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부기구와 국가의 국제화 [역주] Joachim Hirsch, 'The State's New Clothes: NGOs and the Internationalization of States', Rethinking Marxism, Vol. 15, No. 2, 2003. 이 글은 미국의 좌파 이론지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에 실린 것으로 국제정치경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한 요소로 비정부기구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히르쉬는 국내에도 몇 권의 책이 번역되어 있는 독일의 국가이론가로서 최근에는 유럽의 금융과세시민연합(ATTAC)의 학술위원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은 '조절이론'의 국가론적 함의를 둘러싼 몇 가지 이론적 쟁점에도 불구하고 비정부기구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중요한 이론적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특히 NGO가 허구적 성격이 강한 '전문적 지식'에 기초한 '확대된 국가기구'라는 주장은 비정부기구의 성격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며 비정부기구와 사회운동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NGO와 ‘국제 시민사회’ NGO는 ‘그 발전이 미약하긴 하지만 세계적 지향을 갖는 시민사회 내에서 세계적 시민권의 전망을 갖는 조직’으로 널리 간주된다(Messner and Nuscheler, 1996; Habermas, 1998; Sakamuto, 1997). NGO에 관한 연구들이 국가이론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은 ‘국제’ 또는 ‘세계 시민사회’ 같은 용어들이 사용되는 방식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앞서 기술한 국가 및 세계적 국가 체계의 변형 과정이 민족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생산의 국제화, 세계시장 내에서의 경제적 관계의 발전, 점증하는 세계적 문제와 위험들, 이주자와 난민의 흐름, 국제적 수준에서의 의존도의 증가, 그리고 운송·통신의 개선 등으로 인해, 세계를 가로지르는 매우 다양한 연관관계가 강화된다. 그러나 또한 이와 같은 발전은 ‘세계적 사회’가 지극히 이질적· 분절적일 뿐만 아니라 권력 및 의존이라는 관점에서 불평등한 관계로 가득 차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Bonder, Rottger, and Ziebura, 1993; Gorg and Hirsch, 1998: 593; Slater, 1998). 만일 ‘사회’라는 개념을 인민·조직·제도들의 단순한 집합체 이상의 의미로―즉, 기본적 가치 체계, 통합적 경제 발전, 상대적으로 응집력 있는 정치제도들의 체계를 갖는 사회구조로― 파악한다면, 이 용어를 국제적 수준에 적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 엄격한 의미에서 ‘시민사회’에 관한 그람시적 용어법을 따른다면, 이 용어는 오직 그 자신의 고유한 내적 모순을 갖는 일관된 정치적·제도적 체계, 즉 ‘확대된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정당한 물리력의 독점’(베버)을 동반하는 ‘국가’ 같은 제도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그런 ‘국가’가 있다손 치더라도 자본주의 생산관계와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제도·수준·구조의 지속적인 분절화는 내가 세계화라고 부르는 과정의 중요한 특징이다. 경제적 세계화는 포괄적이고 일관성 있는 정치 제도들의 체계를 동반하지 않으며 개별국가들의 존재에 의해 지속적으로 결정된다. 이는 ‘세계 시민사회’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는 것처럼 마치 민족국가 내에서의 ‘시민사회’와 유비될 수 있는 것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람시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 관한 고전적인 자유주의 이론(Keane, 1988)에 따르더라도, 개별 국가의 경계 내에서 ‘시민사회’의 기능은 ―표현 및 결사의 자유에 기반하여― 제도화된 여론형성과 의사결정과정의 조건을 창출함으로써 합의와 헤게모니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국가적 제도들의 중앙집중화된 체계가 존재해야 하고, 그러한 체계 내에서 형식적 규칙에 따라 의사결정이 확립·집행되며 헤게모니적 기획이 실현·유지될 수 있다. 경제적 세계화의 과정에서 국가의 변형은 합의를 형성하고 헤게모니와 정치적 정당성을 창출하는 이러한 체계 내에서 주요한 변화를 야기했다. 이는 특히 국제적 수준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바, 많은 저자들이 ‘세계 시민사회’보다는 ‘신봉건주의’ 또는 아예 ‘구조화된 무정부상태’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에는 일리가 있다(Gorg and Hirsch, 1998: 600). ‘세계 시민사회’라는 용어는 때때로 특정한 행위자들, 즉 국제적인 관리 계급의 진화와 연관된다. 영리 기업의 경영자, 과학자, 국제조직의 관료, 국가관료기구의 일부와 NGO를 비롯한 다양한 범위의 ‘사적’ 조직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Cox, 1993; Sklair, 1997; Demirovic, 1997: 246; Gorg and Hirsch, 1998: 591). 혹자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일관성 있는 사회 집단의 진화를 목격하고 있으며, 이들은 ‘특수한 자기-관리(self-direction) 형태’를 발전시켜 ‘세계적 합의와 세계 국가 기획의 확립이라는 특수한 목표’를 실행함으로써 민족국가 체계를 크게 변형시킬 것이라고 추정한다(Demirovic, 1997: 247). 확실히 이들 국제적 관리계급은 예컨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과 같은 형태로 자신들의 제도를 건설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들은 이들이 세계적 수준에서의 지배전략 및 사회-경제적 전망의 발전에 착수할 수 있게 해 준다(Demirovic, 1997; Slater, 1997; Van der Pijl, 1997). 어쨌든 이 구조들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적 모델의 우위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Plehwe and Walken, 1999). 그러나 동시에 국제적 관리 엘리트들은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기존의 국가적 조절체계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들의 내적 구조는 앞으로도 세계 자본주의의 경제적·사회적 분절화에 종속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세계 정치와 관련하여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 국제적 조절의 맥락에서의 NGO NGO의 역할과 기능은 개별 조직의 구조와 목표를 통해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변형 과정의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민족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민족국가들의 국제적 체계는 조절과 정당성의 능력을 심각하게 상실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NGO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NGO는 국가 관료들이 소유하지 않은 (과학적) 지식과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활용한다. NGO는 사회 문제와 위협을 식별하고 정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적 협상과 의사결정을 위한 의제설정에 깊숙이 연루된다. 이들은 기성 정치 제도 안에서 들리지 않거나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익들을 대변한다(Brand and Gorg, 1998: 102; Princen and Finger, 1994: 34). 그리고 이들은 국제 협상을 감시하기도 한다(Brand and Gorg, 1998: 101). 이런 식으로 NGO는 민족국가 체계의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변형과 결합된 대표성의 위기에 대한 반작용을 대표한다. 이들은 광범위한 문제 및 이익과 관련된 정치 제도의 지역적·민족적·국제적 수준들 사이의 소통 통로로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 결과 이들은 국제조직, 국가, 기층의 풀뿌리 집단, 그리고 여타의 NGO들과 대조를 이루게 된다(Brand and Gorg, 1998: 101; Princen and Finger, 1994: 38; Brunnerngraber and Walk, 1997: 71). 마지막으로, NGO는 국가 행정기관들이 수행할 수 없거나 또는 수행하고 싶지 않은 실천적 프로젝트―특히 개발 및 구호 작업의 영역에서―에 참여하며, 종종 국가 행정기관들은 정치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 NGO들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한다. NGO가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공식적 기회는 거의 없다. 그들 대부분은 기부나 보조금에 의존하기 때문에 재정적 기반이 취약하고 부족하다. 따라서 NGO가 자신들이 권력을 실행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한 방식은 바로 그들이 보유한 지식과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과학적·기술적 전문성의 결과로, 그리고 국지적·부문적 구조와 문제에 정통한 덕택으로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이에 기초해서 NGO는 문제정의, 의사결정, 정책수행의 전반적 과정에서 정부 및 국제조직과 협력 또는 갈등한다. NGO가 보유한 권력의 결정적 자원은 여론을 동원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다. 사실상 NGO는 오직 여론의 압력의 결과로서만 정치적 전장에 진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이를 위해 힘쓰는 것이 NGO 정책의 핵심적 목표가 된다(Wapner, 1995; Brunnengraber and Walk, 1997; Wahl, 1997; Brand, 2000). 그러나 그들은 자체적인 물질적 자원이 없는 탓에 강력한 미디어 산업의 협력에 의존해야 하고 미디어의 작업 방식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개발 원조의 영역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여기서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하며’ 따라서 볼거리가 없는 사업은 공적으로 주목받기 어려운 반면, 미디어가 극화하는 대재앙의 경우 많은 주목을 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부 면에서도 훨씬 매력적이다. 이는 불가피하게 NGO 활동의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치며, 이런 점은 지난 몇 년간 지속된 국제적 긴급 원조 사업의 팽창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린피스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미디어 지향의 ‘초민족적 NGO’는 정부 및 영리기업에 맞서 상당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 그들은 미디어 지향의 기준들에 따라 자신들의 우선순위를 전술적으로 조정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각양각색의 NGO는 특히 국제적 조절의 수준에서 합의와 타협을 발전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 결과 더 넓은 범위의 이익이 고려되고 더 합리적인 결정이 내려진다. NGO는 정치적 전장에서 중요하고 새로운 행위자로 인정될 수 있다(Princen and Finger, 1994: 41; Wapner, 1995; Brand, 2000). 이들은 전통적인 사회조직, 예컨대 국가, 정당, [사적] 협회와 매우 다르며,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변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NGO가 진정으로 국가 제도로부터 독립적인지, 아니면 ‘확대된 국가’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 제기된다. NGO와 국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일정한 지속성을 갖는 전문적 조직으로서 NGO가 일반적으로 기부 이상의 재정적 자원을 필요로 하며 특히 대규모 프로젝트와 관련해서는 더 많은 자원이 요구된다는 사실에 의해 대체로 결정된다. 그 결과 그들은 국가와 국가연합(유럽연합과 같은), 국제조직, 심지어는 [사적] 협회나 사적 기업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의존관계 때문에 기부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NGO를 활용할 수 있다. 사실상 몇몇 NGO는 아예 기부 국가나 조직이 창설하고 통제한다. 또한 NGO는 민족적 행정부와 국제조직의 내부,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거대중심 국가들이 주변부 국가들의 정부 활동을 우회·포위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민족 정부들이 국제조직에 대항하는 데 동원되거나 또는 그와 반대 상황에 동원되기도 한다(Bruckmeier, 1994; Walk, 1997; Wahl, 1997; Gorg and Hirsch, 1998: 602). NGO는 ‘국가지향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NGO들이 재정적으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사법적·행정적 권력 그리고/또는 사적 기업의 선의에 의존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Brand, 2000). 그들의 유효성은 국가가 얼마나 기꺼이 협력하려 드는지 여부에 상당한 정도로 의존하며, 이는 NGO가 그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국가에 의해 이용될 수 있는 위험을 항상 수반한다. 이는 NGO가 상당 부분 ‘수요측 유인’에 의해 창설된다는 사실, 즉 NGO가 출현하게 되는 곳은 거의 어김없이 국가가 협력을 통해 정보와 정당성 또는 조절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이해를 갖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에 의해 증명된다(Gorg and Hirsch, 1998: 602).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NGO를 국가의 선발 조직이라고 간주한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동전의 한쪽 면일 뿐이다. NGO들은 그들이 국가의 기관들이 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정한 수준의 재정적·정치적·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한에서만 자신들의 기능―조직화, 특수이익의 대변, 집단 및 쟁점과 관련된 지식의 공유와 정당성 획득―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NGO의 역할과 기능이 민족적 수준이나 이와 연동된 ‘시민사회’ 개념의 범위로 국한된 전통적인 국가와 사회 모형에 의거해서 평가되기 어렵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다른 한편 그람시의 ‘확대된 국가’ 개념 또한 제한적으로만 유용할 뿐인데, 왜냐하면 국제적 수준에는 통합된 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NGO는 ‘세계적 통치성(governance)’이라는 복합적 체계의 일부이며 그 유효성은 대체로 국가의 ‘국제화’로부터 나온다. 진화 중인 국제적 조절 체계는 극히 이질적이며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바로 이것이 NGO 정치의 주요한 ‘전략적 관문’이다(Brand, 2000; Wapner, 1995; Brand/ and Gorg, 1998). 국제 NGO의 관료는 어느 정도까지는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관리 계급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다. 최소한 그들은 활동 영역, 행위 형태, 문화적 지향, 그리고 은어를 공유한다. 이는 NGO가 공식적·비공식적 협상 및 의사결정 과정에 접근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된다. 또한 NGO 체계의 구조는 위계적인 국제 경제 및 정치 권력의 구조를 반영한다. 특히 ‘북반구’의 초민족적 NGO는 비단 기술적·재정적 자원 면에서만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또한 ‘문화 자본’을 보유하는데, 그 덕에 그들은 더 큰 유효성을 가질 수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단일 쟁점에 관한 전문화가 국제 NGO의 활동에서 성공의 주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였지만, [이같은 협소한 전문화는] 더 광범위한 문제들과 관심사들이 무시되게 만들 수 있다. NGO가 이런 식으로 항의와 저항의 힘들을 감소시키고 분할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Demirovic, 1997; 256, Wahl 1997). 국제적 수준에서 NGO가 대표성의 기준과 의사결정의 규칙 같은 형식적인 민주적 구조를 결여하고 있는 대표 및 협상의 정치적 과정에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NGO가 억압되거나 무시당했던 관점 및 관심사를 환기시킬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전혀 투명하지 않는 권력자들의 협상장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그 곳에서는 ―납득할 만하고 투명한 의사 결정 절차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소 무정부적인 ‘하위정치’ 체계가 성장해 왔다(Gorg and Hirsch, 1998: 605). 따라서 NGO는 국제정치의 ‘재봉건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NGO는 기껏해야 ‘국제적 체계의 민주화를 위한 촉매’의 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을 뿐이다(Wahl, 1997: 311). NGO는 ‘아무런 형식적인 민주적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지만’, ‘세계사회’의 ‘분절화를 향한 경향’에 대응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민주주의의 대용품’이 되어야 한다(Gorg and Hirsch, 1998: 605). 따라서 민족적 수준과 국제적 무대 모두에서 NGO의 강력한 대두는 국가와 그들의 국제적 체계에 대한 포스트포드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의 귀결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의사결정 및 실행이라는 정치과정의 광범위한 사유화를 낳고, 결국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서 근본적 변화를 초래했다. NGO의 점증하는 숫자와 정치학자 및 사회전반이 이들에게 쏟는 관심의 증가는 이제는 지배적인 위치를 점한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의 일부로 온당하게 간주될 수 있다(Brand and Gorg, 1998; Wahl, 1997). 현존하는 정치·경제 구조, 점증하는 경제적·사회적 분절화, 이에 못지 않게 민족국가가 여전히 보유한 압도적으로 중요한 지위 등을 고려할 때, NGO의 중요성은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되며, 특히 민주화에 관한 이들의 영향력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GO는 새로운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국제적 조절체계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세계화의 주변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Wahl, 1997: 295). 민족국가를 넘어선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는 그 역사적 뿌리와 기능적 요건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적 민족국가와 -비록 매우 모순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 민족국가의 진화와 함께 사회는 매우 분명한 지리적 경계, 상대적으로 폐쇄된 경제체계, 중앙 통제에 종속되며 정치적으로 규정되는 인구,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통제의 책임을 지면서 동시에 통제를 받는 행정권력을 갖춘 정부 등을 갖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세계화 과정에서 진행되는 국가의 국제화가 국가의 중요한 토대를 침식한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동의되고 있다(Hirsch, 1995, 1998; Gorg and Hirsch, 1998; Zurn, 1998; Narr and Schubert, 1994; Archibugi and Held, 1995; Held, 1991, 1995; Sassen, 1996). 이는 역으로 사회적·계급적 관계의 조직화에, 따라서 사회적 재생산의 조건 일반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화 및 국제화 과정의 가장 중요한 결과들 중 하나는 개별 국가의 정부들이 국제 자본의 전략 및 자본축적의 동역학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는 점이다. ‘생산 현장’으로서 국가들 사이의 경쟁은 압도적인 중요성을 갖기 때문에, 민주적 제도들은 유지되기는 하지만 점차 무력해지고 활기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한다. 이 때문에 ―특정 제도들의 구조조정과 함께― 국가와 사회의 새로운 분리형태가 생겨나게 되는 한편 정부 행정기관들은 자율화·권위주의화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사실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재무행정부서와 중앙은행이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으로부터 확고한 독립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국가에 의해 장려되었던 사회협약과 계급간 사회적 협력의 토대를 제거한다. 자본주의적 계급 갈등의 타협과 포괄적 제도화라는 포드주의적 [조직]형태와 대조적으로 계급관계의 신자유주의적 조직화는 대체로 분절화와 분할, 개인간·집단간 경쟁의 촉진에 의존하는 바, 이는 종종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복지 쇼비니즘 따위의 특징을 띤다. 동시에 사실상 민주적 통제를 벗어난 국제 조직 및 협상장에서 정치적 논쟁과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점차 증가한다. 개별국가 내부의 민주적 제도와 절차들이 정치적 결정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자유민주주의는 과거의 시민들이 -비록 제한적이었다 할지라도- 향유했던 자유와 자기결정을 상실한 지배의 체계로 환원된다. 이런 식으로 민주적 절차들이 무력해지면서, 정치체계는 사회를 통합하고 갈등하는 이익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한다. 이들은 점차 사회 내부의 세력관계, 관심사들, 그리고 새로운 문제들에 대응할 수 없게 된다. 즉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조절에서 민주적 구조들의 핵심적 기능이 되어온 학습능력을 상실한다. 세계적 수준에서 볼 때, 민주적 제도와 절차들은 점점 더 통합을 위한 세력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점점 더 사회정치적 분절화의 원천이 되고 있다. 통치기관으로서 국가와 사회적 자기결정이라는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괴리는 점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발전은 특히 자본주의 중심부와 종속국의 관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주변부의 경우 ―동서 갈등의 종언과 함께, 그리고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명목상 민주적인 체제가 권력을 잡았지만, 이는 사실상 ‘무능력의 민주화’의 사례일 뿐이다(Hippler, 1994). 과거의 상황에 걸맞게 확립되어온 형식적인 민주적 구조는 실천적으로 권위주의적이며 국제자본과 국제조직, 강대국들에 의존적인 정부들에 대해 대체로 무력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한편 거대 중심부에서 민주주의는 일부 노동자를 포함하는 특권화된 인민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배타적인 조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배타적 조직은 세계적·민족적 수준에서 다른 모든 집단들을 배제하면서 스스로를 배타적 소수로 확립하려는 정치적 의도에 봉사한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지표는 많은 나라들에서 계속되는 이주자와 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해 거주 인구의 일부만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민주적 정치 과정으로부터 사실상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사람들의 불참과 결합되어 세계를 지배하는 서구 민주주의가 부유한 이들의 클럽인 동시에 확고하게 방어되고 바리케이트 쳐진 사회적 요새의 정치적 판본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사회적 아파르트헤이트의 조직된 형태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은 퇴행적 발전은 민주주의로부터 본래의 보편적·개방적·진보적 성격―과거에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존재했던―을 박탈한다. 이상은 세계적 지배력을 확립하려는 OECD 국가들의 계획과 일치하는데, 그러한 계획은 점차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 주된 토대가 되는 것은 복지 쇼비니즘, 인종주의, 그리고 ‘문화들의 전쟁’(헌팅턴)에서 서구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가정이다. 게다가 그것은 ‘(외국의) 조직된 범죄’, ‘테러리즘’, 그리고 ‘반-서구적’ 체제 등에 맞선 지속적 전투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다. 이러한 전투를 위해 위기 상황에 대한 ‘인도주의적’ 군사·경찰 개입이라는 수단이 동원되며, 세계화의 희생자이거나 또는 제국주의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세계의 일부에 대한 고도의 선택적인 재난 구호 조직이라는 수단이 활용된다. ‘인권’이라는 명목으로 전쟁이 수행되면서 이제 인권은 거대중심적/자본주의적 생활양식과 그 정치적·경제적 토대의 체현으로 변질된다. OECD의 계획은 퇴행적이고 특수한 ‘보편주의’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는 ‘서구적 가치’와 ‘자유와 민주주의’의 미국적 모형―즉 자유시장과 사적 소유라는 자본주의적 원칙의 확고한 방어와 강대국의 지배―을 일반적 규범으로 확립한다. 국제적 ‘인권 체제’가 민주화를 추동하는 효과를 가질 것이라는 희망(Sassen, 1996: 83)은 적지 않은 회의주의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커지는 시장관계의 우위는 스스로의 자연적·사회적 토대를 파괴하는 씨앗을 그 내부에 품고 있다. 과거에 이러한 발전은 대항적 힘들(노동운동이나 노동자정당 같은 사회운동)의 발전과 민족국가 내부에 서 다소 정착된 민주적 구조에 의해 상쇄되었다(Polanyi, 1990). 국가의 국제화 과정에서 이러한 특수한 정치구조들이 약화될 때, 일군의 대항 세력들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들이 사라지게 된다. 혹자는 이로 인해 세계적 세력균형의 포괄적이고 장기적인 사회적 위기가 초래되었고 이러한 위기를 낳은 세력관계는 상호연관된 경제적·정치적 과정의 복합체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가정할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가 새로운 국제적 정치조절 형태를 필요로 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국제화를 겪고 있는) 현존하는 국가체계를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새로운 조절형태가 위기에 대한 임시변통적 대응에 지나지 않으며 탈선하고 있는 세계질서의 토대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민주적 토대의 구조적 결여는 통제 받지 않는 시장의 힘의 파괴적 결과들에 맞서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자본주의의 위기나 붕괴가 해방 과정의 시작점이 될 거라고 희망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파괴적 발전에 맞서 정치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억압·분할·배제의 내재적 메커니즘을 갖는 전통적 민족국가 체계를 단지 복원하는 데 그치는 해결책은 ―국제자본의 우위와 지금껏 일어난 계급 구조상의 근본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설사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전도 유망한 해결책이 아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운동이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민주주의가 정치적 논쟁 쟁점으로 부활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발전이다. 사실 이와 같은 발전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한편으로 이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자신들의 우위를 확립하려는 OECD의 시도의 표현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침식과 세계화에 동반되는 사회적 분절화 및 퇴행에 반작용하려는 항의의 형태다. ‘인권’의 의미는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모호하다. 나폴레옹은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인권’을 들고 이집트를 정복하려 떠났다. 달리 말해, 현재 진행 중인 토론과 논쟁에서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들은 어떻게 현실적 실천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차이가 가장 뚜렷해지는데, 이는 ‘시민사회’를 둘러싼 토론을 떠올려 보면 분명해진다. 자본주의 중심부에서 시민사회에 관한 토론은 부유층의 바리케이트 처진 요새가 되고 있는 ‘경쟁적 민족국가’의 정치 구조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데 일차적으로 기여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적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슬로건으로 기능하고 있다. 반면 주변부에서 ‘시민사회’는 ―예를 들어 멕시코 싸파티스타 봉기에서 시작된 토론들에서처럼- 권위주의적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자기결정적 민주 사회를 창출하려는 투쟁을 반영한다(Brand and Cecena, 2000). 민주주의라는 개념과 이에 관련된 정치 조직 및 운동에 관한 이러한 논쟁은 분명히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민족국가의 경계를 넘어 민주적 질서―상투적인 민주주의 모델과는 반드시 판이하게 달라야 할 민주적 질서―를 발전시키고 실현하려는 시도가 의제에 올라온 상태다. 민주적 정치의 새로운 형태가 발전되어야 하는데, 이는 특히 현재 진행 중인 국가의 국제화 때문에 그렇다. 민주주의의 이러한 형태들은 민족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행정의 국가적 체계로부터 ―조직과 활동 면에서― 훨씬 더 독립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연계된 정치적 규범―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 대표 및 의사결정과정의 기본 원리―이 근본적으로 재정식화되어야만 한다. 이는 국가와 사적 기업으로부터 독립적인 운동 및 조직들의 국제적 협력이 새로운 방식으로 발전·강화·제도화되고 그 결과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세계 시민사회’가 그 이름에 부응하기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Gorg and Hirsch, 1998). 이와 같은 과업은 국제적 수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지방적·지역적·민족적 수준에서의 기본적인 민주화 과정이 선행되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민주화 과정 역시 유사하게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의 지평과 한계를 넘어 확장된다. 이제 문제는 NGO에 대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과학적 문헌과 정치적 토론 모두에서 NGO는 국제 정치의 민주화와 문명화에 주된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예를 들어 Habermas, 1998을 보라).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과정과 구조를 분석해 보면, 사실 적어도 일부 지역에서는 NGO가 국제 조절체계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최소한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열려진 문제다. 문제는 NGO를 국제 조절체계의 일부로서의 기능으로부터 분리시켜서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행위자로 간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일 민주주의 이론에 관한 최근의 토론에서 더욱 빈번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정치적 절차와 의사결정에서의 기능성(functionality) 및 합리성과 등치한다면(Gorg and Hirsch, 1998: 594), NGO는 ‘민주적’ 조직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그들은 확실히 더 넓은 범위의 이익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고, 문제의 규정 및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더 커진 합리성에 기여한다. 민주주의를 참여의 제한성을 갖는 견제와 균형의 다원주의적 체계로 이해할 경우에도 이러한 판단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민주주의를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가능한 최대의 자유와 자율성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체계라고 이해한다면 문제는 훨씬 복잡해진다. NGO가 민족적·국제적 수준의 관료적 국가 행정기관에 의존하고 근본적으로 국가지향적인 한, 근본적인 사회 변화 전략을 발전시키고 추구하는 능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Wahl, 1997; Brand, 2000). 비록 그들이 내적으로 민주적이고 ‘풀뿌리’에 밀착돼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어느 정도의 대표성과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적절한 제도적 메커니즘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NGO는 조직 자체의 무시할 수 없는 자기이익 때문에 자신들이 대변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들의 욕구와 밀접하게 연관되기 어렵다. 그리고 물론 NGO가 민주적 정당성이 없거나 분파주의적인 이익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지금까지는 NGO의 활동이 대부분 환경, 사회, 개발, 인권 정책 등과 같은 ‘다루기 쉬운’ 쟁점에 국한되었던 반면, 안보, 방위, 기술, 경제와 같은 ‘다루기 어려운’ 쟁점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는 무엇보다 이런 영역에서는 국가가 그들과 협력하려는 이해관심을 거의 또는 전혀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IMF, 세계은행, WTO의 정책에 관한 최근의 논쟁들은 이와 같은 상황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제 지뢰 캠페인에서 이러한 변화의 징후가 어느 정도 드러났다(Gebauer, 1998). 마지막으로 NGO들은 자원과 행동반경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다양한 정치적 역량을 갖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북’과 ‘남’의 NGO를 비교하고 ‘남’의 NGO의 빈번한 재정적·조직적 의존성을 관찰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Bruckmaier, 1994; Demirovic, 1997: 255). 또한 NGO들 내부의 권력의 위계가 존재하는데, 보통 거대중심부에 근거를 둔 강력한 ‘초민족적’ NGO가 지방적·지역적 수준의 더 작고 약한 조직에 대해 상당한 우위를 점한다(Wahl, 1997; Walk, 1997). NGO 체계는 민족국가들의 권력 불균형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NGO의 민주적 본질이 개별 조직의 작업 조건, 내적 구조, 목적 등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비록 그 내적 구조가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보다 넓은 국제적인 정치적 조절 체계 내에서의 입지와 기능에도 의존한다는 점은 분명하다(Wahl, 1997: 313; Gorg and Hirsch, 1998: 602). 민주주의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NGO는 수많은 행위자 중 하나일 뿐이다. 또한 종종 서로 대립하는 극히 다양한 NGO들이 존재한다. 일반원리의 수준에서 보자면, NGO가 국가, 국제조직, 사적 기업에 대한 자신의 물질적·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능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민주적 과정에서 그들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 NGO는 국가의 행정 및 핵심 기능과 관련된 문제에서 국가의 지원금이나 보조금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금 조달을 위해 미디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도 않아야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사회운동과 대중적 주도권이라는 능동적인 정치적 토대의 지지에 의존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개인별 전자우편이나 TV 자선 음악회만으로는 충당될 수 없다. 정말 필요한 것은 정확하고 비판적인 정보가 관심 있는 이들에게 제공되는 것, 또한 NGO의 활동, 작업 조건, 이들이 직면하는 난점들, 그리고 필요하다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한 이유 등에 관한 공적 토론이 벌어지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토대 위에서만 국가 행정기관과 사적 기업에 대항하여 충분한 상쇄력-단순한 상징적 권력을 넘어서는-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현존하는 조절 및 지배 체계의 규범의 제한을 넘어서는 정치적 전망과 사고를 발전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Gorg and Hirsch, 1998). 이는 또한 ‘다루기 힘든’(hard) 정치 영역, 즉 세계적인 사회정치 질서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며 동시에 NGO가 국가 제도들의 협력과 도움을 확신할 수 없는 영역에서의 유의미한 활동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해방적인 사회 변화를 위한 전략은 ‘정치’ 개념을 근본적으로 확장시켜서 새로운 쟁점들 예컨대 생산과정, 소비, 생활양식과 성별 관계, 그리고 이것들과 함께 의식고양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과 사회적 학습의 증진 등과 같은 쟁점들을 다룰 필요가 있다. 이는 국가가 지배하는 협상장 내에서의 로비활동으로 제한되지 않는 정치적 지향과 행동을 요구한다(Princen and Finger, 1994: 34; Wapner, 1995). 국가 및 국제조직에 대한 NGO의 의존성은 협력과 활동을 위한 국제적 동맹을 창조함으로써만 충분히 감소될 수 있다(Princen and Finger, 1994: 36; Wapner, 1995; Wahl, 1997: 313). 여기서 다시 국제 지뢰 캠페인은 중요한 사례가 된다(Gebauer, 1998). 특히 중요한 것은 국제 체계 안의 복잡하고 모호한 협상 채널을 보다 공적이고 투명하게 만들도록 힘쓰는 것이다(Princen and Finger, 1994: 35). 마지막으로 NGO의 민주성 정도는 NGO가 그 이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맺느냐와 관련된다. NGO는 그 ‘수혜자’가 독립성을 상실하고 그들이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조직했더라면 획득할 수 있었을 모든 기회를 상실하게 하는 방식으로 ‘수혜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물질적 원조를 제공할 수도 있다. 발전 원조와 구호사업에 관련된 사례들에서 종종 이러한 현상들이 발견될 수 있다. 다른 한편 NGO는 미디어의 이해관심에서 보자면 구경거리가 덜하고 또 국가 당국과 충돌을 낳을 수 있는 자기조직화의 증진을 목적으로 할 수도 있다. 심지어 이런 접근조차 여전히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우선, 외부의 개입이 정치적 자기결정을 증진시키는 데 진정으로 봉사할 수 있는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정부간 갈등,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의 착취에 활용될 위험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향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Wapner, 1995: 334). 민주화를 추동하는 NGO의 영향력은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지방적·지역적 정치 구조를 지지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Gorg and Hirsch, 1998; 또한 Walk, 1997을 보라). 이러한 길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NGO는 ‘급진적 행동에 대한 대안으로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Princen and Finger, 1994: 65)고 가정하는 것은 오해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기껏해야 더 광범위한 운동이나 네트워크의 일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1999년 시애틀, 2000년 프라하, 2001년 제노바에서 열린 WTO, IMF, 세계은행, G7/8 총회에서의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항의시위와 관련된 NGO의 모호한 역할이라는 사례에서처럼 NGO와 사회운동의 관계는 다소 복잡한 관계를 내포한다. 이러한 모호성은 NGO들이 거리에서의 항의를 조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탓에 정부 및 국제조직과의 협상에서 진지한 파트너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날 때 분명해진다. 만일 세계적 지배·착취·종속을 극복하는 것이 문제라면, 급진적 행동, 즉 제도적 구조 외부에서의 직접행동에 대한 대체물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직접행동은 지배적인 정치 의제들의 한계를 넘어서고, 합의를 파괴하며, 민족적·국제적 수준의 광범위하고 복잡한 지배체계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에 대한 대체물을 상층의 외교적 접촉이나 협상 테이블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전혀 가망 없는 일이다. 자체적인 구조와 기능 때문에 NGO는 희귀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행동에 참여하기 어렵다. 우리는 기껏해야 NGO가 급진적 행동의 결과를 수용하면서도 그 당시 그들이 누리던 보다 강력한 지위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내적 구조, 정치적 활동, 방향 등에 조응하여 그러한 행동을 할 의지와 능력을 갖는 한에서― 정부 및 국제조직과 대립하면서 국제 협상에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다. 급진적 사회운동은 항의하고 저항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이 제도 안에 제한되는 것을 거부하는 바, 여전히 민주적 발전의 기본적 토대들 중 하나다. 그 결과 NGO 체계의 민주적 본질은 NGO가 보다 급진적인 정치적 주도세력 및 운동들과 지속적인 갈등관계를 가질 때에만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역설이 생겨난다(Brand 2000). 만약 NGO 부문의 성장이 급진적인 정치운동의 쇠퇴에 대한 대응이라는 진단을 면밀하게 검토해본다면, 이러한 진단은 민주화를 추동할 수 있는 NGO의 잠재력에 관한 상당한 회의주의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살펴본 것처럼, NGO라는 용어를 매우 좁고 엄밀하게 정의할 때에도 그 용어는 매우 상이한 다양한 조직들에 적용될 수 있다. 그린피스와 옥스팸, 국경없는의사회와 메디코인터네셔널의 구조와 기능은 유사하지만 그들을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한계가 있다. 또한 사실상 기업으로 파악되어야 할 수많은 조직들이 존재한다. NGO의 민주적 본질은 이러한 차이가 NGO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얼마나 정치적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에 어느 정도 좌우된다. 우리는 여전히 유물론적 국가·사회 이론이 ‘시민사회’에 관해 말해주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그것은 지극히 이질적이며, 사회 모델의 발전과 실현을 둘러싼 투쟁의 전장이다. NGO들은 이와 같은 투쟁에 참여하며 사실상 서로 빈번하게 대립한다. 민주화를 추동하는 NGO의 영향력은 국제적인 국가 협상 체계 내에서의 ‘건설적’ 활동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일부를 이루고 있는 지배적 정치체계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 ‘맨주먹싸움 과정에서의 비판’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한다. 이런 일이 실현되어야만 비로소 NGO가 관련된 곳에서 ‘민주적 시민사회’에 관해 더욱 진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 맞는 NGO의 구호를 인용하자면, 문제는 ‘시민사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꾸는 것이다. NGO의 무차별적이고 규범적인 모든 속성들과 함께 NGO에 관한 신화적 이미지―학술적 담론과 공적 논쟁에서 유행하고 있는―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해방을 향한 중요한 일보가 될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국토균형개발계획과 동북아중심국가 플랜의 허구성 이제까지 드러난 행담도 개발의혹의 개요 유전 투자비리 의혹에 이어 터진 행담도 개발의혹이 주를 넘기고 있다. 지난 주 중에 마무리될 듯 했던 감사원 조사도 6월9일로 연장됐다. 이제까지 드러난 의혹의 3인은 대통령 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 문정인, 전 한국도로공사 사장 오점록, (주)행담도개발 사장 김재복(EKI의 최대지분인수자)이고, 이들 간에 이루어진 핵심의혹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한국도로공사와 EKI투자회사간에 맺어진 특혜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냐는 것. 한국도로공사가 행담도 개발이 실패할 경우, 주 투자자인 EKI의 투자지분 1억5000만 달러를 주식선매형식으로 떠 안는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계약이었다. 사업이 실패하더라도 주투자자인(90%) EKI는 실투자금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지분 10%에 불과한 도로공사로부터 보장받는 무리한 특혜가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의혹은 동북아위원회 문정인 위원장이 EKI와 사업협력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지원의향서(일명 추천서)를 발급하는 등 개별기업을 무리하게 지원한 점. 또 여기에 EKI와 도로공사와의 이런저런 분쟁과정에 정찬용 청와대 전 인사수석 등이 중재자로 적극 개입했다. 셋째, 미국에서 발행된 에콘사(EKI의 모회사)의 회사 채권 8300만 달러 어치를 우정사업본부와 교원공제회가 전량 매입한 경위이다. 외자(外資)유치를 명목으로 동북아위와 청와대측 인사들의 지원에 힘입어 발행된 채권을 매개로 외자는커녕 정부의 통제를 받는 공기업의 자금이 제공된 것이다. 최근에는 이 채권발행을 안건으로 외교통상부와 건설교통부 등 정부 관계부처가 대책회의를 가졌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는 마당이다. 행담도 개발의혹의 성격 1 : 권력형비리인가 단순 직권남용인가 감사원의 한국도로공사 감사과정에서 행담도 의혹이 제기된 직후인 지난 주 26일 문위원장과 정태인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동북아위원회 전 기조실장)이 사표를 제출했다. 사표의 제출이유는 불분명했다. 행담도 개발의 몸통 격인 전라도서남해안 계발계획 S프로젝트의 성공적 진행에 누를 미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청와대 또한 사표수리 여부는 감사원 발표 이후에 결정할 일이며, 국토균형발전과 동북아중심국가 구상에 따른 S프로젝트는 변함 없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27일 청와대는 행담도 개발은 국책사업인 S프로젝트와는 별개의 사업이었고 다소 무리 있는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며, 말을 바꿔 문위원장과 정태인 수석의 사표를 서둘러 수리했다. 국토균형발전과 동북아중심국가 계획의 중심사업인 S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행담도 개발에 대한 지원이 다소 무리한 형태로 이루어졌을 뿐, 이 사건이 권력형 비리사건은 아니라는 것이 청와대측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형태로 공기업이 개별기업을 상대로 수천억원대의 특혜를 제공했고, 이 과정에 청와대 인사들과 대통령 공식자문기구가 명백한 직권남용의 형태로 개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권력형비리가 아니라는 설명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비상식적인 규모의 특혜계약과 사기성 채권매입이 고위관료들의 노골적인 비호와 직권남용에 힘입어 이루어진 마당에, 권력형비리와 단순 직권남용을 구분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넌센스다. 행담도 개발의혹의 진정한 쟁점은 이런 넌센스가 아니다. 진정으로 가려져야 할 것은 행담도 개발의혹의 본류 격인 S프로젝트와 S프로젝트가 표방하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국토균형개발이 과연 어느 만큼의 진실성을 가진 계획이며, 외자유치 전략에 기반 한 동북아중심국구상은 진정 무엇을 목표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정책인가이다. 행담도 개발의혹의 성격 2 : 정권의 아마추어리즘인가 인민의 정치적 통제의 무력화인가 노무현정부는 위원회 공화국이다. 공식정부기구가 아닌 대통령산하 위원회가 22개나 된다. 직권남용의 도마 위에 오른 동북아위원회 역시 이들 위원회 중 집행권한이 없는 자문기구의 하나다. 한나라당과 조·중·동 보수언론은 이번 행담도 사건의 기본성격을 노정권의 아마추어리즘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잇따른 대규모 국책사업의 실패가 소수정예 전문가들의 견해를 무시하고, 다수우중과 NGO, 이익집단의 압력에 좌충우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들이 가장 자주 문제삼는 예는 지율스님의 단식요구를 뒤늦게 일부수용한 일이다). 즉 보수파들은 노정권의 아마추어리즘을 주되게 공격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정치현상을 거대한 금융 사기극에 뒤따르는 무능, 부패 사건임과 동시에 이것을 관리통제하는 정치시스템의 변환, 즉 신자유주의적 파퓰리즘(populism)화의 일환인 ‘정치의 사인(私人)화’로 본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전문성의 결여가 아니라 인민의 정치적 통제를 사전 봉쇄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비공식기구들은 대통령 개인의 직속 기구이거나 대의 민주주의적인 통제체계의 사각지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번 행담도 사건에 개입된 일부 인사들은 실제로 전직관료 출신의 사인신분이었다. 이들 개개인들이 별다른 전문적 식견을 갖추지 못했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386개혁세력이라는 점은 충분히 확인될 사안이다(반대로 NGO의 전문가주의도 존재한다). 그러나 더욱 문제인 것은 이들이 적절한 민주주의적 통제권(그것이 아무리 한계적인 제도적 통제제도라 할지라도) 밖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토균형개발 한다며, 정치는 파퓰리즘적 선거표 투기!! 자본은 땅 투기!! 서남해안계발계획 일명 S프로젝트는 무안 영암 목포 등 전남 서남해안 일대에 500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해 물류, IT, 생명공학 단지를 조성하고, 외국인이 3분의 1 이상 거주하는 인구 250만 명의 도시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내용이다. 노무현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지난해 11월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투자를 요청하며, S프로젝트를 직접 챙겼다. 그러나 목표로 밝힌 싱가포르로부터 200억 달러 외자유치는 이런 저런 말만 오고간 채 그 이상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싱가포르 기업인 에콘사와 그 자회사인 EKI가 행담도 개발에 참가하고 있던 것이 유일한 실마리였다. 하지만 에콘사의 부도로 그 자회사인 EKI는 (주)행담도개발의 사장인 김재복이 그 최대지분을 인수했던 터다. 국책사업인 S프로젝트의 입안과 집행과정에 S프로젝트와 무관한 행담도개발의 김재복 사장이 관여하게 된 경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싱가포르에 연고가 있는 김사장을 통해 200억 달러의 투자가 이루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 말 그대로 혹시나 하는 이 마음이 공과 사가 얽히고 온갖 직권남용의 도화선이 되어 오늘의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요컨대 S프로젝트는 계획의 근간을 이루는 외자유치에 관한 어떤 신뢰할만한 근거도 없고, ‘낙후한 전라도’를 향해 던져진 선심공약일 뿐이다. 그것도 전체인구 200만 명인 전라남도에 250만 명 규모의 외국인 도시를 짓는다는 허무맹랑한 공약을 말이다. 하지만 그 같은 선심공약이 두 가지 부문에서는 만만치 않은 힘을 발휘한다. 열우당의 호남표 몰이와 전남 일부 개발 예정지의 땅 소유주와 투기자본의 돈벌이가 그것이다. 노무현과 열우당은 이미 지난 수도이전공방과 현재의 행정복합도시건설계획을 통해 충청도 표심을 다잡고, 불황기에 목말라하던 아파트, 땅투기 집단의 욕구를 만족시켜주었다. 일확천금의 로또 땅을 낳은 판교신도시계획, 노무현을 따라 해남과 영암 간척지 일대에 골프장, 호텔, 실버타운, 외국 대학·병원, 카지노, 해양리조트 등을 갖춘 상주인구 50만 명의 복합레저도시를 건설한다는 전라남도 도청의 J프로젝트가 바로 이 S프로젝트와 행정복합도시계획이 대표하는 국토균형발전계획의 아류들이다. 자본가에겐 규제완화/특혜, 노동자에겐 고용불안정화/노동통제강화를 선사하는 동북아중심국가플랜 국토균형발전과 함께 이번 행담도 개발의 명분은 바로 동북아중심국플랜이다. 동북아중심국플랜은 김영삼의 4차 국토종합개발계획 시절에 제기되어, 김대중 정권을 거쳐 노정권이 주되게 내세운 국가적 비전이다. 하지만 이 플랜은 허황된 규모의 외자유치를 전제로 추진되는 내용 없는 정책일 뿐 아니라, 과도한 자본투자특혜와 외국인 거주환경 확보라는 미명으로 추진되는 교육/의료 등 서비스부문 추가개방, 그리고 주로 노동, 환경과 관련된 무차별한 규제완화와 기존 제도개악이 외자를 유치하기 위한 유일수단으로 따라붙는 정책이다. 때문에 동북아중심국가 건설이라는 거창한 정치적 수사와 달리 이 플랜은 별달리 진척되는 일없이 개발기대이익을 노린 투기세력들의 호주머니만 채우고 노동자의 노동조건 및 고용을 심각한 형태로 위협하는 반민중적 정책이다. 그리고 자본의 공화국 안에 다시금 공화국의 기본주권개념마저 무색케 하는 ‘기업도시’ 자본천국 개발계획과 도시빈민의 눈물 위에 국제 금융거점을 건설한다며 온갖 비리를 저지른 서울시의 청계천개발, 재정난에 빠진 지방자치단체들의 공룡특구에서 카지노, 경륜, 소싸움, 개경주에까지 뻗은 도박향락 관광개발 열풍 등이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이에 뒤따른다. 차라리 뇌물 때문에 추진되었다고 고백하라 : 행담도 개발의혹은 단지 몇몇 인사들의 비리로 그치지 않는 거대한 금융 사기극의 일각이다. 올 3월에 노무현정권은 재벌기업과 반-부패NGO들을 대동하고 ‘반-부패 투명사회협약’이란 걸 체결했다. 그러나 그 즉시 자신의 대선비리자금줄들을 석방해주었고, 연이어 오일게이트가 터졌다. 하지만 여권 실세들이 개입된 황당무계한 오일게이트 수사는 막바지에 이르러 청계천개발비리와 맞바꿔 덮어주기 판이 되고, 다시 또 다시 행담도 의혹이 터져 나왔다. 허구적 축적과 투기에 기반한 빈 껍데기뿐인 국토균형발전계획과 동북아중심국가플랜이 이번 행담도 개발사건과 같이 예정된 실패를 모면하자하는 정치가, 관료들의 애처로운 직권남용과 부패비리를 낳는 것은 필연이다. 우리는 차라리 이 사태가 뇌물에 눈먼 몇몇 정치인, 관료들만 책임지는 것으로 그치고 말 사안이라면 일말의 분노를 덜겠다. IMF위기를! 벤쳐투기거품 비리를! 카드대란을! 장기내수침체를! 단순 부패비리사건으로 호도하며, 정권과 보수정치가, 자본가들은 불법 뇌물과는 비교되지 않는 합법적 이득과 정치적 대가를 챙기지 않았는가! 국토균형발전, 동북아중심국가건설을 명분으로 발생한 부패비리를 그 원인인 금융화 개발 사기극의 성공적 진척을 위해 척결하겠다는 말장난은 제발 그만 두라. 균형 잡힌 국토의 주민이며 동북아중심국가의 국민인 노동자 민중은 위기의 원인을 직시해가고 있으며, 사법당국의 형식적으로 찔끔거리는 부패수사에 더 이상 희망을 두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다.
비정부기구와 국가의 국제화 (상) [역주] Joachim Hirsch, 'The State's New Clothes: NGOs and the Internationalization of States', Rethinking Marxism, Vol. 15, No. 2, 2003. 이 글은 미국의 좌파 이론지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생각한다}에 실린 것으로 국제정치경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한 요소로 비정부기구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히르쉬는 국내에도 몇 권의 책이 번역되어 있는 독일의 국가이론가로서 최근에는 유럽의 금융과세시민연합(ATTAC)의 학술위원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은 '조절이론'의 국가론적 함의를 둘러싼 몇 가지 이론적 쟁점에도 불구하고 비정부기구의 역할과 기능에 관한 중요한 이론적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특히 NGO가 허구적 성격이 강한 '전문적 지식'에 기초한 '확대된 국가기구'라는 주장은 비정부기구의 성격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며 비정부기구와 사회운동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글 분량이 많아 이번 호와 다음 호 두 번에 나눠 싣는다. 비정부기구(NGO)는 숫자 면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언론인과 정치학자에게 갖는 의미라는 면에서도 일종의 성장 산업이다. 이 개념은 몇 년 전의 '새로운 사회운동'이나 '시민사회'에 비견될만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 동안에 몇몇 사람들은 다시 지상의 현실에 눈을 떴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NGO가 해방적인 사회변화를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NGO는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발전을 보장할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관념은 특히 국제적 수준에서 널리 적용되고 있다. 국제적 수준에서는 이론적인 차원에서조차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의 시대에 국제적 수준에 관한 논의의 중요성은 점차 커지고 있다. 사람들이 NGO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거는 까닭은, NGO가 정치적 투사를 위한 이상적인 스크린을 제공해 주는 동시에 사회과학자들의 자기정당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주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자들은 종종 NGO의 세계와 가깝게 접촉하며, 어떤 식으로든 사회적·문화적· 정치적으로 NGO와 밀접한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NGO 개념의 인기는 무엇보다, 최근까지 '새로운 사회운동'에 걸었던 주요한 사회 변화에 대한 희망이 시들었다는 점을 반영한다. 근본적인 사회 변화에 대한 수많은 희망들이 좌절로 끝이 났고, 이제 '새로운 사회운동'도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1989년 이후 몇 가지 추가적인 난점들, 즉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로 보이는 현상들로 인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거스르는 정치적 방향성의 난점들이 존재한다. 1980년대 말 '시민사회'의 (재)발견이라는 사례에서처럼, NGO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체념의 표현, 즉 기본적인 변하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 사회 구조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내에서 실행 가능한 것을 찾아 임시변통으로 대처하려는 태도의 표현인 것처럼 보인다(Narr 1991). 따라서 NGO가 '90년대의 가장 과대평가된 행위자'가 되었다는 피터 바흘의 논평에는 얼마간의 진실이 있다(Warl, 1997: 293). 이러한 과대평가는 정치적으로 왜곡된 관점뿐만 아니라 그것과 이론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다. NGO를 대상으로 한 수많은 연구들은 국가와 사회에 관해 완전히 부적합한 이론적 개념들을 사용한다. 이 때문에 일찍이 1989년 이래로 '민주적 시민사회'에 관한 논쟁을 특징짓던 이론적 결함들이 지속된다. 그 결과 소위 세계화의 와중에서 개별 국가들이 종속되는 세계적 변형의 과정들을 올바르게 분석하는 것이 어려워진다(Hirsch, 1995, 1998; G rg and Hirsch, 1998; Hirsch, Jessop, and Poulantzas, 2001; Hirsch, 2002). '국가'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정치적 조절 양식 내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이와 연동되어 자유민주주의 구조 내에서 주요한 변화가 발생한다. 비정부기구는 이런 과정의 표현임과 동시에 행위자다. 이 논문에서 나는 NGO를 더욱 엄밀하게 정의하고 이와 같은 정치적 조직 형태가 점차 두드러질 수 있게 된 조건들을 서술할 것이다. 국가 이론의 몇 가지 기본 개념을 명료하게 한 후, 나는 소위 세계화 과정에서 국가들과 그들의 국제적 체계가 종속되어 있는 변형 과정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을 서술할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관한 논의에 기초해서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국제적 조절 체계 내에서 NGO의 역할이 파악될 것이다. 이는 특히 국제적 수준에서 NGO가 얼마만큼 그리고 어떤 조건하에서 민주화의 추진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비정부기구'란 정확히 무엇인가? NGO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은 형식적으로는 사적인 조직들이 민족적·국제적 수준에서 정치과정에 점차 더 빈번하게 개입하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조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문제는 이 조직들이 새로운 형태와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비정부기구'는 일종의 잡동사니 격의 용어로서 매우 잡다한 함의를 갖는다. 그 함의의 일부는 외부의 관찰자들이 활용하며, 다른 일부는 NGO 자신들이 활용하고,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상당한 이데올로기적 어조를 갖는다. 서술적 개념과 규범적 개념은 종종 양자를 구분하여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함께 뒤섞인다. 그렇긴 하지만, 비정부기구의 '비(非)'는 진지하게 취급해야 할 변증법을 지시한다. 어떻게 보면 NGO는 형식적으로 사적인 조직들이 어떻게 국가의 특성들을 띠게 되는지, 또는 국가의 기관들이 어떻게 '사유화'되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비(非)'는 일반적으로는 국가와 사회의 구조 내에서, 그리고 특수하게는 민족적·국제적 수준에서 국가 및 국가 조직들과 관련하여 NGO의 지위에 대한 분명한 묘사라기보다는 모호한 용어가 된다. 여기에 덧붙여 'NGO'라는 용어는 대체로 매우 다양한 조직들에 일반적으로 붙여질 수 있는 특정화되지 않은 이름표의 역할을 한다. 이와 연관된 딜레마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조직된 비정부기구(GONGO)와 의사 비정부기구(QUANGO) 따위의 역설적인 약어들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상 'NGO'들은 비록 정부에 의해 설립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때때로는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고 정부의 목적을 위해 활용된다. 예를 들어 주변부의 종속국가들에서는 종종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적인 NGO의 설립이 국제적 원조를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 된다. 자본주의 중심부와 그들의 신흥 NGO 사업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벌어진다. NGO는 종종 '국가의 권력'으로 불릴 만한 기능을 한다. 소위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Gebauer, 2001)에 대한 병참적·정치적 지원에서 이는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NGO들이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지 않거나 정부 자금을 자신들에게 끌어들이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많은 수의 NGO들이 존재할 것인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이는 NGO가 국가 조직이 아닌 진정한 '시민사회'의 조직인지, 아니면 사실상 정부적·조절적 복합체의 일부로서 그람시의 표현을 빌자면 '확대된 국가'의 일부로 파악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Gramsci, 1986; Anderson, 1979; Kramer, 1975). 바흘(Wahl, 1997: 313)에 따르면, NGO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 자발적 연합체다. 국가나 정당으로부터의 독립성, 자선과 우애, 비영리적 정향, 그리고 인종·민족·종교·성별의 관점에서의 비배제성. 그러나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이는 규범적이고 자기-기술적인 기준들의 집합으로, 현실에서는 온전히 만족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민족적·국제적 수준에서의 새로운 정치적 조절형태라는 맥락에서 NGO의 역할을 조사하고 싶다면, 애매한 부정적 특징('비정부적')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훨씬 좁게 정의되고 분석적으로 정확한 용어를 채택하는 게 필수적이다. 나는 바흘의 정의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민족적·국제적 수준에서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아래와 같은 특징을 드러내는 형식적으로는 사적인 일체의 조직으로 NGO를 정의하려고 한다: 비영리적 정향(자선적 지위)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대표하지 않고 자발적인 지지 활동에 대한 참여 국가와 영리적 기업으로부터의 조직적·재정적 독립 전문가적 자질과 조직으로서의 영속성 특히 마지막 특징이 중요하다. 조직의 자기이익(예컨대 피고용자들의 일자리와 소득을 유지하려는 이해관심)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과 특수이익 또는 공적 복리를 대표한다는 목표 사이에는 기본적인 긴장이 존재한다. 대체로 NGO는 인류적 이해의 이상주의적 담지자일 뿐만 아니라, 비록 그렇게 정의된다고 할지라도 불가피하게 경제적·재정적 제약의 기초 위에서 작동하는 '도덕 기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의는 NGO와 다른 조직들 특히 정치적 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다른 '비정부' 조직들 을 (비록 매우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구별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에 따라 NGO는 사적 영리 기업(비록 자선적 지위를 갖는 상담회사처럼 혼성적인 조직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자기 구성원들의 특수이익을 대표할 뿐인 결사체와 집단들(예를 들어 노동조합처럼 거대한 관료적 결사체와 기층의 풀뿌리 이익집단들), 그리고 일시적으로 또는 느슨하게 조직된 정치적 발의와 캠페인과 같은 여타의 형태들과 구별된다. 반면 NGO와 사회운동을 구별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대체로 사회운동은 단일한 조직과 구별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복합적 네트워크로 정의된다. NGO가 사회운동의 일부일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때대로 NGO는 특정한 운동 네트워크의 다소 안정적인 요소를 이루거나 운동이라는 하부구조의 조직적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Roth, 1994). 다른 한편 NGO는 종종 사회운동의 해체의 부산물로 간주되기도 한다(Brand, 2000). 그리고 만약 사회운동이 기성의 제도적 체계 이와 관련된 NGO 구조를 포함하여 로부터 독립적이거나 또는 갈등관계에 있다면, NGO는 사실상 운동과 대립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G rg and Hirsch, 1998: 606). NGO의 발전 조건들 1864년에 창설된 적십자를 생각해보면 NGO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점을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NGO가 숫자가 크게 늘고 공적 영역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얻게 됐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는 한편으로는 국가제도의 종별적인 실패와 그것에 연동된 기성의 정치적 대의 및 이익 매개 형태의 쇠퇴의 직접적 결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의 증가하는 분화 그리고/또는 제도화의 직접적 결과다(Messner and Nuscheler, 1996; Brand and G rg, 1998; Brand, 2000). 이것은 근본적인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즉, 소위 세계화 과정에서 새로운 축적 및 조절 형태의 확립(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이행)과 이에 관련된 민족-국가의 '민족적 경쟁국가'로의 변형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Hirsch, 1995, 1998; Brand, 2000; Hirsch, Jessop, and Poulantzas, 2001). 다음과 같은 발전양상은 특히 중요하다. · '새로운' 사회운동의 쇠퇴, 이는 1980년대 이래로 발생해 왔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좀 더 분명한 구별이 필요하다. 쇠퇴가 가장 뚜렷한 곳은 자본주의 주변부의 민족해방운동으로, 이들은 동-서 갈등의 종언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세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토대를 크게 박탈당했다. 대체로 보면, 사회운동 영역 안에서 분화와 제도화의 과정이 벌어지는데, 이로 인해 느슨하게 조직됐던 운동들이 보다 견고한, 그리고 어느 정도 전문화된 조직으로 변형되었다(Roth, 1994). 이는 전직 활동가들이 국가와 상업적 기업 외부에서 일할 수 있는 새로운 조건과 영역을 찾고 발전시키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문제는 사회운동의 쇠퇴라기보다는 차라리 구조적 변화다. 이는 의회 외부 정치의 광범위한 위기의 표현으로, 여기에서는 협력적인 정치 활동 형태가 비제도적인 항의와 저항을 지양하고 있다. · 세계화 그러니까 국제적 통신·운송·자료관리의 발전과 상품·서비스·금융·자본 시장의 자유화에 기초한 새로운 국제화된 생산 형태의 확립. 이는 개별 국가들이 개입 능력의 일부를 상실하고 그 결과 자유민주주의적 제도들이 침식되어 대의체계의 위기가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적어도 사람들의 전반적인 인식에 따르면 둘 이상의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 문제들은 개별 국가에 의해서는 적절하게 혹은 아예 처리될 수 없다. 이것들의 기저에 깔린 원인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사실은 동-서 갈등이 종말에 이른 까닭에 세계 질서가 그 구조와 단층선이라는 면에서 훨씬 복잡해졌다는 점이다. · 세계적 과정의 관리에서 새로운 쟁점들과 난점들의 출현. 과학적 이론과 지식은 정치에서 점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어 급기야는 항의와 저항보다 지식과 전문가들의 의견이 정치적 영향력의 행사에서 점점 더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고 있다. 이는 특히 환경 위기 같은 사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G rg and Brand, 2001). 과학적 분석과 문제-해결 전략이 정치적 갈등에서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관료적 국가 조직이 이러한 업무에 부적합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복잡하고 다양한 정치적 목표들은 오직 다양한 국가적·비국가적 행위자를 참여시킴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고, 특히 사회적인 현대화 및 조정 과정이 관련된 곳에서는 더 그렇다. 이와 함께 세계화와 지역화의 모순적 과정('세계지방화'(glocalization)) 때문에 다양한 수준 지역적 수준에서 국제적 수준까지 의 정치들 사이의 교통의 통로를 발전시키는 것이 점점 더 긴급해진다. 국가와 국가 체계의 변형 '국가'와 '시민 사회': 몇 가지 간략한 정의 NGO의 기능과 역할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가 및 시민사회 이론의 전제가 되는 가정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용어로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변화를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극히 중요하다. 여기서 나는 유물론적 국가이론과 조절이론에 따른 자본주의 분석에 기초해서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특히 1970년대 서독의 국가논쟁, 그리고 풀란차스와 그람시의 기여가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몇 가지 기본 전제에서 이들 접근을 연장하는 것으로 논의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Holloway and Piciotto, 1978; Poulantzas, 1978; Jessop, 1982; Hirsch, 1995). 유물론적 국가이론에 따르면, 분리된 실체로서 국가의 존재와 '경제'로부터 '정치'의 분리, 또는 '사회'로부터 '국가'의 분리는 비록 기능적으로 보증되지 않고 언제나 갈등의 주제가 되긴 하지만 부르주아-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적 특징이다. '국가'와 '사회'는 서로 독립적이지 않으며, 동시에 단순한 형태로 서로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모순들로 가득 찬 사회체계의 특수한 표현이다(Gramsci, 1986; Poulantzas, 1978; Hirsch, 1995). 국가는 물리적 강제력의 집중과 그것의 사회계급들로부터의 분리의 산물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들 중 하나다. 국가는 자본주의 생산체계의 일부이자 그 재생산의 전제조건으로서 비록 특정 계급의 단순한 도구는 아닐지라도 일종의 계급 국가다. 따라서 국가는 하나의 인격, 주체 또는 그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순수하게 합리적인 조직 등으로 간주될 수 없다. 대신 국가는 사회 내부의 적대 관계의 결정체(crystallization)로 이해되어야 한다. 동시에 국가는 그 자신의 역동성과 제도적 안정성을 보여주며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 이는 국가가 폐쇄적 조직이 아니라 일종의 복합체로, 즉 사회의 상이한 계급 및 집단과 다양한 때로는 갈등적인 방식으로 관련되고 종종 서로 대립적으로 행동하는 집합적 실체들의 복합체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국가는 물리적 강제력 행사의 재량권이라는 수단을 갖는 중앙 집중적인 지배체(ruling body)다. 반면 '시민사회'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모든 사회·정치 조직들을 지칭하는데, 여기에는 특수이익을 대변하는 결사체, 정치 집단, 언론매체, 교회, 학술기구, 연구소, 지식인 집단, 그리고 '두뇌 집단'(think tank) 따위가 포함된다. 시민사회는 공적인 논쟁에서 상이한 관점들과 이익들이 표현되고 대결할 수 있는 포럼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이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들,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임금노동자, 시장, 핵가족 등에 의해 광범위하게 규정된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권력 행사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상이한 경제적·정치적 강제형태들에 예속된다. 공적 토론과 논쟁은 국가권력 정당화에 봉사하며 국가가 그 지배권(dominance)을 주장할 수 있게 해 준다('합의'). 동시에 국가는 공적 토론과 논쟁에 개입할 수 있다('강제'). '시민사회'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전장으로 볼 수 있는 바, 여기에서 사회 질서와 발전의 대안적 개념들이 출현할 수도 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는 모순으로 가득 찬 권력관계의 복합체, 또는 강제와 합의 양자 모두에 기반한 '지배 체계'―그람시적 용어로 '헤게모니 블록'이라 불리는―를 형성한다. 우리는 시민사회의 모순적 본성을 고려함으로써 시민사회를 '확장된 국가'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매우 많은 (민족)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체계의 근본적인 측면이다. 국경에 따라 계급들(과 계급들 안의 집단들)을 분할하고 국경을 가로질러 계급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자본주의 체계를 조절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이는 무엇보다 계급들과 그 분파들을 서로 반목시켜 어부지리를 꾀하고 민족국가 내에서 사회협약을 확립할 수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이질적 제도들의 모순적 복합체로서 국가의 본성은 국가들의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국제적 수준에서 재생산된다(Hirsch, 1995: 31.). 변형 과정: 탈민족화, 사유화, 그리고 정치체제의 국제화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세계화'라 일컬어지는 은 부르주아-자본주의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정치구조의 주요한 변형을 동반해왔다. 바로 이러한 연관 속에서 NGO는 현재적 의미를 획득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발전양상이 중요하다(Jessop, 1997a; Sassen, 1996, 1999; G rg and Hirsch, 1998; Z rn 1998). 첫째,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는데, 이는 '탈민족화'로 묘사될 수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생산의 국제화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내부 시장의 발전 포드주의에 전형적인 '민족' 경제 안에서 에 초점을 맞추는 축적과 조절 체계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려고 한다. 세계화와 이에 동반되는 탈규제 전략의 핵심적 구성 요소는 특히 경제·사회 정책의 영역에서 개별 국가의 개입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다. 이는 국가가 사회발전을 일관되고 협력적인 방식으로 조절하는 능력을 축소한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 사회들은 더 이질화된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사회적 불균형과 분할이, 다른 한편으로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경제관계의 확립이 증가한다. 이와 동시에 국제적 불균형으로 인해 이주자와 난민들의 흐름이 더욱 거대해진다. 이는 다시 계급구조의 재조직화, 노동형태의 전화, 그리고 사회에서 권력 관계의 변화를 초래한다(Sassen, 1996: 59; Samers, 1999; Pellerin, 1999). 그 결과 사회들은 전반적으로 점점 더 '다민족적'이고 '다문화적'이게 된다. 사회적 불균형과 분할의 증가는 분명한 역설로 귀결된다. '탈민족화' 과정은 점증하는 민족주의적·인종주의적 경향을 동반한다. 민족국가라는 현상은 그 자체로는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족국가는 여전히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에 기초하여 계급관계의 조절 및 일정한 사회적 응집력의 창출이라는 목적에 복무하는 핵심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Jessop, 1997b). 둘째, 경향적으로 정치가 '사유화' 또는 '탈-국가화'된다. 이때 핵심은 조절적 네트워크의 발전인데, 여기서 국가 다소 독립적인 사회적 행위자와 집단들의 집합체를 조정하고 매개하는 존재로서 는 다만 동급 최강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은 국가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사적 협상과 (가장 넓은 의미에서) 집합적(corporate) 구조로 이동한다. 이러한 '협상' 국가가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은 아닌데, 왜냐하면 정부는 언제나 강력한 사회 집단들과 타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사유화 과정에서 국가는 점점 더 빈번하게 이러한 역할을 맡고 있다. 시장의 탈규제화가 행정적 개입의 범위를 축소시키는 반면, 강력한 '사적' 행위자들 특히 점차 개별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게 된 초민족적 기업들 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여기에 덧붙여 점증하는 '지방적 활동들의 경쟁'에 직면해서 다양한 권력 및 지식 자원을 동원할 필요성이 있다. 이는 사법적·행정적 수단을 통해서는 제한된 정도로만 달성될 뿐이다. 따라서 '협력적' 전략들이 요청된다. 바로 이러한 배경 위에서 '거버넌스'와 '네트워크' 이론들이 지금 현재 붐을 일으키고 있다―물론 그 이론들이 언제나 이러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Scharpf, 1996; Messner-Nuscheler, 1996; Messner, 1995, 1997; Kommission, 1995; Rosenau, 1999).{이러한 이론들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적 평가를 위해서는 Brand et al. (2000)을 참조하라.} 거버넌스나 네트워크 같은 개념들은 종종 그릇된 관념, 즉 모든 국가들, 국제기구들, 상업적 기업들, 그리고 비-정부 조직들이 다소 동등한 수준에서 서로 협력하거나 대립한다는 관념을 동반한다. 이런 식의 관념은 경제적·정치적 자원이라는 측면에서의 주요한 불균형을 고려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국가의 물리적 권력 국가에 고유한 정당성을 동반하는 이 여전히 국가의 '교섭력'의 주요한 원천을 이룬다는 점을 무시한다. 너무 자주 간과되고 있지만, '거버넌스' 구조의 발전과 연결된 국가와 사회의 관계 변화는 민족적·국제적 수준에서 계급간 관계의 근본적 전화를 의미한다. 이는 한편으로 초민족적 자본의 출현, 다른 한편으로 사회 안에서의 점증하는 이질성과 분할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비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발전은 정치의 '재-봉건화'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제도적 의사결정 과정의 중요성이 쇠퇴하고 비공식적 협상공간들이 선호되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그러한 공간들은 전통적인 민주적 제도와 절차의 통제로부터 거의 완전히 벗어나 있다(Maus, 1991; Sassen, 1996: 40). '경쟁력 있는 국가'나 '심의 민주주의'라는 개념들로의 '현실주의적' 변화도 이러한 배경 하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개념들은 민주주의를 지극히 불평등한 행위자들의 시민사회 내에서의 협상 절차로, 또는 단순히 지방들의 국제적 경쟁을 위한 참여적 동원으로 축소시킨다(G rg and Hirsch, 1998: 326). 셋째, 정치 조절체계가 점점 국제화되고 국제적 수준에서 조직, 제도, 그리고 비공식적인 '체제'의 한층 밀집된 네트워크가 창출된다.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 이유로는 세계적 축적과정 및 그 결과들(국가의 붕괴, 금융시장의 현재적 위기, 세계적 환경 위협 등)이 만들어 낸 문제들이 개별 국가의 능력과 국경을 넘어 확장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동시에 정부들은 개입 범위의 상실을 보완하기 위해 국제적 조절 체계를 창출하거나 강화시키려 한다. 이는 정부들을 새로운 협력 형태에 속박하고 특히 약소국들의 선택권을 제한한다(Hein, 1998). 또한 세계화는 점증하는 지역화와 민족이상적인(supranational) 경제 블록을 창조하려는 시도들을 동반한다. 따라서 지역적·민족적·거시지역적(macroregional) 수준들 사이의 조정의 필요성이 증가한다. 전통적인 국가-행정적 정치 제도의 맥락에서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새로운 국제적 권력 구조에서는 자본주의 3극의 더 강한 국가들이 갈등적 협력 형태를 통해서 세계를 다소간 지배한다. 이는 이들 중심의 공통이익을 대표하는 국제조직들(특히 신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중심적인 제도적 표현으로서 세계무역기구(W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세계은행(WB), 국제화폐기금(IMF),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덜 제도적인 조정과 네트워크 형태들도 존재하는데, 여기서는 초민족적 기업들과 비정부기구(NGO)들이 각각 차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협상 국가'는 국제적 수준에서도 발전 중이다. 다른 한편 전후 시대의 구(舊)세계질서가 종언을 맞고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적 우위가 확립되면서, 과거에 평화로운 '신(新)세계질서' 창조라는 거대한 희망과 기대를 받고 있던 국제연합(UN)은 점점 더 그 의의를 상실―적어도 국제연합이 자본주의 중심부의 이해에 복무하도록 활용될 수 없는 한―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와 같은 환경에서 세계시장 수준에 배태된 경제적 과정의 단순한 탈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특히 국제적 수준에서, 신자유주의적 입헌주의에 조응해서 새로운 정치적·제도적 '배태성'의 새로운 형태들이 창조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에 더 부합할 것이다(Gill, 1995; Scherrer, 2000). 국제적·민족이상적 기구들, 그리고 어느 정도 제도화된 각양각색의 협력관계와 '체제'(Mayer, Rittberger, and Z rn, 1993)의 중요성이 점점 커진다고 해서 개별국가들로부터 진정으로 독립적인 국제적 정치 영역이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국제조직 및 체제는 협력체 내에서 더 강한 국가들의 이익에 상당한 정도로 의존하며, 더 강한 국가들은 국제조직과 체제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제한하고 규정한다.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비공식적 네트워크는 회원자격과 의사 결정 과정에 관해 분명한 규칙을 갖고 있는 공식적 국제조직와는 대조를 이루는 데, 이는 더 강한 국가들과 초민족적 기업을 한편으로 하고 약한 국가들을 다른 한편으로 할 때 그 양자의 불균형을 반영한다. 가장 강력한 국가들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은 강대국들의 우위에 의해 협력을 강제 받는다. 오직 미국만이 협력의 압력에 때때로 저항할 수 있다. 유럽연합은 특별한 사례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민족이상적 국가의 몇몇 특징을 띠고 있지만 이 경우에도 의사결정 권력이 여전히 개별 국가들에게 있으며 이 국가들이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포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입안 '체제'의 국제화는 확실히 개별 국가들의 체계를 지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국가들이 행동할 수 있는 맥락과 제도적 구조 내에서 영속적인 변화를 초래하는데, 왜냐하면 광범위한 부정적 결과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무시할 수 없는 구조들과 조절형태들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국제조직과 체제의 중요성이 점증하면서, 다수의 민족적 사회들에 관련된 국가 관료기구는 더 큰 적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국가의 '국제화' 종합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발전들은 국가장치의 국제화를 구성한다. 이는 국제조직, 체제, 그리고 여타 국제적 협력 형태들의 중요성이 점증하는 것으로, 그리고 지역적·민족적·민족이상적 수준들의 한층 복잡한 연계들이 발전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 과정의 주요한 특징은 국가장치 그 자체의 국제화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그것에 동반되는 탈규제 및 사유화의 과정에서, 개별 국가들은 점점 국제 금융시장에 의존하게 되는데, 여기서 일차적 행위자들 무엇보다도 '강대'국과 초민족적 기업들 은 효과적인 경제적 메커니즘에 힘입어 개별 국가들의 정책을 점점 더 많은 정도까지 결정한다. 이는 개별 국가들의 정부적 장치의 배치의 중대한 변화를 통해 제도적으로 표현된다. 이 과정의 의미심장한 부분은 재무부와 중앙은행의 비중이 증가하는 것인데, 이 장치들은 대체로 민주적인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으로부터 독립적이다. 양자 모두 국제 자본의 이해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국제적 자본의 흐름과 개별 국가의 정책들의 매개자, 심지어는 아예 단순한 전달 벨트로 행동한다. 이는 무엇보다 개별 국가들의 정치 과정에서 세계적 규범의 행정적 내면화를 제도적으로 표현한다. 민족국가는 지리적 경계로 둘러싸인 사회 내에서 집중된 권력과 의사결정 능력을 갖는 통합적 실체인 한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배치, 분산화, 그리고 분절화라는 강력한 힘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민족국가가 '민족적 경쟁 국가'(Hirsch 1995, 1998)로 변형된 것은 정부의 수준과 정치적 기능의 점증하는 지리적·사회적 분기와 연관된다. 민족국가는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함으로써 여전히 현존 사회질서와 사회적 통합의 주요한 보증자로 기능한다. 그것은 여전히 계급간 관계 조절의 주된 중심이다. 또한 그것은 여전히 기본적 생산 조건, 즉 하부구조, 연구, 기술 등의 공급을 보장하는 과업을 맡고 있다(Sassen, 1996; Boyer and Hollingworth, 1997; Hirst and Thompson, 1997). 사회 내에서 집단간·계급간 갈등 관계를 조절하는 것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개별 국가의 소관이며, 이로 인해 세계시장이 극히 불균등한 생산 및 가공 조건을 가진 민족적 '생산 현장들'의 체계로 존속할 수 있게 보증되는 바, 이는 여전히 세계적 착취와 축적의 근본적 토대가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부 수준 및 국가 기능의 분화 포드주의적 민족-국가라는 역사적 현상과 비교해 볼 때 는 정치적 과정과 관련된 중대한 결과들을 낳는다. '협상 국가'로의 변형이 진척되고 국제조직 및 네트워크의 중요성이 점증하면서 여전히 개별 국가의 경계로 제한된 민주적 체계는 심각히 침식되고 있다(Hirsch, 1995, 1998; Hirsch, Jessop, and Poulantzas, 2001). 이 때문에 대의 구조의 위기가 초래되고 정치 체계의 정당성은 더욱 부족해진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NGO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주된 요인이 된다. 지구 전체에서 점증하는 불평등과 이 때문에 생겨나는 이주와 난민의 물결들 때문에, 강력한 거대중심(metropolitan) 국가들의 민주적 체계는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시민들의 결사체로 변질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러한 특권적 결사의 일차적 목표는 타자들을 내쫓음으로써 부자들의 요새를 지키고 주변부의 위기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민족적 안보와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 모두에서 물리적 자원에 대한 접근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따라서 '민족적 경쟁 국가'는 또한 '민족적 안보 국가'가 되기 위해서 무장력을 갖춘다(Hirsch, 1998). 여기서 개별 국가들이 단순한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차라리 전략적 행위자라는 사실을 주되게 강조해야 한다. 이들은 국제 정치체계에서 진정으로 핵심적인 행위자들인데, 왜냐하면 군사적 강제력에 대한 최종적 통제권이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국제화는 세계적 수준에서 계급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원인이자 결과다. 개별 국가 안에서 정부의 행정적 장치의 구조조정은 금융제도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사회사업부, 정당, 그리고 사회적 협력의 코포러티즘적 구조 등과 같은 제도 광범위한 주민대중의 이해를 대변하고 통합적 역할을 수행한 의 약화를 수반한다(Baker, 1999; Lukaukas, 1999). 세계적 수준에서 볼 때 개별 국가들의 체계는 점점 더 피착취·예속 계급들을 민족적 경계 내에서, 그리고 그 경계를 따라 분할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세계화는 자본의 국제적 신축성과 이동성을 더욱 촉진했다. 이에 따라 분절화와 분할의 과정이 더욱 분명해지는 반면, 노동자들과 그/녀들의 조직은 여전히 민족적 경계 너머로 시야를 넓히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화와 국제화의 결과로 '국가'와 '자본'의 관계도 변형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본이 '무국적화'되어 간다거나 국가로부터 상당한 정도까지 독립성을 갖게 된다고 가정하면 잘못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탈규제화의 과정에서 확실히 국제적 자본은 자본축적에 대한 국가적 조절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졌고 국가의 조절제도는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초민족적 기업은 세계적인 다국가 체계 내에서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위치에서 유연하게 행동하는데, 이는 그들이 '생산 현장'으로서 개별 국가들의 비교우위를 이용하고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국가의 권력과 조직적 능력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국가는 자본들 사이의 경쟁적 이해를 초월하는 '자본의 정치'를 확립하는 데 있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국가는 세계시장 내에서 특수한 자본 집단에게 토대를 제공한다. 그러나 국제적 자본이 점차 WTO나 세계은행, IMF 등과 같은 국제조직에 준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본이 국가적 토대를 활용해서 세계시장 내에서의 분절화를 심화시킨다는 논의의 중요성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국제 기구들의 정책들은 여전히 상당 부분 개별 국가 내에서 형성된 이익들에 의해 결정된다. 초민족적 기업들은 민족적 시장, 관련 생산 조건, 그리고 사회협약 등에 점차 덜 구속된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훨씬 독립적으로 행동하고 국가들을 서로 반목시켜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생산 및 유통의 국제화는 '민족 자본'과 '민족 부르주아지'라는 용어의 타당성을 의문에 부친다(Poulantzas, 1974: 77; Jessop, 1997b). 국가와 (국제화된) 자본의 관계는 새로운 형세를 취하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자본과 국가 장치의 상호연계 정도가 감소되지는 않는다. 초민족적 기업들은 여전히 국가에 의지하여 시장이 제공할 수 없는 생산 조건의 공급을 보장받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필요하다면 강제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이해를 보호한다. 거의 모든 초민족적 기업들이 세계적 체계의 강대국 내에서 활동하거나 그곳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Sassen, 1996: 1). 이 때문에 그들은 이들 국가의 군사적 우위와 이들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 구조(예컨대, 특히 군산복합체의 틀에서 유래하는 선진적 기술 발전에 대한 적합한 환경)로부터 편익을 취할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국가를 자신들만의 이해에 복무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초민족적 기업과 국가의 관계는 여전히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이 관계는 협력과 함께 갈등의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갈등은 개별 국가 장치들 내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국제적 자본, 국가, 그리고 국제조직의 복합적 상호연관 때문에 국가간의 국제적 관계의 수준에서도 재생산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삼극의 기업들이 지배적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에 기반을 두려고 시도할 때 이러한 모순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좀더 비판적으로 살펴보면, 정치학자들은 종종 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OECD 세계'(Z rn, 1998) 역시 초민족적 자본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국가와 다국적 기업들 간의 갈등적 관계는 특히 다자간투자협정(MAI)에 대한 합의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패한 것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MAI는 무엇보다 산업화된(초거대) 국가들이 초민족적 자본의 이해를 주변부 국가들에게 강제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MAI에 대한 합의에 실패한 것은 범세계적인 여론의 동원과 주변부 국가들의 저항(서서히 조직되고 있는)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초거대 국가들과 추정컨대 그들이 대변하는 기업들의 이해가 분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9년 가을 시애틀에서 열린 국제무역기구 총회가 실패한 것도 유사한 이유 때문이었다. 초거대 국가들과 주변부 국가들 간의 이해 갈등 외에도, 미국 정부와 유럽 연합이 대변하는 기업들의 이익 갈등(예컨대 유전공학 분야에서)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McMichael, 2000; Chakravarthi, 2000). 초민족적 기업들은 통일된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쟁한다. 이러한 경쟁은 국제적 국가 체계와 국제조직 내에서도 벌어진다. 전체적으로 볼 때, 자본과 국가의 모순적 관계는 자본주의적 계급 체계의 일관성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PSSP
1. 이면합의에 대한 정부의 입장 2. 정부의 계속되는 거짓해명 1) 쌀협상과 양자현안(쌀이외 다른 품목)과의 관계에 대해 2) 쌀협상 과정에서 양자현안(쌀이외 다른 품목)이 협상내용으로 제기된 시점에 대해 3) 쌀협상 최종발표(2004. 12.30) 당시 이미 공지를 하였기 때문에 이면합의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4) 양자의 부가적인 사항에 대한 이면합의 여부 및 정부의 은폐기도에 대한 문제 5) 기타 쟁점이 되는 사항 (1) 중국과의 양자차원의 부가합의 사항중 “국내여건을 감안하면서 조정관세 대상품목 축소 및 세율 인하를 위해 공동 노력”의 건 (2) 인도 이집트와의 양자차원의 부가합의 사항중 “MMA수입과 별개로 식량원조용(대북지원) 쌀 구매시 우선권 부여”의 건 (3) 아르헨티나와의 양자차원의 부가합의 사항중 “닭고기, 쇠고기 등의 가금육과 오렌지 등에 대해 수입위험평가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합의함”에 대한 건. 3. 정부 쌀협상안 및 거짓해명에 대한 전국농민회총연맹 요구사항
인터넷 저작권 논란에 숨어있는 정치적 배경 양 희 진| 정보공유연대 IPLeft 운영위원 * 이 글은 '정보공유라이센스: 영리불허, 개작허용(http://freeuse.or.kr/license/by-nc/)'에 따라 자유롭게 복제, 배포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2005년 2월 25일 작성되었습니다. 최근 개정 저작권법이 발효된 것을 계기로 네티즌의 관심이 저작권에 쏠려있다. 실연자와 음반제작자에게 전송권이 부여되자 네티즌들은 음악파일(mp3)을 블로그나 까페의 배경음악으로 깔거나 개인홈페이지에 업로드하는 행위, p2p 서비스를 통해 음악파일을 공유하는 행위가 새롭게 금지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블로그나 까페에서 배경음악을 삭제하거나 업로드했던 음악파일을 대거 삭제하는 네티즌들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불복종운동을 벌이며 오히려 대량으로 음악파일을 업로드를 하는 네티즌들도 생겼다. 뿐만 아니라 'No Music No Blog' '개정 저작권법 반대' '네티즌을 범죄인화하는 저작권법 반대'라는 슬로건의 까페가 만들어져 네티즌 스스로 조직적인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문화관광부는 당초 '이번 법개정으로 새롭게 불법이 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불법이었는데 다만 네티즌들이 몰랐을 뿐이며 앞으로 대대적인 단속을 벌일 예정'이라고 밝혔다가, 네티즌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한발 후퇴했다. 문광부 홈페이지에 2차 공지를 내어, 일정한 '계도기간을 거친 후에 영리적 사이트를 중심으로 한정하여 단속을 벌이겠다'고 네티즌을 다독이고 있는 상황이다. 인터넷에서 음악파일을 전송하는 행위가 애초부터 불법이었다는 문광부의 말은 맞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부터 불법이었는가가 아니라, '현재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네티즌이 '이제서야 불법을 인식했다'라는 것은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준법의식이 없다고 핀잔주고 '계도할'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네티즌이 비로소 지금 그 금지가 정당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문광부가 해야 할 일은 그 정당성을 설명하든가 네티즌의 비판과 항의를 받아들여 정당하지 못한 법을 개정하는 것이지, 나중에 단속하겠다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정보공유연대를 비롯한 31개 시민사회단체들은 문광부나 음반업계에 맞서 저작권법재개정 투쟁을 선포하고, 이를 위한 지지서명을 받는 등 여러 캠페인을 벌여나가고 있다 ({{{{http://www.ipleft.or.kr/antilaw }} }}). 지난주부터는 대통령에게 애국가선물하기, 애국가 배경음악채택하기 등의 저작권법 불복종운동을 벌였다. 동시에 국회 앞에서 1주간 1인 시위를 벌였다. 문광부 담당자나 국회문광위 소속 의원들도 네티즌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문제제기에 약간은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네티즌과 시민사회단체들의 핵심적 요구사항인 저작권법 재개정 요구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며, 오히려 저작권법을 개악하려고 준비중이어서 3월, 4월은 저작권법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이 계속될 전망이다. 시민사회단체들 주장의 핵심은 지금의 저작권법이 인터넷의 자유로운 정보소통구조를 전혀 배려하지 못하고 있어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행 저작권법에 따르면 동호회게시판이나 카페에 시 한 편, 노래가사 하나만 업로드 해도 저작권침해이다. 블로그에 배경음악을 깔면 손해배상청구를 당할 지도 모른다. 신문기사를 퍼 나르는 것도 모두 불법이다. 블로그나 까페 등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는 다양한 소통과 새로운 창작의 과정이 저작권법에 의해 원천적으로 막혀있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의 행위는 복제와 전송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음에도 저작권법이 복제권과 전송권을 저작권자에게 거의 무제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터넷에서의 저작물 전송과 복제를 일정한 범위에서 허용하는 쪽으로 저작권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저작권법의 재개정이 궁극적인 대안이다. 혹자는 저작물을 복제하고 전송하고 공연하는 등 저작물의 모든 처분 권한은 저작자에게 있으니 그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러니 그들의 권리주장은 정당하고 법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단지 이용자들의 무임승차 의식이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다. 심지어 국회의원도, 문광부 공무원도 같은 질문을 한다. "우리 헌법은 사유재산권을 보장한다. 저작권법도 그 재산권의 하나이다. 그러니 저작권법도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이다"라고. 사유재산권을 운운하며 헌법을 들먹이지만, 실상 사유재산권은 제한할 수 없다는 논리야말로 위헌적 발상이다. 우리 헌법은 입법자가 법률로써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를 정하도록 위임하고 있다. 따라서 본질적인 내용의 침해가 아니라면 재산권도 얼마든지 제한할 수 있다. 토지소유권은 그린벨트로 묶거나 거래허가제를 통해 제한하고 있다. 자기 땅에 건물을 세우더라도 건축법에 따른 허가를 받거나 신고를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일조권을 침해하지 않으려면 일정한 높이 이상으로 지을 수 없다. 저작권법도 마찬가지다. 제한할 수 없는 권리가 아니다. 저작권을 제한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리로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국어 책을 낭송하게 하면 아이와 선생은 공연권 침해가 될 것이다. 글을 쓰면서 남의 글을 인용하는 것도 복제권 침해가 될 것이며, 저작권이 만료되지 않은 건축물 앞에서나 조각, 그림이 장식된 실내에서는 시사보도를 위한 취재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소풍간 학생들은 같이 노래를 부를 수도 없고 학교 방송에서 음악을 틀지도 못할 것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들이 저작권법 위반으로 처벌될 것이다. 그러나 안심해도 된다. 이런 행위들은 타인의 저작물을 공연하거나 복제하는 행위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저작권법에서 허용하고 있다. 즉 저작권법은 공연권이나 복제권을 저작권으로서 보호하는 한편, 저작권을 제한하고 있다. 왜? 저작물을 일정한 범위에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보장하지 않으면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불편하고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저작권을 통해 달성하려고 하는 문화의 발전이라는 것도 어느 만큼은 저작물을 자유롭게 사용하게 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작권법 제1조에서 보듯 저작권법의 역사는 저작권과 이용자의 권리간에 균형을 금과옥조처럼 유지하려는 과정이었다. 그 균형점이라는 것이 사회변화에 따라 좌우로 이동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인터넷 디지털 환경으로 변화되면서 변화된 환경을 법, 제도에 수용하는 방식은 권리자를 강력하게 보호하는 쪽으로만 기울어져 왔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저작(인접)권자에게 전송권이 보장되고, 전송권에 대한 제한은 거의 두지 않으면서 저작권과 이용권 간의 균형이 깨어지고 있다. 또한 개인적인 목적의 비영리적인 사용을 위해서라면 저작물의 복제도 허용되었으나, 인터넷 환경에서는 실질적으로는 개인적, 비영리적 사용임에도 네트워크 환경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한정된 범위에서 사용됨에도 개인적 사용의 범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비영리적 사용이면서 저작권자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한 실질적으로 보아 개인적 사용이라면 인터넷 상에서도 보장되어야 한다. 이 만큼은 저작자의 권리가 제한되어야 한다. 우리가 저작권 문제를 주목하는 이유는 비단 '불편'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작권의 강화는 바로 '차별'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정보의 소통이 규제되고 인터넷이 하나의 시장으로만 전락할 때는 정보의 부익부빈익빈이 강화되고 이는 정보사회의 삶의 질의 격차로 이어질 것이다. 저작권의 강화는 실제로 미국 헐리우드 자본에 의한 요구가 미국 정부를 매개로 국제적으로 관철된 것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시장의 논리가 세계화과정에서 정보의 소통과 활용에 적용된 결과이다. 결국 저작권 문제에 대해 공유의 공간을 넓혀 가는 것은 빈곤과 차별의 원천인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는 길이기도 하다.PSSP
대안세계화와 한국 사회운동 임 필 수 | 정책국장 오늘의 세계화는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며 새로운 제국주의다. 극단적인 착취와 강탈, 전쟁의 폭력,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세계 민중에게 유례 없는 도전이다. 이에 저항하는 세계의 사회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지배세력의 온정주의나 보수적·퇴행적 '반세계화'를 넘어서 '대안세계화'의 이름으로 이념과 운동을 발견하고 있다. 이들은 인민의 권리의 자율적 실현, 사회적·경제적 변혁, 사회운동과 공동체 간 교통과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지배세력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망과 새로운 파퓰리즘적인 정치 행태 속에서 심각한 동요를 경험하고 있으며, 동시에 '대안세계화' 운동의 전진적인 요소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사회진보연대는 한국 사회운동의 긴급한 과제와 앞으로 사회진보연대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를 밝히고자 한다.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 미국 경제의 위기와 이와 날카롭게 대비되는 미국 군사력의 압도적인 우위는 세계 인민들에게 진정한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은 해외직접투자와 포트폴리오투자를 통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로 엄청난 양의 소득을 빨아들였다. 미국의 부유계급은 미국 내 신자유주의 개혁의 흥청거림 속에서 풍요한 소비를 향유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저축률의 감소, 경상수지 적자로 외채증가, 외국으로의 거대한 소득유출, 국내 자본소득의 감소라는 악순환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은 달러화 약세라는 궤도로 돌아섰고, '글로벌한 정책협조'라는 미명으로 그 부담을 타국에게 분산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 경제가 짧은 시간 내에 대파국을 맞으리라 예상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경향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금융적 지배와 제국주의 권력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모순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미국은 이라크를 군사력으로 강점한 후 신속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걷고 있다. 2004년 말 19개 나라로 구성된 '파리클럽' (주요채권국회의)은 이라크의 1200억 달러에 이르는 외채 가운데 파리클럽에 지고 있는 400억 달러 중 80%에 대한 부채탕감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초기 30%를 탕감한 후에는 IMF 프로그램이 승인된 후 30%를 탕감하고 마지막 20%는 IMF 조사위원회가 프로그램의 이행 여부를 판단하여 탕감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라크 인민의 시각에서 볼 때, 전쟁을 감행한 당사자들에게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아가 앞으로 진행될 IMF 프로그램은 이라크 인민의 민주적 결정 과정을 철저히 배제한 중심부 국가의 이익을 위한 개혁이 될 터이므로 심각한 저항을 야기할 것이다. 이미 정통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이라크 임시정부가 이를 감당한 능력을 과연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을까?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점령은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한 사회를 한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은 지녔지만 그것을 재건할 수 있는 정치적·경제적 능력은 결핍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부시의 대통령 재선은 도덕심, 애국주의 등 어떤 치장을 하더라도 미국 사회가 종교적 이데올로기나 전쟁의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야말로 미국 스스로가 주도한 금융세계화의 부메랑 효과에 대한 퇴행적, 반동적 대응의 한 측면이다. 이는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가 착취와 강탈, 이데올로기적 맹신과 전쟁의 폭력이라는 첨예한 국면으로 이미 진입하였음을 보여준다.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는 세계화의 새로운 국면이자 '새로운 제국주의'라고 부를 만하다. 이는 세계 민중에게 유례 없는 도전이자 투쟁의 대상이다. 세계화에 대한 불만들 오늘의 세계 자본주의의는 18-19세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원시적 축적' 과정과 비견할 만하다. 마르크스는 '원시적 축적'을 광범위하게 관찰했다. 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농민 인구의 강제적인 구축, 다양한 형태의 소유권(공공소유, 집단소유, 국가소유)의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으로 전환, 공공의 권리의 억압, 노동력의 상품화와 생산과 소비의 대안적·토착적 형태의 억압, 자연자원을 포함하는 자산의 식민지적·신식민지적·제국주의적 영유과정, 교환과 납세의 화폐화(특히 토지), 노예무역, 고리대금·국채·신용체계 등등. 마르크스가 언급한 이러한 특징들은 현재에도 강력하게 남아 있으며, 어떤 것은 과거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한다. 신용체계와 금융자본은 약탈, 사기, 도둑질의 중요한 수단이다. 주식부양, 인플레이션을 통한 구조적인 자산파괴, 인수합병을 통한 자산약탈, 한 나라의 모든 인민을 부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채무부담의 증대, 신용과 주식 조작을 통한 기업의 사기와 자산 강탈(연금 기금의 유용과 주식과 기업의 붕괴를 통한 대규모 피해) 등등. 또한 강탈에 의한 축적은 완전히 새로운 메커니즘을 형성하고 있다. WTO 협상에서 지적소유권에 대한 협상(TRIPS 협정)이 강조되는 것은 중요한 사례다. 지적재산권은 지배세력이 주장하는 자유무역의 유용성, 즉 지식과 기술, 사상의 자유로운 교통이라는 이념이 무색한 대표적인 보호무역의 사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유전물질의 세계저장량에 대한 약탈이 소수의 거대 초민족기업의 이득을 위해 진행 중이다. 세계 환경 공유물(토지, 대기, 물)의 점증하는 고갈과 생물서식지의 하락은 대대적인 자연의 상품화의 결과며, 이는 자본집약적 농업생산 양식을 제외한 모든 농업을 제약한다. 문화적 형태, 역사, 지적 활동의 상품화는 대대적인 강탈을 동반한다. 이러한 강탈의 과정은 세계화에 대한 불만들을 누적시키고 있으며, 광범위한 저항을 야기하고 있다. 반세계화인가, 대안세계화인가? 그러나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은 다양한 경향들을 포함하고 있다. 1999년 미국 시애틀 WTO 각료회담 반대투쟁은 그러한 요소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예컨대 당시 미국노총이 보여준 입장은 중요한 사례다. 그들이 시애틀투쟁에 참가한 중요한 동기의 하나는 중국의 WTO 가입 반대였다. '중국의 가입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제공을 통해 중국의 엘리트들이 대중을 억압하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담론은 사실상 국수주의·보호무역주의, 그리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었다. 금융세계화가 동반하는 생산과 고용의 파괴라는 현실의 원인을 외부의 국가 또는 인민에게 돌리는 매우 위험스러운 주장이다. 또한 외부의 국가 또는 인민을 적으로 삼는 이데올로기는 곧바로 내부의 적-이주자, 여성, 실업자 등등-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국민 중에 기생충이 있다"는 대처의 발언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미국말고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범죄화를 주장하는 극우세력에게도 '반세계화'는 중심 구호가 되고 있다. 나아가 시민권의 '민족 우선' 원칙을 세운 유럽연합은 배타적인 권리부여를 체계화한다. 세계화가 낳은 혼돈으로부터 또는 '미국화의 물결로부터 자기 민족에게 고유한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반세계화'의 논리는 이처럼 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도 이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세계화에 대한 불만이 보수주의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 반대'의 코포라티즘 경향도 분명히 존재한다 (민족경제의 재건, 국유화나 '투자의 사회화'를 통한 산업의 균형발전, 노동자 전체의 고용증진과 복지개선 등등).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금융세계화의 현실에서 이미 '미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배세력 중 일부는 이러한 경향을 대중조작을 위한 간판으로 간혹 활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이후 먼 훗날의 신기루로 한없이 지연된다. 대안세계화: 세계 민중운동의 저항의 전진적 요소들 이처럼 '반세계화'라는 명칭이 우리의 운동을 지칭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세계농민운동조직인 비아캄페시나(소농의 길)는 '투쟁을 세계화하자, 희망을 세계화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민족적·인종적 분할, 성적 억압과 배제라는 현실의 조건을 지양하는 보편적인 이념과 그에 적합한 운동을 건설하는 것만이 능동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사회운동의 흐름에서 어떤 전진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계발해야 하는가? 첫째, 인민들의 권리의 자율적인 실현이라는 원칙을 발전시켜야 한다. 세계경제기구나 글로벌 NGO가 내세우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망이나 '반세계화' 운동의 보수적, 퇴행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안세계화 운동은 모든 인민들의 권리의 목록을 재작성하려는 노력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의 고통 속에서 인민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요소를 제거하고 상호확장적인 권리를 발견하며, 또한 인민들의 자율적인 운동을 통해 쟁취하고자 하는 원칙이다. 둘째, 금융세계화의 현실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경제적 전화의 전략과 요구를 계발해야 한다. 예컨대 세계 자본주의 주변부와 신흥공업국을 휩쓴 외채위기를 겪으며, '국제금융·무역기구' 반대(또는 전화), 제3세계 외채탕감, 금융거래과세를 통한 자본통제 등의 요구를 제시했다. 현재 세계사회운동의 가장 활동적인 세력의 하나인 농민운동은 식량주권(단순한 민족적 식량자급이 아닌 토지, 생명종과 유전자원, 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토지개혁과 대안적 농업모델을 두고 활발한 모색과 투쟁을 펼치고 있다. 거대한 사유화·상품화의 물결 속에서 지식에 대한 소유권과 자연 공유물에 대한 소유권에 반대하는 투쟁도 성장하고 있다. 세계화가 낳은 여성의 빈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여성운동의 모색과 투쟁도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기된 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세계화는 복합적인 현실의 변화를 낳고 있으며, 대안세계화 운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몇몇 제한적 요구의 제기로 단순화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금융세계화에 조응하기 위해 화폐통합을 매개로 신자유주의 경제통합을 단행하고 유럽헌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유럽연합의 현실은 이 문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참조점이다. 현재 유럽연합의 건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긴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한다. 예컨대 유럽의 입법·사법·행정기구의 민주화 (특히 유럽연합의 사법체계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화되면서 전횡을 휘두르게 된다), 사회적 노동의 재조직화('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이라는 목표의 갱신), 국경의 민주화 (인민들의 순환과 거주의 보편적 권리), 교육의 일반화 (특히 획일적인 민족적 교육체계에 의해 억압되는 익명의 이주자들 사이에서) 등등. 이는 세계화가 억압하는 인권·시민권의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과제이자 사회의 변혁을 위한 출발점일 수 있다. 대안세계화 운동은 세계적·지역적 시민권(노동권, 여성권)의 재건을 위한 경로들을 발견해야 한다. 셋째, 사회운동은 (앞서의 목표를 위해서도)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분리된 민족 또는 공동체 간 교통과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특히 '문명의 충돌'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갈등과 전쟁을 불변으로 간주하거나 이를 진압·순치하는 게 '성스러운' 임무라고 주장하는 세력과 대결하는 게 긴급한 과제다. 오늘 세계에서 전쟁과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발호는 세계화가 낳은 가장 극단적인 결과이자 인민운동의 진정한 무능력을 표현한다. 현재 움터나고 있는 반전운동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감행되는 '인도주의' 전쟁이나 침략전쟁을 거부하며, 전쟁과 폭력의 전장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사회운동들간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곧 저발전 지역이며 곧 퇴행적인 사회이며, '인도주의' 개입을 통한 민주주의의 이식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서구 제국주의가 제공하는 시각을 거부하고, 인민운동 차원의 교통과 연대의 틀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대안세계화와 한국의 사회운동 한국의 사회운동은 '반세계화'를 넘어서 '대안세계화'라는 이름을 찾고 있는가? 한국의 사회운동은 노무현 정권의 파퓰리즘이라는 조건 위에 있다. 노무현정권은 김대중 정권의 노선을 보완하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신속하게 강도 높게 추진하기 위해 새로운 파퓰리즘적인 정치 행태를 창출하고 있다. 행정부 권력의 비대화, 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 대통령 개인에 대한 대중적 지지나 지역주의(실리주의)적 동원 등의 정치 행태는 민중운동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고 있다. 또한 정권과 NGO의 결탁은 위기의 순간마다 민중의 단결을 교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게다가 노무현정권의 파퓰리즘은 기본적으로 기존 노동자운동을 배제하는 (과거 남미의 페론주의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참여와 대화'라는 수사는 계속 허구적으로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사법부와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자율화되면서 민중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며 사회의 위기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국가의 민주화'는 우회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인민이 우선 '국가의 민주적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세계화의 승리자(수혜자)'라는 미망을 타파하며, 전쟁의 폭력이라는 위급성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우리 운동의 공동의 과제를 인식하고 분석과 입장을 마련해나갈 것이다. 첫째, 대안세계화운동에 적합한 노동자운동의 개조. 현재 국제노동자운동은 형성 중인 대안세계화운동에서 가장 비활동적인 부문으로 남아 있다. 이는 국제자유노련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노동자운동조직의 전통적인 '반공주의·코포라티즘' 지향과 그 몰락의 유산이다 (북반구 노조운동의 쇠퇴, 로비중심의 활동 행태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협력기구(OECD)나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하는 '괜찮은 노동'(decent work)이라는 슬로건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금융세계화의 현실에 대한 진정한 맹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노무현정권이 기본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배제하는 파퓰리즘 형태를 창출함으로써, 현존 노동조합 운동이 큰 동요를 겪고 있다. 즉 노동조합은 최소한의 코포라티즘적 지향조차 포기하며 정권의 '위기관리' 파트너가 될 것인가 동요한다. 한편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면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의 지향을 '사회적 합의주의'라고 부르기에는 부적합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최소한 '사회적' 또는 '코포라티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합의의 결과가 노동자대중의 포괄적인 부문들에게 그 결과가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재의 지향은 노동자의 상층 일부의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할 뿐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합의주의나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나, 그것을 허구적으로 주장할 뿐이다.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라는 구상이 일부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으로 현실적으로 전환된 것은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는 현재의 노조운동의 지향을 증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현재 '비정규직 철폐투쟁'도 갈림길에 있다. 비정규직권리보장 입법과 같은 '법제화' 시도는 사회 전체에 걸친 '사회적 노동의 재조직화'-일례로 '모두에게 일자리를'이라는 구호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정도의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이나 여성의 가사노동과 같은 광범위한 사회적 활동의 사회적 인정. 또는 이와 전혀 다른 방식의 생산관계의 전진적인 변혁-가 동반되지 않으면 비정규직 철폐의 현실적 경로를 발견할 수 없다. 현재의 구조에 단순히 편입되는 게 불가능하다면 현재의 구조를 변혁하는 게 유일한 경로다. 방향의 전환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실업·빈곤, 이주노동자의 권리의 문제를 동시에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양립. 지난 세기 노동자운동은 가족을 매개로 재생산의 부담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온존시켰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여성이 출산, 양육과 전반적인 가사노동을 책임져야 할 뿐만 아니라 생계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이중적 노동을 해야만 하는 상태를 촉진했다. 이는 여성의 출혈적인 노동력 판매를 확대하고 그 결과 여성의 빈곤과 고통은 악순환되었다. 여기서 남성 가장의 임금이 가족의 재생산을 담보한다는 '가족임금'은 하나의 맹목점이 되었고, 현실의 고통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빈곤 문제에 관한 전진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편,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는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적 현실을 더욱 증폭한다. 먼저 전쟁은 대부분의 전쟁이 증언하듯이 '성별화된 폭력'을 확대한다. 전쟁은 여성에 대한 잔혹한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상징적 폭력을 동반한다. 또 한편으로 금융세계화가 강요하는 여성의 빈곤은 성매매의 문제를 더욱 증폭한다. 전쟁과 성매매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에 직면해 여성의 권리의 견지에서 운동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셋째,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전운동의 결합.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침략전쟁만이 유일한 전쟁이 아니다. 현재 미국은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과 같이 미국의 이해관계가 '사활적인 지역'에서는 기존의 군사동맹과 무기체계를 강화하면서 도발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콜롬비아나 베네수엘라에서 저강도 전쟁(마약과의 전쟁, 정권의 전복)이 꾸준히 시도되고 있으며,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이외 배제된 지역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에 대해서는 어색하게 침묵하거나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미명으로 중심부로의 분쟁확대를 저지하는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로부터 배제된 지역은 과거 식민주의·제국주의·신식민주의의 역사를 거치며 인간생명과 자연자원의 착취, 외채를 통한 수탈을 겪었고, 구 식민권력이 이식한 부정한 토착정권의 이중수탈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황폐화되었고, 군벌들 간 약탈전쟁마저 만연하다. 이러한 사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세계의 배제된 지역에서 반전운동과 대안세계화운동이 결합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사회운동 차원의 교통과 연대가 확장되어야 한다. 세계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전쟁과 빈곤은 극단적 폭력의 지대를 공고히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또한 현재 한반도는 '신자유주의 경제통합'과 '절멸 전쟁'의 위기에서 장기적인 미래를 내다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희망하는 한미동맹의 안정적인 분쟁관리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급진화의 길인가를 두고 갈림길에 서 있는 시점이다. 역시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복합적인 과제들이 존재한다. 대안세계화 운동에서 가장 활력 있는 부문으로 성장하고 있는 농민운동, 식량주권과 농업개혁에 관한 요구와 분리될 수 없는 생태운동, 현재의 실업/반실업·빈곤의 문제와 깊게 연루된 대중교육의 위기 등의 문제는 우리가 공동으로 풀어나가야 할 긴급한 과제다. 사회진보연대는 이와 같은 한국 사회운동의 중장기적 과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공동의 전망을 세워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PSSP