인다. 프랑스를 제치고 유럽의 두 번째 경제강국이 되었다는 그들의 자랑은 유럽연합에서 가장 낮은 실업률과 세계 2위의 금융시장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19세기 '아름다운 시절'의 축소판처럼 보이는 현재 영국의 상황은 부와 권력의 거대한 계급적 이동을 의미한다. 노동당이 전쟁 매파의 상징이 된 현실은 노동당의 계급적 기반과 성격이 크게 변했다는 분명한 지표의 하나다. 영국 신노동당, 총유권자 22%의 지지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다 영국 노동당의 변화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사실은 영국 노동자의 상당수가 투표를 포기했다는 점이다. 2001년 투표율은 59%라는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2005년에도 61%로 조금 증가했을 뿐이다(1992년 총선에서 키녹이 이끌었던 노동당이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았을 때 득표는 1150만 표였지만, 최다의석을 얻게 된 2001년 선거에서 득표는 1070만 표였다). 그로 인해 영국 신노동당은 총유권자 22%의 지지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신노동당이 3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요소도 작용하였다.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은 "그래도 불가피한 차악(次惡)"이라고 생각하거나, "영국 노동당의 깊숙한 곳에 있는 진정한 노동자 전통과 영혼이 언젠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신노동당은 (노동자에 대한) '우호가 아닌 공평'이라는 구호가 말해왔던 노동자 정당의 성격을 지우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 대안이 없는 노동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온정주의에 입각한 선전구호와 최소한의 예산지출을 동반하는 사회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영국 보수당의 와해는 1997년 이후 노동당의 도전 없는 지배의 전제조건이 되었다(보수당 득표는 1992년 1400만 표. 그러나 1997년 960만 표, 2001년 830만 표로 감소했다).1) 노동당은 범죄나 난민 문제와 같은 보수당 이슈를 가공하여 정치적 구심을 잃은 부동층에 대한 '상품성'을 높이고자 시도했다. 또한 승자독식의 선거체계는 낮은 득표율과 높은 의석비율이라는 괴리를 낳았고, 노동당이 과잉 대표성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대처의 금융빅뱅과 블레어 정부의 '아름다운 시절' 해외자본에 의한 국부유출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최근 한국경제를 두고 '윔블던 효과'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영국이 개최하지만 우승자는 항상 외국인이 차지한다는 데서 유래된 비유인데, 이제 영국은 초민족 금융기업에게 거래장소만 제공한다는 뜻이다. 대처정부는 1979년 실시한 전면적인 외환거래자유화(대외금융거래 완전자유화)에 이어 1986년 금융서비스법을 제정해 증권시장과 관련 규제를 철폐했다(은행의 증권업무 허용, 증권수수료 자유화, 증권회사 소유제한과 업무영역 폐지). 그 결과 SG워벅, 베어링, 모건-그레펠 같은 수 백 년 전통의 투자은행이 외국자본에 인수되고,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와 같은 미국 투자은행이 런던에 진출하면서 외국계 금융기관의 활동범위가 급속히 늘어났다. 이제 런던의 금융산업은 선물, 옵션, 스왑 등 신종금융상품과 금융기법의 중심지가 되었고, 뉴욕에 이어 세계 2위의 금융시장 지위를 회복했다. 영국의 금융수출은 큰 폭으로 성장하여 대외수지에 기여하며, 금융산업은 국내총생산(GDP)의 큰 몫을 차지하며(2002년 영국 GDP의 5.3%를 차지했고, 법률·회계·컨설팅 등 관련서비스분야를 합치면 8.3%에 기여한다), 2003년 현재 104만 명을 고용하는 산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결과로 영국사회의 모습은 과거 '젠틀맨 자본주의'의 모습을 완전히 탈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교외 건축물이 남부 잉글랜드까지 뻗어 나가고, 일본과 미국 자본이 투자한 실리콘 산업과 제약회사가 급속히 성장했다. 낡은 방직산업 공장은 폐쇄되었고, 철강산업은 갈아엎어졌다. 규제철폐, 낮은 노동비용, 세계언어로서 영어라는 이점 때문에 영국은 유럽단일시장으로 들어오는 해외자본의 가장 유망한 항구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비스부문(미장원, 커피숍, 가든센터, 소매점 등)이 강력히 성장했고 실업률이 떨어졌다. 주식거래에 대한 관대한 세금우대는 소규모 저축자들을 주식시장으로 유혹했다. 이제 영국은 과거 제국시대 거품의 축소판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대처리즘이 완전히 바꾸어 놓은 영국사회를 상속받았다. 처음부터 신노동당은 대처리즘을 대체할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기보다는 상속받은 모델을 강화할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블레어혁명>이란 강령선언문은 대처의 성취에 대해 경외에 찬 존경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미 1992년 총선패배 이후 선언된 신노동당 구상의 핵심은 당헌 4조("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공공소유와 모든 산업과 서비스에 대한 인민의 관리와 통제체제")의 공식적인 폐기와 노조주의와의 절연이었고, 신노동당의 대처리즘에 대한 경배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새로 집권한 신노동당은 1993년 이후 4년 간의 경제팽창을 선물로 여겼고, 보수당이 확립한 경향을 앞으로 밀고 나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 말은 그런 대로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평균 GDP 성장은 2.4%였다 (앞서 5년 간 평균 3.2%에 비해 다소 감소한 수치다). 1990년대 영국의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투자가 빈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영국은 2000년대에 들어서 정보통신산업의 위축으로 미국이 입은 타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금융거품은 실업률을 역사상 최저 수치로 낮췄다. 비록 그들 중 40%만 종신제, 풀타임 일자리에 근무했지만…. 가계소비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평균 5.7% 상승했다. 따라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영국은 대제국 시대의 금융·상업강국으로 복귀하고, 가장 이상적인 국제자본의 역외서비스기반으로 재탄생한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따라서 영국은 이제 경제쇠퇴가 끝나고 새로운 활력의 시대로 진입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시절의 절대적인 노동착취 그러나 영국의 '아름다운 시절'의 본질은 부와 권력의 계급적 이동이 탁월하게 성공한 것에 불과하며, 영국의 쇠퇴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대처의 현대화는 생산성과 투자라는 장기적 문제에 대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1997년 이후 GDP 성장은 단위 노동시간 당 산출물의 증대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특히 저기술 분야의 노동시간 증대에 기인한 것이다. 경제전반의 생산성 수준은 G7 국가들 중에서 낮은 편에 속하고 투자는 지체되고 있다. 반면 인프라의 문제는 사유화를 통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기술경쟁에서 뒤쳐진 나라의 자본이 택할 수 있는 방식은 인플레이션을 통한 실질임금 삭감(생산된 가치의 이전)이나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 즉,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의 증가 뿐이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무한정 확대될 수 없는데, 자국통화의 가치절하와 맞물려 1970∼8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경제파탄의 소용돌이로 휘말릴 가능성이 잠재하며, 금융화를 위해서 인플레이션 억제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유로존에 가입한다면(블레어는 유럽단일통화를 기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유럽중앙은행의 엄격한 인플레이션 통제를 수용해야 한다. 따라서 영국처럼 기술경쟁에서 뒤쳐진 나라는 더더욱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의 증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방식을 오늘날 '노동신축화'라고 부르며,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2) (역으로 유럽연합은 인플레이션과 가치절하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 생산성이 뒤쳐진 나라들이 회원국 가입를 꺼리는 것을 막으려면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로 영국사회에서 가난한 자로부터 부유한 자로 거대한 부의 이전이 발생하고 있다(간접세 비율도 대처시대보다 더 높다). 전체적인 불평등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저임금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축에 속하고, 임금격차 특히 남성과 여성 간 격차는 노동당 집권 시기 동안 꾸준히 커지고 있다. 노동강제복지: 산업예비군 확대와 인플레이션 억제 또한 노동당이 최선의 '빈곤퇴치, 범죄근절, 가족장려' 방법이라고 선전하는 복지개혁 즉 노동연계복지(워크패어)는 인플레이션 억제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실업을 실업자 개인의 인격과 특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대처리즘과 마찬가지지만, 신노동당은 '산업예비군'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 임금하향 압박을 형성하려는 숨겨진 목표를 혁신하였다. 신노동당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을 도입했다. 첫 번째 방식은 산업예비군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특히 실업자로 공식 분류되지도 않았고 노동시장 참여를 기대하지도 않았던 편모나 실업자의 다른 가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들였다(병자와 장애인도 점차 포함되고 있다). 정부는 그들이 일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복지는 없다며 급여 박탈이라는 위협을 가한다. 한편 자본은 늘어난 산업예비군이 '고용능력'(employability)을 갖춰야 한다며 그들의 태도와 기술 훈육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사실상 고용능력이라는 자본의 난해한 표현은 임금을 낮춰야 한다는 뜻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들을 고용하는 자본가에게 직접적인 보조금을 제공한다. 노동당이 채택한 두 번째 방식은 저임금 노동자에게 세금공제(tax credit)라고 부르는 취업자급여를 제공하는 것이다. 노동당은 취업자급여를 25세 이상 모든 저임금 노동자로 확대하기로 했다. 최저임금제도는 엄격하게 강제된다면 임금의 최저선을 제공하겠지만, 자본은 정부가 최저선 이상으로 임금을 올리라고 압박하지 않을 것이라고 잘 알고 있다. 물론 최저임금제도가 없다면 재무성은 취업자급여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최저임금제도는 노동당정부에게 무척 중요하다. 전쟁정당 신노동당의 총선구호 중 하나는 "전쟁은 잊어라, 문제는 경제다"였지만, 블레어 정부를 말할 때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노동당의 지도자들은 보수당보다 더 미국에 아첨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영국이 한국전쟁에 지상군을 파병하는지를 보고 협력관계를 결정하겠다는 미국대사의 말에 놀라 애틀리 정부는 국가보건체계 기금을 빼돌려 군대를 무장해 한반도에 보냈다. 윌슨은 베트남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데에는 머뭇거렸지만 미국의 전쟁수행에 박수를 보냈다. 누구보다도 블레어는 클린턴에게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나도 가겠다'고 맹세했고, 신노동당은 워싱턴의 노예가 되었다. 1998년 10월과 2000년 여름 <사막의 여우> 작전이나 NATO의 78일에 걸친 유고슬라비아 공중폭격 때 블레어는 백악관보다 더 매파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부시로 바뀐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노동당의 외교정책은 국내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영국 금융자본과 초민족기업이 커다란 채찍을 휘두르는 미국에게 확실한 지지를 보내야 할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렇다면 블레어의 전쟁정책도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물론 블레어가 주도한 정치개혁과 권위주의적인 정치스타일은 전쟁 결정이 신속하게 내려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영국 노동당은 당헌개정을 통해 점점 더 노동조합과 관계가 멀어졌고, 블레어 같은 정치엘리트가 주도하는 정당이 되었다. 또한 정부 내각의 권한은 블레어의 사적 참모집단으로 대체되고 있다(블레어는 "장관들도 동의할 것이다"라고 종종 말한다). 이라크 무기사찰관이었던 켈리 박사의 죽음을 계기로 폭로된, 블레어가 전쟁수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정보를 왜곡했다는 사실은 노동당 정부의 반민주적 성격의 한 단면을 드러냈다. 따라서 핵보유국인 영국에서 블레어 정부가 "그렇소, 나는 핵 버튼을 누를 것이오"라는 식의 핵 정책을 고수하는 것도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세계 경제·정치의 수렴 과거 경제정책과 다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특징은 세계경제의 중심부 국가에게 바람직한 경제정책은 주변부나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바람직하다는 가설이다. 미국과 국제경제기구는 바람직한 거시경제, 구조조정 정책을 제시하고, 경제위기를 매개로 강제적인 시행을 명령한다. 이로써 세계 각 나라의 경제정책의 수렴 현상이 발생한다. 금융개방, 노동신축화, 복지개혁과 같은 경제, 사회정책이 서로 똑같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반영하여 정치·정당개혁, 교육개혁도 점차 닮아가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외교군사 정책에 대한 충성심 경쟁도 강요된다. 영국 신노동당과 한국 노무현정부의 각종 개혁조치에서 동일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전범 부시, 블레어, 노무현을 민중의 심판대로"라는 구호가 나온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블레어가 내세우는 '금융적 성장체제', '노동신축화와 노동강제적인 복지개혁'의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사실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다. 1) 대처의 현대화 계획은 노동조합과 국유산업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점차 공무원, 대학, BBC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고, 결국 보수당의 정치적 헤게모니의 근거가 된 권력조직 전체에 대한 총공격으로 발전했다. 이로써 전통적인 권력조직의 정당성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수당의 핵심세력은 전통적인 귀족, 고관과 같은 특권적인 엘리트층에서 더욱 전투적인 소부르주아, 신중산층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보수당에서 부상한 새로운 세력의 이데올로기는 고상한 토리 전통('한 민족 온정주의')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들은 1950년대 프랑스를 강타한 푸자드 운동, 곧 중소상공업자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며 납세거부운동으로부터 출발한 공격적, 권위주의적 운동에 훨씬 더 가까웠다(지난 프랑스 대선 때 결선까지 진출한 국민전선의 르펜은 푸자드 당의 이름으로 27세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특히 1997년 총선 패배로 전통적인 보수당 엘리트는 급격히 추락했고, 지도부를 장악한 새로운 층은 당의 이해관계를 시티(영국금융집단)와 초민족기업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다. 1998년 보수당은 당헌을 개정하여 지금까지 별다른 권력이 없던 지방의 선거권협회에 당 지도부를 선출할 권리를 주었고 (그들은 평균 62세였고 대부분 농촌 거주자였다), 그 결과 전통적인 엘리트층은 당권에서 더욱 멀어졌다. 본문으로 2) 물론 오늘날과 같은 노동신축화 정책이 대세를 장악하기까지 영국은 길고도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1960년대 영국의 경제쇠퇴 기미가 확연해지자 - 2차대전 후 잠깐 동안 영국은 독일과 일본의 경제파괴 때문에 상대적인 우월성을 누릴 수 있었으나, 낙후된 산업기반과 금융자본의 해외이동으로 인해 1960년대에 이르게 되자 더 이상 경제침체의 징후를 감출 수 없게 되었다 - 보수당이나 노동당 모두 현대화를 위한 계획을 세웠지만 공격방향을 노동자운동으로 삼은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영국 노동조합운동은 대륙에 비해 정치성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작업현장에 참호를 파놓았고 강인함과 문화적 응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64년 윌슨 노동당정부나 1970년대 히드 보수당정부 모두 노동자조직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노동조합의 비타협적인 반대에 직면했다. 1976년 선진국에서는 처음으로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후 등장한 대처의 현대화 계획은 한마디로 '복수극'이었다. 대처 집권 10여 년 동안 실업자는 최대 300만 명까지 치솟았지만, 노동조합의 목을 비트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노동조합의 저항을 박살냈다. 노동법을 다섯 번 개정했고, 1990년 최종판은 클로즈드샵(채용조건으로 노조가입을 의무화) 완전폐지, 모든 2차 쟁의행위 불법화, 비공인쟁의행위에 대한 노동조합의 책임부담을 담고 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